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8-외적인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8-외적인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

1)

앞에서 정립하는 반성[ㄴetzende Relexion]과 전제하는 반성[voraussetzende Reflexion]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판단이 지닌 두 측면이다. 한 측면은 본질에서 현존을 끌어내서 판단(정립)하는 작용이다. 이렇게 정립된 것이 곧 ‘그 자체 부정적인 것[an sich Negative]’인 가상이다. 다른 측면은 개별 현존에서 다시 그 근거가 되는 일반 본질을 찾아가는 판단 작용이다. 이는 현존을 전제로 본질에 이르는 길이다.

이 두 측면은 사실 동일한 판단의 두 측면이며 서로 이면이면서 교차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 두 측면을 인식의 발전 과정으로 설명했다. 현존하는 가상은 이미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 즉 정립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정립은 감추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정립이 의문시되면서 감추어진 본질을 자각하여 제시할 때 이것이 전제하는 작용이다.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은 서로 순환한다. 이런 순환은 인식의 운동에서 항상 일어난다. 인식은 어떤 주어진 개별자로부터 귀납하여 일반적 본질에 이르지만, 이런 귀납은 순환적이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것은 감추어진 일정한 본질을 통해서 이미 선택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귀납이란 자기가 이미 감추어놓은 본질에 다시 이르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전제하는 반성 운동을 통해 찾아진 본질은 주관적으로 미리 설정한 것에 불과하니 헤겔은 이런 반성은 ‘외적인 반성’에 그친다고 한다.

“반성이 지양하면서 자기에 전제하는 직접적인 것은 단적으로 다만 정립된 것이며 그 자체로 지양된 것이어서, 이는 자기 내로 되돌아옴[본질]과 상이하지 않으며, 그 자체 다만 이런 자기 내로 되돌아옴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정립된 것은 동시에 부정적인 것으로서 규정되니, 이는 일자[직접적인 현존]와 직접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본질]와도 직접 대립하는 것으로서 규정된다. 대립한다. 그러므로 반성은 특정한[bestimmt: 주관적인] 것이 된다. 반성은 이 규정성[Bestimmtheit]에 따라서 전제를 가지니 자신의 타자로서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니, 이런 반성은 외적인 반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이런 외적인 반성은 자신이 출발하는 지점이 “자신의 타자로서 직접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그것이 이미 그가 주관적으로 선택된 즉 이미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2)

이런 외적 반성은 순환적이다. 외적 반성은 현존을 한번은 직접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한 번은 본질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는 그가 의식하고 있는 측면이다. 후자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측면이다. 그는 진정으로 직접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미리 선택해놓은 것에서 출발한다.

“외적 반성은 이런 규정 속에서 이중화되어 한번은 전제된 것으로서 또는 자기 내로 반성하여 직접적이 되는 것으로서[현존] 존재하며 다른 한 번은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는[가상] 반성으로서 존재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2-253)

이런 외적인 반성은 직접적인 것을 전제로 해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전제하는 반성 또는 칸트가 말한 반성 판단과 같다. 헤겔도 그러므로 주석에서 “칸트가 특수자가 주어진 경우 그것에 대해 일반자를 찾으려는 것이라는 의미를 할당한 반성은 이미 밝혀지듯이 다만 외적 반성과 흡사하다”라고 말한다.

칸트의 반성 판단에 속하는 미적 판단은 칸트 자신은 순수하게 직접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믿었다.

“사유하는 반성은 외적인 반성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사실상 단적으로 주어진 것 즉 그것에 낯선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나가서 자신을 단순히 형식적인 활동으로 즉 내용과 소재를 외부에서 받아들이고 독자적으로는 다만 그런 내용에 의해 제약된 활동으로 고찰한다.” (헤겔 논리학, GW11, 255)

그러나 사실 헤겔이 말한 대로 이런 반성 판단 즉 외적인 반성은 이미 주관적으로 선택된 것에서 출발하는 순환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반성 판단을 그런 외적인 주관적인 반성에 그친다고 보고, 진정한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반성을 떠나서 절대적인 고찰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낭만주의 철학자들은 절대자를 직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헤겔은 그들이 반성을 “절대적 고찰방식의 반대 극이며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간주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4-5)라고 말한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보듯이 절대자에 관한 이런 직관주의적 인식론을 밤에는 모든 소가 검게 보인다고 하면서 비판했다.

3)

헤겔은 인식이 개념을 통해 일어나는 선험적 인식인 한에서 반성적 인식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반성이 처음에는 외적 반성이더라도 마침내 절대적인 반성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절대적 반성은 곧 반성을 통해 얻어지는 본질이 단순히 외면적 주관적인 본질이 아니라 사물 자체의 고유한 본래적 본질 즉 객관적 본질이 될 수 있게 하는 반성이다.

“그러나 반성에는 또한 절대적 반성의 개념도 있다. 왜냐하면, 반성이 자기의 규정 작용 속에서 다가가는 일반자, 원리 또는 규칙과 법칙은 출발점이 되는 그런 직접적인 것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직접적인 것은 무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런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 즉 규정하는 반성이 비로소 직접적인 것을 그 진정한 존재에 따라서 정립하는 것으로서 여겨지며 그런 규정하는 반성이 직접적인 것에서 수행하는 것 즉 그런 반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규정은 그런 직접적인 것에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래적 존재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4)

헤겔은 이런 객관적 본질에 이르는 반성을 ‘절대적 반성’이나 ‘내재적인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bestimmende Reflxion]’이라는 개념으로 서술한다. 헤겔의 논리학 본질론에서 반성 운동의 명운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규정하는 반성이며, 이는 본질론이 존재론과 개념론을 매개하는 장이니, 논리학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으니, 이제 이 개념이 지닌 정확한 의미를 탐구해 보기로 하자. 도대체 어떻게 반성 운동이 외적인 반성에 그치지 않고 규정하는 절대적 반성이 될 수 있는 것일까?

4)

헤겔은 1편 가상의 2장에서 반성을 다루다 그 3절에 이르러 규정하는 반성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지금껏 논의하지 않았던 ‘반성 규정[Refleionbestimmung]’이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이 반성 규정은 나중에 ‘본질 규정[Wesenheit]’이라고 하므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 절 바로 다음 1편 3장에서 다루게 될 ’동일성‘과 ’차이‘, ’대립‘과 ’모순‘이라는 규정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먼저 이런 반성 규정이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질적 규정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한다. 질적 규정에서 어떤 규정은 그 자체에서[an ihm selbst] 자신의 타자로 이행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그 자체에서 파란색으로 이행한다. 이런 이행은 질적 판단에서 긍정 판단에서 부정 판단으로의 이행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현존은 그 자신에서 부정을 지녔던 존재이며 이런 부정은 그 자체 직접적인 것이었으니 존재는 그 부정의 직접적인 받침대이자 지반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5)

그러나 반성 규정에서 어떤 현존 즉 규정은 마찬가지로 타자와 관계하지만, 여기서 관계는 반성의 관계에 있다. 즉 어떤 것은 자신의 타자를 통해 규정될 뿐이다. 예를 들어 왼쪽은 오른쪽이 아닌 것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이다.

“반성 규정은 존재, 질의 규정성으로부터 구별된다. 이 존재의 규정성은 일반적으로 타자에 직접 관계한다. 정립된 존재도 타자에 관계하지만, 이때 타자는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질의 부정성은 존재하는 것으로서 부정성이다. 존재가 그 근거와 지반을 이룬다. 그러나 그에 반해 반성 규정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헤겔 논리학, GW11, 256)

즉 본질의 영역에서 하나의 현존은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자기 내 반성’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질은 자기 내에서 부등하며 따라서 이행하는 것이며 타자로 소멸하는 계기이다. 그에 반해 반성 규정은 부정으로서 정립된 것이며 그 근거에 부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부정이며 자기 내에서 자기와 부등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본질적이며 비 이행적인 규정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56)

“정립된 것은 자신을 규정으로 고정하는 데 그 이유는 반성이 반성을 통해 부정된 존재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성을 통해 부정된 존재는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규정은 존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동일성을 통해 성립한다. …반성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적인 것[타자]을 부정적인 것으로 즉 지양되거나 정립된 것으로서[부정함] 가지므로 부정적인 것에 존립을 주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6)

5)

여기서 자기 내로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의 타자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가 규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질적인 규정과 반성 규정은 부정성의 차이가 있다. 질적 규정성에서 부정성은 타자로 이행, 특정한 부정[bestimmte Negation]이다. 반면 반성 규정에서 부정은 부정의 부정[die Negation des Negatives]이며, 자기로 복귀하는 것이니, 그런 한 타자와 관계하면서도 각자는 자유롭다.

“반성 규정은 이처럼 자기 내로 되돌아온 것이므로 자유로운 본질 규정으로 나타나니, 이 본질 규정은 공허 속에서 서로 견인하거나 반발하는 것 없이 떠도는 본질 규정이다. 이 본질 규정 속에서 규정성은 자기 관계를 통해서 고정되었으며 무한히 고정되었다. 그것의 규정되어 있음은 그 이행과 단순한 정립됨을 자기에 종속시키거나 그것의 타자로의 반성을 자기로의 반성으로 구부러지게 한다.”(헤겔 논리학, GW11, 256)

“반성 규정은 정립된 것이며 부정이지만, 이런 부정은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기 내로 구부려 되돌아오게 하니 이런 부정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의 타자가 통일된 것이 다만 이를 통해 본질 규정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57)

하나의 현존과 다른 현존 사이의 이런 반성 관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 동일하거나 차이를 지니며,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한다. 반성 규정은 본질론 영역에서 다루어진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를 규정하는 일종의 메타 규정성이다.

6)

이제 헤겔이 반성 개념을 두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의 차원은 현존을 본질과 관계하여 반성 운동을 말한다. 이때 제시된 것이 외적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이다. 다른 하나는 본질의 영역에서 현존 사이의 차원에서 사용한다. 이런 현존은 서로 반성적 관계 속에 있으며 이를 통해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규정을 지닌다.

본질과 현존 차원의 반성 운동은 수직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현존과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는 수평적이라 할 수 있다. 양자는 그러면 어떤 관계인가? 현존 사이의 반성 관계는 다양한데(즉 차이와 대립, 모순 관계) 이 반성 관계를 통해 현존이 현존하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 현존의 공간은 존재론에서 질의 공간이나 양의 공간과 구별되는 공간이며 반성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공간이다. 반성에 두 차원이 있다는 사실은 아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반성은 자기 내에서 지속하는 규정 작용이다. 본질은 이런 규정 작용 속에서 자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구별된 것은 단적으로 정립된 것이며 본질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구별된 것은 정립된 것이 아니고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다. 부정으로서 부정은 이런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 속에 있으며 자기의 타자 즉 자기의 비 본재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다.”(헤겔 논리학, GW11, 257)

여기서 헤겔은 정립의 측면과 자기내 반성의 측면을 구별한다. 전자는 본질과 가상의 차원이다. 후자는 현존 사이의 관계 차원이다.

그런데 두 차원은 서로 관계하는 것이 아닐까? 즉 본질이 열어주는 것이 바로 현존의 공간이 아닐까? 하이데거는 존재가 현존재가 살아가는 세계를 열어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헤겔에서도 본질이 현존의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거꾸로 현존의 공간을 통해 그것이 열어준 본질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즉 그 본질이 내재적인지 외적인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은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이를 통해 반성 규정[반성 관계]은 규정된 가상을 즉 가상이 본질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인 본질적 가상[반성 운동]을 이룬다. 이런 이유로 규정하는 반성은 반성이 자기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은 지배적인 것으로 된 부정 속에서 상실된다.”(헤겔 논리학, GW11, 257)

여기서 헤겔은 규정하는 반성은 반성이 자기를 벗어나 더는 반성이 아닌 것으로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규정하는 반성을 통해 본질이 현존에 내재하게 되면 여기서 개념 운동이 시작되는 주체 개념이 출현하기 때문이다.이 개념은 자기 실현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며 이를 헤겔은 “지배적으로 된 부정” 즉 주체라고 한다.

