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삶의 가족’으로 2-③ [4人4色 책읽기]

이현숙 (자유기고가)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추스르는 사람의 일관된 표정을 보면 서늘하게 압도당하고 만다. 최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도 그보다 몇 배 더 엄청난 자제력을 보여준 일본이 그런 유형이다. 반면, 그 와중에 ‘독도’발언을 하며 챙길 것은 끝까지 다 챙기는 그들을 보면, 외국인에게 ‘국화’와 ‘칼’을 양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질서정연하고 차분한 일본인에게 이유 없는 도심 살해의 광기가 빈번하게 번득이는 양면성은 왜 생겼을까? 의문에 대한 일말의 답을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그린비 펴냄)을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경제 성장과 맞물린 가족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적

부제 ‘오늘날 일본가족의 재구조화’는 저자가 강력히 주장하는 ‘가족 구조조정’의 목적이다. 저자가 맺음말에서 밝혔듯이 “현재의 ‘가족 양상’이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자유.공정성.효율성’이라는 관점에 비추어 보아 불합리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현대 일본의 가족 구조조정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대공황 시대에 케인스(Keynes,John Maynard, 1883-1946)가 경제영역에 적용했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자유에 의한 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가족의 새로운 양상 연구에 도입했다는 것이 저자의 고백이다.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의 사적인 조직에도 경제학 이론을 적용시켜 ‘자유.공정성.효율성’을 따져야 한다니, 얼핏 신자유주의의 덫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저자의 ‘가족 이데올로기’ 주장을 통해 나의 예단이 자본주의시대에 사는 소시민의 과민 반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나 적용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전형적인 가족의 이상 모델을 찾고자 했던 독자들의 섣부른 기대를 저버리면서도 끝까지 현실로 드러나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가족 사회학의 범주에서 다양하게 분석해나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저자의 의지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해 경직되어 있는 사회의 최소단위 ‘가족’이 이제는 개인의 자유와 공정한 법적용, 일방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는 효율성의 기준 위에서 재편성되고, 새롭게 구조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전후 일본 사회에 형성된 ‘표준가구모델’이 경제 성장의 굴곡과 산업화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기여했는가를 제시한다. ‘샐러리맨 남편과 전업주부 아내’의 전형적인 가족 구조가 고도경제성장기의 일본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샐러리맨 남편의 집중된 생산력과 노동력을 창출했고, 보장된 미래를 꿈꾸는 전업주부의 전폭적인 내조를 이끌어냄으로써 사회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가능케 했다. 이 시기에 결혼은 남녀 모두에게 삶의 질적인 향상과 안정을 보장해주는 것이었고, 연애결혼과 계획출산 등으로 ‘가정’의 내실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녀 모두에게 신분상승과도 같은 장밋빛 ‘가족 이데올로기’는 저성장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와 가족의 구조전환을 야기했고, 어두운 그늘과 후유증을 낳기에 이른다. 1973년 석유파동이후 전 세계적인 불황을 일본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유지하는 선에서 뚫고 나간다. 중년 남성의 고용을 보장하고, 수출증대를 꾀하며, 전업주부들이 시간제 취업을 하며 불황의 공백을 미온적으로 메워나가는 방식으로 타개해 나간 것이다. 이로 인해 연공 서열이 높은 기득권과 손해를 감수하는 젊은 세대가 공존하면서 ‘미혼화’와 ‘저출산’이라는 사회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IMF구조조정의 치명타를 맞으며 20세기 말을 휘청대며 겨우 지탱해온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차이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집집마다 자식 돌 반지까지 꺼내 놓게 한 국가적 위기감 조성과 실직 가장, 가정의 해체, 전업주부의 저임금 노동시장 진출,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적 직급 등장 등 가족과 국민 개개인의 파탄을 오랜 후유증으로 치러내야 했던 암담했던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평생직장 이란 개념은 그때 이미 사라져버렸고, 생계의 고통은 당시 20세기 말에 실직한 가장으로부터 취업난에 시달리는 21세기 자녀에게까지 이어지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 일본에 비해 한국은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끈끈한 관계로부터 훨씬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가족, 감정 표현의 자유와 생활이 보장되어야

저자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경제체제, 도덕성(가치관)의 지배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가족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 했는데도 ‘가족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억압이 어떻게 개인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법과 규범의 안팎에서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 일본 국회에 상정되지 못한 채 끝나 논란의 여지를 남긴 ‘결혼 및 이혼에 관한 민법개정안’은 1)선택적 부부 別性제 도입 2)결혼 최저 연령 만 16세->만 18세로 조정 3)여성 재혼 금지 기간 180일->100일로 조정 4)5년 이상 별거는 이혼으로 인정 5)혼외자녀의 법정 상속분 평등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부부 별성제 도입’과 ‘5년 이상 별거의 이혼 인정’부분이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부부 별성’을 인정하면 부부관계가 방종하게 되어 도덕성을 위협하고, 이혼이 증가할 것이며 결국 가족이 붕괴할 것이라는 반론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경제가 정체될수록 도덕성을 강조하여 역행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자유를 봉쇄하고 차별을 정당화한다며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또 이전의 가족 틀 안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던 ‘감정 표현의 자유화’가 ‘5년 이상 별거의 이혼 인정’으로 드러났음을 인식하고, ‘싫다’는 비효율적인 감정을 구조 조정하여 효율적인 가족으로 재편하는 것이 옳다고 책 서두에서 짚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귀결이기도 하지만 ‘가정 내 이혼’이라는 별거상태가 지속된 관계에서 사람을 좋아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부관계의 규제완화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느끼는 것’과 ‘느껴야만 하는 것’의 감정 사회학적 관점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혼하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싫어지면 안 된다’는 감정적 압력이 연애결혼 이데올로기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과 관습, 도덕에 묶여 이미 부부가 아닌 삶을 피상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다수 일본인의 불행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고자 하는 저자는 자본주의에 매몰된 현대의 남녀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제안한다.

“남녀 모두가 자립할 수 있는 상황, 즉 여성도 직업을 갖고 남성도 가사와 육아를 부담하는 사회적 환경으로 정비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 모두 경제적으로나 생활면에서 자립하게 된다면 ‘좋아 한다’ ‘싫어 한다’는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절대적으로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가족이데올로기 별거하라!

가족 불확실성 시대에 대처하는 결혼전략으로 ‘결혼 후에도 직업을 유지하라’, ‘친정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라’는 저자의 조언은 전업주부가 사라져가는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신 전업주부’는 거품경제도 끝났고, 좋은 일자리도 없으니 고생스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주는 남자만 찾는 일본 미혼여성들의 새로운 트렌드이다. 저자가 현대 일본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한 ‘미혼화’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특히 미혼여성이 부모와 함께 살며 독신생활을 즐기기 때문에 ‘미혼화’가 심각해지고 있고, 이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미혼여성을 붙잡아두고 있는 부모에게 있다고 집중 공격했다. 남녀평등의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해온 저자의 논점에서 본다면, 이 부분의 해석은 고생하기 싫어하는 철없는 미혼여성과 그들 부모의 안일함에 ‘미혼화’의 전적인 책임을 묻는 듯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혼남성은 개인주의와 소극적인 인간관계, 경제적 문제 등으로 적극적인 결혼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출산’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심각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들은 매우 피상적이고 단견에 머물러 있다. 아이를 낳도록 아무리 부추겨봐야 근본적인 육아환경과 직장 내 성차별적 환경이 개선되지 않으면 맞벌이부부, 특히 여성은 절대 출산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저출산의 열쇠는 ‘여성노동의 정당한 평가와 처우’에 있다는 저자의 혜안은 이런 점에서 탁월하다.

결혼 후 맞벌이로 힘겹게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육아 스트레스와 고용의 불안까지 떠안아야 한다면 어떤 미혼여성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독신을 포기하고 애써 결혼을 선택하겠는가? 미혼여성의 미혼화가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면 미혼남성의 미혼화는 현실의 악조건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농어촌 미혼남성들만 결혼 기피 대상이 되어 노총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의해 ‘결혼 시장’에서 낙오되는 도시 미혼남성들도 급증하고 있는 시대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남자는 월등한 경제력을, 여자는 미모와 전문 직업을 갖추어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일본 미혼여성의 ‘미혼화’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의 혜택을 입어 경제력을 갖춘 부모들이 자녀를 독립시키지 않고, 사치스런 개인의 삶을 향유하게 한 데 중대한 원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를 점하는 서민층에 해당되는 해석은 아니라고 본다. 백수인 20대 자녀와 50대인 실직한 남편, 비정규직 아내로 이루어진 서민 가족이 고통스럽게 생계를 이어나가는 한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오히려 빈부의 양극화가 극명한 한국에서는 부유층 자녀들끼리의 중매결혼, 결혼 정보업체를 통한 수준(경제)별 결혼이 성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령화’의 문제도 일방적으로 여성들이 고령자의 ‘개호(간병)’를 전담해온 사회적, 관습적 행태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와 다르게 한국의 고령화는 ‘독거노인’과 ‘가족의 해체’ ‘의료시스템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 전반적으로 부동산 경기는 침체하고, 도심의 전세난은 가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 간병사업과 고급실버타운은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자본주의와 가족 이데올로기, 빈부의 양극화를 첨예하게 드러내는 거울이 아닌가 싶다.

 

자유와 삶이 존중되는 가족의 희망을 품다

<윤리 21>에서 가라타니 고진(Karatani Kojin, 1941~ )은 고베 시 중학생 사건을 다루면서 ‘사회’라는 강력한 힘의 유래를 ‘마을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 사회 구성원은 고립을 두려워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일 뿐, 중심은 ‘사회’이고 ‘자기’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없는 구성체에서 인간은 과연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고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기본 단위로 존재해 온 ‘우리가 알던 가족’은 과연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가?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불편함의 본질을 모른 채 동거해온 가족이 비로소 구조적인 해체 작업을 시도하고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자기’를 망각하고 가족을 위한 삶을 구성해온 전업주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도구화, 파편화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을 가족의 보호막에서조차 밀어내 버린다면 미래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일방의 희생으로 연명하는 가족의 구조에서 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삶이 존중되는 이해와 협력의 구조로 재편된다면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오래된 미래와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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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사회를 보는 프리즘, 가족 2-④ [4人4色 책읽기]

주승일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자)

가족의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다. 혼자 생활하는 싱글과 결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명절 때나 되어야 가족이 간신히 한자리에 모이면 화제는 단연 ‘결혼’이다. 결혼적령기는 해가 갈수록 늦춰지고 있고, 사회의 만혼화?미혼화 역시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렇다고 결혼 생활이 솔로 생활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솔천커지’(솔로 천국, 커플 지옥)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있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미친 소리가 아니다. ‘이혼’은 TV 등 대중매체의 단골손님 아니던가. 이제 가족은 영원한 동반자이고 가정은 안정된 공간이라는 생각은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원제와 같이 ‘가족의 구조조정’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일본의 가족은 어디로 가는가?

