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론 대 공간론 :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 자연배후학으로서 자연론 대 문명론
– 2026 04 20. 우수(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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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하늘에 나는 새와 저 산의 짐승들을 누가 만들었어요? + 하나님이 만들었지
–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과, 해와 달은 누가 만들었어요 + 하나님이 만들었지,
– 선생님과 아버지 오마니는 누가 만들었나요? + 물론 하느님이 만들었지
–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요? + 그게 하나님이지.
–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드네요, + 학문적으로 동어 반복이라 하지.
= 벩송은 이것을 악순환이라고 하고, 논리상으로 선전제미해결의 오류라고 부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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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기원에는 무엇이 있는가? 생각한다는 인간의 사고 또는 사유를 우선 뒤로 젖혀두자. 우주든 상상작용의 대상이든, 원리든 기원이든 하나에서 출발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를 통일성 또는 단위라고 부르자. 가(A)가 있다. 가 이외의 것을 하(Z)라 하자. 그런데 논리적 사고에서는 A가 있고 A아닌 것(non-A)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누가 어떻게 나누느냐? 논리주의자들은 가와 하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든 하이덱거든 진리를 발견한다고 할 때, A 아닌 것이 아니라 A이라는 동일성의 논법에 있다.
:: 하(non- A, 나눌 수 없는 것)
[동일성이라는 원리를 먼저 있고, A는 non-A아닌 것이라는 모순율, 그리고 A와 non-A사이에 둘중의 하나 A는 맞고 non-A는 맞지 않는다는 배중율을 조작해 낼 것이다.]
동양에서는 가와 하를 음과 양이라 부르고 꼭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밤과 낮, 하루, 한해 등처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이라 한다. 다른 한편, 여와 남처럼 나누어지는 것은 둘 사이의 조화와 교감이 있다고 하지만 하나의 생명에서 나왔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인데도 나누는 것에 문제가 생기니 불이(不二)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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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사회적 견해들에서 A와 B도 있고 AB교집합 C도 있다고 한다. A는 가치(공공)를 B는 탐욕(이익)에 선후 중경을 두고, 사람들은 한편으로 공공에 다른 한편으로 사적 이익에 관심으로 양명성을 지닌 쪽을 AB가 있다고 한다. 이런 견해를 철학사적으로 19세기에 공시태에서 본 사실을 평면적으로 구별하는 차이의 설명이다. 그 19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는지를 탐문하는 수학–논리학자들은 존재의 근거가 A에 있다고 보았으며, 사고의 대상이라 하고, 논리의 상위(류개념, 신개념)를 버릴 수 없었다는 점에서 스콜라적이라 한다.
이런 수학–논리를 확장하면서 벤 다이아그램을 2차원(평면)의 4경우, 3차원(공간)의 8경우, 4차원(무슨 위상?)의 16경우 등에서 항상 순열을 나열해보면, 이상하게도 각 조합들에서 공집합(여집합)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물론 4차원 이상을 경험과 구체성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의 추론작업에서 상상작용은 무한히 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4차원이상의 경계(한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인간의 지성의 역량의 한 방편으로 정의(규정, 한정)한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고대 사유에서 유한과 무한의 논리적 차이가 있고, 근대에서 한계와 비한계의 미분화 또는 세분화에서 차히가 있으며, 이 차이와 차히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대수학과 알고리즘이 분리된다. 전자에서 우주의 기계적인 정적 통일성을 주장하고 후자에서 파동역학, 열역학, 전자기학 등의 동역학에서 지속의 통일성(정체성)의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19세기 말에 프왕까레는 공간의 차원이든, 추론의 차수의 등급이든, 세분화의 과정에서 중첩적 기억의 위상이든, 인간의 지적 역량의 협약(합의)이지,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고 했다.
18세기의 유산으로 자연수의 무한(infini)과, 19세기 후반의 집합론으로 0과1사이의 소수들의 비한계(illimit, 무한계), 푸앙카레의 협약에 의한 비결정(indéterminé) 사이에서 인간이 맞다 틀리다는 진위 규정에 대해 또는 도덕적으로 선악 규정에 대해 반성 한다. 앵글로색슨에서는, 푸앙카레의 수학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앵글로색슨 수학–논리학들이 설정하는 진위, 선악, 정부(정의 불의)라고 정의(la définition)를 기준으로 삼아서, 모든 단위들이 한정(définit)와 무한정(indéfini)로 구별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논리주의의 착각은 그들도 악순환, 파라독사, 불합리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건 안에서라고 하는데, 그 조건이 논리의 요청이며, 원리와 공리의 선인정, 즉 선전제미해결이다. 이런 사고가 펼쳐진 것도 언어학에서 공시태가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자연배후학’에서 우주론이 우선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통일성의 우선을 선가정하면서, 이런 방법에 따르지 않는 통시태 사유, 우주발생론 사유, 그리고 인간에서도 자연생성론을 배제 또는 악의 축처럼 다루었다. 21세기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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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에서 자르기와 나누기의 문제가 올바로 제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대상을 자를 수 있는지 또는 나누기한다는 데 참여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플라톤의 인식에서 선분의 비유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분할의 선분분할의 설명은 자르기가 아니라 나누기(참여하기)에 있을 것이다.
