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내가 읽는 『자본론』’ 스무 번째 글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어른들은 몰라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지난 2019년, 대한민국의 선거권 제한 연령 기준이 만19세에서 만18세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것은 광복 이후 세 번째 선거권 제한 연령 조정이자, 청소년의 참정권 쟁취를 위한 무수한 투쟁들이 단면적으로 가시화된 일이었다. 필자는 2019년 3월을 지나며 만19세가 되었기에 실제적 변화를 체감할 순 없었지만, 이 연령 기준 조정을 두고 여러 현장에서 설왕설래가 오가던 나의 스물 살 시기는 아직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내 주위에서도 연령 조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미성숙한 청소년이 벌써 정치에 참여해서 좋을 것이 없다.”라고 얘기하거나 또 다른 이들은 “참정권은 국민의 기본적, 보편적 권리이므로 청소년을 이 기본적 권리에서 배제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령 하향 조정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는 전자의 주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만한 지점을 시사한다.
우선 전자의 주장은 ‘장유유서’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동북아 문화권 특유의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 나이주의) 문화와 맞닿은 견해라 판단된다. 연령에 따라 정해지는 위계질서와 그 규범에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복종해왔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실제로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을 불완전한, 혹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또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들을 종종 발견한다. 에이지즘 문화를 토대로 형성된 연령-차별적 문화 속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은 자연히 여러 억압에 놓이게 된다. 이 같은 억압의 양태는 개별적 개체로서의 아동과 청소년, 또 우리 사회 분업 체계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도맡는 구성원으로서의 아동과 청소년을 동시에 옥죄고 있다.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피억압과 더불어 ‘노동자’로서의 아동과 청소년은 성인 노동자의 그것보다 더욱 무겁고 커다란 억압의 사슬을 발목에 차게 되었다.
추상화 된 사변적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을 떠올려보자. 당장 우리가 여러 가지 종류의 판·구매와 소비, 거래, 교환 등을 실현하는 장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사회적 분업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청소년과 아동들은 어떠한 상태에서 근로하게 될까? 우선, 대부분의 대한민국적인 문화가 그러하듯, 에이지즘 문화가 그 관념적(관습적) 기반을 이룬 사업장에서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크고 작은 차별과 부당대우에 놓여있다. 이들의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이유로 이들을 향한 공격적 발언과 차별적 행위가 큰 거리낌 없이 (연장자들에 의해) 자행될 것임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추론 가능한 종류의 현상이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상품 노동력에 관한 부분에서 포착된다. 에이지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아동·청소년-노동자는 충분히 숙련되지 못한 노동력의 판매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종류의 편견을 지닌 고용주들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성인 노동자가 같은 시간 동안 수행하는 노동보다 질이 낮은 노동만을 수행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일정부분에서 이는 사실이다. 특정한 노동의 행위 경험과 이에 대한 능숙도가 비례하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의 특수한 형태와 개별적 상황에 따라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성인 노동자들에 비해 더욱 우수한 역량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편견이다. 고용주들은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업무적 미성숙을 빌미로 시간적 크기가 성인 노동자의 그것보다 훨씬 큰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노동력을 성인 노동자의 노동력 가격과 비슷한 가격에 구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같은 값에 아동·청소년 노동자를 성인 노동자보다 오래 고용하고자 하는 셈이다. 언뜻 보면 이는 등가거래로 보일 수도 있다. 아동이나 청소년이 판매하는,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품질의 상품임에 동의하는 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질이 떨어진다는 식의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이유로 어린 ‘노동력’의 가치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고용주들의 음흉한 속셈은 커다란 오류를 낳는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에 적용되는 원칙과 마찬가지로, 이 상품에 투여(체현)되어 있는 노동량의 총합으로 책정된다. 