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신년회 후일담 2]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오늘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다. 오후 3시에 시작해서 영화감상, 시평 토론회, 정기총회, 저녁식사와 여흥을 마치고, 현재 일부 회원들이 남아서 자유발언 중이다.

지금은 정년을 곧 맞이하는 이화여대 이규성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이규성왈

“나는 이제 책 안 본다. 이제 문자로 이루어진 책을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광화문에 가면 큰 책이 있다. 이 책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 큰 책 앞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모두 무효가 되었다. 지금 나는 이 큰 책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린 이제 큰 책을 보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의 페북에서 재게재)

철학은 개폼이다 [신년회 후일담 1]

철학은 개폼이다.

역시 올해 정년을 맞이하는 방송대 이정호 교수의 한철연 신년회 발언이다.

“철학은 왜 하냐? 철학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이다.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철학하는 자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가면 공부하지 않는다. 퇴직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반면 제도권 밖에서 연구하는 이들은 정년이 없다. 한 사람의 실존적인 자부심은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는다.
자부심은 자신이(自) 짊어지는(負) 것이다. 이것이 기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다.
남들은 개폼 잡는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철학은 바로 개폼이다. 내 시선을 기준으로 처절한 자기응시에 직면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고 공부다.”

우린 이제 처절하게 고민하고,처절하게 성실하고, 처절하게 반성하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 페북에서 재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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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박종성(호원대학교)

 

“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 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
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고
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
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게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
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시대에 대한 성찰: “이게 국가냐”

“정말 이건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니지 않냐”, 집회 나온 할머니의 말이다. “순실”의 시대에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는지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민중은 자괴와 상실만을 하지는 않았다. 상실의 시대에 민중들은 다시 촛불의 희망을 들었다. 7차 집회까지 연인원 700만을 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서울, 부산, 거제,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어린이, 대학생, 노인들에 이르는 민중의 모습은 우리의 시대에 대한 촛불의 거대한 시대의 성찰이자 주권자의 실천이었다. 촛불 혁명이었다. “오늘 이곳으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나니, 우리는 바로 그 탄생의 현장에 서 있다.” 괴테가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발미 전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우리는 촛불 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고, 그 탄생의 현장에 시민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있었다. 광장의 정치, 그 목소리는 다양했고, 정치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평화로우며 축제 분위기였다. 가정주부는 답답하여, 학생들은 정유라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는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노동자도 그렇게 광장으로 나왔다.
촛불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입학에 분노하였고 정의를 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정의(justice)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의 원리, 각자는 각자의 공헌에 따라 분배받는 것인 분배적 원리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 공헌에 따라 분배받지 못한 정유라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렇듯 시민들, 학생들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였다. 광장의 정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이며, 유신 잔당들의 해체와 종식을 알리는 새로운 역사이어야 한다. 그런데 87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광장정치가 그야말로 텅 빈 기표로 남지 않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역사의 탄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는 공적인(publica) 것(res)의 파괴이다. 공적인 것의 파괴와 사적인 것이 지배하는 국가, 바로 그런 지금의 국가(republic)에 대한 성찰이 촛불 혁명을 만든 것이다. 촛불 혁명은 탄생하였다. 그 성장의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철학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현실에서 시민은 논박보다는 촛불을 들어 통치자의 무지 자각을 일깨우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박근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물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유신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폭정, 불의, 강도 짓을 일삼던 자들의 영혼, 즉 오늘날 망령, 독재의 유령은 이들의 영혼이 정화되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 인하여 망령은 현실에서 배회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 그것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선택하였다. 민중들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사회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에게, 곧 부, 명성, 명예의 획득에만 혈안이 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수백만의 민중들은 묻고 있다. 세월호 참사, 사드 배치, 국정원 선거 개입, 교육부 국정 교과서, 한일군사협정, 부정 입학, 국정 농단, 성과연봉제 등등 국정 전반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 질문이었다. 민중들은 충분히 철학적이었다.
둘째, 탐욕과 시기는 나라가 망하는 두 요소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화폐였다. 요약하자면 이번 사태의 핵심은 사적인 인간의 화폐에 대한 탐욕이었고 이것을 정치권력이 두둔하고 은폐하였다는 것이다. 공적인 혈세는 사적인 인간의 부의 증대로 둔갑하였다. 맑스가 말하는 “치부욕”에, 곧 사적인 인간의 치부욕에 우리들의 혈세가 쓰인 것, 민중들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였고 자신의 현실적 삶의 성찰을 통해 거대한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을 믿지 않고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Plutus)를 믿는다. 맑스는 재물의 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사회의 “경제적 ·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었다. 그렇다, 국정을 농단한 결과는 도덕적 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질서까지도 파괴하였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의 역할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경제민주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을 위한 국가는 변혁되어야 할 대상이다.
플루토스를 추구하는 근대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생활원리를 눈부시게 비춰주는 화신(Inkarnation)을 자신의 황금 성배(Goldgral)로서 환영한다.”고 맑스는 말한 바 있다. 맑스는 『자본』에서 화폐형태는 일반적인 등가형태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특정한 상품의 특수한 현물형태(Naturalform)로 전환되어 상품소유자들의 공동의 행위 때문에 특정한 상품의 배타적 기능이 되고,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한다. 화폐는 “추상적 부의 물적 현존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일은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오물을 흘리면 태어난 자본주의에서 민중들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민중이 권력을 갖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요구는 촛불 혁명이라는 광장의 정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로 인하여 죽어간 구의역의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발길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에서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자본이 생명의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에 대해 성찰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에 낸 국정농단 사태, 그곳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수백만의 민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민중은 철학적이었다.

