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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023, 2쇄-수정증보 개정판) 추천사 모음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쇄-수정증보 개정판) 추천사 모음

  • 2023년도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교육부 우수학술도서

 

국내 최초로 슈티르너의 독일어 원전을 번역하여 화제가 된 박종성 번역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가 2쇄를 내면서 내용을 수정증보하고 책 표지를 새롭게 바꾸어 펴냈습니다. 지난번 표지와 달리 이번에는 슈티르너의 얼굴을 추정하여 그린 초상화를 넣었습니다.

2쇄를 내면서 동료 연구자 및 철학 전공자들이 이 책에 대한 많은 추천사를 써주셨습니다. 아쉽게도 2쇄 개정판에는 담지 못했기에 지면을 통해 글들을 소개합니다. 지금 소개드리는 추천사는 책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 각자의 눈으로 슈티르너 철학에서 발굴할 수 있는 의미, 사상사적 의의와 가치, 그리고 앞으로의 철학적 지향까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를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슈티르너는 모든 ‘권위’를 거부한다. 종교, 국가, 법, 이데올로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인간’, ‘인간의 본질’ 같은 개념조차 “정신을 빼앗긴 사람”의 헛소리라고 거부한다. 반역적 언사와 파격적 은유로 일관되어 접근이 쉽지 않고, 통상의 사상사에서는 언급조차 안 되는 책이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은가! 이 책이 그 많은 문인과 사상가(Camus, Oscar Wilde, Husserl, Habermas, Herbert Read, Emma Goldman, M. Buber, Jacques Derrida…)의 애장 도서목록에 있거나 그들에게 직간접 영향을 미친 이유, 또 현대 주요 사조(니체, 아나키즘,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의 한 원류(源流)로 평가받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서유석(호원대학교 교수)

 

♦ 현대인은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시스템, 구조, 조직, 국가에 의해 압도되며, 민족, 인민, 프롤레타리아트, 국민, 대중, 다시 말해 ‘그들’의 익명성 속에서 ‘나’의 고유함과 독특함이 사라진다. 나치주의와 같은 국가민족주의가 새로운 극우 포퓰리즘으로 부활하고 있고, 스탈린주의와 같은 국가사회주의가 인민을 통제하고 있다. 거대 자본과 플랫폼 기업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중을 쥐어짜고 있다.

막스 슈티르너는 각자의 유일한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평등한 연합을 꿈꾼 아나키스트이다. 그는 모든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 자유인이다. 그의 책에서는 분자혁명을 이야기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를, 한나 아렌트가 고대 그리스의 참다운 민주주의로 내세운 이소노미아를, ‘세계공화국’을 외치는 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을, 제국에 맞서 다중민주주의를 제시한 네그리와 하트의 아나키즘을 예견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의 도전과 그에 대한 대안적 사상을 그려볼 수 있다.

―김성우(상지대 파인드칼리지 교수)

 

♦ 파스칼은 우리의 세계가 우리의 이성적 의사결정이 아니라 ‘숨은 신’(Deus absconditus)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 말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나의 의지에 따라 단독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믿지만 사실상 이 세계가 만든 어떤 믿음의 틀에 사로잡힌 육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오인 혹은 환상에 불과하다. 슈티르너의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바로 그러한 환상에 대한 비웃음이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우리를 얽매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을 말하는 책이다. ‘유일자’(der Einzige)는 그러한 비웃음과 저항의 근거가 되는 ‘나’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종교적, 도덕적, 법적 기준 또는 국가관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슈티르너가 보는 ‘나’는 ‘구체적인 나’로서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추상화될 수 없는 ‘나’이다. ‘나’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며 유일하다. 또 그러한 유일자의 자유며 생명, 주권은 나 자신에게 고유하며 나만이 소유(Eigentum)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인종’, ‘국민’ 등 보편 추상화된 이름으로 규정하거나 도덕과 규범 등을 적용하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에 대한 폭력일 수밖에 없다.

슈티르너의 책이 ‘사나운 책’이라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것이 설령 신이든 국가이든 또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 믿어왔던 것이든 ‘나’의 유일성을 침해하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기성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일탈이고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에 ‘잘못’(tort)이다. 그래서 이 책은 ‘위험한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변화의 물줄기는 그 잘못으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독해가 까다롭고 도발적인 제안에 순간 멈칫하게 만들지만, 지금의 ‘나’가 그리고 ‘우리’가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철학적 사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벅찬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김종곤(건국대학교 교수)

 

♦ 슈티르너로 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시선을 과거 한반도로 돌려보자. 그리 멀진 않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적 강점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10여 년이 지난 1920년대 일군의 혁명적 운동가들이 낯선 인물들을 식민지 조선의 담론장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맑스, 크로포트킨 등과 함께 막스 슈티르너의 이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 필요한 서구 변혁이론의 적극적인 소개와 수용 속에서 막스 슈티르너도 그렇게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물론 당시의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범사회주의 이론들이 맑스주의로 전일화된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무산자 계급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한 슈티르너의 외침은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민중의 궁핍한 생활을 가져온 봉건잔재와 식민지적 모순의 타파, 나아가 지배계급의 타락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 등의 시대적 요구 등이 슈티르너 철학의 소개를 불러 온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럼 다시 우리의 시선을 2023년 한반도로 가져오자. 과거 100여 년 전 식민지 조선에 울려퍼진 슈티르너의 치명적인 제안은 그 생명력을 조금도 손실치 않은 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전세계적으로 만연한 자본주의의 억압성 심화, 동아시아를 짖누르는 신냉전과 분단체제의 폭력성 존속, 한국사회 내부의 혐오와 적대심 증폭 등은 자유로운 주체의 존립을 가로막는다. 진정한 나로 결코 살아갈 수 없게 된 우리들의 실존은 이미 특정한 시기와 세대를 넘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결코 절망만을 할 수 없다. 반격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우리들에게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그 반격을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철학적 사유가 존재했음을 상기하자. 슈티르너의 철학을 오직 단 한가지의 단어로 집약시킨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유’일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슈티르너 철학은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필요한 철학적 사유이다. 슈티르너와 함께 유일자의 자유로운 발걸음을 시작하자.

―박민철(건국대학교 교수)

 

♦ 올해 내가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몇 번씩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슈티르너의 사상은 이 시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무력한 청년들의 정신세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 그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르다. 나는 나답게 살 것이다. 어떤 조직이나 대중의 취향에 맞춰서 살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능성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역시 내 안에 어떤 힘을 숨어 있는지 나 스스로도 모른다’고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런 사람들이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으면 더 많이 나답게 되고, 한 개인으로 살아 갈 용기가 생길 것이다. 슈티르너의 말처럼 개인은 언제나 자신을 드높임으로써만 개인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은 더 많이 개인이 되고, 개인의 영역을 확장시켜서 늘 그 누구도 이용당하지 않는 유일한 개인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으면서 막스 슈티르너에게 감동을 받아, 그를 통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은 최악의 상태다. 슈티르너가 원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위대한 유일자가 되는 것이며,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 각자의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샤오체텐(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사)

 

♦ 바야흐로 무기력의 시대이다.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개개인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모든 동력을 잃었다. 더 이상 새로운 종류의 움직임을 상상하긴 어렵다. 곧 해변을 덮칠 거대한 파도 앞에서 저항이나 탈주라는 행위가 과연 가능할까? 비명을 지른다고 한들 들리기나 할까? 모두들 불안해하면서도 휩쓸려 가기만을 기다린다.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통제와 폭력에 맞서 각자 자기 자신만의 영토를 확립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이라는 기본권과 연결되기에 오늘날 세계에 던져진 사람들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드러나는 막스 슈티르너의 가르침이 무기력에서 벗어날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다고 파도를 잠재울 수는 없다. 다만, 이 책은 어쩌면 파도가 사실 환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그 의구심의 이름은 희망이다. 그리고 환영이 사라진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순전히 나와 당신에게 달려있다.

―곽장훈(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 위대한 철학자는 불멸한다. 오늘날 우리 언어로 행해진 ‘막스 슈티르너’의 부활은, 시대와 사회의 문제가 슈티르너를 요청하고, 또 슈티르너가 그 문제에 적절한 답을 던지기에 행해졌을 것이다. 그의 유일자 사유는 대중으로 묶어진 채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한 ‘우리’ 시대의 과제와도 조응한다. 현대인들은 분명히 ‘나’임에도 동시에 ‘어떤 것’으로 포섭되는 탓에, 자유롭지도 안정되지도 못한다. 이에 그는 나를 얽매는 환상들을 파괴하라 말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진 ‘제각각의 나’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이 사회에는 ‘나 자신’은 물론 내 곁의 ‘유일한 나’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해 혐오와 차별이 만연해 있다. 드디어 슈티르너 번역이 이루어진 이 시점에, 그가 부르짖은 ‘유일한 나’들과 그들의 ‘자유로운 연합’의 세계를, 그리고 서로 다르기에 소중한 ‘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답하는 ‘애정과 이해의 세계’를 꿈꿔볼 때이다.

이 저술은 그가 얼마나 ‘시대를 초월한 인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시대가 열광하는 현대 철학자들의 지적 풍토를 누구보다도 앞서,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참된 해방과 자유를 꿈꿔본 이에게, 슈티르너의 사유에 빠져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공간과 시간을 넘어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분들이 많다. 물론 막스 슈티르너도 이에 해당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연구와 번역으로 후속 세대의 꿈을 돕고 응원해주시는 박종성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

―안성혁(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그대는 생각 세계의 중심”이라는 슈티르너의 말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계는 내가 보는 대로 구성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가진 욕망을 더 분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를 이끄는 어떠한 관념이 있다고 전제하면 나는 의사 결정을 할 때에 내 욕망이 반영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세계가 각자의 경험지평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에 모두가 나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식의 오만함을 보일 가능성도 낮아지겠죠. 결국은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이 부재함에 따라 각자의 속성이 존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논리에서 생각해 볼 때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하게끔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 구성될 필요가 있으니 ‘개성 존중’의 유용성을 의심하는 독자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독일어 원전 번역본으로는 이 책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새흰(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아나키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드디어 독일어 원문 번역으로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 책을 우리에게 전해준 박종성 번역자와 마르크스 공부를 함께하며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을 때만 해도, 그저 슈티르너는 낯설고 위험하며 공상적인 사상가라는 편견도 가졌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책에서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정리해 역사 유물론을 확립하면서 당시의 독일 철학 이데올로기가 관념과 망상을 걷어내면 모든 현실적인 억압과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헛된 기대 속에서 그저 급진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비판의 대상이 바로 슈티르너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이제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를 꿈꾼다면, 과연 그때의 연합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슈티르너처럼 고유한 유일자인 개인들을 억압하는 국가 같은 질서(아르케)에 대항하면서도, 그 고유한 유일자 개인들이 공동으로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아나키즘은 물론 이런 억압의 아르케를 드러내며 저항할 것을 촉구한다. 그럼에도 이때 각각의 고유한 유일자 개인들은 아르케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 어떤 무언가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창조해낼 수 있을까? 이제 슈티르너와 마르크스의 지향점을 함께 고민해 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우리들에게 비로소 이런 논의를 시작할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다.

