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읽는 『자본론』]
/0 Comments/in 내가 읽는 『자본론』, 블로그분과진 /by Jin Bosung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은 노동을 해왔다. 수렵을 하고 채집을 하거나, 사냥을 나가거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매일 매일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 이전의 노동 형태와 현재의 임금 노동에 차이가 있다면,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전의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이 내 것이었고 임금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은 자본가의 것이다.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우리의 신체를 판다. 회사든 공장이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안에 머문다. 우리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월말에 들어오는 월급뿐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자를 ‘자유로운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노동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것이고, 기저에서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of) 것이다.
많은 맥락에서 우리는 전자의 자유에 초점 맞추기를 좋아한다. 노동자 자신도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고, 자본가도 노동자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많은 채용공고들 중 어느 곳에 지원할지 선택할 수 있다. 서점에서 알바할지 식당에서 서빙을 할지 고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니까 노동자가 착취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고등학생 동창 중 최저시급이 7,530원이었을 때, 시급 5,500원을 주는 편의점에서 일한 친구가 있다. 시급은 적지만 위치로나 근무 시간으로나 그 친구한테는 그나마 최적의 알바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최저시급 이하로 임금을 주는 곳에서 일하기를 선택한 것은 친구니까, 이는 착취라고 할 수 없을까? 아니다. 명백한 착취다. 친구더러 ‘네가 선택했으니까 너는 착취당하는 게 아니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다. 마찬가지로 편의점 알바를 했을 때다. 졸업한 고등학교 근처의 편의점에서 약 2주간 일한 적이 있다. 나는 계산대 지키는 일이 아니라 물건이 들어오면 선반에 진열하고 창고에 정리하는 역할을 했는데, 사다리를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해서 1시간만 일해도 체력이 바닥났다. 4시간 동안 천천히 하면 됐을 것을, 내 속도에 따라 빨리 끝날 수 있는 일이라 늘 2시간 만에 일을 끝내고 집에 갔다. 두 시간이면 당시 시급으로는 약 15,000원이다. 하지만 2시간 일해서 15,000원 받고,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께 그만둬야겠다고 말씀드리니,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게 한 시간 만큼의 임금은 제하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고등학생 때 받은 나름의 노동교육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찾아가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부당하다고.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긴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나는 분명 노동을 했으니 내가 노동한 만큼의 임금은 주시는 게 맞다고. 어림없었다. 퇴짜를 맞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할까 고려했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나에게 없었다. 5만 원을 떼였다. 약 8시간 동안의 노동이 공중분해 된 것이었다. 내가 작은 빵집의 사장이었다면 8시간 동안 빵을 만들면 그 빵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이 이야기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명제는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진정한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권리라고. 노동력밖에 가지지 못한 노동자는 결국에는 어떤 걸 선택하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감내해야 한다.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free of) 노동자이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노동의 노예로 전락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나를 위한 노동’으로 보았다. 노동의 과정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의 직접적인 생존과 나의 잠재력 실현의 수단이다. 그래서 노동이란 내가 필요하면 하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길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시간을 조절할 권리도 나에게 있어야 한다. 현대의 임금 노동에서 후자의, 나를 위한 노동의 요소들은 전부 제거되고 전자의, 온전히 타인만을 위한 노동만 남아버렸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 동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퇴근해서야 조금의 자유의지를 되찾는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는 이러한 사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퇴근 후의 시간뿐이 아니라 노동의 과정 자체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국회의원과 정책 입안자들이 ‘완전고용’의 구호는 사실 틀렸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나 양적으로 늘어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다운 노동을 원한다. 하지만 이 요구는 너무나도 자주 무시당한다.
인간다운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요새 떠오르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란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아직은 개념으로서만 존재하지만, 최근에 정부에서 실행한 재난지원금 정책이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를 조금 구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재난지원금을 통해서 우리는 만약에 기본소득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기본소득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6년이었다. 내가 새내기가 된 해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이 개최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뭣도 모르고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봉사단에 지원해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스텝이 되었다.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발표자와 청중이 몰려왔는데 스텝의 특권은 강의실들을 기웃거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에 애써 귀 기울여 보니,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썩 괜찮게 느껴졌었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토지가 인류의 공동재산이라는데 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해 쓸 만한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 땅을 해당 농부의 소유로 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땅의 개간자가 토지의 소유자가 되는데, 이때, 페인은 그 소유자가 땅의 진짜 주인인 공동체에 빚을 지는 것이라고 봤다.1 토지뿐만 아니라 대기와 데이터, 기술과 같은 유무형의 다른 재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우리가 진정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시 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강렬히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맞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공동의 것인데 왜 누구는 그걸 가지고 부를 축적하고 누구는 굶주려야 하지? 우리의 노동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지?’ 그 이후부터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기회가 날 때마다 조금씩 공부를 했다. ‘기본소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유토피아적 세계. 하지만 알고 보니 기본소득은 또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에서 내가 쫓아다니던 한 미남이 있는데, 브라질에서 온 길고 검은 곱슬머리의 ‘마르코’였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즐겨보던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서 이집트 파라오 군대를 이끌던 내 이상형과 똑 닮았었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튼, 그한테 어렵게 말을 걸어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집에 가서 그의 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자기 소개란에 ‘나는 자유주의자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들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던 나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르코가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기본소득은 좌파에 의한, 그리고 좌파를 위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본소득이 보수와 진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나중이 돼서야 알았다.
물론 진보와 보수에서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보수는 기본소득 발상이 출발했던 ‘권리’의 개념보다는 ‘효용’에 더 집중한다. 생산력은 점점 증가하는데, 소비 주체는 줄어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순환의 위기에 대한 대안쯤으로 보는 것이다. 또는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대신 복지의 축소를 주장하면서 시장 이윤의 재분배에 개입하지 않는 작은 정부를 기대하는 것이다. 진보 측에서는 기본소득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신 삶의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평등, 그리고 인간다운 삶 등이 진보 스타일 기본소득의 목적이다.
그러나 양측의 찬성 견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양측의 반대도 드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복지병을 걱정하거나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유발하고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 안에서는 논쟁이 더 복합적이고 치열한데, 진보에서 기본소득에 반대를 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부의 분배’라는 사회적 당위를 실현하는 방법이 기본소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부의 분배가 부자들에게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이 국가에서 주는 소득의 수혜자가 되면 국가의 주인이 아닌 국가에 의해 통제를 받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우려도 있는데, 이 주장은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오히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기회가 열린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맑시즘(Marxism)으로 넘어가면, 그 안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이 갈린다. 마르크스가 근본적으로 주장한 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이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견도 있고, 기본소득이 실시되어도 자본주의는 존속되며, 생산수단이 노동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는 주체성을 잃고 오히려 사회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해 계급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약에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마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않을까? 혹은 취직할 나이가 되었으니, 다른 꿈을 꾸는 것은 엄두도 못 내기에 다음 생으로 미뤄두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에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걱정으로 의미 없는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이 뛰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다. 시민정치에 더 많은 참여를 하거나 금요일 저녁,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밥을 차려줄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아무리 달콤한 상상일지라도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입장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태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양 입장을 전부 고려하면, 기본소득 시나리오의 결말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살아있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자기가 좋아했던 소파 의자 위에 앉아 턱을 괴며 조만간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기본소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골똘히 고민할 것이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2012년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이끌어냈던 다니엘 헤니는 기본소득이 결코 답은 아니라고 한다. 대신 기본소득은 많은 것들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다. 기본소득은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나와 공동체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삶에 관한 질문이다. 나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한 번에 해결할 답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대신,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장되고, 이 질문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답이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새내기 때 자원 활동했던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관중 중에 일본에서 온 사회학 교수와 그 제자도 있었다. 순진했던 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제자가 웃어 보이면서 ‘그것은 누구나의 꿈이지요.’라고 했던 게 기억에 진하게 남는다.
<참고문헌>
다니엘 헤니・필립 코브체 저, 원성철 역, 『기본소득 자유와 정의가 만나다』, 오롯, 2016.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천관율, 「진짜 뉴딜은 기본소득이다」,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20~24쪽.↩
열여덟 번째 시간, 버팀목 [시가 필요한 시간]
/0 Comments/in 시가 필요한 시간 /by Jin Bosung열여덟 번째 시간, 버팀목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7월이 시작되고도 벌써 보름이 흘렀네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학교들이 전면 온라인수업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진통을 겪은 지도 벌써 4개월여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종강을 하고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죠?
2020년의 절반을 보낸 나에게 중간 성적표를 매겨본다면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남은 절반을 시작하면서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가요? 저는 2주에 한 번씩 좋은 시를 소개하는 이 “시가 필요한 시간”을 더 열심히 꾸며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운동도 할 거구요, 주변 사람들도 좀 더 살뜰히 챙기는 하반기를 보내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오늘 들려 드릴 시는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입니다. ‘버팀목’이라고 하면, 혼자 뻗어 자라나기에는 좀 얇은 가지들을 지탱해주려고 옆에 꽂아두는 나무 막대기를 말하죠? 방울토마토나 고추 같은 식물을 키울 때 옆에 세우고 식물이 기대어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버팀목입니다. 이 시는 시 텍스트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워낙 선명해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들어보시죠.
버팀목에 대하여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 귀로 읽는 시간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들어보았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드는 시죠? 저도 읽으면서 약간 울컥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이것이 다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거 같아 보일 때가 있죠. 특히 성인이 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거나,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면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뭔가 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많은 거 같아요.
이 시의 첫 시작에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나옵니다. 험한 바람에 쓰러져 있는 다 자라지 못한 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으면서, 옆에 각목을 하나 세워서 기댈 수 있도록 버팀목을 세워주죠.