사회적 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곧 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을 창출하거나 보존하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을 정의로 보고 있다. 맑스의 진지한 고민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함께 존재함의 행복은 신자유주의와 상반된다. 신자유주의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된다. ‘일자리를 줄이는 경기회복’(Jobloss Recovery)이라는 사이렌의 소리는 새로운 불안한 계급들을 유혹하여 그 존재를 난파시키고 불안정한 삶으로 그들을 구속하며, 끝끝내 삶 자체를 침몰시켜버린다. 경제적 불안은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고 그러한 불평등은 불안한 자들의 불안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의 좌절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적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유대는 깨져 버린다. 이 시대의 철학은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촛불혁명은 바로 사회적 유대의 강화를 보여준다.
플라톤이 말하는 “고상한 거짓말”을 대한민국에서도 확인하였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국가의 태도에 민중들은 분노하였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의 방식에서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규정했다. “창조경제”, “국민행복 시대”라는 고상한 거짓말, 먼저 이 고상한 거짓말이 정치에서 의미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도시를 결속시킬 만큼 강력한 힘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끊임없는 고상한 거짓말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력을 약화하면서 보수단체를 이용하여 참사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희석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러한 사유 틀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반사회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자신의 안락인 이기주의, 타자의 고통인 악의를 버리고 타인의 안일을 원하는 동정(Mitleid)을 주장하였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루소 또한 동정(pity)을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유대는 비단 이성만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여러 추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동정의 사회적 유대이다.
민주주의를 선점한 자본으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킨 국가의 모습에서 새로운 민주적 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증오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부정적 계열에 속하는 정념인 증오를 사회적 유대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라는 정념들의 양가성을 인정한다. 공동선에 대한 사랑, 하지만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다. 정의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증오이다. 촛불 혁명은 바로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사회적 유대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할 것인가? 그 정념의 역량을 분출하고 시민의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

결국 민주주의의 다시금 회복시켜 자본에 종속된 권력을 민중에게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참여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이후 민주주의는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서 나타난 “보통 선거권”의 확대에서 드러나듯이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렇다, 주권(sovereign)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superus) 최고의 권력(power)이다. 그러나 현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불일치, 그 틈을 메웠던 것이 촛불혁명이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에서 이 틈은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메워진 틈을 더 좁히는 일이다. 결국, 대표성을 강화하는 것, 이것을 모색하여 더욱 더 민주주의의 본래성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결국 민중의 삶은 자원배분의 문제, 곧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사실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갈등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노가 투표를 통해 정부를 정당하게 해임하는 것이다. 결국, 갈등은 민주주의에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을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반면에, 민주주의 질서에서는 갈등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촛불은 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쟁점은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이다. 이는 마치 호남 vs. 비호남과 같은 지역적 문제로 정치적 쟁점을 대체하거나 조직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민주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결함인 대표성과 주권 원리의 불일치, 그 틈을 더욱더 메워 주체화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더욱 더 자본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에 계급 간의 불평등은 정치에 있어서 너무나도 강력한 정치적 갈등이므로 더욱더 지역을 넘어선 철저한 계급투표를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삶의 문제이다. 주권의 대표성을 강화하여 자원의 재분배에 참여하는 것, 그리하여 그야말로 민중(demos)의 권력(kratia)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촛불로 “죽 쒀서 개주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민주주의를 탈(재)전유(exappropriation)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재전유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될 민주주의라는 미래를 위하여, 자본이 선점한 민주주의를 재전유하기 위하여 민중들은 민주주의라는 현재를 잡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비전유(expropriation)할 때의 지배성의 위험을 너무나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플라톤의 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잡아라)

 

