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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26-실재성과 반성적 사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실재성과 반성적 사유

1)

앞에서 헤겔의 논리학 현존 장의 전개가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에서 지각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평행한다고 말했다. 현존 일반은 질로 규정되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감각적 규정을 말한다. 이 감각적 규정은 존재하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타자 존재이기에 여기에 명멸하는 세계가 출현한다.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신의 결론은 감각적 규정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각 장의 출발점이 되는 감각적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헤겔은 감각적 규정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이중성을 지닌 것으로 발전하는데, 헤겔은 이것을 실재성이라고 규정한다.(1 절은 현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실재성이라는 순서로 전개된다) 이 실재성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성질에 대응한다.

그런데 헤겔은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초판에서는 사용하지만, 재판에서는 제거해 버렸다. 재판에서는 규정성([Bestimmtheit] 뒤에 나올 규정[Bestimmung]과 구별된 의미를 지닌다)이라는 범주로 대체되다. 초판과 재판의 차이점 가운데 용어만 가지고 본다면, 이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¹

주1: 질이라는 표현도 차이가 있는데, 초판에서는 목차만 보더라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재판에서는 1절 감각 규정에 한정해 사용한다.

왜, 재판에서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지워버렸을까? 실재성은 긍정성을 의미하며, 이는 부정성에 대립한다. 실재성 즉 긍정성과 부정성은 반성 개념에 속하며, 이는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다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초판에서는 이런 점을 헤겔이 스스로 간과하고 앞에서 다루었던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통일성으로서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이용했는데, 재판에서 이를 깨닫고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실재성이라는 표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석에서 이미 실재성에 관해 많은 설명을 했는데, 재판에서도 이걸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은 이런 점에서 독자를 의아하게 한다. 왜 현존을 다루는 주석에서 실재성에 관하여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말이다. 사실은 초판에서 실재성 범주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이 초판에서 규정성 대신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하고 재판에서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은 흔히 철학에서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헤겔은 이 실재성이라는 범주를 소개한 다음 상당히 긴 주석을 달아 철학사에서 실재성이 다루어지는 맥락을 소개한다. 이 맥락은 헤겔 철학과 여타 철학과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므로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2)

우선 헤겔이 실재성을 어떻게 규정했는가 보자.

“현존은 오직 그 자신을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로 규정하는 한에서 또한 현존의 계기를 이루는 두 존재의 통일인 한에서 현존이다. 반성적 현존이라는 점에서 현존은 실재성이 된다.”(논리학, 1판, GW12, 63)

감각적 성질 예를 들어서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대타 존재를 지닌다. 이 빨간색은 사과, 양귀비 등에 공통된 성질이므로, 그 점에서 그 자체 존재다. 그런데 빨간색은 파란색과 구별되므로, ‘파란색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되면, 이것이 곧 실재성이다.

‘파란색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의 반성 관계를 전제로 한다. 즉 빨간색은 자신의 타자를 통해서 또는 자신의 타자에 비추어서 규정된 것이다. 그 때문에 헤겔은 이를 ‘반성적 현존’이라고 말한다.

실재성 개념에 반성 관계가 전제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부정성은 실재성에 직접 대립한다. 반성 규정의 본래 영역에서 부정성은 긍정적인 것에 대립한다. 긍정적인 것은 부정에 부딪혀[AUC] 반성한 실재성이다. 이 실재성에서 부정적인 것이 비추어지지만[scheint], 이 부정적인 것은 실재성 속에서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논리학, 2판, GW21, 101)

이 구절에서는 더 분명하게 실재성이 자신의 타자인 부정성에 대해 반성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사실이 언급된다.

3)

빨간색이 ‘파란색이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은 철학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철학자 가운데 대표적으로 들뢰즈와 아도르노는 이런 주장을 반대한다. 실재하는 세계의 어디에도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디에서 부정성은 없으며, 어떤 것의 부정성은 다만 우리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주 우리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의 부정성으로 즉 결여태로 파악한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의 결여태며, 여자는 남자의 결여태다. 등등.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왼손잡이는 그 나름대로 긍정적인 실재이며, 여자 역시 그 나름대로 긍정적 실재가 아닌가? 왼손잡이나 여자를 결여태로 보는 것은 사유가 개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결여태라는 개념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대표적으로 스피노자는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려 했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즉 “Ommnis determination est negation”(모든 규정성은 부정성이다) 헤겔도 마찬가지로 실재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인식이 구조적이라는 사실로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빨간색은 항상 다른 색깔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순수하게 빨간색만을 알 수는 없다. 빨간색은 무지개색의 구조나나 삼원색의 구조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빨간색은 이미 그것과 구조 속에 있는 다른 색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조적 연관은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다. 주관적 구조와 객관적 구조를 가려내는 일은 논리학에서나 인식론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을 다루는 것은 나중에 반성 규정을 다루는 본질론에서 등장하니, 뒤로 미루기로 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실재성은 이처럼 구조적 연관 속에서 다른 실재성을 부정하는 부정성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4)

