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청춘의 서재]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청춘의 서재]

소율(자유기고가)

 

간소한 문장은 깊이 우려낸 녹차의 맛과 비슷하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는다.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상대방의 손을 잡는 행위와 동일하다. 밑줄은 독자가 저자에게 보내는 공감, 동의, 지지, 환희, 동맹을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식이다. 당연히 좋은 책일수록 밑줄을 긋는 횟수도 늘어난다. 하지만 이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밑줄을 칠 문장보다 밑줄을 치지 않을 문장이 더 많을 때 밑줄을 긋게 된다. 왜냐하면 밑줄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길면 길수록 밑줄은 어느새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은 우승할 확률1%인 대책 없는 80년대 삼미 야구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미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팀이기보다는 야구를 취미로 즐기는 사회인 야구 동호회 성격이 강한 팀이었다. 선수 이름도 슈퍼스타에 어울리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최강타, 전태풍, 백두산 같은 멋진 이름 대신 금광옥과 장명부 그리고 패전 전문 마무리 투수 감사용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금광옥은 새로운 사과 품종 이름 같았고, 장명부는 일본의 인기 만화 데쓰노트를 한국식 이름으로 지으면 어울릴 만한 이름 같았다. 그리고 감사용은 감사용 다음에 선물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가? 다가오는 한가위엔 고객 여러분의 정성에 보답하고자 저희가 감사용 선물을 준비했어요.

슈퍼맨 망토 입고 야구를 하는 정신없는 구단답게 꼴찌는 삼미의 몫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기록은 대부분 삼미가 기록했다. 한 시즌 최다 연패, 한 시즌 최소 승률, 한 경기 최대 점수차 역전패, 한 경기 최다 병살타, 한 경기 최다 홈런 허용, 한 경기 최다 사사구 허용, 특정 구단 상대 최다 연패 등등. 하지만 박민규는 승률 1%의 꼴찌 팀 삼미에 주목했다. “승리한 경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적지만 패배한 경기에서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특급 투수 크리스 매튜스의 말이다. 꼴지로 출발한 삼미는 다음 시즌에 기똥차게 변신을 한다. 최종 성적은 1위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2위였다. 그는 만화적 세계와 농담과 명랑으로 꼴찌와 실패의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개나 줘 버려! 낄낄거려도 좋고, 깔깔거려도 좋고, 데구르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나 다시 데구르르 굴러도 좋은 소설이었다. 아, 재미있다 !

나는 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책에 밑줄을 단 한 번도 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인 내가 저자인 박민규에게 보내는 야유가 아니며 그의 문장과 서사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아니다. 첫 페이지 첫 문장 첫 음절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길게 이어질 밑줄을 긋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감의 밑줄이 길다. 그만큼 박민규의 서사는 압도적이다. 그 동안 주류 문단의 젠체하는 문장, 뒷짐지고 훈계만 하려는 꼰대들의 서사, 당대를 외면한 낭만적 후까시와 후일담, 징징거리는 신경 쇠약 직전의 신파, 쓸데없이 무게 잡는 우울, 이 세상 모든 트라우마의 주범은 모두 폭력적 아버지라고 말하는 뻔한 가족 서사에 진절머리가 났던 시절에 읽은 이 소설은 시시껄렁한 잡담과 명랑으로도 깊이 있는 문학의 향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작품이었다. 장정일의 소설들이 시시해질 무렵 등장한 박민규은 싱싱해 보였다. 진정한 슈퍼스타는 박민규였다.

야구란 본질적으로 실패와 어긋남의 서사이다. 3할 타자란 10번 대결해서 7번 실패하고 겨우 3번 성공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의 법칙으로 보자면 3할은 실패한 승률이다. 10번 대결해서 3번 성공했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는 3할 타자를 훌륭한 타자라고 자랑한다. 이렇듯 야구는 백전백승의 세계가 아니고 승자 독식의 세계도 아니다. <3승 7패의 세계>이다. “7패나 했어?”의 세상이 아니라 “ 3승이나 했어!”의 세상이다. 맹추, 띨띠리, 멍충이, 해삼, 멍게, 말미잘의 세상이다.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라 !

1%의 승자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불행한 시대의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등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꼴등에 대한 따스한 위로와 공감이다. 이상적인 사회란 일등이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꼴찌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 시대는 한 명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 > 은 이 시대 청춘들에게 헛스윙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얼핏 이 위로는 상투적인 스포츠 서사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방점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지지에 있다. 사실 역경을 극복하고 이룬 기적 같은 성공 스토리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박민규는 성공이 아닌 실패에 밑줄을 긋는다. 7패 다음에 3승이 찾아온다고, 7패 다음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8패 뒤에 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외로워도 슬퍼도 웃음을 잃지 말라고, 들장미 소녀 캔디가 되라고, 말랑말랑한 것은 딱딱한 것보다 더 힘이 세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채찍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이 시대의 불안은 당신 탓이 아니며 당신의 무능 또한 당신 탓이 아니다. 그런 위로의 말이 간절한 시점이다.

엄청나게 빠른 직구를 자랑하는 투수의 공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공은 딱딱한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으로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온다. 니체는 말했다. 고통이 영혼을 갉아먹을수록 웃음을 잃지 마라. 나는 당신이 헛스윙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도 돌아서서 씨익 웃었으면 한다.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은 마른 잡초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357a~367e)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357a~367e)

이한빈

 

*진도표에는 ‘글라우콘의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 비판’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해당 부분에는 글라우콘의 정의관만이 나타나 있었을 뿐이지, 거기에 대한 비판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판’이라는 글자를 뺐습니다. 또 엄밀히 말해서 이건 글라우콘 자신의 정의관은 아니고, (트라시마코스를 포함한)당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의관의 입장을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한 것이기에, “글라우콘이 ‘가상으로’ 취하는 정의관(협약주의 정의관)”이라고 제목을 썼습니다.

 

1.제2권의 논의 도입부 (357a, 2권 처음 ~ 358e)

: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의 중에서, 올바른 것이 올바르지 못한 것보다 모든 측면에서 낫다(좋다)는 것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좋다’는 것일까? 글라우콘은 거기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좋은 것’에 세 가지가 있다는 점을 도출한다. “올바름이 그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올바름이 그것 자체로도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글라우콘은 가상으로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고, 소크라테스는 그와 반대로 올바름이 그 자체로 좋다는 입장을 취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1의 세부 내용―

 

글라우콘은 ‘좋은 것’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묻는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좋은 것이 있음을 소크라테스가 동의한다.

첫째, “그 결과를 바라서가 아니라 오직 그 자체 때문에 반기며 갖고자 하는 그런 것)”이 있다. 여기에는 기쁨, 해롭지 않은 즐거움 등이 있다. 기쁨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로 인하여 생기지 않는다. (357b)

둘째, “그 자체 때문에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들 때문에도 좋아하는 그런 것”이 있다. 슬기로운 것이나 보는 것 또는 건강한 것 등이 있다. (357c)

셋째, “그것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보수라던가 그 밖에 그것들에게서 생기는 결과(평판을 통한 명성 등) 때문”에 수용하려 하는 것이 있다. 이것들은 수고스럽긴 하지만 우리를 이롭게 한다. 그것 자체 때문이라면 기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신체 단련, 치료받음, 돈벌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357c)

소크라테스는 이 세 종류 중 두 번째 종류에 올바름이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트라시마코스를 포함하여)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글라우콘은 말한다. 그는 다수의 생각(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과는 달리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상으로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입장에 선다. 그가 가상으로 취하는 입장에 반대하는, 소크라테스의 올바름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다고 옹호하는 주장을 듣고자 한다.

