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68-생명의 탄생(3)

헤겔 형이상학 산책68-펩타이드 연결과 본질

1)

앞에서 헤겔이 화합물 사이에서도 일종의 역 비례 관계가 출현한다고 했다. 이때 화합물의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가 화합물 내부의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으며 이행하는 화합물 속에 공통적이고 연속적인 부분을 이룬다. 각 화합물은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여 화합물의 고유한 질적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을 지니며 이 부분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

이때 이행하는 부분이 한쪽이 증가하면 다른 쪽이 감소하는 식의 관계를 지니게 되면 역 비례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역 비례 관계를 지닌 것의 구체적 예를 헤겔은 제시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유기 화합물의 동족 계열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은 더 나가보자. 헤겔은 이런 화합물 사이의 관계에서 위와 같은 정 비례나, 역 비례를 넘어서 제곱의 비례도 가능한 것으로 본다. 헤겔은 정량의 비례를 다룰 때 제곱(제곱근)의 비례에서는 미분적 차이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 미분적 차이는 두 정량의 비율이며 이 관계의 비율 자체가 점차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관계다. 이런 비율 자체의 증가나 감소에 따라서 두 정량은 누적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런 제곱하는 관계가 더 발전되면, 마치 두 천체 사이의 타원형 궤도와 같은 방식(3/2제곱 비례)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미분적 차이를 이루는 비율 자체가 근일점과 원일점에서 증가하는 비율이 달라지는 경우다. 원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느려지며 그 결과 회전 속도도 느려진다. 반면 근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빨라지기에 그 결과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이처럼 회전 속도를 규정하는 미분적 차이의 비율 자체가 유동적인 경우다.

헤겔은 정량에서 제곱 비례를 통해 기존의 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 출현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직선을 제곱하면 면적이 되고 면적을 제곱하면 부피가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러하다면, 화합물의 작용에서 이런 제곱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통해 단순한 화학적 화합물이 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질을 가진 화합물이 만들어 지지 않을까?

2)

우선 이런 제곱 비례를 이루는 화합물이 이행 관계를 헤겔은 개념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자. 헤겔은 지금 다루어지는 ‘본질의 생성Werden’ 장 마지막 C절(본질로의 이행Uebergehen)에서 마침내 특정한 자립적 존재로부터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로의 이행을 설명한다.

여기서 특정한 자립적 존재란 척도 관계를 말하며 예를 들자면 하나의 화합물이다. 이런 척도 관계를 매개하는 촉매는 외적이고 이행을 매개한 후에는 화합물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제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는 역 비례에서처럼 촉매가 화합물 내에 머무르면서 연속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것이 외면적인 차이 없는 존재[외적 촉매]가 현존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동시에 차이 없는 존재가 처해 있다고 발견되는 대립은 곧 다만 잠재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그런 현존에 대립적으로 규정되고 대자 존재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는 대립이다. 또는 그런 현존은 외적인 반성이어서 그 반성은 특정화한 것들이 본래 또는 절대자 속에서 동일하고 하나며 그 구별은 다만 무차별적인 구별이며 본래적인 구별이 아닌 구별이라는 사실에 머물러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81)

그런데 역 비례에서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은 즉 화합물의 이행에서 변화하는 부분은 촉매가 되는 부분과 외적으로 결합하는 부분이었다. 이 결합은 우연적이어서 이것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조건 즉 열이나 전기 에너지가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제곱 비례에 이르면, 남아 있는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이 이 촉매 부분에 내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다시 말하자면 촉매 부분 자체가 생성하는 부분이 된다. 이런 내적 관계를 지닌 것은 필연적이어서 외적 조건의 변화가 없더라도 가능하게 된다. 물론 외부에서 주어지는 재료가 있어야 하지만, 이 재료가 주어지는 즉시 촉매 부분과 내적 연관 때문에 자동적으로 결합이 일어난다.

“여기서[잠재적인 차이 없는 존재]에서 여전히 결여된 것은 곧 이 반성이 사유하는 주관적 의식의 외면적 반성이 아니어야 하고 그런 통일이 전개하는 구별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고유한 규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런 통일은 절대적 부정성을 드러내니, 이 절대적 부정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차별하고 그 고유한 무차별성에 대해 무차별할 뿐만 아니라 타자 존재에 대해서도 무차별하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3)

이런 점에 이 관계는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이중적 부정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한편으로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이행하고 다시 타자를 부정하여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를 매개하여 자기와 통일을 이루는 관계이다.

이런 통일은 고요한 통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 대해 자기가 반발하면서 자기를 타자화하는 것이니, 오직 이런 자기와 대립 또는 모순 속에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차이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과 그것이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또는 그것의 본래 존재하는 규정과 그것이 정립된 규정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므로 부정적 총체성이며 그 규정성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한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자신의 근본적 일면성 즉 그 잠재적 존재를 지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차이 없는 존재는 사실상의 모습으로서 정립되면서 자기에 대해 단순하고 무한하게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것, 자기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반발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동시에 이 타자는 자립적인 것이거나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적인 통일, 고유한 자기 관계 속에서 다만 계기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그것을 통일하는 전체도 단순히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타자로부터 복귀하는 것을 통해 성립하는 자기 매개적 존재일 뿐이다.

“그 계기는 최초에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통일에 속하고 그런 통일을 떠나지 않고 기체로서 그런 통일에 의해 지탱되고 다만 그런 통일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따라서 그 존재 일반이나 구별된 규정성이 지닌 존재나 직접성은 마찬가지로 본래적 존재로서 사라지며 그 통일은 존재이며 직접적으로 전제된 총체성이서 단순한 자기 관계이며 이런 전제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그것이 전제되어 있다거나 직접적 존재라는 사실은 그것이 반발하는 운동의 계기일 뿐이니 근원적인 자립성과 자기 동일성은 다만 결과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한 자기와의 합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재판, GW21, 382-383)

이런 자기 매개하는 존재가 곧 본질이다. 이 본질은 곧 정량의 제곱 비례에서 등장한 미분적 차이이며, 이 미분적 차이가 이루는 누적적 결과는 마치 선이 면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새로운 질을 그 이전에 개별적 정량에서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질이 출현하게 된다. 그 새로운 질이 곧 생명의 자기 재생산성이다.

4)

이상에서 헤겔은 제곱 관계로부터 유추를 통해 화합물의 결합을 통해 생명이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이는 유추이며 그가 실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헤겔이 자연을 자연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유기화학에서 단백질의 합성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너머 생명의 화학적 합성 가능성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그런 합성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단백질을 발견하고 DNA 사실을 발견한 것은 그런 가능성을 암시하는 데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예를 들어 하나의 단백질 구조를 살펴보면서 헤겔의 개념적 설명과 비교해 보자. 필자의 무지 때문에 확고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필자의 추측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단백질은 펩타이드 결합이 반복된 방식으로 출현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펩타이드 결합인데 이 결합은 다음 도표를 통해 잘 보여진다.

위 도해를 보면 아미노산은 중심 축을 중심으로 두 상반된 결합기를(카르복실기COOH와 아미노기NH2)가 있어 이 두 결합기가 교차적으로 결합하면서 긴 아미노산 연쇄 사슬이 만들어진다. 이 결합 방식을 펩타이드 결합이라 한다. 이 아미노산의 펩타이드 결합체가 복잡하게 발전하면서 생명체의 원천이 되는 단백질이 되고 이 단백질의 자기 복제를 통해 생명이 유지된다.

앞에서 유기 화합물의 경우 동일한 기체가 이중 부분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에 새로운 화합물이 결합하면서 연쇄를 이루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런 펩타이드의 결합이 지닌 차이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이 곁사슬(중심축)이 좌우로 상반된 결합기를 지니고 결합한다. 상이한 아미노산의 연결은 상반된 결합기가 맡는다.

반면, 이 곁사슬(중심축)이 다양한 구조(H-C-R]는 또 다른 상반된 결합을 가능하게 하면서 연쇄된 아미노산 펩타이드 결합의 자기 복제를 가능하게 한다. 얼핏 보기에 유기 화합물의 결합과는 정반대 모양을 보여주는 이 펩타이드 결합은 헤겔적 언어로 보자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상반된 결합기로 연결된 아미노산 연쇄가 헤겔 말로 하자면, 대자적으로 자립적인 차이 없는 존재다. 중심축을 통한 상반된 결합은 그것이 생산하는 타자이다. 아미노산 연쇄가 이런 타자를 통해 복제되는 것은 자기 매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용하게도 헤겔의 개념적 언어가 실제로 발견된 단백질 복사 과정을 개념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헤겔 형이상학 산책67-생명의 탄생(2)

헤겔 형이상학 산책67-화학적 역 비례

1)

앞에서 촉매의 매개를 통해 화합물의 이행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서 촉매는 매개하는 가운데 사라지며, 서로 이행하는 화합물에 대해 외면적이었다.

촉매가 이렇게 외면적인 것이라는 사실에서 곧바로 다음에 등장할 개념이 예측된다. 그것은 곧 두 화합물이 외적인 촉매의 작용 없이 내적으로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내적인 결합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 이행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처음의 화합물 내부에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 촉매는 사라지지 않고 화합물 내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즉 어떤 화합물이 이미 이행하는 화합물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 내적 촉매가 한쪽에서는 이것과 결합하였다가 다른 쪽에서는 다른 것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의 이행을 매개한다.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화합물이 그와 같이 자기 이행의 요소 즉 내적 촉매를 자기 내에 품고 있는 것일까? 사실 헤겔 자신은 구체적으로 이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읽어보면, 헤겔이 여기서 개념적인 유추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유추는 곧 비례 관계에서 나온다.

앞에서 헤겔은 두 정량의 관계를 다루면서 비례 관계를 설명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형태인 정 비례는 A/B가 일정한 상수이다. 여기서 A와 B는 서로 독립적인 정량이지만, 외면적으로 일정 비율로 관계했다.

이어서 역 비례는 A*B가 일정한 상수인 관계다. 여기서 A가 자립적으로 변화할 수 있지만, 그 변화는 상대방 B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그것이 변화하는 만큼 B도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A, B는 각자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자립적인 것이면서도 어떤 일면에서는 다른 것에 제약된 정립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A, B의 관계가 제곱이나 제곱근의 비례에 이르게 되면, 그 내부에 미분적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즉 A의 미분적 변화가 축적되면서 B가 이루어지니, 양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내적 관계에 있게 된다.

헤겔은 이런 비례 관계의 유추를 통해 화학적 작용에서 생명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기화학도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사실 그런 유추에 해당할 만한 화학적 작용(아마도 유기화학일 텐데)을 알지 못한 채 그런 유추에 의거해 개념적으로 이 과정을 설명했다.

이런 설명은 유추에 불과하니 아직 사변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헤겔이 화학적 결합을 통해 그것이 결합하는 방식이 변화한다면, 생명체도 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이런 예감은 자연을 어디까지나 자연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된다. 헤겔 당시 대부분 철학자가 생명의 출현을 신적인 개입이나 자동 발생적인 것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시도가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가 짐작된다.

3)

그러나 과연 이런 유추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정량에서 비례를 다루는 경우와 화합물에서 비례를 다루는 경우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전적으로 양적인 것의 관계다. 그러나 화합물은 비록 양적인 측면 즉 비율을 가지지만, 그 비율을 이루는 구성 요소는 두 화합물에서 서로 다르다.

하나의 화합물의 양적 비율A/B과 다른 화합물의 양적 비율C/D 사이에 비례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 서로 다른 물질로 구성된 화합물의 비율을 관계시킨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화합물에서도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가 동일하지만, 다만 양적으로만 서로 구별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헤겔은 화합물 사이에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있다면, 비례 관계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정량에서의 비례와 화합물 즉 척도 관계에서 등장하는 비례의 차이는 특히 논리학 초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설명된다. 여기서 형식적인 역 비례와 실재적 역 비례가 구분되고, 전자는 정량의 역 비례이지만, 후자는 질들의 역 비례라고 한다.