문제는 이 두 차원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논의다. 본질과 공간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문제는 헤겔 논리학에서 핵심 문제인데 헤겔은 이 문제를 바로 다음 장 즉 본질 규정 장에서 다루고 있으니, 일단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후로 미루기로 하자.

6)

헤겔은 존재의 영역에서 직접 주어지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반성적 관계를 통해 규정된 것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본다. 많은 철학은 이런 직접 주어지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가장 직접 주어지는 것을 찾아서 고대 철학의 지각 경험에서 근대 철학의 감각 경험으로 다시 현대 분석 철학 등에서 제기하는 요소적 감각 경험으로 나갔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직접 주어지는 경험은 지각이든 감각이든 요소적 감각이든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는 정신현상학 감각적 확신 장을 읽어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이미 후일 콰인 등이 제시한 지시적 불확실성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헤겔은 칸트 선험적 인식론을 따라서 모든 인식은 개념의 체계를 토대로 출현한다고 본다. 칸트는 이런 개념적 인식이 물 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에 부딪힌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헤겔은 오히려 그 개념적 체계가 개별자들에 대해 외면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며 본래적이어서 물 자체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는 이런 개념적 인식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에 즉 물 자체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정립된 것이 더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이 정립되면, 현존은 그것의 본래적 모습 즉 부정적인 것이며 단적으로 다만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에 관계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립된 것은 본질과 관계해서 정립된 것 즉 자기 내로 되돌아간 것[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56)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

1)

앞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부정적인 것의 자기 부정 운동이 곧 본질이며, 이 부정의 부정이 자기 관계하면서 직접적인 가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 양자의 관계를 종과 개체의 관계에 비추어 이해했다.

본질과 가상은 서로 순환하는데, 이런 순환하는 운동의 양극단이 본질과 가상이라면 양극단을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이다. 헤겔은 반성하는 운동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우선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다음으로는 외적인 반성과 내적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의 짝이 있다.

먼저 정립하는 반성[앞으로 정립으로 축약]과 전제하는 반성[앞으로 전제로 축약]을 살펴보자. 헤겔은 양자는 상호 작용적으로 보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했던 두 가지 판단 작용의 구분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설명한 적이 있지만, “이 장미는 빨갛다”라는 판단에서 한편으로 이 판단은 주어인 꽃이 지닌 여러 성질(빨갛고, 향기로운 것 등) 가운데 하나인 빨간색을 끌어내는 것이다. 빨간색은 개별 장미에 내재한다. 칸트는 이런 판단 작용을 구성적이라 했다. 이는 지성의 작업이다.

그런데 이 판단은 장미라는 개별 대상을 빨간 것들이라는 일반적 유에 포섭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개별자를 일반자에 포섭하는 판단은 전제하는 판단이며 이는 상상력의 작업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판단력 일반은 특수를 일반 아래에 포함된 것을 사유하는 능력이다. 일반이 주어져 있는 경우에는 특수를 이 일반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은 규정적이다. 그러나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특수에 대하여 일반을 찾아내야 할 경우에는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이다.”(칸트 판단력 비파], 서언, S. 27)

2)

칸트는 판단을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해서 서로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인식에서 구성적 판단도 구상력을 통한 도식을 매개로 하며 거꾸로 미적 판단도 필연적이려면 지성의 개입이 필요하다. 지성은 개별 대상을 가장 적절하게[필연적으로] 일반적 유에 포섭한다. 결국, 칸트 자신은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모든 판단은 구성과 포섭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겔은 논리학 3부 주관 논리학 판단론에서 판단을 내재와 포섭이라는 이중적 작용으로 파악한다. 이 가운데 내재란 칸트가 구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반면 포섭이란 칸트가 반성이라고 했던 판단 작용이다.

“그러나 이제 주어는 자립적인 것인 한 그런 동일성[계사로서 이다]은 술어가 그 스스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고 그 존립을 다만 주체 속에서 갖는다는 관계를 가진다. 술어는 주어에 내재한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술어 역시 자립적인 일반성이고 주어는 거꾸로 그 술어의 한 규정일 뿐이다. 그런 한 술어는 주어를 포섭한다.“(헤겔 논리학 2부, GW12, 57)

하나의 판단에서 이 두 가지 작용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주어는 내포 상으로는 다양한 규정을 잠재적으로 포함하는 것이고 외연 상으로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술어는 이런 내포적 규정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것이고 동시에 개별자를 포괄하는 일반자가 된다.

위에서 말한 판단의 주어 술어 관계는 모든 판단 일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다루어지는 것은 질적 판단, 양적 판단을 넘어서 출현하는 반성 판단 또는 관계 판단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는 개체이며 술어는 종적 규정성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사유하고 있다”와 같은 판단이다. 이런 판단에서 여기서 주어가 곧 가상이며 술어가 곧 본질이다.

3)

반성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 가상과 본질은 판단하는 운동의 양극단이며 양자를 매개하는 운동이 곧 반성 운동이다. 이 반성 운동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립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전제하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은 판단을 구성하는 두 측면으로 보아도 좋지만, 헤겔의 반성 운동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를 하나의 운동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어떤 것을 발견한다. 우리가 발견할 때 그것은 이미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직접 현존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것을 나름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눈앞의 현존에 관한 이런 규정을 마치 자연적인 것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규정은 아직 어떤 판단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선술어적인 규정이다. 이것을 헤겔은 직접적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곧 이것을 판단으로 구성한다. 즉 예를 들어 ‘이것은 개다’라고 판단한다. 선술어적 판단이 판단으로 이행한다. 이런 선술어적 판단에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규정이 판단에 이르게 되면, 주어 술어로 분화된다. 즉 판단이 성립한 것이다.

“가상은 반성과 본성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가상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반성이다. 자기 내로 복귀한 가상, 따라서 그 직접성으로부터 소원화한 가상을 우리는 반성이라는 외국어로 표현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본질은 반성한다. 이 생성이나 이행이 자기 내에 머무르기에 여기서 구별된 것은 단적으로 다만 그 자체에서 부정적인 것[규정된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된다.”(헤겔 논리학, GW11, 249)

가상은 최초에는 직접적인 것인데 이 가상이 직접성을 벗어나서[소원화하면서] 반성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반성하면서 가상은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 과정이 곧 정립하는 반성이다.

4)

이렇게 판단 속에서 규정된 것이기에 이 직접적 현존은 더는 “출발점으로 되면서 그 자신의 부정으로 이행하는 최초의 직접적인 것[선술어적 직접성]이 아니며” 그렇다고 “반성을 통해서 운동해서 지나가는 존재하는”(GW11, 249-250) 불변하는 기체[Substrat]도 아니다.

“이것은 정립된 것이다. 즉 직접성이 순수하게 다만 규정성으로서 또는 자기 반성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이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본질]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직접성은 가상의 규정성을 이루는 직접성이며 이로부터 반성 운동이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헤겔 논리학, GW11,251 )

이와 같은 정립하는 반성에서는 이미 그런 근거 즉 개의 본질적 규정이나 종적 규정이 판단하는 자에게 알려져 있었고 그는 그런 근거를 통해 그것을 개라고 판단했다. 그는 예전에 그런 물음을 제기했고 나름대로 그 답을 알거나 배웠다.

그러나 이미 익숙해져서 그 근거는 이렇게 판단할 때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마치 자전거나 수영하는 기술을 그가 알고 있으나 명확하게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 대부분은 이런 명확하게 의식하지는 않으나 이미 알고 있는 근거를 통해 내려진 판단이다.

5)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왜 그게 개야?”라고 물으면 그가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개의 본질, 즉 판단 근거로 간주했던 것을 제시할 것이다. 즉 저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는데 개 머리는 개에게만 나타나는 것(개의 종적 규정성)이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런 근거를 제시하기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그 근거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는다. 개 머리를 보는 순간 곧바로 “저건 개야”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판단하면서 그것은 이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정립된 것이 된다. 이게 헤겔이 말하는 반성 운동의 첫 번째 과정인 정립하는 반성이었다.

그런데 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왠지 종종거리고 걷는 것이 꼭 고양이 같아서 저게 개인가 하고 의문스러워지는 때(또는 “그게 왜 개야?”하고 누가 묻을 때), 우리는 개라고 하는 판단의 근거를 묻게 된다. 이렇게 물음은 개에 관한 관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 물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를 알게 된다. 그는 개가 어떻게 걷든 간에 개 머리를 하고 있으면 모두 개야라는 생각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제 어떤 판단의 근거 즉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을 헤겔은 전제하는 반성이라 한다.

“반성은 부정적인 것[가상]을 지양하는 것이니 곧 반성의 타자[가상]를 지양하는 것이며 직접성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되돌아온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 자기와 합일하는 것으로서[자기 부정으로서 본질] 직접성이므로 이 반성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가상]을 부정적인 것으로서 보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반성은 전제다.”(헤겔 논리학, GW11, 251)

“또는 직접성은 되돌아온 것인 한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며 직접성이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 자신을 부정하는 것[직접성의 정립]을 지양하는 것이다. 반성은 자기와 합일이니 반성은 그 자신의 정립을 지양한다. 반성이 자신을 정립하는 가운데 이런 정립을 지양하니 이런 반성이 곧 전제다.” (헤겔 논리학, GW11, 251)

이때 전제된 것은 현존에서 관찰된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개 머리의 모습이다. 그는 이 개 머리를 전제로 그러면 그것은 개라는 종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때 판단의 전제가 된 것은 개별적 현존에서 관찰된 현상이다. 이 현상을 전제로 해서 그 근거로 되돌아갔으니 왜냐하면 이 현상은 곧 본질의 종적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자기가 넘어나가고 그로부터 복귀한 직접적인 것을 자기 앞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런 되돌아옴은 이런 발견된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전제된 것은 생성되는 동시에 다만 버려진다. 그 직접성은 지양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거꾸로 지양된 직접성은 자기 내로 되돌아오는 것이며 본질이 자기에 이르는 것이며 단순하게 자기 자신과 동일한 존재[본질]이다. 이를 통해 자기에 이르는 것은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직접적인 것] 자신을 반발하는 것이며 [직접적인 것을] 전제하는 반성이다. 반성의 자기 반발은 자기 자신[본질]에 이르는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7)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현존을 개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현존의 본질 규정성 때문이다. 최종적인 판단이 내려지는 과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런 정립하는 반성을 논리적으로 규정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개의 본질 규정성은 곧 개 머리를 지닌 것이다.

이것은 개 머리를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이것은 개다.

반면, 전제하는 반성을 도해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개다.

———————

왜냐하면, 개 머리를 지닌 것은 개의 본질 규정성이고

이 개는 개 머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정립하는 반성이나, 전제하는 반성은 동일한 것이다. 다만 그 방향만 전도되어 있다. 정립하는 반성은 ‘그러므로’를 통해서 근거로부터 규정된 것이며, 전제하는 반성은 ‘왜냐하면’을 통해서 근거를 찾아 나선 것이다.

결국, 정립하는 반성은 습관적으로 일어난 판단이며, 전제하는 반성이란 판단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각적으로 그 근거 즉 본질을 밝히는 작용이다.

