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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60-실재하는 척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0-실재하는 척도

1)

잣대는 어떤 정량을 측정하는 단위다. 어떤 사물의 정량은 그 잣대로 측정된 특정화된 정량 즉 몫수이다. 잣대나 사물은 양적 관계 외에 각기 고유한 질적인 측면을 가진다.

“정량은 그 이중적 존재 속에서 외적인 것이며, 동시에 특정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며, 구별된 양적인 것 각각은 이런 이중적 규정을 그 자신에서 갖고 동시에 단적으로 타자와 교차되어 있다. 질적인 것들은 오직 그 속에서만 규정된다. 이 질적인 것들은 서로에 대해 존재하는 현존 일반일 뿐만 아니라 분리될 수 없이 정립되어 있고 그런 질적인 것에 묶여 있는 크기 규정은 질적인 총수[Einheit]다. 즉 이런 질적인 것들이 개념상 본래 연관되어 있는 척도 규정이다. 따라서 척도는 두 질적인 것의 내재적 양적 상호 관계다.”

잣대와 사물의 정량 사이의 양적 관계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이제 헤겔은 잣대나 사물이 양적 측면 외에 질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이 양적인 관계의 측면과 질적인 측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앞에서 두 잣대를 비교했다. 하나는 비중(무게/부피)과 같은 잣대이고 다른 하나는 온도(열에너지/물체의 부피)와 같은 잣대다. 둘 다 두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잣대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각 잣대는 두 정량의 비례이지만, 비중의 경우, 어느 사물에서나 두 정량은 동일한 비례 관계에 있다. 어느 사물에서나 부피가 늘면 일정하게 무게도 증가한다.

그러나 온도의 경우, 두 정량의 관계는 비례하지만, 그 비례지수는 사물마다 각기 다른데, 예를 들어 동일한 열에너지에 대해 철 온도가 돌 온도보다 몇 배 빨리 증감한다. 철은 빨리 뜨거워졌다가 빨리 식는다면, 돌은 천천히 뜨거워지며 천천히 식는다. 헤겔은 온도와 같은 잣대가 지닌 이런 특징을 일러서 “특정화하는 척도”라고 한다.

특정화하는 척도는 단순한 척도 즉 잣대와 달리 사물마다 다르게 작동한다. 단순한 잣대 예를 들어 비중은 물체에 대해 외적, 무차별이지만, 특정화하는 척도 즉 온도는 물체에 내적인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2)

내적인 연관은 발전한다. 온도만 해도 두 정량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직접 비례 또는 정비례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나 이런 직접 비례가 반비례를 거쳐 제곱에 이르게 되면, 그 관계는 더욱 밀접해진다.

기체의 압력과 부피는 서로 반비례한다. 그것은 압력과 부피가 동일한 분자 운동 에너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압력과 부피는 밀접한 연관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제 제곱 비례하는 경우를 들어보자.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전기에너지는 전류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렇게 제곱의 관계나 비례에 있을 때, 헤겔은 그 관계를 통약할 수 없는 비례라고 한다. 제곱 관계는 앞에서 개별 정량을 다룰 때 이미 등장했다. 그때 거리의 제곱은 곧 면적이라는 명제가 다루어졌는데, 여기서 보듯이 하나의 질은 자기를 양적으로 제곱함으로써 새로운 질이 출현한다.

그러나 거리로부터 면적으로 새로운 질이 생성한다 할 때, 거리나 면적은 모두 공간의 일부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질적 생성은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정량이 좌표상 확장한 것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척도에서도 양적인 제곱의 관계가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지금 다루어지는 관계에서 예를 들어 속도가 제곱해서 운동에너지를 낳는다고 할 때 양적인 제곱 관계에서는 서로 다른 새로운 질이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서로 무관한 독자적인 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질’의 생성이라는 측면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개의 질적 존재가 관계한다. 그 관계는 양적인 제곱 관계이다. 예를 들어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이다. 그중 하나[속도]는 그 자체로 규정된 양이며 단위다. 다른 것[운동에너지]은 그 단위에 의해 특정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정량이며 그 몫수이다.

이런 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각각은 이런 양적 관계 바깥에 독자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운동에너지이며 다른 하나는 속도다. 여기서 운동에너지의 질적인 측면과 속도의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하다. 어떤 현존(속도든, 운동에너지든) 양적 측면은 질적인 측면과 무차별하다. 양적 측면에서 서로 관계한다. 그런 점에서 양자에는 동일성이 존재한다. 반면 질적인 측면은 서로 무관계하다. 양자는 전적으로 다른 질적 성격을 지닌다. 서로 관계하는 양적인 측면은 무차별한 질적인 측면에 대해 외적이며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관계를 맺는 현존 즉 질과 그 현존의 상호 양적 관계가 서로 무관하니, 이 관계를 통해 새로운 질이 생성되었다고 말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곱 관계가 새로운 질을 생성한다고 할 때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제곱 관계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만, 한계가 있다. 길이가 면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 차원을 확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속도가 운동에너지로 확장한다고 할 때 그 질적 생성은 사실, 그 질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마치 동일한 것이 모양만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속도는 운동에너지의 미분적인 힘이다. 어떤 한순간 지닌 운동에너지가 속도이며 이 운동에너지를 일정 시간에 걸쳐 적분하면 운동에너지가 나온다. 이런 점에서 운동에너지와 속도는 서로 동일한 것이다. 서로 동일한 것이 다만 한순간이냐 그것이 쌓여서 나타나느냐 하는 차이가 질적인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3)

비중은 물체와 무관하다. 그리고 온도의 전달은 물체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 관계는 상당히 외면적이다. 나아가 운동에너지는 속도뿐만 아니라 물체의 무게와도 관계하므로 물체에 더욱 내면적이다. 양적 관계가 물체의 질적 현존에 대해 내면화되는 과정을 헤겔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설명한다.

헤겔은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점차 고도화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속도는 시간에 직접 비례한다[V=aT). 여기서는 두 정량은 단순 비례의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낙하 법칙에서 거리는 시간에 대해 제곱 비례한다[S=1/2gT²]. 좀 더 발전하면 천체 운동에서 공전 속도의 제곱은 장 직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T² ⍶ a³ ]

헤겔은 속도와 같은 등속도 운동을 부자유 운동, 낙하 법칙과 같은 가속도 운동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며, 마지막으로 천체 운동과 같은 것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라 하는데, 그 까닭은 직접 비례에서 제곱 비례로, 나아가서 삼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운동이 물체 자체에 내재하는 운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침내 천체 운동에 이르면 이는 이제 개념 운동에 개념이 자기 자신을 구별하여 다시 복귀하는 운동에 다가간다. 이제 천체 운동에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개념’은 곧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비례지수다. 즉 a³/T²이다. 이 지수가 자기를 분화하며 다시 통일한다. 그런 가운데 천체 운동 궤적 위에 모든 점이 형성된다. 그 점들은 비례지수라는 ‘개념’의 특정한 ‘현존’에 지나지 않는다.

천체 운동을 위에서 개념의 현존으로 규정하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직 천체 운동을 개념과 현존의 관계로 규정할 수 없다. 개념과 현존의 관계는 논리학 개념론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그 이전에 본질론에서는 유사한 관계가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지금 이 관계는 아직 본질과 현상의 관계라고도 할 수 없다. 이 관계는 다만 대자 존재와 일자의 관계다. 질적 범주에서 이미 대자 존재와 일자가 출현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자 존재는 질적 대자 존재와는 구별된 양적 대자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

4)

이미 설명했듯이 헤겔은 이 관계에서 양적 관계는 처음에는 두 질적 존재에 대해 무차별했다. 구체적으로 비중은 물체의 질적 측면에 대해 무차별하다. 그러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 사이에서 연관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열에너지는 사물마다 다르게 전달된다. 각 사물에는 열이 전달되는 고유한 척도가 있다. 이렇게 사물마다 달라지는 척도가 곧 특정화된 척도다.

직접적 척도는 다만 어떤 정량이며, 사실 질적인 것을 자기에 부착하고 있는 하나의 개별적 정량 일반이다. 선행하는 규정인 척도는 단순한 외면적인 정량을 질적인 것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특정화하는 척도 속에서는 두 가지 크기 규정성의 구별이 정립되며 이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외적 정량에서 다수의 척도가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37)

마침내 두 질적 존재 사이의 양적 관계가 직접 비례, 반비례, 제곱 비례로 발전하면서, 두 질적 존재의 양적 관계의 측면은 각각의 질적 측면과 더 긴밀하게 통일을 이루게 된다. 마침내 두 질적 현존 사이에 천체 운동의 법칙과 같은 관계가 출현한다. 이 천체 운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운동이듯이 두 질적 현존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두 현존의 양적 관계는 두 질적 현존에 내재하게 되며, 이를 통해 자유로운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이 자유로운 관계에서 두 현존의 양적 비례지수가 개념이 된다. 이 개념을 헤겔은 부정적 통일성이라 하며, 관계를 맺는 두 측면은 즉 질적 현존은 이 개념의 자기 구별에 해당한다. 이 개념은 이제 완전한 자립성을 획득하며, 자기를 이중화하면서 두 현존이 된다.

처음에 직접 비례적인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대해 무차별한 관계다. 이때 질적 현존은 그 양적 관계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운동에 이르면, 양적 관계는 질적 현존에 내재화하면서 이제 더는 양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그것은 이미 통약 불가능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질적 현존의 양적 관계를 넘어서 질적인 것 자체의 관계가 출현한다. 순전히 질적인 것들 사이에 어떤 상호 연관을 헤겔은 실재화된 척도라고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화성의 관계다.

“그러나 좀 더 발전된 규정을 이루는 것은 척도가 이제 이런 방식으로 실재화된다는 사실이며, 그 두 측면이 하나는 직접적이며 외면적인 척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내에서 특정화된 척도라는 점에서 구별되는 척도라는 사실이다. 이런 통일로서 척도가 이루는 관계 속에서 크기는 질적인 것의 본성을 통해 규정되고 상이하게 정립되며, 따라서 그 관계 규정성은 전적으로 내재하며 자립적이고 동시에 직접적 양을 구성하는 대자 존재 속으로, 직접 비례를 구성하는 지수 속으로 몰락하고 만다.”(논리학 재판, GW21, 462)

“부정적 통일성이 곧 실재적인 대자 존재이며 어떤 것의 범주 즉 척도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질의 통일로서 존재한다. 이는 완전한 자립성이다. 두 가지 상이한 비례로 발생한 이 두 가지 질은 직접적으로는 이중화된 현존을 제공한다.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그와 같은 자립적 전체는 대자 존재하는 것 일반으로서 구별된 자립적인 것으로 반발하는 것이며 그것의 질적 본성과 존립(물질성)은 척도의 규정성 속에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44)

헤겔 형이상학 산책59-척도의 종류: 비중과 온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9-척도의 종류: 비중과 온도

1)

정량은 외연량, 내포량, 제곱 양을 거쳐 척도에 이른다. 이상에서는 하나의 정량이 다루어졌다. 제곱 양에서 두 정량이 관계하지만, 아직은 하나의 정량이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두 정량이 서로 관계하면서 척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부피와 무게가 서로 관계하는 것으로서 비중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정량은 개별적 사물에 속하지만, 척도는 여러 사물에 공통으로 속하며 그런 점에서 특수성[Besonderheit]을 지닌 정량이 된다. 이 척도는 어떤 사물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것 즉 특정[sdpezifisch] 양이 된다. 그러나 아직 이 고유성은 주관적인 것에 지닐 뿐이니, 이제 논리학의 운동은 객관적으로 고유한 것 즉 본질 또는 이데아에 이르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런 운동에서 핵심은 앞으로 서술되겠지만, 이해의 단서를 위해 미리 제시하자면, 사물에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척도가 그 사물에 필연적인 척도로 이행하는 과정이며, 이런 이행은 동시에 개별 사물의 부수적 속성에 그치는 척도가 독자적으로 실재하는 척도가 되는 과정이다.

