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천 하룻밤 이야기]

  혁명 대 쿠데타

– 인민의 생동감 대 탐만치의 독극물을 마신 자들의 망상

— 2024년 9월 22일. 추분(秋分): 그저께 밤새 비가 내리더니, 더위가 꺾였다.

ㆍ학문에는 경계가 없다. 현자도,

ㆍ학자는 경계 안에 있다. 지자는 패거리에 갇혀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면서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온 것은 착한 이야기로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런 신선놀이 하는 천국 같은 이야기를 하던 시대는 어디에나 있었을 것이고, 표현하는 방법이 시대마다 또는 삶의 터전마다 다를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구전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것이다. 자연에서 삶이 먼저이기에, 이 산, 이 강물, 이 땅,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고 저것들이 누구의 것이라는 사적 소유 관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 공산사회가 먼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시절에도 인간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끈질긴 노력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전에, 정보의 전달이 문자화되기 이전에, 자연재해에 대해, 즉 자연에서 규칙성을 찾지 못해 기후변화나 태풍, 지구변화에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과 화산 등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시절 인간이 소유를 말했기나 했을까?

소유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추상 관념이 설정되는 시기에 대상이 현상적 표현 또는 재현 가능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세상에서 살면서 공유와 터전을 말한다면 이것은 서양철학사에서 퀴니코스-스토아의 전통일 것이다. 하늘의 영원과 땅의 시간으로 대비시켜 설명한 것이 플라톤이었는데, 퀴니코스-스토아는 현재가 있는데, 미래는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지만 그 현재의 항상된 이중적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 파들의 현자들은 그 현재라는 시점에서 점이라고 여기는 찰나는 영원하며, 즉 한번 이루어진 것, 만들어진 것은 사진의 장면처럼 영원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점이 아니라 열린 덩어리로 보았을 경우에, 그 덩어리는 그 변화하는 중에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달리 순간은 과거(어제) 온갖 찌꺼기들을 포함하고 또한 미래(아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지속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찰나와 순간의 구별은 삶의 과정의 태도와 의식을 보여줄 뿐만아니라, 세상에서 “뭣”을 대하는 인식에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이 땅의 대조에서 시간의 기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 하지만, 양자의 구별에는 그 만큼의 뜻이 있다. 현실의 삶에서 어떤 측면은 변할 수 없는 것이 있기도 하고, 삶의 과정은 끊임없는 변화의 측면이라고 한다. 이중성은 하늘과 땅의 대조에서만일까? 그런데 사실상 현재가 이중적이지 않는가? 이 이중적인 것을 한번은 하늘에 기준을, 다음번에는 땅에 옮겨서 그림자를 재는 편리를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일까? 삶의 터전에 따라 인간들 각각의 심성이 그림자를 재는 것만큼이나 달리 표출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영원에게 삶의 태도를 묻고자하는 사고방식은 언제 어디서 왔을까? 영원을 하늘에 묶어 두는 한, 인민의 저항과 봉기도 반란과 역적으로 몰리는 것이 아닌가.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선가부터 현실의 변화를 인도하는 인민의 항쟁과 혁명이 있었다. 어쩌면 플라톤주의자들을 전복하는 사유가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인민의 혁명의식을 하늘에 맡기라고 누가 말하는가? 18세기 말 대혁명과 20세기 초 공공재의 공산화하는 두 나라의 성립 이후, 거꾸로 하늘에서 천사와 성자들끼리 개혁이니 변혁이니 말씀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은 인민에게 반역과 모반을 꾀하는 쿠데타 사고방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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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를 상층의 이데아(관념) 중심으로 읽으면 쿠데타 세력을 플라톤이 주장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박홍규와 들뢰즈는 플라톤 사유에는 이중성이 있었다고 한다. 플라톤에서 아페이론이란 용어를 사회(토지)에서 인민으로 읽으면, 인민의 활동에 능동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이상한 종족이나 신앙자들은 플라톤의 아페이론을 이데아(관념)의 설득의 대상처럼, 피조물로서 다루어야 할 자연, 지배해야할 인민 등으로 여겼을 뿐이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상반된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서양철학사의 기원을 기원전 7세기 이오니아의 탈레스로 잡는데, 그 탈레스가 자연을 대상으로 착각했다고 여긴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크리스토스 신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을 받아들여 자연을 대상으로, 그리고 신의 피조물처럼 여기듯이 인민을 다루어야할 지배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젖었다.

서양철학사가 왜곡되는 것은 한 찰나이다. 찰나의 고정은 불변이며, 천국도 불변이다. 그런데 지속하는(살아있는) 순간은 변화하며 지속한다. 그것을 영원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어서, 순간조차 쪼개어서 마치 원자가 불변인 것처럼, 순간을 찰나로 고정하여 불변으로 만들었다. 그 속임수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서양 철학사는 누누이 말하였지만, 이법과 신앙을 별개 사항으로 따로 놓음으로서 신앙은 찰나이면서 순간이라고 망상 또는 착란에 빠진다. 이를 프로이트 후학들은 파라노이아(편집증)라고 한다.

신앙자들은 왜 이 둘이 따로, 별개라고 하고 신앙이 우선이라고 하는가? 억지, 편집증의 초기와 닮은 자폐증의 치졸함이, 산타클로스 할배가 실재한다고 믿는 여섯 살 꼬마처럼 유치함이 상식의 이름으로, 그리고 탐만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극우는 강박관념과 파라노이아를 사회 속에서 펼친다는 점에서 윤석열 집단처럼 일곱 살쯤 돼 보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중세 말기에 성행했던 마남사냥처럼, 현실에서 제대로 살아남지도 못할 지경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별개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길고도 흥미롭게 시로 쓴 철학자가 니체이다. 신앙자들은 니체가 사유의 전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허무라고 해석하지만, 니체는 신앙자들의 질병(강박과 편집)과 탐만치에 빠진 아집을 벗어나라고 하면서, 불교의 도피안과 같은 저 너머 보살행을 행하자고 한 것이라 한다. 니체는 신앙자가 아니다. 그는 이슬람의 신의 놀이와 같은 아자르(주사위 놀이)로 설명하려 했겠는가? 자연의 다양한 발현이 아자르이다. 자연, 즉 이법은 신앙과 아무 연관도 없이, 45억 년의 오래 세월 동안 거기서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고, 이제도 변하고 있고 아제도 변할 것이다.

서양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전은 그리스 이전에도 있었다. 들뢰즈가 흥미있게 전개한 것은 도구/무기의 방식이 인류사상사의 변역(變易)의 과정이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 최초 철학자라는 탈레스 이전에도 인간이 살았다. 1859년 인류학회 이래로 인류의 과거를 연결하는 6백만 년 전의 유인원까지 갈 필요 없이, 3만 년 전 구석기. 만 년 전 신석기, 7천 년 전 현 터키지방의 아나톨리아의 자연동광의 발견으로 구리시대, 청동기시대, 기원전 천 년 전쯤에 철기시대로 이르기까지 도구의 발달로 여기지만, 도구를 무기를 사용하여 자연의 위험에 대처하고 동물이든 타종족이든 위협에 저항하기를 넘어서, 타를 정복하여 잉여이익의 착취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정복이 농경과 목축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집단을 형성하고 분업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효율적인 정복에서 정복자는 집단을 다스릴 체제로서 참주제를 이용하였고, 제도 속에 정보와 배치는 소수의 소유로 이루어 졌다. 이 제도에서는 의식의 변화과정보다, 인식의 활용과 전승에 중요성을 알아서, 소위 말하는 지성의 체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도구/무기를 기호와 문자로 전승하는 철기시대의 발달 시기쯤에서 권력의 유지와 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리라 이 즈음에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국가)”편과 “법률”은 방어와 번영을 염두에 두었다고하는데, 이런 체제가 현실상에 있을 수 없다고 상상적 나라 또는 이상국가라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고려해 보건데, 원시 공산사회가 있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상부상조의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를 의미할 것이다. 자연 속에서 소규모의 집단들은 자체의 존립을 위해 상부상조했을 것이나, 무기/도구를 먼저 생각하는 참주제와 같은 우두머리 체제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정복의 잉여이익의 착취가 집단의 표본처럼 되어가는 것이 고대 문명사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부상조의 삶의 터전에 대한 향수는 남아있었을 것이다. 정복의 문화 대 상부상조의 문화라고 맞대응 시킬 수 없겠지만, 기록과 유물의 역사는 정복의 체제에 치중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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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상이 철학적 사유의 근본 또는 기원이 아니라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제기되었고, 20세기에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럼에도 19세기 전반까지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자들의 사고가 인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인민이 주인이라고 하면, 반역이니 반국가세력이니 하여 마남사냥처럼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조차 사형 또는 참수하였다. 프랑스가 세 번의 혁명을 거치면서, 인민 주권을 확실하게 만들고 나서, 그리고 20세기의 두 번의 전쟁에서 인민이 주축이 된 나라, 소비에트 공화국, 중화인민 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뒤에야, 세계사에서 인민의 저항과 항쟁이 자기 방어로서 정당화되고, 상부의 정권을 쟁취하는 세력이 쿠데타 즉 반역의 세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현재 윤석열 정부도 인민의 의사를 거슬러 권력을 사유화하려 한다면, 반국가세력의 반역이 될 것이다.

그리스 사상이 의식적 사유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 사유의 심정적 공감의 사유는 그리스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의 문명의 사유가 전개되었다는 것도 당연히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이상하게도 인더스 문명을 말하지만 인더스 문명은 거의 지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선 문명에서 산술과 기하, 천문과 지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승되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처럼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홍익인가) 한다고 표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원시사회라고 말한다면, 아름다운 동산에 사는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보건데 청동기 시대 이래로 거의 정복의 역사이고, 전쟁의 승리자가 신격화되는 시대이다. 몇몇 상부의 사유와 지식의 전유(생산도구의 전유보다 더 전횡을 할 수 있다)라는 시대를 거쳐서, 인간이 각자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철기시대에 진입하여 생산력이 발달해야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산물의 잉여가 있어야 동냥하며 수도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 쯤에서 자기의식의 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 초기를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싯달다, 지중해 바닷가에서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 이후의 여러 사유의 갈래들은 통일성을 갖기에는 인간의 도구(언어, 문자, 학설)가 (실증적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하지도 않았고, 획일적이지도 않았다. 4세기가 지나 신앙이라는 이상야릇한 사고방식이 침입하였고, 크리스토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황제와 보편을 본따서) 신앙을 획일적으로 보편화하는 사고방식으로 고정시키려 했다. 언어/무기를 사용하여 3세기 간의 피튀기는 투쟁으로 단일화하였고, 서양은 그런 방식에 묶여서 중세 천 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 개인의 자의식의 발현이 있었다. 그리고 400여 년을 신앙자들과 달리 생각하는 도구/언어를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자의식이 무엇인가를 도구로 만들면 무기로 바꾸어 사용하는 쪽이 참주제의 사고방식으로 있어왓다. 이에 비해 마남사냥 속에서도 소수의 자의식은 인민으로 퍼져나갔고, 세기를 지나 인민의 혁명들을 거치면서, 제도에서도 인민이 기본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 의식의 확장과 더불어, 인식의 발전과 진보를 믿는 이들은 다른 지역을 정복하고 쟁취하는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문화(문명)들 간에 충돌에서,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의 성립이 정복의 피비린내 속에서 피지배지의 확장을 통한 권력을 쟁취와 확장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그러했고, 크리스토스의 주장자들이 따라 배웠으며, 십자군전쟁까지도 치르면서, 천년의 신앙의 황제(교황)를 만들었다. 시대의 변화에서 유럽의 민족들은 자기의식에 따라 각 지방의 언어가 성립하고 개별 국가가 성립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과학의 일반화로 상식을 넘어 양식에 따른 사유체계를 정립하여, 인간들의 자유와 사유의 발전을 기여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고의 정립은 다른 사고방식의 지배에 있었으며, 식민지 확장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타 지역의 다른 문명이 도구 사용방식은 다르더라도 문화가 낮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제국주의 내부에서 두 번의 대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도구/무기의 문명이란 도구를 무기로 사용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은 정복에서 탈취와 착취를 쉽게 손 놓지 못하였다. 제국주의에 이어서 정복의 사고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제국은 신앙자들의 형이상학적(주지주의) 논리, 국가주의자들의 법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진리를 주장하는 분석과학철학 등과 패거리(카르텔)를 형성하여 지식/무기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21세기 SNS라는 도구/무기를 지배하려들면서, 또한 핵 발전도구와 핵무기의 이중성 함께, 전지구적으로 위협과 공포를 통해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공공재 공유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이익창출을 위한 사유를 우선시 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균열은 한 세기를 지나 분명한 간극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는 공공재는 사유화하는 방식과 공공화 하려는 방식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에 있다. 이 갈등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이 사유화의 세력은 신앙, 법률, 지식의 카르텔 형성하면서 돈을 신으로 모시며 지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민의 자의식은 고대나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확장과 강도의 수준이 전파와 속도 덕분으로 엄청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민이 주인이고 인민이 토대인데, 패거리의 장난과 놀음이 강압적 법률로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신앙은 공공재화의 사적소유가 폐기되면 무너질 것이고, 지식을 달리하는 사유하는 자의식의 확산으로 새로운 분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혁명은 번개처럼 갑자기 도래한다. 기나긴 의식의 역사 속에 간헐적으로 분출되었지만 폭발적이었다. 세계사는 공공재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 공공재의 공유화가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살리는 길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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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역사상 자의식의 발동은 여러 번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 개인에게 자의식의 분출은 그들에게도 사회주의 국가 성립이후 20세기 후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입말과 문자로 통용한지 79년째이다. 그럼에도 외교에서는 미국과 관계에서 영어를 우선으로 하지만 말이다. 서양도 경험시대, 종교시대, 지성주의 시대, 현대이듯이 우리나라도 전승의 시대,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이다. 상동구조가 아니라 상사구조로 변역을 겪어왔다.

