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유로 존 떠나라!” 칸트의 대답은…[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 임마누엘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박지용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유럽 재정 위기 속 민족과 민중

“그리스는 유로 존을 떠나라!” 유럽 선진국의 상당수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외치고 싶겠지만 당당하게 소리 내어 외치지는 않는다. 축적된 세계의 부를 최전선에서 누려오면서, 스스로 계몽된 시민이라 생각하는 자의식과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내심 그리스가 그냥 알아서 유로 존에서 나가줬으면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독일에서 계속 미루어 왔던 유럽안정화기금(ESM)이 헌법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합헌이라는 결정이 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정 지원에 대한 독일 국내 정치의 논의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충분히 알려져 있다. 재정 지원을 둘러싸고 진행된 독일의 국내 정치 상황은 아무래도 기독교민주당(CDU)과 자유당(FDP)을 위시한 보수 정당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은 슈뢰더 집권 이후 줄곧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해왔다. 그런 와중에 자유당(FDP)은 시장과 정치가 분리되어야 하며, 금융 시장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이 재정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피력해왔다. 재정 위기를 둘러싸고 이렇게 정치적인 입장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다시 유로화 통합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복고주의 입장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독일과 프랑스에서 절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정치적으로는 극우주의가 득세할 수 있는 형세인 것이다. 그리스에서 극우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작금의 국가 부도 위기의 책임이 선진 유럽 국가들에 있다는 책임 전가 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유럽 재정 위기는 단지 경제 문제를 넘어서 정치의 위기를 낳을 소지가 산재해 있다.

정치와 경제가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은 “유로화가 망하면 유럽이 망한다”고 밝힘으로써 유로 존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유로화를 살리는 것이 유럽을 살리는 길인가? 유럽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유럽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화폐 통합과 유럽의 공동체

최근 독일 ZDF 대담 프로그램에서 사회민주당(SPD)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일의 진정한 정치인이라 추앙받는 헬무트 슈미트는 유럽 위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간명하게 밝혔다. 방송 내내 그는 그에게만 허용된 담배를 물고 힘주어 말했다. “독일이 유로의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이유는 역사적인 책임에 기인한다.”

독일이 홀로코스트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이 떠안아야 할 특별한 역사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슈미트가 언급한 이 대담한 발언은 왜 독일인들이 그에게 큰 존경심을 보이는가를 알게 한다. 게다가 방청객으로 참석한 많은 청년들에게 “너희 할아버지의 일에 너희들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교훈조로 훈계했고, 청년들도 현자의 지혜를 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인들은 그들의 잘못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어 현명해진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슈미트는 궁극적으로 “유럽이 지향해야 할 미래의 비전을 구체적인 정치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 보다 높은 유럽의 진보”라 말했지만,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정치적 과제가 되기 어렵다. 지금 상황에서는 눈앞에 닥친 발등의 불을 끌 응급처치를 찾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 왜 유럽은 화폐 통합을 시도했는가? 슈미트도 지적하고 있는 바, 유럽의 선택은 규모의 경제학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달러화의 위력과 급성장 일변도의 위안화, 이에 대한 대항마로서 유럽은 뭉쳐서 유로화로 통합함으로써 몸집을 키우려는 결정을 내렸다. 이념적으로 유럽 통합은 과거보다 진일보한 지평의 자유를 선택했지만, 실상은 그저 경제 통합을 통한 몸집 부풀리기가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만약 유럽의 통합이 그저 화폐 통합만을 위한 것이고 또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이 형세는 그야말로 기괴한 모양이 된다. 화폐는 단일한 경제 체제의 몸을 관통하는 혈액과 같은 것인데, 작금의 유럽 통합은 한 몸에 정치체의 머리가 여럿 달린 메두사가 된 것이다. 머리가 여럿이니 몇 개가 잘린다 해도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시키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린 머리는 자신을 자른 머리를 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이 머리들을 안정시킬 기제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의 위기는 곧 정치의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유럽 스스로의 자율적인 자기 결정, 다시 말해 정치적인 선택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유럽은 경제 통합만을 주요 의제로 고려한 채 통합을 정치적으로 선택했을 뿐 경제 통합이 파생시킬 정치적인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급한 불이 어떻게 꺼질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향후 유럽이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정치적인 고민이 가중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유럽이 앞으로 어떤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하는지를 모색할 때, 칸트의 정치사상은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유럽의 미래와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지구 반대편 변방의 한 철학자가 주제넘게 세계의 중심 유럽에 대해, 그것도 유럽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 사건에 대해 견해를 가진 사람은 세계 시민이다. 그 사건이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나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자유를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라 했다.

칸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공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기가 발휘되는 데에는 분노의 감정이 결부된다. 나의 일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한 사정에 분노하는 것이 바로 학자(배운 사람)로서 간주되는 세계 시민의 용기인 것이다.

