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법치에 대한 단상 [썩은 뿌리 자르기]
오상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상지대 강사)
얼마 전, 진보진영의 버팀목이셨던 이소선 어머니께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한(恨) 많은 그분의 마지막 길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바람처럼 떠나버린 아들, 태일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40여년의 세월, 그 슬픔과 고통의 무게를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제 사람이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에서 편히 잠드시길 기원한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이십대 초반의 한 청년의 절규가 있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짧지만 깊은 울림을 전하고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폈다. 그가 전태일이다. 유명무실했던 ‘법’ 앞에서 참담하고 무력했던 젊은 혈기는 자기를 태워 세상을 비추고자 했다. 법을 지켜달라는 소박한 바람은 재가 되어 모란공원에 잠들었다.
며칠 전, 학부 4학년 후배에게 ‘한국 사회의 법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 녀석 머뭇거림도 없이 짧게 되물었다. “유전무죄 아닌가요?”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을 하면서도 생활고에 못 이겨 범죄를 저지를 이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것이 한국 사회의 법치가 아니냐고. 취업 전선에 내몰려야 하는 예비 사회인의 대답이라 더욱 가슴에 남는다.
2010년 봄, MBC의 간판 시사프로그램인 PD수첩에서는 이른바 ‘스폰서 검사’편이 방송되었다. 제보자 스스로가 ‘다수의 전현직 검사들에게 지속적으로 금전 · 향응 · 성상납 등의 스폰서 행위를 해왔다고 밝힌 문서를 토대로 진행된 취재의 결과물이었다. 제보자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하여 세밀한 부분까지 사실에 가까운 보도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기에 순식간의 세간의 관심이 주목된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에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들은 과연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지난 7월 6일 연합뉴스에는 ‘스폰서 검사’ 의혹 사건의 중심인물 중에 한 사람인 한승철 전 대검찰청 감찰부장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됐다가 1ㆍ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면직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냈고 이에 대한 판결이 기사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예상(?)대로 재판부는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시 말해서 ‘스폰서 검사’ 사건으로 인해 면직처분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정씨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부분은 인정되지만 그 금액이 100만원 정도에 불과해 징계 종류로 면직을 선택한 것은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것으로 취소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득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검사(檢事)’라는 집단의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든 잘 모르겠다면 사전부터 뒤져보자. 그러면 실마리가 보이는 법이니까. ‘검사’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 행정공무원과는 달리 각자가 단독으로 검찰사무를 처리하는 단독관청으로서 오로지 진실과 정의에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오로지 진실과 정의에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지고 계신 분들’께서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인정되지만 그게 고작(?) 100만원 정도라면 별 문제 없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말이다.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처분이 내려진다지만 어딘가 좀 수상한 법이 또 하나 있다. ‘병역법’이 그것이다. 병역법이 대한민국 모든 청년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회 지도층’이라 통칭되는 그룹, 다시 말해 정치인이나 재벌들의 2세가 군에 입대하는 비율은 일반 청년들이 입대하는 비율에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적다. 현 정부 고위 관료들을 보아도 그 흔한 군필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법은 왜 권력을 지닌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이 순진한 물음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동아시아 사상사에 있다. 특히 고대 제자백가 중의 하나인 법가(法家)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법가는 모두가 인정할 만한 창시자가 없다. 따라서 사승관계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법가로 분류되는 학자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을 본래적으로 이익(利)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법가는 진(秦)의 시황제가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하면서 통치기반으로 삼은 사상이었다. 시황제는 법가 사상가인 이사(李斯)의 도움으로 통일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법가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상가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군서(商君書)』의 저자로 알려진 상앙(商?, ?~BC 338)이다. 그는 ‘법(法)’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음으로는 ‘술(術)’을 군주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은 신불해(申不害, ?~BC 337?)다. ‘술’은 군주가 신하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술책(術策)이나 술수(術數)처럼 계략(計略)이나 수단으로써의 기술을 의미한다. 마지막 인물은 신도(愼到, BC 395~BC 315)다. 그는 ‘세(勢)’를 중요하게 여겼다. ‘세’는 용례로 쉽게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데, 기세(氣勢)아 권세(權勢) 혹은 형세(形勢)처럼 물리적 힘을 의미하는 말이다. 군주가 ‘세’가 없다면 법이나 술도 발휘되기 어려울 것이다.
대중들에게는 낯선 학자들을 셋이나 등장시켰던 이유는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비자(韓非, BC 280?∼BC 233)를 언급하기 위해서다. 한비자는 앞서 언급한 ‘법’, ‘술’, ‘세’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국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비자는 이사와 더불어 순자(荀子) 아래에서 배운 인물로 인간의 본성을 악함으로 규정했던 순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을 ‘이익을 좋아하고 해악을 싫어하는 존재’로 보았다.
인간을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백성은 국가가 ‘위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통제해야 할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 때문에 법은 절대 권력과 그 언저리에 있는 자들이 일반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의미를 갖게 된다. 요컨대 힘깨나 있는 사람들은 법 위에 군림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법가의 속내는 사실 이런 것이었다.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이란 책의 역자는 그의 서문에서 동아시아의 법의 역사에 대해 이런 소회를 담았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역자는 법가적 전제 정치를 우선 박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법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 걸음 다가서려면 말이다.” 박멸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책(政策)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백성들은 (단지 법적으로) 면하려고만 한 뿐,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러나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또 올바름에 이르게 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論語』, 「爲政」)
“옳지 않음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 『孟子』「公孫丑上」)
위의 두 문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부끄러움(恥, 羞)’이다. 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지만 않으면 무슨 일을 하든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공자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놈”이라고 나무란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끄러움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꾸짖는다. 맹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을 ‘의(義)’의 단서라고 했다. 의(義)란 ‘바름’이나 ‘의로움’으로 풀이되는데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였던 ‘정의(正義)’가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토록 경쟁적으로 읽혀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제 우리 사회에서 ‘정의’는 책으로 보고 배워야만 알 수 있는 화석화된 개념이 되었다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이 내걸고 있는 ‘정의’와 국민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진짜 ‘정의’가 궁금했던 것일까?
법은 빈부와 귀천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적용되어야만 한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진짜 ‘정의 사회’를 구현하는 길이다. 물론 이런 사회가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