| 이데아들 |
Ideas |
에피스테메 |
| 수학적대상들 |
Objets mathe |
| 사물들 |
Etres vivants |
독사 (견해)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플라톤의 이런 도식에 대해 후대에 여러 다른 방식으로 변환을 거치면서 설명의 도구로 삼았다. 우리는 간단히 3가지 정도만 보자. 하나는 지식의 대상은 상위 둘(에피스테메)에 있고, 하위 둘(독사)은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다루지도 않았다. 둘째는 경험적으로 보아 그림자를 보고 피라밑(사물)의 높이를 알 수 있듯이, 이런 유비로 추상적인 수학의 도형들을 보고 도형의 원형이 이데아를 안다고 해서 탐구의 단계로 보는 방식도 있다. 셋째는 상위의 인식은 지성(오성)의 대상이고 하위의 인식은 감성(미학)의 대상으로 여기며, 인식론적 구별을 인간의 역량에 대한 차이를 영혼과 신체에 대입시키는 방식이었다. 둘째의 계속성에서는 자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첫째와 셋째는 잘라서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는 쪽이다. 문제는 자르다와 공간의 계속(시간의 연속)의 구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엉뚱하게 대상을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차이를 찾으려 했다.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이데아를 볼 수 없는 직관의 것이지만, 수학적 대상들은 땅위의 측량에서처럼 도형을 그릴 수 있다. 인식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의 차이는 대상의 추상화에 있고 공간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에 비해 사물들로서 신체는 볼 수 있는데, 이를 움직이는 동력(심성)은 볼 수 없는 것임에도 얼 또는 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로서 상층의 이원성과 심층의 이원성이 전도된 사고방식이 아닌지에 대한 낌새를 알아차린 19세기 후반에 유기적 조직화로서 사회학과 심리학이 도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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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논리주의자들이 진위, 선악, 미추의 상위로서 진선비의 선전제로 인정하는 것은 선분의 분할(자르기)의 인정 위에 선의 이데아를 올려놓았다. 물론 신학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의 하늘나라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국(에테르)를 만들었던을 것을 유추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 선의 이데아(원, 아름다움) |
| 이데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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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res vivants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소크라테스의 한 계열인 퀴니코스–스토아 전통의 유물론자들은 ‘선의 이데아’를 상징기고 기호(추상)일 뿐이며, 진실로서 얼과 혼의 움직임이 먼저이고 기원(아르케)이라고 보았다. 상층의 최고 지위(위상. 토포스)를 사고 알 수 있듯이, 깊이(심층)에도 마그마와 같은 불덩어리로 되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생한 활동을 제시할 수 있었다. 순수유물론자들은 플라톤의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돌아다니는 원인, 노마드 원인)가 있다는 것이 실재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여긴다.
| 이데아들 |
Ideas |
| 수학적대상들 |
Objets mathe |
| 사물들 |
Etres vivants |
| 그림자들 |
Images Ombre |
|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 무관의 제왕) |
<위의 도표와 이 도표 사이에서 어느쪽을 실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위의 것은 관념론으로 이것은 자연론 또는 순수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로서 상위에서 직관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추상적 대상이 있고, 심층에서도 나눌 수는 없지만 실재성이 있다. 원의 아름다움과 기하학적 도형의 아름다움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발생하는 아름다움은 흔들리는 아름다움이며 회화에서 터너의 그림과 인상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 선의 이데아(원, 아름다움) |
| 이데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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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아페이론, 무관의 제왕) |
<무관의 제왕은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9)”에서 능동적 의미에 아나르키(무권위주의)에 대한 명칭이다. – 우리나라에서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비하된 표현일 것이다. >
이로써 선분의 비유에서 자르기인지, 아니면 양면으로 나눌수 없는 이중성의 등장인지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사유는 양면으로 겹치기에 닮은 것은 같다. 들뢰즈가 파라노이아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스키조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영과 육은 동전의 앞뒤처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랜 플라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의자, 유일신앙자, 스콜라주의자, 관념론자는 선의 이데아의 위계 도식에 열광하면서도, 자연에서 생명의 발생과 노마드의 발현의 발생론적 흐름을 악마 취급하였다. 