칸트는 그 이전에는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던 타인의 부당함에 대해 분노했다.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이 감내해야 했던 부당함에 대해, 칸트가 보여준 분노는 배운 사람에게 요구된 용기라는 미덕이다. 칸트는 당시 가까운 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해서나 대서양 건너 미국 독립에 대해 세계 시민적 견지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1795년 출간된 칸트의 저작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는 정치적 주제를 담고 있고 있으며, 평화에 대한 철학자의 관점이 개진되어 있다. 우선, 칸트의 정치철학은 근대 자연법 사상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된다. 홉스, 로크, 루소로 이어지는 계약론적인 전통은 칸트 정치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 저작에서 드러나는 칸트만의 차별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임마누엘 칸트 지음, 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칸트는 홉스가 제안한 ‘자연 상태로부터 계약을 통한 사회 상태’라는 발상을 수용하지만, 홉스와 달리 평화가 법적으로 강제된 안정을 통해 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칸트에 있어서 정치란 ‘실행하는 법학’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칸트의 이해 방식에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가령 시민 사회 혹은 경제적 영역(자본주의와 시장)을 정치적인 고려 대상으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궁극적으로 정치의 의미와 역할을 도덕 철학의 협소한 영역으로 제한했다는 비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정치의 철학적인 원리를 보편적으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응일 수 있다. 홉스가 제안한 평화 상태는 국가 내 내전을 강제하는 모델인데 반해, 칸트는 궁극적으로 더 넓은 차원에서 다시 말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국가들 간의 평화 상태 즉 국제법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저작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더라도, 프로이센이 프랑스 혁명 정부를 인정하고 평화 조약을 맺은 바젤 조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들 간의 전쟁은 전쟁 시기 중에서라도 잠정적으로 전쟁 이후에 체결될 평화를 염두에 두고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는 실제적인 경험으로부터는 입증할 수 없는 이념적인 것이다. 곧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흥망성쇠, 전쟁과 평화가 교차된 것이므로 전쟁이 전혀 없는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이념적인 수준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칸트가 그려본 영원한 평화를 위한 최소 조건은 모든 나라들이 공화적인 법적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환대’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는 세계 시민 사회의 철학자로 격상되고 있다. 국가들 상호 간에 전쟁이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시민권은 서로 간에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인 원칙을 넘어,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두렵고 이질적인 이방인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제를 담는 적극적인 원칙이다.

역으로는 뿌리 깊은 공동체에 접근할 때, 스스로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칸트가 말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것이다. 이 권리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위해 모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것 없이는 평화도 달성될 수 없다. 이 권리는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손님으로 대우받을 것을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으며 그저 상호 간의 방문을 허용하는 정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업적인 교류를 위해 바다 건너 희소 자원을 교류하려고 방문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방문하려 할 것이다. 육상 생물인 인간이 지구 위에 발붙일 땅을 가질 때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경제적 기반이 붕괴 직전인 그리스에서 많은 사람들은 삶을 찾아 자신이 발 딛을 땅을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더 안정된 나라에서 찾을 것이다.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네오 나치는 평화의 적이며, 인류와 인간성의 적이다. 그들을 기꺼이 환영할 마음과 여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지성이자 존경받는 정치인 헬무트는 과거의 독일의 교훈을 통해서 미래의 독일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서 유럽의 미래, 평화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무능해서 실업자? 넌 유능해서 사장이니?[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의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사회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있다. 그리고 그 관심은 자기의 이익과 관계가 있다. 경제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가깝게는 생존의 문제 때문이고, 형편이 좋은 사람은 치부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고, 대다수 소상인은 경제가 잘 되어야 자기 수입도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정치, 경제 엘리트를 제외하고 일반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직업, 일자리이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만 사람이고, 사람처럼 행세할 수 있다. 일종의 예언서(!)인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이영호 옮김, 민음사 펴냄)은 서구 서점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프킨에 따르면 미래 세계에서는 노동이 없어지고 전자 통신 서비스가 종래의 노동을 담당하니, 그곳에서 일자리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종말이라는 개념은 ‘노동의 유연성’, 즉 노동자의 안정된 생활을 저해하는 해고, 비정규직 문제를 방기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 지음, 김교신 옮김, 동문선 펴냄)의 저자들은 노동의 종말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공화국(프랑스)의 가치가 노동하는 인간에 의해 그 토대를 놓았으니, 새로운 시대의 구상도 여전히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들을 위해 준비하기를 호소하고 있다.

▲(도미니크 슈나페르·필리프 프티 지음, 김교신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저자들에게 자유주의 국가나 복지 국가 간의 단절이나 불연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노동의 사회를 재고하고 시민의 유대를 다시 세워야 한다면 적어도 ‘노동의 종말’의 형식이 아니다. 죽은 것은 노동이 아니다. 다만 산업이 만들어준 일자리가 기술 혁명에 저항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공화국은 지속적인 창조 속에서 노동의 구체적인 형태와 조건들을 갱신해야 한다. 노동을 재조직하고 노동 시간을 줄이고 대인 서비스 분야를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 노동의 배척에 맞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시 노동이다.

노동 문제 해결이 공화국의 가치에 근거할 때, 저자들의 주장은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도 연관된다. 그들의 이야기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거나 우리의 상황과 다르다고, 또는 저자들이 책을 만들면서 대담 형식을 취함으로써 주제가 집중되지 못했다 해서 관심을 멈추지는 말자.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면, 더 나은 사회를 계획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노동할 권리

인간 노동은 자본주의 시민 사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문제에서 다시 해답의 기초가 된다. 근대적 노동의 탄생과 함께 시민 사회가 탄생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시민 사회, 자유 부르주아 사회는 노동의 발달과 함께 탄생하였다. 따라서 사회는 노동에 빚지고 있거나 노동의 자식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노동 문제 역시 노동의 전사와 시민 사회의 전사를 염두에 두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이때 분배와 복지의 문제의 경우, 성공한 경제 엘리트들의 비뚤어진 주장을 극복해야 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노동의 종말이라는 표현은 터무니없다. 그것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는 의미라거나, 일하기를 원치 않는다거나, 일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라면, 현실은 그 반대임을 입증한다. 상징적으로 보면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 그리고 미국의 독립과 더불어 탄생한 근대 사회는 개인으로서의 시민과 생산자라는 이중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노동의 지위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면 생산적인 노동과 시민권의 관계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근대 시민은 노동을 함으로써 그 존엄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와 서비스의 생산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 속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우리의 생활 방식, 사회적 지위와 부부구성하는 개인들 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등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관계를 던져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해보려는 노력을 기피하게 만든다.

