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갈면 봄이 오리라![철학자의 서재]

칼을 갈면 봄이 오리라![철학자의 서재]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진보성(대진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지금은 잠시 몸을 추스르고 기다릴 때

 

사람은 누구나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에는 움츠리고 다음에 곧 찾아올 따뜻한 봄을 기다리게 된다. 내가 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이 시간 동안 몸과 정신이 성장한다. 이 말을 규명할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나의 경험이 그렇고 내 주변인들과 감각적으로 교유한 결과가 그렇다.

2012년 말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대선이 끝나게 되면 유권자의 반은 내가 지지한 후보가 ‘됐다’는 일종의 안도감에 기뻐하고 나머지 반은 심할 경우 ‘멘붕’ 상태로 스스로를 방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희망과 절망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종류의 안경을 쓴 사람이건 간에 곧 이 안경도 다시 벗어던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서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뽑은 사람이 됐으면 돼서 그만이고, 안 됐으면 안 됐기 때문에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은 일개 정치인에게 나의 삶 전체를 맡기고 나중에 찾아가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위험한 태도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을 일단 선출하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가 포함된 집단의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유권자들의 희망과 절망의 태도는 맹목적인 희망이 되고, 더 무거운 절망이 된다.

그 동안의 역사에서 봐왔듯이 어떤 권력도 국민의 동의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고 판단하면 모든 정책과 행보는 정치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두고 민중이라는 정치적 대상은 일상이라는 사회의 영역 안에 철저히 가두어 버린다.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강을 만들어 절연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선거 때만 민주’라는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아직 달성된 적 없는 민주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선거만 끝나면 민주주의를 잠깐 경험했다는 찰나의 환희를 기억하며 축제를 마무리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민주주의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당선자에게 정치적 기반은 주었지만 아직 권력의 전부를 양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은 당선자를 지지했던 사람이나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 모두 정치권의 행보를 찬찬히 지켜봐야 할 입장에 있다. 비판적 성찰을 통해 그가 민주적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지 간을 봐야 한다. ‘대통합’이라는 말, 마치 어린 백성이 전제군주의 즉위식을 희망에 들뜬 마음으로 축하하듯 다함께 힘을 모으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아직도 대한민국이 왕조국가인가? 국민 모두 선거 국면에 휘둘려졌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치권에 대한 비판과 감시의 능력을 내적으로 고양시킬 때이다.

황종희의 역저 <명이대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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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지음, 김덕균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그런 면에서 17세기 중국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 1610~1695)가 쓴 <명이대방록(明夷待訪綠)>(황종희 지음, 김덕균 옮김, 한길사 펴냄)은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명말청초라는 시대적 혼란기를 살다 간 황종희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규정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정치에 대한 원칙론적 견해를 풀어낸 정치사상서이다. 중국의 근현대 사상가들이 극찬한 책이고 황종희를 두고 ‘중국의 루소’라고 명명하기도 했지만 간혹 비현실적인 책이라는 비판도 들었다. 그만큼 저술 당시와 이후 오랜 시간을 두고 평가될 만큼 파격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이기도 하다.

물론 <명이대방록>에는 현대의 사회ㆍ정치 상황과의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황종희가 가졌던 문제의식과 날카로운 통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부분이 분명 많이 있다. 특히 이 책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저자의 태도는 바로 권력에 대한 칼날 같은 비판의 날을 항상 꼿꼿이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황종희가 이 책을 썼을 당시 중국의 내부 상황은, 한족이었던 명왕조가 이민족인 청왕조로 교체되던 시기였고 패망으로 치닫던 명왕조의 부조리한 상황과 사회 전반의 모순이 표면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원칙적인 대안 의미를 제시하고 방책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자신의 염원은 물론, 그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와 정치, 경제 부분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담았다.

책 제목에 보이는 ‘명이(明夷)’라는 말은 <주역> 64괘(卦) 중 하나로서 36번째 위치하는 ‘명이괘(明夷卦)’에서 따온 말이다. 이 괘의 모양새는 땅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 坤上) 에, 해와 빛을 상징하는 ‘이(離)’가 아래(?, 離下)에 위치한다. ‘명이’라는 말은 땅 아래에 해가 있는 형상이니 밝은 태양이 땅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明入地中 明夷”) 괘의 의미는 “빛이 가려지면 현자의 명철함이 해를 입어 어려움에 처하게 되니 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정도를 지켜 참고 인내하며 재능을 감추고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효사(爻辭)가 상징하는 의미 중에는, 절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인내하면서 저항 세력끼리 은밀한 규합을 이루고 옳지 못한 권력에서 벗어나야 하며 바르지 못한 정치는 결국 망한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명이대방록>의 구성은 정치개혁론이 주를 이룬다. 원군(原君)·원신(原臣)·원법(原法) 등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의 지배력을 상징하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 법이라는 국가운영 근거에 대한 원칙적인 개혁론을 전개한다. 이런 면에서 황종희는 민중의 혁명성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던 맹자(孟子)를 닮았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 서두에서 맹자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해진다”(一治一亂)고 한 말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왜 삼대(三代) 이후에는 혼란만 있었고 다스려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다. 황종희는 또 다른 저서 <맹자사설(孟子師說)>(이혜경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그 원인을 통치자에게 돌리면서 통치자가 ‘불인(不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인은 의서(醫書)에 기(氣)가 관통하지 않아 ‘손발이 마비된 것’을 말한다고 정자(程子)가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서 불인한 통치자는 백성,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의 독락을 획책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통치자이다. 기론과 관련하여 황종희는 “기가 운행하는 모든 것은 동체(同體)”라는 우주론적 해석으로 확대한다. 바로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근거하는 것이다.

황종희는 인간이 자기의 ‘개인적인 것(自私)’과 ‘주관적인 이기심(自利)’으로 나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통치자인 군주가 공리(公利)를 추구하게 되면 오히려 개개인들의 자사와 자리를 만족시키며 승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최고 권력을 가진 자가 사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종희는 “천하에 큰 해가 되는 것은 군주뿐”이라고 했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자로서 그 존재가치가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군주는 객이고, 백성이 주인이다

황종희는 ‘원군(原君)’ 편에서 고대 성왕(聖王)이라고 불리는 통치자들을 거론하면서 “옛날에는 천하의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가 객이 되어 무릇 군주는 일생 동안 천하를 위해 경영했는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 백성이 객이 되어서 무릇 천하의 어느 곳도 평안하지 못한 것은 군주만을 위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군객민주(君客民主)’라는 슬로건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 동양의 유가 정치철학에서 보이던 전형적인 ‘군주민본(君主民本)’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현대의 민주와는 거리가 있지만 기존의 민본과는 차별되는 급진적 민본주의로서 ‘민주적 민본’이라 부를 만하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기존에 있던 아래의 것과 위의 것을 전도시킨다. 이미 황종희는 이자성의 농민봉기군에 의한 명왕조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민중의 힘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황종희의 급진적 민본주의가 당시로서 파격적인 면을 분명 갖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정치개혁과 사회 재편성의 주인공은 합리적인 엘리트로서 자신과 같은 사족계층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식도 노출한다. 이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성에 의해 국민의 실질적 주권행사는 시기적으로 분할되어 한정되어 있고 여전히 정치적 주체는 따로 있다. <명이대방록>의 관점을 현대에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한계점이고 그 연장선에서 똑같은 고민이 현대에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황종희는 ‘원신(原臣)’ 편에서 잘못된 통치 권력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사실 청왕조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펴서 그들을 양지로 끌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황종희는 청왕조의 지속적인 요청에 어떠한 관직도 수행하지 않았다. 과거 명나라에 대한 지조를 지키는 면도 있었지만 <명이대방록>이 명왕조의 회복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쓴 저술임을 생각하면, 그의 이런 생각은 자신이 정치적 노선에 진출하는 것과 그 당위성, 그리고 물러나 처신할 때의 합당함을 증명하는 출처의리(出處義理)와 관계가 있다.

황종희는 명태조가 맹자의 “민이 귀하고 다음이 사직이고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말을 폐기하고 재상까지 폐지했던 사실에서 환관이 득세하여 사족 계급은 물론 백성까지 고통스럽게 만든 상황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학교, 서리, 환관에 대해 언급한 편에서 그의 이런 생각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바라는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며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을 통해 지식인으로서 현실의 모순과 잘못된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도(正道)를 회복하는 입장에서 ‘너희들이 알고 있던 그것은 원래는 이런 것이야’라고 외치는 듯하다. 물론 구호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주장과 정밀한 근거를 갖추고 있기에 비중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황종희는 명왕조의 유산을 지니고 있던 지식인이었지만 청왕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자로 기억될 수 있던 점은 바로 어떠한 권력에도 협조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정치권을 가만두지 않고 간섭해야만 하는 유학자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점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사대부로서 가지고 있던 책임감은 황종희가 말한 민주를 놓고 보면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개념의 측면에서 민주의 주체는 사회구성원 개인들이 그 적임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정치권에 대한 태도는 매우 당당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황종희가 당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참여에 있어 실질적으로 제외되었지만 끊임없이 지배 권력에 대해 견제하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던 점은, 현대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또 소외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치권과 관련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조언하는 바가 크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민주사회를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현재의 우리는 과연 황종희가 말한 ‘군객민주’의 그 민주조차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황종희가 경제개혁론에서 주장했던 지방분권적 통치는 민 자체의 의식이 개선되거나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주장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의식이나 개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의식도가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치권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하며 자기 삶의 자유와 여가를 확장하는 기회를 유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파가 모든 것을 움츠리게 만드는 이때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비록 시기적 간극이 넓은 책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다. 현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명이의 시기에 새로운 개혁의 시대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기에 절실하게 필요한 책이 될 것이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공(公)’의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의식의 지침서로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지금 혹 봄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명이괘’의 풀이처럼 그럴 때일수록 ‘연대’와 ‘의지’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묘(妙)를 느껴야 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연대하고 의지해야 할 것이 민중과 민중이라는 점이다. 정치권과 권력은 비판의 대상이지 평생 단심(丹心)으로 종사(從事)할 대상이 아니다. 지지하고 응원했지만 권력을 획득한 정치권력에게는 그 순간부터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 황종희처럼 말이다. 지금은 모두 그 칼날을 갈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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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조주영(서울시립대학교 박사 과정)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1.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별다른 일 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친구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날이었기에 수다도 금세 시들해졌고, 우리는 각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그만 집에 가는 게 좋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만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우는 나를 보며 친구는 몹시 당황했고,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눈물의 이유를 찾아야 할 텐데, 이유라고 할 만한 게 당최 없는 것이다.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애꿎은 책을 탓했다. 책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짜증도 나고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난 거라고,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바로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이다. ‘최악의 저자 상’을 받을 정도로 문체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자자한 버틀러이니만큼, 책이 어려워서 짜증이 났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질질 짜면 어떻게 하냐는 둥, 서른 넘어 주책이라는 둥 핀잔을 주고받으며, 나와 친구는 그렇게 그 순간을 넘겼다.

그런 일이 있었던 지도 벌써 며칠이다. 그 사이 어찌어찌 마지막 장까지 넘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삶>은 이해불가인 채로 있다. 그럼에도 감히,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울었던 그날, 하필 읽고 있던 책이 그 책이었고, 책을 덮기 전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65쪽)”라는 문장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고, 눈물이 터져 나온 건 아마도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2.

그 문장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울컥하게 만든 것일까? 겨우겨우 책을 읽고 난 뒤 이걸 확 던져버릴까 하다가 마침 그 일이 생각나서, 그 문장을 다시 찾아보았다.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자격”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때문인 것 같다.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아”라든가, “내가 과연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라고 말할 때처럼, 어떤 자질이나 능력, 조건 등을 평가할 때 “자격”이라는 낱말을 쓰는 게 아니던가? 혹시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자격(資格)
【명사】
1.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
2.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일정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

역시,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다. “자격”이라는 낱말은 “과연 그럴 만한가?”를 물을 때 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 ⓒ경성대학교출판부

그래서인지 “삶으로서의 자격”이라는 구절이 영 마뜩치 않다. 삶에 대해 자격을 운운하는 게 과연 말이나 되는가? 삶의 자격을 따지는 것은 누군가의 삶은 살 만한 삶이고 누군가의 삶은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 자체는 가능할 수 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묻는 것, 그것이 삶으로서의 자격을 따지는 거라면, 삶에 대해 자격 운운하는 것도 말은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삶에 대해 자격을 논할 수 있다고 치자. 어떤 삶이 자격을 갖춘 삶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판단의 권위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너에게는 삶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너의 삶은 살 만한 삶이 아니다. 너는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은 누가 갖는 것인가? 그러한 “자격”을 갖춘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을 그려보았다. 나만의 상상이니 조금은 낯간지러워도 남에게 귀감을 주는 삶으로 평판이 자자한 그런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으련만, 한낱 가십거리밖에 안 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 먼저 떠오른다. “걔 아직도 여전하다며?” “어머 어머, 그 나이 처먹도록 뭐 하고 살았다니?” 수군수군 수군수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큰 죄를 지었다거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면서도 누군가 내 삶을 비웃지는 않을까,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이 빠진다.

