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㉝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376c-d]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성향φύσις을 논한 후 이제 그러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양육τρέφειν되고 교육παιδεύειν받도록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가 장차 전개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나라에 있어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지τίνα τρόπον ἐν πόλει γίγνεται;를 알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령 다소 길어질μακροτέρα 지라도 이에 대한 고찰σκέψις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후 이 사람들을 논의를 통해 교육시켜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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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수호자의 성향이 거론된 후 이제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의 시작을 장식하는 것은 수호자에 대한 교육론이다. 앞으로 수행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 그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본격적인 국가론을 시작하면서 수호자 교육론이 일차적인 과제로 내세워지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어색하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국가론을 다룰 때 우선 논의되는 것은 주로 정부와 권력 구조, 법률과 제도 등 국가 시스템에 대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틀에 박힌 물음이지만 아주 오래된 물음 즉 인치(人治)가 먼저인가 법치(法治)가 먼저인가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론의 시작을 수호자 교육론으로 장식하고 있는 플라톤의 입장은 분명 인치가 먼저라는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치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정치의 핵심에는 법률과 제도 이전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므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법률과 제도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거나 그러한 믿을만한 사람의 주도 하에 만들어지고 운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독재정치의 폐해를 혹독하게 경험한 이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법치 즉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제정된 법률과 제도를 통한 지배만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통치 방식이며 모든 정치 행위 또한 그 법률적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져한다는 생각이 정치적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지금 시작하려고 하는 수호자 교육론은 현대인들에게 시작부터 그 의미가 격하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살아간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생각을 단순히 폄하만 할 일도 아니다. 플라톤은 법률과 제도에 따른 지배가 보편화된 오늘날과 달리 사람에 의한 통치가 당연시되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누가 나라를 통치할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중대하고도 거의 유일한 정치철학적 관심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플라톤 당대에도 법률과 제도가 존재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헌법적 수준의 법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법률 또한 확고한 구속력을 갖는 오늘날의 실정법과 다른 다소 느슨한 관습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치냐 법치냐를 이분법적으로 극단화해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인치의 시대를 살던 플라톤은 물론이고 법치가 기반을 잡은 오늘날에서조차 모두가 동의하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과 제도를 갖춘 나라라고 할지라도 누가 정치권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정치 현실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치와 법치는 상호 배척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라는 데에는 오늘날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피게 될 플라톤조차 크게 이의를 달지 않는다. 실제로 플라톤은 이곳에서는 비록 인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당대의 관습법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법률체계를 토대로 법률의 지배 또한 함께 강조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이곳 <국가>의 논의에서는 인치를 강조하는 관점에서 수호자라는 통치 권력자를 핵심으로 이상 국가론을 펼치고 있지만, <국가> 못지않은 만년의 대작 <법률>을 통해 그는 헌법적 개념을 포함하여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인 입법 과정과 내용을 토대로 인치가 갖는 현실적 한계를 보완함은 물론 법치가 갖는 고유한 중대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전모를 이해하려면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 아니라 <법률>의 논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2) 그러나 일단 이곳 <국가>에서의 논의에서는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무엇보다도 나라를 다스리는 수호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수호자의 성향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을 장차 제대로 된 자질과 능력을 갖춘 훌륭한 수호자로 길러내는 일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론으로 시작된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은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를 밝혀 정의가 왜 부정의보다 나은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찰의 목적에 대한 표현이 조금씩 달라져 오긴 했지만 수호자가 어떻게 길러지고 자라나는가를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가가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가가 함께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다.

3)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논의가 다소 길어질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가>에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차지하는 분량을 보면 다소 길다는 표현에서 우리가 느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우선 바로 이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 부분만 보아도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모두를 합해 이곳 376e부터 제3권 412b까지 이어진다. 이 분량은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35쪽에 가까운 것인데 이 분량은 우리가 제1권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핀 분량(스테파누스 쪽수로 48쪽)의 3분의 2에 가까운 분량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은 수호자를 선발한 후 본격적으로 수호자의 교육이 다루어지기 이전 단계 즉 18세 이전의 아테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일종의 예비 수호자 교육만을 다루고 있다. 이후 제6권과 제7권에 가면 수호자와 통치자를 단계별로 선발한 후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교육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곳의 분량까지 포함하면(502c~541b) 수호자의 교육을 직접적인 주제로 내세워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만 해도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85쪽에 이른다. 이 분량은 <국가> 전체(327a-621d.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294쪽) 분량의 거의 30%를 차지한다. 나머지 내용도 거의 다 이러한 수호자 교육이 결과하는 내용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자체가 기본적으로 수호자의 교육과 관련한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4) 여기서 양육τρέφειν이란 건강한 신체를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고 교육παιδεύειν은 건강한 혼을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기본적으로 교육은 각자의 혼 안에 있는 힘을, 마치 눈을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이, 실재와 좋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 즉 혼의 전환περιαγωγῆ을 위한 방책τέχνη이다.(518c)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교육의 목적은 영혼 속에 잠재된 최상의 것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다짐과 습관을 통해 혼 안에 덕을 구현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혼이 근본적으로 자신과 친숙한 것을 닮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한, 땅에 심은 식물이 토양과 대기에 의존하여 잘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혼 또한 어떤 것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함께 하느냐에 따라 좋음과 아름다움에 더욱 다가가고 그에 동화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425c, 492a)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376e]

*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교육παιδεία은 어떤 것일까, 오랜 세월에 걸쳐 고안된 교육방식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일까’를 물은 후, 현존하는 아테네의 전통적 교육 방식에 준해 몸을 위한 교육으로 체육ἡ ἐπὶ σώμασι γυμναστική을, 혼을 위한 교육ἡ ἐπὶ ψυχῇ μουσική으로 시가μουσική 교육을 제시한 후 이 가운데 시가 교육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시가에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이야기에 사실적인 것τὸ ἀληθές(alēthes)과 허구적인 것ψεῦδος(pseudos)이 있고 어린이παίδιον들 교육은 그 가운데 허구적인 것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의아함을 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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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들 즉 시가 교육의 대상은 직접적으로는 앞에서 언급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수호자 교육을 아테네의 전통적인 방식에 준해 수행할 것을 표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교육의 대상은 천성과 상관없이 아테네 시민 계급 젊은이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대 아테네에서는 귀족 여부에 상관없이 시민이라면 모두 어려서부터 18세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언급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마친 후 수호자를 선발할 때에도 천성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오직 교육의 결과에 따른 능력만을 기준으로 선발하고 있다. 현대 비평가들은 종종 플라톤이 태생에 따른 천성의 차이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주의자로 그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공고한 신분사회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가문이나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오직 능력에만 기초하여 교육의 기회는 물론 통치자의 자격까지 부여한 그의 구상이야말로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할 그의 진면목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교육은 천성적 성향을 더욱 살려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천성적 성향이 다소 모자라도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천성적 성향을 가지고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 못지않은 수준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훌륭한 양육과 교육이 수반되지 않으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2) 참고로 이곳 제2권과 3권에서는 수호자를 기르기 위한 초기 교육의 일환으로 시가 교육과 체육 그리고 초보적인 수준의 과학 교육이 이루어지고(18세까지) 18세부터 2,3년 동안은 수호자로서 군사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다 강화된 체육교육이 이루어진다. 이후 20세가 된 수호자들 가운데 통치자가 될 사람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30세까지 어린 시절 받았던 기초 수준의 과학 교육에 이어 체계적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을 받으며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35세까지 최고 수준의 철학 교육 즉 변증술 교육을 받는다.(537a-d) 물론 이때에도 시가교육은 지속적으로 부과된다. 그리고 이 모든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사람들은 명실공한 통치자들로서 15년 동안 도시의 관리와 행정, 군사 관련한 고위 직책을 맡아 나랏일에 봉사하고 50세에 이르면 그러한 모든 일에서 벗어나 철학적 관조에 시간을 보내면서 순번에 따라 철학자왕의 역할을 수행한다.(540a-b) 이때 철학자왕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정해진 기간 동안만 왕으로 봉사한다. 철학자들이 순번대로 왕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넓게 봐서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의 성격을 갖는다고도 하겠다. 이것은 <법률>에 가서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라는 집단지도체제로 구체화된다.(<법률> 908a-908a, 672d)

3) 수호자의 교육과 선발에서는 물론 앞으로 펼쳐질 교육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보여주는 모습은 가히 혁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호자의 교육 방식 좀 더 정확하게는 장차 수호자 선발을 위한 청소년기의 예비 교육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채택하고 있는 교육방식은 일단 현존하는 전통적인 아테네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이상국가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수호자 교육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그가 변혁하려는 아테네의 기존의 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가지고 있는 기본 문제의식은 물론 그 구현 방법론에 있어 그가 가지고 있는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백지상태에서 그가 꿈꾸는 대로 설계하고 건설되는 이상국가가 아니다. 앞서 나라의 기원과 발달에서도 살폈듯이 그의 이상 국가로서 정의로운 국가는 염증 상태에 빠진 나라를 정화하여 세워지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와 같은 염증 상태의 나라가 쉽게 정화될 수 없다는 것을 당대 아테네는 물론 몇 차례의 쉬라쿠사이에서의 정치실험을 통해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평생을 통해 목도한 아테네 현실은 정화의 구상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견고하고 그 역사적 뿌리 또한 너무 깊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정의로운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피폐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인 동시에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그가 찾아낸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정의로운 수호자를 길러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 현실에서 어린이는 물론 젊은이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쳐왔던 교육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일 유연한 어린 시절부터 18세까지 이루어지는 시가 교육이었다. 특히나 시가 교육은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단순한 예술 교육을 뛰어 넘어 평생을 통해 아테네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아테네 현실 또한 오랜 시간 그와 같은 시가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다. 그런 만큼 플라톤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시가 교육의 개혁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가 내용의 토대를 이루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는 그 자체의 역사적 권위뿐만이 아니라 이후 여러 시인들에 의해 수많은 작품으로 각색되고 변용되어온 만큼 그것을 모두 폐기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그 방대한 분량을 대체할 새로운 시가를 창작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국가론에서 채택한 방법은 기존의 시가 교육 방식에 따르되 신화의 근본 축을 이루어야 할 규범들을 새로 마련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시가 내용에서 잘못된 내용을 철저히 바로 잡아 장차 수호자가 될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기존 설화들을 비판하자 그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이냐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들은 나라의 수립자로서 신화를 지어내는 시인들이 아니라 그 시인들에게 규범τύπος을 제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는 것도(378e-379a) 그러한 앞뒤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4) 여기서 우리는 이제 시가와 시가 교육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아테네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지배할 정도로 심대한 것인지를 살펴야할 할 때가 되었다. 사실 <국가>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시가 교육을 어린 시절 어린이의 감수성에 맞추어 부여되는 예술 교육 정도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에서 시가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이나 시문학 정도의 성격을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가μουσική(mousikē)는 뜻만으로는 무사(Mousa) 여신 즉 뮤즈 여신들이 관장하는 모든 기예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가는 직접적으로 그리스의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신화는 아테네의 조상들의 믿음과 삶과 역사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전승되고 오랜 동안 그들의 의식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서 기원전 5세기 시절에 이르러서는 아테네인들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는 거의 종교적 경전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신화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중요성에 따라 여러 시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각색되어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창작되었고 그 작품들 가운데 우수한 작품은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정기적으로 혹은 축제 때마다 연주와 합창, 춤을 동반한 연극의 형식으로 상연되기도 하였다. 즉 아테네에서 연극은 단순히 오락을 위한 연극 수준을 넘어서서 일종의 시민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가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믿음을 담은 시문학적 담론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은 노래와 춤 모두를 포함한 일종의 종합적인 종교 예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은 단순히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젊은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음악이나 예술 교육만이 아니라 아테네인으로서 일반교양은 물론 표준적인 가치관,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 굳이 오늘날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플라톤은 기존 시가 교육이 갖는 토대 위에서 그 장점들을 수용하고 존중하면서 자신이 구상하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규범들 특히 신의 선성과 관련한 혁명적인 관념을 내세워 기존 시가의 잘못된 부분을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은 물론 아테네 사람들 모두에 대한 의식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런데 이러한 시가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담고 있는 담론의 내용 즉 이야기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있어 이야기가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고 이야기를 사실과 허구로 구분한 후 어린이들의 시가 교육은 허구적인 것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허구’라고 번역한 말의 그리스 원어는 ψεῦδος(pseudos)이다. 그런데 pseudos의 원래 의미는 거짓말,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학적 허구도 사실이 아닌 것을 지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우리말 역어로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말은 매우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갖는다. 문학적 허구는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거짓말은 모두에게 일단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소크라테스가 시가 교육에서 pseudos부터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하자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의아해한 것도 아마 pseudos가 갖는 거짓말의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육 특히 어린이 교육에서 거짓말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잘못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pseudos의 원래 뜻인 거짓을 살려 모두 거짓말로 번역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가 최소한 신들과 관련해선 상당 부분 거짓말임을 밝히려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려나 우리는 역본들에서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역어를 함께 접하게 되겠지만 그 두 역어의 그리스어 원어는 모두 pseudos임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읽어야 한다.

6)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체육은 몸을 위한 교육으로, 시가는 혼을 위한 교육으로 구분하지만 나중 체육을 따로 논하면서 체육도 궁극적으로 혼을 위한 교육임을 밝힌다.(410c)

 

[377a-378a]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처음엔 어린이들에게 설화μῦθος를 이야기해준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반문하면서 설화는 대체로 허구이지만 사실적인 것ἀληθῆ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 후 어린이들에게 신체 교육 보다 설화 교육을 먼저 이용하는 이유를 시가 교육을 체육 보다 먼저 착수하는 이유와 등치시킨다. 설화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어리고 연약한νέῳ καὶ ἁπαλῷ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모든 일의 시작ἀρχὴ παντὸς ἔργο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377a) 그것은 어렸을 때가 가장 유연성이 있고μάλιστα πλάττεται 누군가가 각자에게 새기어 주고 싶은 인상이 제일 잘 받아들여지기ἐνδύεται τύπος ὃν ἄν τις βούληται ἐνσημήνασθαι ἑκάστῳ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지어낸 이야기로μύθους πλασθέντας 닥치는 대로 듣게끔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이 커서 반대되는 생각들을 마음속에 지니게 해서는 안 되며(377b) 그에 따라 설화 작가μυθοποιός들을 감독하여ἐπιστατητέον 그들이 짓는 것이 훌륭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377c)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모들과 어머니들에게 훌륭한καλὸν 이야기로 아이παῖς들의 혼을 형성해주도록πλάττειν τὰς ψυχὰς 설득하고πείσομεν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많은 것은 버려야만 한다ἐκβλητέον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버려야하는 설화에는 큰 규모와 작은 규모τούς τε μείζους καὶ τοὺς ἐλάττους가 있지만 그 모두 틀τύπος은 같고 같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377d) 그 큰 규모의 설화가 다름 아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및 다른 시인ποιητής들이 구성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허구적인ψεῦδος 설화임을 밝힌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허구적인 설화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탓하는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 무엇보다도 제일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서 ‘좋지 못한μὴ καλῶς 거짓말’(377e) 즉 마치 화가γραφεύς가 전혀 닮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과 같은, 신과 영웅들에 관해 나쁘게κακῶς 묘사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지 못한 거짓말로서 가장 큰 거짓말, 가장 중대한 것들에 대한 거짓말τὸ μέγιστον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γίστων ψεῦδος로서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한 우라노스Οὐρανός가 저지른 짓과 크로노스Κρόνος의 행적을 적시한다. (37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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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이에게 설화를 이야기할 때 허구적인 것을 이용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설화에는 사실도 있지만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이른바 옛날이야기나 동화들은 기본적으로 허구pseudos이다. 그런데 이러한 허구pseudos에는 훌륭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리고 연약한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므로 설화 작가들을 감독해야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큰 규모의 설화 가운데에는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좋지 못한 거짓말pseudos 즉 나쁘게kakōs 묘사한 것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언급들을 토대로 pseudos를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다시 분류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 a) 사실과 다른 사실 왜곡으로서 pseudos.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말 뜻 그대로 거짓말. b) 지어낸 것으로서 훌륭한 것 즉 훌륭한 허구로서 pseudos. c) 지어낸 것으로서 나쁜 것 즉 나쁜 허구로서 pseudos.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먼저 유념해야 할 근본 전제가 있다. 즉 소크라테스에게 신은 훌륭하고 선한ἀγαθὸς 존재이다.(379b) 그러므로 어떤 설화이든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그 자체로 잘못 묘사한 거짓말 즉 위의 구분 상 a)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에서도 신들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리고 신들을 좋게 묘사한 것은 위의 기준으로 b)에 해당하는 신에 대한 진실로서 훌륭한 허구 아니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 시인들이 지어낸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1)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는 a)와 c)의 구분이 따로 없다. 이와 달리 좋게 지어낸 것은 훌륭한 허구 즉 b)에 해당하는 pseudos이다. 요컨대 위의 분류에서 소크라테스의 어법에 따르면 최소한 신과 영웅과 관련해서는 a)의 pseudos와 c)의 pseudos는 모두 우리말 거짓말에 해당한다. 그리고 b)에서처럼 좋게 묘사하면 앞서도 말했듯 훌륭한 것 즉 좋은 pseudos 아니면 사실로 인정된다. pseudos가 어쨌거나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한, 소크라테스에게는 비록 이곳에서는 신과 관련한 이야기에 국한 되어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설화작가건 시인들이건 정치가이건 간에 좋은 허위, 좋은 거짓말이 허용될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는 셈이다. 거짓말의 문제는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하여 나중에 다시 또 다루어질 것이다.

