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⑰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문답을 통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는 기술 일반의 특성에 기초해 볼 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행하는 자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렇게 문답의 귀결이 트라쉬마코스가 처음에 제기한 주장과 정반대의 것으로 뒤바뀌자 트라쉬마코스는 마침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343b]
* 트라쉬마코스는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은 양도 주인도 아닌 자기의 이익 때문인 것처럼 통치자도 피지배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자신이 처음에 동의한 엄밀론을 스스로 저버리고 태도를 바꾸어 다시 현실론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343c]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것το δικαίον과 정의δικαιοσύνη, 부정의한 것το ἀδικαίον과 부정의ἀδικία에 대해 아주 노골적으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 ‘실제로 정의란 남에게 좋은 것’τὸ δίκαιον 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 τῷ ὄντι 즉, 2)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3) 복종하고 섬기는 자에게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4)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조종(지배)하고ἄρχει 5) 피지배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6)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εὐδαίμονα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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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흥미롭게도 앞서와 달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 대신에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타자의 이익)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분명 앞에서 그가 한 말들과 다른 방식의 표현이어서 순간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그가 서있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보면 ‘남에게 좋은 것’이란 ‘피지배자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바로 이어서 그 ‘남’이 가리키는 대상이 ‘강자’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다른 방식으로 연이어 또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트라쉬마코스는 별다른 전제도 없이 태연스럽게 앞에서 말한 정의와 ‘반대적인 것으로서 부정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에서 한 말과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는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언급했다가 4), 5), 6)에서는 ‘부정의가 정의를 조종하고 강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부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상호 모순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라쉬마코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자인 까닭에 그가 말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경우의 정의와 부정의인지가 종종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부분 즉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지배)하고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저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을 분석하여 어디서 어떤 내용이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고 어떤 이유 때문에 그 내용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지를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 부분을 ‘반대의 것’이 가리키는 경우의 수에 따라 분석한 표가 이 글 말미에 첨부된 <별첨 자료>이다.
* 이 <별첨 자료>에 의하면 결국 트라쉬마코스는 1), 2), 3)에서 정의를 언급할 때는 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강자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기준으로 정의를 진술하다가 4), 5), 6)에서 부정의를 언급할 때는 별안간 기준을 바꾸어 이른바 공평과 정의가 제대로 확립된 실제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진술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이곳에서도 정의와 부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정의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을 아무런 사전 전제 없이 편리한 대로 뒤 바꾸어 가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 1), 2), 3)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다시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정의는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공평과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말들은 하지만 현실의 정의를 기준으로 약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의는 실제로 남인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을 섬기는 약자인 자기한테는 손해이다.” 그리고 또 그와 달리 관점을 바꾸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언급한 4) 5) 6)에서의 진술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 반면에 진짜 정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와 정반대로 부정의야말로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하고 약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의 주장이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고 그의 속마음이 흔들리거나 일관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논리적 일관성은 없을지언정 어떤 경우이든 강자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초지일관하다. 그 강자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앞에서 정의를 말할 때 적용한 기준과 뒤바꾼 것이고, 덧붙여 앞에서 말한 남과 자기가 가리키는 대상 또한 뒤바꿔 놓은 것이다.
