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에 대한 논평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이다.1

 

박종성(건국대, 한철연 회원)

♦ 이 글은 『시대와 철학』 제33권 4호(2022년 겨울호, 12월 31일 발간)에도 기고글로 동시 게재합니다.

 

이 글은 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2에 대한 논평이다. 먼저 김우철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첫째, 『자본』에 적용된 변증법적 방법의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이 두 가지 문제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변증법적 모순과 형식 논리적 모순의 구별, 변증법과 유물론의 관계(‘중층적 모순’)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자본의 내적 논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본의 내적 논리 규명의 이론적 과제는 본질과 현상, 추상과 구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문제는 모순이라는 주제로 압축된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긍정적 이해 속에서 그것의 부정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모순의 인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우철 교수는 둘째, 『자본』의 서술에서 ‘논리적 모순’의 지위를 살펴본다. 맑스가 자본의 일반 정식, 즉 ‘화폐-상품-화폐’(좀 더 분명히 말하면 화폐’일 것이다. – 논평자)를 처음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자본의 모순규정을 주장한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마찬가지로 유통에서 발생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에서 발생해서는 안 된다.”

 

위 인용문은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 형식 논리학의 모순은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니다’ 혹은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 위 인용문은 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자본의 모순규정은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3으로 위 문장의 논리적 모순은 해소된다.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에 주목해야 한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이지만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이다. “노동력이 그 자체 상품이 되고 이 특수한 상품의 경우 자신의 교환가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용가치가 바로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힘이라는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노동력의 가치 크기는 자신이 사용되는 데서 창조되는 가치 크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에서 가치법칙(등가교환)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인 반면,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 곧 생산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가치이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현상적으로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의 구조이다. 즉 자본의 ‘논리적 모순’은 새로운 탐구로 이행하기 위한 문제 제기이다.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상호제약 관계이다. 그러니까 교환과정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없으며 또 사용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가치로 실현될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A’)와 가치(A”) 사이에는 상호제약적, 내적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용가치와 가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결국, 변증법적 모순은 형식논리의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A’와 A”의 내적 통일성은 동일성(A)으로 환원될 수 없고 단순히 상호 무관한 것들(A와 B)도 아니다. 그래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모순을 정식화한다.

 

“공속해야 할 내적 필연성과 상호무관한 자립적 존재는 이미 모순의 기초이다.”

 

그래서 자본의 모순은 궁극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상호종속적인 동시에 상호자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왜 노동의 이중성(사용가치, 가치)은 상품교환 사이에서 모순으로 정립되는 것인가?

김우철 교수는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셋째, ‘상품의 모순과 그 전개과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바로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이다. ‘가치’는 상품을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위선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으로 만든다. 그러나 “가치 대상성에는 한 조각의 자연 소재도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가치란 무엇인가? “노동생산물의 가치 관계는 노동생산물의 물리적 성질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서 그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는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상품가치 속에 표현되고 있는가? 구체적 유용 노동은 상이한 형태인 추상적 인간 노동(교환의 기초, 사회관계의 기초)을 매개로 해서만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다.

이제 모순의 실현과 해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용가치로부터 가치가 완전히 자립된 형태인 화폐는 자신의 고유한 기능(가치척도, 유통수단, 지불수단)에서 볼 때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위한 사용가치를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바로 화폐이다. 화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화폐는 그 자신 상품으로서 어느 누구의 사유 재산으로 될 수 있는 외적인 물체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으로 된다.”

