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 ~ 10(X)권[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 ~ 10(X)권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1.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9장~10장)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가 정의상으로, 시간상으로, 존재론적으로 가능태에 앞섬을 기술했다. 9장에서는 가치의 측면에서도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더 우월함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인 활동은 훌륭한 능력보다 더 좋고 고귀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능력을 가진 것은 반대의 능력 또한 함축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은 처음부터 현실태로 있으므로, 나쁜 것이 포함될 수 없다.

10장은 있음과 참 간의 관계를 다룬다.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참과 거짓의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참과 거짓의 문제는 대상들의 결합과 분할에 따른 것이다. 결합된 것을 결합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참을 말하지만, 대상들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따라서 판단은 사물들에 대한 결합과 분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과 거짓은 무언가를 결합하거나 분리할 때 발생하는 복합적 판단이다. 따라서 단순한 것은 참 거짓의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합성되지 않은 실체의 경우에는 모두 가능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있기에 잘못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형이상학> 10(X)권(1장~10장)

 

10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 개념으로부터 있음, 동일, 다름, 차이 등의 개념들을 구체화한다. 하나에는 크게 4가지 뜻이 있는데, 이는 각각 본성적으로 연속적인 것, 전체를 이루는 특성한 형상, 수적으로 분할불가능한 개별자, 그리고 종적으로 분할불가능한 학문적 하나이다. ‘하나이다’는 ‘분할불가능하다’는 것, 무엇보다도 각 유, 주로 양의 첫째 척도임을 뜻한다. 따라서 양을 갖는 것은 모두 하나에 의해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하나는 수인 한에서 수의 원리이다. 모든 것에서 척도와 원리는 하나이자 분할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하나임’은 일종의 척도이며, 따라서 무제한적인 뜻에서나 하나인 한에서 하나는 분할불가능하다.

 

2장에서는 하나와 있음의 관계성을 다룬다. 하나와 같은 보편자는 실체일 수 없으며, 있는 것 자체도 여럿과 떨어져 있는 하나로서 실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하나는 가장 보편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술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과 ‘하나’는 똑같이 여러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는 ‘있는 것’과 ‘하나’가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데, 이 둘은 여러 범주들에 대해 똑같이 적용되고 어떤 범주 안에 있지도 않다. 따라서 ‘하나이다’는 ’어떤 것이다’와 다른 것이 아니다.

 

3~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 개념을 통해 여럿, 동일, 다름, 차이, 모순 개념을 구체화한다. ‘하나’와 ‘여럿’은 분할가능성을 기준으로 하여 대립한다, 분할되어 있거나 분할가능한 것은 다수이며. 분할불가능하거나 분할되지 않는 것은 하나라고 불린다. 동일은 하나에 속하고, 다름과 비동일은 다수에 속한다. 이때 ‘아님’은 ‘동일함’과 대립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서로 동일하거나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와 ‘다름’은 서로 다르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 기준이 되는 동일한 것이 먼저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차이는 동일한 종이나 유 안에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대 또한 일종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는 많고 적음의 정도를 가질 수 있는데, 이 중 가장 큰 차이를 ‘반대’라고 한다. 종적 차이는 반대자들이 극단을 형성하며, 극단에 있는 것들 사이의 간격이 가장 크므로 종차의 간격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상반성이라면 반대로서의 마지막 차이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여럿은 하나에 반대되는 것일 수 없다. 여럿은 하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많은 하나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반면 모순은 가장 강한 결여다. ‘A이다’와 ‘A가 아니다’라는 관계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는 중간이 없다. 모순의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반대자들 사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으므로 모순과 반대는 같지 않다.

 

 

6장에서는 하나와 여럿 사이의 대립관계에 대해 다룬다. 하나와 많음이 무제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하나도 그저 수가 적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많음에 대립하는 것은 수가 적은 것인데, 다수인 둘의 경우에도 수가 적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수가 적은 것이 다수일 수 있다면, 그리고 많음이 하나와 무제한적으로 대립한다면 하나도 다수에 해당한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하나는 무제한적으로 많음과 대립한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많음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데, 첫째는 양이 많은 것이고, 둘째는 수가 많은 것이다. 이 중 분할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수가 많다는 의미만이 사용되는데, 이 경우에만 많음은 하나와 대립한다. 왜냐하면 수가 많음을 표현할 때, 하나는 많음을 이루는 수들에 대한 척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와 많음의 대립은 척도와 척도에 의해 측정되는 것 사이의 대립과 같다.

 

7~9장에서는 반대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반대자들은 그 사이에 중간자가 있는 것이다. 이 중간자들은 필연적으로 반대자들로부터 유래해야 한다. 이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중간자는 중간자를 갖는 것들과 동일한 유에 속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중간자는 변화하는 것이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중간자는 어떤 대립자들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한쪽의 대립자를 출발점으로 해서 이 대립자들의 본성에 따르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중간자들이 동일한 유이고 반대자들 사이에서 성립한다면, 중간자는 필연적으로 반대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반대자들은 합성체가 아닌 원리들인 반면, 중간자들은 한쪽의 반대자에서 다른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양쪽의 반대자들의 일부를 갖는다. 따라서 중간자는 모두 합성적이며 반대자들로 이루어진다.

 

종이 다른 것은 어떤 유 안에서 서로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동일한 것 안에 서로 다른 둘에 대한 술어와 부수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유이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것은 하나의 공통적인 것 안에 있으므로 이 다름은 같은 유에 속한 다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반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자들은 동일한 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종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 둘은 같은 유에 속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반대 중에 종을 나누는 반대와 종을 나누지 않는 반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차이는 반대가 종을 나누는 그 유의 고유한 속성인지 아닌지에 따라 구별된다고 설명한다. 서로 다른 이름이 붙거나 복합체의 경우에도 반드시 이들이 각각 다른 종에 속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정식에서 반대가 있음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개체의 경우에는 최종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위 종으로 나뉘지 않는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멸하는 것과 가멸하는 것이 반대자가 아니며 서로 다른 유에 속함을 밝힌다. 반대자들은 서로 형태가 다르고, 가멸적인 것과 불멸적인 것은 서로 반대자이기 때문에 가멸적인 것과 불멸적인 것은 그 부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멸성과 불멸성은 부수적인 뜻에서 다른 것에 속할 수 없는데, 부수적인 뜻에서 소멸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멸성과 불멸성은 그것이 속하는 대상의 필연적으로 속한다. 또한 가멸적인 것에 있어 가멸성, 불멸적인 것에 있어 불멸성은 그것의 실체이거나 실체 안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둘 모두 어떤 것 안에 필연적으로 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멸적인 것과 불멸하는 것은 대립적인 서로 다른 실체 안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나므로, 둘은 서로 부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이어서)

 

 

2.2.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일반적으로 인자는 어진 사람, 지자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풀이되며 덕목의 종류만 다를 뿐 ‘어떠한 덕목을 갖춘 자’라는 점에서 인자와 지자는 동일하다. 그리고 한국어로 ‘어질다’와 ‘지혜롭다’는 엄밀하게는 다르겠으나 의미상 상당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인자와 지자에 대한 궁금증은 앞선 「옹야」(雍也) 편의 인자와 우물의 예시 구절과 연결된다. 앞선 구절에서 인자는 단순히 맹목적으로 인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상황 파악 능력과 외부에 휘둘리지 않는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파악 능력과 판단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속임에 쉽게 넘어가고, 재아의 말대로 인을 찾기 위해 우물 안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가 답하길 군자(인자)는 ‘남에게 속을 수는 있어도 그로 인해 부덕한 행위를 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자는 덕을 추구하면서도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자는 곧 지자인가? 인자와 지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옹야」(雍也) 편에서는 인자와 지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활발하고 인자는 고요하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공자에게 지자는 물을 좋아하는 이미지인 듯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논어 내에서 물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거의 없으며 물의 특성에 대한 언급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자에 대해서는 몇몇 구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지(知)에 대한 언급은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덕목으로서 지(知)는 단순히 정보나 지식의 보유를 넘어서 그것을 실생활에 적절히 적용하고 활용할 줄 아는 단계까지도 포섭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지자는 단순히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위 구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인지와 지자를 묘사하는 내용은 「리인」(里仁) 편에도 등장한다.

 

공자 초상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인(不仁)한 사람은 곤궁한 데 오래도록 살지 못하며, 안락한 데 오래도록 살지 못할 것이다. 인자(仁者)는 인을 편하게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

 

앞선 「옹야」(雍也) 편의 구절에서 인자는 오래 산다고 언급한다. ‘수(壽)’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인자는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이미지인 듯하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누구보다 인을 잘 실천하기로 알려진 안회(顔回)의 경우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안회가 곤궁한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던 이유가 인에 있다면 인은 수용 혹은 포용에 관한 덕목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지자라면 똑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까? 아마도 인자와 마찬가지로 지자 또한 곤궁에 처했어도 근심하지 않고 삶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결과는 비슷해도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인자가 상황에 녹아드는 방식이라면 지자는 상황에 따른 합리적인 대응법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인자가 인을 편하게 여기는 까닭은 인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식하지 않아도 호흡하고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인자에게 인은 말 그대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면 지자에게 인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이다. 위 구절에서 지자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고 하지만, 인보다도 더 합리적인 대안이 있다면 지자는 인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자와 지자의 차이는 다름 아닌 삶의 모습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인자가 좋아하는 산은 작은 요소들이 수없이 모여 거대한 하나를 이루며 그 모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인자의 삶은 짧은 시간과 작은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꾸준한 실천을 통해 가꾸어지며, 그렇게 해서 쌓인 경험들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쉽게 모습을 바꾸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해서 산이 되지 않으며, 한 그루의 나무가 없다고 해서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지자가 좋아하는 물은 고정되지 않고 붙잡히지 않으며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물은 일정한 길을 터주면 그 길을 따라 흐르고, 결국에는 한곳으로 모인다. 지자의 삶은 얽매임이 적고 변하기 쉽지만, 그만큼 적응에 능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을 것이다. 인자, 지자에 대한 공자의 비유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공자가 두 인간상을 구분한 것은 두 개가 완벽히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자와 군자의 관계이다. 인자와 군자는 모두 유가의 바람직한 인간상이자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인자가 인(仁)의 덕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군자는 여러 덕목을 갖추어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단속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단속할 책임과 역할을 진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군자는 인자에 비해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인자와 군자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점은 군자에게 인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라면 응당 인을 품고 그와 함께 살아야 한다.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지만, 군자는 인자의 면모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인자는 잠재적인 군자일 수도 있겠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둘째, 인자와 지자의 관계이다. 인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인자와 지자는 구분된다. 인자는 인을 삶의 방식(태도)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인자에게 인을 실천하는 것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며 더 큰 이익을 위해서 또는 강요를 받아서도 아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고 상대의 마음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태도가 체화된 사람이 인자이다. 반면 지자에게 인은 유용한 수단이다. 기본적으로 지자는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그것을 채우는 데 능하다. 또한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 잘 적용하며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인을 삶의 구심점으로 살아가는 인자와 달리 지자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며 인은 그 가능성 중 하나이다. 섣부른 결론을 내리자면, 지혜로운 인자와 어진 지자는 있을 수 있지만, 인자이면서 동시에 지자인 사람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와 지자는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인자는 넓은 외길을, 지자는 좁지만 여러 갈래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자와 지자가 대립하거나 대척하는 관계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어에서 논의된 맥락에 따르면 두 인간상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상으로 인자, 지자, 군자에 대한 나름의 소견을 정리해 보았다. 글을 매듭지을 때가 되어서야 논의의 엉성한 부분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인지와 군자의 관계 그리고 인자와 지자의 관계를 분석해 보았는데, 군자에 대응하는 인자와, 지자에 대응하는 인자는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의미를 구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같은 개념이라도 맥락과 의도에 따라 함축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또한 큰 개념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섬세하게 논의되지 못한 내용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유가의 핵심 개념인 인(仁)을 한정된 맥락 속에서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의 활동을 통해 보완해 나가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인과 의에 관한 맹자의 구절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끝)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3-무한 판단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3-무한 판단에 관해

1)

현존(질) 범주에 속하는 판단의 마지막은 무한 판단이다. 무한 판단이 무엇인가에 관해 논의가 분분하다. 철학자나 논리학자마다 무한 판단은 다르게 설정된다.

① 일반적으로는 무한 판단은 부정 판단에서 부정적 술어를 다시 부정하면서 생긴다. 즉 ‘S는 P가 아니다[-P]’에서 술어를 다시 부정하면 무한 판단 ‘S는 (-P)가 아니다’가 나온다. 예를 들자면, “장미는 붉은 것이 아닌 것이 아니다”와 같은 것이다.

이런 판단은 일반적으로 긍정 판단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 -(-P)는 곧 P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 논리학은 무한 판단을 독립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판단 형식에서 배제한다.

2)

② 칸트는 무한 판단을 이와 달리 해석한다. 칸트에서 무한 판단은 긍정적인 형식이지만, 술어가 무규정적인 것일 경우다. 칸트가 들고 있는 예는 ‘영혼은 불사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는 ‘불사’ 즉 ‘죽지 않은 것’인데, 이 세상 가사적인 것을 모두 경험할 수는 없으니, 그 바깥에 있는 불사적인 것이 있는지 또는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이 ‘불사’는 무규정적인 것이다.

칸트는 이 ‘불사’가 고유한 의미를 지닌 술어로 본다. ‘불사’는 죽음에 대립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규정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서 이미 부정을 규정적인(특정한) 부정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외연적으로는 무규정적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제한적이므로 독자적인 판단이 된다는 것이다.

