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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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경제의 진실>
이관형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경제의 진실>(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을 놓고 쓴 이 글은 서평이 아니다. 철학(미학)을 공부하는 자가 경제에 대해 뭘 그리 잘 안다고 떠들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보고 느낀, 좌충우돌하는 생각조각들을 늘어놓으련다. “이런 조각글 싫어하세요? 미안합니다.”(착한 나) “꼬우면 읽지 말든가!”(김어준) “답답하면 니들이 쓰든지!”(기성용)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한마디로 출세한 경제학자다. 게다가 백수(白壽)를 누렸으니 여러 면에서 부러운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버클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쳤다. 미국경제학회장, 경제인연합회장에다가 대통령 클린턴의 경제 선생이었다. 이렇게 강단과 현실 정치의 양 분야에서 공히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는 읽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출간 당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책이다. 그의 ‘쩌는’ 스펙 얘기는 이쯤하자. 아무리 방자한 글쓰기를 획책했더라도 제목으로 내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내용을 살펴보자.

내가 잘나가 봐서 아는데 경제는 사기야

그는 경제가 사기란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총체적 사기란다.

먼저 ‘자본주의’를 ‘시장(체제)’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사기다. 이런 말 바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주는 역사적, 부정적 의미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에는 기업이 권력을 지니는데 기업의 권력은 자본가(혹은 주주)가 아니라 경영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하면 경제 권력이 ‘자본가’라는 게 딱 떠오르는데 ‘시장’이라고 말하면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은폐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역사적’ 개념임에 비해 ‘시장’은 ‘초역사적’ 개념처럼 보일 수 있다. “자! 쭈-욱, 이대로!”

‘소비자 주권’도 사기다. 소비자가 조종, 통제되는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라 봉이란 말씀? 딩동댕.”

‘노동의 즐거움’도 사기이다.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필수다. 일에서 해방된 부자는 칭송과 부러움을 받는다. “일해서 돈벌어. 누가 벌지 말래냐? 나처럼 되긴 어렵겠지만 말이야!”

여가는 부자들에게는 용납된다. 가난한 이들이 여가를 즐기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 “없는 놈이 여가생활은 무슨···하여간 꼴값을 떨어요.”

현대 기업은 고루한 ‘관료주의’를 비난하지만 이 또한 사기다. ‘생동감 넘치는 기업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대기업화한 오늘날의 기업은 자신이 바로 ‘관료주의’에 처해 있다. 게다가 소유자나 주주의 권한은 예의 그 ‘경영’에서 배제된 허울뿐인 이미지만 지닐 뿐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선진 경제 제도라 좋은 거라던 경제학 교과서의 말씀이 뻥이라는.”

나아가 기업 권력은 고삐가 풀린 상태다. 기업 권력은 관료화한 경영자의 몫이다. 이러한 관료주의가 기업의 업무와 보수를 통제한다. 자기 업무의 감시자는 사실상 자기이다. 자기에게 보수를 주는 이도 자기이다. 감시는 지나치게 없고, 보수는 지나치게 많다. “생선을 고양이에게! 그것도 셀프무한리필로!”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이 나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사기다. 공공 부문의 이름 아래 공사 협력 체제라는 형태로 실제로는 민간 부문이 일하고 있다. 심지어 전쟁도 민간 기업이 대행한다. “로보캅이 현실로, SF가 다큐로!”

금융계는 사기가 만연된 세계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직업은 사람들이 좋아할 기대를 이야기해준다고 해서 두둑한 보상을 받는다. “하나의 예. 보험 많이 드셨어요? 아유 든든하시겠네. 근데 한번 확인해 보세요. 진짜 많이 주는 건지. 아니, 주기는 하는 건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명성도, 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만 주력했을 뿐 경기 조절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우아한 현실 도피로서 사기일 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버냉키 사임 예정(2014년) 기사가 올라와 있다. 그나마 그린스펀보다는 백배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허긴 뭘 할 수가 있겠는가? 쩝.”

기업 권력의 사기 행각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부패한 회계 보고도 사기다. 현대 사회에서 경영진이 행사하는 기업 권력은 민간 부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으로까지 확장된다. 기업 권력은 국방 정책, 환경 정책, 조세 정책도 좌우한다. 객관적인 실증적 연구도 기업 권력의 로비를 당한 군대나 정부에 의해 배척당한다. 군산복합체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고만해라. 백날 피켓 들고 떠들어도 나 니들 말 안 듣다. 니들이 나한테 돈을 주니, 나 옷 벗고 난 다음에 갈 자리를 주니? 비켜라. 바쁘다. 업체 분들과 회식 있다.”

