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발표회 참관기] 김원열 선생의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에 관하여

Spread the love
?[2011년 6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발표자: 김원열

 

김원열 선생의 ‘진보대통합에 대한 성찰과 대안’ 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

 

 

1.

한철연이 단체로서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국사회의 운동에 많이 기여해 왔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더구나 다양한 분파들의 활동에 각기 연계되면서도, 한철연 속에 심각한 분파적 갈등이 없이 서로 친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남들은 이것이 너무 혼란스럽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거꾸로 생각한다. 그런 분파적인 개입들 때문에 한철연이라고 내부 갈등이 없을 수 있었겠나? 하지만 그런 갈등을 잠재우면서 내부적인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철연 회원들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무엇이 바로 한철연의 철학이 아닐까?

한철연은 단순히 사회운동의 분파들의 통합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사회철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출발했으나 한철연은 철학의 통일전선을 이룬 것은 이미 초창기에서부터이었다. 다양한 철학이 한철연 속에 함께 어울려 풍요함을 마련해 주고 있다. 고대철학, 실존철학, 동양철학,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최근의 탈포스트주의(라캉, 지젝) 등. 더구나 한국철학계의 고질 중의 하나이었던 지연과 학연의 한계도 그동안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한철연의 성과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필자는 거침없이 대답하고 싶다.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넘어선다는 것, 그게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철학이라면 한철연이 바로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차이를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잠들어 있는 무규정적인 동일성이다. 차이를 상대적인 차이로서만 인정한다면, 그것은 무기력한 무차별성이다. 한철연의 철학은 차이가 차이로서 조화를 이루는 통합이 아닐까? 마치 다리가 없는 사람과 눈이 없는 사람이 함께 가듯이 말이다.

2.

최근 이런 한철연의 철학이 후퇴하는 조짐을 보여 필자는 안타깝다. 사회 운동의 분파적 갈등이 한철연 내부에 서서히 축적되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가 서로 대화를 단절시키고, 서로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듯하다. 비웃음처럼 보이는 엷은 미소들이 떠돈다. 한철연과 더불어 활동해 오던 많은 철학도(비사회철학전공자)들이 어느새 멀리서 한철연의 활동을 관망하는 듯하다. 그런 둔중한 움직임의 반면에서 한철연 내부에는 특정한 경직된 목소리가 강하게 들려온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아직 충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우선 생각나는 것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심적으로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들고 싶다. 원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한쪽이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쪽은 슬금슬금 기어들어가게 마련이다. 그 결과 한철연의 움직임이 둔중해 진 것이 아닐까? 이제 이명박 정권 초기의 충격을 사람들이 많이 극복한 듯하다. 멀지 않아 경직된 듯한 목소리가 줄어들 것이고 다시금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고 활기 있게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필자는 이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철연이 다시금 다양한 분파, 다양한 철학들 사이에 활발한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침 한철연의 월례발표회에서 분열된 진보세력의 통합을 위한 움직임과 관련해 발표회를 마련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철연 운영위에서 갑자기(?) 필자를 이 자리의 사회로 임명했다. 무조건적인 통합론자 중의 하나인 필자에게 기꺼이 사회를 맡긴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선택이 아닐 수 없어 필자는 며칠이고 고민해 왔다. 사회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하늘에 맡기고 사회에 임하기로 했다.

3.

필자의 기대와 달리 한철연 내부에서 이런 토론에 대해 냉담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참여인원이 기대와 달리 소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짐작할 수 있다. 통합을 거부하는 마음은 통합에 대한 토론도 거부하려 하겠지. 이런 짐작은 필자의 선입견일까?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상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철학도들이 남의 얘기를 들어줄 생각도 못할 만큼 편협해졌단 말인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 너무 아득하다는 느낌 때문에 필자는 암담해졌다.

발표자 김원열 선생은 ‘진보 통합 시민회의’의 공동대표이라서 그런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통합의 움직임을 일어난 그대로 정리하여 주었다. 발표문의 내용은 그런 진행과정에 대한 보고서에 가까웠다. 그런 가운데 김원열 선생은 통합의 필요성과 방식에 관한 시민회의의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설명해 주었다. 김원열 선생의 발표에 따르자면 통합의 필요성은 바로 선거승리라는 목표와 직결되어 있었다.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은 합법적인 진보정당의 불가피한 요구이고, 여기서 최대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권에 대항하는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에 즈음해서 이루어지는 선거연합은 불안정하여 최대한의 효과를 이룰 수 없다. 따라서 보다 안정적인 단합이 필요한데, 이 과정을 발표자는 두 단계로 상정했다. 하나는 바로 진보대통합이다. 이것은 아마도 계급(또는 민중)적인 단결을 목표로 하는 통합이다. 여기서 핵심은 곧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이다. 물론 이 통합은 양자를 넘어서는 모든 진보주의자의 대통합을 목표로 한다. 이런 통합을 전제로 하여, 장차 일종의 ‘인민전선’(정치적 공동책임 즉 정책연대와 공동정부)을 형성하는 것이 다음 단계의 과정으로 상정되어 있는 듯하다.