“무릇 가능한 존재들의 전 외연 중에서 가사적인 것이 그 일부요, 불멸적인 것이 나머지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의 명제[영혼은 불사적이다]에 의해서 내가 말한 것은 영혼은 내가 가멸적인 것을 모두 제거한 뒤에 남는 바 무한한 사물 중에 하나라는 의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가능적인 것의 무한한 분야에서 가멸적인 것이 제거되고 공간의 그 나머지 분야 중에 영혼이 들어가는 한, 모든 가능적인 것의 무한한 분야라도 제한을 받는 셈이다. ..즉 논리적 외연에 관한 한 이 무한 판단은 인식 일반의 내용에 관해서는 사실 제한적이다.”(칸트, 순수이성비판, A판, 97, 최재희 역, 박영사, 1985, 109)

이런 경우라면, 형식상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의미는 사실상 부정 판단이다. 그러므로 부정 판단에 집어넣을 수 있다. 즉 ‘불사’라는 술어를 ‘죽지 않는다’로 바꾸면 된다.

더구나 술어가 무규정적일 때 무한 판단이라면, 부정을 칸트처럼 규정적 부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전적인 부정으로 이해할 때는 모든 부정적인 술어의 의미는 무규정적으로 된다. ‘빨갛다’의 부정은 ‘파랗다’도 되고, ‘수3’도 되고, ‘코끼리’도 된다. 그러면 부정 판단 자체가 무한 판단이 된다. 그러므로 칸트와 같은 방식으로 무한 판단을 설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3)

③ 헤겔은 또 다른 무한 판단의 예를 거론한다. ‘정신은 붉다’라거나 ‘장미는 코끼리다’라거나 ‘지성은 책상이다’ 등과 예다. 이 무한 판단은 주어와 술어가 서로 무관한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판단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판단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니, 이런 판단은 부조리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헤겔은 범법도 이런 부조리한 판단에 집어넣는다. 일반적으로 악한(잘못된) 행위는 법을 인정하고 그 법을 여러 이유로(욕망이나 분노 등에 의해) 어기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죄의식이 전제된다.

그러나 범법[Verberechen]은 법을 부정하되, 이 법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에 부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를 들어 양심범이나 확신범의 행위다. 행위는 법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런 행위는 행위 자신의 지반인 법을 부정하므로 여기서 주어인 법과 술어인 행위는 무관한 것이다.

(헤겔이 양심적 범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행위는 한편으로 부조리한 무한 판단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기존의 법의 체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법의 체계를 구성하는 매개가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런 판단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주어와 술어가 서로 연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다. 만일 경험이 없는 어린아이의 경우는 이런 판단을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이런 판단은 허위인 판단이지만, 이런 판단을 부정하면 ‘정신은 붉지 않다’거나 ‘장미는 코끼리가 아니다’라거나 ‘지성은 책상이 아니다’는 진리인 판단이고, 저겅도 세계를 분류하는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거꾸로 ‘정신은 붉다’와 같은 판단도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 ③의 예는 비록 부조리한 것은 아니더라도 거꾸로 만일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차라리 긍정 판단이나 부정 판단 속에 집어넣더라도 문제는 없으니 굳이 무한 판단이라는 독자적 판단을 설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헤겔은 무한 판단을 의미 있는 독자적 판단 형식으로 규정하는데, 이때 헤겔이 무한 판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부정적 무한 판단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간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니며, 노란색도 아니다…등’과 같이 “술어의 전체 영역이 부정되는”(논리학 2부, GW12, 69) 경우다. 이런 경우를 더 단순화하면, 어떤 술어 P의 부정과 그 부정적 술어 -P의 부정이 결합된 형태다. 즉 -P&-(-P)이다.

헤겔은 자주 무한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를 이중 부정으로 설명한다. 연속된 부정과 이중 부정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헤겔이 말하는 무한성으로서 이중 부정은 부정이 연속되는 과정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먼저 부정이 있고 이어서 그 부정의 부정이 일어날 때 이것이 무한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 부정은 사실 부정의 연속 즉 -P&-(-P) 속에서 한 단계로 이해해야 하며, 일반 논리학에서처럼 단순한 이중 부정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무한판단의 경우는 부정 판단의 연속적인 결합체로 다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일반 논리학에서는 이런 판단은 부정 판단의 결합체로 여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판단이 부정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판단을 단순한 부정 판단과 구별하며, 무한 판단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때 연속된 술어의 부정이 단순히 부정적인 형식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에서 부정이 ‘특정한 부정’이며 이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어떤 특수한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일반성 속에서 그런 부정이 일어나고 일반성은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술어의 부정은 단순히 무한 진행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특수성을 넘어서 일반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든 술어의 부정은 그 술어의 토대가 되는 일반성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위의 예에서 ‘빨간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니다..’ 등이라면 그것은 일반적인 색깔이 된다.

본래 긍정 판단에서 술어는 추상적 일반성(이는 곧 감각적 개별성이다)이지만, 그 진리는 특수성이고 그것은 부정 판단에서 정립된다. 부정 판단에서 특수성은 이미 지각적 일반성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내적인 것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정 판단이 무한 판단으로 되면서 이런 일반성이 마침내 정립된다.

이 새로운 일반성은 추상적 일반성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이 일반성으로서 술어는 지금까지 다루었던 주어에 외면적이며 우연적인 술어, 특수성으로서 술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며 따라서 주어에 내재하는 필연적 술어가 된다. 지금까지 현존 범주에서 술어는 감각적 성질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제 무한한 판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은 지각적 일반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4)

부정적 무한 판단에서 일반성이 정립되면, 이는 긍정적 무한 판단이 된다. 예를 들어 ‘이것은 색깔을 지닌 것이다’라고 할 때 이 술어는 빨간색, 노란색 등의 토대가 되는 일반성으로서 색깔이면서 동시에 개별자에 고유한 일반성이다. 즉 주어인 어떤 것은 어느 것이든 색깔을 지니며 이 색깔은 이 어떤 것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개별자에 내재하는 일반성을 ‘자기 반성된 개별성’이라 한다. 앞에서 긍정 판단에서 추상적 일반성이 부정 판단에서 특수성으로 다시 무한 판단에서 ‘자기 반성적 개별성’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무한 판단의 형식은 ‘개별자는 자기 반성적 개별자다’가 되면서

이 개별성은 직접적인 개별성 즉 실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직접적 개별자는 오히려 앞에서 추상적 일반성으로 규정되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별성은 주어에 내재한다는 측면에서 자기 반성적 개별성이며, 규정된 규정성[Bestimmte Bestimmtheit]이며 주어가 그 속에서 연속된다는 측면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구체적 일반성을 의미한다. 헤겔에서 추상적 일반성은 직접적 개별성이며, 자기 반성적 개별성은 곧 구체적 일반성을 의미한다.

“무한 판단 즉 부정의 부정이 지닌 긍정적 형태는 개별성의 자기 자신 내로의 반성이다. 이를 통해 개별성은 비로소 특정한 규정성으로서 정립된다. 개별자는 개별자라는 명제는 무한 판단을 그런 반성에 따라서 표현한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70)

5)

무한 판단에서 술어에서의 변화와 더불어 주어도 변화하게 된다. 주어의 개별자는 술어 속에서 자기를 연속하게 한다. 그러므로 술어는 구체적 일반성이다. 개별적 술어는 주어에 내재하는 개별성이면서 또 마찬가지로 구체적 개별성인 다른 술어와 주어 속에서 융합한다. 그러므로 주어는 이제 여러 구체적 일반성이 융합된 일반자가 된다.

“이를 통해 개별자는 주어와 동일한 그 술어[자기 반성적 개별성]에서 자기를 연속하게 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따라서 또한 일반성도 마찬가지로 더는 직접적 일반성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별된 것을 총괄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긍정적 무한 판단은 이와[‘개별자는 구체적 일반성 즉 개별성이다’]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일반자는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무한 판단에서 개별자는 개별자인 것에 못지않게 자기 자신 내로의 복귀로서 정립된다.”(논리학 2부, GW12, 70)

이상 두 관계를 결합해서 무한 판단을 표현하면 ‘개별자[일반자]는 일반성[개별성]이다’가 된다. 여기서 외연적 표현은 ‘개별자는 일반성이다’. 그 내포적으로는 ‘일반자는 개별성이다.’ 이런 형식만 보면, 다시 질적 긍정 판단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술어의 일반성이 구체적 일반성이고 주어의 개별자는 내재하는 일반성의 융합으로서 개별자이다.

현존 범주 즉 질적 판단 형식에서 운동은 외재하는 술어가 주어에 내재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내재의 관계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이제 술어에서 구체적 일반성이 출현하면서 주어인 개별성이 이 술어와 일치하게 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운동이 양적 범주 즉 반성 판단 형식에서 일어나는 운동이 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2-부정 판단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2-부정 판단에 관해

1)

일상적으로 판단은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진리는 그런 내용이 세계 속의 사태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논리적 진리로서 동일률이나 모순률은 그런 내용이 자기 동일적이거나 자기 모순적인가만을 다룬다.

그러나 헤겔은 판단 형식이 그 구체적 내용과 상관없이 형식 그 자체로 고유한 내용을 갖는다 하며, 이것을 곧 ‘논리적 내용[Gehalt]’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 판단 형식은 외면적으로는 ‘개별자는 일반자다’이고 내포적으로는 ‘일반자는 개별자이다’라는 것인데, 이 형식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특정한 관계 즉 포섭과 내재라는 관계를 포함한다. 이 특정한 관계가 곧 논리적 내용이다.

이처럼 판단 형식이 고유한 논리적 내용을 가지므로 여기서 판단 형식 자체가 논리적 내용과 대립하면서, 이런 모순을 통해 하나의 판단 형식은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런 이행의 끝에 판단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대립이 해소되면서 판단의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헤겔은 철학의 목적은 단순히 판단의 구체적 내용이 진리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그런 진리는 우연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철학의 목적은 이성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데, 이 이성적 진리는 곧 판단의 형식 자체가 그 논리적 내용과 합일에 이른 것을 말한다.

2)

이성적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질적 긍정 판단의 형식은 자기 모순적이다. 술어는 일반성인 동시에 개별성이니, 곧 특수성이다. 이런 특수성은 다른 특수성에 대립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에서 부정성을 지닌 것이다. 앞에서 헤겔은 ‘현존’을 다루면서 이런 특수성 즉 그 자신에서 부정성을 지닌 실재성을 ‘유한성’이라 규정한다.

“긍정 판단은 자기의 진리를 우선 부정 판단에서 갖는다. 개별자는 추상적으로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별자[주어]의 술어는 그 자체 특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술어는 그러한 술어[특수한 것]이거나 또는 주어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고찰된다면 이 술어는 추상적인 일반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개별자는 특수자다.”(논리학 2부, GW12, 65)

유한성은 자기에 대립하는 것을 이미 자기 자신에서[an ihm selbst] 지니고 있으니,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의 대립물로 이행한다. 그러므로 질적 긍정 판단은 질적 부정 판단으로 이행한다. 이런 질적 부정 판단의 판단 형식은 우선 외면적으로는 ‘개별자는 일반성이 아니다’며 내포적으로는 ‘일반자는 개별성이 아니다’다.

이런 부정 판단은 부정적인 형식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그것이 지닌 긍정적인 의미는 오히려 긍정 판단의 형식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다. 즉 여기서[‘이것은 P가 아니다’] 계사의 부정 즉 ‘아니다’를 술어[P]에 붙여서 이해하면 그것에 대립하는 술어 즉 -P가 된다. 즉 부정 판단은 ‘이것은 (-P)이다’가 된다. 만일 (-P)를 Q로 이해하면, 부정 판단은 곧 ‘이것은 Q이다’라는 긍정 판단이 된다.

부정 판단 형식은 이렇게 긍정 판단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부정 판단 형식은 외면적으로 보면, ‘개별자는 (일반자가 아닌 것)이다’며 내포적으로 보면, ‘일반자는 (개별자가 아닌 것)이다’가 된다. 여기서 술어는 ‘(일반자가 아닌 것)인 동시에 (개별자도 아닌 것)’이므로 이것 역시 특수자다. 따라서 질적 부정 판단 형식은 ‘주어(개별자, 일반자)는 특수자다’가 된다.

“여기서 우선 주목될 수 있는 것은 a) 술어의 자리에 특수성이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이 특수성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되었지만, 여기서 이 특수성은 외적 반성을 통해 정립된 것이 아니라 판단에서 제기된 부정성의 관계를 매개로 해서 발생했다. b) 여기서 이 특수성이라는 규정성은 술어의 자리에 자리 잡는다. 직접적 판단 즉 현존 판단에서 주어는 근거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그 규정성은 우선 술어에서 여러 개념 규정성을 거쳐나가는 것처럼 보인다.”(논리학 2부, GW12, 65)

3)

판단의 형식에서 보면, ‘이것은 빨갛다[P]’에서도 술어는 특수성이며 ‘이것은 빨갛지 않다[Q]’에서도 술어는 특수성이다. 이제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긍정 판단 형식과 부정적 판단의 긍정적 표현 형식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그 논리적 내용 즉 의미가 다르다.

단순한 긍정 판단 형식에서 술어는 추상적 일반성이다. 그것은 다른 것과 무관하게 고립적으로 존재하므로 추상적인 일반성이다. 그것의 진짜 모습은 특수성이지만, 아직 그 특수성은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부정 판단의 긍정적 형식에서 술어는 곧 정립된 특수성이다. 왜냐하면, 이 술어는 타자와의 매개를 통해 즉 ‘P가 아닌 것’으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P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Q이다.

긍정 판단 형식에서 부정 판단 형식으로 이행하더라도 주어는 여전히 그대로 남는다. 이런 이행의 운동은 앞에서 말했듯이 술어가 주어에 내재하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긍정 판단 형식에서 추상적 일반성이 부정 판단 형식에서 특수성으로 정립되면서, 이 특수성이 주어에 외적이고 우연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술어가 ‘특수하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 가지는 이 술어가 ① 개별자인 주어에 외적이고 우연적으로 속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그러므로 이 주어는 그 특수한 술어에 대립하는 다른 술어 즉 ② 다른 특수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빨갛지 않은 것[-P]’ 즉 파랗거나 노랗거나 하는 특수한 술어를 가질 수 있다.

