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찌질하거나 어리석음에 관한 수고로운 보고서 3-① [4人4色 책읽기]

김종옥 (작가)

지구보다 훨씬 더 큰 행성에서 인간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을 한, 문명을 가진 지적생명체가 있다고 치자. 그들이 지구를 보았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꼬물꼬물 모여 살면서 집도 지었다 허물었다 하고, 먹을 걸 만들어 먹기도 하고, 무기로 서로를 죽이기도 하며 난리일 게다. 그 사는 모습이, 제 집을 짓고 먹이를 모으고 새끼를 낳고 물어뜯고 싸우는 다른 짐승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제 터전을 열심히 망쳐가면서 살기도 한다는 것이겠다.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38억년이 지나오면서 가장 고약한 종은 인간이다. 인간은 그 자신 지구생태계의 일원이면서도 아닌 척 고개를 외로 꼬고 스스로 꼭대기에 선 듯 행동한다. 살아온 역사가 각종의 전쟁과 정복의 저열한 역사였으니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생은 둘째치고 제 무리들하고의 공생과 조화조차 못 이루고 살아왔다고 보인다. 그래도 지구상에 나타났던 어떤 특정한 종이 존재하는 평균 기간이 대략 4백만년 정도라고 하니, 그에 비추면 우리 인간종들은 무척이나 성공적으로 살아 온 것이다. 그러니 네 깜냥대로 계속 그렇게 거칠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외계인이 있다면 그는 이 밉쌀스런 인간 무리를 몰아내고 지구에 이주할 생각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서론이 길어졌다. 반복되는 어리석음에 하릴없이 농을 풀어본 것이다. 물론 정색을 하는 것보다는 농을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농과 풍자는 적어도 나는 그 속에 속해 있지 않다는 거리감이 담보될 때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반복되는 비극에 일말의 책임도 없는가. 스스로 삶의 터전을 제 손으로 더럽히고 허물어뜨리는 어리석은 일에 눈꼽만큼도 책임이 없는가. 자연이 스스로의 상처를 스스로의 손길과 숨결로 간신히 꿰매어 나가고 있을, 그걸 보면서 감탄하고 박수치고, 그러다 끝내는 그걸 느긋하게 누릴 자격이 내게 있는가. 우리에게 있는가. 태안에 가서 기름묻은 자갈 한 번 닦았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찜찜한 마음을 숨기며 바닷가 가서 몸을 담가주면, 서해안산 조개 구어 먹었으면 그런 자격이 주어지는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한 이 책 <태안은 살아있다>(동녘 펴냄)를 보면 누구라도 쉽사리 난 가해자가 아니오, 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모두는 당연하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연은, 고맙게도 피해자인 동시에 스스로 치료사이고.

태안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바닷가로 밀려오던 무겁고 시커먼 기름띠와, 물새떼들마냥 무리지어 앉아서 기름묻은 자갈을 닦아내던 자원봉사자들의 감동 어린 장면만을 기억한다면 제2의 재앙, 제3의 재앙이 이어질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태안은 살아있다>라는 제목의 책

물론 태안은 살아있다. 물론 과거에도 죽은 적이 없으니 지금도 살아있으며 미래에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2007년에는 한 때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 때는 인간이 태안 앞바다를, 갯벌을 죽인 것처럼 보였다. 시화호가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고인물로 죽어있었듯이 태안도 그렇게 죽어서 더 이상 생명이 깃든 자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3년여가 지난 지금 태안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걸 보면서 자연은 결코 죽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깊어서 죽은 듯이 보일 뿐이며 다만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죽은 듯 보이는 자연 안에서 정작 죽어버리는 건 사람의 삶이다.

자연이 생명을 품지 않는다면 그 어떤 영악한 생명도 그 안에서 살아낼 수 없다. 태안이 지금도 살아있는 건 사람이 기름을 걷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복구가 그만큼 놀랍도록 성실했기 때문이다. 기름을 걷어낸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자연은 그 수고보다 훨씬 더 많은 응답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안은 우리가 ‘살려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처가 아물고 속속들이 완전히 새살이 돋아나려면, 그래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려면 앞으로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야 한다니, 그때까지 태안의 바다는 묵묵히 제 살을 치유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태안이 어떻게해서 살아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먼 훗날 태안의 자연이 스스로 제 몸으로 보일테니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손으로 어떻게 자기 환경을 더럽혔고, 그 바람에 자기 공동체사회가 어떻게 망가졌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바둑돌이 잘못 놓였었는지 알 수 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바다도 갯벌도 자기 색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그 바다와 갯벌이 품고 사는 사람 사회는 깊은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일종의 자기진술서라고 할 수 있는 이 보고서는 사고의 원인과 진행과정을 치밀하게 짚어가면서, 태안의 일을 ‘태안의 기적’이니 ‘태안을 살려냈다’니 하는 무용담으로 포장하는 게 얼마나 참람한 짓인지 보여준다. 비록 바닷물빛이 돌아오고 갯벌에 윤기가 흐른다고 해도 한 번 튕겨져 나갔던 인간들이 그 생태계의 구성원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는 아직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공동체 사회를 회복하기까지는 아직 계산해야 할 복잡한 목록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해서 태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사건으로 살아있기도 한 것이다. 박원순 이사가 ‘희망을 향한 미완의 기록’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이유도 그것이다.

태안의 죽음

2007년 12월 6일 서해바다의 기상악화가 예보된 상황에서 삼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과 이를 이끄는 2척의 예인선단이 인천에서 경남 거제로 출발했다. 12월 7일 새벽 서해에는 강풍과 파도가 일었고 풍랑주의보도 내려져 있었다. 운항을 강행하던 삼성크레인선단은 새벽 5시경부터 예인력을 잃고 풍랑에 밀리기 시작했다. 근처 대산 지방해양수산청 관제실은 예인선단이 정박 중인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에 접근하는 것을 발견하고 긴급 호출했으나 예인선단은 응답이 없었다. 드디어 새벽 7시 6분경 삼성크레인은 현대오일뱅크의 기름을 실은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했다.

이 충돌로 원유는 사상 최대인 1만 2500여 킬로리터가 바다로 쏟아졌고, 49일간의 해상방제로 회수된 양은 그 3분의 1인 4175킬로리터였다. 시커먼 기름띠는 인근 해안선을 오염시키기 시작하여, 충남 6개 시 군의 11개 읍 면과, 59개 도서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부안 군산 영광 무안 신안 등 전라남북도의 연안 해안과 42개 도서를 오염시켰다. 또 김 굴 미역 양식장 820여 곳과, 조피볼락 넙치 등 종묘시설 81곳, 해수욕장 15곳이 황폐화되었다. 양식장과 어장, 숙박업소, 음식점, 유통과 운송 등 주민들의 피해 신고는 10만 건에 달한다.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 IOPC’의 엄격한 보상 기준에 따른 추정액만도 피해액이 6천억 원을 넘어선다.(국내 전문가들은 실제 피해규모를 3조원대로 추정한다.) 태안 일대가 실로 ‘6천억 원짜리 환경 쓰나미에 휩쓸린’(노진철) 것이다.

이 참담한 현실에 맞서 자원봉사자와 태안주민 등 군 관 민이 모두 팔을 걷어부치고 기름을 걷어내고 닦아내기 시작해서 사고 일주일만에 기름띠 오염 해안선의 79%가 응급방제되었다. 겨울을 지나 7개월여 이어진 방제에 자원봉사자 123만 명을 포함해 200여만 명의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해 2008년 여름에는 깨끗해진 해수욕장을 볼 수 있게 되는 기적같은 일도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의 개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건의 제목만 알고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사건의 시작도, 진행과정도, 결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는 게 너무 없다. 가해자는 누구이며 피해자는 누구인지, 무엇이 망가졌으며 무엇이 복구되었는지 아는 게 없다. 2010년까지 보상된 것이 고작 54건에 그나마 기대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160억 정도라는 것도,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완전한 회복은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른다는 것도 잘 모른다.

왜 삼성은 무리한 운항으로 엄청난 사고를 쳐놓고도 법원 판결 뒤로 슬그머니 빠져 있는지, 왜 현대오일뱅크는 이중선체에 들어가는 수십억의 비용을 아끼려고 기름 유출에 취약한 단일선체구조의 선박을 쓰다가 기름을 쏟아놓고도 그 책임에 대해선 왜 아무 말이 없는지, 재난처리를 관장해야 할 정부는 왜 책임 소재 규명과 배상 및 보상에 그토록 소극적이고 무능하며, 왜 제대로 된 재난관리 매뉴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지, 그보다 앞서 초동 대응에는 왜 그렇게 허점이 많았는지, 왜 자원봉사자의 활동은 감격에 겨워 열정적으로 보도하던 매스컴이 정작 3명의 주민이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공동체 붕괴의 현실과 그 복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지, 그 어느 것도 우리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사고 후 3년도 지난 2010년 2월에 또 한 명의 주민이 자살을 택했을 때도, 그를 쓰러뜨린 절망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게 없다. 아는 게 없다면 당연히 얻어야 할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고,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잘못은 언제건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자연재난에 이어 현재 진행형인 고통스런 사회재난도 모두 일단 잘 기억해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재난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이고자 하는 이 책에는 재난의 원인과 경과, 진단이 모두 여러 각도에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환경의 측면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사회공동체는 어떤 식으로 파열되었는지, 공적 재난관리 체계는 어떻게 허술했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한편, 잘못된 보도로 말미암아 쇼가 되고만 자원봉사자 활동의 명암도 짚어본다. 또 재난관리의 매뉴얼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갈등 상황에는 어떤 해법이 있을지, 어떻게 공동체를 복원 할 지 등이 언급되어 있다. 글을 읽다 보면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쏟아낸 것은 1만 2천여 킬로리터의 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 양이 증폭되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총체적 재앙이었음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진다.

 

갈등, 갈등, 갈등

사고 발생부터 태안에는 숱한 갈등이 생겨났다. 모든 단체간, 모든 개인간에 온갖 종류의 갈등이 서로 얽혀서 만들어졌으므로 실로 허베이 스피리트호 사고의 본질은 이 수많은 갈등구조를 파악하는 데서부터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태순 씨와 이재은 씨, 노진철 씨의 보고서는 이 복잡다단한 갈등 양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고원인자이자 가해자인 삼성 등과 법적 공방, 정부의 책임문제, 배상문제 등을 놓고 태안 주민과 삼성, 유조선회사, 중앙정부, 태안군, 아이오피시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며, 태안 재건 방향을 놓고도 군민들과 태안군, 충남도, 정부 간에 이견이 표출되었다. 또 생계비 배분을 둘러싼 마을과 마을 간의 갈등, 통합 대책위 구성을 둘러싼 수산과 비수산 간의 갈등, 삼성과의 자매결연을 둘러산 갈등 등이 발생했다. 이쯤되면 태안 사람들이 수많은 집단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처럼 들린다.”(박태순)

“방제 방식에 대한 갈등, 사고 원인에 대한 견해 차이, 중대과실 책임, 삼성중공업의 책임 범위에 대한 갈등, 생계비의 지역별 배분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간 갈등, 주민 간의 생계비 배분의 형평성을 둘러싼 갈등….. 이밖에도 사고 원인 규명과 관련한 갈등, 피해 조사와 관련한 갈등, 배상액 산정과 관련된 갈등, 피해 주민 간 갈등, 지방자치단체 간의 갈등, 중앙정부와 삼성과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갈등, 지역개발 방식을 둘러싼 갈등, 생태계 복원 방식을 둘러싼 갈등 등이 있다. 또 함께 살아온 주민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져나갔고, 이것 때문에 이 지역사회를 뒷받침해오던 공동체 사회의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잃어버린 것이다.”(이재은)

