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악순환』을 읽는 한 가지 방법 – 니체와 광기 ‘사이’ [철학자의 서재]

 

『니체와 악순환』을 읽는 한 가지 방법

니체와 광기 ‘사이’

 

니체는 도덕과 의식, 동일성에 반대하고 비도덕, 의식 이전의 충동이나 무의식, 비동일성을 중시한다. 우선, 책을 좀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도덕이란 결정적 한 번으로 채택된 관습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장치일 뿐이다(p. 22). 우리는 이런 도덕에 맞서 쉼 없는 성찰, 반성에서 나오는 근원적 요구들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충동’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우리는 충동을 억압하고 의식이 만들어낸 온갖 억압 장치에 따라 자신을 억압하고 산다. 교육과정을 통해 인간은 이렇게 문명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우리는 교육받고 문명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동일한 ‘하나의 주체’(인격체)로 구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자기 동일성은 실재일까. 니체에 의하면 그것은 만들어진 동일성일 뿐이다. 니체는 모든 동일성을 부정한다. 니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면서 스스로 니체 자신이길 그만두었다(p. 297). 동일성의 부재, 이것이 니체를 광기로 이끌었을까.

‘만들어진 동일성’ 그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충동’이다. 충동은 인간의 삶을 위해 개인화되었으므로 오로지 탈개인화되기만을 갈망한다(p. 51). 한 인간은, 인격은 ‘결정적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다시 표현되는 영원회귀의 체험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체험은 악순환이고 목적과 방향도 없다(p. 54). 니체는 이러한 영원회귀의 체험을 긍정한다.

니체는 주체도 객체도 의지도 목적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p. 66). 우리의 토대에는 카오스와 충동, 무의식만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니체에게 이러한 우리의 조건은 부정적인 게 아니다. 의식과 이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는 카오스와 충동에서 무한히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 그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충동이라는 힘의 의지(p. 74)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은 ‘주체’라는 일체성이 아니라 ‘충동의 투쟁’이라고 말한다(p. 78).

‘나’라는 동일성은 영원회귀가 계시할 때 파괴된다(p. 89). 영원회귀는 하나의 동일성, 정체성을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망각하고 무한히 창조하기를 시도하는(p. 100)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너 자신이기를 그치고 다양한 개인들 모두가 되어야 한다(p. 102). 위버멘쉬는 이러한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의 의미이자 목적에 다른 아니다(p. 103). 영원회귀는 충동이고 창조이며 영속적 동일성의 말소(p. 104)이다. 영원회귀의 힘은 끊임없는 변화하며 균형을 파괴한다. 그래서 니체에게는 개인도 없고 종도 없으며 동일성도 없다(p. 130).

그래서 니체의 영원회귀의 세계에는 교환가능한 것도 없고 우연만 있으며 황홀한 비밀스런 체험이다(p. 131). 초인이 아니고서야 동일성의 초극, ‘모두가 되는’ 경험을 아무나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비밀로 남아 있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상에 영원회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불가능성 앞에서 니체가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영원회귀라는 현기증 앞에서 말이다.

우리의 시각에서 영원회귀는 악순환이고 부조리하다. 그것은 카오스이고 비동일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균형의 파괴이며 초과하는 힘이고 이는 우리를 개인 이상의 존재로 끌어올린다(p. 157). 이 힘은 모든 것을 교환의 원리로 대체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맞설 수 있게 할지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위험이다. 그리고 영원회귀는, 창조는 위험상태를 유발해야 한다(p. 172).

이 위험은 현실원칙의 중지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위험이다. 현실원칙을 중지하는 유희에 자신을 거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충동의 강도들의 조건들을 자신의 고유한 형상들 안에 복원한다(p. 177). 예술의 충동은 하나의 ‘환영’을 창조한다. 그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실존에 목적을 주는 어떤 존재, 모든 의지의 자유이다(p. 192). 이때의 ‘환영’은 재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을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 질서의 통념이나 지배적 규범 체계와 관습들을 전복시키는 미지의 가능성이며 시인 김수영은 바로 이곳에서만 시의 존재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예술적)환영 그리고 충동, 영원회귀는 평균 이상이길 원하고 영원한 낯섦(p. 220)이길 원한다. 광기에 빠져서 니체는 이 환영 속에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같은 세인들에게 니체의 이러한 사상은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니체가 본 진실, 현실의 균열, 틈, 부조리, 현실의 상처를 애써 회피하고 눈감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증상으로 우리에게 언제든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에, 충동에, 정서에 호소해야할 지 모른다. 이성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놀이와 우연의 세계, 영원회귀의 세계, 자유의 세계로 도피해야할 지 모른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정적 한번으로 삶이 결정되어 꼼짝도 못하는 삶이 아니라 유동하는 삶을 갈망하게 될 지 모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성과 정신이 아니라 느낌으로 정서로 어떤 것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이나 예술가에게 빠져 허우적 거릴수도 있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식으로든 ‘책임’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고 예술을 만나고 하는 일은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광기에 빠져서 해야 하는 것일까. 니체는 영리하지 못하게 정말 광기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되는 것일까. 라캉은 자신의 박사논문 <개인의 형성에서 가족 콤플렉스>에서 법의 판결이, 그러니까, 상징계의 법과 금지가 개인의 정신병적 정체성 혼돈을 정지시키는지를 증명했다.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위에 의존하는 주체를 만드는 일, 그것은 법의 역할이었다. 법이라는 동일성을 해체하고(법이든 주체이든 해체하고) 기존의 관습과 상식을 깨려고 했던 니체에게는 ‘법’과 ‘아버지’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니체에게, 우리에게 항상 되돌아오는 문제는 상징계의 법이고 아버지다. 여기에 대응하고 저항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광기와 정상 사이, 정상과 정상 ‘사이’를 방황하고 유동하는 것, 그 ‘사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니체와 라캉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닐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한동안 그 ‘사이’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즐길 수는 있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끝나지 않아도 좋다. 좋은 놀잇감이다. 이 책, 쉬운 책은 아니지만 새해를 맞이하여 일독을 권한다.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한길석(한철연 회원, 가톨릭대)

 

나는 2008년 박사 학위를 수료한 상태로 지방의 모 국립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박사 학위 소유자가 아니면 강단에 설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선배들의 배려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립대학의 강사료는 사립대학의 그것보다 훨씬 후하다. 더구나 당시에는 정부에서 강사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국립대 강사료를 시간당 10만원 수준까지 인상한다는 정책 목표를 추진하고 있었던 덕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타 강사들에 비해 조금 나았다. 그래도 한 해 수입은 2천 만 원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북 지역에 있는 대학에 출강할 때는 9시 강의에 맞추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날 강의를 마치면 다음날 강의를 위해 값이 헐한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또 아침 첫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강의료의 일부는 늘상 약값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지만 생계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늘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곤 했다. 방학 동안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어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편한 마음으로 학문에 전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든 맞게 마련이다.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담당 강좌 시수가 줄어들더니 2012년이 되자 내가 출강하던 모든 대학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박사 논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자 했지만, 불현 듯 눈앞이 캄캄해 지는 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학기동안 손가락만 빨고 지내다가 선배들의 주선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수도권의 모 대학에 출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박사 논문을 마치고 전임교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생계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통증을 달고 살았다.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결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강의를 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사명감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연이은 강사들의 자살 소식에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외롭고 춥고 비참한 시절이었다.

어느 결에 강사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제2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많은 강사들이 강사법 제정을 반대하는 역설적 상황이 몇 해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진통 끝에 강사법이 통과되었다. 교육부에서는 관련 예산을 편성하면서 강사법의 실행에 대학들이 협조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대학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대량 해고가 필연적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면서 어느덧 강사 해고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현실인 양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사 대량해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다. 대량해고에 대한 예상은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극을 전망하는 것이다. 불길한 예언의 쓸모는 들어맞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게 함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사실은 이러하다. 강사법이 마련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방학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강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령하고 있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증적이고 강제적인 힘이다. 일단 법으로 제정된 이상 강사들을 쉽게 내치지는 못한다. 아무런 무기도 없던 강사들에게 드디어 의지해 볼만한 합법적 무기가 생긴 것이다. 이제 강사들이 할 일은 변변찮음을 탓하며 힘들게 마련된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익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이 무기를 들고 대학에 맞서고 있다. 부산대에서는 강사들이 파업에 나섰으며, 고려대에서는 강사법을 핑계로 추진하려 했던 대학 구조조정 방안을 무산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정치적 실천 운동과 함께 할 때 법의 효력이 구현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사례다.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 없이는 만들어지지도 강제력을 집행하지도 못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불가피한 현실인 양 여기는 어리석음은 일어나지 않은 비극의 힘을 과대하게 키울 뿐이다. 할 일은 한 가지다. 강사법이 명령하는 바를 대학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정치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운동의 조직적 실천은 2019년 5월에 마련될 시행령에서 강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시행령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애써 마련한 강사법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강사들은 학내에 강사법의 관철을 위한 정치적 실천 거점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파리 목숨에 불과한 강사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런 운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량해고가 불을 보듯 뻔하다면 강사법 관철을 위한 운동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실천 활동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강사 이외의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과 전임교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밥 그릇 지키기’로 폄하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이슈를 강사들의 고용 안정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 전임교원들의 근무 여건을 악화시키는 일방적 대학 구조조정 방안에 대한 비판으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조정 방안을 감행하게 하는 대학의 지배 및 경영 구조의 개혁에 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사법은 아직 불행한 현실을 몰고 오지 않았다. 대량해고는 엄포에 불과하다. 대학이 대량해고의 소문을 흘리는 이유는 강사들에게 대학에 저항할 합법적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도구는 쓰면 쓸수록 손에 익는 법이다. 강사들이 할 일은 강사법이라는 도구를 손에 익도록 활용하여 그것이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 이 글은 필자의 2018년 가을 학단협 연합 심포지엄 발표문의 일부입니다. 필자의 동의로 게재함을 밝힙니다.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시간강사 문제에 대한 내부의 시선 교원으로서의 지위 획득과 시간강사로서의 처우 개선 사이에서

 

여름 방학부터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딸아이가 건강보험에서 떨어져 나가 직장 건강보험 가입대상이 되었다. 1년 일하면 퇴직금도 준다고 한다. 기가 막힌다. 이른바 4대 보험 가입자가 된 것이다. 지난 추석에는 의기양양하게 선물 세트도 받아왔다. 20년 이상 시간 강사 경력 동안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처우를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어느 시간강사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에 대한 처우보다 대학의 시간강사 처지가 더 열악하다고 강변한 현실을 딸과의 비교를 통해서 실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의 시간강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후 몇몇 분들의 헌신적이고 끈기 있는 투쟁 덕분에 국회에서 시간강사법 제정에 이르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획득은 흔들릴 수 없는 전략적 목표이다. 그렇기에 그간의 성과가 매우 소중하다. 일각의 주장대로 부족한 점은 추후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보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강사법은 몇 년째 유예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마도 이번 년도에는 실시가 확정되어 내년부터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듯도 하다.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어떤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일일이 살펴 따질 생각은 없다. 전략적 목표가 같다면 전술적인 방법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경험한 부당함의 내용에 따라 시급한 현안에 대한 방점도 다른 곳에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가벼이 여겨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 수립에만 매달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권 초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청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필자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한 목표는 장기적으로 추진하더라도 강사료 현실화라고 하는 문제부터 압박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취급되었다. 교원지위만 확보되면 그에 따르는 처우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지에 강사료 현실화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하면 강사료가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세월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나마 국공립대의 경우에만 강사료가 대폭 올랐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강사료는 한 번 정해지면 최소 5,6년은 동결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이슈가 되었던 반값 등록금 문제는 강사료 인상을 방해하는 대교협의 또 다른 명분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자가 십 수 년 전의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그 때 필자가 했던 주장이 옳지 않았느냐 하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강사법이 제정되고 유예를 반복한 마당에 지금이라도 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 주변의 후배들 중에는 강사료 소득만으로는 연간 소득 2,000만 원 이하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비단 철학 전공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확인해 봐야 정확한 추계를 할 수 있겠지만 시간강사들의 수입을 연간 500만 원 정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 3,500억 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전국의 강사 수를 대략 7만 명으로 고려한 수치이다. 이를 정부와 전국의 400여개 대학이 공동으로 부담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후속세대 관련 지원 예산 등을 통합 관리하고 정부의 고용 안전 자금 예산과 유사한 방식의 지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일자리 안정을 위한 정부 예산이 민간 기업에도 지원이 되는데 공공적 성격이 강한 대학의 일자리에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인지 그 원칙에 대한 문제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영업자도 지원하고, 유치원도 지원하고, 중소기업에도 지원하는 데 시간강사는 이등 국민이라 지원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앞서 언급한 공청회에 참석한 당시 교육부 관계자의 언급은 이러한 방식의 문제 해결 가능성을 비추기도 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에서는 국립대학 기준 시간당 강사료 100,000원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사립대의 경우도 강사료를 현실화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법률 제정이 필요한 요구에 대해서는 속도를 조절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보장에 대한 요구 역시 그 때도 느긋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교육부 당국자의 발언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공청회 자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관료의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리한 모든 것은 일단 챙기고 봐야 전술적 목표도 전략적 목표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강사료 올려주었다고 해서 교원 지위 보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시간강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학들은 ‘대학교육협의회’를 중심으로 담합에 가까운 대응을 보여 왔다. 비정년트랙이라는 제도를 만드는가 하면, 겸임교수, 연구교수, 강의전담교수, 초빙교수 등의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의 비정년 강의자를 양성해 왔다. 여기에는 어김없이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사장의 논리가 좋다면 시장의 논리 안에서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강사료 현실화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너무 추상적이다. 일반적인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직이 요구하는 기준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하지만 이는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 상품 이용의 측면에서 단기 임대 재화는 시간당 이용료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 카메라 한 대를 몇 년간 렌트해서 이용할 바에는 아예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 상품 역시 단기 사용 노동에 대해서는 시간당 보수를 더 책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장의 원리에 맞다. 따라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준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비정규직 우대임금이라고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강사료 현실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현재 전임교수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에서 강의에 대한 수고에 해당하는 금액만 따져 봐도 현재의 강사료보다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강사료의 현실화는 무엇보다 대학의 강사들도 생활인이고 자식을 교육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실존을 인정하면 당연하게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자신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자기 자식의 대학 진학에 앞서서는 등록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의 강사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강사들은 금융 이용에서도 많은 제한을 받는다. 하기야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봐야 갚을 처지도 못될 수도 있긴 하다. 대학의 강사는 더 이상 전임교원으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직업 활동을 강사로서 마치게 된다. 그것도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이… 어쩌면 학위기는 운전면허증보다도 자부심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2018년 현재 강사료는 국립대의 경우도 10만원이 못되고, 사립대의 경우는 더더욱 빈약하다. 강사료 현실화 없는 교원지위 보장은 자칫 속빈 강정이 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대학들은 강사료 인상 없이 방학 중에도 급여를 지급한다는 명목 하에 8개월분의 강사료를 12로 나누어 지급하는 술책을 실시하거나 획책 중이다. 국가는 대학의 강사들을 이등 국민으로 생각하고 대학은 강사들을 원숭이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학이 강사를 고용하는 경제적 부담이 클수록 안정적인 교원으로서의 전환을 더욱 재촉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말고 그들

 

개정된 고등 교육법, 이른바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많은 대학들은 강사 수를 줄이기 위한 각종 편법을 강구하고 있다. 강사법 시행에 따른 대학의 재정 부담 가중을 부풀리면서 대규모 강의를 늘리고, 전임교수들의 강의 시수를 늘이고, 졸업 이수 학점을 줄이는 방식 등으로 강사 수를 줄이려고 한다는 사실은 대학 스스로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그러한 술책에 동조하고 동의하는 대학 구성원들 역시 대학의 본령은 망각하고 자신들의 직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학이 그러한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한다면 먼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우리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에게 하루 빨리 학업을 중단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권고해야만 그나마 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들을만할 것이다.