따라서 자본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화폐-상품-화폐’에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상호공속성은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종속으로 의미가 바뀐다. 그래서 화폐는 “과정 전반을 포괄하는 주체”이자 자기 매개적 주체이며, 자신의 대립물을 자기 바깥에 갖지 않는 ‘절대자’이다. 이제 화폐는 한편으로 살아 있는 노동을 지배하는 가치, 곧 과거 노동이 자본가 속에서 인격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단순한 대상적 노동력, 곧 상품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하여 김우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의를 결론짓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오로지 자본의 통제와 주도 아래에서 발휘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자본의 내재적 생산력처럼 나타난다.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물신주의, 이것이 바로 자본이 이룩한 업적이다.”(209쪽).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일 것이다.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된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을 다시 전도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박종성 지음

가치가 삶의 목적인 이곳에서

사용가치가 삶의 목적인 그곳으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에서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해서만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에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으로

 

노동력의 가치가 사용가치를 종속하는 곳에서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서로 함께 하는 곳으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인간들의 관계라는 현실적 형태를 취하는 곳으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유통과정인 곳에서

구매를 위한 판매가 유통과정인 곳으로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에서

화폐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으로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곳에서

산 노동이 죽은 노동을 지배하는 곳으로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지배하는 곳에서

 

그렇지 않은 곳으로,

 

그곳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고(故) 김우철 교수(1960 ~ 2021.12.09)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시대와 철학]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정동훈(성공회대 대학원)

 

올해 하반기에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있다면 아마 ‘책임’이 아닐까 싶다. 이태원에서 발생한 대규모 참사와 함께 수 많은 말과 말 그리고 말들이 이어졌다. 그 중 압권은 ‘책임이 없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수도 한복판에서 수 백명이 넘는 국민들이 죽고 다쳤다. 사건 직후부터 충분히 대비할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책임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심지어 집권여당도 ‘책임은 없다’라고 말했다. 대형참사 앞에 무작정 책임이 없다고 우길 수는 없으니까 온갖 말들을 쏟아낸다. “지자체가 공식적으로 주최한 행사가 아니니까”, “외국의 문화를 즐기다가 죽은 것인데” 등등 사태의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말들로 부자연스러운 무책임을 빚어간다. 그들의 말은 너무 가볍다 아니 저열하다.

이 가벼움은 11월을 맞아 절정에 이른다. 11월 초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다녀온다. 귀국하는 대통령은 마중나온 행안부 장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출근길 문답에서 한 방송사의 기자가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과 행동을 했고 그것을 막으려고 설전을 일으킨 한 비서관은 ‘불미스러운 사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임을 했다. 이 모습이 보여주는 의미는 참으로 애석하다. 이태원 참사에 정치적 책임이 있는 장관의 어깨는 감싸주면서 언론통제를 하지 못한 비서관은 사임을 하는 모습은 왕조시대의 모습을 방불케한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시작된 지금의 시점까지 이러한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그들의 말은 더 저열해지고 있다.

또 한가지 가벼운 말은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 정부와 정치권의 본령이 아니던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사건보다 더 정치적이며 정치권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중요한 사안이 있을까? 특히 의회는 정쟁을 하는 곳이다. 정쟁을 통해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의회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행위의 정당성을 선출이라는 대단히 요란스러운 의식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다. 즉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은 정치와 정치인의 존재 목적을 부인하는 것과 진배없다. 집권세력이 그리고 선출직이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의의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정치의 수준이 얼마나 가벼운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벼움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일까? 정치인들이 가볍다고 저열하다고 비난하고 몇 글자 적으면 끝이 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 정치의 수준을 가볍고 무책임하게 만드는 저열한 언어들은 시작은 정치권이지만 결국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재생산 된다. 이 잔혹하고 허접한 언어들은 소위 시사평론가와 정치유튜버라는 사람들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면서 시민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그것이 선거나 여론조사 등을 통해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의 하향평준화에 기여한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이 글의 주된 소재가 집권세력에게 큰 책임이 있는 사안이라서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본질적으로 제 1야당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 가벼움과 저열함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가볍고 저열한 언어가 근본적으로 문제적인 지점은 죽은 사람은 항변할 수 없음에 있다. 항변할 수 존재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결국 살아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흘러가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면의 한계상 다 담을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비교해서 우리의 수준이 더 가볍고 저열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2년 12월 제3차 정기세미나 영상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2022.12.16.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세 번째 정기 세미나입니다.

(이번 세미나는 사정상 동영상이 아닌, 음성파일로 올립니다.)