이러한 갈등의 본질은 결국 ‘돈’ 문제였고, 이것을 조정할 능력이 정부에게도, 주민에게도, 물론 사고당사자에게도 없었다는 것이 공동체 붕괴의 위기를 맞은 원인이 되었다. 복잡하고 지난한 심사와 재판과정을 거쳐야 하는 피해보상금 문제도 그렇지만,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지원비도 서로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려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어차피 국고에서 지원되는 ‘눈먼 돈’인 바에야 내가 못 챙기면 남이 챙길 것이므로 양보고 염치고 차릴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치열한 내 몫 챙기기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바닥을 보아버린 주민들은 공동체 사회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 비극은 ‘주민들 스스로 만든 갈등도 아니었고, 기름 유출 사고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으니’(박태순) 겪지 않아도 될 고통, 보이지 않아도 될 바닥을 보이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허베이 스피리트 사고가 가져온 가장 큰 비극은 아마도 이것인 듯 싶다.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곳도 이 대목이다.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그에 기대어 살고 있던 사람의 공동체에도 균열이 갔다. 생태계의 파괴가 사회적 재난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태계의 파괴도, 사회공동체의 균열도 책임은 모두 인간에게 있지만, 길게 보아서 생태계가 복원되면 그에 기댄 인간 공동체도 결국에는 예전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기다리기에는 지금 당장의 상처가 너무 크고 당장의 삶이 너무 절박하다. 보상과 배상 문제, 복구 방향 등이 아직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라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오히려 앞으로 더 증폭될 우려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위기에 놓인 마을공동체의 분열을 막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결국 지역을 살려낼 사람은 지역주민들이기 때문이다.’(노진철)

그렇지만 상황이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태안에서 이미 싹트고 있는 희망을 본 연구자도 있다. 박태순 씨는 ‘다행스러운 것은 갈등의 주체들이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자신과 이웃을 재발견하고, 협력과 상생의 중요성을 스스로 터득해가는 과정을 지켜보기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태안을 되돌릴 원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본 희망대로 태안 사고의 ‘완결판’을 만들 때쯤이면 ‘싹트고 있는 희망’이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4대강, 구제역, 반복되는 악몽

몇 년 사이에 몇 조에서 몇십 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단위의 돈을 입에 자주 올린다. 허베이 스피리트 재앙이 크게는 5조대에 이르는 피해라고 하더니만, 4대강을 콘크리트로 감싸는 공사비가 십몇 조, 이십몇 조라고 하였다. 작년 겨울부터는 구제역에 들어가는 처리 비용이 몇 조란다. ‘억’도 억 소리 나게 큰 돈인데, ‘조’라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문제는 이 엄청난 돈들이 결국 헛돈이라는 데 있다. 들이지 않아도 되었을 돈이고, 들이지 말아야 할 돈이다. 구제역과 허베이 스피리트 재난에 들어가는 돈은 환경을 망친 대가로 치러야 하는 비용이고, 4대강 사업비는 어이없게도 환경을 망치는 비용이다. 세 경우 다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보다 얼마나 더 큰 비용이 단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던 시점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이 헛돈을 메꾸기 위해 국민들은 얼마나 아까운 땀을 공연한 곳에다 흘려야 하는가.

앞장서서, 혹은 제 책무를 방기해서 크게 망쳐놓고 국민들의 땀을, 성금과 봉사를 요구하는 국가는 대체 어떤 수준의 국가라고 할까. 태안 재난에 관련한 이 중간 보고서는 약 4백여 쪽이다. 이 기막힌 수준의 국가는 4대강과 구제역으로는 또 얼마나 어마어마한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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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기름유출 사고 이후 3년, 다시 쓰는 태안 리포트 3-② [4人4色 책읽기]

정한 (인천대 윤리교육과 졸업생)

 

2010년 12월 말부터 발생한 구제역 파동 11년 2월 말이 되어서야 잠잠해져 갔다. 그러나, 구제역이 퍼져나가는 건 멎어들었다 해도 구제역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 재산피해, 피해보상, 앞으로 국민들이 겪어야 할 문제들이 과제로 남았다. 국내에 네발달린 동물들은 죄다 살처분 당했고 남아난 가축들은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으며 그로인해 치솟는 물가와 철철 흘러내리는 세금, 울부짖는 농가, 썩은 내 진동하는 피맺힌 매립지, 현장은 지옥과 같은 살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상황을 과거에도 본 적이 있다. 재난의 발생,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응, 대규모의 재난으로 확산, 군까지 동원하여 대응하였으나 대응방침에 대한 문제, 보상에 대한 문제, 언론의 편중된 보도.

과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유사한 사고들 중 가장 큰 충격으로 남았던 것은 07년도에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 태안 기름유출사고가 그것이다. 규모의 문제도 있었으나 200만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몰려간 그 사고는 우리 국민들 속에 잊을 수 없는 사고 중 하나로 기억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태안의 사고는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고 자체는 잊지 못할 지라도 그것이 아직도 진행형이며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그러한 의도에 걸맞게 출판된 저서가 있다. ‘태안은 살아있다.’가 바로 그것이다. 희망제작소가 기획하여 출판된 저서는 노진철, 박진섭, 위평량 등 총 11명의 저자들이 쓴 글을 묶어 낸 것으로 태안의 문제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으며, 다양한 사진과 인터뷰 내용으로 현장의 모습을 전달한다. 총 400쪽이 넘어가는 분량으로 책은 다소 두껍지만 그 만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바라본 태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책의 구성 역시 하나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글을 앞에 두고 환경, 경제, 행정, 언론의 문제 및 태안 군민의 갈등, 삶의 질에 대한 분석까지 세세하게 살펴 태안의 모습을 빠짐없이 전달해 주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저서에도 밝혔듯이 태안 사고와 관련된 언론의 편중된 취향은 많은 국민들이 알고 싶었던 부분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의혹과 알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점이 사실이다. 삼성과 현대, 태안 주민들의 실질적인 보상과, 그 규모, 태안은 복구가 된 건지 등 상당히 많은 부분을 언론에서 놓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관심으로 외면하기 쉽고 안타까운 오해까지 생긴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람들의 뇌리에는 하나의 해결된 사고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3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의 출판은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담는다. 그렇다면 ‘태안은 살아있다.’ 저서는 사람들 기억 속에 침전된 사건을 다시 수면위로 부상시킬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태안은 살아있다’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쓴 글을 엮어 만든 책이다. 이렇게 각자의 글을 모아 만든다는 것은 혼자서 다 집필하는 것 보다 기간을 줄일 수 있고 또 깊고 확실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이점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문제없이 한 책으로 잘 묶여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무리 뜻 깊고 유익한 책이라도 자신이 꼭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면 억지로 책을 읽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약간이라도 흥미를 느끼게 하거나, 적어도 지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저서는 유사한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독자를 지치게 한다. 물론 각자 글을 쓰는데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고자 하는 전개부분은 사실 유사할 수밖에 없다. 즉, 태안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으며 본론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면 들어가야 한다. 뜬금없는 내용이 튀어나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하나 놓고 봤을 때는 흥미와 집중력을 끌 수 있을지 몰라도 뭉쳐놓고 보니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자의 글을 온전히 싣는 것에 중점을 둔 모양인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두지 않아 아쉽다.

각자의 글을 엮어낸다는 것은 사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저서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은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제를 각자 전문가의 분야에 맞게 잘 분배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서로 달라서 많은 시간동안 조율되지 않으면 전체적인 흐름을 해칠 수 있다. 특히 같은 분
야를 연구한 이들이 모여서 쓴 글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문제점이 저서 곳곳에서 눈에 띄며 그것이 책을 읽는데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서의 매력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바라본 태안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는 태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행정학을 연구한 이는 태안 사고에서 무엇을 중점으로 보는지 각 분야의 보고서는 말 그대로 태안의 현 실태를 상세하게 알려줌과 동시에 태안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방향을 그려낸다. 저서를 다 읽은 독자는 마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앞에 두고 보고를 들으면서 회의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글들 간의 소통은 정말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이며 그렇게까지 자세하고 세부적인 내용까지도 독자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도 걸려 마치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독자들을 따로 상정해 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자잘한 것들은 제쳐두고 크게 보자면 그러한 구조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저서 나름의 개성이며 장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고 본다.

구조가 독특하여 장점과 단점을 끌어안고 출판된 저서는 노진철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태안, 6천억 원짜리 환경 쓰나미에 흽쓸리다’라는 제목의 글로 시작한다. 글은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 내용을 실어가며 현장감 있는 접근으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방식은 단지 첫 글에서만 들어난 것이 아니라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이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를 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마을 주민들의 고통과 분노, 고민과 절망의 감정을 손쉽게 전해 받을 수 있으며 글의 흥미를 끄는 요소로 작용된다. 또한 글은 전에 행복하고 평안했던 태안 주민의 모습과 사고 이후 절망에 휩싸인 마을의 모습을 비교해 보여주면서 태안의 고통을 독자에게 각인시켜 나간다. 그러한 과정은 단순히 근거 없는 추측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수치를 보여주어 좀 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여 객관성을 높힌다.

글은 전반적인 태안의 모습들을 객관성 있는 자료를 통해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어 섬마을 사람들의 고통이나, 태안주민의 자살문제, 피해보상과 관련된 문제 등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내용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데 독자가 알고자 했던, 혹은 알고 있었어야 하는 문제들을 다뤄 독자를 태
안의 문제로 인도한다. 글의 끝부분에 가서는 태안 곳곳에 달린 현수막을 통해 태안 마을 주민들의 심경변화를 대변하는데 그 현수막의 글귀들이 독자들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태안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이렇게 독특한 방법으로 접근한 시도는 그들의 분노와 억울함,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고마운 감정들까지 직접적으로 보여주어 독자들의 관심과 감정을 이끌어낸다.

글은 흠잡을 데 없는 짜임새로 태안의 전반적인 내용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소개한다. 태안의 사고과정부터 피해보상, 태안주민들의 심정까지, 이 글은 태안 문제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려 저서의 기둥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러나 손댈 곳이 없는 듯한 완전함은 오히려 저서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분명 처음에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의 관심을 붙들고 소개하는데 무리가 없으나 덕분에 뒤에 실린 글들이 퇴색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글 이후 다음에 이어지는 글들을 읽어나가면서 ‘읽었던 부분인 것 같은데…’, ‘이 내용 앞에서 본 것 같은데…’란 생각을 계속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첫 글은 태안의 전반적인 밑그림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 자체로 이미 책의 내용을 다 읽어버린 듯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차라리 이 글을 뒤에다 배치시켜 놨으면 그러한 감각이 덜 느끼게 만들 수는 있겠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글들은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라 글 자체만으로 질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첫 글에 나오는 것이 또 무리이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그러한 문제 외에도 독자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할 만한 부분 중 하나인 사고에 대한 법원판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사고일지에서처럼 이해할 수 없는 선박들의 움직임이나 글에서도 밝혔듯이 왜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판결이 나온 건지, 또 그러한 부분에 대해 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다뤄주지 않고 간략하게 소개만 한 체 넘어간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나라의 사례를 소개해 이 판결이 불합리한 판결이라는 사실을 들어내는 측면은 불만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준다.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푸른 바다, 검은 재앙 안에 갇히다’ 박진섭 생태지평연구소 부소장의 글이다. 생태지평연구소에 계신 분이신 만큼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태안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기름 유출에 의한 오염과 관련해서 단순히 우리는 ‘몸에 나쁘다’라는 인식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을 전문적인 지식과 과거 사례들을 이용해 소개한다. 그러나 이 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오염되지 않았던 태안의 해양생태계를 소개하는데 이것이 단지 거대한 생태계의 보고가 황폐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면 다소 글의 주제를 퇴색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자는 글을 더 확대시켜 해양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언급한다. 결국 저자는 단순히 태안 생태계 환경오염의 심각성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무너져가는 해안생태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글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뜻 깊고 유익하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태안과 관련된 문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지 느닷없는 확장은 독자를 당혹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개를 보이는 글은 이 글뿐만 아니라 저서에 담긴 몇몇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금빛바다를 잃어버린 사람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의 글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재산피해규모와 같은 여러 수치들을 다양한 표를 통해 보여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태안의 모습이다. 상당히 독특하게 관점에서 전개하는데 이러한 글들은 보기 드물다. 보통 태안과 같은 문제들은
사회학자나 환경단체에서 주로 글을 써냈기 때문인데 그렇게 때문에 특별한 이 글이 독자에게 참신하게 다가온다. 과연 태안의 경제발전은 가능한가? 앞으로 그들의 지역개발은? 무너져 버린 생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효율적인 피해보상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러한 내용 중 몇몇은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라 겹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의 글은 넘쳐나는 수치와 분석을 통해 풀어나가는 방식이 신선하다. 단지, 숫자에 질리지 않을 사람들 내에서 말이다. 너무나 많은 숫자와 표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또한 그렇게 세부적으로까지 알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대략적인 규모로 이야기 해도 저서의 의도를 해치지 않았을 것이라 보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각자가 생각한 독자층이 따로 있는 듯 하여 들어난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2장으로 넘어와서 재난관리에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는 주로 행정학을 연구한 이들이 쓴 글이 모여 있는데 2장의 시작은 ‘초기재난관리의 실패’ 이재은 충북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의 글이다. 경제학을 연구한 저자와 마찬가지로 행정학을 연구한 이의 글 또한 독특한 관점이다. 물론 행정을 중심으로 바라
봤으니 대부분은 재난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했는지가 주로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는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행정학을 연구하는 저자라 그런지 글 자체도 매뉴얼 형식이다. 소제목들이 일종의 체크리스트처럼 되어있는데 그것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대응은 적절한가?’, ‘방제물자, 비축과 관리는 적절했나?’, ‘현장 지휘, 혼란스럽지는 않았나?’, ‘2차 오염가능성은 예상했나?’, ‘자원봉사자 관리는 철저했나?’ 등 이렇게 하나하나 체크해 나가는 방식은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직접적으로 알려줘서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빠짐없이 전달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이점이 있다. 글 자체도 무척이나 깔끔하고 간결하다.