아마도 스스로가 “일반적인 삶의 패턴“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에 “일반적인 삶의 패턴”이라고 할 만한 게 과연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평범한 삶, 보통의 삶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모델은 분명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사회지표를 나타내는 통계청 자료만 봐도 어떤 삶이 보통의 삶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2012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균 여성”은 29.1세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에 첫 아이를 낳는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5세~29세가 71.4퍼센트로 가장 높고, 30세~39세는 “결혼·육아 등으로” 55퍼센트 대 수준으로 크게 하락하였다가 40대 초반부터 다시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여성인구가 증가한다.

“평균 여성”의 삶에 비추어 보자면, 30대 초반인 나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어야 하며,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거나 휴직을 한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였다. 지금이야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고 있지만, 매달 40만 원의 월세는 아직도 부모님께 의존하고 있다. 아이는커녕 아직 결혼도 안 했고 향후 몇 년 안에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평균 여성”의 삶에서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것 같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자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괴감을 키우고 스스로 위축된다. 삶에 떳떳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내가 꿈꾸는 “다른 삶”을 위한 준비 기간이 긴 것뿐이라고 자위해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그 “다른 삶”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함을 들키기 싫어 괜히 센 척을 해본다. 내 삶이 아무리 비루해도,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뭐람! 너나 잘 하세요!

3.

“자격”이란 말에 너무 발끈한 나머지, 정작 <불확실한 삶> 얘기를 못했다. 이 책은 버틀러가 2001년에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사건인 9.11 이후에 쓴 다섯 편의 논문을 묶은 것이다. 9.11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매스컴을 통해 사건의 현장을 본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도 충격공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폭력으로 기억되고 있다.

저 멀리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건 선정적으로 보도를 한 언론의 탓도 크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12쪽)”이 그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도 분명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든 예기치 못한 폭력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나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고, 그로 인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슬픔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버틀러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슬픔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논문 중 특히 2장의 논문 ‘폭력, 애도, 정치’에서 그 주장이 강하게 드러난다. 어떤 슬픔은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확장되는 반면, 어떤 슬픔은 사유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세계 무역 센터의 희생자들은 말 그대로 “무고한 희생자”로 애도되고 신성하게 된다. 반면 미국의 “공정한 전쟁”에서 살해된 이들은 알려지지 않고, 따라서 애도되지 않는다. 애도될 수도 없다.

어떤 삶은 애도할 만한 것이고, 어떤 삶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인가? 누구의 삶이 삶다운 삶인가? 목적의 왕국의 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할진데, 어째서 누군가는 애도되고 누군가는 애도 받지 못하는 걸까?

“세계 무역 센터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에 겪었던 일에 대한 복잡다단한 보도는 영혼을 압도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 보도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강렬한 동일시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서사들이 어떤 인간화하는 효과를 갖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통해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서사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사람들과 나란히 사라진 삶 역시 인간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도들이 그 장면을 무대화하고 그러한 애도가능성 안에서 ‘인간’을 확립하는 서사적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터넷에 올라오고 주로 이메일 접촉을 통해 유포되었던 몇몇 보도를 제외한다면 어딘가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된 아랍인들의 삶을 다룬 서사를 공적 매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애도할 수 있는 삶이 어떤 조건하에서 확립되고 유지되는지, 어떤 배제의 논리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삭제와 탈명사화(denominalization)의 실천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69~70쪽)”

이런 대답이 가능할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배타적인 “인간” 개념을 생산하고 유지시킨다.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에 대한 반응과,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가하는 차별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특히 그 범죄가 살인 등의 강력 범죄였을 경우 그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묘사된다. 특정 개인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외국인 범죄”로 기술됨으로써 불특정 외국인에 대한 불안과 분노가 가중된다. 특히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인종의 사람들은 모두 “한층 강화된 감시의 대상이 된다(71쪽).”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애도될 수 없기에 인간이 아니며, 인간이 아니기에 애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불안과 공포를 쉽게 그들에게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아무런 형태도 없는 인종차별주의,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게 된다.(71쪽)”

4.

예기치 못한 폭력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포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이 드러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이다. 신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살아가면서 상처를 피해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상처받기 쉽다는 취약성,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는 이 취약성이 우리를 “우리”로 묶어주는 건 아닐까? 이 취약성으로부터 배타적이지 않은 “인간” 개념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나는 “평균적인 삶”에서 먼 삶을 산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고백했다. “자격”이라는 단어에 너무 꽂힌 나머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상상의 나래도 펼쳤다. 하지만 그때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 어쩌면 삶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취약성, 폭력에 대한 공포.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훅 밀려온 것이다.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러나 애도될 수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에, 그 삶에 폭력이 가해진다고 한들 그것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쉽게 만연하듯이 말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폭력을 당했는데 나의 삶이 삶다운 삶이 아니어서 그 폭력이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분명 폭력을 당했는데, 누구도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해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을 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공포와 슬픔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무기력해지는데, 버틀러는 바로 그 슬픔을 정치를 위한 자원으로 만들자고 말한다.

“슬픔이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열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제공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의식적인 설명을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자율적이고 강한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바로 그 생각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50쪽)”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이 결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나의 운명이 당신의 운명과 근원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를 횡단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반대 논증을 할 수 없는 관계성이다(49~50쪽).” 이러한 관계성,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관계적 끈(49쪽)”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인간 공통의 취약성”이다.

인간 공통의 취약성은 “나”의 형성에 선행하는 조건, “우리가 붙잡고 논쟁할 수 없는, 처음부터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였다는 조건이다.(61쪽)” 이와 같은 조건으로서의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윤리적인 책임감, 즉 “우리가 직접 겪은 것과 같은 폭력으로부터 다른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게 만들 원칙(60쪽)”이 나오는 것이다. 슬픔이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슬픔을 통해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이 제안하고자 한 것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폭력과 공모하는 우리, 상실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과 그 결과로서의 애도의 과제, 이런 조건에서 공동체의 토대를 찾는 것, 이 모두와 연관이 있는 정치적 삶의 차원을 고려하자(45쪽)”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슬픔이 정말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속 시원히 대답까지 해주면 좋으련만, 버틀러는 역시나 친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 다른 사유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의 슬픔, 나의 불안, 나의 공포, 이 모두가 떨쳐버릴 수 없는 나의 취약성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제쳐두는 대신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그것이 다른 사유를 위한 첫걸음일 테니까.

당신은 진짜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나?[철학자의 서재]

당신은 진짜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나?[철학자의 서재]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

남기호 연세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얼마 전 대선으로 국민의 절반은 무척 기뻐하고 나머지 절반은 무척 낙담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사회 복지가 정책의 전면에 등장할 것이며, 비리 척결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기에 어느 정도 정치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됐든 이제 선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지기에 정치 행위는 대다수 선거권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정치의 개선은 국민 모두의 사회 문화적 책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주변에 늘 전경들을 볼 수 있었던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꽤나 좋은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정권 말기가 되면 비슷한 문제들이 터지고 고질적인 병폐가 반복된다.

흔히들 지금한국 사회를 소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 실질적 민주주의 시대라 부르곤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제 정치적으로 안착한 상태이니 무엇보다 시민 삶과 관련된 민주주의의 내실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제 민주화니 교육 민주화니 사회 복지니 반값 등록금이니 하는 말들은 다 비슷한 말들이다. 그러나 내실을 기하는 이 모든 문제의식들은 한 가지 논점을 기정사실로 전제한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민주화된 사회이다.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의사 표현할 수 있고 단체를 결성할 수 있으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정말 그런가.

민주주의의 역설

▲ <민주주의의 역설>(샹탈 무페 지음, 이행 옮김, 인간사랑 펴냄). ⓒ인간사랑

일반적으로 현대 민주주의는 근대 정치의 산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근대 정치사상가 중 자신의 이론에 민주주의란 이름을 붙여가며 논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기적인 인민 집회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하려던 장 자크 루소조차도 민주정은 역사상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제도라 말한다. 오늘날 민주적이라 평가되는 사상들을 피력할 때 그들은 오히려 공화주의나 입헌주의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곤 했다.

근대인들에게 민주주의란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를 의미했으며, 쉽게 대중 선동에 휘말려 소크라테스를 죽일 수도 있는 정치 제도 정도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이 그렇게 목말라하고 찬양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테네 중우 정치의 위험을 극복했는가. 민주적 자유는 정치적 억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가. 민주적 평등은 사회적 차별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절차적으로 보장된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이 더 쉽게 억압과 차별을 조성하지는 않는가.

샹탈 무페는 바로 이 역설의 관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역설이란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결코 화해될 수 없는 긴장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 우린 분명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기에 말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 민주주의의 계보를 좇아가며 힘들게 에둘러 갈 필요는 없다. 우리 삶에 흔히 문제되는 것들은 자유와 평등 간의 충돌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기업에게 영업의 자유를 먼저 보장해야 하는가, 아니면 골목 상인들의 평등한 상권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하는가. 교육의 평등을 고려해 등록금을 없애야 하는가, 아니면 경제적 능력을 고려해 자유롭게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가. 왜 내가 자유로운 직업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타인의 평등한 복지를 위해 세금으로 내야 하는가. 나는 정치가를 자유롭게 비판한 것뿐인데, 왜 그 정치가는 자신의 평등한 인권이 침해되었다고 고소하는가.

사실 근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꺼려했던 민주주의란 표현이 대중적으로 일상화된 것은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한 프랑스 혁명 전후 시기였다. 이 혁명 이념들이 민주주의 정치사상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논의들은 대부분 자유와 평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들로 가정한다. 나치에 이론적으로 봉사독일의 칼 슈미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페의 역설은 이 슈미트의 민주주의 이론에 의거한다.

슈미트의 경고

독재에 봉사한 사람의 이론은 물론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해서 전혀 교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슈미트는 나치 당원에 가입하기 이전부터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democracy)는 원래 인민 즉 데모스(demos)의 지배(kratia)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민이 있어야 하고, 이들의 지배권이 있어야 한다. 인민 주권이란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지닌 인민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일 수 없다. 주권을 지닌 인민이란 엄밀히 말해 민족적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동질적인 공동생활을 영위해 온 사람들로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권을 지닌 인민이란 그런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평등 개념이지 지구상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무차별적인 개념일 수 없다. 이러한 인민 주권 개념에 기초해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제한을 철폐하려는 흐름이 있다. 자유(freedom)란 본래 어떤 제한이나 속박으로부터(from) 벗어남(free)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어야 하고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거나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슈미트는 자유주의가 경제적 개념이지 결코 정치적 개념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의거해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이 많은 국가의 주권을 침해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즈음 글로벌 세계 시장이니 인터넷 국제 소통이니 하는 것들도 슈미트에겐 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을 해치는 흐름일 뿐일 것이다. 막대한 피해 보상금을 떠안고 허덕이던 패전국 독일의 인민으로서 슈미트의 고민은 그러했다.

따라서 슈미트의 결론은 이렇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제한적 인민의 평등한 주권을 해체하는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가 인종을 차별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잘 맞닿는다. 그렇다고 슈미트의 결론을 무조건 부정할 수만도 없다. 우파든 좌파든 민주주의 정치는 어느 정도 제한된 평등 개념에 기반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가 자유주의를 무제한 허용하게 되면, 국가적 정체성이 뒤흔들릴 수 있고 시민의 공동체적 삶이 파괴될 수 있다. 과도한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점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무페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평등과 자유의 결코 화해될 수 없는 긴장을 슈미트처럼 상호 배척적인 권력관계로만 보지 말고 항상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경쟁적 대립 관계로 보자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설은 결코 조화되거나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 편의 승리만 노릴 수도 없다. 차라리 이 역설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인정하고 상호 다원적 경쟁의 관계로 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실 민주주의 진단

민주주의의 역설을 한 편의 승리를 통해서만 해결하려 할 때 생기는 문제점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제한적 평등이 극단화되면 북한 같은 사회가 될 것이다. 시민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다른 민족이나 시민에 대한 차별 의식이 기세를 발휘할 것이다. 민족의 평등한 주권 운운하며 매년 북쪽에 풍선을 날리는 사람들의 극단적 민족주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자유주의가 무제한적으로 허용되면 양육강식의 사회가 될 것이다. 대기업의 골목 상권 침입도 자유라는 인권에 의거해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흔히 받아들이는 위험한 자유주의도 있다. 이른바 재테크라는 말로 통용되는 우리 일상의 돈놀이가 전부 그렇다. 집이 기본적인 거주의 평등한 보장을 넘어서 개인의 자유로운 자본으로 인식된다.