신이 침묵하는 시대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신이 침묵하는 시대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 이행의 시기
최근 이 나라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의 길거리에 무려 200백만 명의 시민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정권을 거머쥐고 말았다. 그는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단파 출신이라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연합을 파괴하는 그렉시트, 브렉시트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자는 불발로, 후자는 작은 미동에 그쳤다.
이 모든 사건들이 지진의 고리처럼 연이어 발생하니, 그 밑에 거대한 지진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아직은 예진에 그치지만, 이것이 앞으로 얼마나 큰 지진으로 발전하게 될지 사람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혼과 여명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가는 시대라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가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대는 설렘보다는 당혹감이, 기쁨의 노래보다는 오히려 절망의 비명이 더 크게 들리고 있다.
도대체 이런 대지진 끝에 어떤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 예측은 어렵지만, 추측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헤겔은 역사가 ‘규정적인 부정(die bestimmte Negation)’에 의해 지나간다고 한다. 그것은 앞의 시대가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의 시대를 지배했던 핵심 규정이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앞의 시대가 지닌 지배적인 규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다가오는 시대가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2) 신자유주의 경제적 위기
그렇다면 우선 신자유주의 시대부터 검토해보자. 대체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1986년 수립된 WTO체제는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징표가 된다. 흔히 WTO체제는 자유무역 체제라 간주되며, 전 세계가 자유무역을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고 찬양되고 있다. 소위 국가를 넘어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아름다운 환상이 신자유주의를 미화해 왔다.
자유무역 체제라는 측면만 본다면 WTO체제가 굳이 그 이전의 국제통상체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굳이 신자유주의 시대로 새롭게 규정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특별하게 규정한다면 그 이유는 WTO체제가 가진 다른 고유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바로 금융자본의 재갈이 풀렸다는 것이다. WTO체제는 개별 국가가 자본의 출입에 대해 가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다. 특히 국제 금융자본은 주로 개도국에게 강력한 금융개방을 요구했으니, 개도국의 자본시장 즉 증권과 채권시장이 국제금융자본의 새로운 먹이가 되었다.
그 후 세계는 글로벌리제이션, 세계화라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동안 은밀하게 활동을 전개하던 금융자본이 자신의 전모를 폭로하게 된 것은 그 뒤 20년이 지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였다. 이 사건을 통해 폭로된 금융자본의 행태를 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금융사기라고 말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금융자본은 대중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채권을 미리 할인해서 다시 자본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자본으로 다시 돈을 빌려주고, 이런 식으로 되풀이 하여 가공자본을 늘렸다. 이런 가운데 악성채권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이런 악성채권을 양성채권 속에 끼워 넣어 패키지로 팔아먹었다. 그 결과 엄청난 가공자본을 창출했으니, 모든 것의 목적은 엄청난 금융수입이었다. 이 금융수입은 제조업이 사라진 미영 금융제국의 부를 증식시켰다.
이 간단한 금융사기 뒤에는 여러 가지 부대조건이 있었다. 우선 금융자본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는 누구인가? 미영 금융자본은 이미 가진 자본으로 자국 내에서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자국 내에서 은행이 투자할 만한 성장가능성 있는 기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이 부동산 투자에 나서게 되자 부동산의 가격이 상승되었다. 미영의 일반 대중들도 덩달아서 여유의 돈을 여기에 투자했고 나중에 가서는 금융자본으로부터 빚을 내서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 때문에 대중은 자신의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은행 역시 자신이 획득한 채권이 얼마나 악성인지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 금융자본은 대규모 이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소위 금융자본에 종사하는 노동자 역시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부동산에 투자되고, 자국의 제조업을 기피하는 동안 국제 금융제국의 국내 제조업이 몰락했다. 남은 국내용 기업의 일자리도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니, 자국의 노동자를 스스로 기피했다. 그 자리를 찾아 이주노동자가 급증했다.
그럼, 미영 금융제국이 획득한 가공자본은 어디에 투자되었는가? 미영 금융자본은 자국에 투자를 기피하면서 개도국에 투자했다. 이런 투자는 제국주의 시대처럼 개도국에 직접 공장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투자는 주로 개도국의 증권 및 채권 시장이라는 자본시장에 투자되었다.
개도국으로서는 부족한 자본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국제 금융자본의 자본이 저절로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개도국 자본은 쉽게 대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출산업을 육성했다. 수출산업 종사 노동자들은 성장하는 수출산업 덕분에 생활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국제 금융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수출 산업에 투자되는 동안 국내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하청기업화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소기업 제품은 또 다른 개도국에서 쏟아져들어 오는 값싼 제품들과 경쟁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니, 금융제국과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소기업은 몰락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도국 자본이 일정 정도 성장하면 이윤율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금융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다른 이웃 개도국에 투자되기 시작한다. 이제 개도국은 이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한편으로 자본이 빠져나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웃 개도국과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존의 수출 산업조차 무너지고 총체적 경제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3) 신자유주의 정치적 위기
결국 이 국제 금융사기는 언젠가 터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8년이 지났지만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 국민이 세금으로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충함으로써 일단 봉합될 수 있었으나 이제 위기는 국가로부터 착취당한 대중으로 전가되고, 경제적 장을 넘어서 정치적인 장으로 확산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브렉시트이고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다. 이런 정치적 사건들이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정치적 영역에서 전개된 특이한 계급 대립구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대립을 일반화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전통적으로 대립의 축을 이루던 보수와 진보라는 틀이 깨졌다는 것이다.
보수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보수의 주류는 국제 금융자본을 옹호하는 세력이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의 이단파가 등장했다. 이 파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자국 제조업의 보호, 이주노동 반대 등을 외친다. 이 이단파의 주요 지지 기반은 자국의 제조업의 부활을 꿈꾸는 몰락한 제조업 자본가 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 역시 두 파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진보의 주류는 이미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의 빌 클린턴 등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하면서 주로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고급전문 노동자층에 기반을 둔다. 이에 대립해서 진보 좌파가 부활했다. 진보좌파는 몰락한 전통 제조업을 그리워하는 실직자, 남아 있는 국내용 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층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로 복지 담론을 중심으로 재규합된 세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과거 계급연합은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적 공화파와 노동계급의 연합이며 흔히 인민전선 또는 민주진보 연합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연합세력이 독점부르주아 세력과 대항하는 것이 전통적인 계급대립 구도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 연합이 깨졌다. 이제 새로운 계급적인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보수 주류와 진보 주류가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 옹호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반면 보수의 이단파와 진보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더구나 이런 새로운 계급 대립구도에서는 진보좌파의 세력도 쉽게 보수 이단파의 주장에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에는 아마 샌더스를 지지했던 세력이 트럼프를 지지한 결과도 한몫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브렉시트가 가결된 배경에도 노동당 좌파 즉 코빈 지지 세력이 노동당 주류인 블레어 세력에 대립해서 오히려 브렉시트를 암암리에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급 대립의 현상을 보자면, 그 바탕에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변동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을 금융자본 중심으로 재편시켰다. 그 결과 국내 전통 제조업은 몰락했으며, 해외로 이전했다. 금융자본 종사자에게는 초과이윤이 배분되었고 그들은 금융자본의 존속에 사활을 걸었다. 반면 전통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는 몰락하면서 이들은 차라리 인종적 색채가 다분하지만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자는 보수 이단파에 협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위기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몰락하면서 문화 이데올로기적인 지형도 변화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과거 근대 자유주의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자유의 개념에 기초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근대적 자유주의가 일정한 정도 사회현실의 법칙적 제약을 인정하는 반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한 어떤 제한도 인정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는 파편화되면서 한 사회의 차원에서 어떤 법칙적 제약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무제한적 자유가 긍정된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여러 철학적 이론이 그 사이에 발전되었다. 대표적이 논리가 바로 푸코나 데리다가 중심이 된 후기 구조주의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적 인식을 강조하면서 이 구조가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더구나 하나의 텍스트에는 다양한 구조가 중첩되어 있어서 서로 알레고리적인 관련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런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 진리나 가치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전기 구조주의에 남아 있던 칸트적 보편과학조차도 사라지고 만다.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이론에는 독일의 하버마스나 미국의 존 롤스가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즉 인권에 기초하여 재구성하려 하였다. 사회적 제도는 모두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하며 다만 이런 합의가 공정하고 또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이론을 전개하고 롤스는 공정한 합의의 조건으로서 무지의 베일을 제시했다. 이미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폭로되기 전에,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자유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자유라는 개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선택은 다만 머릿속에서 그치는 자유가 아닐까?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변덕스러운 힘이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배하면서 그가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힘은 의지를 통해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속 사유 자체도 지배하고 만다. 즉 욕망의 힘은 마치 그것이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원한 것이라는 자기기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덕스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는 환상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런 한계는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이르면 더욱 노골화된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유행하는 가운데 오히려 파시즘적인 폭력과 외적인 침략이 난무했다는 것은 미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라크 침략이 미국이 욕망이었으며, 백인 경관의 흑인 살해가 또 미국의 욕망이었다.