―조은평(건국대학교 철학강사)

 

♦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그를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이 책에서 당대의 종교, 철학, 정치 사상에 대한 전면적 거부와 비판이라는 무자비함을 보인다. 현존하는 모든 정신의 지배와 감히 맞서 싸우려는 탓에 주류 사상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언더독, 슈티르너의 급진성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지켜보고 싶은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슈티르너의 유일자 철학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꿰뚫는데, 그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실천으로 나아간다. 슈티르너는 개개인이 비동등하다는 사실로써만 동등한 유일자임을, 따라서 이미 그의 바깥에 있는 관념에 복종하는 대신 진정으로 자기의지에 의해서만 살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삶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과 같다. 우리 존재는 발 디딜 곳 없이 위태롭게 휩쓸리고 있고, 작은 섬이라도 발견하면 당장 그곳으로 헤엄쳐 가고 싶을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근원적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곳에 머무르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고정된 관념의 섬에 우리 존재를 가두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유일한 개인으로서 살아갈 용기를 얻고자 하는 나와 비슷한 청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고주연(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 철학하는 사람들이 갖는 공부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마음 한편에, 아니 요즘 식으로는 뇌구조 한편에 결핍이란 단어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자기가 갖지 않은 어떤 것을 사상가를 통해 채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슈티르너의 주요한 사상적 궤적으로 아나키즘이나 헤겔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언급하지만, 내가 보는 그의 사상의 기본은 실존주의다. 내가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不惑의 깔딱 고개를 넘길 거부하는 슈티르너의 자기 고백서로 읽은 이유다. 不動心의 숙제는 而立을 지난 모두가 꿈꾸는 유일한 마음이지 않은가.

“나는 사랑하기로 되어 있다.” 아울러 나는 슈티르너의 글 속에서 괴테를 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신을 니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데, 일찍이 현정복음 1장에는 “…괴테가 마침내 신을 피해 동정녀 그레첸을 통해 헤겔과 쇼펜하우어를 낳고…쇼펜하우어가 베를린에 사로잡혀 갈 때에 슈티르너를 낳고 슈티르너가 열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 다섯째가 니체다.” 라고 쓰여 있다. 헤겔을 신학과 어떻게든 연결하려 애쓰는 애비 애미도 모르는 연구자들은 반성하시라. (코찡끗) MY oNe and Only LOVE를 떠올리는 제목에 혹해서라도,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책을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같은 30대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읽고 나면 유일이라는 단어와 소유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實感할 것이고, 그의 우유를 팔아주지 않은 사람들을 나와 함께 원망할 수 있으리라.(나는아직비쥬얼30대) 내가 아는 번역자는 매우 의지가 약하고 의존적인 인물인데, 이 어렵고 주체적인 작업을 그가 해냈다. 남은 것은, 슈티르너가 상하기 전에 얼른 많이많이 파는 일. 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럼, 이 빌어먹을 “끊임없는 자기광고(Werben)를 위하여 건배!”

―인현정(이화여자대학교 철학강사)


출처: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2478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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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탐대실(小貪大失) [천 하룻밤 이야기]

소탐대실(小貪大失)

2023. 10. 08. 한로(寒露)

    어떤 교인이 북(北)에다 퍼부어주는 집단이야 말로 악마같은 집단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악마와 교류하자고 하는 이들이 나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른 어떤이는 매년 수조의 돈으로 무기를 사들이면서, 북에 비해 남(南)이 국방비를 많이 쓰면서도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위정자가 악마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자에게 어느 악마가 실재로 악마이냐는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전자는 정치이야기는 그만하자고 한다. 정치의 ‘정’자가 나오면 정치 이야기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북에 퍼부어 준다는 말은 정치와 다른 입장인 척 말하면서 정치 이야기를 그만하자고 하는 그 논리방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전자처럼 자기가 먼저 자기 판단을 말해놓고, 다른 견해를 말하면 그만하자는 사고방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제 눈에 들보를 보지 않고서 남의 눈에 티끌을 나무라는 격인데, 나로서는, 그가 남을 비판하여 말해 놓고서, 그의 견해와 다른 견해를 함께 논의해보자는 데는, 이미 그가 맞고 남이 틀리다는 그 고약한 사고가 중세 종교재판의 사고일 것인데, 왜 20세기를 넘어서 21세기에도 진행되고 있는가?

    플라톤 전문가였던 박홍규 교수는 철학이 있는 자료들을 모두 다 놓고서, ‘어떤 이론이든 학설이든 자료에 근거해서 사유해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자료들을 삶에서 통 털어서 함께 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수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그리고 인간과학들인 역사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등이 있다고 길게 언급하면서, ‘새내기들이 그거 언제 다 해요, 하나 하기도 힘들고 바쁜데, 철학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돌아버리는 것 아닌가요? 그래, 머리가 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돌고 있다고, 하나라도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하나에서만 답을 찾는 것을 조심하라’고 하였다. 여럿을 함께 다루는 방식을 추론적 사유라 부르고,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 방식을 추리적 사고라고 한다. 전자에는 경험의 총체를 추론하여 다루지만, 후자에서는 논리의 선후에 맞는 추리만을 한다. 전자에서는 ‘이다’에서 답이 있다고 여기고, 후자에서 ‘있다’에서 답을 찾기 위해 합의하고 계약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우리 입말에는 ‘이다’와 ‘있다’가 구별이 있지만, 서양 언어들에서는 그리스에서 로마로, 그리고 각국의 언어에서 분화하면서도 여전히 두 가지 사이의 구별이 모호하여 학문을 규정하는 방식이 늦게서야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들 한다.

    현대사에서 현실에는 패거리(카르텔)가 있다고들 한다. 카르텔의 설명하는 ‘이다’에서는 상식을 기반으로 순서와 배열이 먼저 있다고 공상하고, 반면에 ‘있다’는 자료들을 현실의 평면위에서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자료들의 분류와 배치에서 각자의 견해와 삶의 방식이 나올 것이다. ‘이다’는 현실이 아니라 상징의 배열로서 다루고, ‘있다’는 실재적 삶에서 무작위에 가까운, 어쩌면 무권위의 배치에서 출발하는 것이리라. 잘 모른다는 것은 무작위의 자료들을 어떻게 된 배치인지 배열인지를 먼저 알 수 방식이 없다는 것이다. 산과 계곡, 들과 강처럼 자연이 나누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nature humaine, 인간본성)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이 어떠한 방식들로 풀어놓았을 것 같은데, 그 본성(자연)을 다룬다는 것은 어렵다. 자연의 배치와 배열을 요즘은 수학적으로 복잡계라고 한다. 복잡계는 ‘있다’를 다루는 것이지, 산술학과 기하학처럼 정해진 단위로 ‘이다’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있다’로서 현실은 두께를 가진 덩어리와 같다. 그럼에도 긴 역사 속에서 간략하게 보면, 3세대가 사는 두께도 평면이라 부를 정도로 얇은 층일 뿐이다. 열여덟 쯤에서 젊은이, 장년, 노년의 3세대가 현실의 평면의 각 층들이다. 이 평면들이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길고 깊은 두께로서, 고조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각각의 질서와 배치가 있었다고 한다. 시대의 평면을 겉으로 보아 단절과 새 질서로 보이지만, 깊이의 흐름은 연속적이고, 인간의 자연(본성)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과정이었고, 맑스주의자가 말하듯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따라 깊이[심층(深層)]의 흐름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역사라 한다. 영혼의 자연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그 표출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왕조 시대 다음으로 식민지 나라에서 국가주의가 이식되면서 겉모습이 바뀌고, 깊이에서 흐름은 겉모습에 짓눌려 없는 것처럼 여겼으나, 백성, 중생, 대중, 시민, 인민으로 불리는 삶의 노력들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국가주의의 권력은 법률로서 정하고 있다고 여긴다. 오랜 관습과 전통의 흐름위에 변전하는 법률과 위계가 있건만, 얇은 평면위에서 심층은 법률의 권력에 눌려서 평면의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에서 법률을 누가 만들었던가 라고 생각해보면, 인민의 제헌헌법이 아니었고, 제국주의의 법률이었다. 그 법률에 의해 해방 이후에도 부역자들은 권력으로 남아 있다가 미국 제국주의로 넘어가서도 식민지 정치에서도 숭미파로 자처하면서 상층으로 남아있다. 권력은 겉으로 계속되는 것보다 더 강하게 이 터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방식을 만들고 있다. 그 방식이 남쪽에서 여러 번의 봉기와 항쟁으로 혁명을 해보려고 했으나, 인민이 원천이면서 최종심급인 법률을 만들지 못했다. 국가주의에 이익을 챙기는 사적이익의 추구자들은 왕조시대에도 식민지시절에도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도 여전히 상층이다. 이들이 헌법을 수정하며 몇몇 공화국들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이들은 과거의 미덕이었던 청백리도 아니고 사변적(통감, 거울에 비추기) 사유도 하지 않았다. 사적 이익, 돈을 위계의 꼭대기로 만들었다. 그 권력은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상층만이 누리는 방식을 만들면서, 앞선 시대의 덕목들조차도 악처럼 취급하려들었다. 홍범도 이야기만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직에서 수십억 대 돈을 벌고, 97만원의 접대를 받아도 귀양 가거나 사약을 받지 않는가라고 하면, 그들은 그것이 구시대의 방식이고, 지금은 능력이 있으면 공무도 맡고, 돈도 번다고들 한다. 그것도 공공의 일을 하면서 말이다. 상층이 사적 축적을 당연시 하는 나라. 이들은 그래도 개인의 이익이 곧 나라의 이익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를 비호해주는 이들이 있지 않는가? 인민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며, 상층의 논리를 만들어준 것이 누구인지를 아무도 묻지 않는 듯하다. 그 상층은 일제의 마름들이었고, 미국이라는 제국의 주구인데, 현 정부는 일본의 주구가 되기를 자청하는 듯하다. 그 상층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인민의 피와 땀을 팔아버린다는 점에서, 과거 산업시대의 매판과는 다른 정보시대의 매판인 것 같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나라와 터전조차 팔아치울 듯한, 이 소탐대실을 권력이 자행하고 있다. 이 귀결에는 세월의 경과 속에서 두께 있는 평면의 요동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 요동은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서이며, 이름하여 복잡계와 같다. 생태계 뿐만 아니라 영혼도 복잡계이니, 개인의 특이성도 복잡계이다.