이번 세미나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2016)의 ‘Ⅶ. 아시아 철학과 선험적 구성론’에서 ‘1. 주희朱熹와 쇼펜하우어’의 내용을 중심으로 저자 이규성의 程子와 주희에 대한 연구논문의 일부를 참조하여 정리한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합니다.

다음 세미나는 2023년 2월 16일(목) 16시 잠정 시행 예정으로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선생님의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세한 평론(가제: 쇼펜하우어로 본 이규성의 소통과 혼융의 철학)으로 진행합니다.

주    제 :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발표자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    시 : 2022년 12월 16일(금) 오후 4시~6시
장    소 : 서소문로 45 소재, 이병창 교수 ‘정치학교’ 연구강의실
방    식 : 대면+비대면 zoom 회의

♦ 동영상 출처 : https://youtu.be/mqXvRjLUvrg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현남숙(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신유물론, 생태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서양철학의 극복되어야 할 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베이컨의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이것이 시사하듯, 자연에 대한 투명한 인식과 그로부터 지배가 가능하다고 보는 관념은, 인류세라 불리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중심적이고 무모한 생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이 아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의 시간지평에서 보면, 베이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의 학문적 공과 중에 ‘과’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베이컨은 당대의 사유관행에 맞서 싸운 우상타파자이자 새로운 학문 방법론의 창안자인 점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손철성(이후 저자)의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관한 대중적 해설서이자 비평서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과 구별되는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의미한다(‘오르가논’이란 ‘도구, 특히 생각의 도구란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논리학 저작 전체에 붙여진 이름이다).

1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을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제시한 인물로 위치 지운다. 그는 베이컨을 근대를 기획한 인물로 명명하면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초입에 도달할 무렵인 16세기에 학문의 대혁신을 이룬 인물로 그려낸다. 대혁신의 요체는 자연을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인식의 방법을 창안하여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의 실제적 내용을 두 각도에서 소개한다. 하나는 지식의 진보를 가로막는 우상타파(종족의 한계, 개인적 편견, 언어의 오염, 기존철학의 방해)에 관한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해석과 지배를 가능케 할 정신의 도구로서의 참된 귀납법에 관한 내용이다. 베이컨은 개별공리로부터 단번에 일반화된 공리로 나아나는 일반적 귀납법과 달리, 경험의 재료를 모아 중간 공리들을 끌어내고 그것을 다시 개별 사례에 적용해 보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참된 귀납법을 제시했다.

3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이 자신과 다른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려준다. 그 중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베이컨 자신이 그려낸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소설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과학기술에 대한 베이컨의 지나친 낙관을 비판하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이 있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학문의 대혁신으로 만들어갈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우화를 제시한다. 한편,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베이컨의 이러한 구상이 갖는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처럼,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대한 쉽고도 신뢰할 만한 입문서 역할을 한다. 뿐더러, 근대 경험주의 계열의 철학자와 만날 수 있는 유의미한 통로로서의 역할도 한다. 특히, 베이컨의 학문적 공과를 균형 있게 풀어나간 점은 저자가 가진 철학적 내공이자 미덕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베이컨의 프로젝트,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여 자연의 우위에 두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식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생각은 대체로 비판받고 있다. 근래 팬데믹이나 기후위기에서 보듯, 자연은 인간의 생각만큼 잘 예측되거나 통제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관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생태적 부작용도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당대에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제시했듯, 오늘날 철학은 인류세에 요청되는 새로운 지식의 도구나 사유의 방향을 제시할 책무를 갖는다. 길을 잃었을 때 왔던 길을 되짚어가서 새 길을 찾듯, 베이컨의 철학을 성찰적으로 복기해 보아야 한다. 저자가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에, 이러한 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서평자 현남숙: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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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1월 월례발표회 영상 “더 좋은 것을 보고 인정하면서 더 나쁜 것을 따른다” -스피노자에게 아크라시아의 문제- [월례발표회·세미나]

11월 월례발표회는 9월부터 시작한 2인 토론자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11월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1월 월례발표회

주 제 : “더 좋은 것을 보고 인정하면서 더 나쁜 것을 따른다” – 스피노자에게 아크라시아의 문제 –

발표자 : 정선우(연세대학교)

토론자 : 이지영(이화여자대학교), 유민석(서울시립대학교)

일 시 : 2022년 11월 25일 오후 7시 – 9시 방 식 : zoom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RY_S9vM57vc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시대와 철학]

누가 각자도생을 하고 있나?