환시대, 단군시대, 부여와 고구려 등으로 내려오는 신선사상의 시대가 있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천년의 불교 영향, 그리고 유학이 들어와 군왕제를 확립한 유학 영향 500년이다. 이 조선 말기에 권력으로부터 밀려난 상부의 몰락 양반들 중에 백성의 삶에 대해 생각했던 실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백성의 입말과 자신들의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했었다. 이런 과정에서 19세기의 학문적 관심은 분명히 새로운 질서와 삶의 터전에 대해서, 그리고 서양 문물의 유입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수의 열망이 있었음에도 우리 입말과 우리 글로 표기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백성 또는 중생이 자각하여 자기의식을 발동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사적 소유의 상부는 외세와 결탁하고, 백성의 저항과 봉기는 문자를 쓰는 선비들에 의해 지도되어 널리 퍼뜨리지 못하고 1894년 일본군대에 의해 민중의식은 수면 밑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상층은 서양을 직접 찾아가기보다 손쉽게 일본의 지식과 제도를 통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고, 일본의 주구(走狗)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저항하는 몰락한 소수의 상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는, 이제 만주에서 세계사의 접속과 일본을 통한 세계사의 편입이라는 이항 대립적 구도가 있음을 깨닫는다. 1919년 두 개의 독립선언문이 이를 증빙한다고 할 수 있다. 묘하게도 만주로 간 독립운동은 지식인이면서 중국과 연계 속에서 한문에 능한 반면, 일본과 연계 속에서 새로운 식자층은 한자를 알고 있다는 지식으로 일본에 급속히 빨려들어가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익힌 일본에 복속되어 갔다. 말하자면 후자들은 들뢰즈 용어로 일본에 “포획”된 형국이었고 곧 이어 일본의 “포로”가 되었다. 이를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이라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함께 하는 이들은 상부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층들과 백성들이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금지되고 수면아래 흐르면서, 또한 마남 사냥과 같은 빨갱이 사냥이 몰아치는 동안에, 남한에서는 윤똑똑이 지식인들이나 문학인이들 겉멋이 들어 19세기 초 독일 낭만주의와 같은 아이러니가 뭔지도 모르고, 산업화에 편승하여 원숭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수면 밑에서는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분출 시켜려는 이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한글을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입말과 문자의 공유가 세계사적으로 보면 늦었지만, 결코 뒤늦은 것은 아니다. 21세기에서 자의식의 발동은 싯달다시대, 소크라테스시대, 데카르트시대, 로베스삐에르 시대, 레닌과 마오 시대와 달리 사유하기가 전개되고 있다. 깨닫든 느끼지 못하던 이 달리 말하기 글쓰기는 젊은이들에게, 프로이트의 구강단계가 아니라 들뢰즈가 말하는 구강성의 활성화에 의해 확장되고 있다. 이 확장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3세대가 거의 다른 입말을 쓸 정도 이지만, 어제-이제-아제의 지속성은 강도(내공)를 더해가고 있다.

실로 우리나라에서 자의식의 첫 발동인 훈민정음 창제에서 거의 600여 년을 침잠하여 흐르고 있었다가 솟아나고 있다. 어느 국가 제국에게도 시달리지 않을 자유의 쟁취로서 혁명도 분출할 것이다. 인민의 혁명 대 사적 소유자의 쿠데타, 당신은 위상은 어디에 있는가? 이들에 속하지 않고 별종으로 세계를 누비려고 한다고? 이 이항대립을 타파해야 걸어서 개마고원과 만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남쪽의 섬 같은 삶은 쿠데타 세력에 동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 제국의 개가 되고 미국 제국의 피를 빨리는 짐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11, 57TMA) (5:36, 57T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8-반성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8-반성 개념

1)

앞에서 칸트는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가지는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 의미는 구체적으로 도식을 통해 주어졌다. 칸트는 이런 판단형식을 마치 좌표축처럼 생각하면서 어떤 경험과 어떤 판단형식을 관계시켰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경험이 충분히 주어지기 전에는 어느 판단형식에 속할지를 가리기 힘들며, 판단형식을 결정하기 위해 충분한 경험은 무한히 지연되므로, 칸트의 인식론은 물 자체뿐만 아니라 심지어 현상에 대한 인식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우리의 인식에서 우리는 잘못된 인식에서 참된 인식으로, 현상의 표면적 인식에서 그 내부 본질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헤겔은 칸트의 좌표축 개념을 넘어서서, 인식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헤겔은 이점을 논리학에서 “내용의 자기 운동”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그것은 하나의 판단형식이 그 스스로 다른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의미이다.

누구나 어렵지 않게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듯이 헤겔 역시 여기서 간단하게 생각했다.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면, 하나의 판단형식은 어떤 사태에 부합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만일 판단형식이 현재 주어진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판단형식은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문제 되는 논의는 예를 들어 ‘철수가 죽었다’가 잘못이고 오히려 ‘영희가 죽었다’가 진리라고 말할 때처럼, 동일한 판단형식이 적용되는 구체적 내용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판단형식 즉 범주 자체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철수가 죽었다’가 아니라 ‘누구나 죽는다’와 같은 판단으로의 변화이다. 이런 판단의 변화는 판단형식 즉 범주 자체의 변화를 동반한다. 즉 개별긍정 판단에서 일반긍정 판단으로의 변화이다.)

헤겔은 판단형식 즉 범주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반성 개념을 통해 개념화했다. 여기서 우리는 반성 개념에 관한 좀 복잡한 논의를 거쳐나가야 할 것 같다.

2)

철학사에서 반성 개념에 관한 논의는 칸트가 촉발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는 지나가는 투로 또는 주변적 문제를 다루는 투로 이 반성 개념을 논했다. 이 개념 쌍은 칸트 순수이성 비판 2편 원칙의 분석론 끝에 대상을 현상체와 가상체로 구별하는 3장 끝에 부록으로 다루어졌다. 그는 이 부록에 “라이프니츠 반성 개념의 모호성‘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칸트가 여기서 다룬 반성 개념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질료와 형식이다. 이 개념은 개념쌍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유사한 좌우나 선후, 명암과 같은 개념과 같이 비교에서는 나오는 비교개념이지만, 위의 네 자기 반성 개념은 어떤 특수한 맥락에서가 아니라 존재자 일반에 사용되는 개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 개념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는 현상계를 다루는 선험적 분석론을 끝내고 물 자체를 다루는 선험적 변증론으로 이행하는 중에, 그러니까 분석론 2부 원칙론, 3장에서 현상체와 가상체를 구별하는 근거를 다루면서 그것에 덧붙여 이 반성 개념을 다루었다. 그래서 전체 논의 핵심은 반성 개념들을 현상체에 적용하느냐, 가상체 즉 물자체에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다.

여기서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동일성과 차이의 개념에만 집중한다면, 칸트는 위와 같이 현상체와 가상체를 구분한다는 관점에서 라이프니츠를 동일률을 비판한다. 라이프니츠는 ‘두 사물의 모든 성질이 동일하다면 동일한 사물이다’라고 말한다. 즉 HaGa.. & HbGb..이면 a=b라는 것이다. 칸트는 그렇다면 물방울이나 나뭇잎은 서로 동일한 성질을 지니니, 하나의 물방울이나 나뭇잎만이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반론을 전개한다.

실제로 라이프니츠의 주장과 달리 다수의 물방울이나 나뭇잎이 존재하는 까닭을 생각해 보면,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을 현상체에 적용하는 것과 가상체에 적용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두 물방울에 관해서, 우리는 그 두 낱[개]의 내적 차이(질과 양)를 죄다 도외시한다 할 수 있더라도, 그 두 낱[개]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보이는 사실은 두 물방울을 수적으로 다른 것으로 간주하기에 족[충분]하다”(순수이성비판, A319, 최재희 역, 박영사, 개정판, 1883, 248쪽)

즉 물방울의 성질은 동일하더라도 장소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공간은 직관 표상에 속하고 성질은 지성의 표상에 속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장소조차도 성질처럼 지성에 속한다고 보면서, 여기에 동일률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지성 표상과 직관 표상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 구분에 따르면 성질 즉 본질의 동일성과 상관없이 직관에서의 차이가 즉 현존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칸트는 논리적 비교와 선험적 반성을 구분한다.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비교하는 일은 개념들의 객체가 어디에 속하느냐 즉 가상체로서 순수 오성에 속하느냐 혹은 현상체로서 감성에 속하느냐 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을 우리가 대상에 적용하려 하면, 그런 개념이 어느 인식능력의 대상일 것인가, 순수오성[지성]의 대상일 것인가 혹은 감성의 대상일 것인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선험적 반성이 필요하다.”(순수이성비판, A 325, 최재희 역, 249쪽)

칸트는 여기서 논리적 비교를 선험적 반성과 구분한다. 논리적 비교 이전에 선험적 반성이 필요한데, 그것은 비교의 대상을 직관의 차원(시공간성, 현존)에서 볼 것인지 아니면 지성(성질, 본질)의 차원에서 볼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위의 예를 들자면 물방울의 성질을 비교할 것인지 아니면 그 현존을 비교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선험적 반성이 없다면, 반성 개념에서 모호성이 출현한다. 그것이 라이프니츠의 동일률이 일견 옳은 듯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적 경험과 대립하는 이율 배반에 빠지는 이유라는 것이다.

“이런 반성이 없고 보면, 나는 개념을 자못 불확실하게 사용하는 것이 되고, 비판적 이성이 승인할 수 없는 사이비 종합적 원칙이 발생한다. 이런 원칙은 선험적인 모호성에 기본하고 있다. 즉 순수 오성의 대상을 현상과 뒤섞는 데에 있다.”(순수이성비판, A 325, 최재희 역, 249쪽)

칸트의 논의는 여기서 그치고 말았다. 그는 위의 네 가지 반성 개념을 가지고 논의했지만, 사실 그는 판단형식으로서 범주를 적용하는 문제를 다루었을 뿐이고, 반성 개념 자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하지 않았다.

칸트는 선험적 반성론에서는 위에 제시된 네 가지 반성 개념을 단순히 ‘비교개념’이라고만 보았다. 이 비교라는 개념은 반성 개념을 설명하지 못한다. 비교되는 것은 서로 동일성과 차이가 규정된다는 것이니,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성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 개념은 비교로부터 설명되지 않으며, 오히려 비교는 반성 개념을 전제로 할 뿐이다.

사실 철학사 전체에서 반성 개념에 대한 분석은 결여되었다. 반성 개념은 로크에 이르러 내적 직관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즉 사물의 성질을 경험하는 것이 외적 직관이라면, 내면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내적 직관, 즉 반성이라 한다.

로크에서 반성은 더 고차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다. 즉 내적 관념을 다시 관찰하는 것이다. 합리론 철학에서 반성은 이런 고차적 반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이것이 의식에 대한 의식 즉 자기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된다.

내적 관찰이든 더 고차적 자기의식이든 반성은 직관적이라고 규정되면서, 외적 직관과 동일한 유형으로 환원되었을 뿐, 반성이 지닌 독자적인 의미는 상실되었다.

4)

칸트에 이르면 반성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 이르러 구성판단과 반성판단을 구분한다. 구성판단은 추상적 범주를 구체적 경험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판단에 속한다. 반면 반성판단은 개별적 경험을 일반적인 개념에 귀속시키는 것인데, 이는 미적 판단이 지닌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한다. 즉 예를 들어 어떤 다양한 자연의 현상을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통일적 원리에 귀속시킬 때, 이것은 반성판단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 우연적인 것으로서 인식하는 하나의 결합에 있어서의 이 법칙적 통일은, 객체의 합목적성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가능적 경험적 법칙 아래 있는 사물들에 관해서는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이요”(판단력 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 재판, 2001, 27쪽)

여기서 반성판단은 일반에서 개별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개별에서 일반으로 올라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우연성을 포함한다. 이는 지성(오성)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작업이다.

