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돌봄 :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영혼의 돌봄: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조은평(건국대 강사)

 

 

 

  1.  상처받은 슬픈 영혼의 자화상

 

-이번 시리즈 강의의 목적은 고전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

-?그렇다면 고전이란??누군가 고전이란 이런 거라고 말하더군요.?모두가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뜻밖에 별로 많이 읽지 않는 책(장식용),?또는 친구가‘요즘 무슨 책 읽어?’라고 물어올 때?[논어]를?‘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듯이?‘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책.(당연히 읽어야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게 고전이기에 처음 읽는다고 말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는 않을까 하는 데서 기인하는 방어기제)

-?그럼 오늘 함께 검토해 볼,?플라톤의?[파이돈]을 읽어보신 분?

-?또한 이번 시리즈 강의의 큰 주제가?‘나이듦의 철학’인데요.?뭐 어떤 의도로 기획된 것일까요?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사실 이중적이죠.?한편으로 세상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잘 알게 된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는 반면에,?살면서 경험하고 판단한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 탄탄해지면서 도리어 그런 관점에 매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죠.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나름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때론 충격을 받으면서 나름의 질문들을 던지게 되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고민하게 되는 삶의 문제들과 질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신가요?

-?과연 바쁘게 주어진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살아온 인생의 중년.?중년의 우리들을 뒤흔드는 삶의 충격들을 무엇일까요??또 그런 충격들 앞에서 어떤 고민과 질문들을 갖게 되나요?

-?누군가 말하더군요.?갑자기 내 삶이 하찮게 느껴지고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먼저 성공한 모습을 절실히 직면하게 될 때라고요.

-?이런 순간,?우리는 한없이 비참해 지면서,?이렇게 비참함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더 한심하게 여기게 되죠.?정말 친했던 친구가,?선배가 후배가 먼저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축하하고 칭찬해 주어야 하는데,?그러지 못하고 그야말로 쪼잔한 마음을 갖게 되는 우리의 슬픈 영혼의 자화상.

-?대체 이런 영혼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아니 이런 영혼의 상처는 왜 생기는 걸까요??아니 대체 영혼이란 뭘까요??그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개념은 아닐까요?

-?지금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영혼’에 대한 논의가 유의미할까요??더구나 오늘 강의의 주제인?‘영혼의 돌봄’이라는 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바로 여러분들과 우리들의 이 슬픈 영혼의 자화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이를 위해 플라톤이?[파이돈]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죽음과 영혼에 대한 논의를 함께 검토해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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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혼 불멸’과?‘영혼의 돌봄’

 

1)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단상들

– ‘악법도 법이다!’라고 인정하며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과연?

– NO!?소크라테스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그저?‘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태연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과 철학에 대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2)?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소크라테스에게?‘좋은 삶’= ‘지혜를 추구하는 삶’

-?아울러 지혜란?‘상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앎.

-?그리고?‘상기’가 가능하다면 영혼은 이미 이전에 존재했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불사한다.?더구나 삶을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본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더 좋은 곳을 가는 반면에,?영혼을 잘 돌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데스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이처럼?‘영혼의 불멸,?불사’를 논증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일단 분명한 것은?‘영혼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것은 철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되는 일’이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서.

-?바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의연하게 전개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플라톤의?[파이돈]!

3)?플라톤의?[파이돈]

:?소크라테스가 그의 벗들과 나눈 마지막 철학적 대화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대화편.?플라톤은?‘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소크라테스가 행한 것들과 이야기한 것들에 특별한 중요성과 무게를 부여하고 있다.

이 대화편의 중심 주제는 영혼의 불멸.?하지만 영혼 불멸을 증명하는 것이[파이돈]을 저술한 플라톤의 목표였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른 데 있었다.?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그리고 이것은 오직 철학함을 통해서,?즉 영혼을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시키고,?순수한 지적 파악의 대상들을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추구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플라톤은 이 메시지를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지 않다.?그것은 오히려 그가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화 행위들을 통해 구체화된다.?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정확한 사태의 진실을 알기 위해 토론에 몰두하는 모습은 플라톤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철학자의 상,?바로 그것이었다.?플라톤,?전헌상 올김, [파이돈],?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2013. 9-10쪽.?작품해설 참조.

(참조.?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보통 저술 시기에 따라 전기,?중기,?후기 대화편으로 구분. [파이돈]은 중기에 속하는 작품. [메논], [향연], [파이드로스], [국가]가 중기 작품들.?대략?[메논] -> [파이돈] -> [국가]?순서로 저술된 것으로 추정.)

 

-?영혼에 대한?[파이돈]의 논의에서 두드러진 특징

1)?영혼과 몸의 확고한 이분법

:?인식론적 측면에서,?영혼과 몸의 이분법은 오로기 순수한 이성 작용에 의해서만 진리가 포착될 수 있으며,?몸에 속한 감각기관들을 통한 모든 인식은 기만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동굴의 비유’,?이데아론)

:?또한 종교적인 측면에서,?이 이분법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욕망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정화될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금욕주의적 특성)

2)?다른 대화편들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

:?몸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관점,?육체적 욕망에 대한 비판과 거부,?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혼의 정화라는 테마,?상기와 연결된 윤회 사상,?사후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은 자의 심판과 그에 따르는 보상과 처벌. (이런 특징들은 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

 

– [파이돈]의 대략적인 내용

<도입부(57a-61c)>

– [파이돈]편 제목이 파이돈인 이유??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달자가 파이돈.?일종의 액자구조.?파이돈의 이야기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왜 곧바로 형의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

-?사형 집행이 늦어진 이유는 테세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델로스 섬으로 떠난 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도시를 정결히 해야 한다는 법 때문.?드디어 델로스로 떠났던 배가 귀환한다는 소식을 듣고,?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이 임박했음을 알게 된 제자들과 친구들이 평소보다 일찍 감옥에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나눴던 이야기를 전해주게 된다.

<철학자와 죽음(61c-69e)>

-?본격적인 철학적 토론의 시작?:?제자들과 친구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앞두고 한 없이 침울한데,?정작 소크라테스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심지어?“분별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나를 따라오라”(61c)고 누군가에게 전해달라는 농담까지.

DSC09172-1-?제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태도가 의아해서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스스로를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인데 철학자는 죽은 사람을 따르려 할 거라고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지요?”

-?이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면 임박한 죽음에 대해 노여워하지 않고 태연히 그것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

-?심지어?‘진정한 철학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죽음을 열망하고 추구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일까??우선 그는?‘죽음이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논의를 진행.?몸과 그에 결부된 감각지각을 통해서는 참된 존재들에 대한 앎이 획득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오로지 참된 앎은 오직 순수한 사고와 추론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그런데 순수한 사고와 추론은 오직 영혼이 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따라서 만일 죽음이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을 의미한다면,?참된 존재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결국 죽음의 상태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셈이다.(‘동굴의 비유’?참조)

-?그렇다면 평생 이러한 상태를 염원하던 사람이 막상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즉 죽음을 앞두고 노여워한다는 것은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영혼 불멸에 대해 옹호하는 논증들(69e-107b)>

-?이처럼?‘철학자는 죽음을 태연히 맞이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사실상?‘영혼이 죽은 다음에도,?즉 몸과 분리된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제자들은 과연 영혼 불멸이라는 전제가 참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기에 해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결국 이후부터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에 대한 일련의 증명들을 선보이고,?다시 제기되는 제자들에 반론에 또 다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논의가 이어진다. ( 1)?순환 논증?/ 2)?상기 논증?/ 3)?유사성 논증, 4)?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 5)?심미아스에 대한 답변?/ 6)?마지막 논증?)

-?이런 여러 논증 중에서 세 가지만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순환 논증(삶과 죽음의 순환)

-?소크라테스의 첫 논변은 변화에 관한 일반 법칙을 근거로 삼는다.?어떤 사물?x가?F라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면,?그리고?F에 반대되는 속성?-F가 존재한다면, F를 가지게 됨이라는 변화는?-F로부터의 변화이다.?말하자면?‘모든 만물은 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는 점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잠을 자는 것’과?‘깨어있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속성이다.?그러나?‘잠을 자는 것’은?‘깨어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깨어있는 것’?또한‘잠을 자는 것’에서 생겨난다.?이와 마찬가지로?‘강하게 됨’은?‘약한 것으로부터 강하게 되는 것’이고, ‘나빠짐’은?‘좋은 것으로부터 나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원칙을?‘죽음과 삶’에도 똑같이 적용한다.?죽음은 삶의 반대이다.?어떤 것이 살게 되는 것은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살게 되는 것이고,?역으로 죽게 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죽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양”눰袖막??균형 있게 일어나야만 한다.?즉?F로부터?-F로의 변화는 반드시?-F로부터?F로의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 반대항 중 한 쪽의 성질을 지니게 되고,?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앞서 제시된?‘반대항으로부터의 변화’라는 원칙과 결합하면,?죽은 자들이 산 자들로부터 생겨나는 것 못지않게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그런데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몸과 결합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해야 한다.