즉, (아동·청소년의 노동력의 가치량은 상품 노동력 생산에 투여된 모든 가치량의 합임에도 불구하고) 아동·청소년들이 판매한 노동력이 그 구체적 행위(노동) 과정(구매자/고용자의 상품 사용 과정) 끝에 이끌어내는 물적(양적) 생산성이 (성인노동자의 그것에 비해) 낮다는 이유로, 본래 가치의 양보다 적은 가치를 아동·청소년의 노동력 가격표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노동력의 질적 문제를 빌미로 자행 되는 (시간적 양이) 과도한 노동이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지속적으로 강제 될 경우, 이는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일상의 재생산’을 방해하며, 나아가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생명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더불어 어린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노동량을 부여하는 것은 고용주가 노동자의 (손에서 창조된) 가치를 앗아가는 착취의 정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 노동력을 판매한 노동자의 삶이 재생산 될 수 있게 하는 생활수단의 양적 크기와 같다. 따라서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지속적으로 과다 노동을 강제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증가하며 이는 이들이 판매하는 상품 노동력의 가치 증대를 초래할 것이다. 이를테면 과도한 노동으로 야기된 질병이나 성장저하와 같은 건강상 문제들이 아동·청소년 노동자의 일상과 그 재생산을 방해하게 될 경우, 고용주가 이들에게 지급해야할 이들 노동력의 값어치는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다음날 출근을 위한 기본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상품으로서 기능 할 수 있는 정상적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생활수단의 양 역시 (건강 문제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용주들은 어린 노동자들의 개인적 사정 따위엔 관심이 없다. 노동력의 가격표는 그대로일 것이고, 이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치착취의 정도가 더욱 증대됨을 의미한다.
『자본』Ⅰ-상 제3편 제10장의 노동일 부분을 통해 우리는 수백 년 전 지구반대편 영국에서도 나이와 권위를 빌미로 한 아동·노동자에 대한 억압이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1 저자 마르크스는 1860년대 영국의 <아동노동 조사위원회>가 펴낸 보고서를 인용하여 당시 영국에서 자행 되고 있었던 아동-노동자에의 착취와 억압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이하에서 묘사되고 있는 노동량을 9~12세의 소년들이 수행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모나 고용주의 이와 같은 권력 남용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
소년들을 주야 교대로 일시키는 방법은 ……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을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이 노동시간은 많은 경우 소년들에게 잔혹할 뿐 아니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시간이다.
……
정상적 노동일이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 반까지 계속되는 어느 압연공장에서 일하는 한 소년은 일주일에 나흘 밤은 적어도 8시 반까지 일했다… 그리고 이것이 6개월간 계속되었다. 다른 한 소년은 9세 때는 가끔 1교대 12시간 노동을 3회 연속했고, 10세 때는 이틀 낮, 이틀 밤을 계속 일했다.
……
12세의 또 한 소년은 스테이블리에 있는 어느 주물공장에서 2주일 동안 계속 아침 6시부터 밤 12까지 일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2
위 내용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당시 영국의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은 너무도 가혹하고 처참했다. 자본과 그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고용주 자본가는 불변자본3 및 생산수단이 빈둥거리며 그 쓸모를 잃게 될까 극도로 염려한다. 자본가가 구매한 생산수단 속의 가치는 생산수단이 사용되지 않는 한 쓸모없이 낭비되며, 이는 자본가의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이 때문에 자본은 본능적으로 기계를 비롯한 자신의 여러 생산수단들을 잠시도 가만히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본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근본 속성은, 노동자를 24시간 제한 없이 착취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동일한 노동자의 노동력을 하루 종일 밤낮없이 착취하는 것은 생물의 육체적 차원에서 불가능하다. 여러 노동자들의 고용주인 자본가들은 고민 끝에, 노동자들을 밤과 낮으로 나누어 교대로 착취하고자 했다. 이 발상에서 비롯한 야간 노동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극도의 비인격적 노동 환경으로 내몰았다. 