글라우콘은 세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특히 트라시마코스)들의 주장을 크게 세 단계로 전개하기로 한다. 첫째, 올바름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둘째,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라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셋째, 사람들이 둘째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온당하다. (358e)

 

2.올바름의 기원에 대한 글라우콘의 말 (358e~362b)

: 1.에서 말했듯이 글라우콘은 우선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올바르지 않는 일과 관해서 최상의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며, 최악의 경우는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의 나쁨이 그런 일을 했을 때의 좋음보다 크기 때문에 법과 계약이 생기게 되었고, 그런 것을 따르는 것이 올바름이다. 올바름이란 단지 그러한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 사이에 있는 것이며,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름은 그것 자체로 좋아서가 아니라, 그만한 힘이 없기에 대접받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예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올바른 사람이라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면 올바르지 못한 자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 (기게스의 반지, 투명해지는 반지의 예) 둘째, 올바르게 보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자와, 올바르지만 올바르게 보이지는 않는 자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하게 살겠는가? 분명 전자가 더 행복할 것이다. 특히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자는, 부유하고, 강력해져서 친구들은 잘되게 해주고, 적들에게는 해롭게 할 수 있다. 또한 제물을 많이 바칠 수 있게 되어 인간뿐만 아니라 신들에게도 사랑받는다.

 

―2의 세부 내용―

 

(1) 글라우콘은 첫째로 올바름이 어떤 성질의 것이며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본래는 올바르지 못한 것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며, 그걸 당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을 당함으로서 입는 나쁨이 그것을 행해서 얻는 좋음보다 월등히 크다.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또 당해 보면서, 그런 일을 하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일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행할 수도, 당할 수도 없도록 계약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로 인해 법률과 계약을 제정하게 된다. 그렇게 제정된 법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이며 올바르다고 한다. 올바름이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고 처벌받지 않는 최선의 경우와, 그러고도 보복할 수 없는 최악의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358e~359c)

 

[2.(1)의 결론 주장] 올바른 것이 대접받는 까닭은 그것이 그 자체로 좋아서가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하고, 또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 대한 근거1] 올바른 사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상정해보면, 분명 탐욕으로 인해 올바르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할 것이다. (359c~359d)

[근거 1의 구체화] “기게스의 반지(투명해지는 반지)”를 생각해보자. 올바른 사람이 그 반지를 갖게 되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가졌을 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359d~360d)

[위에 대한 근거2] 가장 올바르지 않은 이와 가장 올바른 이를 대비해 보자. ‘가장’ 올바르지 못한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올바른 자로 보인다. 그는 올바름에 있어 최상의 평판을 받는다. ‘가장’ 올바른 자는 올바르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가장 올바른 사람이며, 그러기를 바란다. (만약 그가 올바르게 ‘보이기’까지 한다면, 그가 올바른 사람인 것이 올바르게 보이는 것으로 인한 결과 때문인지 아니면 올바름 그 자체로 인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앞의 가장 올바르지 않은 이와는 반대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악명을 갖고 있으며, 최악의 평판을 갖는다. 이들 중 누가 더 행복하겠는가? (360e~361e)

이 사례에서의 가장 올바른 자는 온갖 나쁜 일을 당하게 된다. 그는 그런 일을 당한 후에, 실제로 올바르게 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깨닫게 된다. (362a~362b)

반면 올바르지 못하지만 올바르게 보이는 자는 여러 이득을 얻는다. 첫째, 나라를 통치하고, 둘째, 가문과도 혼인하고, 혼인 시킬 수 있으며, 누구와도 거래 할 수 있다. 셋째, 올바르지 못한 일을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어서 모든 면에서 이득을 얻는다. 적을 압도하고 능가하며, 부유하게 된다. 그로 인해 친구들은 잘 되게 해주고, 적들은 해롭게 할 수 있다. 신들에게도 많은 제물을 바칠 수 있어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들에게도 사랑을 받게 된다. (362b~362d)

 

3.글라우콘의 말에 대한 아데이만토스의 보충

: 올바르지 못함의 입장을 가상으로 취하여 한 글라우콘의 주장을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보충한다. 그건 신이 올바른 자에게는 상을 주고, 올바르지 못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올바르지 못하지만, 부유한 자들이 주술이나 마법의 힘, 혹은 제사를 통해 그들이 받아야 할 벌을 피해가며, 오히려 올바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올바르게 산다면 단지 신의 벌을 받지 않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통해 얻는 이익을 얻을 수 없지만, 올바르지 못하게 산다면 그런 행위를 통한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제사를 통해 신으로부터의 징벌을 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올바름을 추구하기 보다는 올바르지 못함을 추구한다.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단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만한 힘과 용기가 없어서 그럴 뿐이지, 그럴 능력만 된다면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이는 올바름을 그것으로 인해 얻는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찬양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아데이만토스는 올바름을, 그것으로 얻게 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것 자체로서 찬양할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부탁한다.

 

―3의 세부 내용―

 

2의 글라우콘에 말에 대하여, 그의 형 아데이만토스가 (그가 보기에) 마땅히 언급되었어야 했을 것에 대해 보충한다. (362d~362e)

그는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무사이오스와 그 아들들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그것들의 공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올바른 자는 내세에 신들로부터 상을 받으며, 올바르지 못한 자들은 신들로부터 징벌을 받는다. (363b~364a)

하지만 그 외에도,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시인들이) 하는 언급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올바르지 못한 것이 올바른 것보다 득이 된다고 말한다. 올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력하고 가난하다면 업신여겨지며 얕보아진다. 게다가 신들도 올바른 이에게는 불행이 있게 하고, 올바르지 않은 이에게는 행운이 있게 한다. 부유한 사람은 탁발승이나 예언자들의 제사나 마법을 통해 신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보상할 수 있으며, 올바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64a~365a)

그렇다면, 이런 것을 알고, 어떤 식으로 살아야 인생을 훌륭하게 마칠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는 영리한 젊은이는 무엇을 택하겠는가? 그는 실제로는 올바르지 않지만, 올바른 듯이 ‘보이도록’ 살아야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올바르지 않으면서도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잖은가? 그러나 정치적 결사, 당파나 대중 연설, 법정 변론을 통해 남의 눈을 피할 수 있으며, 제물을 바쳐서 신들로부터의 벌을 피할 수 있기에 문제없다. (365a~366a)

올바른 사람은 신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올바르지 않은 일을 통해 얻는 이득은 얻을 수 없다. 반면 올바르지 못한 이는 그런 일을 통해 이득을 얻으며, 만일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제물을 바쳐서 신들의 징벌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올바르고자 하겠는가? 아무도 자발적으로 올바르게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르게 하려는 사람들은 단지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용기나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도 만일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힘만 갖는다면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를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올바르지 못함을 비난하거나 올바름을 찬양하는 데 있어, 그로 인해 얻는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가치를 근거로 찬양한 적은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그런 방식으로, 즉 올바름을 그로인해 얻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찬양할 것을 부탁한다. (366a~367e)

이상 국가 건립을 통한 정의 개념 확립(367e ~ 434d), 국가 수립의 기본 원리(369b ~374e)

2012.05.12.

