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시대와 철학]

새해, 촛불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절차 악용 쿠데타가 브라질에서 성공한 이유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이유-

 

김성우(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세계화의 파산과 극우 포퓰리즘의 재등장

 

7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박근혜 정부 집권 1년 차인 2013년 말은 민주 시민에게는 절망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다룬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유럽의 변방인 구동구권 출신으로 당대의 떠오르는 스타 철학자였다. 지젝의 정세 인식을 바탕으로 이 논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이란 보수 쪽에서의 신자유주의적인 협박이 있다. 보수가 훨씬 능동적이고 풀뿌리적인 포퓰리즘의 형태를 취한다.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자유주의적인 현 상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권과 민주주의에 반하는 테러리스트가 된다.”

더 나아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퇴색하고,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자본과 시장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스템으로 전락한 채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체제가 공고해지고 있다.”

극우적 포퓰리즘이 득세할 것을 염려한 상황 인식은 불행하게도 2012년 우리나라 대선에서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과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실현되었다. 또한 절차 민주주의의 허점을 악용할 것을 걱정한 불길한 예측은 브라질의 연성 쿠데타로 이뤄지고 말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고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개혁과 혁명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이때 취약한 계층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체제 전복을 막는 운동 세력을 조직화하려는 전형적인 극우적 해법이 있다. 나치즘과 같은 포퓰리즘이 그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극성을 부리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민주적 저항에 맞서기 위해 기득권 카르텔이 내세운 카드이다. 새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여도 대단히 낡은 카드이다.

대망의 새로운 밀레니엄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의 노동당과 독일의 사민당과 같은 진보 정권들도 신자유주의적 언어로 자신의 정책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논란을 일으킨 참여 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2008년 월가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위력이 마법같이 사라졌다. 세계화의 불평등과 이를 공고히 하려는 반민주적 기득권 카르텔에 저항하는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불길처럼 타올랐다. 2010년부터 중동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을 상징하는 재스민 운동과 2011년에는 미국에서 봉기한 ‘월 가를 점거하라!’라는 오큐파이 운동이 대표적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과 혁명의 세계사적인 시대적 흐름 안에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 실패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반민주적 정책에 국민들이 염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선 캠프는 박정희 전 대통령 향수를 자극하는 포퓰리즘을 바탕으로 경제 민주화를 포장지로 내걸었다. 문재인 대선 캠프는 민주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도 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극우 포퓰리즘 등장의 세계적 신호탄이었다.

2013년 여름, ‘아랍의 봄’에서 탄생한 이집트 최초의 민주 정부가 법원과 검찰의 포위 아래 다시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다. 프랑스와 노르웨이 같은 진보 정당이 오래 집권했던 나라까지 포함해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당이 지지세를 넓혀 가고 있었다.

2016년 여름, 영국에서는 보수당의 일부 극우 정치인들의 아젠다인 ‘브렉시트’가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영국에서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2019년 말 열린 총선에서 영국판 트럼프라고 불리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승리로 귀결된다.

같은 해 여름, 브라질에서는 보수 야권 세력이 연방 검찰과 재벌 언론의 유착을 바탕으로 포퓰리즘 방식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마침내 노동자당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은 검찰과 사법부를 이용한 연성(soft) 쿠데타로 규정된다. 이 쿠데타가 연성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군부의 총칼이 아닌 법적 절차를 악용한 합법을 가장한 정권 탈취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 언론이 가세한 극우 포퓰리즘이 견고하게 작동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수사 절차와 사법 절차를 남용한 쿠데타는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달아 같은 해의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는 극우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업고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세계화의 피해자인 백인 남성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모든 주류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다. 이는 가짜뉴스와 결합한 극우 포퓰리즘이 세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극우 포퓰리즘 정치 세력은 특히 기독교 파시즘 세력과의 결합으로 운동의 기본 동력을 마련하고, 가짜뉴스로 여론을 조작한다. 이런 식으로 진보 정권에서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며, 보수 정권에서는 친정부 시위를 이끈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민주진보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난민 혐오나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반난민 정서를 부추기고 반중국 정책으로 자기 지지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유사하게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종북’이 민주진보 세력을 매도하는 대표적인 언어였다. 현재의 극우 야권 인사들은 문재인 정부를 친북이나 친 중국적인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한다. 자신들이 독재의 후예이면서도 시장의 권력을 약화하고 민생을 보살피는 개혁 정책이나 법안을 입법화하면 (재벌과 부유층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재라고 맹비난을 가한다.

세계 전역에서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과 재벌이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은 언론의 여론 조작과 검찰의 선별적 수사와 사법부의 자의적 판결에 의해 포퓰리즘적인 동원력을 갖추고 민주진보 정부와 운동을 짓밟는 힘을 과시한다.

브라질에서 연성 쿠데타가 성공한 원인은 식민지 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구축된 5개의 연합으로 이뤄진 기득권 카르텔이 굳건한 데 있다. 반면에 현재 미국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절차 남용 쿠데타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 전 브라질 대통령.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ilma_Rousseff_-_foto_oficial_2011-01-09.jpg

 

쌩큐, 박근혜! 쌩큐, 트럼프!

 

트럼프보다 4년 먼저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2월에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가결되어 직무가 정지되고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당한다. 트럼프는 4년 뒤인 2020년 말 대선에서 패배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탄핵을 방해하기 위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막무가내식 시도에 촛불 시민들이 얼마나 혀를 내두르고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엽기적인 내막이 알려지자 우리 사회의 기득권 카르텔이 전가의 보도로 내세운 박정희 신화의 철갑이 벗겨졌다. 이로 인해 여론과 민심의 지형이 바뀌고 말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민주진보진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역부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인해 촛불 시민들이 각성하자 운동장의 기울기가 역전되었다.

여기에는 기득권 카르텔의 내분도 한몫했다. 권력의 애완견 역할을 자처하던 보수 언론도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을 공격적으로 보도하고, 보수 정권의 사냥개 역할을 하던 검찰도 과감하게 국정농단 수사를 했다. 그 당시 심지어 친박에 속하는 여권 의원들도 탄핵 의결에 동참하고, 친보수적인 판결을 일삼던 헌법재판소마저 탄핵소추안을 인용했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박정희 신화가 사라져버려 거꾸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현 보수 야권은 4차례의 선거에서 전패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도는 철옹성처럼 보였다. 올해 총선에서는 180석의 거대 여당이 탄생하고 문재인 정부는 성공적인 방역으로 경제에서도 선방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게다가 영화와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한류는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오래된 식민지 의식의 잔재인 열등감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진국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하지만 불행히도 작년 여름부터 브라질식의 연성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아직 진행 중이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에 대한 강압적인 수사로 검란이 일어났다. 검란에 기초하여 보수 언론과 보수 야당은 가짜뉴스에 가까운 여론 공세로 극우적 포퓰리즘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다. 사법부는 이미 사법농단으로 독립성이 흔들리며 국민적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법 논리를 악용한 판결로 검란에 동참하고 말았다.

검찰에 유착된 보수 언론의 가짜뉴스에 가까운 편파적 보도와 보수 야당의 극우화에 기인한 포퓰리즘적인 선동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검찰과 사법부의 쿠데타 시도는 현 정부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기득권 카르텔의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구축된 기득권 카르텔이 박근혜 탄핵 이후 발생한 균열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절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록 대선에서 졌지만, 포퓰리즘적인 선동에 능한 까닭에 열성적인 지지자를 대규모로 모아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하였다. 그 지지세에 놀란 공화당마저 자기편에 서게 하여 정치적 외톨이에서 당을 장악한 정치인이 되었다. 게다가 고위 관료와 연방대법관마저 자기 사람으로 심어 미국이 오랫동안 구축해온 민주적 절차와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뉴미디어와 대규모 열성 지지자를 동원해 선거 조작을 외치며 엄청난 물량의 소송전을 펼쳤지만, 각종 법원에서 연달아 거의 모든 소송이 기각되었다. 고위 관료와 다수의 공화당 인사들로 주의회나 주정부를 흔들어 대선 선거인단 투표를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나름대로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법적 투쟁을 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쿠데타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합리적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의 공화당은 식민지 해방 이후 생겨난 신생국들의 보수 정당처럼 군부 독재 세력의 잔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력이 당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미치 맥코넬 상원 원내대표나 부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유력한 공화당 인사들이 대선 결과에 승복하고 있다.