이런 가족의 위기는 우리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도서출판 그린비 펴냄)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 책은 전후(戰後)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정착된 ‘남편-샐러리맨’과 ‘아내-전업주부’를 골격으로 하는 일본의 핵가족 구조가 경제 거품이 꺼진 후 해체되어 가는 모습을 분석해 주고 있다. 우리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와 함께 이 책을 기획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가족 구조 변화를 살펴보고, 이러한 현상을 우리의 시각에서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지 우리의 가족 구조와 비교하며 분석할 수 있는 논점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큰 틀에서 보자면 동아시아의 각종 문화 현상, 역사적 문제를 공유하고 서로 간에 교류를 더 넓히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일본의 가족은 1990년대 이후 급격한 노령화와 이혼율의 증가, 미혼화, 저출산 등에 시달리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부모를 모시는 걸 점점 꺼려하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관계 또한 꺼려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배우자 외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기회도 늘고 있고, 이에 발맞추어 싫어진 배우자와 이혼하는 건수도 늘고 있다. 경제적 욕구로 결혼 상태를 마지못해 유지하는 ‘가정 내 이혼’ 빈도까지 고려하면 부부관계부터가 위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의 성립을 가져오는 결혼을 보자면, 그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평균 초혼연령 추이를 보면 전후 이래 점차 상승해 90년대 말에는 남성 28.6세, 여성 26.7세에 다다랐다. 이 책은 결혼이 늦춰지는 이유로 저성장으로 인해 젊은 세대의 경제력이 부모 세대만 못하게 되어 경제력 높은 부모를 가진 여성 및 경제력 낮은 남성은 결혼하기 어렵게 된 점, 그리고 결혼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지게 되어 인기 있는 사람은 결혼 시기를 늦추고 인기 없는 사람은 상대를 만나기 어려운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경제력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령화를 시스템을 통해 해소하지 못하고 여전히 가정 내 부양 책임에 의존한다는 점도 결혼 기피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한다.
결혼 기피와 맞물린 저출산의 문제 역시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다. 대졸 미혼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 심리적 동인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철이 들 때까지는 일을 쉬고, 아이가 크면 다시 일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아이 셋을 키우려면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쪼들려요.” “내 아이니까 직접 키우고 싶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생활비 때문에 가능하다면 계속 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은 경제력이 윗세대만 못하기 때문에 취업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자연히 아이를 많이(혹은 아예)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다.
현대 일본사회의 기본단위가 되어 주었던 ‘가족’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렇게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이 위기의 주범으로 이 책은 ‘경제의 저성장’을 들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저성장’으로 포괄하기보다는 거시경제와 사회구조가 맞물린 문제라는 점, 특히 경제와 고용의 문제가 부각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핵심은 경제와 고용의 문제

일본에서 경제 불황의 여파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있다. 그것은 1994년경에 있었던 일본의 유명 항공사가 스튜어디스를 계약직으로 채용한 사건이다. 스튜어디스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해야 가능한 직업이었기에 젊은 여성들에게는 동경하는 직업 중 하나였고, 스튜어디스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분 상승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업에서조차 급여와 대우가 한참이나 열악한 비정규직을 둔 것이니 일본인들의 충격이 컸던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크게 늘면서 ‘종신고용, 연공서열’ 등 일본 노동계의 상징이 무너진 것이다. 위 사건과 같은 직장 내 하청(사내하도급), 그리고 하청에 하청을 주는 등의 악성 고용 방식이 나타나 이른바 ‘유연하게’ 노동자들을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노동자들 간에도 위계가 뚜렷이 구분되어 갈등의 불씨를 안게 되었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할 것 없이 고용 불안, 심하면 실업 공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고, 비정규직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재계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평생직장 개념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청년들 역시 높아진 취업 장벽에 가로막힌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1996년 이래 취직 빙하기의 파도가 바뀌지 않고 취직이 정해지지 않아서 우왕좌왕하는 학생, 취직 재수를 하겠다고 결의하는 학생 등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젊은 여성들이 ‘취집’(전업주부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경제력 있는 젊은 남성들이 줄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쉬운 길이 아니다. 취업의 길이 어렵다 보니 일본에서는 기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뚜렷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프리터’(free+arbeiter)나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적 싱글’(parasite single), 그리고 (직접적 원인은 아닐 수 있지만) 사회생활을 회피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 등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인간형이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 큰 문제로 부각될 정도로 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문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은 이미 전체 노동자 중 1/3 이상(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약 35%)을 차지할 정도인데 이는 일본과 비슷한 수치이며(2010년에 34%), ‘88만원 세대’로 상징되는 청년들의 실업 문제는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위해, 불법파견과 무단해고(정규직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훨씬 자르기 쉬운 상황이다)에 항의하기 위해 회사에서,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이런 힘조차도 없는 이들은 (‘비정규직 보호법’에 보호받기는커녕) 해마다 자리를 옮겨야 하고,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면서 고강도 노동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들은 취직을 위한 일(공부)에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면서도 취업이라는 바늘구멍 뚫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청년들은 경쟁사회에 내몰려 있고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식’들만이 좋은 위치로 등극하고 있다. 빈부의 격차만큼이나 빈부의 되물림이 심화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지나친 경쟁의 피로감에 지친 청년 세대에서 일본과 마찬가지의 기형적 생활인이 탄생하여 사회문제로 부각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따로 또 같이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을 꿈꾸며

가족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이다. 역으로, 사회 문제가 가족의 위기를 불러 왔다. 기존 가족 구조의 붕괴는 구성원들 개인의 태도와 심리에 국한할 수 없다. 이 책은 주로 ‘불황’을 문제 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회 기저에 흐르는 구조적 모순이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지은이 야마다 마사히로는 다른 책에서 일본의 지나친 경쟁과 그 속에서 패배한 이들이 다시 일어서기 힘든 구조적 모순, 다른 꿈조차 꾸기 힘든 하류인을 양산하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연구하는 가족사회학은 ‘가족’만큼이나 ‘사회’ 전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제안하는 사회학적 처방은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가짐이나 상대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을 포함하면서도 근대사회가 지향하는 합리성과 효율성, 제도적 정비와 방안을 강조하고 있다. 성별 역할의 분담이나 풍족한 생활에 대한 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한 애정으로 결합하고, 직장이나 자원봉사, 취미 등 좋아하는 영역에서 각자의 꿈을 추구해야 하고”, 자녀에게는 압력을 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는 생활의 보장, 노동력의 재생산, 가족의 경제생활 보장, 성차별적인 노동환경 개선, 약자 보호, 여성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 개선 등의 관점에 기반하여 제도적인 근본 대책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은 이래야 한다’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삶의 보람을 느끼며 ‘더 좋은 가족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끝을 맺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가족을 거시적 안목과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원리적인 수준이지만) 대안을 제시한 사회학 저서이다. 이제 이를 이어받아 가족과 연동된 질문들(예컨대 고용과 세대와 관련한 문제들)을 첨예하게 벼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자체를 좀 다른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함께 사는 사람들’이나 ‘공동체’의 관점에서, 혹은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라는 식구(食口)의 관점에서, 아직은 생소하지만, 가능한 가족의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맹목성,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폭력, 장애인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같은 문제가 기존 가족 관념의 그림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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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권력의 시선에서 자유로울까?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장윤성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매일 두 번 이상 엘리베이터를 타며 오르내린다. 엘리베이터를 낯선 이와 함께 타면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곤란하다. 아마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와 상대방은 각각 다른 곳을 응시하며 한 평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을 어색한 침묵에 잠기게 한다. 상대방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린 후 비로서 내 시선은 자유로워진다.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고치거나 얼굴을 살핀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없기 때문에 내 시선도 행동도 자유롭다. 내가 아닌 남이 나를 쳐다보는 것은 어색하다. 심지어 불쾌하기도 하다. 작가는 그 이유를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당혹감과 모욕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남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의사가 환자의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생물학적 양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이다.

이런 시선의 관계에는 지배 관계가 따른다. 바라보는 자는 시선이고 바라보여 지는 자는 눈이다. 바라보는 자의 시선은 바라보여지는 자의 눈을 지배한다.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타인은 내게 지옥이 된다. 그래서 뒷모습을 보일 때 더 안절부절 해진다.

면접을 보게 되는 상황도 한가지이다. 면접관의 객관적인 냉혹한 시선 안에서 나는 하나 둘 옷이 벗겨지는 듯하다. 면접관은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지만 나는 두려움에 긴장한다. 면접관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면접관의 눈을 응시하며 말해야 되는 상황에 식은땀을 흘린다. 면접관의 바라보는 시선과 나의 바라보는 눈 사이에 지배와 종속관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시선에도 권력은 존재한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잔인한 처형은 공개된 처형이었다. 17세기말 아비뇽의 판례를 보면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죄수를 처형했다. 형리는 처형된 죄수의 몸을 내장부터 하나하나 꺼내 분해한다. 시체에 가혹행위를 하는 까닭은 군주가 가진 힘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지배자인 군주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처벌은 잔혹했으며 이 처벌을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보여줬다. 공개처형은 이 장면을 바라보는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여 군주의 권력을 굳건하게 만드는 통치수단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공개처형은 사라지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18세기부터 19세기 개혁론자들은 공개처형이 민중을 위협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은 표면적 이유이다. 공개처형을 보면서 민중은 처벌받는 사람과 동질감을 느꼈다. 민중은 죄수가 당하는 잔인한 처형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감에서 저항의지가 시작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후 로마는 크리스트교를 핍박했다.

크리스트교 신자들을 원형 경기장에 넣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 했다. 끔찍하고 처연한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죽음에 로마시민 중 일부는 크리스트교인이 되기도 했다. 구경거리가 된 죽음 앞에 크리스트교인들의 종교적 신념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로마는 크리스트교를 공인했다. 공개처형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해 폐지된 것이다. 푸코는 공개처형제도의 폐지가 죄수에 대한 인권신장이 아니라 한계에 부딪친 권력 기술의 전환이라고 했다.