플라톤 <국가> 발제

지 미 정.

 

2012.05.12.

지 미 정.

플라톤의 정의관: 이상 국가 건립을 통한 정의 개념 확립(367e ~ 434d)

1.올바름을 구조하는 방법과 이득과 관련된 진실

1)“우리가 착수하려는 탐구 과제는, 내가 보기에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사람의 일거리인 것 같으이.”…“그러니까 우리는 유능하지도 않은 터이니, 이 문제의 탐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이 내겐 생각되네. 이를테면, 누군가가 그다지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더러 작은 글씨들을 먼 거리에서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즉 똑같은 글씨들이 어디엔가 더 큰 곳에 더 큰 글씨로 적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 먼저 이것들을 읽고 난 다음에 , 한결 작은 글씨들이 이것들과 혹시 같은 것들인지를 살피게 된다면, 이는 천행으로 여겨질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368d~368e)

2)“그러니까 어쩌면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아내기도 더 쉬울 걸세. 자네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도록 하세나. 그런 다음 한결 작은 형태의 것에 있어서 올바름을 마찬가지로 검토해 보도록 하세나.”(369a)

2. 국가 수립의 기본 원리(369b ~374e)

1)소크라테스의 논변1: 필요에 따라 성립한 국가

(1)나라가 생기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한 가지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필요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는 식으로 하는데, 사람들에겐 많은 것이 필요하다. 즉 많은 사람이 동반자 및 협력자들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공동 생활체’(synoikia)에다 우리가 ‘나라’(도시국가:polis)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369b~369c)

(2)나라를 수립하는 일은 우리의 ‘필요’(chreia)가 하는 일이다. 나라는 이처럼 많은 여러 가지 것의 마련을 위해 농부, 집 짓는 사람, 직물을 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다 제화공이나 아니면 신체와 관련되는 것들을 보살피는 또 다른 사람을 보탤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 한도의 나라’(최소 필요국:he anankaiotate polis)는 넷 또는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다.(369d~369e)

(3)각 부류의 사람들이 생산하게 되는 물건들을 나라 안에서 서로들 나누기 위해 ‘협력(공동) 관계’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다. 우리한테 시장과 교환을 위한 표인 화폐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더불어 소매상의 출현과 임금 노동자의 출현도 어떤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371b~372a)

2)소크라테스의 논변2: 성향에 따른 기술자가 필요한 국가

우리 각자는 서로가 그다지 닮지를 않았고, 각기 성향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게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일에 매달리게 된다. 어떤 일을 더 잘 해내게 되는 것은 한 삶으로서 여러 가지 기술에 종사할 때가 아니라 한 삶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할 때이다. 즉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의 적기(適期:kairos)를 놓쳐 버리게 되면, 그 일은 완전히 망치게 될 것이란 것도 분명하므로 각각의 것이 더 많이, 더 훌륭하게, 그리고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kataphysin) 적기에 하되,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이다. 하지만 이 나라를 수입품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그런 곳에다가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나라의 생산품은 자신들을 위해서 충분할 만큼 생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는 상대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류의 것들을 또한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이 나라에서는 더 많은 농부들과 장인들이 필요하다. 더구나 각 종류의 물건들을 수입하며 수출할 또 다른 심부름꾼(봉사자)들이 필요 한데, 이들이 무역상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무역상들도 필요하며 무역이 해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해상 운송에 정통한 또 다른 많은 사람이 추가로 필요하다.(370b~371b)

3)소크라테스의 논변3: 준비된 사람들의 생활 방식

그들은 빵과 포도주, 의류와 신발을 만들고 집을 짓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다. 깨끗한 공간에서 그들의 아이들도 잘 먹이고 즐겁게 교제하며 가난이나 전쟁을 유념하여 재력을 넘게 자식을 낳지도 않는다. 또 그들은 요리를 위해 소금과 올리브, 치즈도 가질 것이며, 후식으로 여러 과일과 포도주도 마시며 평화로움 속에서 일생을 보내다 고령에 죽으면서 그와 같은 인생을 후손에게 남긴다.((372b~372d)

4)글라우콘의 물음1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 ‘돼지들의 나라’를 수립하고 계셨다면, 바로 이런 것들로 그것들을 살찌우지 않으셨겠습니까?”소크라테스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반문하자 “관습대로죠. 그들은 고생을 견디어 내려고 하지 않을 사람들이라, 침상에 기대 누워서, 식탁에 차린 식사를 하며, 또한 요새 사람들도 먹는 것과 같은 요리와 후식을 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372e)

5)소크라테스의 논변4: ‘호사스런 나라’가 성립하는 이유에 대한 고찰

‘호사스런 나라’의 성립 배경을 고찰하면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이 도대체 어떻게 나라에서 자라나게 되는지를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다. ‘참된 나라’는 ‘건강한 나라’다. 어떤 이들에게는 방금 설명한 나라의 생활 방식으로는 만족감을 주지 못할 수 있다. ‘염증 상태의 나라’를 알아보면, 그들은 의식주만을 필수품으로 여기지 않고 온갖 종류의 것들을 갖춰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나라를 한층 더 크게 만들어야 하며, 그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으며 규모와 수에서 확장과 충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모든 부류의 사냥꾼과 예술가, 음송인, 배우들, 합창 가무단원들, 연출가들, 기구를 만드는 사람들, 또 여인들을 위한 소품을 만드는 사람들과 봉사자, 즉 교육을 위한 유모들, 보모들, 시녀, 이발사, 일반 요리와 고기 요리를 위한 요리사가 필요하다. 추가로 돼지 치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 밖에 온갖 가축이 필요하며 그 수요가 있는 한은 그렇다. 이 같은 방식으로 살다보면 의사가 필요할 것이고 영토 역시 그들을 먹여 살리기엔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하다. 이로 인해 이웃 나라의 땅을 일부 떼어내야만 하고 그들 역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를 벗어나 재화의 끝없는 소유에 자신을 맡기면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한다. 그 다음엔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 말하지 말고 전쟁의 기원을 발견했다는 것만 말하자. 나라는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나쁜 일들이 생길 경우에 그 단서는 그런 것들이다.(373a~373e)

6)소크라테스의 논변6: 전쟁의 겨룸도 기술적인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기술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 전쟁과 관련된 겨룸은 기술적인 것이다. 제화 기술이 전술보다 더 신경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한 가지 일만 허용했는데 이건 각자가 타고난 적성에 맞는 일이며 이 일이야 말로 적기를 놓치지 않고 훌륭하게 해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이야말로 훌륭히 해내야 하는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일에 능하려면 그 일을 어려서부터 해오지 않고 부차적인 일로 취급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쟁 무기와 장비를 들었다고 해서 전투에 유능한 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도구가 그를 장인이나 운동선수로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도구는 그 각각의 지식을 지니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렇다면 수호자들의 일(기능)은 가장 중요한 일이며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를 요구하는 반면,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요하는 일이다.(374b~374e)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청춘의 고전 시즌2]-③

?[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③

??? 일시: 2012. 4. 28.?(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성의 한계를 넘어라!

