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3)[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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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장애의 벽을 허물다

일주일이 지나도 할머니의 두통은 지속되고 있었다. 대화 중간에 말을 끊고 침묵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침묵하는 동안의 할머니는 마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통의 실체를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두려워하는 듯했다. 60년 동안 할머니의 내면에만 머물렀던 고통의 실체는 크고 단단한 옹이가 되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옹이를 할머니는 ‘몸 안에 묵어 있던 이거’라고 표현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꺼내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혼자 고통을 되새기며 보내는 동안 몸과 마음은 경계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몸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몸이 마음의 장애가 되어 자신을 속박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장애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나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을 때 고통은 시작된다.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속박했던 장애의 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러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마음 사이의 갈등은 할머니의 내면을 분열시키고 있었다. 갈등에 의해 할머니는 마음을 한 군데에 두지 못하고 계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행적을 차마 말로 옮기지 못하고 망설일 때에 시는 공감의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내 죽으모 그거는 인자 남가 놓고” 갈 수 있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면의 고통을 드러낸 시를 죽은 뒤에 남길 수 있는 자기의 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할머니에게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제 그 고통을 남겨 놓겠다는 말은 자기를 외면하고 소외시켰던 세계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하나의 징후이다.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회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취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할머니의 삶을 지배하던 고통의 근원은 몸의 질병과 그 질병으로 인한 삶의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고통의 실체를 시를 통해 드러내는 것은 삶의 장애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징후이지만, 그 징후는 망설임과 갈등도 동반하고 있음을 첫 번째 시에서 알 수 있었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 밤> 전문

이 시에는 고통의 근원인 한센병에 대한 표현은 없고, 할머니의 고통이 단순하게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첫사랑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연의 슬픔은 여름밤 풀벌레 울음소리와 초승달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전이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표현은 할머니의 내면세계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전이와 투사는 시를 쓰긴 했지만, 처음부터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내면의 갈등은 가라앉지 않는 두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같은 한센병을 앓았던 한하운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삶을 궁금해 하는 것은 시가 할머니에게 단절되었던 과거의 세계로 다가가는 소통의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다

할머니는 두 번째 시 <어머니>에서 60년의 세월 동안 결코 멈추지 않았던 사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한센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이듬해 큰병을 앓지도 않았고 시름시름 앓지도 않았지만 자리에 누운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는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입양시킨 후였다. 할머니는 “하늘과 땅 사이에 나만 남았지”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다섯 번째 시 <내 인생길>에서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노라고 했다.

어느 8월 15일

유난히도 밝은 달이었다

내 발걸음은 태화강을 걸어 가

강변에 우둑히 선

반구돌에 우뚝 서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

이것마저도 내 운명이 아니었는가

뱃놀이 나오는 사람들의

구제의 손길에 다시 살아났다.

<내 인생길> 부분

자신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채 물조차 마실 수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이자 태화강으로 몸을 던졌다. 자살은 세상과 단절되어 절대적인 밀폐의 상황에 놓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자기표현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과 한센병 발병이라는 현실에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이 불안이 극대화되자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관계를 통하여 전체를 구성한다.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체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면 ‘자기’라고 할 수 없다.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은 하나의 종합이므로 관계가 없는 인간은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라는 정체성은 혼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있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또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주고 들어 주었더라면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극단적인 행동은 없었을 것이다. 자살은 할머니가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뱃놀이 나온 사람들에 의해 구조됨으로써 할머니는 또 다른 삶을 만나게 된다.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자기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며(<어머니>)” 살아야 하는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내 인생길>)” 인간이기에 “차라리 벼가 되었으면(<내 인생길>)”하는 자기 부정은 분노를 불러 온다. 그러나 분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의식 있는 자는 고뇌하며, 고뇌하는 자는 분노할 수 있으며, 분노는 절망과 달리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신을 스스로 세우게 한다.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고 싶지 않으며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분노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분노에 의해 자기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마음의 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삶을 만나다

혼자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움막으로 찾아 왔다. 조금씩 이상 증후를 띠는 몸 때문에 할머니는 그 남자가 움막에 드나드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며칠을 계속 찾아와서 할머니로서는 구하기 힘든 ‘대풍유’같은 한센병 치료제를 건네주었다. 자신을 약장수라고 소개하면서 중매도 한다고 했다.

“이 동네 저 동네 소문이 난 기라. 한센병 걸린 젊은 처자가 혼자 산다고 옆 동네에서 들었다 카더라.” 끈질긴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지만, 혼자 움막에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더 컸다. 그 남자는 일본에서 한센병 전문의사가 와서 무료로 치료해주는 진료소를 차렸는데, 그 곳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제의도 했다.

할머니가 움막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도 아이도 떠났고, 할머니의 마음은 배고픔과 외로움과 불안감으로 지쳐갔다. 어쩌면 일본인 의사의 도움과 좋은 약을 먹으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지금이라도 병이 나으면 마쓰시타와 아이를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에 그 남자를 따라 길을 떠났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길을 잊을 수 없노라고 했다. “옷 보따리 하나 가슴에 안고 떠났제.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걷고 허름한 시골집 헛간에서 자고 또 걸었제.” 가도 가도 진료소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 그 남자가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때만큼 자신이 한센병에 걸린 게 고마웠다. 겨울의 추위는 낡은 옷과 신발을 뚫고 할머니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사흘째 되던 날, 문득 눈 속에 반쯤 묻힌 자신의 발가락이 더 이상 시리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발가락이 동상에 걸렸다고 막 울었다. 그 놈은 삐죽이 웃더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가 밀려왔다. 더 이상 안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몸은 마음과 달리 그 남자를 따라갔다.

초가지붕이 서로 어깨를 맞댈 정도로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그 중 가장 큰 초가지붕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했다. 의사라고 소개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할머니는 눈이 쌓인 마당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의 엄지 발가락이 꺾어져 발이 몽탕했다. “속았제. 속은 기라. 그 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엉터리 약도 팔고, 나처럼 병이 얕은 처자나 없는 집 처자들을 속여서 집단촌에 넘기는 기라.”

의사라고 소개받은 사람은 자기는 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일본에서 학교 다니던 중 징집을 받았으며, 군 생활 중 잦은 구타 끝에 한센병을 얻었다고 했다. “김철수라카대. 핸섬하대. 친절하고, 예의도 바르고, 마이 배워서 이해심도 깊고….”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흔들며 오래 전의 상황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다.

할머니에게는 병을 고쳐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납덩이처럼 가슴을 누르는 아이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마쓰시타를 찾아가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할머니에게 그런 희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집단촌이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각 떨어져 다른 집에서 거처했다.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되었다. 그게 정부의 시책이었으며, 그 마을이 존재하기 위해선 모두가 말없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그 마을마저 없어지면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또 다시 산과 들을 헤매며 살아야 했다. 부부들은 낮에 일할 때만 서로 얼굴을 대하고 안부를 묻고 해가 지면 서로 다른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곳에서 할머니는 몇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잡혀 곤욕을 치루었다. 때로는 독방에 가두어 놓고 며칠씩 굶기기도 했다. 때로는 사는 게 싫어서 스스로 굶기도 했다. 마지막 탈출 시도 후, 갇혀 있는 방으로 김철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찾아왔다. “혼인하자카더라. 안 하면 인자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하대. 거기서 사람 목숨 하나 사라지는 거는 장난이라.” 나라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그 곳의 법이 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할머니는 혼인했다. 혼인하고 나니 남편은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럴수록 할머니의 외로움은 깊어갔다. 병든 사람들과 마주 대하고 있으면 자신이 금방 무너질 것만 같았다. 눈 속에서 시린 줄 몰랐던 발가락이 하나씩 없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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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회현동 계단>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셰익스피어, 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진정한 광대 [기획서평]

이현숙 (자유기고가)

어두운 무대 한 귀퉁이, 비탄에 잠긴 여배우가 핀 조명을 받으며 주저앉아 있다. 삶의 전부라 여겼던 연인과 이별한 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보인다. 힘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여배우는 점차 분노와 허탈감, 애증과 모멸감에 몸을 떨며 격앙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격한 대사를 토해내다 끝내 실신하는 장면이 이 연극의 절정이다.

나는 여배우로 분장한 딸의 눈에서 순간 ‘번쩍!’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우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안 돼.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지, 조바심으로 입이 마른다. 절규하며 쓰러진 여배우, 그리고 암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의 연기를 해낸 딸이 자랑스러웠다.

 

청년 햄릿을 만나 평생 ‘셰익스피어’를 끼고 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의 말처럼 “연극은 지독한 중독”이다. 무대 중독에 빠져 지내던 딸과 가슴 졸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어미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어린 십대의 딸이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 그것은 땀과 눈물과 고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듯이 나를 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리는 무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곳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없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이다. 그 무대에 서 본 이, 그 무대를 만들고 꾸민 이, 무대에서 함께 호흡해 본 모든 이들은 기꺼이 이 중독에 함께 빠져든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며 조용한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어느 새 훌쩍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이 책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독한 인연은 운명’인가 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하며 만난 ‘햄릿’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금방 잡히지도 않았고, 연하기도 강하기도 달기도 쓰기도 떫기도 맵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날 이후 30년 동안 껴안고 산 셰익스피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독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햄릿>을 만나 처음 맛 본 인생의 온갖 맛과 냄새와 감촉은 청년이었던 저자에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유한하고 변덕스런 인간과의 첫사랑이 아닌 자기 생애의 첫 궤적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체험이기 때문에. 나무 주걱으로 엉덩이를 맞아가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땀과 눈물로 익히고 올라선 소녀의 첫 무대,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헌납해 버린 문고판 명작선 50권과의 만남, ‘햄릿’을 만난 저자의 떨림이 나의 추억 속에서도 파문을 일으킨다.

 

‘희망’의 다른 이름, 셰익스피어 비극

저자는 셰익스피어에게 고리타분한 학술적 접근으로 다가서지 않고 400년이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연출가이자, 배우, 작가, 관객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소개한다. 특히 ‘성격 비극’이라 명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세계로 이끌면서 황홀하고 거친, 그렇지만 발을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숲으로 과감히 이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 저자의 이 같은 시도는 매우 참신하고 친근하다. 마치 무대 전체가 회전하는 원형 극장에 앉아 무대의 뒷면까지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관객의 속마음을 꿰뚫는 노련한 솜씨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중세 연극에 빠져들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소제목에서 저자가 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총 37편의 희곡, 4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 중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4편의 비극을 추려낸 저자는 꿈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옮긴다.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완전한 선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나 선이 이길 수는 없다.”

지뢰처럼 널린 악에 의해 선도 함께 폭발하고 폐허가 된 우주는 새로운 선의 질서로 다시 세워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법칙을 전하면서 저자는 선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강렬한 비극의 세계가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고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어서 비극에 사로잡힌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비극이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본 것인가, 악한 존재로 본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이끌고 저자는 다시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고.

