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박종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에고이스트의 의미를 흔히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사람’,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타주의자’와 대립하는 의미로 알고 있고 이러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에고(ego)와 같은 의미로 ‘egoistisch, persönlich, eige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에고와 관련된 의미는 ‘나다운, 나답게, 자기다운, 자기만의, 자신의’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에고이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눈이 필요하다. 그는 일반적이고 굳어진 개념보다는 새로운 의미로 에고를 이해하고 있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살아가는 동안 자기다움이 짓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한번쯤 “너 참, 인간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또는 이런 말을 남에게 해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슈티르너가 보기에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인간답지 않는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Menschlichen)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다운 사람과 자기다운 사람(Egoist)을 대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답지 않는 인간(das Unmenschliche[unhuman])이 자기다운 사람이다. 또한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Einzige)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그가 사용하는 아래의 문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das Egoistische als das – Einzige)”(162), “인간답지 않은 인간, 즉 자기다운 사람”(142) ‘인간답지 않은 인간’, 혹은 ‘자기다운 인간’(egoistischen Menschen)(376)

 

이제 분명한 것은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란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고이즘도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아주의로 번역하였다. ‘자아주의’는 ‘자기 찾기’, ‘자기에게 유용함’(376)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자아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주의와 사제직의 전쟁, 현세에 마음이 있는 사람과 성령에 마음이 있는 사람의 전쟁”(401) 슈티르너가 보기에 ‘인간다움’은 어떤 정신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정신을 ‘덧없음’으로 과소평가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신을 덧없는 것, 유한한 것, 무상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답게’(egoistisch)(350)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너의 모든 힘, 너의 능력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것이다.(350) 그리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고 있는”(208) 것이다. 자아주의는 나다움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자아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개성이라든가 개별화(Einzelheit oder Vereinzelung)에 거주하는 일치하지 않은 비동등성과 자기다운 비동등성”(108). 결국 자기답게 사는 것은 개성과 개별화 즉 비동등성, 곧 차이에 대한 인정이다. 나아가 자기다운 사람은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말을 확인해 보자.

 

“자기다운 사람은 자신을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떤 소명도 인정하지 않으며, 인류가 더 발전하는 목표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상상 따위도 하지 않기에 그러한 목표를 위해 눈곱만큼도 기여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스스로의 삶을 살아 나가고 펼쳐 나갈 뿐, 그로써 인류가 잘될지 나쁘게 될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339)

 

과연 우리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자아의 그릇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관념의 도구,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 인류를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은 자기다운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감정을 구분하면서 자기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이는 감정이 나를 고취하였던(eingegeben) 것인지, 단지 감정이 나를 자극하였던(angeregt) 것인지 이다.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이 자기 자신의 감정, 자기다운 감정들이다. 왜냐하면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은 나에게 감정을 각인하지 않았고, 받아쓰거나 따라하도록 불러주지 않았으며,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0)

 

그러니까 고취하는 감정과 나를 자극하는 감정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자기다운 감정으로 간주한다. 그의 글에서 고취하는 감정을 확인해 보자. 그것은 어떤 현실의(wirklich) 내가 어떤 “자유로운 시민”, 어떤 “국가의 시민”, 어떤 “자유로운 혹은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국가를, 국민을, 인류를 그리고 그 밖의 유사한 모든 것을 자기 내면에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어떤 낯선 나’를 받아들여서,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어떤 낯선 나(eines fremden Ichs)를 위한 헌신’을 받아들여서 진리를 보고 내 자신의 현실성(Wirklichkeit Meiner)을 본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247)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고취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들림이다. 그것은 미친 것이다. “만약 ‘신들림’(Besessenheit)이라는 말이 당신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렇다면 이 말을 선입관(Eingenommenheit)1이라고 부르자, 그렇다, 그 이유는 정신이 당신을 사로잡기(besitzt) 때문이고 모든 ‘고취’(Eingebungen)는 정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열광(Begeisterung) 그리고 황홀(Enthusiasmus)이라 부른다. -부진하고 철저하지 못한 방법으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황홀(Enthusiasmus)은 –광신(Fanatismus)이라 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48)

잠시 ‘Begeisterung’ 단어에 주목해 보자. 맑스는 <자본>에서 “노동의 불길이 죽은 사물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고’(begeisten)”(강신준, 292-293)라고 쓴다. 맑스가 사용한 이 단어는 헤겔도 사용하였다. 메럴드 웨스트팔에 따르면 ‘begeisten’는 헤겔이 만든 단어이다. 학문적 노고를 통해 진리에 이르는 정신적 활동이 ‘begeisten’이다. 이와 달리 열정에 휩싸인 상태{begeistern(Begeisterung)}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인 상태, 열정에 휩싸여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는 앞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들린 사람(Besessener)과 연결된다. ‘인간다운 사람’이라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신들린 사람, 미친 사람이다. 신들린 사람과 대립하는 사람은 유일한 사람, 자기다운 사람이다.

자기다운 사람과 사랑의 문제를 살펴보자. “자, 어떤 개인에 자기다운 충동(Trieb)이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을 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족을 공경’한다.”, “이와 반대로 그의 혈관에서 자기다운 피가 충분히 이글거리며 부글부글 끓는다면, 그는 가족에 ‘범죄자’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하고 가족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242) 슈티르너가 보기에 자기다운 사랑이 아닌 것은 “자발적 사랑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본질의 자기 사랑”,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다운(egoistisch)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다운 사랑이다.”(341)

자기다움과 국가의 관계는 어떨까? 국가는 신성하지 않는 사람을 야만인, 자연스러운 인간, ‘자기다운 사람’으로 간주한다.(263) 그래서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을 길들이고자 애쓴다. 국가는 구속이 없는 욕망을 발산하는 사람에게 “자기다운 사람”(egoistische Mensch)이라고 욕한다.(350) 슈티르너는 자아주의와 인간다움(Humanität)은 같은 의미이었어야만 했다(200)고 아쉬워하며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새로운 ‘인간다움’은 자기다움이다. 자발적이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더 높은 본질에 신들리지 않은 사람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움이고 에고이즘은 자아주의이다. 자기다운 사람이 유일자이며, 더 이상 인간다움이 아니라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래의 글은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슈티르너의 ‘기도’라고 비꼰 부분인데, 필자는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이라고 본다. 원문은 시의 형식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시의 형식으로 변형하였다. 아래의 글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결연한 용기로 자기 자신에 등을 돌리면서, 동시에 평온을 어지럽히는 비판가를 외면하고, [162]비판가의 항의를 건드리거나 다루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어떨까? “당신은 나를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고 부른다.”고 비판가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보기에 실제로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외다. 왜냐하면 오로지 당신이 나를 인간다운 사람과 대립시키기 때문이외다.

내가 내 자신을 이러한 대립에 매료되도록 하는 한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경멸할 수 있었나이다.

나는 경멸당할만한 사람이외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보다 나은 자아를 내 밖에서 찾았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다운 인간’을 꿈꾸었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다운 인간의 ‘참된 자아를 갈망하고 항시 ‘가엾은 죄인’으로 남아 있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닮았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만 나 자신을 생각했나이다.

나는 충분히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고 충분히-유일한 사람도 아니었나이다.

바로 지금 나는 나 자신이 인간답지 않는 인간으로 여겨지기를 중지하나이다.

그리고 나를 인간에 비교하여 측정하거나 측정 당하는 일을 그만두고, 나보다 높은 어떤 것도 인정하기를 중단하나이다.

그럼 –잘 가시게, 인간다운 비판가여!

나는 이제까지 단지 인간답지 않는 인간에 불과했나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더 이상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아니외다.

오히려 유일자이외다.

그렇다, 당신이 몹시 싫어하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은 인간다운 사람과 인도적 사람, 그리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람에 견주어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외다.

오히려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나이다.”

글의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인간답지 않은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인가?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다음에 쓸 글의 주제는 “그렇다면 나답게 사는 것은 혁명일까 반역일까?”이다.)


  1. 이 말은 54쪽, 78쪽에 나온다. eingenommen은 ‘편견에 사로잡힌’이라는 형용사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3월 월례발표회 영상 “서양철학 1세대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 오래된 미래로서의 한반도 민주주의”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3월 월례발표회

 

링크: https://youtu.be/R77mYJeYhQs

한철연 학술1부에서 기획한 2021년 2월부터 6월까지의 월례 발표회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들’ 1]이라는 기획 아래 총 5번의 발표가 기획되었습니다.
이번 3월 월례 발표회는 조배준 선생님의 발표와 유현상 선생님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3월 월례 발표회

* 기 획: 자유주의 VS. 민주주의
* 주 제: “서양철학 1세대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 오래된 미래로서의 한반도 민주주의”
* 발 표: 조배준(건국대학교)
* 토 론: 유현상(숭실대학교)
* 일 시: 2021년 3월 26일 (금) 오후 4시 – 6시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글: 행길이

 

아, ‘테스형!’

 

‘네 주제를 알아!!’