2)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어린이에게 들려 줄 설화 가운데 많은 것을 버려야 하고 또 그러한 것을 지어내는 설화 작가를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감독의 대상이 어린이를 위한 설화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경우 오늘날에도 감독의 필요성이 요구되듯이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면 기존의 신화나 설화는 물론 새롭게 창작되는 시인들의 작품 모두에 검열의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문학과 예술을 검열하는 다시 말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있다. 앞으로 그 해당 부분에 가서도 각각 살피게 되겠지만 우선 이러한 비판은 앞에서 우리가 살폈듯이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성격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규범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선한 신의 관념 등을 고려하면 그렇게 적확하고 합당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앞서 살핀 대로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문학 내지 예술 작품의 창작이나 일반적인 예능 교육 차원을 넘어서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국가 종교 내지 세계관 교육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시가 교육은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아테네 시민으로서 함께 공유해야할 진실이자 함께 지켜나가고 유지해야할 일종의 이념이자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설계하는 이상 국가에서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부분은 그 어떤 부분보다도 엄중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할 중대한 문제 영역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플라톤이 시가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으려는 새로운 신관은 이상 국가의 이념에 준하는 매우 중차대한 교육 목표의 하나임을 고려하면 수호자에 대한 시가 교육에서 신들과 관련하여 거짓말을 가르친다는 것은 쉽게 용인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앞서 살폈듯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오늘날 생각하는 일반적인 교양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국교 교육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오늘날 다종교 국가에서 조차 개신교 교리 교육과정에서 코란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혹은 이슬람 교리 교육과정에서 불교 경전을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그것도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가르치는 경우 아무런 감독 없이 자유로운 학술활동으로 방임하기란 상상조차 힘들다.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갖고 있는 이러한 특수한 성격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차대한 신들과 관련한 거짓말을 감독하는 것과 마치 오늘날 일반 시민 사회에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것을 등치해서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요컨대 플라톤은 수호자 교육에 있어 아테네의 시가 교육 방식을 받아들이되 내용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만은 아테네 사회에서 경전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의 핵심 내용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그의 이상국가론이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기 위한 이론임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배척하고 진정한 신관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려는 그 자신의 철학적 실천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이 문맥이 담고 있는 합당한 의미라 할 것이다.

3) 박종현 역본에서 ‘허구적인 설화를 구성해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냥 ‘거짓말로 설화를 구성하여’로 변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그래야 그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뭔가 탓을 하려는 것으로 여기는 아데이만토스의 태도가 이해된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여기서(377a) ‘좋지 못한 거짓말’은 신화 내용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니라 그냥 ‘사실과 다른 거짓말’을 의미하고 ‘나쁘게 묘사할 경우’ 또한 ‘사실과 다르게 잘못 묘사할 경우’를 의미한다.

 

[378a-b]

* 소크라테스는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설령 그것이 진실ἀληθῆ이라 할지라도 어린 사람νέος에게 그것을 경솔하게 들려줄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σιγᾶσθαι이 상책이며 불가피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비밀리에 최소한의 소수ἐλάχιστος만이 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이 나라에서ἐν τῇ ἡμετέρᾳ πόλει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가 듣고 있는데 누가 그런 극단적인 부정의ἀδικῶν τὰ ἔσχατα를 저지르는데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투로 말해서도 아니 되고 정의롭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온갖 방법으로 응징하는데도κολάζων 위대한 신들도 그런 짓을 한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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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주장 또한 전체주의 내지 독재시대에 횡행했던 금서 정책 또는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 금지 내지 정보의 독점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린이는 물론 극히 소수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 모두에게 그러한 방침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당연히 오늘날 확립된 자유주의적 가치관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지식과 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이 역시 정의로운 국가를 설계하면서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과정에서 나라의 중추적 이념이자 가치관의 기초가 되는 신들에 관한 관념을 바로세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임을 고려하면, 기존의 잘못된 신화에 대한 부정과 비판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신은 선한 존재임에도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주 중차대한 거짓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그것은 신들과 관련한 특정 사실의 은폐가 아니라 신들에 대한 거짓 정보의 폐기 내지 부정이었던 것이다.

* 그럼에도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침묵이 상책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신과 관련하여 여전히 뭔가 진실을 숨기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이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말이기 보다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어린이 교육의 필요상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달리, 이후 신들의 나쁜 이야기에는 뭔가 다른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을 수 있다는 시사를 내비치고 있음(378d)에 기초하여 이 부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행실은 겉으로 나쁘게 보이지만 뭔가 숨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행적은 순진한 어린이들에게는 나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한지라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중에(380a) 소크라테스가 그와 같은 숨은 뜻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신들의 나쁜 행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기존 신화에 실린 신들의 나쁜 행적 모두가 합리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것은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그 자체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떨어진다. 플라톤이 최대한 기존 신화에서 신들의 선성을 살려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여 정의로운 국가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종교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나중 살피게 되겠지만 그가 내세우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들은 플라톤의 이러한 종교 개혁이 가히 혁명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독일 이데올로기』 1, 2 출간 안내(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이병창 옮김, 먼빛으로, 2019년 7월 5일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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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 1, 2 출간 안내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이병창 옮김, 먼빛으로, 2019년 7월 5일 발간)

 

맑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가 완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병창 선생님이 10년에 걸쳐 흘린 땀과 노력이 두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도 완역이 드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완역되었습니다. 매우 의미있는 성과입니다. 최근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으로 아직 완독한 분들이 많지 않을 듯 합니다. 아래 출판사의 책 소개와 서평으로 알림을 대신합니다. 앞으로 [철학자의 서재]에서 서평으로 다시 만나보기를 고대합니다.

 

  • 출판사 책 소개와 서평

 

『독일 이데올로기』는 『자본론』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저서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6에서 1847년까지 공동으로 작성한 이 저서를 통해 사상의 역사에서 역사적 유물론이 탄생했다.

 

이 저서는 그동안 1권 1장에 해당하는 포이어바흐 장만 번역됐다. 이제 처음으로 전체 저서 1권, 2권이 완역됐다. 이 저서의 완역은 전 세계에서도 드물며,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이다. 1918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세워진 한인사회당이 우리나라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기점이라면 근 100년 만에 완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1990년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 이후 전 세계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가 퇴조하면서 다시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곳곳에서 모색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마르크스 엥겔스가 지은 『독일 이데올로기』가 처음으로 완역된 것은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치열한 논쟁 시대의 산물이다. 1840년대 독일은 철학의 시대이다. 이 시대 철학을 대표하는 포이어바흐와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 모제스 헤스 그리고 마르크스, 엥겔스는 서로 치고받았다. 이 저서에서도 문체나 내용을 통해 그런 논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저서에서 타자의 말로 타자를 비판하는 아이러니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빌린 풍자를 보여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두 권으로 기획했다. 그 가운데 『독일 이데올로기』 1권은 바우어와 슈티르너의 관념론적 역사 철학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이런 비판 과정에서 그들이 옹호했던 포이어바흐 유물론의 한계를 깨닫고 추상적 유물론에서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가게 됐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포이어바흐 테제』에서 보듯이 인간 역사를 “감각적인 인간 활동,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역사관이다.

 

이어 『독일 이데올로기』 2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의 진정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모제스 헤스 등은 생 시몽 등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을 독일화하여 이를 진정 사회주의로 불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2권에서 공상의 산물인 진정 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실제 역사를 반영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이행할 필연성을 제시했다. 1848년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마르크스의 역사, 혁명 이론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작업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런 치열한 논쟁 덕분에 출현한 『독일 이데올로기』는 비극적 운명을 걸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당시 독일의 문화 권력자들을 비판하면서 이 저서의 수고를 완성한 다음에도 좀처럼 출판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수고는 창고에 처박혀 쥐들의 비판에 맡겨졌다.

 

이 저서의 운명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완성 수고로 남은 이 저서는 여러 차례 편집됐다. 대표적인 편집본인 MEW판, MECW판, MEGA2판을 제외하고도 수없는 편집본이 난립했다. 이런 편집본 역시 그 시대 정치 사회적 대결을 반영했다.

 

이 번역본의 후기에 이 책의 간난한 운명, 그 탄생의 비화와 편집의 논쟁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위의 세 가지 판본이 특히 차이가 나는 지점은 1권 1장 포이어바흐 장이다. 이 책은 포이어바흐 장을 세 가지 판본이 각기 어떻게 편집하였는가를 비교 분석하여 놓았다. 이런 비교 분석을 통해 그 동안 잘못된 맥락에 놓여 있었던 포이어바흐 장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역자의 10년간에 걸친 부단한 노고를 통해 마침내 『독일 이데올로기』의 완역이 세상에 탄생의 울음을 터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저서의 완역을 통해 그 동안 접근할 수 없었던 부분이 알려지면 마르크스 엥겔스에게서 여러 가지 새로운 이론, 사상,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라면 마르크스 엥겔스가 슈티르너를 비판하면서 제시한 유용성 이론이다. 이 완역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사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출현할 것으로 기대한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8월 마당(4회차) 안내

안녕하세요? 한철연 총무부입니다. 무더운 날씨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에 다들 건강하신지요?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8월 마당(4회차)를 안내합니다.

지난 6월에 이어 철학 마당 4회를 맞았습니다.

이번 회에는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이 좀 더 드러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관심 있는 회원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8월 마당> 사회 :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주제 : 중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유가철학, 도가철학, 선불교철학 등
* 일시 : 2019년 08월 17일(토요일) 오후 2시
* 공동좌담자(가나다순) :

①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②김선희(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연구교수)

③이병창(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④이 지(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⑤이현구(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초빙교수)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 이후 일정 ***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㉜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서론 강해에서 <국가>의 목차를 언급하며 살폈듯이 우리는 권수를 기준으로 제1권을 <국가>의 서론, 그 이후 제2권부터 9권까지를 본론, 제10권을 에필로그로 나누고, 본론의 첫째 부분을 제2권에서 제4권까지, 둘째 부분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셋째 부분을 제8권에서 제9권까지로 구분하여 <국가>를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권수를 고려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제1권부터 호사스런 나라에서 수호자가 등장하는 바로 앞 374e까지를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앞서 진행된 서론적 논의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다만 소소하게는 위의 견해와 같되 수호자의 성향까지를 서론적 논의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강해는 <국가>의 서론적 논의(제1권부터 제2권 357a-374e까지)를 모두 마무리한 셈이다.

* 이에 따라 이제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작에 앞서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비유를 내세워 논의를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하고 나라의 발전에 따른 계층들의 발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미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과 개인의 영혼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정의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그것들의 유기적 연관성을 토대로 전개될 것임을 일러 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살필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의 첫 부분 또한 그러한 구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나라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나라의 구성 요소로 생산자 계층, 수호자 계층(통치자 계층 포함)을 등장시킨 후 → 수호자의 교육 이념을 통해 그 세 계층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고 → 그 다음 단계로 개인의 영혼 또한 나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이성, 기개, 욕구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밝힌 후 → 그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도 나라의 정의와 동일하게 영혼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게 될 위와 같은 논의 내용들을 강해 서론에서 제시한 목차를 기준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제2권 375a-제4권 끝)

 

  1. 본론 1,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나라의 기원(357a-374e)
  2.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3.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

{376e-383c(제2권 끝), 제3권 386a -392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3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 신화(412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권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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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 <국가>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강해를 이어가자.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2.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374e]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τὸ τῶνφυλάκων ἔργον이 가장 중요하고μέγιστον 그만큼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σχολῆ를 요구하는 한편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τέχνη과 관심ἐπιμελεία을 요하는 것임을 밝힌 후 곧바로 수호자들에 적합한 성향φύσις들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한 일에 착수하는 것은 사안의 성격상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며 주춤 거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375a-b]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가문 좋은 젊은이의 성향과 지키는 일의 관점에서φυλακὴν 혈통 좋은 강아지σκύλαξ의 성향은 서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φύλαξ나 강아지 모두 감각αἴσθησις에 있어서는 예민해야ὀξύν 하고 감지된 것을 추적하는데 날렵해야ἐλαφρός 하며 붙잡고 싸워야 할 때는 힘이 세야만ἰσχυρὸν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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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kyōn라고 해도 상관없음에도 젊은이에 맞추어 새끼 강아지로 표현한 것은 강아지의 원어 skylaks와 수호자의 원어 pylaks의 말미가 같다는 것을 고려한 말놀이일 수도 있다. 개kyōn는 개를 나타내는 명칭 그대로 아테네에서 이른바 퀴니코스kynikos 학파(the cynics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내리고 있는 개의 함축과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개의 함축이 거의 상반될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흥미를 끈다. 플라톤의 개는 나라를 책임지는 수호자에 비유되고 있지만 견유학파의 개는 오히려 나랏일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375b]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개이든 그 밖의 어떤 동물이든 맹렬하지θυμοειδὴς 못한 것이 어찌 용맹한가ἀνδρεῖος를 반문하고 격정θυμός이야말로 그것이 일게 되었을 때 마음ψυχὴ 이 모든 것에 대해 겁이 없고ἄφοβός 꺾이지 않는다ἀήττητος고 말한다. 즉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성향은 신체적으로는τοῦ σώματος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하는데 날렵하고 힘세어야 하고 심적으로는τῆς ψυχῆς, 격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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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는 동물에 대해 쓰일 때는 맹렬함의 의미를 갖지만 사람에게 쓰일 때는 기본적으로 격정, 분노의 의미를 갖되 생각이 깃든 분노 즉 의분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감정적 격분과는 달리 이지적 측면 즉 자존심에서 우러나오는 기개의 성격을 갖는다. to thymoeidēs는 이후 플라톤에 의해 개인의 영혼에서 ‘기개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된다.