대학의 졸렬한 대응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강사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대학들에 대해서 교육부는 단호한 방침과 의지를 가지고 불이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 지원되는 재정의 불이익을 주고 교육부가 주관하거나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 지원하는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방침을 마련하면 된다. 그로인한 불이익의 크기는 강사법의 취지를 무력화해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게 설계하면 대학은 강사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교육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교육부는 학문 생태계 파괴의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사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는 학문 후속세대의 단절을 야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 후속세대 문제는 비단 시간 강사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앞으로는 현재 학위 과정에 있거나 박사 수료 후 현직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후학들의 문제는 더 심각해질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강사법이 실시 적용되면 교원 지위를 획득하게 될 강사들의 경우는 1년 단위로 계약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년간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후의 후학들이 그나마 강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강사라는 신분으로 버틸 수 있던 연구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미래는 더욱 비관적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과거 전임 교수들이 강사 문제에 무관심했듯이 교원이 된 강사들이 무관심해도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한다. 힘은 없다. 전임 교수들도 그랬다. 하지만 강사 문제 해결을 수십 년 동안 방해한 사람들은 전임 교수에서 총장이 되고, 이사장이 되고, 교육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힘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도 못한다. 진정한 학문 후속 세대는 우리가 아니다. 현재의 강사들은 학문 후속세대가 아니라 대개는 중견 연구자들이다. 이 글에서도 학문 후속세대 하면 시간 강사들을 먼저 떠올리는 방식으로 다루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진정한 의미의 학문후속세대들은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첫 맛도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니고 그들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345d)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에서의hōs alētōs 통치자 즉 현실 통치자(343b)가 서로 정반대이다. 소크라테스는 통치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고 말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그런 경우라면 누구도 통치를 자진해서 맡지 않고 기피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와 반대로 통치는 철저히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현실 통치자는 누구나 다 통치를 기피하지 않고 자진해서 맡는다고 생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일반 다스림을 맡는 사람들이 보수를 요구하는 경우를 들어 현실 통치자들의 이익은 통치술 자체와는 무관하고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임을 밝힌다. 그러니까 통치술이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은 의술이나 조타술 등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자들의 이익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346b]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을 끌어들인다. 즉 보수 획득술도 하나의 기술이자 능력δύναμις으로서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대상에게 그 기술 특유의 이익을τήν ὠφελίαν ἑκάστης τῆς τέχνης ἰδίαν 제공한다고 말한다. 즉 의술이 의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건강을 제공하고 조타술이 조타술로 불리면서 특유의 이익으로 항해의 안전을 제공하듯이 보수 획득술도 보수 획득술로 불리면서 그 특유의 이익으로서 보수τὸ μισθὸν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346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의사나 선장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무슨 이익을 얻든 그것이 공통된κοινῇ 것이라면 그들은 무엇인가 동일한 것을 공통되게 추가로 이용함으로써προσχρώμενοι 이득을 얻게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곧 전문가들이 보수를 받아서 이득을 보는 것은 공통적으로 보수 획득술이라는 추가적인 기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46d]

* 요컨대 각자의 전문적인 기술은 대상의 이익을 도모하고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보수 획득술은 별도의 기술이다. 이를테면 건축술은 집을 만드는 반면에 이에 부수되는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한다. 이처럼 전문 기술에 보수 획득술이 추가되지 않으면 전문가는 그 기술로 자기 이익을 얻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346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문가가 무상으로 일을 할 때는 이득을 주지 못하나요?ἆρ᾽ οὖν οὐδ᾽ ὠφελεῖ τότε, ὅταν προῖκα ἐργάζηται;’라고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럴 때도 대상에 이익을 준다고 대답한다. 무상 즉 자기 이익을 빼고도 기술이 대상에게 온전하게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기술의 이익은 모두 대상의 이익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런 논의를 토대로 어떤 다스림ἀρχὴ도 자기가 아니라 그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며παρασκευάζει 지시를 내린다ἐπιτάττει는 것 즉 약자의 이익을 생각하지σκοποῦσα 강자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δῆλον해졌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다스리는 일을 맡는 사람들이 왜 자진해서 맡으려 않고μηδένα ἐθέλειν ἑκόντα ἄρχειν 왜 보수를 요구하는지를 앞에서와 마찬가지로의 논리 즉 통치자들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아니라 오로지 대상만을 위해 최선의 것을 한다는 점을 근거로 다시 한 번 부연 설명한다.

———————

* 엄밀론을 포기하고 현실론으로 돌아가 양치기 기술을 예로 들어 통치술이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이처럼 또다시 논박을 당한다. 그 논박의 기초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보수 획득술μισθωτικὴ이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보수 획득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쟁점이 있다. 그 점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1) * 우선 보수 획득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술과 이익에 관한 기존의 입장과 부딪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을 제공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보수 획득술도 기술로서 대상에게 최선의 이익으로서 보수를 제공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수 획득술이 최고의 것을 제공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최선의 이익 즉 보수는 자기의 이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모든 기술은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된다. 설사 보수 획득술의 대상을 ‘보수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 즉 보수 획득이라는 기능의 향상으로 규정하여 일단 개념상 자기 이익과 분리시킨다 해도 보수 자체가 자기 이익을 뜻하는 한 그 또한 ‘자기 이익의 획득을 잘 하게 하는 것’이 되어 결국 자기모순을 피할 수가 없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그러한 언급은 기술 일반에 대한 앞의 언급과 일관되지는 않지만, 다른 기술들과 달리 보수 획득술은 기술의 대상 자체가 자기 자신인데다 보수라는 말 자체가 자기 이익을 의미하는 한, 내용상 불일치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자기 이익과 관련해서는 보수 획득술이 다른 기술과 차이가 있음을 미리부터 밝히고 들어간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기술에 관한 이전의 언급과 모순되는 말을 한 것만은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설사 그 점을 인정한다하더라도 보수 획득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과 우리가 문제 삼는 트라쉬마코스적 통치술이 제공하는 자기 이익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을 통해 추구하는 자기 이익은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빼앗아 얻은, 자기 몫 이상의 이익 즉 부도덕한 자기 이익’이다. 그런데 보수 획득술이 가져다주는 자기 이익은 탐욕과 강탈에 의한 이익도 아니고 자기 몫 이상의 것(pleonexia)도 아니며 다만 기술 전문가로서 자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이자 보수로서 자기 이익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제공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몫인 것이다. 이런 몫은 생존 자체를 위한 것이므로 생명체로서 당연히 추구해야할 일이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까지 부도덕한 이기주의의 범주에 넣는다면 생명체의 행위 가운데 부도덕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면서 보수 획득술이 대상으로 하는 자기 이익과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통치술을 통한 자기 이익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자기 이익 각각은 말 만 동일하지 내포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자기 사랑이자 당위이지만 하나는 타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자기의 이익만을 노리는 탐욕으로서 부도덕한 것이다.

2)* 둘째는 보수 획득술이 과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쟁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보수 획득술 역시 기술로서의 능력을 갖고 대상에 대해 자기 특유의 이득 즉 보수를 제공하는 하나의 기술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346b-c) 그런데 기술 일반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술은 그 기술 고유의 기능을 활동을 통해 발현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은 모종의 활동이다. 소크라테스가 지금까지 언급했던 기술들 역시 모종의 활동으로서 각기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술들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보수 획득술이라는 기술은 그것이 갖는 고유한 활동이 없다. 실제로 전문 기술자들은 자기 전문 기술 활동을 하면서 혹은 기술 활동을 마친 후에 보수의 획득을 위해 별도의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고유한 활동이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활동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도 보수 획득술은 기술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기술들은 기술사용에 따르는 가치 즉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사용 활동이 없으므로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모든 기술들은 바로 그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역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술은 사용가치 뿐만 아니라 그것에 자동으로 부수되는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보수란 이러한 기술 용역에 대한 대가로서 주어지는 기술의 교환가치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수는 보수 획득술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전문 기술이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를 갖게 됨에 따라 자동적으로 부수되는 것으로서 별도의 독립적인 기술적 활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요컨대 보수 획득술이란 기술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수 획득술을 마치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의 기술인 양 언급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도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보수 획득술을 일단 다른 기술들처럼 기술이라고 부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보수 획득술을 다른 기술들과 분명하게 차별을 두고 있다. 우선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소크라테스는 다른 전문 기술들이 대상의 이익을 위한 것인데 비해, 보수 획득술은 전문 기술자 자신의 이득과 관계된 것임을 (346c-d) 미리 밝히고 있고, 또 보수 획득술은 독자적인 기술이 아니라 각기 다른 기술들이 공통으로κοινῇ 가지고 있는 기술이자, 각 기술이 추가로 이용하는προσχρώμενοι 기술(346c) 즉 일반적인 전문 기술들에 부수되는ἑπομένη 기술(346d)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도 그 자신 보수 획득술이 독립적인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부차적으로 따라 붙는 부수적인 기술 즉 예외적인 기술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독자적인 활동은 없지만 의존하는 보수의 획득이 모태 기술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수 획득술도 기술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 또한 일정부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도 있어 보인다. 즉 보수 획득술은 비록 그 자체로는 독립적인 활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태가 되는 기술 활동에 의존하고 있고 그 활동 과정을 통해 보수가 획득된다는 점에서 의존의 형식으로 모태 기술 활동에 포함되어 있거나 모태 기술의 활동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술 일반론의 입장에서도 보수 획득술 역시 의존적이지만 모종의 활동으로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보수 획득술은 일반 전문 기술과 달리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보수 획득술이 전적으로 기술이 아니라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기술의 활동이 사용가치 뿐만이 아니라 상품으로서 교환가치도 가지고 있고 보수 획득술도 의존적이나마 모종의 활동이자 기술임을 인정한다고 하면, 보수 획득술은 사용가치 대신 교환가치를 특유의 이익으로 발생시키는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에서 언급된 보수 획득술을 지금까지 말해온 기술들과 아주 똑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여 자기모순으로 비판하고 기술의 범주에서 배제하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자신 ‘기술론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다만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술의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려고 대상 쪽의 이익이 아닌 기술 쪽의 이익을 도모하는 예외적인 기술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있는 이해가 아닐까 싶다.

3) 어찌되었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은 입장에 따라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을 고대 아테네가 아닌 오늘날의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서 보면 나름 독립적인 기술로서 고유의 활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여지도 없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인은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능력과 기술을 잘 알리고 틈틈이 스펙도 쌓아야 하고 이미지 관리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경쟁에서도 밀리고 취업도 어려워져 보수획득도 실패한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겨 취업을 한 경우에도 자기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멈출 수 없다. 실적도 올려야 하고 임금협상 능력도 길러야 하고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조활동도 해야 한다. 현대를 자기 PR의 시대, 이미지 시대, 광고의 시대, 마케팅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위와 관련한 활동 모두가 자기 일에 대한 보수의 획득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술을 가칭 자기 마케팅 기술이라고 부른다면 분명 그 기술은 분명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보수 획득술과 다름이 없다. 게다가 그 기술은 고유한 활동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수적인 기술이 아닌 독립된 기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양치기의 경우도 현대 노동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긴 하더라도 다른 양치기 보다 자기가 더 잘 인정받으려고 주인에게 더 잘 보여 양치기 일을 계속 맡으려고 양치기 기술 이외에 자기를 잘 알리려는 모종의 활동들을 했을 것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는 동기가 낳은 지나친 발상일까?