“여기서 역 비례가 돌아온다. 그러나 이 역 비례는 최초의 형식적인 역 비례는 아니다. 최초의 역 비례에서 특면들의 질적 관계가 있었는데, 한 측면은 다른 측면이 지닌 질이 아니었으며 즉 무차별했다. 왜냐하면, 두 측면은 정량 일반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즉 실재하는 역 비례에서 두 측면의 고유한 질적 본성은 양자를 연관시켜주니, 각자의 특정화하는 규정은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배제의 계기를 포함한다.”(논리학 초판, GW11, 225)

4)

이런 구성 요소는 동일한데 양적으로 차이가 생기면서 서로 다른 질을 지닌 화합물이 있을까? 헤겔 자신은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지 못했으니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헤겔 이후 발전된 유기화학에서 합성물의 예들을 보면, 어느 정도 헤겔이 유추했던 것과 같은 비례가 출현한다.

소위 유기 화합물에서 동종 계열을 보자. 한 예로서 알코홀의 동종 계열인 메타놀과 에타놀을 비교해 보자. 위의 화합물은 메타놀이고 아래 화합물은 에타놀이다. 두 가지는 왼쪽에 CH3 이 있고 오른쪽에 OH가 있으며 가운데 CH2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CH2가 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여러 알코홀의 동종 계열이 만들어진다.

메타놀과 에타놀의 차이에서 보듯이 그 각각은 질적으로 다른 물질이지만, 여기서는 구성 물질은 동일하다. 그 구성 비율만이 다르며, CH2의 양적 증가가 이 알코홀의 동종 계열의 질적 차이를 낳는다.

이런 유기화학의 예를 헤겔적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메타놀과 에타놀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부분 즉 CH3-OH는 마치 내재하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니, 이는 차이 없는 존재 또는 기체에 해당한다. 반면 CH2는 증가하면서 새로운 질을 산출하는데 이는 상태 변화에 해당한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외적인 관계로서 촉매 반응은 촉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촉매가 물질 내부에 계속 남아 있어서 자기의 한 부분[CH3-OH]이 타자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이어서 타자의 부분[CH3-OH]을 이미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CH2의 증가에 의해 질이 변화할 때 이 화합물은 촉매[CH3-OH]에 이제 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이미 촉매와 결합하여 이를 통해 고유한 질을 지닌 화합물에 내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위와 같은 예는 내적 촉매가 동일한데 일정 요소가 계속 증가하는 결합 방식이니, 정비례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정비례가 가능하다면 역 비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필자처럼 유기화학에 대한 문외한이 어설프게 주워들어 억지로 꿰어맞추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화합물의 역 비례 관계는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위의 식은 에타놀의 산화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한 번 산화하여 에탄알이 되고 다시 산화하여 에탄산이 된다. 위의 변화에서 CH3-C-OH는 모두 동일하다. 다만 한쪽에 CH2의 증가와 다른 쪽에 O가 증가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마치 CH2와 O사이에 역비례 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헤겔을 따라서 이런 역 비례를 개념적으로 설명해 보자. 이런 역 비례에 각 항은 공통적으로 내적 촉매를 포함하지만, 다른 한편 자기의 항의 질을 규정하는 요소뿐만 아니라 다른 항의 질을 규정하는 요소도 포함한다. 각 항은 이미 다른 항을 포함하므로 다른 항과 연속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각 항은 이미 그 자체에서 차이 없는 존재와 같다. 그러므로 각 항은 이미 그 자체가 전체이다. 여기서 각 항은 서로 역 비례의 관계에 있으므로 정량에서 역 비례와 마찬가지로 이 비례에서 각 항은 한편으로 자립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

“그들은 양적으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차이 없는 존재이니, 이 후자의 측면에 따르자면 서로는 서로로 넘어가 연속되어 있으며 이 연속성은 두 가지 통일의 각각 속에 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각각은 두 측면 즉 규정의 전체이므로 따라서 차이 없는 존재를 포함하는 가운데 서로에 대해 대립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자립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75)

“두 측면은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통일[척도 관계]인데 본래 동일하며 자립적인 것이지만, 그들이 이런 통일인 것은 그 부정이나 타자에 의해 매개되는 한에서다. 각각은 타자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논리학 초판, GW11, 226)

다만 하나의 질적인 항은 한 측면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항보다 많으며 다른 측면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항보다 작다. 각 항이 포함하는 두 측면 가운데 한 측면은 줄어들고 다른 측면은 증가하면서 다른 항으로 이행한다.

“두 측면의 구별은 하나의 측면에서 하나의 질이 더 많은 것을 지닌 채 정립되고 다른 측면에서는 더 적은 것을 지닌 채로 정립되며 다른 질은 거꾸로 방식으로 정립된다는 것에 제한된다. 그러므로 각 측면은 그 자신에서 차이 없는 존재의 총체이다. 두 질 각각은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본다면 마찬가지로 합으로 머무르는데, 이는 차이 없는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376)

각 항이 한 측면에서 증가하는 것은 다른 항이 그 측면에서 감소하기 때문이며 거꾸로 각 항이 다른 측면에서 감소하는 것은 다른 항이 이 다른 측면에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n*A/B+1/m*C/D] * [1/n*A/B+m*C/D]=p

헤겔 형이상학 산책66-생명의 탄생(1)[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6-본질로의 이행

1)

헤겔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의 1권이 존재론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부분을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해 왔다. 이 1부 존재론의 마지막 3편이 척도이고, 그 3편의 마지막 3장은 제목이 ‘본질로의 생성’이다. 1권 2부가 본질론이니, 존재에서 본질로 이행을 다루는 부분이다.

‘본질’이라는 개념은 헤겔에서는 생명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지속적인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처럼 자기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계에서는 생명체에 와서 시작된다.

자연계에서 그 이전 영역 즉 물리적 영역에서 다루는 물체나 화학적 영역에서 다루는 원소는 아직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아 항상 자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반면 생명체는 외적인 영향을 받더라도 그 영향을 자기에 동화시킴으로써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다. 이런 재생산성이 있으므로 지속할 수 있고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실체[Substance]라고 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제이 실체 즉 종이 제일 실체 즉 개체라고 하는 주장은 이런 생명체의 종이 개체를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을 통해서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헤겔에서도 마찬가지다. 헤겔은 실체라는 개념은 일반적 본질 예를 들어 사회와 같은 것에 한정해서 사용하고, 단순한 종적 개체로서 생명은 본질이라고 규정한다. 헤겔의 이런 본질 개념은 플라톤적인 이데아 개념과 구별되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실체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것이니, 이는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자기 재생산 과정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본질이 다루어지는 영역이 바로 본질론이다. 본질론에서는 이 생명체의 자기 운동을 다루니, 그 운동의 방식이 앞으로 소개하겠지만, 곧 반성 논리이다. 지금까지 다루었던 질과 양, 그리고 척도의 영역에서 다루어졌던 것은 역학적 물체나 화학적인 원소에 해당하는 논리였다. 그것은 물체나 원소가 운동하는 방식인데, 질에서는 이행의 운동이, 양의 영역에서는 연속성의 운동이 지배했다. 마지막 척도에서 양자의 통일 즉 질과 양의 상호 전환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앞의 장 마지막 부분에서 헤겔은 ‘기체[Substrat]’라는 개념에 이르렀는데 이 기체는 화학의 영역에서 촉매를 고려해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부터 다루려 하는 3장 ‘본질로의 생성’은 화학 영역에서 제시된 촉매가 생명체의 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2)

논리학을 다루는데 생명체로의 발전을 다룬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순수 형식적 논리라면, 논리의 전개와 자연의 발전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의 논리학은 그렇지 않다. 처음 시작할 때 언급했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아무래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헤겔의 논리학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삼단논법에서 보듯이 일반적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개별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이행은 헤겔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배후에는 자연의 발전이 전제되고 있다. 자연은 감각적 질로부터 점차 일반화되어 나간다. 이 과정은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같은데, 다만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전개이니, 자연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자연사는 단순히 자연 진화의 역사를 의미하기보다는 자연의 범주적 층위(물체, 원소, 생명 등)가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역학적 물체, 화학적 원소, 생물학적 생명체로 발전되는 과정이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운동이 대상의 운동을 매개로 해서 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논리적 이행은 자연의 범주적 생성과정을 매개로 해서 전진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자연의 범주적 생성과정이 경험적으로 일어난 결과 그 최종 결과를 통해서 이 생성과정이 회고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논리적 전개 과정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항상 논리 범주를 전개할 때 주석 등을 통해서 그 범주와 관련된 영역에 관한 자연사의 진화를 파악하는 과학의 성과를 소개하고 비판했다. 그는 그런 과학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이를 회고적으로 논리적 범주의 발전으로 재구성했다.

3)

그런데, 심지어 우리 시대에서도 자연 영역에서 생명의 발전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여전히 생명에 관한 창조론적인 견해나 신비한 자동발생적 사유가 만연하고 있다.

더군다나 논리학 재판이 발간된 1831년 다음 해에 사망한 헤겔에게는 화학의 영역조차도 아주 초보적인 원리의 발전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당대 베르질리우스에 의해 요소의 합성이 이루어짐으로써 처음 유기화학이 시작되었지만, 헤겔은 이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시대 유기화학으로부터 단백질과 같은 생명체의 기본 구조의 발생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헤겔은 화학적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이와 유사한 철학적 개념인 상호 침투의 원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화학적 결합을 설명하는 데는 이르렀으나, 이런 화학적 결합으로부터 생명체의 발전을 경험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헤겔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제 살펴보려 하는 ‘본질로의 생성’ 장은 극히 논리적이고 극히 단순화되어 있어 심지어 양적으로도 많지 않다. 과학적 경험과 관련된 것도 전혀 없다. 생명의 탄생을 다루는 이 부분이 지니는 중요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사변적 설명으로는 헤겔이 생명의 탄생을 어떻게 다루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헤겔이 생명의 발생을 신비한 창조적 작업에 돌리지 않고 자연적 과정을 통해 특히 바로 전 단계인 화학적 작용을 통해 끌어내려 시도한 것은 특히 눈에 뜨인다. 자연을 자연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유물론이라면, 논리학에서 헤겔은 이런 유물론적인 논리를 전개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생명의 발전을 다루었던 것인가? 그 생명의 탄생이 우리가 바로 앞에서 다루었던 화학적 촉매 개념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다행이 우리로서는 화학적 작용으로부터 생명체의 발생에 이르는 과학적인 과정에 대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단서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유기화학이나 단백질의 형성, DNA의 구조 등이 그런 단서에 속한다.

하지만, 필자와 같이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겨우 화학의 기본 원리나 따라갈 정도지, 이런 유기화학, 단백질, DNA 등의 개념은 헤겔의 책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간신히 꿰어맞추는 정도인데, 이런 한심한 지식을 가지고서도 어떻든 헤겔이 사변적으로 전개한 논리를 어렴풋하게나마 맞추어 보려는 것이 필자의 시도다.

4)

그럼, 이제 헤겔이 촉매를 통한 화학적 결합 작용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침내 생명 개념에 이르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 출발점은 촉매라는 개념이 될 것이다. 이 촉매는 하나의 화합물을 다른 화합물로 이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 자체는 양자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 또는 ‘기체[Substrat]’라고 한다.

물론 이 촉매 역시 하나의 화합물인 한, 독자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질은 촉매가 수행하는 매개 작용과는 무관하다. 이 촉매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양적 비율이 매개 작용에서 결정한다. 이 촉매 속에 들어 있는 원소의 양적 관계가 매개가 되어 하나의 질을 지닌 화합물이 다른 질을 지닌 화합물로 변화된다.