칸트가 이를 반성이라고 한 것은 반성(reflexion: 굴절)이라는 말 자체에 충실한 표현으로 보인다. 여기서 개별에 대해 일반이 근거로 작용하므로,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부터 다시 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즉 굴절, 반사라고 하겠다.

칸트가 앞에서 선험적 반성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것은 어떤 대상을 어떤 차원에 귀속시키는가 하는 문제였으니, 개별에서 보편으로 올라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반성 개념을 굴절, 반사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반성 개념을 이해하는 데서 중요한 단서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함축된 의미를 더 분석하지는 않았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제시한 반성 개념의 단서를 발전시켜 위의 네 가지 개념을 반성 개념으로 규정한 당사자는 곧 헤겔이었다.

5)

헤겔에서 반성이란 곧 어떤 것이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좌가 좌인 이유는 우에 대해 대립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은 아버지가 지닌 나이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대립물인 아이에 대해서 아버지이며, 아이가 없다면 그는 아버지도 아닐 것이다. 밝은 것은 어두운 것에 대해서 밝으며, 어두운 것은 밝은 것에 대해서 어둡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은 차이에 대해 동일하며, 차이가 없다면 동일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무차별한 존재들이 있다. 학교, 수3, 코끼리는 서로 무차별하며 그러기에 그들 사이에 어떤 동일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것은 질료나 형식도 마찬가지다. 질료는 그 형식의 질료이며, 형식은 그 질료의 형식이다.

어떤 것이 자신에 대립하는 타자에 대립해 규정된다면, 그 자신의 규정 속에 이미 타자의 규정을 포함한다. 타자는 이미 그 자신의 규정을 포함하고 있으니, 자기 자신의 규정은 자기 자신의 부정인 타자를 다시 부정하면서 규정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의 규정은 독자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반성된 것, 되돌아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반성 규정에는 부정성, 그것도 이중 부정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면 타자가 되지만, 자기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 있으니 자기의 부정은 곧 자기의 타자의 부정이며, 그러므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렇게 반성 규정 속에는 무한한 순환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반성 개념은 일정한 틀을 전제로 한다. 그 틀 속에서 어떤 것과 그 타자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으며, 그런 대립은 배타적인 통일을 형성한다. 즉 X=P or -P이다. 이 배타적 통일 속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관계를 구조주의는 변별적 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반성 개념은 구조주의적 사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알튀세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적 논리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헤겔적 총체성과 자신의 구조적 총체성 개념을 구분했는데, 헤겔의 반성 개념과 구조주의의 변별적 차이가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기절초풍하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4. 철학자 왕정과 그것의 실현 가능성(497a-502c)

 

*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은 앞서 살핀 바대로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은 가짜 철학자들을 활개 치게 만들어 철학에 대한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고 소수의 철학자들은 현실 정치를 등지고 스스로 고고한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의 삶은 철학자로서 최대의 것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최대의 것은 그에게 맞는 정치체제를 만나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 나라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대화의 주제는 과연 철학자에게 맞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497a-502c]

1)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오늘날의 정치체제들 중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497a) 이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들 중 지혜를 사랑하는 자연적 성향φύσις에 걸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 안에서는 그러한 성향의 부류가 힘을 유지하기는커녕 이질적인 성품 ἦθος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그 체제가 다름 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가며 수립했던 나라일 것이라 생각한다.(497b)

2)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즉 ‘정치체제의 원리λόγος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 하나가 나라 안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점에서 바로 그 나라라고 말한다.(497c) 그런데 그때는 제기된 반론들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τὰ καλὰ τῷ ὄντι χαλεπά는 말도 있듯이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에 답하려 한다고 말한다.(497d)

3) 오늘날에는 철학 자질이 있는 청소년들이 철학 활동에서 떠나버리는 바람에 어른이 되어서 철학적 논의λόγος를 접해도 그것을 부차적인πάρεργος 것으로 여겨 결국 노년에 이르면 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철학의 불꽃이 꺼져버린다.(497e-498a) 그러므로 나라가 제대로 철학을 대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의 파멸을 피하려면 민주정의 현실과 정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지혜 사랑을 접하게 하여 철학에 봉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영혼이 완성되기τελεοῦσθα 시작하는 시기에 영혼의 단련ἐπιτείνει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498b) 그리고 기력이 쇠해 정치와 군사 업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비로소 세상일에서 떠나ἄφετος 철학의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후 저승에서 살아온 삶에 어울리는 운명을 받게 된다.(498c)

4)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열의에 탄복하지만 트라쉬마코스를 위시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반발하며 어떻게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 자신의 논의를 접하고 그때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될 때까지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8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하에서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ῥήματα ἐξεπίτηδες ἀλλήλοις ὡμοιωμένα에만 익숙해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는 까닭도 언급한다.(498e) 그들은 ‘말과 행동에서’ἔργῳ τε καὶ λόγῳ 완벽하게 덕ἀρετῇ과 닮은 사람이 권력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고(498e) ‘아름답고 자유로운’καλῶν τε καὶ ἐλευθέρων 논변을 충분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 논변이란 앎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리τὸ ἀληθὲς를 추구하고 반대로 명성δόξα과 말다툼ἔρις만을 목표로 삼는 교언τὰ κομψά과 쟁론τὰ ἐριστικὰ들에는 안녕을 고하는 논변이다.(499a)

5)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서두적 결의를 표한 후 마침내 “소수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δυναστεία나 왕좌βασίλεια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θεία ἐπιπνοία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499b-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이며 무사 여신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 비록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6)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대중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9d)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를 향해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μὴ πάνυ οὕτω τῶν πολλῶν κατηγόρει 그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μὴ φιλονικῶν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게 하고παραμυθούμενος 배움 사랑φιλομάθεια에 대한 그들의 편견διαβολή을 해소해 주면서(499e) 어떤 사람들이 철학자인지 그들의 자연적 성향과 활동을 규정해서 잘 알려 주면 그들은 분명 다른 의견δόξ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500a) 왜냐하면 시기심 없고ἄφθονος 온순한πρᾶος 사람이 사납지 않은 사람에게 사납게χαλεπῶς 구는 법도 없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을 시기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나운χαλεπός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500a) 결국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사나운 태도를 갖는 까닭은, 부적절하게οὐ προσῆκον 철학에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가짜 철학자들 때문이다.(500b)

7) 진정 철학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을 여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에 진정으로 생각이 향해 있어 ‘항상 동일하게κατὰ ταὐτὰ ἀεὶ 있는 것’들을 보고ὁρῶντας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κόσμῳ 이성에 맞는κατὰ λόγο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θεωμένους, 그것들을 모방하고μιμεῖσθαί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ἀφομοιοῦσθα 하는 사람들이다.(500c) 그러므로 철학자는 신적이고 질서 있는 것과 어울려서, 비록 어디에나 비방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도까지 신적이고 질서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철학자는 절제와 정의, 그리고 모든 대중적 덕δημοτικῆ ἀρετῆ을 구현하는 장인δημιουργός으로서 어떤 강제ἀνάγκη가 생겨서 이로 인해 그가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단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쓸 수밖에 없게 된다.(500d)

8) 철학자에 관한 이러한 말들이 진실임을 대중οἱ πολλοὶ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결코 철학자들에게 사납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신적인 본παράδειγμα을 사용하는 화가διαγραφεύς들이 나라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해도 나라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500e) 그러나 철학자들이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이든 나라든 깨끗한 상태에서 넘겨받거나 그들이 직접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는 거기에 손을 대거나 법률을 써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것ὑπογράψασθα이다.(501a) 그들은 이를 완성해가면서 ‘양쪽을 반복적으로’πυκνά ἑκατέρωσε 살펴보며ἀποβλέποιεν 즉 한편으로 ‘본성상 정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 절제 있는 것’과 그러한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 인간들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밑그림을 채워간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섞어서 이것들로부터 ‘인간 상’τὸ ἀνδρείκελον을 합성해낸다. 호메로스가 말한 ‘신의 모습을 한 것’ θεοειδές이자 ‘신을 닮은 것’θεοείκελον이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501b)

9)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이처럼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ζώγραφος임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사납게 굴었던 태도도 바뀌어 훨씬 온순해질 것이다.(501c) 그리고 그들은 철학자들이 ‘있는 것’τὸ ὄν과 진리 ἀληθεία를 상대로 사랑에 빠진 사람ἐραστής임을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 또한 그것에 알맞은 활동을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성향보다도 완벽하게 뛰어난 것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501d) 그래서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이야기에 대중들이 설득된 것πεπεισμένοι ἔστων으로 보면 어떨까 물은 후 그의 동의를 받아낸다.(501e)

10)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은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로 태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502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비록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이 구원받기σωθῆναι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만 모든 시대χρόνος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제정한다면, 시민πολίτης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분명 아니라고 말한다.(502b) 요컨대 가능하기만 하면 그것이 최선’βέλτιστα, εἴπερ δυνατά이다. 그리고 입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실현된다면 그것들이 가장 좋은ἄριστα 것들이고, 비록 실현이 어렵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50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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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97d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ta kala tō onti chalepa :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속담으로 435c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2) 497c ‘그때’, ‘한 가지’, ‘정치체제의 원리’ :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현실 정치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을 피력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체제가 그들 서로가 제2권 369a에서 제4권 445d에 이르기까지 ‘말로 수립한 나라’(logopolis)라고 여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만 빼고 다른 모든 점들에서 그 나라임에 동의를 표한다. 그 한 가지의 핵심은 ‘정치체제의 원리(logos)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의 존재’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부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말로 나라를 세우는 제4권까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을 의식하여 그는 ‘통치자들(hoi archontes)’을 ‘철학자(philosophos)’로 명시하는 것을 피하고 ‘감독자(epistatēs)’(412a), ‘가장 훌륭한 사람들(hoi aristoi)’(412c),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aleis)’(414b)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뺐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그때 통치자들의 임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철학자들임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도 실토하고 있듯이(502d) 만약 그때 그 점을 밝혔다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반감을 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제4권까지 ‘말로 수립하는 나라’에서도 통치자들이 철학자임을 암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크라테스도 503a에서 밝히고 있듯이 앞서 살핀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375a-412b),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412b-427c) 관련 부분과  그 후 제시된 통치자로서 철학자의 자질(484a-487a) 부분을 비교하면 양자가 일치하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치체제의 원리(logos)가 기본적으로 나라에서건 혼에서건 ‘서로 다른 부분들의 조화의 원리’로서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시가 교육을 다루는 402a를 보면 ‘제대로 시가 교육을 받은 자가 나중 커서 제대로 알아보는 준거’로서 ‘원리’(logos)(402a)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원리가 철학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감독자’를 언급할 때도 그 감독자란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적이며 가장 조화로운 사람’(412a)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할 때’로 보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 <국가>의 전체 구도를 논의할 때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한 후 이어서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그러나 제5권 서두에 대화자들이 처자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에 따라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제7권까지 이어지고 정작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서는 제8권에 가서야 다루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일단 논의 순서상 일종의 일탈이다. 그러나 앞서 제5권 서두 내용을 살필 때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의 일탈은 정작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철학과 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국가> 서술 계획의 일환이다. 요컨대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는 사정상 ‘그때’ 못 꺼낸 철학과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인 주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실질적인 이상국가로서 철학자 왕정을 다루기 위한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던 것이었다. <국가>에서 형식상 논의의 일탈로 보이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실제로는 <국가>의 핵심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로 평가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3) 497d- 498a : 이제 주제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로 전환된다. 기존의 정치체제 특히 민주정에서는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최상의 존재로서 철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생존하기조차 힘들고 그 속에서 소수 살아남은 철학자들조차 현실을 등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정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제대로 평가받고 제대로 그에 적합한 활동을 최선으로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정은 청년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나날이 뒤떨어지게 하여 어른이 된 후 철학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 속에서 설사 소수의 철학자들이 살아남았더라도 그들에게서 철학의 불꽃이 지속해서 타오르기를 기대하기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민주정이 철학을 멀리하여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면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철학자 왕 정치체제가 들어서야 철학자가 가장 자신에 적합한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으므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해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 3) 498b-c :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철학자왕 체제에서 철학자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교육과 책무 전 과정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연령 및 시기별 자세한 사항은 강해 45에서도 언급하였고 제7권 해당 부분에서도 살피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어려서부터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한 후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좋음 자체’(to aghaton auto),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아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며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린다.(540b) 그리고 직무에서 해방되면 여생을 철학으로 소일하다 사후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간다.(519c, 540b)

