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7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2)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V)
3)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519c-521c)
[519c-521b]
* 나라수립자οἰκιστής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τάς τε βελτίστας φύσεις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ἰδεῖν τὸ ἀγαθὸν 강제하는ἀναγκάσαι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보고 나면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그런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μὴ ἐπιτρέπειν. 즉 “거기에 머물며, 저 수감자들 곁으로다시 내려가기καταβαίνειν를 원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의 수고πόνος와 명예τιμή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μηδὲ μετέχειν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519c-d)
* 그러나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ἀδικήσομεν 것, 즉 그들이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데도 더 못한χείρων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지 반문한다.(519d)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 γένος가 특별히διαφερόντως 잘 살게εὖ πράξει 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에 그런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즉 법νόμος은 설득πειθός과 강제ἀνάγκη를 통해서 시민πολίτης들을 화합시키고συναρμόττων, 각자가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이로움ὠφελία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그것을 서로서로 나누어 주도록μεταδιδόναι 만든다.(519e) 법 자신이 나라 안에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도록 내 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신이 나라의 결속σύνδεσμος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철학자가 된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을 ‘돌보고 수호하도록’ἐπιμελεῖσθαί τε καὶ φυλάττειν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다.(520a)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수호자를 양육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국가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τέλειος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 벌 떼들σμῆνος의 지도자들ἡγεμόνας이자 왕들βασιλέας처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520b) 그러니 각자가 차례로ἐν μέρε 나머지 시민들의 거처συνοίκησις로 내려가야 하고καταβατέον,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τὰ σκοτεινὰ θεάσασθαι 익숙해져야 한다.συνεθιστέον. 익숙해지고 나면 그들은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과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τὸ τἀληθῆ을 본 까닭에 그곳 사람들보다 만 배나 더 잘 보게 될 테고, 각각의 영상들τὰ εἴδωλα이 어떤 것이며 무엇의 영상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깨어있는 상태οὐκ ὄναρ에서 다스려질 것이다. 오늘날 그림자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σκιαμαχούντων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가 그러하듯 결코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다.(520c) 그들은 마치 통치하는 일이 무슨 큰 좋은 일이라도 되는 양, 그와 관련해서 내분을 일으키고στασιαζόντων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즉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은 사람들’ᾗ ἥκιστα πρόθυμοι ἄρχειν이 통치하게 되는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ἀστασιαστότατα 다스려질 것이 필연적이며, 그 반대의 통치자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그 반대이다.(520d) 그러므로 우리에게 양육 받은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순수한 곳에서 서로 함께 살면서, 각자 차례가 되면ἐν μέρει 나라에서 ‘수고하는 일을 함께하길’συμπονεῖν 원할 것이다.(520d) 우리는 정의로운 자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명령하지만 그들 각각은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과 달리 통치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불가피한ἀναγκαῖος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임할 것이다.(520e)
* 만약 통치할 사람들에게 통치하는 일보다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이 있다는 것을 자네가 찾아낸다면, 잘 다스려지는 나라가 실현가능ἔστι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에서만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들’οἱ τῷ ὄντι πλούσιοι이 통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란 금으로 부유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부유해야 할 것으로 부유한 사람, 즉 ‘현명하고 좋은 삶으로’ζωῆς ἀγαθῆς τε καὶ ἔμφρονος 부유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만약 사적인 좋은 것들에 굶주린 거지πτωχός들이 공적인 일에서 좋은 것들을 낚아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일에 나서고 있다면, 그런 나라는 실현가능하지 않을οὐκ ἔστ 것이다. 그런 경우 통치하는 일이 싸움거리περιμάχητος가 될 것이고, 그러한 전쟁πόλεμος은 나라 안에서ἔνδον 벌어지는 내전이어서 그들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까지 모두 파괴할ἀπόλλυσι 것이다.(521a)
* 요컨대 ‘진정한 철학의 삶’τὸν τῆς ἀληθινῆς φιλοσοφίας 말고 정치권력을 낮춰 보는καταφρονοῦντα 삶은 없다. 통치하는 일에 나서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사랑에 빠진 자’ἐραστής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애 경쟁자들οἵ ἀντερασταὶ끼리 싸움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가장 현명하고φρόνιμος, 또한 정치적인πολιτικός 명예τιμή와는 다른 명예를 누리며, 정치적인 삶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들을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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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9 d : ‘그들의 수고와 명예를tōn par’ ekeinois ponōn te kai timōn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mēde metechein’ : 이 문장에서 ‘그들(수감자들)의 수고와 명예’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특히 수감자들의 명예라는 표현은 당혹감마저 안겨준다. 그러나 전치사 para에 주목하면 이 말은 ‘수감자들 쪽에서 힘들어 하는 것과 영예롭게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철학자가 동굴에 내려가 수감자들을 데리고 나오려면 우선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 또한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어둠에 익숙해지는 과정’(517a)의 일환이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한, 먼저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동거하며(520c) 동고동락(同苦同樂)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여민(與民)의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참고로 ‘나누려 하지 않는다’에서 ‘나누는 것’의 원어 metechein은 ‘사물들에 그 사물의 이데아가 분유(관여)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그 ‘分有(關與)’의 원어로도 쓰인다.
* 철학자들과 달리 현실 권력자들과 사회 기득권자들은 일반 시민 대중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들을 낮춰보고 자기들만의 생각,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대중의 힘이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기에 부와 권력, 언론과 교육 제도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자신들의 의식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시민 대중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의 비판 정신을 마비시킨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피폐한 민주정 치하 소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어떻게 일군의 대중을 선동하여 폭압적 참주정의 주도 세력인 양 이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행태는 20세기 나치즘, 파시즘의 등장을 거쳐 현재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대선을 앞두고 그 일단의 세력들이 단말마적 발악을 자행하고 있다. 불타협의 태세로, 시민들의 강건한 연대로 그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 519e ‘환기시킨다.’ : 제5권 466a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가리킨다. 본 강해 참고
* 519e ‘설득peithos과 강제anagchē’ : 이 표현은 488c에도 나온다. 설득과 강제는 사람을 의도자의 목적에 따라 변화시키는 방편이다. 설득은 말logos을 통해 강제는 행위ergon를 통해 이루어진다. 행위는 제도와 법률의 집행은 물론 개인들의 폭력이나 거짓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설득으로 이루어지나 제도로서 강제의 측면이 있다. 도덕과 강제와 관련해서는 강해 본문 참고.
* 520a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 흥미롭게도 글라우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끌어들이고 있는 정의관은 제1권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제기한 정의관 즉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다. 그 정의관의 한계는 충분히 비판되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생각에 맞추어 설사 당대 상식적 정의관에 비추어보더라도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 520c ‘깨어있는 상태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 전자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 후자는 타락한 정치가들이 다스리는 현실의 나라를 가리킨다. 현실의 나라임에도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실상이 아닌 영상들 즉 동굴 속 그림자 같은 것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520c-d 내분stasis(분쟁, 내란, 반목, 대립) : stasis는 <국가> 전편에 걸쳐 계층과 집단 또는 영혼의 상태로서 나라와 집단, 개인이 맞이하는 최악의 것으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351d-352a, 440b, 442d, 444b, 459e, 464e, 465b, 470b-d, 471a, 520c-d, 521a, 545d, 547a, 554d, 556e, 560a, 566a, 58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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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는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속 어둠을 빠져 나와 좋음의 형상을 본 후 그것이 얼마나 신적인 즐거움을 안겨 주는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인간사에 마음 쓰고 싶지 않고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517c-d) 그러나 철학자는 이제 수감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있다. 나라수립자들은 철학자가 동굴 속 수감자들 곁으로 돌아가 수고든 명예든 공유하려하지 않고 동굴 바깥에서 고고하게 지내는 것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이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못하게 하는 것은 부정의한 일이 아닌지’ 반문한다. 그러면 이러한 반문에 대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어떤 대답을 제시하고 있을까?
