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2]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2]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② –
□ ‘68’ 이전의 시기를 우선 살펴본다면, 선생님의 세대에 속한 독일 철학자 동료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무엇입니까?
■ 돌이켜보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나와 동료 철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정 어린 친밀감이나 일정한 거리감을 결정짓는 데, 전문적‧개인적 자질 외에도 하나의 요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적 성향에 내재한 정치성이었습니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의 정치적 분열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보다 급진적인 돌파구, 새로운 시작을 바랐던 사람들과—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헤르만 륍베(Hermann Lübbe)인데—지배적인 반공주의에 전적으로 기대어 나 같은 사람을 ‘건전한’ 혹은 ‘방어 가능한’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간주했던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었습니다. 뮌스터에서는 일종의 마지못한 모더니즘[민주주의를 대놓고 거부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수용하면서 내심으로는 권위주의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태]의 정신 속에서 칼 슈미트(Carl Schmitt)와 접촉하는 일이 재빨리 재개되었습니다. 냉전이라는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68혁명 운동의 양극적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헌법은 좌우 모두 동의했지만 그렇다고해서 보수 진영이 좌파 동료들을 내부의 적으로 의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파를 반박할 때 부드러운 말투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치 시절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에서 비롯된 이 공개적인 논쟁은 사실 학생운동이 전개되면서 격화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 그 편집장 요아힘 페스트(Joachim Fest)에 의해서도 부추겨졌으며,1 철학뿐 아니라 많은 인문학 분야에서도 우리 세대 사람들 사이에서, 즉 우리 선생들이 아니라 우리 또래들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회학계는 귀국한 망명자들과 옛 나치들이 서로 맞서는 양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학계의 모임은 이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다. 루트비히 폰 프리데부르크(Ludwig von Friedeburg)의 주도로 1950년대 후반부터 매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남을 가졌던 산업사회학 중심의 ‘젊은 사회학자들’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뮌스터, 쾰른, 프랑크푸르트와 같이 정치적‧학문 정책적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대립하던 학계 진영들과는 달리, 자신들을 하나의 협력적이고 연대 의식이 있는 세대로 인식하였습니다. 이처럼 ‘학파들’ 간의 대립을 지나치게 극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각 진영의 입장 차이가 다양한 정치적 삶의 궤적들과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반드시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월하게 가능했습니다. 저는 학문적 경력 속에서 하인리히 포피츠(Heinrich Popitz), 랄프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 레나테 마인츠(Renate Mayntz), 라이너 렙시우스(Rainer Lepsius)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크리스티안 폰 페르버(Christian von Ferber), 크리스티안 폰 크로코우(Christian von Krockow) 같은 플레스너 학파 제자들과도 교류하였습니다. 물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과도 관계를 맺었는데, 이 분은 좀 더 독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 울리 베러(Uli Wehler)를 통해 저와 제 아내 우테(Ute)는—그 당시 학문적 친분은 부부 간에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곤 했습니다—정치사나 사회사 등 동시대의 역사 주제를 다루었던 역사학자들의 친밀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한스 몸젠과 볼프강 몸젠(Hans und Wolfgang Mommsen), 위르겐 코카(Jürgen Kocka),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빈클러(Heinrich August Winkler) 등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래의 모든 동료들은 학문 분야와 무관하게, 성장기 동안 하나의 역사적 단절을 경험했다는 사실에서 공통된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공통의 경험은 하나의 세대를 구성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서로 달랐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시대사 연구자들에 의해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저작들을 보면 그 점이 드러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의 역사학 및 역사이론에 대한 혁신적인 기여로부터 아무런 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독일의 전통을 더 이상 여과 없이 계승할 수 없다는 비판적 인식과, 새로운 시작이 불가피하다는 절박한 자각은 주로 자유주의적이거나 좌파 성향의 진영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 하지만 전후 시절 젊은 철학자들이 처했던 상황은 이후 몇십 년, 특히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에서 달랐던 것일까요?
■ 전후 세대 철학자들의 세대적 특징에 대해 고집스럽게 묻고 계시는군요. 저는 사실 그 세대가 우리 다음 세대, 이를테면 저희의 ‘제자 세대’와 그렇게까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희 세대는 좀 더 동질적인 교육 과정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문 분야의 세분화가 아직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같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중요했던 고전들은 공통적으로 동일했지요. 왜냐하면 저희는 1920년대의 철학적 거장들을 ‘스승’ 삼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현상학, 해석학, 철학적 인간학은 독일 관념론의 전통과 더불어 반드시 공부해야 할 분야였고, 칸트와 헤겔에서부터 딜타이,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쉘러, 플레스너, 겔렌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요한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학문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한 시대의 정신, 다시 말해 독일 철학이 마지막으로 ‘세계철학’의 지위를 가졌던 그 시기의 사상과 자연스럽게 접속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희는 그러한 ‘세계철학’이라는 이상과의 연을 끊은 첫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스승들의 고양된 관념론적 이상, 혹은 철학만이 [현실과 세계의 본질을 해명할 수 있는 고유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는 태도에서 이탈하였습니다. 단지 좀 더 소박한 작업을 했다는 것뿐 아니라, 철학에 임하는 자세 자체가 비판적 자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대적 태도는 심지어 아도르노나 가다머처럼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스승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누구에게는 약하고 누구에게는 더 강하게 드러났지만요. 게다가 저희는 독일의 전통적인 철학 커리큘럼에는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영미 철학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를테면 분석적인 논증 스타일,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 경험적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민감성, 사회과학에 대한 개방성 등입니다. 저희가 어느 정도 자기 주도적으로 수행했던 학습 과정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카르납과 빈 학파의 수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수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중 몇몇에게는 퍼스와 프래그머티즘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와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철학의 핵심 영역들에서도 서구[영미권]로의 개방이 일어나고 있었던 셈이지요.
□ 두 학기는 괴팅겐에서 그리고 한 학기는 취리히에서 공부한 후 본에서는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머물렀다는 점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본에서 철학 공부를 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점이 있었나요?
■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는 많은 우연한 일들과 몇 가지 의식적인 중요한 선택들로 이루어집니다. 괴팅겐에서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에게 지루함을 느꼈고, 그곳에서는 인간 관계도 얻지 못했습니다. 차가운 북부 지역보다는 라인강 인근의 본이 더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본에서 친구가 된 굼머스바흐 출신의 만프레드 함비처한테 본의 극장 그룹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매력을 느꼈죠. 이번에는 공부할 장소를 개인적인 이유로 선택한 셈이었어요. 그래도 에리히 로타커(Erich Rothacker)는 적어도 이름난 철학자긴 했고, 그의 저서들에 대해서도 막연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인상은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치 초창기 멤버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차츰 알게 되었지만 이런 우연한 선택이 행운을 만나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곳에서 우테를 만나 이후 제 삶을 결정지었고, 로타커의 수요일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학문적으로도 매우 자극적이고 배울 점이 많은 토론 환경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타커만의 고유한 철학 이론을 배우지 못했지만, 그의 강의에서는 독일 역사학파의 광범위한 전통을 접할 수 있었고, 심리학 세미나에서는 1920년대 이래 철학적 인간학 논의의 기반이 되어온 풍부한 실증적 연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철학 세미나에서는 ‘사유 그 자체’가 마치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며, 이때의 경험 덕분에 언어철학에 대한 관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사회학은 아직 관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 그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연구하셨던 동료 칼-오토 아펠을 만나셨죠. 두 분께서는 이론적으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한 독서 경험과 체계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 그는 이미 박사 학위를 마친 연장자로서 전쟁 동안 병사로 복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비대칭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개인적으로 가까워졌는데, 저는 박사 과정 때 그의 옆방에 배정받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멘토와 같았고, 저는 그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그는 『존재와 시간』을 실존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칸트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저에게 매우 잘 맞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책을 이미 괴팅겐에서 읽었죠. 아펠은 결코 특별히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를 통해 저는 철학이 현재의 세계관과 자아 인식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살아있는 본보기로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펠의 시대 진단은 제가 아침 마다 비판적으로 읽던 FAZ(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부비에 서점에서 구입한 학생용 정기 구독권으로 읽었는데요—에서 자주 접했던 도발적인 시사 문제들과는 아직 꽤나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여름 어느 주말에 아펠이 내 손에 쥐여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을 읽은 것이, 철학 공부와 불타는 정치적 시사 — 하이네만 대 아데나워! — 사이를 가로막던 벽을 단번에 허물어 버렸습니다.2
□ 아펠과 맺으신 우정 어린 관계는 일찍 시작되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특히 1980년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분이 각각 담론윤리를 발전시키던 시기에 다시 아주 긴밀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관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우리 사이의 참으로 길고도 복잡한 관계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 속에 아펠과 칸트의 영향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당신의 추측에 답하기 위해서도, 본 시절 학생과 멘토로서의 관계[0단계]는 이후 진정한 의미의 동료이자 우정 어린 관계로 발전한 세 개의 단계[1~3단계]와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1954년 박사학위를 마친 뒤, 나는 아펠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는 프랑크푸르트로 갔고, 아펠은 건강상 중단하곤 했던 그의 교수 자격 논문을 집필하고 있었습니다. 그 끊어진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은 거의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철학 강연에 초청받았으나 그 당시 이미 나 자신을 사회학자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대신 아펠에게 초청을 넘겼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가 나중에 동료가 된 이후 —1960년대에는 각각 하이델베르크와 킬에서— 철학적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교류로 이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손편지들 중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들이 남았더라면 우리가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따로따로 추구하던 시기에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저에게는 상호적인 것으로 보이는— 보여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기 동안 아펠과 나는 철학 작업의 의도에 있어서 가장 가까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인식 관심 이론’이 그러한데, 이 이론은 일종의 반성(reflection) 양식을 지향하며, 우리는 이때 정신분석학적 대화를 그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펠은 실제로 정신분석을 받은 적이 있었던 듯하며, 나의 경우에는 학생 시절 『Psyche』 지를 읽으면서 지니게 된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프로이트 강의3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대 후반부터 담론 윤리(diskursethik)에 대한 고찰이 전개되었고, 저는 그 기본 사상을 『정당화 문제 Legitimationsprobleme』 제3부에서 “실천적 질문의 진리능력(Wahrheitsfähigkeit praktischer Fragen)”이라는 제목 아래 처음으로 발표했습니다.4 이러한 점에서 에를랑겐(Erlangen) 학파와의 논의도 중요했습니다. 아펠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 고려할 점은, 제가 언제나 아펠보다 더 빨리 글을 출판했다는 점입니다. 너무 성급하게도요. 예를 들어 저는 아펠에게 『철학의 변형 Transformation der Philosophie』이라는 그의 두 권짜리 대작을 수년 동안 출판하라고 독촉해야 했습니다. 이런 비대칭적인 출판 속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긴밀한 사유 교류에서 그 결과물에 대해 단 한 번도 ‘선점권’ 문제는 불거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직을 막 시작하던 시기에 아펠은 저보다 훨씬 더 깊이 분석적 언어철학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저작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제게 처음 일깨워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저는 하이데거의 존재사 개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유물론적 사례와 경험적 고찰로 그를 몰아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출발점에서 실천적 칸트 해석과 담론 이성 개념을 향해 서로 접근해갔습니다.
제 기억에 두 번째 단계는 1970년대 초에 종결되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아펠은 내 책 『인식과 관심 Erkenntnis und Interesse』의 한 지점에 대해 아주 정확하고 결정적인 비판을 했습니다. 즉 저는 반성(reflection)의 두 개념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구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생애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된 자기반성으로서의 ‘반성’,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하고 행위하며 말하는 방법에 대한 보편적이지만 수행적으로만 현전하는 ‘방법지(Wissen-wie)’에 대한 이성적 재구성으로서의 ‘반성’5. 이 구분을 불충분하게 하는 바람에 저는 세 번째 인식 관심, 즉 ‘해방적(emanzipatorisch)’ 인식 관심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명하는 체계적 난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비판을 『인식과 관심』의 다음 판 후기에 즉각 반영했습니다.6
우리의 두 번째 관계 단계는 제가 공부를 마친 후 시작되었는데, 이 두 번째 단계는 다시 또 두 협력의 시기로 나뉩니다. 칼-오토 아펠의 프랑크푸르트 임용과 동시에 저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습니다. 두 협력 시기 중 첫번째는 제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집필하던 슈타른베르크 시절이었습니다. 아펠이 슈타른베르크를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반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서로를 안 지 20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그 당시엔 다들 그렇게 했습니다.
