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지면 죄인’, 그 생각이 노예다![철학자의 서재]

‘빚 지면 죄인’, 그 생각이 노예다![철학자의 서재]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 인간>

정준영(정암학당 연구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는?

K씨의 한탄을 들어보자.

“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렵사리 공부해서 간신히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나 나는 오십을 채우지 못하고 명예퇴직을 당하고 말았다. 퇴직금이 있었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장래와 부부의 노후 대비를 하기에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퇴직금의 반은 주식투자를 하는 데에, 반은 부동산 투자를 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러나 주식은 반 토막이 났고 은행 융자를 끼고 구매했던 부동산은 폭락해서 결국 경매 처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빚은 남아 결국 신용 불량자로 전락하여 잔혹한 채권추심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난 정말 한평생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내 스스로 성실한 자라고 자부해왔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빚도 못 갚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난 게으름뱅이이고 이 사회의 기생충인 것만 같다. 아, 난 비도덕적인 인간이다. 도대체 내 삶은 뭐란 말인가!”

K씨의 사례는 요즘 들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우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K씨가 죽일 놈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아온 인생 자체에 대한 혼란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K씨에게 상황이 어쩌다 그리 된 것인지를 매끄럽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도대체 빚을 진 것과 K씨의 재앙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K씨는 대표적인 투자 실패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K씨의 투자는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니까 모든 책임은 K씨가 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사태가 모두 개인적 선택으로 환원해서 설명 가능한 것일까? 공공부채며 국가부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를테면 20세기 후반 외환 위기 사태를 맞이하여 혹독한 고통을 당한 것 또한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알다시피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 현상을 합리적 선택을 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채권자에게 채권추심을 당할 때 K씨와 채권자 간의 관계는 이미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없다. K씨의 삶 전체가 채권자의 요구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를 어찌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교환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주류 경제학은 부채에 의해 생기는 실존의 고통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은폐시키기까지 한다. 이런 점에서 주류 경제학은 삶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아주 나쁜 학문이다. 몇 가지 수리모델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빚의 노예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지음,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메디치미디어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 인간>(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은 K씨의 경우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는 빚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노예란 자유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라자라토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주류 경제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며, 이를 통해 주류 경제학이 진정한 사태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다. 또한 이런 비판적 작업을 통해 은폐된 사태를 폭로하려고 한다. 우리가 새로운 노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라자라토의 책은 경제 문제를 다루지만 경제학 서적은 결코 아니다. 그는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철학의 문제를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하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마르크스, 푸코와 들뢰즈 및 가타리를 가로지르면서 현대 경제를 ‘부채 경제’로 규정한다. K씨의 사례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그 같은 가로지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신자유주의란?

라자라토는 이런 사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여기서 독자들은 ‘아, 그 신물 나는 소리를 또 듣는구나’ 하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나 금융 자본주의쯤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에서 실제로는 시장주의가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금융 경제’라는 규정조차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온전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라자라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부채 경제’이다. 즉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경제라는 표현은 불평등한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은폐하며, 자본이 개개인을 포획하는 양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채’와 관련해서 이 같이 급진적인 규정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라자라토의 대답은, 자본주의가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채무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부채를 무한한 부채가 되도록 전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사회의 부채는 유한한 부채였다. 나는 나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만 빚을 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나의 부채는 이제 상품으로 둔갑한다. 나의 부채는 금융에 의해 또 다른 상품으로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파생 금융 상품이다. 이런 전유 과정을 통해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단순한 일 대 일 관계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의 관계로 전환된다. 나의 실존을 부채를 통해 통제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의 채권자가 아니라 블록화된 금융 자본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의 부채 관계는 금융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 무한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 같이 부채가 전면적으로 확장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자라토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공공 부채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1970년 이래 중앙은행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금융 시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금융 자본은 국가의 금융 정책 없이 형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 라자라토의 분석이다. 즉 은행의 활동을 증대시키고 자본을 집중화한 것은 바로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대 자본주의를 ‘부채 경제’로 칭하는 건 단순히 금융이 확장되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산조차 금융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은 주식에 의해 금융 자산으로 간주되고, 기업의 생산조차 금융과 공생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의 경우도 리스 등의 신용 대출 메커니즘과 전적으로 함께 기능한다. 자동차를 구매할 때 구매액 전부를 내고 구입하는 사람은 소수가 아니던가.

이런 분석이 함축하는 바는, 현대 자본주의가 부채를 대대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K씨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건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신자유주의가 채무자를 양산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셈이기 때문이다.

복지 국가, 여전히 가능한가?

라자라토의 분석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복지 국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재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늘어난 국가부채와 공공부채를 축소하기 위해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실상 민간 기업의 수익성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실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사회에 강요했던 것이 바로 그런 정책 아니었던가. 그리고 현재 MB 정권이 추구하는 정책도 그런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시민들이 어떻게 해서 사회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자라토는 복지 국가의 이념이 부채 경제 속에서 변형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자본의 막강한 힘 앞에 자본의 개혁을 위한 도구였던 ‘복지 국가’는 권위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복지 국가’의 기능은 완전히 변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뉴딜 정책이란 불가능하다. (…) 개혁적 자본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라자라토는 민영화 정책을 통한 복지 정책이란 사실 자본의 구속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한국의 경우 저소득 계층을 위해 ‘햇살론’과 같은 신용 대출 상품을 마련하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개개인은 국가에 의해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 무한한 채무 관계를 맺게 된다. 말로는 복지 혜택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채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현재의 복지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민영화 정책은 공공 정책의 결정권을 소수의 금융 자본 블록에게 양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언제나 채무자를 배려하기보다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는 의사 결정 과정과 분배 과정에서 현재의 부채 경제가 공공성을 배제한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라자라토는 이런 분석에서 훨씬 더 나아간다. 그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펴냄)에 의존해서 빚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해석한다. (사실 다른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이 대목이 이 책의 압권이다.) 빚을 진다는 것은 이미 갚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행위에서 빚을 지고 있다. 이를테면 “신용 카드의 사용은 영구적 부채를 확립하는 신용 관계의 자동적 개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채무자가 되고 만다.

그런데 라자라토가 주목하는 것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부채 경제 아래서 부채는 채무자에게 내면화된 고통이 되며 부채에 대한 책임감은 죄책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채 경제는 약속의 도덕과 죄의식의 도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죄의식의 배면에는 신자유주의가 개개인을 ‘자기 경영자‘가 되도록 요구하고, 이에 따라 스스로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K씨가 퇴직금을 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을까? 퇴직금만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K씨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이제 퇴직금을 운용해서 이윤을 추구한다. 일종의 개인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K씨는 자기 경영자로서 자신의 투자 책임을 고스란히 혼자 져야 한다는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부채 의식을 통해 개개인의 주체를 통제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도록 하자.

“대출은 정치 경제가 한 인간의 도덕성에 간섭하는 판단이다. (…) 대출 시스템에 속하는 인간 안에서 철폐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인간은 돈으로 변화한다. 즉 다시 말해 돈이 인간으로 육화된다. 인간의 개체성, 인간의 도덕성은 상업적 상품인 동시에 돈의 실존적 재료로 변모한다. 돈의 영혼이 소유하는 육체, 재료는-이제 더 이상 돈과 종이가 아니라-나의 인격적 실존, 나의 살과 나의 피, 나의 사회적 덕성, 나의 사회적 평판이다. 대출은 가치를 돈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살,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다.”

이것은 라자라토가 아니라 청년 마르크스의 육성이다. 라자라토는 마르크스를 재해석해서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구속하고 있는가는 보여주려 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임금노동·시장·상품은 물론, 공동체 및 인간 마음의 가장 고귀한 감정까지도 경제적 ‘가치’ 생산에 종속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채 경제는, 개개인이 ‘자신과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윤리적 노동 자체’까지 착취하고 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K씨의 리스크는 K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우리는 엄청난 삶의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리스크는 이제 개인적 차원에서 관리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된 지금, 개개인이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세계 경제까지 분석해서 자기를 경영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K씨에게 ‘당신이 실패한 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역설적으로 라자라토는 우리 앞에 놓인 이런 문제의 지평을 보아야 채권자-채무자라는 왜곡된 권력 관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자라토에게서 그 밖의 구체적인 대안을 듣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는 자본주의는 더 이상 어떤 개혁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고 진단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는가? 빚에 의해 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의 삶을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부채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우리는 ‘결백한’ 사람을 뽑아선 안 된다!”[철학자의 서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경제의 진실>
이관형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경제의 진실>(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을 놓고 쓴 이 글은 서평이 아니다. 철학(미학)을 공부하는 자가 경제에 대해 뭘 그리 잘 안다고 떠들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보고 느낀, 좌충우돌하는 생각조각들을 늘어놓으련다. “이런 조각글 싫어하세요? 미안합니다.”(착한 나) “꼬우면 읽지 말든가!”(김어준) “답답하면 니들이 쓰든지!”(기성용)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한마디로 출세한 경제학자다. 게다가 백수(白壽)를 누렸으니 여러 면에서 부러운 삶을 살다간 사람이다. 버클리,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쳤다. 미국경제학회장, 경제인연합회장에다가 대통령 클린턴의 경제 선생이었다. 이렇게 강단과 현실 정치의 양 분야에서 공히 성공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는 읽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출간 당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책이다. 그의 ‘쩌는’ 스펙 얘기는 이쯤하자. 아무리 방자한 글쓰기를 획책했더라도 제목으로 내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내용을 살펴보자.

내가 잘나가 봐서 아는데 경제는 사기야

그는 경제가 사기란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총체적 사기란다.