“따라서 반성하는 운동은 고찰된 것에 따라서 볼 때 자기 내에서 절대적으로 받아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왜냐하면, 자기 내로 되돌아옴[본질]이 전제하는 것[가상]은 본질이 그것에서 나와서 비로소 되돌아감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인데 이런 되돌아옴 그 자체 속에서[정립하는 반성]만 가능하다.”(헤겔 논리학, GW11, 252)

“반성이 출발한 지점인 직접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은 오히려 비로소 이런 넘어감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직접적인 것을 넘어가는 것은 그런 직접적인 것에 이르는 것이다. 운동은 앞으로 나가는 가운데 직접 자기 자신 내로 전환하여 다만 그런 방식으로 자기 운동한다. 정립하는 반성이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자기에서 나온 이런 운동은 전제하는 반성인 한에서 단적으로 정립하는 반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52)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6-라이프니츠의 표상에 관한 헤겔의 비판

1)

앞에서 설명했듯이 본질과 가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존재론에서 질 즉 현존[Dasein]은 직접적 존재지만, 가상은 직접적 존재더라도 본질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가상에서 본질에 대립하는 규정성이 갖는 직접적 존재는 본질의 고유한 직접성일 뿐이다. 이 본질의 직접성은 존재하는 직접성이 아니라 단적으로 매개되거나 반성된 직접성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7-248)

“가상은 존재의 규정성 속에 있는 본질 자체이다. 본질이 가상을 갖는 방식은 곧 본질이 자기 내에서 규정되고 이를 통해 그 자신의 절대적 통일로부터 구별되는 방식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8)

가상은 그 자신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상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니, 이렇게 부정적인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이 곧 본질이다. 이를 통해 가상은 자기 내로 복귀하여 본질이 된다.

본질은 부정성이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이런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가상이 된다. 그런 가상은 앞에서 말했듯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여 본질로 복귀한다.

“부정성은 부정성 그 자체이니, 이 부정성은 자기가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성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 부정성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 자신을 반발시키는 부정이다.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직접성은 직접성에 대립하는 부정적인 것이거나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성 자체는 절대적 부정성이며 규정 작용이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이며 자기 내로 되돌아옴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48)

마치 자기 관계로서 가상과 부정의 부정으로서 본질은 서로의 이면이며 마치 순환하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가상이나 본질은 모두 이중화된다. 가상은 직접적이면서도 자기 부정적인 것이며, 본질은 부정의 부정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2)

헤겔은 이런 가상을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와 비교한다. 회의주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이 그 자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회의주의는 이런 부정조차도 다시 부정하니,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세계에는 풍요한 내용이 있다.

어떤 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도 그것의 부정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니, 여기서는 어떤 판단도 내려질 수 없으며 그 결과 판단중지 상태에 빠지는데, 헤겔은 가상이란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정은 곧 부정을 부정하는 것이니 그것은 존재한다.

이런 이중적 상태는 근대 관념론에서 현상 개념도 마찬가지다. 칸트의 경우 현상은 물 자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부정된다. 하지만 현상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선험적 감성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에서 물 자체만이 모순이 아니다. 칸트에서 현상 자체도 이미 모순이다. 그것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으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회의주의에서 판단중지, 관념론에서 현상은 그것은 다양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것이 실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뿌리도 없이 다만 풍요한 내용만 나타나는 것은 마치 허공에 뜬 물거품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과 같다.

“이런[회의주의나 관념론] 내용에는 사실 어떤 존재나 어떤 사물 또는 물 자체가 밑바닥에 놓여 있을 수 없으며 내용은 독자적으로 내용이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머무른다. 다만 내용은 존재에서 가상으로 옮겨졌을 뿐이니 가상이더라도 자기 자신 내에서 직접 존재하고 상호 대립하는 다양한 규정성을 갖는다.”(헤겔 논리학, GW11, 247)

3)

가상과 본질의 이런 관계는 자주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에 비추어진다. 사물은 거울에 비추어어서 자기를 보며 거꾸로 거울 역시 사물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거울과 사물 사이의 빛의 유희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빛의 유희는 그야말로 사물이나 거울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거울과 사물에서 빛의 반사는 표면 배후에 마치 이와 무관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겔에서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차라리 종과 개체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종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종은 개체가 자기를 복제하는 과정 중에서만 즉 그런 운동을 통해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체는 직접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런 종의 자기 재생산을 매개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일시적인 존재다. 개체는 자기를 부정하기 위해서만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만 직접 존재할 뿐이다.

본질 역시 마찬가지다. 본질은 현존과 구별되는 현존을 피안에서 갖지 않는다. 본질은 오직 자기를 재생산하는 개체의 운동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 가운데 본질은 시간상 지속해서 존재한다.

4)

이런 맥락에서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에서 표상 개념을 소환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표상을 전개한다. 그러나 모나드는 생산하고 결합하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표상은 모나드 속에서 거품처럼 떠오른다. 표상은 무차별하며 직접 존재하니 서로에 대해 대립할 뿐만 아니라 모나드 자신에 대해서도 대립한다.”(헤겔 논리학, GW11, 247)

이 짤막한 구절은 곧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헤겔의 긍정과 부정을 통시에 포함하는 말이다. 그 말의 구체적 의미는 헤겔이 철학사 강의에서 라이프니츠에 관해 설명한 것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표상을 본질의 가상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단순 실체인 모나드는 어떤 질이나 규정을 지니고 있다. 이 질이 곧 모나드의 표상 또는 지각이다. 모나드가 질이나 표상을 지니지 않으면 이 세계의 다양성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나돌로기, 명제8 참조)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질이나 표상을 스피노자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본 것과 달리 자기 내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내부에서 주어지는 질과 표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헤겔이 말한 본질의 가상이 된다.

모나드는 단순한 실체이므로 이미 내부에 모든 질과 규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나드가 지닌 하나의 질은 다른 질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모나드는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이런 이행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내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나드의 질적인 이행을 일으키는 힘이 곧 모나드가 지닌 욕망이다. 이처럼 모나드가 욕망하는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모나드는 원자론자의 원자와 다르다.

“변화를 일으키는 내적 원리의 작용(즉 하나의 지각으로부터 다른 지각으로의 전이)이 욕망이라 불리는 것이다. 욕망은 그것이 목표로 하는 전체 지각에 항상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은 항상 어떤 지각을 획득하며 새로운 지각에 도달한다.”(모나돌로기, 명제 15)

5)

그런데 여기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이 있다. 욕망은 자주 자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나드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필연적으로 변화한다. 여기에는 필연적 법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욕망과 필연 사이에 대립이 생기지 않을까?

이런 문제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욕망과 필연성을 화해시키려 한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침의 비유를 든다. 자침은 필연적으로 북쪽을 향한다. 그러나 자침이 만일 의식이 있다면 자유롭게 북쪽을 욕망하지 않을까? 즉 법칙을 따르는 것이 자유라는 스피노자적인 개념이 여기서 되살아난다.

이런 이행은 단적으로 일어날 수 없고 연속적, 점진적으로 일어나니, 여기서 모나드는 다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갖게 된다. 모나드는 통일성 안에 다중성을 지닌다. (모나돌로기, 명제 13 참조)

헤겔은 모나드가 욕망을 지니고, 자기를 표상하며, 다수성 속에서 통일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아나 정신과 같다고 한다. 즉 모나드는 정신적 원리이며 관념적인 것이라 한다. 여기서 물체적 모나드는 아직 자각되지 않은 미소의 상태에 있는 의식적 모나드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여기까지는 헤겔이 라이프니츠에 찬탄하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보다 탁월한 지점이 이렇게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에 라이프니츠가 이미 이르렀다는 데 있다. 그러나 헤겔은 곧바로 라이프니츠는 본질의 가상이라는 개념을 아직 충분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6)

여기서 우선 헤겔은 의문을 표시한다.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이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에 헤겔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의 질 즉 표상은 마치 “거품과 같다”고 한다. 이는 가상 개념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개별적 질이 거품과 같다면, 이는 욕망이 이를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은 자기가 정립한 질을 왜 다시 부정하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헤겔은 모나드는 각자 “자기 자신과 대립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는 부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긍정적인 것일 뿐이니 하나의 질이 다른 질로 이행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더구나 질의 이행과 관련해서 라이프니츠는 신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이렇다. 즉 모나드는 개별적인 모나드인데 서로 다른 질을 가지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어떤 외적인 영향을 주거나 받을 수 없으니 이들은 각자 자립적으로 다른 모나드와 무차별하게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와 전혀 무관하지만, 라이프니츠로서는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모나드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인데, 그런 필연성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면, 우주는 곧바로 무질서한 세계가 되어 맹목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통해 난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가 난파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나드의 질적인 변화가 각자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나드는 자립적이고 타자와 무차별하니 이런 모나드들 사이에 질적 변화를 서로 조절하여 통일하게 하는 힘은 모든 모나드를 넘어서서 모나드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 즉 신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라이프니츠에 따른다면 이 세계가 난파하지 않는 것은 신이 예정조화를 통해 모나드들 사이의 조화를 우주에 부여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에서 신을 상정하는 것은 마치 연극에서 기계 신을 도입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한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본질과 현존 사이의 수직적인 매개 관계를 생각해냈으나 아직 본질을 매개로 현존과 현존이 수평적으로 매개된다는 원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본다. 수직적 매개와 수평적 매개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헤겔에서 본질의 반성 운동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5-가상과 진리[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5-가상과 진리

1)

서론에서 헤겔은 본질 개념이 출현하는 과정을 다룬 다음, 본질론 1편에 들어가 1장에서 가상을 다룬다. 이 가상 장에서 헤겔은 본질의 운동인 반성 운동을 다룬다.

가상은 독일어 ‘Schein’의 번역어인데 정말 다른 번역어가 없을까 고민스럽다. ‘Schein’은 ‘scheinen’에서 나온 말이다. ‘scheinen’은 ‘빛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빛으로 사물을 비추어 드러낸다는 의미지만, 가상이란 번역어는 거짓이라는 뜻이 들어가 원어 ‘Schein’의 의미와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헤겔이 가상[Schein]이라고 할 때는, 현상[Erscheinung]이라는 말과 대조해서 사용한다. 현상이란 어떤 것이 드러나는데 이때 매체의 힘을 통해 왜곡된다. 그러므로 현상은 사실 진리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우리가 현실 세계를 이데아의 모상이라 할 때는 이런 의미에서 현상이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로부터 멀어진 현상은 자신이 진리로부터 멀어진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진리로 생각하니, 스스로 기만에 빠진다. 반면, 어떤 것이 자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자기가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오히려 진리를 말한 것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일 때 헤겔은 이를 가상이라 한다. 그런 점에서 가상은 오히려 진리이다.

2)

가상과 현상 그리고 상징이라는 개념은 헤겔이 미학 강의에서 미적 정신의 시대 구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헤겔에서 예술은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기호이다. 이 절대정신은 그 시대 공동체적 의지인 국가를 의미한다. 이 국가는 종교적으로는 신으로, 예술적으로는 기호로, 철학적으로는 자기인식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 예술에서 이 기호는 시대에 따라서 상징, 현상, 가상으로 발전한다.

상징은 관습적이거나 문화적으로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레고리라는 개념에 가까운데, 헤겔은 고대 인도, 페르시아, 이집트 등 아직 개인이 출현하지 않고 혈연 체제(이는 동시에 노예 체제다) 속에 살아갈 때, 출현하는 예술적 형식을 상징이라 한다. 이 시대 예술은 낯선 신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런 암시는 그 시대 살아가는 그 민족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것이다.

반면, 그리스 시대에 이르면 개인이 출현하여 도시 국가를 형성한다. 이런 시대에 신은 곧 인간의 육체적 모습 그것도 영웅적인 인간의 운동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개인의 자각이 그만큼 발전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시대 예술로서 국가를 건설한 영웅의 생동적인 삶과 운명을 표현하는 조각이나 시문학은 곧 절대정신의 직접적인 현상이다.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면, 상업적 교환이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출현한다. 이런 인간의 상호 교류를 통해 절대정신이 개인의 내면에 소외된 방식으로 출현한다. 개인은 이런 절대정신으로 건너가는 하나의 매개인데, 이런 매개가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종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이다. 예술적으로는 이런 매개 즉 부정적인 존재 즉 개인의 자기 부정을 통한 절대정신으로의 복귀는 가상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음악이나 미술, 그리고 근대 시문학은 결정적으로 이런 가상적 이미지로 충만하다. 대표적인 것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악한의 자멸이다.