1970년대 우리의 서신들에는 아마도 촘스키-그의 중요성을 나는 1965년 첫 미국 여행에서 깨달았습니다-, 오스틴과 설의 발화 행위 이론 그리고 그에 기반해 전개된 보편 혹은 형식 화용론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제 입장에서는 사실상 ‘피할 수 없는’ 이성적 담론과 의사소통 행위의 화용론적 전제를 아펠은 언제나 초월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 점에서 우리 사이의 견해차가 분명해졌습니다. 여기서 이미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된 더 깊은 수준의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일종의 ‘약한’ 자연주의(ein schwacher Naturalismus: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기는 하지만 인간의 행위를 뇌과학 등과 같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의 자율적 규범 구조를 고려하는 자연주의적 입장7에 속하는 것이라 본 반면, 아펠은 언어적 전회 이후에도 여전히 ‘제1철학’8의 개념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그의 입장은 칸트적 지성계의 진지한 탈초월화(detranszendentalisierung)와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탈초월화란 이성이나 도덕을 형이상학적·초월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실 세계 안에서 해명하려는 시도. 하버마스가 보기에 아펠은 논증의 최종 정당화(Letztbegründung)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탈초월화를 지향하는 아펠의 본래 의도와 충돌한다고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펠은 제가 『또 다른 철학사』에서 이끌어낸 결론들을 매우 불만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슈타른베르크 시기를 지나 프랑크푸르트 세미나에서 함께 강의하던 네 번째 단계, 곧 1980년대의 논의 시기를 규정하던 우리 둘의 입장 차이와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도 존 설, 찰스 테일러, 딕 번스타인 등과 함께 진행한 세미나들에서도 자주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논의들은 기존의 입장 차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그쳤고, 진리 개념, 궁극적 정당화 문제 그리고 아펠이 담론윤리에 추가하고자 했던 ‘B부분’과 관련해도 그 차이가 구체화되었습니다.9
저는 제 박사논문 서론에서 청년 헤겔학파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사유의 흐름을-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던- ‘탈초월화’라는 주제로 진지하게 수용했습니다. 반면 아펠은 이를 ‘제3의 패러다임 속 제1철학’이라고 부르며 끝까지 고수했습니다.10 이제 당신의 질문 속에서 제가 감지한 의심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즉 해석학과 담론윤리, 곧 ‘헤겔보다는 칸트’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과 잘 어울리지 않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를 ‘다른 진영’으로 분류하려 한다는 것이죠. 저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을 이어갈 것이냐, 갱신할 것이냐, -혹은 단절할 것이냐- 하는 논의에 결코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새로운 역사적 맥락과 새로운 인식 아래에서 적절히 수정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이어지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37년 『사회연구 저널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에 실린 호르크하이머와 마르쿠제의 선언적 논문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했던 이성 개념과 합리적 자유의 개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도르노 역시 벤야민적 동기를 특유의 방식으로 해석하면서도 이 개념에 충실했습니다. 저의 사회 이론 역시 –바뀌어야 할 것들은 바꾼다는 생각에서 mutatis mutandis– 이 본래의 개념 틀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 탈형이상학적 사유라는 개념에 대한 언급은, 다시 본 시절로 돌아가 귀하의 셸링 독일 관념론의 문제 지형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 선생님의 박사 논문으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옹호하게 된 일종의 전제였다고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일까요? 다시 말해, 청년 헤겔파로부터 자극받은 사유의 충동이 셸링과 이론적으로 대결하면서 비롯된 것이고, 특히 역사 속에서 절대자를 찾으려 했던 셸링의 시도를 선생님께서는 실패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당시 셸링 사유의 양면성을 지적하셨던 만큼, 그의 사상 안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탈형이상학적] 사유를 계속해 나가게 만든 어떤 계기나 자극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 이 질문은 놀랍지만 흥미롭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터무니없지 않은 질문입니다. 학업을 마쳤을 때, 저는 어떤 결정적인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철학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 더 깊이 해명하고자 하는 제 관심을 만족시키는 알맞은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저는 철학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현 상황을 정치적 관점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이고 경험적인 해명을 기대할 수 있는 관점에서는 사회학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사회학을 정식으로 공부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당시 몇몇 대학에서만 교육이 재개되었던 사회학 분야에 옆문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 익히 알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문헌들은 칸트와 헤르더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길, 즉 철학에서 사회이론으로 이어지는 길이 얼마나 짧은지 보여주었습니다. 하인리히 포피츠와 랄프 다렌도르프 역시 마르크스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그와 같은 시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또한 헬무트 셸스키는 한때 독일 나치당원이었지만 빠르게 태도를 바꾸고 후학을 구하던 인물로 제가 본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지 몇 주 만에 점심 식사에 초대하여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후 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연구 조교로 일하며, 사회학 공부를 놓친 부분을 마치 현장에서 보충하는 듯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60년대 교수 시절에도 당시 조교였던 클라우스 오페와 울리히 외버만과 함께 공동 세미나를 하면서 많은 사회학 지식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제가 로타커의 지원을 받아 시작했으나 프랑크푸르트에 두고 온 ‘이데올로기 개념’에 관한 독일연구재단(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 연구 과제를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제가 사회학이라는 방향을 택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의 근본 문제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셸링의 문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셸링에게 제기된 문제인 ‘역사 과정 속에 고정된 절대자’에 관한 문제를 계속해서 다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우회로를 통해서라도 오늘날까지도 제가 끊임없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로 볼 때 같은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성의 역사적·언어적·사회적 구체화를 숙고하는 탈형이상학적 사유에서도 이성의 보편적 타당성 요구에 위배되지 않도록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자라는 핵심은 진리의 절대성을 절차적으로 유동화한 [탈형이상학적] 보편성 요구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저의 철학사 연구 역시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의사소통 실천은 진리 지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역사적 존재 방식의 내적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 즉 “내적 초월(transzendenz von innen)”이라는 개념으로 귀결됩니다. 이 용어를 제가 처음 쓴 것은 제 기억이 맞다면 1980년대 말 시카고에서 신학자들과 함께 한 학회였습니다.11
다음 회에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7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4)
C. 철인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기하학(526c-527c), 천문학과 입체 기하학(528a-d)
[526c-527c] 기하학
*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찾는 배울 거리들μαθήματα중 두 번째 것으로 계산 기술λογιστική과 산수ἀριθμητικὴ에 이어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을 꼽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기하학이 군대 주둔στρατοπέδευσις과 지역 확보, 군대στρατιά의 집결과 산개 등 전쟁과 관련된 일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은 기하학과 계산λογισμός의 간단한 부분으로 충분함을 지적한 후 기하학은 근본적으로 많은 부분과 상급 단계가 좋음의 형상을τὴν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ν 더 쉽게 보게κατιδεῖν ῥᾷον 해주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 중에서ἐν ᾧ ἐστι 가장 행복한 것τὸ 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ν이 자리 잡은 저 영역을 향해 영혼의 방향을 바꾸도록 강제하는ἀναγκάζει 모든 것이 그런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있음οὐσία을 보도록θεάσασθαι 강제한다면 적합하고προσήκει, 생성을 보도록 강제한다면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526c-e)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일부 기하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 이를테면 정사각형 만들기’τετραγωνίζειν니 ‘맞추어 대기’παρατείνειν니 ‘덧붙이기’προστιθέναι니 같은 온갖 소리를 해대는데 그것은 이 분야의 앎ἐπιστήμη과 정반대의 성격을 갖는 것이며, 기하학이 수행하는 것은 항상 있는ἀεὶ ὄντος 것에 대한 앎γνῶσίς을 위한 것이지 때에 따라 생겨나고γιγνομένου 소멸하는ἀπολλυμένου 것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영혼을 진리ἀλήθεια로 이끌어가는 것이자 우리 영혼이 위를 향하도록, 철학적인 사고φιλοσόφου διανοία를 만들어내는 것이다.(527a-b) 그러므로 아름다운 나라καλλίπολις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기하학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것의 부산물τὰ πάρεργα도 적지 않다. 즉 그것은 글라우콘이 말한 전쟁πόλεμος과 관련된 것들만이 아니라 어떤 배움μάθησις이든 그것을 더 잘 수용하게 해준다.(527c)
[527d-528d] 천문학과 입체기하학
* 이제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세 번째 배울 거리로 천문학ἀστρονομία이 제시된다. 글라우콘은 천문학에 대해서도 계절ὥρα과 연월μήνη καὶ ἐνιαυτός을 더 잘 알아보게 하여 농사일γεωργίᾳ과 항해ναυτιλίᾳ 장군직 등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자신이 지시하는 배울 거리가 대중들πολλοὶ이 보기에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까 두려워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 후 다른 활동들로 망가지고 눈멀게 되는 각자의 영혼의 도구ὄργανον가 이 배울거리들을 통해서 정화되고ἐκκαθαίρεταί 다시 점화된다ἀναζωπυρεῖται는 확신을 갖고 그 영혼의 도구를 보존하는 것이 만μύριοι 개의 눈을 보존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직 이것에 의해서만 진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훌륭하게 보일 것이나 그런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에서 이렇다 할 이로움ὠφέλεια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글라우콘의 이야기가 그저 실없는ἀμήχανος 소리로 들릴 것이라고 말한 후(527d-e) 글라우콘에게 이들 중 어느 쪽을 상대로 대화할 것인지διαλέγῃ 아니면 어느 쪽도 특별히 고려하지 않고 주로 자네 자신을 위해서 논의를 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대체로 저 자신을 위해서 묻고ἐρωτᾶν 대답하며ἀποκρίνεσθαι 이야기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한다.(528a)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지금 기하학 다음에 오는 것을 제대로 취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차원δεύτερος의 평면ἐπίπεδος 다음에 삼차원τρίτος 입체στερεός 즉 정육면체κύβος 같은 깊이βάθος를 가진 것과 관련된 것을 취해야 함에도 회전하는περιφορά 입체를 먼저 취했다는 것이다.(528a) 이에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맞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된 데에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음을 밝힌다. 우선, 어느 나라도 이것들을 존중하지 않아서 이 어려운 것들에 대한 탐구가 빈약하게 이루어져 그 탐구를 이끌 감독자οἱ ζητοῦντες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고(528b) 설사 감독자가 생기더라도 현 상황이 그러하듯이 이걸 탐구하는 사람들ζητητικοὶ이 거만해서 감독자를 따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중들과 이게 어떤 점에서 유용한지를 설명할 수 없는 탐구자들에 의해 이것들이 경시되고 방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χάρις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을 뚫고βίᾳ 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언급한다. (528c)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배울 거리로서 기하학은 명확하게 말하자면 평면을 다루는 것이 기하학이고 그다음 다룰 것은 입체 기하학이지만 모든 것들을 빨리 설명하려고 서두르다가 입체 기하학을 건너뛰고 다음에 천문학, 즉 깊이를 갖는 것의 운동을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5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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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6c ‘기하학’ : 여기서 말하는 기하학은 앞 강해에서 살폈듯이 내용적으로 산수를 포함한 당대 수준의 수학 일반을 의미한다. 선분의 비유에서 사고의 대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적인 것’이라 말했을 때도 이미 그곳에는 기하학적 도형이 포함되어 있다. 퓌타고라스 수학에서도 당연히 수와 도형은 하나로 다루어진다. 우리가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술을 보통 <기하학 원론>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는 원리들 내지 요소들(elements)을 뜻하는 stoicheia이고 그 책에는 수와 도형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 526c ‘군대 주둔과 지역 확보, 군대의 집결과 산개 등 전쟁과 관련된 한에서 적합하다’ : 이전 강해에도 언급했듯 글라우콘은 배울거리가 제시될 때마다 그 적합성을 실제 용도에서 찾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서곡으로서 기하학의 적합성은 오로지 좋음의 형상을 더 쉽게 보게 하는 일, 그 영역을 향해 영혼의 방향을 바꾸는 일 즉 철학적 사고를 만들어 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굳이 실제 용도를 따진다 해도 이러한 일을 알고 그 부산물로 배울 때 더 큰 용도를 얻을 수 있다.
*527a ‘맞추어 대기’parateinein, ‘덧붙이기’prostithenai :‘ ‘맞추어 대기’는 ‘주어진 선분을 도형의 한 변과 일치하게 해서 도형을 옆에 붙이는 것’을 의미한다.(<메논> 87a참고) 그리고 ‘덧붙이기’는 ‘한 도형을 다른 도형에 덧붙여 놓는 것’을 의미한다.(<메논> 84d) 당시 일부 기하학자들은 도형들을 탐구하면서 실제 실물을 제작하여 여기저기 붙이거나 맞추어보곤 했다고 한다.
* 527c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 :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나라를 흔히들 ‘이상 국가’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표현은 <국가>에 없다. 다만 그러한 표현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전거를 들어야 한다면 바로 이곳에서 언급된 ‘아름다운 나라’를 꼽을 수 있다.
* 527d ‘영혼의 도구’ : 도구에 해당하는 원어는 ‘기관’의 뜻도 갖는 organon으로 영혼에서 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영혼 3분설(434c-4441c)을 기준으로 보면 영혼의 이성 부분일 것이다. 천문학은 오늘날에서조차 대중들 사이에서는 망원경을 통한 육안의 관찰이 중심인 양 여겨진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천문학 역시 사고를 통한 수적 비례와 계산이 탐구의 토대를 이룬다. 영혼의 도구를 보존하는 것이 만 개의 눈을 보존하는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진리가 보인다.