하나의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 촉매 없이 일어나는 이행은 외적 상태에 의해 일어나는 우연적인 작용이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이행을 무한진행이라 하였다. 그러나 촉매가 등장하면서 두 화합물의 이행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니, 촉매야말로 진무한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화합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질을 지닌 화합물이 양적으로 해체되고 촉매 과정을 거쳐서 다시 양적으로 새롭게 구성되면 새로운 질을 지닌 화합물로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을 촉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이행은 촉매가 동일하게 남아 있는 차이 없는 존재, 기체가 되고 화합물의 이행은 그것이 지닌 외적인 상태가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촉매의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며 다시 자기를 자기가 부정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전체적으로 자기의 부정을 통해 자기에 관계하는 자기 매개의 과정이며 부정적인 통일이다.

“그러나 절대적 무차별성이라 불릴 수 있는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는 존재에 속하는 모든 규정성 즉 질적 규정성과 양적 규정성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척도에서 일어나는 양자의 직접적 통일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매개하여 단순한 통일로 되는 것이다. 그 규정성은 차이 없는 존재에서는 다만 여전히 하나의 상태로서 즉 질적인 외면성으로서 존재하니 이것은 기체에 대해 차이 없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73)

이런 자기 매개의 과정, 단순한 부정적 통일 등은 후일 헤겔이 개념을 설명할 때 그 본질적 특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촉매는 그런 개념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촉매는 화합물을 이행하게 하는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촉매는 화합물로부터 빠져나온다. 그것은 이 촉매가 화합물의 이행에서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촉매 즉 기체가 아직 잠재적으로만 자립적인 존재이지 진정한 생명체에 이르러서 나타나는 대자적인 자립적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고 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65-화학에서 촉매와 기체의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5-화학에서 촉매와 기체의 개념

1)

앞의 글에서 척도 관계를 다루었는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에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헤겔은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를 이루는 산과 알칼리 또는 일반화해서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분자적 결합 관계를 척도 관계라고 한다. 즉 두 척도가 결합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런 척도 관계는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데, 예를 들어 질소 산화물을 보면 일산화 질소NO, 이산화 질소NO2, 질산 이온NO3-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산화물을 좀 더 확장하면, 다양한 금속 산화물을 들 수 있겠다. 산화 제일철FeO 산화 제이철Fe2O3, 그리고 산화 마그네슘MgO와 같은 것이 있다.

헤겔은 이런 척도 관계의 계열은 징검다리와 같은 마디 선[Knotelinie]을 이룬다고 한다. 단순한 정량의 계열에서 각 항 사이가 균등하게 전개되는 반면, 마디 선의 경우 각 항 사이가 불균등하게 전개된다.

이제 하나의 화합물이 다른 화합물로 변화하는 것을 살펴보자. 앞에서 보았지만, 추상적인 정량의 경우 하나가 부정되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하나가 출현한다. 여기서 정량의 부정은 다시 정량이다. 양적인 것은 이미 자기 내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힘을 지닌 것이다. 그 변화는 연속적이고 점진적이다.

그러나 마디 선과 같이 띄엄띄엄 존재하는 화합물의 경우 각 화합물은 이지 대자 존재 즉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자립적이다. 여기서 변화는 자기 내에서 나오지 않으며 외적인 다양한 영향에 의해 일어난다. 새로운 화합물 역시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이니 그것의 출현 역시 자기 내적인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행은 우연적이다.

더구나 하나의 부정은 곧바로 다른 화합물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간에 비어 있는 틈 즉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행은 단속적이다. 그사이에는 텅 빈 죽음이 매개하고 있다.

2)

여기서 척도 없음, 과도한 것[Masslos]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어떤 화합물은 자기 관계하는 것이므로 일정한 척도를 지닌다. 그 척도가 곧 그 화합물의 질을 이룬다. 예를 들어 이산화 질소는 질소와 산소가 1:2의 비율로 결합한 것이다. 1:2라는 비율이 이산화 질소의 척도다.

그런데 만일 이 화합물이 자기의 척도를 넘어서게 되면, 그것이 곧 과도한 것이니, 헤겔의 표현에 따르면 ‘das Masslose’이다. 어떤 화합물이 자기의 척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은 외부의 영향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합물을 둘러싼 일정한 온도가 그런 과도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과도한 것은 그런 화합물이 해체된 것이며, 아직 그것이 새로운 것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다. 아직 화합물을 구성하던 소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시 어떤 결합을 이룰지는 주변 환경에 달려 있다.

이런 과도한 것, 척도를 넘어선 것은 무한 진행한다. 하나가 해체되면 주변 환경에 따라 새로운 것이 나오며 다시 그것 역시 주변 환경의 영향에 따라 해체되어 다시 새로운 것으로 변화한다.

하나의 척도 관계가 다른 척도 관계로 변화하는 이행 과정은 하나의 척도 관계인 질적인 것이 질적 규정이 없는 양적인 것 즉 ‘과도한 것’으로 이행하고 다시 여기서 새로운 척도 관계인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서술된다. 이런 이행 과정의 바탕에서 척도 관계를 이루는 두 척도의 양적 비율이 변화한다.

3)

이런 무한 진행은 그 이전에 언급했던 질적 무한 진행과 양적인 무한 진행과 구별된다. 질적인 무한 진행은 하나의 질이 부정되면 그것과 대립적으로 관계하는 다른 질로 이행한다. 이 다른 질은 하나의 질에 대해 타자 즉 피안이다. 즉 빨간색의 부정은 빨강이 아닌 색이다. 양에서도 무한 진행이 출현했다. 여기서 하나의 양의 부정은 또 하나의 양이며 여기서는 질은 변화함이 없으며 다만 양 즉 크기만 변화한다. 이런 진행은 무한한 크기의 양이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현존에서 존재하는 질적인 무한성은 무한자가 유한자에서 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이행이며 차안이 그 자신의 피안으로 소멸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양적인 무한성은 그 규성상 이미 정량의 연속성이니 정량이 자기 자신ㅇ르 넘어나가는 연속성이다. 질적인 뮤한자는 무한자로 된다. 양적인 유한자는 그 자신에서 자기의 피안이며 자기를 넘어 나간다.”(논리학 재판, GW21, 370)

이런 질적 무한 진행이나 양적인 무한 진행과 구별되어 과도한 것은 무한 진행이기는 하지만, 징검다리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한편으로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이 상호 지양되어 통일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진행은 환경의 영향에 따라 종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우연적인 변화이고 불규칙적인 도약이다.

“그러나 특정화한 척도[관계]에서 나타나는 무한성은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상호 지양하는 것으로서 정립한다. 따라서 이는 양자의 최초로 일어나는 직접적인 통일이니, 이런 통일은 일반적으로 자기 내로 복귀한 것으로서 따라서 정립된 것으로서 척도이다. 질적인 것 즉 특정한 현존은 다른 현존으로 이행하니 이때 다만 [척도] 관계에서 나타나는 크기 규정의 변화만이 일어난다.”(논리학 재판, GW21, 370)

4)

그런데 여기서 헤겔의 서술에서 새로운 범주가 출현한다. 이 구절 바로 다음에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사태’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따라서 양적인 것의 질적인 것으로의 변화는 외적인 것이고 무차별한 것으로서 정립되며 그리고 자기와 합치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양적인 것은 곧바로 지양되면서 질적인 것으로 즉 그 자체이며 대자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질적인 것으로 지양된다. 이처럼 척도의 교체 속에서 자기 내에서 연속하는 통일성이 진정하게 머무르는 자립적인 물질 즉 사태 자체다.”(논리학 재판, GW21, 370)

위의 구절에서 앞부분은 “외적이고 무차별한 것”이란 구절은 척도 관계의 무한 진행을 서술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의 뒷부분에서 “자기 합치하는 것”이나 “그 자체이며 대자적으로 규정된 것”, ‘사태’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진 무한 개념이 나온다.

사태는 곧 “진정으로 지속하는 자립적 물질”이다. 그 핵심은 자기를 지속하는 존재 또는 자기를 재생산하는 존재다. 이는 장차 출현하게 될 본질 개념의 출발점으로 된다. 그것은 아직 ‘본질’ 자체는 아니며 다만 ‘기체’에 머무른다.

이런 기체의 개념은 화학적인 촉매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합물의 해체와 다른 화합물로의 이행은 외적인 영향에 좌우되니 우연적인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런 이행을 조절할 가능성이 생겨난다. 바로 촉매를 집어넣는 경우이다. 기체상에서 발생하는 간단한 예로, 2 SO2 + O2 → 2 SO3 반응은 일산화질소NO를 첨가하여 촉진될 수 있다. 이 반응은 두 단계로 발생한다.

2 NO + O2 → 2 NO2

NO2 + SO2 → NO + SO3

여기서 목표는 아황화가스를 삼산화황(황산의 원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행 과정은 촉매로 일산화질소를 사용하면 두 개의 화학적 결합과정을 포함한다. 즉 일산화질소가 이산화질소로 이행하는 과정과 이산화질소가 아황화 가스와 결합해 삼산화황(황산의 원료)이 나오는 과정이다.

5)

위와 같은 촉매 반응은 화학적 결합물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제 거꾸로 촉매를 중심으로 서술하면, 촉매는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변화하지만, 이 타자는 다시 자기를 부정하면서 원래의 자기로 복귀한다. 이런 자기로 복귀하는 것은 재생산되는 것이므로 ‘사태[Sache]’로 규정된다.

척도 관계의 무한 진행에서 띄엄띄엄 존재하는 척도 관계 사이의 비어 있는 틈은 척도 관계에 대해 외면적이었다. 그러나 이 비어 있는 틈이 척도 관계 자체에 내재적이 되면 그것이 곧 사태이다. 틈이 비어 있는 것이라면 사태는 척도 관계들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척도[관계]들의 교체 속에서 자기를 자기 내에서 연속하는 통일성은 진정하게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자립적 물질 즉 사태이다.”(논리학 재판, GW21, 370)

이제 기체를 매체로 일어나는 척도 관계들의 변화를 헤겔은 ‘상태 변화’라고 한다. 이 전체 변화의 과정에서 각 척도 관계는 하나의 마디일 뿐이며 그것을 매개하는 촉매는 영속적으로 머무르며 그러기에 기체[Substrat]으로 불린다.

“이제 그러한 관계는 다만 동일한 기체의 마디로서 규정된다. 이를 통해 척도들과 그것을 통해 정립되는 자립성은 상태로 전락한다. 변화는 다만 상태의 변화이며 이행시키는 것[Uebergehende]은 그 속에서 동일하게 머무르는 것으로서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71)

헤겔에서 무한 진행은 악 무한이다. 반면 진 무한은 자기 관계하는 대자 존재다. 질의 차원에서 진 무한은 양적 일자이며, 양적 차원에서 진 무한은 미분 즉 소멸하는 비례이다. 이제 척도 관계에서 악 무한이 앞에서 말한 과도한 것이라면, 그 진 무한을 헤겔은 사태라고 규정한 것이다.

“영속하는 기체는 동일한 방식으로 우선 그 자신에서 존재하는 무한성의 규정을 갖는다.”(논리학 재판, GW21, 370)

하나의 질적 촉매는 자기를 자기로부터 반발하게 하여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는 것이지만, 이 타자 역시 자기로부터 발발하니, 이 전체 과정을 통해 촉매 자기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촉매 과정에서 이행은 이행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는 이 촉매는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와 매개하는 자립성”(논리학 초판, GW11, 223)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타자로 되는 가운데 오히려 이런 것 즉 타자로 되는 것을 지양하니 각자는 이렇게 타자로 되는 가운데 다만 자기 자신과 합일한다.”(논리학 초판, GW11, 222)

6)

이미 척도 관계에서 질적인 통일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산과 알칼리는 결합하면서 부피는 통일된다. 이런 통일이 곧 대자 존재 또는 질의 측면이다. 그러나 여기서 통일은 한 부분에서의 통일이니 무게의 양적인 측면은 자기를 유지하면서 단순히 혼합될 뿐이다.