?모순과 부정(Negation, 否定)의 창조자, 달리와 아도르노

–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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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김성우 교수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계’와 ‘치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물음을 듣고 혹시 누군가 바로 ‘흐르는 시간’과 ‘녹아내리는 치즈’를 연상해냈다면, 그는 어쩌면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화가, 달리만큼 창조적인 상상력을 지녔을 수도 있다. 치즈 한 조각,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지는 치즈의 하얀 맛과 녹아 흐늘거리는 촉감, 시기와 때마다 돌고 도는 하루해와 수적으로 반복되는 1년, 2년… 이렇게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세계, 그리고 입과 손으로 당연하게 느껴지는 감각 세계를 함께 담아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이라고 이름 붙였다. 시간의 ‘정지’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 (시계), 즉 기억된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림에서 흐느적흐느적 흘러내리듯 늘어진 시계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시간 모습을 넘어선다. 생각의 단편인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마치 그림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인다.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는 어느 정도 기억되겠지만, 그때의 기억된 시간은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머지않아 내용을 잃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개미들의 습격을 받아 사막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4월 28일, 김성우 올인고전학당 소장은 이렇게 기억과 시간의 초현실적인 모습을 담은 달리의 그림을 갖고 상상마당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달리의 그림을 이성의 한계를 넘은 “능동적 상상력으로 포착한 예술”이라고 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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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상력이 달리에게 능동적 예술의 힘이 됐을까?

<기억의 지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무질서한 조합을 보여준다. 김성우 교수가 꼬집어내었듯 이 그림은 이성의 통제 없이 창작자 위주로 그린 것이지 사실 세계를 재현한 작품이 아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시대 밀로의 <비너스> 여신상처럼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비너스 여신상은 사실미에 바탕을 두면서 아름다운 인간을 8이라는 미적 비율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역시 별의 사실적인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 빛나는 별의 색감은 그러면서 가슴에 박히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들>은 인물묘사에 바탕을 둔 것이면서 빛의 효과를 이용해 우리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정감을 전달한다.

반면 달리의 그림은 수학적이거나 고전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전혀 다른 미의 맛을 보여준다. 눈감은 사람,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바다와 땅, 사막, 고정된 사각형 모양의 대지, 그 위를 역설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시계의 시간밖에 없다. 친숙한 사물들이 묘사되지만 서로 다른 맥락들이 만나 ‘시간의 운동’이라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성우 교수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시각적인 충격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적인 신비스러움을 자극하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화가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달리의 그림을 두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감상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의 무의식 세계를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그림이 1931년도 작품임을 고려하면, 이때는 무의식이론의 거장 프로이트가 이미 일흔의 나이를 훌쩍 넘은 때이고, 그의 정신분석학연구가 세계?역사적으로 인정받았던 시기이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 정권의 수립으로 정신분석 서적출판 금지처분이 아직 내리기 전이기도 하다. 즉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생과 사가 무수히 교차하는 전쟁의 폭풍이 지나기 전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천재라고 부른 달리(1904-1989), 그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적 창작력은 그럼에도 그가 지켜보았던 전쟁의 아픔과 인간사의 비극 내지는 정치적 허무와 직접적 연관이 없어 보인다. 달리는 오히려 정치적 현실과 무관한 상상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는 “예술은 사실주의의 거울이 아니다. 그래서 창 없이도 사회를 표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꿔 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생계 요구는 물론 필연이지만, 진정한 예술은 이데올로기나 상황에 좌우되는 사회적 창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속한 사회 그 자체, 거시적으로 삶 근저에 놓인 인간사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 그 이상의 존재론적, 역사적 존재이다. 단순한 사회적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난해한 예술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아니, 예술 그 자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예술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의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김성우 교수는 아도르노의 예술철학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그의 말처럼 “자율성과 사회적 사실 사이”에서 생겨나는 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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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1903년에 태어난 아도르노는 시대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 있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어서 미국으로 이주를 가야만 했고 전쟁이 끝나고서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사회조사연구소를 재건하였다. 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시대와 철학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아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과 『미학이론』(?sthetische Theorie 1970, 미완성)을 저술하였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미학이란 칸트나 헤겔이 보여준 것보다 좀 더 예술적인 것이었다. 칸트는 물리적 자연의 아름다움을 승화시켜 창조적으로 규칙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가리켜 예술적 재능이라고 하였다. 독일에 쾰른 성당이나 이탈리아에 두오모 성당은 제한된 양의 길이와 넓이를 초월한 수학적 건축미로 탄생한 것이다. 또 바티칸에 피에타상(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은 힘의 숭고미를 역학적으로 보여준다. 산과 바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건축이나 조형의 예술미는 본래의 형식을 무제약적으로 넘어서는 숭고미에 속한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미적 판단력이 자연미를 시공간적 형식을 통해 인식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념적으로 느끼고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새롭게 구상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칸트의 이러한 관점은 이후 아도르노의 예술철학 형식미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예술성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이미지화이다. 아도르노의 견해로 이 미적인 능력은 조건과 한계를 넘고 넘어 또 새롭게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부정'(Negation, 否定)의 원리에 기인한다. 대상이나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지향하는 예술적 창조력은 바로 이 부정의 과정, 비동일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미학은 이런 점에서 김성우 교수가 얘기했듯 명확하게 헤겔 변증법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변증법이란 예컨대 씨앗이 새싹을 내고, 자라서 꽃이 피고 때가 되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정-반-합의 방식으로 정신도 처음에 단순한 존재의 상태에서 점차 생성변화의 상태로 그리고 완성된 상태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윽고 다시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정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이 말하자면 헤겔 변증법이다.

아도르노 변증법은 나와 타자,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개인과 사회, 과거와 미래 등등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차이’로 인정하는 데에 그 독창성이 있다. 각각의 이질성을 이해하고 기존의 것에 대한 관계를 통찰함으로써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 틈을 본 것이다. 변화 자체의 조건을 수용하는 아도르노는 그래서인지 인간과 자연을 도구화, 사물화의 대상, 즉 변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합리적인 이성에 치중되거나 광적인 파시즘(나치주의)은 인간의 왜곡된 자연미라고 할 수 있다. 김성우 교수가 말한 바로는 “사물을 정복하거나 노예화하는 것 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음악, 춤에 지나치게 동화, 동일화”되는 것은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매몰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달리의 경우 그의 특이한 콧수염, 그가 보여주었던 기괴하다 싶을 정도의 퍼포먼스, 때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전위예술 등은 미메시스 충동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순수한 자연미는 달리의 추상화 중에서도 특히 <기억의 지속>에서 생생히 구현되었다. 그림 속에 시계를 비롯한 여러 요소의 조합은 아도르노의 “흩어져 있는 것들의 비폭력적인 종합(Konstellation)”을 가리킨다. 달리의 모방적 자율성은 분명 예술의 무사회성이다. 또한, 그림 속 시계의 존재와 움직임은 마치 화해를 위해서 화해에 대한 모든 기억의 흔적마저 지우는듯하다. 규정된 사회, 규정된 삶과 현실에 대한 규정적인 부정, 이러한 아도르노의 예술관이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음을 김성우 교수는 이번 강연을 통해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주의와 아도르노의 미학의 연결점에서 그가 강조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러므로 “예술은 기만 없는 가상이다”.

