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2020.04.05.

 

이상하(한철연 회원)

 

 

“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궁핍에서 태어난 산물로
고찰할 줄 아는 자만이, 현재의 순간에 과거를
자신을 위한 최고의 가치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중에서 발췌)

 

 

1.

지난 시간에 두 폐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반대로 이 폐허 속에서 점화된 불꽃, 낙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낙원,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은 어느 시대에나 형태는 달랐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또는 소비 자본주의 시대, 나를 가져봐! 나를 즐겨봐! 그러면 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거야! 라고 외치는 광고가 세상 천지에 깔려있고 돈만 된다면 자진해서 사람 피부에도 광고판을 새겨놓는 21세기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철학자가 자주 농담처럼 말하듯 이 소비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란 결국 모두에게 ‘즐겨라’ 라는 지상명령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체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세상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재벌 이재용이든 서울역 노숙자든 원한다고 해서 모든 걸 즐기거나 가질 수는 없다는 건 명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으로 종종 화폐,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시공간을 상상하고 꿈꾼다. 그리고 그런 시공간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분명 없지는 않았고 사실 지금도 존재한다. 그 실제적 사례를 들자면 역시 절이나 수도원같은 종교인들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리라. 또한 혁명과 해방을 외치며 영주에게 저항하며 도망친 농노들이 만들어낸 중세 코뮨 도시나, 러시아 혁명의 소비에트=평의회라든지 로버트 오언의 공동농장같은 유토피아적 사회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실험들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아 물론 나의 이 말에 대해 뉴스를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고기먹고 술 먹고서 단체 도박을 하다가 검거된 땡중이나 헌금 경쟁을 장사하듯 부추기는 부패한 대형 교회의 폐허를 떠올리게 하는 뉴스를 떠올리며 종교인들의 유토피아라는 말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 공동체를 쉽게 다 타락했다고, 거기엔 아무런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자체일 뿐이다. 현대의 수도원 같은 공동체라고 해서 화폐, 돈 자체가 없는 곳은 아니지만, 분명 엄격한 계율 아래에서 사유재산 자체가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약자를 위한 봉사에 힘쓰는 신부님과 수녀님 종교인들은 여전히,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런 종교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종로의 조계사처럼,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려는 전 간부나 정권의 노동탄압을 막으려는 노동조합 회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하려 찾는 신성하고 현실 권력에 불가침적인 해방의 공간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의 공간을 찾으려고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던 벤야민과, 한명의 전문가로서 뛰어난 약효를 입증한 만드라고라 마스터인데도 수도원을 향했다가 도피하고 방황하던 청춘, 웹툰 덴마의 나오미수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둘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는 도피와 삶의 행복의 사유-이미지에 대해 한번 고민해볼 수 있으리라.

 

 

-벤야민은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즉 실제 생활들, 눈에 보이는 것들, 만지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유 이미지가 학문이나 철학의 영역을 외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 자유, 사유 이미지, 이미지 사유이자 변증법적 이미지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 사유가 구체적으로 총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성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그 경제 논리가 아무리 첨예하고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육체성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있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고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310p 중에서 인용.

 

 

2.

나와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른다. 수도원 같은 폐쇄된 작은 공동체가 이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지 오래고, 막스 베버같은 사람이 말한 것처럼 탈주술화가 진행된 근대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무슨 큰 상관이 있느냐고. 철학적 사상적으로 봐도 우리는 이미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에 살고 있고 19세기의 마지막에 니체가 선언했듯이 신은 죽었다고 봐야 되는 게 아니냐고, 지금 시대에 종교가 무슨 큰 현실적인 영향력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기존 종교의 유일신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대인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졌을까. 그렇다면 수도원같은 오래된 신의 성전에 대해 다루기 전에 지금 우리 시대의 신흥 유사종교, 영원한 경제성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지난 글에서 말한 유시민/진중권과 웹툰-덴마라는 새해 첫날의 두 폐허를 목격한지도 벌써 세달 째, 이제 내가 사는 서울 홍대동의 날씨는 분명 겨울이 지나갔고 정말이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가정통신문처럼 진부한 말이지만 개나리와 벚꽃이 슬슬 기지개를 켜려고 한다. 허나 이런 계절의 순환과는 달리 매서운 코로나 사태는 종식은 커녕 글로벌하게 점점 장기화될 조짐이다. 세계경제의 침체는 확실시되고 선진국들의 예상 경제성장률은 거의 다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지금이 이렇게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결국 주가는 다 회복하고 경제는 다시 성장하리라는, 끝없는 성장신화라는 유사종교를. 도대체 이 근거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상원의 저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참고해서, 천년도 더 전에 기독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413-426)에서 이런 끝없는 성장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찾을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한때 로마 제국은 지금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의 뿌리였고 거대한 영광 그 자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많은 고난 끝에 이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았고 이천년뒤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심지어 세계의 달력과 시계는 모두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로 시간을 세고 있으며 21세기 근대화된 국가 중에 사실상 예외는 없다. 허나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 이 로마의 국교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다. 이교도이자 야만족으로 불렀던 서고트족의 군사적 침입과 패배로 로마는 엄청나게 흔들렸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구원에도 당연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철학의 창시자 또는 역사철학 일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 그리스 철학의 원형적 시간관-즉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시간에 대한 관점을 벗어난다.

그는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은 무한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설정한대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지막엔 최후의 심판과 구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선형적)시간관을 전개한다. 이 최후의 종말, 심판 또는 구원이 예정되어 있기에 지금 현실의 어떤 고통도 사실 언젠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의 영광과 구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현재의 비극을 견뎌낼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기에 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허나 이는 어쩌면 언젠가 경제가, 내 주식은 언젠가는 오를 거고 내 살림살이가 좋아질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버틸 수밖에 없는 21세기 우리네 대다수의 삶과 구조적으로 과연 무엇이 다른 걸까.

 

 

3.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분명히 깨닫고 있다. 서른이 넘은 내 세대가 직접 겪어본 것만 하더라도 97년의 IMF구제금융 사태, 2008년의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공황, 그리고 2020년의 코로나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까지. 영원한 경제성장이란 없으며 10년 정도 주기로 세계적인 불황,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것을 과연 누가 경험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경제성장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자신의 옷을 바꿔 입을 뿐 끝없이 현재 세계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주가 폭락 사태를 대다수 개인들, 이른바 개미들이 스스로 국난을 극복하자며 동학 농민 운동을 패러디하여 ‘동학 개미 운동’을 펼치는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연극을 펼치는 중이다. 지금의 천도교인 동학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바로잡자며 백년 전에 펼친 그 운동을 이제 주식시장에서 다시 반복해보자는 이 우스꽝스러움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불황이 있음에도 여전히 경제성장이라는 불멸의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보며 겨우 재작년에 겪은 전국민의 휩쓸린 비트코인 폭등과 폭락 대란이 떠오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이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희극과 비극에 대한 명언을 다시금 되새겨볼 즈음이 아닐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그리고 이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근거없는 사이비 종교스러운 언어처럼 지난 10년 사이 가장 그 의미 내지 뉘앙스가 변해버린 말로는 뭐가 있을까. 수많은 후보군이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2030세대에서는 아마 ‘청춘’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 교과서에서 ‘청춘 예찬’이라는 글의 주요 주제를 파악하는, 아니 외우는 병든 실험용 쥐 같았던 수험생들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대 소비자학 교수 김난도가 백만권 넘게 판매한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읽고서 한번 더 힘을 내봤지만, 당연히 그 책을 읽는 95퍼센트 이상은 서울대생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김난도 그의 행적과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냉대에 실망한 수많은 리얼 청춘들의 반항 내지 저항은,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의 말 한마디로 종결된 듯하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나오미수녀의 고난과 도피는 그야말로 이런 우리 세대의 청춘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스케치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또한 그러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난 글에서 말한 벤야민의 사유-이미지의 실제적 사례를 수집하고 산책하고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칸트의 명언을 패러디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감히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감히 재구성해보라, 너 자신만의 감각을 표현할 용기를 가져라!

 

1927년 1월 30일. 모스크바 일기.

여기 베를린에 와서 비로소 분명해진 모스크바에 대한 몇가지를 더 적는다. (1월 29일부터의 일기는 2월 5일 베를린에서 쓰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베를린은 하나의 죽은 도시다. 거리의 사람들은 황량할 정도로 개별화되어 있고 한 명 한 명은 다른 사람들과 너무 떨어진 채 큰 거리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다. 동물원 역에서 그루네발트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나야 했던 거리들은 마치 닦고 문질러 씻은 듯 지나치게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도시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그들의 정신적 사태를 반영한다. 이 도시에서 얻게되는 새로운 시각은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 체류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비록 러시아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의식하면서 유럽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것이 분별력 있는 유럽인이 러시아에서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러시아 체류는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 방문자들에게 정밀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요구된다. 평균에서 벗어나 있거나 개인적인 사람,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체제에 덜 적합한 사람일수록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는 손쉽게 더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상황에 더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유럽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다가서는 추상적 사유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될 것이다. … 모스크바는 다른 대도시에서 저항하기 힘든 멜랑콜리를 퍼뜨리곤 하는 교회 종소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이것 또한 모스크바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되고 그리워지는 것 중 하나다. (257-258)​

 

 

4.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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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웹툰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를 따라가보자. 덴마의 주 무대인 드넓은 제8우주의 행성 중 하나인 위노바, 한 작은 수도원의 막내로 보이는 나오미 수녀는 그야말로 군대의 이등병처럼 중노동에 하루종일 시달리는 아픈 청춘이다. 혼자서 수십명의 환자 간병에 청소에 빨래에 음식까지… 하루에 하나만 해도 사실 충분히 피로에 지칠 수십명분의 가사 노동인데 이 많은 노동을 나오미 수녀는 모두 떠맡고 있고, 심지어 이 와중에 같이 일하는 수녀들 사이에서도 나오미 수녀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이전에 나오미 수녀의 건의대로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사회의 낮은 존재, 약자인 동네의 노숙자, 걸인들을 수도원에서 보살피게 되자, 기존 동네 신자들의 수도원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주 액션 활극이자 현실에 대한 풍자극, 블랙코미디인 덴마에서 이런 수도원이 나오는 걸까. 이 가난한 수녀들의 수도원에 대해서 우리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에서 한상원의 언급을 한번 살펴보고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기독교 전통은 이렇듯 공통의 정신적 가치뿐 아니라 물질적 재화의 공동 분배 역시 공동선의 원리로서 강조해왔다. <사도행전>에서는 초기 기독교 신자 공동체에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85p)

반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러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회 전체를 지적, 이데올로기적으로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질적으로도 지배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와 부패는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을 필두로 하여 교회의 혁신을 추구하는 수도원 운동과 직면한다. … (86p)

수도원 운동은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바티칸이 상실해버린 사도 바울의 공동선 이념을 복원하고자 시도했다. 그 시작점은 성직자들이 청렴한 삶을 살고, 수도원 내에서 자율적, 자족적인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따. 수도원 운동의 교회 개혁 중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교회의 재산 소유와 상속(당시 성직자들 중에는 교회법을 어기고 자녀를 낳은 사람들이 많았다)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가 어디까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하는 신학적 논의가 펼쳐지면서 이러한 논쟁은 다소 정치적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87p)

현실 풍자적 요소가 다분한 덴마의 우주에서는 태모신교라는 종교가 굉장히 큰 세력을 쥐고서 실버퀵이라는 자체 회사를 통해 우주의 물류를 장악하고 있다. 물류, 유통을 장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마존이 지금 미국인들의 삶을 장악하고 쿠팡이 당일배송으로 한국인의 편리함을 장악하고 있듯이 경제의 대단히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태모신교에 비교해 마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에 나오는 고엘 종교회와 나오미수녀의 선행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렇게 헌신하면서 당연히 기존 지역사회의 헌금이나 십일조도 줄었으리라. 게다가 수도원 토지의 소송에서도 져버려서 신의 성전을 용역 깡패가 노골적으로 폭력을 쓰며 쳐들어오고 협박을 일삼는다. 이렇게 나오미 수녀는 안밖으로 압박을 받으며 삶에 지쳐가는 중에, 병환으로 누워 있는 원장 수녀님에게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결심한다… 깡패가 얼릉 이 수도원에서 떠나라고 협박하며 그녀의 몸에 붙여놓은 빨간색 재산 철거통지서를 만지면서.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재산권의 정당한 법적 행사라는 신성한 권리를 내세워서 종교라는 이전의 신성을 폭력으로 짓밟고, 심지어 생일날 수녀를 때리고 철거집행 통지서를 수녀의 몸에 붙이는 이 장면은 정말이지 인상적인 양영순의 연출이다. 세계 역사에서도 기독교는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유일신의 논리였지만, 지금 21세기엔 누가보아도 기독교보다 자본주의가 더 전세계적으로 우세한 유일한 신성의 논리가 아닐까. 물론 이렇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벤야민적인 시선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정신적인 종교와 물질적인 자본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의 알레고리, 우화야말로 마치 수천년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신 포도의 이솝 우화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고 말해줄 테니까. 여튼 나오미 수녀는 더이상 이런 고통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도피를 결심한다. 딱히 목적지도 없이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다는 마음으로 떠난 나오미수녀. 허나 떠난 곳에서도 부랑자에게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등 수난은 계속된다. 허나 수녀는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유대인 말살정책을 펼치던 나치를 피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나치가 득세하는 지금의 유럽을 피하기 위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던 벤야민도 마치 이런 심경은 아니었을까.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에벤에셀에 대한 자칫 놓치기 쉬운 복선을 한 독자의 매우 친절한 베스트댓글이 탁 하고 잡아준다. 나오미 수녀가 정처없이 떠나서 도착한 지역 에벤에셀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를 베댓처럼 나오미 수녀의 선행, 만드라고라 마스터로서 살아오고 베풀어온 그녀의 업이 이 먼 도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을 더해보자면, 나오미수녀는 그저 별 목적없이 그저 지금 여기, 고통스런 현재의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조차도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수녀를 인도한 것이고, 덕분에 나오미는 그동안 고생한 것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칼뱅의 예정설처럼, 나오미의 이 돌발행동마저도 신의 입장에선 다 예견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전에 나오미 수녀가 키워냈던 위노바 행성의 특산물인 건강식품 만드라고라. 이 식물은 가장 많은 애정을 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 형상대로 꽃이 피는 신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건 위에 나온대로 수도원에서 그 중노동을 나오미수녀가 감당하기 이전엔 농부로서 애정을 가지고 만드라고라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단순히 나오미수녀가 일반인 이상의, 앞선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처럼 엄청난 고통과 억압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초인에 가까운 존재인 걸까?? 아니면 야엘같은 초인이 아니라도, 벤야민의 표현을 살짝 빌려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메시아가 열어놓은 희미한 작은 문’ 은 존재할까??

