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8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7)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576b-580c]

*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증명ἀπόδειξις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최악κάκιστον의 인간이란 한마디로 꿈ὄναρ에서나 가능한 상태를 깨어 있을 때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가장 참주정적인 성향을 타고난 자가 독재자μόναρχος가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576b) 대중πολύς에게는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그러한 자가 가장 사악한πονηρότατος 자이자 가장 비참한ἀθλιώτατος 자이다. 그리고 나라와 개인이 닮았다ὁμοιότητος는 점에서 덕ἀρετῇ과 행복εὐδαιμονίᾳ의 문제도 나라와 개인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576c)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와 왕정체제의βασιλευομένης 나라를 덕과 행복과 관련하여 비교 판정κρίνειν할 때는 그 주변의 몇몇 사람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576d), 나라 곳곳을 살펴보고서ἰδόντες 의견δόξα을 내놓아야 한다. 글라우콘은 이 말에 동의한 다음, 참주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비참하고, 왕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576e)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비교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사유διανοίᾳ를 통해 인간의 성품ἦθος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고διιδεῖν, 참주와 한 지붕 아래 살면서συνῳκηκότος 공적 사적 모든 행동이나 모습을(577a) 모두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판정 능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인 척 해보자’προσποιησώμεθα고 제안한다.(577b)

* 이렇게 비교 판정을 위한 준비를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첫 번째 증명을 시작한다. 그 내용을 정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와 사람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을 상기하면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나라가 아니라 노예 상태δοῦλος에 있는 나라이다. 그곳에서도 주인δεσπότης들과 자유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전체로 보면 그 나라는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수치스럽고ἄτιμος 비참하게 노예 상태로 있는 나라이다.(577c) 사람이 나라와 닮았다면 나라와 동일한 구조τάξις가 필연적으로 사람에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나라를 닮은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은 숱한 예속δουλεία과 자유인답지 못함ἀνελευθερί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가장 훌륭한 부분들은 노예 노릇을 하는 반면, 작은 부분이자 가장 사악하고 광기 가득한 부분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 있는 나라는 그 어떤 나라나 보다도 원하는 바ἃ βούλεται를 못 하는 나라이므로 영혼 전체ὅλη ψυχῆς에서 보면 영혼 또한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그런 영혼은 폭력적인 욕망의 침οἶστρος에 늘 쫓기며 혼란ταραχή과 후회μεταμέλεια로 가득 차 있다.

2)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부유하긴πλούσιος커녕 가난할πενομένη 수밖에 없어(577e)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πενιχρός 채워지지 않은ἄπληστος 상태로 있고 또 두려움φόβος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만큼 비탄ὀδυρμός과 한탄στεναγμός, 통곡θρῆνος과 고통ἀλγηδών이 더 많이 발견되는 곳은 없다. 이에 따라 사람의 경우에도, 참주정적인 인간보다 더 많이 욕망ἐπιθυμία과 욕정ἔρως으로 미쳐버린 경우 또한 없다.(578a) 그러므로 바로 이 나라가 가장 비참한 나라로 판정된다.(578b) 그리고 특히 최고로 비참한ἀθλιώτατον 자는 이들 사인(私人)ἰδιώτη으로서 참주정적인 인간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συμφορά을 만나 실제 참주가 된 자이다.

