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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하)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연세대)

 

『출구』의 후반부에서 식수는 그리스 비극, 독일 근대 문학 작품 그리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통해 이 작품들을 여성적 글쓰기와 연관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우선 아이스퀼로스의 그리스 비극 속에서 식수가 이 작품들의 인물들을 어떻게 새롭게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엥겔스는 『가족, 사회, 국가의 기원』에서 모권제 중심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그렸다. 이른바 모권의 세계사적 패배다. 이를 식수는 그리스 비극의 주요 이야기를 통해서 입증 가능함을 보인다. 그러나 식수의 관점이 새로운 것은 그리스 신화, 비극 등에서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이들의 긍정적인 역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 5 : 코에포로이>│https://i.ytimg.com/vi/KJwputLOd8k/maxresdefault.jpg

 

식수는 그리스 비극 특히 아이스퀼로스의 『코에포로이』에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 등의 장면을, 클리템네스트라, 오레스테스, 엘렉트라의 인물을 통해 그린다. 서양 역사에서 부친 살해는 많이 주목되었지만, ‘모친 살해’는 잘 부각되지 않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로 결정적인 모권제 종식의 주요 인물이 되며, 식수는 이 사건을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장면으로 그린다.

트로이전쟁의 승리를 위해 남편 아가멤논이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여신들의 제물로 바치자 이에 분노한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래서 클리템네스트라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건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클리템네스트라가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계획을 미리 안 딸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를 피신시킨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를 복수하기 위해 살해한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이제 남성 중심적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모권제는 황혼을 맞이하게 되며 모권의 광채는 흩어진다.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로 옛날 모권제하에서 모계에 따라 이어지던 혈통의 방향을 바꾸는 피가 쏟아진다. 오레스테스는 가장 죄악인 행동 즉 ‘모친 살해’를 하였다. 이 모친 살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피와 말 사이의 투쟁에서 말(로고스, 남성 상징)과 의지로 하는 약속은 피(여성)의 끈보다 더 강하다고 아폴론은 주장한다. 이럼으로써 어머니에게 연결된 피의 끈은 느슨해지고 말에 연결된 끈은 팽팽해진다. 이후 육체와 정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설립되어, 이성과 남성을 대변하는 말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식수는 모친을 살해한 오레스테스를 전형적인 남성적 인물로만 그리진 않는다. 오레스테스는 남성적, 여성적이 아닌 중성적인 인물로 반은 능동적이며 반은 수동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들의 위대한 통치의 정지를 각인시키고 부권제로의 이행을 앞당긴, 그래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새긴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리스 신화 속에서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은 아가멤논도 아폴론도 오레스테스도 아닌 ‘여성들’이다. 식수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자매인 헬레네를 남성의 법의 지배를 받은 이 대지 위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위대한 여인으로 그린다. 그녀는 변질되지 않은 자, 얼굴 하나로 테세우스를 은퇴시킨 여자, 납치당하지만 영원히 승화된 여자, 매혹적인 인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는 세기를 통해 그 이름 속에 격리된 여자로 국한해 묘사되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조하여, 딸이 아버지에 대한 편향을 지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하는 여아의 복잡한 심리를 그린 상황을 말한다. 이런 엘렉트라를 식수는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리지 않고, 이름 그대로 자석(electronic)처럼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역할로 그린다. 특히 엘렉트라의 혀를 강조하는데, 이는 여성의 무기인 수다를 혀로 상징하는 것이다. 모친 살해를 통해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오레스테스의 혀에서 나온 말과 엘렉트라의 혀에서 나온 말은 다르다. 엘렉트라는 모권제의 쇠락함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엘렉트라는 여자 아닌-여자, 동시에 너무-여자, 모든 면에서 논리의 과잉으로 인한 미친 이성을 가진 여자이다. 즉 이성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뒤죽박죽의 존재가 된다. 오레스테스와 마찬가지로 엘렉트라도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가는 이행기의 과도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인 남자 형제의 명령이 흐름-전기-엘렉트라성을 끊음으로써, 엘렉트라는 막대한 무기력으로 들어가고, 프로이트가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위대한 남자가 지닌 ‘정신성’ 때문에 인류는 비로소 ‘진보’와 ‘문명’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식수는 엘렉트라의 혀, 여성적 엘렉트라 등에서 엘렉트라의 역할만 어느 정도 부각하고 있을 뿐인데, 아쉬운 것은 클리템네스트라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지 못한 점이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적 주인공의 역할, 즉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고 그 결과 자신의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깨달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역할인데, 이 역할에는 클리템네스트라가 적격이다. 그녀가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남성의 법칙의 세계를 어겼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지만, 그 벌을 받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 클리템네스트라는 모권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 상황을 그려낸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진 6 : 펜테질리아>│https://media.s-bol.com/mZwrOqQppBp3/526×840.jpg

 

두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독일 근대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클라이스트(H. W. von Kleist, 1777~1811)가 쓴 『펜테질리아』이다. 이에 대한 식수의 해석 역시 통념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전쟁 때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 의해 사망하고 이 때 아마존족의 여왕인 펜테질리아가 등장해 이 전쟁에 참여하여 그리스 측의 아킬레우스와 만나게 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연인 관계가 형성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식수가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으로 파악한 주제는 ‘사랑’이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에게서 태어난 연인은 모두 한결같다고 평가하면서 심지어는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다’라는 기묘하고 과감한 주장을 한다. 호메로스가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부정적으로 그렸다면, 클라이스트는 이 두 인물을 굉장히 긍정적이고 호감있게 그린다. 그래서 클라이스트가 자신의 정체성을 펜테질리아로 파악한 것은 자연스럽다.

펜테질리아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하면서 아킬레우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후, 그녀의 존재는 새롭게 열리게 된다. 통상적으로 트로이전쟁은 처음에는 전형적인 남성적 전쟁으로 그려지며 힘들의 충돌이 보인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여성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힘 대신에 평화가 중요해지는 국면에 들어선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리아』를 통해 아킬레우스를 다른 남자들과 다른 예외적 존재로, 사랑에 포획된 자로 해석한다. 펜테질리아는 아마존의 여왕으로 이 여성들이 취하는 행동 양식은 남성의 법, 전쟁과는 다르다. 펜테질리아는 여성적인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펜테질리아가 거둔 이 승리는 남성적 승리의 의미와 다르다. “남성은 파괴하기 위해 지배한다. 그러나 여성은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지배한다. 여성은 지배공간을 파괴하기 위해 지배자를 지배한다.”(『출구』, 167-168쪽) 이 대목이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지배의 의미가 남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식수는 펜테질리아 속에서 광기를 본다. 광기 속에서 펜테질리아는 사랑의 끝을 향해 도약한다. 결국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 작품 속에서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동일하게 보며, 심지어 클라이스트, 펜테질리아, 아킬레우스 다 동일한 인물로 보고 동일시하게 된다고 식수는 해석한다. 그래서 펜테질리아가 아킬레우스를 삼키고, 자기 체화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클라이스트 역시 펜테질리아가 되어 죽는다. 죽지 않고서는 펜테질리아가 될 수 없기에 그녀는 죽고 클라이스트도 역시 죽는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식수가 부각하고자 하는 것은 트로이전쟁의 힘의 논리 대신에 평화와 사랑이다.

 

세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플루타르크가 쓴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로마 시대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이다. 역사에는 실제로 사랑의 승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안토니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명장군의 탁월한 자질과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지내다 생을 낭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식수는 안토니우스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영웅주의적 시각을 버려 그의 사랑꾼의 면모를 보여주며 제국의 시선을 버린 인물로 새롭게 그린다.

식수가 보기에 사랑이야말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사람의 공동 주제이자 존재 이유다.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한다. 통상 클레오파트라를 탁월한 미모를 지닌 인물로 그려 왔다. 그러나 식수는 클레오파트라를 미모보다는 대화술이 탁월한 존재로 평가한다. 그녀는 10개의 언어를 모두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욕망, 소비, 풍요의 인물로 그린다. 반면에 관대함의 영역에 있어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한 인물로 해석한다. 이런 부분이 식수의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존 평가와 다른 부분이다. 대체로 안토니우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평가, 즉 용감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인 평가가 있는데, 식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식수의 시각이 반드시 여성주의적 시각이라고만 볼 수 없지만, 이성 중심적이고 업적 위주의, 제국 위주의 남성 중심적 시각에 비하면, 안토니우스에 대한 다른 평가인 셈이다.

또한,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전통적인 역사적 평가와 다르게 새롭게 해석한다. 식수가 보기에 클레오파트라는 고고하고 자유로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그녀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더 위대한 여자이다. 삶을 만들고 사랑하고 삶에 몰두하는 무한한 지성을 지닌 여성이자 예술이 된 여성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식수는 극적인 묘사와 평가를 한다. 이 마지막 죽음에서 두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왕국들에서 멀리, 수많은 카이사르들에게서 멀리, 싸움판에서 멀리, 페니스와 검의 선망으로부터 멀리, 이 세상의 수많은 ‘재산’에서부터 멀리, 번드르르한 겉치레와 자존심에서부터 멀리 그들은 서로에게 조율된 채 아직도 살아 있다.”(『출구』, 199쪽) 이처럼 식수는 문학 속에 비추어진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완전히 새롭게 그렸고, 전형적인 남성들의 모습을 새롭게 해석했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방식에 따라 틀에 박힌 인물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진 7 :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https://m.media-amazon.com/images/I/6107cv4IdGL._SL1500_.jpg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가장 영감을 주고 영향을 준 현대 작가는 누구일까? 식수가 특별히 ‘여성적 글쓰기’라는 글이나 책을 쓴 적은 없지만, 여성적 글쓰기의 정신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식수가 쓴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1993년 출간)에는 그녀의 글쓰기의 성격이 암암리에 들어가 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사다리’와 ‘세 칸’이다. 사다리는 글쓰기를 은유하며, 가로로 연결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식수가 말하는 세 칸은 글쓰기를 배우고 익히는 세 종류의 학교, 즉 망자의 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이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작가들은 리스펙토르, 베른하르트, 츠베타예바, 바흐만, 카프카 등이다.