 

계속…


 

열세 번째 시간, 향기 [시가 필요한 시간]

열세 번째 시간, 향기

 

마리횬

 

요즘 부쩍 거리의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붙잡고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꽃의 향기가 참 좋죠. 향수를 뿌려야만 향기를 가질 수 있는 인간과는 달리, 꽃은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인간이 뿌린 향수는 아무리 짙은 향수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향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꽃은 피어 있는 동안 심지어는 말라서까지 그 향기를 간직하고 사니까,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셈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향기. 이 향기가 꽃에게는 있는 이유가 뭘까? 오늘 소개해 드리는 시를 읽으며 한 번 생각 해 보시죠.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고운 자리에

꽃처럼 순하고 어여쁜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꽃 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꿀벌과 나비와 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꽃이 좋아 밤낮으로

꽃을 만지는 이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시인은 시인이자 수녀님이시죠.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시에서는 ‘꽃마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시인이 우리에게 가지길 원하는 이 ‘꽃마음’이 무엇일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은 꽃에게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겸허한 태도를 엿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화려한 꽃이라도, 또 어느 담벼락의 볼품없는 꽃이라 하더라도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법이 없죠.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겸손하게 자라나고, 그리고 때가 되면 활짝 피어 납니다.

 

꽃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활짝 핀 꽃 속에는 하늘과 태양, 비와 바람의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꽃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뜨거운 태양빛도 받아야 하고, 거센 빗줄기도 속절없이 맞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더위와 추위, 외로움, 또 바람 불 때의 아픔.. 꽃이 피어 나려면 그 모든 것을 오롯이 견뎌내야만 하죠.

뿐만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손길도 있습니다. 농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꽃을 기르고 키우며 정성을 다 했던 사람들의 어루만짐의 시간들도 한 송이의 꽃 속에 들어 있겠죠.

그 긴 시간들을 감내했기 때문에 지금의 꽃이 있는 것일 텐데, 활짝 핀 꽃송이만 봐서는 그런 모든 시간들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의 이야기가 꽃 속에 감춰져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결코 쉽게 피는 꽃은 없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기다림의 꽃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다림의 꽃마음을 우리에게도 가지고 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쉬운 인생이란 없잖아요. 꽃이 그러했듯 우리도 향기로운 삶으로 피어나려면, 견뎌내야 할 것들을 견디고, 겪어야 할 연단을 겪으며, 피어날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실, 열매가 열리려면 먼저 꽃이 져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잘 아는 상식이죠. 시인은 그 부분까지도 고찰해냅니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이 보아낸 또 하나의 꽃마음은 열매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매년 곱게 빛나는 꽃의 마음, 주어진 삶의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겸손과 만족의 꽃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겠죠.

이 시에서 말하는 꽃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마음을 가지고자 매 순간 노력한다면 그러한 삶이 정말 향기 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는 이문세의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어>라는 곡입니다. 마이너 코드와 메이저 코드가 번갈아 진행되는 것이, 마치 평탄치만은 않은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위로 흐르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마치 어려움 속에서도 피어나고야 마는 아름다운 꽃처럼, 굴곡진 우리의 인생 속에도 분명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봄날에 참 어울리는 곡입니다. 시와 노래와 함께 오늘도 향기로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문세 –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어

               주소https://youtu.be/VumtfvtThtc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의 무기 『자본론』 [내가 읽는 『자본론』]

나의 무기 『자본론』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독어판 서문에서 순진한 독일 독자들에게 일갈하는 대목이다. 『자본론』이 나온 지 벌써 150여 년이 지났지만, 또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은 『자본론』의 배경인 유럽이 아니라 대한민국 땅이지만, 이 일갈은 2020년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물론 전 세계 사람들 모두에게도 ̄ 유효한 언명이다. 『자본론』의 문제의식은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각자가 살아가는 조건이 다른 만큼, 『자본론』도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는 나의 조건에서, 2020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자본론』을 읽고, 그에 관한 글을 쓸 것이다. 본격적으로 그러기에 앞서, 나와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과 『자본론』에 관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현재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반대한다. 또한 『자본론』이 가진 문제의식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은 지금까지 결코 해소된 적 없으며, 앞으로도 자본주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딱히 『자본론』을 읽어서 이런 ‘빨갱이’가 된 건 아니다. 『자본론』은 나의 그러한 사상적 입장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게 해주는 숫돌이지, 결코 경전이 아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기에 굳이 그 두껍고 문체도 건조한 『자본론』을 꾸역꾸역 읽은 것일 게다.

그럼에도 『자본론』은 내 인생의 책 중 한 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가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가졌던 여러 문제의식에 공명해주는 가장 강력한 책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사회에 의문을 가지고 살았다. 처음에는 그냥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철이 들어가면서 ‘그냥 그런가봐’ 하면서 복권당첨을 꿈꾸며 자기 앞에 닥친 일에만 신경 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남들보다 덜 철이 들었나보다. 부러움과 동정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세상에 대한 분노는 인생에 대한 의문으로, 인생에 대한 의문은 체제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내 주변 환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내 주위에는 항상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회는 항상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도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런 사회의 선전이 곧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명문대 출신들에게 고액과외를 받을 때 그들은 동네 허름한 보습학원을 전전했고, 다른 친구들이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닐 동안 동네PC방에서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나름 여유로운 형편의 친구들은 집에서 용돈도 받으면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할 때,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제대로 된 자기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들은 대학은 꿈도 못 꾸었으며, 중·고등학교도 어영부영 다니고 바로 사회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이 말이 정말 싫다.

대학에 와서 더 적나라하게 느꼈다. 지갑이 두꺼운 사람과 지갑이 얇은 사람은 생각하는 게 다르다. 요즘 시대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들 한다. 그런데 진짜 밥을 굶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봤다. 단 몇 천원이 아쉬워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비싼 서울 방값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서 고시원을 전전하고 친구 하숙집에 몰래 얹혀살다시피 하는 대학생이 2020년 대한민국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에게 미래는 밝은 꿈이 아니라 어두운 현실이다. 20대의 꿈도 지갑이 두꺼워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러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노력만으로 이러한 삶을 벗어나려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해야 한다. 학교 수업 외 모든 시간 노동을 해야 하고, 그러면서 공부도 해야 한다. 점점 가진 자에 대한 부러움은 시기로 변했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은 내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망적인 고민으로 변해갔다.

더 가진 자에 대한 시기와 덜 가진 자에 대한 동정은 돈 못 별면 사람대접 못 받는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그랬다. ‘내 고민의 근원에는 자본주의가 있구나.’ 그렇게 살아왔다. 어쩌다 『자본론』을 읽게 되었다. 그냥 열심히 읽었다.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읽었다. 1권을 다 읽었다. 별 답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다. 일상의 당연했던 문법들이 낯설어졌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설명할 하나의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200년 전 태어난 털북숭이 독일인 아저씨에 공명하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자본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본론』을 철 지난 헛소리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보았다. 여전히 일만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어디선가는 4차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세상이 어찌되든 간에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와 같은 대학생들 역시 정교하게 따져본 적도 없고 투철한 계급의식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미래에 임노동자가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기업체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른 빈부격차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해소될 여지도 없어 보인다. 아직까지 『자본론』은 현재 그리고 어느 정도의 미래까지 우리가 처했고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는 동의하는 사람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들을 앞에 두었을 때의 나의 심정을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문구가 대변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자본론』을 펼쳐들고 읽으라 강제하고 싶었다. 당신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게 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비극이 필요한지 알고 있냐고, 왜 남들 살라는 데로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처음의 분노처럼 계속해서 감정이 끓어 넘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론』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은 책도 아니고, 진리가 담긴 경전은 더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고민하기보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는 기회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치열하고 엄밀하게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쓴다.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배우면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바람이 크다.

맨손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순 없다. 나 혼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끊임없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도구가, 무기가 필요하다. 나는 『자본론』이 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자본론』은 무려 시대의 삶을 바꾸었다. 그런 책은 드물다.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계속되는 한, 『자본론』은 그 대안을 모색하는 길잡이로서 가장 유의미한 논의로 남을 것이다. 지난 150년간 그래왔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본론』이 제기한 문제의식의 원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수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와중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세계가 지속되는 한 『자본론』의 생명력은 결코 다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경우가 아닌 우리 삶의 작은 조각에서도 『자본론』은 우리의 무기가 되어준다. 대학 못 가면 인간 대접 못 받는 사회가 절망적이라면, 그래서 꾸역꾸역 대학 갔더니 졸업하고 취직도 안 되는 현실이 지긋지긋하다면, 인간을 돈으로만 보는 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겠다면, 겨우겨우 취직하니 일만 하다 죽을 것 같다면, 이 이상한 삶을 끝장낼 무기로 『자본론』을 사용해보자. 답을 얻지는 못해도 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 글은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자, 내 친구들을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나는 집도 없이 한 끼 한 끼 겨우겨우 먹고 살아가는 내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자본론』을 나의 무기로 삼아 나아가겠다. 언젠가 세상은 나아지겠지만, 또 나아져야만하겠지만, 그 과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갈려나가는 순간의 연속일 터이다. 그 희생과 헌신에 나의 보잘것없는 노력도 함께할 것을 다짐해본다.

열두 번째 시간, 기도 [시가 필요한 시간]

열두 번째 시간, 기도

 

마리횬

 

 

 

‘무언가를 빌다’라는 뜻의 한자어, 빌 기(祈)에 빌 도(禱)로 이루어진 말, ‘기도’입니다. 종교의 유무에 따라 어쩌면 자칫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단어일 텐데요, 그런데 이문재 시인의 시 <오래된 기도>에서는 조금 다른 ‘기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것들을 보면, “어떻게 저런 게 기도가 될 수 있지?” 라고 반문이 드는 것들이 있죠. “음식을 오래 씹는 게 기도하는 거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이 시에서 ‘기도’라고 말하고 있는 행동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다름아닌 ‘잠시 멈춤의 상태’, 곧 일상의 빠른 흐름에서 순간의 시간, 일부의 시간을 떼어내는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노을이 지는 때라면 곧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찾아왔음을 의미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로 오늘을 보내버리기 전에, 잠시 멈춰 노을을 한 번 바라본다면, 그 짧은 순간만큼은 잠시 하루를 돌아 볼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음식을 오래 씹는 것 역시, 별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한 번쯤 천천히 음식을 오래 씹는다면, 아무래도 그 순간만큼은 잠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어떤 ‘멈춤의 상태’, 마구 흘러가 버리는 시간에 잠시 ‘매듭’을 지어보는 것. 시인은 그러한 시간이나 순간들을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또한 관심 없이 지나가버릴 수 있는 사소한 존재, 생명, 주변의 자연에 한 번 더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 역시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버스에서 혹은 길에서, 아이들에게 눈 마주쳐 준 적 있으신가요? 피어있는 꽃을 잠시 바라보셨나요? 그럼 여러분도 기도를 하신 겁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기도라는 것이 과연 어떤 거창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며,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주변에 숨쉬고 있었던 기도의 순간들. 그래서 시인은 이 기도를 ‘오래된 기도’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 순간에도 이미 이 오래된 기도를 해오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 2013)>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데요,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운 것 곁에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 데서 생겨난다. … 완전히 자기 안에 고요히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 이것이야 말로 인간을 신의 곁으로 데려간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사색적 헌신’은 이문재 시인의 시 속에 담긴 여러 모양의 ‘오래된 기도’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름다운 것 곁에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에 잠기는 것이 바로 우리가 누려야 할 최고의 행복이며, 우리들에게 필요한 오래된 기도인 것이죠.

어떻게 한 주가 흘렀는지 모르게 벌써 주말을 맞이하고, 어느새 4월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는 이유, 모든 것이 점점 가속도가 붙은 듯 흘러가버리는 이유. 한병철 교수의 표현을 빌면, 흘러가는 시간을 묶어주는 ‘사색적 헌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 삶에 기도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외출도 자제하게 되고, 어쩔 수 없는 멈춤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죠. 한 편으로는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 곧 친구와 만나 나누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나, 반가운 얼굴들과의 악수, 계절마다 걸었던 벚꽃길 등..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일상들이 이제 와 보니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멈춤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바쁜 하루, 분별없이 흘려 보내는 오늘을 살고 계신가요?

