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하거나 어리석음에 관한 수고로운 보고서 3-① [4人4色 책읽기]
김종옥 (작가)
지구보다 훨씬 더 큰 행성에서 인간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을 한, 문명을 가진 지적생명체가 있다고 치자. 그들이 지구를 보았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꼬물꼬물 모여 살면서 집도 지었다 허물었다 하고, 먹을 걸 만들어 먹기도 하고, 무기로 서로를 죽이기도 하며 난리일 게다. 그 사는 모습이, 제 집을 짓고 먹이를 모으고 새끼를 낳고 물어뜯고 싸우는 다른 짐승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제 터전을 열심히 망쳐가면서 살기도 한다는 것이겠다.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38억년이 지나오면서 가장 고약한 종은 인간이다. 인간은 그 자신 지구생태계의 일원이면서도 아닌 척 고개를 외로 꼬고 스스로 꼭대기에 선 듯 행동한다. 살아온 역사가 각종의 전쟁과 정복의 저열한 역사였으니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생은 둘째치고 제 무리들하고의 공생과 조화조차 못 이루고 살아왔다고 보인다. 그래도 지구상에 나타났던 어떤 특정한 종이 존재하는 평균 기간이 대략 4백만년 정도라고 하니, 그에 비추면 우리 인간종들은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니 네 깜냥대로 계속 그렇게 거칠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외계인이 있다면 그는 이 밉쌀스런 인간 무리를 몰아내고 지구에 이주할 생각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서론이 길어졌다. 반복되는 어리석음에 하릴없이 농을 풀어본 것이다. 물론 정색을 하는 것보다는 농을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농과 풍자는 적어도 나는 그 속에 속해 있지 않다는 거리감이 담보될 때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반복되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도 없는가. 스스로 삶의 터전을 제 손으로 더럽히고 허물어뜨리는 어리석은 일에 눈꼽만큼도 책임이 없는가. 자연이 스스로의 상처를 스스로의 손길과 숨결로 간신히 꿰매어 나가고 있을, 그걸 보면서 감탄하고 박수치고, 그러다 끝내는 그걸 느긋하게 누릴 자격이 내게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가. 태안에 가서 기름묻은 자갈 한 번 닦았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찜찜한 마음을 숨기며 바닷가 가서 몸을 담가주면, 서해안산 조개 구어 먹었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한 이 책 <태안은 살아있다>(동녘 펴냄)를 보면 누구라도 쉽사리 난 가해자가 아니오, 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모두는 당연하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연은, 고맙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스스로 치료사이고.
태안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바닷가로 밀려오던 무겁고 시커먼 기름띠와, 물새떼들마냥 무리지어 앉아서 기름묻은 자갈을 닦아내던 자원봉사자들의 감동 어린 장면만을 기억한다면 제2의 재앙, 제3의 재앙이 이어질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태안은 살아있다>라는 제목의 책
물론 태안은 살아있다. 물론 과거에도 죽은 적이 없으니 지금도 살아있으며 미래에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2007년에는 한 때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 때는 인간이 태안 앞바다를, 갯벌을 죽인 것처럼 보였다. 시화호가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고인물로 죽어있었듯이 태안도 그렇게 죽어서 더 이상 생명이 깃든 자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3년여가 지난 지금 태안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걸 보면서 자연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깊어서 죽은 듯이 보일 뿐이며 다만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죽은 듯 보이는 자연 안에서 정작 죽어버리는 건 사람의 삶이다.
자연이 생명을 품지 않는다면 그 어떤 영악한 생명도 그 안에서 살아낼 수 없다. 태안이 지금도 살아있는 건 사람이 기름을 걷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복구가 그만큼 놀랍도록 성실했기 때문이다. 기름을 걷어낸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자연은 그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은 응답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안은 우리가 ‘살려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처가 아물고 속속들이 완전히 새살이 돋아나려면, 그래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다니, 그때까지 태안의 바다는 묵묵히 제 살을 치유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태안이 어떻게해서 살아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 훗날 태안의 자연이 스스로 제 몸으로 보일테니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손으로 어떻게 자기 환경을 더럽혔고, 그 바람에 자기 공동체사회가 어떻게 망가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바둑돌이 잘못 놓였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바다도 갯벌도 자기 색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그 바다와 갯벌이 품고 사는 사람 사회는 깊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일종의 자기진술서라고 할 수 있는 이 보고서는 사고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치밀하게 짚어가면서, 태안의 일을 ‘태안의 기적’이니 ‘태안을 살려냈다’니 하는 무용담으로 포장하는 게 얼마나 참람한 짓인지 보여준다. 비록 바닷물빛이 돌아오고 갯벌에 윤기가 흐른다고 해도 한 번 튕겨져 나갔던 인간들이 그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는 아직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공동체 사회를 회복하기까지는 아직 계산해야 할 복잡한 목록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해서 태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살아있기도 한 것이다. 박원순 이사가 ‘희망을 향한 미완의 기록’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이유도 그것이다.