이제 하나의 척도 관계를 다른 척도 관계로 이행할 때 등장하는 촉매 즉 사태는 자기 자신을 타자화하면서 다시 타자 속에서 자기로 복귀하는 자기 매개하는 자이면서 진정한 무한자이다. 헤겔은 이를 “절대적으로 규정된 대자 존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 촉매는 하나의 화합물이어서 그 스스로 일정한 비율을 지닌 대자 존재로서 질적 존재다.

그런데 이런 매개 과정에서 그 자신의 질적 존재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교환체로서만 의미를 지니니, 그것이 지닌 양적 비율만이 문제가 된다. 이 양적 비율이 이제는 전체의 매개 중심으로서 매개의 단위가 된다. 즉 양이 그 자체로 질이 되니, 진정한 양질의 통일이 여기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기체는 아직 개념이 되지 못한다. 개념이라면, 그 계기들이 개념의 자기 구별로부터 나와야 한다. 즉 “그 자신의 구별된 것들에 내재적 규정을 제공해야”(논리학 재판, GW21, 372) 한다. 그러나 여기서 촉매는 변화하는 계기들에 영속하는 기체일 뿐이다. 계기들은 그 기체의 외적인 상태일 뿐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64- 척도 관계의 계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4- 척도 관계의 계열

1)

헤겔 존재론 3편 척도 장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복잡해 그 체계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면, 척도 개념이 규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두 정량의 관계가 척도를 이룬다. 예를 들어 비중과 같은 것인데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관계다. 두 척도의 관계가 척도 관계이다. 척도 관계들이 서로 배열될 때 예를 들어 도미솔과 같은 동일한 주파수의 배가에 의한 결합도 있지만, 예를 들어 산과 알칼리 또는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과 같은 결합도 있다. 전자가 단순한 친화성이라면 후자는 선택적 친화성이다.

산과 알칼리 또는 화학적 결합은 두 척도의 선택적인(또는 배타적인) 결합이다. 여기서 결합하는 두 측면은 각기 척도이다. 즉 두 물질은 각기 비중(무게와 부피)을 지니면서 서로 결합하는데, 이 결합에서 무게는 단순히 혼합되지만, 부피는 서로 뒤섞이니 즉 상호침투적이다. 헤겔은 이때 부피의 측면을 대자 존재의 측면 즉 질적인 측면이라 하고 무게의 측면을 양적인 측면이라 한다.

이제 이렇게 선택적 친화성을 통해 결합한 산물은 일정한 계열을 이룬다. 대표적인 것이 일산화질소[NO], 이산화질소{NO2], 질산이온[NO3-]이다. 이것들은 질소와 산소의 결합 즉 척도 관계다. 이것이 곧 이제 우리가 다룰 척도 관계의 계열이다.

이 계열은 상대 극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출현한다. 위에서 산소를 반대 극에 둔 질소의 계열을 살펴보았는데, 수소를 반대 극에 둔 계열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러면 물(H2O), 암모니아(NH3)와 같은 계열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상 이야기를 간단히 말하자면, 두 양의 관계로서 척도, 두 척도의 관계로서 척도 관계, 척도 관계들의 관계로서 척도 관계의 계열이라는 식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2)

지금까지 척도 관계로서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이제 척도 관계들이 이루는 계열을 살펴볼 차례다. 척도 관계의 계열을 이루는 각 항은 각기 하나의 척도 관계이며, 그것들은 한편으로 고유한 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일산화질소와 이산화질소는 각기 다른 고유한 질을 지닌다. 전자는 몸에 유익하지만, 후자는 치명적이다.

이런 질적 차이는 서로 선택적으로 결합한(또는 부정적으로 통일한 것) 결과로 다른 것에 대해서 특정화한 것이니, 여기서 타자와의 관계는 곧 자기와 관계이어서 자립적이다. 쉽게 말해 그 결합이 견고하다. 이런 선택적 결합체 즉 척도 관계는 다른 척도 관계에 대해 질적인 차이를 지니며, 각자 특정한 것이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비약적이다.

“관계로 이루어진 척도의 자기 관계는 그것의 양적 측면에 속하는 외면성이나 가변성과 상이하다. 이 관계적 척도는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이는 양적 측면에 대립하는 하나의 존재하는 질적 토대이니, 동시에 그런 관계적 척도는 자기의 외면성 속에서는 연속하지만, 질 속에서는 이 외면성을 특정화하는 원리를 내포했어야 지속하는 물질적 기체가 될 수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64)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척도 계열의 각 항은 양적 차이를 지닌다. 이산화질소는 산소에 대해 질소가 하나이며, 이산화질소는 두 개, 질산이온은 세 개다. 이런 양적 변화는 연속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연속성에는 정량의 연속성과 다른 측면이 있다. 자연수에서 수는 연속적인데, 각 수가 앞이나 뒤의 수에 대해 갖는 관계는 균등하다. 반면 음정의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 보이는 연속성은 각 음정에서 앞이나 뒤의 음정에 대해 갖는 관계는 차이가 있어 불균등적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자연수처럼 배가되는 음정이 있는데 그게 조화를 이루는 음정 도미솔이다.

이제 척도 관계의 계열을 보자. 위에서 일산화질소, 이산화질소, 질산이온 등은 자연수처럼 진행하여 마치 균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척도 관계의 계열은 그 앞뒤의 관계가 불균등하며 중간이 비어있는 경우도 많다.

“그와 같은 대자 존재는 본질적으로 양의 관계이므로 외면성이나 양적 변화에 열려 있다. 그런 척도 관계는 하나의 틈을 갖는다. 그런 틈 안에서 이 척도[관계]는 변화에 대해 무차별하며 그 질을 변화하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365)

그러므로 이런 척도 관계들의 계열을 보면, 연속적이기는 하지만, 정량[수]의 연속성과 달리 마치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는 연속성이다. 헤겔은 이와 같은 연속성을 ‘마디 선[Knotenlinie]’이라고 말한다.

4)

이런 마디 선의 개념과 더불어 척도 관계의 계열이 지닌 특성이 드러난다. 이미 앞에서 정량을 다룰 때 질과 양의 상호이행에 관해 서술했다. 자연수는 양적으로는 앞의 수와 연속되어 있다. 이런 연속성의 측면에서 보면 그 수는 개수이다. 예를 들어 다섯 개는 네 개에 하나 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총수 다섯 개를 우리는 다섯이라는 수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이 다섯이란 고유한 질적인 규정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것을 총수[Einheit] 즉 통일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결과 양이 변화하면 질이 변하고 질이 변화면 양이 변화하게 된다.

그런데 헤겔은 여기서 마디 선과 더불어 다시 양질 변화를 언급한다. 여기서 일산화질소에서 이산화질소 양적인 변화는 동시에 고유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양적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연수 또는 정량에서 질량 변화와 달리 척도 관계에서 질량 변화는 차이를 지닌다. 우선 척도 관계는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를 통해 자기 관계하며 자립적인 질을 이루고 있으므로 하나의 척도 관계가 다른 척도 관계로 이행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척도 관계가 변화하는 원인은 외적인 상황, 조건 때문이다. 즉 “무규정적인 타자, 우연성, 외적 상황”(논리학 초판, GW11, 216) 때문이다.

이런 외적 상황과 조건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척도 관계에 대신해서 새로운 척도 관계가 나올 때 그것은 이전의 척도 관계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척도 관계로부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65).

또한, 이런 척도 관계의 계열에서는 그 계열은 불균등하므로 중간이 비어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 변화가 점진적 내적이지 않다. 이 변화는 우연적이며 비약적이다.

5)

이와 관련해서 헤겔은 자연에는 우연과 비약이 없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자연은 점진적, 내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우리 눈에 비약이 보이는 것은 사실 이미 미소한 것이 출현해서 그 크기가 성장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그 미소한 것의 출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 때문에 자연에 갑작스러운 비약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자연이 척도 관계들의 계열인 한, 이 관계들이 우연하고 비약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헤겔은 심지어 도덕이나 국가조차도 이런 양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비약이 존재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도덕적으로 경솔함은 대부분 사소한 잘못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소한 경솔함이 엄청난 도덕적 불법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국가도 일정한 크기가 지속 증가하더라도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크기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이루기도 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로마가 팽창하다가 갈리아나 중동을 정복하면서 더는 공화국 체제로 유지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예를 들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온 대로 자연에 우연적 비약을 인정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흔히 헤겔의 체계가 개념적 필연성을 인정한다는 주장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모순적이지 않다. 개념의 필연성은 개념적 존재 즉 정신적 존재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반면 자연은 아직 비정신적 존재이니, 여기서 개념의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적 비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주 자연과 사회 및 정신에 적용되는 변증법을 동일시하는데, 이는 헤겔 변증법에 대한 오해이다. 변증법은 각각의 영역에서 고유하게 발전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변증법적 발전 방식과 사회나 정신의 발전 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정신이나 사회도 그것의 양적인 측면 즉 자연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자연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연성과 비약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결론)-동학사상과 영 일원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결론)-동학사상과 영 일원론

1)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규성은 90년대 중반 황종희의 철학에 기울어졌다가, 다시 2001년에는 왕선산의 철학으로 기울어진다. 전자는 내재의 철학인데, 우주적 기와 마음의 합일에 의해 혼연일체가 되어 만물과 소통하는 강력한 소통의 철학이다. 그러나 기의 변화를 다만 기다리는 내적 망명이나 현실 도피에 이른다.

반면 후자는 음기와 양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물의 본체가 성립하며, 개별 사물들은 음양의 운동 상태로 중정을 향해 움직여 가는 가운데 상호 보완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본체를 통한 자주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운동 상태에서 본체로의 복귀라는 강력한 실천 동기가 출현하지만, 소통성은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수준으로 약화된다.

이규성은 자주성에도 관심을 지니지만, 그에게서 일차적인 것은 천인합일에 의해 만물과 소통하는 강력한 소통의 철학이니, 그는 다시 양명학의 일원론적 기 철학으로 돌아가면서도 강력한 실천성과 현실 저항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런 가운데 이규성이 주목한 것이 바로 동학 최시형의 철학이다.

이규성은 최시형에 관해 2011년 <최시형의 철학-표현과 개벽>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에 앞서서 이미 1999년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필자는 뒤의 책을 구하지 못해 앞의 책만을 참고로 했는데, 필자 생각으로 뒤의 책을 다시 발표한 책이 아닐까 짐작한다. 동학사상에 관해서는 2012년 발간된 <한국현대철학사론 1장 표현과 개벽>에서도 다루어지는데, 이 책이 내용상 오히려 더 풍부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최재우에서 최시형을 거쳐 이돈화, 손병희 등 초기 동학 사상가를 포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최시형의 철학을 다루는 책에서 부제에 ‘개벽’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주목된다. 그것은 이미 이규성이 최시형을 다룰 때 그의 철학이 지닌 현실 변혁의 저항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현실 저항성은 자주성과 소통성을 추구해온 이규성의 철학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목표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규성은 최시형의 철학을 양명학의 기 일원론의 철학적 체계에 따라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황종희, 현성파로 이어지는 양명학의 흐름에서는 저항성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기의 변화를 기다리는 내적 망명, 현실 도피적 성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유사한 철학적 토대 위에서 최시형은 어떻게 현실 저항성을 획득했을까?

2)

동학사상을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의 개념을 통해 해석해 생명이 생성하는 철학으로 확립하려는 시도는 이미 이돈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근 김지하도 생명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마찬가지로 생명철학으로 해석했고, 이런 입장은 이규성 자신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규성은 동학사상의 천도를 하나의 우주적 기로 보며 이 우주적 기가 펼쳐지면서 만물이 형성된다고 본다. 이 “기의 운행은 剛健하며 不息하며 玄妙無爲하니”(최시형, 천도교 경전, 241) “만상은 천도의 表顯이다”(최시형, 천도교 경전, 428). 만물에 하늘이 임존하니 “사사천이며 물물천이고” “천불이인이고 인불천인”(최시형, 천도교 경전, 329)이다. 그 운동은 한편으로 동질화하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화하는 운동이다. 전자가 음의 운동이라면 후자가 양의 운동일 것이다.