맨 처음 언급되는 망자(죽은 자)의 학교에서는 죽은 자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내려가는 자들’, 가장 낮은 것들과 가장 깊은 것들을 찾아가는 탐험가이다. 망자의 학교는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한 죽음의 길로 들어설 필요성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식수가 보기에 글쓰기는 원초적인 그림,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그림을 복원하고 발굴하고 다시 찾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글쓰기는 죽는 법을 배우는 것,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망자들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두 번째 꿈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꿈과 글쓰기 속에서 우리 몸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몸을 발견하기 위해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에 착수해야 한다. 꿈의 학교에 가려면 침대부터 시작하여 무언가의 위치가 변해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의 정체이다. 앞에서 언급한 츠베타예바, 카프카, 리스펙토르, 주네, 바흐만은 모두 꿈꾸는 사람들이다. 또한, 식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은 깨어있는 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과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낮 속에 숨겨진 밤을 글자 그대로 재발견해야 하는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러한 꿈의 학교는 『꿈의 해석』의 대가인 프로이트의 방점과는 다르다. 프로이트에게는 꿈의 번득임이 더는 없다고 식수는 비판한다. 우리는 꿈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법을, 꿈을 파괴하는 모든 내적 외적 악마들을 불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꿈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 학교인 뿌리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식수가 말하는 뿌리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근본, 계통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경계 건너기 혹은 경계 넘기이다. 즉 뿌리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게, 근본이 되는 정체성의 구획이 아닌, ‘경계 넘기’이다. 식수는 리스펙토르를 분석하면서 뿌리의 뿌리 없음을 폭로한다. 글쓰기의 사다리를 가로지르는 뿌리는 분리임과 동시에 통로이고, 단절임과 동시에 연속을 보여준다.

<사진 8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https://www.que-leer.com/wp-content/uploads/2020/12/claricelispector_fotoarquivodefamilia2_0.jpg

 

이 가운데에서 특히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작가는 브라질 현대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이다. 리스펙토르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는 작가인데, 그녀는 식수에 앞서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현실 속에서 여성의 갈등의 문제를 보여주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시간』(1989)에서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본다. 리스펙토르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거부하고 낯선 감각과 직관을 통해 글쓰기를 한 것을 식수는 기존의 언어를 해체하고 재탄생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게다가 리스펙토르가 여성 억압을 해방하고자 하고 기존의 남성 중심주의적 언어체계를 뒤흔든다는 면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일찌감치 시도했다고 식수는 보았다. 물론 리스펙토르가 페미니스트이거나 여성 이론에 기대어 작품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현실 속에서 문제화되지 않았던 여성의 내면세계 등을 난해하고 불가해한 글쓰기 방식으로 써 내려갔을 뿐이다. 1980년대 이후에 프랑스 페미니즘에서 여성적 글쓰기가 일어났을 때, 특히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로 받아들였으며, 그녀로부터 영감과 영향을 받았음을 여러 곳에서, 특히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유사 이래 남성 언어, 이성 언어만 있었던 근대시대까지, 남성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발언하고 주장해 왔다.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의 언어를 빌어 몸에 맞지 않은 채, 자기 생각을 말하다가 말문이 막혀 침묵하거나, 사회의 뭇 남성, 명예 여성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여성 언어를 찾고자 하는 시도, 여성적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시도는 페미니즘 3세대부터 본격적으로 있었다. 물론 현재 여성들이 여성의 언어를 완전히 찾아 자기 생각을 완벽하게 길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여성적 글쓰기가 여성의 정체성을 다 담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한계 상황에 봉착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상) “여성은 자기 육신을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난공불락의 언어를 창안해 내야 한다.”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여성은 자기 육신을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난공불락의 언어를 창안해 내야 한다.”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연세대)

 

<사진 1> : 엘렌 식수|https://www.thefamouspeople.com/profiles/images/hlne-cixous-1.png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1937~ )는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함께 제3세대 페미니즘을 이끈 여러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신(新)프랑스 페미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헤겔, 프로이트, 라캉 등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라캉에게는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플라톤 이래 서양 전통 형이상학, 즉 남성 이성중심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 왔고, 나아가 이를 전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이 썼던 주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가운데 공통적으로 꼽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주제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가 될 것이다. 특히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의 선두로 평가될 수 있으며, 이 글에서도 이를 주목할 것이다.

<사진 2> : 『메두사의 웃음/출구』 한글본|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57495&srsltid=AfmBOopiOG8q9cPl24ee6udTp7GYMs0HWsNys-69QJHN5yqTUs-lfZC-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1975)과 『출구』(1975)(『메두사의 웃음/출구』, 박혜영 옮김, 동문선, 2004, 이하 인용에서는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를 분리해서 쪽수 표기)는 그녀의 다양한 저작들 가운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식수의 저작 목록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 그녀는 특별히 철학자라고만 불리지 않고, 작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로 더 주목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저작 목록에는 적지 않은 소설들과 연극 대본들이 있다. 페미니스트로 평가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저작인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 등은 철학 저작이기보다는 에세이로 분류된다.

식수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자전적인 기록이 있다. 이는 『출구』의 앞부분의 ‘타자 살해’의 부분으로 식수가 태어난 배경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본인이 겪었던 성장 배경을 잘 적고 있는데 꽤 난해하다. ‘여성의 글쓰기에 다다름’ 바로 뒤에 이 부분을 식수가 배치해 놓았는데, 식수 자신이 왜 ‘여성적 글쓰기’에 다다르게 되었는지가 자신의 탄생 배경, 기원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식수의 국적은 프랑스이며 유대인으로 알제리의 옛 수도인 오랑에서 1937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유대인이자 내과의사로 식수가 어렸을 때 죽었고, 어머니는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남편이 죽은 후 산파(간호사)가 되었으며, 알제리에서 다른 프랑스 의사들이 마지막에 추방당했을 때 알제리를 빠져 나왔다. 식수는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령인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다양한 인종 차별, 소수자 차별을 경험했다. 이때의 경험을 『출구』의 ‘타자 살해’에서 상세히 적고 있다. 그녀는 18세 이후에 결혼(10년 후 이혼)과 더불어 프랑스로 건너가서 영어 교수자격 시험을 보고 『율리시즈』를 쓴 제임스 조이스로 박사 논문을 쓰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식수의 연구 활동에서 철학 연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가늠이 안 되지만, 그 주 무대는 주로 문학, 창작의 영역이었고 발표한 글들도 소설, 비평, 에세이들이 많다.

식수는 어렸을 때 겪었던 다양한 차별들의 경험으로 활발한 현실 참여를 하였다. 특히 미셸 푸코와 1970년대 초반 GIP(Group d’information sur les prisons : 감옥정보그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를 읽어 보면, 곳곳에서 그 당시 겪었던 차별적 경험들이 새로운 글쓰기 문체로 바뀌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진 3> 메두사의 웃음 영어본│https://0701.static.prezi.com/preview/v2/ssgknompkvnhpnbnhboyng4ww76jc3sachvcdoaizecfr3dnitcq_3_0.png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에서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카락 가닥가닥이 뱀의 얼굴인 여성 괴물이다. 메두사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남자들을 돌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가지며, 그만큼 남성들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역사적으로 남성들은 자신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알 수 없는 신비의 대상을 늘 악마화해 왔는데, 중세시대에 똑똑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을 시킨다든지, 잔 다르크를 마녀사냥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면에서 이 마녀사냥의 원조가 메두사인 여성 괴물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식수가 메두사를 택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탁월한 전략이다.

『메두사의 웃음』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글쓰기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메두사의 웃음』, 9쪽) 이 문장에서 우리는 식수의 이 책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왜 이 글을 쓰는가? 여성들 자신이 글을 쓰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다음 말이 더 극적이다. 여성적 글쓰기의 목표와 방법은 ‘여성들이 여성의 육체로부터 격리된 만큼이나 여성이 글쓰기에서 격리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식수의 여성들의 글쓰기의 특이점은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육체를 매개로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해 식수는 과거, 옛것, 낡은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남성적인 옛것에서 벗어나 여성적인 새로운 것을 써야 함을 강조한다. 즉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에서 최소한 두 개의 얼굴과 두 가지 목표 즉 ‘파괴하기와 부숴 버리기’,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기와 투사하기’를 들고 있다. 스스로를 감추고 들여다보지 않았던 여성들을 향해 ‘그대는 왜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식수는 외친다.

전통적으로 글쓰기가 특권층의 남성에 의해 전유되어 왔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글쓰기는 여성에게 너무나 문턱이 높지만, 여성들이 글을 써야 함을, 멀리에서부터, ‘바깥’으로부터 돌아와야 함을 촉구한다. 역사적으로 여성 작가의 숫자는 지극히 미미했으며, 글쓰기는 지금까지 남성적인 경제에 의해 주도적으로 경영되어왔고, 여성의 억압이 재생산되는 장소였다. 그러한 글쓰기의 장소에서 여성은 이제 자신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새롭게 가질 수 있으며, 전복적인 사상의 도약대가 될 수 있는 공간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씀으로써 새로운 반란적인 글쓰기를 창안해 낼 것이다. 그 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여성은 자신에 대해 글을 쓰면서 이제까지 몰수되었던 여성의 육체로 귀향하여, 육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가 이전의 남성들의 글쓰기와 전적으로 차이나는 점은 육체를 텍스트로 하는 글쓰기라는 점이다. 이성의 무기를 가진 남성의 글쓰기에 비해, 남성의 언어를 교란할 여성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의 언어는 자신의 육체에 기반하여 새로운 난공불락의 언어가 된다. 이러한 글쓰기의 행위가 이뤄짐으로써 여성에 의한 말의 장악이 나타나고, 여성 마음대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식수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성 정체성 형성의 고전적인 양성성의 발달을 비판하면서, 남성의 결핍으로 남겨져 온 ‘검은 대륙’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비유를 거부한다. 식수는 여성이 거세되었다는 최악의 진실에 맞서 실제로 여성은 거세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메두사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그리스 신화에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된 “메두사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름다운 존재”(『메두사의 웃음』, 29쪽)로 더군다나 웃고 있다고 식수는 새롭게 그린다. 메두사의 웃음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남성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그런 웃음이 아닐까? 여성은 거세, 혹은 머리 잘림을 두려워하는 남성들의 공포 앞에서 흔쾌히 그 공포를 비웃는다. 그래서 식수는 정신분석적인 울타리 속에 갇히지 말고 그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가로질러 가라고 강하게 제안한다. 이제 여성들은 길들여지지 않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사진 4> la Jeune nee 책│https://images-na.ssl-images-amazon.com/images/S/compressed.photo.goodreads.com/books/1325352365i/1364294.jpg

 

『메두사의 웃음』이 분량이 짧고 간단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면, 『출구』(『출구』는 『새로 태어난 여성』에 수록)는 분량도 많고, 그 내용도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출구』는 엑소더스 즉 탈출을 의미한다. 어디로부터 탈출한다는 말인가? 지옥, 적들, 남성들 세계, 가부장 세계, 억압과 차별, 배제로 점철된 모순투성이의 현실로부터의 탈출이 아닐까 싶다. 『출구』는 억압된 현실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새로운 문인 셈이다. 헤겔 등의 철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스 비극, 문학 작품들과 근대 독일의 작가인 클라이스트 등의 문학 작품도 나온다. 『출구』의 전반부의 핵심 문제의식과 내용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남성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식수는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 속에는 남성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의 유구한 전통의 추적과 그 비판이 담겨 있다. 그 전통과 역사에는 어머니, 여성의 자리가 없다는 것, 여성은 존재하지 않음이 전제된다. 출발점에 전통적인 이분법 도식이 굳건하게 자리한다. “능동성/수동성, 아버지/어머니, 지적인 것/감정적인 것, 로고스/파토스, 남자/여자”(『출구』, 49쪽)처럼 사고는 항상 대립을 통해 움직였다. 계급화된, 이중적 대립, 우월한 것/열등한 것 등으로 말이다. 남성의 특권은 대립성으로 유지되며, 전통적으로 성적 차이의 문제는 능동성/수동성이라는 대립과 짝지워 다뤄지고 철학 속에서 항상 여성은 수동성 쪽으로 정리된다.