 

<햄릿>, 중세를 걷어내고 고통스런 인간의 삶 투영하다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엄숙한 소명을 스스로 짊어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114쪽)였던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진실인가를 묻는 자였다.

햄릿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세상의 악에 맞서 복수를 꿈꾸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유약한 청춘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도, 여자도 모두 역겨울 뿐만 아니라 복수를 꿈꾸더라도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뇌하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그는 그대로 중세시대의 인간이며, 셰익스피어 자신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세의 화두는 ‘신’에 맞서는 ‘인간’의 성찰이 아니었던가.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엉뚱한 생각일랑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판단은 삼가야 한다”(83쪽)는 플로니어스의 대사가 운명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햄릿을 조롱한다.

햄릿은 인간의 비극이 ‘신’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원형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고통의 삶이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덧붙인다.

 

천성만 남은 ‘왕’은 ‘광대’와 다를 바 없다

“앞으로는 슬픔이 사랑에 따르리라

사랑은 의심에 사로잡혀

시초는 달콤해도 끝내는 쓴맛으로 변하리라.” (<비너스와 아도니스> 1136-1138행)

비너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죽음을 맞은 아도니스가 자줏빛 아네모네로 핀 것을 보고 비너스가 한 예언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모든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저주는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사랑하리라’는 <오셀로>의 소제목은 비너스의 저주보다 더 짙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긴다. 사랑 자체가 인간을 짧은 행복과 긴 슬픔,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걷어치운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 오셀로, 한순간의 광기에 휩싸여 평생토록 사랑한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98~1990)가 문득 겹쳐진다.

흑인 장군이었던 오셀로의 불같은 성격이 지고지순한 백인 아내 데스데모나와의 역설적인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오히려 이들의 파격적인 사랑을 등불 삼아 현대인의 얕고, 약은 사랑을 들추어보게 된다. 나이도, 신분도, 조건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끝내 간교한 이아고에 의해 파멸의 쓴맛을 보았지만 21세기의 사랑은 시작부터 달콤하지도, 조건을 뛰어넘지도 않기에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이어진다.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랑의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파탄에 빠지는 가장 불우한 왕 ‘리어 왕’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사랑하는 부모에 비해 효도하는 자식이 턱없이 희소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오죽 충성스런 신하, 효도하는 자식이 없었으면 충효(忠孝)라는 덕목을 유교의 첫째가는 가치로 내세웠을까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백두난발을 하고 광풍 속을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희망을 보는 듯해 서글퍼졌다. ‘늙음’은 약한 인간을 더욱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리어 왕’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나이 먹은 댓가를 가혹하게 받은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타고난 천성만 남았으니, 왕이나 광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195쪽)라고 조롱하는 광대의 목소리,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이가 일어서는 법이지”(206쪽)라고 내뱉는 에드먼드의 대사가 인생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숨도 멎지 않은 부모의 곁에서 물려받은 재산 다툼으로 혈안이 된 자식들을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고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

어느 새 <맥베스>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우리를 인도한 저자는 셰익스피어와의 대화로 압도해나간다.

셰익스피어에게 묻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또 묻는다.

“희망은 없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양심이 있습니다.”

악마 맥베스가 웃는다. (269쪽)

저자는 또 맥베스에게 묻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것인가요?”

“양심은 양처럼 온순하고 욕망은 이리처럼 사납소” (276쪽)

왕의 살해에 동참하여 함께 손에 피를 묻혔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 “인생이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떠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읊조린다.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이 저절로 묻어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무대 위에서 뽐내며 떠드는 인간의 유형을 ‘무사’와 ‘광대’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사는 세상을 움직이나 광대는 무사를 움직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지만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는 말로 에필로그를 장식한 저자, 그는 진정한 ‘광대’를 꿈꾸는 자이며, 위대한 ‘광대’였던 셰익스피어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극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광대’

인간을 꿈의 세계로 이끄는 무대, 그 무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며 주인공을 빛나게도 하고, 날카로운 유머와 조롱을 날리며 관객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광대’. 세상을 무대로 삼고, 인간을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아 4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광대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한 또 한 사람의 광대, 그는 저자이다. 무겁고 암울하고 참담한 비극을 소재로 한 무대를 순회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보게 한 저자의 수고로움이 광대에 버금간다.

주인공인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여자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스트들을 열 받게 했을 법한 중세인 셰익스피어의 한계는 동시대 조선에서 횡행하던 ‘여인잔혹사’를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중세도, 근대도, 현대도 한참 지난 21세기 한국에서, 강요된 술 접대와 성 접대로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배우의 속절없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과연 몇 등급의 비극에 속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배우의 복수는 햄릿의 복수보다 더 실현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를 보면 아직도 세상은 ‘무사’의 차지인 것만 같고, 일본이 당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진다. 이 악물고, 두 눈 질끈 감고 버텨도 더욱 모질고 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비극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기어이 ‘희망’을 끄집어내라고 말해 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립다.

 

평등이 부재한 세상,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4-① [色다른 책읽기]

최은정(숭실대 중문과 강사)

누가 초현대에 오를 것인가?

옛 중국의 유주(幽州), 지금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에 아주 오래된 누대(樓臺)가 있었다. 유주에 있어 유주대(幽州臺) 혹은 계북루(?北樓)라고도 부르는 이 누대는, 옛날 유주에 나라를 세웠던 연나라 소왕(昭王)이 어진 이를 모셔와 거처하게 하기 위하여 지은 황금대(黃金臺)로 일명 초현대(招賢臺)를 가리킨다. 당대(唐代) 중국의 시인 진자앙(陳子昻, 661-702)은 ?등유주대가?를 두고 이렇게 읊은 바 있다.

앞으로는 옛사람을 보지 못하고, (前不見古人)
뒤로는 미래의 사람도 볼 수가 없네. (後不見來者)
천지의 무궁함을 생각하다, (念天地之悠悠)
홀로 슬퍼하며 눈물 흘리네. (獨愴然而涕下)

시인 진자앙이 남긴 위의 시는 가슴에 한 가득 원대한 포부를 안고 험난한 출사의 길에 자신을 내던지던 역사 속 여느 지식인들이 모두 통탄에 마지않으며 공감하는 명문이다. 시는 은연중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는 옛 사람을 보지 못하고, 뒤로는 미래의 사람도 볼 수 없구나. 그렇다면 어진 이를 모셔와 거처하게 한다는 초현대(招賢臺)에 오를 자 누구인가?” 그런데 진자앙의 시대로부터 약 1,400년이 훌쩍 지난 국경 너머 조선 땅 어디쯤인가 유독 골목길 이 씨를 자처하는 한 사내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도발적 언사를 늘어놓는다.

과거의 부처는 나 앞의 나
미래의 부처는 나 뒤의 나.
부처 하나 바로 지금 여기 있으니
호동 이 씨가 바로 그. (<호동거실> 제158수)

그 사내가 바로 골목길 이부처 이언진이다. 요즘 흔한 말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 듯, 내지르는 그의 말투에는 이언진이라는 사람의 성품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언진 평전의 저자 박희병은 이것을 ‘주체성에 대한 확신’이라 평가한다. 문화평론가 조우석에 따르면,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확신은 곧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되는데, 스스로를 ‘호동의 부처’라고 선언한 이 시만큼 조선시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라고 한다.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에서, 더욱이 억불숭유(抑佛崇儒)의 기치를 내세우던 당시의 유교적 봉건사회 속에서 역관(譯官)이라는 중인의 신분으로 살면서 부딪치며 느낀 수많은 좌절과 실의를 이루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숲 속에서는 다만 나무만 보이고, 숲을 벗어나야 진짜 숲의 모습을 여실히 볼 수 있는 것. 조선이라는 사대부의 나라에서 기득권의 열쇠를 쥐지 못한 중인 신분의 이언진이었기에 조선 사회를 직시할 수 있었고 또 자기 자신을 직시함으로써 결국 신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함과 주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유독 ‘부처’를 자처한 것인가? 바로 여기에 이언진의 ‘저항정신’이 드러난다. 근엄한 주자학 나라, 유교가 밥 먹여주는 조선이라는 곳에서 그는 망설임 없이 ‘부처’를 외친다. 기득권에 대한 반발과 저항 그리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 나아가 변혁과 혁명을 도모하는 그의 숭고한 정신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시(詩)의 혁명

더욱이 이언진은 그의 시집 <호동거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따거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
손에 칼을 잡고,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 (<호동거실> 제104수)

‘이 따거’라 함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양산박 호걸의 한 사람인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를 가리킨다. 이언진이 소설 속의 인물 이규를 불러와 그의 쌍도끼로 부숴 버리고자 한 것은 물론 조선의 왕조 체제이며, 죄악과도 같았던 신분제였다. 다시 말해 그는 위의 시를 통해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뜨거운 혁명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보여 준 혁명의 의지가 그의 정신에서 뿐만 아니라 시의 예술성에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시를 창작함에 있어 그는 구태의연한 詩의 체제를 탈피하고자 하였다. 그의 ?호동거실?이라는 시집은 시인 이언진이 자신의 사상을 시라는 형식을 차용해 개진해 놓은 텍스트로서의 성격이 농후하다고 저자 박희병은 말한다. 이것은 이른바 시의 의론화(議論化)라고 할 수 있다.

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의론’은 중국이 당말(唐末)에서 송(宋)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출현한 시의 새로운 경향이다. 이후 송(宋)의 시들은 낭만성과 유미주의적 경향보다 는 강한 의론적 성격 일변도를 걷게 된다. 이언진이 보여준 시를 통해 사상을 개진하는 철학적 시 쓰기의 혁명은 ‘유가와 성리학적 가치’에 부합하는 ‘치세 이념’과 ‘심성 수양’을 드러내는 정주학 중심의 사상·문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유불선(儒佛禪)을 융합하고 노장(老莊)및 서학(西學)을 받아들이는 독창성을 보인다.