내일은요 잠시 가만히 눈을 감아 보시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보시고, 또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도 불러보고, 노을이 질 때 잠시 걸음을 멈춰 보고, 갓난아기와 눈도 맞춰보고, 차를 타지 않고 한 번 걸어도 보고,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 보는… ‘오래된 기도’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와 함께 들어볼 노래 소개해드릴게요.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ost 중 <나의 피아노> 라는 곡, 이병우 기타리스트의 연주로 들으면서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적 헌신의 시간을 한 번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이병우 – 나의 피아노 https://youtu.be/559T9wiwwCE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내가 읽는 『자본론』]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마르크스의 『자본』, 이른바 『자본론』이라 불리는 책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당신의 머릿속을 불현 듯 스치는 불온서적이 있다면 유추하는 그것이 맞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얼핏 들어본 거 같은데… 마르크스 어쩌고 하는 고전책 아냐?” 정도의 배경 지식이 담긴 답변도 거의 듣기 힘들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올해로 만 20세가 되는 대한민국의 2000년생 남자다. 물론 제목의 ‘김필진’도 동일 인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 나이 또래의 대한민국 사람에게 2020년 1월 현시점에서 『자본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면 더욱 저조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래도 개중에는 소싯적 신문의 정치면 사설 좀 읽어왔다며 그 불온서적에 대해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이들에게 특별히 한마디 해주고 싶다. “나 요즘에 바로 그 『자본론』 읽어요.” 그들의 대답은 비교적 비슷할 것이고 예측 가능하다. 빨갱이냐고 묻거나 아직도 그걸 읽는 사람이 있냐고 답할 것이 확실하다. 21세기 현재, 스스로 좌파임을 자부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외면 받는 책이 바로 『자본론』이다. 그걸 읽고 있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이 말이다. 왜? 나는 왜 『자본론』을 읽고 공부하는 것일까?

‘금기’ 나는 금기라는 벽과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에 싸움쟁이였다. 학교 끝나면 가방 던져놓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공을 찼고, 학급 내 주먹질 다툼은 월례행사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 주차된 차의 백미러를 깨먹는 일 정도는 큰 사건도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모범적이고 올바른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아왔고, 꽤나 반항적인 편이었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모습에 속을 태우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나의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학생으로서의 쇄신을 위해, 목동 7학군으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나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 일은 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생을 살던 곳을 떠나 첫 교복을 입게 된 동네는 내가 살아왔던 곳이 아니었고,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나를 인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목동의 치열한 학구열은 나의 평범한 하루하루들을 옥죄어왔다. 버티기 버거웠다. 학교를 안 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신경성 복통에 하루를 멀다하고 입원했음은 물론이요, 우울증에 불안-강박증, 심리 상담까지, 몸도 마음도 상했고 그야말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 시기도 있었다. 내 학창시절은 산산조각이 났고, 중학교 시절에 사귄 친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많이 다퉜다. 아버지의 이사 결정이 내 삶 자체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씩 커가며,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사회적 괴물이 아버지의 그러한 판단을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생김과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엄청난 놈의 존재를 피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본론』은 이 무렵에 내가 접한 여러 종류의 불온서적 중 하나였다.

『자본론』과 나의 첫 만남은 내가 살아온 맥락 위에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 당시에는 『자본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공부하지는 못하였으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김수행 선생님께서 지으신 『자본론 공부』 등의 가벼운 책들로 흥미를 키워갔다. 결정적으로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술, 이를 테면 『공산당 선언』이나 『독일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수고』의 요약문 등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의 고통과 불만, 피해의식을 보듬어 내 잘못이 아님을 다독여준 것은 다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털보 할아버지와 ‘소외론’이었다. 나는 그들의 휴머니즘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의 눈에 그러한 책들은 그야말로 파격이었고, 내 안에 꿈틀대던 금기에 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었다. 금기의 벽은 사회에 대한 나의 반항심만으로는 꿈적도 않더니, 내 손에 낫과 망치가 쥐어진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내 『자본론』이 내 머리 속에 들어오자, 금기의 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공차는 것을 좋아하던 반항아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 끝에 결국 벽을 넘어서고야 만 것이다.

누구보다 시끄러운 사춘기를 보내고 어느 새 나는 대학생, 새내기의 문턱에 있었다. 그렇게 앙망했던 경희대학교에 입학해 보니, ‘이까짓 대학이 뭐라고 나는 그렇게 망가졌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학교를 쉬거나 그만두기도 했고 가족들과 갈등을 겪기도, 사랑하는 것들을 잃기도 했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던 이유는 결국 대학 입시에서 시작되었었기에 더욱 허망했다. 그토록 강요받던 ‘인서울 4년제’, ‘국내 TOP10 대학’은 그 무엇도 보상해주지 못했다. 허망함으로 방황하던 첫 학기, 나는 교양 수업으로 수강하게 된 ‘고전 읽기 : 『자본』’ 수업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는 완전히 아물지 못한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내가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또 공부하고 싶은 것들, 내가 나아가야할 길, 그리고 내가 싸워내야 할 것들이 보다 명료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계속 나를 우울의 늪으로 빠뜨리기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했다. 그간 꾸준히 놓지 않았던 『자본론』 등 여러 불온서적을 또 다시 꺼내든 나는, 우울한 이 세상의 무자비함에 당하고만 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신입 생활은 『자본』과 함께하게 되었다.

『자본론』은 개인적인 내 정서의 흐름과 밀접히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대학생, 성인, 사회인으로서 내가 만난 세상은 내 경험과는 무관하게 『자본론』의 필요성을 꾸준히 증명해주었다. 알바생으로서, 대학생으로서, 국민으로서, 철학전공자로서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자본론』으로 명쾌히 답변이 가능한 미스터리들이 많았다.

우선 대한민국의 20대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는, 알바와 같은 실제적 임노동 상황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던 2019년 한 해 동안 꾸준히 알바를 해왔다. 2020년에도 알바를 계획 중인데, 최저시급이 오른다고 한다. 뭔가 이상했다. 2020년의 최저시급 인상은 진작부터 결정되어 있었을 터인데, 나는 2019년 한해 8,350원의 최저 시급에 내 노동력을 판매했다. 그렇다면 내 노동력과 교환되어야할 값어치만큼의 최저임금이 8,590원으로 사전에 판단/책정되었던 것은 2019년이나 혹은 그 이전일 것이고, 이를 토대로 2020년의 최저임금인상을 예정해둔 2019년 당시에도 나는 (그 보다 적은 값인)8,350원에 내 노동력을 판매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차익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내 노동력의 값은 분명히 고정되어 있을 텐데 왜 엉뚱한 이들이 이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 노동력의 값어치는 8,350원이 맞는가? 8,590원이라고 단언할 수는 있는가? 나는 매달 매해 항상 똑같이 노동력을 생산해 판매하는데, 해가 바뀐다고 그 교환의 등가 값어치가 바뀌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수많은 궁금증과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메웠다. 알바 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누구 하나 명쾌히 답을 주지 못했다. 내 질문으로 인해 비슷한 의문을 함께 품게 된 친구도 있었다. 『자본론』은 이에 대해 간단하고도 무서운 대답을 슬그머니 제시하고 있었다. “가격은 가치와 다른 것이고, 내 노동력의 가치는 불변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본론』은 설명하고 있었다.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32873529925

 

이 같은 『자본론』의 예리한 통찰은 나아가 대학생으로서 김필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김필진에게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우선 『자본론』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서 마르크스는 ‘물신숭배’에 대한 언급을 제법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물신숭배’란 단적으로는 사회적 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물건에 인격을 부여해, 물건이나 상품 그 자체를 숭배하거나 인격화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니며 그 대상이 상품(물건)에서 일종의 상품인 ‘화폐’로 바뀐 ‘화폐 물신성’ 또한 함께 설명되고 있다. 사실 이렇게 어렵고 와 닿지 않는 용어들을 사용하면 그 참된 의미와 현실성을 체감하기 힘들다. 다만 위의 서술처럼 간단하게나마 그 핵심 의미를 인지하고 우리 주위의 현실 세상을 둘러본다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자본론』 속의 ‘물신성’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극도로 고도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더욱 더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결국엔 돈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XX브랜드의 상품은 정말 우아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YY 회사의 제품은 그 스스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우수하다.” 등등. 사실 이러한 문제는 깊게 고민해보지 않아도, 위와 같은 주위의 사례들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다. 돈과 상품이 그 자체로 처음부터 어떤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고 믿으며, 돈과 상품의 신비성을, 그것들을 인격화하여 숭배함으로서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돈과 상품이 불러오는 이로움을 돈과 상품 자체에 내재된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성’의 환상은 일반 대중들의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면화 되어왔다. 특히 돈과 상품에 예민한 20대 대학생들을 둘러보면 그 양상을 더욱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본론』은 우리가 무의식에 내포하고 있던 그릇된 환상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저술과 자본주의적 ‘물신성’에 대한 고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로 자본주의적 모순의 맥을 꿰뚫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론』의 내용이 이러한 일반론적 원리와 세계를 구성하는 포괄적 메커니즘에만 포커스를 두는 것은 아니다. 『자본론』의 여러 파트에서는 당대 유럽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자본주의적 착취의 실태를 낱낱이 서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부분은, (간단히 말해서) 영국 북부의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하기 위해, 아일랜드나 영국의 각종 농업지의 갈 곳 없는 이들과 농민들을 마음대로 잡아다 날라서 노동력의 공급을 증폭시켰다는 내용이다. 사안의 비인간성과 잔혹함뿐만 아니라 내가 해당 내용을 인상 깊게 여기는 까닭은 그 현재성에 있다.

얼마 전 선배를 통해 알게 된 ‘고용허가제’라는 제도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자본」에 등장하는 위의 영국의 사례와 닮아있다. 2020년 현재 고용노동부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실행되고 있는 제도인 ‘고용허가제’는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해 일을 하고자 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공장주나 사업주들이 고용노동부에 노동력 공급을 요청하면 고용노동부에서 지원 받은 이주노동자들을 선별해 뽑은 뒤 양측을 연결해 사업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때 해외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하게 될 곳이 어떠한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자기의 고용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근로하게 되며, 자신이 일할 직장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 또 이직은 3번으로 제한되며, 이를 어길 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다.

한마디로 강제노동에 가까운 이러한 제도는, 스스로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 아직도 『자본론』에 등장할법한 말도 안 되는 노동법이 살아 있음에 매우 분개한다.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위와 같은 제도를 떠받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계속해서 『자본론』을 읽고 ‘고용허가제’와 같은 비인간적 착취 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가야할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자본론』은 2020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보편적인 현재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앞서 제시한 ‘최저시급’과 ‘고용허가제’의 두 가지 사례는 그 현재성의 단편적이고 구체적인 양태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 사례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의미에서 내가 『자본론』을 계속 공부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약간은 다른 맥락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현실적 동기도 존재하는데, 내가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철학을 전공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비판 서적인 『자본론』에서 철학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자본론』의 전체를 관통하는 ‘노동가치설’은 논의의 시작부터 ‘가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를 동반한다. 물론 ‘노동가치설’이 철학적 이론이거나, 철학적 사유가 뒷받침이 되어야만 학설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실제적인 ‘가치’의 형성과정이 그 근본 맥락의 시발이다. 다만 경제학의 주류가 ‘효용가치설’이고 ‘가치’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보편적 관념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가치’의 참된 의미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노동가치설’에 다가가기 위한 첫 단추로서 필요할 것이다. 그냥 아무 일이나 한다고 해서 전부 다 가치를 만드는 노동인 것은 아니며, 가격이 높고 수요가 증가한다고 해서 그 상품의 ‘가치’가 높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깊은 사색과 고찰 속에서만 일반적인 경제상식의 문을 깨부수고 나올 것이다.

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에 의해서 형성되며, 따라서 ‘가치’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원천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식의 인간애의 사유는 충분히 공부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린 시절 한창 교복 입던 때의 나를 따뜻하게 달랬던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은 『자본론』의 커다란 맥락과 흐름에도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자본론』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이다.

지금까지 『자본론』에 관한 이야기는 내 개인의 삶과 그 외부에 실재하는 자본주의 세계 간의 관계망에서 서술을 해봤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일들을 구체적 사례로 삼아,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를 설명하고자 노력했고, 또 같은 맥락에서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내가 『자본론』을 계속해서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필연성의 이유와, 현실적/현재적 유효성의 이유,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20대로서 내가 살아왔던 삶은 마르크스주의 인식에서 사회의 불의와 맞닿아있었으며, 『자본론』은 그러한 문제의 본질과 그 현실적 해결법의 실마리를 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그리고 현재성이 충분한 책이었다. 그것이 내가 계속 『자본론』을 읽게 하는 원동력이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하는 동기이기도 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는 영향력 있는 큰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가치설은 전 세계의 경제학도들에게 외면 받고 있다. 이제는 커다란 계급적 혁명도 일어나지 않으며, 화폐물신화는 이미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읽는다. 뉴스와 신문, 정치인과 이웃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주입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가장 최선의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정녕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시스템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착취와 억압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걸까? 다양한 관점을 견지해보고, 열정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져본다면, 이 세상은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인간의 살아 숨 쉬는 가능성을 정치와 철학 속에서 찾고 싶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자본론』을 권할 것이다.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난 뒤에야 맛볼 수 있는 떨림,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뜨거운 열정과 버무려진 그 떨림에, 2000년생 김필진은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

열한 번째 시간, 봄 [시가 필요한 시간]

열한 번째 시간, 봄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코로나19로 여전히 많은 것들이 연기되고 멈춰 있지만, 가까이에 다가오는 봄기운마저 막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산수유의 노란 꽃망울이 올라왔고, 햇빛 비치는 곳에 서 있으면 따스함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봄’이 성큼 눈앞에 와 있네요. 아직 바람은 조금 차갑긴 하지만 말입니다.