    국가주의의 등장 배경을 보면 유일신앙에서 교리(도그마, 독단)와 이론(체계)의 변형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신앙자체로서는 이론적으로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실재로는 없다. 인간 사유와 추론의 발달 과정에서, 또는 유일신앙의 사고는 평결과 계약에서 이익과 잉여를 취할 궁리로 만들었고, 이런저런 논의들 중에서 신앙에 맞는 것을 추리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서, 철학적 이론을 유비와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신앙자들을 현혹하여 그 집단의 제도적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삼위일체성립에서 스콜라철학까지의 과정이 증거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처단, 화형, 잠수 시켰음에도 반성도 참회도 없었다. 잘났다고 무오류라 한다. 신앙의 무오류와 체계의 완전성이 있기나 한가? 그들은 권세라고 한다. 이런 권세를 누린 방식을 국가라는 단위로 옮겨서 권력으로 변신시켰다. 이로부터 유일신앙은 권력의 뒤에서 권세를 누렸고 누리고 있다. 성직자들과 교회들이 가난한 자에게 아카페를 실행하지 않고서, 왜 부를 축적하고 있는지를 되물어보면 알 것이다. 학문들 각각이 제자리를 잡기에 어려웠던 것은 권세의 독단이 거대한 힘을 발휘하였고, 천문학으로부터 물리학, 화학으로 차차 독단이 무너지면서 19세기 후반에서야 달리 말하기가 등장하였다. 그 유일신앙이 권세를 누린 것은 중세의 종교재판과 마남(녀)사냥의 방식에 있었다. 마남사냥을 본따서, 현대에 와서는 사상검열이라는 이름으로 악의 축만들기, 빨갱이 만들기를 하며 악마사냥을 하고 있다. 이런 전도된 사고를 뒤집으면 악의 축을 만드는 자들이 악귀같은 자들인 셈이다. 자기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선량한 의도를 가진 자들을 물속에, 불속에 넣어버렸지 않았던가. 일제는 독립운동을 종교재판 같은 보안법을 만들었고 해방 후에도 이런 권력은 마남사냥처럼 보안법을 휘둘렀다. 그 권력과 권세의 사고는 ‘있다’는 현실의 평면보다 ‘이다’라는 논리의 단면으로 재단하여 판결하고 심판하려 든다. 인민이 죄종심급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암묵적 카르텔이라기보다더 구체적으로 논리적 사고에서 동일성을 유지하였으며 서로는 유비와 알레고리로서 교환하고 있다. 이 악귀들은 그들이 저지른 악남(惡男)사냥에 대해 회개하지도 않았고, 공동체 또는 공공의 삶의 실천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산업시대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실천으로 나가는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역사이다. 규소시대에는 아직 미지수인 것이 복잡계와 같다.

    서양의 중세이든 동양의 왕조시대이든, 정해진 학문의 틀 밖으로 나가서 사유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서양에도 동양에도 틀 밖의 사유를 하는 별종(anomalie)은 여전히 쭉 있어왔다. 별종이 어쩌면 인간의 자연(본성)을 온자연(Nature) 속에서 찾으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있다’에 관한 자료들(la donnée, les données)을 다루려고 했는데 비해, 비유와 알레고리에 젖은 하늘나라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이다’의 사고에서는 자료들(le donné, les donnés)을 상징처럼 다룬다. 전자에서는 자료들을 함께 다루어야 하기에 특이자, 개별자, 일반자, 관념자(이데아)의 성격들과 그것들의 능력과 기능을 총체적으로 다룬다. 이에 비해 후자에서는 1, 무한, 하나, 통일, 전체, 완전이라는 ‘하나’를 ‘이다’로서 다루었는데, 이들 모두는 ‘이다’의 ‘1’(하나)에 대한 추리로서 동일성의 귀결들로 향하고, 비유와 알레고리를 통해 동일성의 최상위 ‘1’을 완전하게 절대적이라 추리한다. 이 양자의 경우에, 전자에서는 실재적으로 사실상 ‘차히’를 다룬다. 이에 비해, 후자에서 추리상 또는 논리상, 벩송의 용어로 ‘권리상’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동일자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고, 이를 종교적으로 옮기면 하나님 논리(로고스)와 같은 알레고리가 성립한다고 믿는다. 이런 후자의 주장자들의 철학적 배경에 이데아들과 원자들이라는 것의 요술적 조립방식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도 ‘진리’라는 용어를 주장하는 이들은 동일성의 ‘하나’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믿는데, 그 추리들이 계열들이 파라독사임들을 그들도 알게 되었다. 현실에서 생활하고 실천하는 ‘진리인 것’은 그나마도 인민의 평결에 의해 또는 제헌의회에 의해 합의되고 계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유 대 사고의 차이에서 논리적 사고자들은 권력과 권세의 대열들에서, 이제 이 사고자들도 누려보고자 늦게서야 이 양자 속에 개입하였다. 19세기 말에 현상을 통해 상징을 재현화하는 논리실증주의가 그러하다. 그들은 이 논리의 ‘진리’가 부의 축적을 가져다주고, 삶의 편리와 향유를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이런 관련을 비유적으로 하면, 상징의 배치를 놀이로 삼아 그 놀이를 노름으로 여기듯이, 또는 투자를 투기로 바꾸어 부를 누리고자하는 속셈을 드러냈다. 학문이 인류의 자유와 평화가 아니라 개인의 영달과 부의 축척의 부속물이 되었다. 권력이 공공이 아니라 사적 지배로 바뀌고, 신앙의 권세가 인민에가 아니라 성직자의 부의 축적과 출세의 수단과 같이 된 것도 세상의 현실이었다. 이 탐만치에 빠진 카르텔에, 진리추구의 논리분석이 예속의 길을 택한 것이다. 진리에는 부의 축적도 명예도 권력과 권세도 없다. 신앙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에서는 진리에 맞는 실천에서 ‘훌륭타’에 있다. 이들은 훌륭타는 버리고, 타인보다 더 많이 ‘안다’ 또는 더 높은 정도의 진리를 ‘안다’는 것을 주장한다. 마치 천사의 계급이 18등급이나 되고 그 등급을 따라 올라가 1등급을 넘는 인식(안다)에서 신의 세계로 들어간 듯이 말하는 이들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 이런 추리자들 또는 논리자들이 권위를 누리고자, 권력과 권세에 야합하여 만든 것이 -마치 사적 이익의 축적과 확대라는 지본 시장에 투자가 아니라 투기판을 만들 듯이- 학문의 세계에도 위계를 정하듯이 다단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실천을 투기로 노름으로.

    권력, 권세, 권위가 서로 암묵적으로 또는 내밀하게 패거리를 만들어 악귀로서 서로 투합하여 만든 것이, ‘진리를 안다’이다. 복잡계도 모르면서. 투자한 것만큼, 아니 수배 또는 수십배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들 한다. 이들에게 대중, 민중, 인민은 그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좋게 말해서 권력 다단계나 종교 다단계를 학문적으로 비유하여 최고 상위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것을, 그 ‘안다’는 진리를 자기들만이 안다고 한다. 그런 학문을 하면서, 신앙을 지니면서, 권력에 가담하면서, 지식분자는 권력과 권세에 예속하는 또는 종속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이 자랑의 끝이 하늘의 ‘일’(하나), 이데아의 ‘일’자를 안다는 것이다. 그 지식의 진리에서 논리상의 근거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 판결, 심판이다. 그러나 그 명제를 누구도 증명하지도,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이는 벩송이다. 이 명제는 ‘이다’의 선전제의 논리이지 현재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도, “있다”의 현실도 아니다. ‘이다’의 허상을 믿는 탐만치에 빠진 자들이 인간과 자연, 지구와 생태계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제 눈의 들보를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끌을 문제삼아 악마로 모는 카르텔 속에서 치열하게 악마사냥을 하면서, 이익과 향유를 즐기려 한다. 그들은 허상이라고 하지 않고 재현(표상)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다’에는 현실과 실재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돈, 돈, 즉 자본에 예속하여 마름, 주구, 예속으로 자처하는 사고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다단계를 하듯이, 계급이 올라서 상위로 올라가는 것을 명예로 삼게 하는 국가권력 위에, 돈도 벌고 지위도 높이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종교권세가 뒷바침하고 있다. 게다가 현실 평면을 잘라서 단면으로 사고 하게하는 논리 속에서, 또한 놀이 속에서, 나아가 놀음 속에서 “진리”가 있다고 하는 권력에 아부하는 학자들에게도 있다. 말하자면 파라노이아 극한에서 무오류를 배워서, 무소불위로 행사하려는 자들에게 미친 악귀들이 있다.

    이런 추리와 논리 추구를 따르는 이들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판단 속에서 그 자신은 속하지 않는다고 믿는 자들이다. 이 명제 자체가 그들 논리자의 표현으로 파라독사이다. 그럼에도 파라독사를 진리로 믿는 자, 믿게 하는 자, 믿고 권력추구에 줄서는 자, 이들은 인간의 자연(본성)에게, 자연의 생태계에게 빚지면서도 사적이익에 목매고서 소탐대실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민을 제국의 황금알을 낳는 거북이로 만들면서 말이다.

    인민은 권력이든 권세이든 권위이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터전에서, 이 모든 자료들의 기원적인 이유(raison)이고 근원적인 토대이다. 게다가 인민의 합의와 계약은 최종평결이다. 이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인민을 어린 자식이라는 알레고리로 만들고 인민의 평결은 인민재판이라 유비로 만든다. 인민이 세상의 평결을 하기에 대혁명에서 제헌의회가 있었고, 반동들이 들어섰을 때는 비밀 계절사, 그리고 민중단체, 나중에는 프롤레타리아 정당 등을 만들었다. 인간의 자연(본성)에서 창조와 생성의 노력에 대해, 빨갱이니 반역이니 악마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이들이 자신들의 잘못과 악을 감추기 위해, 마남(魔男)사냥 때처럼 상대를 (브루노처럼) 산채로 화형에 처넣으려는 악귀같은 자들이다. 자연(본성)은 수십억년전 지구 생성의 그 때도 지금도 복잡계이며, 그 복잡계에서 생성한 생명체도, 인간의 영혼도 복잡계이다. 이를 완화된 표현으로 인간 세상사를 들뢰즈가 “다양체”라고 불렀다. 한 인간의 일생도 다양체이다. 다양체의 두께 있는 평면은 여전히 역동적이고 혁명적이다.

(4:05, 56UKG), (4:36, 56UKH) (5:08, 56UKH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이판사판 [천 하룻밤 이야기]

이판사판

2023. 09. 08. 백로(白露)

– 아침 오솔길 가장자리의 풀잎에 이슬이 맺는다.

— 결로(結露)는 더운 쪽이 찬 쪽을 만나 결실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인류가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려는 방식은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은 지층이 보존하였던 유물 정보들이다, 돌에서 쇠의 시대로 전환과정에서 구리와 청동을 지나 철기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1200년경이라 한다. 각 시대의 지층과 같이 기념물(추억들)의 특성이 우리에게 전설로서 전승되는 것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영웅들의 신격화이다. 그러면 신격화는 철기시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인데, 그러한 계보학적 전승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줄줄이 엮어서 만들었을 것이다. 이 계보학의 전승이 세대마다 부자 세습의 연결이 잘 안 되는 것은 이집트의 기록된 고왕조들(기원전 3천년경)의 승계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에서는 요(堯)에서 순(舜), 그리고 우(禹)로 넘어가는 것도 세대의 변화보다 다른 계보의 등장인 셈이다. 생명이라는 종의 역사에서 인간이 스스로 위대하고 여기고, 자연에 대해 지배력을 갖는다는 생각하는 것은 도구로서 돌을 넘어서, 열을 통해 새로이 제작하는 쇠(구리와 철)의 시대에 와서일 것이다. 청동이나 철을 다루듯이 자연의 대상들을 다룬다면, 그 자연에 대해 다른 것들도 잘 다룰 수 있는지를 고민하였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기원전 6세기 정도라고 한다.

맑스주의자는 이 시기에 철기가 일반화까지는 아니라도 생산도구로서 인민들에까지 퍼진 시대라 한다. 이 시기 이전에 현자는 세상을 알기 위한 떠돌이로서 양떼를 몰든지, 소나 말을 몰든지 하면서 천막을 가지고 자치적이고 자주적인 부분을 지니며 소그룹으로 다녔다고 한다. 알레고리로서 이야기를 보태면 고대 그리스의 아르고선원들이 이야기나, 유명한 오디세이 이야기도 초기 철기시대의 도래 이지만, 상부들이 전쟁의 도구로서 청동기를 잘 다루었던 시기에 주인공들의 이야기라 한다. 그런데 6세기 정도에는 농사의 도구에도 철기가 보태지면서 생산력이 과거에 비해 비약적 발전을 했다고 한다. 그런 시기에서야 떠돌이 거지, 걸승이 등장할 수 있다고 여긴다. 유비적으로 공자의 주유도 그러하고, 싯달다의 고행 후 평생의 걸승도 그러하고, 고대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주변에 헤라클레스를 본받은 퀴니코스 학자들도 그러하다.