<호동거실> 제120수에서 이언진은 “관은 유자요 얼굴은 승려 성씨는 상청의 노자와 같네. 그러니 한 가지로 이름 할 수 없고 삼교의 대제자(三敎中大弟子)라 해야 하겠지”라고 읊는다. 상청(上淸)은 도교의 선인이 산다는 천상의 세계이다. 게다가 노자의 성은 이언진 자신 과 같은 ‘이 씨’이다. 그에게 유불도는 모두 존숭해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은 유불도 삼교의 대제자라 자처한 것이다. 사상탄압이 심한 조선의 하늘 아래에서 그의 시 창작이 갖는 탁월한 혁명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시는 투식을, 그림은 격식을 따라선 안 되니
틀을 뒤엎고 관습을 벗어나야지.
앞 성인(聖人)이 간 길을 가지 말아야
후대의 진정한 성인이 되리. (<호동거실> 제33수)

즉 독창의 세계를 창조할 때 참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인을 답습하는 구태의연함을 벗어나 판을 깨부수고 틀을 뒤집고 말 것이라는 그의 말 속에 투철하고 타협하지 않는 혁명의 의지와 정신이 빛난다. 특히 “이 따거”(李大哥)가 등장하는 제104수는 중국의 백화체 문장의 어투로 통속적 느낌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이언진의 시는 대단히 난해하다고 인식되어 왔으며 바르게 번역되지 못해 왔는데 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가 자유롭게 사용한 백화에 대한 정확한 독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역관이라는 신분적인 배경이 다소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시의 언어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인 것이다. 시의 언어와 사상이 한 작품 속에서 상승 작용을 하여 독자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이 따거의 쌍도끼”가 등장하는 <호동거실>의 제104수와 같은 작품은 시의 혁명을 이룬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골목길 돌아 돌아

이언진의 호는 호동, 다시 말해 골목길이다. 글 읽고 시 쓰는 선비의 호가 모퉁이 굽이굽이 좁은 길 돌아 돌아 다녀야 하는 먼지 뒤엉킨 골목길이라니. 당시의 근엄한 정주학의 세계에서 보란 듯이 고집스럽게 지어 낸 호동 이라는 호는 시대의 이단아로서의 그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의 호가 알려 주듯 그의 문학의 주된 관심과 소재는 서민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활의 중심무대가 호동이요, 그의 문학의 중심무대가 호동이었던 것이다. 호동, 골목길 그곳에는 북적북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하루 종일 시끄럽게 지지고 볶고, 웃고 떠들고 싸우고 뒤엉키고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가 간다. 이언진이 표현한 당시 한양의 골목길 풍경은 어땠을까? 그의 시를 통해 살펴보자.

달구지 소리 뚜닥뚜닥 덜컹덜컹
여인네들 조잘조잘 재잘재잘
나는 면벽(面壁)한 승려처럼
평생 신(神)을 기르네 이 시끄런 데서. (<호동거실>? 제8수)

가는 것은 소, 오는 것은 말길에는 오줌, 저자에는 똥.
선생은 코끝으로 청정(淸淨)을 관(觀)하고
책상엔 피워 논 향 하나. (<호동거실> 제4수)

비집고 들어 갈 틈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비좁고 혼잡한 골목길을 이리 저리 피해 가며, 이 사람 저 사람과 어깨 맞부딪혀 가며, 호리호리 깡마른 체구에 가름하고 백지장처럼 흰얼굴빛의 한 내가 지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눈 속에 들어 온 골목길의 풍경은 시끄럽고 불결하지만 정겹기 짝이 없다. 소란스럽게 북적이는 골목을 끼고 자리한 보잘 것 없는 집 한 채. 골목길 부처의 보금자리다. 남루한 민중들의 집결지인 골목길, 그 한복판에 자리한 가난에 찌든 집에서 놀랍게도 시인은 승려처럼 깨달음을 추구하고, 참선을 한단다.

이언진이 보여 준 ‘속(俗)’의 한복판에서 행해지는 ‘성(聖)’의 지극함은 차라리 짐승의 분뇨 냄새 코끝에 진동하는 말구유에서 태어난 어떤 이처럼 숭고하고 성스럽기 그지없다. 뿐만 아니라 ‘속’의 최전방에서 지극한 ‘성’을 이루고자하는 시인의 구도求道 태도의 근저에는 구체제에 대한 확고한 저항과 반역의 정서가 도사리고 있다. 진시황이 죽자 진(秦)에 반기를 들고 진 나라 타도에 나섰던 진섭(陣涉)과 고려시대 노비해방운동을 일으킨 만적(萬積,?-1198)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하는 외침이 절로 오버랩 된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이언진의 시를 통한 사상의 개진에 대해 박희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문이 (사상을 펼쳐 보이는) 정규전이라면, 시는 게릴라전에 가깝다. 따라서 기습, 치고 빠지기, 응축을 통한 포괄, 도달할 수 없는 심연(深淵)의 포착을 꾀하거나 시대를 넘어선 감수성을 표현하는 데에는 시가 유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시는 사유의 삽질을 본령으로 삼는 철학과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이언진은 문학사만이 아니라 사상사의 시좌로 조망되지 못할게 없다.”

각 종 매스컴과 인터넷을 통한 개인 의견의 자유로운 전개가 담보된 오늘날의 현재 우리 사회는 ‘논객’들의 활약이 뜨겁다. 이언진 시의 게릴라전적 사상전개의 양상은 흡사 오늘날의 ‘논객’과 비슷하다. 논객들의 말은 예리하고 날카롭게 상대의 급소를 찌른다. 때로는 날카로운 정도가 아니라 말로써 극악을 떤다. (인터넷에서 익명성을 방패삼아 맹렬한 사나움을 드러내는 삐뚤어진 인터넷 워리어 일명 ‘전사’들도 많지만 그들은 공격의 철학적 기저도 공격의 대상도 방법도 ‘논객’과는 다르므로 차지하자.) 논객들이 극악을 떨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대의 아성이 너무도 견고하기 때문이다. 혁명은 피의 대가를 요구한다는 말이 그냥 생겼겠는가? 우리 사회의 도처에 포진해 있는 온갖 구타를 유발하는 장치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으니 피를 불사하며 투쟁하는 것이다.

시인 이언진이 시 작품을 통해 기습적이고도 공격적으로 제시한 가치는 ‘저항’이었고 ‘혁명’이었으며 ‘혁신’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에 가득 찬 신분제와 인간 차별에 대한 저항과 낡은 사회체제를 부숴 버리고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고자 한 혁명과 혁신이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란 현재나 과거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오늘날 우리사회의 신분의 벽과 차별이 조선시대 당시에는 가시적이고도 굳건한 사회 체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미 평등이 부재한 세상을 바꾸는데 페어플레이가 왠말인가? 사치일 뿐이다. 그러니 그 예의 없는 세상에, 구타를 유발하는 세상의 질서에 흑선풍(黑旋風) 이규의 쌍도끼를 휘둘러 버릴 수밖에.

혹자는 말하기를 진보 논객이라 함은 우리가 지향할만한 가치를 거침없이 제시하는 사람이고, 보수 논객은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를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 조선의 논객 이언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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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이번부터는 <色 다른 책 읽기>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다루는 책은, 박희병 지음,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돌베개 펴냄)으로, 최은정(숭실대 중문과 강사), 이현숙(자유기고가), 이경아(돌베개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조선의 뒷골목, ‘아만’의 등불을 밝히다! 4-② [色 다른 책 읽기]

이현숙 (자유기고가)

요절한 천재 시인, 시문(詩文)을 태우다

‘아악~ 안돼요!’
품앗이로 종일 기름 냄새 절어가며 부침개 부쳐주고 얻어온 떡 보따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공터에 쭈그려 앉은 누더기 승복의 왜소한 남자, 불길에 어른대는 옆얼굴이 틀림없이 남편 이언진이었다. 피를 토하듯 집필한 서책들이 화마에 스러지며 절반 이상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물거릴 틈도 없이 집안으로 뛰어든 그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타다 남은 서책을 치마폭에 쓸어 담고 골목어귀로 달려 나왔다. 사흘 밤낮을 앓으며 죽으로 연명해 온 남편이 죽을힘을 다해 태워 없애는 그의 전부, 그의 분신들. 눈물바람을 하고 허둥지둥 집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뇌리 속에는 ‘이언진’ 이름 석 자마저 지워버리고 떠나려는 절통한 남편의 소리 없는 절규가 가득하다. 아깝고 서러운 내 남편, 내 사랑이여!

조선 영조 때 태어나 스물 여섯 해를 살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언진(李彦?, 1740-1766). 시문 가운데 일부나마 남게 된 건 그나마 그의 부인 덕이다. 앞의 상황은 부인의 애절함을 상상하며 그려본 장면이다. 신분질서의 부조리에 저항했던 조선시대의 이단아, 이언진은 그렇게 부인 덕에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흔적마저 말끔히 거둬 산화하려는 마지막 저항, 그 숨 막히는 긴장과 위기 속에서 목숨을 건진 이언진의 분신들은 부인과 후세의 집념어린 학자의 손을 거쳐 어렵게 세상에 전해졌다. 그리고 앞서 우리는 박희병 교수의 전작 <저항과 아만>을 통해 이언진의 시를 만나고, 오늘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평전>을 통해 그의 불꽃같은 삶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미 <저항과 아만>(돌베개 펴냄)을 통해 그의 <호동거실>의 일체를 소개했음에도, 작품 소개만으로는 불꽃처럼 살다간 저항 시인 이언진을 알리는 데 허기를 느꼈다며 박희병 교수는 평전을 펴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는 한국 고전 인물전(傳)의 형식을 활용하여 입전(立傳), 인물의 생평(生平)을 시간적 계기 속에서 개괄하고, 인물의 본질적 면모를 공시적으로 고찰한 후에 논평을 붙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이 인물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영향을 주고받던 대상과 세계로 확대되는 것은 독자의 관심과 지적 호기심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언진의 스승이자 당시 명망 있는 문인이던 이용휴(李用休, 1708~1782)는 “세상에 드문이런 보배를/어찌 오래도록 빌릴 수 있으랴” 하며 요절한 제자를 안타까워했다. 일찍이 역관을 많이 배출한 강양(江陽, 오늘날 경북 합천) 이씨(李氏) 출신의 이언진은, 부친이 관왕묘(관우를 모신 사당)에 가서 문장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해 얻은 아들이었다. 서얼로 차별받는 중인신분 역관의 아들로 태어나 20세에 역과에 합격한 천재문인 이언진의 모진 운명은, 잉태를 바라는 기도에서부터 정해졌던 것이다. 양반이 아니면 출세가 불가능한 시절에, 역관이었던 이언진의 아버지는 왜 하필 ‘문장가’를 바랬던가? 날개 달린 새에게 걷기만을 요구할 때에는 미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 “오래 빌릴 수 없는 보배” 라는 스승의탄식은 그의 비극적 운명의 정곡을 찌르는 듯하다.

 

일본 열도에서 하루 천 개의 부채에 시를 남기다

박희병 교수에 따르면, 이언진에 대한 입소문은 조선이 아닌 일본을 통해 역으로 날아 들었다. 지금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이언진의 장편시 ?바다를 구경하다?(海覽篇)는 조선과 일본의 문단을 술렁이게 하며 새로운 천재의 등장을 알렸다. 당시 일본에 동행한 원중거는 “… 좌중이 돌려가며 이 시를 읽었는데 정말 奇才다… 이 같은 재주를 지니고도 머리를 굽혀 역관 직에 종사하다니 애석하다”고 했다. 또 1천 개의 부채에 시를 적고, 5백수의 율시를 지으면서, 자신이 지은 시를 하나도 착오 없이 외운 이언진에게 일본인들은 혀를 내두르며 경탄했다고 전해진다. 동시대인인 박준원은 “이 사람은, 총명하기로는 글을 한 번 보면 금방 외고, 민첩하기로는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짓는다”는 글을 남겼다. 문장으로 단번에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던 것이다.