스피노자나 헤겔처럼 실재성을 이처럼 부정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와 연관된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하나 즉 일자라고 말했다. 즉 데카르트에서처럼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유 실체나 연장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실재성이라고 본다면, 세계는 “자체 내 아무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며 하나의 실재는 다른 실재를 지양하지 않는” 세계가 된다. 여기서 사유나 연장도 각기 하나의 실재성이니, 독립적 실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성이 곧 부정성이라면, 실재성의 총합인 신은 위와 같은 무차별한 실재성의 세계가 아니다. 여기서는 실재성의 총합은 서로 대립하는 것의 통일이므로, 더는 규정성이 없는 무규정적 일자가 된다. 그러니 사유와 연장의 통일체로서 실체는 사유도 아니고 연장도 아닌 일자인 것이다.

실재성에 관한 주석을 끝내면서 헤겔은 독일어 ‘(in)Qualierung’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사실 사전에 이 표현은 없고, ‘quaelen’이라는 표현은 있는데, 그 뜻은 ‘고통을 가하다’라는 뜻이다. 헤겔은 신비주의 철학자 야콥 뵈메가 이 표현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질[qualitaet]의 운동’을 의미한다고 한다.

헤겔에 따르면 질은 (규정성, 실재성으로 본다면) 부정성을 지니며 그런 한 ‘자기 자신에서 자기 자신의 불안[Unruhe ihrer an ihr selbst]’을 내포하고 “자기를 투쟁 속에서 출현하게 하니”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어떤 규정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렇게 규정성을 지니면서 실재하며 실재한다는 것은 곧 고통에 빠진다. 즉 인생은 고[苦]다, 세계는 고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통한다.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소개 글 :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김교빈)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

 

김교빈(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철학)

 

이 글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의 여섯 번째 발문(추천서문, 35~38쪽)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웹진에 게재합니다.

 

2009년 7월 31일 한국 전통의학을 대표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그리고 뒤늦은 감이 있지만 2015년 6월 국보 319호로 지정되었다. 『동의보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네스코의 선정 과정을 거쳐 인류 모두가 보편적으로 기억해야 할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을 기반으로 전통의학 이론의 핵심 개념인 정기신의 초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서술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인류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오랜 인문학의 전통을 지녀왔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학문을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인문이 나머지 둘을 포괄한다고 생각했다. 인문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면 천문과 지문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인본주의와 인문의식의 출발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문학을 의미하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럴 아츠(Liveral Arts)’는 민주주의의 출발이라고 하는 그리스에서 노예 교육과 달리 자유민인 그리스 시민의 소양을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했다. 그래서 ‘리버럴 아츠’는 오늘날에도 인문학을 뜻하는 동시에 교양 교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인간의 사유만이 아니라 그 사유를 밖으로 표현해 낸 예술까지를 인문의 범주에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을 뜻하는 또 다른 용어인 휴머니티스(humanities)는 신 중심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 사고를 뜻하며 르네상스 이후 화려하게 불타오른 인문정신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에 담긴 인문정신은 책의 구성에 잘 드러나 있다. 『동의보감』의 첫 편은 「내경(內景)」이고 두 번째 편은 「외형(外形)」이다. 그리고 그 뒤로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편이 붙어있다. 만약 『동의보감』이 병증의 원인과 증세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뒤의 세 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면 전근대시기의 그렇고 그런 의학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의보감』은 구체적인 질병과 처방을 말하기에 앞서 사람 몸의 겉과 속, 그리고 사람과 사람 밖의 자연을 얘기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체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이 깃든 사람의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몸 안의 장부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몸 안의 구조와 몸 밖의 신체 부위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사람의 몸과 자연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건강은 무엇이고 질병은 무엇인지, 생명을 지키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양생법이 필요한지, 생리(生理)와 병리(病理)를 설명하는 정(精)·기(氣)·신(神)이 무엇인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면서 당시의 의학이 도달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은 패러다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보편성만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라는 말은 『동의보감』 서문에 있는 것처럼 당시 중국에 있던 남의(南醫)와 북의(北醫)에 대한 우리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동의보감』 출간 284년 뒤에 나온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도 ‘동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의학의 계보를 잇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약재와 처방 모두에서 그 이전 몇 백 년 동안 쌓아온 우리의 의료역량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향약집성방』에 수록된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약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는 처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본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어떤 책인가?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인문학의 토대 위에서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을 중심으로 우리의 전통의학을 풀어낸 책이다. 특히 저자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그 사유의 기반인 기철학을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최종덕은 기를 사유하는 자신의 기본 입장을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라고 하였고,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란 물질적 유물론이 아닌 역사 존재론으로서의 유물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존재’란 ‘생명의 탄생부터 시작하는 진화론적 시간 속에서 선택된 존재의 변이과정 및 인간사회 속에서 관계성의 다양한 힘들이 농축하거나 분산하는 존재의 시간적 과정 그 자체’라고 부연하였다.