만일 이성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의 연대성, 남성들이 세우고 떠받치는 주춧돌이 산산히 부서진다면, 위대한 철학적 체계들, 전반적인 세계 질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이성 중심주의의 계획이 폭로된다면, 모든 역사는 달리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사고 가능하지 않은, 또 다른 사고가 온 사회의 기능을 변모시킬 것이라는 주장 속에 새로운 사고를 모색하고자 하는 식수의 의도가 명확히 보인다. 즉 여성에 의한 새로운 사유 혁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말이다.

남성, 이성 중심주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심지어 타자를 살해해 온 적나라한 현실로 이어진다. 식수는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타자가 되고 경계인이 되는 경험을 겪었음을 토로한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식수는 ‘타자 살해’(『출구』, 64-68쪽)에서 자전적 기록을 적는다. 특히 프랑스 점령 국가인 알제리에서 원주민들이 받는 억압, 탄압 등을 얘기하고 있다. 그들이 겪는 폭력, 타자로서 대접받으면서 타자가 되어 가는 상황, 즉 타자는 다른 곳에 바깥에 존재한다고 식수는 말한다.

출신 자체가 타자의 경험을 안고 있고, 체제 재생산을 강요받지 않는, 어떤 탈출구로 식수는 글쓰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글쓰기의 나라는 신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어떻게 왜 식수가 글쓰기에 전념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식수는 힘과 권력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에서 심취했던 유년 시절의 헛된 꿈에서 벗어나 여성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억압과 남성의 성차별주의에 맞서 자신이 여성으로서 설 자리를 찾은 것이다. 식수는 타자와의 이런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가 ‘글쓰기’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여성의 욕망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공주에 얽힌 동화를 읽고 자랐다. 식수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 동화를 언급한다. 동화 속 잠자는 공주인 여성은 절대적으로 무력하므로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옛날 옛적의 동화들은 여자의 사랑과 운명에 대해 똑같이 기만적이고 잔인한 도식을 반복한다. 각각의 신화와 이야기에 늘 되풀이되는 것은 “우리 국가의 업무 안에 여성의 욕망을 위한 자리는 없다.”(『출구』, 58쪽)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의 욕망 성취를 위험한 것으로 취급해 왔다. 여자는 그림자, 남자의 빛을 위한 밤, 남자의 흰 빛을 위한 검은 빛이다. 남성의 체계, 그 공간에서 여자는 배제된 존재에 불과하다. 여성은 검은 대륙으로 취급받았고 여자들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으며, 자기의 집을 탐험하러 가지도 않았다. 여기서 식수는 여성에 은유된 검은 대륙이 검지도 않고, 탐험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항변하고 있다. 검은 대륙은 아직 탐험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식수가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식수는 프로이트의 거세 이론을 비판한다. 식수는 여성이 거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의 자기 고유의 제국은 하나의 두려움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두려움은 전형적인 남성적 분리의 두려움. 즉 거세 위협의 충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이 세운 자기 고유의 제국이 거세 위협의 충격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에 비해 여성들에게는 그 왕국을 벗어나서 출구로 나가면서 다시 돌아와야 함을 식수는 권고한다. “나가자. 여자들이 멀리서부터, 영원, 바깥, 황무지로부터 돌아온다. 여자들은 어린 시절로부터 돌아온다. 검은 대륙에 비유된 여성들은 아름답다”(『출구』, 68쪽)라고 식수는 주장한다.

프로이트가 설정한 여성적 상황의 ‘숙명성’은 사실 해부학적 ‘결함’의 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비도는 단 하나밖에 없으며, 리비도는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다. 성적 차이는 팔루스적 단계로부터 출발해 새겨진다. 소년, 소녀는 이 단계를 거치는데, 소녀는 일종의 작은 소년으로 취급된다. 두 성 모두에게 최초의 사랑의 대상은 어머니이며, 이성의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은 단지 소년에게 해당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식수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성적 차이는 단순히 해부학에 대한 판타즘(Phantasm)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해부학은 대부분 시각 행위에 근거할 뿐이며. 이는 관음증 환자의 이론과 다르지 않다.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사람들은 질문한다. 그렇다고 이 질문이 여성의 욕망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 속에서 여자의 욕망을 위한 자리는 거의 없다. 여성들은 자기 욕망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도 없게 된다. 역사는 남성 중심주의만을 생산하고 기록했다. 식수가 보기에 이러한 남성 중심주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적이다. 남성 중심주의에서는 남자들도 불가피하게 손해를 본다. 물론 그 손해는 남녀, 다 심각하다. 그래서 식수는 이제 지금이야말로 변화시켜야 할 때이며, 또 다른 역사를 창안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세 번째,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 주체성의 문제이다.

현존하는 남성적 언어 질서 즉 상징계가 아닌, 상상계의 언어는 가능할까? 식수가 시도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일종의 여성적 상상계의 언어인가?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서 여성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것인가?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가 여성 주체성을 찾아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통로임을 보여 주려는 것인가?

식수는 “오늘날 글쓰기는 여성들의 것이다.”(『출구』, 98쪽)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적 글쓰기에는 ‘실천’이 중요하다. 그러나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단지 여성적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가 하는 ‘행위’ 안에서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실천은 결코 이론화되거나 제한되거나 코드화되거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적 글쓰기는 ‘이론’이기도 하다. 여성적 글쓰기는 어느 정도 ‘이론적’이지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의 비이론적, 경험적 측면을 전면에 내세울 것을 권한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보다도 기존의 남성적 글쓰기와 차이가 나는 점은 ‘몸으로 글쓰기’라는 점이다. 이러한 몸으로 글쓰기의 전형을 식수는 어머니 됨에 있다고 본다. 어머니 됨은 자기-영속적이며, ‘남성적인’ 증여의 순환경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한다. 어머니 됨은 우리가 타자에게 ‘주는’ 증여/능력(gift)이다. 식수는 어머니 됨이 아마도 얻어질 수 있는 타자와의 가장 강렬하고 완전한 관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 내부의 경험, 타자를 위한 능력이라는 경험, 타자에 의해 유발되는 부정되지 않는 변화이자 긍정적인 수용성이라는 경험을 갖는다.”(『출구』, 155쪽)라고 말한다. 물론 모든 여성이 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충분한 공감을 얻기는 어렵다.

새로운 주체를 삶으로, 낯섦 속으로 내놓는 것을 사유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일이다. 이런 과정이 ‘낳는’ 글쓰기는 상징계의 엄격함과 영적 공허함으로부터 일보 물러설 수 있는 글쓰기이다. 즉 언어-이전에-오는 것’의 잔향을 듣기 위해 귀 기울이며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발화와 달리 글쓰기는 자신만의 시간에, 자신만의 말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비난하는 시선에 의해 제약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글 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또한 해방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해방은 ‘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몸을 재발견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이제까지 여성은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게 여겨왔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식수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써야만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비-언어적’이고 ‘무의식적인, 본능적 충동들과 감각들에 귀 기울여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몸으로 글쓰기를 통해 여성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며 여성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식수는 몸의 언어로 침입해서 자신을 위해 언어를 전유하는 것, 언어를 소유하고 변형시키는 것이 ‘여성의 제스처’이자 ‘여성 주체성’이 확립되는 징표임을 시사한다.

문화 전통 대 신실재론 [천 하룻밤 이야기]

동지(冬至),

문화 전통 대 신실재론

2025 12 22. 동지(冬至), 소설(小雪)때 갑자기 추웠었고 어제부터 다시 춥기 시작 한다.

 

류종렬(한철연)

 

    동지(冬至)의 글을 쓴지 스물다섯 해, 4반세기가 지나간다철학사에서 흐름을 보려고 하다가인간의 살아온 과정을 보게 되고 그리고 자연의 변화에 대해 관심이 생명과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서양철학을 간단히 표현한 말로서 박홍규 선생님보다 잘 표현한 것을 찾지 못했다서울대 박홍규 교수는 1984년 6월 15일 퇴임강연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냐 공간이냐 둘 뿐이에요플라톤은 둘 다를 놓았고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이론(form theory)을 놓았고베르그송은 시간에서 정리했습니다그 이외는 없어요.” (54)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54.

    벩송(1859-1941)의 저술에서 관통하는 사상이 있다그의 관점에 따르면고중세는 하늘에근대에는 표면에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이제 안에서부터 철학을 해야 한고 한다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철학사는 상층의 철학에서표면의 이중성으로현대에서 심층에서 생성의 다양성을 이야기 해야 한다고 한다벩송은 따로 단행본을 쓰지 않았지만 그의 저작의 순서를 따라가면하늘에서 표면으로그리고 내부로 라는 것을 알ㄹ 수 있다들뢰즈는 벩송의 생성론을 따라서가타리와 함께 천개의 고원(1980)』을 썼다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박홍규(1919-1994)와 들뢰즈(1925-1995)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양쪽에 각각 있으면서비슷한 생각으로 서양 철학사의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하는 서양 철학사는 하늘과 땅의 이중화에 어떤 연대가 있다고 보았다그런데 사유는 하늘의 운행에서 운동하면서도 동일반복을 한다는 점에서 고정성과 영원성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그리고 신화학이 아니라 유일신학과 접하면서 하늘이 우선이고 땅의 사실들은 인생무상(人生無常)처럼 허상으로 보았고상층 사상과 종교의 하늘나라가 지배하는 방식이 고중세 철학사라고 한다인간의 사유가 다시 태어나는 르네상스에서표면인 터전에 사는 인간이 중심이 되었고생각하는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이로서 벩송은 말하기를인간의 생각이 하늘의 원리를 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지상의 표면으로 내려왔다고 한다표면에서 인간의 사유와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이중화 현상에서표면 아래로 또는 사유의 내부로 들어가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한다내부로 파악은 물질에서 원자 안으로 사유에서 심리 또는 기억의 내부로 향하였다고 한다물질의 내부로의식의 내부로 연구가 19세기 후반에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더불어 펼쳐졌다.

