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향연에서 꽃핀 인간의 위대함[고전은 숨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고전은 숨쉰다]의 첫 번째 고전 비평으로 두 번에 걸쳐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글은 영웅적 삶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두 번째 소개글은 영웅들 간의 경쟁에 관한 현대 연구자들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일리아스』가 왜 현대에도 유효한 논쟁의 장(場)이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려 합니다.(필자)

기독교 윤리와 희랍의 윤리

서양 문명의 대표적인 윤리 체계로는 기독교 윤리와 희랍의 덕윤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윤리, 특히 예수의 윤리는 용서를 통해 인간이 행한 일의 업과(ta opheil?mata)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발견한다. (‘ta opheil?mata’는「마태복음」 6장12절(주기도문의 일부) 등에 나오는 표현으로 희랍어 원래의 의미는 ‘빚(진 것)’을 가리킨다.) 바로 그 길이 새로운 인격적 관계인 사랑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일의 결과를 신이 떠맡음으로써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에서 예수의 윤리는 인간 ‘자체’의 탁월성에 주목하는 윤리는 결코 아니다.

반면에 희랍의 덕윤리는 인간 자체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서 성립된다. 흔히 德으로 옮겨지는 ‘aret?’는 인간적 탁월함(excellence)이나 훌륭함(goodness)을 뜻하는데, 이 같은 인간적 탁월함을 꽃피우는 데서 아름다움(to kalon)을 발견하고 또 그런 가치를 고양하는 인생관에서 희랍 윤리가 자라났다고 할 수 있다. 느슨하게 말하자면 인간적 가치를 발견하고 고양하는 태도 속에 서양 휴머니즘의 원초적 뿌리가 있다고 하겠다.

호메로스, 희랍의 교사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그의 작품이 서양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각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가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발견은 호메로스가 후대 희랍에 미친 영향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고대 희랍인들은 호메로스의 작품을 암송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겼으며, 플라톤의 『이온』(533d-e)에서는 호메로스를 자력(磁力)과 같은 매력을 가진 존재로까지 묘사한다.

호메로스에 대한 고대 희랍인의 평가는 단순히 매력적인 시인이었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크세노파네스는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호메로스를 따라 배웠다.”(DK21B10)고 하고, 플라톤 또한 호메로스가 희랍을 가르쳤다고 말한다.(『국가』606e.) 그렇다면 도대체 호메로스가 희랍인들에게 가르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능한 영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영웅서사시이다. 따라서 우리가 호메로스의 가르침으로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영웅들의 영웅적 활동, 즉 승리와 성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상 우리는 영웅하면 무슨 성공신화의 대명사처럼 여기지 않는가. 이런 영웅 개념에 따르면 영웅적 존재는 어떤 난관이든 아무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전능한 존재이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언제나 모든 난관을 쉽게 해쳐나가며 눈부신 행적만을 보이는 건 결코 아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권위만 내세우다 결국 수치스러운 꼴을 당하며,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당한 모욕에 화를 내다가 분을 이기지 못해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부관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어린아이처럼 줄줄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트로이아의 영웅인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벌이게 될 결투에 앞서 두려움에 움츠리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영웅에게서 기대하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여기에 『일리아스』를 단순한 영웅 무훈시로만 보면 안 되는 까닭이 있다.『일리아스』에서 묘사되는 영웅들은 잘나기만 한 ‘신적인’ 영웅이 아니라 뭔가 빈 데가 있는 ‘인간적인’ 영웅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시

간결하고 압축적인 표현을 하는 호메로스식 문체를 깊게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리아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시인은 곳곳에서 죽음의 전장을 묘사한다. 전사들이 흘린 피가 내를 이루고 돌이 힘줄과 뼈를 박살내며 창이 관자놀이를 관통하고 창자가 땅 위로 쏟아지는 이야기와 표현들이 텍스트를 뒤덮고 있다. (죽음이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듯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것이 호메로스의 특징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일찍이 라인하르트(Reinhardt)는 『일리아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의 시’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여기에 시인이 드러내려는 핵심이 있다. 인간은 영웅이라고 해도 신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thanatos)이다. 신의 몫이 불멸이라면, 인간의 몫(moira)은 피할 수 없는 죽음(moira)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을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XII.324)로 여긴다. 그 곳에서 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리라. 영웅들은 죽음(의 전장)을, 전사의 탁월성이 꽃필 수 있는 터전으로 생각했던 셈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리아스』는 승리만 이야기하는 무훈가가 아니다. 시인은 승리만큼이나 패배에 대해, 그리고 그 패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대해 세부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영웅 서사시이면서 어떻게 죽음과 파멸을 노래하는 시일 수 있는 것일까? (통속적인 영웅 개념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독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테면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와 벌일 결투를 앞두고, 협상하는 쪽과 맞서 싸우는 쪽 중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한다. 그는 후자를 선택하면서 “영광스럽게 죽는 것(olesthai euklei?s)이 더 나을 것”(XXII.110)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것은 형용모순이다. 이때의 죽음이란 패배를 뜻하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죽음이란 다름 아니라 ‘명예로운 패배’를 뜻하니 말이다. 패배가 어떻게 명예로울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는 아킬레우스에게서 볼 수 있다. IX권(410-416)에서 그는 자신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죽는 길과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중 전자의 길, 즉 죽는 길을 택할 경우 자신의 명성(kleos)이 불멸할(aphthiton) 것이라고 말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성이 죽음을 통해 실현되는 양 말하고 있다. ‘불멸의 명성’이 죽음이란 소멸을 통해 달성된단 말인가? (그렇다!)

아름다운 죽음

역설적으로 보이는 영웅들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 조건 내지 일부로 보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전사답게 싸우다 쓰러져 죽는 것, 이것을 이상으로 삼은 데 영웅들의 진면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관은 실패(패배)를 두려워하기보다 죽음이라는 리스크(risk)를 무릅쓰고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려는 태도 속에서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단순한 운명론자도 아니며 수동적인 존재들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20세기 대부분의 서양고전학자들은 호메로스 영웅들에게 의지의 자율성과 자기의식이 없다는 이유로 행위자(agent)의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렇게 볼 때 영웅들이 ‘행동하는 능동적 존재’(men of action)였다는 바우라(Bowra)의 통찰은 몇 십 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생생한 울림을 가진다. (바우라(이창대 옮김),『그리스 문화예술의 이해』,철학과 현실사,2006. 참고. 원저는 The Greek Experience라는 제목으로 1957년에 출간되었다.)

영웅들이 죽을 줄 알면서 죽음의 길을 택하는 건, 죽음이란 운명의 몫에 굴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능동성을 펼쳐 보이려는 태도 속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희랍 영웅주의의 일차적 본질이 있다. 영웅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내면화했다는 것을 시사하며, 죽음 자체보다는 어떻게 죽느냐가 더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죽음을 내면화한 그들에게 ‘어떻게 죽느냐’는 것은 일종의 삶의 방식을 뜻했다. ‘비겁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 그 속에서 탁월성을 꽃피우는 것 그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이것은 행위의 의미를 성공이나 실패라는 결과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행위자 연관적으로 보았음을 암시한다. ‘용감한 방식의(용감하게)’ 행위는 행위자와 연관될 때만 유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용기’와 ‘비겁’은 행위자와 연관 짓지 않고는 ‘실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자긍심’과 ‘품위’(aid?s)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영웅들의 위대함이 있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겉으로 보면 형용모순으로 보이는 이런 인생관을 압축적으로 멋지게 묘사한다. ‘아름다운 죽음’(kalos thanatos)이라고!(『니코마코스 윤리학』,1115a34.)

고통을 보듬는 연민

전통적으로 『일리아스』의 XXIV권, 그리고 XXIII권까지도 전체 플롯의 구도에서 벗어난 부분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XXII권에서 헥토르가 아킬레우스한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전투 장면은 끝나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슨 할 말이 남은 것일까?

『일리아스』는 죽음의 시일지언정 단순한 전쟁시는 결코 아니다. 구성에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균형감을 잃지 않는 시인은 XXIII권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추모하는 아카이아인들의 모습을 그리며, XXIV권에서는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와 만나 탄원하는 장면과, 헥토르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긴 트로이아인들의 장례식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두 권 모두 산 자들이 먼저 간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받아들임이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가 만나는 장면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운다는 데 있다. 프리아모스는 먼저 간 헥토르를 생각하며 울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며 통곡한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자기 자식(헥토르)의 시신을 내달라는 프리아모스의 탄원을 받아들인다. 아킬레우스가 탄원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기처럼 프리아모스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데 대한 공감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울음이 공감을 자아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민(eleos)의 정서이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죽음 앞에서 굴하지 않는 당당함을 보이는 한편, 죽음을 끼고 사는 같은 인간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진다. 이 같은 연민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일리아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을 내면화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 측면에서 비극적이다. 후대의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비극시인으로 부르고 있는데 ‘어떤 점에서’ 이는 적절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 희랍에 미친 영향

우리는 앞에서 호메로스가 희랍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호메로스를 모르고서는 고대 희랍을 다 알았다고 할 수가 없으리라. 왜 그런가? 지면상 몇 가지 간단한 이야기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우선 고전기 비극이 흔히 옛날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극은 일반적으로 행위자가 수행하는 행위의 ‘의도’와 행위가 끝나고 난 뒤 일어난 ‘결과’ 사이의 단절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이 비극의 hamartia 문제이다!) 비극이 호메로스보다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차이는 있지만 애초에 이런 문제를 제기한 건 호메로스이다.

호메로스는 인간의 삶에서 행위의 의도와 결과의 결속이 깨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위험이 죽음과 같은 운명(moira)이란 삶의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놓여 있음을 통찰한다. 인간 앞에 어쩔 수 없는 필연의 운명이 놓여 있다는 것을 응시하고, 그 운명의 조건을 어떤 식으로 내면화할 것이냐는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필연이 결정론적 필연인 건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일리아스』는 인간적 삶의 비극성을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고, 이렇게 본다면 비극은 다분히 호메로스의 유산을 업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유산이 이것으로 끝나는 건 결코 아니다. 고전기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 한 대목을 보도록 하자.
“그들[아테네 사람들]은 맞서 싸우고 감내하는 것이 굴복해서 살아남는 것에 앞서는 일이라고 생각해 수치스런 비난은 기피하고 해야 할 일은 온몸으로 감내해 냈습니다. 그리고 찰나와 같은 운명의 호기를 통해 공포가 아닌 영광의 절정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던 것입니다.”(투퀴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42.4.(이정호 옮김,『메넥세노스』부록,139 쪽.))

페리클레스는 영웅적 가치관을 아테네 폴리스에 적용하고 있다. 호메로스에게 영웅이 개인이었다면, 페리클레스에게 영웅은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라 ‘폴리스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희랍 고전기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호메로스적 영웅주의의 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는 친숙한(?) 소크라테스에서도 호메로스 전통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28c-d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킬레우스가 “죽음과 위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반면, 못난 사람으로서 사는 것을 (…) 훨씬 더 두려워”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죽음에 맞서는 자신의 선택을 아킬레우스에 빗댄다. 호메로스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를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죽음에 굴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면모 역시 호메로스가 남긴 유산의 일부로 보는 것도 지나친 해석만은 아닐 것이다.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가라리 네히어라-물체, 그리고 우리 신체

서양철학사를 들여다보면, 철학 용어의 쓰임새가 시대별로 다른 관점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 중 실재성의 개념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상층의 대상 즉 이데아를 실재성으로 보았던 시절은 고ㆍ중세 시대일 것이고, 심층의 실재성으로서 기억과 무의식을 실재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생물학과 심리학의 도래한 시대이다. 그리고 데카르트 이래로 근대의 실재성은 이원론이라 불리는 두 개의 실체, 영혼과 신체의 관심 속에서도 있다. 그에 따르면 두 개의 실체를 사변적으로 한계에까지 연장해 보면 정신과 물체라는 개념으로 양극화가 된다.

우리는 ‘가라리 네히어라’를 쓰면서 정신과 영혼, 물체와 신체 사이에 개념상 차이가 있음을 은연중에 강조해왔다. 다시 말하면 영혼과 신체의 문제는 표면의 문제로서 상층과 심층과는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상층에서는 정신의 대상인 이데아를, 심층에서는 이데아를 전혀 포함하지 않은 물질을 양극으로 하는 논리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가정하였다. 이제 양극의 중간에 위상적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영혼과 신체 관계에서, 영혼은 정신과 별개일 것이고 물체는 물질로부터 나왔기에 인식의 다른 대상이라는 가정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체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신체가 물체와 다르다는 것을 예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아주 가끔 신체는 물체와 다르다는 생각을 잊고 산다. 특히 사람들은 슈퍼맨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순간적으로 이동한다거나 빛과 같은 속도로 지구를 도는 영화를 보면서 즐기며 가끔은 그 현상들이 실재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좋아한다. 꼬마들은 그것을 실재로 해보고자 보자기로 망토를 걸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가끔 인간의 신체가 늘여져서 매우 가늘게 되었다가 다시 원래 덩어리로 돌아 올 수 있다면, 아마도 미세한 빈틈이 있는 만리장성과 같은 벽의 미세한 빈틈을 통과한 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곤 한다. 이보다 더하여 전자 매체 속에서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나 상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물체가 입자 또는 전자처럼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미세한 것이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정해 보는 것이다.

그 물체가 신체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르게 느끼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물체와 신체는 구성체이며 어떤 물질적인 재료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 양자가 단지 분해와 조합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해명해야 될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구성방식 즉 조직화에서만 차이가 날까? 이처럼 풀어 가는 것과 다른 방식도 있다.

즉 물체와 신체에 작동하는 양태와 내용이 왜 차이를 갖는가에 관심을 기울이자. 이런 관심은 신체가 영혼에 비하여 덜 중요시되었던 시기를 지나, 19세기 말 이래 생명의 진화에서 생명체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20세기 후반 이래로 환경과 생태계와 더불어 살아야 할 몸이라는 점에서 몸(신체)의 잘 지냄(bien-?tre, well-being)에 대한 관심이 몸철학, 즉 신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개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물체 개념 규정들로부터 시작하여, 신체의 양태와 내용에 대해 보기로 하자.

물체도 신체도 프랑스어에서는 꼬르(coprs)라고 하며, 구별 할 경우에, 하나는 그냥 물체(un corps)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신체(notre corps)라고 쓴다. 독일어에서는 신체(Leib)와 물체(K?rper)를 구별하여 쓴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도 근대 철학에서 물리학적으로 물체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적 규정으로서 ‘물체’는 자아를 포함하는 ‘우리 신체’의 규정과 같지 않음에도, 소위 몸과 맘, 영혼과 신체라는 과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유비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몸과 맘이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과 유비적으로 연관이 있을까 하는 물음은 일단 젖혀 두기로 하자.

