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자본론 에세이-4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대상화의 비극: 노동, 여성, 그리고 자연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작년 여름에 한 선배랑 대화를 나누던 중, 선배가 난데없이 뱃사람과 듀공의 이야기를 해줬다. 항해를 떠나 오랫동안 여자에 굶주린 뱃사람들은 듀공을 잡아다 강간하고 나서 그 고기를 먹고, 남은 잔해는 도로 바다로 던지곤 했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듀공이 느꼈을 감정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뱃사람들을 비난했고 선배는 “성욕은 있고, 여자는 없는데 그럼 어떡해. 나는 뱃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데?”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선배가 나를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듀공을 좀 닮은 것 같네?” 이 일로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동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불쾌하기보다는 실감이 안 났다. 자기가 내뱉은 말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아픈 말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말들을 하다니. 그때 처음 깨달았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은 절대 듀공의 입장에 설 수 없는 것이구나. 평생 고기를 잡아다 팔고, 먹곤 했던 뱃사람에게는 듀공 역시 그냥 자신이 낚은 수천 마리의 고기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서두에 넣은 이유는 ‘대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자본론 제7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 대상화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가치가 증식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있다. 나는 이중 가장 핵심은 ‘노동의 대상화’라고 판단하였다. 노동이 대상화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노동만이 아닌 자연과 여성의 대상화를 함께 다루고, 그런 대상화를 가능케 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자본론 7장을 시작하며 마르크스는 먼저 대상화되기 이전의 노동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자기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이 구간을 그냥 읽으면, 마치 노동 그 자체가 자연을 착취하는 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동물들을 떠올렸을 때 위와 같은 노동에 대한 설명은 생태계의 모든 생물에게 해당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스스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꽃가루를 채취하는 꿀벌이나, 지렁이를 파먹고 나뭇가지로 둥지를 트는 새도 마찬가지다. 이때 이루어지는 노동에서 자연과 인간의 생존은 직결된다. 인간은 자연의 것을 가져가되 결코 파괴할 수는 없다. 자연이 파괴되면 생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임금노동 이전의 노동이란 자기의 몸과 자연을 대등하게 보살피는 것이었다. 다만,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인간과 동물의 노동 간의 차이점은 동물은 노동을 본능적으로 하지만, 인간은 노동 행위 이전에 일종의 구상을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 목적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 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위의 말을 정리하면, 노동자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노동 방식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으며, 또 그 목적에 맞게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이야기다. 또 노동자는 목적에 맞게 자기 자신을 통제하기도 한다. 목적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탁월한 성질이지만, 그 성질 때문에 대상화가 발생하기 쉽다. 노동의 목적이 ‘자연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난 것’을 가공하여 받는 임금이 목적이 될 때, 자연은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연의 안위는 더 이상 나의 생존과 직결되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을 최대한 착취해서 임금을 많이 받는 것만이 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대상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 대상화를 영어로 한 ‘objectification’의 한국어 뜻풀이는 ‘(사람에 대한) 객관화[대상화], (사람을) 물건 취급함’으로 나와 있다. 대상화는 ‘타자화’, ‘사물화’라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대상화를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어떤 종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물건]에 대상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이 특정 사물의 가치로 등치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상화가 다른 존재에 나의 주관을 객관화하여 씌우는 것을 의미할 때, 대상화된 존재는 본연으로서의 의미와 맥락이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나의 주관을 객관화한 실체로만 유의미하다. 노동의 대상화는 그래서 사실상 살아있는 노동을 죽여서 사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화폐가 등장하고,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오직 임금노동만이 생존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 됨에 따라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연도 대상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이 담당했던 가사노동의 경우는 타인에게 판매될 수 있는 노동이 아니었다. 가사노동은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을 수 있었던 당시 남성의 노동에 자연스럽게 우위가 발생했고, 가사노동은 폄하의 대상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여성은 전적으로 남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유일하게 여성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여성의 성이었다.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는 자본주의적 특성에 따라, 여성의 신체 역시 대상화되었다.

이렇게 노동, 자연, 그리고 여성. 이 세 영역의 대상화는 노동자는 기계라는, 자연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는, 여성은 인격체 없는 남성의 자위기구라는 환상을 우리 사회에 심어놨고, 그 결과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주검과 코로나19, 최근에 겪은 이례적인 장마와 전 세계 곳곳의 이상기후, 그리고 ‘곤란한’ 페미니즘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터지고 사람들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우리 사회가 드디어 반성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보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본질적인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이번에 내놓은 뉴딜 정책의 경우, 여전히 성장주의가 그 핵심에 있고, 디지털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디지털화를 통해 대면 상호작용과 이동을 최소화하고 비교적 친환경적인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이 사태에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다른 에너지를 줄이고 전기사용을 확대하거나 친환경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 환경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상 전기자동차의 보급화는 환경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만 덜어주는 역할을 할 뿐, 오히려 주행거리와 운행 빈도는 더 늘어났다고 한다. 또 우리는 자동차만 친환경으로 바꾸면 되는 줄 아는데, 자동차 산업과 자동차가 차지하는 도시 인프라 자체에서 발생하는 탄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친환경 연료는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온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친환경 에너지 자체도 고민해볼 지점이 많다. 우리나라 태양열 에너지의 경우, 땅이 좁아서 산을 깎아내는 식으로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있다는데, 에너지 확보를 위해 산을 깎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 않는가.

디지털화가 대안이 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대면의 비대면화가 초래할 디스토피아적 인간상 때문이다. 누군가와 대면하여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납작한 청각과 시각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요소들이 개입을 하는 상호작용이다. 우리는 상대와 나를 둘러싼 공기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특정 순간에 흘렀던 음악을 머릿속에 평생 저장해두어 추억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상대가 다리를 떠는지, 팔짱을 끼는지를 봄으로써 불편함을 포착하기도 하고, 눈과 입의 미세한 떨림, 움직임으로 인해 상대의 감정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공감능력을 형성하고, 타인과 유대를 맺어왔다. 하지만 모든 상호작용이 비대면화 되면 우리는 상대와 나 사이에 화면이라는 벽을 놓게 되는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TV 속 광고와 인스타그램에 속아왔듯이, 우리는 화면으로 보이는 것에 우리의 상상만 덧입히게 되지, 실제로 상대를 온전히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N번방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해자들은 화면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피해자들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화면이라는 평평한 창을 통해 접해왔던 수많은 과장되고 허구적인 상(像)들 때문일 것이다. 화면 앞에서 질주하는 그들의 욕망을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누가 앉아있든 화면은 지극히도 개인적이고 평평한 것이기에.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대체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교육 역시 입시경쟁에 의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의 장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일. 더불어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안전한 대면이 가능한 환경은 예컨대 소규모 학급을 운영하고, 더 넓은 교실과 더 많은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효율 논리에 따르면 이런 방안들이 논의될 리 없다. 디지털화, 비대면화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곳곳에서 이토록 빠르게 적용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값싸고 효율적이기 때문이지, 옳고 이성적이어서는 결코 아니다.

 

진정한 최선은, 우리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풍요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성장 중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벗어 던져야 한다. 지금 같은 시대에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성장 자체에 착취가 내포되어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땅이든, 자본은 무언가를 갉아 먹어야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갉아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재선으로 당선된 프랑스 파리시의 시장(市長)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장 ‘안 이달고’는 ‘파리를 위한 선언’으로 도시개혁 계획을 발표했다. 파리를 위한 선언의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핵심적인 것들만 나열해 보겠다.

 

⓵ 파리 전역 운행속도 30km/h 제한

② 주차장 면적 절반 축소, 도시 전체를 정원으로

③ 디지털 광고판 퇴출

④ 에어비앤비 주택 사들여 저렴한 공공임대

⑤ 파리시민의 식량주권 확보 (높은 식량 자급률 달성, 대안적 가축 사육 지원 정책 마련)

 

이달고 시장의 철학은 도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한, 그리고 사람과 호흡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달고 시장은 파리를 자동차가 다니기 힘든 도시로 만들어 자연과 사람이 숨 쉬는 도시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달고 시장의 이러한 정책 취지에 파리 시민이 공감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파리시장 Anne Hidalgo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ne_Hidalgo_(3).JPG © Remi Jouan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반(反)성장의 삶은 개개인이 혼자서는 달성하기 힘들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개개인은 시스템의 이탈자가 되는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달고 시장이 했듯이 시스템과 제도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이어 국가적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변화가 있어야만 다른 삶이 가능하다.

 

결론이다. 앞서 살펴봤듯, 임금노동에서 시작해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이 경제적 파편들로 잘게 잘게 쪼개졌다. 그리하여 노동과 여성과 자연은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로부터 죽임을 당해왔다. 사회는 노동에 대해, 남성은 여성에 대해, 인간은 자연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착취자인 뱃사람의 입장에 서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19와 각종 자연재해를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피해자들의 눈을 응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상황이 급박한 만큼, 당장의 방역과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눈은, 앞으로 우리가 듀공의 입장이 되어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더 멀리, 그리고 본질적으로 봐야 한다. 죽은 듯 보였던 것들은 사실 전부 살아있기에. 내려오자. 대상화의 단상에서 생(生)이 있는 대지로.