    박홍규와 벩송을 중첩하여 보면하늘의 운동이 지상의 운동으로 이전은 지속이 아니라 위치이동과 같은 물체 운동인데물질자체의 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사유는 있어왔다고중에에서는 이런 자체 운동의 과정을 위치이동처럼 설명할 수밖에 없었지만운동의 과정에 대한 반성을 우주발생론이라 부르고위치 이동처럼 설명하는 운동의 조립과 조작에 대한 관심을 우주론이라 부른다이런 관점을 고대와 근대에 연결하면우주론의 뒤에 절대자와 같은 신이 있다고 여기는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이 있다이에 비해 우주의 자기 발생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연에 대한 관점을 자치적이고 자율적이라고 생각했다근대에서이분법이 아니라표면을 대하는 이중화 현상에서 자연(또는 우주)의 배후는 신이 아니라 자연자체일 것이라고 여겼다그러나 고중세의 오랜 관습의 사고는 상층이 우선이듯이자연의 배후에 신의 정신과 같이 하는 인간의 정신이 있다고 여기면서자연에서부터 발생과 변화의 사유가 불합리하다고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칸트가 이야기했다자연의 배후에 신인지 인간인지의 문제를 인간의 역량이 알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그래도 세상 또는 국가를 유지하는 도덕과 천륜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벩송의 표현으로 지상에서 상층으로 다시 올린 철학자가 헤겔인 셈이다벩송은 맑스와 니체를 다루지 않았지만종교의 권위와 국가의 권력이 상층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백성이 또는 인민이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다종교제도든 국가체제이든상층에 대해 자연이 자체적으로 성립하듯이제도와 체제의 상부에 대해 인민이 토대이며 심급의 최종결정권자라는 의미에서 대혁명을 이어받아루소에 이어 맑스도 인민주권인민권력의 등장을 알렸다.

    상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심층으로부터 사유의 확장을 두려워 한 쪽은 제도와 체제의 옹호자들이다이들을 벩송은 네오스콜라주의라고 한다자연에서 실증적 사실들의 자료들지층과 화석은 신의 창조를 허구 또는 망상으로 만들었다상층의 절대성과 보편성은 중세 후기에서 유명론에서 지위를 잃었지만근대에서 이원성에서 정신이 상위라는 주장에 편승하여이야기(우화)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국가의 성립에서 국가의 꼭대기에 앉으려고(왕권과 참주 위에 있었듯이네오스콜라주의로 기울어졌다꽁트의 실증주의와 맑스의 공산사상에 대항하여헤겔이후에 앵글로색슨에서 현실의 이중성에서도 제도와 천륜이 먼저라고 두고 지배방식을 유지하고자하였다고중세에서 이데아와 하늘나라가 실재성이라고 했듯이관념(이데아)의 모방에서 이중화와 현실의 생성에서 이중화 사이에정신과 사유가 상위이며 이에 정합한 것을 진리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실증주의가 뒷받침하였다이런 논리와 사유의 정합성을 위한 현실의 상태에서원리에 맞는 모방을 재현 또는 표상으로 삼아표상 또는 현상이 실재성이라고 하였다이런 실재성을 고중세의 실재성과 달리 표면에서 현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가져다준다고 하면서 신실재론이라 하였다이런 현상의 신실재론과 네오스콜라주의 개념들의 신실재론이 제국주의와 함께 패거리를 맺는 것이 1차대전과 2차대전이라 한다이 전쟁을 누가 일으켰고 누가 배를 불렸는가가 그 해답을 말해준다.

    천지의 이중성에서 언제나 상위를 설정하고 있고그 설정이 진리라고 또는 원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근대성이 정립되는 시기에 관념론자의 신실재론이 있다이들이 주장이 그럴듯하게 보였던 것은심층으로 또는 내부로 들어가는 학문적 방법이 미숙했기 때문이었다지층을 통한 연대가 억년을 넘어가는 실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901년의 마담 뀌리의 방사능에 대한 연구이래로여러 광물에 의한 반감기의 연대측정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근대의 세포와 신체의 생리학적 흐름은 현미경이 발달해야만 가능했고원자의 단위 속에 핵과 전자핵 속에서 양성자와 중성자 등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를 재는 회전의 방식보다 더 깊고 정교한 사이클로트론이 발명되어야 했다철학은 지층의 유물들과 같은 추억들로서 과거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자연에서 생명의 과정 속에서 지속하고 있는 기억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심층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미 다양한 방식들과 방향들에서 다룬다는 것은 대상과 사물의 단일성(통일성속에 이미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다한 생명체든 사실이든 사건처럼 다양체이며 복잡계라는 것이다이 다양체의 발현의 방식을 빛의 발산처럼 온 방향으로 퍼져나가기에한 방향을 다룬다는 것이 개연성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이제 상층의 원리와 통일성으로부터 표면의 현실을 볼 것이 아니라자연의 자기 발생에서 나온 현실의 새로운 생성을 보자는 것이다이런 학문적 방향에서도권세권력권위의 패거리들이 전쟁에 일으키고 지배와 배치를 공고히 하였다여기에는 도구/무기의 생산과 활용이 있었다그 지배가 학문을 일 방향에 맞고 다른 방향은 틀렸다는 도구적이고 실용적 입장에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였다.

    세계는 이분법으로 되어있지 않다그럼에도 사람들은 편리와 실용에 경도되어 당연히 맞고 틀리다는 진위구별의 이원화에 빠져있다산다는 것은 서로의 연관이고 이 연관은 다양하다삶에서는 솔직함과 진실함을 먼저 가늠하고 약간의 손해가 있다하더라도 사람들은 평화와 행복을 위한 방향을 찾으려 한다생성에서 우주발생론과 우주론의 관점의 차이가 있고인식면에서 형이상학의 이중화 현상에 자연배후학과 신()배후학이 있듯이삶의 품성에서 공동체의 공감이 먼저라는 쪽이 있는가 하면이익의 창출에서 부의 축적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현실의 활용에서 상층은 수학의 무한과 같이 상징의 계산논리인데 비해현실의 이중성에서 상징의 지배방식과 달리 심층의 다양한 발현에서 협의(평결)와 협약이 우선한다고 여긴다신실재론은 3패거리의 지배권을 유지하려고표면 상층의 표상과 현상을 실재라고 하는데우주론과 신()형이상학에 예속되어 그 속에서 자유니 민주니 한다이에 비해 실재론은 언제나 내부와 심층이었고그것은 자연의 생성이었다이런 자연이 자치성과 자율성을 갖기 시작한 것이 근대이며벩송 이후에 자연의 자발성을 말하게 된다자연(본성)의 자발성의 실현이 자유인 셈이다.

*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극우파들이 얼마나 설쳐대었던가를 철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 이상하게도 기술정보(IT) 시대가 인공지능을 만나면서도 이런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 관념 우파의 신실재론이 앵글로색슨 계열에서 헤겔주의자들이었고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앵글로색슨철학을 이루고 있다그런데 19세기 후반에 심층의 실재론은 자연 속에서 인간그리고 어느 터전에 사는 인종의 심정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그 담론들은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침잠해 있다가 20세기 중반에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이런 실증주의의 경향은 벩송처럼 삶이 먼저이고사유(반성)은 다음이라 한다산업사회를 지도한다고 여긴 패거리가 두 차례의 대전쟁 이후에도 체제를 유지하였다그리고 터전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속을 이어가고 기억하는 반세기를 보낸 셈이다그럼에도 전쟁과정에서도 심층으로부터 연구는 있어왔다물론 제국주의에 복속되어 겉보기에 무기생산이었지만, 20세기 이후에 다른 세기를 형성할 전파망원경과 전자현미경의 발명이었다이 둘은 1953년을 기점으로기술과 생명에서 두 가지 길을즉 디지털과 DNA의 길을 열었다. 21세기에 문제제기에서 디지털의 인공지능이 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유역량을 외부축적(외장하드또는 크라우드(지식 공유위상)를 만들자고 한다제국은 이런 외적공유위상을 지배하는 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이 크라우드가 현실에서 적용과 활용에서 조립과 조작을 실재성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19세기의 상층의 관념이 현실의 지배에 이용되는 방식과 같이신실재론이란 용어를 끌어다 쓴 것 같다이제는 현실에서 적용과 실행 가능한 현상을 실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그 실재의 현상에서 재현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크라우드 속에서 관념 또는 가상성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요즘 떠도는 앵글로색슨 계열의 논문들과 논의들에서 신실재론은 19세기말 제국주의자들이 진리의 진위를 주장하며 정합성 속에 맞는 것을 신실재론이라 하는 것과 닮았다왜 이런 이야기가 학문의 경향으로 유행하고 있을까크라우드 속은 수학의 상징계 속에서 허수를 다루는 것과 닮았는지 모른다삶의 이야기는 달리 전개될 것이다.

    엉뚱하게 이재명 대통령이 산하기관의 공개점검에서 환빠의 이야기를 하여 화제라 한다문헌으로 하는 학문은 이집트의 고대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5천년 전이라 한다그렇다고 여러 삶의 터전에서 같은 시기에 기록 자료들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심층으로 내부로 삶의 과정을 본다는 것은 지층 속에서 유물과 유적들이다나로서는 심정성을 연구하였던 레비브륄이래로 르화구랑이 인류가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와 신석기의 기호들의 발전으로 보았던 것을 흥미롭게 여겼다그리고 그 후배격인 빠스칼 삐끄가 생리학적으로 인간의 입말이 짐승들의 입말과 다른 구강성을 갖는 시기를 200만년전의 호모 에르가스테르까지 소급하여 전개하는 것도 이야기 거리이다그럼에도 들뢰즈가 인간의 내재성의 발현을 소빙하기가 지나면서기원전 1만년전을 언어의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재배와 가축기르에서그 다음 사냥의 포획에서 말이다그래서 그가 신석기에서 동기(銅器)로 이행에 가장 빨랐던 현 터키지역인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구리의 발견과 도구화를 생각하는 역사 속에서 한 고원으로 설정하는 것도 흥미있다.