 

봄을 기대하면서, 오늘 함께 읽을 시는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게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쳐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인생을 이야기 하거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비유적으로 이야기 할 때,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인생을 항해로 표현했죠.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도 생각이 납니다. 또 어떤 중요한 결단을 내린 후에 “우리 이제 한 배를 탄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 비유가 이 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인생은 항해다’라는 표현을 하진 않지만,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어디 한두 번이랴”라고 하는 표현에서 그 비유가 드러나고 있죠.

우리가 살아가는 일속에는 기쁜 일도 많이 있지만,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죠. 생각해보면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한 두 번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 파도에 흔들리면서 그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나를 놓아버리지 말 것을 시인은 당부합니다. 오히려 그런 날은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닻을 내린다는 건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요, 성난 파도가 일고 바람이 마구 부는 상황에서 배를 그냥 놔둔 채로 계속 항해를 한다면, 아무리 큰 배라고 하더라도 여기저기로 휩쓸려 버릴 것이고,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다 떠밀린 후에 그제서야 다시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을 찾으려면 여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시인은, 내가 이리저리 흔들릴 것만 같은 그런 날에는 조용히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닻’의 의미에 대해서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배를 고정시켜주는 닻을 살펴보면 무게는 상당하지만 크기가 꽤 작습니다. 배보다 큰 닻 본 적 있으세요? 평소에는 배에 싣고 다녀야 하니까 배의 몸체보다는 훨씬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훨씬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몇 십 배의 큰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닻이죠. ‘배’가 ‘나 자신’을 의미한다면, ‘닻’은 ‘작지만 나를 지탱해줄 힘이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배마다 닻이 하나씩 있듯이,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이 ‘닻’과 같은 작지만 큰 무언가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은 있다는 의미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닻’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친구와의 전화 한 통, 부모님의 격려의 말 한마디,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시 한 편, 맛있는 커피 한 잔 등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이 ‘닻’이 되는지 한 번 생각 해보세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뜻하지 않게 만나는 파도와 같은 일들, 바람과 같은 일들이 없을 수는 없겠죠. 그럴 때 그 파도와 바람에 흔들려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닻을 내리시고 그 일들을 잠시 묻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파도가 지나고 바람이 멎었을 때, 그때 다시 내 방향대로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 분노가 치미는 일이나,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을 때, 괜히 애꿎은 다른 사람에게 그 화를 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본의 아니게 괜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그 순간 잠시 한 숨 쉬어 가면서 내 마음 속에 닻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만 바보같이 참으라는 얘기냐!”라고 말이죠. 똑같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나에게 상처를 줄 텐데, 나만 닻을 내리고 참으라는 거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럴 때 시인은 마지막 연으로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 줄 수 밖에 없는 삶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오게 되어있는데, 춥다고 아무리 불평해봤자 그만큼 시간이 빨리 흐르지도 않아요. 더 춥게 느껴질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겨울’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요, 시인은 우리의 삶에 있을 그 아픔과 상처의 시간들을 덤덤하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시간 동안 나는 파도에 휩쓸려 더 긴 시간을 돌아 올 것인가, 닻을 내리고 내 방향을 지키며 그 시간을 버틸 것인가. 선택해야 하겠죠.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나요? 여러분 배의 닻을 내리고 그 시간들을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이제 곧 봄의 시간이 여러분 앞에 다가올 겁니다.

오늘 이 시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로, 홍이삭의 ‘봄아’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홍이삭이 제 24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던 곡인데요, 따뜻한 목소리와 가사가 봄기운을 느끼게 해 주는 곡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과 잘 어울리는 것 같죠? 여러분, 조금만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꽃 필 차례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습니다.

 

홍이삭 <봄아>https://youtu.be/_v7AKeXZqrc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㊵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401b-401e]

* 소크라테스는 시가의 선법과 리듬에서 뿐만 아니라 그림 등 모든 기예, 나아가 인체 및 생물들의 본성에서도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ἦθος과 생각διάνοια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인에 대해 좋은 성격의 상τοῦ ἀγαθοῦ εἰκόνα ἤθους을 시 속에 새겨 넣도록 강요하거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에 대해 동물들의 상이나 건물 그 밖의 어떤 제작물에도 나쁜 성격τὸ κακόηθες과 무절제ἀκόλαστος, 비굴ἀνελεύθερος, 꼴사나움ἄσχημον을 새겨 넣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ἐπιστατητέον고 그는 말한다.(401b)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수호자들이 나쁨의 모상 속에서ἐν κακίας εἰκόσι 양육될 경우 수호자들의 영혼 안에도 하나의 큰 나쁨κακὸν μέγ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καλός 우아한εὐσχήμων 본성을 추적하는데 타고난 능력이 있는 장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αὔρα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아름다운 작품ἔργον으로부터 젊은이들οἱ νέοι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προσβάλῃ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401c)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ὁμοιότης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συμφωνί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401d)

* 이상의 논의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시가교육μουσικῇ τροφή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젊은이들의 혼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력 때문임을 밝힌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장단ῥυθμὸς과 화음ἁρμονία이 영혼의 내부에εἰςτὸ ἐντὸς τῆς ψυχῆς 가장 잘 스며들고καταδύεται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을 실어 날라φέροντα 영혼을 가장 힘차게ἐρρωμενέστατα 사로잡는ἅπτεται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우아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401d) 그런데 무엇보다도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ὁ ἐκεῖ τραφεὶς은 아름답게 제작되지 못했거나 아름답게 성장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곳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가장 날카롭게 지각할 수 있다ὀξύτατ᾽ αἰσθάνοιτο ὡς ἔδει.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이전’πρὶν λόγον δυνατὸς εἶναι λαβεῖν, 즉 어려서부터 이미 그것을 제대로 비난하고ψέγοι 미워할μισοῖ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칭송하고 즐길 줄ἐπαινοῖ καὶ χαίρων 알며 그것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 훌륭하고 뛰어나게καλός τε κἀγαθός 된다는 것이다.(401e)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양육된 사람인 까닭에 자라면서 그 논거를 접하게 되면ἐλθόντος τοῦ λόγου 그 친근성 덕에δι᾽ οἰκειότητα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γνωρίζων서 제일 반기게ἀσπάζοιτ᾽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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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시가의 선법과 리듬뿐만 아니라 기타 그림과 자수, 건축 등 기타 예술 영역 모두를 가릴 것 없이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시가의 원칙들이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 전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 즉 원칙 적용의 확대와 일관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 말에서 플라톤 예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간취할 수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예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성품과 생각의 반영으로서 결코 도덕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예술은 좋은 성품을 만들고 좋은 성품은 좋은 예술을 만들며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예술의 좋음과 나쁨이 있다면 예술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 예술이 반영하거나 담고 있는 성품과 생각의 좋고 나쁨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문제는 곧 도덕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즉 예술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반영하고 도덕은 심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이끄는 좋은 예술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훌륭한 예술가와 예술 교육은 정의와 도덕이 살아 숨 쉬는 나라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의 조건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가 교육의 목표와 과정 일체를 법으로 제정하여 굳건한 제도로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문제를 분별 있게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논리적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주관적 요인이 강한 감각을 통해 생동하는 감성에 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감각의 영역은 매우 주관적이고 경계가 불분명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성 또한 민감하고 충동적이며 은밀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별도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빠져들게 만들고 특히 감성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혼속에 들어와 그들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 우아한 본성이 남긴 자취까지 추적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분별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예술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자못 실감나는 수사적 비유까지 들어가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그렇게 뛰어난 예술가들이 있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그들이 만든 아름다운 작품으로부터 젊은이들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이처럼 플라톤에게 시각과 청각을 기초로 하는 예술과 예술 교육은 그 민감성의 크기만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바르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매우 중차대한 과제로 제시된다. 예술 교육은 눈과 귀를 통한 감성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로는 비록 낮은 단계의 교육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특성 상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그와 같은 감성 교육 단계에서의 감수성의 발달은 그 발달의 정도에 비례하여 이후 전개될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 과정에도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오늘날 정서 교육에서 시청각 교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감성 교육에서 시각과 청각이 갖는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시각과 청각을 신의 선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갖는 교육적 의미 때문이다. 즉 시각은 하늘에 있는 지성을 관찰하여 우리 안에 있는 사유의 회전으로 하여금 그것에 닮게 하는 것이고, 청각은 우리 안에 있는 혼의 회전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질서를 찾기 위한 연합군으로서 무사 여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티마이오스> 49a-d)

*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러한 시가 교육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도 지금 다루고 있는 음악 교육 분야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이곳의 논의 주제가 시가라는 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과 관련한 다른 대화편의 내용들과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림이나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와 관련한 내용 모두를 통틀어보아도 여기만큼 큰 비중과 분량을 가지고 음악이 다루어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이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 왜 그토록 유독 음악 분야를 강조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플라톤은 여기서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예술적 요소들보다 영혼 내부에 가장 잘 스며들고 우아함을 실어 날라 영혼을 가장 힘차게 사로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러 예술들 가운데 감성에 작용하는 자극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시가의 원어 mousikē에서 나온 music이 오늘날 음악의 의미로만 쓰여 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가사에 비해 음악적 요소가 갖고 있는 감각적 직접성이 그만큼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은 단순히 감각상의 자극만이 아니라 시가가 가지고 있는 내용, 즉 그리스인들이라면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선조들의 생각과 행동들을 자극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다 모종의 직감적 세계관으로 강력하게 아로새겨 넣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음악관에 따르면 좋은 장단과 리듬은 혼에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그 자체로 조화를 구현하는 수학적 원리에 따라 배열되고 설계된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는 장단과 리듬이 결합된 음송의 형식을 띠면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채용되고 전승 발전되었고,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서는 당대 시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점차 합창 등이 결합된 연극이라는 종합적인 공연 예술로 발전하면서 마치 오늘날의 영화가 대중문화 영역에서 누리는 인기 그 이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시민을 교육하거나 위무하는 최상의 수단으로 더욱 확고하게 인식되면서 급기야 나라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정례 공연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그 시가에 붙는 음악적 요소들은 아테네에서 젊은이들의 영혼에 가장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인 동시에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이끄는 일종의 지배 이념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자 토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그러한 정황 속에서 수많은 연극 공연 및 시가 교육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시인과 지식인들의 양태는, 그야말로 플라톤이 보기에 당대 아테네 시민과 젊은이들로 하여금 현실의 극복을 위한 올바른 세계관과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함양하기는커녕,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위무라는 미명하에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부추겨 정치적 무관심과 이기적 개인주의, 성적 쾌락과 현실 도피를 조장하여 정치 영역에서 선동 정치가 판을 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이런 까닭에 새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어렸을 적부터 그러한 풍토를 정화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올바른 시가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입법의 형식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제대로 된 시가 교육을 통해서만 올바른 감성 교육이 이루어지고 나중 이루어질 지성 교육에도 제대로 된 기초를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시가 교육 내지 감성 교육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예술적 감수성이 길러지고 그렇게 형성된 예술적 감수성만이 이성적 능력이 발현되기 이전, 즉 어려서부터 참과 거짓을 직감하여 그것을 제대로 칭송하고 즐기거나 미워할 줄 알게 해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훌륭하고 뛰어나게 해주며, 이후 아름다움의 논거를 접했을 때에도 그 친근성 덕에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서 제일 반기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가를 통한 예술 교육은 감성 교육 차원에서 참과 거짓을 민감하게 직감하는 이른바 가치 감수성, 나아가 정의감 내지 도덕의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다음 단계에서 이루어질 과학교육과 철학 교육의 건강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제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플라톤이 언급하고자 한 시가 교육의 근본 목적이자 그 중요성인 것이다.