* 527e ‘’만개의 눈‘ : murioi는 10,000 또는 무수한 수를 의미한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어에서 수를 표기할 때 수마다 모두 고유의 알파벳 글자로 표기했다. 그런 까닭에 고대 그리스의 수표기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 표기 방식과는 도저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렵다. 이를테면 243을 표기하려면 3을 나타내는 tria와 40을 나타내는 tettarakonta 그리고 200을 나타내는 diakosia를 합해 ’tria kai tettarakonta kai diakosia’로 표기해야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날은 초등학생 수준에서도 가능한 덧셈 뺄셈은 물론 곱셈과 나눗셈 등 큰 수의 계산이 고대 일상인들에게는 아예 엄두를 못 내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계산할 줄 아는 전문적인 기술자들이 따로 있었다. 이곳에 나오는 logistikē란 그러한 ‘계산 기술’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에서 수학이 크게 발달했다는 것은 오늘날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 528a ‘어느 쪽을 상대로 대화할 것인가’ : 영혼의 도구로 보는 사람들과 육안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서 글라우콘은 대중의 시선으로 대화에 임했다가 핀잔을 듣고 물러서지만 그렇다고 영혼의 도구로 보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수준도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묻고 대답하는 쪽을 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 528a ; ‘이차원의 평면 다음에 삼차원 입체’ ; 배울 거리의 순서가 차원을 기준으로 고려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수학은 기하학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산수는 자연수 위주의 수론에 머물러 있어 차원을 기준으로 기하학 이전의 배울 거리로 제시된 것이다. 당시 산수는 무리수(無理數)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무리수의 발견 이후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그러하듯 기하학은 무리수를 도형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산수보다 진전된 배울 거리로 여겨졌다. 이것 또한 그리스 수학이 산수보다 기하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까닭의 하나이다.
* 528b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 당대 비교적 낮은 수준의 입체 기하학과 관련한 이곳의 언급은 <국가>가 설정하고 있는 대화 시점이 소크라테스 생전 이후 아무리 늦게 잡아도 플라톤 중년 시기 이전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는 이곳의 언급과 달리 다섯 가지 입체를 포함한 높은 수준의 입체 기하학적 논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에우클레이데스는 그 자신 플라톤주의자로 불릴 정도로 플라톤과 똑같이 <원론>에서 다섯 가지 정다면체를 다루고 있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에서 기하학이 핵심 교과였음을 고려하면 이곳의 내용은 당시에 실용적 계산 기술과 경험 기하학에 머물렀던 기하학이 플라톤이라는 탁월한 감독자를 통해 아카데메이아에서 획기적으로 발전되었음을 함께 보여준다. 실제로 플라톤의 제자였던 Eudoxos는 한때 도형과 도구에 너무 의존한다고 플라톤에게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J. Adam 527a 노트 참고) 종래 그가 이룩한 연구 성과 또한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에 포함될 정도로 큰 성취로 평가되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거만했던 탐구자들이 기하학의 매력에 이끌려 ‘어려운 조건을 뚫고 성장하고 있다’는 이곳의 언급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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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논의는 배울 거리의 두 번째 것으로 평면 기하학을 다룬 다음 그다음의 논의로 왜 입체 기하학을 다루지 않고 천문학을 다루게 되었는가가 주제를 이루고 있다. 예비적인 배울 거리와 관련한 이곳 논의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이 얼마나 기하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시종일관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다루어지는 천문학과 화성학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나같이 이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천문학과 화성학 역시 기본적으로 기하학에 기반을 둔 학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배울거리들을 논의하면서 이토록 기하학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앞서 살폈듯이 배울거리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근본적으로 장차 불변 부동의 진리로서 형상적 앎을 획득하기 위한 변증술적 능력을 함양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보여주듯 감각적 가시적 세계로부터 그와 관련한 의견doxa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영혼의 상승적 전환을 통해 오로지 사고와 지성이 지배하는 가지계로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형상적 앎이야말로 생성과 변화를 겪지 않으면서 항상 있는 것으로서 존재 세계의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사실 기하학’geōmetria이란 명칭은 ‘토지측정’을 뜻하는 말로 이집트에서 연원한 것이다.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토지가 유실됨에 따라 토지의 경계를 다시 복구하려는 용도에서 기하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기하학은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로 들어오면서 퓌타고라스 학파를 통해 감각 너머의 참된 존재 세계에 이르는 통로로 제시되었고 그 이후 플라톤에 이르러 오직 사고와 지성을 통해 진리를 담보하는 순수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부 플라톤주의자들은 ‘토지 측정’이라는 기하학의 이름 자체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j. Adam 노트 참고) 이곳에서도 플라톤은 기하학이 대중들의 생각과 달리 경험과 관찰과는 무관한 오직 영혼의 도구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비감각적 앎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하학이 어떻게 그러한 진리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진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즈음에서 기하학이 도대체 어떤 특성을 가졌기에 플라톤이 그토록 배울거리들의 배울 거리로 중시하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 주지하다시피 기하학(수학)의 근본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에우클레이데스(Eukleidēs 기원전 330?-270?)의 <원론>stoicheia을 떠올린다. (우리말 역본 : <유클리드 원론> 1, 2 박병하 옮김, 아카넷 2022) 그리고 우리는 그 책을 통해 플라톤이 왜 그토록 기하학(수학)을 중시했는지 근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 물론 에우클레이데스가 시대적으로 플라톤보다 후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접근이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미 플라톤주의자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다 실제로 그의 책 내용을 들여다보면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룩한 기하학적 성취를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 이어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기하학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을 끌어들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순수 사고를 통해 점과 선과 각과 도형과 관련한 23개의 정의(horoi)를 바탕으로 증명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5개의 공리(axiōma)들과 9개의 공통 개념들(axiōmata)을 세운 후 그것들로부터 465개의 정리들(theōrēmata) 즉 수학적 진리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도출 과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필연성을 담보하는 이른바 연역 추론의 과정으로서 그 자체로 정리들 각각이 참임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개인적 판단이나 경험, 사회적 관습이나 관행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에 따라 465개의 명제는 어디에 살건 어느 시대에 살 건 인류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리적 연역체계 즉 보편적 진리 체계로 확립되었고 이후 수학의 방법은 인류사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지적 작업의 근본 토대이자 원천이 되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대학에서 <원론>을 배우며 천문학의 기초를 닦았고 플라톤의 <법률>(967a)에서 천문학의 필연적 성격에 주목한 것도 그리고 데카르트(R. Descartes)가 <원론>의 수학적 방법론을 토대로 좌표계를 이용한 해석 기하학과 근대 역학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원론>의 기본 내용과 정신은 2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교육과정에서 수학의 이름으로 지적 탐구의 기본 교과로 하나같이 채택되고 있다. 한 마디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필연적으로 참을 담보하는 논증적 추론 즉 참에서 참인 방식으로 참을 필연적으로 도출해내는 연역 추론의 원형paradeigma을 담고 있다. (플라톤과 그리스 수학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아래와 같이 훌륭한 논문이 발표된 바 있다. 김성진, “pytagoras 학파의 수학과 자연철학” <서양고전학 연구> 제5집 1991. 이상인, “서양 고대의 수학과 철학 – 플라톤의 보편 수학을 중심으로”, <대동철학> 제18집 2002)
* 에우클레이데스 <원론>의 위와 같은 추론 방식은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추론적 사고dianoia가 수행하는 논증 방식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곳에서도 영혼은 추론적 사고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확보할 때까지 논증적 사고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그 어떤 전제나 가정도 없이 자체적으로 참임을 드러내는 자체적 존재 즉 형상적 앎으로 육박해 들어가고 마침내 변증술적 능력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한 후 하강과정에서 그것을 통해 비로소 추론적 사고에게 형상을 분유하는 최상의 논증적 앎으로서 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 그런데 이미 알아차릴 수 있듯이 선분의 비유가 보여주는 이러한 추론적 사고의 수행 방식은 참을 담보하는 것이되 궁극적인 형상적인 앎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보기에 기하학은 형상(이데아)에 준하는 그 자체로 증명과 상관없이 자명한 참을 담보하는 것임에도 플라톤에게 그것은 아직 자체성kath’ hauto을 갖는 형상적 앎epistēmē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동일성tauton을 가질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자기 동일성과 달리 그 어떤 관계 맺음도 없이 어떤 가정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스스로 참임을 드러내는 진리에만 붙여질 수 있다. 그렇지만 플라톤에게 수학적 기하학적 진리는 자기동일적인 진리로서 앞서 살폈듯이 순수 사유의 산물로서 선과 각과 도형들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가정하고 성립된 것이다. 철학적 진리는 그러한 가정hypothesis들마저 완전히 떨쳐 버리고 순전히 말 그대로 자체적으로 스스로 참alētheia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형상적 앎은 추론적 사고dianoia 단계를 넘어 지성적 이해noēsis의 단계에서 이른바 변증술적 능력dialegesthai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우클레이데스는 철학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진정한 철학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오늘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참의 체계로 받아들여진 <원론>의 진리가 중력장이 미치는 공간 내부에 한정해서 성립하는 이른바 평면 기하학적인 진리로 밝혀진 것도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가 지적한 가정의 한계를 에우클레이데스가 채 인지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평면 기하학으로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를 딛고 제시된 리만 기하학적 진리 또한 수학 자체가 갖는 가정들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하는 한, 언젠가 모종의 또 다른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플라톤이 기하학적 지식을 영혼의 전환을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매우 중차대한 앎으로 평가하고 중요시했음에도, 기하학적 지식 일반 즉 이곳에서 제시되는 배울 거리 모두를 형상적 앎을 위한 예비적 준비 단계로 파악하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결국 플라톤에게 오늘날 발전된 자연과학적 성취조차 본질적인 한계상 궁극의 철학적 진리로 끊임없이 다가갈 수밖에 없는 불확정적인 것이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53c-61c)에서 영혼과 물질로 구성된 우주를 순수 기하학적 요소로서 고도의 균형을 갖춘 정다면체들(흙은 정육면체, 물은 정이십면체, 불은 정사면체, 공기는 정팔면체)로 해명하고 물질적 원소로서 그 입체들을 궁극적인 최소 단위인 두 개의 비물질적인 직각삼각형으로 환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독창적인 해명방식은 하이젠베르크도 인정했듯이 오늘날 물질의 궁극적 구성 요소를 아(亞)물질적인 양자와 중성자의 수학적 균형관계로 파악한 양자역학에도 선구적인 성찰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플라톤에게 자기동일적 참을 담보하는 논증적 지식은 자연세계에 대해 말logos로 할 수 있는 최상의 지식을 제공하지만 자연 세계의 근원적 원인aitia 중 하나인 생성(to aei gignomenon)을 완전히 넘어설 수 없는 한, 지고의 진리로서 자체성을 갖는 진리는 아니다. 수학적 진리도 그런 의미에서 제한적이고 잠정적이며 자연학 역시 다만 개연적 설명(eikos logos)을 넘어서지 못한다. 문제는 자체성을 갖는 철학의 궁극적 진리로서 형상 특히 좋음의 형상이 분명 존재하고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변증술도 있다고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고백하고 있듯이(506d-507a) 그것은 숙명적으로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말로 하는 학문으로서 철학은 무엇일까? 학문이기는 한 것일까? (故 素隱 박홍규 선생은 만약 플라톤이 현대의 베르그송을 만났다면 그 고민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소은 선생의 형이상학에는 플라톤과 베르그송이 대척점에 서 있지 않고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 철학이 종국적으로 총체적 앎에 대한 인간 욕구의 극치로서 형이상학을 숙명으로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 그렇다고 플라톤이 가시적 대상, 경험적 관찰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그것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및 인식상의 근본적인 한계를 직시하고 오히려 그것들이 갖는 규정적 측면을 찾아 최대한 그것들에 대한 학적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티마이오스>에서도 플라톤은 시각을 커다란 유익을 주는 원인이라 언급하면서 그것을 통한 관찰이 우주의 본성을 탐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47a) 이곳 선분의 비유에서도 기하학자들은 어떻게든 눈에 보이는 도형들을 이용하여 도형 자체를 사고하여 그것을 가지고 추론을 구성한다.(510b) 언제나 문제는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다. 그런데 기하학자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용한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에 들어있는 주관적 요소들을 넘어설 수 있으며 그런 경우 가시적 감각적인 것들도 논증적인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든 그것들은 논증적인 것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개별 현상들은 보편적 논증의 요소가 될 수 없지만 그것들에서 공통으로 반복되는 것들을 사고가 추상하여 개념화할 경우 그것들은 그 현상들에 대한 논증적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경험적 판단들을 가지고 논증을 구성할 수 있는 것도 다 사고가 가시적인 것들에서 반복적인 것을 추상하여 일반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시적 대상들이 비록 경험적인 것일 것일지라도 사고작용을 통해 논증적인 것으로 재구성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경험적인 것에 대한 앎을 획득하고 체계화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이러한 방식은 나중에 연역법과 더불어 논증 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은 이른바 귀납법과 비슷해 보이지만 논증의 성립 근거가 전혀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귀납법(induction)은 자연의 제일성(the uniformity of nature)을 자명한 전제로 가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통해 일반화를 관철하지만[이런 이유로 흄(D. Hume)은 경험지를 개연지로 여겼다] 플라톤은 그 일반화의 근거를 이미 가시적 감각적인 대상들에 분유(metechein)되어 있는 반복적 지속치 즉 형상을 닮은 분유치에서 찾고 있다(흄과 근거는 다르지 플라톤은 이런 이유에서 경험지를 개연지로 여겼다.) 플라톤에게 근대적 의미의 귀납 논증은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사고를 통한 일반화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삼단논법(이를테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의 대전제가 보여주듯이 비록 경험과 관련된 판단이지만 일반 명제로서 논증적으로 참된 결론을 연역해내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초기대화편에서 ‘이것이 무엇인가?’ ti esti 즉 정의(定義) 문제를 다룰 때도 ‘용기’, ‘경건’, ‘절제’ 등에 대한 일상의 경험적 견해들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규정성을 가질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비판적 검토(elenchos)를 진행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의 가지적인 지식에는 가장 아래쪽에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사고를 통해 추상된 일반지로부터 가장 위쪽으로는 수학적 대상, 사고의 대상을 넘어 지성적 이해를 통해 획득되는 형상적 앎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다만 플라톤에게 앎의 최소한의 요건은 경험에 기원하는 것이건 아니건, 가시적인 것이건 아니건 어떤 방식으로든 사고를 통해 규정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험지도 일반화를 거쳐 논증적 이론지가 될 수 있고 그 이론지를 통해 경험적 통찰 또한 확장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관찰을 통해 얻은 행성에 대한 관찰지를 사고를 통해 이론화하여 30년 후 그 행성의 궤적을 추론해 냈고 실제 30년 후 사람들은 그 행성이 그가 추론한 궤적대로 거의 정확하게 움직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론적 사고는 결코 경험적 사고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론적 사고는 경험 세계를 관통하는 가지적 질서에 대한 학적인 이해를 가능케 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당장의 실용적 이익을 넘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수많은 경험을 앞당겨 들여다보고 우리 삶과의 내적 연관을 사유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은 천상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합리적 이상에 대한 믿음으로 일관되게 현실 구제를 지향한다.