    국가 구별이전에 인종이라고 그 이전에 종족이라고 구별하는 것도 서술의 편의를 위한 것이리라인류는 마지막 소빙하기 이래로 터전의 변화에 맞게 이동을 하였을 것이고삶의 이동이 지구상의 위도가 비슷한 곳에서 일어났을 것이고그리고 그 이동은 오랜 시간을 걸렸는데동물의 가축화와 이동수단으로 동물의 사육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동을 훨씬 멀리까지 이루어졌을 것이다그런 이동에서 상호연관은 현재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정보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생산방식과 생산도구의 이동만큼이나 과거의 지식정보도 이동하여 살만한 북반구의 위도 대()를 형성했을 것이다이런 과정에서 먹거리 다툼에서 싸움이 있었을 것이고이런 싸움에서 먹거리와 잠자리를 지키기 위한 군대와 같은 제도를 갖추고 수장도 필요했을 것이다이런 전쟁의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과 터전에 대한 변형으로 집단화 또는 소도시화는 당연했을 것이다이 집단에서 정보의 전승을 위해 삶의 양식의 기호화 입말의 문자화도 이루어졌을 것이다인류학을 연구했던 초기 실증주의자들은지나가는 이야기로지자는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해가 지는 서쪽에 관심이 있었고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현자는 동쪽에 관심이었었다고 한다해가 지는 쪽에 죽음이후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은 동쪽에올 것이라고 것도 착각이지만관심의 차이는 비슷한 위도 대에서 삶의 터전의 양식을 달리 했을 것이라 상상하였다동쪽의 끝에 있는 우리나라현자의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을까이런 말을 했을 때 이미 환빠라는 소리를 들었다그러나 청동기와 같은 시기에 고인돌의 유적이 세계의 40% 이상이 우리나라에그리고 많은 수가 서유럽에 있다는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양의 자의식의 발현은 데카르트시대인 16-17세기프랑스어로 문헌을 남기기 지작한 몽테뉴부터라고 한다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일찌기 언어가 아니라 입말이 문자화하였다는 것이다입말의 문자화를 갖는 15세기의 훈민정음이었다삶의 양식을 터전의 방식에 맞게 표현하는 것은 중요했을 것이로, 1우리나라의 상층은 한자로 표기해야한다고 여겼다상층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서로 같은 문화를 형성했다고 여겼지만백성은 달리 살았다프랑스에서 대혁명에서 상층과 다른 제3신분이 등장한 것은프랑스어 입말의 문자화가 이루어진지 200여년이 지나서였다우리나라는 상층의 지배가 16세기말 17세기 초 왜와 청나라 전쟁에서 무너졌음에도백성이 일어서지 못했다우리 입말의 문자화가 없었다프랑스에서 18세기 말 혁명은 일부 신부와 지식인들이 스스로 제3신분으로 자처하면서 이루어졌다우리나라는 16세기말 17세기 초 두 전쟁 후 피폐해진 나라에서 200여년을 지나면서도 상층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다시 일본제국주의에 먹힘으로써그때서야 지식인이 각성하였다이로서 만주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선구자들이 민중 또는 인민을 토대로 한 공화국을 생각하였다고 한다여기에 환빠가 있다이들은 남녘의 지배층들이 일본과 미국의 지식에 예속되어 앵글로색슨 학문을 수용과 달랐다만주의 선구자는 한자가 아니라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서울을 중심으로 일본 수용자들은 백성의 발현보다일본 지식에 함몰되었다지금에 미국 지식이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이다만주로 간 선각자들이 공화정을 바라면서도 한문 투로 글을 남겼는데훈민정음이래로 우리 입말을 널리 이롭게 하지 못한 안타까움도 있지만그나마도 망국 속에서 한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그런데 이들 선각자들이 중국과도 일본과도 달리 생각하는 사유들을 남긴 전승이 해방 후에 단절되었다일제의 잔재와 앵글로색슨 학문이 성행하면서선진 유가적 전통에서 나온 공화정이라는 의미는 비판을 받고미국 제국을 수용하면서 인성자유주의가 아닌 시장자유주의인도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서구 사상인 것처럼 지배하였다이런 경향은요즘도 철학계의 90%정도가 앵글로색슨이라는 것과 같은 경향이다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19세기말 신실재론을 내재하고 있으면서, 21세기 크라우드 정보시대에도 신실재론의 유행을 따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러 차례 이야기 했지만우리가 자율성과 자발성을 갖고서 입말을 하고 있으면서 문자화와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이 시대에도 9대 1정도의 사유 방식의 차이가 있는데이에 비해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자연배후학 대 신()배후학심층 대 상층의 비율이 51 대 49로 변환의 시대가 되었다삶과 터전입말과 문자화가 자율성과 자발성을 통해 인민이 토대로서 기본심급과 인민의 평결과 계약(제헌헌법)으로서 최종심급의 공화정을 이룰 때이다이런 시대의 변역(變易)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문제제기를 하였다고 본다. AI의 저장고인 크라우드를 이용하는 입말의 소통은벩송의 말대로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지만속도와 강도의 노력은 우리 스스로 크라우드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세계 문화의 새로운 변역(變易)은 동쪽의 문화에서 있을 것 같다.

(5:02, 58WME) (5:22, 58WMC)

     덧우리나라에 오랜 전통으로 선도(仙道)가 있었다고 한다왕권국가가 생기면서 한문문화권이 들어오고중국을 본뜬 체제가 성립하면서 유학(儒學)과 도가(道家)가 들어왔다고 하며선가는 도가를 닮았지만 선가는 민중신앙으로 남아있다고 한다그리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유학과 더불어 천년을 이어왔다조선 시대에는 유학을 체제의 정통을 삼으로면서 스님은 천민화되어 가다가 선도와 결합하는 것이 조선 말기라고 한다조선 시대에서 상부세력의 다툼은 조광조이래로 사림파와 사장파로 갈라졌고제도 밀려나기 시작한 사림파인 남인은 실학(실증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백성이 근본으로 여겼다고 한다임란과 호란이후에 노론의 지배는 유교를 체제유지에 이용하였다가일본 제국주의에 병탄되었다이 사림파의 후예들인 남인들이 공화정을 선호하였다그런데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한계를 보았고일부는 인민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입말을 통한 자주성을 찾으려했다고 한다이런 만주의 운동에서 고대의 상고사에 관심과 민족주의의 맥을 이어가고자 하여 대종교와 연계되기도 하였으며이런 사상이 환빠와 연결되었던 것 같다일본과 미국을 통한 앵글로색슨의 신스콜라주의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세기 이상을 지배한 경향이었다유럽이 보기에 우리나와 중국에서체제의 제도와 사상에서유일신 없는 제도와 체제를 만들었다고 한다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천지건곤음양은 교대라고 보았듯이또한 색()과 공()이 따로 있지 않듯이상층과 심층 사이에 대립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순환과 조화에서 공화를 보았을 같고터전에서는 이제 다양체로서 입말을 쓰는 인민이 평결과 협약의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공화제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6:01, 58WME)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6-비례 형태의 발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6-비례 형태의 발전

1)

앞에서 헤겔은 정량이 비례로 발전하는 과정에 관해 설명했다. 그 과정은 하나의 추상적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를 맺어 구체적인 복합적 정량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외연량, 내포량, 그리고 양적 비례[비례량]의 개념이다.

외연량은 추상적 고립적 양이다. 내포량 즉 정도[Grad]는 개별 양이지만, 이미 타자와 비교해서 규정되는 양이다. 마침내 양적 비례에 이르러, 두 정량이 관계하면서 새로운 구체적 복합적 양이 나온다. 외연량의 대표적 예가 길이, 무게다. 내포량의 대표적 예는 경도나 강도가 될 것이다. 양적 비례 또는 비례량의 대표적 예는 비중이다. 알다시피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헤겔은 외연량에서 비례량에 이르는 과정은 양적 부정성 개념이 매개된다고 한다. 하나의 외연량은 자기를 부정하면서 타자 즉 다른 정량이 되는 데(일차적 부정) 이 타자로부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이차적 부정) 비례량이 된다. 이 이중 부정의 과정은 개념의 자기 전개 과정이지만, 이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경험의 발전이다. 우리는 경험 속에서 처음에는 추상적 양을 발견하지만, 좀 더 경험이 발전하면 다른 양의 비례 관계를 통해 이루어져 있는 구체적 복합적 정량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 과정에서 수 개념이 전개되는 것으로 본다. 수는 정량을 대표[또는 대리]하는 것 즉 상징, 그 기호다. 이런 수는 더하기에서 나누기로 발전하는 데, 이런 수의 발전은 수 자체가 발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량의 발전과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더하기가 외연량을 표현한다면, 분수는 내포량을 표현한다.

2)

이제 헤겔은 비례 자체의 발전을 다룬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비례를 다루면서, 양의 관계로서 비례가 발전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비례가 분수로 표현된다고 할 때, 이 분수는 통약 가능한 정수비에서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 비로 발전한다고 했다.

헤겔은 무리수 비를 다루면서 주석에서 미분 개념의 정당화라는 거의 100쪽에 달하는 논의를 전개했다. 이 무리수 비가 미분 개념의 핵심이며(그 반대인 제곱비가 적분을 이룬다), 이 무리수 비를 통해 헤겔은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 길이는 면으로 발전한다.

이런 발전은 한편으로 본다면, 동일한 정량의 한계에 머무른다. 예를 들어 선이 면이 되고, 속도가 가속도가 된다 할 때, 면은 길이의 제곱이다. 제곱이란 곧 같은 것의 반복이니,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자기 반복을 통해 이미 다른 정량이 된다. 즉 길이와 면은 다른 정량이다.