그럼에도 한 가지 차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의 일부로서 영혼이라는 관점들이 있는데, – 내가보기에 – 고대에서부터 누스(Νου?)와 로고스(λογο?)의 차이가 있었고,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의 예지계와 지성계를 구별을 본 따서 정신(Νου?)과 영혼(ψυχ?, ?me)을 차원 상으로 구별하였다. 이들에게 신체는 철학적으로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왜 그럴까?

고대사에서 신체는 물체와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신체에는 무엇인가 내재해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는 신체의 무덤이지만, 한 인간의 죽음과 그 영혼을 숭배하고, 영혼이 신체와 더불어 이 세상에 다시 올 것을 기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신체의 죽음이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호메로스 이전 시대에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신체 일부의 파손으로부터 죽음이라 여기는 것은 아킬레스의 죽음이 그 예일 수 있다. 즉 가장 중요한 부분의 손실 또는 기능 정지도 죽음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서 에스키모 사회에서도, 물개 사냥을 하지 못할 정도로 힘없는 늙은 에스키모인을 죽음이라 칭한다고 한다. 신체 기능의 정지에 대한 개념에서 죽음을 보았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신체에는 물체와 달리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에 의해 전승되는 바에 의하면, 소마(σ?μα, 신체)를 세마(σ?μα, 무덤)라 여기는 것은 영혼(psych?)이 갇혀있는 무덤을 신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신체 속에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소크라테스에 이어서 플라톤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현실 생활에서 문제거리가 있으면 다이몬에게 묻는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그 다이몬을 자신들이 신탁하여 물어보는 신들이 아니라 하여 불경건하다는 이유에서, 소크라테스를 두 가지 죄목(다른 하나는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중에 하나로서 고발하였고,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언도 받고 독배를 마시고 철학적 순교를 했다. 다이몬이 신체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리라는 점에서 그는 소마-세마의 도식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들 한다. 즉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전하는 설화, 에르(Er)라는 자를 통하여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영혼은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다른 곳이 저 세상의 세계라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이어 받은 플라톤은 영혼은 육체와 달리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간다는 이집트 이래로 오랫동안 인류에게 전승되어 온 관념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혼의 불멸을 표현하고자 한, 또 관념의 실재성을 믿었던 플라톤주의에서, 신체는 철학적 문제거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크리스트교 성립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학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삼신 개념(trinit?)의 성립을 일자와 누스와 영혼의 세 양상의 전개 방식으로 본다면, 일자로서의 절대자로부터, 누스로서 초월적 정신과 그의 일부로서 영혼들로 넘쳐나는 과정을 거쳐서, 그 마지막 차원에서 물체 또는 물질이 생겨난다. 그 신체와 물체는 다른 세 가지 실재성들과 별개로서 잘못을 범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관점이 중세 1500년 동안에, 성직자는 백성에게 신체를 비실재성이라 가르치고, 현실의 부정에서 영혼의 상승을 설교하여, 백성에게 예속과 굴종을 강요했다. 현실에서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들이 인민을 현혹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마찬가지이다.

신체가 새롭게 정립된 것은 물체의 실체를 주장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과학의 발달 이후이다. 세계는 물체들이라는 실체에 의해 구축되어 있고, 그 세계는 어쩌면 창조주의 현실적 개입이 없이도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물체는 정신이나 영혼과 달리 만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우리 신체’는 다른 ‘물체’들과 달리, 자기 재량권이 있으며, 어떤 통일성을 지니는 독특한 단위이다.

우리는 여기서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의하면, 정신도 영혼도 물체(corpus, 코르푸스)라고 칭하며, 인간의 신체와 물체도 코르푸스라 하며, 게다가 모임과 사회라는 정치체(corps politique)라고 하듯이 코르푸스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서는 개념적 단위를 형성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코르푸스인 셈이다. 그럼에도 각 코르푸스는 ‘물질적 형성물’들의 다른 여러 양상인 셈이다. 이점에서 유물론이라 한다.

이 사상의 역사적 전개 과정은 불연속적이고 단속적이기에 무엇이라 설명하기 곤란하나, 관념의 세계인 정신의 형성물(관념)도 물질적 형성의 한 측면으로 간주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단어[corpus, corps]의 영향이 있다고 보아, 따라서 근대 물리학은 고ㆍ중세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이 물질적 물체에 실체성을 부여하였고, 그것을 정신과 별개로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혁명적 발상은 새로운 세기를 열었다. 이로부터 데카르트는 우리 신체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우리 신체와 영혼은 속성을 달리하더라도 같은 ‘관념’으로서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발상 속에 데모크리토스 이래로 원자론적 관점이 새롭게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원자론적 관점은 우주[현존하는 모든 존재들 일체라는 의미에서]가 빈 것과 원자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체들이란 원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중에서 영혼도 다른 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원자들로 되어 있으며 다른 것보다 훨씬 빠르게 운동하는 물체일 뿐이다. 이와 달리 데카르트와 그 후학들은 에피큐로스 학파의 물체와 “부피있는 실체”(substance ?tendue) 사이에 차이를 보았다. 후자는 독립적인 실체이며 관념이다.

영혼과 우리 신체를 구별하였던 데카르트는 한편으로 “사유실체”라는 영혼이 물질과 다른 질적인 것임을 강조하였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부피실체”가 영혼과 별개라는 점에서 “물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길을 열었다고들 한다. 이로부터 물질적 실체를 따로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근대 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우리 신체”와 우리 영혼 사이의 특수한 통일성을 보았고, 이 둘의 통일적 관계를 신체 속에서 즉 송과선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는 1643년에 엘리자베스에 보낸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신체의 느낌이 사유의 방식이 아니라 “감관에 의해 매우 분명하게 인식된다”고 주장했다.

이제, 물리학적 질량(la masse)을 가진 물체(un corps)와 살아있는 생명의 덩어리(la masse)인 우리신체(notre corps) 사이의 차이를 깨닫게 되면서,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제기한 문제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출발이 영혼은 신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고대의 가설에서부터 출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인 히포크라테스(Hippocrate, 기원전 466-377)가 신체의 질병에는 심리적인 측면도 있다고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고대에서도 있었다. 근대에 와서 이 영혼은 이제 신체와 연관 없이 생각할 수 없는 단위가 되었다. 이런 발상은 영혼이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과 연관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이 통일된 단위를 물질의 생성과 연관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고, 프랑스 18세기 유물론자들의 주제가 되게 하였고, 또 한 세기 지난 이후에는 심층(深層 profond)과 연관 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제서야 의학-생물학의 관점에서도 그 다음에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신체 그 자체의 자기 자치성과 완결성이라는 ‘이념’(id?e)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자치성에 이어 재량권을 생명체의 고유한 속성으로 인식하여 생명을 다루듯이, 우리 신체 속에 있는 영혼도 자유롭다는 고유성을 지닌 것으로 다루는 방식이 도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시대가 고ㆍ중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기였기에, 영혼의 상위로서 “정신”은 순수사유로서 물체와 관계없는 기호와 상징으로서 인식세계를 열어갔던 것이다. 초월적 에고(Ego)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신의 인식세계를 삶과 관련 있는 영혼과 따로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히 수학적 공리들과 공준들에 관하여 지식의 전개와 확장에서 정신은 영혼과 별개라는 관점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정신은 물체 또는 신체와의 연관보다는 다른 세계에서 통일성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고, 지금도 수학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이 정신의 통일성을 가라리 중에서 상층 가라리의 통일성이라 부른다.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데카르트의 시대를 지나면서 영혼은 정신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신체와 더불어 신체 속에서 문제거리로 제기된다는 점이었다. 이 신체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인격성의 일부로 제기된다. 우리가 보기에, 루소에서는 이기심(l’amour-propre)과 이타심(l’amour de soi)에 대한 구별에서도 이타심은 자연적 배려로서 자기보존의 근거로 하고, 게다가 사회 속에서 타인 없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타인과 관계 속에서 그의 자기보존은 신체를 포함하는 자연주의적 태도이다.

그런데 철학사에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가 처음으로 『자연권 이론』(1796)에서 자기신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또한 프랑스 철학자 데스뛰 드 트라시(Antoine Louis Destutt de Tracy, 1754-1836)도 자기 신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의식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생산의 변화에서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려는 입장에서, 신체를 통한 노동이 자아의 완성과 자기 인정을 실현할 것이라 보는 견해도 나오게 된다. 이 견해는 현실적으로 사회적 환경에서 중요하게 된 계급의식과 맞물려 신체의 노동을 인간성의 본질로 간주했다. 다른 한편으로, 몸에 밴 습관과 기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신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두 측면을 현실이라는 표면의 이중화(d?doublement)라 본다. 왜냐하면 사회적 자아로서 신체의 노동과 특이성의 자아로서 신체의 기억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기억을 통한 신체의 현실화는 신체의 한 양태로서 구체적 노동 과정에서 실현된다.

기억에 관한 한, 모든 생명체는 각각 생명의 기원으로부터 자기의 과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신체의 현상적 통일성 이상의 것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이런 신체를 선천적 이념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통일성을 탐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신체는 살(chair)로 되어 있고, 감각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현실 세계 속에서 구현될 지향적 총체성이다.

“우리 신체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가 세계에 거주한다(habiter). 신체의 진실한 현존은 객관적인 어떤 존재의 현존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체, 즉 내가 존재하는 신체이며,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신체, 즉 세계에서 나의 존재를 특징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는 불가분 총체성 즉 구현되어야 할 지향점으로서 총체성(totalit?)이다” 라고 한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 ‘신체의 움직임’은 인격을 내포하는 품성(conduite)과 행실(comportement)이라는 점에서 삶의 질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 몸의 운동은 반복하면서도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몸의 운동은 새로운 반복자이다. 이 반복하는 시뮬라크르의 이해는 삶의 질이라는 점에서 과학적이나 합리적이 아니라 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물체를 다루는 것이 과학적 지식과 방법의 한계 속에 정합 또는 합리(rationnel)에 의존하는 반면에, 우리 신체에서는 품행들 사이에 연민과 공감을 지니고 있으며 이성(raisonnable)적이기를 바란다.

이 두 가지 점을 구별한다면 전자에는 세계에 대한 인식론이며, 후자는 세상의 삶에 대한 도덕론이다. 물체가 실험적이고 동일한 반복을 가능하게 한다면, 우리 신체는 일회적 경험이며, 끊임없이 덧붙여진 새로운 반복이다. 우리 신체에 대한 기원과 본성에 대한 이해와 성찰은 진화론이 발달하면서 또한 심리 내적 의식을 밖으로 끌어내면서 20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뚜렷해졌다. 우리 신체는 각각의 개별성을 표출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욕망 하는 방식에 따라 기호작용, 함축성, 의미 등에서 거의 무한한 다양체를 이룬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신체는 특이성으로서 다양체이다.

게다가 생명으로서 몸의 상태의 지속과 수명이 길어지는 시대에서 신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도 상당히 달라졌다. 신체의 역량, 즉 스포츠 같은 인간 한계 체험에서 신체는 더 이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등장하였다. 신체의 역량이란 놀이(jeu)일뿐만 아니라 신체의 자기 소질의 개발이다. 게다가 신체의 건강과 감성에 따른 미적 취향 등에서 신체의 주체는 노동을 통한 인격의 완성이라는 측면과 다른 측면이 신체에게 요구되고 있다. 또한 좋은 영양만으로 신체에 좋다고 여길 수 없는 건강, 그리고 자연환경 및 생태계와 신체 조화에 대한 시각은 잘 산다(well-being)에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

신체는 이제 영혼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그를 넘어서 세상과 함께 세상 속에서 거주하는 주체이다. 전체와 떨어질 수 없는 전체 속에서 부분이다. 세상살이에서 신체는 영혼의 안녕과 지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신체의 불가양도성은, 물체의 불가침투성을 넘어서, 고유성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체의 자유가 인정될 때 진정으로 자유가 실현될 것이다.

영혼이 신체와 별개라는 생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영혼의 자유를 인간의 자유로 착각하는 경우이다. 이 착각은 여전히 인간이 구성한 사회 속에서 신체는 부분일 수밖에 없고, 물체처럼 신체가 분해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 기반을 둔다. 자아를 신체와 분리하는 생각은 합리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아무래도 이성적이지 못한 것 같다.

플라톤(Platon)과 같은 철학자도 신체를 “영혼의 폭력”이라고 하면서 신체를 금욕적으로 다루고자 했지만, 그래도 『필레보스』편에서 “신체 없는 영혼도 구원이 되지 않듯이, 영혼 없는 신체도 구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피노자(Spinoza) 같은 이는 이 분리를 착각이라 주장하면서 자연의 권능을 지닌 신체 속에서 권능(puissance)을 발현하기를 권하였다. 니체(Nietzsche) 같은 이는 성직자들이 말하는 정신의 신체에 대한 억압에 벗어나기를 권하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에서 “너의 지혜가 최상일 때보다 더 많은 것이 너의 신체 속에 있다”고 했다. 생물학적으로도 우리가 신체를 통하여 발현되는 품행은 현실에서 발현되지 않은 것에 비해 거의 하찮은 부분들이라 한다.

20세기 중반에 와서야 신체 속에, 특히 세포 속에 유전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유전자 정보의 지도를 그리면서, 신체의 비밀스런 작동에 대해 기계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지도에 그려진 유전자 계열의 거의 1/10정도만이 현실의 사회체(socius) 속에서 개체로서 발현되고 그 나머지는 발현되지 않으면서도 왜 그 긴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직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신체를 통하여 각각의 인격을 표출하고 있고, 그 인격들이 65억 인구 각각에게 고유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신체의 “양도불가능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인격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신체의 존중을 먼저 강조한다. 인간의 사회적 소외에 앞서, 신체의 고유성과 자기보존을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체만으로 인격의 고유성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물체의 해명이 수억 광년의 먼 우주에서 미세 소립자의 해명에까지 폭을 확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신체, 또는 생명체에 대한 해명은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이 해명이 있어야 사회체도 해명된다고 하는 것은 현실의 삶을 미래로 미루는 것이다. 이렇게 미루는 것은 미래의 소망으로 현실을 개혁하지 않고 습관 속에서 굴종으로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해명이 언제 될 값이라도, 현실의 공동체에서 신체의 “양도 불가능성”의 토대 위에서 각 인격의 고유성에 대한 존중을 지금 여기서부터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가라리 네히어라-‘관념’이란?