더군다나 <뉴욕타임스>와 <CNN> 등과 같은 주류 언론은 언제나 날을 세워 트럼프와 대립하였고, 심지어 친트럼프 언론의 대명사인 <폭스뉴스>마저 선제적으로 트럼프에게 불리한 예측을 했다. 심지어 트럼프가 임명한 국방부 장관이나 법무부 장관, 심지어 법관들마저 공개적으로 트럼프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리한 발언을 하거나 판결을 내렸다. 이는 다섯 영역의 기득권 카르텔이 균열되어 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할 절차적 민주주의를 허무는 쿠데타에 찬성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트럼프식의 연성 쿠데타 시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기득권 카르텔의 연성 쿠데타 시도도 실패할 것으로 예측된다. 우선 보수 언론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들의 뉴미디어 언론이 있다.

보수 언론이 아무리 정부와 여권에 대해 맹공을 가해도 다소 출렁거림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선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보수 언론이 조국 가족에 대해 80만 건 이상의 친검(檢) 보도를 했지만, ‘검찰 개혁과 조국 수호’를 외치며 서초동에 모인 백만 이상의 촛불 시민의 집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극우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민주 시민들이 정부와 여당을 견인하여 공수처를 설치하고 다양한 개혁 정책들과 법안들을 입법화하고 있다.

거기에다 군부 독재 세력의 후신인 현 보수 야권이 많이 약화되고 분열되어 있다. 물론 검언(檢言) 카르텔이 대단히 견고하고 상당히 많은 보수적 판사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이 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연성 쿠데타 시도가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검언 카르텔이 일으킨 쿠데타에 법조 카르텔이 참여하면서 민주 시민들의 촛불에 다시 불을 지르고 말았다. 이 쿠데타에 무사안일하게 대처하던 민주당이 민주 시민들의 성난 목소리에 떠밀려 2차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 및 윤석열과 사법 농단 판사 탄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미 여권은 180석을 바탕으로 국정원과 경찰 및 검찰이라는 3대 권력 기관의 1차 개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검언과 사법 쿠데타 시도로 말미암아 문재인 정부는 그 임기 내에 민생 개혁, 검찰 개혁, 언론 개혁, 사법 개혁을 마무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4대 개혁 과제에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재보궐 선거와 대선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새해에는 민주 시민들의 분노가 지닌 엄청난 압력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상당히 이뤄낼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현 정부의 대명사인 선제적인 검사 외에 국내 치료제 개발과 해외에서 개발 중인 백신 계약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에 검사, 치료, 예방이라는 3대 조치로 코로나바이러스 퇴치도 기대한다.

트럼프의 쿠데타 시도가 이미 실패로 판정이 나고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쿠데타 시도도 민주 시민과 거대 여권의 연대에 의해 제압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니 촛불 시민들이여, 분노하라! 그 분노의 목소리를 크게 외치자! 정부와 여권이 4대 개혁을 향해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도록!

 

시가 필요한 스물네 번째 시간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네 번째 시간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 뵙네요.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해야 했고, 지금도 여전히 겪어내고 있는데요,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은 어떤 기억들을 간직하셨는지, 또 2021년을 맞이하면서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연말과 신년은 여러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보내기 마련인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서로 떨어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거리두기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들이 고독해지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2021년도 어김없이 코로나와 함께 살게 될 텐데요, 한 번 살아봤으니 2년차에는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요?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는 용혜원 시인의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용혜원 시인은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92년에 계간지 <문학과 의식>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시인입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는 순수하고 어렵지 않아서, 누가 읽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특별히 오늘 제가 가져온 <나를 불러주는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시로, 요즘 같은 때에 읽으면 더 큰 감동이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리횬의 목소리로 듣고 오시죠.

 

 

나를 불러주는 사람

                                  용혜원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이 막힐 듯 답답하던 생각지 않은 날에

곱게 피어나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있다면

행운이라도 잡은 듯 기쁠 것이다

 

목마른 그리움 탓에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데

한 순간 가까워질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아도 좋다

 

내 눈동자에 내 마음에

사랑을 꽃피워 줄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아무도 몰래 내 마음 꺼내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서로 토닥이고 다독여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억을 한 아름 만들 수 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네, 용혜원 시인의 시 <나를 불러주는 사람> 듣고 왔습니다. 이 시의 첫 줄처럼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이런 날이 한 번씩 찾아옵니다. 특별한 일도 없고 누가 스트레스 주는 상황이 아님에도 갑자기 훅 우울한 기분이 드는 날이 있죠. 요즘처럼 거리두기가 계속되어 주변 사람들과 만날 수 없는 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외로운 날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보고 싶은 사람이

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이 막힐 듯 답답하던 생각지 않은 날에

곱게 피어나는 사랑을

나눌 시간이 있다면

행운이라도 잡은 듯 기쁠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 마침 보고 싶은 누군가가 다정스레 내 이름을 불러 준다면 어떨까요?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생각지 못한 날에 보고 싶었던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거나 짧은 메시지 한 통 받는다면 어떨까요? 반가움에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지면서, 한 순간에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목마른 그리움 탓에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데

한 순간 가까워 질 수 있다면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아도 좋다

 

[…]

 

서로 토닥이고 다독여준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억을 한 아름 만들 수 있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

 

며칠 전에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보이스톡을 받았어요. 신년을 앞두고 문득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며 안부를 전해주었는데요, 예전에 함께 학교 다니던 생각이 나면서 너무 반갑고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면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이에서 아무 특별한 일없이 먼저 연락을 취하기란 사실 쉽지 않아요. 보통은 무언가 용건이 있어야만 연락을 하게 되죠.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상대방이 놀라면 어쩌지?’ ‘내 연락을 불편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머뭇거리기 일쑤이고, 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 싶어 선뜻 연락하지 못했던 적이 있으실 겁니다. 저도 그것을 잘 알기에, 먼저 연락을 준 친구에게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 저도 메시지 창을 열어 그간 연락하지 못했던 다른 지인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내 친구가 그러했듯 나도 먼저 용기를 내자! 이 따뜻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게 해 주자! 하고 말이죠.

비록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자주 만날 수 없는 환경에 있더라도, 문득 생각이 나는 날에 잠시나마 안부를 전할 수 있다면, 멀게만 보였던 서로의 간격은 한 순간에 허물어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는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죠. 오랜 기간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로 내 마음을 살포시 담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1월 1일을 놓치셨다구요?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또 한번의 새해인 ‘설날’이 곧 찾아오니까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 친구들에게 “잘 지내?” “내가 좋은 시 한 편을 읽었는데 네 생각이 났어”라며 먼저 연락해보세요. 그 사람 역시 여러분의 연락을 받고 ‘아 나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위로와 격려를 한아름 누리게 될 겁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이적의 <당연한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이 노래는 가수 이적씨가 SNS에 개인적으로 만들어 올렸던 곡이었는데요, 2020년 제56회 백상예술대상 특별공연에서 아역배우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곡입니다. 코로나 여파가 계속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만 여겼던 모든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고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우울함 속에서도 밝은 미소를 지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노랫말이 용혜원 시인의 시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따뜻하게 보내시구요,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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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 당연한 것들 / 주소: https://youtu.be/LYSR0iAF8i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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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영상 –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 – 윤태양 회원 발표

 

링크: https://youtu.be/eS6II1sNO1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1월 월례발표회

2020년 11월 26일에 줌(ZOOM)으로 진행한 월례발표회 영상입니다.

 

-일    시: 2020년 11월 26일 (목) 오후 4~6시

-주    제: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 – 순자철학을 중심으로

-발표자: 윤태양(건국대 모빌리티인문학연구원)

-토론자: 배기호(충북대 철학과)

 

“이 발표문은 윤리적 행위를 해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한 가능성으로 정동적 변화를 지목하고, 그것이 어떻게 이동성과 다양성이 만연해진 현대사회에 효과적인 제안이 될 수 있을지 탐구한다. 한국 학계에 있었던 ‘정동(情動, affect)’ 개념을 둘러싼 토론을 정리하고, 순자 성악설의 논리구조와 ‘정안례(情安禮)’를 중심으로 모빌리티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동적 변화와 윤리적 존재화의 길을 모색한다.”