* 519c ‘좋음을 보도록 강제하는anagkasai 것’ : ‘강제’와 관련한 표현은 짧은 이 문맥에서만 아래와 같이 네 차례나 나온다.[‘법은 설득과 강제anagchē를 통해서’(519e) ‘돌보고 수호하도록 강제anagchē’(520a). ‘통치하는 일을 불가피한anagkaios 것으로 여기고’(520e),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anagkazein(521b) 등]. 강제의 그리스 원어 anagchē는 ‘강제’의 뜻만이 아니라 ‘필연’, ‘불가피함’, ‘운명’의 뜻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때 anagchē가 포함하고 있는 강제의 범위는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에서부터 형벌이나 처벌, 폭력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유념할 것은 플라톤이 철학자 또는 철학 교육과 관련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사회적 정당성에 기초한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 네 군데가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배의 비유(488b-489a)에서 ‘선원들(소피스트)이 선주(대중)에게 행하는 ‘강제’의 경우는 그와 다르게 바로 이어서 예시되고 있듯이 시민적 박탈과 벌금, 사형 등 외적인 강요와 폭압의 성격이 강하다. 위 두 경우는 같은 강제일지라도 자율과 타율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정반대이다. 전자의 경우는 강제의 사회적 도덕적 정당성에 기초한 강제, 즉 내적인 동의에 따른 자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내적인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무조건적 수용, 즉 외적 강제에 따른 타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자율은 도덕적 실천의 기본 원리이다.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일’이 본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인지 강제에 의한 것인지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자율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비록 동굴에 내려가는 일이 자신의 본성상 선뜻 반길 일은 아니지만 그것의 당위적 정당성을 배움에 따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그 강제를 내적인 동의, 즉 자발성과 강제를 공존시키는 자율의 방식으로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적 당위나 사회적 의무는 그 자체로 시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선뜻 반기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나 나라를 지키려 군대를 가거나 세금을 내는 일 등을 즐거워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순순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당위나 그것의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비록 힘들고 싫은 일이라도 그것을 자율적으로, 또는 최소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원함(wollen)과 당위(sollen)는 분명 다르지만 최소한 공동체의 시민에게 그 둘은 도덕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공존할 수 있다.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강제도 이런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그 공존을 누구보다도 기꺼이 그리고 쉽게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 철학자가 동굴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즉 통치 참여의 근거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본성과 배움 모두에 기초해 있지만 설명의 내용에서 보면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도덕적 당위성의 측면이 강조되고 어떤 경우에는 본성과 자질의 측면이 강조된다. 우선 전자의 측면에서 그 근거는 철학자도 시민 공동체의 일원인 한 법 준수의 의무 차원에서 제시된다.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가 특별하게 잘 살게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화합시키고 그들에게 이로움을 나누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사실 플라톤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이미 제4권(420b)과 제5권(466a)에서도 “아름다운 나라가 지향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잘 지내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름 아닌 시민을 돌보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인 한, 그들은 법에 따라 통치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이상 국가가 지향하는 법의 정신뿐만 아니라 제1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전통적 정의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나라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나라의 수호자로 일하도록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에 대한 나라의 처사는 부정의한 것이 아니다.
* 플라톤은 이같이 사회적 법적 당위성 측면만이 아니라 본성과 자질의 측면에서도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즉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누구든 간에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적합한 일을 수행함으로써 나라의 안녕은 물론 자신의 행복을 구현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과 좋은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을 본 까닭에 그 누구보다도 또 다른 나라의 그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만 배나 더 잘 볼 수 있다. 배의 비유에서도 플라톤은 배를 지휘하기에 적절한 참된 키잡이라면 ‘한 해와 계절들 하늘과 별들 바람들 그리고 그 기술에 합당한 온갖 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게 필연적’이라고 말한다.(488d) 배를 거짓된 선원들에게만 맡기면 결국 배도 파도에 쓸려 난파하고 키잡이를 포함해 모두가 파멸한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나랏일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나라 공동체를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실상이자 진실이고 무엇이 영상이자 거짓인지를 탁월하게 분별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를 늘 깨어있는 상태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맞는 일을 가장 잘 해냄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타자들의 이익 즉 나라와 시민들의 행복도 함께 가져다준다. 이처럼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하는 것 즉 동굴로 내려가는 것은 수감자들을 무지와 불행으로부터 구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자신의 행복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배움을 통해 통치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긴 하지만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임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에게 통치는 부득이 감수해야 할 일이자 수고로운 일이기도 하다.(347c) 그래서 플라톤은 이들에게 통치를 맡기려면 벌로서라도 강제해야 한다고 말한다.(347a) 그리고 이때 벌zemia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347c)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벌의 성격이 비록 강제이기는 하지만 앞서 살폈듯이 수치를 두려워하는 철학자의 본성상 그들의 자율적 동의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이 벌이 철학자들로 하여금 수치를 면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그것을 보상misthos의 부류에 넣는 것도 그 때문이다.(347a) 참고로 이 벌은 오늘날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신보다 저열한 자들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플라톤의 금언으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실제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이 경고하는 대상은 시민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 인용이 비록 적확하지는 않더라도 플라톤의 현대적 적용 차원에서 민주주의 현실을 사는 오늘날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아무려나 통치하는 일은 분명 수고로운 일인지라 통치를 맡는 자들에게 보상이 있어야 하듯 철학자에게도 보상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사람들조차 보상을 원하기 마련이다.(347a) 그러므로 나라는 철학자들에게 나랏일을 맡기되 그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통치 의무를 번갈아 가며 수행토록 해야 하고 통치자로서 의무를 마친 후에는 이들을 위한 기념물도 만들고 신과도 같은 분들로 모시고 철학자로서 복된 삶을 하나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540b-c)
* 그러나 통치자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더라도 ‘인간사를 떠나 고고하게 철학자로서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 이상의 것은 없다. 관조의 삶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철학자들이 원하는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부득이하게 통치업무를 수행하지만 어떻게든 빨리 그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 한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자 왕은 나랏일에 가장 유능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원천적으로 권력에 대한 욕구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철학자들은 신적인 능력이라 할 만큼 정치권력에 초연할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인간의 권력의지와 관련하여 최소한 철학자의 경우 근본 전제부터 달리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치자에 대한 가히 비현실적이라 할 정도의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만큼 당대 현실 통치자에 대한 절망이 컸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목도한 당대 현실 국가의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모두 진실보다는 거짓에 매몰된 채 권력욕에 젖어있었고 그에 따라 통치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나라와 시민들의 이익보다는 오로지 권력의 유지와 자기 이익의 보전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들에게 통치 권력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는 최대 방편에 불과했던 까닭에 그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은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나라와 나라, 계층과 계층이 분열하고 개인과 개인이 반목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으면서 동시에 깨어있는 상태의 사람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다. 통치자는 결단코 권력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달리 길이 없다. 그런데 제대로 길러진 진정한 철학자의 경우 그러한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관조의 삶이 진정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정치권력을 능히 낮춰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권력보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들을 길러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그래야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 다스려질 수 있다. 현실국가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서 그 이상의 것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 조건이자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통치 권력자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초래할 위험성에 대한 의심에 기초해 있다. 이점을 고려하여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을 사람이 아닌 정치 원리로 바꾸어 말하자면 플라톤 <국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지성의 정치’, ‘정치의 지성화’라 할 것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되살아나 우리나라 시민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으로 반지성적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린 –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 – 세계사적인 장면을 목도하였다면 대중들에 대한 철학 교육을 <국가>의 중심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하는 근거를 다각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철학자들의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비록 대비적일지라도 훌륭한 삶으로서 상호 조화를 이루고 일치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제6권에서도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단순히 실재들에 대한 인식과 관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받고 삶에 구현하려고 하는 자(500c)이다. 지성이 좋음의 형상을 알고 있는 한, 다른 이들의 나쁨과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다. 만약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좋음의 형상을 모르는 것이다. 좋음의 형상을 인식하는 지성은 그 자체로 부정의에 대한 고도의 분별력과 함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섬세할 정도의 감수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 자신을 형성함은 물론 공적으로도 타자 즉 대중의 덕을 구현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다.(500d) 물론 배의 비유에서 보듯 철학자들이 다중의 광기에 둘러싸여 나랏일은커녕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 그들은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비를 피해 벽 아래에 대피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비록 작지 않은 성취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철학자에게 최대의 성취가 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496e) 그곳에서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철학자가 이룩하는 최대의 성취’란 다름 아니라 ‘철학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정체를 만나 자신도 성장하고 개인적인 것들과 함께 공동의 것들도 보전하는 것’(497a)이다. 요컨대 철학자는 나라에서 통치자로 참여하면서 자신들과 공동체의 보전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그곳에서 철학자로서 자신의 개인적 삶도 더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이처럼 철학자가 동굴에 다시 내려가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 배움에 부합하는 혼의 행복을 담보하는 일이자 공적으로는 나라를 수호하고 시민들의 이익과 행복을 돌보는 이른바 개인과 나라에서 상호상승의 덕을 실현하는 일이다.