먼저 ‘자본주의’를 ‘시장(체제)’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사기다. 이런 말 바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주는 역사적, 부정적 의미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에는 기업이 권력을 지니는데 기업의 권력은 자본가(혹은 주주)가 아니라 경영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하면 경제 권력이 ‘자본가’라는 게 딱 떠오르는데 ‘시장’이라고 말하면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은폐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역사적’ 개념임에 비해 ‘시장’은 ‘초역사적’ 개념처럼 보일 수 있다. “자! 쭈-욱, 이대로!”

‘소비자 주권’도 사기다. 소비자가 조종, 통제되는 것이 실상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라 봉이란 말씀? 딩동댕.”

‘노동의 즐거움’도 사기이다.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필수다. 일에서 해방된 부자는 칭송과 부러움을 받는다. “일해서 돈벌어. 누가 벌지 말래냐? 나처럼 되긴 어렵겠지만 말이야!”

여가는 부자들에게는 용납된다. 가난한 이들이 여가를 즐기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 “없는 놈이 여가생활은 무슨···하여간 꼴값을 떨어요.”

현대 기업은 고루한 ‘관료주의’를 비난하지만 이 또한 사기다. ‘생동감 넘치는 기업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대기업화한 오늘날의 기업은 자신이 바로 ‘관료주의’에 처해 있다. 게다가 소유자나 주주의 권한은 예의 그 ‘경영’에서 배제된 허울뿐인 이미지만 지닐 뿐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선진 경제 제도라 좋은 거라던 경제학 교과서의 말씀이 뻥이라는.”

나아가 기업 권력은 고삐가 풀린 상태다. 기업 권력은 관료화한 경영자의 몫이다. 이러한 관료주의가 기업의 업무와 보수를 통제한다. 자기 업무의 감시자는 사실상 자기이다. 자기에게 보수를 주는 이도 자기이다. 감시는 지나치게 없고, 보수는 지나치게 많다. “생선을 고양이에게! 그것도 셀프무한리필로!”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이 나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사기다. 공공 부문의 이름 아래 공사 협력 체제라는 형태로 실제로는 민간 부문이 일하고 있다. 심지어 전쟁도 민간 기업이 대행한다. “로보캅이 현실로, SF가 다큐로!”

금융계는 사기가 만연된 세계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다. 그런데 미래를 예측하는 직업은 사람들이 좋아할 기대를 이야기해준다고 해서 두둑한 보상을 받는다. “하나의 예. 보험 많이 드셨어요? 아유 든든하시겠네. 근데 한번 확인해 보세요. 진짜 많이 주는 건지. 아니, 주기는 하는 건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명성도, 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만 주력했을 뿐 경기 조절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우아한 현실 도피로서 사기일 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버냉키 사임 예정(2014년) 기사가 올라와 있다. 그나마 그린스펀보다는 백배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허긴 뭘 할 수가 있겠는가? 쩝.”

기업 권력의 사기 행각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부패한 회계 보고도 사기다. 현대 사회에서 경영진이 행사하는 기업 권력은 민간 부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으로까지 확장된다. 기업 권력은 국방 정책, 환경 정책, 조세 정책도 좌우한다. 객관적인 실증적 연구도 기업 권력의 로비를 당한 군대나 정부에 의해 배척당한다. 군산복합체의 힘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고만해라. 백날 피켓 들고 떠들어도 나 니들 말 안 듣다. 니들이 나한테 돈을 주니, 나 옷 벗고 난 다음에 갈 자리를 주니? 비켜라. 바쁘다. 업체 분들과 회식 있다.”

사기의 끝은 전쟁이며 그것을 피할 길은 없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 ⓒ지식의날개

갤브레이스에 의하면 현대 사회의 최고 권력은 대기업 권력이다. 그리고 그 대기업은 주주나 자본 소유자가 아니라 경영자의 수중에 있다. “한국의 재벌이 주주 혹은 자본가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경영권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매우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기업의 공헌은 경제적 성공, 심지어는 문명화한 성공의 일반적인 척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회적 성공이 더 많은 자동차와 더 많은 텔레비전과 더 다양한 옷들과 더 많은 소비재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더 치명적인 무기의 소유도 성공의 빼놓을 수 없는 척도가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업적을 평가하는 척도다. 부정적인 사회적 영향, 즉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 보호받지 못하는 시민들의 건강, 군사적인 행동과 죽음의 위협은 성공을 평가하는 데 포함되지 않는다. “오래되고 찌그러진 차를 타고 다니니까 나를 무시하냐? 이런 차 탄다고 내가 루저로 보이냐고? 내가 분리 수거나 등산 쓰레기 가져오기, 애완견 배설물 치우기 열심히 하는 건 안 보이냐?” 그랬더니 나더러 이런다. “너 루저 맞거든.”

경기 침체기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일갈한다. 불경기에 저소득층은 교육과 의료, 기본적인 가계 수입 등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정부는 사회 지출을 삭감한다. 오히려 소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 소비를 할 사람에게는 이를 박탈하는 정책이 지속된다. 그동안 경기가 호전되어왔을 때조차도 어떤 분명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서 (경기 호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불경기에는 소비 활동을 할 빈곤층이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확실한 효과를 낸다. 그렇지만 이는 쓸모없는 동정에 불과하다는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반면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 종종 세금 감면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절박한 필요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소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돈을 확실히 소비할 빈민들은 이런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 돈을 저축할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만 이런 보상이 주어진다. “부자 감세 철회하라. 부유세 거둬라. 공공 복지저소득층 지원 정책 확충하라. 그래야 경제가 산다.”

미국 얘긴지 한국 얘긴지 모를 이야기가 이어진다. 끝에 이르러 그의 이야기는 현대 문명의 파국을 예언하는 묵시록으로 바뀐다.

소위 문명화된 삶은 인간의 업적을 찬미하는 하얀 거탑이지만 그 정상에는 영원히 감돌고 있는 거대한 먹구름이 있다. 인간의 진보는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왔다. 나(갤브레이스)는 이제 독자들에게 슬프지만 의미심장한 진실을 남기고자 한다. 문명은 과학, 의료, 예술 그리고 경제적 복지에서 수 세기 동안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 그러나 문명은 또한 무기개발과 전쟁의 위협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다. 대량살육은 결국 문명이 가져 온 것이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과 폭력, 문명화된 가치의 정지, 전쟁 직후의 무질서와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탈출구는 없다.

사람이 아니무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아예 아니무니다, 내가 잘못된 건가?

이 책의 원제는 “The Economics of Innocent Fraud(결백한 사기의 경제학)”이다. 갤브레이스는 경제 분야에서 벌어지는 사기 행각을 ‘결백한 사기(innocent fraud)’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노센트(innocent)’를, 이 책의 역자처럼 ‘결백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를 따르기로 한다. 이 말을 갤브레이스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쓴다. ①’적법한, 즉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②’의도하지 않은, 즉 사기를 치려고 사기를 친 것이 아니다.’ 만약 ①의 뜻만 지녔다면 아마도 대기업 경영자들은 법망은 피했을지언정 도덕적 비난만큼은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②의 뜻도 지닌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렇다면 ②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

갤브레이스의 말에서 대강을 취하자면 이러하다. 이런 사기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업 권력, 기업 경영자들은 법적인 책임은 (법이 이들의 것이니) 차치하고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아니 물어 봤자 헛수고다. 이들은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힘이 있고 부유한 자들의 이익을 명료한 견해(논리)를 바탕으로 지지한다. (흔히 진보 진영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듯이) 이들의 이런 지지를 경제적 동기나 다른 정치적 동기에 입각한 행동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사기가 사기인 줄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올바른 행동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가카’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한 말이 추호의 거짓도 없는 그의 진심임을 깨닫는다. 이쯤 되면 절망이다. 이런 절망에 빠졌던 또 한 사람의 탄식이 떠오른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赦 :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복음 23:34) 그가 그를 섬긴다니 그는 그를 사하시길.(‘가카’는 장로님) 그러나 그가 섬기지 않았던 그들은 그를 사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가카가 물러나도, 심지어는 여야가 뒤바뀌어도 ‘가카들’은 여전히 권세 있는 세력으로 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기에도 세 차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갤브레이스에게 물었다. “당신(갤브레이스)처럼 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못 막는 사기를 나더러, 우리더러 어쩌라고? 진실이니 뭐니 하면서 당신만 양심적인 척하는데 이거야말로 사기 아냐? 대안은 하나도 안 써놓고 말이야.”

사기로 점철된 현대 경제가 결국 현대 문명 자체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더니 책의 마지막에서 불쑥 이런 말을 던진다. “이 글에 기술된 (…) 문제들은 (…)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다. 이 문제들은 이미 그렇게 해결되어 왔다.” 이 문장이 대안이라면 유일한 대안이다. 근데 이 양반 기억력이 참 까마귀다. 책의 대부분을 비관적 전망(‘전쟁은 피할 수 없고 현실의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으로 일관하다가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단다. 아니 그렇게 해결되어 왔단다. 이게 다다.

갤브레이스는 이 책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의 돌출 발언을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학자니까 진실을 보여주는 거 이상은 못하겠어. 그리고 난 죽으러 가야하거든. 당신들은 살아야 하니까 내가 가르쳐 준 문제들은 당신들이 해결해봐. 인류는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여기까지 왔거든. 아마 당신들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래 경제가 사기라는 게 뭐 그리 새로운 말인가? 당신(갤브레이스) 글에서 일부 새롭게 얻은 내용이 없진 않지만 대개 알거나 느끼거나 하고 살아왔거든 나도. 당신이 던진 문제에 답은 나도 못 내겠고 ‘사기’ 얘기나 더 하고 끝내지 뭐.”

갤브레이스는 경제가 사기라고 했지만 백남준은 예술이 사기라고 했다. 한술 더 떠 푸시킨은 삶 자체가 사기라고 했다. 요즘은 통 볼 수가 없지만 어린 시절 이발소에 갈 때마다 기도를 하는지 이삭을 줍는지 하는 사람들 그림 옆에는 예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붙어 있지 않았던가?