5) 박근혜 정권의 몰락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이란 신자유주의 경제적 붕괴를 알리는 경고이다. 이 경고는 신자유주의의 축이라할 금융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한국과 같은 개도국에서도 출현했으니, 그것이 곧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게 된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동안 금융자본의 지배 아래 한국은 소위 수출 산업 중심으로 또한 10대 산업(전자, 자동차, 조선 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수출 산업은 국제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이윤율을 달성하기 힘들어졌다. 이미 국제금융자본은 한국의 증권, 채권 시장을 버리고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한국은 성장하는 중국산업과의 경쟁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에 밀어닥친 구조조정, 해고의 바람이 바로 그 증상이라 하겠다.
이런 수출산업의 위기는 노동자의 대량실업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정치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차적 현상이 지난 총선에서 영남수출산업 벨트에서 새누리당의 몰락이었다. 영남의 대체세력인 민주당은 수출산업을 옹호하는 노동자층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리고 수출산업 중심 발전에서 배제된 중소기업과 농민 역시 한미 FTA 이후 지속적으로 분노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국민의 당이 부상한 기반이다. 이 두 세력은 모두 재벌 중심 새누리당 세력에 반발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지와 반대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상호 대립적이니 분열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지진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또 하나 거대한 지진이 폭발했으니, 그게 바로 이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라 하겠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는 엽기적인 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한 감정적 원인에 속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재벌과 권력의 유착관계이다. 사태의 본질은 재벌이 생존을 위해 권력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그만큼 재벌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이 벌린 그 이상한 문화산업이란 것도 사실은 10대 수출산업의 몰락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호도하기 위한 권력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제 한계에 처한 수출산업은 이미 획득한 부를 달리 사용할 데가 없었다. 이 부는 거의 대부분 부동산으로 투자되었다. 박근혜 정권 시대 부동산 거품은 생활비용을 앙등시켰으니, 이미 대중은 여름에 전기값조차 지불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대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이런 여러 원인들이 겹겹이 충첩된 가운데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국민의 이런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라 하겠다.
차라리 박근혜 개인의 실정이나 최순실의 국정농단 때문에 박근혜가 몰락했다면 이는 일시적이고 정권의 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위기가 근본적으로 한국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순한 정권교체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6) 철학의 시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무도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더 이상 금융자본의 국제적 지배라는 체제는 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금융자본의 지배가 사라진 이후, 과연 브렉시트나 트럼프가 원하듯이 국제 금융제국은 자국의 산업, 제조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렉시트를 포기하고 국제 금융자본의 지배체제 아래서 재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 포르투갈, 이태리는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때는 복지담론으로 우르르 달려갔다가, 또 한때는 안철수 식 공정성장이 각광을 받다가 또 한때는 다시 박정희 식 경제개발이라 해서 이명박, 박근혜를 향해 달려갔다. 그 어느 것도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없으니, 국민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시대는 과거 20세기 초 반복되는 경제공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시대와 마찬가지 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시대는 바로 묵시록에 예고된 신이 침묵하는 시대이다. 이 침묵 그리고 그 앞에서의 절망감은 항상 파시즘의 온상이 된다. 이미 브렉시트나 트럼프를 보면 파시즘적인 인종주의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이미 박근혜 정부 초기에 국민들에게 종북몰이라는 현상으로 이런 절망감이 표출된 바가 있다.
다행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이 기회는 보수가 정권을 잡은 브렉시트나 트럼프와 달리, 민중이 주도가 된 혁명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남유럽 국가들처럼 다시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때야말로 다가오는 존재의 소리를 경청하는 철학자와 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2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e)시대와 철학의 웹툰 시리즈 제 2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선과 시선이 전 정말 좋네요. 앞으로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참고로 본 웹툰의 저작권은 전적으로 작가 본인에게 있으니, 함부로 허락없이 무단 전재하시면 안됩니다.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서울 시민청 강좌]-2