4) 그리고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논거들 중 일부도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통치를 맡고서 별도로 보수를 요구한다는 점을 들어 통치술과 자기 이익과의 무관성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은커녕 오히려 코웃음을 치게 만들 수도 있다.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보면 소크라테스가 최고의 권력을 갖는 통치자와 일반 관리들을 같은 다스림 차원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란 일반 행정 차원의 권력 정도라서 따로 자신의 수고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겠지만,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의 경우는 통치를 맡는 순간부터 그 자리 자체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특권과 이익은 물론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기 때문에 보수는 그냥 푼돈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반 관직을 맡은 사람들 역시 소크라테스의 말에 코웃음을 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이 지금과 같은 일반 관리직 정도가 아니라 그야 말로 최고 통치자가 누리는 권력이라면 전혀 생각과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그러한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질 수만 있다면 보수를 요구하기는커녕 자기의 보수를 뇌물로 다 바쳐서라도 통치를 맡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내세우기 위한 논변을 위한 논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설득력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반 사람들에게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의 허황된 꿈 정도로만 들릴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의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들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순결성을 내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부정의한 현실을 변혁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담론과 힘을 길러,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대중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 마음과 열망에 불을 지르고 희망을 갖게 하여 함께 변혁을 이룰 세력으로 연대하고 함께 성장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 민중에게까지 코웃음이 될 만한 주장으로는 어떤 변혁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자기 한계까지 엿보이는 이런 주장들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드러내놓고 검토하고 살피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탐욕의 실체를, 그리고 또 현실에서 그것을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본성과 태도를 그리고 자신의 미흡한 태도마저 그 일체를 반성적으로 객관화하여 최대한 샅샅이 있는 그대로 살피고 드러내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그들의 탐욕이 철두철미한 그 만큼 그에 맞서 그 철두철미함 이상으로 철저히 변혁해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보면 제1권에서 노정되는 논쟁점들은 소소한 것들이건 아니건 그 모두 정의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조건들의 세밀한 탐색이자 그것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온갖 용도의 고임돌이자 디딤돌이자 받침돌들이라 할 것이다.

 

4-9(347a~.347e) : 통치자에게 보수는 강제나 벌이다.

 

[34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통치기술 자체가 대상 쪽 이익에 관계되고 자기 이득과는 무관하므로 아무도 자진해서 통치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그것이야 말로 관직을 맡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μισθός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라고 말을 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 보상의 예로 돈ἀργύριον과 명예τιμή를 들면서 흥미롭게도 누가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보상이 벌ζημία(벌금, 벌칙, 손실이라는 뜻도 있다)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이 논의에 끼어들어 보상의 부류에ἐν μισθοῦ μέρει 벌이 포함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의 주제는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에 관한 문제로 넘어 간다.

 

[347b]

* 앞서도 언급했듯이(345e-346e) 참된 통치자는 통치를 자진해서 맡으려 하지 않고 기피한다. 그 참된 통치자들은 여기서 ‘최선의 인간들’τῶν βελτίστων, ‘가장 훌륭한 사람들’οἱ ἐπιεικέστατοι(ἐπιεικής, ‘적합한’, ‘능력 있는’의 뜻도 있다)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통치를 기피하던 이 사람들이 통치를 맡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보상μισθὸν(앞에서는 ’보수‘로 옮겼다)’때문이라고 말한다. 전 시간 이야기 했듯이 참된 통치자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이유는 통치가 자기 이익과 무관하기 때문이었음을 고려하면 여기서 통치를 하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보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단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자들은 통치에 대한 보수를 요구한다’는 앞서의 언급(346e)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것을 벌이나 강제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글라우콘도 의아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밝히는 그 이유는 이러하다. 우선 통상 통치를 맡으려는 사람들은 보상으로서 명예나 금전을 원한다. 그런 인간들은 명예에 대한 사랑과 금전에 대한 사랑τὸ φιλότιμόν τε καὶ φιλάργυρον을 추구한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에게 명예나 금전은 수치스러운 것ὄνειδος이다. 즉 그들에게 그것은 통치를 하게 만드는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를 기피하게 만드는 나쁜 것들인 셈이다. 게다가 그들은 드러내놓고φανερῶς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고용인들μισθωτοὶ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고 통치를 구실로 몰래λάθρᾳ 보상을 취하는 도둑들κλέπται로 불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훌륭한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어떤 오해조차도 받지 않으려는 결벽 수준의 자기 반성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고용인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고용인들에 대한 고대인들의 계급적 비하를 일정부분 반영하고는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는 통치 업무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주인 의식과 주체적 자발성을 강조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시민이 주권자고 통치자는 주권자의 고용인 역할을 하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통치자와 관리들은 거꾸로 고용인으로 불리길 자처해야 하고 나아가 그 점을 시민을 위한 통치자의 기본자세로서 마음속에 깊이 명심해야할 것이다.

 

[347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금전이라는 보상 자체가 훌륭한 사람들에게는 창피한 일이라서 훌륭한 사람들로 하여금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려면 그들에게 강제ἀνάγκη나 벌ζημία이 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강제 당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μὴ ἀνάγκην περιμένειν 자진해서 통치하려고 나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αἰσχρὸν νενομίσθαι도 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러한 강제나 벌로서 최대의 벌τῆς ζημίας μεγίστη은 ‘스스로 통치에 나서지 않을 경우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τῆς δὲ ζημίας μεγίστη τὸ ὑπὸ πονηροτέρου ἄρχεσθαι, ἐὰν μὴ αὐτὸς ἐθέλῃ ἄρχειν이다.

————————-

* 훌륭한 사람들은 강제 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통치하려 나서는 것을 창피한 일로 생각한다. 명예나 금전에 대한 사랑으로 통치에 나서는 것은 보상은 커녕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의한 현실에 신음하는 시민들을 위해 어떻게든 빨리 통치에 나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단지 자기 자존심 때문에 강제를 기다렸다가 그제에서야 통치에 나선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시간 순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정의로운 사람들인 한, 그들이 느끼는 수치감에는 이미 부정의한 통치자들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짐으로써 시민들이 불이익을 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에 대한 수치와 두려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수치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벌로서라도 통치를 맡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서 강제가 있기 전에 자진해서 통치를 맡지 않는다는 말 역시 강제가 주어진 연후에야 통치를 맡는다는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들이 자진이 아닌 강제로 통치를 맡게 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선후관계를 말할 뿐이다. 굳이 시간적으로 보자면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들 보다 못한 사람들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순간 수치심을 느끼고 그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즉시 자기가 싫어하는 통치를 벌로라도 받아서 통치에 나서는 것이다. 즉 수치심이 발생하고 통치가 벌로서 주어지는 강제의 시점과 그것을 맡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통치에 임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동시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통치를 강제하는 것이 누구인지도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은 부정의한 통치일 수도 있고, 그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요구일 수도 있고 그러한 현실을 목도한 통치자들 자신일 수도 있고 그것들 전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메카니즘을 굳이 정리해서 말하자면 일단 통치가 벌로서 주어진다는 점에서 강제이지만 그 벌을 통해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보상이 주어지며 동시에 통치를 벌로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그들이 자각하고 그에 따라 자진해서 통치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통치 참여는 그들의 자발성이자 자유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훌륭한 사람들은 비록 통치는 싫지만 불의한 현실이라면 늘 그렇게 통치자로 강제당하기를 자진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347d]

* 그리고 이런 사정을 거쳐 결국 강제에 의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맡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들은 무슨 좋은 일이나 안락 때문에서가 아니라οὐδ᾽ ὡς εὐπαθήσοντες 통치를 맡아하는 수고를 다른 동료에게 떠맡기는 것ἐπιτρέψαι이 싫어서 자기부터 나서서 통치에 임하려 한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가 되었을 경우에는 마치 오늘날 현실 통치자들이 통치를 맡으려고 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서로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싸운다고 한다.

* 위의 두 상황은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에 임하게 되는 각기 다른 배경을 보여준다. 하나는 불의한 현실에서 참된 통치자의 수고가 크게 요구되는 상황을, 다른 하나는 통치가 잘 되어 통치자가 크게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을 보여준다. 전자의 상황에서는 체질상 통치를 싫어하는 다른 동료들을 생각해서 자기가 먼저 나선다는 것이고 후자의 상황에서는 어차피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가 본성상πέφυκε 오직 피지배자의 이익을 생각하며 통치를 잘할 것이 명백한 이상, 수치스러운 일도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통치 또한 수고로움으로까지 여겨질 일도 아니므로 그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에 전념하려고 서로 나서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상황은 우리가 맞이하는 일상적인 현실의 경우이고 후자의 상황은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된 경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무려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강제는 결과적으로 수치를 면하는 혜택을 훌륭한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 강제는 앞서(347a)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소극적이나마 ‘최선의 인간들이 받는 보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 철학자에게 수치심은 너무도 큰 치명적인 손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손실을 면하게 되는 것은 역으로 그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이나 진배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명예나 금전에 기초한 유인과 그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호응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와 정반대이다. 그것은 ‘네가 통치자로 나서지 않으면 너는 수치감 속에 살아야 할 거야’라고 하는 손실 회피에 기초한 강권과 그것을 의식한데 따른 부득이하지만 다른 한편 적극적인 수용의 결과일 뿐이다. 철학자가 요구하는 보상과 다른 한편 두렵고 수치스러운 강제와 벌ἀνάγκη καὶ ζημία이 연계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통치자가 되는 벌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에게 보수는 곧 철학자로서 그 자신의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의 보전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식견이 있는(지각 또는 분별이 있는) 이ὁ γιγνώσκων라면 누구나 다 남을 이롭도록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을 택할 걸세.’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을 돕는 노고를 하지 말고 남한테 의지하여 자기 이익이나 챙길 것’을 권하는 말 같이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말을 바로 앞 상황과 연결 지어 아래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나라 상황이 태평천하일 때는 식견이 있는 사람(훌륭한 사람)이라면ὁ γιγνώσκων 누구나 남(시민들)을 위해서 수고를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남(동료 수호자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롭도록 되는 쪽(철학을 공부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 그러나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양치기 예를 들어가며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돌아와 ‘정의는 남에게 즉 강자에게 좋은 것이며 자기 즉 피지배자에게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343b,c) 이래 둘 사이에서 펼쳐진 논의들에 대한 마무리임을 고려하면 아래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말대로 정의는 남 즉 강자의 이익이고 자기 즉 피지배자의 손해라면 식견 있는 사람들 그 누가 남 좋은 일 그러니까 강자 좋은 일을 위해 생고생을 하겠느냐. 소크라테스 말대로 우리 피지배자들의 이익만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런 통치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들이 이롭게 되는 쪽이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최소한 분별 있는 사람들이라면 트라쉬마코스 주장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자신들에게 더 유익하고 합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347e]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나로서는 이 점에 대해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τοῦτο μὲν οὖν ἔγωγε οὐδαμῇ συγχωρῶ ὡς τὸ δίκαιόν ἐστι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τοῦτο μὲν δὴ καὶ εἰς αὖθις σκεψόμεθα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344d 이후 기술론에 입각하여 전개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즉 기술론적 논박은 여기에서 일단락된다.

* ‘그 점에 대해 다시 또 우리가 검토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고가 <국가>편 아니면 다른 대화편 어디에서 과연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J. Adam. 347e note 참고. 박종현 선생과 천병희 선생은 공히 Adam의 견해에 따라 이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스쳐가는 말 또는 상투적인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앞에 트라쉬마코스와 도저히 의견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결론적 발언의 직접적인 근거가 앞의 논의 전체에 대한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임을 고려하면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누가 보더라도 그 자신이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통치가 강자만을 위한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보다는 통치가 시민을 위한 이익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선택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바보가 아닌 한 자기 이익을 위한 통치를 바라지 누가 남이자 강자만을 위한 통치를 바라겠는가? 이 점에서도 식견 있는 사람들의 판정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판정에 이어 아래와 같이 물을 것이다. ‘소크라테스 선생! 우리들은 당신의 말하는 통치 쪽을 선택할 것이오. 그런데 그런 통치가 가능하기나 한 것이오.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우리가 그 쪽을 선택한 것인데 그런 것이 옳다는 주장만 했지 가능하다는 근거는 아직 제시하지 않으셨잖아요. 이제 그 점을 말해 주셔야죠.’ 소크라테스 역시 바보가 아닌 한, 식견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요구를 할 것이라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검토해보게 될 걸세’라는 말은 결코 상투적인 말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식견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궁금해 할 수 있는 문제들을 소크라테스 역시 당연히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점’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정의로운 통치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라고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실제로도 그에 관한 문제가 <제2권> 이후에서 검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347d)에서 말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πόλις ἀνδρῶν ἀγαθῶν(정의로운 나라와 관련한 표현으로서 처음 나오는 말이다) 즉 ‘정의로운 국가에 관한 논의’를 예고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이 부분은 이러한 예고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1권’은 결코 <국가>와 별개로 따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서론으로서 처음부터 계획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