3)

헤겔이 논리학 본질론에서 다루는 본질과 가상의 관계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구체적으로는 생물체에서 종과 개체의 관계를 의미한다. 개체란 종의 산물이면서 종을 재생산하는 매개이니, 종은 개체를 통해 재생산된다. 반면 개체는 자기 부정을 통해 종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종과 개체의 이런 관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제2실체 즉 종과 제1실체 즉 개체 사이의 관계를 이해했는데, 마찬가지로 헤겔 역시 이런 종과 개체의 관계를 통해 본질과 가상의 관계를 이해한다. 이제 종과 개체라는 관계를 모델로 헤겔의 본질과 가상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이해해 보자.

먼저 헤겔은 ‘본질적인 것’이란 개념을 끌어낸다. 이것은 본질이지만, 개별적 현존에 대립하는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존재로부터 나와 존재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지양되면서 “자기 자신과 단순하게 동일한 것”이지만, 그렇기에 개별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질 자체는 존재하는 직접적 본질”이다.

그러기에 헤겔은 이를 ‘본질적인 것[Wesentliche]’이라고 하면서 본질과 구분한다. 그 구별의 핵심은 이 본질이 직접 현존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본질은 추상적인 일반자인데 직접 현존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마치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이데아를 말하는 것일까? 헤겔은 그런 경우라면, 본질이 피안에 존재한다고 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직접 현존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나중에 실체를 말할 때 일반적 존재가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하는데, 본질적인 것은 이런 실체적인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헤겔이 말하는 이런 본질적인 것은 어떤 것인가? 헤겔은 이런 본질적인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와 본질은 이런 방식으로 서로 타자로서 상호 관계한다. 왜냐하면, 각자는 상호 무차별한 직접적인 것 즉 존재를 가지며 양자는 이 존재에 따라서 본다면, 동일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다만 일반적으로 말해 존재가 본질에 대해서 타자로서 관계하는 한 이런 본질은 고유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다만 다르게 특정화된 현존 즉 비본질적인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5)

“이런 현존 속에 존재가 지닌 모습이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이라는 사실은 그것의 현존 자체에 외면적인 또 하나의 규정이니 거꾸로 보자면 이는 본질이 그 자체로 대자적인 존재이지만 다만 타자에 대립해서 특정한 관점에서 그러할 뿐인 것과 같다.”(헤겔 논리학, GW11, 245)

여기서 헤겔의 본질 개념이 종에 비추어 볼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종이 하나의 개별적 현존으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종은 새로운 개체를 생산하는 조상으로서 종이다. 또는 과학자는 종을 분류할 때 그 종을 대표하는 개체를 표본으로 삼는다.

조상으로서 종이나 표본으로서 개체를 단순한 개별적 개체와 구별할 때 헤겔은 전자를 본질적인 현존이라고 하고 후자를 비본질적인 현존이라 한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차이는 상대적이다. 과학자는 주관적으로 어떤 것을 표본으로 삼을 수 있으며, 한 조상에서 나온 개체는 또 다른 개체의 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구별은 “외적으로 정립된 것”이며, 이런 분리는 “제삼자에 속하는 분리”라 한다.

4)

이제 헤겔은 본질을 이런 비본질적인 것과 구분한다. 그 본질을 규정하면서 헤겔은 가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본질은 곧 “본래 그리고 대자적으로 무실한 직접적인 것” 즉 ‘비실재[Unwesen]’ 또는 ‘가상’이다.

“본질은 존재의 절대적 부정성이다. 이 본질은 존재 자체지만, 타자로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존재가 직접적인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직접적인 부정으로서 즉 타자 존재를 동반하는 부정으로서도 자기를 지양한 것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5)

본질은 현존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존이 자기를 부정하는 운동, 부정된 것이 다시 부정되는 운동 자체를 말한다. 본질은 현존 내에 존재하는 이런 운동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가상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우선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부정되는 그 자신이 이미 부정된 것 또는 정립된 것이다. 이를 정립하는 존재는 곧 본질이다. 이 부정된 것이 자기를 부정하니, 그 결과 자기 내로 복귀하니 본질로 된다.

이런 부정을 통한 자기 복귀는 이중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이를 부정의 부정 즉 부정성의 자기 복귀라는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본질이다. 이런 자기 복귀는 자기 관계하는 직접적인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가상이다.

이렇게 구별해 보면, 가상과 본질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본질은 자기 복귀를 통해 직접적인 것으로 되니 가상이고 가상은 부정적인 것으로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 자기로 복귀하니 본질이다.

“가상은 존재의 규정성 속에 있으면서도 이런 직접적인 비 현존이니 다만 타자 즉 자신의 비 현존과 관계하는 가운데 현존하며 다만 자기가 부정되는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비자립적인 것이다.” (헤겔 논리학, GW11, 246)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4-본질에 이르는 길[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4-본질에 이르는 길

1)

본질론을 시작하며, 헤겔은 그 서론 격으로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라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 주장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존재가 지양되어서 본질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양된 것이기에 존재한다[sein]의 과거 분사 ‘gewesen’에서 본질[Wesen]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본질에 관한 인식은 직접 일어나지 않으며, 직접 인식된 존재를 지양해서 얻어진 매개적 인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양된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하다. 헤겔은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서술하는데 우선 그것은 개별자인 존재자에서 일반자인 본질로 이행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일반자가 근거이고 개별자는 그 근거로부터 나온 산물이므로 이는 결과에서 근거로 되돌아가는 것 즉 ‘근거로의 복귀’라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추상적 개념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구체적 과정과 다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갑자기 당혹하게 된다. 흔히 논리학은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즉 추상이 구체화되는 하강하는 연역적 과정으로 생각된다. 반면 정신현상학은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일반적 개념에 이르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으로 상승하는 귀납적 과정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논리학에서 존재론의 운동을 거쳐 마침내 도달한 결과인 본질은 헤겔 자신의 말대로 개별 현존의 근거가 되는 일반적인 본질이니, 논리학의 전개 과정이 상승하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이었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해서 논리학의 길이 정신현상학의 길과 같아진 것인가?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는 여러 번 강조해서 설명했다. 정신현상학은 표면적으로는 상승하는 귀납적 과정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념의 자기실현이 매개되어 있다. 거꾸로 논리학은 표면적으로는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경험이 상승하여 자기 내로 복귀하는 과정을 매개로 한다.

이런 설명을 전제로 한다면, 헤겔이 여기서 본질에 이르는 길은 존재가 지양되어 근거로 복귀한 길이라고 한 주장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헤겔은 여기서 논리학에서 본질이 출현하는 매개적 길을 설명한 것이다. 실제 논리학에서 존재는 추상적인 질로부터 시작하여 더 구체화한 양으로 발전하고 이 양이 더욱 구체화하면서 척도를 거쳐 본질에 이르렀다. 이런 구체화하는 과정이 논리학의 표면적 길이다.

2)

헤겔은 자기 내 복귀 과정으로서 지양을 또 다른 측면에서 파악하는데, 사실 헤겔이 이 서론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에서 강조하려는 측면은 바로 이런 측면에 있다.

존재의 지양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의 방식은 곧 그 지양이 외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지양은 자의적인 추상 작용인데, 만일 본질이 주관이 자의적으로 추상하여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개별 존재자의 본성에 무관한 것이 될 것이다.

흔히 경험적 사실을 추상하여 일반적 본질을 얻는다는 과학적 작업은 자칫 이런 주관적인 추상에 머물러 주관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본질을 얻을 뿐이다. 이것은 자주 경험 과학이 빠져드는 오류인데, 헤겔은 이런 주관적 본질을 규정된 존재에 대립하는 본질이며, 비록 순수한 존재이며 무규정적인 단순 존재라고 하더라도, 이는 내적으로 죽어 있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주관적 자의적 추상을 비판하면서 헤겔은 존재에서 본질에 이르는 과정은 “존재 자체가 스스로 거쳐나가는 길”이며, 이는 자기 부정을 통해 나가는 ‘무한한 운동’이어서 ‘내면화의 길’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내면화를 통해 얻은 본질은 주관적 본질처럼 존재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계가 절대적으로 소멸해서, 존재를 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 내에 들어 있는 본질이다. 이런 본질은 존재에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에 내면적으로 관계하므로 이는 주관적인 본질이 아닌 객관적 본질이다.

3)

주관적 본질 또는 ‘단순한 그 자체 존재’와 대립하는 객관적 본질 또는 ‘절대적 그 자체 존재’가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사물의 객관적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철학의 이념이며 모든 철학이 이를 목표로 했으나 결국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길은 자주 본질 직관을 끌어들여 해결되지만, 헤겔은 이런 본질 직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식은 개념을 통한 인식이지만, 이런 개념적 인식은 칸트가 말하듯이 물 자체에 부딪히지 않는가? 그런데도 헤겔은 이런 객관적 본질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니, 과연 어떻게 그와 같은 길이 가능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길은 논리학에서는 서술되지 않는다. 이 길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발전하는 길을 통해 설명되었다. 헤겔은 여기서 그런 길을 전제로 하고 그런 길이 매개되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존재에서 본질에 이르는 길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길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서술된 의식 경험의 길을 여기서 다시 정리하자면, 그 길은 주관적 개념이 자기모순을 통해 나가는 길이다. 이 개념은 자기를 규정하여 대상화하지만, 여기서 현상을 넘어선 물 자체 즉 자기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이 개념은 개별적 개념임이 드러나며, 이제 개별적 개념을 넘어서 모순적 경험까지 포괄하는 일반적 개념이 출현한다.

이 일반적 개념은 사물 자체에 더 적합한 내재적 개념 즉 객관적 개념이 되며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대상화가 일어난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자기모순을 겪는 가운데 마침내 개별적 개념은 주관적인 개념을 벗어나 사물 자체에 객관적인 일반적 개념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등장한 개념은 대상에 대해 외면적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의식 경험의 길이 반복해서 일어남으로써 대상에 대해 내재적인 객관적 개념이 출현한다. 즉 이런 내재성과 객관성은 의식 경험의 길이 반복하면서 점차 증가해 왔다.

4)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을 매개로 하면, 주관적 본질이 어떻게 객관적 본질로 발전하는지가 이해된다.

정신현상학에서 본질은 감각적 확신의 대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성을 거쳐 지성 장 끝에서 자기의식에 이르기 직전에 도달한다. 이때 헤겔은 물체의 본질로서 법칙이 마침내 생명의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 생명의 개념이 곧 논리학에서는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정신현상학의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 논리학에서는 존재론으로 전개된다. 이 존재론의 처음 출발점은 감각적 질인데, 이는 아직 주관적 본질인 존재 범주[단순한 An sich]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처음 등장한 주관적 본질은 존재론의 운동을 통해 생명 개념에 이르는데 이 생명 개념이 곧 객관적 본질이다.

논리학에서는 이렇게 도달한 본질이 처음 추상적으로 출현했다가 이를 구체화하면서 마침내 실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처음 추상적 본질을 헤겔은 무규정적 본질이라 하며, 구체적으로 실현된 본질은 무한한 대자 존재로서 본질이라 한다.

“이렇듯 존재가 완전히 자기 내로 되돌아옴을 의미하는 본질은 처음에는 무규정적인 본질이다. 존재가 지닌 규정성은 그 속에 지양되어 있으니 본질은 자기 내에 이들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본질에서 정립된 방식으로 포함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자기와 통일되어 단순성 속에 있는 절대적 본질은 어떤 현존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현존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헤겔 논리학, GW11, 242)

“왜냐하면, 절대적 본질이란 곧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인 존재이니 즉 그 자신이 그 자체로 내포하는 규정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본질은 그 자신을 자기로부터 반발하게 하거나 자기를 무차별하게 대하여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자기를 자기에 대립하게 한다. 또한, 절대적 본질은 자기로부터 자기를 구별하는 가운데 자기와 통일을 이루는 한에서 오직 무한한 대자 존재이다.”(헤겔 논리학, GW11, 242)

4)

헤겔은 이 서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질의 운동을 존재론에서 등장한 질이나 양에서의 운동과 비교한다. 존재론에서 하나의 질은 그 자체에서 다른 질로 이행한다. 이는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는 부정의 길이다. 양에서 이행은 자기를 넘어서 자기에 도달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양은 연속적이며 그것들의 차이는 이런 연속성에 외면적인 크기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질이나 양에서의 운동은 수평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하나의 양에서 다른 양으로 이행이 일어난다. 이 길은 한 마리 개미가 무한한 평면을 지나가는 길처럼 보인다.