이언진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통신사를 대표해 학식을 논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문인들이 이언진과의 만남을 소원하고, 그 내용들을 자신의 문집으로 남겼을 정도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언진과 필담을 나눈 일본의 다섯 문사(文士)를 소개하며 그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필담’(筆談)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순발력과 학식을 총동원해야 하며, 오자가 나와도 고치기 민망한 현장에서 이루어진 ‘진검 승부’이기에 특출한 재능 없이는 주목받기가 쉽지 않다. 이언진과 필담을 나눈 일본 문인들 또한 만만치 않은 명사들로, 이언진은 자신의 사상과 뜻을 과감히 피력하고, 때로는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을 구사하며 ‘아만’ 특유의 고집스런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이언진이 다이텐과 나눈 필담에서, 다이텐이 조선 문학의 일인자가 누구냐고 묻자 “주(周)는 물고기가 아니니 어찌 물고기를 알겠습니까” 라고 엉뚱하게 답한다. 다이텐이 그것은 “주(고대 중국의 장자)가 한 말이 아니지 않느냐며 자기를 상대하기 싫어서 그러냐”고 서운해 하자, 이언진은 정말 아는 것이 없어 그렇다고 발뺌을 한다. ?장자?에 나오는 고사로 혜자가 장자에게 한 말이라는 것은 이언진도 잘 알고 있지만, 일부러 논의를 회피하기 위해 말을 바꾼 것이었다. 박식함과 천재성을 갖춘 이언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며, 박희병은 당시의 필담들을 조목조목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바다를 구경하고, 아득한 산하를 넘어 ‘조선’을 뛰어넘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에 앞서 두 번이나 다녀온 중국 기행을 통해 이언진의 조선 바깥 세계에 대한 사유의 폭은 더욱 넓어졌다고 한다. 김인겸이 ?일동장유가?에서 “우리나라 도성 안은 동에서 서에 오기 10리라 하지만 채 10리가 못 되며…” 라고 일본과 우리나라를 견주어표현했는데, 이언진은 북경과 조선이 4천여 리나 떨어져 있으며 산하가 아득하여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야 한다며 “천 리 아득히 마을이 없어/날다람쥐 울어대고 독수리 나네” 라는 시를 읊으며 중국의 광대함을 상대적으로 드러냈다. 중국을 통해 기하학, 서학, 천문학 등에 두루 지식을 쌓은 이언진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개방적이며 앞선 세계인식을 갖게 된다.

지구의 수많은 나라들이
바둑돌과 별처럼 벌여 있네.
월나라에서는 상투를 틀고
인도에서는 머리를 깎네.
제나라와 노나라 옷은 소매가 넓고
북방의 호(胡)와 맥(貊)은 털옷을 입네.
혹은 문채 빛나고 예(禮)가 있으며
혹은 시끄럽게 지껄이누나.
무리에 따라 나뉘고 끼리끼리 모여 살아
지구상에 온통 인간들일세.

저자가 말하듯 ?바다를 구경하다?의 서두를 보면 이언진이 조선이라는 좁은 세계, 그것도 서울의 여항인으로 사는 자기 현실의 한계를 스스로 넘어설 꿈을 꾸게 된 것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더 넓은 세상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음이 잘 드러난다. 안으로는 눈에 불을 켜고 학문을 연마했으며, 밖으로는 역관이라는 신분을 통해 변화하는 18세기를 온몸으로 체득했던 이언진의 삶. 이를 저자는 ?호동거실?을 다룬 전작에서 ‘저항’과 ‘아만’이라고 명명한다. (<평전>에 소개된 시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박희병 교수의 <저항과 아만-호동거실 평설>을 읽어보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이언진이 일본에 다녀 온 후 자신의 시문을 모아 엮은 ?송목관집?은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스승 이용휴의 서문이 남아 있어 우리는 당시 이언진의 면모를어느 정도 알게 한다.

“시문을 짓는 사람 중에는 남을 좇아서 견해를 일으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를 좇아서 견해를 일으키는 자가 있다. 남을 좇아서 견해를 일으키는 자는 비루하여 논할 것이 없지만, 자기를 좇아서 견해를 일으키는 자라 하더라도 편벽됨이 섞이지 않아야 참된 견해에 이를 수 있다. 거기에다 또 반드시 참된 재주가 뒷받침을 해줘야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을 찾은 지 여러 해 만에 송목관주인(松穆館主人) 이군 우상을 얻었다. 군은 이러한 도(道)에 있어서 출중한 학식과 현묘한 사색이 있어 먹을 아끼기를 금처럼 하고 구절을 다듬기를 단약(丹藥)처럼 하니, 일단 붓을 종이에 대기만 하면 후세에 전할 만한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그를 알아줄 만한 사람이 세상에 없었기때문이다. 또 남에게 이기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이길 상대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112-113쪽)

이용휴는 저 유명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숙부로 둔 당시의 대표적 문장가이니 그의 이 같은 평가가 애제자에 대한 과찬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저자가 이 부분을 소개하며 이언진이 ‘내적 망명’ 상태에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세상에 알려지길 꺼리고, 남을 이기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스승의 전언을 토대로 한 것 같다. 박희병이 이언진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용어 ‘아만’(我慢)은, 대적할 자 없을 정도로 학식을 쌓고, 선진 외국을 섭렵한 의식의 고양에도 불구하고 발딛고 선 당시 조선의 신분의 벽 속에서 이언진이 느껴야 했던 절대 고독과 자폐에 가까운 고립의 정신세계, 거기에 덧입혀진 병마와의 싸움으로 점철한 그의 인생을 잘 응축하여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아아, 아만한 이언진!

최근에 읽은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에서 나카지마 아츠시는 ‘존대한 수치심’과 ‘겁많은 자존심’ 이란 표현을 소개한다. 당(唐) 현종 때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 젊은 나이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남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관직을 내던지고 은둔하며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징’이란 인물의 삶을 그린 ?산월기?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의 광기와 울분을 참지못해 호랑이가 되어버린 이징은 ‘겁 많은 자존심’으로 연명하며, ‘존대한 수치심’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어 맹수가 되고 말았다는 고백을 한다.

참으로 글 쓰는 자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을 명징하게 드러낸 말인 듯하다. 안으로는 자신에게 상처입고, 밖으로는 세상과 타자로 인해 거듭 고꾸라지는 자존심과 수치심 덩어리, 그것이 글 쓰는 자의 운명이다. 박희병이 소개하는 이언진, 그리고 그의 시문을 통해 전해지는 이언진의 정신 또한 이와 다를 바가 없는 듯이 느껴진다.

 

골목길의 소외된 삶에서 ‘주체’를 찾다

이언진의 대표작 ?호동거실?은 170수의 연작시로, ‘호동’이란 ‘가난한 하층민의 골목길’을 뜻한다. 이언진의 호가 ‘호동’이니, 스스로 사대부를 지향하는 중인이 아닌 서민과 같은 피지배층으로 간주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는 중국 구어인 ‘백화(白話)’체가 등장하고, 6언 시로 이루어져 있어 당시 문단의 전통과 관습을 거부하고 형식에서 이미 새로움과 저항, 자유 등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이언진의 시 작업이 논리와 이성에 중심을 둔 산문 글쓰기와 달리 직관과 정서에 기초한 구술과 전근대 글쓰기인 ‘시’의 전통을 이어나간 새로운 진리인식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끝까지 자기 목소리를 지키려 한 이언진에게 ‘시’는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었다.

노자(老子), 묵자(墨子), 형명가(刑名家)는 저마다 작가
가을꽃은 봄꽃만 못하지 않네 (<송목관진여고> 중에서)

길 위의 행상과 거간꾼들은
칭찬과 비난에 개의치 않네 (<호동거실> 제30수)

미칠 땐 기생한테 가고
성스러워질 땐 불전(佛前)에 참배하네 (<호동거실> 제149수)

쌀 빚과 땔감 빚에 개의치 않고단지 책과 그림만 사니
처자가 어찌 알고 고시랑거리며
나를 보고 미쳤다 오활타 하네 (<호동거실> 제167수)

철저한 신분제 사회 조선을 야유하고, 유교 이외엔 이단인 세상에서 노자와 묵자를 칭송하며, 체면과 권위에 짓눌린 사대부를 호동의 서민과 상인에 빗대어 조롱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본성과 삶의 고단함을 ‘시’로 압축해 이만큼 전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자의 번역의 힘이 큰 몫을 하겠지만.

이언진의 주체의식은 사대부와 서민 사이에 낀 모호한 정체성에서 탈피함으로써 가능했다. 사대부가 되지 못한 열등감, 피해의식에 매몰되지 않은 항장한 기개로 조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평민에게서 주체의식을 찾아내고 체화해 나간 것이다. 다만 끝내 떨쳐낼 수 없는 아쉬움은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현실을 도피한 흔적들이다. 홀로 향불을 피워놓고 승복을 입고 참선에 든 20대의 이언진을 떠올리면, 세상 고통을 모두 초월한 듯 우아하게 노년을 장식하는 한 때의 투사들이 겹쳐진다. 종교는 스스로 날개를 접고 들어앉기에 더없이 안락한 쉼터를 공공연히 제공한다. 비겁과 실패를 감추기에 그만이지 않은가. 중세의 거울로 오늘을 비춰보아도 좀 탁하기만 할 뿐 보이기는 다 보인다.

모든 것이 경쟁인 사회, 돈과 외모, 인맥, 학벌이 우열을 판가름하는 사회, 그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소통은 없고 소외는 넘쳐나는 사회, 그래서 수치심도 자존심도 없는 사회, 소외된 사람들에게 오늘날 현실이 서얼 이언진의 조선과 무엇이 다를까! 그곳에 ‘호동’의 푸른 씨앗을 다시 심을 수는 없을까? ‘아만’의 등불을 높이 들고, 친구들과 뛰어놀던 골목길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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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이번부터는 <色 다른 책 읽기>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다루는 책은, 박희병 지음,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돌베개 펴냄)으로, 최은정(숭실대 중문과 강사), 이현숙(자유기고가), 이경아(돌베개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조선에서 자유와 평등을 꿈꾼 ‘그’를 되살리다! 4-③ [色 다른 책읽기]

이경아 (돌베개 편집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이다. 박희병 선생의 ‘이언진 3부작’(<골목길 나의 집>, <저항과 아만>, <나는 골목길 부처다>)을 만들며 든 생각이 바로 이 시다. 나는 박희병 선생의 제자이자 박희병 선생의 책을 만든 편집자다. 이언진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박희병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박희병 선생은 국문학계에서 유명한 필자다. 그의 글을 읽으면 천여 매의 원고가 마치 단숨에 쓰인 것처럼 느껴진다. 숨도 쉬지 않고 써내려간 듯 막힘없는 글에 감탄하고, 조사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 그의 철저함에 또 한 번 감탄한다. 그는 책 한 권을 쓰면서 동시에 다음 책에 대한 구상에 들어가는 듯하다. 하나의 주제로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음 글을 뭐로 할까 떠오르는 듯. 땅에서 고구마를 캐내면 줄줄이 딸려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줄기차게 온 힘을 다하여 글을 쓰고 연구한다. 때론 가차 없는 비판과 반론으로 화제의 중심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건 그가 출중한 국문학자라는 것이다.