* 이곳에서 이루어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은 우리들에게 정치의 이념은 물론이고 기술과 기술문명이 지향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은 앞으로 <국가>의 논의를 통해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한 조건 탐색에 심혈을 기울이고 우리 또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접하게 되겠지만 그의 기술론적 입장이 갖는 낙관성은 낙관적인 그 만큼 현실에서 늘 도전과 난관에 직면한다. 앞으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 도전과 관련한 몇 가지 상념을 함께 나누어 보기로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의 기술론적 논박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채워주는 것, 대상에게 최선의 것, 최선의 이익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이 점은 엄밀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트라쉬마코스도 어쨌거나 동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술 일반론의 관점에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술은 기술의 대상의 결함을 채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결함이 무엇인지는 미리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앞서도 살폈듯이(342b-c 강해) 그것은 기술을 행사하는 자의 기술자체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기초한 기대와 욕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기술은 그런 기준 하에서 결정된 부족부분, 결핍을 채우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실제 따져 봐야할 문제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그 기술을 통해 기대하고 욕망하는 것 즉 동기와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가 될 것이다. 사실 통치술의 경우만 해도 그것의 결함과 부족함, 바람직함과 그렇지 않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플라톤의 생각대로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기준 자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실제 현실을 보면 기술의 결함 여부는 기술을 수행하는 자가 그 기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그 기술에 거는 욕망과 기대의 충족 여부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통치술의 경우도 마키아벨리나, 스탈린이 생각하듯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대상이 되는 국민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그 기술의 본질로 규정할 경우, 그리고 플라톤의 말대로 기술은 대상의 결함을 최선으로 채워주는 것이라 규정할 경우, 그 기술의 최선은 대상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관철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이라고 다 좋은 기술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자라고 해서 다 선한 기술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기술에는 기만의 기술도 있고 독재의 기술도 있고 하물며 학살의 기술도 있으며 같은 기술일지라도 악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참주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서 자기이익을 극대화시키고 게다가 가장 정의롭다는 평판까지 누리는 자라면, 참주 또한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 기술자이다. 그리고 참주가 참주인 한, 최대의 통제와 착취를 자신의 통치 기술의 본질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에게는 시민이 자기 통제 하에 있지 않거나 그가 아직 빼앗지 못한 뭔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들 모두를 자기의 통치술이 해결해야할 결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참주의 입장에서 대상에게서 그 결함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국민을 완전히 자기 밑에 종속시키고(348d) 국민이 누리고 있는 그것을 완전히 탈취해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런 참주들이 수없이 존재해왔고 그들의 그러한 통치 기술의 발명과 완전성을 위해 이른바 수많은 전문가가 동원되었다. 비감스럽게도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 이렇게 보면 통치술과 기술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인 생각은 어찌 보면 하나의 입장이고 세계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악과 부정의한 현실이 엄연히 위력을 발휘하고 또 자본 주도의 기술문명이 현재 진행형인 한, 그것은 플라톤적 세계관의 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플라톤의 낙관론적 기술관과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플라톤의 노력과 열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차대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단하고도 힘든 삶의 현실들을 감당하며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세계관의 문제는 단순히 상대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선과 정의를 관철하는 나라와 영혼을 향한 전면적인 선택과 결단과 실천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철학은 선과 정의의 문제를 절대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것들 모두를 상대화하여 대립되는 가치 그 모두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형식적 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철학은 권력과 탐욕, 부조리와 이기심이 자기 증식하듯 뿌리를 내려 마치 그 자체로 삶과 역사의 진실인 양 으스대며 우리 앞에 서 있는 이기주의적 세계관에 결연히 맞서 불타협의 정신으로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공동체적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왜 우리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찌든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거부하고 서로 다른 욕망들의 공존과 조화를 꿈꾸는 플라톤의 정의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기술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를 통해 그의 치밀한 논리뿐만 아니라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에 대한 그의 치열한 분노와 적대감 그리고 그것을 깨부수고 말겠다는 의지의 간절함 또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 철학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국가>를 읽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공부하는 목적 또한 정의로운 나라와 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세계관의 구축과 내재화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늘 마주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적 세계관과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와 투쟁 그리고 그들에 대한 압도적인 승리에 있다고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금도 외치고 있다. ‘타협하지 말라! 그 뿌리를 뽑아라!’


<공지 사항> 2018년 12월 26일과 2019년 1월 2일은 연말연시를 고려하여 학당 강의를 일시 휴강하기로 함에 따라 이곳에 연재되는 강의록도 잠시 쉬었다가 2018년 1월 중순에 다시 연재할 예정입니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인형의 집에서 노라와 반역자인 유일자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은 그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에서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노라의 이야기를 한다. 왜 갑자기 슈티르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입센을 언급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입센의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의 모습이 ‘유일자’의 모습, 곧 나다움의 추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인 노라는 슈티르너가 말하는 노라의 ‘체내화’(Verleiblichung/incorporation)라고 할 수 있다.(407)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화(Heiligung)에 대한 반역으로 탈신성화 혹은 신성 모독(Entheiligung)을 주장했다. 신성모독은 곧 나다움을 찾아가는 길의 첫걸음이다. 그렇다면 입센은 이 희곡에서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가출을 선택하는 ‘노라’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자아 각성과 자아실현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은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를 차용한다. 그의 문학에서 노라를 자아 각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노라는 슈티르너가 주장하는 자의식, 자기중심적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염상섭의 초기 문학에서 그는 “가네코 우마지의 자연주의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개성’이라는 개념에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반역자’라는 개념을 접합하여, 개성의 자각을 사회의 억압기제에 대한 ‘반역’으로 변형시키면서 정치 미학적 색채를 가미한다.… 주인공 이인화는 냉소적 이성의 소유자로 지성과 행동이 분열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동경에서 경성으로 여행하는 동안 제국 일본의 다양한 억압기제를 확인하고, ‘자기 반역’을 통한 주체 재정립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이인화는 정자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역자로 거듭나야 함을 역설한다.”(민족문학사연구 / 52권, 권철호)

이를 통해 우리에게 그동안 너무나 시,공간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유일자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까운 시간과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혁명인가 반역인가!

 

먼저 다시금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아로서의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들(verwerte) 때, 내가 나 자신의 가치(Wert)를 나에게 줄 때, 그리고 내 자신의 값(Preis)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에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저항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을 때, 자신의 가치를 만들지 못할 때, 그러한 경우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은 반역이다. 그는 우선 슈티르너는 ‘혁명과 반역’(Revolution und Empörung)을 구분하다. 그리고 혁명은 상황의 전복,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 혹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이며, 따라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행위라고 말하고, 반역은 불가피한 결과로서 실질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환경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을 경험했는가? 우리의 역사에서 몇 번의 혁명이 있었고 그 혁명을 속에서는 우리는 어떤 존재였고, 지금은 또한 어떠한가? 우리는 여전히 그것에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슈티르너는 “반역(Empörung)이라는 말을 그 말의 어원학상의 의미와 관련하여 선택한 것이고, 또한 형법에서 금기시된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주석 96) ‘empor’는 부사로 “위로, 높이”라는 뜻이고 분리동사의 전철로, ‘위로·높이’의 뜻이다. 동사 ‘empören’은 ‘올리다, 누구에게 반항하다’라는 뜻이다. ‘개’라는 말과 연결되는 견유(犬儒)학파의 디오게네스(키니코스학파의 디오게네스를 슈티르너도 인용한 바 있다)의 기념비에 새겨진 개처럼 낮은 것을 높이고 높은 것은 낮추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보았듯이, 기존에 높은 것은 고정관점, 위계질서 등인데, 슈티르너는 바로 이것을 낮추고자 겸손하지 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관심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지금 개처럼 낮은 것은 바로 우리 개개인들, 유일자들, 노동하며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유일자를 무(無) 위에 놓는다는 것은 유일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므로, 지금 현실에서 개처럼 낮은 유일자를 ‘높게’(empor) 하는 것이 유일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이윤, 자유로운 경쟁을 주창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개개인들의 가치를 추구하여 나다움을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슈티르너는 반역의 의미를 다시금 유일자의 철학이 추구하는 나다움으로 연결시킨다. 제도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계하는 유일자의 모습을 그는 나다움을 찾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다움이라는 표현은 자기 소유자임을 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반역은 무장봉기(Schilderhebung)가 아니라 제도(Einrichtungen)로부터 야기되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일어서는 개인의 어떤 반항(Erhebung), 어떤 번영(Emporkommen)이다. 혁명은 새로운 제도를 목표로 한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354)

 

위 문장에서 ‘제도’(Einrichtungen)와 ‘설계하다’(einrichten)라는 단어로 언어유희를 하고 있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앞 문장은 설계하는 것을 ‘내버려두는(lassen)’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으면 삶을 설계하는 것은 나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슈티르너는 반역을 “현존하는 것(Bestehende)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곧 “나의 목표는 기존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나의 고양(Erhebung)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에게 그리고 나의 나다움(Eigenheit)에 어떤 자기중심적인 나다움(Eigenheit)이라는 올바로 상태”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는 계속하여 나다움을 주장한다. “반역(Empörung)은 기운을 차리는 것을 요구하거나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emporzurichten)을 요구한다.”(같은 곳) “가난한 사람들이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그들은 단지 자유롭게 되고 소유자가 될 것이다.”(288)

결론적으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보다 반역이고, 반역은 반항(Erhebung)이고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 곧 번영(Emporkommen)이다. 그래서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282) 다시 말해 자신의 번영(Emporkommen)을 위한 반항(Erhebung)이고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다움이라는 소유자가 되는 것은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가능한 것이다.

 

 

반역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

 

익숙한 가치를 다르게 평가할 줄 알 때, 그때야 비로소 반역은 가능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재치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슈티르너가 주장했듯이, 신성한 것은 낯설고 친숙한 것이다. 신성한 것은 두 대립적 규정이 통일되어 있다. 따라서 신성한 것은 운동이고 모순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가치체계가 소리 없이 굳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 반역은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데카르트)라는 테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변주되었다. “나는 의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셸링)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카뮈) 그렇다면 슈티르너에게는 어떻게 변주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슈티르너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그를 익살꾸러기 광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분노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온갖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 얽힌 그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고 충고하고 도덕적 영향력을 고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해보자. “너나 잘 하세요” 대립으로 드러난 경멸!

 

 

경멸받지 말고 나를 경멸하는 것에 대해 경멸하라!

 

니체는 국가, 시대, 계급, 문화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구토감이 초인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는데(프리드리히 니체, 박성현 옮김,『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심볼리쿠스, 2012, 19쪽 주석 참조),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도 모든 신성한 것들, 곧 국가, 민족, 자유, 도덕 등등에 대해 신성모독과 경멸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와 그리스도 시대는 대립적인 목표를 끝까지 추구한다. 그런데 전자는 실재를 이상화하려하고(idealisieren), 후자는 이상을 실현하려하며, 전자는 ‘신성한 정신’을 얻으려고 애쓰고, 후자는 ‘거룩한 육체’를 얻으려고 애쓴다. 따라서 전자는 실재에 대한 둔감으로, 곧 ‘세계경멸’(Weltverachtung)로 종결한다. 그러나 후자는 이상(Idealen)의 벗어던짐으로, 곧 ‘정신의 경멸’(Geistesverachtung)로 끝나게 될 것이다.”(407)

 

그는 ‘세계경멸’과 ‘정신의 경멸’을 넘어서는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375)을 주장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니체가 말하는 ‘건너가기’라고 할 수 있다. 곧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이다.(『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21) 이렇게 보면, ‘자기극복’은 ‘내려가기’와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행위를 ‘내려가기’(Untergang)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는 사람을 저는 사랑합니다. 미덕은 내려가기를 감행하겠다는 의지이며 초인에 대한 갈망을 담고 날아가는 화살이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22) 니체에게 이 단어는 반복되는 말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를 변증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대립된 두 개의 규정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방법을 변증법이라고 한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추상적인 것(민중,인류)과 구체적인 것(나)은 대립된 것이다.

 

“민중과 인류의 가라앉음(Untergang)은 나를 떠오름(Aufgange)으로 초대할 것이다.”(238)

 

나다움의 가라앉음은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 없음(의기소침Mutlosigkeit)에 의해 -겸손(Demut)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344) 결국 나의 가라앉음은 인류의 떠오름이고 그것은 겸손이라는 나의 단념과 나의 자기부정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나의 떠오름, 나다움의 떠오름을 위해서는 겸손을 벗어나야 한다. 자기극복은 나의 떠오름이고 세계극복(Weltüberwindung)(25)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맑스의 파악으로 본다면, 자본의 잉여가치 창출의 떠오름은 나의 가라앉음이다. 유일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유일자=비인간적 인간이다. 유일자=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고 인간다움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꾸로 인간다움의 ‘부정’은 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는 나다움의 긍정을 위하여 인간다움을 부정해야 한다. 유일자는 상이한 사람이다.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다. 그래서 상이한 사람들의 부정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 비동일성의 부정은 인간이다. 곧 비동일성의 부정은 동일성이다. 결국 인간은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 칼 맑스가 물신숭배를 비판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공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적인 노동이 다양한 노동과 교환된다는 것, 곧 추상적 인간노동의 대상화, 다시 말해 교환가치 속에서 상이한 노동과의 동일성은 비동일성의 추상성이기 때문이다.

유일자를 비동일성이라고 이해한다면, 비동일성의 부정, 곧 자기극복의 모습은 유일자의 또 다른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경건하지 않음’(Unehrerbietigkeit)과 ‘뻔뻔스러움’(Frechheit)을 유일자의 태도로 제시하는데, 다시 말해 신성한 것에 맞서는 유일자의 태도는 조롱(Spott), 욕설(Schmähung), 경멸(Verachtung), 의심(Bezweiflung) 등등 이다. 경멸의 내용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경멸받고 있는 것, 경멸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거꾸로 경멸받지 않아야 하는 것, 경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니체는 ‘거대한 경멸’의 대상으로 행복, 미덕, 이성, 정의, 연민 등을 거론한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일자의 태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경멸하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를 무(無)로 되돌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훨씬 더 신성한 것에 대한 근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님, 무관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린이 같은 사람의 태도는 대상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 곧 주체가 대상과 여전히 관계 맺고 주체가 그 대상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음’이다. 신성함은 신성함에 대한 선포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신성모독은 신성함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가능하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침몰하는 대학]

고려대 민동 강사법관련 구조조정 저지 대자보

※ 위 링크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서 지난 11월 28일 발표한 대자보 PDF 파일입니다. 메인 이미지 대자보 사진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저작자와 성명단체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게재를 허락한 저작자와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감사드립니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박지용(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사업1부장)

 