2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2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1971~1982)

『인식과 관심』 이후 하버마스는 체계이론(루만), 발달 심리학(피아제, 콜버그), 사회 이론(베버, 뒤르켐, 파슨스, 미드 등)을 끌어와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전환하였다. 『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1971[1973]), 프린스턴대학에서 행한 가우스 강의록(『사회적 상호작용의 화용론에 대하여』라는 책에 수록(1984[2001]), 『의사소통과 사회진화』(1976[1979])에 실린 글들이 이 시기에 속한 결과물이다. 가우스 강의록은 하버마스 사상에 있어서의 의미심장한 변화를 나타내는 저작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구상에 있어 적절한 개념틀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강의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이 “언어적 전회”를 단행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인간 행위와 상호이해가 언어적 구조에 의해 충실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이론의 토대를 다시 만들고자 했던 이러한 예비적 시도는 1976년에 발표된 중추적 논문인 「보편화용론이란 무엇인가?」(CES: 1~94; OPC: 21~103)라는 결실을 거두게 한다. 이 글에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능력에 관한 이론의 토대를 다졌다.

이 시기에 가장 드높은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하버마스는 이 두 권짜리 책의 목적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이성이 인지도구적으로 축소되는 것에 저항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이다. 나는 이 합리성 개념이 회의적 고찰을 너끈히 견딜 수 있도록 전개하였다. 둘째, 생활세계와 체계의 패러다임을 결합하는 2단계 사회 개념이다. 두 패러다임은 단순히 수사적 방식으로 결합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병리 유형들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병리의 유형들을 의사소통적 구조를 갖는 삶의 영역들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자립화된 행위체계들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는 가정 아래 설명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근대의 역설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적 삶의 연관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 1』 20쪽)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도입된 이론적 모델의 핵심에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에 대한 고찰] 그리고 생활세계와 체계 간의 이항대립이 자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사회진화(social evolution)를 사회적 학습(societal learning)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학습은 사회 체계 안에 침전되어 있다고 한다. 사회 체계는 점점 복잡하게 분화되는 가운데 고유한 자체 논리를 획득하면서 개인이나 사회적 행위 집단의 통제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는다. 반면에 사회화와 개인화 과정은 생활세계-훗설에게서 가져온 이 개념을 하버마스는 형식화용론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에서 이루어진다.

 

  1. 탈형이상학적 사유: 합리성, 도덕성 그리고 민주주의(1982~2000)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출판 이후, 하버마스는 합리성 및 근대성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동시에 그것의 개념적 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인다. 그는 탈근대주의, 회의주의, 역사화된 상대주의(historicizing relativism) 그리고 교조적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진리와 정당화(1999 [2003])』에서 그는 진리에 대한 기존 설명을 고치면서 “약한 자연주의”[적 입장](이후 내용을 참고할 것)을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는 모든 종류의 인간 행위에 적용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윤리학과 사회 정치 철학으로 전환하면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개념적 뼈대를 이용해 담론윤리학적 형식의 도덕이론, 토의민주주의론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이론을 전개한다. 이 세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 그는 각 영역들의 담론 및 합리성 형식들과 연관된 규범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러한 영역들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갖춘 주체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구조들의 종류에 대한 분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저작은 『도덕의식과 의사소통행위(1983 [1990])』, 『근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 [1987])』, 『탈형이상학적 사유(1988 [1992])』, 『담론윤리의 해명(1991 [1993]), 『이질성의 포용(1996 [1998]) 그리고 정치이론 및 법이론에 관한 기념비적 저작인 『사실성과 타당성(1992 [1996])』이다.

 

  1. 후기세속주의적(postsecular) 사유와 후기국민국가적(postnational) 사유(2001~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버마스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철학적 인간학으로 다소 회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특히 담론 윤리학에 대한 토론은 동기화의 문제를 자주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합리적으로 행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와 같은 문제 말이다. 하버마스는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며 보편주의적인 칸트적 인식 및 행위 주체관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 년간의 저작에서 그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로 인한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줬다. 이러한 전개는 2001년 독일서적상협회평화상의 수락 연설인 “신앙과 지식”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2001 [2003b])』에 수록된 <인류의 윤리적 자기이해에 관한 논쟁>이라는 긴 논문과 더불어 선보여졌다. 여기서 그는 인간복제와 착상 전에 이루어지는 유전자 검사에 반대하고 있다. 우리 인류는 도덕적 인격이라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그리고 도덕성은 그러한 인격 속에 구현된 것이라는 어떤 윤리적 자기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버마스는 피험자의 동의 없이 생물학적인 조작이 이루어지면 그러한 일은 우리가-동시에 이 피험자가- 자율적 행위자라는 생각을 위협하고 자유로운 행위자로 살아온 우리의 경험을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개략적으로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생명윤리학적 논쟁에 이바지하면서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와 그가 “후기세속주의적”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지칭한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 썼다. 여기서 그는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으로 계몽된 자기이해와 주요 세계종교에 대한 신학적 자기이해-이것은 과거에서 생성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서 작금의 현대에 튀어나온 것이다- 사이의 기이한 변증법”(하버마스 2010: 영문 번역본 16페이지. 번역은 수정)으로 묘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하버마스는 도덕성, 민주주의 그리고 법에 대한 담론 이론적 절차주의뿐만 아니라 탈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전념해 왔는데 이런 그의 입장은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2005 [2008]』라는 책에서 언급한 근대사회에 대한 후기세속주의적 자기 이해로 여겼던 것과 정확히 수렴한다.

후기세속주의적 사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시도하고 종교 문제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담론 윤리학에 내재하고 있었던 쟁점들(위에서 언급했던 동기화의 문제 같은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 정치 상황에 대한 고찰로 인한 것이었다. 독일을 비롯해 여타 유럽 지역에서는 늘어나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문제들로 얼룩지고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후 팽창한 유럽연합은 조화로운 유럽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구적 타원에서 보면, 종교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9. 11 테러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분명한 요인이었다. 1999년 코소보 사태에 대해 하버마스는 나토의 군사 개입과 폭격을 지지한 반면에, 2003년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이는 정당한 근거를 필요로 하였고 하버마스로 하여금 국제법과 그것의 규범적 강제력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지지 및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하버마스는 사회 민주주의가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 확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구적 정치 질서 안에서의 범세계적(cosmopolitan) 민주주의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최근 저작들에서 분명히 철학적 인간학으로 회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규범적 비판이론을 좀 더 명확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4-1.[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이상하(한철연 회원)

 부끄럽게도, 벤야민과 덴마를 읽으며 폐허와 낙원, 행복과 도피에 대해 과거에서 오는 희망을 노래하는 글을 쓰는 와중에도 현실의 나는 또다시 삶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한때는 나의 내면 밑바닥을 박박 긁어모아 살짝 드러낸 자작시로, 한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가 손으로 닿는 것을 좋아해주고 나의 못난 마음을 치유해주는 카페의 고양이 언니에게로. 그리고 난 그 사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바다를 두 번 아니지 서해 을왕리까지 조용히 세 번이나 다녀왔다.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순례와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서 어린시절 마을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겨나서 여름 방학내내 매일 죽는 것만을 생각하다가 자기 치유를 위해 떠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를 그려냈듯이. 그리고 동해의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일출을 보면서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나를 다독이고 수정하고 써보기로 했다… 반복과 폐허와 낙원에 대해서.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

 

 

 태양의 일출은 분명 50억 년째 매일 변함없이 반복되는 자연 현상이지만, 인간의 삐딱해지기 쉽고 비틀어지기 쉬운 이 시각과 관점은 이 반복되는 일출 속에서도 새로운 구도를 매번 포착할 수 있는 무언가, 상수가 아닌 변수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코 간단하거나 쉽지는 않다. 촬영 버튼 한 번만 누르면 같은 대상을 0.01초마다 반복해서 찍어도 매번 아주 조금씩 다른 사진이 나오는 이 현대기술의 총집체 스마트폰 카메라라고 해도, 결국 그 진정한 차이를 가져오는 프레임을 결정하는 것은 떨리는 사람의 손이다. 그래서 벤야민도 사진의 작은 역사 같은 에세이에서 이 새로운 사진 기술에 대한 작지 않은 희망감을 내비쳤으리라.

