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023, 2쇄-수정증보 개정판) 추천사 모음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쇄-수정증보 개정판) 추천사 모음
- 2023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교육부 우수학술도서
국내 최초로 슈티르너의 독일어 원전을 번역하여 화제가 된 박종성 번역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가 2쇄를 내면서 내용을 수정증보하고 책 표지를 새롭게 바꾸어 펴냈습니다. 지난번 표지와 달리 이번에는 슈티르너의 얼굴을 추정하여 그린 초상화를 넣었습니다.
2쇄를 내면서 동료 연구자 및 철학 전공자들이 이 책에 대한 많은 추천사를 써주셨습니다. 아쉽게도 2쇄 개정판에는 담지 못했기에 지면을 통해 글들을 소개합니다. 지금 소개드리는 추천사는 책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 각자의 눈으로 슈티르너 철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의미, 사상사적 의의와 가치, 그리고 앞으로의 철학적 지향까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를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슈티르너는 모든 ‘권위’를 거부한다. 종교, 국가, 법,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인간’, ‘인간의 본질’ 같은 개념조차 “정신을 빼앗긴 사람”의 헛소리라고 거부한다. 반역적 언사와 파격적 은유로 일관되어 접근이 쉽지 않고, 통상의 사상사에서는 언급조차 안 되는 책이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은가! 이 책이 그 많은 문인과 사상가(Camus, Oscar Wilde, Husserl, Habermas, Herbert Read, Emma Goldman, M. Buber, Jacques Derrida…)의 애장 도서목록에 있거나 그들에게 직간접 영향을 미친 이유, 또 현대 주요 사조(니체, 아나키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한 원류(源流)로 평가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서유석(호원대학교 교수)
♦ 현대인은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시스템, 구조, 조직, 국가에 의해 압도되며, 민족, 인민, 프롤레타리아트, 국민, 대중, 다시 말해 ‘그들’의 익명성 속에서 ‘나’의 고유함과 독특함이 사라진다. 나치주의와 같은 국가민족주의가 새로운 극우 포퓰리즘으로 부활하고 있고, 스탈린주의와 같은 국가사회주의가 인민을 통제하고 있다. 거대 자본과 플랫폼 기업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중을 쥐어짜고 있다.
막스 슈티르너는 각자의 유일한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평등한 연합을 꿈꾼 아나키스트이다. 그는 모든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자유인이다. 그의 책에서는 분자혁명을 이야기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를, 한나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참다운 민주주의로 내세운 이소노미아를, ‘세계공화국’을 외치는 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을, 제국에 맞서 다중민주주의를 제시한 네그리와 하트의 아나키즘을 예견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의 도전과 그에 대한 대안적 사상을 그려볼 수 있다.
―김성우(상지대 파인드칼리지 교수)
♦ 파스칼은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이성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숨은 신’(Deus absconditus)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 말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나의 의지에 따라 단독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믿지만 사실상 이 세계가 만든 어떤 믿음의 틀에 사로잡힌 육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오인 혹은 환상에 불과하다. 슈티르너의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바로 그러한 환상에 대한 비웃음이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우리를 얽매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책이다. ‘유일자’(der Einzige)는 그러한 비웃음과 저항의 근거가 되는 ‘나’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종교적, 도덕적, 법적 기준 또는 국가관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슈티르너가 보는 ‘나’는 ‘구체적인 나’로서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추상화될 수 없는 ‘나’이다. ‘나’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며 유일하다. 또 그러한 유일자의 자유며 생명, 주권은 나 자신에게 고유하며 나만이 소유(Eigentum)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인종’, ‘국민’ 등 보편 추상화된 이름으로 규정하거나 도덕과 규범 등을 적용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슈티르너의 책이 ‘사나운 책’이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것이 설령 신이든 국가이든 또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 믿어왔던 것이든 ‘나’의 유일성을 침해하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기성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일탈이고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에 ‘잘못’(tort)이다. 그래서 이 책은 ‘위험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변화의 물줄기는 그 잘못으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독해가 까다롭고 도발적인 제안에 순간 멈칫하게 만들지만, 지금의 ‘나’가 그리고 ‘우리’가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벅찬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김종곤(건국대학교 교수)
♦ 슈티르너로 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시선을 과거 한반도로 돌려보자. 그리 멀진 않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적 강점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10여 년이 지난 1920년대 일군의 혁명적 운동가들이 낯선 인물들을 식민지 조선의 담론장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맑스, 크로포트킨 등과 함께 막스 슈티르너의 이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 필요한 서구 변혁이론의 적극적인 소개와 수용 속에서 막스 슈티르너도 그렇게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물론 당시의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범사회주의 이론들이 맑스주의로 전일화된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무산자 계급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한 슈티르너의 외침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민중의 궁핍한 생활을 가져온 봉건잔재와 식민지적 모순의 타파, 나아가 지배계급의 타락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 등의 시대적 요구 등이 슈티르너 철학의 소개를 불러 온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럼 다시 우리의 시선을 2023년 한반도로 가져오자. 과거 100여 년 전 식민지 조선에 울려퍼진 슈티르너의 치명적인 제안은 그 생명력을 조금도 손실치 않은 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전세계적으로 만연한 자본주의의 억압성 심화, 동아시아를 짖누르는 신냉전과 분단체제의 폭력성 존속, 한국사회 내부의 혐오와 적대심 증폭 등은 자유로운 주체의 존립을 가로막는다. 진정한 나로 결코 살아갈 수 없게 된 우리들의 실존은 이미 특정한 시기와 세대를 넘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결코 절망만을 할 수 없다. 반격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우리들에게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그 반격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철학적 사유가 존재했음을 상기하자. 슈티르너의 철학을 오직 단 한가지의 단어로 집약시킨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슈티르너 철학은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필요한 철학적 사유이다. 슈티르너와 함께 유일자의 자유로운 발걸음을 시작하자.