그러나 행정학자가 쓴 글이라면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은 ‘매뉴얼, 과연 현실상황에 적합했는가?’하는 점이겠다. 저자 역시 그러한 매뉴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매뉴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소개하는 것 보다 그렇게 매뉴얼이 있는데 왜 대응에서는 그렇게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지의 내용이 더 중요하고 핵심이기 때문에 구지 매뉴얼 소개에 그렇게 많은 지면을 소모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잊혀진 씨프린스호’ 이야기가 나오는데 씨프린스호의 사례를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단순한 소개로 끝난다. 씨프린스호 사고는 국내에 영향을 준 사고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사례 소개로 마무리 된다면 해외에서 일어난 여러 기름유출 사고를 소개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씨프린스호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우리는 한번 겪은 사고에도 학습하지 못하고 또 큰 사고를 경험했다는 것이 초기 재난관리의 측면에서 구멍을 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곁들여 졌거나 좀 더 명확한 비교분석이 들어갔다면 사례소개가 이처럼 무의미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글에서도 씨프린스호를 언급하는데 혹시 내용이 겹치기 때문에 편집자가 의도해서 그 부분만 빼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뜬금없다.

다음은 ‘재난은 있어도 재난보도는 없었다’ 박동균 대구한의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쓴 글이다. 경찰행정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시각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중점이다. 분명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고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묻혀져 의아했던 부분을 풀어준다. 글은 간략한 사고일지의 소개 이후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제일 먼저 ‘가해자’로 분류된 삼성과 현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의 얌체적인 행동들을 고발하고, 사법당국의 엉뚱했던 수사발표 역시 푹 찌른다. 또한 해경과 검찰의 침묵을 지탄하고 그들을 감시해야 할 언론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전반부의 중립적인 태도와는 조금 달라서 시원스러운 전개가 독특하다. 왜 언론은 미담만을 전했는가. 왜 언론은 그들의 제목에서 가해자를 숨겨버렸나. 왜 분신자살과 같은 사건들의 심층적인 보도는 없었나. 필자가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11년 1월 7일자 기사에서 태안주민들은 인지세 730만원을 내지못해 자살어민 유족들의 소송이 재판에 오르지도 못한 채 끝났고 인지세를 지원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 요청 역시 기각되었다는 사실이 기사는 있어도 제대로 표면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 태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침전해 들어가고 있다.

다음은 ‘재난관리 매뉴얼’ 양기근 원광대학교 소방행정학과 교수의 글이다.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매뉴얼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간 글로, 2장 첫 글의 미비한 부분을 해소시켜 준다. 2장에서는 간단한 소개만 하고 넘어갔던 씨프린스호에 대해서도 제대로 짚고 넘어간다. 저자는 특히 기름유출사고와 관련된 모의훈련을 08년 8월 24일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훈련이 아무런 소득이 없었는지, 매뉴얼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파고들어 가는데, 매뉴얼에 어떤 문제가 있었으며 왜 그러한 문제가 있는 매뉴얼이 유지되고 있었는지, 앞으로 매뉴얼을 수정하고 그에 맞는 훈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언급한다. 누가 알았겠는가. 기름유출 사고 매뉴얼에 평온한 바다만을 상정하고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생존, 그 이상의 삶에서는 이제 태안주민들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이어진다. 그 첫 번째 글은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 소장의 ‘갈등관리 해법을 찾아서’인데 서로 불신의 담을 쌓아가고 있는 태안주민들에게 유익한 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 번째로, 글을 쓰는 목적을 밝힌다 하면서 ‘외부집단과 태안주민의 갈등을 중심으로 서술하지는 않겠다’거나, ‘태안의 상태를 알리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라고만 했지, 정작 무엇을 중점으로 쓰겠다는 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다. 희망을 발견 할 수 있기 위해 쓴다는 것만 밝혀서는 무슨 내용이 이어질지 짐작할 수 없다. ‘갈등관리 해법을 통해 희망을 발견 할 수 있기 위해..’라고 썼다면 아주 명확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제목 하나만 써두고 언급하지 않아도 될 부분이기도 했다.

이렇게 애매한 흐름을 보이는 것은 곳곳에서 들어나는데 특히 ‘갈등이 보다 합리적 문제해결의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라던가, ‘태안은 위기상황에서 공정성과 공평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갈등이 스승 역할을 한 것이다.’ 라는 문장은 마치 ‘갈등이 필요했다’라는 의미 같다. 물론 우리가
좀 더 앞으로 내걷는 과정에 있어 갈등은 분명 큰 스승이 되어줄 수 있다. 이러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이 말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단, 태안사고는 단순한 갈등이 아니다. 손가락 절단이나 분신시도와 같은 것을 갈등이라 보면서 위와 같은 문장을 사용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순수하다 할지라도 오해할 소지가 있다.

또한, 글의 소제목을 ‘갈등개요-갈등전개-갈등해소-갈등특징’으로 나열했는데, 갈등해소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생계비 분배문제가 갈등해소가 되었거나 갈등해소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나? 그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단순히 ‘불만이 없다’라는 문장만으로 주장하기에는 민감한 문제이며, 저서의 글들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의견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생계비 분배문제 이전에 생계비 지연문제 역시 갈등을 제공하여 자살자가 3명이나 나왔는데도 언급이 없다는 부분은 아쉽다. 뿐만 아니라 ‘통합조직구성을 둘러싼 갈등’에서는 분열된 조직이 다시 통합했기 때문에 ‘훨씬 체계적, 수평적, 민주적, 투명하게. 운영될 것이다’는 주장을 하는데 근거 없이 낙관적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태안은 스스로 갈등을 해소해 나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느닷없이 갈등해소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갈등을 해소해 나간다고 보면서도 갈등해소방법이 필요한가? 필요할 수는 있겠으나 다소 설득력이 부족한 구조는 아닌가. 사실 갈등 해소방법은 태안주민과 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글의 핵심이 된 이유는 저자가 꼭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태안의 갈등을 이야기의 시작으로 꺼내 놓은 후 자신이 말하고 싶은 부분, 바로 갈등의 해법을 이야기 하고, 갈등의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 하며 갈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의 의지를 보이면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바를 엿볼 수 있는데 처음부터 태안 주민들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법들을 이용해 갈등을 접근해 가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해야 설득력이 있지 태안 자체로도 해결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앞뒤가 안맞다.

다음은 ‘파괴된 삶을 복원하라’, 유현정 충북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의 글이다. 이 글은 저서의 부록을 제외한 모든 글을 통틀어서 가장 친근하게 접근한다. 필자가 연구하는 과정을 경험담 형식으로 풀어나가는데 저서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뷰 내용도 이용한다. 저자는 태안주민들의 삶의 질과 만족,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데 문제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다른 저서의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이지, 역시나 다른 독자층을 대상으로 쓴 것인지, 주민들의 수입을 억대라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앞의 글들에서 알려준 정보와는 틀리며 마치 태안 주민의 평균적인 소득을 말하는 것 같아 모호하다. 또한 공공근로 수입이 6만이란 이야기도 앞의 내용과는 틀리다. 세부적으로 나눠 설명하지 않고 방제비로 6만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앞의 글에서는 분명 공공근로는 방제작업의 위험성 때문에 배제된 노인들에게 할당된 일이며 3만5천의 적은 수입으로 불만이 가득하다는 글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이러한 모호한 사실전달에는 문제가 있으나 6만의 일당 덕분에 5만에 구했던 주방 도우미를 구할 수 없다는 하소연 등 생활일상의 소개는 놓치고 가기 쉬운 부분이며 태안 주민들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렇게 비록 명확한 사실전달에는 다소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태안주민들의 바로 옆에서 듣는 것과 같은 글의 흐름과 구성은 태안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있어 큰 지표가 되어 준다.

저서의 글들은 각자 저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서로의 통일성을 해치며 글들 간의 소통이 없다는 점은 분명 문제가 있다. 편집자의 재량이 좀 넓어서 몇몇 군데만 수정을 가했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큰 줄기는 놓치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 저자의 개성이 잔뜩 살아나 마치 저자가 누군지 안보고도 저자의 분야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독특한 느낌은 이색적이다. 좀 더 아쉬운 부분은 의료적인 분야에도 글이 있어서 태안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부작용에 대한 전문적인 견해가 들어갔으면 하는 면이 있으나 그것은 단지 필자의 개인적인 사소한 바램이다. 이미 저서가 지닌 방대한 정보는 태안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각하여 우리가 분명히 신경 써야 할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태안문제를 다시 사회의 표면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저서는 태안의 문제들과 관련해서 비난할 대상을 지목하거나 공격적으로 작성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객관적인 사실의 전달을 그 중점으로 두는데, 이러한 점은 저서의 신뢰도를 높이며 사회의 단결된 힘을 끌어내는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줄 것 같다. 이 저서를 시발점으로 앞으로 많은 칼럼이나 기사가 나와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구제역 파동과 함께 국민이 뭉쳐 해결해 나갈 사회적 문제로 토론의 장에 올라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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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살아나는 태안, 처절한 몸부림 3-③ [4人4色 책읽기]

김한규 (하동해설사회 생태해설가)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 6분,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어족자원을 터전으로 삶의 활력이 넘치던 태안반도는 순식간에 암흑 같은 절망으로 뒤덮였다. 기상악화가 예보된 상태에서 삼성중공업의 해상 크레인과 이를 예인하는 3척의 선박으로 이루어진 예인선단이 무리하게 운항하다 서해에 정박중이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와 충돌한 것이다. 이 사고로 1만 5천톤의 기름이 태안 앞바다에 폭포처럼 쏟아져 밀려들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1995년 7월 23일, 여수 해역에서 좌초되어 5.035톤의 기름을 바다에 쏟아낸 시프린스호 사건의 악몽을 겪었다. 여수 앞바다의 일부 해저에서는 사막화가 우려된다는 보고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허베이 스피리트호에서 쏟아져 나온 기름은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선박 유류사고의 유출량을 합친 것 보다 많은 양이었다. 이처럼 크나큰 재앙으로 뒤덮였던 태안반도는 3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살아나고 있을까.

사고 당시 구성된 재난관리 전문가들 열 한명이 3년 동안 조사하고 연구하여 자료로 묶은 보고서 <태안은 살아있다>가 ‘희망제작소’의 기획으로 나왔다. 생태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전공분야로 구성된 이들은, 사고와 기름유출의 배경, 환경오염과 변화, 주민공동체의 붕괴와 고통, 배상을 둘러싼 문제들을 조사하고 분석하였다. 이 보고서들에는 한결같이 바다의 기름유출사고가 자연과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해결과 복원은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를 구체적인 지표로 보여주고 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는 크고 작은 선박의 기름 유출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1997년에서 2006년까지 10년간 선박의 기름 유출 사고를 보면 총 3,915건이 발생했고 1만 235.5킬로리터의 기름이 유출되어 바다를 오염시켰다.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가 난 서해 바다에도 1997에서 2006년까지 10년간 총 230건의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고 293.6킬로리터의 기름이 유출되었다. 한 해 평균 390건의 기름 유출사고가 발생하고 있으며, 매년 1,203킬로리터의 기름이 바다로 유출되고 있는 실정이다.”(박진섭)라는 것이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다. 바다의 생태를 온전히 지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근원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이기심과 욕망은 생명의 근원을 죽음의 터로 바꿔놓고 있다. 특히 가장 크게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이익이 걸려 있는 원유의 수송을 둘러싼 나라들의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인간에게 하루도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기름은, 필요한 물건의 용도를 넘어 매순간 재앙의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 끊임없는 재앙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선박사고의 경우 운항과실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운항과실은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한 무리한 운항에서 비롯될 것이다. 태안을 악몽으로 뒤덮은 기름유출 사고도 삼성중공업 예인선단의 무리한 운항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사고를 각오하고서라도 자본의 이해관계는 이익의 목적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한 다음에는 그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대기업의 속성이다.