헤겔은 이런 운동을 마치 논리적 범주 자체가 자기를 전개하는 것처럼 서술했지만, 이는 서술의 문제이며 사실 이 운동의 바닥에는 경험의 발전이 놓여 있다. 그런 경험의 발전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이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정신현상학에서 이 운동은 지각에서 지성으로 발전하는 운동이며,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철학에서 소피스트를 넘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이 등장하는 시기다.

여기서는 그런 경험의 발전에 관한 정신현상학의 설명은 전제로 할 뿐,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만 이를 전제로 하여 논리적 범주의 운동으로만 서술하자.

2)

앞의 글에서 사물의 척도를 논의했을 때는 척도의 개념은 추상적이었다. 이 척도는 각 사물의 특정량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척도가 상호 비교될 때 비교의 기준이 되는 것이 표준이다.

예를 들어 물의 비중을 기준으로 하면, 철의 비중은 물보다 크고, 나무의 비중은 물보다 작다. 이런 비중은 물의 비중을 표준으로 하여 비교된 값이므로, 앞에서 다룬 내포량에 해당한다. 물론, 앞서 설명된 내포량은 개별 정량에 관한 설명에서 제시된 범주지만, 이제는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새로운 정량 즉 특수 양에 적용된 것이다.

어떤 것의 표준[Massstab]이 되는 것은 이제 사물의 잣대[Regel]이 된다. 표준은 다만 비교를 위한 기준점에 불과하다. 표준은 다만 크고 작은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철을 물속에 빠뜨리면 가라앉으니, 철의 비중은 물보다 크지만, 나무는 물 위에 뜨니까 물보다 그 비중이 작다.

이처럼 단순히 비교를 통해 아는 것과 달리 잣대가 되면 사물의 척도는 이 잣대의 크기를 통해 산술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단순히 비교의 기준이 된다고 해서 다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철이나 나무도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이 잣대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잣대가 되는 것은 단순히 크고 작다는 비교를 넘어서 다른 것을 규정하는 수적 단위가 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비중의 잣대가 어떻게 규정되는지는 모르지만, 비중을 재는 저울이 있다고 한다. 비중병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모른다. 비중을 재는 비중계를 쓰면, 사물의 비중은 수적으로 증가하는 일정한 크기로 측정될 수 있다.

이 비중병으로 재면 철의 비중은 10이 되고 나무의 비중은 0.1이 된다(예이니까 구체적 수치의 오류에 괘념하지 말자). 0.1에서 10으로 전개되는 이 수적 크기는 하나의 정량을 규정되는 외연량이지만, 이제 여기서 이 잣대는 앞서 설명한 단순한 외연량에 그치지 않고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양에 적용된 범주다.

3)

이 잣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은 잣대의 양적인 크기에 관한 관점이다. 이 점에서 잣대는 이중성을 지닌다. 이 저울에서 크기는 수적으로 변한다. 이 변화는 점진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저울은 단순히 무게를 재는 저울과는 다르다. 그것은 비중병을 이용한 저울이니 그 자체 무게와 부피의 관계로 이루어진 특별한 저울이다. 이런 관점에서 비중병은 질적인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즉 비중병이라는 잣대로 다른 사물의 비중을 재는 관점에 보자면, 비중병은 다른 사물의 척도를 재는 단위[Einheit]가 되며, 다른 사물의 척도는 그런 단위를 통해 재어진 결과 얻어지는 양적 크기 즉 몫수[Anzahl]가 된다. 전자의 관점에서 비중병은 그 자체로 규정된 크기이며, 후자의 관점에서 크기는 특정한 크기다.

“이민 언급된 것과 같이 잣대나 표준은 그 자체에서 규정된 크기로 존재한다. 그런 규정된 크기는 단위가 되면서 특수하게 현존하는 사물이 지닌 정량에 대립한다. 그 사물의 정량은 잣대가 되는 것이라고 할 다른 것 곁에[an] 현존하고 그 잣대에서[an] 측정되면서 그런 단위의 몫수로서 규정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33)

“이런 비교는 외적인 활동이며 그 단위는 그 자체 임의적 크기이며 마찬가지로 다시 어떤 몫수로서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보폭은 일정한 수의 뺨이다) 그러나 [비교의] 척도는 다만 외적인 잣대는 아니며 오히려 어떤 정량을 지닌 타자에 대해 그 자체에서 관계하는 특정한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33)

어떤 사물을 잣대로 측정하면 일정한 몫수가 나온다. 앞의 예에서 물로 만든 비중계로 측정하면 철은 10이 나오고 나무는 0.1 나온다. 이 비례지수가 각 사물을 규정하는 사물의 척도가 된다.

여기서 어떤 사물이 잣대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단위가 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고유한 양적 크기를 가진다. 물을 표준으로 삼지 않고 나무를 표준으로 삼는 비중 잣대(비중계)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나무 비중계는 물 비중계(현재 사용되는 비중병)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거리를 측정할 때 자로 재든, 미터로 재든 마찬가지인 것과 같고, 은이 화폐로 사용되든, 금이 화폐로 사용되든 마찬가지였던 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총수를 지닌 것이 하나의 단위로 사용되는가는 자의적인 것(또는 관습적인 것)이다.

4)

이상에서 척도와 표준과 잣대의 관계가 설명되었다. 유사한 말이지만, 헤겔은 다른 맥락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이해된다. 사물의 비례 양을 추상적으로 말하면 척도다. 그 척도가 다른 것과 비교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표준이다. 이 표준이 되면서 외적인 양적 크기로 다른 사물의 척도를 기술해 주는 것이 잣대다. 앞에서 등 비중을 예로 든다면, 비중 자체는 척도이며, 비중을 재는 표준은 물이다. 그리고 이 표준을 이용하는 비중계(소위 비중병)가 잣대다.

이제 척도(동시에 표준과 잣대)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보도록 하자. 이제 다시 관점을 바꾸어서 척도를 이루는 두 요소 즉 두 서로 다른 정량 사이의 관계를 보자. 두 요소 사이 관계는 척도에 따라서 다르다. 우선 예를 들어 비중의 경우를 보자.

비중의 경우 모든 사물의 비중의 기울기는 같다. 부피가 증가하면 무게도 같은 만큼 증가한다. 그러나 온도의 경우는 다르다. 열량과 물체의 온도 사이의 관계는 사물마다 다르다. 어떤 물체는 동일한 열량이 전달되고 다른 물체는 느리게 전달된다. 물체마다 고유한 매체적 성질이 열량을 전달하는 데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열과 물체의 매체 사이에 어떤 내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외적으로 표상된 온도가 특정한 사물의 온도와 맺는 관계는 고정된 비례지수를 갖지 않는다. 사물에서 현존하는 열의 증가와 감소는 외적인 온도의 증가와 감소와 동양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외적인 열기가 가로로서 다른 것이 세로로서 표상된다면, 전자가 동양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후자의 상응하는 변화를 통해서 곡선이 기술될 수 있다.”(논리학 초판, GW11, 197)

“온도는 그 온도 속에 처해 있는 상이한 특수한 사물에 의해 상이하게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이 사물들은 그것에 내재하는 척도를 통해서 외면적으로 수용되는 온도를 규정하며 그런 사물의 온도 변화는 매체의 온도 변화에 상응하지 않으며 다시 말해 그 매체의 온도 변화에 서로 직접 비례 관계 속에서 상응하지 않는다. 여러 사물은 동일한 온도 속에서 비교되면 특정화된 열이나 열용량 비례 수를 준다. 그러나 이런 사물의 열용량은 상이한 온도 속에서 변화되니 특정한 형태의 변화가 등장하는 것은 이 상이한 온도와 결합돼 있다.”(논리학 초판, GW11, 197)

이렇게 비중과 온도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비중과 온도가 다 같이 척도이지만, 그 척도가 사물 자체와 맺고 있는 관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비중은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지만, 온도는 사물에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척도가 사물에 대해 내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그런 척도가 이제 실재하는 척도 또는 특정화하는 척도[spezifische Mass]가 된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괴물, 트럼프의 ‘마가주의’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신자유주의가 낳은 괴물, 트럼프의 ‘마가주의’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시론]에 게재된 2026년 2월 22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김성우(대동평화연구원 연구원)

 

현재 대한민국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기존의 세계 질서와 국제적 합의가 무너지는 전례 없는 위협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펼치는 거래적 외교는 과거의 동맹 가치를 위협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실존적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러한 대혼란에서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있는 전환기적 상황임을 읽어내야 한다. 또한 미국의 새로운 세계 전략을 수립한 트럼프 대통령의 마가(MAGA)주의를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가주의의 뿌리가 구소련 붕괴 이후인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 중심의 패권 질서가 구축해 온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 붕괴 이후 형성된 미국 중심의 유일 패권 체제는 시장의 무한한 자유와 무역 장벽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세계 질서를 구축했다. 세계화는 보편적 번영을 약속했으나, 실상은 자본의 이동성만 극대화하고 자국 내 제조업 붕괴와 더불어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며 미국과 유럽 대다수 시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무한 경쟁과 시장의 자유를 내세웠던 세계화는 번영 대신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으며, 마가주의는 이러한 불평등 구조 속에서 병든 개인들과 집단의 분노를 동력 삼아 탄생한 괴물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휘두르는 관세 장벽과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 우방국을 향한 경제적 ‘갈취’는 세계화에서 소외된 ‘백인 남성 고졸 노동자’의 분노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구하는 마가주의의 본질은 공공성이 아니라 사적 이익과 야심을 위한 독재적 횡포를 향한 선동적 포퓰리즘이다. 이는 대의 민주주의가 소수 엘리트만의 과두정 게임으로 전락했을 때 나타나는 기형적인 현상이며, 가짜 뉴스와 혐오를 통해 본질적인 불평등 구조를 은폐하는 대중선동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는 소외된 시민을 대변하는 진정한 포퓰리스트가 아니라, 가짜 뉴스와 선동으로 타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대중선동가(데마고그)이다.

그는 능력주의라는 허울 아래 일론 머스크로 상징되는 빅테크 승자들만의 자유를 추구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병든 이들의 분노를 불법 이민자나 외부의 적에게 전가하는 비겁한 선동 정치에 매몰되어 있다.