종말을 기술 혁명의 덕분으로 보면서 노동의 종말을 찬양하는 자들은 확인된 사실과 규범을 혼동한다. 확실히 오늘날에는 전보다 적은 시간을 일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실로부터 노동이 더 이상 규범이 아니라거나 가치를 잃었다거나 공동생활을 조직하는 기능을 잃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

노동은 여전히 노동하는 이들에게나 직장을 잃은 이들에게나 똑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은 물질생활을 보장하고, 우리를 사회라는 시간과 공간에 연결시키면서 조직해 주는 수단이다. 직업과 관계된 노동 시간은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그 의미를 부여해 준다. 한 세기마다 발생하는 노동 시간의 감소가 규범의 약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일할 준비가 된 젊은이들 또한 일자리, 무엇보다도 진정한 일자리를 원한다.

오늘날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기술 발전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기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법과 목적의 변증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기술은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인간을 소외시키기도 한다. 기술은 수단으로 남아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발전시키며 인간은 기술을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술이 강제 수용소를 만들 수도 있다. 기계 그 자체는 현실에 적용된 지능의 고도의 집약을 의미하므로,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목적 그 자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기계의 상용은 정치와 도덕의 감독 하에 있어야 한다.

저자들은 복지 국가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유에 대한 권리와 신뢰에 대한 권리를 보증할 것을 모색한다. 과거에 복지 국가는 경제 발전, 완전 고용 그리고 시민들의 존엄성의 원천을 구성해 온 임금 제도의 확산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재정의 위기는 사회적 위기를 초래한다. 적자나 실업으로 인해 분담금을 내는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보상 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울타리 안에 존재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될 위기에 처해 있다.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 사회 보장 제도는 모든 구성원에게 이롭도록 구성해야 하고 자금 역시 효과적으로 지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공동 세상에 대한 소속감으로 이해되는 공민 정신의 재건 없이는 연대적이고 구세주적인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민적 차원에 호소할 때, 공통의 가치관에 의거할 때에만 복지 국가의 존재와 그 가치관이 약자들에 대한 권리 양도를 정당화하게 된다.

엘리트와 시민 사이의 대립, 또는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척의 문제는 공화국, 즉 사회의 가치에 근거하여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무능력하기 때문에 무직자가 된다고 하면 성공한 엘리트들이 약자들을 이용하는 셈이 된다. 이는 부정적 개인주의 사회를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 두렵다.

배척되는 현상의 뿌리들은 기술 변화와 관련이 깊다. 사회는 기술 변화가 직업의 구조를 바꿀 때 재조직된다. 경제적 발전은 일자리에 많은 이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산업 사회가 변하고 있다 해도 노동의 직종별 분류로 불평등을 분석하기에 충분하다. 일자리 없는 이들의 지위는 사회적 보호와의 관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경제적 질서 내에서 볼 때, 한 사람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빼앗기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생산하는 사람들이 활동이 없는 사람들에게 양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가치관을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의 특권 문제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시민들의 사회는 모든 사람들의 지위가 평등하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불평등은 합법성의 토대, 모든 시민들의 지위의 평등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고용주가 다섯 배, 여섯 배 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이라면 문제가 된다. 서로의 월급이나 세금의 양을 보자면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들은 일종의 카스트(특권)를 형성하고 있다.

카스트 개념은 민주 사회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 뇌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도덕적으로는 책임이 있지만, 죄인이 아닌’ 지도층에 속한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규범 하에 있지 않다는 것, 중대한 과실을 저지르고도 죄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대기업 경영자가 엄청난 소득을 올리면서 소득을 줄여 세금을 낸다면 그는 시민들과는 다른 생활 방식과 금전 평가를 지닌 특권 계급이다. 이는 사회를 약화시키는 일이다.

엘리트와 약자 시민 사이의 대립이 드러났다면, 그 해소책은 강자의 정서 변화와 관련이 깊다. 경제에서 이중의 잣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시민 사회의 이상은 기회의 균등이지 결과의 균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이상은 현실적인 효과를 낳는다. 정치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시민들에게 사회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줌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는 참여 열정을 높인다. 그리고 이 경우 약자 보호 원칙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노동에 부여된 가치, 물건을 만들면서 자연을 통제하고 과학적 지식의 결과들을 거기에 적용하려는 인간의 오랜 계획을 상기하자. 이 계획은 칼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펴냄)에서 말한 바와 같다. 노동에 부여된 가치가 우리의 특징이다.

“인간은 물건을 만들면서 현실적으로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존재로 드러난다. 생산하는 것, 그것은 창조적인 종으로서 인간의 삶이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

모든 이는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 즉 ‘한 개인은 그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하며, 다른 이들도 ‘그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를 해치는 것이 특히 실업, 배척과 관련되어 겪은 체험들이다. 물론 가장 높은 지위를 보장해 준 사회에서는 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했다. 노동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사회적 지위는 더 낮다.

퇴직자들은 예외이다. 퇴직자의 존엄성은 실업자의 경우와 다르다. 직장을 가져야만 사회적 규범에서 시민이기 때문이다. 굴욕감을 느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휴가 중이거나 여가를 갖는 것과 다르다. 일해야만 감각을 조정해 주는 시간까지도 그에게는 파괴적이다. 퇴직자는 노동했으므로 퇴직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실업자는 이런 느낌조차 갖고 있지 않다. 모욕을 겪을 뿐이다.