“‘개별자는 특수한 것이다’라는 명제는 부정 판단의 긍정적 표현이다. 위의 표현은 긍정 판단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긍정 판단이 그 직접성 때문에 다만 추상적인 것을 자신의 극단[술어]로 갖지만, 특수한 것은 바로 이 긍정 판단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을 통해서 최초로 매개된 규정으로서 생기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65)

4)

이상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부정적 계사 즉 ‘아니다’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위에서 부정 판단 형식을 긍정 판단 형식으로 이행할 때 계사의 부정[‘아니다’]을 개념 규정[주어, 술어]의 부정[-P]으로 전환했는데, 과연 이런 전환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주장한다. 즉 존재 영역의 범주나 본질 영역의 범주와 달리 개념 영역의 범주에서는 개념 규정은 이미 그 자신에서 타자와 관계하고 있으므로, 판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는 곧 이미 개념 규정 속에 있는 관계의 표현, 정립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 규정성과 판단의 관계는 서로 일치하므로 거꾸로 판단에서 부정적 관계가 출현하면, 이는 다시 개념 규정성에서 부정성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부정적 관계 즉 A와 B가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A와 -B가 관계한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극단[술어]의 계기로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본래 처음에는 그렇듯이 관계의 규정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판단은 또한 부정 판단으로서 고찰될 수 있다.”(논리학 2부, GW12, 66)

“판단 규정은 개념 규정이므로 자기 자신에서 일반적인 것이고 자신의 타자 속에 연속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거꾸로 판단의 관계는 극단이 갖는 것과 동일한 규정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바로 이와 같은 극단이 서로 속으로 연속하는 일반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이 구별되는 한, 관계는 또한 그 자신에서 부정성을 갖는다.”(논리학 2부, GW12, 66)

5)

이런 전환을 통해 헤겔은 부정에 관한 해석을 다른 논리학자와 달리한다. 일반적으로 논리학자는 이 “부정 판단의 ‘아님[Nicht]’을 계사에 덧붙여 왔다.” 그러므로 이 부정은 명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직접적인 비존재’를 의미하며 그 결과는 “전적으로 무규정적이니 비일반자이다.” 즉 “무규정적인 범위 전체에 걸쳐서 긍정적 개념의 타자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논리학 2부, GW12, 66)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헤겔은 이것을 ‘전적인 부정’이라 한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빨갛다’의 부정은 ‘이것은 파랗다’도 될 수 있으며, ‘이것은 수 3이다’라거나 ‘이것은 코끼리다’라는 것도 될 수 있다. 즉 ‘이것은 빨갛다’라는 명제의 부정은 그 명제가 아닌 명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은 긍정 판단 형식에서 부정 판단 형식으로 이행에서 “계사의 부정은 그에 못지않게 술어에 덧붙여져야 하며 따라서 술어는 비 일반적인 것으로서 규정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66)고 말한다. <정신현상학>에 따르면 이런 부정은 ‘특정한 부정’이다. 이 특정한 부정이란 ‘그것이 유래한 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헤겔에서 어떤 것은 이미 그것의 대립물, 즉 타자와 관계 속에 있다. 현존의 영역에서 유한성은 이미 자기 자신에서 부정성을 지니며, 본질의 영역에서 긍정은 부정과 관계한다. 이런 관계는 현존이나 본질의 영역에서는 아직 내적이거나 부분적으로만 드러났으나, 이제 개념의 영역에서는 전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어떤 것이 자신의 타자와 관계 속에 있을 때 그 어떤 것에 대한 부정은 동일한 관계 속에 있는 자신의 타자가 된다. 즉 “부정적인 것은 자기에 긍정적인 것이 대립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할 뿐”(논리학 2부, GW12, 67)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빨강의 부정은 파랑이나, 노랑과 같이 색이라는 일반성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부정일 뿐이다.

“여기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해 제삼의 것이 양자의 근거가 되면서, 이를 통해 부정적인 것은 닫힌 영역에 보존되며 이 영역 속에서 하나의 것이 아닌 것은 어떤 특정한 것이다. 그러나 개념과 개념 규정성의 절대적 유동성 속에서 아님은 더욱 직접적으로 긍정적인 것이 되며 부정은 규정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성 속에 받아들여지고 일반성과 동일하게 정립된다. 따라서 비 일반적인 것은 특수한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67)

5)

이와 같이 질적 부정 판단 형식에서 부정되는 것은 다만 특수성이며 여전히 일반성은 보존된다. 그러므로 부정 판단 형식은 그 역시 일반성 아래 있는 어떤 특수성이다. 다만 긍정 판단에서 특수성과 대립하는 특수성일 뿐이다. 이런 부정을 통해 긍정 판단에서 추상적인 일반성이 감추고 있던 특수성이 부정 판단에서 정립된다.

“부정되는 것은 술어에 있는 일반성 일반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반성에 대립하여 내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닌 추상성과 규정성이다.”(논리학 2부, GW12, 67)

부정 판단의 특수성[Q]은 부정적 관계[-P] 매개로 한 특수성이니 이것은 주어인 개별자에 대해 외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낸다. 이런 외적 관계 역시 긍정 판단 형식에서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 부정 판단 형식에서 드러난 것이다. 이 외적인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이제 살펴보기로 하자.

긍정 판단 형식도 이미 특수성이지만, 표면은 아직 추상적 일반성에 머물렀다. 부정 판단 형식에서 특수성이 정립되는데 이때 특수성은 하나의 실재성이면서 이미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부정성을 지닌 것 즉 유한성이 된다.

이 특수성은 유한성이며 자기의 타자인 자기의 부정성으로 이행하지만, 이런 자기 부정성 역시 하나의 특수성이며 유한성이니, 다시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부정 판단 형식에서 예를 들어 ‘빨갛다’는 ‘빨갛지 않은 것’에 대립해서 규정된 빨간 것이므로, 자기의 부정인 ‘빨갛지 않은 것’으로 이행한다. 이 ‘빨갛지 않은 것’은 처음에는 하나의 특수한 색깔인 ‘파랗다’이지만, 이것 역시 유한한 것이므로 자기를 부정하여, 다른 것 예를 들어 ‘노랗다’로 이행한다.

그러므로 ‘빨갛다’의 부정은 무 규정적이다. 그것은 적어도 일반성인 색에 속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란색도 될 수 있고 노란색도 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빨갛다’라는 술어가 잠정적인 것, 이행하는 것, 우연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술어는 주어인 개별자에 대해 외면적인 것임이 폭로된다.

“그러므로 특수성은 주어에 상응하지 않는 술어이다. 그러므로 주어는 그런 술어 속에서 아직 자신의 진리를 갖지 않는다. 개별자[주어]는 다만 개별자이고 개별자의 부정성은 자신의 타자[술어]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이런 타자에 관계하지 않고 오히려 다만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부정성이다.”(논리학 2부, GW12, 68)

이런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은 술어와 무관하게 자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정 판단은 이런 무규정적인 부정이라는 것을 통해서 무한판단으로 이행하게 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1-질적 긍정 판단[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1-질적 긍정 판단

1)

앞에서 헤겔은 판단의 형식을 주어, 술어라는 용어보다는 개별성, 일반성 등 개념 규정성을 통해 규정했다. 헤겔은 이런 판단 형식을 네 개의 범주로 구분하는데, 이런 구분은 전적으로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에서 했던 것과 일치한다.

다만, 그 용어가 특이하다. 칸트가 질의 범주라 했던 것을 그는 현존 범주라 하고, 양의 범주라 한 것은 반성 범주라 한다. 칸트에서 관계 범주는 동일하게 관계 범주이며, 칸트가 양상 범주라 한 것을 헤겔은 개념 범주라 한다.

이런 범주의 이름을 보면, 헤겔이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에서 다루었던 논리적 범주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곧 헤겔이 객관 논리학을 쓸 때, 이미 판단의 네 개 범주에 따라 범주들을 전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으로 보이는데, 칸트가 판단 범주를 구분할 때 양의 범주를 먼저 내세웠던 것에 반해, 헤겔은 질의 범주 즉 현존 범주를 양 즉 반성 범주보다 먼저 내세우고 있다. 칸트에서는 범주 사이의 발전이라는 연관이 없으므로 양의 범주가 먼저 나온 것은 특별할 것은 없다. 그러나 헤겔에서는 범주의 발전이라는 논리적 연관이 중요하므로, 현존 범주가 반성 범주보다 먼저 나온 것은 현존 범주가 발전하여 반성 범주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판단 범주 가운데 처음 등장하는 범주는 현존[Dasein] 범주인데, 이 현존 범주는 일반적으로 질의 범주로 알려진 것이다. 즉 긍정 판단, 부정 판단, 무한 판단이다. 여기서 현존이란 1부 객관 논리학에서 1편의 제목이 ‘현존’임을 생각하면, 이 1편의 내용에 상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긍정 판단은 실재성과 부정 판단은 유한성과 무한 판단은 무한성과 상응한다.

헤겔은 이런 현존 범주를 내재[inhaerieren]의 범주라 한다. 즉 판단 형식은 내재와 포섭이라는 두 가지 관계를 포함하는데, 현존 범주에서 주어의 개별성 즉 어떤 것에 대해 술어의 일반성 즉 규정성이 처음에는 외면적인 것이었으나, 판단의 운동을 통해 내재적으로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의 운동은 인식 경험의 운동과 상응한다. 인식에서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일반성이다. 이런 일반성은 오직 개별적 사물에만 속하고, 그렇기에 그것은 개별 사물에 외면적이다. 여기서 감각이 지각으로 발전하면서, 일반적 질이 더는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내재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이 질은 그런 종류의 사물이라면, 모든 것에 속하는 일반적인 성질이 된다. 이런 내적인 일반적 질을 흔히 속성이라 하는데, 판단의 운동은 이런 질에서 속성으로의 이행을 매개하는 운동이다.

현존 범주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주어에서 개별자는 그대로 유지되는 채, 술어에서 일반성이 질에서 속성으로, 즉 외재적인 일반성이 내재적 일반성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주어의 개별자는 “직접적인 것, 최초의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고, 반면 술어의 일반성은 “비자립성의 형식을 가지며 주어에서 그 토대를 가진다.”(논리학 2부, GW12, 60)

이런 질적 긍정 판단도 또 다른 관계 즉 포섭의 관계를 지니지만, 아직 여기서 포섭 관계 자체에서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3)

이제 최초의 질적 긍정 판단을 살펴보자면, 이 판단 형식은 최초의 판단 형식이므로 판단에 내재하는 통일성은 아직 감추어져 있으니, 주어나 술어는 서로 외면적이므로 각기 추상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따라서 주어는 추상적 개별성이며 이것은 개별적인 지시어 즉 ‘이것’이나 ‘저것’으로 지시되는 것이다. 술어는 추상적인 일반성이다. 이 일반성은 감각적인 질이며,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주어에 내재하는 것,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즉 순수한 감각질이 아닌 일반적 질 즉 실재성이다.

이 긍정 판단의 형식은 ‘개별성은 일반성이다’라고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빨갛다’라거나 ‘저것은 좋은 향기가 난다’라는 것이다. 헤겔은 이 판단 형식을 일반적으로 흔히 ‘A는 B이다’라고 하는 것을 반대한다. A, B는 이름일 뿐이며 개념 규정성이 아니니, 이런 형식은 예를 들어 단칭 판단이나 정언 판단에도 적용할 수 있는 모호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판단의 형식이 그 자체로서 지닌 내용과 이 판단의 형식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면서 얻는 내용을 구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라는 판단에서 세계 속에 있는 구체적인 사태로서 ‘이것의 빨강임’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내용이다.

반면, 이 판단 형식에서 주어와 술어의 독특한 관계 즉 개별성과 일반성의 특정한 관계 즉 포섭과 내재의 특정한 방식이 곧 판단 형식이 그 자체로 지니는 내용이다. 헤겔은 판단 형식이 형식 자체로서 지니는 내용, 즉 판단 형식의 객관적 의미를 논리적 내용[Gehalt]라고 한다. 칸트가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가 지닌 구체적 도식을 제시했을 때, 바로 그런 도식이 헤겔에서 논리적 사태가 된다.

이런 긍정 판단 형식에서 판단의 주어와 술어는 전적으로 외면적, 무차별한 것이지만, 그것의 내적인 통일성이 이미 감추어져 있다. 판단의 운동은 이런 감추어진 통일성이 드러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구체적인 사태에서 일어나는 운동이 아니라 이미 그 판단 형식 자체가 지닌 논리적 내용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판단의 형식과 판단 자체의 내용, 즉 논리적 내용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며 이 모순이 곧 판단 형식의 운동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4)

우선 ‘개별자는 일반적이다’라는 형식이 지닌 구체적 내용을 보자. 외연상으로 보면, 여기서 주어인 개별자는 술어인 일반자 속에 포섭되면서 일반자가 지닌 여러 예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니, 이런 의미에서 개별자는 ‘잠정적인 것[Vergaenglich]’한 것이다.

내포 상의 관계에서 본다면, 개별자는 여러 성질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드러난 것이다. 즉 개별자는 ‘자기를 결단하여[entschliessen]’ 일반자를 통해 ‘자기를 해명[Aufschiessen]’한다. 그 때문에 이 술어 속에 자기를 연속시키고, 그런 술어 속에 자신을 유지한다.

이런 내재의 관계서 본다면, 이 긍정 판단의 형식은 ‘일반자는 개별성이다’라는 형식을 취한다.

주어인 개별자는 이 일반자인 술어가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며, 주어인 개별자는 여러 술어가 자기 내로 반성된 것이므로 여러 성질이 융합된 것[zusammenwachsen]이다. 그러므로 주어는 일반자이다.