하나, 대학 내 시간 강사와 강사법

2018년 11월 28일, 7년이나 유예된 강사법이 다시 법사위를 통과했다. 그 다음날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8일, 29일 거의 실시간으로 김영곤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통과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진통 끝에 2019년 8월 1일부로 강사법이 시행되게 되었다. 강사법 시행과 관련하여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은 김영곤, 김동애 두 부부 선생님이시다. 전국강사노조는 1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회 앞 텐트 농성으로 강사법 시행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충분한 여론을 형성해 왔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전공선택 과목을 가르치다가 2009년 대학 측의 해고통보로 강사직을 잃고 복직 투쟁을 하셨다. 당시 학교 당국은 박사 학위가 없는 시간강사들의 강의를 네 학기로 제한함으로써 ‘비정규직 보호법’을 피하려 했고, 이 결정에 따라 88명의 시간 강사들이 해고되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2년 넘게 계약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적인 취지와 달리 비정규직의 고용 상황을 더 열악하게 만들게 되었다. 김영곤 선생님의 복직 투쟁은 결과적으로 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사립대학이 공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업일 뿐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고려대학은 복직 소송에 패소한 김영곤 선생님께 천만 원의 법률비용을 청구했다. 일 년 동안 학교가 지급한 강사료가 천만 원도 안 된다는 사실은 학교 당국이 잘 알고 있다. 통상 기업들이 강고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써먹는 수법을 일개 대학 강사에게 적용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이 학교 당국의 법률비용 청구가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종결되기는 했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해왔지만, 학교의 압력으로 그 텐트는 교양관 앞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강의하러 교양관을 들락날락하면서 항상 그 텐트는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몇 해 전 첫눈이 왔던 추운 어느 날, 텐트 앞에서 김영곤 선생님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당시 나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복직 판결을 받았고, 선생님은 밝게 웃으시며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셨다. 큰 틀에서 보자면 강사법 투쟁 또한 노동자 권익을 위한 투쟁이었다. 강사법은 국회와 정치인들이 약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가치에 따라서 시혜적으로 통과된 것이 아니다. 권익을 위한 투쟁은 항상 약자들 스스로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강사법 시행에 이르기까지, 권리를 향한 단결 투쟁이 제도 변화를 낳은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원론적인 관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둘, 사학 자본의 민낯

자본주의는 노동착취를 통해 이윤을 낳는다. 대기업이 쌓아둔 영업이익이나 사립대학이 쌓아둔 재단적립금의 실체적인 원천은 같다. 노동자들의 착취가 대학과 대기업이 쌓은 이익의 원천이다. 이제 강사법은 방학 중 임금 지급과 4대 보험 지급의 의무를 고용기관인 대학에 부과한다. 그런데 대학 측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용을 법으로 강제하다니!’라는 억울함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대학은 돈이 없다고,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강사들을 협박한다. 이런 사립대학의 뻔한 대응을 예견한 사람들은 법 시행 주체인 사립대학이 각종 대응책을 미리 마련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 목소리는 다시금 강사법 시행의 부당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학은 예상한 그대로, 비용지출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대학 졸업 학점을 대폭 낮추고 강좌를 줄이는 식으로 구조조정 전략회의를 했고 또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사립 유치원장이 정부지원금으로 명품가방을 샀다는 기사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많은 사립대학들은 재단적립금을 부당하게 주식투자로 돈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사회의 교육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은 정치권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보다는 공공성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립 유치원보다 국공립 유치원이 더 신뢰도가 높고 안전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점차적인 공공성 확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실현과 관련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도 분명하다. 교육의 사회적인 공공성에도 불구하고 사학재단에 대한 구조조정을 정치적으로 결단하는 데에는 정당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대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사립 교육기관 대 교육 공공성 사이의 딜레마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국립대학에 대한 예산은 현재 강사 수준을 조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결정되었다. 그러니 국립대학 교수들과 총장들은 사립대학이 구조조정 없이 시행하라고 편하게 말한다. 하지만 사립대학은 정부지원금이 없으면 추가비용을 들일 수 없다고 대응한다. 이 과정에서 한 예로 11월 14일 고려대학교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한 교무회의 비공개 문서가 언론에 드러났다. 곧바로 강사법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의 방문을 단행했다. 나는 내가 가입해 있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이 사안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직접 이해관계 당사자가 아니라도 졸업생들의 입장에서 민주동우회는 모교의 부당한 결정에 반대하여 공동대책위원회와 연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는 12월 3일 강사법 관련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전면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투쟁 역시 잠정적인 승리일 뿐 정작 강사법 시행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 되어서는 어떤 입장 변화가 있을지 주시해야 한다.

김동애 선생님은 한 회의에서 강사법 투쟁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서정민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러니 더욱 강사법으로 인해 다시 극단의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해고는 살인이다!”

 

셋, 사립대학은 강사법 시행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벌써 몇 주 전부터 2019년 1학기 강의 시간 배정과 관련해서 선배, 후배, 동료들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A 대학에서는 4대 보험을 다른 곳에서 들고 있는 강사들만을 남기고 정리를 했다고 한다. B 대학에서는 한 강좌만 하던 강사들은 정리했다고 한다. C 대학은 교양과목의 강사들을 모두 정리했다고 한다. 이 모두 정리해고 되는 경우들이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이 감정의 변화들을 감내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다. ‘그래, 이게 현실이라면 화가 나도 받아들여야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지만 장기화된 해고 상태가 개선되지 않은 채 지속하면 어떤 불행한 사태들이 나타날지 모두 알고 있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더 심각한 상황을 낳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 불안한 징후는 벌써 현실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박사 학위를 눈앞에 둔 학문 후속세대들의 위기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세심한 대책이 더욱 필요하다.

강사법 시행을 위한 정부 예산안이 국립대와 사립대에 불균형적으로 배정되어 사립대의 대량 해고를 막아낼 수 없는 현시점에서, 강사노조 단체들은 다시금 사립대학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체 시간강사들의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2019년 8월 1일부로 시행되는 강사법에서 시간강사들의 전체 규모가 현저히 낮아지지 않도록 교육부에 사립대학 지원과 관련한 명확한 지침을 요구해야 한다. 가령 교육부가 전면에 나서서 구조조정의 실행 여부와 그 규모에 따라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교육부는 눈앞의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을 실행한 학교들을 전수조사하고 철회를 분명히 강제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2018년 12월 14일.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1.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⑱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을 담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직후 그것의 의미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를 내세울 때만 해도 그의 주장은 자기 이익의 극대적 실현을 위한 권력지상주의로 비쳐졌고 그 단적인 경우가 참주정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참주정 찬양론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정작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앞의 주장을 살펴보면 트라쉬마코스는 오히려 일상의 사회적 이해관계에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 즉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다만 그것의 우위를 판정해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로서 가장 부정의한 권력인 참주와 참주정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권력지상주의와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 모두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고 그런 점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또한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가 표방하는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이 하나의 나라에서 하나의 입장으로 동시에 양립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을 총동원하여 시민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시민들이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고 부정의를 일삼도록 결코 내버려 둘리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강자의 정의와 시민의 부정의는 둘 다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사회적 관계에서는 이기심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배타적인 데다가 특히 강자에게는 독점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이 이미 현실적으로는 기회주의 이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 모두가 철저히 이기주의자로서 일관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 참주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참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철저히 참주 편에 서서 시민을 착취하는데 앞장 설 것이고, 참주정이 쇠할 때는 참주 몰래 부정의를 저지르는데 몰두하다가 또 시민들이 득세하면 시민들 편에 서서 부정의를 선동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주의자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하건 앞서 우리가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 자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 모두를 함께 내걸고 시종일관 줄기차게 일관된 소신으로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어떻게든 남을 누르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정의 찬양론 위에 서 있되, 기회가 되면 권력에 빌붙어 약자들의 부정의 찬양론도 탄압하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지상주의를 함께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그의 주장 자체가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는 안중에도 없는 반도덕주의적 입장이자 그야말로 공동체 파괴주의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앞서 그가 쏟아낸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극단적이고도 파괴적인 이기주의는 국가 차원과 개인 차원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 하나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가 철저히 모든 국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거울에서 실물과 허상이 모든 면에서 서로 대응되면서 모든 내용에서 정반대인 것과 같이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철저히 대립해 있다. 이런 점에서도 <국가> 제1권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의 논의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안티테제로서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서술 계획 아래 제시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인간 삶의 이익과 행복의 문제는 그만큼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것이고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투쟁 또한 그만큼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것이다.

4-7(344d~ 345e): 소크라테스의 분노와 재반론

 

[344d]

* 트라쉬마코스는 그의 속내를 마치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βαλανεύς들이 물을 쏟아 붇듯 우리의 귀에다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 넣고서는καταντλήσας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동석한 사람들은 그러도록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그것이 과연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우리 스스로 알게 되기도 전에’πρὶν 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εἴτε οὕτως εἴτε ἄλλως 떠날 생각이냐고 묻고 간청하다시피 말을 한다.πάνυ ἐδεόμην τε καὶ εἶπον

* 트라쉬마코스는 대화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면서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스스로 알게 해주는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사람’이다.

 

[344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묻는다. ‘혹시 선생은 우리가 사소한 것을 결정하려 꾀하고 있지 각자가 어떻게 삶으로써 가장 유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지 그 삶의 방식을 결정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시오?’ἢ σμικρὸν οἴει ἐπιχειρεῖν πρᾶγμα διορίζεσθαι 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ν, ᾗ ἂν διαγόμενος ἕκαστος ἡμῶν λυσιτελεστάτην ζωὴν ζῴη;

*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정의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논하고 싶어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정의에 관한 문제는 곧 우리를 가장 유익한 삶,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 일체’(the whole way of life)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다. 이것은 곧 <국가>의 테마이다.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전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않을οὐδὲν κήδεσθαι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모름으로써ἀγνοοῦντες 더 나쁘게χεῖρον 살게 되든 또는 더 훌륭하게βέλτιον 살게 되는 전혀 개의치 않는οὐδέ τι φροντίζειν 것 같다고 질타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당황한 듯 짧게 반문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멈추지 않는다.

————————–

* 그런데 앞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를 정치체제와 정치적 강자와 관련하여 거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의에 관한 논의의 핵심으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삶의 방식’은 언뜻 개인적 차원의 삶의 방식으로 느껴져 다소 의아스러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 말 대신 ‘가장 유익을 가져다주는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를 언급했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된 ‘삶의 방식’을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로만 제한하여 이해할 경우 오히려 플라톤의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 사실 <국가>에서 정의 문제를 논의하는 기본 흐름을 보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가?’ 즉 개인 차원의 정의와 행복 문제로 시작했다가 소문자보다 대문자로 보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나라에서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확대된 후, 논의의 말미에 다시 개인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것은 정의로운 삶의 문제를 탐문함에 있어 플라톤이 얼마나 개인의 행복을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도 여기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결코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국가나 특정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플라톤의 정의론이 반대로 개인주의적 정의론이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책의 제목과 부제에 들어 있는 ‘폴리테이아’politeia와 ‘디카이오쉬네’dikaiosynē라는 말이 갖는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인 함의를 살펴본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은 <국가> 전체를 통해 정치적 삶과 개인적 삶 가운데 어느 것을 우위에 두거나 구분하지 않고 그것들 각각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적으로 밀접하고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현대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는 플라톤은 여전히 전체주의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이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오히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소외를 속수무책 방관하고 오히려 인간의 삶과 문명을 황폐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플라톤적인 정치철학이 갖는 내적 가능성과 의미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정의와 관련하여 논의의 핵심으로 거론된 ‘삶의 방식’은 개인들 각각의 삶에 어느 것이 가장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함축함과 동시에 ‘삶의 방식들 일체’란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이미 개인들의 정치적 삶의 방식 즉 정의로운 정치체제의 문제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45a]

*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말한다. 그리고 하물며 부정의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μὴ διακωλύῃ 멋대로 저지르게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득κερδαλεώτερον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설사 부정의를 남 몰래하든 싸움을 벌이든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우리 중에도 있으며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닐 것οὐ μόνος이라고 선언한다.

————————-

*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결연한 거부가 담겨있는 이 부분은 그가 혐오하는 소피스트의 웅변조의 연설같은 느낌마저 든다. 344d에서 시작해서 345b 중간까지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분명 무지의 지와 겸손을 앞세우며 늘 차분하게 대화를 이끌던 평소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그 말 속에는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녹아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 예시하고 있는 참주조차 대놓고 부정의를 저지르지는 못한다. 법을 내세우는 기만의 방법으로 몰래 자신의 이익을 취할 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참주조차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의 가장 유리한 조건 즉,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부정의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결코 그는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 된다고 자신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ἄδικος μέ γε οὐ πείθει ὡς ἔστι τῆς δικαιοσύνης κερδαλεώτερον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혐오와 반대의 정도가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트라쉬마코스를 질타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보면 여러 곳에서(345e) ‘성의를 보이시오’προθυμοῦ, 345b, ‘납득시켜 주시오’πεῖσον, ‘345b 견지하시오’ἔμμενε, ‘속이지 마시오’μὴ ἐξαπάτα) 등 명령어가 사용되고 있고, ‘전혀’, ‘아무런’ 등 완전부정을 뜻하는 οὐδείς라는 표현도 여러 번(344e, 345a) 등장할 정도로 말투 또한 결연하고 단호하다. 다그침에 가까운 질문과 명령어만이 아니라 말의 길이도 이제까지 그가 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길다. 아마도 <변명>정도라면 모를까 어떤 대화편에서도 이 부분만큼 소크라테스의 결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거의 없을 듯싶다. 공관복음서에서 장사치들로 들끓는 성전에서 분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연상된다면 과언일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그의 비장한 결의가 엿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말에는 어떤 극단적인 부정의 상황에서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며 그들은 용기로써 늘 함께 연대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또한 담겨 있다. 사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열매를 맺으려 한다. 재생산을 위해서이다. 하물며 부정의한 자들은 열매가 보장되지 않는 일은 도모할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들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만 하지 않는다. 싸워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들은 싸운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해도 끝없이 재생산되는 신비 아닌 신비, 결코 마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곧 부정의한 자들이 원천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는 이유이자 증거이다.

 

[345b]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에 이제까지 자기가 한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억지로 머리(영혼)속에 집어넣어 드릴까요?εἰς τὴν ψυχὴν φέρων라고 대든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데만 능할 뿐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나아가 그 말을 논리적으로 검토하거나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을 어떻게든 피해가려는 그의 태도에는 말투와 달리 다소 겁을 먹고 움츠려든 느낌이 든다.

