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이 과연 다른가? [맹자와의 대화 1]
전호근 / 김시천 대담
혁명과 성선의 사상가, <맹자>와 만나다!
김시천: 요즘 전통 고전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 다양한 동아시아 고전과 관련하여,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특히 처음으로 모신 선생님은 <맹자> 강의로 유명한 전호근 선생님입니다. 안녕하세요? 2012년을 맞이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호근: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e시대와 철학>의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김시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맹자>인가요? 저는 선진(先秦)의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상가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렇게 잘 읽혀지는 고전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맹자>를 강조하고 중시합니다. 왜 그런가요?
전호근: 제가 만난 사람들은 아마도 <맹자>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96년부터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맹자>강의를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 <맹자>강의를 열면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예를 들어 텍스트의 재미로 본다면 사마천의 <사기> 그 중에서도 <사기열전> 강의가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한 편, 한 편이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소설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어서 그런 강의를 하면 많은 분들이 오실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런데 <사기열전> 강의할 때보다 <맹자>강의를 할 때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맹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이 고전을 직접 읽어보려고 왔다고 볼 수 있죠.
김시천: 그건 일반화할 수 없는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맹자>는 우리에게 ‘혁명’(革命)이나 ‘성선’(性善)과 같이 가장 무시무시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움 사상을 펼친 사상가였지만, 그 유명세만큼이나 그가 현실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오랫동안 <맹자>강의를 해오셨는데, 선생님의 강의에 모인 일반 시민들의 <맹자>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전호근: 제가 강의하던 <맹자>는 주희가 정리한 <맹자집주>본으로 하는 강의였습니다. 그 <맹자집주> 맨 앞에 ‘서설’이 나옵니다. 서설을 강의할 때에는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 ‘맹가열전’부터 시작하는데, 그 맹가열전을 통해 맹자가 어떤 사람인가 밝혀지면 강의 들으러 온 분들이 놀랍니다. 실제 그 분들이 생각했던 맹자와 사기열전에 소개된 맹자와 다르기 때문이죠.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좌파(?) 사상가, 맹자
전호근: ‘사기열전’에 소개된 ‘맹가열전’은 137자밖에 안되지만 명문입니다. 참고로 ‘공자세가’에 소개된 공자의 전기는 8천 자 가까이 됩니다. 노자는 1천 50여 자 정도 됩니다. 장자도 235자입니다. 그런 것과 비교해볼 때 맹자는 130여 자밖에 되지 않으니 제대로 기록하였다고 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죠. 그런데 그 137 자가 명문이어서 맹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바로 드러납니다.
김시천: 글자 수를 세어 본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군요. 그럼 ‘맹가열전’을 들은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전호근: 실제로 강의가 진행되면 이른바 맹자의 ‘혁명론’도 나오고 토지 균분론과 같은 ‘정전제’(井田制)도 등장하고 합니다. 한 마디로 정전제는 토지 재분배론입니다. 토지를 생산수단으로 하는 농경 사회에서 공정한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므로, 이런 것을 현실에 맞추어서 강의하면, 강의를 듣는 분들이 상당히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00년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좌파에 대한 공세가 강하게 드러났던 2002년, 노무현 정권 시절에 제가 <맹자> 강의를 하다가 ‘좌파’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보고 좌파라고 하길래 저는 맹자로 도망갔죠. 제가 좌파가 아니라 아마도 맹자가 좌파인 것 같다고 하면서 말이죠.
김시천: 저도 언젠가 어떤 선생님의 맹자 발표에 관한 논평을 하면서, 맹자가 말하는 주장을 오늘의 정치와 관련해서 보면 ‘좌파’에 가깝지 않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 역사 내내 맹자만큼 좌파였던 사람도 없었던 듯한데… <맹자> 강의를 하면서 ‘좌파’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선생님의 심정은 어땠나요?