술어는 주어에 외면적이다. 즉 그 술어가 주어에 내재하고 필연적으로 속한다는 사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 주어는 그런 성질을 지니지만, 그런 성질은 아직은 우연적이며 개별적인 방식으로 주어에 부착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주어가 지닌 여러 성질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술어는 개별적이다.

5)

질적 긍정 판단을 외연적으로 보면, 술어는 일반성이라는 형식을 지닌다. 그러나 내포적으로 보면, 술어는 개별성에 불과하다. 술어는 형식상 본래 일반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그 내용은 개별적인 것에 불과하다. 즉 이 술어는 주어가 지니기는 하지만, 우연적이며 외면적으로 지닌 것이다.

여기서 질적 긍정 판단의 모순이 출현한다. 어떤 술어가 일반적인 동시에 개별적이라면 그 자체에서 모순적인 것이다. 즉 판단의 형식과 내용 사이에 모순이 출현한 것이다.

술어에서 ‘일반성’인 동시에 ‘개별성’인 것은 개념 규정성에 따르면 ‘특수성’이다. 특수하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다른 것에 대해 대립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특수한 것은 다른 특수한 것과 대립하는 관계 속에 있다.

구체적으로 ‘빨갛다’라든가 ‘향기가 좋다’와 같은 술어는 일반성으로는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특수한 것이 되면, ‘빨갛다’는 ‘파랗다’나 ‘노랗다’에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되며, ‘향기가 좋다’는 ‘향기가 나쁘다’와 대립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특수성으로서 실재성은 자기에 대립하는 것 즉 부정성을 이미 그 자신에서 지니고 있는 것이니 헤겔은 이런 의미에서 실재성은 곧 유한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실재성은 자기에 대립하는 것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이행을 통해 질적 긍정 판단은 판단 자신의 고유한 운동을 통해서 질적 부정 판단으로 이행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0-계사[kopula]와 존재[Sein][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0- 계사[kopula]와 존재[Sein]

1)

앞에서 헤겔이 판단을 주어, 술어의 관계라고 규정하지 않고, 두 가지 개념 계기(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개념 규정성)의 관계로 규정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런 판단을 이루는 개념 규정성은 무엇보다도 총체적이다.

즉 판단을 이루는 개념 계기는 각자 속에 이미 다른 계기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내적으로는 이미 통일되어 있다. 판단이란 이 내적 계기들이 자립적인 것으로 독립해서 다시 서로 관계하는 것이다.

판단의 운동은 한편으로 통일된 개념이 자기를 분리하는 운동이며, 이런 분리 속에 이미 통일이 내재하며 판단의 운동이란 내재하는 주관적 통일이 밖으로 드러나 객관적 통일로 나가는 운동이다.

이런 판단을 이루는 개념 계기들은 판단 속에서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헤겔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 술어라는 용어를 지양하고 개념의 계기로서 규정성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제 판단의 양 측면은 개념 규정성으로 대체된다. 과거 주어나 술어는 어느 것이든 개별성이나 특수성, 일반성을 모두 취할 수 있다. 이런 개념 규정성이 판단에서 계사를 통해 연결된다. 그러므로 판단은 예를 들어 ‘개별성은 일반성이다(질적 긍정 판단)’이라든가 ‘일반성은 특수성이다(선언 판단)’과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헤겔은 판단에서 두 개념 규정성이 계사의 앞과 뒤라는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 두 자리는 계사로 묶어져 있다. 앞과 뒤의 관계는 시간적 선후라기보다 오히려 판단 자체에 내적 관계 즉 논리적 선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주어나 술어 개념을 취소하고 이와 같은 선, 후의 개념 규정성의 계사를 통한 결합으로 설명하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주어, 술어라는 규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주어, 술어의 규정은 판단이 지닌 하나의 관계만을 말할 뿐이며, 앞으로 논의에서 주어, 술어라는 용어는 이런 판단에서 선, 후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2)

헤겔은 이 선, 후의 관계를 개념의 내포와 외연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우선 두 개념의 계기들은 내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즉 판단에서 후의 개념 규정이 전의 개념 규정에 속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개념 규정의 내포적인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런 내포적인 관점에서 선, 후는 전통적인 주어, 술어의 규정과 일치한다. 선 개념 규정은 후 개념 규정이 속하는 기체[hypokeimenon] 즉 밑에 놓여 있는 것이므로 주어이다. 반면, 후 개념 규정은 기체에 속하는 것[Attribute: attríbŭo 맡기다]이므로 술어라 한다. 여기서 속한다는 것은 내포가 속한다는 의미이니, 헤겔은 이 관계를 내재[inhaerieren]의 관계라 한다.

“그러나 이제 주어는 자립적인 것인 한에서 그와 같은 동일성이 의미하는 관계는 술어가 독자적으로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술어는 주어 속에서만 존립한다는 것이다. 즉 술어는 주어에 내재한다. 이에 따라서 술어가 주어로부터 구별되는 한에서 술어는 다만 주어가 개별화된 규정성이며 다만 그 속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주어 자체는 구체적인 것이고 다양한 규정성의 총체성이니 이는 술어가 하나의 규정성을 포함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주어는 일반자이다.”(논리학, GW12, 58)

다른 한편, 판단의 선, 후 개념 규정성은 외연적으로도 관계한다. 이런 외연상의 관계에서 보면, 선 개념 규정성은 후 개념 규정성에 속하는 하나의 원소가 된다. 여기서 후의 개념 규정성은 선 개념 규정성을 외연상 포섭[Subsumieren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술어는 또한 자립적인 일반성이고 주어는 거꾸로 다만 술어의 한 규정이다. 그런한 술어는 주어를 포섭하며 개별성과 특수성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본질과 실체를 일반자에서 갖는다. 술어는 주어의 개념을 표현한다. 개별자와 특수자는 우연적인 규정이며 술어는 절대적 가능성이다.”(논리학, GW12, 58)

이렇게 보면, 판단의 선, 후의 개념 규정성은 이중적이다. 내포적으로 보면, 후 개념 규정성이 선 개념 규정성에 내포된다. 외연적으로 보면, 선 개념 규정성이 후 개념 규정성에 포섭된다. 판단은 단순한 하나의 관계가 아니라 이렇게 이중적인 관계이다. 더구나 이 두 관계 즉 내재와 포섭은 서로 반대되는 관계이다. 하나는 포괄에서 단순성으로 나가며, 다른 하나는 개별에서 일반으로 나간다.

하나의 판단은 선, 후의 개념 규정성이 분리될 뿐만 아니라, 그 관계 역시 이렇게 서로 대립하면서, 이 관계의 변동에 따라서 선, 후 개념의 구별이 통일을 향해 나간다.

3)

판단이 지닌 이 두 가지 관계는 헤겔이 처음 내놓은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유에서 분석과 추상이 대립한다. 분석은 사물이 지닌 내포를 구별해 내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내포가 이미 그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연역적 과정이다. 반면, 추상은 사물을 포괄하는 일반자를을 찾아내는 과정이니, 이는 곧 귀납적인 과정이며 여기서 일반자는 개별자를 자신의 원소로 ‘포섭’한다.

헤겔이 내재와 포섭이라고 말한 관계는 전통적으로 사유가 지닌 두 과정 즉 분석과 추상, 연역과 귀납이라는 두 과정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전통적으로 분석과 추상이라는 사유 과정은 서로 대립하는 사유 과정이기에 따로 떨어져서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에서 내재와 포섭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판단이 지닌 두 가지 관계이다. 판단은 이 두 서로 대립한 관계가 동시에 통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분석과 추상이라는 사유의 두 대립하는 과정이 통일적으로 파악되는 데 매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칸트다. 칸트 자신은 판단이 지닌 이 두 가지 관계를 판단의 두 가지 종류로 구분했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판단은 선험적 연역의 과정이다. 즉 여기서는 범주를 구체적 대상에 적용하는데, 이 과정은 선험적 통각 속에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범주 가운데 하나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구체적 경험과 결합하는 것이니 칸트는 이를 구성 판단이라 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곧 분석적이고 연역적 사유이며 헤겔로 말하자면 곧 내재의 관계다.

반면,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구성 판단과 구별되는 반성 판단을 제시한다. 이 반성 판단은 어떤 개별자에서 그것이 귀속하는 일반적 범주를 찾아내는 것이니, 즉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추상과 귀납의 과정이며 헤겔로 말하자면 곧 포섭의 관계다.

칸트는 두 종류의 판단이 각기 다른 능력에 속하는 것이라 보았다. 구성 판단은 지성의 작용이며 반면, 반성 판단은 상상력의 작용이다. 칸트는 두 가지 판단을 종류로 구별했으며 심지어 서로 다른 능력에 속한 것이라 보았으나, 이미 이 두 가지 판단과 두 가지 능력이 서로 매개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선험적 구성 판단은 도식을 매개로 하는데, 이 도식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거꾸로 반성 판단은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이 상상력이 지성의 작용에 제약되어 이 반성 판단은 일반성을 지니게 된다. 그 때문에 칸트에서 이미 두 가지 판단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칸트 뒤에 헤겔이 양자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4)

이런 대립하는 관계가 하나의 판단 속에 동시에 들어 있으므로, 판단에서 운동이 생겨난다. 하나의 판단은 두 개념 규정성의 동일성이지만, 이 개념 규정성이 자립적인 한 양자가 분리되어 있다.

이런 분리의 결과 주어와 술어 사이에는 내재와 포섭이라는 두 가지 관계가 출현한다. 내재와 포섭은 하나가 다른 것에 내포상이든, 외연상이든 귀속하는 관계이니 부등한 관계이다. 이런 부등성 때문에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그 운동은 내재든 포섭이든 분리된 개념 규정성이 서로 같게 되려는 운동이다.

판단에서 운동은 이 두 관계의 운동은 동시에 일어나기보다 교차적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질적 판단 범주에서는 내재를 전제로 분석의 운동이 전개되며 즉 여기서 술어가 주어에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 즉 본질로 된다. 양적 판단 범주에서는 포섭을 전제로 귀납의 운동이 벌어진다. 여기서 주어는 개별자에서 일반자로 됨으로써 술어에서 제시된 본질에 적합하게 된다.

다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관계 범주에서는 분석 운동이 일어나고 개념 운동에서는 귀납 운동이 일어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가장 처음의 판단형식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던 두 개념 규정성이 최종 판단형식에서는 통일을 이루면서, 이를 통해 판단이라는 운동 자체가 지양되고 추론으로 넘어가게 된다.

“주어와 술어[여기서 헤겔은 선, 후 개념 대신 편의상 주어, 술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의 동일성이 그와 같이 고찰된다면, 한번은 주어에 개념 규정의 하나가 속하며 술어에 다른 개념 규정이 속하지만, 다음에는 마찬가지로 거꾸로가 되었다면 그에 따라서 이 동일성은 항상 다시 겨우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동일성이어서 판단의 두 측면이 지닌 자립적인 상이성 때문에 그들의 정립된 관계는 또한 이 두 가지 측면을 처음에는 상이한 측면으로 갖는다. 그러나 이런 구별됨이 없는 동일성이 본래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를 이룬다.”(논리학, GW12, 58)

5)

판단에서 선, 후의 개념(편의상 주어, 술어라 하자)을 연결하는 것을 계사[Kopula]라고 한다. 이 말은 라틴어 ‘연결시키다[cópŭlo]’는 말에서 나왔는데 영어로 copulation(짝 짓기)과 어원이 같다. 이 계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일반적으로 ‘이다[Sein]’를 통해 표현된다.

하지만, 계사의 개념은 논리적 연결사로 확장할 수 있다. ‘아니다’라는 부정적 연결사, 선언적이거나 가언적 연결사도 계사에 속하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흔히 ‘존재[Sein]’를 ‘존재자[Dasein]’과 구별할 때, 존재는 곧 계사, 즉 논리적 연결사를 의미한다.

계사는 구별하자면, 여러 논리적 연결사로 나누어지지만, 사실 이 논리적 연결사는 두 가지 연결사로 환원될 수 있다. 가언이든 선언이든 환원하면, 결합[⦁]과 부정[-]이라는 두 연결사가 남으며, 이는 곧 ‘이다’와 ‘아니다’이다.

헤겔에서 심지어 이 두 계사 즉 ‘이다’와 ‘아니다’조차 서로 대립하면서도 이미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양자를 통일하는 원천이 곧 선험적 통각[헤겔에서는 곧 ‘개념’이다]인데, 그러므로 ‘이다’가 동일성을 표현하고 ‘아니다’가 구별을 표현한다면, 원래 계사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므로 한편으로 ‘이다’는 이미 자기 속에 ‘아니다’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니다’ 속에 이미 ‘이다’가 포함된 것과 같다.

판단에서 계사는 운동 속에 있다. 판단의 첫 형식에서는 동일성은 구별과 서로 대립한다. 양자는 단적으로 서로 이행할 뿐이다. 그러나 판단의 최종적 형식에 이르면 이제 동일성과 구별이 다시 통일을 이룬다. 즉 여기서는 동일성이 구별과 통일된다.

즉 이 운동을 계사의 측면에서 보면, 계사 즉 존재가 자기를 비존재로 구별하며 다시 비존재로부터 자기로 되돌아오는 운동이다. 즉 헤겔이 개념이 자기를 정립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계사의 운동은 곧 존재의 운동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9-판단이란 무엇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9-판단이란 무엇인가?

1)

논리학 2부 주관 논리학 1편 주관성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이 개념이고 2장이 판단이며 3장이 추론이다. 이제 그 가운데 2장 판단론을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판단론 앞에 상당히 긴 서론을 붙여 판단이 무엇인지 논한 다음, 판단을 4개 범주로 나누어서 전개하고 있다.

