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㊿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2) 절제, 정의(430d-434c)

 

[430d-432a]

* 나라에서 알아보아야 할 덕으로서 절제σωφροσύνη와 모든 탐구의 목적이 되는 정의δικαιοσύνη가 남아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는 우선 절제부터 살피기로 한다.(430d) 소크라테스가 절제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순서대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절제는 앞의 것들보다는 일종의 화합συμφωνίᾳ과 조화ἁρμονίᾳ를 더 닮았다. 절제는 일종의 질서κόσμος이며 어떤 즐거움ἡδονή과 욕구ἐπιθυμία들의 제어ἐγκράτεια이다.

2) 사람들은 이 제어를 ‘자신보다 강하다’κρείττω αὑτοῦ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보다 강한 내가 보다 약한 나를 이기는 것으로 (430e)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τὸ βέλτιον이 ‘더 못한 부분’τὸ χεῖρον을 제어하는 것이다.

3) ‘자기 자신보다 약하다’ἥττω ἑαυτοῦ라는 표현은 나쁜 양육과 어떤 교제ὁμιλία 때문에 ‘더 못한 다수’χείρονος πλῆθος에 의해 ‘더 나은 소수’σμικρότερον τὸ βέλτιον의 부분이 지배되는κρατηθῇ 경우이며(431a)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방탕하다고ἀκόλαστος 부른다.

4) 요컨대 새로운 나라가 절제 있고 자신보다 강한 나라라면 그 나라는 나라에서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다스리는 나라이다.(431b)

5) 나라에는 자신들에게서 다종다양한 많은 욕구들과 쾌락ἡδονή과 고통λύπη들이 발견되는 사람들로서 아이들παισί과 여자γυνή와 가내 노예οἰκέτης 그리고 자유인ὁ ἐλεύθερος들 중 다수의 평범한φαῦλος 사람들이 있다.(431b)

6) 그리고 나라에는 또 지성νόος과 올바른 믿음ὀρθῆ δόξα을 동반하고 추론λογισμός에 의해 인도되는 단순하고도ἁπλός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욕구들을,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431c)

7) 절제 있는 나라는 전자에 해당하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이 상대적으로 더 적은 수의 더 훌륭한ἐπιεικής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들과 그들의 현명함φρόνησις에 의해서 지배되는 나라이다.(431d)

8) 이처럼 절제 있는 나라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다스리는ἄρχουσ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ἀρχομένοις 자들이 똑같은 믿음δόξ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431e)

9) 그러므로 절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양쪽에 다 있다.(431e) 용기와 지혜는 제각기 나라의 어느 한 부분에 있지만, 절제는 나라 전체에 걸쳐 있으면서 현명함을 기준으로하든 완력ἰσχυρός을 기준으로 하든, 수πλῆθος든 재물χρῆμα이든 그밖에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하든,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게 하므로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432a)

10) 그러므로 절제는 ‘생각의 일치’ὁμόνοια이라고 말하는 것이 옮다. 즉 나라에서든 한 사람에서든 더 못한 것과 더 나은 것 중 어느 쪽이 다스려야 하는가를 두고 양쪽이 ‘본성에 맞는 화합을’κατὰ φύσιν συμφωνίαν 이루는 것이 절제이다(43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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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3)에서 ‘자기 자신보다 강하다’는 표현은 <법률> 626e에서도 여기와 같은 방식으로 나라에 비슷하게 적용되어 있다.

* 위의 글 5)에서 여자γυνή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나중에 여성도 수호자로서 철학적 지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견해와 상충된다. 이것도 다만 그러한 주장이 워낙에 파격적인 주장인데다 아직 제기되기 이전이라는 점에서 일단 여기서는 시대 통념에 따라 언급된 것이라 하겠다.

* 위의 글 6)에서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이라는 표현이 비로소 나오는데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용기가 믿음이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은 바로 이 올바른 믿음을 가리킨다.

* 위의 글 7)에서 보듯 소크라테스는 현명함(phronēsis)을 지혜(sophia)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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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로 옮긴 그리스어 sōphrosynē는 앞서 언급한 대로 지혜, 용기, 정의와 더불어 4주덕의 하나로서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에서 분별과 사려를 갖춘 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 모종의 겸양과 염치, 자기 절제를 표현할 때 사용되어온 개념이다. 그리고 그 말이 군사용어로 쓰일 때는 중갑보병들이 방패와 창을 들고 전투 대형을 이룰 때 대오를 무너트리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하지 않도록 자신의 자리를 부단히 살펴 가며 지켜내려는 정신 상태 즉 자신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치열한 자기 인식과 실천을 의미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카르미데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도 그리고 여기에서 절제를 일종의 질서이자 즐거움과 욕구에 대한 제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절제에 대한 그러한 전통적인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389d 포함) 그러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절제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에서 출발하되 절제를 그가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 걸맞은 덕목으로 새롭게 정립하려 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자기 제어로서 절제를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으로 정립한 후 그것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한다. 즉 절제 있는 나라란 ‘자연적 성향에 맞춰 가장 잘 자라고 가장 잘 교육받은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듣는 순간 벌써 거북함부터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말은 지적 수준이 낮은 다수의 대중은 자신의 분수를 알아서 그 분수에 맞게 지적 수준이 높은 소수의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미덕인 양 들리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분수를 알라는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절제의 의미와 매우 상통하는 말이다. 다만 그 우리말이 통상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꾸짖거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책망할 때 쓴다는 점에서 거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사회적 계층 어느 한쪽의 덕이 아니라 나라 구성원 모두의 덕이라고 말한다.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의 순종이 아니라 쌍방의 덕에 기초한 쌍방의 일치된 생각에 따라 세워진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우리말로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은 다수 대중뿐만이 아니라 소수 통치자에게도 함께 요구되는 덕목이다. 소수 통치자들도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통치자는 나랏일 전체를 잘 아는 능력은 있으나 여느 장인들처럼 집도 구두도 못 만들고 농사도 지을 줄 몰라 스스로 먹을 것, 입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통치자는 어떤 재산도 가질 수 없어 언감생심 시민의 재산을 탐하거나 빼앗아도 안 되며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도 연애나 결혼조차 참아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꾸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역시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나랏일 전체를 알기 힘들고 외적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능력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나랏일 전체를 알고 외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고 공익에만 힘쓰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지배를 맡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통치자나 시민들은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아는 한,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사실을 똑같이 알아차린다. 절제를 일치된 생각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 그리고 ‘보다 낫다’와 ‘보다 높다’라는 우열의 차이도 모든 분야 어느 일방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열의 차이들은 지적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완력과 수, 재물, 일반 기술 등 모든 기준에 적용되어 경우에 따라 나은 자와 못한 자가 다르게 나타난다. 지적 능력과 완력은 소수 지배자들이 우월하지만 수와 재물에서는 시민 대중이 통치자들보다 우월하고 일반 기술 또한 뛰어나다. 그리고 그것들은 두 집단 상호간의 시기와 침탈의 대상이 아니라 상호부조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해당 분야에서 가장 약한 자들과 가장 강한 자들, 그리고 중간이 되는 자들이 다 같이 전 음계에 걸쳐서 같은 노래를 부르는 일종의 조화와 닮았다. 물론 소수 통치자들의 권력이 갖는 막강한 위력을 고려하면 분명 이들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불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계적 구조를 불평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그러한 위계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라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위계는 다만 역할의 차이일 뿐 위계가 곧 차별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역할 상 중요한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만, 소수의 통치자이건 다수의 평범한 시민이건 자신의 천성과 욕구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나누어 수행하면서 그 역할의 성취를 통해 모두가 각자 행복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그들 모두는 차별 없이 동등하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는 서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충분히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만한 이유를 가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 좋다는 것에 합의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치된 생각으로 순전히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화합이자 조화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 요컨대 자기 제어로서 절제는 개인의 경우에는 ‘영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는 뭔가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제어하는 것’이고 절제 있는 나라란 ‘나라 각 계층이 자기 제어를 통해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서로 일치된 견해 즉 똑같은 믿음을 지니는 나라’이다. 그리고 절제는 나라의 계층 내지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제어를 통해 갖게 되는 똑같은 믿음이자 일치된 견해라는 점에서 특정 계층이나 개인에게 속한 덕이 아니라 모든 계층 모든 개인에 다 걸쳐있는 덕이다.

* 이처럼 정의로운 나라는 절제라는 앎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나라이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근대 이후의 확고한 경험과 그러한 경험에 기초해서 확립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의 나라 사람들의 절제에 대한 믿음은 가히 무지할 정도로 소박하고 낙관적이다. 오늘날 권력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다. 20세기 이래 플라톤에게 가해진 수많은 비난에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절제 있는 나라는 일방적이고 불평등하기 그지없다. 그 나라는 나라의 구성원들을 좀 더 나은 사람과 그보다 못한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차별하고 있으며 그것을 근거로 다수 평범한 대중들에 대한 소수 엘리트의 정치적 지배와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하고 있다. 모두가 절제를 통해 같은 믿음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정작 이곳에서는 지배자의 절제 내용은 거론되지 않고 반대로 다수 평범한 피지배자들인 대중에게 이성적 능력이 결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배자에 대한 의존과 존경을 절제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특히 통치자와 보조자로 구성되는 수호자 계층이 기본적으로 전사라는 점에서 보면 절제 있는 나라란 소수 엘리트 통치자들과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대중의 욕구가 강제로 통제되는 일종의 군사 독재국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배타적 이기심을 가진 개인들이 상호간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성립된 사회계약론적 국가론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얼마나 무망(無望)하고 참담한 것인지에 대한 뼈저린 체험에서 비롯된 일종의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과 의심에 기초해서 성립된 체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지배자 계급과 피지배자 계급의 화합과 조화는 사회관계 자체가 개인적 이해관계의 총화인 한, 터무니없는 공상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형이상학적인 괴물에 불과하다.

* 플라톤의 나라뿐만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 두 나라 모두 그러한 차이들이 어떤 형태로건 불합리한 차별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나라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플라톤은 우선 문제 영역마다 뛰어난 해결 능력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정치 영역에서도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랏일이 갖는 규모의 크기와 중대성 그리고 공적인 특성상 그 정치 전문가는 고도의 전문성과 더불어 높은 도덕성이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일반 시민 대중들은 원천적으로 그 전문가에 포함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뛰어난 자질과 소양을 갖춘 자들만이 정치가 즉 정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러한 정치가를 길러내기 위한 최소 30년 이상 장기간의 교육과 훈련, 공동생활 및 사적 소유의 금지 프로그램을 제도적으로 구축하고 그 혹독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만을 통치자로 선발하여 그들을 통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층과 신분에 따라 부와 권력 및 교육 수준의 차이가 존재하고 영역과 사람에 따라 전문적인 문제 해결 능력도 분명 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정치적 문제 영역에서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평가할만한 전문가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신분이나 출신, 학력과 경력을 내세워 능력 있는 정치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들이 더 큰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경험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는 부와 권력 및 교육 그리고 전문 영역에 상관없이 모두의 참여가 보장된 선거를 통해 다수가 선택한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해 제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각성을 통해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발전과 진보를 이룩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다수 시민 대중들의 선택으로 정치적으로 참담하고 어두운 격변의 세월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선한 권력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시행착오를 통한 확실한 개선을 믿었으나 착오가 초래한 비극의 크기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나치 정권을 선택하고 광기 어린 지지를 보내며 유태인 학살에 침묵했던 사람들도 20세기 초 서구 유럽 민주주의 시대를 살던 시민 대중들이었고, 오늘날 소수 지배 엘리트들과 자본이 생산한 가치와 담론들을 마치 자신들의 가치 및 정치의식의 반영인 양 무비판으로 환호하며 반대 세력을 무차별 혐오하는 사람들도 현대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 대중들이다. 하물며 서구 유럽은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에서조차 인종주의와 배타적 국수주의로 무장한 극우주의자들이 정치적 주류 세력으로 나날이 득세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에는 그 수정을 위한 견제와 비판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촛불 혁명을 통한 정치적 변혁이 그것도 역사상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공적인 무혈혁명의 형태로 구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그러한 수정과 비판의 체계가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나라의 2016년 촛불 혁명도 그렇고 10여 년 전 튀니지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이른바 재스민 혁명 등 수많은 시민 저항 운동들 역시 얼마 안 돼 다시 반동화 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정치·사회적 변화를 담보하는 토대로서 교육조차 소수 기득권자에 의해 견고한 신분 재생산의 기지로 장악되어 있어 전망은 더욱 어둡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자 형식 민주주의로 비판하는 까닭도 그곳에 있다. 소수 지배 권력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선택한 비판과 의심의 체계로서 민주주의 또한 전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절망감 이상으로 오늘날 큰 난관에 봉착해 있다. 게다가 그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황금처럼 보일 정도로 21세기 대명천지를 사는 오늘날에조차 플라톤 시대 참주정체처럼 정치적 의사결정 자체를 독점하고 시민들의 비판을 폭력으로 억누르며 폭압적인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들도 여전히 허다하다.

* 21세기가 당면한 이 모든 한계가 원천적으로 근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잉태한 왜곡된 국제질서와 냉전적 패권주의 그리고 그 이후 세계 경제를 주도해온 서구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금융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판적 이념의 하나로서 플라톤의 공동체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정치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플라톤은 당대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아테네의 제국주의 및 패권주의를 시종일관 비판하면서,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된 인간의 욕망 구조 자체가 변화되지 않는 한, 인간적 삶의 구현과 나라 간 평화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결국 좌절하고 마는 것임을 이미 2,500년 전부터 경고해왔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다시 태어나 철학자 왕들의 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신 이른바 집단지성을 통한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연대를 목도한다면, 당연히 그는 변혁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서 교육을 통한 철학자 시민 계급의 등장과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일지도 모른다. 희망은 여전히 지성에 있다. 문명적 위기에 둘러싸인 혼돈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진보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끊임없이 불태우는 일군의 깨어있는 시민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플라톤 정치철학의 의의는 다름 아니라 인간적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대중의 반성적 자기 인식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에 있다할 것이다.

 

 

[432b-434c]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정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우리 자신이 어떤 식으론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발 앞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그걸 보지 않고 어디 먼 데를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이다.(432b-432e)

*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처음에 나라를 세웠을 때부터 시종일관 관철해야 하는 것으로 정했으며 정의는 ‘그것 아니면 그것의 한 형태’ἤτοι τούτου τι εἶδος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εἰς ὃ αὐτοῦ ἡ φύσις ἐπιτηδειοτάτη πεφυκυῖα εἴη에 전념해야 한다.ἐπιτηδεύειν는 것이었음을 환기케 한 후에(433a) 정의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정의는 다른 많은 사람한테서 듣기도 했고,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 정의는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 καὶ μὴ πολυπραγμονεῖν이다.(433a)

2) 정의는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는 힘δύναμις이자 그것들이 보전σωτηρία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433b). ‘자신의 것을 함’τὸ τὰ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의 구현이 정의라고 함도 그 때문이다.(433b)

3)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가운데 어느 것이 나라를 좋게 만드는데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는 가려내기 힘들다. 요컨대 정의는 나라의 덕과 관련하여 나라의 지혜와 절제와 용기에 필적한다.ἐνάμιλλος(433d)

4) 재판δίκη할 때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ἕκαστοι μήτ᾽ ἔχωσι τἀλλότρια μήτε τῶν αὑτῶν στέρωνται이 재판의 목표이듯이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ἡ τοῦ οἰκείου τε καὶ ἑαυτοῦ ἕξις τε καὶ πρᾶξις이다(433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가 나라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을 경우 생기는 위험즉 부정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를테면 목수가 구두장이가 서로 도구와 지위를 바꾸거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한다면 그 정도는 나라에 큰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장인이거나 무슨 다른 돈벌이하는 사람이 어떤 것에 고무되어 다른 계층 내지 부류에 들어가려 들거나, 전사 중에 한 사람이 자격이 안 되는데도 숙고하는 수호자 부류에 들어가려 하거나 이들이 서로의 도구와 지위를 바꾸는 경우, 또는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하려는 경우 이들의 변화μεταβολὴ와 참견πολυπραγμοσύνη은 나라에 파멸ὄλεθρος을 가져온다.(434a-b) 요컨대 세 부류 상호간의 참견과 변화는 나라에 가장 큰 해악βλάβη이며, 아울러 그건 최대의 악행 κακουργία 즉 부정의ἀδικία이다.(434c) 그리고 반대로 돈벌이하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부류, 보조하는ἐπικουρικός 부류, 수호하는φυλακικός 부류가 자신에게 속한 일을 하는 것, 즉 이들 각각이 나라에서 자신의 것을 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나라를 정의롭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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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우리 스스로도 자주 언급했듯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지금까지 정의를 그렇게 정의한 부분은 없다. ‘다른 많은 사람들한테서 듣기도 했다.’는 말도 433c에서 그렇듯이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의를 언급하는 것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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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소크라테스는 탐구의 최종 목적인 정의를 살핀다. 그런데 그는 정의가 처음에 나라를 세울 때 정했던 분업의 원칙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분업의 원칙은 여기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듯이 ‘각각의 사람이 나라와 관련된 일들 중 저마다 타고난 자연적 성향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이러한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로서 규정한 후 우리가 이미 각 논의 단계에서 수차 언급한 대로 정의를 ‘자신의 것을 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덧붙여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지혜, 용기, 현명함이 나라에 생겨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그것이 온전하게 유지 보전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라고 언급한다. 즉 정의는 각자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일을 수행하는 것이 갖는 정당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줌으로써 통치자는 통치자답게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고, 수호자는 수호자답게 용기로써 나라를 수호할 수 있게 해주며, 통치자들과 수호자들 그리고 생산자들 모두 나라의 구성원들답게 절제로써 서로 화합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정의는 공동체로서 나라 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적 책임감이자 동시에 영혼의 보살핌을 통해 개인들 각자가 누리는 자부심의 토대인 것이다. 이처럼 정의의 덕을 바탕으로 나라의 구성원들 각각이 자기 역할에 맞게 지혜와 용기, 절제의 덕을 구현해 가는 나라 그 나라가 곧 정의로운 나라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이렇게 정의의 덕이 지혜, 용기, 절제를 각기 그것답게 뒷받침해주고 조화롭게 묶어주는 바탕이 되는 덕임에도 그러한 덕들 모두가 하나같이 나라 전체를 관통하고 결속하여 나라를 좋게 만드는 한, 어느 것이 선한 나라에 가장 기여하는 것인지 가려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 네 가지 덕들은 모두 서로에게 필적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생산자 모두는 계층 차원에선 개인 차원에서건 자신의 덕과 영혼의 조화를 통해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경우 역할 상의 중요도는 있을지라도 그들 모두가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정의로운 사람임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비록 장수 한 사람이 병사 한 명보다 중요하고 통치자 한 사람이 장수 한 명보다 중요하지만, 그들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최선으로 수행하는 한, 그것이 결과하는 행복과 고통의 정도는 모두 동일하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개인들의 역량 차이에서 비롯된 정도 차이는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고유 역할의 일을 수행하는 한, 계층 간 개인 간 소질과 욕망의 차이 말고 그들 서로에 대한 차별이나 선망도 없으며 모두가 다 좋은 나라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하나같이 서로 평등하다.