* 철학자로서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노정하는 갈등적 측면은 어쩌면 플라톤 자기 삶의 여정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곱 번째 편지>(324b-326b)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겪은 그와 같은 갈등들을 직접 토로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은 종국적으로 좋음의 형상에 대한 깨달음을 토대로 그 두 측면의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지만, <파이돈>에서는 논의 주제의 특성상 ‘몸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해짐으로써’(67a) ‘영혼 자체를 그것 자체로 가지기를 열망하는’(67e) 순수 관조의 삶이 크게 부각되어 있고 그와 달리 <국가>에서는 부정의한 나라를 정의로운 나라로 이끌어가는 실천적 삶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조차 배의 비유에서 선주와 선원들에게 무시 받는 참된 키잡이에 대한 소회를 통해 플라톤 그 자신 얼마나 관조의 삶을 소망하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496d)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철학자로서 결코 작은 성취는 아닐지라도 결코 최대의 성취는 아닌 것이다.(497a)
* 끝으로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들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논의를 시작하며 철학자 자신은 자신의 변화 때문에 행복하다 여기지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는’eleein 장면(516c)이 그것이다. 이것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에 본성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심정이 그 출발점으로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후에 제기되는 논거들이 대체로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그로부터 연역되는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이곳에서 피력하고 있는 수감자에 대한 불쌍함은 그러한 논거들의 원천적인 배경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대중(수감자)을 불쌍하게 여기는 표현은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대중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크게 돋보이는 <국가>(499e-500b)의 내용을 포함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부성주의(paternalim)적 관점에서 또는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입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실 동굴의 비유가 동굴 속 어둠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구출하는 이야기를 골조로 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동굴에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이나 존재론, 정치철학과 도덕론 차원의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확장, 음미,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 사실 일상의 측은지심(惻隱之心) 너머 삶의 근원적 불쌍함에 대한 깨달음은 도덕이나 정치의 영역을 넘어 일종의 종교적 거룩함의 경지에 다가설 때 비로소 얻어지는 삶의 진실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삶의 근원적 비참성과 철학자들의 하강 또한 비록 그 배경과 성격은 다르긴 하지만 기독교 은총 신학만이 아니라 불교의 심우도(尋牛圖) 입전수수(入廛垂手)가 그러하듯 구원의 문제가 왜 궁극의 관심사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불교의 수행자는 세계의 실상으로서 불성을 깨우친 후 고고하게 산사에 머물며 자신의 평안만을 누리려 하지 않고 그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미망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속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대속을 통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 왔다가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시민의 무지를 일깨우려 시장과 거리로 나가 거침없이 진리를 설파하다 그 역시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가 종교적 대속자로 부활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대속자로 오늘날 되살아나 여전히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있다.
* 동굴의 비유는 위와 같이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와 정황을 논하는 것으로 모두 마무리된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그런 일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 것인가의 문제로 이행한다. 즉 어떤 이들이 지하세계로부터 신들에게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듯이 이 철학자들을 어떻게 광명으로 인도할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다루어진다. -끝-
다음 강해 :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527c)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천 하룻밤 이야기]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2025년 4월 20일 곡우(穀雨), 비가 올라오더니 빌라 밑 처마에 제비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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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의 뜻이 하늘이라 했었다. 공동체에서 각각이 고유 권리로서 사회권과 자연권이 있다는 이야기는 유일신앙의 첫 화두인 하늘이 무한하다는 하는 브루노의 무한 개념이 열리고 난 뒤이다. 하늘이 열리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망원경을 통해 하늘에 뚜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껑위에 옥황상제나 유일신, 선녀나 천사가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나라 이야기가 하늘에 대해 경외심을 심었던 것은 여섯 살 꼬마에게 삶에서 도덕과 은덕을 가르치는 도덕론이었다. 서양사에서 하늘과 땅 다음으로 ‘인간이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인간이 황제의 신민도 아니고 신앙의 예속자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종속하다는 뜻이 바뀌어 인간이 주체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들어선다. 화두는 하늘과 땅에서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근대의 시작인 셈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하늘의 완전성과 땅의 불완전성의 대비는 고대로부터 요즘의 AI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화두로 남아있다. 하늘의 무한성도 땅의 개연성도 인간의 오성 또는 지성이 만든 체계이거나 배치에 따른 질서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가 만든 원리와 공리를 알고, 법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를 안전하고 원활하게 이끌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 안전과 편리를 기준으로 도덕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구의 발달에서 인간이 눈과 귀로 익히는 것 이상으로 순서에 맞게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도덕교육을 넘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의 최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1750년대 증기기관과 1830년대 모터의 발명이후 배, 자동차 등에서 도구를 다루는 것은 과정의 순서와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 공동체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면 질서를 따라야 한다. 이런 배치와 질서의 존중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는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터전이 넓어지고, 같은 배치와 질서 속에서 있지 않은 공동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도 통일적인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 그 통일성의 기원과 원천은 언제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편리와 선후 문제에 앞서 있어야 하는 화두가 다시 불려 나온다. 절차와 순서들은 선문답들로서 파라독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멋이 중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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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기 지금 하나의 사물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에 다른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법칙과 질서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터전에서도 동일한 질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일한 질서는 무엇인가? 이 질서 이외에 다른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은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여긴다. 동일성에 벗어나는 것은 이탈자 또는 반대자로 생각한다. 동일성 속에 산다는 것이 통일성 속에 사는 것이고, 하나의 법칙과 질서로 사는 것이다. 이 법칙과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하나의 원리와 공리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원리와 공리는 어디서 오는가? 이것을 신앙자들은 신에게서 온다고 믿었다. 적어도 크리스토스를 내세우기 이전에는 현자들은 논리의 원리와 기하학의 공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원리와 공리가 매우 정합적이고 체계적이라 이를 잘 아는 것이, 천체의 운행에도 지구 위에서 삶의 이동에서도 잘(bien) 실행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 원리와 공리가 누가 만들었는지를 모르지만 두 가지 방향에서 인간들 사이에 전승되었다. 땅위의 10진법과 하늘의 60진법을 은연중체 체계화 세웠듯이, 터전에서 인간이 서로 소통하면서 말하는 데도 언어(입말)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원리와 공리에 걸 맞는 논리의 법칙이 동일률의 규칙이다. 이 동일률의 성립은 자연(땅)에도 하늘(신)에도 성립하는 통일성을 갖추었다고 여겼다. 말로 표현하여 하늘(신)은 하늘(신)이고, 땅은 땅이다, ‘사람은 사람이다’를 부정하는 이는 없다. 이것은 하나는 맞다 이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하는 경우에, 동일률에 맞으면 맞고, 아니면 틀렸다고 한다. 동일률이라는 것이 먼저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은 항상 같이 있어왔다. 하나를 질서 또는 순서로 정하게 되면, 다른 질서는 틀린(다른, 맞지 않은, 나쁜) 질서인 것처럼 여긴다. 게다가 공동체에서 달리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에 입말의 논리학이 성립하는 시기에 동일률과 더불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논리도 생긴다. 간단히 A는 A아닌 것이 아니다(A=~A)이다.