땅도 마찬가지이다. 기업가만 자본가가 아니라 집이나 땅, 어떤 것이든지 팔 수 있는 것을 가진 자는 다 자본가이다. 재산 증식을 위해 대출까지 받아가며 집을 사고 땅을 사고 주식 시장으로 몰려간다. 그 속성으로 볼 때 자본주의가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과도한 자유주의는 의회 정치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 자유로운 의사 진행 발언으로 끊임없이 회의만 하고 국가 중대 사안의 결정은 한없이 지연된다. 그러다 안 되면 날치기를 한다. 모두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침식해 평등을 무제한적으로 허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무페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대부분 자유주의에 침식당한 것으로 진단한다. 특히 시민의 자유라는 수식어로 재산 증식의 기회를 보장하는 정책을 무수히 쏟아내는 인기 영합적 우파 정당이 많은 국가들에서 권력을 잡았다. 전통적으로 복지를 주장하던 좌파 정당들은 이미 신자유주의에 스스로 백기를 들었다. 그래서 복지조차도 승리한 우파의 담론이 되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우파의 복지 정책이란 자유로운 경쟁에서 이긴 자가 자비롭게 나눠주는 혜택 그 이상이기 어렵다. 언제쯤 우리는 가난한 자가 자존심을 구겨가며 혜택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복지는 목마르게 간청하는 혜택이 아니라 평등한 시민의 기본권이어야 한다.

그러나 무페의 경쟁적 다원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좌우 경쟁 세력들 간의 상호 인정이 필요하다. 복지가 경제 논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좌파가 필요하고 자유로운 삶이 인민의 평등 논리에 의해 억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파가 필요하다. 이렇게 경쟁적 다원주의는 좌우파 정당의 존립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런 구도 하에서 매번 선거를 통해 한 쪽이 권력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다른 한 쪽을 정치적 심의 과정에서 배제해서도 안 된다.

민주적 합의의 조건

그렇다면, 경쟁적 다원주의에서 민주적 합의는 어떻게 도출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무페는 민주적 합의 모델로서 존 롤스나 위르겐 하버마스가 아니라 분석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참조한다. 그가 보기에 롤스는 자유주의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에 너무 편향되어 있다. 어느 쪽으로 편향되어 있든 이들은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합리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정치의 본질은 권력을 잡는 데에 있지 합리성을 내세우는 데에 있지 않다. 그리고 선거를 통한 권력 획득의 기준은 언제나 시민들의 삶의 형태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있다. 자유주의가 더 옳은지, 민주주의가 더 옳은지, 자유민주주의 말고 더 좋은 체제가 있는지, 이런 문제들은 모두 경쟁적 다원주의의 과정을 통해 결정될 열린 문제이지, 정치 행위 이전에 미리 결정되어야 할 닫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 획득을 본질로 하는 정치 행위는 차라리 비트겐슈타인의 맥락주의에 의거해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에 따르면 경쟁하는 다원적 정치 세력들은 정치 현장에서 시민의 삶을 놓고 언어 게임을 하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더 나은 시민의 삶의 형식을 제공한 쪽이 권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물론 권력 획득과 행사에는 엄중한 책임이 따르며 경쟁 세력들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늘 심판받는다. 경쟁적 다원주의에서 집권 세력은 언제나 일시적인 승리자일 뿐이며, 모든 합의는 잠정적 헤게모니의 일시적인 결과일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민주주의라면 언제나 민주적 대립 자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결정이든지 늘 배제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시적 결정을 절대화해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 경쟁자 없는 정치는 항상 독재로 치달았다. 그때마다의 결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을 경쟁자로서 인정하고 표출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페가 제시하는 문제의식과 그 대안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것은 참된 민주주의가 아니다. 갈등과 대립은 민주주의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 건강성의 지표인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런 이론적인 흥미만 생기지 않는다. 지난 선거철에 모 대학 교수는 좌파의 비판을 재비판하는 일방적인 보고서를 학생들에게 과제로 냈다고 한다. 요즈음은 과격한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인터넷을 도배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누구는 처벌받고 누구는 점잖게 계도된다. 비리로 투옥된 전직 대통령 가족은 벌써부터 사면한다고 난리다.

우리에게 한번이라도 건강하고 책임 있는 경쟁 관계가 유지된 적이 있는가. 교육도 직업도 재산도 승자독식이 합리화되는 사회에서 정치마저 날치기를 빈번하게 일삼는다. 우리는 진정 민주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친 노무현이면 콩쥐, 친 이명박이면 팥쥐?![철학자의 서재]

친 노무현이면 콩쥐, 친 이명박이면 팥쥐?![철학자의 서재]

오항녕의 <조선의 힘>

 

오상철(한철연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PC방에서 들킨 대한민국

대선 기간 막바지, PC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문재인은 빨갱이야”, “맞아 맞아, 근데 박근혜는 친일파래”, “히히, 그럼 누구 찍어?” 희희낙락하며 주고받는 이 대경대화에 아연실색하여 돌아보니 허탈하게도 초등학생 몇몇 애들이었다.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좋은 놈이야?’

아이들은 한 후보를 빨갱이라 하고, 한 후보를 친일파라 말하고 있었다. 주변, 특히 인터넷에서 연일 쏟아지는 책임 불명의 말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발음되고 언어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조용히 모니터 화면에 몰두했다. 세상의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결정하는 일이 당장의 온라인 게임보다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름이다.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게, 회자되는 소재에 대해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아이들은 각자 사유에 의한 판단이 아닌 직관적인 선택을 했고, 그 둘의 차이는 다행히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어느 무리에 소속되기를 바랐을 뿐이니까. 선택은 나열된 사안 중에 단지 한 가지를 고르는 행위이고, 판단은 특정한 상황에서 사리 분별을 통해 결정하는 행위라고 하자.

PC방 아이들은 손쉽게 ‘선택’했지만 그것은 ‘판단’이 아니다. 그리고 선택도 단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양자택일 구조의 선택이었다. 한쪽이 좋은 사람이면 한쪽은 나쁜 사람이다. 다른 경우는 없다. 내 편은 좋은 사람이고, 내 편이 아닌 사람은 적이고, 적은 나쁜 사람이다. 비단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논리 구조의 문제일까? 선택에는 마땅히 그 선택을 이유로 한 목적이 수반된다. 그런데 그 목적이 단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요즘 한국에선 특정 당의 정책을 비판하면, 당 그 자체를 비판하는 정치 세력으로 치부된다. 만약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반정부주의자로 둔갑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복지 정책에 비판적인 사람과 정부 정책에 긍정적인 사람이 있다. 전자는 기존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후자는 기존 정책이 유지되길 바란다. 점진적 보완과 수정으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정부의 정책은 다양하고, 그 분야에는 가짓수도 대단히 많다. 그런데 정부의 정책 중 일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말미암아 그를 반정부주의자로 매도하고, 심지어 비난한다. ‘정책’에 관한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정책’ 선택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꼬고 야유한다.

‘정책의 다름’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대상의 한 부분이라도 누군가가 문제 삼으면 곧바로 선택에 들어간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 반정부주의자고, 나쁜 사람이다. 이런 바탕에선 정책을 논할 수 없다. 이런 판은 광장이라 할 수 없다. 인터넷 공간을 부유하는 한낱 정체불명의 구호들을 입으로 배설하고 있던 PC방 초등학생들의 수준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 사유화를 거치지 않은 채 ‘선택’에만 국한한 논의는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타당한 정치적 행위 자체를 불신하게 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한다. 결국 선택의 목적이 적에 대한 확신이나 자기 방어가 되어, 스스로 만든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우리 사회는 이미 상당 부분 이런 이분법적 사고 프레임에 잠식되어 있다.

나는 우선 이런 사태의 원인 중에 하나를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조선 역사 왜곡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에선 이 프레임에 대한 한 편의 근거를 제시한다.

콩쥐/팥쥐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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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오항녕의 <조선의 힘>은 조선이 왕조를 50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저력에 관해 말하고 있다. 최고 권력자인 왕에 대한 교육과 견제 작용의 경연(經筵), 역사의 흔적 실록(實錄), 200년간 진행된 대동법(大同法), 오래된 미래 조선 성리학(性理學) 그리고 조선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풀어가면서 조선 시대의 가치를 조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선이 근대로서 전환 실패에 따른 실패한 체제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근대로의 전환은 시험에 합격, 불합격을 따지듯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일부만 제외하고는, 지구상에 조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명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5쪽)

근대를 척도로 한 역사의식과 서구 역사를 잣대로 한 시대 의식이 조선을 편견으로 바라보게 하진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의 유전인자에 원래 사대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식민사관의 세뇌가 우리의 역사적 자부심을 억압하고 있진 않는가?

저자는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폭력적인 프레임을 말한다. 근대를 절대화하여 ‘근대=선’/’조선=전통=악’이란 도식이다. 나아가 ‘사대=나쁜 나라’ 대 ‘주체=좋은 나라’라는 전형적인 ‘콩쥐/팥쥐’ 구도를 형성한다고 한다.

‘콩쥐/팥쥐’ 구도는 판단이 아닌 선택이고, 선택이 아닌 강요이다. 이미 좋은 편, 나쁜 편이 결정되어, 좋은 편은 무엇을 해도 좋은 일이고, 나쁜 편은 무엇을 해도 나쁜 일이 되는 구조, 그리고 내 편이 아니면 다 나쁜 편이고 내 편을 싫어하면 다 나쁜 편이 되는 구조에서 우리의 선택은 ‘과연 선택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돌출시킨다.

조선의 팥쥐 대동법, 성리학, 사대

조선에는 어떤 콩쥐와 팥쥐가 있을까? 먼서 대동법 콩쥐/팥쥐를 살펴보자. 대동법은 공납의 폐해를 개선하고자 백성을 위해 펼쳤던 정책이다. 약 200년이 걸린 이 정책은 조선 사회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대동법을 정책이 아닌 지주/소작이라는 계급론으로 환원하여, ‘콩쥐/팥쥐’의 구도로 만들어 버렸다. 양반은 지주이자 팥쥐, 백성은 소작이자 콩쥐로 만들었다. 그리고 양반 세력에 맞서 대동법을 실행하고자 했던 왕도 콩쥐가 되었다.

사람들은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은 놈들이지, 그놈이 그놈이야” 하면서 정치인들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자들로 보면서 서민과는 다른 집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대동법은 누가 추진했을까? 백성을 사랑한 왕이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양반들과 싸워서 이긴 결과일까? 아니다. 대동법의 제안도 실행도 모두 양반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관료들이 양반이었고, 지주들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정책을 논의하고 실행할 때 어떤 관료는 정통한 지식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개혁을 추진하고, 어떤 관료는 사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며, 어떤 관료는 반대하기도 한다. 방향이 같아도 진단이 다를 수 있고, 그에 따라 급선무를 달리 생각하기도 한다. 재정 안정을 고려할 수도 있고, 군비를 고려할 수도 있으며, 민생을 고려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다기요소를 제도화해 현실에서 운영하는 것이 정책이다.” (127쪽)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환멸은 그들을 정책을 내는 사람이 아닌 계급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팥쥐가 있다. 조선 성리학이다. 사람들은 흔히 조선이 망한 이유를, 현실 감각이 없는 이상주의 성리학자들이 조선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안위는 뒤로 한 채, 예송 논쟁과 형이상학 논쟁(주리(主理)-주기(主氣))에 대한 담론만 일삼았기에 나라가 강해지지 않고, 일본에게 강제 합병되어 조선이 망했다고 한다. 500년간 이어진 왕조에 대해서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닐까? 이런 논리는 성리학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주기-주리의 개념을 통해 정치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사상사와 정치사의 분리 현상이다. 일제 시대의 다카하시 도오루의 주리-주기 논리를 이어받은 이병도가 여러 유보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단칠정 논쟁과 호락 논쟁을 관념적 독단 정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의 당쟁론 정도에서 이해하게 되는 근원적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0쪽)

조직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를 제시한다. 그리고 조직은 지향하는 이념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공고히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의 체계화 과정만 싹둑 잘라 놓은 단편만으로 조선 성리학자들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관념 논쟁에만 빠져있던 성리학자는 팥쥐가 되고, 현실적인 이단자는 콩쥐가 되었다. 그리고 나쁜 성리학자들은 주자학과 다른 경전 해석을 하거나 유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하는 좋은 이들을 이단이자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조선의 지배층은 자아도취에 빠진 히스테리 환자이자, 소인배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과거 청산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기 위한 기본 전제이다. 역사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당하기란 퍽 어려운 일이다. 친일파 청산도 같은 선상에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대한민국의 친일파에 대한 처분은 그리 명백하지 못하다. 아니, 아직도 끌려 다니고 있다. 우리가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혹시 팥쥐가 되어버린 조상 때문은 아닐까.

