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열정의 시대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1

열정의 시대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무엇이든 때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계획 없이 흐르고 있는

식지 않은 공기를 보고 있으면

아직 의미 없음에 대해 의미를 찾는다.

 

존재에 대한 절망적인 희망을 놓지 않고

계획 없이도 의미를 찾기 위해 힘을 쓰고

방향을 알 수 없이 흐르는 한 점 한 점 이어지는

길 위에 길을 찾으려고 힘쓰기도 한다.

 

무수한 에너지는 어디로 흘러가고

어디로 모여 함께 하는 것일까

부딪히는 섬광에 노을이 깨지면

아침 햇살이 반짝 떠오르듯

삶의 애틋함도 마련되는 것인가

 

전하의 온도를 느낄 수 없는

공기를 타고 온 바람의 온도가

뜨겁기만 할 것 같지만

나의 가슴에 차갑게 안긴다.

 

뜨거웠던 여름을

바람이 찾는다.

바람이 차다.

곧 가슴에 흰 눈이 내리겠지.

 

작은 방에 흐르는 곧 춥고 어려질

따뜻한 등이 그리워지면

계속해서 청춘의 봄을 맞이했던

그 열정은 찬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그리고 곧 뜨거워질 여름이 오겠지.

항상 가슴 속의 뜨겁지만은 않은 여름이 아쉽고

곧 식어갈 여름이 아쉽다.

 

2017.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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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까만 밤의 생상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0

까만 밤의 생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먼지가 되어 갖는 여유의 푸른 공기는

풀벌레 가득한 달을 바라본다.

그 해에, 그 달에 찬바람이 일어나

둥실둥실 산은 머리를 휘날리며

꺼져가는 우주를 우쭐하며 바라본다.

탁한 술에 달을 그리고 어둑한 얼굴은

나무 그림자에 바람을 일으키고

그리운 별 섬에 해가 어둑하게 지쳐 내린다.

검은 밤 뒷문 창으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앉아 있고

먼 곳을 바라보는 그 곳에 나의 환영이 있다.

 

까만 밤, 마당에 앉아 무수한 별에

별을 바라보는 개가 웃는다.

음매 우는 소 없는 외양간에

쓸쓸한 별의 별 소리가 흩날린다.

 

우스개 같은 여름이 열리고

별의 바람이 있는 별일이 무수하게 열린다.

검은 개와 토실한 토끼가 잠자고

살구가 까만 밤에 둥실 떠오르고

모과도 밤도 감도 호박도 박도 땅콩도

달빛 향기에 취해 투정하는 까만 밤이다

생상스에 흐트러지는 소리가 흔들리고

별빛 누워 초승달을 지키는 산허리가 그립다.

 

201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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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철학자의 서재]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다시 읽는 스피노자부터 칸트까지,

스포일러 없는 서평 추구

 

 

 

스펙이나 쌓는 저렴한 삶은 살지 않겠다 해놓고 보니, 취직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철학 관련 책들을 읽을 때는 정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비전공자들은 그래서 철학 서적들을 읽을 땐 2차 문헌이라고 하는 안내서나 입문서들을 통해 읽거나 할 수 밖에는 다른 묘수가 없다. 스피노자니 칸트니 헤겔이니, 다 그렇다. 말하자면 내 방에 과외 선생님이 필요한 건데 이 책은 내게 그 역할을 해주었다.

 

스피노자의 <에타카>는 읽다가 읽다가 버티고 버티다가 그냥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은 스피노자에 대해 쉽고도 재밌게, 가령 스피노자가 어떻게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쉽다’거나 ‘어렵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거미에겐 쉬운 거미집 짓는 일이 인간에게는 어려울 것이며 인간에게 쉬운 일을 거미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산수를 못하는 거미에게 무능력하다고 하겠지만 그건 인간중심적 사유방식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사실 거미와 인간에게는 공통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자신의 편리대로 사물을, 대상을 바라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신까지도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

 

