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4-본질에 이르는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4-본질에 이르는 길
1)
본질론을 시작하며, 헤겔은 그 서론 격으로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라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 주장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존재가 지양되어서 본질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양된 것이기에 존재한다[sein]의 과거 분사 ‘gewesen’에서 본질[Wesen]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본질에 관한 인식은 직접 일어나지 않으며, 직접 인식된 존재를 지양해서 얻어진 매개적 인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양된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하다. 헤겔은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서술하는데 우선 그것은 개별자인 존재자에서 일반자인 본질로 이행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일반자가 근거이고 개별자는 그 근거로부터 나온 산물이므로 이는 결과에서 근거로 되돌아가는 것 즉 ‘근거로의 복귀’라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추상적 개념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구체적 과정과 다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갑자기 당혹하게 된다. 흔히 논리학은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즉 추상이 구체화되는 하강하는 연역적 과정으로 생각된다. 반면 정신현상학은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일반적 개념에 이르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으로 상승하는 귀납적 과정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논리학에서 존재론의 운동을 거쳐 마침내 도달한 결과인 본질은 헤겔 자신의 말대로 개별 현존의 근거가 되는 일반적인 본질이니, 논리학의 전개 과정이 상승하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이었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해서 논리학의 길이 정신현상학의 길과 같아진 것인가?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는 여러 번 강조해서 설명했다. 정신현상학은 표면적으로는 상승하는 귀납적 과정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념의 자기실현이 매개되어 있다. 거꾸로 논리학은 표면적으로는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경험이 상승하여 자기 내로 복귀하는 과정을 매개로 한다.
이런 설명을 전제로 한다면, 헤겔이 여기서 본질에 이르는 길은 존재가 지양되어 근거로 복귀한 길이라고 한 주장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헤겔은 여기서 논리학에서 본질이 출현하는 매개적 길을 설명한 것이다. 실제 논리학에서 존재는 추상적인 질로부터 시작하여 더 구체화한 양으로 발전하고 이 양이 더욱 구체화하면서 척도를 거쳐 본질에 이르렀다. 이런 구체화하는 과정이 논리학의 표면적 길이다.
2)
헤겔은 자기 내 복귀 과정으로서 지양을 또 다른 측면에서 파악하는데, 사실 헤겔이 이 서론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에서 강조하려는 측면은 바로 이런 측면에 있다.
존재의 지양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의 방식은 곧 그 지양이 외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지양은 자의적인 추상 작용인데, 만일 본질이 주관이 자의적으로 추상하여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개별 존재자의 본성에 무관한 것이 될 것이다.
흔히 경험적 사실을 추상하여 일반적 본질을 얻는다는 과학적 작업은 자칫 이런 주관적인 추상에 머물러 주관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본질을 얻을 뿐이다. 이것은 자주 경험 과학이 빠져드는 오류인데, 헤겔은 이런 주관적 본질을 규정된 존재에 대립하는 본질이며, 비록 순수한 존재이며 무규정적인 단순 존재라고 하더라도, 이는 내적으로 죽어 있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주관적 자의적 추상을 비판하면서 헤겔은 존재에서 본질에 이르는 과정은 “존재 자체가 스스로 거쳐나가는 길”이며, 이는 자기 부정을 통해 나가는 ‘무한한 운동’이어서 ‘내면화의 길’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내면화를 통해 얻은 본질은 주관적 본질처럼 존재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계가 절대적으로 소멸해서, 존재를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 내에 들어 있는 본질이다. 이런 본질은 존재에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에 내면적으로 관계하므로 이는 주관적인 본질이 아닌 객관적 본질이다.
3)
주관적 본질 또는 ‘단순한 그 자체 존재’와 대립하는 객관적 본질 또는 ‘절대적 그 자체 존재’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사물의 객관적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철학의 이념이며 모든 철학이 이를 목표로 했으나 결국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길은 자주 본질 직관을 끌어들여 해결되지만, 헤겔은 이런 본질 직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식은 개념을 통한 인식이지만, 이런 개념적 인식은 칸트가 말하듯이 물 자체에 부딪히지 않는가? 그런데도 헤겔은 이런 객관적 본질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니, 과연 어떻게 그와 같은 길이 가능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길은 논리학에서는 서술되지 않는다. 이 길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발전하는 길을 통해 설명되었다. 헤겔은 여기서 그런 길을 전제로 하고 그런 길이 매개되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존재에서 본질에 이르는 길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길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서술된 의식 경험의 길을 여기서 다시 정리하자면, 그 길은 주관적 개념이 자기모순을 통해 나가는 길이다. 이 개념은 자기를 규정하여 대상화하지만, 여기서 현상을 넘어선 물 자체 즉 자기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이 개념은 개별적 개념임이 드러나며, 이제 개별적 개념을 넘어서 모순적 경험까지 포괄하는 일반적 개념이 출현한다.