이런 철기 문화에서 거푸집을 통해서 동일한 물건들을 재생산하는 방식은 인간의 지성과 예지의 사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하였다. 거푸집이 튼튼하고 영구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비슷한 것과 다른 것들을 생산할 수도 있었으리라. 물레를 돌리면서 만드는 항아리는 거의 비슷한 것을 만들지만, 거푸집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의 닮은 것을 만들어내는 좋은 거푸집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닮음을 보다 정확하게 만들어가는 긴 과정에서 서구에서는 르네상스시기에 언어와 논리에서도 닮음을 재현하듯이, 도구들도 다시 만들어도 동일한 것이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시기를 철학에서 일반개념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일반화로 만든 개념들은 거푸집의 동일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고 여겼다. 물론 일반관념보다 거푸집과 같은 모형의 관념이 먼저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관념은 현실의 변화와 동떨어져 있었는데 비해, 개념들은 사물과 현실에 접근하였다.

물론 이런 개념적 생각에는 가설적으로 이어온 관념과 공리(공준)의 완전함이 먼저라는 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인정의 뿌리는 깊다. 영웅시대 이래로 앞에서 있었던 것 다음으로(시간적) 뒤이어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암묵적이고 실질적으로 인정해온 것이다. 그 실질적 이어짐의 과거의 깊이 또는 기원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있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다음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실천한다. 이런 이어짐을 5관(안,이,비,설,신)을 통해서는 알 수 없고, 또한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이라 한다. 이런 생각 다음으로, 사람들이 사는 터전에서 여기와 저기는 마치 앞과 뒤, 위와 아래가 있는 것을 구분하는데, 이런 터전에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5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전설따라 삼만리에서 지평선의 끝을 따라가면 낭떠러지가 있다는 생각도, 평면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시하면서 사람이 사는 터전의 전체가 볼 수 없는 것이라 여겼고, 데모크리토스는 ‘빈 것’이라하고, 그러고 나서 공간이라는 일반화의 개념이 생긴다고 여긴다. 볼 수 없는 공간이라는 관념이 생길 것이다.

시간을 볼 수 없듯이, 터전을 이루는 공간을 볼 수 없는 것이고 여긴, 그리스 사유가 인류사에서 철학의 기원이 되는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지적 분자들이 머리를 짜내고, 깊이 토론하고, 생각을 교환했기에 발생한 것이라 한다. 뭔가를 알고 노력하며, 거지같이 지내는 떠돌이들이 어디를 안 가 보았겠는가. 현자들이 지성과 예지를 합하여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보아도, 그 당시의 상식(5관)으로서 해명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네 가지 정도로 규정했다. 시간, 공간, 원자, 영혼(프쉬케)이다

로마에 항거한 이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은 한 두 사건들이 아니었다. 노예의 항쟁으로 스팔타쿠스(기원전 73년)도 있었고(몇킬로의 거리에 십자가를 매달았다던가?), 프랑스인 조각가이면 꼭 한번 작품으로 거쳐 가는 로마에게 저항한 항쟁자 베르셍제토릭스(기원전 50년경)도 있었고, 유다왕국에서 나자렛의 예수(전04-후31경)의 저항도 있었다. 이런 시대의 과정에서 누구는 전사에, 누구는 열사에, 누구는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후대의 이야기꾼(역사가)들이 것이었고, 파라독사들 중에서 이익이 챙기는 경우에 더욱 미화하고 재미있게 이야기가 전승되었던 것이다. 21세기에는 “해리 포터(Harry Potter, 1997-2016)”와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1954-1955)”이 휩쓸 듯이, 넷 플릭스에서 “오징어게임”은 짧은 시기에 전 세계의 이야기 거리로 만든 것도 파라독사의 이야기 거리이다. 그럼에도 실재와 현실에서는 여전히 여러 갈래들 사이에 부조화도 있고 갈등도 있으며, 그 보다 깊이에서는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겉보기로서 표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예전의 현자처럼 거지로서 떠돌이라는 것은 사라졌다고 여길 것이다. 왜? 그래도 여전히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는 젊은이들 또는 탐험가들도 있고, 그리고 명상과 관조를 추구하는 공동체를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다. 철기의 시작으로 걸승이 가능했던 그때나, 사적 소유가 엄격하여 담 넘어 사과 하나 먹지 못하게 하는 법률이 엄하더라도, 걸승이 움직이고 사유하는 세계는 현실을 직시하는 세계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이, 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영혼이 실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현자는 세계(코스모스)를 연결하고 연대하는 역동적인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인류의 기나긴 욕망과 그 작업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 실재적이고 현실적 판(평면)위에서 지속하고 있다.

이 현실의 찰나의 평면만을 공간이라고 아는 이는, 공간이 잘려져서 마치 종잇장처럼 또는 원반처럼 있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에서 그 평면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두께를 갖는 불럭과 같은 것을 지닌 평면이다. 말하자면 현실태의 평면은 갓난애들로부터 현 찰나에 숨을 거두는 이들까지 두께가 있고, 먹고 싸고 자고 일하는 평면 위룰 말한다. 터전, 영토라는 말은 도덕적, 정치적 표현의 일부일 것이다. 시간적으로 평균하여 그 두께 있는 평면은 0세- 87세(평균연령)까지의 과정이며, 평면의 두께에는 여러 나이뿐만이 아니라 여러 색깔의 인종과 여러 직업(임무)에 종사하는 이들과, 그리고 거지(무소유)로서 떠돌이들도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공간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 평면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찰나에도 태어나는 이가 있고, 세상을 뜨는 이도 있지만, 이 흐르는 공간(코스모스)은 여전히 평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철학적으로 보아, 대통령 김대중은 정치를 아는 분이다. “정치는 생물과 같아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역동적이다. 그리스 인들이 공간이 생물처럼 움직이고, 그 판이 역동적으로 울렁거리면 진동하고 파동을 친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이 파동 속에서 어느 경우에 파고가 높아서, 그 파고 위를 타고 가는 한 두 계열들이 선두에 서서 시대의 사명과 운명을 걸머질 때, 혁명이 솟아나는 것이다. 조용한 평면은 어쩌면 투쟁 속에서 준안정상태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가만히 있는 평면이 아니라 움직이며 살아있는 듯한 공간. 그 공간을 지성과 이성(로고스)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예지와 누스(Nous)로 추구하는 자들이 사유한다. 이 잘려진 평면 위에 점과 같은 존재들이 현재 사는 각 개체이며, 이들의 집합을 전체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고가 평면 위에 개념과 명제로 그림을 그리듯 세상을 서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평면은 두께가 있고 진동하며 움직인다. 그런 평면의 두께가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과거의 지층과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두께의 변화과정에서 안중근이 살았던 평면과 전봉준이 살았던 평면과도 뗄 수 없는 과정이기에, 시간의 경과와 과정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 시간도 마찬가지도 공간처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과 별개로 있는 것이다. 이런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여 느끼는 것은 영혼이리라.

영혼만이 시간과 공간과 별개로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인간들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느끼고 있는 것이다. 먹고 자고 싸고 일하며, 노력하며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 느낌은 오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포함하여 또 다른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스에서 공감성이니, 불교에서 여섯째 식(육식, 칠식..)이니 하지만, 나로서는 다섯을 포함하여 관통하는 다른 어떤 것인데, 지각작용(perception)이라 부른다. 영혼이 이런 지각작용으로 등장하였는데, 사람들은 다섯 기능에 보태어 한 기능을 더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오관과 따로, 신체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따로 만드는 이들이 돈 받고 종교를 만드는 자들인데, 불교에서 사판승과 같다. 이런 사판승에 저항하는 이를 이판승이라 한다. 서양 종교에서 사제들과 목사들과 달리 수도원에서 청빈, 노동, 순명을 따르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사가 이판승인 셈이다. 이판승과 같은 이어짐은, 독립운동에게 만주에서 뭐했냐고 물으면 그냥 개장사 했지라고 할 때도, 사판승처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국경 없이 무장투쟁하면서 지낸 시절을 그냥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돈 받고 가르치지 않았고, 싯달다도 돈 받고 설법하지 않았으며, 예수도 돈 받으려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야기를 남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솔직하지 못하고 이익을 챙기는 이들은, 이 두께있는(볼 수 없는) 평면을 종잇장과 단면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들을 매우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또한 위기가 기회라고들 떠들고, 전쟁이 자기를 살린다고들 한다. 이 자른 평면의 사고자들은 사적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지, 공동체와 인민에 대한 생각도 이익의 창출로서만 생각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잉여착취를 위한 제도, 즉 제국주의와 제국을 고수하려는 것과 같다. 이런 부류의 사고는 현실이라는 평면 위에, 수탈과 착취를 위한 평면을 그리기에 두께도 없지만, 또한 시간의 과정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이 얇은 평면위에 사람과 사물들을 나열시키고 그리고 위계질서로서 제도를 만들어 그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여긴다. 거기에 현재 위계상으로 사판승과 같은 윤석열이 있다고들 하며, 그 위에 일본이, 그리고 또 그 위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안다. 그 평면을 잘라서 사고하는 이들이 백선엽의 동상을 세우려는 속좁은 이성의 사고, 파라노이아 광기에 빠져있다(푸꼬가 광기의 이야기를 잘 썼다). 이에 비해 볼 수 없지만 실재하고 있는 공간의 평면의 두께 속에는 현실의 두께만이 아니라 볼 수 없는 시간을 포함하는 과거의 두께도 있으며, 홍범도, 안중근, 전봉준도 있고, 그 속에는 이순신도, 강감찬도, 을지문적도…  단군도 있다. 파라독사라고 하더라도, 다른 이야기로서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보다 흥미진진하고 가슴을 울리는 파라독사라는 이야기가 있다.

법률 조문이라는 명제들로 이어진 문장들을 외우는 것과 같은 사판의 외우기가 공부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그럼에도 외워서 적용하는 이긴다는 속좁은 이성의 머리는 위계질서 속에 꼭대기에 있다고 한다. 그 꼭대기가 누구 밑에 있는지를 아는 이는 다 안다. 볼 수 있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있고, 영혼도 있다고 했다. 그 영혼(프쉬케)의 문제는, 속좁은 사고의 전체와 부분에서 전체가 먼저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그 전체라는 것이 프쉬케를 사유하는 자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공간, 시간, 영혼, 전체는 볼 수 없는 것인데도, 이것과 연관하여 살고 있는 신체는 어떤 능력을 개발하고 작동하려 하는지를 고민했던 이들이 걸승과 같은 이들이었다. 내가 이판승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사판승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 항거, 항쟁하였다. 이판과 사판의 투쟁은 겉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독립 운동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이판사판의 투쟁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전체라는 것이다. 그 전체를 지금도 볼 수 없지만, 8천5백만을 사유해 보고, 21만 평방킬로가 넘는 터전을 사유해보라. 미친(파라노이아)사고가 고작 5천만과 9만 평방킬로미터를 사고하는 탐만치(貪慢癡)에 빠진 자들이라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이 공유하는 느낌은 인민의 미덕이며, 기본 심급이다. 권력을 엎어버리는 것도 인민이라는 의미에서 최종심급도 인민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은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 달리 실천하기에 있다. 두께가 거의 무한정한 터전이 우리 안에 있다. 이 생명의 터전을 벩송은 다양체라 부르고, 이 다양체는 다발(묶음)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묶음들의 계열 중에서 먼저 솟아나는 계열의 혁명의 선두 일 것이고, 이들이 투사와 전사이다.