* 4) 498d ‘트라쉬마코스와 다른 이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서 이러한 논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의 삶에 도움이 될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플라톤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그리고 당대 지식인은 물론 대중들이 그 철학적 논변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플라톤이 얼마나 열의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설득의 시도는 사람들이 이생에서는 물론 저승에서건 다시 태어나서건 그때 그 주장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깨달을 때까지 결코 포기될 수도 멈춰질 수도 없다. 그 긴 시간을 아데이만토스가 ‘참 짧은 시간을 말씀하시네요.’(498d)라고 반어적으로 답하는 것은 냉소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후까지 끌어들이고 이생의 기간을 그쯤이야 정도로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대한 의구심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제10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사후 영혼이 불멸하다면 이생의 시간들은 그저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자 글라우콘 또한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608c-d) 486a에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와 관련하여 인간적 삶의 시간과 구분되는 ‘모든 시간’(pas chronos)이 언급되고 있다. 저승과 혼의 불멸과 관련한 논의는 제10권에 가서(608c-621d)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 4) 498e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 : 이 말은 당대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가 수사학을 가르치며 즐겨 쓴 표현들을 가리킨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의 수사학자들을 가짜 철학자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법정에서든 사적인 교류에서든 오로지 명성과 말다툼(eris)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ta eristika)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에 반해 진정한 철학자는 저절로 짜임새와 운이 맞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자유로운 논변을 구사하고 말과 행동에서 덕과 같은 짜임새를 가지고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다.(499a)

* 5) 499b-c :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 내용은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테제이자 플라톤 정치철학의 목표가 왜 철학과 정치 권력의 결합으로 운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핵심 테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표현상 다소 차이도 있어 그 부분들 전문을 소개하면 각기 아래와 같다.

i) 우선 <국가>에서 플라톤은 앞서 대화자들의 이의에 따라 제기된 난관들에 직면하여(471c-474c) 처음으로 통치자가 왜 철학자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사랑하는 글라우콘, 나라들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자랄 수 있는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473c-d)

ii) 그런 연후 플라톤은 이곳에서 가짜 철학자들의 주장에 휩싸여 있는 대중들에게 철학자 왕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설득하고 환기한다는 차원에서 그 내용을 다시 또 아래와 같이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쓸모없다고 불리는 이 소수의 철학자들을 운이 좋게도 어떤 강제가 에워싸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499b-c)

iii)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플라톤은 그러한 철학자 왕정 체제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언급하면서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또다시 꺼내 든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501e)

iv) 그런데 이 내용은 그의 <편지들> 가운데 일흔 살이 넘어 쓴 것으로 알려진 ‘일곱 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올바르고 진실 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질 않을 것이다.”(<편지들> 326b).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 플라톤은 그 생각을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칠리아 방문 당시부터 그러니까 그의 나이 38세 전후쯤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왕정 사상이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 와서야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초기 대화편을 집필하면서부터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가>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철학자의 모습(500c)과 플라톤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29a)이 활동 구도에서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펼친 철학자왕 사상을 말년에 가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론적으로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펼친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은 젊은 시절 이래 이상으로서 일관된 지위와 의미를 갖고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말년의 정치철학 저작 <법률>을 플라톤 신념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현실 수정판으로 여기는 일부 견해들은 잘못된 것이다. 누구라도 이상과 현실적 대안을 동시에 함께 가질 수 있듯이 플라톤 역시 <국가>의 이상은 최선의 이상 그대로, 최선의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의 세부 입법은 그 나름의 최선 그대로 그의 정치철학 전체를 구성하는 두 축으로 함께 병립해 있는 것이다.

* 7) 499e : 소크라테스가 철학과 정치의 결합과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하는 데 있어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애 때까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겠다(498d)고 말하고 있는 것은 철학과 정치의 결합에 관한 논변이 플라톤에게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논변의 진실을 설득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한 것임을 함께 보여준다. 사실 설득의 기한에 사후의 시간까지 포함될 정도면 사실 이생에서 그것을 설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대중들이 이런 이야기에 설득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도 철학과 정치의 결합 가능성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에 대중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99d) 그러나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바로 반박한다.(499e)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대중에 대한 태도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는 대중에 관해 이어지는 그의 말을 통해 이내 해소되는데 이 부분은 플라톤 대중관의 진면목을 들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들이 설득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대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가 빚어낸 선동정치와 소피스트들이 이끄는 그릇된 교육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에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철학에 뛰어들어 명성과 말다툼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을 일삼는 행태가 일상에 넘쳐난다. 게다가 대중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 나라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으므로 철학과 정치의 결합, 즉 철학자가 통치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주장이 전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499d)이라는 확신으로 대중들이 그러한 정치체제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간다면 그들의 생각 또한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500a)

* 이곳에서 그려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 즉 대중에 대한 폄하와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이 사납고 시기심이 많은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민주정 아래에서 가짜 철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굳이 본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사나운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500a)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대중들의 생각과 태도가 본성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살핀 ‘말로 수립한 나라’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 계급, 이른바 대중들은 절대 사납지 않고 다른 계층에 대한 시기심도 없다. 여기에서도(500d)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나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결코 그들이 사나워지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500a, d)

* 우리가 제4권에서 살폈듯이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층과 더불어 절제라는 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다른 계층과 갈등 없이 나라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요컨대 대중들은 훌륭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자들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논변을 통해 그들을 ‘설득’(peithos)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의 과정에는 어떠한 ‘강제’(anangchē)나 ‘폭력’(bia)도 개입되지 않는다. 설사 철학자의 설득이 성공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강제는커녕 하물며 이생을 넘어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그들의 말의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순전히 설득의 방식으로만 일관되게 이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은 민주정 통치 아래 선동 정치가에 휩쓸려 군중심리에 빠진 상태의 대중에 대한 플라톤의 혹독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시민으로서 절제와 대중적 덕을 갖춘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완성을 기약하기 힘든 정치체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공동체 일원으로서 대중의 가능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정치 원리에 기반하여 있는 것으로서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도 법을 갖춘 정치체제인 한에서는 강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통치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곳에서도(499b, 500d) ‘강제’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말도 어떻게든 정무를 피해 철학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철학자들에 대한 강제로 언급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이 수립하는 입법은 강제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나라건 개인이건 설득을 통한 내적 조화의 가능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훗날 <법률>에서 표명된 구체적인 법률들조차 징벌과 강제보다는 교육과 교정에 그 입법의 근본 취지가 자리하고 있다.

* 7) 500d ‘대중적 덕’dēmotikē aretē :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단련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시민적 덕'(<파이돈> 82a-b)을 의미한다.  제4권 430c에 나오는 ‘시민적 용기’도 이러한 덕에 해당한다.

* 8) 500c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500d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 이 부분은 철학자들이 가짜 철학자들과 달리 어떻게 진정으로 ‘있는 것들’에 생각이 향해 있고 그에 따라 나라에서건 개인에서건 얼마나 철학자로서 통치자로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맞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그것들을 모방하고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자 모든 ‘대중적 덕’을 구현하는 장인(dēmiourgos)로서 거기서 본 것을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쓰는 사람들이다.(500d) 이들은 마치 신적인 본(paradeigma)을 사용하는 화가처럼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든 후 본과 그림 양쪽을 반복적으로 ‘살펴보며’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501a) 이러한 철학자들의 모습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 언급된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플라톤이 여기서 치열할 정도의 열의를 갖고 그려내는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들은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신적인 것’, ‘신을 닮은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플라톤 자신의 내적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지대하고 진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누차 언급했지만, 플라톤 철학은 위계상 ‘있는 것들’이 최상위에 있지만 진정 플라톤 자신이 정작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그 ‘있는 것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니라 그 ‘있는 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즉 ‘지상에 있는 것들’의 구제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었다. 앞으로 살피게 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514a-521b)에서 철학자가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참된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태양을 보았음에도 다시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철학자왕의 임무는 ‘있는 것들’을 보고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과 최대한 닮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원칙과 원리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처자공유를 비롯한 수호자 집단의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부분을 되돌아보면(464b–466d) 우리는 완벽한 수호자로서 철학자왕이 지향하는 핵심가치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2,500여 년 전 제시된 통치자의 임무와 지침들임에도 현금의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 윤석열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무도한 자인지,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대중이 기득권자들, 곡학아세를 일삼는 자들에 휘둘려 통치자를 잘못 뽑으면 얼마나 참담할 정도로 나라가 도탄에 빠트리는지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다. 그러한 견지에서 그것을 다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 10) 502c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 소크라테스는 가짜 철학자에 대비되는 진정한 철학자 특히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 왕에 대한 논의와 그러한 논의의 설득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 철학자 왕정 체제 즉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어 든다. 이 철학자 왕정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사실 앞서 세 번째 파도로서 제기된 그때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다루면서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강해 56 참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한 요약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logopolis)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3) 그와 같이 본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권좌에 있는 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4)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은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은 이후에 제시될 교육과정이 제도화되는 한 ‘불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을 제정한다면, 시민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국가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502b)

*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이 가느다란 가능성에 기대어 플라톤 자신 이상국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국가를 이상적 목표로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자신 불가능에 가까운 꿈에만 매달리는 몽상가가 아닌 한,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현실적인 대안을 병행하여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기했다면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의도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정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기대하고 제도화할 만할 정도로 쉽게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상으로서 <국가>와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이 함께 병립하는 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플라톤은 우선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로 그가 도달한 것이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 즉 철학과 권력의 결합으로서 철학자 왕정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상적 철학자 왕정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이다. 이렇게 보면 <법률>은 <국가>의 이상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이상이자 궁극적 지향이라는 깨달음과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세워진 실질적 대안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따라 나라를 실제 건설하는 형식으로 구체적인 법률들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플라톤 정치철학의 위대한 두 축이다.

* 이제 철학자 왕정의 구현을 위한 다음 과정은 그 철학자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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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상의 배움 : 좋음의 이데아(502c-506b)

헤겔 형이상학 산책7- 칸트를 삐딱하게 보기[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7- 칸트를 삐딱하게 보기

1)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를 언어의 분류틀로 보았으나, 칸트는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보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변화인데도, 철학사에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언어는 존재와 상응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분류틀로부터 곧바로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 핵심은 사물의 종적 본질이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칸트의 경우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판단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에 관한 한, 그것이 존재와 어떻게 상응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칸트는 이 문제를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성하는 선험철학을 통해 해결했다. 칸트의 선험철학에 대해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헤겔의 형이상학적 혁명인데, 헤겔의 혁명이 시작되는 출발점은 칸트의 선험철학이 지닌 한계다.

문제는 칸트가 12개의 범주를 마치 하나의 좌표축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즉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표상이 식을 통해 좌표축의 하나의 범주에 위치하게 되면, 어떤 판단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b, a-b, a-b, … 등과 같이 두 개의 직관 표상이 규칙적으로 후속한다면, 이는 인과 범주의 도식이므로, 이는 가언판단을 발생시킨다. 반면 ab, a, ac…과 같이 하나의 직관 표상은 반복하지만, 다른 직관 표상은 발생하기도 하고 발생하지 않기도 한다면, 이 경우 정언판단이 생긴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후일 구조주의적 사유의 모범이 된다. 구조주의 역시 경험적 자료를 일정한 좌표축 위에 설정하니, 예를 들어 한식은 기본적으로 밥, 국, 반찬의 공존하는 구조 속에 있다. 반면 서양 음식은 시간적 구조 속에서 전채와 주식, 후채로 구분된다. 음식의 좌표축을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때, 만일 음식을 한 상에 차려서 내온다면, 그것은 한식 범주에 속한다. 반면 음식을 시간적 차례에 따라 내오면 그것은 양식 범주에 속한다. 동일한 음식이라도 그것이 속하는 범주가 다르면 규정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과인을 한식에 포함되면 반찬이 되지만 양식에 포함되면 후채가 된다.

2)

칸트와 같이 범주를 좌표축으로 본다면, 어떤 경험은 그 도식을 통해 곧바로 어떤 범주에 귀속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실체인지, 또는 인과 관계가 있는지를 경험하는 순간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이 경험은 다양한 경험이 시공간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기에 일정한 정도 시간 공간이 경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 공간이 경과 하기까지, 아무런 판단이 일어나지 않다가, 어느 정도 경과 하면 갑자기 어떤 판단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곧 의문이 생겨난다. 약간의 시공간이 경과 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것일까? 그러면 대체 어느 정도의 시공간이 경과 해야 하나? 심지어 실체 판단이니 인과판단이니 하는 것은 영원히 기다려도 결코 내려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어떤 것이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지속하다가도 그 한계를 넘어서면 중단할 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규칙적으로 후속하다가도 갑작스럽게 그런 규칙성이 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일정한 한계 정말로 어디까지인지를 결정할 수는 없으니, 영원히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선험철학은 현상계에 대해서조차도 영원히 판단이 내려지지 않게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칸트 선험철학의 한계가 된다. 헤겔이 부딪혔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헤겔은 칸트 인식론이 부딪힌 문제가 단순히 물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현상계에서조차도 인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선험철학을 살리면서도 칸트가 부딪힌 인식 불가능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없을까? 어떻게 보면 인식 즉 어떤 경험에 관한 판단 즉 인식은 순차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닐까? 처음에 경험이 제한된 경우는 피상적인 판단이 내려졌다가, 경험이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진 다음에 비로소 좀 더 진실에 가까운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런 순차적 인식이 우리가 실제 삶과 역사 속에서 얻어지는 인식이 아닌가?