최종덕은 매우 폭 넓은 공부를 해 왔다. 학부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독일 기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처음 만났고, 얼마 안 가 ‘기(氣)철학분과’에서 보게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다른 학회들과 달리 분과 모임들로 나뉘어 있고, 분과들은 매 주 정기적으로 모여 세미나를 진행한다. 1989년 학회 창립과 동시에 내 제안으로 시작된 ‘기철학분과’는 동양철학 연구자 세 명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인원이 늘면서 동양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한의학 연구자와 과학철학 연구자인 최종덕 교수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 대상 텍스트도 대표적인 기철학자 장횡거의 『정몽(正蒙)』이나 방이지의 『물리소지(物理小識)』 뿐만 아니라 『황제내경』, 『동의보감』, 『격치고(格致藁)』 같은 전통의학 서적도 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기철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고, 동양철학 연구자들 또한 전통의학과 자연철학으로 논의를 깊여갔다.

최종덕은 기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면서 ‘개인의 건강이나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신비적인 영역의 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과 사회적 비판기능 내지는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생산 역량을 지닌 기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관점은 ‘과학적 접근방식과 철학적 접근방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한 것이다. 특히 최종덕은 전통의학을 ‘자연주의 의학’이자 ‘유기체 의학’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을 잘 담아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써 낸 것이다. 최종덕이 전통의학, 기철학, 물리학, 자연철학 등의 여러 분야를 날줄과 씨줄 삼아 자유자재로 엮은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만난 독자들은 전통철학과 현대철학, 기철학과 자연철학을 동시에 보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울러 이 책이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을 융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뜸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교빈 씀)


필자 김교빈: (재)민족의학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호서대학교 문화기획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지은 책으로 《한국철학 에세이》, 《하곡 정제두》등이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화담집》, 《강좌 한국철학》, 《기학의 모험》, 《동양철학과 한의학》 등이 있으며, 함께 옮긴 책으로 《중국의 고대 논리》,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 《중국 의학과 철학》, 《기의 철학》 등이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5회|5. 인문학 수업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5회

5. 인문학 수업 (3)

이제 나에게 남은 학기는 마지막 한 학기다. 하지만 졸업하기 위해서는 2학년 때 F를 받은 형법 총론 수업을 재수강해야 했다.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는 내가 그 수업을 듣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었다. 당시 형법 강의는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K 대에 있다가 Y 대로 옮긴 L 교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고 강의도 열심히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방학 때는 독일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제대로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는 것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나에게는 힘든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필이 꽂히면 만사를 제쳐 놓고 깊이 빠지지만, 관심이 떠나면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중간고사는 우여곡절 끝에 보았다. 그런데 마지막 기말고사는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광복관을 향해 올라가는 도중에 고시 공부하던 후배를 만났다. 그래서 그에게 대리 시험을 부탁했다.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가 대신 시험장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그날 밤 후배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형, 큰일 났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후배 목소리가 많이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이야?”

“오늘 형법 총론 시험을 대신 보다가 감독관한테 걸렸어요.”

“아니, 그게 어떻게 걸리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사람이 제가 기숙사에서 잘 아는 대학원 선배예요. 이 선배가 왜 공부 잘하는 내가 형법총론 수업을 듣느냐고 물었던 거예요. 내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이 선배가 중간고사 답안지와 필체 대조를 한 거예요. 꼼짝없이 걸린 거지요.”

다른 강의도 아니고 형법 수업을 들으면서 대리 시험을 보게 했으니 완전히 빼도 박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

“일단 L 교수님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교 선배였던 또 다른 L 교수가 부정 사실을 알고서 당장 교수회의를 열자고 설쳤다. 하지만 과목 담당인 L 교수가 일단 당사자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했다고 한다.