나는 이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내 벗도 좋아한다. 그 만치 그리스 철학자들 중에 파라노이아에 빠지 않았던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크라테스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만물은 투쟁 속에서 생겨난다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 (56T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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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글,

윤구병이 이오덕1을 좋아하는 이야기에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범(우리말이다), 호랑(虎狼)이가 아니다. 범, 즉 밤(ᄇᆞᆷ)은 산넘어 일하고 늦게 돌아오는 오마니를, 엄마 떡 하나하나 먹듯이 다리와 팔과 그리고 온 몸을 먹어 치운다. 이 범 또는 밤이 애들에게 찾아가 문 열어 달라고, 이런저런 속임수로 동생에게 문을 열게한다. 방안에 빛으로 보아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도망 나온 자매는 밤을 이기는 빛으로서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한다.> 밤은 낮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대결의식을 넘어서, 밤과 낮의 교대의 이야기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 단군 신화에서 범과 곰이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의 전승에서는 굴(자궁)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를 사유하는 것이 윤구병은 현자라고 생각한다. 누가, 우리의 파라독사가 신앙 없는 이야기로 악마의 이야기처럼 만들었던가. 입말을 통해 면면이 이어져 왔었고, 한글로 팔천오백만이 공유하는 평면의 두께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의 집단이 위계질서의 꼭대기에서 조문(코드)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두께 있는 평면과 기나긴 시간의 기억이 넘실거려 큰 파고의 높이를 만드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혁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들뢰즈는 혁명은 어느 시대 어느 평면에서든 일어난다고 생각했으며 “혁명의 미래에 대한 질문은 나쁜 질문입니다.”(p.176)고 한다(들뢰즈, 「정치들 II (Politiques II, 1977)」) 혁명은 현재 평면 안에 있다. 혁명은 평면을 잘라서 계산하고 배치하는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의 역동성과 현실 평면의 두께 울렁임이,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횡축과 공간의 가로축이 만나는 순간에 파고의 마루를 형성할 때이다. 벩송 자유의 실현은 간헐적이고 폭발적이라 한다. 그 자유를 혁명으로 바꾸어 읽으면 같은 이야기이다. (5:12, 56TK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입추(立秋): 파라독스 [천 하룻밤 이야기]

파라독사들: 여러 사건의 생성

– 2023, 08, 08, 화요일

— 입추(立秋): 아무리 더위가 심해도 가을은 온다: 순환은 또 다른 회귀이다.

여섯 살 꼬마가 산타클로스 할배가 선물을 갖다 준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애들을 만나면 할배가 아니라 부모가 전날 갖다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안다. 믿음과 사실은 다르다. 열여덟까지 세상이 가장 큰 것도 있고 무한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 무엇보다도 크고 완전하고 무한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여 충만하다고 믿는다. 선을 그으면 무한히 가지. 누구도 무한히 가지 못하지만, 무한히 선이 가고 있지. 중고등에서 데카르트의 좌표기하학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을 배우면서도 계산하며 답을 찾는데 메이다가, 학력고사를 마치고 나서 조용히 생각해보니, 그 무한히 나아간다 또는 무한히 자른다는 것이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신이 무한하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산타 할배와 같고, 무한을 넘어서도 하나님을 넘어서도 계산할 수 있을까? 한계 또는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 인간의 현실 또는 현존의 문제거리일까 공안이지 화두일까?

청춘의 젊은이에게 아버지의 아버지(할배)가 있고, 할배의 할배(한할배)가 있고, 그 큰 한아비의 한아비가 단군이며, 단군의 할배는 환(桓)이다고 말하면, 에이 그것 전설이잖아. 학문적으로 파라독스 같은 이야기이지. 그런데 예수의 아버지를 거슬러 그리고 다윗으로 다윗을 거슬러 아브라함으로, 또 올라가서 아담이 있지, 아담은 누가 낳았는데, 신(하나님)이 만들었지. 그러면 그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그러면 그 이상을 묻으면 안 된다고 한다. 서양 신학이런 완전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을 독단론(dogmatisme)이라 한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라고 묻는 것은 학설(doctrine)이라 한다. 학설적으로 완전하고 충만한 것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었던 이들은 퀴니코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이다. 학설을 완전한 것이 자체적으로 있는 거야. 그리고 자체적으로 있는 것을 묻지 않기로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오르간)의 불문율이야. 더 이상 묻지마.

하늘나라에 옥황상제가 있는 곳에는 맛있는 과일이 있고 선녀들이 있으면, 누구도 아프지 않고 즐겁고 상괘하게 지낸다. 한 젊은이가, 에이 그거,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잖아 라고 한다. 그래 들뢰즈가 답하기를 파라독사야. 불교에서 극락세계에서는 석가모니와 사리자(舍利子) 마하가섭가섭(摩訶迦葉), 아난존자(阿難尊者), 수보리(須菩提)가 둘러 앉아 얼마나 오랫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하는 하는지를, 갠지스강의 모래만큼 많은 항하사(恒河沙 1052)수 만큼 해를 거듭해야 사람으로 태어나고, 불가사의(不可思議 1064)수 만큼 거듭해야 아라한으로, 무량대수(無量大數 1068)해야 부처가 된다고 설을 풀고 있다고 하면, 불교 설화잖아. 그래 파라독사야. 가이야에서 만년을 지나 우라노스시대로, 천년을 지나 크로노스시대로, 그리고 천년을 지나 제우스와 함께 지상을 지배하는 신들이 올림푸스에서 노닐고 있었는데로 이어가면, 그거 그리스 이야기 잖아. 그래 파라독사라고. 산타클로할배이야기보다 재미있지, 하늘 나라에 하느님과 18계급의 천사가 있고, 예수는 하나님 옆에 앉아 있다고 하면, 그거 ‘말되네’, ‘말씀이야’ 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 파라독사야.

들루즈는 ‘말 되네’가 바로 의미(sens)를 갖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파라독사 같은 난센스(non-sens)가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난세스는 사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닌데, 그 믿음을 크리스트교 신학자들은 독단(dogma, 교리)이라고 부른다.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 속에서, 선택받은 자들 속에서, 푸꼬 표현으로 정신 나간 자들(aliénés) 속에서는 자기들끼리 모여, 마치 공자는 맹자의 손자인 것처럼, 스스로 진리라고 한다. 그래, 그 이야기가 의미있다(sens). 다른 것은 의미 없고(non-sens)이다. 의미는 무의미를, 처음에는 겉보기 또는 현상으로, 그리고 거짓 또는 착각으로, 나쁨 또는 허무로, 천년을 지나가면서 무의미가 악마처럼되었다. 19세기에 언어분석철학자들이 대상과 사실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두 넌센스라고 생각했었다. 러셀은 고대철학에서 거짓말쟁이 역설이, 논리학에서 수학에서 언어학에서 등등 넌센스가 넘친다는 것을 알았다. 어, 그 이야기는 넌센스이네, 그래 그 모든 전설따라 삼천리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들 모두 파라독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여섯 꼬마에게 그것보다 유용한 것도 거의 없다.

하늘나라 이야기가 넌센스이고 파라독사인데도 왜 의미가 있다고 하는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하는 시절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꼬마애가 산타할배가 의미 있듯이, 청춘기(헤베, ἥβη, 젊음, 혈기, 용기)에는 완전하고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무협지 등이 청춘에게 읽히고 있었던가. 그가 자연에 순환에 대해, 요즘으로 대기의 순환에서 엘리뇨와 번개를 잘 관찰하여보면 달리 생각하는 길을 발견한다. 자연을 진속하게 대하면 달리 사유하기가 등장한다. 중국의 [대학]에는 ‘격물치지성의정심,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는데, 젊은 시절에 학교 교육과 달리 자연(본성)에서 사회에서 격물(格物)에서부터 스스로 깨쳐나갈 길을 찾는 것이다. 자연과 사회에서 자연이 먼저 이며 앞서[앞에가 아니라] 있다. 겉멋만 들은 검사들은 수신제가를 말할 것이지만, 젊은이는 사물의 진수를 아는 것이 먼저이다. 불교에서도 싯달다가 여섯 해 동안 고민고민 끝에 처음으로 젊은이들을 만나서 한 이갸기가 [념처경(念處經)]인데 그 속에서 ‘신수심법’의 네 단계의 노력과정을 통해 선업을 쌓기를 이야기 한다. 그 ‘신’은 신체에 관한 것인데,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격물과 닮은 데가 있다.

스스로 가정과 동네를 떠난 삶을 살아가는 시기에, 헤베(청춘기)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 한다. 사회는 제도 속에서 규율과 훈육에 따라 살아가가는 과정을 촘촘히 순서를 만들어, 그 순서를 따라야 살아가는 것으로 체제를 만들었다. 너희들 덜 고생시키려고. 이 체제 속에서 벗어나면 낙오자(루저)니, 못난이(개돼지)니, 타락자(소외자)니, 결국에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정도로 여긴다. 삶은 산업사회 속에서 제도만이 아니라, 절후를 간직하며 사는 풍토와 터전이 기본 토대로 있고, 그 위에 도구의 사용으로 산업이 있고, 그리고 자고 먹고 싸고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쾌하게 삶을 사는 놀이도 하거나 구경도 하면서 교양 문화를 지니며 산다. 자연, 산업, 문화 등이 중첩되어 있다. 청춘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서 어쩔 수 없이 사는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삶의 긴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방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세상에 현실적인 평면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살고 있지만, 국가라는 체제를 꾸리는 쪽에서 보면 5천만은 평면위에 보이지 않는 그물 속에 있다. 체제는 어장관리를 하듯이 그물을 줄이고 넓히면서 적당히 키우고 그 에너지를 제도 속에 소비하기를 바란다. 열심히 살아서 제국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는 밧데리가 아닐까? 이런 이야기는 파라독사 일까? 하늘나라 속에서는 진짜이고, 그물 속에서 삶은 넌센스일까? 들루즈가 말하기를, 환의 이야기든, 옥황상제 이야기든, 보살세상의 이야기든, 제우스 이야기든, 예수이 이야기든, 이런 이야기들은 파라독스(paradoxa)인데, 그 논리(추리) 속에 성숙되어 에너지를 공급하는 인간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은 독사(doxa)라는 것이다. 현실의 평면 위에 오천만은 누구의 에너지를 위한 소모품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진정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명상하며 사유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 반성의 토대에 가장 기본적으로 자연이 있다. 24절기가 있다. 서양철학에서 자연을 본성이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이상하게도 자연과 인간, 자연과 삶, 자연과 신이라는 주제가 먼저(앞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버리고 파라독사에 빠져서, 위대함, 완전함, 충만함, 연속성, 동일성, 불멸성, 영원성을 말하면서 철학한다고 설레발친다. 이런 이라는 넌센스(non-sens)를 철학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비신자에게 던지는 공안 정도이다. 청춘에서 청년으로 공안을 넘어서 선문답으로 가면 여러 경우를 한자리에 놓고 추론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삶의 문제거리를 화두로 삼아 장년이 되어 자기 길을 스스로 깨닫는 데로 향한다. 공자는 그 나이 쯤이면 불혹이라 하고, 세상사에서는 그 나이에 자기 얼굴에 다쓰여있다고 한다.