태안 앞바다를 기름으로 뒤덮은 뒤에도 자본의 그런 속성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삼성중공업이 2008년 12월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손해배상 책임을 50억원으로 제한해달라는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유조선 쪽 잘못으로 피해가 커졌기 때문에 법정 한도 안에서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피해규모가 6,000억 원이 넘는데 가해자는 그 100분의 1도 안 되는 돈만 내놓겠다고 주장한 것이다.”(이재은) 결국 ‘2010년 2월 말까지 보상 청구된 주민들의 피해건수 7만2402건 중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의 사정이 완료돼 보상금이 지급된 것은 0.9퍼센트인 653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보상비 책정이이나 배분을 둘러싸고 주민과 지역 사이에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책임져야 할 주체들은 뒤로 빠지고 무자비한 재앙의 고통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으로 돌려질 뿐이다.

<태안은 살아있다>는 인간의 삶에서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 결코 경제적인 이익이나 가치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의 근원은 자연에 있는 만큼 자연을 이익의 대상으로 정복하고 이용하려 들 때에 결과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닥치고 있는 크고 작은 불행과 재앙의 원인이 결국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3년이 지난 지금, 태안 주민들은 지금까지 갈등을 해소하고 삶의 터전을 회복하여 희망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주민들의 몫으로 남겨지는데 있다. 한 예로 사고 이후 15명의 암환자가 발생했지만 구체적인 역학조사나 대책이 별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 언론도 일본의 자원봉사 기적을 보도하며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행렬을 유도했지만 피해의 책임규명이나 본질을 충분히 파고들지 않았다. 결국 주민들은 삶의 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생활에 대한 만족과 의미, 가치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태안은 살아있다>에서도 태안 주민들의 피해를 제대로 보상하고 공동체와 삶을 온전히 복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의 입장과 주민의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작성된 보고서인 만큼, 충분히 기억을 되살리며 고통에 참여시키고 책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이웃의 문제이며 내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에 매달려 있는 인간들은 망각에 익숙해져 있다. 개인은 물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는 만으로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될 것이다.

<태안은 살아있다>는 구체적인 기억과 현재진형인 고통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되찾고자 한다. 그 희망을 피해 당사자들인 태안과 서해 주민들이 힘겹게 일궈가고 있다. 그 때 현장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우리는 어느새 그 참혹한 때를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태안을 살아있다>에 실린 보고서를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내 일상의 안일을 위해 빚진 것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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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우리가 씻긴 것, 태안인가 삼성인가 3-④ [4人4色 책읽기]

이정미 (동녘 편집자)

벌써 다 잊었나 ― 아직 끝나지 않은 일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전에 서둘러 안면도로 대하를 먹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인데 차가 막혀 저녁에 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래, 가을엔 대하지.”
아무 뜻 없이 그런 말이 나왔고, 친구하고는 약속을 미루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 그동안 회사에서 준비해온 지난 2007년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에 관한 기록들을 사고 3주기가 되는 12월 7일 안으로 책으로 완성해야 하는 일정이 짜여졌습니다. 그때 문득 며칠 전에 통화를 한 그 친구가 떠오르더군요.

지금 다시 봐도 불편한 ‘그때’의 장면들을 펼쳐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자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건가’ 싶었습니다. 사건 일지와 사진 자료, 보도된 기사들을 봐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탄식뿐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사고의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시점에서 이 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더군요. 그저 눈으로 하는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발생 시점으로 돌아가 사고가 발생한 17시간이 집약된 일지부터 읽는 일이었습니다.

3년 전 2007년 12월 7일 새벽, 태안 청정해역으로 1만 500톤의 검은 기름이 쏟아졌습니다.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기름 유출 사고 유출량을 합한 것보다 많은 양의 기름이었다고 합니다. 태안의 바다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밀려드는 파도에도 양식장에도 갯벌과 모래사장에도 어느 곳을 가도 기름 범벅이었고, 기름 냄새로 호흡이 곤란할 지경인 그 모습들이 생생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양식업자, 어선어업인, 식당업자, 숙박업자, 맨손어업인들은 기름 유출 때문에 당장의 생활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대학 때 바닷가 고향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시던 용돈으로 생활을 하던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와 그 가족들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나 살아 있는 사람이나 그 마음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당시 집계로 6,000억 원 이상의 피해규모에도 불구하고 사고 가해자인 삼성중공업은 법원에 손해보상을 50억 원으로 제한해 달라고 신청한 상태였고, 공범자인 현대오일뱅크에는 무죄가 선고된 상태였습니다. 3년 뒤, 2010년 2월 26일에는 전피해민연합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성정대 씨가 자살을 했습니다. 성정대 씨는 양식업 실패에 대한 절망감에다 2년 동안 지급된 보상이 청구된 주민들의 피해 건수 7만 2,402건 중 0.9퍼센트인 653건에 불과해 피해의 1퍼센트도 보상을 받지 못한 지지부진한 성과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2년 전 피해 어민 3명이 자살했던 고통스런 시절에서 무엇 하나 뚜렷하게 나아진 것이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내용과 책이 될 원고들을 정리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만 남은 이 사건을 복기하는 일,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책이 나왔다 ― 우리가 씻긴 것은 삼성이었나?

사고 시점부터였으니 상당히 긴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구성된 재난관리 전문가 조직이 사고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출발해 2010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구자들이 애정을 가지고 태안을 지속적으로 방문하며 연구한 자료를 모은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이 정리되었습니다. 책은 사회학자, 생태학자, 경제학자의 눈으로 분석하는 일, 행정학자들이 모여 초기 재난관리의 실패를 반성
하고, 소방행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일, 그리고 사고 이후 주민들의 생활과 갈등과 건강 등을 충분히 기록했습니다. 사회적 재난이 번지면서 마을공동체를 위협하는 갈등 상황을 분석하는 일을 마치고 해결 방향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벌써 다 잊었나 봅니다. 제가 태안을 방문했다는 친구의 얘기를 듣고도 그때의 그 사건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 늦은 외침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못했고, 막상 책의 실물을 본 사람들의 소감도 ‘사고가 벌써 3년이나 지났어?’ 정도였습니다. ‘30만 자원봉사자들의 노력과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으로 씻긴 것이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은 태안이 아닌 삼성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괘씸한 건 삼성의 태도였습니다. 마을 몇 곳을 찾아 마치 큰 혜택이나 주는 듯 자매결연을 하고 자신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을 뿐 실질적인 보상은 나몰라라하고 있으니 말이죠. 푸른 바다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모든 주민들의 삶이 기름 재앙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지는 못했습니다. 진정한 생태계의 복원은 인간 공동체가 함께 복원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태안의 파괴된 삶이 복원될 때 비로소 생태계의 치유와 다른 문제들이 함께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삼성은 법원 판결 뒤로 숨어 우리의 망각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소리 죽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사고 이후 지금 태안은 예전의 아름다움과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지만, 주민생활의 완전한 복구는 미진하기만 합니다. 생활 터전을 잃어버리고 이웃을 잃은 상처와 서로간의 불신으로 공동체가 무너지는 등 상흔이 크게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이 살아남아 계속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반성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재앙을 극복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더 큰 관심과 응원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태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덧붙이는 말 ― 만든 책, 만들어지는 책

뒷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들면서 ‘책의 운명’과 ‘책의 외연’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아 이곳저곳에 작업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요청했었습니다. 원고에 참여한 재난관리 전문가들과 환경운동연합의 도움으로 많은 자료가 있었지만 좀 더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헌데 도움의 손길을 뻗치자마자 신기하게 손을 맞잡아 주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태안에 내려가 자원봉사를 하며 사진과 영상을 기록으로 남긴 대학생들, 지역신문을 만들며 태안살이를 하고 계신 분 등 많은 분들이 기꺼이 자료를 보내주셨습니다.

특히 지역신문 《태안시대》에서 보내준 현재 되살아난 태안 푸른 바다의 모습은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암담한 사고의 기록부터 사람들의 힘으로, 자연의 복원력으로 회복해가는 지금의 모습까지 담을 수 있어 책은 좀 더 풍부해질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책의 판매량을 두고 책의 운명을 운운하는데, 책의 운명이란 게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이번 작업은 제게 책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한 고마운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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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세번째 책은, 희망제작소에서 기획안 노진철 외 지음, <태안은 살아있다>(도서출판 동녘 펴냄)으로 김종옥(작가), 김한규(생태해설가), 정한(대학생), 이정미(동녘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아울러 글 사이에 게재된 사진들은 출판사의 협조로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영원한 현자, 소로우와의 만남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임명옥 (보령 책 익는 마을 회원)

 

방문객이 되어 길을 떠나다

나는 방문객이 되어 그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를 방문하려 했을 때 사실 내 마음은 덜컹거리거나 삐걱거리고 우글우글 끓거나 오글거렸다. 안일함을 추구하는 자아와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아가 만나서 갈등하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깨어 있는 삶과 본질적인 삶을 추구했으며, 말과 글로써 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살다 간 그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월든 호숫가로 이끌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이라 여겨지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모험과 실험 정신을 가지고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 찬 인생길을 선택했다. 극심한 고통과 근심, 과도한 노동에 마음을 빼앗긴 이웃들에게 그리고 집의 노예, 재산의 노예, 일의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 자급자족과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직면해 보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고향인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햇볕이 화사하게 내리쬐어 만물을 회생시키는 이 최초의 봄날 아침, 숲으로 들어선 나는 월든 호수 근처에서 개구리와 거북이의 마중을 받는다. 월든 호수는 웅장하지는 않지만 수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묘사대로라면 여름날 청명한 날씨에는 청색빛, 폭풍우가 부는 때는 청회색빛, 사방이 눈으로 덮였을 때는 초록빛을 띤다. 호수에는 강꼬치고기, 메기, 퍼치, 피라미, 황어, 기름종개, 송어, 장어가 서식하고 봄과 가을에는 물오리와 기러기가, 여름에는 횐가슴제비가 물살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소로우에게 월든 호수는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친밀하며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이자 대지의 눈이다.
소로우,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다

소로우는 1845년 3월 말 경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마을에 통나무로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가 혼자 힘으로 봄과 여름 내내 집을 지었다. 숲에 있는 호두나무와 소나무를 자르고 베고 깎는 일은 그에게 즐거운 노동이었다. 기둥과 서까래를 다듬고 굴뚝을 만드는 일은 그에게 재미있는 놀이였다. 점심으로 그는 버터 바른 빵을 싸 갔는데 송진이 묻은 손으로 만진 빵에서는 소나무 향이 풍미를 더 했을 것이다. 28달러의 비용으로 거주할 공간을 완성했는데, 그 비용은 그 당시 하버드 생이 학교에 내야 할 일 년 치 월세보다 더 싼 비용이었다. 즉, 소로우는 적은 돈으로 평생 살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나는 그의 오두막 집 문을 두드린다. 그는 노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이 가져 오는 맑으면서 풍부하고, 깊으면서도 예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진지하면서도 신중해 보였는데,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 온 방문객을 성의껏 맞아 주었다. 그의 집은 폭이 약 3m, 길이가 4m 50cm, 높이가 2m 40cm 정도로 몇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작고 아담한 크기이다. 집 안에는 탁자 하나, 침대 하나, 의자 세 개, 책 몇 권, 그릇 몇 개 정도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벽난로를 놓았고 창문과 출입문이 있다. 소로우에게 주거 공간이란 기본 요건만 갖춘 간소한 집을 의미한다. 살아가는 데 필수품인 것들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릇이 몇 개 없으니 찬장이 필요 없고, 옷도 몇 벌 없으니 장롱도 필요 없다.