다음 날 부리나케 후배와 함께 L 교수 방으로 찾아갔다. 어떻게 변명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나도 나지만 고시 공부를 열심히 하던 후배는 무슨 잘못인가? 미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교수가 말을 했다.

 

“거두절미하고 두 학생 모두 자신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하게.” 딱 그 한마디뿐이었다.

 

졸업 학기를 두고 반성문을 써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확신 범의 신념인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진술했다. 나의 관심은 이미 법학을 떠났다. 나는 앞으로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도저히 어쩔 수 없어 후배를 끌어들여 대리 시험을 보게 했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런 식으로 장문의 반성문을 썼다. 이런 나의 솔직한 반성문이 주효했는지 L 교수는 더 이상 대리 시험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만약 또 다른 L 교수처럼 교수 회의를 열었더라면 어쩔 수 없이 최소 정학을 맞았을 것이고, 졸업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훨씬 나중에 L 교수를 교내 화장실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다. 그때 L 교수는 “철학 공부 재밌어?”라고 관심을 보였다. 두고 두고 고마운 분이다. 나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가를 배운 셈이다. L 교수는 당신이 구제한 학생이 먼 미래에 한국의 철학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대리 시험까지 보게 했지만, 참으로 나의 대학 생활은 험난했다. 1학년 때 당구에 빠져서 성적 불량으로 한 학년 유급하고, 그 이후로도 쌍권총을 수도 없이 찼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했는지 전혀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나의 행동은 너무나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 당시 ‘경제원론’이 정법대 필수 과목이었는데, 내가 이 과목을 무려 3번이나 F를 받았다. 대학 1학년 1학기 때 정법대 학생 전체가 나중에 총장이 된 J 교수에게 ‘경제원론’ 수업을 들었다. 상대 대형 강의실에서 그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에는 인상적인 J 교수의 수업을 열심히 듣긴 했다. 그런데 1교시 수업을 듣기도 힘들고, 그 수업이 끝나자마자 상경대 뒷편에 있는 종합관에서 법학통론 수업을 듣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언덕을 한 참 걸어 올라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종합관 5층에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몸이 불편한 내가 도저히 10분 안에 걸어서 이동하기 힘들어 수업을 자주 빼먹었다. 결국 J 교수에게 F를 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당시 유명한 경제 사학자인 C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이분이 그렇게 대단한 교수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C 교수는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문고판 『한국경제사』를 가지고 리포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아서 F를 맞았다. 세 번 째는 노동 경제학을 하던 K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기말고사를 볼 때 내가 모르고 시험 시간이 끝날 때쯤 시험 장소로 들어간 것이다. 얼마나 시험 보기 싫었으면 시험 시간까지 잊었을까? 그것도 세 번 씩이나 재수강하는 수업을 말이다. 내가 원래 공간에 대한 지각 능력은 떨어져도 시간관념은 철저한 편이다. 그런데 한 시간 늦게 들어갔으니 변명하기도 힘들었다. 김 교수가 자기 연구실로 따라오라고 해서 그 연구실 안의 교수 옆에서 시험을 보았다. 당시 나는 시험공부보다는 컨닝 페이퍼만 잔뜩 준비해갔는데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수에게 리포트로 대신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지만 교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 그래? 그럼 F지. 시험지 두고 그냥 나가게.”

 

변명할 것도 없이 또 F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과목을 세 번씩이나 F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경제학을 싫어한 사람도 아닌데 경제원론 한 과목에서 무려 세 번을 F 받았으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경제학과의 세 교수한테 한 마디로 돌림 빵을 당한 셈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모두가 나의 책임이었다. 운 좋게 졸업 학기 때 경제원론이 선택으로 바뀌는 바람에 간신히 졸업할 수가 있었다. 내가 대학 생활을 이런 상태로 보낸 것은 한편으로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당시 나에게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충만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리고 어떤 규칙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겠다는 고집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적표를 가지고 내가 법대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마냥 힘들었고, 나 자신을 부적응자로 낙인찍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철학과 대학원에 가보니까 나 못지않게 권총을 많이 찬 동기가 있었다. 그는 훨씬 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다음 교수 임용 면접 시험에서 권총이 너무 많아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가 칸트 철학자로 유명한 김봉한이다. 타과에서는 흠집이 되는 것이 철학과에서는 인정될 수 있는 낭만적 시대였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신간안내] 최종덕 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무료 자유배포 전자책(PDF) 안내 [한철연 소식]