배중률의 편리는 공동체 안에서 편가르기를 한다. 이런 편가르기는 터전(땅)의 논리에서 이곳은 내꺼 라는 소유의 방식에서 온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삶에서 터전과 하늘은 공유의 것인데, 이런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경계를 만든다. 농경이나 목축에서 토지와 하늘(기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들 덕분에(음덕으로 은총으로) 생산된 것은 생산하는 자의 소유가 된다. 그 시대에 생산자는 그 덕분에게 감사한다. 생산물을 수확하면 첫물의 곡식으로, 첫물의 새끼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자연(하늘과 땅)의 덕분임을 감사한다. 이 생산물을 전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전유의 생각은 단지 “덕분”에게만 감사하고, 주변의 이외에 사람들에게 나눈다는 것을 배제하는 방식이 도래한다. 사적 소유의 생각에서 배제의 방식이, 즉 이로서 배중률이 생활 속에서 젖어든다. 이를 좀 더 사유의 외골수로(공상으로)가면, 나 이외에 다른 이를 믿지 말라 이며, 더욱 추상화의 길로(망상으로)가면 나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가 나온다. 배중률이 사유규칙으로 나오기 전에 이 ‘나이외’라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회의 사적 소유가 생기고, 도적질 하지 말하는 규약은 어느 초기 공동체에도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너도 노동하고 노력해서 먹고 살려고 해야지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당연히 개인이 노동력이 있을 경우인데, 어린 시절과 늙은 시절에 노동력이 없는 경우를 생각하여, 가족과 씨족 공동체 안에서 능력있을 때 일하며 노동력없는 이들을 먹여 살리고, 스스로 노동력 없을 때 도움을 받아서 산다. 사적 소유가 없는 작은 공동체에서 남의 것을 훔친다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도와서 살아가고 또한 삶의 과정 전체에서 노동과 필요가 상부상조로 배치되고 분배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배중률은 언어 소통에서, 이 말투와 판단(명제)은 맞기에 이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저 말투와 저 판단은 논리적 과정에서 위반되기에 행동을 하거나 함께 일하게 되면 어긋나거나 질서 파괴가 이루어 질 수 있기에 수정 또는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배중률이 공동체 삶의 확장에서 하늘과 땅을 소유할 수 없듯이,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소유 없는 공동체와 달리, 공동체가 확장되고 생산력(분업)도 생산량도 많아지면서 자연의 위험에 대비하고 외부의 적들에 공격에 대응한 군사들도 필요하게 되면서 공동체 안에서 체계를 갖추고, 이를 총괄하는 우두머리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동체의 체계는 중한 것과 먼저인 것(중경과 선후)에 따라 실행하는 방식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중경과 선후를 공동체에서는 평의를 거쳐서 평결을 내리고 합의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급박한 천재지변과 또는 외적의 급습에 대비하는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의 필요에 따라 배치의 질서가 위계적 질서로 가는 것이 편리하고 안정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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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상부상조 하는 방식으로 함께 산다는 점에서, 또한 타인의 또는 기술의 전승의 덕분으로 산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냈다. 이런 공동체의 사유에 말 그대로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를 걸쳐서 몸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의 도구발달은 전혀 다른 공동체 상황을 만들었다. 동일생산물의 다량제작이라는 거푸집의 발달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금속들을 다룬다는 것은 생산력 뿐만 아니라 도구/무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도구의 소유를 개인의 능력으로 착가하는 이들이 배중률을 심는다. 나 이외 다른 이를 믿지 않는다. 이 이기심은 자기와 달리 생각하고 다른 발명과 창안을 배제한다. 이런 관계들 두 질서 사이에 모순이라고 하며 모순률을 들이 민다. 그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승된 지식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자기의 것으로 여긴다. 이 배제를 믿게 만든 신앙이 유일신앙이다. 다른 질서가 있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스스로 체계와 통치에서 상층에 있다고 여긴다. 인간위에 인간, 인간 밑에 인간을 만드는 사고가 고착되어간다. 그럼에도 모순을 해소하고 변증법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 간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공동체에서는 배중률이라는 것이 착각과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우주라는 세계에서 자연의 발생은 언제나 여러 갈래였고, 각각의 길들은 터전에서 여러 삶의 방식들을 표현한다.
질서는 하나의 질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질서가 있다. 한 질서에 비해 다른 질서가 배제되거나 모순된다고 하면서 자기 동일성만이 진리이고 덕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속에 탐욕과 오만이 스며들어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들을 만들어가면서, 타인의 삶과도 함께하면서 배치와 배열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회이고 국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일률과 배중률에 세뇌된 상층은 다른 질서를 나쁜 것으로 또는 악마로 몰아갔다. 이런 놀이에서 가장 나쁜 사례가 브루노를 산채로 화형 시킨 것이다. 이 치졸한 부류는 1889년에도 브루노를 단죄하였으며,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화두는 여전히 유일 신앙자들에게는 배중률에 속한다. 인간의 스스로 아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동일률과 배중률이 삶에서 필요인가 또는 다른 인간을 도구로서 개돼지 취급의 지식인가? 인간이 자연과 하늘의 이법을 정립할 것인가는 선문답처럼 남아있다. 나 이외 다른 것(똥짝대기)을 믿지 말하는 화두는 불교에서 이미 오래 전에 불성이 똥짝대기에도 있다고 여겼고, 그리고 서양사상사에서 12세기에 유명론에 의해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으며, 의식과 인식의 주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다는 이신론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인민이 주체화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시대에서는 유일신앙의 화두를 아편쯤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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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배우는 하나 더하기 하나, 한 점과 다른 점을 잇는 가장 바른 선은 하나다 라고 하는 상식은 오관을 통한 지식이다. 오관을 넘어서 의식이 다루는 지식은 근대 이래로 여러 갈래이다. 동일률과 배중률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은 상층의 원리와 공리가 지구(터전)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그 믿음은 그리스어로 플라톤이 쓴 피스티스(억측)이었으며, 번역 상으로 견해이며, 영미 철학에서 믿음이라 한다. 이런 믿음은 더 이상 묻지 않은 선천성으로 진리는 통일성을 갖고 동일률에 근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였다. 경험론의 믿음에는 삶의 공동체에서 감정과 감화가 있고도 한다. 이 시대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서양이 중국을 알면서 놀란 사실이 있다. 종교개혁이후로 카톨릭이 자신의 내부에서 불화와 반대에 부딪히면서 이방지역(다른 문화지역)에 종교전파를 위해 군대식으로 만든 제수이트들이 중국의 문화를 보았다. 그들이 놀란 것은 유일신앙 없이도 도덕과 사회를 잘 건설하였던 역사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구 안에서 문화들이 통일성을 갖는가? 서구는 원리와 공리의 학문이 전지구적이라는 문명을 들이대며, 다양한 문화에 대해 문명의 통일성이란 측면에서 서구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전지구적으로 유일신앙 밑에다가 식민지들을 만들어 가려했다. 이 탐욕과 오만에는 철학사적으로 사적 소유의 인정과 위계질서에서 공동체의 질서 위에 유일신앙의 질서가 있다고 한다. 이 무지몽매한 질서가 하나이며, 다른 질서는 모순이며 배제이며, 불온세력이라며 악마화하고, 자신들의 망상을 감추려 빨갱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에서 유일신앙에 반대하여 생긴 소비에트와 중국에 대해 우월권을 행사하기 위해, 미국의 패권 제국이 20세기 후반 내내 해왔던 수법이다. 21세기에 뭔가 달라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을 미국이 굴복시키려고 하다가, 제국주의 붕괴처럼 미국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부상조로서 터전을 가꾸어가는 방식(공유질서)과 하나의 질서 아래 다른 문화를 배척하고 한 문명 속에 굴종시키려는 방식(패권질서) 사이에 차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배제의 원리로서 윤석열이 계엄을 하듯이,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고 한다. 달리 사유하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는 윤석열에 항쟁하는 반정권세력인 셈이다. 다양성은 전지구적으로 퍼지고 있다.