“누가 ‘포퓰리즘’을 악용하는가? ‘포퓰리즘’이 게으른 분석과 냉전식 선동 논리로 남용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를 시작하며,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병 위기는 자연재해 말고도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더 드러내 보였습니다. 어려움은 바이러스뿐만이 아닙니다. 집권당은 거대의석에 걸맞은 개혁을 보여주기는커녕 실망스러운 모습만 안겨주고 있습니다. 촛불 이후 민주주의가 크게 진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사라지고, 커져만 가는 불평등과 자영업 붕괴,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서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집니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한 어느 재벌 회장의 죽음은 추도하면서, 택배기사들을 비롯해 산업 현장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습니다. 교육 현장은 비대면 수업의 전면화 이후 이른바 ‘언택트’ 방식으로의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어느 누구도 수업의 질과 강사들의 생존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미투 운동의 확산 이후에도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는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번 코로나 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해고되는 것은 여성이고, 성소수자들은 이태원발 집단감염 당시 강제 커밍아웃에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철학을 업으로 삼고, 철학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러한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두고 철학적으로 개입하여 시대진단과 비판적 시각을 담은 글을 써보려 합니다. 들어가는 큰 주제는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 ‘코로나 이후의 한국사회’, ‘사회운동의 현재와 미래’, ‘강사법과 대학 사회’ 등으로 잡아봤습니다.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라는 기조를 공유한 몇 사람들이 먼저 집필을 시작합니다. 참여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아래 글은 2019년 11월 5일자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정치면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게재를 허락한 저작권자 김성우 회원에게 감사드립니다. 기사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84264&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누가 ‘포퓰리즘’을 악용하는가? ‘포퓰리즘’이 게으른 분석과 냉전식 선동 논리로 남용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김성우(한철연 회원, 상지대)

 

<포퓰리즘으로 망한 아르헨티나… 한국이 따라 가선 안 돼>(한국경제)
<‘조국 사태’와 포퓰리즘의 상관관계>(동아일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기업성장 저해>(중앙일보)
<디지털,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기로에 서다>(한겨례)
<포퓰리즘과 혼돈의 한국 정치>(프레시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최근 언론에 실린 기사 제목에는 어김없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적이자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악으로 등장하고 있다. 왜 포퓰리즘이 이런 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포퓰리즘은 냉전 시대의 전체주의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에 불과하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가 동구권의 자유화 이후 소련 스파이 대신에 새로운 악역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의 냉전 시대에는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상대방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악용되거나 남용되었다. 우파의 파시즘도 전체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좌파의 스탈린주의도 전체주의라고 비난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이와 유사하게 유럽과 미국에서 트럼프로 상징되는 극우의 부활로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있다.

이는 포퓰리즘을 대중선동주의나 대중영합주의로 사용한 예이다. 이렇게 되면 광화문 기독교 극우 집회도 포퓰리즘이 되고, 서초동이나 여의도 촛불문화제 집회도 포퓰리즘이 되어 의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 세력으로 똑같이 취급을 받게 된다. 위에 열거한 기사 제목처럼 이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보수지와 진보지를 막론하고 소위 정치 전문가들에 의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상대 진영을 비판하는 냉전적 언어이듯이 포퓰리즘도 극도의 흑백논리적인 언어이다. 다시 말해 포퓰리스트를 데마고그(대중선동가)로 착각해서 부르는 것이다. 민중의 편에 서는 민중주의자와 엘리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대중선동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원래 포퓰리스트는 기득권층인 엘리트에 대비해서 민중, 평민, 서민 등을 옹호하는 정치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대의 민주주의가 엘리트만의 게임으로 변질될 때 포퓰리즘은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로서 다시 대의 민주주의가 민중이나 서민을 대표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정치운동이다.

마치 전체주의가 그 이름과 정반대로 일인 독재나 일당 독재로 지칭되어 상대 체제를 서로 낙인찍는 애매모호한 명칭이 되었듯이 포퓰리즘도 그 원래 의미를 잃고 상대 진영을 비난하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언론과 방송에서 광화문 극우 집회도 포퓰리즘이고 여의도 촛불문화제 집회도 포퓰리즘으로 부르며 양비론을 구사한다. 엘리트의 입장을 양비론의 우산을 펼치며 보호하고 엘리트 중심의 의회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식이 이른바 의식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분석가나 기자들의 행태이다.

어떤 낱말이 모든 것을 지칭하거나 애매모호하게 사용된다면 이미 그 단어는 생명력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전체주의’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폐기하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날카로운 주장이 이를 입증한다. 인종 차별과 전쟁광의 논리인 극우 파시즘과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극좌 무장투쟁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짜 뉴스로 대중 선동을 일삼는 대중선동 집회와 스스로 팩트 체크를 하며 기성 언론을 비판하는, 깨인 시민들의 자발적 집회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두 가지 유형의 정치운동을 무분별하게 동일한 언어로 동급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족보 있는 단어를 난데없이 족보를 무시한 채 임의적으로 남용하는 일은 이른바 전문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유행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더 이상 남발해서 애매한 양비론의 희생양으로 만들지 말고 엘리트 권력을 은폐하는 우산으로 사용하지 말기를. 냉전식 선동 방식으로 현재 일고 있는 사건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면밀한 분석 대신하지 않기를. 포퓰리즘에 그 원래의 의미를 돌려주고, 촛불문화제를 통해 우리 시대의 진리(검찰개혁과 언론개혁, 불공정한 제도 개혁 등 엘리트 파워 폐지)가 현현하고 촛불시민이 새로운 정치 주체로 호명되는 사건적 의의를 무시하지 말자.

의철학의 지도 그리기 – 최종덕의 『의학의 철학』 서평 [철학자의 서재]

의철학의 지도 그리기

최종덕의 『의학의 철학』 서평

 

김범수(한철연 회원, 상지대)

 

평생에 걸쳐서 하나의 이론적 지형을 그려낸 저작이 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분야라서 그 노고만큼의 화제나 명성을 얻기도 힘들다. 이 소모적인 일을 저작에 대해서 짧게 말하려고 한다. 이 책은 최종덕 교수가 쓴 『의학의 철학』이다. 이 저작은 아마도 교과서와도 같이 필요하면 소환되어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뒤에도, 20년이 지난 뒤에도 독자들에게 소환되어 저작에 그려진 ‘의철학’이라는 낯선 지형을 탐색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깊이의 책을 독해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의학의 철학』은 최종덕 교수가 학자로서의 평생 업적을 집약해 놓은 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기센대학에서 양자역학의 존재론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물리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시도를 해왔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관심은 물리학, 수학에서 진화론과 생물학으로 넓혀갔다. 물리 대상에서 생명으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몸으로 관심분야가 확대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저작의 주제는 다수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의학 철학이다. 이 과정을 살펴본다면 저자의 이력은 과학 철학이라는 큰 울타리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분기해서 생물학이며 의철학으로 꽃을 피운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작은 이미 앞선 『생물철학』, 세종도서상을 받은 『비판적 생명철학』의 연장선이자 발전이기도 하다. 실제로 『비판적 생명철학』에서는 단순히 생명을 규정하기 위한 마이어와 같은 학자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론적 사고와 생기론적 사고를 비교하면서 생명의 특성 안에 상호작용, 혹은 공생의 의미를 살피고 있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따뜻한 인문학 안에 과학적 사고의 요청과 필요성을 소환하려는 저자의 이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유는 자연스럽게 진화론과 연결되면서 『생물철학』에서 『의학의 철학』을 집필하게 될 전조가 감지된다.

최종덕 교수가 쓴 『의학의 철학』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제법 두껍기도 하거니와 생소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주제가 배치되어 단번에 읽어 보겠다는 야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버거울 수 있다. 이에 많은 분량을 간단하게 분류하여 그 흐름을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구성을 임의로 재배치하면 크게 세 주제 혹은 네 묶음으로 재분류할 수 있다. 1장과 2장, 그리고 11장은 의학철학의 존재론적 문제가 중심을 이룬다. 존재론적 문제에서 인식적 차원의 논의로 이해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3장, 4장, 5장이다. 그리고 인식론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인식적 문제의 주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독자적인 부분으로 이해할 법한 9장과 10장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면역학과 노화방지학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6장, 7장, 8장의 진화(의학)론이다. 이렇게 보면 대략 세 주제 혹은 네 묶음으로 재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의철학의 존재론적 물음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11장에서도 이러한 구성에서 철학자의 분투가 그려진다. 왜 그런지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 존재론적 물음은 흔히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서 찾는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에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계속 묻는다. 가령 용기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 이 간단한 질문은 대화 상대를 늘 곤경에 빠뜨린다. 심지어는 이 물음을 던질 소크라테스마저도 ‘나도 잘 몰라’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바로 이런 물음이 존재론적 물음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마저 무지를 고백하게 만드는 존재론적 물음은 거인족(티탄족)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언뜻 인식론적 차원에서 논의가 접근되는 것 같지만, 어김없이 “~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한다. 이 물음을 그대로 ‘의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구체적으로 제기해 보자.