탁자는 책상이자 식탁이고, 집은 거실이자 침실이자 부엌이다. 커튼은 자연이 만드는 채광이 있으니 필요 없고, 창문을 통해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으니 그림이 필요 없고, 자고 일어나면 온 숲 속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로 음악이 필요 없다. 나는 그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는다. 그의 집에는 의자가 세 개인데 하나는 고독을 위해서, 두 개는 우정을 위해서, 세 개는 사교를 위해서, 라고 그는 설명해 준다. 나는 그가 새벽마다 근처 샘가에 가서 떠 왔을 물 한 잔을 대접받는다. 물이야말로 현명한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음료라는 생각이 소로우의 오두막집 음식문화이다. 술은 그다지 고상한 음료가 아니고 아침의 희망을 한 잔의 뜨거운 커피로 꺼버리고 저녁의 희망은 한 잔의 뜨거운 차로 꺼버리기에 커피와 차도 불필요한 음료라는 게 소로우의 덧붙여진 설명이다.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즐기는 나로서는 무색하고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기호식품은 생필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을 직면하고자 하는 그에게 기호식품은 사치품일 텐데, 나로서는 “이것마저 포기해야 해요?” 라고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은 맑고도 향기롭다. 자연과 숲이 물속에서 교감하고 체화되어 순수함을 만들어 낸 듯하다.

소로우, 참다운 농부가 되다

소로우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오까지는 대부분 콩밭을 가꾸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콩밭을 매면서 소로우는 자문한다. ‘나는 콩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이며, 콩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급자족해야 하는 그에게 콩밭 가꾸기는 그의 직업이 되어 심고 김매고 수확하고 도리깨질하고 추리고 팔고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오직 호미 한 자루와 두 손으로만 일을 한다. 말과 소, 개량된 농기구들을 이용하지 않고 비료와 거름을 주지 않는다. 그의 농사일을 돕는 조수들은 단지 이슬과 비, 지력과 태양빛, 공기 그리고 새들의 노랫소리이다. 그렇게 하고도 그는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말한다.

“농사가 한때는 신성한 예술이었다. 지금은 농업의 여신이나 대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지 않고 지옥의 황금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 때문에……. 토지를 재산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은 불구가 되고, 농사일은 품위를 잃고 농부는 비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 .”
“금년에 숲에 밤이 열릴 것인지 아닌지 다람쥐가 걱정을 않듯 참다운 농부는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 밭의 생산물에 대한 독점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최초의 소출뿐만 아니라 최종의 소출도 제물로 바칠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식사를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서 빵으로 만들어 먹거나 쌀로 죽을 끓여 먹거나 감자를 먹는다. 때로는 월든 호수에 나가 송어나 메기를 잡아 오기도 한다. 한번은 그에게도 육식에 대한 본능이 있어서 숲에서 우드척을 사냥했는데 육식을 먹기 위한 과정이 감자를 먹는 과정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이 소모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는 감자나 옥수수 가루, 쌀을 먹는 게 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책상 위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비롯한 고전 몇 권이 놓여 있다. 그는 독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거처는 사색을 하기 위한 곳일 뿐만 아니라 진지한 독서를 하기 위한 곳으로도 어느 대학보다 낫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데,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신탁이다……. 기록된 말은 역사적 유물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그것은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예술작품이다.”

간소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오전에 김매기나 독서나 글쓰기를 다 끝마치고 월든 호수에 몸을 담근 후 소로우는 가뿐해진 몸과 마음으로 오후에는 마을에 산책을 나간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거나 숲에 있는 새와 다람쥐를 관찰하듯 우거진 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 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러 마을로 향한다. 어느 날 그는 마을에 갔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소로우로서는 인간을 가축처럼 매매하는 국가는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한 국가에는 세금도 낼 수 없었기에 세금 납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국민’보다 ‘인간’이 중요하고, ‘법’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했다.

아직 흑인노예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소로우는 흑인노예제라는 야비한 제도에 빠져 있는 천박한 국민들과 악랄한 노예주인 남부의 농장주와 새로운 노예를 생산해 내는 북부의 공장주들을 함께 비판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삼는 것도 비판했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노예 감독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래서 그는 과도한 노동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고, 간소한 옷과 집, 소박한 음식과 단순한 삶을 살게 되면 자기 인생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주인으로 자주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본질과 진실을 찾아 가는 삶

소로우는 2년 2개월 동안 문명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실험해 보고 이 책 『월든』을 탄생시켰다. 그의 정신세계는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지만, 그의 문장은 자연에 대한 예찬과 아름다운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소로우는 자신이 살고 있던 19세기를 들떠 있고 신경질적이며 어수선하고 천박하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탐욕을 따르기보다는 절제된 삶, 소박하고 간소하며 단순한 삶을 추구했고, 진정한 문명인으로서 일과 돈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여유롭고 자유로우며 건강한 삶을 추구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나 돈, 명예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인생을 깊이 있게 사유하면서 순결함과 고귀함, 진취성과 용기, 선행과 겸손, 너그러움과 신뢰, 정직함과 모험을 사랑했고, 숲에서 호수에서 천국을 발견했다.

소로우의 집에서 나와 나의 집으로 향하면서 내 마음 속이 여전히 오글거림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그가 말하는 인생의 본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이다. 본질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져서, 그 길을 찾기가 어려워져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착잡하기도 하고 19세기와 21세기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라고 변명을 해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본질을 찾아가는 삶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소로우가 말한 대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끊임없이 노력하지 말고,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게 진실과 가까운 삶일 것이다. 나는 소로우와의 만남을 통해 앞으로의 내 생이 지금보다 더 간소하고 소박해지기를, 그래서 자연과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게 살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소로우식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이 가증스럽고 허황되며, 탐욕스럽고 몰염치한 21세기에 사는 것보다는 이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서 있거나 앉아서 생각에 잠기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어떠한 힘도 나를 막을 수 없는 그런 길을 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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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셋째 글로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강승영 옮김, 이레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가족의 종말! 그리고 그 이후는? 2-① [4人4色 책읽기]

김세서리아 (성신여대 연구교수)

 

삼식이의 비애
어느 저녁나절, 5, 60 대로 보이는 여성들 몇 명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소곤거린다.
“000은 삼식이 때문에 못 나온대. 그냥 우리끼리 갑시다.”
“아휴. 삼식이가 있대? 쯧쯧. 그래, 우리끼리 가요.”
삼식이? 나는 그저 삼식이가 누구 집 아들의 이름이겠거니 했다. 소곤거리던 여자들의 나이로 보아 아마도 늦둥이를 두어서 저녁 나들이가 여의치 않은 가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얼마 후 우연히 다른 자리에서 삼식이가 ‘삼식(三食)이’ 인줄을 알고 나서는 배꼽이 빠지게 한참을 웃었다. 삼식(三食)이, 집에서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중년 남자를 일컫는 말이라니.
전통 사회에서 가족을 중요시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가족을 통해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생활 자료의 생산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 공동체로 간주되었다.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길쌈하고” 라는 유가 경전의 언급이나,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남자는 평생토록 일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는 수고를 해야 하는 벌을 내리는 야훼의 말에서처럼 남자와 여자가 분업을 함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간직되어 온 바깥일을 맡은 남편과 집안일을 맡은 아내, 뭐 이 정도 구도쯤은 되어야 그래도 평등할 수 있다는 게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바깥일에만 종사하던 남편은 은퇴한 이후 더 이상 나갈 ‘바깥’이 없다. 그러니 집에 들어앉아서 꼬박꼬박 세 끼 밥만 챙겨 먹을 수밖에. 그렇다고 은퇴한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여자 일인 집안일까지 할 수도 없다.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래서 점점 더 간 큰 남자만 되어 가고, 뭇 여자들의 비아냥거림, 불만은 커져만 간다.
금융위기를 맞고 경제성장이 둔화된 최근, 이러한 상황은 자꾸만 늘어가고, 전통적인 가족 안에서 누렸던 가장의 권위에 대한 향수는 짙어만 간다. 세상이 변했으면 그만큼 가족에도 가족의 일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변해도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그런 실체로서의 가족, 남녀가 각기 맡아야 할 역할 분담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삼식이의 비애, 그 끝은 어디일까?

가족 = 보금자리?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거칠고 삭막한 사회로부터의 안식처, 지친 몸과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보금자리” 와 같은 전통적인 가족의 이미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만큼 어필될 수 있는 말일까? 신문, TV, 라디오 할 것 없이 온갖 미디어들은 가족이 아닌 가족의 모습을 보도한다. 뺏고 때리고 내쫒는 노인 학대부터 술 마시고 발로 차고 때려 부수는 아동 학대, 방임, 아내 구타에 이르기까지 온갖 폭력성이 난무하는 장소로서의 가족의 모습들이 방송꺼리로 이용된다.
<바람난 가족>, <결혼은 미친 짓이다>, 우리 삶을 이루어 가는 것들 중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이런 단어들에 해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수식어가 붙고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가족이나 결혼을 전통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결혼, 가족, 출산, 양육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가족제도는 서서히 물러나고, 결혼도 출산도 혈연 가족을 이루는 것도 모두 오랫동안 숙고해야 할 것으로 되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을 꾸리는 일은 이제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꼼꼼히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하고 타협하고 협상을 거쳐야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제 “애? 너나 많이 낳으세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면서,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이 되기도 하고, 결혼 자체를 회피하는 싱글족이 되기도 한다.
결혼을 선택하더라도 결혼을 일생일대의 계획이며 그래서 한 번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는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검은 머리 파뿌리’ 라든가 ‘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산다’는 등의 말들의 실효성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황혼 이혼’ 이란 말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혼 보험이 필요한 일본 사회
가족 사회학자인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는 현대 사회의 이런 세태 속에서 이미 엄청나게 변해버린 일본 가족의 모습을 진단하고 있다. ‘이젠 가족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는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민법개정안들이, 변화한 일본 가족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이해한다. 페미니즘의 영향, 애정의 고도성장에 대한 경제의 저성장이 가져 온 이혼률 증가 등은 가족 내에서의 구조 조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대국이 된 일본, 거기에는 일본 특유의 가족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국가와 기업의 질서를 보강하는 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부부 중심의 가족을 이루고, 이렇게 성별 분업의 형태를 이룬 부부 중심의 가족이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경제가 저성장기로 접어든 현재, 일본에서는 가족 구성원은 물론 가족의 의미들이 점점 변화되어 간다. 결혼하지 않는 싱글이 늘어나고 별거 5년이면 이혼 사유가 정당화될 수 있고 폭력이나 외도 등의 한 쪽 배우자의 잘못이 아니라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진 것만으로 이혼 사유가 되는 사회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는 다소 엉뚱한 아이디어를 선보인다. 이혼 보험이 상품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보험이란 것이 어떤 사태로 인해 경제적 손실이 난 것에 대해 손해를 보상하는 것이라면, 이혼을 통해 손실이 난 경우에도 보험 상품이 성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야마다 교수가 궁리해 본 이혼 상품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혼한 여성은 그 동안 남편이 벌어들이던 급여를 더 이상 손에 넣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그것을 손실 이익으로 보고 이에 상응하는 보험금을 받는 것이다. 자녀나 남편의 경우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세태를 반영해보면 이것처럼 적절한 보험이 없을 듯싶다. 물론 야마다 교수는 이혼 보험이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라 전망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이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전제로 해도 보험금을 노린 위장결혼과 이혼 등의 보험사기 사건을 막을 수는 없고 보험회사에서 위장이혼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가족, 그것이 사라진 이후에는 무엇이 올까?
이미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게 된 가족이 붕괴되는 것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 해체, 이 말은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까지 가족을 둘러싸고 불안감과 공포감을 조성해왔던 말이다. 대가족이 붕괴되고 핵가족이 산출되는 시점에도 많은 사람들은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을 불안해했고 지금 다시 혈연 가족이 붕괴되어 가는 상황에 대해 초조해 한다.
<불량 가족>, <가족의 탄생>, 이런 드라마나 영화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이면 부모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그런 관계가 아닌 사람들의 관계가 자꾸 거론되고 있는가에서 오는 불편함이다. 그들은 남인데, 왜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묶을 수 있다고 하는가가, 이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불펴한 사람들이 갖는 생각이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 제목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지금 해체하려는 가족은 혈연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친밀성을 떠올려 보면 가족은 ‘친근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 이라 재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가족이란 단지 혈연관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친근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일컫는 개념이 될 것이다.
가족이 사라진 그 이후에 무엇이 올까? 그것은 아마도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아니라, 구조조정이 된, 다시 새롭게 정의된 ‘가족’일 것이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서 이루어진, 부부와 미혼자녀로 이루어진 형태 뿐만 아니라, 장애자 가족, 한 부모 가족, 동성애 가족 등을 모두 포함한 열린 의미의 ‘가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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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들, 가족과 결혼 2-② [4人4色 책읽기]

