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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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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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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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더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증가, 그리고 그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경쟁과 다툼 이런 사회의 변화 때문에 정말 잘 사는 삶의 의미를 잊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원래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던 원형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 혼자 잘 살아보겠다는 개인주의라는 삶의 위세에 눌려 남들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은 어느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원시적인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현대라는 역사적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처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자고 굳이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경오염, 문명오염, 정치오염, 그리고 그보다 더 겁나는 개개인의 의식오염이 이미 퍼져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실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쓸려간 땅에도 그 다음 해에는 풀이 돋아난다. 이러한 풀의 기운을 되살려 풀죽어 가는 삶에 풀먹이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고” 또한 남에게 기대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그러면서도 더불어 “함께 하는” 자연(自然)을 생각하고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삶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추상적인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문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오염된 틀에 너무 쉽게 면역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억지로” 그리고 “남에 기대는” 그리고 “혼자만 살려고 하는” 모순된 삶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모두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거나, 산업문명을 거부하여 원시생태로 돌아가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작은 희망이고 구체적인 실현가능의 삶을 추구하는 하나의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현실 안에서 “억지로” 그리고 “남이 시키고 남에 기대는” 모순된 삶의 벽을 하나 하나씩 깨트리고, 그래서 “함께 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같이 걷고 함께 마련하며 어울어 숨을 쉬는 그런 작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의 공간은 지리적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라고 하는 문화공간에 적응하는 새로운 방식의 삶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연의 흐름대로 저절로 살고 스스로 사는 삶, 그리고 우리의 자연과 함께 또한 남과 함께 두고두고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의 지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적게 쓰면 된다. 그리고 둘째로 이왕 썼으면 그 쓴 것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논리를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은 한 개인 개인에게 있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공학적이거나 경제학적 접근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환경을 말하기 전에?자연을 죽어 있는 물질로만 보는 기존의 입장이 아니라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의 하나로서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환경은 인간학이 우선되어야 하고, 나아가 인간이 모여 잘 살 수 있기 위하여 철학의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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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소외와 소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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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합니다. 획일화된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사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주의의 양상은 조심해서 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대중매체서나 길거리에서 이제는 첨예화된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뉴스 감으로 되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개인의 개성을 찾는 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매체에서 말하는 개성은 편협한 개인주의와 산업화의 한 단면이고, 상업주의의 농락에 빠진 개성이며 따라서 인간의 고립을 자초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이제 자기만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인간적 공격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공동체가 지니는 관계의 끈을 모조리 끊어 버리고 맙니다. 관계의 끈이 없어진 나는 생존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남을 헐뜯고, 남이 안볼 때 쓰레기를 대충 버리고 마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자아상실 혹은 편집광에 가까운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새롭게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의 성곽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투영하는 주머니 속의 반사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의 그물망 속에서 내가 속한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객관적인 나의 모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그물망이란 상업주의나 개인주의의 맹목적인 희생물이 될 것을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런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양식은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현대인은 기계화된 산업화 속에 매몰된 자아를 찾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기계나 사회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삶의 주체자로서 행동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회사의 과장으로서의 나, 두 아이의 아비로서의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교회 집사로서의 나 등으로서 답변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합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주체적인 나를 찾기 위하여 먼저 할 일은 내가 남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이란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도 포함합니다. 시간적으로 먼 남을 같이 생각하는 일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타인을 생각하는 일은 환경을 생각하는 출발점입니다. 그 역사적 타인은 나의 자손과 지구 저편 사람들의 자손까지도 포함합니다. 왜 나 하나 살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멀리 있는 남까지도 생각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나도 비로소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현대를 보통 정보사회라고 말합니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지구 구석구석이 더욱 가까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는 분명히 과학의 산물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교통과 통신의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해 나와 남이 더욱 가까워졌습니. 