사실 세상이 사기라고 본, 보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제 뜻대로 세상을 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세상을 산,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세상을 사기라고 여긴, 여기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백남준의 예술=사기는 이와는 거리가 있다. 흔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선사(禪師)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 예술은 선사의 손가락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그러니 예술은 사기다. 그렇다고 백남준이 예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은 전혀 아니다. 손가락을 통해 우리는 달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손가락이 달이 아니라 하여 손가락을 가짜이며 무가치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예술=사기론은 여기서 끝. 근데 인터넷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 있다.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 선사가 일갈한다. 제자가 답한다. “손가락이 너무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하하. 이 글 올린 사람, 누군지 보고 싶다. 성철스님 대 김성동(소설가)으로도, 모던 대 포스트모던으로도 아무튼 여러 가지로 읽힌다. “방금 말한 거 무슨 뜻인지 독자 여러분들 잘 모르시겠지요? ㅋㅋ 담에 써먹어야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낭만주의의 영향 하에 성장하여 리얼리즘으로 나아간 푸시킨의 문학은 이 둘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 사조를 껴안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기투성이인 ‘슬픈 현재’를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한다. 이는 그의 문학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추방당하고, 차르(Czar)에 도전한 데카브리스트를 후원하느라 감시를 당하고, 자신의 부인을 차지하려는 자와 결투를 벌이다 사망하기까지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속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말처럼 그는 현실을 견뎠다. 그렇지만 그 견딤은 결코 수동적인 견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속이는 ‘슬픈 현재’에 맞서 자신의 ‘마음이 사는 미래’로 초월하려는 적극적 견딤이었다. 결국 그에게 ‘현재는 슬픈 것’이었으나 그의 ‘마음이 살던 미래’는 그를 러시아 최고의 문인으로 올려놓는다.

백남준의 ‘사기’는, 예술이라는 가상(손가락)을 통해 본질(달)을, 감각적인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이념을, 미적인 것을 통해 진리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이런 나의 해석은 헤겔식이다. 백남준이 헤겔에 동의할 것 같으냐고? 이경규식으로 답하겠다. “별(들)에게 물어봐”, 백남준은 별이 되었으니.)

푸시킨의 ‘사기’는,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갈구하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니 어쩌면 이성을 지니게 된 대가로 모든 인간들이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 아닐까?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우리가 왜 삶을 사기라고 느끼는가를 경제라는 구체적 현상을 통해 보여준다. 즉 사기는 그저 느낌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에 만연한 것이다.

백남준의 사기가 ‘긍정적’인 것이라면, 갤브레이스의 사기는 ‘부정적’이다. 예술의 사기는 추구되어야 한다. 경제의 사기는 부정되어야 한다. 푸시킨의 사기는 ‘숙명적’이다. 우리는 이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남준의 사기와 푸시킨의 사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술가가 아니니까. 숙명이니까. 경제의 사기는? 이것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결백한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마침 대선이 코앞이다. 복지니 경제 민주화니 하는 여러 말들이 오간다. 대선의 최대 화두니 어쩌니 하면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했다. 아마 여기서 ‘시장’은 대기업, 재벌을 뜻하는 것이리라. 노 전 대통령의 말에 분노하거나 절망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분노 혹은 절망했던 것인가? 그의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말이 맞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옳은 말이 곧 옳은 행동인 것은 아니다. 나는 물론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정도로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고 본다.

노 전 대통령과 똑같은 말을 갤브레이스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이미 권력은 대기업과 대기업 경영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갤브레이스가 말하는 “진지한 고민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당장 닥친 지금의 대선 국면에서라면 어떻게 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결백한(이노센트·innocent)’ 사람을 뽑아서는 안 된다!

 

연대의 철학을 위하여 [한철연 교육강좌]- ⑬

[한철연 교육강좌]- ⑬

연대의 철학을 위하여

 

강사 : 서 유 석(호원대 교수)
후기 : 한 길 석(한철연 교육부장)

 

연대(solidarit?)라는 말과 사상이 역사에 의미있게 등장한 것은 프랑스 혁명기이다. 프랑스 혁명기에 연대는 ‘자유(libert?)’, ‘평등(?galit?)’과 함께 혁명의 이념으로 제시된 ‘형제애(fraternit?)’의 유사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이 정치적 의미를 지니면서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로 정착한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덕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연대에 큰 의의 부여한 까닭은 그것이 자본의 착취에 맞서는 무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에게 연대는 투쟁 수단만이 아니었다. 연대(연대적 삶)는 동시에 미래 이상 사회의 구성 원리이기도 했다. 이상적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연대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68혁명을 전후하여 등장한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에서의 연대 역시 억압 구조의 타파를 이루기 위한 구성원들 사이의 정서적 결합과 상호협력을 의미했다. 사회주의 연대와 신사회운동의 연대는 양상의 차이(자본주의 타파냐 억압구조의 타파냐)는 있지만 연대 투쟁의 과정에 분명한 적이 있었고 목표(인간 해방)가 보편적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서유석 호원대 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연대의 원리는 사회보장 정책을 정당화하는 원리로도 작용한다. 현대의 사회복지정책은 빈민구제가 아니라 제도화된 상호부조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사회적 연대의 구현으로서의 사회권 쟁취 운동은 오늘날 나날이 강조되고 있다. 물론 사회보장 정책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사회보장정책은 체제 안정을 위해 지배자의 편에서 도입되었다. 독일의 사회보장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제도화된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사회보장은 인권을 확보하는 투쟁을 통해 획득되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사민주의자들의 사회권 투쟁이 대표적이다.

사회주의자들이 제기한 ‘해방 투쟁을 위한 연대’는 현실에서는 매번 좌절되었다. 맑스도 예상치 못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인 복지국가 정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변혁을 위한 연대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었다. 그람시는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체제 위기가 와야 하는데 실제는 아니었다. 국가가 국민을 달래고 적당히 동의하게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의 지배는 폭력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주민의 동의에도 일정한 기초를 두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회 또한 노동자 대 자본가라는 단순 구도로 구조화되지 않았다. 구조가 단순하지 않으니 그것을 변화시킬 싸움도 단순하게 전개될리는 만무하다. 단순한 기동전이 아니라 끈질긴 진지전이 제시되는 이유이다. 이 과정에서 변혁 세력은 국민적 동의를 얻어내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도 기동전이 통하는 시기는 아니다. 자본주의적 체제의 자정 능력이 의외로 효과를 거두고 있는 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노동계급 중심의 사회주의적 연대가 아닌 다양한 계층의 실제적 삶 속에서 연대를 조직하는 진지전적 작업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유효할 것이다. 주민 자치 운동의 활성화를 통한 연대적 삶의 조직은 실천적 사례가 될 수 있다.

지역 공동체의 주민자치운동은 민주주의를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고 나와 이웃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운동이다. 전국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로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구현할 수 없다. 이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주민의 삶의 현장인 주거 공동체, 일터, 학교, 그리고 기초 단체의 행정 집행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구현되어야 하고 삶의 제 분야인 여성, 아동, 노인, 장애인, 이주 노동자, 교육, 먹거리, 교통, 환경 등 일상의 구석구석에서 주민의 직접 참여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져야 민주주의는 완성된다.

여기서 일본 ‘혁신 자치제’의 경험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민주 세력들은 1960년 중반 이후 공산당, 사회당이 중심이 되어 환경, 생활, 복지를 지방자치의 핵심 의제로 걸며 지방 자치의 혁신을 시도한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활 문제의 해결을 정치의 핵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집회, 도민실 운영, 심의회 등 주민 참여형 행정이 도입되었다. 중앙정부도 지자체가 선도한 조처들을 국가 정책으로 받아들여 나가게 된다. 일본 지방 자치 연구소 스가와라 연구원은 이를 두고 당시의 전략은 “자민당이 주도하는 중앙 정부를 포위하는 구상”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등장한 주민자치운동의 사례도 진정한 연대적 삶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주목할 만하다. 산본 쓰레기 소각장 건설 반대운동은 ‘군포자치시민회’의 결성과 ‘수리산 자연학교’의 건립으로 이어져 지속적 주민자치운동으로 발전했다. 마포 성미산 지역에서는 생협운동, 공동육아운동, 대안학교운동, 친환경급식운동, 지역 차원의 대안경제운동 등의 다양한 공동체 운동이 발생하면서 개별 운동 영역간의 폐쇄성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을 통해 주민들은 정치의 실제적 주체가 되고 정치적 영향력이 높아지고 정치적 고민의 폭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 지역 주민만의 정치가 아니라 일반적 시민의 정치까지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들은 정치적 무관심, 정치적 무임승차 의식, 계급 배반 투표, 박정희 신드롬 등의 현상이다.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대다수가 보편적 복지 구현이라는 진보정당의 강령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세금 인상은 반대하고 있다. 세금과 규제는 피하고 각자 노력하여 많은 수입을 벌면서 제도적 혜택은 혜택대로 누리려는 무임승차 의식, 그리고 성장의 신화를 잊지 못하는 퇴행적 향수는 보수당에게 표를 몰아준다. 이런 이율배반 심리는 정치가 국민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진보 및 개혁 세력이 실제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지역 공동체의 주민자치 운동은 시민 스스로 무임승차심리를 극복하게 하고 박정희 신드롬을 극복하도록 하는 민주주의의 최상의 학교요 교육의 장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주민자치운동은 중앙 정치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주민 스스로 해결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내부 소통과 숙고, 실천과 참여를 거치면서 공공성을 획득하고 시민운동으로 발전한다. 주민자치를 포함한 사회적 연대운동이 진정한 연대의 과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열린 연대운동이 되어야 한다. 집단 이기주의적 닫힌 연대는 배제되어야 한다. 노동 운동도 공동체 운동도 이 동질 집단에 대한 충성의 경향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사용가치[자본론 강독]-②

사용가치[자본론 강독]-②

 

 

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나태영, 박종호, 신재길, 신준하, 윤지미, 최혜진

정리 : 신재길(2012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

?*? 2012년도 교육강좌 후속 세미나로 [자본]을 읽고 있습니다. 세미나 팀에서 매번 정리하여 웹진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자본론의 목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밝히는 것이고, 그 출발은 상품에서 시작하며 방법은 분석이다.?