저자들은 노동조합의 역할을 명료히 한다. 노조는 공무원들이나 준 공무원들을 대변하지만 실업자와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방향으로 간다면 노조가 파시스트로 불리게 될 것이다. 실업자의 모욕, 일상의 권태, 절대 고독으로 귀착하는 사회적 교환의 둔화는 안타깝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결국 통합이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노동이 없다면 통합도 없다. 완전 고용을 체험하지 못하는 임금 노동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허약성을 의미한다. 사회를 (프랑스) 공화국 체제로 회복하는 것, 즉 시민의 유대를 재건하는 취지의 정치적 결정-노동을 위한 결정-이 필요하다. 유급 노동은 개인의 총체적 안정에 필요한 하나의 조건이되 일자리와 연결된 자기주장, 독립, 사회적 교류의 장인 동시공동체의 유대 방법이다. 여기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드러난다.

기업은 경제학적 기관만이 아니다. 합리적인 경영에 의해 인간과 기계를 모으고 통합하는 장소로서 사회의 중심을 구성한다.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학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따라서 기술 덕에 기업이 발전했다면 마땅히 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은 일정부분 사람들의 일자리를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인하여 노동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보 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동생활의 분야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욕구, 진정한 욕구에 주목해 보자. 유아, 청소년이나 노인뿐만 아니라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성인들을 도와주는 일자리의 광맥은 무한하다. 예를 들어 문제아는 과밀 학급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 반에 열 명만 앉혀 놓는다면 이 문제는 사라지는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다른 나라, 기업과의 생산 경쟁이라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교육, 사회 보장, 문화 분야에서 무한정 필요로 하는 그 일자리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공유해야 할 가치들

경쟁(력)이라는 말은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 시책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하는 맨 앞자리에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거나 권력과 결탁한 기업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는 희생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기업-외국 기업-간의 경쟁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새로운 사회경제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쟁이라는 개념을 극복해야 한다.

저자들은 리프킨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 대한 요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우리는 산업 사회의 최후를 목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를 넘어선 하나의 사회를 생각하고 3차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 발전은 사회의 자본에 근거한다.” (81~82쪽)

이에 대하여 저자들은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산업 사회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할 때, 리프킨이 대인 서비스 분야, 즉 사람들을 보살피는 행위를 발전시키려면 물건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동시에 만족스런 임금은 자국 물건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경쟁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기술 발전과 노동을 통하여서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부를 창조하는 연금술은 없다. 오늘 우리가 경쟁력이 있다 해서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똑똑하다. 따라서 희생양으로만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경쟁력은 기술 발전과 노동에서 나온다.

경쟁력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일해야 하고, 일을 하기 위해 저자들이 제안하는 것이 노동을 위한 기업 연결망, 일종의 사회적 통신망이다. 그런데 이 같은 역할을 우리 사회에서는 일용 용역 회사가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끄럽고 약한 사회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제안은 우리의 용역 회사의 역할과 다르다. 임금 노동자는 생산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이 망의 기업들은 각기 새로운 형태의 고용을 보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임금 노동자들의 사회보장 요구와 생산조직의 유연성에 대처할 수 있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리프킨은 사회 보장 자본의 출자에 대해 질문하자 ‘기술적 재산에 대한 세금’을 제안했다. 저자들은 이에 동의한다. 보충하여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 시민 사회는 노동의 사회와 함께 출발했다.
– 모든 기술은 이전 시대의 노동으로부터 발전해 왔다.
– 오늘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은 노동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자본도 마찬가지이다. 이 유산들은 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 보완하자면 신기술은 개인이나 기업의 것이되, 기술자를 교육시켜 키워 준 사회의 것이요, 기업을 키워준 사회의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사회적 자본, 즉 기술 발전 세금은 가능하다.

공화국의 기초를 놓은 이들의 사상은 계몽적 이성에 대한 신뢰와 모럴의 힘에 대한 신뢰였다. 역설적이게도 정치, 경제인들의 윤리적 둔감성은 공화국에 대한 합리적 경영을 표방한다. 외적으로는 개발과 경쟁이라는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내적으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자본을 사용했다.

친구들이여, 딸들과 아들들아, 선거의 승리를 전쟁의 승리나 왕조반정의 성공 정도로 보면서 공화국의 부를 약탈하고 논공행상하듯 국가의 부를 먹어치우는 자들에게 분노하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지지는 말자.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들을 해결하자. 억울한 가난과 생존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자.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노동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 한 사회의 체제는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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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文-安 단일화, 민주주의 살릴 주문인가?[철학자의 서재]

 

지젝·아감벤 등의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조은평 (건국대학교 강사)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민주주의라는 신은 죽었는가?

대학 시절,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설명해 보라는 시험 문제를 접한 적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니체의 그 유명한 선언을 두고 힐난하듯 농담하던 기억은 남아있다. ‘원래 있지도 않았던 신이 어떻게 죽을 수 있단 거지?’ 혹시 니체는 ‘우리가 꿈꾸며 기대하던 그런 과거의 신이 죽었다고 말한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던 건 아닐까?’ 뭐 이런 식의 생각들을 술자리에서 주고받던 기억 말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난장 펴냄)라는 책을 접했을 때, 불현듯 먼저 머릿속에 스치던 생각도 바로 이런 거였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하는 질문에도 역시 두 가지 방식의 답변이 가능하지 않을까? ‘원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죽긴 뭘 죽냐?’, 아니면 ‘우리가 꿈꾸며 투쟁해 왔던 민주주의는 이제 죽어버렸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발명해야 한다’는 답변 말이다.