 

 

출처-직접 찍은 정동진 해변 일출2

 

 

 이제 본론인 덴마의 지로와 벤야민으로 돌아와보자. 여기 하나의 밑바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도 사람이 산다. 마치 태양이 뜨고 지듯이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feat.세익스피어)의 일상이 반복되지만, 아무도 안전한 오늘이라던가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을 결코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제8우주 행성 모압의 한 슬럼가. 여기에 사람이 있다. 여기에도 사회가, 공동체가 있다. 이 밑바닥 슬럼가 여기에도 사람’들’이 산다. 고대 시절부터 존재 자체로 경멸받기도 하고 공포 또는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한, 벤야민의 사상을 이어받은 또 한명의 철학자 아감벤의 말을 빌리자면 호모 사케르Homo sacer, 저주받고 신성한 뒤틀린 모순된 존재들이 사는 빈민가. 오늘 누군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요한 의식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사회에서 존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존재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덴마 웹툰 전체의 주인공 덴마는 오늘도 실버퀵의 택배를 신속 안전 배송하기 위해 치안이 불안하다고 여겨지는 행성 모압의 슬럼가로 꼬마의 몸으로 홀로 들어서다가 자기도 슬럼가 출신이라며 이상한 편견 가지지 말라고 하다가 택배를 강탈당한다. 그리고 이 밑바닥 슬럼가 안에서도 최악의 쓰레기 취급을 받는 한 사람. 덴마의 제8우주 세계관에서 물리적 오류로 인해 공간 도약과 사물의 기억 읽기라는 희귀한 초능력을 가진 퀑. 그러나 그저 마약 중독자 약쟁이로 하루하루 연명할 뿐인, 쓰레기 퀑 지로가 슬럼가의 가장 밑바닥에서 마약을 빨면서 숨쉬고 있다. 이 지로에 대해서 수많은 관점의 카메라를 현미경처럼 들이댈 수 있겠지만, 일단은 현상학에서 말하는 에포케Epoke 판단중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저 이성의 판단이나 선입견이 아닌, 지로의 삶을 찬찬히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3&weekday=tue

 

 지로는 아무 능력도 재주도 없는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든 부러워할 만한 탐나는 초능력을 두 개나 가진 퀑이지만, 하루라도 마약을 하지 않으면 삶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기에 그저 그 능력은 도둑질에 이용될 뿐이다. 이전 식스틴 에피소드에서 나온 지로와 같은 신체 공간도약 능력을 가졌지만 그 권투 챔피언이자 경호대 대장으로 살고 있는 막스와 너무나도 대조되는 삶.  그리고 이렇게 도둑질로 기껏 생긴 돈으로는 마약에 전재산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자기 동생마저도 약물 중독에 빠뜨린, 가족에게마저도 경멸받아 마땅한 존재. 지로는 이 세상에 어떠한 특별한 희망도 기대도 욕망도 없다. 그저 오늘 하루만 살아갈 뿐이다. 오늘 하루 어떻게 약을 빨고서 그냥 누워있을까 하는 욕망만이. 

 

 물론 이것은 단순히 지로같은 마약쟁이에게만 해당되는 욕망일리는 없지 않던가? 20세기말 IMF위기 이후 모두 부자되세요를 외치던 이 한국 사회에서, 다들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없이 수익을 받는 건물주가 되기를 대놓고 욕망하는 21세기 현대 한국인들은, 사실상 장래희망이 이렇게 아무 노력도 노동도 없이 그저 편하게 쾌락만을 탐닉하는 마약쟁이를 자신도 잘 모르는, 숨겨진 욕망을 건물주라는 합법화되고 사회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은 한때 로또의 꿈이었다가, 주식대박의 꿈이었다가, 비트코인의 꿈이었다가 조물주 아래 건물주라는 다른 형태로 표현될 뿐,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노동없는 이윤을 원한다는 본질은 수백년쨰 어쩌면 수천년째 동일하지 않은가.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7&weekday=tue

 

 지로의 이런 쓰레기같은 행태를 보고 어떤 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경멸의 눈빛과 언행을 마다않을 것이고, 어떤 이는 섬뜩해하며 그저 멀리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타인의 불행을 감상하리라. 물론 이것 외에도 이런 마약에 찌든 인간을 동정하거나 그저 웃음거리로 삼고 내가 힘들지만 그래도 저정도 쓰레기같은 삶은 아니지 하며 나의 심리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이 중 어떤 방식이든, 그 누구도 지로처럼 이렇게 자신이 그저 약물중독된 폐인으로 살아가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로도 힘든 슬럼가 생활에서 그저 당장의 위안, 지금의 쾌락을 쫓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약쟁이가 되었을 뿐. 물론 오해하실 필요는 없다. 이는 결코 타인에게 온갖 민폐를 끼치는 약쟁이 지로의 삶 자체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지로 또한 이 슬럼가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라는 관점을 슬쩍 드러내고 싶었을 뿐이니. 이에 대해선 이 나이트 에피소드 연재글의 마지막에서 좀 더 다루게 될 것이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49&weekday=tue

 

 

 지로의 이러한 불행과 가족들과의 갈등을 독일 부르주아 집안의 소년이던 벤야민의 유년시절과 겹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이 베를린의 유년시절 에세이집에서 부모의 손을 잡고 선물사러 나간 크리스마스 날 구걸을 하거나 장사를 하는 거리의 빈민층 아이들을 보며 느낀 거리감과는 좀 다르게, 우리는 그저 이 시대에 지로의 사례같은 타인의 불행을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은근슬쩍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불행 포르노 또는 고통 포르노를 만끽중인 것은 아닐까. 지금 시대에 이런 행태가 가장 적나라한 곳은 유튜브와 인터넷 개인방송들이리라. 가짜사X이 같은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며 이X 대위에 환호하고 찬양하지만 사실은… 다들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한때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것처럼 사실 못난 공혁X, 4번 훈련생, 자기만 아는 자기 고통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벤야민이라면, 그 진흙탕같은 지옥의 시공간 속에서도 메시아적 중지의 시간을, 구원의 계기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이 가고싶고 닮고싶은 방향도 그러하다.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53&weekday=tue

 

 

 범행을 저지르려다가도 약기운이 떨어지면 오로지 마약을 하기 위해 남의 신발도 핥고 불구덩이 속에 자신의 맨살도 집어넣는 쓰레기 약쟁이 지로. 더이상 돈없이 오면 거래를 끊겠다고, 약을 주지 않겠다고 마약 거래상이 엄포를 놓자 지로는 급기야 몽둥이를 들고 막무가내로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마약을 손에 넣는다. 누구 맘대로 약을 끊냐고, 너희는 끊어도 나는 절대 못 끊는다고.

 이를 보면서 양영순의 수많은 충성독자인 덴경대들이 댓글에서 지각연재가 일상인 양영순을 향한 자신의 애증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다른 웹툰들은 다 11시에 칼같이 올라오는데도 그저 덴마가 자신에게 재미있다는 이유로 몇시에 올라오든 심지어 다음 날에 올라와도 그저 오매불망 기다리고 욕하면서도 반드시 양영순을 찾아오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덴마의 팬아트를 만들고 연재 등록을 알려주는 덴경대 어플을 만들어낸 이 덴경대 독자들. 그렇기에 이 연재글의 초반에 말했듯이 완결없는 완결에 대한 그들의 배신감은 더욱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각이 일상인 현실과 마약이라는 비정상이 정상처럼 굴러가는 가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복되는 이 비현실적인 일상을 중지시키는 초월적인 무언가를 우리는 외부로부터 기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안에 이미 그런 초월적 힘이 잠재되어 있을까?

 

 아마도 그 대답은… 후에 지로가 만나는 인생의 은인 중 하나인 퀑 딜러 주완의 말처럼 자신의 밑바닥에 정말 진심으로 물어봐야만 하는 게 아닐까?

 

당신은 정말 진심으로, 지금의 이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합니까?

 

계속…

출처-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565&weekday=tue

스물한 번째 시간, 나를 돌아보다 [시가 필요한 시간]

스물한 번째 시간, 나를 돌아보다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한차례 긴 장마가 끝나고 막바지 여름의 무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낮의 더위도 더위지만, 잠잠해질 것이라 기대했던 코로나19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상황은… 정말 참기 어렵고, 관련된 뉴스를 들을 때마다 기운이 쭉 빠집니다. 이제 학생들은 개학을 해야 하는데, 이 시점에서 또다시 대유행이라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네요. 어떤 크고 강력한 조치도 필요하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작은 영역에서의 방역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여러분과 함께 나눌 주제는 ‘나를 돌아보다’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어떻게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니까? 잠들기 전 그 날 하루를 되짚어보면서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 오늘 했어야 했는데 미처 하지 못한 어떤 계획들을 점검하면서 내일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또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다른 사람이 저지른 어떤 행동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가끔은 나와 진짜 똑 같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죠. 말투와 행동, 욱 하는 성격, 화를 참지 못하는 마지노선마저 너무 똑같은 누군가를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아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저렇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죠.

그렇다면 시인들은 어떻게 자신을 돌아볼까요? 오늘 소개해드릴 시에서 시인은 부러진 나뭇가지,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을 시는 정호승 시인의 <부러짐에 대하여>입니다.