―박민철(건국대학교 교수)
♦ 올해 내가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몇 번씩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슈티르너의 사상은 이 시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무력한 청년들의 정신세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 그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르다. 나는 나답게 살 것이다. 어떤 조직이나 대중의 취향에 맞춰서 살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능성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역시 내 안에 어떤 힘을 숨어 있는지 나 스스로도 모른다’고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런 사람들이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으면 더 많이 나답게 되고, 한 개인으로 살아 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슈티르너의 말처럼 개인은 언제나 자신을 드높임으로써만 개인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은 더 많이 개인이 되고, 개인의 영역을 확장시켜서 늘 그 누구도 이용당하지 않는 유일한 개인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으면서 막스 슈티르너에게 감동을 받아, 그를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은 최악의 상태다. 슈티르너가 원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위대한 유일자가 되는 것이며,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각자의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샤오체텐(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사)
♦ 바야흐로 무기력의 시대이다.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개개인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모든 동력을 잃었다. 더 이상 새로운 종류의 움직임을 상상하긴 어렵다. 곧 해변을 덮칠 거대한 파도 앞에서 저항이나 탈주라는 행위가 과연 가능할까? 비명을 지른다고 한들 들리기나 할까? 모두들 불안해하면서도 휩쓸려 가기만을 기다린다.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통제와 폭력에 맞서 각자 자기 자신만의 영토를 확립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이라는 기본권과 연결되기에 오늘날 세계에 던져진 사람들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드러나는 막스 슈티르너의 가르침이 무기력에서 벗어날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다고 파도를 잠재울 수는 없다. 다만, 이 책은 어쩌면 파도가 사실 환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그 의구심의 이름은 희망이다. 그리고 환영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순전히 나와 당신에게 달려있다.
―곽장훈(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 위대한 철학자는 불멸한다. 오늘날 우리 언어로 행해진 ‘막스 슈티르너’의 부활은, 시대와 사회의 문제가 슈티르너를 요청하고, 또 슈티르너가 그 문제에 적절한 답을 던지기에 행해졌을 것이다. 그의 유일자 사유는 대중으로 묶어진 채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과제와도 조응한다. 현대인들은 분명히 ‘나’임에도 동시에 ‘어떤 것’으로 포섭되는 탓에, 자유롭지도 안정되지도 못한다. 이에 그는 나를 얽매는 환상들을 파괴하라 말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진 ‘제각각의 나’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이 사회에는 ‘나 자신’은 물론 내 곁의 ‘유일한 나’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해 혐오와 차별이 만연해 있다. 드디어 슈티르너 번역이 이루어진 이 시점에, 그가 부르짖은 ‘유일한 나’들과 그들의 ‘자유로운 연합’의 세계를, 그리고 서로 다르기에 소중한 ‘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답하는 ‘애정과 이해의 세계’를 꿈꿔볼 때이다.