* 이제 기하학 다음에 입체 기하학이 다루어져야 함에도 천문학이 세 번째 배울 거리로 제시된 이유가 논의되고 형식적 순서상 입체 기하학을 세 번째로 다시 조정한 후 네 번째, 다섯 번째 배울 거리로서 천문학과 화성학이 각각 다루어진다.
다음 주제 :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제7권 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천문학(528e-530c), 화성학(530d-531d)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생성의 역사에 관해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생성의 역사에 관해
이병창(한철연 회원)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생성의 역사에 관해 연구자들이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일부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MEW판 독일 이데올로기 그 가운데 특히 포이어바흐 장이 위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표시한다. 잘못하면 기존에 알려진 마르크스 엥겔스 역사적 유물론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질 판이다. 국내에서 정문길 교수님의 독일 이데올로기 편집에 관한 논문을 읽은 연구자는 더욱 그러하다. 정문길 선생은 그 차이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판본을 직접 비교 대조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때문에 그 차이가 과장되면서 위작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발생한 것 같다.
필자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하면서 MEW3권을 기초로 번역했지만, 영어본과 MEGA2에 나오는 포이어바흐 장을 함께 번역해 실었다. 1권에는 MEW3 포이어바흐 장이 2권에는 MEGA2와 영어본 의 포이어바흐 장이 실렸다. 이 자리에서 포이어바흐 장의 원본이 지니는 의미를 밝히려 한다.(필자가 양자를 동시에 번역한 것은 두 개의 편집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MEW 3 은 아도라츠키가 편집한 포이어바흐 장에 기초한 것인데, 원본의 구절을 추가하거나 배제한 것은 없다. 다만 원본의 구절을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했다. 그러나 MEGA 1, 영어본, 그리고 최근 발간된 MEGA2은 리야노프스키가 발굴한 원본 그대로를 살리려 했다. 그 결과 주요 내용은 인류 역사를 시험 삼아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따라 스케치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스케치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한 것은 1848년 2워 혁명 이후다.
(위의 원본을 살리려는 각 시도들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전지를 반으로 나누어서 왼쪽에 쓴 원문을 오른쪽에서 고쳤는데, 고친 부분이 왼쪽의 앞뒤에 어느 부분에 들어가는지를 편집자가 달리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마르크스의 의도를 알면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아도라츠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의 편집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여백에 남긴 표시에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백의 표시가 꼭 그렇게 옮기라는 지시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위작이니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존의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가 의심될 여지도 없다.
다만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발전사적인 측면에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원리가 오늘날 확립된 원리와 다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는 분업의 전개를 중심으로 했고 아직 생산력이나 생산관계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 개념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가서야 확립된다. 분업과 생산관계는 서로 다른데, 분업은 교환이나 분배까지 포함한 더 포괄적 개념이어서, 실제 역사에서 전개된 정치적 투쟁을 이해하는데서는 생산관계 개념보다 더 도움이 된다. 물론 분업의 전개 자체를 다시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해 설명해야 마땅하리라.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관한 돕- 스위지 논쟁은 바로 생산관계 중심이냐 아니면 분업(교환관계)를 중심으로 하느냐 하는 논쟁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 논쟁을 해결하는 데서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생각으로는 역사를 볼 때 분업과 생산관계 개념을 통일적으로 파악해야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포이어바흐 장 원본을 발간하는 것은 기존의 생산관계 중심의 역사적 유물론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겠다.(필자는 이 부분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잡지여서 연구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필자는 지금하는 작업을 마친 다음 이 논문을 개편해서 학회지에 발표하려 한다.)
아래는 각 판본의 편집자가 밝힌 생성의 역사다. 필자의 능력으로 그 이상의 연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려 한다. 다만 그 가운데 MEGA2의 편집자는 200쪽에 달라는 방대한 생성사를 서술했다. 다만 너무 방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해 필자가 간단하게 요약해 두었으니, 특히 이 부분을 참조로 하기 바란다.
덧불일 것은 포이어바흐 테제는 독일 이데올로기가 작성되기 전에 이미(45년 4월) 작성되었다. 포이어바흐 테제는 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장과는 시기, 문체,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독일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것인데, 편집자들이 이 테제를 독일 이데올로기에 집어넣은 것은 독일이데올로기가 작성되기(대체로 46년 겨울) 전에 이미 마르크스가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도달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작성에 동기를 준 것은 슈티르너의 포이어바흐 비판인데( 45년 6월), 마르크스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슈티르너의 충격과 무관하게 이미 구성됐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또 2권의 내용은 편집자마다 다르다. 모제스 헤스와 관계, 출판의 문제 등 때문에 추가되고 배제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핵심 부분과 무관하다.
후기3 『독일 이데올로기』 성립의 역사에 관해(필자가 번역한 독일 이데올로기 번역본의 1411-1432쪽 부분)
독일 이데올로기의 작성과정은 W, CW, GA2가 각각 해명한다. 아래 각 판본이 밝힌 작성과정을 정리했다.
1) MEW
[W는 주 2에서 해명한다. CW 주 7은 이 내용을 보완했다.]
『독일 이데올로기, 최근 독일 철학의 대표자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 그리고 진정 사회주의의 여러 예언자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5~46에 집필한 저서이다.
1845년 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이 저서를 집필하기로 결심하고, 1845년 9월 열정을 다해 이 작업에 착수했다. 초고는 약 50매의 인쇄 전지 분량이고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의 내용은 원칙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의 완성된 기본 논제와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의 철학적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반면 2권이 담는 내용은 진정 사회주의의 여러 대변자의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CW 보완:1845년 봄(4월 초) 엥겔스가 브뤼셀에 왔을 때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당시 겨우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던 역사에 관한 그의 유물론적 견해를 요약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에 관한 청년 헤겔주의자의 관념론적 견해나 포이어바흐의 엉성한 유물론에 대항해 자기들의 유물론적 견해를 내세우려는 의도로 철학 저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기획의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가 작성됐다. 1845년 가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청년 헤겔주의자와 진정 사회주의자를 겨냥한 두 권의 저서를 작성하기로 확정적인 계획을 세웠다. 1845년 가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저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작업의 과정에서 저서의 계획과 구성이 여러 번 변화했다. 모제스 헤스는 그 가운데 두 장을 작성하기로 요청받았다. 그러나 청년 헤겔주의자 루게Arnold Ruge에 대항해 헤스가 작성한 장은 1권에 넣기로 했으나 『독일 이데올로기』의 최종판에서 배제됐다. 헤스가 진정 사회주의자 쿨만Kuhlmann을 다루는 장은 2권에 넣기로 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편집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주요 작업은 원래 1846년 봄에 끝을 맺었다. 이 시기에 1권의 대부분이-즉 바우어와 슈티르너의 견해를 비판한 장(「라이프치히 공의회」)-끝났으며 2권의 대부분도 끝났다. 1권의 첫 부분(포이어바흐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1846년 후반기까지 계속됐지만, 끝을 맺지 못했다. [CW 보완: 1권 서론 초안은 8월 중순 전에 마르크스가 작성했다. 2권의 결론 장에 해당하는 엥겔스의 「진정 사회주의자」는 1847년 1월에서 4월 사이에 작성됐다.]
그들은 1846년 5월 초 1권의 초고 주요 부분을 바이데마이어Joseph Weydemeyer의 베스트팔렌에 있는 인쇄소로 보냈다. 바이데마이어는 출판을 위한 재정적 도움을 받기 위해 그곳에 있는 사업가들-진정 사회주의자인 마이어Julius Meyer와 램펠Rudolf Rempel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2권의 대부분이 베스트팔렌에 도착한 이후 마이어와 헴펠은 마르크스에게 1846년 1월 13일에 보낸 편지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출판에 대한 재정 지원을 거부했다. 1846~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저서를 출판하기 위해 새로운 출판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노력은 난관에 부딪혀 성과 없이 끝났다. 그 난관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경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판업자들이 계속 거부한 것 때문이다. 출판업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반대하는 노선[즉 진정 사회주의]의 대표자들에 대개 공감했다.
마르크스 엥겔스가 살아 있는 동안 저서 가운데 단지 한 장 즉 『독일 이데올로기』 2권 4장이 잡지 『베스트팔렌 증기선Westfahlen Dampfboot』(1847년 8월과 9월)에 실렸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1권 2장 중 몇몇 쪽과 일치하는 내용이 익명으로 잡지 『사회의 거울Gesellschafstspiegelss』(1846년 1월 「소식과 메모」 난, 6~8쪽)에 소개됐을 뿐이다. 기사가 작성된 날짜는 브뤼셀, 12월 20일이다.
『사회의 거울』 4권(「소식과 메모」 난, 93~96쪽)에는 『독일 이데올로기』 2권 4장과 여기저기 일치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저서의 제목과 1, 2권의 표제는 초고 속에 적혀 있지 않다. 이 제목과 표제는1847년 4월 9일 트리어 신문에 소개된, 마르크스가 그륀Karl Grün을 반박하는 메모[「칼 그륀에 대한 포고」]에 근거한다.
1장 「포이어바흐」의 표제 설정이나 자료 정돈은 초고의 모퉁이에 적어 놓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주에 근거한 것이다. 성 막스 부분을 두 부분으로-1) 『유일자와 그 소유』와 2) 『변호를 위한 주석』-구분한 것은 이 장의 처음에 제시된 저자의 지침에 따르고 또한 이 장 전체 내용에 근거해서 판단한 결과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2권 2, 3장은 초고에 없었다. [추가: 아마도 마르크스/엥겔스의 「크리게에 반대하는 통문」과 엥겔스의 논문 「독일 사회주의의 시와 산문」이 이 부분에 해당할 것이다.]
2) MECW주 7) 추가
[역자: CW주의 앞부분은-앞에서 보완한 부문만 빼고 W와 같으므로 여기서는 나머지 뒷부분만 추가한다.]
수고는 상당히 처참한 상태다. 종이는 노랗게 변했고 곳곳이 손상됐다. “쥐가 쏠아 먹음으로 이룬 비판”이라는 말을 마르크스는 후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수고의 「서문」에 썼는데, 이 말은 수많은 쪽에 그 흔적을 남겼다. 또 다른 여러 쪽이 누락됐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서문」과 변경하거나 추가한 것 중 어떤 것은 마르크스가 필기한 것이다. 그러나 수고는 대부분 엥겔스가 필기한 것이다. 다만 2권의 5장과 1권의 3장 몇 쪽은 요셉 바이더마이어가 필기한 것이다. 통상적인 일이지만, 각 쪽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주요 텍스트는 왼편에, 추가나 개정은 오른편에 있다. 많은 쪽은 저자들이 직접 삭제했으며, 몇몇 쪽은 베른슈타인을 통해 삭제됐다(이 점은 반S. Bahn이 『사회사 국제 논평집』 7권, 1962년, 1부에 실린 그의 논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약간의 텍스트 보완」이라는 논문에서 지적됐다.
읽을 수 없게 된 말과 구절은 가능하다면 그때마다 손상되지 않은 부분에 기초해 재구성됐다. 그런 재구성된 구절은 꺾쇠 속에 넣어졌다.[역주: 번역의 형편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런 표시를 지웠음을 양해해 달라.]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몇 마디를 집어넣을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말을 마찬가지로 꺾쇠에 넣어 인쇄했다. 수고에서 나타나는 글의 중단은 각주에서 지적됐다. 여백에 쓴 메모와 삭제된 쪽 중 중요한 것은 각주[노트]에서 복구됐다.[역주: 편집상의 필요 때문에 본문에 집어넣어 노트로 표시했다.] 이 각주는 별표로 표시되고 반면 편집자의 노트는 번호를 매겨 지시됐다. 베른슈타인이 삭제한 쪽은 해독이 가능한 한 복원됐다.