* 어떤 주석가들(G. Ferrari 등)은 정의가 분업의 원칙의 한 형태라는 말에 주목하여 정의가 분업의 원칙과 달리 위계의 구조를 갖는다고 주장한다.(김영균(2008), <국가, 훌륭한 삶에 대한 근원적 성찰>, 149-150쪽 참고) 정의로운 나라를 성립시키는 역할 가운데 통치자의 역할이 갖는 중대성과 강제성을 고려하면 그들과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단순히 횡적인 분업적 동반자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라는 통치자를 정점으로 지배와 피지배라는 권력적 위계구조를 유지할 때 단순한 분업적 상호 협동체를 넘어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맥을 정확히 들여다보면 정의는 ‘그것(분업의 원칙)이거나 그것의 한 형태(ētoi toutou ti eidos)’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정의와 분업의 원칙간의 차이보다는 동일함에 방점이 있는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의로운 나라에서 통치 역할의 중요도와 강제성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역할들 간의 차이를 위계적 차이로까지 차별해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배와 피지배라는 말 자체는 위계와 강제의 의미를 분명 포함하지만, 실제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보면 그들은 똑같이 정의의 덕을 통해 위계적 명령일지라도 자발적으로 그것을 수용하여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기초한 분업의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수행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은 위계적 권위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니는 정의의 덕을 토대로 상호 동등한 합의에 따라 지배자는 지배자답게 피지배자는 피지배자답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자발적으로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지배와 피지배는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구분되어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론적으로는 단지 통치 구조상 지시와 수행이 지니는 역할 상의 차이일 뿐 그 과정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누리는 자부심과 행복감의 차별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차별이 난무한 오늘날 사회 현실에서 보면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은 그야말로 환상일 수도 있으나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고 어떻게든 그러한 방향으로 변혁이 이끌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가히 그 희망을 견인하는 이상적인 푯대이자 꺼지지 않는 횃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상주의는 그렇게 난관의 벽 앞에서조차 변혁의 열망을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개입을 추동하면서 그 시행착오를 통해 실천적 변혁의 방안을 끊임없이 천착하게 만든다.

* 우리는 통상 정의를 논할 때 재판정에서 정의를 떠올린다. 재판정에서 정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각자가 남의 것을 갖지도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재판정에서 정의는 개인의 권리 및 경제적인 소유의 배타적 보장 즉 기본적으로 소유권과 관련한 정의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소유권의 방어적 보장에 더해 자신의 내적 소신과 고유한 역할에 대한 적극적 실천을 추가한다. 즉 정의는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그것의 행함’인 것이다(433e) 이것은 플라톤의 정의가 소유권의 배타적 보장을 넘어 타인과의 정의로운 관계를 위한 영혼의 자기 돌봄이자 적극적인 도덕적 실천임을 의미한다.

* 절제가 ‘자기에게 속한 것을 행함’(<카르미데스> 161b)이자 자기 제어를 통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즉 자기 자신이 해야 할 바에 대한 앎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기서 ‘각자 자신의 것을 함’, ‘자신에게 속한 자신의 것을 가짐과 행함’으로 언급된 정의의 뜻과 거의 유사하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절제와 정의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J. Adam 430d note 참고) 그러나 절제가 자제와 신중함 등 다소 반성적인 앎의 성격을 지니는 것에 비해 정의는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적극적인 앎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정의는 재판 등의 영역에서 법률적 기준으로 확대 적용될 수 있지만, 절제는 다분히 내면적 반성과 염치 등에 연관되어 있다. <카르미데스>에서 소년 카르미데스가 절제를 부끄러움(aidōs)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그것을 보여준다.(160e) 게다가 정의는 절제의 덕을 포괄하지만, 절제가 정의를 포괄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 소크라테스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서로 필적한 것임을 설명하는 국면에서(433c) 지금까지 다루어진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1) 지혜 : 다스리는 자들의 현명함과 수호의 능력 2) 용기 : 어떤 것들이 무서운 것이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적법한 믿음의 보전 3) 절제 :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사이의 ‘일치된 믿음’ὁμοδοξία 4) 정의 : 각자가 자신의 것을 행하고 다른 것에 참견하지 않는 것. 이 중 지혜는 통치자의 덕목이고 용기는 수호자의 덕목이고 절제는 생산자는 물론 통치자, 수호자 모두가 공히 갖고 있어야 할 덕목이다. 그런데 통치자는 수호자 가운데에서 뽑힌 자들이므로 당연히 용기를 덕목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지혜, 용기, 절제의 덕목 모두를 지니는 사람이고 수호자는 용기와 절제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당 논의 단계에서 각 계층이 갖는 주요 덕목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실제로 각 계층은 통치자들의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일정 정도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개인의 영혼을 다룰 때 누구를 막론하고 개인들은 영혼의 세 부분 즉 ‘이성’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면서(영혼 3분설) ‘나라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것들이 각 사람의 영혼에도 있으며 수적으로도 같다’(441c)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의 덕들이 개인의 영혼 부분들에도 있고 수적으로도 같다는 것은 나라의 세 계층 역시 개인의 세 영혼 부분처럼 지혜, 용기, 절제를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나라를 다루면서 지혜와 용기의 덕을 통치자와 수호자에 한정한 것은 논의 단계상 철학자로서 통치자와 수호자의 전모가 아직 드러나기 이전에 그냥 나랏일 전체를 다루는 정치가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데 따른 것이다. 용기의 경우는 시민적 용기로서 절제와 더불어 시민들도 갖고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으나 지혜의 경우 역시, 나랏일 전체에 대한 지혜는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일과 관련한 전체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 시민들도 일정 정도 지니는 것이다.

* 정의와 더불어 간단하나마 부정의에 대한 언급도 주어진다. 부정의는 부나 자기들의 수나 완력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에 고무되어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저버리고 다른 부류의 역할에 참견하거나 그 부류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라에 가장 큰 해악을 미치는 행태는 통치자들이 자연적 성향을 거슬러 다른 부류 특히 돈을 좋아하는 부류의 욕망으로 변질되어 권력을 그들 부류의 재산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의로운 나라의 기초인 서로 다른 욕망의 조화와 공존을 무너뜨려 서로에 대한 침탈과 배타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나라의 구성원 모두의 욕망을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으로 변질시켜 나라의 파멸을 초래한다. 이 파멸의 종착지가 곧 참주가 지배하는 가장 부정의하고 참담한 정치체제인 참주정이다.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이러한 부정의한 행태가 어떤 변질의 과정을 거쳐 참주정에 이르는가를 마치 현실의 정치사를 추적하듯 아주 실감 나도록 구체적으로 분석해 들어간다. 이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이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라 치열하고도 냉철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이루어진 일종의 비판적 이념임을 보여준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 정의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탐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어서 서두에서 대문자 비유에 따라 정의에 대한 논의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된 배경을 상기시킨 후(434d) 이제 최초의 논의 목적에 따라 지금까지 나라를 통해 드러난 것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적용해보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또 맞지 않으면 다시 나라로 돌아가 살펴보고 그렇게 서로 그 둘을 번갈아 살펴보고 서로 문지르다 보면 나무들을 문질러 불씨를 얻듯이 마침내 정의가 환히 드러나 우리 자신들 사이에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434e-435a) 이렇듯 정의에 관한 종합적이고도 최종적인 정의(定義)는 우리가 이어서 다루게 될 개인의 정의에 대한 논의까지 마무리된 다음에야 가능하다.  -끝-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다음에 계속

모라토리엄의 곁에서 [톡,톡,씨네톡]

모라토리엄의 곁에서

 

박근형(전북대 철학과 대학원)

 

함박눈이 쏟아지던 1월 초, 거실에 상추를 심었다. 흐린 겨울날이 계속되면서 우중충해진 집안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는 신록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이미 다육식물 등의 화분이 있었지만, 식물 키우는 재미를 느끼려면 한 달이면 쑥쑥 자라서 따먹을 정도가 된다는 상추가 제격이지 싶었다. 큼지막한 화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배양토를 붓고 씨앗을 심은 뒤 물을 흠뻑 주었다. 새싹이 돋을 때만 해도 초록이 주는 설렘에 기대가 만발했다. 그러나 웬걸. 날이 한참 따사로워진 4월 말에도 상추는 이제 겨우 엄지손톱 크기만큼 자랐을 뿐이다. 성장이 멈추어 버린 상추를 두고 나는 20대의 어느 날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2014년 개봉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이하 <다마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다. 코후 스포츠샵 딸내미 다마코와 사진관 아들내미 히로시는 코후 스포츠샵의 벤치에 늘어지게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올해 23세인 다마코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 곁에서 놀고먹으며 1년을 보낸 상태다. 여름이 끝나면 아버지에게서 독립해야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농구부 활동을 하는 중학생 히로시에게 다마코는 주전이 될 수 있을지 여부와 여자친구와의 안부를 묻는다. 히로시는 주전 선발 여부는 “미묘”하며, 여자친구와의 관계는 “자연 소멸”했다고 답한다. 그는 내일 다마코를 다시 만날 것처럼 간단한 인사로 떠나고, 홀로 남은 다마코는 기지개를 켠다. 그녀는 자연 소멸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들어보았다며 웃으며 프레임을 벗어나고 이후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거창한 것 없는 이 2분 18초간의 엔딩 장면에 87분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줄곧 이야기한 것이 압축되어 있다. <다마코>는 말한다. ‘사계절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듯, 청춘의 모라토리엄도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이 있다.’

모라토리엄은 본디 국가나 지자체가 빌린 돈에 대해 상환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라토리엄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젊은 세대가 충분히 경제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사회적 진출을 꺼리고 두려워하여 학생이나 무직 상태로 남아있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마코>는 다마코가 놓인 모라토리엄의 시작과 끝을 잔잔히 담는다. 그녀의 모라토리엄은 구직활동은 제대로 하고 있냐는 아버지의 일갈에 “지금은 아니야!”라며 버럭 대들면서 현시되고, 여름이 끝나면 독립하라는 아버지의 통보에 ‘좋은 아버지 합격’을 주면서 ‘자연 소멸’한다.

<다마코>를 처음 접했던 20대 후반의 어느 시기, 나는 다마코보다 훨씬 긴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감상평은 “유예”에 방점을 찍었고 나도 그랬다. 꿈이 있다는 핑계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놓고 그 꿈조차 유예하고 있던 날들이 있었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도, 포기할 용기도 나지 않아 모든 걸 회피하고 있으면서도 양심은 남아있어서 어영부영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시기였다. 부모님이 어려운 마음으로 전세자금을 지원해 준 노량진의 원룸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다. 화장실은 가건물이었다. 여름에는 비가 샜고 겨울에는 세탁기와 변기가 얼었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다. 20대 중반의 두 자매가 반나절 만에 구한 집이었으니 좋은 집일 리 만무했다. 학자금 대출도 없었고 묵묵히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계셨으니 경제적인 사정이 어렵다고는 할 수 없고, 그저 미래가 궁핍했던 시기였다. 와중, 아르바이트 구직구인 앱을 통해 노량진의 슈퍼마켓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평일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슈퍼는 주말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면 되었다. 노량진의 아침은 새벽 시장만큼이나 이르게 시작해서, 유명한 강사의 수업을 앞자리에서 듣고 싶으면 수험생들은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강의실 앞에 번호를 적은 노트 등을 놓는 방식으로 줄을 미리 서 놓아야 했다. 그들은 카페에서 제일 저렴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몇 시간씩 공부를 하므로, 공부하기 좋은 카페들은 ‘음료 주문 시 4시간까지 착석 가능’ 등의 문구를 미리 표기해 두었다. 노량진 마트나 슈퍼에서는 초코파이 1개 200원, 두루마리 휴지 1개 500원, 커피 믹스 스틱 1개 100원, 이런 식으로 생필품을 쪼개 팔았다. 그러면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신은 공시생들이 그것들을 사 갔다. 천이백 원에 세 개인 휴지를 사지 않고 오백 원에 하나인 것을 사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해의 겨울은 길었다. 슈퍼 안까지 햇빛이 들 리는 만무하니 집에서도, 슈퍼 안에서도 모든 시간이 항상 밤 같았다. 고독을 이겨보려고 유튜브에서 철학 강좌를 검색해서 틀어두었더니 공시생들이 나도 같은 공시생인 줄 알고 음료수와 인사를 건네는 일도 더러 있었다. 몇백 원짜리 간식도 셈해서 사야 하는 처지를 알기에, 나는 그것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기꺼이 받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격려는 언어로 구체화되지 못한 일련의 연대 행위이자 동질감의 표현이었다.

엔딩크레딧이 오른 후 다마코가 취업을 할 수 있을지, 코후 스포츠샵을 떠나 어디로 갈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아빠로만 존재할 것 같았던 아버지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수용할 수 있고, 피하고만 싶었던 동창생에게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넬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다마코>는 밑도 끝도 없는 유예에 대한 영화가 아니며, 무책임한 힐링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힐링은 순간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황 개선에는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힐링에는 힘이 없다. … 끝없는 위로만을 보내며 우리 청춘을 같은 자리에 유예시킨다. 스스로의 연민에 빠진 청춘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마비된다. 나는 ‘아프니까’ 라고. ”1 애초에 다마코는 스스로에 대해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다마코>는 주관적인 서정을 형성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위로와 양보를 해주지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인생과 몫이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다마코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므로, 아버지는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하지만, 그녀의 도약과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지원할 수 있는 분명한 한계선을 제시한다. 태생적으로 재원과 권력 구조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가족 내 헤게모니에서 백수인 다마코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합격” 선언을 통해 삶을 선택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유지한다. 그럼으로써 <다마코>는 ‘고달픈 청춘’이라는 소재가 빠지기 쉬운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을 피해 가는 영리한 영화다. 기지개와, 앵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행위는 새로운 시작의 직관적인 메타포다. 좁은 방에 누워있던 장면으로 시작한 <다마코>는 필연적으로 집이라는 닫힌 구조의 외부에서 모라토리엄의 종기를 맞이한다.

그리하여 <다마코> 이후에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모라토리엄을 보내고 있는 청춘에 대한 개인적인 공감인가? 최근 발표된 결과에 따르면, 취업난 속에서 학자금 상환 개시 소득에 이르지 못한 저소득 청년 수는 갈수록 늘어가고 있으며, 취업 후 상환을 시작했다가 중도에 감소하는 바람에 상환이 중단된 사례는 2017년(4만 7천여 명)에 비해 2021년(9만 8천여 명)에 2배 가까이 늘었다.2 개인적인 공감은 이러한 국가 전반적인 경제·사회적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갖기에는 미약한 수단이다. 한국 현대 수필 문학에 대해 비평하고 반성한 <수필의 자폐성을 넘어서>에서는 현대수필의 문제점으로 “세계의 자아화”를 꼽았으며, ‘외적 사물, 사건, 현실을 자아의 몽롱하고 주관적인 내면으로 끌어와 ’주정主情‘으로 몰아간다.’고 비판하였다.3 비단 현대 수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시 등 모든 예술 작품이 빠질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직언이었다. 창작자뿐 아니라 수용자 역시 <다마코>를 자기 경험이나, 가족 및 주변인에 투사하고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그친다면 이 또한 ‘세계의 자아화’에 불과할 것이다.