스피노자하면 ‘신 즉 자연’이라는 말부터 떠오르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스피노자의 ‘신의 자연화’는 자연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거나 자연이 오묘한 설계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해체하기 위한 말이었다(p. 103). 이렇게 되면 신이 인간에게 특별히 도움을 주기 위해 인간 신체의 기관들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자연은 따라서 신의 설계가 아니라 다만 기계적 기술의 결과라는 말이 된다. 오늘날 읽어도 이런 스피노자의 생각들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칸트나 헤겔은 또 어떤가. 물론 그 전에 홉스, 로크, 흄, 루소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는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개인의 권한을 국가나 군주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게 홉스의 기본적 생각이다. 여기서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개인이 원하는 바가 곧 군주가 원하는 바’라는 점에서 개인과 군주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건 끝나지 않은 질문인 것 같다. 너(지배자)와 내가 하나인 상태, 균열이나 분열 없이 그런 상태가 가능한가. 아주 작은 집단조차 뜻이 안 맞아 분열하고 갈라서는 데 말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폴리스(시민들이 의논하면서 공동으로 실천하던)가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과 행복이라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p. 172). 홉스의 사회이론은 이런 시대에 탄생했다. 홉스는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했다. 그게 ‘자연상태’이다. 하지만 홉스는 왜 자연상태를 상호부조의 상태가 아니라 전쟁상태라고 단정 지은 걸까. 홉스의 자연상태는 하나의 가상 상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는 인간에게 자연권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쓸 수 있는 힘을 말한다(p. 174). 따라서 이런 상태의 인간들이 ‘국가’가 없다면 전쟁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이기적이만한 걸까. 최근에는 이기적 성향이 인간 유전자 속에 자연적으로 입력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자연적 증거로 제시되지만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는 자명하지 않다(p. 181). 아마 홉스는 근대의 시작을 지켜보면서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닌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나면서부터 무한한 이기적 권력욕을 지닌다는 ‘생리학적 본성론’을 가정했을 것이다(같은 곳).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이제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전쟁을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다. 홉스에게 이성이 이기적이면서 사적인 반면, 로크에게 이성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상호 존중하는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p. 206). 둘 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근대 부르주아 정치 이념이 태동하던 시기에 활동했지만 말이다. 홉스에게 시민사회의 목적이 죽음을 피하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었다면, 로크에게 그것은 ‘재산의 보존’이었다(p. 209). 로크에게 시민은 자유로운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재산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로크는 스스로 공적 이성을 중시했지만 그 이성은 ‘재산을 가진 시민의 이성’이었던 것이다.

 

루소는 로크의 주장과 달리 ‘소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또 루소는 홉스식으로 자연상태를 전쟁상태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독립적 존재들의 세계로 묘사한다(p. 276). 이런식으로 루소와 로크, 홉스의 정치, 사회이론을 논쟁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건너 뛸 뻔 했다. 루소로 가기 전에 흄이 있었다.

 

흄, 하면 인과론을 비판했다는 건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데 인과론을 왜 비판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이걸 문제 삼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흄에 따르면 그건 우리의 반복적 경험에 따른 믿음이지, 직접 지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p. 251). 막말로 내일 태양이 안 뜰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이런 습관적 인식을 흄은 비판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한 나라고 가정된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나, 함빡 웃고 있는 나, 설레는 나, 떨리는 나, 화난 나, 이런식으로 존재할 뿐 ‘불변하는 나’라는 ‘실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대번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니라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대답은 각자 마련해 보시길. 너무 많은 걸 스포일러 할 순 없잖은가.

 

그래서 칸트까지만 간략 소개할까 싶다. 헤겔은 소중하니까 남겨두는 걸로. 흄이 없었다면 칸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흄을 넘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철학자 아닌가. 기존에는 객관 대상에 의거하여 주관이 인식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칸트는 주관에 의해서 객관이 성립된다는 인식 방법상의 대전환을 이루었다(p. 308).

 

칸트는 인간의 인식, 주관, 내면 세계에 대해 탐구하면서 여기에서 인간의 해방, 즉 ‘자유’를 발견한다. 자연적 존재로서 경향성을 지닌 인간 존재는 결정론적 인과법칙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경향성, 인간의 자연성을 넘어서 도덕법칙을 추구할 수 있으며 이때 자신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 수 있다.

 

칸트에게는 자연보다 ‘자유’가 우위이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인데 저 두 세계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칸트의 고민이었다. 그래서 칸트가 거기서 찾아낸 것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의 영역 사이에 중간항(p. 319)으로, 이 판단력의 매개를 통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판단력의 영역, 즉 ‘미적 체험’에서 인간은 저 두 세계(자연과 자유)를 통일할 수 있으며 이때 인간은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낄 때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감(p. 323)이라는 게 있어서 충분히 그런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정리가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한번 근대철학사를 훑어보는 일도 필요한 것 같다. 큰 산의 형태를 한 번 보고 나무를 하나씩 살펴보는 재미랄까. 물론 중요한 일은 직접 스피노자를 읽고, 칸트를 헤겔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무턱대고 칸트를 펼쳐들었다간 낭패를 보게 된다. 이게 우리가 칸트 입문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꼭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전처럼 공부하다가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수학 정석이 집합 부분만 새카만 것처럼 모든 책의 서문만 까맣게 된 책들이 많은 건 나 뿐일까. 그래서 요샌 아예 중간이나 뒤에서부터 책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책은 궁금해서 앞을 볼 수 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아니던가. 잘 정리된 서양근대철학사 한권쯤은 읽어야 할 것 같은 계절이다.