엥겔스가 죽은 후 『독일 이데올로기』의 수고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37년간에 걸쳐서 그 반도 인쇄하지 못했다. 「3장 성 막스」의 한 부분은 1903~4년 베른슈타인Bernstein이 출판했다.(마르크스와 엥겔스, 「3. 성 막스」, 『사회주의 자료집』, 소책자 3권, 1~4월과 7~8월, 슈투트가르트, 1903/『사회주의 자료집』, 소책자 4권, 5~9월, 슈투트가르트, 1904) 이 장의 다른 부분 즉 「나의 자기 향락」 부분은 1913년 발표됐다.(마르크스, 「나의 향락」, 『노동자 문예』, 뮌헨, 8권과 9권, 1913년 3월) 마이어Gustav Meyer가 1921년 「라이프치히 공의회」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 쪽과 「2장 성 브루노」를 출판했다.(엥겔스와 마르크스, 「라이프치히 공의회」, 『사회과학과 사회 정치학 서고』, 47권, 소책자 3, 튜빙엔, 1921 참조) 「1장 포이어바흐」 즉 가장 중요한 이 장은 192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를 통해 처음으로 발간됐다.(『마르크스 엥겔스 서고』, 1권) 그리고 독일에서는 1926년 『마르크스 엥겔스 서고』, 1권으로 발간됐다. 우리에게 전승된 전체 저서는 (나중에 발견되고 『사회사 국제 논평』, 7권, 1962년도 1부에 실린 6쪽을 제외한다면) 1932년 소련 중앙의 산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를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총서[GA1]』, 5권 1부로 발간됐다.
1장의 최초 영어판은 러시아판에서 번역했으며, 미국의 잡지 『마르크스주의자』 4호(1926년 7월)에 발표됐다. 이 장의 몇몇 부분은 독일어판에서 번역됐고, 1933년 3월 영국의 잡지 『노동 월간』 15권 3호에 실렸다. 1장의 「포이어바흐」와 2권 「진정 사회주의」의 영어 번역은 『독일 이데올로기』1부, 3부라는 제목으로 1938년 로렌스와 위샤르트Lawrence & Wishard 출판사가 출판했다. 전체 저서의 영어 번역본[CW 5권]은 1권 1장의 한 쪽(수고 29쪽)을 제외하고는, 1964년 모스크바 프로그레스Progress 출판사를 통해 발간됐다.
3) CW주 8)
[여기서는 특별히 포이어바흐 장의 성립 과정을 설명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1장[포이어바흐 장]의 수고는 여러 분리된 문서 형태로 우리에게 전승된다. 이 문서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일반적인 계획을 변화한 데 기인한다.
처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를 동시에 다루는 비판적인 저서[H5a에 해당]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들은 바우어와 슈티르너를 다른 장에 다루기로 결정했다.(2장 성 브루노 3장 성 막스) 그리고 1장은 일반적 소개를 담는 장으로 설정됐다. 이 소개는 포이어바흐에 반대하는 그들의 고유한 견해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래 수고에서 바우어와 슈티르너와 관련해 썼던 구절들을 삭제한 다음 이를 2장과 3장으로 옮겼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포이어바흐에 관한 장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첫 부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어서 그들은 2장을 작성하고 3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슈티르너의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던 과정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전환을 겪게 됐다. 이런 전환 가운데서 그들은 역사에 대한 고유한 유물론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라서 그들은 이런 전환 가운데 두 가지를 슈티르너의 장에서 포이어바흐 장으로 옮겼다. 첫 번째는-6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슈티르너의 관념론적 견해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작성됐다. 그 견해란 곧 역사는 정신을 통해 지배된다는 것이다.(이런 전환의 내용은 원래 「D. 위계체제」절에 존재했다.) 두 번째 비판적인 전환은-37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슈티르너가 부르주아 사회, 경쟁 그리고 사적 소유자 사이의 관계, 국가, 법에 대해 가졌던 견해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작성됐다.(슈티르너의 장에 있던 이 구절은 다른 구절로 대체됐다.) 이 두 가지 전환은 연대기적으로 볼 때 포이어바흐의 장 가운데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을 이룬다.
포이어바흐의 장을 이루는 세 부분의 쪽은(1~72까지) 마르크스가 매겼으며 전체 장의 휘갈겨 쓴 복사본을 이룬다. 수고의 쪽 3~7과 36~39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대체적인 얼개를 개정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정서된 복사본을 작성했다. 그 처음 부분은 두 판본이 있다. 우리는 수고의 다소간 독립된 네 가지 부분을 발견했다.(대체적인 복사본에 속한 세 부분과 정서된 복사본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현재 편집본에서 포이어바흐 장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부분[A절 앞부분]은 정서본인데 복합적인 단편들로 이루어진다. 둘째 부분[A절 뒷부분]은 전체 장의 원래 핵심을 포괄한다. 셋째 부분[B절]과 넷째 부분[C절]은 슈티르너의 장에서 옮겨온 이론적으로 전환을 이룬 부분이다. 각 부분은 전체적으로 일관되며 논리적으로 정합적이다. 각 부분은 서로 보완하며 함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개념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네 가지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소개, 헤겔 이후 독일 철학이 지닌 관념론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의 전제, 본질, 일반적 윤곽에 해당한다.
두 번째 부분은 역사 발전에 관한 유물론적인 개념이며,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에서 나오는 결론,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개념 일반에 대한 비판, 특히 청년 헤겔주의자와 포이어바흐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개념의 기원을 다룬다.
네 번째 부분는 생산력의 발전, 노동 분업, 소유의 형성, 사회의 계급적 구조, 정치적 상부구조, 사회적 의식의 형식을 다룬다.
수고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비교해 보면 이 장의 논리적 구조를 추출할 수 있으며 저자들이 가졌던 의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장의 일반적 계획을 재구성할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이어서 역사에 대한 관념론자의 개념에 대비되는 유물론자의 개념을 제시하며 최종적으로 관념론자의 개념을 비판한다. 이 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즉 저자들의 전제-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그들의 이론에서 나오는 결론이라는 구조이다.
대체로 이 장의 계획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도에 부합해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 서술(1절 서론과 1항, 2절 1항)
2) 유물론자가 지닌 역사 개념의 전제(1절 2항)
3) 생산(2절 3~5항, 1절 3항, 4절 1~5항), 교류(4절 6~10항), 정치적 상부구조(4절 2항), 사회적 의식의 형식(3절 1항, 4절 12항)
4) 유물론자의 역사 개념에서 나오는 결론과 요약(2절 6~7항, 1절 4항)
5) 관념주의자의 역사 개념에 대한 비판과 특히 청년 헤겔주의자 또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비판(2절 8~9항, 3절 1항)
수고의 전체 제목은 「1장 포이어바흐」이다. 1888년 마르크스가 죽은 이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초고를 정리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수고를 발견했고 그것을 다시 읽었다. 그는 이 장의 마지막에 “1장 포이어바흐, 유물론자의 견해와 관념론자의 견해의 대립”이라고 메모했다.
이장의 부분들은 세부 절로 나누어진다. 이 세부 구분은 편집자[CW의 편집자]가 한 것이며, 이 편집자가 제목의 대부분을 붙였다. 편집자에 의한 제목이나 모든 편집자의 언급은 괄호 속에 있다.
수고의 쪽은 이 책에 지시된다. 정서본(1, 2)은 엥겔스가 부분적으로 쪽수를 매겼으며 ‘정서본1, 2’ 등으로 매겨져 있다. 저자가 번호를 매기지 않은 정서본의 첫 번째 판본의 쪽은 ‘낱장1, 2’ 등으로 매겨져 있다. 휘갈려쓴 세 초고의 쪽은 마르크스가 매긴 것이며, ‘수고1, 2’ 등으로 표시된다.
1장에서 수고의 다른 부분의 배열과 세부 구분은 러시아판과 같다. 이 판은 『철학의 문제Voprosy Filosofii』 10, 11호(모스크바, 1965)에 실린 것이다.
4) GA2의 부록의 설명
[역주: 전체 약 200쪽에 걸치는 상당히 긴 설명이다. 간단한 요약해 서술했다.]
(1) 동기
『독일 이데올로기』는 1845년 10월부터 1847년 4/5월까지 작성됐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작성의 의도가 변화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상적으로 포이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입장이 긍정에서 비판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며 또 마르크스, 엥겔스가 진정 사회주의자들과 사상적으로 단절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처음 수고를 작성하게 된 동기는 마르크스가 바우어와 슈티르너에게서 포이어바흐의 아류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신성 가족』(1845)에서 바우어를 비판하자 바우어가 『비간트』 계간지 3호(1845년 10월)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특징』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마르크스를 포이어바흐의 아류로 비판했다. 슈티르너 역시 1845년 4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발표하면서 마르크스의 원류인 포이어바흐를 비판하자, 포이어바흐는 『비간트』 2호(1845년 6월)에 이를 반박했다. 슈티르너는 이에 대해서 『비간트』 3호에 『슈티르너에 대한 비평가들』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직접으로는 포이어바흐를, 간접으로는 마르크스를 비판했다.
마르크스 사상에서 포이어바흐는 기초였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도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영국의 정치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포이어바흐를 벗어났다. 1845년 초 작성한 「포이어바흐 테제」를 비롯한 수고들은 마르크스가 이미 독자적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직 포이어바흐에 대한 단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우어와 슈티르너의 비판을 계기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서술할 필요가 생겼다.
그런데 『신성 가족』을 통해 바우어를 비판할 때까지만 해도 마르크스, 엥겔스는 헤스와 함께 활동했으며 사회주의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이 사회주의는 프루동에서 연원한 사회주의다. 그러나 1845년경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벗어나 공산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845년 12월 브뤼셀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에 속하는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독일 사회주의자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스와 함께 루게 등 자유주의자와 대결했으니, 진정 사회주의자와의 차이를 분명히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수고의 작성
마르크스는 처음 1845년 10월 말 기존의 계간지에 발표하기 위해 바우어 비판에 착수했다. 대체로 11월 말에 이르러 바우어 비판은 완성됐다. 그런데 1845년 11월 말에 이르러 마르크스, 엥겔스는 헤스 등의 독일 사회주의자와 새로운 계간지를 발간하는 계획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계획을 2권으로 확대했다. 1권은 바우어를 넘어 슈티르너까지 비판할 예정이었다.
1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동시에 작성했다. 두 사람은 새벽까지 한줄 한줄 토론하면서 글을 써갔으나, 주도적인 역할은 마르크스가 맡았다. 나중에 이를 정서하는 책임은 엥겔스가 담당했다. 부분적으로 바이데마이어가 담당하기도 했다. 정서된 원고 옆에 마르크스가 다시 수정하는 글을 달아 교정했다.
2권은 진정 사회주의자(헤스 등)와 함께 작성하기로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2권에서는 각기 독자적인 글을 작성했다. 전체적인 편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책임졌다. 다른 기고자들의 글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개입해서 부분적으로 교정했다.
계획이 세워지자 11월 말부터 마르크스는 슈티르너 비판에 착수했다. 이런 비판 과정 중에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할 필요성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슈티르너는 개인의 관점에서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를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는데, 마르크스는 이때 이런 관점이 한면에서는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가 추상적인 만큼 슈티르너의 개인도 비역사적인 추상적 존재라고 보았다.
이 시기가 대강 1846년 3월 경이며, 이때 마르크스는 슈티르너의 사적 소유와 국가, 법의 관계를 비판할 무렵이었다. 그는 이 부분의 일부(H5c: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발전)를 떼어 내어서 자신의 입장을 서술하는 서론으로 쓰기로 했다. 기왕에 썼던 부분 중 슈티르너의 위계체제를 비판한 부분 중의 일부(H5b: 유물론적 이데올로기 개념) 그리고 바우어 비판의 일부(H5a: 욕망에서 생산, 역사적 생산으로 즉 역사의 논리적 구성)를 결합했다. 이렇게 마르크스가 자기의 입장을 밝히는 서론 격으로 모아놓은 부분은 내용상 포이어바흐 비판과 중첩되므로,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의 장 즉 1장으로 변화됐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여전히 포이어바흐의 입장에 머무르는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마르스와 엥겔스는 2권을 쓰면서 독일 사회주의(진정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하는 원고를 작성했다. 이때가 1846년 2월에서 4월 사이이다. 진정 사회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주로 헤스에 집중됐다. 특히 그가 발표한 『미래 철학의 근본 원리』(1943)와 『사회의 거울』에 발표한 『최근 철학자들』(1845년 6월)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1권의 중심 원고는 1846년 3월 24일 완성했고, 엥겔스와 바이데마이어가 필사했다. 1846년 4월 3장 슈티르너 비판 부분의 정서도 마쳐서, 바이데마이어를 통해 원고를 베스트팔렌으로 보냈다. 4월 중순에서 5월 말 사이에는 2장 바우어 비판의 정서도 마쳤다. 그러나 아직 1장 포이어바흐 장은 여전히 개편하는 중이었다. 이어서 2권 진정 사회주의 비판(H12, 2권 1장), 칼 그륀 비판(H13, 2권 4장)도 원고를 완성했다.
계간지 발간 합의 이후 2권에 실릴 다른 작가들의 글은 베르트Georg Weerth, 베르네이즈Karl Ludwig Bernays, 바이틀링Wilhelm Weitling, 헤스Mose Hess의 글이다. 공산주의자 바이틀링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헤스와 가까운 진정 사회주의자다. 2권에 실리는 다른 작가 즉 진정 사회주의자의 원고도 이 시기에 완성됐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른 작가의 원고는 거의 수정 없이 편집했으나 헤스가 쿨만을 비판한 원고(2권 5장)에 대해서는 엥겔스가 개입해서 헤스의 비판적 논조를 더 강화했다. 이런 작업은 1847년 5월 말까지 전개됐다.