후기?/ 김은하 (건국대 외래교수)

꽃처럼 붉은 울음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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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이사는 수 없이 다녔다. 아니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살다가 떠나가라면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울
▲ 에비슨이 촬영한 나병 환자(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산의 집단촌은 초가집이었지만 방이 있었고, 비도 피할 수 있었다. 거친 식량이었지만, 관청에서 나오는 배급품도 있었기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의 원성에 못 견뎌 한센인들은 흩어져 다른 지방으로 옮겨졌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순서는 정확하지 않은 듯했다. 같은 지명을 다시 말하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이 옮겼다. 60년, 50년 전에 다니던 데는 가물가물한다. 험하대이.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서러움을 세상이 험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할머니는 울산 집단촌을 나와 부산으로 온 것은 기억하지만, 부산의 첫 지명은 기억하지 못했다.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듯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부산에 와서 처음 살게 된 곳은 그리 큰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센인들이 모여 산다는 말이 돌자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때로는 가족이 들어와 함께 살면서 마을의 규모는 커져 갔다. 울산에서도 그러했지만, 마을이 커지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 주변 사람들의 핍박은 거세진다.

구걸도 힘들었고, 마치 한센병이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것처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비한센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한센인들의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했다. 그들은 주거 공간이 다르고, 주거지가 많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도 같은 지명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비한센인들에게 한센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를 넘어 없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거기서 용호동으로 갔제. 그래도 거(용호동)가 괜찮았다. 좀 살았던 것 같네.” ‘좀 살았던 것 같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사셨어요?” “아매 2~3년 살았제. 하모. 그때는 마이 살았던 거제.” 용호동에서는 양계를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밤낮없이 일만 했다. 바닷가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한센인들의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2. 세상이 그런 기라

 

2004년도에 우연히 용호동 한센인 집단촌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45도에 가까운 경사로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산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그 판잣집들은 철거 중이었다. 지금은 부산 용호동을 대표하는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하여 한센인들의 집이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그날 나는 보았다.

창문 대신 비닐이 쳐져 있는 집들의 대부분이 반쯤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오륙도가 보이는 그 곳 바닷가에서 노인 대여섯 명이 무표정하게 우리 일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산과 집단촌 사이에 나 있던 도로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방문들이 부서져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참으로 처참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그때 용호동 바닷가에서 보았던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던 그 노인들은 전기도 수도도 끊어진 그 곳에서 바다만 보고 있었다. 노인들 곁에 남아 있는 것은 햇살뿐이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이 그러했으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을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비켜서지 않고 바다를 보고 지은 집들에는 한센인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사람이 살 수 없던 척박한 환경이어서 한센인들은 집단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 밑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서 천막을 하나씩 지어 내려 간 것이 바닷가에까지 닿았을 게다. 세상이 바뀌어 그 곳이 천혜의 자연을 지닌 산책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은 오래 전에 강제로 쫓겨 와 살기 위해 구걸하고 한편으로는 닭을 키우고 비탈을 개간하여 천막을 판자로, 다시 판자의 일부가 스레트로 바뀌었지만,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연은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곳은 이제 부자들이 도시의 오염을 벗어나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지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한센인들은 그 곳을 떠나 다시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용호동은 왜 떠나셨어요?” “휴우, 거기는 살기가 괜찮았다. 바람이 마이 불고 추워도, 산나물 있제, 계란 팔제. 계란은 파는데 남는 기 너무 없는 기라. 그래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았제. 그기 그렇다. 처음에는 그렇다가 좀 있으모 꼭 말썽이 생기는 기라.”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 나중에 들어 온 사람, 일 안 하고 잘 묵는 사람, 세상이 그런 기라.”

 

3. 아픈 줄 모른께 그리 살았제

 

할머니는 최초의 정착인이 아니었다. 이미 한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에 할머니가 들어갔으므로 내부의 갈등으로 떠나야 할 사람도 할머니와 함께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닭을 키워 계란을 팔았으나, 직접 시장에 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자연히 외부에서 계란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필요했고, 마을 내부에서 그 중개인을 상대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의혹에 의한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좀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은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을 불러왔다. 이러한 갈등 끝에 시시비비가 붙었고, 일의 잘잘못을 떠나 공동체는 분열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용호동을 떠나야 하는 쪽이었다. 같은 한센인이지만 그 갈등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 마을과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은 용호동에서 서로 반목하던 사람들끼리 나뉘어져 정착한 곳으로 현재도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더 멀어 보였다. 할머니를 만나기 이전에 먼저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을 방문했었다. 그 곳에서는 개인적인 접촉이 불가능했다. 나와의 만남을 가져보겠다는 사람도 마을 대표의 한 마디에 연락처도 없이 뒤돌아섰고, 나는 마을 안으로 아예 들어서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부산의 또 다른 지명은 신암이었다. 신암이라는 지명은 기억하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었다. 단지 많이 힘들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신암에서 강제로 이주 당해 간 곳이 을숙도였다. 할머니는 을숙도에서의 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을숙도에서의 생활은 몸은 고단했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한센인들이 이주하기 전부터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한센인들은 서로의 생활 영역을 존중하며 생업에 열중했기 때문에 마주 칠 일이 거의 없었다. 섬이었지만 누군가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한센인들은 어떤 일이든 했다. 원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집중한 반면, 한센인들은 섬에 지천으로 널린 갈대와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었다. 갈대와 싸리나무는 젊은 남자들도 맨 손으로 꺾어 다듬기 어려운 식물이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불편한 손으로 갈대와 싸리나무를 꺾어서 구부리고 다듬어 빗자루로 엮었다.

그 빗자루는 뭍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 갔다. 함께 사는 것은 거부했지만, 한센인들이 만드는 빗자루는 다른 빗자루보다 견고하고 성능이 좋았기 때문이다. 빗자루도 한센인들이 뭍으로 직접 나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작은 나룻배에 싣고 강 가운데로 가면 뭍에서 나룻배를 타고 온 사람에게 넘겼다. 그 길만이 당시 을숙도에 살고 있던 한센인들의 생계수단이었다.

“김선생, 말도 마라. 온 손은 상처투성이고 피도 마이 났다. 피 나는 줄도 모르고 했다. 한참 하다 보면 그것들(갈대와 싸리나무) 군데 군데 피가 묻어 있는 기라. 그래 보모 온 손에 피라. 아픈 줄 모른께 그리 했제. 아팠으면 그리 했겄나” 한센인들이 돈을 벌어 삶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것이 빗자루를 만드는 것이기에 그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 했다.