 

진보성(한철연 회원)

 

이 글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 <KNOU위클리>(https://weekly.knou.ac.kr/articles/view.do?artcUn=3461)에 동시 게재함을 알립니다.

요즘 뉴스 기사나 개인 블로그 글을 읽다 보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자주 본다. 자본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각자 살기를 도모하다’라는 뜻의 이 용어는 팍팍한 현실에 남보다 먼저 안정된 사회 주도층의 대열에 합류하겠다거나, 자칫 사회의 변방에서 처량하게 서식할 자신의 처지를 경계하는 지금 사람들의 군상과 사회의 분위기를 너무나 잘 반영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각자도생을 현대에 만들어진 신조어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실은 출전이 있는 꽤 오래된 말이다. 각자도생은 조선 시대에 국가적이고 공적인 위기 상황에서 종종 사용되곤 했다. 이 용어는 당시 국정의 책임자들 사이에서 발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 55권(선조 27년 9월 6일의 5번째 기사)에는 임진왜란 시기 평양 전투에서 패한 왜적이 퇴각하며 도성의 백성을 모두 죽인 일을 예로 들면서 ‘타지의 백성도 이를 미리 알게 하여 각자 살길을 도모할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이 보인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해야 했던 일차 대상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각자도생을 일컬은 말은 국가 내부의 위기사태에도 등장한다. 『순조실록』 12권(순조 9년 12월 4일의 1번째 기사)에서는 광주 목사 송지겸이 흉년의 실상을 상소하면서 “<백성들이> 지금 살던 마을을 떠나 각자 살기를 도모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폐허가 된 민중들 삶의 처참함을 묘사한다.

한편 각자도생은 ‘各自圖生’과 함께 ‘各自逃生’ 즉 ‘각자 달아나 살길을 찾는다’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역시 임진왜란 시기의 기록인 『선조실록』 32권(선조 25년 11월 17일의 2번째 기사)에는 국경 변방의 일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인 비변사가 “경기의 동쪽과 강원도 북쪽에는 통솔할 만한 장수가 없어 그곳 백성들이 각기 살길을 찾아 <난민이 되어> 산골짜기에 모여 있는데 남의 나라 땅 일과 같이 되어서 매우 미안하다”고 고했다는 글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각자 목숨을 보전하려 살기를 도모하는 것으로 묘사된 대상이 힘없는 백성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던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족들도 그러했다. 『인조실록』 17권(인조 5년 10월 4일의 4번째 기사)에는 “종실(宗室)은 모두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인데 난리를 당하자 임금(인조)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한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라며 위기 앞에서 무력했던 왕실 인사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조는 결국 피난에 임금을 호위하지 않았던 왕족들의 가볍지 않은 죄를 모두 사해주고 다시 국가의 녹봉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례를 살핀 것은 아니나 각자도생의 기록을 살짝 들춰본 뒷맛은 씁쓸함을 넘어 분노스럽다. 과거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측은한 감정을 느꼈거나 역사적 사건의 실상에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시국 동안 각자 거리 두기로 각자도생하던 사람들이 해방구로 몰려들었던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의 경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살기 위해, 희생자가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다시 ‘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던 현실과, 유가족들의 각자도생은 방관하며 자기 책임은 회피하려 들었던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개개인의 삶의 양태가 각자도생으로 나가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긴 한데, 사람들이 각자도생을 안 하면 안 되게끔 만드는 국정 책임자들의 각자도생은 어떻게(어찌) 두고 볼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더 도망할 곳도 더 도모할 거리도 이제는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현실이 조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문제라는 것.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가을 제63회 정기 학술대회(12월 3일) 알림

학사상구회 2022년 가을 제63회 정기 학술대회(12월 3일)

 

2022년 12월 3일 () 12:30 부터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 캠퍼스(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호암관에서

63회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가을 정기 학술 대회가 개최됩니다.