물론 이 책의 원제목은 <민주주의는 어떤 상태에?>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회자되고 현실화되어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진단하려는 취지다. 이에 비해 번역서가 새로 설정한 제목은 다소 자극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생각엔 오히려 더 적절해 보인다. 원래의 책 제목에 응답한 여덟 명의 사상가들(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다니엘 벤사이드, 웬디 브라운, 장뤼크 낭시, 자크 랑시에르, 크리스틴 로스, 슬로보예 지젝)이 제기한 문제의식도 단순히 민주주의의 현 상태를 진단한다기보다는 그 단계를 훨씬 더 뛰어넘어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사회’ 자체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표


어떤 사상가들은 원래 ‘민주주의’가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거나 단지 사건이나 운동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 구체적인 실체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원래 없었기에 죽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 본다. 또 다른 사상가들은 우리가 꿈꾸며 목도하고 있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저 텅 빈 기표이거나 완전히 변질돼서 소수가 이끌어가는 과두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민주주의자를 자처한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85쪽)인 셈이다. 더구나 이제는 이념의 갈등과 현실의 냉전으로 대표되던 20세기는 지나갔기에, 더 이상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는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라고도 자처한다. 하지만 바로 ‘탈-이데올로기 시대라고 자처하면서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조르조 아감벤 등 지음, 김상운·홍철기·양창렬 옮김, 난장 펴냄). ⓒ난장

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또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할 때, 대체 ‘민주주의자’란 뭘 뜻하는 것일까? 자유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공화 민주주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식으로 수많은 수식어를 통해 각자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구분하려 하지만, 대체 이러한 수많은 ‘민주주의들’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공통 분모는 뭘까?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민주주의’의 본뜻에 주목한다. ‘인민(demos)의 통치(cratie)’라는 뜻을 지닌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단어에.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귀족정, 과두정, 참주정처럼 특정한 정체(통치 형태)와 통치 원리를 뜻하는 용어들과는 전혀 다르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순전히 정치적인 주장,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며, 일부나 어떤 대타자가 아니라 전부가 정치적으로 주권자라는 주장만을 담고”(87쪽)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인민의 자기 통치’를 뜻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구체적으로 인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배해야 하는지, 또 자신들의 주권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주는 바가 없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나라가 대부분 민주주의라고 자처하지만, 그저 대의 민주주의, 입헌 정치, 정당 정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 아울러 자유로운 시장을 기반으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정치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서로 내세울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통치 형태가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보장해 주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에서는 전 지구적인 자본이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경제 질서뿐 아니라 한 국가의 경제 정책도 좌우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힘과 결탁한 전문 정치인들이 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인민의 통치를 대신해 준다고 떠벌려 댄다.

인민의 통치’를 봉합해온 민주주의(?)


단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만 이랬던 것은 아니다. 원래부터 근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쌍둥이 형제와 결합해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날개로, 여러 가지 배제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인민 통치’의 사건들과 기억들을 억압하고 봉합하면서 대의 민주주의나 공화정이라는 상징으로 정착되어 온 것이 바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인지도 모르겠다.

우선 브라운의 지적처럼, 자본과 신자유주의적 합리성만이 소위 자유 민주주의적 제도의 기반처럼 강조되면서 “국가는 공공연히 인민의 지배가 아니라 경영 관리 운용의 구현체로 탈바꿈”(90쪽)해 버렸다. 또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가 노예와 여성을 배제했던 것처럼 근대 민주주의도 경쟁에서 도태당한 빈민을 배제하면서 성장해 왔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서구 민주주의는 불법 거주자나 이주 노동자를, 또는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가정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성역을 보호하려 한다.

더구나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는 정말로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사건들과 운동들을 억압하고 그 기억들을 봉합하면서 오늘날의 온건한 ‘대의 민주주의’로, 또는 ‘공화정’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로스가 ‘민주주의’라는 랭보의 시를 언급하면서 강조했던 1871년 5월 파리 코뮌의 몰락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당시 “파리 코뮌의 전사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 이들은 그동안 견고히 존재해온 위계적, 관료적 구조 대신에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적인 조직 형태와 절차를 도입했다.”(153쪽)

이런 면에서 파리 코뮌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이자 소규모로 코뮌을 실현했던 역사였다. 그럼에도 파리 코뮌은 당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참칭한 부르주아-공화주의 정부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게다가 가장 민주주의적인 사건의 패배를 가져온 이 대학살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 제3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결국 랭보의 ‘민주주의’라는 시는 당시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 실험이 어떻게 봉합되었는지, 또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 ‘문명화된 나라(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로스의 말대로, “실제로 서구의 정부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완전히 통제하게 됐다. 그 단어가 예전에 간직했던 해방의 울림을 완전히 제거한 채 말이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극소수 사람들만의 통치, 그리고 말하자면 인민 없는 통치만을 허용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161~162쪽) 과연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민의 통치’를 실현하려던 파리 코뮌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실험이 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고 봉합된 것일까? 또 인민의 통치를 의미하는 민주주의가 왜 역설적으로 ‘인민 없는 통치’가 된 것일까?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가?