* <국가>의 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현실의 구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한, 여기서 펼쳐지는 그의 예술과 음악에 대한 사유 또한 그가 살던 당대 아테네의 정치적 현실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나 시가는 줄곧 이야기해왔듯이 단순히 노래나 시가 아니라 고대 아테네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뿐만 아니라 당대 지식인이나 정치가들은 모두 시가 자체가 아테네 사람들 모두가 숙지해두어야 할 기초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들 모두 시가 교육을 당대 아테네의 가치관을 유포하고 공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시가를 내용으로 하는 연극과 합창 공연은 아테네에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나라의 재정적 지원 혹은 부유층의 기부를 토대로 정기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시민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수차 언급하였듯이 그와 같은 연극이나 시가의 내용을 짓거나 유포하는 당대 시인들과 지식인들의 사고방식과 행태였다. 플라톤의 눈에 그들의 행태는 위기에 빠진 아테네를 구제하기는커녕 더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철저하게 비판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로운 나라를 확립하는 일환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왜 그토록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왜 그토록 단호하고도 엄격한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무려나 플라톤의 예술관은 비록 수호자 교육이라는 특수한 목적 하에 제시된 것이라 할지라도 현대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일양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 특히 한 개인이 갖는 적합성을 아무리 그 나름의 소질이나 적성과 연관 지운다 해도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예술적 경험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까지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납득하기가 힘들다. 에를 들어, 오늘날 아무리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관생도일지라도 음악적 감수성은 각기 다를 수 있고 오히려 그와 같은 다양한 경험들이 훗날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플라톤의 인식 자체만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비록 진리 인식과 관련하여 감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의 심급을 낮게 본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예술 자체의 중요성까지 낮게 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예술관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다만 기본적으로 최소한 현대의 자유주의적 예술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예술관이 내세우고 있는 예술과 인격 내지 도덕의 결합 그리고 나아가 정치적 현실과 현실의 결합은 분명 그의 예술관이 갖는 특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예술을 정치적 현실과 연관시키는 관점 자체를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이 저질렀던 오류, 즉 예술을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시켰던 피폐한 경험들을 토대로 무조건 부정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 예술과 정치적 현실의 관계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적 예술관이나 순수 예술지상주의는 비록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현대 예술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경향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자유주의 예술관 역시 현대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하나의 경향일 뿐 새로운 정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고 비판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철학적 균형 감각과 비판 정신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입장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대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주도하고 있었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비판적 균형 감각의 소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라톤이 주목하고 있는 예술과 도덕, 예술과 정치의 문제는 예술 또한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한, 결코 사라지거나 무시할 수 없는 부동의 주제로 예술사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고 그 때마다 플라톤의 관점은 매우 의미 있는 토론의 토대와 출발점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402a-402d]

* 그리고 플라톤은 이것을 마치 글자들γράμμα을 충분히 읽을 줄 알게 될 때까지의 경우에 비유한다. 즉 소수의 요소 문자들τὰ στοιχεῖα이 그것이 결합된 단어들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περιφερόμενα 경우 그것이 작게 쓰이건 크게 쓰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것들 모두를 주목해가면서ἠτιμάζομεν 열심히 식별αἰσθάνεσθαι할 때 충분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402a) 글자들을 알기 전에는 글자들의 모상εἰκών이 물속이나 거울에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므로 글자를 익히는 기술τέχνη과 훈련μελέτη은 글자들의 모상을 익히는 기술이나 훈련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402b) 우리가 수호자로 길러내려는 사람들, 즉 시가에 밝은 사람이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절제σωφρ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자유로움ἐλευθεριότης, 고매함μεγαλοπρέπεια의 부류들εἴδη,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ἐναντία 모두가 시가 속 여기저기서 옮겨가며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뭔가 그것들 안에 그것들 자체αὐτὰ와 그것들의 상들εἰκόνας αὐτῶν이 들어가 있음ἐνόντα을 깨닫고αἰσθανώμεθα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것을 믿게 되면서 비로소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 된다는 것이다.(402c)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글과 글자 그리고 글자의 모상의 예를 사람의 혼에도 연결시킨다. 즉 사람의 혼(시가) 속에 훌륭한 성품ἦθος(어떤 글자)이 있고 그것과 합치하고 조화되는 것들이 외모(글자의 모상)에도ἐν τῷ εἴδει 있게 된다면, 그리고 이것들이 같은 원형τύπος(글자 자체)에 관여하고μετέχοντα 있다면 이는 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τῷ δυναμένῳ θεᾶσθαι 가장 아름다움 광경θέαμα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ἐρασμιώτατον이라고 말하고 이런 사람들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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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이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자를 익히는 과정은 우리가 처음 글을 터득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자를 터득하고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간결하게 언급된 이 부분의 내용을 좀 풀어 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우선 글들을 반복해 보면서 글이나 단어들이 몇 개의 한정된 요소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반복해서 그러한 글이나 단어들을 보거나 또 사람들이 그 글들을 어떻게 읽는가를 반복해서 접하면서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를 어렴풋이나마 식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오랜 시간 반복해서 경험하며 글자를 식별하는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어떤 글이나 글자가 물속이나 거울에 흐릿하게 또는 굴절되어 나타나더라도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가 각각 무엇이고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 분명하게 식별할 줄 알게 되고 종국에는 그것을 토대로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에서 글자를 아는 것에 이르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앞에서 예술적 감수성이 훗날 지적 감수성의 토대가 된다는 언급의 연장선상에서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끌어들이고 있는 비유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인간의 인식 능력의 발전과 관련한 인지심리학 내지 인식론적 흥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플라톤의 인식론과 관련한 몇 가지 토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이곳에서 글자를 알게 되는 과정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을 근대 인식론적 용어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즉 감각(글자에 대한 최초의 지각)은 모상 수준의 것을 지각하는데 불과하지만 그러한 개별적인 지각 과정에서 현상에 대해 비슷한 지각, 즉 비슷한 감각적 경험이 여러 번 반복해서 생기다 보면 일정한 경험적 관념이 형성되고(글이 요소 문자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단계) 그러한 경험적 관념은 다시 비슷한 현상을 접하면서 주어진 감각 소여(所與)에 더해져 그러한 현상에 대한 보다 더 선명한 경험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어느 정도 식별하고 익히는 단계) 그리고 다시 또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경험적 관념들과 새로운 감각 소여들 간의 상호 작용이 상승 반복하면, 비슷한 관념들은 모종의 동일한 현상으로 추상화되고 마침내 일반적인 경험적 관념들, 즉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개념지가 생겨나게 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하여 반복된 경험과 훈련을 통해 획득한 이러한 개념지를 토대로 비로소 물이나 거울 속 등에 그것들의 상이 보일 경우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된다.(글자의 종류와 음가를 충분히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고 종국에는 이것을 토대로 글을 충분히 읽고 쓰는 것은 물론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인식론에서 경험지의 성립과 관련하여 흄(D. Hume)이 언급한 관념연합의 법칙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 추상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반복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선천적인 오성 능력에 있다고 가정하면 경험지를 감성과 오성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칸트(I. Kant)를 연상케도 한다. 다만 여기서의 플라톤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글자는 그에 대한 내용적 인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불가지의 물자체가 아닌 주관 바깥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실물 글자인데다 비유의 내용 역시 그 실물의 글자를 식별하여 개념지로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은 칸트의 구성설적 개념지와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할 것이다. 플라톤의 앎은 구성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모상에 대한 모사지로 시작하여 점차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형상으로서의 완전한 참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있는 직관지이다.

* 그런데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글자와 관련된 존재론적 층위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와 용기, 자유로움 등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개념들의 층위와 상호 맞물려지면서 이곳의 내용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모종의 연관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즉 글자의 비유402a-b)(A)와 이어지는 덕들에 관한 언급(402c)(B)은 각기 글자와 덕들을 깨닫는 과정이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에 비추어 볼 때, 내용적으로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상응 관계가 분명치 않은 까닭에 이 내용을 이데아론과 결부시키는 데 많은 논란과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다. 우선 덕들에 관한 언급(B)에서는 덕의 부류들과 그것들 자체, 그리고 그것들의 상이라는 말도 나오고 이어서(402d) 그에 상응하여 혼 안의 성품들과 외모 그리고 그것들이 관여하는 원형이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존재론적인 층위로 구분해 보면, 다분히 실물과 모상, 그리고 이것들에 관여 내지 분유되어 있는 형상으로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즉 이 부분을 이데아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 비유 부분(A)을 보면 여기(B)에서 언급되고 있는 만큼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A와 B 두 부분에서 존재론적 층위에 맞추어 같은 층위에 해당하는 개념들을 대응시켜 보면, 실제 쓰고 읽는 글자는 실물에, 물속이나 거울에 비친 그 실물 글자의 상은 모상에, 그리고 글자(요소 문자) 자체는 형상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A에는 원형 내지 형상을 가리키는 ‘자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형상으로서 글자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B에서는 존재론적 층위에 있어 이데아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들이 다소 명시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B부분을 이데아론을 기초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즉 시가와 현실 여기저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거나 경험되는 덕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과 함께 거론된다는 점에서 덕들의 구체적인 양상들, 즉 덕의 모상들이고, 그렇게 반복되는 상들에서 추상된 일반적 덕목들은 개념지로서 덕목들이며, 그것들 자체는 일반적인 덕목들 배후에 있는 본질이자 형상으로서의 덕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어지는 언급에서 나타나는 외모와 성품, 그리고 원형과도 큰 어려움 없이 짝처럼 서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외모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무규정적 성격의 모상이고, 영혼의 성품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모상의 운동성과 원형의 존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즉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이며, 원형은 그것에 관여되어 있지만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형상으로서의 자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명할 때 많이 쓰고 있는 관여metexis라는 말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B부분에서도 ‘덕들 부류’라는 표현에서 ‘부류들’eidē이 가리키는 것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일반적인 ‘개념적 차원에서의 덕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들이 들어 있는 것’이 그 ‘부류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이 갈리기 때문이다.(E. Zeller, 박종현 등은 부류들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아예 부류라는 말을 형상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에 이견을 갖는 사람들(J. Adam 등)도 많다. 이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선 이데아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제7권에 들어가기 한참 전인 이 부분에서 전후 맥락상 아무 시사도 없이 그 중대한 이데아론을 꺼내놓는다는 것이 뜬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러한 주장은 이곳에서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과 글자의 상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절제 등 그런 부류들에 들어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을 깨닫는 것’이 모두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언급(402b, 402c)과 내용적으로 상호 모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라는 말을 이데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플라톤의 그 말은 플라톤 자신 어떤 대상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다름 아닌 그 대상의 상에 대한 반복적인 식별 훈련 내지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의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란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경험과 수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야말로 순수한 지성적 직관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는 중요성과 그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는 문맥으로만 이해해야 하며, ‘자체’라는 말도 그 연장선상에서 모상에 대비되는 실물의 의미 그 이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야 또 B부분의 내용과 A부분의 내용이 플라톤의 의도대로 서로 모순 없이 서로 동일한 내용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 말대로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수련과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비록 의미상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긴 할지라도, 인간의 인식 과정에서 하물며 플라톤에게서 조차 과연 그것들이 전혀 별개의 단계로 서로 단절되어 있는지는 그들 입장의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마치 물을 끓이면 어느 순간 액체 상태가 기체로 변하듯이 그 상태 자체는 별개의 것으로 규정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현상이 드러나는 이행과정 자체는 하나의 연속을 이루고 있다.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 역시 어느 순간 전후맥락 없이 별안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승이 피나게 힘든 고행 끝에 어느 순간 깨달음에 이르듯이 끊임없는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피나는 사유와 성찰 그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자의 비유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덕의 식별과 관련한 언급들을 같은 선상에서 풀어서 비교하자면,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 등은 소수의 글자들(알파벳) 같은 부류들이고 시가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것들의 모상이고 시가는 글(단어 혹은 센텐스)에 해당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글자에 대한 앎은 점차 글로 이루어진 시가를 읽는 능력으로 발전하고, 시가를 읽으면서 내용에서 획득되는 개별 덕들에 대한 앎은 종국적으로 시가가 담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깨달음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은 실물 글자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가를 익히는 기초가 되면서 종국적으로 시가의 본질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부류-자체 그리고 외모-성품-원형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 역시 감성 교육 단계에 이어 앞으로 수행될 과학교육,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철학교육의 단계 및 그것들에 상응하는 교육 대상들을 함축하기 위해 끌어들인 구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앎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논의된다. 모상을 아는 것이건 원형을 아는 것이건 모두가 동일한 전문 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은 아마도 참된 지식의 체득과 관련한 이러한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 부분이 이데아론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 아무려나 모상에 대한 지각과 원형 자체에 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 자신이 그것들을 동일한 전문지식과 기술적 수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론적인 영역에서건 실천적인 영역에서건 그의 철학 내지 철학함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야말로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의 부류들,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 모두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글자를 익힘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논의 전개과정에서 점차 드러나겠지만 그가 설계한 교육의 단계와 그것들이 총체적 통일성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교육의 단계를 감성 교육의 단계, 과학 교육의 단계, 철학 교육의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비록 감성 교육에 대한 과학 교육, 지성 교육의 우위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과학 교육이나 철학 교육 모두 감성 교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식별을 위한 반복적인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란 단순히 선천적으로 지성적 소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더해 크건 작건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기술적 수련을 반복하면서 공력을 쌓아가는 사람, 그렇게 해서 그야말로 자신의 삶 자체를 최상의 예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402d-403c]

* 이에 글라우콘은 어떤 사람이 영혼에서 어떤 결함이 있다면ἐλλείποι 그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결함이 신체적인 것τι κατὰ τὸ σῶμα이라면 그는 참고서ὑπομείνειεν 기꺼이 반기려 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그러자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듣고 글라우콘에게 신체에 결함이 있는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있거나 있었던 것이라고 지레 짚어 말한 후 그의 말에 동감을 표하면서 절제σωφροσύνῃ와 과도한 쾌락ἡδονῇ ὑπερβαλλούσῃ 사이에 공통점κοινωνία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쾌락이 고통λύπη 못지않게 사람을 얼빠지게ἔκφρων 만드는 것인데 무슨 말씀이시냐고 반문한다.(402e) 이에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쾌락과 그 밖의 덕ἀρετῇ들은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오만함ὕβρις과 무절제(방종)ἀκολασία와는 아주 잘 어울리며 성적인 쾌락ἡδονὴν τῆς περὶ τὰ ἀφροδίσια보다 더 크고 짜릿하고ὀξύς 광적μανικός인 쾌락은 따로 없음을 서로 확인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랑ὁ ὀρθὸς ἔρως이란 시가를 알고 절제를 갖춘 사람답게 단정하고κόσμιος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인 한, 올바른 사랑을 그 어떤 광적이거나 무절제 같은 것에다 갖다 붙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403a)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ἐραστής와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서로 올바르게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면 결코 그런 쾌락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아래와 같이 입법해야νομοθετέω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소년을 사랑하는 자가 소년 애인을 설득할 때는ἐὰν πείθῃ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χάρις로 사랑하고φιλεῖν 같이 지내며συνεῖναι 어루만져야ἅπτεσθαι 하며 그밖에 다른 일로도 그 이상의 관계로 보이지 않는 선에서 상대와 사귀어야 한다ὁμιλεῖν.(403b)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시가에 무지하고ἀμουσία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ἀπειροκαλία으로 비난ψόγος을 받게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관한 논의ὁ περὶ μουσικῆς λόγος가 끝맺어야 할 곳에서 끝맺음을 본 것 같다고 말하고 아마도 ‘시가의 문제’τὰ μουσικὰ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τὰ τοῦ καλοῦ ἐρωτικά로 끝나야만 할 것 같다는 말로 376e부터 시작된 시가 교육에 관한 긴 논의를 모두 마무리 한다.(40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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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영혼 속에 있는 성품과 외모 그리고 원형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들이 원형에 관여하고 있다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고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글라우콘은 자기는 신체적 결함이 있더라도 영혼이 온전하면 참고 사랑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외모가 떨어지는 소년과 소년애 관계에 있음을 내비친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를 의식해서 지레 변명하듯 나온 고백일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 소년애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을 입법해야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당시 육체적 관계를 당연시 했던 소년애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올바른 소년애란 육체적인 쾌락과 무관한 것이며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로 사랑하고 같이 지내며 어루만져야 하며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향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철저히 물리치면서 오직 철학적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실제로 <향연>에서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지혜를 향한 에로스의 치열한 여정을 아주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205e-212a)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마치 불가의 수도승이 교(敎)와 선(禪)을 아우르며 치열하고도 고뇌에 찬 구도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극적 희열과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듯이 시가의 문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고 그러한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문제, 즉 철학의 문제는 ‘지혜에 대한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 한편 사람들은 종종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의 의미를 이와 같은 소년애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으로 잘못 한정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토닉 러브’는 육체적 관계 자체를 부정하느냐 않느냐에 상관없이 다만 사랑은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간에 ‘지혜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플라토닉 러브는 앞서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 즉 철학인 것이다.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는 진정으로 그것을 열망하는 한, 육체적 쾌락조차 절제의 덕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혜를 고양하는 동력의 하나로 승화된다.