2)?상기 논증(상기설을 통해 태어나기 이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을 논증)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상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상기(anamnesis)란?:?어떤?a라는 사람이?X를 통해?Y를 기억해 내는 것!

-?예를 들어,?누군가(a)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이나 사진(X)을 보고 그 사랑하는 사람(Y)을 기억해 내는 것 같은 방식이 상기라는 것.?기본적인 논증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a는?Y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알고 있어야 한다.

2. a는?X를 감각지각을 통해 인지할 뿐만 아니라?Y를 떠올려야 한다.

3. X와?Y는?(유사하지만)?서로 다른 지식의 대상이어야 한다.

4. a가?Y와 유사한?X에 의해서?Y를 상기했다면, a는?X가?Y에 유사성에 있어서 뭔가 부족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5.?우리는?‘같은 것들’(X)로부터?‘같음 자체(Y)’에 대한 지식을 떠올린다.

– 5와 같은 기억도 역시 상기.

-?따라서 감각지각을 통해?‘같은 것들’로부터?‘같음 자체’를 떠올리고,?또 이 둘이 유사성에서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미 감각지각을 갖게 되기 이전에,?다시 말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같은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결국?‘같은 자체’에 대한 앎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영혼이 가지고 있어야하면,?이는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해야 함을 함축한다.

(?참조)?예를 들어?[메논]편에서 노예소년에게 삼각형에 대해 상기시키는 논의.

삼각형 모양의 그림,?현실에서는 완벽한 삼각형은 없지만 유사한 삼각형의 모양을 통해?‘완벽한 삼각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노예소년도 그럴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런 완벽한?‘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알 수 있다. )

3)?유사성 논증

-?이제 상기 논증에서 밝혀지는 것은 결국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한다는 점.

-?하지만 그럼에도 죽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계속 존재하고 불멸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반론 제기. ‘몸으로부터 빠져나온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 제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

-?우선 존재하는 것들을?‘가시적인 종류’와?‘비가시적인 종류’로 구분하고,그 각각이 가지는 특징들을 열거한다. ‘가시적인 것’들은 결합적이고 결코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반면, ‘비가시적인 것들’은 비결합적이고 항상 동일한 상태를 유지한다. (예를 들어?:?같은 것들/같은 자체,?아름다운 것들/아름다움 자체,?사랑하는 것들/사랑 자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렇다면 몸과 영혼은 각각 둘 중 어떤 종류의 것들과 유사한지를 묻는다.당연히 몸은 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고,?영혼은 비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다는 동의를 얻어낸다.?이로부터,?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몸은 쉽게 해체되기 마련이지만,?비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영혼은 해체되지 않고 늘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따라서 우리는 죽은 뒤에 우리의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하고 어린아이처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논증에 뒤이어?“철학함이 영혼을 돌보는 최선의 길”이라는 관점이 생동감 넘치는 비유를 통해 제시.

 

<신화?(107c-115a)>

-?영혼 불멸에 관한 논변이 종료된 이후,?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사후에 겪게 되는 일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15a-118a)>

-?소크라테스가 의연하게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

 

 

3. ‘영혼의 돌봄’은 어떻게 가능할까??또 어떤 식으로 실천해야 할까?

 

-?결국 플라톤의?[파이돈]이 전하는 메시지는?‘영혼의 돌봄’

-?아울러 이는?‘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를 추구하기 위해 몸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늘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하지만 아마 영혼의 불멸과 정화되지 못한 영혼의 심판이라는 테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낯선 신화에 불과할 것.

-?그럼에도?‘영혼의 돌봄’이라는 테마는?‘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왜냐하면 영혼이 정말 존재하고 불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우리는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여전히 고민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영혼을 돌보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또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1)?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도록 항상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사회?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아름다운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필사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개인들의 사회?

-?하지만 우리 자신들도 잘 알고 있듯이,?때때로 내 영혼을 팔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우리들의 사회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드라마?[빅맨]?속의 이야기?:?주인공 김지혁?VS?강동석?/?영혼을 팔 수밖에 없는 강동석의 부하직원!?그렇다면 이에 비해 주인공 김지혁이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었던 비법은??타고난 천성??시장 사람들에게 받은 돌봄의 관계,?그 관계가 만들어준 인성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영혼의 돌봄’이라는 과제는 어쩌면 우리 모두 늘 추구하고 싶은 삶의 목표일지도 모르지만,?사회적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 어쩔 수 없이 내 영혼을 그 무언가에 팔아버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그렇다면 더 중요한 과제는?

2) ‘영혼의 돌봄’을 방해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

– [피로사회](한병철)의 테마를 생각해 보자.

-?끊임없이 성과를 강요하는 사회(성과사회),?무엇이든 할 수 있다!?또 그래야만 나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회적인 강요 속에서 자기 자신도 착취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또한?‘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들의 어리숙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적 주체에 대한 비판>

-?플라톤은 당시의?‘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철인정치’를 내세운다.?당연히 오늘날 보기에 귀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는 이런 플라톤의 논의에서?‘민주주의’가 지닌 문제점들을 이끌어 낸다.?그것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주체의 유형에 대한 비판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언급한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중에서)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31쪽)

-?바디우에 따르면,?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아울러 플라톤의?[국가]편의 일부를 현대판으로 각색해서 이렇게 번역한다.

조은평 도봉 그림1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이런 정치적 현실에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영혼의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될 것.

-?이는?‘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즉?‘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그저 혼자 고민하며 시지프스처럼 외롭게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길을 모색할 과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4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4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덕 윤리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 와중에서도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됩니다. 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이나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됨, 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나 애국심 논란도 이러한 미덕과 악덕의 범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덕과 미덕의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2006)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 ‘좋은 삶’이 주제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 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자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 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 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 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라고 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 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 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 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즉,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에 강제적인 규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 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 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 ‘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 동물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고려하면 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 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 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哲人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다시 말해서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politeia)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 ‘완전하게’(성숙하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 “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을 들이고 경험을 쌓아야 얻을 수 있으므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덕목입니다. 성숙한 어른은 경험 많은 의사처럼 최고의 규범이나 이론을 곧바로 현재 상태에 적용하지 않고,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여기에 알맞게 규범을 적용합니다. 레시피대로가 아니라 손맛으로 요리하는 숙련된 요리사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행동 방식을 억제하고 중용(中庸)의 태도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과함이나 부족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mesotes)’입니다. 이 가운데를 수학적인 도식으로 계산해낼 수 있는 평균값이 아닙니다. 중용은 그 상황에 맞게 새롭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함(미덕)입니다. 초보자와 달리 원숙한 지혜로운 어른이야말로 원칙과 상황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이는 새로운 이상에 사로잡혀 조급한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미숙한 청년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용이 타락하면 이 말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노회한 정치가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신하는 영리한 기회주의자, 그리고 나서지 않고 엎드려 복종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처신을 치장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 지성적인 관조(명상)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 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 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성이 ‘인간’인 한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 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 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잘 양육을 받고, 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유교도 같은 문제점을 앉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6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

김성우(ⓔ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 글은 <프레시안>과 공동게재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우려면 신이 존재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무신론을 택한다. 그의 실존주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시나리오)이나 규범이 없게 될 테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실존하면서) 자신의 시나리오(본질)를 써 가는 작가가 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자유를 선포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라캉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는 이러한 말로 정치적인 전체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진정한 스탈린주의 정치가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끔찍한 정화(숙청)와 집행(학살)을 수행한다. 그의 마음은 그 일을 하면서도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이 인류의 진보를 향한 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는 단지 ‘역사적 필연성’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도착증 환자의 태도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462도착증의 대표적인 유형은 가학증인 사디즘과 피학증인 마조히즘이다. 도착증의 전형적인 태도는 자신을 ‘큰 타자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큰 타자는 주체에게 그 상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가에게는 ‘국민의 뜻’, 기업가에게는 ‘소비자의 욕구’, 일신교도들에게는 ‘신의 뜻’,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의 사명’, 관료에게는 ‘조직의 명령’ 등이 그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대표적 사례인 사디스트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을 ‘큰 타자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도착증에 전형적인 부인(disavowal)에 해당한다.

지젝은 이러한 도착증의 범주를 가지고 정치적 전체주의는 물론 테러리즘에 빠져든 종교적 근본주의까지 해명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정적을 살해하거나 표적물을 죽일 때도 역시 ‘알라신의 뜻’에 호소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나자 이완용은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특히 5월 29일에 기고한 제3차 경고문에서 그는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가 된 것도 다 ‘상천(上天, 유교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썼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망령된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매국도, 제국주의적 침략도 정당화하는 마법 지팡이이다.

혹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의 ‘하나님의 뜻’에 관한 발언도 이러한 도착증적인 증상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유명해진 그의 온누리 교회 강연록(국무총리실 제공)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그때도 그러면 왜 그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셨으면 일본한테 합방하지 않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이렇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그런데 저는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생활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용하신 거예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예요.”