(3) 수고 발간의 난파
마르크스는 프랑스 체류 시기(1843~1845)에 루게와 『독불 연보』를 편집했다. 이 연보가 중단된 이후, 마르크스는 진정 사회주의자 피트만이 주도하는 『라인 연보』의 편집자로 추천됐으나, 마르크스는 피트만과 협력을 거부했다. 대신 공산주의자 바이틀링과 영국에서 계간지를 발간하려 했다. 『라인 연보』도 곧 탄압을 받자, 출판사 사장인 레스케는 마르크스와 검열받지 않는 계간지를 발간하기로 계획했다. 1845년 11월 말 사업가이자 진정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율리우스 마이어와 루돌프 램펠이 이 계간지의 재정을 지원하기로 약속하면서 계간지 발간이 가능하게 됐다. 이 시기에 앞에서 말했듯이 마르크스,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2권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계간지 발간 계획이 좌초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진정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가진 것이 진정 사회주의자에게 알려진 것도 한 원인이 됐다. 브뤼셀에서 한때 공동생활을 하기도 한 헤스와의 충돌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런 충돌 이후 헤스는 1846년 3월 말 벨버Velver로 이주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스를 추종하는 사업가 메이어와 램펠과도 소원해졌다.
게다가 메이어와 램펠은 이 시기 재정적인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재정을 보조할 서적 판매상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럼펠은 1846년 1월 서적상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사정을 들어서 헤스에게 편지를 내어 계간지 발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사이 일어난 헤스와 마르크스의 충돌은 갈등을 강화했다. 결국 1846년 5월 기존의 합의는 해소되고 말았다. 마르크스는 이를 직접 듣지 못했고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바이데마이어를 통해 간접으로 전해 들었다.
계간지 발간이 난파한 다음에도 마르크스, 엥겔스는 원고를 단행본으로 발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출판사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런 사이 1847년 6월에 1장 포이어바흐 장의 개편이 시도됐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쪽을 다시 매겼다. 원고는 다시 정서를 시작했다. 이 정서는 주로 엥겔스가 맡았다. 그래서 정서본(H3, H5)이 남았다. 그리고 1장 서문을 썼다. 두 번이나 쓴 것(H2, H3)을 폐기하고 새로 썼다. 남아 있는 H4가 최종 완성된 1장 서문이다. 최종적으로 1권 서문(H1)이 마르크스를 통해 독자적으로 작성됐다.
거듭된 출판 시도는 끝내 좌절됐다. 처음 2권으로 단행본을 발간하려던 계획은 다시 축소해 2권 가운데 다시 다른 작가의 글을 배제한 채 1권으로 통합해서 발간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
베스트팔렌에 보냈던 원고는 바이데마이어를 통해 쾰른의 다니엘에게 전달됐으나 1847년 겨울 쾰른의 원고는 다시 마르크스의 손으로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돌아온 원고 중 슈티르너 부분(H11)의 구조를 개편하고, 축약하고 쪽수를 부여했다. 엥겔스는 진정 사회주의를 다시 비판할 필요성을 느끼고 글(H15)을 다시 작성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그때까지도 출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판이 지지부진한 사이 헤스가 쓴 루게 비판 논문 『도토레 그라찌아노』는 『독일 브뤼셀 신문』 1847년 8/9월 호에 독자적으로 발표됐다. 2권 가운데 진정 사회주의자인 벡과 그륀을 비판하는 2장과 4장은 1847년 말에 『독일 브뤼셀 신문』에 독자적으로 발표됐다. 그때 제목이 「진정 사회주의의 시와 산문」이다.
결국 1847년 겨울에 이르면 출판의 모든 시도가 포기됐다.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아직 분명한 이름이나 구조도 부여되지 않았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름과 구조를 유추할 수는 있다. 1846년 여름 계간지에 실릴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고와 1847년 겨울 단행본 출판을 위한 광고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전자에서 우리는 수고의 구조를 알 수 있고 후자에서 우리는 수고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이 『독일 이데올로기』이다.
(4) 전승
12년 뒤 마르크스는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해』 서문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자기 해명에 두었다는 언급을 남겼다. 그는 역사에 관한 자기 이해가 분명해진 다음 수고는 쥐가 쏠아 먹는 대로 방치했다고 한다.
마르크스 사후에 원고는 엥겔스 손으로 넘어갔다. 엥겔스는 유고를 편제했으며, 1장 포이어바흐 장에 제목을 부여했다. 엥겔스는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수고를 참고했다고 했으며,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에 「포이어바흐 테제」를 조금 수정해 실었다. 그는 수고를 세 뭉치로 나누어 보관했다.
엥겔스 사후 유고는 베른슈타인과 베벨의 손에 나누어져 전달됐다. 그 후 1924년 리야자노프David Rjazanov의 손으로 마르크스 엥겔스 문고로 편집됐고, 1926년 독일어판으로 발간했다. 193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연구소의 아도라츠키Vladimir Adoratskij가 새로 편집했다. 이 편집본은 1932년 『마르크스 엥겔스 총서Marx Engels Gesammelte Aausgabe』[GA1]로 발간됐다.
리야자노프는 1장을 수고의 쪽수 대로 편집했으나, 아도라츠키는 1장에서 마르크스가 방주로 남긴 편집 지시에 따라 재편했다. 아도라츠키판은 동독 마르크스 레닌 연구소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arx Engels Werke)』(Dietz Verlag, 1958)(W, 3권)을 작성할 때 기초가 됐다.
그 후 W 편집을 비판하는 여러 시도가 등장했다. 1965년 소련공산당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 레닌 연구소에서 바가투리아Georgi Bagaturia가 리야자노프판에 따라 새로 편집했다. 이 편집본은 1966년 단행본으로 발간됐고, 1969년 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에서 영어본(Marx Engels Collected Works[CW])으로 출판됐다.
그 뒤 일본의 히로마쓰 와타루가 1장을 시험적으로 편집했으며, 2003 타우버트Inge Taubert 등이 다시 1장을 시험적으로 편집해 『마르크스 엥겔스 연보 2003』(연보판)에 발표했다. 최근 2018년 국제 마르크스 엥겔스 재단(Internationaenl Marx Engels Stiftung[IMES])은 마르크스 엥겔스 총서를 다시 출판하면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총서 1/5권(Marx Engels Gesammelte Aausgabe』[GA2])으로 발표했다. 이 판본은 라야자노프와 바가투리아의 판본을 따라 수고의 쪽에 따라 편집했다. 바가투리아가 1장의 수고에서 좌단과 우단으로 나누어진 글을 지그재그식으로 연결해 편집한 반면, GA2판은 수고의 좌, 우단을 그대로 편집해 수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내용상 차이는 없다. 아래에서 W, CW(바가투리아판), GA2의 편집을 비교해 보았다.
참고로 각 판본의 출판 사항을 아래에 밝힌다.
W 3권:
원본:
소련 공산당 중앙위 부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연구소, GA1 5권, 1932
편집 고문: Vladimir Adoratskij
독일어판:
독일 민주 공화국 통일 사회당 부설 마르크스 레닌 연구소, W 3권, 1958
편집 Ludwig Arnold
교열 Walter Schulz
CW 5 권:
출판사: Progress, Moscow, 1969
Lawrence 8c Wishart, London, 1973
편집 고문: Georgi Bagaturia
편집자: Vladimir Bruschlinsky
서문, 주석, 주제 색인: Lev Churbanow
인물 색인, 인용문헌, 정기 간행물 색인: Nina Loiko
영어 번역:
라이프치히 공의회(2, 3장), 엥겔스 진정 사회주의자: Clemens Dutt
포이어바흐 장: W.Lough
2권: C.P.Mgill
영어판 편집: Maurice Cornforth, E. J. Hobsbawm, James Klugmann, Margaret
Mynatt. Salo Ryazanskaya,
감수: Lydia Belyakova, Nadezhda Rudenko, Victor Schnittke
GA2 5권:
책임: 국제 마르크스 엥겔스 재단
편집 위원회: Beatrix Bouvier, Fangguo Chai, Marcel van der Linden, Jürgen Herres, Gerald Hubmann, Götz Langkau, Izumi Omura, Teinosuke Otani, Claudia Reichel, Regina Roth, Ljudmila Vasina
출판: Walter de Gruyter, Berlin, 2017
헤겔 형이상학 39-반발력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39-반발력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의
1)
일자의 개념으로부터 일자들의 관계가 나온다. 그 관계는 공허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며, 이 관계는 두 가지 힘의 대립을 통해 유지된다. 그 힘은 곧 견인과 반발이다.
일자, 공허 그리고 견인과 반발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논리학의 세계는 드디어 물리학과 접촉하게 된다. 그 이전 현존의 세계는 감각적 질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질이 명멸하는 세계거나 하나의 질이 다른 질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였다. 물리학은 이런 감각의 세계를 다룰 수 없다. 그러나 일자와 공허가 출현하면서 역학의 세계가 시작된다.
이제 물리학의 세계 그 가운데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역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사물은 이제 질량을 가진 일자들이다. 이들은 공허한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하는데, 그 관계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최초의 모습은 곧 견인(력)과 반발(력)(또는 반발력)의 관계이다.
헤겔은 견인과 반발의 개념을 물체의 개념으로부터 끌어냄으로써 “역학에 대한 철학적 단초와 토대를 놓은 사람”으로서 칸트를 들고 있다. 헤겔은 견인과 반발을 다루는 논리학 3 절 대자 존재의 마지막 C 항 ‘견인과 반발’ 항 마지막에 긴 주석을 달아 칸트의 책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원리>(1786)에서 다루는 견인력과 반발력의 관계를 설명한다.
비판철학자 칸트가 의외에도 자연 철학자였다는 사실은 흥미롭지만, 칸트가 사실 천체의 회전 운동을 설명하면서 성운가설의 기초를 놓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물체에서 견인과 반발의 관계를 단순한 ‘역학’이 아니라 ‘역동학’이라 명명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역학’이라는 개념은 뉴턴과 데카르트의 힘의 개념과 연관되지만, ‘역동학’이란 라이프니츠의 활력(에너지)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떤 물리학 교과서도 반발력(척력)이라는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자연과학의 초기에만 해도 반발력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논의됐고, 특히 헤겔에서 이 개념은 자연을 두 대립된 힘의 통일 관계로 이해하는데, 핵심적 개념이 된다. 칸트와 헤겔이 다룬 반발력 또는 반발력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자연과학에 관한 상당히 복잡한 철학적 논쟁을 거슬러 올라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알다시피 갈릴레오의 천체 법칙으로부터 뉴턴은 역학의 기본 법칙을 끌어냈다. 그게 곧 힘의 법칙이다. 이 힘의 법칙을 통해 뉴턴은 낙하법칙을 설명하고 천체의 운동까지 일의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뉴턴의 힘의 법칙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질량과 힘의 분리였다. 힘은 질량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하므로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운동은 관성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런 관점에서 물체가 전개하는 운동을 보면, 인력과 반발력이라는 대립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체가 회전하는 운동은 원심력과 구심력이라는 두 힘이 필요하다. 뉴턴은 구심력 즉 인력은 중력을 통해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체의 원심력 즉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반발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뉴턴은 일단 최초에 신이 가한 충격에서 이를 설명했는데, 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이미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어떻든, 뉴턴은 인력과 반발력(반발력)은 질량에 대해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두 가지 힘으로 상정됐다. 이 두 가지 힘은 서로 대립하는 힘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이며 크기도 다르다고 보았다.
3)
헤겔은 인력과 반발력이라는 개념이 발전하는 데서 칸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칸트는 물체가 다른 물체의 충격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서(침투 불가능성) 물체의 내부에 반발력이 있다고 가정했다. 이 반발력은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작용하며 공허를 통해서는 못한다. 반발력 그 자신으로서는 물체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런 확산을 통해 물체 내부에 공허의 공간이 확대된다.
칸트는 물체가 만일 반발력만 있다면, 물체로서 자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분산되니, 물체가 자기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물체가 일정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연속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견인력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 견인력은 내부에 비어있는 공간을 제거하며 안으로 수축하도록 하는 힘이니 반발력과는 반대 방향을 작용한다. 이 견인력은 반발력과 달리 공허를 통해 직접 작용할 수 있으며 표면을 넘어서 내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 보았다.
칸트는 물체라는 표상은 한편으로 충만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침투 불가능하니, 이런 두 가지 표상으로부터 반성적인 사유를 통해 견인력과 반발력이라는 두 가지 힘을 끌어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칸트에서 이 견인과 반발이라는 두 힘은 서로 대립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각기 독립적이며 그 크기도 다르다. 견인력은 그 핵심이 지구 중력이니 물체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질량에 비례한다. 이는 물체의 종류에 무관하다. 그러나 반발력은 물체 사이의 거리의 세 제곱에 비례하며 마치 물체가 지닌 탄성처럼 물체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칸트는 이 견인과 반발의 힘은 물체의 개념에 내재하지만, 물체 자체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은 물체의 본성을 이루는 질량과 무관하지만, 물체가 물체로서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속성이라 보았다.
4)
그러나 칸트가 서로 대립하는 견인력과 반발력이 물체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그 이후 자연에 관한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를 발전하게 하는 데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헤겔은 견인력과 반발력은 항상 대립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칸트처럼 두 힘이 독자적 힘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양자는 쌍으로 작용하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은 견인력과 반발력 사이의 상관성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우선 앞에서 전제를 다시 한번 상기해 두자. 견인은 공간을 충만하고(수축) 반발은 공간을 공허하게 한다(확장). 즉 견인은 공허를 제거하며 반발은 충만을 비운다.