 

똘똘이에게는 요즘 한창 연예인이 될 꿈에 부푼 덩치라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덩치는 똘똘이 앞에서 그동안 열심히 익힌 솜씨를 보여준 후 이렇게 말합니다. “어때? 이만하면 이번에 열리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적어도 톱 텐에는 들 수 있겠지?” 내심 덩치의 솜씨에 감탄하던 똘똘이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배알이 뒤틀려서 이렇게 비아냥댑니다. “흥, 소크라테스가 한 명언도 몰라? 네 자신을 알아야지. 주제 파악이나 좀 하라구. 무식한 딴따라같으니라구.” 심술궂은 이 말에 화가 난 덩치는 주먹을 날렸어요. 똘똘이는 ‘객관적’ 사실을 알려준 호의를 주먹질로 보답한 덩치가 원망스러워요. 순간 똘똘이는 무지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느꼈던 소크라테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역시 진리를 외치는 자는 고독한 거야.” 이렇게 되뇌이며 똘똘이는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친구의 무지함을 깨우쳐주려 했다가 우정을 해친 똘똘이는 과연 지혜로운 걸까요? 그는 과연 무지에서 벗어난 이일까요? 아무래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참뜻은 똘똘이가 생각하는 의미가 아닌 것 같군요.

 

1. ‘너 자신을 알라’=무지(無知)의 자각(自覺)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4백 여 년 전, 지중해 유역의 머나먼 나라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에 소크라테스(Sokrates)라는 현자가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겼으며 구질구질한 옷차림으로 매일같이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곤란한 질문으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말입니다. 바가지를 긁던 그의 아내 크산팁페(Xanthippe)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하지만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 말은 흔히 “함부로 까불지 말고 네 주제 파악이나 해라”라거나 “나쁜 규칙이라도 그것이 규칙인 이상 잔말 말고 지켜야 해”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이런 심술궂은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나요? 정말 그는 이 두 ‘명언’을 남긴 사람일까요?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른들은 아마 “무슨 소리야!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구. 난 그걸 교과서에서 배웠는 걸!!”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틀렸답니다. 두 말 모두 소크라테스가 한 게 아니어요. 소크라테스가 남에게 면박이나 주고 부당한 규범을 강요하는 영감탱이였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존경과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테니까요.

원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늘 되뇌이고 있었던 상식적인 격언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활용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집니다. 델포이(Delphoi) 신전의 무녀들은 신전 입구에 이 말을 걸어놓고 신탁을 요청하는 이들의 금언으로 삼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당시 사람들과 다르게 해석하면서 자기 삶의 경구로 삼습니다. 그는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라’는 의미로 풀이했죠. 이것을 어려운 말로 ‘무지(無知)의 자각(自覺)’이라고 한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지혜로운 자라고 칭송을 받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의 가르침을 경건하게 따르는 삶을 살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라는 신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델포이 신전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남달랐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한 원인이었죠.

‘소크라테스’ 출처: 위키피디아

 

2. 델포이 신탁

 

아마도 조각가였을 거라고 짐작되는 소크라테스는 당시에 특출한 지혜를 가진 이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카이레폰(Chairephon)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찾아가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신탁을 이랬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친구로부터 신탁의 내용을 전달받은 소크라테스는 기뻐하기는커녕 혼란에 빠졌어요.

 

“내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은 나 자신이 잘 아는데, 신은 나를 가장 지혜로운 자로 지목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하지만 신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틀린 말을 할 리는 없을 테고… .”

 

자기는 무지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일단 신의 말대로 살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심 깊은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보고 있는 이상 이 말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의 뜻대로 살면서도 자신의 의혹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자. 그래서 그들이 정말 지혜로운지 시험해보자.”

 

그는 우선 가장 지혜롭다는 정치인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 중 누구도 지혜로운 답변을 내놓지는 못했어요. 이어서 그는 라케스(Laches)와 니키아스(Nikias)와 같은 이름난 장군들을 찾아다니면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알면 가르쳐 달라며 여러 가지를 끈덕지게 묻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소크라테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있는 사람이 아님이 판명되었어요. 이어서 그는 작가들에게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당시 작가들은 가장 훌륭한 통찰력을 지닌 이들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이들도 자기가 쓴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작품을 지혜를 가지고 짓는 게 아니라 타고난 끼나 우연히 얻게 되는 영감에 의해서 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내놓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탁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영명한 지혜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지혜롭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이 모르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겸손한 지혜를 다른 사람들도 갖도록 권하면서 돌아다녔어요. 사람들이 그의 깨달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이용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무지의 자각’이라는 철학적 성찰로 해석한 거죠. “우리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탁월하며, 용기있는 이들이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함께 진지하게 노력합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깨달음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더 건강한 아테네 사회를 위해 사람들이 노력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3. 전쟁과 내전

 

소크라테스가 이런 충고를 하고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이웃 나라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어요. 한 때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을 함께 물리친 두 동맹국은 강력한 적을 물리치자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27년 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약소국을 침공하는 등 부당한 짓을 여러 차례 저질렀습니다. 그 와중에 국론은 분열되고 민심은 사나워지기 시작했어요. 내란도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정의보다는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는 데에 급급해졌어요. 아테네인들이 자랑했던 빛나는 자유의 영혼은 점점 부패하고 추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정신이 부패하여 사회가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답니다. 아테네를 사랑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빌어 영혼의 빛을 잃고 헤매고 있는 아테네인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를 바랐던 겁니다.

 

4. “힘 센 놈이 정의로운 거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아테네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연합이라는 정의로운 정신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오직 힘만이 정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힘 있는 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정의로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법과 제도라는 것도 결국에는 권력(힘)을 가진 이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휘두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죠.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와의 논쟁에서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정의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거듭할수록 자기의 무지가 드러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트리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분명히 현실에서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들어맞는 것 같은데, 소크라테스와 함께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니 그것은 틀린 게 분명해보였던 까닭입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서 대화하는 아테네 사람이었다면 트라시마코스가 아닌 누구라도 화를 내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국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이웃나라를 부당하게 멸망시키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이 정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른말을 하는 소크라테스가 얄미워보였겠죠.

 

5. “나는 굼뜬 말을 깨우는 등에라네”

 

소크라테스의 대화 여행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롭고 덕망있는 자로 한껏 뽐내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이 멍해져 버렸답니다. 그리곤 어느새 무지한 자로 전락하게 된 자기를 발견하게 되죠. 이렇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여 진지한 탐구의 자세를 갖게 하는 대화의 방법을 문답법(dialektik)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걸려든 이들은 황급히 말꼬리를 잡아 소크라테스를 논박해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공격을 미끄러운 뱀장어 마냥 요리조리 피해가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밉살스런 전기뱀장어같이 보였어요. 소크라테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믿음을 비웃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어요. 신탁의 말을 확인해보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은 집단적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가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죠.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 특유의 위대한 정신을 잊고 점점 자신의 적이었던 페르시아의 추악함을 닮아가는 아테네인들이 걱정스러웠어요. 그에게 아테네는 ‘혈통은 좋지만 이제는 욕심 때문에 살만 뒤룩뒤룩 쪄서 잠만 자려고 하는 말’ 같아 보였어요. 소크라테스는 이 뚱뚱이 말을 깨워 다시 뛰게 하기 위해 따끔한 자극을 선사하는 등에가 되기로 했답니다.

 

6.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

 

여러분도 이제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게 되었을 테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다만 그는 자기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헬라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델포이 신전의 경구를 활용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무지를 스스로 깨달아 다시금 영혼의 눈을 떠서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유도하고 싶었어요. ‘우리 앞에 있는 문제의 해답은 나도 잘 모르고 당신도 잘 모릅니다. 우리 아는 척은 이제 그만둡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 문제의 해답을 함께 고민해보는 친구가 되자구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그러니 이제는 친구를 비아냥대거나 비웃는 마음에서 이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겠죠?

 

②편에서 계속…

 


2편 가기

한철연을 비롯한 27개 철학 학회 <미얀마 민주화 지지 성명서 발표> 2021.04.12. 기사 링크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 회장 연효숙)을 비롯한 27개 철학 학회가 함께한 한국철학자연합대회 주최 <미얀마 민주화 지지 성명서 발표>가 지난 2021년 4월 12일(월) 오후 4시부터 4시 20분까지 줌(zoom) 온라인 회의로 진행되었습니다. 성명 발표는 이중원 한국철학회 회장이 맡았습니다.

이어서 미얀마 민주화 지지 성명서 발표에 대한 기사가 『교수 신문』(http://www.kyosu.net)에 <철학 27개 학회 “미얀마 군부는 즉시 폭압을 중지하라”>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습니다.

한철연을 비롯하여 한국철학계가 한국 내 사태가 아닌 국제 사회 이슈에 직접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국어와 미얀마어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도 미얀마 민주화 지지하고 미얀마 군부 제재하는 데 동참하라”는 주장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한철연은 미얀마 민중의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미얀마 군부는 즉각 폭압을 중지하고,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미얀마 사태의 해결을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길 요구합니다.

아래 기사 원문 링크(출처 주소)를 클릭하여 성명서 내용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64349

 

첫 번째 글 – 시작하며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1)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 첫 번째 글

시작하며

박영미(한철연 회원)

 

1

‘길 위의 우리철학’을 웹진에 연재하고 책으로 출판한 후 뒤를 이어 한국근현대철학을 계속 소개하고자 했던 분과의 계획은 얼마간 연재되다 중단되었다. 오랜 공백에 뭐라도 해보자며 호기롭게 웹진에 글을 쓰겠다고 나섰지만, 곧바로 후회로 바뀌었다. 그렇게 미적거리는 사이에 분과에서는 새로운 책을 기획했고 동시에 글을 시작할 수 있는 힘도 얻게 되었다.