이런 그가 이언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언진의 작품을 온전히 바로잡고 정확하게 번역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은 두 가지 간본이 전하는데, 그 하나는 <송목관집>이고 또 하나는 <송목관신여고>다. 그리고 별도의 필사본이 두 가지 전하는데, 연세대본인 <송목각시고>, 고려대본인 <송목각유고>다.

모두 ?호동거실?을 수록한 이언진의 유고집이지만 각 책별로 오류가 적지 않고 배열의 착란이 없지 않다.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탈락되거나 오기된 시도 많았다. 박희병 선생은 이네 가지 판본을 비교하여 전체 170수의 『호동거실』 판본을 정비하고, 정확한 번역을 해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골목길 나의 집>이다. 이 책은 돌베개 출판사의 ‘우리 고전 100선’시리즈의 12권에 해당하는데, 이 시리즈가 일반 대중을 위한 교양서인지라 각 시에 대한 설명이 지극히 소략할 수밖에 없었다.

박희병 선생은 ?호동거실?의 각 시들이 무척 난해하고 또 문제적이어서 자세한 분석을 요하는데다 처음 번역된 이 작품을 이렇게만 하는 것이 작품에 대한 그리고 이언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세한 분석서를 냈는데 그것이 바로 『저항과 아만』이다. 부제가 ‘?호동거실? 평설’이다. 그리고 이 두 책을 통해 소개된 이언진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삶과 사상을 정리한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을 출간함으로써, 이언진에 대한 연구와 집필을 3부작으로 마무리하였다. 요즘 말로 하면 박희병 선생은 ‘이언진종결자’인 셈이다.

 

이언진, 역사의 그늘에서 걸어나오다

박희병 선생이 이언진(李彦?, 1740∼1766)에 관한 책들을 펴내기 전까지 이언진은 아주낯선 인물이었다. 심지어 이언진의 시집 <호동거실>은 ‘동호거실’이라고 불려왔다. 하지만 이런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학계에서도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언진은 300년 전 조선의 대문호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글로 알려졌다. 연암은 이언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전기를 썼는데, ?연암집?에 수록된 ?우상전?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전(傳)은 이언진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박희병 선생은 연암과 이언진의 ‘진리인식의 틀’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연암은 조선왕조의 틀 안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이언진은 조선왕조의 틀을 부정하고 그 바깥으로 나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는 18세기 조선의 이단아 이언진에 대한 평전이다. 신분차별과 사상통제가 엄격하게 지켜지던 과거의 시공간을 산 이언진을 21세기의 시각으로 다시 본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언진을 평가한 당대 문인들의 글을 살펴보고, 또 당대동아시아 삼국의 이단아들과 이언진을 비교함으로써 중세 동양의 사상사 속에서의 이언진의위치를 가늠해보고 있다.

한낱 중인 역관 신분에 20대에 요절했고 또 작품도 변변히 남긴 게 많지 않은 이언진을 이처럼 깊게 파고드는 까닭은 중세 동양의 사상사 속에서도 독특한 빛을 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세 조선도 다양한 인물 유형이 숨 쉬는 사회였을텐데, 그간 우리 학계가 그려낸 조선 사회는 선비, 유학자, 도학자, 승려, 그리고 상놈이라는 뭉뚱그려진 집단으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양반을 위주로 하고 그리고 종교인 정도의 유형만이 사는 사회였다. 상놈―여기서 상놈은 중인 계층까지 포함한다―은 그저 숨만 쉬고 살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무의미한 집단으로 분류되던 중인 신분에 이처럼 독특한 인물이 있었다. 연암의 전기 ?우상전?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묻혀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을 인물이었기에, 우선 이언진의 전기를 쓴 연암 박지원에게 감사를 해야 될 것이다. 조선의 정신사에서 ‘이언진’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주체이다. 이 주체는 이전의 역사 속에서는 전혀 드러낸 적이 없었으며, 장차 도래할 새로운 시대를 예고한다. 때문에 아주 낯설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조선의 골목길에 살던 부처, 새로운 주체의 탄생

이언진의 신분은 중인(中人)이다. 조선의 지배질서 속에서 중인은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자리에 있었다. 중인은 전문지식을 갖추었지만 지배관계 내에서 여전히 예속적, 부용적 지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언진은 중인이면서 자신의 타자성을 투철하게 자각하고, 스스로 를 ‘주체’로 전화(轉化)해냈다. 이언진은 자신의 중인이라는 신분을 태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대부라는 주체와 대립하면서 사사건건 맞섰다. 그러므로 사대부적주체를 ‘지배적 주체’라고 한다면 이언진과 같은 주체는 ‘저항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언진이 스스로 주체로 설 수 있었던 데에는 외적인 영향과 내적 요인 두 가지 경우를 다 살펴야 한다. 외적인 요인은 이탁오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양명학 급진좌파로 명명되는 이탁오의 사상은 뚜렷한 자아의식을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이언진이 이탁오의 주아사상(主我思想: ‘나’를 주장하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스승 이용휴의 영향인 듯하다.

이언진이 스스로 주체로 설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은 두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는 이언진이 스스로를 사대부에 예속된 비천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태생적으로 비범하고 예민한 문학적 감수성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더러운 골목 지나 깨끗한 내 방에 들어와
맑은 향 피우고 수불(繡佛)을 걸면
피부병 있는 자건 몹쓸병 있는 자건
모두 다 보살 생각을 하리. (<호동거실> 제17수)
이언진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거처하는 호동까지도 주체적인 영역으로 확대한다. 이는 이언진이 스스로 ‘호동’(골목길)이라고 호를 한데서도 드러난다. 이언진은 주체를 공간화함으로써 ‘나’의 자각과 각성을 호동의 자각과 각성으로 연결지었다. 또 이언진은 드러내놓고 사대부를 조롱하기도 했다.

한 그릇 밥 먹고 배부르면 쉬고
큰길가에서 웅크리고 자는
저 거지아이 승지(承旨) 보고 불쌍타 하네
눈 내린 새벽 매일 출근한다고. (<호동거실> 제13수)

이언진의 넘쳐흐르는 주체성은 결국 스스로를 부처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부처는 나 앞의 나
미래의 부처는 나 뒤의 나.
부처 하나 바로 지금 여기 있으니
호동 이씨가 바로 그. (<호동거실> 제158수)

이언진이 스스로 부처라고 한 것은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확신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확신은 곧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된다. ‘나’는 깨달음의 주체요, 세계의 중심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호동의 부처’라고 선언한 이 시만큼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탁오, 안도오 쇼오에키 그리고 이언진

혹자는 이언진이라는 인물이 천재문인이긴 하지만 26살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고, 남긴저서도 고작 시집 ?호동거실?과 그밖에 짧은 글들 몇 편(<우상잉복> 포함)뿐이라, 사상을 논하거나 동아시아의 대사상가와 비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언진이 살았던 시공간 속에서 이언진의 글을 본다면 그의 비범함은 이미 조선을 뛰어넘었다. 또한 남긴 저작이 시집 한 권이라서 그의 사상을 보여주는 산문이 없기는 하지만, 짧은 시만으로도 사상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사상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정제된, 그리고 비유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특징을 지닌 시(詩)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진술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법구경>이나 <성경>의 ?시편?, <바가바드기타>, <숫타니파타>의 운문 부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언진의 시집만으로도 그의 사상을 충분히 논할 수 있다. 박희병 선생은 이런 이언진을 온전히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18세기라는 같은 시간을 산 동아시아의 이단자들을 내세웠다. 중국의 이단아 이탁오(李卓吾, 1527-1602)와 일본의 이단아 안도오 쇼오에키(安藤昌益, 1703-1762)가 바로 그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이 좀 더 많이 집필되기를 희망했다. 작품 분석과 이언진 개인에 대한 분석에 비해 이 부분은 소략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나의 의견에 대해 박희병 선생은 일부 긍정하면서도 당신은 조선이라는 시공간에서 자유와 평등을 외친 이언진이라는 독특한 인물을 되살려내는 데 초점을 둔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언진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독특한 유형의 인물인가를 보여주는 데는 이 정도의 비교면 충분하다고 했다. 또한 다른 이단아와의 비교를 통한 본격적인 사상 비교는 사상뿐 아니라 당시 사회에 대한 분석이 부연되어야 하므로 좀 더 다른 지면이 필요하다는 점도.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멀지 않은 장래엔 한번 집필해봄직하다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로서의 나의 욕심이다.

이언진은 조선 후기에 한중일 세 나라를 두루 경험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만큼 조선은 폐쇄적인 사회였다.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을 드나드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던 그런 나라였다. 역관이라는 신분은 이언진의 명을 짧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또한 세 나라를 두루 여행할 수 있었던 큰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스승 이용휴를 통해 중국의 이단아 이탁오의 좌파 양명학을 받아들였고, 일본 문인과의 대화를 통해 주자학 일변도가 아닌 왕세정(王世貞, 1526-1590)과 이반룡(李攀龍, 1514-1570)의 문학적 장점들을 두루 평가하고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조선의 사상계는 송시열 이후로 주자학 유일주의였다).

그렇다면 그와 견줄만한 이단적인 인물을 동아시아 삼국에서 찾아 비교해 본다면 좀 더 정확하게 이언진의 존재를 평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중국의 이단아 이탁오, 일본의 이단아 안도오 쇼오세키 두 사람의 예를 들어 이언진의 사상과 비교하고 있다. 이탁오는 명말(明末)의 저명한 사상가로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었고, 안도오 쇼오에키는 18세기 전반(前半)에 활동했는데, 철저하게 계급을 부정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이 세 명의 사상가는 저마다 치열한 사유행위를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 체제에 도전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희병 선생이 이언진에 대해 이렇게 3부작의 집필을 통해 공을 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유사 이래의 독특한 인물 유형 발굴이라는 큰 의의를 둘 수 있겠고, 또 하나는 이를 통해 일반인과 학계 연구자들의 조선 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확대를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조선 사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확대만이 다양한 연구와 저작을 내놓을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박희병 선생은 이제 이언진을 내려놓고 능호관 이인상에 전념하고 있다. 또 한 번 종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것이라 기대해본다. 독자로서 그리고 선생님의 편집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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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이번부터는 <色 다른 책 읽기>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다루는 책은, 박희병 지음,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돌베개 펴냄)으로, 최은정(숭실대 중문과 강사), 이현숙(자유기고가), 이경아(돌베개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노비의 역사, 현재형이 되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황선만 (책익는 마을 전촌장)

 

내가 노비가 되다

1895년 갑오개혁 이후 우리사회에 노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왕이 노비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그 후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자유의 세상, 정치적 민주화의 시대가 자리를 잡았다. 며칠 전 보수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박종철 열사와 6월 민주화 운동>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기념회를 열기도 하였으니 민주화 시대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당시 담당검사였던 안 대표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 은폐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자기 홍보를 위해 박종철 열사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 시대는 개인의 존엄이 확고히 자리잡지 않았겠는가.