물론 야간노동에 내몰렸던 노동자들이 모두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인에 비해 주체적 결정권이 부족한 아동과 청소년들은, 고용주 혹은 부모나 기타 어른들의 나이에 근거한 차별과 그 강압으로 말미암아 반강제적으로 위와 같은 고용 형태와 노동 환경에 순응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거의 모든 아동과 청소년들은 야간 노동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 의지로 이 같은 작업 환경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위와 같은 비인간적 형태의 참혹한 착취가 성인에 비해 아동에게 더욱 심각한 건강과 병태 생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은 더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 이와 같은 교대제 또는 윤번제는 영국 면공업의 왕성한 성장기에 성행했으며, 현재에도 특히 모스크바의 면방적 공장에서 성행하고 있다. …… 이런 곳에서 노동과정은 6일간의 노동일 동안에는 매일 24시간 계속될 뿐 아니라, 일요일에도 거의 24시간으로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는 남녀의 성인과 아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동과 소년들의 나이는 ‘8세’부터(일부의 경우에는 ‘6세’부터) 18세까지의 모든 나이층에 걸쳐 있다. …… 약간의 부문들에서는 소녀와 부인도 남자 종업원과 함께 야간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
야간노동의 일반적인 나쁜 영향들을 당분간 무시하면, 24시간 중단 없이 계속되는 생산과정은, 예컨대 앞에서 말한 매우 긴장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산업부문들[각 노동자의 공인된 노동일은 대체로 주야를 불문하고 12시간으로 되어있다]에서는 표준노동일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 그러나 이 한계를 넘는 과도노동은 다수의 경우 영국 공식보고서의 말을 빌린다면, ‘참으로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
[제강공장인 네일러 앤드 빅커즈사의 공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 미만 소년들의 야간노동 없이는 우리 일은 잘 될 수가 없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생산비의 증가다. …… 숙련공과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소년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 미만 소년들의 야간노동을 금지하면 막대한 곤란이 생길 것이다. 최대의 곤란은 ……비용 증가다. …… 손실은 공장주의 부담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노동자]들은 당연히 그 손실을 부담하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4
실상 자본가는 자신의 손실을 극도로 꺼려하여 손실 문제의 책임 소재를 노동자에게 전가 하려고 하는데, 보통의 노동자 역시 손실을 부담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기에, 결국 이를 감당하여 손실을 메꾸는 몫은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실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근본적 계급 관계 때문에 자본에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으로 연령이 낮은 ‘아동·청소년’이라는 점 때문에 복합적인 착취의 위험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에이지즘의 문화 구조, 그리고 이념적 권력 관계의 작용은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에게 두 가지 교차적 차원에서의 불이익을 선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에이지즘을 자본주의적 착취와 버금가는 불의로 상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엄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보다 정합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나이주의 문화와 자본주의 속 에이지즘의 양태에 대해 분석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 오늘 내가 쓰고 있는 글의 목적은 에이지즘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나이에 따른 위계(권력) 형성이 바람직한지 논함에 있지 아니하다. 이를 위해선 너무나도 엄밀하고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논증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 내 논의의 범위는 실제적 현상에 드러난 에이지즘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영향들을 고민해보는 수준에 국한하기로 했다. 에이지즘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명료화 할 수 없다고 해서 이 글이 무의미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과거(1800년대)의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탐구해온 자본주의적 착취와 에이지즘적 불평등의 결합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1년 지금 세상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대한민국을 휘감았던 ‘열정페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열정페이’란 젊은 구직자들이나 청년들에게 극단적 저임금 혹은 무임금으로 노동을 시키며, 기술력의 교육이나 열정 창출 등을 지급했음을 주장하는 기성세대 고용주들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인터넷 지식백과에선 ‘열정페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무급 또는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주 적은 월급을 주면서 청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태를 비꼬는 신조어다. 즉, 취업을 희망하는 취업준비생을 무급 혹은 저임금 인턴으로 고용하는 관행으로 2014년 유명 의류 업체와 소셜커머스 업체 등 몇몇 기업의 부당한 청년 고용 실태가 보도되면서 이 용어가 부각됐다.”5