국가는 권력유지를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감시’이다. 공개된 처형 대신 폐쇄된 공간 속에서 죄수들을 몰아넣고 엄격한 감시와 꼼꼼한 일과표로 통제한다. 1797년부터 죄수들은 네 부류로 나뉘었다. 네가지 부류로 나눈 기준은 죄수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감시되는 개인의 잠재적인 위험이 근거였다. 죄수들은 일과표에 따라 식사, 노동, 운동, 학습 등을 철저히 수행한다. 이 규범의 수행여부는 감시를 통해 확인한다.

죄수들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 규율적 권력이다. 규율적 권력은 공개처형에서 보여준 과시적 권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권력이다. 과시적 권력은 민중들에게 저항의지를 심어주기도 한다. 규율적 권력은 저항 의지 자체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규율적 권력은 민중이 스스로 권력에 복종하도록 한다. 죄수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권력에 순종하는 인간이 된다.

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우리는 많은 규율에 시달린다. 내가 경험한 규율중 가장 심각했던 규율은 중, 고등학교 시절 두발 단속이었다. 용모단정이라는 미명하에 머리카락 길이는 귀밑 5cm로 정해졌다. 선생님들은 자를 들고 다니시며 5cm가 넘는 머리카락을 가위로 무자비하게 자르셨다. 싹둑 잘려나가는 내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내 의지도 함께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군대에서 받는 훈련들로 ‘극기’를 하여 강한 남자로 개선된다고 한다.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우리는 군에서 받는 반복되는 훈련들로 ‘순종’하는 인간으로 개량되어 간다.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 경제력을 가진 재벌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도 종종 군대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복종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힘든 훈련을 통해 순종하는 인간으로 개량할 필요가 없다. 순종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규율적 권력은 감시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감시는 바로 시선에서 나온다.

나는 감시당하고 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은 완벽한 감시 장치, ‘판옵티콘’을 구상한다.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판옵티콘’은 하나의 시선만으로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감옥건물이다. 건축가도 아닌 정치 사상가였던 벤담이 감옥 건축을 구상한 까닭은 감옥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실험공간이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의 원리는 시선의 불균형,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반지모양의 원형건물 안 중앙의 탑에는 감시인을 둔다. 중앙 탑은 빛이 차단되어 수감자는 감시인을 확인하지 못한다. 반면 수감자의 독방에는 항상 빛이 통과되게 한다. 이 빛은 감시자의 시선이 죄수들을 더 잘 파악하게 만들어준다.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의 원리인 시선의 불균형, 비대칭성은 오늘날 경찰서 심문실에서 이용되고 있다. 용의자가 있는 심문실은 거울처럼 보이는 창이 있다. 용의자는 그 창을 통해 다른 방에 있는 검사와 경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검사와 경관은 그 창을 통해 용의자를 관찰한다. 판옵티콘의 죄수들이나 경찰서 심문실의 용의자는 감시인을 확인하지 못한다.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식하고 있다. 이 시선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제약이 따른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구상으로만 끝나버린 채 건축되지 못했다. 판옵티콘 이라는 건물은 존재하지 않으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변형된 판옵티콘들이 존재한다. 그 변형된 판옵티콘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감시하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들은 시험으로 학습능력을 감시당하고 교사들은 교원평가제로 교수능력을 감시당한다. 소비자들은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하면서 기업에게 소비행태를 감시받는다. 보유율 90%가 넘는 휴대폰도 훌륭한 감시도구이다. 휴대전화 통화기록으로 감시당하고 GPS와 결합하여 위치도 추적당한다. 나의 언행이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로 찍히기도 한다.

인터넷 상에서 회원가입을 하면서도 감시받는다. 내가 기록한 구체적 신상정보가 유출되어 불이익도 받는다. 건강보험제도로 내 질병의 사항들이 보험회사 등에 의해 감시받는다. 나는 기억조차 못하는 내 질병을 보험회사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곳곳의 폐쇄회로 TV는 우리를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구실로 유용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 감시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울지 알 수 없다. 행정안전부는 2013년부터 주민등록증에 IC칩을 내장한 전자주민증으로 변경하겠다고 한다.

정부가 전자주민증이 필요하다고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응급치료 상황시 필요한 혈액형 정보를 넣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는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응급상황시라도 수혈을 하기 전 혈액형검사는 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알려준 혈액형이나 주민증에 기재된 혈액형으로 수혈하는 의사는 없다. 그대로 수혈하기에는 위험성이 크다는 것은 의사라면 숙지하고 있는 기본 의학상식이다. 정부가 근거없는 이유를 내세워 국민을 기만하면서까지 전자주민증으로 변경하려는 목적은 감시이다. 좀 더 효율적으로 국민을 감시하려는 것이다.

나는 트루먼이다

십여 년 전에 섬뜩한 영화를 관람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이다. 트루먼 쇼는 트루먼이라는 남자의 일상을 24시간 숨겨진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전 세계에 내 보내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이 트루먼 쇼에 열광한다. 평범한 남자의 일상생활에 푹 빠진 이유는 엿보기의 심리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사생활을 엿보며 쾌감을 느낀다. 실제로 트루먼 쇼 같은 인간의 엿보기 심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장르로 방영되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이혼위기에 처한 여러 쌍의 부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전개되는 내용을 시청자들도 대충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하는 이유는 가상이 아닌 실제 부부생활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먼 쇼를 관람한 후 다른 사람을 내가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나도 엿볼 수 있다는 확연한 진실을 깨닫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금인출기 앞에서, 주차장에서 나는 트루먼이다. 어디를 가든지 카메라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나는 트루먼처럼 나를 촬영하는 폐쇄회로 TV를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폐쇄회로 TV가 나를 촬영하고 있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의식의 세계는 그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다. 내 의식은 나를 감시하는 시선에 길들여져 있어서 편안하게 익숙해졌다. 자연스러운 그 익숙함은 감시받는 시선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지니지 못하게 한다. 설령 그 의지를 갖게 되더라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섬을 탈출한 트루먼은 과연 시선에서 탈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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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둘째 글로서 <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차라리 탈선했으면 싶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

이 책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시민단체가 ‘등대지기 학교’라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09년 4-5월에 <시사IN>에 중계한 내용을 단행본으로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교육 평론가 이범,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 이우학교 교감 이수광, 사이버대학교 상담학부 교수 신을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기숙, 인고 서원 대표 허아람,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송인수 등 총 일곱 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강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의식 문체를 사용하며 현장의 반응도 기록하고 있어 독자가 마치 청중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 만큼 이 책은 주제에 비해 생동감 있고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밝힌 바 ‘아이들을 스스로 공부하는 창의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동시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을 끝장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이남수, 신을진, 허아람의 강의는 주로 전자의 취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범, 이수광, 조기숙의 강의는 주로 후자에 초점을 맞춘 강의였다. 마지막으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공동대표인 송인수의 강의는 이 운동의 존재가치와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공부 못하는 나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다. 왜냐면 바로 내가 무지막지한 사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을 벗어난 학습을 사교육이라 정의한다면 외국 학교에 보내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만큼 확실한 사교육이 있겠는가? 내가 바로 자식들을 외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송구스럽고 부담스러웠다. 특히 송인수 대표의 세상을 바꾸는 순서에 나는 제1영역, 제4영역에 속하는 부류인데, 이 부류는 현 교육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새로운 정책을 갈망하면서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자구책을 세우는 경우로 현실주의자라 칭한다. 이 부분에서 발가벗은 임금님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또한 읽는 내내 답답하였다. 조기숙 교수의 강의에 밝힌 바, 최다 수업시간, 최고의 사교육비, 공교육비가 GDP의 4.5%,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국가경쟁력, 대학경쟁력, 국민의 행복지수가 모두 낮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해 200명이상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며, 자살이 10대 사망 원인 중 교통사고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는 현실이다. 또한 현 정부의 공교육 강화정책이 사교육과 경쟁하고, 결국에 가서는 사교육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시골의 대표 고등학교가 서울의 유명 영어강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하고 결국 학생들의 영어성적이 늘었다는 것이 공교육의 사교육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방과 후 수업과 활동이 사교육비 비용을 줄였다고는 하나 사교육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방과 후 수업을 경험하고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느낀 부모가 64%나 된다지 않나. 또한 돈 있는 집안의 학생들은 아예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험은 사회, 경제문제를 도외시 한 채 교육문제만 따로 떼어 정책과 제도적 접근만을 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도시와 부자에게 날개 달아주는 사교육

이렇듯 부끄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면서 이 분들이 제시하는 핵심은 두 가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핵심은 대학입시에 있고 대학입시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사회경제모순과 철저히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은 학벌사회, 대학서열주의, 그리고 유교적 과거제의 전통 등이 결국 대학입시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인생이 바뀐다는 신화 이면에는 일등주의, 획일주의, 물질만능주의라는 가치가 내재화 되어 있다. 사회양극화, 경제불평등, 공정치 못한 사회라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학생과 학부모를 더욱 경쟁으로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쟁구도 하에서는 시골은 도시에, 빈자는 부자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 사교육이 도시와 부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꼴이다. 이 책에서 강사들은 현실을 분석하고 다양한 정책과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꼼꼼히 그것들을 읽다보면 그래도 현 수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강사들은 특히 아이의 적성을 파악 못 하고 스스로의 가치부재 혹은 혼란으로 우왕좌왕하는 부모의 모습을 지적한다. ‘엄마표’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는 알파맘과 베타맘 사이에 끼어있는 주변맘의 혼란스러움을 분석하였다. 이우학교 교감이신 이수광은 부모의 여섯 가지 유형을 예로 들면서 위로는 탈주형, 질주형이 있고, 좋은 방향으로 역방형, 유목형이 있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동화형, 순응형이 우리의 대다수 모습이라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보다 부모가 더 문제고 교육자체보다 사회가 더 문제라는 사실이다. 부모가 평생 공부할 자세가 안 되었다면? 부모가 성찰하고 분투하고, 연대하고 소통하지 않는 삶을 사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올바른 공부를 지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면 아무리 공교육이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어도 우리의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단선적 사고방식의 오류에 빠지고, ‘그래서 어쩌라구?’ 라는 반발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의 문제는 결국 부모와 어른, 사회의 문제라는 의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사교육과 공교육, 연대는 불가능할까?