* 이로써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전개되었던 시가 교육에 관한 논의가 시가 교육의 목적과 관련한 논의를 끝으로 모두 마무리 되고 이어서 체육 교육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

 

<참고> 이 글은 3월 19일 새벽에 처음 올린 글의 일부를 고쳐 3월 19일 밤에 다시 올린 것이다.


 

내가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자본론 에세이1) [내가 읽는 『자본론』]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세 명의 대학생이 『자본론』을 읽기 위해 모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자본론』을 읽으며 더 선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앞으로 『자본론』을 읽으며 읽은 내용이나 이들에게 남은 살아있는 얘기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남기려한다.

 

 

내가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모든 일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나는 2008년에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교실 앞에 앉아 우리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셨고, 우리의 시험은 우리만의 동화를 써서 내는 거였다. 이렇듯, 맨날 숲에서 뛰어놀고, 흙 놀이를 하며 나무를 타다가 한국의 초등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첫 중간고사 광경은 나한테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험을 볼 때 우리는 가림판을 책상 가운데에 세워놔야 했고, 옆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셨다. 시험은 아주 엄격한 일종의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복도에서 쉬고 있는데, 그 당시에 제일 친하게 지냈던 지희가 내게로 왔다. 지희는 배실배실 웃으면서 “보경아, 우리 같이 63빌딩에서 뛰어내릴래?”하고 물어봤다. 깜짝 놀라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중간고사를 망해서 그렇다고 한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했던 그 친구의 말과 표정은 아직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겨우 12살이었다. 우리 사회에 뭔가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쉬는 시간에도 수학의 정석을 푸는 애들을 보면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같이 어엿한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독일의 친구들은 수영을 배우고, 숲으로 현장학습을 나가며 시 쓰는 법을 배우면서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한국의 나는 의자에 꼭 붙어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떨어지는 순간 엄청난 공포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불안함과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맞물리면서 친구들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노트필기 하나 보여주지 않는 치사함, 등수와 내신 등급에 대한 사소한 거짓말들, 그리고 질투가 다분했다. 제일 친했던 친구는 나한테 “너 그렇게 살다가 좋은 대학 못가.”라는 말을 밥 먹듯 했다. 나는 공부를 못해서 돈을 내고 방과 후 수업을 들어야했는데, 어떤 아이들은 ‘특별반’에서 심화 수업을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본 아이들은 지쳐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섞이면 왠지 당당하고 반짝였다. 저렇게 똑똑해져만 가는 친구들을 언제 따라잡나 싶었다. 정말 내 인생은 망하게 될까? 전교 135등이라는 내 등수는 지지리도 나를 괴롭히고 우울 속으로 몰아넣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도 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다. 어른들은 일하느라, 친구들은 공부하느라 바빴다. 모두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듯했다. 외로웠다.

 

  고등학교는 혁신학교에 다녔는데, 사실 학교가 나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혁신학교가 내가 원했던 고등학교가 아니어서(나는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어 고등학교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배정표를 받을 때 친구들과 함께 엉엉 울고 난리를 쳤다. 거짓말 안 하고 그 학교에 배정받은 모든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졸업식 때는 슬퍼서 울어야 하는데, 우리는 중학교 3년이 끝나는 걸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걱정만 했다. 그 당시 설립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던 혁신학교는 날라리들이 많고 공부 못하는 애들만 가는 학교라서 거길 가면 인생이 망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입학생들이 1년 내로 전학을 갔다. 하지만 첫 수업시간, 사회과목 선생님께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들고 오셨다. 사탕을 하나하나 까서 학생들 입에 넣어주셨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보자.’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나는 혁신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에는 종이 위에 찍히는 성적표 말고도 중요한 가치가 많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NGO 동아리에 들어가서 공정무역과 시민단체에 대해 배우며 따뜻한 가슴을 배우지 못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다른 모든 것들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예쁘다는 것도 배웠다. 학교에서 ‘날라리’라고 낙인찍어 소외시키는 애들은 그 누구보다 생각과 고민이 깊은 아이들이었다. 한 친구는 종이를 별모양으로 오리더니 “너는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적어서 나에게 줬다. 그 별은 아직도 내 일기장에 붙어있다. 공부를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선생님들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한 학생이라도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정말 많이 노력해 주셨다. 그 덕에 학생들도 나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놀았다. 옆 학교가 소위 ‘좋은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의 이름만 현수막에 내걸 때, 우리 학교는 전교생의 이름이 적힌 거대한 무지개색깔 현수막을 달고 졸업식을 진행했다. 졸업식 때 하는 수상도, 전교생이 각자 하나의 상을 받을 수 있게끔 기획했다. 나는 ‘미스코리아상’을 받았다. 예뻐서가 아니라 세계를 평화롭게 하라고.

팽목항 세월호 리본, 출처: pixabay

  나의 학창시절이 이대로만 마무리되었다면 아마 『자본론』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4월 16일,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세월호가 침몰했으나 전원 구조됐다고 했다. 안심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주로 희생된 사람들은 동갑내기 또래들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가 제시하듯 그 어떤 구조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통신내용 조작도 이루어졌으며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부재했다. 이마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에 관심을 두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슬펐을 뿐이고, 구조되지 못했던 게 아니라 구조되지 않았던 것이기에 분노했을 뿐이다. 가슴이 아픈 사람들이 좌파라면, 나는 기꺼이 한 명의 좌파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내 삶과 모든 가치관을 540° 뒤집어 놓았다. 그 이후로 나는 삐딱해져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호 사건은 내 마음에 일종의 공포심과 조급함을 심었다. 이것 때문에 때로는 숨을 제대로 쉬는 것도 힘들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정부가 보인 모습들, 그리고 사회의 일부가 취한 행동들(일베의 어묵 먹기나, 폭식 투쟁, 어버이 연합의 시위와 같은)은 17살 머리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루는 광화문 광장을 지나가다 한 무리가 작은 집회를 열고 있기에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나보다’하고는 가까이 가서 봤는데 어버이 연합이었다. 그 사람들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유가족들에 대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절 팔을 45도 위로 쭈욱 뻗더니(나치가 연상되었다), 함께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눈에 보이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미어졌다. 자식이 있어 본 적 없는 나도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아프지 않은 걸까.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는 순진했다. 지금이야 그런 장면들을 마주칠 때 그러려니 하고 말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애니메이션 같은 데서 보면 푸르른 하늘과 녹음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이 마녀의 저주에 의해 회색으로 변하고 식물들이 죽어 나가는 장면들이 있다. 나에게 세월호 사건은 그런 사건이었다. 삶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건을 겪으니까 그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용 자동차 부당해고 사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월세를 못 내, 그것도 자기 피붙이들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고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전쟁 난민과 아파도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수치화되는 중요한 모든 무형의 것들, 교육을 둘러싼 허무한 정치적 싸움들, 사회가 손을 잡아주지 못한 사람들을 봤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정당화시키는 정치를 봤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 대해 ‘왜?’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왜 우리의 삶은 이 모양인가?

 

  어처구니없는 이 사회를 만들어낸 원인들은 여럿이 있겠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목격해 온 불행의 파편들에 대해 고민하면서 내가 어렴풋이 내린 커다란 결론은 ‘자본주의사회’였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이토록 고독해지고 치열한 삶을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교육의 문제, 노동의 문제, 불평등의 문제, 복지와 권리의 문제, 심지어 인간의 외로움마저 모든 것은 결국 자본과 연결되었다. 화폐로 인해 우리 삶은 풍요롭고 간단해졌지만, 그것은 점점 거대해지면서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들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지금 우리의 세상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장밋빛 혁명을 꿈꾸기도 했다. 혁명은 쉬워보였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나오는 것처럼 수천 명의 학생을 모으고 서울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세우자. 대학에 들어가면 운동권에 들어가서 자본주의와 불평등 교육의 뿌리를 뽑고 사람이 아프지 않은 사회를 만들자! 이렇게 다짐했다. 정말 쉬울 줄 알았다. 물론 그때 내가 마르크스에 대해 아는 거라곤 사실 ‘자본’ 그리고 ‘혁명’과 같은 키워드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마르크스를 사랑했고, 마르크스가 알고 보니 아주 추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스스로 자신은 ‘맑시스트’가 아니라고 했고, 대학에 다니면서 맑시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허세 가득한 얼간이라는 걸 알고 실망하긴 했지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제를 잘 파악하는 게 1순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고 『자본론』을 정말 읽기 시작했다. 『자본론』을 손에 잡은 것은 가슴이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한 발악이자, 이걸 읽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이었다.

 

  지금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에 찌든 대학생일 뿐이다. 세상을 바꾼다고 대학에 왔지만 오히려 그 세상과 점점 괴리되는 아이러니도 겪는 중이다. 머리에 든 건 많아졌지만, 무기력도 그만큼 일상이 되었다. 배운 대로 살기란 쉽지 않다. 공부는 심지어 이가 알 낳듯, 마음에다가 얄궂은 오만을 낳는다. 게다가 무뎌진 탓에 ‘세상이 정말 그렇게 잘못됐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의 통증이 이젠 식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짜 사랑은 강렬했던 첫사랑 이후의 잔잔한 바다와 같은 사랑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도 그렇다. 마르크스가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치밀하게 분석했던 자본, 그런 그의 사투에서 나는 여전히 작은 희망을 본다. 고민조차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사이에는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자본이 증식하는 속도나 방법들은 변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비집고 들어와 일상을 미묘하게 지배하고 있는 방식은 비슷하다. 그 연결고리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고, 이것들을 알아가면서 비록 내가 혁명은 일으키지 못할지언정 나의 삶과 내 주변은 바꿔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 뭉뚝하되 꾸준한 가슴으로.

열 번째 시간, 두려움: 어둠을 지날 때 [시가 필요한 시간]

열 번째 시간, 두려움: 어둠을 지날 때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요즘 서로 거리를 두어야만 하고, 불필요한 외출도 삼가야만 하는 유례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민하고 불안하죠. 매일 TV와 신문을 뒤덮는 뉴스들에 촉각을 세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무래도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두려움에 정복당하지 않고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될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바로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프로필을 찾아보시면 시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데요, 박노해 시인은 군사정권 때에 반국가단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98년 김대중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서 석방된 시인입니다. 그 이후 시인은 시집 출간을 뒤로하고 약 12년 동안 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현장을 돌면서 사진과 시를 남기는 활동을 시작했고, 그 시들을 모아서 12년 만에 신작으로 출간한 시집이 바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제목의 시집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시는 동명의 시집에 실린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입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트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네, 박노해 시인의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들어봤습니다. 메시지의 울림이 큰 시죠. 시인이 직접 경험했던 사건을 시로 표현한 것이어서 그런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인 산속을 혼자 가고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볼까요? 앞도 잘 보이지 않아 두려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내딛는데, 저 멀리서 작은 불빛이 하나 나타난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쁠까요?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던 찰나에 나타난 불빛은, 아무리 작고 희미하더라도 그 순간 그 어떤 빛보다도 더 강렬하고 강력한 생명의 빛으로 다가올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어둡고 두려운 때가 분명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코로나19사태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겪어왔던 어떤 인간관계의 문제, 학업의 문제, 취업, 경제상황, 가정문제 등 답답한 사건들 앞에서 ‘내 인생은 왜 이렇지?’ ‘난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지?’ 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누군가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또 누군가는 자신감이 부족해서 등등, 각자 자신의 능력의 한계점을 만나고, 그것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암흑과도 같은 상황을 만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당장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어둠, 나를 짓누르는 그 커다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내게 필요했던 것이 결코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었음을, 그저 작은 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눈 앞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그런데 우연히 등불을 들고 그 길에 있었던 케로족 청년은 자신의 등불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될 줄 알았을까요? 아마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청년의 불빛은 겨우 주변 1미터 반경 정도만 밝힐 법한 희미한 호롱불에 불과했죠. 호롱불을 가지고 숲의 어둠을 다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어쩌면 케로족 청년도 덜덜 떨면서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년이 그 등불을 갖고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한 사람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가 2017년이었는데요, 한국에서는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이 벌어지고 있었고, 당시 저는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호주와 비교되는 비효율적이고 공평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사회 시스템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들던 차에, 국정농단 사건까지 터지면서..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실망하고 절망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시를 읽고 스스로 많은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큰 메시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었죠.

