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전호근 지음,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 –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가?

 

한여름이다. 연일 폭염에 시원한 소나기는 언제나 내릴지 하늘만 보다가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2022)를 손에 잡았다.

맹자의 글을 두고 한여름 더위를 식히는 소나기 같다고들 한다. 『맹자』에는 속 시원하게 내리는 비, 성대하고 세차게 흐르는 모양을 뜻하는 패연(沛然)이라는 말이 나온다. 벼 이삭을 자라게 하는 자연의 순리처럼 덕으로 펼치는 왕의 통치가 필요했던 전국시대, 백성 돌볼 줄을 몰라 왕 노릇도 하지 못하면서 무력으로 전국을 제패하여 패왕 자리에 오르려던 자들에게 바른 말[正言]을 거침없이 날렸던 맹자의 언변은 예나 지금이나 통치의 기본도 모르면서 자리만 차지한 자들을 보며 쌓인 마음의 답답함을 해소하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전호근의 『맹자: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원하는가』는 청량제와 같은 『맹자』를 읽으면서 속만 풀고 말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정치에서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어떤 통치자여야 하는지를 알고, 우리가 지금 어떤 통치자를 얻었는지를 다시금 살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은 맹자 사상의 요점을 밝힌 1장과 『맹자』 원문을 가려 뽑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번역하고 해설한 2장에서 맹자의 정치론을 간명직절하게 정의한다. 맹자의 왕도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혁명론은 “누가 천하를 다스려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이 두 주제는 『맹자』를 관통하는 맹자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맹자의 사상은 왕 노릇을 할만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와 왕 노릇 못하는 왕은 끌어내려야 한다는 ‘혁명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 이 세 가지의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 셋은 『맹자』 안에서 유기적으로 엮인다. “혁명은 왕도의 의무를 저버린 군주에 대한 저항이고 왕도정치의 실현 가능성이 성선설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주장을 분리해서 볼 수는 없다.”(15쪽) 현실 정치에서 무능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형이상학적 근거는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권력에 맞설 수 있고 바람직한 권력을 희망할 수 있다.

오늘날 『맹자』를 제대로 읽었다면 “방관자들의 압도적 무관심 속에서 독재와 억압의 부조리가 창궐했던 경우”(73쪽)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맹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75쪽) 이것이 맹자가 말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써서 행하는 기준이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사람”(74쪽)들이 권력을 탈취하면 사회에서 차마 그러지 못할 일들이 버젓이 횡횡한다.

옛날에는 자신을 수양하는 군자가 이러한 마음 씀과 행위의 기준을 담지하고 세상에 나아가 제시했다면, 민주 사회에서는 보통 시민들이 이 일의 당사자이기에, 그러함에 뻔뻔한 권력자들이 우리 사회에 여전한 것이 그저 남의 부끄러움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맹자는 제선왕이 제사에 희생으로 쓰일 소가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소 대신 양을 쓰라 명한 것을 두고 제선왕이 왕도정치를 베풀 수 있다고 말했다. 의아해 하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임금님의 은혜가 소 한 마리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런데 그 공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결국 은혜를 베풀지 않기 때문이지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지금 임금께서 왕도정치를 베풀지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양혜왕상」)”(154쪽)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찮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맹자에 의하면 이 작은 마음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과 남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하지 않는 마음으로까지 확장된다. 2011년 구제역 살처분 당시 “우리 소는 평소에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 비루 말랐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싶습니다.”라는 축산인의 말에 현장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고 눈시울을 적셨다는 일화(153쪽)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선함을 믿고 그 가능성의 길을 따라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맹자의 꿈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왕도정치가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정치적 상상을 그 누가 할 수 있었을까.

맹자가 말한 것처럼 백성을 위하고 시민을 위한 정치는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데도 방기하고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전국시대가 그랬고 지금 시대가 그러하다. 맹자도 그랬지만 아마 우리가 원하는 통치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자’일 것이다. 이런 자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많은 수의 우리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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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하편. ‘시민의 자유와 예속관계는 교환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계약을 남성과 그에 예속되는 여성과의 관계, 여성과 그녀로 인해 자유에 대한 판타지를 가진 남성과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적인 성차를 토대로 살펴보았다. 성차의 정치적 특성은 혼인계약, 고용계약이나 노예계약에서와 같이 시민법에 의거해 시민 개개인의 행동이 국가로 인해 제한된다는 조건 아래 맺는 사회계약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남녀 간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시민의 자유와 지배가 예속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시민은 국가로부터의 보호를 보상으로 되돌려 받는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교환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과연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가 제대로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캐롤 페이트만에 따르면, “자유와 교환가능한 예속이 착취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1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호교환할 수 있는 이원 항은 일단 등가물로서 동등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데, 자유와 착취 간의 관계는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자유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제대로 규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실상 20세기 중반 영국 런던 출신의 정치가이자 작가이면서 경제학자, 신학자 및 역사학자였던 죠지 콜(George Cole, 1889~1959)은 노동당에 소속되어 있었고, 길드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페이트만은 콜의 급진적인 정치이론이나 활동은 일단 논외로 두고, 콜이 언급한 노동자들의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콜에 의하면, 정작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가진 잘못된 생산 시스템을 비판하거나 지적하지 못했다.”2는 점에 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 환경이나 조건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조차 깨닫거나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사회계약의 노예제와 같은 속성이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노동계약은 그저 추상적이고 막연한 가난이고 불공평한 것이었다. 페이트만이 지적한 사회계약의 어두운 면은 20세기 초반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시민의 몰이해와 편견, 불식, 무지 등으로 인해 폐허로 남아 있다.

캐롤 페이트만은 성과 부부와 관련한 사적인 생활을 비정치적 범주로 묶어 부성의 권력 아래 완전히 감추고 망각시킨 사회계약을 비판하는 반면,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는 강요된 비정치적 자연 및 권리를 종교와 민속학 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크리스테바는 『여성과 성스러움』에서 가톨릭 미사의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발작증세를 보인 흑인여성에 대해 알린 바 있다. 이 증세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없었다. 미사 시간에 쓰러져 울부짖은 여성은 “신들림, 미친 여자, 히스테리, 투밥(서구화된 아프리카인 여성), 애니미즘, 미국식 외침 요법, 묘기, 영매 등”3으로 명명되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엄격한 수도회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인 수녀들이나 엘리트층 여성들은 발작 증세를 일으키지 않았다. 대개 하층민 여성들에게 일어난 히스테리는 유럽으로부터 강제 이식된 가톨릭교에 짓눌려 있던 토속종교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신분석학자이면서 기호학자, 철학자, 작가이고, 파리 디드로 대학의 명예교수인 크리스테바는 흑인 여성의 이러한 증세를 “성스러운 착란증”, “가톨릭교의 성스러움과 다른 새로운 성스러움”4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인들이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자신만의 리듬을 만드는 “감응적 기질”5이 성스러움에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녀는 페이트만과 같이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을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욕망하는 대상으로 만나는 모성, 즉 가부장제로 인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으로 정의하였다. 인간은 태어나 주관적인 입장을 관철하면서 성장하여 모성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인간은 모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모성을 부정하는 것에 집착하고 억압받는다. 페이트만은 시민의 자유와 예속의 관계를 성적 계약으로 밝힌 바와 같이,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를 통해 주체의 모성 배척 행위와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강박증적 억압의 상태를 제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자유와 예속의 교환관계에서 보상되어 얻는 국가로부터의 보호권을 대신하여, 인간 주체가 내재적으로 드러내는 신경증적 징후를 제시하였다. 인간이 자연을 부인하고 분리하려고 할수록, 그는 무의식의 보상 및 억압 기제로 인해 자연에 더 집착하기를 욕망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회계약을 어머니와 맺는 인간 최초의 애착 관계로 보았다. 어머니와의 욕망과 억압 관계는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과 공포의 감정으로 표출되면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무의식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자아와 지각의 대상을 분리하고,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면서 겪는 근심과 불안감은 안과 밖의 경계성에서 의미를 무수히 창출한다. 이것이 크리스테바가 제시한 문화비평 용어인 “아브젝시옹”6이다. 아브젝트는 공포증이나 자아분열증과 같이 어느 대상을 부인하거나 동일시하는 행위가 뒤섞이는 이념을 말한다. 아브젝트는 사회계약론으로 규정된 성적 계약의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실재이다.