사계절을 거치면서 다마코의 영역은 조금씩 확장되어 간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가을’ 파트의 등장인물은 다마코와 아버지뿐이며 카메라 역시 집 밖을 벗어나지 않지만, 계절이 진행되어 갈수록 다마코의 관계의 영역은 확장되고 등장인물도 증가하며 공간적 배경도 다채해진다. 우리의 경계도 이처럼 조금씩 확장되어 가야 한다. 나에게서, 가족과 주변인에게로, 동시대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마침내 사회와 역사로. 청년뿐 아니라 여러 이유로, 여러 부분에서 누군가는 모라토리엄을 겪고 있다. <다마코>에서 청년 취업률의 감소, 캥거루족의 증가 등의 사회적 현상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청년기의 모라토리엄은 왜 발생하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의문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개인의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만 돌려서는 안 되는 이유는 많든 적든 그것은 시대적 악몽을 그림자처럼 지니기 때문이다.”4

8년가량의 세월이 지나 <다마코>를 다시 감상하는 지금, 이번에는 ‘기다림’에 포커스를 둔다. 새해 전날 다마코는 엄마의 전화와 결혼한 언니의 방문을 기다리고 다마코의 아버지는 그런 다마코의 독립을 기다린다. 이런 류의 기다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애정이다. ‘기다림’은 다른 방향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영화였다면 속도감 있는 전개를 위해 생략되었을 법한 장면을 <다마코>는 편집하지 않았다. 다마코가 자전거를 타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장면, 무료하게 떡을 먹는 장면, 아버지가 보일러 석유를 교체하는 장면… 카메라는 묵묵히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기다린다. 기승전결에 필수적인 장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듯이,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모라토리엄의 이 순간마저 언젠가는 추억하게 될 것이라는 듯이 <다마코>는 그런 장면도 애정을 담아 기록한다. 감독이 의도했는지 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기다림이라는 상태는 느리다는 행위에 잇따르고, 느림은 근본적으로 사유를 낳게 되어있다. 영화가 기다림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 너머를 사유하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다마코>는 느린 호흡으로 배우와 상황 곁에 서있다. 카메라는 역동적인 로우앵글이나 하이앵글로 장면을 담지 않는다.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정면각에 가까운, 아이레벨숏으로 촬영된 것은 극적인 드라마가 아닌, ‘당신의 눈높이에서 함께 바라보는 일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라는 연출된 메시지로 읽힌다. 눈높이를 맞추고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소소한 안부와 일상을 주고받는 것. 그 겨울 노량진에서 건네받았던 음료수에 담겨있던 마음을 돌이켜본다. 확장할 수 있는 힘은 공감에서 비롯하여 연대에서 출발한다. 다마코의 이야기를 나의 경험담과 겹쳐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 내게 건네주었던 격려를 잊지 않고 다른이에게 전해주는 것, 누구나 유예기를 겪을 수 있으며 그럴 수도 있다고 공감해 주는 것, 그렇게 손을 맞잡고 나면 한 발짝 더 나아가 목소리를 내어보는 것.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그런 마음들이 모이면 반드시 “좀 더 괜찮은 세상”의 실마리가 되리라고 믿는다.

퇴근하면 나는 제일 먼저 상추를 찾는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컸는지, 새싹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언젠가는 자랄 것이라고 믿는 마음으로 마른 흙을 적셔준다. 몇 달 만에 이제야 싹을 틔우는 씨앗도 있다. 너무 일찍 자란 싹은 줄기가 웃자라 힘이 없지만 느지막이 기지개를 켠 싹은 작은 몸뚱어리를 흙에 단단히 박았다. 잎사귀 색도 웃자란 싹보다 훨씬 선명하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같은 시기를 보낼 수는 없다는 삶의 진리를 늦게 움트는 상추 새싹에서 만난다. 16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중시하였다. 그는 “삶이란 마치 조각모음과 같”아, “일관된 자기 모습을 구성하기란 무망”한 일이라고 보았다. “일관된 모습이 없으니 후회스런 삶이 있을 까닭이 없다. 모든 삶이 예외 없이 존귀할 따름이다.”5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출처] https://blog.naver.com/readingclassics/222995108058 (세상책방 진로글방)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의 1강(강사: 김성우) 강의록 일부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알립니다.

김성우(상지대)

 

자유를 묻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정의 내릴 때는, 지배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자유의 반대말이 ‘지배’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가 왜 노예인가? 주인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노예이다.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지배에 대한 관점에 따라 자유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유의 의미가 여러 가지이기에 자유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애매모호하다. ‘자유주의’라는 말이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자유주의(liberalism)가 유래한 liberal이라는 말은 현재 미국에서는 진보를 뜻하고, 유럽에서는 소유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는 시장주의(자유방임주의와 작은 정부를 외치는 고전적 자유주의나 이것의 세계화 버전인 신자유주의)를 가리킨다. ‘libertarian’의 경우도 지금은 시장만능의 극우논리로서의 자유지상주의(신지유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배 없는 삶. 이것이야말로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이다.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마르크스가 내린, 코뮌주의의 정의도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코뮌주의란 “자유로운 개인들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연합(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런데 지금의 자유주의는 재산권과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며 지배 없는 삶을, 재산(생산수단)이 있는 소수에게만 부여하고 재산이 없는 다수를 지배하는 논리로 전락했다. 자본과 이를 보호하는 권력에 의해 착취 받을 자유만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자유로운 소수가 다수를 예속하고 착취하는 자유주의의 자유는 형식적인 자유, 가짜 자유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가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소수만 자유로운, 더 정확히는 죽은 노동인 자본만 자유로운, 가짜 자유를 외치는 자유주의가 자유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루소,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사르트르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철학자가 외친 진짜 자유를 다시 외쳐야 한다. 그래서 진짜 자유를 실현하는 ‘세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만인이 자유로운 이성국가(헤겔)이든, 자유로운 연합(마르크스)이든, 다중의 절대민주주의(네그리)이든, 자유로운 시스템으로서의 국가(지젝)이든,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세계공화국(가라타니)이든.

세계화로 인해 불평등이 심각해지자 자유주의자들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전락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스스로 자유의 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장 실패로 인해 시장의 자유가 예전의 헤게모니(설득에 의한 지배력)를 잃었다. 그러자 우리 사회에서 보수 언론이 ‘공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훔쳐갔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교묘한 엘리트주의인 ‘능력주의’를 포장하는 기만적인 언어조작에 불과하다. 본래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말한 ‘공정’은 소수 엘리트가 부와 지위의 독점을 보장하는 논리인 능력주의가 아니라, 최소수혜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는 사회 정의이다. 유사하게 마이클 샌델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내세워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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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단어는 1980년대 민주화 이후에 우리의 간절한 열망에서 사라졌다. 어떤 낱말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많이 화석화됐고 더 나아가서는 자본에 의해 독점화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의미보다는 왠지 낡아빠지고 의미 없게 느껴진다. 도리어 정의나 평등 아니면 복지라는 단어가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정의라는 철학적인 개념도, 평등이라는 개념도, 복지라는 개념도, 자유 개념이 빠지면 그 고유한 의미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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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다. 그런데 민주화된 이후에 우리는 실제로 자유로운가? 일상생활에서 여러분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컨대, 지도 교수님에게 매여 자기 발언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심지어 고상한 음악을 하는 대학에서도 매를 맞는다. 다행히 물의를 빚은 그 폭행 교수는 쫓겨났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항상 무언가에 예속되어 있어요. 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자신은 비정규직이고 그래서 일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워도 항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법치의 이름으로, 여론의 이름으로 미국과 브라질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극우적인 엘리트 정부가 들어서기도 한다. 이로 인해 촛불시민이 이룩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 앞에서 현재의 정치 시스템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지운 제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촛불시민의 강인한 열망도 확인할 수 있다. 열망은 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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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속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모델 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서 비롯된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이다. 모델 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된다.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들이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이다. 모델 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이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공동체 체제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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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첫 번째 모델,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이기적 개인’이 가장 원하는 자유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따라서 첫 번째 자유의 모델은 신자유주의의 모델로서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누가 개인에게 간섭하는가? 간섭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점도 여러분이 이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최소 국가’를 의미하다. 국가가 내 재산을 지켜주고 타인이 내 재산을 뺏어가는 것을 막아주기를 원하는가? 방범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다. 다만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은 로빈 후드처럼 강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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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두 번째 모델, 강제로부터의 자유

이제, 두 번째 자유의 모델이다. ‘지배’를 ‘강제’로 해석해 보면 이런 ‘강제’의 반대말은, 칸트가 말한 ‘자율’ 개념이다. 자율이란 내가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고 나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의 규칙은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학처럼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공자님이 말씀한 경지이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가 내 뜻대로 하지만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지이다. 그래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 개념이 왜 공리주의나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다른지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법칙을 내게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이 진정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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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세 번째 모델,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자유의 세 번째 모델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간섭이나 강제는 간헐적일 수 있다. 하지만, 전근대사회의 노비나 현대사회의 비정규직처럼 예속은 지속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속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해방(liberation)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월레스가 외친 프리덤(freedom)이다. 노동해방과 민족해방과 같은 단어가 이러한 모델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자유가 아니다. 해방의 자유를 의식하고 실현하려면 먼저 노예로 살아가는 예속적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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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화된 이후에 민주와 자유를 얻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건 형식적인 민주와 형식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자유를 형식적인 자유와 실질적인 자유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자유라는 말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분제 사회의 노예는 아니다. 법적으로 1인 1표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우리는 똑같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실질적인 자유, 실질적인 평등이 요구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민주화를 통해서 형식적인 자유와 형식적인 평등을 성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법 재판에서 자본과 권력에 유리한 판결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당장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 돈과 연줄이다. 예컨대, 삼성 X파일 사건이 있었다. 삼성과 연관된 쪽에서 대권 주자한테 어마어마한 뇌물을 준 사건이다. 그런데, 이걸 기자가 신중하게 공표한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사생활을 침해한 범죄라고 해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래도 그중에 다섯 분이 반대 의견을 냈다. 사실 반대 의견 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반재벌 성향의 법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판사를 그만두고 나와 변호사로 성공하기 어렵다. 재벌에 협조하면 엄청난 수입이 보장되어 있다. 반대하는 행위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판사들도 소수이지만 존재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조금씩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성취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법꾸라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선택적 수사’, 심지어 ‘조작적 수사’를 하는 검사와 이에 동조하는 판사도 존재하고, 이를 여론조작으로 돕는 언론인들도 있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제도적 권한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이 우리 시대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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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자유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라는 단어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를 극우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참된 자유는 단지 국가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가짜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국가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바로 주체적인 ‘시민으로서의 자유’이다.

일상생활에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거시적인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시와 거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한 대로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근본 흐름은 같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전체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하나의 흐름은 개인을 만들고 또 하나의 흐름은 전체를 만든다. 자유주의의 흐름은 자유주의적 시민을 만들고 자유주의적 국가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정치적 운동은 새로운 주체의 모습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 사회에는 불행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우리에게 강제된 제도인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체제’ 탓이다. IMF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1997년에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들어왔다. 불행하게도 구조화된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커졌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간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경제는 성장하는데 왜 대다수는 행복하지 않은가? 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가? 왜 정의와 평등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가? 이는 진정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이는 정의도 평등도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정의와 평등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성취될 수 없다. 따라서 정의와 자유, 평등과 자유를 함께 고민해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

푸코가 말한 대로 철학이란 바로 현대에 우리가 사는 우리의 현실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며 동시에 우리의 현재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로크의 <정부론>은 오늘날 우리의 제도를 그리고 있다. 이 <정부론>에서 나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가 미국 헌법의 언어이며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이다. 이처럼 고전이 우리의 제도와 틀과 우리의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러면 내가 어떤 고전을 읽는가가 우리 삶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하다. 현재 만들어진 것을 이해하게 해준 거라면, 거꾸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우리가 이것을 다른 식으로 바꿔볼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는 데 의미가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자유’에 관한 정치철학적인 정립에 대단히 중요하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에까지

과연 트럼프적인, MB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정치권력 행사는 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제도이지만 민주주의 위기라는 시대적 모순으로 인해 제도가 뒷받침하는 권한 ‘행사’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과연 우리의 입법권이 국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나 있지 않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과연 우리 국민들에게 잘하고 있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불신은 널리 퍼져가고 있다.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정치권력이 이렇듯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게 사적인 것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공적인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자유주의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전혀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이므로 어떤 개인과 어떤 정치 공동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하지, 공적이라고 해서 자유를 억압한다는 단순 도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출발점과 문제의식을 오늘 철학적으로 마련해 보고자 했다. 일단 자유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원초적이고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자유를 향한 전쟁터에 있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적인 자유로 실현하는 것,’ 이것이 루소,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적 과제였다. 내가 살아가는 데 어느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낀 그 순간이 바로 철학함의 시작점이다. 루소만 따로 읽으면 그 철학적 의미가 잘 엮이지 않는다. 고전들도 서로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루소를 칸트나 롤스와 같은 사람의 입장 속에서 읽을 수 있지만,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나 푸코 같은 사람들과 연결해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계열로 책을 읽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고전들도 관계가 있으므로 여러 계열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다양한 계열의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한 사람의 철학도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망 속에 있고 그런 관계망 속에 서야 그 철학적 고전의 의미가 우리의 삶을 제대로 비출 수 있다.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우리 사회에서 독재적 억압에서 벗어난 민주화 이후에 왜 평등과 정의뿐만 아니라 다시 자유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유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한쪽에서 독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진정한 실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평등과 정의를 강조하다 자유를 놓쳐버리면 평등과 정의를 외치는 체제도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정권처럼) 억압적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이 절규한 것처럼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 버렸다’는 자기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말은 독재라는 거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우리 스스로가 일상생활에서 자유의 적(敵) 노릇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다. 자유는 자유주의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시장과 선택의 자유는 단지 하나의 자유가 아니라 소수만을 위한 가짜 자유이다. 이러한 가짜 자유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진정한 자유에 역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자유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에서 신분제와 봉건사회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대적 열망을 담은 주요한 가치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자유는 단지 근대적인 것만도, 자유주의적 것만도 아니다. 자유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 자유는 인간다움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다. 정의는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제도의 원칙이다. 공정은 자유주의적 정의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다. 소수의 횡포로 다수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는 정의롭거나 공정하지 않다. 이를 능력주의로 공정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공정을 훔친 격이다. 물론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진정한 정의로 가는 디딤돌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루소, 헤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이다. 민주주의가 위협에 받은 지금이 도둑맞은 공정을 되찾아 빼앗긴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정의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㊾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지혜와 용기

 

[427d-428b]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네의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 후에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고 행복하게 될 사람은 그중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427d-e)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가 올바르게ὀρθῶς 세워진다면, 완벽하게τελέως 좋은ἀγαθός 나라이며 그에 따라 그 나라는 지혜롭고σοφός 용감하며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정의로운δικαία 나라라고 말한다.(428a) 그리고 이 가운데 무엇을 찾아내면ἐζητοῦμεν 나머지는 아직 못 찾은 것이지만 맨 먼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알아보았을ἔγνωμεν 경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ἐγνωρίσαμεν 그것 또한 우리가 찾고 있던 것τό ζητούμενον을 알아본ἐγνώριστο 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정의를 찾는 방법은 바로 정의를 찾아서 알아보거나 나머지 셋을 찾아서 알아보면 된다는 것이다. 아데이만토스가 이 말들 각각에 다 동의를 표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후자의 방법을 택해 나머지 셋 가운데 하나인 지혜σοφία를 찾아 알아보기 시작한다.(42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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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과정(375a-434c)에서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통치자의 생활 방식과 임무 등 나라의 기본 틀을 언급한 다음에 이제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과연 정의로운 나라인지 그리고 그러한 나라야말로 행복한 나라인지를 살핀다. 그것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지금까지 세워진 정의로운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자고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정의를 찾는 방식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J. Annas(1981) An intriduction to Plato’s Republic. p.109-111 참고) 우선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올바르게 세워지면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왜 그 나라가 완벽한지 따로 설명이 없다. 둘째 그 나라가 완벽하게 좋은 나라임을 근거로 바로 그 나라가 우리가 이제 찾고자 하는 정의를 포함 지혜, 용기, 절제 등 4가지 덕들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의아스럽다. 왜냐하면, 이 말은 완벽하게 좋은 나라는 당연히 4가지 덕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그 전제의 근거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소크라테스는 그 4가지 덕 중 정의를 바로 찾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나머지 셋을 먼저 알아봤다면 정의를 알아본 셈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세 가지 덕을 아는 것만으로 정의라는 덕까지 알 수 있는 것인지 그 근거 또한 불분명하다. 정의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세 가지 덕을 찾아 알면 당연히 알 수 있다는 것일까?