한국 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을 대주제로연구 영역의 확장과 성과의 축적이 기대되는 이번 학술 대회에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2022년 제63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가을 정기 학술대회

○주제: 한국 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주최: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후원: 한국연구재단

○장소: 인문사회과학캠퍼스(서울) 호암관 3층 50307호(세션1), 50308호(세션2)

○시간: 2022년 12월 3일(토) 오후 12시 30분

○프로그램(아래 포스터 참조)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 캠퍼스 호암관 오시는 길:

https://hakbu.skku.edu/hakbu/intro/location01.do (첨부파일 참조)

※셔틀버스 이용 안내:

https://www.skku.edu/skku/campus/support/welfare_12.do?mode=hView&srId=34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로 나오셔서 도보로 오시거나
좀더 편하게 오시려면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오셔서
셔틀버스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셔틀버스: 토요일 07:00∼19:00 운행, 교내 정류장명 “농구장”→호암관)

★지정 주차 구역: 600주년기념관 지하국제관 지하 (D구역)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재유 지음, 『스미스의 국부론 –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국부론』(1776)을 통해서 자신의 시대에 남아 있던 봉건제와 중상주의적 통제 정책을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시스템이 어떻게 생산력 증진을 가져오고 일반 시민들을 전반적으로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논증하고자 했다. 알다시피 『국부론』의 원제는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그런데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부제는 『인간 노동이 부를 낳는다』이다. 바로 이 점이 그동안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이해와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국부론』이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단초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자이기 이전에 『도덕감정론』(1759)의 저자였다. 스미스는 도덕적 판단의 원천을 ‘공감’이라 했다. 이재유는 이 지점을 중심으로 『스미스의 국부론』을 집필하였다.

 

이재유의 『스미스의 국부론』의 1장에서 애덤 스미스의 철학적 세계관을 조명하면서 공감의 원칙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시장자유주의와 복지주의의 인간관, 아울러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관을 살펴본다. 여기서 스미스의 인간관을 철학자 흄, 홉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등과 연관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스미스의 인간관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국부론』을 읽는다. 이재유는 2장을 마치면서 스미스 사상의 핵심은 “모든 부의 근원은 인간의 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이므로 노동자가 부를 만드는 주체라는 것이다. 3장 ‘철학의 이정표’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스미스의 친구였던 데이비드 흄의 『오성에 관하여』를 소개한다.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 이어지고, 존 로크의 『통치론』,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룬다.

 

이재유는 노동이 부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구성원 모두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재화를 만드는 노동이 타인 공감의 실천적 행위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스미스의 이기심은 흄의 ‘공감’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자기애이다. 나아가 『도덕감정론』의 “공평한 관찰자”는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연결시킨다. 이렇듯 스미스의 사상 속에는 철학적 토대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통해 “공감-공평한 관찰자-노동-보이지 않는 손”으로 정리하고 있다. 또한 루소의 사회계약은 스미스와 흄의 공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과 연결된다. 나아가 로크의 저항권은 애덤 스미스의 ‘독점 반대’와 흄의 제한된 공감을 넘어서는 공감의 확장과 연결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

더욱더 거세지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국부론』을 인용하며 이기성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스미스의 인간학에는 공감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노동가치설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하는 이들은 가난하다. 노동하지 않는 이들이 부자다. 이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국부론』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길일 것이다. 그것을 이재유는 ‘공감’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국부론』의 저자가 쓴 『도덕감정론』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덕감정론』의 저자가 쓴 『국부론』을 읽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부론』이란 책에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정신현상학』으로 『볼데마르』 읽기”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0월 월례발표회