따라서 지금 노비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 전통사회 역사의 한 구석을 호랑이 담배피우는 옛 이야기 듣듯이 넘겨다보는 일에 불과하다. 잔잔한 남한강 어디쯤에서 조각배를 저으며 풍광을 구경하듯이 말이다. 내가 임상혁이 쓴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 나는 노비로소이다』를 펼쳤을 때 그런 마음이었다. 이참에 못다한 역사공부나 하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웬걸, 한가한 내 생각은 머리말에서 부터 흔들리고 말았다.

“예전에 글쓴이가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조상이 노비였던 분은 손들어 보세요.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모두 까르르 웃을 뿐, 물론 손 올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체로 연구자들은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일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3분의 2까지 보는 학자도 있다고 말해줄때면 놀라는 기색이 완연합니다. 노비는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일생동안 상전에게 재화와 노동을 바치는 알짜배기이지요. 이 시기 부의 척도는 거느린 노복들의 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문대가라 불렸던 집안에는 수백 명의 노비를 자손에게 분배하는 상속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옵니다.”

순간 나는 ‘혹시 내 조상도 노비였을지 몰라. 그렇다면 노비해방이 안 되었다고 할 때 나는 지금 노비로 살아갈거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몸서리 쳐지는 것이었다. 인신과 정신이 상전에게 구속받아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으며 온종일 상전이 시키는대로 복종해야만하는 노비의 삶, 내 귀여운 자식들도 똑같이 그런 굴레에 갖혀 일평생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비를 거부하는 노비들

인간이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법, 전통사회 노비라 하여 어찌 자유를 갈망하지 않았으랴. 이 책의 송사에 등장하는 두 당사자는 노비인 자와 노비 아닌 자였고, 노비는 항상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된다. 특히 시종 이야기를 끌고가는 두 주인공 이지도와 다물사리의 궤적은 우리 전통사회의 노비제에 관한 다양한 배경지식을 알려주고, 시대를 흘러도 변치 않는 인간의 욕구와 갈망을 보여준다.

원래 양인인 다물사리가 노비인 윤필과 결혼하였고 인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인이가 이유겸의 사노비인 구지와 결혼하여 6남매를 둔다. 따라서 다물사리의 딸과 자손들은 모두 이유겸 집안의 사노가 되어 상속되게 된다. 자신의 귀여운 손자 손녀들이 모두 사노비의 생을 살게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던 다물사리는 관가의 노비담당자의 묵인하에 스스로 관노가 되어 가솔을 모두 관노로 등록시킨다. 왜냐하면 사노비 보다는 관노비의 생이 훨씬 덜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이유겸 집안에서 소를 제기하게 되고 결국 다물사리의 가족은 쓸쓸히 사노비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안동시에 사당을 두고 있는 학봉 김성일이 나주 목사로 재직하던 시절(1583년8월~1586년12월)에 처리한 판결문에 실려 있다. 저자는 숭실대 법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법학자로 조선의 노비재판과 관련한 사료를 찾아내 김성일의 명 판결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의 형사소송과 민사소송, 심급제도, 소송절차를 비롯해 최고의 법전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의 소개에 이르기까지 법학자답게 전통사회의 법과 그의 적용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러나 법학도 비슷한 인연도 없었던 필자로서는 저자가 소개하는 노비재판의 실화들에 더욱 눈길이 가고 그들의 삶이 궁금해지곤 하였다.

 

불공정한 판결

양인으로 잘 살아가던 한 가족이 노비로 급락하는 일도 있었다. 1568년 해남의 하급 아전이었던 허관손은 자신의 처와 세 자녀를 모두 노비로 빼앗긴다. 상대는 과거에 급제하고 이조참판까지 지냈던 유희춘이었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고위 관료였던 유희춘과의 소송을 소개하며 저자는 판결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유희춘의 누나는 다음해 7월 허관손의 아내와 그의 세 자녀를 잡아다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소나 말을 ‘부리듯’ 말이다. 멀쩡하던 처자식이 노비로 전락했으니 허관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급 관료지만 그 시대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자유는 허락받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불현 듯 다가온 가족의 쇄락을 허관손은 어찌 감당했을까. 그러나 법학자인 저자는 이 판결에 의구심을 버리지 않는다. 다음 인용을 보자.

“양반 상민, 노비 할 것 없이 소송능력은 법적으로 제한 없이 인정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고위관리에 맞서는 소송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으로 치면, 고액을 들여 전관예우 변호사를 고용한 상대방에 맞서 나홀로 본인소송을 하는 당사자가 고단하기 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헌부, 장예원의 관리들은 수시로 미암에게 와서 심리의 진행상황을 보고하였으며, 그의 동료 관리들은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24년 전의 판결을 찾아내는 등 유리한 증거를 모았다.”

자신의 조상이 사실상 노비였기에 다시 노비로 돌아간다 하여도 극도로 싫었을 터인데, 만약 양인이었다가 권력자의 소송으로 억울하게 노비가 된다면 그 울분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는 상상을 하니 허리가 곳추세워지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었다. 법이라는 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약자보다는 강자에게 가까운 것이 아닌가 말이다.

 

해방된 노비들, 어디로 갔을까

노비신분을 벗어나고자 하는 대표적인 노력은 고려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만적이라는 노비가 중심이된 만적의 난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는 노비 소송이 넘쳐났다. 그래서 소송처리에 지친 태종이 “사전을 혁파하였듯이 사천제도를 없애버리면 이런 폐단은 없어질 것”이라며 노비제의 혁파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비해방이 공식화된 갑오개혁 이전인 1801년 순조1년에 관에서 부리던 공노비를 해방시켰으니 우리 전통사회는 노비의 노동력에 의존해왔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고자했던 몸부림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그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노예제와 농노제가 있었다면서 우리의 노비제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개명천지 21세기가 되었고, 세계화와 인간존중이라는 근엄한 사유가 지배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의 독재에 저항하는 북아프리카와 아랍민중들의 항거소식이 연일 전파를 타고 있으니 이 시대 사람들은 진전된 인간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가.

노비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이 땅에 신분상 천민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력이 확보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은 유력한 집안의 머슴살이를 하여야 했다. 또 주인집에 얹혀살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담살이, 주인집을 드나들면서 일을 도와주는 드난살이도 있었는데 산업화 이후 사라졌다.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영세한 농민들의 수 많은 가족들이 도시의 공장노동자로 전업한 것이다. 이것은 노비의 역사이면서 노비의 현재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투표권을 갖고 나라의 대표, 마을의 대표를 뽑는다. 자유로운 세상이다. 해방된 세상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담살이나 드난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노동과 피땀이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다. 그 에너지는 생산의 기초이자 우리 사회의 주춧돌이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렇게 잔잔할 줄 모르는가. 아직 노비해방은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신분상승으로 가는 최고의 길인 일류대 합격률은 강남 학군에서 대부분 점령한지 오래다. 아버지가 기업을 갖고 있으면 약간의 불법을 감행하더라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용인되곤 하는 당당한 상속사회이다. 아버지가 대형교회 목사이면 자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뻔뻔한 대물림 신분사회이다. 그 사이에 서 있는 노비의 후예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벌사회의 들러리, 부당한 권력과 떳떳하지 못한 재산의 사적인 세습을 도와주는 입닫은 노비들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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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여덟번째 일로서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너머북스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대학의 이념』칼 야스퍼스 – 등록금문제와 대학의 이념[청춘의 서재]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한 학생이 이야기한다. “학업을 계속하려면 학업을 포기해야 해요.” 거짓말인줄 알았다. A를 얻기 위해 A를 포기해야한다니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마치 선문답이나 동화에서 말하는 교훈 속에 있는 이야기같았다. 그런데 이런 금도끼 은도끼이야기 속에 나오는 나무꾼들이 광화문광장에 하나 둘 모여들고 있다. 등록금을 벌어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오늘도 공부대신 ‘알바’를 하는 대학생, 그들의 젊은 이성은 오늘도 열심히 돈 번다.

등록금문제가 한참 이슈다. 하루 이틀된 문제도 아니지만 이번엔 뭔가 조금 달라 보인다. 철되면 돌아오는 제철음식처럼 으레 봄이 되면 하는 개나리투쟁도, 광우병 이후 오랜만에 잡은 소위 ‘껀수’도 아니다. 이번에 대학생들에게 보이는 비장함은 대학생이라는 실존에 대한 위협에서 나왔다. 대학생이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고 대학은 더 이상 이성이 아니라 돈벌이를 가르치는 현실에서 학생들은 처음으로 모두의 문제나 타인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거리에 섰다. 등록금문제는 단순히 돈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그 금액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생과 예비 대학생들의 진로도 좌우한다. 높은 등록금 덕택에 학생들은 자유로운 이성보다 시장논리에 더욱 익숙하게 대학생활을 보낸다. 높은 등록금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이 아닌 미래의 돈을 기대한다. 이성과 학문의 자유로운 연애에는 이제 대학에서 익숙하지 않은 낯선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생이 학문을 할 수 없는 사회, 대학은 취업만 할 수 있다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 되어버린 사회는 이른 바 ‘대학이 위기’인 사회다. 대학이 위기라는 말이 함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대학과 학문의 위기에 대해 이미 수십 년 앞서 고민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칼 야스퍼스(1883~1969)이다. 칼 야스퍼스가 활동하던 시대도 대학이 위기인 시대였다. 그는 유대인 아내와의 이혼을 거절하여 나치로 인해 대학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나치는 대학에 직접 개입하여 수백 년간 이어져온 소위 ‘대학의 이념’들에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야스퍼스는 대학과 학문이 가지는 가장 큰 미덕은 보편적 앎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로 보았다. 대학의 목적은 근원적인 지적 욕구를 실현하는데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지적 욕구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며 그 앎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발견하는데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 당시 대학은 나치는 물론이고 나치집권 전후에도 이미 자본에 의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유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야스퍼스는 1945년 나치 12년간 굴복당한 대학의 이념을 다시금 바로세우고자 소책자를 발간한다. 이 책은 야스퍼스가 겪은 고통스러운 나치의 지배와 대학의 정신에 대한 그의 믿음 속에서 집필된 것으로 그 동안의 강연과 수기를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이 바로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누고자 하는 『대학의 이념』이다. 『대학의 이념』에서 야스퍼스는 학문과 대학의 목적, 그리고 그 존립 조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야스퍼스는 대학의 위기를 학문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그리고 학문의 본질에 대해 논하면서 서서히 대학의 존립의 문제를 고민한다. 그는 이 책에서 요란스럽지 않다. 대학의 이념과 그것을 침해하는 외적요소들에 대한 ‘스펙터클’한 공격을 기대한다면 이 책에선 잠시 흥분을 가라 앉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근차근 대학의 이념에 대해 설명하지만 우리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듯하다. 이미 그가 60~70년 전에 말한 대학과 학문의 정신을 마주하면 그렇지 못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자꾸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취업 후 상환이라는 무책임한 대학등록금 대책을 무슨 은혜 베풀 듯 하는 나라님이 있는 나라에서는 대학생들은 어서 취업해야 한다. 취업이 잘되는 과로 전과도 빚쟁이에게 쫒기 듯 어서하지 않으면 돈 안 되는 학문을 4년이나 배워야한다. 대학의 역할 중 직업훈련도 분명히 한 축을 담당하지만 한 건물에서 한 기둥만을 위해 다른 기둥의 못을 뽑아버리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대학의 이념은 지적인 욕구에 부응하여 교수와 학생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진리를 터득해 나가는 것을 바탕으로 총체적인 인격의 도야를 목적으로 한다. 그는 대학교육을 전인교육, 직업훈련, 연구 세 가지로 이루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대학의 교육을 이루는 요소지만 하나가 분리되어 그것만이 강조 될 경우 대학의 목적은 요원해진다. 야스퍼스는 대학이 학문의 미덕의 전체성이라 말한다. 대학의 이름이 university인 것처럼 대학은 하나의 우주이다. 그는 전체성과 결별한 학문과 학생의 생산에 대해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의 생명력은 전체와의 관계에 근거한다. 대학은 학문적 견해가 일생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도록 그 기초를 갖추게 하고, 지식의 통합을 추구한다. 의사, 교사, 행정가, 판사, 목사, 건축가 등의 직업은 비록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직업을 위한 준비는 그 과정이 전인적이지 못하거나, 지각력을 계발시키지 못하거나, 안목의 지평을 넓혀주지 못하고 ‘철학적’사고를 형성해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지 못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 것이다. 요즘 국가고시의 경우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전문지식의 부족은 직업적 실생활에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학문적 교양의 기초가 결여된 사람으로부터는 어떠한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72~73쪽) 오래 전 글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참 와닿는 말이다. 고대그리스에서도 통했던,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처럼 그저 보편성을 가진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문화라는 폭력에 내몰리는 대학 학문의 위기라는 점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다.

