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이어서)

 

  1. <형이상학> 3(B)권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탐구되는 학문과 관련하여 이 학문의 물음 즉, 철학이 물어야 하는 주제가 어떤 주제들인지를 나열한다. 이 물음들은 철학적 난점들 즉, 아포리아(Aporia)들로 제시되며, 이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어려움과 탐구 주제를 보여준다. 로스(W. D. Ross)의 구분에 따르면 아포리아들은 총 15개가 제시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학문이 네 가지 원인을 모두 다룰 수 있는가? 2) 공리들을 다루는 것은 실체에 대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학문이 그것들을 다루는가? 3) 하나의 학문이 모든 실체를 다룰 수 있는가? 4) 실체에 대한 학문은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도 함께 다루는가? 5) 감각적이 아닌 실체들도 있는가? 그렇다면 그 종류는 얼마나 되는가? 6) 유들이 사물의 첫째 원리들인가, 아니면 사물들에 내재하는 부분들이 첫째 원리들인가? 7) 유들이 원리들이라면, 최상의 유들이 그런가 아니면 불가분적이 그런가? 8)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9) 첫째 원리들은 각각 종이 하나인가 아니면 수가 하나인가? 10) 가멸적인 것들과 불멸적인 것들의 원리들은 같은가? 11) 있는 것과 하나는 실체들인가 아니면 속성들인가? 12) 수학의 대상들은 실체들인가? 13) 감각물들이나 수학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이데아들도 있는가? 14) 첫째 원리들은 가능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있는가? 15) 첫째 원리들은 보편자인가 개별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물음들을 이전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참조하면서 이 물음들이 단순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포리아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포리아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여러 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그럼에도 이 아포리아들은 <형이상학>에서 큰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말해지는 아포리아들이 책이 탐구하는 학문 즉 형이상학의 범위와 문제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1. <형이상학> 4권(Γ) 3장까지

 

4권에서는 드디어 본격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논증이 펼쳐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형이상학을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면서,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의 첫째 원리와 최고의 원인들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때, ‘있는 것’이라는 말은 다의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있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설명한다. 있는 것은 실체와의 관계에 따른 하나의 원리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실체도 있는 것이고, 양태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원리를 지닌 것들은 저마다 그 원리를 따르고, 그것과 관계된 것으로 말해지는 것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학문이 있다. 이러한 실체 자체와 그 관계를 통해 다의적으로 있는 것 모두를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하나의 유에는 하나의 학문이 할당되고, 하나의 학문은 할당받은 유와 그 유에 속한 종들에 관한 분과들을 종으로 지니기 때문에, 철학은 있는 것의 유에 속한 종들만큼의 분과들을 그 종으로 지닌다. 따라서 있는 것의 유와 하나의 유는 서로의 유에 속한 종들이 일치하며, 하나의 유에 속하는 종들을 탐구하는 것 또한 철학과 그에 속한 분과들의 몫이다. 따라서 하나의 유에 종으로 속하는 동일성과 동질성 그리고 그것들에 반대되는 다름과 이질성 또한 철학의 탐구 주제에 속한다. 반대자들은 동일한 원리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음과 다름 그리고 실체를 다루는 학문을 고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철학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첫 번째 뜻에서 있는 것, 즉 실체를 탐구하고, 하나와 여럿,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반대자들, 그리고 있는 것과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탐구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의 첫째 공리 즉, 모순율을 탐구한다. 언뜻 수학에 몫인 듯 보이는 공리에 대한 이 물음은, 이 공리가 특정한 유에만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공리들에 대한 고찰 역시 보편적으로 있는 것과 첫째 실체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공리를 모순율로 제시하며 모순율에 대해서 모든 원리 중에서 가장 확고한 원리에 대해서는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무전제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있지 않을 수는 없고, 반대되는 것들이 동시에 동일한 것에 속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모순율은 여타의 모든 공리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원리이다.

 

(끝)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18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質勝文則野文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자왈:「질승문칙야문승질칙사문질빈빈연후군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본질이 꾸밈을 이기면 너무 거칠고, 꾸밈이 본질을 이기면 너무 사치스럽다. 꾸밈과 본질을 겸하여 아름답게 빛나면, 그 후에 자연히 군자답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색을 이기면 곧 야인이다. 색이 본질을 이기면 사관이다. 색과 본질이 겸비되고 겸비된 후에야 군자인 것이다.

서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무늬를 이기면 촌스럽고 무늬가 바탕을 이기면 사치스럽다. 무늬와 바탕을 모두 겸비하여 빛나면 그러한 후에 군자라고 본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본질이 (먼저) 훌륭하면 곧 문장은 질박해지고(수수해지고), 문장이 (먼저) 뛰어나면 곧 본질이 화사해진다.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가 서로 잘 어울리는, 후자야말로 군자의 모습이다.

 

「옹야」18에서 크게 논할 수 있는 부분은 한 가지가 있었다. 이는 ‘야(野)’와 ‘사(史)’의 해석에 대한 것으로 ‘야’를 야인 혹은 촌놈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관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야’를 거칠다, 촌스럽다, 질박하다 등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치스럽다, 화사해진다 등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용언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논어』 안에서 ‘야’와 ‘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야’의 사용이다. 『논어』 안에서 ‘야’가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선진(先進)」1이다. 「선진」1에서 ‘야’는 전자의 해석인 인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야’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야인(野人)’으로 사용되며 『논어』 안에서 ‘야’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다음으로 ‘야’가 사용된 부분은 「자로(子路)」3이다. 「자로」3에서 ‘야’는 후자의 해석인 용언으로 사용되었다.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야’는 ‘비속(鄙俗)’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야’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어느 한쪽이 더 확실한 해석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사’의 사용이다. ‘사’ 또한 『논어』 안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위령공(衛靈公)」7이다. 「위령공」7에 나온 ‘사’는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정확히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사’는 「위령공」7에서 ‘관명(官名)’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사’가 사용된 부분은 「위령공」26이다. 「위령공」26에서 ‘사’는 「위령공」7과 같이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사’는 관명 혹은 사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전자의 해석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야’의 용법에서는 두 해석 중 무엇이 더 정합적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의 용법에서는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두 해석 가능성을 평가하자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고 뒤에 나오는 군자를 고려해보았을 때 문장의 통일성도 더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야’와 ‘사’를 용언으로 해석한 후자의 해석은 ‘야인’과 ‘사관’이라는 현대인은 『논어』 안에서 사용된 그 특징을 이해하기 까다로운 단어를 용언으로 풀어서 설명하면서 그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옹야」18 ‘야’와 ‘사’에 대한 해석은 한국의 여러 『논어』 번역서에서도 그 해석의 방법이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 「옹야」19

 

아래 인용은 「옹야」19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자왈:「인지생야직망지생야행이면。」)

재국: 선생이 이르길, “사람이 직하게 살면, 불행한 삶이 아니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삶이 곧으니 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요행히 면한 것이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살아있는 자의 삶이란 곧게 하는 것(바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고, 망자의 삶이란 (살아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용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어』 한국어 번역본은 종범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장에서는 수진의 번역을 공유하고자 한다. 수진은 ‘망지생(罔之生)’을 망자의 삶, 즉 죽은 사람의 삶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앞선 ‘인지생(人之生)’과 대응 구조를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공자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살아있는 사람은 바르게 살고, 죽은 사람은 (제사를 받음에 있어서) 은혜를 베풀면서 용서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번역이지만 몇몇 문제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이 번역이 『논어』 안의 다른 구절과 모순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선진」11과 「옹야」22이다. 「선진」11에서는 산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삶을 모를 때 어찌 귀신을 섬기고 죽음에 대하여 알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다음으로 「옹야」22에서는 사람의 ‘의’에 힘쓰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는 귀신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 혹은 공경하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그리고 핵심적으로 실제 살아가는 삶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는 부분은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망자의 의무를 논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의 번역이 의미를 지니는 부분은 「옹야」19의 문법적 구성을 보았을 때 앞과 뒤를 대응 구조로 해석할 수 있는 적어도 문법적으로는 편하게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처음 번역하는 사람이 한 번은 고민해보아야 할, 다른 번역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번역이 더 합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논어』 전반의 구성을 고민해볼 수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되기에 이렇게 그 번역을 공유하며, 그 정합성에 대하여 논했다.

 

(계속)

플라톤의 <국가> 강해(83)

플라톤의 <국가> 강해(83)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1.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2.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a-576b) -(1)

 

[562a –566d] 민주정에서 참주정으로의 변화

* 소크라테스는 이제 가장 아름다운κάλλιστος 정치체제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참주정τυραννίς과 참주τύραννος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우선 그는 민주정이 어떤 방식τρόπος으로 어떻게 참주정으로 변화하는지μεταβάλλει에 대해 언급한다.(562a) 그것은 과두정이 좋은 것ἀγαθόν으로 내세운 것 바로 부에 대한 끝없는 추구ἀπληστία 그리고 돈벌이χρηματισμός 때문에 그 체제가 파괴되었듯이 민주정 또한 그것이 좋은 것으로 규정하는 것(562b) 자유ἐλευθερία에 대한 끝없는 추구ἀπληστία와 다른 것들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그 체제가 파괴되고 참주정이 요청되는παρασκευάζει 상황에 이르게 된다.(562c)

* 민주정체제의 나라는 통치자들이 자유를 많이 허용해주지 않으면 그들을 과두정적 인간ὀλιγαρχικός들이라고 비난하고 통치자들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은 노예가 되려는 자라 모욕한다 προπηλακίζει, 그리고 자유ἐλευθερία가 극단에 이르러 통치자들과 피통치자들, 아버지와 아들, 시민ἀστός과 거류민μέτοικος 또는 외국인ξένος, 선생διδάσκαλός과 학생φοιτητής, 젊은이νέος들과 연장자πρέσβυς들 사이에 어떠한 위계나 예의도 찾아볼 수 없다. 서로가 하나같이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팔려온 남녀노예도 저들을 사들인 자에 못지않게 자유롭고, 아내와 남편 사이도 서로 평등ἰσονομία하고 자유롭다. (562d-563b) 이 나라에서는 자유가 넘쳐나 짐승 이를테면 개κύων도 여주인처럼 되고, 말ἵππος과 나귀ὄνος도 사람들이 비켜서지 않으면 언제든 들이 받을 정도로 자유롭고 당당하다σεμνῶς.(563c)

*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 그 핵심은 시민πολίτης들의 영혼ψυχή을 아주 예민하게ἁπαλῶς 만들어서 누가 그 어떤 예속이라도 가하려 든다면 발끈하고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563d) 이들은 자신들의 제멋대로의 자유를 위해 성문γεγραμμένων법이든 불문ἀγράφων법이든 법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참주정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 만큼 멋지고 기세등등하다νεανική.(563e)

* 그러나 과두정에서 생겨나 과두정을 파괴했던 것과 똑같은 질병νόσημα이 민주정에도 생겨난다. 그 질병으로 민주정의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ἐξουσία는 더 널리 퍼지고 더 강력해져서 되레 민주정을 완전히 예속시켜버린다καταδουλοῦται . 무엇이든 지나친 것τὸ ἄγαν은 그 반대쪽으로의 큰 변화μεταβολὴ를 이끌어낸다.(563e) 개인이나 나라를 막론하고 지나친 자유는 바로 지나친 예속δουλεία으로 변한다. 이렇게 민주정으로부터 참주정이 수립된다. 극단적인 자유로부터 최대의 예속이자 가장 야만스러운ἄγριος 예속이 수립된 것이다.(564a)

* 민주정을 참주정으로 예속시킨 질병은 다름아닌 저 게으르고ἀργός 사치스러운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들 중 가장 용감하고 부류를 이끄는 자들이 이른바 침을 가진 수벌κηφήν이고 그들 뒤따르는 자들이 침이 없는 수벌들이다. 이들 두 무리는 가래φλέγμα와 담즙χολή이 몸에서 그러듯이, 어느 정치체제에서 생겨나 소동을 일으킨다.(564b)

* 그러므로 나라의 뛰어난 의사ἰατρός인 입법가νομοθέτης는 최대한 이런 무리가 생겨나지 않도록 미리미리 잘 살펴보아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생겨난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이것들이 들어있는 봉방κηρίον까지 함께 도려내야만 한다.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이 처해있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우리의 논의에서 민주정체제의 나라를 세 부류γένος로 분할해 볼 것을 제안한다.(564c) 이들 중 첫 번째 부류는 과두정에서는 관직ἄρχων도 단련의 기회도 없어서 강력해질 수 없었지만 민주정에서는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 덕에 훨씬 더 강력해진 부류이다. 이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장 사납고 가장 앞장서 있는 자들로서 이 정치체제에서는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일을 이들 부류가 결정한다.(564d)