여러분은 이 시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으셨나요?

저는 이번에 다시 한 번 이 시를 읽으면서, ‘나의 등불’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등불’이란 뭘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볼 때, 나의 ‘지식’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진 ‘물적 재산’, 나의 ‘경험’, 혹은 나의 ‘능력’ 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 ‘내가 맡은 어떤 사명’이라고 생각해 볼 때, 각자가 맡은 직업이나 역할, 각자가 지켜야 할 규칙이 될 수도 있겠죠. 내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이 보잘것없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내 자리에 서 있을 때, 케로족 청년의 ‘희미한 빛’이 박노해 시인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준 것처럼, 나의 작은 ‘등불’이 어둠 속에 두려워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이 시의 표현처럼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 만약 여러분이 희미한 등불로라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서 있는다면, 끝내 꺾여지지 않을 한 사람으로 존재해 준다면, 바로 여러분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우리의 희미한 등불은 어둠을 이길만한 넉넉한 빛이 될 겁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말합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대가 아무리 작은 불빛이더라도.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나의 등불이 희미해 보이나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자리에서 나만의 등불을 밝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등불을 밝히십시오. 여러분의 불빛이 어둠에 갇혀있는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요 생명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이 시기에, 서로를 향한 격려와 사랑의 말을 건네는 것도 칠흑 같은 어둠에서의 밝은 불빛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만큼,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관심과 격려를 더 쏟아야 하지 않을까, 더욱 열심히 전화와 메시지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삶은 기적이고, 인간은 신비이고, 희망은 불멸이다! 이 시의 메시지 기억하시면서, 요즘처럼 응원이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한 시기에 곁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이 시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연주곡을 하나 가져왔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입니다. 레비 파티(Levi Party)의 <아픔을 지날 때>라는 곡인데요, 반노네온 연주자인 고상지 씨가 함께 협연한 곡이기도 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어둠을 지날 때’ 만났던 작은 빛처럼, 지금 혹여 아픔을 지나고 계신 분들, 어둠을 지나고 계신 분들 계시다면, 이 곡이 그 분들께 작은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듣고 싶습니다. 그럼, 저는 2주 후에 또 다른 시와 음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힘내시고, 건강 유의하세요!

 

레비 파티 – 아픔을 지날 때https://youtu.be/qopL0sBi60g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벤야민과 만화 – 폐허 산책하기 1편: 서론. ‘유시민/진중권’과 ‘웹툰 <덴마>’라는 새해의 두 폐허와, 역사의 두 천사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 – 폐허 산책하기 1편: 서론.

‘유시민/진중권’과 ‘웹툰 <덴마>’라는 새해의 두 폐허와, 역사의 두 천사 2020.02.29.

 

이상하(한철연 회원)

 

1.

누구나 1월 1일 새해엔 또 좋은 일이 있을 거라 믿으며 ‘해피 뉴 이어’를 외치고 새해의 소원을 비는 신성한 제의를 하기 마련이다. 이제 2020년이라는 나름 기념비적인 새해가 찾아온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나가고 있고, 이젠 운동이든 공부든 무엇이든 새해에 빌었던 소원과 결심이 다소 흐트러지거나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즈음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올해에 새해 소원이 무너지거나 포기할 일 자체가 없었다. 내가 마음을 굳건히 먹고 소원을 달성키 위해 온몸으로 실천해서가 아니라, 새해 첫날부터 황량한 두 폐허를 목격하게 되면서 새해에 대한 희망이나 소원 자체를 가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칫 올해도 소원 따위 마음먹고 기대해봐야 마음만 다치고 작년과 비슷하게 뻔한 반복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공포심리가 악몽같이 나를 짓누른 것이다.

이렇게나 나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 새해 첫날의 두 폐허란, 첫 번째로 새해기념 ‘100분 토론’이었다. 유시민과 진중권은 한때 나뿐만 아니라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고 실천하려는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진보의 아이콘으로 여겼던, 아니 더 과격하게 말해서 진보적 시민들의 아이돌이었다. 유시민의 책 『거꾸로 보는 세계사』나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어린 시절에 읽고서 세상을 기존 시점과 좀 다르게 봐야겠다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던 사람들이 한국에서 수십만 명 이상일 것이고, 그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독서 시장에서도 유시민과 진중권의 신간을 소비해 왔다. 그러나 한때 같은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노유진의 정치카페 같은 인기 팟캐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던 이 대중 지식인들은, 작년 조국 사태에서부터 완전히 갈라섰다. 물론 여기까지는 수많은 운동과 진보의 역사를 두고 보면 그리 특별할 일은 아니다. 같은 정당이어도 정파는 다를 수 있고 추구하는 노선은 당연히 더더욱 다를 수 있으니까. 분열은 어쩌면 진보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기에.

허나 이 유시민/진중권의 갈등이 극에 달해 폭발한 새해 토론은 이 둘의 갈등이 진보 운동의 노선 차이나 목표하는 이상의 차이와는 다른 것임을 명백히 드러냈다. 한때 자기 소속 정당의 보수성에 비판과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고, 국회에 정장이 아닌 청바지를 입고 입장하는 파격으로 신선했었던 정치인 유시민은 이제 죽었고, 남은 건 오로지 노무현-문재인 계파의 돌격대장 또는 대변인으로서 자기편에 불리한 건에 대해선 침묵하거나 감추기 급급하고 자기 외의 다른 편은 다 나쁜 놈이라는 진영논리의 함정에 빠져버린, 자기 자신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어용 지식인의 한계를 유시민은 낱낱이 보여줬다. 진중권 또한, 10년 전에는 영화 <디 워>에 대한 비평 논란이나 황우석의 거짓 논문에 대한 폭로 국면에서 수많은 국민이 자신을 비난하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지속하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의 일이 아닌 일에도 옳지 않다며 참견하는 지식인’다운 일기당천의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이 새해기념 100분 토론에서 보여준 진중권의 모습은, 교수라는 직위와 기득권을 억울하게 빼앗겼다면서 자신을 비판한 대중을 그저 스스로 생각 못 하는 홍위병으로 몰아붙이고 비하하는 엘리트주의자의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토론 도중에 상대방 말 끊기를 하는 등 기본적인 매너도 최악인, 그야말로 이게 토론인가 싶은 황량한 폐허를 새해 첫날부터 목격해버렸다. 그리고 이 첫 번째 폐허에서 난 평소 안식 또는 구원으로 여겨온 만화의 세계로 도피하려 했으나, 곧이어 네이버 웹툰에서도 또 하나의 망한 댓글의 잔해로 가득한 폐허를 보았다. 바로 10년간의 연재 끝에 완결 없이 완결 나버린 양영순의 웹툰 <덴마>에 대한 이야기다.

 

 

2.

나의 이 두 폐허라는 감상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분들도 있을 듯하다. ‘유시민과 진중권은 한때 한국의 진보, 대중 지식인의 아이콘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양영순과 <덴마>가 무슨 한국의 문화 예술계의 상징도 아니고, 만화계의 대표라고 말할 정도의 위상인가?’라고 말이다. 90년대 한국에서 서태지를 문화 대통령이라 대중과 언론에서 호명하고, 2000년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걸그룹 춘추전국의 시대를 연 것 같은 영향력과 대표성을 만화계에서 양영순이 가진 적이 있었던가? 물론 양영순의 <덴마>는 단 한 차례도 네이버 요일 웹툰 안에서도 1위를 한 적도 없고 단행본이나 신문연재 부수로 무슨 붉은매처럼 백만 권을 판 전적도 없다. 그러나 유시민과 진중권 또한 이 보수적인 한국 정치판에서,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책에서 말하듯 국가의 기원부터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보’의 대중적 상징으로 성장하고 널리 활용되었듯이, 양영순도 데뷔작인 성인만화 <누들누드>부터 최근의 스페이스 오페라 <덴마>까지 마이너하고 파격적인 만화 분야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세게 말해 본다면, 일본 만화체의 아류 또는 표절작이거나 한번 보면 두 번 다시 볼 생각이 안 드는 진부한 학원물로 차고 넘치는 이 한국 만화-웹툰계에서, 스타워즈 시리즈같이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마이너 장르로 무려 10년의 장기연재를 해온 양영순에게 나는 무조건적 지지와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방탄 소년단에게 팬덤 아미가 있듯이, 나는 열성적인 양영순의 팬덤, 이른바 ‘덴경대’란 이름의 열성적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덴마> 작중에 등장하는 ‘백경대’라는 일종의 중세 유럽 영주의 기사 같은 경호원 집단을 패러디한 ‘덴경대’ 독자들은, 양영순 작가의 연재 지각이 계속되자 독자들 스스로 웹툰이 업로드되면 즉시 알려주는 덴경대 어플을 만들기도 하고, 연재 말기에 작가가 그리기 어려운 단체전투 액션 신을 스킵 해버리자 자신들이 직접 액션 신을 그려서 팬사이트에 올리기도 하는 등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생비자(prosumer) 개념으로 진화하여 2차 창작을 즐기는 충성스러운 독자들이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도 웹툰계에서 일종의 컬트 집단이 된 덴경대는 괜히 다른 웹툰 댓글에 가서 이런 수준 낮은 만화 말고 깊이 있는 양영순의 <덴마>를 보라고 무리한 영업을 하는 등 흔한 팬덤의 부작용도 있었지만, 마치 BTS의 팬덤 아미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2차 창작을 통해 방탄소년단의 음악과 메시지를 전 세계에 공유하고 전파하듯, 분명 한국의 웹툰 소비자들이 진화하고 있다는 명확한 풍경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양영순의 무리한 스토리 진행 및 그동안 깔아둔 수많은 떡밥, 복선에 대한 아무런 수습도 없는 무책임한 완결 덕분에 이 수많은 충성스러운 팬덤 백경대는 완전히 극한의 안티로 돌아서게 되었고, 이제 <덴마>의 댓글란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댓망진창으로 가득하여 하나의 거대한 폐허더미가 되고 있다. 이 또한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상품에 대해서 그저 무시하거나 소비를 중단하는 것이 아닌, 더 적극적으로 소비 파업, 불매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고 한 어떤 소설 제목처럼, 양영순과 <덴마>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물신’처럼 여겨지며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될 정도로 고평가되었던 만큼 퇴락도 끝이 없는 무저갱처럼 지하의 지하로 떨어졌다.

 

 

3.

지금 시대에 그다지 좋지 않은 비유일 수 있지만, 나에게 이 두 폐허의 풍경은 마치 한때 너무나 사랑했던 첫사랑을 사창가에서 스치듯 다시 만난 듯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단순히 양영순 혼자만의 과실일까. 물론 양영순은 무책임한 작가로서 자신을 믿어준 독자들에게 백번 사죄해야 마땅하지만, 나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 생각하지 않는다. <덴마>의 이 형편없는 폐허 같은 완결은 현재 네이버 웹툰을 비롯해 퇴락하고 있는 한국 웹툰계에 대한 하나의 징후 또는 증상이 아닐까. 더이상 신선하면서도 깊이 있는 신작이 나오지 않기에 그저 수익을 위해서 기존의 인기작가를 휴재 후 미리보기 유료연재를 하라고 쥐어짜거나, ‘신과 함께’나 ‘치즈 인 더 트랩’ 같은 예전에 인기 있던 명작을 재연재하는 네이버웹툰. 이는 덩치만 공룡같이 커지고 전 세계로 수출 중이라 자랑하는 이 한국 웹툰계가 내부적으로 매우 부실해졌다는 상징적인 증상이 아닐까 나는 의심해본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웹툰계만의 일이었나 거꾸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나 음악 같은 문화 계열뿐만이 아니라 한국경제와 정치야말로 새천년의 지난 20년간 과연 무엇이 새로웠던가. 계속 재탕에 삼탕은 아니었나.

노무현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씁쓸하게 발언한 이후, 부동산 토건 귀족과 재벌 대기업 위주의 한국경제는 정말이지 구조적으로 전혀 변하지 않았고, 한국의 정치 또한 지역주의 정서와 구도는 여전하고 정치인-국회의원을 나를 잘먹고 잘살게 해주는 일종의 먹고사니즘 메시아로 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한국이라는 총체적 폐허 속에서 상념에 잠기다가 이쯤 되면 니체의 철학 개념 중 하나인 영원회귀에 대한 가장 비관적이고 악몽스러운 해석이 떠오른다. 수십만 년이 지나도 이 세계는 눈곱만큼도 변하지 않고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도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삶이란 그저 반복일 뿐이고 어떠한 노력도 실천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미래를 바꾸지 못한다는 극한의 허무주의적 해석이 나를 새해 첫날부터 악몽처럼 짓눌렀다.