최종덕 회원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2025년 1월 발간한 『한의학의 자연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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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을 첨부하오니 아래 링크를 눌러 다운로드 받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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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감사의 글 —– 2발문(추천서문) —– 10
발문1: 박석준(한의학), 나는 왜 과학과 철학을 공부하는가
발문2: 구태환(철학), 탈근대 시선으로 읽는 한의학
발문3: 이정수(철학), 몸(정기신)과 함께 펼치는 자연스러운 철학적 사유
발문4: 전방욱(생물학), 생태학적 의학을 바라며
발문5: 오재근(한의학), 철학자가 살펴본 한의학 그리고 제언
발문6: 김교빈(철학),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서문 —– 39

1장 기氣와 도道의 자연철학 —– 45
1. 기, 개념적 사고와 이미지 사고
2. 기의 원류와 자연 해석
3. 과학으로 접근하는 기
4. 존재-인식-행위의 삼각대, 경계없는 유한, 운동과 복잡계
5. 신비주의 위험에 빠진 기
6. 역사 존재로서 기
7. 물질론과 생기론의 얽힘으로 읽는 기
8. 화이트헤드와 신유물론으로 본 기
9. 노이마틱으로서 기
10. 정기신으로 본 기
11. 기에서 도로 포월하는 장자
12. 기에서 덕德을 거쳐 도로
13. 도의 자연지리학
14. 정지된 실체가 아니라 운동하는 동사형으로서 도

2장 관계망과 위상공간의 한의학 —– 90
1 서양의학의 철학적 기초- 실재와 실체
2. 서구과학의 기준과 동아시아 의학의 과학
3. 유기체 실재론으로서 동의학- 열린계의 관계장르
4. 한의학의 소산구조와 경험개념
5. 몸의 연결망과 옴살론 – 얽힘
6. 관계와 위상으로서 한의학 – 비국소적 위상공간
7. 治心의학으로서 한의학

3장 동형성의 자연관, 회절 자연주의 —– 129
1. 소유의 자연
2. 자기운동하는 자연
3. 인간과 자연의 일체 모델, 동형성과 합생
4. 수양론을 향한 합생concrescence
5. 기의 신실재론new realism
6. 자연-사회-인체-심리 동형성 구조
7. 동의보감에 영향을 준 조선의 탈인간 자연관
8. 동의학의 자연주의: 반영 자연주의에서 회절 자연주의로
9. 회절 자연주의 의학의 사례 : 면역학

4장 이제마의 인간의학 —– 168
1. 이제마의 등장과 사상 개념의 탄생
2. 기의 승강원리로 엮은 휴머니즘 의학
3. 수기치인의 생리학
4. 결정론이 아닌 현상학적 지향성으로서 사상의학
5. 존재결정론이 아닌 행위수행론
6. 서로에게 응답하는 사심신물事心身物의 열린 관계

5장 생로병사의 자연철학 —– 200
1. 생로병사의 진화론적 사유구조
2. 진화론적 사유구조로 본 몸 – 체질과 소질
3. 불교에서 말하는 생의 의미
4. 유교와 도가에서 본 몸과 ‘생’
5. 생명과 양생
6. 생물학적 양생과 문화적 양생
7. 제언 : 개인 양생에서 공동체 양생으로

부록 : 자연지리와 삶, 한국 고대 재앙사 분석 —– 225
가뭄, 홍수, 태풍, 특이기상, 황충,
기근, 역질, 지진, 괴현상

참고문헌 —– 252

색인(인명/주제) —– 263

 

♦ 책 속으로~


<저자소개>
저자 최종덕은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과 생물학을 공부해오면서, 현대자연철학의 지식을 삶의 수행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작업을 시도 중인 독립학자이다. 『공백의 실재』, 『생물철학』, 『의학의 철학』, 『비판적 생명철학』, 『이분법을 넘어서』,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등 현대자연철학 관련 책을 다수 출간했다. 최종덕의 전문연구와 삶의 글쓰기 자료 모두를 저자의 홈페이지 philonatu.com에서 볼 수 있다.

[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14회|5. 인문학 수업 (2)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14회

5. 인문학 수업 (2)

 