* 그리고 대중πλήθος과 구별되는 또 다른 두 번째 부류는 본성이 가장 질서 잡혀 있는 자들οἱ κοσμιώτατοι이어서 돈벌이도 잘하는 가장 부유한 자들οἱ πλουσιώτατοι이다. 그에 따라 이들은 수벌들의 먹잇감βοτάνη이라고 불린다.(564e)

* 그리고 세 번째 부류가 민중τὸ πλεῖστον이다. 이들은 스스로 노동을 하고αὐτουργός 공무에는 상관하지 않으며ἀπράγμων 가진 것이 결코 많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지만 모일 경우 민주정 내에서 수도 가장 많고πλεῖστον 가장 강력한κυριώτατον 부류이다. 그러나 이들은 앞장선 자들οἱ προεστῶτες이 가진 사람들로부터 재산을 빼앗아 그 대부분을 자신들이 차지하고 나누어주는 나머지를 자기 몫으로 얻을 뿐이다.(565a)

* 한편 재산을 빼앗긴ἀφαιροῦνται 자들은 정변까지는 엄두를 못내도 자신을 방어ἀμύνεσθαι할 수밖에 없어 무엇이든 하려 하지만 다른 편들로부터 민중에 대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자 과두정적인 인간들로 고발을 당해 결국 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진짜 과두정적인 인간ὀλιγαρχικοὶ이 된다. 민중들이 그러는 건 자발적인 게 아니라βούλονται μή 무지해서 그리고 중상하는 자들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이고,(565b) 부자들이 그러는 것 역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저 수벌이 침으로 그들을 쏘아 일으킨 나쁜 일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민중들과 부자들 사이에서는 서로 간에 탄핵εἰσαγγελία과 재판κρίσις, 소송ἀγών이 벌어진다.(565c)

* 그런데 민중δῆμος은 늘 누구 하나를 특별히 세워 자신들의 앞장을 서게 하고서 그를 보살피고τρέφειν 크게 키워내는αὔξειν 습성이 있다εἴωθεν.(565c) 그렇다면 참주는 이 선도자προστατῆς라는 뿌리ῥίζα로부터 싹 터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선도자가 참주로 변하는 것은 마치 아르카디아 지방의 뤼카이오스 제우스 신전에 관한 이야기처럼 민중의 앞장 선 자가 동족의 피를 맛보고 늑대로 변하는 것과 같다. 선도자는 동족이 피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사람들을 부당하게 고발하고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으로 끌고 가 사형시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불경한ἀνόσιος 혀와 입으로 동족의 피를 맛보며 사람들을 추방ἀνδρηλάτης하고 (565d) 살해하며ἀποκτεινύῃ 채무탕감ἀποκοπή과 토지재분배ἀναδασμός를 암시한다. 필연적으로 이런 자는 그러다가 정적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사람에서 늑대로 변해 참주 노릇을 하게 된다.(565e) 바로 이런 자가 재산οὐσία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내분을 일으키는 자ὁ στασιάζων가 되고 이런 자가 추방되었다가 적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되돌아오게 되면, 참주로 완성되어 돌아온다.(566a)

* 그런데 그를 쫓아낼 수도 없고 시민들의 적이라고 중상하여 처단할 수도 없을 경우, 그의 적들은 폭력을 써서 그를 암살ἀποκτεινύναι할 음모를 꾸미게 되고 그에 맞서 참주는 참주다운 저 유명한 요구αἴτημα 즉 민중을 돕는 자ὁ τοῦ δήμου βοηθός인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경호대φύλαξ를 민중들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이에 민중은 저자가 잘못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정작 자신들 걱정은 하지 않고서 경호대를 마련해준다.(566b)

* 돈도 있고 또 돈에 더해 민중혐오자μισόδημος란 혐의를 받게 된 사람이 이런 일들을 보게 되면 제 못난 것을 부끄러워하지도αἰδεσθείη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붙잡혀 죽음을 당해 다시 부끄러워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566c) 저 선도자 자신은 더 이상 선도자가 아니라 상대를 숱하게 쓰러뜨리고서 ‘나라라고 하는 전차δίφρος’에 올라타 있는 완전한 참주가 된 것이다.(56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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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2a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 ; 557c에서는 민주정이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로 나오고 이곳에서는 참주정이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로 나온다. 차이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민주정이 갖는 온갖 성격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만하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직접 참주정을 가장 아름다운 체제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아름다운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참주가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도 소크라테스는 ‘참 아름다운 정화’(567c)라고 말하고 있다.

* 562c ‘천성이.. 이 나라 뿐이라는 소리’ :  이를테면 『메넥세노스』 아래 귀절 참고.  아테네에서 ‘본성에 따른 태생상의 평등은 우리로 하여금 법적 평등을 추구하도록 강제하고 있고’( 239a)

* 562a ‘무정부상태anarchia’ : 무정부주의(anarchism)란 말에 익숙해서 이렇게 번역은 하였지만 기본 뜻은 ‘다스림이 없는 상태’이다.

* 562e ‘아들은 아버지처럼..두려워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지’ : 제멋대로의 자유가 가져다 준 이러한 행태는 <법률> 701b-c에도 나온다.

* 563c ‘사람들이 기르는 짐승’ : 로마 시대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율리아누스도 자신의 풍자 저서인 『Misopogon(수염 혐오자)』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 시민들의 과도한 자유와 방종을 비꼬며 짐승에 비유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당나귀나 낙타가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이 동물들을 호화로운 공공 산책로 끌고 다니는 상황을 마치 신부가 결혼식장으로 입장하는 것 같다고 풍자하고 있다.(Teubner 판, p. 22, 23)

* 563c ‘상대가 비켜서지 않으면 언제든 들이받아 버리지’ : 에우리피데스도 『이온(Ion)』 (635~637행)에서 아테네의 도시 생활에서 지식인 또는 시민들이 겪는 수모 중 하나로 길거리에서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 떠밀림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 564b ‘가래’와 담즙’이 몸에서 그러듯이’ : 뜨거운 체액은 통증을 유발하는(침이 있는) 것에 반응하고, 차가운 체액은 통증이 없는(침이 없는) 것에 반응한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85d 이하 참조.

* 564c  ‘세 부류’ : 부유한 자들, 가난한 자들 그리고 그 사이 중간에 있는 자들. 아리스토텔레스도 폴리스를 구성하는 세 부분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정치학』 4권 11장 1295b 1-5)

* 564d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 민주정의 지도자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벌(무능하고 기생하는 자들)’ 집단에 속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소수의 예외는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II 65. 8, 9 및 크세노폰 『향연』 8. 39) 또는 플라톤 자신이 직접 언급한 아리스티데스(『고르기아스』 526b)가 있을 것이다.

*565a ‘나머지를 민중에게 나누어주는’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장 초기이자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정에서 민중dēmos은 주로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국토 전역에 흩어져 있어 민회는 자주 열리지 않았고 필요성도 별로 없었다.(『정치학』 6권 1319a 30 이하, 1318b 11, 그리고 1292b 27)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아테네 농부들의 아테네 강제 이주는 아테네 민주정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아리스토파네스의 『평화』 632~643행,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14장 및 16장) 그러나 아테네 말기 민주정이 타락하면서 일찍이 페리클레스 이후 지급되었던 민회 수당ekklēstikos misthos은 민중을 현혹하는 꿀로 여겨졌고 그에 따라 민회가 빈번하게 열리게 되었다.(『정치학』 1293a 1 이하). 민회는 1년에 40회 정도 열려 국가 중요사안 일체가 모두 심의 되었다. 민회는 6000명 이상의 출석을 필요로 했고 도심에서만 열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시민은 참석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민회 수당으로 아고라에서 물건을 구입할 겸 생업을 일시 접고 상경하여 민회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수당지급도 중지되고 아테네의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특히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테테스 층의 귀족들에 대한 공공연한 기부요구, 상습적인 무고를 통한 이권수수가 횡행하면서 점차 아테네의 공동체 정신도 사라져갔고 민주정의 기본골조도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 565b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 : 이것 역시 아테네 민주정의 극도로 타락해 있던 시기 부유한 자들이 처한 상황들을 인용한 것이다. 당시 그들은 자위를 위한 공개적인 활동이 제한되어 있어 비밀 결사 같은 조직을 결성하였고(아리스토파네스 『말벌』 488 이하, 휘블리(Whibley)의 『아테네 정파들』(Pol. Part. in Athens) 65쪽 주석3 참고) 민중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을 중상하여 민중에 맞서는 과두정적 인간으로 몰아갔다.(『정치학』 1304b 21 이하) 이 과정에 인민 선도자가 개입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565c ‘민중은 … 습성이 있지’ : 이 내용 또한 아테네 민주정 전성기 시절 민중들이 민중의 선도자prostatēs로서 페리클레스나 클레온 등을 내세웠던 것을 가리킨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30년 가까이 민중에 의해 지속적으로 장군직에 선출되어 오랫동안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군림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의 정체를 민주정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참주정에 가깝다고까지 평하기도 하였다.

* 565e ‘늑대lykos가 되고야 만다는 이야기’ : 뮐러(Müller) 의 『그리스 역사가 단편(Frag. Hist. Gr.)』 제1권 31쪽, 헤카타이오스 단편 375) 및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안내』 제8권 2장 6절 참조. 영국의 유명한 인류학자이자 고전학자인 프레이저(Frazer)는 파우사니아스의 해당 책 해당 구절에 대한 각주에서 늑대인간에 관한 고대의 전설들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 미신의 후대 역사에 대해서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9판에 실린 맥레난(McLennan)의 ‘Lycanthropy(늑대인간)’ 항목을 참고. 비고전적 신화들에 나타나는 유사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타일러(Tylor)의 『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 제2판 제1권 308~315쪽을 참고.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 566a ‘채무탕감과 토지 재분배’ : 플라톤 『법률』 684e,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305a 5이하 참고. 참고로 아테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책에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참주이긴 해도 온화한 인품과 노련한 정치술로 솔론의 개혁안을 유연하게 실행으로 옮겨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 하되 쿠데타를 피해 망명한 귀족이나 부패한 귀족들의 토지만을 몰수 하여 평민들에게 분배하였고 영농자금의 지원은 물론 수공업의 발전과 해상 무역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참주가 된 장남 히피아스는 사리사욕에 빠진 데다가 폭정까지 일삼아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트려 결국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국외로 추방됨으로써 반세기만에 아테네 참주정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기원전 510) 당시 참주 히피아스의 동생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순교한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이후 아테네인들에게 참주정의 폭압성과 자유의 이념을 일깨어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후 아테네는 고전기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정치체제 또한 서서히 민주정으로 진입해들어 간다.
* 566b ’저 유명한 요구‘ : 이 또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호위대를 요구한 사례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길버트(Gilbert)는 『그리스 국가 제도론(Gr. Staatsalt.)』 I2권 281쪽 각주 1에서 경호대의 존재가 거의 모든 참주정의 발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 아테네 민주정에 관한 보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본 웹진 필자의 글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15), 주제2. 그리스 문화사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을 참고. 그리고 같은 곳 주제2. 5. ‘아테네 민주정 약사(略史) – 그 의의와 한계’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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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살폈지만 제멋대로의 자유를 특징으로 하는 이곳의 민주정은 아테네 민주정이 가장 타락했던 시기의 양태가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민중 스스로 끊임없는 몸부림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와 권리를 사회적으로 관철해온 근 100년 역사의 아테네 민주정의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모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민주정이 어떻게 참주정으로 변화하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용되는 사례들 가운데에는 정치체제에 상관없이 아테네 정치사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플라톤 자신의 경험을 연상시키는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누가 통치자이고 피통치자인지 모르게 된 상황은 기원전 406년 민주정 혼란기 아르기누사이 해전 직후 장군들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한 민중들의 행태를, 추방되었다 돌아오는 선도자의 행적은 기원전 550년 전후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를, 그리고 동족에 대한 살해, 탄핵과 재판, 소송 등은 기원전 416년 멜로스인 학살, 플라톤 자신이 체험한 30인 참주정과 말기 아테네 민주정의 타락상을 연상시킨다. 특히 참주의 행태를 묘사할 때는 그가 살던 시대의 가장 눈에 띄는 참주였던 쉬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 1세의 여러 모습과 특징들을 차용하고 있다. 다만 이곳의 정치체제의 변화가 플라톤의 실제 역사관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라도 플라톤은 자신의 사후에도 아테네가 계속 타락을 면치 못할 경우 결국 참주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J. Adam. 노트 참고) 그러나 아테네는 플라톤 사후(기원전 348년) 10년이 지난 즈음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에 패배하면서 아예 멸망하고 만다.