물론 지배 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상징적으로 전유해 온 탓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 책에서 제기하는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바로 이 측면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곧 ‘인민은 정말 자기 통치를 원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사회는 무슨 수로 자기-제도화하며, 제도화된 것의 자동 보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66쪽)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기-제도화된 현재의 역설적인 ‘인민 없는 통치’의 상황에서 사회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첫 번째 질문은 ‘민주주의’가 주체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바디우가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재해석하면서 비판하는 지점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 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3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 ‘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 “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 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 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

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 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 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또한 두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주체나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아마도 이 지점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재점유하는 투쟁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랑시에르의 말대로 “정치적 투쟁들은 단어들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131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현재의 ‘민주주의’에서 껍데기들을 걸러내는 체가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민주주의적인 권력이란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공통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 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150쪽) 말하자면 그 누구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등의 전제를 놓치지 않는 것! 그렇기에 “집단적인 의사 결정에 참여할 능력을 지녔다고 규정된 사람들(전문가, 정치인, 혁신적인 자본가)과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해지는 사람들”(150쪽)로 끊임없이 사회의 위계를 구분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일 것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기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명분 속에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정권 교체를 원하는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정말? 혹시 우리는 어려운 나의 살림살이가 좀 더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누군가를 욕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노와 불만 때문에, 새로운 대한민국을 꿈꾸며 이명박 대통령을 욕망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이 CEO의 마인드로 경쟁력 있고 살기 좋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욕망의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게 됐고, 그 때문에 절실히 후회하면서 절망에 빠져봤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욕망해야 할까? 좀 더 국민을 배려하고 함께 잘사는 사회를 이루어줄 수 있는 또 다른 지도자를? 제발! 이제는 어떤 지도자를 꿈꾸고 욕망하기보다는 시스템과 체제 자체를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인민의 자기 통치’가 현실화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말이다.

한편에서는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받은 박근혜를 막기 위해서 지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나도 그럴지 모르겠다. 하지만 딱 그 이유 말고는 아직 다른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리고 별로 기대하지도 않는다. 박근혜를 막아내고 이명박 정권을 심판한다고 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바로 스스로 해방된 자들이 될 수 있는 우리 인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체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그 지도자가 민주주의를 실현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그런 기대는 이미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일지도 모르니!

‘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영화 보기 싫은’ 10대들, 그 이유를 듣고 보니… [철학자의 서재]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사례 1. 추석 연휴 귀성길에 어떤 묘한 가족을 목격했다.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아이와부부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터미널로 향하는 지하철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지하철이 터미널에 도착하는 내내 각자의 핸드폰에만 몰두해 있었다. 아이는 게임을 했고, 엄마는 인터넷을 했고, 아빠는 카카오톡을 했다. 셋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조차도 안내 방송을 듣고 각자 짐을 들고 내릴 뿐,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는 그 셋이 왜 티셔츠까지 맞춰 입었는지 궁금했다.
#사례 2. 10대들을 상대로 ‘당신이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었다. 1위는 ‘핸드폰을 꺼놓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히다

나는 아직 2G 핸드폰을 사용한다. 굳이 스마트폰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서 그냥 쓰던 것을 쓸 뿐이다. 그런데 내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아직까지 사용하다니, 대단하다”고 말한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뚝심이 있다고도 말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왜 고장 나지도 않은 기존의 것을 버리면서까지 ‘신상‘을 사는 것일까? 대체 왜 ‘신상’에 둔감하지 못한 것인가? 왜 소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하는가? 바로 그것이 세련되고, 혁신적이고, 시대에 충실한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상’들이 나를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게 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례 2의 설문 조사에서 영화관에서의 단 두 시간도 핸드폰을 꺼놓기 싫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핸드폰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핸드폰을 꺼놓는 것을 세상과의 단절, 고립으로 느끼는 듯하다. 핸드폰이 곧 세계와의 연결 고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바로 옆의,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과의 연결보다는 ‘저기’ 멀리의 어떤 사람과의 연결을 원한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인내와 타협과 소통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접속’과 ‘차단‘이 번복 가능한 아주 가벼운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례 1의 가족처럼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마치 “각자 자신의 보호막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례 1의 가족은 티셔츠까지 맞춰 입고 가족의 화목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유대는 핸드폰이라는 프라이버시 요새 안에서 무전으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얼굴을 맞대고 직접 대화를 통해 귀찮고 더디고 힘겨운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 없이 말이다.
물론 그럼으로써 더 이상 인간관계에 영속성은 수반되지 않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피상적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인간관계도 이제 질보다 양이 우선시된다. 이렇듯 그들은 협소한 프라이버시 요새에 자발적으로 갇혀버렸고, 또 다시 광장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사실상 점차 변화해온 인간의 의사소통 기술이 가져온 효과는 마치 은행 주도로 이루어지는 업적들과 마찬가지로 그 손실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반해서 그 이득은 사유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양쪽 경우 모두에서 발생하는 ‘이차적인 피해‘도 정말 드물게 생기는 이점들에 비해서 오히려 한쪽에만 보다 더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는 것 같다.” (51쪽)
고독의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책에서 이토록 편리해진 세계의 불안한 이면을 꼬집는다. 이제 세계는 실체 대 실체가 아닌, 그래서 어떤 위험성도 어떤 고통도 없이 섬세하고 가벼운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가상의 네트워크가 즐비하다.
‘워크맨’의 최초 판매자들은 “당신은 결코 다시는 혼자 있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인터넷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고독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그 관계가 불편함과 불쾌함을 유발하게 되면 언제든 ‘삭제’ 버튼 하나로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다. 우리는 현실의 인간관계에서처럼 “이제 혼자라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지나친 요구에 노출되어서 위협당할 필요도 없다. 희생하라거나 타협하라는 요구에 위협당할 필요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식의 요구에 응할 필요도 없다.”(29쪽)
하지만 바우만은 결국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의존하는 것은 동료들이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겨진 공허감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할 뿐이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워크맨이라는 작은 친구는 얻었지만, 정작 동료들의 진짜 목소리를 잃은 것이다. 인터넷은 어떤가? 바우만은 우리가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고독을 누릴 기회마저 놓쳐버렸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고독할 시간도, 필요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도망치려고만, 기피하려고만 애쓰던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사랑도 우정도 미움도 분노도 예술도 철학도 모두 고독안에서 태동한다.