Carole Pateman in Brazil 2015, 출처: 위키피디아 / <Agência Brasil> https://agenciabrasil.ebc.com.br/

캐롤 페이트만은 원초적 사회계약이 가부장제가 폭로되는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이라고 비판한다. 그녀는 “사회계약론에 나타난 개인은 실체도 정체성도 없이”7 추상적인 자아만을 가지고 있어 행동 발달 과정에서도 구체화되지 못하고 추상적인 단계에 머무른다고 지적한다. 남성의 행동은 보편적이고, 여성의 행동은 개별적이라고 보는 사회계약론은 결코 성차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미국 버클리 도시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이면서 정치철학, 윤리학, 여성주의, 퀴어 이론, 문화 이론 분야의 전문가로서, 개인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것은 ‘나’라는 인칭대명사나 이름이 아니라 언어의 독특한 수행성을 띠는 동사라고 주장한다. 수행언어를 통해 젠더 문제를 논한 그녀는 페미니즘 분야에서 대표적인 젠더이론가이자 퀴어학자,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욕망의 억압 기제에서 더 나아가, 자유와 예속의 보상물로서 잃어버린 모성을 향한 애착을 “우울증”8으로 제시하고, 이것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의 대표 저서인 『젠더 트러블』에서는 젠더의 우울증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한 버틀러의 초기 의도가 후반부에서는 나타나지 않거나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녀에 따르면,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젠더의 정치적 특성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 증세는 젠더 문제가 규범적이거나 미리 규정된 형식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는 고유한 수행적 특성으로부터 발생한다. 버틀러는 젠더를 지배하는 규범들을 파괴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수행”9적 언어를 믿지 않는다. 젠더가 담지하는 사회적 수행성은 자신을 ‘나’일 수 있도록 만드는 조건으로서 투명하지 않을뿐더러 사회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정확히 규명되어있지 않다. 즉,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은 ‘나’라는 인칭을 나타내는 언어에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이름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버틀러에 의하면, ‘나’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와 사회 간의 예속관계에 있다. 우리는 이미 언어가 지시하는 행동을 수행하는 맥락에서, 동사 언어는 “계약한다”의 뜻을 지닌 사회계약론을 이미 담지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수행언어가 아닌 진술을 목적으로 하는 명사는 사회계약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버틀러는 사회계약론을 동사의 수행적 정체성이 지니는 지시작용, 현시작용, 의미작용으로 대표되는 기호학적 구조로 정의한다.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의 근간으로 간주되어 온 남녀 간의 성적 계약을 비판했다면,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0~)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왜곡된 모성과 관련한 계약을 비판한다. 남성은 모성을 모체와 관련한 사회적 관계, 이성과 권력, 언어 등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물질, 사회에서는 능력 없는 자연으로 여기고, 이것들을 교환할 수 없고, 보상받을 수 없는 가치로 분류하면서, 모성을 단절해버린다(뤼스 이리가레, 『반사경: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 심하은‧황주영 역, 꿈꾼문고, 2021, 62-65쪽). 이리가레에 따르면, 모성을 현전하는 남성은 특유한 부채 의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남성성에서 벗어난 채로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인 것처럼 가장한다. 끊임없이 사회가 가치 판단을 강요하는 남성성에 대해 자신은 방관하는 척, 무관심 및 무책임한 척, 그것을 가장 보편적인 이성으로 논리정연하며, 도덕적인 질서로 포장한다. 남성성도 여성성도 없는 어느 이의 중성성이 남기고 간 존재의 “빈 공백”(뤼스 이리가레, 위의 책, 2021, 67쪽)은 남성성에 예속된 여성들에게는 하염없이 나약하고 지지부진하며, 어설픈 어느 가치를 다시 만회하고 채워야 하는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의무감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은 맥락 없는 무책임과 막연한 의무감 사이에 생겨나는 무의식적 억압 기제는 선험적이고 합리적인 인식론의 모습을 한 채 철학사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 논의와 관련하여, 이리가레는 모성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억압적인 분화과정과 차이 개념이 폭로된다고 본다. 이러한 분화와 차이 관계가 자연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을 없애고, 철학사 속 합리적 이성과 같은 물질을 역설적인 진화 과정에서 살펴보고, 모체와 남성, 여성 간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에게 이리가레가 내세우는 남성과 여성 간의 성적 차이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이라서 고정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본질이나 실체이다. 즉, 그녀에게는 이리가레가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 구도를 급진적인 관점에서 분리 구도로 재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정신의 관계에서 더 이상적이고 높은 단계에 다다르기 위해 무엇을 멀리하거나 배격하는 관계 양상을 모성에 억압된 남성성과 그것을 계속 회복하려고 하는 여성성의 집착증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에게 헤겔의 자연과 정신의 지양성은 정신분석학에서 살펴보는 무의식 기제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므로, 이는 캐롤 페이트만이 사회계약론으로서 남녀 간의 억압된 성적 계약을 비판한 만큼의 분명한 안티테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 이리가레에게 정신과 자연의 분리 구도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상징적 언어에 불과했다. 또한, 그녀는 남성이 얼마나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서의 자연으로 배제하고 타자화하는지를 오롯이 비추는 거울(반사경)은 어떻게 여성에게 자신만의 관점과 세계를 구축하게 하고, 자신을 재현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서, 헤겔의 이상적인 변증법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여성의 자유와 권력은 단지 상징적 언어에 귀속된 상상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리가레는 여성학자로서 문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정신병리학을 전공함으로써 여성의 인권과 자유의 문제를 정신병리학적 관점에서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캐롤 페이트만이 제시한 페미니즘적 사회계약론을 읽고, 저작의 핵심 개념어를 선정하여 이를 중심으로 그녀와 다른 관점을 보이는 여러 여성학자들의 입장을 비교 분석하여 보았다. 페이트만이 논하였듯이, 남성중심주의적인 철학사에서 벗어나 여성과 남성 간의 감추어진 사회계약론을 비판하는 입장은 오늘날 미래 인류의 위기, 우리가 사는 지구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할 수 있다. 인본주의, 형이상학, 인식론, 관념론, 존재론, 유물론, 윤리학, 실재론 등 이제까지 철학사를 구성한 주요한 논의들은 모두 미래에는 상상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할 수 있다. 필자는 글을 끝마치기 전에,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쓰레기와 퇴비와 같은 어두움에 숨겨져 왔거나 감춰왔던 순수 물질, 즉 “방문하기, 일하기, 놀기의 방식과 방향을 결정하는 동물 공생자들”(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최유미 역, 마농지, 2021, 191쪽.)을 배치해 본다. 과연 몇 백년이나 몇 천년 후의 세대로 포함할 비-인간은 앞으로 인간과 어떠한 사회계약을 맺으며 살아갈 것인지를 자문해본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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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에서 2023년 4월부터 11월까지 예정으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를 기획·연재합니다. 지난 2018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블로그분과진에 연재되었고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에 이어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합니다. 본격 연재 전 자세한 소개는 「연재의 변」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캐롤 페이트만의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을 읽고
상편. ‘더 이상 우애 정신은 없다 – 포스트 코로나 시기를 앞두고 우애적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유가연(여성과철학 분과)