*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이 당대 주류 지식인이고 소피스트나 수사학자, 극작가들은 플라톤에 의해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있었던 비주류 지식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플라톤이 그들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플라톤이 당대 주류 지식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당시 주류 지식인은 소피스트와 수사학자, 극작가들, 이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실용 철학자들이었고 플라톤은 명문가 귀족이긴 하지만 현실과 무관한 수학이나 천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홀대를 받았다. 아테네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소크라테스와 데모스테네스가 나라의 운명을 걸고 크게 논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왜 플라톤은 아무런 말이 없었는가를 문제 삼는 사람도 있으나 배의 비유에서 조타수가 완전 무시되고 있듯이 사람들은 애초부터 플라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죽임을 당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스승 플라톤이 죽기 직전 아테네를 떠났다. 플라톤은 망해가는 아테네 한 가운데서 묵묵히 제자들을 길러가며 자신의 철학 담론을 글로 써내려갔고 우연찮게 그것이 온전히 전승되고 그 통찰이 갖는 탁월성이 인정되면서 기원 후 한참 뒤에야 철학사의 거두가 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기본적으로 시민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관직에 참여하고 정치적 결정에 있어 시민들의 다수의 권위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체제로 규정한다. 그런데 인민 선도자가 나타나 법보다 그가 이끌어 낸 군중의 결의psephismata가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면 인민은 다수로 구성된 한 사람 즉 각자로서가 아니라 집합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갖는 민주정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민주정을 자신이 분류한 민주정의 종류 중 가장 극단적으로 타락한 4번째 것 즉 선동정치로 이어져 참주정과 유사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5권 4장 1392a 5-20 참고) 이곳에서 그려지는 민주정의 타락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민주정의 마지막 단계와 완전히 일치한다. 즉 그것은 민주정 스스로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와해시켜가면서 스스로를 참주정의 예속에 빠트리게 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참주정의 등장 배경으로 부자들에 대한 반감을 등에 없고 권세를 키워온 인민 선도자의 등장을 꼽고 있다.(『정치학』 5권 5장 1304b 20 –1305a 35)

* 플라톤은 이곳에서 민주정이 어떻게 참주정으로 변화하는 지를 그리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동일한 사람이 인민 선도자와 장군이 되었던 예전에나 그러한 일이 있었고 (『정치학』 5권 5장 1305a 7 이하) 실제로 참주정은 귀족정에서 과두정 형태의 정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등장했다.(Whibley <그리스 과두정> 72~83쪽. J. Adam 564a 노트 참고) 다만 이곳에서 플라톤은 이곳 논의 목적에 따라 자신이 설정한 욕망구조의 타락과정에 맞추어 참주정의 기원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는 개인의 영혼이 쇠퇴할 때, 모든 욕망이 등질화 되는 ‘isonomia 평등’의 상태에서 불필요한 욕구의 뒤를 이어 불법적인 욕구 내지 ‘비자연적인paranomoi 욕망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비자연적인 욕망의 정치적 표현이자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의 등장을 그리고 있다.

* 특히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는 과두정에서 이미 관철된 계층 간 고유 역할의 붕괴와 욕구의 등질화에 더해 사회 관습적으로 그간에 용인되었던 모든 일상의 위계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려 민주정이 참주정으로 타락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자유의 극단적인 과잉은 모든 사회적 차이 이를테면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는 물론 부자 사이, 부부 사이, 노소 사이를 동등한 사이에 존재하던 관습적 위계와 차이마저 무화시켜 모두가 서로 동등한 관계로 전환시켜 결과적으로 충돌과 갈등, 혐오를 불러일으켜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던 제멋대로의 자유마저 심각하게 제한하게 만든다. 욕망이 등질화된 사회 내 갈등관계에서는 누군가가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 자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회적 관계는 결국 날이 갈수록 보다 힘센 자가 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관계로 변화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러한 관계 속에서 강자에 대해서는 열등감에 따른 시기 질투와 선망을, 약자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무시와 폭압을 서슴지 않는 신경증적 분열적 인간으로 변모해간다. 자학과 가학을 오가는 이러한 분열적 심리 상태는 마침내 자신을 보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약자를 짓밟고 자발적으로 강자에 의존하고 빌붙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결국 자유의 과잉은 자발적인 예속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강자는 그들의 보호자임을 자처하여 사회 부유층을 착취하여 일부를 나누어 주고 동시에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명분으로 더욱 강고한 방식으로 그들을 통제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그토록 예민하게 추구했던 자유를 포기하고 예속을 자신의 삶의 보전책으로 기꺼이 수용한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민주정을 구성하는 세 부류 즉 민중과 부자들 그리고 선도자들은 선도자의 주도 아래 그러나 자발적인 형식으로 위와 같은 상호 지배 관계의 변화를 거쳐 그들 스스로 마침내 참주정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 자유의 과잉이 초래하는 이러한 비극상은 20세기 들어와 에리히 프롬(E. Fromm)의 『자유로 부터의 도피』를 통해 파시즘의 등장 배경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크게 재조명된 바 있다. 이때 그의 분석이 갖는 탁월함은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내적 심리와 관련한 심리학적 방법론을 채용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그 개인적 자아가 결여하고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그 자신을 융합시키려는 경향이 있다.”(재5장 도피의 메카니즘 제1절 권위주의 도입부) 즉 개인의 불안과 공포, 무력감은 그로 하여금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권위에로의 맹목적인 귀의를 결행케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미 2500년 전에 플라톤 역시 프롬과 똑같이 정치체제 변화를 영혼 내지 욕망구조 즉 심리학적 요인과 결부시켜 자유의 역설과 참주의 등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플라톤의 관점은 기본 틀에서 프롬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점만 보더라도 이곳에서 참주정의 등장과 관련한 플라톤의 성찰이 얼마나 놀랄만한 것이자 선구적인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트럼프 같은 현대판 참주의 등장과 극우주의, 파시즘의 위협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참주정의 등장 배경과 관련한 2500년 전 플라톤의 선구적 통찰이 갖는 위대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 프롬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 통찰의 중요성을 깨닫고 운위하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반성과 비판적 성찰은 생각났을 때가 제일 빠를 때이다. 그 또한 오늘 우리가 <국가>를 다시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 참고로 제8권 이상국가가 해체되어 타락하는 마지막 단계로서 참주정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지금까지 살핀 정치체제의 타락과 욕망구조의 변화 과정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간략히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정치체제

통치 구조 욕망 구조 목표 지배 욕망
철인왕정 철학자 왕 지배

3계층 분업과 조화

이성 부분의 지배를 통한

이질적 욕망들의 조화와 공존

이성 이성의 지배
명예정 전사 계층의 지배

통치, 전사 계층 간

경계가 와해

수호자 계층의 물질화

이성 부분의 변질

기개 부분의 지배

욕구 부분 절제가 흔들림

명예 기개의 지배
과두정 소수 부자의 지배

3계층 형식상 존재실질 경계는 와해

생산자 계층에 대한 착취

욕구의 등질화

절제의 덕 와해

금권욕의 전일화

필수적 욕구의

지배

민주정 민중 혁명

민중의 지배

3계층 경계 완전 와해. 선도자 출현

욕구의 등질화, 금권화에

제멋대로의 자유가 추가

자유 불필요한 욕구의

지배

참주정 참주의 지배

참주를 제외한

전 계층의 예속화

권위를 향한 자발적 의존

영혼의 질병 상태

권력 불법적인 욕구의

지배

 

* 칼리클레스는 『고르기아스』에서 아래와 같이 강자를 찬양하며 정의와 평등을 비웃는다. (483e-484a) “우리는 우리 자신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강한 자들을 빚어내는 과정에. 사자들을 그렇게 하듯이, 그들을 어릴 때부터 붙잡아 동등한 몫을 가져야 하며 그게 훌륭한 것이고 정의로운 것이라는 말로 주문과 마법을 걸어 노예로 만들지요. 하지만 충분히 강한 본성을 지닌 사람이 태어나면 그는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부서트리며 벗어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노예는 자연에 반하는 우리의 기록, 마술, 주문, 법들을 모두 짓밟고 들고 일어나 자신이 우리의 주인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자연의 정의가 빛을 발합니다.”

이제 가장 타락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과 참주에 대한 논의가 남아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연 철인왕정과 철학자는 참주정과 참주보다 정말 강하고 행복한지 그 최종적인 판정이 기다리고 있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1.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2.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a-576b) – (2)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5-부정적인 것은 실재하는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5-부정적인 것은 실재하는가?

1)

모순하는 것은 자기인 동시에 자기의 타자이다. 즉 A이면서 -A이고 거꾸로 -[-A]이면서 동시에 [-A]이다. 헤겔은 이처럼 자신의 타자로 필연적으로 이행하는 모순의 운동을 ‘자기 자신을 배제하는 반성[sich selbst ausschliessende Reflexion]’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곧 “자립성 속에서 자기를 지양하여” “스스로 자신을 자신의 반대물로 번역하는[Uebersetzen]“ 운동이다.

대립하는 것은 자기의 부정인 타자를 부정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이런 이중 부정을 통해

자기 관계에 이르고 자립적인 것으로 되지만, 동시에 이는 타자에 대립하는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모순하는 것 속에서 출현하는 자기를 배제하는 반성을 통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몰락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배제하는 반성은 동시에 정립하는 반성이다. 모순의 결과는 0일 뿐만은 아니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자립적인 것이 정립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이 자기 자신을 통해 부정되는 것은 이렇게 정립된 자립적인 것을 지양한다. 이것은 모순 속에 진정으로 몰락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1)

2)

이런 몰락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 즉 0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을 통해 대립하는 것이 몰락한다는 것은 그런 모순하는 것을 산출했던 공간 자체, 그리고 이를 열어놓는 본질의 부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모순이 출현하는 것을 통해 그 본질은 주관적인 본질임이 드러난다.

대립에서 모순으로 이행하고 주관적 본질이 객관적 본질로 전환하는 과정은 역동적인 과정이다. 모순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위상을 달리한다. 긍정적인 것은 자기 동등한 것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것에 부등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 모순이지만, 그 모순은 아직 감추어져 있다. 긍정적 모순은 아직 대립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에 이르면, 이 부정적인 것은 자기에 부등한 것이니,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해서도 부등하며, 그 결과 내적 모순이 외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모순이 출현하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외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며 주관적 본질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본질의 주관성 때문에 부정적인 것에서 자기모순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순에서 부정적인 것이 지닌 자기 부정성은 곧 이행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부정적인 것의 자기모순은 새로운 반성을 일으키면서 더 근본적이고 더 포괄적인 본질, 사태에 외적인 본질이 아닌 사태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본질, 즉 객관적 본질이 출현하게 된다. 이것이 곧 규정하는 반성이며 여기서 출현하는 객관적 본질 속에 부정적인 것은 이제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3)

규정하는 반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제 더 근본적이고 더 포괄적인 본질 즉 객관적 본질이 등장한다. 그 이전에 서로 모순하는 것은 그런 객관적 본질이 열어놓은 공간 속에서는 모순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서로 모순하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거의 통일로서 본질”(GW11, 282)이다.

“그래서 자립적인 것은 자기 자신을[eigene]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는 통일이 된다. 왜냐하면, 이 자립적인 것은 자신이 정립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이런 통일은 본질에 속하는 통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와 동일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1)

이 객관적 본질은 개체적 현존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개체적 현존과 대립하지 않는 “긍정적인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본질”((GW11, 282)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이데아처럼 초월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적 현존을 서로 매개하는 운동으로서만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는 것으로서만 출현하니, 이런 점에서는 이 본질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성으로서 자기에 관계하며 그러므로 자기를 규정하고 배제된 정립된 존재[개체적 현존]로 만드는”(GW11, 282) 동일성이다.