① 견인은 서로 끌어당겨 내부를 충만하게 한다. 만일 이미 서로 충만한 것 사이에 반발력이 생길 수는 없다. 이미 충만한 것이 반발한다면 그것은 충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충만한 견인만 있다면, 자연은 일 점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② 반발은 서로 밀어내서 내부를 공허하게 한다. 만일 이미 서로 떨어진 것이라면 그만큼 견인이 작용할 수 없다. 만일 서로 떨어진 것에 견인이 작용한다면, 서로 반발하는 것일 수는 없다. 만일 반발만 있다면, 자연은 무수히 많은 점으로 분산돼서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③ 차례로 놓인 세 점을 생각해 보자. a와 b가 서로 견인한다면 b와 c는 서로 떨어진다. 이는 곧 반발을 의미한다. 견인하는 것은 반대편에서 보면 반발하는 것이다. 만일 a와 b가 서로 반발한다면 b와 c는 서로 견인한다. 즉 반발하는 것은 반대편에서 보면 견인하는 것이다. 점 b에서 보면 견인은 곧 반발이며 반발은 곧 견인이고 양자는 항상 동일하다.
④ 견인과 반발이 유래한 표상인 물체의 연속성이나 침투 불가능성은 사실 같은 것이다. 연속적이므로 침투 불가능하며, 침투 불가능하므로 연속적이다. 견인하므로 반발하며 반발하므로 견인한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하는 양자는 함께 작용하면서 물체의 연속성과 침투 불가능성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5)
앞에서 말했듯이 칸트는 뉴턴적 힘 개념에 머물러 인력과 반발력은 질량과 분리된 힘으로 보았다. 칸트는 모호하게도 두 힘은 물체의 개념에 속하기는 하지만 물체 자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운동을 물질에 외면적인 것으로서만 전제하고 운동을 어떤 내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운동을 물질 속에서 파악하지 않았다. 따라서 물질 역시 운동 없는 것으로서 관성적인 것으로서 고립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두 대립하는 힘이 서로 상관한다면, 이 힘은 물체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것이 개념에 속한다면 그것은 곧 그것 자체에 속할 수밖에 없다.
“칸트는 견인력은 반발력과 마찬가지로 비록 물질 속에 포함된 것은 아니더라도 물질의 개념에 속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칸트는 이 주장을 강조했는데,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모르겠다. 왜냐하면, 어떤 규정이 사태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라면, 진정으로 사태에 포함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두 힘이 물체 자체에 속하며 이 두 힘의 관계가 곧 물체 자체라고 보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체의 힘에 대립하는 질량조차도 힘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은 그의 변증법의 가장 핵심인 대립적인 힘의 통일이라는 법칙으로 발전했으나 실제 자연과학에서 그의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력과 반발력의 상관성을 자연 속에서 찾을 도리가 없었다. 전기는 + 힘과 – 힘이 있고, 자기력은 북극과 남극의 힘이 있어 인력과 반발력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중력에는 반중력이 없으니, 그런 상관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헤겔의 주장은 당장 경험적 사실을 통해 비판받았다. 그는 견인력과 반발력이 크기가 동등하다고 보았는데, 경험적으로 볼 때 양자는 서로 다르다. 인력은 질량에 비례하지만, 흔히 반발력의 대표적 예로 여기는 물체의 탄성은 그 질량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후일 엥겔스는 자연 변증법에서 대립적 힘의 통일이라는 법칙을 확립하는 자연과학적 사실을 끌어모으려 했으나 결국 그 자신도 그런 과학적 사실을 찾을 수 없었다. 엥겔스는 자연변증법을 위하여 엄청난 자료를 모으고 많은 글을 남겼으나 결국 출판을 포기했으니, 그로서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적 근거 없이 발표하기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6)
오늘날 자연과학의 발전을 보면, 헤겔이 인력과 척력의 동등성을 주장한 근거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발견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있다. 그 단서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라이프니츠다.
근대 역학에서 힘의 개념은 질량과 분리된 힘이다. 이를 역학적 힘이라 한다. 이 힘은 가속에 비례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미 역학적 힘 외에 역동적 힘 즉 활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중에 이 활력은 에너지 개념으로 발전했다. 알다시피 이 에너지는 가속의 제곱에 비례한다.
처음에 과학자는 힘의 보존 법칙을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에너지 개념이 발견되면서 마침내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에너지 보존 법칙이 세워졌다. 이 에너지 보존 법칙은 하나의 힘이 있다면 그것에 대립하는 힘이 항상 있어야만 가능하다. 만일 서로 대립하는 힘이 동등하지 않다면 자연의 운동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개념을 통해 본다면, 자연에서 견인력과 반발력은 여러 가지 힘들의 종합적인 결과다. 사실 지구 중력은 가장 중요한 견인력이기는 하지만, 견인력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발력 역시 열에너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외 다양한 에너지 질량 에너지, 빛이나 소리 에너지 등도 함께 작용한다. 이 에너지를 전체적으로 보면 항상 인력과 반발력은 대립하지만 동등하게 된다.
맥스웰이 증명한 에너지 보존 법칙조차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하는 과정이 밝혀지는 한 최종적으로 증명됐다 볼 수 없다. 아인슈타인에 이르러 질량 에너지가 확립되면서 마침내 에너지 보존 법칙이 확립됐다.
최종덕 회원의 <신유물론의 자연철학> 강의 영상 안내 [한철연 소식]
2025년 4월 7일부터 6월 9일까지 매주 월요일 유럽인문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최종덕 회원의 <신유물론의 자연철학> 강의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를 안내합니다.
영상은 최종덕 선생님이 운영하는 개인 유튜브 계정(https://www.youtube.com/@philonatu)에서 제공됩니다.
강의자의 동의를 얻어 소개하오니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시청바랍니다.
♦ 신유물론의 자연철학 (최종덕) 강의 시리즈 유투브 주소
1. 들뢰즈에서 라투르까지;미분법과 리만기하학
https://youtu.be/J8OF-Pofc7U?si=F5PtiYQvHxJy1EFY
2. 해러웨이 신유물론의 생물학적 기초
https://youtu.be/Ls00WVR4egs?si=a8ac0mz6Y_vxzq-v
3. involution, 해러웨이와 들뢰즈 차이
https://youtu.be/gvH_pBoOUNA?si=PXOn0Ao5HaVwyD6Q
4. 해러웨이, 기존 영장류학 비판
https://youtu.be/VUqWI_Bubfc?si=_zntBflcy1eC7Yc_
5. 캐런 버라드, 양자역학으로 본 얽힘과 결풀림
https://youtu.be/C4Dli8ieqQA?si=9yCggnII8HH38lLP
6. 버라드의 무nothingness와 생성
https://youtu.be/8a3CvfDPNtU?si=jdfEnk3TA_d6qF-h
7. 신유물론으로 읽는 화이트헤드
https://youtu.be/_TwpaCKuMSQ?si=xf6wuQgBxDbv-aGf
8. 티모시 모튼, 하이퍼객체와 저주체
https://youtu.be/Wc20Z3taEto?si=3PSmKhbHwIdmY4un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1]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소개글]
하버마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기 그지 없는 그의 사상이 무엇을 의도했고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되도록 간명하게 알고 싶어 한다. 여러 개론서들은 독자들의 이런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되지는 못했다. 2024년 출판된 이 인터뷰집은 하버마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독자들의 이러한 불만족을 해소해 준다. 오랫동안 하버마스를 연구했으며, 그의 학문적 전기를 깊이있게 서술했던 질문자들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이 인터뷰는 하버마스의 어릴적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학문적 여정을 차근차근 다루고 있다. 인터뷰를 따라가다보면 하버마스와 스승 세대, 동료들 그리고 제자 세대에게서 받은 여러 영향들이 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독자들은 이런 영향들이 하버마스의 사유에 있어서 어떤 동기를 부여했으며, 발전 방향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그리고 하버마스가 이런 영향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면서 수용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인터뷰는 학문적 생애를 단순히 회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2019년 두 권으로 출판된 대작 『또 다른 철학사』를 통해 구현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계보학’이 어떤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관철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하버마스 취하고 있는 탈형이상학적 사유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의 철학이 현실 사회의 모순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 형성된 지적 정치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내비치는 소소한 개인사와 사적 인연들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딱딱하고 진지하기만 한 이 이론가가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느끼게 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번역은 AI의 도움을 받아 수정했다. 저본은 Habermas, Jürgen. 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 :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Stefan Müller-Doohm, Roman Yos, Frankfurt am Main: Suhrkamp.
[1]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① –
□ 하버마스 선생님, 예전에 “살면서 자기의 근본적인 의도를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근본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이론 발전과 직업 경로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49년 괴팅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1949년 제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역사적으로 급격한 어떤 단절을 경험한 세대로 회고해 볼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우리는 4년 동안 나치 지배가 남긴 심연을 시간을 갖고 되새기며, 그 시절 우리가 살아갔던 ‘정상적’ 일상의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를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윗세대보다 우리에게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젊었기 때문에, 우리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상적 일상 속에 숨어 있던 심연의 깊이를 민감하게 너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나 방조(放棄)한 일에 대해 책임져야만 할 기억이 없었기에, 그런 통찰을 중지하게 할 만한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헬무트 콜이 말했던 ‘늦게 태어난 것의 은혜’라는 표현은 이 점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나이 많은 이들은 우리 세대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에 참여한 이들의 세대차를 늘 매우 의미 있게 보아왔습니다. 그처럼 완전히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는 민족적 환경 한가운데서, 우리 젊은 세대는 방향 감각과 계몽에 대한 갈망,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데 심리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비판적 성향을 지닌 이들이 주변의 ‘굳어 버린 사고 방식’과 결별하게 된 것은 일종의 직관적 통찰 덕분이었습니다. 즉, 나치는 ‘본질적으로 건전한 문화’ 안에 침투한 이질적인 물질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한낱 지나간 ‘악몽’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민족 문화의 가장 어두운 유산을 자신들의 자양분으로 삼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문화 유산은 심지어 토마스 만 같은 국민적 대문호조차도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1789년의 정신[프랑스 혁명 정신]’에 맞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런 배경만이 나치가 공습 대피소 안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그 ‘감염력’을 설명해줍니다.
통화 개혁 전까지 이어진 전후 초 잡지와 문학 속에는, ‘문명 파괴’라는 이름조차 미처 붙이지 못했지만 그런 단절에 대해 스스로 책임 있게 성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는 저에게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가정 환경, 그리고 학비를 기꺼이 대려 했던 아버지도 한 몫 했습니다. 그러나 전공 선택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기로 했을 당시 저는 특정한 직업—그리고 특히 교수라는 직업은 전혀—염두에 두지 않았고, 단지 관심을 충족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1949년에는 한 세대의 약 5%만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늘날에는 50%에 달하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된 시기였습니다. 단순히 한 전공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학부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주제나 대상들을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스스로 구성한 셈인 공부 과정을 통해, 중간 시험 같은 것을 본 적도 없이, 박사 시험에 필요한 두 개의 부전공을 나중에 선택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미 대학 입학 시험(Abitur)을 통과하기 전부터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그 결심에 이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선생님의 삶의 상황, 특히 철학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경험이 있었을까요? 청소년기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어릴적 의사가 되고 싶다고 희망해서 해부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열두 살 무렵 ‘융폴크(Jungvolk)’에서 ‘펠트셰어(Feldscher, 야전 의무병)’로 옮겨서 훈련받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사춘기 시절 입천장 갈림병(구개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 그 문제를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제 친구 유프 되어(Jupp Dörr)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불쾌한 경험을 몇 번 당한 것을 제외하면 순진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도록 꽤 잘 보호받으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의학에 대한 관심은 생물 수업의 영향을 받아 점차 이론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습니다. 제 흥미를 자극했던 생물 선생님은 사실 전쟁 이후에 나폴라(Napola, 나치 엘리트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부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나치였던 셈이죠. 그러나 매우 해박했고, ‘인종생물학’의 함의를 이미 넘어선 학문 자세를 견지하면서 우리를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입문하게 했습니다.
그 이후 제 관심은 생물학을 넘어서 인간학적 질문들로 확장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통화 개혁 이후 어느 날 저는 우연히 슐츠-헨케(Schultz-Hencke)1의 책을 손에 넣었는데, 이는 나치 체제에 순응한 정신분석학 교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나지움(고등학교) 마지막 2년 동안에는 심리학 잡지 《Psyche》를 정기 구독할 수 있게 되었죠. 이처럼 넓은 의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결국 제가 고교 졸업 시험을 보기 전 몇 해 동안 칸트와 헤르더의 역사철학을 읽으면서 철학적 관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아이러니하게도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우(Otto Friedrich Bollnow)라는 구 나치 인사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은 특히 그의 희곡을 통해 우리 세대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굼머스바흐(Gummersbach)역 근처에 있던 공산당 서점에서 접한 마르크스주의 문헌들 그리고 그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서 제 아버지 세대가 선호했던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과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도 저의 지적 환경을 함께 구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저는 개인적인 ‘에세이’(Aufsätze) 속에서 풀어냈습니다. 그 에세이를 가지고 저는 학교에서 몇 안 되는 비(非)나치 교사 중 한 명이자 제가 깊이 존경하던 라틴어 교사 클링홀츠(Klingholz) 선생님을 꽤 괴롭혔습니다. 그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고, 저는 그에게 그런 글을 자주 들이밀었기 때문에 꽤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또한 저의 외삼촌 페터 빈겐더(Peter Wingender)는 철학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칸트의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와 같은 ‘진지한’ 책을 추천해주며 제게 자극을 줬던 수많 내용들이 단순한 ‘흥미’ 수준에서 끝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이처럼 지적으로 무수한 세계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환경에 살다 보면,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따로 의식적으로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근본 의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철학 같은 학문을 전공하며 살아가겠다는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나중에, 뜻밖에도 제가 교수가 될 수 있었을 때조차도, 저는 제 능력이나 성과 나아가 제 직업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직업—대학교수이자 학자—를 어느 정도 잘 해내고 있다는 감각이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 건, 1980~90년대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재직 시절부터였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이 전공을 선택하게 된 어떤 ‘내면적’ 동기가 없었던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가치 지향을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건 없었나요?