여전히 문화의 다양성을 만든 것은 지구라는 터전이 통일성이라기보다 다양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가 먼저가 아니라, 자연과 생태계가 먼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찍이 벩송은 한 질서의 규정과는 다른 질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 질서가 다른 질서들을 거짓 또는 나쁜 질서라고 보는 것이, 벩송의 부드러운 어법으로 유일신앙이 정태적 종교로서 착각이라고 한 것이다. 착각은 자기 탐욕과 오만한 자식 그리고 배중률의 신에 예속되어 망상에 빠지는 것이고, 그 망상을 피스티스 또는 신앙으로 받아들여 착란에 빠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구에서 밀농사를 짓는 문화과 쌀농사를 짓는 문화의 차이에서만이 아니고, 날씨에서 더운 열대 그리고 온대와 난대 사이에서 문화의 차히는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우선이라는 것이 생태계의 섭리이다. 벩송이 말한다. 사는 것이 먼저이고(primum vivere) 그리고 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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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말했지만, 유일신앙의 권세, 국가주의의 권력, 앵글로색슨 철학의 권위의 세 패거리를 만들어 세상사를 지배하려하며, 로마제국이 식민지들 다스리듯이, 제국을 형성하려 했다. 그게 쉽지 않아서,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금본위를 그 다음 기축통화로,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지역 전쟁으로 그리고 21세기에는 무역으로 지배하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제국이 여전히 자연에서 인간이 주체로서, 패권으로서 하늘과 땅을 인간의 지배하에 둘 수 있다는 신앙에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그런 오만한 인간중심주의 신앙과 차히를 생성하고 발산하고 있다. 신앙에 체계화든, 사회의 조직화든, 지식의 통일화이든, 인간이 만든 것이지 신의 계시나 은총이 아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터전에 맞게, 사건들의 연관에 평의와 평결에 의해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타자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 주체화이다. 아직 인간의 우주 안에서 지구의 터전에서 주체화가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체화는 지구의 터전에 따라 다르다. 어쩌면 20세기에 소련과 중국을 통하여 실험과정을 겪으면서, 미국 패권의 제국과 다른(차히)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성립에서, 이기심을 주장하는 문명의 도구 사용에 대한 지식이 49퍼센트쯤, 상부상조와 더불어 자연의 섭리와 함께 생태계를 따르면서 살아가는 의식이 51퍼센트가 되어 갈 것 같다. 이런 사회의 건설에서 전자의 카르텔에 젖어서 김건희와 윤석열 집단은 자기들만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망상과 착란에 젖었다. 인민은 그렇지 않다고 광장에서 불빛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소수의 분파적 지식 인간이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를 만든다. 상층이 아무리 인민을 개돼지 취급한다고 해도, 인민이 합의하는 평의와 평결은 인민의 최종심급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단지 국회, 정부, 사법의 고위직위자들이 자신들이 판단과 심판이 최종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의 누리소통은 인민의 최종판결 없이는 어떠한 질서, 법칙, 원리, 공리도 현상화에서 사건들에 그들의 뜻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체화는 우선 같은 입말을 쓰는 8천만의 방식에서 공통감각으로서 상식과 생명의식으로서 공통 감정과 공감이 세 패거리의 야합보다 먼저 기본으로 깔려 있다(밑에 있는 것이 실체 sub-stance 라는 개념이다)는 것이다.
패거리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들의 지배가 당연하고 필연적이라고 여기며, 불온세력이니 중국추종자니, 반국가적 빨갱이니 하면서 배중률에 의한 자기 동일성에 논의 또는 문답을 하면서도, 그 말을 하는 그네들이 파라독사에 빠졌다는 것을 젊은이들은 잘 안다. 젊은이는 과거의 어떤 시대와 달리 상층의 지배 사고와 차히나는 주체화 과정의 흐름에서 트래픽 덩어리의 연관들을 보고 있다. 젊은 세대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달리 사유하고 문명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의 차히를 생산하고 창안하는 시대 속에 있다. 과거에는 상층이 인민에 반란이란 표현을 섰지만, 거꾸로 누리소통 시대에는 김건희와 윤석열이 반란세력이라는 것을 안다.
세계사에서 공동체사회를 만들려는 국가들이 반세계적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과 공포를 만드는 미국 제국의 패권이 반세계적이라는 것을 안다. 일부사상가들은 18세기를 계몽의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층이 백성과 대중을 교화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프랑스 18세기는 “빛들 시대”라고 하는데, 빛은 중심에서 밖으로 무한히 다양하게 발산한다. 그 세기의 사상가들은 탈종교의 시대였으며, 계몽이 아니라 인민이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그 시대에 똑같은 단어(pitié)가, 상층은 민중에게 동정을 배푼다고 하였고, 빛들의 사상가들은 인민이 인민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고 한다. 동정과 연민의 용어 사용의 변화가 있듯이, 인간이 사회를 조직화하면서 위계를 모방 속에 사는 백성들은 서로간에 전쟁으로 보았던 홉스 같은 사회권(자연권)을 주장하는가 하면, 루소는 인민들 사이에 연민이 있어서 자연권을 지니고 그 권리를 국가권력에 양도하지 않고서, 권력이 인민의 의사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를 소환하거나 파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화국은 동정이 연민으로 사회권이 자연권으로, 반란이 항쟁(발현)으로, 같은 입말이라도 사용방식이 바뀌는 시절에 대혁명이 도래했으며, 국가권력인 왕을, 교회권력인 일부 성직자를 단두대에 보내면서 공화국을 세워보았고, 반동들에 의해 왕정으로 되돌아갔더라도 인민의 의식화와 주체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공화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민의 저항에 대해 권력의 반란이라는 12월 3일 이후, 사법권에서도 반란수괴를 파면시키는 4월4일을 거쳤다. 동학혁명으로 한글이 전면에 나온 1895년 이래로 그리고 1987년 가로쓰기와 순 우리말쓰기는 인민의 주체화 과정이었다. 젊은이들의 손바닥에 놓인, 부처님 손바닥처럼, 누리소통의 도구 속에서 입말만이 아니라 그림과 노래까지도 리좀이 흐르고 있다. 고착적이고 고정된 유일신앙의 사고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새로운 소통도구와 입말이 그 소임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는 새로이 조직화(3.3.3,3)의 발현과 창안과 흐름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 것이다. 영웅, 호걸, 성인, 군자가 세상을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로 등장하면서 스스로 인물과 덕후 만들기(생성, 되기)의 시대에 있다. 이 만들기에는 노력과 내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노력과 내공을 이루려는 젊은이들 조직을 창안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자발성으로 주체화를 이루는 시대가 왔다.
삶이 먼저이며, 혁명은 여전히 흐른다. 흐름에서 즐겁게 잘 흐르는 트래픽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젊은이의 멋있는 삶이 될 것이다.
(5:28, 58OLI) (6:06, 58O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산책34-미분적 차이로서 진 무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산책34-미분적 차이로서 진 무한
1)
헤겔의 부정성 개념이 추상적 부정성이 아니라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특정한 부정성이란 “그 자신이 유래한 것을 부정하는 무”(정신현상학, GW 9, 57)를 의미한다.
부정적 무한판단이나 그것의 변형인 모순 판단에서 부정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토대 위에서 있는 개별적인 것의 부정 즉 특정한 부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무한한 부정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그런 개별적인 것의 일반적 토대이다. 즉 필연적 속성(p or q or r..)의 일반적 토대가 곧 비X가 된다.
질적 무한판단은 세 가지 형식을 갖는다 했다. 첫 번째 형식이 부정적 무한판단 즉 속성을 반복적으로 부정하는 형식이다. 즉 -p & -q & -r… 등이다. 두 번째 형식은 모순 판단의 형식이다. 위의 무한판단은 -p & -(-p) 즉 -p & p의 형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판단은 긍정적 무한판단 형식이니 -(p or q or r..) 또는 (p or q or r..)을 X라 할 때, 비X라는 판단 형식이다.
