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박종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에고이스트의 의미를 흔히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사람’,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타주의자’와 대립하는 의미로 알고 있고 이러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에고(ego)와 같은 의미로 ‘egoistisch, persönlich, eige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에고와 관련된 의미는 ‘나다운, 나답게, 자기다운, 자기만의, 자신의’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에고이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눈이 필요하다. 그는 일반적이고 굳어진 개념보다는 새로운 의미로 에고를 이해하고 있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살아가는 동안 자기다움이 짓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한번쯤 “너 참, 인간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또는 이런 말을 남에게 해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슈티르너가 보기에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인간답지 않는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Menschlichen)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다운 사람과 자기다운 사람(Egoist)을 대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답지 않는 인간(das Unmenschliche[unhuman])이 자기다운 사람이다. 또한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Einzige)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그가 사용하는 아래의 문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das Egoistische als das – Einzige)”(162), “인간답지 않은 인간, 즉 자기다운 사람”(142) ‘인간답지 않은 인간’, 혹은 ‘자기다운 인간’(egoistischen Menschen)(376)
이제 분명한 것은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란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고이즘도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아주의로 번역하였다. ‘자아주의’는 ‘자기 찾기’, ‘자기에게 유용함’(376)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자아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주의와 사제직의 전쟁, 현세에 마음이 있는 사람과 성령에 마음이 있는 사람의 전쟁”(401) 슈티르너가 보기에 ‘인간다움’은 어떤 정신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정신을 ‘덧없음’으로 과소평가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신을 덧없는 것, 유한한 것, 무상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답게’(egoistisch)(350)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너의 모든 힘, 너의 능력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350) 그리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고 있는”(208) 것이다. 자아주의는 나다움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자아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개성이라든가 개별화(Einzelheit oder Vereinzelung)에 거주하는 일치하지 않은 비동등성과 자기다운 비동등성”(108). 결국 자기답게 사는 것은 개성과 개별화 즉 비동등성, 곧 차이에 대한 인정이다. 나아가 자기다운 사람은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말을 확인해 보자.
“자기다운 사람은 자신을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떤 소명도 인정하지 않으며, 인류가 더 발전하는 목표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상상 따위도 하지 않기에 그러한 목표를 위해 눈곱만큼도 기여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스스로의 삶을 살아 나가고 펼쳐 나갈 뿐, 그로써 인류가 잘될지 나쁘게 될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339)
과연 우리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자아의 그릇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관념의 도구,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 인류를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은 자기다운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감정을 구분하면서 자기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이는 감정이 나를 고취하였던(eingegeben) 것인지, 단지 감정이 나를 자극하였던(angeregt) 것인지 이다.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이 자기 자신의 감정, 자기다운 감정들이다. 왜냐하면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은 나에게 감정을 각인하지 않았고, 받아쓰거나 따라하도록 불러주지 않았으며,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0)
그러니까 고취하는 감정과 나를 자극하는 감정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자기다운 감정으로 간주한다. 그의 글에서 고취하는 감정을 확인해 보자. 그것은 어떤 현실의(wirklich) 내가 어떤 “자유로운 시민”, 어떤 “국가의 시민”, 어떤 “자유로운 혹은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국가를, 국민을, 인류를 그리고 그 밖의 유사한 모든 것을 자기 내면에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어떤 낯선 나’를 받아들여서,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어떤 낯선 나(eines fremden Ichs)를 위한 헌신’을 받아들여서 진리를 보고 내 자신의 현실성(Wirklichkeit Meiner)을 본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247)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고취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들림이다. 그것은 미친 것이다. “만약 ‘신들림’(Besessenheit)이라는 말이 당신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렇다면 이 말을 선입관(Eingenommenheit)1이라고 부르자, 그렇다, 그 이유는 정신이 당신을 사로잡기(besitzt) 때문이고 모든 ‘고취’(Eingebungen)는 정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열광(Begeisterung) 그리고 황홀(Enthusiasmus)이라 부른다. -부진하고 철저하지 못한 방법으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황홀(Enthusiasmus)은 –광신(Fanatismus)이라 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48)
잠시 ‘Begeisterung’ 단어에 주목해 보자. 맑스는 <자본>에서 “노동의 불길이 죽은 사물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고’(begeisten)”(강신준, 292-293)라고 쓴다. 맑스가 사용한 이 단어는 헤겔도 사용하였다. 메럴드 웨스트팔에 따르면 ‘begeisten’는 헤겔이 만든 단어이다. 학문적 노고를 통해 진리에 이르는 정신적 활동이 ‘begeisten’이다. 이와 달리 열정에 휩싸인 상태{begeistern(Begeisterung)}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인 상태, 열정에 휩싸여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는 앞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들린 사람(Besessener)과 연결된다. ‘인간다운 사람’이라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신들린 사람, 미친 사람이다. 신들린 사람과 대립하는 사람은 유일한 사람, 자기다운 사람이다.