마지막 팥쥐는 ‘사대(事大)’이다. 사대란 약자가 강자를 섬긴다는 뜻이다. 후금이 만주에서 흥기했을 무렵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다. 동생들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패륜아이자, 끝없는 궁궐 공사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 간에 실리 외교로 재조명받는 왕이 되었다. 실리 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콩쥐가 되고, 사대주의 명분론으로 국익을 망친 반정 세력은 팥쥐가 되었다. 명분은 헛된 것이고, 실리는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분과 실리는, 같이 가면 좋은 것이 아니라, 원래 같이 가는 것이다. 명분 없는 실리는 오래 가지 못하고, 실리 없는 명분은 공허한 것이다. 곧 원칙 없는 정책, 비전 없는 정책이 오래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분과 실리를 나누어 어떤 역사적 사실을 해석했던 우리의 오염된 관점을 이쯤에서 반성해야 한다.” (223쪽)

정책에서 명분만 있는 혹은 실리만 있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명분과 실리라는 이분법적 구조에서 명분만 따지는 사대주의자들을 비판할 근거가 생겼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외교와 반정 세력의 명분론을 대립시키면서, 이 명분론을 명에 대한 사대주의로 규정했다. 식민사관의 사대주의론은 이렇게 광해군이 부활하면서 완성되었다. 타율성론-사대주의론-실리 외교론은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사대주의론은 식민지 조선인,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죽은 자만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망한 나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사대주의-명분론 vs 실리론” (235쪽)

오항녕이 말하는 콩쥐/팥쥐 구조는 완성되었다. 이제 현재 대한민국에서 콩쥐/팥쥐 구조를 맛보기로 하자.

콩쥐/팥쥐 맛보기

현재 한국에서 콩쥐/팥쥐 구도를 살짝 대입해보자. 노무현-친노 세력이라는 팥쥐를 만들었다. 콩쥐는 반노 세력이지만, 그 의미의 폭은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친노’라는 개념 자체를 일부 언론에서 폭력적 이분법 논리로, 더군다나 그 스펙트럼조차 모호하게 퍼뜨렸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들은 노무현을 팥쥐로 만들고, 노무현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정책이나 정치력과는 상관없이 필요성이 있다면 어떤 관계든 끌어와서-팥쥐로 몰고 한 패거리라고 몰아붙인다.

노무현은 나쁜 사람인가? 대통령 시절의 자질 문제인지, 정치적인 이유인지, 자신의 이익과 관련해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고, 한국을 망쳤기 때문에 나쁜 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을 노무현과 함께 팥쥐로 만들어버렸다. 노무현과 관련된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구도를 만들었다. 비판하는 사람 중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들과 무관하다고 말하거나 꼬리 자르기를 하였다. 이는 프레임을 동등하게 형성하지 않고, 편한 대로 형성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는 논의의 차원을 벗어난 통일성 없는 잣대이다.

오항녕은 이러한 프레임에 대해 “<국화와 칼>이란 책이 출간된 뒤, 마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나 21세기 한국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일본의 지식인들도 베네딕트가 강제한 ‘표상’에 대응했다. 전형적인 것이 1950년에 글을 발표한 와쓰지 데쓰로처럼 ‘일부 일본인은 그렇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대응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 프레임에 빠진다. 말하자면 해당 명제에 대항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내면화해버리는 것이다”(237쪽)고 말한다.

중용의 역설 : 진짜 우리의 이름은?

한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적절한 중도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다른 이들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 스스로도 자기 시야에 매몰되지 않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장려하는 중용의 미덕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과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가 주류를 이루는 요즘의 여론 환경에서 사람들은 앞 다퉈 극단을 좇는지도 모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하나의 극단적인 주장이나 입장이 없으면 주목받지 못한다는, 수많은 정보와 말들의 편린 속에서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시나브로 우리의 의식을 점령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예컨대 ‘비겁’과 ‘만용’ 사이의 가운데쯤에서 ‘용기’를 택하듯이 극단(side)과 극단(side)을 피해 가운데를 선택하는 서양 철학에서의 중용 개념과, 동양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중용 개념은 사뭇 다르다. 왼쪽의 모서리(side)와 오른쪽의 모서리(side) 사이의 가운데 어디쯤을 선택한다 한들 그것 역시 결국은 하나의 모서리(side)가 될 수밖에 없다. 동양 철학에서의 중용이란 단지 입장의 양 극단을 피하라는 구호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존에 산재한, 그리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편견과 미혹 없는 마음으로 사물을 평직(平直)하게 바라보는 것.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한 일련의 공부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중용이란 결국 하나의 온당한 모서리(side)를 가지기 위한 치열한 성찰과 연마(硏磨)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완벽한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지만, 어쩌면 그것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나은 방법론을 개발하고 관점을 공유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거기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진실은 하늘의 몫이지만,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라고, 성리학의 발달과 함께 사서의 하나가 된 중용의 저자는 말했다. 세상엔 정말로, 콩쥐도 팥쥐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이름이 콩쥐이고, 팥쥐일 필요는 없다. 콩쥐와 팥쥐 사이, 진짜 이름을 찾은 사람끼리 있는 힘껏 자기 모서리를 부딪치고 또 조율하는 세상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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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의 첫걸음, 재벌 딸과 노동자 아들 결혼부터![철학자의 서제]

사회주의의 첫걸음, 재벌 딸과 노동자 아들 결혼부터![철학자의 서제]

조지 버나드 쇼의 <쇼에게 세상을 묻다>

김정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대선이 끝났다. 주어진 결과에 대해 누군가는 안도와 함께 환호할 테고, 누군가는 아쉬움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또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관심도 없는 사람도 있겠다. 정당한 절차에 따른 결과인 만큼, 일단 결과는 인정하고 볼 일이다. 이제는 승리한 진영과 실패한 진영 모두 결과에 대한 분석과제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저마다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내게는 이런 분석에 힘을 보탤 능력이 없다. 단지 유권자들이 어떤 경위로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모든 유권자는 후보들을 정책적으로 따져보고,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까? 정말 세대와 지역갈등만으로 설명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정치를 왜 알아야 하나?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 버나드 쇼의 만년 저작 <쇼에게 세상을 묻다>(김일기·김지연 옮김, 뗀데데로 펴냄)가 눈에 띄었다. 거의 100년을 살았던 영국의 극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쇼는 풍자와 독설로 유명한 인물이다. 극작가의 정치론답게 책은 첫머리부터 정치와 관련된 이 책이 지루하다면 차라리 추리 소설이나 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쇼는 토지와 정당 제도, 민주주의의 기원과 불평등이 나타난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야말로 ‘정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 각 분야 별로 상당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쇼는 본인이 만년에 정치에 관련된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정치적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요즘에는 누구나 정치에 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대부분이 아주 기초적인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우리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과 다르다. 그 ‘조금’의 차이가 평화롭고 합헌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국토의 절반을 폐허로 만드는 내전을 야기하기도 한다.”

▲ <쇼에게 세상을 묻다>(버나드 쇼 지음, 김일기·김지연 옮김, 도서출판 뗀데데로 펴냄). ⓒ뗀데데로

우리는 쇼가 말하는 ‘조금’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선거 때만 다가오면 우리는 저마다 후보들을 평가하고 논쟁한다. 그러나 저마다 평가의 잣대는 일정하지 않다. 대부분 일부만 보고 정치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려 든다.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이지만, 결론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할 몫이 되어버린다. 선택권의 행사는 잘 했지만,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장면을 우리는 이미 수도 없이 보았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조금’도 몰랐던 탓이 아닐까.

유권자의 선택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경험에 따른 선택 기준이 개인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보들의 정책을 냉정하게 살피고 투표를 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단순히 고향이 같아서 찍고, 누구는 특정 후보가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후보를 찍는다. 혹은 특정 정당만 보고 찍는 경우도 있다.

물론 경험의 다양성은 어쩔 수 없다. 자라환경, 가지고 있는 재산과 규모, 소속된 일터의 성격, 사회적인 명성과 위치 등 수많은 요소들이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선거의 흐름에 따라 감정적으로 투표를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정책의 성격과 방향을 보고 선택한다. 이런 경향은 진보와 보수, 지역과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경험의 다양성에 비해 찍을 수 있는 선택지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던진 한 표 한 표는 모두 동등하며 소중하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정치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갈등의 원인 : 소득의 불평등

쇼의 설명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결국 평등을 의미한다. 자연이 부여한 각자의 재질과 능력은 다르지만 신체적인 욕구는 모두 같다. 따라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는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같은 계급의 선원은 같은 돈을 받는다. 여기에 개인의 자질이나 재능의 차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자질이나 재능은 돈으로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에 따라 쇼는 소득의 평등화를 주장한다. 소득의 평등화는 (단순히 모두의 소득이 동등해지는) 수학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일정 단계에 이르면 수학적 평등이 무의미해진다. 1년에 수백 파운드도 못 버는 계층과 수천 파운드를 버는 계층의 차이는 끔찍하다고 말한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두 계층 사이에 결혼이 제한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사회는 민주적 사회주의이다. 쇼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모든 국민이 충분한 소득과 평등한 기회를 누리며 누구나 계층에 관계없이 결혼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필수품과 사치품이 우선순위에 따라 생산되고, 돈에 매수된 변호사들이 사법 정의를 흔들지 못하게 될 때 비로소 그러한 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다. 소득 평등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다. 현재의 사회 계층이 전체적으로 상향 조정되면,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소득과 계층에 관계없이 결혼할 수 있는 사회’라니. 가능하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참 꿈같은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는 일은 찾기도 쉽지 않고, 결혼은커녕 연애마저 포기해야할 지경에 놓인 21세기 초 한국 젊은이들의 상황을 보면 쇼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소득의 불평등이 해소되면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어진다.

“1년에 수천 파운드를 버는 A는 1주일에 고작 몇 파운드 버는 B에 대해 거의 전제 군주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겠지만, B도 수천 파운드를 벌게 되고, A는 한 10만 파운드쯤 번다면 B가 A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 누구든 사회 계층에 관계없이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평등해질 것이다.”

소득 불평등 해소의 기준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지적한 점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결혼’이라면 경제적인 부분 말고도 따질 부분이 많아 상상만 해도 피곤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결혼은 두 사람의 사랑 외에도 경제적인 측면과 계층적인 측면까지 결합되어 있다.

쇼가 말하는 ‘소득의 평등’은 오늘날 주장되고 있는 ‘기본 소득’ 개념과도 비슷하다. 사람으로서 최소한 누려야 할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자는 취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쇼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소득의 평등이 곧 정치적인 평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단순히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평등한 것은 아니다. 소득의 불평등이 해소되면, 계층과 갈등 자체가 사라지게 될까? 쇼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사회주의 체제에도 계층이 존재할까? 정당, 종교, 노동조합, 전문가협회, 클럽, 정파, 파벌에 더해서 새로운 전문가 집단까지 존재해야 할까? 물론이다. 아마도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겠지만 항상 대화하고 서로 혼인할 수 있는 조건, 그러니까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엄청나게 많은 계층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계층 간 갈등이 있다고 해도 갑을 관계의 갈등이 아니다. 평등한 관계를 전제한 갈등이다. 누구나 어느 계층에 속해 있고, 외부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며 토론할 수 있다. 다만 쇼가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점진적인 단계에 따라 소득의 평등화를 이뤄야 한다는 원론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사실 소득 불균형은 비정규직 문제, 비현실적인 최저 임금 문제만 제대로 해결되어도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은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여가와 미학적 인간

쇼는 19세기의 사회주의가 가난을 해소하는 데 지나치게 집착한 반면 여가와 문화를 향유하는 데에는 지나치게 소홀했다고 평가한다. 바로 소득의 불평등을 해결한 다음 단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소득의 평등은 곧 여가를 가져온다. 최소한의 시간만 노동에 투자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돈을 더 벌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여가의 활용이다.