나는 사실 사교육과 공교육의 대결구도가 악과 선의 구도로 가는 것은 반대한다. 일등주의, 하나의 가치만 중시하는 획일주의를 조장하는 체계가 잘못된 것이라 인정한다면 사교육이나 공교육은 똑같은 선상에서 평가될 대상일 뿐이다. 잘못된 가치를 조장하는 사교육이 나쁘다면 그런 사교육을 닮아가는 공교육도 나쁘다. 공교육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키워주는 사교육은 다안성 측면에서 옳다. 공교육의 고유한 영역인 바른 품성을 갖는 인성과 인권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옳다. 그런 측면에서 사교육과 공교육은 반목하고 경쟁할 수 있는 존재지만 연대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연대가 주류가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은 하지 말자. 정상을 향해 일렬로 빽빽하게 서 있는 주류의 시스템은 그 사이와 경계에서 휘젓고 다니는 소수의 연대세력에 의해 부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을 향해 서 있는 모든 이가 어느 순간 뒤로 돌아 자신들 앞에 펼쳐진 드넓은 대양을 보게 된다면 정상에서 온갖 폼을 다 재고 있던 그 허무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깃발을 내리지 않겠는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 책의 여는 글에서는 그런 자신감이 묻어나있다. 또한 이 책의 저자인 일곱 분의 강사들 면면이 참으로 뛰어난 사교육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또한 진정한 공교육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벌써 저자들 속에 모종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분들이 있기에 각성된 대중이 모이고 이들이 세상을 개혁하는 소수가 될 것이라 확신해 본다.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특히, 인디고서점 허아람 대표의 글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의 속에 소개된 책들을 모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책장에 꽂아놓고 저걸 언제 읽어야지 노려볼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방법이 인디고서점의 활동에 녹아있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시골에 사는 나는 줄곧 이런 생각을 해 왔다. ‘강남의 아이들처럼 따라 하면 우린 백전백패다. 우린 뭔가 다른 모습으로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의 근거는 처지와 환경이 다른 우리가 강남의 부모들의 가치관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된다. 어떻게 우리 시골아이들을 창의력 있고 리더쉽이 뛰어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나는 책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읽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전자는 후자에게 많은 것들을 금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문고전 독서였다.’ 내가 속해 있는 ‘책익는마을’도 사교육 좀 했으면 싶다. 그야말로 사회적 사교육!, 아이들에게 책 사주고 읽으라고만 하는 사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독서가가 되고 멘토가 되어 그들과 같이 해 줄 수 있는, 친구이며 스승이며 선배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지배계급이 되어 자기 삶에 매몰되지 말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그들과 맞장을 뜰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키워주는 것 말이다.

그런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이수광 교감의 강의에서 요즘 아이들 유형이라는 내용이 있다. 제도적 학습능력과 지적 호기심이라는 변수에 따라 체제순응형인 똑똑이, 체제동의형인 엄친아, 그리고 체제무감각인 잠돌이, 그리고 제도권 공부는 못 하지만 지적호기심은 왕성한 탈선아가 있단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그것을 보장하는 부모의 역할, 사회의 역할이 있었으면 한다. ‘책익는 마을’의 사회적 기여도 이런 맥락에서 설계되었으면 한다.

‘세상의 변화는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중심을 무너뜨린다. 우리 시골아이들에게 중심으로 가라는 것은 맨주먹인 채 전쟁터로 내모는 것과 같다. 주변에서 놀게 하자. 그야말로 탈선하게 하자. 물론 이 말은 내말이 아니다. 이우학교 이수광교감의 인용글이다.

‘줄을 벗어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 줄 것이다.’

이 말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나, 바로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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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첫째 글로서 <굿바이 사교육>(이범 외 지음, 시사 IN 펴냄)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핀란드식 희망 교실은 어떻게 가능한가? 1-① [4人4色 책읽기]

윤영돈 (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핀란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차라 그런지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 펴냄)을 읽으면서 한국의 교육 현실을 반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읽는 과정에서 핀란드의 초?중학교 교실 현장에 대한 원저자(후쿠타 세이지)의 생생한 묘사가 돋보였으며,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매 항목마다 한국의 교육현장과 비교?해설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거리가 떠올랐다. 왜 우리는 핀란드의 교육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핀란드식 교육이 무한 경쟁 시대에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핀란드식 교육이 학생의 개별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핀란드의 교육적 성취가 과연 한국적 현실에서 제도적 개선 없이 교실로부터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책 제목을 풀어 쓴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은 핀란드 교육, 교실에서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이 왠지 “한국의 공교육은 붕괴되고 있으나 사교육에서 핀란드식 교실혁명이 가능하다!”라고 읽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래도 책을 읽어간 순서대로 이야기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핀란드의 교실에 피어난 전인 교육의 가치

한국 사회는 숨 막히는 성적 경쟁을 촉발하는 시험사회이다. 그런데 핀란드의 교실에서는 학생들 간의 성적 경쟁이 없다고 한다. 경쟁이 없이 성적이 향상될 수 있을까. 경쟁이 없으면 성적이 향상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제고사와 같은 각종 시험을 적극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마다 서로 다른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타고난 능력과 소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학교 간 그리고 학생 간 경쟁을 부추기는 표준화된 시험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시험과 같은 동일한 척도로 개별성과 다양성을 지닌 학생들을 상대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개인의 차이는 비교대상이 아니라 배려대상”으로 간주하는 핀란드에서는 의무교육 기간에 해당하는 중학교 3학년(16세)까지 상대적인 학력평가를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간의 학력 격차가 크기 않으면서,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력을 지닐 수 있다. 한마디로 교육의 평등성과 수월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 의한 사회적?경제적 신분의 상승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교육에 의한 계급 재생산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좋은 가정의 자녀가 그렇지 못한 가정의 자녀보다 성적도 뛰어나고, 명문대 진학률도 높으며, 나아가 보다 우월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핀란드에서는 학생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핀란드의 핵심적인 교육과제가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위권 학생들을 끌어 올리되, 상위권은 제한 없이 개방한다. 특히 문제가 있는 학생을 위해서는 사회복지사, 심리전문가, 상담전문가, 특수교사 등에 의한 다각적인 교육지원이 이루어진다. 개인별 맞춤형 수업이 공교육 교실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개인별 맞춤형 수업은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의 전유물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암담하게 보인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은 어떻게 가능했나

핀란드의 교실혁명이 가능한 요인에는 다양한 수준의 여건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육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전반 핀란드는 사회민주주의를 토대로 규제완화와 분권화의 흐름 속에서 교육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가이드라인 정도를 제시하는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장학관제도나 교과서 검정 제도 폐지, 표준화된 평가 지양, 학급당 학생수 조정(20명 이하).

이와 함께 교육의 권한이 학교 현장과 교사의 손에 맡겨졌다. ‘경쟁’과 ‘효율성’을 키워드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교육흐름과는 사뭇 다른 독자노선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핀란드는 학력사회가 아니라서 명문대학을 졸업해야 사회적으로 유리하다는 인식자체가 없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고 있는 선행학습 열풍은 중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소위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문대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학문적 성취보다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한 간판 따기라는 것이 솔직한 답이 아닐까.

복지와 평등이라는 핀란드의 사회적 분위기는 학교 문화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배려와 존중과 협동의 가치가 교실이라는 미시적 차원에도 꽃피고 있다. 학생의 개별성과 자발성의 가치가 개인별 맞춤형 수업에서 드러난다. 더 나아가 교사와 학생 간 그리고 학생 상호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의 구성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사회 구성주의적 교육관이 실현되고 있다. 한국 교육계 역시 7차 교육과정 이래로 구성주의적 교육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교수?학습과정에 구현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노력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문대를 들어가기 위한 입시풍토와 표준화된 평가 시스템의 위력 앞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은 사회적?제도적 성숙과 함께 탁월한 교사의 수업전문성에서 그 성공 요인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교사의 수업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학급당 학생 규모를 들 수 있다. 학급정원의 상한성은 초등학교는 25명, 중학교는 18명인데, 현장에서는 초등학교는 20명 미만, 중학교는 10명 남짓 되는 소규모 학급으로 운영된다. 이러한 여건과 함께 교과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있어서 절대적인 재량권을 교사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 역시 교사의 수업전문성 발휘를 위한 중요한 여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교사들은 학생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최대한 옹호하면서, 개인별 맞춤형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의 성장을 위한 개별 평가를 실시한다. 교사의 수업전문성은 슐만(L. S. Shulman)이 언급한 바 있듯이 교과를 구성하는 학문의 내용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수업전문성은 ‘내용지식과 교수법의 합성물’로서 ‘교수학적 내용지식(Pedagogical Content Knowledge)’을 의미한다.

핀란드 교사들이 석사학위 소지자로서 수업전문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한국의 교사들은 그 정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사들 중에 석사학위뿐 아니라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도 적지 않고, 현장에서 열과 성을 다해 교사의 책무를 감당하는 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입학 자체가 힘든 현실에서 치열한 임용고시 경쟁을 뚫고 합격한 교사들의 실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필자 또한 대학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3차에 걸쳐 진행되는 임용고시의 수준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 첫발을 내딛은 교사들의 교육적 사랑과 열정이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국 사회에서 전인 교육은 순전히 교실만의 문제일까? 필자는 사회적?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스팔트에서 꽃 피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본다.

 

한국 교육의 희망이 교실에서 꽃피기 위해

핀란드 못지않게 한국의 교육 역시 3년마다 시행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분야별로 2,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문제는 그러한 학력 수준이 순수하게 공교육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교육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데 있다. 한국은 사교육비 규모가 연간 20조원이 넘는 사교육 1위 국가이다. 학업성취도는 단연 세계 최상위 국가에 속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지고, 과열된 경쟁과 입시 부담으로 인해 창의적 사고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문제해결 능력이나 리더십은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2007,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지식 채널e)을 보며 한 참을 운 적이 있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학생들이 10명 중 7명이었는데, 학교 수업내용을 학원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이란다. 설문에 참여한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가출 충동을 느껴보았고, 상당 부분 자살도 생각한 적이 있단다. 성적 때문에. 한 학생은 자신의 가장 큰 결점으로 ‘공부를 못 한다’고 말한다. 학습 부담으로 힘들어 하던 한 초등학생은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음악을 무시해 (…) 음악을 하고 싶은 우리들은 어디에서 배워야 하나 (…) 왜 우리는 다 다른데 같은 것을 배우며 같은 길을 가게 하나, 왜 음악을 잘 하는데, 다른 것을 배우며 다른 길을 가게 하나요(…)” ?음악시간?(이승기) 가사의 일부이다. 표준화된 시험과 입시전형으로 인해 학생들 대다수는 자신의 강점 지능을 발휘할 기회를 상실한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은 대체로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에 강점을 보이는 학생에게 유리하다. 그와 다른 지능에 강점을 지닌 학생들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시험일 수 있다. 음악 지능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하워드 가드너(H. Gardner) 하바드대 교수는 경험적으로 입증된 최소 8개의 지능을 다중지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바 있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학생은 신체운동 지능이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 수업과 관련된 내용을 몸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학교공부는 서툴지만 자기를 싫어하는 친구를 오히려 좋은 친구로 바꿀 수 있는 학생도 있다. 이러한 학생은 인간친화지능이 뛰어나다. 같은 수업 내용이라도 학생마다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하고, 이해한 것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에서 보여주고 있는 수업 방식은 어떤 면에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에 근거한 수업 모형과도 유사하다.