* 그러나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당연하듯 동의하고 있다. 물론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수준에서 동의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아데이만토스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앞서 다루어진 내용에서건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에서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첫째 의문과 관련해서는 앞서 다룬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 보인다. 앞서 이 나라는 자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질과 적성에 따라 서로 분업적으로 의존하여 자족을 실현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애초 의도대로 올바르게 나라가 잘 세워지면 애초 목적대로 모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 애초 자족할 수 없는 결핍된 삶에서 상호 협동적 공동체를 통해 자족적인 삶이 가능해졌다면 소크라테스로선 그 나라를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문제와 관련해서도 앞선 설명들에 의지해서 일정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논의에서(412d-414b) 우리는 이곳의 덕목들과 그 특징들이 일종의 총론적 서론의 형식으로 예비적으로 드러나 있음을 살핀 바 있다.(강해45 참고) 소크라테스는 그곳에서(412d) 이미 현명(phronimos)함을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서 제시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에게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를 갖추고 있다.(433b) 그리고 그곳에서(413b-e)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고유한 덕으로서, 강제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갖추어진 능력과 어떤 환락의 상황에서도 홀리지 않고 의젓함을 유지하는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능력들이 각기 용기와 절제의 덕임을 간취하는 것은 전후 문맥상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 그러나 위와 같이 앞에서 논의된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이유를 아예 다른 곳에서 끌어와 설명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플라톤이 국가의 덕으로 새로 발견한 덕목들이 아니라, 그리스 사회에서 좋은 삶의 토대로서 4가지 기본 덕목들, 이른바 4주덕(四柱德, the cardinal virtues)으로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들은 사주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별다른 이의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들로 플라톤 대화편은 물론 피타고라스학파의 교리와 핀다르(Pindar)의 네 가지 덕(tessares aretai), 크세노파네스의 <회상>(III 9 1-15, IV 6 1-12), 아이스퀼로스의 <9월> 등 여러 곳을 제시한다.(J. Adam note 참고) 실제로 플라톤은 여러 대화편을 통해 비록 이곳과 그대로 일치하지 않지만 이러한 덕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프로타고라스> 329c, <라케스> 199c, <메넥세노스> 78d, <고르기아스> 507b, <파이돈> 69c, <법률> Laws 631c에서 절제, 정의, 용기 및 슬기로움이 함께 거론되고 있는데 앞서 인용했듯이 현명함(phronēsis)은 지혜(sophia)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경건(hosioēs)은 포함되지 않거나 정의와 같은 것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미 사주덕이 대화자들 모두에게 따로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친숙한 덕목들이었음을 보여준다.(J. Adam. note 참고) 다시 말해 그들 모두에게는 완벽하게 좋은 나라라고 한다면 그 사주덕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덕목들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이곳에서 사주덕과 관련하여 일단 전통적인 관념에서 출발하되 이제 새롭게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기존의 관념과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사주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셋째 의문에 대한 이해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혜, 용기, 절제의 의미를 찾아 안다고 해서 아직 살피지도 않은 정의까지 그 내용적 의미를 찾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과 하나가 포함된 4개의 과일 중 3개의 다른 과일을 찾는 것으로 사과를 찾는 단순 귀류법과도 거리가 있다. 찾는 것은 정의의 정재(Dasein)가 아니라 상재(Sosein) 즉 내포이다. 이렇듯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판단해도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했을까? 여러 주석가들이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J. Adam note 참고) 사실 그리 신통치는 않다. 굳이 앞서 논의된 내용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아래와 같은 설명 정도이다.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2권(370b – 374c)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 나라와 관련된 일 중에서 자기 성향이 천성으로 가장 적합한 그런 한 가지 일에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고 그 천성과 소질에 따라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를 임명한 바 있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란 다름 아니라 구성원들 모두 자신의 고유한 덕을 기초로 각기 자신의 역할을 하는 나라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의 고유한 덕들로부터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라는 정의의 덕을 추론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433a에서 정의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앞서 제2권의 내용을 정의를 규정하는 바탕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다만 문제는 ‘각자 자기 할 일을 함’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대한 덕목임에도 그것이 정의로 규정되는 것은 이후의 논의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의 말에 바로 동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논의에 대한 혜안을 가졌으면 모를까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428c-429a]

* 소크라테스는 우선 이 나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κατάδηλος 것은 지혜이고 그 지혜는 이상한ἄτοπον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아데이만토스가 그 이유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한다. 먼저 그는 이 나라는 진정으로τῷ ὄντι 지혜로운 나라인데 그 까닭은 숙고εὔβουλος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숙고를 잘하는 것은 무지ἀμαθίᾳ 때문이 아니라 앎 때문이므로 숙고를 잘함은 일종의 앎ἐπιστήμη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앎은 목수τέκτων나 농부들이 아는 앎들이 아니다. 그런 앎은 목공이나 농사에 대한 최선의 상태를 숙고하는 것이지만 그 숙고로 인해 나라가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에 능하다고만 불릴 뿐이다.(428c) 요컨대 지혜는 일종의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ὁμιλοῖ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이다. 그리고 그 앎은 수호하는 앎이고 완벽한τέλειος 수호자로서 통치자들에게 있는 앎이다. 그리고 통치자들의 그러한 앎을 통해 나라는 숙고를 잘하는 나라, 진정으로 지혜로운 나라라고 불린다.(428d) 그리고 그러한 앎을 가지고 있는 수호자들은 자연적 성향에 따라 수가 가장 작은σμικροτάτῳ 집단ἔθνος이자 가장 작은 부분μέρος이고 그 집단에 있는 앎 때문에 전체가 지혜롭다.(429a) 요컨대 이 앎은 앎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지혜라 불러 마땅한 앎이고 본성상κατά φύσιν 가장 수가 적은 통치자들이 그 앎에 참여하기에 적합한 이 부류γένος들이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넷 중에서 하나를 찾아냈고 그것이 나라의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찾아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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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지혜(sophia)를 ‘숙고를 잘하는 앎’으로 규정한다. ‘숙고’로 옮긴 그리스어 εὔβουλος(euboulos)는 ‘take counsel, deliberate, determine or resolve after deliberation’의 뜻을 가진 동사 βουλεύω(bouleuō)에서 나온 말로서 ‘뭔가를 결정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사려 깊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에서 나랏일 전체에 관한 최고 의결기구인 평의회(boulē βουλή)도 이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목공이나 농부도 숙고한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자처럼 나라 전체에 관한 것을 숙고하지 않고 자기 일에 한정해 숙고하므로 지혜라고 하지 않는다. 지혜는 ‘숙고를 잘하는 앎’이되 ‘나라 안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서 이 나라가 이 나라의 시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를 숙고하는 앎’인 것이다. 요컨대 이곳에서 지혜는 나랏일 전체를 숙고하는 정치적 통치 능력으로서 총체적 앎이다. 그리고 유념할 것은 이 나라가 지혜로운 나라인 까닭은 이 나라에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통치자로 있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지혜로운 자가 통치하지 않는 한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에게 있어 숙고를 통한 총체적인 앎으로서 지혜는 여기에서처럼 나랏일 즉 통치 영역에만 한정된 앎이 아니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지혜는 원천적으로 총체적 앎의 극치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앎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사태에 관한 총체적인 앎 그 자체를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말 자체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으로 불리는 것도 이미 철학적 앎의 기저에 총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곳에서는 논의 계획과 순서에서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를 논하기 이전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일단 지혜를 나랏일과 관련한 통치자의 총체적인 숙고 능력, 즉 통치자만 유일하게 갖는 덕으로 한정하여 말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에서 통치자는 아직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아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철학자로서 통치자는 제6권과 7권에서 다룬다.

* 그런데 나라에 필요한 부분적 역할을 나름의 수준에서 숙고하여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을 수 있어도 나라라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숙고하고 그에 필요한 역할과 기능을 총체적으로 숙고하는 앎으로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나라 안에서 소수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가장 작은 집단(ethnos), 부분(meros), 부류(genos)라고 부른다. 물론 이들의 수를 정확히 계산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지난 강해(강해 46)에서도 살폈듯이 아무리 수호자까지 포함하여 크게 잡아도 1.5%에서 3% 정도로 추정될 만큼 극히 소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혜에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말(428c)은 이렇듯 소수의 지혜 있는 자가 나머지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 누누이 살폈듯이 통치자들은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소수의 특권 계급과 전혀 거리가 멀다. 그들은 소수이지만 여느 특권 계급처럼 사유 재산은커녕 가족도 꾸리지 못하고 통치권력 또한 여럿이 돌아가며 수행하며 기간 또한 한시적이다. 그에 비해 나머지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있고 결혼으로 가족도 꾸릴 수 있고 평생을 자기 일에 종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통치자 혼자 전제 권력을 종신토록 휘두르고 시민들 모두는 사유 재산도 가족도 가질 수 없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공산주의 사회’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권력자들은 시민들과 달리 어떠한 재산도 주택도 가질 수 없으며, 일정한 지역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된 훈련을 수행해야 하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자기 가족으로 여기면서, 오직 시민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서로 돌아가며 한시적으로 나랏일을 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사람을 특권층이라고 선망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시의 대화자들마저도 이미 그런 사람들이 어찌 행복할 수 있냐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권력자들의 횡포와 부정부패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사람들은 감탄하면서 그들 권력자에게 선망이 아닌 연민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나라에서는 권력자들이 그렇게 갇혀 지내면서 아예 재산조차 가질 수가 없네!’라고.

* 이 부분에서 주목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설명하면서 숙고의 대상에 이 나라와 이 나라 시민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가장 좋을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현대의 정치적 현실에 적용할 때 일단 2000년이라는 시대적 격차가 가장 큰 장애로 작용하지만, 일반적인 주제에서조차 그 어려움이 뒤따르는데 그 대표적인 영역이 곧 국제관계에 대한 정치철학적 이해 영역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관심사의 경우 비록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내전을 막는 게 근본 목표로 주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 대책의 대부분은 국내 문제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대화편 전체에서 타국과 관련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교역 문제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현대의 대부분 국가에서 이른바 세계화와 지구화가 국민국가 차원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정치철학 영역에서도 가히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문제에 대한 접근은커녕 해결을 위해 어떠한 방책도 구해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 정치철학의 현대적 적용은 여러모로 근본적인 제한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구체적으로 국제문제를 다루는 부분들은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통치의 중대사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듯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보여주고 있는 국제관계의 기본 원칙만은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다.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가 국가 간 갈등과 나라 간 빈부의 차이, 그로 인한 전쟁 발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 플라톤은 이미 그에 대한 원칙적인 대답을 대화편 전체 내용을 통해 내놓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나 <법률>을 통해 서로 다른 여럿의 조화와 공존이 정치철학의 근본 목표이자 원칙임을 하나같이 견지하고 있고 그에 따라 타자와의 차별과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물질적 욕망에로의 획일화를 극력 비판하고 있다. 특히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연설을 다루는 <메넥세노스>는 전쟁을 해야 한다면 오로지 방어 전쟁에 국한할 것을 강조하면서 타국에 대한 침략적 지배를 통해 관철된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메넥세노스>(2021) 이정호 옮김, 아카넷 참고. 이 점에서도 알렉산더의 등장은 고대 그리스의 종말을 상징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기본적으로 나라 안은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반패권주의 및 반제국주의에 기초한 평화와 공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나라에서 가난을 가장 나쁜 최대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한 나라에서건 여러 많은 나라에서건 빈부의 양극화를 없애는 것이 정치가들이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역할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국제적 현실은 어떠할까?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부분 나라는 하나같이 무한경쟁과 노동의 유연성을 내세워 분배와 복지보다 나라 전체의 총량적 경제 성장에 매달리고 있다. 특히 강대국들의 경우,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여 AI, 챗 GPT 등 첨단 지식정보산업에 마치 미래의 사활이 걸린 듯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그것들이 초래할 수 있는 인간 지성의 왜곡과 노동의 소외, 환경의 파괴, 빈부의 세계적 양극화에는 눈을 감은 채, 오직 효율지상주의를 통한 패권주의적 우위를 달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러한 문명적 위기에 대한 총체적 비판은커녕 누가 먼저 그러한 전환에 발맞추어 살아남을 것인가 각론적 해결 방안에 대해서만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각자도생하여 살아남을 것인가가 지적 성찰의 주제가 된 세상이다. 2000년 전 삶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숙고 능력으로서 플라톤의 지혜와 현실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429b-430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같은 방식으로 용기ἀνδρεῖα와 그 용기가 나라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찾아서 알아본다. 우선 용기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에 복무하는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에게 있다. 즉 나라가 비겁한 나라인지 용기 있는 나라인지는 순전히 그들에 의해 결정된다.(429b)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입법가가 교육을 통해 알려 준 그런 류의 무서운δεῖνος 것들에 대한 믿음δόξα(doxa)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할σώσει 수 있는 힘δύναμις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29c)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힘을 용기라고 부르고 그런 의미에서 용기는 일종의 보전σωτηρία이라고 말한다. 즉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λύπη이나 즐거움ἡδονή, 또는 욕구ἐπιθυμία나 공포φόβος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429d)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보전을 염색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염색공βαφεύς은 염색하고βάπτω 싶을 때면, 먼저 그 다양한 색깔의 모직 중에서 본래 흰색만을 가진 모직을 고르고, 그다음에는 최대한도로 색깔을 받아들이도록 적지 않은 공을 들여 미리 준비하고 나서, 그런 상태가 되어야 염색을 한다는 것이다.(429e) 그래야만 모직이 단단히 착색되어 세제를 쓰든 안 쓰든 세탁을 해도 광택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인στρατιώτης들을 뽑아 시가μουσική와 신체 단련γυμναστικῇ으로 교육하는 것도 염색의 예에서 보듯 그들이 우리의 설득을 가장 훌륭하게 받아들여, 적합한 자연적 성향과 양육을 갖춤으로써 무서운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다른 것들에 관한 믿음이든 단단히 갖게 하여 강력한 세척력을 지닌 어떤 쾌락이나 고통과 두려움, 욕망도 그들에게서 그 믿음을 씻어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용기는 무서운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올바르고 적법한 믿음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전하는 힘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른 믿음일지라도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긴 믿음을 짐승들과 노예들의 믿음에 비유하며 소크라테스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430a-b)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용기를 다만 시민적πολιτικός 용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원할 경우 나중에 다시 더 잘 살펴보겠지만 여기에서는 정의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43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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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덕으로 지혜에 이어 용기(andreia)를 찾아 살핀다. 그에 의하면 용기는 법과 교육παιδεία을 통해 생겨난 믿음의 보전 즉 무서운 것이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믿음의 보전을 의미한다. 앞서(413b-e) 통치자들의 선발 조건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이곳에서 말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전함’이란 괴로움이나 즐거움 또는 욕구나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내내 보전하고 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 ‘무서운 것들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δόξα(doxa)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종교적 신앙이나 신뢰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어떤 ‘생각(a notion, true or false)’ 내지 ‘견해(opinion) 즉 넓은 의미에서 모종의 앎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앎은 고도의 철학적 인지 단계에서 획득되는 참된 앎으로서 앎(epistēme)이 아니라 다만 그보다 낮은 인지 단계, 이를테면 감각이나 경험을 통해서건 혹은 일정 수준의 추론을 통해서건 인지자 스스로 참이라고 믿고 있는 일종의 자기 확신으로서 앎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믿음은 진정한 앎과 비교하여 어떤 경우 그에 근접하여 올바른 믿음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된 확신 즉 거짓된 믿음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플라톤이 말하는 믿음(doxa)의 정확한 의미와 인식론적 위계는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룰 때 따로 자세히 다룬다] 그런데 이곳에서 용기와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 믿음은 오랜 기간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비록 고도의 인지 능력에 의해 획득된 앎에는 미치지 못하나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믿음’(orthē doxa)으로서 건강한 앎이자 능력인 것이다.(J. Adam note 참고)

* 소크라테스도 언급하고 있듯이 무지한 노예도 용감하고 오늘날 깡패들이나 조폭들도 싸울 때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다. 이들 모두도 그럴 수 있는 믿음 즉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주인이나 두목으로부터 생계도 보장받고 지위와 금전 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모두 신분적 예속이나 조건에 기초해 있으므로 신분이 달라지거나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뒤바뀌거나 배반할 수 있는 조건부 생각이자 유동적인 믿음이다. 동물도 살기 위해 본능으로 용감하지만, 더 강한 것 앞에서는 바로 꼬리를 내리거나 도주한다. 충성스러운 개조차 먹이를 주는 주인이 바뀌면 바뀐 주인을 따른다. 그 믿음을 보전하는 힘은 일시적이고 본능적이어서 강렬한 듯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용기는 이와 달리 오랫동안 법과 교육을 통해 생겨난 올바른 믿음이자 그 믿음 자체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보전하는 일관된 힘이자 능력으로서 덕이다. 특히 시가 교육과 신체단련 교육은 어떠한 경우도 탈색이 되지 않는 잘 염색된 모직물처럼 그러한 믿음을 자신에게 적합한 자연적 성향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다.

* 그리고 나라가 용기 있는 나라일 수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나라의 수호자로 복무하기 때문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수호자로 나서지 않거나 그런 사람을 수호자로 임명하지 못하는 나라는 결코 용기 있는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수호자로 나서지 않는 그 개인 역시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앎은 곧 실천인 것이다.

* 이렇듯 용기는 단순히 용맹한 행위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의미 이전에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굳세고 올바른 믿음 즉 내적인 앎이다. 현명한 사람은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의연하게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지만, 어리석고 무지한 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의 용기와 무지한 자의 만용을 가르는 것은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즉 ‘진정한 가치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앎은 능력 곧 힘이자 덕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용기를 덕이자 믿음으로 말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용기를 힘이자 능력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 용기는 ‘올바른 믿음의 보전’이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은 올바르다는 점에서 앎에 근접해있지만 믿음인 한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앎(epistēme)에는 못 미친다.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의 용기를 ‘시민적 용기’(politikē andreia)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중에(500d) 언급되는 시민적 덕(politikē aretē), 평민적 덕(dēmotikē aretē)도 이곳에서 언급되는 시민적 용기 수준의 덕을 가리킨다. 요컨대 시민적 용기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에는 못 미치지만(<라케스> 195a, 196e ff., <프로타고라스> 349d)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관여되어 있으므로(제6권 506a 참조) 믿음이되 ‘올바른 믿음’(orthē doxa)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훈련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것’(<파이돈> 82a-b) 즉 오랜 기간 시가와 체육 교육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신념이자 확신이다. 요컨대 수호자들은 무서운 것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올바른 믿음을 확고하게 내면화하고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도 그 믿음을 흔들리지 않고 보전한다. 그리고 이 올바른 믿음은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통해 진정한 앎으로서 상승할 수 있다. 다만 현 단계 수호자의 경우 믿음을 앎으로 상승시키는 철학적 성찰의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수호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군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시민적 용기는 수호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앎으로서, 시민들에게는 최선의 교육 목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덕으로서 용기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시민적 용기로 불렀을 것이다. 시민들은 최선의 시민적 용기를 갖고 수호자를 따르고 견고하고 올바른 믿음을 지니는 수호자는 진정한 앎으로서 용기를 지닌 통치자를 따라 나라를 지킨다. 종국적으로 지혜는 물론 용기와 절제의 덕 모두 고도의 철학 교육과 훈련을 마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철학자 왕을 통해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이자 덕으로서 구현된다.