 

캐롤 페이트만(Carole Pateman, 1940~)은 1940년 영국에서 출생한 정치학자이자 여성학자이다. 1963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72년 시드니대학 정치이론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캘리포니아대학 정치과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페이트만은 이 대학의 명예교수로 재직해 있다. 그녀는 민주주의와 관련한 여성이론과 정치이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자 교수이며,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입장에 서 있다.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은 1988년에 출간한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페이트만이 시드니대학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을 때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후인 1990년대 초중반에 그녀는 최초로 국제정치학회에서 여성 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The sexual contract로, 한국어로 번역한 제목보다 더 간략하다. 이 책의 내용은 페이트만이 미국과 호주에서 열었던 여러 강연과 토론을 바탕으로 하고, 참고 자료들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스탠포드대학 행동과학연구소에서 수집하였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프린스턴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1

이 책은 홉스, 칸트, 로크, 루소 등의 근대철학 텍스트들에서 쉽게 간과하거나 가볍게 다룬 부분들을 골라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페이트만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여러 가지 계약들에 관한 논의들이 정치이론에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나타난 여성에 관한 논의를 폄하하거나 과도하게 비난하는 입장을 피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통적 정치이론과 현대적 정치이론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적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페이트만이 여성이론 분야에서,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를 정치이론 텍스트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이유는 역사의 균열 속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가진 지속성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이 역사의 굴곡에서조차 없앨 수 없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열망은 아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넓게 조망하고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속적이고 존속적인 시간에 담긴 것이었다.

Carole Pateman(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Political Science, Distinguished Professor)  https://ucla.academia.edu/CarolePateman

페이트만에 따르면, 너무 잘 알려진 토머스 홉스,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는 정작 여성들이 배제되어 있다. 정치철학 및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 논의들이 배제되었던 1970~80년대만 해도 여성의 정치적 의무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바라본 입장은 급진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보였다. 정치학이나 정치이론 분야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도 낯설었지만,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사회계약설에 대항하는 입장을 내세우는 시도는 더욱 낯설었기 때문이다. 홉스는 여성이 시민사회에서 혼인계약을 할 수 있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를 내세우지만, 여성이 시민의 자유를 획득하는 사회계약에 참여하지 않고 참여할 수 없는 신민(臣民)이라고 간주하는 실질적인 계약과 시대 및 사회적 한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2 홉스의 시민 계약론도 남성중심주의를 이상적으로 규정한 점에서 볼 때, 기존의 근대 철학자들의 입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시민들이 스스로 국가와 시민법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보호를 위해 예속이 교환된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루소는 시민을 자발적으로 지배하고 예속하는 사회계약설을 제시하는데, 시민의 지배 및 예속권이 가지는 자발성은 결국 사회계약을 교의적으로 만들어버렸고, 실질적이고 자유로이 실천가능한 모델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시민의 권리 문제는 루소의 사회계약설로 인해 진부한 논의로 치부되거나 더 나아가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주제로 전락해 버렸다.3 로크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과 사회적 권력을 구분하고, 계약을 통해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페이트만은 로크의 사회계약설은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을 배제하였다고 비판한다. 혼인계약은 매춘계약이나 고용계약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예속하는 수단이었고, 사회계약은 결국 인류사와 함께 지속되어온 성 계약을 토대로 하고 있다. 성적 계약은 가내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라진 후에 새로이 등장한 형제계약에 속한 가부장제에 기반해 있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권력이 중심되는 가족구조가 아니라 시민사회와 시민의 자유에도 영향을 주는 형제계약이다. 따라서, 형제계약에 속하는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사회에 예속되는 개인의 신분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가부장제 계약은 항상 국가, 자본과 노동 간의 협상에서 수많은 논쟁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임금에 의한 노예계약과 시장사회주의에서 수많은 페미니즘운동을 일으킨 신체상의 소유권 등이 그 예이다. 사회계약에 대한 노동자나 시민의 예속과 복종의 관계는 언제나 가부장제를 토대로 한다. 사회계약의 전반에 걸쳐 계약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은 가부장제에 있다. 그렇지만, 푸코가 제시한 바와 같이 사회계약이 사법제도나 교육상의 훈육, 통제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책의 제목과 같이 페이트만은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다루고 다양한 법적 계약 관계를 주제로 삼지만, 특정한 계약법을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계약과 성 계약은 각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계약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상호대립관계에서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를 갖고 평등한 상태로 태어나고, 존엄성과 권리를 가진 모든 인간을 토대로 사회계약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자연에 가까운 원초적 계약의 상태는 남성과 여성 간에 커다란 차이가 남겨져 있다. 은연중이든 의식적이든, 편협적이든 포용적이든, 상징적이든 실재적이든 간에, 사회계약에서 자유를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남성으로 상징하고, 예속을 자연으로 간주하는 경우를 여성으로 대표하는 질서라는 것을 해체하기란 쉽지 않다. 남성과 여성의 성차는 인간의 원초적 계약상태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관계 차이인 것이다.

17~18세기 국가와 시민, 정부 간의 사회계약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발전이 있었으나 성적 계약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괄시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성인은 시민이 되고 결혼함으로써 자유를 얻는다. 또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성인이 획득하는 자유에 여성을 소유하는 것도 해당해 있다. 페이트만이 내세우는 여성과 관련한 핵심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회계약도 성적 계약에 기초해 있고, 시민이 얻는 자유도 이러한 성적 계약으로 인한 가부장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여러 가지 계약 형태를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남성에게는 사회계약뿐만 아니라 성적 계약까지도 원시적 자연이자 자유라는 의견이 오래된 편견으로 남아 있고,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만든 법에도 남성중심주의가 지닌 오래된 파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왜 가부장제를 문제시 여기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아버지의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가정 내 아버지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을 형제애로 탈바꿈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것은 남성의 성에 대한 권리가 근대적 사회계약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어에는 애인이나 연인을 가리킬 때에 사랑(amour)에서 비롯되는 연인(amant)의 표현 외에 우정(amitie)에서 비롯되는 ‘한 명의 사랑스러운 친구’를 뜻하고, 엉(윈) 쁘띠(뜨) 아미로 발음하는 표현인 ‘un(e) petit(e) ami(e)’가 있다. 한 명의 친구를 프랑스어로 표현하면, un(e) ami(e)인데, 이 어휘에서 ‘petit(e)’와 같은 형용사가 들어가는 이유는 petit(e)가 ‘작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사랑스럽고 귀여우며 정답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는 의미를 가진 어휘에 ‘친밀한 감정’의 의미가 함께 포함된 이유는 주니어(junior)와 같은 ‘막내 형제’가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애인을 가리키는 ‘쁘띠(뜨) 아미’는 마치 맏형이 막내동생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 등에서 연유한다. 즉, 성적 계약에 기초한 애인을 표현하는 어휘는 가족애적인 가부장제가 우애적인 가부장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어휘임을 알 수 있다. 18~19세기 혁명기의 사회계약설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나의 연인’과 같은 어휘에는 혈연관계를 뜻하는 형제애의 맥락과 의미가 비어있는 채 잔여물로 남아 있다. 근대 형제애는 여성이 남성에 종속된다는 뜻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형제계약은 고용계약, 매춘계약을 포함한 성적 계약으로 간주되어서 사회계약에 속한 결혼 계약과 구분된다.