 

[375c-e]

* 그런데 이러한 성향들은 수호자 서로 간에 그리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거칠어ἄγριος 서로와 스스로를 파멸할 수도διολέσαι 있으므로 친근한 사람에게는 온순해야하고 적들에 대해서만 거칠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수호자는 온순하면서도 대담한 성품 ἅμα πρᾷον καὶ μεγαλόθυμον ἦθος 즉 서로 대립적인ἐναντίος 온유한πρᾶος 성향과 격정적인θυμοειδής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대립적인 성향을 함께 갖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앞서 수호자에 비유한 혈통 좋은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두개의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고 있는 수호자를 찾는 일은 ‘자연에 어긋나는 게 아니’οὐ παρὰ φύσιν라고 말한다.

 

[ 376a-c]

* 그런데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되 친한 사람의 모습과 적의 모습을 식별καταμαθεῖν하여 그 앎과 모름에 의해 친근한 것과 낮선 것을 구별한다는 점에서 개의 천성의 상태는 영리하고κομψός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배움을 좋아한다φιλομαθὲς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나라의 훌륭하디 훌륭한καλὸς κἀγαθὸς 수호자가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정적이며θυμοειδὴς 날래며 굳세야ταχὺς καὶ ἰσχυρὸς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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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음미할 것이 있다.

 

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필요한 계층들이 생겨나고 마침내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대문자에 해당하는 정의로운 나라를 살필 준비가 갖추어진다. 장차 드러나겠지만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들은 소문자에 해당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의 세 부분들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기본적으로 수호자 계층에만 집중되어 있다.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에 수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기층 생산 계층이 지성의 지배로 표징되는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 자리를 차지하기란 처음부터 난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논의를 시작하면서 수호자의 성향부터 꺼내든 것 역시 수호자 계층 또한 분업과 전문화 원칙에 따라 무엇보다도 타고난 적성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호자의 성향을 다루는 이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상응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들의 부분이 어떤 것들인지가 거의 명시적이다시피 드러나 있다. 수호자의 성향 자체가 수호자의 내적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수호자의 성향에 관한 서두 부분은 나중에 펼쳐질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 대한 예비적 암시이자 나라의 계층들과 개인의 내적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아예 미리부터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실제로 수호자의 성향을 강아지에 빗대어 신체적으로는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에 날렵하고 싸울 때 힘이 세야 하고, 심적으로는 맹렬해야(격정적이어야)하며 동시에 아는 사람과 낯선 사람을 식별함에 있어서는 지혜롭고 영리해야 한다는 언급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장차 개인의 내적 영혼들을 나타내는 말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거나 거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선 ‘격정적’이라는 말 thymoeidēs는 나중 영혼의 ‘격정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와 표현부터 그대로 일치하고, 식별하고 헤아리는 능력 역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logistikon(명사형 logos)와 내용적으로 일치하며, 감각을 뜻하는 aisthēsis나 신체적 능력을 나타내는 ischus라는 말 역시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epithymētikon(명사형 epithymia)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이다.(440e 참고) 특히나 개의 능력과 관련하여 친한 사람과 적을 구별하는 능력과 연관해 사용하는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os’라는 말과 ‘배움을 좋아하는’philomathes라는 말은 수호자의 성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향을 나타냄과 동시에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성적인 부분이 갖는 성격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렇듯 이곳에서의 수호자의 성향은 장차 언급될 영혼 3분설에서 언급되는 영혼의 내적 부분들과 그대로 일치한다. 물론 영혼 3분설이 사람 일반에 적용되는 한, 수호자뿐만 아니라 생산자 또한 이성적 부분, 격정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영혼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차츰 밝혀지겠지만 그것들 세 부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그들 각각의 전체적인 성향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갖게 된다. 마치 장기판의 장기 알들은 모두 똑같지만 장기판의 형세는 두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3) 소크라테스는 온순함과 대담함, 온유와 격정이라는 대립적 성향을 함께 갖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훌륭한 수호자란 불가능하다고 운을 뗀 후, 곧바로 개의 경우를 들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또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간단히 판정해낸다. 그러나 여기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자문자답을 곱씹어보면 이 부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읽고 넘어갈 곳이 아님을 이내 직감하게 된다. 물론 상식적 수준에서 나라를 지키는 수호자 즉 전사가 하는 일이 아군과 적을 식별하고 그에 따라 정반대의 태도로 임하는 것이 당연한 한, 그 말에 달리 주목할 만한 의미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수호자 가운데 통치자가 선발되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정치 행위임을 고려하면 이 문맥은 한층 중요한 의미로 다가 올 수 있다. 즉 그 말은, 나라에 늘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 모두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인 한, 수호자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즉 통치의 핵심은 그러한 대립적인 것들 중 하나를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로 수직으로 교차하는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하나의 옷감으로 만들어 내는 직조술을 정치가의 기술로 언급하고 있는 <정치가>의 내용(281a-283b)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4) 그러나 이 문맥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가 그 동안 씨름해왔던 존재론적인 고민들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의미와 논쟁거리를 안겨준다. 우선 플라톤 이전 시기까지 그리스 지성계를 지배해왔던 엘레아주의적 사고에서 보면 대립자들이 함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하다. 엘레아주의자 말대로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는 한, 오로지 부동의 일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런 식의 접근은 현실을 공간적 사고에만 가두어 두는 것으로서 시공간 속에서 만상이 엉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엄연한 실재로 우리 앞에 현존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자론자들처럼 운동하는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허공kenos이라는 없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운동을 그저 원자atom들의 물리적 충돌로만 설명하려는 것 또한 혼돈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제하는 방안이 될 수 없다. 이에 플라톤은 대립적인 것들이 함께 엉켜 변화무쌍하게 운동을 거듭하는 것이 현실의 진상(眞相)인 한, 그것을 정당화하는 존재론을 제시하고 그 현실의 변화에 인간이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내야했다. 그것이야말로 존재론적으로 현실을 해명하는 참된 길이며 동시에 모멸의 현실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넘어서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요컨대 만물의 근본 원인으로 존재to on와 생성to aei gignomenon이 있다하더라도 현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로 환원될 수 없고 그렇다고 없는 것으로 해체되지도 않는 제3의 것이다. 현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 속에는 이른바 존재적 성격과 생성적 성격이 무한히 관계 맺으며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그 현실의 단적인 국면이 드러나는 곳이 곧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어떠한 능동자poioun의 개입이 없는 한 현실은 무규정적apeiron 욕망이 지배하면서 사회적 관계는 해체되고 개인은 불행의식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 무규정적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불행한 현실은 어떻게든 다양한 욕망이 함께 공존하는 방향, 즉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운동하되 지향과 목적telos을 가져야 한다.

5) 그러나 운동은 해체를 의미할 뿐이라는 종래의 사고로는 그러한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운동하되 그 지향의 끝 즉 자기동일성을 동시에 담보해내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부동의 형상을 넘어 그 힘을 생명체의 자기 운동에서 발견한다. 생명체야말로 운동을 통해 오히려 자기 동일성을 보전하고 그 스스로의 합목적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에게 운동의 정지는 자기동일성의 상실이며 해체일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형상의 초월성을 인정하되 자기 운동을 통해 오히려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보전하고 다(多polla)의 영원한 조화와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agahthon)의 실재 또한 진실로 통찰한 연후, 완벽한 생명체로서 그 우주의 내적 생명력으로서 ‘우주 영혼’을, 현상세계와 인간의 욕망을 우주적 질서로 견인하는 지고의 근거이자 힘으로 천착해낸다. 그리고 플라톤은 다행스럽게도 신들이 현실의 생명체를 만들면서 인간을 가장 자신의 영혼과 닮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우주 영혼을 본 그대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혼돈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철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우주 영혼을 본으로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철학자의 현실 개입이야말로 현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곧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지적 실천이자 최선의 정치이다.

6) 이처럼 플라톤은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생성을 넘어 현실을 구제하기를 열망했고 그에 따라 자기동일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존재론을 마침내 우주에 대한 성찰로부터 천착해냈다. 우주는 끝없이 자기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해체되지 않으며 수많은 대립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질서 속에서 완벽하게 조화시키고 있는 유일한 실재이자 가장 선하고 완벽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주 영혼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하고 그 영혼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현한 철학자를 통해서 혼돈의 현실이 변혁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플라톤이 그야말로 전래의 엘레아적 일자에 버금가는 존재론적 지위를 우주적 생명력의 기초로서 우주 영혼에 부여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자의 영혼은 우주 영혼을 본으로 삼아 물질의 필연성에 끝없이 반역하고 거스르는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향해 가장 능동적으로 가장 적확하고도 분명하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모든 부분들과 모든 차이들과 모든 대립자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질서로 용융해내는 지고의 영혼, 즉 우주 영혼의 최상의 모상이었던 것이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 수호자의 성향에 대한 논의에 이어 수호자의 교육론이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35쪽에 이를 정도로(376c-412b) 상당히 길게 펼쳐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의로운 국가를 구축하려는 그의 언급의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수호자 교육론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며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수호자 교육론의 대부분이 시가교육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 시가 교육에 관한 내용은 매우 중대하고 독립적인 주제를 이루므로 다음 시간에 다루기로 한다.

 

<공지> 정암학당 강해가 여름 방학을 맞아 일시 휴강함에 따라 본 웹진 강해는 잠시 쉬었다가 8월 15일 경에 다시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억과 기억들』(현기영, 전상국, 문순태, 임철우, 이순원, 통일인문학연구단) [철학자의 서재]

♦ 아래 글은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제78집(2019. 6)에 게재된 서평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철학자의 서재]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통일인문학』 편집위원회 측에 감사드립니다.

 

『기억과 기억들』

현기영, 전상국, 문순태, 임철우, 이순원, 통일인문학연구단, 『기억과 기억들』, 씽크스마트, 2017.

진보성(청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나는 요즘 들어 아주 오래지 않은 옛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거나 기억들이 뒤섞여버리는 일을 가끔 경험한다.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여러 일들을 맞이하게 되고 현실에서 감당해야할 최신정보들을 선별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한다. 개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망각은 기억해 두어야할 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염려되지만 곧 복구가 가능하다. 그리고 과거의 실수나 안 좋았던 일은 자꾸 떠올리지 않아야 사는데 편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함께 기억해야 할 것들이 사라지거나 왜곡되면 다시 복구하기 힘들다.

그 기억은 틀림없이 고통스러운 기억임에 분명하겠지만 살아가기 위한 인간 본성의 망각이 아니라 강요되고 의도된 망각이기 때문에 당사자의 상처는 아물지 않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할 수 없게 하고 본질을 흐린다. 가까이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과정에서 우리가 본 것은 기억되어야할 것들이 망각의 장치들 앞에서 위태롭게 표류하던 장면이다. 아이들과 가족을 잃은 부모·형제들은 졸지에 좌파 빨갱이가 되었고 아직도 진실은 저 심해에 묻혀 있다. 누구는 이제 지겨우니 그만 잊자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참사의 진실은 공적으로 기록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 망각하면 이로울 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다.

『기억과 기억들』은 우리 역사에서 적대적인 “분단의 논리에 따라 삭제되고 망각된 기억을 복원하여 분단의 역사를 좀 더 객관화된 시각”(10쪽)으로 보려는 의도로, “타자의 상처에 공감하는 시선으로 분단의 역사를 ‘재-맥락화’하려는 작업”(10쪽)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분단의 역사에서 출발하여 이후 민중 저항의 역사까지 적대적인 분단 역사의 유산들은 4·3제주와 5·18광주에서 국가폭력으로 자행된 만행의 기억을 왜곡시켰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앞서 말한 세월호 참사와 그 진상 규명 과정에서 목도한 이른바 서북청년단재건위원회와 같은 과거 남북분단갈등의 망령은 분단의 논리가 현대에도 여전히 타인의 상처를 폭력과 사실 왜곡으로 짓이길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분단문학’을 주목했고 한국의 대표적 작가 다섯 명의 구술을 통해 그들의 사유와 집필의 생생한 배경들을 담았다. 이들 작가 역시 우리와 같은 현실을 사는 사람들이기에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말을 담아낸다는 것은 소설의 서사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진실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이다. 다섯 작가는 현기영, 전상국, 문순태, 임철우, 이순원이다. 이들은 모두 분단문학 작가들로 지칭될 수 있지만 인터뷰를 통해 소설의 서사 안 문제의식은 한 시기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 다섯 작가와 인터뷰 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일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 현기영 작가

제주에서 태어난 현기영 작가는 1978년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 4·3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어린 시절 4·3을 겪었던 기억이 작품을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비록 그 기억이 아주 조금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증언과 자료를 더해져 구성되었다. 작가는 권력이 강요한 망각의 늪에서 4·3에 대한 집단 기억을 건져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제주에서의 4·3사건이나 보도연맹 사건은 국가와 지배계층이 저지른 범죄였지만 기록에서 삭제되었고 왜곡당하거나 부정되었다. 국가폭력에 의해 발생한 참극이지만 국가는 기억하고픈 것만 기억하게 하고 학살의 기억은 망각하게 강요했다. 그리고 4·3을 금기로 묶었다. 국가는 국민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작가는 전쟁과 죽음에 반대하면서 평화와 인권을 외치는 제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광지로 대표되는 제주의 표상이 제주의 아픔 또한 드러내어 제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방법도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4·3의 트라우마에서 작가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금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군사정권 하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현기영 작가는 4·3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트라우마의 치유는 사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다. 영화 <밀양>에서 본 것처럼 사과는 회개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과는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얼굴을 마주보고 ‘타인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다.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진실성이 있어야 하고 진실성은 4·3의 만행을 자행한 자들의 진심어린 사과로 증명된다. 국민에 대한 국방부의 공식적인 사죄가 진심의 출발이다.

 

  1. 전상국 작가

전상국 작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6·25전쟁을 객관화하려 했다고 한다. 이른바 빨갱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듣고 실제 빨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봤지만 그 실체는 오히려 친근한 이웃이었다. 이념은 경험하지 않은 실체를 적대적으로 만들어서 서로 자신이 피해자고 상대가 가해자라고 강변하게 만든다. 사실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말이다. 남과 북은 오랫동안 이념으로 나뉜 나와 타자를 적대시하면서 결국 서로가 서로를 더욱 타자화 시켰다. 그 결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과거 전쟁의 상처를 돌보지 못해 상처는 아물어 들지 않으면서 현재의 삶까지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이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은 여기에 공감하지 못하니 남과 북의 정서적 차이는 좁혀질 수가 없다.

전상국 작가는 분단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남북 교류는 이어지지만 이는 오히려 이분법의 구도 아래서 서로를 더욱 심하게 이질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현재 진행형이다.