* 플라톤이 <국가>에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청소년기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거론하고 20세에 이르면 수호자를 선발 임명하고 그 후 고도의 철학 교육과 현장 실습 단계를 거쳐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이 되는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발생론적인 단계와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지혜에 관한 논의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통치자의 덕과 앎을 논의하기는 하되 좋음의 이데아를 본 ‘철학자 왕으로서 통치자’를 논하는 단계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시민적 용기로 제한하면서 여기서 용기에 대한 탐구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말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430c) 앞에서 언급된 교육과 양육의 목표는 나라의 덕을 다루는 현 단계로서는 ‘올바른 믿음’ 정도 수준의 앎이다. 그러나 나중에(6권-7권) 철학자로서 통치자가 다루어질 즈음에 이르면 지혜, 용기는 물론 절제, 정의 모두 통치자가 갖추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앎이자 덕임이 밝혀진다. <국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맞이하는 난관의 대부분이 ‘철학자 왕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을 다루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끝-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427d-434c) (2) 절제와 정의. 다음에 계속)


 

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한철연 세션-한국현대철학분과 발표 “한국현대철학사의 몇 가지 지평들: 전통과 근대, 종교사상, 서구와 식민”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 한국철학자연합대회 한철연 세션

 

○ 세션 주제: “한국현대철학사의 몇 가지 지평들: 전통과 근대, 종교사상, 서구와 식민”

○ 세션 주체: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현대철학분과

○ 일시 : 5월 13일(토) 15:00-18:00

○ 장소: 서울시립대 미래관 33-B111

– 전체 사회: 김정철(한국국학진흥원)

 

【제1부】

▶개회사: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1발표. (15:00~15:35)

주제: 근대이행기 민(民)에 대한 이해 – 최제우와 나카에 조민 사상을 중심으로

발표자: 이지(이화여대) 토론자: 송인재(한림대 한림과학원)

▶2발표. (15:35~16:10)

주제: 동학의 연대적 공동체 의식과 근대의 길

발표자: 진보성(방송대) 토론자: 구태환(한철연)

-휴식 10분 (16:10~16:20)-

【제2부】

▶3발표. (16:20~16:55)

주제: 일제강점기 신문·잡지 속 윤리·도덕 담론 연구

발표자: 윤태양(성균관대) 토론자: 배기호(중원대)

▶4발표. (16:55~17:30)

주제: ‘한국현대철학사’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이해의 가능성: 그 시론적 검토

발표자: 박민철(건국대) 토론자: 유현상(숭실대)

【제3부】

▶종합토론 (17:30~18:00) 좌장: 김정철(한국국학진흥원)

▶폐회사: 현남숙(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C1YAKBk1lPg

 

삶과 예술의 화해(2)-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삶과 예술의 화해(2)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

 

4)

금복은 후반부에 이르면 전반부와는 대립된 성격으로 변화한다. 그녀의 욕망은 이제 남성적 욕망의 형태를 띠며, 작가는 최후로는 금복이 남자로 바뀌는 것으로 설정한다. 금복은 이런 남성적 욕망에 토대를 두고 총명한 지혜를 이용하여 마침내 평대에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금복은 노파의 국밥 집을 운영하다가 다방으로 바꾸어 커피를 팔게 되고 돈을 모았으나 강도에게 다 털린다. 그날 폭풍우가 치면서 국밥 집 지붕이 무너져 노파가 쓰지도 못하고 감추어놓은 돈 무더기가 쏟아진다. 그 중에는 남발안이라는 곳의 토지문서도 있었는데, 금복은 곧 남발안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금복은 지식인 다운 모습을 지닌 ‘문’(이름이 아니라 성만 기록된다)을 데리고 남발안을 방문한다. 문이 이 땅의 진흙을 만져보고 이 진흙을 이용해 벽돌을 찍으면 되겠다고 말하자. 금복은 문에게 벽돌 개발 책임을 맡기고 뚝심을 부려가면서 가진 모든 돈을 투자하여 마침내 벽돌공장을 세운다. 여기서 나온 벽돌은 단단하고 아름다워 전국에 팔리고 곧 금복은 부자가 된다.

 

금복은 그녀가 과거에 만난 사람들을 불러모아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그녀는 생선장수를 불러 평대에 운수업체를 세우며 그 정점에서 금복은 그녀의 거대한 꿈을 실현시킬 고래를 닮은 극장을 세우려 한다. 

 

작가는 이 고래 극장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는 금복의 고래에 대한 동경을 서술하면서 이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를 통해 금복은 그녀의 뒤를 쫓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런 고래를 획득할 수는 없다. 결국 극장이라는 환상적 예술의 형식을 통해 고래를 획득할 수밖에 없으니, 고래 극장이란 이런 점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고래극장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존재이며 따라서 허망한 존재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래극장은 다름 아닌 자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죽음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런 자본은 사실 축적한 순간 곧 무너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금복은 마침내 고래극장을 세움으로써 고래를 획득했다고 믿지만 사실 이 순간이 바로 그녀가 추구했던 거대한 욕망이 물거품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금복은 자신이 어릴 때 사귀었던 약장수를 불러 고래극장을 맡기고 자신은 어린 창녀인 수련의 몸을 탐닉한다. 하지만 약장수와 수련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둘은 미리 돈을 빼돌린 다음 함께 도망치고 만다. 금복은 실의에 젖어 술에 취해 살다가 극장에 라이터를 던져(떨어트린 것이지만, 아마 던졌을 것 같다) 고래극장은 불타고 만다. 영화를 보던 관객 800명도 함께 죽는다.

 

금복의 몰락은 자본의 몰락이니, 자본의 사회과학적인 일반적 법칙이라 하겠다. 하지만 작가가 자본을 그려내는 방식에는 자본에 대한 사회과학적 파악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후일 자본가가 되는 금복이 전반부에서는 오히려 예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금복이 기업을 세우고 마침내 고래 극장을 세우는 것을 죽음의 극복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래 극장은 자본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을 의미한다. 이 경우 예술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허망한 꿈을 제공하는 사기 예술에 불과하다.

 

5)

그렇다면 진정한 예술은 어떤 것인가? 천명관의 입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토마스 만의 입장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토마스 만은 독일 낭만주의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기초하여, 예술을 죽음에 대한 동경, 몰락에의 의지를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에게서는 몰락과 죽음이 곧 아름다움이니 그런 점에서 예술은 삶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명관은 토마스 만과 달리 예술을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는 진정한 의지로 설정한다. 작가는 예술의 꿈과 자본의 꿈이 어쩌면 동일한 바탕 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앞에서 금복의 삶을 통해 말했듯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인데, 작가는 이 점에서 예술 또한 마찬가지로 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자본이 죽음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판단 위에서 작가는 오히려 진정한 예술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 삶의 의지를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본다. 이런 판단을 통해서 이제 소설 3부에서 예술가로서 춘희의 삶이 시작된다. 작가에게 예술가는 병약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춘희의 모습이다.

 

춘희의 삶에서 보듯이 예술가는 마침내 예술에 도달하기까지 삶 속에서 끝없는 희생을 겪어야 한다. 마치 노파가 무심한 눈을 가진 반편이를 닮았다고 자기 딸을 애꾸로 만들었듯이 금복은 춘희를 태어났을 때부터 냉담하게 대한다. 춘희는 춘희가 걱정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지만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결과인 듯 춘희는 말을 하지 못하며, 어머니 금복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온갖 수난을 당한다. 마침내 춘희는 남발안 벽돌공장으로 돌아와서 들판을 쏘다니며 짐승처럼 살아간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통뼈인 트럭 운전사의 아들을 만나 잠시 삶의 기쁨을 찾고 아이도 놓지만, 그는 춘희가 아이를 뱄을 때 자신의 자유가 얽매이는 것이 싫어 춘희를 버리고 떠난다. 춘희는 그가 떠난 겨울 차가운 눈 벌판에서 아이를 먹이려 애쓰다가 잠이 들고 아이도 얼어 죽게 된다. 깨어난 춘희의 온몸에서는 새로 탄생하는 예술의 힘인 듯 울음이 터진다. 말 못했던 자폐아 춘희가 드디어 예술적 소통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미 감옥을 나왔을 때 노파의 두부를 먹으며, 춘희는 수난을 일차 마치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의 죽음으로써 춘희는 예술적 단련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마치 예수 수난사를 연상시키는 이런 춘희의 삶(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이 더욱 그렇게 보이게 한다) 가운데 그녀에게 내재하던 교감의 능력이 싹이 트고 자라나며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며 그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으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든다.

 

벽돌을 만드는 것은 금복과 춘희가 동일하지만 금복은 그것으로 허망한 부를 쌓으려 했던 반면 춘희는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다. 춘희는 무상의 예술로서 벽돌을 남발안 벌판에 쌓아놓고 죽는다. 그러나 예술로서 벽돌은 살아서 춘희의 죽음을 넘어선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벽돌로 대극장이 완성된다. 그것은 고래극장과 같은 극장이지만, 이제 의미는 달리 한다. 고래극장이 헛된 꿈을 부풀리는 가상의 세계라면 대극장은 삶의 버팀목이 되는 예술이다.

 

6)

전체적으로 볼 때 삶과 예술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천명관 작가는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 예술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이 삶과 예술을 극명하게 대립시켰던 것과 달리 천명관은 삶과 예술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미 삶을 대변하는 자본가 금복에서도 내재적으로는 예술적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금복의 예술은 허망한 꿈으로서 예술이니, 그것은 자본과 동일한 속성이 된다. 거꾸로 춘희는 예술의 원리를 대변하지만 그의 예술은 죽음에의 동경으로서 예술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로서 예술이니, 예술은 고통과 희생을 딛고 출현하며 삶을 견디고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삶과 예술의 화해(1)-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삶과 예술의 화해(1)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

 

1)

삶과 예술은 여러 면에서 대립한다. 삶은 현실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은 현실 너머에 있는 영원을 향한다. 삶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면 충족될 수 없지만 예술은 가상적인 수단을 통해 목적에 이른다. 삶은 지루한 일상을 통해 강건함을 유지하지만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 속에 생명을 갉아 먹는다.

 

삶과 예술의 대립을 해결하고자 지금껏 많은 철학적 사유가 등장했으며 예술가는 이 문제를 자신의 방법으로 풀어나가려 했다. 치열하게 이 문제와 맞싸웠던 예술가 중 대표자는 토마스 만일 것이다. 그의 청년기, 노벨상 수상 작품인 붓덴부르크 일가는 상인으로부터 시작한 독일 자본가의 4대에 걸친 성공과 몰락을 그리고 있다.

 

4대의 흥망에서 결정적 전환점은 붓덴부르크 가문의 3대 수장 토마스이다. 왕성한 자본가이었고 마침내 정치적 권력도 획득한 아버지와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아름다운 어머니 사이에 그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 예술에 심취했으나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가 남긴 기업을 이어받는다. 그는 투철한 책임감으로 기업을 발전시키지만, 그의 내면에는 예술에 대한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그는 병약한 예술가의 모습을 가진 여성 게르다와 결혼한다. 이미 토마스 시대 말기에 그의 기업은 몰락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4대 하노는 마침내 음악에 대한 동경에 빠져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기업이 몰락하는 것을 방관하고 만다.

 

2)

천명관의 소설 고래도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로 삶과 예술의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그는 토마스 만과는 삶과 예술의 대립보다는 삶과 예술의 화해 가능성을 그려낸다. 이 소설 역시 3대에 걸쳐 전개되는데, 주요 무대는 평대라는 산골이다. 이곳은 기차가 지나가는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으나, 주인공 금복이 세운 벽돌공장 때문에 개발 붐이 일어났던 곳이다.

 

작가는 3대에 걸친 인간의 운명을 그려내기 위해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화자가 되어, 마치 초기 영화의 변사처럼 주인공의 운명을 슬퍼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해설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작가는 서사시적 특징을 지닌 소설 속에 다양한 장르로부터 빌어온 장치를 끌어넣는다. 그는 환상과 캐리커처, 풍자를 비벼 주인공의 운명을 조탁해 낸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은 어쩌면 모두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그들은 각기 내면 속에 자기와 대립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몰락하고 말며, 전체적으로 모든 인물은 자가당착적이다.

 

주인공 1대가 노파라면 2대는 금복이다. 마지막 3대가 춘희이다. 이들 사이에는 엄격하게 핏줄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금복은 노파가 운영했던 국밥 집을 이어받았는데 폭풍우가 몰아 지던 날 노파가 감추어 놓고 죽은 돈을 발견하고 이 돈을 바탕으로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벽돌공장을 비롯해 운수업체 그리고 마침내 고래극장이라는 거대한 건물은 그녀가 집념으로 이룬 산물이다. 춘희는 금복의 딸이지만, 금복이 거지가 되어 전국을 유랑할 때 우연히 낳은 딸일 뿐이다. 그런데 금복은 춘희가 4년 전에 죽은 자신의 연인 걱정을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춘희를 걱정의 딸로 간주한다.

 

이들 3대는 어떻게 보면 한국자본주의 발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시대 배경을 알아볼 수 없도록 제거해 버리는데,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한국 자본주의의 서사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3)

1대 노파는 박색이며 가난한 천민이다. 그러나 그녀는 왕성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반 가 막내 아들인 반편이와 관계하다가 두들겨 맞고 쫓겨난다. 그녀는 반편이를 꾀어내어 물에 빠트려 죽이고 도망해, 철도 건설 공사가 한창 이던 시기 평대에 국밥 집을 차려 돈을 모은다. 그녀는 기어 다니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지붕 밑에 감추어 둔다. 노파의 이런 모습은 마치 민중에서 나온 초기 자본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다. 노파는 삶의 원리를 대변한다. 

 

그러나 삶의 원리를 대변하는 노파의 몸 속에 이미 이에 대립하는 예술의 원리가 싹트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애꾸이다. 노파가 반편이와 관계하여 낳은 딸이 애꾸인데, 노파는 딸의 눈이 자신이 죽인 반편이의 무심한 눈을 닮을 것을 보고 죄의식 때문에 부지깽이로 딸의 논을 찔러 애꾸로 만들고 딸을 산 속에 사는 벌치기에게 꿀벌 2통에 팔아버린다. 애꾸는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노파의 돈을 훔치려다 결국 노파를 죽이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벌치기로부터 벌과 교감하는 법을 배운다. 무심한 눈, 자연과의 교감은 후일 예술가가 되는 춘희를 연상시킨다.

 

3)

소설의 중심은 금복이다. 작가는 금복의 삶을 전반부(1부의 이야기)와 후반부(2부의 이야기)로 구분한다. 전반부에서 금복은 세상의 물정을 파악하는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불타는 내적 욕망(작품 속에는 ‘바람’으로 상징된다)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자신을 향하는 아버지의 욕정을 피해, 생선장수와 도망쳐 항구에 이른다. 거기서 그녀는 천부의 총명함으로 생선장수를 도와 덕장을 운영하다가, 걱정을 만난다. 걱정은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단순하여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하는 남자이다. 금복은 걱정을 사랑하여 생선장수를 버리고 걱정과 살림을 차리지만, 금복 자신이 예감한 대로 걱정은 단순성에서 나오는 만용으로 폭풍우 속에 굴러 떨어지는 통나무를 막다가 다친다.

 

춘희는 걱정을 보살피는 가운데, 칼잡이를 만난다. 칼잡이는 세상의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 깡패 두목이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자 기생인 나오꼬를 위한 것이다. 칼잡이는 자신의 손가락 6개를 바치고 나오꼬를 품에 안지만, 아침에 그가 발견한 것은 그를 기다리다 이미 나이 들어 노파가 된 여자였다. 칼잡이는 자신의 욕망이 허망했다는 것을 깨닫고 평생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으나 나오꼬를 닮은 금복을 보자, 사랑에 빠진다.

 

결국 걱정을 사랑하는 금복은 그녀를 사랑하는 칼잡이와 함께 살기로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걱정은 금복이 칼잡이와 관계하는 것을 보고, 집을 떠나 바다에 빠져 죽는다. 칼잡이는 걱정을 붙잡으러 따라 나섰으나 금복은 칼잡이가 걱정을 살해해 바다에 던진 것으로 생각하고 칼잡이를 등 뒤에서 작살로 찔러 죽인다.

 

이렇게 해서 전반부는 끝난다. 금복은 걱정을 상실한 절망과 칼잡이를 죽인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지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다가 어느 마구간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아이를 낳는 중에 쌍둥이 자매에 의해 구원받으면서 전반부가 끝난다.