 

4.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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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나환자촌. ⓒ동은의학박물관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쓸쓸한 얼굴을 보며,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톱 이야기>는 중학교 교사인 화자가 낙동강 하구 명지의 조마이섬에 사는 건우네 집을 가정방문하여 알게 된 조마이섬의 내력과 그 섬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가는 건우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마이섬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지배했고, 지금은 유력 인사가 사유지로 하려는 곳이다. 갈밭새 영감은 정부에 의해 이주해 온 한센인들을 몽둥이, 쇠스랑 등으로 쫓아내다가 팔을 다쳐 흉터도 지니고 있다. 오래 전부터 살았으나 아무도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한 몇 안 되는 조마이섬 사람들을 대신하여 갈밭새 영감이 유력 인사와 싸웠으나 결국은 감옥으로 가고, 건우는 학교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내가 들려주는 소설을 집중하며 듣던 할머니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릎을 탁 치며 “그긴 갑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의 무대인 조마이 마을은 처음 듣지만,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반색을 하며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자신의 이야기를 떠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건과 유사한 내용의 소설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강한 호기심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긴 갑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가. 요쯤(여기쯤)은 바다고 또 한 쪽은 땅인디, 한센 환자들이 거기 살려고 했제. 그런데 주민들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너거가 왜 오노 하고 막았다. 살라고 하는 한센 환자들하고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들 하고 크게 싸웠제.” 할머니가 사는 을숙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사건은 한센인들 사이에 회자되었기에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를 그 사건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회상하는 그 강변에서 한센인들과 주민들과의 투쟁은 처절했다. “환자들이 거서로 천막을 쳐놓고 살았던 모양이라. 천막을 쳐 놓고 집에 대창을 해가지고 싸우다가 안 되가 저거가(원주민이)…….그래가 술로 받아가지고……. (한센인들에게)술로 얼마나 먹여 놨던가, 한센 환자들이 술 먹고 그 마 잤삤어. 자는 여개(사이에) 그 사람들(원주민)이 와가지고 (천막에)불로 붙였어. (한센인들을)다 죽여 삘라고 불로 붙였는데 그서 튀나오는 사람 창 갖고 찔러 죽이고, 온 가족들하고 그 식구들하고 저쪽에 있고, 요쯤을 점령하면 (한센인)가족들도 욜로 올 수 있는 기라.”

할머니는 그 사건을 설명할 때, 두 팔을 벌려 한쪽팔로는 “요쯤은 바다고”, 다른 팔로는 “한쪽은 땅이고”라는 몸짓으로 그 강변의 지형이 길쭉했음을 온 몸으로 나타냈다. “그래 갖고 젊은 청년들 마이 죽었다. 그때 그래 많이 죽고 그래 갖고 요새 겉으면 한센 환자들 얼마나 많은 줄 아나 그냥 안 있다. 데모를 하든가 무슨 수를 내도 몇 만 명 되는데 그때만 해도 옛날이 되논께네……말도 못하고, 그리 되니까네 군수도 말로 못 하겠다 쿠고.”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어도단의 절벽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온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바라본 할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는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하면서 긴 한숨을 쉬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많은 한센인들이 죽었고 다쳤지만, 어떤 보상도 없었다.

요산 김정한은 <모래톱 이야기>의 조마이섬이 가상의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다와 인접한 실제 낙동강변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산은 곳곳을 직접 다니며 알게 된 사실들을 사회 비판적인 안목으로 소설화한 작가이다. 어쩌면 낙동강 주변을 탐색하다 한센인들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있었던 참혹한 사건을 듣고 <모래톱 이야기>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모래톱 이야기>가 발표된 196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실제 사건을 그대로 소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조마이섬에서의 한센인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소설적 장치로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그 강변의 정확한 지명을 묻는 나에게 “생각이 날락말락 한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고. 하기사 나도 쫓기는 건 매 한가진데”라며 기억을 애써 더듬었지만, 그 당시의 사건만 정확하게 되풀이 했다.

 

5. 해와 하늘빛이 서러워

 

젊은 한센인들이 살기 위하여 투쟁하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 사건은 그대로 시간 속으로 묻혀 갔다. 할머니는 끝내 그 곳이 낙동강 어디쯤인지 아니면 부근 다른 지역인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나, 사건의 정황은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이 많은 시간이 지나 다시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시인 서정주는 오래 전 항간에 떠도는 말들을 그대로 시에 옮겨 놓아 세간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한센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묘사했다. 비한센인들은 그들의 관념에 사로잡혀 한센인들을 배척했다. 두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세인의 어리석음은 ‘오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구분지어 나누어 버린다. ‘나’아니면 ‘너’가 되는 것이다. ‘우리’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면서도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됨을 애써 모른 척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선을 그어 관용과 이해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병든 몸으로 시간을 헤쳐 나온 생명의 강인함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상념에 잠긴 옆모습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 많은 한센인들의 슬픔을 만나고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살고 싶다는 그들의 작은 소망을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달빛 아래에서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었던 그들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소생하고 있었다.

 

 

『국가』 제 1 권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논의

올바름에 대하여 Ⅱ

 

가만히 듣고 있던 트라시마코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며 논의에 끼어든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올바름이 무엇인지 진정 알고 싶다면 묻기만 하지 말고 누군가가 하는 대답을 논박하고서 뽐내려고만 하지 말고 직접 대답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적절히 대처하며 결국 트라시마코스가 직접 말을 하도록 만든다.

 

(1) 트라시마코스의 1정의 : 올바른 것은 강한자의 편익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338c

 

(2) 소크라테스의 검토 : 강한자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강한자인 팡크라티온 선수 같은 자를 말하는 것이냐? 338d

 

(3) 트라시마코스의 1정의 수정 : 나라마다에 있어서 힘을 행사하는 것은 지배하는 쪽이며,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이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다. 즉 올바른 것은 통치자의 편익이다. 로 수정된다. 339

 

(4) 소크라테스의 반론 : 올바른 것이 편익이 되는 것이라는 점은 동의하나 다른 것은 더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하며 통치자들은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 자들인지 실수를 하는 자들인지 묻는다. 트라시마코스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자들이라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어떤 것은 그들이 옳게 법을 제정하고 어떤 것은 옳지 못하게 제정한다. 옳게 제정한다는 것은 자신e들의 편익이 되는 것들을 제정하는 것이지만, 옳지 못하게 제정하는 것은 편익이 못 되는 것들을 제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그것은 통치자의 편익뿐만 아니라 편익이 못 되는 것도 이행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된다. 339d~339e

 

(5) 트라시마코스의 반론 : 어떤 사람이 실수를 저지를 때, 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강한자로 부를 수가 없다. 엄밀한 뜻으로 말 한다면 어떤 전문가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 실수하지 않으며 실수를 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을 제정하게 되고,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이행해야 한다. 따라서 올바름은 강한자의 편익이라는 것이 정당하다. 340c~341a

 

(6) 소크라테스의 반론 : 엄밀한 뜻의 의사는 돈벌이를 하는 사람인지 환자를 돌보는 사람인지 묻는다. 트라시마코스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키잡이는 선원들의 통솔자인지 선원인지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다시 선원들의 통솔자라고 대답한다. 그들이 키잡이로 불리는 이유는 항해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선원들에 대한 통솔에 관한 기술 때문이다. 고로 기술도 원래 각각(선원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기술은 엄밀한 의미에서 온전한 것 정확한 것이기에 그 기술 자신에 대한 편익을 생각하기보다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에 편익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 고로 어떤 통솔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인 한은(통솔의 기술을 가진 자는)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한다. 341d~342e