한국 사회에도 핀란드식 교실혁명을 일구어 가는 교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전인교육의 이상을 교실로부터 구현하고 있는 영웅적인 교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적?제도적 변화 없이 모든 교사에게 핀란드식 교실수업을 실시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교사 일반에게 요구되는 의무(duty)를 상회하는 초과의무(supererog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교실현장에서 초과의무를 수행하는 교사들에게 눈물 어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핀란드식 희망 수업이 우리 사회에서 꽃피기 위해서는 성과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국가 수준의 교육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고, 학급정원도 OECD 평균수준(21.5명, 2006년 기준)까지 줄여야 하며, 불필요한 행정 업무로부터 교사를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삼류대학 출신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다면 기업체에서 기꺼이 고용하는 기업 문화와 소위 명문대라는 간판보다는 사람됨과 재능이 부각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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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핀란드 교실, 왜 보여주기만 해요? 1-② [4人4色 책읽기]

김윤희 (서울상도중학교 교사)
학교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을까

사실 난 이 책을 이미 2년 전에 읽었다. 당시 난 몇몇 뜻이 맞는 동료교사와 더불어 한 달에 한두 번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다. 당시 상황이 우리가 모여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학교가 척박해졌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식의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바람이 우리나라에까지 불어왔던 것이다. 게다가 IMF 이후 경제적 안정이 중시되면서 교사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올라갔고 정년보장 62세, 철밥통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교사는 전 국민의 주적(主敵)이 되다시피 했다.

당시 교사에게 서열을 매겨 점수가 낮은 교사는 가차 없이 잘라내겠다는 협박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는 교사들을 위축시켰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학생들이 교사를 대하는 태도도 존경은 고사하고 신뢰조차 갖기 어려워지는 듯 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밤늦게까지 학원에 끌려다니며 學(학)은 했을지언정 習(습)은 할 시간 여유가 없었고,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분노가 쌓이는 듯했다. 학생이건 교사건 마치 건드리면 터질 듯한 그런 상태처럼 보이기만 했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도 없는 학생들에게 남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생각됐다. 한편으로는 버릇없고 이기적인 학생들에게 화가 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안쓰럽기도 했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게 하나 없다는 자괴감과 모멸감, 저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끝없는 자기 환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은 바꿀 수 없을지라도 단위학교에서나마 학교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꿔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모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교육철학과 교육사에 대한 책에서 시작해 대안교육, 학급경영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실행방법 등을 배울 수 있는 책으로 옮겨갔는데, 그 때 읽은 책 중 하나가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 펴냄)이다. 이 책은 후쿠다 세이지 교수가 핀란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수십 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책인데, 역자인 비상교육연구소장 박재원 씨가 한국교육의 실정에 맞게 전문가의 해설을 덧붙여 펴냈다. 각 장의 끝에서는 전문가 해설, 한국에서 적용가능성, 우리교육의 문제점과 희망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핀란드 교실혁명의 비밀, ‘차별 없는 교육’

기초교육에 해당하는 16세까지 상대적인 학력평가도 없고, 공부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며, 교사는 학생을 돕고 정부는 지원하고 부모는 협력하는 나라, 핀란드! 개인의 능력발달이 가정이나 지역의 환경조건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아 학교 내의 격차는 있지만 학교간의 격차는 작은 나라. 잘 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투자하고 똑같은 교육여건을 제공하면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 나라. 게다가 모든 권한을 단위학교에 위임하고 기회균등이야말로 능력을 키우는 최고의 방법임을 강조하는 나라. 이런 환상의 나라가 있다니, 책을 읽으면서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우리나라가 다양한 차이를 제도화하여 경쟁을 통해 탈락자 또는 패배자를 가급적 일찍 걸러내는 시스템이라면, 핀란드는 차이를 최소화 해 개개인의 불리함을 만회할 수 있도록 돕는 맞춤식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간의 격차를 없애고, 언제 어디서든 차별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학급 안에서는 학력의 차이에 따라 개별지도가 가능한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평균학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내 눈에 인상적인 것은, 한 학급 안에서 두 학년에 걸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아이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가능하도록 복식학급을 일반화한 커리큘럼이었다. 긴 안목으로 보면 모든 아이가 성장하게 되어있다는 전제 아래, 같은 학생이라도 과목이나 분야에 따라 적성과 능력이 다르므로, 모두 똑같은 과제를 부여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여유! 이 여유가 우리에겐 전혀 없음이 안타까웠다.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창원이’(가명)가 떠오른다! 수업시간에 늘 멍 때리고 손가락이 망가질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는 창원이도 핀란드에서라면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의지가 없는지 능력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체육시간을 제외하곤 창원이가관심 갖는 수업시간은 없다. 도무지 따라잡을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사고의 과정이나 지식의 활용이 중요한 것이지 양이나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우리교육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의 자율성보다 제도적 개선이 먼저

핀란드 교육은 학교와 교사의 자율권을 보장하여 학교가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교사가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하는 환경이야말로 학생들의 학습을 향상시키는 밑바탕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역자도 ‘단위학교로의 권한과 책임의 이양’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주장하지 않고, 교사 개개인이 교실에서 자율적으로 우리교육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쉬웠다. 역자가 공교육종사자가 아니다보니 아무리 현장교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문을 구했다고는 해도 학교 현장과의 괴리감이 있을 수밖에!

모두에게 묻고 싶다! 교사 개개인의 노력이 학생의 의욕증진과 동기부여를 불러오고, 그것이 공교육의 신뢰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교사 개개인의 노력으로 극심할 뿐만 아니라 공정하지도 않은 이 무한경쟁을 바꾸고 피폐해진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다고 보는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답답했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공교육과 교사에 대한 불신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오히려 우리 교육의 현주소가 선명해져 절망감이 들었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교육여건과 환경을 가진 핀란드식 교육이 우리에게 과연 현실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특히 한국식 경쟁교육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이 핀란드식 교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핀란드 교육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모든 학생들에게 차별 없이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공교육에 대한 관점과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세계 어느 나라이든 모두가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는 단지 희망하기에만 머물렀다는 것이고, 핀란드는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 아닌가 싶다.

 

핀란드 교육, 왜 따라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중학교 2학년 아들 녀석이 한마디 한다.

“핀란드 교육에 대해 텔레비전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러 번 봤는데, 왜 따라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좋으니까 보여주었을 거 아냐? 한 학급에 학생은 15명, 보조교사 선생님도 두 명이나 되던데! 왜 보여주기만 하는 거지?”

참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웃음만 나올 뿐. 결국 문제는 공교육에 대한 관점과 철학의 부재가 아닐까? 교육을 위한 기본 인프라는 구축해 놓지도 않고 불합리한 승진제도에 목매는 교사가 우대받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교사와 학생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다. 모든 아이는 성장한다는 바탕 아래 개인차를 인정하고, 그래도 뒤처지는 학생에게는 특별 팀을 만들어 도움을 주고 끝까지 한 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도록 지원하는 핀란드 교육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 교육의 현실은 30명이 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식의 수업을 하고 정착된 지식의 양으로 ‘잘 한다, 못 한다’를 판단한 뒤, 뒤떨어지는 학생들은 하루라도 빨리 낙오자를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하는 체제와 다름없다. 핀란드처럼 교사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보조교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학급당 학생 수를 25명 이하로 감축시킨다면 제대로 된 공교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 이후 변화가 있기는 했다. 먼저 교육청이 교육지원청으로 바뀌고, 교원평가라는 서슬퍼런 칼날도 누그러졌다. 게다가 ‘학업성취도 검사’가 ‘문화예술 체험학습의 날’로 바뀌고,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학교운동이 서울에도 불기 시작했다. 입시제도 한 쪽으로만 쏠려 있던 우리 교육이 다각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봐도 될까? 무한경쟁 교육의 문제점이 극대화되면서 혁신학교가 하나의 대안으로 나왔고, 그 혁신학교 이론과 성공 가능성을 <핀란드 교실혁명>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이 책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학생 하나 하나와 눈 마주치며 수업할 수만 있다면

얼마 전 교육과학기술부는 ‘예비교원 해외진출’과 교원자격증 소지자 가운데 ‘학습보조 인턴교사’ 1만 명을 채용해 새 학기부터 전국 초·중·고교에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교사들의 업무 부담을 덜고, 학생들의 학력신장 효과도 얻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학교에는 비정규직 교사가 너무 많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은 교육에 전념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또 언어적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예비교사 수출 역시 제고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아직 우리 교육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교육 인프라의 확충이라고 본다. 즉 교육여건과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정규교사를 대폭 늘려서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싶다.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들면 학습 부진아를 줄이는데도 가장 효과적이리라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30명이 넘는 아이들 눈 한 번 마주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그 학생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핀란드 교육이 가진 강점 중 다른 것은 놓아두더라도 학급당 학생 수 축소, 이것 하나만이라도 시행한다면 공교육의 문제점 중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핀란드 교실혁명>의 역자는 핀란드 교육의 성공 사례와 견줄만한 일을 우리나라 방과 후 학교로 들었는데, 그 성공 이유 또한 학생 수가 적었기에 다양한 시도와 개인별 맞춤지도가 가능하고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2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지금의 교육현장에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혁신학교들이 선두에서 우리 공교육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바람직한 새 교육모델을 만들어 적용시키고자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으며, 교사들도 그 움직임에 동참하려는 기운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후쿠다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혁명>과 사토 마나부의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라는 책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교육에서 평등성과 효율성은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깨닫고, 우리 교육의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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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교사의 변화, 일파만파의 교육혁명이 된다 1-③ [4人4色 책읽기]

김세연 (인천도림초등학교 교사)
왜 세계 사람들은 핀란드에 주목하는가?