 

by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대학원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배기호

 

좋은 이름 없을까? 지방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던 필자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른들이 지나가듯이 이종사촌동생의 이름을 생각해보라는 말에, 정작 학업은 뒷전으로 하고 말이다(솔직히 노상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낸 이름이 ‘나라’였다. 당시 우리말 이름이 유행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냥 부르기 쉽고 하늘을 나는 새처럼 동생이 자유롭게 꿈을 향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진심을 담은 결과였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 동생의 이름은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나라’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필자가 직접 이름을 붙인 아이니(아, 지금은 엄연한 어른이다) 이상할 것은 없다.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은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노래했던가. 그리고 그 노래는 끝없는 돌림노래 형식을 취했는지, 여전히 누군가에 의해 불리기도 하고 우리 주위에 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을지라도 그것의 표현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맹점은 간혹 우리를 헛갈리게 만든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의 정몽주와 정도전은 우국충정의 대명사다. 다만 어떠한 ‘나라’에 대한 충정이었느냐에 따라 그 구체적 내용이 달라졌고, 그에 대한 평가가 나뉠 뿐이다. 그렇게 40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우국충정의 노래는 아주 강렬하게 울렸다. 열강들의 간섭과 침략으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각각의 창법과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개화파(開化派), 동도서기(東道西器), 서도서기(西道西器), 동도변용(東道變容) 등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되었다.

 

당시는 어찌할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음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상대적으로 그들의 부강함이 당시 이 땅의 현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으로 이 땅을 유린한 것은 서양이 아닌, 동양의 한 섬나라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300여 년 전에도 그랬듯이 서양의 세(勢)를 앞서 배우고 익혀 이 땅을 넘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로 인해 짓밟힌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실히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 반민족행위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2009년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문신, 고위관료, 정치가, 외교관, 언론인, 독립협회 회장, 민족운동가, 종교운동가, 교육운동가 등으로 다양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에 대한 평가는 개화를 주장하며 민족의 실력양성을 주도했다는 공과 친일행위를 했다는 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에 국한했을 때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67% 이상이 윤치호를 모른다고 한다(최훈, 「윤치호 연구」, 『慶州史學』 第39·40合輯, 85쪽 참조). 이는 그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력과 행태를 세세하게 알리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이른바 당대를 주름잡던 지식인이라고 소개할 정도의 인물임을 감안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현상이다. 또한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일기로 남겼다. 그리고 그 일기는 그에 대한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그를 알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현재 그 일기의 몇몇 내용이 어록이라는 미명아래 인터넷을 떠돌고, 나아가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칭송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럽다.

 

 

윤치호는 일찍이 일본과 청, 미국 등에서 유학했다. 그러면서 서양이 발전하고 일본이 열강의 반열에 오른 건 모두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종교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땅도 개화하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 중심의 사회진화론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그런 생각 저변에는 힘의 논리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부강한 자가 그렇지 못한 자보다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이 땅은 부강하지도 않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에 부강한 자에게 의탁해야 한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 땅이 일본의 치하에 들어가는 것이 축복이라고까지 말했다. 일본을 같은 황인종이며, 동양이면서도 서구 열강에 버금가는 부강한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땅은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일본에 의탁해 배우고 익혀 어른이 된 후에 독립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12년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일제에 체포되었다 3년 만에 출감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을 거치며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노골적으로 변했다.

 

배우고 익힘의 결과는 무섭다. 교육의 힘을 누구보다 믿고 실천한 윤치호 자신이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인 차원이라면 무서움을 넘어 재앙에 가깝다. 이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지금과 가까운 시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기대어 이 땅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의 믿음이라면 모를까, 교육운동가나 지식인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보기에는 순진하다 못해 가볍고 어설프다.

 

애국계몽운동가. 윤치호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혀 근대적 사고를 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매우 어리석은 질문이 든다. 그가 사랑한 ‘나라’는 무엇이고, 새로움은 무엇이며, 근대는 무엇인가?

 

 

지금도 애국, 곧 ‘나라’ 사랑의 노래는 곳곳에서 여러 사람의 입에서 독창, 합창, 제창 등의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다. 어쨌든 ‘나라’를 사랑한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겉으로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관심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럼으로써 이 땅이 다시는 윤치호 같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월감을 가진 이중인격자가 나오지 않는 곳이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몇 해 전, ‘나라’의 하나 뿐인 언니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이모의 SNS에는 ‘우리나라 사랑해’라는 문구가 항상 적혀 있다. 밝히기 쑥스럽지만, 필자 역시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그리고 더불어 드는 생각… 동생들은 자기 이름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알까? 괜히 미안한 생각에 ‘우리’·‘나라’가 보고 싶다.

 

기고자: 배기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순자의 철학사상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를 좋아한다. 잡기에 능하며 가끔 공부도 한다. 사람의 일, 정치에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섦 – 변절자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9

변절자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수십만의 우주 속에서

수백만의 변화의 물길을 가르고

수천억만의 물은 변화를 일으킨다.

 

시끄러운 감정의 폭풍은

뭉게뭉게 하얗게 피어나는

유혹의 무지개를 일으킨다.

 

색은 형용할 수 없지만

형용할 수 있는 물질로 채워져

심장을 가르는 통증으로

우리의 뜨거웠던 가슴은

차갑게 표정을 바꾼다.