결국 다수의 패자가 신음하는 부자유한 사회 속에서 극단적 분열은 심리적 내전 상태로까지 번졌고,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인 공공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이 새로운 마가주의 전략에 맞서려면, 결국 강자의 약탈적 자유를 제한하고 모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공공성을 추구하는 민주 정부가 필요하다. 국가의 역할은 사적 이익의 극대화가 아닌 공공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혐오와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를 끝내고 모두의 평등한 자유를 실천하는 것은 ‘빛의 혁명’을 함께 일궈낸 대한민국 주권자와 현 민주 정부가 함께 짊어져야 할 지엄한 시대적 과업이다. 대한민국이 각자도생의 거센 파고를 넘어 국익을 중심에 둔 균형외교를 하는 자주 주권 국가로 우뚝 서기를, 그리하여 극우 포퓰리즘의 난동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7521&page=5&total=11236


 

플라톤의 <국가> 강해(8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2)

 

Ⅵ.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4. 민주정과 민주정적인 인간,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555b-562b)-(2)

 

[558c-562b] 민주정적인 인간

* 소크라테스는 이제 민주정에 상응하는 개인을 살피기 전에 그가 과두정적 인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먼저 고찰한다. 이곳에서도 그러한 변화 과정은 앞서와 동일한 비유 즉 아버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또 어떻게 아버지와 다르게 변해가는 지를 통해 제시된다.(558c) 절약하는φειδωλός 과두정적인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 아래 길러져 소비적이며ἀναλωτικός 돈벌이에 도움 되지 않는 온갖 쾌락ἡδονή들을 힘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소크라테스는 보다 분명한 논의를 위해 욕구를 ‘필수적인ἀναγκαῖος 욕구ἐπιθυμία’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로 나눈다.(558d)

* 필수적인 욕구는 우리가 물리칠 수 없는ἀποτρέψαι 욕구들, 충족됨으로써 우리를 이롭게 하는ὠφελοῦσιν 욕구들을 말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어릴 때부터 훈련한다면μελετῷ 벗어날 수 있는ἀπαλλάξειεν 욕구들로서 어떤 좋은ἀγαθός 일도 하지 않는 욕구들이다. 이것들 각각의 예παράδειγμα를 들자면 필수적인 욕구란 건강ὑγιεία과 활력εὐεξία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 먹고자 하는 욕구, 요리ὄψον에 대한 욕구 등이다.(559a) 먹을 것에 대한 욕구는 이로운ὠφέλιμος 것이라는 점에서도, 충족이 안 될 경우 생명활동ζῶντα을 중단시킬 수 있다παῦσαι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들을 넘어서는 그 밖의 다른 종류의 먹을 것들에 대한 욕구는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들로 몸에도 해롭고βλαβερός 영혼이 현명해지고φρόνησιν 절제하는 데τὸ σωφρονεῖν에도 해롭다,(559b) 이러한 욕구들은 소비적인ἀναλωτικός이지만 그에 반해 필수적인 욕구들은 일들τὰ ἔργα이 이루어지는 데에 유용하므로χρήσιμος 돈 벌어들이는χρηματιστικός 것이다. 성욕ἀφροδισίων ἐπιθυμία과 같은  그러한 쾌락ἡδονή과 욕구ἐπιθυμία로 가득 차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조금 전 수벌κηφήν이라고 이름 붙였던 사람들이고, 필수적인 욕구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곧 절약하는φειδωλός 사람이자 과두정적인 사람이다.(559c)

* 이러한 과두정적인 사람에서부터 민주정적인 사람이 생겨나는 경위는 이렇다. 즉 교육도 시키지 않고ἀπαιδεύτως 돈을 아껴가며 길러낸 젊은이가 수벌이 그러듯 꿀μέλι을 맛보고γεύσηται 온갖 종류의 다채로운ποικίλος 쾌락을 제공할 수 있는 사납고αἴθων 무서운 짐승θήρ들과 어울릴 때,(559d) 그 사람 안에 있는 과두정이 민주정으로 변하기 시작μεταβολή한다. 이 때 이 젊은이는 닮은ὁμοῖος 것이 닮은 것을 지원하듯이 욕구들 중 어느 한 종류가 그것과 닮은 외부 욕구의 지원을 받아 바뀌는데, 만일 이런 지원에 맞서서 그를 훈계하고 책망하는 그의 아버지나 다른 친척들로부터 동맹군이 와서 이 젊은이의 안에 있는 과두정적인 요소를 지원할 경우(559e) 그 사람 안에서 내분στάσις과 이에 대한 반동ἀντίστασις 즉 자기 자신과의 싸움μάχη이 일어난다.

* 이 싸움에서 민주정적인 요소τὸ δημοκρατικὸν가 과두정적인 요소에 굴복하여ὑπεχώρησε 이 젊은이의 영혼 안에 염치αἰδώς와 같은 것이 생겨난다면, 다시 질서가 잡히겠지만κατεκοσμήθη 대개의 경우 아버지의 양육τροφή에 대한 무지함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때문에, 추방당한 욕구들과 같은 종류의 욕구들이 다시 뒤이어 자라나고 많아지고 또 강력해지곤 한다.(560a)

* 이후 플라톤은 젊은이의 영혼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는 문학적, 수사적 성격을 고려하여 최대한 전문에 가깝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그것들은 이 젊은이의 영혼의 성채ἀκρόπολις에 신의 사랑을 받는θεόφιλος 사람들의 마음διάνοια에서 최상의 파수꾼φρουρός이자 수호자φύλαξ 노릇을 하는 훌륭한καλός 배움μάθημα과 활동ἐπιτήδευμα, 진실된ἀληθής 말λόγος이 비어있음κενός을 알아채고는, 마침내 그 성채를 점령해 버린다.(560b) 거짓되고ψευδής 허풍 가득한ἀλαζών 말과 믿음δόξα이 젊은이의 마음을 차지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저 로토스를 먹는 자들Λωτοφάγοι에게로 가서 공공연히 눌러 살면서 친척들이 보낸 지원군βοήθεια은 물론 연장자πρέσβυς들의 말도 사절πρέσβις로 받아들이지 않는다.(560c) 젊은이의 영혼을 장악한 허풍 가득한 말은 염치αἰδώς를 어리석음ἠλιθιότης이라 칭하며 시민권을 박탈해ἀτιμόω 망명객φυγάς으로 만들어 밖으로 내몰고,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남자답지 못함ἀνανδρία이라 부르며 진창에 처박아 내쫓아버린다. 그리고 절도 있음μετριότης과 적절한κόσμιος 지출δαπάνη도 촌스럽고ἀγροικία 자유인답지 못한 짓ἀνελευθερία이라고 설득하여 다수의 이롭지 못한 욕구들과 한 편이 돼서 그것들을 추방해버린다περορίζουσι.

* 그리고 그것들은 신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거창한 의식τέλεσις으로 입교하는τελουμένου 젊은이의 영혼에서(560d) 이런 것들을 어떻게든 비워내고 정화하고서καθήραντες, 그다음에는 오만함ὕβρις과 무정부상태ἀναρχία, 낭비ἀσωτία와 몰염치ἀναίδεια에 화환을 씌워 많은 가무단χορός과 함께 복귀시킨다. 그리고 오만함ὕβρις을 기품있음εὐπαιδευσία으로, 무정부상태를 자유ἐλευθερία로(560e), 낭비벽ἀσωτία은 화통함μεγαλοπρέπεια으로, 몰염치는 용기ἀνδρεία로 부르며 찬양하고 미화한다. 필수적인 욕구들 속에서 길러진 젊은이는 이런 식으로 필수적이지 않고 이롭지 않은 쾌락들을 풀어주고 해방하는 쪽으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이 젊은이는 필수적인 쾌락 못지않게 필수적이지 않은 쾌락을 위해서도 재물χρῆμα과 수고πόνος와 시간을 소비하며 삶을 영위한다διατριβή.(561a) 다만 만일 그가 운이 좋아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는다면, 게다가 나이도 좀 들어서 질풍노도θόρυβος도 지나가고 쫓겨났던 것들 중의 일부를 다시 받아들이고 또 침입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지도 않는다면, 그는 여러 쾌락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지낼 것이다. 그리고 마치 추첨에 뽑히기λαχούσῃ라도 한 듯, 그때그때의 쾌락에게 그것이 충족될πληρωθῇ 때까지 늘 자신에 대한 지배권ἀρχή을 그것에게 내어주고, 그러고는 다시 다른 쾌락에게 내맡기면서 결코 그 어떤 쾌락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동등하게ἐξ ἴσου 키운다. 나아가 누군가가 아름답고καλός 좋은ἀγαθός 욕구에 속하는 쾌락은 높이 평가하고 그렇지 않은 다른 쪽은 제재를 가하고 예속시켜야 한다δουλοῦσθαι고 말해준다고 해도(561b) 그는 이런 이야기를 용납하거나 자신의 요새φρούριον 안으로 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쾌락은 다 마찬가지라고, 모두 동등하게ἐξ ἴσου 평가τιμητέας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런 사람은 그때그때 닥쳐오는 욕구들에 그런 식으로 영합하면서χαριζόμενος 하루하루 살아간다.(561c) 어떤 때는 술 취해서 아울로스 선율에 심취하는가 하면, 또 물만 마시면서 살을 빼기도 하지. 어떤 때는 또 신체단련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게으름 피우며 모든 것에 무관심ἀμελής하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철학φιλοσοφίᾳ을 하는 것처럼 지내기도 하고. 종종 나랏일을 하기도πολιτεύεται 하고 벌떡 일어나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전사πολεμικός가 부러우면 그쪽으로 옮겨가고 돈 버는 사람χρηματιστικός이 부러우면ζηλώσῃ 또다시 그리로 간다. 이 사람의 인생에는 그 어떤 질서τάξις도 강제ἀνάγκη도 없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인생을 즐겁고ἡδύς 자유인다우며ἐλευθέριος 복된μακάριος 삶이라 부르면서 평생토록 내내διὰ παντός 그렇게 살아간다.(561d)

*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평등을 추구하는ἰσονομικός 사람의 삶βίος을 아주 제대로 설명해 주셨다고 답하고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을 온갖 성격ἦθος으로 가득 찬μεστός 다면적인παντοδαπός 사람, 아름답고 다채로운ποικίλος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그의 삶 안에는 정치체제와 생활방식τρόπος의 사례들이 아주 많이 있어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그를 부러워한다고 말한 후(561e) 이 사람을 민주정에 상응하는 민주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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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8c ‘이 체제에 상응하는 개인’ : 명예정과 명예정적인 인간, 과두정과 과두정적 인간은 전자가 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철학자왕정은 철학자들로 구성된 것이 된다. 그것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제시되었던 대문자와 소문자의 비유에서 대문자와 소문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다만 크기와 규모만 다를 뿐 서로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들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것의 변화 과정은 형식상 평행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에 상응하는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이미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558c ‘절약하는pheidōlos 과두정적인 사람’ : 부를 추구하는 과두정적인 사람은 돈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필수적인 욕구를 넘어서는 것에 돈을 쓰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벌이에 도움 되지 않는 온갖 소비적인 쾌락들을 힘으로 다스린다. 이들은 수벌이 그러듯 꿀을 맛보고 다채로운 쾌락을 제공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점차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소비적이고 사치스런 욕구를 갖게 되면서 민주정적인 사람으로 변화한다.

* 558c ‘일들ta erga이 이루어지는 데에 유용하므로’ : 여기서 ‘일들’이란 말 그대로 돈 되는 일을 말한다. ‘돈 되는데 유용한chresimos’ 일을 한다는 것은 곧 ‘돈을 벌어들이는chrematistikos’ 일을 한다는 것이다. 과두정적인 사람에게 절약 또한 돈 되는데 유용한 일로서 그 자체로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다.

* 558d 필수적 욕구 : 의식주와 관련하여 생물로서 생존 및 자기 보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과두정적 인간은 돈에 대한 욕구에 매몰되어 있어 돈을 쓰는 데 아주 인색하여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것 이상을 욕구하지 않는다.

*558d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 욕구를 이상의 쾌락과 사치와 관련한 것들에 대한 욕구를 말한다. 이러한 욕구는 좋은 일도 하지 않고 해로운 것이지만 어릴 때부터 제제와 교육을 받으면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선을 추구하려는 도덕적 욕구’ 같은 것도 생물학적 자기 보전과 관련한 필수적인 욕구를 넘어선 것이라는 점에서 이곳에 말하는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에 해당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면 좋은 것도 이로운 것도 아닌 것이 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주장과 어긋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여기서 말하는 욕구epithymia는 나라의 3계층 중 생산자 계층에 상응하는 개인 영혼의 3부분 중 욕구 부분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생존과 자기 보전과 관련한 일종의 물질적 생물학적 욕구를 가리킨다. 그런데 한편으로 넒은 의미에서 영혼 자체가 뭔가를 인식하고 가치를 지향하고 그에 부응하는 행위를 유발하는 기능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욕구 또는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고에서 사용되는 욕망구조라는 말에서 욕망이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측면에서 앞서 말한 ‘선을 추구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이른바 도덕적 욕구는 영혼의 이성 부분이 갖고 있는 욕구 내지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558d ‘사납고 무서운 짐승thēr들’ : 과두정 치하에서 부를 추구하다가 경쟁에 밀려 부를 탕진하여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 즉 수벌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부자들에 적대감을 품고 그들의 돈을 뜯어 소비적인 쾌락에 빠져들고 부유층 젊은이들을 유혹하여 필수적이지 않은 사치스런 욕구를 갖게 만든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점차 늘어난 사회적 불만층을 선동하여 기득권자들을 무너뜨리는 주도 세력이 된다.