* 아무려나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정의에 대한 정의(定義)라기 보다는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정의가 현실 속에서 실제로 드러내는 결과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드러내는 진술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따라 그가 언급한 1)‘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란 말은 그 스스로 확인해주고 있듯이 ‘강자’임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결국 2), 3)은 그것에 근거하여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트라쉬마코스가 바라 본 현실에서의 정의의 실상이다. 그리고 별표에서 드러나듯이 4)에서 말하는 부정의는 앞에서 말했듯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별표 기준 B) 정의와 부정의를 언급할 때의 부정의이다. 다만 트라쉬마코스에게 그 부정의는 현실에서 정의로 위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껍데기 정의’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름만 정의이지 실제로는 부정의이다’라고 말할 때 그런 정의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4)를 풀어 읽으면 ‘현실에서의 껍데기 정의, 실제로는 진짜 부정의는 참으로 순진하고 진짜 정의로운 사람을 지배하고’가 된다. 5)는 4)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고 6)은 5)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343c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주목을 끌어왔다. 특히 니콜슨(Nicholson. P. P, ‘Unravelling Thrasymachus Arguments in the Republic’, Phronesis 19, 1974)이 그 주장을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의 일관성을 해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주목한 이래 그것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졌다.(Keferd. G. B. ‘The Doctrine of Thrasymachus in Plato’s Republic’ in Sophistik in Wege der Forschung clxxx vii , Darmstadt, 1976) 이 주장의 요체는 즉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규정과 관련해서는 ‘정의는 타자의 이익’ 즉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의 규정을 일관성있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통치자들이 그러한 정의의 규정에 따라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강자와 약자들 모두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강자나 약자 구분 없이 모두 실제로는 자기 이익 즉 부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트라쉬마코스도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정의의 규정 위에 서 있되 다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그 정의가 결과한 현실상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의는 남에게 이익이자 자기에게 손해, 부정의는 자기에게 이익 남에게는 손해’라는 윤리학적 의미에서의 부정의 찬양론인 동시에 약자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이중성과 정의의 현실상에 대한 냉소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트라쉬마코스의 말에서 자기와 남을 권력의 우열관계로 특정하지 않을 때나 가능한 주장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여기서 남과 자기를 분명하게 강자와 약자로 특정하고 있다. 강자와 약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권력관계에서 강자의 부정의와 약자의 부정의를 동시에 찬양하는 이론은 그 자체로 자기 모순적인 것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한 규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전혀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예 원래부터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정의의 규정 또는 정의(定義)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토대가 되는 권력관계를 괄호에 넣고 순전히 본성론적 입장에서 보면, 그의 주장 역시 철저히 인간의 이기심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넘어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최대로 구현하는 권력지상주의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강자 자신은 아무리 부정의를 찬양하고 지지해도 약자들에게까지 부정의를 용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의 강자 즉 통치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부정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이른바 불법이 판치는 무정부상태를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통치자가 아니다. 가장 부정의한 강자는 법적 정의를 내세워 통치 대상을 기만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철저히 약자를 착취하고 자신은 재산뿐만이 아니라 평판과 명예까지 독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인 것이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 자신의 논리적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표이기도 하지만 그 비일관성이 누가 보더라도 쉽게 눈에 띨 정도로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원천적으로 막무가내 강자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정의를 정확하게 규정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능멸하기 위한 도발일 수도 있다. 어쩌면 플라톤은 이 부분을 통해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말과 논리로 정의를 규정하고 부정의를 논박하는 일 자체는 트라쉬마코스 같이 정의의 정의(定義)와는 무관하게 강자의 이익만을 어떻게든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소용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 대한 논의의 관심사는 장차 밝혀지겠지만 그의 정의관의 논리적 일관성 여부 보다는 정의의 정의(定義) 자체를 무시하고 능멸하는 트라쉬마코스의 태도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모아져야 한다. 그의 주장의 비논리성도 그런 차원에서 비판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트라쉬마코스는 논리와 무관하게 정의이건 부정의이건 그 어떤 이름을 가지든지 기본적으로 오직 강자의 이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권력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굳이 그의 일관성을 찾는다면 ‘강자의 이익’을 향한 이기적 탐욕과 권력 의지의 일관성이다. 그에게 정의의 정의(定義)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의가 법으로 표현되는 한, 트라쉬마코스의 강자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을 만들어 언제라도 법적 정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기만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의를 내세우는 이유는 지속적인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통치 권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평판에 대한 욕망까지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정의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는가에 있는가에 있지 않고 다만 제멋대로 법의 형식을 빌어 어떤 것도 정의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권력뿐인 것이다. 어떤 현실이 펼쳐지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비록 그렇게 강자의 이익을 주장하더라도 그 자신이 최고의 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 평생을 늘 강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누리는 최대의 이익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물론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앞으로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폭로되고 비판된다. 당대 젊은이들을 소피스트들에게서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더욱 철저하게 폭로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궁극적으로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주장의 외적인 논리적 비일관성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그의 생각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비논리적 내적 아집과 권력지상주의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을 어떻게 깨부수고 제압하느냐에 있다.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독단과 아집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논파를 해도 그것만으로 결코 파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것에 필적하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힘을 갖는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고 그 정의로운 나라를 지탱할 철학과 그에 합당한 권력자를 키워 부정의한 권력자와 그 세력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국가> 전체를 구상하고 설계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부여한 <국가> 제1권의 의미 또한 그러한 난관들에 대한 치열한 자기인식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에 있을 것이다.