이처럼 어떤 정량이 자기를 반복하는 것을 통해 다른 정량으로 발전하는 것이 곧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 비례[앞으로 무리수 비라 하자]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런 무리수 비는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다른 것이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 그다음 단계에서 출현하는 비례 즉 다른 정량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비례를 논리적으로 예고하며 그것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비례가 곧 두 다른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비례 즉 비중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비례는 역시 고유한 하나의 정량이다. 예를 들어 비중은 길이나 무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량이다. 그러나 비중은 두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두 정량은 완전히 다른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다. 그러므로 비중은 길이가 면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같은 것의 한계 내에 머무르는 것과는 구분된다. 그런 점에서 수 즉 무리수 비로 표현되는 것과 그 관계를 이제는 수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비중은 구분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즉 어떤 정량이 무리수 비를 이루면서도 비중에서처럼 자기와 완전히 다른 정량으로 이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속 운동의 경우는 특이하다. 가속 운동은 시간의 차원에 한정해서 본다면 거듭제곱의 관계다. 속도가 가속도로 발전한다는 점은 마치 선이 면으로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가속도는 곧 힘이 된다. 시간이 힘으로 발전한다고 보면 여기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에서 정량은 척도를 거쳐 마침내 본질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발전은 우리가 여기서 상상한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논의는 차후에 맡겨놓기로 하고, 우선 정량에서 비례를 거쳐 척도에 이르는 헤겔 자신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3)

이상에서 헤겔은 양적 비례의 개념을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수 비와 무리수 비가 매개됐는데, 필자가 헤겔의 설명을 미리 앞당겨서 끌어들인 것이다. 나중에 나올 것을 미리 끌어들이는 것은 필자의 고육지책이었다.

필자는 이 비례의 발전과정을 수학적인 분수 형태의 발전을 통해 설명했다. 정수 비와 무리수 비다. 헤겔은 이 발전과정을 비례 형태의 발전과정을 통해 설명했다. 정수 비는 헤겔에서 정비례에 해당하며 무리수 비는 헤겔에서 제곱비례에 해당한다. 필자는 단순히 둘로 나누어 설명을 단순화했으나, 헤겔은 가운데 역 비례를 집어넣어 설명이 좀 더 복잡하고, 매개 과정이 더 잘 설명된다. 이제 헤겔 자신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외연량이 비례가 되면서, 두 정량의 관계가 나온다면, 이 정량의 관계는 그 비례의 형식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이 과정을 헤겔은 미분 개념을 길게 다룬 다음에 양적 비례라는 장(1부 존재론 2편 양적인 것, 2장 정량 3절 무한성에 이어서 3장에 해당한다)에서 다룬다. 여기서 헤겔은 비례의 다양한 형태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즉 정비례와 역 비례 그리고 제곱비례다. 3절 제목인 제곱비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은 이 부분이 미분 개념을 다루는 곳이다.

비례에서 두 정량이 관계한다. 두 정량은 이제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 아니라 비례라는 관계 속에 묶여 있으니, 여기서 두 정량은 비례의 계기가 되며, 각 정량은 타자를 통해서 규정되니, 타자를 매개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고 할 수 있다.

“두 정량은 본질상 외적인 양들로서 서로 관계하지 않는다. 각자는 그 규정성을 다른 것과 관계 속에서 갖는다. 따라서 각자는 그 타자 존재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 각자가 무엇인가는 타자 속에 들어 있다. 타자는 각자의 규정성을 이룬다.”(논리학 재판, GW21, S. 310)

4)

헤겔이 비례 형태의 발전을 다룰 때 주요 개념 장치는 곧 수 개념의 두 계기인 총수와 개수의 관계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개수는 단위가 몇 번이나 반복되는가를 말한다. 이는 집합 개념에 속한다. 반면 총수는 이 반복된 단위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규정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7이란 수는 개수로 보면 1이라는 단위가 7번 반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칭하는 말 ‘일곱’은 7개의 개수 전체를 지칭하는 고유한 말이다. 이 ‘일곱’이 총수다.

이제 x와 y가 정비례 관계[y=ax]에 있다고 할 때, 이런 비례 관계 속에서 x, y 두 계기 중 y는 독립적인 정량이 아니라 이 비례 관계에 묶여 있는 계기로 규정된다. 즉 y(종속 변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x 즉 독립 변수는 무차별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 비례 지수 a는 x를 a 번 반복하라는 의미이므로, 개수다. 이때 반복되는 단위는 곧 총수 x이다. 즉 x가 a 번 반복된다. 이때 a는 x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규정된 정량이다. 총수 x가 무차별한 정량이듯이 개수 역시 무차별한 정량이다.

y는 x를 a 번 반복해서 나오는 수이므로, a와 마찬가지로 개수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수는 단순히 개수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체를 지칭하는 총수가 된다. 지수는 총수이자 개수로서 두 계기를 동시에 지니지만, 지수의 두 계기 x, a는 각기 하나의 계기만을 지닌다. x는 총수로서만 의미를 지니고, a는 개수로만 여겨진다.

5)

직접 비례에서 개수 a와 총수 x가 나뉘어 있고 서로 무차별한 데, 양자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성립하면서 지수와 총수가 통일을 향해 다가가면서 새로운 비례가 출현한다. 직접 비례에 이어서 출현한 비례는 역 비례다. 역 비례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a= x*y이다.

여기서 x와 y는 서로 무차별한 독립적 정량이면서도 대립적 관계에 묶여 있다. 하나가 줄어들면 그만큼 다른 하나가 늘어나며 하나가 늘어나면 다른 하나는 감소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는 타자 속에 자기의 규정을 가지며 타자의 규정을 자기 속에 품는다. 타자를 자기의 비-존재라 할 때, 자기는 자기의 비-존재 속에 속하며, 타자의 비-존재 때문에 자기가 존재하면서 타자의 비-존재를 자기 안에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비례 속에 서 있는 크기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연속해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서 이 하나의 크기는 그것과 다른 측면 즉 개수의 총수로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 이 하나의 측면은 다른 측면으로 부정적 측면으로 부정적 방식으로 연속된다. 하나는 자기만큼 티자 속에서 지양된다. 각자는 개수로서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다. 각자는 다른 것이 줄어드는 만큼 존재한다. 각자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것을 포함한다.”(논리학 초판, GW11, S. 182)

지수는 그 자체로서는 직접적 정량이지만, 이미 그 내부에서 x, y의 구별이 출현한다. 각 구별된 계기는 전체의 계기이며, 잠재적으로 전체다. 비례 지수 a는 양자가 변화할 수 있는 한계가 된다. 각자는 자기의 한계에 다가가지만 아무리 가더라도 다가가지 못하니, 각자는 잠재적으로 한계이지만, 이는 무한진행이며 그 도달은 다만 피안이나 당위에 머무른다.

“지수는 이런 직접적 규정 속에서는 비례의 두 측면이 지닌 한계이며 이 한계 내에서 두 측면은 상호 대립적으로 증가하고 감수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지수는 그 한계, 두 측면의 비-존재를 이룬다. 왜냐하면, 지수는 존재하는 전체이지만, 두 측면은 다만 전체인데 한 면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수는 두 측면이 무한히 다가가는 두 측면의 피안이며, 무한진행의 악무한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316)

지수는 두 구별된 계기에 대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피안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정량이다. 그러므로 지수는 피안이 현존하는 것이다.

“이런 양자가 다만 점차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뿐인 무한자는 곧바로 긍정적 차안으로서 출현하며 현현한다. 그것이 곧 지수의 단순한 정량이다. 이 속에서 비례의 두 측면이 부착되어 있는 피안이 도달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316)

직접 비례에서 의존 관계는 일방적이다. 그러나 역 비례에서 두 정량의 의존성은 상호적이다. 그러므로 각각은 한편으로 독립적 정량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벗어난 정량이다. 이 가운데 독립적인 것은 총수가 되고 의존적인 것은 개수가 된다(x가 총수이면 y는 a/y의 개수를 지닌다). 어느 것이 총수가 되든 무방하지만, 자기를 총수라 하고 타자를 개수라 한다면 그 자신 속에 총수의 측면과 아울러 개수의 측면을 지니게 된다.

정비례에서 총수와 개수는 각기 독자적이고 서로 무차별한 정량이었다. 역 비례에서 총수와 개수의 통일이 출현하지만, 이런 통일은 다만 직접적이어서 교대적으로 한번은 총수가 되고 다른 한 번은 개수가 될 뿐이다. 총수와 개수가 완전한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제곱비례가 등장한다.

6)

헤겔은 역 비례를 거쳐 제곱비례를 설명하는데 이 제곱비례가 앞에서 미분 개념을 다룰 때 출현했던 것이다. 그 기본 형식은 x*x=x²의 형식인데, 여기서 x²이 곧 비례의 지수가 된다. 이 형태는 한편으로는 정비례와 닮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 비례와 닮았다.

즉 지수 x²이 총수 x에 따라 변화하고, x는 독립 변수이고 x²은 종속 변수라는 점에서 정 비례를 닮았다. 그런데 이 제곱비례에서는 총수와 개수가 서로 같다. 그에 따라 어느 것이 총수이고 개수이든 무방하며, 자기 안에 자기의 비-존재인 타자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역 비례와 닮았다.

“이제[제곱비례] 개수는 다만 총수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된다. 이것이 제곱비례에서 나타나는 경우다. 제곱비례에서는 그 자체에서 개수인 총수가 동시에 총수로서 자신에 대립하는 개수가 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318)

이런 제곱비례에서 지수는 총수의 제곱인데, 총수가 의미하는 정량과 지수가 의미하는 정량은 서로 다른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총수가 선이라면 지수는 그 제곱 즉 면을 의미하게 된다. 면과 선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는 생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량은 제곱 속에서 자신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정량은 그 자신에게 타자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신의 타자는 동시에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통해 제한된 것이다.”(논리학 초판, GW11, S. 185)

그러나 선은 면의 한계, 그 끝이라고 본다면, 이 제곱비례는 곧 면이 자기를 통해 자기를 생성한 것이 되며, 자기의 끝, 타자로부터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 된다. 비례는 이미 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외연량처럼 추상적인 자기 관계가 아니라 타자에 대립해서 자기가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타자를 통해 자기가 규정되는 제곱비례에 이르면 질적인 것이 비로소 완전하게 출현한다. 제곱비례의 운동은 자기가 자신을 부정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7)

제곱비례를 넘어서면 비례는 마침내 완전히 다른 정량의 관계가 된다. 이때 비례는 새로운 정량이 되며, 두 정량의 관계는 더는 수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이것이 척도다.

질적인 것은 자기를 지양해서 양적인 것으로 된다. 질적인 것은 타자에 대립해서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에 대립해서 빨간색이 된다. 질적인 것은 일반적 성질로 발전하고, 두 가지 성질의 관계를 통해 대자 존재가 출현하면서 양적인 것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양적인 것은 정량으로 발전한다. 이 정량은 다시 두 개 정량의 관계를 통해 비례로 발전한다. 이렇게 해서 양적인 것은 질적인 것으로 복귀한다.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운동,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그리고 양적인 것에서 다시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운동을 통해 마침내 척도가 출현한다. 이 척도는 서로 다른 두 량의 관계다. 예를 들자면 무게와 부피의 관계인 비중과 같은 것이다. 이 서로 다른 두 량은 제곱비례를 넘어서 두 정량의 비례로 출현한 것이다.