관념(l’idee ?δ?α), 플라톤의 이데아(Idea), 생각(영 idea)

삽화에서 보듯이 머리 위에 반짝이는 별이,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아이디어는 생각이다. 관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몇 가지 이야기를 먼저 하자.

내가 20살쯤이었을 때 관념이란 용어가 철학의 모든 것인 줄 알았다. 어려운 용어는 모두 다 관념이고 그 자체를 알아야 한다고들 하였다. 마치 누군가 ‘부처’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부처’라는 관념은 선사의 선문답처럼 홀려서 들렸듯이. 그때 이해하지 못한 그 관념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었다. 부처, 도(道), 신, 그리고 이데아도 그 자체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탐구하여 밝게 아는 것이 철학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나는 그 자체 있다는 것으로 답하기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느꼈다. 그 자체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자체에 대해 무엇인가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나는 산에 다니며 놀았다. 암벽 등반을 잘 하는 산 선배 중의 한 분이 밤에 텐트 속에서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산도 내가 다니는 산(개별)이 아니라, 그 산은 곧 신(관념)과 같은 것이었다.

‘산은 없다. 거기에 사람이 오르기에 있다’ 또는 ‘바위는 마음이다. 마음에 겁이 없으면 잘 오르다가, 아차 마가 끼면 온갖 잡사가 떠올라 한 손톱만한 잡을 것도 보이지 않아 오르지 못한다’ 지금 생각하면 ‘산은 없다’거나 ‘바위는 마음이다’는 어쩌면 영국 근대 철학자 버클리의 경지일지 모른다.

나의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어릴 때, 방학이라 고향에 가면 온갖 이야기를 듣는다. 그 중에 이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다. 누군가 ‘중공군 백만이 백두산에서 오줌을 누면 우리 반도가 떠내려 간다’거나, ‘중국의 인구 5억이 함께 발을 구르면 지구가 흔들거린다’거나, ‘소련의 모스크바 광장에 비둘기가 없다. 평화가 없으니깐’ 등이다.

앞의 두 물음은 고등학교 시절에 물리학을 배우면서 구체적으로 계산을 해보았고,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받침점을 계산을 하면서, 그런 지렛대는 실재상으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수학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위 두 이야기가 뻥(농담)이구나 했었다.

셋째 이야기는 여행도 못하는 시절에 누구도 가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을 검증해 볼 수 없지만, 막연하게 생물학적으로 비둘기는 키우면 되는데, 소련은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둘기조차 살 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어낸 넌센스 또는 유머일 것 같았다.

철학을 공부한답시고 의문이 가시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부처를 믿었고 또한 미륵보살이 모든 사람을 밝은 세상에 살게 하기 위해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어디엔가 있다고 믿으셨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도 미륵이야 불교의 설화중의 하나라고 치부하면 되었는데, 세상은 그런 분이 여럿인 모양이다. 내가 ‘세상을 구원하는’ 또는 ‘저 세상에 있는’ 주제자에 대해 관심을 갖은 것은 이야기 속에서였다. 어느 때인가, 저 세상에 사는 이든, 주제자이든, 그런 어떤 누군가가 있기는 있는가?

그래도 극락에는 부처와 보살들이, 천당에는 크리스트와 천사들이, 중국에는 옥황상제와 그 부류들이, 우리 이야기 속에는 환인과 환웅 그리고 나무꾼과 선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누군가가 있다고들 한다. 믿는 양식에 따라 각각은 착하게 살아서 각각이 바라는 그곳에 가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죄 값을 치르는 곳에 간다고들 한다.

이상한 것은 그 명칭들 중의 하나가 주제를 하면 다른 명칭은 배제되거나 소외되고, 나아가 그 명칭에 신앙을 건 자들은 다른 것에 대해 비하하고 심지어는 악으로 간주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것을 웃기기 위한 농담의 일부라고 하면, 각각의 신앙자는 농담이라고 하는 자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기와 다른 자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자들이 미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다.

신앙자가 자기를 제외한 사람에 대해 갖는 반대 또는 적대 의식이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하나의 존재에 대한 그것 외에는 모순이라는 논리적 생각을 먼저 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그가 사는 문화에 젖어서 다른 문화에 대한 적대의식이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닐까?

자! 생각해보자. 그 곳도, 그 명칭들(환인, 부처, 크리스트, 상제)도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l’id?al)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왜 상징의 이상이 존재가 되고 가치에 개입하는 하는 것일까? 철학을 배우면서 다시 생각하기를, 관념(l’id?e)이라는 용어가 그 기원에 자리하고, 또 그 용어에 어떤 성질 또는 속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그 기능과 역량을 개입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에는 이상도 있고 관념도 있고, 그리고 일상적으로 대화를 위해 일반적 사물을 지칭하며 소통하는 개념들도 있고, 자신도 이해 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서 만든 것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가라리 네히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본다. 이 중층에는 상징으로 이상, 논리적으로 관념, 경험 일반의 개념, 잘 알 수 없지만 이름을 붙인 이념(유명, 이름 붙이기)이 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관념과 이념을 따로 구별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 답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제 그 이야기, 즉 담론을 시작해보자.

관념은 어원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idea ?δ?α)이다. 이 이데아는 1. 형식, 2. (사물을) 봄(lat. species), 3. 종류, 본성. 4. 에이도스(eidos ε?δο?), 분류, 종류, 류(類) 등으로 쓰였다고 한다. 나는 이데아라는 용어가 피타고라스의 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라는 사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원리상 수(數)에서 하나(un)는 수들 중에서 일자(l’un)가 아니다. 하나는 모든 것에 기입되지만, 일자(l’un)처럼 자기 스스로 따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존재(Etre)는 모든 사물에 부가 또는 바탕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물체 없이 따로 현존(l’existence)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와 존재가 ‘있다’고 할 때, ‘있다’는 ‘없다’고 말할 수 없기에 쓰인 논리적 용어정도, 한계의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 이상의 논의는 전문적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여기서 그치고, 우리의 주제 “관념”으로 가보자.

“이데아”를 설정한 플라톤의 이 용어가 “관념”으로 번역된다. 이데아는 영원하고 불변하며, 지적 본질 또는 지적 형식을 나타낸다. 그리고 감각적 사실들은 이 이데아에 참여한다(분유한다)고 한다. 이 “이데아의 세계”는 지상의 세계, 또는 물질적 세계에 대립된다. 또한 이데아 세계는 진실한 세계이며, 지상의 세계는 가상의 세계 또는 현상의 세계라고 한다. 게다가 플라톤은 이 다수의 관념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설정하고, 이 관념들이 현세상의 모범이라 한다. 그리고 이 관념들의 최고의 관념은 선의 관념이라 한다.

플라톤의 이런 생각(id?e)은 아름다움(미 美)을 판단하면서,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인간들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판단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논쟁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아름다움의 관념은 인간의 인식과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즉 미의 관념은 인간과 별개로 존재한다. 마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처럼. 그럼에도 인간의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점에서 어떤 이는 담론은 당시의 시대와 관계있다고 하고, 플라톤이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싸움을 위해 이러한 주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상대주의 세계를 전복하기 위하여 진실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것이라 한다.

나는 이 전복이 현실적 개념의 기준을 삼기 위한 노력이지만, 심층에서 우러나는 새로운 개념의 생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여긴다. 아름다움의 관념은 기준이 아니라 어쩌면 상징으로서 이상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환희의 외적 표현일 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아름다움을 인간과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이름(유명 有名)일 뿐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란 이름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 만을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데아가 별개적 존재라는 것을 반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당대 그리고 중세 이르기까지의 문화 속에서 이상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반박하기에는 인간의 삶의 터전이 너무나 열악했다. 단지 있을 수 있다면 거지처럼 살았던 퀴니코스 학파의 사람들이 있었거나 걸승처럼 떠도는 수도자가 있었을 것이다. 열악한 사회조건에서 터전을 부정하고 미래의 저세상에 희망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인민은 현실의 고통과 가난을 부정하고 미래의 삶의 지표로서의 이상을 수용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퀴니코스 학파는 내세와 죽음을 미끼로 담론을 전개하는 것을 사기라고 보았다. 내일의 희망, 미래의 신앙은 현실을 부정하고 개혁하려는 힘일 수도 있지만, 현실의 열악한 조건을 수용하고 묵묵히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아편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르네상스라는 시기 이전에 유명론자들은 관념세계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현실세계에도 미래세계와 같은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유명론자들은 관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 소리(flatus vocis)일 뿐이라는 이유에서 현실의 사실에 부합하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과학은 물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는 관점을 제시한다. 갈릴레오는 천상의 운동이 지상의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 시기에 데카르트는 진실한 관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서도, 그 독립적 존재에 물체의 관념을 포함시키고 있다. 또 그는 사유와 부피라는 관념들이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 속에 두 개의 실체의 존재를 주장한 것은 관념의 전복은 아닐지라도 철학사의 전환이었다.

데카르트는 타고난 관념(l’id?e inn?e)이 “명석 판명”한 것으로 여겼다. 이 관념은 영국 경험론자들의 견해처럼 만들어지는 개념도 아니고, 칸트처럼 절대적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선천적으로 구성된 개념도 아니며 선험적 변증론에서 성립하는 이상적 이념도 아니다. 경험론자들은 대부분 이데아와 같은 신 관념은 이름일 뿐이라고 여긴 데 비하여, 데카르트는 수학적 명증성의 확신으로 창조자로서 신은 아니지만 절대적 관념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근대 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중세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별개 존재로서 관념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났다. 그 대신에 관념이 어떻게 생겨나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세 가지 관념들을 구별했다. (소위 선천적이라고 표현하는) 타고난(inn?es) 관념들, 밖에서 오는 부수적(adeventices 우연적) 관념들, 내가 자의적으로 만드는 인위적(factices) 관념들이다. 표현이 즉 관념이지만, 플라톤의 표현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현대적 번역으로 개념들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타고난 개념(관념)이 신의 절대적 관념에 의해 우리 정신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경험론자들은, 특히 홉스 같은 이는 타고난 관념이 없다고 보았다. 초월적이고 절대적 신앙을 벗어난 경험론자들은 물질적 세계의 일반성에 주목한다. 개념의 형성은 상식(공통감각)을 통해서 경험 속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형성이란 인상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에 각인되어 반복의 결과로서 일반성, 즉 개념이 된다.

이런 귀납적 방식은 흄의 인과성의 원리에 대한 회의로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즉 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에 의한 판단들은 개연적 인식으로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지식의 확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귀결에 이르렀다. 이는 칸트로 하여금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이르게 한다. 칸트에게서 개념은 미리 주어진 2선험적 형식과 12개의 오성의 범주를 가지고 인간이 구축하는 것이다. 이 전환은 데카르트에서 전환이라기보다 플라톤의 관념의 형성에 대한 전환이었다.

플라톤은 관념을 인간이 외재적으로 원래 있는 것으로 믿음으로써 그에 대해 열망하는 (소크라테스적 사랑 필로스의, 심리학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다면, 칸트는 관념을 인간이 선천적 능력과 선험적 구성력을 통해 포획하는 것으로 보았다. 공간의 개념을 예로 들면, 플라톤에서는 공간은 ‘하나’와 ‘존재’처럼 부정할 수 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비하여, 칸트는 공간이 선천적으로 절대적 형식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여겼다.

데카르트에게 관념(개념)은 형식적이 아니고 실재적이지만, 그 실재성으로서 공간 또는 부피를 이해하는 데에는 생물학적 일반성의 관념이 도래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베르그송은 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서양 철학사가 데카르트 이후 400여 년을 인간의 이기심(틀뢰즈 용어로 포획성)으로 인하여 실재성을 상실하는 길로 나갔다고 하면서 한탄한다. 그는 이 버려진 미지의 세계로 길을 돌려놓고 심층으로 탐구해 들어갔다. 그래서 2500년 이래 플라톤주의자들의 전도된 심리학을 바로 세운 것이 베르그송 자신이었다고 한다. 이를 이어 들뢰즈는 그의 철학을 “개념의 생성”이라 부르면서, 생성의 철학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 했다.]

어쨌거나 인간 지성에 대한 관점이 관념의 원리 또는 본성에서 관념의 형성 또는 생성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칸트에 이르러 관념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올바른 사용을 구축하게 된다. 칸트에서는 플라톤주의자의 관념은 이상에 속하며, 개념과 판단을 통해 과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철학이다. 이에 비해 들뢰즈 철학은 이상을 상징으로 바꾸고 상징은 의미가 여러 가지라고 한다.

나는 이쯤에서 “가라리 네히어라”에 비추어 정리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상으로서 관념이며 상층이라는 한 ‘가라리’며, 데카르트에서 두 실체는 표면의 이중성이다. 즉 표면의 이 중성으로 두 ‘가라리’다. 경험론자들은 표면의 겉면을 공격하면서도 상층으로 공략하러 올라가다가 자기 회의에 빠졌으며, 칸트는 표면의 겉면을 인정하기 위해 표면의 속면으로서 선험적 형식과 범주를 내세웠지만, 이 두 가지를 다시 표면의 겉면으로 올리고, 속면의 생성에 대해 (생물학과 심리학의 도래를 보지 못하고 죽었기에) 무지했기에, 다시 말하면 물자체를 수동성의 영역의 일부로서만 보고 나머지는 버려버렸기 때문에, 심층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전회” 또는 “2400년 철학사를 전복”하지 못했다. 이 심층이 나머지 ‘가라리’이다. 자, 인간 의식에서 심층으로 들어간다는 것, 보다 정확하게 심층에서 솟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때가 되었다.