저자는 의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우회적인 답을 내린다. 그 답의 키워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고, 다른 하나는 플랫폼이다. 저자가 말하는 의철학은 다음과 같은 우회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철학은 추상적인 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실존적인 현실 문제도 깊이 다룬다. … 철학은 미술작품이나 문학작품에 대해 미학적 해석을 시도하며, 로봇윤리와 같이 인공지능의 가치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의학에 대한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의료윤리와 같은 가치론을 다룰 수 있는데, 이런 분야를 ‘의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 엄밀하게 이런 정의는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하지만 의철학의 위상을 매우 솔직하고 정확하게 지도 그리기를 한 것이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를 상상해보자.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한다. 그 지도는 여행 전체 일정을 바꿀 수도 있다. 지도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낯선 곳이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라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바뀌게 된다. 이로부터 여행은 더 안락하고 즐거워진다. 이 책에서는 의철학을 설명하면서 그 인식론과 존재론, 가치론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은 매우 불친절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향으로 책이 정리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의철학이 다루는 존재론의 문제, 인식적 문제, 가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하나의 의철학 지도로 톺아보면,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이나 깡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 새롭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구체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학의 철학』에서는 그려진 지도가 매우 자세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영토를 표시하는 지도가 아니라 풍경이 그려진 지도의 형식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지도 그리기로 설명한 존재론적 문제에서 인식적 차원의 논의로 좀 더 세분하여 나아가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3장, 4장, 5장, 그리고 9장과 10장으로 연결된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야하는 부분이 바로 질병에 대한 ‘인식’이다. 질병이 무엇이고, 왜 생기는지를 알 수 있다면 건강과 장수의 희망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 분류 의학의 존재론적 기초를 다루면서 질병마다 고유한 본질을 따로 갖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로부터 근대 의학이 탄생할 수 있는 병리학의 위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분류 의학의 존재론적 의미가 질병관의 역사적 모델과 함께 상세하게 4장에서 다뤄진다. 그리고 의료인류학의 인식적 기초를 5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의료인류학은 인간의 건강이 사회적 요소에 의해서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연구 분야이다. 의료인류학은 문화적, 역사적,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 질병의 경험을 기술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질병이 단순히 실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료인류학적으로 문화 횡단적이고, 역사적이며, 진화론적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6장부터 8장까지 최종덕 교수는 진화론과 의학의 관계를 조명한다. 진화에 관한 논의는 물론 라마르크나 다윈과 같은 학자들의 논의에서 출발하지만, 이내 진화 의학으로 발전적인 지도를 그려간다. 진화의학은 우리 신체가 적응진화의 소산물이라는 진화론적 인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질병과 병리적 징후군의 기원과 원인을 이해하여 더 나은 치료와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임상과 이론의 의학 체계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진화의학은 의학계에서 외면 받아왔다. 최종덕 교수는 그 이유를 진화 의학의 다양한 해석을 제공하면서 임상의학에서 이용될 수 있는 접점을 그려보고 있다.

한편 5장에서 다루어진 의료인류학은 삶의 문화적 실존과 더불어 삶의 실존을 억압하는 현실의 사회-역사적 조건을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여러 감염병의 파장으로 지역적 의료환경과 보건 정책 등을 따져보게 된다. 이로부터 건강 모델이나 공중보건 모델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9장에서 면역의학으로 연결될 수 있다. 면역의학은 면역학적 사유체계를 통해서 질병을 해석하고 생리의 역동구조를 이해하려는 인식론적 태도를 말한다. 이 인식적 태도에서 공진화와 공생과 같은 개념이 따라 나온다. 그리고 이로부터 공존의 존재론, 즉 숙주의 면역작용과 기생체의 공격작용이 하나의 방향이 아니라 변화를 겪는 공존의 존재론적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책 전체를 보면 의철학을 구성시킬 수 있는 인식론적, 가치론적 태도가 다시 존재론적 위치에서 다시 탐문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처음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의철학이란 무엇인가? 아니 이 질문은 실용적으로 다음 질문으로 대체해 보자. 의철학은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가? 『의학의 철학』에서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캐플란은 1992년 “의철학이 존재하는가?”라는 논문에서 고유한 영역이 가능하려면 그 영역만의 핵심 교과서를 필요로 한다고 지적한다. 의철학은 그 당시까지 고유 영역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고립된 지식의 섬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서 그는 의철학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비관적인 주장을 담았다. 하지만 의철학은 고유한 영역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마컴은 의철학의 고립성을 부정한다. 의철학 교과서가 미비하고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계속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고 있고, 앞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마컴(Marcum)은 의철학의 고유성을 제기한다. 바로 이런 설명이 앞으로의 의철학 발전을 위한 플랫폼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책 11장은 본질적이라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 등 여러 조건에서 의철학의 규정이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플랫폼’이라는 형식을 제안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은 세상을 보는 비판적 시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적 시선을 잃지 않는 관점이며 문제와 문제 아닌 것을 구분하여 진짜 문제를 질문하는 태도를 말한다. 의철학이란 그런 질문을 의학에 던지는 사유행위이다. 의철학은 철학사에 갇혀 있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인문의학과 의료인문학의 방향과 지향을 안내하는 나침판이다.”

플랫폼은 빈 그릇이다. 그리고 그 빈 그릇에는 매우 다양한 것을 담을 수 있다. 애초에 『의학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두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지도 그리기’와 ‘플랫폼’이 그것이다. 이제 이 책 『의학의 철학』으로부터 지도와 플랫폼을 하나의 격자로 만들어서 각자가 그려갈 의철학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제59회 정기 학술대회 안내(zoom-온라인)

[학사상구회] 2020년 가을, 제59회 정기 학술대회 안내 –

한철연 정기 학술대회를 알립니다.

 

일시: 2020년 12월 12일 토요일 오후 1시 50분

온라인(Zoom) 방식으로 진행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격상됨에 따라, 이번 학술대회는 온라인(Zoom)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Zoom 회의 ID: 816 5313 0565 / 암호: 12345]

《한국 근현대 철학과 ‘운명’》이라는 주제로 2인의 발표와 2인의 토론·논평이 준비돼 있습니다.

그리고 각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청중 질의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종합 토론 시간이 이어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해 드린 포스터를 참고해 주십시오.)

비록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이번 학술대회 역시 열정적이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개최될 것을 기대합니다. 회원 및 관심있는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자본론 에세이-6, 제10장: 노동일 ) [내가 읽는 『자본론』]

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누구나 평생의 고독과 공허함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흔히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 구멍을 채울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 다르다. 어떤 이는 그 구멍이 신(神)의 자리라 하고, 다른 이는 사랑, 혹은 소울메이트의 자리라고 한다. 누구는 자연과 일치하는 삶의 자리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결코 채워지지 못하기에 그저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고독이 있는 반면에, 요즘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공허나 외로움은 무척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현대의 공허는 마음에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무언가가, 두꺼운 고무마개 같은 것으로 막고 있어서 질식당하는 느낌이랄까. 구멍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고무마개는 그렇지 않다. 그건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최근 6~7주 동안 일종의 생활 실험을 진행했다. 청년 중 대다수가 여가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넷플릭스, 인터넷 쇼핑 등과 같이 화면을 통한 활동을 하면서 보내는데, 우리는 처음에 그러한 생활방식이 우리 공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디어에 찌든 ‘한심한’ 우리의 생활습관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실험의 제목을 ‘화면과 단절하고 새로운 것과 연결하기’로 정하고, 각자의 규칙을 세워 실험을 진행해봤다. 실험의 핵심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세상, 그리고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보자는 것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실험은 실패에 가까웠다.

나는 삶에 있어서 가장 회복하고 싶은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유대감이었기 때문에 실험 기간 최대한 많은 시간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거나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 5일 출근하는 데다, 통근 3시간, 아침에 준비하는 시간과 씻고, 자고, 최소한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시간을 빼면 24시간 중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3시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수면 시간을 5시간 반으로 잡았을 때 가능한 얘기다. 나는 그 3시간을 주로 녹취록 푸는 알바와 글을 쓰고 강아지와 노는 시간 등에 할애하며 보냈다.

실험을 시작했으니, 이제 그 3시간을 사람에게 할애해야 했다. 나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평일 저녁에 약속들을 끼워 넣고, 주말까지도 사람들로 꽉꽉 채웠다.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 당연히 좋았지만, 같이 있는 내내 나를 짓누르는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나는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너무나도 피곤해서 친구들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고, 이들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도 해주지 못했으며 많은 시간을 내주지도 못했다. ‘내일 출근해야 해서’, ‘집에 가서 또 할 일이 많아서’라는 말들로 늘 아쉽게 헤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진 후 홀로 집에 가는 길이면 뭔가 찜찜하고, 함께했음에도 부재(不在)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와서는 밀린 일을 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그러면, 다음날 출근해서 졸음을 견디려고 몸속에 커피를 계속해서 들이붓는다.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마음이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몸이 안 좋아지고, 머리가 수시로 지끈거렸다. 그러다 보니 정신상태도 그리 온전치 못했던 것 같다. 좋자고 하는 실험이었는데 삶이 더 망가졌다. 그리고 나는 더 외로워졌다.