 

전반부에서 나타난 금복의 모습 속에는 아직 후일 대기업을 일으키는 자본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금복의 모습은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인데, 그녀가 감추고 있는 거대한 욕망의 모습은 걱정을 사랑하는 모습에서나 칼잡이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모습에서 보듯이 남성적 욕망과 대립하는 여성적 욕망의 형태이다. 작가는 그 때문에 금복에게 남자를 홀리는 냄새가 들어있다고 서술한다. 여성적 욕망의 형태는 자주 예술적 기질의 원천으로 설명되는데 이런 점에서 금복의 전반부에서 모습은 예술가적 기질을 보여준다고도 하겠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㊽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 3(423d- 427c)

 

[423d-427c]

* 소크라테스는 앞서 말한 임무들이 쉽고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의 크고 충분한ἱκανόν 하나가 있다고 말한 후 그것이 다름 아니라 교육παιδεία과 양육τροφή임을 밝힌다. 만약 수호자들이 교육과 양육을 잘 받아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사람들이 되면 앞서 말한 정도의 임무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미뤄두고 있는 문제 즉 부인을 취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문제들까지도 쉽게 간파할διόψονται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423d-e)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최대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ά τά φίλων’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에 동의를 표한다. 게다가 그는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일단 잘 출발하면 발전적인 순환κύκλος을 이룬다고 말한다. 즉, 유용한χρηστός 양육과 교육이 보존되면σῳζομένη 그것이 좋은 본성φύσις을 만들어 내고 자손의 출산과 관련해서도 한층 더 낫게 된다는 것이다. (424a)

* 요컨대 나라를 돌보는 자ἐπιμελητής들은 교육과 양육을 고수하여ἀνθεκτέον 어떤 경우에도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ή과 시가μουσική에 급진적인 변화νεωτερίζειν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424b) 노래ᾆσμα가 아니라 노래 방식τρόπος만 새로 고쳤다고 칭송해서도 안 된다. 시가의 형식εἶδος이나 방식τρόπος의 변화는 가장 중대한 나라의 법νόμος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불법이 쉽게 끼어들지 않도록 시가에 수호자들의 초소φυλακτήριον를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424c) 그것은 조금씩 성품ἦθος과 행실ἐπιτήδευμα에서 계약συμβόλαιον으로, 법률과 정치 체제로 이행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기τελευτῶσα 때문이다.(424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이들이 준법적인ἔννομος 놀이를 잘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시가를 통해 훌륭한 법질서εὐνομία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그들 자신의 성장은 물론 나라에서 잘못된 것도 바로잡고 이전 사람들이 망쳐놓았던 사소해 보이는 일상 예법들도 모두 찾아낸다는 것이다.(424e-425a)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것들을 법제화νομοθετεῖν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아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잡게 되면 닮은 것τό ὅμοιον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어 좋은 것이 됐든 그 반대되는 것이 됐든 하나의 전적이고도τέλειος 강력한νεανικός 어떤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25c) 시장과 관련한 세칙들 이를테면 계약 폭언과 폭행과 서면고소αἰκία, 재판관들의 임명과 관련한 일들, 세금의 징수나 납부 등 시장이나 도시를 감독하거나 항구세와 관련된 일들도 굳이 법제화 할 필요가 없다.(425d) 아데이만토스가 말한 대로 아름답고 뛰어난 사람들은 법제화해야 하는 것들 대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25e) 이에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에게 신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법을 보전σωτηρία해 주는 경우 그렇다고 말해준다.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렇지 못한 경우 그들은 마치 최선의 것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평생 이런 유의 많은 법규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고쳐가며 산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그런 사람들은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ἀκολασία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δίαιτ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 거라고 말한다.(426a)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병을 더 키우면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치료약φάρμακον을 조언해 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그것으로 건강해지리라는 기대를 지니는 멋진χαρίεις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래와 같은 진실 즉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그만두기 전에는 그 어떤 처방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오히려 누구보다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26b)

*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것은 멋진 게 아니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데이만토스의 생각을 받아 주면서도 짓궂게도 한술 더 떠서 그런 일을 저지르는 나라와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과연 그들이 앞의 사람들과 같은지 그리고 과연 그들은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묻는다.(426b) 즉,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터이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이 있다면 그 나라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인지를 물은 후에, 그렇게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도 시민들이 즐거워하도록 보살피고θεραπεύῃ, 아첨하며 환심을 사는 것은 물론 그들의 의향을 미리 알아 만족시키는 데 능란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고 힐난한다.(426c)

* 이에 대해서도 아데이만토스는 정색을 하고 그런 사람들 모두 앞서 말한 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자들로 어떤 식으로도 칭송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다시 힐난하는 말투로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 의향과 열의를 지닌πρόθυμος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이 가상하다고 말하고 측정할 줄μετρεῖν 모르는 자가 마찬가지로 측정할 줄 모르는 자에게 키를 알려주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426d)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또다시 반대를 표명하자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은 짓들을 하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멋진 사람들χαριέστατοι이라고 다시 비아냥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휘드라의 목을 자르고 있는 꼴인지 모른 채 계약상의 사기κακούργημα 등 이러저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매번 뭔가 끝πέρας을 볼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세세한 것까지 모두 법으로 제정하고 또 고친다는 것이다.(426e)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입법가는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할πραγματεύεσθαι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이 무용지물ἀνωφελής이며 아무것도 이루는 게 없고πλέον οὐδέν,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 중 일부는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일부는 이전의 관행ἐπιτήδευμα들에서 저절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427a)

* 이후 소크라테스는 다만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법령νομοθέτημα들 중에서도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으뜸가는 법령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θυσία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δαίμων들과 영웅ἥρως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에 관한 해석은 전적으로 대지의 중심에 있는 배꼽ὀμφαλός에 앉아 이런 것들에 대해 해석해 주는 조상 전래의 해석자ἐξηγητής에게 맡긴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이 일단 마무리 된다. (42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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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4a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koina ta philōn은 그리스의 속담으로 <국가>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소유와 결혼 그리고 자식들 문제까지 이 말을 적용해서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도 그 말에 찬성을 표한다. 그렇다고 아데이만토스가 여기서부터 벌써 처자 공유를 동의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차마 그것까지 공유한다는 말씀일까 긴가민가하면서 단지 그 속담에만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449c에 가서야 아데이만토스는 이 말이 처자와 자식까지 공유하는 것임을 알고 이의를 제기한다. 이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자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까지 표현하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이다.

* 425b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예법들’은 구체적으로 연장자 앞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적절하게 말을 삼가는 것,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부모를 모시는 것θεραπεία, 머리와 옷과 신발을 단정히 하는 것을 비롯한 전체적인 몸가짐과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들 등이다. 흥미롭게도 이것들 모두는 동양의 전통 예법들과도 별 차이가 없다.

* 425d ‘법제화할 것이 없다.’ : 여기 나오는 사안들 대부분은 플라톤의 <법률>에서 다시 언급된다. 계약에 대한 것은 913a 이하와 920d 이하, 폭언에 대한 것은 934e 이하, 폭행에 대한 것은 879b 이하, 서면 고소에 대한 것은 949c 이하, 재판관의 선임에 대한 것은 767a 이하와 956b 이하, 도시감독관과 시장감독관에 대한 것은 763c 이하 참고. 한편 항구세와 관련해서는 <법률>에서 수출품이나 수입품에는 세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다.(847b) <국가>에서는 이러한 세칙은 법제화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가 <법률>에 가서 법제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법률>의 국가가 <국가>의 국가와 비교하여 실천적 현실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나라의 본을 다루고 <법률>이 나라의 실물을 다루는 한 그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 426c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테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 : ‘흔들면’으로 옮긴 κινεῖν은 의미 상 비판을 물론 체제를 변동하려는 시도까지 포함한다. 이 나라들은 426b에서 비유한 대로 시민들의 근본적인 개혁 요구와 비판을 거부하고 오히려 과도한 탄압을 일삼는 정치체제들을 가리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목도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과 30인 과두정 그리고 시칠리아의 참주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정체들 모두 반대파는 물론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다. 아테네 민주정은 실정에 대한 개혁 없이 반대파에 과도하게 예민하여 소크라테스마저 반체제로 몰아 사형에 처했고 30인 과두정도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는 사람들조차 사형에 처했다. 제1권에 등장하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도 30인 참주들에 의해 처형 되었다.

* 426d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θεραπεύειν 의향과 열의를 지닌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 : 이 말은 잘못된 나라에서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갖는 만용에 가까운 권력욕과 그들의 섣부르고 무모한 태도를 의미한다. ‘너그러움’의 원어 εὐχέρεια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좋은 의미로는 대범함의 의미도 가지지만 여기에서는 경계해야 할 일임에도 제 욕심에 못 이겨 섣불리 나서는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무모함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엄격해야 함에도 무작정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자들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 부분에서 아데이만토스와 주거니 받거니 그야말로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치자와 대중들의 잘못된 양태에 관해 물을 때마다 아데이만토스가 시종일관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음에도 마치 못 믿겠다는 듯이 힐난조로 계속 되물어 본다. 이것은 아데이만토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아 놓은 당대 아테네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분노를 아데이만토스를 상대로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드러내 보이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를 제자나 동료가 아니라 당대 아테네 지식인이자 시민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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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호자들의 임무로서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업무는 물론,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성원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임무 또한 절대 쉽지 않은 임무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임무 모두를 쉬운 임무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임무보다도 교육과 양육 관련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음이 여기서 밝혀진다.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큰 것 하나 정도가 아니라 충분한 것 하나로 표현할 정도이다.

*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375a-434c)을 크게 나누면 (I) 그 나라의 중추로서 수호자와 통치자들이 어떤 성향으로(375a-376c) 어떻게 교육되고(376c-412b) 임명되며(412b-415d) 어떤 생활방식(415d-421c)과 임무(421c-427c)가 부여되는지 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 등에 관한 주제가 먼저 다루어지고(375a-427c) (II) 그 후 그러한 기본 틀과 직무를 갖춘 나라가 어떻게 정의로운 나라일 수밖에 없는지 그 나라의 내적 특성과 덕목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427d-434c) 이 가운데 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를 다루는 부분(I)이 스테파누스 쪽 수 분량으로 총 42쪽 분량인데 흥미롭게도 이 가운데 교육이 차지하는 부분이 36쪽에 이른다. 게다가 <국가>의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6권과 7권에서도 변증술 등 보다 진전된 수준의 교육 과정이 근 40쪽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교육의 문제를 얼마나 중대한 과제로 여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플라톤 주석가들이 <국가>를 주제 구분상 정치론이라기보다는 교육론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 플라톤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이데아론을 떠올릴 것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최상의 위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이 기본적으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데아는 존재론의 위계상 최상의 가치이자 목표일 수는 있어도 정작 플라톤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그러한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인간 능력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다. 플라톤 철학의 주제가 내용상 영혼론이자 교육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인간적 삶의 본질인 양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비참성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우주적 본성에 의지하여 반드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우주적 본성은 교육을 통해 고양된 영혼으로 각성되면서 비로소 삶의 근원적 비참성을 극복하는 적극적 능력으로 현전한다. 사회 또한 고양된 영혼의 지배를 관철하는 정치를 통해 해체의 위기에서 벗어나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로 진보한다.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정치 체제가 일단 출발을 잘 하게 되면 교육과 양육이 보존되고 그것이 보존되면 좋은 본성을 낳고 그것은 또 자손의 출산도 낫게 만들어 선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의 전망과 관련하여 플라톤 자신 나름의 확신과 낙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확신과 낙관 역시 교육과 양육이 견고하게 잘 자리 잡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만큼 교육과 양육의 제도적 정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교육과 양육의 방책을 온전하게 수립하고 잘 보전하는 것은 수호자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은 그 보전의 과정에서 교육과 양육을 그르치는 것이 있다면 마치 돌다리도 두드려가듯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일상에서 시민들이 부르는 노래 방식의 변화마저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초가 되어 노래도 바뀌고 그에 따라 시가에도 변화가 생기면 시가 교육 자체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실 노래 방식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노래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변화는 물론 결국에 가면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를 감시하는 초소를 세우겠다는 언급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자행된 문화 검열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과장과 기우의 수준을 넘어 가히 신경증적 반응으로까지 비추어진다. 요즘 시절로 보자면 어떤 인기 가수가 아리랑 정도의 국민가요를 나름 편곡해서 다르게 부르는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꼴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음악 또는 대중문화의 변화 및 발전에 대한 플라톤의 신경증적 거부 의식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 자신의 수구적 경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비난한다.

* 그러나 시가 교육을 다룬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에서 시가가 차지하는 위상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이러한 의구심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시가 교육을 다루면서(376e-403c) 시가 즉 mousikē가 단순히 음악이나 특정 문화 양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뮤즈(mousa) 여신이 관장하는 제반 지적, 예술적 행위 및 성과 일반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리스인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신화적 세계관 그리고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것임을 확인한 바 있다. 문맥에 따라 mousikē를 학예(學藝)라고 번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시가 교육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와 공동체가 추구해온 가치관과 세계관은 물론 일상의 생활 방식의 요체들을 전수하고 준법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일종의 시민 교육이자 종교 교육인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시민 모두에게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부여되며 이후에도 연극과 예술 공연을 비롯한 정례적인 행사들을 통해 늘 마음에 되새기고 학습해야 할 이른바 평생 교육의 과제로 주어진다. 사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노래는 시가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노래 방식은 또 노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그 노래 방식의 변화에조차 민감함은 시가 자체가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노래는 아테네 시민들의 일상 영역인 연극 공연 등을 통해 감각에 직접적이고도 빈번하게 작용하는 것인 만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여파가 작지 않았을 것이다. 노래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여파에 대한 우려는 <법률> 700c-701d에서도 구체적으로 다시 피력된다. 노래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개인의 성품과 행실에도 영향을 미치고 법률과 정치 체제까지 뒤집어 버린다는 것이다.

* 아무려나 시가에 대해 플라톤이 왜 그토록 예민하게 여기는지 일정 부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 체제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면모로 비추어진다. 물론 보수주의 자체가 비난거리는 아니다. 플라톤 생각대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체제가 있다면 그것은 굳이 바꿀 필요도 없고 굳이 새로운 것을 찾을 이유도 없다. 그것이 그 자체로 늘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무리 걱정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변화는 작건 크건 늘 일어나고 변화의 욕구가 크게 쌓이면 어떤 경우 정반대의 방향으로 급격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 만큼 반대로 우리는 플라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만약 플라톤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정의로운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하거나 또 그래서 결국 부정의한 정치 체제로 바뀌었을 경우 플라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도 있다. 이곳에서(426c)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민들이 잘못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의 질서와 체제를 바꾸려 하는 경우 사형에 처하겠다고 포고하는 나라들을 단호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플라톤 역시 최소한,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는 경우 시민들이 그것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필연지사이자 마땅한 일이며 권력자들은 그것을 폭압적인 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편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황이 나온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온의 친척들에게 잘못된 권력자들에 대해 용기 있게 쓴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승 소크라테스마저 죽음에 몰아넣은 자들의 폭력성과 어리석음이 떠올랐을까? 다만 그랬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거나 아예 공염불일 게 분명하다면 조언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편지> 330d-331d 참고) 사실 <국가>는 이런 나라들에 대해 철저히 절망한 나머지 그러한 나라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구상 하에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은 백지상태에서 이상적이기 만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타락해버린 돼지들의 나라를 정화하는 변혁의 차원에서 나라를 세우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임무에 관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수호자들이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까지 법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세세한 관습까지 법제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425b)이다. 왜냐하면, 닮은 것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므로 굳이 그에 따른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하자면, 뛰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경우 법제화 이전에 잘못될 만한 일을 쉽게 간파하여 미연에 방지할 것이기 때문에 법제화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고, 또 반대로 어리석은 자가 나라를 잘못 다스릴 경우에는 아무리 법제화를 해 봐야 자신은 물론 누구도 온갖 법 기술을 동원하여 탈법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것이다. 전자는 그야말로 입법의 궁극 목적은 법이 필요 없게 하는 것이라는 금언에 일치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후자는 아무리 법률이 세분되어도 입법자가 무도한 자인 한 또 다른 법 제정과 법 기술만 양산할 뿐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라 할 것이다. 이른바 전자의 나라는 그야말로 치자의 뛰어난 능력에 기초한 이상적인 덕치의 나라이고, 후자의 나라는 참주와 같은 치자의 폭압적 강제력에 기초한 극단적인 법치의 나라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427a) 진정한 입법가는 어떤 것을 법제화하고 어떤 것은 관행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지 잘 분별해낼 수 있으므로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치자들은 마치 온갖 것을 법으로 다 다스릴 수 있다고 믿고 온갖 세세한 것까지 다 법으로 제정하고 또 수정하는 것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

* 이곳에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는 어리석은 나라의 여러 사례는 제8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타락한 민주정과 참주정의 나라의 양태들과도 일치된다는 점에서 이곳 또한 그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법 제정의 원칙으로서 나라의 최대선과 최대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462a)이 없이 무작정 법률에만 의지하는 어리석은 치자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의 힐난은 그야말로 적나라하고 단호하다.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 이들 모두는 아예 근본을 치유할 능력(덕과 원칙에 기초한 통치 능력)도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아 마치 휘드라의 목을 자르듯이 그저 끝없이 그때그때 즉물적인 대증치료를 반복하면서(법률 제정과 수정의 악순환) 자신의 병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여기서 반체제 인사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을 하면서도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능란하고 그런 역할에 열의를 가진 정치가들과 그런 자들을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는 대중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무도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 그리고 그에 환호하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참주와 선동정치가들은 진실과 자신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자들이어서 대중들의 갈채에 눈이 멀어 마치 자기들 생각과 의견이 옳은 양 맹목적인 확신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홀려 갈채를 보내는 대중들 또한 진실과 자신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이들의 양태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적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반정부 민주화 세력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른바 3S 정책(Sports, Screen, Sex 정책 : 프로 스포츠의 출범, 컬러 티브이의 확대. 통금해제, 심야 주점과 성매매, 성인 영화와 황색 잡지의 보급, 올림픽의 유치 등)을 수립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최대한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유도하였고 하물며 국민 위무책이라는 명분으로 5·18 광주 학살 희생자 1주기 즈음해 연예인을 총동원하여 국풍 81이라는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비감하게도 어처구니없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플라톤의 말마따나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아무 통치 능력도 없는 자가 기득권자들의 부추김에 눈이 돌아 권력을 잡은 후 강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는 한없이 아첨하면서 반대파들과 약자들에 대해서는 갖은 공권력과 법적 수단을 동원해 탄압하는 작태를 우리는 지난 1년 내내 목도하고 있다.