이렇게 과학기술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서로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아성을 더 높게 쌓고 불필요한 소비만을 낳게 하는 거대한 상업주의를 거들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사는 지역만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나는 세계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보통 신화적 자연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화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로, 그리고 나아가 정보의 시대로 변화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언어로 우리의 자연을 전부 그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자연과학이 형성되었고 자연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모두 그려 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오만이 팽배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이성의 오만함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자연을 갖고 자연을 정복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은 근대과학을 낳고 산업화를 이루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업주의 전략에 빠져 이기적 개인주의를 마치 개성의 표현인 양,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주체성인 양,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남과 벽을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의 흔적이 진화되어 사람들의 의식 안에 정착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현대에 이르러 인간위기와 더불어 전지구적인 환경위기를 초래해 가고 있다는 징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의 환경위기는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 것이어서 우리가 총체적인 인간관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현재의 환경위기를 대처하는 일은 사실 눈감고 아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창하게 인간의 소외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성을 팽개치고 관계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끈을 쓸데없이 꼬거나 끊어버리고, 개인들의 경쟁과 탐욕으로 모인 어설픈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경제문제, 사회문제가 하도 심각하니 환경문제는 도외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각종의 매스컴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진짜로 바꿔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나도 그럴 뿐인데 뭘 야단이야’ 하는 생각이 환경문제에서 정말 심각합니다.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있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환경위기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위기인 것입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위기의 원인이 단순한 물질적 오염이 아니라 의식 오염으로부터 야기된 것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로부터 어떻게 헤쳐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과학기술을 통한 환경 개량주의도 그 해결의 작은 방도일 수 있지만 환경위기가 인간위기의 한 단편임을 깨닫기에는 모자랍니다. 결국 궁극적인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단초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의 문제, 사회민주화의 문제, 경제 정의의 문제 등을 올바르게 보고 그에 따른 실천의 생활관습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먼저 소비의 문제를 따져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왜 소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소비는 문제일 수도 없고 문제되어서도 안 됩니다. 소비는 더 나은 문화적 창조를 위한 것으로 연결시켜야 하며 이러한 연결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대한 철학과 반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산림을 무차별하게 깎아 먹는 골프장과 한강변이나 신도시 주변의 러브호텔들, 축사오염, 염색공장의 폐기물, 과대포장, 일회용품 사용을 반대하는 실천적 운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시설물이나 제품이 나와야 하는 모순된 사회경제구조를 반성적으로 질문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소비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문제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표피적 현상에 얽매어 있다면 결국 개발 최상주의라는 환상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를 다시 청소년 문화로 돌려봅시다. 소위 신세대 경향은 개인주의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부분이고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구세대가 만들어 놓은 마취제 기능이 성공적으로 나타난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과소비 행태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소비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소비성향의 사회적 풍조를 반성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물질적 풍요로움의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해서 소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어 소비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누군가라는 것은 고정된 정관사가 아니고 우리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왜곡되어 나타난 총체적인 부정관사의 모습입니다.?
소비 문제와 관련하여 에너지 생산과 절약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존자원 에너지를 계속 늘려가자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존자원을 영원히 그리고 무한정 늘려 갈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구호를 계속 외치는 일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에너지 생산의 한계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욕구이며 둘째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된 에너지이며 셋째는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된 물질의 오염과 의식의 오염이 그것입니다. 의식의 오염은 새로운 물질적 욕구를 낳게 되며 다시 끝없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대하여 오로지 앞의 둘째 문제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안전하다느니 발전소 건립의 충분한 경제성이 있다느니 하는 말만을 하는 개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발전소 건립 이후 야기되는 셋째 문제가 중요합니다. 순전하게 경제적 이유만을 따진다해도, 핵발전에서 생기는 저준위, 고준위 폐기물을 처리해야만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의 처리비용을 계산한다면 핵발전의 경제적 타당성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미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핵발전 시설계획을 전면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핵발전소 역시 콘크리트 구조물이기 때문에 구조물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핵발전소는 수명이 다한 후에 아파트처럼 재건축할 수도 없고 폐기해야 하는데, 이 때 건축 폐자재인 콘크리트 조각 하나하나 모두가 영구히 보존해야할 방사능 누출오염 폐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핵폐기물 처리에 드는 경제적 비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경제적 이유를 떠나서 원자력 발전소 건립으로 더 많은 물질적인 혜택이 예상되지만 그것은 초과된 소비이며, 그 소비를 향유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회범죄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파괴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단지 우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식의 오염은 핵 쓰레기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에너지를 갖고 또 얼마나 많은 ‘문명의 잔해’를 만들어 낼 것인지 생각해 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개발주의자들은 지구의 미래를 장밋빛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싶겠지만 지금 같은 소비형태와 문화양상으로 비추어 볼 때 결코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에 이어서 계속되는 경제 불황의 근본 원인은 위기를 낳은 사회적 요인에 대하여 근원적인 치료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일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의 경제위기를 단순히 경제 정책이나 단순이론으로만 풀려는 것은 진정한 문제해결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경제난국을 푸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경제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경제단위인 주체인 소비자의 맹목적인 소비 행태들을 스스로 반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소비의 맹목성을 부채질한 기업의 소비 유도논리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의식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의식오염을 정화하기 전에는 결코 정상적인 경제 정착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 뻔한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총체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이해 없이 개인의 환경구호만을 강조하면 지하철과 공원과 길거리는 깨끗해질지라도 기업의 일회용 포장지와 화학적 제품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도쿄의 길거리는 정말로 깨끗하지만 1인당 일회용품 사용량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쓰레기 분류가 잘 되기는 하지만 사회의식이 결여됐다면, 지금의 검측기로 측정이 어려운 다이옥신은 소각로 굴뚝에서 더 많이 나올 것이며, 원자력 에너지가 청정에너지라는 정부의 홍보가 승리하여 여기저기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님비현상을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라고 계속 몰아붙이면서 행정편의주의로 가거나 기업가의 손을 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폐기물 이동금지협약은 유명무실해져서 국가간 기술이전과 경제원조라는 명목 아래 힘의 논리와 경제논리가 우선한 특정폐기물의 보이지 않는 이동이 더할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시장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FTA 체제 국제경제의 흐름은 시장경제기준을 몇몇 힘 있는 선진국에 맞출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논리와 전체논리 사이의 괴리는 경쟁과 이기주의, 약육강식과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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