조주영 (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결혼, 꼭 해야 합니까?
언제부턴가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가 꺼려진다. “아직도 학교에 더 다녀야 하는 거니?”로 시작해서 “그래서 졸업은 언젠데?”로 이어지는 질문들. “논문을 써야 졸업을 하죠.” 우물쭈물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올해는 제발 그 질문 좀 안 했으면 했던 바로 그 질문이 날아온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데?”
그렇다. 앞서의 모든 질문들은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 전의 전초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른이 넘은 딸, 조카에게 어른들이 궁금했던 건 내가 어떤 공부를 어떤 관심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아니고, 결혼을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니다. 남들 다하는 결혼을 도대체 왜!!! 안 하고 있는 건지가 궁금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시집을 가도 벌써 갔을 나이인데…….” 라며 말끝을 흐릴 때,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꾹 삼켜낸 그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라고 하고 싶으셨겠지.
어른들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장성한 자식을 시집장가 보내는 것까지를 자신들의 의무로 여기고 계심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는 걸 요만큼도 상상하기 힘들이 때문이리라. 어른들의 질문 세례는 일단 논문부터 쓰고 결혼은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어물쩍 넘겼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결혼을 꼭 해야만 합니까? 나이 차면 결혼하는 게 정말 당연한 걸까요?” 물론 나는 독신주의자는 아니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은 갖고 있지만, 절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아니다. 하게 되면 하고, 안 하게 되면 뭐 그런대로 살자는 입장이랄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5∼29세 여성의 미혼율이 1975년에는 11.8%였으나 2005년에는 59.1%로 높아졌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결혼기피 심각. 적령기女 미혼율 60%”라는 타이틀로 보도가 되기도 했다.(2010년 7월 28일 연합뉴스 기사 참조) 기사에 따르면, 미혼자의 28.3%가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하니, 결혼에 대해 “하게 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닌가보다. 한편, 기사에 따르면,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미혼자는 46.4%라고 한다. 어쨌든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다면 미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미혼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이른 나이’, ‘교육을 더 받고 싶어서’, ‘자아 성취와 자기 개발을 위해’ 등 가치관과 관련된 이유가 54.9%로 가장 많았고, ‘소득이 적어서’, 또는 ‘결혼 비용이 마련되지 않아’, ‘실업이나 고용상태 불안’ 등 경제적 이유가 31.9%로 그다음이었다고 한다.
통계청의 ?인구통계연보?에 따르면, 2008년 평균 초혼 연령이 남자는 31.4세, 여자는 28.3세라고 한다. 1990년에는 평균 초혼 연령이 각각 27.8세, 24.8세였다고 하니, 근 20년 동안 초혼 연령이 꾸준히 상승한 셈이다. 20대 중 후반 여성의 미혼율의 급증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혼율의 급증, 초혼 연령의 상승은 저출산 문제로 이어진다. 이 기사는 “저출산의 원인은 교육기간과 취업준비기간이 늘어나는 데 따른 초혼 연령의 증가 등 만혼화와 이에 따른 자녀 출산시기 지연 때문으로 요약된다”며 “초혼연령을 낮추는 정책방안이 강구돼야 한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변용찬 선임연구위원의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결혼 문제는 국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옆 나라 일본의 상황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야마다 마사히로는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오늘날 일본 가족의 재구조화>에서 일본 가족 구조의 변화를 사회 구조의 변화, 특히 경제 변화와 연관지어 분석했다.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즉 가족 내 이혼, 미혼화, 저출산, 자녀 양육과 노인 보호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데, 그 양상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일본 가족 구조 문제에 비추어 우리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사회 구조, 특히 경제 구조가 변하면 그에 따라 가족 구조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야마다 마사히로의 주장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가족의 표준 모델인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은 전후 경제 부흥기에 알맞은 모델로, 경제 침체가 장기화 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경제 부흥기에 일본 기업은 연공서열-종신고용 제도를 고수했다. 따라서 남자들은 직장에서 성과가 낮다고 해도 해고될 염려가 없었고, 경력이 쌓이면 임금은 저절로 올라간다. 여자들은 결혼을 할 경우, 남편의 임금만으로도 중산층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밖에서 일하기보다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쪽을 택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샐러리맨-전업주부’를 이상적인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고도의 경제 성장 덕분에 그런 형태의 가족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표준 가족 모델은 흔들리게 된다. 우선 기업에서 연공서열-종신고용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실직할 경우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내들은 남편의 임금만으로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자녀들도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 혹은 더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달리 안정된 가족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표준 가족 모델을 유지하고자 할 경우, 여성의 경우에는 부모의 경제력이 높을수록, 남성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제력이 낮을수록 결혼하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직업이 있든 직업이 없든 부모와 같이 살 경우 중산층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기 때문에 굳이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 가족에 감돌고 있는 정체 분위기이 원인은 남편의 수입이 가족생활 수준을 결정한다는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이 뿌리 깊다는 점, 성인 자녀가 부모와 동거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보낸다는 현상에 있다. 원흉은 여성 차별적인 직장 환경과 성인 자녀를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 부모의 태도인 것이다.(228쪽)
부모와 동거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하는 성인 자녀들을 저자는 ‘기생적 싱글’이라고 부른다. 이 기생적 싱글들의 증가가 저출산의 원인이다. 즉 결혼한 여성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가임 여성 한 명당 출생률인 합계출생률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달라졌음에도 표준 가족 모델을 고수하는 것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기생적 싱글들의 결혼난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88만원 세대의 결혼, 가족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청년실업 몇 만 명,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뜻),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뜻), 88만원 세대……. IMF 이후 경기 침체 속에 유행처럼 번진 말들이다. 특히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2000년대 이후 사회에 진출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만큼의 안정적인 직장과 소득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은 부모로부터 풍족한 지원을 받으며 부모 세대가 받은 것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세대별 고등교육 이수 비율(전체 인구 중 고등교육 인구 비율)이 25~34세는 55.5%, 55~64세는 10.9%라고 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08년 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률은 99.9%, 99.7%로 집계됐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비율도 83.8%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 간 학력 격차는 크지만,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 간 학력 격차는 그리 크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이는 우리 부모들이 우리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 이상으로 지원을 해 주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상황이나 우리의 상황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실질 임금의 하락하면 중산층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한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차별, 가사와 출산?양육에 대한 책임과 부담은 여성으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더 쉽게 선택하게끔 한다. 여성 노동력은 일종의 상비군과도 같아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사회의 필요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실례로, 조금 멀리 떨어진 얘기일 수도 있지만, 60년대 초 미국의 상황을 보도록 하자.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은 다시 돌아와서 그동안 여자들이 다니고 있던 직장이나 대학교로 다시 복귀했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남녀 사이에 경쟁이 늘었고, 케케묵은 여성에 대한 반감이 되살아나 여자들이 직장을 구하거나 승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런 점이 확실히 여성들에게 다시 결혼과 가정으로 돌아가게 했다. (중략) 전시에는 여자들의 능력, 그들(남자들)과의 경쟁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전후에 여성들은 비록 정중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남자들에게서 철옹성 같은 정도의 적의를 받았다. 그러므로 여자들에게는 사랑을 하거나 사랑받는 것이 더 쉬웠고, 그러기 위해서 남자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변명도 쉽게 할 수 있었다.(베티 프리단, 김현우 옮김(2005), <여성의 신비>, 이매진 펴냄, 320~321쪽)
여성의 사회 진출이 페미니즘의 성과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의 상황은 60년대 초 미국의 상황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정중하지만 철옹성 같은 정도의 적의”가 암암리에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기가 호황이라 일자리가 넘쳐날 경우에는 그나마 덜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할 경우 경계 대상 1순위는 여성이다. 어느 분야든 여성이 부각될 경우 이슈가 된다. 공무원 시험에 여성 합격률이 남성 합격률보다 높다거나, 사법고시 고득점자 가운데 여성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거나, 초등학교 교사 중 여성의 비율이 높다거나 등등. 정당한 경쟁의 결과임에도 간호사나 유치원 교사 등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는 여성 비율의 증가는 매번 도마 위에 오른다. 상황이 이러하니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느니 차라리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리해보자. 6~70년대 경제 성장을 이끈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 세대는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풍족하게 자랐다. 200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경기 침체로 인해 우리 세대는 안정된 높은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다.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한 후에도 맞벌이를 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 불황은 역으로 여성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암암리에 부추긴다. 어찌어찌 결혼해서 아이를 낳더라도 부모가 해준 것만큼 내 자녀에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에라, 그냥 부모님 곁에서 될 수 있는 한 오래 살아보자. 결혼을 해도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아이는 낳지 말자.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새로운 가족의 탄생
야마다 마사히로는 직장에서의 성 차별을 없애는 것 못지않게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 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각각 이러이러해야 한다, 자녀들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보살펴야 한다, 바람직한 가족의 모습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등등 가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고 문제를 키우기보다, 개인의 감정을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관계로 가족이 구성될 때 오늘날 일본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가족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변하면 가족도 변한다.
동성애 커플이든, 이성애 커플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꼭 혈연관계로만 이루어질 필요도 없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는 미라(문소리 역)를 통해 가족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결정적 요소는 그 외양이나 틀이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애정과 친밀도임을 보여준다. 미라는 남동생이 부인이랍시고 데려 온 엄마뻘의 여자 무신(고두심 역), 무신을 찾아 온 여자 아이―심지어 이 아이는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딸이다.―과 어쩔 수 없이 동거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했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를 가족으로 인정하게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 것이다. 가족은 결혼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 지, 할 수 있을지, 할 수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미라처럼 가족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그 형태에 관계없이 가족으로 인정하는 날이 올까? 다음 명절에는 어른들께 말씀드려야겠다. 저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족은 만들고 싶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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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삶의 가족’으로 2-③ [4人4色 책읽기]

이현숙 (자유기고가)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추스르는 사람의 일관된 표정을 보면 서늘하게 압도당하고 만다. 최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도 그보다 몇 배 더 엄청난 자제력을 보여준 일본이 그런 유형이다. 반면, 그 와중에 ‘독도’발언을 하며 챙길 것은 끝까지 다 챙기는 그들을 보면, 외국인에게 ‘국화’와 ‘칼’을 양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질서정연하고 차분한 일본인에게 이유 없는 도심 살해의 광기가 빈번하게 번득이는 양면성은 왜 생겼을까? 의문에 대한 일말의 답을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그린비 펴냄)을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경제 성장과 맞물린 가족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적