강의 2 :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강지은 (건국대 강사)

소비없는 세상은 상상불가능하다. 소비를 주도하는 유행의 본질에 대한 분석과 쇼핑을 통해 얻는 자유와 구속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본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편지13>, <편지16>, <편지17>, 참조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신용카드로 얻은 자유
<편지16> 유행에 관하여
<편지17> 쇼핑하라!

<차례>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입을 옷이 없습니다. 진짜 옷이 옷장이나 서랍에 없는 게 아닌데 입을 옷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건 뭔가요.
아마도 그 이유는 유행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딱히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저런 생각을 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나 혼자 나팔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탔다고 생각해보세요.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아마 그 날 하루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지점이 정확하게 같지는 않습니다. 살짝 변형이 되어 돌아오죠. 예전에 유행했던 나팔바지가 다시 유행한다고 예전 바지를 꺼내 입고는 못돌아다닙니다. 색상이든 바지폭이든 무언가 변형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죠.
저는 진짜 유행이란 걸 쫒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철마다 돈써야죠, 신경써야죠. 가뜩이나 팍팍한 삶에 유행이란 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를 괴롭게 할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행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재미있게도 물리학에서 꿈꾸어왔지만 포기했던 기계장치인 ‘페르페투움 모빌레 Perpetuum mobile’를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페르페투움 모빌레란 스스로 유지되서 영원히 움직이는 기계장치인데요. 물리법칙에서는 불가능한 기계장치죠. 기계장치란 저항을 만나면 추가적으로 외부에서 동력을 제공해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기계장치의 원리가 사회학으로 넘어오면 실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영역이 바로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유행은 영원할 것이라는 거죠.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게오르그 짐멜은 인간의 너무도 강력한 인간의 두 가지 욕구나 열망들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처럼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인간의 욕구나 열망들이란 바로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욕구’, 이 두 가지를 의미한다.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말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그 안전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그 맞잡은 손을 다시 놓아 버리려는 자유에 대한 욕구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짐멜이 말한 대로 “유행이란 사회적인 평준화를 추구하는 경향과 개인적인 톡특성을 추구하는 경향 사이에서 타협을 보장하는 독특한 삶의 형태이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타협은 ‘안정된 상태’일 수 없다. …….그 타협은 절대 그대로 가만히 유지될 수 없기에 반드시 영구히 재협상되어야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짐멜이 말하고자 하는 유행의 본질은 어찌보면 모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핵심을 짚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입든 절대 남들보다 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늘 염색을 하지만 튀는 색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화점에서 예쁜옷을 골라서 사입었지만 그 옷을 나만 샀을리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하철을 탔을 때 건너편에 앉은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나를 발견하면 굉장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개성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유행이란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더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계율도 바로 “항상 새롭고 가장 최근에 인기를 끄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야 한다!”라는 계율만큼이나 반드시 꼼꼼하게 살피고 열심히 지켜야만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바로 이것입니다. 작년에 사입은 옷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새로 산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많이 들어본 멘트이시지요?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저는 마음이 급해집니다. 주로 TV홈쇼핑에서 쇼호스트들이 하는 방송멘트인데 아주 높은 톤으로 외쳐댑니다. 화면의 방송마감 시계는 몇 분 안 남았습니다. 카드를 꺼내서 결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제가 햄릿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삶의 고뇌가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때로는 몇 분 남았는데 완판! 글자가 화면 가득 뜹니다. 아차, 안타까운 순간입니다. 쇼호스트들은 시청자들에게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음을 섭섭해하며 다음 상품 방송으로 몇 분 일찍 넘깁니다. 몇 번 이런 경험을 한 TV홈쇼퍼들은 중독구매 혹은 강박구매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TV홈쇼핑 같은 경우 텔레비전을 보면서 물건을 구경하고 감정이입하고 상상하는 시간이 시청자로 하여금 굉장한 만족감을 줍니다. 사실 직접 물건을 만질 수도 없고 고를 수도 없는데 그보다 더한 선택의 기회를 받은 듯한 착각을 하게 되죠. 쇼핑의 만족감은 어디까지일까요. 결재를 하는 순간 끝입니다.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계속 홈쇼핑을 시청하고 계속 결재를 해야 하는 중독증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죠. 백화점의 명품 쇼핑이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선망인 명품가방의 만족감은 얼마나갈까요. 구경하고 고르고 결재하고 집에 들고 가서 한 일주일 정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상품의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쇼핑을 하는 상품들이 과연 치약이나 비누 쌀처럼 사용가치가 있는 것들 뿐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는 명품가방, 예쁜 그릇처럼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기호가치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더 많이 소비하면서 살아갑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소비지상주의사회입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부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낸 첫 메시지는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였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라는 요청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좀 더 분석적으로 생각해보면