 

흘러가는 구름은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고

기억나지 않을 시간을 준다.

시간은 한없이 춤을 추고

우리의 색깔은 붉은 낙타위에

고개를 목 놓아 울고 있다.

붉은 태양에 흩날리는 모래는

붉은 피를 흡수하고

찬란하게 빛날 푸른 공기에 흩뿌린다.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디로 짙어 가는가.

어디로 무색해지는가.

 

2017. 9. 28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살아가는 동안 1분 1초를 쪼개어 사는 이 시간의 공간 속에 수많은, 수억의 물질의 형태는 변화를 일으키고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도 수없는 변화와 수많은 감정을 일으키고 변화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쉽게도 변화하는 형태의 오묘한 모습이 마음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물은 수많은 형태로 변화하고 수많은 형질로 표현되고 수없는 색으로 짙어지고 또 흘러가고 또 색이 없는 형태로 돌아갑니다. 그런 무형과도 같은 유형의 물질은 마음을 닮아 있어 알 수 없는 수백만의 공전과 자전을 하는 우주의 행성만큼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항상 변하는 변절자이기도 합니다. 변화는 것은 그대로가 아니어도, 변화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이 세상이 무엇인지 여전히 물음표로 사색하지만 밤하늘의 셀 수 없는 별만큼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인간이 자생하는 자연의 물질로 생명을 얻는 것 자체의 행위는 삶을 얻고 우주를 얻고 신비로운 이 세상의 발자취를 남기는 온전하지 않지만 온전한 행위에 한 걸음 다가가는 변절자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변하는 변화는 아름답습니다.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유현상

 

‘길 위의 우리 철학’에 걸 맞는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덕소를 지나 6번 도로로 들어서서 양수리를 지나 신원역 옆길로 600미터 언덕길을 오르면 몽양 여운형(1886년~1947년)의 생가와 기념관이 나타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약간 돌아가기는 하지만 글쓴이가 사는 곳 역시 양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을 나서기는 했으나 그리 먼 길도 낯선 길도 아니었다. 하지만 몽양 여운형은 여전히 낯선 느낌이다. 일차적으로야 나 자신의 무식과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몽양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불행과도 연관되어 있다.

 

[2011년에 복원된 몽양 여운형의 생가(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위치)]

 

몽양은 1886년 4월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명문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역시 백사 이항복의 11대 손녀였다. 어린 시절 여운형은 아버지보다는 조부인 여규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본래 소론파의 야인이었던 여규신은 갑오년(1894)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가를 이끌고 모두 동학에 가담하여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벗들을 사귀었던 몽양에게 인간 평등을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로 삼는 동학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의 상을 치른 후인 1908년 몽양이 집안의 종들을 모아 놓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해방시켜 준 일은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몽양의 근대적인 인간관은 단지 동학의 영향에 의한 결과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구적인 근대식 교육을 받았고, 1907년에는 기독교에 정식으로 입교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자신의 생가 인근에 근대적 신학문을 가르치는 광동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비록 동학과 기독교의 뿌리는 다르지만 몽양은 두 종교 모두에 내재한 보편적 가치를 수용하여 근대적 세계관을 가슴에 품게 된 것이다. 종교와 사상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은 몽양의 삶은 이후로도 평생 이어져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거리낌 없이 넘나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는 한결같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삶을 살았으며, 실질적인 목표를 성취하려는 정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독립을 위해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919년 당시 몽양은 김규식(1881~1950)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비록 일본 대표단의 집요한 방해로 파리 강화회의 본회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국내의 독립 운동 열기를 자극해 3.1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세력들은 임시정부라도 서둘러 세워 국권회복을 위한 중심을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몽양은 정부 형태보다는 운영에 부담이 적은 당조직을 중심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는 이상적인 방법보다는 현실적인 방법을 먼저 고민하는 몽양의 실리추구의 면모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국호에 ‘대한’을 붙이거나 황실을 우대하는 임시 정부 수립과 연관된 원칙들에 의견을 달리한 몽양은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임시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주로는 교포 사회인 거류민단을 중심으로 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몽양이 임시정부의 황실 우대의 원칙에 반대한 것도 봉건적 체제를 거부하는 근대적 정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3.1 운동의 실질적 배후가 몽양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제의 하라 내각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일본으로 초청하였다. 일제는 당시 독립운동을 자치운동으로 유도하는 모양새를 취해 독립운동의 열기를 가라 앉히려는 계획에 몽양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몽양은 당시 일본 유학생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은 자치를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며 독립을 위한 담판을 짓기 위해 왔노라고 말한다. 당시 34세의 몽양은 실제로 일본의 고관들과 만나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굽힘없이 주장하였고, 동경 제국호텔에서는 500여명의 전 세계 기자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강력히 규탄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상해에 머물던 시절의 가족사진(몽양 여운형 생가에 전시)]

 

1920년에 몽양은 공산당이 조선 독립 운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여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의 조선 대표로 참가하여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후 주로 상해에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다 1929년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 넘겨져 국내로 송환된다. 일제에 의해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몽양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길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1936년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발간하는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빌미가 되어 신문사 사장에서 물러난다.