E 여대 철학과 교수인 J 교수의 인식론 강의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J 교수는 인식 이론에 관한 일반 강의를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매시간 간단한 명제를 제시하고 그것에 관해 A4 용지 한 장 정도로 학생들이 답변서를 써오도록 했다. 그리고 학생들 답변서를 읽으면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업 시간을 채웠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완전히 토론식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J 교수가 첫 시간에 내준 숙제는 “자살로서 복수를 할 수 있는가?”였다. 이에 관해서 찬반으로 답변을 쓰면 된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복수는 그것을 지켜볼 주체가 있어야 하는 데 자살한 이후에는 전혀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적은 것이다. 그런데 정교수는 이것을 보고 ‘Excellent!’라고 점수를 주었다. 내가 이 떡밥을 물고서 생각한 바가 있다. “아, 나는 정말 철학이 맞는 거 같아.” 나중에 학위를 받고 우연히 학회에서 J 교수를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거진 30년 전의 일이라 기억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J 교수가 이끈 수업은 내가 철학의 문제의식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문과대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인문학에 관심갖는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문사철과 같은 학문들이 나의 관심과 체질에도 맞는 느낌이다. 문과대를 드나들면서 문과대의 전형적인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기도 했다. 그들과 술도 많이 마시고 토론도 많이 하면서 분과대 분위기에 서서히 적응해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진로와 관련해 결정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계속 공부하려면 대학원에 진학을 해야 한다. 일단 전공과 관련해서도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점점 흥미를 갖게 된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내가 집에서 대학원 학비를 보조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대학원 입학 시험에 합격한다하더라도 어떻게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1982년에 접어들자 대학가는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대학가나 그 주변은 매캐한 체루 가스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등교를 할 때는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호신용 무기를 들고 교문에서 짭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대학은 이제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전장(戰場)과도 같았다. 학생들의 마음도 점점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장한 짭새들이 최루탄을 터트리면서 학교로 밀고 들어오고, 그것을 막기 위해 돌팔매질을 할 때는 전쟁이 따로 없었다. 매일 그런 전투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강의는 수시로 휴강이 이루어져서 한 학기 제대로 수업을 한 기억이 요원할 정도다. 그 와중에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스타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세미나는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70년대에는 주로 학내 이념 서클에서 진행되었던 세미나가 80년 대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일상적인 공부 방식이었다. 80년대의 의식화 작업은 이렇게 선후배 동료 간에 이루어지는 세미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끊임없이 전투에 임할 전사를 배출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한국의 70-80년대의 학습 방식은 세계의 투쟁사에서도 귀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욕구는 대단했다. 워낙 책이 없었던 시대라 책에 대한 욕구도 컸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구입하곤 했다. 집의 책장에 책이 한 권 두 권 쌓이는 것을 보는 것도 낙이었고 자부심도 컸다. 그 당시는 단순히 욕구가 아니라 문제의식도 컸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인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가, 왜 한국 사회는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대학생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으로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의식들이다. 물론 이런 시대 현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노는 데 열중하는 낭만파나 아니면 출세가 보장된 고시 공부에 몰두하는 고시파들도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학생들은 회색분자로 치부되곤 했지만, 그들 역시 시대 문제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치열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많았다. 한 마디로 요즘 학생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공감하기도 힘든 대학 생활이었다. 단순 비교가 쉽지 않겠지만,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요즘 학생들은 너무 나약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26- 감각적 성질과 대타 존재

1)

지난 글에서 헤겔이 존재론 2장에서 전개한 현존 개념을 살펴보았다. 현존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식된 감각적 확신의 세계다. 이 세계는 가장 직접적이기에 가장 완전한 진리의 세계이며 가장 풍요로운 세계로 간주되어 왔다. 비트겐슈타인이 원초적 명제로 보여주려는 세계, 아도르노가 미메시스를 통해 그려낸 세계가 바로 이 세계다.

그러나 반성적 사유를 무기로 삼고 있는 헤겔이 보기에 이 세계는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존재의 세계다. 즉 플라톤이 말한 토 헤테론의 세계다. 여기서 어떤 규정은 잠시도 멈춤 없이 다른 규정으로 전환하니, 간단히 말해 명멸하는 세계다. 이 세계는 아마도 우리가 악몽 속에서 만나는 세계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아름다운 직접 진리의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 악몽과 같은 명멸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헤겔의 반성적 사유가 지닌 특징이다. 어떤 것은 항상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2)

이제 본격적으로 이 현존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있다. 1권 존재론 2장 현존 장은 헤겔이 재판에서 초판의 내용을 엄청나게 수정해, 언뜻 보면 헤겔이 초판과 재판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간단하게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현존

재판 현존

A

현존 그 자체

현존 그 자체

1

현존 일반

현존 일반

2

실재성

a

타자 존재

b

대타 존재와 즉자 존재

c

실재성

3

어떤 것

어떤 것

B

규정성

유한성

1

한계

어떤 것과 다른 것

2

규정성

특정성 상태 한계

a

규정

b

상태

c

3

변화

유한성

a

상태의 변화

직접적 유한성

b

당위와 한계

한계와 당위

c

부정

유한의 무한으로 이행

c

무한성

무한성

1

유한성과 무한성

유한성과 무한성

2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유한과 무한의 상호작용

3

무한의 자기 내 복귀

긍정적 직접성

위의 표면 보면 도저히 초판과 재판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초판과 재판 사이의 상응하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초판에서 A절에서 다룬 ‘현존과 타자 존재’, ‘대타 존재와 그 자체[즉자] 존재’가 재판에서는 B절 1항에서 ‘어떤 것과 다른 것’이라는 제목 속에 함께 다루어진다.