[343d-e]
* 이어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자는 부정의한 자보다 아래와 같이 ‘어떤 경우에나 덜 갖는다.’πανταχοῦ ἔλαττον ἔχει고 말한다. 1) 상호간의 계약 관계에서ἐν τοῖς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υμβολαίοις, 계약을 해지할 때ἐν τῇ διαλύσει τῆς κοινωνίας 2) 나라와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ἐν τοῖς πρὸς τὴν πόλιν 세금εἰσφορά을 낼 때 3) 나라에서 받을 것이 있을 때 ὅταν τε λήψεις 4) 저 마다 어떤 관직을 맡고 있을 때ὅταν ἀρχήν τινα ἄρχῃ ἑκάτερος 위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운 자는 결코 이익을 보지 못하고 손해 보기 일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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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고대 아테네에서 계약과 세금 부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계약συμβόλαιον 형태와 방식들은 놀랄 정도로 오늘날과 거의 똑같다. 토지와 건물의 매매ōnē 계약, 신전의 건축과 도로 및 가옥의 건설 및 보수를 위한 건축계약, 건물과 토지의 임대차 계약, 근로 계약, 은행을 통한 금전 위탁parakatabēkē 및 대출 계약은 물론 개인 간 채무 계약도 오늘날과 똑같이 계약문서syngraphē로 행해지고 그와 관련한 세부 조건들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매 계약에 노예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트라쉬마코스는 계약 관계에서 계약을 해지할 때 정의로운 자가 ‘덜 갖는’ἔλαττον ἔχει 경우가 생기고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데 이 때 그가 말하는 계약 해지의 경우는 정상적인 계약만료에 따른 해지가 아니라 계약 불이행에 따른 중도 계약해지 즉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 역어의 원어인 διαλύω는 계약을 깬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계약을 일방적으로 깰 경우 정의로운 자가 손해를 입는 경우는 고대라고 해서 오늘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매매 계약의 경우에 매매가의 100분의 1을 공지세로 내야 했는데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정의한 사람일수록 매매가를 낮춰 잡았을 것이고 토지 건물의 임대차 계약의 경우에도 시가의 12% 정도를 연세로 내게 되어 있지만 부정의한 자일수록 연체를 미루거나 떼먹고 도주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아테네가 상업화되고 국제화된 이후 아테네에는 이방인xenoi과 거류외인metoikoi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들은 부동산을 소유할 수가 없었으므로 건물 임대차 계약은 계약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고 그 만큼 부정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특히 채무 계약은 이자율이 평균 연12% 정도에서부터 높게는 20-30%에 이르는 고리채도 많았다고 하니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일수록 ‘덜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8% 정도의 이자율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푼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대 이자 수익에 대한 욕망이 낳은 폐해가 어느 정도였을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건의 교환 수단에 불과한 화폐로 돈을 버는 것 자체를 부정하여 이자 수수 행위를 반대하고 있다.(플라톤 <법률> 742c,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8, 2-8)
* 한편 세금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나라가 시민에게 최대한 부담을 덜 주는 것이 오래된 원칙이었던 만큼 기본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는 직접세 즉 재산세eisphora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고 전쟁 시기나 비상시에 한 해 민회의 승인을 받은 연후에야 그것도 최상류 부유층을 대상으로 부과되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재정이 기본적으로 신전 공물과 부유층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5,6세기 이전의 아테네는 귀족들의 귀족들을 위한 귀족들에 의한 나라였고 그 때문에 마치 가장이 식솔을 돌보듯 전쟁 장비를 비롯해 참전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이 경비를 대는 일은 당연시 되었고 그 만큼 권력도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재정을 부유층들이 책임지는 이러한 전통은 5세기 들어와서도 이어져 아테네가 전성기를 이루는 5세기 중반까지는 부자들(거류외인들 가운데 부를 이룬 사람들 포함)의 공적 기부제leitougia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재산세 납부가 요구될 때에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아테네에 민주정이 급진화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발발함에 따라 재정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자 속국들에 대한 조공 요구는 물론 부유층에 대한 기부 압박 또한 증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점차 