페미니즘에서 연구한 가부장제에 관한 모호하거나 불명확한 특성으로 인해, 페이트만은 사회적 결사를 위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개인이 신체를 자유로이 소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재산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사회적 결사란, “시민들끼리의 개인적 우애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를 도모하는 집단으로서의 복수 형태인 우애‘들’을 의미한다.”4 이 용어는 남성 중심적인 비밀결사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모든 계약은 재산이나 권리의 상호교환과 이에 따른 평등이 전제해 있다. 그러나 한쪽이 “잠재적인 재산이 되면 불평등하게 된다.”5 재산은 기본적으로 물질에 기반하므로, 잠재성을 전제로 한다면, 반드시 현실화되는 실재가 동반한다. 이것은 물질에 이미 담겨 있는 가치상에서의 평등이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상상적인 신체로만 여기고, 실재적 신체를 가상화하는 관계에 제한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더 이상 합법적이거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여기에서 잠재성은 어느 행위가 현실화되는 가능성(계기나 준원인 등)을 의미하는 한에서의 가상성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실재하는 신체를 가진 남편이 현실에서 실재적인 아내의 신체를 특정한 가상 세계의 도구로 삼거나 특정한 성적 행위를 포함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 혹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을 만큼 아바타나 메타버스, 인터넷게임 등으로 가상화되어 있는 경우에 가상 남편이 가상 세계에서 연장된 현실의 실재적 아내에게 실질적 행위를 하는 경우 등, 전혀 현실화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적인 가상 세계에 의해 선택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언어와 행위의 실질적인 영향력 등의 경우에 남녀의 성적 차이는 가상과 실재 간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지 자연적 성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녀 간의 성차가 순수한 자연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상과 실재의 차이에서 비롯된 다양한 법적 지위와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소유하는 권리를 가상과 실재의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박탈당하는 경우는 여성의 인권뿐만 아니라 성적 정체성을 박탈당하는 경우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민의 자발적인 신체 소유권 문제는 남성과 여성 간에 형제애를 토대로 한 형제계약에서 비롯된다. 이 계약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이어온 자본경제의 역사와 관련된다. 자본경제는 남녀 간의 형제애를 이상적인 모델로 규정하여 현실과 신화 간의 간격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이 남성에게는 오이디푸스의 신화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여성에게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뿜어져 나온다. 근대 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은 언제나 신화적 특성을 배제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이자 보편적인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는 프랑스어로 fraternite라고 하며, 우애 혹은 형제애라는 의미도 가진다.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이념인 박애 정신은 근대 시민사회 시민들끼리 강하게 유대하도록 이끌어 오늘날에는 관용 정신(똘레랑스)으로 불린다. 박애 이념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사회에서 관용 정신은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을 심각하게 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애나 형제애 정신으로 대변되는 다양한 사회계약, 특히 성적 계약이나 혼인계약, 매춘계약, 고용계약, 노예계약 등은 여러 유형의 가정폭력과 성범죄, 각종 중범죄, 빈부격차, 인종차별, 성차별, 난민수용의 문제 등을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관용 정신이든 근대사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공화국 및 민주주의를 형성한 주요 정치이념마저도 가부장제의 어두운 면을 피할 수 없었다. 프랑스를 민주주의 공화국을 향한 혁명의 길로 이끌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시민들이 민중이 되어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끈 정치이념은 더 이상 사회통합의 계기가 아니라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근대 사회계약의 토대를 이루는 성적 계약에 대해 살펴보았다. 페이트만은 이 책에서 사회계약론을 살펴보려면 우선 성적 계약을 논해야 한다는 페미니즘적 이념을 내세웠다. 그녀는 다양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이념을 연구하면서, 가부장제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일어난 지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부장제에 대한 개념과 범위 규정,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살펴보는 역사적 고찰, 사회적 권력의 구조화 문제, 사회의 보편성인지 특수성인지의 여부,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여성성과 관련한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고찰 등과 같은 연구 과제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긴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 페미니즘 연구는 현대 여성들의 사법 판결권을 개혁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자 작업이다. 4년 전 현 인류에게 느닷없이 닥친 코로나19 팬데믹은 또 다른 현대적 우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 세계 통계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망한 자가 약 670만 명이 넘고,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었으며, 시민들의 경제 및 사회활동이 줄어들자 자영업자들의 소득이 크게 감소하여, 많은 점포들이 문을 닫아 길거리 문화가 사라질 위기가 처해 있다. 또한, 20~30대 청년들은 사회의 양극화 구조가 심각해지고, 기존의 산업 패러다임이 해체된 가운데 일자리를 얻거나 정식적인 학교 교육을 받는 데 어려움이 늘고 있다. 2023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17세기 근대정치사상으로부터 탄생한 민주주의 공화국의 이념과 시민의식, 인권사상, 자본주의 경제사회 등이 300년 넘게 이어온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계약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새로이 깨닫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시민사회는 또 다른 정치적 의무이자 권리, 자유를 실천하고, 논의를 확장 및 발전시키는 과제를 미래에 남겨두고 있다.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교의적으로 수용되었던 시민의 자유와 권리의 문제는 이제 허물을 벗었다. 우리는 신종바이러스의 발견과 감염경로, 방역 대책, 예방진료,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통계 및 이와 관련한 신기술들을 경험하면서, 진부하고 하찮게만 여겨졌던 근대 사회계약설을 재고찰하게 되었다. 끝내 사회계약은 시민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기만한 성적 계약의 진면모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성적 계약은 시민들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제3의 성이든 간에 어떠한 성(性)이라도 띠며 살고 있음을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페이트만이 이 책에서 강조한 형제애적 가부장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꼭 고려해야 할 논의이다.

—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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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두 번째 연재의 변’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여성과철학 분과

 

지난 2019년에 발행된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의 작업을 잇는 연속 작업으로, 이번 기획은 페미니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할 수 있는 확장된 작업을 진행하고자 한다. 우리의 이전 기획 이후 지난 3년간 출판된 여러 편의 페미니즘의 고전을 비롯해, 페미니즘을 혁신하거나 다양화시키는 여러 텍스트들이 번역‧출판되었으며, 우리는 페미니즘 사상의 발전을 위해서 이들의 추상적 개념, 전개되는 논리,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기존의 질서 및 이데올로기와의 전투,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아나키즘-자유주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정신분석학 등과의 우호적이거나 적대적 마주침, 철학-법학-사회학-생물학-인류학-문학-언어학-공학-자연과학의 분과학문적 틀 안에서 혹은 그것과 투쟁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모험 등을 쉽고 익숙한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오늘날 여성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형태로 정규화되고 규범화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사유의 궤적과 흐름을 추적 및 구성하면서 현재의 사회지형 안에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철학적 면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기획은 한편으로는 이론의 관점에서는 이론적‧분석적‧논리적‧비판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실천의 형태에서는 실천적‧대중(지향)적‧구성적‧상상적인 성격을 띤다. 즉 자유롭게 상상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외연과 의미를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연구를 하면서도, 그것의 서술과 전개과정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실천적 활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자 한다.