이렇게 긍정적 무한판단이 성립하려면 비X 곧 일반적 토대가 어떤 긍정성을 지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긍정적 토대가 있는가는 의문이다. 긍정적 무한판단이 의미를 지니려면 그와 같은 비X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가능성이 있을까?
예를 들어 ‘불멸적 존재’를 생각해 보자. 언뜻 생각하면 이 ‘불멸적 존재’는 마치 ‘붉은 것’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언어적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멸적 존재’는 영원한 존재자인데, 우리는 경험적으로 영원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비X란 무한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부정을 그저 언어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고, 그런 비X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 철학에서 긍정적 무한판단을 허용하는 사람은 칸트와 헤겔 두 사람일 것이다. 긍정적 무한판단을 허용하는 칸트는 그 의미를 제한성에 두면서 감각의 정도 즉 내포량에서 0과 1사이에 있는 것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내포량은 양적 범주로 질적 범주 속으로 양적 범주를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반면 헤겔의 경우 긍정적 무한판단을 허용할 때 비X 즉 일반적 토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존재는 물론 ‘붉은색’이나 ‘짠맛’처럼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닌 관념적 존재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된 구절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관념성은 무한성의 질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관념성은 본질적으로 생성의 과정이며 따라서 현존으로의 생성과 같은 이행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관념성’이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를 들어 ‘색깔 일반’처럼 우리의 의식 속 관념의 세계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또는 ‘불멸적 존재’처럼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일반적 토대로서 비X를 그렇게 보는 철학자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헤겔적 사유는 아니다. 그렇다면 헤겔이 관념적 존재라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2)
여기서 우리는 비X로서 일반적 토대라는 개념에 관해 사유가 부딪힌 당혹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금은 두 가지 필연적 속성을 지닌다. 짠맛과 입방체는 서로 다른 속성이다. 한 사물 즉 소금에 이런 두 가지 대립된 속성이 내재하더라도 여기서 어떤 일반적 토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런 속성이 소금의 서로 다른 장소에 있어서 혼합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 반박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엄밀하게 말하자면 짠맛이 있는 곳에 입방체는 없고 입방체가 있는 곳에 짠맛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금은 짠맛이며 동시에 입방체다. 즉 양자는 소금의 서로 다른 속성이지만 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궁여지책으로 이른바 ‘다공성[porositaet]’ 개념을 제시했다. 어떤 속성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다른 속성이 그 구멍에 끼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도 아니고 어떤 질적 속성이 구멍이 뚫린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으며, 설혹 그런 구멍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더라도 그리고 그 구멍이 미세해서 두 가지 속성이 마치 혼연일체가 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히 양자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을 뿐이다. 그 구멍에는 어떤 속성은 없고 다른 속성은 있다.
어떤 사물에 우연성은 혼재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그 우연성은 어디까지나 그 사물에 외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다른 속성이 한 사물에 동시에 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결국,사물의 본질 즉 필연적 속성의 일반적 토대란 없다고 결론 내려야 할까?
3)
어떤 일반적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속성과 저런 속성이 뒤섞여 혼연일체가 된 것이 아닐까? 반죽은 아무런 형상이 없으므로 이런저런 형상으로 빚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물의 일반적 토대를 사물의 본질로 보기보다 이런 반죽과 같은 것으로 보면 어떻겠는가?
일반적 토대가 이런 반죽과 같은 것이라면 즉 이 속성도 아니고 저 속성도 아닌 것이라면, 어떤 사물의 고유한 본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플라톤의 생각은 이 반죽 밖 외부의 힘에 의해 그 반죽에 부여된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그 사물의 본질로 부여된 속성이 곧 형상이고 반죽은 질료가 된다. 사물에 아무 속성이나 부여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아무렇게나 부여된 속성은 반죽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반죽에 이미 있는 속성 중의 하나가 부여된다. 이것이 곧 플라톤의 형상 질료론이 된다.
그러나 플라톤적 생각은 곧 반박에 부딪히는데, 한 사물에 여러 속성이 등장한다면 그 가운데 어느 속성이 사물의 형상이 되는지 가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끌어들인다. 한 사물에 어떤 형상이 부여된다면, 그 형상은 그 사물의 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형상은 최선의 목적이라는 것에 종속한다. 하지만 선의 이데아를 끌어들인다면, 악의 이데아를 끌어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런 플라톤적 사유의 난점을 벗어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적 토대를 어떤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여긴다. 즉 여러 속성은 마치 생명체의 지절과 같이 서로 관계하고 있으며 마치 지절의 통일적 연관이 생명이듯이 사물 속의 다양한 속성의 통일적 관계 자체가 곧 일반적 토대이며 사물의 실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사물에 내재하는 여러 속성 가운데 어떤 하나의 속성이 그 사물의 본질에 해당한다고 보기보다는 사물의 본성은 이런 여러 속성의 관계에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만일 이런 속성의 관계가 유지되기만 한다면 그 사물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니, 이런 관계는 지속적 존재 즉 실체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외부의 힘이나 선의 이데아를 전제하지 않으므로 단순하지만, 속성의 관계라는 말이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여러 물질이 서로 관계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책상은 다리와 등받이 엉덩이 받침이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외면적 공간적 관계므로 쉽게 표상된다. 그런데 소금에서 짠맛과 입방체도 그런 관계를 가질까? 속성의 관계란 외면적 공간적 관계일 수는 없는데, 과연 어떻게 속성은 관계하는 것일까? 더구나 이런 속성이 서로 대립적이라면 대립적인 속성이 서로 관계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4)
헤겔의 사유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근대 과학의 성과를 철학적 사유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제 여기서 비X 즉 일반적 토대에 관한 헤겔의 사유를 정리해 보자.
속성의 관계라는 말은 자연법칙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낙하법칙은 시간과 거리의 관계다. 압력은 부피와 온도의 관계다. 그러므로 속성의 관계란 속성이 가진 일정한 법칙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이런 법칙은 어떤 속성과 다른 속성 사이의 일정한 연관이 경험을 통해 밝혀지면서 나온다. 그러나 경험은 하나의 속성과 다른 속성 사이에 존재하는 상응 관계만을 표현할 뿐 실제로 여기에 어떤 끈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보여주지 않으며 왜 그런 관계가 나오는 것이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미적분학은 이런 법칙이 지니는 관계를 설명해준다. 법칙에서 두 속성 사이의 관계는 미분적 차이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미분적 차이가 전개되면서 어떤 곳에서는 이런 속성을 다른 곳에서는 대립하는 속성을 드러내지만, 이미 어떤 속성이 있는 곳에 대립하는 속성이 잠재되고 이에 대립하는 속성이 있는 곳에 그런 속성이 잠재되어 있다.
미분적 차이라는 개념은 이제 헤겔이 말하는 비X 즉 일반적 토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비X란 속성 p q, r의 토대가 되는 미분적 차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면서 그런 속성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런 미분적 차이는 사물에 내재하는 일반적 토대, 본질이며 그러나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법칙적 관계에 내재하는 것이므로 관념적인 것이다. 헤겔이 무한성을 관념적이며 동시에 생성이라고 규정할 때 이 생성은 바로 미분적 차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긍정적 무한자(진 무한)s , 비X= 일반적 토대, 미분적 차이를 헤겔은 다시 ‘대자 존재’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범주가 출현한다. 여기서 대자 존재란 자기를 산출하면서 그 결과 자기가 자기에 대해 있다는 말이 된다. 대자 존재는 이렇게 자기를 산출하는 것에서 성립한다. 미분적 차이야말로 자기를 지속해서 산출하는 것이므로 대자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대자 존재가 출현하면서 논의의 차원은 새롭게 전개된다. 존재론 2장 현존은 2절 3항에서 무한성을 다룬 다음 2장의 마지막 절인 3절에서 대자 존재를 다룬다.