칸트의 개념 구축은 매우 중요하다. 오죽 했으면 들뢰즈가 자신의 생성의 철학이 칸트 위에 서 있다고 했겠는가? 칸트가 죽은 시기(1804) 이후 즉 19세기 이래로 세상은 이전 시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 방면에서 빠른 속도로 달라졌다. 프랑스는 이미 대혁명을 겪었다. 모든 인간이 자유, 평등, 박애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물질 문명이 인간의 의식을 변하게 했다. 왜냐하면 사물들을 다루면서 인간에게 이롭게, 유용하게, 실용적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학설이 이 세상의 변화에 걸맞게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또한 인간은 스스로 개념을 구축하였듯이,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을 열 가능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신의 존재에 의탁하지 않고, 심지어는 신과 같은 창조자로서 세계에 대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르네상스 시대와 엄청난 차이로서 새로운 생산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미래를 당겨서 현실에서 풍요와 안녕을 통한 평등의 터전을 곧 구가하면서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증기기관과 모터의 발달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소외는 더욱 심화되고, 빈부의 격차는 어느 시대보다 인민의 삶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인민에 의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관념을 논하는 자들이 아니라, 경제적 기반에 대한 정치학을 말했던 맑스였다. 맑스는 새로운 개념의 구축이 변증법적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언젠가 다가올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칸트가 뉴턴 물리학의 인식적 토대를 주기 위해 개념을 구축한 것에 비해, 새로운 관점으로 개념의 생성을 보여준 것은 프랑스의 유물론자 전통에 선 의학생물학자들 중의 한명인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였다. 그는 역사가 어떤 주제자에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이 생명 생성의 터전을 이념(l’id?e)이라 불렀다. (이것은 어쩌면 자유의식의 상층으로 향하는 과정을 이념이라고 불렀던 헤겔과 대척점에 있다)

심층에서 생성되는 원리를 이념이라 부르게 되면, 소박한 유물론자는 그것을 생기론이라 한다. 이 의학생물학의 유물론은 물자체(심층)로부터 유익한 것만을 물체로 구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자체(자연 자체)가 생명을 생성하고 자기 단위 속에서 자치적이고 자기 조절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생명이 중동의 전설에 따라 삼천리에서 나온 설화의 영감이 창조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생성되었다고 하면 생명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질 수 없는가? 그는 원리로서 이념을 세우고 생명체 속에 이념이 있다고 주장한다.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이를 이어받아 주장하듯이 생명체의 이념은 오랜 생성과정에서 생성한 실재적 일반관념(표면이 상상 또는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일반관념을 들뢰즈는 개념의 생성이라 부른다. 그런데 서양 철학사적으로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관념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일반 관념(개념)을 형성하였지만 그 체계의 단일성(통일성)에 부딪혀 상층의 관념을 인정했던 것과 달리, 이 의학생물학은 지금까지 오랜 과정에서 변화하는 힘에 의해 새로운 물체가 형성되고 이 형성된 신체(생명체)가 지니는, 또는 타고난 일반 관념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일반 관념(생성된 개념) 중에 데카르트의 부피(l’?tendue)도 이에 속한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개념이며 태어나면서 갖는 개념이다. 이것은 베르그송 용어로 생명체 속에 등록된 것이다. 이 개념은 칸트가 말하는 포획하는 개념으로서 신체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생체 속에 오랫동안, 심지어는 생명의 역사 모두를 등록한 일반 개념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회상(r?miniscence)과 달리, 베르그송이 기억(la m?moire pure 순수기억)이라 부르는 이념이다. 베르그송은 관념의 동일성과 다른 의미에서 이 이념에도 동일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인격성이라 부르고, 심층자아에서 표면자아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의 현전을 지속(la dur?e)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동일성은 기학학적 동일성(l’identit?)과 같은 단어이지만, 지속을 정체성(l’identit?, 생명정체성)이라 부를 수 있으며, 이념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이 이념은 상징으로서 상층의 동일자에 대한 이데아와 전혀 다른 대척점에 있다.

물체의 형성에 대해 개념 형성을 소박한 유물론이라 하면, 생체의 생성에 관한 것을 실질적 유물론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실재론은 형상적 형이상학이라 한다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란 표현은 표면의 이중성의 실재성에 대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고, 르네상스 이래로 400여년을 지난 후 회복한 실재성, 즉 전도된 실재성을 바로 세운 베르그송의 실재론은 질료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전복의 철학을 제시하면서, 생명 기억의 움직임 또는 이 능동성이자 잠세성을 노마드라 불렀다. 그에게 있어 표면 위의 겉면에 재현하는 칸트 식의 구축개념의 형성은 도구주의의 포획의 일부일 뿐이다. 표면 위에 말달리듯 선을 긋는 것을 노마드라고 부르는 것은 들뢰즈에 대한 곡해이다. 들뢰즈의 노마드란 의식의 흐름, 기억의 능동적 종합, 생명의 자기 발현이 심층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표면의 약한 균열을 뚫고 나오는 연기(jouer)이다. 연기의 일반적 또는 공통적 감각을 상식이라 부르고, 그 상식의 일반화를 개념이라 부른다면, 플라톤주의 철학을 이용한 플라톤주의의 전복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성은 의식의 흐름이며, 기억의 총체이며, 그 총체의 발현에서 자유가 있다. 철학은 오랜 과정 속에서 인격성의 자유 실현에 대해 기대해 왔었다. 그 기대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표면 위에 선긋기하는 철학 즉 규범의 철학은 정태적 철학에 불과하다. 인격성의 운동전개에 따른 동태적 철학의 도래는 이미 있어왔다. 그 실행이 남아있을 뿐이다.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가라리 네히어라-‘물질’이란?

물질: (그리스어)m?t?r, (라틴어)materia, (프랑스어)mati?re (독일어)Materie, (영어)matter,

*대부분의 철학사전에서 라틴어 마테리아(materia)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잘 쓰여졌다는 동녘에서 나온 『철학대사전』을 펼쳐 보라. 왜 우리는 이런 철학사적 의미의 개념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가? 의심해 볼 필요는 없을까? 그래서 “물질”이라는 의미를 지닌 용어는 아니지만,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planomene aitia 방황하는 원인)에서 나온 그리스어로서 어머니를 의미하는 메테르(m?t?r, 어머니)라는 단어가 물질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위에 첨가한 것이다. – 다른 한편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휠레(hyle)와 관련 되고, 그것이 라틴 철학에서는 물질 개념으로, 즉 시니피에로 연결되어 근대철학에서의 물질 개념 정립으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실천하거나 사유하거나 놀이하거나 간에 인간은 일반적으로 주체와 사물이라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이 주체와 대상이란 것은 인간이 다른 것과 떨어져 있다는 가정을 한 뒤에 성립한다. 과연 인간은 주객 이원적 철학이라는 것이 있기 전에도 ‘나’와 다른 것이 주객처럼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그 먼 과거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은 찌꺼기와 상상을 통해 과거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설명을 만들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손쉽게 그 먼 과거 어느 날 신이라는 영감님이 ‘하늘이 있으라’ 해서 있었던 것처럼 하늘이 있었다고 믿는다. 이 사람들은 마치 만화경에서 처음 이루어진 질서가 무질서 가운데 아름다운 질서를 형성하듯이, 무질서 다음에 그 영감님의 질서가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다른 이들은 이 질서 성립의 이야기를 반박하기에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아서, 자연이 그 자체로 이루고 있는 중이라고 여기지만, 우선 잘 모른다고 말할 뿐이다.

그 질서 성립의 주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또 우리가 그 주체의 이름을 붙여본다면, 유명론으로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자연이 거의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체로서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경우를 보자. 한편에서는 주체로서 권위를 가지고 행사해 왔던 것으로 여기는 하나님이 있고, 그가 절대성과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여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시대의 과학이 주체에 관해 해명할 수 없을 때 상식으로 그렇게 말하자는 정도에서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성립한 것으로 여긴다. 주체로서 자연은 무엇인가? 아무도 그 과정을 아직 다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철학사에서 세계가 ‘있으라’ 해서 있는 것인지, 또는 잘 알 수 없지만 어떤 물질이 자기 변화에서 여러 가지로 변형했는지, 이들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후자의 입장에 서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이 세계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자문하면서, 그것은 원질(arche)에서 생겨나서 변형되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혼돈에서 질서라는 어떤 한 방식을 생각했던 부류, 그리고 근원적인 물질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부류 사이에서, 전자는 하나의 질서를 설정하면서 이에 맞지 않은 다른 질서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후자는 질서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생성하는 가운데 이런 저런 질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탈레스 이후에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 또는 물질에 대한 어떤 논의가 있을 수 있는가? 진정으로 플라톤주의자들처럼 이데아는 진상이며 물질은 허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철학사적으로 주류를 이루는 생각이었을까? 내 생각에, 물질이란 이데아(관념)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인데, 이상하게도 플라톤시대 이래로 물질이 비하되고 관념이 우월하다고 여겨진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래서 ‘물질’ 개념에 대한 상상력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유물론(le mat?rialisme), 역사적 유물론(mat?rialisme historique) 등에서 쓰는 ‘물질’이란 개념이 물질의 근원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근접해서 나온 것인지를 되물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물질이란 개념은 라틴어 마테리아(materia)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에서 쓰는 물질 개념은 당연히 라틴어를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것을 가볍게 추리할 수 있다.

내가 ?가라리 네히어라?라고 한 것은 사유에서나 세상살이 문제에서 네 가지 생활양식(modus vivendi)이 – 내가 지어낸 개념이지만 그 만큼의 사유양식(modus cogitationis)이 – 은연중에 있어왔음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네 가지 생활양식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일반인들은 각 편의 둘씩을 하나로 모아서 존재와 무처럼 극한적 인 두 사유양식이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양극의 둘로 갈라지기 이전에 양극을 얼마간씩 포함하는 중간의 것들, 즉 중간에서 양극의 일부들을 수용하여 형성하는 중간의 둘들은 개별적 사태들의 일부이며, 매우 다양한 사유 양태들인 셈이다. 왜냐하면 양극의 중간에 위치한 혼합적 사실들은 각기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중첩적 현상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중간을 양극과 연관하여 각 극에 관계맺는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중간도 이중이라고 한다. 이 중간의 이중으로서의 둘은 간단히 말하면 어느 쪽 극단으로 기울어지기 이전의 한 몸의 두 측면, 즉 상상의 두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상징으로 형상의 극과 실재로서 물질의 극 사이에서 이중성을 띠고 있다. 이로서 우리는 두 극단의 둘, 그리고 그 극단의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 중간 양식의 둘, 이 넷을 ‘가라리 네히어라’라고 한다.

이 관점을 적용해 보면, 흥미롭게도 한편으로 탈레스에게서는 생성의 원질이라는 실재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와 파르메니데스 학파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수 또는 하나의 존재가 먼저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 둘만을 보면 가라리 둘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플라톤이 세계의 생성 또는 우주 발생에 대해 그럴듯한 긴 이야기를 쓰면서 가라리 둘이 아니라 여럿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가라리 여럿으로 갈라진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편에서 이데아는 자신의 닮은 모습을 가상이라는 세계에 데미우르고스를 통해서 실현하려(조작하려?) 한다. 그런데 그 가상에도 자기 성질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상부의 권력이 이념을 인민에게 강요하지만 인민은 인민의 의지와 욕망이 있어서, 그 권위의 적용이 잘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의 그럴듯한 이야기에 상상을 보태보자. 우선 이데아라는 진상의 여럿들이 자족적으로 있다. 이 진상을 가상에 적용하는 데미우르고스를 따로 떼어놓고 있는데, 이 작용을 논외로 하자. 진상과 가상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가상에는 여러 성질이 있어서 이데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있고(추종자, 복사물), 그리고 어차피 따라봐야 그들의 욕망이지 인민의 욕망이 아니라며, 이데아와 연관없이 스스로 생산하려는 부분도 있다(생성자). 이 양쪽을 관망하면서 추종자를 모방할 것인지 생성자와 함께 새로운 모방물을 만들어 볼 것인지 하는 부분도 있다(놀이자).

즉 이데아가 한 가지이고, 그와 반대의 생성자가 한 가지이다. 여기에 이데아 쪽을 바라보는 추종자의 가지도 있고 생성자와 협력하며 는 모방자의 가지도 있으니 이들을 보태보면, 가라리 네히로구나. 그런데 이데아를 제외한 세 가지 가상은 이런 여러 성질로서 중첩되고 층위를 지니며 어떤 경우에는 압축된 이름을 지닌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방황하는 원인, 방원) – 들뢰즈의 표현으로 ‘미친생성’, 베르그송의 ‘생명’, 스피노자의 ‘자연’과 연관 있다 – 라 불린다.

‘방원’은 이데아에 대립(대립을 모순이라 하는 자들이 전쟁을 만든다)한다는 점에서 질적 다양성을 지닌 차이들로 되어 있다. 이 방원은 그 자체가 인식적으로 무가치나 비합리도 아니고, 윤리적으로 악도 선도 아니다. 단지 이데아와 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생성의 부분들일 뿐이다. 진화 역사의 긴 과정에서 ‘방원’의 생성 자체가 자신의 내용을 표현하면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 생성 중에서 어느 것이 이로운 것인지, 또한 생성의 실재성이 무엇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그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지성이 지닌 한계에 따라 선호도를 가질 뿐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이 지성의 한계일 것이다.

이 ‘방원’은 플라톤 자신이 그럴듯한 이야기로 쓰려 해도 해명이 잘 안되었기에, 대부분의 관념론자들의 구구한 이야기를 거치고 난 뒤에 원인으로서의 수용성 정도로 여겨졌다. 특히 방원은 들뢰즈 표현으로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원인으로 표현된다. 이것을 플라톤은 상상적으로 ‘공간(ch?ra), 자리(hedra), 보모(Titth?), 어머니(m?t?r)’ 등으로 명명한다. 나는 여기서 마지막 개념, 즉 비유적이고 상상적 개념인 ‘어머니’라는 말에 주목한다.

누군가 서양 철학사에서 적대의식을 남긴 가장 큰 죄를 지은 학설들 중의 하나가 피타고라스의 이분법이라 했다. 그 여러 이분법들 중 하나로서 규정적인 것과 비규정적 것을 1과 2(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음과 양으로)라는 방식 나누고, 초기에는 전자는 남자 후자에 여자를 단순 대비시켰다가, 나중에는 모순이라고 강조하고 의미 확장하여, 전자에 지배, 후자에 피지배를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분법을 단순한 상상력에서 나온 과장이 아니라고 본다. 후기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과 더불어 이런 이분법적 구별에 의해 전자를 선으로 후자를 악으로 나누고, 전자의 선이 지배하고 후자의 악을 전자의 기준에 맞게 교정하는 것을 합리적인 것처럼 착각했다. 이러한 방식은 군주와 백성 사이에서 제국과 피식민 사이로 이어지며, 상부 이데올로기의 합목적과 하부의 수용, 권력의 절대 권위와 인민의 복종 사이에서 모순이라는 이름으로 강압적 지배로 나아갔다. 실제로 이것을 야만의 폭력이라고 고발한 것은 가타리와 들뢰즈라 할 수 있다.