초판에서 B절에서 다룬 ‘규정과 상태’, ‘내재 존재와 한계’는 재판에서도 B절 2항에서 다루어진다. 제목은 ‘규정, 상태, 한계’다. B절 3항은 초판이나 재판에서 모두 ‘당위와 한계[제한]’을 다루고 있어서 공통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헤겔은 초판에서 산만하게 전개한 내용을 재판에서 한 데로 집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초판에서는 B절에서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보다 앞에 나온다. 반면 재판에서는 ‘내재 존재와 한계’가 ‘규정과 상태’ 다음에 나온다.

아마 헤겔이 재판에서 결정적으로 수정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헤겔이 수정한 것이 옳다고 받아들인다면, 재판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서 현존 장을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각 개념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에서 점차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으로 나가니, 그리고 실제로 ‘규정’이라는 개념보다는 ‘내재 존재’라는 개념이 더 복잡하니, 재판의 순서가 헤겔 논리학의 개념에 비추어서도 정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재판의 순서에 따라서 헤겔의 현존 장을 설명해 나가고자 한다.

3)

재판의 전개 방식에 따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절

a. 현존[질]과 타자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대타 존재

b.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 양자의 통일로서 실재성[Realitaet: 어떤 것etwas] 또는 규정성[Bestimmtheit]

B 절

c. 규정[Bestimmung]과 상태[Beschaffenheit], 양자의 통일로서 한계[Grenze]

d. 내재 존재[In Sich Sein]와 한계, 양자의 통일로서 제한

e. 당위와 제한[Schranke], 양자의 통일로서 유한성

C 절

f. 무한성과 유한성, 양자의 통일로서 대자 존재

이상과 같이 정리하면, 어떤 리듬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대립하는 X항과 -X항이 나타나서 양자가 통일되면, 그 통일된 Y항이 새로운 대립에서 -Y가 되고 그것에 대립하는 X항이 다시 출현하는 식이다.

과연 이런 전개 방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식의 리듬만 보면 마치 신비한 변증법을 보는 듯하니, 마치 신이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이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다양한 단계를 거쳐나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단순하게 최종적인 결과인 종적 물질을 산출하면 되지 않았을까?

더구나 당혹스러운 것은 헤겔이 현존 장을 전개하면서 구별한 개념들 즉 질, 실재성, 규정성, 규정, 내재 존재, 당위, 유한성 등 어떻게 보면 유사한 개념들이 어떤 구별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재판의 경우 헤겔은 이 개념들을 순서에 따라 사용하지만, 초판의 경우 이 개념들이 마구 뒤섞여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목차에서 보듯 초판에서 질이라는 개념은 세 번이나 반복된다.

더구나 ‘타자 존재’나 ‘대타 존재’, ‘규정성’과 ‘규정’은 단어도 유사하고 ‘실재성’, ‘규정성’, ‘유한성’이나 ‘한계’와 ‘제한’은 모두 유사한 개념이고 ‘그 자체 존재’나 ‘내재 존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런 혼란을 뚫고 헤겔의 현존 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필요하다. 이미 앞에서 필자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전개 과정과 논리학에서 개념의 전개 과정이 평행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앞의 글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현존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면서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에 나오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이 전개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경험이 축적되면서 개별자에서 일반자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존 장에서 위와 같은 논리적 개념이 전개되는 것도 그런 경험의 발전에 비추어 본다면, 이해되지 않을까? 즉 논리적 개념이 위와 같이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무슨 신비한 조화가 아니라, 경험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일어나는 전환이라는 것이다.

4)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보면, 최초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규정[질: Qualitaet]은 곧 이런저런 대상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것이라는 사실 밝혀진다. 예를 들어 감각적 규정인 빨강은 처음에는 가장 개별적인 규정이었으나, 사과 양귀비 입술 등에 공통으로 속한다. 이 경우 이제 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질[Eigenschaft]이라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현존, 즉 단 일 회만, 한순간 나타나는 개별적인 질은 나타났다가는 곧 사라지니, 붙잡을 도리가 없다. 명멸하는 이 세계가 앞에서 말한 현존과 타자 존재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 경험이 조금 발전하면, 이제 일반적 성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빨강’이나 ‘단맛’ 등의 감각적 성질이다.