‘현대인이 살아내야 하는 삶은 우정이고 연대고 뭐고, 불가능한 삶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마음속 빈 공간을 아무리 채우고 싶어도 불가능한 삶. 이토록 지치고 피곤한데 다른 사람의 삶에 진정으로 귀 기울 힘이 남을까. 사람이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과 소비가 채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지?’ 앞이 막막했다. 지금이야 겨우 인턴이라 몇 개월만 지나면 다시 조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겠지만, 나중에 생계를 위해 노동하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텐데, 그 안에서 내 삶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염려되었다. 사람도, 감각도 흐릿해진 삶을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그저 화면을 들여다보며 공허함을 견뎌내는 일에 익숙해질까.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해답을 찾아가던 중 나는 조금 더 무기력해졌다. 처음에는 내 습관과 마음가짐만 바꾸면 덜 외로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여가는 나의 것이 아니었고, 다음날 출근해서 일할 상태로 내 몸을 되돌려놓는 일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여가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거나, 느긋이 앉아 독서를 하는 것 등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모해서는 안 되었다. 집에서 충전 중인 핸드폰을 집 밖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몸은 오로지 ‘충전’이라는 것에, 집이라는 공간에 메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노동을 해야만 하므로 구멍을 채우는 것은 개인의 몫일지 몰라도,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은 구조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쓰는 다이어리의 월간 페이지를 펼쳐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온다. 31개의 네모난 칸이 기대되고 설레는 날들이 아니라 마치 통과하고 이겨내야 하는 퀘스트(Quest)로 보인다. 언젠가부터 ‘오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침을 맞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매일 매일의 끝에 나는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유와 우정일까, 풍요로움일까. 혹은 암 덩이처럼 불어나는 고립감뿐일까.

 

『자본론』 제10장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히 설명한다. 10장은 ‘노동일’에 관한 장인데, 노동자의 하루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마르크스가 친절히 설명해주는 장이다. 먼저,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노동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일은 하루 24시간 전체를 포함하는데, 그중에서 노동력이 다시 봉사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약간의 휴식시간은 뺀다.”

 

자본가의 시각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기 생에 전체에 걸쳐 노동력 이외에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노동자에게는 물론 휴식과 여가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간은 사실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 바쳐지는 충전의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그리하여 우리가 신체의 성장과 건강의 유지에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즐기는 데 필요한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식사마저도 다음 노동을 위한 연료가 될 뿐이다. 마치 기계에 기름을 부어주듯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평균 식사시간이 12분뿐이라는 택배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1 노동일 안에 운동시킬 수 있는 노동력의 최대한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더 밀어붙이게 되는데, 아예 노동자의 수명을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탐욕스러운 농업경영자’가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을 맞바꾸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1

토지의 비옥도는 땅의 ‘기(氣)’와 같은 개념이다. 땅의 에너지는 일정량만 있어서, 다음 해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싶으면 땅의 기운이 전부 소멸하지 않을 방식으로만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작물에 따라, 어떤 땅은 한 번 농사지으면 소모된 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7년이 필요하기도 하다. 땅의 힘을 한꺼번에 다 써버리거나, 땅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 땅은 죽게 된다.

하지만 농업경영자에게는 땅의 수명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땅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역시 천지에 널린 것이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농업경영자가 땅의 기를 전부 사용해 최대의 이윤을 창출한 후, 죽은 땅을 내버려 두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듯이, 자본가도 노동자의 수명을 길고 가늘게 유지하는 것보다는, 짧고 굵게 끝내려고 한다. 노동자의 노동을 최대한도로 쓰다가, 노동자가 나가떨어지면 다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이 자본가에게는 더 효율적이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노예무역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했다. 노예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노예의 노동이 있어야만 지장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노예 소유자는 노예를 당연히 인간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가 죽으면 당장 자신의 삶도 지속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노예는 외국의 ‘흑인사육장’에서 값싸게 보충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재료의 목적이 ‘소모되는 것’이듯, 그때부터 노예의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는 대신,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짜낸 후, 죽기라도 하면 다른 노예를 사 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노예무역 이후, 천지에 널린 것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노예의 수명은 그가 생존할 때의 생산성보다 덜 중요하게 되었다”2

 

생명과 맞바꾼 이 노예무역의 효율 중심 원리가 현대를 사는 내게 낯설지 않음이 가슴 아프다. 이 원리는 개인이 삶의 풍부한 면모들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존재의 가치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노예무역과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노동자가 죽었고, 2020년 상반기만 해도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만 470명이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임을 잊고 살아서 ‘노동자가 죽었다’는 말에,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가 죽은 것처럼 느끼지만, 노동자의 죽음은 친구와 가족의 죽음, 나의 죽음과 같은 말이다. ‘노동자가 죽었다’와 ‘사람이 죽었다’는 같은 말이다. 산재만 불합리한 죽음으로 볼 수 있을까. 자살과 교통사고까지도 모두 다 생산효율이 최우선인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재’가 아닐까.

마르크스, 엥겔스와 베를린 TV타워

노동일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읽으며, 다시금 우리의 일상이 얼마만큼이나 우리의 것이 아닌지 실감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매일 못난 자신만을 스스로 자책하고 있다.

한 가지 이야기로 올해의 마지막 에세이를 마무리하려 한다. 최근에 읽은 홍은전의 『그냥, 사람』3이란 책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다. 사회는 장애인의 부양의무를 그 가족에게 지운다. 하지만, 장애인이 홀로 생활하고 이동하기 힘든 사회에서 장애인의 부양의무가 지워진 가족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개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을 감당하라고 강요하니 학대와 폭력과 방치가 다반사다. 라면을 끓여 먹다 불이 나서 다친 동생과 세상을 떠난 형의 이야기가 ‘가정사’를 넘어 사회적 문제인 이유, 치솟는 청년 자살의 원인이 청년들의 나약한 ‘멘탈’이 아닌 이유,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한 일이 해당 기업의 회장만의 잘못이 아닌 이유는 이 모든 일이 사실, 못난 개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한 개인이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연대하고 보살피는 사회가 필요하다.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뿐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지금은 다소 일그러지긴 했어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민주정치를 한다.

만약에 모든 건물과 시설, 교통수단이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리한 구조로 되어있었다면, 사회의 돌봄이 가정의 보육 부담을 덜어줬다면, 청년들이 어렸을 적부터 서로 경쟁만 하도록 부추기는 교육과 구조가 아니었다면, 노동자들의 휴식과 안전이 법으로 보장되었다면, 우리는 이토록 홀로 버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죽음이 일상이 되어 무감각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020년은 코로나-19와 장마의 해이기도 했지만, 전태일 열사 50주기이기도 하다. 전태일은 더 이상의 전태일이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전태일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외롭고 아프다.

2021년은 2020년과 달랐으면 좋겠다. 우정과 연대가 가능한 일상의 여유를 위하여, 사람과 자연의 생명을 착취해왔던 자본주의의 효율 중심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죽음이 곧 사회의 죽음임을 모두가 알아서 어떤 사람도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그리고 그 누구도 홀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있는 삶을 위하여.

 

그 첫걸음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부터 통과시켜야 한다.

 

출처: http://nomoredeath.kctu.org/measure/contents.php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홈페이지

 

  •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내가 읽는 『자본론』]의 2020년 연재를 마칩니다. 2021년 다음 연재가 시작될 때까지 잠시 쉽니다.

 


  1. 『자본론』, p.359.

  2. 『자본론』, p.360.

  3.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로 있었던 그가, 그간 한겨레에 투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책.

6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6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

『인식과 관심』은 근대적 지식 형식의 기초를 인식하고자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시도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하버마스가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제시했던 사회적 지식에 관한 역사 맥락적 분석에서 완전히 벗어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틀어 전념하고자 했던 기획으로 이동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저작이었다. 새로운 기획은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인데, 그것은 분화된 인간 지식과 행위의 실제적 토대를 이루는 “미시논리적” 수준과 사회적 근대성을 발생시킨 “거시논리적” 수준 모두를 포괄한다. 근대성은 이러한 토대를 구현하는 실천들이 새로운 제도들과 다양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이룩된다.