■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건 오히려 철학에 대한 플라톤적인 자기 이해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런 관점을 한 번도 공유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늘 ‘진짜 철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곤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이죠. 즉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으로 타당한 통찰을 추구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래그머티즘에서 [철학적 탐구에 대한] 제 동기들을 더 많이 발견했습니다.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 아니 최소한 늘 되풀이 될 위험이 있는 퇴행을 막으려는 노력이야말로 결코 하찮게 볼 수 없는 동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라는 호칭에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 ‘철학자’라는 호칭만 붙이면 선생님께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던 건가요?
■ 그건 오랫동안 말 그대로 느낌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동료들 가운데 제가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 가끔 그 점을 곱씹어보게 됩니다. 확실히 위대한 형이상학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아무 거리낌 없이-하지만 아무 맥락 없이 그런 건 아니죠- 직접적으로 계승한 사람 중 로베르트 슈페만(Robert Spaemann)만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고전 텍스트에 대해 깊이 있는 정독을 통해 놀라운 통찰을 끌어내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그 점에서 저는 종종 레오 슈트라우스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 가까운 철학 동료들 역시 각자 고유의 이론적 구상 속에 겉보기엔 냉철해 보이면서도 ‘위대한 철학’ 전통에 다소간 뿌리박고 있는 동기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락하신다면 몇 가지 대략적인 도식으로 설명드리죠. 예컨대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의 경우, 도덕의 최종적 정당화(die Letztbegründung der Moral)를 향한 그의 열정만 보아도, 그는 ‘탈형이상학적 사고’를 너무 멀리 밀어붙여선 안 된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건 우리 사이의 핵심적인 의견 차이기도 했습니다.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의 경우, 형이상학적 근본 동기는 명백합니다. 즉, 성찰로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와 낯익은 것(Mit-sich-Vertraut-Sein)과 같은 게 있다는 직관을 확신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직관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 하여금 [모든 존재자들의 바탕이 되는 형이상학적 근거와 같은] ‘포괄적 전체(Allumfassenden)’를 이해하게 하는 문턱이 된다는 것이죠. 미하엘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은 평생 동안 종교적 동기들과 씨름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에는 상호주관성과 청년 헤겔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 독해를 거쳐 말년에는 후기 하이데거로의 회귀를 시도했죠. 저는 그 시도가 그리 생산적이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가장 명석하고 냉철한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조차도 자신의 언어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번역한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윤리학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지향성은 그의 후기 작업인 신비주의로의 전환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기중심적 주체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압도적인 우주에 대한 관조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는 칸트의 보편주의적 정의 개념과 이성적 자유 개념을 구제할 수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죠. 저에게는 그런 종류의 ‘심층적인’ 동기들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붙잡고 있는 문제는 왜 인간 사회는 그토록 쉽게 파괴되고 반복적으로 붕괴되어왔는가 그리고 그런 취약한 사회적 공존을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될 수 있느냐고요? 저에게 인간의 자연 의존성[죽음의 숙명과 같은 것을 탐구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경향]은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철학적 탐구는 다만 인류가 언어를 통한 사회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진화적 도약을 이뤄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인간 사회 외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에 중심을 두고 사유됩니다. 제 철학의 ‘궁극적’ 동기를 굳이 꼽자면, 그것은 아마도 ‘언어의 해방적 힘(die befreiende Kraft des Wortes)’일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개별화된 사회화가 오직 상호 평등한 인정 관계 속에서 이뤄질 때에만 온전히 펼쳐질 수 있습니다. 가까이함과 멀리함, 예와 아니오, 해방과 퇴행, 찬성과 반대(Zustimmung und Widerspruch), 자립과 의존(Selbstsein und Abhängigkeit), 이 모든 것은 개인들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아가 되어가는 과정을 치러낸 의사소통적 경험들입니다. 그런 개인들은 서로 상반된 극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때만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 사회 외적 토대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 통합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죠. 저는 이런 직관을 가지고 철학과 사회 이론을 전개해 왔습니다. 저의 이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이후 [세속주의적] 철학자들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직관을 세속적 사유로 완전히 이행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철학은 그리스적 동기보다는 성서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말씀도 이미 어떤 근본적인 직관에 따른 것처럼 들리는 데요.
■ [관념적이기보다는] 좀 더 사실적인 측면에서 얘기해 봅시다. [앞에서 저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성공 여부가 취약하다고 했어요. 이와같은] 성공적이거나 실패하지 않은 형태의 사회적 통합(soziale Integration)에 대한 직관은 저를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이끌었고, 이 점은 제가 언어학적 전회에 주목했음을 말해줍니다. 처음 시작할 땐 명확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훔볼트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사고, 즉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 형식을 언어적으로 구성한다는 사고만이 언어학적 전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카르납, 콰인, 데이비드슨 같은 주요 분석철학자들에게 언어학적 전회는 단지 방법론적인 의미에 불과했습니다. 덧붙여 이[렇게 언어학적으로 전회한] 패러다임은 조지 허버트 미드와 윌리엄 제임스 같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이 제기한 개별화와 사회화의 동시 기원성과 상호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과할 때에만, 제1인칭, 제2인칭, 제3인칭 간 관계의 역동적인 긴장 구조에 내재한 변증법적 요소를 획득합니다. ‘나-너(Ich-Du) 관계’는 ‘우리(Wir) 관계’의 틀 안에서 형성되며, 이 ‘우리’는 [어떤 의견 등에 대해] ‘예’와 ‘아니오’라고 말하는 행위 주체들이 자신들이 공유하는 언어라는 공동 배경과 그로 인해 열리는 근거들의 공간을 인식하면서, 세계의 어떤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해 합의를 이루려는 관계입니다. 저는 이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즉 헤겔의 변증법처럼 행위 주체들 상호 간의 대립과 투쟁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기적인 분위기의 변증법과는 다른 의미에서의—‘변증법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성장해 가는 이들은 자신들이 ‘나(Ich)’로서 경험하고 자의식을 형성하는 정도가, 자신들이 각각 ‘너(Du)’로 인식하는 제2인칭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그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법을 배우는 정도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는 것은 자의식만이 아닙니다. 의사소통 행위와 담론을 통한 이해는 타당성 주장에 대한 상호 비판을 목표로 하며, 그 점에서 문자 그대로 변증법적[변증술적] 과정입니다. 동시에 이 과정은 의사소통 행위를 하는 주체들로 하여금 ‘예’ 또는 ‘아니오’의 입장을 취하도록 강제하며, 이 입장에 대해 그들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중요한 상황들에서는 이 책임감이 단지 개인의 자립성과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고유의 독특한 특성 또한 형성합니다.
□ 선생님의 생애로 돌아가 보죠. 이를테면 당신의 ‘첫 번째’ 대학 이야기말입니다. 왜 괴팅겐 대학이었나요?
■ 대학 입학 시험을 마친 후 어디서 공부할지는 자연스럽게 결정됐습니다. 그 당시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누구나 꼭 가서 배워야 할’ 두 명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프랑크푸르트에 대학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어요.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전쟁 때문에 ‘중단된’ 학년이 있었고 전후에 여전히 의무적으로 시행되던 정리 작업들(시설 재건 등)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거기서 공부하려면 몇 달, 어쩌면 한 학기를 더 보내야 했기 때문이죠. 반면 괴팅겐 대학에서는 하르트만과 ‘입학 면담’만 하면 됐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별 관심 없어 보이던 그에게 저는 릴케의 작품을 읽은 경험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 첫 학기는 마침 제1차 독일 연방의회 선거운동 기간과 겹쳤습니다. 우리는 나치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마지막 몇 해 동안에서야 어느 정도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도덕적인 반응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정치적으로도 깨어나게 되었죠. 그래서 괴팅겐에서 열리는 선거 유세 행사들을 거의 빠짐없이 찾아갔지요. 그때 저는 민주주의를 대부분 책을 통해서만 배워 온 젊은이로서 아주 극단적인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현실 민주주의와 했던 첫 대면은 충격이었죠. 그 충격은 1944년 7월 20일 베를린에서 반(反)히틀러 음모자들을 체포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Otto Ernst Remer)가 극우 독일제국당 대표로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충격에 빠뜨린 것은 BHE(동유럽 국가들에서 거주하다가 추방된 독일인 연합 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 독일당 그리고 기독교민주당의 선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레머 못지않게 극우적인 태도를 보였거든요. 그때 제가 알게 된 오버렌더, 제보움, 메르카츠(Oberländer, Seebohm, Merkatz) 같은 인물들은 거만하고, 모욕적이고, 점령국들에 맞서 들끓는 말투의 뻔뻔한 태도로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아데나워 초대 내각에 전원 포함되었던 겁니다! 그들의 무책임한 언설에서는 나치 시대와의 단절이라는 필수적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납니다. 어떤 행사에서 독일 국가의 첫 소절이 연주되자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그 순간 청중들의 야유와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 국가가 12년 동안 나치의 당가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떠올렸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원래는 별 문제가 없는 국가였지만, 그런 식으로 악용되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독일 국가에 대해 일종의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4년 연방총회에서 요하네스 라우가 로만 헤어초크와 경쟁해 낙선했을 때, 저는 그 자리에 있던 페터 글로츠에게 ‘독일 국가가 연주되기 전에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그 시점에 맞춰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제 첫 학기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 시절 우리 세대가 ‘정치적으로 자명한 것들(die politischen Selbstverständlichkeiten 정치적으로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원칙이나 가치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철학적 깨달음에 대한 지적 욕구는 그런 자명성에 깊이 젖어 있었지요. 세상은 더 나아져야만 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 전후 시절 당시 철학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나요? 디터 헨리히가 ‘1945년 이후 세대 철학자들만의 고유한 세대적 특징이 있으며, 그것이 특히 현재에 대한 특정한 시각으로 표현되었다’고 한 말에 동의하십니까?
■ 전후 세대 철학자들에 관해 헨리히가 말한 ‘특유한 세대적 특징’이라는 감성을 제가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세대 구분으로 철학자들을 다른 학문 동료들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저와 제 아내는 같은 또래 사회학자들 그리고 역사학자들과 우정을 맺으며 매우 비슷한 사고 방식을 경험했습니다. 인문학부 내 모든 학문 분야에 존재하던 더 깨어 있고 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정신들 속에서 어떤 공통된 세대적 특성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전통이 부패한 뒤 모든 것이 오염되었다는 혐의를 얻었고, 모든 것이 회의와 불신, 비판의 여과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리는 철학 교수로서 나중에 플라톤 전통의 엄숙한 제스처에 맞서서, 우리의 직업적 역할에 대해 냉철하고 소박한 이해, 특히 우리의 주장과 이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뿌리내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이데거가 여전히 찬양하던 진리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분석철학의 방법과 정신을 습득하려 노력했습니다. 독일에서 한때 경멸받던 프래그머티즘조차도 금방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이러한 서구에 대한 무조건적 개방은 독일 철학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저희 세대는, 자랑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저는 전쟁을 겪은 칼-오토 아펠, 에른스트 투겐트하트, 디터 헨리히, 미하엘 토이니센과 가장 가까웠습니다. 앞에서 말한 동기들 때문에, 우리는 모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각자 철학 프로젝트를 발전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다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로를 지켜본 것 같습니다. 브루멘베르크(Blumenberg)는 독불장군이었고,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는 1960년대 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뮌스터 대학 동료들, 특히 슈패만(Spaemann), 륍베(Lübbe), 마르쿠바트(Marquard)를 포함한 뮌스터(Münster)의 동료 철학자들은, 제가 보기엔 리터 학파(Ritter-Schule) 소속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졌을 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울 로렌젠(Paul Lorenzen)의 ‘에를랑겐 학파’와 특히 ‘콘스탄츠 학파’인 프리드리히 캄바르텔(Friedrich Kambartel), 위르겐 미텔슈트라스(Jürgen Mittelstraß), 나중에는 페터 야니히(Peter Janich)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세대 철학자에는 알브레히트 벨머(Albrecht Wellmer)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수학을 전공했던 그가 제 첫 제자였는데, 우리는 곧 매우 우정 어린 관계를 맺었고, 다른 경우들처럼 가족 간 교류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뉴스쿨(New School)에서 수년 간 가르치면서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벨머는 뉴 스쿨에서 비판이론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 과정에서 토마스 매카시와 그의 제자들도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통은 오늘날 독일보다 미국에서 더 생생합니다. 197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딕 번스타인(Dick Bernstein 리처드 번스타인), 딕 로티(Dick Rorty 리처드 로티), 특히 긴밀한 연구 협력 관계를 맺은 톰 매카시와의 우정이 수많은 다른 인맥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