대학의 위기는 체계와 자본주의 본질의 문제이지 어느 한 현상적 문제로 귀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대학 등록금의 문제는 이러한 본질적 문제를 꿰뚫고 있다. 야스퍼스의 『대학의 이념』에서 대학이 갖추어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전체성과 자율성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의 목적은 인간의 지적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지적욕구는 항상 전문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야스퍼스는 지적욕구의 본질은 지식의 통합과 전체성을 추구하는 것이고 대학은 바로 그 통합의 장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대학은 개별지식의 다양성과 그 통합을 추구하면서 university가 된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대학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학문에 대해 다시 정의하면서 학문을 수행하는 대학을 이야기하는데 그가 말한 학문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그 내용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며 보편타당성을 갖추는 것이다. 대학의 목적은 이러한 학문을 수행하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대학의 이념이 갖는 전체성인데 이러한 전체성은 대학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자유로는 지위를 보장받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그 자율성은 중요하다. 따라서 대학은 전체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가져야한다.

그런데 요즘 일어나는 대학의 재정문제와 시장화는 이러한 대학의 전체성과 자율성을 심하게 침해하고 있는 듯하다. 자본에 의해 종속된 대학은 직접적으로 금화를 생산할 수 있는 학문만을 육성하고 그곳에 학생들이 모인다. 몇몇 학문에만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대학학문이 가져야할 보편성과 전체성이 공격받는다. 이는 대학이 가진 ‘하나의 우주로서 학문의 장’이라는 자신의 역할은 물론 보편성을 추구하는 학문자체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한다. 또 몇몇 집중된 인력은 항상 공급과잉을 초래하여 적정 수의 산업예비군을 항상 유지하게 한다. “자본의 학문지배 -> 학문의 전체성 상실 -> 대학 학문과 교육의 다양성 상실 -> 자본의 노동 및 대학구성원(교수, 연구자, 학생)에 대한 지배강화 -> 자본의 학문지배”라는 악순환이 바로 대학과 학문의 위기의 본질이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배를 학문의 전체성 상실을 통해 이루고 있으며 강력해진 자본은 더욱더 대학과 그 학문을 간섭하며 전체성과 자율성을 침해한다. 현재 한국의 대학 등록금문제는 이러한 대학의 위기 속에서 그 문제가 심화되어왔다. 야스퍼스는 대학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로부터 오히려 보호받고 지원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국가와 사회가 이성적 결과물들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방안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할을 국가와 사회가 못해주고 있기 때문에 재정이 약한 대학은 무리해서 등록금을 인상하거나, 자기 자신이 바로 자본으로서 학문과 대학구성원의 적을 자임한다. 현재 한국대학의 취약한 재정구조, 특히 86%에 이르는 높은 등록금의존율은 대학에 대한 자본의 지배, 즉 대학자체의 총체적 위기를 이야기한다. 이것이 왜 지금껏 단순한 경제적 부담에서 불거졌던 대학생들의 등록금투쟁이 이제와 새삼스럽게 사회적 문제가 되고, 왜 또 ‘조국통일이나 노동해방’과 같은 거창한 거시적 담론만을 투쟁의 담론으로 삼았던 대학생운동이 선배들의 투쟁 주제에 비하면 소소하기 그지없는 ‘등록금’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당면과제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야스퍼스는 대학의 이념과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책의 목차를 유기적으로 구성했다. 그는 전체성과 보편성을 설명하는 학문의 본질을 앞서 이야기하고 이어 그 학문을 유지하는 지적 삶에 관한 문제, 그리고 대학의 조직, 마지막으로는 대학의 재정적 문제에 대해 논한다. 그는 마치 백의를 입은 선비처럼 대학의 목적을 순수한 앎의 추구라는 학문적 문제제기를 하며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곧 현실 속의 사상가로 돌아와 국가와 사회의 역할 및 대학의 재정으로 『대학의 이념』을 마무리 짓는데 이는 대학의 위기를 단순히 ‘학문하기 어려움’으로 진단한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학문의 자체의 위기에 대항해 자신이 생각한 ‘대학의 이념’을 다시금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대학은 지적양심과 욕구를 실현 할 수 있는 연구와 소크라테스식의 민주교육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이는 이상적이고 선언적일지 모르고 그것이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도대체 언제일까라는 고민은 남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정의는 오늘날 대학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해준다. 대한민국 초중고 모든 교육이 대학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학자체는 자신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그 혼란을 높은 등록금이란 형태로 학생들과 공유하고 있는 ‘인심 좋은’ 대학이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 야스퍼스의『대학의 이념』은 대학이 본래가진 초심은 물론,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대학의 모습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4)

김남우 (정암학당)

[우신은 삶의 행복이 사태의 올바른 인식이 아니라, 허상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거짓과 아부와 허상 등은 모두 어리석음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을 위무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해주는 경우에 이것을 ‘아부’라 합니다. 오늘날 아부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그래도 아부는 사태 자체보다는 언어에 현혹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들은 아부와 진실함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도저히 가까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들을 예로 살펴보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개처럼 착 달라붙으면서도 진실한 짐승은 또 어디 있습니까? 다람쥐처럼 알랑거리며 사람들에게 진실한 동물은 또 무엇입니까? 설마 포학한 사자들이나 야성의 호랑이들 혹은 거친 표범들이 인간 삶에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아부도 있는바, 이로써 몇몇 악의적인 냉소주의자들은 상대방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가련한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하지만 나 우신을 따르는 아부는 호의적이며 선량하여, 아부와 반대되는 직언, 혹은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우악하고 신랄하고 귀 따가운 사설보다는 훨씬 덕에 가깝다 하겠습니다.1) 이런 아부는 낙담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어둡고 우울한 사람에게 활기를 주며, 풀죽어 늘어진 몸에게 자극을 주며, 멍청하게 넋이 나간 인간을 일깨우며, 병에 지친 육신에게 고통을 덜어 주며, 감사납고 매몰찬 인사를 나긋나긋하게 녹이며, 사랑으로 인연을 맺어 주며 맺어 준 사랑을 붙잡아 둡니다. 또 어린 학생들이 책을 붙잡고 공부하도록 부추기며, 노년을 는실난실 들뜨게 하며, 송덕을 가장하여 심사 불편이 없게 군주들을 훈계하여 가르칩니다. 정리하면 아부는 누구나 스스로에게 흡족하고 기뻐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바, 이는 행복의 한 부분 혹은 행복의 요체라 하겠습니다. ‘노새끼리 서로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보다 제격인 일이 있겠습니까? 아부가 존경받는 웅변술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의학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며 시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지 못할까 마는, 아무튼 아부는 인간 삶 전체를 달콤하게 하는 꿀이며, 살맛을 북돋는 양념입니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합니다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입니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습니다. 인간 만사는 변화무쌍하고 황홀난측하여,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덜 오만하다 할 나의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옳게 판단하였던바,2) 무엇 하나 제대로 분명히 사태를 파악하기란 아예 무망한 일이며, 설혹 무언가 사태의 실마리가 보였다 한들 이는 드물지 않게 즐거운 인생에 오히려 성가실 뿐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영혼은 진상보다는 차라리 거짓에 끌리기 쉽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요구한다 치면, 교회의 설교시간을 보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심각한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꾸벅거리며, 하품하며 싫증을 냅니다. 사제의 사설 ― 아니 설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실수했습니다 ― 에 흔히 있는 일인바 꼬부랑할망구의 옛날이야기가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모두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피며 입을 벌립니다. 심지어 성인이 이야기를 술술 재미지게 풀어내거나 솔깃하게 지어 낸다면, 이에 대한 예로 여러분은 게오르기우스 혹은 크리스토포루스 혹은 바르바라 등의 성인들을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이 성자를 베드로 혹은 바오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경건하게 경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것은 지금 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쯤 합시다.