“인간은 자연에 예속된 존재라는 것은 초당파적인 대전제이다. 따라서 노동이라는 짐을 분담하고 여가라는 이득을 나눠가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최대한도의 복지를 누리도록 인간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를 갖지 못하는 반면 10퍼센트의 사람들은 늘 여가를 즐기고 전혀 또는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얼마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지는 체감하기 어렵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리려면 여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가의 활용은 미학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미학이라니? 예술을 말하는 건가?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저런 배부른 소리를 꺼내는 것 자체가 어이없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여가를 제대로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한다. 이들에게 미학적인 취미는 사치에 불과하다. 쇼는 이런 생각은 오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술에 대한 그러한 오해가 생긴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 계급이 토지를 전용하면서 임금노동자(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겨났고, 이 임금 노동자들이 먹고살기 바쁜 나머지 문화와 여가와 용돈은 꿈도 못 꾸는 상황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쇼는 계층과 소득 불평등의 기원을 토지 문제로부터 설명해 나간다. 미학적인 취미를 만족시킬 수 있으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60년 전에 한 말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돈도 시간도 부족하다. 심지어 우리는 여가가 있어도 어떻게 쓸지 제대로 배운 적조차 없다. 우리에게도 미학 교육이 필요한 까닭이다. 단순히 시험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쇼가 말하는 미학 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다.

“우리는 취향을 가진 수백만의 관중, 청중, 감식가, 비평가, 애호가를 길러내야 한다. 한마디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한 줌의 프로페셔널을 길러내는 한편 수많은 아마추어들도 양성해야 한다.”

사람들을 모든 분야의 천재로 길러내는 교육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미학 교육을 통해 누구나 취향에 맞는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제공할 수 있다. 꼭 전문가가 아니어도 좋다. 쇼가 보기에 가난, 무지, 고된 일, 배고픔은 재능과 천재성을 가로막는 벽이다. 공평한 출발선이 주어지면 천재성은 스스로 드러나고, 발현될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격변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이념의 대결과 지역 간 갈등이 이어졌고, 이제는 세대 간 갈등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비해 다양한 정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로막는 제도의 개선과 사회의 여러 불평등한 요소를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반 영국과 21세기 초 한국의 상황은 동일하지 않지만, 쇼의 정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겉으로 드러난 세대와 지역의 갈등 이전에 근본적으로 소득 불평등의 측면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핵발전소 도시 No! 에너지 자립 도시로![철학자의 서재]

핵발전소 도시 No! 에너지 자립 도시로![철학자의 서재]

헤르만 셰어의 <에너지 명령>
강경표 중앙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갈림길에 서다

기본적인 에너지 사용량이 늘고 있다. 지금전구 하나를 밝히고 라디오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세상이 아니다.

수많은 가전제품의 소음이 집안을 장악한다. 미세한 냉장고 소리, 컴퓨터 하드디스크 구동음, 메시지가 왔다는 스마트폰의 울림 등이 이미 내가 많은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앞으로 통신망을 기본으로 모든 전자 제품을 제어하는 유비쿼터스 도시에 살게 된다면 기본적인 전기 에너지 사용량은 더 늘어날 것이다.

에너지 효율이 좋은 제품이 쏟아져 에너지 사용량이 줄 수도 있지만 효율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제품들도 나올 것이다. 우리는 분명 그런 제품들을 사용할 것이고, 그때마다 일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점점 증가할 것이다.

그 많은 에너지는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우리가 사용하는 핵에너지와 화석 연료만으로 그 에너지를 충당할 수 있을까? 위험성과 환경 파괴라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우리는 그 에너지를 계속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 <에너지 명령>(헤르만 셰어 지음, 모명숙 옮김, 고즈윈 펴냄). ⓒ고즈윈

이미 두 에너지의 사용량이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찾자!’, ‘대안 에너지가 답이다!’ 이런 사실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2010년 타계한 헤르만 셰어의 <에너지 명령>(모명숙 옮김, 고즈윈 펴냄)은 그의 마지막 저서이자 우리가 가야 할 에너지 정책의 방향과 행동 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셰어는 에너지 문제가 우리 모두고민해야 할 사회 윤리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순전히 경제학적인 에너지 토론에 관여하는 것은 극히 근시안적이고 미래를 망각하는 시각이다. 이런 에너지 토론은 논쟁을 실제적인 가격 비교의 단순한 형태로 환원한다. 에너지 변화에 결정적인 것은 재생 가능 에너지의 사회적 의미와 시각이다.” (329쪽)

그러나 지난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 그 누구도 에너지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아니 토론하지 않았다. 단지 이 추운 겨울, 핵발전소를 가동 못해 블랙아웃을 걱정하는 정부가 “전기를 아껴 쓰자”고 외치고만 있을 뿐이다.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을까? 검소함과 절약을 익혀 누구나 에너지를 아끼고 소중히 하며 살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며 살려고 할까? 불행히도 지금 내 대답은 후자에 더 가깝다.

대선 후보들의 슬픈 에너지 공약

지난 18대 대선의 화두는 단연 ‘경제 민주화’였다. 그러나 각각의 후보마다 내용이 다른 ‘경제 민주화’라는 용어 때문에 공약의 차별성이 보이지 않았다. 공약에 투표하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에너지 공약 또한 차별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핵에너지와 화석 연료 의존도가 각각 31퍼센트, 65퍼센트인 상황에서 단번에 에너지 전환을 이끌어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가 핵 발전에 대해서는 국민의 안전을 고려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짧은 에너지 공약을 통해 보였을 뿐이다. 핵발전소의 위험성이야 누구나 아는 일이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재생 가능 에너지에 있다. 대선 후보들은 재생 가능 에너지 공약은 자신들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도 한참 후인 2030년쯤으로 미뤄버렸다. 어떤 재생 가능 에너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지 고민한 흔적도 없었다. 구체성도 결여되어 있었다. 단지 먼 미래에는 재생 가능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읽을 수 있을 뿐이었다.

셰어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지난 대선 주자들의 재생 에너지 공약은 다음과 같은 행동 양식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을 주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그 방향으로 성큼성큼 빨리 나아가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또 이런 구실로 시간을 벌어서,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을 가능한 오래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종래의 에너지 공급 구조를 깨부술 용기가 부족하다. 또 누군가는 에너지 변화를 어떻게 실제로 구현할 수 있을지 방책도 구상도 없다.” (14쪽)

대선 후보들의 에너지 공약이 슬픈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끌어나갈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집중적 에너지 공급 정책을 바꿀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너지는 권력이다. 에너지원이 집중되면 권력도 집중될 수밖에 없다. 핵에너지가 매혹적인 이유는 그 에너지가 권력과 함께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방 자치를 얘기하는 대선 후보들은 지방에 더 많은 권한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지방 분권에 필수적인 지방세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기존의 정치가 그랬듯 말 잘 듣는 지방 정권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핵에너지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들도 핵이라는 에너지 권력의 매력에 빠진 게 아닐까?

아직까지는 돈이 곧 권력이다.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에너지 소비가 점점 증가하고, 기존의 전통적 에너지가 점점 부족해지는 미래에는 에너지를 가진 자가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핵에너지의 속성이 권력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박원순 서울 시장님께

절대 왕정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독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몸소 배워왔다. 지배와 피지배의 사슬을 벗어나는 길은 권력을 분산하는 데 있다.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에너지를 생산하고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에너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기반을 지닐 수 있다.

누구나 에너지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자연이 제공하는 공기와 물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내리쬐는 햇빛과, 귓불을 스치는 바람에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용 가능한 자연 에너지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할까? 그렇다!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최소한 자연 에너지를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 에너지로 바꾸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비용은 누가 감당해야 할까? 바로 그 에너지를 사용할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아직은 많은 비용을 감당해야 하기에 기존의 에너지와 재생 가능 에너지의 발전 단가를 비교해 가며 핵에너지가 가장 싼 에너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주 많다. 특히 에너지를 소비할 줄만 아는 대도시 시민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값싸고 좋은 에너지원을 당신들이 사는 도시에 놓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사정이 달라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지금은 서울 시장이 된 박원순의 ‘원순닷컴’을 보면 “송전탑을 보며 에너지의 분권화를 생각한다”는 짧은 글이 있다.

“제가 언젠가 독일을 여행할 때 독일은 전기의 생산을 지역마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마을 단위로 작은 발전소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원거리를 송전함으로써 누전도 방지하고 동시에 발전의 집중으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방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너지 분권, 발전의 분산-저 큰 송전탑을 보면서 해 본 생각입니다.” (‘원순닷컴’, 2010년 6월 18일)

서울 시장이 된 지금도 그 생각을 유지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박원순 시장님, 그 많은 송전탑이 어딜 향해 있는지 알고 계시죠? 바로 특별하고도 특별한 서울특별시입니다. 바쁘시겠지만 혹시 서울특별시가 소유한 가장 많은 재생 가능 에너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셨나요? 바로 똥과 쓰레기입니다. 1000만 시민이 배출하는 똥과 쓰레기로 재생 가능 에너지에 도전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 상상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에너지 분권을 상상하며 자료를 찾을 때 국내에서는 처음 발견한 글이기에, 시장님의 글이 마음남아 있어 이렇게 적어봅니다.”

그래도 에너지 분권이 답이다

서울특별시만 놓고 보면 에너지 분권은 쓸모없는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과 경기 일부에 집중된 인구를 분산시키고 균형 있는 지역 발전을 꿈꾸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분산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늘리는 에너지 분권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새로운 에너지 생산을 위한 입지의 인가권을 얻는다면, 이와 함께 사회적 보상을 배려할 가능성도 생긴다.” (252쪽)

최소한 신도시를 개발하거나 도시를 재정비할 때 고려해 볼 만한 사항부터 생각해 보자. 새롭게 짓는 아파트 옥상마다 태양광 설비를 놓는 것은 어떨까? 최소한 공용 전기만이라도 자연으로부터 얻고, 관리비 지출을 줄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미 목포옥암 푸르지오에서 실천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좀 더 나아가 에너지 분권이 더해진 지방 분권 도시를 상상해 본다. 만약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 에너지 값을 할인해 주는 도시가 있다면 당신은 그 도시로 이주할 생각이 있는가? 전기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주를 고민해 볼만하다. 각각의 도시들이 에너지 자립 기반을 갖는다.

도시의 특성에 맞는 재생 가능 에너지를 생산하고 그 에너지원을 기반으로 지방 자치를 실현해 간다. 지방자치단체가 도시에 맞는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고 에너지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면, 든든한 에너지 기반을 갖춘 도시에는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집 앞의 핵에너지와 화석 연료 사용은 지방자치단체 스스로 자제할 것이다.

미래 우리는 이런 도시 광고를 접할 수도 있다.

“우리 ○○시는 시민이 사용하는 에너지 가격을 20퍼센트 인하합니다.” “△△시로 오시면, 다른 지역보다 전기료가 10퍼센트 저렴합니다.”

에너지 기반을 갖춘 도시가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도시로 이주해갈 것이다.

이제 18대 대선은 끝났다. 새로운 정부는 에너지 분권이 가능하도록 초석을 마련해야 한다. 핵발전소가 필요하다는 뉴스보다는, 핵발전소가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원이라는 광고보다는, 재생 가능 에너지가 필요한 이유와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한다.

재생 가능 에너지만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를 충당하기에는 아직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 활성화를 꿈꾸는 이유는 지구상 모든 에너지의 근원인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1만 배 정도의 햇빛이 지구를 비추고 있다. 이 정도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사용할 수만 있다면 인류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재생 가능 에너지 개발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과학자에게는 기술 개발을 독려하며, 기업이 재생 가능 에너지의 단가를 낮출 수 있는 길을 찾아 준다면, 대한민국의 재생 가능 에너지 미래도 어둡지만은 않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재생 가능 에너지는 에너지 특성상 핵에너지와 같은 집중 구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에너지 분권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또 지방 정부에게 에너지 권한을 넘겨줄 때 지속 가능한 지방 자치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유치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상상도 해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효율 좋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언젠가는 내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내 손으로 온전히 생산해 내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그때가 너무 늦지 않게 찾아오기만을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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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는 ‘강제 천만’? 관객 끈 진짜 이유는?[철학자의 서재]

<광해>는 ‘강제 천만’? 관객 끈 진짜 이유는?[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 <맹자>

박영미(한양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영화가 대신하다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때쯤 되면 각 후보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설명해야 하고, 그것은 서로 비교되어야 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그 정책들이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의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적어도 지금쯤 우리는 각 후보자들, 아니면 캠프들의 치열한 정책 공방을 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지금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둘 곳 없는 정치적 욕망을 한 편의 영화에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광해>가 개봉한다고 할 때도, 관객 수가 500만 1000만을 넘는다고 할 때도 나는 이 영화를 봐야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일단 이 영화의 제작사와 배급사가 평소에 마땅치 않았고, 주연 배우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스크린을 독점한 대기업이 이때쯤은 이런 것이 잘 먹힐 거라며 쳐놓은 그물 같아서 그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기 싫었다는 것이 가장 컸다. 그런데 어느 평론가가 ‘<광해> 강제 천만 사태’라고 명명하듯이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을 이끄는지는 궁금했다.