적지 않은 시간 중국근현대철학, 한국근현대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마지못해 일본근현대철학도 기웃거렸다. 이들을 함께 잘 정리해 구성할 정도의 연구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많은 물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을 거칠더라도 글로 쓰기로 했다. 제목을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로 정한 것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묻고 어떤 틀에도 얽매임 없이 그 물음의 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결과가 항상 뒤따라올 것 같지는 않다. 묻기만 하고 답이 없는 무책임한 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이러한 ‘좌충우돌’도 이해해주시기를 미리 부탁드린다.

 

2

서양의 근대는 분명하게 사유되는데 우리의 근대는 모호하다는 한 사회학자의 고백은 우리 근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대변한다.

“사회과학을 하는 필자에게 서양의 근대는 언제나 뚜렷했고 분명했다. 가령 독일의 노동 계급이 태어났던 1850년대 독일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당시 시민의 삶은 여러 역사 연구를 통해 상상할 수 있다. 미국 역시 토크빌의 여행기나 그 밖의 역사 기록 덕분에 19세기 전반 미국의 사회 상황을 머릿속에서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다. …… 그런데 한국은 근대의 기원과 진화 궤적이 모호하다. 여러 학문 분과에서 한국의 근대를 찾아 힘든 지적 모험을 감행해 왔지만 총체적 모습은 아직 흐릿하다. 어떻게 시작됐는지, 근대의 발전 궤적은 왜 집단적 기획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천지 사방으로 흩어졌는지, 제국주의적 통치는 어떻게 그것을 왜곡했는지를 두고 아직 논쟁이 분분하다.”1

서양의 근대는 물론이고 중국의 근대, 일본의 근대라고 하면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들이 비교적 분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에 대해서는 ‘뚜렷하지 않다’고 토로하거나, 우리의 근대를 찾는 것은 ‘힘든 지적 모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 이유가 우리 근대사 자체의 복잡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양 중국 일본과 달리 유독 우리의 근대만 복잡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근대의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 그 연관과 평가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의 근대를 잘 정리하고 해석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방치했기 때문이다.(이는 특히 한국근현대사상 및 철학 연구에서 두드러진다)

 

3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우리 근대 읽기가 어려운 것은 근대를 마주하면 다음의 질문들이 뒤엉켜지기 때문이다. 우리 근대에 서양의 근대에서와 같은 주체가 존재했을까? 근대적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근대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지 않을까? 이는 주로 동학을 연구하며 부딪치는 질문이다. 식민의 경험과 친일(매국)에 대한 분노는 식민통치 이전으로까지 소급되어 일본과의 영향 결탁된 모든 것들이 배제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주로 개화파를 연구하며 부딪치는 문제이다. 시대의 변화를 강하게 거부했던 집단은 왜 여전히 근대사의 전면에 자리하고 있을까? 이는 위정척사파에 대한 서술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의 근대로 자신 있게 내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정리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뜻 나서지 못하거나 나섰더라도 좌절하게 되고 결국 외면하게도 된다. 나의 우리 근대 읽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인정하고, 과도하게 소급해서 평가하지 않고, 시대를 역행했던 집단은 그에 맞는 역사의 자리에 있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우리의 근대는 애써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히 읽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우리 근현대의 공간1 : 근현대사 기념관

서울 강북구에 있는 근현대사 기념관은 작은 규모지만 우리 근현대사를 집약해서 전시하고 있다. 4.19 민주묘지에서 가깝고, 주변에 독립운동가의 묘역들이 있다.

 

 


  1. 송호근, 『시민의 탄생』, 민음사, 2013.

시가 필요한 스물일곱 번째 시간, 꽃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일곱 번째 시간, 꽃

 

마리횬

 

오늘은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꽃’에 관한 시를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국내에 발표된 꽃에 관한 시는 정말 많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태주 시인의 동명의 시 <꽃>도 있죠. 복효근 시인의 <안개꽃>이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좋은 시들이 참 많이 있는데 다 소개해드리지 못해서 아쉽네요.

 오늘 소개해 드릴 시는 <사람의 꽃이 되고 싶다>라는 제목의 시로, ‘이채’라는 필명을 쓰는 시인의 작품입니다. 저는 이 시를 통해 처음 만나는 시인인데요, ‘꽃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 준 시라서 가져와 봤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관계,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듣고 올까요?

 

  사람의 꽃이 되고 싶다

                                                    이채

 

그대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서로의 꽃이 될 수 있을까

꽃집으로 들어설 때의 설레임과

한아름 꽃을 안고 집으로 오는 동안

한 잎 한 잎 고운 향기 맡으며

상큼한 웃음 감추지 못하던 그 표정으로

 

나는 그대에게 어떤 꽃으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발을 밟은 그대라면

어깨를 부딪친 그대라면

길을 묻는 그대라면

서로의 이름은 몰라도 은은한 들꽃 같은 향기로

미소가 예쁜 친절한 꽃으로

사슴의 눈망울을 닮은 착한 꽃으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저마다 뜰은 있어도 가꾸지 않고

꽃병은 있어도 꽃이 없는 창가에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본다 한들

시끄러운 귀로는 물소리를 들을 수 없고

불만의 목소리로 백조의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며

비우지 못한 욕심으로 어떻게 새들의 자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부족함 속에서도 늘 감사하는 행복의 꽃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느끼는 기쁨의 꽃

보이지 않는 숨결에도 귀 기울이는 관심의 꽃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꽃

사막에서도 물을 길어 올리는 지혜의 꽃

사람의 뜰에는 만 가지 마음의 꽃이 있어도

어느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네…

 

우연히 길에서 이름모를 들꽃들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꽃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지만, 꽃들은 우리가 누구든 간에 만나는 모두에게 자신의 빛깔과 향기로 친절히 미소를 지어줍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 인간은 어떤 가요? 서로 잘 아는 사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너그럽죠. 특히 나와 어떤 이해관계가 있다거나,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굉장히 친밀합니다. ‘학연’, ‘지연’이라는 말이 괜히 만들어지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반대로 나와 그다지 상관이 없는 사람이거나 잘 모르는 사람, 시인이 시에서 말하듯 버스에서 실수로 부딪히거나 발을 밟은 사람, 길에서 방향을 묻는 사람을 마주칠 때, 괜스레 무관심하게 되고, 그 관계에서 ‘나’와 ‘내 기분’이 우선 되어 가끔 무례하게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하기 위해 꽃집에 가서 한아름 꽃을 포장해 나설 때의 그 기분과 행복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가 반문합니다. 꽃은 우연히 마주친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아름다운 향기와 빛깔로 행복감을 나누는데, 우리는 우연히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죠.

‘전혀 모르는 사람, 우연히 만난 사람을 어떻게 ‘행복한’ 표정으로 대할 수 있다는 말이지?’라고 고개를 갸우뚱 하고 계신가요?

저는 호주에서 2년간 거주했던 경험이 있는데요, 이 시를 읽으면서 호주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외국에서 거주하면서 많이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길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으면서 인사한다는 것이었어요. 버스에서 부딪히거나 우연히 스치는 경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움직이다가 눈이 마주친 경우에도, 한국에서라면 눈을 피해버리거나 무표정으로 넘어가기 일쑤인데, 호주 사람들은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지어 줍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라고 한마디 건네기도 하고 말이죠.

일부러 억지로 하지 않아도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고 있다는 여유와 따뜻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마다 뜰은 있어도 가꾸지 않고

꽃병은 있어도 꽃이 없는 창가에서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본다 한들

시끄러운 귀로는 물소리를 들을 수 없고

불만의 목소리로는 백조의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며

비우지 못한 욕심으로는 새들의 자유를 이해할 수 없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2021년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향상되었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기술적으로도 많은 나라를 앞지르는 그야말로 ‘선진국’을 향하고 있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저마다 뜰”, “꽃병”, “아름다운 호수”가 갖추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서로를 위하는 여유와 따뜻함이 없는 삶이라면, 저마다 뜰이 있더라도 그것을 가꾸지 않는 삶이며, 꽃병은 있지만 꽃이 없는 쓸쓸한 창가라고 말이죠.

당장 ‘뜰’도 없고 ‘꽃병’도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와 요구가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들에게는 뜰을 갖추고 꽃병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 저마다의 뜰과 예쁜 화병까지 가지게 된 우리라면,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길 권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뜰을 가꾸고, 꽃병에 꽃을 꽂으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꽃을 가꿔야 할까요?

 

부족함 속에서도 감사하는 행복의 꽃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느끼는 기쁨의 꽃

보이지 않는 숨결에도 귀 기울이는 관심의 꽃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꽃

사막에서도 물을 길어 올리는 지혜의 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꽃에게서 배워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꽃들은 비바람이 불더라도 햇빛이 쨍쨍하더라도, 어떤 부족한 것이 있어도 늘 그 자리에 피어나요. 찌는 듯한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잠깐 내리는 소나기에 감사하며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 내죠. 물이 한 방울도 없을 것만 같은 절벽에서도 지혜롭게 물을 찾아서 자기 자신을 피워내는 꽃을 보면, 내게 부족한 것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겸손히 자기의 역할을 다 해내는 꽃의 덕목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꽃송이라도 저마다 아름다운 빛깔과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쁜 일이 있을 때 꽃으로 축하하고, 사랑의 마음, 감사의 마음도 꽃으로 표현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 꽃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겠죠.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존재가 ‘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어느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면서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행복의 꽃, 기쁨의 꽃, 관심의 꽃을 피워 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소한 것부터 목표를 정해 하나씩 고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나태주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 노랫말을 붙여서 만든 노래 가져왔습니다. 가수 정밀아가 부른 <꽃> 들으시면서, 이번 한 주간 내 마음에 어떤 꽃을 피울지 다짐해보시면 어떨지요.