부제 ‘오늘날 일본가족의 재구조화’는 저자가 강력히 주장하는 ‘가족 구조조정’의 목적이다. 저자가 맺음말에서 밝혔듯이 “현재의 ‘가족 양상’이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자유.공정성.효율성’이라는 관점에 비추어 보아 불합리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현대 일본의 가족 구조조정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대공황 시대에 케인스(Keynes,John Maynard, 1883-1946)가 경제영역에 적용했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자유에 의한 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가족의 새로운 양상 연구에 도입했다는 것이 저자의 고백이다.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의 사적인 조직에도 경제학 이론을 적용시켜 ‘자유.공정성.효율성’을 따져야 한다니, 얼핏 신자유주의의 덫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저자의 ‘가족 이데올로기’ 주장을 통해 나의 예단이 자본주의시대에 사는 소시민의 과민 반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나 적용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전형적인 가족의 이상 모델을 찾고자 했던 독자들의 섣부른 기대를 저버리면서도 끝까지 현실로 드러나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가족 사회학의 범주에서 다양하게 분석해나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저자의 의지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해 경직되어 있는 사회의 최소단위 ‘가족’이 이제는 개인의 자유와 공정한 법적용, 일방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는 효율성의 기준 위에서 재편성되고, 새롭게 구조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전후 일본 사회에 형성된 ‘표준가구모델’이 경제 성장의 굴곡과 산업화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기여했는가를 제시한다. ‘샐러리맨 남편과 전업주부 아내’의 전형적인 가족 구조가 고도경제성장기의 일본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샐러리맨 남편의 집중된 생산력과 노동력을 창출했고, 보장된 미래를 꿈꾸는 전업주부의 전폭적인 내조를 이끌어냄으로써 사회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가능케 했다. 이 시기에 결혼은 남녀 모두에게 삶의 질적인 향상과 안정을 보장해주는 것이었고, 연애결혼과 계획출산 등으로 ‘가정’의 내실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녀 모두에게 신분상승과도 같은 장밋빛 ‘가족 이데올로기’는 저성장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와 가족의 구조전환을 야기했고, 어두운 그늘과 후유증을 낳기에 이른다. 1973년 석유파동이후 전 세계적인 불황을 일본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유지하는 선에서 뚫고 나간다. 중년 남성의 고용을 보장하고, 수출증대를 꾀하며, 전업주부들이 시간제 취업을 하며 불황의 공백을 미온적으로 메워나가는 방식으로 타개해 나간 것이다. 이로 인해 연공 서열이 높은 기득권과 손해를 감수하는 젊은 세대가 공존하면서 ‘미혼화’와 ‘저출산’이라는 사회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IMF구조조정의 치명타를 맞으며 20세기 말을 휘청대며 겨우 지탱해온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차이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집집마다 자식 돌 반지까지 꺼내 놓게 한 국가적 위기감 조성과 실직 가장, 가정의 해체, 전업주부의 저임금 노동시장 진출,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적 직급 등장 등 가족과 국민 개개인의 파탄을 오랜 후유증으로 치러내야 했던 암담했던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평생직장 이란 개념은 그때 이미 사라져버렸고, 생계의 고통은 당시 20세기 말에 실직한 가장으로부터 취업난에 시달리는 21세기 자녀에게까지 이어지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 일본에 비해 한국은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끈끈한 관계로부터 훨씬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가족, 감정 표현의 자유와 생활이 보장되어야

저자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경제체제, 도덕성(가치관)의 지배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가족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 했는데도 ‘가족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억압이 어떻게 개인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법과 규범의 안팎에서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 일본 국회에 상정되지 못한 채 끝나 논란의 여지를 남긴 ‘결혼 및 이혼에 관한 민법개정안’은 1)선택적 부부 別性제 도입 2)결혼 최저 연령 만 16세->만 18세로 조정 3)여성 재혼 금지 기간 180일->100일로 조정 4)5년 이상 별거는 이혼으로 인정 5)혼외자녀의 법정 상속분 평등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부부 별성제 도입’과 ‘5년 이상 별거의 이혼 인정’부분이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부부 별성’을 인정하면 부부관계가 방종하게 되어 도덕성을 위협하고, 이혼이 증가할 것이며 결국 가족이 붕괴할 것이라는 반론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경제가 정체될수록 도덕성을 강조하여 역행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자유를 봉쇄하고 차별을 정당화한다며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또 이전의 가족 틀 안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던 ‘감정 표현의 자유화’가 ‘5년 이상 별거의 이혼 인정’으로 드러났음을 인식하고, ‘싫다’는 비효율적인 감정을 구조 조정하여 효율적인 가족으로 재편하는 것이 옳다고 책 서두에서 짚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귀결이기도 하지만 ‘가정 내 이혼’이라는 별거상태가 지속된 관계에서 사람을 좋아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부관계의 규제완화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느끼는 것’과 ‘느껴야만 하는 것’의 감정 사회학적 관점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혼하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싫어지면 안 된다’는 감정적 압력이 연애결혼 이데올로기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과 관습, 도덕에 묶여 이미 부부가 아닌 삶을 피상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다수 일본인의 불행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고자 하는 저자는 자본주의에 매몰된 현대의 남녀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제안한다.

“남녀 모두가 자립할 수 있는 상황, 즉 여성도 직업을 갖고 남성도 가사와 육아를 부담하는 사회적 환경으로 정비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 모두 경제적으로나 생활면에서 자립하게 된다면 ‘좋아 한다’ ‘싫어 한다’는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절대적으로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가족이데올로기 별거하라!

가족 불확실성 시대에 대처하는 결혼전략으로 ‘결혼 후에도 직업을 유지하라’, ‘친정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라’는 저자의 조언은 전업주부가 사라져가는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신 전업주부’는 거품경제도 끝났고, 좋은 일자리도 없으니 고생스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주는 남자만 찾는 일본 미혼여성들의 새로운 트렌드이다. 저자가 현대 일본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한 ‘미혼화’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특히 미혼여성이 부모와 함께 살며 독신생활을 즐기기 때문에 ‘미혼화’가 심각해지고 있고, 이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미혼여성을 붙잡아두고 있는 부모에게 있다고 집중 공격했다. 남녀평등의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해온 저자의 논점에서 본다면, 이 부분의 해석은 고생하기 싫어하는 철없는 미혼여성과 그들 부모의 안일함에 ‘미혼화’의 전적인 책임을 묻는 듯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혼남성은 개인주의와 소극적인 인간관계, 경제적 문제 등으로 적극적인 결혼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출산’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심각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들은 매우 피상적이고 단견에 머물러 있다. 아이를 낳도록 아무리 부추겨봐야 근본적인 육아환경과 직장 내 성차별적 환경이 개선되지 않으면 맞벌이부부, 특히 여성은 절대 출산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저출산의 열쇠는 ‘여성노동의 정당한 평가와 처우’에 있다는 저자의 혜안은 이런 점에서 탁월하다.

결혼 후 맞벌이로 힘겹게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육아 스트레스와 고용의 불안까지 떠안아야 한다면 어떤 미혼여성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독신을 포기하고 애써 결혼을 선택하겠는가? 미혼여성의 미혼화가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면 미혼남성의 미혼화는 현실의 악조건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농어촌 미혼남성들만 결혼 기피 대상이 되어 노총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의해 ‘결혼 시장’에서 낙오되는 도시 미혼남성들도 급증하고 있는 시대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남자는 월등한 경제력을, 여자는 미모와 전문 직업을 갖추어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일본 미혼여성의 ‘미혼화’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의 혜택을 입어 경제력을 갖춘 부모들이 자녀를 독립시키지 않고, 사치스런 개인의 삶을 향유하게 한 데 중대한 원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를 점하는 서민층에 해당되는 해석은 아니라고 본다. 백수인 20대 자녀와 50대인 실직한 남편, 비정규직 아내로 이루어진 서민 가족이 고통스럽게 생계를 이어나가는 한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오히려 빈부의 양극화가 극명한 한국에서는 부유층 자녀들끼리의 중매결혼, 결혼 정보업체를 통한 수준(경제)별 결혼이 성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령화’의 문제도 일방적으로 여성들이 고령자의 ‘개호(간병)’를 전담해온 사회적, 관습적 행태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와 다르게 한국의 고령화는 ‘독거노인’과 ‘가족의 해체’ ‘의료시스템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 전반적으로 부동산 경기는 침체하고, 도심의 전세난은 가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 간병사업과 고급실버타운은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자본주의와 가족 이데올로기, 빈부의 양극화를 첨예하게 드러내는 거울이 아닌가 싶다.

 

자유와 삶이 존중되는 가족의 희망을 품다

<윤리 21>에서 가라타니 고진(Karatani Kojin, 1941~ )은 고베 시 중학생 사건을 다루면서 ‘사회’라는 강력한 힘의 유래를 ‘마을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 사회 구성원은 고립을 두려워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일 뿐, 중심은 ‘사회’이고 ‘자기’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없는 구성체에서 인간은 과연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고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기본 단위로 존재해 온 ‘우리가 알던 가족’은 과연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가?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불편함의 본질을 모른 채 동거해온 가족이 비로소 구조적인 해체 작업을 시도하고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자기’를 망각하고 가족을 위한 삶을 구성해온 전업주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도구화, 파편화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을 가족의 보호막에서조차 밀어내 버린다면 미래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일방의 희생으로 연명하는 가족의 구조에서 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삶이 존중되는 이해와 협력의 구조로 재편된다면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오래된 미래와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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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사회를 보는 프리즘, 가족 2-④ [4人4色 책읽기]

주승일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자)

가족의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다. 혼자 생활하는 싱글과 결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명절 때나 되어야 가족이 간신히 한자리에 모이면 화제는 단연 ‘결혼’이다. 결혼적령기는 해가 갈수록 늦춰지고 있고, 사회의 만혼화?미혼화 역시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렇다고 결혼 생활이 솔로 생활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솔천커지’(솔로 천국, 커플 지옥)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있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미친 소리가 아니다. ‘이혼’은 TV 등 대중매체의 단골손님 아니던가. 이제 가족은 영원한 동반자이고 가정은 안정된 공간이라는 생각은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원제와 같이 ‘가족의 구조조정’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일본의 가족은 어디로 가는가?

이런 가족의 위기는 우리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도서출판 그린비 펴냄)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 책은 전후(戰後)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정착된 ‘남편-샐러리맨’과 ‘아내-전업주부’를 골격으로 하는 일본의 핵가족 구조가 경제 거품이 꺼진 후 해체되어 가는 모습을 분석해 주고 있다. 우리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와 함께 이 책을 기획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가족 구조 변화를 살펴보고, 이러한 현상을 우리의 시각에서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지 우리의 가족 구조와 비교하며 분석할 수 있는 논점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큰 틀에서 보자면 동아시아의 각종 문화 현상, 역사적 문제를 공유하고 서로 간에 교류를 더 넓히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일본의 가족은 1990년대 이후 급격한 노령화와 이혼율의 증가, 미혼화, 저출산 등에 시달리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부모를 모시는 걸 점점 꺼려하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관계 또한 꺼려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배우자 외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기회도 늘고 있고, 이에 발맞추어 싫어진 배우자와 이혼하는 건수도 늘고 있다. 경제적 욕구로 결혼 상태를 마지못해 유지하는 ‘가정 내 이혼’ 빈도까지 고려하면 부부관계부터가 위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의 성립을 가져오는 결혼을 보자면, 그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평균 초혼연령 추이를 보면 전후 이래 점차 상승해 90년대 말에는 남성 28.6세, 여성 26.7세에 다다랐다. 이 책은 결혼이 늦춰지는 이유로 저성장으로 인해 젊은 세대의 경제력이 부모 세대만 못하게 되어 경제력 높은 부모를 가진 여성 및 경제력 낮은 남성은 결혼하기 어렵게 된 점, 그리고 결혼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지게 되어 인기 있는 사람은 결혼 시기를 늦추고 인기 없는 사람은 상대를 만나기 어려운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경제력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령화를 시스템을 통해 해소하지 못하고 여전히 가정 내 부양 책임에 의존한다는 점도 결혼 기피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한다.
결혼 기피와 맞물린 저출산의 문제 역시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다. 대졸 미혼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 심리적 동인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철이 들 때까지는 일을 쉬고, 아이가 크면 다시 일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아이 셋을 키우려면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쪼들려요.” “내 아이니까 직접 키우고 싶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생활비 때문에 가능하다면 계속 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은 경제력이 윗세대만 못하기 때문에 취업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자연히 아이를 많이(혹은 아예)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다.
현대 일본사회의 기본단위가 되어 주었던 ‘가족’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렇게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이 위기의 주범으로 이 책은 ‘경제의 저성장’을 들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저성장’으로 포괄하기보다는 거시경제와 사회구조가 맞물린 문제라는 점, 특히 경제와 고용의 문제가 부각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핵심은 경제와 고용의 문제