인간은 그런 우주적 기와의 합일을 통해서 만물과 소통하는 상태에 이르며(내유신령) 이를 통해 깨달은 우주적 기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 한다.(외유기화) 합일을 통해 자각된 우주적 기의 진정한 모습은 평등한 세상이며 서로 소통하는 조화나 동포의 세계이다.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타인과 내가 포태를 같이 하고 사물과 내가 포태를 같이하는 전체적 진리를 깨닫는다.” (최시형, 천도교 경전, 355)

그것은 투쟁을 치유하고 원한을 용해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구체적으로 경천, 경인, 경사의 관계로 규정된다. 이제 이런 세계가 막 실현되려 하니, 곧 선천의 세계는 지나가고 새로운 개벽이 다가온다.

동학사상의 일반적 얼개를 위와 같이 정리해 보면, 이는 전형적으로 앞에서 황종희의 철학을 통해 밝혀진 일원적 기가 전개하는 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규성 자신도 동학사상은 “신유가의 이학적 사고를 계승한다” 또는 최시형은 “동학을 도학으로 도학을 심학으로 이해한다”(한국현대철학사론, 78)라고 말한다.

이규성은 그러면서도 동학사상에 나타나는 강력한 실천성과 저항성에 놀라며, 이것이 기 철학 자체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는 일원론적 기의 철학이 중국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내적인 비밀의 힘을 동학사상에서 발견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통해 이규성이 추구했던 소통의 철학은 완성에 이르렀다.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본체적 원리는 모든 곳에 빈틈없이 내재하는 충만의 원리이자 개체들을 관류하여 융통시키는 연속성과 소통성의 원리이다.”(한국현대철학사론, 59)

3)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등장한다. 동학사상을 기 일원론으로 규정하면 그것은 황종희나 현성파의 바탕이 되는 기 일원론과 유사하게 된다. 이규성은 현성파를 다루면서 현성파는 결국 기의 흐름이 변화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런데 동학의 사상에서는 개벽이 닥쳐왔다는 종말론적인 확신이 출현했으니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그것은 일원론적 기 철학에 내적인 비밀의 힘이 등장한 것인가? 과연 지금껏 없었던 힘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것인가? 아니면, 동학사상을 이렇게 기 철학에 한정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동학사상은 이처럼 기 일원론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여러 개념들이 출현한다. 동학사상은 기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항상 거기에 어떤 절대적임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덧붙인다. 이 기는 一기이며, 至氣이고, 元기이다. 마찬가지로 도를 언표할 때도 단순히 도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극대도다. 사실 동학사상에서는 기라는 개념 못지않게 靈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천령, 심령이나 性령, 靈符이다. 또는 천이라는 말을 사용하니 천명이며 한울이고 천도이다.

이런 표현들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암시한다. 동학사상의 출발점에는 이런 절대적 존재와의 만남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출현한다. 그것이 경신년 4월 5일 최제우의 체험이고 최시형 역시 유사한 체험을 겪었다.

흔히 기독교의 영향으로도 설명되는 이런 영성에 관련된 표현들은 앞에서 이해된 기 철학적인 체계와 어떤 관련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4)

이규성 자신은 확신을 가진 듯이 동학사상이 이학이며 심학이라 하지만, 동학사상에 관한 그의 설명 가운데 이미 이런 영적인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기는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본체적 원리”(한국현대철학사론, 59쪽)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다시 반복된다.

“동학의 영원성에는 미묘한 양의성 즉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성격이 있다.”(한국현대철학사론, 110쪽)

이 구절이 나온 맥락은 먼저 성서적 시간관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나온다. 성서적 시간관은 요한복음에서 보듯이 초월적 영원성이 이 지상에 임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도 내재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초월성을 더 강조하는 반면 동학사상에서는 인내천을 강조하면서 무극대도의 내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한다.

논의의 의도 자체는 동학사상을 기 일원론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지만, 필자는 오히려 위의 논의에서 이규성이 한편으로 내재성 못지않게 다른 한편 초월성을 인정한다는 것에 주목된다. 그것은 이규성이 동학사상에 내재성 이상으로 초월성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무극대도는 내재적 원리로서 생명, 기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이규성이 동학사상에서 무극대도가 단순한 생명 또는 기 이상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개벽을 천명으로 규정하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규성은 최시형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선천은 물질개벽이요 후천은 인심개벽이니…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되었으니 우리의 도를 천하에 포덕하여 창생을 널리 구원하는 것이 한울의 명하신 바이다.”(최시형, 천도교 경전, 417-418)

‘개벽의 운’이라는 표현은 기 철학에서 음양 운동의 양태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기 일원론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다시 ‘한울의 명하신 바’로 규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 철학에서 말하는 천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울의 명은 초월적 계시에 가까운 표현이다.

5)

이런 맥락에서 그가 최종적으로 쓴 책 중국현대철학사론 가운데 마지막 장 장세영에 관한 이규성의 서술이 관심을 끈다. 장세영을 다루면서 이규성은 그 마지막 부분에 장세영이 기대했던 희망의 개념에 주목한다. 그것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1938-1947)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1964)에 대한 장세영의 논평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장세영은 예술이 제시하는 환상을 설명하면서 이 환상은 비록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현실을 이끌어가는 힘을 주니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진실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환상이 지닌 진실을 기독교적 종말이 주는 희망과 연결한다.

“희망은 현실, 현존하는 것, 분명하게 나타난 것을 초월한다. 비애에 빠지는 것도 유한성에 갇혀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희망 속에 살며 하루에는 하루의 희망이 있다. 인간은 무한성을 품은 유한자다. 장세영이 보는 최상의 희망은 인간과 만물이 일체인 경계다. 이 경계는 무한의 관점에서 유한을 보는 자유의 경계이다.”(중국현대철학사론, 1058)

이규성이 장세영의 피안이 주는 희망 개념에 주목하면서 그의 저서를 끝내고 심지어 그것으로 그의 삶 자체가 끝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규성의 종말론적 희망은 동학의 개벽 개념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면 동학의 개벽 역시 이런 종말론적 희망 개념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런 종말론적 희망의 바닥에는 신성 즉 천령이 존재한다. 동학사상은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본다면 기 철학에서처럼 내재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본체는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천령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규성이 천도로 규정한 생명 개념도 영성의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6)

필자가 보기에 이규성은 동학사상의 무극대도를 기 이상으로 즉 천령으로 파악했음에도 전통적인 기 철학에 기대어 이를 내재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절대적인 존재는 기독교에서처럼 인격적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인격적 존재는 세계를 창조하고 수시로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섭리를 펼치는 존재다. 그러나 동학사상에서 절대적 존재는 우주적 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물을 생성하여 만물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다. 이런 점에서 동학사상은 범신론적인 체계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이런 천령을 통해 심령의 윤리를 전개한다. 이 천령의 운동은 만유를 관통하고 있으니 이 천령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은 만유와 소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주적 심정에 근거한 자유의 윤리를 선택해야 할지 그 여부를 결단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있다.”(한국현대철학사론, 120)

이 자유의 윤리는 부르주아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자유의 윤리는 “타인은 물론이고 만유와 연동하는 투명한 소통적 관계”(한국현대철학사론, 120쪽)를 의미한다. 심지어 이규성은 이런 자유의 윤리를 ‘영혼의 코뮤니즘’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 생명 개념이 천, 영의 개념으로 확장되면서, 이 운동은 이제 단순한 자연의 운동이 아니라 신적 절대적 존재가 전개하는 운동으로 된다. 이 절대적 존재는 인간에게 계시를 통해 명령하니 그것이 곧 다가온 개벽이다.

신적 명령 즉 천명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통해 개벽은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필연적 의무로 다가온다. 절대적 존재가 계시를 통해 직접 명령한다는 것이 동학의 실천성 저항성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닐까?

기 일원론에 빗대어 이 개념을 우리는 ‘영 일원론’, 그 윤리는 이규성이 말한 대로 ‘영혼의 코뮤니즘’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규성은 이를 직감했지만, 더는 전개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이런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테이야르 샤르댕이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 개념을 확장하여 영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8) – 왕선산의 한계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8) – 왕선산의 한계

 

1)

위에서 황종희가 그의 형이상학과 달리 전통 유가 질서를 옹호하는 이탈을 범했듯이 왕선산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주성과 소통성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확립했으면서도 자신은 이를 통해 전통적인 유교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왕선산의 형이상학에서 유교적 차별 질서가 어떻게 도래하는가? 이규성 자신은 이에 관해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① 먼저 마음의 본성과 신체의 기질 사이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는 체용의 관계로 규정되었지만, 체용의 관계는 모호하다. 체용의 관계는 양자의 동시에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이지만, 동시에 그 가운데 더 중요한 가치는 어디까지나 체에 있게 된다. 또는 체는 순수하지만, 용은 불순하다는 정도의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도심과 인심, 기질지성과 정욕의 체용적 관계를 사회적으로 적용해서 이를 남녀나 지배피지배층에 적용한다면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나오게 된다는 점에서 체용 관계는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② 또한, 의를 다루면서 이규성이 했던 발언도 주목된다. 여기서 의의 차별성은 각자에게 ‘각자에 마땅한 몫을 주어야 한다’는 객관적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선산은 의의 차별성에서 전통적인 유교적 차별적 질서를 정당화하려 했는데 이는 역사적인 차별을 자연 법칙화하는 물신주의적 견해라고 한다. 이규성은 그 때문에 왕선산 자신은 자기의 인간 본성론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객관적 정의관은 개인의 추상적 인격의 가치를 평등하게 긍정하는 주관적 정의관[추상적 인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과 대립적이다. 또한, 그의 인성론이 자유의 생명성에 기초한 개방적 인격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정치학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왕선산의 정의관은 사회의 구조를 자연 법칙화하는 물신주의적 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생성의 철학, 300)

③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왕선산의 한계를 파악하는 데서는 이규성은 왕선산이 음양 가운데 양이 음에 대해 우위를 가지고 지배적이라고 보았다고 했다. 이를 윤리적 차원에 적용한다면, 인간성에서도 음양의 관계에서 양이 음에 대해 지배적으로 되는데, 여기서 불평등이 유래할 수도 있다.

 

2)

왕선산이 이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양이 음에 대해 우위에 이른다고 본 것은 음양의 규정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껏 오해를 피하려 왕선산의 음양 개념을 음양으로만 소개했으나 사실 왕선산에서 음양은 ‘유순함’과 ‘강건함’이라는 특정한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아마도 주역의 건괘와 곤괘에 대한 해석에서 이런 성질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음양을 이렇게 규정한다는 것 자체에 이미 양의 지배라는 사고가 감추어져 있다.

“이렇게 순전한 양을 건으로 삼은 것은 음양이 합하여 운행하는 가운데서 그중 양이 왕성하고 광대하게 유행하는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왕선산, 주역내전, 생성의 철학, 140, 재인용)

음양 대립은 자체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그것은 다만 서로 대립하는 힘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기는 운동하는 가운데 기질을 지니니, 그 기질을 통해 대립하는 힘은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자연력에서 인력이나 척력, 전기력에서 +전기와 -전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순함과 강건함은 엄밀하게 대립하는 힘은 아니다. 그것은 강약의 차이라는 정도의 차이이니 대립에 속하지 않아 음양을 규정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왕선산은 이를 음양의 성질로 규정하니, 강건함은 본래부터 유순함보다 더 강한 것이니 여기에 우위라는 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제 남녀가 음양으로 규정되면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우위가 되고 지배층이 양이고 피지배층이 음이면 마찬가지로 여기서 지배층의 지배가 도출되니, 음양의 규정 자체에 이미 불평등의 구조를 감추고 있었다.