대한민국의 교육에 만족하는 학생, 학부모, 교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 계속 쏟아지는 교육관련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학교가 가고 싶은 곳, 즐거운 곳, 행복한 곳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교사인 나도 점점 힘들어지니 학생들은 어떤 마음일지 상상이 된다. 한동안 교육계에는 핀란드 바람이 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하는 국제학생성취도평가(PISA)에서 핀란드 학생들이 2000년, 2003년, 2006년 모두 다른 나라의 학생들보다 우수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도 교육복지의 나라, 교육개혁이 성공한 나라로 불리는 핀란드가 궁금했다. 물론 한국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세계 사람들이 핀란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 결과에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핀란드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북유럽 교육탐방의 기회가 있어 2010년 1월에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학교를 직접 방문했다. 먼저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교육현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건물 하나를 짓더라도 아이들을 생각하고, 교육철학을 녹여 토론을 하며 교사들이 설계안을 낸다. 국가에서는 교육과정의 큰 틀만 제시하고 모든 권한은 학교와 교사에게 준다. 단 한명의 학생도 소중히 여기고 대학입학 시험 전에는 특별한 평가를 하지 않는다. 복지국가이다 보니 교육비 걱정도 없다. 누구라도 배울 수 있는 평등한 기회가 보장이 된다.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교육청장이 20년간 바뀌지 않은 나라가 핀란드다.

 

Commentary – 핀란드 vs. 대한민국

우리의 교육현실을 돌아보면 절로 한숨이 나고 걱정이 된다. 사회적 합의도 없이 교육정책이나 제도를 만들고, 몇 십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모양의 교실에서 똑같은 교과서로 아직도 일제식 수업을 하고 있다. 핀란드를 부러워만 할 수도 없고 핀란드 제도를 갖고 온다고 해도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있는 이 나라에 잘 정착할 수도 없다. 우리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핀란드 교실 혁명>은 저자 후쿠타 세이지가 수십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쓴 책이다. 핀란드 교육제도와 여러 가지 특징들이 설명되어 있고 학교 3곳을 탐방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학교탐방은 하루 종일 수업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하여 핀란드 교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책이 단순히 번역만 해서 출판했다면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우리식’으로 교육을 펴기 위해서는 ‘우리 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꼭지마다 한국과 핀란드를 비교한 번역자의 해설이 달려 있어 좋았다. 난 이 해설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국가 정책이나 예산 문제처럼 거창한 문제는 일단 제쳐두자. 핀란드 교육의 좋은 점 중에서 반드시 우리가 교실에서 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내용이다.

 

교육혁명의 시작 – 교실

그 내용을 곱씹으며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 펴냄)이 우리에게 주는 새로운 관점을 살펴보자.

첫째, 지식관과 학력관의 변화이다. 지금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암기하고 있는가를 두고 평가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두뇌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가 진짜 필요한 지식일지는 의문이다. 사회구성주의적인 학습관은 지식이 고착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스스로 편성해가는 것이라 본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의 목적, 가치관, 알고 싶다는 욕구 등이 중요하고 교사는 학습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PISA2009에서는 디지털을 이용한 읽기, 쓰기 능력이 처음으로 측정되었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여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육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학생들에게 동기부여하기이다. 핀란드는 학생 뿐 아니라 학부모, 교사 모두가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강요한다. 교사들은 학생의 관심과 흥미보다 내가 잘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 아이들이 무엇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배움이 즐겁다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은 다른 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아이들이 일주일간의 학습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평가하는 시간이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데 교과학습과 그 외 하고 싶은 내용을 스스로 계획한다.

셋째, 협동학습을 통한 교육활동이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속에서 더욱 큰 배움이 일어난다. 경쟁은 사고력을 약화시키고 깊이 생각할 시간과 협동의 기회도 빼앗고 심각한 스트레스와 공부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낳는다. 반대로 협동학습은 학생들의 사회성도 키우고 학습의 효과도 높다. 교실의 분위기와 학생들의 공부 태도에도 영향을 미쳐 서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방송에서 많이 나왔던 아키타 현의 기적과 사토 마나부 교수의 배움의 공동체를 실천하고 있는 학교들을 보면 협동학습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다. 어느 학년을 가르치더라도 수업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넷째, 학생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수업 모형을 개발하는 것이다. 특히 교수법 보다는 학습법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진보적 교육감이 당선된 지역에서 추진하는 혁신학교에서는 주제통합 학습, 블록제 수업, 테마 학습 등의 다양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수업은 집중력도 높고 학생들이 즐거워한다. 단순한 암기, 지식 전달만을 하는 수업을 벗어나 보자. 기존의 수업 모형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다수 학생들은 낙오자가 되고 만다. 그 아이들을 수업에 참여시켜야 한다.

다섯째, 여유를 두자. 우리는 수업을 시작하고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통제가 들어간다. “여기를 봐라”, “책을 펴라”, “떠들지 마라” 등의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체벌을 하는 교사도 있다. 하지만 핀란드 교사들은 다르다. 학생들의 개인차를 인정하고 여유 있게 기다릴 줄 안다. 신기하게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천천히 수업에 참여한다. 15분~20분 정도가 되면 모두 함께하는 수업이 된다. 우리의 조급함이 더 산만한 수업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한다.

물론 평가와 입시가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면 교육의 새로운 변화는 오지 않는다. 바꾸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이 있어야 큰 변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들의 변화이다. 협동학습을 이야기했지만 실제 교사들은 협동, 협력하고 있지 못하다. 교사들의 교육철학, 실천 노력, 배움에 대한 가치가 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교육주체끼리 서로 상대의 변화만 요구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일파만파라 했다. 교사의 변화라는 물결이 교육혁명이라는 파도를 몰고 오리라. <핀란드 교실 혁명>은 큰 변화를 향한 첫 걸음에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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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핀란드 교육이 아닌 ‘교실’을 이야기 1-④ [4人4色 책읽기]

박재원 (기획 및 번역자 / 비상교육연구소 소장)

우리나라에서 교육 이야기만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최근 복지 논쟁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교육 문제만큼 꼬여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이 책은 이미 많이 읽혔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서 의미 있는 서평은 새로운 서평이 아니라 이전 서평에 대한 정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일반 독자가 아니라 번역과 해설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간의 서평을 평가해보고 싶었다. 전반적으로 낮은 평점을 준 독자들에게 서운함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소모적인 논쟁의 역사로 점철된 교육 분야의 책이어서 일까? ‘혹평(별 2개)’과 ‘호평(별 5개)’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혹평과 호평 사이에서

우선 해설자에 대한 평가에서 크게 엇갈린다. ‘학교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주변부에’, ‘구체적인 현실경험이 없는 이론학자’, ‘등수와 만점에 집착하는 인간’ 등의 혹평을 볼 수 있다. 반면 ‘진보적 교육운동가가 아니라 사교육의 첨병에 서 있는 사람’의 문제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서평도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의 특징인 원작 뒤에 붙인 해설 자체에 대한 혹평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척하는 논평에 짜증이’, ‘이건 완전 이 책에 대한 테러다.’, ‘저 해설 때문에 완전 망쳤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새롭고 신선한 시도다.’ ‘우리에게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호평도 보인다. 마지막으로 해설 내용에 대한 평가에서도 분명하게 갈린다.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실에 대한 비판’, ‘공론적인 담론하는 변이 참으로 역겹다고 느낀다.’ 가볍게 볼 수 없는 혹평이지만 아래와 같은 극찬의 호평도 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우리나라 교육과 비교하여 대안을 생각해보는 내용’, ‘우리나라도 교육현장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변명과 옹호

핀란드를 선택한 것은 다분히 선정적인 동기였음을 인정한다. 핀란드가, 특히 핀란드 교육이 워낙 잘 팔리는 인기 주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이 순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부를 매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작은 속물이었지만 나중은 교육적 열정으로 채워졌다고 생각한다. 핀란드 교육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활용하여 우리 교육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했다고 생각한다.(물론 심각한 혹평들을 보면서 반성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핀란드 교육 읽기는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따라할 수 없는 이상으로 보기도 한다. 추구해야 할 가치로 보기도 하지만 참고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생각도 보인다. 하지만 어렵게 구한 이 책의 원작을 보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핀란드 교육 새롭게 읽기 방식’이 떠올랐다. 바로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교실을 진지하고 자세하게 관찰하는 방식이다.(이 책에는 실제로 핀란드 교실을 촬영한 사진이 많다.)

핀란드 교육과 우리 교육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교육을 정치와 경제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정말 다르다. 1972년부터 91년까지 국가교육청장을 지낸 에르키 아호의 사례가 상징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은 계속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만으로도 핀란드 교육의 다른 점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잡무에 시달리는 우리 교사들에 비해 핀란드 교사들은 ‘학부모나 행정기관도 교사를 지원’(60쪽)하고 있다. 온갖 규제에 시달리는 우리 현실과는 달리 핀란드는 ‘거의 모든 권한은 일선 학교로 위임, 관리나 감시에 소요되던 불필요한 인력이 없어졌고 결과적으로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지식(교육과정)은 국가 관리에서 해방되어 학습 주체가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되었다.’(23쪽) 또한 ‘아이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가능하도록 커리큘럼과 교재가 짜여 있다.’(95쪽)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편견이 난무하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핀란드는 ‘뒤떨어졌다든지 특수하다든지 하는 구별은 하지 않아요.’(159쪽)

하지만 핀란드 교실과 우리나라 교실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기도, 의미 있기도 하다.(물론 학급당, 교사당 학생 수의 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핀란드 교실 관찰하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고 국민들의 불만과 원성이 터져 나올 때마다 시도되었던 교육 개혁이 계속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바로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는, 방향과 원칙만 제시하고 교실 현장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외면한 결과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국 교실을 개혁하지 않으면, 수업을 혁신하지 못하면 그 어떤 제도적 개혁도 공염불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핀란드 교실이다. 먼발치에서나마 핀란드 교실을 관찰할 수 있기에 막연하기만 한 수업 혁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실제로 핀란드 교실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개발한 교재 시스템을 활용하여 수업 혁신에 성공한 국내 사례가 있기도 하다.)

또한 왜 학부모들은 학교를 불신하는가, 왜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열심이지 않은가, 굳이 자기 돈을 내고 사교육을 받으려는 이유는 정말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충분히 고민하고 나름대로 진단한 문제들에 대한 인식에도 편향과 왜곡이 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바로 학교 교실의 낮은 생산성으로 인한 악순환 구조의 재생산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만든다. 공교육으로 얻은 세계 최고 학력과 사교육으로 얻은 비슷한 학력에 대해 깊은 우리 교육이 천착하여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다른 교실의 분위기를 통해 우리나라 학교에서 여전한 권위주의적인 모습들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교권이 붕괴되었다고들 하는데 정말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달라져야 하는지, 그 이상향을 핀란드 교실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흐르는 학부모와 학생 중심의 관점에 대해서도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 사회에서 사교육이 공교육에 완승하는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학부모와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이 학부모와 학생을 위에서 바라본다면, 사교육은 옆에서 아니면 밑에서 바라본다. 일본에서 시작된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우리나라에도 착근에 성공하면 정말 많이 달라지겠지만 핀란드 교실에서 볼 수 있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비록 사교육이기는 하지만 정말 많은 학부모, 학생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만난 경험을 통해 우리 교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학부모들의 이기심을 비난하고 입시준비에만 매달리는 학생들을 탓하지만 과연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당당할 수 있는지 늘 묻고 싶었다.