*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것은 대화와 설득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에게는 가장 혐오스런 말이자 모욕적인 말이다. 그야말로 무례하고 파렴치하다. ‘결코 그러지 마시오.’μὰ Δί᾽ μὴ σύ γε라는 말에는 트라쉬마코스를 압도하고 남을 정도의 단호함이 배어있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본래 그가 해오던 대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검토하여 논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다시 논박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단호하다. 통상적으로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적 검토에 앞서 상대방의 동의를 먼저 구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동의는 고사하고 논박에 앞서 트라쉬마코스에게 먼저 말 바꾸는 태도부터 고치라고 야단치듯 다그친다. ‘말한 것은 견지하라ἔμμενε. 혹시, 견해를 바꿀 시에는 그걸 명백히 바꾸되 우리를 속이지 말라ἡμᾶς μὴ ἐξαπάτα.’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칼리클레스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고르기아스> 499b~c cf. 334e, 340b~c

 

[34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가 바로 앞에서 한 말 가운데에서도 말을 바꾼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처음에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통치자의 행태에 입각해서 정의를 이야기했다가 비판에 부딪치자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였다고 말을 바꾸고 또 그것이 비판에 직면하자 양치기의 예를 내세워 다시 현실적 의미에서의 통치자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양치기 기술과 관련한 문제부터 검토하기 시작한다.

* 우선 트라쉬마코스가 예로 든 양치기ποιμήν는 서로가 동의한 엄밀론에 입각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치기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트라쉬마코스가 양을 살찌우는 것πιαίνειν은 양들의 최선의 상태τὸ τῶν προβάτων βέλτιστον를 염두에 두어서가 아니라 마치 자기가 접대 받을 손님인 양 성찬εὐωχία으로 올라올 양고기를 염두에 두고 양을 치고 있거나 아니면 마치 자기가 돈벌이꾼χρηματιστής인 양 나중에 돈을 벌기 위해 팔 것을 염두에 두고 양을 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345d]

* 그러나 앞서 기술에 관한 논의에서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했듯이(342b~c) 양치기 기술이 적어도 양치기 기술인 한, 그 기술이 양들의 보살핌에 있어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할 미흡함이 없는 완벽한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한, 양치기 기술의 관심사는 스스로의 이익 아니라 그 기술의 대상ἐκεῖνος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

* 기술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대상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342a~b의 논의를 통해 플라톤에 의해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전쟁술과 수렵술의 예를 들어 기술이 그 기술의 대상을 반드시 이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전쟁술은 전쟁의 대상인 적군을 해치는 것이고 수렵술 또한 수렵의 대상인 동물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단 타당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대상’에 해당하는 원어 ἐκεῖνος(이 말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내 바깥 쪽 저것’that person or thing there을 뜻한다.)의 의미를 단순히 외부의 실체적 대상이 아니라 즉 ‘기술이 마주하는 과제로서 저것’ 즉 기술이 관여하는 일차적인 과제 내지 목적obj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대상을 실체적 대상으로만 한정할 경우 이를테면 의술이나 제약술의 대상은 다 ‘병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기술임에도 대상간의 고유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술의 고유성에 맞추어 대상의 고유성도 살린다면 이를테면 통치술의 경우, 통치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수렵술의 경우도, 수렵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동물의 포획’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동물의 포획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이러한 기술 모두 일단 외부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고 나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기술은 기술 대상의 이익에 관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기술론은 통치술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나름의 유비적 타당성을 갖는 것이고 위와 같은 해석 또한 최대한 플라톤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려는 사람들로서는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입장과 관점에 따라 기술 관련 언급 자체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345e]

* 소크라테스는 모든 다스림ἀρχή은 그것이 다스림인 한, 공적이든 사적이든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돌봄을 받는 쪽ἀρχομένῳ τε καὶ θεραπευομένῳ을 위한 최선의 것을 생각하는 것τὸ βέλτιστον σκοπεῖσθαι이라고 서로 동의했음을 트라쉬마코스에게 환기시킨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럼에도 나라들에 있어서 통치자들이 즉,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μὰ Δί᾽ οὔκ 그 점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εὖ οἶδα’ 동의를 표한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통치자들’은 트라쉬마코스가 343c에서 말한 현실에서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한 적이 있는(341b)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이다. 그리고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앞에서 그가 설명한 대로 ‘통치술이 통치술인 한, 통치자의 이익과는 무관하므로 강제라면 몰라도(347c) 그런 자리를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트라쉬마코스 역시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 통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점은 잘 알고 있다’라고 답을 한다. 트라쉬마코스도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 대상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술은 맡아봐야 자기에게 좋을 것이 없는데 왜 자진해서 맡겠느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나 트라쉬마코스 모두 일단 참된 통치자건 아니건 누구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기피한다는 것을 공히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점차 밝혀지겠지만 통치의 대가로 주어지는 권력과 명예는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에게 수치스러운ὄνειδος 것으로서 그들 자신에게 결코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통치를 기피한다는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는, 소크라테스의 말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란 게 그저 시민의 이익만 도모하고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는 누구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생각은 현실에서의 통치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의 통치와 달리 자기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위와 정반대로 자격이 되건 안 되건 누구라도 자진해서 그 일을 맡으려 한다는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통치술 자체와 자기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잘못된 생각을 깨기 위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예시한 다스림과는 다른 다스림(관직)들τὰς ἄλλας ἀρχὰς의 경우를 들어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한 것이고 오히려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익임을 재차 밝힌다. 즉 일반 다스림의 경우 하나같이 ‘자진해서 다스림을 맡지 않고 보수를 요구 한다μισθὸν αἰτοῦσιν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로 통치술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와 돌봄을 받는 쪽의 이익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관직을 맡은 사람들은 별도의 보수를 따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과 보수를 얻는 기술이 별개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로 붙여서 잘못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 혹자는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더라도 통치술 자체가 시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훌륭한 사람들은 무상으로라도 통치를 맡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비록 통치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통치술 자체가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을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이익을 위한 참된 통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들이 맡아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강제ἀνάγκη와 벌ζημία이라는 방식으로 통치가 맡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와 벌을 받아들이는 배경에는 통치를 맡지 않을 경우, 자기보다 못난πονηροτέρου 사람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수치심αἶσχος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강제는 적극적인 보상μισθός은 아니지만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도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이기도 한 것이다. 강제로서 벌과 보상이 연결되는 지점도 이곳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훌륭한 사람역시 사람인 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꺼려하므로, 최소한 다른 훌륭한 사람이 통치를 맡아 수치심의 면제가 담보되는 한, 자신은 최대한 통치를 맡기를 기피하려 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은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강제된다면 그 역시 다른 훌륭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 일을 맡아 시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수 획득술의 문제를 다루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346a]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앞서와 같은 논박을 토대로, 다스림이 위와 같듯이 다른 기술들도 각각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을 가지고 각기 자기 기술의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임을 밝힌다. 의술ἰατρικὴ 은 건강ὑγίεια을 제공하고 조타술κυβερνητικὴ은 항해할 때 안전σωτηρία을 제공하듯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듯 통치술과 보수를 획득하는 기술 즉 보수 획득술은 각기 다른 것을 제공하는 다른 기술이라는 것이다.

 

 

낸시 초도로우(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8.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 (下)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주 어린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도, 스스로 음식을 섭취할 수도, 심지어는 스스로 잠을 청할 수조차 없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즉 문자그대로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시기 어린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를 필요로 하지만, 자신과 환경, 그리고 자신과 자신을 돌보는 사람(주로 어머니)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머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함에도, 아이는 자신과 분리된 존재인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잘’ 돌본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낀다. ‘잘’ 돌보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극도로 헌신하며 아이의 생리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섬세하게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의 일차적인 관계는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하며 모든 사랑의 토대가 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처럼 어머니와 아이의 초기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와 같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면, 자녀 양육이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한 완전하고 충만한 관계를 어머니가 되어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모든 어머니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어머니는 육아우울증에 걸리는 걸까? 초도로우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강하게 비판한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성은 아이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머니는 관계와 사회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여성은 아이 외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가정 밖의 사회에 또한 속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예 생존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인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느끼고 경험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적 중요성이 상호적이지 않다는 점 외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이 초기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기술하는 정신분석학은 문제적이다. 어째서 여성만이 양육하는 ‘어머니’가 되는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돌봄을 받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를 가졌던 모든 이들이 부모노릇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주로 여성만이 아이를 돌보는 부모노릇을 한다. 남성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돌본 부모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초도로우는 여자아이만이 자라서 ‘어머니’가 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남자아이와 정확하게 대칭적으로 해소한다. 그 결과로 여자아이는 여성으로서 젠더정체성과 남성을 향한 이성애 지향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극복기는 초도로우가 지적하듯, 매우 비약적이며 단순한 설명이다.

 

  • 여성-어머니의 돌봄으로 인한 대상관계경험의 젠더화

 

대상관계이론은 인생 초기에 만나는 가장 가까운 타인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이 자아 내에 대상 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렇게 자아에 내면화된 대상과의 관계가 훗날 타인과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도로우는 대상관계이론의 설명을 빌어,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된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고 ‘어머니’가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다시 쓴다.

초도로우에 따르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내용과는 달리, 여자아이 또한 남자아이 못지 않게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애착하며, 그 관계에 등장한 아버지를 경쟁자로 본다. “양성의 아이들 모두에게 일차적 사랑과 동일시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들은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그 관계 구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기 진입 이전, 즉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 아버지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오이디푸스기’에서부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은 다르게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이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초도로우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이 다른 이유를 비대칭적인 부모노릇에서, 그리고 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매개되는 부모의 양육 태도, 감정과 무의식에서 찾는다.

모자관계와 모녀관계를 다룬 여러 임상자료들을 통해 초도로우는 어머니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다름을 지적한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이 타고난 충동들에 의한 것이라 설명하지만, 아이의 심리발달에는 돌보는 이의 느낌과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초도로우가 다루는 임상자료들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과 분리된 타인으로 경험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어머니 자신과 분리하도록 권한다. 반면에 어머니는 자신 또한 어머니의 딸이었기에 자신의 딸을 분리된 타인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확장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오이디푸스적 경험은 남자아이가 명확한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여자아이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장려한다. 그리하여 이 대상관계적 경험은 남자아이는 독립적인 남성적 남성이 되도록, 여자아이는 관계적인 여성적 여성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어머니노릇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어머니노릇)의 재생산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재생산은 일차적 양육을 감당하는 특정한 심리적 능력과 태도를 지닌 여성과 그것이 없는 남성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전오이디푸스기를 거쳐 여자아이는 자신의 성애적 지향을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바꾸는 오이디푸스기에 진입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착을 깨뜨릴 만큼 충분히 중요한 대상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의존, 애착, 공생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새로운 관계의 대상으로 등장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단순히 추가되는 오이디푸스적 애착일 뿐이다. 이에 따르면 여자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더라도, 이는 자신에게 페니스를 주지 않은 어머니가 미워서, 혹은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경쟁상대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데,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전히 특별히 중요한 대상으로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획득하고 싶지만, 어머니가 이미 이성애자임에 대해 좌절한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하는 성애적 사랑을 여자아이에게 제공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만한 페니스를 소유한 사람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거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기는 아버지와 딸의 문제인 만큼이나,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연장된 어머니와 딸의 문제이기에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해결한 이후, 새로운 성적 자극이 등장하기까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섹슈얼리티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학에서 ‘잠재기’라고 부르는데, 초도로우에 따르면 이 잠재기에 아이들은 가족 안의 삶과 더불어 학교나 또래집단 등 가족적 삶의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역할을 훈련한다. 잠재기 이후, 보다 더 비가족적인 관계의 세계에 진입하는 청소년기의 여자아이는 또 다시 위기와 갈등에 직면한다. 남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잘 해결했기 때문에 가족 외부의 세계에 쉽게 진입한다. 반면에 이 시기 여자아이는 해소하지 못한 전오이디푸스기와 오이디푸스기의 갈등을 지속한다. 게다가 청소년기는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고, 남성과 교제를 하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의 모든 사회학적, 심리학적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어머니는 딸의 발달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아이는 어머니-여성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양가감정을 갖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거부의 양가성에서 동요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어머니 대신에 사랑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단짝을 찾거나, 남성을 향한 성애를 선택하면서 이성애적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게 된다.

 

  • 서로를 재/구성하는 가족관계와 경제관계

 

“우리는 노동의 성별분업을 성 불평등과 분리할 수 없다. 노동의 성별분업과 여성의 아이 돌보기 책임은 남성 지배와 연결되고 남성지배를 낳는다.”

 

초도로우는 딸이 ‘어머니’가 되는 가족 내의 구조가 가족 외에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책 전반에서 강조했듯, 어머니가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가정 밖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가정에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전오이디푸스기, 오이디푸스기, 청소년기를 모두 거쳐 성인기에 진입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여성을 여성으로 사회화시키는 노동시장의 가족 외 제도에 속하게 된다. 노동시장이라는 사회는 여성을 일차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 규정하고, 여성의 일을 “정서적 일”로 정의하는 반면, 남성은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직업적 용어로 규정한다. 이는 단지 서로 다른 정의를 할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성적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에 반해 여성적 활동은 열등하고 남성의 활동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노동 세계와 가족 내적 삶은 서로를 재/구성하면서 남성지배적 가족과 사회를 재/생산한다.