전상국 작가가 자신의 글쓰기를 무당의 굿판에 비유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살풀이의 시작은 원한과 증오를 풀어내고 화해를 도모하는 노력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명 <지뢰밭>처럼 분단으로 생긴 우리 마음속 지뢰 때문에 우리는 역사의 비극을 터놓고 서로의 상처에 난 아픔을 공감할 기회를 만들기 쉽지 않다고 작가는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근원적 정서에 호소하며 남과 북이 공감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길 원한다. 통일에 대한 접근도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처럼 경제론적인 시각이나 맹목적인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고 서로의 차이와 가치를 먼저 인정할 것을 주문한다. 바로 공통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1. 문순태 작가

6·25전쟁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문순태 작가는 집안사람들을 따라 백아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생활을 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비극을 체감했다. 특히 이념에 무감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기 안의 고통과 슬픔은 배가되었다. 가슴에 한 맺힌 그 기억이 지금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되었다. 작가는 한이 상대에게 복수해서 해소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키우는 어떤 의지이고 생명력이라고 한다. 일종의 무병을 푸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예술창작이나 운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한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고 혼자 푸는 것도 아니다. 민중의 한은 큰 물결이 되고, 그 물결이 역사를 움직이기도 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이 그 중 하나라는 것이다. 결국 해한, 한을 푼다는 것은 모두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치유는 화해로 완성된다.

문순태 작가의 화해는 빨갱이라는 허물이 씌워진 원한의 발원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고향에서 고향 사람들과 직접 만나서 밥도 먹고 옛날 얘기도 하는 것, 얼굴 맞대고 지난 갈등을 없애는 것, 이것이 화해의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하던 전통적 공동체 문화 속 나눔의 가치는 소중하고 복원되어야 할 것들이다. 분단 과정의 갈등과 상처는 지금 남북관계에만 그치지 않고 지역과 지역, 마을과 마을 사이의 작은 군집 사이에 남아서 아물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5·18의 기억 역시 분단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5·18이 상품화 되면서 그 기억의 파편들은 사라지고 오히려 부정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래서 작가는 분단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큰 담론보다는 쉽게 망각되어 버리는 개인의 역사에 주목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기록되지 않은 삶의 역사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파괴된 공동체의 가치가 복원되고 크고 작은 상처의 치유가 가능하다.

 

  1. 임철우 작가

임철우 작가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 완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완도에 진입했다던 나주부대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전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학살의 기억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당사자였던 것이다. 작가는 이후 연좌제의 현실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의 삶 속에 분단과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작가에게 그 기억의 연장은 5·18이었다. <봄날>에서 작가는 5·18발발 처음 3일의 기억을 또렷이 옮기면서 간첩, 용공분자, 또는 양아치들의 폭동이라고 알려졌던 조작된 정보를 바로잡는데 힘썼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가 쓰고 있는 이야기들이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고 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삶의 기억 안에 존재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했던 존재들이고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우리’ 혹은 ‘나’로 태어나기에 소설의 이야기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임철우 작가는 우리가 공유해야할 일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현실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진정 위로하고 공감을 통해 치유의 길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상징이 소설 속에서 해원을 도와주는 무당의 역할로 표현되었다면 현실에서는 문학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1. 이순원 작가

강원도 강릉이 고향인 이순원 작가는 <그대, 양진을 아는가>·<잃어버린 시간>에서 기막힌 분단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수복지구 양양을 무대로 일정시기의 기록이나 기억이 폭력적으로 사라진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쓰는 소설은 역사가 증언하지 못한 것을 증언하는 기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증언이다. 소설 속에 보이는 이 곳 사람들의 모습은 침묵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우클릭으로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선명히 하는 삶을 선택한다. 작가는 수복지구라는 특정한 공간이 연좌제와 같은 이념에 의해 발 묶인 곳이었음을 옛 기억을 통해 회상하고 이 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분단의 망령을 보면서 세월이 지나도 이념에 관한 사회의 변화가 지지부진한 것이 특정 시기나 공간의 문제만은 아님을 알린다.

작가들이 남북문제에 대해 자기를 검열하는 것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이다. 소설 속 수위 조절은 곧 자기의 이념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작가는 이런 분단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길은 원산에서 잡은 옛 추억 속 털게를 속초에서 먹는 것처럼 단순히 경제교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동질적인 정서가 있어서 그런 식으로 조금씩 서로 스며드는 방식의 문화교류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교각만 남은 끊어진 철길에 대한 기억이 있어서일까, 이순원 작가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DMZ를 쭉 가로지르는 종단 트레킹 길을 만들고 싶어 한다. 금강산까지 트레킹하는 꿈을 꾸는 이 길은 그가 지금까지 소설로 다루었던 가족, 고향, 도시, 전쟁, 군대, 5·18 등 전방위적 문제들이 해소되는 길이기도 하다.

 

다섯 작가들의 인터뷰는 소설에서 다 말하지 못한, 혹은 소설이 담고 있었던 다양한 방면으로 이야기가 연계되는 맥을 보여준다. 『기억과 기억들』 서문의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이 “통일과 분단 그리고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적 과제들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12쪽)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들의 소설 속 배경이 되었던 우리 현대사의 다양한 사건과 문제의 원인에는 남북 분단의 갈등과 상처가 있었고 이념문제를 포함한 현시대의 여러 사회적 갈등의 근저에는 해결되지 않은 분단의 모순적 상황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지금의 문제는 더욱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같은 선상에서 연계하여 고민해야할 과거의 유산으로 남북의 통일과 분단극복은 우리 역사에서 발생한 시대 모순의 가장 근저에 위치한 쉽지 않은 과제이다. 더 나아가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정립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분단문학 작품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통합 서사의 사회적 확산을 염두에 두고 이를 생산해내는 방법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획”(11쪽)된 것이 『기억과 기억들』이다. 독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6·25, 4·3, 5·18등 우리 현대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한 작가들의 경험을 구술로 풀어내 담았기에 현대사의 많은 문제적 지점들에 기억의 고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생생히 확인했다. 또 각각의 작가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얻은 체험으로 기억을 구성했지만 그 연결 지점 역시 서로 교차하고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우리의 기억은 ‘나’의 기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이 되고, 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기억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역사이다. 강요된 망각과 왜곡된 기억, 조작된 기록 아래 분단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은 분단의 논리와 이념에 의해 규정된 적대적 타자를 영원히 적대시할 수밖에 없다. 그 적대적인 모습은 우리 내부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타자의 상처에 공감하고 원한을 풀어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계속 소설을 쓰는 것이고 『기억과 기억들』은 그들의 문학적 외침을 재가공하여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연대와 평화 그리고 정의와 인권의 가치로 채워진 ‘통합 서사’를 사회적 기억으로 바꾸어 가는 일”(10쪽)은 지금 우리 현실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담아내주길 기대한다.

『길 위의 우리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의 서재]

♦ 아래 글은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제76집(2018. 12)에 게재된 서평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철학자의 서재]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통일인문학』 편집위원회 측에 감사드립니다.

 

『길 위의 우리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길 위의 우리철학』, 메멘토, 2018.

 

김재현(전 경남대 철학과 교수)

 

1.  답사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길 위의 우리철학』이란 책을 읽고 무척 기뻤다. 철학연구자들이 최초로 역사학자들의 유적답사처럼 발품을 팔아서 서술했으므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어 재미있었고 우리(철학)사상의 현실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현대철학분과 소속 12명의 연구자들이 한국근대지성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길과 장소를 탐방하여 쓴 것으로 ‘최시형부터 안호상까지 근대지성 13인의 발자취를 따라’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글쓴이들은 “앞서 간 사상가나 지식인들이 ‘사상’과 ‘실천’을 아로새긴 ‘길’을 먼저 찾아보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려고”(6)했으며 이들이 “걸어간 길을 되밟아 보는 여정 속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고개를 드는 물음을 정리하고 그것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7쪽)고 말한다. 필자들의 이런 의도가 어느 정도 실현됐는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여러 인물들이 간 길을 크게 5개(5부)의 이정표로 나누는데 ‘낮은 데서 찾은 진리’라는 길에서는 최시형 방정환, 장일순을 ‘경계를 넘어선 큰 마음’에서는 여운형과 한용운을 다루고 ‘역사와 교육에서 희망을 보다’에서는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를 ‘펜과 칼을 함께 들다’에서는 나철, 박치우 ‘타협과 저항 사이’에서 신남철, 현상윤, 안호상을소개한다. “근대 지성인들과 함께 걸어갈 열세가지 길에는 우리철학사상이 걸어온 단절과 모방, 비판과 창조, 저항과 굴종이 모두 담겼다”(10) 이처럼 여러 필자들이 우리 철학사상의 흔적을 찾아 간 인물과 장소는 매우 다양한데 우선 이들이 간 길을 책의 순서에 따라 찾아가 보자.

 

2. 구태환은 해월 최시형(1827-1898)의 기념비가 있는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을 찾아간다. 그곳에는 최시형이 도피생활을 하며 숨어 지내던 원주의 동학교도인 원진여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조선시대 좌포도청이 있던 단성사 자리터도 찾아가는데 최시형이 이곳에서 재판받고 처형된 곳이다. 또한 피맛골과 낙원상가 부근의 국밥집도 찾고, 한양성 내의 시신을 내보내던(따라서 최시형의 시신이 나갔던) 시구문이라는 별칭이 있는 광희문도 찾는다. 이러한 탐방을 거친 후에 묻고 나름대로 답한다 ‘최시형이 꿈꾸던 세상이 왔나?’ “모든 사람이 한울님인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 흐르는 민중의 자각과 저항의 물결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울님, 사회의 주인임을 깨달아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최시형의 벗이고, 한울님이다”(31)

김세리는 33세로 요절한 소파 방정환(1899-1931)을 만나기 위해 그의 동상이 있는 어린이대공원을 찾는다. 그리고 어린이 날이 시작되고 선포된 천도교 광장, 생가터가 있는 세종문화회관 뒤편, 묘소가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찾으며 소파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다. 필자는 “방정환이 어린이에게서 미래를 보았듯 우리도 어린이에게서 미래를 보고 어떤 미래를 제시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47)라고 말한다.

구태환은 장일순(1928-1994)의 체취와 다양한 일화를 만날 수 있는 원주역에 가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옛집인 원주 봉산동과 밝음신협 건물을 찾아가는데 이 건물 4층에 그의 서화가 전시되어 있는 무위당 기념관이 있다. 한 인물의 삶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공간과 장소, 건물을 찾아가면서 그의 삶과 사상을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인데 장일순 편에서 이런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난다.

유현상은 여운형(1886-1947)이 1947년에 7월 19일 암살당한 현장인 혜화동 로타리를 찾아 서거지 표석을 확인한 후, 경기도 양평의 남한강변에 있는 그의 생가와 기념관을 찾는다. 이곳 가까이에는 다산 기념관도 있다. 기념관을 보면서 여운형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고 해방 정국에서 좌우파의 극한 대립과 독립운동 세력들의 갈등 속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여운형과 현실에 대해 안타까와 한다. 그리고 4.19 민주묘소에서 도선사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묘소에 찾아가 남북합작 노력이 무산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송인재는 한용운(1879-1944)이 만년을 보낸 서울 성북동 북정마을의 심우장을 찾는다. 심우장은 만해가 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는 한옥이다. 심우장 가는 길에 ‘님의 침묵’을 새긴 비석과 만해동상이 있다. 그리고 1918년 [유심]을 발행한 장소인 계동에 있던 유심사를 찾고 3.1운동 때 만해를 포함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태화관 터도 찾는다. 이 터에 있는 태화빌딩 입구에는 ‘삼일독립선언 유적지’라는 표석 만 남아있다. 다행히 서울시가 내년인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선언기념 광장을 만들기로 했다. 탑골공원, 천도교중앙대교당을 포함해 이 일대에 독립운동을 기리는 공간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만해가 투옥됐던 서대문 형무소도 찾는다. 서대문형무소는 안창호를 포함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장일순, 리영희, 김근태 등 민주화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다.

이 지는 박은식(1859-1925)을 만나기 위해 1898년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종로구 종로 1가 사거리와 보신각 주변을 찾는다. 박은식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했고 이 활동이 그가 개혁사상가로 전환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자리(서울시 종로고 수송동 85)와 교육운동가로서 참여한 서북학회터도 찾는다. 이 곳에 있던 서북학회회관은 1985년 건국대학교 교내로 이전해 복원되었다. 마지막으로 한성사범학교 교관이던 박은식의 흉상이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구 한성사범학교) 역사관을 찾는다.

배기호는 서울 강남 도산로에 있는 도산공원을 찾아 기념관을 자세히 살피면서 도산 안창호(1878-1938)의 삶과 민족운동과 사상에 대해 소개한다. 필자는 흥사단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는데, 서울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흥사단 본부를 탐방하지 않은 것이 아쉬

움으로 남는다.

진보성은 충북 청주에 있는 신채호(1880-1936) 사당과 묘소와 기념관을 찾아 어린 시절과 성균관 입교하기 전까지 신기선과의 만남과 영향 등에 대해 소개한다. 신채호는 19살 되던 해 성균관에 입교한다. 그는 개화자강론에 관심보이고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서대문에 있던 독립회관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필자는 독립관터 표석이 있는 곳을 찾아가고 신채호가 논설위원으로 활동한 <황성신문>이 있던 지금의 종각 부근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터도 찾는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1910년 칭따오로 떠나기 직전까지 살던 삼청동 옛집터도 방문한다.

김정철은 일제하 민족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1863-1916)을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의 사직단 가까이 있는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단군성전을 찾는다. 대종교는 본래 단군교라 불렸는데 나철이 단군교를 되살리고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는데 앞장섰다. 필자는 민간 신앙 속의 단군을 찾기 위해 인왕산 중턱에 있는 국사당을 간다. 이 국사당은 본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는데 일제가 신사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국사당을 옮기게 했다. 또한 전남 보성군 벌교의 금곡에 있는 나철 생가를 찾아가 그가 어떤 계기로 대종교를 이끌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1909년에 대종교의 거듭남을 선언한 지금 감사원 부근에 있는 취운정터 표석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대종교의 총본사가 있는 홍은동에 찾아가 나철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독자에게 다시 던진다.

조배준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해방 후 박헌영의 측근으로서 월북하여 빨치산으로 죽은 박치우(1909-1949)를 만나기 위해 태백산국립공원을 찾는다. 박치우가 1949년 11월 20일 태백산 골짜기에서 빨치산으로 남하하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치우가 해방 직후 중국에서 돌아와 1946년 3월에 창간한 <현대일보>의 사무실이 있던 옛터를 찾는다. 박치우는 “지금 여기에서 ‘나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과제”라고 밝히고 이를 실천한 철학자로서 “‘우리 철학’을 고민하는 후학들에게 작은 이정표로 남았다”(233)

이병태는 대학로 안에 있는 경성제국대학 옛터를 찾아 신남철(1907-1958?)을 생각한다. 신남철은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조교생활도 하고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에 암울한 상황에서 사상적 방황을 하면서 해방을 맞는다. 해방과 함께 조선학술원 위원으로,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활동했다. 미군정의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정치활동도 하다가 좌절되자 1948년에 월북한다. 신남철은 김일성 대학 철학과 교수를 했지만 북한에서도 그의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신남철은 장소를 찾지 못한 지식인이었고, 실제로 그 어떤 장소에도 귀속되지 못했다”(255)

윤태양은 현상윤(1893-?)을 만나기 위해 탑골공원을 찾는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이 민족대표 33인만이 아니라 선언을 준비한 사람까지 포함해 48명인데, 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이 3.1 운동을 준비한 사람으로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중앙학교

(현 중앙고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를 찾아 현상윤의 행적을 소개한다.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를 1932년에 인수하고 1946년에 현상윤을 교장으로 초빙하는데 그해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되고 현상윤은 고려대 초대 총장이 된다. 그리고 1948년부터 고려대에서 한국사상사를 강의하면서 한국사람이 한글로 쓴 최초의 근대적 한국사상사인 [조선유학사]를 1949년에 간행한다. 현상윤은 일제말의 친일적인 행적과 글들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는데 『조선유학사』에 대한 평가를 포함해 그가 남긴 공과 죄는 분명히 평가되고 알려져야 할 것이다.