칸트 인식론의 문제는 물 자체의 인식 불가능성이라기보다 현상계의 인식 불가능성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판단이 경험이 더 풍부해짐에 따라서 다른 판단으로, 더 피상적인 판단에서 더 진실한 판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만이 판단형식이 사태와 무관한 외적 형식이라면, 이런 판단형식이 아무리 바뀐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발전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판단형식이 고유한 내용을 그리고 경험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이런 판단형식이 경험을 매개로 하여 더 진실한 판단형식을 발전하는 것도 원리상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이행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3)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의 논리학이 출현한다. 그러기에 헤겔은 판단형식의 이행에 관해 초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보다 오히려 학문적 인식 속에서 자기를 운동하게 하는 것은 오직 내용의 본성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용이 스스로 행하는 반성이야말로 내용의 규정 자체를 비로소 정립하고 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초판 서문. S. 7-8)

(유감스럽게 국내 논리학 번역본이 초판을 번역한 것이어서 인용하기 힘들다. 앞으로 인용문은 전부 전집 21권(재판본 논리학)으로 하겠다.)

“개념의 내재적 발전을 뜻하는 정신의 운동이야말로 인식의 절대적 방법이며 동시에 내용 자체의 내재적 혼이다.”(초판 서문, S. 8)

“내용은 자체 내에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오로지 그런 형식을 통해서만 영적 생기를 지닌 내용이 된다는 사실이며, 형식 자체는 다만 어떤 내용이 거기서 빛나는 가상으로 전환하여, 그럼으로써 이렇게 빛나는 내용에 외적인 형식은 그러한 [내용이 빛나는] 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2판 서문. S. 17)

“[칸트 철학은] 사유 규정이 … 그 자체에서 무엇인지 즉 사유 규정의 상호 대립과 상호 관계는 고찰의 대상으로 되지 않았다.”(2판, 논리학의 구분, S. 48)

“내용의 자기반성 운동”, 또는 “내용의 내재적 혼”, 형식은 “내용이 거기서 빛나는 가상”이란 표현은 헤겔이 논리학에서 자주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내용이란 어떤 판단이 지닌 내용인데, 그것은 판단의 구체적 의미라는 뜻이 아니라 그 판단이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내용은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범주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의 이행을 헤겔은 자기 운동 즉 내재적 혼이 이끌어가는 운동이라고 한 데 있다. 즉 칸트 철학이 간과한 “사유 규정의 상호 대립과 상호 관계”이 중요한 핵심이다. 헤겔은 사유 규정 즉 범주의 이행을 “무한한 형식” 또는 “[자기 운동하는] 개념”(2판 논리학의 구분, S. 48)이라고 하기도 했다.

범주 즉 판단형식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하나의 모습에서 다른 모습으로 운동하는 것일까? 아무도 범주가 마치 소나무나 새처럼 또는 인간처럼 생명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내용이 즉 판단형식이 자기 속에 혼이 있어서 스스로 운동한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내용의 자기 운동을 이해하는 단서는 반성 개념에 있다. 칸트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12개의 판단형식에 12개의 범주를 대응시켰다. 그런데 철학적 사유 속에 흔히 떠돌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에는 판단형식에 대응하지 않는 개념들도 있다. 칸트는 그런 개념으로서 네 가지 개념 쌍을 거론했는데, 곧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질료와 형식이다.

이런 개념 쌍은 철학이 출발한 이래로 철학자들이 즐겨 다루어왔던 개념인데, 사실 그 정체가 모호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처럼 언어적 범주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도 술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칸트의 범주처럼 판단형식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칸트는 판단형식을 12개에서 더 늘려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개념들은 사물로부터 추상화된 개념에 속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추상적 개념이라면 다른 것과 분리된 채 고유하게 의미를 지니지만, 위의 개념 쌍은 항상 상대적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네 가지 개념 쌍은 이와 유사한 개념들 예를 들어 공간적인 좌우, 시간적인 선후, 질적인 차원에서 명암 등의 개념들에서 보듯이 어떤 비교 가운데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개념 쌍은 대상 전체에 적용할 수 있기에, 형이상학 영역에서 다루어졌던 개념 쌍이다. 대체 사유 속에 떠돌고 있는 이 개념 쌍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4)

이 개념 쌍을 이해하는 단서도 역시 칸트가 마련했다. 다만 그는 지나가는 투로,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흘려서 다루었다. 이 개념 쌍은 칸트 순수이성 비판 2편 원칙의 분석론 끝에 대상을 현상체와 가상체로 구별하는 3장 끝에 부록으로 다루어졌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꿈의 주변에 있으면서 가치 없고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데 있다고 했다. 이점을 발전시켜 나중에 지젝은 사물을 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런 주변에 있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칸트에서 순수이성비판을 넘어서는 길은 칸트가 부록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다룬 데 있다. 헤겔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삐딱하게 보면서, 바로 이 반성 개념에서 새로운 논리학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6- 존재자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 존재자의 형이상학에서 존재의 형이상학으로

1) 칸트의 혁명

앞에서 칸트가 판단형식과 범주를 연결했다는 것을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개별 언어를 분류하는 틀이었던 범주가 칸트에 이르면 판단형식을 규정하는 고유한 내용으로 규정되었다. 범주가 언어의 틀에서 판단의 틀로 바뀐 것일 뿐인데, 이게 뭐 큰일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일으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유의 역사에 유사한 사건이 또 있다. 데카르트의 좌표이다. 데카르트는 우리 흔히 아는 수학의 XY축을 발견했다. 여기에는 무리수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고대 철학자는 유리수와 무리는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수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무리수를 유리수 사이에 끼워 넣어 수의 연속성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통일적인 좌표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콤파스를 이용한 간단한 작도를 통해 무리수를 직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으니, 이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 좌표축을 통해 기하학과 대수학의 통일할 가능성이 생겨났으며, 라이프니츠 뉴턴의 미적분학이 출현했다. 미적분학이 근대과학을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과히 데카르트의 좌표 혁명이라고 말할 만하다.

칸트가 범주를 판단형식과 관계시킨 것도 이런 사유의 혁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가 일으킨 사유의 혁명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자.

2) 형식 논리학

우선 기존의 논리학은 판단의 형식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판단형식은 주어, 술어가 관계를 맺는다. 이 주어 술어의 관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기존 논리학에서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개념 논리학뿐만 아니라 최근에 발전된 다양한 기호논리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양화 논리학은 주어와 술어를 함수로 표현하지만, 그것은 표현의 문제이고, 그 함수가 주어 술어의 관계에 대한 어떤 해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화 논리학이 주어나 술어의 양을 다룬다 하더라도 이것은 주어 술어의 관계와는 무관하다. 그저 복합판단을 표현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개념 논리학이든 기호논리학이든 논리학의 출발점은 명제 또는 판단이다.

최근 발전된 새로운 기호논리학의 업적이라면, 판단형식의 겉모습을 파헤친 데 있다고 하겠다. 표면적으로 단순한 주어 술어 관계로 표현된 많은 판단은 복합적인 판단으로 분석되었다. 이런 작업은 흔히 분석철학에서 언어의 거짓된 모습을 제거하고 언어의 진정한 모습을 발굴해내는 방법이라고 지칭되었다. 소위 언어분석의 철학이 여기서 시작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특칭판단이나 전칭판단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라는 판단은 ‘소크라테스가 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 등등’으로 표현되어야 할 복합판단을 단순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부정판단조차 기본적 판단이 아니라 긍정판단에서 나온 직접추론(대당관계) 즉 부정하는 사유의 결과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는 판단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판단은 부정된다’라는 추론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논리학은 마치 레고를 쌓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작업은 판단의 내용 즉 주어 술어 관계와 무관하게 판단 자체를 이리 쌓았다 다시 해체하고 달리 쌓은 것이 된다. 이 작업은 내용과 무관한 내용에 전적으로 외면적인 작업이므로, 순수한 형식적 작업이 된다.

이 형식적 작업을 지배하는 규칙이 있다. 그것은 곧 순수한 비어 있는 공간에서 이리저리 물체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순수한 비어 있는 공간이 곧 사유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형식은 아무리 바꾸어도 여전히 내용은 같은 것이 되어야 하니, 즉 동어반복이 지배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동어반복의 비어 있는 공간을 벗어나면 잘못된 사유가 된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일종의 사유 유희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았다가 부수고 다시 쌓은 아이의 유희와 마찬가지 유희일 뿐이니 이런 논리학이 세상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진리를 얻는 것은 사유와 무관한 경험일 뿐이다. 여기서 사유의 세계와 경험의 세계는 단적으로 구분된다.

3) 판단형식의 차이

그러나 칸트가 판단형식을 범주로 규정하면서 논리학에 관한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판단형식이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다. 판단형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판단에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는 것은 주어와 술어가 관계하는 여러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판단에서 주어는 대상을 지시하고 술어는 어떤 일반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 즉 판단의 형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이것은 빨갛다’에서 술어의 의미인 성질은 주어의 대상에 ‘속한다’고 말하는 데 이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소금이다’라고 할 때, 술어인 ‘소금’은 ‘빨갛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 대상에 ‘속한’ 것일까? 오히려 여기서는 주어의 대상이 술어인 소금이라는 유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상의 판단들은 언어분석의 작업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겉보기와 다른 판단형식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이것은 소금이다’라는 판단이 다른 기초 판단으로 분석 가능할까? 그런 분석의 예를 들자면 ‘이것은 흰색이고, 사각형이며, 짠맛이 난다’와 같은 복합판단일 텐데, 이런 분석은 본래 ‘이것은 소금이다’라는 판단과는 다른 종류가 아닐까? 위의 복합판단은 흰색, 사각형, 짠맛이 이것에 속한다는 의미이지만, 아래 판단은 이것이 소금에 속한다는 판단이니,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환원주의자는 모든 판단형식은 기초적 판단으로 환원 가능하며, 기초적 판단에서 주어 술어의 관계는 ‘속한다’와 같은 것으로 일정하니, 판단형식을 더 문제 삼을 바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판단형식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철학은 기본적인 판단형식 자체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판단형식의 차이는 각기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분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4) 범주적 관계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를 관계시키는 것이 계사 즉 ‘이다(또는 존재)’라는 말이다. 존재란 곧 관계이다. 판단형식을 통해 존재의 다양한 모습이 제시되는데, 그것이 곧 범주다. (앞에서 우리는 칸트가 12개의 판단형식을 통해 12개의 범주를 끌어내는 것을 보았다.)

판단형식이 곧 주어 술어의 관계이고 그것이 곧 범주라면, 관계 범주(예를 들어 선언판단이나 가언판단)가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언뜻 보아도 이해된다. 그러나 나머지 범주들에서는 그것이 판단형식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질의 범주는 술어와 관계하고 양의 범주는 주어와 관계한다고 보지 않는가?

그러나 범주를 판단형식으로 본다면, 질이나 양의 범주조차 주어 술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된다. 술어의 부정은 개별 술어가 ‘이 세계에 없다’라는 의미에서 부정이 아니라 개별 술어가 ‘이미 판단에서 제시된 주어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부정이다(나중에 헤겔은 ‘특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또한, 특칭이란 주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이 세계에 다수 존재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술어에서 제시된 속성 속에 그런 대상이 다수 존재한다’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5)

판단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주어와 그 지시 대상, 술어와 그 의미는 서로 상응한다. 그런데 판단의 주어 술어 관계를 이루는 계사는 어떠한가? 그 계사는 단순히 어느 경우에나 ‘이다’이고 이 세계 속에 이런 ‘이다’에 대응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Sein]는 존재자[seiendes, dasein]의 전체가 아니다. 존재는 계사 즉 ‘이다, 또는 임’를 말하며, 존재자는 ‘있는 것, 있음’을 말한다. 우리 말로 이다와 있는 것은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게르만 계통 언어에서는 다같이 sein(be) 동사에서 나온다. 존재는 칸트에 이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범주가 된다.

모든 판단형식에서 계사는 ‘이다’이더라도 그 구체적 의미는 다르다. 그 구체적 의미는 칸트에서 보듯이 범주를 통해 규정되는데, 이렇게 계사를 범주로 확장해 보더라도 그것이 경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거나 추상을 통해 형성된 개념은 아니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세계 속에는 부정성이란 없다. 모든 존재자는 그 나름대로 긍정적 존재이다. 이 세계 속에 특칭적 존재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은 있어도 ‘여러 철학자’라는 존재는 없다. 가언적 관계는 세계에도 유사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에 존재하는 인과적 관계가 가언적 관계와 다르다는 사실은 철학사에 널리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우연성 역시 세계 속에는 없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일회적 사실이고, 이것을 우연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다.

사실 그런 관계가 직접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인식론이라는 골치 아픈 철학이 생겨났을리도 없을 것이다. 결국, 이 관계는 사유 자체에 고유한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주어 술어를 결합하는 것이 사유라면,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이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계의 진정한 모습은 이런 판단의 관계와 무관한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가 칸트가 해결하려 했던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선험적 연역이다. 여기서 칸트의 선험적 연역에 관해서는 추후 살펴보기로 한다. 이렇게 판단의 관계사 사유라고 보면, 여기서 지금까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논리학의 역할이 바뀌게 된다는 것만은 짚어두고 가자.