쓰러졌던 나무는 버팀목인 각목에 기대어 다시 살아갑니다. 잔뿌리를 하나씩 내리고 곧 다시 싹도 틔우게 될 거예요. 하지만 각목은, 그 역시도 한 때는 살아있는 나무였겠지만, 이제는 깎이고 다듬어져서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죽은 나무 가지(조각)’에 불과하죠. 죽은 나무인 버팀목은 자신의 어깨를 산 나무에게 내어주면서 나무가 잘 자라도록 옆에서 자기 역할을 다 합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살아있는 나무가 싹을 키우고 잔뿌리를 내리며 자랄수록, 각목은 점점 햇빛과 비바람에 마모되고… 무수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삭아 없어지게 됩니다. 버팀목이 삭아 없어질 만큼의 세월이라면, 과거 태풍에 쓰러졌던 나무도 그만큼 성장해 있겠죠.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잘 자란 나무는 이제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어엿한 거목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시인은 나무가 더 이상 쓰러지지 않는 이유가 그 자체의 건장함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해진 나무가 스스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 나무를 버티게 해 주는 ‘사라진 버팀목’이 있다는 것이죠. 그 대목에서 이제 시인은 나무에서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내가 바로 쓰러졌던 나무인 셈이고,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버팀목이 되어준 누군가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허위허위’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면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먼저 ‘손발 따위를 이리저리 내두르는 모양’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손을 휘저을 때 “훠이 훠이”하는 의성어를 사용하는데, 그 모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힘에 겨워 힘들어하는 모양’이라는 뜻도 있어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가지의 뜻이 한 단어에 들어 있죠? 이 두 가지의 뜻은 시 안에서 절묘하게 만나게 됩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내두르는데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내가 혼자 힘겹게 걸어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 라는 뜻이 될 수 있죠. 시인은 아무도 곁에 없는 것 같고, 내가 혼자 힘겨워하는 것 같지만, 아버지와 이웃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응원이 나의 버팀목으로 서 있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이웃들이 태풍에 쓰러졌던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듯이,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지금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라고 시가 끝나고 있는데요, 이 시를 읽고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지금의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버팀목과 같은 가족, 친구, 이웃들의 격려와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내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 역시.. 단순히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시 지금 태풍 같은 어떤 어려움에 넘어져 계신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허위허위 저어봐도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외로움에 있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고, 여러분을 든든히 지켜 줄 버팀목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꼭 붙들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내시라는 메시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버팀목을 힘입어 든든한 나무로 자라셨다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댈 어깨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시면 어떨까요.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악동뮤지션과 양희은씨가 함께 만든 ‘나무’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악동뮤지션의 찬혁군이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갔던 경험을 가지고 작사 작곡 한 노래로 알려져 있죠.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그가 떠난 자리는 나무랄 것 없이 텅 비어 있었다”라고 끝나는데요, 이 <버팀목에 대하여> 라는 시에서의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내 곁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라는 시 구절과 뭔가 연결되는 것 같고 함께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골라 보았습니다. 마침 또 제목이 ‘나무’라구요.
오늘 하루도 힘 내시고, 이 시와 노래 한 편이 여러분에게 버팀목이 되길 바라며,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양희은, 악동뮤지션 – 나무 https://youtu.be/GLQTRlYyPco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신간 안내] 『의학의 철학』(최종덕 지음, 씨아이알, 2020년 7월 8일 발간)
/0 Comments/in ⓔ시철 아카데미, 한철연소식 /by Jin Bosung『생물철학』(2014)과 『비판적 생명철학』(2016)에 이어 이번에 ‘의학’을 주제로 최종덕 회원의 신간이 출간되었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만남’을 중심으로 오랜시간 연구에 매진한 저자는 한철연에서 마르크스와 자연학, 진화 생물학과 페미니즘, 환경철학 등 근본적이면서 시의성 있는 다양한 논의 주제로 세미나와 집담회를 진행해왔습니다. 『의학의 철학』은 진화와 노화, 그리고 면역이라는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자 철학적인 실존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시의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삶에 깊숙히 침투한 전염성 질병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할지에 큰 도움이 될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일독을 권하며 많은 회원들과 관심있는 분들의 서평과 견해를 기다립니다. 아래 출판사의 소개글을 전합니다.
의학의 철학
질병의 과학과 인문학
♦ 책소개
진화, 노화, 면역을 통해 몸이라는 자연을 인식하다
“이 책은 의철학 분야에 환영받을 만한 또 다른 성과일 뿐만이 아니라 의철학 분야를 유의미한 방식으로 진전시킨 책이며, 이런 점을 잘 알리려고 한 것이 내 추천 서문의 뜻이다. 또한 나는 이 책이 의철학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이 연구하는 데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미국 베일러 대학 의철학 교수 제임스 마컴 추천 서문 중에서
의철학은 철학사에 갇혀 있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인문의학과 의료인문학의 방향과 지향을 안내하는 나침판이다. 인문의학이 의학자만의 감성적 소유도 아니지만 인문학자만의 지성적 소유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철학도 철학자만의 특별한 사유구조의 소산물이 아니며 의학자만의 고유한 사명의식도 아니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갈등, 병원과 정책에 대한 사회적 갈등, 과학과 임상에 대한 지식론적 갈등, 문화와 인류에 대한 역사적 갈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런 갈등을 풀고 싶어 하는 문제의식을 갖는 모든 사람이 의철학의 주체이다.
의학의 철학은 과학의 경계를 벗어난 고통과 질병의 존재가 가능함을 알게 해준다. 어떤 유형의 고통은 과학의 대상보다는 실존의 문제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의학의 철학은 고통에 직면한 환자 개인마다의 실존과 규격화된 임상의 현실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성찰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눈을 키워준다.
♦ 출판사 서평
과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집중하지만, 거꾸로 철학은 문제를 일으키는 데 주목한다.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은 원래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인데, 가짜 문제를 골라내고 진짜 문제를 찾아 질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의학의 철학』에서 말하는 질문 역시 정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문제를 심어주는 데 있으며, 문제와 문제 아닌 것을 스스로 식별하도록 하여 거짓 문제를 해소하는 데 있다.
의학의 철학은 의학적 이론을 투영하는 렌즈이며, 의학적 세계를 비춰보는 유리창이며 의학적 인간학을 반성하는 거울이다.
의학은 질병 인식의 최종 목적지를 분명하게 향하고 있지만, 의학의 철학은 목적지를 향하는 수많은 길이 그려진 지도를 제공할 뿐이다. 어느 길이 더 좋은 길인지 쉽게 알지는 못해도 막혔던 길, 낭떠러지 길, 함정의 길을 가지 않도록 안내하는 것이 철학의 지도이다. 질병의 지식보다는 우선 질병을 이해하는 지도가 우선이다.
냉철한 과학과 성찰적 철학을 궁금해 하는 독자라면 의철학의 배를 타고 이 책의 지도를 따라 항해하면 진짜 건강한 거주민의 땅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진화, 노화, 면역을 통해 몸이라는 자연을 인식하려는 저자의 열망이 듬뿍 담긴 이 책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우리 몸들을 위한 귀중한 방향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 강신익 교수 추천서문 중에서
출처 : http://circom.tizi1011.gethompy.com/board.php?board=tnshopmain&command=shop&view=2_view_body&no=690&corner=&sort=gs_ord&indexorder= 도서출판 씨아이알
♦ 목차
지은이: 최종덕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양자역학의 존재론’이라는 주제로 독일 기센(Giessen)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상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화생물학과 의학의 철학 공부에 집중해왔다. 현재는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의 저서로 학술원 과학도서 우수상을 받은 『생물철학』(2014), 세종도서상을 받은 『비판적 생명철학』(2016) 그리고 『승려와 원숭이』(심재관 공저, 2016), 『뇌복제와 인공지능 시대』(최순덕 공역, 2020) 등이 있다. 이전 저서를 포함하여 저자의 모든 공부경력은 저자의 개인 홈페이지 <철학의 눈> http://eyeofphilosophy.net이나 새로 구축 중인 http://philonatu.com에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되어 있다.
[신간 안내] 『중국현대철학사론』(이규성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0년 6월 30일 발간)
/0 Comments/in 한철연소식 /by Jin Bosung『한국현대철학사론』(2012)과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2016)에 이어 중국현대철학의 흐름과 역사를 획득과 상실이란 주제로 짚어본 이규성 회원의 역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2017년 9월부터 한철연에서 2년 넘게 세미나를 열어, 일정 부분 집필한 원고를 가지고 동료 후배들과 토론을 하며 책을 써나갔습니다. ‘이 책은 결국 모두가 함께 쓴 것’이라는 저자의 겸사는 이 책이 폭 넓은 이해를 담고, 자기 안의 깊은 고민에서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방대한 분량(1,136쪽)이지만, 곧 한철연 회원 및 관심있는 분들의 서평과 견해가 나오길 바라며,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중국현대철학사론<이화학술총서>
획득과 상실의 역사

출처: http://www.ewhapress.com/ewhapress/164/subview.do?enc=Zm5jdDF8QEB8JTJGYm9vayUyRmV3aGFwcmVzcyUyRjY5MDYlMkZ2aWV3LmRvJTNG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책 소 개
20세기 중국 주요 사상가들의 세계상을 통해
중국현대철학의 획득과 상실, 그 역동의 역사를 짚어보다
이 책은 20세기 근 100년에 걸친 중국현대철학의 흐름을 짚어보는 철학서이다.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신민주주의 혁명인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인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자본주의 세계화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서구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적 지형의 변화와 더불어 전통철학과 변별되는 개념인 신철학(新哲學)이 동서를 막론하고 등장했다. 대대적인 동서문화의 충돌과 융회로 현대철학의 주제는 더욱 다양해졌고, 이질적 문화에 뿌리를 둔 상호적이고 혼종적인 개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20세기의 역사적 상황이 주는 과제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수용한 중국철학은 외세의 위협과 함께 들어온 이질적인 사고방식들을 만나 비로소 자신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되었고, 문제의식을 담아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서 학문적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중국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큰 철학적 흐름이 형성되었다.