“왕선산은 군주정을 자연적 질서로 간주한다. 건의 강건성이 세계의 주인이다. 건은 군음의 종주이다.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본성적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사물이 올바른 것이다. 건의 강건성이 구체적 사물이 능가할 수 없는 존재와 변화의 주인이다.”(생성의 철학, 172)

 

3)

황종희나 왕선산은 자신의 형이상학이 전통적 유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규성은 오히려 그들은 자기의 형이상학이 지닌 본래 가치를 망각했다고 한다. 이규성에 따르면 황종희의 기 일원론이나 왕선산의 음양의 상호작용은 평등하고 소통하는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왕선산의 형이상학과 인성론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소통성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미 설명하는 가운데 언급되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여기서 황종희에서 형이상학의 세계는 기 일원론의 홀리즘적 성격이 강하다. 황종희에서 만유는 본체를 지니지 않는 우주적 기의 운동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여기서 우주적 기와 마음은 혼연일체를 이룸으로써 마음은 만물과 소통한다. 이런 세계에서 아주 강력한 소통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만물에 아직 고유한 본성이 결여하므로 아직 개별자의 고유한 자주성은 결여한다.

황종희 자신은 이런 세계를 통해 전통적 유가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이규성이 볼 때 이는 부당한 비약이었다. 이규성은 오히려 황종희의 형이상학은 이런 혼연일체를 통해 생겨나는 무차별적 평등의 세계이며 이는 태주학파나 이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고 한다.

황종희의 이런 철학을 이규성은 내재의 철학으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혼연일체의 강력한 소통성은 90년초반까지 전개되었던 운동권의 연대의식이라는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그러나 왕선산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는 대립하는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사물의 고유한 본체가 출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개별 사물은 음양 운동이 치우친 상태이며 다시 중정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이를 통해 자기에 대립하는 개별자로부터 힘을 빌어오니 양자는 서로 상보적이고 이것이 왕선산에서 소통성의 토대가 된다.

왕선산은 이를 통해 개체의 자주성을 인정한 가운데서 상반상성의 상호 보완적인 소통성을 추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소통성에서는 혼연일체를 주장하는 황종희보다 뒤떨어지지만, 이런 소통성을 개체의 자주성을 확보한 위에서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탁월하다.

왕선산의 이런 체계는 9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이후 개인의 자발성이 강조되던 시기의 시대 정신을 잘 반영한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연대의 의식이 강했으니, 이규성은 자주성과 소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런 왕선산의 체계로부터 발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이전에 살펴보았듯이 황종희의 일원적 기의 세계는 문제점을 지닌다. 황종희에서 음과 양은 운동의 양태로서 교체될 뿐이니, 현성파에서 보듯이 양이 지배하는 세계는 개방성과 소통성의 토대가 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그것은 천도의 교체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 왕선산에서 소통의 가능성은 본체의 자기 지속성과 회복력을 인정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단지 기다리지 않고 중정으로 복귀하려는 강한 실천적 동기가 마련될 수 있다.

그러나 이규성은 개인의 자주성보다 소통성을 더 강조하는 편이다. 그러기에 왕선산의 체계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강력한 혼연일체의 무차별적 평등적 세계에 강력하게 이끌린다. 그러므로 그는 왕선산의 글 가운데서도 왕선산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왕선산은 왕양명의 심즉리가 사실은 윤리적 가치가 심의 본체에서 자생하는 심의 내재적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주장된 것임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또한, 태주 학파와 이지가 기존의 이는 군자 집단의 특권적 지배 원리이기 때문에 서민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보편적일 수 없다고 하는 비판적 발언을 한 데 대해서도 성찰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생성의 철학, 328쪽)

결국, 이규성은 왕선산의 철학을 떠나 다시 황종희의 기 일원론으로 돌아간다. 황종희의 철학에 기초해 평등한 소통의 세계를 확보하면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실천적 동기, 혁명적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이규성은 동학 최시형의 세계로 마지막으로 관심을 이동하게 된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7) – 왕선산의 인간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7)-왕선산의 인간론

 

1)

왕선산에게서 인간의 본성은 그의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다른 자연과 구별된 고유한 기질을 지닌다. 그 기질은 맑고 유동적이어서 사물을 관통하는 것, 즉 청통의 기질이다. 이 기질은 우주의 원초적 기질이니 그것은 만물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기라고 불리지만, 구체적으로는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은 단순히 신기라는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신기와 더불어 동물적 기질도 지닌다. 동물적 기질의 특성은 신기에 가깝게 다가가지만, 그것의 관통 능력은 감각에 불과하고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욕구를 지닌다.

더구나 인간의 삶은 자연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자연 물체는 탁한 기로 이루어져 있고 융통성이 없지만, 역시 우주적 기의 산물인 한 부분적으로는 서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과 신체 그리고 마음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문제다.

 

2)

먼저 자연과 관계해서 인간은 만물을 본질을 관통하여 인식하고 이를 삶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파괴하여 소모하는 활동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방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속에서 이용후생의 덕을 실현하고 예의의 문화를 건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본질을 파악하여 자연의 본질을 실현한다.

“.. 타고난 본성을 단순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지만,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본성을 개발하는 성취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생성의 철학, 272쪽)

그런 점에서 이규성은 기존 성리학이 도덕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본다면, 왕선산은 “문명의 창조자로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다”(생성의 철학, 273쪽)고 한다. 또한, 문명의 창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도가적 관점과 달리 “인간의 사회화에 따른 문화인으로의 발전은 인간다움의 필수적 조건이라”(생성의 철학, 273쪽)고 한다.

왕선산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것은 아니니,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자. 더 중요한 것은 우선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문제다.

 

3)

인간의 본성은 그 기질이 청통의 기질, 신기 또는 마음이 벌이는 운동에서 나온다. 왕선산에서 이 운동은 두 측면에 걸려 있다. 하나는 지적인 인식과 실천적 행위 즉 지능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윤리적 본성에 관한 문제다.1

신기의 지와 능은 일단 나중에 언급되는 신체에서 나오는 감각과 욕망과 구별된다. 여기서 지와 능은 기의 음양과 관련된다. 지는 양기에 속하며 만물에 관통하는 능력을 지닌다. 반면 능력은 실천적 능력인데 도덕적 자유의지 개념에 가깝고 음기에 속한다.

우선 지적인 차원과 관련해서 인간의 기질은 마음이며 이는 맑고 유동적이기에 만물을 관통하는 소통적 성질을 지닌다. 이를 통해 지적 인식이 가능하다. 만물 역시 다양한 기질을 지니지만, 원초적으로는 마음이니, 지의 이런 능력은 외적 감응을 통해 일어나지만, 사실은 자기 인식이다.

“지는 힘에서는 자발성, 폭에서는 광대성, 깊이에서는 관통성을 가진다. 그것은 ‘만상 가운데 들어가 장애를 받지 않는’, 허명하고 청허한, 하나이자 거대한 신묘성이다.”(생성의 철학,  285쪽)

이규성은 마음의 이런 능력으로부터 소통성의 근거를 확보하려 한다. 앞에서 황종희에서 마음은 우주와 직접적 합일을 통해 소통하지만, 여기서는 마음의 외적인 감응을 통해 소통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외적 감응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추론하거나 귀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적 감응은 마음이 소통하는 통로일 뿐이니, 그 인식은 마음이 마음과 통하는 것으로서 자기 인식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질적 능력에서 이러한 실천의 관심을 넘어서 스스로를 이완시킴으로써 사물의 내적 본성에 침투할 수 있는 이완적 유동성을 갖는다. 심적 능력의 이완성은 게으름의 이완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진입하여 세계의 통일적 본질을 체험하는 초월적 자기 수렴의 운동성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성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만유의 소통적 본성에 자신을 여는 개방적 자기 인식이자 세계 인식이다.”(생성의 철학,  306쪽)

“허명하여 조감하는 것은 신의 밝음이다. 태허는 형체에 막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편재적인 밝음이다… 조감이란 살피고 관찰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능력을 말한다.”(생성철학, 285) “이목은 견문에 그치지만, 오직 마음의 신묘성만이 모든 공간을 궤뚫고 장구한 시간을 관통한다.”(생성의 철학, 285쪽)

나아가 왕선산에서 지와 능은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지에는 능이 저절로 따른다고 본다. 물론 이 조화는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조화가 될 것이다. 즉 지능의 부조화가 항상적이지만, 이는 늘 균형을 향해 나가는 운동 속에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양명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양지양능의 즉각적인 무조건적인 일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와 능의 관계는 왕선산의 기본 공리 가운데 하나인 음양 각자가 극이 아님이 없으면서도 치우친 극은 없다는 원칙 즉 극이 없으면서도 위대한 극이라는 도식에 따라 파악되고 있다.”(생성의 철학, 292쪽)

 

4)

그런데 이런 지능의 관계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윤리적 본성의 문제다. 그 윤리적 본성은 인의의 상호작용이다. 인은 상통성을 지향하며 의는 차별성을 지향한다. 인의가 양과 음이라면,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져서는 부조화의 운동 상태에 있을 뿐이다. 양자는 함께 상호 작용해야만 조화로운 윤리적 인격이 이루어진다.

이런 인의가 개별적으로 본다면, 운동의 치우친 상태가 되며, 양자의 균형이 인간의 본성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인을 우위로 본 주희나 의를 우위로 본 담사동과 달리 왕선산은 인과 의가 “상보적 균형”(생성의 철학, 301쪽)이며 상호작용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인의의 상호작용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구체적으로 본다면 신기, 마음의 음양 운동을 통해 형성된다*. 이 가운데 양의 운동이 측은지심에 해당하며 음의 운동이 시비지심에 해당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기에서 두 대립하는 마음의 운동인데 이를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인의가 된다. 여기서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별이 발생한다. 전자는 추상적이며 후자는 인간의 기질에서 출현한 본성이다. 그런데 주희는 천지지성이 독자적으로 존립한다고 보고 이를 본연지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왕선산에서 천지지성은 추상적인 것일 뿐, 구체적으로는 기질지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5)

이제 인간을 다룰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이 마음과 신체의 복합체이라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마음이 고유한 기질을 지니듯이 신체 역시 고유한 기질을 지닌다. 그것은 동물적 기질이니, 여기서 감각과 정욕이 발생한다.

신기의 지적 능력과 달리 감각은 한정적이며 그것이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표면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에 대해서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렇지 못한 것에는 혐오를 느끼니, 이는 감정에 속한다. 감각과 욕망 역시 음양의 관계를 지니며, 즐거움과 혐오 역시 음양의 감정을 지닌다. 이런 음양의 관계를 통해 일정한 질서가 즉 신체적 기질의 질서가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 되는 것은 마음의 기질에서 출현하는 도심 즉 본성과 신체의 기질에서 출현하는 인심 즉 욕망 사이의 관계다. 일단 양자는 모두 자연적 기질의 산물이므로 천성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대립하니, 신기의 감응과 감각의 지각이 대립하며 마음의 본성과 신체의 욕망이 대립한다. 전자는 인식론과 관련된 문제니 제쳐 두고 후자만 여기서 살펴보기로 하자. 본성과 욕망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 관계는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그 관계는 앞에서 말한 도와 기의 관계에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양자는 ① 동행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욕[公欲]이 곧 이가 된다. 그보다 자주 이 관계는 ② 전통적인 양분법인 체용 관계로 설명되기도 한다. 체용은 상호 공속하니, 그 어느 것도 동시에 필요한 것이며 이런 점에서 평등성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도심과 인심은 ③ 음양이 층간에서 서로 교차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즉 신체의 음기과 마음의 양기, 신체의 양기와 마음의 음기가 상호작용하니, 마음을 통해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거꾸로 신체를 통해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정신을 수련하여 육체의 허약함을 보완할 수도 있고, 신체의 강건함이 정신의 허약함을 보완할 수도 있다.