그들이 미쳤으니, 푸꼬가 광기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파라노이아, 그르려니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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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이 A, AB, B의 도식은 사회라는 평면에서 공익과 사익에 대한 관점정도 인데, 이에 대해 반응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앵글로색슨 철학의 계보에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우리 입말로 우리 사유를 발현하고 창안하고 창발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것도 코로나 이후로 누리소통 덕분이다. 알파고 시나씨가 말하듯이 우리 젊은이들 세계와 소통하고 프앙까레 같은 협약을 탐색하고, 프란체스코 학파처럼 평결론으로 계약과 합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전지구적 활동의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 유일신앙 (원리, 악순환) |
| A |
C(AB) |
B |
| 조화중항 : 점, 얼 |
역량 |
수, 원자 : 비례중항 |
| 공산사회 |
노력 |
탐욕사회 |
| 자연 발산 (원인, 자발성) |
[* 점들(points)과 얼들(Ames)을 같은 계열로 놓았던 철학자는 문헌적으로 라이프니츠였다. 참조: 브륑슈비크(1869-1944)의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p. 221] – [이 관점의 시초는 박홍규의 탁월한 견해대로 플라톤이었을 것이다. 참조: <류종렬: 20세기 철학자, 박홍규와 들뢰즈, https://cafe.daum.net/milletune/REMI/14>;]
[* 노력(코나투스)의 이중계열이 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상층에서 표면으로 전개에 노력하였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노력(conatus)을 보았던 이는 홉스와 라이프니츠였다. – “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제10장 라이프니츠의 수학 철학, pp. 197-229]
[* 조화중항 대 비례중항의 기원은 퓌타고라스학파에 있으며, 이를 실질적으로 다룬 철학자는 플라톤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박홍규는 플라톤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두고 다룬 첫째 철학자라고 평했다. – 참조 <마실에서 천사흘밤에서, 우수(雨水): 비례중항 대 조화중항, https://cafe.daum.net/milletune/REM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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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글다고 하고, 지구가 스스로 자전하고 그리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으며, 태양계가 은하계 안에서 소용돌이 속의 일부로서 기나긴 시간 지속 속에서 활동(생성) 중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초기에는 태양계의 회오리의 조성하는 경과에 따라 수많은 지구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가, 다음으로 은하계 안에서 아마도 회오리의 조성의 정 반대편에 우리와 사유방향은 다르지만 비슷한 조건에서 우리 같은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러다가 그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민을 하면서, 아마도 우주 안에는 저 먼 성단에서도, 수학적 우발성(포앙카레의 협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과 같아서, 우주의 기나긴 지속 발생에서 45억년을 거쳐 온 지구와 같은 행성은 우주 안에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구 생명체도 유일한 것이라는 추론이다.
공시태, 우주론, 공간론으로 인식은 상식에서 중요하게 쓰이지만,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시기는 지나갔다. 인간의 생각하는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통시태, 우주발생론, 시간–지속론으로 아름다운 지구, 그 생태계를 역량이 높아진 인간이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이런 역량의 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신학에서 자연이 묶여 있다가 브루노에 의해 우주가 무한히 열리고, ‘빛들세기’에 프랑스의 소박한 유물론자들이 자연의 자치성과 자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19세기 후반에서야 자연의 자발성을 생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류가 제 나름대로 사유하기 시작하여 공동체를 만든 빙하기 이후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1만 2천년 정도이다.
생명체 상으로 이런 짧은 시기에 볼 수 없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을 구별하면서, 현자의 철학적 사유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건데 고대 철학 이래로 볼 수 없는 것은 수, 원자, 점, 얼 등등이 있었다. 수와 원자는 자르기를 기준으로 하는 상층론자의 견해로 계속 이어가고, 점과 얼(온)은 자르기가 잘 안되기에 다루는 방식을 고민하던 심층론자들(내재적 참여론)은 과정과 연속에 자기 동일성(정체성)을 갖는 기억의 지속으로 설명하려 한다.
수학사에서도 철학사에서도 선전제의 정의(한정과 비한정)를 문제로 삼았지만 여전히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논리–산술적인 이들이, 수학적 논리에서도 무한(유한의 대비)과 비한계(한계의 대비)가 정의(한정과 비한정, 규정괴 비규정)에 연관 없이도 자기 충족이유를 갖는다는 생각을 하였고, 급기야 수와 원자의 소박한 유물론에 대해 점과 얼의 진솔한 유물론(자연론, 우주발생론) 사이에 차히를 갖는다고 설명하게 된다.
지구의 발생과 운동이 플라노메네아이티아라고 하였듯이, 인간의 삶과 사유도 노마드의 발현이다. 인간의 자각이, 맞는니 틀리느니라는 기준으로 지구상의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 이제는 기나긴 우주의 변역과정과 인간 삶의 역정의 기억에 적합하게 협약을 찾으며, 평결을 이루면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4:27, 59OLI) (5:28, 59OL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