‘정치·사회 철학’을 주장한 진독수(陳獨秀)와 모택동(毛澤東) 등은 반봉건·반식민을 위시하며 기존의 사회 위계를 극복한 새로운 민주사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문화주의적 형이상학’을 내세운 종백화(宗白華), 양수명(梁漱溟), 웅십력(熊十力), 풍우란(馮友蘭) 등은 회고적 입장에서 중국문화의 보편적 의의를 강조하며 전통문화의 재해석을 통해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논리적 이성주의 철학’을 주장한 풍우란(馮友蘭)과 김악림(金岳霖) 등은 이성주의 입장에서 동서 형이상학을 융회하는 것과 더불어 전통철학이 결여한 지식론과 형식논리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개별자와 타자성의 철학’은 장세영(張世英)이 표방한 사조로, 중국철학의 새로운 흐름들이 실증철학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며 사회적 관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내적 자유의 요구에도 응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사상적 중첩성을 띠고 발전해온 중국현대철학을,
대표적인 여덟 명의 주요 사상가와 그들의 세계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장과 2장에서는 정치·사회 철학을 주장한 진독수와 모택동의 사상을 살펴본다. 1장에서는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진독수(陳獨秀, 1879~1942)를 다룬다. 그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보고 스탈린 체제를 비판했으며, 후기에는 ‘대중민주주의’와 ‘민주공화주의’를 통해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행적을 애국계몽 후 신학문 학습까지의 시기, 북경대학 인문대학장 취임 후 5·4운동 발생까지의 시기, 공산당 초대 서기장 취임 후 퇴출까지의 시기, 좌익 반대파가 되어 민주공화주의자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2장에서는 중국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구축한 모택동(澤東, 1893~1976)을 다룬다. 그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표방하다가 인민공화국헌법 반포 후 사회주의 개조정책을 선포하며 혁명을 급진 좌경화했으며,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을 긍정하고 그에 대한 모순의 발견과 실천론을 강조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생애를 학습과 사상의 편력 시기, 중국혁명을 촉발한 중국적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사상 형성 시기, 문화대혁명을 촉발한 좌경 급진혁명론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3, 4, 5장에서는 문화주의적 형이상학을 주장한 종백화, 양수명, 웅십력의 사상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중국현대미학의 형성자 종백화(宗白華, 1897~1986)를 다룬다. 그는 유럽 낭만주의 흐름을 접하고 그것에서 예술적·종교적 철학과 비교미학을 수용한 후 동서융회의 철학과 공령·충실의 미학을 강조했으며, 중국적 생명주의 미학을 발전시켰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생애를 사상적 맹아기이자 모색기인 전기와, 예술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구제하고자 한 시기인 후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4장에서는 신유가학자이자 문화결정론자였던 양수명(梁漱溟, 1893~1988)을 다룬다. 그는 자기에 대한 반성적 이해를 표방하는 ‘자기학’을 생활문화로 삼으며, 이 자기학으로서의 동서 범심주의적 생명철학 및 동서비교적 문화관을 형성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전변을 사공학적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은 시기, 형이상학에 기반을 두고 염세적·출세간적 사상으로 나아간 시기, 향촌자치운동을 벌이며 송명이학적 사고와 지행합일론을 따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5장에서는 역시 신유가학자였던 웅십력(熊十力, 1885~1968)을 다룬다. 그는 유식학을 재해석해 유·불·도를 종합·절충하는 체용불이의 세계상을 세웠으며, 송명이학을 재해석해 수렴·발산하는 힘 간 대립·통일의 법칙인 흡벽론을 수립해 서양의 문화적 힘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 장에서는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치적 학술통제에 불만을 품고 공산사회적 이상을 지지하며 민주주의적 해방을 염원했던 웅십력의 5·4혁명 전후 성숙한 체용합일적 체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6장과 7장에서는 논리적 이성주의 철학을 주장한 풍우란과 김악림의 사상을 살펴본다. 6장에서는 동서융회의 관점과 형식주의 신이학을 표방한 풍우란(馮友蘭, 1895~1990)을 다룬다. 특히 그의 사상적 발전 과정을, 철학을 선의 추구로 정의한 인생철학 시기, 플라톤주의적 관점을 반영해 『중국철학사』를 집필한 시기, 송대이학에 대한 형식논리적 논의를 통해 인격 이상의 철학을 주장한 신이학적 체계 시기,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중국철학사』를 수정한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7장에서는 논리학과 지식론을 통해 철학의 보편성을 정립함으로써 중국철학의 현대화에 기여한 김악림(金岳霖, 1895~1984)을 다룬다. 그는 ‘중국에서 발견한 철학’과 ‘중국에서의 철학’을 구분하고 논리적 형식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된 윤리적 형이상학과, 이성적 개념 및 감각적 경험을 함께 중시하는 절충적 지식론을 주장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초기 정치사상과 더불어 주요 철학사상인 윤리적 형이상학 및 지식론을 살펴본다.
8장에서는 개별자와 타자성의 철학을 주장한 장세영의 사상을 살펴본다. 이 네 번째 유형의 철학에서 장세영(張世英, 1921~현재)은, 앞서의 세 유형의 철학이 개인성과 타자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철학이 소홀히 해온 개념들, 즉 무근거성, 우연성, 타자성, 자유 등을 송명이학적 만유상통의 원리와 연결함으로써 개별자의 독특성과 타자성의 문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장에서는 장세영 사상의 핵심인, 유심론적 ‘합리적 내핵’의 원리와, 변증법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비롯해 우주와 인생에 대한 윤리-심미적 통찰을 담아낸 ‘신철학’에 대해 알아본다.
이 책에서는 이들 사상가의 철학적 세계상을 이들의 주요 문제의식과 해결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가운데 각각의 특징과 시대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논한다. 이제 인류는 과거와 달리 문화 상호성과 지구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중국철학 역시 세계와의 연관성 안에서 자신의 장단점을 반성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철학은 평안한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는 전통적인 함영(涵泳)의 철학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인생의 부조리와 사회적 선악의 갈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 역시 융회적 특징을 띠고 발전해온 중국현대철학사의 큰 맥을 짚어봄으로써 중국철학이 사회주의 정치철학과 기존 질서에서 배제된 타자성의 철학 간 결합을 통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를 전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www.ewhapress.com/ewhapress/164/subview.do?enc=Zm5jdDF8QEB8JTJGYm9vayUyRmV3aGFwcmVzcyUyRjY5MDYlMkZ2aWV3LmRvJTNG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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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들어가는 말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1. 구국과 ‘주권재민’(1897~1919)
2. 공자 비판과 대아적 덕성주의
3. 근대과학과 ‘에너지의 명령’
4. 생명감정과 현실 참여
5. 동류의식과 사회주의
6. 연대적 윤리와 역사관
7. 중국대혁명과 전략
8. 취소주의와 후기 민주주의론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1. 사상의 전변과 ‘체용’의 윤리
2. 파울젠과 우주적 대아론
3. 양창제와 발현의 철학
4. 마음의 힘과 민중
5. 생성과 ‘중첩적’ 모순
6. ‘실사구시’와 실천적 인식론
7. ‘민중연합’과 ‘사회혁명’
8. ‘일조진리’와 문화대혁명의 코뮌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1. 문제의식과 사상적 구도
2. 공령과 충실의 미학
3. 분투와 융회
4. 생명과 ‘거리 두기’
5. ‘율력의 철학’과 ‘상’과 ‘수’
6. 동양예술의 공간성과 ‘평면화’ 및 ‘추’의 방법
7. 철학과 음악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1. ‘생명’과 생활문화로서의 ‘자기학’
2. 사회주의와 향촌자치론
3. 오이켄의 ‘정신생활’과 양수명의 ‘직각적 이성’
4. ‘문화방향론’과 유식학의 ‘감각론’
5. 현대과학과 철학의 변화 및 생철학
6. ‘자각적 능동성’과 ‘자동성’
7. 동서학술의 분화와 ‘회통’
8. 러셀의 권고와 ‘중국의 길’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1. 신해혁명과 ‘혁심’의 형이상학
2. 절충적 ‘회통’과 ‘무’의 효용성
3. 『신유식론』의 ‘흡벽론’과 신인성론
4. 생성론의 두 가지 의미
5. ‘경학’의 근본정신과 정치·역사관
6. 철학과 과학의 ‘상관’
7. 비판과 의의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1. 사상의 확대와 구조
2. 동서비교와 ‘인생철학’
3. ‘새로운 언어분석’
4. 신이학과 논리적 형식주의
5. 이기론과 ‘유형론’
6. 예술과 경계론
7. 역사관과 신이학에 대한 비판들
8. 철학사와 형이상학적 보수주의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1. 철학의 조건과 ‘자기인식’
2. 정치사상과 ‘자아실현’의 형이상학
3. 중국철학의 ‘대전변’과 실천적 회통성
4. ‘능’과 ‘식’의 형이상학
5. 목적론적 과정으로서의 ‘도’
6. ‘이사겸중’의 지식론
7. 경험적 소여와 개념적 ‘도안’
8. 『러셀철학』과 사건론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1. 자유의 길과 ‘귀향의 길’
2. 헤겔철학의 ‘합리적 핵심’과 유물변증법
3. ‘자유의 주체성’과 ‘소통성’
4. ‘무근거성’과 ‘경계론’
5. 심미적 ‘신철학’과 자유의 미학
6. 희망과 무한
결론. 상실과 전망
참고문헌
찾아보기
지은이 : 이규성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9년부터 201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2016),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2012),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2011), 『생성의 철학: 왕선산』(2002), 『내재의 철학: 황종희』(1994)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세계의 탈환과 자유의 길」(2017), 「康有爲의 세계의식과 이상사회」(2013), 「무한모순의 변증법과 생성의 세계」(2010), 「한국현대철학에서의 두 가지 변증법과 사상의 혁명」(2009), 「경험과 생철학의 가능성」(2009), 「朱熹와 李延平: 사유의 전환과 구조」(2008), 「한국근대 생철학의 조류와 구조」(2008), 「심정과 자유의 철학: 함석헌」(2006) 외 다수가 있다.