이것은 지난 2016-2018년을 경과하며 미투 운동으로 상승했던 페미니즘 운동이 최근 하강/침체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운동에서의 다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이론적 계기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이 기획은 이전의 운동이 가진 단조로움이나 협소함을 넘어서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더 넓은 연대의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한 이론적 포용성을 넓히는 것에 초점이 두어진다. 또한 이 기획은 “한철연” 내에서 ‘여성과철학’ 분과의 지난 활동들의 결과물을 모으는 것이기도 하며, 그래서 활동을 강화하고 신규회원을 모집하는 계기도 지니고 있다.

이 기획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철학> 분과”가 진행하는 것으로, 먼저 웹진 <e-시대와 철학> ‘블로그 분과진’에 글을 업로드하고, 모든 글이 최종 마무리 제출된 이후에는 글들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펴낼 생각이다.

 

집필자 : 김세서리아, 김은주, 연효숙, 유가연, 이승준, 이지영, 정유진, 주현


  • 연재 글의 저자와 주제

[1] 전반기

  • 유가연 : 남과 여, 은폐된 성적계약(캐롤 페이트먼)
  • 이승준 :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샌드라 하딩)
  • 연효숙 : 『2의 성』(시몬 드 보부아르),
  • 주현 : 『스트레이트 마인드』(모니크 위티그)
  • 이지영 : 『몸 페미니즘을 향해』(엘리자베스 그로스)
  • 정유진 : 『캘리번과 마녀』 / 『혁명의 영점』(실비아 페데리치)
  • 주현 : 『섹스할 권리』(아미아 스리니바산)
  • 김은주 : 『변신』 / 『포스트휴먼』(로지 브라이도티)

[2] 후반기

  • 연효숙 : 『시적언어의 혁명』(줄리아 크리스테바),
  • 이승준 : 『여성 인종 계급』(앤절라 데이비스)
  • 김은주 :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 김세서리아 :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프리드리히 엥겔스)
  • 유가연 : 『반사경』(뤼스 이리가레)
  • 김세서리아 : 『권력의 정신적 삶』(주디스 버틀러)
  • 이지영 :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트러블과 함께하기』(도나 해러웨이)
  • 정유진 : 『대항성 선언』(폴 프레시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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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상)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①

1. 캐롤 페이트만,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②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유재민 지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초빙교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 플라톤(Platon, 기원전 429?-347)과 함께 고전기 그리스 철학, 나아가 서양 사상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그리스 북동부 칼키디케 반도의 스파케이로스로 그리스 변방 출신이다. 기원전 367년, 17세에 그는 당대 문화의 중심이었던 아테네로 유학을 가서, 플라톤이 교장으로 있었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한다. 학생 시절 그를 가리키는 몇 가지 별명은 “학원의 지성”, “부지런한 독서가”였다. 그는 20년 후 아카데미아를 떠나 자신의 독자적 학파를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한 철학자이다. 그는 ‘만학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서양 사상사 거의 전 분야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서양 최초로 학문을 분류한 사람이다. 그의 저술은 크게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적 저술로 분류된다. 그리고 ‘실천적 학문’에 윤리학과 정치학적 저술들이 포함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과 함께 실천적 학문에 속한다. 그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대표하는 저술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윤리학적 저술에 『에우데모스 윤리』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포함되는데, 이 책의 제목은 에우데모스[아폴론 뤼케이오스(아폴론 신의 별칭) 신전 근체에 세운 학교인 뤼케이온 학원 구성원 중 한 명]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인 니코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록을 편집해서 붙인 것이다.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부제를 “행복한 사람이 욕망에 대처하는 자세”로 붙였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제1장의 첫 소제목인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이다. 그리고 유재민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다음 소제목을 “행복에서 시작하여 덕으로 나아가다”, “행복, 윤리의 사다리”, “객관적 행복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으로 정했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재민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를 ‘행복’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인 그는 제2장에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행복이란 무엇인가”,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읽기 시작한다. 마지막 제3장에서는 “철학의 이정표”라는 제목으로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테오프라스토의 『성격의 유형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에피쿠로스의 『세 통의 편지』, 윌리엄 프라이어의 『덕과 지식, 그리고 행복』을 소개하고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지,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돌진하는 군인은 ‘착한’ 군인이 아니라, ‘훌륭한’ 군인이다. ‘윤리’는 그리스어 ‘에티코스’(êthikos)를 번역한 말이다. ‘에티코스’의 어원은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이다. 사람이 습관을 들여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성격’ 혹은 ‘성품’이다.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성격에 관한 책’ 혹은 ‘성품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 행위자의 본성적이고 본질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또한 이 원리는 좋은 사람을 만들어주고 행복한 사람을 살게 해주는 여러 덕목들에 관한 설명을 통해 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 덕과 중용, 정의와 우정, 공동체의 행복이라는 덕목들을 개인 안에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국가에 살고 있는가?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현남숙(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신유물론, 생태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서양철학의 극복되어야 할 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베이컨의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이것이 시사하듯, 자연에 대한 투명한 인식과 그로부터 지배가 가능하다고 보는 관념은, 인류세라 불리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중심적이고 무모한 생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이 아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의 시간지평에서 보면, 베이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의 학문적 공과 중에 ‘과’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베이컨은 당대의 사유관행에 맞서 싸운 우상타파자이자 새로운 학문 방법론의 창안자인 점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손철성(이후 저자)의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관한 대중적 해설서이자 비평서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과 구별되는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의미한다(‘오르가논’이란 ‘도구, 특히 생각의 도구란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논리학 저작 전체에 붙여진 이름이다).

1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을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제시한 인물로 위치 지운다. 그는 베이컨을 근대를 기획한 인물로 명명하면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초입에 도달할 무렵인 16세기에 학문의 대혁신을 이룬 인물로 그려낸다. 대혁신의 요체는 자연을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인식의 방법을 창안하여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의 실제적 내용을 두 각도에서 소개한다. 하나는 지식의 진보를 가로막는 우상타파(종족의 한계, 개인적 편견, 언어의 오염, 기존철학의 방해)에 관한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해석과 지배를 가능케 할 정신의 도구로서의 참된 귀납법에 관한 내용이다. 베이컨은 개별공리로부터 단번에 일반화된 공리로 나아나는 일반적 귀납법과 달리, 경험의 재료를 모아 중간 공리들을 끌어내고 그것을 다시 개별 사례에 적용해 보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참된 귀납법을 제시했다.