전호근: 그런 경험을 하면서 ‘선생님’의 권위가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념 공세 앞에서는 선생님이고 뭐고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좌파라는 공격을 받고나서 이런 경험에 대해 동료나 선배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더 재미난 경험도 했었죠. 어떤 분께서 “나는 사회철학 전공자인데 나는 강의하면서 좌파라는 공격을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수치로 여긴다”고 말씀하는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맹자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이 그런 강의를 통해 바뀌는 지점이 되었고, 제가 가감 없이 맹자를 있는 그대로 강의한 것이 그분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갖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분들의 맹자에 대한 관심이 반갑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시천: 저 역시 그런 점을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오히려 한국보다 이념적 성격에 대한 검증이 더 치열했던 중국의 경우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던 듯 싶네요. 대륙 중국에서 1949년부터 1960년대 중후반까지 ‘전통 계승 논쟁’을 하면서 선진 시대 제자백가에 대해 수없이 평가가 변화했습니다. 1920년대에 ‘사람 잡아먹는’(食人) 교주로까지 몰렸던 공자조차 ‘좌파’까지는 아니어도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묵자(墨子)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회주의 중국에서 그런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 ‘맹자’였습니다. 그 시기의 중국학계의 <맹자> 연구를 다룬 한 외국의 학자는, 당시 <맹자>를 다룬 논문이 단 3편 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회주의 중국에서조차 ‘좌파’로 끌어 들이지 못한 <맹자>를 강의하면서 ‘좌파’라는 말을 들으셨다니, 참 흔치 않은 일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곧 정치 담론이다
김시천: 우리 나라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20세기 후반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맹자>에 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도덕형이상학’에 입각한 ‘심성론’과 통치론으로서의 ‘왕도정치’(王道政治), 동아시아의 독특한 역사관으로 이해되는 ‘치란’(治亂) 사관에 집중되어 있었던 듯 합니다.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구분이긴 한데, 왠지 <맹자>의 정신이 잘 드러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호근 선생님의 <맹자>는 매우 독특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시민 청중들이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좌파’라고 말한 것 아닐까요? 선생님이 <맹자>에 가장 주목하는 점은 어떤 것인지요?
전호근: 저는 기존의 <맹자>에 관한 연구가 모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도덕형이상학이나 성선론, 왕도정치론 모두 유의미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맹자의 그런 사상들이 왕도론, 혁명론, 성선론으로 다 각각 따로 분리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전체가 서로 아귀가 척척맞듯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공자가 ‘성선’을 주장했느냐 아니면 ‘성악’을 주장했느냐에 관해 논란이 있지만, 저는 당연히 성선설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공자도 ‘덕치’(德治)를 주장했기 때문에 ‘성선설’이 아니면 덕치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간이 선한가, 아닌가가 핵심이 아니라 ‘덕치’를 정치 이념으로 제시하려면 ‘성선’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김시천: 그렇습니다. 흔히 <노자>나 <장자>에 대해서 학자들이 평가할 때에도 노자나 장자는 아마도 성선설을 지지할 것이라고 해석하곤 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노자나 장자는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신뢰가 없었지요.
전호근: 반면 순자나 한비자, 그리고 진시황을 도왔던 이사와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아예 ‘덕치’의 싹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덕치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맹자의 ‘성선론’도 기본적으로 정치 담론으로 봅니다. 그리고 ‘왕도론’과 같이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것이 바로 ‘왕도론’이자 ‘덕치’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맹자를 사회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변혁의 철학자로 바라볼 때 맹자에 대한 온전한 시각을 갖출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사회에서도 수많은 전제 군주들이 바로 그런 점을 맹자에게서 빼려고 노력했거든요.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위험했고, 그것이 맹자가 노렸던 점이었습니다.
김시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면 어떨까요?
전호근: 물론 맹자의 사상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맹자>에서 양혜왕(梁惠王)을 만나 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의 푸줏간에는 살찐 고기가 가득하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들이 가득한데,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다!” 이 말은 맹자가 당시 전제 군주들에 대해 가졌던 기본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한 것”이라고요. 성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고, 토지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므로 사람의 시체가 성과 들판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라고 맹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시천: 그 부분은 저도 기억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대화 장면이기도 하지요! 양혜왕이 맹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맹자가 이렇게 묻지요.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을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맹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갑니다. “칼날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당시의 뛰어난 실력자 양혜왕의 앞에서 말하는 맹자의 태도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 삶에서 보아도 대담하고 대범합니다.
전호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극명한 대비입니다. 살진 고기와 백성의 굶주린 기색, 살진 말과 굶어죽은 백성들의 시체! 이런 식의 극명한 대비는 우리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맹자> 뿐만 아니라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같은 작품도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죠. 오렌지 농사가 유례없는 풍년을 기록했는데도 아이들은 비타민이 부족해서 각기병에 걸려 죽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런 극명한 대비를 통해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당위성과 뜨거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맹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맹자를 그런 변혁의 철학자로 바라볼 때 <맹자>가 온전하게 이해되고, 그런 입장에서 바라볼 때 ‘성선설’도 ‘왕도론’도 이해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