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내가 읽는 『자본론』]
/0 Comments/in 내가 읽는 『자본론』, 블로그분과진 /by Jin Bosung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최재식 (경희대 철학과)
사회 대부분의 거래에 돈을 사용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돈은 중요하다. 돈이 많으면 좋다. 돈이 많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떠나서 생각해봐도,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은 먹어야만 살 수 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돈벌이를 스스로 못하는 사람이 다 큰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이유도 이런 돈의 중요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막상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돈 버는 일이 즐거운지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부양해야 할 사람의 안녕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지 돈 버는 일 자체가 즐겁지는 않다. 당장 내 주위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아르바이트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겠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님도 가족 부양을 위해서 돈을 번다고 말씀하시지 그 자체가 즐겁다는 이야기는 안 하신다. 엄청 중요한 돈인데, 왜 막상 그 중요한 돈을 버는 과정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일까?
나는 대다수 사람들의 돈 버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다. 돈 버는 사람 중 절대다수는 임금노동자이거나 소상공인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판매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번다. 자신의 노동력과 돈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력과 돈의 교환은 다른 교환과는 좀 다르다. 즐겁게 돈을 벌 수 없는 이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과정을 살펴보자.
교환은 왜 발생할까? 교환은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남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나에게는 필요하지만 남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기 위해 발생한다. 마르크스는 이걸 좀 어려운 말로 “모든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니고, 그것의 소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사용가치다.”1라고 표현했다. 쌀농사를 짓는 나에게는 남아있는 쌀이 필요가 없지만 닭이 필요하고, 닭을 기르는 옆집 사람은 닭고기가 질려서 쌀이 필요하다면, 나와 옆집 사람은 자연스럽게 쌀과 닭을 교환할 것이다.
이런 교환이 누적되다 보면 사람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쌀을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보니, 쌀을 원하는 옆집 사람이 아니면 바로 교환을 할 수가 없다. 당장 나는 옷이 필요한데 만약 옷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쌀이 아니라 생선을 원하면 나는 옷을 구하기 위해 쌀이 필요한 어부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겪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환에 사용하는 상품들 전부의 가치 측정수단으로서 화폐(돈)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화폐가 등장하고, 교환과정이 반복되는 와중에 화폐가 집적되어 자본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번다.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상품은 원소유자에게는 쓸모가 없기에 교환과정에 들어가 상품이 되어 돈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쓸모가 없으면서 남에게는 쓸모 있는 그런 상품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많이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밖에 팔 게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임금노동자가 되고, 소상공인이 된다. 문제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들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노동력은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나온다. 죽은 사람은 일을 할 수 없다. 노동력은 인간의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실상 자신에게 매우 필요한 생명력을 파는 일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와 상관없이 당장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당장 나와 내가 부양하는 사람들의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팔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노동력은 상품이지만, 다른 상품들과는 다르게 원소유자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돈을 버는 걸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뇌와 근육을 원하는 곳에 사용하지 못하고 본인의 바람과 관계없는 곳에 써야 하는 현실이 우리가 오늘도 아침부터 출근이 싫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그 사이의 간극에서 당장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인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이 소유한 공장, 상점, 사무실에서 소모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고 지루해지는데,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기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까?
물론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현대 문명이 발생하기 전부터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수렵채집을 해야 했다. 또 인간은 자신이 살 집도 지어야 했고 자신이 입을 옷도 만들어야 했다. 아마 모든 노동을 로봇이 수행하고 그 과실을 온전히 인간이 향유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행해야 하는 노동은 너무하지 않은가? 자급자족 사회,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교환만이 존재했던 사회는 지금보다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노동이 자신에게만 인정받으면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다시 한 번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렇다.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동이 과연 타인에게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생산물이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않느냐는 오직 상품의 교환만이 증명할 수 있다.”2 내가 일을 해서 만들어낸 물건으로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게 나에게 만족을 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에게 필요한지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며 살아가는 지금 사회에서 내 노동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곧 자본이 그 노동을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노동이 자본에게 유용해야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대가로 임금을 받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보다 자본의 필요에 자신의 삶을 맞춘다. 우리 주변만 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직장 일정에 자신의 하루 계획부터 연간 계획까지 맞춰야 하는 직장인,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 미래 노동력을 더 잘 팔기 위해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전부가 그렇다.
자본은 사회 전체의 공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관심사 밖의 일이다. 자본은 인간 개인이나 사회보다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에, 가치 증식에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래서 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불리는데 필요한 인간 노동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투기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다 사회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공공부문 노동자나 기간산업 종사자보다 더 보상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자본 증식에 대한 기여도가 그러한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땀 흘리는 일상의 노동은 그 보상을 가능한 한 줄여야 하는 ‘가변자본’에 불과하다. 땀, 심지어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이런 노동에 대해 기적과 같은 대가는 없다. 그나마 그런 노동의 기회조차 부여잡기 힘든 시대. 여기에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본래 우리 인간이 교환을 시작한 이유는 사실 우리 인간에게 그 교환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그 과정을 통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역으로 인간이 자본의 필요에 따라 교환과정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주식시장의 흐름에 따라 사회 전체가 출렁이는 지금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이런 현실이 과연 긍정적인 현실인지 나는 모르겠다. 아니 지금의 현실은 꾀 안 부리는 사람들이 힘들여 일해서 생산하는 재화와 가치들을 자본의 하수인들이 복잡하고 어려우며 자신의 손해를 남에게 떠넘기는 금융상품을 통해 갈취하는 지옥도이다. 그래서 나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이다.
착취론 같은 거창하게 들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당장 우리 주변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열심히 팔아 모은 돈을 어디다 쓰는지 생각해보면 왜 이 사회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라고 표현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죄다 집세 내느라 부동산 투기자본한테 피땀 흘려 번 돈을 뜯기고, 어쩌다 돈 좀 모아 주식 몇 주 사면 투기세력의 시장 널뛰기로 혼란한 시장 틈바구니에서 투자금을 투기세력들한테 다 뜯기는 게 대다수 한국인들의 현실이다.
그럼 거꾸로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돈벌이가 즐거울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의 공공복리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해 투기를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보람차게 돈벌이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간극을 줄이고, 그 간극을 교란하는 불로소득을 최소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우리는 그 중요한 돈을 즐겁게 벌 수 있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을 읽고 쓰는 글이지만 『자본론』에 구체적이고 세세한 답이 있진 않다. 이 연재 처음에 얘기했듯이 『자본론』이 모든 문제에 답을 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자본론』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사회였던 때에 나온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금의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가치하다고 규정짓는 건 과도한 처사이다. 오히려 『자본론』의 서술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욱 놀랍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노랫말이 있다. 나는 수천 년의 인류 문명을 기초부터 지탱해온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명력과 노동력을 온전히 자신과 우리 모두의 공영을 위해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새 세상을 꿈꾼다. 언젠가 새로이 도래할 일하는 자들의 세상을 위해, 그리고 그 세상의 주인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
열일곱 번째 시간, 비 [시가 필요한 시간]
/0 Comments/in 시가 필요한 시간 /by Jin Bosung열일곱 번째 시간, 비
마리횬
6월도 다 지나가고 이제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입니다. 갑작스런 무더위가 계속되는 동안 햇빛은 뜨겁고, 마스크는 마스크대로 한층 더 답답하게 후끈거리는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었는데요, 드디어 며칠간 반가운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가을이라도 된 것처럼 한낮에도 살짝 서늘하기까지 하더라구요. ‘아 여름이 이대로만 시원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오늘은 앞으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될 ‘비’를 이야기하는 시를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비 좋아하세요?
저는 비를 좋아해요. 빗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이 더 알맞을 것 같네요. 특히 비가 내려서 도로가 비에 젖었을 때, 그 위로 자동차가 달리면서 내는 “촤악~” 소리가 참 좋습니다. 밤에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파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거 아세요?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해변가에 나와있는 것 같고 괜시리 기분도 좋아진답니다!
왠지 모르게 비 오는 날에는 조금 차분해지기도 하고, 비 오는 날만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시가 바로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는 시가 아닐까 싶은데요, 유안진 시인의 <비 가는 소리>입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아니라, 비가 ‘가는’ 소리라니 약간은 생소하죠.
‘비 가는 소리’라면 비가 점차 그치기 시작할 때의 빗소리를 말하는 것일 텐데요, 내리는 비가 그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 시를 통해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비 가는 소리
유안진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 돌아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 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낮에 비가 내렸다면 당연히 빗소리가 들릴 것이고, 창 밖 풍경으로 빗줄기가 보일 테니 비가 오는 줄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비가 오는 줄 몰랐다가 나중에야 ‘아, 비가 왔었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은 ‘밤비’뿐이겠지요. 이 시는 비가 그치고 있는 어느 날 밤, 화자가 잠을 깨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잠든 사이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렸고, 이제는 서서히 그치고 있는 밤비를 보면서 시인은 문득, 온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새 가버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벌써 6월이 다 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듯, 이미 지나가버린 뒤에야 늘 아쉬움으로 남는 것들이 있죠. 우리의 젊음이 그렇습니다. ‘내가 10년만, 아니 5년만 더 젊었다면’하는 생각, 다들 한 번씩은 해 보셨겠죠? 이제 막 젊음을 누리는 10대나 20대초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던 시간의 빠름을 그 때가 지나간 후에 점점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또 누군가가 떠난 이후, 그 존재의 무게와 깊이가 얼마나 컸었는지 뒤늦게야 와 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수도 있고, 가족,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감정일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이 없는 내 마음이 이렇게 허전한 것을 보니 그가 내 곁에 가까이 머물렀었구나’, ‘그의 존재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게 틀림 없구나…’라고 누군가가 떠난 흔적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가 있죠. 역시 한창 어리기만 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 일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눈 앞에 왔을 때 두 손으로 꼭 잡았어야 했던 것인데, 당시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가 지나쳐 버린 후에야 ‘그 때 시도해 볼 걸’, ‘….걸, …걸..’하며 후회하죠. 왜 진작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이렇게 깨닫게 되는지..