쇼핑이 모든 고통이나 불행을 치유하고 그 어떤 위협도 물리치고 밀쳐내며, 그 모든 기능 불량 상태도 수리하는 방법, 곧 아마도 유일무이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분명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아마도 쇼핑몰을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근심거리들에 대한 해결책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7> 150쪽.

현대인에게 쇼핑몰이든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쇼핑하러 돌아다니는 일은 일상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TV나 스마트폰이 우리의 쇼핑을 도와줍니다. 게다가 요즘은 쇼핑할 때 내가 돈을 쓴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세상이 왔습니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쇼핑할 땐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단말기에 카드를 긁는 모습이나마 보기라도 하지요. 스마트폰 결제시스템은 그저 등록해놓은 카드의 비밀번호만 누르면 일사천리로 결제가 이루어집니다. 복잡하게 일일이 카드 고유 넘버나 카드 뒷면의 세 자리 숫자 따위를 누를 필요조차 없습니다.
카드 결제를 마치는 순간 쌓여있던 근심걱정도 눈 녹듯 사라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날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따라올 또다른 스트레스는 애써 외면합니다. 모두 무엇인지 아시죠? 바로 카드 결제일입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예전에 신용카드가 우리의 지갑을 채우기 이전을 기억하시지요? 물건을 구입하려면 현금을 꺼내서 대금을 지불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돈쓰는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돈 버는 재미도 있었지요. 월급을 봉투에 받던 시절을 지낸 분도 있으실겁 니다. 두툼한 월급봉투의 맛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겁니다. 그 땐 무엇을 구입하든 쉽게 턱턱 구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갑을 열어서 현금을 꺼내야했기 때문이었죠. 또 지갑에 현금이 없으면 무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신용카드가 등장한 이후 소비의 패턴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지갑에서 현금이 사라지고 당장 현금이 없어도 물건을 구입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공식적으로 전 국민이 빚지고 사는 세상이 된 것이죠. 카드광고가 텔레비전을 도배하다시피 했는데 그중에서 인상깊었던 광고멘트가 바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였습니다. 기억나시죠? 카드 광고들을 보면 사람들이 스포츠와 레저를 즐기고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여유있는 시간도 보내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깜짝 파티도 해주더군요. 그것이 모두 카드 덕분이라네요. 그렇다면 카드로 미리 선결제하고 나중에 지불했을 텐데요. 만약에 통장에 잔고가 없다면 다른 카드에서 돈을 빌려 갚는 돌려막기라도 해야 합니다. 수입은 한정되어 있는데 무리한 지출을 한 모양입니다. 이번 달은 대리운전이라도 해서 결제하지 못한 부분을 메꿔야하겠네요. 돌려막기할 카드가 없는 사람은 카드를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지갑엔 보통 서너 장 이상의 카드가 꽂혀 있지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카드로 즐긴 당신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사회생활이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패턴이 언제부터 시작될까요. 신용카드를 처음 발급받은 때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비슷한 전처를 밟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로 우리는 자유를 얻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결코 자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는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모두가 빚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시기에 단지 ‘살기 위해 대출 받는 사람들’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사람들이 가장 취약한 시기, 다시 말해 유년기에서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야말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이다. …… 바로 이러한 시기야말로 대출회사가 이들의 약한 정곡을 노려 공략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이다.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젊은이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던 이 세상의 지도에서 부모들이 차지하던 자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부업자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부모 자리를 대신해서 슬며시 그 젊은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다.
…….
게다가 이런 젊은이들이 대출회사의 공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하는 다음과 같은 상황도 한 몫을 한다.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대출회사가 각 나라 정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 이에 따라 각 나라 정부들은 학생들이 그 어떤 학과나 학부를 선택하든지 간에 모든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에서 ‘신용거래와 관련된 생활기술’을 이론과정 뿐 아니라 실습과정으로도 배울 수 있게끔 필수 교과과정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더구나 이제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지만 말이다. 그런 식의 학자금 대출은 받기 쉽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분명 잘못될 여지가 많으며 더구나 되갚기 쉬운 듯이 매력적으로 유혹하지만 결국에는 기만적인 속임수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보통 평균적인 학생이라면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간에 엄청난 빚을 떠안은 채 학업을 끝마치게 되며, 조만간 그 누구라도 다른 수많은 대학 졸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빚이 쌓여 도저히 되갚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깨닫게 될 거시이다. 더구나 떠안게 된 그 빚이란 것도 실상 대출 받은 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은 빚을 져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의미할 뿐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114~116쪽.