 

1940년대 초에는 몇 차례의 동경 방문 경험을 통해 일본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에 이미 광복 이후를 대비한 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건국동맹의 결성은 당시 여운형이 얼마나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건국동맹은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로 이어졌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말았다. 해방 정국에서의 몽양은 그 누구보다도 견실하게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좌우의 극한 대립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의 갈등 사이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청년기 시절부터의 이력이 보여 주듯이 몽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종교나 세계관에 구애받지 않고 연대하려는 태도를 유지했다. 조선 독립이라는 대의에 비하면 사상이나 종교 이념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모양새다. 달리 말하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균형 감각을 잘 유지한 정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몽양은 정신의 개발 못지않게 신체의 단련도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몽양의 균형은 정적들에게는 공격의 빌미가 될 수도 있는 요소가 되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여운형의 모습]

 

오랜 시절 동지였던 김규식과 더불어 여운형은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또한 1946년에는 북한의 김일성과도 총 6차례의 회담을 하면서 남북 합작의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으로 인해 여운형은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위기 상황일수록 극단적인 정치적 목소리가 온건한 주장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극단적 정치 노선은 정치적으로 더 선명하고 원칙에 충실한 입장처럼 비춰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보적 민족주의자임을 자처했던 몽양의 정치적 입장은 사회적 갈등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을 경우에는 원만한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립의 결과가 생사를 결정할 정도의 치열한 상황이라면 중도는 양쪽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때 고려 공산당원이었던 이력을 고려했을 때 강경 사회주의자들에게 여운형은 회색 지대에 서 있는 변절자라는 공격을 받기 십상이다. 또한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한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고려하면 우파들에게도 여운형은 사회주의로 전향한 변절의 아이콘으로 삼기 좋은 먹이감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식민 통치 후반기에 국내에서의 활동 역시 그를 더욱 고립시키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1942년 몽양을 다시 체포한 일제는 그를 풀어주면서 억지로 전향서를 쓰게 하고 친일성명서를 작성한 것처럼 날조해 그에게 오욕의 상처를 새기고 말았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몽양을 변절자로 몰아가게 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몽양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기반으로 1945년 11월에는 조선 인민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게 된다. 또한 1945년 9월에 출범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부주석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비록 미군정은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 여운형은 사회주의 인사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6년 1월에 좌익계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내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입장에 협조하기로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몽양의 입지는 찬탁을 주도한 박헌영에게 밀려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박헌영이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고 이북 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반면 반탁 입장을 고수한 여운형은 좌파로부터도 외면당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우파로부터도 고립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몽양은 이에 그치지 않고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김일성과 담판을 지으려고 시도하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통일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는 의견에 서로 동의한 바 있다. 하지만 여운형은 남한에서의 박헌영의 활동에 비판적이었고 좌파 중심의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대의는 유사했으나 방법론적 차이가 결국은 회담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46년 2월의 박헌영과 여운형(사진출처-Naver)]

 

결국 몽양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전선 구축이라고 하는 목표 역시 김일성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해 좌우합작의 가능성은 더더욱 낮아지게 되었고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몽양은 좌우로부터 모두 소외당한 채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년 7월 18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2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하고 만다.

 

보스니아 기차여행 [유철의 유럽방랑기] -5

보스니아 여행에서 놓치면 안되는 것 중 하나가 기차를 타는 것이라고 한다. 사라예보에서 남쪽 끝, 보스니아의 유일한 해안도시 네움Neum으로 향하는 기차여행이 그 중에서 으뜸이라 들었다. 특히 사라예보에서 남쪽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모스타르Mostar까지의 길은 놓치면 안된단다. 하루에 오직 두 편, 오전 6시, 그리고 오후 8시에만 운영하는 기차, 내 선택지는 물론 오전 기차 뿐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새벽 4시에 숙소에서 나섰다. 피곤함에 조금 게으름을 피울까도 싶었지만, 이곳을 떠나면 언제나 다시 올까 싶은 마음에, 조금 일찍 나선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마치 콘크리트 파편에 빨간 페인트로 채우듯 사라예보를 내 마음에 담는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라예보 기차역,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다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이다. 역무원 하나 안보이고, 영어 안내 표지판 하나 없는 친절한 역. 주변에 영어는 오직 한 쪽 벽면을 덮은 코카콜라 광고판 밖에 없다. 어제 미리 예약해 받은 기차표도 어찌나 허술 한지 손바닥 만한 종이 쪼가리에 수기로 적힌 플렛폼과 좌석 정보가 전부다. 그러나 그마저도 온통 보스니아어인 탓에 어떤 숫자가 플랫폼 번호며, 좌석 번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두리번 거리고 있는 찰나, 한 낡아 헤져 구멍이 난 반바지, 반팔을 입은 여성이 내게 다가 왔다.