 

  • 대안을 상상하기 – ‘어머니노릇’에서 ‘부모돌봄’으로, 그리고 사회적 돌봄으로

 

가족 내에서 돌보는 어머니와 가족 외에서 역할을 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돌보는 성향을 닮아 아이와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가 되는 딸과 아버지를 닮아 독립적이고 사회적인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 낸시 초도로우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같은 장면을 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았음에도 이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이끌어낸 통찰은 매우 다르다. 초도로우는 <모성의 재생산>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 노력의 하나이다. 그것은 어머니노릇을 사회적 조직과 젠더 재생산의 중심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어머니노릇의 재생산을 분석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자신의 글이 어머니의 배타적인 자녀 양육에서 출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각종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여성주의적 개입임을 강조한다. “왜 여성이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인가? 왜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는 여성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어머니라는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그 다음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부모의 젠더와 성역할,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결정론적, 목적론적 심리발달과정을 기술하는 정신분석적 체계들을, 여성주의적 관심과 더불어 아들과 딸을 가진 어머니를 상담하여 얻어낸 임상 사례들을 통해 반증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자연화하고 낭만화한 어머니의 역할과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 구성된 것으로 역사화하고, 젠더 정체성 획득과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는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초도로우의 논의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그가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어린시기에 결정적임을 전제하기에 문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초도로우는 후에 여성을 관계적인 사람으로, 남성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본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신분석학이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5세 이전에 핵심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지만, 삶의 경험으로부터 변화될 수 있고 분석적 과정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초도로우는 자신의 개입점을 명확히 한다.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어린아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헌신한다면,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아이의 젠더와 무관하게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답습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도로우는 가족 외에도 아이가 사회화되는 여러 핵심적인 과정들을 다루면서, 그 과정들이 어린 시절 형성된 정신구조가 공고해지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정상’과 ‘비정상’적 젠더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나누고, 학습시키는 제도들 또한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에 개입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불평등한 젠더이데올로기를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초도로우 자신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적 가족 모델에 한정해서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이성애적 핵가족 모델 안에서 여성의 배타적인 ‘어머니노릇’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가족모델과 다른 형태의 양육이 가져다 줄 다른 형태의 젠더관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 낸시 초도로우의 <모성의 재생산>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 연재될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바랍니다. 🙂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 아래 글은 [건대신문]에 12월 4일자로 게재된 칼럼입니다. <이 시대와 철학>에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건대신문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모교인 건국대에서 수업을 할 때면, 늘 마음 한편이 무겁다. 10년 내내 강사료가 49,700원이여도, 또 4대 보험과 6학점 강의를 보장해준다며 강사료를 6개월로 쪼개주는 기형적인 형태로 초빙교수를 뽑을 때도 아무 말 못했던 나. 심지어 성적입력이 늦을 경우 강사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1년 간 강의금지라는 조항을 신설할 때도 가만있었고, 그 대가가 부메랑처럼 마침 독감에 걸려 입력이 하루 늦은 내게 되돌아왔을 때도 머릿속으로만 저항하며 안으로 골병들어가던 내 모습이 죄책감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문제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몫이 없던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안정화된 제도적 질서를 비집고 비로소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늘 정치철학은 안정화된 정치질서를 유지하려고 실제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나름의 몫을 누리고 있다고 여기도록 잘못된 셈법을 고안해왔지만 말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 현실에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대학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만 보더라도 이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대학의 주인은 누구일까? 과연 대학의 구성원들은 모두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지니고 있을까? 정말 그럴까?

내년 시행될 강사법에 대비해 이미 대학들은 강좌수를 줄이거나 대형 강의로 통폐합하고, 졸업학점을 줄이면서 시간강사를 대량 해고하는 전략에 돌입한 것 같다. 강좌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면서도 전체 강좌비용의 1~3% 정도만 지불되는 강사의 인건비. 그런데도 교원지위보장과 방학 중 강사료 지급, 4대 보험 등을 핵심으로 하는 법 시행을 앞두고 몇몇 대학은 앞으로 부담할 비용이 엄청나다는 근거 없는 괴담을 퍼트릴 뿐, 정작 학생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고맙게도 랑시에르는 잊어서는 안 될 교훈 하나를 전해준다. 노예들의 반란 이야기. 스키타이족은 노예들의 두 눈을 멀게 해 길들였다. 하지만 주인인 전사들 대부분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난 사이, 노예의 자식들이 하나 둘 늘어나 멀쩡한 두 눈을 갖게 된 노예 후손들은 자신들도 전사로서 주인과 맞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침내 주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노예들은 성 주변에 해자를 파고 전사로서 주인과 대적했다. 그런데 웬걸 주인인 전사들이 창을 버리고 예전처럼 채찍을 들고 달려들자 모두 식겁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대학의 구성원인 우리들도 어쩌면 이런 노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시간강사인 우리는 더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없었다는 걸 자각하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위 교훈처럼 단지 싸울 수 있다는 것만 깨닫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미 대학의 구성원이자 ‘정치’를 실현하고 구성할 수 있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그런 권리를 실현할 정치적 기반과 통로도 마련해 나가야 한다.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⑰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문답을 통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는 기술 일반의 특성에 기초해 볼 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행하는 자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렇게 문답의 귀결이 트라쉬마코스가 처음에 제기한 주장과 정반대의 것으로 뒤바뀌자 트라쉬마코스는 마침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343b]

* 트라쉬마코스는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은 양도 주인도 아닌 자기의 이익 때문인 것처럼 통치자도 피지배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자신이 처음에 동의한 엄밀론을 스스로 저버리고 태도를 바꾸어 다시 현실론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343c]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것το δικαίον과 정의δικαιοσύνη, 부정의한 것το ἀδικαίον과 부정의ἀδικία에 대해 아주 노골적으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 ‘실제로 정의란 남에게 좋은 것’τὸ δίκαιον 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 τῷ ὄντι 즉, 2)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3) 복종하고 섬기는 자에게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4)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조종(지배)하고ἄρχει 5) 피지배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6)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εὐδαίμονα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

*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흥미롭게도 앞서와 달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 대신에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타자의 이익)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분명 앞에서 그가 한 말들과 다른 방식의 표현이어서 순간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그가 서있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보면 ‘남에게 좋은 것’이란 ‘피지배자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바로 이어서 그 ‘남’이 가리키는 대상이 ‘강자’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다른 방식으로 연이어 또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트라쉬마코스는 별다른 전제도 없이 태연스럽게 앞에서 말한 정의와 ‘반대적인 것으로서 부정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에서 한 말과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는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언급했다가 4), 5), 6)에서는 ‘부정의가 정의를 조종하고 강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부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상호 모순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라쉬마코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자인 까닭에 그가 말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경우의 정의와 부정의인지가 종종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부분 즉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지배)하고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저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을 분석하여 어디서 어떤 내용이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고 어떤 이유 때문에 그 내용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지를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 부분을 ‘반대의 것’이 가리키는 경우의 수에 따라 분석한 표가 이 글 말미에 첨부된 <별첨 자료>이다.

* 이 <별첨 자료>에 의하면 결국 트라쉬마코스는 1), 2), 3)에서 정의를 언급할 때는 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강자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기준으로 정의를 진술하다가 4), 5), 6)에서 부정의를 언급할 때는 별안간 기준을 바꾸어 이른바 공평과 정의가 제대로 확립된 실제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진술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이곳에서도 정의와 부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정의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을 아무런 사전 전제 없이 편리한 대로 뒤 바꾸어 가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 1), 2), 3)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다시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정의는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공평과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말들은 하지만 현실의 정의를 기준으로 약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의는 실제로 남인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을 섬기는 약자인 자기한테는 손해이다.” 그리고 또 그와 달리 관점을 바꾸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언급한 4) 5) 6)에서의 진술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 반면에 진짜 정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와 정반대로 부정의야말로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하고 약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의 주장이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고 그의 속마음이 흔들리거나 일관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논리적 일관성은 없을지언정 어떤 경우이든 강자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초지일관하다. 그 강자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앞에서 정의를 말할 때 적용한 기준과 뒤바꾼 것이고, 덧붙여 앞에서 말한 남과 자기가 가리키는 대상 또한 뒤바꿔 놓은 것이다.

* 아무려나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정의에 대한 정의(定義)라기 보다는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정의가 현실 속에서 실제로 드러내는 결과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드러내는 진술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따라 그가 언급한 1)‘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란 말은 그 스스로 확인해주고 있듯이 ‘강자’임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결국 2), 3)은 그것에 근거하여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트라쉬마코스가 바라 본 현실에서의 정의의 실상이다. 그리고 별표에서 드러나듯이 4)에서 말하는 부정의는 앞에서 말했듯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별표 기준 B) 정의와 부정의를 언급할 때의 부정의이다. 다만 트라쉬마코스에게 그 부정의는 현실에서 정의로 위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껍데기 정의’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름만 정의이지 실제로는 부정의이다’라고 말할 때 그런 정의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4)를 풀어 읽으면 ‘현실에서의 껍데기 정의, 실제로는 진짜 부정의는 참으로 순진하고 진짜 정의로운 사람을 지배하고’가 된다. 5)는 4)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고 6)은 5)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343c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주목을 끌어왔다. 특히 니콜슨(Nicholson. P. P, ‘Unravelling Thrasymachus Arguments in the Republic’, Phronesis 19, 1974)이 그 주장을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의 일관성을 해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주목한 이래 그것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졌다.(Keferd. G. B. ‘The Doctrine of Thrasymachus in Plato’s Republic’ in Sophistik in Wege der Forschung clxxx vii , Darmstadt, 1976) 이 주장의 요체는 즉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규정과 관련해서는 ‘정의는 타자의 이익’ 즉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의 규정을 일관성있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통치자들이 그러한 정의의 규정에 따라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강자와 약자들 모두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강자나 약자 구분 없이 모두 실제로는 자기 이익 즉 부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트라쉬마코스도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정의의 규정 위에 서 있되 다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그 정의가 결과한 현실상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의는 남에게 이익이자 자기에게 손해, 부정의는 자기에게 이익 남에게는 손해’라는 윤리학적 의미에서의 부정의 찬양론인 동시에 약자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이중성과 정의의 현실상에 대한 냉소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트라쉬마코스의 말에서 자기와 남을 권력의 우열관계로 특정하지 않을 때나 가능한 주장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여기서 남과 자기를 분명하게 강자와 약자로 특정하고 있다. 강자와 약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권력관계에서 강자의 부정의와 약자의 부정의를 동시에 찬양하는 이론은 그 자체로 자기 모순적인 것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한 규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전혀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예 원래부터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정의의 규정 또는 정의(定義)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토대가 되는 권력관계를 괄호에 넣고 순전히 본성론적 입장에서 보면, 그의 주장 역시 철저히 인간의 이기심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넘어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최대로 구현하는 권력지상주의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강자 자신은 아무리 부정의를 찬양하고 지지해도 약자들에게까지 부정의를 용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의 강자 즉 통치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부정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이른바 불법이 판치는 무정부상태를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통치자가 아니다. 가장 부정의한 강자는 법적 정의를 내세워 통치 대상을 기만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철저히 약자를 착취하고 자신은 재산뿐만이 아니라 평판과 명예까지 독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인 것이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 자신의 논리적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표이기도 하지만 그 비일관성이 누가 보더라도 쉽게 눈에 띨 정도로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원천적으로 막무가내 강자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정의를 정확하게 규정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능멸하기 위한 도발일 수도 있다. 어쩌면 플라톤은 이 부분을 통해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말과 논리로 정의를 규정하고 부정의를 논박하는 일 자체는 트라쉬마코스 같이 정의의 정의(定義)와는 무관하게 강자의 이익만을 어떻게든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소용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 대한 논의의 관심사는 장차 밝혀지겠지만 그의 정의관의 논리적 일관성 여부 보다는 정의의 정의(定義) 자체를 무시하고 능멸하는 트라쉬마코스의 태도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모아져야 한다. 그의 주장의 비논리성도 그런 차원에서 비판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트라쉬마코스는 논리와 무관하게 정의이건 부정의이건 그 어떤 이름을 가지든지 기본적으로 오직 강자의 이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권력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굳이 그의 일관성을 찾는다면 ‘강자의 이익’을 향한 이기적 탐욕과 권력 의지의 일관성이다. 그에게 정의의 정의(定義)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의가 법으로 표현되는 한, 트라쉬마코스의 강자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을 만들어 언제라도 법적 정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기만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의를 내세우는 이유는 지속적인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통치 권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평판에 대한 욕망까지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정의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는가에 있는가에 있지 않고 다만 제멋대로 법의 형식을 빌어 어떤 것도 정의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권력뿐인 것이다. 어떤 현실이 펼쳐지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비록 그렇게 강자의 이익을 주장하더라도 그 자신이 최고의 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 평생을 늘 강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누리는 최대의 이익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물론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앞으로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폭로되고 비판된다. 당대 젊은이들을 소피스트들에게서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더욱 철저하게 폭로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궁극적으로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주장의 외적인 논리적 비일관성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그의 생각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비논리적 내적 아집과 권력지상주의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을 어떻게 깨부수고 제압하느냐에 있다.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독단과 아집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논파를 해도 그것만으로 결코 파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것에 필적하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힘을 갖는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고 그 정의로운 나라를 지탱할 철학과 그에 합당한 권력자를 키워 부정의한 권력자와 그 세력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국가> 전체를 구상하고 설계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부여한 <국가> 제1권의 의미 또한 그러한 난관들에 대한 치열한 자기인식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에 있을 것이다.

 

[343d-e]

* 이어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자는 부정의한 자보다 아래와 같이 ‘어떤 경우에나 덜 갖는다.’πανταχοῦ ἔλαττον ἔχει고 말한다. 1) 상호간의 계약 관계에서ἐν τοῖς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υμβολαίοις, 계약을 해지할 때ἐν τῇ διαλύσει τῆς κοινωνίας 2) 나라와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ἐν τοῖς πρὸς τὴν πόλιν 세금εἰσφορά을 낼 때 3) 나라에서 받을 것이 있을 때 ὅταν τε λήψεις 4) 저 마다 어떤 관직을 맡고 있을 때ὅταν ἀρχήν τινα ἄρχῃ ἑκάτερος 위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운 자는 결코 이익을 보지 못하고 손해 보기 일쑤이다.