현대사회는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오죽하면 일부 사회운동가들이 ‘Not Buy Day’운동을 외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비하지 않고 살기는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궁리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농사도 짓고 벌도 키우는 실험도 하더군요. 세상은 소비의 천국, 선택의 자유가 있는 자본주의 사회인 것은 맞지만 내손에 쥔 돈이 없을 때 이곳은 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텅빈 지갑 때문에 힘겹습니다. 이제 다른 시스템을 궁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6 [내게는 이름이 없다]

5. 칼리가리(Caligari)

<칼리가리박사의 밀실 Das Cabinet des Dr. Caligari>을 지은 두 작가 중 한 명인 체코인 한스 야노비츠(Hans Janowitz)는 프라하-현실이 꿈과 뒤섞이고 꿈이 공포의 영상으로 변해버리는 바로 그 도시에서 자랐다. 1913년 10월의 어느 오후 이 젊은 시인은 자기를 매혹시킬만한 훌륭한 미모와 예절을 갖춘 소녀를 찾아다니며 함부르크의 어느 축제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축제마당의 텐트가 레퍼반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 곳은 선원들에게 세계 최고의 쾌락을 선사하는 장소 중 하나로 이름난 곳이었다. 레더러(Lederer)의 거대한 비스마르크 동상이 홀스텐발 거리 근처에서 항구에 들어선 배들의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예의 그 소녀를 찾아다니는 와중에, 야노비츠는 희미한 웃음소리를 따라 홀스텐발 거리에 인접한 어두컴컴한 공원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를 유혹하는 데에는 확실한 효과를 내던 이 웃음소리는 관목숲 어느 즈음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젊은이가 자리를 뜨자, 조금 있다가 덤불 어딘가에 그때까지 숨어있던 또 다른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예의 그 웃음소리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스쳐가는 이 기이한 그림자를 야노비츠는 언뜻 보았다. 그는 보통의 부르주아처럼 보였다. 어둠이 그를 다시 삼켜버렸고, 더 이상은 보기 힘들었다. 다음날 지역 신문의 커다란 머리기사에 다음과 같이 났다. “호스텐발가의 무시무시한 성범죄! 소녀 게르트루드… 살해당해.” 게르트루드라는 소녀는 축제마당의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느낌에 사로잡힌 야노비츠는 이 희생자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느꼈다. 추도식에서 그는 갑자기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은 그 살인자를 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의심하고 있던 사내 역시 그를 알아본 듯했다. 그 사내는 덤불 속의 그림자, 바로 그 부르주아였다.

<칼리가리>의 공동 저자 칼 마이어(Carl Mayer)는 오스트리아의 지방 도시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과학적’ 도박꾼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을 것이다. 한창 때의 그는 틀림없는 ‘시스템’으로 무장한 채 자기 재산을 팔아치우고서는 몬테카를로로 떠났다. 몇 달 후 그는 파산한 채로 그라츠에 다시 나타났다. 이 편집광적인 아버지는 열여섯 살의 칼과 세 살 아래 동생 앞에 파산의 스트레스를 부여안고 나타났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소년에 불과했던 칼 마이어는 세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기압계를 팔고 합창단에서 노래도 부르다가 야외극장의 단역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점점 무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떠돌이 생활 동안 그가 찾아다니지 않은 무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온갖 경험으로 가득했던 이 시기는 훗날 영화 시인으로서의 그의 경력에서 큰 쓸모를 발휘하였다.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청소년이었던 그는 뮌헨의 한 카페에서 힌덴부르크의 얼굴을 담은 엽서를 그리면서 생활을 꾸려갔다. 야노비츠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이후 그는 자기의 정신 상태를 반복적으로 검사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마이어는 자기를 담당하던 군대 내 고위 정신과 의사에 대해 격심한 분노를 품고 있었던 듯하다.

전쟁이 끝났다. 갑작스러운 전쟁 발발로 인해 보병 연대의 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야노비츠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당국에 대한 증오로 인해 투철한 평화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는 절대적 권위는 그 자체만으로 나쁘다고 느꼈다. 베를린에 정착한 그는 칼 마이어를 만났고, 이제까지 글이라고는 한 줄이라도 써 본 적 없는 이 별난 젊은이가 자기와 혁명적 기질과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다. 이런 기질과 관점을 영화에 표현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베게너의 영화에 심취했던 야노비츠는 이 새로운 매체가 강력한 시적 계시를 빌려줄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청년의 의지로 이 두 친구들은 마이어가 정신과 의사와 벌인 정신적 투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야노비츠가 홀스텐발가를 어슬렁거리며 경험한 모험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서로의 기억과 이미지를 북돋워주거나 보완해주었다. 이 짝궁은 이런 토론을 하다가 휘황찬란하고 떠들썩한 칸트 거리의 축제 마당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껴 밤거리를 거닐곤 했다. 그곳은 번쩍이는 정글이었고 천국이라기보다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두려움을 결핍에 대한 공포로 바꿔버렸던 사람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어느 날 저녁, 마이어는 야노비츠를 자기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소극에 끌고 갔다. ‘인간인가 기계인가’라는 제목의 소극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기적같은 용력을 얻은 사내를 출연시켰다. 그는 마치 최면이 걸려있는 듯이 행동하였다. 가장 이상한 일은 그가 불길한 예감에 빠지도록 관객의 넋을 빼앗는 말을 해가며 묘기를 부린다는 사실이었다.