“열정페이(熱情Pay)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줬다는 구실로 청년 구직자에게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적게 줘도 된다는 관념으로 기업이나 기관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경험이 되니 적은 월급(혹은 무급)을 받아도 불만 가지지 마라,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라는 태도를 보일 때 이를 비꼬는 말이다. 이 말에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로 치달은 사회 분위기에 대한 냉소가 담겼다.”6
‘열정페이’란 현대의 청년-노동착취를 우습고 엉성하며 얼토당토아니한 포장지로 포장하는 셈이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용주가 ‘열정페이’를 지급하고자 억지를 부리는 대부분의 경우는 청소년 및 청년층이 노동력 판매하는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 1800년대 영국 공장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아동들보다는 조금 더 넓은 스펙트럼의 연령대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면서도 이를 통해 깨닫는 중요한 점은 나이주의 문화에 근거한 권력 구조를 토대로 발생하는 심화된 형태의 노동 착취가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에 계속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현대엔 사회가 더욱 첨단화 되어감에 따라 착취를 고도화 하는 에이지즘적 억압이 더욱 교묘하고 세밀한 양상으로 첨예화 된 것으로 보인다. 저출산과 수명의 연장으로 사회 지배층-피지배층 간의 연령적 단절은 더욱 뚜렷해졌고, 이는 나이주의 위계 질서와 권력 구조를 공고화 했다. 또 이 때문에 위와 같은 복합적이고 결합적인 피착취 대상의 연령적 범위는 더욱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용주 계급과 기득권층을 구성하고 있는 연장자들은 사회적 권력과 기득권적 지위를 보다 더 공고히 했으며, 이는 더 많은 아동/청소년/청년을 억압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생애 주기’의 기준으로 과거엔 ‘한창 일할 시기’에 막 진입하곤 했던 젊은이들은 이제 일자리를 쉬이 구하지 못하게 되었고, 사회적 권력에서 더욱 더 소외됨으로써 절박하고 간절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해버렸다. 일전엔 정상적 성인 노동자로 취급 받던 젊은 20대 노동자들이 이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이주의적 경향에 의해) 보다 심화된 노동 착취적 현실을 그대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열정페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신조어의 등장은 단지 추상적·사변적 유행어나 가벼운 말장난의 등장 정도로 판단할 수 없다. 실제로 내 주위에도 이 같은 ‘열정페이’의 사례들이 너무나 빈번하고 흔하게 존재하고 있다. 먼저, 아동 청소년이나 젊은 청년 계층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하고자 하는 사업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제도로 ‘수습’, ‘실습’, ‘교육’ 등의 방법들이 사용되는데, 이는 ‘열정페이’가 의미하는 바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습생’, ‘실습생’, ‘교육생’ 따위의 이름표를 달게 된 어린 노동자는 보통 수습이나 교육, 실습 기간 동안 합의된 급여보다 적은 급여(심각한 경우엔 무급여)에 일하게 된다. 연장자인 고용주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어린 노동자들에게 기술력 이전 및 각종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제시하며 이 노동착취의 관례를 적극 옹호한다. 더불어 고용주들은 ‘실습 제도’에 노동자가 쓸 만한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는 것인지 시험해보는 의의도 있음을 주장하는데, 이는 해당 노동력이 성에 차지 않으면 수습(실습)기간 전후에 고용주 마음대로 얼마든 (일방적으로) 해고해버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중고교시절, 청소년의 입장에서 수습기간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했던 아르바이트-계약들을 숱하게 경험 했다. 그때는 생각의 한계로 지금 같은 문제의식은 없었지만, ‘대체 교육과 급여의 지급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의아함은 분명 들었다. 즉 고용주가 미래에 그럴듯한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구입하고 싶어 어린 노동자에게 교육 또는 실습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이는 어디 까지나 고용주 자신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며, ‘당연히 계약된(합의된) 동일한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 맞지 않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좀 더 면밀히 현실을 들여다보면, 알바생 실습, 교육 제도 정도는 양반이다. 