이런 객관적 본질은 자기를 현존하게 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것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분지한다. 즉 A=P or -P이다. 이런 근거 속에서 모순하는 것들은 서로 종합하여 전체적 본질을 이루는 것이 된다. 이제 P나 -P거나, 정립된 개체적 현존은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이 되며, “정립된 존재가 정립된 존재로 되는 가운데 이 정립된 존재는 자기 자신과 통일[본질] 속으로 복귀한다.”(GW11, 282)

이제 그 속에서 본질이 긍정적으로, 자기 관계하는 자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즉 정립된 존재는 본질이 전적으로 자립화한 것이니 “이 본질은 근거 즉 이런 자신의 부정태[개체적 현존] 속에서 자기와 동일한 것이며 긍정적인 것이다.”(GW11, 282)

이상에서 모순의 상호 통일이 곧 근거라는 사실을 제시한 끝에 헤겔은 이제 모순론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러므로 자기 모순적인 자립적 대립은 이미 그 자체 근거이다. 자기와의 통일이라는 규정이 덧붙여진다. 이 규정을 등장하게 하는 것은 곧 자립적인 대립물 각자가 자기를 지양하고 자기를 자신의 타자로 만들어 몰락하지만 그런 가운데 동시에 다만 자기와 합치하며 그러므로 자기의 몰락 속에서 즉 자신이 정립되거나 부정되는 것 속에서 오히려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와 동일하게 된 본질로 된다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2-3)

4)

5)

헤겔은 모순을 다루는 끝에 주를 세 개나 덧붙인다. 그 가운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주 1이다. 주2는 형식논리학에서 모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배중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며, 주3은 고대 변증론자가 모순은 운동의 근거라고 말하면서 모순을 인정하지 않기에 운동 자체를 부정했지만, 모순이 운동의 근거라고 한 것 자체는 옳다고 한다. 헤겔은 이런 주 모두에서 모순이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 했다.

주1에서는 헤겔은 흔히 실재는 긍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주관이 사유를 통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을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은 전자는 객체이어야 하지만(그 이름상으로는 가정된 것Poniertsein, 정립된 것을 표현하더라도) 후자는 주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여진다. 물론, 여기에서 주관적인 것은 다만 외적 반성에 속하기에 그 자체로 대자적인 객체를 전혀 다루지 못하며 전적으로 그런 객체 앞에 나서지도 않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4)

모든 실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일견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부정적인 판단이다. 어떤 것은 P이다가 허위라면 어떤 것은 P가 아니라는 주장은 진리가 된다. 이 부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소위 긍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긍정적 사실 또는 사태가 있을 때 긍정판단이 진리가 된다면, 부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부정적 사실이 있어야 이 부정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부정적 사실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은 지각될 수도 없고 인과적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지각되지도 않고 인과적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부정적 사실은 없다고 해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부정적 사실이 없다면, 부정판단은 왜 진리가 되는 것일까? 부정적 사실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면, 부정판단은 긍정판단을 사유를 통해서 부정함으로써 출현한다고 설명된다.

긍정판단이 허위이므로 그것으로부터 긍정판단을 사유를 통해 부정하는 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번에는 긍정판단을 허위로 만드는 것이 문제가 된다. 긍정판단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긍정적 사실이라면, 긍정판단을 허위로 만드는 것은 그런 긍정적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긍정적 사실이 없다는 것은 부정적 사실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닌가?

결국, 부정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할 수도 없고, 부정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다. 부정적 사실의 존재는 일종의 딜레마이며 자가당착에 빠지는 문제다.

5)

헤겔은 위의 구절에서 부정적인 것을 주관적 사유의 산물로 보는 입장을 비판하는데, 그는 우선 부정적인 것이 주관적 사유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에 대응하는 대자적인 객체[부정적 사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사실상 부정적인 것이 주관의 자의가 추상한 것에 지나지 않거나 외적인 비교에서 나온 규정을 표현한다면 이 부정적인 것은 물론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것 앞에 출현하지 않는다. 즉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자기 자신에서 그러한 공허한 추상에 관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에서 자기가 긍정적인 것이라는 규정도 물론 다만 외적인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4)

부정적인 것의 실재를 부정하는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론은 단순하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조차도 사실은 사태 자체에 외적인 반성에서 나오는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겔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유가 필요하다.

부정판단이 지닌 딜레마는 긍정판단과 부정판단을 각기 고립적으로 이해하면서 나오게 된다. 이를 고립시킨다면, 부정판단은 긍정판단 전체의 부정이니, 긍정판단의 진리에 의존하게 된다. 이 긍정판단이 진리라면 문제없는데 허위라면, 문제가 벌어진다.

긍정판단은 독자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니(이 경우 긍정판단의 허위를 결정하기 위해 부정판단의 진리로 되돌아가는 것은 도돌이표에 불과하다) 그것이 허위인 경우 부정적 사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정적 사실이란 그 자체가 개념상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니, 있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다.

6)

그러나 우리의 사유는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반성적이다. 즉 사유 자체가 반성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사유는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빨간색은 파란색과 같은 빨갛지 않은 색에 대립하여 규정된다. 이 파란색을 빨간색의 부정으로 만드는 것은 사유에서의 반성적 관계다. 사실 파란색은 사유에서는 반성적 관계를 통해 빨간색의 부정이지만, 사실은 그저 파란색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정판단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긍정적 사실에 대한 판단이며, 다만 사유를 통해 부정적인 판단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나는 파란색을 보는 순간, 이것은 파란색이라고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동시에 이것은 빨간색이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진리인 부정적인 판단은 사실 긍정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을 통해 나온 것이다.

,

거꾸로 허위인 긍정판단도 마찬가지로 반성적으로 판단된 것이다. 이것은 파란색인데, ‘이것은 빨간색’이라고 판단할 경우 그것은 허위이다. 이런 판단은 이것은 파란색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동시에 이것은 빨간색이라는 판단은 허위가 된다. 이는 곧 반성 관계를 통해서 나온 것이지, 이 허위인 긍정판단이 부정적 사실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6)

인간의 사유가 반성적이라는 사실은 진리인 부정판단보다 더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없다. 어떤 논리도 판단을 고립적으로 즉 요소 명제나 원자 명제로 파악한다면, 부정판단의 진리의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긍정적인 판단이든, 부정적인 판단이든 사실은 다 긍정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 긍정적 사실을 반성적 사유를 통해 긍정적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진리인 부정적인 판단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긍정적이다. 부정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긍정적 사실은 서로 상이할 뿐, 그 사실 사이에는 대립은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다른 문제다.

긍정적 사실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 긍정적 사실이 서로 대립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전기는 +전기에 대립하지만, -전기가 부정적인 사실은 아니다. 남극은 북극에 대립하지만, 남극이 부정적 사실이거나 아니면 북극이 부정적 사실은 아니다.

형식논리학에서 사유는 존재에 외면적인 것이며 이때 어떤 것들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묶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 사유에 속하는 것이며 실재 자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의 선험적 철학에 따르자면, 사유가 존재를 구성하므로 사유에서 대립은 존재를 대립적으로 구성한다. 그러므로 사유에서의 대립은 존재에서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빛과 어둠을 보자. 양자는 대립하지만, 이는 사유에서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빛과 어둠은 곧 존재에서의 대립이기도 하다. 어둠이 빛에 대립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둠이 어떤 긍정적인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어둠은 고유한 실재를 지닌다. 그러나 빛과 대립하여 본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현상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동시에 반성적 사유에 의해서 대립한 것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것이 사유를 통해 구성된 만큼 긍정적인 것 역시 사유를 통해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위에서 부정적인 것만 사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사유에 속한다고 했다.

7)

물론, 이런 대립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할 때 이는 현상적인 대립이다. 칸트는 물 자체는 사유 밖에 있다고 했다. 사유에 의해 구성된 대립이 아닌 물 자체에서의 대립이 있는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헤겔은 외적 반성에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물 자체에 내재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규정하는 반성에 사유에서 본질은 곧 객관적이니 여기서 긍정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것도 실재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객관적인 것으로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4-모순과 의식 경험의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4-모순과 의식 경험의 길

1)

앞에서 대립을 살펴보았다. 대립은 상이한 것이 모순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다. 여기서 한편으로 개체적 현존은 자기의 부정인 타자를 통해 규정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개체적 현존은 직접적이어서 서로 무차별하다.

여기서 대립을 통해 규정되는 것은 개체적 현존에 대해 외적인 반성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즉 마치 영하와 영상이 섭씨 0도라는 주관적 기준에 의해 대립하듯이, 주관적인 관점을 통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헤겔은 이런 대립하는 것을 모순하는 것과 구분하는데, 모순하는 것은 우선 대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긍정과 부정이 서로 대립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런 대립에서 긍정과 부정으로 규정된다는 말은 곧 그 자신이 직접 규정되지 않고 필연적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정립된 존재]는 말이다.

이때 타자는 다시 자기의 부정(-A)이니, 결국 자기의 부정을 부정하는 이중 부정(–A)을 통해 자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각자는 타자를 이미 내포하고 있는 전체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각자는 타자를 배제한 채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이고 대자적 통일이다.

이런 이중 부정이 성립하는 것은 A와 -A 즉 긍정과 부정 사이에 어떤 다른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배중율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A와 -A는 서로 배타적인[부정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2)

대립하는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각기 직접 존재하는 것이다. 양자는 개념에서는 대립하지만, 실제 존재는 우연하다. 그러나 모순하는 것에서 양자는 서로에 대해 필연적이다. 즉 자기[A]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타자[-A]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순하는 것에서 자기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이 된다. 또한, 타자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즉 A이면 -A이며, -A가 아니면[–A] A도 아니다[-A]. 결국, 논리학적으로 말하자면, 모순하는 것은 딜레마, 이율 배반이며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자립적인 반성 규정은 다른 규정을 포함하고[-A] 이를 통해 자립적으로 되는 것[A]과 동일한 관점에서 똑같이 타자를 배제하므로[–A] 자립적인 반성 규정은 그 자립성 속에서[A] 자신의 자립성을 자기로부터 배제한다[-A]. 왜냐하면, 이 자신의 자립성이 성립하면[A] 자기와 다른 규정을 자기 내에 포함하고[-A] 이를 통해 외적인 것에 관계하지 않을 뿐[-A]이지만, 마찬가지로 직접 자기 자신이고 자기에 부정적인 규정을 자기로부터 배제하기[A]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9)

모순이 이처럼 필연적으로 자기의 타자로 이행한다는 것은 곧 어떤 개체적 현존에 대해 서로 모순적인 술어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이며 이는 그런 것이 이제 더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3)

타자와 모순하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에 자기가 모순하는 것이다.

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정립된 모순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부정적인 통일 자체이면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며[A] 그런 가운데 각자는 자기를 지양하고 자신의 반대물[-A]을 정립하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9)

② “이 양자는 배제하는 한에서 규정하는 반성을 이룬다. 배제는 구별이며 구별된 것 각각은 배제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 전적인 [타자의] 배제이기에[–A] 각각은 자기 자신 속에 자신을 배제한다[-A].”(헤겔, 논리학, GW11, 279)

이런 자기모순 속에서 즉 자기를 자신이 배제하는 가운데 대립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던 외적 반성이 사라지고 ‘규정하는 반성’이 출현한다.

어떤 것이 자기 모순적이어서 자기가 존재하는 동시에 자신의 타자가 존재하게 된다면, 이 모순은 사실 어떤 개체적 현존을 규정하는 공간을 열어놓는 본질이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한계 선상에서 출현하는 어떤 것은 이제 이렇게 규정되면서도 동시에 그 반대로 규정되며 또 이렇게 규정되지도 않고 그 반대로 규정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제 본질이 발전하여 이런 모순적인 것을 포괄하는 더 근본적인 본질 즉 심층적 근거가 출현하게 된다면, 이 근거 속에서 모순은 사라지고 각자는 그 근거의 공간 속에서 일정한 현존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근본적인 본질에 이르는 반성이 곧 규정하는 반성이다.

이율배반적인 것은 칸트에서 물 자체가 출현한다는 것의 신호이다. 물 자체는 인식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니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반대도 성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심지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칸트는 이런 물 자체에 부딪히면서 인식이 난파하고 말지만, 헤겔에서 이런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서 더 포괄적이며 더 근본적인 본질, 외적 주관적 반성이 아니라 내재적인 객관적 본질이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 자체에 부딪힘으로써 본질로 반성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 관해서는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개념으로 서술한 바가 있다. 논리학 본질론에서 모순 개념은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을 배후에 깔고 이루어지는 반성 운동이다.

4)

대립하는 것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두 계기로 가진다면, 긍정과 부정의 관계는 주관적 관념에 속하는 것이며 각자는 직접 우연하게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것만 존재하거나 부정적인 것만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순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그 의미가 변화한다. 이제 긍정적인 것은 어떤 것이 직접 정립되어 있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것에 대립하는 것이니, 이런 대립한다는 점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잠재적 모순이다. 그런 모순이 외화하면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것은 모순이다. 즉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배제하여 자기와의 동일성을 정립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을 어떤 것의 부정태로 만들며 그럼으로써 자기가 자기로부터 배제했던 것인 타자로 만든다.”(헤겔, 논리학, GW11, 280)

거꾸로 부정적인 것은 무엇을 부정하는 것 즉 긍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런 부정적인 것 자신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니, 이를 통해 긍정적인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런 긍정적인 것은 아직 자기 속에 내포되어 있으며 드러나지 않았다. 이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외적 반성에서 주관적 본질이 규정하는 반성에서 심층적 근거로 발전해야 한다.