 

(7) 트라시마코스의 재반론 및 정의 추가 :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보모가 있었는지를 언급하며 새로운 반론을 제기한다. 양을 치는 이들이나 소를 치는 이들이 양이나 소한테 좋은 것을 생각하며 이것들을 살찌게 하고 돌보는 것이 주인한테 그리고 자신들한테 좋은 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양이나 소를 위한 것이 아님을 언급하며 통치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덧붙임에 있어서 올바름 올바른 것은 실은 남에게 좋은 것을 하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올바르지 못한 자는 가장 행복하게 되고 반면에 올바르지 못한 짓이라고는 아예 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가장 비참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343b~344a

 

(8) 소크라테스의 반론 : 목자가 양을 살찌우는 것은 그가 목자인 한, 양의 최선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며 목자가 돈벌이를 하는 사람처럼 그것을 팔 것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양을 치는 기술에 있어서 그 기술이 맡아 돌보도록 되어 있는 대상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공토록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그 기술이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이미 충분히 갖추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 345c~345e 그리고 통치자들이 자신해서 통치를 맡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통치를 맡음으로 인해서 보수를 요구한다. 이 점에 있어서 통치술 자체만으로는 통치를 하는 자들에게 이득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보여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조타술을 통해서 건강하게 되었다고 조타술을 의술로 부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노동을 하는 자가 건강해졌다고 해서 보수획득술을 의술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전문가들이 각각의 기술들을 활용해서 이득을 보는 것은 보수 획득술을 추가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즉 의술은 건강을 생기게 하나 추가되는 보수 획득술이 보수를 생기게 한다. 또한 다른 모든 기술도 이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제 기능을 하며 각각기 맡도록 되어 있는 그 대상을 이롭도록 한다. 그리고 그 기술에 보수획득술이 추가되지 않는다면 그 전문가가 그 기술로 해서 이득을 얻는 일이 없다. 고로 통치술만으로 통치자가 이득을 얻는 것이라는 주장이 반박된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맡아 남의 나쁜 일들을 바로 잡으려 하지는 않고 보수를 요구하는데 그 이유는 그 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이 벌이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일을 맡지 않음으로 받는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이며 자신들이 통치를 맡게 되는 것은 그런 벌을 두려워함으로써 부득이하게 맡게 되는 것이다. 고로 ‘올바름은 강자의 편익이다.’ 라는 주장이 논파 된다. 345c~347e

 

(9) 트라시마코스의 두 번째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 1 :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삶이 더 훌륭하고 올바른 사람의 삶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두 번째 주장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올바른 사람은 저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같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올바른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 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시가에 능한 사람과 시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시가에 능한 사람은 분별력이 있고 훌륭하나 시가를 모르는 이는 분별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가에 능한 사람은 리라를 조율할 때 현을 죄거나 늦춤에 있어서 역시 시가에 능한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하거나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음이 드러난다. 반면에 시가에 능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능가하려 함이 인정된다. 그리고 전문지식이 있는 이는 지혜롭고 지혜로운이는 훌륭함이 인정된다. 고로 훌륭한 이(올바른 이)는 자기와 같은 사람(올바른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을 것이나 같지 않은 사람(올바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함이 드러난다. 여기서 올바른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이를 닮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못되고 무지한 이를 닮았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도출되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논파 된다. 348a~350d

 

(10) 트라시마코스의 두 번째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 2 : 다음으로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 더 유력하고 강하다고 했던 트라시마코스의 두 번째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이 이어진다. 9)에서 논의 되었던 데로 올바름이 지혜이며 사람의 훌륭함이라면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 보다 더 강할 것이 쉽게 드러날 것 같다고 한다.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있어서 다른 나라들을 부당하게 굴복하게 하여 예속화하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나라를 속국화 해서 갖고 있다는데서 출발한다. 그러한 올바르지 못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도 강하게 될 그 나라가 올바름 없이도 그런 힘을 지닐 수 있게 되었는지 아니면 올바름을 갖추어야 되는지가 올바름은 지혜라는 이전 논의의 결론을 통해 올바름을 갖춰야만 하는 것으로 쉽게 귀결이 난다. 그렇다면 나라 같은 어떤 집단이 올바르지 못하게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에 자기들끼리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다면 그 일(다른 나라를 예속시키는 것과 같은 올바르지 못한 짓)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 확인된다. 고로 자신들끼리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며 이 올바르지 못함이 서로 간에 대립과 증오 및 다툼을 가져다주나 올바름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기 때문임이 확인된다. 이로써 두 사람의 사이에서도 한 사람의 안에서도 올바르지 못함은 갈등이 생기게 되어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들게 된다. 고로 올바르지 못한 이들은 아무것도 서로 어우러져 해낼 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고로 일종의 올바름이라도 깃들어져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올바르지 못함이 한 개인 안에 깃들이게 되었을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갈등이 생기게 하고 한 마음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도록 만들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이 되게끔 만들고 말 것이라는 것으로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 유력하고 강하다는 논의는 논파된다. 351a~352b

 

(11) 트라시마코스의 두 번째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 3 : 마지막으로 올바르지 못한 이들이 올바른 자들보다도 또한 더 훌륭하게 살며 더 행복하다는 것을 검토한다. 이 논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며 신중하게 논의를 시작한다. 눈에 맞는 기능이 있고, 귀에 맞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어떤 기능이 부여되어 있기도 한 각각의 것에는 훌륭한 상태 또한 있다는 것이 합의된다. 그렇다면 눈의 훌륭한 상태 또한 있고 귀의 훌륭한 상태 또한 있다. 그렇다면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에 의해서는 그 기능이 제 할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되지만, 나쁜 상태에 의해서는 나쁘게 수행하게 되는 것이라는 접이 합의된다. 또 그것이 자기의 훌륭한 상태를 빼앗겼을 때에는 자기의 기능을 잘못 수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를 적용시킬 수 있으므로 혼(psyche)에는 돌봄, 잘사는 것 등등의 기능이 있는데 이 혼에도 훌륭한 상태가 또한 있다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혼이 고유의 훌륭한 상태를 빼앗기고도 자신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지 못함은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그런데 앞의 10)번 논의에서 한 사람에서의 올바름을 논의 할 때 올바름은 혼의 훌륭한 상태 그리고 올바르지 못함은 혼의 나쁜 상태임에 이미 동의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람은 혼의 훌륭한 상태를 지녔으므로 그것의 고유한 기능인 잘 살게 될 것임이 필연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혼의 훌륭하지 못한 상태를 지녔으므로 고유한 기능을 상실한 것이니 잘 살지 못하게 될 것이 필연적이게 된다. 그러니까 올바른 사람은 행복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것이 입증되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논파된다. 352d~354a

 

마무리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그것은 내버려둔 채로 그것이 나쁨이며 무지 인가 지혜이며 훌륭함인가에 대한 검토만 착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도 더 이득이 된다는 주장에 반박하느라 올바름이 무엇인지 고찰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로 올바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훌륭함인지 아닌지 그것을 지닌 자가 불행한지 행복한지 알게 될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하며 1권이 마무리 된다. 354b~354c

조화로운 삶-스콧 니어링[청춘의 서재]

조화로운 삶-스콧 니어링[청춘의 서재]

 

박지용(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혁명가의 삶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노예혁명가 스파르타쿠스,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로베스 피에르, 파리코뮌의 극좌파 블랑키,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전사 체 게바라. 이 외에도 한참을 더 열거할 수 있는 이들 혁명가의 삶에는 혁명을 위한 열정과 저항의 파토스가 있다. 혁명가를 혁명가이게끔 하는 어떤 종류의 뜨거움이 있다. 이들 혁명가의 뜨거움이 대중의 심장을 끓어오르게 하고 진동시킨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분노로 떨려야 혁명은 일어난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살펴 본 혁명들은 저항하기 힘든, 압도적으로 거대한 체제를 적으로 삼고 있다. 폭력 혁명으로 전복된 체제는 폭력으로 반동화되며 이 과정에서 폭력의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지난한 폭력의 역사는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 파리코뮌의 몰락까지 근 1세기의 달하는 근대사에서 집약된다.