 

6)

전체적으로 본다면, 황종희는 인간에서 본성을 규정하려 했다. 그는 이 본성을 마음의 기질이 이루는 음양 운동을 통해 설명했는데, 이렇게 본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개인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회복하려는 운동이 곧 개인의 자주성이다. 이 자주성은 단순히 자의적인 자의가 아니라 본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양심 또는 도덕적 자유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에서 인과 의의 관계, 마음과 신체, 도심과 인심의 관계는 음양의 운동 상태이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곧 중정을 회복하려 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 한쪽은 자기에 대립하는 다른 쪽을 통해 보완된다. 즉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면서도 소통성을 지닌다.

인간의 곧바로 사회적인 관계로 규정될 수 있다. 한 개인의 내적 갈등은 사회적 갈등의 압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인자와 의자 또는 남녀, 정신적 노동자와 육체적 노동자 사이에서도 상반상성의 관계가 나온다. 즉 그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다.

이규성의 생성철학(6) – 왕선산의 코스모고니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6) – 왕선산의 코스모고니

 

1)

형이상학이란 자연의 질서를 기초하는 원리를 밝히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의 핵심 원리는 최종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는가를 통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연이 음양의 동정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왕선산의 주장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형이상학이 설명하려는 질서는 과학이 다루는 구체적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일반적 질서다. 그 가운데 핵심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범주 또는 층위에 따라 구별하고 그 생성을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연에는 물체와 생물 그리고 인간이 있는데 그 생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가 형이상학의 성패가 달린 문제다.

과학에 관한 왕선산의 입장에 관해 이규성은 왕선산 대신 방이지의 ‘질측지학’을 소개한다. 이규성은 “방이지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관점은 왕선산의 관점과 같다”(생성의 철학, 129쪽)고 단정한다. 방이지의 말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과학은 ‘일체를 모두 궁극적 원리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물의 개별적 영역을 멋대로 덭어 가려 구체적 원리들에 대해 정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생성의 철학, 127쪽)

“물에는 그것의 원인이 있다…그 불변적 측면과 변화의 측면을 추론한다. 이것을 질측이라 한다. 질측은 곧 통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28쪽)

질측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탐구다. 통기는 그것의 원리에 대한 탐구이니 곧 철학이다. 이런 관점은 우주와 합일에 머물렀던 황종희와는 구별된다. 왕선산은 철학이 과학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2)

자연은 누구나 알다시피, 물체의 세계와 생물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그 차이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런 것은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에 속할 것이다. 물체와 달리 생물은 재생의 능력을 지니며 인간은 인식과 자유의지라는 정신의 능력을 가진다.

왕선산이 제시한 형이상학 원리 즉 음양이라는 두 가지 기체의 동정이 이런 자연이 물체에서 인간으로까지 발전하는 생성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단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사물이 물체냐 생물이냐, 인간이냐는 그것을 이루는 기의 질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태허 가운데 응취한 것은[무기적 물질] 무겁고 혼탁하여 다른 사물이 침투할 수가 없다.”

“식물은 땅에 뿌리박고 있어서 오행이 결합한 땅의 유형적 기를 받아서 성장한다. … 다만 형질만 있고 성은 없다.”

“동물은 땅 위로 나와서 오행의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기를 받아 태어난다. 형체가 신으로써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각기 자신의 성을 머금고 있다.”(생성의 철학, 267-268쪽 요약)

“인간만이 순수한 형태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청통의 기 즉 신기 혹은 신리를 그대로 자신의 내적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의 본체가 영민하면 할수록 그 작용도 더욱 광대하다.”

이상 인용문을 볼 때, 기질에 관한 왕선산의 특별한 설명은 없지만, 자연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청탁과 경중, 대소1 등과 같은 기질의 성질에 대한 설명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물체는 대체로 탁하고 무거우며 큰 기질의 운동이며 반면 인간은 맑고, 가볍고, 작은 기질의 운동이어서 전자보다 후자는 훨씬 유동적이어서 영묘하다.

3)

그런데 기는 하나이다. 그 기는 사실 음양 두 기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호작용한다는 면에서 하나라고 한다. 이 하나의 기가 어떻게 해서 위와 같이 자연의 범주나 층위를 구분하는 기질로 나누어지는가? 이에 관한 설명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현상 세계도 ‘수많은’ ‘다양한’ 이라는 규정을 갖는다. 이 다수성의 출현 과정은 음양의 상징인 양효와 음효가 6열로 배열되어 64괘를 형성하며 이의 순열 조합에 의해 수가 증가되는 방식으로 확산된다.”(생성의 철학, 149쪽)

“단순한 본체는 순열조합적 과정으로 현상화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하게 증가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음양의 재출현에 불과하다.”(생성의 철학, 150쪽)

이상의 설명은 왕선산의 주역에 대한 설명을 이규성이 정리한 주장이다. 이규성의 설명을 검토해 보면, 음양의 운동이 중첩되면서 하나의 음양 위에 또 다른 음양이, 그리고 그 위에 또 음양이 운동한다.

그 중첩되는 정도만큼 질적 차이가 나타난다. 이런 질적 차이가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처음에 탁하고 무겁고 큰 기질은 점차 맑고 가볍고 작게 되며 점차 유동화되고 영묘해진다. 전자가 물질적 기질이라면 후자는 심적 기질이다.

이런 설명이 정확하게 왕선산의 자연 설명에서 나오는지 필자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2, 적어도 이규성의 설명을 따르자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설명이라 하겠다. 사실 이런 설명은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음양으로 오행을 설명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발상에 속한다.

음양으로 오행이 설명된다면, 이때 오행은 4괘로 설명된다. 즉 음양이 중첩되면서 4괘가 생기고 그 각각에 오행이 대입되는데(예를 들어 물은 소음이며, 불은 태양이다. 나무는 소양이라면 쇠는 태음이 된다), 이런 발상을 확장하면 운동 상태에 있는 만물은 각 층위에서 음과 양의 중첩적으로 조합하여 이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이규성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설명은 일단 개별 사물의 상이 지닌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물이 이처럼 여러 층위의 음양이 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 즉 상이라면, 자연의 같은 범주에 속하는 물체들이 지닌 질적 차이들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물은 최종 층위에서 음양을 달리하더라도 나머지 층위에서는 음양을 같이 할 수 있으니, 이런 차이를 통해 개별 사물이 범주나 층위로 구별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런 범주나 층위에서 작용하는 음양의 기질적 차이를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4)

이런 발상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개별 사물은 마치 남녀와 같이 자기의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치우친 상태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개별 사물은 중정으로 복귀하려 하는 운동을 전개하려 하며, 그 때문에 자기와 대립하는 것에서 힘을 빌려오는 상보적 관계를 맺는다. 이를 상반상성의 관계로 규정하였다.

이제 하나의 사물은 여러 층위를 지니고 각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것이라 한다면, 사물들의 상반상성의 관계는 층위를 넘어서까지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층위가 중첩되었다고 할 때, 아래층과 위층의 음양이 서로 교차해서 관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위의 층에서 음은 아래층에서 양을 끌어당기고 아래층에서 양은 위의 층의 음을 끌어당기는 관계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 층위의 복합체인 사물들 사이에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관계가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예를 들어 오행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물은 소음이니(위층의 음), 소양(아래층의 양)인 나무를 생성하며, 불은 태양(두 층 모두 양)이니 태음(두 층 모두 음)인 금을 생성한다. 소위 오행의 상생상극의 관계가 이런 층위에서 교차하는 음양의 운동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주역에서 이 층위 간 교차 관계를 왕선산이 설명하고 있는지,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지는 필자가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이론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적어도 이규성의 ‘순열조합’이라는 말을 통해 그런 이론적 가설은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이제 사물은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층위 간에 음양 운동이 서로 교차할 수 있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사물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만물 간에 층위를 넘어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층위에서 상반상성의 예 즉 남녀의 관계가 이규성이 추구했던 사물 간의 소통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만물의 층위 간에 음양의 교차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만물 사이에 상반상성의 관계 즉 상보적인 소통 관계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서 이규성은 소통성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앞에서 황종희의 경우, 사물은 본체를 결여한 채 홀리즘적 방식으로 소통했다. 그런데 왕선산은 위에서 보듯이 사물의 고유한 본체를 통해 자주성을 인정한 채 동시에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지금 저 현상은 하늘의 색과 땅의 색, 순수한 것과 잡된 것으로 인해 문채를 얻고, 장단과 종횡으로 인해 양적 한도를 얻는다. 견고하거나 약하고 움직이거나 멈추어서 그로 인해 형질을 얻고 대소와 동이로 인해 고유한 경향성을 얻는다. 일월성신으로 인해 광명을 얻고 진흙이나 흑색 토양으로 인해 산물을 얻는다. 초목과 꽃과 열매로 인해 재물을 얻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산과 평원으로 인해 절기를 얻는다. 귀는 구멍을 열어 들을 수 있으며 눈은 눈동자를 가지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로 통일되게 된다. 현상은 다양성으로만 언제나 있을 수 없으므로 역의 논리로 통일된다.”(생성의 철학, 232쪽 재인용)

 

4)

사물의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의 문제는 추상적인 차원이다. 이것은 추상적 차원에서 사물의 본성을 다룬다. 그런데 자연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복합체다. 인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의 복합체다. 그러므로 복합적인 사물은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 말고 다른 물질의 기질도 동시에 가지면서 여기서 사물의 도와 기[器]의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하나의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본성을 지닌다. 이 본성은 운동 속에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다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니, 이 본성은 지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하나의 사물은 그 본성의 바탕이 되는 기질 즉 형질이 있다. 이것이 곧 기[器]이다. 사물의 본성은 그 바탕이 되는 형질의 음양 운동 위에 또는 그 속에서 출현하니, 여기서 출현하는 본성을 도라 한다.

여기서 도와 기[器]의 관계가 문제 된다. 앞에서 이규성은 기질의 관계를 기의 중층적 발전 개념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도기의 관계는 기질 층간 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그 관계는 우선 수용성 즉 담지자 개념이다.

“기가 토대가 되고 도는 그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는 추상적 원리가 의존하는 그릇이다. 그것은 기와 그것의 산물인 만물을 질서의 담지자로서 이해하게 하는 개념이다.”(생성의 철학, 256쪽)

기[器]는 본성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 때문에 본성이 다양하게 발생하며 여기서 하나의 사물에서 개별적인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즉 이 즉 도는 하나지만, 기[器]는 다양하다. 하나의 도는 순수하지만, 기 속에 받아들여진 도는 불순하다.

또는 이규성은 왕선산에서 도와 기[器]의 관계를 다시 체용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든, 여기서 두 기질의 관계, 본성과 기의 관계는 모호하지만, 대체로 두 요소의 동시적 필요성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느 것도 결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물체를 이루는 층위 간에 음양의 교차 운동이 가능하다면, 도와 기의 관계는 결국 하나의 사물 속에 복합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로 볼 수 있으니, 여기서 도와 기의 관계를 앞에서 말한 층간 음양의 교차 운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5)

황종희에서 개체는 본체가 없으며 만유는 기의 운동이 지나가는 매듭에 불과하다. 반면 왕선산에서 기는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각 층위에서 음양이 상호작용한다. 이를 통해 만물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는 동시에 그 음양의 운동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 .

그렇다면, 아직 중층적 운동을 전개하기 전 원초적인 기 즉 그 기의 가장 근본적인 본체는 무엇인가? 이규성은 왕선산의 체계를 범신론에 빗대어 범심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심이란 곧 기체의 본질을 의미한다.

원초적인 기가 심적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는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심적인 기질에 이른다. 그 기질은 유동적이며 영묘한데, 이런 최종 발전된 기질이 곧 원초적인 기질이 될 수 있을까?