자기다운 사람과 사랑의 문제를 살펴보자. “자, 어떤 개인에 자기다운 충동(Trieb)이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을 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족을 공경’한다.”, “이와 반대로 그의 혈관에서 자기다운 피가 충분히 이글거리며 부글부글 끓는다면, 그는 가족에 ‘범죄자’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하고 가족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242) 슈티르너가 보기에 자기다운 사랑이 아닌 것은 “자발적 사랑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본질의 자기 사랑”,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다운(egoistisch)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다운 사랑이다.”(341)
자기다움과 국가의 관계는 어떨까? 국가는 신성하지 않는 사람을 야만인, 자연스러운 인간, ‘자기다운 사람’으로 간주한다.(263) 그래서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을 길들이고자 애쓴다. 국가는 구속이 없는 욕망을 발산하는 사람에게 “자기다운 사람”(egoistische Mensch)이라고 욕한다.(350) 슈티르너는 자아주의와 인간다움(Humanität)은 같은 의미이었어야만 했다(200)고 아쉬워하며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새로운 ‘인간다움’은 자기다움이다. 자발적이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더 높은 본질에 신들리지 않은 사람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움이고 에고이즘은 자아주의이다. 자기다운 사람이 유일자이며, 더 이상 인간다움이 아니라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래의 글은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슈티르너의 ‘기도’라고 비꼰 부분인데, 필자는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이라고 본다. 원문은 시의 형식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시의 형식으로 변형하였다. 아래의 글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결연한 용기로 자기 자신에 등을 돌리면서, 동시에 평온을 어지럽히는 비판가를 외면하고, [162]비판가의 항의를 건드리거나 다루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어떨까? “당신은 나를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고 부른다.”고 비판가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보기에 실제로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외다. 왜냐하면 오로지 당신이 나를 인간다운 사람과 대립시키기 때문이외다.
내가 내 자신을 이러한 대립에 매료되도록 하는 한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경멸할 수 있었나이다.
나는 경멸당할만한 사람이외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보다 나은 자아’를 내 밖에서 찾았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다운 인간’을 꿈꾸었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다운 인간의 ‘참된 자아’를 갈망하고 항시 ‘가엾은 죄인’으로 남아 있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닮았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만 나 자신을 생각했나이다.
나는 충분히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고 충분히-유일한 사람도 아니었나이다.
바로 지금 나는 나 자신이 인간답지 않는 인간으로 여겨지기를 중지하나이다.
그리고 나를 인간에 비교하여 측정하거나 측정 당하는 일을 그만두고, 나보다 높은 어떤 것도 인정하기를 중단하나이다.
그럼 –잘 가시게, 인간다운 비판가여!
나는 이제까지 단지 인간답지 않는 인간에 불과했나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더 이상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아니외다.
오히려 유일자이외다.
그렇다, 당신이 몹시 싫어하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은 인간다운 사람과 인도적 사람, 그리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람에 견주어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외다.
오히려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나이다.”
글의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인간답지 않은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인가?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다음에 쓸 글의 주제는 “그렇다면 나답게 사는 것은 혁명일까 반역일까?”이다.)
이 말은 54쪽, 78쪽에 나온다. eingenommen은 ‘편견에 사로잡힌’이라는 형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