이처럼 밤비가 지나가버린 뒤에야 비가 왔었다는 것을 깨닫는 새벽녘의 선잠처럼, 뒤늦은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들이 우리 삶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쉬움과 애잔함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이 시에서의 ‘불협화의 음정’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를 때 듣게 되는 ‘화음’이 있죠. 음정이 딱 맞아 떨어지는 화음(협화음)은 듣기에도 안정적이고, 아름답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서로 어긋나고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의 음정은 불안하고 약간의 긴장감을 주고, 한편으론 아련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시인은 불협화음이 자아내는 그러한 아련하고 슬픈 느낌을 ‘가고 있는’ 빗소리를 통해 느끼고 있는 것이죠.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 소리 보다, 왔다가 떠나가는 빗소리가 더 들린다면, 어쩌면 이제 조금 더 성숙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모든 것은 “왔다가 가고야” 마는 것인데, 그것을 전혀 모른 채 아쉬움 없이 떠나 보냈던 수많은 날들, 젊음, 사랑, 기회들을 이제는 돌이켜보게 되었다는 것이니까요.
분명 비 가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감수성이며 성찰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에만 너무 지나치게 붙들려 있어서도 안될 겁니다. 오히려 이 시의 화자처럼,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라고 그것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남은 인생에서 어김없이 또 다시 비가 내릴 테니까요.
황동규 시인은 “즐거운 편지”라는 시에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치겠지만, 눈이 그치면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다가 또 눈이 퍼부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지금 눈이 그치고 마치 내 사랑도 끝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세월 지나 다시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눈처럼, 내 사랑 역시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기다림의 자세를 말해주고 있는 거 아닐까요? 유안진 시인의 <비 가는 소리>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눈을 떠 보니 어느 새 비가 그치고 떠나가고 있나요? 그 ‘비 가는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신 후에, 다시 훌훌 털고 다음 번에 내릴 비를 기다려 보면 어떨까요? 내일이 될 지, 다음 주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반드시 다시 비가 내릴 겁니다. 그 때는 ‘비 오는 소리’도 반갑게 들을 수 있게 말이죠.
오늘 이 시와 어울릴만한 노래로 한영애 씨의 <바람>을 골라 보았습니다. 내리는 줄 몰랐다가 그쳐버린 비처럼, 곁에 있는 줄 몰랐다가 떠난 뒤에야 알아차리는 것들이 많다고 이야기 했었는데요, 우리 주위의 바람, 구름, 비가 되어 그대의 곁에 머물겠다는 가사가 한영애씨의 목소리를 만나 한층 더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이번 주에는 비 소식을 기다려보면 어떨까요. 저는 2주 후에 또 좋은 시를 가지고 찾아올게요.
한영애 – 바람 https://youtu.be/ljb6_c2TIfA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0 Comments/in 블로그진,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톱뉴스 /by 이 상하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이상하(한철연 회원)
지난 글에서 다룬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기독교의 해방서사스러운 스토리텔링의 전형이었습니다.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을 거듭한 주인공이 도피와 고난과 시련끝에 현재를 극복하고 삶의 행복과 영광을 얻는 이야기였죠. 그렇다면 오늘 다루는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주인공 야엘은 어떨까요. 이전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사회나 국가와는 별개로 그저 자기 삶의 의미란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수녀 한 명이었습니다. 반면에 행성 네게브의 최하층 천민 피코로 자라난 야엘은 어린 초등학생 시절에 남들보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기에 밥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고 이에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부당한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무척이나 사적이면서도 너무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자라온, 헤겔의 말을 빌려보면 한 세계사적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으로 야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조금 서글픈 진실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진부하고 뻔하고 슬픈 말이지만, 억압과 차별이 없는 시대는 인류의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마다 날 때부터 능력과 신분과 계급이 다른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애초에 가문에 유전자에 타고난 게 사람마다 다른 법인데 대우를 다르게 받는 게 뭐가 문제고 대체 뭐가 차별이냐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스스로가 행하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와 집단을 만들고, 심지어 제도권 내에 극우 정당을 만들고 떵떵거리며 차별을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정치를 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이 국가, 네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라고. 괜히 선동과 말장난으로 세상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좀 받아들이라고.
허나 이런 불행한 역사의 진실에 대응하는 힘도 역사상 존재해왔죠. 과연 너희들이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건 언제 어디에 존재하냐고, 만약 있더라도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의 눈으로 그걸 어떻게 알고 느낄 것이냐고. 시대가 변해도 살아남는 진정한 문학과 예술은 항상 그러한 현실에 맞서서 상상력의 힘으로 날아오르며 니체의 말처럼 현실이라는 대지의 중력에 맞서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양영순의 웹툰 덴마-야엘로드 편도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흔한 전형의 스토리텔링은 아니고 약간 비틀린.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29&weekday=tue
국회의사당에서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가 테러로 국회가 무너진 상황에서, 택배를 전하러 온 주인공 덴마와 함께 야엘은 목숨을 건 탈출 중에 자신이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합니다. 작중에서 행성 네게브의 가장 가난하고 몸도 작은 최하층 계급 피코로 태어난 주인공 야엘은 다리도 짧아서 느리기에 어릴 때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중의 기본인 밥 문제부터 선착순이라는 능력주의의 가면을 쓴 차별을 겪습니다. 심지어 이를 도와주고 해결해줘야 마땅한 보육시설의 선생도 넌 최하층 계급이니까 불평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며 누가 봐도 부당하게 야엘을 윽박지릅니다. 이러면 당연히 사람으로써 어이가 없고 화가 나지만, 야엘은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식사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힘들어도 자신을 더 짜내고 더 힘내서 뛰어봅니다. 이는 이전 나오미수녀의 기독교적 믿음과 비슷하면서도, 마치 볼테르 이후 헤겔 맑스를 비롯한 근대 계몽주의의 후손들이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렇기에 우리가 더 열 배 천 배 힘내야 한다는, 그러면 역사의 법칙은 미래엔 반드시 우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선형적 진보사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에 대해선 우리가 계속 덴마와 함께 읽어온 한상원을 말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맑스는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사회적 관계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자였다. 그리고 맑스 자신과 그의 사상 역시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맑스의 역사철학적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지적 풍토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갔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맑스의 계몽주의, 독일 고전철학 상이의 연관성 속에는 19세기까지 서구의 모든 역사적 사유를 사실상 지배해 왔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기독교 종말론적 역사관의 흔적들이 공명하고 있다. 물구나무 선 사변적 세계를 뒤집어 인간의 두 발이 땅을 향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철저한 유물론자 맑스의 역사적 사유에 기독교 종말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맑스 자신이 언급한 적이 있듯이,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이 언급은 맑스뿐 아니라 볼테르 이후 역사의 진보와 이성의 최종적 승리를 주장했던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01-102쪽 인용.
이렇게 불합리하고 부당한 현재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행성 네게브의 계급차별에 대해 항의하고 더 힘내서 분투하려는 야엘은 마치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에 대한 억압을 잘 이겨내며 씩씩하고 당찬 야엘조차도 버티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day=tue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억압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도 있고 괜찮지만 나의 거울이나 다름없는 내 친구나 가족에 대한 욕은 나에 대한 모욕보다 더 참기가 어렵지요. 심지어 연주자라는 꿈에 대한 좌절에 겹쳐,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라는 친구에 대한 이중적 차별을 그냥 듣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친구의 쇼크사를 모욕했기에 자신이 정신놓고 떄린 인간이 재단 이사장 아들인지 아닌지는 적어도 야엘에겐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종종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도 아닌데 타인의 고통에 관심가지는 사람들을 관심종자니 정치병이니 심지어 위선자니 몰아세우고 적극적으로 조롱하지만, 어쩌면 야엘의 경우처럼 우리는 타자의 고통과 부당함에 민감할때만 진정으로 차별적 구조를 깨뜨리는, 현재의 반복을 중단시키는 강력한 저항과 혁명의 원동력이 생겨나는 걸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차별에는 적당히 참고 넘어가던 야엘이 자신이 잠시나마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듯이, 그리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 어쩌면 벤야민이라면 이런 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불러와서 그 힘으로 지옥같은 현재의 동일한 반복을 깨뜨리는 ‘지금시간’ 이에 대해선 천천히 더 깊숙히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힘을 동원한 저항의 순간은 당연히 기존 체제의 강력한 억압에 부딪칩니다. 체포되어 소년원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는 중 참고 참다가 참다못한 야엘이 죽은 소녀와 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결심하려 하는 차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미래를 본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남겨준 과거 예언의 기록을 꺼내보게 됩니다.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day=tue
너무나 많은 정서들을 함축하는 피코 야엘의 저 웃음과 울음.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건축물을 패러디한 행성 네게브 영웅의 전당. 만화 나루토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물이 나온 적이 있죠. 당연히 원 모티브는 미국의 러쉬모어 산에 있는 4인의 거대한 조각상입니다. 과거의 역사에 이 위대한 전당에는 피코가 아닌 상류 계급 출신만이 조각되었지만, 데바림 선생님은 이 전당의 가장 높은 곳에 바로 최하층 계급 피코인 야엘이 올라갈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자살 직전까지 갔던 야엘은 이 예언을 통해 더더욱 놀라운, 혼신에 헌신의 노력을 다하게 되어 국회 보좌관까지 올라갑니다. 마치 한국에서 가난한 비수도권의 흙수저 출신이 사법고시를 통과한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거기서도 상위 계급 출신들의 온갖 차별과 억압을 받지만, 예언을 통해 미래에 대해 확신이 생긴 야엘에겐 이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야엘이라는 개인의 갈등과 투쟁이 행성 전체를 의외의 결과로 이끌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계사적 개인에 대해선 또 한상원과 헤겔을 참조해보며 숙고해볼만 만합니다.