그래도 이 경우엔 수습기간이 끝나면 이러한 노동 착취를 어느 정도는 끊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내가 재학 중인 대학 내외에 존재하는 특정 매장(사업장)에서 훨씬 더 충격적인 노동 현장들을 목격해왔다. ‘크루’, ‘지기’ 등의 그럴듯한 이름을 부여 받은 ‘무급’ 대학생 노동자들로 운영되는 매장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로 내 주위에 즐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알아보니 이들은 수익금을 기부하거나 자신들의 학부를 위해 쓰거나 하는 비영리적 성격임을 밝히고 있었고, 특정한 한 명의 고용주가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방식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를 어디론가 통째로 흩날려버리고 있었고, 이는 노동의 의미와 그 중대한 가치에 대한 심각한 훼손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학 시절 해맑게 웃으며 자발적으로 ‘열정페이’를 실현해낸 젊은 구직자들이 머리가 희끗한 대고용주들 눈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겠는가. 이 어린 노동자들의 무급 노동을 일종의 협동 조합식 기업 운영으로 포장하려해도, (노동-생산과정의 통제력은 자신들이 지닐지 몰라도) 결국 노동의 생산물 혹은 노동력이 창조해낸 가치를 이들이 소유하지 못하므로 합리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더불어 노동자의 유(類)적 본질 그 자체도 소외되고 훼손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이 행위자의 의식적, 창의적, 자발적, 인간적 행위일 때에는 그 자체만으로 노동 행위자를 만족시키고, 인간의 능동적 행위임에 해당 노동에 인간의 유(類)적 본질로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노동의 대가로서의 가치가 필요 없게 된다. 노동 자체가 이미 인간적 목적이며 대가를 필요로 하는 수단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노동은 생계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그 본질적 의미는 이미 퇴색되었고, 그 과정의 결정권과 통제력마저 이미 노동자의 손을 떠났으며, 노동자로 하여금 그저 대가로서의 가치만을 바라게 한다. 내가 언급한 대학생 무임금 노동의 경우엔, 노동의 과정 자체는 노동자들 스스로 통제 할 수 있는 의식적 창의적 행위로 구성되지만, 노동의 목적 자체가 노동자 스스로의 욕구 충족이나 만족을 위함이 아니고, 노동의 생산물을 노동자가 소유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당 노동이 수단으로 기능하여 노동자가 어떠한 가치를 (노동의) 대가로 지급 받게끔 하는 것(임금 노동) 또한 아니다.]
요컨대 2021년 현재에도 어린 노동자들은 노동자-일반이 당하는 착취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부당하게 착취당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복합적 착취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가 나열한 모든 종류의 실제 노동착취 현장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아동/청소년/청년 노동자들이 경험하게 될 냉혹한 현실이라 단언하겠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이가 제법 차 고용주가 나이주의 권력을 이용하기 부적합한 노동자들은 이전의 노동 경험을 근거로 실습(교육) 등의 착취적 경험에서 면제되며, ‘젊은 시절의 경험’ 등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될 무임금 노동의 새 희생양 후보에서도 제외된다. 이쯤 되면 이미 내가 굳이 『자본』 속 옛 사례들까지 꺼내어 문제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이 모든 실례들이 『자본』 속 사례들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영국 및 유럽 각지에서 자행 되었던 아동·청소년 노동 착취가 껍데기만 바꾼 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당연히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린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히) 급여 대신 지급 받아야 할 대가로서의 가치로 보기 어렵다. 이들에게 필요한건 사라진 임금의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 기술력의 교육이 아니라, 인간적 노동 환경 보장과 노동 가치의 온전한 반환으로서 누릴 수 있게 되는 인간적 ‘성장’과 학술적 ‘교육’의 기회다. ‘교육’은 고용주의 핑계 거리가 아니라 어린 노동자들의 권리로 기능해야 한다.
『자본』 속 서술들 역시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본문에서 제시하는 19세기 영국의 사례들은 2021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봐도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현대의 알바생 실습 제도와 유사한 사례들이 제시되어있음에 매우 놀랐다. 이를 조금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인노동자들이 소년들에게 베푸는 지도는 소년들의 임금의 일부로 계산되며 …… 성인 노동자들은 소년들의 노동을 비교적 싸게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소년들의 야간 노동이 금지된다면) 각 성인노동자는 자기 이득의 절반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
바꾸어 말해 샌더슨사는 성인노동자들의 임금 일부를 소년들의 야간 노동에 의해 지급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급해야할 것이다. …… 이리하여 샌더슨사의 이윤은 약간 감소할 것인데, …… 이 사실이 샌더슨사로 보아서는 소년들이 자기 일을 낮에는 배울 수 없다는 훌륭한 이유인 것이다.