* 559c ‘성욕aphrodisiōn epithymia’ : 물론 생물학적 자기 보전 즉 생식을 위한 필수적 욕구로서 성욕도 있다. 그러나 aphrodisios가 성적 쾌락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형용사라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성욕은 생식을 넘어서는 쾌락을 위한 비필수적 욕구로서 성욕이다.

* 559d ‘교육시키지 않고’apaideutos, 560a ‘아버지의 양육trophē에 대한 무지함anepistēmosynē 때문에’ : 과두정적 아버지는 돈벌이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닌 한, 어떤 교육과 양육에도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플라톤에게 교육과 양육은 나라와 개인을 보전하는 가장 중추적이고 핵심적인 토대이다. 이곳에서도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교육과 양육의 부재이다. 교육과 양육에 무지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추방시킨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들이 없어지기는커녕 다시 뒤이어 자라나 많아지고 강력해진다.

* 560c ‘로토스를 먹는 자들’lōtophagoi : <오뒤세이아>(9권 83-104)에 나오는 자들로 이곳에선 과두정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꿀을 맛보게 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온갖 쾌락에 빠지게 하여 민주정적 인간으로 변하게 만드는 수벌들과 수벌을 따르는 민중들을 가리킨다. 민주정 치하 민중과 민주정적 인간에 대한 플라톤의 부정적 인식이 담긴 말이다.

* 560c-e : 타락해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깝고 비탄 섞인 소크라테스의 심정이 실감나게 표출되어 있다. 이러한 탄식은 494d에도 나오는데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젊은이로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었을 대표적인 인물로 알키비아데스를 꼽고 있다.(J. Adam. 이 부분 노트 참고)

* 560d ‘거창한 의식으로 입교하는 젊은이의 영혼에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든 비워내고 정화하고서’ : 젊은이들에게서 어떻게든 좋은 것을 비워내고 없앤다는 표현에 ‘정화하고서kathērsante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종교 의식을 주석가들은 엘레우시스Eleusis 밀교 의식으로 보고 있는데 맥락상 플라톤은 당대 그리스 사회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엘레우시스 밀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종의 궁극의 앎에 이르는 통로로 이러한 비의(秘儀)적 입문 내지 비밀스런 가르침을 담은 장면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플라톤에게 수학과 기하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피타고라스학파 역시 기본적으로 궁극의 앎은 비의적 입문과 수행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고르기아스> 497c, <향연> 210a, 218b, <테아이테토스> 155e-156a, <법률> 666b, 870d-e, <파이드로스> 250b-c, 249c, <파이돈> 81a, 69c, <국가> 378a 등(J. Adam 이 부분 노트 참고)

* 561a ‘화통함megalopreia’ ; megalopreia는 호방함, 큰 도량을 의미하는 말로 486a에도 나온다.

* 561b ‘어떤 쾌락은 아름답고 좋은 욕구에 속하고 …… 어떤 쾌락은 나쁜πονηρός 욕구’ : 이와 관련해서는 <고르기아스> 494e, <필레보스> 13b 이하, <프로타고라스> 353d 이하, <법률> 733a 이하 등 참고.

* 561c ‘쾌락은 다 마찬가지라고, 모두 동등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 젊었을 때 나쁜 쾌락에 휩쓸려 있다가 나이 들어 운이 좋게 이전의 좋은 쾌락의 일부를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좋은 쾌락과 나쁜 쾌락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마찬가지로 동등한 쾌락으로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에게 진정한 동등이란 주어진 조건이나 자질에 맞게 그 값어치대로 나누거나 대우하는 이른바 비례적 동등 내지 ’기하학적 동등‘hē isotēs hē geōmetrikē이다.(<고르기아스> 508a)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이 여기서 말하는 동등이란 맹목적인 상대주의에 입각한 형식적이고 산술적인 동등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동등은 아니다.

* 561c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 ‘부정하며’의 원어 anaueuō 동사의 일차적 의미는 ‘고개를 뒤로 젖히다’이다. 당대 그리스에서 그런 행위는 우리들이 부정을 표시할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처럼 부정을 나타내는 행위로 사용되었다.

* 561e ‘평등을 추구하는ἰσονομικός 사람의 삶’ : 민주정은 동등한 자에게나 동등하지 않은 자에게나 동등함을 똑같이 나누어 준다.(558c) 그리고 앞에서 살폈듯이 쾌락에도 분명 좋고 나쁨이 있고 각기 그것만의 고유한 값어치를 갖는 것들이 있음에도 민주정적 인간은 그것들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평가한다. 아데이만토스가 민주정적 인간의 삶을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으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정 치하에서는 각자의 적성과 소질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물질적 욕구를 중심으로 등질화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최소한 욕망구조의 측면에서 계층에 상관없이 모두가 제멋대로의 자유를 평등하게 누리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구성원 모두가 산술적으로 평등하게 무차별적 자유를 제멋대로 행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예상되는 갈등을 방임하는 것으로서 사회적, 법적 안정성을 와해시켜 결국에는 나라를 무너뜨리는 근본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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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자와 소문자 비유에 따른 논의 구도 그대로 이곳에서도 타락한 정치체제와 개인 즉 과두정과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은 각각 서로에 상응하면서 서로 닮아 있다. 그런데 이때 유념할 것이 있다. 그것은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이 비록 타락한 정치체제일지라도 모두 정치체제인 한, 기본적으로 세 가지 계층 즉 통치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명예정적 인간,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적 인간 또한 영혼 3분설에 따라 영혼의 이성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이곳에서 정치체제의 타락은 이러한 3계층과 3영혼들 간의 관계의 재편 내지 변질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명예정은 전사 계층이 통치의 주도권을 갖는 관계로 재편된 경우이고, 그것을 닮은 명예정적인 인간은 영혼의 기개 부분이 행위의 주도권을 갖는 관계로 재편된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렇다고 통치 계층 내지 통치 기능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정치체제인 한, 명예정에서도 통치 계층 내지 통치 기능은 존재하되, 다만 통치 계층 대부분이 전사 계층으로 대체되었거나 통치 기능이 그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도구로 변질 또는 전락한 상태로 있다. 과두정과 민주정도 마찬가지이다. 과두정에서도 통치 계층 내지 통치 기능은 존재하되 통치 계층이 부자들로 대체되었거나 통치 기능이 부자들의 욕구 즉 부를 보다 효율적으로 축적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상태에 있다. 민주정에서도 통치 계층 내지 기능이 존재하긴 하되 통치 계층이 민중으로 대체되었거나 통치 기능이 민중들의 욕구 즉 제멋대로의 자유를 보다 효율화하기 위한 도구로 대부분 전락한 상태에 있다.

* 정치체제를 닮은 개인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명예정적 인간에서 영혼의 기개 부분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존재하긴 하되 그 기능이 더 이상 제대로 된 본래의 이성 기능이 아니라 기개 부분에 영합하는 도구적 이성 기능으로 대부분 변질되거나 전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과두정적 인간과 민주정적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과두정적 인간에서 부를 위한 욕구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것 역시 영혼의 이성 부분이 존재하긴 하되 그 기능이 더 이상 영혼의 기개 부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부에 대한 욕망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도구적 이성 기능으로 대부분 변질되었거나 전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민주정적 인간에서 영혼의 욕구 부분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 역시 영혼의 이성 부분, 기개 부분이 존재하긴 하되 그 부분들 모두 욕구 부분으로 하여금 필수적 욕구를 넘어 사치스런 욕구로까지 확대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대부분 변질되었거나 전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욕망구조의 변질 차원에서 보면 과두정적 인간 이후의 단계에 이르면 영혼의 부분들 모두 물질적 욕구에 지배되어 있다. 영혼의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은 다만 그 욕구를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도구적 기능으로 전락해 있다.