판단이란 흔히 주어와 술어가 계사[Kopula]를 통해 결합한 것으로 알려지며 일반 논리학(아리스토텔레스적)에서 사용하는 ‘판단’이라는 용어를 형식 논리학(메가라 학파는 명제 논리학이라 한다)에서는 굳이 사용하지 않고 ‘명제’라는 말로 대신한다.

명제는 더는 분할할 수 없는 원자와 같은 것이니, 나눈 것[teilenen]이라는 의미를 지닌 판단[Urteil]과는 구별되며 일반 논리학에서 판단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주어 술어 관계가 논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어, 술어 구별은 일종의 복합적인 명제로 재구성된다.

일반 논리학의 법칙은 전적으로 형식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일반 논리학에서 추론은 상당히 직관적인 방식에 의존하는데(그 때문에 그 추론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벤 다이어 그램이 사용된다) 형식 논리학에서는 이런 추론이 순수 사유를 통해서 다루어지니 자주 형식 논리학은 일반 논리학의 발전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헤겔 [주관] 논리학은 일반 논리학이나 형식 논리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근거 위에 서 있다. 그 밑바닥에는 ‘판단’에 관한 헤겔의 고유한 해석이 깔려있다. 일반 논리학이나 형식 논리학이 판단을 더 나눌 수 없는 명제로 환원한 것과 달리 헤겔은 판단과 명제를 명백하게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2)

서문에서 판단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에 들어가면서 헤겔이 처음 언급한 것은 곧 판단과 개념의 관계이다. 헤겔은 판단은 ‘개념의 규정’이며 ‘개념의 실재화, 구체화[Realizierung]’, “개념 자체가 규정된 개념을 정립하는 것”, “개념이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하는 것”(논리학, GW12, 53)이라 한다.

개념은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개념 계기는 서로 구별되지만, 이미 다른 나머지 계기를 포함하는 총체성이다. 따라서 이런 구별은 다만 내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고, 개념은 이미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관성 내에 머무르는 개념일 뿐이다.

그런데 판단은 개념에 내적으로 머무르는 계기들이 각기 자립화하면서 서로 외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개념이 실재화하는 것’이라 하지만, 그런 무차별적인 분화에도 여전히 개념의 통일성은 그런 분화된 계기들 속에 내적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외적으로 서로 무차별한 계기들은 내적으로 이미 관계 맺고 있으니 이 관계가 곧 판단이다. 다만 이 내적인 통일성은 판단의 출발점에는 감추어져 있는 것 즉 잠재적인 것이다. 판단이 앞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내적인 통일이 정립되면서, 판단은 더는 분리된 것으로서 판단[Ur-Teilen]에 머무르지 않고 연결된 것[Schliessen]을 의미하는 추론이 된다.

“판단은 일반적으로 말해 총체성을 양 측면으로 한다. 이 총체성은 우선 본질적으로 자립적인 것인데, 따라서 개념의 통일은 다만 최초에는[판단의 출발점에서는] 자립적인 것의 관계이며 이 통일은 아직 이 자립적인 실재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복귀하여 충만된 구체적인 통일이 아니고 오히려 이 실재성은 그런 통일 바깥에 머무르면서 그런 통일 속에서 지양되지 않는 극단으로 존립한다.”(논리학, GW12, 54-55)

헤겔이 판단을 이루는 요소는 개념 규정성이라 할 때, 이 개념 규정성은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 즉 헤겔이 보기에는 차라리 하나의 표상이라고 할 관념이 아니다. 여기서 개념은 앞에서 말한 개념의 계기로서 개념인데 핵심적인 차이는 이 개념 계기가 지닌 근본적인 특성은 곧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개념의 규정성은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며 각자가 구별된 것이지만, 동시에 각자는 이미 내적으로 다른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는 총체성이다. 판단을 이루는 요소가 이처럼 총체성으로서 개념이기에 거꾸로 판단은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라 배후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3)

판단에 관한 헤겔의 이런 설명은 흔히 제시되는 판단에 관한 설명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크다. 흔히 하나의 판단은 흔히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주어’는 직접 존재하는 것을 지시하는 이름, 즉 단순한 표상이며 이 주어가 무엇인가 하는 규정은 주어에 역사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부여된 것이며, 주어의 이름 안에는 아직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술어는 그런 주어의 이름이 감추고 있는 규정 즉 “[주어로서] 존재가 개념이란 의미에서 포함하는 것”(논리학, GW12, 54)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며 그것은 주어의 의미, 규정, 본질 등이다. 이런 술어를 끌어내는 것은 사유가 지닌 추상화하는 작업이며 그 결과 이렇게 끌어낸 술어는 마음에 있는 관념에 해당한다고 한다.

판단이란 결국 서로 외면적으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는지 즉 주어의 존재에 관념으로서 술어가 적합한지를 표현하는 것이며, 양자가 일치하면 진리가 되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허위가 된다.

판단에 관해 흔히 알려진 이런 견해를 헤겔은 이 서문에서 하나씩 부정한다. 우선 ‘주어’와 ‘술어’라는 말의 문제다. 헤겔은 ‘주어’나 ‘술어’라는 말이 판단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주어’, ‘술어’라는 표현은 판단의 한 측면에 불과하고 피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단을 단순히 주어, 술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4)

우선 헤겔은 ‘판단’과 ‘명제’를 구별한다. 헤겔에서 판단이나 명제는 내용상에는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이 73세에 죽었다’라고 할 때, 이 동일한 명제가 판단으로도 또는 명제로도 사용된다. 어느 것이나 형식적으로 보면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고 내용상 동일하지만, 사용되는 맥락이 다를 뿐이다.

즉, 판단이 되려면, 어떤 것에 관해 무엇인가가 주장[behaupten]되어야 한다. 즉 그것에 관해 다른 것이 주장될 수도 있는데 다만 이 무엇인가가 주장된다면, 그것이 판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떤 물음, 회의가 전제된다. 위의 예에서 판단은 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것은 나이 60세 때가 아니냐?’ 할 때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반면 명제는 어떤 것에 관해 무엇인가가 단순히 서술되거나 묘사될 경우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보고하고 알려주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런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삶에 관한 사실을 서술하거나[darstellen] 보고[nachrichten]하거나 묘사할[ausdruecken] 때 사용된다.

그런 주장과 서술의 차이 때문에 동일한 주어, 술어의 형식을 가지지만, 더 세부적으로 보면 판단의 형식과 서술의 형식은 구별된다. 헤겔은 판단의 경우 주어와 술어가 개념 형식에서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즉 ‘개별자’가 ‘일반자’이거나, ‘일반자’가 ‘개별자’이든가다. 그 때문에 주어와 술어 사이에는 상이성, 분리가 들어 있으며 그래서 판단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형식상 동일성의 관계를 취한다. 즉 ‘개별자’는 ‘개별자’이라는 형식이다. 물론 주어와 술어라는 형식으로 서술되는 한, 그 차이를 없앨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가능한 한 양자를 일치시키는 것이 적절한 서술이 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서술하려면, 단순히 그가 73세에 죽었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죽었다는 식으로 개별자의 모든 점을 상세하게 서술해야 한다.

5)

헤겔이 주어, 술어라는 용어를 피하려는 이유에 또 하나가 있다. 판단에는 단순히 주어와 술어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 것도 많다. 헤겔은 칸트가 만든 12개의 논리적 범주 즉 판단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여기에는 주어, 술어라는 형식만을 가지고 보면, 판단형식이라고 볼 수 없는 것도 많다.

우선 질적 범주나 양적 범주에서 속하는 무한 판단을 보자. 즉 질적 무한 판단과 양적인 전칭 판단이다. 단순히 주어, 술어의 형식만을 가지고 보면, 질적 무한 판단은 판단이라 할 수 없고, 양적 무한 판단은 단칭 판단으로 환원된다. 또한, 관계 범주에 속하는 정언 판단도 긍정 판단과 다른 바가 없다.

관계 범주에서 가언 판단이나 선언 판단은 복합적인 판단이어서 단일한 주어, 술어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고, 양상[개념] 범주에서 판단은 주어나 술어의 형식을 가지지만, 여기서 주어나 술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어, 술어와 의미를 달리한다. 주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명제이며, 술어는 어떤 존재를 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칸트가 12개의 판단형식을 받아들인 것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독자적으로 고유한 의미를 지니면서 따라서 그것에 대응하는 고유한 도식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헤겔은 여기서 더 나가서 이런 12개의 판단형식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판단형식을 주어, 술어의 관계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이유로 판단형식을 설명하는 데는 주어, 술어 대신 앞에서 개념론에서 논의했던 개념 규정성을 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어떤 판단형식은 ‘개별성이 일반성이다’ 라거나 ‘일반성은 특수성이다’든가 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8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8)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즐거움에 기초한 증명(580c-583a)

 

[580c-583a]

*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증명ἀπόδειξις을 시작하면서 우선 영혼의 세부분에 기초하여 세 가지 욕구와 즐거움을 구분하고 그에 상응하여 사람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1) 한 나라가 세 부류로 나뉘었듯 각 개인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셋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즐거움ἡδονή도 욕구ἐπιθυμία와 다스림ἀρχή도 세 종류τριχῆ가 있다. 우선 영혼의 세 부분이란 사람이 ‘그것으로 배우는μανθάνει 부분’, ‘그것으로 화내는θυμοῦται 부분’,(580c-d) ‘욕구부분’ἐπιθυμητικὸν으로 나뉜다. 이 욕구 부분은 ‘돈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부분’이라고도 했는데, 그건 그런 욕구들은 돈을 통해서 가장 잘 충족되기 때문이다.(580e)

2) 즐거움과 사랑φιλία의 관점에서 이 부분은 이득κέρδος을 향해 있으므로 ‘이득 사랑하는φιλοκερδής 부분’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기개부분 τὸ θυμοειδὲς은 지배하는 것과(581a) 승리하는 것, 좋은 평판 얻는 것εὐδοκιμεῖν을 ‘언제나 전적으로’ἀεὶ ὅλον 추구하므로ὡρμῆσθαι ‘승리 사랑하는φιλόνεικος 부분’이자 ‘명예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부분’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은 언제나 전적으로 진리가 어떠한지를 아는 것τὸ εἰδέναι으로 향해 있으므로τέταται ‘배움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부분’ 그리고 ‘지혜 사랑하는φιλόσοφος 부분’이라 부른다.

3) 이 부분은 돈과 평판에 대해서는 세 부분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관심 없다.(581b) 영혼의 이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는지ἄρχει에 따라’ 인간ἄνθρωπος의 경우도 세 부류 즉 ‘지혜 사랑하는 자’, ‘승리 사랑하는 자’, ‘이득 사랑하는 자’로 나뉘고 그에 따라 즐거움의 경우도 인간 각각에 하나씩 해당하는 것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581c)

4) 이때 만일 이 세 부류의 인간 각각에게 세 종류의 삶 중 ‘어떤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인지’τίς τούτων τῶν βίων ἥδιστος를 차례로 묻는다면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가장 찬양할 것이다.ἐγκωμιάσεται(581c) 돈벌이꾼은 재물χρῆμα에서 오는 즐거움만을,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명예를 누리는 즐거움만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다른 즐거움은 연기καπνός 같은 것이자 헛소리φλυαρία라고 생각할 것이다.(581d)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가 어떠한지 아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다른 것들은 ‘불가피한 것들’ἀναγκαίας이라고 부를 것이다.

5) 위와 같이 각 종류의 인간이 가지는 즐거움과 삶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ἀμφισβητοῦνται, 이때의 논란은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답고 추한지’τὸ κάλλιον καὶ αἴσχιον도, 누구의 삶이 ‘더 낫고 못한지’τὸ χεῖρον καὶ ἄμεινον가 아니라, 단지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지τὸ ἥδιον καὶ ἀλυπότερον’에 대한 것이다.(581e)

6)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구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훌륭하게 가려내기 위한 판정κριθήσεσθαι 기준κριτήριον으로 경험ἐμπειρίᾳ 과 현명함φρόνησις 그리고 논변λόγος을 제시한다.(582a)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 판단 기준에 기초하여 우선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ἐμπειρότατος 자인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이득을 사랑하는 자의 경우, 배움의 즐거움의 경험자가 될 그 어떤 필연성ἀνάγκη도 없지만οὐ ῥᾴδιον,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는 일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받아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해서 지혜 사랑하는 자가 이득 사랑하는 자를 크게 넘어선다πολὺ διαφέρει고 말한다.(582b) 명예 사랑하는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넘어설 수가 없다. 그리고 ‘있는 것’το ὄν을 관조하는 것이 어떤 즐거움을 갖는지는 지혜 사랑하는 자 외에 어느 누구도 맛볼 수 없다고 말한다.(582c)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이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판정할 사람은 바로 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이 사람의 경험만이 현명함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논변이 훌륭하게 판정하기 위한 도구ὄργανον라면 지혜를 사랑하는 자야말로 그 도구를 갖춘 자라고 말한다.(582d)

7)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즐거움과 삶 자체와 관련한 논란에서(581d-e)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훌륭하게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득을 사랑하는 자나 명예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자 논변을 사랑하는 자이고 그가 칭찬하는 삶이 가장 참될 수밖에ἀληθέστατα εἶναι 없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이득 사랑하는 자는 부와 이득으로,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명예와 승리 그리고 용기ἀνδρείᾳ로 판정할 때나 가장 참된 판정을 내리는 자들이다(582e)