종교적 근본주의의 특징은 일종의 논리적인 합선(short-circuit)이다.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제멋대로 합선시켜 구사하는 것이다. 광신주의적 살인마는 표적물이 된 사람에게 보낸 협박 편지를 신의 분노로 포장한다. 그는 교묘히 세속적인 협박 편지가 주는 공포와 최후의 심판 때 신의 분노를 마주할 때 일어나는 두려움을 섞는다. 문창극 후보자의 논리에도 이러한 합선이 존재한다. 학술적이거나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우리의 민족사와 신성한 섭리를 뒤섞어 민족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식민 지배, 더 나아가 분단과 6·25라는 민족적 비극의 역사를 단 한마디로 풀어낸다. 이런 사건 모두 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은 너희들은 안 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래서 분단을 시켰어요. 그것뿐입니까? 6·25까지 만들어 주셨어요. 이 6·25까지 주신 거야. 우리 생각에는 이야, 하나님 참 너무 하다,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6·25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6·25가 저는 이렇게 얘기하면 지가 죽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6·25를 또 저렇게 미화한다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련이 된 거예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논리적 합선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도 문제를 삼고 있다. 광주 기독교연합회(NCC·CBS·YMCA·YWCA)는 “문 후보자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자의적 해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킨 비성경적이고 반신학적인 인사“라고 규정한다.

물론 또 다른 기독교 인사들은 문 후보자의 논리를 두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종윤 원로목사는 “우리가 당한 고난의 길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문 후보의 교회에서 강연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 지극히 성경적 표현인 것”이라고 평했다. 심지어 전광훈 목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4백년 애굽종살이나 70년간의 바벨론 포로도 하느님의 주권적 섭리”로 해석되는 것처럼 “한국 근대사에서 긍정적 내지 부정적 모든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며 “세상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에서 교회 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 관점에서 이를 재단하는 것은 잘못이자 교회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대로 기독교 신앙적 관점과 세상적 관점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적인 관점과 기독교적인 관점의 구분도 중요하다. 문 후보자를 비롯한 그를 비호하는 목사들의 해석은 세상적인 것에 기독교적인 관점과 심지어 유대교적인 관점까지도 뒤섞어버린다. 이는 테러와 침략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및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BBC 방송에 따르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신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처럼 “나는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라고도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은 이들의 정신세계에서는 라캉의 말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과연 테러, 학살, 침략을 이렇게 신의 계시, 신이 주신 사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이슬람적인 관점이거나 기독교적인 관점인가? 가해(加害)를 신의 명령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나와 같은 비신학자가 보아도 당연히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피해(역사적 비극)를 신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족사와 유대교의 민족사를 마구 뒤섞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어디에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 예수는 도리어 “가이사(로마의 황제인 케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로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한 것도 일본에게 주신 신의 뜻인 것인가? 이러한 해석이 앞선 말한 도착증 환자의 논리적 합선에 해당한다. 가해를 신의 뜻으로 본다면 이는 사디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하고 피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마조히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한 것이다.

더군다나 왜 문 후보자는 애국적인 투사인 안중근도 아닌, 김구도 아닌 매국노의 대표자인 윤치호의 글을 인용한 것인가? 더군다나 비판적인 자세가 아니라 공감적인 자세로 인용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또 버전 업을 시켰느냐 하면, 이 윤치호라는 사람은. 조선유학생들이 일하기가 싫다, 이거야. 그리고 앉아서 순 말로만 하는 것 좋아한다 이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아주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이조 말기에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 먹는 게 아주 그냥 몸에 박혀 있었대요. 하여튼 이런 나라였어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와가지고 변화를 시킨 거야.”

이완용ⓒWikimedia Commons

이 인용문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데 선교사가 와서 변화를 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자기 폄하와 서구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이러한 자기 폄하는 일제의 식민 사관에서 가장 강조하는 핵심적인 주제이며 유럽의 식민 사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기 폄하와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는다는 것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매국노의 기본 논리이다. 그래서 친일은 필연적으로 친서구로, 종국적으로는 친미로 귀결된다.

“6·25전쟁이 그렇게 났으면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 밑에서 그 후원을 받은 북한에 우리 다 지금 다 흡수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되겠다, 너희들 붙잡아야겠다. 너희들 어떻게 붙잡느냐. 미국을 못 가게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미국을 우리 딱 붙잡아 주셨어요. 미국이 6·25 사변이 끝나면서 우리하고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상호안보조약을 맺었어. 그건 뭐냐.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침략을 당한 것처럼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우리가 침략 당한 것처럼 또 미국을 도와준다. 우리가 무슨 미국을 도와줄 힘이 있습니까? 괜히 미국에 조약을 맺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까지 그 조약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살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에 미군이 없는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친일과 친미적 사관이 기독교적인 사관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러면 예수는 친(親)로마적인 매국노인가? 아니면 반(反)로마적인 민족 투사인가? 아니면 이런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종교적 구원자인가?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세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기독교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도착증 환자라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선택할 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진실을 부정하는 방식에 있다. 지젝에 의하면 부정(Verneinung)은 무의식의 저항이다. 일종의 방어 메커니즘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형태의 부정, 즉 억압(Verdr?gung), 부인(Verleugnung) 그리고 거부(Verwerfung)가 있다. 이러한 부정의 세 가지 심리 메커니즘은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이라는 진단 범주들에 상응한다. 신경증적인 부정은 억압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주전자를 빌린 후에 다시 깨진 주전자를 돌려줄 때 세 가지 형태로 부정하는 발언들이 존재한다. “난 결코 네가 요구하는 주전자를 빌린 적이 없다.” 이런 발언이 전형적인 억압적인 부정이다. 또한 물신주의적인(도착증적인) 부인은 다음과 같다. “난 그것을 온전한 상태로 너에게 돌려주었잖아.” 마지막으로 정신병적인 거부(Verwerfung, foreclosure)의 사례는 상징 질서인 큰 타자를 배제하고 있어서 비(非)논리적으로 발언한다. “어쨌든 그것은 구멍이 있었어.”

이와 유사하게 문 후보자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발언의 변화를 살펴보자. 채널A 방송에 따르면 처음에 문창극 후보자는 출근길에 교회에서의 강연 내용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반문했다. 청문회 준비단과 회의를 한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한 강연이 일반인의 정서와 거리가 있을 수 있으며 오해의 소지가 생겨 유감”이라고 표명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 청문회 준비단은 왜곡된 보도를 하는 언론사에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이후에 문 후보자도 퇴근길에서 “(강력 대응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다음 날, 몇몇 기독교 목사들은 문 후보자의 해석이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두둔했다. “어쨌든 그것은 성경적이었어.” 이러한 태도는 처음에 인용한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식이다.