넌센스의 이야기와 달리, 현실 세계의 평면을 잘 생각해보라. 5천만은 현재의 평면과 같은 설국열차를 타고 가고 있는데, 그 열차의 칸들 속에 어디서 어떤 이들이 내릴지 모르고, 어떤 이들이 탈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열차는 하나의 현실 평면과 같다. 한배를 탔다고들 하지만 배는 가는 곳까지 주변은 물이다. 열차는 철로 위로만 달리지만, 현실 평면 위의 삶은 매끈한 공간 위로 달린다. 어디에서 내리면 반천리 금수강산의 어느 터전 위에 있을 것인가? 그 내린 지점이 어느 현존들과 같이 할 것인지를 모른다. 열차 칸 안에서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바깥에 대해 잘 모르고 있듯이. 그럼에도 산업사회를 넘어서 규소(디지털)시대로 가면서도 잘 모르니깐, 굴을 파고 은둔하는 이들도, 터전을 만드는 이들도, 열차와 관계없이 영토 위를 이리저리 쏘다니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리좀처럼 연결될 수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하늘에 번개가 치듯이, 터전의 평면 위에 서로 간에 드문 벙개가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저항과 항거는 지금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작은 리좀의 연결이 지방에서도 나라에서도 세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맑스의 포이에르바하 테제 11번의 해방만이 아닐 것이다. 그 세계가 하늘나라이며 화엄의 세상일 것이다.

이 삶의 평면 위에서, 깊이 탐구하는 이들이 넓게 리좀을 연결할 수 있다. 살아있고 움직이는 리좀들이 터전에서 매끈한 면 위에서 마주칠 것이다. 그 마주침이 한꺼번에 연결되는 것은 하늘의 번개가 동일하지 않듯이, 이 땅위에서도 동일한 벙개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벩송의 말대로 자유와 혁명은 간헐적으로 솟아나며, 폭발적이라 한다.

(3:10, 56SKB) (3:26, 56SKH)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어떤 두려움 –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에 – [내게는 이름이 없다]

어떤 두려움 –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에 –

 

행길이(한철연 회원)

 

‘어떤 두려움’

 

올해는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이다. 비판이론 1세대의 아도르노, 2세대의 하버마스, 3세대의 호네트 등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학파의 전통은 계승보다는 비판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선배의 이론을 수용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이론적 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간에 대립과 단절의 계기를 지닌 채 비판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이 학파의 정체성이자 전통인 것이다. 하버마스의 입장이 아도르노와 다르듯이 호네트도 하버마스와 같지 않다.

철학자마다 입장이 다른 까닭은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그가 처한 역사적 조건이 상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배 세대들이 망명 유대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은 하버마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전체주의 시기 하버마스는 철없는 소년이었고, 게르만 민족의 범죄적 역사를 의식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도 되지 못했다. 그는 의사를 꿈꾸던 착실한 소년에 불과했다.

소년기의 무구함을 벗어나게 된 계기는 뉘른베르크 재판이었다. 소년은 자기가 속한 민족공동체가 인류 최악의 범죄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였다. 하버마스는 의사의 길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신체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정신의 질병을 다스리는 것이 더 중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대학에 입학한 하버마스는 선배 아펠의 도움으로 비판적 문제의식을 넓혔고, 졸업 무렵에는 비판적 저널리스트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하이데거 철학의 근저에 흐르고 있던 전체주의적 정신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게재하여 호응을 얻던 차였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학문적 재능을 알아본 아도르노가 조교직을 제안하면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로 이끌자 그는 비판적 저널리스트의 꿈을 접고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하버마스는 독일 국민들을 권위주의적 전체주의 체제의 하수인으로 만든 모든 정신적인 것들을 일소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구제하는 철학적 투쟁에 평생 헌신한다.

전후 서독 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과거의 야만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전체주의 체제의 지적 선봉대들과 그 후예들이 반공주의적 자유주의를 구실로 권위주의적 정신을 퍼뜨리고자 하는 데에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서독 지식 사회가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세우며 전체주의의 부활을 시도하자, 하버마스는 ‘역사가 논쟁’에 뛰어들어 이들의 반민주주의적 의도를 낱낱이 폭로하는 비판 활동에 힘썼다. 독일 시민들은 하버마스의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과거의 망령에게 혼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민주화 이후 3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독일의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현 정부는 ‘민주주의를 제거한 자유’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적잖은 사람들이 거기에 호응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 대항하는 비판적 담론이 활기차게 제기되지도 못하는 데다가 시민들 사이에 확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건 한숨과 조롱 그리고 역정뿐이다. 과거의 망령들이 하나둘 무덤에서 나와 활개를 치고, 권위주의 체제가 부활에 성공하는 것 같아 참으로 두렵다. 과한 두려움일까?


 

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에 대한 논평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이다.1

 

박종성(건국대, 한철연 회원)

♦ 이 글은 『시대와 철학』 제33권 4호(2022년 겨울호, 12월 31일 발간)에도 기고글로 동시 게재합니다.

 

이 글은 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2에 대한 논평이다. 먼저 김우철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첫째, 『자본』에 적용된 변증법적 방법의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이 두 가지 문제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변증법적 모순과 형식 논리적 모순의 구별, 변증법과 유물론의 관계(‘중층적 모순’)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자본의 내적 논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본의 내적 논리 규명의 이론적 과제는 본질과 현상, 추상과 구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문제는 모순이라는 주제로 압축된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긍정적 이해 속에서 그것의 부정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모순의 인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우철 교수는 둘째, 『자본』의 서술에서 ‘논리적 모순’의 지위를 살펴본다. 맑스가 자본의 일반 정식, 즉 ‘화폐-상품-화폐’(좀 더 분명히 말하면 화폐’일 것이다. – 논평자)를 처음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자본의 모순규정을 주장한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마찬가지로 유통에서 발생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에서 발생해서는 안 된다.”

 

위 인용문은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 형식 논리학의 모순은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니다’ 혹은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 위 인용문은 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자본의 모순규정은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3으로 위 문장의 논리적 모순은 해소된다.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에 주목해야 한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이지만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이다. “노동력이 그 자체 상품이 되고 이 특수한 상품의 경우 자신의 교환가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용가치가 바로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힘이라는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노동력의 가치 크기는 자신이 사용되는 데서 창조되는 가치 크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에서 가치법칙(등가교환)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인 반면,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 곧 생산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가치이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현상적으로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의 구조이다. 즉 자본의 ‘논리적 모순’은 새로운 탐구로 이행하기 위한 문제 제기이다.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상호제약 관계이다. 그러니까 교환과정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없으며 또 사용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가치로 실현될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A’)와 가치(A”) 사이에는 상호제약적, 내적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용가치와 가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결국, 변증법적 모순은 형식논리의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A’와 A”의 내적 통일성은 동일성(A)으로 환원될 수 없고 단순히 상호 무관한 것들(A와 B)도 아니다. 그래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모순을 정식화한다.

 

“공속해야 할 내적 필연성과 상호무관한 자립적 존재는 이미 모순의 기초이다.”

 

그래서 자본의 모순은 궁극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상호종속적인 동시에 상호자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왜 노동의 이중성(사용가치, 가치)은 상품교환 사이에서 모순으로 정립되는 것인가?

김우철 교수는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셋째, ‘상품의 모순과 그 전개과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바로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이다. ‘가치’는 상품을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위선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으로 만든다. 그러나 “가치 대상성에는 한 조각의 자연 소재도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가치란 무엇인가? “노동생산물의 가치 관계는 노동생산물의 물리적 성질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서 그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는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상품가치 속에 표현되고 있는가? 구체적 유용 노동은 상이한 형태인 추상적 인간 노동(교환의 기초, 사회관계의 기초)을 매개로 해서만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다.

이제 모순의 실현과 해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용가치로부터 가치가 완전히 자립된 형태인 화폐는 자신의 고유한 기능(가치척도, 유통수단, 지불수단)에서 볼 때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위한 사용가치를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바로 화폐이다. 화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화폐는 그 자신 상품으로서 어느 누구의 사유 재산으로 될 수 있는 외적인 물체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으로 된다.”

따라서 자본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화폐-상품-화폐’에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상호공속성은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종속으로 의미가 바뀐다. 그래서 화폐는 “과정 전반을 포괄하는 주체”이자 자기 매개적 주체이며, 자신의 대립물을 자기 바깥에 갖지 않는 ‘절대자’이다. 이제 화폐는 한편으로 살아 있는 노동을 지배하는 가치, 곧 과거 노동이 자본가 속에서 인격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단순한 대상적 노동력, 곧 상품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하여 김우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의를 결론짓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오로지 자본의 통제와 주도 아래에서 발휘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자본의 내재적 생산력처럼 나타난다.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물신주의, 이것이 바로 자본이 이룩한 업적이다.”(209쪽).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일 것이다.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된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을 다시 전도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박종성 지음

가치가 삶의 목적인 이곳에서

사용가치가 삶의 목적인 그곳으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에서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해서만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에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으로

 

노동력의 가치가 사용가치를 종속하는 곳에서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서로 함께 하는 곳으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인간들의 관계라는 현실적 형태를 취하는 곳으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유통과정인 곳에서

구매를 위한 판매가 유통과정인 곳으로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에서

화폐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으로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곳에서

산 노동이 죽은 노동을 지배하는 곳으로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지배하는 곳에서

 

그렇지 않은 곳으로,

 

그곳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고(故) 김우철 교수(1960 ~ 2021.12.09)

‘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의 책과 리뷰]

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도 볼 수 없다”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종전 40주년 연설문에서

 

히틀러는 세계사에서 가장 포악하고 공포스러운 정치권력자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히틀러의 무소불위 전권은 히틀러 개인의 독재력에 있지만, 독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가능해졌다. 히틀러가 어떻게 독일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치에 저항하는 독일인들이 왜 드러나지 않았는지 답답하면서도 궁금했는데,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이라는 한 권을 책을 읽으면서 나의 답답함과 궁금함이 풀렸다.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이후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한 총통으로 스스로 지위를 높였다. 히틀러가 스스로 지위를 높일 수 있었던 권력 즉 무제한에 가까운 권력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가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혼란정치와 대공황에 이은 파탄경제로 인해 독일 국민대중은 새로운 정치 권력의 탄생을 원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히틀러라는 악마를 낳게 했다. 히틀러는 민족공동체, 고용확대, 경기회복이라는 선전으로 절망에 빠진 독일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다. 아리아인의 ‘국민동포’라는 민족공동체 부양 구호는 독일 국민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얻게 된다.(18쪽) 이 책에 나온 일반 여성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우리들이 바라는 건 오직 일과 빵이었어요. 배가 고파서 데모도 했지요. 그러나 그건 히틀러가 총리로 되기 전의 일이지요. 히틀러는 단번에 모든 걸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에게 일자리가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국민 대중이 모두 히틀러 지지지가 될 수밖에요.” (책 26쪽)

 

실제로 독일 국민들은 물질적 부의 혜택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의 상징인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설과 더불어 도로를 가득 채울 자동차 산업 등이 국민기업으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노동복지정책과 레저산업이 구체화되었다. 1936년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은 대중들의 자부심과 히틀러의 인기를 최고로 올렸다. 이렇게 이어진 변화는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이런 변화속도를 의도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기획은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나치 기획의 성공은 절대 독재이면서도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데서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중의 압도적 지지는 실제로는 일종의 마취 현상이었다. 유럽침탈의 장치인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민족공동체의 허상을 실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으로서 나치는 적군과 아군을 엄격하게 차별하는 악의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을 구원하거나 동조하는 일체의 행위를 악의적 행동으로 규정하여 그런 행동을 증거 조사 없이 기소할 수 있는 특별법, 소위 ‘악의법’을 1934년 통과시켰다.(60쪽) 자국민에 대한 언론 통제를 하면서 라디오 등의 외국방송 청취 일체를 금지했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가혹할 정도의 처벌을 했다. 히틀러는 청소년에 대한 의식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1936년 540만 명을 넘어선 국가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는 히틀러 독재 권력을 가장 옹호하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막상 독일 대중들은 히틀러가 청소년을 “교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32쪽)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938년 나치 지도부는 포그롬Pogrom기획을 앞세워 나치를 반대하는 일체의 저항세력을 공개적으로 처벌하는 대박해를 시작했다. 이로써 국고 파탄을 유대인의 물적 자원으로 메꾸는 전시경제를 치밀하게 시행했다. 나치의 포그롬 대박해는 가시적인 약탈과 폭력을 합리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청소년을 중심으로 고발과 밀고를 일상화하는 생활습관을 만들어 놓았다.