일본에서 경제 불황의 여파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있다. 그것은 1994년경에 있었던 일본의 유명 항공사가 스튜어디스를 계약직으로 채용한 사건이다. 스튜어디스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해야 가능한 직업이었기에 젊은 여성들에게는 동경하는 직업 중 하나였고, 스튜어디스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분 상승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업에서조차 급여와 대우가 한참이나 열악한 비정규직을 둔 것이니 일본인들의 충격이 컸던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크게 늘면서 ‘종신고용, 연공서열’ 등 일본 노동계의 상징이 무너진 것이다. 위 사건과 같은 직장 내 하청(사내하도급), 그리고 하청에 하청을 주는 등의 악성 고용 방식이 나타나 이른바 ‘유연하게’ 노동자들을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노동자들 간에도 위계가 뚜렷이 구분되어 갈등의 불씨를 안게 되었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할 것 없이 고용 불안, 심하면 실업 공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고, 비정규직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재계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평생직장 개념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청년들 역시 높아진 취업 장벽에 가로막힌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1996년 이래 취직 빙하기의 파도가 바뀌지 않고 취직이 정해지지 않아서 우왕좌왕하는 학생, 취직 재수를 하겠다고 결의하는 학생 등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젊은 여성들이 ‘취집’(전업주부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경제력 있는 젊은 남성들이 줄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쉬운 길이 아니다. 취업의 길이 어렵다 보니 일본에서는 기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뚜렷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프리터’(free+arbeiter)나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적 싱글’(parasite single), 그리고 (직접적 원인은 아닐 수 있지만) 사회생활을 회피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 등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인간형이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 큰 문제로 부각될 정도로 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문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은 이미 전체 노동자 중 1/3 이상(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약 35%)을 차지할 정도인데 이는 일본과 비슷한 수치이며(2010년에 34%), ‘88만원 세대’로 상징되는 청년들의 실업 문제는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위해, 불법파견과 무단해고(정규직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훨씬 자르기 쉬운 상황이다)에 항의하기 위해 회사에서,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이런 힘조차도 없는 이들은 (‘비정규직 보호법’에 보호받기는커녕) 해마다 자리를 옮겨야 하고,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면서 고강도 노동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들은 취직을 위한 일(공부)에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면서도 취업이라는 바늘구멍 뚫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청년들은 경쟁사회에 내몰려 있고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식’들만이 좋은 위치로 등극하고 있다. 빈부의 격차만큼이나 빈부의 되물림이 심화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지나친 경쟁의 피로감에 지친 청년 세대에서 일본과 마찬가지의 기형적 생활인이 탄생하여 사회문제로 부각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따로 또 같이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을 꿈꾸며

가족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이다. 역으로, 사회 문제가 가족의 위기를 불러 왔다. 기존 가족 구조의 붕괴는 구성원들 개인의 태도와 심리에 국한할 수 없다. 이 책은 주로 ‘불황’을 문제 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회 기저에 흐르는 구조적 모순이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지은이 야마다 마사히로는 다른 책에서 일본의 지나친 경쟁과 그 속에서 패배한 이들이 다시 일어서기 힘든 구조적 모순, 다른 꿈조차 꾸기 힘든 하류인을 양산하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연구하는 가족사회학은 ‘가족’만큼이나 ‘사회’ 전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제안하는 사회학적 처방은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가짐이나 상대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을 포함하면서도 근대사회가 지향하는 합리성과 효율성, 제도적 정비와 방안을 강조하고 있다. 성별 역할의 분담이나 풍족한 생활에 대한 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한 애정으로 결합하고, 직장이나 자원봉사, 취미 등 좋아하는 영역에서 각자의 꿈을 추구해야 하고”, 자녀에게는 압력을 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는 생활의 보장, 노동력의 재생산, 가족의 경제생활 보장, 성차별적인 노동환경 개선, 약자 보호, 여성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 개선 등의 관점에 기반하여 제도적인 근본 대책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은 이래야 한다’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삶의 보람을 느끼며 ‘더 좋은 가족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끝을 맺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가족을 거시적 안목과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원리적인 수준이지만) 대안을 제시한 사회학 저서이다. 이제 이를 이어받아 가족과 연동된 질문들(예컨대 고용과 세대와 관련한 문제들)을 첨예하게 벼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자체를 좀 다른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함께 사는 사람들’이나 ‘공동체’의 관점에서, 혹은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라는 식구(食口)의 관점에서, 아직은 생소하지만, 가능한 가족의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맹목성,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폭력, 장애인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같은 문제가 기존 가족 관념의 그림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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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권력의 시선에서 자유로울까?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장윤성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매일 두 번 이상 엘리베이터를 타며 오르내린다. 엘리베이터를 낯선 이와 함께 타면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곤란하다. 아마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와 상대방은 각각 다른 곳을 응시하며 한 평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을 어색한 침묵에 잠기게 한다. 상대방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린 후 비로서 내 시선은 자유로워진다.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고치거나 얼굴을 살핀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없기 때문에 내 시선도 행동도 자유롭다. 내가 아닌 남이 나를 쳐다보는 것은 어색하다. 심지어 불쾌하기도 하다. 작가는 그 이유를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당혹감과 모욕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남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의사가 환자의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생물학적 양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이다.

이런 시선의 관계에는 지배 관계가 따른다. 바라보는 자는 시선이고 바라보여 지는 자는 눈이다. 바라보는 자의 시선은 바라보여지는 자의 눈을 지배한다.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타인은 내게 지옥이 된다. 그래서 뒷모습을 보일 때 더 안절부절 해진다.

면접을 보게 되는 상황도 한가지이다. 면접관의 객관적인 냉혹한 시선 안에서 나는 하나 둘 옷이 벗겨지는 듯하다. 면접관은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지만 나는 두려움에 긴장한다. 면접관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면접관의 눈을 응시하며 말해야 되는 상황에 식은땀을 흘린다. 면접관의 바라보는 시선과 나의 바라보는 눈 사이에 지배와 종속관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시선에도 권력은 존재한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잔인한 처형은 공개된 처형이었다. 17세기말 아비뇽의 판례를 보면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죄수를 처형했다. 형리는 처형된 죄수의 몸을 내장부터 하나하나 꺼내 분해한다. 시체에 가혹행위를 하는 까닭은 군주가 가진 힘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지배자인 군주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처벌은 잔혹했으며 이 처벌을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보여줬다. 공개처형은 이 장면을 바라보는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여 군주의 권력을 굳건하게 만드는 통치수단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공개처형은 사라지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18세기부터 19세기 개혁론자들은 공개처형이 민중을 위협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은 표면적 이유이다. 공개처형을 보면서 민중은 처벌받는 사람과 동질감을 느꼈다. 민중은 죄수가 당하는 잔인한 처형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감에서 저항의지가 시작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후 로마는 크리스트교를 핍박했다.

크리스트교 신자들을 원형 경기장에 넣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 했다. 끔찍하고 처연한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죽음에 로마시민 중 일부는 크리스트교인이 되기도 했다. 구경거리가 된 죽음 앞에 크리스트교인들의 종교적 신념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로마는 크리스트교를 공인했다. 공개처형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해 폐지된 것이다. 푸코는 공개처형제도의 폐지가 죄수에 대한 인권신장이 아니라 한계에 부딪친 권력 기술의 전환이라고 했다.

국가는 권력유지를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감시’이다. 공개된 처형 대신 폐쇄된 공간 속에서 죄수들을 몰아넣고 엄격한 감시와 꼼꼼한 일과표로 통제한다. 1797년부터 죄수들은 네 부류로 나뉘었다. 네가지 부류로 나눈 기준은 죄수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감시되는 개인의 잠재적인 위험이 근거였다. 죄수들은 일과표에 따라 식사, 노동, 운동, 학습 등을 철저히 수행한다. 이 규범의 수행여부는 감시를 통해 확인한다.

죄수들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 규율적 권력이다. 규율적 권력은 공개처형에서 보여준 과시적 권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권력이다. 과시적 권력은 민중들에게 저항의지를 심어주기도 한다. 규율적 권력은 저항 의지 자체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규율적 권력은 민중이 스스로 권력에 복종하도록 한다. 죄수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권력에 순종하는 인간이 된다.

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우리는 많은 규율에 시달린다. 내가 경험한 규율중 가장 심각했던 규율은 중, 고등학교 시절 두발 단속이었다. 용모단정이라는 미명하에 머리카락 길이는 귀밑 5cm로 정해졌다. 선생님들은 자를 들고 다니시며 5cm가 넘는 머리카락을 가위로 무자비하게 자르셨다. 싹둑 잘려나가는 내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내 의지도 함께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군대에서 받는 훈련들로 ‘극기’를 하여 강한 남자로 개선된다고 한다.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우리는 군에서 받는 반복되는 훈련들로 ‘순종’하는 인간으로 개량되어 간다.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 경제력을 가진 재벌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도 종종 군대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복종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힘든 훈련을 통해 순종하는 인간으로 개량할 필요가 없다. 순종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규율적 권력은 감시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감시는 바로 시선에서 나온다.

나는 감시당하고 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은 완벽한 감시 장치, ‘판옵티콘’을 구상한다.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판옵티콘’은 하나의 시선만으로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감옥건물이다. 건축가도 아닌 정치 사상가였던 벤담이 감옥 건축을 구상한 까닭은 감옥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실험공간이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의 원리는 시선의 불균형,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반지모양의 원형건물 안 중앙의 탑에는 감시인을 둔다. 중앙 탑은 빛이 차단되어 수감자는 감시인을 확인하지 못한다. 반면 수감자의 독방에는 항상 빛이 통과되게 한다. 이 빛은 감시자의 시선이 죄수들을 더 잘 파악하게 만들어준다.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의 원리인 시선의 불균형, 비대칭성은 오늘날 경찰서 심문실에서 이용되고 있다. 용의자가 있는 심문실은 거울처럼 보이는 창이 있다. 용의자는 그 창을 통해 다른 방에 있는 검사와 경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검사와 경관은 그 창을 통해 용의자를 관찰한다. 판옵티콘의 죄수들이나 경찰서 심문실의 용의자는 감시인을 확인하지 못한다.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식하고 있다. 이 시선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제약이 따른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구상으로만 끝나버린 채 건축되지 못했다. 판옵티콘 이라는 건물은 존재하지 않으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변형된 판옵티콘들이 존재한다. 그 변형된 판옵티콘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감시하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들은 시험으로 학습능력을 감시당하고 교사들은 교원평가제로 교수능력을 감시당한다. 소비자들은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하면서 기업에게 소비행태를 감시받는다. 보유율 90%가 넘는 휴대폰도 훌륭한 감시도구이다. 휴대전화 통화기록으로 감시당하고 GPS와 결합하여 위치도 추적당한다. 나의 언행이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로 찍히기도 한다.

인터넷 상에서 회원가입을 하면서도 감시받는다. 내가 기록한 구체적 신상정보가 유출되어 불이익도 받는다. 건강보험제도로 내 질병의 사항들이 보험회사 등에 의해 감시받는다. 나는 기억조차 못하는 내 질병을 보험회사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곳곳의 폐쇄회로 TV는 우리를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구실로 유용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 감시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울지 알 수 없다. 행정안전부는 2013년부터 주민등록증에 IC칩을 내장한 전자주민증으로 변경하겠다고 한다.

정부가 전자주민증이 필요하다고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응급치료 상황시 필요한 혈액형 정보를 넣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는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응급상황시라도 수혈을 하기 전 혈액형검사는 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알려준 혈액형이나 주민증에 기재된 혈액형으로 수혈하는 의사는 없다. 그대로 수혈하기에는 위험성이 크다는 것은 의사라면 숙지하고 있는 기본 의학상식이다. 정부가 근거없는 이유를 내세워 국민을 기만하면서까지 전자주민증으로 변경하려는 목적은 감시이다. 좀 더 효율적으로 국민을 감시하려는 것이다.

나는 트루먼이다

십여 년 전에 섬뜩한 영화를 관람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이다. 트루먼 쇼는 트루먼이라는 남자의 일상을 24시간 숨겨진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전 세계에 내 보내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이 트루먼 쇼에 열광한다. 평범한 남자의 일상생활에 푹 빠진 이유는 엿보기의 심리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사생활을 엿보며 쾌감을 느낀다. 실제로 트루먼 쇼 같은 인간의 엿보기 심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장르로 방영되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이혼위기에 처한 여러 쌍의 부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전개되는 내용을 시청자들도 대충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하는 이유는 가상이 아닌 실제 부부생활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먼 쇼를 관람한 후 다른 사람을 내가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나도 엿볼 수 있다는 확연한 진실을 깨닫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금인출기 앞에서, 주차장에서 나는 트루먼이다. 어디를 가든지 카메라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나는 트루먼처럼 나를 촬영하는 폐쇄회로 TV를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폐쇄회로 TV가 나를 촬영하고 있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의식의 세계는 그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다. 내 의식은 나를 감시하는 시선에 길들여져 있어서 편안하게 익숙해졌다. 자연스러운 그 익숙함은 감시받는 시선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지니지 못하게 한다. 설령 그 의지를 갖게 되더라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섬을 탈출한 트루먼은 과연 시선에서 탈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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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둘째 글로서 <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