* 민주정에 관한 논의에서는 ‘제멋대로의 자유’가 민주정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되었지만, 이곳 민주정적인 사람에 관한 논의에 와서는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의 추구’가 민주정적 인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언급되고 있다. 나라에서 제멋대로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기에 개인이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까지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둘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사실 나라와 개인 타락과정에서 이미 과두정 단계에 이르면 욕망구조에서 계층과 영혼의 부분들 전체에 걸쳐 물질적 욕구가 지배하고 있고 통치 기능과 이성 기능은 그것의 효율적극대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 있다. 그런데 과두정적 인간이 어떻게 민주정적 인간으로 변화하는가를 논의하면서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이 물질적 욕구를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로 구분하고 이후 민주정적인 인간이 참주정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단계에 가서는 그러한 욕구들에 이어 불법적인 욕구까지 제시한다. 그리고 이처럼 세 가지로 구분된 욕구들은 물질적 욕구로 등질화된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적 인간, 참주정적 인간의 욕구 각각을 보다 세부적으로 구분하고 규정짓는 핵심적인 특징들로 제시된다. 이것은 나라와 개인의 타락과정을 욕망구조의 변질로 설명하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과두정적 인간 이후 개인 영혼의 타락과정에서 물질적 욕구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타락의 심도를 더해가면서 끝내 불법적인 욕구로까지 변질되어 가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그러니까 영혼의 부분들은 욕구 부분의 세분화까지 포함하면 ‘이성 부분’, ‘기개 부분’, ‘필수적 욕구 부분’,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부분’, ‘불법적인 욕구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그것들 각각은 철학자 왕정과 이후 타락을 더해가는 정체들에 각기 상응하여 그것을 닮은 사람들의 핵심적인 특징들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나중 밝혀지겠지만 결국 정의로운 개인과 부정의한 개인의 판정이 영혼의 부분에서 이성 부분에 충실한 자와 욕구 부분 중 최악의 상태인 불법적인 욕구에 매몰된 자들이 갖는 행복과 불행의 크기로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제시된 욕구의 세분화와 그에 상응하는 정체적 인간들의 구분 또한 그 궁극의 판정을 위한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이곳에서 제멋대로의 자유를 구가하는 민주정적 인간을 논하면서 일단 민주정적 인간의 삶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들 모두가 일상에서 평생토록 내내dia pantos 평등하고도 지속적으로 제멋대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561d) 게다가 이곳에서 플라톤이 들고 있는 제멋대로의 자유에 해당하는 사례들도 이른바 타인을 해치는 부도덕한 행위나 타인에 대한 간섭이 아닌 개인이 그냥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행태들로 구성하고 있다. 플라톤은 나중에 드러날 실제 전개와 상관없이 일단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의 삶을 민중들이 기대하고 믿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희망에 맞추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이곳에서 그려진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이 실제와 무관하게 이곳 논의 계획에 맞게 플라톤이 설정한 ‘플라톤의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한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을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려진 그림 그대로 따로 떼어놓고 들여다보면 그것은 인간이 서로 평등하게 제멋대로의 자유를 평생토록 누릴 수 있는 상황 즉 개인들이 일상에서 타인의 자유를 서로 침해하지도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자유도 침해 받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꿈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곧 다가올 수밖에 없는 파국에 대한 무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그렇게 될 수 없는 다만 대중의 환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꿈같이 펼쳐놓은 민주정적 인간의 그러한 삶의 양태들 그 자체는 플라톤의 생각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인간의 자유로운 삶의 낭만과 쾌락을 꿈꾸는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특히 플라톤이 이곳에서 동원한 풍부하고도 실감나는 문학적 수사는 거부감이전에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감과 함께 큰 감명을 안겨다 주었다. 어쩌면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는 원하는 것을 한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자유 이념으로서 소극적 자유를 넘어서는 적극적 자유의 선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명한 <국가>의 주석가 아담(J. Adam)조차 599d 부분 노트에서 플라톤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과 정황을 아래와 같이 감탄조로 서술하고 있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묘사한 민주적 인간의 기원은 고대와 현대 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장엄하고 웅장한 글 중 하나이다. 롱기누스(Longinus)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 대부분에서 플라톤의 문체는 ‘마치 넓디넓은 바다처럼 풍요로움 속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거대함’을 보여준다. 숭고함의 본질을 ‘웅대한 사상과 이미지, 그리고 언어의 가득 찬 조수’ – 소리나 거품조차 일지 않을 만큼 깊고 가득 찬 조수 -에서 찾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나은 예시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플라톤 특유의 제사장적 풍모에 대해 롱기누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전해 받고 있다. 특히 그의 <숭고에 대하여> 33~36장을 보면, 롱기누스가 정의한 ‘고결한 정신의 울림’으로서의 숭고함이 단순한 메아리 그 이상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반면,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뉘시오스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기는 하지만, 그의 현학적인 비판을 보면 오히려 아티카 수사학자들에 대한 공부만으로는 플라톤을 심판할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플라톤의 이 대목은 문체의 고결함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통찰력 면에서도 매우 놀랍다. 인간 사회의 ‘카멜레온’으로 묘사된 민주정적 인간에 대한 서술(561c 이하)은 시대를 초월한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실제 사실에 대한 묘사로서는 여느 때처럼 다소 과장된 면이 있으나, 매우 생생하고 강력하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대한 플라톤적 유추가 거장의 손을 거칠 때,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혼이 작동하는 방식을 풀어내는 얼마나 훌륭한 단서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은 앞서 살폈듯이 아테네 민주정의 현실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당대 그리스 민주정의 모습과도 상당 부분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제8권에서 타락한 정치체제와 개인의 한 양태로서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을 플라톤 자신 어떻게 규정하고 있고 그러한 플라톤의 생각이 지닌 철학적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를 살피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일단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과두정에서 소외된 민중들이 선도자를 앞세워 혁명을 통해 세운 정체이고 그 민중들이 추첨을 통해 직접 관직에 참여하고 무엇보다 제멋대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정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민주정이 플라톤에게 왜 타락한 정치체제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플라톤의 민주정은 누구나 상관없이 관직이건 어떤 사회적 직분이건 마음대로 참여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것은 원천적으로 인간 각자가 갖는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자연적 본성과 소질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를 통치하고 관리하며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일은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적성과 능력을 갖춘 자가 맡아야 하지 추첨이라는 무작위 방식을 통해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유지와 보전에 전혀 유익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에 반해 플라톤의 철인왕정은 서로 다른 자연적 본성과 소질에 따라 각자 원하는 사회적 직분과 역할을 배정하여 그것의 수행을 통해 각자가 갖고 있는 다양하고도 고유한 나름의 행복감을 누리게 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 민주정은 철인왕정과 거리가 먼 타락한 정치체제이다. 물론 민주정도 사회적 직분과 역할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배경과 바탕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민주정은 명예정과 과두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다양했던 소질과 적성을 제대로 길러가지 못한 채 물질적 욕구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욕망구조 상 돈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등질화된 상태에서 그에 부합하는 정치체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욕망구조의 등질화 그것도 욕구 부분의 지배로 등질화되었다는 것은 제한된 물질적 재화에 대한 경쟁을 필연적으로 초래하고 결국 나라는 양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부자의 나라와 가난한 자의 나라로 분열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꿈꾸는 플라톤으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 이제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와 민주정적인 인간의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서로를 강화하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평생토록 평등하게 그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들을 무참하게 깨트리고 만다. 상호 동등을 내세워 위계와 질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사되는 방만한 자유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무분별한 상호 침탈과  부류간 다툼을 불러일으키다가 결국은 침달린 수벌같은 자들이 지배하는 비참한 예속 관계를 낳는다. 플라톤은 이것이 초래하는 결과를 참주정의 등장으로 이어서 다루고 있지만, 이즈음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단계에서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위한 대표적인 방책으로 가장 먼저 홉스(T. Hobbes)의 사회계약론을 떠올릴 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민중들의 계산적 이기심은 서로가 똑같이 늑대와 늑대인 상태가 야기할 약육강식의 관계가 결국 그들 모두를 공멸로 이끌 것임을 알아차리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통제해 줄 정부를 상호 합의로 수립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부에 이양하는 이른바 사회 계약의 방식으로 공멸의 위기를 벗어난다. 실제로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이런 사상적 특징에 힘입어 실제로 이후 자유주의 국가들의 정부 수립에 이론적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플라톤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그대로 제멋대로의 자유의 과잉은 결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역설적으로 프롬(E. Fromm)이 말한 대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불러일으켜 결국은 강한 권력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복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나치즘과 파시즘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플라톤이 이곳에서 피력하고 있는 참주정의 등장 배경과 마치 2000년 후의 일을 내다보기라도 하듯 거의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 참고로 니체 이후 그를 계승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및 현대의 여러 욕망 관련 이론들은 개인의 욕망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거대 권력 또는 담론들에 대한 사상적 비판 근거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이후의 지식인들 특히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사적인 개인의 권력의지 차원을 넘어 국가  권력자의 욕망 차원에서 보면, 나치의 히틀러가 스스로 니체의 초인임을 자임하고 자신의 욕망을 권력의 힘을 빌려 폭력적으로 표출했듯이, 어용적 지식인들이 그 이론을 끌어들여 국가 권력자의 무분별한 욕망마저 자연스런 욕망인 양 뒷받침하고 부추길 경우 가늠하기조차 힘든 절망과 폐해로 이어질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극우 정치가들이 득세하는 것도 권력자 자신의 욕망을 소외된 대중의 욕망에 투사하여 마치 대중의 욕망을 대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자 민주주의의 표상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의 최고 권력자가 마치 이곳 민주정적 인간이 그러하듯 자신의 욕망을 제멋대로 행사하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듯이 회복하기 힘든 세계사적 불행으로 귀결되고 있다.  플라톤이 민주정적 인간의 타락과정을 서술하면서 탄식을 담아 그리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 트럼프의 한창 시절 모습과 오버 랩 된다해도 전혀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하지 않다.  목하 트럼프는 마치 당대 알키비아데스가 그랬듯이 젊은 시절의 욕망 그대로 탐욕을 키워가며 끝내 욕망의 극점에 다가서 최고 권력자가 된 지금에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치 자신이 받아야 할 당연한 보상이라도 되는 양 아무런 수치심 없이 환호와 갈채를 받아가며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욕망과 이기적 탐욕에 사로잡혀 침략전쟁까지 불사하고 있다.

* 우리는 이제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폭압적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참주정과 참주정적 인간, 참주로 변화해 가는지를 다음의 논의 주제로 남겨두고 있다. 플라톤이 이곳 <국가>에서 그리고 있는 ‘민주정과 민주정적 인간’의 ‘참주정과 참주적 인간’으로의 변화는 불행하게도 20세기는 물론 오늘날 극우 세력의 득세 현상과 더불어 미국 민주정 트럼프의 행태가 보여주는 그대로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제도로서 민주주의도 중요하지만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식상할 정도로 당연한 말이 새삼 실감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끝-

 

다음 강해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1)

헤겔 형이상학 산책 58-척도의 개념과 양질 전환의 법칙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8-척도의 개념과 양질 전환의 법칙

 

1) 특정 양

3편 척도는 1장에서 척도의 개념을 다루며 2장에서 자립적 척도 또는 실재하는 척도를 다룬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소위 화학적 친화성의 개념이다. 3장에 이르러 무-척도가 등장하면서 본질로 이행한다.

우선 1장에 다루어지는 척도의 개념을 살펴보자. 우선 헤겔은 ‘특정 양[spezifische Quantum]’의 개념에서 시작한다. 특정 양은 앞에서 말했듯이 서로 다른 정량들이 내적으로 관계하여 이루어진 정량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가 곧 비중이다. 이 비중[Gewicht]을 가리키는 말은 ‘특정화하는 무게[spezifische Gewicht]’로 규정되니, 헤겔이 여기서 특정 양[spezifische Quantum]이라는 말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특정[spezifisch]는 ‘특수한[bosondere]’의 번역과 혼용될 수 있으나, 차이가 있다. 특수하다는 것은 여러 사물에 공통된 것을 의미하며, 특정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 지닌 고유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특정한 양이란 어떤 사물의 척도가 되는 양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는 처음에 물질은 형태나 크기와 같은 공간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원자의 고유성을 규정하기 위해 무게가 도입되었다. 아르키메데스에 이르러 사물의 비중이 발견되면서 비중이 사물의 고유한 척도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양 즉 비중이라 규정되었다. 오늘날 비중은 사물의 고유한 척도의 자리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그러나 비중이라는 말은 그대로 사용된다.

헤겔의 경우 비중은 더는 사물의 고유한 척도가 아니다. 다만 주관적 척도가 될 수는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양을 다루며, 그런데 이 특정한 양은 주관적 척도라는 의미이니, 가장 적합한 예가 비중이 된 것이다.

특정 양의 예로서는 흔히 발견되는 비중 말고도 속도가 있다. 속도는 거리/시간의 관계다. 단, 여기서 시간을 거리의 또 하나의 차원으로 본다면, 이 속도는 제곱 양에 머물러 있다고 보겠다. 헤겔은 앞에서 속도가 미분될 수 있는 이유로 이것이 제곱 양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특정 양의 주된 예로 비중을 들려 한다.

2) 특정 양의 개념

앞에서 외연량과 내포량에 이어서 제곱 양 또는 제곱 관계가 다루어졌다. 외연량은 예를 들어 사물의 ‘길이’를 ‘길이’를 지닌 자로 규정하는 것이니, 자기를 통해 자기가 규정되는 양이었다. 내포량은 타자와 관계하는 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통해 규정된 양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도나 강도와 같이 동일한 정량을 다만 타자와 비교하여 규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곱 양은 이미 두 정량의 관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두 정량이 관계하여 새로운 정량이 출현한다. 다만, 여기서는 두 정량은 실질적으로 같은 것의 다른 차원으로서 정량이다. 예를 들어 면은 선의 제곱이다. 예를 들어 같은 것 즉 선이 제곱하여 즉 자기 관계하여 다른 것 즉 면에 이른다.

그러나 특정한 양에 이르면,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정량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정량이 출현한다. 비중에서 무게와 부피는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정량이다. 서로 다른 정량이 관계하여 새로운 정량이 출현하니 그것이 곧 비중이다.

부피와 무게는 서로 무관하다. 그런데도 사물에서 부피 없는 무게가 없으며 무게 없는 부피도 없다. 그 때문에 무게와 부피는 내적인 연관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양자의 내적 연관이 비중이라는 말로 규정된다.

3) 특정 양의 두 측면

어떤 사물이 비중을 가진다고 할 때, 그 비중은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자기 관계의 측면 즉 질적인 측면이며 다른 측면은 외면성의 측면 즉 양의 측면이다. 비중은 분수 즉 무게/부피인데, 그 분수 값이 일정한 정수 예를 들어 1.5라면 이 분수 값의 측면은 외면적 양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이 값은 단순히 직접 주어진 무게가 아니라 무게를 단위 부피에 따라 나눈 것이며, 이는 무게가 부피를 통해 규정된 것이다. 이 부피가 무게에 외면적이라면 이는 자기 관계가 아니겠지만, 이 부피가 무게에 내면적이라면 이는 자기 관계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자기 관계는 감각적 질과 같은 직접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 자기로 복귀한 것이므로 매개된 자기 관계다. 그러므로 비중은 자기 매개를 통해 출현한 질적인 측면이 된다.