부디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이끄시는 분들 가운데 몇 분이 혹시라도 도착증 증세가 심해지거나 심지어 정신병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살다 보면 바뀌는 것도 있고,?안 바뀌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한국사회가 지난 한 세대 동안 너무 숨 가쁘게 달려 왔기 때문에 당연히 외형적인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너무 다이나믹하다 보니 한?2-3년만 지나도 도시의 외관이 달라지고 도로가 달라지고 건물이 달라지는 경우가 숱하다.그러다 보니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도 당연히 크게 바뀐 것 같다.?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이다.?종종 토론 주제로 동성애를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의외로 학생들이 남녀 불문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이다.?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외계인 취급을 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내가 대학 시험에 합격을 하고 겨울에 고대 타임 반 동계 특강을 다닌 적이 있다.?이 타임 반은 상당히 유명해서 동계 강좌인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타임>지를 선배들이 읽고 설명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그런데 그 때 타임지 표지 모델로 여자?2명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그 중의 한 여자는 가방을 들고 바지를 입고,?다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스커트를 입은 것으로 기억된다.?타임즈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을 처음 화두로 올렸던 것이다. 1976년이니까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주목을 받던 초기였으리라.?그 때 강독을 이끌던 고 학번 선배가 이 중에 누가 여자 역할을 하고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는가를 맞추어 보라고 주문하는 것이다.?그 당시 나는 그런 장면이 너무나 희한하고,?또 그런 것들이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거진?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음을 반증한다.?그 뒤로 별로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다 박통이?10.26?사태로 죽고 나서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간 적이 있다.?지금도 인상적인데 그 교회의 남성 반주자가 피아노도 잘치고 얼굴도 이쁘장한 사람이었다.?신앙생활도 아주 잘해서 교회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다.?그 사람이 당시 중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여러 명 건드렸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혈기방장하던 시절이라 그 문제를 덮지 못하고 교회와 각을 세우다가 혼자 나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90년대 중반 이른바?PC?통신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통신망들의 대화 방은 밤만 되면 북적거리던 시절이다.?대화 방에 가면 숱하게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밤을 새워 밀담을 즐긴다.?입담 좋으면 여자 만나기도 쉬워 이른바 번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안다.?그런데 어느 날?’이반’이라 이름붙인 대화 방에 들어가려니까 일반인지 이반인지 묻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모 몇 학년 몇 반 정도로 생각해서 그냥 일반이라고 하니까 일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입장 불허하는 것이다.?하도 이상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동성애자들의 방이라고 한다.?일반은 일반인을 말하고,?이반은 그냥?2반이 아니라 일반을 일탈한?’이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그 사정을 알고는 그 방 근처만 가도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그만큼 당시의 우리 세대에게는 동성애는 여전히 낯선 코드이고,?그만큼 편견도 적지 않다.?이런 편견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이다.?이 당시?e-Mail을 통한 소통과 연애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You’ve got a mail’에 잘 나타나 있고,?대화 방은 전도연이 주연한?’접속’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서구에서 유대 기독교의 영향을 받던 시기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악마적이고 자연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된다.?서구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동성애에 대해 반대가 심한 곳은 기독교적 전통이 큰 곳에서이다.?기독교가 서구의 중심에 자리 잡기 전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다.?특히 그리스 문화에서는 성인 남자가 어린 미소년과 사귀는 일종의 원조교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이런 문화는 철학적 정당성도 얻고 있었다.?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저급한 욕망에 기초해 있지만,?성인 남자와 미소년의 관계는 순수한 영혼의 교류라는 것이다.?그 만큼 더 사랑의 이데아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터인데,?일찍부터 이성이 가방 들고 감성의 욕망을 쫓아다녔다는 증좌일터이리라.?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늘 젊은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그리스의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던 알키비아데스이다.?그는 명문가 출신이고 용모도 수월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이다.?그런 그가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연모한 것이다.?한 번은 둘이서 해변 가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 사랑은 짝사랑이다.?파도소리가 들리고,?별이 보석처럼 밤하늘을 장식한 해변 가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새운다고 상상해보라.?얼마나 가슴이 설레 이겠는가??알키비아데스도 그런 대단한 썸씽을 기대했을 것이다.?그런데 돌부처 같은 우리의 소크라테스는 동이 틀 때까지 우뚝 서서 꿈쩍도 안하고 동쪽 하늘만 바라다보았다고 한다.?그러니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실망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플라톤의?『향연』에 보면 그가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정을 토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그만큼 동성애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의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이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 집안사람들은 대단한 천재들이고 예술적 재능도 타고 났다.?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인 탓에 그의 집에는 늘 당대의 뛰어난 재사와 예술가들이 북적거렸다.?하지만 그의 형제들 대부분은 비극적 운명으로 일찍 죽거나 자살을 하고 또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모델로도 나온다.?유명한?’볼레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전쟁에서 오른 팔을 잃고 돌아온 그의 형인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가 라벨이 헌정한 곡이다.?약관?21살에?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틈틈이 메모로 썼던?『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은?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성전 역할을 하기도 했다.?철학 도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 책의 명제 몇 가지.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거의 잠언 수준이다.?집안 내력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우울한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캠브리지 대학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종종 그곳을 들렀다는 보고도 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자라는 것은 확증된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이 문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한 때 포스트모던 철학의 기수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셸 푸코도 동성애자이다.?그는 친 동성애자 운동,?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행동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예일 대 교환교수로 있을 때 종종 게이 바를 들렀는데 결국?1984년에?AIDS에 걸려 죽기도 했다.?그는 근대의 정신과 몸을 지배하는 지식과 권력 체계를 비판하는 일에 주력했다.?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이성과 반이성을 나누고,?광기를 추방하고,?의학적 지식이 이런 지배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발했다.?감옥과 병원의 탄생,?그리고 학교의 탄생이 근대적 지식의 담론 속에서 동일한 출생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미시 권력의 네트워크와 생산적 권력의 개념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광기의 역사』,?『감옥의 탄생』,?『감옥의 탄생』등은 많이 읽히는 그의 주저들이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필라델피아>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고발한 빼어난 법정 영화이다.?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인 주인공 톰 행크스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업무 미숙을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다.?그 당시만 해도?AIDS?환자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커서 동료 변호사들도 그의 소송을 대리하려고 하지 않는다.?편견으로 주저하던 흑인 변호사 댄젤 워싱턴이 사건을 맡으면서 톰 행크스와 함께 로펌을 상대로 진행하는 법정 공방은 법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일깨워준다.?배심원 측이 회사 측의 부당 해고를 인정하면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자 법원은 원고에 대한 피해배상 외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던 피고에 천문학적인 징벌적 손해 배상을 선고한다.?왜 한국의 법정에서는 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가??이 영화를 보다 보면 동성애자를 감싸주는 가족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한국의 가족에서 동성애자임을 커밍 아웃하면 여전히 맞아 죽을 일이고 쫓겨날 일이다.?사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다만 성적 기호만이 다를 뿐이다.?이러한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종종 우리들의 편견은 그것을 잊고 있다.?이 영화의 빼어난 장면 중의 하나가 최종 판결 전에 죽음을 예감한 톰 행크스가 변호사 워싱턴 앞에서 마리아 칼라스의?”La mamma morta”(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들으면서 몸으로 연기하는 장면이다.?안 본 사람은 꼭 한 번은 볼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b0p9mTJOJI?변호사가 동성애자 의뢰인에 진정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는 아리아다.?동성애자들의 빼어난 예술적 취향을 보여주려는 뜻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다.?사랑이 사랑으로만 끝나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모든 인륜지 대사의 기초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나는 굳이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동성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고 있고,?세계적으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그리고 미국의 매서츄세츠 주 등 아직은 소수이다.?문화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파리에서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시위가 몇 달 전에 격렬하게 일어난 적이 있을 만큼 아직은 거부감도 크다.?하지만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다.?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 역시 이 추세를 거부하기 힘들지 모르겠다.?이미 영화감독 김조광수는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선언한 적이 있다.?그렇다면 결혼을 남녀로 국한시키는 혼인법이나 가족법,?기타 이와 관련된 친족 상속법,?민법 등 많은 법 개정도 불가피할지 모르겠다.?미래의 가족은 우리가 그간 알아 왔던 형태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란 생각이 크다.?일단 결혼이란 이성간의 일이라는 것만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될 때가 올 것이다.?이 부분은 문화적인 인정과 사회적인 합의가 있기 까지 진통도 클 것이다.?특히 기독교는 신의 섭리,?창조 질서 등을 앞세우면서 반대가 심할 것이다.?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때2세 생산도 과거와는 크게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입양과 시험관 아기,정자와 난자의 기증 및 매매, 2중 대리모와 대리부 등 이성 간의 결혼에서 생각하기 힘든 방식이 일상화될 것이다.?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집착과 교육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미래에는 교육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동성결혼으로 인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이 될지는 지금 예단하기는 힘들겠다.?덕분에 우리 시대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무조건 귀를 닫으면 꼴통 보수요,?꼰대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조은평(건국대)

 

 

3. ‘소비의 사회’와 현대인 :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소비사회’라는 규정에 대해>

– 소비사회의 문제는 오늘날 여러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회학자는 오늘날의 소비사회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의 공동체라고 보고 있다.

조은평 표4

– 일단 ‘소비사회’라는 규정은 ‘상품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된 사회’를 의미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고도성장은 기존의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는데,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것을 ‘소비의 사회’라고 지칭한다.
– 하지만 단순히 대량생산에 기초해서 대량소비가 경제적으로 가능해진 풍요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드리야르는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소비개념과는 다른 소비개념을 통해 현대사회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상품(사물)의 소비란 ‘사용가치’의 소비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뛰어 넘는 어떤 행위이다. 그는 사물을 기호로 파악하고, 사회를 의미작용의 체계로 해석하면서 소비 행위를 특정한 상품(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닌 차이에 대한 욕구로 규정한다.(‘사용가치’에서 ‘기호가치’로!)

<소비사회가 개인에게 가져온 변화>

1) 상품미의 무한 추구.
– 현대 소비 사회에서 사람의 취미를 형성하는 것은 ‘예술미’라기 보다는 ‘상품미’다. 상품은 이런 미적 가상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이자 자본의 수단이며, 소비자는 상품미에 현혹되어 욕망을 가상적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의 허기가 생긴다.

2) 개인의 욕망구조도 변화.
–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일과 생산을 통해 채우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놀이와 소비를 채우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놀이를 통해 채우는 욕망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생겨난다. (일과 생산 -> 놀이와 소비)
–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를 소비한다. 사용 가치는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지만 기호 가치는 지위나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 그렇기에 소비 사회에서 욕망의 논리도 차이의 논리다. 소비 사회에서 욕망은 특정 사물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욕망이다.