다시 돌아가 그리스어 어머니(m?t?r)라는 용어에서 라틴어로 마테르(mater)로의 변전을 살펴보자. 이 마테르(어머니)라는 단어는 물질이라는 라틴어 단어 마테리아(materia)의 어원이라 한다. 왜 철학사는 물질의 개념을 어머니라는 의미와 함께 했을까? 플라톤에서 공간(ch?ra)의 단순 수용성과 수동적 종합성인 어머니(m?t?r)가 동급의 성질은 아니지만 ‘방원’의 다양한 이질성(차이와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라틴어 마테르가 수용성이면서도 생성을 지닌 종합성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철학사는 물질 종합성을 제거하고 자기 생성력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을까?

여기에서 나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들의 사회가 크리스트교의 지배를 받아서 물질성이 스스로 영혼을 만들면 안 된다는 사유, 이데아를 물질에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방원’과 이데아의 두 극이 있고, 또 이데아의 단순 수용의 겉 부분(겉감 윗표면), 방원의 생성이라는 수동적 종합을 포함하는 부분(안감 안표면)이 있다. 이 ?가라리 네히어라?에서 상상의 부분으로서 겉감과 안감이라는 이중성을 상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겉감이 이데아의 모방물로서 겉모습이라면, 안감은 생성자의 오랜 과정의 귀결로서 내용이다.

이로서 안감은 어머니 물질로서 생성이며, 아버지 없는 생성의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가정하는 이들의 측면에서 보면, 안감은 미친 생성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안감의 생성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또다시 이데아에 말려드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상상에 빠질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질료 속에 형상이 먼저 들어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프랑스 18세기 계몽기의 유물론을 첨가해보면, 이 생성의 물질에는 아버지가 없다. 그러면 18세기 계몽기의 유물론에서 생성은 이데아 없이 어떤 모습으로 생겨날 것인가? 그 생성은 그들의 주변을 모방하면서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 생성은 이데아가 없지만 오랜 과거의 경험과 기억으로, 또는 생명의 의지로, 또는 자연의 자기 원인의 발생으로, 안감을 형성하여 만들어 낸다. 이것을 스피노자는 자연의 표현이라 한다. 결국 생성에는 물질성과 안감이라는 다른 가라리 둘이 있다.

물질의 생성이 우연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윗표면과 안감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표면의 표현을, 나중에도 이야기하겠지만, 엄격하게 구별하여 물체(물질이 아니며, 신체가 더 적절할 것이다)의 이중성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물체의 이중성에 대한 관점에서 윗 표면을 중요시하는 유물론자는 생성의 근원으로서 마테르(마테리아)를 말하기보다 어떤 방식이든지 결과 또는 효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유물론 이전에 이중성에 대해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라고 했으나, 우리가 보기에는 두 양식을 제기한 것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두 속성이라 불렀다. 하나는 사유이고 다른 하나는 부피라고 부르지만, 나는 사유 실체란 데미우르고스의 변형으로 기하학적 사유이고, 부피 실체는 새로운 자족적 개념으로 유물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즉 그 사유는 위 표면이며 부피는 안감인 셈이다. 이 안감은 철학사가 전개됨에 따라 물체의 부피 속에다가 에너지와 생명과 기억을 보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물체’(사유실체)의 주체는 부피 바깥(겉표면이나 상층)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자연과도 신체와도 분리되지 않은 방황하는 실체’로서 안감과 그 생성 속에 있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길은 멀기만 하다.

이쯤에서 과학이나 지식이론에서 설명하는 물질 개념의 다양성을 살펴보자. 아리스텔레스가 질료-형상론에서 질료라는 개념을 창안해냈다는 것은 장점이다. 그 질료인 물질은 이데아라는 형상에 대립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질료 개념을 이데아(idea)에 대립시켰지만, 그 질료 속에 형상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질료(물질)는 능력(puissance) 즉 잠재성(virtualit?)으로 정의된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물질의 요소들이 근본적 실재성이다. 그것들은 불연속적 아톰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다양하게 결합한다. 데카르트에서 물질은 정신과 대비되는 신체로서 실체이다. 그 실체의 속성은 부피(l’?tendue)와 운동이다. 따라서 그 실체는 공간적 도형의 개념들과 기계적 운동으로 설명된다. 디드로에서는 결국 물질이란 역동적 실체이며, 관성적 물질에서 생명과 사유에까지 근본적 형식들로서 연속적 방식으로 변형된다.

소박한 유물론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 이래로 물질을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있다. 이는 물질 자체보다 물체의 형성(결과)에 관심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사유는 근대과학에 깊은 영향을 주어 물질의 외적 정량을 다루었다. 그러나 결합 방식의 에피쿠로스적 조합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원자적 결합들의 역량들이 발견되고, 그 내부의 성질을 다루면서 물질 자체의 개념이 새로운 추상 즉 새로운 관념이라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서서히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이 세계의 생성에 대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물질 자체는 기하학적 크기와 물리적 운동들로 다룰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 예외적인 물체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생명체의 생명과 의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럼에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회귀의 측면도 있는데, 그 회귀는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생성을 한다. 이점에서 수학적이 아닌 다른 유물론자들로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를 주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 과학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은 세계 내에 있으면서도 세계에 대해 탐구와 조작을 잘 실행한다고 여긴다. 이들은 또한 과학적 실행에 들어가면 갈수록 인간으로서 행하는 것이라기보다 도구의 도구가 실행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런 확장에 따라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은 물질 자체를 해명이 잘 안 되는 형이상학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래도 이 학문은 인간이 언젠가 모든 물체를 해명하고 곧 인간이라는 물체도 해명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 미래는 아직도 불확정성이다. 그렇다면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본성들은 점점 더 관찰할 수 없게 되며, 또 물질이란 개념은 점점 더 추상화되어 이론적으로 개념화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이 물질이 관념을 통해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가설은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데아란, 물질이라는 원질의 생성, 운동성, 방황성, 거친 성질, 공포성 등에 대한 불확실성과 인간의 규정을 넘어서는 비결정성을 한탄하다가 회고적으로 만들어 낸 거푸집이 아닐까? 이것이 인류가 물질을 잘 몰랐던 어린 시절에서 나온 사유의 반영이 아닐까? 아직도 이 사유에 젖어 어느 늙은 불임의 영감님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유아기적 상상의 반영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닐까?

유아적이고 어린 시절의 상상에도 불구하고 생성은 다른 반복을 행하며 지속되고 있다. 성장한 인간은 새로운 생성을 받아들이고, 그 생성의 결과 속에서 공통의 것을 모아보는 노력을 하고 있지나 않은가.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가라리 네히어라 – 개념의 사중주

우리 사회는 좌파와 우파라는 이상한 놀이 규칙에 빠져 있다. 한 쪽은 법 없이도 착하게 살 수밖에 없고, 다른 쪽은 법대로 하자면서 ‘차카게 살자’라고 강제하고 명령한다. 어떤 이는 서로가 공감하며 정직하게 살 수밖에 없고, 어떤 이는 순위와 차별이 있는 세상을 인정하며 ‘정직하게 살자’고 주장한다. 정직하지 않은 어떤 재벌은 ‘정직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자신들은 정직하니 다른 이들도 정직하라는 유머(의미)를 전달하면서 은근슬쩍 그 자신들도 정직한 부류에 끼워 넣는다.

예전에는 ‘민주공화’라고 이름을 쓰는 이들이 군사독재를 하였고, ‘민주정의’라고 부르짖는 이들이 장충체육관 독재를 실행하였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이어질까? 좌파와 우파, 생명질서와 기하질서, 빨갱이와 파랭이, 표면을 기준으로 심층(深層 profondeur)과 상층(上層 hauteur), 하부의 구체적 노동과 상부의 이데올로기 등으로 알려진 이런 개념들은 일상에서 많이 쓰이고 있음에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와 적용, 그리고 사용과 의미 소통이 잘 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절까지, 즉 성인의 문턱까지는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반복하여 노력하며 공부한다. 이들은 순박하고 착하다. 이들은 마치 수학의 몇몇 개념이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믿고 있듯이 우리에게 태어나면서 지니는 개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와 직선이 그러하다. 그러나 조금 더 반성을 해보면 개도 소도 하나라는 것을 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개나 소도 주인에게 달려올 때 갔던 길을 거꾸로 이리저리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똑바로 직선으로 되돌아온다.

사람이 개를 대할 때 개는 그 사람의 얼굴빛이나 행동에서만 그 사람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개는 그 사람의 몸 상태, 감정, 깊은 곳(심층)에서 우러나는 애정에 따른다. 동물에게도 현상의 형태에서 오는 일시적 판단과 심층에서 나오는 경향에는 차이가 있다. 미성년에서 성인이 되면, 표면의 일상 현상을 형상화한 상층의 논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만들려고 욕망하는 심층의 경향으로 공감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표면으로부터 제기되는 이중성은 철학에서 관점의 ‘차이’이지, 세상살이에서의 ‘차별’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라는 이름의 이중성은 수리와 생명 사이에서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말하는 추억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내용에도 이중화 현상이 있다. 이 이중화는 모순 대립을 주장하는 이원화가 아니다. 인간은 현실에서 살며,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여전히 작동시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억 중의 일부는 현실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스스로 억제된다. 즉 현실에 맞는 기억을 작동시키고 잘 맞지 않는 기억을 잠재워 둔다.

회사라는 곳의 대화에서 상사가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말한 직원은 아마도 의 김용철처럼 쫓겨날 것이다.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요령이 없는가, 그 자리에서 해서 될 말이 있고 해서 안 될 말이 있지”라고. 말해서 안 될 것이 있는 것처럼, 삶에서도 기억에서 나오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자기 검열이 있다.

자기 검열이 잘 된 이들은 기억들이 마치 서랍 속에 정돈된 물건들처럼 즉 기념물처럼 잘 정리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 사람은 서랍 밖에 자기가 있듯이 기억도 자기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자신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그 착각은 자의적이다. 자신이 밖에서 세상을 조작할 수 있은 것처럼 여기는 착각은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그 세상 속에서 살면서 행하는 것이지, 자신만이 바깥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하는 세상(공동체)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지난하다. 서랍 속에 든 기록들을 잘 정리하면서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배제되고 은폐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사람들은 배제된 것을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어떤 이들은 추억의 일부를 지워버리듯이 사람들을 없애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빨갱이 또는 좌파의 딱지를 붙이면서 상대를 적대시하고 멸시하고 또한 지워버리듯이 없애고자 한다. 배제 없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성찰, 반성, 비판을 필요로 한다. 배제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미 잘 정돈되었다고 여기는 개념들과 새로운 관계들 속에서 사용하려는 개념들 사이에서 비판과 반성, 나아가 새로운 개념 이해를 필요로 한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개념들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누군가 세계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그 세계가 그 사람이 살아온 지역인지, 우리들이 사는 지구라는 땅덩이인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이상한 곳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달을 넘어서 어두운 공간까지 총칭하는 것인지를 알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개념의 범위와 사용의 영역을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좌파는 어떻게 사용되며 언제부터 생긴 개념이며, 형이상학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정치경제학적으로 어떻게 쓰이는가? 또는 좌파라는 개념을 한나라당 원내 대표 안상수처럼 군대를 갖다 오지 않은 자가 군대를 갖다 온 봉은사 명진 스님에게 붙일 수 있는가? 그보다 속 깊은 다른 의미가 있는가? 이런 검토로부터 좌파라는 개념이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 여기서 한 가지 예를 제시해보자. 단순히 좌우라는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왼손잡이는 좌파라고, 오른손잡이는 우파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에 양자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새의 날개는 둘이며, 좌우가 함께 움직여야 잘 난다고 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물질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경우, 긴 막대 자석을 N(파란색, 파랭이)과 S(빨간색, 빨갱이)로 표시하여 둘로 분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빨갛게 색칠한 부분을 잘라내 보라. 그러면 남은 부분들이 모두 파랭이로 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잘라낸 파랭이 속에서 절반은 남극으로 빨갱이다. 이런 현상에서 좌우는 무엇일까? 이러한 성찰에서 물리학적으로 입자론의 관점과 파장론의 관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런 반성을 정치경제학적으로 확장하여보면, 상층의 입장에서 표면의 현실을 상층 원리의 모방이라고 여기는 것과 심층의 입장에서 표면 현실을 심층 변화의 생성이라 하는 것에는 입자론과 파장론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한쪽을 맞다고 여기면서 다른 쪽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대립과 적대의 사유가 무엇을 만들었고,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한다. 그런데 심층으로부터의 생성이 구체적 현실이라는 좌파와 상층으로부터 본뜬 모방물들을 현실에서 무시하여도 괜찮다고 여기는 우파, 이 양자 사이에는 어떤 품행의 차이가 있는지는 그 사람의 인생관에 달려 있다.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이해에는 철학적 개념의 함의, 내포, 강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성찰과 이해를 위해 50여 개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제안은 프랑스에서 고교 마지막 학년(고등학교 4학년)에서 청소년의 나이에 철학을 필수적으로 배우고 있다는 점을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철학에 대한 관심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할 것이다.

나는 이천년 역사상 세상에 가장 위대한 개인은 예수라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의 제국, 즉 로마제국에 저항했고 또한 백성을 얽매었던 그들의 종교에 대해 항거했다. 그는 실패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몸주로 남아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자 노력한다. 그를 초월적 신으로 만든 상층주의의 사유는 기만이며 착각이라 본다.