이제 상품의 분석을 따라가 볼 차례다. 그런데 그러기 전에 한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맑스는 왜 자본이나 노동, 시장 또는 인간의 경제행위에서 시작하지 않고 상품에서 시작했을까? 하비에 의하면 맑스는 자본론의 시작을 자본으로 할 것을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맑스는 상품으로 시작했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다. 결국 그 해답은 을 마지막까지 읽어야 풀릴 것 같다. 짐작해 본다면 상품이야 말로 자본주의 전체를 대표하는 중심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맑스는 상품의 개념정의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맑스는 상품이 우리 앞에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상품의 여러 속성들 중 크게 두 가지를 상품자체에서 분리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이다. 그 중 먼저 사용가치로부터 시작한다.

 

*사용가치는 유용성이다.

 

“상품은?우선?외적?대상으로,?그?속성을?통해?인간의?여러?가지?욕망을?

충족시키는?물적?존재?(Ding)이다.”?(M49, 87)

 

상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건이라고 맑스는 말하며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상관없으며, 또 개인적 생활에 소비되는 것인지 생산에 투입되는 것인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구체적 욕망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상품은? 인간의 욕망을 총족시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상품의 유용성을 사용가치라고 한다.?

 

*사용가치는 재화이다.

 

“어떤?한?물적?존재의?유용성은?그?물적?존재를?시용가치(?Gebrauchswert)

로?만든다.??그러나?이?유용성은?공중에?떠다니는?것이?아니다.?그?유용성

은?상품체(商品體,?warenk?rper)의?속성에?따라?제약되며,?따라서?상품체

없이?는?존재하지?않는다.?그러므로?철?·?밀?·?다이아몬드?같은?상품체는

그 자체로서?사용가치?또는?재화이다.”?(M50. 88)

?사용가치라고 하니까 새로운 용어에 뭔가 신비한 것이 있을 것 같은 감이 들지만 사용가치는 우리가 늘상 사서 소비하는 물건들을 말할 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품이란 바로 이 사용가치로서의 상품이다. 그런데 우리가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은 물품만이 아니라 서비스라는 용역도 있다. 물론 인간의 서비스나 용역도 상품이다. 그런데 이는 노동력이라고 해서 맑스는 따로 뒤에서 다루고 있다.

 

*사용가치는 사회적 속성이 아니라 물질적 속성이다.

 

“상품체의?이러한 성격은 그 유용성을?얻기?위해?인간이?소비한?노동의?양이?얼마인지 와는?무관하다.”(M50. 88)

 

?사용가치는 상품의 물질적 속성에서 나온다. 철은 그 특유의 물질적 속성을 가지므로 그에 따른 다양한 사용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철이 존재하는 한 어떤 사회에서나 같은 사용가치를 갖는다. 물론 기술과 쓰임의 용도에 따라 철의 사용가치가 달라지겠지만 이는 맑스의 말에 의하면 ‘역사의 과업’이며 ‘사회의 관습’에 따르는 것이다. 철의 다양한 속성들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새롭게 발견되며, 또 그런 속성들 중 사회의 관습에 따라 쓰이기도 하고 안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철의 다양한 속성이 새롭게 발견되고 그에 따라 사용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철의 내재적 속성의 발현인 것이지 철에 없던 속성을 사회가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는 경제학의 대상이 아니다.

 

“상품의?사용가치는?독자적인?하나의?교과목,즉?상품학(Warenkunde)?의?소재를?제공한다.” (M50. 88)

 

경제학은 사회과학으로 사회과학은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그 중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적 관계를 다룬다, 그러나 사용가치는 인간과 물질의 관계를 다룬다. 따라서 경제학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물론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효용(유용성이나 주관적 사용가치)개념을 통해 물질과 인간의 관계를 경제학에 끌어들이지만 맑스경제학에서는 철저히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을 다룬다. 상품을 다루는 목적도 상품이라는 물질에 가리워져 있는 인간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의 담지자라는 경제학적 의미를 갖는다.

 

“사용가치는?부의?사회적?형태가?무엇이든 상관?없이?그?부의?소재적?내용을 구성한다.?또한 사용가치는 우리가?고찰하게?될?사회형태에서 교환가치(Tauschwert)의?소재적?담지자가된다.”(M50,89)

 

?‘사회적?형태’란?자본제나?봉건제,?노예제등을?말한다.?사용가치는?자본주의에서는?교환가치의?담지자라는?의미만을?갖는다.?교환가치란?뒤에서?보게?되겠지만?상품의?교환비율을?말한다.이?교환가치는?눈에?보이지?않는?관념적인?것이다.?이러한?보이지?않는?교환가치를?담고?있는 그릇이?사용가치?즉?재화이다.?이는?사람을?정신과?육체로?생각해?볼?때?정신을?교환가치라?한다면?육체를?사용가치라고?비유할?수?있을?것이다.

?하지만?사용가치는?자본주의가?아닌?사회형태에서는?매우?중요한?역할을?담당하게?된다.?사용가치는?자본주의사회가?아닌?모든?사회의?생산에서의?궁극목적이?되기?때문이다.?생산을?한다는?것은?생산한?물품의?사용가치를?생산한다는?의미며?그?물품이?소비됨으로서?사용가치는?실현된다.?그러나?자본주의사회에서는?상품의?생산의?목적이?사용가치가?아니라?교환가치에?있다.

이제?이?자본주의의?생산의?목적인?교환가치를?보자.

 

구보씨, 다시 동물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다시 동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구보씨는 11월을 좋아한다. 늦가을에 마음을 주는 것이지만, 달로 치자면 11월이다. 왜냐구? 그냥이다. 따지자면 이유야 많겠지만, 그런 건 아마 사후(事後)에 가져다붙이는 핑계들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뭔가 한 가지 들어야겠다면, 찰기와 집착이 덜어진 이즈음의 투명한 햇살이 11이라는 숫자를 닮아서라고 해 두자. 그것이 기껏 ‘빼빼로 데이’를 연상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11은 평행의 숫자만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클리나멘(clinamen)의 기호다. 물기 마른 나뭇가지에 욕심 없이 내려앉는 햇살들처럼 비스듬히 만나고 합쳐지는 편의(偏倚)의 움직임이 11월에는 배어 있다. 왜냐구? 그것도 그냥이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필요하다면 새로움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떨구는 자연의 눈부심 때문이라고 해 두자. 올해는 더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것이 혹 연말의 선거를 염두에 둔 이미지는 아니냐구? 글쎄, 그렇게 보고 싶다면야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어떻든 11월은 대지(大地)와 몸을 섞는 낙엽의 계절이다.

 

그러나 이런 너스레로 구보씨가 늦가을의 정취를 상찬(賞讚)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른다. 엄혹한 겨울을 앞둔 그 전조(前兆)의 안타까움이 어떻게 기꺼움과 그토록 쉽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눈앞에 닥칠 어려움을 하찮게 여길 만큼 여유로운 처지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추위와 굶주림은 이제 옛날 일이 되었는가? 구보, 네게는 바야흐로 장기 불황으로 빠져드는 이 세상의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우리의 얄팍한 구보씨는 누구 못지않게 그런 세태에 민감하다. 그나마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 철학이어서 그 경박함이 약간 감해지고 있음을 언제나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터다. 그럼에도 구보씨는 철학의 유행사조들을 이런 세태에 견주어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얄팍함을 정당화하려 할 정도로 뻔뻔하기조차 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구? 역시 경박한 얘기다. 불황기에는 불황기의 철학이 뜬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철학에 불황의 철학이 어디 있고 호황의 철학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은 사유가 묵직한 사람들의 견지다. 대부분의 훌륭한 철학자가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철학도 부침(浮沈)을 겪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불경기를 바라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나, 불가불 불황을 겪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줏대 있는 인간이더라도 자신이 놓인 조건의 제약 속에서만, 또 그 제약에 따라 사고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사고의 결과가 세간에 영향을 미치는 강도와 양상은 더욱 더 그 환경적 조건과 관련이 깊다.

오늘의 철학적 환경은 흡사 11월과도 같지 않은가, 라고 구보씨는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에겐 11월이 아름답게 비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구보씨는 가벼울지언정 긍정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모든 긍정은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느끼는 데서 시작되며, 아름다움이란 이런 유혹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긍정적 삶은 이제 시작하는 현재를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11월의 황량함이 아름답다는 건 난센스거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 아닐까? 게다가 만일 시작점이 진정 아름답다면, 거기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도리어 어려운 일이 되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름다움에 대한 해묵은 오해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멈춰 있어야 하는 어떤 지점, 우리가 움켜잡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어떤 지점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행복이라는 말이 흔히 그러하듯 우리를 기만하는 표면적 이미지일 따름이다. 아름다움이 유혹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궁극의 도달점이거나 목표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움직임을 부추기고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어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의 느낌이 굳이 있어야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천박하게 말해, 아름다움에는 늘 대가가 있는 법이다. ‘팜므 파탈’은 아름다움의 중요한 면모를 드러내 준다. 애써 묵직하게 말해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삶의 아름다움은 늘 위험을, 때로 치명적인 운명을,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그림자를 배경으로 삼는다. 우리를 분리 이전과 이후의 심연으로부터 끌어내는 감각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인간만의 감각이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를 내미는 모든 생명체는 그런 힘을 발휘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필요로 한다. 하얗고 차가운 겨울이 절박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며, 스산하고 매정한 늦가을이 처연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이다.