기부 회피와 조세 저항의 경향 또한 늘어나 시칠리아 원정 패배 이후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급기야 재산세 부과 대상도 시민 대다수에게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언급한 세금은 이러한 정황에 따라 시민 대다수에게 부과된 재산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 재산세는 재산액에 비례하여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정직한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테네가 제국의 위세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속국들의 조공은 물론 급격한 교역량의 증가에 따른 관세와 시장세(telē) 등 간접세의 수입으로 재정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4세기에 들어오면 속국들의 조공도 끊어지고 관세 수입도 줄어든 데에다가 부유층마저 무고자들의 협박에 시달려 기부는 물론 조세마저 노골적으로 기피하게 되자 아테네는 각자도생을 위한 혼란과 분열을 겪으면서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언급하고 있는 위의 4가지 경우는 기원전 5세기말에서 4세기에 걸쳐 고대 아테네에서 일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놀랄 정도로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일들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순서 그대로 오늘날에도 1) 갑을 간에 불공정 계약과 허위계약이 판을 치고 있고 2) 세금 또한 소시민, 월급쟁이들은 꼬박꼬박 정직하게 납세하지만 부유층, 권력층은 법망을 피해 탈세하기 일쑤이며. 3) 납품단가조작, 입찰담합, 대형국책사업 부정수주 등 소시민은 엄두도 못 낼 일들을 부유층, 권력층은 시도 때도 없이 저질러가며 나랏돈을 축내기 일쑤이고 4) 하위직 공무원은 박봉에도 묵묵히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지만 고위직은 뇌물수수, 측근비리, 낙하산 채용, 정경유착에다 퇴직 후 전관예우, 고액 연금까지 온갖 특권과 혜택을 누리기 일쑤이다.
* 계약을 의미하는 라틴어 pactum은 평화를 의미하는 pax에 어원을 두고 있다. 즉, 특정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상호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행위이되 계약 당사자 서로가 강제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고도 흔쾌한 만족과 기대감을 동반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는 근대 국가의 기초로서 홉스(T. Hobbes)적 사회계약론에서부터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노동의 상품화와 유연화에 기초한 임노동계약, 하청계약 등 일상에서의 사회적인 계약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불공정 계약이 고착화되어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히려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위력적일 정도로 호소력을 갖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그것이 위력적인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도 나타나있듯이 그러한 부정의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 또한 그와 같이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배우고 철학을 공부하고 권하는 이유 또한 트라쉬마코스 부류들이 저지르는 악덕과 그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들어대는 담론들을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의 담론을 생산하고 나누고 공유하고 연대하여 그 부정의한 세력들과 맞서 싸워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철학은 고고하게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후예임을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344a]
* 트라쉬마코스는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부정의한 자야 말로 남들을 ‘크게 능가할 수 있는 사람’ τὸν μεγάλα δυνάμενον πλεονεκτεῖν.이라고 주장한다. 사적인 관계에서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것을 판정해내려면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미 충분하지만 제일 쉽게 판정하는 길은 ‘가장 완벽한 상태의 부정의’ 즉 공적 차원에서 참주들이 행하는 참주정τυραννίς의 경우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정의의 실상을 가장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고ῥᾷστα μαθήσῃ 부정의한 자를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ν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정의로운 자를 가장 비참한ἀθλιωτάτος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참주정은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λάθρᾳ καὶ βίᾳ 빼앗기를 조금 씩 조금 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συλλήβδην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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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다’는 의미로 사용한 πλεονεκτεῖν는 아무튼 비교 대상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제약 없이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콕 집어 그의 주장의 부당성을 논박하는 근거로 삼는다. 