헤겔에게서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는 자유를 향해 진보한다. 역사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희생, 고통은 이러한 자유를 시련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 세계사의 전체 과정은 이 충동을 의식적으로 도달하도록 하려는 노동이다. 이를 위해 역사에는 갈등과 적대가 불가피하다. 세계사는 대립이 표출되는 전장과도 같다.
적대와 갈등, 폭력이 자유를 향한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은 다시금 역사 속에 존재하는 섭리의 신비를 보여준다. 헤겔은 세계사를 행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세계사적 개인에 관해 언급한다. 세계사적 개인 혹은 영웅의 창조적 행위는 새로운 사태와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를 추동한다. 그런데 이때 영웅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실은 정신 자신의 본질에 의해 작동하는 현실이다. 세계사적 개인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충동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추동하는 개인적은 특수한 욕망과 열정, 의지를 통해 세계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성은 교활한 책략을 통해, 행위하는 개인의 의식이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끌고 나간다. 이성이 지닌 간지는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섭리의 구체적 형태다.
“열정의 특수 이익은 보편자의 실행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특수한 것, 한정된 것, 그리고 그 부정으로부터 보편자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투쟁하며 그중 한쪽이 몰락하는 것은 특수한 것이다. 보편적 이념은 대립과 투쟁 속으로, 위험 속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공격과 손실로부터 물러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이를 이성의 간지라 부를 수 있다.”
–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14-115쪽 인용.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1&weekday=tue
정해진 미래가 있으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 어떠한 어려움도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야엘은 이런 말을 하는 것에서는 단순히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준의 신앙이 느껴집니다. 그 누가 현재의 나를 억압하고 조롱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든 나는 반드시 내 구원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서사. 이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전형적인 기독교적인 구원의 서사이자 계몽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야엘로드는 분명히 계급 갈등과 경제적 차별이라는 흔한 진보주의 또는 유물론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적인 지점과 결합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바로 이렇게 이질적인, 섞이기 어려워 보이는 유물론과 신학을 결합시켜서 나치가 득세한 2차대전중의 독일인으로서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철학을 펼쳐나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신학적인 자세로 과연 괜찮은 걸까요? 혹시 작중의 야엘처럼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게 되면 기존의 신학은 오히려 없으니만 못한 거짓된, 허무한 낙관주의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이 또한 헤겔이 말한대로 적대와 투쟁을 통한 이성의 간지일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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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내가 읽는 『자본론』]
/0 Comments/in 내가 읽는 『자본론』, 블로그분과진 /by Jin Bosung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나는 지금, 집 근처 24시 카페에 앉아있다. 끝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의 커피를 타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홀을 치우는 저 알바생분은 아마 새벽 파트타임 알바인지 매일 밤 내게 커피를 건넨다. 너무도 분주한 그가 안쓰러워질 때쯤 문득 이 곳에 일하는 알바생들은 과연 근로의 대가로 얼마를 지급받는지 알고 싶어졌다. 곧장 ‘알바천◯’에 접속해 확인한 결과, 이 곳에서 근무하는 알바생들이 1시간에 받는 급여는 놀랍게도 법정 최저시급인 8,590원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 필자도 알바를 꾸준히 해왔다. 학교 앞 고깃집, 오목교역 앞 디저트 카페, 그리고 가장 최근까지 근무했었던 경희대 정문의 어느 회덮밥 집까지,., 알바 근무가 얼마나 고된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 알바생이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순간 마음이 아팠다. 저렇게나 열정적으로 걸레질을 하는 데도 최저시급을 받는다니,,, 그렇다면 저 열정적인 노동의 대가를 과연 얼마로 책정해야 합리적이고 정확한 수치라고 할 수 있을까? 시급을 1만원으로 인상하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커피 한 잔에도 정성을 쏟는 저 알바생분의 노력과 열의는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정당한 것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취급 받는다. 뭐 이 지점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 값어치이다. 21세기 현재, 세계 주요 국가들은 고용주가 노동력을 구매할 때 노동자에게 지불해야할 시급의 최저 기준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으며, 이후의 가격 책정 및 가격의 변동과 흥정은 자본주의 하의 여타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즉 주류경제학의 기본적 메커니즘으로서 ‘효용가치설’을 기반으로, 수요-공급의 원리에 충실한 법칙성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많아지면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하고, 반대로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줄어들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승한다. 현실 속 노동력의 값어치 책정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법칙도, 가치 척도도 없으며,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화폐화 된 노동력의 값어치가 변화할 뿐이다. 내가 노동하는 강도와 양, 방식과 메커니즘은 그대로인데, 저 알바생분이 제공하는 커피의 질도, 양도, 맛도 그대로인데, 외부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시급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무언가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우리가 판매하고, 또 직접 행함으로써 판매가 완료되는 우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가, 별개의 외부상황에 의해 그 가격과 가치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미심쩍은 현실에, 나는 적지 않은 의문을 품는다. 우리가 알바 근무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해결해야할 몇 가지 핵심적인 의문이 있음은 명백하다. 나아가 오늘의 논의를 빌어 필자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잘 것 없는 우리 같은 알바생들이 이런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선, 먼저 첫째로, 경제적인 ‘가치’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찰해야할 것이다. 이어서 ‘가격’과 ‘가치’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급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다뤄져야하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늘 그래왔듯,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을 꺼내어 이 의문들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본다면, 놀랍게도 늘 그랬듯 힌트가 될 만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저서 『자본』Ⅰ-상 제1편 제1장에서 우리의 의문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제1편 제1장 ‘상품’에서 가치의 형성과정과 상품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또 제2장 ‘교환과정’과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에서는 앞선 논의에서 형성된 가치가 화폐형태로 거래되는 과정과 상품의 교환과정 및 화폐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다룬다. 먼저 제1장에서 그들이 심도 있게 고찰하는 가치 및 화폐 형성의 역사적 맥락을 토대로 우리의 첫 번째 의문 속 ‘경제적 가치’의 형성과정에 대해 자세히 탐구해보고자 한다. 사실 그들의 서술을 그대로 인용하기에는 문체가 너무나도 난해하고 그 내용 역시 현학적이기에, 필자가 읽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논의를 이어갈 생각이다.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본문의 이해하기 힘든 표현 방식 속의 근본 원리와 핵심적 내용은 비교적 명료하고 이해 가능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읽고 이해함에 큰 무리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가치’의 형성을 역사적인 흐름에서 고찰하려면, 우리는 응당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 가 봐야한다. 물물 교환이 성행하던 원시 사회에서 상품이나 시장, 가치와 같은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당대의 사람들은 우연적 만남을 통해 물물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물건의 교환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이는 우연의 형태로 단순한 개별적 형태이며, ‘경제적 가치’의 [제1형태]라로 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교환하고자 하는 물건의 가치는 오로지 다른 사람의 물건에 의해 표현되고, 이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거래를 전문으로 다루는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교환을 이어갔기에 물건의 정확한 가치를 책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서로 간의 교환을 승인 할 때의 척도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인데, 본인이 가지고 온 물건에 들인 노력과 정성을 어림잡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에 비교하는 과정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우리가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물물교환 할 때도, 내가 공을 많이 들인 소중한 물건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거저주운 물건과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상식이다.
거래가 조금 더 활발해지면 앞선 단계를 넘어선 두 번째 가치형태가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제1형태]에서는 상대방의 물건으로만 내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수동적인 과정이 반복 되어 특정한 이들이 특정한 물건을 지속적으로 교환과정에 내놓는다면, 물물교환 장에 나온 모든 이들은 그 특정한 물건을 통해 자신들의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게 된다. 이를테면 매번 손수 만든 아메리카노 커피를 가지고 나오는 이가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과 교환 될 수 있는 아메리카노 커피의 양을 고려해 자신의 물건에 대한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 특정한 물건은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이 상황을 [제2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 물물교환 단계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교환의 장이 형성되고, 교환과정과 가치의 형태가 조금 더 발달하면, 앞선 등가물이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게 된다. 즉, 앞서 우연적이며 상이한 개별적 교환 사건들의 종합으로, 사람들이 물건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던 등가물이 그 기능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생산과정 전반에서부터 비단과의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물건을 생산하며, 비단의 양으로 자기 물건의 가치를 예측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더불어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물건을 비단과의 교환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상황이 비단(일반적 예시) 생산의 활성화와 맞물려 시간적, 공간적으로 크게 증대된다면 비단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등가물로 기능을 하게 된다. 비단이 노력/정성의 양, 그리고 ‘가치’를 어림잡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제작한 이후 비단에 비추어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비단을 얻는 상황을 먼저 고려하며 자신의 물건을 만들게 된다. 가치의 이러한 형태가 [제3형태]이고, 비단이 금과 같은 본격적인 화폐 형태로 변모하는 순간부터 [제4형태] : ‘화폐 형태’로 변화한다.