태안의 죽음
2007년 12월 6일 서해바다의 기상악화가 예보된 상황에서 삼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과 이를 이끄는 2척의 예인선단이 인천에서 경남 거제로 출발했다. 12월 7일 새벽 서해에는 강풍과 파도가 일었고 풍랑주의보도 내려져 있었다. 운항을 강행하던 삼성크레인선단은 새벽 5시경부터 예인력을 잃고 풍랑에 밀리기 시작했다. 근처 대산 지방해양수산청 관제실은 예인선단이 정박 중인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고 긴급 호출했으나 예인선단은 응답이 없었다. 드디어 새벽 7시 6분경 삼성크레인은 현대오일뱅크의 기름을 실은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원유는 사상 최대인 1만 2500여 킬로리터가 바다로 쏟아졌고, 49일간의 해상방제로 회수된 양은 그 3분의 1인 4175킬로리터였다. 시커먼 기름띠는 인근 해안선을 오염시키기 시작하여, 충남 6개 시 군의 11개 읍 면과, 59개 도서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부안 군산 영광 무안 신안 등 전라남북도의 연안 해안과 42개 도서를 오염시켰다. 또 김 굴 미역 양식장 820여 곳과, 조피볼락 넙치 등 종묘시설 81곳, 해수욕장 15곳이 황폐화되었다. 양식장과 어장, 숙박업소, 음식점, 유통과 운송 등 주민들의 피해 신고는 10만 건에 달한다.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 IOPC’의 엄격한 보상 기준에 따른 추정액만도 피해액이 6천억 원을 넘어선다.(국내 전문가들은 실제 피해규모를 3조원대로 추정한다.) 태안 일대가 실로 ‘6천억 원짜리 환경 쓰나미에 휩쓸린’(노진철) 것이다.
이 참담한 현실에 맞서 자원봉사자와 태안주민 등 군 관 민이 모두 팔을 걷어부치고 기름을 걷어내고 닦아내기 시작해서 사고 일주일만에 기름띠 오염 해안선의 79%가 응급방제되었다. 겨울을 지나 7개월여 이어진 방제에 자원봉사자 123만 명을 포함해 200여만 명의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해 2008년 여름에는 깨끗해진 해수욕장을 볼 수 있게 되는 기적같은 일도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의 개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건의 제목만 알고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사건의 시작도, 진행과정도, 결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게 너무 없다.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지, 무엇이 망가졌으며 무엇이 복구되었는지 아는 게 없다. 2010년까지 보상된 것이 고작 54건에 그나마 기대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160억 정도라는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완전한 회복은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른다는 것도 잘 모른다.
왜 삼성은 무리한 운항으로 엄청난 사고를 쳐놓고도 법원 판결 뒤로 슬그머니 빠져 있는지, 왜 현대오일뱅크는 이중선체에 들어가는 수십억의 비용을 아끼려고 기름 유출에 취약한 단일선체구조의 선박을 쓰다가 기름을 쏟아놓고도 그 책임에 대해선 왜 아무 말이 없는지, 재난처리를 관장해야 할 정부는 왜 책임 소재 규명과 배상 및 보상에 그토록 소극적이고 무능하며, 왜 제대로 된 재난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지, 그보다 앞서 초동 대응에는 왜 그렇게 허점이 많았는지, 왜 자원봉사자의 활동은 감격에 겨워 열정적으로 보도하던 매스컴이 정작 3명의 주민이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공동체 붕괴의 현실과 그 복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지, 그 어느 것도 우리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사고 후 3년도 지난 2010년 2월에 또 한 명의 주민이 자살을 택했을 때도, 그를 쓰러뜨린 절망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다면 당연히 얻어야 할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잘못은 언제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자연재난에 이어 현재 진행형인 고통스런 사회재난도 모두 일단 잘 기억해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재난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이고자 하는 이 책에는 재난의 원인과 경과, 진단이 모두 여러 각도에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경의 측면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사회공동체는 어떤 식으로 파열되었는지, 공적 재난관리 체계는 어떻게 허술했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한편, 잘못된 보도로 말미암아 쇼가 되고만 자원봉사자 활동의 명암도 짚어본다. 또 재난관리의 매뉴얼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갈등 상황에는 어떤 해법이 있을지, 어떻게 공동체를 복원 할 지 등이 언급되어 있다. 글을 읽다 보면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쏟아낸 것은 1만 2천여 킬로리터의 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양이 증폭되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총체적 재앙이었음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갈등, 갈등, 갈등
사고 발생부터 태안에는 숱한 갈등이 생겨났다. 모든 단체간, 모든 개인간에 온갖 종류의 갈등이 서로 얽혀서 만들어졌으므로 실로 허베이 스피리트호 사고의 본질은 이 수많은 갈등구조를 파악하는 데서부터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태순 씨와 이재은 씨, 노진철 씨의 보고서는 이 복잡다단한 갈등 양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고원인자이자 가해자인 삼성 등과 법적 공방, 정부의 책임문제, 배상문제 등을 놓고 태안 주민과 삼성, 유조선회사, 중앙정부, 태안군, 아이오피시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며, 태안 재건 방향을 놓고도 군민들과 태안군, 충남도, 정부 간에 이견이 표출되었다. 또 생계비 배분을 둘러싼 마을과 마을 간의 갈등, 통합 대책위 구성을 둘러싼 수산과 비수산 간의 갈등, 삼성과의 자매결연을 둘러산 갈등 등이 발생했다. 이쯤되면 태안 사람들이 수많은 집단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처럼 들린다.”(박태순)