“긍정적인 것은 다만 잠재적으로만 이런 모순이다. 그에 반해 부정적인 것은 이 모순이 정립된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것의 자기 내 반성 속에서 그리하여 그 자체로 대자적인 부정태가 되거나 부정태로서 자기와 동일하게 되면서 이 부정적인 것은 비동일한 것 즉 동일성을 배제하는 것이라는 규정을 가지게 된다. 부정적인 것은 동일성에 대립하여 자기 동일적인 것이고 따라서 배제하는 반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자기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0)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이런 이행은 각자가 그 자신에서 타자가 된다. 대립하는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순하는 것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발전하는 운동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내재하는 모순이 외화되고 이를 통해 본질로 반성이 일어나는 운동의 과정이다.

“이제 나가서 각자[긍정과 부정]는 타자의 본래 모습과 같은 것이니, 부등한 것[긍정과 부정]의 관계는 양자가 동일성을 이루는 관계[ihre identische Beziehung]이다.”(헤겔, 논리학, GW11, 280)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3-대립과 남녀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3-대립과 남녀 관계

1)

앞에서 설명했듯이 상이성은 가족 유사성과 같이 개체 사이의 동등성과 부등성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즉 동등성과 부등성은 다른 관점에 따라 규정되니, 어떤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점에서 그들이 부등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동등성은 상이한 개체적 현존에 외면적인 것일 뿐이다. 이는 외적 반성의 결과다.

상이한 개체적 현존들 가운데에는 경험의 발전을 통해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자면 암수 또는 음양의 관계다. 헤겔은 이런 서로 대립하는 개체들을 긍정적인 것[Positive]과 부정적인 것[Negative]으로 대표한다.

대립하는 것은 상이한 것과 모순적인 것 사이의 중간 단계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상이한 것보다는 모순에 가까운 측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상이한 것에 가까운 측면도 지닌다. 대립하는 것은 자주 모순적인 것과 뒤섞여 사용되는데, 헤겔은 대립하는 것을 이런 중간적인 것으로 모순적인 것과 구분한다.

2)

상이한 것과 달리 대립하는 것은 부분적인 동등성이 아니라 집합 전체가 어떤 하나의 관점[A]에서 A이든가 그것이 아닌 것 즉 -A로 갈라진다. 여기서 서로 부정하는 관계가 성립하려면 A와 그것의 부정인 -A가 배타적이어야 한다. 즉 양자의 가운데 A이면서 동시에 -A인 것이 없어야 하며, 양자는 배타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 모든 개체적 현존은 생식의 측면에서 암컷이든가 아니면 수컷이다. 암컷이거나 암컷이 아닌 것은 없다.

서로 대립하는 개체적 현존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의 측면은 상호 관계의 측면이다. 다른 측면은 무차별성의 측면이다. 상호 관계의 측면에서는 모순적인 것에 가까우며 무차별적인 측면에서는 상이한 것에 아직 머물러 있다.

두 측면 가운데 먼저 상호 작용의 측면을 보자. 이 측면은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있다. 우선 배타적, 부정적 관계의 측면이다. 어떤 것은 그 자체로 규정되지 않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① 어떤 것은 자신의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즉 “비교되는 반성 속에서만” 규정된다. 즉 P[Positive]는 -N[Negative] 이고 N은 -P이다.

타자에 의해 부정된 것으로 규정된다면, 어떤 것은 자신의 규정 속에 이미 타자를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② 각자는 자기의 타자를 포함하는 전체이며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이다.

“두 계기의 각자는 그 자신의 규정을 지니는 가운데 전체이다. 각자는 다른 계기도 또한 포함하는 한에서 전체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2)

동등성은 자기 동일적인 것이지만, 부등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니, 이런 부등한 것을 부정하면서 부등성을 내포하는 동등성이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부등성도 마찬가지다. 부등한 것은 동등한 것과 부등한 것이니, 이런 부등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부등성은 자기 자신과 동등하다. 이처럼 동등성을 내포하는 부등성이 곧 부정적인 것이다.

“이런 자기와의 동등성이 자기 내로 반성하면 자기 자신 속에서 부등성에 대한 관계를 포함하면서 긍정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부등성이 자기 자신 속에서 그 비존재 즉 동등성에 대한 관계를 포함하면 부정적인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3)

3)

그것은 타자에 의해 타자가 아닌 것으로 정립되지만, 이 타자는 거꾸로 어떤 것 자신에 의해 정립된 것이니, 어떤 것이 규정된다는 것은 곧 자기에 의해 정립된 타자에 의해 정립된 것이니, 어떤 것은 곧 ③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는 것으로 되면서 곧 자기 내로 반성한 것,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측면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대립의 ‘절대적 계기’다. 여기서 양자는 상호 순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각자는 자기 자신이며 동시에 타자이고 이를 통해 각자는 자기 규정성을 타자에서 갖지 않고 그 자신에서 갖는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 관계하면서 이때 다만 자신의 타자에 관계할 뿐이다. 각자는 이중적 측면을 갖는다. 각자는 자신의 비존재에 관계하지만, 이 타자를 자기 내로 반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비존재는 다만 그 자신 속에 있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73)

대립은 앞에서 말한 타자에 의해 부정되는 정립된 존재의 측면과 이중 부정을 통해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지닌다. 어떤 것이 자기 내로 반성하며 ① 자기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자기가 자립적인 것[–A]임을 의미한다. ② 자기가 타자에 의해 부정되는 관계에 있다는 것[-A]이다. 이는 정립된 존재의 측면이다. 그러므로 자립적 존재는 다시 타자에 의존하는 정립된 존재가 된다.

전자의 측면은 ①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측면[–A]에 대응하며 후자의 측면은 ②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측면[-A]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성하는 규정은 우선 양자가 대립의 절대적 계기라는 점에 존립한다. 그것이 존립한다는 것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의 반성이다. 그것을 존립하게 하는 매개 속에서 ① 각자는 자신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서 따라서 그의 타자 또는 ② 그 자신의 비존재를 통해서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73)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해 우선 각자는 타자가 존재하는 한에서 존재한다. 각자는 타자를 통해서 ② 그 자신의 비존재를 통해서 각자의 본래 모습이 된다. 각자는 다만 정립된 것이다. 둘째로 각자는 ①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존재한다. 각자는 타자의 비존재를 통해서 그 본래 모습이 된다. 각자는 자기 내로 반성한다.”(헤겔, 논리학, GW11, 274)

4)

이런 순환은 구체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자가 이미 남자에 의해 규정된 존재니, 여자에 의해 남자로 규정된다는 것은 사실은 남자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규정한다고 해 보자. 남자가 이미 여자에 의해 규정된 존재니, 이는 여자가 자기를 규정한다는 말이 된다.

실제 우리는 남자가 여자를 비난하면서 한탄할 때 사실은 자기가 그런 여자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남자를 비난할 때 그런 남자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여자 자신이다.

앞에서 지젝이 반성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보았는데, 그때 그는 ‘전제를 정립하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가족으로부터 혹사당하는 어머니의 예를 들었다. 그 어머니는 가족이 자기를 혹사한다고 불평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그런 가족을 자기를 혹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주 드는 예로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사실은 여자가 그 남자로 하여금 그를 유혹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예를 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대립에서 정립된 것이 곧 자기 내 반성된 것이다. 그러나 대립하는 것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즉 직접적 무차별성의 측면이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개념적으로는 서로 대립적으로 규정되지만, 동시에 각자는 직접 무차별한 하나의 현존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대립적 규정은 특정한 관점에 따른 것이며 이는 외적인 반성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에서도 기점을 어디로 잡는가에 따라서 음수와 양수가 대립한다. 우리는 섭씨 0도를 기준으로 그 이하는 음수로 그 이상은 양수로 잡을 수 있고 화씨 0도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음이거나 양이 된다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지, 그 개체적 현존 자체에 고유한 것, 내적인 것은 아니다.

대립적인 것이 이런 직접적인 규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통해 드러난다.

우선 이런 직접성 때문에 어느 개별적 현존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그에 대립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든가 상관없다. 남녀의 관계에서 남자를 긍정적인 존재로 보든, 여자를 긍정적인 존재로 보든 차별이 없다.

“따라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규정성 가운데 하나가 사실 모든 측면에 속하지만, 그런 규정성은 서로 뒤섞일 수 있으며 각 측면이 존재하는 방식은 각 측면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도 괜찮으며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도 괜찮은 방식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4)

또한, 남녀는 개념적으로는 대립하지만, 남과 녀는 따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데, 이 세상에는 남자만 존재하거나 여자만 존재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존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우연적인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빛만 있다거나 어둠만 있을 수도 있으며, 자산만 있거나 빚만 있을 수도 있다.

헤겔은 대립을 설명하는 주석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갖는 흥미로운 예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누가 어떤 자산을 타자에게 빌려주었을 때, 그것은 그 자산을 누가 사용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빌려준 자에게는 부정적인 것이고 빌려 온 자에게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권리, 소유권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빌려준 자에게서는 긍정적인 자산이고 빌려 온 자에게서는 부정적인 빚이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a* +a와 +a*-a가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알다시피 위의 두 식은 음수와 양수를 대립적으로 보는 관점에 따르자면, 동일한 결과 즉 -a²이다. 그러나 -, +를 직접적인 것으로 읽는다면,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즉 전자 즉 -a를 빚으로 보면 빚a를 a번 곱하면 빛 a² 즉 -a²가 나온다. 그런데 후자에서 +a를 자산으로 읽고 -a를 a 번 ‘빌려준다’로 읽는다면, 여전히 자산이 a² 만큼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5)

대립하는 것은 이처럼 두 측면을 지닌다. 하나의 측면에서 대립하는 것은 타자를 부정함을 통해 규정된다. 이는 동시에 이중 부정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대립하는 것은 직접적인 것이고 무차별한 개체적 현존이다.

이런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대립하는 것은 이제 ‘자기 자신에서[an ihm selbst]’ 긍정적인 것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긍정적인 것은 자기 자신[an ihm selbst]에서 타자에 대해 긍정적인 규정성이 들어 있는 관계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은 타자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규정성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안에서[in ihm selbst]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74)

이런 ‘자기 자신에서’ 긍정적이고 부정적이라는 것은 서로가 부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이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각자의 밖에 놓여 있는 외적 반성의 관점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런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닌 통일 속에서 서로 타자에 관계하는 것 또는 그렇게 정립되는 것”을 말한다.

개체적 현존이 외적인 반성을 통해 긍정적인 것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도 이 외적 반성이라는 관점이 망각되면, 이런 외적인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마치 어떤 것에 내재하는 즉 본래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마치 빛이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것이며, 탄생이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다. 그런 긍정적인 것은 “정립되지 않은 것이며 대립이 지양된 것이지만, 사실은 대립 자체의 한 측면으로 존재한다.”

반면 부정적인 것도 사실은 직접적인 것이고, 외적인 반성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것이 결여된 것인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것은 본래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마치 본래부터 어둠은 부정적인 것이며, 죽음도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6)

대립은 아직 외적 반성에 머물러 있다. 대립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개체적 현존 자체에 외면적인 규정일 뿐이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서 모순으로 이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운동의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인 것은 대립에 머무르지만, 부정적인 것은 모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것은 직접 존재하는 자기와 동등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규정되니, 이런 점에서 부등한 것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것은 이미 모순적인 것이지만, 아직 그 모순은 출현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것은 자기 동등성에 고착되면서, 외적인 반성에 머물러 있다.

“사실 어떤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볼 때는 타자에 관계하는 가운데 규정되어 있으나 그 방식을 보자면, 그런 긍정적인 것의 성격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긍정적인 것은 이 타자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기 내로 반성한 것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74)

부정적인 것에 이르면, 그것은 긍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여기에서는 아직 외적 반성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가능성을 지닌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부정적인 것조차 아닐 가능성이다. 부정적인 것은 자기와 부등한 것인데, 이런 자기 부정의 가능성이 출현하면서 이중적 부정을 통해 자기와 동등할 가능성이 출현한다.