 

유동하는 세계는 잔인하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Liquid Modern World)’는 바우만의 개념이다. 그는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처럼 유동적인 근대를 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도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이다. 그는 마흔네 편의 편지를 통해 지금은 막스 베버가 말한 “강철 외투”가 아닌 “가벼운 외투”의 시대임을 천명한다.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선택이든 가벼운 외투를 걸치듯 간단하게 이루어지고 또 언제든 벗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스턴트식 인간관계가 바로 이러한 시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유동한다는 것, 액체성이라는 것은 일견,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 어떻게 나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잔인함을 뜻한다.
“유동하는 근대의 문화는 ‘함양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유혹해야만 하는 고객들을 갖고 있다.” (162쪽)
속눈썹 감모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성형 수술을 판매하고, 그저 약간의 수줍음도 사회 불안 장애라는 이름을 붙여 의료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이다. 쇼핑하지 않는, 혹은 소비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된 인간으로 분류해 버린다.
“철학자 다니 로베르 뒤푸르가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는 지구의 한계점까지 자기 영토를 밀고 나가서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모두 상품으로 채우려 할 뿐 아니라, 아래로도 깊이 파고들어가 이전에는 사적인 일들에 불과했던 것을 상업적으로 수익성 있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 영토를 확장하려 한다. 물에 대한 권리나 인간 게놈 유전자에 대한 권리, 살아남은 생물종이나 아기, 인체 조직들에 대한 권리에 이르기까지 지구 표면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다 상품으로 만들려 하고, 예전에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몫이었던 주체성이나 섹슈얼리티 같은 것들도 상품처럼 판매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재활용하려 한다.” (206쪽) 하지만 자본주의의 파도가 넘실대는 근대는 이렇듯 집요하고 잔혹한 모습을 은폐하려 애쓴다. 예고 없이 일방적으로 단행되는 해고와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비정규직, 예비 노동자의 어두운 삶 또한 노동의 유동성, 유연성이라는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이름에 가려져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단순한 표류 이상의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힘겹게 자맥질한다.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사이에서

이러한 유동하는 근대에 맞서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우만의 제안은 책의 마지막 편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는 ‘편지 44.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에서 카뮈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다. 카뮈는 시시포스와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그 전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해결책으로 타인들을 위한 삶, 즉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삶을 택한다. 반면 시시포스는 자기 자신의 그 비참한 고통에 압도당해 그 인간적 곤경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에 끌리게 된다. 카뮈는 이 둘을 병치시키며 “나는 반항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왜냐하면 시시포스의 곤경에는 프로메테우스가 발을 들여놓아도 될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그 노동들이 무의미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비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그 안에 개입하는 순간, 시시포스는 노예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 실천가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바우만은 카뮈가 “그 어떤 운명도 경멸(상황을 무시하는 태도)을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는 법이다”고 말했다면서, 그는 체념과 싸우며, 무관심을 찌르며, 자기 자신과도 싸워야 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카뮈는 우리에게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며, 우리가 이러한 존경할 만한 추구들이 폭정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러한 추구들에 한계를 설정하고 항상 주시해야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즉, 바우만은 카뮈를 통해 ‘나’만이 아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시시포스의 형벌과 노역의 세계로 들어가 시시포스를 변화시키듯, 힘을 합쳐 이 자본주의와 유동성의 근대에 반하면 원자화된 개인들의 가짜 보호막을 걷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우리는 다시 친밀감과 영속적인 관계를 위한 그 지난한 좌절과 상처의 시간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이상 답답하고 지루한 위협의 시간, 믹소포비아(Mixophobia, 이질 공포증)의 시간이 아니라, 즐거운 비참의 시간, 아름다운 상흔의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귀찮고, 두려워했던 그 인간관계의 좌절과 상처가 장애물이 아니라 사실은 견고하고 영속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하나의 필수요소인 것을 깨닫게 되면 말이다.
우리는 조금의 상처도 주고받지 않는 산뜻한 관계를 꿈꾸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한 관계, 언제든 처분되고 또 손쉽게 포기할 수 있는 관계, 즉 아무것도 아닌 관계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충분히 상처받고, 좌절하며, 번뇌하고, 인내하며, 분노하고, 반항하며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 소중한 인생의 기회를 스스로 버리지 말자. 고독할 기회조차 잃은 자는 진정으로 고립된 세계를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5년 만에 치르는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 누구는 절대 안 되는지 또 어떤 정당은 국민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줄 수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정국이다.

물론 선거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지켜진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선거란 거짓말쟁이들의 잔치이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야 하며, 그 외면 자체가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별 의미 없이 진행되었던 선거의 역사를 숱하게 많이 경험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지만 늘 결과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같은 색 정당 깃발로 뒤덮였다.

수십 년을 같은 색깔 표시로 뒤덮인 한반도의 지도는 언제나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지형도가 깨질 수도 있음을 이미 확인한 전례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다.

공포의 사회, 전체주의 정치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1951년),(1958년),(1961년) 등을 통해 격동의 20세기를 날카롭게 비판한 아렌트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흑인 인권 운동, 1968년 학생 운동 등 세계사적 사건을 두루 겪으며 20세기를 사상적으로 성찰하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를 지목한 부분이다(역자 서문, 8쪽). 전체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의존하여 판단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마련한다. 이렇게 대중화된 사람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본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은 지금의 정치가 전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폭력의 공포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어릴 적부터 움츠리고 조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간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안 된다. ‘묻지 마 살인’과 흉악한 범죄들 때문에 거리는 감시 카메라 속에 가두어졌다.