학교 교실에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라도, 개인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면서라도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학교에 가면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옆에서, 밑에서 바라봐주는 사교육 현장을 찾게 되는 사정을 보듬어줄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접한 핀란드 교실을 통해 정말 우리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학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교육학자나 관료 또는 교사들의 시선이 아니라 정말 너무도 간절한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에서 핀란드 교실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 학부모가 진정으로 원하고 학생들이 환호할 수 있는 교실의 모습을 통해 더 이상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핀란드 교실을 따라하면서 우리 교실도 조금씩 바꿔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긴 해설을 달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정말 핀란드와 한국 교육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육 생산성 측면에서도 더욱 그렇다. ‘시험을 위해 한 공부는 대개 낭비된다.’는 말을 떠올리면 평가제도와 경쟁풍토의 개선 없이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교실 관찰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세한 관찰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냥 한 번 해보자. 이것저것 사정을 너무 많이 알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단순해야 용감해질 수 있고 그래야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 맹목성에라도 희망을 걸어야 할 만큼 우리 교육에서 신음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심각하다. 교실마다 자살 대기자들이 한 두명씩 있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가?

 

엄연한 경쟁현실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은 바로 교실부터 바꿔서 사교육으로 쭉 이어지는 초장시간 공부노동으로부터 조금은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핀란드 교실혁명’이 우리 교실 바꾸기의 교본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소박한 문제제기에 대한 반응

본격적인 핀란드 교육 평론서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주로 별 2개를 준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해설자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문제제기에 반응한 독자들은 별 5개를 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혹평을 보면서 예비 독자들에 대한 의무감을 느낀다. 더 이상 실망하는 독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 책을 보고 싶다고 느끼는 독자들 중에 아래와 같은 사람은 책을 구입하지 말고 도서관에서 빌려 해설을 빼고 원작자 부분만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현직 교사가 아님에도 학교 교실을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

-핀란드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핀란드 교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원작보다 많은 해설로 인해 원작의 의도가 훼손되었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사람

원작자 후쿠다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 지면중계는 정말 가치 있는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는 수월성과 평등성의 갈등을 해소시킨,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교육이 그동안 놓쳤던 교육 개혁의 또 다른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족 같은 해설자의 개입으로 인해 원작자의 기여가 축소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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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월례발표회 참관기]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2011년 4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
발표자: 신승철 (동국대)

 

박지용 선생의『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1.

철학자들에게는 야릇한 흥분을 주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철학토론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런 결론도 없이 끝나고, 생산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철학적 토론에 저렇게 흥분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에게 결론이 없다거나, 생산성이 없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철학자들에게 철학적인 토론은 그 자체로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준다. 그것은 마치 투우장에 나간 투우사의 야릇한 흥분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야 그런 투우를 직접 본 적은 없고 그저 영화에서나 보고 짐작하는 것이지만, 뒷다리로 버티고서 커다란 눈으로 노려보는 소 앞에서 칼을 빼들고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투우사의 긴장된 몸에는 리비도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난다. 그런 리비도가 철학토론에 나선 철학자들의 몸에서 느껴진다 해서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철학자라는 인종은 독특한 유전자를 타고 난 것이 아닐까 한다. 무슨 철학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크로포트킨은 우애 협력의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하고 더구나 요즈음은 별별 유전자가 다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일본인에게는 가미가제 유전자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번 원전 사건을 보면 그들은 모든 대안들을 굳이 다 물리치고 가미가제식 특공대를 조직해서 스파르타 300인 전사의 흉내를 낸다. 그건 가미가제 식의 행동이 그들의 유전적 본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학자 유전자가 따로 있다고 해서 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나 역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수많은 다른 길이 있었는데, 실제로 상당히 오래 그쪽으로 걸어가 본 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그저 철학토론회나 심포지엄에 참여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니, 철학 유전자의 힘이 아니라 할 수 없다.

 

2.

그런데 자칭 한국 최대의 철학자 조직인 한철연의 월례 발표회에 참가했는데 도무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발표자와 사회자 그리고 회장, 딸랑 세 명이 나와서 이젠 아예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참여하니 이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해 하니, 내가 오히려 민망할 정도이다. 혹이나 이 사람들이 내가 정말로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 참가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도 사실은 바쁜 일이 있지만 오늘 발표 주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억지로 시간 내서 참가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그것도 은근하게 풍기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들 철학자들은 서로 말은 안 해도 아니 서로의 변명을 짐짓 이해하는 철하면서도 다 알고 있다. 즉 우리들은 유전적 본성에 이끌리거나 아니면 강박증에 끌려서 철학토론회에 참가한 것을 말이다. 그러니 이미 세 명이라면 충분히 많은 수인데, 나까지 참가했으니, 철학토론은 봄을 맞아 푸른 리비도처럼 생기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이 금방 퍼진다. 철학토론의 장이 섰다는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정말 창피하게도 당구를 치러갔던 일단의 철학자들이 부끄러운 듯 당구대를 던지고 몰려들어 갑자기 좁은 월례발표회 장은 꽉 찬 느낌을 주었다.

 

3.

드디어 박지용 선생이 논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속으로 옛날에는 굳이 논문을 다 읽지 않아도 누가 논평을 통해 정리해 주었는데, 토론을 하기에 정말 모자라는 이 아까운 시간을 논문 낭독으로 다 보내다니 하고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눈으로 따라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칸트의 숭고와 아방가르드 예술』이라는 논문 제목이 알려 주듯이 아무리 당대의 뛰어난 철학자라도 이런 철학논문을 한 번 읽어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칸트라면 나도 약간 공부했고 더구나 숭고라는 개념은 여간 흥미로운 개념이 아니어서 여러 번 그 개념에 부딪힌 적이 있었기에 간신히 따라가기는 했지만 솔직히 중간에 맥을 놓치고 갑자기 졸음이 닥쳐와 꼬박 졸기도 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칸트나 숭고의 개념에 무관심했다면 읽는 도중 내내 졸았을 게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내 앞에 앉아있던 서유석 선생도 졸았다고 고백한다. 여하튼 읽기를 마친 다음 드디어 토론의 시간이 다가왔다.

 

4.

논문의 요지는 칸트의 숭고의 개념과 관련된다. 철학자들에게는 상식이지만, 칸트는 숭고의 개념을 미감 판단과 구분했다. 그런데 칸트는 미감 판단은 예술을 대상으로 하지만, 숭고의 개념은 주로 자연에서 발견된다. 논자의 주장은 칸트의 숭고 개념을 예술적인 대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여기서 칸트의 숭고 개념이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이것이 자연의 몰형식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런 자연의 ‘몰형식’은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키는데, 이런 마비가 숭고라는 감정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순한 판단 마비가 아니라 판단 마비가 주관에게 일으킨 심정이 곧 숭고이다. 논자는 이런 측면에서 칸트에서 숭고의 대상이 객관적인 어떤 성질이라는 해석도 비판하면서 또한 숭고가 객관적인 전제 없이 일어나는 주관의 어떤 감정이라는 해석도 비판한다.

이어서 논자는 이 두 가지 전제가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논자는 칸트가 사용한 치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 두 전제 즉 자연의 몰형식과 주관의 감정 사이의 관련을 찾아보려 한다.

논자는 이 지점에서 료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특히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을 이런 숭고한 예술로 규정했다는 데 도움을 얻는다. 논자는 여기서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 속에 시간의 발생이 표현되며, 이것이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런 시간의 발생은 칸트의 몰형식 개념과 연결되므로, 그렇다면 이를 통해 숭고가 예술적 대상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칸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

논자가 발표를 마친 이후 다들 한숨을 쉰다. 그 한숨은 승리자의 한숨이다. 그것은 졸린 것을 간신히 참고 견디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 아닐까? 드디어 투우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졸린 것을 참고 견딘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토론에 임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은 웬 일인가? 아차, 투우장에 들어가기 위해 칼과 망토와 소를 홀리는 베일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필자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칸트의 숭고라는 개념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말하자면 선무당이 칼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뒤 끔찍한 학살극에 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자.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했던 철학자들의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니 양해를 바란다.

토론을 통해 논자의 논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려고 애썼으나 다들 숭고라는 개념 앞에서 판단 마비가 생겨난 듯 했다. 토론 도중 송석현 선생이 숭고 예술의 예가 된다고 하는 바넷 뉴먼의 그림과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을 프린트 해 와서 토론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토론이 어떤 결실을 얻기에는 다들 숭고 개념에 대한 가방끈이 짧은 것 같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집에서 초연하게 앉아서 정리해본 의문을 이 자리에서 박지용 선생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논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6.

우선 논자의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얼까? 아무래도 숭고의 전제가 되는 자연의 몰형식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그런데 자연에 몰형식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자연의 몰형식이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선험적 인식형식에 기초한다. 이런 선험적 인식 형식을 넘어선 세계가 곧 물자체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불가능하며 만일 판단한다면 이율배반이 생긴다. 이런 물자체의 세계가 곧 자연의 몰형식이다.

우리가 자연세계 속에 이런 물자체의 세계는 직접 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자연 속에 몰형식이 출현한다면 이것은 논리적인 차원이 아니고 현실적인 차원이다. 예를 들어 우리 소시민은 돈을 셀 때 일억까지는 계산이 가능하지만 일조가 되면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이런 일조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사유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사유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유불가능이 논리적 사유불가능성을 대신하는 경우가 칸트에게서 숭고의 전제가 되는 몰형식의 의미이다.

논자는 이런 대신의 관계를 치환(subrep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 논자는 이 관계를 설명하면서 ‘부정적인 현시’라고 규정한다. 즉 물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나 부정적으로 표시해 줄 수는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칸트가 이런 치환의 구체적인 예로서 우상숭배 금지의 규칙과 이시스 신전의 비명에서 발견한다고 본다.

 

7.

몰형식에 관한 논자의 주장의 핵심이 제대로 정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을 전제하고 박지용 선생에게 몇 가지 물어보자. 기회가 되면 한철연 웹진을 이용해서 답변해 주기를 기대한다.