두 정량의 비례를 통해 이제 등장한 새로운 정량은 앞에서 다룬 정량과 구분된다. 앞에서 질적인 것이 일반적 성질을 거쳐 대자 존재로 발전했듯이, 여기서도 그런 발전이 일어난다. 외연량은 추상적인 개별적인 정량이었다면, 이제 등장하는 새로운 정량 즉 척도는 특수한 정량이다. 전자가 어떤 개별자에 한정되는 것이었다면, 이제 척도는 일반성을 지닌 정량이다. 그러나 마치 성질의 일반성이 특수한 주관적 일반성이듯이, 이 척도 역시 특수한 주관적 일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5-미적분은 정당한가(4)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5-미적분은 정당한가(4)

1)

이상에서 헤겔은 뉴턴의 미분 증명이 이론적으로는 다른 미분 증명보다 탁월한 점을 제시했다. 그것은 페르마, 라이프니츠, 칸트 등이 여전히 무한소나, 사라지는 크기 개념에 매달렸을 때, 뉴턴은 최종 비례라는 개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미분은 곧 최종 비례이다.

그런데 헤겔은 뉴턴이 이론적으로 확립한 이런 최종 비 개념이 실제 계산 과정에서는 무시되고 말았다고 말한다. 헤겔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①계산을 편리하게 한다는 욕구가 미분 계산이 지닌 문제점을 간과하게 했다.

헤겔은 뉴턴이 범한 오류를 곱하기 즉 x*y의 미분을 끌어낸 증명에서 발견했다. 이 곱하기의 미분은 (x+1/2dx)(y+1/2dy)-(x+1/2dx)(y-1/2dy)이다. 뉴턴은 그 답이 xdy+ydx라고 했는데 사실은 dxdy가 추가돼야 한다.

그런데도 계산상의 욕구가 뉴턴이 자기 답이 오류라는 것을 무시하게 했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뉴턴은 마찬가지로 미분 계산에서 첫 번째 항을 제외한 나머지 항은 그 값이 사소하기에 계산의 편의를 위해 버려도 무방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② 운동의 함수를 보면, 등속 운동은 v=ct 로 표현되고, 등가속 운동은 s=1/2at²이며 저항은 3차 함수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뉴턴은(이는 사실 라그랑쥬에서부터 유래하는데) 미분을 위한 전개식에서 첫 번째 항은 등속 운동을 의미하고, 두 번째 항은 등가속 운동, 세 번째 항은 저항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것은 전개식의 각 항에 질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예를 들어 낙하운동의 속도를 구하는 미분에서는 첫 번째 항 속도와 무관한 두 번째 이하의 항은 관계없으니 무의미한 것이라 보면서 제거했다는 것이다.

③세 번째는 카르노처럼 미분 계산에서 나오는 이항 정리에서 각 항은 동일한 비례가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니, 버려도 된다는 주장이다.

2)

이어서 헤겔은 라그랑쥬의 입장도 소개하는데, 그는 뉴턴에 귀속되는 이유 중 ②을 포함하여 새로운 이유를 갖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미분 계산 가운데 이항 전개에서 나오는 각 항은 그다음 모든 항의 합보다 크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은 점차 미분의 거듭제곱이 더 커지는 것인데(예를 들어 dx, dx², dx³ …) dx가 아주 작은 수이니 그 제곱은 제곱으로 작아지기 때문이다. 라그랑주가 들고 있는 이 이유는 사실 첫 번째 항을 제외한 나머지 항은 그 값이 사소하다는 주장과 같은 주장이니 주장①에 통합해도 될 것이다.

라그랑쥬의 주장을 제쳐 놓으면, 남은 것은 뉴턴이 말한 세 가지 이유다. 이 가운데 ②, ③ 주장은 그 주장 자체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지 않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뉴턴이 정말 그랬을까 싶은데, 일단 헤겔은 그렇게 파악한다는 사실만 말하고자 한다. 헤겔 자신도 그런 주장을 소개만 할 뿐, 정당한지는 따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핵심은 역시 첫 번째 주장에 있다. 뉴턴은 이론적으로는 최종 비례라는 개념을 끌어냈으나, 실제 계산에서는 다시 최종적 크기, 또는 사라지는 크기라는 개념으로 되돌아가면서,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항은 크기가 작으므로 버려도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헤겔은 뉴턴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크기로 되돌아간 것은 수학적 증명 과정에서 dx와 dy가 비례 관계로 묶이지 않고 각자 독립적으로 출현하므로, 이를 최종 비례의 계기로 보지 않고, 사라지는 크기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헤겔은 미분 계산에서 dx, dy는 단적으로 dy/dx의 계기로서만 여겨져야 하는데도 “특히 그런 기호를 적용하는 데서 기계적으로 계산하는 가운데 미분 계수의 양 측면[dx, dy]이 서로 떼어 내진다는 것으로부터 그런 계산이 끌어내는 장점이 사라진다”(논리학 재판, GW21, S. 265)고 한다. 여기서 그 계산이 지닌 장점이란 곧 미분을 비례로 이해함으로써, 미분 계산이 부딪힌 모순이 해결되는 장점을 말할 것이다.

3)

이상과 같이 헤겔은 뉴턴의 미분을 이론에서는 최종 비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용에서는 이를 다시 사라지는 크기로 이해하는 잘못을 서술한 다음, 최종 비의 개념이 비례의 한계라는 개념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례의 한계란 곧 dy/dx가 질적인 크기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한계는 곧 가변적 크기의 함수 즉 원래 함수 관계에 있는 x, y 즉 F(x)가 지닌 한계다. 질적 한계(dy/dx)를 이루는 두 요소 dx, dy는 오직 이런 관계 속에서 계기로서만 존재하며 더는 독자적인 정량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정량에서는 한계가 자기에 외면적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 스스로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 이런 정량은 그 한계 즉 규정이 자기에 외면적이니, 서로 동일하면서도 서로 무차별하다. 여기서 독특한 양적 관계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이중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비례에 이르면, 한계는 다시 내면화하면서 고정된다. 하나의 질적인 한계 즉 어떤 규정은 내면화되는 동시에 다른 질적 한계나 규정과 대립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제 하나의 비례 규정은 타자와 대립해서 자기를 규정한다.

이런 비례의 한계 개념에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dx가 0으로 수렴하더라도, 비례의 한계 즉 dy/dx는 0/0이 아니라 일정한 값을 지니게 된다. dx 즉 증분은 끊임없이 0에 다가가는 점근적인 것이더라도, 비례의 한계는 일정하다. 그러므로 이런 비례의 한계 개념은 사라지는 크기로서 증분 또는 미분이라는 개념에서 해방된다.

“미분 계산에서 dx, dy로 출현하는 무한소는 어떤 유한적이지 않은, 주어지지 않는 크기가 지닌 부정적 공허한 의미를 더는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적인 것의 질적 규정 즉 비례의 계기 그 자체라는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 ”(논리학 재판, GW21, S. 265)

사라지는 크기라는 개념은 여전히 정량의 개념에 머무른다. 그러나 최종 비, 또는 비례의 한계라는 개념을 통해 진정한 무한의 개념이 출현하며, 정량은 그 자체로서 지양되면서 질적인 크기 즉 비례의 계기가 된다. 헤겔은 이를 “유한한 크기가 무한한 크기로 전환한다”라고 말한다.

“지적된 바와 같이 소위 미분은 비례의 양 측면 즉 정량이 사라짐을 표현하며[사라지는 크기] 남아 있는 것은 양적 비례이어서 그런 한 순수하게 질적인 방식으로 규정된다. 질적 관계는 여기서 사라지지 않으니, 오히려 바로 유한한 크기가 무한한 크기로 전환하는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268)

유한한 크기 즉 정량과 무한한 크기 즉 비례는 서로 다르다. 구체적 예를 들어 원호는 정량으로 본다면, 할선보다 클 수밖에 없다. 할선은 직선이며 두 점 사이에 최단 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호를 무한한 할선으로 구분하면, 무한한 원호는 무한한 할선과 같게 된다.

또 운동을 예로 들어 볼 때, 곡선 운동과 직선 운동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양적으로 양자는 다르지만, 무한한 크기로서는 양자는 같다. 즉 가속 운동[ungleichfoermige Bewegung]에서 무한히 작은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는 등속 운동[gleichfoermige Bewefung]에서 무한히 작은 시간에 지나가는 거리와 같다.

4)

주석1을 마치면서 헤겔은 마지막으로 수학적 방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옛날의 해석학자는 해석학을 어디까지나 구체적 대상과 관계하여 전개했다. 이때 구체적 대상이란 바로 공간적 관계나 역학적 운동을 말한다. 사실 뉴턴은 경험적으로 증명된 것 즉 갈릴레오에 의해 발견된 낙하 법칙이나 케플러에 의해 발견된 천체 운동 법칙을 그의 미적분론을 통해 정당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헤겔 당시 해석학자는 구체적 대상과 관계 속에서 지닌 실질적 의미를 무시하고 전적으로 추상적인 수학적 방식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이를 모든 대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수학의 지위를 경험을 넘어 고양하면서 수학적 사유에서 자연법칙을 끌어내려 했다.

“그런 명제는 역학의 근대 해석학적 형태에서는 전적으로 계산의 성과로서 소개되며 그런 명제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즉 어떤 실존이 그런 명제 자체에서 독자적으로 어떤 상응하는 의미를 지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또한 그런 것의 증명도 고려하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S. 271)

“단순한 계산을 통해 경험을 넘어서 제시되는 법칙, 어떤 실존도 갖지 않은 실존 명제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학문의 승리로 과장되고 있다.””(논리학 재판, GW21, S. 271)

“그와 같은 가상을 사람들은 단순한 믿음이나 경험적 지식보다 항상 더 우선시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이 단순한 주머니 돌리기 요술이나 증명하는 체하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 아래에 뉴턴의 증명조차 집어넣는데 굳이 숙고해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272)

그러나 헤겔은 이런 수학의 월권을 비판한다. 수학은 경험을 통해 이미 발견된 법칙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미적분론은 자기 제곱이 가능한 대상 즉 공간이나 역학적 운동에서나 타당할 뿐이라고 한다.