앞에서 말했듯이 형식 논리학에서는 판단은 통째로 경험을 통해 주어지며, 주어진 판단을 결합하는 논리적 형식은 즉 추론의 형식은 내용이 없다. 그러니 논리학은 세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사유의 형식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다양한 판단형식을 통해 다양한 관계가 제시된다. 판단형식에서 주어 술어 관계는 구체적 내용을 지닌 것이면서도 사유의 관계이다. 판단형식이 이렇게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떻든 이 판단형식은 세계의 모습에 연루된다.

물론 그것은 올바른 것일 수도 있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나 이런 옳고 그름이 판단형식이 구체적 내용을 지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형식 논리학에서 사유의 형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묻지는 않는다. 그것은 규칙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따질 뿐이다. 그러나 판단의 형식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묻지 않을 수 없으니, 판단형식은 세계에 개입한다. 그러기에 칸트는 일반논리학과 구분하여 자기의 논리학을 선험적 논리학이라 한다.

판단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논리학의 영역 자체를 확장한다. 즉 논리학은 추론에서 판단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렇게 확장된 논리학은 구체적 내용을 지니면서 세계에 연루된다. 이렇게 구체적 내용을 지니게 된 논리학, 세계에 연루된 논리학이 헤겔의 논리학의 출발점이 된다.

6) 형이상학의 혁명

지금까지 언어와 세계의 관계는 언어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였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는 세계 속에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발견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자가 지닌 일반성을 다루었으며, 그런 존재자의 일반성은 언어의 범주를 통해 제시되었다.

그러나 칸트처럼 판단형식을 범주로 보게 된다면, 그리고 이 범주가 자기를 주어 술어의 관계로 전개했다면, 그리고 이 판단형식 즉 계사 즉 ‘존재’가 세계와 연관한다면, 이제 세계 속의 존재자의 전체가 아니라 이 존재가 형이상학적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칸트의 형이상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구분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하이데거 역시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일반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의 관계이며, 그런 한 하이데거 역시 칸트가 열어놓은 형이상학의 길을 걸어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혁명가 칸트의 모습을 단순히 그의 선험철학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의 혁명적 모습은 형이상학 자체의 양상을 바꾸어 놓은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곧 존재의 형이상학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5-칸트의 논리학 혁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칸트의 논리학 혁명

1)

문제의 발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범주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서 주어로 사용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결국 실체 개념이 제시되었다. 실체는 자기를 통일하는 하나이며, 그럼으로써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개별자를 징검다리로 해서 시간상 지속하는 진정한 실체는 곧 종적 본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좀 불분명한 것 같다. 플라톤의 형상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도 개체들이 지닌 질료적 속성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플라톤을 비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비추어 본다면 본질이란 질료들의 통일적 관계 자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겔의 철학적 출발점도 다름 아닌 이런 본질 개념에 있다. 헤겔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가 아닌 이런 본질적 존재이다. 본질적 존재가 곧 자기를 통일하면서 무로 해체되는 것을 막으면서 자기를 지속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속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실체라는 말을 좋아했다면, 헤겔은 이 실체가 자기를 통일하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측면에서 아예 주체라고 이름을 붙였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분명하게 본질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적 속성의 상호적 관계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본질을 다시 힘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속성의 상호적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 그사이에 양자를 매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본질이란 이런 매개하는 힘과 다르지 않다.

헤겔은 이 힘을 그의 시대 등장한 미분적 차이의 개념에 기초하여 두 가지 힘의 대립적 관계로 규정했다. 이 두 가지 힘이 곧 표출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이다. 이를 동양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미분적 차이는 곧 음양의 동정이다. 음양의 동정으로부터 만물이 실체로서 자기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는 헤겔이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근거를 따지다가 범주라는 개념에 이르렀고 이 범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실체라는 개념으로 빠져들었다. 이쯤하고 다시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2)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범주론에서 구별된 10개의 범주는 대체로 언어를 분류한 틀로 보인다. 그런데 언어가 의미하는 것이 곧 대상이니, 이런 분류는 대상을 분류한 것으로 보아도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특히 5장에서)에서는 범주론에 제시되었던 범주들이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사용한다. 형이상학적 개념이란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주1) 범주론과 형이상학 5장을 비교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괄호 밖이 범주론, 괄호 안이 형이상학이다. 실체(8절), 양(13절), 질(14절), 관계(15절), 장소, 시간, 상태(20절), 행동, 능동(12절), 수동(12절) 형이상학에서는 범주론에 다루어지지 않은 개념 원인. 필연성 등이 다루어지며, 또한 동일성과 차이, 대립과 배치, 앞과 뒤 등 반성 개념도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어디까지나 언어(존재자)의 가장 일반적인 류에 속하는데, 이와 같은 범주의 의미는 칸트에 이르러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칸트에서 범주의 의미는 이제 판단형식과 관계된다. 언어와 판단형식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그런 차이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우선 칸트가 판단형식과 관련해 범주를 어떻게 규정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알다시피 칸트는 소위 12개의 판단형식을 제시했다. 칸트 자신은 이런 판단형식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부터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구나 배웠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네 가지뿐이다. 전칭긍정 판단, 전칭부정 판단, 특징긍정 판단, 특칭부정 판단이다.

그런데도 칸트는 대담하게도 네 가지 판단형식을 12개의 판단형식으로 확장하였다. 우선 칸트가 제시하는 관계 판단(정언, 가언, 선언)이나 양상 판단(개연, 실연, 필연)을 보자. 이는 전통 논리학에서는 일종의 복합판단이므로, 독자적인 판단형식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칸트는 이를 기본적인 판단형식으로 받아들였다. 또 분량판단이나 성질판단도 이상하다. 분량판단에서 전통 논리학에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전칭판단과 단칭판단이 구분되며, 성질판단에서는 전통 논리학에서 배제한 무한판단을 받아들인다.

3)

칸트가 왜 이렇게 판단형식을 부풀렸을까? 이는 형식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칸트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칸트의 독단이었을까? 그 이유는 칸트가 제시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일반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무시한다. 즉 인식과 객체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한다. 그래서 한 인식이 딴 인식에 관계할 무렵의 논리적 형식만을 다룬다. 즉 사고 일반의 형식만을 다룬다. 그러나 (선험적 감성론이 증시했듯이) 순수 직관이 있는 동시에 경험적 직관이 있기 때문에, 대상의 사고에도 순수한 사고와 경험적 사고가 구별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인식의 모든 내용을 무시하지 않는, 논리학이 존재하겠다. 왜냐하면 대상의 순수한 사고에 관한 규칙만을 포함하는 일반논리학은 경험적 내용을 소유하는 모든 인식을 배척하겠기에 말이다. 선험적 논리학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바 기원을 다루기도 하겠으나 이런 기원이 대상에 귀속될 수 없는 한에서 다루겠다.”(순수이성비판, A판, 80)

칸트의 말을 자를 수가 없어서 인용이 길어졌지만, 그 내용은 간단하다. 형식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다만 형식일 뿐, 어떤 내용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선험 논리학에서 판단형식은 일정한 내용을 갖는다.

이 내용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판단형식 자체에 고유하게 들어 있어서 경험을 규정하는 내용이다. 즉 ‘s는 p이다’라는 단칭 판단형식은 경험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든가, ‘백두산이 지리산보다 높다’ 등과 같은 경험적인 명제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판단형식이다. 이 판단형식은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 또한 ‘S는 p다’라는 사물의 종을 주어로 하는 정언 판단형식은 예를 들어 ‘사람은 죽는다’ 또는 ‘산은 언덕보다 높다’라는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는 일반적 형식이다.

그러나 ‘s는 p다’라는 단칭 판단형식은 ‘S는 p다’라는 판단형식과는 판단형식 자체에서 어떤 차이를 갖는다. 이 차이가 곧 판단형식 자체에 속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판단형식 자체에 속한 내용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예에서 주어지는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고유한 내용을 갖는다는 선험 논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의 복합판단에 속한 관계 판단이나 양상 판단이나, 무한판단과 전칭판단도 하나의 고유한 내용을 지닌 판단형식이다. 칸트는 이런 이유로 판단형식을 12개의 기본적 판단형식으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겠다.

4)

이처럼 판단형식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는 선험 논리학의 관점은 논리학을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다. 판단형식이 그 자체 의미를 지닌다면, 형식 논리학의 근본 관점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이 혁명적 사건이 칸트를 넘어가면서 헤겔 논리학의 출발점이 되었으나, 우리는 여기서 헤겔로 바로 뛰어넘기보다 헤겔이 칸트의 혁명을 받아들이다가 갈라지는 지점까지 더 추적해 보기로 하자.

칸트는 선험논리학의 관점에서 각 판단형식에 고유한 내용을 추구하면서 이를 범주로 규정하면서 범주표를 만들었다. 이 범주표는 A판 106쪽에 실려 있다. 보기 쉽게 아래에 표를 만들어 보았다.

분류

판단형식

범주

분량

단칭판단

단일성

특칭판단

수다성

전칭판단

전체성

성질

긍정판단

실재성

부정판단

부정성

무한판단

제한성

관계

정언판단

실체

가언판단

인과

선언판단

상호작용

양상

개연판단

가능성

실연판단

현존(우연)성

필연판단

필연성

이 범주표를 보면, 누구나 쉽게 범주의 의미가 판단의 형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평범한 말과 같지만,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의 의미를 언어의 종류에서 찾았던 것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혁명적인 주장인지 짐작될 것이다.

판단형식이란 곧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관계가 곧 계사[Sein]이니 거꾸로 말하자면 판단형식의 차이는 곧 계사[존재]의 차이이며, 계사[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의 차이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 즉 언어의 차이는 어떤 개별적 존재자 사이의 차이를 다룬다. 그러나 칸트에서 범주의 차이는 계사[존재]의 차이이니, 쉽게 말해서 하나의 경험[주어 경험]과 다른 경험[술어 경험]이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차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범주의 의미를 개별자[언어 또는 대상]에 관한 것에서 개별자들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전환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를 다루었다면 칸트는 이제 존재[계사]를 다룬다는 것이다.

5)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범주는 언어의 류이면서 동시에 존재자의 류가 된다. 언어가 의미하는 것이 곧 존재자이니, 이런 전환은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가 이제 판단형식에서 나온 범주를 경험 세계를 규정하는 일반적 범주로 전환한다면, 여기서는 누구나 금방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에 속하는 판단형식이 세계의 일반 구조란 말인가? 사유와 세계가 일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그림이론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주장을 단순히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판단형식과 이런 동일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세계를 인간이 전체적으로 경험하여 그 근본구조를 밝혀냈기에 사유의 근본구조가 성립하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원시인부터는 제쳐놓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우리까지 사유의 근본구조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아직 세계의 근본구조를 안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동일성이 가능한 것은 칸트와 같이 사유가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판단형식으로부터 칸트의 인식론적 혁명으로 나가는 길은 이처럼 단순하다. 여기서 칸트 자신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므로 선천적인 개념으로서의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그것에 의해서만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에 의거한다. 대저 그럴 적에는 범주는 필연적으로 즉 선천적으로 경험의 대상에 상관한다. 왜냐하면 범주에 의거해서만, 경험의 그 어떠한 대상은 일반적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A판, 126쪽)

판단형식에서 범주를 끌어낸 데서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나가는 길은 단순하지만, 혁명적인 길이었다. 판단형식 즉 범주가 이처럼 경험을 규정하게 되면, 판단형식 즉 범주가 이제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된다. 이런 전환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에서 형이상학으로 간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언어로부터 존재자로 나갔으나 칸트는 판단형식 즉 계사[존재]로부터 경험 세계로 나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일반적 규정을 다루지만, 칸트의 형이상학은 이제 과학으로 전락한다. 즉 보편적 경험의 세계를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다.

6)

판단형식이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이것이 경험을 선험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라면, 실제로 경험이 판단형식을 통해 어떻게 규정되는 것일까? 이 과정이 바로 칸트의 선험적 연역의 과정인데, 그 핵심에는 도식이라는 개념이다.

칸트에서 판단형식 즉 범주의 의미 내용은 이 도식에 의해 규정된다. 이 도식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칸트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범주표처럼 도식표도 있다.

분류

판단형식

범주

도식

분량

단칭판단

단일성

시간계열(수)

특칭판단

수다성

전칭판단

전체성

성질

긍정판단

실재성

시간내용

충실

부정판단

부정성

공허

무한판단

제한성

관계

정언판단

실체

시간순서

지속

가언판단

인과

후속

선언판단

상호작용

공존

양상

개연판단

가능성

시간총괄

혹시

실연판단

현존(우연)

정시

필연판단

필연성

상시

(위의 도식표는 칸트의 작품이 아니라 순수이성비판 번역자 최재희 선생의 작품이다. 번역본 180쪽에 나온다) 주2) 범주와 도식의 관계는 마치 논리적 판단을 컴퓨터 언어로 전환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컴퓨터 언어는 이진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범주 즉 판단형식을 경험에 어떻게 적용한 것일까? 그는 마치 이 도식표를 하나의 좌표처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어떤 경험이 다른 경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들어오면, 그것은 어떤 판단형식의 좌표 중 어떤 지점 즉 어떤 범주에 귀속된다. 그런데 경험의 다른 관계가 출현하면, 그것은 또 다른 좌표 다른 범주에 찍히게 된다.