 

부러짐에 대하여

                                     정호승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은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네, 정호승 시인의 시 ‘부러짐에 대하여’ 들어 봤습니다. 요즘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인지 길을 걷다 보면 바닥에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이 많이 떨어져 있죠. 이 시를 읽으면 바람 따라 이리저리 굴러가는 그 나뭇가지들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시인은 얇고 작고 가벼운 나뭇가지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새 툭 꺾여져서 땅에 떨어지고 마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고, 지저분해서 얼른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버려야만 하는 쓰레기에 불과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나뭇가지들이 새가 둥지를 짓는데 필요한 귀중한 재료가 된다는 사실. 그 사실을 시인은 발견해냅니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은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약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죠. 누가 나를 조금이라도 얕잡아볼 까봐 과한 자존심과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늘 ‘갑’의 위치에 있어야만 하고, 조금만 낮고 작은 자리에 내려오면 마치 ‘을’이 된 양, 굉장히 패배자가 된 것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고 나면, ‘때로는 부러질 필요도 있다’. ‘때로는 조금 꺾일 필요도 있다’ 라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시인은 바닥에 나뒹구는 작고 가늘게 부숴진 나뭇가지들을 보면서, 저렇게 ‘작고 가늘게 부숴져’ ‘바닥에 떨어져야’만 어린 새들이 물고 높이 올라가 집을 지을 수 있지 않겠냐는 사소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굵고 큰 가지는 어린 새들이 물 수도, 가지고 올라갈 수도, 집을 지을 수도 없으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지. 시인은 사람이 누군가의 곁에서 인간의 집을 지을 만한 도움이 되려면 작고 가늘게 그리고 때로는 낮은 자리로 내려올 줄도 알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너무 강하기만 한 상대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열 수가 없죠.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크고 굵은 가지를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할 때가 있고, 작고 가늘게 부러져 나뒹굴며 어린 새들에게 집이 되어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나요? 나는 오늘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알맞게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샘 옥(Sam Ock)의 <Small>이라는 노래 가져왔습니다. 혹여 현재의 내 모습이 이 시의 나뭇가지처럼 너무 밑바닥에 놓여있는 것 같고, 작고 가늘어 보인다고 좌절하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구요, 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의 본래 모습이 그 작은 가지가 아니라, 크고 굵게 뻗은 큰 나무라는 사실이니까요. 샘 옥은 자신의 노래에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가 필요한 시간은 여기까지 입니다. 오늘 하루도 힘내시고, 시와 노래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하루를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파이팅! 건강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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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옥(Sam Ock) – ‘small’ : https://youtu.be/6YRFSmY_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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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노동력(Arbeitskraft)과 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Arbeitskraft)능력(Vermögen) 그리고 에고이스트

 

박종성(한철연 회원)

 

화폐에 대한 갈망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양심의 독촉, 모든 명예심, 모든 관대와 모든 동정(Mitleid)1을 부인한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모든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64)

 

맑스는 1844년부터 국민경제학을 공부했는데,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1857-1858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에서 자본가가 지불해서 얻은 상품은 노동자의 능력(Vermögen)이며, 일종의 잠재성 내지 재능이라고 했다.2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은 자본의 착취의 비밀을 밝히는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증식의 비밀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 (1869)에 이르러서야 노동능력(Arbeitsvermögen) 대신 노동력(Arbeitskraft)이란 말을 사용한다. 능력(vermögen)과 힘(kraft)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mögen은 잠재성을 가진 힘이고 kraft는 잠재성이 없고 특정한 방향으로 행사되는 일정한 양의 힘이다. 니체는 kraft(force)와 구분해서 애용한 힘(Macht)도 mögen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나 라틴어 포텐차(potentia)와 통한다.3

그렇다면 맑스가 가혹하게 비판했던 슈티르너는 이 단어들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그러나 내 능력(Vermögen)은 단순히 내 노동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내 노동능력(Arbeitsvermögen)으로 애써 조달하는 얼마 안 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304]

 

그러나 나는 노동하는 것을 “당신의 능력(Vermögen)을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305]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먼저 능력이 노동능력보다 더 다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능력 중에 일부가 노동능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슈티르너는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화폐가치’를 인간의 ‘능력’(Vermöge)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화폐가치는 노동능력의 가치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능력과 구분하여 “노동력”이란 용어를 사용한다.(293) 그런데 그는 노동력의 사용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노동력을 능력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동력의 사용만이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그에게 ‘능력’이란 무엇인가?

 

“네가 할 수 있는(vermagst)것이 너의 능력이다!”(294),

“내가 소유할 능력이 있는(vermag) 것, 그것이 내 능력이다.”(294)

“우리는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물건들을 사용한다.”(377)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 능력은 네가 할 수 있고 소유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능성과 현실성(Möglichkeit[Possibility] und Wirklichkeit[reality])은 항상 함께 일어난다.”(369)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능성=현실성=능력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능력이 아닌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어야만 그것이 능력이다.

가능태와 현실태의 고전적 구별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데, 한편으로 현실다운 것은 물질에 대립되는 형상을 뜻하며(모양을 갖춘 대리석), 다른 한편 가능태나 잠재태에 대립되는 활동성 자체를 뜻한다(말할 수 있음과 실제 말하고 있음). 이와 달리 가능성과 현실성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슈티르너에게 가능성, 예를 들어 말할 수 있음이 곧 실제 말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mögen은 그리스어 뒤나미스(dynamis)와 통한다고 했는데, 슈티르너는 추상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들이 소유할 ‘지배’(Herrschaft)를 ‘뒤나미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151)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의미에서 dynamis는 현실태와 대립되는 가능태란 어떤 형상으로 결정되지 않은 경향, 단순한 잠재성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뜻하게 되었으면, 능동적 에너지 곧 어떤 현실적 결과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힘을 뜻하게 되었다. 슈티르너가 지배와 뒤나미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지배, 곧 현실태는 잠재태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슈티르너의 능력 개념은 단순한 잠재성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결과를 생산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가능성과 현실성을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슈티르너는 힘(Macht)과 능력(Vermögen)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노동력과 구분한다.

 

[350]당신은 연합(Verein)으로 너의 모든 힘(Macht), 너의 능력(Vermögen)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에서 당신은 당신의 노동력(Arbeitskraft)을 사용한다.

 

정리하면 슈티르너에게 능력은 가능성=현실성=힘=뒤나미스이다. 그리고 연합 속에서는 힘, 능력이 발휘되지만 사회에서 사용되는 것은 노동력이다. 그는 사회보다는 연합체를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게 노동력의 사용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자신의 능력, 그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드는 잠재적 힘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연합이 에고이스트의 삶이다. 맑스도 노동능력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곧 온갖 사물(정신적인 것을 포함해서)을 생산하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다.4 그렇다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노동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유용성을 인정받은 인간의 행위능력, 다시 말해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인간의 생산능력은 “인간의 전반적 노동능력의 희생을 대가로 일면화 된 전문성”5이 된다. 다면적인 잠재능력 중 특정 재능만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달인의 경지’는 다면적인 잠재능력이 아니다. 슈티르너가 노동력과 능력을 구분한 것도 이러한 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전면적인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사회가 아니라 연합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인간이, 더 정확히 말하면 유일자, 에고이스트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노동의 현실은 어떠한가? “거의, 아니면 전혀 자신의(eigene)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Arbeit des Kapitals)과 공순한(untertänig) 노동자의 노동”[125]일 뿐이다. 결국 자본을 위한 노동이지 나를 위한 노동이 아니다. 또한 자본을 위한 노동자의 태도 또한 공순(恭順)한 것인데, 이는 노동자라는 주체를 공손하고 온순한 노동자로 형성하고자 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 가치설에 따르면 노동력은 노동자의 소유이다. 그러나 소유는 “돈과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 즉 자본가6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이런 노동자에게는 교양 있는(gebildet) 정신의 향유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기껏해야 조잡한 오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양(Bildung)이라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131) 여기서도 인간의 다면적 잠재능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금 현실에서의 노동을 살펴보자. “그는 다른 어떤 사람의 손아귀에서만 노동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이 그를 이용한다(착취한다exploitiert).”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126) 노동력을 소유한 사람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노동력의 사용권, 이용권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가의 것이 된다. 바로 자본가의 노동력의 사용, 이용은 착취이다. 맑스의 언어로 말하면, 잉여가치는 착취와 같은 말이다. 잉여가치의 비밀은 노동력이다. 이러한 상황을 전복시키고자 슈티르너는 노동자의 엄청난 힘을 믿고 있다. 그가 보기에 노동자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파업이다.

 

노동자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언젠가 그들이 자신의 힘을 제대로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어떤 것도 그들에 저항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아마 동맹 파업을 하기만 하면 될 것이고,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향유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곳곳에서 발발하는 노동자 소요(Arbeiterunruhen)의 의미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127)

 

에고이즘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Geizige)”은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7 이 구절은 탐욕(Geiz)이라는 점에서 맑스가 자본가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슈티르너가 보이기에 여러 가지 욕망 중에 “하나의 것(Eins), 곧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열정 등등에 다른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사람”8, 곧 “화폐에 대한 갈망(Gelddurst)을 추구했던 탐욕스러운 사람”은 “탐욕이 그를 쓸어간다.”9 이는 자신이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에고이즘은 자율주의인데, 이는 탐욕이 주체가 되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화폐욕망’(Geldgier)은 ‘병적욕망’이고 ‘자기극복’10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앞서 슈티르너가 화폐에 대해 갈망하는 사람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예로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언급하였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물론 탐욕스러운 사람의 행위는 명확히 자기 이해관계, 자기중심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행위는 에고이즘이라 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사람의 행위는 슈티르너가 거부하는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와 행동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 열려 있지 않은,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bornierter Egoismus)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에고이즘과 구분하여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신들린 상태”(Besessenheit)이다.11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하나의 목적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고, 이 하나의 목적은 우리를 고취시키고, 열광시키며, 공상에 빠지게 하므로 그것은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에고이즘은 ‘나’다움이고 자율성이며 자기지배로 볼 수 있다. 자신을 희생하는 에고이즘, 곧 편협 고루한 에고이즘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다움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자기 지배는 외적이고 내적인 영역이다. 에고이스트, 곧 유일자는 스스로가 타자에 종속되는 것에서 벗어나길 요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욕구나 목적에 복종시키는 것을 피하길 원한다. ‘관념’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들어보자. 어떤 관념이 “내 마음 속에서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고(sich etwas in Mir festsetzt) 그것이 용해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나는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 예컨대 어떤 신들린 사람이 될 것이다.”12 마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신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 사람은 “자신을 선이라는 관념의 도구(Werkzeuge der Idee)”로 만든다.13

이러한 관념에 대한 비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에고이스트가 더 이상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생각의 실현을 위한 도구”14로, “관념의 어떤 도구”15로 만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관념과 이념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에고이스트가 실행하는 힘은 “세계의 무리한 요구와 무법행위”를 능가하는 것이고16, “내 본성을 능가하는 ”을 실행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에고이스트는 “내 욕구의 노예”17로 존재하는 것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것이 나다움을 위해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 자본가는 가치증식의 실현을 위한 도구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화폐에 대한 갈망의 도구이다. 그래서 그들은 관념의 포로이고 노예이며 신들린 사람이다.