정밀아 – 꽃, 주소: https://youtu.be/r1QVbQtwrko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최종덕의 책과 리뷰]

자기의식과 자유로부터 얻어낸 인정욕구

 

서평자: 최종덕(독립학자; http://philonatu.com)

 

이정은 씀,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

 

남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런 인정욕구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실존적 현실이다. 실존적 현실이란 생물학적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이 서로 얽혀져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접촉되고 있는 생명의 실상이다. 그런 스펙트럼을 나는 ‘스피노자 스펙트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거듭 말해서 스피노자 스펙트럼의 대표적인 것이 인정욕구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정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엄연한 사회적 현실이며 동시에 존재론적 필연이다. 사회적 현실이라는 이유는 단박에 이해되어지는데 반해, 존재론적 필연이라는 이유는 쉽게 이해되지 않고 개념부터 어렵다. 그런데 인정욕구의 존재론적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해준 책을 찾았다. 그 책은 이정은의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살림 2005)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허망함과 유한함에 부딪히는데, 이를 극복하려고 무한성과 불멸성을 가져보려는 욕구가 생겨났으며, 이런 욕구는 동물적이고 자연적인 욕구와 달리 정신적이고 의식적 욕구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의식적 욕구를 스스로 자각 하는 원시인류에서 도덕이 생겨났나는 칸트의 이야기, 욕구 충족에 관련된 좋고 나쁨이 극단적으로 되어 선과 악의 구분으로 되었다는 니체의 이야기를 거쳐서, 저자 이정은은 헤겔의 자기의식과 자유 개념으로부터 인정욕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이 책의 의식적 욕구에 대한 자각 편) 인정투쟁의 도덕철학을 다룬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 남성 중심 혹은 양성 중심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부정하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차이의 정치를 제시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재분배 정치에서 인정의 정치로의 확장을 강조한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인정투쟁을 다문화주의와 연결시킨 찰스 테일러( Charles Margrave Taylor, 1931~), 차이의 정치를 넘어서 포괄의 정치를 확립한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2006) 모두 자신의 철학적 배경을 헤겔에 두고 있다. 헤겔 철학의 계승인지 아니면 부정인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인정투쟁 논의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의 저자가 인정욕구의 철학을 말하기 위하여 헤겔 철학의 배경을 다루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인정투쟁에 이르는 헤겔의 논의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는데, 이 책은 그런 헤겔철학의 철학적 문맥을 우리들 일상의 문맥으로 바꾸어 서술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정은은 인정욕구와 같은 의식적 욕구를 채우려면 자연 욕구에서 벗어나 자아를 반성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헤겔의 논의를 중심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반성을 위해 욕구 대상을 객체화시켜야 하며, 내가 객체화된 대상을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헤겔은 “노동”을 통하여 이런 자각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노동을 통해서 대상을 단순 소비재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창조성을 얻을 수 있다. 대상을 창조하는 나의 창조행위는 나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과 같은데, 헤겔은 이를 자기의식의 자각 과정이라고 했다. 자기의식을 자각하면서 나는 자유로워진다. 나의 자기의식과 자유는 남들의 자기의식과 자유에 연결되어 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생성된 나의 자기의식이 바로 반성력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대상을 통해 반성하는 나의 주체적 활동이다. 이런 반성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자기인정의 정립이다. 자기인정은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 즉 인정욕구의 원천이라는 논리구조를 저자는 잘 풀어서 우리 독자들에게 설명해 준다.

헤겔 『법철학』에서 인정욕구를 사적인 욕구에서 공적인 욕구로 전환할 것을 헤겔은 요청했다. 사적 욕구는 나를 중심에 둔 이기적 욕구이다. 사적 욕구는 개인적이고 특수하기 때문에 남들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헤겔은 특수한 개별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를 『법철학』에서 ‘시민사회’로 규정했다. 시민사회는 공동체 실현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취약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정착되어 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시민사회는 개인 권리를 실현하려는 근대사회의 특징인데, 저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출처: 위키피디아

시민사회의 경제적 욕구는 욕구대상물을 생산하게 되고 이를 위해 단순 노동행위를 가했다. 이런 노동행위는 경제활동의 주축으로 되었지만, 생산품이 많아질수록 욕구 또한 무한대로 커지므로 결국은 채워질 수 없는 욕구만 낳게 된다. 이를 “욕구의 여변 지대”라고 표현했다. 욕구의 여변 지대, 즉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노동’을 필요로 하고 나와 너는 서로 의존하게 된다. 너와 나 사이의 생산 의존관계는 인정욕구의 의존관계로 이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하여 나는 남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의 철학적 토대를 저자는 쉽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 편)

우리는 서로 인정하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서로 인정받으려고 해서 더 괴로워한다. 나만의 욕구를 채우려 하니 힘들고 남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더 힘들어진다는 삶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소화해내는 논의구조가 이 책의 탁월한 특징이다.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라! 인정욕구에서 벗어나면 그런 괴로움이 없어질 것이라’는 덕담이 회자하지만, 그런 추상적 덕담은 나도 할 수 있다. 욕구는 나의 자연적 본래에서 온 것이라 말로만 좋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의 욕구가 없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큰 문제다. 인정욕구의 실존적 현실과 개체적 특수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욕구와 욕망에 마주한 나의 갈등을 보편적으로 정립하는 구조를 저자는 보여주고 있어서, 이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헤겔의 표현대로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정립’이라는 것인데, 보편성의 정립은 개인 중심에서 공동체 전체의 문화 도덕의 발전을 유도한다고 말한다. 거꾸로 공동체에서 도덕의 고양은 결국 개인의 인간성 실현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헤겔의 변증법 과정을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보편성 정립을 통한 인간성 실현은 국가 공동체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인정의 지향점」 편)

문제는 인정욕구가 상호보편성에서 탈선하여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방적 욕구실현으로 왜곡된다는 점이다. “왜곡된 인정모델”은 강요된 보편화의 병리현상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사례로 들은 노사관계에서 보듯 노동자의 욕구는 배제되면서 기업주의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위장되는 많은 경우들이 드러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 계층이 없어졌지만 인정투쟁에서 이긴 자와 진 자 사이의 계층화가 고착되고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계층 고착화를 막기 위한 철학적 대안으로 저자는 자기의식과 자유라는 헤겔의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인정의 지향점」 편)

헤겔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인격을 지닌 존재이다. 인정투쟁은 그런 자유를 실현하려는 활동이다. 헤겔은 인정욕구와 인정투쟁의 고유 개념을 그의 『정신현상학』(1807)에서 전개했다. 여기서 인격적 존재의 의미는 자신의 내적 목적을 지니며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그 목적을 실현하려는 데 있다.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할 때 ‘자기의식적 존재’로서 자아도 실현된다. 인정욕구는 ‘자유’와 ‘자기의식’의 두 가지 절대원리에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자유에 대한 자각과 자기의식에 대한 자각은 같은 지평에 있는데, 그런 원리를 정립하려는 이성적 존재가 인간이다.(「인정을 위한 싸움」 편)

동물원 침팬지를 대상으로 보여준 인정욕구 실험은 유명하다. 격리되었지만 서로를 볼 수 있는 두 마리의 침팬지가 있다. 먼저 한 쪽 1번 침팬지에게 오이를 주면 잘 받아먹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쪽 2번 침팬지에게만 파인애플을 주면, 이를 본 1번 침팬지는 화를 내면서 원래 잘 먹고 있던 자신의 오이를 내팽개쳐 버린다. 2번 침팬지와의 차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만의 자기의식이 없었다면 나는 타인의 행동에 대해 반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정투쟁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또한 ‘타인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발생한다. 인정욕구 투쟁은 자기의식을 동반하여, 나는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투쟁한다. 인정을 받더라도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인정을 받는다면 여전히 공허감에 빠진다는 뜻이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메타포처럼 주인은 노예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식을 자각하지 못하게 억압과 공포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억압 상황에 순응되어진 노예는 외부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끊고 ‘자기의 내면’으로 빠질 수 있다. 노예와 같은 자기 내면화는 헤겔이 반성적으로 관찰한 금욕주의(stozismus)의 한 모습이다. 이런 금욕주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한 가지 태도라고 헤겔은 보았다. 자기 내면화는 사유와 관념 속에서 자유를 누리려는 관념론적 태도인 셈이다. 헤겔은 이를 “현실과 대상의식을 포기한” 자기의식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했다.