이러한 가치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이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상품’이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상품’의 개념을 탐구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비단(일반적 예시)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만들어 이를 실제로 비단(혹은 화폐)과 교환하는 상황은 매우 인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위해 물건을 만들고, 거래 과정을 통해 이를 실제로 교환하게 되면, 그 물건은 비로소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상품은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유용성이 필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필자의 위 서술은 한 가지 비밀을 더 암시하고 있다. 바로 상품에 내재된 가치가 두 종류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카페 의자가 매우 불편하다고 느끼던 찰나이기에, 이 의자를 예시로 삼아 보겠다.— 의자도 분명 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도 질적으로 상이한 두 종류의 가치를 내포한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사용가치’다. 이는 의자의 기능과 관련된 것으로, 앞서 말한 상품의 사회적 유용성에 기인한 ‘쓸모’이며, 각 물건에 따라 기능적 특수성을 띤다. 의자는 사람이 앉아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사용가치’를 드러낸다. 두 번째로, 의자는 ‘가치일반’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 혹은 ‘가치일반’이란 의자의 교환(거래)이 가능케 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비록 조금 불편하지만, 이 의자 역시도 분명히 상품으로서 거래와 교환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척도로?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기준으로 이 의자는 교환될 수 있었을까?
‘경제적 가치’의 형성 과정은 바로 그 척도로서의 ‘가치일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과정의 양상이 달라졌을 뿐, 물물교환 시절부터 화폐형태의 등장까지, 교환의 장에 나온 이들이 항상 고려했던 것은 물건 제작에 투여한 노력과 정성이었다. 즉 의자가 교환될 수 있게 하는 척도이자 기준으로서의 ‘가치일반’은 노력과 정성, 다시 말해 의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인 것이다. 이 의자를 판매한 이가 의자를 만드는데 투여한 노력에 걸맞은 가치를 돌려받기 희망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상식이고 자명한 것이다. 요컨대, 상품 속에는 두 가지 형태의 ‘가치’가 내포되어 있으며, 교환과 거래를 가능케 하는 ‘가치일반’은 상품에 투여된 노력,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겠다. 사실 이는 우리의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핵심적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경제적 가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자본』은 가치의 형성과정에 관한 역사책을 펼쳐들며 ‘노동일반이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 위에 약간의 첨언을 얹어보자면, 상품에 이질적인 두 개의 가치가 내재되어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동 역시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을 가지게 된다. 의자만의 특수한 기능, 즉 사용가치(유용성)를 만드는 특수한 실제적 노동과, 교환의 척도가 되는 가치일반을 창조하는 노동일반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노동 역시 두 측면으로 분화되며, 노동일반과 그 속에서 창조되는 가치일반은 추상적 / 관념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반면 앞서 말했듯, 특수한 실제 노동과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용가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또 실질적인 유용성의 형태를 띠게 되는 셈이다.
‘경제적 가치’란 노동에서 나온다는 역사적 고찰과 함께 첫 번째 의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그렇다면 화폐의 양으로서의 가격과 가치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의식중에 상품의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하곤 한다. 이는 올바른 판단이 맞을까? ‘이디◯ 커피’의 아메리카노가 지닌 가치는 3,200원의 가격으로 온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을까? 앞서 언급한 [제3형태],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물 자체가 ‘일반적 등가물’로 변하며 모든 상품들의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즉 앞선 예시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또는 비단)는 일반적 등가물이 되며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직접적·사회적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노 커피(일반적 등가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상품이 이와 같은 성격을 얻지 못하기에 이뤄진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에서만 형성 가능하다. 일반적인 가치형태에서의 이 아메리카노 커피의 역할은 모든 상품들이 차지할 수 있다.
사회적 타당성과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일반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역사적으로는 ‘금’이 차지해왔다. 나아가 ‘금’처럼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독점적인 등가형태가 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화폐 상품’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금이 화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금은 자신에게 체현된 노동일반의 양을 척도 삼아 다른 모든 상품들을 견줄 수 있게끔 하는 특수한 역할을 도맡아 왔다. 위의 언급에서 가치의 [제4형태]는 바로 ‘화폐형태’였다. 이는 금이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하는 구체적 상품으로 정해졌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제3형태]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일반적 등가형태가 최종적으로 상품으로서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형태를 통해 화폐형태로 전환된 것이 [제4형태]이다. 화폐의 기능을 하는 금에 의해 표현되는 단순한 형태가 바로 ‘가격형태’이며, 길고 긴 역사적 과정 속에, 드디어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가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메리카노 커피에 붙은 3,200원이라는 가격표를 이제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금이 아니며, 금과는 질적으로 매우 상이해졌다. ‘금’은 화폐로 기능을 시작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투여된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통해 가치의 척도를 대변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5만원권 속 신사임당은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대변하지 않으며, 노동일반으로서의 ‘경제적 가치’의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또 어떤 가치(사회적 노동일반)를 직접 담아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화폐는 자신이 직접 가치(투여된 노동일반의 양)를 지님으로써 가치의 척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가치를 대변할 뿐이며, 가치의 관념적 도량형의 역할만을 도맡게 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변천 속에 사람들은 화폐(혹은 금)가 본래 어떤 가치(가치의 척도로 기능할 수 있는 신비한 성질)를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분명한건 오늘 내가 건넨 3,200원과 3,200이라는 수적 표현은 실제로 어떤 실질적 가치일반(노동일반)의 양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관념화된 척도로서 ‘3,200원’이라는 가치의 관념적 양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의 대가로 지불한 3,200원은 실제 ‘경제적 가치(=노동일반의 응고량)’의 양이 아니라 관념적 ‘가격 형태’이며, 가치와 가격은 엄격한 의미에서 구분된다. ‘가격 형태’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가치일반의 양과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음에 기인했지만, 이제 우리는 화폐와 그 가격형태를 그저 관념적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즉 가격이 상품에 투여된 가치(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대변해준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더군다나 21세기 자본주의 속 상품의 가격 형태는 수요 공급의 주류경제학 논리에 따라 수시로 변모한다. 똑같은 가치를 담은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내일 새벽에는 갑자기 달라진 ‘가격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졌던 첫 번째 의문, 즉 ‘경제적 가치’의 원천에 대한 궁금증은 ‘노동일반’이라는 개념을 깨닫게 했고, 나아가 이는 ‘가치’와 ‘가격 형태’의 근본적인 의미 차이와 맥락의 구분을 암시한다. 우리가 두 번째로 묻고자 했던 ‘가치’와 ‘가격’의 관계 역시도 어느 정도 해명이 된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의 시급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우리의 시급은 어떻게 판단해야할까? 논의의 서두에서 얘기했듯,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여타의 상품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작용한다. 알바 시급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명료히 하려면 시급의 대가로 우리가 사장님들에게 판매하는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 더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이라면, 앞서 말했듯, 다른 상품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속에 내재된 가치를 평가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상품의 경제적 가치를 무엇으로 해명했는가? 바로 ‘인간노동일반’이다. 즉 아메리카노 커피에 투여된 인간의 추상적 노동일반의 양이 그 가치를 표현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 가치를 측정해야한다. 다소 난해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의 논리와 그 정합성에 의거했을 때. 상품 ‘노동력’의 가치는 그 생산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필자도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낯설고 해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우리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해보자. 오목교역 24시 이디◯ 커피의 알바생분이 사장님에게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는 알바생이 상품 ‘노동력’을 위해 준비한 모든 노동 및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알바생은 오늘의 근로를 위해 잠을 잤을 것이고, 기본적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기도 하며 나름대로의 노동을 이어왔을 것이다. 밥이나 배달음식을 먹고, 샤워를 하거나, 보다 말끔한 모습을 위해 이발도 하며 머리 손질에 공을 들였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시간이 이디◯ 커피 사장님이 구매한 알바생의 ‘노동력’의 가치를 형성한다. 알바생분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를 위해 그 생산과정에서 준비한 모든 노동과 그 시간만큼의 노력의 합은 그의 상품 ‘노동력’의 가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유 방식이지만, 눈을 감고 조금만 고민해보면, 우리의 마지막 의문을 명쾌히 해결해줄뿐더러, 노동력과 시급의 관계 전반에 대한 탁월한 해답이 떠오를 것이다. 그 해답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이 지닌 특수한 성질에 대한 인지에서 출발한다. ‘노동’은 인간의 본성적, 본질적 행위일뿐더러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 과정에서 더욱 특별한 성질을 드러낸다. 이디◯ 커피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한 상품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대가를 급여로 지급받고, 실제로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력’의 판매를 이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거래가 되는 한편, 구매자의 상품 사용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게 된다.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고, 상품 ‘노동력’은 판매자의 (구매자를 위한) 실제 노동 이행을 통해서 상품 교환의 거래가 완료되기 때문이다.