비판사회이론의 명확한 개념화라는 작업에 있어서 『인식과 관심』의 인간학적 지향을 승인하는 것은 적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학, 특히 언어행위이론의 한 분야인 화용론이라는 인접 분과학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는 합리성 이론의 원천을 [언어행위라는] 사회적으로 뿌리내린 일련의 보편적 능력들 속에서 발견하기 위한 시도였다. 언어를 의미 목록으로 여기기보다는 상호주체적 체계이자 조정 행위로 간주하던 하버마스는 어떻게 언어가 실제로 행위 조정에 활용되는지 탐구하였다. 즉 화자와 청자들이 서로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이룩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핵심적 능력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것이다 (CES를 볼 것).

이런 발상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현대 언어학과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이었다. 하버마스는 모든 자연 언어들의 저변에는 보편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언어행위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화용론적으로 불가피한 기술과 능력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없이는 행위 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라는 화자와 “너”라는 청자의 위치를 자유롭게 번갈아 가며 변환시킴으로써 인칭대명사의 체계 내에서 부여되는 위치를 확정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능력은 올바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발언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데에 필요하며, 상호주관적인 언어 행위의 대칭적이면서 호혜적인 요구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특히 참이라고 주장되거나 정당화된 발언들의 실천적이면서 사회적인 차원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초기 저작이래 지속되어왔던 철학과 재구성적 과학들 사이의 밀접한 협업 관계를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 (1981 [1984/1987])』에서 마침내 완성된 형태로 주장할 수 있었다. “자리 지키는 자이자 해석자로서의 철학”이라는 논문은 이러한 입장을 요약적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 저작에서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들을 분석하면서 사회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 이론은 성인 화자와 청자들이 집단적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자기 및 상대방에게 부여해야만 하는 언어 능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을 재구성하기 위해 여러 학문 분야를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는 언어학과 행위 및 논의 이론, 발달심리학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이론들과 이에 연관된 인지적이고도 도덕적인 학습 과정에 대한 이론적 연구방법들, (인간의 의사소통을 자연 언어에 숙달되는 것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행위로 분석하는) 언어행위이론 그리고 경험적 근거를 지닌 자연적 논의 이론들까지 섭렵하였다.

『의사소통행위이론』 역시 여러 사회학 분야들의 역사, 구조 그리고 목표에 대한 심오하고도 일관된 문제로 구성되어있다. 거기에는 막스 베버의 합리성으로서의 근대화 이론,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에밀 뒤르켐의 세속화 및 집단 의식 변형이론 그리고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에 대한 깊이있는 해독이 망라되어 있다. 이처럼 놀랍게도 다양한 지식들을 묶어내게 되면 그 이론은 중심점이나 안내자 없는 상태로 머무르게 되어 이론 기획 전체가 전복될 위험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서의 철학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하버마스의 입장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이러한 접근 방법은 궁극적으로는 심오한 철학적 시도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은 근대적 주체와 사회적 삶에 대한 근대적 형식들의 바로 그 구조 안에 존재하는 합리적 행위의 잠재력을 찾아내고, 식별하고, 정교화하려는 목적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는 언어 능력에 관해 보편 화용론이 작업하던 세부 사항을 통하거나, 해석 사회학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방법론적 논쟁을 통하는 등의 모든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으로써 이런 [근대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에 대한 주요 위협들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위협들에 대응할 수있는 방법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버마스의 지적 영향

 

하버마스가 철학과 사회 영역에 끼친 가장 의미있고도 지속적인 영향은 물론 추산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개략적으로는 소개할 수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철학 및 정치이론을 다룬 저작들은 2차대전 이후 반세기와 21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서양철학의 변형의 와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 영향은 다음과 같은 세 측면으로 부각된다.

 

학제적 협력

첫째, 위에서 논의했듯이, 하버마스는 철학에 융합적 학제적 백과사전적으로 광범위하게 접근하면서 철학적 활동의 기존 모델(때때로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되었는데)에 사려깊은 대안을 제시하였다. 철학 활동의 기존 모델은 고독하고도 자아 성찰적인 철학자가 내적 의식의 심연에서 심오한 진리를 불러내는 이미지로 그려졌는데, 이와같은 철학적 활동 방식은 2차대전 이후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하버마스의 철학 저작은 방법론적 고립이라는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등지고 있다. 이제 철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성과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가 오가는 대화의 한 당사자로서 참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철학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전문적 기술 용어로 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견을 공적 토론에 적합하도록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데 도움을 제공하는 통역사로서의 책임이거나 필요하다면 그런 공적 토론의 장에서 심판관으로서의 책임을 맡는 일에 그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은 대중적이다. 아마도 [하버마스의] 이런 철학적 모델은 장구한 세월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역사학이나 제도의 기나긴 역사를 다루는 사회학과 다르다. 이 철학 모델은 자연에 대한 그리고 학문적 혹은 과학적 탐구의 한계에 대한 고도의 자기 성찰성과 자기 인식의 문제를 끈덕지게 다룬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해 독점적으로 접근하게끔 하는 원칙과 방법을 모두 단념했다. 진리에 대한 독점적 태도는 여타 관련 학문에서도 결핍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철학의 본질과 목적을 축소시키는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철학에게 과학의 시대에서도 적합성을 유지하도록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이성의 복권

둘째,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성의 복권으로 대표된다. [앞서 보았듯이] 하버마스는 “자리하는 자 및 번역자로서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이제까지 철학은 여타 학문들이 [자기 영역에서 발견한 사실을]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학문들이 다양한 인간 문화의 영역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최종적 판단을 내려주는 역할을 맡아왔다고 허세를 부렸는데 그러한 허세를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말이 “합리성의 수호자”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포기하여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주체와 이른바 이성적 중핵의 불확정성에 대한 영미 분석적 인식론, 언어철학, 논리학 및 유럽 대륙의 ‘포스트모던’ 이론들의 궤적과는 다르게,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은 인간이 시도해왔던 모험의 중심에는 이성이 있어야 한다는 고대 철학의 주장을 유보 없이 받아들인다. 나아가 하버마스가 방어하려던 이성이라는 것은 인류의 기본적인 역량이자 재능이다. 우리는 이성이 인간사를 의식적으로 규제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강제적 규범이나 주장들의 원천으로서 간주될 수 있으려면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또한 이성은 토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즉 인간 이성 및 보편적 주장의 원천으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자연적 혹은 사회적 진화의 우연한 과정 속에서 얻은 자연적 결과물로 여겨질 수 없다. 이성이 사회적 개인적 규범들의 정당화 요구에 관한 인식가능한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저 성공 전략이나 타산에나 관련된 합리적 계산 능력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궁극적으로 이성은 규범적인 것이다.

이성의 복권과 관련된 이 두 번째 주장은 [철학은 자리하는 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는] 첫 번째 주장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주장은 철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내 인접 학문과 협력적 상호작용에 나서는 탈신화적 실천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실 하버마스적 철학의 기획에서 발견되는 독특성은 이 둘[이성에 대한 겸손한 태도와 이성이 인간적 사유와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입장] 간의 조화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기존 특성과 자율성에서 연유하는 역할과 방법을 가치 절하할 것을 요구하는 [겸손한] 입장은 이성의 중심적 위치를 복권하려는 입장과 조화될 수 있다. 만일 하버마스의 작업이 ‘주체 철학’ 및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에서라면 말이다. ‘주체 철학’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이성을 자율적 주체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입장을 거부하고, 이성이란 단지 상호주관적 상호작용과정에서 도출되는 특성일 뿐이라는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다.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철학적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본래적 토론장은 자기 성찰적 정신이 수행하는 내적 삶이라고 여겼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있어서 상호작용은 사회 속에서 주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언어를 매개로 한 것인데, 이런 상호작용은 주체들의 [내적] 자기 관계 과정 속에서 도출된 것으로 간주되며 그에 따라서 패턴화한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상호작용, 즉 상호인격적 의사소통을 하면서 근거들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끌어진다는 것을 요점으로 삼는다. 이런 류의 협동적 의사소통이 성공하려면 관련 담론 절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합의를 지향해야만 한다. 만일 담론 참여자들이 합당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이 담론 절차에 관련된 모든 참여자들은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평등, 호혜성, 솔직함 혹은 비기만성 그리고 공정성의 규칙을 채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은 궁극적으로는 정당화가 가능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조건들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정의 그리고 법적 공정성과 같은 ‘실생활에서 유통되는(downstream)’ 규범적 주장들을 위한 토대로 기능한다.