< ‘소비사회’라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

1) 미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하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구멍이 뻥 뚫려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얼이 빠져 버린 미국인들에게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보냈던 첫 메시지. ->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to go back shopping!”
(cf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정부 관련 기사 “정부, 세월호 참사후 처음 ‘소비 둔화’ 우려 진단, 파이낸셜뉴스, 2014. 5. 6 / 현오석 부총리, “세월호 참사 후 서비스업 다소 부정적영향”, 아시아경제, 2014. 5. 6)

2) 아이 여성(child-women)의 출현 : 아동기에 대한 상업화!
–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많이 수집해 놓은 구두나 핸드백을 신어보거나 걸쳐보면서 보내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더구나 당시 그녀는 가슴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지만, 좀 더 자신의 우상인 모델 조던처럼 되기를 꿈꾸면서 그 수술을 기다리는 일조차도 무척 힘들어했다는 이야기.
– 익숙하게 들었을 법한 이야기. 그러나 당시 그 소녀의 나이가 10살!
– 더구나 한 영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대다수의 10세 소녀들은 ‘헤어스타일이나 패션, 화장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 또한 그 소녀들 중 26퍼센트는 ‘자신들이 별로 날씬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몸무게 때문에 고민’. 말하자면 점차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날씬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아름답지도 않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잡지 속에 인쇄된 우상(아이돌)들의 그 불가능한 이미지’와 비교한다.

3)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익숙해지는 쇼핑과 쇼핑몰 문화?
– 어린 시절부터 갖고 노는 쇼핑카트!(뽀로로 쇼핑카트)

4) 쇼핑몰이라는 공간의 전략.
– 백화점과 쇼핑몰 건물에서 상품이 본격적으로 진열된 곳에 공통적으로 없는 그 무엇은 뭘까?
– 광고처럼 모든 쇼핑몰의 공간(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도 포함해서)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구성된 공간. 그처럼 마케팅 원칙에 따라 구성된 공간에 들어선 소비자는 당연히 포획당할 수밖에 없다. (참조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5부작 중 2부 ‘소비는 감정이다’)

조은평 사진2-1

 

4. ‘소비 사회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가능할까?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의 약국 속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왜 탈출해야 할까? 이렇게 좋은 자유로운 약국에서 말이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듯.

1) 우선 ‘왜 탈출해야 할까?’
– 사실 소비를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사회처럼 결국에서는 구매력에 따라 위계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소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그 누군가의 희생에 기초해서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이러한 사회는 ‘소비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에 지탱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해야 한다.
– 또한 ‘소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이는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일 뿐이다. (환상의 공동체) 좀 더 다른 형태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 소비사회라는 동굴, 쇼핑몰이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 그냥 소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기? 과연 가능할까?
: 합리적 소비자로 생활하기?
: 소비자 운동을 통해 저항해보기. 불매 운동(예. 광고 불매 운동, 녹색 소비자 연대 등등)
: 소비 하지 않기? 아마도 가장 두려운 현상일 것!! 예)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의 말!
자본 – 상품 – (불려진) 자본( M-C-M’ / C-W-C’)
– 말하자면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의 순환 운동’에서 탈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아마도 대부분 회의적일 것. 아니면 너무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이야기로 여길 듯.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사회’를 유지하고 만들어 낸 ‘자본의 흐름’을 변혁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점.
– 결국 이것은 ‘정치적으로 앞으로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 그럼에도 일단 ‘탈출을 가능하게 해줄 지점’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 사실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계를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그대로 따라 쫓아가야만 생존할 수도 있고, 어쩌다 성공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500만년을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간은 23:59:56! EBS 다큐프라임)
–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그저 잘못된 현실 인식이나 단순한 오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허위의식’이라는 과거의 이데올로기 개념처럼 말이다.
– 오히려 슬라보예 지젝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치 티벳 승려들이 기도할 때 기구를 돌리는 것처럼,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의식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형성하고 확고히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시스템이나 위계질서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면서(또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동굴 상황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 다시 말해 현재의 소비 시스템(소비사회의 전략)을 따라 소비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되풀이해서 ‘소비사회’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다.
–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다시 이런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들을 형성하려는(수행하려는) 노력 속에서 또 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tienne Balibar)가 베를린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나는 이미 2011년 5월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움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강연만 마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이어진 다른 강연을 거의 대부분 참석해 청중석에서 모든 연사들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던 진지한 노학자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베를린 일정 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6월 13일 열린, 그와 그의 오랜 지적 동료이며 베를린 자유대학교(FU Berlin) 철학과 명예교수인 (그리고 나의 부지도교수이기도 한) 프리더 오토 볼프(Frieder Otto Wolf) 사이의 대담이었다. 두 노(老) 거장들의 우정어린 대화 속에 진행된 이번 행사는 발리바르가 1993년 집필한 책 『맑스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rx)』이 오토 볼프의 변역으로 최근 독일에서 새로 출판된 것을 기념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지역에 위치한 인문학 서점 b_books에서 열린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사진1>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발리바르에 대해서야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프리더 오토 볼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독일에 얼마 되지 않는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으로 1970년대 이래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으며, 최근에는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는다(Lire le Capital』를 최초로 독어로 완역(기존의 번역은 영어판, 한국어판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을 번역했을 뿐 랑시에르, 마슈레 등 다른 저자들의 글은 번역되지 않았으며 숱한 오역으로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했을 뿐 아니라, 알튀세르 전집을 편집, 발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실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89년까지, 그리고 1994년부터 99년까지 두 차례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으며, 현재 독일 휴머니즘 연합(Humanistischer Verband Deutschlands)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사진 2>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발리바르는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조류의 맑스주의 정치철학들(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날 이 철학자들의 부흥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맑스의 철학』을 집필한 1993년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 ‘맑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지적, 실천적 영역에 확산되고 그 자리에 푸코,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등 새로운 이론 조류들이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에 맑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저작 의도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시에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공식적 맑스주의 조류들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 맑스주의 철학 조류의 결정적 문제는 맑스의 ‘철학’을 다른 저작들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경제학 비판’의 경우 물신주의를 비롯한 일부만이 논의 주제로 부각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이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찰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맑스주의의 극단적으로 위험한 사고는 특히나 구 소련을 중심으로 맑스주의를 ‘체계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발리바르 자신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반체계적 서술’에 몰두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식 맑스주의의 체계화 경향이 그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맑스주의라는 유기적인 이념과 담론이 당형태의 운동으로 고착화되는 데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반체계적 서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맑스의 철학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으로 정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맑스의 사상이 하나의 동일한 체계로 고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맑스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는 것이 워낙 일상적 언어용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편집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현재와 같은 단수 표현으로 제목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라는 굳어진 사상체계도, 또 맑스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시도도 모두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맑스 이론의 대안은 오히려 맑스의 사상 자체를 ‘변형’하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미셸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근대)철학적인 역사 개념이자 19세기적인 진화론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며 비판한 이래로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한 뒤,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자본주의 비판으로서 맑스의 사상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맑스가 말한 것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맑스가 제공한 도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작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맑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관념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발리바르에게 있어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은 ‘다원적 맑시즘’의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진 대담에서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단수로서의 철학’이라는 관념에 종말을 고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특성 상황에 대한 반성적인 이해로서 다수여야 하며, 이는 정치적 행동과 관련을 맺으며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은 마지막 단어를, 궁극적인 답을 갖지 않는다. 언제나 철학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 것, 담론화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반성활동을 통해 이를 도그마로 만들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또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의해 196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자본을 읽자’ 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적 운동은 맑스 이론을 단지 재발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맑스 사상의 재구성에 기여했고 이는 특히 (헤겔을 차용한) 기존 맑스주의의 논리적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상이한 사회에 대한 상이한 지배분석의 필요성’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사진3>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청중토론 시간에 나는 지젝, 바디우, 네그리, 아감벤 등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맑스주의 내지 비판적 철학이론들에 대한 바디우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발리바르의 제자이기도 한) 진태원 선생이 한국에서 이 철학 이론들을 “좌파 메시아주의”라고 비판한 뒤 촉발된 논쟁을 발리바르에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말했다. 발리바르는 나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며 친절하게도 무려 20분가량을 할애해 아주 상세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새로운 조류의 비판적 이론들을, ‘맑스주의의 죽음’이 선언된 상황에서 철학적 담론의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시도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저자들 중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거부해야 할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다. 발리바르는 이 저자들이 모두 훌륭하고 발리바르 자신보다 뛰어나다며 (매우 겸손하게) 그들의 이론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이 훌륭한 이론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사상 전체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에 있어서 그 사상적 자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됐다. 이는 맑스만이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는 그의 모두발언 결론과 연결되는 주장이다. 즉,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은 푸코, 한나 아렌트, 들뢰즈 등 다양한 형태의 담론들로부터 얼마든지 비판적인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단순화된 기존 1세대 맑스주의의 변형과 재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날 맑스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달리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을 사고해야 한다. 이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우리가 맑스 자신으로부터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이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 발리바르는 맑스 자신의 사상에도 ‘메시아적인 것’의 요소, 즉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 것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운, 다른 형태의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종말론적 열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정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고 현재의 상황을 보상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 자신은 매우 비판적이라고 고백했다.