나는 어떤가? 당신은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1. 경건함을 뜻하는 라틴어 pietas가 어원인데, 타인의 불행한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공감, 전통적으로 철학은 동정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으나, 루소에게 동정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문명화된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원초적 본성이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은 이기주의와 이해관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유대의 가능성을 확립한다, 지배의 욕망을 누를 수 있는 것도 동정이다. 이후 쇼펜하우어가 중요하게 다룬 주제이다.

  2. 칼 맑스 지음, 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그린비, 2007, 266쪽.

  3.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6쪽.

  4. 고병권,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천년의상상, 2019, 167쪽.

  5.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Ⅰ-1」, 길, 2008, 483쪽.

  6. 자본가에 대한 느슨한 정의인데, 맑스의 개념과 비교 가능하다. “화폐소유자는 이 운동[가치의 증식; 옮긴이]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담당자(Träger)로서 자본가가 된다. 그의 몸 또는 그의 주머니가 화폐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그리고 그 유통의 객관적 내용, 곧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 목적(subjektiver Zweck)이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를 단지 추상적 부를 더 많이 벌어들이는 데 두는 한 그는 자본가(Kapitalist)로 기능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화된 자본으로, 곧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결코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별적 이익 또한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이익을 얻기 위한 쉬지 않는 운동만이 자본가의 직접적 목적이다.”(167f., 강조는 M. H.) 하인리히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1) 이용할 수 있는 화폐의 소유자(Eigentümer) 역시 자본가인데, 그는 오직 이용할 수 있는 화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어야만verfügen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7.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금욕(Entsagung)의 복음(Evangelium)을 성실하게 준수한다…. 그러므로 근면(Arbeitsamkeit)과 절약(Sparsamkeit) 그리고 탐욕(Geiz)이 그의 주요한 덕목이 되었고,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정치경제학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147)

  8. 같은 책, 81.

  9. 같은 책, 64.

  10. 같은 책, 379.

  11. Stirner, Max: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82.

  12. 같은 책, 157.

  13. 같은 책, 362.

  14. 같은 책, 385.

  15. 같은 책, 411.

  16. 같은 책, 373.

  17. 같은 책, 374.

손님이 왕? [내가 읽는 『자본론』]

손님이 왕?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엄청난 생산력과 유통망을 가졌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능력은 서울 한복판 대로변에서부터 두메산골 잡화점까지 뻗친다. 어딜 가나 쇼윈도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들은 잠재적 소비자인 행인들의 시선을 끌며, 그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지갑을 열기 위한 노력에 맞서기는 참으로 어렵다. 결국 지름신이 강림하고 어느새 지갑 안에 갇혀있던 신용카드가 계산원의 손에 쥐어진다. 우리는 생산할 때보다 소비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를 통해 이 사회의 모두가 평등하다고 되뇐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는 항상 속삭인다.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너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법이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왕으로 만든다. ‘손님은 왕이다!’ 모두가 소비자인 자본주의 사회는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 세상,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를 얻는다. 배가 고프면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 한 그릇을 사먹고, 몇 주에 한 번 머리카락을 다듬을 때가 되면 미용실을 방문해 머리카락을 손질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과정이 소비이고, 거기서 얻는 만족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다음 봉급일만을 바라보며 일한다. 돈을 쓸 때 우리는 왕이니까.

 

소비는 짜릿하고 기분 좋은 행위이다. 원하는 사용가치를 얻은 우리는 행복하다. 또 원하는 사용가치를 찾아가는 그 순간 자체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 과정에서 주인의식을 느낀다. 애X스토어에 방문하여 최신 아X폰을 둘러볼 때 점원들에게 받는 대접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왕이라도 된 것 마냥 만들어준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격언이 잘 실현될 때 소비자로서 우리는 주인의식을 느끼며 만족한다.

 

우리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즉 소비를 통해 왕이 되려고 노력하며 돈을 버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C-M-C’로 정식화한다. C는 상품(앞의 C와 뒤의 C는 다른 상품), M은 화폐이다. 상품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내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구한다. 여기서 C는 사용가치로 존재한다. M은 교환과정을 간략하게 만든다는 화폐 본래의 속성에 충실한 화폐, 화폐로서의 화폐이다.

 

원래 ‘C-M-C’는 물물교환의 연속인 ‘C1-C2-…-Cn’에서 비롯되었다. 나에게 필요 없는 사용가치를 다른 사용가치들과 계속해서 교환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사용가치를 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물물교환의 불편함이 화폐를 불러왔고, 화폐가 물물교환의 과정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시켜 ‘C-M-C’라는 사슬이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C-M-C’는 사용가치가 목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자본의 목적은 사용가치가 아닌 자본의 증식, 즉 가치증식이다. 화폐가 목적인 것이다. 자본의 정의부터가 그러하다. 아무리 많은 돈이 쌓여있더라도 그 돈들이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돈을 더욱 크게 불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구두쇠’일 뿐 자본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아까 논의한 C-M-C로 설명할 수 없다.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자본으로 시작하여 자본으로 끝난다. 그런데 처음의 자본보다 나중의 자본이 줄어들어 있으면 이 과정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의 증식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M-C-M′(M′=M+ΔM)’ 자본은 상품을 만들어내고 그 상품을 다시 팔아 자신의 몸집을 더욱 크게 불린다. 끝의 M′은 원래의 자본에 자본의 증가량이 더해진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고리대와 같이 M-M′으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자. ‘쌀을 팔다.’ 어떤 의미의 말일까? 물론 이 문장은 쌀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른 용법이 있다. 돈을 주고 쌀을 살 때에도 쌀을 ‘판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쌀을 산다’는 것은 쌀을 팔고 돈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용례의 기원에 대한 여러 설들 중, 과거 화폐경제가 성립되기 시작할 무렵, 그 이전 시대 상거래의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던 쌀과 화폐를 교환하는 과정을 쌀 중심적으로 바라보아 그런 용례가 성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돈을 불려야 하는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은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고, 다시 상품을 팔아 화폐를 사는 게 아닌가? 이를 C-M-C와 엮으면 우리는 돈이라는 물건을 팔아 사용가치를 대가로 받는 판매자인 건 아닐까? 즉 우리는 자본이 만든 물건을 사는 데에 집중하여 우리를 소비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우리가 돈을 팔고, 자본이 돈을 사는 건 아닐까?

 

자본이 스스로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도 아니다. 자본은 우리에게서 ‘돈’을 사옴으로써 몸집을 불려야 하는데, 그 돈을 사기 위해서는 상품을 팔아야 한다. 그 상품을 사올 때 팔았던 돈의 가격 그대로 되파는 건 자본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돈을 팔아 상품을 사는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들은 곧 자본가가 아닌 우리들이다. 결국 우리는 상품을 팔아 사는 돈보다, 상품을 살 때 파는 돈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자본이 몸집을 불리는 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과정에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M-C-M′ 중에서 상품을 만드는 C과정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왕이 아니다. 자본이 손님(=소비자)이고 우리가 판매자이기 때문에 자본이 왕이 된다. 또 우리는 자본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산한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몫을 남에게 빼앗기는 사람은 왕이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은 노예에 가깝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언명에 현혹되어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허위의식에 덮였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우리를 왕으로 생각하던 소비의 과정에서도 최후의 승자는 자본이었다. 자본주의는 모두가 노력하면 그만큼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과정이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모두가 소비자, ‘손님’이기에 평등하다고 강조했지만 그것은 사기였다. 자본은 그저 우리에게서 싼 값으로 돈을 사오기 위해 ‘손님은 왕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고 다른 자본과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소비자임에 동시에 어디서는 계산원으로, 어디서는 경비원으로, 어디서는 미화원으로 존재한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은 우리가 손님이 아닐 때에는 왕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평등은 속 빈 강정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주인이라고 선전하지만, 사실 그 평등은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평등이거나 비슷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평등이다. 조지 오웰은 동구권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러한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그 격언을 피해갈 수 없어 보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어떤 인간은 더욱 평등하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멋진 말 뒤에는 사실 우리에게서 우리의 몫을 빼앗아가는 고약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숨어있던 것이다. 손님이 왕인 세상보다, 그냥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손님일 때에만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멀쩡한 세상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왕으로 살고 싶지도 않고, 노예로도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소박한 이 바람이 실현되기까지 요원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1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1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 글은 Barbara Fultner eds., Jürgen Habermas: Key Concepts, NY: Routledge, 2014라는 책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영미권의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하버마스의 이론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는 훌륭한 개론서다. 하버마스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서툰 번역으로나마 틈나는 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 인용된 하버마스 저작의 축약어는 아래와 같다. 꺾쇠 안에 표기된 년도는 영문판 출간 년도다.