이번 10월 월례발표회는 9월과 마찬가지로 두 명의 토론자가 참여합니다. 지난 발표와 마찬가지로 풍성한 발표회가 되었습니다. 1인 발표와 2인 토론(논평) 구도는 앞으로 한철연 월례발표회의 특장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월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주    제 : 『정신현상학』으로 『볼데마르』 읽기
발표자 : 남기호(연세대학교)
토론자 : 박정훈(서울대학교), 이병창(한철연)
일    시 : 2022년 10월 28일(금) 오후 6시 – 8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동영상출처: https://youtu.be/_MYdkvjb45I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나치게’ 유명하다. 한 번 읽어보라는 권유가 심드렁하게 여겨질 정도로. 더욱이 ‘세탁’이나 ‘교육’ 프랜차이즈의 이름에 작품명의 라임이 남아 있어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식상하기까지 하다. 고전치고는 내용도 짧고 쉽기에, 한 권 읽어냈다는 서푼짜리 정복감 외에 그다지 인상적인 독후감도 남지 않는다. 사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다가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이처럼 과한 낯익음에 있다.

연효숙의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소상한 안내서가 빛을 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 식상한 인상을 벗겨 『유토피아』가 흥미롭기 그지 없는 작품임을, 그리고 지성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깨닫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1장 ‘이상 국가를 꿈 꾼 토마스 모어’, 2장 ‘『유토피아』 읽기’, 3장 ‘철학의 이정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토피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중요한 문제의식까지 꼼꼼하게 짚어낸다. ‘유토피아’에 대한 모어의 상상은 그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란 제목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더욱이 모어의 삶, 그리고 그 배면의 역사적 변화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또 상세하게 설명함은 작품의 진면목에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하고도 긴요한 배치다.

모어는 근대세계가 급부상하는 격변의 역사를 온 몸으로 관통했던 인물이다. 성속의 대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그의 삶을 통해 극적으로 함축되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오랜 종교적 가치를 보듬으면서도 관용적이었던 그의 윤리적 삶은 실제로 헨리8세의 막강한 세속적 권력과 충돌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로 치면 영의정쯤이라 할 수 있는 상서경(Lord Chancellor)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즉 온갖 사회적 수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토마스 모어는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의 뿌리와 이를 심화하고 있는 당대의 역사적 변화를 지극히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돈과 힘의 위세가 종교적 윤리의 고삐를 벗어던짐으로써 심화되는 새로운 시대의 위험성, 그리고 이같은 변화 속에서 뭇 백성들에게 들이닥친 생존의 위기는 비판을 넘어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문제였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길지 않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지를 차분하고 깔끔하게 보여준다.

일신의 안녕을 등진 치열한 문제의식은 모어로 하여금 전례가 없는 이상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내도록 한 바탕이었다. 그의 ‘유토피아’가 배고픔과 질병의 고통, 죽음의 공포를 단순 부정했던 종교·신화의 이상향과 판이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대적 유토피아의 상상은 생산의 풍족함과 분배의 공평성, 모두의 평등과 연대를 가능하게 할 실질적 기반까지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기복적 피안의 흐릿한 꿈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지닌 지성사적 가치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책 말미(3장 ‘철학의 이정표’)에 연관된 고전들을 소개함으로써 모어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을 고대와 중세, 다시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지성사적 계보 하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까닭이다. 주지하다시피 모어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잇고 있으며 이는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마르크스, 캉유웨이, 에른스트 블로흐, 발터 벤야민까지 나란히 연관 저작으로 배열하여 보여준다. 이는 지성사를 통해 이어진 이론의 계보가 부단한 것이었음을 적절하게 환기하는 것이나 사실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처럼 면면한 지성사적 계보 너머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유와 인정을 둘러싼 불평등, 그리고 그에 대한 투쟁은 여전하다. 그래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친절한 입문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모어가 넘어서고자 했던 현실의 질곡이 50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변함없음을, 따라서 ‘희망’ 또한 그치지 않음을 애써 일깨우고 있는 까닭이다.


서평자 이병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사)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