이어 내 질문에 대해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소개하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조류들은 실천적으로 반드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철학 이론가들의 사상은 각자가 가진 장점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각 이론가들의 장점들을 중첩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맑스 이론의 현재화와 재구성은 무엇보다도 도그마적 체계화에 대한 거부와 다원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본주의 비판의 사상적 원천을 넓게 개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발리바르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스주의의 다원성’에 대한 강조는 맑스의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고정시키고자 했던 20세기의 공식적 맑스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다만 나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을 덧붙이고 싶다. 맑스주의와 메시아적 사상의 결합은 맑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려고 했던 블로흐뿐 아니라 벤야민과 아도르노 같은 유대인 지식인들에 의해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이념을 변혁적 정치와 결합하려는 시도들에 의해서도 이미 선취된 것이었다. 벤야민은 그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결합을 새로운 역사 인식의 필수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직된 사회와 이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들 그리고 이 투쟁들로 구성되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현존의 ‘초월’이라는 신학적인 이념과 결합되지 않으면 손쉽게 현재 상황에 대한 타협과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교조화와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체계화)으로부터 비롯한 성찰이다. 아도르노 역시 유물론과 신학은 그 목적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의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강조되는 ‘우상숭배 금지원칙(Bilderverbot)’과 결합시켜서 현실의 모순적인 논리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비판이론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한다. 즉 비판이론은 긍정적인 규범적 당위(예컨대 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들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실현이 사회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즉 내재적 비판으로써만 진정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내재적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나 현존하는 사회의 변화, 즉 ‘초월’에 있는 것이다. 나는 유물론적 이론이 이렇게 초월에 대한 이념을 수용함으로써만 일관된 비판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물리쳐선 안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나는 정치를 메시아주의로 환원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메시아주의적 요소와 유물론적 정치 이론이 결합되는 것(이는 다른 말로 “‘구원’과 ‘해방’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을 그 자체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청중의 질문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더 소개해보자. 발리바르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을 비판하며 ‘최종심급’에 대한 사유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청중은 “최종심급에 대한 관념 없이 어떻게 비판과 정치가 가능한가?” 하고 물었는데, 발리바르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관념이 그 당시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포기할 수 없는 유물론의 시금석이었으며, 이를 폐기할 경우 마치 관념론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맑스주의 내에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연하게도 맑스주의자들이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계급투쟁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으로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유물론의 시금석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그람시가 도달한 문제의식(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의 거부)보다도 훨씬 후퇴한 영역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엥겔스에게서 차용한) 수려한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이 관념의 문제를 상쇄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최종심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봉착한 이 두 문제를 모두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이 상반된 정식화는 계급투쟁과 그 중요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결정심급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그러나 ‘최종’ 심급이라는 표현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그 표현이 마치 하나의 사회가 수직적인 축과 결정구조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이 표현을 포기해야 하며, 지배구조의 다원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 영역이 동일하게 결정력을 갖는다’는 식의 다원주의적인 표상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중층결정 과정에서 각 사회적 영역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가는 지배적 구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 그리고 청중들이 함께 대화와 토론으로 만들어간 이 대담회는 오늘날 급진 정치철학의 재구성에 대해 고민하는 신구세대의 의견 교환의 장이었다. 젊은 세대는 ‘오늘날 과연 당이 필요한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는 어떻게 긴장 없이 공존 가능한가?’ 같은 새로운 질문과 의견들을 전달했고, 두 노 학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몇몇 과도한 편향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비판적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철학의 거장들과 젊은 세대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격식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이 ‘키치’적인 철학 행사는 그 자체로 나에게 몹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아가 두 노 학자들이 자신들의 변함없는 오랜 우정을 과시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습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철학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것은 동시에 존경과 경탄의 감성이 드는 광경이기도 했다. 베를린의 어느 여름날에 펼쳐진, 인문학적이며 또한 급진적인 풍경이었다.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최종덕(한철연 회원)

단 하루, 어제 신문에 오른 사회면 뉴스만 대충 집어보련다

문창극 총독 지명자는 대학원 다니고 박사학위 다 할만 했으니까 한 거라고

송광용 신임 비서관은 논문 표절 아니라구 허구

노대래 공정위원장은 손석희 아나운서를 빨갱이라고 하니

이 세상 빨갱이 천지가 되었고

전광훈 목사는 서울시민들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우질 않나,

하기야 그 목사만 그런 게 아니니까

박상은 국회의원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개그까지 하고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언론은 모두 입을 다물라“고 대국민 협박을 하고

박유하라는 교수는 위안부를 매춘부로 묘사한 책을 냈다니,

교수들은 신림동 좌판 나물 파는 우리 할머니에게 머리 조아리라

끔찍한 일베의 살인인증사진과 더불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직원들의 댓글달기를 몰랐다는 판결이 났다고 하는데,

글쎄 누가 믿을까

거짓말들,

어제 하루치 신문에만 뜬 거라고.

하루하루가 이런 뉴스들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으니,

온갖 거짓이 횡행하더라.

기만이 땅에 가득차고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니

신도 혼미해졌는지 교회까지 자기 속임수에서 허우적거리는거군.

기만은 자기 이익만을 크게 하려니,

부끄럼 한 점 없다고 당당한 위선의 몸짓까지 흉내낸다

기만을 성공시키려니

첫째가 뭇 사람들이 내 속임수를 눈치 챌 수 없도록 속임수를 세게 가는 거야

둘째는 네가 혹시 내 속임수를 의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 속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잔머리도 늘어나는 거지.

기만꾼들은 남들이 내 기만에 마음을 놓고 속아 주도록 주도면밀함까지 있다구.

거기다 대통령이 받쳐준다고 생각하니,

든든한 마음에 허세 또한 당당해져

그보다 기만에 더 능한 자들이 여기저기,

자기 자신도 자기가 하는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기만들이 많거늘,

그런 기만을 자기기만이라 하더라.

남들에 마법을 피우기 전에 나 자신에게 기만의 주술을 거는 거야.

그리고 나서야 남을 더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이지.

기만자는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끝까지 우기는 거야.

신문에서 날마다 보듯이 말이지.

인간중독이 아니라 자기중독이라서, 그건 약도 없어.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일단 왕권력을 바꾸고 봐야겠지.

거짓을 탐지하고 알아채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런 사기꾼들이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들이 기꺼이 속아주면 기만자들은 놀랄 속도로 자기증식하니깐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믿음은 지식권력의 수단일 뿐임을 아는 거지.

교회나 절에 나가는 신도는 믿음은 강한데, 그런 믿음도 권력지식의 노예니깐

자기기만 병증이 샤머니즘이나 주술의 향을 타고 이 땅을 질식키려는데,

원래가 교회권력이나 독재정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행동양상인거지

다행히 우리 몸속에는 기만을 알아채는 생리적 능력이 있으니 그런 능력을 잘 발휘해야겠지

발휘하면 뭐하나, 눈 부릅뜨고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신문 좀 편하게 봐야지.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조은평(건국대)

 

 

조은평 사진1-1

 

‘긍정의 힘’과?‘힐링’!?곳곳에서 상처받고 삶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말들입니다.?게다가 인생의?‘멘토’를 자처하는 온갖 전문가들이?‘멘붕’에 빠진 우리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돼주겠다고 외쳐댑니다.?물론 이 복잡하고 유동적이며 불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은 어쩌면 절망적인 삶에서 헤쳐 나오려는 나름의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인생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요??대체 누가 어떤 권리로 내 삶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사실 우리는 너무나 힘든 삶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이런 전문가들에게 기대려 합니다.?그럼에도 이처럼 전문가들에게 기대려는 충동은 결국 스스로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인문학,?특히 철학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어쩌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주변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더구나 그런 자신의 고민들을 주변 지인들과 나누며 치열하게 토론한다면,?누구나 우리 삶을 억누르며 방해하는 요인들과 사회 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아마도 철학은 이런 스스로의 노력들이 만나 소통하는 공간이자 함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서로 소통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철학이란? : ‘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로부터 출발하는 철학함

“스스로의 철학함(Philosophieren)?없는 철학은,?다시 말해 자신의 철학적 체험이 없는 철학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1)?일상에서 솟아나는 철학

-?철학이란??과연 인간이 생각하는 이유는? ‘철학이란 결국 비-철학,?철학의 외부’?때문에!

조은평 표1

2)?그럼에도 일상에 거리두기를 하는 철학(비판/반성/낯설게 보기)

-?일상에서 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매몰되는 우리들.

-?말하자면?‘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면에서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철학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처럼 일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즉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철학적 물음을 당연히 공허하다.?하지만 반대로 일상에서의 삶에만 매몰되고,?그 속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만 갇혀 있게 될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철학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동시에?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고 고민한다.

-?바로 플라톤의?‘동굴의 비유’는?‘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일상???철학?(일상에서 솟아나는 동시에,?일상에 거리두기)

조은평 표2

 

2.?오늘의 주제이자?‘일상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질문’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

-?나는 왜 쇼핑몰을 갈까??또 쇼핑을 하면 왜 즐거운 걸까??특히 기분이 우울하거나 짜증날 때,?대형 쇼핑몰에 가면 왜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까??뭐 여러 가지 질문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듯.

-?그럼 왜 쇼핑몰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당연히 내가 그 공간에서 만큼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소비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

-?그러면 일단 우리 삶에서 쇼핑이 이루어지는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쇼핑할 때 느끼는 자유와 해방감(?)