진짜 왕 노릇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맹자 지음, 박경환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 ⓒ홍익출판사

진짜 왕은 정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웠고 그에게 정치는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얻는 파워 게임이었다. 그러나 광대 출신 가짜 왕은 대역 왕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가고 함께 아파한다. 일일 드라마처럼 누가 봐도 빤한 대립 구도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월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자신의 먹성 때문에 끼니를 거를지 모를 나인들을 걱정하며, 중전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염려하는 그에게 점점 마음이 끌려간다.

제 선왕이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을지를 묻자, 맹자는 백성들을 잘 보호해 주면 가능하며 제 선왕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제사에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양으로 바꾼 사례를 들면서 “왕의 은혜가 동물에게 미칠 정도로 충분하면서도 그 공적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백성들이 편안하지 않은 것은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께서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은 실은 하지 않기 때문이지 못 해서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44~48쪽)

맹자는 통일된 천하의 왕이 되는 시작이 제사에 끌려가는 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라고 말한다. 소에 대한 연민은 비록 그 대상을 양과 바꾸는 것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펼쳐진 곤경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느끼게 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바로 공감의 마음이다. 그리고 소에게도 미친 왕의 공감의 마음과 그 실천(양으로 대체함)이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은 왕이 ‘못하는 것이 아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백성의 곤궁에 공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를 실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책이지만 그래도 소의 곤경에 공감하는 마음을 가진 당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격려이기도 하다.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내 집안의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어른에게까지 이르게 하고, 내 아이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아이에게까지 이르게 한다.”(상동) 그리고 이렇게 공감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정치는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목표로 한다. 맹자에게 정치의 시작과 끝은 공감, 즉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느낌이다. 함께 느낀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너에게로, 너의 마음이 나에게로 경계 없이 다가서는 것이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정치를 맹자는 차마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라고 한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토대한 정치이며,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이 확충되어 실천된 정치인 인정(仁政)이다. 영화에서 내 마음을 이끈 것은 가짜 왕의 진짜 마음, 측은지심이었다.

선한 마음만으로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가짜 광해는 진짜 광해가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 땅과 세금 문제인 대동법과 대외 관계 문제인 등거리 외교를 실행한다. 공감이 정치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여긴 맹자이지만 그 마음만으로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선한 마음만으로 정치를 행하기는 부족하다고, 제도도 스스로 실행될 수는 없다.”(187~190쪽) 정치가의 선한 마음은 제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제도 역시 정치가의 선한 마음이 없이 실행되기 어렵다.

“인仁한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확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경계의 확정이 바르지 않으면 정전의 토지가 균등하지 못하고, 토지의 수확에서 얻는 봉록 역시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144~149쪽)

정전(井田)은 국가에서 백성에게 토지를 나눠줄 때 우물 정(井)으로 구획하는 것으로, 아홉 조각 중 여덟 조각은 사전(私田)으로 1가구당 한 조각씩 분배하고 남은 한 조각은 공전(公田)으로 함께 경작하여 그 소출을 세금으로 낸다. 맹자는 토지 분배방식으로 정전제를 주장하는데, 정전제는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근간이 된다.

조세는 정전제에서 공전을 공동 경작하여 내는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조법을 적용하고 따로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천하의 농부들이 모두 기뻐하며 그 나라의 땅에서 농사 짓기를 원할 것이다.”(104~105쪽) 정전제와 9분의 1 조세 제도를 통해 맹자는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릴 만하게 하여, 풍년에는 언제나 배부르고 흉년에도 죽음을 면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조법은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액이 달라지므로 국가에게는 재정의 항상성이 문제가 되지만, 국가가 풍년과 흉년에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국가는 토지와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펴야 한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홀아비라고 하고, 늙어서 남편이 없는 이를 과부라고 하며, 늙고 자식이 없는 이를 독거노인이라 하고, 어린데 부모가 없는 이를 고아라고 한다. 이들은 천하에 곤궁한 백성으로 그 처지를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이들이다. 문왕은 인한 정치를 펼 때 이 네 사람들을 가장 먼저 보살폈다.”(67~69쪽)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의 확충은 정치가 최우선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토지, 세금, 복지 제도를 갖춘 후에 교육이 필요하다. “상(庠과) 서(序)에서의 교육을 엄격하게 시행효도와 공경의 의미를 거듭해서 가르치면 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51~55쪽) 맹자는 인간다움의 확충이 백성에게는 안정된 생업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또는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의 계급적 인식의 한계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제도를 통한 안정된 생활이 우선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성이 공감의 주체다

가짜 광해는 명에 파병하고 사대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신하들에게 “적당히들 하시오. 대체 이 나라가 누구 나라요?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다”고 일갈한다. 이쯤 되면 진짜 왕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진짜 왕은 이미 세습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백성과 공감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자이다. 진짜가 사실은 가짜였고 가짜가 진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판단해 정치권력을 맡기는 것은 누구일까? 맹자에게 그것은 백성의 선택이다.

양 혜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하내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곳의 백성들을 하동으로 이주시키고 노약자들에게 식량을 풀어 구제해줍니다. 하동 지방에 흉년이 든 경우에도 그렇게 합니다. 다른 나라를 보면 저처럼 마음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줄어들거나 내 나라의 백성들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요?”(36~39쪽)

양 혜왕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했던 것을 내세우며 자신이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한다고 자부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자신보다 잘 통치하는 것 같지 않은 이웃 나라 백성들이 자신의 나라로 옮겨 오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한다. 그에게 통치는 백성에 대한 시혜이고, 백성은 자신의 소유물로 더 많은 수가 확보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양 혜왕에게 맹자는 그의 태도가 전쟁에서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 백 보를 도망간 사람을 보고서 비겁하다고 비웃는 것”과 같다고 질타한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시혜를 좋은 통치 행위라고 생각하는 왕이 나쁘지는 않더라도 나라를 옮겨 가면서까지 함께 해야 할 왕은 아니라는 백성들의 정확한 판단과 선택이다.

왕의 진짜/가짜 마음과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백성은 공감에 반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공감을 이끌어내는 주체다. 바로 정치의 주체다.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하찮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209쪽)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위임한 정치권력의 회수를 선택할 수 있다. “인을 해치는 자는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는 잔인하게 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남을 해치고 잔인하게 구는 사람은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일 뿐이다. 인심을 잃어 고립된 사람인 걸과 주를 처형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73~74쪽)

영화 <광해>의 ‘강제 천만’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요일 저녁 TV를 틀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리더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역시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누군가 이번 정권을 지나면서 대통령에게 ‘감성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으며, ‘감성적 능력’은 아픔을 가진 사람의 그 아픔에 가 닿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의 지적처럼 영화 <광해>의 천만 관객 돌파는 가짜 ‘광해’의 진짜 마음에 대한 공감과 환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정치 현실과 정치인들의 모습에 대한 질책을 의미할 것이다.

의도한 것이었는지 프로그램의 시작은 ‘나는 비정규직이다’였다. 임금 노동자의 50퍼센트가 비정규직인 대한민국, 그들의 아픔은 수많은 또 다른 아픔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아픔을 함께 나눌 정치와 정치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그런 정치와 정치인을 요구하고 가질 자격이 있는가? 정작 나는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고 함께 나누지 않으면서 영화처럼 진짜 마음을 가진 왕이 나타나 좋은 정치를 해준다면 그것을 누리고만 싶은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임을,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한 영화 <광해>는 설레고, 슬프고, 아픈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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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지면 죄인’, 그 생각이 노예다![철학자의 서재]

‘빚 지면 죄인’, 그 생각이 노예다![철학자의 서재]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 인간>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는?

K씨의 한탄을 들어보자.

“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사리 공부해서 간신히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나는 오십을 채우지 못하고 명예퇴직을 당하고 말았다. 퇴직금이 있었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장래와 부부의 노후 대비를 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퇴직금의 반은 주식투자를 하는 데에, 반은 부동산 투자를 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러나 주식은 반 토막이 났고 은행 융자를 끼고 구매했던 부동산은 폭락해서 결국 경매 처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빚은 남아 결국 신용 불량자로 전락하여 잔혹한 채권추심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난 정말 한평생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내 스스로 성실한 자라고 자부해왔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빚도 못 갚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난 게으름뱅이이고 이 사회의 기생충인 것만 같다. 아, 난 비도덕적인 인간이다. 도대체 내 삶은 뭐란 말인가!”

K씨의 사례는 요즘 들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K씨가 죽일 놈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인생 자체에 대한 혼란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K씨에게 상황이 어쩌다 그리 된 것인지를 매끄럽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도대체 빚을 진 것과 K씨의 재앙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K씨는 대표적인 투자 실패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K씨의 투자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니까 모든 책임은 K씨가 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사태가 모두 개인적 선택으로 환원해서 설명 가능한 것일까? 공공부채며 국가부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를테면 20세기 후반 외환 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혹독한 고통을 당한 것 또한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알다시피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 현상을 합리적 선택을 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채권자에게 채권추심을 당할 때 K씨와 채권자 간의 관계는 이미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없다. K씨의 삶 전체가 채권자의 요구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어찌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교환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주류 경제학은 부채에 의해 생기는 실존의 고통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폐시키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주류 경제학은 삶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아주 나쁜 학문이다. 몇 가지 수리모델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빚의 노예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지음,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메디치미디어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 인간>(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은 K씨의 경우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빚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노예란 자유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라자라토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주류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며, 이를 통해 주류 경제학이 진정한 사태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또한 이런 비판적 작업을 통해 은폐된 사태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가 새로운 노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라자라토의 책은 경제 문제를 다루지만 경제학 서적은 결코 아니다. 그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철학의 문제를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마르크스, 푸코와 들뢰즈 및 가타리를 가로지르면서 현대 경제를 ‘부채 경제’로 규정한다. K씨의 사례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그 같은 가로지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신자유주의란?

라자라토는 이런 사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독자들은 ‘아, 그 신물 나는 소리를 또 듣는구나’ 하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나 금융 자본주의쯤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에서 실제로는 시장주의가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금융 경제’라는 규정조차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온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라자라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부채 경제’이다. 즉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경제라는 표현은 불평등한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은폐하며, 자본이 개개인을 포획하는 양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채’와 관련해서 이 같이 급진적인 규정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라자라토의 대답은, 자본주의가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채무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부채를 무한한 부채가 되도록 전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의 부채는 유한한 부채였다. 나는 나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만 빚을 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나의 부채는 이제 상품으로 둔갑한다. 나의 부채는 금융에 의해 또 다른 상품으로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파생 금융 상품이다. 이런 전유 과정을 통해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단순한 일 대 일 관계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의 관계로 전환된다. 나의 실존을 부채를 통해 통제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채권자가 아니라 블록화된 금융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의 부채 관계는 금융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 무한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같이 부채가 전면적으로 확장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자라토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공공 부채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1970년 이래 중앙은행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금융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 자본은 국가의 금융 정책 없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 라자라토의 분석이다. 즉 은행의 활동을 증대시키고 자본을 집중화한 것은 바로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자본주의를 ‘부채 경제’로 칭하는 건 단순히 금융이 확장되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조차 금융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주식에 의해 금융 자산으로 간주되고, 기업의 생산조차 금융과 공생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의 경우도 리스 등의 신용 대출 메커니즘과 전적으로 함께 기능한다. 자동차를 구매할 때 구매액 전부를 내고 구입하는 사람은 소수가 아니던가.

이런 분석이 함축하는 바는, 현대 자본주의가 부채를 대대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K씨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건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채무자를 양산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셈이기 때문이다.

복지 국가, 여전히 가능한가?