사기의 끝은 전쟁이며 그것을 피할 길은 없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 ⓒ지식의날개

갤브레이스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최고 권력은 대기업 권력이다. 그리고 그 대기업은 주주나 자본 소유자가 아니라 경영자의 수중에 있다. “한국의 재벌이 주주 혹은 자본가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경영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매우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기업의 공헌은 경제적 성공, 심지어는 문명화한 성공의 일반적인 척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회적 성공이 더 많은 자동차와 더 많은 텔레비전과 더 다양한 옷들과 더 많은 소비재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더 치명적인 무기의 소유도 성공의 빼놓을 수 없는 척도가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업적을 평가하는 척도다.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 즉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보호받지 못하는 시민들의 건강, 군사적인 행동과 죽음의 위협은 성공을 평가하는 데 포함되지 않는다. “오래되고 찌그러진 차를 타고 다니니까 나를 무시하냐? 이런 차 탄다고 내가 루저로 보이냐고? 내가 분리 수거나 등산 쓰레기 가져오기, 애완견 배설물 치우기 열심히 하는 건 안 보이냐?” 그랬더니 나더러 이런다. “너 루저 맞거든.”

경기 침체기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불경기에 저소득층은 교육과 의료, 기본적인 가계 수입 등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부는 사회 지출을 삭감한다. 오히려 소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소비를 할 사람에게는 이를 박탈하는 정책이 지속된다. 그동안 경기가 호전되어왔을 때조차도 어떤 분명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서 (경기 호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불경기에는 소비 활동을 할 빈곤층이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확실한 효과를 낸다. 그렇지만 이는 쓸모없는 동정에 불과하다는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반면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종종 세금 감면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절박한 필요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소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돈을 확실히 소비할 빈민들은 이런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 돈을 저축할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만 이런 보상이 주어진다. “부자 감세 철회하라. 부유세 거둬라. 공공 복지저소득층 지원 정책 확충하라. 그래야 경제가 산다.”

미국 얘긴지 한국 얘긴지 모를 이야기가 이어진다. 끝에 이르러 그의 이야기는 현대 문명의 파국을 예언하는 묵시록으로 바뀐다.

소위 문명화된 삶은 인간의 업적을 찬미하는 하얀 거탑이지만 그 정상에는 영원히 감돌고 있는 거대한 먹구름이 있다. 인간의 진보는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왔다. 나(갤브레이스)는 이제 독자들에게 슬프지만 의미심장한 진실을 남기고자 한다. 문명은 과학, 의료, 예술 그리고 경제적 복지에서 수 세기 동안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 그러나 문명은 또한 무기개발과 전쟁의 위협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대량살육은 결국 문명이 가져 온 것이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과 폭력, 문명화된 가치의 정지, 전쟁 직후의 무질서와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탈출구는 없다.

사람이 아니무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아예 아니무니다, 내가 잘못된 건가?

이 책의 원제는 “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결백한 사기의 경제학)”이다. 갤브레이스는 경제 분야에서 벌어지는 사기 행각을 ‘결백한 사기(innocent fraud)’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노센트(innocent)’를, 이 책의 역자처럼 ‘결백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를 따르기로 한다. 이 말을 갤브레이스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쓴다. ①’적법한, 즉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②’의도하지 않은, 즉 사기를 치려고 사기를 친 것이 아니다.’ 만약 ①의 뜻만 지녔다면 아마도 대기업 경영자들은 법망은 피했을지언정 도덕적 비난만큼은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②의 뜻도 지닌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다면 ②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

갤브레이스의 말에서 대강을 취하자면 이러하다. 이런 사기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업 권력, 기업 경영자들은 법적인 책임은 (법이 이들의 것이니) 차치하고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아니 물어 봤자 헛수고다. 이들은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힘이 있고 부유한 자들의 이익을 명료한 견해(논리)를 바탕으로 지지한다. (흔히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듯이) 이들의 이런 지지를 경제적 동기나 다른 정치적 동기에 입각한 행동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사기가 사기인 줄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올바른 행동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가카’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한 말이 추호의 거짓도 없는 그의 진심임을 깨닫는다. 이쯤 되면 절망이다. 이런 절망에 빠졌던 또 한 사람의 탄식이 떠오른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赦 :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34) 그가 그를 섬긴다니 그는 그를 사하시길.(‘가카’는 장로님) 그러나 그가 섬기지 않았던 그들은 그를 사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가카가 물러나도, 심지어는 여야가 뒤바뀌어도 ‘가카들’은 여전히 권세 있는 세력으로 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기에도 세 차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갤브레이스에게 물었다. “당신(갤브레이스)처럼 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못 막는 사기를 나더러, 우리더러 어쩌라고? 진실이니 뭐니 하면서 당신만 양심적인 척하는데 이거야말로 사기 아냐? 대안은 하나도 안 써놓고 말이야.”