* 그런데 이곳 정의로운 나라의 법제화 수준은 위의 대비 차원에서 언급한 극단적인 두 나라 중 순수할 정도의 덕치의 나라와 비교하여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 수호자들은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때마다 법제화를 시도하고 있는 데다(380c, 383c, 403b, 409e, 410a, 417b) 나중에 가서도(484b-c) 법률 및 관행들의 수호를 아예 수호자들의 임명 조건으로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실물을 염두에 두고 본(本)으로서 그려진 최선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상 국가는 올바른 정치에 의해 정의로운 삶이 담보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인치와 법치가 균형을 이루되 가능한 한, 법제화를 최소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반대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다스려지는 참주정이나 민주정의 국가는 권력가들이나 시민이나 가릴 것 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다툼을 일삼는다는 점에서 나날이 법적 강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법률도 더욱 세분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다른 정체의 나라 간 차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근대 이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들을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수차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정치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 본성이나 욕망구조의 근원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정치적 구상마다 그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나 욕망구조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르고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어떤 개인도 혼자 자족(autokratia)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근본 전제로 두고 출발한다. 그러므로 자족을 이루기 위해서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서로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아 서로 분업적으로 협동하고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나라의 기원이며 이러한 나라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며 자족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다. 즉 정치가의 기본 역할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협동적 공동체를 수호하고 유지 보전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어떤 사회적 역할이 특별하거나 다른 것에 우월하지 않다. 그 역할들 모두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정해지고 그에 따라 추구하고 좋아하는 가치들 또한 고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자에 대한 질투나 경쟁 없이 자기 소질에 따라 분업적인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나라의 관리 역할을 맡는 통치자 또한 본성상 물욕이 없는데다 제도적으로도 사적 소유가 아예 금지되어 있어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 또한 자연스럽다. 요컨대 나라 구성원들은 서로 욕망구조가 이질적이고 다양함에 따라 상호 의존적 협동적 사회관계를 통해 자족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의 역할은 시민들 각자 자신의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잘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보살핌(epimeleia)의 영역으로 규정된다.

*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는 위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뿐만이 아니라 부정의한 현실 국가들까지 모두 살피고 들여다본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할 경우 어떠한 과정을 밟는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이상 국가는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는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구조가 변질되고 권력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치를 불신하고 마침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된다. 각자도생과 배타적 의심과 경쟁이 마치 자연의 본성에서 기원한 것인 양 당연한 일상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치 체제의 변동과 관련한 이러한 플라톤의 분석은 역사적 현실, 특히 근대 이후 사회적 현실을 설명하는데도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마침내 신자유주의의 지배로 전일화된 현대 사회는 무한 경쟁 속에서 국가 간 계층 간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 수준으로 심화시키고 있고 그에 따라 가난과 불평등, 부당한 차별을 불가피한 사회적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자는 강자대로 약자는 약자대로 무한결핍에 시달리면서 정치의 목적으로서 자족적 삶은 단지 개인의 심리적 자기만족이나 종교적 믿음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정치·사회적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이미 나라는 수없이 많은 나라와 개인들로 분열되고 그러한 개인들의 내적 영혼까지 분열된 것이다.

* 사실 플라톤도 비록 이상 국가를 가장 이상적 정체로 내세우기는 했으나 욕망이 이기적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다수결이 최선이며 그에 따라 그러한 상태에서는 민주정이 최선의 정치적 선택임을 인정하고 있다.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붕괴시키고 그 대신 급진적 과두정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던 30인 참주들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처럼 보였다고 플라톤이 말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구성원들의 욕망구조가 우주적 자연의 본성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바뀌기 전에는 그 어떤 종류의 제도적 변혁도 성공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어디에서 주어질까? 단순히 이상 국가만을 들여다보면 그 길은 하염없이 멀고 방책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 8권에서 탁월하게 진단하고 성찰한 이상 국가의 타락 과정과 <법률>의 방책들을 함께 들여다보면 그 회복의 단서가 발견될 수 있다. 앞으로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은 정치 권력의 부패와 그로 인한 빈부의 양극화의 근원을 시종일관 교육의 부재에 따른 욕망구조의 왜곡, 즉 본성의 물질적 획일화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출발 또한 근본적으로 획일화된 욕망구조를 바꾸는 데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또한 그러한 변혁을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이 변혁의 주체로 내세운 철학자 왕은 정치철학적으로 다만 권력과 지성의 결합에 기초한 정치의 지성화의 다른 말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기획을 우리의 변혁 열망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정치가와 시민들의 지적 각성에 기초한 교육체제의 개혁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욕망구조와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을 향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중간 목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빈부의 격차 없이 모두가 자신들 고유의 욕망을 구현하면서 행복하게 공존하는 하나의 나라가 최종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 모두 각성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와 조직적인 저항 그리고 진지하고도 뜨거운 연대가 없으면 어떠한 진전도 담보할 수 없다.

*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을 만드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들, 영웅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 또한 적성과 소질에 따른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이고 수호자들이 적극적으로 챙겨야 할 고유 업무는 아니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은 일단 마무리되고 어떻게 그런 나라가 왜 정의로운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인지 그 나라가 포함하고 있는 덕목들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에 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㊼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419a- 427c)

 

4권 [419b-421c]

* 소크라테스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언급을 마치자 아데이만토스가 끼어들어 누군가가 그런 생활 방식이 수호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뭐라고 변론할ἀπολογήσῃ 것인가를 묻는다. 그들은 나라가 자신의 것인데 이 나라 덕택에 누리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처럼 땅과 집, 살림살이, 금화 은화도 소유하지 못하고 신들에게 제물도 못 드리고 손님 대접도 못해 마치 용병으로 고용된 보조자들ἐπίκουροι μισθωτοὶ같다는 것이다.(419a)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한술 더 떠 수호자들은 끼니 정도만 제공되고 여행도 못하며 애첩ἑταίραa들에게 선물도 못 주며 돈도 제대로 못 쓴다고 말하면서 그런 고발 거리로 말하자면 그밖에도 허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 위의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ι해도 전혀 놀랄θαυμαστός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하면서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 취지가 우리 안의 어떤 한 집단ἔθνος이 특별히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나라 전체 ὅλη ἡ πόλις가 최대한 행복해지는 데 있음을 환기 시킨다.(420a-b)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고 가장 나쁘게 세워진 나라에서는 부정의가 가장 잘 발견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가 오랫동안 탐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판정을 내릴 수 있음이 재확인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은 소수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빚어내는 중이고 그 반대되는 나라도 이어서 살펴볼 것이라 말한다.(420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앞에서와 같은 고발 거리는 마치 생명체ζῷον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눈ὀφθαλμός을 검정으로 칠했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각 부분에 적합한 것들τὰ προσήκοντα을 배당해서 전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요컨대 그런 비난들은 수호자에게 부적합한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을 수호자들에게 부여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420c-d) 우리도 농부γεωργός들에게 금장식을 두르고 즐거움 삼아 땅을 갈게 하거나 도공κεραμεύς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며 진수성찬을 즐기면서 만들고 싶은 만큼만 도자기를 만들 줄 알지만(420d) 그러한 경우 농부는 농부가 아니고 도공은 도공이 아니듯 나라 구성원들 그 누구도 제 역할σχῆμα을 못한다.(420e)

*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구두 수선공이 아니면서 그런 체하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지만, 수호자들인 체하는 사람들의 경우라면 그들은 나라 전체를 철저히 파괴한다. 나라를 잘 경영οἰκεῖν하고 행복하게 할 기회 역시 수호자들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421a)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나라에 해를 가장 안 끼치는 진정한 수호자들φύλακας ὡς ἀληθῶς을 만들고 있음에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나라가 아닌 다른 걸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을 임명할 때는 수호자들 사이가 아니라 나라 전체에 행복이 생길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ἀναγκαστέον 설득해야πειστέον 한다.(421b) 다른 모든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히면 그때 가서 각 집단이 자연적 성향 ἡ φύσις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놔두어도 될지 살펴봐야 한다.(4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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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파누스 쪽수가 419a에서 420a로 건너뛴 것은 스테파누스 플라톤 전집 원본 체제로 419쪽 b-e부분은 4권과 관련한 주석 등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본문은 다음 쪽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쪽수의 건너뜀은 권이 달라질 때마다 나타난다.

* 애첩ἑταίραa(420a) : 뷔데판 불어 역본에서는 ἑταίρα를 여행 동반자로 번역하고 주석에다 부유한 아테네인들이 여행 중에 애첩을 동반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 419a에서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이 가리키는 대상을 이상 국가 내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권력자들로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있다.(J. Adam 등) 물론 이상국가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테이만토스가 그냥 당대 아테네 부유층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제1권에서 아테네 거류 외인이자 부유층 노인 케팔로스는 손님도 대접하고 집안에 제단도 갖추고 제물도 바칠 정도로 풍족하다.

*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τὸν αὐτὸν οἶμον πορευόμενοι(420a)에서 같은 노선이란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 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노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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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권은 사유재산 금지를 비롯한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제5권에서도 4권 말미에 제기된 소크라테스의 과격한 제안들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다. 제4권 말미에 제기된 제안들이 남녀평등 및 처자 공유 등 훨씬 과격한 제안들임을 고려하면 제4권의 서두 역시 제5권 서두에서 본격적으로 제시될 의구심과 반론들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다.

* 아데이만토스의 의구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의구심들과 달리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하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며 나라를 세우는 취지는 어떤 한 집단이 아닌 나라 전체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의구심에 대한 변론 대신 그와 정반대의 결론부터 내놓는다. 다만 변론의 단서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 살펴온 같은 노선을 걸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노선이 다름 아니라 애초 논의의 출발점이 그랬듯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은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과 달리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선임을 환기시킨다. 그에 따라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고찰도 이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420c)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에 가서 가장 부정의하고 불행한 나라와 개인들의 경우를 끌어들여 실제 현실에서 우리들이 부딪치는 현실적 정의와 행복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 검토하고 그것을 토대로 최종적인 판정을 내린다.

* 수호자들이 남들 보기에 가혹한 생활 여건 속에서도 왜 행복한 사람들인지 그리고 수호자들은 왜 나라를 지키는 힘든 임무들을 기꺼이 감당해야 하고 또 감당하는지는 <국가>의 중요한 주제를 형성하면서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논의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예비적 서론의 성격을 갖는 이 부분에서도 비유를 통해서나마 그 기본 원칙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즉 인간은 생명체로서 여러 신체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존재이다. 그리고 그 신체 기관들은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을 가진다. 각기 고유하고도 다른 기능들이 있다 함은 각기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걸맞은 고유한 특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고유성과 무관한 어떤 것을 그저 남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에 획일적으로 적용할 경우 오히려 그 고유성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나라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개인들은 태어날 때 각기 서로 다른 천성과 소질을 갖고 태어나므로 사람들 모두 각기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정의롭고 좋은 나라가 되려면 구성원들 모두가 행복해야 하므로 각기 자신의 천성과 소질에 맞는 역할이 부여되어야 하고 그 역할을 보다 잘 해낼 수 있도록 나라는 그들에게 그에 걸맞은 교육과 양육을 끊임없이 베풀어야 하고 그러한 역할의 부여와 교육과 양육의 과정들이 과연 적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천성 또한 가능성이지 필연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요컨대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태생적인 요인과 그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욕망의 구조가 서로 상이하다. 어떤 이들은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나라 지키는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뭔가를 만들기를 좋아하며 어떤 이들은 장사를 좋아한다. 사실 이러한 플라톤의 본성론은 사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 그리 낯선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태생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오늘날 획일적인 인간관이 훨씬 낯설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적성과 소질보다는 부와 출세 욕망에 기울도록 순치되면서 오늘날 인간의 욕망은 이기적인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마치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인 양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한 시대의 사회적 변화가 초래한 획일화된 욕망을 마치 태생적인 본성인 양 고착시킨 근대인들과 다르게 아테네의 물질적 이기주의를 다만 당대의 사회적 격변이 초래한 자연적 본성의 왜곡과 타락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전복하는 사회적 변혁과 일관된 교육을 통해 인간 본래의 자연적 본성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획일적인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며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고 갈등하는 사회적 현실에 저항하며 그와 전혀 다른 우주적 자연에 걸맞은 정치 사회적 변혁 즉 태생적으로 서로 다른 욕망들의 조화와 공존이 관철되는 사회적 변혁을 꿈꾸었고 그에 따른 기본 원칙과 실천적 전략으로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 그러나 어쨌거나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를 보다 완전하게 뒷받침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논의 노선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런데 미리 유념해두어야 할 것은 종국에 가서 정의와 행복이 일치하는 나라와 개인이 확립되고 논증되었다고 하더라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서 확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472c-d) 즉 그러한 정의로운 나라의 구현이 수호자들의 목표로 설정되어도 본이 반드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구현 능력으로서 영혼의 수준이 늘 변수로 개입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완벽한 수준의 교육이 담보되지 않는 한, 수호자들이 실제 현실에서 자기들의 책무를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수행하기를 힘들어하고 언제든지 그것을 거부하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플라톤이 수호자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로 하여 자신들의 일에 대해 가능한 한 최고의 장인(dēmiourgos)들일 수 있도록 강제하고 설득해야 한다.’(421c)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제와 설득은 자발성의 한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되 그 자체로는 대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두 가지가 함께 섞여 있다. 교육과 훈련이 최상의 단계로 이루어져 최고의 장인이 되면 거의 자발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늘 교육과 훈련의 방향과 반대로 될 가능성이 늘 함께 있다. 강제는 나쁘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이고 설득은 더 좋게 될 가능성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함께 공존한다. 이렇듯 플라톤에게 나라와 개인에 있어 지적 훈련은 존재론적으로 늘 가변적인 가능성의 영역으로서 그 자체로 긴장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모두 다 함께 성장하고 훌륭하게 기반이 잡혀도 각 집단이 과연 자연적 성향에 맞는 행복에 참여하는지 늘 지켜보아야 한다.(421c) 이점에서도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존재론 그리고 교육론은 하나로 만난다.

 

[421c-423d]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문제 제기에 답한 후 그 문제와 형제가 되는 문제를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후 다른 장인들을 망치고 나쁘게 만드는 것들로서 부πλοῦτος와 가난πενία을 제시한다.(421d) 왜냐하면 부는 장인들로 하여 기술에 관심을 덜 기울이게 하여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들고, 가난은 기술에 필요한 장비나 다른 어떤 것을 갖출 수가 없게 하여 일도 더 형편없게πονηρός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나 그가 가르치는 다른 사람들을 더 나쁜 장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421e) 즉 가난과 부는 기술의 결과물τά ἔργα은 물론 그 자신도 더 나빠지게χείρων 만든다. 결국 수호자들 몰래 나라로 기어서 들어가지 않도록 어떻게든 지켜야 할 것들 즉 부와 가난이 찾아진 셈이다. 부는 사치τρυφή와 게으름ἀργία과 변혁νεωτερισμός을 불러일으키고 가난은 변혁은 물론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기량저하κακουργία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422a)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나라가 재물χρήματα을 갖지 않고 크고 부유한 나라를 상대로 어떻게 전쟁을 치를 수 있는지를 묻는다.(422b)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 하나를 상대로는 더 어렵지만, 두 나라를 상대로는 더 쉬울 것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다시 그 말의 의미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은 전쟁의 선수ἀθλητής로서 가장 훌륭하게 훈련된 한 명의 권투선수πύκτης가 권투를 모르는 부유하고 살찐 두 명을 이길 수 있듯이 아무리 수가 더 많다고 하더라고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한다.(422c) 게다가 설사 부자들이 권투기술에 대한 앎ἐπιστήμῃ과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 수호자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전투 기술은 갖고 있지 못하므로 수호자들은 자신들보다 두세 배 많은 사람과도 쉽게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422c-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두 나라 가운데 한 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이 나라에서는 소유가 금지되어 소용이 없는 금화와 은화를 주는 조건으로 연합 전쟁을 제안할 경우 그 나라는 다부지고 날렵한 개들과 싸우기보다 개들과 한편이 되어 허약한 양떼와 싸우기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422d)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게 해서 만약 다른 나라들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된다면 그로 인해 부유하지 않은 나라가 위험에 처하게 되진 않을까 재차 의문을 표한다.(422d)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나라도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니 속 편한 사람이라고 힐난하고 그런 나라들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 말처럼 각기 ‘수많은 나라들’πάμπολλαι이지 ‘나라’πόλις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나라들은 어떤 경우이든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나라 즉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를 가지고 있고(423e) 이 두 나라 각각 안에도 아주 많은 나라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들을 하나μία로 보지 말고 여럿으로 보고 대응하여 한쪽 편에 다른 편의 재물과 권력을 주거나 그 사람들 자체까지 주면 언제나 동맹군은 많이, 적은 적게 갖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으로 절제 있게 나라가 운영될 경우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 그 나라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며(423a) 이런 나라는 그리스 사람Ἕλλην들 사이에서도 이민족βάρβαρος들 사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한 가장 훌륭한 기준ὅρος을 제시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며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423b)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게 되게끔 수호하라고 임무πρόσταγμα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임무는 그들에게 쉬운 임무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쉽기로 말하면 앞서 말한 임무 즉 수호자들의 태생과 계층 이동과 관련한 임무(415b)가 그보다 훨씬 쉬운φαῦλος ἴσως 임무라고 말한 후 그 말의 취지가 다른 시민들도 ‘각자가 저마다 자신이 타고난 본성에 맞게 한 가지 일을 맡아야 한다.’πρὸς ὅ τις πέφυκεν, πρὸς τοῦτο ἕνα πρὸς ἓν ἕκαστον ἔργον δεῖ κομίζειν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다시 또 환기한다. 즉 시민들이 자기의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ἐπιτηδεύων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ἡ πόλις μία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423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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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혁νεωτερισμός(422a)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대한 급진적 변혁의 시도(to attempt anything new, make a violent change) 즉 혁명에 준하는 일종의 정치·사회적 변혁을 의미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부와 가난은 나라와 기술의 결과물은 물론 자기 자신도 나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 말은 부와 가난은 개인 차원에서도 영혼의 변화 그것도 변혁에 가까운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쳇말로 적도(適度) 이상의 부와 가난은 사람을 돌게 만든다.