조은평 표3

– 우리가 느끼는 자유와 해방의 상황은 아마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말하자면 다른 일상에서의 삶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누릴 수 없더라도, 쇼핑을 하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쇼핑몰을 산책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듯.

– 이런 측면에서 쇼핑의 공간은 마치 ‘약국’과도 같은 곳.(아래 바우만 참조). 다시 말해 모든 일상의 괴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 (물론 나의 구매력이 허락하는 한!)

2) 쇼핑몰이라는 동굴의 비밀(?)

– 하지만, 사실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즐기는 쇼핑의 순간은 그저 잠깐일 뿐이고 그때 느끼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해방의 감정도 결국에는 나의 구매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 이렇듯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쇼핑을 할 때, 또 쇼핑몰을 구경할 때 우리는 그럼에도 자유롭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율성이라는 환상 : 독립적인 소비자. 합리적인 소비자. 주체적인 소비자) 말하자면 그 무엇에 의해(광고든, 마케팅이든 간에) 영향을 받아 소비를 한다고 하더라고(그렇다고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나의 결정이니까 나의 자유라고. 그렇기에 난 자유롭고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뭐 이런 식으로 우린 스스로의 자율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후적으로 정당화한다.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 이데올로기적인 원환성)

–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는 너무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일터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늘 전문 정치인들에게 지겹게 끌려 다녀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일상의 부자유 공간에서 벗어나 쇼핑할 때만큼은 나의 자유를 누린다고도 할 수 있을 듯.

– 하지만 쇼핑의 공간과 쇼핑의 상황은 어쩌면 ‘플라톤의 동굴’과도 흡사하다. 마치 동굴 속 죄수들이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하듯이, 현대의 소비자들도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 ‘동굴’ 벽면에 펼쳐지는 이미지 세계 =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

–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푸코가 ‘현실에 감옥이 왜 존재하는지 아는가? 현실이 감옥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기 감옥이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쇼핑몰이 우리 주변에 멋지게 펼쳐져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쇼핑몰과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고’.

– 말하자면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이미 소비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소비지상주의 사회’라는 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몰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고 믿게 하는 사회는 어떤 식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일까?

– 바로 이런 논의가 ‘소비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철학적, 사회적 논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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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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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구태환(상지대 강사)

 

이 글은 5월 20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세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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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그리고 공자와?『논어』

우리나라의 성인들 대부분은 『논어』라는 책을 한 번은 접해봤을 것이다.그래서인지 『논어』의 첫 구절인?“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대부분 알고 있다.?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다는 것은 맞아.?하지만 공부가 얼마나 지겨운데.?배우고 익히는 게 기쁘다는 것이 말이 돼?’라고 말이다.?물론 멀리 있는 벗이 나를 보고자 찾아왔는데,?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그런데 배우고 익히는 것,?즉 학습(學習)은 진정으로 기쁘지 않은 것일까??여기에서 우리는『논어』 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여기에서‘배우고 익히는 것’은 반드시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읽기 싫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영어,?수학을 배우는 것도 배우는 것이지만,?수영,?오락,?기타,스케이트보드,?스키,?춤,?노래,?축구,?심지어는 화투를 배우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그것이 재미있고 기쁘지 않다는 말인가??실제로 공자는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서 그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석 달간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심취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논어』에는 언뜻 봐서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 제법 있다.?물론 『논어』에 담긴 모든 말을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와 재전(再傳)?제자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공자(이름은 구丘)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경제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였다.?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붕괴되고 힘을 상실한 천자를 대신해서 각국의 제후들이 중국 천하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다투던 혼란기이다.?공자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종법적 질서가 회복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이러한 공자의 노력은 각국을 돌아다니던 공자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그는?56세부터?68세까지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나름의 천하를 평정할 방도를 역설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고,?공자는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오죽하면?‘도가 실행되지 않는 세상을 떠나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다니고 싶다’고까지 한다.?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임금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조나라의 필힐이 부르자 그를 만나려 하고,?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당시에 국정을 좌우하는 여인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위나라 군주의 아내인 남자(南子)를 만나기도 한다.?그리고 이런 행동 때문에 제자 자로(子路)로부터 욕을 먹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공자는 이처럼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노력했지만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결국?68세의 나이에 조국 노나라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쓰다.

 

학습의 내용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의 내용은 무엇일까??사마천의『사기』?에 의하면,?공자의 제자는 약?3,000명이고 그 가운데?‘육예(六藝)’에 통달한(通)이가?72명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공자의 학습 내용은?‘육예’였던 셈인데, ‘육예’는 예(禮,?예의범절),?악(樂,?음악),?사(射,?활쏘기),?어(御,?말이나 수레 몰기),?서(書,?글쓰기),?수(數,?셈하기)를 말한다.?이 여섯 가지는 당시의 지배층이 습득해야 교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육예에?‘통달했다’는 것이다.

통달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것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의 원리까지 체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학습의 궁극의 경지이다.?예컨대 조상에 대한 제사나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예의 중요한 항목이다.?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례나 상례를 치룰 때 그러한 의식을 왜 거행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답습한 대로 실행할 뿐이다.?하지만 공자는 제례나 상례가 조상과 부모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의식임을 밝히고 있다.?어떤 의식에 통달했다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연원이 무엇인지를 궁구하여 밝히고 이해하는 것이다.?그리고 겉모습으로서의 예의만이 아니라 그 예를 실행할 때의 마음가짐까지 갖추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리고 이러한 교양은 지배층이 습득해야 할 것이다.

 

배움의 목적,?군자

DSC09035-1사실 공자가 개창한 유가 사상은 일반 백성들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지금과는 달리 신분제 사회였던 과거에 일반 백성은 그 사회의 주인이 아니었다.그 사회의 주인은 임금을 비롯한 소수의 지배층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유가 사상은 사회의 주인인 이들 지배층이 어떻게 하면 일반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공자가 보기에는 이들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했다.?그리고 배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들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군자(君子)’이다.?우리는 흔히?‘군자’라고 하면, ‘도덕군자’, ‘성인군자’를 연상하며,?도덕적 인격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하지만?‘군자’는 글자 그대로 임금(君)의 아들(子),?즉 지배층이다.?그런데 공자는 이 용어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말 그대로 지배층이다.?계강자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선해지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질 것입니다.?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으니,?풀 위에 바람이 불면(풀은)?반드시 눕게 됩니다.”?지배층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면,?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백성들도 그를 모델로 하여 선해질 것이라는 말이다.?이처럼 군자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자 이전에는 당연한 것이었다.?그런데 공자는 이 개념을 변용한다.

공자는 지배층을 가리키는?‘군자’를 군자다운 덕목을 가진 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그는 군자를 이야기할 때 원래는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인?‘소인(小人)’과 대비해서 말하고 있는데,?그 중 하나가?“군자는 옳음에 밝고,?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다.?이것을 현대어로 바꾸면, ‘지배층은 무엇이 옳은가에 관심을 갖고,?피지배층은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가 된다.

그런데 공자의 이러한 언명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위를 말하고 있다. ‘착한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가 실제로는?‘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는 의미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위의 언명도?“군자(지배층)는 옳음에 밝고,?소인(피지배층)은 이익에 밝다”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지배층은 옳음에 밝아야 하고,?피지배층은 이익에 밝아야 한다”로 읽힐 수 있다.?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옳음에 밝아야 지배층 자격이 있고,?이익에 밝은 이는 피지배층일 뿐이다”?라는 말이 된다.?이는 옳음,?사회적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공자의 질타이다.

 

군자의 모습

공자가 말하는 배움이 진정

DSC09029-1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그러한 군자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비교적 잘 알려진 구절로는?“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는 못한다)를 들 수 있다.?여기에서
의?‘화’는 조화나 화합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이러한 조화나 화합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 사이에 가능하다.마치 오케스트라의 여러 다른 악기들이 각각의 음을 내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듯이,?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타인과 조화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낸다.?이처럼 서로 화합하고 조화하는 그들이지만,?결코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힘 있는 이의 견해에 무조건 동조하는 소인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을 갖는 이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커다란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즉 이들도 서로간에 다름 속에서도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그 안에서 조화할 수 있을 것이다.?공자의 사상에서 그러한 원칙은 인(仁)과 예(禮)라고 할 수 있다.?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랑을 표현해내는 수단(예)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을 공자는 꾸밈과 바탕의 적절한 조화라고 한다. “子曰,?質勝文則野,?文

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공자가 말했다.바탕이 꾸밈을 넘어서면 야만인이고,?꾸밈이 바탕을 넘어서면 문서를 다루는 관료이다.?꾸밈과 바탕이 아름답게 조화된 다음에야 군자가 된다)”는 문장에서 바탕(질)이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즉 인이고,?꾸밈(문)이란 사랑의 표현,?즉 예이다.?이처럼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군자인 것이다.