아무튼 11월의 철학, 불황의 철학은 한편으로 동물의 철학이다, 라고 구보씨는 지레 생각해 본다. 왜냐구? 글쎄, 이것도 그냥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 붙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구보씨의 동물적 감각이 그렇게 지시하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사실 따지고 보면, 구보씨가 이전에 입에 올렸던 벌거벗음이나 이제 내세우려는 동물성이나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문명의 치장 한 꺼풀 아래를 겨냥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다만, 요즘 같은 늦가을과 불황의 정취 속에서라면,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벌거벗음을 재삼 거론하여 한기(寒氣)를 불러들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지난 번에 잠깐 언급했던 아감벤이건 또 말년에 몇 년간 동물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던 데리다건 동물성을 긍정적으로 거론하는 현대 철학자들이 대개 걸고넘어지는 상대는 역시 하이데거다. 하이데거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존재뿐이라고 하면서 동물과 인간을 확연히 구분했던 탓이다. 그에 따르면, 동물이 살아가는 세계는 주어진 환경에 얽매인 빈한한 세계다. 반면에, 인간은 스스로 세계를 형성하는 존재고,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세계 속에 존재한다. 대지 위의 우뚝 세워진 세계, 그것은 인간만의 세계다.

이런 생각은 보기에 따라 몹시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다. 도대체 하이데거가 동물의 처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하이데거 철학의 주안점이 고정된 규정에 매인 이른바 존재자위주의 사유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그는 인간의 사유를 중심에 놓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긴, 인간이 인간의 사유를 벗어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그렇더라도 하이데거의 문제는 인간의 삶과 사유의 우월함을 적극적으로 전제하고 인정했다는 데 있다.

 

 

최근 우리말로도 번역된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을 쓴 마크 롤랜드는 인간의 세계가 다른 동물의 세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물의 지능이 인간보다 못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인간과 동물은 다른 지능을, 다른 용도로 발달된 지능을 지녔을 뿐이다. 이를테면 늑대는 늑대가 살아가는 방식에 적합한 지능을, 원숭이는 원숭이가 살아가는 방식에 적합한 지능을 지닌 것이고, 그 점은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는 집단의 다른 구성원의 마음을 읽고 기만할 줄 알지만, 늑대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에는 그러한 기능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도 이런 차이를 쉽게 위계화하여 다른 동물을 낮추어 보는 것은, 인간이 거둔 짧은 기간의 성공에 도취해서, 각기 다른 방식의 삶이 지닌 자연사적 무게를 무시하는 것이다.

 

마크 롤랜드는 전문적으로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주제적으로 다루는 구보씨 또래의 철학자지만, <동물의 역습> , <SF철학>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책들의 저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늑대와 함께 살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철학자와 늑대>라는 특이한 책을 썼다. 그렇다고 그가 야생 상태의 늑대와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개를 키우듯 늑대를 키웠고 그 늑대와 같이 생활했다. 늑대와 같이 달리고 장난치고 여행했으며, 심지어 강의실에도 늑대를 데리고 다녔다. 가족처럼,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가까이 지냈던 셈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가 제시하고 싶어 한 것은, 늑대가 인간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멋진 존재이며, 사랑할 만한, 심지어 존경할 만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브레닌이라는 이름의 늑대를 키우고 사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롤랜드에 따르면, 그것은 늑대가 “인간의 영혼 속에 오래도록 잊혀져 왔던 깊은 구덩이를 파내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표현을 빌면, “구원의 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얘, 구보야, 나 많이 참았거든. 하지만 어쩌지? 이젠 네 횡설수설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 11월이 어쩌구 낙엽이 어쩌구 하다가, 불황이니, 동물이니, 늑대니 되는 대로 주절대더니, 이젠 뭐, ‘구원의 밤’이라구? 네 스스로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ㅎㅎ, Y야, 물론이지. 말이 되고말고… 어어, 그렇게 화내지 말구 조금만 더 들어 봐. 내가 금방 설명해 줄께. 늦가을이라는 게 뭐야? 시련을 앞둔 계절 아냐? 그걸 요즘의 불황이랑 연결 짓는 게 뭐가 이상해?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랑 연결할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동물성에 관해 생각하는 건, 이렇게 시련에 크게 봉착한 문명이라면 어차피 밟게 되는 반성의 수순이라구. 그 동안 버텨온 자만심에 대해 반성할 때, 그게 천상을 향한 기도로만 뻗치지 않는다면, 또 갈 곳이 어디겠냐? 그나마 이렇게 동물성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건 이제껏 쌓아둔 문명의 여유가 뒷받침되기 때문이야. 정말 급하고 절박하면 구덩이를 깊게 파볼 여유조차 없을 거거든. 늦가을 즈음해서, 매섭고 추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전에, 우리의 됨됨이를, 우리의 소이연(所以然)을 깊이 있게 되씹어 보는 거야. 그게 말하자면 ‘영혼의 구덩이’인 셈이지. 영혼이란 우리가 동물과 함께 가지는 것이거든. 영혼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와 애니멀(animal)의 어원적 근친성을 생각해 봐. 그리고 ‘구원의 밤’이란, 우리가 이렇게 근원적으로 파고들어갈 때 닿게 되는 깊이와, 그것에 따르는 간곡한 바람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어. 사실 새로운 날은 밤에서 비롯하는 거잖아.”

“헐, 그렇게 갖다 붙이면 연결 안 되는 게 어딨니? 그 정도면 박근혜와 잔 다르크도 이어 붙일 수 있겠다.”

“박근혜와 잔 다르크? 어, 그건 새로운 얘기가 아닌데? 예전에 한나라당 주성영이 ‘박근혜는 잔다르크다’ 그런 적이 있어.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말이지.”

“내 말이 그 말이야. 너, 그 주성영이 성매매 의혹으로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했다가 얼마 전에 새누리당 유세지원단장이 된 거 알아?”

“어, 그래? 정말 웃기는군. 사람이 없는 건가, 아부가 힘이 센 건가… 그런데, 가만, 이상하네… 지금 Y 네 말은, 내가 주성영 같은 인간하구 비슷하다는 거야?”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하지만 알게 뭐야, 그 깊은 ‘동물성’에서 보면 상통하는 면이 있을지도…풋, 구보야, 그렇다고 표정까지 그렇게 야수 흉내를 낼 필요는 없잖니?”

 

스마트하게 혁명을?; 6월 항쟁과 촛불에 대한 철학적 성찰[한철연 교육강좌]- ⑫

[한철연 교육강좌]- ⑫

스마트하게 혁명을?; 6월 항쟁과 촛불에 대한 철학적 성찰

 

강사 : 박 영 균(건국대 HK교수)
후기 : 한 길 석(한철연 교육부장)

 

일반적으로 한국의 정치학자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수립된 체제를 ‘87년 체제’로, 1997년 IMF 위기 이후에 형성된 사회 구성의 결과물들을 ‘97년 체제’로 일컫는다. 87년 체제의 특징은 군부 독재의 소멸과 대통령 직선제 등의 형식적 민주화의 구현이다. 97년 체제의 특징은 신자유주의의 본격적 도입이었다.

1970년대 한국 경제는 정부의 지도로 전개되었다. 대외 자본을 도입해 국내 경제를 키우는 이른바 ‘종속 파시즘 체제 전략’은 중남미나 한국이나 구조적으로 동일했다. 그러나 한국이 성공한 이유는 대외 자본을 국내 생산 체제의 건립으로 전용한 데에 있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자립적 자본 축적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노동 세력 및 자본 세력 모두를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파쇼 체제의 면모는 여전했다. 특히 한국 정부는 기업의 돈줄을 쥐면서 자본을 통제하는 관치 금융 체제 전략을 취함으로써 민간에 대한 우위를 굳건히 지켜나갔다. 그렇지만 정부의 지원을 통해 자본 세력은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했으며, 대단위 사업장의 등장으로 인해 거대 산업 노동자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 둘은 훗날 정부에 대항하는 두 가지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의 통제력에 저항하던 중심적 세력은 대학 운동권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1980년대에 도입된 소위 과학적 맑스주의(칼 카우츠키류의 속류적인 경제 결정론적 맑스주의)로 무장하면서도 동시에 지사적 순교자 의식을 지니면서 저항 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학생은 예비 지식인이고 이른바 지식인은 노동자의 생산물을 거저먹는 이들이므로 그들의 삶을 위해 모든 생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녔던 것이다. 이렇게 저항하던 운동의 결실을 보게 된 시기가 바로 1987년 6월이었다. 당시 대학 운동 세력은 일정한 조직 역량을 바탕으로 저항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87년 항쟁은 조직적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벤야민이 말하듯이 마치 ‘메시아처럼 재림’한 폭발적 사건이었다. 항쟁의 역량이 갑작스레 증가한 이유는 사무직 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일반 시민의 참여에 있었다. 일반 시민들까지 거리로 나와 서울시 한 복판을 점령하자 파쇼체제는 6?29선언으로 후퇴했다. 이후 시위 군중의 수가 감소하면서 변혁의 동력은 갑작스레 사그라들었다. 항쟁 국면은 7, 8월의 노동자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어용화된 한국노총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거대 사업장을 필두로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형국을 취했다. 노동자 총파업의 결실로 전노협이 건설되었다.