 

BFN Between Facts and Norms (1992 [1998])

BNR Between Naturalism and Religion (2005 [2008])

CES Communication and the Evolution of Society (1976 [1979])

DW The Divided West (2004 [2007])

IO The Inclusion of the Other (1996 [1998])

JA Justification and Appilication [1993]

LC Legitimation Crisis (1973 [1975])

KHI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68 [1971])

MCCA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1983 [1990])

OPC On the Pragmatics of Communication [1998]

PDM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1985 [1990])

PMT Postmetaphysical Thinking (1988 [1992])

PNC The Postnational Constellation (1998 [2001])

STP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1962 [1989])

TCA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1981 [1984/1987])

TRS Toward a Rational Society [1970]

TJ Truth and Justification(1999 [2003])


 

들어가며

바바라 풀트너(Barbara Fultner)

 

Barbara Fultner, 출처: https://denison.edu/people/barbara-fultner

 

의심할 여지없이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전 세계 사회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설립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후계자이자, 비판이론이라고 하면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머마스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탁월한 공적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여러 주요 신문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수많은 유명인들과 공개 대화를 전개하였다. 거기에는 자크 데리다에서 미셸 푸코, 리처드 로티 그리고 베네딕트 14세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까지 다양하다. 하버마스는 심오한 체계적 사상가이며 완벽한 통합이론가다. 그의 이론적 개념들은 영미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마르크스의 이론, 유럽대륙철학을 끌어와 합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저작을 읽는 일은 여간한 도전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1929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하버마스는 이 도시의 상공부 책임자였다. 2차 대전 후 그는 괴팅겐 대학, 취리히 대학, 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이 무렵 나치의 잔혹행위와 기만행위에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던 하버마스는 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나치 체제와 공모하거나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했던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그중에서도 마르틴 하이데거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1950년대 반핵 운동과 1960년대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세대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대변하던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버마스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을 완성한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잠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4년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자로서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 연구소의 철학 및 사회학 교수로 지명되었다. 1971년에서 1982년까지는 슈타른베르크에 자리한 과학기술세계에서의 삶의 조건에 관한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그는 1994년 은퇴하여 저술에 몰두하면서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의 노스웨스턴 대학, 뉴욕의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과 스토니브룩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초청 강좌를 맡았다.

이 책의 글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하버마스의 광범한 지적 성과에 대한 개념 지도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난 40 여 년 간 그는 각 연구 영역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수많은 획기적인 저작들을 내놓았다. 이 책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설정해 주곤 했다. 그의 영향은 비판이론과 사회정치철학에서 가장 뚜렷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의 기고문들이 보여주듯이, 언어학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으로서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윤리학, 인식론, 심리 철학, 언어철학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아마도 하버마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남을 것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사회, 근대화 및 합리성에 관한 포괄적 이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에 이어지던 연구 작업, 즉 도덕이론, 정치 이론 그리고 법 이론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론 진화의 발자취

이 책은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버마스의 지적 발전을 역사적 관점에서 추적하고 있기도 하다. 하버마스의 저작들에서 눈에 띄는 사실은 체계성 및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입장과 관심사들은 이론의 내적 논리에 따라 진화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다른 이론가들의 비판에 답하고 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하기도 하였다. 그는 변증법적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대화적 사상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저작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1 대부분의 경우 시기 구분은 기본 관점의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하버마스에서 이 네 시기는 기본 관점에서의 변화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초점이나 강조하는 바가 달라짐을 나타낸다. 하버마스 사유의 흐름이 이런 시기 구분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네 시기 구분은 다소 임의적이라 하겠다.

 

  1. 철학적 인간학: 의식철학과 실증주의 비판(1954~1970)

첫 번째 시기는 박사논문에서 『인식과 비판』까지다. 이 시기의 저작에는 『공영역의 구조변동(1962[1989])』, 『이론과 실천(1963[1973])』, 『사회과학의 논리(1967[1988])』,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소묘(1971[1983])』가 있다. 이 시기 동안 하버마스는 독일 관념론(칸트, 피히테, 헤겔)과 후설 현상학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해석학과 사적 유물론을 연구하였던 하버마스는 사회진화와 인류 역사를 강조하는 사회이론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의식철학을 거부하게 되었다. 18세기 커피 하우스 문화에 대해 세세히 분석하고 있는 『공영역의 구조변동』은 비판이론과 문학 연구에 있어서 표준이 된 책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영역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며, 당시에 생겨난 특정한 경제적 변화(자본주의, 세계 무역 등)와 긴밀히 묶여 있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공영역의 구조가 역사적 조건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공영역의 구조변동』이라는 책은 공영역이라는 개념을 하버마스의 일생에 걸친 관심사로 만듦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연구를 미리 예시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문화 상업화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후에 등장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를 미리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1980년대에 천착하게 될 주체성의 사회적 해명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이미 이때부터 관심의 싹이 트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하버마스는 실증주의 과학에 대한 비판을 고조시켰다. 그는 과학에 내재하고 있는 잘못된 객관성 개념을 거부하였다. 과학이 몰역사성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문화가 우리의 본성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점은 의식철학도 공유하고 있다. [하버마스에게] 인간은 사회문화적 과정에 의해 매개되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며,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상태에서 진화의 결과물로서의 지식을 얻게 되는 주체다. 이런 인간이 구체적 현실에서 멀어져 버린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와 객관적이고도 편향적이지 않은 과학자로 대체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하버마스적 주체의 인지 능력은 따라서 변치 않는 본성으로서 미리 새겨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학습되어 [본성적 능력으로 보이게끔]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습득되는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는 기획은 평생의 동료이자 친구인 칼-오토 아펠에 의해 인식인간학 (Erkenntnisanthropologie)혹은 인간학적 인식론(anthropological epistemology)으로 일컬어졌다.

『인식과 관심』 역시 앞으로 등장할 이론의 토대를 놓은 저작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인간의 관심을 인간의 인식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로 여기면서 세 가지 근본적 인식을 구성하는 관심들을 식별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적, 실천적, 해방적 관심이다. “기술적 통제를 지향하고, 처신(conduct of life)에 있어서의 상호 이해를 지향하며, 외관상 ‘자연적’ 속박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됨을 지향하는 것”(KHI: 311)은, 정확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등장한 세 가지 구분들, 즉 이론적, 실천적, 미적 담론과 이에 각각 상응하는 세 가지 타당성 요구, 즉 진리성요구, 규범적 정당성 요구, 진실성 요구의 전조가 되었다. 『인식과 관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언어를 “그것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314)으로 도입함으로써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토대가 될 언어적 전회의 도화선을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관심』은 방법론적 쟁점을 제기하였다. 즉 그것은 하버마스에게 경험적 근거와 근대성에 대한 규범 비판적 분석을 통합한 사회이론을 형성하려는 목적에 적합한 이론적 틀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1. 이 시기 구분은 Eduardo Mendieta가 제안한 것을 채택한 것이다.

스무 번째 시간, 손 [시가 필요한 시간]

스무 번째 시간, 손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하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귀로 읽는 시간’입니다. 위 재생버튼을 누르시면 편하게 ‘시가 필요한 시간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여러분, 요즘 손 잘 씻고 계신가요? 2월말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발발한 이후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추세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데요, 한국의 상황은 그나마 안정권에 접어들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때문에 이번(2020년 초) 겨울에는 독감과 감기 환자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코로나를 예방하려고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모두 착용하고 지내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감기 바이러스가 활발히 옮겨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손 씻기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느꼈습니다.

오늘 왜 갑자기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냐구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을 시가 바로 ‘손’에 관한 시이기 때문이죠. 오늘 제가 가져온 시는 정호승 시인의 <손에 대한 예의>입니다.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죠? 여러분은 평소에 ‘손’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악수하는 이미지나 하이파이브 하는 이미지도 생각이 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와 같은 말도 생각이 납니다.

생각해보면 ‘손’이 의미하는 것이 꽤 많아요. 누군가의 손을 보면 때론 그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죠.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어느 정도 손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손톱을 예쁘게 길러서 아주 화려한 네일 아트로 손을 꾸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꾸밈없이 손톱을 바짝 깎는 사람도 있죠. 손만 보아도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간은 비약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손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면, ‘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어쩌면 곧 내가 지켜야 할 ‘나 자신에 대한 예의’와 같은 말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손’에 대해서 어떤 예의가 있을까, 우리는 손에게 어떤 예의를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까.. 시인의 시를 통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손에 대한 예의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번 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어둠 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

 

♦ 귀로 읽는 시간-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네, 정호승 시인의 <손에 대한 예의> 들어보았습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손에 대한 예의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우리의 ‘삶에 대한 충고’와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가 조금 길지만,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로 묶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1) 부모님의 사랑을 늘 기억할 것

2)여유를 가지고 살며 자연을 사랑할 것

3)비굴하지 않은 선한 삶을 살 것

4)때론 나를 위해 고독할 것

 

시인이 가장 첫 번째로 꼽은 손에 대한 예의는 바로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놓치기 쉬운 존재가 우리의 부모님이죠. 여러분은 언제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손을 잡아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서 살다 보면, 전화나 메시지는 자주 할지 몰라도, 부모님을 찾아뵙는 시간을 자주 가지기는 참 쉽지 않은 요즘 젊은이들이죠.