무릇 창조적인 일들은 모든 요소들을 전체적인 하나로 통합하는데 필요한 단 하나의 경험이 덧붙이는 순간에 이르게 만든다. 그러한 경험을 제공했던 것은 이 장사의 신비로운 풍모였다. 이 쇼를 본 날 밤에 두 친구는 <칼리가리>의 원안을 처음으로 마음속에 그려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후 6주 동안 시나리오를 썼다. 야노비츠는 각자 맡을 부분을 나누면서 자신은 “씨앗을 뿌린 아버지로, 마이어는 그것을 품어 키워낸 어머니”로 칭하였다. 막판에 작은 문제 하나가 발생하였다. 이 작가들은 마이어가 전쟁 동안 만났던 일생일대의 적수를 원형으로 삼아 만든 주인공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탕달의 알려지지 않은 편지』라는 희귀 도서가 해결책을 제공하였다. 야노비츠가 이 책을 훑어보는 동안 그는 스탕달이 전쟁터에서 복귀하자마자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에서 칼리가리라는 이름의 장교를 만났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이름을 보자 두 작가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부 독일의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홀스텐발이다. 어느 날 회전목마와 소극으로 이루어진 박람회가 이 마을로 찾아든다. 그 중에는 이 소극을 공연하는 안경 쓴 괴이한 남자 칼리가리박사와 그것을 광고하는 세자르가 있다. 칼리가리는 공연 허가를 위해 시청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박사는 거만한 관리에게 험한 대접을 받는다. 다음날 아침 이 관리는 자기 방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박람회의 즐거움을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의 딸 제인과 사랑에 빠진 두 대학생 프란시스와 알란은 수많은 구경꾼들을 따라 칼리가리 박사의 천막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똑바로 세워진 관에서 걸어나오는 세자르를 구경한다. 칼리가리는 오싹해하는 관객들에게 이 몽유병자가 앞일에 대한 물음에 답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분한 상태에서 알란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 것 같은지 묻는다. 세자르는 입을 연다. 그는 무시무시한 최면력을 내뿜는 주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답한다. “새벽까지.” 새벽녘에 프란시스는 자기 친구가 예의 관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칼리가리를 의심하던 이 대학생은 그의 수사를 도와주십사고 제인의 아버지를 설득한다. 수색영장을 지닌 두 사람은 칼리가리의 마차에 강제로 밀고 들어가 최면술을 그만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한 여인을 살해하여 체포된 범죄자에 대한 조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구로 경찰서에 소환된다. 그는 연쇄 살인마의 혐의에 대해 미친 듯이 부인하는 중이다.

프란시스는 계속해서 칼리가리를 염탐하고, 해가 저물자 창문을 통해 마차 안을 몰래 들여다본다. 그러나 세자르가 관 속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그가 잘못 생각하는 동안, 세자르는 제인의 침실에 침입하여 잠든 그녀를 칼로 찌르려다가 가만히 그녀를 보고서는 단검을 내던진다. 비명을 질러대는 제인을 팔에 안고 그는 지붕을 넘어 길거리로 도주한다. 그녀의 아버지의 추격을 받은 그가 제인을 땅에 떨어뜨리자,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반면에 이 고독한 납치범은 기진맥진해있다. 프란시스는 자기가 본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제인으로 인해 수수께끼를 풀고자 칼리가리를 두 번째로 찾아간다. 그와 동행한 두 경찰관이 관과 같이 생긴 상자를 압수하자 프란시스는 거기서 예의 몽유병자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끄집어낸다.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서 칼리가리는 도망치는 데에 그럭저럭 성공한다. 그는 정신병원으로 안전하게 피신하였다. 그를 뒤쫓던 프란시스는 도망자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병원장을 부르다가 겁에 질려 소스라치게 놀란다. 병원장이 칼리가리였던 것이다.

다음날 밤 병원장이 잠든 사이에 프란시스는 이 사건에 새로 입문한 병원의 세 직원들과 함께 병원장의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정신질환을 다루는 이 시설의 과오를 완벽하게 입증하는 물증을 발견한다. 그들은 책 더미 속에서 칼리가리라는 이름의 흥행사에 관한 오래된 책을 발견한다. 그는 18세기 이탈리아 북부를 돌아다니며 최면에 걸린 세자르로 하여금 온갖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세자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밀랍 인형으로 그를 대신함으로써 경찰을 속였다. 가장 중요한 증거물은 원장의 의료 기록이다. 이 기록물들은 원장이 칼리가리의 최면 능력을 실증하는 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그는 몽유병자가 병원에 맡겨졌을 때 칼리가리가 했던 가공할 게임을 재연하고자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칼리가리의 정체성을 제 것으로 삼았다. 원장이 범죄를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해, 프란시스는 원장의 도구였던 몽유병자의 시체를 원장에게 들이댄다. 세자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괴물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수행원들은 그런 그에게 능숙하게 구속복을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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