“부정적인 것은 절대적 반성인 한에서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아니며 오히려 정립된 존재[긍정적인 것]가 지양된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니, 그 자체로 대자적[자기 관계하는]인 부정태이며 자기 자신에 긍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므로, 타자에 대한 그 관계[-P]를 부정한다. 그것의 타자가 긍정적인 것인데 즉 자립적인 존재다. 따라서 그런 긍정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는 자기를 자기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74-5)

이 가능성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외적 반성에서 본다면, 그것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이 부정적인 것을 통해 모순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 자기모순에 부딪히면서 외적 반성은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면서 더 포괄적이며 더 근본적인 본질 즉 객관적인 본질이 등장하게 되면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 규정하는 반성에 이르면 자기와 부등한 부정적인 것은 자기와 동등한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 12-상이성과 가족 유사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 12-상이성과 가족 유사성

1)

생물체에서 개체적 현존은 모나드처럼 자기 완결되어 있으니 다른 개체적 현존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고립적인 개체다. 그러나 이런 고립적 개체는 개체 내적으로는 자기 부정성을 통해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구별과 동일성을 통일하는 것이다. 어떤 개체적 현존은 이처럼 자기 부정성을 통해 자기 관계하면서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할 뿐이니 이런 점에서 개체적 현존을 상이한 것이라 한다.

존재론에서 현존과 타자는 분리되어 있지만, 그 자체에서 타자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자는 접점을 통해 분리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본질론에서 현존과 타자는 상이한 것이니, 이는 분리되어 있으면서 접점이 없는 무차별한 것이다.

“동일성은 그 자신에서 상이성으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절대적 구별을 자기 내에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을 자기의 부정태로 정립하고 이 두 가지 계기 즉 동일성 자체와 자기의 부정태인 자기 내 반성이 서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는 동일성은 이와 같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직접 그 자체로 지양하고 그런 규정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구별된 것은 서로 무차별하게 상이한 것으로서 존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7)

2)

이런 상이한 것들은 무차별하지만, 어떤 비교를 통해서 서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런 공통성이 찾아지면, 그것들의 차이도 발견된다. 상이한 것들 모두에게서 하나의 공통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 이런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공통성이 발견되더라도 그 공통성은 상이한 것들의 부분에만 성립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공통성은 일종의 가족 유사성이다.

이런 가족 유사성과 같은 공통성은 비교의 관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 비교는 개체들에 대해서 외면적이며, 그런 한 여기서 공통성과 차이는 외적 반성에 속하는 것이다. 이는 주관적인 공통성과 차이이며, 그 사물 자체에 속하는 본질적 공통성과 차이는 아니다.

외적 반성은 반성 운동 즉 수직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상이성은 개체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서 나타난다. 양자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 상이한 것이므로 외적 반성만이 가능하며 거꾸로 외적 반성을 통해 정립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상이하다. 헤겔은 이런 외적인 반성을 통해서 얻은 공통성과 차이를 ‘동등성[Gleichheit]’과 ‘부등성[Ungleichheit]’으로 규정한다.

동등성은 부등성은 동일한 비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동등성은 부등성에 대립하여 규정되며, 거꾸로 부등성은 동등성에 대립해서 규정된다. 동시에 동등성과 부등성은 분리된다. 양자는 상이한 것들이 지닌 다른 측면 다른 관점에서 본 것을 말한다. 전자의 측면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정립된 것이며 후자의 측면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직접적인 것[그 자체로 반성한 것]이다.

3)

예를 들어 가족 유사성에서 가족 A, B, C가 있다 할 때, A와 B는 코가 동등(유사)하고, B와 C는 눈동자 색깔이 동등하다. A와 C는 머릿결이 동등하다. 이런 경우 어떤 성질 A와 B의 코의 동등성은 A와 B의 머릿결의 부등성과 관계 속에 있다. 양자의 코의 동등성은 머릿결의 부등성과 짝을 이루며, 서로의 이면을 이룬다.

그러나 A가 지닌 눈동자 색깔은 B와는 무관하다. A의 눈동자 색깔은 B의 관점에서는 자기와 무관한 A가 지닌 직접적인 것이다. 물론, A를 C와 관계해서 보면, 눈동자 색깔은 동등성에 속하고 이는 A와 C가 코가 부등하다는 것에 대해 부정성의 관계에 있으니 정립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A, B, C가 지닌 모든 성질은 한편으로는 정립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관한, 직접적인 것이다. 어떤 것이 지닌 무관한 직접성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립된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무관한, 직접성을 헤겔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반성[an sich Reflexion]’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규정한다. 사실 헤겔이 왜 이런 표현을 골랐는지는 모호하지만, 생각해본다면, 그 자체로[an sich]란 아직 잠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니, ‘그 자체로 반성적인 것’이란 반성이 아직 일어나지는 않은 직접적인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립된 것으로 바뀔 수 있으니, 그런 점에서 단순히 직접적인 것은 아니고 잠재적으로 반성적인 것이 된다.

헤겔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상이성이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정립된 측면과 그 자체적인 반성의 측면이다.

① “상이성은 무차별한 구별이므로 이 상이성 속에서 일반적으로 반성이 자신에 외적으로 생성된다. 구별은 다만 [동일성에 대해] 정립된 것이거나 또는 지양된 구별[독립성]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그 구별은 전적으로 반성한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7)

② “그러므로 이중적인 측면이 출현한다. 즉 자기 내 반성 자체와 부정성 또는 정립된 존재로서 규정성이다. 정립된 존재는 자기에 외적인 반성이다. 정립된 존재는 부정으로서 부정이다. 따라서 그 자신에서 사실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이나 자기 내 반성이지만, 다만 그 자체로 그럴 뿐이다. 그런 정립된 존재는 외적인 것으로서 그런 부정에 관계하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8)

③ “그 자체에서 반성은 동일성이지만, 구별에 대해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구별을 전혀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서 구별에 대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8)

4)

위에 설명한 것처럼 상이성에서 두 가지 계기 즉 동등성과 부등성은 외적으로 정립된 것이어서, 가족 유사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경험이 발전하여 상이한 것들 가운데 동등성과 부등성이 단적으로 대립해서 그것에 속하는 모든 원소가 동등한 측면을 지니면서 동시에 부등한 측면을 지니게 된다면, 이런 경우는 동등한 것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부등한 것은 부정적인 것이 된다. 헤겔은 이런 경우를 대립이라고 규정한다.

상이성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중첩될 뿐, 서로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대립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단적으로 대립하므로 이는 통일을 이룬다.

헤겔의 논리학이 항상 그렇듯이 개념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이런 경험의 발전을 회고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논리적 발전이다. 마찬가지로 상이성에서 대립으로 개념이 발전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 경험의 발전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경험은 물론 생물의 개체적 현존에 대한 경험이다. 생물학은 분류를 통해 발전했다. 처음에는 외적인 특징을 가지고 생물이 분류되었으나 그런 분류를 벗어나는 예외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아직 상이성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근대에 와서 분류는 종이 재생산되는 방식 즉 생식을 기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어느 생물에서나 일정한 발전을 이루어 유성생식에 이르게 되면, 암수의 구별이 생겨난다. 암수의 분류는 다른 분류 기준과 달리 위에서 말한 대립을 이룬다. 암수는 단적으로 대립하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헤겔은 이처럼 일어나는 경험의 발전을 상이한 것이 개념상 자기모순을 통해 대립으로 나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즉 경험의 발전이 개념적으로 설명된 것이다.

5)

상이성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가족 유사성에서 보듯이 서로 무관하고 외면적이다. 그것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위의 예에서 A와 B는 코의 측면에서 동등하지만, 눈동자의 측면에서는 부등하다. B와 C는 눈동자의 측면에서는 동등하지만, 머릿결의 측면에서는 부등하다.

“동등성과 부등성이 이리저리 넘어가는 관계는 이런 규정성[동등성과 부등성]에 외면적이다. 또한, 양자는 서로 관계하지 않으며, 각자는 독자적인 것으로서 다만 제삼자에 관계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8)

“그러나 서로 무차별하다는 것을 통해 동등성은 자기에만 관계하고 부등성도 마찬가지로 고유한 관점에서 일어나는 독자적인 반성이다. 따라서 각자는 자기 자신과 동등하다. 동등성과 부등성의 구별은 사라진다.”(헤겔, 논리학, GW11, 269)

이런 외적인 반성, 즉 제삼자에 의해 일어난 반성에 따라서 조건이나 측면, 관점에 따라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달라지니 양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런 서로 분리된 동등성과 부등성은 개념상 모순을 범하게 된다. 이 개념적 모순은 마치 플라톤의 저서 파르메니데스에서 나오는 논변을 상기시킨다. 아래를 보라.

우선 동등성은 자기에 대해 동등하지 않다. 왜냐하면, 동등성은 부등성과 분리된 것 즉 부등성과 부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등성은 자기모순이다. 마찬가지로 부등성도 자기모순이다. 왜냐하면, 부등성은 자기에 부등한 것인데,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존재하므로 동등한 것이다. 그 결과 부등한 것이 동등하다는 모순이 나온다.

“그러므로 동등성은 자기 자신과 동등한 것이 아니고 부등성으로서 부등성은 자기 자신과 부등하지 않으며 자기에 부등한 것은 그 자체가 동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등한 것과 부등한 것은 자기 자신과 부등한 것이다. 따라서 각자는 이런 반성이니 동등한 것은 자기 자신이며 동시에 부등한 것이며 부등한 것은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동등한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9)

이상의 논변은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상이성에서 나타나는 동등성과 부등성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 유사성에서는 관점(코나 머릿결 등)을 제외한다면, 동등한 것이 동시에 부등하고, 부등한 것이 동시에 동등하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A와 B는 동등하면서도 부등하며, 그것은 B와 C는 부등하면서도 동등하다.

이처럼 가족 유사성 즉 상이성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자기모순을 통해 붕괴하면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이 출현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상이한 것은 [동등성과 부등성으로] 정립됨을 통해서 부정적인 반성으로 이행한다. 상이한 것은 구별[동등성과 부등성]이 단순하게 정립된 것이므로 더는 그 구별은 구별이 아닌 것이며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등성과 부등성 자체는 정립된 것으로 되면서 무차별성이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반성을 거쳐서 자기와의 부정적 통일로 즉 동등성과 부등성을 자기 자신에서 구별하는 반성으로 되돌아간다. 상이성은 자기의 무차별한 측면들이 동시에 잔적으로 이 부정적 통일의 계기로 되면서 곧 대립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70)

상이한 것들에서 동등성과 부등성은 외면적이다. 그러나 대립한 것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예를 들어 암수의 구별과 같은 것)은 개체적 현존 자체에 내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개체적 현존 자체가 “자기 자신에서 구별하는 것”이며 그 구별 즉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 통일의 계기”로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1-개체와 심연으로서 본질[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1-개체와 심연으로서 본질

1)

반성 운동은 현존과 본질 사이의 관계다. 이런 관계의 축은 수직적이다. 반면 본질 규정에서 다루어지는 동일성과 구별, 상이성과 대립, 모순은 개체적 현존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의 축은 수평적이다.

개체적 현존과 개체적 현존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것이 본질이다. 개체적 현존을 그 자체로 보면, 유기적인 통일체이고 자기 완결적이다. 그러므로 마치 모나드처럼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러므로 이 개체적 현존 사이는 서로 건너갈 수 없는 심연의 바다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개체적 현존은 사실 본질의 구체적 실현태이며 본질을 통해 다른 개체적 현존과 연관된다. 이 본질이 열어 놓는 공간에서 하나의 현존이 다른 현존과 관계한다. 이 본질을 통해 하나의 개체적 현존은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 지속한다.

본질이 현존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즉 그 운동이 외적 반성 운동인가 아니면 내적 또는 규정하는 반성 운동인가에 따라 개체적 현존의 관계도 변화한다. 그 관계는 외적 반성 운동에서 개체적 현존의 관계는 상이성이다. 반면 규정하는 반성에서 개체적 현존의 관계는 대립, 모순이다.

2)

반성 운동을 다룰 때 추상적인 차원에서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이 있어서 현존과 본질 사이의 운동하는 양 측면을 이루었다. 마찬가지로 개체적 현존을 개별적으로 보면, 그 내부에서 두 측면이 존재한다. 즉 동일성과 구별이다. 즉 동일성과 구별은 아직 개체적 현존 사이를 다루지 않고 이 서로 관계하는 개체적 현존 각각에 내재하는 두 측면이 된다.

그 가운데 본질의 운동은 자기 부정성을 통해 매개된 자기 관계이다. 이런 자기 부정성이 자기 관계하는 측면을 일컬어 동일성이라 한다. 이 동일성은 곧 자기 동일성이며 개체적 현존이 지속해서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치 모나드처럼 창이 없으며 타자와의 사이에 심연이 놓여 있다.