반면 이제 본질의 운동은 앞에서 말했듯이 존재론에서의 운동과 전혀 다르다. 이 운동에서 개체는 바로 다른 개체로 직접 이행하지 않는다. 마치 양자 사이에는 무한한 심연이 놓여있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체와 개체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개체와 개체를 연결해 주는 것은 곧 본질이다. 개체는 자기의 배후에 있는 본질로 이행하고 이 본질이 다시 개체를 생산하면서 이 개체들의 연관은 배후에 있는 본질을 매개로 일어나는 연관이다. 그러므로 이런 운동은 마치 수직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처럼 보인다.

“본질의 운동은 그 자신에서 부정과 규정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자기를 현존하게 하고 그것이 지닌 잠재적인 것을 무한한 대자 존재로 생성하게 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본질은 잠재적인 존재에 그의 잠재적 존재와 동일한 현존을 부여하면서 개념으로 된다.”(헤겔 논리학, GW11, 243)

개별적 본질은 단순한 종이다. 단순한 종에서 현존 즉 개체는 우연적이다. 종은 개체에 내재할 뿐이다. 그러나 개념에 이르면 이 본질은 일반적인 본질로 되며 이는 자기 의식적 개인이 이루는 사회다. 이 사회는 개인에 필연적이며 개인과 독립해서 실존한다. 이 독립적 실존이 자립적으로 되면 그것이 곧 개념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가이다.

본질이 개념에 이르는 길은 역시 의식 경험, 즉 자기모순을 통해 발전하면서 이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논리학에서 전형적인 방식인 회고적 방식으로 서술한다면, 이는 본질 속에 이미 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여 구체적 개념이 되는 길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3-칸트의 미적 판단과 반성 운동[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3-칸트의 미적 판단과 반성 운동

1)

위에서 비교라는 개념이 반성 개념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말했다. 칸트는 이처럼 비교를 통해 나오는 반성 개념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반성 개념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이미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할 때 선험적 반성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가 성질과 현존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오류에 빠졌는데 그는 이를 구별하면서 이런 구별을 대상 자체에서 차이가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 능력에서의 차이를 통해 제시한다.

칸트는 성질은 지성의 개념에 귀속되는 것이며 반면 현존은 감성의 형식에 귀속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을 그것의 근거인 인식 능력에 귀속하는 작업을 선험적 반성이라 했다. 여기서 반성은 어떤 것의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반성 즉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성 개념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한 것은 판단력 비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두 가지 판단을 구분한다. 하나는 규정적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반성적 판단이다.

2)

규정적 판단은 일반적 개념 아래에 개별적인 대상에 포섭하는 것이고 모든 인식 판단은 이런 규정적 판단이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 판단 역시 이런 포섭 판단 속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와 다른 또 하나의 판단이 있는데, 그것은 개별자가 주어지면 이 개별자에 적합한 어던 일반적 개념을 찾아내는 판단이다.

칸트는 이런 판단을 반성 판단이라 하면서 심미적 판단은 인식이나 실천 판단과 달리 이런 반성 판단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규정적 판단은 지성의 작용이라면 반성 판단은 상상력의 작용으로 보니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인식의 근원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

여기서 제시된 반성 개념은 앞에서 논의된 비교를 통해 나오는 반성 개념과 거리가 있다. 칸트 자신은 양자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양자를 구별해서 용어를 구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칸트가 반성 개념을 이렇게 이중적으로 사용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칸트의 이런 시도는 곧 반박에 부딪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칸트가 제시한 규정적 판단과 반성 판단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다.

규정적 판단은 일반적 개념을 개별 대상에 적용하는 것인데, 이런 적용은 직접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도식을 매개로 해서 적용된다. 그런데 이 도식은 상상력(칸트는 구상력이라 했지만, 본래 상상력과 같은 것이다)의 작용이다. 상상력이 미리 개별 대상에 적합한 일반적 개념을 찾아놓지 않았다면, 이런 구성 작용도 불가능할 것이다.

거꾸로 미적 판단에서 상상력을 통해 개별자에 적합한 일반적 개념에 귀속하는 것도 지성의 매개를 통해서 가능하다. 상상력은 개별자를 임의로 일반 개념에 귀속시키니, 이는 그 자체로 보면 자의적 작용이다. 하지만 미적 판단이 자의적이지 않고 일반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개별자에 가장 적합한 일반적 개념이어야 한다. 이는 그 개별자를 필연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이니, 이런 필연적 관계는 지성의 개념 구성 작용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3)

이제 헤겔은 칸트가 구별한 두 판단 형식 즉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을 판단 자체에 내재하는 두 가지 과정으로 통합한다.

하나의 판단은 술어가 주어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의 관계라 한다. 예를 들어 이 꽃은 빨간색이라는 판단은 이 꽃이 지닌 여러 성질 가운데 하나인 색깔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 내재 관계는 곧 주어인 일반 개념에 속하는 구체적 술어를 끌어내는 측면에서 개념의 구체화하는 운동을 보여준다.

반면 주어인 어떤 개별자들이 술어인 일반적 유에 속하는 관계를 포섭의 관계라고 한다. 이런 빨간 꽃들은 장미다라고 할 때와 같다. 이런 개별자로부터 일반적 유를 찾아 들어가는 운동 과정을 헤겔은 근거로의 복귀라고 한다.

헤겔이 개념 논리학 판단론에서 전개한 판단의 두 가지 의미는 본질론에서는 반성 운동의 두 가지 형식으로 규정된다. 개념이 구체화하는 과정은 정립하는 반성에 속하게 되며, 반면 근거에로 복귀하는 과정은 전제하는 반성에 속하게 된다.

헤겔은 칸트가 두 가지 과정을 두 가지 독자적인 판단으로 구분하여 하나는 인식과 도덕의 판단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미적 판단으로 보았던 것과 달리, 양자를 하나의 판단이 지닌 두 가지 대립된 계기로 이해한다.

즉 그에게서 A는 B다라는 판단은, 한편으로는 A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술어 B를 정립하는 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 A를 추상화하여 일반적 유인 B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그에게게서 주어와 술어는 각기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A는 한편으로는 추상적 개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자다. 개별자는 내적으로는 추상적 개념을 담지하고 있으니 구체적으로 꽃은 개별 장미인 동시에 장미의 일반 개념을 담고 있다. 이런 개별자인 동시에 내적인 일반 개념을 헤겔은 그 자체 존재라고 규정한다.

반면, 술어 B는 한편으로는 구체화된 개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 유이니, 예를 들어 빨간색은 장미 개념의 구체화이면서 장미의 일반적 유에 해당하니, 헤겔은 이를 개념이 그 자체적으로 동시에 대자적으로 실현된 존재라고 한다.

4)

헤겔의 반성 개념은 칸트가 벌여놓았던 철학적 논의를 종합하는 가운데 출현한다. 그는 앞에서 칸트가 구성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을 구별한 것을 반성의 두 가지 개념 즉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으로 구분한다.

헤겔은 양자를 하나의 판단이 지닌 두 가지 계기로 통합한다. 즉 정립하는 반성은 전제하는 반성을 매개로 하며 거꾸로 전제하는 반성 역시 정립하는 반성을 매개로 한다.

이런 통합된 반성 개념을 헤겔은 다시 공간적 현존과 연관시킨다. 사물이 관계하여 공간을 이룰 때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 동일성과 차이와 같은 반성 개념이다. 이런 반성 개념은 사물이 관계하는 공간에서만 적용할 수 있으며 그 관계가 없다면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헤겔에서 모든 성질은 관계 속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일정한 공간적 현존을 지니고 여기서 반성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에서 이 공간적 관계는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서 달라진다.

앞에서 질의 범주를 다룰 때 하나의 질은 이미 그 자체에서[an ihm]에서 다른 질과 관계한다. 여기서 하나의 질은 다른 질로 단적으로 이행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단적 이행의 관계도 하나의 공간이지만, 사실 양자가 동일한지 차이 있는지를 비교할 수는 있더라도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이행은 순간적으로 이행하는 명멸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양적인 범주를 보자. 양적인 범주는 자기를 넘어서 간다. 여기서는 연속성의 관계가 존재하며 그 차이는 양적인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범주를 적용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양은 그 물체에 외면적이기 때문이다. 3과 3은 같고 3과 4는 같지 않지만, 세 개의 바퀴를 지닌 자전거와 세 개의 다리를 지닌 솥이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헤겔은 관계가 이미 존재론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여기서 반성 개념을 다루지 않는다. 헤겔은 반성 개념을 비로소 본질 개념이 출현한 이후인 본질론에서 다룬다. 본질은 앞에서 생명의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생명체의 종과 개체 사이의 관계가 전개된다.

이때 개체는 다른 개체에 대해 같은 종이지만, 서로 다른 개체가 되면서 여기서는 같다와 다르다가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나와 타자는 하나의 개체로서 지속한다. 이런 지속성이 있으므로 비교될 수 있으니 동일한지 다른지가 문제 된다. 여기서 개체는 종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작용한다. 암수의 구별은 종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5)

이처럼 본질과 개체 사이의 관계에서 비로소 반성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 반성 개념 자체는 어떤 공간에 현존하는 사물들 사이에 적용된다. 그러나 그런 사물들이 비교되는 공간 자체를 만들어내는 본질과 현존, 종과 개체의 관계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이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반성 운동 즉 정립하는 반성과 전제하는 반성이다.

반면 같은 공간 속에서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는 개체들은 직접적 연관이 없다. 그것들은 심연을 통해 단절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종의 개체들 사이의 관계는 질의 관계나 양의 관계와 구분된다. 질과 양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들은 직접 서로 관계한다.

개체들의 직접 관계를 수평적 관계라 한다면, 종의 개체들은 그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심연을 통해 관계하니 즉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본질을 통해 재생산 된 현존이므로 이런 점에서 본질을 통해 매개적으로 관계한다. 이를 우리는 수직적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수평적 관계와 수직적 관계를 구분할 때, 헤겔은 반성 개념 즉 동일성과 차이 등의 개념은 수평적 관계에 적용되며, 규정하는 반성이나 전제하는 반성과 같은 반성하는 운동은 수직적으로 관계한다. 수평적 관계는 이런 수직적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거꾸로 수직적 관계는 수평적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2-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물방울 논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2-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물방울 논쟁

1)

앞에서 형식적으로 본질론의 운동이 반성 운동이라는 점을 서술했다. 이제 본질론에서 다루는 개념들이 내용적으로 반성 개념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서는 반성 개념에 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반성 개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반성 개념으로 ‘아버지와 아들’, ‘학교와 공장’, ‘민중과 지도자’, ‘왼손과 오른손’, ‘아래와 위’ 등과 같은 개념들을 들고 있다. 이런 개념들은 흔히 짝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라 하는데, 여기서 짝을 이룬다는 것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로 대립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개념들은 그중 하나를 규정하기 위해 반드시 이와 짝을 이루는 다른 것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왼쪽은 오른쪽이 아닌 것이며 오른쪽은 왼쪽이 아닌 것이다. 지도자는 민중의 지도자이고 민중은 지도자의 민중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며,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반성적인 규정성은 사물을 고립적으로 본다면, 발견될 수 없는 규정성이다. 왼쪽에 있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살펴보아도 거기에 왼쪽이라는 성질을 발견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왼쪽에 있지만,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는 오른쪽에 있다. 아들이 없이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아버지 없이 아들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반성적 규정성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관계해서 볼 때만 비로소 생겨나는 규정성이다.

어떻게 본다면 모든 성질은 관계 속에 있다. 관계 속에 나타나지 않은 성질은 없다는 점에서,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반성 규정이 직접 발견되는 성질에 우선하고 그 근거가 된다. 심지어 본질주의적 인식론에서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직관적으로 인식된다고 보는 많은 개념조차 따져보면 이런 대립적 관계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은 없다.