이 저술은 그가 얼마나 ‘시대를 초월한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시대가 열광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지적 풍토를 누구보다도 앞서,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참된 해방과 자유를 꿈꿔본 이에게, 슈티르너의 사유에 빠져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공간과 시간을 넘어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분들이 많다. 물론 막스 슈티르너도 이에 해당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연구와 번역으로 후속 세대의 꿈을 돕고 응원해주시는 박종성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
―안성혁(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그대는 생각 세계의 중심”이라는 슈티르너의 말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계는 내가 보는 대로 구성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가진 욕망을 더 분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를 이끄는 어떠한 관념이 있다고 전제하면 나는 의사 결정을 할 때에 내 욕망이 반영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계가 각자의 경험지평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에 모두가 나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식의 오만함을 보일 가능성도 낮아지겠죠. 결국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이 부재함에 따라 각자의 속성이 존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논리에서 생각해 볼 때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하게끔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 구성될 필요가 있으니 ‘개성 존중’의 유용성을 의심하는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독일어 원전 번역본으로는 이 책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새흰(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아나키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드디어 독일어 원문 번역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 책을 우리에게 전해준 박종성 번역자와 마르크스 공부를 함께하며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을 때만 해도, 그저 슈티르너는 낯설고 위험하며 공상적인 사상가라는 편견도 가졌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책에서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정리해 역사 유물론을 확립하면서 당시의 독일 철학 이데올로기가 관념과 망상을 걷어내면 모든 현실적인 억압과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헛된 기대 속에서 그저 급진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비판의 대상이 바로 슈티르너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이제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를 꿈꾼다면, 과연 그때의 연합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슈티르너처럼 고유한 유일자인 개인들을 억압하는 국가 같은 질서(아르케)에 대항하면서도, 그 고유한 유일자 개인들이 공동으로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아나키즘은 물론 이런 억압의 아르케를 드러내며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그럼에도 이때 각각의 고유한 유일자 개인들은 아르케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 어떤 무언가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창조해낼 수 있을까? 이제 슈티르너와 마르크스의 지향점을 함께 고민해 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우리들에게 비로소 이런 논의를 시작할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다.
―조은평(건국대학교 철학강사)
♦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그를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이 책에서 당대의 종교, 철학, 정치 사상에 대한 전면적 거부와 비판이라는 무자비함을 보인다. 현존하는 모든 정신의 지배와 감히 맞서 싸우려는 탓에 주류 사상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언더독, 슈티르너의 급진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지켜보고 싶은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슈티르너의 유일자 철학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꿰뚫는데, 그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실천으로 나아간다. 슈티르너는 개개인이 비동등하다는 사실로써만 동등한 유일자임을, 따라서 이미 그의 바깥에 있는 관념에 복종하는 대신 진정으로 자기의지에 의해서만 살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삶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과 같다. 우리 존재는 발 디딜 곳 없이 위태롭게 휩쓸리고 있고, 작은 섬이라도 발견하면 당장 그곳으로 헤엄쳐 가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근원적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고정된 관념의 섬에 우리 존재를 가두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유일한 개인으로서 살아갈 용기를 얻고자 하는 나와 비슷한 청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고주연(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 철학하는 사람들이 갖는 공부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마음 한편에, 아니 요즘 식으로는 뇌구조 한편에 결핍이란 단어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자기가 갖지 않은 어떤 것을 그 사상가를 통해 채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슈티르너의 주요한 사상적 궤적으로 아나키즘이나 헤겔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언급하지만, 내가 보는 그의 사상의 기본은 실존주의다. 내가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不惑의 깔딱 고개를 넘길 거부하는 슈티르너의 자기 고백서로 읽은 이유다. 不動心의 숙제는 而立을 지난 모두가 꿈꾸는 유일한 마음이지 않은가.
“나는 사랑하기로 되어 있다.” 아울러 나는 슈티르너의 글 속에서 괴테를 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신을 니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데, 일찍이 현정복음 1장에는 “…괴테가 마침내 신을 피해 동정녀 그레첸을 통해 헤겔과 쇼펜하우어를 낳고…쇼펜하우어가 베를린에 사로잡혀 갈 때에 슈티르너를 낳고 슈티르너가 열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 다섯째가 니체다.” 라고 쓰여 있다. 헤겔을 신학과 어떻게든 연결하려 애쓰는 애비 애미도 모르는 연구자들은 반성하시라. (코찡끗) MY oNe and Only LOVE를 떠올리는 제목에 혹해서라도,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책을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같은 30대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읽고 나면 유일이라는 단어와 소유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實感할 것이고, 그의 우유를 팔아주지 않은 사람들을 나와 함께 원망할 수 있으리라.(나는아직비쥬얼30대) 내가 아는 번역자는 매우 의지가 약하고 의존적인 인물인데, 이 어렵고 주체적인 작업을 그가 해냈다. 남은 것은, 슈티르너가 상하기 전에 얼른 많이많이 파는 일. 그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럼, 이 빌어먹을 “끊임없는 자기광고(Werben)를 위하여 건배!”
―인현정(이화여자대학교 철학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