그런데 전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가 있다. 이 혁명의 다름은 ‘그게 무슨 혁명이야’라는 반응을 낳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피를 뜨겁게 하지 않는 냉철한 사유의 혁명, 적과 마주대해 무력으로 싸우지 않는 혁명, 그럼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명. 혹시 깊은 산 속에서 일으키는 자아의 혁명을 말하려는 게 아닌가라고 짐짓 의심할 수 있다. 이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는 스콧 니어링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에 철두철미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삶은 다른 의미에서 혁명적일 수 있다. 이 혁명은 정치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지는 않으나 체제의 전복을 다르게 실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체제의 부도덕성에 대한 분노라는 반대급부의 소진적인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냉철한 사유와 삶의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작은 혁명에 관한 모범적인 사례이다. 이 혁명은 자본주의적 삶을 거부하고도 삶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현실화시킨 그의 삶 자체이다. 어찌보면 니어링의 삶과 사상은 정치적인 투쟁이나 분노의 파토스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그가 미국 좌파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적인 성찰이나 계획에 대한 집착은 혁명적 파토스와는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다.

자본주의가 수탈하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가치를 조화시키고 복원시키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것은 자연에 기초한 삶이었다. 노동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자연에 대한 신뢰와 지식이 있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울 수 있다는 점을 그는 20년 동안의 전원생활을 통해 보여준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계획과 연구의 필요성은 자손대대로 농부로 살아온 이웃과의 대조에서 잘 드러난다. 이웃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만 어설픈 농부인 니어링보다도 못한 결실을 낳는다. 계획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관성대로 살아온 삶을 살게 되지만, 삶과 일을 계획하고 통제할 경우 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된다는 교훈이 남는다. 물론 이러한 보편적인 행위 원칙들은 전원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혁명운동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점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대도시에서의 정치 투쟁을 포기하고, 전원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한 그들의 삶이 혁명에 대한 발상의 새로움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버몬트의 전원생활에서 니어링 부부가 추구한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생활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농사를 짓고 작물을 키우는 목적은 자본축적이 아닌 단순히 먹고 사는 데 있었다. 이윤이 없는 생활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농사를 지어서 전혀 남는 것이 없는 바는 아닐테지만 남겨서 돈을 모아두고 그 돈으로 또 뭔가를 해서 또 남기고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이자 생활 습관일 따름이다. 이렇듯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이 감정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하면서 불안을 벗어나려는 축적의 몸부림에 허덕인다.

그런데 니어링은, 마치 성경의 한 대목처럼 ‘자연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라는 배포 큰 태도를 보인다. 사실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볼 때, 불안한 삶을 더욱 불안하게 느끼게 하고 또 달래주는 것이 모두 그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은퇴 후의 삶? 실직 후의 삶? 미리부터 대비해야 한다는 불안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비하고 또 축적해야 한다는 외침은 실상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불안한 삶에 대한 위안은 자본의 축적과 투자로만 달래질 수 있지만 그도 녹록치는 않다.

20년의 삶 동안 니어링 부부는 스스로의 자기평가 속에서 그들의 선택이 정당했다는 점과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삶이 극복될 수 있음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부정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농업공동체는 니어링의 제안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져갔다. 대안이라는 말 자체는 제한적인 가치를 갖는다. 말 그대로 대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혁명가가 목가적 전원생활에 도취한 것일 뿐이라거나, 혁명의 의미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시킨 혁명의 변절자라고 섣불리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성공적으로 제시된 대안은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으로 확산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극복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작 자본주의적 삶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그러한 삶의 가능성에 대해 다수의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으로서, 하나의 대안적 사례로서 니어링의 삶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작은 혁명인 것이다. 실상 두려운 것이 자본주의 이후의 삶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상실감 혹은 공허감은 아닌가. 니어링은 도시를 떠나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보험과 저축이 없어도 삶은 만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체질적으로 충돌을 통한 돌파보다 우회함을 선호하는 성격들이 있다. 혁명에 대한 열정보다는 냉철한 분석과 진단을 선호하는 경향들도 각기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목표는 같으며, 그들이 공유하는 적대전선은 자본주의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농촌에 가서 살아볼까라는 생각에 그치지 말고, 니어링이 전해주는 사례를 예시로 삼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독일어 원전강독연습 강의계획서

독일어 원전강독반 강의계획서

담당 : 서유석

목표 : 독일어 문법 학습 및 원전강독 기초능력 배양

기간 : 2012년 4월 21일 – 9월 말(총 24주)

시간 :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 오후 1시

장소 : 한철연 세미나실

 

<학습내용>

1. 문법 학습

– 독어 기초 문법(초급, 중급 수준) 학습

– 낯선 독일어, 독일 문화 친숙하게 하기 : 독일문화, 독일역사 짬짬 감상 및 강의

– 강독을 위한 독일어 학습에 초점

 

2. 원전 강독 연습

– 독일어 문법 일정단계 이른 후 시작(13주차부터 예정)

– 대상 텍스트

현재 <독일이데올로기>(Marx/Engels) 1부를 염두에 두고 있으나

수준과 관심을 고려하여 변경 가능.

가급적 현대 표준 독일어에 가까운 텍스트 선정 예정

 

<교재>

Tangram aktuell 1 (Lektion 1-4) : 기본교재

– 1. 교재 : Tangram aktuell 1 (Lektion 1-4) Kursbuch +Arbeitsbuch

– 2. 학습장 : Tangram aktuell 1 (Lektion 1-4) ?bungsheft

– 교보에 판매(인터넷 구매 가능) : 가급적 오디오 CD함께 구매

 

기타 문법학습 필요한 자료(유인물) : 한철연 제공.

독일문화 소개 자료(독일외무부 제작 자료, 비디오 자료 등) : 한철연 제공.

희랍철학 고전읽기 강의계획서-아리스토틀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읽기와 해석

담당선생님: 김재홍

 

1> 주별 강의 계획

1강(6월 2일): ‘행복’이란 무엇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10권

 

2강(6월 9일): ‘탁월성(덕)’이란 무엇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2,3,4권

 

3강(6월 16일): ‘정의란 무엇인가’와 ‘자제력 없음이란 무엇인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 6권

 

2. 주교재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김재홍, 이창우, 강상진 옮김), 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