8)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이 지혜로운 사람을 판정관ὁ κριτὴς으로 삼아 영혼의 부분들 중에서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의 즐거움이 이 세 가지 즐거움들 가운데 가장 즐거울 것이며 또한 우리 가운데서 영혼의 이 부분이 다스리는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현명한 자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찬양할 때는 분명 그렇게 할 권위를 지닌 자κύριος로서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전사와 명예 사랑하는 자의 즐거움이 두 번째, 이득 사랑하는 자의 즐거움이 맨 마지막이라고 말한다.(58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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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0c ‘영혼에 세 부분이 있으니까 즐거움 역시 각 부분에 고유한 것 하나씩 세 종류가 있고, 욕구epithymia와 다스림archē도 마찬가지로 종류가 셋일 것 같네.’ : 우리는 영혼 관련 언급할 때 ‘욕구’epithymia하면 영혼의 ‘욕구 부분’epithymētikon을 떠올리고 그 욕구 부분만이 욕구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세 종류의 욕구가 있다고 말한다. 즉 영혼의 이성 부분logistikon과 기개 부분thymoeidēs, 욕구 부분epithymētikon 모두 각기 욕구하는(사랑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영혼이 욕구하는 기능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영혼의 한 부분으로서 ‘욕구 부분’에서 쓰인 ‘욕구’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 ‘돈, 이득 등 물질적 욕구’를 의미하고, 여기서(580c)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욕구’라는 말에서 쓰인 ‘욕구’는 영혼의 욕구 부분은 물론 이성 부분, 기개 부분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영혼의 욕구 일반’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영혼에서 욕구 부분to epithymētikon만이 욕구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을 포함한 영혼 전체가 명예나 돈을 욕구하고 추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주의할 것은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는 세 종류의 욕구가 있다고 해서 한 사람의 영혼에서 이 세 가지 욕구가 따로따로 세 가지로 분리되어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신분열증 환자에게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그 세 가지 욕구들은 한 사람의 영혼 내에서 영혼의 세 부분들의 내적 관계 맺음을 통해 결정된 하나의 욕구로 표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의 세 부분 가운데 어떤 부분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하나로 표출되는 욕구의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성 부분의 지배 내지 다스림에 따라 영혼의 나머지 부분의 욕구들이 관계를 맺으면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이성적인 욕구, 지혜와 배움을 사랑하는 욕구로 표출되고 그 에 따라 정의로운 개인이 된다. 그러나 기개 부분 또는 욕구 부분의 지배 내지 다스림에 따라 영혼의 나머지 부분의 욕구들이 관계를 맺으면, 이성 부분부터 욕구나 기개 부분의 도구가 되어 영혼의 욕구는 오로지 승리와 명예, 돈에만 집착하는 욕구로 표출되고 그에 따라 각각 부정의한 개인들이 된다. 결국 최종적으로 판정의 대상이 될 사람들의 부류는 그 사람의 영혼이 갖는 욕구에 따라 세 부류, 즉 ‘정의로운 자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부정의한 자로서 명예를 사랑하는 자와 이득을 사랑하는 자’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삶은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명예 또는 돈을 사랑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삶은 없다고 생각한다.

* 580d ‘즐거움’hēdonē : 즐거움의 원어는 hēdonē이다. 즐거움은 좋은 경우도 있지만 나쁜 즐거움도 있다.(500c) <국가>에서도 몇 가지 예외, 이를테면 ‘이야기를 나누려는 욕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329d), ‘그의 욕구들은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485d)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이거나 최소한 비도덕적인 함축을 지니고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hēdonē는 ‘즐거움’ 보다는 ‘쾌락’으로 더 많이 번역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hēdonē를 갖고 있고 욕구도 그에 상응하여 세 종류가 있으며(580d) 영혼의 욕구 부분만이 아니라 기개 부분, 배우는 부분 역시 각기 승리하는 것, 진리를 아는 것 등 뭔가 나름의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향해있다(581b)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영혼의 부분들 가운데 욕구 부분만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들 모두 모종의 욕구를 갖고 있으며 hēdonē 또한 그것들 모두의 욕구 대상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영혼의 각 ‘부분’이 자기가 속한 ‘부분’의 성격에 따라 자신만의 즐거움(쾌락)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이와 같은 견해는 <필레보스>뿐만 아니라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3~5장에서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분석과도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을 마치 금욕주의의 선구인 양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곳에서도 hēdonē는 행복한 삶과 관련하여 주요한 관심사이자 주제로 제시되어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에게도 정서적으로 즐거운 감정은 대중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행복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요건의 하나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하는 좋은 즐거움에는 즐거움의 지속성과 도덕성을 담보하는 현명함이 포함되어 있다.

* 581b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 : 영혼의 세 부분은 이성 부분logistikon, 기개 부분, 욕구 부분으로 나뉜다. 이곳에서 기개 부분과 욕구 부분은 이름 그대로 언급되는데 이성 부분만 ‘그것으로 우리가 배우는 부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 581b ‘승리 사랑하는philoneikos 부분’ : philoneikos를 철자 그대로 ‘싸움neikē을 사랑하는’의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사실 당대 승리nikē에서 유래한 말들의 경우, 승리를 사랑하는 자는 투쟁 또한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i와 ei를 혼용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philoneikos는 앞뒤 문맥상 philonikos 즉 ‘승리를 사랑하는’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예 philonikos로 표기되어 있는 사본(MSS)도 있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 581e ‘불가피한 것들’anankaias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는 즐거움, 성적 즐거움 등은 생물학적 자기 보전을 위한 행위들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것들이지 따로 그가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즐거움은 아니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 580e ‘돈 사랑하는philochrēmatos 부분이라고 했는데’ : 소크라테스는 앞서 욕구 부분을 돈을 사랑하는 부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553c)

* 580e ‘먹을 것과 마실 것, 성적인 것 그리고 이것들을 뒤따르는 그 밖의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욕구들은 돈을 통해서 가장 잘 충족되기 때문’ : 욕구들은 앞서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에서 살폈듯이 필수적인 최소한의 물질적 생물학적 생존 욕구는 물론 필수적이지 않은 사치 욕구들과 온갖 종류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불법적 욕구 일체를 포함한다. 욕구 부분을 돈을 사랑하는 부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은 그러한 욕구들 모두 돈이라는 교환가치를 통해 모두 충족되기 때문이다. 금전이 인간 욕망의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화신으로 자리 잡은 역사는 이토록 뿌리가 깊다.

* 581e 이때의 논란 : 앞서 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란을 말한다. 그 논란은 단지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진정 논란이 되어야 할 사안은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다운지, 수치스러운지 그리고 훌륭한지 못난지에 관한 것이다.

* 582b ‘누가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empeirotatos 자인가’ : 이것은 언뜻 즐거운 경험의 많고 적음이 즐거움의 우위를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누가 보더라도 ‘누구의 삶이 더 즐겁고 고통 없는 삶일까?’의 문제와 ‘누가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 자인가?’ 문제는 논점상 별개의 문제이다. 비록 남보다 경험의 종류는 적더라도 특정 경험의 깊이와 느끼는 정도에서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즐거운 상태에서 가장 즐거운 삶을 산다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 취지는 이러하다. 우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모든 즐거움’은 즐거움 일반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 한 ‘배우는 즐거움’, ‘승리하는 즐거움’, ‘돈 버는 즐거움’을 말한다. 그 기준에서 보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3가지 즐거움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고, 그에 비해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머지 두 가지. 돈 버는 사람은 마지막 한 가지를 경험한 사람이다. ‘모든 즐거움에서 가장 경험이 많다는 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경험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단순히 경험이 많다가 아니라 첫 번째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독보적인 즐거움이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 판정자격을 갖추고 있음은 경험의 종류에서도 많지만 그의 즐거운 경험에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그 만의 고유한 특성이 독보적으로 수반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 582c ‘있는 것’to on : ‘있는 것을 관조 또는 구경하는 것’tēs tou ontos theas이란 표현은 이미 제7권(517b, 525a, 532c)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그 말은 동굴 바깥으로 나가 궁극적으로 좋음의 형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글라우콘의 이 말은 두 번째 증명이 필연적으로 세 번째 증명 즉 형이상학적 방식에 근거한 증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 582e ‘지혜 사랑하는 자이자 논변 사랑하는 자가 칭찬하는 것이 가장 참될 수밖에 없습니다.’ : 즐거움과 가장 참됨을 연결하는 이 구절 역시 이 두 번째 증명이 세 번째 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가 판정관인 한 그의 칭찬은 곧 그의 판정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원어는 ‘ho philosophos’이다. 그 말은 보통 ‘철학자’로 옮기지만 이곳에서는 지혜, 욕구, 이득 등 욕구의 대상을 각각 드러내기 위해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말로 옮기고 있다. 

* 583a ‘이 판정관은’ : 행복 관련 비교 판정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대화자들이 판정 능력을 갖춘 척하자고 말하고(577b) 시작되지만, 이곳의 판정관은 문맥상 앞 문장의 ‘현명한 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판정의 권위자인 동시에 자신이 가장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임을 자임하고 있다. 그럼에도 형식상 자기가 자기를 판정하는 격인지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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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증명은 인간 영혼에 기초한 증명 즉 일종의 심리학적 근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그 요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개인의 영혼의 세 부분에 상응하여 세 종류의 즐거움, 욕구, 다스림이 있다.

2) 즐거움과 사랑(욕구)의 관점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은 배움을, 기개 부분은 승리와 명예를, 욕구 부분은 돈과 이득을 사랑(욕구)하고 그것의 획득을 즐거워한다.

3) 다스림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영혼의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느냐에 따라 인간도 지혜를 사랑하는 자, 승리하는 자, 이득을 사랑하는 자로 나뉜다.

4) 이 들 중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인지를 차례로 묻는다면 저마다 자신의 삶,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5) 이때 이들의 논란은 누가 더 아름답고 추한지가 아니라 누가 더 즐겁고 고통 없는 자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일 뿐이다.

6) 그렇다면 이들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경험과 현명함, 논변을 제시하고 그 기준에 기초하여 우선 경험을 기준으로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즐거움을 가장 많이 경험한 자’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꼽는다. 특히 ‘있는 것’을 관조하는 즐거움은 그만이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게다가 현명함을 기준으로도, 판정 도구인 논변을 기준으로도 지혜로운 사람만이 그 도구를 갖추고 있다.

7)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만이 판정관의 자격을 갖고 있다.

8)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사람인 판정관의 입을 빌려 결론적으로 세 인간들 중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라 판정한다.

* 첫 번째 증명이나 이번 두 번째 증명 그리고 세 번째 증명 모두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를 판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두 번째 증명은 행복을 즐거움에 연관 지어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지를 판정하려 한다. 일단 판정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영혼의 부분들이 욕구하는 즐거움에 상응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 즉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승리를 즐거워하는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 돈 벌기를 즐거워하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판정 과정은 이 중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가장 즐겁다는 것을 밝히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지혜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고 나머지 두 사람 부정의한 사람임을 말해 준다. 증명을 마친 후 ‘이제 이렇게 이 두 판에서 정의로운 자가 부정의한 자를 두 번 거푸 이겼다’(583b)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그것을 분명하게 뒷받침한다.

* 사실 증명 과정에서도 우리는 그들이 부정의한 자들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곳에서 그들을 포함한 세 부류의 사람들은 영혼의 세 부분 중 ‘어느 부분이 다스리는지archēi에 따라’(581c) 구분된 사람들이다. 다만 이들 중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분업의 측면에서 분명 이상 국가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그들 자신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이성의 다스림을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즉 이곳에서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성의 지배에서 ‘언제나 전적으로’aei holon(581b)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부정의한 것이다. 이상 국가에서 전사계층이 가장 명예를 사랑하고 가장 용맹하면서도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생산자 계층이 가장 이득을 사랑하고 가장 생산적이면서 정의로울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처럼 자신의 기개 부분이나 욕구 부분이 아니라 영혼의 이성 부분의 다스림에 따르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나라에서 그들은 ‘절제’sōphrosynē의 덕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가 가장 극대화되고 다른 계층들과도 최선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그 절제의 덕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나라에 걸맞은 자신의 분업적 역할에 따라 각기 정의로우면서 명예와 승리를 사랑하는 가장 용맹한 사람, 정의로우면서 돈과 물질을 사랑하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정의한 사람들은 쉽게 말하자면 각각 타락한 정치체제의 하나로서 명예정과 과두정을 닮은 명예정적인 사람, 과두정적인 사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영혼의 ‘욕구 부분’이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불법적인 욕구로 세분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타락된 형태로 ‘전적인 자유’exousia를 사랑하는 민주정적인 사람, 폭력적 지배를 사랑하는 참주정적인 사람 즉 최악의 비교 대상으로서 참주까지를 두루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두 번째 증명은 비교 판정의 기본 목표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비교하는 것임에도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 즉 지혜로운 사람의 우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른 사람들의 저열성은 경험의 가짓수가 적다는 것 외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에 따라 두 번째 증명은 판정 기준 상 지혜로운 사람의 경험만이 갖는 적합성 내지 그들의 즐거움이 수반하고 있는 독보적 탁월함들(경험, 현명함, 논변)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즉 누구의 삶이 더 즐거운가를 결정하는 관건은 누가 더 많이 그러한 탁월함들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살펴보니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탁월함 내지 능력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증명은 궁극적인 비교 대상으로서 참주까지 살펴볼 필요 없이 곧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최종 우승자로 결론 내리고 있다. 그 만큼 정의로운 사람은 즐거움과 관련해서도 그 자체로 우월한 사람이다. 그래서 두 번째 증명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아예 판정관으로 내세워 최종적인 우승자로 결정하는 형식을 취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것은 내용상 판정의 대상인 자가 스스로에게 우승을 부여하는 격으로 누가 보더라도 공정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한 플라톤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가질 법한 그러한 의구심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philosophos 즉 철학자란 곧 자기 객관화에 가장 능한 자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따로 설명할 사안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트럼프 같은 현대판 참주들은 물론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 자기를 객관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새삼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철학에 대한 플라톤의 정의를 토대로 그의 논증 과정 전체를 들여다본다면 정합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그 자체로 완전한 자기객관화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토대이다. 그것을 담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극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이 논증은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이념적 이상과 권위kyrios를 재확인하는 것이자 그 객관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583a) 그 만큼 플라톤에게 철학과 지성은 현실의 삶을 넘어서기 위한, 정의로운 삶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토대이자 근본 조건이다. 그러나 철학의 지적 객관성이 곧 철학자의 지적 객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철학과 철학자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그 어느 주제보다 철학과 철학자의 정의 그리고 철학 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국가>의 백미라고 부르는 제5권에서 제7권 전체에 걸쳐 매우 주도면밀한 문답을 전개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이 <국가>의 주제를 한마디로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 제9권 말미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나라와 개인의 정의와 행복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 국가가 그러한 교육이 다가가야 할 하나의 본이자 푯대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에 따라 플라톤은 말년에 <법률>을 통해 현실에서 그 이상을 최선으로 구현하기 위한 현실적 실제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현실에서 철학자란 자신이 도달한 신념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 자체 참된 것이라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신념을 중시하고 실천하되 그것에 이르기까지 견지해왔던 열정과 긴장 그대로 늘 그것의 진리성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다듬고 보완 정련해가는 사람이다.