박민철은 ‘국민교육헌장’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안호상(1902-1999)을 찾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국민교육헌장비’를 방문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그가 근무했던 보성전문학교를 찾고, 안호상과 이승만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자유총연맹’이 있는 서울 남산의 자유센터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를 찾아간다. “안호상에게 이승만이 자신의 철학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정치적 상징이었다면, 이승만에게 안호상은 통치 이념을 세련되게 꾸미고 보완해 줄 이데올로그였다”(286-287)

 

3. 이 책은 한국 근대지성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체적인 길과 장소, 건물, 유적비, 표석 등을 탐방하면서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스토리텔링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서평자가 여정을 따라 같이 읽어보니 대부분의 필자들이 이런 과제를 잘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책 끝부분에 있는 추천답사코스 안내도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이 코스를 따라 답사하고 싶은 마음을 생기게 한다. 이 점에서 여러 필자들의 노고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해방 후 친일파의 집권에 따른 역사의식의 부재 때문에 잊혔던 또는 망각했던 한국근현대사의 인물들의 삶과 사상의 흔적을 복원하여 이들에게 적절한 장소를 찾아주고 한국현대사 속에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 후대 연구자들의 과제이자 역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길 위의 인문학’(7)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철학계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고 이루어낸 바람직한 성과라 생각한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언급된 인물들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필자들이 여러 명이고 개별적으로 서술하다 보니 이 인물들의 시대적 상호연관성이나 영향관계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것 같다. 사회역사적, 사상적 연관관계를 더 자세히 해명하면서 구체적

장소를 추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동학이 천도교와 대종교에 미친 영향과 함께 최시형, 나철, 신채호, 현상윤, 장일순 등의 사상적 계보에 대한 정밀한 추적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에서 찾아가지 않았던 유길준, 서재필, 함석헌 등 여러 사상가들을 포함해 한국근현대 사상사에서 다룰만한 인물들에 대한 후속 연구와 함께, 지역적으로도 북한을 포함해 동아시아적 차원, 더 나아가 글로벌한 차원에서 탐방을 진행하여 『길 위의 우리철학』 2권, 3권 등이

계속 나오길 기대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㉛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3a]

* 이후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를 ‘염증(부어오른) 상태의 나라’φλεγμαίνουσας πόλις로 다시 명명한 후 그 나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에서 염증 상태의 나라로 변하는 원인은 다름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τισιν 건강한 나라에서 주어진 것들과 그곳에서의 생활 방식δίαιτα이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기οὐκ ἐξαρκέσε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사치스런 것들이 추가된다.

* 소크라테스가 열거하고 있는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침상κλίνη과 식탁τράπεζα 및 기타 가구σκευή들, 요리ὄψον와 향유μύρον 및 향료θυμιάματα , 기녀ἑταίρα와 생과자πέμμα, 기타 필수적이 아닌 것들οὐκέτι τἀναγκαῖα 즉 회화ζωγραφία와 자수ποικιλία, 황금χρυσός과 상아ἐλέφαντα 등 그와 같은 유의 온갖 것들.

 

[373b-d]

* 이런 것들이 추가되면서 앞의 나라는 규모ὄγκος와 수πλῆθος에서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게 되어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하지가 않게οὐκέτι ἱκανή 된다. 그리하여 필요불가결한τοῦ ἀναγκαίου 것을 넘어서는 직능의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모든 부류의 사냥꾼θηρευτής과 모방가μιμητής들이 생겨나는데 모방가들 중 일부는 형태와 색채σχήματά τε καὶ χρώματα에 관여하는 사람들(조각가와 미술가)이고 일부는 시가μουσική에 관여하며 이를 돕는 시인ποιητής, 음송인ῥαψῳδός, 배우ὑποκριτής, 합창 가무단원χορευτής, 연출가ἐργόλαβος들이다. 그리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기구σκευή들 즉 여성들의 꾸밈κόσμον과 관련한 다양한 소품(장신구)들παντοδαπῶν을 포함해 더 많은 봉사자(시종)διάκονος들, 이를테면 가복παιδαγωγός(가정교사), 유모τίτθη(건강 관련 시종), 보모τροφός(음식 시중 시종), 시녀κομμώτρια(의복 관련 시종), 이발사κουρεύς, 일반 요리사ὀψοποιός, 고기 요리사μάγειρος(푸주한)가 생겨나고 육류 공급을 위해 앞서 말한 사냥꾼 이외에 양돈가συβώτης 및 온갖 종류의 가축βόσκημα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건강한 나라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살게 되면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어서 의사ἰατρός들이 많이 생겨난다.

 

—————————–

 

* 호사스런 나라가 규모와 수에서 한층 더 커진다고 했을 때 규모와 수가 가리키는 것은 의식주에 있어 필수적인 것 이상의 것들과 그것들을 제공하는 직능의 수는 물론 그런 것들의 확장에 수반하는 인구의 증가까지 포함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규모와 수의 증가는 이미 호사스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욕구가 더 이상 생존 욕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사치스런 욕구에서부터 문화적 욕구에로까지 확대되었음 보여준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맛을 추구하고 고기 요리까지 탐닉하며 자수와 회화는 물론 치장 도구까지 욕구하고 있는 양상은 이미 인간의 욕구가 동물적 욕구를 넘어 사치욕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고 특히 시가μουσική 관련한 욕구의 증대는 이른바 인간의 고유 욕망으로서 문화 예술에 대한 욕망이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모와 유모는 물론 아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의 출현 또한 본능적 돌봄 이상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음을 나타낸다.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문명 생활에 대한 욕구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 호사스런 나라에 ‘돼지 치는 사람’συβώτης이 등장하는 것 또한 이 나라에 생존을 위한 식욕 이상의 고급 요리 등 식탐과 미식에 대한 욕망도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사실 기원전 5세기 만해도 아테네 사람들 대부분은 주로 채식을 했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고기 요리는 특수 신분이나 즐겼을 법한 고급 요리로 그려진 것이다. 실제로 아테네에서 소와 양은 기본적으로 식량이나 양모 등을 얻기 위해 사육되었던 까닭에 소고기와 양고기가 일상의 식탁에 오르는 일은 그 자체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순전히 식용을 위해서 사육된 동물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상류 계층의 고기 수요는 주로 돼지고기였을 것이다. 호사스런 나라에 이르면 사냥술도 이제 더 이상 양이나 가축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기술만이 아니라 식탐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로도 활용된다.

* 미술가와 조각가 그리고 시인들을 모두 모방가μιμητής로 부르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의 예술의 목표가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사실적인 모사와 모방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사실주의 회화들조차 단순 모사 즉 복제가 아닌 작자 자신의 정신이 창조적으로 반영된 모종의 개념적 추상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기서 소개되는 자연에 대한 회화적 모사는 저자의 창조적 관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결핍을 안고 있는 그럴듯한 복제물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 플라톤에게 예술가의 모방은 최소한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진상과 거리가 먼 가상을 추구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오늘날 music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말을 음악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349d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말 자체가 원래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가는 이른바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문학적 시가를 비롯해서 그에 수반하여 이루어지는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예술 분야 전반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에 준하는 이야기이자 노래였던 까닭에 mousikē에 능하다는 것은 예술 능력은 물론 품위 있는 시민으로서의 교양과 식견을 두루 갖추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mousikē는 ‘학예’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μουσικός(mousikos) 또한 단순히 음악 관련 전문가만이 아니라 예술인과 지식인의 뜻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 플라톤이 통치자를 언급하며 가장 많이 비유적으로 인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의사이다. 통치자는 나라의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체적 질병이 문제여서 말 그대로 의사가 필요하다.

 

2-7. 전쟁의 기원과 수호자 계층의 발생(373d-374d)

 

[373d]

*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가 어떻게 호사스런 나라로 변화하는지를 자세하게 이상과 같이 살펴본 후에 이제 이러한 나라에서 왜 전쟁πόλεμος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나라에서는 식량 수요가 크게 늘어나 결국에는 식량을 생산할 영토χώρα가 모자라게 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목축하고 경작하기에 넉넉한 땅을 가지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경우 이러한 땅을 가지는 방법은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웃나라 사람들의 땅을 일부분 떼어내야ἀποτμητέον 할 것이고, 이웃나라 사람들 역시 그들대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τὸν τῶν ἀναγκαίων ὅρον를 벗어나 ’재화(돈)의 끝없는 소유에’ἐπὶ χρημάτων κτῆσιν ἄπειρον 자신들을 내맡겨 버릴 때는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이다.

 

[373e]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전쟁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지εἰ ἀγαθὸν ἐργάζεται 나쁜κακὸν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 다만 최소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 만큼은 발견했다고 말하기로 하자고 언급한 후,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라고 단언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틀림없는 말씀이라고 동의를 표한다.

 

[374a]

*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이제 이 나라에는 소규모가 아니고οὔ τι σμικρῷ 나라의 모든 재산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들에τοῖς ἐπιοῦσιν 대항해서 싸울 전체 군대만큼의ὅλῳ στρατοπέδῳ 확대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로써 충분한지 못한지οὐχ ἱκανοί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듯이 ‘한 사람이 여러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ἀδύνατον ἕνα πολλὰς καλῶς ἐργάζεσθαι τέχνας.고 말한 후, 전쟁과 관련한 겨룸ἀγωνία 또한 하나의 전문 기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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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373d-374a)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음미해볼 것이 있다..

1) 호사스런 나라의 규모와 수가 크게 확대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욕구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영토 확장욕과 필수적인 것 이상에 대한 욕구 증대로 인한 재화의 소유욕이다. 물론 텍스트는 목축과 경작을 위한 영토 확장욕은 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재화에 따른 소유욕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욕망들 모두가 전쟁의 원인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전쟁의 원인은 목축과 경작을 위한 보다 넓은 땅과 호사스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화 즉 땅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이다. 373e에서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그런 것들’이라는 말에서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돈의 소유욕에 자신을 내맡기게 되는 경우를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라가 호사스런 단계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욕망이 모두 화폐가치로 환원될 정도로 질적인 차이가 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비와 사치가 미덕으로 추앙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적성과 소질에 따른 다양한 욕망은커녕 모든 욕망들이 화폐가치로 환원되어 서열화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다양성은 다만 그러한 서열의 상승을 위한 수단의 다양성에 불과한 것으로 질적으로는 이미 획일화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전쟁의 원인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이 제시되고 그에 따라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고 종국에는 철인정치가 내세워진 것도 근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탐욕이 초래하는 그러한 파행적 종말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2) 박종현 역본은 이 부분을 앞서 인용하였듯이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로 옮기고 있다. 이 번역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하는 단서로만 풀이되어 있고 그 나쁜 일들에 전쟁이 포함되는지 여부를 열어 놓고 있다. 이는 아마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을 ‘전쟁과 그와 같은 부류의 일들’(war and the like)로 해석하는 일부 주석가(Schneider, Stallbaum)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연구가들은 위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을 바로 앞의 문장에 나오는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과 연결시킨다. 그러한 한, ‘그런 것들’은 영토와 재화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 문장을 앞에 나오는 문장과 연결시켜 다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나라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또는 공적으로나 정작 나쁜 일이 생길 경우에 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들인데 전쟁 또한 그러한 것들로부터 생기는 것일세.’

3)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전쟁이 나쁜 결과를τι κακὸν 가져오는지 좋은 결과를ἀγαθὸν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는 말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는 언급은 나중에 말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데 기대와 달리 <국가>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말의 의미를 그냥 전쟁에서 이기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패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가 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 증대는 결국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현실 경험을 통해 결과적으로 수호자 계층을 비롯해서 철학과 문명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은 나쁘기도 하지만 선을 결과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Adam 주석 참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처구니가 없다. 부정의 때문에 철학 통치자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부정의를 좋은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4) 필자 생각으로는 그 말은 평생 동안 플라톤 자신이 경험하고 목도한 아테네 전쟁들에 대한 평가, 무엇보다도 페리클레스가 제국주의를 내세운 이후 아테네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들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가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 덕분에 사회 경제적 성장은 물론 문학과 철학 예술 분야에서 다른 폴리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문화적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는 같은 민족인 이웃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와 착취의 기반으로서 이후 스파르타 등 이웃 나라의 반발을 초래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야기되면서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385년 전후 역시 아테네의 번영은커녕 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테네의 국력이 크게 쇠잔해진 시기였다. 평생 동안 아테네의 이와 같은 흥망성쇠를 지켜보면서 플라톤은, 페리클레스와 그 후계자들이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이 비록 사회 경제적, 문화적 풍요는 가져다주었기는 하지만 결국은 아테네를 멸망에 이끈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을 뼈저리게 통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메넥세노스>를 비롯한 여러 대화편에서 틈틈이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와 침략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아테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켜세울 법한 기원전 5세기 그 영광스러운 시절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고 있는 것이라 판단된다.

5) 플라톤은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결국은 이웃 나라 사람들의 땅을 떼어내려는 전쟁, 즉 침략 전쟁의 배경이 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흥미롭게도 정작 그 때문에 새롭게 생기는 군대를 침략자가 아니라 반대로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수호자 즉 방어를 위한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 호사스런 나라가 땅을 떼어내기 위해 벌이는 침략 전쟁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전후 맥락상 어색한 일이다. 왜냐하면 드러난 문맥만 보면 호사스런 나라는 욕구가 증대해도 어떤 영토도 침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형국으로 읽혀질 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맥을 플라톤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플라톤의 속내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호사스러운 나라에 이르면 그 증대된 욕구로 말미암아 전쟁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게 불가피하다. 그러나 설사 그럴 지경에 직면했을지라도 플라톤은 어떻게든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통해 그 욕구를 해결해서는 안 되며, 다만 전쟁을 해야 한다면 이웃 나라가 침략할 경우 방어를 위한 전쟁에 한해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을 편들어 이 문맥에서 그러한 함축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럴 경우 호사스런 나라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침략 전쟁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의 문제가 플라톤에게 남는다. 물론 여기서 그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전후 문맥들을 종합적으로 살펴가며 생각을 기울이면 우리는 플라톤이 호사스런 나라의 등장을 불가피한 현실로 인정하고 전쟁 욕구도 상존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기 보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을 통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들과 직능들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그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가 직면하는 문제들이 비록 전쟁 욕구를 촉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그들 내부의 욕망들을 규모와 수, 종류와 형태의 측면에서 서로 조율하고 조화시키는 이른바 정치적인 해결 방식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의 나라에 이어 호사스런 나라를 등장시키고 전쟁에 대한 욕구와 그에 대처하는 군대의 필요까지 끌어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단지 전쟁관련 전문가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관련 전문가도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진 후 나중에 가면 수호를 위한 최고의 직능으로서 정치를 담당할 통치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이들 통치자가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리는 한, 최소한 침략 전쟁은 없으며 전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나라를 수호하는 방어 전쟁만 있을 뿐이다.