“모스타르 가니? 그럼 날 따라와.”

독일에서 왔다는 23살의 안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녀는 공부를 마치자 마자 자신에게 선물로 두 달간의 여행을 떠나 왔다고 한다. 검게 탄 피부, 그리고 허름한 옷차림이 그녀의 지난 여정을 대신 설명한다. 알바니아-코소보-세르비아를 거쳐 보스니아에 도착한 그녀는 다시 크로아티아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그녀의 집이 있는 마부르크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녀의 지난 두 달여 간의 여행은 이제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덜컹 덜컹’

그렇게 그녀와 지난 여행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식이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꽤나 현대적인 내부를 지닌 기차다.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보스니아 정부 주도의 철도 민영화 과정에서 기차 사업권을 얻은 한 러시아 회사가 들여온 새로운 기차인데, 소비에트 당시 운영된 기차를 들여와 내부만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보스니아인들은 엉터리 라며 반발하고 있으나, 이미 이전에 운영된 기차는 그 보다도 오래된 기차였고, 그 사업권의 대가 중 하나가 철로 정비사업을 포함한 것이라고 하니.. 자본이 부족한 보스니아 정부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민영화는 보스니아의 최대 이슈 중 하나다. 여전히 민족간 갈등이 잠재되어 있는 가운데 지난 2010년 총선에서 정치적 혼란과 반목이 이어져 EU가입 후보국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 결과 4천만 유로 규모의 EU로 부터의 지원금이 중단된 터였다. 결국 당장 돈이 없는 보스니아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하려 하지만 부패한 관료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자국내 재벌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민영화를 추진한 몇 몇 기업이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이 실패는 실질적인 청년실업률이 약 60%(전체 실업률 약 45%)를 기록하고 있는 보스니아에게 그나마 고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체불이라는 재앙까지 덮치며, 지난 2014년 보스니아 내전 이후 가장 큰 대규모 시위를 불러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됐다. 시위대들은 시민 총회를 열어 공무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여러 개혁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민영화청을 설립하여 현재의 민영화 정책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의 기미는 없어 보인다.

서서히 출발한 기차는 사라예보의 총탄자국 가득한 아파트촌을 거쳐, 텅빈 평야를 달리더니 산길을 오르고 내리고, 그 산들 사이를 그리고 산과 산을 잇는 다리 위를 달린다. 
특히 코니치에서 모스타르로 이어지는 네레트바 밸리가 압권이다. 빗물이 석회암으로 형성된 지표면을 깎아 내리면서 만들어진 다채로운 자연환경은 절경이다. 에메랄드 빛 네레트바 강변을 따라 해발 2000m가 넘는 석회암 산들 사이로 달리는 기차, 그 창 밖으로 보이는 보스니아의 절경은 그렇게도 사람들이 보스니아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좌우로 이어지는 절경들. 그 절경의 한쪽만 보는게 아쉬웠다. 우연히도 나란히 안게 된 안나와 나는 카페가 위치한 칸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너는 중국에서 왔니?”

비교적 이동이 자유로운 카페 칸에서 좌우로 펼쳐지는 경관을 카메라에 그리고 눈에 담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 승무원 한 명이 내게 묻는다. 아주 드물게 한국인인지를 묻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유럽 어디에 가든 중국인이냐고 묻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니야, 나는 한국에서 왔어. 괜찮아 나도 너희들을 구분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그는 머쓱한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네가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줘. 음.. 나도 한국 사람을 하나 알지. 박지송? 숭? 성? 축구선수 말이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승무원과 대화를 듣던 안나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묻는다.
“참, 나도 얼마전 너희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봤어. 박근혜? 맞지? 그녀의 사법 절차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변방의 작은 나라의 이미지는 이렇게 서구사회에서 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특별한 발자취로 남겨진 이들로 인상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과거에는 한국 하면 한반도 북쪽 김씨 왕조를 묻는 사람들이 대다수 였다. 요즘처럼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아니면 핵실험을 할 때면 모든 친구들이 내게 와서 그들을 묻기 일쑤였다. 그러나 요즘은 박근혜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 영국에서 테레사 메이의 인기가 추락하면서는 현역 대통령을 탄핵시킨 나라라는 점에서 부러움을, 다른 한편에서는 ‘독재’ 혹은 ‘권위주의’ 나아가 ‘부패’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된 것 같다. 물론 건조하고 시니컬하게 그러한 한국 사회에 대해 논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개’한 제 3세계의 이미지를 포착할 때면 마냥 시니컬하게 반응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 2월 박근혜에 대한 헌법재판소 선고가 있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사회과학 대학 박사과정 학생들의 정례 세미나 날이자, 동시에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 토론회가 있었던 날이었다. 당시 발표 꼭지 중 하나를 맡아 ‘러시아 혁명과 한국의 촛불시위’ 라는 주제로 논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구인들에게도 어떠한 폭력사태 없이 법적 절차에 따라 현역 대통령을 탄핵시킨 것은 물론이요, 사법절차에 들어간 사례가 많지 않기에 큰 화젯거리 였다. 따라서 당시 토론회 참가자들은 탄핵국면까지 가는 과정, 그리고 정부의 부패 및 권위주의, 제 3세계의 특징 등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동유럽 출신의 대부분은 촛불시위 중 미국과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 그리고 그 안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역할에 관심을 갖는 한편, 서유럽 출신들은 주로 제 3세계 국가들의 특징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던 중 한 프랑스 여학생이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야. 제 3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부패 스캔들이 프랑스에서도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문제는 대안이 없어. 사회당은 부패했고, 마크롱은 자본의 대변인이야. 그렇다고 멜랑숑이 대안이 될 수 없어. 그는 이상주의자일뿐 더러, 반 EU주의자야. 물론 여기에서 르펜을 거론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해.”