여기서 비중의 양적인 측면은 증감 가능하며, 외적 규정에 열려 있고 이런 양적인 증감은 점진적 연속적이다. 그러나 어떤 비중의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물체마다 고유한 비중을 지니므로, 이런 양적 관계(무게/부피) 값의 변화에 따라서 하나의 물체는 다른 물체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온도가 내려가면 수증기는 물이 되고, 다시 더 내려가면 얼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중은 물체의 척도가 된다.

일반화하여 말하자면, 특정 양은 양적 측면에서 보면 다른 정량과 마찬가지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물체를 규정하는 고유한 척도가 된다. 고대인의 눈에는 비중이 물체마다 다르므로 물체의 본질을 규정하는 객관적 척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런 척도는 물체의 본질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규정하는 척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주관적 척도다. 이런 주관적 척도이므로 이 비중은 ‘특정한 양’에 머무른다.

“현존에서 나타나는 양적 규정성은 이중적 규정성이어서 즉 한번은 질이 의존하는 규정성이며 다른 한 번은 이 질과 무관하게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으니, 하나의 척도를 지닌 어떤 것의 몰락은 그것의 정량이 변화되는 것 속에서 일어난다. 이런 몰락은 한편으로는 기대되지 않은 것으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정량에서는 척도나 질을 변화함이 없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몰락은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으로 되니 즉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몰락이다.”(논리학 재판, GW 21, 331)

4) 표준의 개념

물체마다 고유한 비중을 지닌다. 물의 비중이 1이라면 철의 비중은 그보다 높을 것(예를 들어 10이라고 하자)이고 나무의 비중은 그보다 낮을 것이다(예를 들어 0.1이라 하자). 여기서 물체의 비중을 측정하는 표준은 물이다.

물은 고유한 척도 즉 1이라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헤겔은 이것이 모든 물체의 비중을 재는 단위가 된다는 점에서 ‘본래적으로 규정된 존재[an sich Bestimmtsein]’이라 한다. 앞에서 정량을 규정할 때 그 단위가 되는 일자를 헤겔은 마찬가지로 ‘본래적으로 규정된 존재’로 언급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표준적 단위는 자의적인 것일 뿐이다. 비중의 기준이 되는 것을 보통 물로 보고, 물의 비중을 1로 규정한다. 왜 물이 비중의 표준 또는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는 관습적인 것일 뿐이다.

일상적 삶에서 긴요한 것이 항해이니 물에 뜨는가 아닌가이니, 아마 물의 비중을 1로 규정해서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항해를 위해서는 물 대신에 바닷물을 표준으로 삼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척도는 일상적 의미에서 표준이니, 그것은 외면적 몫수[Anzhal]에 대립하여 그 자체에서 규정된 총수[Einheit]로서 자의적으로 받아들여진 정량이다. 그와 같은 단위는 사실상 그 자체에서 규정된 총수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피트나 그와 같은 근원적 척도다. 그러나 그런 총수가 표준[Massstab]으로서 다른 사물에 적용되는 한에서 그 사물에 다만 외면적이며 그것에 내재하는 척도는 아니다.”(논리학 재판, GW 21, 330)

이제 어떤 물체의 비중을 물이라는 표준을 통해서 보자. 물체의 비중 자체는 추상적인 양이다. 비중이 무게/부피라고 해서 무게를 재고, 부피를 측정하면 비중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물체의 비중을 재기 위해서는 먼저 단위가 되는 물의 부피를 정해야 한다. 물 1L의 부피에 해당하는 무게가 1kg이면, 철이나 나무 1L의 부피를 잰 다음 그것의 무게를 알아보아야 그 비중을 알 수 있다.

철이나 나무는 일정한 무게와 부피를 지닌다. 이런 무게나 부피의 관계는 직접적 정량이다. 그러나 이 비중을 물이라는 표준을 통해서 본다면 일정하게 규정된 비중을 지닌다. 이 비중은 타자를 통해 자기 관계하는 것 즉 특정화된 양이다.

물체의 특정화된 양은 곧 비례 지수가 된다. 예를 들어 이 물체의 비중은 물체의 무게와 부피 사이의 비례를 규정하는 비례 지수가 된다. 물체의 무게는 물체의 비중* 물체의 부피가 될 것이다. 물체의 부피를 알면 우리는 그 무게를 알 수 있다.

5) 자연 변증법

비중이 두 측면 질적 측면과 양적 측면을 지니므로 여기서 그 유명한 법칙 양질 전환의 법칙이 나온다. 양이 변화하면 질이 변한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은 엥겔스가 자연 변증법에서 이를 자연의 한 법칙으로 삼았고 구체적 예로서는 수증기가 물로 되고 물이 얼음으로 되는 것을 들고 있다. 이어서 엥겔스는 사회적 생산에서 생산력의 양적 변화가 생산 관계라는 질을 변화한다는 예를 통해 이를 설명했다. 그 이후로 이 법칙은 널리 알려진 법칙이다.

엥겔스가 자연 변증법의 법칙을 세 가지로 들었는데 그 각각이 헤겔 논리학에서 나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양질 전환의 법칙은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나온다. 상호 침투의 법칙은 본질론에서 끌어낸 것이다. 이중 부정의 법칙은 개념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엥겔스는 이런 법칙을 자연의 일반적 법칙이라고 규정했고 그것이 적용되는 구체적 영역 즉 헤겔 같으면 존재론, 본질론, 개념론이라는 영역을 표현해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이런 법칙들이 무차별하게 아무 데나 적용되곤 했다. 헤겔의 존재론은 역학의 영역이다. 본질론은 굳이 찾자면 생물학의 영역이다. 개념론은 인간 사회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각 영역에 다른 법칙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특히 양질 전환의 법칙은 앞서 말한 대로 헤겔이 특정 양의 영역에 적용한 것이다. 그것은 물체의 어떤 상태를 양적으로 표현할 때 나온다. 구체적 예는 비중과 같은 것이다. 이런 영역을 넘어서 다른 영역에 이런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주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중이 바뀌어 수증기가 물이 되고 물이 얼음이 되는 것은 마땅히 양질 전환의 법칙이 적용될 만하다. 그러나 생산력과 생산 관계가 논의되는 사회적 영역에서 단순히 양질 전환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철학을 대하는 관점들 [천 하룻밤 이야기]

서양 철학을 대하는 관점들

– 2026. 03. 20. 춘분(春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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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의 한계와 영토의 경계: 삶의 유한성

    철학 또는 일반화하여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학문들의 역사에 서 변역(變易)의 과정을 보면 철학자 또는 제반 학자들에게 국경이 있는 것 같다. 파스퇴르(1822-1895)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고 했다. 파스퇴르의 표현은 프랑스와 프러시아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패전국의 학자로서 독일에 불려가 발표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그 과학자는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에서 연구 방식이, 공동체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일이 의학과 생리학에서 화학적 관심으로 기술적 생산에 관심이었다면, 프랑스는 자연에서 삶의 조화와 연관 있는 생명과 의학에 관심이었다. 생물학에 대한 관심의 방향과 자연에 대한 태도는 단지 의학에서만 있었던 것이라기보다, 철학적으로 칸트에서 과학의 관념론과 도덕의 이상론에 치중하였다면, 이에 반하여 콩트에서는 자연의 조직화, 인간사회의 조직화에서 실증적 사건들에 관심을 기우렸다.

    서양사에 국가관의 성립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후, 국제법과 주권국의 지위를 규정하며, 각 나라에서 국가체제를 형성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왕정국가에서, 인민 또는 주민을 토대로 한 자주국가의 성립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유럽을 통합하려는 전쟁의 영향에서 나왔다 한다. 이 전쟁이 국민의 자주의식을 일깨웠고(피히테), 소위 말하는 근대국가가 성립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학문의 유럽화 이외에 각국에서 개별학문의 발달도 이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알려진, 프랑스철학, 영국철학, 독일철학 등이 자리를 잡는다. 특히 철학에서 이 세 나라의 학문의 독자성과 영토성이 자리 잡으면서, 스페인,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라틴계로, 프러시아 이후에 동유럽은 독일계에 속하며, 미국의 독립으로 영국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 국가이지만 학문과 문화에서 영미 철학이라 불리는 계열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브레이어 철학사(1934)이후, 즉 서양의 양차대전 이후에는, 학문들의 경향성과 더불어, 거의 자기 나라의 방법과 방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향성은 서양이 동양 삼국에 미친 영향에서도 드러난다. 이 나라들과 연관들이 역사적 깊이와 상대적 교환에 따라서, 일본은 앵글로색슨에 깊은 영향을 입고, 중국은 유럽과의 교류에서 긴 역사만큼이나 유럽 대륙 전체와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이차대전 이후에 사회주의의 영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어쩌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중적 관점이 있으며, 풍토상 추가령지구대를 가르는 문화적 창안의 차이만큼이나, 이중적 관점으로 경향과 방향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터전에서 경계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하는 또는 상상하는 의식은 경계를 넘어서 거의 무한하게 확장한다. 이런 점에서 경계는 임시적이고 한정적이다. 이런 경계를 넘어서 사유하는 방식은 인간이 처한 여러 어려움들에, 고통이든 비참이든, 처한 상황들을 벗어나기 위하여, 그리고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에서 생겨나는 어려움이다.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학문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철학의 시작은 고대 지중해의 그리스인들의 삶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어려움들의 해소를 위해, 철학이 시작하기 이전에는 그리스 연극을 통해서 상황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방식을 보여주려 했다. 신화를 빌어서 신들이 개입하듯이, 한 방식으로 외적인 신(deus ex machina)을 불러들여 해결하려 하였다. 이런 해결방식에 꼭 개인에 속하지 않더라도, 민중들은 신들에 의해 또는 누군가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갔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힘 또는 신에 의한 해결이 인간 자신의 숙명이라면, 신이 명령한 숙명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해결이 생각을 깊이 하는 이들에게는 해결이 아니라, 어쩌면 해결의 회피이며, 숙명에 맞대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나약한 존재로 여길 수 있었다. 이런 고뇌에서 몇몇 현자들은 숙명 또는 필연에 대해 진솔하게 대면하고 해결하려고 했다. 그들은 이런 필연이 당연히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기간 동안에 스스로 풀 수 있는 문제들과 풀 수 없는 문제들 사이에 구별해야 한다는 것도 사유할 줄 알았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도구뿐만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가 도구를 돌의 사용으로부터 시작하여 구리를 발견하고 주석을 섞어서 돌보다 더 단단한 도구인 청동을 사용하고, 이로서 농업과 삶의 양식이 조금씩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철기의 도래는 인류의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청동과 철의 사용을 통하여 동일한 도구의 제작에서, 추정하기로 동일성 또는 동일반복의 방식에서, 단위(통일성)를 설정하는 생각을 할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철학자의 사유의 발전적 과정이 지중해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게다가 청동기와 철기의 문화가 사유의 일반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과 동북아시아도 비슷한 시기에 청동과 철기를 통한 동일성의 단위를 설정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시기가 기원 6세기 전후라고 한다. 이런 시기에 지리적 경계와 사유의 한계가 영토에서 삶의 경계를 갖는 것은, 일정 영토에서 비슷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운반 도구의 미비함에서 온 것이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치 동일반복과 같이 여기는 동일한 도구의 거푸집을 통한 생산이 사물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여긴다.

    물론 천문학에서 하늘의 별자리들이 매년 동일한 자리에 있다는 것이 먼저이다. 그럼에도 하늘의 별자리는 운행하고 또한 무한 반복하기에 대상화가 인간의 삶의 범위를 벗어나서 단위설정이 어려웠으리라. 이에 비해 하여, 도구의 제작에서 한계와 반복이 인간의 사고 정립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어쩌면 거꾸로 하늘에 영원성을 두고, 지상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열망과 욕망이 진지하게 자연(하늘과 땅)에 대해 규칙 또는 법칙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이런 한계(limite)를 넘어서려는 노력과 인간의 유한한(fini)의 자각(또는 한탄) 속에서 경계를 넘으려는 의지와 생명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욕망에서, 일반적으로 삶에서 고통과 비참을 해소하려는 노력과 함께 사유의 방법과 기술을 제시하려 할 것이다. 학문은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표현으로 경계가 없으나, 유한한 삶의 개인은 어느 터전 위에서 산다는 점에서 경계 속에 있었다. (58N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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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은 하나(통일성)에서 출발하는가?