6) 그리고 욕구의 증대가 초래하는 과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에는 뭔가가 생략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이웃 나라와의 전쟁의 원인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그가 구상한 논의 전체 틀에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 포석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곧바로 이웃 나라에 대한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에는 과정상 뭔가 간과되어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가 372e-a에서 보듯이 어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 이전에 내부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이 심해지면 이른바 내전도 일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런 내부의 갈등이나 내란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그것이 생략된 이유를 찾아본다면 내란이나 내분, 분쟁 등으로 번역되는 stasis라는 말 자체가 이른바 전쟁을 의미하는 polemos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전쟁의 발생 배경을 언급하는 단계에서 그것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나 다툼도 호사스런 나라가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인 한, 호사스런 나라에는 전쟁에 대한 욕구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치에 대한 욕구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 전체를 보면 내분이나 내란의 문제는 플라톤에 의해 현실 국가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서 이곳저곳에서 수도 없이 반복해서 거론되고 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은 종종 내부의 분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촉발되기도 한다. 아테네 역시 그랬다. 그런 점에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전쟁에 대한 욕구에는 그러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군인만이 아니라 통치자에 대한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는 추정은 이후의 플라톤의 논의 전개와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7)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로 발전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시킨다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앞서도 살폈듯이 이곳 논의 단계의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에 후속해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애초부터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 즉 작은 글씨인 개인의 영혼들을 나라라는 큰 글씨를 통해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인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에 대한 설명에 이어, 그 상위 부분인 기개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서 등장하는 수호자 계층에 이어 장차 통치자 계층의 등장과정에 대한 설명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 역시 전체적인 논의 구조상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8) 이곳에서(375e) 군대의 등장을 ‘소규모가 아니라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울 전체군대만큼의 확대’라는 표현 또한 이곳에서 요구되는 직능의 확대가 단지 전쟁 발발에 따른 특정 전쟁 기술들이 일부 추가되는 수준이 아니라 침략자 전체에 대항할 만한 규모 즉 생산자 계층의 규모에 상응할 만한 새로운 계층의 등장임을 보여준다. 즉 호사스런 나라에서 전쟁의 발발을 배경으로 요구되는 전쟁 관련 기술은 생산자 계층에서의 특정 직능과 동급 수준의 직군이 아니다. 생산자 계층에 농부와 제화공, 벽돌공, 무역상 등이 내부 세부 직군으로 소속되어 있듯이 전쟁 관련 기술 또한 이를테면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중무장 보병, 기마병, 해병, 노수 등 전투 형태별 기술은 물론 장비별로도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세부 기술들이 그 내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체 군대만큼의 확대’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특정 직능 수준의 군인이나 군대의 확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자와 싸울 전체 기술들과 직군들을 총망라한 모든 군대만큼의 확대 즉 계층 차원에서의 확대임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전체 틀을 염두에 두고 순서에 따라 생산자 계층에 이어 수호자 계층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9) ‘그들로써 충분하지 못한가요?’라는 글라우콘의 물음은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따로 군대라는 별도의 전문적인 직군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인으로서 일반 시민들 모두가 군인으로 나서 싸우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에서(370c)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음을 환기시킨다. 사실 이러한 언급은 생산자 계층의 구성에서도 확인되었듯이 플라톤의 분업과 전문가 주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글라우콘의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이라는 플라톤 비판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요 근거로 종종 인용된다. 왜냐하면 스파르타야 말로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언급한 대로 직업적인 군인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군인이고 생산 관련 일은 그러한 군인들이 틈날 때에 종사하던 이른바 전사들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분명 그러한 나라를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 생산자 계층과 군인 계층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고 군인 계층조차 전술과 무기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전문적인 직군들로 구분하고 있다.

 

[374b-c]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쟁과 관련된 겨룸ἀγωνία 역시 기술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러한 ‘전쟁 관련 기술’πολεμικῆ이 제화 기술 등 일반 기술보다 더 신경을 써야하는κήδεσθαι 일임을 밝힌다. 그리고 최초의 나라에서 여러 전문 기술자들에게 각각이 적성에 따라 한 가지 일을 맡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σχολὴ로이 대하고 오직 그 일에만 종사하게 한 것은 각자 자기 일을 적기καῖρος에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재확인 한다. 그런 연후 그는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 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 전쟁 관련 기술 역시 철저하게 분업과 전문가 원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쟁과 전쟁 무기와 관련한 기술들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예시한다. 즉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방패ἀσπίς 등 전쟁 무기πολεμικῶν ὅπλον나 장비들ὀργάνων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고 해서 그날로 중무장 병기 사용술ὁπλιτικός이나 다른 형태의 전투μάχη에서 유능한 전사ἀγωνιστής가 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도구든 그 각각에 대한 지식ἐπιστήμη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충분한 연습을τὴν μελέτην ἱκανὴν 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쓸모χρήσιμος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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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룸(경쟁)의 원어 ἀγωνία(agōnia)는 오늘날 번뇌를 뜻하는 영어 agony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경쟁이 곧 번뇌임은 그제나 오늘날에서나 불변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

* 박종현이 옮긴 ‘제화 기술이 전술보다도 더 신경을 써야만 되는 것인가?’라는 역문에서 ‘전술’이라는 말은 ‘전쟁 관련 기술’이란 말로 고치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그 말의 원어 πολεμικῆ(polemikē)는 전쟁 관련 기술 일반을 총칭하는 말로서, 생산자들의 기술이 제화 기술, 농업 기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듯이 polemikē 역시 중장비 병기 사용술, 해전술, 기마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전쟁관련 기술을 총칭하는 그 말을 생산 기술의 어떤 하나인 제화 기술과 동급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 말 자체로 전쟁 관련 기술이 나라의 존망과 관련된 기술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범주 차원에서도 당연히 훨씬 많이 신경을 써야할 계층 차원의 기술임을 의도적으로 담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이란 역어가 전쟁관련 기술의 하나인 전술(tactic)의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 말의 원래 뜻과 어울리지 않는다.

* ‘다른 형태의 전투’는 중장비장갑보병 및 기마병 등이 수행하는 육상 전투 형태들 그리고 삼단노선을 이용한 해상전투 형태를 망라해서 표현한 말이다.

* 지식과 연습에 대한 언급은 기술의 탁월성이 선천적인 적성만이 아니라 후천적인 연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기술은 앎이자 지식이되 단순한 앎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앎이다.

 

[374d]

* 전쟁을 수행하는 기술은 그에 적성이 맞는 사람이 따로 있으며, 게다가 무엇보다도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374c) 이 나라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곧 수호자φύλαξ들이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들이 나라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μέγιστον 것인 만큼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가 요구되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요한다고 말한다.

 

[374e]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업무에도 그에 걸 맞는 적성이 요구되는 만큼 나라의 수호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고 어떠한 성향들이 적합한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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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에서 매우 중대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수호자’라는 말이 이곳에서 처음 나온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하게 되면서 생산자 계층에 이어 마침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러한 수호자 계층이 수행하는 일ἔργον은 단순히 어떤 특정 기술과 비교될 수 없는 나라의 수호와 관련된 기술 내지 일 전반에 걸쳐 있다. 그러한 한, 수호자의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 만큼 다른 일에 대해 최대한 한가로운 태도와 그 자체로 최대의 기술과 관심이 요구되는 일이다.

* 수호자 계층은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전사들)stratiōtai과 통치자들archontes이 될 사람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 구성을 거론하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통치자 계층은 이 수호자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따로 선발된 사람들이고 전사 계층은 그 나머지 사람들이다. 실제로 <국가> 제3권 414b, 제4권 428b에 가면 수호자 계층이 두 부류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이름들로 불리어진다. 통치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은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eleis), ‘완전한 수호자들teleoi phlakes’, ‘참된 수호자들alēthino phylakes’로 불리어지고 나머지 사람들 즉 전사들은 ‘보조자들’epikouroi 또는 ‘협력자들’boēthoi로 불린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구성되고 이른바 수호자 계층이란 그곳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 이후에는 수호자들의 성향 내지 적성들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제2권 처음부터 여기(374e)까지를 <국가>를 구성하는 큰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구획 짓고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연구자들은 앞서 생산자 계층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적성과 성향을 같이 언급했듯이 다음에 이루어지는 수호자들의 성향에 관한 논의까지(376c)를 하나의 큰 단락으로 묶고 이후의 내용부터 수호자의 교육을 다루는 새로운 단락으로 구획 짓기도 한다.

* 우리의 강해는 제2권 강해 서두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자의 구분에 따르고 있다. 그래서 실제 학당 강의는 이후의 내용까지 일부 다루었지만 위의 단락 구분을 고려하여 이번 웹진 강해록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서울자유시민대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2기 수강 안내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2기 수강 안내

<서울자유시민대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2기 수강 안내를 합니다.

많은 분들의 성원과 호응으로 1기 강좌가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이에 오는 7월 18일부터 10월 10일까지 매주 목요일 7시, 총 10주 동안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에서 2기 강좌를 진행합니다.

2기에는 더욱 풍부한 주제와 강의로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 여름과 가을까지 한철연에서 함께하는 지성의 장을 펼쳐보시길 바랍니다.

시민 여러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2기 수강 안내 –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문제들

○ 강좌기간 : 2019년 07월 18일(목) ~ 10월 10일(목)
○ 일시 : 기간 내 매주 목요일(08월 15일, 09월 12일, 10월 03일 휴강) 저녁 7시~9시
○ 장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첨부파일 약도참조)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서교동)
○ 수강대상 : 서울시민이나 우리 삶과 철학에 관심 있는 청년 및 중·장년
○ 수강인원 : 선착순 20명
○ 수강료 : 무료
○ 수강신청기간 : 06월 03일 ~ 07월 17일(수강신청 이후에도 자리가 남으면 수강신청 가능합니다)
○ 신청방법 : 이메일신청 kophil@daum.net (반드시 이메일을 이용해 주세요),
신청자의 이름, 연령, 성별, 연락처, 이메일을 꼭 적어서 신청해 주세요.
※ 1기 신청자도 2기 수강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 문의  kophil@daum.net  02-332-4301

 

  • 제2기 주제와 일정 :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문제들 / 강사 : 송종서, 이지영

<1주~5주 강사 : 송종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1주 7.18(목) 근대 동아시아의 사상·문화 변동 : 1) 서양 학습의 어려움과 ‘공화제’의 갈증 2) 무너져버린 대한제국의 ‘천하’관 3) 에도 말기 ‘나쁜 이웃’과 메이지유신

2주 7.25(목) 유교 전통과 20세기 동아시아 : 1) 중화민국~신중국의 반(反)유교 운동 2) 홍콩·타이완 신유가의 ‘중국문화선언’ 3) 유교사상과 경제발전의 관계

3주 8.1(목) 유교역할론과 ‘아시아적 가치’ : 1) 1980년대 ‘문화열’과 현대신유학 연구 2) 유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3) 리콴유와 김대중의 아시아적 가치 논쟁

4주 8.8(목) 글로벌리즘 VS 팍스 시니카 : 1) ‘중국특색사회주의’에서 ‘중국몽’까지 2) 팍스 시니카: 유교적 평화주의 전략 3) 촛불광장과 ‘공자학원’의 어색한 풍경

5주 8.22(목) 신(新)중화제국 VS 세계 다극화 : 1) 영·미: 브렉시트와 세계 다극화 전략 2) 일본: 반중·대미종속에서 다극화로 3)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한국인의 의식 4) 혼종(hybrid) 문화전략과 신(新)한류

<6~10주 강사 : 이지영(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6주 8.29(목) 17세기 서구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탄생 : –개인과 자연권으로서의 시민권

7주 9.5(목) 18세기 여성과 시민권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8주 9.19(목) 여성주의와 비인간 생명의 권리 :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스

9주 9.26(목) 다양성, 숙고와 참여로서의 민주주의 1 : -아이리스 영

10주 10.10(목) 다양성, 숙고와 참여로서의 민주주의 2 : -아이리스 영

 

나는 나인가? 내가 나라면, 나를 표현하라!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는 나인가? 내가 나라면, 나를 표현하라!

 

박종성(한철연 회원)

 

 

내가 사람에 대한 애정에서 글을 쓰는가?

아니다, 나는 세계 속 현존을 내 생각에 마련해 주려고 글을 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생각이 당신에게서

당신의 휴식과 당신의 평화를 빼앗을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을망정,

내가 이러한 생각의 씨앗으로부터

가장 피 터지는 전쟁과 많은 세대의 몰락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알망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생각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당신이 하고자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그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331)

 

 

이 글에서는 맑스의 가치 형태 분석을 차용하여 슈티르너의 인간다움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상품들이 등가형태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듯이, 인간다움이라는 대상성의 힘에 눌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유령적 대상성의 힘, 가치의 거울이 우리 자신을 재현하고 있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령적 대상성이라는 이상을 현실화하지 말고, 자기 가치를 표현하는 삶을 위해 고정된 대상과의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운 대상과의 관계, 곧 자아의 자기실현을 창조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라는 명령이 등장한다. 힘의 사용은 소유를 가능하게 한다. 자아의 자기실현은 자기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아가 자신이 자신에게 명령하므로 자유이다.

먼저 슈티르너의 의심을 들어보자. 고정된 대상성을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은 ‘의심’이다.

 

 

보편적 이성이라는 유령적 대상성

 

더 현대다운 철학 혹은 시대가 우리를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 않기 때문에, 더 현대다운 철학 혹은 시대가 자유를 성취 했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94)

 

맑스의 대상성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자. 모든 가치 형태의 비밀인 제1가치형태, 즉 단순한 가치형태는 “xA(상대적 가치형태) = yB (등가형태)”이다. 여기서 등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건들의 물리적 속성이 다른데 같다는 것은 추상노동, 평균적 인간, 추상적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 A는 자신의 가치를 B를 통해 표현한다. 다시 말해 A의 거울은 B이고, B는 ‘대상성’(Gegenstandlichkeit), 곧 ‘가치의 거울’(Wertspiegel)이다. xA = yB; 아마포 20미터= 저고리 1벌이다. 여기서 ‘저고리 1벌’은 ‘유령적 대상성’, ‘가치 영혼’(Wertseele)이다. 맑스는 등가형태를 대상성, 곧 상대적 가치형태가 ‘마주’본다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대상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략하게 말하면 개인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다. “나는 세계와 마주하여(gegenüber) 더 이상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사랑이 나를 나타낸다.”(330) 사랑이 나를 나타낸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인간다움=‘추상화된 본질’(197)이라는 의미이고 참된 인간=국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고정관념은 “머릿속에서 ‘유령으로 출몰한다(spukt) 그리고 “가장 괴롭히는 유령(Spuk)은 인간(der Mensch)이다.”(80) 일반적 본질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A = C 이고 B = C이다. 따라서 A = B인데, 다시 말해 나는 단지 인간일 뿐이고 너는 단지 인간을 뿐이다. 고로 나와 너는 같다.(196)

 

A, B는 개별자, 개인인데 C라는 ‘인간’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 그러니까 ‘인간’, ‘추상적 본질’, ‘참된 인간’ 등등은 맑스의 용어로 ‘유령적 대상성’이고 ‘가치의 거울’이다. 또한 민중들과 국가들을 ‘인류’와 ‘보편적 이성’(allgemeinen Vernunft)으로 변용시키는 것은 노예근성을 더 강하게 생성한다고 비판한다.(267) 자아와 비아의 관계는 역설적이다. 비아가 강해지면 자아는 약해지고 비아가 위대하고 신성하면 자아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된다. 가치의 거울은 ‘보편적 이성’, ‘인간다운 사회’, ‘인류’, ‘인간다운 가치’이다. 달리 말해 일반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일반적 이성’으로 변용시킨다는 것, 그것은 맑스의 화폐형태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슈티르너가 말하는 변용을 화폐형태의 발생에서 제3형태인 일반적 가치형태와 상응시키면 어떻게 될까?