3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이 자신과 다른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려준다. 그 중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베이컨 자신이 그려낸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소설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과학기술에 대한 베이컨의 지나친 낙관을 비판하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이 있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학문의 대혁신으로 만들어갈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우화를 제시한다. 한편,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베이컨의 이러한 구상이 갖는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처럼,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대한 쉽고도 신뢰할 만한 입문서 역할을 한다. 뿐더러, 근대 경험주의 계열의 철학자와 만날 수 있는 유의미한 통로로서의 역할도 한다. 특히, 베이컨의 학문적 공과를 균형 있게 풀어나간 점은 저자가 가진 철학적 내공이자 미덕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베이컨의 프로젝트,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여 자연의 우위에 두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식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생각은 대체로 비판받고 있다. 근래 팬데믹이나 기후위기에서 보듯, 자연은 인간의 생각만큼 잘 예측되거나 통제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관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생태적 부작용도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당대에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제시했듯, 오늘날 철학은 인류세에 요청되는 새로운 지식의 도구나 사유의 방향을 제시할 책무를 갖는다. 길을 잃었을 때 왔던 길을 되짚어가서 새 길을 찾듯, 베이컨의 철학을 성찰적으로 복기해 보아야 한다. 저자가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에, 이러한 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서평자 현남숙: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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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국부론』(1776)을 통해서 자신의 시대에 남아 있던 봉건제와 중상주의적 통제 정책을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시스템이 어떻게 생산력 증진을 가져오고 일반 시민들을 전반적으로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논증하고자 했다. 알다시피 『국부론』의 원제는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그런데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부제는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이다. 바로 이 점이 그동안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해와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국부론』이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단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자이기 이전에 『도덕감정론』(1759)의 저자였다. 스미스는 도덕적 판단의 원천을 ‘공감’이라 했다. 이재유는 이 지점을 중심으로 『스미스의 국부론』을 집필하였다.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1장에서 애덤 스미스의 철학적 세계관을 조명하면서 공감의 원칙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시장자유주의와 복지주의의 인간관, 아울러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을 살펴본다. 여기서 스미스의 인간관을 철학자 흄, 홉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등과 연관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스미스의 인간관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국부론』을 읽는다. 이재유는 2장을 마치면서 스미스 사상의 핵심은 “모든 부의 근원은 인간의 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므로 노동자가 부를 만드는 주체라는 것이다. 3장 ‘철학의 이정표’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스미스의 친구였던 데이비드 흄의 『오성에 관하여』를 소개한다.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지고, 존 로크의 『통치론』,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룬다.

 

이재유는 노동이 부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구성원 모두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재화를 만드는 노동이 타인 공감의 실천적 행위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스미스의 이기심은 흄의 ‘공감’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자기애이다. 나아가 『도덕감정론』의 “공평한 관찰자”는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연결시킨다. 이렇듯 스미스의 사상 속에는 철학적 토대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통해 “공감-공평한 관찰자-노동-보이지 않는 손”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루소의 사회계약은 스미스와 흄의 공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과 연결된다. 나아가 로크의 저항권은 애덤 스미스의 ‘독점 반대’와 흄의 제한된 공감을 넘어서는 공감의 확장과 연결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

더욱더 거세지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국부론』을 인용하며 이기성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스미스의 인간학에는 공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노동가치설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하는 이들은 가난하다. 노동하지 않는 이들이 부자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국부론』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길일 것이다. 그것을 이재유는 ‘공감’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국부론』의 저자가 쓴 『도덕감정론』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덕감정론』의 저자가 쓴 『국부론』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부론』이란 책에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나치게’ 유명하다. 한 번 읽어보라는 권유가 심드렁하게 여겨질 정도로. 더욱이 ‘세탁’이나 ‘교육’ 프랜차이즈의 이름에 작품명의 라임이 남아 있어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식상하기까지 하다. 고전치고는 내용도 짧고 쉽기에, 한 권 읽어냈다는 서푼짜리 정복감 외에 그다지 인상적인 독후감도 남지 않는다. 사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다가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이처럼 과한 낯익음에 있다.

연효숙의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소상한 안내서가 빛을 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 식상한 인상을 벗겨 『유토피아』가 흥미롭기 그지 없는 작품임을, 그리고 지성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깨닫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1장 ‘이상 국가를 꿈 꾼 토마스 모어’, 2장 ‘『유토피아』 읽기’, 3장 ‘철학의 이정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토피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중요한 문제의식까지 꼼꼼하게 짚어낸다. ‘유토피아’에 대한 모어의 상상은 그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란 제목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더욱이 모어의 삶, 그리고 그 배면의 역사적 변화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또 상세하게 설명함은 작품의 진면목에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하고도 긴요한 배치다.

모어는 근대세계가 급부상하는 격변의 역사를 온 몸으로 관통했던 인물이다. 성속의 대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그의 삶을 통해 극적으로 함축되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오랜 종교적 가치를 보듬으면서도 관용적이었던 그의 윤리적 삶은 실제로 헨리8세의 막강한 세속적 권력과 충돌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로 치면 영의정쯤이라 할 수 있는 상서경(Lord Chancellor)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즉 온갖 사회적 수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토마스 모어는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의 뿌리와 이를 심화하고 있는 당대의 역사적 변화를 지극히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돈과 힘의 위세가 종교적 윤리의 고삐를 벗어던짐으로써 심화되는 새로운 시대의 위험성, 그리고 이같은 변화 속에서 뭇 백성들에게 들이닥친 생존의 위기는 비판을 넘어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문제였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길지 않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지를 차분하고 깔끔하게 보여준다.

일신의 안녕을 등진 치열한 문제의식은 모어로 하여금 전례가 없는 이상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내도록 한 바탕이었다. 그의 ‘유토피아’가 배고픔과 질병의 고통, 죽음의 공포를 단순 부정했던 종교·신화의 이상향과 판이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대적 유토피아의 상상은 생산의 풍족함과 분배의 공평성, 모두의 평등과 연대를 가능하게 할 실질적 기반까지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기복적 피안의 흐릿한 꿈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지닌 지성사적 가치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책 말미(3장 ‘철학의 이정표’)에 연관된 고전들을 소개함으로써 모어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을 고대와 중세, 다시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지성사적 계보 하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까닭이다. 주지하다시피 모어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잇고 있으며 이는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마르크스, 캉유웨이, 에른스트 블로흐, 발터 벤야민까지 나란히 연관 저작으로 배열하여 보여준다. 이는 지성사를 통해 이어진 이론의 계보가 부단한 것이었음을 적절하게 환기하는 것이나 사실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처럼 면면한 지성사적 계보 너머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유와 인정을 둘러싼 불평등, 그리고 그에 대한 투쟁은 여전하다. 그래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친절한 입문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모어가 넘어서고자 했던 현실의 질곡이 50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변함없음을, 따라서 ‘희망’ 또한 그치지 않음을 애써 일깨우고 있는 까닭이다.


서평자 이병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사)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배기호 지음, 『순자: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2022)를 읽고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배기호 지음, 『순자 – 악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읽고

 

윤태양(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예전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동양)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물어오기에, 발간 취기 뒤로 치기를 숨기며, ‘군자가 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자(君子).

원래 군자는 말 그대로 ‘임금의 자손’, 즉 혈통적 지배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공자(孔子)에 의해 ‘군자’라는 개념은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핏줄로 얻은 지배계층의 지위 (이것은 기존의 의미이지요), 다른 하나는 지배계층에 요구되는 능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들 (이것은 공자가 새로 부여한 의미입니다) 로 말이죠. 그리고 후자인 ‘군자다움’은 배움과 자기 수양을 통해 얼마든지 획득 가능한 것이라고, 공자는 설파했습니다.