* 위와 같은 측면에서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만이 현명함을 동반한다.’(582d)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핵심적 덕목이 다름 아닌 ‘현명함’임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명함의 원어는 phronēsis이다. phronēsis는 보통 실천적 문제 해결 국면에서 요구되는 총체적 인식과 지혜(practical wisdom), 분별(prudence) 내지 슬기로움을 의미한다. <국가>에서도 phronēsis는 이곳을 포함해서 대체로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559b, 571d, 586a, 591b, 621b, 621c) 특히 그 말은 실천과 관련하여 ‘욕구를 지배하는 것’(431d)으로 또는 ‘완력과 신체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432a, 461a, 518e), ‘습관과 훈련에 의해 얻어지는 신체의 덕과 달리 신적인 덕으로’(518e) 언급되기도 한다. (참고로 정암학당 역본은 ‘현명함’으로, 박종현 역본은 ‘분별(슬기)’로 옮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플라톤은 <국가>의 모든 논의를 마무리하는 제10권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신들과도 친구 되고자 한다면 현명함을 동반한 정의를 모든 방법을 다해 실천하는 것’(621c,d)이란 말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현명함’은 어떤 개인의 좋음이나 이익을 위한 현명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좋음과 이익과 관련하여 실천적 정치사회적 현실 영역에서 적용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정의로운 앎이자 지혜를 의미한다. 이곳에서도 현명함의 덕(518e)은 ‘있는 것’으로서 현실의 삶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을 규정하는 독보적이고도 핵심적인 능력으로 제시되고 있다.

* 이 두 번째 증명에서 언급되고 있는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영혼의 명예 부분, 욕구 부분의 다스림에 지배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리며 산다고 믿고 있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이 갖는 특성 즉 현명함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고결한 정신적 즐거움과 관련한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정서 상태로만 기준으로 할 경우 누구의 삶이 가장 즐거운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즐거움과 고통은 사람에 따라 주관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참된 즐거움은 현명함의 덕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일상적 즐거움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성적 탐닉이나 마약 같은 것이 가져다주는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은 반복을 거듭할수록 결국 고통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선행을 베풀거나 진리를 배울 때 느끼는 즐거움은 좋음과 현명함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어서 늘 마음을 채우고 오래남아 누구든 칭송하고 좋아한다. 이것은 즐거움과 관련한 판정에서 사람에 따라 갈리거나 다툼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모종의 객관적인 기준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러한 참된 실재를 관조할 수 있고 그것에 근원하는 현명함과 논변을 토대로 참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다.

* 그런데 이곳 <국가>의 논의대로 거창하게 이상적인 나라와 개인의 영혼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일상의 현실 차원에서도 앞서 말한 현명함의 덕을 남달리 특별하게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 자신의 내적 갈등은 물론 다른 사람간의 갈등과 관련해서도 화해와 포용의 능력에서 남다르게 뛰어난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부처님의 열반의 즐거움까지는 아닐지라도 –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감각적 즐거움은 물론 명예욕 인정 욕구에도 시달리며 살아온 경험도 있겠지만 – 자신의 현명함을 통해 비록 몸은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과 좋음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만의 경험을 갖고 있다. 아무리 많고도 즐거운 경험들일지라도 현명함을 동반하지 않았을 경우 그들에게 그것들은 그저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양적인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처럼 오늘날 일상의 현실에서도 현명함의 덕을 갖춘 사람들은 참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가장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현명함이 결여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즐거움은 얼마 가지 않아 결핍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바뀌거나 권태를 불러일으킨다.

*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즐거움을 안겨주는 현명함까지는 갖추고 있지 않아도 일상의 선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 이른바 소확행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능력 내지 탁월함은 앞서 언급한 현명한 사람들처럼 사회적 좋음이나 모두의 즐거움까지 아우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의 현실을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현명함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소확행이 개인주의 사회가 갖는 구조적 불행의 조건까지 뒤바꿔 놓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플라톤의 관심사는 그 구조적 불행을 전복할 수 있는 근본 원리와 조건들을 찾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여전히 현실적 삶과 관련한 문제들과 그 총체적 연관들을 근본에서 따져 묻고 그에 대한 총체적인 해결 방식 내지 원리를 탐색하는 형이상학이다.

*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관조하는 즐거움을 포함하여 현명함을 수반하는 경험과 논변을 독보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곧바로 그에게 즐거운 삶과 관련한 판정관의 자격을 주고 그가 내린 판정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두 번째 증명을 완성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즐거움이 다른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왜 참됨과 현명함을 비롯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특성들이 보다 크고 많은 즐거움의 근원이 되는 것인지 이제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세 번 째 증명을 통해 그 즐거움의 진리성 즉 즐거움들이 과연 얼마나 참된 실재에 기초해 있는가를 묻는 궁극의 탐구 방식 즉 존재론적 방식을 끌어와 철학자와 참주 중 누가 더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지를 판정해 내려 한다. 이곳에서 이미 소크라테스가 시종일관 시사하고 있듯이(581e) 결국 플라톤에게 가장 즐거운 삶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즐거움의 양상이 아니라 참된 형이상학적 실재로서 그 즐거움이 갖는 ‘좋음과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판가름된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3) 세 번째 증명 : 즐거움의 존재론적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8a)

철학의 거울- 형이상학의 근거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철학의 거울-형이상학의 근거에 관해

1)

형이상학이 무엇을 다루는가에 관해 논란이 많다. 누구는 신을 다루는 것이라 하고 누구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 원리를 다루는 것이라 하며 또 누구는 실재나 본질, 실체와 같은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arche]을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이 무엇이든, 그것은 형이상학의 근거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형이상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사유의 나래를 펼쳐나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형이상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단순한 공상과 매한가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형이상학이 형이상학이 되려면, 적어도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형이상학이란 말이 어떤 ‘형’을 넘어서는[meta] 것이라는 말인데, 이때 사유를 통해 그 형을 넘어서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형이 전제되는 한에서 넘어서는 것이니, 바로 그 형이 형이상학의 근거가 될 것이다.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넘어가는 대상인 자연학[physics]이다. 그 때문에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오해가 지배했다. 하지만, 이 ‘physis’가 꼭 자연과학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형이상학’이란 말에서는 ‘형’은 구체적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니, 구체적 형태라면 어느 것이나 형이상학의 근거로 가능하다.

여기서 근거라는 말이 모호하다. 근거는 형이상학은 사유의 전제가 된다는 말이지 그 근거가 형이상학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근거는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지, 형이상학을 규제하고 진리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넘어섬’을 사유에서는 연역적인 사유와 구별되는 귀추법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연역적 사유가 근거에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귀추법은 설명되는 현상에서 거꾸로 설명하는 근거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2)

철학에서 형이상학의 근거로 가장 널리 이용된 것은 수학이다. 피타고라스학파가 음을 수적 비율로 환원한 이래 수학적 원리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의 근거로 격상되었다.

‘원’은 완전성을 의미하고 ‘삼각형’은 안정성을 의미한다는 일종의 상상적 사유는 제쳐 놓자. 중요한 것은 수의 원리이다. 일자와 공허,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것이 수의 원리나 기하학의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세계의 근본 원리로 고양되면서, 모든 세계가 이런 기하학적 공간과 같다거나 수적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형이상학이 등장한다.

그러나 수의 원리는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원리가 된다 하더라도 이 일반적 형식은 세계의 가장 외면적인 것에 해당할 수는 있으니, 세계 속의 모든 존재가 외면적으로는 이 수의 원리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이 지닌 가장 외면적인 측면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 아닐까? 이런 외면적인 것을 곧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인간의 가장 외면적인 측면은 단순한 공간적 존재나 물질적 질량이다. 공간이나 질량은 수적인 원리에 따라 전개된다. 이 공간이나 물질적 질량 없이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지만, 이것은 가장 외면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이상학의 근거는 자주 자연과학 특히 물리화학이라고 알려진다. 사실 ‘형이상학’이라는 말 자체가 ‘자연학을 뒤에 또는 넘어서’라는 뜻이니, 자연에 관해 알려진 법칙, 그것도 가장 일반적인 법칙은 자주 형이상학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뉴턴의 법칙은 근대 유물론의 근거가 되었으며, 오늘날 양자 역학이나 파동설은 최근 논의되는 많은 신유물론적 형이상학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자연과학의 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의 세계나 인간의 역사도 하나의 세계이니, 자연과학의 영역 즉 물리화학의 세계만을 형이상학의 근거로 보면, 생물의 세계나 인간 정신의 세계는 그로부터 설명되지 못하거나, 이를 자연과학의 세계로 환원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3)

형이상학의 또 한 가지 중요한 근거는 우리의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존재’니 ‘운동’이니, ‘원인’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자주 사용되는 언어는 원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원초적인 의미야말로 형이상학의 세계를 드러내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의 작업이 자주 형이상학의 모범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가장 잘 알려진 ‘현존재’라는 개념을 보자. 즉 인간은 현존재[Dasein]인데, 이는 ‘Da’에 ‘Sein’이 현현한 것이며, 인간은 존재가 자기를 현현한 존재자이니, 거꾸로 인간의 현존재를 이해하면 마침내 존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원초적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작업이 아닐까 한다. 추상적 개념이 형성될 때는 구체적 감각적 개념을 비유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 의미가 생생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것이 항상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것은 여러 의미가 뒤섞인 것으로 볼 수 있으니, 한편으로 이 감각적 구체적 개념을 매개로 해서 추상적 개념이 지닌 일상적 의미에서 감추어진 다른 의미로 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이런 도약 자체가 비유에 기초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주 철학강의에서 어려운 말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면, 처음에는 아주 쉽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뒤에는 도대체 더 모르겠다고 한다. 구체적 예가 명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또, 철학 용어를 우리말화하려는 시도도 우리말 속에 우리 민족의 원초적 사유가 들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말이 반드시 그런 원초적 사유라고 볼 이유도 없다.

게다가 이런 경우 소위 말장난이 벌어진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가 그렇다. 이를 하이데거처럼 풀이하는 것은 일상적 의미와는 다르다. 일상적 의미에서 현존재는 영어로 ‘There is’라는 의미이니, 어떤 공간에 존재하는 것, 즉 거의 모든 사물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헤겔은 현존을 바로 이런 존재자 즉 실재성, 경험적 대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4)

형이상학은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을 찾아 나선다. 지금까지는 주로 밖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면, 이제 자기 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칸트는 이런 형이상학의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칸트는 우리가 직관을 통해 경험을 받아들이고 이런 관념을 사유를 통해 추상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즉 우리는 세계를 논리적 범주를 통해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이다.

논리적 범주는 판단의 형식이며, 칸트는 이런 범주에 12가지가 있다고 했다. 세계는 이런 12가지의 범주를 통해 인식된다. 여기서 판단을 보는 중대한 관점의 변화가 출현했다. 그 이전 형식(일반) 논리학에서 판단(또는 명제)은 사유를 구성하는 단위일 뿐이다. 판단은 그 자체로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 판단에 대응하는 것은 사태이며, 판단이 독립적인 불가분적 원자를 이루듯 이 사태 역시 하나의 원자로 세계를 구성한다.

형식 논리학은 판단을 단위로 해서 이 판단이 사유의 공간에 움직이는 법칙을 찾는다. 그 법칙은 곧 동일성이고 모순율이니, 사유 속에서 이런 법칙에 따른 어떤 운동을 통해서도 판단의 내용, 그것의 진위는 변함이 없다. 그 결과 모든 사유는 동어반복이며, 사유의 공간은 마치 유크리트 기하학에서의 공간처럼 추상적이고 단순한 공간이다.

이 사유 공간은 사유의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은 사유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사유의 핵심은 판단 작용에 있는 형식 논리학은 사유의 내적 구조 즉 판단의 형식에 관해서는 파고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칸트가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고 하면서 판단을 그 자체로 사유의 단위로 보는 관점이 무너졌다. 칸트로부터 판단의 내적 구조, 그 형식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세계의 근본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판단은 가장 단순하게 보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판단의 형식에 따라서 여러 유형, 방식이 존재한다. 판단의 형식 즉 논리적 범주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세계를 어떤 경우에는 이런 방식의 범주로, 다른 경우에는 다른 방식의 범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세계가 지닌 다양한 모습이 이런 판단의 유형과 방식에 따라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는 여러 영역 즉 물리학적 세계나 생물학적 세계, 인간 사회의 세계 등은 모두 이런 범주의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

칸트에서 세계의 모습은 다양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 칸트에서 형이상학은 논리적 범주를 근거로 한다. 칸트의 선험철학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형이상학을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그러나 칸트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논리적 범주를 통해 구성된 세계를 현상계로 규정한다. 칸트가 말한 12개 범주로 구성된 세계는 수학이나 자연과학과는 무관하다.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칸트의 현상 세계를 근거 지을 수 없다.