헤겔이 말하는 금욕주의는 저급한 자기의식 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금욕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저자 이정은은 이 주제에 대한 설명을 읽기 좋게 전개하여 잠재적인 오해를 말끔히 풀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만이 아니라 주인도 마찬가지로 순응의 틀에 빠지고 마는 노예-주인-변증법적 관계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노예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노예의 노동으로 얻은 부를 착취하면서 주인은 노동하지 않고도 물질을 향유하고 자연적 욕구에 빠진다. 결국 주인 역시 자유와 자기의식을 잃는다. 헤겔이 말한 사례에서 보듯 공포정치가 확산될 경우 주인은 물질적 향유에 빠지지 않더라도 현실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빠지고 금욕주의를 택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무관심과 부정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자기의식의 저급한 단계’라고 헤겔은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자칫 ‘금욕주의’, ‘저급한 단계의 자기의식’, ‘시민사회’ 개념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 즉 이런 개념들의 원래 의도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 관념적이고 개체적인 것, 고립적이고 정적인 것을 반성하면서 관계적이고 동력학적인 변증구조를 회복하자는 데 있음을 저자 이정은은 잘 해명해주고 있다.(「인정투쟁」 편)

앞서 서술했듯이 강요된 자기내면화에 빠진 노예나 향유와 저급한 금욕주의에 빠진 주인이나 다 같이 인정욕구의 상호관계에 놓일 수 있다. 주인이 향유에 빠질 때 노예는 자기의식과 자유와 무한성을 자각하면서 미약해진 주인과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정투쟁의 시작이다. 그 결과 주인은 노예로 되고 노예는 주인으로 바뀔 수 있다. 주인이 된 노예는 주인의 허망함을 느낄 수 있다. 인정투쟁의 끝은 주인-노예 관계의 역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인정에 있다. 이러한 상호인정의 변증법이 인정욕구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한다. 바람직한 상호인정이 실현되려면 다음 조건이 요청된다. 사회관습이나 민족정신 등의 공통의 삶의 지평에서 형성되는 이성적이고 체계적이며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자유와 자기의식의) 질서가 인륜성으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조건 말이다.(「인정 욕구의 양상」 편)

현실적으로 볼 때 인정욕구가 모두 실현되리라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욕구를 고통의 산실이라고 체념하기보다는 그런 고통을 해소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매우 소중하다. 그런 장치로서 첫째 인간의 욕구를 관찰하는 성실한 분석이 있어야 하며, 둘째 왜곡되어가는 인정욕구의 삶의 구조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용기 안에는 타인이 원하는 인정욕구를 수용하는 태도, 타자 속에서 나를 직관하는 내 안의 타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포함된다. 현대인의 과제는 어떻게 나의 삶을 타자로부터 폐쇄시키지 않고 타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느냐에 있다고 저자 이정은은 말한다.

법철학에서 헤겔의 논의는 매우 어렵고 복잡하기로 유명한데, 저자 이정은은 이런 헤겔의 이론구조를 인정욕구라는 관점에서 매우 평이한 문장으로 설명해준다. 헤겔 법철학의 서술특징은 연구대상(내용)과 연구방법론(형식)이 서로 겹쳐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헤겔은 변증법 구조를 서술하면서 그 서술의 방법 자체가 변증법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헤겔 서지학의 특징 때문에 헤겔의 작품을 독서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성실한(ehrich) 의식과 현실화된 정신(Geist) 사이의 관계, 공허한 사태와 사태 자체(Sache selbst) 사이의 관계, 금욕주의와 현실포괄 사이의 관계, 시민사회와 공동체 사회의 관계, 특수와 보편의 관계, 우월욕구와 대등욕구의 관계 등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갈등과 정립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런 관계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 Bewusstsein)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이 전개되는 방식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은 그나마 겨우 이해되기는 하겠지만, 그런 구조를 설명하는 설명 틀의 형식도 변증법적이라서 헤겔의 글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변증법적 내용을 변증법적 형식으로 다룬 헤겔 인정욕구의 중층 구조를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풀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단한 글쓰기 능력이다. 인정욕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많은 사람들에게 욕구의 문법을 좀 더 수월하게 읽어보도록 이 책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를 강추한다.

 

시가 필요한 스물여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2) – ‘비움’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여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2) – ‘비움’

 

마리횬

 

지난 시간에 우리는 도종환 시인의 시 <깊은 물>을 함께 읽었습니다. <깊은 물>을 통해 내면의 강물을 깊이 채워야 한다는 ‘채움’의 메시지를 읽었는데요, 오늘은 ‘채움과 비움’ 두 번째 시간으로 ‘비움’에 관한 메시지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비움’은 ‘채움’과 정 반대의 행위를 말하는 것 같지만, 오늘 함께 읽을 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채움과 비움의 두 행위가 만나는 지점이 분명히 있음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도종환 시인의 시를 만나 보실 텐데요, 바로 <여백>입니다.

 

 

  여백

                                 도종환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네, 도종환 시인의 시 <여백> 듣고 왔습니다. 차를 타고 숲길 높은 곳을 달릴 때, 산 능선을 따라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의 실루엣을 보신 적 있을 겁니다. 참 아름답죠. 특히 해 질 녘에 해가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뾰족뾰족한 그림자는 노을을 더 운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자연의 풍경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시를 읽으면 더 좋겠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시인의 시각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시인은 높이 솟은 나뭇가지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여백, 허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세세한 나무의 가지들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하늘의 빈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는 나무의 잔가지들이 다 보이죠. 시인은 그 모습을 가리켜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이라고 표현합니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가지를 뻗어 곧은 나무로 자라나기까지 나무는 무수한 세월을 견뎠을 것이고, 수 백 번의 겨울을 보냈을 겁니다. 그 살아온 길이 잔가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마구잡이로 자라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 있는 나무끼리 서로 겹치지 않게 균형을 잡고 멋들어지게 가지를 뻗어 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시인의 말처럼 나무의 가지는 나무의 생명의 손가락인 것이죠.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하지만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배경 속에서는 잔가지들의 모양이나 그 균형, 흔들림을 볼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은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풍경이 그렇지 않나요? 고층 건물에, 건물마다의 요란하고 휘황찬란한 간판들.. 정말 눈이 쉴 곳이 없지요. 그런 꽉 찬 배경은 나무의 생명의 손가락을 쓰다듬어 줄 수 없습니다.

무언가로 지나치게 꽉 차 있어 여백이 하나도 없는 풍경이 그 어느 것도 품지 못하듯, 우리의 내면에도 여유롭게 비워 놓은 여백이 있어야 누군가를 품어줄 수 있겠죠. 그렇기에 시인은 때로는 텅 빈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채움’과 ‘비움’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자세를 말해줍니다. 나 스스로는 중심에 깊은 물을 채우듯 무게를 잡고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자세를 가져야 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는, 작고 연약한 나뭇가지부터 큰 산까지 넉넉하게 품을 수 있는 넓은 비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볍게 인생을 살지 말되, 너무 꽉 채운 삶을 살지 말 것. 쉽지 않은 삶의 태도이지만, 그럼에도 채움과 비움의 메세지를 통해 다시 한 번 다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을 노래는 ‘여백’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가수, 곽진언의 노래 <자랑>이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저는 다음 시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곽진언 – 자랑, 주소: https://youtu.be/aSD5Xx3f8do»

 

☞ 채움과 비움(1) 보러가기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의 책과 리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대 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2019, 에디투스)에 대한 서평: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여정 (2부)

 

최종덕(한철연 회원)

 

세 번째 흐름: 페미니즘과 차이의 정치

 

<프레이저> 구소련의 몰락과 좌파 사상의 동반 몰락의 틈을 파헤치고 다양한 인정투쟁이 나타나는 시대를 포스트사회주의의 조건이라고 낸시 프레이저는 파악한다. 프레이저는 재분배 중심의 정치가 사라지고 인정(recognition)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재분배와 같은 경제적 투쟁 대신에 정체성의 문화적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강조하는 것이 프레이저 정치철학의 내용이다.(229~230쪽) 프레이저가 구분하는 사회적 부정의는 첫째 잘못된 분배로 인한 사회경제적 부정의와 둘째 지배적 타자 문화에 종속되거나 경멸 혹은 무시(불인정) 당하는 문화적 혹은 상징적 부정의이다.(231쪽) 여기서 프레이저는 경제적 부정의가 해결되면 문화적 부정의도 따라서 해결된다는 롤즈의 환원주의 방식을 비판한다. 물론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가 서로 모순되어 변증법적 관계라는 안티-테제론도 반대한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필자 이현재는 강조한다.

여성은 경제적 부정의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문화적 부정의의 피해자인데, 프레이저는 이런 여성의 모습을 이가적 집단(bivalent collectivities)이라고 표현했다. 경제적 부정의의 내용인 재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폐기해야 하고 문화적 부정의의 내용인 불인정의 사회를 없애려면 여성성의 젠더를 강조해야 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두 가지 양면 가치를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 딜레마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4쪽) 프레이저는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재분배와 인정이라는 이가적 태도에 대하여 긍정 해소책과 변혁적 개선책을 구분한다. 그리고 재분배 변혁을 위한 사회주의와 인정 변혁을 위한 해체주의의 결합이 서로의 상충이나 딜레마 없이 부정의를 해소하는 개선책이라고 프레이저는 말한다.(235쪽)

정치적 대표자로서 여성이 여성의 목소리를 낼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여성은 삼가적(trivalent, 三價的)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237쪽) 주디스 버틀러나 아이리스 영은 재분배와 인정의 구분이 이분법적 사고의 창조물이라고 비판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 논쟁은 우리 한국사회의 젠더 운동과 방향을 제공할 것이라고 필자 이현재는 말한다.