그러니 행복에로의 접근은 얼마나 적은 비용으로 가능합니까? 사태의 진실을 파악해야 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수고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며, 문법과 같이 하찮은 일조차도 값싼 것은 없습니다만, 거짓은 제일 쉬운 일인바 가진 허상만큼 혹은 가진 허상보다 훨씬 큰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금에 절여 삭힌 고기를 먹으며, 어지간한 사람도 그 역겨운 냄새를 견딜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마치 천상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묻거니와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이 별미라 할 상어알 젓을 메스꺼워한다면, 이 사람의 행복은 무엇에 달린 것입니까? 또 만일 무지막지하게 못생긴 아내를 보면서 마치 베누스 여신과 경합을 벌일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이는 진실로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것과 진배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주홍과 노랑으로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그림을 쳐다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여 아펠레스 혹은 제욱시스의3)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제 저 유명한 화가들의 위대한 그림을 비싼 돈을 치르고 구입하고도 그림 감상에서 그저 엇비슷한 정도의 쾌락을 얻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할 것입니다.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이를 알고 있습니다.4) 그는 새로 얻은 부인에게 선물로 인조 보석을 선물하면서,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를 발휘하여 그 보석이 천연의 진품 보석이며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내 묻거니와, 그런 보석으로 눈과 영혼을 충분히 배부르게 먹이고, 가짜 보석을 마치 굉장한 보물인 양 감추고 아낀다면 가짜든 진짜든 여인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의 착각을 이용하여 비용을 아꼈으며, 많은 돈을 주고 사들인 선물로 아내를 감동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자신에게 붙들어 두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동굴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온갖 다양한 사물의 그림자와 모상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진상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지 않으며 지금 그대로 만족한다고 할 때, 동굴로부터 탈출하여 세상 온갖 사물들의 진상을 알게 된 현자와 이들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루키아노스가 이야기한 부자 뮈킬로스가 만일 영원히 황금의 꿈을 꿀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다른 행복을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이가 전혀 없으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허상에 빠진 어리석은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허상을 선택한 경우가 훨씬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 분명한 즉, 다만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허상의 억견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유이든지 함께 누릴 사람들이 없다면 하나도 즐거울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설령 있다 한들 매우 소수에게만 국한되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수백 년 동안 희랍인들을 현자로 다만 일곱 명을 헤아리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칠현인을 자세히 파고들면, 아니면 내 목숨을 내놓겠는바, 그들 가운데는 얼치기 현자가 끼어 있으며, 혹은 그들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현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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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라티우스 <서간시> 1, 18, 6행

2)여기서 ‘오만한 태도’와 관련하여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21d이하 (최명관 역, 종로서적, 1981, 47쪽)을 보라. “오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저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지자라고 여겨지고 있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저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당신은 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알게 하려고 힘썼습니다.”

3)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화가였다. 제욱시스는 기원전 425년 이전에 아테네를 찾은 화가로서 소크라테스 등과 교류하였다. 남부 이탈리아 크로톤의 헤라 신전에 헬레네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4)아마도 토머스 모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ME 133쪽 참조).

사랑의 조미료로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만드는 비법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박비호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사랑의 조미료’에 관한 이야기

“지금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 말은 십 여 년 전부터 급식 조리 사원을 뽑을 때 지원자들에게 내가 던지는 유일한 질문이다. 질문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요즘 당신은 가족들과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계십니까?” 이다.

지금부터 십 칠년 전에 학교에 납품하는 위탁 급식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이 된 것은 과연 소비자들이 얼마동안이나 우리 음식에 질리지 않고 계속해서 먹어줄까 하는 것이었다.

‘일류 호텔의 주방장들이 고급재료를 엄선하여 만든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하여 두 끼를 먹기가 힘들지만 집에서 아내나 엄마가 만들어 준 음식은 비록 솜씨가 부족하고 재료가 보잘 것 없다고 하더라도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먼저 그 원인을 찾고 난 후에 이 사업을 시작하면 성공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나는 얼마 후에 그 해답을 어머니와 아내의 가족에 대한 ‘사랑의 결과’ 라는 형이상학적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은 음식의 재료나 음식 솜씨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족에 대한 정성과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을 일명 ‘사랑의 조미료’ 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 그리고 사랑과 정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사원으로 채용하였고 음식 재료의 선택부터 음식을 만드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고스란히 사업장에서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사랑의 조미료’를 흠뻑 뿌려 만든 음식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날 집안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나 사원 상호간에 갈등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 혹은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걱정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음식 조리에서 배제하였다. 이와 같은 운영의 결과였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십칠 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서해안에서 유일한 급식 납품업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

 

과학으로 비과학적인 문제를 증명한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

2002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1943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요코하마 시립대학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한 에모토 마사루의 작품으로 모든 생물의 생명은 물론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물을 주제로 수시로 변하는 물의 사진을 통하여 물에도 의식이 있음과 특히 물이 말과 글씨, 음악 등에 따라 변화되는 것을 물 결정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특히 우리 인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물이 우리의 의식에 따라서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책이다.

1. 우주는 무엇으로 되어 있을까?

저자는 ‘인간은 물이다.’ 라고 정의하면서 이 말을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키워드라고 한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드라마는 물이 비쳐내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바다에 물방울을 떨어뜨림으로써 사회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물에게 말을 들려주고, 글씨를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었을 때 물이 보여주는 신비하고 놀라운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랫동안 물과 파동에 대한 연구를 해온 저자는 눈(雪)의 결정체 하나하나가 그 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부터 물의 결정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사랑, 감사’와 같은 말이나 긍정적인 글을 보여준 물에서는 완전한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이 나타났지만 ‘악마’, ‘멍청한 놈’, ‘바보’, ‘짜증나, 죽여 버릴 거야’ 등과 같이 부정적인 말에는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찌그러진 결정체의 모습이 나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 주세요’ 라는 온유한 말에는 꽃처럼 예쁜 육각형 결정이 나왔지만 ‘그렇게 해!’ 라는 명령조의 말에는 ‘악마’ 라고 말할 때와 같은 결정을 보였다고 한다. 물 결정 사진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결정을 보인 것이 바로 ‘사랑’과 ‘감사’라는 말에 대한 결정이다.

인간의 몸도 70퍼센트가 물임을 고려하면 우리가 서로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즉 사랑과 감사처럼 긍정의 에너지를 주고받으면 몸속 물도 건강하게, 맑고 아름답게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과 감사로 가득 채우면 사랑해야 하는 것, 감사해야만 할 멋진 일들이 저절로 찾아와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만 원한이나 불만, 슬픔과 같은 파동을 발하면 한층 더 원한을 품어야 할 상황이나 슬픔으로 가득 찬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 오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어떤 세계를 선택하고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한다.

2. 물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입구

하늘에서 내려온 빗물은 몇 십 년, 몇 백 년의 세월에 걸쳐 흙을 통하여 지하수가 된다. 저자는 스위스 취리히 공대 교수였던 조안 데이비스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물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은 정보를 기억하고 지구를 순환함으로써 그 정보를 전달하며 물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해독하는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물의 결정에 관한 관찰이라고 한다. 특히 ‘고맙습니다’ 라는 말에 반응하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결정체와 ‘사랑과 감사’라는 말에 반응하는 장엄한 광체가 물의 생명과 혼의 모습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과 감사’ 라는 말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고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말이라고 한다.

3. 의식이 모든 것을 만든다.

저자는 물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이끌려서 인간이 오염된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가의 답을 물과 연관하여 찾고 있다. 그리고 물의 결정이 생기는 이유는 모든 물질의 감정과 의식이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파동이 물에 영향을 주어 파동에 상응하는 결정구조를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글자 또한 고유한 파동이 있기 때문에 물이 거기에 반응한다고 주장한다.

생각과 의식이 파동 에너지로 전파되듯이 사랑을 느끼는 것도 혹은 서로 반목하는 것도 파동의 영향이라고 한다. 또 분노와 슬픔, 원한 같은 감정을 치유하는 데도 파동의 법칙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좋지 않은 감정과 정반대의 파동을 내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한이란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분노에는 연민을, 공포에는 용기를, 불안에는 안심을, 초조에는 안정을, 압박감에는 평상심을 가지면 된다고 한다. 이런 원리로 원한의 감정으로 병에 걸린 사람은 감사의 마음을 되찾음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과 의식은 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즉 의식이 물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4. 한순간에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끝으로 저자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연구하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셀드레이크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번 만들어진 형태의 장은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넘어서 전파된다고 한다.

즉 형태의 장이 만들어 지면 다른 장소에도 영향을 끼치며 이것은 한 순간에 세계를 바꾸는 일이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장으로 살아가는데, 따라서 우리는 주위 사람이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의식을 향한다는 말은 사랑으로 대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장을 만드는가에 따라서 고통과 상처의 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사랑과 감사로 가득한 세계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넘치는 사랑과 감사로 세계를 감싸줄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멋진 형태의 장이 되어서 세계를 바꾸어 간다고 한다.

 

인간이 서로 조화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사랑의 조미료’라는 말이나 ‘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과 음악 같은 소리는 물론 글자에도 반응한다.’는 형이상학적인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비과학적이고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랑과 감사라는 말은 멀지않은 장래에 그 중요성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확실하게 증명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 역시 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물에서 조차 아름답게 반응하는 낱말인 ‘사랑과 감사’라는 말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지역이나 인종, 언어 등 모든 여건을 초월하여 인간이 서로 조화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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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일곱 번째 글로서 에모토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양억관 옮김/나무심는사람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 – 박지원, 「不移堂記」 [연암읽기 02]

전호근(경희대)

사함은 연암 박지원의 벗이다. 본디 대나무를 좋아했던 사함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 곧 ‘대나무집 늙은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연암이 막상 가서 보니 사함의 집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연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을 터. 그러고는 느닷없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양천의 이야기를 꺼낸다.

연암의 스승 이양천은 일찍이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이인상과 막역한 사이였다. 본래 제갈공명을 흠모했던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공명의 사당에 심어져 있는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난 뒤 이인상이 족자를 보내왔는데 펼쳐보니 잣나무 그림은 없고 양나라 사혜련이 지은 「설부(雪賦)」, 그러니까 눈에 관한 시만 있다. 이양천이 어찌 된 거냐고 묻자 이인상은 「설부」 안에 잣나무가 들어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대꾸한다. 그림을 달라고 했는데 글씨를 보내오고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눈 속에서 찾아보라니? 이양천은 의아할 밖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양천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간했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유배지로 가던 중 눈이 내리더니 곧이어 금부도사가 오면 사약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전갈이 왔다. 따라갔던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울부짖는데 이양천은 문득 멀리 눈 속에서 어릿한 나무를 발견한다. 아, 이인상이 말하던 눈 속의 잣나무가 바로 저기 있구나!

섬에 갇힌 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드는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토하고 어지러워하는데 이양천은 이렇게 노래했다.

“남쪽 바다의 산호야 꺾인들 어쩌겠는가마는 오늘 밤 임금의 처소가 추울까 걱정이라네[南海珊瑚折奈何 ?恐今宵玉樓寒].”

얼마 뒤 이인상에게서 편지가 왔다.

“근래에 그대가 지은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았더니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겠소. 이제 보니 그대야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할 만하오.”

이런 이양천이 세상을 떠난 뒤 연암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의 잣나무로다. 선비는 곤궁해진 뒤에 평소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법이니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어찌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사함에게 들려주고 연암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나의 벗 ‘죽원옹’ 사함은 대나무를 사랑한다. 사함이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이라면 날씨가 추워진 뒤에 우리는 눈 덮인 그대의 뜰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잣나무와 대나무는 모두 선비의 변함없는 지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지만 당대의 화가 이인상이 보기에 그야말로 자신의 삶으로 잣나무를 제대로 그린 사람이었다. 연암 또한 자신의 벗 사함이 어려운 시절이 닥치더라도 변함없이 지조를 지켜 삶의 대나무를 그리리라는 믿음으로 보이지도 않는 눈 속의 잣나무를 이야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