칸트는 자기의 형이상학적 세계가 자연과학이나 수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형이상학이 자연과학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뉴턴의 법칙을 끌어낸 것이 아니며 수학의 법칙을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논리적 범주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넘어 찾아 들어간 형이상학의 세계다. 칸트는 형이상학 앞에서 그것이 일반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것은 현상계이며 과학의 세계이고, 그 너머 또 다른 어디에 형이상학이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가 이 또 다른 어디에 있는 형이상학을 찾아 나선 것은 자기 자신의 논리적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논리적 범주 넘어서 직접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범주는 12개로 제한되는데, 왜 하필이면 12개인지를 확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적 범주라는 개념을 일반 논리학에서 이를 끌어냈지만, 일반 논리학은 경험적인 방식으로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을 4개로 제한했다. 칸트는 질, 양에서 무한 판단 형식을 추가하고 기존에 복합판단으로 여겨지는 관계 판단이나 양상 판단을 판단의 기본 형식으로 끌어들여 12개 판단 형식을 만들기는 했으나, 그 근거는 확립하지 못하고, 이를 기존 논리학에서 그러하듯이 경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 결과 그 자신 12개의 판단 형식이 자의적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12개의 판단 형식 넘어 세계를 가정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물 자체의 세계에 부딪혔으며, 이런 물 자체의 세계는 판단 형식 넘어 세계라고 보았고 이 물 자체의 세계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형이상학이라 했다. 물 자체는 알 수 없는 세계이므로 그 개념상 그런 세계는 알 수 없으니, 형이상학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의 논리상 불가피했다.

6)

칸트의 선험철학은 판단의 형식, 주어와 술어의 다양한 결합 방식이 형이상학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판단 형식, 논리적 범주로부터 형이상학을 끌어낸 가능성은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야말로 처음으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형이상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주어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실체’라 했으며, 술어로 사용되는 것을 ‘속성’이라 했다. 이런 규정은 주어나 술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판단의 형식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어는 이런 판단 형식에서 주어이며 술어는 이런 판단 형식에서 술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 방식 자체를 더는 문제 삼지는 않았다. 실체와 속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는 데 그쳤다. 반면 칸트는 논리적 범주를 통해 주어와 술어의 관계 즉 판단의 다양한 형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칸트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단서에 따라서 나가는 형이상학의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이런 전환이 가지는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이해한 것은 헤겔이었다. 하지만, 칸트가 부딪힌 물 자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논리적 범주가 자의적인 주관의 산물이 아니라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객관적인 범주라는 사실을 확립해야 했다.

헤겔이 했던 일은 칸트에 비하면 오히려 단순하다. 즉 칸트의 12개 범주를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즉 칸트에서 12개 범주는 마치 좌표축처럼 분포되어 있어서 경험이 이 가운데 어느 한 축에 있는 범주에 집어넣은 것과 달리, 헤겔은 12개의 범주를 논리적으로 하나가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물론, 하나의 범주가 그다음 범주로 이행하는 데는 경험에서 부딪히는 모순이 매개 된다. 이 모순은 칸트가 범주를 물 자체에 적용하면 생겨난다고 말한 모순인데, 헤겔은 각각의 범주마다 이런 모순에 부딪힌다고 보았다. 즉 기존의 범주를 통해 경험을 구성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런 범주로서 규정할 수 없는 경험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험이다. 이 ‘이율배반’이나 ‘자가당착’은 새로운 경험 즉 기존 범주의 한계선상에서 출현한 경험에 기존의 범주를 적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모순적 경험에 부딪히면, 사유는 자기 내로 반성해서 기존의 범주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근원적인 범주로 이행한다. 이 새로운 범주에서는 기존의 범주에서 모순적인 경험이었던 것도 이 새로운 범주의 체계 내에 들어와서 규정된다. 모순은 해소되지만, 이 새로운 범주에 다시 또 한계선상의 경험이 출현하게 되면서 논리적 범주에서 계속된 전진이 일어나게 된다.

헤겔은 이 길을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서술한 바 있으나, 상세한 것은 생략하고, 헤겔에서는 이 의식 경험의 길이 곧 형이상학의 근거라는 것만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런 의식 경험의 길은 칸트의 선험철학 즉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가 경험을 구성한다는 원리를 전제로 하니, 헤겔은 칸트가 제공한 단서에 따라서 칸트가 완성하지 못했던 길을 앞으로 달려나갔다.

헤겔은 <논리학> 판단론에서 구체적으로 이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분석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존의 형식 논리학은 명제를 하나의 사태에 대응하는 고립된 원자로 보고 판단의 내부 형식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헤겔은 판단론에서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이를 분석하려 했고, 이런 분석이 그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는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판단 형식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 것이니 생략하자. 인간의 사유의 독특함은 명제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침팬지도 언어를 사용하지만, 주어 술어로 분화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원숭이에게 명제는 형식 논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사태에 대응하는 것이다. 반면 인간의 사유를 기초로 하는 언어는 주어 술어로 굴절[articulate]되어 있으니, 이것이 인간 사유의 근본적 특징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문제는 이런 독특한 구조를 가진 세계가 주관의 사유 법칙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거꾸로 세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근거가 되는가이다. 바로 이 형이상학의 근거를 제시한 것이 칸트의 철학이니, 칸트의 철학적 혁명은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 하겠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8-개념에서 판단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8-개념에서 판단으로

1)

일반적으로 개별성은 지성이 개념화하기 이전에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직관적 개별자다. 이런 구체적 개별자는 자기 속에 다양한 속성을 품고 있는 무구별된 즉 무규정적인 전체이다. 이런 개별자는 눈에 보이지만, 사실은 모호한 존재다.

지성은 한편으로 이런 구체적 개별자에서 공통성을 추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지성은 개별자의 다양한 속성 가운데 하나를 분리해 이를 정립한다. 그 결과 내포적으로 단순하고 외연적으로 일반적인 개념이 만들어진다.

이런 일반적 개념이 다시 통합되면서 개별자가 나온다. 이 개별자는 여러 규정성이 통일을 이루면서 다른 한편으로 추상적인 일반성은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이렇게 해서 내포적으로는 복잡하고 외연적으로는 개별적인 개별성이 다시 돌아온다.

이 개별성은 처음에 개념화 이전의 개별성과 구별된다. 처음의 개별성은 무규정적인 일반성이면서 직관에 주어지는 개별자이었다. 다시 돌아온 개별성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개별자이지만, 규정성을 통일적으로 포함하는 체계화된 개별자이다. 이는 내부가 투명하게 보이는 명확한 존재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파악된 개별자이다.

2)

일반 논리학에서는 직관적 개별자와 일반성으로서 개념(‘규정된 개념’이라 한다)만이 다루어진다. 헤겔 논리학에서도 존재의 영역에서 개별자는 출발점이었을 뿐, 논리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본질의 영역은 아직 일반적 개념에 머무르면서 개별성의 출현은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마침내 개념의 영역에서 개별자는 구체적인 개별자로서 출현한다.

개념의 영역에서 개념의 개별성은 일반성과 특수성을 거쳐 나온다. 개념의 계기로서 일반성은 단순성 즉 자기 관계일 뿐, 그 ‘부정성’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특수성의 계기에서 정립된다. 그러나 특수성은 특정한 것일 뿐, 아직 그것의 자기 부정은 아니다. 즉 이 ‘부정성의 자기 관계’는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마침내 개별성의 계기에 이르러 부정성의 자기 관계, 즉 부정적인 것의 부정이 정립된다.

그러나 일반성이나 특수성은 이미 자체 내에서 총체성을 지닌다. 일반성도 이미 일반성과 규정성의 통일이니 개별성이며 특수성 역시 규정성과 일반성의 통일이므로 개별성이다. 다만 일반성이나 특수성에서 개별성은 아직 정립되지 않는다.

거꾸로 개별성은 규정성의 자기 관계이니, ‘자기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미 일반성이며 그것이 ‘부정성’의 자기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특수성이다. 개별성은 양자의 통일이 마침내 정립된 것이면서 이 매개의 측면은 사라지고 하나의 직접적인 개별자로 등장한다.

“일반성과 특수성은 한편으로는 개별성이 생성하는 계기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미 제시되었듯이 이 양자는 각자 자기 자신에서 총체적인 개념이고 따라서 개별성으로 이행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 개별성 속에서 이 양자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 정립될 뿐이다.”(주관 논리학, GW12, 49)

3)

앞에서 개별성에서 특정한 개념을 거쳐, 개념의 개별성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설명했다. 헤겔은 이 운동을 통해 개별성이 정립되면서 동시에 개념은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동시에 개념은 자신을 상실하여 개념의 실재성 즉 판단으로 이행한다.

“개별성은 개념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개념을 상실하는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개념의 일반성은 내포적으로는 단순한 속성이지만, 외연적으로는 하나의 일반자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개념의 일반성 즉 유[Gattung]는 두 가지 대립하는 방향에서 분화된다. 내포적인 차원에서 분화는 두 가지 서로 대립하는 속성으로 분화한다.

한편으로 속성 P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립하는 규정성[-P]이다. 전자는 그 개념의 종[Art]에 속하는 속성이며 후자는 그 개념의 유[Art]에 속하는 속성이다. 이런 대립하는 특수성에 따라서 개념적 실체는 두 대립하는 현존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속성 P를 실현한 현존이며 다른 하나의 현존은 속성 -P를 실현한 현존이다.

이것은 마치 척도 관계가 두 대립하는 속성(산성과 알칼리성)을 지니면서, 이 속성에 따라 두 대립하는 척도(산과 알칼리)로 분화되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어 인간의 개념을 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 할 때 인간에게는 종에 속하는 이성성과 유에 속하는 동물성이라는 대립하는 속성이 존재한다.

이때 인간은 두 대립하는 현존으로 분화되는데, 하나의 인간은 이성적인 인간이며 다른 하나는 비이성적 동물적 인간이다. 전자는 개념의 종차가 실현된 현존이며 후자는 무규정적인 유적 개념이 그대로 현존하는 것이다.

개념의 특수성이 이처럼 이중적으로 분화되므로 이 특수성에서 개별성으로 나가는 반성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하나는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반발하면서 규정성이 독자적으로 자립적인 규정성으로 된다. 이는 곧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질적인 규정성이다. 헤겔은 이를 ‘질적인 일자’[독립적 성질]로 규정한다.

속성이 두 대립하는 속성이므로, 각자 타자로부터 반발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규정성이 나오지만, 이 두 규정성은 이런 상호 반발을 통해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규정성은 서로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규정성이다.

“그러므로 개별자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인 한에서 부정적인 것이 자기와 직접 동일한 것이다. 개별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는 개별자는 추상이지만, 이 추상은 개념을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관념적 계기에 따라서 직접적 존재로 규정하는 추상이다. 그러므로 개별자는 질적인 일자이거나 이것[Dieses]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첫 번째로 이것[Dieses]는 이런 질에 따르자면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반발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여러 가지 다른 일자가 정립된다. 두 번째로 이것[Dieses]은 이제 이 전제된 타자에 대립하여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그런 한 개별자는 배타적인 것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

4)

다른 하나의 반성은 규정성이 자기에 대립하는 규정성과 통일하면서 구체적인 개별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부정성의 자기 관계이면서 일반적 개념이 실현된 구체적인 일자가 되니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더라도 질적인 개별성이 아니라, 이제 지시하는 대상으로서 반성적 개별자가 된다.

이런 통일은 하나의 개별자만이 아니라 다양한 동일한 개별자를 낳으니, 여러 가지 다른 일자가 출현한다.

“이것[Dieses]은 자기 내로 반성된 일자인 한에서는 독자적이고 반발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는 이런 반성 속에서 반발은 추상과 결합하여 반성하는 매개를 이룬다. 이 반성하는 매개는 이 개별적인 것에 존재하는 데 그 결과 이것[Dieses]은 정립된 직접성 즉 외적인 것에 의해 지시된 직접성이 된다. 이것[Dieses]은 존재하며 직접적이다. 그러나 이것[Dieses]은 지시되는 한에서만 이것[Dieses]이다.(주관 논리학, GW12, 51-52)

여기서 ‘지시한다는 것[monstrieren]’의 의미를 헤겔은 반성적으로 규정한다. 즉 규정성이 통일되면서 더는 분석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므로, 이는 지시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이다.

“지시란 반성하는 운동인데, 자기를 자기 내로 끌어모아서 직접성을 정립하지만, 이를 다만 자기에 외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운동이다.”(주관 논리학, GW12, 52)

특수성은 반성을 통해 이것[Dieses]이 되는데, 이때 나오는 이것[Dieses]은 이상에서 설명한 대로 두 가지 종류다. 하나는 ‘질적인 이것[Dieses]’이며 다른 하나는 ‘반성된 이것[Dieses]’ ‘지시되는 이것[Dieses]’이다. 전자는 질적인 규정성이며 후자는 개별적인 대상이다.

두 가지 개별자는 모두 특수성의 반성을 통해 동시에 나오는 것이므로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한다. 이 두 이것[Dieses], 질적인 이것[Dieses]과 대상으로서 이것[Dieses]이 관계하면서 판단이 이루어진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지는데, 처음 출발점에서 주어는 지시되는 대상으로서 개별자이고 술어는 질적인 규정성이다.

“나아가서 이 구별된 것은[술어와 주어, 질적인 이것[Dieses]과 반성적 이것[Dieses]] 단순히 서로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자들이 아니다. 그런 다수성이라면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자기를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하는 이것[Dieses]은 자신을 외적으로 구별된 것으로 정립하지 않으며 개념적으로 구별된 것으로서 정립한다. 그러므로 개별자][주어]는 일반자[술어]를 자기에서 배제하지만, 이 일반자는 개별성 자신의 한 계기이므로 일반자는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이 개별성에 관계한다.” (주관 논리학, GW12,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