“본질[본질의 현존]*은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이런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타자 존재와 타자에 대한 관계가 단적으로 자기 자신에서 순수한 자기 동일성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본질은 자기와 단순한 동일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0)

주*) 여기서 본질이란 현존과 구별되는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본질은 현존하는 것으로서 본질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동일성은 부정성의 부정을 매개로 한 자기 관계이고 이 자기 부정성이 곧 구별이니, 이 동일성은 구별을 자신의 한 계기로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동일성은 추상적인 동일성과 다른 것이다.

추상적 동일성은 서로 다른 현존을 비교하여 공통된 것을 의미하므로 이 공통성은 현존들이 서로 구별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이 동일성은 타자 즉 구별을 부정함으로써 규정되는 동일성이다.

반면, 생물체의 개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를 통해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듯, 이 개체적 현존에서 나타나는 동일성은 이미 내적으로 자기 부정성 즉 구별을 포함하고 있으니, 그 자신은 전체의 한 계기이면서 동시에 전체가 된다.

“동일성은 자기 내로의 반성[본질로의 반성]이어서 이는 내적인 반발인 한[현존의 정립]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반발은 자기 내로의 반성으로서 반발이며 직접 자기 내로 자기를 환수하는 반발이다. 따라서 동일성은 자기와 동일한 구별인 한에서 동일성이다. 그러나 구별은 동일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비동일성이므로 자기 자신과 동일할 뿐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2)

3)

동일성의 이면인 구별의 측면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구별은 추상적인 구별과 다르다. 추상적 구별이 비교를 통해 나온 구별이며 그것은 공통성이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체적 현존에서 나타나는 구별은 자기 자신과의 구별이니, 헤겔은 이를 ‘절대적 구별’이라 한다. 이런 자기 구별은 동시에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그런 가운데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니, 절대적 구별은 이런 자기 동일성을 자신의 한 계기로 내포하고 있는 구별이다. 이 구별은 자기의 한 계기이자 동시에 전체이다.

“구별은 본래 자기 관계하는 구별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타자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구별은 구별 자체가 아니며 자기의 타자이다. 그러나 구별로부터 구별된 것은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구별은 구별 자체인 동시에 동일성이다.”

“이 구별은 그 자체이며 대자적인 구별이니, 절대적 구별이며 본질의 구별이다. 그 자체이며 대자적인 구별로서 이 구별은 외적인 것을 통해 일어나는 구별이 아니며 구별이 자기에 관계하므로 단순한 것으로 되는 구별이다.”(헤겔 논리학, GW11, 266)

존재론의 영역에서 개별 현존[즉 어떤 것의 술어적 규정]은 타자로 직접 그 자신에서 이행한다. 빨간색은 어떤 것에 우연적이므로 이 어떤 것[주어]은 언제라도 파란색이라는 타자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본질론에서 개체적 현존이 지닌 구별은 생물적 개체에서 보듯이 구별된 것이면서 동시에 구별되지 않은 것이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분명 다른 나이지만, 동시에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은 나이다. 그런 점에서 이 구별은 필연적이니, 헤겔은 여기서 타자는 그 자체로 대자적인 타자라고 한다.

“이 구별은 반성의 구별이며 현존[존재론 영역에서]의 타자가 아니다. 현존과 그 타자 존재는 서로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서로 대립적으로 규정된 현존 가운데 각각은 독자적으로 직접적인 현존을 갖는다. 그에 반해서 본질의 타자는 그 자체로 대자적인 타자이지 타자 밖에서 발견되는 타자로서 타자가 아니며 또한 단순한 규정성 그 자체로서 타자가 아니다.”(헤겔 논리학, GW11, 266)

4)

개체적 동일성은 자신의 타자인 구별을 지양하면서 자기 동일성에 이르지만, 이 자기 동일성은 이미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곧 자신의 타자인 구별로 넘어가는 것이다.

개체는 자기의 타자인 구별로 넘어가는 측면을 헤겔은 자기 반발이라 하는데, 이렇게 자기 반발은 다시 구별에 이르지만, 이 구별은 다시 지양되니, 개체는 다시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 관계 즉 동일성에 이른다.

개체적 현존은 동일성으로서 다른 개체적 현존과 심연을 통해 떨어져 있으나 이미 자기 부정성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의 다른 개체적 현존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개체적 현존과 다른 개체적 현존은 심연을 통해 연결된 본질적인 동일성이다.

심연을 통해 단절되고 동시에 연결되는 이유는 개체적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 심층 속에 존재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체적 현존이 내부에서 겪은 운동은 곧 현존과 본질 사이의 운동이며 이 운동이 표면에 비추어지면, 동일성과 구별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개체적 현존이 본질로 자기 내 반성하는 것은 개체가 자기를 구별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본질이 다시 자기를 개체적 현존으로 정립하는 것은 자기 관계하는 동일성으로 나타난다. 수직적 운동이 매개되어서 수평적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5)

동일성과 구별의 통일은 생물체의 종적 개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헤겔은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상의 사실[구별의 절대성]이 반성의 본질적 본성이며 그리고 모든 활동[Taetigkeit]과 자기 운동[Selbstbewegug]의 특정한 원초적 근거[bestimmte Urgrund]로서 고찰될 수 있다.”(헤겔 논리학, GW11, 266)

윗글에서 ‘자기 운동’이라는 말이 주목된다. 헤겔에서 스스로 운동하는 것은 바로 생물체의 종적 본질밖에 없다. 이 스스로 운동하는 본질이 곧 개체적 현존과 개체적 현존의 심연 속에 잠복하면서 개체적 현존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동일성과 추상적 구별과 달리 공허한 동어반복으로서 사유 법칙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종적 개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필연적 법칙이니, 그것은 존재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이행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법칙이고 구체적인 법칙이다.

개체적 현존이 이처럼 두 측면 즉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며 양자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이제 이런 개체적 현존과 다른 개체적 현존 사이의 관계가 출현한다. 처음 나타나는 관계가 곧 상이성이다.

6)

자주 헤겔은 동일성의 철학자로 간주한다. 특히 현대에 와서 아도르노나 들뢰즈 등이 헤겔을 그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헤겔 자신은 정신현상학에서 셸링의 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셸링이 모든 소는 밤에 까맣게 보인다고 주장한다면서 비난했다.

이런 비판은 셸링의 직접적인 일반성 또는 무차별적 존재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런 무차별적 존재가 아도르노나 들뢰즈 철학의 기초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서로서로 동일성의 철학으로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동일성은 자기 부정성의 자기 관계이며 그런 점에서 이미 구별을 내포하는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은 생물체의 개체적 현존이 지닌 동일성이며 이 개체적 현존은 본질을 매개로 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동일성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자기 부정성의 철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자기 부정성이 곧 절대적 부정성이며, 이것이 곧 차이이니, 헤겔은 차이의 철학자이며 이 절대적 부정성이 곧 본질이 자기를 재생산하는 생성의 운동이니 헤겔은 또한 생성의 철학자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0-본질 규정과 동일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0-본질 규정과 동일률

1)

헤겔 논리학 본질론 1편 2장은 본질 규정을 다룬다. 헤겔은 이 본질 규정을 반성 규정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규정이 동일성과 구별, 상이성과 대립 그리고 모순이라는 규정이다. 이 규정은 오른쪽과 왼쪽, 아버지와 아들 등과 같이 반성 규정이지만, 오직 본질적인 것 즉 본질의 현존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본질 규정이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질적 반성 규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본질 규정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헤겔은 바로 주석을 달아서 이 본질적 반성 규정[본질 규정]이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규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이 문제를 본질적 반성 규정이 지닌 독특한 특징과 관련하여 풀어나간다. 그 문제란 곧 본질적 반성 규정은 사유의 일반 법칙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법칙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동일률이나 모순률 그리고 배중률과 같은 것인데,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이 동일성, 구별, 모순 등과 같은 반성 규정이다. 왜 질적이거나 양적인 다른 규정 즉 존재론에 속하는 규정들은 사유법칙으로 되지 않지만, 반성 규정은 사유의 법칙으로 올라설 수 있는가?

이 동일률이나 모순률은 흔히 사유법칙으로서 동어반복을 표현하는 것이니 필연적인 추론의 법칙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현실을 파악하는 범주로서는 무의미한 것이라 보는데, 헤겔은 이 사유법칙을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일까?

2)

존재론에 속하는 질적인 규정이나 양적인 규정은 판단의 술어에 해당한다. 판단의 술어는 한편으로는 주어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독립적인 것이어서 여러 가지 것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렇게 독립적이더라도 그것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판단의 술어인 질적 규정이나 양적 규정에 관해서는 일반화된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두 독립적인 것의 만남이니, 이는 항상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술어는 그 사물에 우연적이며 경험적인 명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상이 바뀌면 술어는 다른 술어로 바뀌게 마련이다. 이를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즉 이런 술어는 그 자체에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며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어떤 규정성은 본질적으로 대립된 것으로 이행한다. 어떤 하나의 규정성을 부정하는 규정성은 그 규정성만큼이나 필연적이다. 모든 규정성은 직접적인 규정성인 한에서 그것에 대립하는 다른 규정성이 직접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9)

그러므로 이런 존재론의 영역에서 어떤 하나의 술어가 모든 사물에 적용되거나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이런 술어에 관해서는 일반화된 법칙이 적용될 수 없다. 이런 주장은 “직접적 진리이거나 반박할 수 없는 사유 명제라는 성격이 더는 귀속될 수 없는”(헤겔, 논리학, GW11, 259) 주장이다. 예를 들어 ‘모든 존재자가 빨간색이라’거나 ‘모든 금은 원자가 32이다’는 판단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동일성과 구별과 같은 반성 규정은 이런 존재론적 규정 즉 술어와는 구별된다. ‘어떤 것이 빨간색이다’ ‘어떤 것의 크기는 3미터다’라는 판단은 말이 되지만, ‘빨간색은 동일하다’라든가, ‘32 그램은 동일하다’는 명제는 무언가 부족하다.

문장에서 반성 규정이 술어로 부가되려면 적어도 비교되는 두 개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두 개의 개별자가 비교될 수도 있고 두 개의 술어가 비교될 수도 있다. 즉 두 물방울의 본질이 동일하거나 현존이 동일하든가 두 색깔이나 두 량이 동일하다. 동일성과 구별이라는 단순한 반성 규정은 그 비교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헤겔은 문장에서 명제와 판단을 구분한다.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지는데, 명제는 술어가 개별적인 것이다. 반면 판단에서 술어는 일반적인 것이다. (헤겔은 명제와 판단의 구별을 나중에 논리학 개념론 판단론에서 서술한다. 여기서는 일단 헤겔에서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지나가기로 하자)

그러므로 어떤 주어가 반성 규정을 술어로 할 때 헤겔은 이를 판단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술어는 일반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립적인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성 규정인 ‘동일하다’는 사물 자체가 지닌 성질도 분량도 아니니, 사물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교하는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비교에서 나오는 반성 규정은 비교되는 대상에 따라 변화하므로 비교 대상에 개별적으로 속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명제다.

“판단은 내용을 일반적 규정성인 술어 속으로 옮겨놓는다. 그 결과 일반적 규정성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단순한 계사로서 그 관계와 구별된다…. 그에 반해서 반성 규정은 정립된 것이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니, 명제 형식에 가깝다.”(헤겔, 논리학, GW11, 259)

여기서 정립된 것은 곧 술어를 말한다. 이것이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라는 것은 곧 그 현존에 고유한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술어가 주어에 고유하니, 이는 판단이 아니라 명제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X 대신 Y나 Z를 주어로 삼으면 ‘Y는 A와 동일하다’라든가 ‘Z는 A와 동일하다’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X는 A와 동일하다’라는 판단에서 ‘A와 동일하다’를 일반적 자립적 술어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A와 동일하다’는 술어와 ‘동일하다’는 술어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금 논의되는 것은 ‘동일하다’는 술어이지 ‘A와 동일하다’라는 술어는 아니다. ‘A와 동일하다’가 아니라 ‘동일하다’라는 술어를 가지고 볼 때, 이 후자는 술어는 일반성과 자립성을 지니지 못한다.

3)

반성 규정 자체만 가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들의 비교에서 나오니, 필연적인 사유법칙이 될 수 없다. 어떤 것은 다른 것의 오른쪽에 있지만, 또 다른 것의 왼쪽에 있다. 그렇다면 동일률이나 모순률과 같은 사유법칙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 본질론에서 헤겔이 다루는 반성 규정은 이런 개별자나 질적, 양적 규정 등의 동일성과 구별이 아니다. 여기서 헤겔이 다루는 것은 특히 특정한 반성 규정인데 그것은 곧 본질이 나타난 현존 즉 개체에서의 반성 규정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여기서 다루는 반성 규정 즉 동일성과 구별을 본질 규정[Wesenheit]*이라 한 것이다.