헤겔의 불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칸트의 선험철학에 경악하면서 따라온 헤겔이 칸트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칸트가 이처럼 도식표를 하나의 좌표처럼 이용했다는 것인데, 헤겔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신간안내] 『정신과 표현 기호로서 예술-헤겔 미학 산책』(이병창 지음|먼빛으로|(2024년 8월 23일) [한철연 소식]

『정신과 표현 기호로서 예술-헤겔 미학 산책』(이병창 지음)

 

이병창 회원이 웹진 <이(e) 시대와 철학>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코너에 연재한 <헤겔미학산책>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정신과 표현 기호로서 예술-헤겔 미학 산책』(2024)입니다.

<헤겔미학산책>은 2023년 11월 6일 1회를 시작으로 2024년 5월 12일 60회까지 이어진 웹진의 대표 연재물이었습니다. 상당한 분량의 연재 글이었습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받았고 2024년 8월 23일 책으로 출간되어 이제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e) 시대와 철학> 입장에서는 매우 뜻 깊은 출간입니다. 오랫동안 헤겔 철학을 연구해 온 이병창 회원의 생동감 있으면서 명확한 전거를 제시하며 풀어가는 헤겔 미학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보시길 바랍니다.

 

♦ 책 소개

헤겔은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미학자였다. 그의 저서 『미학 강의』는 예술에 관한 일반 이론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출현한 예술 형식을 구체적으로 탐구했으며, 예술 장르의 기본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분투해 마지않았다.

헤겔은 예술이 유희나 장식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형식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 독일은 분열되고 봉건적 억압 아래 있었으니, 그는 예술을 통해 민족의 자유로운 공동 의지가 형성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헤겔은 예술의 분석에서 현대의 기호학적인 방법론과 닮은 방법론을 사용했다. 그에게서 예술은 정신을 표현하는 기호이다. 그는 표현 기호라는 개념을 예술의 역사뿐만 아니라 예술 장르의 개념에도 적용했다.

저자는 헤겔 미학의 본질을 60개에 걸친 물음을 던지면서 분석한다. 저자가 던진 물음은 예를 들어 고전이냐 근대냐, 리얼리즘이나 표현주의냐, 상징이냐 현상이냐 가상이냐 등과 같은 물음이다.

저자는 이런 물음을 통해 헤겔 미학에 관한 다양한 오해를 제거하고자 한다. 흔히 헤겔은 고전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저자에 따르면 헤겔은 근대 낭만주의 의 가상 미학에 더 관심을 가졌다. 가상은 자기 부정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을 말한다. 헤겔에게서 근대 예술은 사실적 경향성을 가지면서도 정신적 생동성을 표현하며, 그 핵심 기법은 색채의 마법이나 음악적 방법에서 보듯이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에 있다.

 

저자 소개

-저자 이병창
서울대학교 철학과 수학,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2011년 2월 명예퇴직, 현대 사상사 연구소 소장
헤겔철학과 정신분석학 및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면서 문화철학 및 영화철학을 연구한다.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 서울대, 2000

-주요저서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헤겔 정신현상학 서문 주해)』, 먼빛으로, 2010
『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 먼빛으로, 2011
『불행한 의식을 넘어(헤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 주해)』, 먼빛으로, 2012
『지젝 라캉 영화』, 먼빛으로, 2013
『청년이 묻고 철학자가 답하다』, 말, 2015
『우리가 몰랐던 마르크스』 , 먼빛으로, 2018
『정신의 오디세이-자유의지의 역사』, 먼빛으로, 2021
『헤겔의 정신현상학-EBS오늘의 클래식』, EBS BOOKS, 2022
『지적 대화를 위한 교양인의 현대철학』, 팬덤북스, 2024

-번역
프리드리히 슐레겔, 『그리스 문학 연구』, 먼빛으로, 2014
프리드리히 슐ㄹ겔, 『미학 철학 종교 단편』 , 먼빛으로, 2020
마르크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먼빛으로, 2018

 

책의 차례

들어가는 말 3
헤겔 미학 산책 1부 미의 일반 개념
1_미학이 가능한 것일까? 15
2_예술의 과거성 테제 21
3_고전이냐 근대냐? 33
4_절대정신이란 무엇인가? 43
5_예술과 종교, 철학의 등근원성 55
6_표현으로서 예술 65
7_기호와 표현 73
8_예술의 쾌활성과 목적 81

헤겔 미학 산책 2부 예술의 역사적 형식
9_예술과 시대 89
10_예술 형식 99
11_상징적 예술 형식 109
12_숭고에 관해 119
13_비유법 129
14_그리스에서 신과 인간 139
15_고전의 전형 페이디아스 149
16_고전적 예술 형식 161
17_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 169
18_소외된 정신과 기독교 177
19_근대인과 파토스 189
20_가상과 추, 숭고 199
21_고딕 예술 213
22_중세 기사도 문학 223
22_개체적 특수성의 예술 237
24_성격 예술 247
25_모험 소설 253
26_낭만주의 해체기 예술 257
27_후마누스[Humanus]의 예술 269

헤겔 미학 산책 3부 예술 장르론
28_질료의 속성 281
29_예술가의 솜씨 291
30_모더니즘 미학의 선구 297
31_장르와 형식의 관계 307
32_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311
33_고대 건축과 고전 건축 321
34_고딕 건축 331
35_조각과 회화의 차이 339
36_조각의 형상화 345
37_조각의 회화화 351
38_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 359
39_색채론-괴테와 헤겔 367
40_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 375
41_회화의 가상성 383
42_내밀성의 회화 391
43_심정의 예술로서 음악 401
44_화성과 선율 그리고 정신 411
45_수반 음악과 자립 음악 421
46_회화 음악 시문학 429
47_시와 산문의 차이 437
48_시문학의 삼각형 445
49_작가와 독자의 공동체 455
50_시문학의 장르 465
51_서사시적 슬픔 475
52_시민적 서사시냐 소설이냐? 483
53_서정시와 이비코스의 두루미 493
54_서정시와 종의 노래 503
55_연극이냐 극시이냐 513
56_극시의 구성 521
57_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과 헤겔 531
58_니체의 비극론과 헤겔 539
59_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과 헤겔 551
60_근대 극시와 헤겔 565
참고문헌 575

책 속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정은 지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 (2022, 저자: 이정은)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정은 교수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통치자는 누구인가? 군주이다. 그러니까 부제를 다시 설명하면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16세기에,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주장했고, 공화국을 주장한 사람은 헨리 8세 시대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였다. 이와 같은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는 1세기 후 필머와 로크로 이어진다.

다시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으로 돌아가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에는 타인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와 자신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요소로는 행운(fortuna)에 의한 경우와 역량(virtú)에 의한 경우가 있습니다.”(115쪽, 강조는 필자) 타인의 무력은 외국군이나 용병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무력, 곧 자국 군대를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의 무력 이외에도 “타인의 호의”가 상황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경우를 행운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당시 지배적이던 교황이 주던 권력 집단의 호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호의’, ‘동료 시민의 호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아들이 체사레이고 체사레의 조카인 로렌초의 작은 아버지가 레오 10세 교황이었다. 곧 체사레와 로렌초는 행운의 아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행운보다는 역량을 강조하는 것은 행운의 성질 때문이다. 곧 행운의 변덕 때문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일개 시민이 군주가 되기 위한 2가지 방법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역량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신의가 없이 처신하고,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을 덕이라고 불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권력을 잡을 수는 있어도,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122쪽, 강조는 필자) 따라서 그가 주장하고 싶은 군주국은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군주국이다. 다시 말해 그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시민형 군주국’이다. 그러니까 이정은 교수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교황의 지지라는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에 기초한 군주국이다.(12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의 좀 더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마키아벨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군주가 타인을 해치지 않고 명예롭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귀족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인민은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인민의 목표가 귀족보다 더 명예롭기 때문인데, 가령 귀족은 그저 억압하려고만 드는데, 인민은 억압당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124쪽, 강조는 필자) 이제, 다시 부제로 돌아가 보자.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부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이다.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은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이다.

정리하면,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군주국을 건설하려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전과 평화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인민에게 평등과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인민의 호의가 없이는 군주의 통치는 가능하지 않다.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러한 군주와 인민의 상호관계를 다시금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고전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성우 지음,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2021)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 (2021, 저자: 김성우)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김성우 교수의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권력의 기원을 찾다”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리 말하면 ‘저항권’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시민사회가 위임하고 신탁한 권력이 입법권이다. 신탁(trust)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탁자와 수탁자가 맺은 계약을 통해 성립한다. 그렇다면 사회계약에서 신탁자는 누구일까? 신탁자는 국민이고 수탁자는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이다. 최고 권력자는 법에 의해서만 공적 인격(public person)을 부여받는다.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권(大權)을 쥔 통치자가 국민을 해롭게 하고, 공공선에 위반하는 일을 할 경우는 독재적 권력이다. 로크는 대권과 독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대권이란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법률의 지시가 없어도, 법의 직접적인 문구에 위반하면서까지도 몇몇 사안들과 관련해서 지배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것을 국민이 통치자에게 허락한 것이다.”(151쪽, 강조는 필자) “독재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이다.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독재는 그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손아귀에 있는 권력을 유용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법이 아니라 그의 의지를 규칙으로 삼는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명령과 행동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쪽이 아니라 자신의 여심, 복수, 탐욕 또는 다른 비정상적인 열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향한다.”(15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국민의 소유(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해 신탁자(국민)은 어떤 권리가 있을까? 로크는 부당하고 명백하게 불법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부당하고 불법적인 권력에만 무력으로 대항 할 수 있다. 이와 다른 경우에 대항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과 인간에게 정당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155쪽, 강조는 필자) 이러한 조건 속에서 로크는 내부적 정부의 해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법부나 군주 중 어느 한쪽이 신탁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입법부는 국민의 재산을 침해하려 할 때나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부를 지배자로 내세우고자 할 때, 신탁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이때 지배자는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독재자가 된다.”(157 쪽, 강조는 필자)

요컨대 국민의 소유(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지키지 못하면 부당하고 불법적 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에 대해서만 저항권을 갖는다. 로크의 질문을 다시금 들어 보자. “정부의 목적은 인류를 이롭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다음 중 어느 편이 인류에게 더 나은가? 국민이 독재자의 한계 없는 욕심에 노출되어 있는 쪽인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국민 재산을 파괴하는 독재자에게 때때로 저항하는 쪽인가?”(158-9쪽, 강조는 필자) 재판관은 누구인가? “통치자가 먼저 약속을 위반한 경우에는 통치권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며 국민은 최고 권력자로서 행동할 권리를 갖게 된다. 국민은 스스로 입법권을 계속 가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아니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입법권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맡길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159쪽,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 그것도 우리 스스로 말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자유, 철학의 역사에서 ‘뭣’을 다루는 방식들 [천 하룻밤 이야기]

자유,

– 철학의 역사에서 을 다루는 방식들.

— 2024 08 22 처서(處暑): 더위가 물러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서양철학사는 인간의 지식 또는 인식의 발달사일까어쩌면 서양의 학문은 늦게서야 철이 들어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이며어떤 지위를 갖는지를자연의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는(speculation)것이 아닐까이제 신의 이야기는 허구(우화또는 수많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이 자기의식 또는 자의식을 갖는 시기를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에 와서야 신학에서 벗어나 두 가지 실체를 주장하면서또는 주체과 객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기에 나왔다고 한다그 자의식에서 문장과 판단에서 주어 문제이기도 하고두 실체에서 사유의 실체만큼이나 너비의 실체도 그와 상응한다고 하는 점에서주어 또는 주체가 주도권을 지니는 관념적 성격에서 나왔다고 한다그럼에도 인류라는 종이 자연에 대해 지배권을 갖는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어서야 인간이 주체로서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이런 의미에서 볼때 인간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 발달로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서 생각하는 경향 위에서 주인의 역할로서 주체이다르네상스가 중세 종교의 시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인간은 종교적으로 신의 부속물 또는 대리자로 생각하기도 하였다그런데 그 대리자가 신과 연관에서 벗어나종교에서 신의 피조물인 자연의 이법(la raison)을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두 실체론(이원론)에 들어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는 신의 피조물인 자연이라기보다 자연의 자기 발생의 능동적 능력도 있음을 보았고데카르트 이후에 이분법의 주체인 사유와 마찬가지도 객체인 물체의 운동에도 능동적 성격(신체의 감정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주체로서 자연 속에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l’illusion)하면 안된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자연의 자기 풀림 또는 전개(발전)이 인간에 의한 것도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이 자연의 풀림과 같은 방향(봉상스)로 나가는 인간의 풀림이 상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데이를 평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자연의 생성과 전개인간의 파악과 추리이 둘은 평행도 대칭도 아니며 각각이 다른 계열이다이를 당시의 수학적 방식으로 설명을 뿐이다르네상스 이후 17세기 철학자들은 인간이 독자적인 인식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증거하려고 했기에 수학적 방식들을 동원하였다그 수학들은 증빙자료를 제시하기보다자료들을 체계화하고 정합성을 유지하려 했으며그 질서가 있음을 아는 인간이 주체로서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그럼에도 후대의 철학자들은 이들이 인간의 개별성이라든지인간 의식의 시간지속성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본다말하자면 시대와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이 동일한 역할즉 개인의 동일 정체성이 시대를 거쳐서도 동일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시대의 한계로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고대에도 있었다그리스에서 가이아우라노스(하늘시대크로노스(시대제우스 시대 등으로 변전의 과정이 있었다이 우화적 이야기를 고대 시대의 변화들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인간 사유의 변화와 연관을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몇몇 역사가들이 시대의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들을 서술하는 연대기나 사건들의 기록들이 역사적 과정과 변화에 관한 규칙 또는 법칙을 찾기보다 사실의 기록으로 후대의 참고로 삼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의 감()과 서양의 사변(spéculation, 비춰봄)이 등장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다양한 자료들에 대한 검토가 시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동시에 한 평면위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비추어보는 것이지만사유의 차이를 대조(le contraste)하는 것이다대조는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경우(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적절한 처방 또는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그래도 13세기는 대조의 시대라 한다).