내 신경을 건드린 건 다름 아닌 ‘제 3세계에서 있을 법한 사건’이라는 그녀의 표현이었다. 묘한 그녀의 발언에 나는 ‘얼마나 세련됐느냐의 차이일뿐, 너희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물론 미국도 권력과 자본의 부패는 존재할 것’이라 답했지만 착잡한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내 안에도 그러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은 변방 출신의 나에게도 그리 쉽지 않다. 그건 앞서 내가 코소보와 알바니아를 두고 그저 근거없이(물론,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하다고 바라보는 것과도 비슷한 느낌은 아닐까? 그건 그저 무지에서 비롯된 우매한 나의 고백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를 하며 그리고 경치를 구경하고 달려온 길. 어느새 모스타르에 도착했다. 강하게 내리 쬐는 볕은 사라예보와 또 다른 느낌이다. 역사를 나서자 뜨거운 열기에 숨을 쉬기도 벅차다. 아직 8시밖에 되지 않았으나 30도를 넘는다. 한낮 기온이 40도를 넘는다 했으니, 조금 걱정이 된다. 짧았지만 인상깊은 대화를 나누며 길동무가 되어준 안나와 찐한 포옹 후 연락처를 주고 받고는 그곳이 독일이든, 영국이든, 한국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나라든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모스타르 하면 도시를 횡단하는 네레트바 강의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다. ‘옛 다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스타리 모스트는 보스니아 내전/국제전을 겪은 이들의 아픔과 화해를 상징한다.
16c 소금이 귀했던 그 시절,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황제로 알려진 쉴레이만은 달마시아 해변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기 위해 다리 건설을 명령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인 하즈루딘이 다리를 설계에 착수한 결과, 1088개의 하얀돌, 길이 30m 폭 5m, 높이 25m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길고 거대한 석조다리를 혁신적인 건축기법을 통해 건설하게 된다. 납 땜 된 철제 핀들과 달걀 흰자로만 커다란 석재들을 지탱하는 기법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던 스타리 모스트, ‘썰’에 의하면 이 기법이 실패할 것에 대해 두려워 하이루딘은 다리가 완공되기 전 도망쳐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확인할 길을 없지만 스타리 모스트를 건설하기 전, 이와 똑같이 생긴 크리바 쿠프리야Kriva cuprija를 만든 것을 보니 그가 스타리 모스트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다리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것이자, 보스니아의 보물같은 존재였다. ‘모스타르’란 마을 이름의 뜻이 ‘다리의 수호자’란 뜻을 지닌 ‘모스타리(mostari)’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1993년 11월 9일 오전 10시, 400년 동안 원형을 유지하던 스타리 모스트는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스타리 모스트 동쪽 탑, 타라 탑에 위치한 스타리 모스트 박물관에서 당시 크로아티아 군의 폭격에 결국 무너지고 마는 스타리 모스트의 모습을 상영하고 있었다.(https://youtu.be/sFF1v0n6VUg)

세르비아가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있는 사이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 극우 민족주의자 프리뇨 투지만은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 군대(Croatian Defence Council, 크로아티아 군대가 아니라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들이 중심이 된 군대로, 최초에는 세르비아에 대항한 전투를 벌였지만 후에 극우주의와 결탁, 보스니아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에 참가한다.)를 앞세워 모스타르를 정밀 폭격한다. 
그렇게 모스타르 서쪽 언덕 위에서 발사된 포탄은 정확히 스타리 모스트에 향한다. 그 포탄의 목표는 그들이 상정한 적도, 모스크도 아니었다. 정확히 그 다리, 스타리 모스트였다.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다리, 스타리 모스트는 한 발, 두 발 포탄을 맞으며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돌들과 철제 핀들을 하나, 둘 씩 흐르는 네레트바 강에 떨구고 만다. 그리고 다시 한 발, 두 발, 세 발. 오랜 다리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간다. 끝내 포탄을 견디지 못 한 스타리 모스트는 자신들이 생기기 이전부터 그 자리에서 흐르던 네레트바 강물에 자신을 맡긴다. 그렇게 스타리 모스트로 형상화 되어 온 산에서 온 돌들은 포탄들과 함께 강에 던져져 다시 산에 일부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400년 전, 오래된 다리가 생기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모스타르. 산도 그대로고, 강도 그대로고, 하늘도 그대로인데, 다리만 사라져 버렸다. 이 소식은 보스니아인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보스니아 정부는 다리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라예보가 포위되어 포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가적 애도의 날을 선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크로아티아 여성문학의 대표작가 슬라벤카 들라쿨리치는 묻는다.
“우리는 왜 파괴된 다리의 이미지를 보며 학살당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볼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는가?”