그리고 내가 주목하는 다른 하나의 사건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 전야의 회의에서 왕을 중심으로 하여 귀족들이 오른쪽에 자리 잡고 제 3신분으로서 인민 편인 자들이 왼쪽에 자리 잡은 이후에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가 형성된다. 프랑스 대혁명은 제국의 권력과 닮은 구체제에 봉기하여 왕을 제거하고 승리했으며, 또한 그 시대의 종교에 저항하여 카톨릭 주교 등을 단두대의 이슬로 보내면서 인민의 자유, 평등, 인류애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 혁명은 햇수로 4년이나 지속했으나, 그 반동은 역으로 거세었다. 그 반동의 과정에서 급진 자꼬방을 이어가려는 평등당의 이념을 세운 것이 붉은 좌파의 기원이다. 그리고 200여년이 지난 프랑스는 아직도 좌파와 우파가 거의 반반으로 존속하는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몸주는 더 이상 없으며,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빈 상층, 빈 권력, 빈 중심, 유머로서 상층, 빈 구조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인류사의 기념비적 사건의 귀결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 이상한 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고교 4학년 전학생들에게 일 년간 철학을 가르친다. 이 철학 교육을 받고 난 인민들은 인권과 자유를 무시하는 어떤 권력이 들어와도 항거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 대학에서 철학이 필수였지만 선택으로 바뀌고, 그리고 논술이라는 이름 아래 글쓰기와 자기 소개서 쓰기에 밀려 철학교육이 사라지려는 현실과 그 결과로 인민들의 저항력이 쇠퇴해 가는 교육 현실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왜 철학 교육을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 제국도 카톨릭 절대왕정도 없는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분단의 아픔을 아직도 쓰라리게 느끼고 있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예수의 저항, 프랑스 인민의 봉기에 이어,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세상의 공동체를 생성할 시점에 있다고 본다. 그 노력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서로가 이해 가능하게 개념들을 공부해보자. 그리고 시대의 벽을 부수거나 넘어서려 했던 철학자들을 다시 공부하자. 그 공부가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공동체는 땅의 노동에서, 기계의 노동에서, 기술과 과학의 노동에서, 예술의 노동에서, 제반 학문의 노동에서 공동의 작업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이 공동체(꼬뮤노떼)의 공동이란 영역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꼬뮤니스트들이다. 꼬뮤니스트로서, 빨갱이로서 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세상살이를 여기-지금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참조**
프랑스 문교부 시행안(1970)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철학개념(42항목)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34명)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교육부의 검정필 교재는 없으며, 교수는 성인이 될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개념들을 좌우를 아우르며 다양하게 가르치고 있다.

철학의 개념

인간과 세계 : 의식, 무의식, 욕망, 정념, 환상, 타자, 공간, 지각, 기억, 시간, 죽음, 현존, 자연과 문화, 역사. (14)

의식과 이성 : 언어, 상상, 판단, 관념, 과학적 개념의 형성, 이론과 경험, 논리와 수학, 생명의 인식, 인간의식의 구성, 비합리적인 것, 의미, 진리. (12)

실천과 목적 : 노동, 교환, 기술, 예술, 종교, 사회, 국가, 권력, 폭력, 권리, 정의, 의무, 의지, 인격, 행복, 자유. (16)

인간학, 형이상학, 철학.

철학자들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에피쿠로스 – 루크레티우스 – 에픽테투스* – 아우렐리우스 – 아우구스티누스 – 토마스 아퀴나스- 마키아벨리 – 몽테뉴 – 홉스 – 데카르트* – 파스칼 – 스피노자* – 말브랑쉬 – 라이프니쯔 – 몽테스키외 – 흄 – 룻소* – 칸트* – 헤겔* – 꽁트* – 꾸르노 – 키에르케고르 – 맑스 – 니이체 – 프로이트 – 훗설* – 베르그송* – 알랑 – 바슐라르 – 메를로퐁티 – 하이덱거 – 사르트르 – [들뢰즈, 푸꼬, 하버마스: 필자의 첨가이다.]

이 표시(*)가 된 것은 모든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다루어야 할 철학자들이다. 내가 프랑스 있을 당시 고교에서 인문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철학수업 시간은 연간 일주일에 10-12시간이며, 순수과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는 8-10시간이다. 예능과 체육을 하더라고 위의 표시(*)를 꼭 다루어야 하며, 기술적인 예능의 경우 2-4시간 정도 철학수업을 한다. 한마디 보태면 프랑스에서 1년간 10시간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으로 환산하면 전후 학기 20학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대학입학자격고사(바깔로레아)에서 4시간 시험을 치고, 그리고 질의응답시험(오랄테스트)도 치른다.

이 나라가 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과 봉기를 인민의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철학이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나라가 지배하러 와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속에 동화될 뿐이라고. 그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철학이 그 심층에서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심층, 생명질서, 좌파, 빨갱이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은 고교철학 덕분임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admin@admin.com

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우리집은 아파트인데도 남들 선호하는 로얄층이 아니라 2층이다. 얼마전 딸아이 친구가 놀러 와서는 “하나는 왜 낮은 곳에 살아요?”하지 않겠는가. 이 동네는 아파트 단지이다. 비싸고 살기 좋은 로얄층은 10층 이상임을 아는 나는 당황스러웠다. “응…종은아 베란다 창을 봐. 나무들이 보이지? 사람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하는 거야.” 아파트 창밖으로 시원한 하늘과 까마득히 멀리 지나가는 성냥갑만한 자동차를 보는 게 전부였던 그 아이에게 나의 답이 과연 설득력을 가졌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있기에.

어쨌든 2층이라고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리기 어려운 계단 보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바쁜 시간대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고 시간 허비하는 일 없어 좋다. 그런데 이사 오자마자 발견한 1층과 2층 사이 계단 벽에 있는 낙서가 재밌다. “구준표♡금잔디 / 첫 날 밤”라는 공중파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다. 어른이 써 놓지는 않았을 것 같고, 고등학생들은 유치하다 할 것 같고, 아마 중학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써 놓았을 법한 낙서엔 사춘기 인간의 설레임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사춘기 인간. 소년, 소녀도 아니고 꼬마도 아닌 인간.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어린 인간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라서 가질 수 있는 권리, 책임 등이 뒤엉켜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질풍노도의 인간이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 1770년에서 1780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운동에서 유래한 이 말은 F.클링거의 희곡 『질풍노도』(1776)에서 유래한다. 당시 여러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 단연 으뜸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열정과 고뇌.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로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믿거나 말거나 이 작품을 읽고 베르테르의 자살을 모방하여 유명을 달리한 사람은 지금까지 전 세계 20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목숨마저 버리게 할 만큼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칸트에게 있다. ‘보편적 인간 이성에 대한 이념’을 전제하고 있는 칸트는 계몽주의자이지만 주관을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측면에서는 낭만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에게 종속되어있는 수동적인 존재인 인간을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칸트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고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칸트의 대표작을 흔히 3비판서라 부른다.『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인식과 한계에 대하여 밝힌다. 또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의지의 규정과 의지의 자유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마지막 『판단력비판』은 미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칸트는 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 인식의 세계인 자연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인 자유세계의 결합가능성에 관해 논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이 태어나서 맞닥뜨리는 세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자연세계, 다른 하나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정신의 세계. 그런데 이 정신의 세계라는 것은 무한해서 도저히 인간의 지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펼쳐진 두 세계는 영원히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아포리아가 될 수밖에 없다. 뭐든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 싶은 욕심이 철학자들에게는 있다. 물론 포스트모던한 철학자들은 하나의 원리가 일종의 편견이라고 비난하지만 여전히 나는 명쾌한 해답이 있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판단력이라고 하였다. 수학과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와 무한히 자유로운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인간의 능력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미적 대상을 만날 때 인간 안에서 작동한다. 장미꽃은 일정한 형태와 향기를 갖춘 대상이고 우리는 앞에 놓인 꽃을 인식한다. 아직은 아름답다는 판단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무한의 상상력을 잡아다 장미꽃과 연결시킨다. 인간은 장미꽃의 형태를 넘어 그로부터 연상되는 우주의 조화로움, 사랑, 그리움 등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꽃을 찬미한다. ‘알 흠 답 다!’ 어느 배우의 발성을 흉내내서 적어본 것이지만 아름답다를 멋지게 소리내어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순간 정지하는 호흡과 내면이 우주로 확장되는 듯 소름 돋는 느낌. 어떤 예술작품을 보더라도 혹은 듣더라도 아마 그로부터 받는 느낌은 비슷할 것 같다. 칸트는 이러한 미적 판단은 반드시 개인의 사적 이익과는 무관한 공평무사한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사실 사적인 마음이 개입되어 있을 때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어렵다. 모나리자가 아름다운 이유는 내가 그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 것 네 것을 따질 때는 이미 사라져버린다.

칸트는 이렇게 자연과 자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미적 심미안을 탄생시켰다. 칸트에게서 아름다움은 현실 대상의 균형과 조화가 아니다. 또 관념에만 존재하는 영적 대상의 신비로움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마 ‘우주와 인간이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일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예술관은 독일낭만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문학에서는 괴테, 철학에서는 셸링을 출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문득 나에게 천국은 과연 무엇일까하고 곱씹어본다. 사실 최근에는 늘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나도 천국같은 세상이 오길 바란다. 로또 1등, 논문 완성, 백점맞는 아이 엄마, 베토벤 합창교향곡 음악회에서 듣기 …. 어쨌든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천국을 경험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나 로테를 떠날 수밖에 없음을 감지하고는 모든 게 불행이고 지옥이었다. 천국과 지옥이 물질의 많고 적음과 삶의 비루함에서 오지 않고 마음에서 왔던 것이다.

괴테부터 예술의 척도는 고전주의가 지향했던 규범과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주관성이다. 창조적 주관성은 언제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베르테르의 사랑과 고뇌를 읽는 이들은 모두 이전의 문학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느꼈다. 그 무한한 정신세계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손익계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 진정성, 인간행위의 동기만이 주인인 세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아무리 이들을 외쳐 보아도 돌아오는 반응은 “진정한 사랑? 그게 밥 먹여주냐?” 그러나 베르테르는 밥도 안 먹여주는 진정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다 죽었고, 그런 베르테르를 읽은 독자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택했다.

다시 글 앞에서 물었던 ‘왜 사람들은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했을까?’ 나는 그 답이 칸트에게 있다고 했다. 베르테르가 죽은 이유, 베르테르를 따라 사람들이 죽은 이유. 그것은 칸트가 미학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소통 가능성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들으며 나눌 수 있는 소통을 잃어버린 인간은 삶의 모든 의미를 잃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은 잊는다. 눈에 콩깍지 씌웠다고 욕먹으면서도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을. 그리고 그 경험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심정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편지글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편지로 전하는 글이다.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되면 누구에게도 말하려 하지 않지만 진리 혹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누구든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 법이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환희를 친구에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그 사실을 함께 말하고 싶었던 이는 로테였겠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인. 진정한 사랑 혹은 진리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이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주권의 확립으로 구성된 인간 주체는 오롯이 그 자체 완결된 인간이었다. 이렇게 원자화된 인간은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길 줄 아는 소통불가능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칸트가 희망했던 것은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다. 서로 이해하는 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어 진실을 말하건대 진실로 이해하는 관계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칸트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에게는 꼭 말하고 싶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겼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것은 그도 나의 생각에 동조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로 여기에 타인에 대한 고려가 전제된다. 타인에 대한 고려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공통감’이라고 했다. 이제 칸트의 미학은 소통의 정치학을 꿈꾼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판단하듯 나의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을 놓고 서로 소통하고자 한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이란 바로 정치적인 것들이다. 정의, 도덕, 평등, 공동체 등등.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이들에 대해 소통하는 장은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정치, 함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정치라면 그리고 그러한 것을 꿈꾸는 것이 철학이라면 나에게 철학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철학자에게 천리마란…[철학의 유언]

동양에서 철학이란 미지 세계에 대한 탐험이 아니다. 이미 축적된 가치와 세계에 대한 확인이며 체득이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고 체득하는 방법을 몰라 방황하기도 한다. 스승이 필요한 이유다. 동양에서 사승관계를 중시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도통론(道統論)도 나왔다. 인생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때론 어떠한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좋은 스승 찾아 수 십리 수 백리 길을 찾아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교육여건 따라 아파트 가격 형성이 천차만별인 것은 요즘 불거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처음 사학(私學)을 개창했다고 하는 공자의 제자가 3천명이라 하기도 하고 72명이란 소리도 있다. 기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수제자 그룹에 속하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72명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인자(仁者)도 있고, 현자(賢者)도 있고, 오합지졸(烏合之卒)도 있다. 거렁뱅이도 있고, 깡패도 있고, 재력가도 있다. 말재주 좋은 재변가도 있고 어눌한 답답이도 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위정자가 본 제자와 스승 공자가 본 제자,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본 제자의 모습은 같지 않다. 당대 위정자들과 일반 사람들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제자라고 평했어도, 공자가 보기에는 무능하고 똑똑하지 못한 제자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자공(子貢)이다. 자공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주변에서는 공자보다 낫다는 얘기도 자주 했다. 그때마다 자공은 부담스러워하며 더욱 겸손했고 더 노력했다. 이쯤 되면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을 만도 했지만, 공자가 본 자공은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반면 안연(顔淵)은 누가 뭐라 해도 부족한 사람이다. 위정자나 일반 사람 눈엔 그랬을 것이다.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한 나약한 제자였다. 늘 스승의 말씀에 “Yes!”란 말만했지, 감히 “No!”라고 대꾸한번 못했다. 거기다가 본인은 물론 처자식의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무능자중의 무능자였다. 그래서 그는 위정자들이 인정하는 재능 있는 사람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본 안연은 최고로 능력 있고, 최고로 똑똑한 제자였다. 어디를 가도 안연을 제일 먼저 챙겼고, 스승보다 먼저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도 공자는 그의 이름을 달고 살았다. 권력자들에게 추천권을 행사할 때도 으레 죽은 안연을 추천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연대의 공동체 운동[철학의 유언]

연대의 공동체 운동[철학의 유언]

유언을 위한 시대의 통찰, 그리고 소명-
서유석(호원대교수)

 

정작 지역(local)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광역이든 기초든 단체장과 의회 모두 같은 당 일색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두 곳 예외가 생겼지만 크게 보면 전국이 비슷하다. 지방권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견제가 이루어질 리 없다. 설상가상, 자치단체장과 의원의 눈은 중앙을 향해 있다. 후보 선출의 실질적 권한이 당 중앙과 국회의원에게 있기 때문이다. 중앙 정치에 기대어 지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에서는 지역 주민도 마찬가지다. 지방자치가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현실에서는 지방분권도 주민자치도 형식적이다. 그뿐인가. 정작 지역 정치에서는 진보도 없다.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넘어서는 진보정치의 구현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여야 모두 대기업 본사와 공장, 그리고 외자 유치에 한 목소리고, 전국적으로 반대여론이 높은 4대강 사업이건 새만금 물막이공사건 돈이 풀리는 일이라면 내심 오케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호남만이 아니다. 경상도가 그렇고 충청도와 강원도, 경기도와 서울이 크게 다를 게 없다. 지역정치의 현주소다. 지역의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소위 ‘진보의 집권’은 먼 나라 이야기다.