     학문에서는 항상 문제제기가 있다고 하며, 화두가 있다고들 한다. 서양철학에서 한편 기원 또는 원인, 다른 한편 원리 또는 법칙을 탐구한다고 한다. 이런 문제제기에는 상상(사유)하는 의식과 사고(추리)하는 지성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이 양자 사이에 참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원이든 원리든 사유하는 또는 추리하는 인간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천지인에서처럼 사람이 관여한다.

     우선 기원을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기원이 있기나 한가? 인간은 자신의 깊이를 모르기에 사물들 대하면서 자연에서부터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그 자연에서 어떤 순환과 변화에서 일정한 규칙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그 자연을 움직이는 어떤 힘 또는 신들이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사유에서는 한편으로 신들의 이야기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변화에서 질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신들의 이야기와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서 신들처럼 또는 정령들처럼 자연에 첨가하는 어떤 힘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들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기로는, 신들과 정령들이라는 대상을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었듯이, 자연에서도 자연의 변화의 질서, 질서의 기원 또는 원인에 대한 대상(또는 단위)을 상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초기 발상에서 보아, 자연, 신들, 인간이라는 삼원성이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 표현으로 천지인으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신들의 대상화에서 최고신을 만들거나 신들의 위계를 또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해석하듯이 신들의 위상들과 역량들을 구별하는 여러 신적 지위를 부여하여 대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자연에 대해서는 신들처럼 대상화하기보다 자연의 운행에서 기원과 원인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생각하면서 기원과 원리를 구별하고서, 기원에 대해서 의식하는 차원을, 원리에 대해서 추리하는 차원을 부여하고서, 두 대상 사이에 있을 법한 차이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삶의 양식이 점점 다양화되어 감에 따라, 탐색의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원리의 탐구를 추론의 전개에서 극한에서 한정 지으려 할 것인데, 이에 비해 기원의 탐색에서 알 수 없는 기나긴 과정의 시초를 한정 짓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각하는 추리는 무한히 전개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연은 우리의 경험상으로 제한된 세계에 머문다고 여겼다. 이점에서 하늘이 닫혀 있다고 하지만 무한한(infini) 운동의 귀결을 찾으려할 것이고, 자연은 한정된 영역에 있지만 무한정한(illimite) 움직임으로 여긴다. 이로서 인간은 사유의 무한성과 삶의 한정성 사이에 대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한한 우주와 유한한 자연이라는 생각이 우선 자리 잡으리라. 그럼에도 인간은 우주의 무한과 삶의 터전에서 한정성이라는 이원성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무한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하늘의 뚜껑 안에서 영속적인 운행에서 영원이란 원리를 생각하였고, 지상에서 무수한 변화들에서도 그 기원에는 원리와 맞먹는 원인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이를 찾고자 하였다. 무한에서 영원이라는 통일성(l’unité)을 탐색하듯이, 변화들 속에서도 불변하는 단위(l’unité)를 찾으려 한다. 이 두 통일성 또는 단위는 용어상 같이 보이지만, 같을 수도 없고 또한 같이 나아갈 수도 없음에도, 사유 속에서 같이 또는 연대하여 관련이 있거나 상응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은 화두로서 제기된 문제에서, 하나의 전체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 전체에서 부분들이 나왔을 것이라고 여겼으나, 사유하는 또는 의식하는 인식은 둘 사이의 심연 같은 깊은 간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심연을 들여다보기보다, 하나의 원인 또는 원리로부터 나온 두 방향, 두 성질, 두 형식, 둘이상의 계열들 사이에서 차이를 봉합하여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성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모두 합하여 하나이지 둘이 아닐 것이고, 인간이 사유하고 의식하는 두 갈래의 길에서도 인간(사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주하나와 인간하나가 같은 기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주와 자연을 생각하던 현자는 인간의 사유의 두 갈래인 지성과 감성이 하늘과 땅의 대비적 사유, 또는 투영적 사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탐구에서 하늘과 땅, 기원과 원리 등을 구별하고 싶지 않았던 현자는 세계가 하나이듯이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도 하나라고 여기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이 하나 또는 전체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어 들어가는 현자는 두 갈래의 방향과 경향에서 길을 잃을까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 같다. 지자는 추리하여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 원리를 구하고 싶었고, 어쩌면 현자는 자연의 변화 과정 속에서 기원을 찾으면 통일성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이쯤에서 원리와 기원을 구별하는 방식에 대해, 대조하고 비교하며 이리저리 이야기를 옮겨 다녀서 혼돈을 가져온다고 하는데 대해, 변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과 땅, 원리와 기원에 대한 확연한 구별로부터 학문이 출발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이해와 지적 수준이 낮았을 때, 구별이 쉽지도 않았고, 구별을 하는 방법도 몰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인류의 역사에서 지역마다 다를지라도, 그리고 자연을 대하는 기술적 방식에 따라, 신화들의 시대가 시기적으로 다르고, 또한 생각하는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 그리고 20세기에는 여러 가지 다양체로 – 방식의 단초를 갖는 사유방식도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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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에서 대상(또는 상태)에 대한 탐색으로 체계를 갖출 수 있을까?

     인간이 삶의 터전에서 자기의 영토가 주어져있다는 것을 자각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구라는 영토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세상을 떠난다는 것 사이에 차이는, 사유방식의 차이보다 엄청났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코스모스는 하늘아래 땅위에 삶의 세상이다. 즉 코스모스가 곧 이 세계이다. 이 세계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를 생각하는 관점에서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세계가 신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상상했을 것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 삶의 고통과 고뇌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겼을 것이다.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들에 관한 이야기는 전승되고, 그 만큼 세계의 사물에 대한 일반화와 용어들이 정초되어 갔을 것이다.

     한편 세계 속에서 삶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삶의 영역에서 도구의 제작과 생산 그리고 소비에 관한한 교환이 있듯이, 다른 한편 인간들 사이에 제도 안에서 소통의 덕목으로서 도덕과 신앙도 갖추어 갈 것이다. 자연과 제도에서 자연은 필연적임에도 제도는 필연적이라기보다 필요조건에 가깝다. 사유하는 대상으로서 하늘과 땅, 다음으로 자연과 제도에는 각각이 내속하는 체계가 다른 것이 아닐까? 인간이 하늘과 땅의 연대 이래로, 종교의 시대를 지나,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대상으로 여길 때, 원인과 원리는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이 대상 또는 체계를 다루는 방식에서 인간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늘이라는 뚜껑아래 우주(코스모스)가 하나라는 것에서, 뚜껑이 열리고 머나먼 성좌들을 포함하는 우주가 하나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 후자의 하나라는 것은 생각하는 오성(지성)이 무한히 넓혀간다는 것이다. 이 만큼이나 자연에서 길이도 길게 갈 수 있고, 이런 두 가지의 상대성이 같은 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기도 한다. 원인과 원리는 같은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르케라고 할 때 자연의 원인(시작)을 탐색했을까? 자연의 원리(사유의 공리)를 탐색했을까? – 이런 구별은 우주발생론과 우주론, 시간론과 공간론의 차히로 여길 것이다. – 이런 차이의 구별은 근대에서 데카르트가 “방법”이라고 설명하면서 탐구의 길을 열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적 정신이 있고, 대상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적용과 응용의 방식에 차이일 뿐이라고 담론을 전개하고 싶었으리라. 하나라는 일반화를 넘어서 추상화 속에 개념(또는 관념)을 설정한다는 것이 인간의 오만과 탐욕(욕망이 아니다)이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가 먼저 있을까라는 탐색은 화두에서보다 선문답의 여러 논쟁거리에 있었듯이, 서양 철학사에 어떤 갈래의 논쟁들이든 어떤 방향들의 합의들이든 하나로 합일된다고 하는 것 속에는 종교적 신앙이 들어있다. 이를 변증법의 하나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어왔다. 왜 이 신앙을 플라톤은 추측(피스티스)라 부르고 싶어했을까, 그리고 이런 추리를 원인론(인과론이 아니다)에서 보면, 한 원인이 동일한 결과를 내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주의가 이미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훔이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론은 자연의 발생이 아니라 인간의 사변적 추리 방식의 일부라고 본 것은 방법적 탐색이었다.

    데카르트와 흄을 거치면서 방법적 논의는, 즉 인간의 사유가 대상으로 삼는 자연이든, 사유의 이미지든, 그 대상화와 일반화에 규칙이 무엇이었는지, 또는 그 규칙이 합당한 또는 공리에 맞는 체계인지를 다시 물어보게 될 것이다. 탐색도 인간의 지성이 하고, 탐구도 인간의 지성이 한다. 이 지성은 무엇을 하는가? 지성이라는 이 인식의 역량이 하나 또는 우주의 통일성을 알고나 담론을 전개하는가? 소크라테스처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할 때, 이데 대해 극작가들은 유일신앙자들의 공리처럼 받드는 것은 ‘신만이 안다’였다. 유명론을 지나면서, 신이 이름뿐이고 상징 또는 기호, 기표일뿐이라고 해도 신은 존재한다고 하고 실재한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인간의 만든 일반화의 오류이다. 벩송 표현으로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 악순환의 오류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인식 역량의 한계를 빌미삼아, 인간의 사유의 추론에는 부분들의 정합성이 있을 뿐이고, 하나의 통일성이 따로 있다면서, 관념 또는 이념을 이상으로 받들었다. 선문답에서 한쪽이 한 갈래에서 답을 찾거나 문제제기를 하면, 다른 쪽이 다른 갈래를 제시하는 사유확장의 길을 열었다면, 이에 비해 화두란 시원와 원인을 물어 들어가기에 의식의 시간성(인연연기) 속에 빠지기도 한다. 즉, 선문답의 이중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한쪽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신이 없으니깐) 원리, 공리, 정리로부터 체계에서 찾으려 한다. 다른 한쪽은 지구의 지층과 더불어 시간여행을 하기도 하면 기원과 원인에 대해 탐색하려고 하는 시도가 늦게서야 나올 것이다. 탐색에서 방향과 방법, 자연에서 계열과 경향, 여러 갈래의 발산을 탐구하려는 노력, 탐구의 길은 찾는 노력은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58L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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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사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를 대하는 관점 : 탐구 방식과 방향

    인간에게서 의식의 확장과 활동이 이중성이라고 할 때, 근세 철학에서처럼 추리하는 사유(사유실체)와 길이의 인식(연장실체)라고 한다. 이런 사유에는 인간의 의식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 온 것이리라. 그럼에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탐색은 그리 넓게 전개되지 못하고, 이해하는 능력으로서 오성이든 지성이든, 그 당대 지식을 토대로 한 역량에 한정되어 있었다. 자의식의 발현은 신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탐구 방식으로 잘 이루지기에 이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인식의 역량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자연의 자치와 자율성을 이해하려든 것은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기도 하였지만,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삼는데 치중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 자연은 인간이 생각해온 것과 달리, 자연 스스로 발생과 생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빛이 자연의 발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종교적 지배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자연의 도구로서 빛은 여러 가지 중에서 두 가지 방향에서 인간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한편 우주의 광활함을 빛을 통해서, 말하자면 망원경을 통해서 탐구할 수 있고, 다른 한편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의 미세함을 현미경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두 계열의 체계가 사유실체와 연장실체처럼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탐구의 방법에서 대상의 ‘만들어진’측면의 차이보다 ‘만들어가는’ 과정의 차히를 달리 보아야한다는 생각이 표면위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지식의 체계는 기원과 원인에서 계열의 과정들을 보기보다 원리와 공리에 정합한 체계를 더 중요시 했다. – 후자의 관점은 AI에까지 이른다.