부모님을 찾아뵙는다면 한번 부모님의 손을 꼭 잡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손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도 이만큼 자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손에 대한 예의로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라는 항목을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 근원, 원천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두 번째로 시인은 자연으로 눈을 돌립니다.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위에서 말하는 자연을 어루만지는 손의 행위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요, 바로 ‘여유’입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데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늘에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수 있을까요? 여유가 없이 분주하게 살아간다면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도, 봄에 내리쬐는 햇살도, 여름에 길 한편에 자라난 풀잎, 가을에 핀 장미도 그저 스쳐 지나칠 뿐 눈 여겨 볼 수 없을 것이고, 계절의 순간순간의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삶이 될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분주한 삶의 한 자락에서 여유를 가지는 마음의 태도를 소유할 것을 충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시인이 말하는 ‘손에 대한 예의’는 무엇이 있을까요?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이 시를 읽다 보면, 말을 하지 않는 손이 때로는 어떤 언어보다도 더 많은 것을 전달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호의를 얻으려고 손바닥을 비빈 적은 없는지,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릴 만큼 돈에 현혹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손이 칼을 쥐는 손이 될 수도 있지만, 상처 입은 사람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손, 놀란 아이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쓸쓸한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비굴하지 않은 선한 삶을 살기를 충고하고 있죠. 이 시의 표현에서처럼 나를 위한 많은 것들을 쥐고 있더라도 한 손은 비워두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아주길 바라봅니다. 그럴 때 우리 손은 어떤 언어보다도 더 마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겠죠. 우리는 우리의 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

마지막으로는 ‘때로는 나를 위해 고독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어봅니다. 저는 마지막에 어둠 속에서도 홀로 기도할 것이라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여럿이 나누는 왁자지껄한 대화가 아니라, 나 홀로 절대자인 신과 나누는 고독한 대화죠. 그 시간을 통해서만이 얻어지는 통찰과 반성, 위로의 경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인은 그 시간을 가지기를 충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둠 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이라는 시행은, ‘기도’의 시간이 노동자이건 회사원이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내가 비록 어둠에 있더라도, 또 손에 박혀있는 굳은살처럼 내 삶이 녹록하지 않더라도, 인생에 어떤 얼룩이나 굳은살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의 문은 늘 열려 있다는 거죠. 누구든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 그것이 손에 대한 예의다. 이것을 끝으로 시는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시에서 말하는 손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면, 그건 곧 나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사는 삶이 되겠죠.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연주곡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 가곡 중에 <연(緣)>이라는 제목의 가곡이 있는데요, 그 멜로디를 첼리스트 정우리의 연주로 담은 곡입니다. 오늘 ‘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손으로 연주하는 악기들이 참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첼로의 선율이 주는 묵직한 감동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가져왔습니다. 이 곡 들으시면서, 오늘 시를 통해 들었던 충고들 마음에 잘 담으시고 기억하면서 하루를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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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리(첼로) – <연> https://youtu.be/MPqCDvU2g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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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내가 읽는 『자본론』]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얼마 전 아주 어린 시절에 함께 어울려 다니던 동네 형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 수년 전이었기에 서로 너무나도 반가웠다. 근황을 묻고 예상치 못했던 서로의 변화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함께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고, 우리 모두 달라져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형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의 역경을 한참 설명하더니 “내가 살아보니 인간이란 게 다 그렇더라… 사람이 원래 그런 거야..”라며, 흔한 꼰대식 조언을 무심하게 던졌다. 그 순간 문득 든 엉뚱한(?) 생각,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 탐구해도 규명해내지 못했던 (인간에의) 정의를 저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꼴에 철학을 전공한다고, 내 머릿속엔 나름의 철학적 의문이 샘솟은 것이다.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왜 웃느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형의 얼굴 너머로 더욱 커다래진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도대체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지 못한 계기로 시작된 철학적 의문은 이후 수일간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름의 답을 찾고자 여러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던 명쾌한 대답은 찾기 어려웠다. 서양철학은 대부분 ‘신’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인간을 수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동양철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지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사조나 ‘실존주의 철학’ 등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나름의 설명을 듣는가 싶기도 했지만, 이 역시도 내 궁금증을 명쾌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이들은 모종의 인간적 특성에 집중하는 문학적 사조의 느낌이 강했으며, ‘실존성’이나 ‘자유의지’ 같은 인간의 추상적 특성을 무조건적으로 전제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명료한 존재론적 해석 방식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근래 『자본』1에 관해 꾸준히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테두리 밖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마르크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였다. 『경제학 철학 수고』의 내용적 얼개까지 확인하자, 비로소 머릿속에 분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의 본질을 특정 짓는 것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인 것이 맞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내 궁금증 역시 절대적/고정적 실체를 요구하는 본질주의적 발상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는 이러한 조심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고정적 실체를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특질을 토대로 인간 본성의 방향성만을 시사하고 있었다. ‘유(類)적 존재’ 그리고 ‘노동’이라는 두 키워드는 기존 철학 사조들의 인간관과 마르크스주의적 인간관이 질적으로 상이함을 암시했다. 마르크스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로 인간의 존재론적 함의를 분명히 한 후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인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더불어 인간을 수동적 존재나 조건적/의존적 존재로 해명하지도 않았다. 넓게 보았을 때,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본인이 근 몇 년간 꾸준히 탐닉해온 『자본』의 사상적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전반의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類)적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 ‘노동’은 인간의 본성과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 것인가?

반가운 만남 속 우연한 계기로 머릿속에 스며든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문득 찾아온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의문은, 본인을 휘감아 흔들었다. 나는 본질주의적 사고의 오류를 경계해가며 해답에 관한 힌트를 찾아 나갔다. 기존의 관심을 계기로 다시 들여다본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와 그 속에 묘사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은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경제학, 사회학, 또는 혁명적 정치학으로만 서술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저에 있던 인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철학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는 체계적 논의를 통해 인간 존재를 해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유(類)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을 담은 비교적 직접적인 개념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자 ‘類’는 ‘무리 지음’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어서 그 숨은 의미를 어렴풋이 암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무신론적 유물론자이자 헤겔 좌파였던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영향으로 그가 먼저 사용했던 ‘유(類)적 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유(類)적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은 마르크스 철학이 기존의 절대주의적 관념론의 인간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 존재의 실체적 본질을 고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기존의 철학들을 비판하는 개념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철학에서 인간을 ‘종(種)’으로 설명하는 경향성을 비판한다.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학문적 조류는, 인간의 종(種)적 본질을 찾아 모든 개별 인간에게 하향식으로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념론적 고전 철학의 흐름이 그릇된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앙상블:ensemble2)’로서 존재함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개개인의 인간이 그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불변한 형태의 어떤 종(種)적 본질만으로 형성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릴 적 동네 형을 오랜만에 만나 별다른 종(種)적 목적성 없이도 마주 앉아 웃고 떠들 수 있던 것은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맥락 위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적 사유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생물학적 속성에 종속되지 않으며, 능동적, 의식적 존재인 셈인데, 이는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도 증명된다. 우리 주위의 개인적 인간들이 동물적, 종(種)적 본성으로만 이뤄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님, 우리 엄마, 내가 아끼는 친구들을 비롯해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은 종(種)적 본질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맥락의 총체로서 오늘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논의를 출발시킨 동네 형과 나 역시도 서로에게 사회적 맥락을 제공하며 서로의 존재를 채워주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유(類)적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실천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인간은 종(種)적 본성에만 지배받는 동물들과는 달리, 유(類)적 성격과 종(種)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의식적 사회 활동과 능동적 행위를 실천해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방향성이 나에게는 일종의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신 존재나 도덕 등 조건적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으며, 매력적인 이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편, 포이어바흐에 의해 유(類)적 존재의 개념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오히려 포이어바흐를 비판하기도 했다. 포이어바흐가 설명하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고정적인 대상으로서 묘사될 뿐, 실천적 주체로서 설명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실천성과 능동성에 특히 더욱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種)적 특성을 고정적/실체적인 무언가로 상정하지 않고, 유(類)적 성격이라는 특질로써 해명하고 있다. 인간의 유(類)적 성격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계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이 불변하는 실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 종(種)의 유(類)적 성격에 의거한 사회적 맥락의 총합으로 구성됨을 시사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인간의 본성적인 사회성과 능동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된다.