자주 가장 구체적인 감각적 질로 여겨지는 빨간색을 보더라도, 이는 이미 파란색이나 노란색에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감각적 성질들조차 지시를 통해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분석철학자 콰인이 지시의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2)

논리학에서는 이런 반성 개념 가운데 판단 형식에 속하는 범주적인 것만을 다룬다. 그런 범주의 구체적인 예로서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네 가지를 거론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형식과 내용, 내면과 외면 등과 같은 개념인데 이런 반성 개념은 칸트가 다루면서 비로소 철학적인 논의의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칸트 이전 로크가 반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를 외적 경험과 구별되는 내적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할 뿐이었다. 즉 감정이나 어떤 지각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을 로크는 반성이라 했는데 이는 외적 지각과 마찬가지로 직관적인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이기에 외적 경험과 개념적인 차이는 없다.

그러나 로크는 이미 반성 개념에 관한 그와 다른 유래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유래는 외적 지각이든 내적 반성이든 일정한 관념들을 서로 비교할 때다. 이런 비교는 마음의 능동적 활동에 속하며 이런 비교를 통해 우리는 관념들이 서로 동일하다든가 차이가 있다라고 말한다.

로크는 이를 ‘논리적 반성 개념’이라고 했는데, 이 논리적 반성 개념은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유명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그의 선험주의를 옹호하려 했다. 논란의 출발점은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동일성의 원리 때문이다.

이 동일성의 원리는 마음의 능동적인 활동 즉 비교를 통해서 사물에 적용된다. 즉 이런 비교를 통해서 비교된 대상이 서로 동일한지 차이가 있는지가 규정된다.

알다시피 라이프니츠는 두 사물의 모든 성질이 동일할 경우 두 사물은 하나일 뿐이라는 원리를 제시했다. 칸트는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두 물방울이나 두 나뭇잎을 예로 들면서 성질이 동일하더라도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존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은 ‘현존’이라는 개념이다. 라이프니츠는 현존[Dasein]을-이는 곧 공간적 존재[Da-Sein]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성질로 간주하였으므로, 이조차 같으면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반면 칸트는 현존은 경험을 통해 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는 사물의 성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성질에서 배제했으니, 다른 성질이 다 동일하더라도 공간적 존재가 다를 수 있으니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틀렸다고 본 것이다.

칸트는 사물의 성질과 공간적 현존은 주어지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성질은 지성의 범주에 귀속하는 것이며, 공간적 현존은 감성의 형식에 귀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일성과 차이라는 반성 개념을 성질에 적용하는 경우와 공간적 현존에 적용하는 것은 구별된다. 즉 성질은 동일하더라도 현존은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공간이 선험적 수용 형식이라고 보았으니, 공간을 주관화하게 된다. 그러면 사물 자체에는 공간적 현존이 있는가 없는가? 사물 자체는 공간적 현존이 없는데 주관의 공간적 형식 속에 수용하면서 공간적 현존이 생기는 것인가 아니면 사물 자체는 공간적 현존성을 지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주관의 감성인가?

칸트로서는 주관의 형식 이전의 사물 자체는 알 수 없으므로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가 어느 입장에 서든가 칸트는 라이프니츠에 대해 불리한 처지에 빠진다. 즉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말이다.

사물에는 공간성이 없다면, 공간적 현존은 사물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을 지나가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칸트가 말한 두 물방울의 현존이나 두 나뭇잎의 현존은 주관적 차이에 불과하니, 사물 자체는 라이프니츠의 주장과 같이 성질이 동일하다면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사물에 공간적 현존이 있고 그것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그 역시 다시 라이프니츠의 주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공간적 현존이 사물의 성질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질이 동일하다 할 때는 공간적 현존조차 동일하게 되니, 여기서도 역시 오직 하나의 사물만이 있게 된다.

4)

그런데 칸트의 라이프니츠 비판을 통해 헤겔에서 반성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시 라이프니츠가 틀렸고 칸트가 옳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동일한 성질이더라도 그것이 성질로서 여겨질 수도 있고 공간적 현존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고투가 필요하다.

칸트의 라이프니츠 비판의 전제가 된 것은 성질과 현존의 구별이다. 전자는 지성에 속하고 후자는 감성에 속한다. 그러나 공간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공간의 개념이 문제가 된다.

공간이란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것처럼 사물의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성질처럼 범주 개념이 구성하는 판단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공간의 질과 공간의 양을 논할 수 없다. 모든 공간은 규정성이 없는 것 즉 빈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공간 개념을 주관화하여 공간을 다만 감성의 형식이 만들어내는 산물로 보면, 사물 자체는 공간적 차이가 없으니 이 사물들은 마치 꿈속 부유하는 것이고 서로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헤겔은 공간을 사물이 맺는 비교의 관계로 본다. 사물은 여러 성질을 지니고 이런 성질에 따라 다른 사물과 비교된다. 이렇게 다른 사물과 어떤 성질의 측면에서 비교될 때 이 비교 관계가 공간을 이룬다. 즉 어떤 사물은 이 공간에 어떤 위치에 현존한다. 그 위치란 곧 그 공간 속의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의 사물은 여러 성질을 지니므로 그 성질에 따라 ① 여러 공간 속에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소금은 맛의 공간에 들어 있거나 색깔의 공간에 들어 있다. 각 공간은 사물의 어떤 색깔이나 소리와 같은 성질이 이루는 것이므로 고유하게 어떤 질을 지니지만, 이 공간을 사물이 비교되는 측면에서 본다면 동질적이고 ② 그 동질성 외 다른 측면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는 무규정성을 지닌다.

이 관계하는 공간 밖에서 사물은 공간의 질적 성격과 구분되는 ③ 다른 독자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 이를 공간적 현존과 구별되는 성질이라 한다. 이 성질은 그 공간에 들어 있는 사물마다 다른 성질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간은 구체적이다. 즉 공간은 사물의 특정한 성질에서 서로 맺는 관계이니, 독자적인 질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 들어가는 사물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 공간은 개별적이다. 화학의 공간이 있다면 생물의 공간이 있고 사회적 공간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물이 모두 하나의 물체로서 속하는 아주 추상적이며 포괄적인 공간 흔히 자연 과학의 공간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5)

공간을 이처럼 관계로 본다면, 사물의 성질에 적용되는 지성의 범주와 구별되는 공간적 현존에 적용되는 범주를 생각할 수 있으니 그 후자가 곧 반성 개념이다.

라이프니츠와 칸트는 사물의 현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성질에 대해서도 반성 개념을 사용했다. 즉 성질이 동일하거나 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색깔이 동일하고 두 소리가 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성질에 대해 반성 개념을 사용할 때 이는 사실 성질을 성질로 이해하기보다 하나의 공간적 관계 속에 있는 현존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사과와 장미를 빨간색의 사물로 보면, 여기서 두 물체는 다른 성질에서는 다르지만, 색깔이라는 공간적 현존에서는 동일하다. 또는 거꾸로 빨간 사과와 파란 사과를 색깔에서 비교해 보면 두 물체는 색깔에서 서로 다른 공간적 현존이 된다.

어떤 성질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니, 동일한 성질이 비교의 대상이 될 때는 공간적 현존에 속하며, 그렇지 않고 다른 성질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이는 사물에 속하는 하나의 성질로 된다.

이와 같은 서로 관계 맺는 공간이 없다면, 두 물체는 서로 동일한지 차이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빨간색과 G음은 같은가 다른가? 코끼리와 수3은 같은가 다른가?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있으므로 거기서 반성 개념이 적용된다.

나아가서 서로 관계 맺는 공간이 달라진다면, 동일한 물체의 동일성과 차이도 달라진다. 신호등의 체계에서 주황색은 빨간색과 같고 녹색은 파란색과 같다. 그러나 무지개색의 체계에서 주황색과 빨간색, 녹색과 파란색은 서로 다른 색깔이다.

6)

그렇다면, 어떤 성질이 비교의 관계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공간은 달라지고, 공간적 현존에서 동일하거나 달라지니, 이런 관점에서는 칸트의 주장이 옳게 된다. 즉 다른 모든 성질이 동일하더라도, 그것이 처한 공간적 현존(비교되는 성질의 관계에 따라)이 다르면, 두 개의 사물이 있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칸트와 라이프니츠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현존을 성질과 구분하는 것이 칸트의 핵심인데, 현존을 성질에 집어넣거나 아니면 현존을 성질과 완전히 분리한다면,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옳게 되며, 동일한 성질이더라도 성질로 언급될 때와 현존으로 언급될 때를 구분한다면, 칸트의 주장이 옳게 된다.

중요한 것은 칸트와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아니라, 반성 개념이 공간적 현존에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반성 개념의 한 특징이 드러난다. 칸트가 말하는 지성의 개념은 사물의 성질과 관계한다. 그것과 달리 동일성과 차이, 일치와 모순, 내용과 형식, 외면과 내면 등과 같은 논리학에서 다루는 반성 개념은 사물이 공간 속에 가지는 위치 즉 공간적 현존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헤겔 논리학에서 본질론의 지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헤겔 논리학에서 본질론의 지위

1)

이제 헤겔의 논리학 가운데 1부 객관 논리학 1권 존재론에 관한 소개를 마치고 2권 본질론에 관한 대결로 들어가게 되었다. 헤겔 논리학 또는 변증법에서 독특하지 않은 부분은 없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독특해서 아마도 헤겔의 논리학의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 있다면 곧 존재론과 개념론을 매개하는 본질론이 될 것이다.

앞에서 헤겔 논리학의 1부 객관 논리학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이 차례로 전개된 것이라 했다. 그 가운데 본질론은 관계의 범주와 양상 범주가 전개된다. 관계의 범주란 곧 정언, 가언, 선언 판단 형식을 말하며 양상 범주란 가능, 우연, 필연적 판단 형식을 말한다.

형식 논리학에서는 관계 범주나 양상 범주는 독립적인 판단 형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 범주들은 복합적인 판단 형식이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12 범주표를 따라서 관계나 양상의 범주도 독립적인 하나의 판단 형식으로 파악한다.

칸트는 이런 판단 형식이 형식 논리학적으로 본다면 복합 판단 형식(예를 들어‘ P이면 Q이다’라든가, ‘명제 p는 필연적이라’는 판단 형식을 보라)을 취하지만, 그의 선험적 인식론으로 본다면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인식 범주라 보았기에 이를 12 범주표 안에 집어넣어 다루었다.

헤겔에서 논리학 역시 단순한 형식적인 학문은 아니다. 그의 논리학은 그 배후에 인식의 운동이 깔려있으며, 논리적 범주의 전개는 이런 인식 운동을 매개로 해서 전개되는 것이다. 논리의 전개는 회고적인데, 인식의 결과로 얻어지는 개념을 그 개념이 실현된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와 마찬가지로 관계 범주나 양상 범주가 인식적으로 독립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서 이를 판단 형식 즉 범주로 다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이런 본질론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우선 이 본질론은 자연 철학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앞에서 존재론은 자연에서 마침내 생명 개념이 탄생하는 과정으로 설명되었다. 그것에 비추어 보면, 본질론은 이 생명 개념이 발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생명 개념은 마침내 인간에 이르러 자기의식적 존재로 전환한다. 이런 전환과 더불어 그 이전 개체적 현존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종적 본질은 자기의식적 개체가 자각적으로 구성하는 사회적 실체로 발전한다.

종적 본질이 일반성이지만, 개별자를 벗어나지 못한 내적인 일반성이고 그 자체로는 독립적으로 현존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 사회적 실체는 개체 밖에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일반자이다. 생명의 본질 즉 종은 단순히 지속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실체는 이처럼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사회적 실체이기에 실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본질론 마지막에 등장하는 실체가 다시 주체화하면서 마침내 개념에 도달하고 여기서부터는 주관 논리학 즉 개념론이 전개된다.