그건 아마도 인간이 갖는 유한적 삶을 초월하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담고 있는 영원성 때문은 아닐까. 당시 보스니아에서 민족간 통혼율이 가장 높았던 모스타르, 스타리 모스트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구혼의 장소로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그 자식과 손자의 사랑이 시작된 장소였다. 그리고 스타리 모스트에서 열리던 한 여름의 다이빙 대회는 수많은 이들의 추억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즉 스타리 모스트가 의미하는 것은 몇 대에 걸쳐 함께 공유하는 집단의 기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름과 공존의 무게를 버틴 공간이었던 오랜 다리였을 것이다.

발칸의 호메로스라 불렸던 이안 보드리치의 대하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의 다리도 그러했다. 소설은 남쪽 무슬림 마을과 북쪽 기독교 마을을 잇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인간들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이해와 공존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드리나 강의 다리는 역사의 증인으로 그곳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함께하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관찰자이자 그들의 삶과 함께한 친구다. 이안 보드리치는 다리에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인생을 알기 전에 다리를 알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전 다리와 먼저 사랑을 나눴다. 다리는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문화와 문화, 종교와 종교가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통로다.”

그런 옛 다리의 파괴는 단절을 의미하는 것 이상 아니었다. 그들이 존재하기 이전 부터 존재해 온 옛 다리가 사라지자, 네레트바 강은 잔인하게 서쪽 마을과 동쪽 마을을 갈랐다. 하나의 마을이었던 모스타르는 카톨릭 신자들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주로 살던 서쪽 마을, 이슬람 신자들인 보스니아인들이 주로 살던 동쪽 마을, 두개의 마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모스타르가 자랑하던 다름의 공존도 함께 무너졌다.

1993년 한 번 무너져 내린 스타리 모스트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7월, 주변국들의 후원을 받아 터키 건축가들이 사료를 기반하여 그것이 건설된 방식으로 복원해 낸다. 그건 과거의 고통을 치유하는 그리고 공존과 평화를 되살리고자 하는 첫걸음이다.
그렇다고 스타리 모스트의 복원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닐터, 여전히 서쪽 마을과 동쪽 마을은 관념적, 실질적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학교로 나뉘어 공부하던 학교는 내전이 끝나고 어느새 하나가 되고 한 지붕 아래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지붕 아래 각 학생들이 오르는 계단도, 공부하는 교실도, 운동장도, 교육과정도 그리고 이들을 책임지는 교장도 둘이다. 심지어 도시 구급 체계를 비롯해 모스타르 지방정부도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두개로 운영되며, 경찰차도, 구급차도, 정치인도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에 참여한 이들 중 일부는 어떠한 형벌을 받지도 않고 여전히 모스타르에서 카페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서쪽 크로아티아계 마을 뒷산에 높이 솟아 있는 거대한 십자가는 단순히 내전 중 사망한 카톨릭 신자들을 추모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저 그건 마음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는 증오와 불신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불행은 시간과 함께 그저 그렇게 지나가거나 혹은 최소한 인간들의 망각 속에 흩어져 사라진다. 오래전 무너져 버린 다리의 돌들이 네레트바 강에 흘러 내려 갔듯이, 그 불행도 새로운 오래된 다리 스타리 모스트 아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에 흘려 내려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오래된 다리 위에서 몇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삶은 다시 시작되어야 할 때인 듯 하다.
모스타르 동쪽 마을, 스타리 모스트가 보이는 한 켠에 조그마한 비석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 비석에 써있는 작은 글씨,

‘Don’t Forget’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그 불행을 인간의 망각 속에 흘려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행을 잊는 것일 뿐, 결코 불행이 가져 왔던 참혹했던 과거를 잊으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다리 위에서의 삶은 그러한 참혹했던 과거의 실수 위에서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작은 비석은 이곳 모스타르에 사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는 듯 하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섦 – 퇴색되어 버린 시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8

퇴색되어 버린 시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모든 것은 퇴색되어 버린다.

모든 것은 동시에 희망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새롭게 변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동시에 좌절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흐른다.

모든 것은 그렇게 순환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잊혀져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모든 것은 그렇게

감각의 무덤 위로

바람이 흩어지고

흙이 흩날리고

감정의 깊이는 무덤덤해져

그렇게 슬퍼지기도 한다.

감정의 세포는

감정의 혈류를 타고

점점 차가워져

깊이는 사라진다.

 

2017, 9. 14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