사기로 점철된 현대 경제가 결국 현대 문명 자체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더니 책의 마지막에서 불쑥 이런 말을 던진다. “이 글에 기술된 (…) 문제들은 (…)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이 문제들은 이미 그렇게 해결되어 왔다.” 이 문장이 대안이라면 유일한 대안이다. 근데 이 양반 기억력이 참 까마귀다. 책의 대부분을 비관적 전망(‘전쟁은 피할 수 없고 현실의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으로 일관하다가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단다. 아니 그렇게 해결되어 왔단다. 이게 다다.

갤브레이스는 이 책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의 돌출 발언을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학자니까 진실을 보여주는 거 이상은 못하겠어. 그리고 난 죽으러 가야하거든. 당신들은 살아야 하니까 내가 가르쳐 준 문제들은 당신들이 해결해봐. 인류는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여기까지 왔거든. 아마 당신들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경제가 사기라는 게 뭐 그리 새로운 말인가? 당신(갤브레이스) 글에서 일부 새롭게 얻은 내용이 없진 않지만 대개 알거나 느끼거나 하고 살아왔거든 나도. 당신이 던진 문제에 답은 나도 못 내겠고 ‘사기’ 얘기나 더 하고 끝내지 뭐.”

갤브레이스는 경제가 사기라고 했지만 백남준은 예술이 사기라고 했다. 한술 더 떠 푸시킨은 삶 자체가 사기라고 했다. 요즘은 통 볼 수가 없지만 어린 시절 이발소에 갈 때마다 기도를 하는지 이삭을 줍는지 하는 사람들 그림 옆에는 예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붙어 있지 않았던가?

사실 세상이 사기라고 본, 보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제 뜻대로 세상을 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세상을 산,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세상을 사기라고 여긴,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백남준의 예술=사기는 이와는 거리가 있다. 흔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선사(禪師)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 예술은 선사의 손가락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러니 예술은 사기다. 그렇다고 백남준이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은 전혀 아니다. 손가락을 통해 우리는 달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손가락이 달이 아니라 하여 손가락을 가짜이며 무가치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예술=사기론은 여기서 끝. 근데 인터넷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 있다.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 선사가 일갈한다. 제자가 답한다. “손가락이 너무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하하. 이 글 올린 사람, 누군지 보고 싶다. 성철스님 대 김성동(소설가)으로도, 모던 대 포스트모던으로도 아무튼 여러 가지로 읽힌다. “방금 말한 거 무슨 뜻인지 독자 여러분들 잘 모르시겠지요? ㅋㅋ 담에 써먹어야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낭만주의의 영향 하에 성장하여 리얼리즘으로 나아간 푸시킨의 문학은 이 둘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 사조를 껴안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기투성이인 ‘슬픈 현재’를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한다. 이는 그의 문학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추방당하고, 차르(Czar)에 도전한 데카브리스트를 후원하느라 감시를 당하고, 자신의 부인을 차지하려는 자와 결투를 벌이다 사망하기까지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속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말처럼 그는 현실을 견뎠다. 그렇지만 그 견딤은 결코 수동적인 견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속이는 ‘슬픈 현재’에 맞서 자신의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하려는 적극적 견딤이었다. 결국 그에게 ‘현재는 슬픈 것’이었으나 그의 ‘마음이 살던 미래’는 그를 러시아 최고의 문인으로 올려놓는다.

백남준의 ‘사기’는, 예술이라는 가상(손가락)을 통해 본질(달)을, 감각적인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이념을, 미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런 나의 해석은 헤겔식이다. 백남준이 헤겔에 동의할 것 같으냐고? 이경규식으로 답하겠다. “별(들)에게 물어봐”, 백남준은 별이 되었으니.)

푸시킨의 ‘사기’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갈구하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니 어쩌면 이성을 지니게 된 대가로 모든 인간들이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 아닐까?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우리가 왜 삶을 사기라고 느끼는가를 경제라는 구체적 현상을 통해 보여준다. 즉 사기는 그저 느낌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에 만연한 것이다.

백남준의 사기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부정적’이다. 예술의 사기는 추구되어야 한다. 경제의 사기는 부정되어야 한다. 푸시킨의 사기는 ‘숙명적’이다. 우리는 이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남준의 사기와 푸시킨의 사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술가가 아니니까. 숙명이니까. 경제의 사기는? 이것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결백한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마침 대선이 코앞이다. 복지니 경제 민주화니 하는 여러 말들이 오간다. 대선의 최대 화두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했다. 아마 여기서 ‘시장’은 대기업, 재벌을 뜻하는 것이리라. 노 전 대통령의 말에 분노하거나 절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분노 혹은 절망했던 것인가? 그의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이 맞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옳은 말이 곧 옳은 행동인 것은 아니다. 나는 물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정도로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과 똑같은 말을 갤브레이스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이미 권력은 대기업과 대기업 경영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갤브레이스가 말하는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당장 닥친 지금의 대선 국면에서라면 어떻게 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결백한(이노센트·innocent)’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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