……
[애터클리프에 있는 압연단철공장인 샌더슨사의 샌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계설비가 놀고 있는 탓으로 생기는 손실은 주간작업만 하는 공장이라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 만약 용광로의 불을 끄지 않으면 연료가 낭비될 것이고, …… 그리고 용광로 그 자체도 온도 변화로 말미암아 망가지게 될 것이다.‘(※이에 대한 저자 마르크스의 반응※ 그런데 동일한 용광로인 노동자들은 주간노동과 야간노동의 교대에 의해 조금도 망가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4차 보고서」(1865, 제85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조사위원 화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규칙적인 식사시간이 보장되는 결과 약간의 열량이 현재보다 더 낭비될 수는 있다. …… 그러나 유리공장에서 일하는 성장기에 있는 아동들이 마음 놓고 식사하며 먹은 것을 소화하기 위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결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나라의 유리공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명력의 낭비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 …… 그처럼 더운 공기 속에서 그처럼 힘든 일을 하는 아동들에게 수면은 절대로 필요한 것인데, 아동들은 이 수면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뛰어놀거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시간을 조금도 얻지 못한다. …… 이 짧은 수면까지도 밤에는 아이들 자신이 지각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중단되며, 낮에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잠이 깨기 때문에 중단된다.
……
[영국 아동노동 조사위원회 제4차 보고서 초안 작성자인 트리멘히어와 터프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년‧소녀‧부녀자들이 주간 또는 야간의 근무시간 중에 수행하는 노동량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7
인용문의 사례는 기술력 교육이 필요한 아동·청소년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며, 성인 노동자들은 해당사항이 없다. 이를 통해 고용주는 임금의 지출을 줄일 수 있고, (어린 노동자들 덕분에 이익을 얻는) 성인 노동자들은 어린 노동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푼다는 명목 아래 보조적 노동력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어린 노동자들의 생명력은 소실되고 궁극적으로 노동-가치 착취를 극대화한다. 이런 상황이 1865년 영국과 2021년 대한민국에 모두 존재한다.
1800년대 영국의 공장에서는 위와 같은 착취적 노동 제도들을 바탕으로 온갖 핑계를 만들며 아동·청소년 및 부녀자들을 24시간 주야 교대 근무제로 내몰고 있었다. 공장주들은 (그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24시간 공장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실습 제도를 내세워 아동과 청소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성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형태의 노동 제도의 치명적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오히려 이를 통해 약간의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모든 부분에서 1800년대의 영국의 공장 노동 실태와 현재 대한민국의 아동/청소년/청년 노동 현장은 공통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200여 년 전의 영국 아이들과 현재 대한민국 아동·청소년 모두 공통적으로 나이주의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자본주의적 노동 착취의 피해자들인 셈이다.
나는 『자본』에 보이는 과서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의 실태가 지금 아동과 청소년들이 겪는 노동 현실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로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오늘 열거한 문제들을 에이지즘의 담론과 직결 시킬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에이지즘이 아동 및 청소년 노동착취의 과정에서 직접적 역할을 하며 뚜렷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의 근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노동 현장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또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추가적 불이익을 받고 있으며, 이는 이들의 노동력 가치를 앗아가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이 에이지즘에 기반을 해 있던 그렇지 아니하던, 어린 노동자들의 근로를 더욱 버겁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만만하게 여겨지는 낮은 연령의 피착취 계급으로 취급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 하나 만으로 우리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의 실제적 노동 상황을 더욱 주의 깊게 살피며, 그 불평등한 현실을 분석적으로 밝혀내고 이에 맞서 싸워낼 당위를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선 아동이나 청소년을 위한 투쟁이 특정 정체성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과거의 어느 때에 아동이었고 청소년이었다. 아동·청소년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 결코 정체성 정치의 일환으로서 계급성을 저해할만한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할 계급투쟁의 가열한 함성 속에, 이제는 아동·청소년 노동자들을 위한 뜨거움을 조금 더 도드라지게 섞어내도 되지 않을까. 청소년과 아동의 인권을 위한 용기 있는 투쟁들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되찾아오고 있듯이, 아동과 청소년들의 노동권 또한 다시 되찾아올 수 있게끔, 시대적 소명을 깨우친 모두가 들끓는 목소리를 모아야만 할 것이다.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구시대의 옛 어휘로 남기를 소망하며,
“이젠 어른들도 알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