하버마스의 저 유명한 ‘담론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규범은 때로는 올바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는 행위 계획인데, 이 규범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된 조건들에 의해 조성된 담론 절차 속에서 합의해 낼 수 있을 때에만 정당화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론원칙은 합당성(reasonableness)이 정당성(rightness)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담론원칙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지니고 있는 직관을 철학적 용어로 정련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고 기꺼이 하기도 하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어떤 행위 요구지만 잘 실행되지는 않는 요구이기도 하다. 즉 굳이 전문적 자질이 없어도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올바른 사회에서라면 그들의 정치 체계 내에 될 수 있는 한 정말로 많이 제도화하도록 권고하는 그런 요구인 것이다. 지배는 결국에 가서는 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을 좌절시킨다. 그것이 사람들이 서로 강요하는 바 없이 협력 행위를 하도록 하는 기본적 자유를 부정하는 정치 체제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든,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자원들을 말라붙게 하여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은 훨씬 음흉한 형태든 상관없이 그러하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거대한 연구주제는 이성과 민주주의의 내적 연관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계몽 기획에 이바지하려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는 그저 정치적 권위(political authority)를 지닌 수많은 그럴싸한 경쟁적 정치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우연에 의해 잠깐 ‘현재 선호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대안들과 비교해 볼 때 합당한 것이라 할 만 하다. 하버마스는 민주적 삶의 합당성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헌신하였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그는 이러한 입장을 모든 적대자들에 맞서 방어해왔다. 이 적대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은 아마도 ‘포스트 모던’ 이론가들로서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들이 이성을 통해 민주적 삶을 강건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방어하리라는 약조를 포기해 버렸다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PDM).

이성을 이렇게 의사소통적이면서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으로 회복시키는 입장은 기존 철학이 지니고 있었던 야망을 위해 입증의 토대를 세우는 것을 열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오늘날의 철학과 사유에 영향을 끼친 하버마스의 핵심 요소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상호주관적 이성의 본성을 다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 시대에서는 지지하기 어려운 전체론(holism)을 재생하려는 실질적이고 배타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교활한 노력과, 합리성 담론을 전적으로 단념하는 풍조(이러한 풍조는 현대적 삶의 형식으로서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를 정당화하는 손쉬운 냉소주의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항해해 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탈형이상학적 사유

이것[탈형이상학적 사유]은 하버마스의 철학적 영향에 있어서 세 번째 및 마지막 측면으로 소개될만한 것이다. 수십년 간 하버마스는 자기의 철학적 기획을 ‘탈형이상학적(PMT)’이라고 일관되게 규정해왔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하버마스의 모든 사유에 있어서 중심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결여되어 있다. 이 용어는 특별한 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저술하는 방법을 위한 넓은 차원의 정신 혹은 전제(postulate)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우선 칸트적 주장을 수반한다. 즉 영혼불멸,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존재, 도덕적 의지의 자유의 사실 등의 철학적 형이상학의 전통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며 그러한 문제들은 인간의 끊임없는 관심사임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탐구는 우리 인간이 확정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이 무엇인지 인식하고자 하는 관심은 결국에는 인간의 인식 가능성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특정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는 탈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하버마스의 관점은 변화한 근대세계 안에서의 변화한 철학적 역할과 관련된다. 롤스의 ‘비이상주의적 non-ideal’ 정치이론 작업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게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의 현실이 복잡성, 다원주의 그리고 다양성을 향해 극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게끔 전개되고 있다고 논평한다. 이러한 전개양상은 철학이 정당하게 해명하고자 할 수 있는 문제 설정에 있어서 강력한 제한을 두게끔 한다. 롤스가 근대 민주사회에서는 전체론적 가치 합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가치다원주의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듯이, 하버마스 역시 근대성에 대한 ‘탈중심화된’ 자기 이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근대사회는 삶과 가치와 좋음의 이상과 연관된 기본적 지향에 대한 폭넓은 합의를 강제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다원주의의 조건과 좋은 삶에 대한 관념에 대한 갈등 아래서, 근대적 생활형식의 합리성은 오직 갈등을 규제하고 사회적 연대를 산출해내는 합당한 절차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합당한 절차들은 민주적 자기지배의 실천과 근대 민주 시민들이 지닌 관용적이고 겸손한 태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의사소통 합리성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근대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철학이 근대사회적 실존의 합리성을 인식하고 다듬으며, 혹시 가능하다면, 증진시키기는 일을 다시 맡아 보기 위해서는 초월적 지식과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를 획득하려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이 임무는 비록 기존의 것에 비해 훨씬 보잘 것 없지만 여전히 중대한 임무다.

 

공적 지식인이자 조언자

하버마스가 2차대전 이후 끼친 광범위한 영향에 대한 논의는 철학 이외의 다른 두 영역에 대한 언급 없이는 끝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하버마스는 철학자로서 이론화했던 ‘정치적 공영역’에 공적 지식인으로 관여하면서 괄목할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독일이나 세계 독자들을 대상으로 국제적 사안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열렸던 회담이나 토론에 하버마스가 참가하지 않은 적은 거의 드물었다.

하버마스가 참여했던 논쟁이 몇 개나 되고 어느 범위까지였는지 세세히 밝히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몇몇 부분을 부각시켜보기만 해도 그 영향력은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1950년대 하버마스는 새로운 독일연방공화국이 민주적 지배의 요구를 그저 관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해 갖춰야할 정치문화의 이행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핵심적 목소리를 냈다. 교육과정 개혁 문제부터 서독의 국제 협약, 모든 국내 정치적 사안, 전후 배상 및 기념 사업에 관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하버마스는 일관되게 열린 사회를 요구해 왔다. 냉전이 종식될 때 하버마스는 독일 통일이 자기 반성적인 토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소리 높였고, 통일 이후로는 유럽 연합 내 독일의 역할과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합과 확장의 중요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논평자로 활약해왔다(DW). 근래에 하버마스는 유전자 기술의 도덕적 정치적 측면에 대한 논쟁과 서유럽의 ‘세속적’ 사회 내 공적 삶에 있어서 종교 및 종교적 가치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여러 개입 과정을 통틀어 보자면, 하버마스의 작업은 공적 철학자이자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통합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탈형이상학적인 민주적 세계에서는 좋은 근거들만이 유일하게 궁극적 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지난 반세기 동안 하버마스는 활동적 철학자로 활약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분포된 후배 학자들의 지적 성장을 촉진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버마스의 이전 제자들은 독일에서는 악셀 호네트, 하우케 브룬트호르스트, 라이너 포르스트, 그리고 미국에서는 토마스 매카시, 세일러 벤하비브, 낸시 프레이저와 같은 이들인데, 사실 이들이 비판이론 ‘3세대’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만한 것이다.

 

한철연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

김나윤(중앙대) 발표 2020.10.22.

 

 

링크:  https://youtu.be/RdOJenOs3Io

사진: http://www.hanphil.or.kr/photo01/view.asp?Page=1&Board_Key=349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줌(ZOOM)진행 영상입니다.

이번 월례발표회는 동양철학 전공자인 김나윤 선생님의 발표와 박영미 선생님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 주 제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

– 발표자 : 김나윤(중앙대 철학과)

– 토론자 : 박영미(한양대 철학과)

– 일 시 : 2020년 10월 22일(목) 오후 4시 ~ 6시

– 오프라인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온라인 : 줌(ZOOM)

마감알바에 숨겨진 비밀 [내가 읽는 『자본론』]

마감알바에 숨겨진 비밀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필자는 축구를 상당히 좋아한다. 직접 하는 것, 보는 것 모두 좋아한다. 축구 관련 기사들도 자주 찾아본다. 응원하는 팀의 경기는 직접 보거나 하다못해 하이라이트 영상이라도 찾아봐야 직성이 풀린다. 축구팬 최재식에게 축구를 볼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을 꼽아보라면 추가시간 극적인 동점 혹은 역전골이 터질 때, 연장전의 치열한 공방, 승부차기의 정적을 꼽을 것이다. 아마 필자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 순간 피치 위의 선수들은 정말 힘들겠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그 힘듦을 이겨내고 한 발짝 더 뛰는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에 열광하게 된다. 축구선수들도 팬들이 있기에 자신들이 존재함을 알 것이고, 그래서 힘들어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극적인 승부를 만든다.

그런데 만약 축구선수들이 경기를 뛴 시간만큼만 돈을 받는다면? 그것도 정규시간 90분 안에서만 돈을 받는다면? 말하자면 축구선수들이 정규시간 90분 중 경기를 뛰는 시간동안은 분당 10,000원의 돈을 받기로 계약한 것이다. 그리고 추가시간과 연장전, 승부차기는 가외시간으로 쳐 돈을 안 받고도 뛰어야 한다. 정규시간 70분 뛴 선수는 700,000원의 돈을 받게 된다. 정규시간 70분경에 교체 투입된 선수는 90분경까지 20분을 뛰고 200,000원의 돈을 받는다. 90분 풀타임을 뛰고 추가시간 5분을 더 뛴 선수는 950,000원이 아닌 900,000원을 받아야 한다.