박영균 건국대 HK교수/ 사진:조배준 한철연 회원

87년 항쟁 이후 변혁의 동력이 꺼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6월 항쟁 이후 형성된 형식적 민주 체제로 인해 사람들은 제도 정치권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또한 민주화 이후 형성된 자유로운 분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 및 향락의 욕망을 발산하도록 돋구었다.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자본은 소비자의 이러한 욕구를 시장에 연결시켰다. 사회주의 패망 이후 이 물결은 전국민의 의식을 휩쓸면서 변혁의 열망을 잠재웠다. 이 속에서 진보 세력 구성원 중 많은 이들이 이탈했으며 제도권 정치 혹은 신사회운동으로 전환했다.

1997년 이후 사회의 대결 구도는 민주 대 독재의 대결이 아니라 진보 대 보수의 대결로 구획된다. 이러한 구도에서 민주주의의 강화와 더불어 평등적 가치의 수립이 강하게 도입되었다. 6월 항쟁 이후 사람들의 의식 속에 민주적 사고가 자리잡았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자존감과 자부심을 형성시킬 수 있었다. 각자가 민주적 시민으로서 인정받고 존중받지 못하면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촛불은 시민들의 이러한 의식 속에서 발현된 현상이다. 촛불은 단지 광우병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 과정에서 정부가 취한 굴욕적 태도가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자신의 상처를 문화적으로 치유했다. 최류탄과 몽둥이를 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맞서던 힘의 공간이 공연 및 토론의 문화적 공간으로 변화했다. 조직적 투쟁과 점거를 가능케 했던 87년의 지도부는 촛불 시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리는 각자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욕망은 자본 등에 의해 조성된 수동적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발현시킨 능동적 욕망이었다.

변혁의 가능성을 여전히 모색하던 이들은 이렇게 변화된 환경에 맞춰서 새로운 논의로 시선을 돌렸다. 최근 진보적 지식인들이 들뢰즈식 맑스주의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전에는 지배 세력에 의해 조성된 이데올로기를 분쇄하려는 시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소비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된 이후에는 진보적 지식인들도 욕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욕망의 해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외적으로 주어지는 욕망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능동적으로 우러나오는 욕망에 주목했다. 이것은 향락적 말초적 단기적 욕망과는 다른 자기 존재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존재론적 욕망이다. 존재론적 욕망은 소비 자본의 욕망과 대결하면서 대면하게 되는 자기 존재의 진정한 욕망이다. 소비자본주의는 다양한 개별적 욕망을 화폐 축적의 욕망으로 환원시킨다. 이 환원된 욕망에 저항하면서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진정으로 실현시키면서 해방감을 만끽하게 하는 욕망에 이를 때 우리는 진정한 해방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현재적 의미는 상당히 값지다. 그렇지만 그것은 개인적 노력의 부담을 지나치게 높게 부과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 욕망을 형성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단순히 자기 개인의 자체적 존재의 욕망을 파편적으로 펼치는 형태는 피상적 인간 관계의 형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 진정한 자기 욕망을 찾기 위한 시도가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의 것을 형성하는 폐쇄적 형태로 전개되어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욕망의 진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획 및 조직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적 욕망의 대의적(representative) 구현을 제안해 본다. 각자의 욕망을 네트워크화하여 전체적 비전을 창출해서 욕망의 길을 일정하게 선도하는 인물, 제도, 조직을 실현시키는 과정도 존재론적 욕망을 구현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새로이 요구되는 해방의 가능성은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후기

87-97-08로 이어지는 우리의 최근 역사를 정치 사회적으로 뿐 아니라 철학적 배경으로 곱씹어보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변화된 우리의 생활과 생각을 어느 방향으로 어떤 방법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생각들은 비슷한 사람들이 갖는 ‘다른 방식’-구조(국가)- 자율체(다양성)에 관심이 많은데,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좋았고, 과거지사 주마등처럼 지나갔던 80년대 후반 90년대를 회상케 해주는 추억의 시간이었습니다.

 

흩어진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관점으로 중심축을 꿰는 곶감의 중심 막대기(?) 역할을 한 것같다. 미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각는 자본을 더 대우해 주는 국가라 생각합니다. 국가를 잘 이용해서 집단의 희망을 대변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민을 위해 일하는 국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존재론적 욕망이 생명의 힘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 믿고 있는(싶은)데, 선생님은 그것이 더 큰 고통, 지고의 삶의 경지를 요구하는 것이라며 이견을 가지신다. 욕망의 대표적 실현, 재현을 위해 기획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아직은 공감하기 어렵다!!!

 

사이버 세계의 이상적 구축은 가능할까요? 민중이 현실에서 반응하는 양식이 비대면의 세계로 간다면 장점의 측면 뿐 아니라 단점의 측면도 하이퍼리얼화 시키지 않을지에 대한 의문을 안고 갑니다.

 

6?10, 노동법 총파엽, 촛불 집회가 가지는 관계성과 성격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더불어 한국에서의 정당의 역사성과 정당의 성격 분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실체가 모호한 춧불집회에 대해서 향후 어떤 형식의 혁명을 규정 또는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사회가 변화하면 또 다른 변혁을 위한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원칙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유로 존 떠나라!” 칸트의 대답은…[철학자의 서재]

[철학자의 서재] 임마누엘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박지용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유럽 재정 위기 속 민족과 민중

“그리스는 유로 존을 떠나라!” 유럽 선진국의 상당수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외치고 싶겠지만 당당하게 소리 내어 외치지는 않는다. 축적된 세계의 부를 최전선에서 누려오면서, 스스로 계몽된 시민이라 생각하는 자의식과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내심 그리스가 그냥 알아서 유로 존에서 나가줬으면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달 독일에서 계속 미루어 왔던 유럽안정화기금(ESM)이 헌법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합헌이라는 결정이 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정 지원에 대한 독일 국내 정치의 논의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충분히 알려져 있다. 재정 지원을 둘러싸고 진행된 독일의 국내 정치 상황은 아무래도 기독교민주당(CDU)과 자유당(FDP)을 위시한 보수 정당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SPD)은 슈뢰더 집권 이후 줄곧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해왔다. 그런 와중에 자유당(FDP)은 시장과 정치가 분리되어야 하며, 금융 시장에 대한 정치적인 개입이 재정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을 피력해왔다. 재정 위기를 둘러싸고 이렇게 정치적인 입장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다시 유로화 통합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복고주의 입장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독일과 프랑스에서 절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정치적으로는 극우주의가 득세할 수 있는 형세인 것이다. 그리스에서 극우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작금의 국가 부도 위기의 책임이 선진 유럽 국가들에 있다는 책임 전가 의식이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유럽 재정 위기는 단지 경제 문제를 넘어서 정치의 위기를 낳을 소지가 산재해 있다.

정치와 경제가 물고 물리는 상황에서 독일 수상 앙겔라 메르켈은 “유로화가 망하면 유럽이 망한다”고 밝힘으로써 유로 존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유로화를 살리는 것이 유럽을 살리는 길인가? 유럽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유럽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화폐 통합과 유럽의 공동체

최근 독일 ZDF 대담 프로그램에서 사회민주당(SPD)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일의 진정한 정치인이라 추앙받는 헬무트 슈미트는 유럽 위기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간명하게 밝혔다. 방송 내내 그는 그에게만 허용된 담배를 물고 힘주어 말했다. “독일이 유로의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이유는 역사적인 책임에 기인한다.”

독일이 홀로코스트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이 떠안아야 할 특별한 역사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슈미트가 언급한 이 대담한 발언은 왜 독일인들이 그에게 큰 존경심을 보이는가를 알게 한다. 게다가 방청객으로 참석한 많은 청년들에게 “너희 할아버지의 일에 너희들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교훈조로 훈계했고, 청년들도 현자의 지혜를 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인들은 그들의 잘못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어 현명해진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슈미트는 궁극적으로 “유럽이 지향해야 할 미래의 비전을 구체적인 정치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 보다 높은 유럽의 진보”라 말했지만,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정치적 과제가 되기 어렵다. 지금 상황에서는 눈앞에 닥친 발등의 불을 끌 응급처치를 찾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 왜 유럽은 화폐 통합을 시도했는가? 슈미트도 지적하고 있는 바, 유럽의 선택은 규모의 경제학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달러화의 위력과 급성장 일변도의 위안화, 이에 대한 대항마로서 유럽은 뭉쳐서 유로화로 통합함으로써 몸집을 키우려는 결정을 내렸다. 이념적으로 유럽 통합은 과거보다 진일보한 지평의 자유를 선택했지만, 실상은 그저 경제 통합을 통한 몸집 부풀리기가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만약 유럽의 통합이 그저 화폐 통합만을 위한 것이고 또 이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이 형세는 그야말로 기괴한 모양이 된다. 화폐는 단일한 경제 체제의 몸을 관통하는 혈액과 같은 것인데, 작금의 유럽 통합은 한 몸에 정치체의 머리가 여럿 달린 메두사가 된 것이다. 머리가 여럿이니 몇 개가 잘린다 해도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시키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린 머리는 자신을 자른 머리를 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이 머리들을 안정시킬 기제가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의 위기는 곧 정치의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유럽 스스로의 자율적인 자기 결정, 다시 말해 정치적인 선택이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유럽은 경제 통합만을 주요 의제로 고려한 채 통합을 정치적으로 선택했을 뿐 경제 통합이 파생시킬 정치적인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급한 불이 어떻게 꺼질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향후 유럽이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한 정치적인 고민이 가중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유럽이 앞으로 어떤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하는지를 모색할 때, 칸트의 정치사상은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유럽의 미래와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지구 반대편 변방의 한 철학자가 주제넘게 세계의 중심 유럽에 대해, 그것도 유럽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 사건에 대해 견해를 가진 사람은 세계 시민이다. 그 사건이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어도 나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자유를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라 했다.

