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회 [철학적 인간극장]
하나.
오늘 이미 졸업하여 학교선생이 된 어떤 제자로부터 아주 귀중한 메일을 받았다. 여기엔 사연이 좀 담겨 있는데, 그 사정은 이렇다.
언제가 내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영화를 하나 이야기 해주었다. 나는 그 영화를 80년 여름 그 지독한 절망 속에서 뒹굴던 일요일 낮의 TV 영화관에서 보았다. 그때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그만 빠져들어서 보았다. 그동안 영화의 줄거리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영화 제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해 8월을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제목도 그해 8월과 함께 잊어버렸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우연히 ‘행복한 사회’라는 주제로 강의하다가 이 영화가 떠올라서 얘기했었다. 학생들에게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모른다고 고백했다. 대개 학생들은 내가 지어낸 얘기로 기억했을 것이다.
오늘 메일을 보내준 제자는 그때 내가 얘기한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는데, 최근 우연히 책을 보다가 내가 얘기한 영화 줄거리와 똑같은 소설의 줄거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로널드 B. 토비아스 저)]를 읽는 도중, 59 쪽에 그 이야기의 핵심 에피소드와 비슷한 줄거리가 실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이렇게 옮겨 적어 주었다.
“셜리 잭슨(Shirley Jackson, 1919-1965)의 짧은 이야기 [복권The Lottery]은 이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설명한다. 이야기의 제목부터 흥미롭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1년에 한 번씩 복권 잔치가 열리고 있다. 복권의 당첨 방식과 거기 연루된 사람들이 소개된다. 독자들은 마을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돌로 쳐 죽인다는 결말을 알게 되기까지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따라가며, 복권 당첨이 주제인 터라 전개과정에 큰 의심을 품지 않는다. 작가로서 잭슨은 교활하리만큼 재치가 있다. 독자로 하여금 꼭 봐야 할 곳을 보게 만드는 동시에 다른 쪽도 보게 한다. 소설을 읽어 나가다보면 복권 당첨자를 선택하는 방식에 흥미를 갖게 된다. 독자는 무방비 상태로 마지막 대목까지 읽게 되는데 비극적 결말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된다.”
이렇게 제자의 도움으로 제목을 찾게 되자 나는 너무나 기뻐 인터넷을 통해 이 제목의 소설이나 영화를 찾아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이 소설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는 않았다. 연세대 영어교육학과에서 어떤 학생이 석사학위논문을 이 소설을 가지고 쓴 게 국내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둘.
그런데 영어소설로는 교보문고에서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셜리 잭슨은 위키페디아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 나온 자료를 통해 그녀의 단편 소설 [복권]이 영화로 3번이나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알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를 지금 세계 어디서도 구할 수는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혹, 누가 이 영화를 가지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이다. 솔직히 내가 본 영화가 3번이나 만들어진 것 가운데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먼저 소설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소설은 어느 일요일 아침 마을 사람들이 축제의 자리에 모여들어, 마침내 제비를 뽑은 사람을 죽이는 과정을 아주 냉정하게 서술한다. 마치 이런 일이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인 듯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저 마을 제사를 하나 지내는 듯이 별로 심각한 동요 없이 가볍고 상쾌하게 그려진다. 이렇게 그려졌기 때문에 이 사건은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아무런 가책 없이 잠자리의 날개를 뜯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 내가 본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에 앞뒤가 좀 더 부연되어 있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유골을 수습하여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자기 어머니가 묻혀있는 마을로 찾아갔다. 그 마을에 도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이상하게도 싸늘한 적대감이 그를 둘러싼다. 다행히 여관집 주인의 딸이 이 남자에 단번에 반해서, 그 남자를 도와주기 시작한다. 남자는 마을 보안관을 찾아가 공동묘지에 묻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보안관은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날 밤에는 마을 청년들이 그를 위협한다.
그는 마을 공동묘지에 들러 자기 어머니의 무덤을 살펴보던 중 기이한 것을 발견한다. 그 공동묘지의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 죽은 날자가 해만 달랐지 동일했던 것이다. 그는 이런 의문을 품고 도움을 얻기 위해 외할머니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침묵하고, 외할아버지는 그를 적대시한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마음을 돌려 그는 어머니가 죽게 된 사정을 알게 된다.
그 마을에는 오래된 마을의 축제가 있었다. 그 축제날 마을에는 제비뽑기를 실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첨된 사람은 축제날 마을 광장에 묶어두고 돌로 쳐 죽인다. 이 신성한 의무에는 마을의 누구도 빠질 수 없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당첨된 사람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만일 이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역시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 축제 덕분에 마을에는 더 이상 어떤 싸움도 없고, 서로 다정하며, 다 같이 행복하다.