이런 사유가 르네상스 이후에우선은 두 가지 방식사유와 운동또는 영혼과 신체 인 것으로 보이지만인식적으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대비로서종교적으로 정신과 물질로서 생각하는 경향을 또는 양식(bon sens)을 갖는다시대가 달라도 삶의 터전이 달라도 이런 이분법적 구분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지도성(조작성)으로 이어질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항대립에서 자의식이라는 자아가 나오는 것인가인식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남는다삶의 터전에서 대조란 소수의 관계와 다수의 연관들이 도덕적정치적 문제거리로 남아있다는 것을 18세기(빛들의 세기계몽기칸트 표현으로 청년기)에 와서야 인간들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는 역사의 시대구분에서 신들의 시대영웅들의 시대인간들의 시대로 나누었다고 하는데말하자면 첫째의 경우에종교의 강제적 힘 이외 다른 강제적 힘은 없었다고 한다둘째에서는 평민은 법률 밖에 있는 시대라고 하고근대에서 자연권의 관계들이 인간들 사이에 일반화된다고 한다이를 체제와 연관하여신정체귀족정체인간적 정부(가끔은 군주정체이다)라는 구별을 하였다이런 시대적 과정에 대한 통찰이 다음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철학 강의에서인간은 이법(이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인간의 자유가 점점 확대된다고 보았다고대에는 황제 또는 참주의 1인의 자유의 시대였다면봉건 시대에는 귀족들이 자유를 누리고 평민을 사회적 부속물로 그리고 농노를 고대 이래로 경제적 도구 정도로 여겼다그도 놀랐던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시민들이 자기의 의사를 표출하고 협의하며법제적인 노력을 한다는 측면에서 시민들에게까지 자유가 확대되어 점점 자유가 인간에게 보편적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혁명이 질서를 혼란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만든다는 이유 때문에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며사회에는 어떠한 큰 덩어리의 체제가 있고 그 내부에서 맞는 여러 제도들을 마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그래서 그 제도들의 성립의 과정이 실증철학의 성립인데이러한 과정은 역사의 발전과 같은 방향을 간다고 보았다그는 학문들이 성립과 그 발전 과정들을 보면서즉 수학들이 대수학과 미적분학들로 확장되고천문학이 점성술을 넘어서 정확성을그리고 물리학이 체계와 법칙들을 세우고화학이 연금술을 넘어서는 분자들의 성격을 규명하고생물학에서 개체의 생명의 고유성이 전개되고 또한 변형이론이 나옴으로서 개인(개체)의 단위가 성립하게 되고사회 또는 국가의 체제 속에서 배제 되었던 평민의 역할이 확장되면서어쩌면 자의식의 발흥으로언론집회결사(협회정치조직)들이 이루어지면서 사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보았다이 여섯째 등장하는 사회는 꽁트는 우선 사회 덩어리가 먼저 있다는 점에서 정태적으로 보았지만각 학문 발달의 과정만큼이 제도에서도 새로운 제도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그는 루소 자연권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앞 시대에 인간은 이기심을 토대로 체제가 성립한데 비해사회는 상부상조와 여러 조직체들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지배의 이기심(l’égoïsme)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 이타심(l’altruisme 꽁트가 창안한 용어이다)이 있다고 하여다음 세상은 협업과 협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따라서 꽁트는 삶의 터전에서 실증성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고대의 시대에 실증성이 결핍된 시대이라 젖혀두고그리고 3단계로서 신학의 시대형이상학의 시대실증의 시대라 한다실증시대의 학문은 사회학이 주축이라는 것이다.

맑스(Marx, 1818-1883)는 정치경제학을 창안하였다사회 제도와 그 체제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원시공산사회고대 노예 경제시대중세 봉건사회자본주의 사회이 사회의 자기모순에 의해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였다그는 꽁트의 사회조직화와 체제에 대한 논의와 달리사회와 국가의 부의 축적과 재생산이란 측면노동상품화폐자본의 개념들을 정립하면서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의 과정에서 잉여와 착취를 찾아냈다이런 착취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가치 생산의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강조하며프롤레타리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였다그 자본주의 사회는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생산도구를 무기로 삼고전쟁의 무기를 확장하여 대중과 인민을 겁주고 달래며잉여와 이자를 통한 착취를 이어가고 있다이런 전쟁 국가의 무너짐이 아니라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데는 로마카톨릭의 교회조직론과 앵글로색슨의 분석논리철학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벩송(Bergson, 1859-1941)은 역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정태적으로 우주론으로 다루어서 안 되고통태적으로 우주발생론(cosmogonie)”으로 다루어야 하다고 보았다꽁트 설명이 이래로 선전제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제반 학문이 무너졌고나머지 남은 학문이 영혼(심리)학 인데이것을 기억이론으로 새롭게 정립하였다이로서 자아의 지속성을 말하게 된다과정과 강도를 높이는 노력에 의해 자아의 정립은 지속하고 있는 중이며아직 완성이니 완전이니 절대니 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앞 시대에서는 자연의 지배를 이해한데 비해벩송은 자연의 자기생성과 자발성을즉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를 강조하였다그는 실증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사실들과 상태들에 대한 자료들은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또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면 문제는 해소된다고 보았다완전자보편자절대자라는 용어들은 선전제 미해결의 용어들로서이런 용어를 앞세워서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착각에 빠진 것이며도덕과 종교의 제도를 세우는 것은 정태적 관계만을 서술하는 우화적이 된다고 보고끊임없이 노력과 강도를 높이는 개인의 영혼(프쉬케심리)의 함양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며라이프니츠 이래로 개체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보았다이런 관점에서 벩송은 서양 학문의 발달사를 상층의 이데아와 에이도스 시대에서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내려와 표면에서 재현과 재생의 사실들과 상태들을 이루며이러한 표면을 성립하게 하는 것은 사물들 안에서 생성하고 생장하는 힘(충력엘랑)이 있다고 하면서생명은 내재성의 발현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표면의 일반화(개념자업)와 이에 걸 맞는 추상화로서 상징과 기호를 다룬다고 하였다.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들을 수강했던 에밀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는 이법과 신앙의 대립에서 근대성의 발달로 실증성이 첨가되어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립된다고 보았다순수 논리와 같은 학문개별적 학문들그리고 인간관계 사실들과 사건들에 관한 학문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았다학문의 분화와 개열들에서 자유의 방향들을 제시하려 하였다.

들뢰즈(Deleuze, 1925-1995)는 벩송의 상층 표면 심층이라는 학문과 인식의 역사적 발전의 설명을벩송의 물질과 기억의 회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그리고 플라톤의 영원과 시간을 퀴니코스스토아의 영원과 시간으로 바꾸어 보았다들뢰즈는 우주 발생론적 과정을 기억의 발현으로 보아심층의 생성에서 표면의 이중성 그리고 이중성의 두 방식이 하나의 가지만을 강조하는 봉상스(좋은 감관)의 길이 있다그 길이 상층의 스콜라주의이데올로기속 좁은 이성의 현상학을 만들었다고 본다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가지는 무엇인가심층의 덩어리의 생성 방식은 추리의 일반화에 의한 표면의 현상(재현시뮬라크르)와 달리 자기 발생과 자기 개체성(특이성)을 생성하고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다이 생성의 현상도 시뮬라크르인데원본에 따른 현상의 시뮬라크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근대 이후로 봉상스의 기준에서 두 시뮬라크르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의 유비 또는 알레고리로 설명하는데 비해들뢰즈는 두 시뮬라크르가 기원과 원인이 다르다고 보았다(벩송의 두 원천처럼). 이로서 들뢰즈는 벩송의 삼단계의 지식의 전개과정과 달리 발생의 도식을 만들며 달리 말한다스토아학파와도 달리 리좀(Rhizome)이란 개념을 창안하면서리좀들의 움직임과 엮음에서 나오는 배치에 따른 새로운 지도그리기(cartographie)를 제안한다(데카르트 식의 좌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리좀은 나무처럼 고정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흐르고 또 생장하면서도 흐른다그 흐름이 이익을 따라 흐르는 것 같지만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만들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이 흐름이 인민의 의식이며이와 더불어 인민으로서 자아의 주체성은 생성 중이라는 의미가 된다.

들뢰즈가 디지털 시대즉 규소의 시대는 속도와 강도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그는 맥루한의 이론즉 빛이 이미지들(기호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빛 자체가 의미 전달체이며 생성의 흐름 덩어리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인터넷에서 다양한 빛의 정거장의 한 항(terme)이 플랫폼(정거장)이라 한다물론 다른 항들의 플렛폼도 여럿 있을 수 있다그러나 대중적인 정거장은 수렴과 발산의 점이라기보다 떠도는 리좀과 같지 않을까플랫폼이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빛의 흐름과 에너지가 우선은 선을 따라 다녔다이제는 선 없이 전 지구를 모으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하면서발산과 수렴이 앞의 순간(l’instant)과 다른 순간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21세기 초반에 인민들의 손안에 든 누리소통(SNS) 도구가어느덧 제국의 도구/무기 체계를 넘어서 무기가 되어 가고 있다누리소통이 인민들 사이의 자유 또는 소통을 통한 협의와 상부상조가 아니라자본의 세 가지 세력들(국가교회구성 학문)의 패거리에게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무기가 되어 가는 듯하다윤석열 정권은 미 제국의 이런 힘을 믿고 있다. 일본의 부역자밀정 노릇을 해도 누리소통을 지배하면 대중과 인민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노리개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이런 시대에 20퍼센트 정도의 지지를 받고도 미국의 지시를 받은 일본그 일본의 사주를 받는 밀정과 매국노가 누리소통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그게 실현이 될까이광수와 부역파들이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했듯이부일자들과 밀정들이 또 한번 이런 말을 한다면한번은 비극한번은 희극이 아니라역사의 발전에서 3패거리들의 박멸과 소멸을 하지 않는 한상식의 믿음을 확장한 양식의 외연확장은 소수의 이기심(탐만치)으로 전승될 것이다그래서 혁명은 당연하다혁명은 이기심이 악라는 것을 증거할 것이며이기심이 자연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도 피폐하게 하여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세 패거리의 인식론이 탐만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그들의 행동에게 욕망이라 부르자 말라 그것은 탐욕이며그들에게 보편이라 부르지 말라 인민은 보편을 추구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는데 그 보편이 맞다고 오만하게 떠든다부를 누리면서공공적 이익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이들에게 무슨 보편이 있는가부일자 숭일자모미자(숭미자)들의 치졸함은 그들은 그들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자주와 자치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미국의 말을 듣고 일본에게서 가져오면 된다고 한다일제 말기에 부일자 또는 밀정들이 되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1446년 훈민정음 이래로 자의식 발동이 이었지만 느리게 진행되어심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한자 문화 속에서 표면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한글로 입말을 쓴지 79년인데 이 속도와 강도는 이전 600년의 속도보다 빠르고 강도가 높다누리소통이 79년의 흐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의 발산과 수렴이 있다이 효과가 인지 아무도 모른다단지 강도와 속도만큼이나 인민의 노력에는 내공이 쌓이고 있다.

심층의 발산 곧 자유의 분출은마치 혁명처럼간헐적이고 폭발적이다누리소통 시대에 균열이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시대의 균열로 흐름은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발성으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4:18, 57SMA) (4:41, 57SMB) (5:09, 57SMBB) (5:11, 57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플라톤과 베르그송)』(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