이 감각적 성질은 반성적 사유에서 볼 때 이미 다른 감각적 성질과 구별된다. 현존의 질 역시 타자와 구별되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니, 대체 서로 구별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일회적 현존 세계는 무차별하다고 한다.

“일회적이니 구별될 수 없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구별이란 항상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적 사유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오직 차이만 있다면 그 차이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현존의 세계가 무차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감각적 성질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일정한 사유의 틀을 전제로 한다. 빨강은 파랑과 구별되는 차이를 지닌다. 여기서 빨강이나 파랑은 색깔이라는 틀 안에서 차이이고, 빨강은 파랑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빨강이고 그것은 파랑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은 이미 구조주의를 통해 널리 확산한 주장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 것으로서 어떤 것 즉 반성적인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 헤겔이 말하는 대타 존재다.

“현존을 비존재를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질적으로 규정된 존재, 부정된 존재 즉 타자이다. 그러나 현존은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동시에 자기를 유지하니, 이런 것을 다만 대타 존재라 한다.”(논리학, 1판, GW12, 62)

다만 부정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타자 존재다. 그러나 부정당하면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기에 대타 존재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일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5)

이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이므로 헤겔은 이것이 ‘그 자체 존재’를 갖는다고 한다. 즉 그것은 “타자에 의해 부정당하는 가운데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부정당하는 측면만 보면 대타 존재다. 그러나 대타 존재는 그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일반성을 갖는데, 이 일반성이 곧 대타 존재의 이면인 그 자체 존재다.

“현존은 그 자신의 비현존 속에서조차 자기를 유지하니, 곧 존재다. 그러나 현존은 존재 일반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비현존과 대립한 상태에 있으니 타자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는 대립하는 자기 관계로서 존재이며 자기의 부등성에 대립하는 자기 동등성으로서의 존재이다.”(논리학, 1판, GW21, 62)

동등성과 부등성, 타자와 대립하는 관계와 자기와 동일한 관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적일 때 그것이 바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다.

여기서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서로 구별되는 성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성질이 그 자체 존재이면서 동시에 대타 존재다. 대타 존재가 없으면 그 자체 존재가 될 수도 없고, 그 자체 존재가 없으면 대타 존재가 될 수도 없다.

헤겔에 따르면 그 자체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립한다. 그러나 그 자체 존재는 “비존재마저도 그 자체에서 간직하니 왜냐하면 그 자체 존재 자체는 곧 대타 존재의 비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또한 대타 존재는 타자 존재에 대해 있는 것이며, 이 대타 존재는 “오직 그 자체 존재를 지시하는 비현존이니 이것은 마치 역으로 그 자체 존재가 대타 존재를 지시하는 것과 같다.”(논리학, 1판, GW21, 62)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가 동일한 것의 양면이라는 주장은 재판에서도 여전히 반복된다.

“두 계기는 동일한 것 즉 어떤 것의 규정이다. 어떤 것은 대타 존재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한에서 그 자체적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하나의 규정 또는 상황을 그 자체에서 가지니 이 상황이 그 자체에서 외적인 것 즉 대타 존재인 한에서 그렇다.”(논리학, 2판, GW21, 108)

“어떤 것은 그 자체 존재인 것과 동일한 것을 또한 자신의 표면에서 가지며 거꾸로 대타적인 것 역시 그 자체에서 가진다. 어떤 것은 두 계기의 동일성이며 양자는 그 속에서 불가분리적이라는 규정에 따라서 볼 때 이것이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의 동일성이다.”(논리학, 2판, GW21, 108)

6)

헤겔에게 양자의 통일은 실재성이다. 이런 것이 감각적 성질이다. 이런 감각적 성질 즉 대타 존재와 그 자체 존재의 통일인 실재성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사유와 언어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이전 현존의 세계는 사유할 수도 언어화할 수도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감각적 성질은 일반적인 것이니 언어로 규정되고, 사유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표현된다면, 질적 개별 명제로 표현된다. 즉 ‘이것은 빨강이다’라는 명제다.

하나의 실재성이 있다는 것은 반성적 사유에서는 그와 다른 실재성이 있다는 말이 되고, 그러면 둘 이상의 실재성이 서로 관계하면서 어떤 것이 된다. 어떤 것[etwas]이 등장하면서 논리적 개념은 ‘그 자체 존재와 대타 존재’라는 개념 쌍은 ‘규정과 상태’라는 개념 쌍으로 변화한다. 이런 변화가 있으려면 우리의 인식 경험이 감각을 넘어 지각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