이디◯ 커피 새벽 알바생분(‘노동력’의 판매자)은 걸레로 테이블을 닦는 등 노동을 이행함으로써 시급의 대가를 지불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사장님에게 만들어 제공하는 셈이다. 시급의 양은 알바생분이 판매한 ‘노동력’ 상품의 가치와 같은 크기, 같은 양일 것이다. 하지만 저 분(알바생)은 자신이 지불받은 시급, 즉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 =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준비한 알바생분의 노동시간 = 시급이 제공해야하는 가치의 양]인 상황에서,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의 대가로 돌려받은 가치의 양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봐도, 우리가 알바를 할 때, 그 날 알바 근무를 위해 ‘노동력’을 준비(생산)한 시간만큼만 당일 근로를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일함으로써 그 판매를 완료하기 위해 우리가 전날 종일 준비했던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구매자의 사용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보다 더욱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논의이나 간단히 말하면, 커피숍의 알바생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위해 이전에 투여한 노동시간보다 단 1시간이라도 더 많은 양의 노동을 근로 과정에서 행하는 순간 잉여가치의 형성과 이에 대한 착취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지점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먼저, 화폐 형태(가격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알바 시급이 수십만 알바생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 상황 속에서는 어떠한 알바생도, 아니 어떠한 노동자도, 사장님에게 제공하기 위해 준비한 상품 ‘노동력’ 속에 녹아있는 (준비과정/생산과정 속)노동시간 만큼만 근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일하기 위해 준비한 시간보다 더 일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가치’가 ‘노동일반’에서 창조되는 한, 자본주의적 분업-생산체계는 알바생들과 노동자들이 만드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착취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기저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 내가 본 것만 해도 수십 개의 아메리카노 커피를 탄생시킨 저 장인은, 만약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시급을 돌려받았다고 해도, 그 가치의 배에 달하는 양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어렵고 난해했던 논의와 우리의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복잡한 고찰을 이쯤에서 줄이고, 다시 새벽녘의 이디◯ 커피에 앉아보자. 사실 어느 가게든 요즘의 알바 시급은 최저시급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초반에 알아본 것처럼 저 알바생분들 역시 2020년 기준 법정 최저시급은 8,590원선에서 자신의 1시간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을 것이다. 근 몇 년간 법정 최저시급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전 논의에 따르면, 이는 정말 납득이 어려운 상황으로 풀이될 수 있다. 우선 몇 년째 꾸준히 이 카페를 방문하는 입장에서, 작년 말에도 저 알바생분은 근무를 했고, 오늘 밤과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내게 제공했으며, 지금 현재도 예년과 비슷한 양의 노동을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알바생분은 2019년에는 8,35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했고, 올해 들어 지금은 8,59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최저시급이 오름과 동시에 저분이 ‘노동력’ 판매를 위해 더 많은 시간 노력을 쏟아 붓기라도 한 것인가? 그러면 모든 노동자들은 최저 시급의 인상과 동시에 ‘노동력’ 생산에 더 많은 노동을 투여하는가? 둘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저 분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가치를 지닌 ‘노동력’을 생산함에도, 이 대가로 시급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정치권에 의해 결정된 정치적 의사결정이며, 실제로 ‘가치’가 거래되는 양상과는 무관하다. 대체 어떤 가격표가 알바생들의 ‘노동력’에 담긴 가치를 제대로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인가? 8,350원? 8,590원? 아니면 9,000원? 알바생분의 1시간 ‘노동력’ 가치의 ‘가격 형태’는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책정되는 것인가? 정치권에서는 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권리로,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노동력’의 값어치와 그 기준 척도를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의문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 알바생들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 그 적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더불어 ‘가치’의 거래 현장과는 무관한 상품 ‘노동력’의 법적 ‘가격 형태’ 책정에 대해 정치권으로부터 어떠한 해명도 듣지 못했다. 설령 시급의 ‘가격 형태’가 알바생 및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지닌 가치와 정확히 동일한 값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자가 추가로 생산하게 되는 잉여의 가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자본의 착취 역시 필연적인 수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필자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가치’의 정확한 표현 방법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지도 못했고, 정치권과 제도권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들을 조정할 권한을 돌려받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대학생 신분인 알바생들이 이토록 커다란 ‘가치’의 문제와 ‘착취’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알바생들은 ‘가치’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착취는 왜 발생하는지, 또 우리의 시급은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진지한 문제인식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 앞의 알바생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화폐와 가치에 관한 사회적 환상에 휩쓸리지 않고, 8,590원 속에 숨어있는 착취의 알고리즘을 포착해야한다. 어떠한 구체적 방식으로 ‘가치’의 참된 의미를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지 줄기차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우린 이미 ‘경제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고, 우리 내의 시급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호도되는지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 해내야할 과제들 역시도 분명해졌다. ‘경제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지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이 지니는 구조적 착취의 모순을 이해하고 분노해야할 것이다. 그 모든 저항과 문제제기의 시발점은 파란 모자의 이디◯ 커피 알바생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시급 8,590원에 있다. 당신의 시급은 어떠한가? 오늘 당신의 시급은 안녕한가?
열여섯 번째 시간, 경지 [시가 필요한 시간]
/0 Comments/in 문화 & 생각보기, 시가 필요한 시간 /by Jin Bosung열여섯 번째 시간, 경지
마리횬
최근에 부쩍 더워진 날씨 탓에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하고 느끼게 되는데요, 여름의 계절이 찾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더위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 부쩍 나무 그늘이 많아진 것을 혹시 보셨나요? 자주 산책하는 공원을 거닐 때 3-4월, 아니 5월까지만 해도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걸었던 것 같은데, 며칠 전에 가보니 그 사이에 나무가 무성해져서, 어느 새 산책로에 나무그늘이 만들어졌더라구요. 푸르러진 나무들이 서로 맞닿아서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을 보면서, 새삼 ‘아 여름이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어쩜 나무들은 늘 그 자리에 서서 무수한 겨울과 여름을 보내며 소리도 없이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내는지. 그 나무들을 보면서 떠오른 시가 있어서 오늘 가져왔습니다. 정병근 시인의 시 ‘나무의 경지’입니다.
나무의 경지
정병근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정병근 시인의 시 “나무의 경지” 들어 봤습니다. ‘경지’라는 말은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단어인데요, 사실 ‘경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어요. 똑같은 한자[境地]를 쓰면서도 뜻이 조금씩 다릅니다. 첫 번째로는 ‘일정한 경계 안의 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경계’가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경지’가 되는 거죠. 두 번째로는 ‘학문, 예술, 인품 따위에서 일정한 특성과 체계를 갖춘 독자적인 범주나 부분’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완전 다른 뜻인 것 같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첫 번째 뜻에서 의미가 이어져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특성과 체계가 있는 독자적인 경계(범주)라는 뜻이니까요.
그렇다면 세 번째 뜻은 뭘까요? 세 번째 뜻은 아마도 여러분이 이 단어를 듣고 가장 많이 생각하셨을 법한 뜻으로, ‘몸이나 마음, 기술 따위가 어떤 단계에 도달해 있는 상태’ 라는 뜻입니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할 때의 그 ‘경지’죠.
그런데 정병근 시인의 <나무의 경지>가 흘러가는 흐름과 이 ‘경지’라는 말의 세 가지 뜻이 신기하게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과 방금 설명 드린 ‘경지’의 세 가지 뜻을 잘 기억해두시면서 시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이 시가 이렇게 시작하죠.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라고요. 이 첫 부분이 “일정한 경계 안의 땅”이라는 ‘경지’의 첫 번째 뜻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어서,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일정 경계 안의 땅’에만 머물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죠.
두 번째 연에서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라고 이어지는데요, 그런데 그 콤플렉스가 그저 콤플렉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어서 시인은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라고 말합니다. 콤플렉스가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자, 독자적인 그만의 영역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경지’의 두 번째 뜻, “학문, 예술, 인품 따위에서 일정한 특성을 갖춘 독자적인 범주나 부분”과 이어지죠.
일정 경계 안에 스스로를 세워 놓고 있는 나무를 ‘한계’와 ‘콤플렉스’를 가진 존재로, ‘이기적인’ 존재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범주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나무가 또 다른 경지에 이르면서 시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일정 경계 안에 있었던 나무의 경지, 그리고 특정한 독자적인 범주를 만든 나무의 경지, 그리고 이제는 다가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나무의 경지. 이렇게 세 가지의 나무의 경지를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는 형식적으로도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요, 어쩌면 시인이 시의 제목을 ‘나무의 경지’라고 하면서 이 세 가지 뜻의 경지를 모두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된 시는 마지막에 두 줄로 이렇게 끝납니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혼자만의 삶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보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삶을 산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또 다른 매력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아름다움이 된다니… 이 시가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 어디로도 가지 않고, 가령, 춥다고 따뜻한 곳으로 가거나 덥다고 시원한 곳으로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서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요. 이 시의 표현처럼 어쩌면 “까마득한 세월”이 걸릴 수도 있겠죠. 잠시 마음먹기는 쉬워도, 사실 그 마음가짐을 계속 고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가 나를 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기본적인 욕심, 인정받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먼저 나를 PR해야지만 살아남을 것처럼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잊힐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남에게 먼저 다가가고, 다른 누군가의 취향에 맞추려고 나 자신을 바꿀 때도 있지 않은가요? 여론이 기우는 쪽으로 내 생각을 바꿔버리기도 참 쉽죠. 대세에 따르는 게 정답인 양, 그러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한 심리를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처럼 한 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이, 어쩌면 요즘 같은 시대에 뒤쳐지고 잊혀지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지만, 내 자리를 올바르게 지키고, 그 자리에서 내 생각(가치관)을 가지고 뿌리 내리고 이파리를 키워 놓는다면, 마침내 많은 지친 생명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이르는 것이 진짜 ‘경지’이겠죠. 여기 저기 쫓아다니면서 내 생각도 없이, 그저 유행만 좇다가 올라간 자리는 결코 ‘경지’가 아니라 일시적인 ‘거품’일겁니다. 쉬우면 너도나도 다 경지에 오르겠죠.
여러분 각자가 겪어내고 공부하고 있는 자신만의 분야가 있을 테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뜻으로의 ‘경지’가 각자 하나씩 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경지’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곡으로, 클래식 연주곡을 가져왔습니다. 영화 OST인데요,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삶과 말년을 다룬 영화 <The Last Station(2009)>에 삽입된 같은 제목의 연주곡입니다. 톨스토이야 말로 자신만의 경지에 오른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의 삶이 도덕적으로 비판 받는 부분들도 있지만, 귀족으로 태어났음에도 농민의 계몽과 교육을 주장했고, 농민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귀족들의 부의 축적을 비판하는 문학활동을 하는 등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톨스토이 자체도 그리고 그의 작품들도 모두 이 시에서 말하는 경지에 이른 것들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지금도 다시 찾고 있고, 그것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위로를 받는 거겠죠. 이 영화의 ost도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곡인데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정병근 시인의 <나무의 경지>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도 시원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Sergey Evtushenko – The Last Station : https://youtu.be/scUVwhUvyJw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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