 

‘군자’를 요샛말로 풀자면 어떨까요. 진지하고 단정한,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는 단호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정한, 행동은 예의에 알맞고 마음은 올바름을 좇는, 공평한 정신으로 공공선을 추구하고, 사사로운 이익 앞에서 의(義)를 실천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요.

 

여덟 글자로 말하자면 ‘극기복례(克己復禮)’ 와 ‘수기안인(修己安人)’.

저는 이것이 『논어(論語)』의 핵심이고, 유학(儒學)의 중추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강하게 폭발했던 때를 꼽으라면,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꼽을 것입니다. 벌떼처럼 일어났던 것은 패자의 자리를 노리고 전쟁(戰爭)을 일삼았던 군웅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사학의 창시자인 공자 이래로 온갖 ‘자(子)’들이 저마다의 논리로 치열하게 논쟁(論爭)을 벌였던 때 역시 바로 이때입니다. 그래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대략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기원전 3세기 초까지인 저 제자백가 시대를 장식했던 무수한 이름들은 무심한 세월 속에 먼지처럼 스러져 갔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孟子)의 이름만은 우뚝하게 ‘유학’의 근본으로 추앙되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울의 성균관과 각지에 있는 231개 향교의 대성전에 이들의 위패를 (물론 가짜이지만) 봉안하고, 아직까지도 매년 석전대제를 지낼 정도입니다. ‘공맹’의 병칭은 ‘유학’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순자(荀子)는 뭐랄까, 유학의 방계(傍系) 혹은 별종으로 취급을 받아온 터라 대성전에 없습니다. 널리 아시는 것처럼 ‘한유가 흠을 잡고, 주희가 낙인을 찍은’ 뒤로 이 한반도에서 순자는 일종의 터부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순자가 터부시 되었던 것은 적어도 고려 중기 이후입니다. 고려의 이규보와 이제현의 비판 뒤로, 특히 주자학이 들어와 조선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한 이후에는 순자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실패자’로 등한시 되었고, 정조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금씩 순자에 대한 재평가 혹은 취사의 시도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윤무학, 2009 참고)

 

순자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크게 그 논리를 둘로 갈래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진(秦)에 대한 매도의 역사관 위에서 진의 강성과 통일을 가능케 했던 이사(李斯)와 법가의 모체라는 비난이고, 다른 하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으로 박혀버린 미운털 탓입니다. 순자의 입장에서는 양자 모두 정정당당한 논리적 비판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순자에 대한 연구는 맹자-주자 계열의 연구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직하의 좨주이자 당대의 대학자 순자는 작금까지의 외면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어쩔 수 없지, 괜찮아.’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순자가 존숭해 마지않던 공자의 언행이 기록된 논어 제일 첫 편 첫 장의 말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이역만리 한국의 젊은 연구자가, ‘멀리서 찾아온 벗’ 마냥 반갑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요.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반갑습니다. 평소 보아왔던 배기호 선배의 모습처럼 ‘지금의 눈으로 옛것을 읽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그의 고민이 장마다 물씬물씬 풍겨서 더 그런 것도 같습니다.

 

오랜만에 순자를 다시 읽다 보니 문두의 옛 감상이 다시금 차오릅니다. ‘나는 공부를 왜 하는가. 결국 더 나은 자신으로 스스로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과 함께 말이죠.

 

저도 순자를 전공했습니다. 군자의 길을 따르기 위해 그토록 예의를 중시하고, 욕망의 힘을 인정하여 매우 경계했으며, 그래서 더욱 학문과 수양을 권장하고, 궁극적으로 공공선의 추구를 가장 앞에 두려 했던 순자의 사상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아주 논리적이고, 치밀하며, 매우 현대적입니다. 짧은 서평에서 다 말하려니 힘드네요. 배기호 선배가 이 책에서 너무나 잘 설명했는데 말이죠.


서평자 윤태양: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순자 도덕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K학술확산연구센터에서 일하고 있고, 유가 도덕론과 한국 근대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가족 같은 세상 [내가 읽는 『자본론』]

가족 같은 세상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 이 글은 2021년 1월 초,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즈음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가족을 참 좋아한다.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분위기’, ‘한 국가를 살아가는 가족’ 등 가족이라는 단어를 어디에나 다 가져다 붙인다. 보통 가족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할 때에 가족은 좋은 의미로 쓰인다. ‘가족 같은~’이라는 표현에서 가족은 화목하고 포근한 공간, 안전하고 끈끈한 집단(공동체)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족이라는 수식어가 가지고 있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성격부터가 문제이지만, 이 글에서는 가족이라는 수식어로 은폐하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계약관계, 그리고 그 계약관계가 가지는 허구의 공정성에 집중해보자.

한때 대한민국 굴지의 모 대기업에서 국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홍보 슬로건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대기업은 해당 슬로건을 통해 좋은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실제로 대한민국 어느 가정을 보더라도 해당 기업의 제품 하나 이상은 찾아볼 수 있으니 이 기업은 대한민국에 한정된 또 하나의 가족이긴 하다.

이 기업은 반도체, 전자기기를 주력 상품으로 한다. 해당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직업병으로 죽거나 중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족’을 내걸며 자신을 알리던 이 기업에게 기업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이 아니었나 보다. 이 기업은 제품 생산 및 연구 공정과 질병 발병의 연관성을 계속해서 부정해왔다. 결국은 법적으로 산업재해가 인정되었지만 그러함에도 여전히 이 기업은 노동권 보장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개발독재 시대 얘기를 해보자. 대한민국은 독재자 대통령을 아버지[父]로 하는 하나의 가족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각하께선 국부(國父)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1 그러나 아버지는 ‘소자의 아픈 곳’을 외면했다. 수출 실적이 매년 사상 최대치를 찍을 때, 청계천 옆 의류 시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가 폐병에 걸리고 손가락이 잘려가면서도 해고될까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찬 바람 부는 서울 길거리에서는 아버지께 아픈 곳을 고쳐 달라고 하던 한 사람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이번 겨울 여의도의 쌍둥이처럼 생긴 빌딩에 일군의 청소노동자들이 농성 중이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은 외부에서 음식물을 반입하지도 못하고 전기를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 빌딩은 ‘인화(人和)’를 창업정신으로 하는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가장 중시한다는 그 기업은 길게는 십여 년 동안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을 관리하던 청소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참고로 그 청소노동자들을 관리하던 용역업체는 해당 기업 오너의 일가이다. ‘진짜’ 가족을 챙겨주느라 창업정신은 잠시 잊었던 것인가.