화폐형태 분석의 제3형태는 일반적 가치형태(Allgemeine Wertform)이다. 이는 아래와 같다.

이전의 가치형태와는 달리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등식 전체의 성격이 변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단순(하나의 상품)하고 통일된(동일한 상품) 표현이라는 점이다. 이는 전개된 가치형태의 무한정성, 잡다함이 해소되고 공통된 어떤 것인 가치, 사회적인 것, 추상노동을 전제한다. 이는 상품 A의 가치표현이 완성되지 않고, 통일성이 없다는 제2형태인 전개된 가치형태의 결함을 극복한 것이다. 맑스의 표현으로는 “다채로운 모자이크”의 결함을 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개된 가치형태는 동일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게 한다. 그런데 동일성을 전제했을 때, 통일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통일성은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나타난다. 이제 특정 상품의 몸으로 현현한 화폐형태가 등장한다. 왕의 출현이다! 왕이 승인하지 않으면 상품사회에서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슈티르너의 용어로 ‘일반적 본질’이라는 통일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것, 곧 가치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된 인간’, ‘국민’, ‘인류’, ‘보편적 이성’(allgemeinen Vernunft), ‘인간다운 인간’, ‘인간다운 사회’, ‘인간다운 가치’, ‘유령들’, ‘고정된 대상’, ‘숭고한 신성한 것’(Hochheiligen), 동등성, 신성한 표상(Vorstellung), ‘보편적 인권’, ‘일반적 본질’, ‘추상화된 본질’, ‘현실적 유적존재’(wirkliches Gattungswesen), ‘본질규정’ 등등이다.

 

 

 

새로운 인간성은 이념의 현실화가 아니라 힘의 표현이다.

 

맑스에 따르면, 가치는 금이라는 자신의 동등성, 하지만 ‘머릿속에서 유령으로 나오는’(Köpfen spukt) 것에 불과한 동등성(Gleichheit)을 통해 내보인다.(자본, S. 110–111) ‘인간다운 가치’는 동등성인데 동등성은 인간다운 정신의 동등성(190)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한 표상’이라는 ‘이상의 현실화’(411)를 비판한다. 그는 개인들의 존재 이유를 ‘이념의 현실화’(Verwirklichung der Idee)(411)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맑스의 ‘현실적 유적존재’를 비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를 그토록 비난한 맑스 또한 계급투쟁이라는 진부한 말 대신, 공산주의를 다시 묘사한다. 공산주의는 더 이상 “현실이 스스로를 가져다가 맞추어야 하는 이상”이 아니라 “현존하는 질서를 폐지해 버리는 현실의 운동”이다. 어쩌면 맑스는 슈티르너를 공격하면서 그와 공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슈티르너는 고정된 대상과의 관계를 ‘폐지의(Auflösens) 관계’(79)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정된 대상의 파괴자이자 새로운 대상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관계는 ‘자아의 자기실현’(Selbstverwertung)(302)이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잘 쓰던 말을 다음과 같이 변주한다. “네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Verwerte Dich!)

그러면서 그는 “에고이즘과 인간성(인도주의 정신 Humanität)은 같은 의미”(200)였어야 한다고 아쉬워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국민이라는 것은 내 특성(Eigenschaft)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이 내 특성일지라도, 나는 내 특성으로 흡수되어 없어지지 않는다. 나는 내 유일성에 의해 비로소 인간에게 실존(Existenz)을 준다.”(271) 내 특성으로 흡수된다는 것은 나다움이 사라진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다움에서 나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다움에서 비로소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동등성(Gleichheit)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오로지 세계보다 상위에 있는 힘(Macht)이고자 하고, 세계를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데, 다시 말해 세계를 향락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한다.”(356) 세계와 내가 교류하는 목적은 향유이다.

잠시 맑스로 돌아가 보자. 단순한 가치형태, 전개된 가치형태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인 상품 A가 자신의 가치를 상품B로 표현한다. 전자가 능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등가형태인 상품 B는 수동적 역할을 수행한다.(김수행,<자본>, 60쪽.) 그런데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형태를 통해서만 상대적 가치형태의 가치를 재현할 수 있다. 이를 표현적(expressive) 관계가 재현적(representative)관계로 대체된 것이라고도 한다. 슈티르너 또한 이러한 재현적 관계를 표현적 관계로 뒤집어 놓고자 한다. 그는 고정관념에 속하는 ‘소명’보다는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갖고자 한다.(366) 힘의 존재는 분명히 힘의 표현(Äusserung)(366)이다.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란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200)

 

힘의 표현은 힘의 사용이며 이는 소유와 연결된다.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힘만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저작 제목 『유일자와 그의 소유』을 상기해 보자. 소유라는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을 음미해 보자.

 

네 힘을 사용하라. 물론 이러한 명령(Imperativ)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놓여 있을 수 있다. 곧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라는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 먼저 자신의 소명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적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소유한 만큼의 힘을 모든 순간에 모두가 사용하는 것이다.(366)

 

‘명령’의 어원은 ‘명령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imperare이다. 도덕 철학에서 “너는 ∼해야 한다”의 명령 형태를 지닌 도덕적 의무를 말한다. 이전의 ‘에고이스트 사랑’에 관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무가 있다. 따라서 “네 힘을 사용하라”라는 명령은 자신이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소명이라는 외적 명령이 아니라, 나의 힘은 나의 것이니까 힘을 소유한 자신이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이는 소명이라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염려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Sorgen)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39)이다. 그의 저작이 출판되고 83년 뒤, 1927년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다”는 인간의 본질적 성격을 ‘실존’이라고 했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염려(Sorge)의 방식으로 관계한다는 것, 곧 자신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이다.

또한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만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힘은 소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힘이 미치지 못할 때, 소유는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소유를 가능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가 단 한번 언급한 ‘개인적 소유’에 대한 음미가 다시금 필요하다. 곧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킨 것만으로는 소유를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개인이 무엇을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어떨까! 따라서 현실적으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다 근원적이다. 잠재태가 현실화되는 것, 곧 현실태로 표현되어야만 자기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다움’에 대한 비판, 그것은 새로운 인간성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라로 귀결된다. “네 힘을 사용하라”는 자기결단이고 자기의지이므로 자기전권위임이다. 자기전권위임은 자유이다. 나는 나인가? 그렇다면 나니까, 나를 표현해 보자. 그리고 자문해 보자. 난 자유인가? 그대는 어떤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4. 무역상, 소매상, 임금 노동자 등 서비스업과 화폐의 발생(371a-371e)

 

* 앞서 문자의 비유가 보여주듯 최초의 나라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기 성향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게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일을 한다’(370b)는 플라톤의 언급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것은 적성에 따른 분업을 정당화하는 중대한 전제로서 장차 정의로운 나라의 속성을 규정하는 핵심 토대가 된다. 플라톤에게 인간은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달리 결코 이기심을 본성으로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그에 따라 서로 필요에 따라 의존하고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될 사회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적성 또한 서로 다르게 가지고 태어나 기꺼이 서로의 필요에 부응하는 자질 또한 갖추고 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생각은 단지 당대 아테네가 패권주의를 지향한 이래 상업화되고 개인주의화되면서 마치 이기심이 자연적 본성인 양 왜곡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의로운 국가는 근본으로 되돌아가 협동적 존재로서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새롭게 다시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371a-b]

* 상대국과의 거래 즉 수입εἰσάγειν 및 수출ἐξάγειν이 요구되는 한, 나라는 상대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류의 것들도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 한다. 이에 따라 더 많은 농부들과 장인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각 종류의 물건들의 수입과 수출을 도와 줄 심부름꾼διάκονος 즉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τῶν ἐπιστημόνων τῆς περὶ τὴν θάλατταν도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 때문에 협력 관계κοινωνία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으므로 나라 안에서도 물건들을 서로 팔고 사는 일이 필요하여 시장과 교환을 위한 표σύμβολον로서 화폐νόμισμα가 생겨난다.

 

[371c-e]

* 그리하여 시장ἀγορά에서 생산물의 유통을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생산물을 교환해줄 심부름꾼으로서 소매상πρᾶσιν διακονοῦντας이 나타나고 짐 운반 등 체력의 사용을 파는 사람들οἳ δὴ πωλοῦντες τὴν τῆς ἰσχύος χρείαν 즉 체력 사용의 대가로서 임금μισθός을 받는 임금노동자(고용인)μισθωτοί도 생겨난다. 소크라테스는 소매상을 ‘제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들의 경우 대개 신체적으로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에는 무용한 사람들’πόλεσι σχεδόν τι οἱ ἀσθενέστατοι τὰ σώματα καὶ ἀχρεῖοί τι ἄλλο ἔργον πράττειν로 묘사하고 있고(371c) 임금노동자는 ‘지적인 일에서 동반자 관계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는’τὰ μὲν τῆς διανοίας μὴ πάνυ ἀξιοκοινώνητοι ὦσιν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371e)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농부와 건축공, 직물공, 제화공, 목부 그리고 무역상과 소매상, 임금노동자를 최초 국가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 즉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른 국가로 언급하고 그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하는 만큼 ‘완전 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ἡ πόλις, ὥστ᾽ εἶναι τελέα라고 말한다.(37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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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무역상ἔμπορος은 수출입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이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은 선박으로 사람과 화물을 운반하는 해운업자ναύκληρος이다.

* 보통 화폐νόμισμα가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 가치의 교환, 가치의 척도, 가치의 저장 기능을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화폐가 처음에 교환을 위한 물표로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이후 화폐는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언제라도 필요한 물건과 바꿀 수 있는 가격 즉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되었고 시장에서도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상점과 상인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화폐는 거래 물건들의 경제적 가치를 표시하는 척도가 되었다. 특히 화폐가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된 이후 화폐는 교환 수단을 넘어서 장차 높은 가격으로 되팔기 위한 매점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화폐 자체가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 되면서 화폐의 소유욕의 증대에 비례하여 차입의 욕구 또한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돈으로 돈을 버는 직종 즉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의 유통과 판매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금융업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화폐의 발생을 통해 사용가치를 갖는 구체적 물건들이 화폐로 추상화되고 가격으로 일원화되면서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우위가 초래된 것이다. 게다가 금융의 발달에 따른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절대적 우위는 생산자 계층에 대한 관리 계층의 우위는 물론 인간의 욕망을 부에 대한 욕망으로 일원화함으로써 금전만능주의를 탄생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대로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수단에 거꾸로 종속되는 이른바 소외(Entfremdung)가 발생한 것이다.

* 아테네 당대에만 해도 이미 은행이 존재했고 개인들 간의 금용 거래는 물론 고리채 또한 성행했다. 플라톤은 이미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 화폐의 기능을 교환 기능으로 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단지 일반론 차원에서 최초국가 단계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언급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화폐의 사적 소유욕의 증대와 고리채 등 금융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상화된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서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아테네 당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재물의 사적 소유가 금지되고 있다. 재물의 소유와 축적은 오직 생산자계층에게만 허용되고 있고 통치자 계층에게는 최소 필수품 이외의 어떠한 소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권력과 부를 함께 갖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권력은 순수하게 시민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덕이자 행복으로 여기는 자의 몫이다.

* 플라톤이 소매상을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데 무용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고 해서 플라톤이 소매상이나 허약한 사람을 폄하하고 있다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곳에서는 최초국가에서 소매상도 나라 안에서 서로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고 그 또한 그 일을 맡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면 그 일은 태생적으로건 후천적으로건 신체가 약한 사람들이 맞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무용하기로 말하면 철학자들 역시 농사나 소매상 등 생산이나 유통 관련 일에서는 무용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소매상을 ‘그 일을 눈여겨보고 스스로 떠맡는 사람εἰσὶν οἳ τοῦτο ὁρῶντες ἑαυτοὺς ἐπὶ τὴν διακονίαν τάττουσιν ταύτην(371c)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소매상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일이 아니라 필요와 적성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뒷받침해준다. 체력의 사용을 파고 사는 사람들 즉 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묘사 또한 소매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그 일을 스스로 떠맡는 사람들이며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라 최초의 나라의 정원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은 그들에 대한 폄하를 포함하고 있다기보다는 신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의 차이가 현실적으로 현존하고 그러한 사정이나 여건이 달리 변화할 가능성이 거의 힘들다면, 그들의 사정과 적성에 따라 그들에게도 서로가 필요한 사회적 역할이 주어질 수 있고 주어져야 함을 언급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여기에 나오는 임금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예속되어 강제로 노동하는 노예와 달리 최소한 이들은 그 일을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 일에 대한 대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이곳 최초의 국가의 정원에는 노예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에 근거해서 플라톤이 그리는 정의로운 국가에 아예 노예 자체가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비록 노예가 맡은 일의 대부분이 체력을 쓰는 일이지만 시민 가운데에도 체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임금 노동자가 바로 그 시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사람이 아닌 마소로 여겼고 플라톤 역시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노예의 존재는 이미 정의로운 국가에서도 당연한 존재로 전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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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최초 나라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을 보면 결국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나라는 농부, 직물공, 건축공, 목부 외에 무역상과 해운업자 그리고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로 구성된 나라이다. 이들 모두는 직접 생산과 유통을 도와주는 이른바 물적 기반을 마련해주는 심부름꾼들로서 장차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생산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아직 정치가나 지식인, 철학자가 없는 이와 같은 최초 국가를 ‘완전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이쯤에서 우리는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 요구에 대한 답변을 시작하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확대시키고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는 한 마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과 나라 안에서 어떤 힘(dynamis)으로 작용하기에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고 낫다는 것인지’를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하는 어떤 힘이란 개인의 경우 영혼들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미 언급된 바 있다.(358b) 사실 그것은 장차 개인의 정의를 설명하는 키워드로서 영혼 3분설에 따른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 기개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임을 예고하는 것이자 소크라테스가 답변을 시작하면서 다룰 대상이 다름 아닌 개인의 영혼임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되 그것을 보다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같은 성격을 갖는 나라를 들여다보고 그 다음에 다시 개인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장차 개인과 나라를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살피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일단 이 제안이 개인의 영혼들을 보다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한 방편으로 끌어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나라에 대한 고찰이 내용적으로 개인의 영혼들에 대응해서 제시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개인 영혼의 세 부분은 나중에 드러나듯이 나라의 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과 그대로 대응된다. 이와 같은 논의 구도상의 전후 맥락을 염두에 두고 최초국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살필 경우, 결국 소크라테스가 그 최초의 국가를 생산자들로 구성된 나라로 구성하고 그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이 최초의 나라가 결국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최초 국가에 이어 사치스런 나라가 소개되고 그 사치스런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나오고 장차 그곳에서 다시 통치자 계층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나라의 기원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정의로운 나라의 세 계층이라는 전체 구도를 염두에 두고 그 가운데 우선 생산자 계층의 성립과정부터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기획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가 장차 사치스런 나라로 계속 변화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이 최초의 나라를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나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우선 일차적으로 생산자 계층에 관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최초국가에 대한 기술을 통해 부정의가 생기기 직전 단계까지 즉 필요에 있어서 최소한도의 수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장차 드러날 정의로운 국가를 구성하는 3계층 가운데 물적 기반의 토대를 이루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우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371e]

* 이러한 나라를 수립한 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이 나라 안 어디에 정의와 부정의가 있으며,ποῦ οὖν ἄν ποτε ἐν αὐτῇ εἴη ἥ τε δικαιοσύνη καὶ ἡ ἀδικία; 그 각각은 우리가 이제껏 검토해온 것들(주민들 또는 기능들)중 어느 것과 더불어 생겨났을까”καὶ τίνι ἅμα ἐγγενομένη ὧν ἐσκέμμεθα;를 묻는다.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사람들 상호간의 어떤 필요” χρείᾳ τινὶ τῇ πρὸς ἀλλήλους에 의해서 그 각각이 생겼다고 답을 한다. 즉 위의 나라는 사람들 상호간의 필수적인 필요χρείᾳ에 입각하여 수립된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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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최초의 나라는 앞서 우리가 살핀 전체 논의 구도상 첫 단계의 완결일 뿐 종결은 아니다. 실제로 최초의 나라는 그 상태 그대로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변화를 맞이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경우, 순진무구하게 생존의 욕구만 충족되면 불만이나 고민도 없는 어린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고 점차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욕구 또한 다양화되고 증대되면서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와도 같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소크라테스가 완전하리만큼 성장한 최초의 나라를 언급한 후에 느닷없이 글라우콘에게 이 나라 안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고 무엇 때문에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지를 묻고 그 원인이 ‘필요’chreia임을 재차 확인하고 있는 장면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최초의 나라는 완결되었지만 최초의 나라를 성립시켰던 필요는 완결을 넘어 계속 나라의 변화를 낳는 근본 원인임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대화는 최초의 나라는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그 다음의 단계 즉 정의와 함께 부정의가 발생하는 단계가 계속 이어질 것이며 그 원인은 하나같이 ‘필요’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5. 건강한 나라, 참된 나라 그리고 돼지들의 나라(372a-372d)

 

[372a]

*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나라가 완전하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필요의 확대에 따라 등장하게 될 나라를 다루기 전에,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성립한 최초 나라의 모습 즉 서로에게 필요를 제공할 준비가 된 최초의 나라의 사람들οἱ οὕτω παρεσκευασμένοι이 어떤 방식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찰한다.πρῶτον οὖν σκεψώμεθα τίνα τρόπον διαιτήσονται.