이 남자의 아버지도 우연하게 그 마을에 들렀다가, 이 남자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해서 이 남자도 낳았는데, 아직 이 남자가 어릴 때, 그해 축제날 그만 그의 어머니가 당첨되고 말았던 것이다. 축제날 사랑하는 아내를 돌로 쳐 죽이는 고통만은 피하려던 아버지에게도 마을 사람들은 억지로 돌을 쥐여 준다. 아버지는 자기의 돌을 던지기 직전 마음을 바꾼다. 돌멩이를 내팽개친 그의 아버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는 아내를 뒤로하고, 어린 남자를 안고서 마을로부터 도주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쫒지만 그는 천신만고 끝에 마을사람들이 모르는 아주 먼 도시로 가서 죽기까지 비밀을 감추고 살았던 것이다.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된 남자는 흥분하지만, 방법은 없다. 그런 남자에게 하숙집 딸이 다가와서, 자기도 이 마을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둘은 다음날 함께 마을로부터 도주하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사로잡혀 그는 갇히게 된다.
며칠 뒤 축제날이 다가온다. 그해 축제날도 제비뽑기가 시행되었다. 우선 몇몇 사람들이 선정되고, 그 중에 둘이 다시 선정되고, 그 둘 중에 최후로 하나가 가려진다.
그런데 그해 축제에는 하숙집 딸과 하숙집 어머니가 동시에 최후의 2인으로 선정되었다. 딸과 어머니는 사색이 된 채 마지막 추첨에 들어간다. 어머니가 먼저 패를 뽑았다. 그 어머니의 패는 사실은 떨어지는 패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기의 패가 무언지를 알자마자, 그 패를 감추고 스스로 자기가 당첨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마을에서는 그녀의 말을 믿고 축제를 준비한다. 감옥에 갇힌 남자도, 하숙집 딸도 강제로 축제에 초대되어 돌이 쥐어진다. 그녀의 어머니가 광장에 묶여 서자,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자도 딸도 돌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 둘은 손에 든 돌을 던져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마치 토끼몰이 하듯이 그 둘을 쫒는다. 다행히도 그 둘은 손을 잡고서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셋.
그런데 이 오싹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론 허구이므로, 실제로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는 상당히 현실감을 가진다.
우선 ‘범죄의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 보자. [복권]에서 마을 사람들은 바로 이런 공동의 범죄 때문에 더 이상 다투지도 않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가장 행복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런 ‘범죄를 통한 공동체’는 현실적으로 자주 발견된다. 가장 가까운 예로서 ‘폭탄주 돌리기’가 있다. 폭탄주를 마시는 가장 큰 이유는 다 같이 함께 정신을 잃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다 같이 광란의 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잊어버리기로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그 광란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폭탄주 돌리기를 통해 내부의 친밀함이 강화된다. 그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공동의 징표를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런데 ‘폭탄주 돌리기’와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 ‘폭탄주 돌리기’가 외부를 향한 공동의 범죄이지만, [복권]의 경우는 내부에서 한 사람을 처단한다.
그렇다면 [복권]에 나오는 이야기를 희생양 제도와 비교해서 이해하면 어떨까? 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공포가 엄습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책임질 어떤 희생양을 찾는다. 그 희생양은 대체로 그 사회의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이방인이다. 사실은 그 공동체 자체 내의 잘못 때문에 발생했는데, 그 책임은 항상 이 이방인에게 돌려진다.
희생양인 이방인에 대한 공동의 적대감을 통해 내부적 결속이 지켜진다. 그렇기에 역사상 자주 희생양이 만들어졌다. 추첨이란 신의 선택의 과정이다. 그것은 자신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장치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외부로 책임을 돌리는 점에서 [복권]과 희생양은 동일하지만, 무언가 차이가 있다. 희생양은 내부에서 공포가 엄습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그러나 [복권]의 경우는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즐거운 축제처럼 시작된다.
또는 이 이야기는 인간의 어떤 사악함이 관련되기에, 어릴 때 했던 ‘잠자리 시집보내기’와 같은 장난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끔찍한 장난이 그때는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행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장난은 항상 여러 아이들이 함께 모였을 때 벌어졌던 것 같다. 이런 장난으로 아이들이 얻을 이익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장난은 그야말로 악을 위한 악의 행위, 곧 사악한 행위였다. 이런 사악한 행위가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벌였다는 점에서 이는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복권]의 이야기는 ‘잠자리 시집보내기’와 사악한 행위라는 점에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복권]의 경우 추첨이라는 과정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복권]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차이점을 지닌다. 어쩌면 이런 세 가지 즉 ‘폭탄주 돌리기’와 희생양, ‘잠자리 시집보내기’가 결합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닐까?
이병창(동아대,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