그래서 나는 이 반복되는 악몽으로부터 또 한번 도피했다. 새해 정치 토론쇼에서 나의 위안이자 구원이었던 만화의 세계로 도피했듯이, 또 다른 구원이었던 도서관, 독서의 세계로. 그 와중에 우연치 않게 새해의 첫 독서로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의 유언장이자 역사철학이 담겨 있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등 몇 권을 읽었다. 물론 번역서였음에도 그 내용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 권의 해설서를 같이 읽게 되었다.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와 한상원 선생님의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이 두 권의 해설서를 통해 벤야민 속을 이리저리 산책하고 방황하면서, 나는 그저 망해버린 폐허라고 생각했던 새해 첫날의 두 풍경이 그저 폐허나 악몽인 것만은 아니겠다고 다시금 생각해봤다. 이것이 이 글을 시작한, 씁쓸하나 희망적인, 매우 개인적 감상이 많이 첨가된 서론, 첫 시발점이다.

김진영 지음,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포스트카드, 2019. 사진출처: https://image.aladin.co.kr/product/18013/59/cover500/k072534740_1.jpg

 

 

4.

“역사의 시간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근거없는 천박한 낙관주의와 공허하고 무책임한 허무주의를 넘어,

미래의 구원(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정당화하고

망각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망각에 저항하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로 ‘도약’하려는 ‘몫 없는 자들’의 서사를 재구성하려는

역사철학의 가능성은 어디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는가.”

― 한상원 저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뒤표지 중에서.

 

“역사가는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가져와 점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빼앗긴 전통을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래의 내 아이들의 얼굴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얼굴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 김진영 저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뒤표지 중에서.

 

벤야민 같은 특유의 통찰력과 흡입력 있는 문장, 게다가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의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인기 많은 스타 철학자에겐 번역서 못지않게 한국의 해설서도 수십 권이 나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두 권을 고르게 된 것은 이 뒤표지의 문구 덕분이다. 누구나 연말에는 자신을 자책하며 이제 과거는 잊자고 다짐하고, 연초 새해에는 미래엔 새로운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쉽게 기대한다. 하지만 새해 첫날에 이제 뭔가 좋은 기대를 품으려고 하자마자 내가 보게 된 것은 한때 내가 10년 전부터 오래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 몰락한 두 거대한 폐허였고, 난 그것들을 이젠 떠나보내고 잊어야 하는지 스스로를 책망하며 크나큰 실망으로 가득 찬 1월을 보냈다. 허나 그건 한상원이 꼬집듯이 근거 없고 천박한 낙관주의와 무책임한 허무주의라는 미래에 대한 두 극단을 내가 겨우 24시간 만에 왕복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진정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과거를 그저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을 따라서 망각에 저항하는 회상의 기억 투쟁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로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폐허 속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희망의 불꽃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한상원은 이렇게 역사철학이라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희망을 불러오기 위해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의 서문 격인 ‘들어가며’에서 ‘역사의 두 천사’를 불러온다. 한 천사는 우리가 흔히 아는 불사의 존재이며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묘사한 ‘거룩한 천사들’이다. 세속 국가에 사는 인간은 언젠가 신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원한 미래를 향하는 거룩한 천사의 시선을 따라 현재의 고통과 수난을 끝없이 감내해야만 한다. 왜? 이 고통과 수난들은 신의 왕국이 지상에 도래하는 최후의 순간, 종말의 순간이 오면 모두 보상받거나 가혹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한번 지나간 사건은 다시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지 않고 오로지 미래를 향해서 직선적으로 운동하는 이 기독교적 종말론의 시간관은, 천 년 전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립해놓은 역사의 원칙이지만 2020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오히려 굉장히 친숙한 관점이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하니까 힘든 지금의 수험생활을 참아야 하고, 좋은 직장에 가야 하니까 사랑도 취미도 접어둔 채 취업에 올인해야만 하고, 미래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저축과 대출을 하고 뼈 빠지게 수십 년간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의 시간에 대한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딱 백 년 전 1920년에 그려진 또 하나의 새로운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와 그에 대한 벤야민의 해석은, 오히려 천 년 전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보다 훨씬 지금의 우리들에게 낯설고 신선하며, 또한 두렵게도 느껴진다.

한상원 지음,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에디투스, 2018. 사진출처: https://image.aladin.co.kr/product/13141/90/cover500/k212532405_1.jpg

 

5.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불리는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한 천사가 묘사되어 있는데, 그는 그가 응시하는 것에서 멀어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눈은 찢어져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얼굴을 과거를 향해 돌린다. 사건들의 연쇄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곳에서, 그는 폐허들로 뒤덮여 있으며 이 폐허들을 그의 발 앞에 쌓아놓는 유일한 파국을 본다.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파괴된 것들을 모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사의 날개를 사로잡은, 그가 날개를 닫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폭풍이 천국으로부터 불어온다. 천사 앞에 있는 폐허의 더미가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쌓여가는 동안, 이 폭풍은 그의 등이 향하고 있는 미래로 그를 끝없이 몰아넣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폭풍이다.”

―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중에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22∼23쪽, 한상원 번역.

파울 클레(Paul Klee)가 1920년에 그린 이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 새로운 천사를 벤야민은 뮌헨의 어느 갤러리에서 21년에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서 그가 자살하기 직전에 남긴 최후의 글인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서 이 천사의 이미지에 대한 그의 고유한 사유, 시간관을 전개한다. 한상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새로운 천사는 진보라는 미래를 향해 부는 폭풍에 떠밀려서 ‘강제로’ 과거에서 미래로 운동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거룩한 천사가 인간을 신이 있는 영원한 미래로 인도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다. 게다가 이렇게 미래로 떠밀리는 와중에서도 천사의 시선은 과거의 잔해를, 즉 과거 속에서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을 향해있다. 미래로 부는 진보라는 폭풍은 과거로부터 떠나가라고 천사를 압박하지만 천사는 이 폭풍의 망각하라는 압박에 저항하며 하나의 ‘망각의 탈압박’을 시도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분명 우리가 흔히 아는 천사와는 다른 새로운 천사다. 과거의 불의와 수난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을 그저 잊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며 추모하며 이 지옥같이 반복되는 현재를 중단시키기 위한 희망의 불꽃으로 삼는 과업이 바로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가의 일이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서 삼풍백화점이나 세월호 참사 같은 과거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제 그들을 놓아주고 마음에 묻어 주는게 그들과 당사자들을 위한 게 아니겠냐고 되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마치 지금의 ‘역사와 현실‘이 과거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있다는 듯 현실을 은폐하려고 한다.

올해 초 경향신문에서 이슈로 제기한 것과 같이, 한국은 하루에 세 명씩 산업재해로 죽고 있지만 이에 대해선 당사자 가족 정도가 아니고선 모두 망각하고 관심을 두려고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들 알다시피 한국은 자살자가 OECD 국가 중 1위를 다투는 나라지만 언젠가부터 자살은 정말 극적인, 속된말로 팔리는 스토리가 아니고선 뉴스에서 아예 다뤄지지도 않는다. 어쩌면 바로 이렇게 망각 되는 과거에 대해 저항하고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재구성하기 위해서 역사가의 기억 투쟁과 수집 투쟁이 필요하다고, 기자나 역사가, 학자 같은 지식-권력을 독점한 전문가만이 아니라 대중이 누구나 수집가, 역사가가 되어야 하고 진보라는 미래로 부는 폭풍에 맞서서, 자본주의 또는 경제성장이라는 폭주하는 열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당겨야 한다고 벤야민은 말한 게 아닐까.

 

 

6.

흔히 독서란 책에 써진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지만, 벤야민은 앞서 말한 새로운 천사에 대한 사유처럼 반대로 생각했다. 독서란 바로 써지지 않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는 흔히 말하는 행간을 읽어내는 좀 더 수준 높은 독서 만이 아니라, 과거를 망각하려는 폭풍에 천사가 저항하듯 텍스트 안에서 억압되고 고통받으며 망각 된 것들을 읽어내는 시선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한 것은 아닐까. 기존의 역사 교과서에서 광개토대왕이 만주를 정복했다 같은 무슨 왕이 무슨 업적을 이뤄냈다는 그 기록 속에서 누가 희생되었는지 누가 망각 되었는지는 결코 교과서의 글 속에서 말해주지 않는다. 비단 고대사가 아닌 최근의 현대사를 따져보더라도 매우 대표적인 사례가 있지 않던가.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가난을 극복했다고 가르쳐 왔으나 그 경제개발 속에 얼마나 많은 소년공, 여공들의 피땀 어린 희생이 망각 되었는지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너도 지금보다 더 잘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하는 말처럼 더더욱 자기를 위해서 지금의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라는 이른바 노-오력하라는 지상명령에 시달린다.

이렇게 스스로를 사람이라기보다는 ‘인적 자원’으로 여기고 더 높은 연봉,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한 미래라는 꿈을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대다수 한국인들은 IMF 사태 이후 지난 20년간 정말 끝없이 자기 계발을 하고 끝없이 노력하고 끝없이 힐링을 원한 끝에, 피폐해졌다. 지하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광장이나 거리로 나가든 삶의 기쁨으로 충만하고 행복해 보이는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내기란 남녀노소 나이 불문하고 스피노자가 『에티카』 마지막에서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말했듯이 참으로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지금 시대를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은 나뿐 아니라 이미 폐허나 다름없다. 이성복 시인이 이미 30년도 더 전에 ‘그 날’ 시에서 말한 구절을 패러디해보자면,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안 아픈 척 건강한 척 행복한 척만 하고 있느라 더욱 병들고 있는 사실이 엄혹한 한국인들의, 어쩌면 21세기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사는 세계인들의 내적 폐허나 다름없는 현실이 아닐까. 그래서 이 폐허가 된 마음에 새로운 신앙이, 종교가 침투한다.

그리고 폐허란 기본적으로 더이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내다 버려진 공간이다. 글의 앞부분에서 말한 100분 토론 영상의 댓글이든 엉망으로 끝난 웹툰 <덴마>의 댓글이든, 그리고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가 삶의 최선이라 믿고 옆집 사람이 고독사해도 세 달 넘게 아무도 모르는 현대인들의 마음이든, 바로 이 폐허라는 말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기는 힘들 듯하다. 하지만 나는 한상원이 벤야민을 읽으며 아우구스티누스와 파울 클레라는 역사의 두 천사의 이미지를 상반된 것으로 날카롭게 구분했듯이, 유시민과 진중권의 토론 같지 않은 토론과 완결 없는 완결 웹툰 <덴마>라는 두 폐허의 이미지도 구분해서 다르게 접근하는 흉내를, 버려진 폐허들에서 잔해를 줍는 수집가의 태도를 이 연재 글을 통해서 모방해보려 한다. 어쩌면 유시민과 진중권이라는 한때 진보의 대중적 상징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이미 조용히 차곡차곡 묘비를 새길 준비작업으로 산책과 수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들의 오랜 인기와 상당한 팬덤으로 볼 때 그건 재벌 걱정만큼이나 쓸데없는 걱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그쪽 걱정은 할 필요 없이 내가 사랑했던 폐허인 웹툰 <덴마>에 대해서 다시금 산책하고 수집해서 기억을 재구성해본다면 그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벤야민이 남긴 유산, 사유-이미지라는 개념의 힌트에 근거해서 말이다.

 

 

7.

“벤야민은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즉 실제 생활들, 눈에 보이는 것들, 만지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유 이미지가 학문이나 철학의 영역을 외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 자유, 사유 이미지, 이미지 사유이자 변증법적 이미지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 사유가 구체적으로 총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성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그 경제 논리가 아무리 첨예하고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육체성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있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 故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310쪽에서 인용.

분명 벤야민이 그렇게 강조한 대로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망각하라는 폭풍에 저항하며 고통받고 희생당한 자들의 과거를 기억하려는 과업은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유가 단지 사유로만 그친다면 육체를 정신의 감옥으로 보던 플라톤 시절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에서 김진영 선생님이 말씀하시듯, 사유 이미지라는 개념을 통해 사진 같은 새로운 기술을 다뤄서 매체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하는 벤야민은 바로 그런 한계에서 벗어난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구체적 삶 속에서 사유가 행사되어야만 그 사유에 피가 돌고 살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변증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사례는 바로 수많은 터치를 통해 스마트폰으로 감상하고 터치로 나의 감상과 사유를 댓글로 남길 수 있으며 심지어 음악이나 영화와는 달리 수월하게 일상 속에서 2차 창작을 할 수 있는 웹툰이 아닐까.

그 수많은 웹툰 중에서도 분명 미래 우주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가 보아도 비극적인 현대인과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풍자로 가득한 양영순의 <덴마>가 벤야민이 말한 구체성을 가진 사유 이미지의 매우 적절한 사례가 아닐까 나는 감히 이 연재 글을 통해 해석하고 기억해보려 한다. 물론 양영순이 딱히 벤야민을 읽었거나 벤야민의 철학을 자기 작품 속에서 녹여내거나 외부화하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허나 이전 문단에서 벤야민이 말했듯이, 독서란 바로 써지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 달부터 매달 한편씩 <덴마> 에피소드와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연결 짓는 시도를 주로 한상원과 김진영을 참고하면서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1. 덴마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난이라는 행복

      -도피한 삶에서 즐거움은, 행복은 있을 수 있는가?

  1. 덴마 야엘 로드 에피소드와 맑스의 해방서사라는 혁명.

      -해방된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혁명은 더 추진력이 붙는가?

  1. 덴마 더 나이트 에피소드와 벤야민의 반복되는 현재를 중단시키는 지금시간.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끔찍한 현재의 반복을 멈추는 힘은,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이 세 편의 연재 글을 통해서 천천히 이야기할 테지만, 조금 성미 급한 사람들을 위해서 미리 연재 글의 결론을 스포일러 하자면, 두 책의 제목을 패러디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희망은 과거에서, 앙겔루스 노부스-새로운 천사의 시선을 통해서 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