인민전선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르주아 민주 세력(민주당)이 자신의 헤게모니에 한계를 느낀다는 말이 된다. 거꾸로 그만큼 민중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멀지 않아서 민중세력이 부르주아 민주 세력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역사적으로 서구는 이미 20세기 초에 이런 헤게모니의 이동을 겪었는데, 이제 한국사회도 이런 이동의 기점에 서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진보세력의 대통합은 헤게모니의 이동을 촉진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긴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4.

김원열 선생의 발표의 중점은 이 두 과정 가운데 우선적인 과정인 진보대통합에 있고,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재결합에 있다. 재결합에서 논의의 중점은 널리 알려진 대로 두 가지라 한다. 하나는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패권주의의 문제이다. 김원열 선생은 이런 문제에 관한 충분한 통의가 이루어졌고 일정한 합의가 가능했으며, 남은 문제는 충분히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잘되어 갈 거라는 예상이다.

결론적으로 김원열 선생은 앞으로 진보통합의 관점을 세 가지로 제안했다. 하나는 단순하게 분열된 두 집단의 통합을 넘어서 모든 진보세력이 통합되는 대통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장기적인 전망 하에서 통합이 이루어져야 공고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상층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 자신이 이런 통합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원열 선생의 발표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이순응 선생의 논점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순응 선생은 통합이 선거승리라는 어쩌면 진보주의자들의 전체 목표에서 부차적인 과정에 불과한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를 의심한다. 설혹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선거승리를 위해 진보세력이 대중들로부터 정권을 위임받을만한 신뢰와 현실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묻는다. 다시 말하자면 진보세력이 단독으로 승리할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칙과 이론의 차이를 가진 진보의 두 세력 사이의 통합은 가능하겠는가 묻는다. 원칙이 없는 선거승리를 위한 통합이란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이순응 선생의 논점은 다양하지만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문제는 어쩌면 단순하다. 이미 진보의 승리를 위한 혁명적인 코스에 대한 논의나, 단독적인 선거 승리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오래 전에 정리(해결이 아니라, 일단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순응 선생 자신도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문제는 거래를 통한 통합이 원칙이 없는 통합이라서 불안정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김원열 선생이 이미 통합의 장기적인 전망이라는 개념으로 암시했다. 다만 김원열 선생은 이런 장기적인 전망이란 현재로서는 오직 통합 이후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오히려 당면한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통합의 필요성이 통합을 더욱 현실적으로 할 것이라 본다.

결국 논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겠다. 이론적인 차이를 가진 세력들끼리 통합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이다.

5.

필자는 사회자로서 이번 토론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원칙 없는 통일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필자가 제기했던 문제를 말해 보자. 먼저 전제할 것은 필자도 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손에 잡힌다면 답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하늘은 답이 없는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 것이니까.

사실 민중운동이 출현한 이래로, 민중세력의 두 집단이 부딪혀 왔다. 노동자와 농민,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의 대립이다. 이런 대립은 한편으로는 식민지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이며, 합법적인 현실주의와 혁명주의의 대립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당 내 엘리트층인 지식인층과 조직적인 대중의 대립이다. 이는 또 조직적으로 민주주의와 집중주의의 대립이기도 한다.

민중운동의 역사를 보면 이런 대립이 모든 역사에서 점철되었는데, 두 집단 사이에 대립이 없다면 그것도 무기력한 정당이 되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된다면 그 후유증은 파국적인 된다. 레닌 시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마오 시대 소비에트노선과 인민민주주의노선의 대립도 그런 일환이다. 유감스럽게도 일제 시대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역사는 이런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분열되어 결국은 종파주의 전락하고 말았다.

필자는 어떻게 본다면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과의 대립도 이런 오랜 역사적 분열을 이어받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이런 분열이 각각의 집단 속의 구성원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 운동 자체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문제는 원칙적으로 분열은 불가피한데 그것을 극복하여 통합을 이루지 않고서는 민중운동은 한 발자국도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피한 원칙적 분열 앞에서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 이런 자가당착적인 모순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서 심각한 철학적인 문제로 나서게 된다. 일제시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 필자 역시 고민스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6.

다행하게도 토론은 심각한 상처 없이 그저 문제를 자각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문제를 문제로 안다는 것만 해도 소크라테스가 늘 철학의 제 일보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이미 철학에서의 제일보는 디디게 되었다. 철학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역사가 움직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지면 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앞으로의 통합에 대해 낙관적이다.

마지막으로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민중운동의 통합이지 진보의 통합인가?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민중의 개념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이 나오면서 갑자기 민중 개념이 사라지고 진보라는 개념이 이를 대체해 왔다. 그런데 진보란 이념의 차원이 아닌가? 역사는 계급의 역사라는 관점을 지킨다면, 필자는 진보라는 말 대신 다시 민중이라는 말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런 경우 비로소 민중계급의 다양한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이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