[신간안내] 『기측체의 역해』(최한기 지음·이종란 편역|동연출판사|2025년 4월 24일) [한철연 소식]
『기측체의 역해』(최한기 지음·이종란 편역)
한철연 이종란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이종란 회원은 박사학위논문 「최한기 윤리사상 연구 : 경험중시적 방법론을 중심으로」(1996) 이후로 최한기의 철학에 관련한 여러 연구 업적을 제출해왔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철연 <근현대 삶 사회 분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있으며 전통철학과 근대사상의 영역을 아우르는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최한기의 대표작 『기측체의』가 국내 처음으로 완역 출간됨에 따라 최한기와 한국의 근대 철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전공자 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아래는 『기측체의 역해』소개입니다.
『기측체의(氣測體義)』는 조선말 철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 초기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 저작이다. 그렇더라도 거기서 다룬 세계관과 인식론은 말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 용어는 생소하고 내용은 독창성이 있다. 이것들은 원시 유학, 주희 성리학, 양명학, 제자백가 사상, 전통 의학, 무엇보다 기의 철학 등에서 합리적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서양 과학과 종교 그리고 그 철학과 신학이 혼합된 서학의 장점과 서로 융합하면서 나온 저자 철학의 표면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한국철학을 전공한 이종란(李鍾蘭)이 옮기고 주석과 해설을 덧붙여 『기측체의 역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 책을 옮기기 위한 옮긴이의 학문적 여정과 최한기 학문의 성격은 서문과 해제에 상세히 드러나 있다. 옮긴이가 밝힌 철학사적인 의의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19세기 우리 철학을 밝힘에 있는데, 옮긴이는 최한기(이하 저자)가 앞선 문헌에서 인용한 문장 하나, 낱말 하나하나를 일일이 추적하여, 원래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어떻게 자기 철학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하였는지 밝혔다. 곧 인용한 이전 문장 속의 글자를 삭제하거나 바꾸거나 글자를 보완하여 사상을 어떻게 자기화하였는지 밝혀냈다. 이러한 작업은 기준이 되는 저자의 주체적 철학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우리 철학을 만들어 감에 있어서 이전의 사상자료를 섭렵하는 가운데 자연히 동서 철학이나 사상의 교섭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곧 서양 고대와 르네상스 시기까지의 과학이나 지리만이 아니라, 서학 서적 속에 녹아든 스콜라 철학과 신학, 그리고 그 속에 깃든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과 인식론, 범주론, 목적론적 형이상학, 그리고 자연학 등이 숨어 있는데, 옮긴이가 해당하는 곳에서 일일이 밝혔다. 이는 당시 천주교 박해 때문에 드러내 놓고 논의할 수 없어서 낱말과 문헌의 전후 맥락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알 수 있는 사항이다. 마지막 하나는 형이상학과 비물질적 초월적 존재를 비판한 데 있다. 주희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요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와 속성의 범주를 활용해 태극(太極)인 리(理)의 존재를 비판하였고, 또 서학에서 말하는 초월적 신의 존재를 유학 특히 주희 성리학의 전통에서 따르는 방식을 적용하여 비판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따른 동서의 장점도 있다. 전통에서는 초월적 신을 거부하고 인도(人道)를 따르는 유학의 합리적 요소를 취하고, 서학에서는 과학적 사유와 경험과 추론〔추측〕을 중시하는 인식론의 수용과 강조에 있다. 옮긴이는 최한기 철학의 현대적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로 새로운 상식으로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철학이며, 둘째로 비판과 거부의 철학이자 적어도 사상적 저항이라 보았다. 그리하여 말기 증세를 보인 조선 사회에 새로운 세계를 전망하고 맞이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철학의 해석이 시의성과 적절성을 갖추면 현대 우리 철학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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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목차
역해자 서문 신기통(神氣通) 권1 신기통 서문神氣通 序 체통體通 신기통(神氣通) 권2 목통目通 이통耳通 비통鼻通 구통口通 신기통(神氣通) 권3 생통生通 수통手通 족통足通 촉통觸通 주통周通 변통變通 |
저자 이종란(李鍾蘭)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철학박사). 교직에서 퇴직한 후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낯선 지연씨의 인생철학』, 『서양 문명의 도전과 기의 철학』, 『민족종교와 민의 철학』(공저), 『기란 무엇인가』, 『율곡의 마음공부』, 『미래를 향한 율곡의 가정교육』, 『의산문답』, 『최한기의 운화와 윤리』, 『전래동화·민담의 철학적 이해』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기측체의 역해』, 『운화측험』, 『공제격치』, 『왕양명실기』, 『주희의 철학』(공역), 『왕부지 대학·중용을 논하다』(공역), 『율곡의 상소문』,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이 있으며, 편역서로는 『뜻을 세워라』, 『배워서 사람 되기』가 있고, 그 외 여러 논문과 다수의 철학동화, 아동·청소년을 위한 저술과 번역서가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33-진무한(眞無限)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33-진무한(眞無限)
1)
앞에서 무한성에 관한 두 가지 개념을 살펴보았다. 즉 악무한(惡無限)과 무한진행이다. 무한진행이 무한을 이행하는 운동 중에서 파악한 것이라면, 악무한은 이런 운동의 끝에 도달하는 결과로서 무한자를 말한다.
이런 악무한과 무한진행은 형식적으로 보면 동일하다. 그것을 판단 형식으로 표현하면, 소위 부정적 무한 판단이다. 즉 “이것은 -p & -q & -r … 등”이다. 여기서 p, q, r… 은 어떤 것의 속성을 표현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런 부정적 무한 판단 형식은 단순한 성질을 가지고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노랑도 아니며 … 등” 그러나 헤겔에서 악무한과 무한진행은 어디까지나 어떤 것의 속성과 관계해서만 이루어진다. 즉 “소금은 짠맛도 아니고 입방체도 아니고 … 등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성질로 이루어진 무한 판단에서는 어떤 성질이 그 자체에서 자기를 넘어가는 무한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흰색이라는 색깔은 사물 즉 소금에 대해 외적인 성질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성질의 부정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일어난다. 소금이 흰색에서 자색으로 변하더라도, 이런 변화는 소금의 규정과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속성의 경우에서는 다르다. 하나의 속성은 다른 속성과 그 자체에서 관계한다. 왜나하면, 한 사물에 두 속성은 그 사물에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속성이 하나의 사물에 필연적으로 속하려면 그것은 서로 교차하고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어떤 속성은 이미 그 자체에서 자기의 부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유한한 것으로 규정되고 그 자체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무한성을 지니면서 무한진행과 악무한이 발생한다.
2)
악무한, 무한진행을 넘어서 헤겔은 긍정적 무한성 즉 진무한(眞無限)으로 발전한다. 헤겔은 진 무한의 개념을 무한진행의 개념에서 끌어내고 있다. 무한진행은 사실 이미 유한성과 무한성의 통일이다. 즉 유한성은 이미 자기 부정성을 지니고 있어 자기를 넘어가니 무한성을 내포한다. 거꾸로 무한성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니 자기 관계하는 것 즉 하나의 유한자다.
그러나 무한진행에서 이런 통일은 동시에 유한자와 무한자의 직접적인 대립 속에 들어있다. 유한자는 직접 존재하는 것이며 무한자는 직접 존재하는 것과 구별된 또 하나의 직접 존재하는 것이니 서로 대립한다. 서로 내적으로 통일된 것이 외적으로 서로 대립하므로 여기서 통일과 대립이 서로 관계하는 방식이 곧 미끄러지는 방식이다. 즉 “어떤 것은 p이었다가 p가 아니게 되며, (-p는 q므로) q이었다고 다시 q가 아니게 되고 (-q는 곧 r이므로) r이었다가 다시 r이 아니게 된다… 등이다.”
헤겔은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이렇게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또는 교체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때 이것을 개념의 외적 실현이라 한다. 무한진행은 통일이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출현하는 것이지만, 이미 이런 무한진행 속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침내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왜곡된 모습을 제치고 자기의 모습을 진정하게 드러내게 되면 그것이 곧 진정한 무한성이 된다.