진보대통합(연합) 논의가 한창이다. 과연 2012년 대선/총선에서 진보가 정권을 잡을 수 있을까.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런 야무진 꿈은 버리더라도, 최소한 제2 견제세력으로서의 의석수라도 차지할 수 있을까. 진보 대통합(연합)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진보 정치 운동에 새로운 생명력이 솟구쳐 대(大)변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진보의 집권이나 중심적 정치세력으로의 부상은 쉽지 않아 보인다. 2012년 이후에도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사회는 병들어 가는데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아니, 그때까지 우리는 무얼 해야 하나. 좀 더 적극적으로,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려 어떤 일을 도모해야 하나.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통합은 설득력이 없다. 대책 없이 신자유주의와 한미FTA를 수용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 정리가 선행되지 않는 한,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줄 세력이 못된다. 그러면 진보정치세력은 어떤가. 사회적 양극화, 공공영역 파괴, 복지 후퇴 등 진보적 대응이 절실한 필요한 사회적 난제는 쌓여 가는데 막상 이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가야 할 진보 정치세력은 날로 왜소해지고 있다. 통합과 연합을 거론하지만 일종의 편집증과 조급증에 걸려 지척거릴 뿐이다. 우선 자기 세력이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편집증에 빠져 있다. 여기에 상처뿐인 구연(舊緣)과 정치적 이해관계 갈등이 더해져 좀처럼 논의에 진전이 없다. 또 한 가지, 진보 정치권 전체가 중앙 정치 진출에 목을 매고 있다. 일종의 조급증이다. 겉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내심 2012년 중앙 정치 진출이 최대 과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안 되면 또다시 4년 후에 목을 맬 태세다. 집권은 중요하다. 정치세력이라면 당연히 꿈꾸는 일이다. 중앙 정치 진출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적극적 동의와 지지를 받아낼 만한 사회적 비전과 정책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기 십상이다.

진보 정치의 실현이 계속 지연되고, 변혁의 그날이 무한히 연기되는 그 사이에 보수의 물결은 장강을 이루고 끊임없이 넘쳐댄다. 전(全)세계적 현상이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차곡차곡 사회의 공적 부문을 잠식해가고 있다. 개방과 규제완화, 민영화와 노동유연성 확대의 미명 아래,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의 심연으로 빠지고 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연대’의 삶은 문화에서도 일상의 삶에서도 경쟁과 서열, 우승열패의 강력한 기제 앞에 사라지고 있다. 지역 이기주의, 사회적 무임승차 심리마저 확산되고 있다. 시민의식의 상실, 유권자의 보수화마저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지역의 작은 공동체 운동들이 있다. 마포 성미산의 대안 공동체 운동, 대안학교 운동, 생협운동, 지역과 농촌이 함께 하는 학교 급식운동, 지역 농산물 소비운동(local food), 동네 환경을 함께 고민하는 운동, 비정규직과 노숙자의 자활공동체 운동 등, 다양한 주민참여형 연대 공동체 운동들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거대한 사회문제에 비해 미미한 운동이고 성향도 각색이다. 때로는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라는 한계, 때로는 지역 이기주의에서 출발한 운동이라는 한계,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논리에 잠식될 우려가 있다는 한계 등이 있다. 하지만 정치와 민주주의의 본질이 주민이 참여하여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 있는 한, 이 운동들은 매우 중요한 운동이요 희망의 싹이다. 참여하는 주민을 ‘시민’이라 부를 수 있다. ‘참여자치시민연대’, 지역 시민단체의 이름이지만 어찌 보면 민주주의와 진보의 키워드들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지역의 주민참여운동, 연대 공동체 운동은 크게 보면 아나키즘 운동의 후예다. 아나키즘, 특히 공산적 아나키즘의 특징이 바로 중앙권력의 거부(de-centralization), 연대적 삶(공동체적 삶)의 구현, 그리고 이 공동체들의 느슨한 연합(federation)에 있기 때문이다. 68운동, 소수자운동, 친환경공동체 운동 모두 마찬가지다. 진보 주류는 이런 운동을 백안시해왔다. 반(反)자본의 아나키즘조차도 변혁 운동의 방해물, 심지어 척결 대상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운동의 초점(혁명, 노동자당)을 흐리게 하고 중앙정치를 거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진보정치는 점점 삶의 현장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결국 유럽 공산당도 일본 공산당도 몰락하고 말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의 진보정치운동이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생활 현장, 노동의 현장, 지역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중앙권력의 논리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작아 보이는’ 지역의 자치공동체 운동, 현장의 운동으로 내려가야 한다. 편집과 조급증을 털어버리고, 아래로부터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운동은 비록 작지만, 시장만능을 거부하는 운동, 신자유주의를 틀을 넘고자 애쓰는 운동이다. 변혁의 그날이 무한히 지연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연대적 삶을 실험하고 구현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또 처음에는 주민의 이해관계, 지역과 집단의 작은 이해관계에서 시작되더라도 주민의 참여와 조직적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공적 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운동이고 이미 그런 사례들이 많다. 일본 전공투 세대의 운동가들이 생활 현장으로 들어가 주민참여의 공동체 운동을 구현하는 노익장을 보이고 있다. 중앙정치의 미련을 버린 공산당이 지역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지역정치, 생활정치가 일본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흔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발상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중앙으로부터가 아니라 지역과 바닥에서 시작하여 점차 중앙을 포위해 가는 전략 말이다. 우리의 진보정치세력, 그리고 운동권 세대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지역운동, 공동체운동의 한계로 변혁 전략의 부재를 든다. 하지만 장기적 소강국면에서는 다양한 진지전이 우선이고, 이들이 연대를 이루어내면 변혁의 주요 동력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이제는 이 길뿐이다. 소강국면의 장기화는 시민의식의 왜곡도 초래한다. 박정희 신드롬, 보수와 단견(myopia)의 만연된 무임승차 심리가 그것이다. 진보의 집권이 난망이지만, 설령 집권한다 해도 이 문제, 그리고 지역 민주주의의 부재, 지역 진보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주민참여의 공동체 운동은 허위의식이 참여와 토론을 통해 극복되는 민주주의의 유일한 훈련장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지역은 중앙에 비해 진보적 삶에 대한 논의가 미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교육감 선거는 훌륭한 경험이었다. 공교육 정상화를 목표로 다양한 조직과 세력, 크고 작은 연대체들이 참여하여 토론하고 힘을 모았던 것이다. 생활 현장, 지역의 현장에서는 중앙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소위 민노당/진보신당 간의 악연(惡緣)이나 정치적 이해관계 갈등도 미미하고, 당면 연대 노력의 방해물이 되지 못 했다. 이런 가능성에 불을 지펴, 지역의 진보 운동과 현장의 목소리가 중앙 정치의 조급증과 편집을 깨 나가야 한다.

「철학의 유언」에 웬 정치 이야긴가. 쓰고 보니까 좀 그렇다. 하지만 이런 운동의 저변을 흐르는 사상이 있지 않은가. 그 동안 ‘자유주의’의 그늘에 가려 아무도 거들어 보지 않았던 ‘연대’(solidarity) 사상의 역사가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도킨스(R. Dorkins)에 가려진 굴드(S. Gould)가 있고, 제도권 학계에서 배제되어 온 북친(M. Bookchin) 같은 이의 코뮨 사상이 있다. 마르쿠제(H. Marcuse)를 비롯한 소수자/아웃사이더 사상의 후예가 있고 소수자 운동의 사상적 뒷받침이 될 ‘인정’(recognition) 논의가 있다. 무엇보다 아나키즘의 사상사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 거대 담론과 주류 담론에 치우쳐 온 철학이 이제 눈을 돌려 잘 살펴보고 공부해 발전시켜야 할 사상들이다. 「철학의 유언」을 하기엔 아직 철학적 내공도 부족하고 나이도 젊다. 그래서 앞으로 함께 이런 공부, 진보 사상의 큰 그림 속에 빈 부분, 하지만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서 공부 좀 해봐야겠다.

 

 

사는 게 철학이지 뭐[철학의 유언]

사는 게 철학이지 뭐[철학의 유언]

이관형(서울대)

 

고등학교 때다. 철학과를 간다니까 친구들이 ‘괴짜’ 취급을 했다. 제법 맘이 통하던 녀석까지 ‘사는 게 철학인데 뭘 전공까지 하려 드느냐’고 했다.(근데 이 친구 나중에 철학과 갔다.) 이게 시작이었고 이후로도 간단없이 들은 말이다. ‘사는 게 철학 아니냐?’고.

난 다소간의 오기와 오만으로 이에 답하거나 무시해왔다. 그런데 막상 지금 와서 생각하니 ‘사는 게 철학 아니냐’는 질문(혹은 주장?)이 무슨 뜻인가를 헤아리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아마 이런 뜻이리라. 인생은 누구에게나 녹록치 않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일을 겪는다. 거기서 얻어지는 희로애락이 바로 철학이다. (꿈보다 내 해몽이 더 좋은가?) 아무튼 좀 더 줄여 보면 철학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는 지혜’로 보는 듯하다. 또 하나 이런 뜻도 담겨 있으리라. 누구나 인생을 산다. 그러니 철학은 누구나 얻는 것이다. 그거면 됐지 그 밖에 뭐가 더 있나?

오호라, 이런 거였어? ‘사는 게 철학이지 뭐’가? 가뜩이나 인문학으로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데, 공납금 내고 시간 바쳐서 공부했더니 아예 전문성도 무시해? “아, 이건 나를 두 번 죽이는 거예요.”(정준하)

철학이 인생의 지혜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주지하듯 ‘철학’은 본래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철학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요인은 차치하자. 누구나 지혜를 사랑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철학이 탄생한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은 자유민만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혜에 대해 궁리할 ‘여가(schole)’가 있는 이들만 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학교, 학파’를 의미하는 ‘school’이 ‘여가’를 뜻하는 ‘schole’에서 왔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깨닫는 것은 누구라도, 심지어 노예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모두 철학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깨달음은 깨달은 자의 의견(doxa, 도그마)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견(도그마)은 철학이 추구하는 참된 앎(episteme)과는 관계없는, 나아가 배격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서양철학은 그 출발점을 보통 이오니아학파로 잡는다. 이오니아학파는 우주세계에 관해 의문을 던졌다. 즉 서양철학은 우주론(존재론)적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반면 동양철학, 아니 중국철학의 출발이라 할 선진유가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른 것 같다. 서양식 학제에 따라 뭉뚱그려 철학이라고 하지만 선진유학은 서양철학의 출발이라 할 이오니아학파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선진유학 역시 생산계급이 생산해 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선진유학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서 안정된 세상을 만들 것인가가 주된 물음이었다. ‘사는 게 철학’이라는 말을 굳이 갖다 붙인다면 이오니아학파 보다는 선진유가에 붙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철학이 직업이 된 효시는 칸트다. 근대는 분업(경제), 분권(정치)의 시대였다. 철학도 칸트에 의해 진·선·미가 각기 다루어졌다. 그리고 칸트 자신이 분업의 시대에 걸맞게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철학자가 되었다. 분업이 그 효율성 면에서 얼마나 탁월한 것인지는 이후 진행된 근대 자체가 잘 보여주었다. 철학도 근대 들어 직업화함으로써 더욱 전문 영역화한다.

칸트에 이어 등장한 헤겔은 구두를 만드는 데도 숙련을 요하는데 그보다 훨씬 도야를 요하는 철학에 대해서만 아무런 수고 없이 접근할 수 있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하였다. ‘사는 게 철학 아니냐’는 말에 대해 직격탄을 쏜 것이다. 실제로 철학은 매우 어렵다. 말 그대로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가 되었다. 물론 철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학문분야이건 고도의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게 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헤겔이 비록 일침을 놓았지만 다른 학문의 전문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해명했는데도) 철학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오해가 일상인의 무지 때문이라고 하면 되는 것일까?

칸트는 진리를 사유와 대상의, 판단과 사유법칙의 합치로 파악하고 그 적용범위를 과학적 지식으로 국한하였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진리·비진리를 판단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만약 칸트의 말이 옳다면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상인들이 철학에 대해 오해하는 이유의 일단이 드러난다.

사람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이 세상은 없지 않고 있을까’, ‘세상에서 옳은 것은 무엇인가’, ‘신은 있는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물음을 (꼭 이와 같이 정리된 방식으로는 아닐지언정) 물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건 아니건, 확고하건 아니건) 생각이나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나 입장이 ‘개똥철학’이라고 불릴지언정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사는 게 철학 아니냐’는 일상인들의 오해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거기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다는 자신의 믿음을 내비치면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로마는 철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로마인)들은 오로지 현실을 직시했다. 철학은 오히려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철학 전공자들 중 많은 이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쉽게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근거가 있을 것이나 하나를 꼽자면 이런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철학’의 내포와 외연은 깊고도 넓다. 다시 말해 시오노 나나미의 입장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입장일 수 있다.

만약 시오노 나나미의 언급이 철학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철학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반성은 있어 왔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망각’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였다. 그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이렇게 말한다. “과학자나 철학자는 일상생활에서 탈피하였을 때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생활을 결코 변화시키거나 퇴색시키지는 못하는데, 이것이 일상생활의 위력이다.”

결정적으로 그 이전에 맑스는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바 있다.

나는 독일관념론을 전공한다. 진리가 고작 참인 사태의 다발, 혹은 참인 명제의 다발이라는 데 대해 실망해서다. 그래서 진리는 그보다는 차원이 높은 곳에 있다는 관념론, 특히 헤겔의 관념론에 마음이 갔다. 반대로 영국 경험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영국 경험론은 진리를 경험의 차원에서 다룬다. 그 논리적 귀결로 학적 진리의 보편타당성 내지 필연성을 부정하는 회의주의에 이른다. 고작 회의에 이르기 위해서 철학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 생각이 뿌리서부터 흔들린다. 흔히 칸트의 철학은 앞서 언급한대로 학적 진리의 논리적 근거, 학적 진리의 보편타당성과 필연성을 정초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인간이 운명적으로 제기할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이율배반을 낳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나는 학적 진리마저도 안티노미를 낳는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 어떤 진리가 보편타당하고 반드시 그러한 것인가?

20대에는 우리를 밝혀주고 우리가 따라야 할 별(루카치)이 있다고 믿었다. 역사를 믿었으며,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고 주체라고 믿었다. 언젠가는 평등의 이념이 현실에 구현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 길을 같이 걷는 동료들을 믿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외화하여 그 말씀의 진리됨을 입증하는 전 과정을 보여준 철학(헤겔)도 말씀(관념)을 떼어내고 ‘나름 현명하게(?)’ 받아 들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루카치의 별이 남긴 잔영이 사라지기도 전에, 재빨리 지혜(?)를 터득한 우리는 ‘언젠가는’을 ‘지금 당장’으로, ‘평등’을 신분상승의 막차를 타기위한 ‘경쟁의 평등’으로 받아 들였다. 소위 386은 고시를 봐서 그를 터전삼아 어린(?) 나이에 선량이 되거나 벤처회사를 차려 대박이건 쪽박이건을 찼다. ‘현명한 유물론자들’은 이념이 ‘밥 먹여 주지 않음’을 간파했다. 최영미가 극구 오해라고 말하는 ‘서른 잔치의 끝남’을, 그(최영미)의 말이 옳다면 386은 ‘창조적 오독’을 통해 실현한다.