라자라토의 분석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복지 국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재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늘어난 국가부채와 공공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실상 민간 기업의 수익성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실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사회에 강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정책 아니었던가. 그리고 현재 MB 정권이 추구하는 정책도 그런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시민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자라토는 복지 국가의 이념이 부채 경제 속에서 변형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 자본의 개혁을 위한 도구였던 ‘복지 국가’는 권위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복지 국가’의 기능은 완전히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뉴딜 정책이란 불가능하다. (…) 개혁적 자본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라자라토는 민영화 정책을 통한 복지 정책이란 사실 자본의 구속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한국의 경우 저소득 계층을 위해 ‘햇살론’과 같은 신용 대출 상품을 마련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개개인은 국가에 의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 무한한 채무 관계를 맺게 된다. 말로는 복지 혜택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채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현재의 복지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민영화 정책은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소수의 금융 자본 블록에게 양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언제나 채무자를 배려하기보다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의사 결정 과정과 분배 과정에서 현재의 부채 경제가 공공성을 배제한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라자라토는 이런 분석에서 훨씬 더 나아간다. 그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펴냄)에 의존해서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석한다. (사실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이 대목이 이 책의 압권이다.) 빚을 진다는 것은 이미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행위에서 빚을 지고 있다. 이를테면 “신용 카드의 사용은 영구적 부채를 확립하는 신용 관계의 자동적 개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채무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라자라토가 주목하는 것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부채 경제 아래서 부채는 채무자에게 내면화된 고통이 되며 부채에 대한 책임감은 죄책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채 경제는 약속의 도덕과 죄의식의 도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죄의식의 배면에는 신자유주의가 개개인을 ‘자기 경영자‘가 되도록 요구하고, 이에 따라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K씨가 퇴직금을 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을까? 퇴직금만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K씨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이제 퇴직금을 운용해서 이윤을 추구한다. 일종의 개인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K씨는 자기 경영자로서 자신의 투자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져야 한다는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부채 의식을 통해 개개인의 주체를 통제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대출은 정치 경제가 한 인간의 도덕성에 간섭하는 판단이다. (…) 대출 시스템에 속하는 인간 안에서 철폐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돈으로 변화한다. 즉 다시 말해 돈이 인간으로 육화된다. 인간의 개체성, 인간의 도덕성은 상업적 상품인 동시에 돈의 실존적 재료로 변모한다. 돈의 영혼이 소유하는 육체, 재료는-이제 더 이상 돈과 종이가 아니라-나의 인격적 실존, 나의 살과 나의 피, 나의 사회적 덕성, 나의 사회적 평판이다. 대출은 가치를 돈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살,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다.”

이것은 라자라토가 아니라 청년 마르크스의 육성이다. 라자라토는 마르크스를 재해석해서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구속하고 있는가는 보여주려 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임금노동·시장·상품은 물론, 공동체 및 인간 마음의 가장 고귀한 감정까지도 경제적 ‘가치’ 생산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채 경제는, 개개인이 ‘자신과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윤리적 노동 자체’까지 착취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K씨의 리스크는 K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우리는 엄청난 삶의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리스크는 이제 개인적 차원에서 관리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된 지금, 개개인이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세계 경제까지 분석해서 자기를 경영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K씨에게 ‘당신이 실패한 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라자라토는 우리 앞에 놓인 이런 문제의 지평을 보아야 채권자-채무자라는 왜곡된 권력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자라토에게서 그 밖의 구체적인 대안을 듣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는 더 이상 어떤 개혁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가? 빚에 의해 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의 삶을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부채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경제의 진실>
이관형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경제의 진실>(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을 놓고 쓴 이 글은 서평이 아니다. 철학(미학)을 공부하는 자가 경제에 대해 뭘 그리 잘 안다고 떠들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보고 느낀, 좌충우돌하는 생각조각들을 늘어놓으련다. “이런 조각글 싫어하세요? 미안합니다.”(착한 나) “꼬우면 읽지 말든가!”(김어준) “답답하면 니들이 쓰든지!”(기성용)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한마디로 출세한 경제학자다. 게다가 백수(白壽)를 누렸으니 여러 면에서 부러운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버클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쳤다. 미국경제학회장, 경제인연합회장에다가 대통령 클린턴의 경제 선생이었다. 이렇게 강단과 현실 정치의 양 분야에서 공히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는 읽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출간 당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책이다. 그의 ‘쩌는’ 스펙 얘기는 이쯤하자. 아무리 방자한 글쓰기를 획책했더라도 제목으로 내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내용을 살펴보자.

내가 잘나가 봐서 아는데 경제는 사기야

그는 경제가 사기란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총체적 사기란다.

먼저 ‘자본주의’를 ‘시장(체제)’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사기다. 이런 말 바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주는 역사적, 부정적 의미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에는 기업이 권력을 지니는데 기업의 권력은 자본가(혹은 주주)가 아니라 경영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하면 경제 권력이 ‘자본가’라는 게 딱 떠오르는데 ‘시장’이라고 말하면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은폐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역사적’ 개념임에 비해 ‘시장’은 ‘초역사적’ 개념처럼 보일 수 있다. “자! 쭈-욱, 이대로!”

‘소비자 주권’도 사기다. 소비자가 조종, 통제되는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라 봉이란 말씀? 딩동댕.”

‘노동의 즐거움’도 사기이다.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필수다. 일에서 해방된 부자는 칭송과 부러움을 받는다. “일해서 돈벌어. 누가 벌지 말래냐? 나처럼 되긴 어렵겠지만 말이야!”

여가는 부자들에게는 용납된다. 가난한 이들이 여가를 즐기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 “없는 놈이 여가생활은 무슨···하여간 꼴값을 떨어요.”

현대 기업은 고루한 ‘관료주의’를 비난하지만 이 또한 사기다. ‘생동감 넘치는 기업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대기업화한 오늘날의 기업은 자신이 바로 ‘관료주의’에 처해 있다. 게다가 소유자나 주주의 권한은 예의 그 ‘경영’에서 배제된 허울뿐인 이미지만 지닐 뿐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선진 경제 제도라 좋은 거라던 경제학 교과서의 말씀이 뻥이라는.”

나아가 기업 권력은 고삐가 풀린 상태다. 기업 권력은 관료화한 경영자의 몫이다. 이러한 관료주의가 기업의 업무와 보수를 통제한다. 자기 업무의 감시자는 사실상 자기이다. 자기에게 보수를 주는 이도 자기이다. 감시는 지나치게 없고, 보수는 지나치게 많다. “생선을 고양이에게! 그것도 셀프무한리필로!”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이 나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사기다. 공공 부문의 이름 아래 공사 협력 체제라는 형태로 실제로는 민간 부문이 일하고 있다. 심지어 전쟁도 민간 기업이 대행한다. “로보캅이 현실로, SF가 다큐로!”

금융계는 사기가 만연된 세계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직업은 사람들이 좋아할 기대를 이야기해준다고 해서 두둑한 보상을 받는다. “하나의 예. 보험 많이 드셨어요? 아유 든든하시겠네. 근데 한번 확인해 보세요. 진짜 많이 주는 건지. 아니, 주기는 하는 건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명성도, 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만 주력했을 뿐 경기 조절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우아한 현실 도피로서 사기일 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버냉키 사임 예정(2014년) 기사가 올라와 있다. 그나마 그린스펀보다는 백배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허긴 뭘 할 수가 있겠는가? 쩝.”

기업 권력의 사기 행각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부패한 회계 보고도 사기다. 현대 사회에서 경영진이 행사하는 기업 권력은 민간 부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으로까지 확장된다. 기업 권력은 국방 정책, 환경 정책, 조세 정책도 좌우한다. 객관적인 실증적 연구도 기업 권력의 로비를 당한 군대나 정부에 의해 배척당한다. 군산복합체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고만해라. 백날 피켓 들고 떠들어도 나 니들 말 안 듣다. 니들이 나한테 돈을 주니, 나 옷 벗고 난 다음에 갈 자리를 주니? 비켜라. 바쁘다. 업체 분들과 회식 있다.”

사기의 끝은 전쟁이며 그것을 피할 길은 없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 ⓒ지식의날개

갤브레이스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최고 권력은 대기업 권력이다. 그리고 그 대기업은 주주나 자본 소유자가 아니라 경영자의 수중에 있다. “한국의 재벌이 주주 혹은 자본가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경영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매우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기업의 공헌은 경제적 성공, 심지어는 문명화한 성공의 일반적인 척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회적 성공이 더 많은 자동차와 더 많은 텔레비전과 더 다양한 옷들과 더 많은 소비재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더 치명적인 무기의 소유도 성공의 빼놓을 수 없는 척도가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업적을 평가하는 척도다.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 즉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보호받지 못하는 시민들의 건강, 군사적인 행동과 죽음의 위협은 성공을 평가하는 데 포함되지 않는다. “오래되고 찌그러진 차를 타고 다니니까 나를 무시하냐? 이런 차 탄다고 내가 루저로 보이냐고? 내가 분리 수거나 등산 쓰레기 가져오기, 애완견 배설물 치우기 열심히 하는 건 안 보이냐?” 그랬더니 나더러 이런다. “너 루저 맞거든.”

경기 침체기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불경기에 저소득층은 교육과 의료, 기본적인 가계 수입 등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부는 사회 지출을 삭감한다. 오히려 소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소비를 할 사람에게는 이를 박탈하는 정책이 지속된다. 그동안 경기가 호전되어왔을 때조차도 어떤 분명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서 (경기 호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불경기에는 소비 활동을 할 빈곤층이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확실한 효과를 낸다. 그렇지만 이는 쓸모없는 동정에 불과하다는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반면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종종 세금 감면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절박한 필요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소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돈을 확실히 소비할 빈민들은 이런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 돈을 저축할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만 이런 보상이 주어진다. “부자 감세 철회하라. 부유세 거둬라. 공공 복지저소득층 지원 정책 확충하라. 그래야 경제가 산다.”

미국 얘긴지 한국 얘긴지 모를 이야기가 이어진다. 끝에 이르러 그의 이야기는 현대 문명의 파국을 예언하는 묵시록으로 바뀐다.

소위 문명화된 삶은 인간의 업적을 찬미하는 하얀 거탑이지만 그 정상에는 영원히 감돌고 있는 거대한 먹구름이 있다. 인간의 진보는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왔다. 나(갤브레이스)는 이제 독자들에게 슬프지만 의미심장한 진실을 남기고자 한다. 문명은 과학, 의료, 예술 그리고 경제적 복지에서 수 세기 동안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 그러나 문명은 또한 무기개발과 전쟁의 위협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대량살육은 결국 문명이 가져 온 것이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과 폭력, 문명화된 가치의 정지, 전쟁 직후의 무질서와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탈출구는 없다.

사람이 아니무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아예 아니무니다, 내가 잘못된 건가?

이 책의 원제는 “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결백한 사기의 경제학)”이다. 갤브레이스는 경제 분야에서 벌어지는 사기 행각을 ‘결백한 사기(innocent fraud)’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노센트(innocent)’를, 이 책의 역자처럼 ‘결백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를 따르기로 한다. 이 말을 갤브레이스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쓴다. ①’적법한, 즉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②’의도하지 않은, 즉 사기를 치려고 사기를 친 것이 아니다.’ 만약 ①의 뜻만 지녔다면 아마도 대기업 경영자들은 법망은 피했을지언정 도덕적 비난만큼은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②의 뜻도 지닌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다면 ②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

갤브레이스의 말에서 대강을 취하자면 이러하다. 이런 사기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업 권력, 기업 경영자들은 법적인 책임은 (법이 이들의 것이니) 차치하고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아니 물어 봤자 헛수고다. 이들은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힘이 있고 부유한 자들의 이익을 명료한 견해(논리)를 바탕으로 지지한다. (흔히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듯이) 이들의 이런 지지를 경제적 동기나 다른 정치적 동기에 입각한 행동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사기가 사기인 줄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올바른 행동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가카’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한 말이 추호의 거짓도 없는 그의 진심임을 깨닫는다. 이쯤 되면 절망이다. 이런 절망에 빠졌던 또 한 사람의 탄식이 떠오른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赦 :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34) 그가 그를 섬긴다니 그는 그를 사하시길.(‘가카’는 장로님) 그러나 그가 섬기지 않았던 그들은 그를 사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가카가 물러나도, 심지어는 여야가 뒤바뀌어도 ‘가카들’은 여전히 권세 있는 세력으로 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기에도 세 차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갤브레이스에게 물었다. “당신(갤브레이스)처럼 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못 막는 사기를 나더러, 우리더러 어쩌라고? 진실이니 뭐니 하면서 당신만 양심적인 척하는데 이거야말로 사기 아냐? 대안은 하나도 안 써놓고 말이야.”

사기로 점철된 현대 경제가 결국 현대 문명 자체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더니 책의 마지막에서 불쑥 이런 말을 던진다. “이 글에 기술된 (…) 문제들은 (…)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이 문제들은 이미 그렇게 해결되어 왔다.” 이 문장이 대안이라면 유일한 대안이다. 근데 이 양반 기억력이 참 까마귀다. 책의 대부분을 비관적 전망(‘전쟁은 피할 수 없고 현실의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으로 일관하다가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단다. 아니 그렇게 해결되어 왔단다. 이게 다다.