칸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공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기가 발휘되는 데에는 분노의 감정이 결부된다. 나의 일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부당한 사정에 분노하는 것이 바로 학자(배운 사람)로서 간주되는 세계 시민의 용기인 것이다.

칸트는 그 이전에는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던 타인의 부당함에 대해 분노했다.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이 감내해야 했던 부당함에 대해, 칸트가 보여준 분노는 배운 사람에게 요구된 용기라는 미덕이다. 칸트는 당시 가까운 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 대해서나 대서양 건너 미국 독립에 대해 세계 시민적 견지에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

1795년 출간된 칸트의 저작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는 정치적 주제를 담고 있고 있으며, 평화에 대한 철학자의 관점이 개진되어 있다. 우선, 칸트의 정치철학은 근대 자연법 사상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된다. 홉스, 로크, 루소로 이어지는 계약론적인 전통은 칸트 정치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이 저작에서 드러나는 칸트만의 차별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임마누엘 칸트 지음, 오진석 옮김, 도서출판b 펴냄). ⓒ도서출판b

칸트는 홉스가 제안한 ‘자연 상태로부터 계약을 통한 사회 상태’라는 발상을 수용하지만, 홉스와 달리 평화가 법적으로 강제된 안정을 통해 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칸트에 있어서 정치란 ‘실행하는 법학’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칸트의 이해 방식에 많은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가령 시민 사회 혹은 경제적 영역(자본주의와 시장)을 정치적인 고려 대상으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궁극적으로 정치의 의미와 역할을 도덕 철학의 협소한 영역으로 제한했다는 비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정치철학은 정치의 철학적인 원리를 보편적으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응일 수 있다. 홉스가 제안한 평화 상태는 국가 내 내전을 강제하는 모델인데 반해, 칸트는 궁극적으로 더 넓은 차원에서 다시 말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국가들 간의 평화 상태 즉 국제법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저작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더라도, 프로이센이 프랑스 혁명 정부를 인정하고 평화 조약을 맺은 바젤 조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들 간의 전쟁은 전쟁 시기 중에서라도 잠정적으로 전쟁 이후에 체결될 평화를 염두에 두고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평화는 실제적인 경험으로부터는 입증할 수 없는 이념적인 것이다. 곧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흥망성쇠, 전쟁과 평화가 교차된 것이므로 전쟁이 전혀 없는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이념적인 수준에서 요청되는 것이다. 칸트가 그려본 영원한 평화를 위한 최소 조건은 모든 나라들이 공화적인 법적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외에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환대’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는 세계 시민 사회의 철학자로 격상되고 있다. 국가들 상호 간에 전쟁이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평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시민권은 서로 간에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인 원칙을 넘어,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두렵고 이질적인 이방인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제를 담는 적극적인 원칙이다.

역으로는 뿌리 깊은 공동체에 접근할 때, 스스로 적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칸트가 말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것이다. 이 권리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위해 모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며, 이것 없이는 평화도 달성될 수 없다. 이 권리는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손님으로 대우받을 것을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으며 그저 상호 간의 방문을 허용하는 정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업적인 교류를 위해 바다 건너 희소 자원을 교류하려고 방문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방문하려 할 것이다. 육상 생물인 인간이 지구 위에 발붙일 땅을 가질 때 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경제적 기반이 붕괴 직전인 그리스에서 많은 사람들은 삶을 찾아 자신이 발 딛을 땅을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더 안정된 나라에서 찾을 것이다.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네오 나치는 평화의 적이며, 인류와 인간성의 적이다. 그들을 기꺼이 환영할 마음과 여력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지성이자 존경받는 정치인 헬무트는 과거의 독일의 교훈을 통해서 미래의 독일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 이러한 교훈을 통해서 유럽의 미래, 평화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구보씨, 동물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동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굳이 개냐 고양이냐를 따지자면 구보씨는 개 쪽이기보다는 고양이 쪽이다. 생긴 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은 아파트처럼 밀폐된 공간에서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늘었는데, 개는 하루만 혼자 두어도 곤란하지만 고양이의 경우는 혼자서도 며칠 정도는 잘 견딘다고 한다. 구보씨도 그렇다. 소란스럽고 번잡한 것보다는 차라리 홀로 있는 게 낫다고 여긴다. 아마 철학자라면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개를 닮은 철학자라고 하면 영 이상하지만, 고양이를 닮은 철학자라고 하면 어째 그림이 그려질 법도 하지 않은가.

하긴 때로 세상엔 개 같은 철학자가 없진 않았다.
(내용이 대단치는 않지만, 이런 책도 있다.)고대(古代) 그리스의 유명한 견유학파(犬儒學派), 곧 키니코스학파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그때의 ‘개 같음’은 개떼처럼 몰려다니면서 욕망의 대상을 약탈하거나 구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는 시끄럽게 짖어대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위계에 따른 협박과 아부의 몸짓을 과시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견유학파의 ‘개 같음’은 온갖 누추함을 마다않고 인위의 번쇄(煩?)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자유로움에 있었다. 그러니까 견유학파에서조차 사교성은 철학자의 특성이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세속의 그 무엇에도 굽히지 않는 자존과 고독의 품위가 있었다. 그것은 개보다는 오히려 고양이 족속들에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다고 구보씨가 호랑이나 사자를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표범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살쾡이라면 또 모르겠다.

“얘 좀 봐, 여전히 웃겨. 너처럼 배나온 살쾡이가 어디 있니?”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이크, Y다. 드디어 그녀가 돌아왔다. 오랜 여행 탓인지 약간 야위고 피부가 그을린 게 야생성이 더 강해진 모습이다. Y야말로 살쾡이 같다.

“글쿠 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지, 애꿎은 짐승들은 왜 끌어들이니? 니들 철학자들이 언제 동물들을 제대로 대접해 준 적이 있기나 하니?”

아니, 그건 오해다. 철학자들도 나름으로 동물에 민감하다. 당장 니체와 말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가.

1889년 토리노.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 말에게 달려가 목에 팔을 감으며 흐느낀다. 그 후 니체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 10년간 식물인간에 가까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이런 내용의 해설자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토리노의 말? 중 한 장면)이 영화는 헝가리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벨라 타르가 작년에 내놓은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이제 영화는 그만 만들겠다고 하더니, 이번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는 뉴커런츠 분야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니체는 말에게 동정(同情)과 공감(共感)을 표시했고, 벨라 타르는 이 공감을 모티브로 삼아, 요즘 유럽에서 다시 유행을 맞은 종말론적 분위기를 인상적인 흑백 화면과 강렬한 폭풍의 음향 속에 담아냈다.

니체가 말의 목을 껴안았다는 1889년은 히틀러가 태어난 해다.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도 그 해에 태어났다. 1989년에는 동구의 사회주의가 몰락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동물이 철학자에게 공감하는 일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철학자가 동물에게 공감을 보이는 일은 확실히 있다. 벨라 타르는 여기에 주목한다. 강한 공감은 위기에서 비롯하고, 거꾸로 강한 공감의 표현이 위기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 근본적인 위기와 동물적인 공감, 꽤 그럴싸한 연결이 아닌가.
(벨라 타르)종말이 근본적인 종말이면 인간과 동물에 너나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혹성탈출? 식의 종말이라면 그것은 인간 지배의 종말일 따름이다. 그런 종류의 위기에서는 오히려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더 두드러진다. 공감이라고 해 봐야 그건 인간 위주의 공감이어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가, 곧 인간의 편인 원숭이와 인간의 적인 원숭이가 문제될 뿐이다. 위기의 심각성에 따라 공감의 양상과 범위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역시 종말론적 분위기에 편승해 요즘도 자주 언급되는 칼 슈미트에 의하면, 누가 동지인지는 누가 적인지에 따라 정해진다. 무엇이 우리랑 같은 부류인지는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적어도 사회적 반향이 있는 공감의 폭과 경계는 이런 적대와 위험에 따라 그 윤곽이 그려지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동물이 공감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라 해도 보통은 인간적 감정의 연장일 뿐이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우리는 우리의 적에 대해 때로 이렇게 외친다. 그런가 하면, 우울하고 서글픈 기분으로 주저앉아 있을 때 개나 고양이가 옆에서 살랑거리면 우리는 거기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래, 니들이 인간보다 낫지…”

그러나 니체가 두들겨 맞는 말에 대해서 느꼈던 연민과 공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 우리 주변에 미치기 마련인 친근성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낯선 말을 위해 니체는 뛰어든다. 그전부터 말에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니체가 말을 아끼던 애마(愛馬) 신사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그는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낀다. 거기에는 비일상적(非日常的)인, 그러나 보편의 심장을 꿰는 울림이 있다.

벨라 타르가 이 보편성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영화의 흑백 화면과 어울리는 수도사적 꼿꼿함의 전통이 깔려 있다. 그것은 물론 서구의 전통이고 기독교적 전통이며 히브리적 전통이다. 아니, 니체가? 기독교의 신을 부인했던 바로 그 니체가 기독교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당근이고 말밥이다. 적어도 신이 살아있었음을 인정해야 그 신이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니체 자신이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기독교적 죄의식과 평생 싸움을 벌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제 정말 니체의 신은 죽었는가? 글쎄… ?토리노의 말?은 무엇보다 유럽의 절망감을 드러내 보인다. 영화의 무대는 황량한 벌판의 외딴 집에 고정되어 있다. 영화의 중간에 등장한 집시들은 마부의 딸에게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꼬드긴다. 그들은 한바탕 소동을 피운 뒤에 물러가지만, 집시 노인네가 건네주고 간 책에는 성소(聖所)가 더럽혀졌으며 회개의 의식(儀式)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집시들이 퍼 마시고 떠난 우물은 말라버린다. 방종(放縱)한 약탈자인 미국은 아직 승리자로 군림해 있는데 꼿꼿한 품위의 유럽은 처연하게 종말을 맞이한다는 말인가?