반응이 더뎠던 이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이들은 세상이 주는 비판을 좀 더 경험했을 따름이다. 세상살이의 녹록치 않음을 경험하던 차에 불어 닥친 IMF는 아노미(anomie)나 반성을 읊조릴 틈을 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늦었든 빨랐든 386, 아니 우리 모두는 ‘정신을 바짝’ 차린다.
‘인생 뭐 있어’가 유행어가 된다. 이 말의 핵심은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이심전심의 공통감(?)에 있다. 이념 웃기고 있네, 역사법칙 웃기고 있네, 윤리·도덕 웃기고 있네. 민중? 좋아하네. 인생 뭐 있어 한 세상 잘 즐기다 가면 되지. 인생 뭐 있어 결국 돈이지!

이런 시대정신(?) 앞에서 모든 이념은 존립의 근거를 잃는다. 남은 이념이 있다면 그건 물신(物神)의 이념뿐이다. 교회에 가도, 절에 가도, 직장에 가도, 동창회에 가도 물질의 소유는 축복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구절은, 왕좌를 물리치고 보리수 아래서 행한 고행은 더 이상 설교·설법의 주제가 아니다. 완전한 세상의 실현으로 여겨지던 성과 속의 일치가, 종교 간의 화해(?)가 ‘물신’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목도한다.

우리는 청춘기의 이념(철학)을 잃고 물신을 얻었다. 왜 전경에게 두들겨 맡고 철창을 드나들었던가? 이후로도 오랫동안 쫓기는 꿈에 가위눌려야 했던가? 출세가도를 달리는 우리도 있지만 왜 적잖은 우리는 연락을 끊고 숨어버렸던가? 왜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던가? 왜 조국을 떠나 이민을 택했던가? 왜 같이 활동한 선·후배·동료들과 서로 상종 못할 ‘웬수’처럼 되었던가? 이러려고?

나는 386과 나의 이야기를 통해 좋았던 과거와 나쁜 현재를 대비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과거가 좋았냐고? 난 대학생활이 터널 같았다. 지금이 좋냐고? 아직도 터널 속이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에는 별(루카치)이 있어서 좋았고 지금은 별이 없어서 좋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좋았고 필연과 당위에 눌리지 않아서 좋다.

‘사는 게 철학이지 뭐’의 요즘 버전은 ‘인생 뭐 있어’다. ‘사는 게 철학이지 뭐’에는 물음의 의미가 다소나마 들어있다. 그러나 ‘인생 뭐 있어’는 대답이지 물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신’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혹여 총애를 받았다 해도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생 뭐 있어’는 ‘인생에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절박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철학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철학은 본래의 의미인 ‘지혜 사랑’을 잃어 버렸다. 지혜는 인간(人間)에, 즉 ‘사람 사이’에 있는 것 아니던가? 철학이 편애해 온 존재론에, 인식론에 일상의 삶과 지혜가 있는가? 아렌트의 말대로 이미 과학이 가져가 버린 ‘진리’에 사로잡혀 정작 자신에게 남은 ‘의미’는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사는 게 철학이지 뭐’는 옳다. 오히려 삶을 배제한 철학, 삶의 의미에 대해 답하지 못하는 철학은 ‘유언’으로만, 철학사적 관심으로만 남을 것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푸른 생명의 소나무라고 말해 주었는데 나는 회색을 쫓았구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는데 내가 만난 부처를 움켜잡았구나. 사는 게 철학 아니냐고 물을 때 난 독사와 에피스테메를 나누고만 있었구나.”

 

친구! 닭 한마리 대신 갚아주게나! [철학의 유언]

친구! 닭 한마리 대신 갚아주게나! [철학의 유언]

이순웅(숭실대 강사)

 

‘철학의 유언’이라니. ‘철학자의 유언’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다만 여전히 마음은 무겁다. 아마도 ‘유언’이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유언이라면 죽음과 떼어놓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지 않는가.

얼마 전 김재현 선생님은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법정 스님을 철학자로, 본인을 철학교수로 규정하였다. 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철학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나름 겸손한 규정이리라.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럼 난 뭐지?’였다. 선생님의 내공을 따라가려면 아직 먼 나로서는 그저 ‘아직 멀었다’고 할 수밖에.

하이데거의 권고와는 다르게 사실 난 죽음을 멀리하고 산다. 어쩌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막걸리 두 잔 먹고 죽음에 대해 잠깐 생각할 때도 있지만 일명 ‘비(非)본래적인 삶’, 이게 내 삶의 대부분이다. 여기에다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를 얹으면 훨씬 더 내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강의 시간에는 내가 아는 이론이나 지식을 들먹이며 “죽음과 정면 승부하라”고 하이데거가 말했다면서 고상한 척도 했지만 실은 나조차도 자신 없는 ‘거짓말’이다.

어쨌든 나에게 ‘철학자의 유언’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철학자는 아니다.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적당히 폼이나 잡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나친 겸손일까. 몇 년 전, 친척 중 한 사람이 내 생년월일을 묻더니 컴퓨터 점을 쳐준 적이 있다. 고지식하다, 공무원이 어울린다 등등 하나같이 ‘정답’이었는데, 공부를 한다면 겉멋으로 한다는 말도 이어졌다. 나는 곧바로 ‘엉터리’라고 응수했지만 어찌나 뜨끔하던지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있다.

‘철학의 유언’이라면 젊은 시절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 신에게 고백을 했듯이 내 삶의 일부를 고백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자기 삶을 한번쯤은 반성해 봐야 죽음 이후에 대한 평가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철학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지만 ‘난 자신이 없다’는 고백, 일단 이것이 나의 ‘철학의 유언’이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산 사람들

어떤 사람이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는 그가 죽었을 때 더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는데 어느 날 옆 마을 어떤 부잣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문상을 다녀온 사람 말이, 문상객이 별로 없더란다. 돌아가신 그 아저씨는 대지주였고 우리 마을 사람 대부분은 그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인심을 잃을 대로 잃은 뒤라 그런 쓸쓸한 장례식을 맞이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가 정년퇴임을 했을 때 아버지의 ‘작은 죽음’을 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허함, 쓸쓸함을 모를 것이다. 물론 정년퇴임이란 게 없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도 아버지의 심정을 모를 것이다. 다만 안타까웠던 것은 왜 실무를 그만 두면 저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날개 없는 천사처럼 무기력해져야 하는가. 권력은 사라졌어도 권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교장에서 할아버지로 전락한 아버지는 ‘옛날에 교장이었음’이라는 이름표라도 달고 싶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죽을 때까지 존경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 나아가서는 사회 구성원에게 이런저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산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존경을 받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잘 살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 기독교도라면, 잘 살았던 그 소수의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근대 사회에 들어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산 사람들은 누구일까. 나는 감히 동학농민군, 빨치산, 그리고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끝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을 꼽고 싶다.

연속극이네 뮤지컬이네, 지금 우리 사회는 명성황후 영웅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일제의 자객에 의해 도륙당한 그이 뒤에는 일본군의 총칼에 스러져간 수만 동학농민군이 가려져 있지 않은가. 그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영웅이다. 진리가 시대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첨단 화력 앞에 죽창 들고 맞선 그들, 이길 수 없는 전쟁, 그렇지만 꺾을 수 없는 확신, 새 세상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권력 수립과정에서는 북쪽이 남쪽보다 권력의 정통성을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퇴로가 차단된 빨치산의 외로운 투쟁 역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난 『태백산맥』의 김범우보다는 염상진과 함께 자폭한 빨치산의 삶이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기는커녕 염상진에게 ‘덕분에 사람답게 살다 죽는다’며 고마워했다. 유엔군과 토벌군에게 졌지만 정의가 이긴 자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빨치산이 비전향 장기수로 가는 길은 너무나 당연한 길이었으리라.

주로 ‘먹물’로 이루어진 지도부가 투항을 결정했을 때,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5월의 시민군’은 계엄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저항한 거 아닐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들의 판단 잣대는 오직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있는가 – 부끄러운 자화상

전두환 씨가 대통령을 할 때 난 학생운동에 몸담았었고 당시에는 교과서적으로 정해진 코스인 노동 현장에도 들어가 봤다. 돌이켜 보면 그때는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산 것 같다. 산다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때 같이 움직였던 사람들과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지금도 여전히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우정이 있다. 그리고 한때는 그 옛 기억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나 이런 사람이었다’며 그때 일을 주위 사람들한테 은근히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과거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참여정부가 들어서고부터는 입을 닫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운동권이 권력을 잡은 게 아닌데, 주위 사람들은 “운동권이 권력을 잡았지만 별 볼일 없다”고 했다. 참여정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로 취급 받는 게 싫었다. 노무현 탄핵 반대는 탄핵을 한 국회(의원)에 대한 반발이었지 노무현 살리기는 아니었다. ‘니들이 뭔데 탄핵질이야!’

그런데 내가 입을 닫은 또 다른 이유는 운동권에도 있다. 9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된다. 노동현장을 나와 방황하다가 대학원에 들어가고 한철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정파적 특성이 강한 어떤 ‘꼴통’ 운동권의 주변인으로 잠깐 활동한 적이 있다. 나의 견해가 자신들의 정파적 입장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즉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나를 퇴출시킨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하겠다. 하지만 그 이후 ‘재정이 부족하니 돈을 내라’며 나를 찾아왔던 것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이미 냈던 수십만 원도 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난 상식조차도 없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제발 당신 같은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안 된다며, 만일 나에게 힘이 있다면 아예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말리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아나키즘이 왜 주목을 받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군사 정부가 끝나고 조금씩 ‘좋은 세상’이 오니 그에 비례해서 ‘자격 없는’ 운동권도 그만큼 늘어갔던 것일까.

하지만 여기까지는 마치 고고한 학처럼, ‘까마귀 노니는 곳에 나는 가지 않았노라’라고 하는 결벽증 섞인 오만함이 배어있다. 거창하게도 동학농민군이네 빨치산이네 5월의 시민군이네 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자신 없다’는 것이 내 대답이다.

학생운동 시절, 유인물 뭉치를 가지고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린 적이 있다. 경찰은 내 허리띠를 빼고 바지 뒤쪽을 움켜쥐더니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런데 우연히 후배가 그 장면을 보는 바람에 연행 사실이 알려졌고 내 동료는 내가 ‘조직’을 발설할 것에 대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소위 ‘이빨을 맞추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우리 과(科)도 아니면서 우리 과 엠티에, 그 먼 곳까지 택시 타고 와서는 ‘조치’를 취할 정도였다. 그런데 재수가 좋게도 나를 조사하던 형사의 형이 우리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의 옆 학교 교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나는 ‘훈방’되었다. “니네 아버지 땜에 살았는 줄 알아, 짜샤!”

풀려난 나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를 취했던 동료에게 섭섭하다 말했다. 설마 내가 발설을 하겠느냐, 나를 못 믿었던 거냐, 너의 행동은 불필요한 것이었다는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런 말이 그야말로 오만함의 극치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데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타 대학 학생들과 연합 거리 시위를 주도하다가 잡혀 조사를 받던 중 ‘견딜 수 있을 만큼’ 맞았을 때, 동료에게 했던 말과 정신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경찰관이 ‘조직을 불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을 뿐, 만일 그런 요구를 했더라면 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발설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길 원한다 했지만 조직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내가 혐오하던 ‘입만 살아있는 사람’에서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

난 고문을 받은 적은 없지만 폭력을 경험했고 그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그런 내가 죽음과 정면 승부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내 청춘을 다 바쳤던,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절, 막상 닥치고 보니 죽음은커녕 잠깐 동안의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나를 보았다.

남은 인생은 어떻게

거창하게 역사적인 삶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미래는 지금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은가. 내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는 내 삶이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헤딩할 자신이 없는 나. 철학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없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 이제 남은 것은 희망사항뿐이다. 그저 다음과 같은 2인칭 죽음을 꿈꿀 뿐.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 1903~1985)는 죽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먼저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서 경험할 수 없는 죽음,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다. 3인칭 죽음은 ‘그의 죽음’으로서 그가 맡았던 기능이나 역할을 곧 다른 사람이 대신한다. 2인칭 죽음은 ‘너의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죽음이다. 2인칭 죽음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죽음이지만, 한쪽 팔이 잘려나간 듯이 아파하거나 망연자실해버릴 수 있는 죽음이다. 바로 이 2인칭 죽음을 겪을 때 죽음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슬픔 속에서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참모습을 통감할 수 있다.

철학자도 아니고 철학교수라고 하기에도 많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저 ‘철학하는 삶’을 희망할 뿐이다. 나는 공자를 잘 모른다. 그런데 우연히 어떤 책에서 공자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니 역시 공자는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지나가고 나자 뒤따르던 제자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단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공자입니다.” “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 말이지요.”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2인칭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잘 산 것일 게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는 내 삶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죽음을 연습해야겠다. ‘작은 죽음’ 말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기도 하기에 선택 전에는 언제나 끝맺음이 있기 마련이다. 끝맺음을 잘해나가면 생물학적 죽음 이후의 나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1958년, 본사 건물 1층 레스토랑에 그림을 그려주는 대가로 3만5천 달러, 현재의 한화 가치로 따지면 약 28억을 주겠다는 씨그램 회사의 청을 거절한다. 이유는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 1970년, “가장 상업적인 것은 가장 예술적인 것이고 가장 예술적인 것은 가장 상업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예술과 상업성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앤디 워홀 등의 팝아트가 유행하던 시절, 그는 갑작스럽게 자살한다. 그의 회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리에겐 잃을 게 없었고 꿈만 있었다.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내 젊은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고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해야 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던 때. 그런데 그 시절이 이제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닌 때가 왔다. 그리고 결말이 불확실한 긴 여행을 떠나는 자유인이기에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보여 불안하다. 그렇지만 추억에서 벗어나, 꿈을 향한 발걸음을 좀 더 힘차게 내딛으려면 꿈만 있는 지금을 행복한 때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유언이란 뭔가 미흡한 것이 있을 때 하는 거 아닌가. 닭 한 마리 빌린 거 갚아달라고 말하며 죽음의 길로 간 소크라테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지 않았을까. 유언이 필요 없는 죽음, 그게 내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