이러한 군자,?즉 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이 현실에서 지배층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린다면,?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그리고 그 사랑을 적절히 표현할 제도를 마련할 것이다.?만약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것을 제도로써 표현해야 할 것이다.?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제도만 내놓는다면,?그 제도는 아마도 백성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얻기 위한 것이거나 눈앞에 닥친 정치적 곤경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하지만 그러한 제도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리는 만무하다.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은 바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공자는 그러한 군자가 세상을 다스리기를 바랐으며,?그러한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은 평화롭고 도덕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군자는 누구인가??우리 시대는 신분제를 거부한다.모든 사람이 평등하며,?헌법에도 나와 있듯이?‘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즉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인인 사회를 지향한다.?신분상으로 봤을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성원이 군자,?즉 이 사회의 지배층인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군자들은 누구를 다스리는가?바로 우리다.?우리는 각자가 군자이면서 소인이다.?이제는 신분상의 군자,소인은 무의미해졌다.?다만 각자의 관심에 따라,?즉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에 따라 소인과 군자가 나뉠 뿐이다.어찌 보면 공자가 생각했던 것이 실현된 사회이다.

자기들을 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지배에 따라 사는 소인이 될 것인지,?스스로가 군자인 지배층이 되어 소수의 관료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살 것인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시대이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 6월 17일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학생들에게?Argumentation Theory를 가르치다 보면 논리학의?’오류론’을 한 번은 꼭 다룬다.?그런데 이 오류 론에는?’형식적 오류’와?’비형식적 오류’가 다 포함된다.?형식적 오류는 형식적 규칙을 위배했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니까 그 규칙만 알면 비교적 판별하기가 쉽다.?마치 도로 교통에서 신호 위반이나 과속의 경우 규칙 위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그런데 일상 언어에서는 형식이 아닌 내용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때로는 이 오류를 일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재판정에서 피의자가 눈물 흘리면서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우가 전형적이다.?그가 한 행위와 그의 처지는 별개지만 눈물은 이 둘을 연결시켜줘서 정상참작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소크라테스도?『변명』에 보면 이런?’연민에의 호소’를 한다. “친구여,?저도 사람입니다.?다른 사람과 똑같습니다.?저도 호머의 말처럼 목석으로 된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고,?식구도 있고,?아들도 셋 이예요.”?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소크라테스 조차 마누라와 자식새끼를 앞세우며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김 시습의?’자지는 만지고,?보지는 조지라'(自知晩知 補知早知)는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혼용되는 우리 일상어의 애매성을 노린 위트 효과다.?서당에서 열심히 글을 읽는 아이들 모습이 기특해 큰 소리로 한 수 읊었더니 서당의 훈장 이하 아이들이 욕하는 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것이다.?사실은 김 시습 자신이 왔는데도 내다보지도 않는 모습에 부아가 나서 야유를 한 것이리라.?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게 알고,?도움을 받아 알려고 하면 일찍 안다는 말이다.?선거철만 되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온갖 비리들이 폭로되는 경우가 있다.?전형적인 물 타기 방식이요,?피장파장의 오류이다.?종종?’예수 믿으시오’?하면서 확성기로 떠들고 앞뒤로는?’불신지옥’?간판을 달고 다니는데 이는 흑백논리의 오류이다.?신이 이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들은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색깔로만 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신의 창조물을 왜곡하는 저들이 오히려 불신하는 것은 아닐까??이런 단순화가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 효과가 강력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인들이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때문에 이런 형태의 오류는 무조건 틀렸으니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기 어렵다.?그 중에 하나가?’거짓 원인의 오류’이다.

이 오류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오류다.?예전에 마당이 있던 시절 여름날 열심히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었는데 소나기가 내린다고 생각해 보라.?또 그런 불편한 경험을 두 어 차례 반복해보라.?그러니까 나오는 엄마들의 소리가?’빨래만 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여러분들은 세차를 할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가??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고…사실 빨래를 널거나 세차를 하는 사건과 비가 온다는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음에도 우리의 연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개들만 조건 반사하는 것이 아니다.?전라도 사람이 어떻고,?경상도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도 사실 그 사람 자체와 그의 출신 지역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다.?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나치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한국 정치에서 늘 반복이 되는 종북 놀이도 그 한 예이다.?과거 왕조시대에 여름 날 가뭄이 심하면 왕이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다.?자연재해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간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믿는가??동양의 전통적인 천인합일의 사상에서는 양자는 연결되어 있고 상호 조응한다고 본다.?이 형이상학적 가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은근슬쩍 학생들한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기우제를 지내면 실제로 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학생들은 당연히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당황 하면서 여러 가지 답변을 내놓는다. ‘안 옵니다.’?사실 이런 답변이 합리적이다.?그런데 배운 것이 죄라고,?어떤 학생은 기우제를 지내면 연기가 하늘로 많이 올라가 비가 내린다고 나름 과학적으로 답변하는 경우도 있다.?마른하늘에 그 한 조각구름이 무슨 큰 역할을 하겠는가??하지만 정답은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왜 그럴까??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까…

일전에 송 강호,?김 혜수가 주연한?<관상>이라는 영화가 히트를 친 적이 있다.?병약한 문종이 관상쟁이를 통해 역모의 상을 미리 알아 단종의 보위를 지키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다.?수양의 상은 전형적으로 역모의 상이라고 한다.?역모는 당시 정치 상황을 꿰뚫고 있다면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관상쟁이의 판단은 다만 사람들에게 합리적 예측에 대해 신념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데 적격이다.?꿈보다 해몽이고 후행적 정당화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관상은 얼굴에 드러난 상을 통해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본다는 것인데 사실 가당찮은 이야기일까??드러난 상은 과거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 있고,?그 과거를 통해 미래를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다.?그리고 이런 판단은 상당히 경험적이고 통계적이다.?게다가 오랜 숙련을 통해 통계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과학적인 통계가 부족하던 시절의 경험적 통계학이다.?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직업에서는 외양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신뢰도가 있다.?나도 그렇게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동양의?12지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일정하게 그 유형에 포함시켜 판단하는 것이다.?예전에 노무현과 이회창이 대통령 선거로 대립할 때 다들 이 회창을 독수리 상이라고 했는데,?나는 쥐 상이다고 하고 노 무현 상이 호랑이 상이다고 어거지 부린 적이 있다.?사실 이런 포괄적 분류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아무튼 이걸 가지고 학생들이 많이 떠들면?”?너희들 다 보인다.?미래가”?라고 엄포주면 서로 봐달라고 하면서 조용해진다.?학생들은 나의 합리적 이론보다는 그런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속설에 더 반응한다.?학자가 하는 애기보다 사주 봐주는 점쟁이 이야기를 더 귀담아 듣지 않는가??일종의 심리적 효과이고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이다.?서양에서도?19세기 초에 이런 형태의 관상학과 골상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용모와 안색,?얼굴에 드러난 특성 등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외면이 내면을 반영한다는 생각이다.?특히 범죄인의 성향과 유형을 판단하는 데 골상학이 상당히 이용되기도 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비 과학으로 더는 과학의 반열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외면으로 드러난 특질,?뼈의 구조와 배치 등이 내면의 정신과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동양에서는 관상보다는 골상이요,?골상 보다는 심상이라고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안에 감추어진 마음을 더 높이 사고 있다.?나는 아직도?”정신은 뼈다”라는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크고 작은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세월 호 사건은 너무도 큰 참사인데다 현재까지도 진행형의 사건이다.?얼마 전에는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양 터미널에서 화재가 나?7명이 죽고 수 십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시민들이 일상으로 이용하는 시설에서 이런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은 큰 충격이 될 수 있다.?전남 장성의 한 요양원에서는 화재가 놔 요양 노인들?21명이 불에 타고 연기에 질식돼서 죽는 사고도 났다.?그런데 이처럼 빈발하는 사고의 형태가 과거 김 영삼 대통령 시절을 연상케 하고 있다.?당시의 대형사고 몇 가지만 손꼽아도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사망292명),?대구 지하철 가스 사고(98명 사명),?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사망500여명), KAL기 괌 추락사고(228명 사망),?성수대교 붕괴사고(32명 사망)이다.?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데 이런 대형 사고가 부지기수로 터지니까 국민들이 받는 체감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그러니까 영부인의 상이 곡상(哭象)이라 국민들의 눈물을 많이 뺀다는 말이 돌았다.?영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들어가고 나온 굴곡(屈谷)이 없지는 않다.?뒤의 곡(谷)을 앞의 곡(哭)으로 치환한 것이다.?어느 유명한 관상가의 말이라고 했다.?물리적인 사고와 대통령 영부인의 상간에 인과관계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마는 관상가들의 그런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리 잡기도 한다.?김 영삼 정부 말에 초유의?IMF?위기를 맞았으니 더 그 말의 울림이 더 크다.?전형적인?‘거짓 원인의 오류’이지만 국민들의 집단 연상의 메카니즘 속에서는 필연성이 있다는 믿음이다.?혹세무민은 바로 이런 틈을 파고든다. “어,?그러고 보니 박 근혜 상도 만만찮아.?눈물 꽤 짜내게 생겼네.?편안한 상이 아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