 

독일에 점령당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는 나치 저항 지하단체들의 활약이 많았는데 왜 독일 내부에서 저항 운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구심의 뿌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폭적인 대중지지의 위력 때문에 저항하는 세력이 은밀한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은밀한 저항을 독일 작가 바이젠보른(Günter Weisenborn 1902-1969)은 “조용한 봉기”라고 표현했다. ‘시민의 용기’ Zivilcourage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284쪽)

 

저항의 용기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기도였다. 암살 기도는 실패했으나 저항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상당한 악의 대가를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전국적인 무차별 보복을 시작했다. 7천 명 이상이 체포되고 그중에서 200명 넘게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 히틀러의 증오에 찬 폭정은 국민을 완전히 압도했다. 정말 무서웠다.

 

그런 공포사회 속에서도 저항그룹은 활동했다. 그들의 활동은 처절한 삶의 저항이었다. 그래서 백장미그룹을 포함한 그들의 저항 운동은 전후 오늘날까지 건강한 시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유대인과 반체제 인사들을 외국으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에밀 아저씨’ 구원 조직은 매국노라는 오명까지 얻으면서도 진정한 인간애를 실현해 나아갔다. 뮌헨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그의 여동생 조피의 저항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게 되었다. <백장미 통신>이라는 삐라 활동을 하던 슈모렉 그룹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나치에 체포, 사형되어 죽음으로 저항의 삶을 마쳤다. 그 외 다양한 계층의 지하집단이 주도한 비밀단체들의 저항 결사 편지와 통신문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 책의 페이지를 가슴으로 넘기고 있었다.

크라이자우 저항 서클의 지도자였고 그래서 1944년 나치로부터 사형당한 트로트Adam von Trott는 나치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22쪽) 이 말은 아픔의 현실을 담고 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나치 치하의 독일 사회에서 저항세력은 오히려 매국노로 치부되었고 밀고의 대상으로 되었다. 청소년의 심리를 교묘하게 역이용한 나치의 히틀러 유겐트와 전통의 침략전쟁 옹호 그룹이었던 극우세력에서부터 실업과 가난에 빠진 일상인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 나치의 민족공동체라는 주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저항세력은 당연히 매국노와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1945년 히틀러는 죽고 전쟁은 끝났지만, 그 주술의 잔재 효과가 따라서 금방 끝나질 않았다. 이 책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은 나치 세력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상으로 종전 그리고 나치 이후 사람들의 관념과 습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치 이후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를 압축한 글을 하나 인용해보기로 하자.(241-242쪽)

 

1945년부터 1947년 사이에 네 모자는 16제곱 미터에 불과한 좁은 다락방에 살며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그릇 하나로 소금에 절인 청어나 감자를 먹고 빨래를 하는 적빈의 생활을 감내했다. 그런 중에 딸 코르넬 리가 통학 도중 전차 운전수가 “아버지는 전사하셨니?”고 묻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코르넬리가 “아닙니다. 히틀러에 반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더러운 배신자의 새끼로구나!” 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댔다.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던 “유족의 다수는 빈곤에 허덕이면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배신자’로 낙인찍은 세간의 차가운 눈초리에 가위눌렸거나 혹은 고통스럽고 끔직했던 과거를 봉인하고 싶었다거나 하는, 유족들이 침묵을 지킨 데에는 저마다 사정이 있었다.”

 

패전 이후 독일 정부는 처음에는 나치 공무원들을 계승한 전후 동/서독 공무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52년 치러진 전국여론조사 결과 나치 시기에 저항단체들의 운동을 긍정적으로 본 응답율이 45%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가 표현했듯이, 독일 패전 이후 7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독일 국민 다수가 히틀러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63쪽)

 

특히 전범을 처리해야 하는 판검사의 사법계에서 판사의 66%, 검사의 75%가 전 나치 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범 처리에 심각한 장애에 부딪혔다. 예를 들어 히틀러 선서를 한 독일인이 전시(나치 시기) 중에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 자체가 이적 행위이며 국가반역이라는 나치 잔재 검찰의 법정 옹호들이 횡행했었다. 나치 저항운동을 국가의 반역행위라고 주장한 레머를 재판하는 그 유명한 1951년 레머 재판에서 레머는 오히려 나치 잔재인 검찰들의 지지를 받았다. 재판 방청객이 연일 천 명이 넘을 정도로 관심을 받게 된 레머 재판은 당시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항운동의 역사적 정당성과 합법성이 확정되는 계기로 바뀌었다. 전후 독일 정부는 나치 친정인 그들 검찰에게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다는 점이다.(270-3쪽)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일제 잔재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한국 정치와 나아가 최근 무소불위의 한국 검찰 권력 상황을 떠올리게 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끝낸 패전 국가이지만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을 끝냈지만, 여전히 전쟁 중 휴전 국가이다. 독일은 과거 히틀러 마약의 약해져가는 잔여효과를 처리하면 될 것이다. 반면 한국 사회는 지금도 지우지 못한 일제 흔적과 한국전쟁 여파인 색깔 주술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흔적과 주술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검찰 권력과 그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자화상을 깨부수는 오늘의 저항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 책에서 깨닫게 되었다.

<끝>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⑤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행길이(한철연 회원)

 

우정, 최고의 기쁨

 

“전 생애에 걸친 축복을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을 갖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혹은 공적 삶을 살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폴리스적 삶의 양식이 무너진 시대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중시킨다. 정치 영역은 이미 권력을 독점한 군주의 손아귀에 장악되었다. 군주는 권력을 분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군주의 지배권을 분할받으려는 시도로 인지되어 파멸의 고통을 면치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군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줄타기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에피쿠로스는 공적 행위인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쾌락의 지속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되니 적이 생기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가 사회생활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활동 이외의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우정이 주는 쾌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키케로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쾌락과 떼어놓을 수 없고, 우정이 없이는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두려움 없이 살지도 못하며 심지어 유쾌하게 살 수도 없기에 우정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 철학의 기본 입장에서 벗어나는 말을 할 정도로-“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에피쿠로스에게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의 커다란 원천이었다.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은 그가 근근이 마련한 작은 안뜰에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볼 수 없었던 풍경이 그의 정원에서는 자연스럽게 벌어지기도 했다. 즉 고대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인 헤타이라들이 드나들며 남성 구성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담론을 나누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의 적대자들은 에피쿠로스를 창녀와 수작이나 부리는 자로 비방하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노예와 어린이들(학단 구성원들의 자녀들)도 친구로 대우하면서 상냥한 편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대지 전체가 고통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가장 많은 선물을 선사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삶을 경험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우정은 홀로 맞는 죽음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원천이다. 죽음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고적함의 고통은 누구에게든 보편적이다. 홀로 죽음의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각성은 모든 인간을 외로운 존재로 남겨두지 않고 친구로 삼게 하는 동기가 된다.

자유시민들의 우정 어린 공동체라 할 수 있는 폴리스가 소멸한 이후에 우정의 기쁨을 전파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안뜰은 폴리스의 몰락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인간들에게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사적으로 선사하였다. 흔히 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우리를 실제로 도와주기 때문에 우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정이 지속되는 이유는 실제의 도움보다는 “친구들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는 믿음”에 있다. 이 믿음이 깨지면 세상은 분열과 고립의 고통으로 넘쳐난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며 늘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불안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우정의 삶은 이러한 고립의 환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폴리스의 연대적 삶이 소멸된 불안한 상황에서 안전과 평화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공간은 에피쿠로스가 제안한 우정의 정원이었다. 비록 이 공간은 사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비정함이 초래하는 삶의 고통에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정원 속에 모인 이들은 우정의 기쁨을 아래와 같이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정이 춤추면서 세상의 주위를 돈다. 그리고 소리친다. 모두 일어나라! 그리고 노래하자!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 시대와 에피쿠로스

 

러셀에 의하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험 가득한 행복을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병약자의 철학이었다. 소화불량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적게 먹어라. 다음 날 아침이 걱정된다면 과음하지 말라, 정치와 사랑과 격렬한 열정을 동반하는 모든 활동을 삼가라.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운명의 인질이 되지 말라.” 고통에 침잠하지 말고 그 속에 잠재된 쾌락을 능동적으로 관조하는 법을 배우라. “육체의 고통은 분명히 커다란 악이지만, 격심한 고통이라는 것은 짧은 법이고, 길고 긴 고통이라는 것은 정신훈련을 하거나 고통 속에서도 행복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참아낼 수 있다.”