주*) Wesenheit는 일상적으로 본성을 의미하는데,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때 Wesen과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이 Wesenheit는 마치 존재론에서 개별자에 관해 적용되는 질적, 양적 규정성「Bestimmtheit]이 다루어지듯이 본질에 관해 적용되는 규정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런데 헤겔 논리학에서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인 본질이 있고 그것이 질료 속에서 현존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존은 자기를 재생산한다. 본질이란 이런 재생산의 과정을 통해서 출현할 뿐이다.

현존은 마치 생물체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개체와 같다. 이런 개체들은 이전의 개체 내의 본질이 자기를 새로운 현존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본질은 이 과정에 감추어져 있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곧 개체적 현존일 뿐이다.

생명체에서 개체에서 또 하나의 개체가 출현하는 것은 시간상 단절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사실 개체 자체가 끝없는 자기 재생산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일 뿐이니 여기서는 개체와 개체 사이에는 시간상의 단절도 없으며 우리가 보기에 하나의 개체가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헤겔이 개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불가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므로,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론에서 술어가 적용되는 주어는 개별자「Einzelne]이지 개체[Individualitaet]는 아니다. 반면 본질론에서 다루어지는 주어는 항상 개체적 현존이다. 이런 개체적 현존 또는 본질적 현존에 대해 적용되는 술어가 본질 규정이다.

4)

이처럼 본질론에서 다루는 동일성 등 반성 규정은 이와 같은 개체의 술어가 되는데, 여기서 ‘A[어떤 개체]가 동일하다’라는 문장은 기이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동일하다라는 반성 규정은 항상 두 개의 비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개체가 동일하다는 문장은 따라서 비문법적인 문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주 ‘A는 동일하다’라고 말한다면, 사실 이것은 생략된 표현이다. 즉 이 표현은 정확하게 하자면 ‘A는 자신과 동일하다’라든가 ‘A는 A와 동일하다’로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A가 A와 동일하다’는 것은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는 일반적으로 사유의 필연적 법칙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은 대체로 ‘A는 A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표현을 하나의 판단으로 보면, ‘A이다‘는 술어화되면서, 마치 빨간색이나 32그램과 같은 A의 존재론적 규정이 된다. 그러나 동일성과 같은 술어는 사물의 존재론적 규정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술어적인 표현은 동일성과 같은 반성 규정을 잘못 표현한 문장이다.

이런 표현이 의미가 있으려면 일종의 동어반복적 추론의 표현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A이면 A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어반복적 표현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문장이다.

또한, 동일률은 지시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샛별은 저녘별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의미의 동일성을 다루는 하나의 반성 명제이어서 예를 들어 색깔의 동일성 문장과 같이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명제이지,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을 표현한다고 볼 수 없다.

5)

형식논리학에서 사유법칙으로서 동일률은 동어반복을 표현하는 것으로 경험과는 무관하게 사유의 규칙[추론의 법칙: A이면 A이다]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은 이 동일률 법칙은 단순한 사유법칙이 아니라 본질의 반성 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비교되는 두 대상은 본질의 구현체로서 두 개체적 현존이다. 두 개체는 모두 자기 자신이니 여기서 비교 대상은 곧 자기 자신이다.

본질은 여기서 감추어져 있으므로 단순히 두 개체적 현존이 비교된다. 그 개체적 현존은 자기 내에서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 밖에 있는 다른 현존과는 무관하다. 두 현존은 마치 심연을 통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현존은 본질의 구현체이다. 물론 이 본질은 감추어져 은폐되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두 개체적 현존일 뿐이다. 그러므로 두 개체적 현존 즉 ‘A는 A이다’라는 명제는 유의미한 것이며 본질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명제이다.

모든 개체는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이것은 개체가 개체인 한에서는 필연적 원리이다. 도대체 개체가 자기 동일적이지 않으면, 이들은 본질의 구현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개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반성 규정은 사실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따라서 타자에 관계하지 않고 대립 없이 존재한다는 형식을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60)

6)

이제 헤겔은 동일률의 법칙을 개체적 현존에 관한 한 필연적인 명제로 본다. 그러므로 그것은 법칙이지만, 이 동일률의 법칙은 단순한 동어반복적 사유의 법칙도 아니고 모든 개별자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법칙도 아니다. 이 동일률의 법칙은 개체 즉 생물적 개체에서만 일반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이다.

반성 규정은 모든 개체적 현존에 관해서는 필연적으로 성립한다. 개체적 현존은 곧 본질의 구현체이므로 다시 말해 “자기 내에서 본질이 비추는 것”이므로 한편으로는 개체적 현존이며 다른 한편에는 본질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기 동일한 것이며 본질이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기 구별적인 것으로 자기 내로 복귀하여 본질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적 현존은 한편으로 동일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사유법칙으로서 동일성과 구별도 서로 대립하면서도 매개하고 지양하는 것이다.

“반성 규정은 서로에 대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 규정은 반성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행이나 모순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사유법칙으로서 제기된 여러 명제들은 엄밀하게 고찰해 볼 때 서로 대립하며 상호 모순적이고 서로 지양한다.”(헤겔, 논리학, GW11, 260)

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반성 운동9- 지젝과 반성 개념

1)

라캉 해석자이면서 문화나 이데올로기 비평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지젝은 헤겔이나 칸트와 같은 고전 철학에 해박하다.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헤겔의 개념을 이용해서 소개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곧 헤겔 반성 개념에 대한 지젝의 설명이다.

그는 1989년 지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국내 번역은 이수련 역, 인간사랑, 2002년 5월)이라는 책의 마지막 6장에서 정립, 전제,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 개념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실재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이는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반성 개념과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그의 설명은 헤겔의 맥락과는 다른 맥락에서 하지만, 그 자체로 흥미롭고 거꾸로 헤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자리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2)

지젝에서 루소의 순수한 자연, 칸트의 물 자체와 포이어바흐의 소외된 신, 라캉의 증상 너머의 실재, 국가의 의지로서 군주, 텍스트의 원초적 의미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된다. 이야기를 단순화하기 위해 여기서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설명하기로 하자. 동일한 논리가 자연이나 신이나 실재, 의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알다시피 칸트는 물 자체라는 개념을 설정 즉 정립했다. 이 물 자체는 현상 너머에 있으면서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인데, 이 개념이 설정되는 논리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헤겔의 반성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는 헤겔이 본질론 1편 1장에서 전개한 반성 운동 즉 정립하는 반성과 외적 반성, 그리고 규정하는 반성을 끌어들이는데 이를 단순화해서 ‘전제를 정립하기’와 ‘정립을 전제하기’라는 두 과정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 두 개념은 헤겔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때 그는 헤겔의 외적 반성을 ‘전제를 정립하기’로 규정하고 규정하는 반성을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헤겔의 정립하는 반성이나, 외적 반성, 규정하는 반성에 부여하는 의미는 헤겔 자신의 것과는 구별되는데, 우선 그의 개념을 설명한 다음, 그 차이를 밝혀 보기로 하자.

3)

그 가운데 첫 번째 정립하는 반성은 어떤 현상을 그 자체로 물 자체로 보는 소박한 또는 순진한 관점을 말한다. 즉 현상적으로 주어진 것을 그대로 믿는 태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취하는 태도가 주어진 현상의 규정을 그대로 믿는 태도이니, 이것을 지젝은 정립하는 반성이라 부른다.

두 번째, 외적 반성은 현상 너머에 현상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물 자체로 설정하는 태도이다. 이 초월적 실재는 현상을 출발점으로 해서 소급적인 방식으로 설정되며, 일단 설정된 이후에는 오히려 이 현상을 설명하는 근거로 여겨진다. 물 자체가 설정된 이후에 물 자체는 현상과 괴리되며, 진리인 물 자체에 비추어 본다면, 현상은 제약된 것,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외적 반성을 그는 ‘전제를 정립하기’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곧 현상을 말하며 전제하기란 이 현상의 근거를 찾아 들어가는 운동을 말한다. 일단 그 근거가 확립된 다음엔 현상은 이제 그 근거로부터 설정된 것으로 규정된다.

사실 이 근거란 현상으로부터 소급된 것이니 현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 현상의 근거로 설정되면서 현상이 오히려 근거에 의존하는 일종의 소외 또는 전도가 여기서 출현하게 된다. 이런 전도는 종교적으로 신에 매달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또 다른 흥미로운 예로서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개념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학대받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이 학대받는 현실을 설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신이 희생당한 존재가 되도록 자기를 희생하게 하는 가족을 설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학대하고 희생하는 현실은 자기도 모른 채 자기가 전제한 것이다.

4)

현상의 근거가 되는 물 자체가 사실은 현상으로부터 주관에 의해 소급적으로 도출된 결과이니 곧 물 자체는 주체 자신이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외적 반성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 이 주체 자신의 설정 운동은 은폐되고 만다. 그 결과 마치 물 자체가 현상 외부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규정하는 반성에 이르면, 이 물 자체가 사실은 주관 자신이 소급하여 설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지젝은 이를 ‘정립을 전제하기’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정립이란 정립하는 주체를 의미하며, 이 정립하는 주체가 곧 물 자체의 전제가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는 흥미로운 예로서 남근을 들고 있는데, 남근은 관념을 통해 발기되지만, 그 관념은 신체적인 것으로서 의식적 통제 너머에 있다. 의식적 통제 너머에 신체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남근은 물 자체로 전제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관념을 통해 발기된다는 점에서는 주관이 설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형식적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주관 밖에 물 자체가 주관이 정립한 물 자체라고 인식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가 되고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지젝은 헤겔이 실체가 주체가 된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이상과 같은 형식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전환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공허한 제스처”이다.

“어쨌든 일어나고 있는 무엇에 대해 책임지도록 하는 순수한 가장 행위이다. 이것이 ‘실체가 주체가 되는’ 방식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45)

5)

지젝은 이상과 같이 헤겔의 반성 개념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한 다음, 헤겔적인 반성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헤겔에 대한 그의 비판은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참조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것이 거짓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며, 그런 이데올로기를 갖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젝 역시 마찬가지다.

첫째, 그에게서 외재적 반성은 단순히 주관이 현상의 근거로 물 자체를 설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외재적 반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본질 자체가 자기를 타자화하여야 한다.

“외재적 반영의 결정적 특징은 본질이 사전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외재성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타자로서 바로 자시 자신을 미리 전제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1)

여기서 ‘본질의 타자화’란 곧 본질 속에서 주체가 현상의 근거를 초월적 물 자체에서 찾고자 하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소외된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소외될 수밖에 없으니, 그 때문에 외재적으로 반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마찬가지로 지젝은 헤겔이 말하는 규정하는 반성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 자체가 주관이 설정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더라도,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 자체를 설정하는 주관 자신의 조건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 변화되어야만 비로소 물 자체를 설정하는 일이 끝나게 될 것이다. 이를 지젝은 신 자체의 주체화라고 말한다.

“인간은 신의 진리이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다시 말해 주체가 소외된 실체적 본체의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체가 자신의 전도된 이미지 속에서처럼 이 본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 반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핵심은 실체적 본체가 그 자체로 분열되어 주체를 산출해내야 한다.(즉 신 자신이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356-357)

5)

외적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에 관한 지젝의 설명은 헤겔의 설명과는 다르다. 헤겔은 외적 반성은 어떤 정립된 것의 본질이 그것 자체에 외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삼자인 주관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규정하는 반성에서 찾아진 본질은 그 어떤 것 자체에 내재적인 것이며, 따라서 제삼자인 주관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 본질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헤겔에서 외적 반성에서 규정하는 반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인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즉 주관적 인식이 사물 자체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지젝에서 외적 반성은 주관이 물 자체를 설정한다는(물론 자각 없이) 의미에서 주관적이지만, 설정된 것은 주관 밖의 물 자체다. 이는 헤겔에서 단순히 주관적으로 본질을 설정하는 외적 반성 개념 이상의 것이다. 헤겔에서는 주관 밖의 물 자체를 설정하는 운동은 나중에 정신의 소외 운동에서 설명되는데, 이는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다수의 주관이 상호작용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다.

또한, 규정하는 반성의 경우 지젝은 주관이 그런 물 자체를 설정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며, 이는 단순한 형식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헤겔에게서처럼 사물에 내재하는 객관적 본질이 인식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