“실재는 유적 본성으로 구획되어 있지만, 그 경계선을 잘라서 볼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연속적 본성에 기인한다. 실재의 궁극적 구조는 고체성의 극한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 연속성에서 얻어진다.”(생성의 철학, 260쪽)

“우주의 본질이 심리적 원리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경험된 것을 본질로서 유추해낸 것이다. … 세계의 본질은 연속적 흐름으로서 하나의 생명 원리이다.”(생성의 철학, 258쪽)

이와 같이 사물과 인간을 이루는 우주적 기는 본질적으로 마음이다. 마음이 우주적 기의 본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지만3, 우리로서는 이규성의 주장대로 일단 우주적 기의 본체가 마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가자.


이규성의 생성철학(5) – 왕선산의 존재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철학(5)-왕선산의 존재론

 

1)

앞에서 말했듯이 이규성은 90년대 초반까지 황종희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일원적 기라는 실재로부터 소통성의 가능성을 찾았다. 그러나 우주적 기의 음양이 교체하는 운동 양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규성의 판단에 따르지만, 우주적 기의 운동으로부터 황종희는 부당하게도 유가의 차별적 질서로 되돌아갔으며, 현성파는 무차별 평등 사회를 꿈꾸었지만, 다만 기의 흐름이 변화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일원적 기의 운동으로는 만물의 소통성의 토대를 마련할 수는 있지만, 홀리즘의 위험을 간직한다.

90년대 중 후반 이후 한국 사회의 시대적 정신이 변화했다. 90년 초반까지 연대를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던 운동 세력은 후퇴하고 서구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 불어닥쳤다. 이 사상은 여러 면모를 지니지만, 그 핵심은 개인의 자발성에 대한 강조였다. 그 때문에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한 소통적 연대라는 새로운 시대 정신이 출현했다.

2001년 이규성은 <왕선산-생성의 철학>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추구했던 형이상학을 왕선산의 철학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1 이규성의 책의 서문에서 황종희의 철학은 내재의 철학인데, 그를 다루면서 생성의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졌고 생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에 나오는 ‘내재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은 서로 동전의 이면으로 보이고 다만 강조점을 어디에 두었는가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종희와 왕선산에 관한 이규성의 해석을 면밀하게 비교해 보면, 두 철학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황종희의 ‘내재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왕선산의 ‘생성 철학’에서는 본체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물의 본체 개념이 없으면, 홀리즘의 가능성이 열린다. 반면 사물의 본체 개념을 전제로 하면 개체의 자주성이 확립되지만, 개체들은 서로 독립하여 연대 가능성이 약화된다. 이를 통해 이규성이 황종희를 떠나 왕선산으로 이행한 이유가 밝혀진다. 즉 이런 이행은 이규성이 시대 정신의 변화에 따라 소통성 못지않게 개인의 자발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규성이 소통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소통성을 홀리즘적 단계에서 고양시켜 개인의 자발성을 인정하면서도 소통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자 한다. 이것은 이규성 자신의 철학적 의식 자체의 발전을 의미하며, 진정한 의미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정신은 이때부터 드러난다고 보겠다. 문제는 황종희의 철학에서와 달리 왕선산의 철학은 음양 두 기의 운동으로부터 본체를 확립하기는 하는데, 여기서 어떻게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가이다. 이제 왕선산의 철학으로부터 소통 가능성을 찾기 위해 고투하는 이규성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신 유가 형이상학 전반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이다. 주희에서 태극의 동정이 음양을 낳는다. 황종희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의 두 대립적 양태다. 이 음양의 동정이 교체하는 양상이 곧 이법이다. 그러나 왕선산에 이르면, 그 관계는 달라진다.

왕선산에서 음양 두 기(음양 대신 인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하나의 기이면서 동시에 둘로 나누어져 운동한다. 왕선산에서 음양 자체가 실체 자체이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상호작용하니 그런 점에서 음양은 하나의 기다.

이 운동 속에서 음양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그런 균형 상태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균형 상태가 태극이며 태극은 운동이 발전하여 균형에 이른 상태라면, 아직 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미발의 상태가 곧 무극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지에서 운동으로 다시 정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끊임없는 운동일 뿐이다. 음양의 균형 속에 나타나는 정지는 절대적 정지가 아니라 음양이 운동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정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태극은 음양의 기의 운동과정이 나타내는 매순간 조화의 극치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화에서의 조화의 극치이다. 따라서 태극은 기라는 실체의 속성이다.”(생성의 철학, 155)

음양의 동정이 만물을 이루니 여기서 만물은 나름대로 고유한 본체를 지닌다. 그 고유한 본체는 기의 동정 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동정 자체가 이루는 균형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체는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질료적 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장자는 일월의 형체는 만고불변이다라고 했다. 형체란 그 규모와 겉모습을 말하며 질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질료는 날로 바뀌나[일신] 형체는 여일하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76 재인용)

 

3)

그러므로 왕선산에서 현상적 사물은 “양면적 성격과 조화로운 규칙성”을 지니며, 이는 음양의 “상호 교환 관계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139)라고 한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는 모습 즉 ‘혼융한 합일’은 곧 ‘태화’이며, ‘충화’다. 또는 양자 관계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 이기지 않는[불상리 불상승] 관계에 있다.”(159)

“그러나 그[태극]의 실제는 음양의 혼융한 합일일 뿐이기 때문에 음양이라 이름 지을 수도 없다. 그리하여 다만 그 궁극성 때문에 더할 것이 없는 것을 서술하여 태극이라 한 것이다…. 음양의 본체는 인온이 서로 얻고 동화하면서 변화하여 천지에 가득차 있으니, 이것이이른바 태화이다. 장자는 것을 위대한 조화라고 했다.”(왕선산, 사문록, 생성의 철학, 154, 재인용)

“음과 양이 적대함이 없는 것을 충이라 한다. 그것의 청탁이 작용을 달리하고 다수의 나뉨이 평등하지 않으나 공을 같이 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는 것을 화라고 한다. 충화가 천지에 유행하고 천지는 그것을 완비하여 서로 화합함으로써 소산물을 널리 풍부하게 한다.”(생성의 철학, 158)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왕선산의 철학을 변역의 철학이며 회통의 철학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음양과 동정, 태극과 무극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마치 촛불2과 같다. 촛불은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고요한 촛불의 형태를 유지한다. 이 힘의 균형 속에 이루어지는 촛불의 모습이 곧 촛불의 형상이며, 그것은 정지한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가운데서 성립하는 균형을 의미한다. 이규성은 이런 왕선산의 도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대립의 통일 개념과 닮았다고 한다.

 

4)

음양의 운동 속에서 운동은 항상 균형만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 운동은 상호 부조화하는 가운데 서로 침범하는 대립 한 가운데 존재한다. 그 균형은 곧 운동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시종도 없으며, 그 사이에 휴지나 틈도 없다. 이런 운동 속에서 사물이 형성되니 그 운동의 균형은 일정한 ‘수’를 이룬다. 사물의 운동 상태는 항상 부조화하고 서로 침범하는 대립 속에 있으므로 그것은 운동의 ‘상’을 나타낸다.

“태극은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에 있으면서 시초도 없고 종말도 없어 틈이 있을 수도 없다. 큰 것에서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도 모두 그것의 상이며 하나에서 만 가지에 이르기까지 수는 모두 그것의 수이다.”(생성의 철학, 157)

음양의 운동이 조화의 균형 상태를 이탈하지 않을 때 중정이지만, 음양의 운동은 항상 대립 속으로 나가니, 이런 운동 상태는 균형으로부터 이탈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중정의 상태로 돌아가는 시기이니 곧 변역의 시기다.

왕선산의 철학에 따르자면, 주역의 64괘는 사물의 균형 상태를 표현하지 않는다. 주역의 64괘는 사물이 중점으로부터 이탈한 상태 즉 변역의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은 다시 중점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탈과 복귀, 변역과 중정이 교체되는 이런 운동을 이규성은 “반대적인 것의 화이부쟁” 또는 “일지일지의 운동”(생성의 철학, 167)으로 표현한다.

 

5)

왕선산의 존재론은 두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하나의 관점에서 운동은 본체에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운동 상태 자체는 본체로부터 이탈한 상태다. 투쟁은 운동의 비본질적 성질이다. 그것은 극복되고 순화될 과정상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161)

이렇게 각 사물이 고유한 본체가 존재하는 세계는 한편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처럼 각자 자기의 이데아를 지켜나가는 세계다. 따라서 이 세계관에서 양명학의 일원적 기의 운동에서나 또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의 창조적 진화에서 보듯 “새로운 요소의 생기와 이것이 과거의 단순성과 결합하여 질적으로 좀더 복잡한 총체성을 생산해 나간다는 전진적 존재론은 나오지 않는다.”(생성의 철학, 161)

“이로써 그는 중국 특유의 유기적 세계관을 방대하게 형성했다. 따라서 그의 세계관은 기계론보다는 역동적이지만, 전진적 친화적 세계관에 비해서는 회귀적인 원환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생성의 철학, 164)

그러나 왕선산의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만물은 이런 균형을 본체로 하지만, 그 자신은 어떤 운동 상태에 있다. 즉 만물은 균형을 중심으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고 다시 중심으로 복귀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의 상호 투쟁과 상호 보완이라는 관계가 나온다.

예를 들어 남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양에 치우친 상태이며 여자는 마찬가지 인간을 중심으로 음에 치우친 상태이니, 이렇게 각자 반대로 치우친 존재이므로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이미 자기 내에서 중심인 인간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그런 가운데 서로 복귀하는 힘을 빌려주고 빌려 받는 상보적 관계를 이룬다. 이 관계가 곧 상반상성의 관계이다. 이렇게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남녀는 사회적으로 중심의 통일을 이룬다. 이 중심의 통일은 남녀 각자가 자기의 중심으로 복귀한 것이며 동시에 남녀가 이루는 통일체이다.

자연에서 사물은 자기가 존재하는 범주나 층위 속에서3 각자 서로 대립하는 음과 양으로서 상호 투쟁하는 동시에 서로 보완한다. 사람에서 남녀가 그러하다면, 지배층과 피지배층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각층에서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늘과 땅, 물과 불, 꽃과 새는 서로 싸우고 서로 돕는다.

사물의 균형과 고유성의 측면에서 사물은 개별적이며 자주성을 지닌다. 그러나 사물이 운동 상태에 있어서 자기 내로 복귀하려 하며 상반상성의 관계에 있다는 측면에서 소통성을 지닌다. 이규성이 왕선산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런 자주성과 소통성이 동시에 가능한 형이상학적 토대이다.

 

6)

그러나 문제는 이 본체의 모습이다. 이규성은 본체에 대한 설명과 관련해서 왕선산의 오류를 지적한다. 왕선산의 음양이 동정하는 운동을 개념적으로 본다면 음과 양은 상호 평등할 뿐이다.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위는 아니며 다만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하나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도 왕선산은 운동 가운데 양과 음의 역할을 분담하며 양이 음에 대해 우위를 가진다고 본다. 양은 강건하며 음은 유순하니, 건의 강건성이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와 변화의 주인이며” 음의 유순성은 리를 지켜나가는 것 즉 “변화를 수용하여 작용을 성취하는 것”(생성의 철학, 172)일 뿐이다.

양과 음의 통일이 사물을 이루지만, 그 가운데 양이 음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은 왕선산 자신의 형이상학으로부터의 이탈이며 결국 전통적 유가 질서로 복귀하려는 것을 정당화할 뿐이다. 이규성은 음양에 대한 이런 해석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문맥에서 강건성은 집단을 응집하는 지배의 주체성이 된다. 그것은 집단을 새로운 미래로 열어젖히는 창조성이 아니라 군거 본능에 지배된 곤충적 주체성이 된다. 집단화된 음의 세력은 강건성의 주체에 의부해야만 자연 질서에 따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