“방제 방식에 대한 갈등, 사고 원인에 대한 견해 차이, 중대과실 책임, 삼성중공업의 책임 범위에 대한 갈등, 생계비의 지역별 배분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간 갈등, 주민 간의 생계비 배분의 형평성을 둘러싼 갈등….. 이밖에도 사고 원인 규명과 관련한 갈등, 피해 조사와 관련한 갈등, 배상액 산정과 관련된 갈등, 피해 주민 간 갈등,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 중앙정부와 삼성과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갈등, 지역개발 방식을 둘러싼 갈등, 생태계 복원 방식을 둘러싼 갈등 등이 있다. 또 함께 살아온 주민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나갔고, 이것 때문에 이 지역사회를 뒷받침해오던 공동체 사회의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잃어버린 것이다.”(이재은)
이러한 갈등의 본질은 결국 ‘돈’ 문제였고, 이것을 조정할 능력이 정부에게도, 주민에게도, 물론 사고당사자에게도 없었다는 것이 공동체 붕괴의 위기를 맞은 원인이 되었다. 복잡하고 지난한 심사와 재판과정을 거쳐야 하는 피해보상금 문제도 그렇지만,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지원비도 서로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려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어차피 국고에서 지원되는 ‘눈먼 돈’인 바에야 내가 못 챙기면 남이 챙길 것이므로 양보고 염치고 차릴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치열한 내 몫 챙기기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바닥을 보아버린 주민들은 공동체 사회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 비극은 ‘주민들 스스로 만든 갈등도 아니었고, 기름 유출 사고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으니’(박태순) 겪지 않아도 될 고통, 보이지 않아도 될 바닥을 보이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허베이 스피리트 사고가 가져온 가장 큰 비극은 아마도 이것인 듯 싶다.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곳도 이 대목이다.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그에 기대어 살고 있던 사람의 공동체에도 균열이 갔다. 생태계의 파괴가 사회적 재난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태계의 파괴도, 사회공동체의 균열도 책임은 모두 인간에게 있지만, 길게 보아서 생태계가 복원되면 그에 기댄 인간 공동체도 결국에는 예전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기다리기에는 지금 당장의 상처가 너무 크고 당장의 삶이 너무 절박하다. 보상과 배상 문제, 복구 방향 등이 아직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라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오히려 앞으로 더 증폭될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위기에 놓인 마을공동체의 분열을 막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지역을 살려낼 사람은 지역주민들이기 때문이다.’(노진철)
그렇지만 상황이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태안에서 이미 싹트고 있는 희망을 본 연구자도 있다. 박태순 씨는 ‘다행스러운 것은 갈등의 주체들이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자신과 이웃을 재발견하고, 협력과 상생의 중요성을 스스로 터득해가는 과정을 지켜보기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태안을 되돌릴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본 희망대로 태안 사고의 ‘완결판’을 만들 때쯤이면 ‘싹트고 있는 희망’이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4대강, 구제역, 반복되는 악몽
몇 년 사이에 몇 조에서 몇십 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단위의 돈을 입에 자주 올린다. 허베이 스피리트 재앙이 크게는 5조대에 이르는 피해라고 하더니만, 4대강을 콘크리트로 감싸는 공사비가 십몇 조, 이십몇 조라고 하였다. 작년 겨울부터는 구제역에 들어가는 처리 비용이 몇 조란다. ‘억’도 억 소리 나게 큰 돈인데, ‘조’라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문제는 이 엄청난 돈들이 결국 헛돈이라는 데 있다. 들이지 않아도 되었을 돈이고, 들이지 말아야 할 돈이다. 구제역과 허베이 스피리트 재난에 들어가는 돈은 환경을 망친 대가로 치러야 하는 비용이고, 4대강 사업비는 어이없게도 환경을 망치는 비용이다. 세 경우 다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보다 얼마나 더 큰 비용이 단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던 시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 헛돈을 메꾸기 위해 국민들은 얼마나 아까운 땀을 공연한 곳에다 흘려야 하는가.
앞장서서, 혹은 제 책무를 방기해서 크게 망쳐놓고 국민들의 땀을, 성금과 봉사를 요구하는 국가는 대체 어떤 수준의 국가라고 할까. 태안 재난에 관련한 이 중간 보고서는 약 4백여 쪽이다. 이 기막힌 수준의 국가는 4대강과 구제역으로는 또 얼마나 어마어마한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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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