이처럼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상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많은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유(類)적 존재 개념 속 의미의 맥락이 모호하기 때문에 후대에 숱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고정적 실체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일각에서는 마르크스가 인간에게 유(類)적 성격을 부여한 것 자체가 인간의 고정적/실체적인 종(種)적 본질을 규정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구조주의적 시각에서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했으며, 훗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어찌 되었든 본인은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전반에서 매우 핵심적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 자본주의 비판의 단초로서 그의 사유 배후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이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결고리는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노동’은 마르크스 인간관의 이해를 돕는 두 번째 키워드이자,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속 궁극적 문제의식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적 행위로서 ‘노동’을 제시하며, 자신의 사유 방식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입장이라면 의문이 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버텨내는 노동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행위가 된다는 것인지 의아할 테다. 앞서 마르크스는 직접적인 신체의 욕구와 본능적 생산 활동에 지배받는 동물과 인간, 또는 동물적 존재와 인간을 명백히 구분했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자연 전체의 다양한 사물과 관계한다는 면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한 인간의 삶과 행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동물적 행위와는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오히려 자유롭다. 또 인간의 의식과 의지의 형성에 관계한다. 이때 인간이 행하는 의식적/의지적 노동의 행위는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유(類)적’ 성격의 행위일 테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만물에 ‘창조적 노동’을 행함으로써 ‘유(類)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더불어, 인간은 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자연을 확장하여 창조하거나 구체화하는 창의적 존재로 설명된다. 인간은 창조적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대상화시키며 또 이 같은 대상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며 자신의 모습을 직관한다. 마르크스는 사회 속에서 의식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노동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특질이라 보았다.

따라서 노동 행위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라, 본디 인간의 ‘유(類)적’ 성격을 실현해내고 확인하는 즐겁고 자발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의 개념을 처음 접하고서 그의 사상 자체가 굉장한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의 ‘노동’론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이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지 암시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행해지는 인간 특질로서의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 및 강압은 ‘노동 소외’3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외’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본질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하는데,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성적 특질로서의 ‘노동’이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졌음을 제시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 행위’는 창조적으로 인간의 유(類)적 본성 혹은 의식적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 보기 어렵다. 그저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수동적, 강압적, 비자발적 과정이 오늘날의 ‘노동’이다. 아끼던 형님을 몇 년 만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도, 강압적 노동의 사회적 압박이 (예를 들면 취업 혹은 취업을 위한 대입 등) 나와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취직 문제로 수년간 고통 받았다던 형님의 씁쓸한 회상처럼, 우리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의 압박에 시달리며,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했고, 이제 어디에서도 ‘인간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우리가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서술을 마주하며 느낀 의문스러움은 ‘인간 노동’이 소외되어왔음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겠다.

본래의 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조금 더 덧붙여보겠다. 앞선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 역시도 인간의 ‘노동’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다. 인간의 본성이자 유(類)적 특질을 드러내는 ‘노동’은 경제적인 측면에선 ‘가치’를 창출해내게 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는 이 ‘가치’(인간 노동)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에서, 줄곧 ‘인간 노동’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애초에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 ‘인간 노동 일반’에 있음을 전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적 상식이나 효용가치설의 기본적 구조와는 완전히 상이한 파격적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인간 노동’이 어떻게 기능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치의 착취에 놓이게 되는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인간 노동’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인간 본성으로서의 ‘노동’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노동’을 중심에 두고 ‘노동가치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애(愛)와 휴머니즘적 양상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사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나 인간 본질에 관한 논의는 마르크스&엥겔스 철학의 초기 저작에서 주로 등장했으며, (위와 같은 경제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게 되는) 후기로 갈수록 이는 사라지게 된다. 짙은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였던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은 후기로 발전해가며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이나 추상적인 헤겔식 독일관념론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의 변모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간 본성에 관한 앞선 논의의 견해들을 포기하거나 변경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들이 (후기에도) 여전히 ‘유(類)적’ 존재로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류의 본성적 경향성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시발점 격이었던 『독일 이데올로기』4의 면면에서 때때로 드러난다고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5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전, 후기 저서를 막론하여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활동성 및 실천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 밑바탕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인간 노동’에의 논의가 핵심적 토대를 이뤄왔음은 물론이다.

이병창, 『독일 이데올로기』1・2, 먼빛으로, 2019.

이 같은 맥락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포이어바흐는 인간을 존재론적 측면에서만 유(類)적 대상으로 파악했을 뿐, 실천적 행동의 맥락에서 인간을 유(類)적 (감성적)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지점을 비판하며 인간의 ‘유(類)적’ 혹은 ‘감성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포이어바흐는 ‘유(類)적’ 존재 개념을 다수의 개별자를 단순히 결합시키는 내적인 보편성/통일성으로 파악했다. 즉 사회적 총체로서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맥락 속 계급 관계 등을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관념론의 흔적을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채, 인간의 본성을 실체적, 대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던 점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포이어바흐가 실천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며, 사회 속의 인간적 계급 구조 형성의 필연성 등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질이란 ‘유(類)적’ 성격과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대로 고정된 실체로서 형이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성격과 실천적 형태의 동적 인간 행위인 ‘노동’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명료화한다. 능동성과 창조성을 중요한 본래적 특질로 지닌 인간은, 사회성을 토대로 그 본성을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인간관에 흡족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는 절대자나 관념적 가치(이를테면 ‘자유의지’, ‘실존성’)에 의존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는 결이 다른 이론적 견해를 보였으며,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인 인간적 관점에서 자신만의 인간관을 정립했기에 그렇다.

또한, 나는 그가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서도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실례를 알고 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매우 반가운 만남이었음에도 동네 형님과 나는 무척 많이 달라져 있었고, 이는 우리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본질이 실체로서 고정되어있었다면, 형과 나는 예전처럼 본성적으로 통해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 따라 구성됨을 설명했고 나는 내 생활세계에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로서 어떠한 실체도 고정화하지 않았던 마르크스는,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강조한 휴머니스트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지만, 동시에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역동적(능동적) 주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갈망하던 종류의 인간관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사견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아마 그러한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여기까지 이끌 수 있음에 글을 쓰는 와중에도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인간에 대한 질문과 철학적 탐색은 오늘날에도 어리고 미숙한 예비 철학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적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확장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근래에 공부 중인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어떠한 생각(인간관)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는지 가늠할 기회를 얻어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유는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여기, 내게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인간관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철학자들과 마르크스&엥겔스, 그리고 필자 본인이 인간 본성에 대해 추측하는 바가 정확한 사실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하며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굉장한 의미가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외부의 객체적 존재들을 명확히 인식하겠는가.

비록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이 의문만 연속되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흥미롭고 가치 있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논의를 이쯤에서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내 주위 나와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각자 스스로의 견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일까?”


  1. 마르크스&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고전서

  2. 여기서 ‘앙상블:ensemble’은 불어인데, 독일인 마르크스가 흔한 독어 표현 대신 불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마 마르크스가 ‘하나’로서의 합일과 전체성을 추구하는 독일(독어)의 신비주의적 흐름의 뉘앙스에서 벗어나, 전체 속에 다양성과 개체성이 조화를 이룸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소외’ 혹은 ‘인간 소외’ 현상의 양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2.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 / 3.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 4. 유(類)적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노동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생산물의 지배권, 노동 과정의 통제권, 동료 인간과의 본성적 화합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나아가 유(類)적 인간의 본성 자체도 소외당하고 있는 셈이다.

  4.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후기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한다고 한다.

  5. 헤겔 철학은 기존의 사유 방식과는 달리 절대자 혹은 신을 역사 속에서 발전, 변화하는 주체적 존재로 묘사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58회 정기학술대회(zoom-온라인)

한철연 2020년 봄 학술대회 안내

이번 봄 학술대회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하여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회원분들께 자료집을 메일로 보내드리면서 온라인 참여 방법을 안내 드립니다.

학술대회는 ZOOM에서 진행됩니다.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접속하실 경우에는 별도의 프로그램 설치 없이 아래 ZOOM 계정을 클릭하시면 학술대회에 바로 참여가능 하십니다.

핸드폰으로 접속하실 경우에는, ZOOM 어플리케이션(프로그램)을 미리 설치하신 후에 아래 링크를 누르셔도 되고,

핸드폰에 ZOOM 설치가 안 되어있는 경우에는 아래 링크를 누르면 설치 화면으로 자동으로 넘어가므로,

그때 프로그램을 설치하신 후에 접속하시면 됩니다. (화면을 크게 보시기 위해서는 컴퓨터 사용을 권장드립니다.

 

  자료집 다운로드: http://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678

 ♦ ZOOM 온라인 학술대회 참여-한철연 계정: https://zoom.us/j/7839705074

각 발표와 논평이 끝난 후 청중 질의시간이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봄 제58회 정기학술대회

♦ 주제: 발터 벤야민, 언어와 혁명
♦ 일시: 2020년 8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
♦ 주관 및 주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로그램
<발터 벤야민, 언어와 혁명>

13:50-14:00 ZOOM 등록 및 개회준비
14:00-14:10 한철연 회장 개회사 연효숙(연세대)

주제발표 1
14:10-14:45
20세기 인간학적 유물론의 실천으로서 범속한 계시
-W. 벤야민의 ?초현실주의? 다시 읽기- 발표: 김서라(전남대학교) 사회: 박민철(건국대)
14:45-15:00 논평: 한길석(중부대)
14:55-15:10 청중 질의
15:10-15:20 휴식

주제발표 2
15:20-15:55
벤야민 언어 이론의 발전사
발표: 이병창(동아대학교)
사회: 박민철(건국대)
15:55-16:10 논평: 강동원(고려대학교)
16:10-16:20 청중질의

16:20-16:30 휴식
16:30-17:40 종합토론 사회: 한상원(충북대)
17:40-18:00 연구협력위원장 보고 박지용(경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