말이 안 된다. 교체 투입된 선수가 아니고서야 모든 선수들은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힘든 게 당연하다. 더 힘든 것도 서러운 데 그 시간만큼 돈도 못 받으면 정말 그 선수는 억울해서 어떻게 살까?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축구팬 최재식은 전날 축구장에서 본 명승부에 취한 채 다음 날 아르바이트 작업장에 출근했다. 15시부터 23시까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 최재식으로 일하는 그는 14시 30분에 미리 작업장에 도착하여 업무 준비를 한다. 15시가 되기도 전에 전 타임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돕던 그는 15시부터 같은 시간대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와 둘이 23시까지 일을 한다. 분명 식당 입구에는 ‘22시 30분 주문 마감, 23시 영업 종료’라고 적혀 있건만, 오늘도 어김없이 22시 31분에 술에 취한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온다. 그나마 오늘 온 손님들은 소주 5병과 함께 1시간 만에 떠나셨다. 손님들이 있을 때 작업장 마감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30분은 더 마감일을 해야 퇴근할 수 있다. 작업장 문 밖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벌써 23시 57분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15시부터 23시까지 8시간 분의 임금만 받기로 구두계약을 했기에 추가로 지급받는 임금은 없다. 법은 그렇지 않다지만, 근로계약서 써주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집에 가서 축구게임이나 해야지’ 생각하며 아르바이트 노동자 최재식은 다시 축구팬 최재식으로 변한다.

작업장 마감 시간 아르바이트, 소위 ‘마감알바’는 그 시간대가 아르바이트 시간대 중 최악으로 꼽힌다. 일단 할 일이 많다. 작업장 청소, 하루치 정산(만약 정산을 하다가 장부에 구멍이 나면 아르바이트 노동자 임금에서 깎이기도 한다), 문단속 등등이 모두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직원이 해야 할 일이다. 차라리 일만 많으면 좋겠는데 식당이나 술집 마감알바면 영업 종료 시각이 되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 손님들을 잘 달래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해도 제 시각에 퇴근할 수 있으면 참 다행이다. 이래저래 일들을 하다 보면 원래 퇴근하기로 한 시간대는 훌쩍 지나있기 마련이다. 추가근로수당도 없다. 근로계약서 제대로 쓰고 근로기준법 지키는 아르바이트 자리는 이 나라에 없다시피 하니까. 힘든 일을 많이, 그것도 오래 하면서 돈도 못 받는 시간대의 아르바이트가 바로 마감알바이다. 마치 공짜로 추가시간을 뛴 축구선수처럼 억울할만한 사람들이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인 것이다. 일은 다른 시간대보다 더 힘들 뿐만 아니라 일하는 시간도 한도 없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그냥 힘들게 보이기만 하는 마감알바에 또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

비밀 이야기 전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 더 나아가 일을 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은 왜 일을 할까?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를 사고, 옷을 사고, 집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가끔 놀러 다니고 학비를 충당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애인이랑 데이트하는 것도 다 돈이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니 마감알바라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먹여 살리고 있다. 언뜻 보면 반대로 보일 것이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함으로써 노동자들과 그가 부양해야 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가 순전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면 고용주들은 왜 우리에게 일자리를 제공할까? 우리가 일을 하는 게 고용주들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게 아닐까? 만약 어떤 노동자가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면 그 10시간을 일해서 만드는 가치 중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10시간어치 전부일까? 적어도 5시간 정도의 몫은 고용주들이 가져갈 수 있으니 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것일 터이다.

물론 고용주들도 충분히 똑똑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중 일부,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본인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노동자들에게 준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고용주 본인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필요노동시간’, 그리고 이 때 행하는 노동을 ‘필요노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고용주, 즉 자본가가 가져갈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잉여노동시간’, 이 때 행하는 노동을 ‘잉여노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노동자들의 삶을 유지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간다. 우선 본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만약 노동자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면 그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식 교육이나 노후 대비도 신경 써야 한다. 또한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취미나 문화생활을 할 여유도 있어야 하고, 가끔 놀러갈 돈도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 본인이 위의 일들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준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밑에서 일을 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나머지 가치들은 자본가들이 가진 자본을 불리는 데에 들어간다. 그래서 필요노동이든 잉여노동이든 노동자들이 행하는 것이지만, 실상 그 노동을 소유하는 건 자본가들이 된다.

마르크스 『자본론』

‘잉여가치율’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언급한 개념이다. 마르크스에게 잉여가치율(rate of surplus-value)은 “가변자본의 (중략) 가치증식의 비율 또는 잉여가치의 상대적 크기”1를 뜻한다. 쉬운 말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자본이 자기 자신을 불리기 위해서 생산과정에 새롭게 집어넣은 가치를 분모로, 그 결과 새로이 생성된 가치를 분자로 하는 비율이 바로 잉여가치율이다. 100원을 투입하여 200원의 가치가 만들어졌다면, ‘(200-100)/100=1’, 이 경우 잉여가치율은 100%가 된다.

잉여가치율은 사실상 ‘잉여노동/필요노동’과 같다. 그리고 잉여가치율이 커질수록 자본가가 가져가는 몫도 커진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잉여가치율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잉여가치율은 비율이기 때문에 그것의 분모를 줄이거나 분자를 키우면 그 크기가 커지게 되어 있다. 즉 다른 조건이 같다면 필요노동을 줄이거나 잉여노동을 늘릴 때 잉여가치율은 커진다. 여기서는 필요노동을 줄이는 것보다 잉여노동을 늘리는 데에 집중해보자. 작업장 사장에게는 축복이고 마감알바 담당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는 비극인 마감알바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우선 필요노동은 거의 고정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 필요한 가치가 널뛰기를 타진 않기 때문이다. 어제는 하루에 필요한 열량이 세 끼 밥으로 충분했는데, 오늘은 열두 끼의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는 없다. 즉 필요노동이 고정된 상황에서 노동의 총량을 늘리면 늘어난 노동의 양은 전부 잉여노동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제 노동시간을 늘리면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남을 알게 되었다. 마치 축구경기의 추가시간이나 연장전, 승부차기와 같이 계속해서 그 끝이 미뤄지는 마감알바는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데에 최적화된 아르바이트 노동 시간대이다. 물론 여기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아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돈을 받고 일하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마감알바의 비밀은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힘듦이 단지 그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에 있음이 아니라, 자신의 주머니에 떨어지는 가치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행동하는 자본의 본성에 있음을 알 때 드러난다. 그냥 밤에 진상 손님이 와서 마감이 힘들다는 점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진상 손님이 와서 그 진상 손님을 처리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 수고의 대가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결국 그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고용하는 점주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하루하루 고단하게 장사해서 먹고 사느라 사장이 직접 마감까지 다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나에겐 대답이 있다. 그런 영세자영업자들 위에 또 다른 자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장사가 조금만 잘 되어도 임대료를 팍팍 올리는 건물주, 손해는 가맹점에게 떠넘기면서 이윤은 악착같이 뜯어가는 프랜차이즈 본사, 오히려 자신들의 소비자에게 갑질하는 거대 유통망, 통 큰 경영을 하겠다면서 좁아터진 골목 한편에 있는 슈퍼 옆에 편의점을 내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투 등등……. 이런 상황에서 영세자영업자들은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들이 일해서 번 돈을 거대자본에게 바쳐야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모순은 거대하기만 하고 거창하기만 한 말이 전혀 아니다. 당장 어머니 아버지가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이고, 학교 친구는 매일 마감알바 하느라 등골이 휜다고 신세한탄하며, 자주 가던 단골 식당이 어느새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하는 게 일상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너무 익숙해서 이게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익숙함에 속아버렸다.

익숙함을 거둬내고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게 새로이 보일지도 모른다. 마감알바라는 일상도 알고 보니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지 않았던가. 새롭게 보이는 세상은 무섭고 낯설게 보일 게다. 그래서 그냥 모른 채 살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면 모험을 떠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잠시 익숙함을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글 중간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관해 잠시 언급했다. 언급했듯 삶을 유지하는 것에는 의식주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필자는 이 사실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생물인 이상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목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으며 감성을 가지고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의식주 이외의 것도 상상해야 한다. 그런 상상력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힘을 모을 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의지가 실현되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바뀐 세상에서는 내 친구가 마감알바로 고통 받지도 않을 것이며, 행복하게 장사하던 사장님이 계시던 단골가게가 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하다 죽고 다치는 사람도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다.


  1. 칼 마르크스 지음, 『자본론Ⅰ 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2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