 

이런 현실에서 왜 노동자들을 가족으로 대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세태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속내를 드러낸다. 그들은 ‘다 알면서 그런 것 아니냐’, ‘근로계약서에 서명한 건 노동자 자신이지 않냐’, ‘자유롭게 계약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결국 ‘가족 같은 회사’나 ‘가족 같은 국가’는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 먹고 살자는 말로 자본가들은 자본을 불리기 위해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고,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다. 계약은 여기서 성립한다. 임금과 노동력이 교환되면서 양측은 각자의 필요를 충족한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고용하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을 때,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을까? 만약 정말 그 계약이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다면 왜 우리 사회는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국가’라는 수식어로 그 계약을 은폐해왔단 말인가. 왜 노동자들은 일하다 죽고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살아야 하는가. 왜 자본이 부당하게 계약을 파기하여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차디찬 겨울 음식물과 전기 공급이 끊긴 곳에 버려져 있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의 계약은 그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처분한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증명한 것이었다. 거래가 완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 그가 자유롭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그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판매해야만 하는 기간이라는 것, 사실상 흡혈귀는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폭로된다.”2

 

이 문장은 비유적 서술이 아니다. 실제로 근대 유럽에서 노동자들은 근육, 힘줄, 피 한 방울까지도 자본, 그리고 자본과 결탁한 국가를 위해 쥐어 짜내야 했다. 그리고 또 대한민국에서도 노동자들은 그래야만 했다. 가족이라는 화목하고 포근한 이름 아래에서 이 착취는 ‘고귀한 희생’으로 세탁되었다. 시간이 흘러 기업이 말해온 가족이라는 개념의 허울뿐인 명분이 조금이나마 벗겨졌지만,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착취는 다시 ‘자유롭고 공정한 계약’이라는 하얀 가면을 쓰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제10장 노동일 파트에서 수많은 노동 착취 사례들을 서술한다. 이 사례들을 보면 당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갉아먹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이고 법적인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항상 자본가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당연히 자본가들은 그 구멍을 점차 넓혀가며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구멍은 노동자들을 병들고 죽어가도록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렇고 유럽에서도 그렇고 세계 어디를 가봐도 “자본은 사회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3 북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대기업들이 대한민국 시장에 진출하면 처음에는 본국에서 노동자들을 대하듯이 대한민국에서도 기업을 경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헬적화’4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자본론』 1권 제10장에 실린 수많은 사례와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서 우리가 목격한 사례는 자본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갑자기 최근에 국회 문턱을 넘어선 법 하나가 생각난다. 본래 이름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었지만 국회를 지나면서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이름이 바뀐 그 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존 산업재해에 관련된 법의 허술함으로 인해 노동자가 죽고 중상을 입는 등 중대한 산업재해가 계속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이 추진되었던 법이다. 본래 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예방과 관리 책임이 있는 주체를 처벌하는 법안으로, 높은 수준의 벌금과 징역형을 통해 재해 예방 책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경각심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 해 수백 수천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나라에서 꼭 필요한 법이었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없는 사회를 위해 나는 지난 10여 주 동안 아침마다 (가끔은 저녁에도) 길거리로 나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거의 매일 했다. 그동안 여러 의제로 피케팅도 해보고 서명운동도 해보았었다. 그런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만큼 큰 호응을 얻은 일은 없었다. 전철역에서 피케팅을 할 때 보통은 피케팅을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역무원들도 ‘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보면 오히려 응원을 해주고 가셨다. 길을 가던 시민이 음료수나 귤을 주시기도 했다. 사람 목숨은 소중하니까, 뭐든 간에 사람을 살리려는 이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나.

이런 시민, 노동자들의 여론에 떠밀려 요지부동이던 정부 여당을 포함한 거대 보수 양당도 진보정당에서 최초로 의제화한 이 법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었다. 다만 정부와 여당, 제1보수야당이 협의한 끝에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누더기가 된 채로 말이다. 10여 주 간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나마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기엔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기업’이 빠진 ‘중대재해처벌법’은 다섯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엔 적용되지 않고, 쉰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에는 수년 뒤에나 적용된다. 벌금 하한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법안 수정을 적극적으로 이끈 집권 여당은 정책위원회 명의의 홍보물에서 “법안의 미비한 부분에 대한 보완과 개선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약속”5했다. 본인들도 미비한 법안임을 잘 알고 있다. 보통 법은 예측되는 미비한 부분을 모두 보완한 뒤 제정하고, 시행 중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개정하는 식으로 고쳐진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5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사업장 중 반을 넘는 게 현실이다. 이제 기업들은 5명 미만으로 따로 하청을 줘서 노동자들을 분리 고용하는 ‘합법적인 꼼수’를 쓸 것은 뻔하다. 만약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처벌과 마찬가지로 법원이 수백만 원 단위의 벌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달라진 게 뭘까. 여전히 노동자의 목숨값은 수백만 원이고, 이 미비한 법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너무나 많으며,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가족 같은 국가’의 ‘가족’에 노동자는 없는 것이 맞다. 그 가족 구성원에는 돈 많은 사람, 중대한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기업가들만 있나 보다.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서 한 해 2,000명 가까이 되는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대한민국이다. 죽음으로 내몰릴 이유가 없던 사람들이다. 죽을 이유가 없고 죽음에 이르지 않을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뒀다면 그것이 노동자들을 일부러 죽인 일과 무엇이 다른가.

 

2주 전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어떤 노년의 여성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전태일을 왜 기념하는지 몰라. 그냥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인데 말이야. 예전에는 나라가 가난해서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어. 내가 해외에 물건 수출하던 기업 운영했던 사람인데 말이야…” 물론 전태일은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이 아니다. 기업이 해외에 수출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안 그래도 좁은 공장에 널빤지로 칸칸이 쪼개어 환기도 안 되는 곳에 밀어 넣어진 여공들이 폐병으로 죽어가던 현실에서, 그들이 먹고 살아갈 방법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사람이 전태일이다. ‘가족’들이 아프니까 ‘아버지’였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편지도 써봤다. 그러나 노동자 전태일의 말을 들어주는 권력자, 자본가는 없었다. 전태일은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를 더 크게 내야 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외치기 위해, 그래서 분신을 선택했다.

『자본론』에는 ‘워클리’라는 소녀의 죽음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워클리는 환기가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 수십 명의 소녀와 갇힌 채 일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죽음은 밀폐된 공간에서의 초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엔 화력발전소에서 탄가루가 수북이 쌓인 채 혼자서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다가 목이 잘려 죽은 청년이 있다. 그 죽음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단식 투쟁으로 이뤄내고자 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누더기가 되어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책에서 고발하는 사례들은 문자로 박제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유예되고 제외된 사람들이 진정 우리 사회의 가족이었을까. 아니면 공정한 계약의 당사자였을까. 그보단 예전 신분 사회 때 하나의 화목한 가족을 지탱하는 데에 필요했던 수많은 노예에 가깝지 않을까. 신분제도는 철폐된 지 오래고, 계급론은 철 지난 구닥다리 이론이라지만 오히려 현실은 ‘책으로만 내려 전해지던 옛날이야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정말 가족 같은 세상이다.


  1. 월간조선, 『(사료)해방40년』(월간조선 1985년 신년호 별책부록), 조선일보사, 1985, “박정희 대통령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전태일의 편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항목 (검색일: 2021. 01. 29)에서 재인용,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308&tabId=01&levelId=hm_160_0020>

  2.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410~411쪽.

  3.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365쪽.

  4. 대한민국 사회를 자조적으로 비하하는 표현인 ‘Hell(지옥)조선’에 ‘최적화’라는 단어를 합쳐 만든 신조어이다. 대한민국 밖에서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대한민국 안으로 들어오자 대한민국 수준으로 망가졌다고 평가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5.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1월 8일 본회의 ‘중대재해처벌법’ 법안통과!”(2021.01.08 18:46:46) 웹포스터 홍보물 문구 중 인용, <https://theminjoo.kr/board/view/policyreference/396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