“무한진행 속에서 처음에 양자 즉 무한자나 유한자는 부정된다. 양자는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를 넘어간다. 두 번째로 양자는 또한 구별된 것으로서 차례로 각자 구별된 것으로 독자적으로 그정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규정을 비교하면서 파악하니, 이 비교 속에서 즉 외적인 비교 속에서 두 가지 고찰방식을 분리한 채로 파악한다. 즉 유한자와 무한자를 양자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는 동시에 양자를 각자 독자적으로 받아들인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유한자와 무한자의 부정은 무한진행 속에 정립되는 한 단순하며 따라서 서로 분리되어 다만 차례로 뒤따르는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지양은 부분적으로는 다만 외적인 사건이며 계기의 교체로서만 존재하며 부분적으로는 통일로서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3)
그렇다면,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이 무한진행에서와 달리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헤겔은 무한진행이 ‘계기의 교체’라면 이 진정한 통일성은 ‘자기 완결적 운동’이라고 한다. 헤겔은 자기 완결적 운동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완전한 자기 완결적 운동이다. 즉 출발점이었던 것에 도착하는 운동이다. 출발점이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 발생하니, 유한자가 반복된다. 그와 같은 것은 자기 자신과 합일한 것이며 다만 자기를 자기의 피안을 통해서 다시 발견한다.”(논리학 재판, GW 21, 134)
“양자는 즉 유한자와 무한자는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로 되돌아오는 운동이다. 양자는 다만 자기 내에서 매개로서 존재하며 양자의 긍정은 양자의 부정을 포함하니 부정의 부정이다.”(논리학 재판, GW 21, 135)
“양자는 다만 자기의 대립물과의 매개를 통해서 그러나 본질적으로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의 지양을 매개로 해서 출현한다는 사실이다.”(논리학 재판, GW 21, 135)
형식상으로 보면 이 운동은 유한자가 무한자를 매개로 해서 다시 유한자로 돌아오는 것이다. 사실 무한진행에서도 유한자는 무한자를 매개로 해서 다시 유한자로 돌아오니, 이미 무한진행도 진무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진무한을 이런 무한진행과 구별한다. 무한진행은 진정한 통일이 왜곡된 표현이고 진무한만이 진정한 모습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라는 말이다.헤겔은 이 차이를 설명하면서 무한진행이 직선으로 표상할 수 있다면 진무한은 원으로 표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4)
지금까지 미끄러지는 직선 운동이 갑자기 자기로 되돌아오는 원운동으로 전환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다시 처음에 제시했던 무한 판단의 형식을 상기해 보자. 무한 판단 형식은 다음과 같다.
① 부정적 무한 판단: S=-p & -q & -r
② 모순 판단: S=-p & -(-p) = -p & p
③ 긍정적 무한 판단: S가 p or -p라면, S=비x
이 세 가지 무한 판단 가운데 ①이 무한진행을 표현한다면, ②가 곧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으로서 무한성을 의미한다. 소금은 짠 것도 아니고 짠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여기서 ‘짠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는 표현은 헤겔이 말한 자기의 부정(대립물)을 매개로 자기로 돌아온 것이니, 자기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무한 판단 형식이 ①에서 ②로 바뀌는 것은 단순히 형식인 변환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q,r …등’이 ‘-p’로 총괄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정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적어도 경험을 통해 새로운 발전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사물은 무한히 많은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대립적인 속성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험이다. 전자가 속성의 상이성에 관한 경험이라면 후자는 속성 모순에 관한 경험이다.
사물의 모순에 관한 경험은 정신현상학에서 하나의 인식 범주가 다른 인식 범주로 이행하는 매개가 된다. 그 점에 관해서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에 대한 그 자체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어떤 의식은 이미 하나의 범주를 지니면서 대상을 선험적으로 구성한다. 그런 구성에서 의식은 불가피하게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되는데, 헤겔은 이런 물 자체를 의식에 대한 물 자체라 하였다. 그것은 기존의 인식 범주로는 더 이상 규정되지 않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식에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모순적 경험에 부딪힘으로써 인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인식 범주를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논리학에서 하나의 범주는 마침내 모순적인 경험에 부딪히면서 자기 내로 반성하여 새로운 범주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험의 발전을 통해 인식 범주가 변화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마침내 질적 범주에서 모순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범주로 나가는데, 그 범주가 무엇인가?
“실재성과 관념성의 관계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대립이 파악되는 방식을 보자면 유한자는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무한자는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관념성은 무한성의 질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관념성은 본질적으로 생성의 과정이며 따라서 현존으로의 생성과 같은 이행이다.” (논리학 재판, GW 21, 137)
헤겔은 이런 진무한의 판단 형식에 대응하는 범주를 우선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생성 그리고 대자 존재라는 개념으로 전개한다. 그러면 모순의 경험을 통해 마침내 출현한 진 무한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진 무한을 관념적인 것, 생성, 대자 존재로 규정하는지를 살펴보자. 헤겔이 말하는 대자 존재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개념과 일치하는데, 헤겔이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영에 서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나의 소설로 한국의 철학을 말한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나의 소설로 한국의 철학을 말한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이종철 지음|대양미디어|(2025년 4월 8일)
나의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대양미디어, 2025)을 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이런 사적 체험의 보편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간단하나마 리뷰 쓰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명백히 나의 소설을 오독한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법학도인 내가 철학에 눈을 뜨면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철학 공부를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 그런 점에서는 내가 다녔던 대학의 철학과 분위기가 배경으로 나오고, 그 당시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 이야기들도 많이 나온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소설은 개인의 사적 체험을 넘어서기 힘들고 그만큼 보편적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나의 공부가 개인적 공부가 아니라 1980년 광주항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시대와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고, 때문에 그 시대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또 그 시대의 갈등 해결에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철학 공부는 결코 책상 위에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현실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고, 이러한 연관 속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연결된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는 한국의 지적 르네상스라고 할 1980년대에 등장한 다양한 이론들을 교통정리하면서 그 한계를 지적하는 이론적 쟁투의 흔적들이 다수 담겨 있다. 지금 보아도 이 시대 이론가들을 포함한 철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은 대단히 치열했고, 고민의 내용도 깊이가 있었다. ‘한국헤겔학회’라는 연구 단체의 탄생은 이런 시대 연관 속에서 이루어진 필연적 산물이었다.
1980년대 후반들어 시대 변혁에 철학 연구자들이 좀 더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한국헤겔학회’와 서울대 ‘사회철학연구실’이 통합을 위해 노력하면서 마침내 1989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탄생했던 것이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탄생은 한국철학사에 두고두고 남을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면에서 학회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제도권 철학자들의 관심과 주시를 받았고 지원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경향 각지로 철학회들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 그들 단체들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간에는 상당한 의미 차이가 있다. 과연 한국의 어떤 철학이 이렇게 깊은 시대 연관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위해 고민했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소설을 저자 개인의 사적인 의미로 제한하고, 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철학 소설에 대해 아무런 리뷰도 하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시대에 비해 지금의 철학자들은 철학을 사적 이해의 한계에 가두어 놓는 것은 아닐까?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 철학은 단군 이래 최대의 활황을 이루고 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경향 각지로 수십 개의 철학회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찍어내는 철학 잡지들도 적지 않고, 한 해 생산되는 철학 논문들도 수없이 많다. 이런 현상을 인문학으로까지 확대한다면 그 규모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활황 국면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가 음울하게 확산되고, 대학의 철학과가 폐지되고 공동화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철학자들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주제화하지 못하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철학자들 자신이 자신들의 삶과 시대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허구한 날 바깥의 철학을 수입하고 해석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한 결코 이런 상황은 달라질 수가 없다. 동료 학자가 쓴 책을 읽지 않고, 읽어도 모른체하고, 더더구나 리뷰 하나 쓰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자기 철학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저 원숭이 철학과 앵무새 철학만 난무하고, 오퍼상 철학과 고물상 철학으로 자기 비하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한국 철학 한다고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겠는가?
저자 이종철 프로필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은퇴를 했고,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브레이크뉴스>와 <저널인뉴스>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에세이철학’ 분야를 새로 개척하고 있고,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 –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위하여》와 《일상이 철학이다》가 있고,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문명의 위기를 넘어》, 《사북항쟁 44주년》등이 있으며, J. 이폴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등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