*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422a)은 자유ελευθερία라는 말에 부정어 ἀν이 붙은 것으로 말 그대로 자유민답지 못함, 노예근성, 옹색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 권투의 비유(422c)는 이중적이다. 선수의 비유는 전문성과 비전문성을 대립시킨 것이고 기술의 비유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과 여러 사람의 통솔과 관련된 기술을 대립시킨 것이다.

*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οἱ προπολεμοῦντες이 천χίλιο명만 있더라도’(423a) 이 구절은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으나 이상국가에서 수호자 집단의 머릿수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적정 규모의 인구를 <법률>의 신생 국가 마그네시아의 인구( 총5040세대 즉 가족이나 노예를 포함해서 약 최소 3-4만명 정도)로 추산해도 수호자들의 수는 전체 인구에서 4%를 넘지 않는다. 참고로 당대 아테네의 인구는 25-3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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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국가>에서 수호자들의 임무를 단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수호자의 임무는 말 그대로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수호는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막는 것과 내부에서 생기는 내분이나 내란을 막는 것으로 나뉜다. 그런데 플라톤에게 이 두 가지 임무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단 하나 즉 나라의 분열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후자의 임무 즉 내분을 막으면 자연스럽게 외부로부터의 침입도 막을 수 있다. 분열은 나라를 수호하는 데 가장 나쁜 요인이다. 이것은 적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적군을 분열시키고 동맹군을 만드는 것이 나라 수호의 최선의 전략이 된다. 요컨대 나라를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그런데 나라를 하나로 만드는 것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가 다름 아닌 부와 가난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평화 시에 수호자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전술과 전략의 개발과 전투력의 증강 이전에 나라 안에서 부의 편중과 그로 인하여 생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적대적 대립을 막는 것 즉 부와 가난의 양극화를 막는 것이다.

* 수호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분열을 막는 것이고 그 분열의 근본 원인이 부와 가난이라 함은 뒤집어 말해 플라톤 역시 그의 경험과 인식 속에서 나라의 존망을 해치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 다름 아닌 경제적 모순이라는 사실을 이미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 생산 관계의 모순을 사회 변동의 근본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생각과 일정 부분 닿아 있다. 다만 플라톤은 그 모순을 미리 해소하려는 입장이고 마르크스는 그 모순을 역사 과정의 필연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정치체제 변동과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경제적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두 사람 간에 차이가 없다. 그만큼 플라톤에게도 경제적 문제는 정치의 지상과제였다.

* 다른 나라의 재물이 한 나라에 집결하였을 경우 그 부유한 나라를 적국으로 두었을 때 대처 방안도 결국 부와 가난의 문제가 답변의 관건을 구성한다. 한 마디로 플라톤은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가져다 부유해진 나라는 ‘한 나라’(mia polis)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유한 자들의 나라 또는 그 이상의 나라들로 분열된 ‘수많은 나라들’(panpollai)이므로 그 나라 역시 분열책에 의해 제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히려 절제 있게 운영되는 나라야 말로 비록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이 천명만 있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하나인 나라이다.(423a)

* 여기서 다른 나라의 재물을 갖다가 부유해진 나라는 다름 아닌 당대 제국주의 아테네를 가리킬 것이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단합하여 부유한 나라 페르시아를 물리쳤지만, 그 후 아테네 동맹이란 이름으로 다른 폴리스들의 재물을 모아 강대한 제국으로서 부를 누렸다. 그러나 아테네는 같은 그리스 민족인 스파르타와 분열하여 오랜 기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빈부의 양극화가 초래한 내분에 시달리면서 결국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다른 나라를 상대로 싸울 때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대비책은 일종의 두 나라 사이를 분열시키는 대책으로 한 나라를 금과 은으로 유인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복잡한 국제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한 나라의 안보 관련 전략치고는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나라의 안보를 담보하는 가장 큰 방책의 하나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고 그 동맹 여부를 결정하는 큰 요소가 경제적 이익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전략의 대원칙에서는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상 국가에서 동맹을 위한 경제적 유인책으로서 금과 은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금과 은이 이상 국가에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수호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소용 가치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상 국가에서 통치자나 개인 모두 금과 은의 소유가 금지될지언정 이상 국가 또한 국유재산으로서 금과 은의 축적을 중시하는 나라 즉 국부까지 소홀히 하지는 않는 나라라 할 것이다.

* 그러함에도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에 대한 플라톤의 시선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일단 강대하고 부유한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가 아니라 부자의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어 있고 그 두 개의 나라는 또 더 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부유하면서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기본 관점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를테면 오늘날 북구 유럽 등 복지 국가들은 부유하면서도 나름 안정적인 통합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이 왜 그런 견해를 갖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플라톤 견해의 배경에는 인간 본성과 욕망구조의 변화와 관련한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입장이 자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인간 본성론은 수차 언급했지만, 태생적으로 다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소질과 욕망 또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목표는 구성원들로 하여 그 다양한 소질과 욕망에 따라 역할을 수행케 하고 그에 따른 자신만의 고유한 성취와 행복감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본래의 자연적 욕망구조가 현실 국가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타락되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그 타락의 과정을 쉽게 요약하자면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어 이기적 물질적 욕망에 물 들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부의 축적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부의 부당한 착취와 편중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애초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갖고 서로 공존하던 사람들마저 각자도생하게 되고 결국 모든 사람의 욕망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왜곡되고 획일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욕망으로 서로 다른 가치를 성취하며 각기 고유한 행복감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하면서 권력자들에 대한 의심은 물론 이웃들까지 부의 획득을 위한 경쟁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국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조화와 공존 대신 구성원들 모두에 대한 구성원들 모두의 경쟁적 싸움과 배타적 의심의 체제로서 민주정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민주정 하에서 이기적 경쟁과 불신 그로 인한 누명과 소송이 일상화되면서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 부익부 빈익빈이 초래되고, 그에 따른 민중들의 변혁 욕구와 선동정치가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참혹한 참주정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분석의 배경에는 그가 겪은 당대 아테네 제국주의의 폐해가 자리 잡고 있지만 프롬(E. Fromm)도 시사하고 있듯이 오늘날 현대 파시즘의 등장 배경과 관련해서도 탁월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사적 현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형식 민주주의가 찰떡같이 결탁하여 견고하게 똬리를 튼 이래 나라와 개인들 모두 부의 축적을 지상의 가치인 양 목매고 있고 그 결과 나라들 사이는 물론, 한 나라 안에서도 극단적인 수준의 빈부 양극화가 이미 고착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북구의 복지국가마저 강대국들의 위협에 둘러싸여 분배보다는 총량적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고 효율 지상주의와 거대 자본이 결합한 정보 산업의 급속한 발달은 그에 비례하여 기존의 국가 간 개인 간 양극화의 골을 가히 불가해의 수준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부유한 나라는 있어도 분열되지 않은 나라는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면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빈부 양극화 문제를 플라톤은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 다시 말해 이상 국가의 수호자들은 자신들의 핵심 임무인 부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어떤 구체적인 임무들을 수행해야 할까? 우선 소크라테스는 분열되지 않은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영토와 관련하여 매우 절제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를 키우더라도 하나일 수 있는 선까지만 키워야 하고 이에 따라 수호자들에게도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작은 나라 또는 큰 나라로 여겨지지도 않고 다만 하나이면서도 충분한 나라가 되도록 수호하라고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423b) 요컨대 아테네 제국이 수행했던 패권주의적 침략 전쟁을 중지하고 부국강병의 책무는 나라의 방어와 시민의 안정적 삶에 충분할 정도만 목표로 삼아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나라를 어찌 나치 제국과 연관시킬 수 있을까?)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러한 제안 역시 오늘날 패권주의가 판치는 현실에서 보면 순진할 수밖에 없으나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이 그렇듯이 그것이 갖는 정치철학적 함의는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어 앞으로 정치적 변혁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추동하는 정치적 대의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 참고로 빈부 격차의 해결 방안과 관련하여 <국가>가 이러한 대원칙을 표방했다면 <법률>은 빈부의 격차를 막기 위한 이보다 훨씬 더 세부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크레테 원주민과 이주민으로 세워지는 새 나라는 기존에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 때문에 재산들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 시민들은 재산에 따라 4개 등급으로 구분되지만 최초 집과 토지는 공평하게 분배되며 재산의 경우 또한 비록 최하위 등급일지라도 최소한 가난함의 한계로 설정된 기준 이상의 기본 재산이 할당된다. 물론 이 등급은 재산의 변화에 따라 바뀌지만 아무리 부를 늘리거나 이미 최상위 등급으로 있다 해도 최하위 등급에게 부여된 기본 할당 재산의 4배를 넘게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행운에 의해 그 이상의 초과분을 획득했을 경우 초과분의 절반은 세금으로 나라에 바쳐야 하고 기타 세금은 모두 공적 장부에 등록된 소유 재산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부과된다.(<법률> 744c-745a)

* 이렇듯 오늘날 우연적 행운에 의해 발생한 이익 중 일부를 중과세 제도를 통해 우연적 불운에 의해 초래된 손실에 벌충해 주는 복지 제도 또한 플라톤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늘날 정례 수익이나 연봉에서 최하 등급과 최고 등급의 차이가 10배 정도도 아니고 100배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고 상류층 5%의 재산 총액이 나머지 계층 95% 사람들의 재산 총액과 맞먹는다는 것을 만약 플라톤이 안다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것이고 게다가 그러함에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기절까지도 했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과 가치를 재산으로 환산하는 반인권적 작태가 이미 일상화된 오늘날이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의 상여도 아니고 평균적인 급여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100배가 넘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평균적인 능력에서 100배 이상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그 또한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이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기득권적 권력과 자본의 억압구조 또한 무서울 정도로 견고하다.

*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임무보다는 비교적 쉬운 임무이지만 그래도 수호자들이 수행할 가장 중대한 임무는 앞서 말한 대로 구성원들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소질과 적성에 맞게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맡아 일하게 하여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사상은 공리주의와도 크게 다르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토대로 다다익선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소수자의 희생과 불행을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자기 욕망을 구현하고 구현한 만큼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이곳 플라톤의 말 그대로 ‘시민들이 자기 일 하나에 전념함으로써 각자가 여럿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온 나라가 여럿이 아니라 한 나라로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423c-d) 지장보살이 지옥에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극락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 결코 한 사람이라도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1261a17~1261b15에서 소크라테스가 여기에서 언급한 내용 즉 ‘나라의 하나 됨’에 주목하여 플라톤이 나라가 갖는 개별적 다수성(plēthos) 내지 다양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총화단결을 외치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으로는 타당하지만,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욕망과 소질을 가진 구성원들의 조화와 공존을 바탕으로 하나의 나라를 구축하려는 플라톤에 대한 비판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경험적으로 드러난 개별적 사회 현상들과 제도 및 체제에 크게 주목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해석들은 개인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을 토대로 나라 구성원 전체의 조화를 해명하려는 플라톤의 영혼의 정치학을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끝- (1-3-3 수호자들의 임무(423e- 427c) 계속)


 

박선 지음, 『카메라 소메티카』(갈무리, 2023) 서평 – 박소연 [철학자의 서재]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영화 이미지의 시대 – 『카메라 소메티카』 (갈무리, 2023) 서평

 

박소연(영화연구자, 수원대/성신여대 강사)

 

영화가 회화의 세계에 접속하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카메라 소메티카』의 분석 대상인 영화가 회화를 참조하는 방식은 조금 특별하다. 이 책은 분명 회화, 화가, 미술관 내/외부, 관람객을 소재로 한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만, 회화 작품이나 미술관을 단지 소재주의적 차원에서 주목하는 데서 그치거나, 영화와 회화의 상호 매체적 관계를 관습적인 방식으로 분석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세심하게 선별한 영화는 하나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회화 작품이나 이를 구성하는 회화 담론을 매개함으로써, 회화와 영화가 공존하는 접경지대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이고 정동적인 화학작용을 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화학작용이란 영화 속의 관람객, 그리고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주체의 인지적 경험을 말한다. 말하자면, 『카메라 소메티카』는 미술(관)의 관람성과 영화의 관객성을 중첩시킨 영화를 인지주의적인 차원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고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포스트 시네마 관객성이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아님을 강조한다. 뉴미디어 시대의 수용자가 신체와 감각을 통해 체험하고 전유하는 정동은 과거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사진 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적 잔여물과 일맥상통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관객의 신체를 경유해 감각하는, 이른바 “복제 이미지의 신체화로서 카메라 소메티카”(17)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저자의 이러한 개념은 동시대 맥락에 적용되거나 재고된, 바쟁, 벤야민, 바르트의 개념이나 논의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카메라 소메티카』의 구성을 살펴보자.

 

회화를 생동하게 하는 영화의 활인화

1장과 2장에서 다루는 <풍차의 십자가>(2011)와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회화가 생산하는 고정된 의미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영화 매체의 활인화 사례로서 등장한다. 브뤼헐의 <갈보리 가는 길>을 활인화 한 영화 <풍차의 십자가>는 회화 속 탈중심화된 인물들을 영화적 몽타주 형식으로 소개함으로써, 폭정의 희생양이 된 플랑드르 사람들의 역사적 현실을 드러내고, 관객이 일방적인 해석이 아닌 개인적인 해석을 가능케 만든다. 저자는 <풍차의 십자가>가 취한 형식적 시도가 회화 작품의 고정성과 폐쇄성을 해체하는 작업이며 이는 바쟁이 제기했던 “재현의 탈인본성(58)”을 구현하고, 나아가서는 완전 영화를 추구하는 사례임을 주장한다.

또 다른 활인화의 사례인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의 회화 속 여성 인물들에 셜리라는 이름과 일관된 정서를 부여하고, 회화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의 배경에 배치하여 관객을 디제시스 세계로 초대한다. 이 같은 방식은 셜리의 내적 정서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연동시키고, 개인과 역사의 교직 속에서 호퍼 그림을 지배하는 고독감을 궁극적으로 에로스적 생명력으로 재탄생시켜 관객과의 교감을 꾀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재매개를 통해 경험을 추체험하기

3장과 4장에서 다루는 <잊혀진 꿈의 동굴>(2013)과 <유메지>(1991)는 각각 동굴 벽화를 남긴 구석기 인류와 화가 유메지의 경험을 영화의 재매개를 통해 추체험하게 하는 영화다. 저자는 유물로서 쇼베 동굴 벽화를 포착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2013)을 분석하면서 이 영화가 기존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은 “동굴벽화를 재현하는 방식과 그 재현 방식의 인지적 효과”(124)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가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재매개하는 방식은 동굴을 찾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구석기 인류와 현대 인류의 유사성을 인지하게 하고, 나아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인 숭고까지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때, 관객은 영화가 재매개하는 벽화동굴 방문자의 이중 숭고 체험을 통해 쇼베 동굴 벽화를 수용하게 된다.

<유메지>(1991)는 화가 유메지가 자신의 창작활동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모습을 줄곧 담는다는 점에서 화가의 전기를 담는 관습적인 화가영화와 구별된다. 더욱 특기할 점은 스즈키 세이준은 유메지가 겪는 창작 불능의 고통을 “현재와 과거, 현실과 몽상, 회화와 영화의 이종적 이미지를 공존”(167)시킴으로써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간극의 공존 속에서 관객은 분산적으로 유메지의 상태를 지각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이 봉건 이데올로기와 서구 지향적 모방 의식 사이(166)”에서 방향성을 잃고 창작 불능에 빠진 예술가로서 유메지가 드러나게 된다.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

5장과 6장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새로운 관객성을 포착한 영화를 분석한다. <뮤지엄 아워스>는 관광지와 미술사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를 통해 지구화 시대의 근대성을 성찰하는 영화다. 특히 저자는 지구화를 근대성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고 벤야민이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 소요객의 이중적 정체성을 주인공 요한에게서 발견한다. 영화는 소요객이자 노동계급 도시인으로서의 요한을 통해 19세기 예술가 지식인과 구별되는, 근대성에 대한 시선과 자의식을 발견해낸다. 이는 “아우라가 대상에 귀속된 성질이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간 정서”(234)로 보는 탈근대적 관점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6장은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과 영국 내셔널 갤러리를 무대로 삼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 <프랑코포니아>와 <내셔널 갤러리>가 “미술관과 예술 담론의 다층성”(249)과 “초국적 공간에서 다변화된 관객의 시선”(281)을 드러내는 방식을 주목한다. <프랑코포니아>가 루브르 박물관을 구성하고 있는 창작자, 권력자, 민중의 관계망을 영화적인 중첩 서사로 가시화한다면,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 속 예술작품이 독자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기보다 “현재적이고 관계적인 양상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구성”(270)되는 풍경을 관찰하고, 제도로서 미술관이 예술성과 대중성 그 사이 어딘가를 지향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저자는 두 영화가 각각 미술관의 안과 밖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동시대의 관람객에 대한 해석은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대의 루브르 박물관은 예술품과 관람객의 거리감이 자아내는 아우라가 아니라 예술품과 관람객 사이 내밀한 접촉과 의식을 만나는 공간임을, 내셔널 갤러리는 미술관의 규율이 설명하지 못하는 관객의 “감각적이고 인지적인 교감”(275)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 소메티카』는 영화가 회화를 활인화하거나 재매개하는 관계 속에서 수용자와 내밀한 관계성을 추구하는 영화 매체의 이미지를 깊이있게 탐구한다. 시차와 논의의 층위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저자의 시도는 전통적인 영화 양식 내에서 인지주의적 접근을 통해 분산적이고 주관적이며 정동적인 포스트-시네마의 관객성에 대한 사유를 이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는 상대적으로 인지주의적 영화 연구가 미진한 국내의 상황으로 보건대 절대 작지 않은 성취다. 나아가, 영화 매체뿐만이 아니라 동시대 영상 매체를 향유하는 관객성을 사유하고 연구하는 데도 좋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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