——————————

*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고대 아테네에서 계약과 세금 부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계약συμβόλαιον 형태와 방식들은 놀랄 정도로 오늘날과 거의 똑같다. 토지와 건물의 매매ōnē 계약, 신전의 건축과 도로 및 가옥의 건설 및 보수를 위한 건축계약, 건물과 토지의 임대차 계약, 근로 계약, 은행을 통한 금전 위탁parakatabēkē 및 대출 계약은 물론 개인 간 채무 계약도 오늘날과 똑같이 계약문서syngraphē로 행해지고 그와 관련한 세부 조건들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매 계약에 노예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트라쉬마코스는 계약 관계에서 계약을 해지할 때 정의로운 자가 ‘덜 갖는’ἔλαττον ἔχει 경우가 생기고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데 이 때 그가 말하는 계약 해지의 경우는 정상적인 계약만료에 따른 해지가 아니라 계약 불이행에 따른 중도 계약해지 즉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 역어의 원어인 διαλύω는 계약을 깬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계약을 일방적으로 깰 경우 정의로운 자가 손해를 입는 경우는 고대라고 해서 오늘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매매 계약의 경우에 매매가의 100분의 1을 공지세로 내야 했는데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정의한 사람일수록 매매가를 낮춰 잡았을 것이고 토지 건물의 임대차 계약의 경우에도 시가의 12% 정도를 연세로 내게 되어 있지만 부정의한 자일수록 연체를 미루거나 떼먹고 도주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아테네가 상업화되고 국제화된 이후 아테네에는 이방인xenoi과 거류외인metoikoi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들은 부동산을 소유할 수가 없었으므로 건물 임대차 계약은 계약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고 그 만큼 부정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특히 채무 계약은 이자율이 평균 연12% 정도에서부터 높게는 20-30%에 이르는 고리채도 많았다고 하니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일수록 ‘덜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8% 정도의 이자율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푼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대 이자 수익에 대한 욕망이 낳은 폐해가 어느 정도였을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건의 교환 수단에 불과한 화폐로 돈을 버는 것 자체를 부정하여 이자 수수 행위를 반대하고 있다.(플라톤 <법률> 742c,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8, 2-8)

* 한편 세금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나라가 시민에게 최대한 부담을 덜 주는 것이 오래된 원칙이었던 만큼 기본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는 직접세 즉 재산세eisphora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고 전쟁 시기나 비상시에 한 해 민회의 승인을 받은 연후에야 그것도 최상류 부유층을 대상으로 부과되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재정이 기본적으로 신전 공물과 부유층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5,6세기 이전의 아테네는 귀족들의 귀족들을 위한 귀족들에 의한 나라였고 그 때문에 마치 가장이 식솔을 돌보듯 전쟁 장비를 비롯해 참전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이 경비를 대는 일은 당연시 되었고 그 만큼 권력도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재정을 부유층들이 책임지는 이러한 전통은 5세기 들어와서도 이어져 아테네가 전성기를 이루는 5세기 중반까지는 부자들(거류외인들 가운데 부를 이룬 사람들 포함)의 공적 기부제leitougia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재산세 납부가 요구될 때에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아테네에 민주정이 급진화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발발함에 따라 재정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자 속국들에 대한 조공 요구는 물론 부유층에 대한 기부 압박 또한 증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점차 기부 회피와 조세 저항의 경향 또한 늘어나 시칠리아 원정 패배 이후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급기야 재산세 부과 대상도 시민 대다수에게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언급한 세금은 이러한 정황에 따라 시민 대다수에게 부과된 재산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 재산세는 재산액에 비례하여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정직한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테네가 제국의 위세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속국들의 조공은 물론 급격한 교역량의 증가에 따른 관세와 시장세(telē) 등 간접세의 수입으로 재정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4세기에 들어오면 속국들의 조공도 끊어지고 관세 수입도 줄어든 데에다가 부유층마저 무고자들의 협박에 시달려 기부는 물론 조세마저 노골적으로 기피하게 되자 아테네는 각자도생을 위한 혼란과 분열을 겪으면서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언급하고 있는 위의 4가지 경우는 기원전 5세기말에서 4세기에 걸쳐 고대 아테네에서 일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놀랄 정도로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일들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순서 그대로 오늘날에도 1) 갑을 간에 불공정 계약과 허위계약이 판을 치고 있고 2) 세금 또한 소시민, 월급쟁이들은 꼬박꼬박 정직하게 납세하지만 부유층, 권력층은 법망을 피해 탈세하기 일쑤이며. 3) 납품단가조작, 입찰담합, 대형국책사업 부정수주 등 소시민은 엄두도 못 낼 일들을 부유층, 권력층은 시도 때도 없이 저질러가며 나랏돈을 축내기 일쑤이고 4) 하위직 공무원은 박봉에도 묵묵히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지만 고위직은 뇌물수수, 측근비리, 낙하산 채용, 정경유착에다 퇴직 후 전관예우, 고액 연금까지 온갖 특권과 혜택을 누리기 일쑤이다.

* 계약을 의미하는 라틴어 pactum은 평화를 의미하는 pax에 어원을 두고 있다. 즉, 특정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상호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행위이되 계약 당사자 서로가 강제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고도 흔쾌한 만족과 기대감을 동반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는 근대 국가의 기초로서 홉스(T. Hobbes)적 사회계약론에서부터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노동의 상품화와 유연화에 기초한 임노동계약, 하청계약 등 일상에서의 사회적인 계약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불공정 계약이 고착화되어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히려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위력적일 정도로 호소력을 갖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그것이 위력적인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도 나타나있듯이 그러한 부정의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 또한 그와 같이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배우고 철학을 공부하고 권하는 이유 또한 트라쉬마코스 부류들이 저지르는 악덕과 그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들어대는 담론들을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의 담론을 생산하고 나누고 공유하고 연대하여 그 부정의한 세력들과 맞서 싸워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철학은 고고하게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후예임을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344a]

* 트라쉬마코스는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부정의한 자야 말로 남들을 ‘크게 능가할 수 있는 사람’ τὸν μεγάλα δυνάμενον πλεονεκτεῖν.이라고 주장한다. 사적인 관계에서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것을 판정해내려면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미 충분하지만 제일 쉽게 판정하는 길은 ‘가장 완벽한 상태의 부정의’ 즉 공적 차원에서 참주들이 행하는 참주정τυραννίς의 경우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정의의 실상을 가장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고ῥᾷστα μαθήσῃ 부정의한 자를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ν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정의로운 자를 가장 비참한ἀθλιωτάτος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참주정은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λάθρᾳ καὶ βίᾳ 빼앗기를 조금 씩 조금 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συλλήβδην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다’는 의미로 사용한 πλεονεκτεῖν는 아무튼 비교 대상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제약 없이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콕 집어 그의 주장의 부당성을 논박하는 근거로 삼는다. 즉 능가한다는 것은 부정의한 자나 하는 일이지, 정의로운 자가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어떤 행위나 기능에는 그 자체로 이미 능가할 수 없는 최상의 한도peras, 객관적 척도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모르고 그 따위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적도(適度), 몫, 분수를 지킴, 자기 직분의 충실함을 함축하면서 그의 정의관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무도함과 부정의는 그러한 정해진 한도를 ‘능가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해내는 것’이란 표현은 그야말로 악의 극치로서 참주정의 피폐함과 죄악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344b]

*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단번에 몰래 깡그리 해내지 못할 때 이를 테면 신전 절도범 ἱερόσυλοι, 납치범ἀνδραποδισταὶ, 가택침입강도τοιχωρύχοι, 사기꾼ἀποστερηταὶ, 도둑κλέπται 같은 사람들은 처벌을 받고 최대의 비난을 받지만, 그러나 부정의한 자들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자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은 부끄러운αἰσχρός 호칭대신에 행복한εὐδαίμων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μακάριος 사람이라 불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제나라 시민들한테서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전면적인 불의를τὴν ὅλην ἀδικίαν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모든 사람한테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 참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실감나는 묘사는 그가 시켈리아에 가서 디오뉘시오스 1세를 보고 경험한 것에 기초한 것이리라. 실제로 플라톤이 그린 참주의 모델이 바로 디오뉘시오스 1세라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 당대의 실상은 오늘날의 정황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다. 어떤 사람이 단돈 몇 푼을 훔쳤다고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재판정에 서는 모습과 수천억을 횡령한 자들이 낯 두껍게도 번질거리는 얼굴을 곧추 세우고 뻔뻔하게 죄가 없다고 으스대며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우리들은 오늘날에도 일상의 다반사로 접하고 있다. 그리고 좀도둑은 온갖 손가락질을 해가며 비난하지만 정치 권력자나 재벌 오너가 온갖 추행과 횡령을 저질러도 비난은커녕 선망의 눈으로 동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강대국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횡포를 저질러도 마치 정의를 구현한 것인 양 떠벌이고 또 그들의 속국을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의 짓거리에 환호를 보내는 반면, 그들의 억압에 저항하다 앙갚음을 받거나 그들끼리의 다툼 때문에 희생된 나라들과 사람들이 그들의 폭력 앞에 온갖 불이익을 당하거나 파리 목숨 취급을 받고 있어도 눈길 하나 보내지 않는다.

*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판정 결과는 사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앞에서 예시한 정도의 ‘남을 능가하는 자’만으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공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참주정 치하의 참주의 경우이다. 참주야말로 정의라는 미명하에 가장 부정의한 일을 마음대로 저질러 최대의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정의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결코 지속적인 이득을 담보할 수 없다. 참주가 가장 이익을 많이 취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이기심을 최대로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부정의 찬양론을 넘어 권력 지상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권력자들의 영광스런 순간과 파멸의 순간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플라톤이 그리고 있듯이 마치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에서 바늘 앞에 놓인 풍선과도 같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폭군들과 20세기의 히틀러와 무솔리니, 스탈린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사의 일그러진 권력자들의 등장과 몰락 또한 그 단면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때’라는 말은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했을 경우 재산의 압류는 물론 신분까지 박탈되어 노예가 되는 경우를 나타낸 것이다. 훨씬 이전인 솔론의 시대에는 채무 때문에 인신을 구속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테네 말기는 이전 시대보다 더 각박하고 비열해진 것이다.

 

[344c]

* 부정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막상 그걸 비난하는 것은 자기가 부정의한 짓을 행하는 것τὸ ποιεῖν τὰ ἄδικα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피해를 당하는 것τὸ πάσχειν 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정의 한 짓이 대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정의보다 더 강하고ἰσχυρότερον 자유로우며ἐλευθεριώτερον 전횡적인δεσποτικώτερον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말한 대로ὅπερ ἐξ ἀρχῆς ἔλεγον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

——————————

*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약자들의 경우 ‘법률을 위반해서 얻는 이익보다 법률을 위반해서 당하는 손해가 더 크기 때문에 법을 지키려 한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장차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을 대하는 약자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말을 통해 부정의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예고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사람들이 부정의를 비난하는 이유를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정의를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고 있다. 사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들키면 처벌의 위험이 있어 두렵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 선택하기에 달렸다. 이에 반해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없으면 꼼짝없이 ‘당하는 불행’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와 정반대의 입장이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부정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렵고 더 나쁜 일이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삼가해야할 일이다. 왜냐하면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영혼에 손상을 가하고 그것을 부패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물론 피해를 입는 것이지만 내가 잘못하여 내 영혼이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건강함’을 중시하는 사람은 ‘부정의를 저질러’ 영혼을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부정의에 당하는 것’이 덜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갖는 윤리학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쟁점이 되지만 이곳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그 대결이 예고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눈에 트라쉬마코스는 영혼이 썩어 문드러져 온갖 악취를 뿜어대며 스스로가 다 파괴되었음에도 ‘부정의를 당하지 않는’ 강자라는 사실에 도취되어 마치 가장 행복한 사람인 양 희희낙락거리는 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눈에는 누가 인생의 승자인지 실로 명약관화한 것이다.

* 그가 결론적으로 재확인하고 있는 ‘처음 말한 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라는 말에서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 이득이다’라는 표현은 그가 343c에서 말한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 표현한 같은 의미의 말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약자의 부정의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만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강자와 약자 모두의 부정의를 촉구하는 입장 정도라면 강자의 이익만을 독점적으로 주장하는 자신의 권력지상주의적 입장과 부딪친다. 그러므로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말하는 ‘자신’은 앞에서 ‘남’이 ‘강자’에 한정된 것처럼 ‘강자’에 한정하여 사용된 말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너희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고 다른 한편 (강자의 실제 행태나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부정의는 (강자) 자신을 위한 이득인 것이다.’

————————–

<별첨 자료>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 즉 정의로운 자를 조정하고 강자를 이롭게 함의미 분석

 

기준 A : 현실 정의, 현실 부정의=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현실의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기준 B : 진짜 정의, 진짜 부정의=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구분

기준 A I II 후속 내용

0

343c 원안

정 의

남(강자)

이익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으로서

강자를 이롭게 함

자기(약자)

손해

 

  1.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일관성 있게 이해할 경우(기준 A를 유지)

구분

‘반대의 것’ 내용 기준 A I II 후속내용과 일치 여부
1 원안 II의 반대 부정의 남(강자) 손해 불일치
자기(약자) 이익
2 원안 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이익 불일치
자기(강자) 손해
3 원안 I,I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손해 일치하나 원안과 모순
자기(강자)

이익

* 1,2 경우 내용 상 동일

* 3의 경우, 취지는 일치하나 정의도 부정의도 다 강자의 이익이자 약자의 손해가 되어 자기모순, 자가당착에 빠짐.

 

  1. 텍스트를 트라쉬마코스의 취지에 맞추어 읽을 경우(기준 B로 전환)

구분

‘반대의 것’ 내용 기준 B I II 후속 내용과 일치여부
4 원안 II의 반대 부정의 남(강자) 손해 불일치
자기(약자) 이익
5 원안 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이익 불일치
자기(강자) 손해
6 원안 I,I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손해 원안과 일치
자기(강자)

이익

* 4,5 경우 내용 상 동일

* 6을 원안 0과 비교하면 기준을 임의로 바꾸고 I, II를 바꾼 것, 그런데 I, II를 바꾼 것은 내용상으로는 후속 내용과 일치하므로 결국 부정의의 기준만을 임의로 바꾼 것.

<결론> 부정의의 기준을 임의로 A에서 B로 바꾼 것 – 진짜 부정의한 통치 권력에 대한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