즉 능가한다는 것은 부정의한 자나 하는 일이지, 정의로운 자가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어떤 행위나 기능에는 그 자체로 이미 능가할 수 없는 최상의 한도peras, 객관적 척도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모르고 그 따위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적도(適度), 몫, 분수를 지킴, 자기 직분의 충실함을 함축하면서 그의 정의관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무도함과 부정의는 그러한 정해진 한도를 ‘능가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해내는 것’이란 표현은 그야말로 악의 극치로서 참주정의 피폐함과 죄악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344b]
*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단번에 몰래 깡그리 해내지 못할 때 이를 테면 신전 절도범 ἱερόσυλοι, 납치범ἀνδραποδισταὶ, 가택침입강도τοιχωρύχοι, 사기꾼ἀποστερηταὶ, 도둑κλέπται 같은 사람들은 처벌을 받고 최대의 비난을 받지만, 그러나 부정의한 자들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자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은 부끄러운αἰσχρός 호칭대신에 행복한εὐδαίμων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μακάριος 사람이라 불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제나라 시민들한테서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전면적인 불의를τὴν ὅλην ἀδικίαν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모든 사람한테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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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실감나는 묘사는 그가 시켈리아에 가서 디오뉘시오스 1세를 보고 경험한 것에 기초한 것이리라. 실제로 플라톤이 그린 참주의 모델이 바로 디오뉘시오스 1세라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 당대의 실상은 오늘날의 정황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다. 어떤 사람이 단돈 몇 푼을 훔쳤다고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재판정에 서는 모습과 수천억을 횡령한 자들이 낯 두껍게도 번질거리는 얼굴을 곧추 세우고 뻔뻔하게 죄가 없다고 으스대며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우리들은 오늘날에도 일상의 다반사로 접하고 있다. 그리고 좀도둑은 온갖 손가락질을 해가며 비난하지만 정치 권력자나 재벌 오너가 온갖 추행과 횡령을 저질러도 비난은커녕 선망의 눈으로 동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강대국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횡포를 저질러도 마치 정의를 구현한 것인 양 떠벌이고 또 그들의 속국을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의 짓거리에 환호를 보내는 반면, 그들의 억압에 저항하다 앙갚음을 받거나 그들끼리의 다툼 때문에 희생된 나라들과 사람들이 그들의 폭력 앞에 온갖 불이익을 당하거나 파리 목숨 취급을 받고 있어도 눈길 하나 보내지 않는다.
*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판정 결과는 사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앞에서 예시한 정도의 ‘남을 능가하는 자’만으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공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참주정 치하의 참주의 경우이다. 참주야말로 정의라는 미명하에 가장 부정의한 일을 마음대로 저질러 최대의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정의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결코 지속적인 이득을 담보할 수 없다. 참주가 가장 이익을 많이 취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이기심을 최대로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부정의 찬양론을 넘어 권력 지상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권력자들의 영광스런 순간과 파멸의 순간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플라톤이 그리고 있듯이 마치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에서 바늘 앞에 놓인 풍선과도 같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폭군들과 20세기의 히틀러와 무솔리니, 스탈린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사의 일그러진 권력자들의 등장과 몰락 또한 그 단면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때’라는 말은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했을 경우 재산의 압류는 물론 신분까지 박탈되어 노예가 되는 경우를 나타낸 것이다. 훨씬 이전인 솔론의 시대에는 채무 때문에 인신을 구속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테네 말기는 이전 시대보다 더 각박하고 비열해진 것이다.