3)

본질론은 또 다른 관점에서 주목받는다. 이 부분은 존재론에서 개념론으로 나가도록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하므로, 논리학의 중추를 차지하는데 존재론이 본질이라는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이라면, 개념론은 개념이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운동이다. 두 운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서로 대립하니, 전자가 상승하는 길이라면 후자가 하강하는 길이다.

이런 존재에서 개념으로, 상승에서 하강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이 두 운동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그사이에 있는 본질론에서 전개된 반성 운동이다. 이 반성 개념은 지금까지 철학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으나 헤겔은 본질론에서 반성 개념을 논의의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 때문에 헤겔의 본질론은 반성 논리라고도 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 헤겔 논리학의 핵심은 존재론에서 나오는 생성 개념도, 개념론에 나오는 개념의 자기실현 운동도 아니고, 본질론에서 전개된 이 반성 운동이 아닐까 한다. 이 반성 운동이 있으므로 생성 운동이 자기실현 운동으로 나갈 수 있으니 이 반성 운동이야말로 헤겔 논리학 전체의 명운이 달린 핵심 문제다.

여기서 헤겔의 반성 개념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헤겔의 논리학 본질론에서 다루는 대상이 이런 반성 운동이라는 사실조차 의심스럽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은 본질론 1편 1장에서 반성 운동을 설명할 뿐이며, 곧이어 전개되는 개념들은 근거와 조건, 현존과 현상, 원인과 결과, 우연과 필연과 같은 개념들인데 과연 이런 개념들의 상호 관계를 반성 운동 속에 포괄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선 헤겔 논리학의 형식적 체계의 측면이 그런 논의에 대한 답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논리학 존재론을 다룰 때(헤겔 형이상학 산책) 이미 언급한 사실이지만, 다시 언급하자면, 헤겔의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은 전체적으로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 즉 범주의 체계에 따라 전개되었다.

1부 존재론은 질의 범주와 양의 범주가 다루어졌다. 1부 본질론에서는 관계 범주와 양상 범주가 다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존재론과 본질론에서 이렇게 판단 형식이나 범주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처음 들어가면서 전체를 개괄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존재론에서는 서문 격으로 ‘학문은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는가’가 논의되고 이어서 1편 1장에서 존재와 무, 생성이 다루어진다. 1편 2장이 현존인데 여기서 개별적 감각적 질의 범주가 다루어지니, 실질적으로 시작은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본질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질론은 서문 격으로 ‘존재의 진리는 본질이다’가 나오고 1편 1장에서 본질과 가상 그리고 반성 운동이 다루어진다. 그런 다음 1편 2장에서 반성 규정으로서 동일성, 차이, 모순이 논의된다. 그런 다음 1편 3장에 이르러 비로소 근거와 조건이라는 관계가 다루어지는데 이 부분이 실질적으로 본질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존재론의 서문과 1편 1장이 존재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한 부분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여기 본질론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질론에서 서문, 1편 1장 그리고 2장까지 본질이 전개하는 운동의 가장 근본적 개념이 다루어진다. 그 개념의 핵심은 모두 반성 운동이라는 개념(1장 C)에 수렴된다. 본질과 가상의 개념(1장 A, B)이나 동일성과 차이 모순의 개념(2장)은 이 반성 운동의 한 측면을 이룰 뿐이다. 그러므로 이 반성 운동 개념은 존재론에서 생성 운동과 마찬가지로 본질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첨언하자면, 2부 주관 논리학에서 개념론의 앞부분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일반적 서술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선 서론 격으로 ‘개념 일반에 관해서’가 나온다. 여기서 개념 운동이 일반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다만 개념론은 1편 1장에서 개념을 다루고 2장에서 판단을 3장에서 추론을 다루는데 이는 이미 개념 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9-자본의 탄생과 본질의 탄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9-자본의 탄생과 본질의 탄생

1)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상품, 화폐, 자본에 이르는 과정은 그 치밀함과 대담함 때문에 감탄을 자아낸다. 마르크스가 이런 전개 과정을 어떻게 발상했을까 늘 궁금했다. 아마도 헤겔의 논리학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헤겔 논리학 어느 부분일까?

헤겔 논리학 어디에서도 똑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으니, 이는 분명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발견이고 마르크스의 유물 변증법 논리를 대변하는 혁명적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적어도 헤겔의 변증법이 마르크스에게 일정한 정도 영감을 준 것은 아닐까 하는데, 그 영감을 받은 부분을 알고 싶었다.

필자는 헤겔이 존재론 마지막 부분에 전개한 척도 관계, 기체 그리고 본질에 이르는 과정을 읽어나가는 중 아마도 이 부분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상품, 화폐, 자본의 과정과 가장 닮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마르크스가 전개한 이런 전환 과정은 그저 경제학적인 사실로만 이해되었고 그 논리적 전개 과정은 대체로 주목받지 못했다. 헤겔의 논리학과 연결되는 접점을 찾는다면, 마르크스의 상품, 화폐, 자본의 개념이 좀 더 개념적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한다.

거꾸로 헤겔의 척도 관계, 기체, 본질의 전개 과정은 너무 사변적이어서 이해하기 난감했다. 필자가 현대에 발전한 유기화학과 단백질 합성을 이용해 헤겔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려 했지만, 헤겔이 그런 과학적 사실을 알 리는 없었으니, 이런 식의 이해는 너무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것에 가깝다.

그런데 헤겔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헤겔의 숨결이 살아 숨 쉬던 시대 1840년대 학습했던 마르크스를 통해서 본다면, 더 설득력 있게 헤겔의 논리가 이해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여기서 필자는 헤겔의 논리와 마르크스의 논리의 유사성을 최대한 밝혀 보려 한다. 이는 필자가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언젠가 해야 하겠다고 한 부분인데, 이제야 비로소 전개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는 부분이다.

2)

간단하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상품, 화폐, 자본이 전개되는 과정을 그려보자. 마르크스는 먼저 상품을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라는 두 척도의 결합물 즉 척도 관계로 이해한다. 교환 가치의 개념이나 사용 가치의 개념은 여기서 굳이 전개하지 않겠다.

이제 두 상품의 교환은 두 척도 관계 사이에 일어나는 이행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교환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용 가치 때문이다. 내가 생산한 상품이 다른 사람에게 사용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상호적이다. 상대방의 상품 역시 내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교환이 일어나는 비율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량을 의미하는 교환 가치에 따른다. 두 상품은 그것의 교환 가치에 비례하여 교환된다.

이런 교환은 헤겔이 척도 관계의 계열을 설명하는 방식과 같다. 예를 들어 산소 화합물의 계열을 보자. H2O, SO2, NO2 등 계열에서 각 화합물은 O의 일정 비율을 지닌다. 즉 O를 중심으로 놓는다면, 각기 1, 2, 2의 비율을 지닌다.

이런 비율은 H2O가 SO2로 전환할 때 두 화합물이 지니는 비율과 동일하다. 즉 H2O가 SO2나 NO2로 전환하려면 어느 경우나 2단위의 H2O가 필요하다. 여기서 O를 중심으로 이루는 물질의 구성 비율이 마치 상품의 교환 가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화합물은 고유한 질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화학적 구성이 변화함으로써 질적인 성격 자체도 변화하게 된다. 이는 곧 상품의 사용 가치의 전환을 의미하게 된다. H2O가 SO2로 전환할 때, 여기서 H2O에서 H와 O가 분리되어 O가 S와 결합하며 H는 상호 결합하면서(기체 분자가 되어 날아간다) 이런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는 마치 상품의 교환을 일으키는 사용 가치의 측면과 비교된다.

상품의 경우 사용 가치는 상품 밖에 있는 인간이 개입하지만, 척도 관계에서는 그 구성 요소 사이의 분리와 결합 관계를 통해서 일어난다. 여기서 이런 분리와 결합의 관계 자체는 각 척도 관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특성에 달려 있다는 차이점이 눈에 띈다.

3)

상품의 일대일 단순한 교환은 서로의 상품이 상대에게 사용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만남은 여러 현실적 제약을 지니고 있으므로 상품의 일대일 교환은 우연하고 개별적인 관계다. 상품의 교환 관계는 연속적인 계열을 이룰 수도 있다. 즉 A가 B로 교환되고, B가 C로 교환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연속적 계열은 일대일 단순 교환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헤겔은 척도 관계의 이행을 과도한 것[Masslos]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즉 A에서 B로 이행하는 것은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것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 과도한 것이라는 개념인 곧 상품의 일대일 교환에서처럼 양자 사이에 내적인 연결 없이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헤겔은 척도 관계의 이행 과정 역시 연속적인 계열을 이룬다고 한다. A는 B로, 다시 B에서 C로 .. 이런 식으로 연속적인 계열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이행 계열은 마디 선을 이룬다. 헤겔은 이런 마디 선과 같은 이행 계열을 척도 관계의 무한 진행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행의 각 단계는 마찬가지로 과도한 것을 통해 일어나며 이는 외적이고 우연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런 무한 진행은 앞에서 말한 마르크스의 일대일 상품 교환의 연속적 계열과 닮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더 하나의 상품이 중심이 되어 A가 B와 교환되거나 A가 C로 교환되는 것이 일어난다. 이런 중심되는 상품이 생겨나면, 이 중심되는 상품은 화폐로 발전하게 된다.

화폐는 본래는 상품이며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를 모두 갖지만, 이제 화폐가 되면 그것이 지닌 사용 가치는 의미가 없어진다. 다만 그것은 교환 가치가 되며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되면서 일반적 교환을 담당하는 매체가 된다.

이처럼 화폐가 등장하면서 교환의 우연성이 사라진다. 이제 화폐는 모든 상품과 교환 가능하며 거꾸로 이 화폐는 모든 상품을 구매 가능하므로, 이를 통해 교환은 내적이며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헤겔에서 화합물 이행 관계에서 이런 화폐에 해당하는 것이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 즉 ‘기체[Substrat]’다. 이 기체가 있으므로 두 화합물의 교환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화폐가 교환 작용을 매개하고 여기서 빠져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헤겔에서 기체 역시 화합물의 이행을 매개한 이후 이 반응에서 빠져나오며, 외적인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기체는 그 자체로 갖는 고유한 질을 가지지만, 화학적 반응에서 이 질이 문제되지 않고 다만 그것이 지닌 양적 비율만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이 기체를 차이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화폐가 고유한 질이 문제 되지 않는 일반적 교환 가치인 것과 마찬가지다.

5)

마르크스에서 화폐는 다시 자본으로 발전한다. 이때 단순한 화폐만 가지고 자본이 될 수는 없다. 화폐는 교환에서 역할을 담당할 뿐, 그 자신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폐가 자본이 되면 이 자본은 자기를 증식한다. 오직 이처럼 증식할 수 있는 것만이 자본이다.

화폐가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두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는 불변 자본 즉 생산 수단이나 원료이며 다른 하나는 가변 자본 즉 노동력이다. 자본은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을 통해 자본이 된다.

불변 자본은 생산물에 가치를 이전할 뿐이며 가변 자본만이 새로운 가치를 추가로 생산한다. 그러므로 자본을 자본으로 만드는 핵심 즉 자본이 증식되는 힘 자체는 가변 자본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가변 자본은 불변 자본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 속에 담지될 수 있다. 만일 불변 자본이 없다면 가변 자본은 자기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자본이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헤겔에서 ‘잠재적인 차이 없는 존재[an sich Indifferenz]’가 ‘대자적인 차이 없는 존재’fuer sich Indifferenz]’로 즉 ‘기체’가 ‘본질’로 발전하는 과정과 같다.

이런 본질은 자기를 재생산한다. 그 결과 생겨난 현존은 본질과 동일하며 본질은 이런 현존의 끊임없는 재생산 속에서 자기를 유지한다. 본질이 자기를 현존으로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외적으로 자연물이 재료로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본질의 현존은 본질과 외적 재로의 결합물이다.