갤브레이스는 이 책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의 돌출 발언을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학자니까 진실을 보여주는 거 이상은 못하겠어. 그리고 난 죽으러 가야하거든. 당신들은 살아야 하니까 내가 가르쳐 준 문제들은 당신들이 해결해봐. 인류는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여기까지 왔거든. 아마 당신들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경제가 사기라는 게 뭐 그리 새로운 말인가? 당신(갤브레이스) 글에서 일부 새롭게 얻은 내용이 없진 않지만 대개 알거나 느끼거나 하고 살아왔거든 나도. 당신이 던진 문제에 답은 나도 못 내겠고 ‘사기’ 얘기나 더 하고 끝내지 뭐.”

갤브레이스는 경제가 사기라고 했지만 백남준은 예술이 사기라고 했다. 한술 더 떠 푸시킨은 삶 자체가 사기라고 했다. 요즘은 통 볼 수가 없지만 어린 시절 이발소에 갈 때마다 기도를 하는지 이삭을 줍는지 하는 사람들 그림 옆에는 예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붙어 있지 않았던가?

사실 세상이 사기라고 본, 보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제 뜻대로 세상을 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세상을 산,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세상을 사기라고 여긴,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백남준의 예술=사기는 이와는 거리가 있다. 흔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선사(禪師)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 예술은 선사의 손가락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러니 예술은 사기다. 그렇다고 백남준이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은 전혀 아니다. 손가락을 통해 우리는 달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손가락이 달이 아니라 하여 손가락을 가짜이며 무가치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예술=사기론은 여기서 끝. 근데 인터넷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 있다.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 선사가 일갈한다. 제자가 답한다. “손가락이 너무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하하. 이 글 올린 사람, 누군지 보고 싶다. 성철스님 대 김성동(소설가)으로도, 모던 대 포스트모던으로도 아무튼 여러 가지로 읽힌다. “방금 말한 거 무슨 뜻인지 독자 여러분들 잘 모르시겠지요? ㅋㅋ 담에 써먹어야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낭만주의의 영향 하에 성장하여 리얼리즘으로 나아간 푸시킨의 문학은 이 둘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 사조를 껴안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기투성이인 ‘슬픈 현재’를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한다. 이는 그의 문학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추방당하고, 차르(Czar)에 도전한 데카브리스트를 후원하느라 감시를 당하고, 자신의 부인을 차지하려는 자와 결투를 벌이다 사망하기까지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속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말처럼 그는 현실을 견뎠다. 그렇지만 그 견딤은 결코 수동적인 견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속이는 ‘슬픈 현재’에 맞서 자신의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하려는 적극적 견딤이었다. 결국 그에게 ‘현재는 슬픈 것’이었으나 그의 ‘마음이 살던 미래’는 그를 러시아 최고의 문인으로 올려놓는다.

백남준의 ‘사기’는, 예술이라는 가상(손가락)을 통해 본질(달)을, 감각적인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이념을, 미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런 나의 해석은 헤겔식이다. 백남준이 헤겔에 동의할 것 같으냐고? 이경규식으로 답하겠다. “별(들)에게 물어봐”, 백남준은 별이 되었으니.)

푸시킨의 ‘사기’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갈구하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니 어쩌면 이성을 지니게 된 대가로 모든 인간들이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 아닐까?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우리가 왜 삶을 사기라고 느끼는가를 경제라는 구체적 현상을 통해 보여준다. 즉 사기는 그저 느낌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에 만연한 것이다.

백남준의 사기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부정적’이다. 예술의 사기는 추구되어야 한다. 경제의 사기는 부정되어야 한다. 푸시킨의 사기는 ‘숙명적’이다. 우리는 이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남준의 사기와 푸시킨의 사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술가가 아니니까. 숙명이니까. 경제의 사기는? 이것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결백한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마침 대선이 코앞이다. 복지니 경제 민주화니 하는 여러 말들이 오간다. 대선의 최대 화두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했다. 아마 여기서 ‘시장’은 대기업, 재벌을 뜻하는 것이리라. 노 전 대통령의 말에 분노하거나 절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분노 혹은 절망했던 것인가? 그의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이 맞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옳은 말이 곧 옳은 행동인 것은 아니다. 나는 물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정도로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과 똑같은 말을 갤브레이스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이미 권력은 대기업과 대기업 경영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갤브레이스가 말하는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당장 닥친 지금의 대선 국면에서라면 어떻게 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결백한(이노센트·innocent)’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 유로 존 떠나라!” 칸트의 대답은…[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 임마누엘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박지용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유럽 재정 위기 속 민족과 민중

“그리스는 유로 존을 떠나라!” 유럽 선진국의 상당수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외치고 싶겠지만 당당하게 소리 내어 외치지는 않는다. 축적된 세계의 부를 최전선에서 누려오면서, 스스로 계몽된 시민이라 생각하는 자의식과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내심 그리스가 그냥 알아서 유로 존에서 나가줬으면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독일에서 계속 미루어 왔던 유럽안정화기금(ESM)이 헌법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합헌이라는 결정이 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정 지원에 대한 독일 국내 정치의 논의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충분히 알려져 있다. 재정 지원을 둘러싸고 진행된 독일의 국내 정치 상황은 아무래도 기독교민주당(CDU)과 자유당(FDP)을 위시한 보수 정당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은 슈뢰더 집권 이후 줄곧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해왔다. 그런 와중에 자유당(FDP)은 시장과 정치가 분리되어야 하며, 금융 시장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이 재정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피력해왔다. 재정 위기를 둘러싸고 이렇게 정치적인 입장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다시 유로화 통합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복고주의 입장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독일과 프랑스에서 절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정치적으로는 극우주의가 득세할 수 있는 형세인 것이다. 그리스에서 극우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작금의 국가 부도 위기의 책임이 선진 유럽 국가들에 있다는 책임 전가 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유럽 재정 위기는 단지 경제 문제를 넘어서 정치의 위기를 낳을 소지가 산재해 있다.

정치와 경제가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은 “유로화가 망하면 유럽이 망한다”고 밝힘으로써 유로 존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유로화를 살리는 것이 유럽을 살리는 길인가? 유럽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유럽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화폐 통합과 유럽의 공동체

최근 독일 ZDF 대담 프로그램에서 사회민주당(SPD)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일의 진정한 정치인이라 추앙받는 헬무트 슈미트는 유럽 위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간명하게 밝혔다. 방송 내내 그는 그에게만 허용된 담배를 물고 힘주어 말했다. “독일이 유로의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이유는 역사적인 책임에 기인한다.”

독일이 홀로코스트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이 떠안아야 할 특별한 역사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슈미트가 언급한 이 대담한 발언은 왜 독일인들이 그에게 큰 존경심을 보이는가를 알게 한다. 게다가 방청객으로 참석한 많은 청년들에게 “너희 할아버지의 일에 너희들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교훈조로 훈계했고, 청년들도 현자의 지혜를 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인들은 그들의 잘못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어 현명해진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슈미트는 궁극적으로 “유럽이 지향해야 할 미래의 비전을 구체적인 정치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 보다 높은 유럽의 진보”라 말했지만,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정치적 과제가 되기 어렵다. 지금 상황에서는 눈앞에 닥친 발등의 불을 끌 응급처치를 찾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 왜 유럽은 화폐 통합을 시도했는가? 슈미트도 지적하고 있는 바, 유럽의 선택은 규모의 경제학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달러화의 위력과 급성장 일변도의 위안화, 이에 대한 대항마로서 유럽은 뭉쳐서 유로화로 통합함으로써 몸집을 키우려는 결정을 내렸다. 이념적으로 유럽 통합은 과거보다 진일보한 지평의 자유를 선택했지만, 실상은 그저 경제 통합을 통한 몸집 부풀리기가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만약 유럽의 통합이 그저 화폐 통합만을 위한 것이고 또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이 형세는 그야말로 기괴한 모양이 된다. 화폐는 단일한 경제 체제의 몸을 관통하는 혈액과 같은 것인데, 작금의 유럽 통합은 한 몸에 정치체의 머리가 여럿 달린 메두사가 된 것이다. 머리가 여럿이니 몇 개가 잘린다 해도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시키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린 머리는 자신을 자른 머리를 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이 머리들을 안정시킬 기제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의 위기는 곧 정치의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유럽 스스로의 자율적인 자기 결정, 다시 말해 정치적인 선택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유럽은 경제 통합만을 주요 의제로 고려한 채 통합을 정치적으로 선택했을 뿐 경제 통합이 파생시킬 정치적인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급한 불이 어떻게 꺼질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향후 유럽이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정치적인 고민이 가중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유럽이 앞으로 어떤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하는지를 모색할 때, 칸트의 정치사상은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유럽의 미래와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지구 반대편 변방의 한 철학자가 주제넘게 세계의 중심 유럽에 대해, 그것도 유럽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 사건에 대해 견해를 가진 사람은 세계 시민이다. 그 사건이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나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자유를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라 했다.

칸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공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기가 발휘되는 데에는 분노의 감정이 결부된다. 나의 일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한 사정에 분노하는 것이 바로 학자(배운 사람)로서 간주되는 세계 시민의 용기인 것이다.

칸트는 그 이전에는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던 타인의 부당함에 대해 분노했다.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이 감내해야 했던 부당함에 대해, 칸트가 보여준 분노는 배운 사람에게 요구된 용기라는 미덕이다. 칸트는 당시 가까운 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해서나 대서양 건너 미국 독립에 대해 세계 시민적 견지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1795년 출간된 칸트의 저작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는 정치적 주제를 담고 있고 있으며, 평화에 대한 철학자의 관점이 개진되어 있다. 우선, 칸트의 정치철학은 근대 자연법 사상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된다. 홉스, 로크, 루소로 이어지는 계약론적인 전통은 칸트 정치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 저작에서 드러나는 칸트만의 차별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임마누엘 칸트 지음, 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칸트는 홉스가 제안한 ‘자연 상태로부터 계약을 통한 사회 상태’라는 발상을 수용하지만, 홉스와 달리 평화가 법적으로 강제된 안정을 통해 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칸트에 있어서 정치란 ‘실행하는 법학’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칸트의 이해 방식에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가령 시민 사회 혹은 경제적 영역(자본주의와 시장)을 정치적인 고려 대상으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궁극적으로 정치의 의미와 역할을 도덕 철학의 협소한 영역으로 제한했다는 비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정치의 철학적인 원리를 보편적으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응일 수 있다. 홉스가 제안한 평화 상태는 국가 내 내전을 강제하는 모델인데 반해, 칸트는 궁극적으로 더 넓은 차원에서 다시 말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국가들 간의 평화 상태 즉 국제법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저작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더라도, 프로이센이 프랑스 혁명 정부를 인정하고 평화 조약을 맺은 바젤 조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들 간의 전쟁은 전쟁 시기 중에서라도 잠정적으로 전쟁 이후에 체결될 평화를 염두에 두고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는 실제적인 경험으로부터는 입증할 수 없는 이념적인 것이다. 곧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흥망성쇠, 전쟁과 평화가 교차된 것이므로 전쟁이 전혀 없는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이념적인 수준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칸트가 그려본 영원한 평화를 위한 최소 조건은 모든 나라들이 공화적인 법적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환대’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는 세계 시민 사회의 철학자로 격상되고 있다. 국가들 상호 간에 전쟁이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시민권은 서로 간에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인 원칙을 넘어,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두렵고 이질적인 이방인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제를 담는 적극적인 원칙이다.

역으로는 뿌리 깊은 공동체에 접근할 때, 스스로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칸트가 말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것이다. 이 권리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위해 모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것 없이는 평화도 달성될 수 없다. 이 권리는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손님으로 대우받을 것을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으며 그저 상호 간의 방문을 허용하는 정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업적인 교류를 위해 바다 건너 희소 자원을 교류하려고 방문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방문하려 할 것이다. 육상 생물인 인간이 지구 위에 발붙일 땅을 가질 때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경제적 기반이 붕괴 직전인 그리스에서 많은 사람들은 삶을 찾아 자신이 발 딛을 땅을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더 안정된 나라에서 찾을 것이다.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네오 나치는 평화의 적이며, 인류와 인간성의 적이다. 그들을 기꺼이 환영할 마음과 여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지성이자 존경받는 정치인 헬무트는 과거의 독일의 교훈을 통해서 미래의 독일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서 유럽의 미래, 평화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