[344c]
* 부정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막상 그걸 비난하는 것은 자기가 부정의한 짓을 행하는 것τὸ ποιεῖν τὰ ἄδικα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피해를 당하는 것τὸ πάσχειν 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정의 한 짓이 대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정의보다 더 강하고ἰσχυρότερον 자유로우며ἐλευθεριώτερον 전횡적인δεσποτικώτερον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말한 대로ὅπερ ἐξ ἀρχῆς ἔλεγον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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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약자들의 경우 ‘법률을 위반해서 얻는 이익보다 법률을 위반해서 당하는 손해가 더 크기 때문에 법을 지키려 한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장차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을 대하는 약자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말을 통해 부정의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예고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사람들이 부정의를 비난하는 이유를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정의를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고 있다. 사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들키면 처벌의 위험이 있어 두렵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 선택하기에 달렸다. 이에 반해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없으면 꼼짝없이 ‘당하는 불행’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와 정반대의 입장이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부정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렵고 더 나쁜 일이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삼가해야할 일이다. 왜냐하면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영혼에 손상을 가하고 그것을 부패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물론 피해를 입는 것이지만 내가 잘못하여 내 영혼이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건강함’을 중시하는 사람은 ‘부정의를 저질러’ 영혼을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부정의에 당하는 것’이 덜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갖는 윤리학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쟁점이 되지만 이곳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그 대결이 예고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눈에 트라쉬마코스는 영혼이 썩어 문드러져 온갖 악취를 뿜어대며 스스로가 다 파괴되었음에도 ‘부정의를 당하지 않는’ 강자라는 사실에 도취되어 마치 가장 행복한 사람인 양 희희낙락거리는 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눈에는 누가 인생의 승자인지 실로 명약관화한 것이다.
* 그가 결론적으로 재확인하고 있는 ‘처음 말한 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라는 말에서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 이득이다’라는 표현은 그가 343c에서 말한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 표현한 같은 의미의 말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약자의 부정의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만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강자와 약자 모두의 부정의를 촉구하는 입장 정도라면 강자의 이익만을 독점적으로 주장하는 자신의 권력지상주의적 입장과 부딪친다. 그러므로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말하는 ‘자신’은 앞에서 ‘남’이 ‘강자’에 한정된 것처럼 ‘강자’에 한정하여 사용된 말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너희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고 다른 한편 (강자의 실제 행태나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부정의는 (강자) 자신을 위한 이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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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자료>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 즉 정의로운 자를 조정하고 강자를 이롭게 함” 의미 분석
기준 A : 현실 정의, 현실 부정의=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현실의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기준 B : 진짜 정의, 진짜 부정의=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구분
|
|
기준 A |
I |
II |
후속 내용 |
0
|
343c 원안
|
정 의
|
남(강자)
|
이익
|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으로서
강자를 이롭게 함
|
자기(약자) |
손해
|
-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일관성 있게 이해할 경우(기준 A를 유지)
구분
|
‘반대의 것’ 내용 |
기준 A |
I |
II |
후속내용과 일치 여부 |
1 |
원안 II의 반대 |
부정의 |
남(강자) |
손해 |
불일치 |
자기(약자) |
이익 |
2 |
원안 I의 반대 |
부정의 |
남(약자) |
이익 |
불일치 |
자기(강자) |
손해 |
3 |
원안 I,II의 반대 |
부정의 |
남(약자) |
손해 |
일치하나 원안과 모순 |
자기(강자) |
이익
|
* 1,2 경우 내용 상 동일
* 3의 경우, 취지는 일치하나 정의도 부정의도 다 강자의 이익이자 약자의 손해가 되어 자기모순, 자가당착에 빠짐.
- 텍스트를 트라쉬마코스의 취지에 맞추어 읽을 경우(기준 B로 전환)
구분
|
‘반대의 것’ 내용 |
기준 B |
I |
II |
후속 내용과 일치여부 |
4 |
원안 II의 반대 |
부정의 |
남(강자) |
손해 |
불일치 |
자기(약자) |
이익 |
5 |
원안 I의 반대 |
부정의 |
남(약자) |
이익 |
불일치 |
자기(강자) |
손해 |
6 |
원안 I,II의 반대 |
부정의 |
남(약자) |
손해 |
원안과 일치 |
자기(강자) |
이익
|
* 4,5 경우 내용 상 동일
* 6을 원안 0과 비교하면 기준을 임의로 바꾸고 I, II를 바꾼 것, 그런데 I, II를 바꾼 것은 내용상으로는 후속 내용과 일치하므로 결국 부정의의 기준만을 임의로 바꾼 것.
<결론> 부정의의 기준을 임의로 A에서 B로 바꾼 것 – 진짜 부정의한 통치 권력에 대한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