 

<누스바움> 정치철학자 누스바움은 “철학자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철학의 통합성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도덕적 삶의 기초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철학은 여성운동처럼 근본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도록 해준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249~250쪽) 분석적이고 범주화된 누스바움의 기초적 질문은 1997년 『성과 사회정의』, 2007년 『성과 윤리학』, 『여성과 인간개발: 역량개발법』 등에서 구체적인 페미니즘이론과 정치철학으로 발전했다. 누스바움의 ‘대상화’ 개념은 페미니즘 핵심개념으로 여성을(사람을)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상화의 일곱 가지 성질을 표현하면, (1)사람을 도구로 삼거나 (2)남의 자율성을 부정하거나 (3)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을 무력화시키거나, (4)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거나 (5)다른 사람 아무나 침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거나 (6)타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거나 (7)타인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경우이다. 레이 랭턴Rae Langton은 여기에 세 가지를 추가했다고 한다. 사람을 (8)몸으로 나아가 (9)외모로만 환원하여 판단하거나 (10)남을 아무 말 못하게 침묵시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이다.(251쪽)

삶, 육체적 건강, 육체적 통합성, 감성, 상상과 사고, 감정, 실천이성, 친밀성, 놀이, 환경 등에 관한 제어능력이 사람답게 사는 기초 역량이라고 한다. 이러한 핵심역량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특히 여성이 인간답게 사는 데 힘들어진다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누스바움의 역량 개발은 국제기구나 미국 정치계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쳤다.(260쪽)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이런 역량들이 제한되어져 왔다. 이제 우리 사회는 역량의 최소치를 제공해야 한다고 필자 유민석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82년생 김지영”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으며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그런 역량의 현실화가 중요하다는 점이다.(261쪽)

<아이리스 매리언 영> 잘 알려진 대로 정치철학자 롤스에서 정의는 공정성이다. 자유권 보장과 분배의 공정성이라는 두 원칙에 입각한 존 롤즈의 분배 정의론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1949~2006) 정치철학의 시발이다. 롤스의 분배정의는 개인주의, 이성 중심, 남성 중심, 원자적 개인 중심이지만, 영은 한 개인에게 책임을 몰아가지 않으며,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구조에 상관적이어서 동적이고 과정적이라고 본다. 개인마다의 차이, 집단마다의 차이를 조명하는 차이의 관점에서 정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정의론 기초이다.(266쪽) 차이를 무시한 동질화는 억압을 더 가중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래서 영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등권의 실현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이질적 공중을 지향하는 “차이의 정치”를 요청한다.(280쪽)

정치에서나 일상에서나 권력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관계적인 것이라는 푸코의 권력 개념을 영은 받아들이면서, 그런 권력 망 속에서 분배논리로 파악되기 어려운 부정의가 산발되고 있음을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지적했다.(270쪽)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의를 도덕심에만 호소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은 정의를 도덕에서 분리하여 정치적인 것으로 설명할 필요를 역설한다. 영이 비유한 “새장의 비유”는 독자에게 앞의 권력구조를 단박에 이해시켜 준다. 억압을 새장에 비유한 마를린 프라이(Marilyn Frye, 1983)를 영이 인용한 것이다. 새장을 만드는 데 사용한 각각의 철사 하나하나는 새를 밖으로 날지 못하게 하는 잠금과 갇힘의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철사가 서로 얽혀 연결되어 새장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되었을 때 새는 밖으로 날지 못하도록 막히게 되어 갇히게 된다. 우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는 바로 이런 새장의 구조와 같다는 비유이다.

공중, 공공성, 공적인 것이란 통일성이 아니라 복수성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아렌트의 영향을 받은 영의 정치철학은 바로 그런 복수성 때문에 진보정치권에서조차 연대를 파괴하는 분리주의와 고립주의를 낳게 될 것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은 거꾸로 차이의 정치가 민주적 소통의 자원(resources)을 제공한다고 항변했다.(282쪽) 획일화된 정체성의 정치는 집단과 개인을 동일시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주변화 시키며 구성원 모두의 동일한 이해관계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질 것을 은연중에 압박하기 때문에, 결국 파벌과 갈등, 배제의 모순을 낳는다고 한다.

영은 심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이 포괄(inclusion)인데, 포괄이란 토론과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거나 소수인 구성원조차도 실질적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괄은 주변화 된 이들을 소통의 과정으로 끌어오고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286쪽) 포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학과 더불어 영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민주적 공공성을 실현하면서 구조적 부정의에 저항하고 차이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영의 차이의 정치학의 구현이라고 필자 김은주는 강조한다.(290쪽)

 

<버틀러> 섹스도 젠더와 같이 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표현은 버틀러 『젠더 트러블』의 주요 메시지이다. 젠더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주체로서 행위자를 가정할 필요 없다고 한다. 주체는 권력이 생산하는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몸이 물질이지만 몸이 담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버틀러의 『혐오발언』(1997)에서는 우리 몸이 권력에 어떻게 지배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버틀러에 따르면 개인은 권력에 복종함으로써만 주체로 된다고 한다.(294쪽) 여기서 우리는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지고 만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은 넘지 못할 규범을 만들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버틀러는 강조한다. 예를 들어 젠더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기를 수술하여 성을 수정하는 것, 즉 정체성의 재배치가 몸에 가해진 강력한 사회적 권력이라고 버틀러는 지적한다. 페미니스트조차도 변화된 각기의 남녀 성적 정체성에 고정되는 것을 버틀러는 비판한다. 페미니스트의 여성 주체성 강조는 정체성 확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버틀러는 보기 때문이다. 기존 이성애적 질서를 부정하듯이 일체의 정체성과 주체성 지평을 버틀러는 같이 부정한다.

주체 부정의 노선으로 버틀러는 헤겔에서 벗어나는 기획에 집중했다. 최근 버틀러의 관심은 삶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의 사회적 조건이 그것이다. 헤겔에서 이성은 분열되었던 의식이 다시 통일되어가는 운동이다. 의식은 타자가 보는 나에서 나와 타자가 다르지 않다는 동일성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헤겔의 동일성으로 표현된 ‘나’ 대신에 변화하고 타인과 다른 나의 차이를 본다. 헤겔처럼 분열된 의식의 통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타인마다 나를 보는 관점과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타자의 철학이 출발된다고 필자 조주영은 평가한다. 나는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며, 변화에 있는 동적인 나를 정적인 무차별로 다루는 정체성의 존재론을 부정하는 것이 버틀러 정치철학의 핵심이라고 한다.(309쪽)

 

네 번째 흐름: 민주주의와 세속화된 근대

 

<하버마스> 하버마스 공영역 개념은 사적 개인들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담론행위로서 그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영역은 중세의 ‘과시적 공영역’과 질적으로 다르다. 근대 공영역은 공적 지위에 오르지 못한 사적 인간들이 모여 생활 속의 공동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던 공간이다. 예를 들어 시장가격, 문학작품, 과학적 발견, 정치적 사건 등을 신문이나 잡지 등의 새로운 형태의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고 한다.(325쪽)

근대성의 주축이 되어온 이성 개념은 해체주의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을 구제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론이 의사소통 합리성 이론이다. 이성을 도구적 이성으로 보는 아도르노의 자기파괴적 합리성 이론을 비판하고, 지배권력으로서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의사소통 패러다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을 구제한다. 의사소통행위 안에 들어있는 일상생활의 상호관계적 실천행위가 이성이 지닌 도구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하버마스는 제안했다. 일상에서 언어행위는 인간 사이의 지배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성 또한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뜻이다.(327-8쪽) 이는 하버마스 의사소통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필자 한길석은 일상 언어행위의 구체적인 대화사례를 들어 그 어려운 의사소통이론을 선명하게 해명해주었다. 책에 나온 예를 보자. 말하고 듣는 일상언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1)객관적 진리성(대화 내용이 객관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 (2)주관적 충실성(대화내용이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만의 콘텍스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문제) (3)사회적 타당성(대화내용이 그들이 속한 사회집단 안에서 사회적으로 불편부당한 점은 없는가의 문제)의 여과장치를 돌리고 있다.(329~330쪽)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상징적 가치와 규범으로 내면화된 생활세계(lebenswelt)와 체계, 즉 화폐(경제체계)와 권력(행정체계)의 조정매체인 체계(System)라는 두 차원을 통해 전개된다. 체계가 생활세계와 분화되고 자립화하면서,(331쪽)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의 역할은 축소되고 체계의 목적합리성이 확장된다. 이렇게 생활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위험스런 현상을 하버마스는 경고한다. 체계의 식민지화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 환경, 반핵운동 등 시민사회의 생활세계가 이끄는 신사회운동을 확대하여 의사소통의 실천을 강화하여, 끝내 시민 차원의 생활세계의 힘이 입법과정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 정치철학의 전략이다.(332쪽) 하버마스의 정치철학의 방향은 인간적 삶의 해방, 혹은 해방적 삶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런 해방적 삶을 찾기 위하여 계몽적 이성과 의사소통의 이성을 구분하고 의사소통의 합리성으로 이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한다. 소통을 통해서, 쉽지 않더라도 사회의 합리적 통합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필자 한길석의 설명이다.