이 일반적 개념은 사물 자체에 더 적합한 내재적 개념 즉 객관적 개념이 되며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대상화가 일어난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자기모순을 겪는 가운데 마침내 개별적 개념은 주관적인 개념을 벗어나 사물 자체에 객관적인 일반적 개념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등장한 개념은 대상에 대해 외면적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의식 경험의 길이 반복해서 일어남으로써 대상에 대해 내재적인 객관적 개념이 출현한다. 즉 이런 내재성과 객관성은 의식 경험의 길이 반복하면서 점차 증가해 왔다.
4)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을 매개로 하면, 주관적 본질이 어떻게 객관적 본질로 발전하는지가 이해된다.
정신현상학에서 본질은 감각적 확신의 대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성을 거쳐 지성 장 끝에서 자기의식에 이르기 직전에 도달한다. 이때 헤겔은 물체의 본질로서 법칙이 마침내 생명의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 생명의 개념이 곧 논리학에서는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정신현상학의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 논리학에서는 존재론으로 전개된다. 이 존재론의 처음 출발점은 감각적 질인데, 이는 아직 주관적 본질인 존재 범주[단순한 An sich]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처음 등장한 주관적 본질은 존재론의 운동을 통해 생명 개념에 이르는데 이 생명 개념이 곧 객관적 본질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렇게 도달한 본질이 처음 추상적으로 출현했다가 이를 구체화하면서 마침내 실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처음 추상적 본질을 헤겔은 무규정적 본질이라 하며, 구체적으로 실현된 본질은 무한한 대자 존재로서 본질이라 한다.
“이렇듯 존재가 완전히 자기 내로 되돌아옴을 의미하는 본질은 처음에는 무규정적인 본질이다. 존재가 지닌 규정성은 그 속에 지양되어 있으니 본질은 자기 내에 이들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본질에서 정립된 방식으로 포함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자기와 통일되어 단순성 속에 있는 절대적 본질은 어떤 현존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현존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헤겔 논리학, GW11, 242)
“왜냐하면, 절대적 본질이란 곧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인 존재이니 즉 그 자신이 그 자체로 내포하는 규정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본질은 그 자신을 자기로부터 반발하게 하거나 자기를 무차별하게 대하여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자기를 자기에 대립하게 한다. 또한, 절대적 본질은 자기로부터 자기를 구별하는 가운데 자기와 통일을 이루는 한에서 오직 무한한 대자 존재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2)
4)
헤겔은 이 서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질의 운동을 존재론에서 등장한 질이나 양에서의 운동과 비교한다. 존재론에서 하나의 질은 그 자체에서 다른 질로 이행한다. 이는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는 부정의 길이다. 양에서 이행은 자기를 넘어서 자기에 도달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양은 연속적이며 그것들의 차이는 이런 연속성에 외면적인 크기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질이나 양에서의 운동은 수평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하나의 양에서 다른 양으로 이행이 일어난다. 이 길은 한 마리 개미가 무한한 평면을 지나가는 길처럼 보인다.
반면 이제 본질의 운동은 앞에서 말했듯이 존재론에서의 운동과 전혀 다르다. 이 운동에서 개체는 바로 다른 개체로 직접 이행하지 않는다. 마치 양자 사이에는 무한한 심연이 놓여있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개체와 개체를 연결해 주는 것은 곧 본질이다. 개체는 자기의 배후에 있는 본질로 이행하고 이 본질이 다시 개체를 생산하면서 이 개체들의 연관은 배후에 있는 본질을 매개로 일어나는 연관이다. 그러므로 이런 운동은 마치 수직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처럼 보인다.
“본질의 운동은 그 자신에서 부정과 규정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자기를 현존하게 하고 그것이 지닌 잠재적인 것을 무한한 대자 존재로 생성하게 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본질은 잠재적인 존재에 그의 잠재적 존재와 동일한 현존을 부여하면서 개념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43)
개별적 본질은 단순한 종이다. 단순한 종에서 현존 즉 개체는 우연적이다. 종은 개체에 내재할 뿐이다. 그러나 개념에 이르면 이 본질은 일반적인 본질로 되며 이는 자기 의식적 개인이 이루는 사회다. 이 사회는 개인에 필연적이며 개인과 독립해서 실존한다. 이 독립적 실존이 자립적으로 되면 그것이 곧 개념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가이다.
본질이 개념에 이르는 길은 역시 의식 경험, 즉 자기모순을 통해 발전하면서 이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논리학에서 전형적인 방식인 회고적 방식으로 서술한다면, 이는 본질 속에 이미 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여 구체적 개념이 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