우선 바넷 뉴먼의 색면추상이 왜 숭고하다는 것인지? 토론자 중에 이 그림을 보고 숭고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뿐일까? 다행히 송석현 선생이 프린트 해온 데에는 박영욱 선생의 설명이 붙어 있었다. 즉 이 그림에는 어떤 형식이 없는 그래서 자기 지시적인 질료만이 존재하므로 숭고하다는 것이다. 몰형식이라는 측면이 숭고와 연관된다는 것은 짐작가능하다. 하지만 그런데 왜 바넷 뉴먼의 그림에 있는 붉음이나, 사각형, 그리고 중간의 노란 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형식이 아닌가? 의문이다. 뭐 이런 의문에 대해서 내가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논자는 이왕 료타르를 끌어 들였으니,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둘째로 이런 의문이 든다. 칸트의 숭고 개념이 바넷 뉴먼의 숭고 개념과 연결시키는 수단은 소위 시간의 발생이라는 개념이다. 그것이 논자에 따르면 료타르가 그 그림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개념이 칸트의 역학적 숭고 개념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바넷 뉴먼의 그림에서 시간의 발생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의문의 초점을 이제 논자의 핵심 주장으로 옮겨가 보자. 사유불가능하다는 것은 대상과 개념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마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칸트에게서 미감 판단은 상상력을 강화하면서 생겨나는 쾌감이다. 그것은 인식의 쾌감이나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쾌감과 구분되는 미적인 쾌감이다. 그런데 만일 상상력이 마비된다면, 거기서는 오히려 불쾌감이 발생한다. 그것은 현기증, 구토, 역겨움, 고통에 가까운 심정이다.

그런데 숭고의 감정은 단순한 구토나 고통과는 구분된다. 거기에는 어떤 쾌감이 흐른다. 그런 쾌감은 어떤 속성을 지니는 것인가? 이 쾌감은 단순한 구토나 역겨움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8.

숭고의 개념은 자주 자유의지의 실현을 통해 얻는 쾌감과 연결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욕망의 만족이 만족감(pleasure)을 야기한다면 자유의지의 실현은 리비도적인 쾌감을 준다. (칸트에게서 자유의지의 이런 리비도적 성격 때문에 칸트와 사드의 비교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숭고의 경우가 물자체가 출현하는 부정적인 현상이라면 자유의지는 물자체(이 경우는 이념이라 한다)가 실현되는 긍정적인 경우이다.

물자체의 직접적인 출현은 칸트에게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자유의지는 요청에 불과하다. 그렇게 본다면 숭고는 칸트에서 부정적인 현상으로 그친다. 그것은 역겨움과 고통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숭고의 감정에 들어있는 어떤 쾌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헤겔이나 그 이후 프로이트 라캉 등에 이르면 물자체(또는 실재계)의 부정적인 출현은 곧 긍정적인 출현인 이념(이드)의 실현과 동전의 이면이다. 그러므로 숭고에서의 역겨움은 이념의 리비도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숭고의 심정이 더 적절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닐까? 숭고 개념과 관련하여 헤겔이나 프로이트와의 연관성을 논자가 좀 더 설명해 줄 수는 없을까?

 

9.

필자가 너무 많은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닐까? 굳이 박지용 선생이 아니더라도 필자의 이런 의문에 대하여 누군가 한 수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토론이 끝난 후 오랜 만에 중국집에서 군만두와 배갈을 먹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물 밀려오듯 다가온다. 오래 전에 사라진 세계여, 이제 늙은이가 되어 밤이면 기억나지 않는 꿈에 사로 잡혀 아침이 되면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소년은 이미 늙었고,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기억밖에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의 감정 속에서 마시는 배갈은 정말 달다.

 

내 마음 속의 ‘아Q’를 보내며 [책 익는 마을 책 읽는 소리]

<보령 책익는 마을> ‘책 읽는 소리’ 연재를 시작하며

박종택 (보령 책익는 마을 촌장)

아큐(阿Q)형!

오늘 날짜로 형에게 이별을 고하고자 편지를 씁니다.

형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던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중국 루쉰(魯迅) 선생님의 소개로 정식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은 명확합니다. 그 후로 형과의 우정 어린 만남은 친밀성을 넘어 동반자적 관계를 가지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 형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 것은 ‘책익는 마을’에 이주하게 된 때부터였습니다.

아Q형,

오랜 동반자적 우정을 나누던 내가 갑자기 이별을 고하니, 분하고 괴이함을 넘어서 나의 속내와 ‘보령 책익는 마을’이 어떤 곳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저도 우리 지역에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발적인 독서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들이 모여서 책을 읽다니 별일이다’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책익는 마을’에 가입하기 전부터 매달 ‘독서토론회’에서 선정된 책을 한 권 더 사서 내미는 보령소방서 강윤규 계장의 권유가 부담스러울 즈음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의 저자 이권우님을 모시고 열린 ‘저자초청토론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회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원진호 내과원장이 시민 누구나 참석가능하다기에 저도 참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독서량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올바른 책읽기가 아니었음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독서토론이 편견을 타파할 수 있는 시선형성에 좋다는 말씀을 듣고서, 가끔씩 욱하는 성격과 보수적 성향, 술에 취하면 극우로 돌변하는 특이 체질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저자초청토론회’를 참관 했었지만 ‘책익는마을’에 가입을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대학 시절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수업을 빼먹는 장기를 갖고, 단 한 번도 세미나에 참석한 사례가 없었던 역사적 사유로 토론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영업을 하다 보니 사업설명회나 브리핑, 워크숍, 심포지엄, 포럼 등은 나와는 아무런 연관성을 찾지 못하며 살아온 관계로 독서토론에 대하여 막연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자초청토론회’로 잘못 인지하고 참석했던 ‘독서토론회’에서 큰 재미를 찾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성인들의 책읽기는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집중하게 되고 기존에 형성된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책 내용을 재단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습니까? 형님의 ‘정신승리법’도 그렇지 않습니까?

‘책익는 마을’에서는 특정 분야에 치우친 개별적 독서를 넘어 서기 위하여 각 모둠 별로 정회원의 순서를 정하고 다음 달 발제자가 자신이 선정한 책을 정회원 모두에게 선물하고 한 달 후에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설정한 의제로 독서토론회를 진행하는 방식이 무척이나 신선했습니다.

즈음하여 제 심신상에도 변화가 왔습니다. 신문구독을 끊고 TV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 어언 15년에, 책을 구매 해 본 것이 10년을 넘어선 나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는 아이가 생긴 것입니다. 혼자 사는 阿Q형님 생각에 결혼을 미루었는지 나의 처지나 능력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었는지 마흔세 살의 늦은 나이로 2006년 초에 결혼하여 그해 12월에 얻은 아들입니다.

아들에게 나도 하기 싫었던 것을 시키는 아버지가 되지 말고, 독서를 통하여 나 스스로 자아존중감을 갖고 아들을 존중하며 아들과 함께 걷는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궁벽한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대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공부를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을 볼 때 덮어 둘 수 없는 위기감과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내가 지향해야 할 진실한 삶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하여, 또 내가 칠팔십의 나이에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책익는마을’에 전입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익는마을’에 전입해서도 3개월간의 준회원 기간은 물론 정회원이 되고나서도 ‘책익는마을’ 카페에 글 한 번 못 올렸던 것이 나의 타고난 성격이었겠지만 阿Q형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형님과 저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을 겪게 되었고 저에게 첫 발제의 기회가 주어진 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형님과의 전투에 나서기 위하여 10년 만에 책을 주문하였습니다. 토론의 그 날을 기다리며 저는 제가 지니고 있던 무기를 갈고 다듬고 신식 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날의 전장에서 멀리 서구에서 저를 도우러 달려온 마키아벨리의 도움으로 소규모의 승전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전투 이후 저는 희망에 들뜬 마음으로 미숙하기 그지없지만 카페에 글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두 번째 발제의 기회가 주어진 달, 최후 결전을 위하여 형님의 일대기를 다룬 『아Q정전』과 『삼성을 생각한다』 두 권의 책을 연관 지어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저마다의 아Q와 맹렬한 전투를 벌였습니다만 형님을 내 마음의 영지 밖으로 몰아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형님 측의 세력이 확연히 약화 된 것은 형님도 인정할 것입니다. 지난 8월 대천한화콘도에서 펼쳐진 ‘보령인문학페스티벌’에서 강사로 모신 12분의 교수님과 방명록에 성함 남겨 주신 180명의 우군 덕택에 1박 2일의 전투에서 아Q형님의 힘은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물론 형님의 힘이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힘이 강성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에 강력히 저항하고 형님을 극복하기 위하여 작년 12월 ‘보령 책익는 마을’ 촌장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카페에 글을 남기기 시작한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고 운영위원도 아닌 저에게 촌장의 자리를 마련해준 속사정이야 지금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내 마음속에 웅크린 악마들과 비루한 노예들, 패배감에 물든 전사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취임을 하였습니다. 지난 7년 동안 ‘보령 책익는 마을’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성을 다해 온 황선만 전 촌장, 운영위원을 비롯한 마을 선배님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마을 일을 살필까 합니다.

무능한 저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기 위하여 각 모둠별로 도움장이 신설되었습니다. 토론문화를 성숙시키기 위하여 운영위원회에서 계획한 사업을 실무적으로 진행할 분들이 모인 것입니다. 식상해 질 수도 있는 독서토론회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고, 초청 저자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내일을 함께 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제부터 마을 분들은 <e시대와 철학>이라는 웹진에, 선별된 한 편의 글을 송고해야 하고, 출판사로부터 책을 전해 받은 후 서평을 쓰는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유월이 오면 2박3일의 일정으로 대천해수욕장에서 이진남 교수님이 이끄는 ‘철학온’과의 연합MT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연합MT는 ‘철학온’ 회원들과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들이 섞여서 저자초청토론회와 독서토론회를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철학온’에 철학을 전공하신분이 많다는 이야기에 긴장하는 회원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논리의 철학은 부족할지라도 부딪히며 살아온 삶의 철학이 있다”, “좋은 문학작품은 변화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믿음을 준다.”고 하셨던 이권우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작년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올해도 변함없이 8월이 오면 1박2일간 대천해수욕장에서 한여름의 ‘인문학페스티벌’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도움장들의 행사진행과 운영위원들의 후원과 열기가 넘치는 마을 분들의 열정으로 보령시의 열린 시민들과 함께 또 멀리서 찾아주시는 분들을 모시고 책, 정, 술을 함께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