    탐구의 방법이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마치 빛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발산하듯이, “빛들 세기(18세기)”를 지나면서 여러 갈래로 등장한다. 그 갈래들이 각각의 체계 안에서 한정된 방식으로 정합성을 지니기 위한 노력을 할 때, 통일성과 완전성이 먼저라는 정합적 체계를 지닌 이들은 한계안의 가설들 사이의 불일치를 비판하면서, 체계정합성이 먼저이고 전체이며, 그 전체의 부분으로서 개별학문들이 성립하고 또는 통일성에 속하는 종속체계를 갖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철학사에서는 아테네에서 융성할 때이래로, 이오이나학파와 엘레아학파 사이의 불협화음은 죽 이어져왔다. 이런 사유과정 안에서 우주론 또는 우주발생론, 공간 중심과 지속 중심, 정지에서 또는 운동에서 등에 대한 담론들이 전개되었지만, 사유의 대상으로서 개념과 관념을 우선시하는 경우에 속하는 우주론과 공간론이 철학적 사고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통일성과 완전성 아래 체계의 정합성이 탐구 방법으로써 자연의 안으로 그리고 생명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생명과 삶에 대한 문제들은 전혀 다른 양상들을 보여주기 시작하였고, 이런 의미에서 자연의 조직학으로서 자연조직학(physis + logos, 생리학), 삶의 터전에서 사회조직학(socio + logos, 사회학)이라는 다른 탐구방식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영혼조직학으로 영혼학/심리학(psyche + logos)에서 인간의 의식은 우주론으로 다루기보다 우주 발생론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기억과 유전을 벩송이 제기하였다.

   인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자율성과 자발성에서 또는 지구와 우주의 움직임에서 생겨나온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오만과 독단은 이 자연에서 기원과 원인을 탐구하기보다, 생활의 편리와 제도의 습관 속에서 원리와 공리가 있고 법칙에 맞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이들이 더 많다. 탐구의 방향을 달리하는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사적인 탐욕만이 아니라, 체제 속에서 패거리들의 세뇌교육에도 있다. 그래서 탐구의 역량을 세우는 철학 교육은, AI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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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사에서 시대적 구별

   인간이 살아가면서 고통과 비참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구석기 수십만년 동안에 돌에 의한 도구의 제작을 서서히 발전시켰고, 그리고 구리와 청동을 거쳐서 철기로 도구를 제작하면서 자연에 대한 어떤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이 자신감에서 자연 안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하는 제도(나중에는 체제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도구 제작에서 동일한 물건들 동일하게 반복하여 만들 수 있는 방법, 게다가 주물에서 거푸집을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양식을 바꾸어 놓았다. 삶의 양식의 전승만큼이나 입말소통(소리 교환이든 상업이든)과 문자화는 과거의 전승을 슬기롭게 이어갔다. 이로서 인간이 세계에 대한 탐색에서 탐구하는 길로서 부분적이지만 의식 체계라는 것을 만들고 문자로 이어갔을 것이다.

   탐구에서 대표적으로 우주론과 우주발생론이 구별을 느끼기 시작하기 이전에, 인류는 자연과 투쟁 또는 다른 동물과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 먼저였을 것이다. 이런 시대를 자연의 시대라고 해서 행복했던 공동체라고 말하는 역사가들은 이제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들을 안고 사는 시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한 과제를 풀어온 것은 인간의 노력 덕분이다.

    알려진 대로 원시 공동체, 고대 노예제, 중세 장원제, 근대 산업화, 현대 국가체제라는 일반적 개념화 도식은 체제의 성립을 중심으로 나열한 것이리라. 맑스주의자가 말하는 농노제에서 산업화 자본가시대,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을 제시한 것도 역사의 변천을 생산도구와 그 소유에 방식 맞게 설명하려는 한 도식일 것이다.

   철학사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화에서 벗어나 자연의 이법을 탐구하는 시대, 신의 교리 아래 통일성의 시대, 그리고 인간의 자의식의 발현으로 이법의 탐구시대, 그리고 “빛들 세기”를 거쳐서, 19세기 개별학문들의 발달과 체제로서 사회와 국가에 담론이 있었고, 생산력을 소유한 자본가들의 국가가 되면서 식민지 개척에서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서, 금융이 지배하는 제국의 시대였다. 그 제국이 전지구를 지배하려고 새로운 도구 인 정보기술과 인공지능을 발달을 추구하고 있다. – 도구/무기의 양면성만큼이나 인간의 욕망/탐욕이 내속해 있다.

   그럼에도 자연이 실체로서 인정되었고, 자연에 자치성과 자율성을 인정하였던 18세기에 인간의 의식의 다양한 발현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한계로서 겨우 물리학이 개별학문의 지위를 얻고, 사회의 조직화에서 인간의 역할이 이미 전제된 원리와 체제가 먼저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빛들세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발성을 가지고 계몽되었다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 자연에 대해 책임을 통감할 때이다.

   시대의 구별로서 연대순의 세기의 구분이 발전과정의 변역의 단계를 표시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정을 인식하는 데 쉬운 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철학사를 보는 입장들은 거의 정해져 있지만 약간의 차이들을 갖는다. 서양에서 철학사적 관점을 갖는 것은 12세기에 평결론자들이 등장하면서, 과거를 비추어보는 통감(通鑑)의 관점, 거울에 ‘비추어 보다’는 사변(la spéculation)이 등장하였다. 꽁트는 사변의 역사를 간단하게 중세까지의 종교의 시대, 근대 사유의 발전을 형이상학의 시대, 그리고 대혁명 이후에 삶의 터전에 대한 실증의 시대라고 한다. 어쩌면 꽁트는 인간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시대를 거쳐서, 학문의 대상으로서 사물을 다루는 방식으로 전향했다가, 새로운 조직화의 사회에서 사건들의 연관들을 다루는 시대를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다루는 앵글로색슨의 진리론을 우선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치 러셀의 철학사처럼, 그들은 진위 구별을 잘 다루려는 것이 철학사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은 원리와 공리가 지식의 과제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일 것이다. 기원과 원인에 대한 탐구와 교육이 필요하다. 벩송이 말하듯이 삶이 먼저이고 사색하는 것은 다음이다. 그럼에도 의식의 변화는 인류의 변역(變易)과정에서 죽 이어져 왔다. 벩송은 그리스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유를 시작한 이래 하늘(즉 상층)이 먼저였다는 것이다. 이 상층이 신이든, 영혼이든, 또는 하늘의 운행이든, 움직이면서도 동일성을 유지하고, 인간 삶에 비해 영원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탐색하고 탐구하는 길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상층의 이해에서 또는 해석에서부터 지구의 표면을 이해하는 방식이 고대인들의 사유방식이라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해와 달, 그리고 수많은 별들에서 12성좌의 동일한 자리로 되돌아옴의 운동이 먼저였다. 그 상층의 운동이 지구상에도 동시성으로 이루어지고, 각각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갈릴레이에 의해서, 벩송이 보기에, 상층에서 표면으로 내려왔다고 하다. 그리고 자연학 또는 물리학의 발전이 자연조직학으로 발전하면서, 19세기에 자연의 내부로 그리고 사물의 내부로 지식체계를 만들어갔다는 것이다. 상층(외부)에서 표면으로, 표면에서 심층(내부)으로 이행이라는 것이다

   시대구분의 방법들과 달리 의식 활동의 변화를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벩송이 이런 관점을 제시하고(1907) 난 뒤, 1920년대에 정신분석학은 초자아, 자아, 이드라는 3원성을 구별하였다. 그런데 들뢰즈가 좀더 심도 있게 구별하면서, 상층에서 표면으로 사고가 있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사유가 있으며, 양편이 만나는 표면에서 이중적 시뮬라크르들(모방체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상층, 표면의 이중성, 심층의 구도는 우선 보기에 존재론적이지 자연론적이 아니다. 그런데 자연론 또는 우주발생론에서 보면, 의식은 여전히 심층에서 소용돌이치면서 생성과 발현을 실행하고 있고 표면에서 여러 갈래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모방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발생에서 표면의 모방체들은 과거의 기억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만들 것인가? 기억의 공감과 자연과 공명을 신의 외적 영향으로 착각하는 쪽이 있다. 이들이 상징계라는 힘을 지닌 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변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 시대의 변화인 변역(變易)이 행진하면서 미래를 잠식하고 있다. 이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나온 과정의 자연과 인간의 지층과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상참여할 수 있다. 이 예상참여에서 지구와 인간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방식을 찾는 것이 인류의 과제일 것이다. 이 방법의 탐구의 도구의 발달에서 주어지기보다, 영혼과 인성의 정립에서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철학은 여전히 소중하다. 자연 속에 인간, 그 인간이라는 도구가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59N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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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누리 소통의 시대 인민은 자연의 산물임을 안다. 자연은 스스로 분출하고 발산하는 자발성을 지니고 있고, 인간은 그 자발성의 일부에 참여하고(또는 플라톤의 용어로 나누어가지고) 살아간다. 자연의 발현에, 요즘 언어로 생태계의 변역(變易)에 책임을 지는 것도 인간이다. 이오니아학파 이래로 자연의 기원과 원인에 대한 탐구에서 아테네에서 퀴니코스-스토아가 세계(코스모스)의 영혼에 합일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화두를 제시했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탐구가 자의식의 발현을 거쳐서 자연을 책임지는 자세에 대해 자각하는 것이 19세기 후반의 영혼(심리)학이었고, 그 영혼학을 삼원성 또는 3원의 중첩조합으로서 8가지 사실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 프로이트-라깡주의자들이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로 해석하였지만, 러셀은 이원성의 벤다이아그램으로부터 배경[비존재]이 따로 있음을 알았고, 확장하여 숙고해보면 3원성, 4원성, 5원성으로 행렬로서 설명해보아도 무(여집합)와 같은 비존재가 파라독사의 원인처럼 생긴다. 항상 순열에서는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경우의 수 이외에 보이지 않지(invisible)만 없다고 할 수 없는 여백(공집합 φ)이 있다. 이 공집합도 수(경우)들 중의 하나다 라고 해야 파라독사에 대한 해명이 된다. 없는 것은 없다. 빈자리는 있는 것이다.

   이로서 서양은 다시 동양의 미학에서 그림 속에 붓이 닿지 않는 여백의 미라고 하기도 하고, 불교의 색즉시공의 공이라고도 한다. 이 공집합과 같은 없는 것 같으면서 있었고 있어왔고 현재도 있는 것이 백성, 대중, 인민이다. 이 인민이 21세기 누리소통의 시대에 표면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 인민의 함성, 인민의 이미지(광장이든 영상이든), 인민의 응원봉이 표출과 발산을 드러냈다. 바디우가 존재의 함성이라고 하였지만, 존재가 아니라 현존, 들뢰즈에서는 심층의 함성, 기억의 함성, 인민의 함성이다. – 이번에 검찰개혁에 대해, 유시민과 김어준이 행한 것은 민주당 안에서 당원의 함성의 발현인 셈이다. –

자연과 함께 공명하며 인간이 서로 공감하는 시대를 여는 것은, 트럼프의 명령이 아니라 인민 열망일 것이다. 자연의 발현과 더불어 자연을 책임질 사유가 도래하였다. 이런 국면 또는 광경 중의 하나로서, 들뢰즈가 표현하는 얼굴의 등장이 어쩌면 춘분 다음날 광화문 광장에서, 방탄소년단(BTS)과 공감하며, 입말의 목소리, 얼굴과 몸짓을 드러내는 이미지가 빛처럼 널리 퍼져 홍익인간을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59NKJ) (59NLG) (59NKJ) (8:10, 59NLA) (8:41 59NLA)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