자기 증식적 자본이 자기 증식하는 가변 자본과 가치의 담지자가 되는 불변 자본으로 이루어지듯, 생명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본질도 자기를 재생산하는 데 여기서 자연적 재료가 불변 자본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생명이 자기를 재생산하는 구조는 곧 가변 자본에 해당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본은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증식하지만, 생명은 다만 자기를 재생산할 뿐이라는 데 있다.

6)

기체가 본질에 이르는 과정에서 헤겔은 두 단계를 설정했다. 하나는 역 비례 관계인데, 각 항이 두 질을 모두 포함하면서 그중 자기의 질은 증가하고 그만큼 상대방에서는 감소하며 이에 대립하는 항 역시 자기의 질이 증가함에 따라 상대가 가지고 있는 질은 감소하는 경우다.

그런데 이런 역 비례를 넘어서 제곱 비례에 이르게 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여 타자가 되면서 동시에 자기 내로 복귀하여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이중적으로 형성되는 관계가 등장한다. 이 관계는 끊임없는 자기 재생산을 통해 일어나는 동적 상태이니 헤겔은 이를 생명 개념으로 규정했다.

전자가 유기 화합물에서 두 결합기 사이에 매개물이 증감하는 경우에 해당하고 후자는 두 결합기가 서로 상반적인 관계로 결합하면서 연쇄물을 형성하는(이중 나선의 펩타이드 결합체) 경우다.

이런 단계의 구분과 유사하게 자본의 경우도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일단 화폐가 상업 자본이 되었을 때, 이는 화폐가 교환을 매개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출발점과 목적이 다르다. 화폐 교환의 경우 상품이 화폐로 다시 상품으로 교환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구매를 위한 판매로 규정한다. 반면 상업 자본의 경우는 판매를 위한 구매다. 그 출발점에 화폐가 있으며 매개물이 상품이고 그 결과는 다시 화폐다.

이런 판매를 위한 구매는 이런 매매를 통해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헤겔에서는 역 비례 관계와 같다. 역 비례 관계는 유기 화학물로 설명하자면, 매개물 또는 촉매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는 경우다. 이때 촉매는 화합물을 매개한 이후 빠져나가지 않고 화합물 내부에 머무른다.

이는 마치 상업 자본에서 양 측면에 화폐가 있는데 가운데 상품이 변화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상품 교환에서 매개체인 화폐는 빠져나가지만, 상업 자본에서는 화폐가 남고 상품이 빠져나간다.

두 번째 단계인 생산 자본의 경우는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진 생산물의 가치가 증가하면서 자본이 증식하는 경우다. 자본은 자기를 재생산한다. 이 재생산은 자기를 분할하여 한편에는 불변 자본과 다른 한편에는 가변 자본으로 분할된다. 불변 자본은 기계나 원료로 이루어지며 이는 생산물 속에 자기를 연속한다.

이런 생산 자본은 헤겔의 개념에서는 본질에 해당한다. 여기서 본질은 자연 재료를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니 이런 자기 재생산이 곧 노동을 통한 자본의 증식과 닮았다.

7)

이상에서 헤겔의 척도 관계-기체-본질의 이행 과정을 마르크스의 상품-화폐-자본의 이행과정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논리학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으나 두 과정의 유사성을 통해서 볼 때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양자의 유사성은 설혹 직접 연관성은 없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준거점으로 삼을 여지를 마련해 준다. 마르크스를 헤겔을 통해 이해하고 헤겔을 마르크스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각자의 이해를 더욱 풍요하게 만들 것이다.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8-생명의 탄생(3)

헤겔 변증법 생성 운동68-유기화학에서 단백질 합성으로,  생명의 탄생

1)

앞에서 헤겔이 화합물 사이에서도 일종의 역 비례 관계가 출현한다고 했다. 이때 화합물의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가 화합물 내부의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으며 이행하는 화합물 속에 공통적이고 연속적인 부분을 이룬다. 각 화합물은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여 화합물의 고유한 질적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을 지니며 이 부분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

이때 이행하는 부분이 한쪽이 증가하면 다른 쪽이 감소하는 식의 관계를 지니게 되면 역 비례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역 비례 관계를 지닌 것의 구체적 예를 헤겔은 제시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유기 화합물의 동족 계열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은 더 나가보자. 헤겔은 이런 화합물 사이의 관계에서 위와 같은 정 비례나, 역 비례를 넘어서 제곱의 비례도 가능한 것으로 본다. 헤겔은 정량의 비례를 다룰 때 제곱(제곱근)의 비례에서는 미분적 차이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 미분적 차이는 두 정량의 비율이며 이 관계의 비율 자체가 점차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관계다. 이런 비율 자체의 증가나 감소에 따라서 두 정량은 누적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런 제곱하는 관계가 더 발전되면, 마치 두 천체 사이의 타원형 궤도와 같은 방식(3/2제곱 비례)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미분적 차이를 이루는 비율 자체가 근일점과 원일점에서 증가하는 비율이 달라지는 경우다. 원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느려지며 그 결과 회전 속도도 느려진다. 반면 근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빨라지기에 그 결과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이처럼 회전 속도를 규정하는 미분적 차이의 비율 자체가 유동적인 경우다.

헤겔은 정량에서 제곱 비례를 통해 기존의 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 출현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직선을 제곱하면 면적이 되고 면적을 제곱하면 부피가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러하다면, 화합물의 작용에서 이런 제곱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통해 단순한 화학적 화합물이 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질을 가진 화합물이 만들어 지지 않을까?

2)

우선 이런 제곱 비례를 이루는 화합물이 이행 관계를 헤겔은 개념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자. 헤겔은 지금 다루어지는 ‘본질의 생성Werden’ 장 마지막 C절(본질로의 이행Uebergehen)에서 마침내 특정한 자립적 존재로부터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로의 이행을 설명한다.

여기서 특정한 자립적 존재란 척도 관계를 말하며 예를 들자면 하나의 화합물이다. 이런 척도 관계를 매개하는 촉매는 외적이고 이행을 매개한 후에는 화합물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제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는 역 비례에서처럼 촉매가 화합물 내에 머무르면서 연속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것이 외면적인 차이 없는 존재[외적 촉매]가 현존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동시에 차이 없는 존재가 처해 있다고 발견되는 대립은 곧 다만 잠재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그런 현존에 대립적으로 규정되고 대자 존재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는 대립이다. 또는 그런 현존은 외적인 반성이어서 그 반성은 특정화한 것들이 본래 또는 절대자 속에서 동일하고 하나며 그 구별은 다만 무차별적인 구별이며 본래적인 구별이 아닌 구별이라는 사실에 머물러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81)

그런데 역 비례에서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은 즉 화합물의 이행에서 변화하는 부분은 촉매가 되는 부분과 외적으로 결합하는 부분이었다. 이 결합은 우연적이어서 이것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조건 즉 열이나 전기 에너지가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제곱 비례에 이르면, 남아 있는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이 이 촉매 부분에 내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다시 말하자면 촉매 부분 자체가 생성하는 부분이 된다. 이런 내적 관계를 지닌 것은 필연적이어서 외적 조건의 변화가 없더라도 가능하게 된다. 물론 외부에서 주어지는 재료가 있어야 하지만, 이 재료가 주어지는 즉시 촉매 부분과 내적 연관 때문에 자동적으로 결합이 일어난다.

“여기서[잠재적인 차이 없는 존재]에서 여전히 결여된 것은 곧 이 반성이 사유하는 주관적 의식의 외면적 반성이 아니어야 하고 그런 통일이 전개하는 구별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고유한 규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런 통일은 절대적 부정성을 드러내니, 이 절대적 부정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차별하고 그 고유한 무차별성에 대해 무차별할 뿐만 아니라 타자 존재에 대해서도 무차별하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3)

이런 점에 이 관계는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이중적 부정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한편으로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이행하고 다시 타자를 부정하여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를 매개하여 자기와 통일을 이루는 관계이다.

이런 통일은 고요한 통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 대해 자기가 반발하면서 자기를 타자화하는 것이니, 오직 이런 자기와 대립 또는 모순 속에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차이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과 그것이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또는 그것의 본래 존재하는 규정과 그것이 정립된 규정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므로 부정적 총체성이며 그 규정성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한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자신의 근본적 일면성 즉 그 잠재적 존재를 지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차이 없는 존재는 사실상의 모습으로서 정립되면서 자기에 대해 단순하고 무한하게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것, 자기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반발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동시에 이 타자는 자립적인 것이거나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적인 통일, 고유한 자기 관계 속에서 다만 계기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그것을 통일하는 전체도 단순히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타자로부터 복귀하는 것을 통해 성립하는 자기 매개적 존재일 뿐이다.

“그 계기는 최초에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통일에 속하고 그런 통일을 떠나지 않고 기체로서 그런 통일에 의해 지탱되고 다만 그런 통일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따라서 그 존재 일반이나 구별된 규정성이 지닌 존재나 직접성은 마찬가지로 본래적 존재로서 사라지며 그 통일은 존재이며 직접적으로 전제된 총체성이서 단순한 자기 관계이며 이런 전제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그것이 전제되어 있다거나 직접적 존재라는 사실은 그것이 반발하는 운동의 계기일 뿐이니 근원적인 자립성과 자기 동일성은 다만 결과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한 자기와의 합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재판, GW21, 382-383)

이런 자기 매개하는 존재가 곧 본질이다. 이 본질은 곧 정량의 제곱 비례에서 등장한 미분적 차이이며, 이 미분적 차이가 이루는 누적적 결과는 마치 선이 면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새로운 질을 그 이전에 개별적 정량에서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질이 출현하게 된다. 그 새로운 질이 곧 생명의 자기 재생산성이다.

4)

이상에서 헤겔은 제곱 관계로부터 유추를 통해 화합물의 결합을 통해 생명이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이는 유추이며 그가 실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헤겔이 자연을 자연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유기화학에서 단백질의 합성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너머 생명의 화학적 합성 가능성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그런 합성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단백질을 발견하고 DNA 사실을 발견한 것은 그런 가능성을 암시하는 데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예를 들어 하나의 단백질 구조를 살펴보면서 헤겔의 개념적 설명과 비교해 보자. 필자의 무지 때문에 확고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필자의 추측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단백질은 펩타이드 결합이 반복된 방식으로 출현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펩타이드 결합인데 이 결합은 다음 도표를 통해 잘 보여진다.

아미노산은 중심 축을 중심으로 두 상반된 결합기를(카르복실기COOH와 아미노기NH2)가 있어 이 두 결합기가 교차적으로 결합하면서 긴 아미노산 연쇄 사슬이 만들어진다. 이 결합 방식을 펩타이드 결합이라 한다. 이 아미노산의 펩타이드 결합체가 복잡하게 발전하면서 생명체의 원천이 되는 단백질이 되고 이 단백질의 자기 복제를 통해 생명이 유지된다.

앞에서 유기 화합물의 경우 동일한 기체가 이중 부분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에 새로운 화합물이 결합하면서 연쇄를 이루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런 펩타이드의 결합이 지닌 차이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중심축을 이루는 곁사슬이 자기의 좌우로 상반된 결합기를 지니고 결합한다. 상이한 아미노산의 연결은 상반된 결합기가 맡는다.

반면, 이 곁사슬(중심축)이 지닌 다양한 구조(H-C-R]는 또 다른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결합기의 좌우 수평적 연쇄에 수직적으로 평행하는 곁사슬의 연쇄가 만들어져 이중 나선 형태의 단백질이 출현한다. 이중 나선의 아미노산 펩타이드 결합의 자기 복제를 가능하게 한다.

얼핏 보기에 유기 화합물의 결합과는 정반대 모양을 보여주는 이 펩타이드 결합은 헤겔적 언어로 보자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상반된 결합기로 연결된 아미노산 연쇄가 헤겔 말로 하자면, 대자적으로 자립적인 차이 없는 존재다. 중심축을 통한 상반된 결합은 그것이 생산하는 타자이다. 아미노산 연쇄가 이런 타자를 통해 복제되는 것은 자기 매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용하게도 헤겔의 개념적 언어가 실제로 발견된 단백질 복사 과정을 개념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