 

[372b-c]

*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를 요약하면 이와 같다. “그들 모두 좋은 자리에 누워 충분하게 먹고 마시면서 신들을 찬송하며ὑμνοῦντες τοὺς θεούς 서로들 즐겁게 교제하고ἡδέως συνόντες ἀλλήλοις, 가난이나 전쟁πενίαν ἢ πόλεμον을 ‘유념하여’εὐλαβούμενοι. 재력 이상으로ὑπὲρ τὴν οὐσίαν 자식을 낳지도 않으면서 건강과 함께 평화로움 속에서ἐν εἰρήνῃ μετὰ ὑγιείας 일생을 보내다가 아마도 늙은이로서 고령에 죽으면서 그와 같은 또 다른 인생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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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먹거리들 즉 주식인 보리 가루ἄλφιτον와 밀가루ἄλευρον[372b] 그리고 부식(요리ὄψον)으로서 소금ἅλας과 올리브ἐλαία, 치즈τυρός, 삶은 구근βολβός과 채소λάχανον 요리, 그리고 후식τράγημα으로서 무화과σῦκον와 콩류ἐρέβινθος(완두콩) καὶ κύαμος(콩), 포도주οἶνος, 도금양μύρτη(방향성의 상록 관목, 아프로디테의 신목)의 열매μύρτον나 도토리φηγός 등(372c)은 당시 그리스의 일반 가정의 식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주목할 점은 그리스가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고 그에 따라 실제로 그리스인들 모두 반도에 정착한 이래 문어와 조개류 등 많은 어류들을 섭취했음에도. 플라톤이 서술하고 있는 식품에는 육류는 물론 어떠한 어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제1권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338c 강해 참고) 그리스인들은 육류는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스런 나라에서는 육류의 수요가 생겨난다.(373c 참고)

* ‘요리’의 원어 ὄψον(opson)은 기본적으로 익힌 주식에 곁들여 먹는 부식을 뜻하지만 익힌 음식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좁은 의미에서 육류와 어류 음식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글라우콘이 앞에서 ‘요리도 없이 잔칫상을 받게 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은 플라톤이 언급한 음식들에서 육류나 어류 등 고급 먹거리가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을 듣고 이어지는 설명이 그에 대한 보완 설명이라고 본다면 글라우콘이 빠졌다고 지적한 것은 그 내용으로 보아 육류나 어류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부식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세부 묘사들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최소한 의식주에 있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만족스러운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비록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정의의 원초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들이 유일하게 조심하는εὐλαβούμενοι 것은 가난이나 전쟁이지만 그것조차 말 그대로 ‘조심’ 또는 ‘유념’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전의 삶 즉 에덴동산의 삶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요컨대 그 요체는 건강과 평화이다. 건강은 말 그대로 신체적인 강건함이요 평화는 나라 사이에서건 개인 사이에서건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서건 갈등과 분열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 최초 국가의 사람들처럼 최소한도의 필요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의 경우, 인생을 살아가며 목표하는 것으로서 이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 이런 나라를 일컬어 ‘건강한 나라’라고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유기체로서 이 나라가 갖고 있는 신체적 건강 때문일 것이고 나아가 ‘참된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 또한 이 나라가 보전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분열과 갈등이 없는 평화의 상태 때문일 지도 모른다.

 

[372d]

* 그러나 글라우콘은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해 그렇게 수립된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ὑῶν πόλις”라고 폄하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 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주로 먹고 사는 일인데 그것은 돼지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으며 소크라테스가 그런 식으로 돼지의 나라를 수립하려했다면 과연 그런 것들만으로 돼지들을 살찌울 수 있겠느냐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주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반문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를 되묻고 글라우콘은 ‘흔히 하는 대로ἅπερ νομίζεται 그들이 불편을 감수할 사람들τοὺς μέλλοντας μὴ ταλαιπωρεῖσθαι이 아닌 한, 그들은 땅바닥 돗자리 위가 아닌 침상에 누워 식탁에 차려진 식사도 하고 요즘 사람들이 먹는 요리와 후식 즉 좀 더 고급스런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반문을 호사스런 나라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하는 것도 고찰해보자라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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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글라우콘에게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원인을 묻고 그 답이 ‘필요’chreia라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372a)과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가 세우려는 나라가 돼지들의 나라인 한, 그가 말한 것들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논의 구도상 최초의 나라에서 호사스런 나라로 이행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최초의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와 진배없으며 그에 따라 마치 돼지가 일정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필요를 추가해서 더 안락한 삶을 욕구하듯이 최초의 나라는 결코 그것으로 완결되지 않고 욕구가 증대하여 종국에는 사치스런 욕구까지 발생하여 결국 다른 나라로 불가불 변화하게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유기체의 성장이 필연이듯 사람의 욕구는 결코 일정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늘 필요를 생산하며 그에 따라 욕구 또한 필연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최소한 인간의 욕구는 어떻든 간에 일단 다양한 형태로 확대된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아가 만약 그 증대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서로의 갈등은 물론 전쟁까지 초래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즉 최초의 나라가 사치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그에 따라 갈등과 다툼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인 것이다.

* 여기서 인간의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는 것이 필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욕망의 증대가 제한된 가치 총량을 넘어설 때는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지만 인간의 가치에 대한 관념이 결코 일원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가치의 총량이란 말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정신적 가치 내지 서로 다른 가치에 대한 욕망은 따로 총량이 없다. 일부 물질적 가치 영역에서 갈등과 다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나 행태를 뒷받침하는 일반적 근거로 확대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인간 욕구의 증대에 따른 나라 내지 사회 계층의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찾고 있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최초의 나라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호사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호사스런 나라는 호사를 추구하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최고 단계인 자기 정화가 가능한 이상 국가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 결국 글라우콘의 냉소적 태도는 이러한 나라는 자신들이 듣고자 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되는 현실의 나라도 아니고 부정의를 정화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나라도 아님을 내비친 것이다. 사실 최초의 나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비록 건강과 평화 상태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나라나 개인이 질병과 분열을 적극적으로 이겨내고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의식주 등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한 채 살아가는 돼지 같은 삶이 가져다주는 건강과 평화이다. 그에 따라 이 나라에는 타자에 대한 긴장도 고민도 문제도 없으며 그런 까닭에 아직 정부도 정치도 철학도 없다. 물론 최초의 나라에는 비록 각자가 서로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여 수행하는 상태 즉 자연적인 정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지속해서 증대하고 그에 따라 나라가 규모나 수에서 확대 되고 필요가 충족되지 않음에 따라 필연적으로 다툼과 갈등이 생기고 그로부터 부정의가 발생하며 그에 따라 그에 대한 대책 또한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다시 말해 부정의를 다스리고 정의를 보전하기 위한 장치가 새롭게 요구되면서 그 일을 맡을 심부름꾼으로서 수호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결국 철학과 정치·문명은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위와 같은 현실 국가에서 요구되는 불가피한 필요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

* 앞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통치자 계층, 수호자(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의 형성 단계상 초기 단계의 국가 즉 생산자 계층으로만 구성되는 국가이다. 나라를 구성하면서 이처럼 생산자 계층의 나라를 최초의 나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 수립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할 요소가 다름 아닌 의식주라는 물적 기반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또한 유기체인 한,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그 다음 정치도 철학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적 토대라는 하부구조 없이 정신과 문화 등 상부구조는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토대와 상부구조가 모두 성립한 이후에 어느 것이 구조 전체를 지배하고 구조의 보전과 지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의 문제는 별개의 논점을 구성하는 것이라 해도, 플라톤 역시 물적 조건 내지 생산자 계층의 역할이 나라 자체의 성립을 위한 일차적이고도 필수적인 기반인 것만은 결코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 그리고 이 나라는 비록 생물학적 자기 보전 자체에 만족하는 이른바 돼지들의 나라이긴 할지라도 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들 사이에는 협동적 삶이 유지되고 있고 그에 따라 고민과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단 플라톤은 부정의의 원인을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특성과 연계시키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국가>에서 정의를 다루면서 왜 수호자 계층만을 주로 다루고 생산자 계층은 크게 다루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플라톤은 부정의를 바로 잡는 주체에서 생산자 계층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비판했던 민주정의 중심 세력으로서 민중이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여전히 생산자 계층을 불신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중에 대한 불신은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역할 자체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 고유 영역을 넘어서 정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서 온 것이다.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 계층의 역할과 협동적 삶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층이 자기 고유 역할을 넘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원인을 생산자 계층에서 찾지 않고 그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게 만든 지배 계층의 탐욕적 욕망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 정치체제의 타락과정을 설명하면서 민주정 치하에서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인 대중이 드러낸 욕망의 왜곡이 생산자 자신 때문이 아니라 통치자 계층의 그릇된 욕망과 잘못된 정치행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부정의의 근원은 소수의 지배계층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발생하는 모든 해악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이 아닌 지배 계층의 탐욕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통치가 소수의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까닭에 소수 권력 계층의 지성화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열망하게 되었고 그 방책을 구축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는 오히려 권력의 지성화가 소수 기득권 계층이 아니라 시민의 지성화, 다중 집단의 지성화를 통해 달성되어야 하고 달성될 수 있으며 달성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플라톤 정치 철학의 핵심이 양적 차원에서 소수 권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 지성에 의한 권력의 지배 즉 권력의 지성화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민중의 지성화를 위한 철학적 원리로도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이 생산자들로 구성된 최초 나라를 건강과 평화가 담보된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플라톤이 생산자 계층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생산자 계층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전체 논의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정의와 부정의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려는 차원에서 부정의가 발생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 논의 구도 하에서 최초의 나라를 넘어서, 즉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들로 구성되는 단계를 넘어서 문명과 문화적 욕구의 단계에 들어와야, 비로소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것임을 말해주기 위한 포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 젤러(E. Zeller)는 ‘돼지의 나라’라는 글라우콘의 언급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견유학파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기원전 445?-365?)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안티스테네스는 플라톤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실천적인 면모에 주목하여 강건한 정신과 몸으로 소박한 삶에 자족하는 삶을 이상으로 여긴 사람이다. 즉 글라우콘의 냉소는 그와 같은 잘못된 이상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최초 나라의 모습은 안티스테네스가 꿈꾸는 그러한 삶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담과 헨켈(Stud zur Gesch, Lehre vom Staat, 8 f.)등은 이러한 젤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의 국가는 다만 이상 국가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그려진 것으로서 일부 아이러니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에서 언급된 필요와 분업, 협동의 원리는 이후에도 수정되고 대체되면서 논의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아직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산자 계층의 삶에 대한 불쾌함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최초 나라의 편안한 삶(εὐχερὴς βίος Pol. 266 C)을 돼지의 삶에 비교한 것은 나름 적절하다. 다만 소크라테스와 달리 글라우콘이 냉소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 최초의 나라가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답변을 통해 기대하고 있었던 현실 국가와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기개θυμοειδής를 크게 중시하는 글라우콘으로서는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물질적 욕구ἐπθυμμα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는 나라의 삶을 경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아담 주석 참고)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2e]

* 이처럼 글라우콘의 냉소를 접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구가 그러한 나라만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도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고찰해보자는 요구로 받아들인다.[372e] 즉 글라우콘이 원하는 나라는 그러한 현실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나라가 아니라, 늘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요구나 관심사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는 현실에서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나라 즉 ‘호사스런 나라’τρυφῶσας πόλις인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보기에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는 앞서 서술한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인 것 같지만 글라우콘이 정 그러한 나라를 살피기를 원한다면 ‘호사스런 나라’를 살피는 것도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말한다.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해서 나라들에 있어서 생겨나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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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앞서도 간단히 살폈듯이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필요에 입각한 나라를 먼저 말한 것은 장차 부정의가 문제되면서 수호자 계층이 요구되는 현실 국가를 끌어들이기 이전에 그 첫 단계로서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최초국가와 호사스런 나라의 모습을 보다 대조적으로 잘 드러내기 위한 밑 작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른바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를 먼저 두고 그 다음에 호사스런 나라를 살펴야 정의와 부정의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깨끗한 흰 백지 위에 뭔가를 그려 넣어야 더 분명하게 보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최초의 나라를 ‘참된 나라’, ‘건강한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두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어떤 이는 이곳 최초의 나라가 자연적 적성과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일을 맡아 수행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장차 밝혀지겠지만 자연적 본성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잘 수행해내는 것이 플라톤의 정의인데 이 나라는 이미 그러한 정의가 자연적으로 구현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건강한 나라’라는 표현은 몰라도 ‘참된 나라’라는 표현은 일종의 아이러니로 해석한다. 참된 나라는 종국적으로 철학을 통해 부정의가 극복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나라를 말하는데 이 최초의 나라는 철학적 사유는커녕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만족을 드러내는 일차원적인 인간들로만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앞서 소개하였듯이 안티스테네스 같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라고 부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러한 나라야말로 실제로 그가 꿈꾸었던 이상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안티스테네스와 달리, 그저 생산자 계층만이 존재하는, 실제 현실과 거리가 먼 그런 나라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욕구가 이글거리고 서로 부딪치는 현실 그 조건 위에서 그것들 모두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꿈꾸고 있다.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은 사실 공허한 일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현실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본(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 있는 현실의 조건 위에 선 이상국가인 것이다. 오히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건강한 나라, 돼지들의 나라는 어쩌면 루소(J. Rousseau)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쳤을 때 그가 염두에 둔 최초 자연 상태의 인간 사회,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향, 또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이상적인 과소(寡少)국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