벨라 타르보다 더 성가(聲價)가 있는 유럽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역시 작년에 종말론적 작품을 내놓았다. 그 영화 ?멜랑콜리아?에서는 아예 지구가 낯선 별에 부딪혀 박살나 버린다. 여기에도 동물로는 말이 등장한다. 종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함을 함께 나누기에는 말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때에도 말은 인간의 세계를 그려내는 주변적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다.
(조르조 아감벤)동물을 종말론과 관련해 전면적이고도 주제적으로 다룬 이로는 『호모 사케르』로 유명해진 조르조 아감벤을 들 수 있다. 그의 책 『열린 것』(이태리어 원본은 2002에, 영어번역본은 2004년에 나왔고, 우리말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선 니체 식 말목 껴안기의 연장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다루는 종말론은 ?토리노의 말?에 비해서도, ?멜랑콜리아?에 비해서도, 니체의 흐느낌에 비해서도 그 절실함이 덜하다. 그것은 아마 10년 전의 이탈리아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에 패배한 것을 빼놓고는 심각한 위기나 절망에 부딪히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조르조 아감벤, 『열린 것』워낙 서구의 전통에선 종말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되지 않는다. 종말은 새로운 시작인 까닭이다. 부활과 구원이 종말이라는 사건과 함께 하지 않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도 여기서는 새로워진다. 아감벤은 『구약』의 ?이사야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그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 새끼가 함께 먹으며 어린 아이들이 그것들을 돌볼 것이다.”(11장 6절) 종말에 이르면 인간과 동물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이제까지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동물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가 사라진다. 말하자면, 완전한 ‘신’(新;神)세계에서 동물과 인간의 공감이 완성되는 것이다.

“구보야,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횡설수설하더니 삼천포로, 아니, 영 엉뚱한 데로 빠지잖아. 동물 얘기하다가 종말이니 뭐니 하는 것도 이상한데, 이젠 아주 천당으로 올라가니? 내가 뭐랬니? 이것저것 괜히 주워섬기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했지. 대체 하고 싶은 말이 있기나 한 거니? 그 동안 내가 없을 땐 어땠는지 정말 궁금하다, 얘.”

“어, Y야. 그래두 내 말에 맥락은 있는 거야. 철학자들이 근래에 동물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게 기본적으로 인간 삶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온다는 거지. 종말론이라는 게 다름 아닌 그런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하는 거고 말이야. 물론 이런 생각들이 주로 서구적인 것이긴 하지만, 뭐, 오늘날의 주된 삶의 패턴이 서구적인 것이니까…”

“그런데 아감벤이 철학자 맞아? 역사학자 아냐?”

“뭐, 미학이나 문헌학적 작업에 익숙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자라고 해야겠지. 내가 말한 책에도 그림이나 옛 문헌에 대한 얘기가 다방면으로 많이 나오긴 해. 그러나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는 건 하이데거의 인간관과 동물관이고 거기에 대한 비판이야. 그리곤 벤야민의 견해를 일종의 대안 비슷하게 제시하지.”

“너처럼 횡설수설한단 얘기야?”

“쯔.,. Y야, 내 말도 횡설수설 아니라니까…”

“그럼, 대답해 봐. 아까, 니체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말했다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그건 아마 자신의 작업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는 뜻이 아닐까. 동물과 공감하는 차원까지 내려가서야 절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래서 니체의 그 말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겠지. 종말론이라는 게 기존의 질서를 부분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 뒤집어야 된다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래? 그럼, 구보 넌 언제, ‘Y야, 난 바보였어. 그 동안 횡설수설했구나.’ 하고 말할 건데?”

판문점에 선 철학; 상처와 화해의 철학[한철연 교육강좌]- ⑪

[한철연 교육강좌]- ⑪

판문점에 선 철학; 상처와 화해의 철학

 

강사: 이병수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후기: 한 길 석(한철연 교육부장)

 

분단 이후 남북 관계의 기본 특성은 적대성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적대는 군사 및 이념적 적대와 생활 문화적 적대로 대별된다. 생활 문화적 적대는 남북 주민들 간에 자발적으로 동의된 적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남북 구성원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적대성이라 그 심각성이 더욱 크다. 같은 동족임에도 남북 국민 모두는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껄끄럽고도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긴다. 적대감이 무의식 속에 내면화된 상태라면 분단은 이미 사회과학적 사태가 아니라 인문학적 고찰을 요구하는 사건이다. 우리 몸과 마음의 분단이라는 차원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병수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그렇다면 홉스봄의 ‘역사적 국가 historical state’ 개념을 활용해 분단 적대성의 원인을 심층적으로 살펴보자. 역사적 국가란 혈연, 언어, 문화, 정치, 역사적 동일성이 구조화된 국가 상태를 의미한다. 동아시아 삼국은 천여년 이상 영토 경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각자의 역사적 국가 상태를 구성해왔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이런 상태가 붕괴되면서 한반도는 망국, 이산, 분단이라는 현실에 휘말렸다. 과거 한국인들은 한반도라는 일정 공간 내에서 민족과 국가가 일치하던 역사적 국가를 이루고 있었는데, 현재는 민족과 국가가 일치하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적 상태는 재중 동포, 재일 동포, 재러 동포 등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엄밀히 보자면 남과 북 국민들 모두가 민족과 국가가 일치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있다. 오랜 역사적 국가 상태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민족과 국가의 불일치 현상은 일종의 치욕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한민족 구성원들은 분단이라는 비정상적 상태에서 벗어나 통일된 역사적 국가 상태를 희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서로를 증오하는가? 서로의 정부를 가짜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을 어머니, 국가를 아버지라 해보자. 우리는 분단으로 인해 두 아버지(두 개의 정부)를 둔 민족의 자손이 되었다. 남북은 서로를 가짜 아버지의 자식으로 치부하면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들었다. 여기에 분단 적대성의 원인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적대성의 근저에는 강력한 동질화의 욕구가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서로 전망하는 동질화의 상태가 상이하기 때문에 상대방과의 화해를 통한 동화는 거부하고 있다. 각자가 상대방을 자기 모습대로 동화하려드는 왜곡된 욕구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적대는 더욱 심해진다. 한국전쟁은 훼손된 민족 국가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던 왜곡된 몸부림이었다. 동질화의 욕망이 왜곡된 형태로 전개될수록 적대 행위는 심화되고 그것으로 인한 상처는 무의식 속에 강하게 각인된다.

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은 식민 트라우마, 이산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라는 세 가지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현실의 불행한 대립의 역사는 이 트라우마를 이성적으로 치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트라우마화된 적대성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화해의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상대방과 내가 다름을 받아들이고 상실한 민족 공동의 서사를 공유하는 것이다. 전자를 인정의 노력이라 한다면, 후자는 민족통합서사를 이룩하려는 노력이라 하겠다. 인정의 노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이해되지 않고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대립하는 것이 손해이기 때문에 갈등 상황을 멈추고자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에는 자신의 관점을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태도가 여전하다. 이것은 일종의 전술적 고려 속에서 나온 인정의 태도에 불과하다. 세력이 비등하므로 억지로 상대방을 인정할 뿐이다.

또 다른 인정의 노력은 타자의 인정이다. 이것은 자기의 정체성과 가치관, 그리고 현재적 상태의 변화를 감수함을 의미한다. 남한만 옳고 북은 고쳐야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상대방이 보기에는 각자의 체제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자기 체제의 문제점을 상대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민족통합서사의 구축은 과거의 통합된 역사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복고주의나 보수적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한반도 구성원들은 식민, 이산, 분단을 겪으면서 각자 상이한 문화, 의식, 역사, 생활양식을 구성해왔다. 이런 상태에서 민족 공통의 서사를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 잊혀진 과거에서 결합의 흔적을 찾다가는 혈통적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도 있다. 현대사에서 공유한 역사적 수난을 바탕으로 하여 남, 북, 해외동포 등의 각 구성원들이 구성한 문화적 성과물들을 결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남북 교류의 확대와 지속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질문1) 탈북 주민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탈북인의 절반은 자신을 북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있다. 체제적 정체성은 포기했으나 북에서 형성한 공동체, 풍습의 정체성은 고수하고 있다. 상이한 문화적 정체성을 주장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같은 민족으로서의 공통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여기서 분단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로서의 공동의 정체성을 인식해야 한다. 탈북인을 같은 동포로 보고자 하는 것은 단지 혈연적 동일성의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질문2) 체제 세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삼대 세습은 분단 구조가 낳은 독특한 체제이다. 분단 구조는 북한 혼자만이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삼대 세습 제도를 유발시키거나 그것을 지속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책임에 대해서는 남한도 자유롭지 않다. 삼대 세습은 현대적 사고에서는 비상식적 사건이다. 그러나 비상식적 사건의 극복은 비난과 조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습 문제를 낳은 분단 구조에 대한 면밀하고도 성찰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후기

남북 문제를 민족의 문제와 국가의 문제로 대비해서 고찰해 볼 수 있는 심층 강의라고 본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민족 정체성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통일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생님이 제기하신 민족적 트라우마 개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단 이후 국가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이 다른 한반도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국가 폭력이 개인의 폭력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이의 인정을 넘어서 타자성에 대한 이해로 남북 체제를 바라보는 화해와 상생을 위한 길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교수님의 강의에 감사드립니다.

기존의 통일에 대한 생각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강의였습니다.

“기존 이념과 국가가 하나가 되는 통일 개념이 잘못하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소통과 교류를 중시하는 과정으로서의 통일로 통일 개념이 바뀔 필요가 있다”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민족과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 폭을 많이 넓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