 

<찰스 테일러> 테일러는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도덕철학의 지평을 정치에 확장시켰다.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가능한 자유를 최고의 인류성으로 보는 헤겔 『법철학』의 전체주의 사상을 테일러는 공동체 가치를 결속하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공동체 가치에서 자유의식은 중요하다.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는 다름을 테일러는 강조한다. 서구 근대화의 기저는 자유주의 가치의 확산이라고 본다. 여기서 테일러는 헤겔과 다르게 자유의식과 자유주의를 구분한다.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근대 세속화가 형성된다. 이런 과정을 테일러는 “탈주술화(disenchantment)”라고 부른다. 개인의 삶의 의미는 그가 속한 공동체에 연관되어 있는데, 근대 이전 주술의 기능은 공동체 개인에 신념과 도덕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해온 것으로 테일러는 분석한다. 즉 근대화의 탈주술화는 도덕적 지평의 상실 과정을 대신한다고 설명한다.(347쪽)

도덕적 지평이 상실되어가는 근대의 세속적 시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테일러는 “보다 높은 시간” 개념을 제시했다고 한다. “보다 높은 시간”은 도덕적 지평을 상실하기 이전의 시간이며 영원성의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시간이며, 사물의 질서가 세워진 시간이다. 도구적 이성, 도구적 합리성으로 상실된 도덕을 되찾는 일이 테일러가 말하는 『불안한 현대사회』로부터의 극복이며, 그의 정치철학의 과제이다.(348쪽) 불안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외양은 민주주의이지만 실제로는 ‘현대판 독재’, 이 세 가지라고 쓰고 있다. 이런 불안은 결국 자유주의가 마치 자유의식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유의식을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필자 유현상은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식이란 ‘자기결정의 자유’인데, 자기결정의 자유는 정치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해주는 “인정의 정치”로부터 나온다고 필자 유현상은 설명해주고 있다.

테일러가 말하는 인정이란 개인의 평등한 인격적 처우만이 아니라 문화공동체에 대한 인정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북미원주민에 대한 인정은 원주민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만이 아니라 원주민 공동체 문화, 즉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358쪽) 한국사회에서 테일러의 자기결정의 자유가 정치철학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동체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포함하여 일반시민들의 사회적 연대가 필요다고 필자 유현상은 강조한다.(361쪽)

 

<아감벤>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Homo Sacer)란 “죽여도 되지만 희생양으로는 삼을 수 없는 생명”이다.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 탄생과 더불어 생긴 호모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주권자(법)가 가진 생사여탈권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었다면 근대 권력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필자 이순웅은 이런 권력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세월호의 비극을 예로 들었는데, 세월호 승객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게 내버려 둔 비극이라고 한다. 세월호 승객들, 장기간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내 이웃으로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필자 이순웅은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통해 설명한다.(371~372쪽)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는 사회계약론자가 말하는 주권(sovereignty)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통치(government)를 통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고 한다. 주권권력이 생명권력으로 바뀌었다는 푸코의 인식을 아감벤도 같이한다. 생명권력의 행사라는 점에서 근대적 주권권력은 그 형성과정에서부터 폭력적이다. 아감벤에서 통치성은 폭력성이다. 폭력성은 비오스(bios)를 무시하고 물질적 신체 조에(zoe)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정치적 폭력을 의미한다. 이런 폭력성은 근대국가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강조점이다. 오늘의 정치는 조에와 비오스 자체를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라고 한다. 근대 민주주의조차도 벌거벗은 생명을 통제하고 보살펴주고 관리하는 효율적 정치형태를 찾는 데에 머물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비관적인 아감벤 정치철학을 해명한다.(378~379쪽)

출생과 동시에 조에 생명이 국가의 관리체제 안에 흡수된다. 이주외국인이나 불법체류자 혹은 미혼모의 자식, 외국난민의 자식 등 이런 체제에서조차 배제되는 조에 생명의 벌거벗은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더더욱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고 필자 이순웅은 말한다. 문제는 눈에 띄는 호모사케르 이상으로 눈에 띄지 않는 호모사케르가 더 많이 편재한다는 점이다. 조에에서 비오스의 생명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렌트의 해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비오스를 되찾는 아감벤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인지 필자 이순웅이 더 보태주면 좋을 듯하다.

 

<지젝> 지젝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지만 하이데거의 주체 해체론을 비판하는 데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해체주의 존재론은 기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그 이면에 세계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용인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해체론 기반의 포스트-맑스주의 정치철학을 반대한다. 라캉철학의 거울을 통해서 헤겔의 전체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무정부주의 자치주의나 협동조합주의를 비판하고 레닌의 혁명정치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지젝의 기본적인 정치철학이다.(402~403쪽)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지젝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모시켰다. 즉 급진민주주의에서 혁명적 전위주의로, 계몽적인 라캉에서 낭만적이고 총체적인 정치혁명의 전위주의자로의 변모이다. 그 이유는 지젝이 본 진보진영의 자기한계에 있었다.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신자유주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즉 그들의 규칙 안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본다. 기존 프레임 안에 갇힌 진보진영의 투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단지 비판적 문화연구에 그치는 자기한계에 빠져있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지젝이 보기에 포스트모던 정치는 고전 맑스주의의 제스처를 반복하거나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배우의 연기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필자 김성우는 표현한다.(405쪽) 예를 들어 진보진영의 포스트모던 정치이론의 전략은 문화적인 인정투쟁이나 무지개(사회주의,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연합정치를 기본으로 하는데, 이는 탈정치화 된 경제를 인정하는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화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젝의 혁명정치학이다.(407쪽)

 

이렇게 모두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의 흐름을 한국의 신진철학자 16명이 한 주제씩 잡아 서술한 책이 『현대정치철학의 네 가지 흐름』, 이 책이다. 현대정치철학의 흐름을 넷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정치철학 지성계의 지도를 보는 것 같아서 서평자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관련 전공자 16인이 모여서 쓴 글이라서 통일된 문맥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필자마다의 글쓰기 성향이 각자 드러나면서도 일반 독자를 배려한 원고 작업이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서문에서 이 책은 대중적 입문서라고 밝혔는데, 하나 두 개 꼭지는 마치 논문을 읽는 것 같아 비전공자가 독서하기에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차이를 알게 되었으며, 여기 서술된 16명의 정치철학자의 사상이 철학사 맥락에서 얽혀 있으며, 20세기 현대사 맥락에서도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정치사의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더 큰 소득이었다.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이 현대정치철학자 모두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의 사회적 현실의식과 철학적 문제의식을 다 보여주고 있다. 16명의 현대 정치철학자가 살아왔던 지난 100년을 투영한 그들의 정치철학적 대안과 주장들 모두가 마치 3.1운동 이후 한국의 100년 정치사를 반영하고 해석하는 듯해서 전율을 느꼈다. 여기 전개된 정치철학의 흐름이 남의 이야기 아니라 바로 오늘의 한국인이 겪고 있고 풀어가야 할 큰 과제라는 뜻이다. 일반 독자 분들이나 철학 전공자라도 전체 흐름을 엮어보는 분들, 자유-욕망-차이-저항-해체의 정신사에 관심을 둔 모든 분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끝>


(1)부 글 보러가기~

가족 같은 세상 [내가 읽는 『자본론』]

가족 같은 세상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 이 글은 2021년 1월 초,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즈음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가족을 참 좋아한다.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분위기’, ‘한 국가를 살아가는 가족’ 등 가족이라는 단어를 어디에나 다 가져다 붙인다. 보통 가족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할 때에 가족은 좋은 의미로 쓰인다. ‘가족 같은~’이라는 표현에서 가족은 화목하고 포근한 공간, 안전하고 끈끈한 집단(공동체)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족이라는 수식어가 가지고 있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성격부터가 문제이지만, 이 글에서는 가족이라는 수식어로 은폐하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계약관계, 그리고 그 계약관계가 가지는 허구의 공정성에 집중해보자.

한때 대한민국 굴지의 모 대기업에서 국내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홍보 슬로건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대기업은 해당 슬로건을 통해 좋은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실제로 대한민국 어느 가정을 보더라도 해당 기업의 제품 하나 이상은 찾아볼 수 있으니 이 기업은 대한민국에 한정된 또 하나의 가족이긴 하다.

이 기업은 반도체, 전자기기를 주력 상품으로 한다. 해당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직업병으로 죽거나 중환자가 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족’을 내걸며 자신을 알리던 이 기업에게 기업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이 아니었나 보다. 이 기업은 제품 생산 및 연구 공정과 질병 발병의 연관성을 계속해서 부정해왔다. 결국은 법적으로 산업재해가 인정되었지만 그러함에도 여전히 이 기업은 노동권 보장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개발독재 시대 얘기를 해보자. 대한민국은 독재자 대통령을 아버지[父]로 하는 하나의 가족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박정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각하께선 국부(國父)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1 그러나 아버지는 ‘소자의 아픈 곳’을 외면했다. 수출 실적이 매년 사상 최대치를 찍을 때, 청계천 옆 의류 시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가 폐병에 걸리고 손가락이 잘려가면서도 해고될까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찬 바람 부는 서울 길거리에서는 아버지께 아픈 곳을 고쳐 달라고 하던 한 사람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이번 겨울 여의도의 쌍둥이처럼 생긴 빌딩에 일군의 청소노동자들이 농성 중이다. 농성 중인 노동자들은 외부에서 음식물을 반입하지도 못하고 전기를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 빌딩은 ‘인화(人和)’를 창업정신으로 하는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가장 중시한다는 그 기업은 길게는 십여 년 동안 기업의 상징적 건축물을 관리하던 청소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참고로 그 청소노동자들을 관리하던 용역업체는 해당 기업 오너의 일가이다. ‘진짜’ 가족을 챙겨주느라 창업정신은 잠시 잊었던 것인가.