2012년 9월 12일 오후 1시 21분 현재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성폭행’ 키워드 기사는 8만1602건에 달한다. 같은 키워드의 기사가 2007년 한 해 동안 5167건, 2008년에는 7627건 검색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2011년 범죄 백서에 따르면, 강간(성폭력범 포함) 범죄 발생 건수는 2007년 1만3634건, 2008년 1만5094건, 2010년에는 1만9939건이었다.

범죄 발생 비율보다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9월 6일자 인터뷰에서 여성학자 권인숙은 “성범죄 보도의 증가가 ‘공안 통치’를 향한 위정자의 욕망 그리고 언론의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정권은 성폭력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부활시키겠다고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전체주의적 정치 기조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박근혜 후보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으니 현 정권과 크게 정치색이 달라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렌트가 살아있다면 21세기 한국이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할 것이다.

칸트의 미학은 정치학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펴냄)에서 칸트의 판단을 차용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한다. 이 책은 아렌트의 강의를 그의 제자 베이너가 모아 출간한 것이다. 완결된 형태의 정치 이론서가 아닌 까닭에 이 책의 구성은 열세 개의 강의와 이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대한 각주를 겸하는 베이너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 강의의 대부분은 칸트의?<판단력 비판>에 대한 재구성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칸트의 인간학 역사철학 등에서 보이는 정치사상을 고루 잘 소개하고 있다. 칸트가 미적 판단 대상을 예술작품, 자연과 같은 ‘사물’들로 한정시키는 것과 다르게 아렌트의 미적 판단 대상은 ‘정치 행위’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미 칸트의?<판단력 비판>에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이 내재해있다고 보았다(첫 번째 강의).

아렌트는 자신의 관심사는 “복수의 인간(men)이며 진정한 목표는 사교성”(네 번째 강의)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이 복수의 인간에 관하여 칸트가?<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칸트의 미학이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미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향해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복수의 인간을 아렌트는 다음처럼 정리한다.

“지상의 존재,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음, 상식과 공통감(sensus communis)과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있음 ; 자율적이지 않음, 심지어 사유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동반을 필요로 함 =??<판단력 비판>제1부의 미적 판단.” (67쪽)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단수의 인간을<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룬다. 칸트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비판하고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는 원자적 인간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판단력 비판>의 인간은 이미 앞선 두 비판서의 대상인 원자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이다.

아렌트는 만약 칸트에게 왜 단수의 사람(Man)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men)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칸트는 그들이 서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일곱 번째 강의)이라고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를 향유하는 인간은 결코 자기 금고에 예술 작품을 가둬놓고 혼자서 음미하는 인간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 가슴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에서 타인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서로 소통하는 순간 예술 작품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며 인간은 복수의 인간이 된다.

일곱 번째 강의에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미 정확하게 생각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음을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나’는 불완전한 자아일 뿐이다. 아렌트는 아래와 같은 칸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위해 공공성이 필수임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소통할 자유를 박탈하는 외부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90쪽)
그렇다면 인간에게 필수적인 공적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는 칸트 철학을 가져와 인간 정신의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정신의 확장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 상상력이다. 칸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미적 공감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아렌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정치적 사안을 공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확장된 정신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도 바로 이 확장된 정신을 통한 공적 소통에 의해 가능했던 우리의 정치적 경험이었다.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만이 정치를 살린다

칸트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핵심 사항 중의 하나는 ‘무사심적 관심(disinterested concern)’이다. 흔히 ‘무관심적 관심’으로 번역되는 칸트의 이 용어는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때는 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이다. 내가 갖고 싶은 신상품에 자꾸 눈길이 가거나 땅장사가 전국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결코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무사심적 관심을 미적 경험을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내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거실에 걸어 놓는다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내가 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모나리자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미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일련의 미적 태도를 관찰자적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112쪽). 관찰자만이 사태를 목격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다.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는 행위자는 결코 자신의 사적 이익을 떠나서 전체를 통찰할 수 없다. 마치 고대철학자들이 철학은 노동하지 않는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유하는 삶, 관찰하는 삶, 관조하는 삶만이 전체를 볼 수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공적 사건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22쪽).

관찰자 앞에서 광경은 전체로서의 역사이며, 이 광경의 참된 주체는 어떤 “무한”을 향해 “진행하는 일련의 세대들” 가운데 있는 인류이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인류의 목적지는 영원한 진보이다.” (118쪽)
칸트의 역사철학의 중심에는 인간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그려져 있다. 비록 개별 인간은 후퇴하기도 하고 진보하지 못하는 듯도 보이지만 종으로서 인류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칸트에게 있으며 아렌트가 그것을 보았다. 그 종착지는 ‘누구도 자신의 동료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인류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국가들 간의 평화’이다. 관찰자는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이다.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칸트는 사람들이 미적 대상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관찰자는 오직 복수로만 존재하며 관찰자는 행위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항상 동료 관찰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공통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감을 잃어버린 인간은 칸트에게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공통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는 것이며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성원들이 갖지 않는다. 본래 공통감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소통하지 않고서는 공통감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공통감을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이다. 나에게 다가 오지 않는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는 버려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경제의 문제이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만사가 형통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역사 어디에서도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민중의 살림이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정치가 바뀌어야 먹고사는 것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표심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경제를 정치 문제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리는 경제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다.

아렌트는 공통감을 공동체 감각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여기에서의 감각이란 몸으로 부딪히는 행위자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반성의 결과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설하고 싶은 비전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하여 함께 소통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다.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군 감축을 주장하는 것,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 교육은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는 것, 그래서 대학 등록금은 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답게 살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이는 나라의 기둥이기 때문에 나라가 돈을 들여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소통할 공동체 감각이다. 관찰자로서 반성해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감각들을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이며 아렌트가 칸트에게서 얻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