5) 이상 헤겔이 수학적 무한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석 1에서 전개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다. 주석 2와 주석 3은 재판에서 추가한 것이다. 주석 2는 방정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고는 주석 1의 내용과 거의 합치한다. 주석 3은 적분 개념을 통해 다시 수학적 무산성을 소개하는데, 주요 내용은 미적분은 수적으로는 거듭제곱의 함수에서 적용되며 구체적으로는 공간 운동이나 역학적 운동에 적용될 수 있을 뿐, 모든 운동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미 주석 1에서 충분히 설명한 부분이라 더 구체적인 소개는 생략하려 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54-미적분은 정당한가(3)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4-미적분은 정당한가(3)

1)

앞에서 헤겔은 자신의 진정한 무한성 개념을 소개했다.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곧 두 정량 사이의 관계 또는 비례다. 여기서 각 계기는 다른 계기에 관계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이런 관계는 질적인 것으로 된다.

이 질적 크기는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이런 무한량 가운데 거듭 제곱의 관계에 있는 것이 곧 분수 가운데 정수비로 환원되지 않는 루트나 파이로 표현되는 분수다. 수적인 제곱 관계는 구체적으로는 길이나 면적, 부피의 관계나 물체의 공간적 운동을 표현한다. 바로 이런 거듭제곱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이 미적분이다.

헤겔은 이처럼 미적분이 적용되는 무한량, 그 가운데서도 거듭제곱의 관계를 소개한 다음, 드디어 미적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때 특히 뉴턴의 방식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뉴턴에 이미 진정한 무한성 개념이 비록 뉴턴 자신은 알지 못했더라도 출현했다는 것이다. 헤겔은 “그 규정의 발견자(즉 뉴턴이다)는 그 사상을 개념으로 아직 정초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적용할 때에는 그와 같은 더 나은 상태에 모순되는 방편이 필요했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3)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뉴턴이 발견하지만, 자각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2)

뉴턴은 미적분을 유출법이라고 했다. 이 유출법의 방식은 그 이전(페르마와 데카르트 그리고 뉴턴의 스승 배로우에 이르기까지)의 무한소 개념에서 기초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무한소 또는 “불가분적인 것이라고 이해한” 무한 개념을 뉴턴은 다르게 이해한 것이다. 즉 “사라지는 가분적인 것”(논리학 재판, GW 21, S. 253)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뉴턴은 이 사라지는 것이 단순히 정량이 아니라 정량의 관계 즉 비례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 점은 나중에 보도록 하자)

우선 미분법을 이해하기 쉽게 다음과 같은 도해를 보기로 하자. 아래의 도해에서 보듯이 곡선 F(x) 상에서 점 p1, p2가 있다고 할 때 두 점을 이으면서 곡선을 자르는 할선의 기울기는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은 삼각형의 세로/가로 곧 F(x+h)-F(x)/ h이다. 이 식을 풀어서 두 번째 항 이하를 버리면, 미분식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F(x)가 이차함수 x²이라면, 이 할선의 기울기는 (x+h)²-x²/h이며 이 식을 이항 정리를 통해 풀어보면 2x*h/h+h/h*h가 된다. 이 식 가운데 h/h는 1이니 남는 것은 2x+h이다. 미분의 계산법에서는 이 h는 0으로 간주하고 버리며, 그 결과 미분은 곧 2x로 규정된다.

문제는 h/h가 1이라는 것과 남는 h가 0이라면서 버리는 이유 또는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페르마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h는 무한소이며 크기가 없는 것 즉 0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h를 버리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h/h다. 이것은 0/0이 되면서 악마의 소굴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무한소 개념이 가지는 모순이라고 했다.

이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 라이프니츠는 이 무한소를 최소값으로서 0이 아니라, 무한히 작아질 수 있는 크기로 보았다. 그것은 0은 아니고 0에 다가가는 수로 규정되는데, 이것이 바로 앞에서 칸트가 설명한 무한진행이라는 개념이다.

라이프니츠의 무한진행으로서 무한소를 헤겔은 ‘사라지는 크기’ 즉 ‘무한히 가분적인 것’로 규정한다. 이 말 자체는 뉴턴이 쓴 말과 같지만, 라이프니츠에서 사라지는 것은 곧 정량, 크기다. 그러면 h/h가 1이라는 것은 이해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머지 h를 버리는 것이 문제다. 라이프니츠는 이 사라지는 크기를 아주 사소한 크기니, 버려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울프는 라이프니츠를 옹호하면서 실제 측정술에서 산의 높이를 잴 때 순간적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모래가 날아가 사라진 것은 계산에 빼도 무방한 것처럼 또는 일식이나 월식을 잴 때 집이나 탑의 높이를 무시하는 것처럼 미분 계산법에서도 아주 작은 크기는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h는 무한히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크기를 가진 것이니, 수학적 엄밀성을 위해서는 버릴 수 없다.

3)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뉴턴은 ‘최종 비’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뉴턴은 이를 사라지는 크기라고도 했는데 여기서 크기는 곧 비례를 의미한다.) 즉 h가 아무리 작아지더라도 h/h는 일정한 크기의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아래 도해를 보면, 할선의 기울기가 점차 접선에 다가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h=o가 되더라도 h/h는 일정한 비율(즉 접선의 기울기)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최종 비이다.

헤겔은 이처럼 일정한 크기가 유지될 때 그 비례를 뉴턴이 최종 비라고 할 때 마음에 품었던 것이라고 본다. 이런 최종 비에서는 분자와 분모를 이루는 두 정량은 독자적인 정량이 아니다. 두 정량은 하나의 관계 속에서 통일되어 있으니, 여기서 두 정량은 비례의 계기에 불과하며, 서로가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일정한 비례를 유지하면서 줄어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계기는 다른 계기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뉴턴이 자기가 말하는 진정한 무한성으로서 비례 개념에 도달했다고 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h/h는 1로 받아들이고 반면 h는 버리는 이유가 정당화된다. 전자는 최종 비이며 h가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비례를 유지하지만, 후자 h는 줄어들면 마침내 0이 되면서 사라지는 것이다.

h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미분 계산의 정확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확성이 오히려 회복된다는 사실은 기하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아래와 같은 도해를 보자.

이 도해에서 보듯이 h가 줄어 들면(h->h’->h’->0′) 할선이 점차 점p에서의 접선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접선이 바로 구하려던 곡선의 기울기 즉 미분이다. 이처럼 기하학적으로 보면, 미분은 기울기가 지니는 한계 즉 극한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비례 아래서 사라지는 크기는 사라지기 전에서도 아니고 사라진 이후에서도 아니며 오히려 그와 더불어 사라지는 가운데 있는 비례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성하는 크기의 최초 비례는 그것이 생성하는 비례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3)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그는 최종 비는 최후의 크기가 지닌 비례가 아니라 한계 없이 줄어드는 크기의 비례가 주어진 모든 유한한 차이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한계다. 그런 한계를 최종 비는 무가 될 만큼 넘어서지는 못한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

현대에서 수리철학자 코헨과 바이어스트라세는 미분을 정의하면서 이런 극한 개념을 사용한다. 이 극한 개념은 헤겔이 뉴턴으로부터 발굴한 최종적 비례, 또는 비례의 한계를 의미하며 그런 한 코헨과 바이어스트라세는 헤겔의 개념 분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겠다.

“한계라는 표상에는 사실 가변적 크기의 질적 비례 규정이라는, 앞에서 제시된 진정한 범주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런 가변적 크기로부터 등장하는 형식 즉 dx, dy는 단적으로 dy/dx의 계기로서만 여겨져야 하며, dy/dx 라는 기호 자체는 불가분적인 유일한 기호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65)

3)

뉴턴은 이 최종비라는 개념을 이제 ‘생성하는 크기[genita]’, ‘생성의 원리’로 이해한다. 그것은 순간적인 증분이나 감분인데 곧 이 생성하는 크기는 무한소나 무한진행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증분이나 감분은 어디까지나 비례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적 증분이나 감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 변화된 운동은 하나의 독자적 정량이며, 뉴턴은 이를 생성의 원리로부터 생성된 크기로 간주한다. 양자는 생성에서 저차적인 질서와 고차적 질서로 구분된다.

이런 설명은 뉴턴이 미분을 이처럼 운동, 생성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을 잘 보여준다. 미분은 어떤 것이 운동할 때 어떤 순간에 운동을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생성된 크기가 어떤 정량이라면, 생성하는 크기는 질적인 것이다. 전자는 현존의 무차별성, 외면성 속으로 이행한 것이며 후자는 타자와 관계 속에 규정되는 계기다. 그러므로 헤겔은 전자와 후자가 수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다르다 한다. 전자가 x, y로 규정된다면 후자는 dx, dy로 규정된다.

‘사라지는 크기[Letzte Groesse]’ 즉 정량의 무한진행이나 ‘최종 비[Letzte Verhaltnisse]’ 즉 비례의 무한진행은 유사한 듯 보이는데도 마땅히 구별돼야 한다. 정량은 무한히 사라지더라도 일정한 크기를 유지한다. 그것은 결코 0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비례의 무한진행은 비례 자체에서 분자와 분모를 이루는 크기는 비례 관계에 묶여 있어 아무리 줄어들더라도 일정한 비례 관계를 유지하지만, 비례를 벗어나게 되면 각 정량은 독자적으로 줄어들면서 마침내 0에 이르게 된다. 아래 두 인용문을 비교해 보라.

-사라지는 크기

“이런 표상이 사태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하는 조건은 정량이 무한진행 속에서 갖는 정량의 항상성이 정량이 사라지는 가운데 자기를 연속하면서, 자신의 피안에 다시 다만 어떤 유한한 정량을 즉 급수[계열]의 새로운 항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

-사라지는 비례

“그러나 진정한 무한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행에서는 항상적인 것은 비례다. 그 비례는 아주 항상적이고 자기를 보존하기에 그런 이행은 오히려 다만 그 비례를 순수하게 드러내는 데 성립하며 또한 비례의 두 측면을 이루는 정량이 이 비례 밖에 놓이면서도 여전히 정량이 되게 한다는 사실 즉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규정이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4-255)

헤겔은 이와 연관하여 오일러의 주장을 소개한다. 오일러는 뉴턴의 최종비 개념을 근거로 하여 h/h는 1이지만, h=0이라는 주장을 이렇게 설명한다.

“무한한 차이[미분]은 다만 정량의 0이지, 질적인 0은 아니며, 정량의 0이더라도 단지 비례의 순수 계기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57)

오일러는 0/0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산술적 비례와 기하학적 비례를 구분했다. 수학적 비례에서 0/0은 악마의 소굴이 되더라도 기하학적 비례에서는 0/0은 일정한 값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오일러가 기하학적 비례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뉴턴이 최종비라고 말한 것에 해당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