어찌보면 소심하기 그지없는 철학이다. 그런 까닭에 얄팍한 위로와 단발적 힐링에 열광하는 부박한 시대에 에피쿠로스는 자칫 힐링의 멘토로 부각될 수 있다. 더구나 시민적 연대의 전통과 사회적 보호의 수단이 점차 훼손되고 있는 와중에 현대인의 고통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대도 극심한 고통으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고난의 시대였다. 지금과 유사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의 미망은 올바른 해답이 될 수는 없었다. 사회적 고통을 해결해줄 구조적 대응은 요원한 형국이다. ‘위로의 구루’가 재림하여 힐링의 향유를 피워대면 사람들은 언제든 ‘좋아요’를 누르며 힐링을 소비할 태세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제안하는 위로의 즐거움은 ‘좋아요’와 같은 손쉬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처방은 정신의 자기성숙을 통한 고통의 극복이다. 정신훈련을 통해 굳건한 정신을 가진 주체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고통도 극복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시대적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은 오늘날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 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향은 다르다. 더구나 사람들은 욕망의 무제한적 표출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체제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다.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로부터 초연해지는 평정한 영혼의 상태(ataraxia)를 권고하는 에피쿠로스가 과연 현대인의 삶을 인도하여 즐거움의 항구에 안착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나인당케의 단상들]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한상원(한철연 회원, 충북대)

 

그림 칼 슈미트의 저서 <대지의 노모스(Der Nomos der Erde)>

Carl Schmitt / 출처: 위키피디아

 

1.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칼 슈미트가 <대지의 노모스>에서 기술한 ‘정당한 적(justus hostis)’과 ‘전쟁 길들이기(Hegung des Kriegs)’라는 개념들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슈미트의 주장은 이렇다. 국제질서는 도덕 규범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간주하는 세력은 상대를 부당한 적으로 간주하게 되고 따라서 적에 대한 잔혹한 응징을 정당화한다. 오히려 교전 당사자를 ‘정당한 적’으로 규정하는 관점만이 전쟁의 극단적 폭력성을 억제하면서 ‘전쟁 길들이기’를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실제로 그러하다. ‘깡패국가(rogue states)’를 응징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명분으로 중동을 군사적으로 침공하고 폭격했던 미국과 나토, 그리고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있는 돈바스 지역의 ‘자치공화국’들을 승인하며 해당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러시아의 푸틴 모두 자신들을 정의의 수호자로, 상대방을 부당한 침략자이자 범죄자로 규정하면서 각자의 군사적 팽창을 정당화한다. 만약 바이든과 푸틴이, 서방과 러시아가 서로를 악마화하지 않고 (각자가 추구하는 질서에 대한 상이한 개념을 가진) ‘정당한 적’으로 규정한다면, 지금의 끝이 보이지 않는 충돌의 위험이 줄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정당한 적’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정치의 도덕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를 국내정치에 대입해봐도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 촛불시위 이후 등장한 민주당 정권은 자신을 ‘촛불 혁명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혁명 이후 실행되어야 할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자신들은 불의한 세력을 응징하는 정의의 심판자이며, 반대편은 심판되어야 할 불의한 적폐 세력이다.

그런데 이 패러다임은 정부와 여당으로 하여금 모든 권력을 잡고도 자신을 영원히 정의의 심판자 역할로 이미지화하면서, 자기 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의들, 예컨대 권력형 성범죄, 입시비리 등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반성적인 태도로 일관하도록 만들었다. ‘정의로운’ 세력이 실은 ‘불공정’을 자행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아냥에 직면한 것이다. 이제 이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과반수가 ‘정권교체’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답하고 있고, 상대진영 대권주자는 이제 똑같은 적폐청산 프레임을 이용해(‘민주당 적폐 청산’) 자신의 권력획득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처럼 거대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적폐로 규정하면서 정작 시민들의 실질적인 삶과 관련된 핵심적인 쟁점들을 흐리는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정치를 도덕으로 환원해서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심판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될 때 벌어지는 해프닝에 가깝다.

 

3.

이러한 논의구도를 조금 더 확장했을 때, 역사적으로 벌어진 수많은 ‘혁명적 폭력’들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이후 벌어진 공포통치나 모스크바 재판과 같은 사건들은 혁명 이후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자신들의 정적을 ‘인민의 적’으로 악마화함으로써 벌어졌다. 여기서도 정치는 도덕화되며 ‘정의’의 이름으로 적을 ‘심판’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작동한다. ‘정당한 적’이라는 관념이 결여된 채 벌어지는 ‘숙청’의 잔혹함은 정치의 도덕화가 실은 매우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들’)을 동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슈미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러나 상통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렌트는 ‘고통’과 ‘연민’이 정치의 주제가 되었을 때 정치가 그러한 고통에 대한 응징으로 변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폭력적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상대가 ‘비인간적 범죄자’라는 도덕적 분노는 ‘인류의 적’으로 규정된 상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어째서 정치적 갈등이 쉽게 폭력으로 전환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사실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슈미트의 ‘정당한 적’이야말로 다원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에 융합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실제로 무페가 ‘적대(antagonism)’를 비폭력적이고 다원주의적인 ‘경합(agonism)’으로 승화시켜 자유민주주의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가장 결정적으로 참조했던 것은 슈미트였다.

 

4.

그러나 이처럼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슈미트의 주장은 문제가 없는 걸까? 과연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첫째로, 민주주의 정치는 원자화된 개인이 집단적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행위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회의 주권자로 거듭나는 주체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과연 개인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정의에 대한 헌신’이나 ‘타자에 대한 연대감’과 같은 도덕적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한 주체화 과정을 단순히 ‘전능한 주권자와의 직접적 동일시’로 이해하고 이를 만장일치적인 박수갈채 행위 속에 가능하다고 간주하는 슈미트의 관점에서는 물론 도덕의 요소가 결합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호명되는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올바른’ 사회를 만들 것인가’와 같은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주권국가들 사이의 국제법 질서를 하나의 헤게모니적 체제로 이해할 때, 그러한 헤게모니 질서는 특정한 규범적 가치에 대한 신뢰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로마가 로마의 패권을 유지했던 것은 단지 로마가 전쟁을 잘 수행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시민권’과 ‘로마법’이 가진 가치에 대한 믿음이 종속민들로 하여금 로마의 동맹세력이 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국제관계에서도 일정한 도덕적 요소를 갖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수행하는 물질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국제인권규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느정도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슈미트는 1919년의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로 생긴 국제연맹, 그리고 2차 대전 후 만들어진 국제연합을 비난하면서, 그 토대가 되는 세계시민주의를 ‘제국주의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난한다. 이러한 비난이 완전히 거짓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국제연합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슈미트라면 따라서 유엔 결의를 통해 공표된 세계인권선언을 정치의 도덕화이자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중립화로, 곧 정치의 탈정치화로 비난할 것이다. 또 인권선언이 가진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인해 ‘인권’을 둘러싼 새로운 갈등이 전개될 것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공적으로 선언된 이념이 갖는 ‘정치적’ 실재성에 관해서 슈미트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발리바르와 랑시에르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이러한 인권선언이 수많은 배제된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치를 지배에 대한 ‘대항정치’의 관점에서 사유하지 않는 슈미트에게서 그러한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제기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를 사회적 지배(아렌트가 말한 ‘사회적인 것’)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주권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그러한 연합이 실행되기 위한 ‘주체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필히 정치와 도덕이 맺는 환원적이지 않고 몹시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5.

결론적으로, ‘정당한 적’과 ‘전쟁 길들이기’라는 슈미트의 통찰은 우리에게 ‘정치의 도덕화가 낳는 폭력’에 대한 유용한 깨달음을 주지만, 이를 통해 정치와 도덕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고 믿은 슈미트의 관점은 온전히 수용될 수 없다. 정치는 (심지어 슈미트가 말하는 ‘적/동지’의 구분이라는 의미에서도) 일정한 ‘가치지향’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의 책과 리뷰]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한철연 회원, 독립학자)

 

  1. 자기기만의 습성을 가진 사람들

습관적 기만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전형은 자신의 거짓말 행위의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습관적 기만행위가 가능한 이유는 스스로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뜻이다. 기억을 짜맞추어 자신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성곽에 갇힌 좁은 세상의 경험을 확대하여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게 된다. 자신이 하는 일상의 기만행위를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이 기만적이라고 확정 판단한다. 이런 증상은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책 232쪽)

광신도적 주술사나 그런 주술에 점입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 광신도 모두 예외 없이 자기기만 증상의 사례들이다. 자기기만 증상자는 어리숙하게 굴기도하면서 주변 상황파악을 못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에 수치심을 갖지 않고 뻔뻔한 행동을 하는 데 능해진다. 특히 사회적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기만 증상을 같이 갖고 있을 때 기만의 사회적 악폐는 더 심각해진다. 이런 경우를 권력형 자기기만 현상이라고 부른다.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도그마를 생산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그마를 강력하게 강요하며 그런 도그마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도그마 권력을 위배하는 사람들 모두를 악마화시킨다. 예를 들어 현재(2022년 2월) 대선후보로 나선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자는 현 정권에 대한 적폐 수사를 한다거나 검찰청 앞에 모인 국민을 사법처리하겠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즉 자기기만 증상자는 자신의 거짓 합리화만이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상대방을 미리 위협하고 강한 공격을 서슴치 않는다. 저자 트리버스는 이런 증상을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말했다.(책 117쪽)

 

  1.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

자기기만의 병증은 극도로 편향된 주술적 성향으로 전개된다.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이란 자기 개인의 불안정한 내부 심리상태를 우주적 특권으로 대체하는 가상세계에 빠지는 경향을 말한다. 트리버스는 이를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라고 표현했다.(책 461쪽) 박근혜씨의 ‘우주 기운 운명론’이 그러했고, 윤석열씨의 ‘왕(王)자 그리고 이마 흰털 생체 부적’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주술성 자기기만 심리상태의 특징은 자기소집단의 서열을 공고히 하며 자기를 정점으로 따르는 소집단 구성원에게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권력집단 기만성이 외부로 탐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남 탓을 하고 분리주의를 유도하며 결국 자화자찬과 상대비난에 함몰한다는 것을 책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책 463쪽)

트리버스의 이 책은 자기기만의 사회-진화심리학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기만의 성공여부는 자신의 기만이 들통 나지 않도록 즉 남이 자신의 기만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달렸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기만형질은 인간의 언어 능력보다 더 오래된 진화적 형질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상대의 기만을 알아채는 심리적 형질도 따라서 진화되었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나아가 권력형 기만자의 자기기만 혹은 타자 기만행위에 대하여 기꺼이 속을(기만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우리 인간의 또 다른 심리적 형질이다.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1. 보통 사람들, 도덕성과 경쟁심의 이중트랙을 볼 수 있는 눈

권력형 기만증상자의 기만행위를 기꺼이 수용하는 개인들의 심리상태를 트리버스는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우리 인간 자신의 또 다른 이면이다. 권력 기만자의 증상이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면서 우리들조차 자기기만의 플라시보 효과를 탐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전염된 우리 보통 사람들을 비난만 해서는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은 진화의 호모 사피언스이다.

대한민국 현실 선거 정치와 연관하여 말해 보자. 대선에 나선 민주당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석열 후보는 기만행위가 많아서 민주당이 결국 선거에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들었다. 그런 말은 호모사피언스의 진화생물학적 현실을 모르는 오판으로 끝날 수 있다. 권력형 기만집단도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만집단의 행위와 그 여파는 우리들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기만이라는 플라시보 효과에 기꺼이 그리고 능동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놓치거나 무시하면 아무리 진심어린 이재명 백 명을 가져와도 선거에 이길 수 없다. 도덕과 진리로 볼 때 상대방보다 낫다고 해서 선거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인성은 두 개의 형질 궤도 위에서 나타난다. 하나의 궤도는 남들과 함께 하는 도덕심이며, 다른 하나는 남을 해치는 약육강식의 경쟁심이라는 궤도이다. 두 개의 궤도로(이중 트랙) 진화된 양면성의 호모 사피언스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냉정한 인식 위에서 만든 응급형 선거정책을 생산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올 것이 분명하다.

 

  1.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를 다룬 이 책,

이 책은 기존 임상심리학에서 많이 연구해 온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의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편향된 정보해석, 편향된 기억, 편향된 판단, 편향된 추측 등의 편향확증의 문제를 자기기만의 상태와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허풍과 기만의 심리를 노출하면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게 되는 심리 상태, 우월감에 도취되어 공동체 분열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상태, 권력형 기만증상을 이용하여 확대생산하는 주변정치인들의 동조 양상, 습성대로 행동한 후 반성없이 얼버무리는 기만행위, 너무 잦은 미성숙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갖지 못하는 인지부조화의 상태를 자주 보아온 우리들, 이 책에서 서술된 수많은 사례들이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 우리 독자는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