 

이런 현실에서 왜 노동자들을 가족으로 대해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세태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갑자기 속내를 드러낸다. 그들은 ‘다 알면서 그런 것 아니냐’, ‘근로계약서에 서명한 건 노동자 자신이지 않냐’, ‘자유롭게 계약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결국 ‘가족 같은 회사’나 ‘가족 같은 국가’는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 먹고 살자는 말로 자본가들은 자본을 불리기 위해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고,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다. 계약은 여기서 성립한다. 임금과 노동력이 교환되면서 양측은 각자의 필요를 충족한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고용하는 사람들과 계약을 맺을 때, 그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을까? 만약 정말 그 계약이 자유롭고 공정한 거래였다면 왜 우리 사회는 ‘가족 같은 회사’, ‘가족 같은 국가’라는 수식어로 그 계약을 은폐해왔단 말인가. 왜 노동자들은 일하다 죽고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살아야 하는가. 왜 자본이 부당하게 계약을 파기하여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차디찬 겨울 음식물과 전기 공급이 끊긴 곳에 버려져 있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했을 때의 계약은 그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처분한다는 사실을 이를테면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증명한 것이었다. 거래가 완결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자유로운 행위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 그가 자유롭게 자기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은 그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판매해야만 하는 기간이라는 것, 사실상 흡혈귀는 착취할 수 있는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폭로된다.”2

 

이 문장은 비유적 서술이 아니다. 실제로 근대 유럽에서 노동자들은 근육, 힘줄, 피 한 방울까지도 자본, 그리고 자본과 결탁한 국가를 위해 쥐어 짜내야 했다. 그리고 또 대한민국에서도 노동자들은 그래야만 했다. 가족이라는 화목하고 포근한 이름 아래에서 이 착취는 ‘고귀한 희생’으로 세탁되었다. 시간이 흘러 기업이 말해온 가족이라는 개념의 허울뿐인 명분이 조금이나마 벗겨졌지만,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착취는 다시 ‘자유롭고 공정한 계약’이라는 하얀 가면을 쓰게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제10장 노동일 파트에서 수많은 노동 착취 사례들을 서술한다. 이 사례들을 보면 당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갉아먹는지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이고 법적인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항상 자본가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당연히 자본가들은 그 구멍을 점차 넓혀가며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구멍은 노동자들을 병들고 죽어가도록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에서도 그렇고 유럽에서도 그렇고 세계 어디를 가봐도 “자본은 사회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는 한, 노동자의 건강과 수명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3 북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대기업들이 대한민국 시장에 진출하면 처음에는 본국에서 노동자들을 대하듯이 대한민국에서도 기업을 경영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헬적화’4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자본론』 1권 제10장에 실린 수많은 사례와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서 우리가 목격한 사례는 자본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갑자기 최근에 국회 문턱을 넘어선 법 하나가 생각난다. 본래 이름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었지만 국회를 지나면서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이름이 바뀐 그 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존 산업재해에 관련된 법의 허술함으로 인해 노동자가 죽고 중상을 입는 등 중대한 산업재해가 계속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이 추진되었던 법이다. 본래 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예방과 관리 책임이 있는 주체를 처벌하는 법안으로, 높은 수준의 벌금과 징역형을 통해 재해 예방 책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경각심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 해 수백 수천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나라에서 꼭 필요한 법이었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없는 사회를 위해 나는 지난 10여 주 동안 아침마다 (가끔은 저녁에도) 길거리로 나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피케팅을 거의 매일 했다. 그동안 여러 의제로 피케팅도 해보고 서명운동도 해보았었다. 그런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만큼 큰 호응을 얻은 일은 없었다. 전철역에서 피케팅을 할 때 보통은 피케팅을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역무원들도 ‘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보면 오히려 응원을 해주고 가셨다. 길을 가던 시민이 음료수나 귤을 주시기도 했다. 사람 목숨은 소중하니까, 뭐든 간에 사람을 살리려는 이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있겠나.

이런 시민, 노동자들의 여론에 떠밀려 요지부동이던 정부 여당을 포함한 거대 보수 양당도 진보정당에서 최초로 의제화한 이 법안 제정에 참여하였다. 결국, 법안은 통과되었다. 다만 정부와 여당, 제1보수야당이 협의한 끝에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누더기가 된 채로 말이다. 10여 주 간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나마 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기엔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기업’이 빠진 ‘중대재해처벌법’은 다섯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엔 적용되지 않고, 쉰 명 미만의 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에는 수년 뒤에나 적용된다. 벌금 하한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법안 수정을 적극적으로 이끈 집권 여당은 정책위원회 명의의 홍보물에서 “법안의 미비한 부분에 대한 보완과 개선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약속”5했다. 본인들도 미비한 법안임을 잘 알고 있다. 보통 법은 예측되는 미비한 부분을 모두 보완한 뒤 제정하고, 시행 중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개정하는 식으로 고쳐진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5인 미만 사업장이 전체 사업장 중 반을 넘는 게 현실이다. 이제 기업들은 5명 미만으로 따로 하청을 줘서 노동자들을 분리 고용하는 ‘합법적인 꼼수’를 쓸 것은 뻔하다. 만약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처벌과 마찬가지로 법원이 수백만 원 단위의 벌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달라진 게 뭘까. 여전히 노동자의 목숨값은 수백만 원이고, 이 미비한 법조차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너무나 많으며,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가족 같은 국가’의 ‘가족’에 노동자는 없는 것이 맞다. 그 가족 구성원에는 돈 많은 사람, 중대한 산업재해가 자주 발생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기업가들만 있나 보다.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서 한 해 2,000명 가까이 되는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대한민국이다. 죽음으로 내몰릴 이유가 없던 사람들이다. 죽을 이유가 없고 죽음에 이르지 않을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뒀다면 그것이 노동자들을 일부러 죽인 일과 무엇이 다른가.

 

2주 전쯤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어떤 노년의 여성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전태일을 왜 기념하는지 몰라. 그냥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인데 말이야. 예전에는 나라가 가난해서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어. 내가 해외에 물건 수출하던 기업 운영했던 사람인데 말이야…” 물론 전태일은 ‘일하기 싫어서 떼쓰던 사람’이 아니다. 기업이 해외에 수출할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안 그래도 좁은 공장에 널빤지로 칸칸이 쪼개어 환기도 안 되는 곳에 밀어 넣어진 여공들이 폐병으로 죽어가던 현실에서, 그들이 먹고 살아갈 방법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사람이 전태일이다. ‘가족’들이 아프니까 ‘아버지’였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편지도 써봤다. 그러나 노동자 전태일의 말을 들어주는 권력자, 자본가는 없었다. 전태일은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를 더 크게 내야 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외치기 위해, 그래서 분신을 선택했다.

『자본론』에는 ‘워클리’라는 소녀의 죽음 이야기가 실려 있다. 워클리는 환기가 안 되는 밀폐된 공간에 수십 명의 소녀와 갇힌 채 일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죽음은 밀폐된 공간에서의 초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엔 화력발전소에서 탄가루가 수북이 쌓인 채 혼자서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다가 목이 잘려 죽은 청년이 있다. 그 죽음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 청년의 어머니가 단식 투쟁으로 이뤄내고자 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누더기가 되어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었다.

마르크스의 책에서 고발하는 사례들은 문자로 박제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바로 여기,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유예되고 제외된 사람들이 진정 우리 사회의 가족이었을까. 아니면 공정한 계약의 당사자였을까. 그보단 예전 신분 사회 때 하나의 화목한 가족을 지탱하는 데에 필요했던 수많은 노예에 가깝지 않을까. 신분제도는 철폐된 지 오래고, 계급론은 철 지난 구닥다리 이론이라지만 오히려 현실은 ‘책으로만 내려 전해지던 옛날이야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정말 가족 같은 세상이다.


  1. 월간조선, 『(사료)해방40년』(월간조선 1985년 신년호 별책부록), 조선일보사, 1985, “박정희 대통령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전태일의 편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사료로 보는 한국사 항목 (검색일: 2021. 01. 29)에서 재인용,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20308&tabId=01&levelId=hm_160_0020>

  2.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410~411쪽.

  3.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Ⅰ-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365쪽.

  4. 대한민국 사회를 자조적으로 비하하는 표현인 ‘Hell(지옥)조선’에 ‘최적화’라는 단어를 합쳐 만든 신조어이다. 대한민국 밖에서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대한민국 안으로 들어오자 대한민국 수준으로 망가졌다고 평가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

  5.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1월 8일 본회의 ‘중대재해처벌법’ 법안통과!”(2021.01.08 18:46:46) 웹포스터 홍보물 문구 중 인용, <https://theminjoo.kr/board/view/policyreference/396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