3) 하지만 가장 중대한 문제, 즉 좋은 삶과 나쁜 삶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통해τῷ τοιούτῳ λόγῳ 보다 더 충실히 고찰해야 한다.(578c) 이를 위해 우선 나라에서 노예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πλούσιος 개개인ἑνὸς ἑκάστου τῶν ἰδιωτῶν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 사람들은 많은 자를τὸ πολλῶν 다스린다ἄρχειν는 점에서 참주들과 닮았다. 그런데 이들은 나라 전체πᾶσα ἡ πόλις가 개개인을 돕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고 가노οἰκέτης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578d) 그러나 만일 어느 신이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한 사람을 그의 재산οὐσία, 노예, 가족과 함께 어느 외딴곳에다 갖다 놓았다고 해보자. 이 경우 그는 나라전체가 주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으므로 자신과 가족이 노예들에 의해 살해되지 않을까ἀπόλοιντο 두려움φόβος에 떨게 될 것이다.(578e) 물론 그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몇몇의 비위를 맞추고θωπεύειν 많은 것을 약속해주고 자유인으로 놓아주면서 그들의 아첨꾼κόλαξ이 되지만, 자기 주변에 다른 자가 주인 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를 극형ἔσχατος τιμωρία에 처하려는 사람들이 이웃으로 살고 있을 경우 그는 온통 적πολέμιος들에 둘러싸여 감시당하면서φρουρούμενος(579a) 한층 더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참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자들은 온갖 종류의 숱한 두려움과 욕정으로 가득 차 감옥δεσμωτήριον에 갇혀 있는 삶을 보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탐심λίχνος으로 가득하지만, 여느 자유인들처럼 구경이나 하고 싶어 하는 그 어떤 것도 못한 채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579b) 다른 사람을 시기φθόνος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어떤 불운에 의해 실제 참주가 된 자는 이처럼 나쁜 것들을 더 많이 거둬들이면서 마치 어떤 자가 몸σῶμα이 병들어서(579c) 자기 자신도 제어하지 못한 채 그런 몸으로 일생을 다른 몸뚱이들σώματα과 경쟁하고ἀγωνιζόμενος 싸우면서μαχόμενος 고달프게χαλεπώς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자야 말로 완전히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이다.(579d)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요컨대 진짜 참주는 가장 큰 아첨θωπεία과 굴종δουλεία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δοῦλος이고 가장 못난πονηροτάτων 자들의 아첨꾼이며(579d). 또한 영혼 전체의 측면에서 그런 자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자이며,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결핍된ἐπιδεής 자이자 가난한 자이다. 결국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와 닮은 상태에 있는 참주는 평생 두려움으로 차 있고 경련σφαδᾳσμός과 고통ὀδύνη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579e) 이런 사람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자신이 잡은 권력 ἀρχὴ 때문에 이전보다 더 시기심 많고φθονερός 믿을 수 없고ἄπιστος 부정의하고ἄδικος 친구도 없고ἄφιλος 불경스럽고ἀνόσιος 온갖 나쁜 것κακία들을 받아들이고 키워내는 자이자 이 모든 것들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운한δυστυχής 자로 만드는 자이다.(580a)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첫 번째 증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논의를 가무단의 공연에 비유하여 최종 판정관이 공연 후 최종 우승작과 순위를 발표하는 것처럼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관을 맡긴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의 순서 즉 가무단χορός의 공연에 등장했던 순서대로 순위를 판정하고(580b)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가장 정의로운δικαιότατος 자가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ς 자이며 그 사람은 가장 왕정적인βασιλικώτατος 사람이자 자신을 왕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 반대로 가장 나쁘고 가장 부정의한 자가 가장 비참한 자로서 이 사람은 가장 참주정적인 사람이자 자신과 나라를 최대한 참주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5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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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6e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 : 소크라테스가 전체를 살펴보고 비교 판정과 관련한 의견을 내놓자고 했음에도 글라우콘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을 미리부터 자명한 사실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비교 판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았다면’(576a) 지금까지의 논의로만으로도 대화자들끼리는 이미 논의의 결론이 충분히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중들 사이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대중에겐 다양한 의견이 있다’(576c)는 소크라테스의 첨언은 앞으로 제시될 증명들이 기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펼쳐온 논의들을 마무리하고 재확인하는 결론적 논의이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가진 대중들을 최대한 설득하기 위한 목적도 크게 고려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주의하고 있지 않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제2권 이후에도 이 대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그는 제5권에서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450b) 플라톤의 설정대로라면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를 의식하고 있다.

* 577b ‘우리가 바로 그것을 판정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자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인 척 해보길 바라나?’ :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증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 증명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 증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자격에 대해 언급한다. 요컨대 사유에 기초한 이론적 판단력도 중요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겪은 경험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자신과 대화자들이 그러한 경험 관련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바로 자신들을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인 양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은 일단 형식상 논리적 비약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처사이다. 어떤 척을 하자고 말하는 것도 소크라테스에게 어색한 일이다. 아마도 이글의 저자 플라톤 자신이 아테네와 시켈리아에서 직접 참주정의 참혹상을 경험한, 그것도 혹독하게 경험한 당사자임을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랬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 언급은 판정에 있어 사유를 통한 판단력뿐만 아니라 경험이 갖는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 577c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 타락하기 이전 정치체제에서 통치 및 수호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 즉 나라의 구조 상 통치자계층과 수호자 계층을 말한다.

* 577d ‘동일한 구조’ : 여기서 ‘구조’의 그리스어 원어는 taksis이다. taksis는 원래 공격 또는 방어에 가장 효율적인 전투 대형을 갖춘 상태 즉 질서 잡힌 ‘대오’의 뜻을 갖고 있는 군사 용어이다. 그래서 taksis는 문맥에 따라 이곳처럼 ‘구조’(577d, 618b)라는 뜻 외에 ‘대오’(468a, 471d, 522d,e, 525b), ‘질서’(561d,587a), ‘순서’(620d), ‘줄’(617d)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여기서 구조는 내용적으로 나라의 세 계층과 개인 영혼의 세 부분 간의 질서를 말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구조가 잘 잡혀있다는 것은 각 계층과 부분의 위계와 역할이 본성에 맞게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구 부분은 본성상 이기적 물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 타자의 이익을 배려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이성 부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플라톤에게 지배 또는 다스림archein은 타자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구성원 모두의 조화와 공존을 도모하는 일이다. 구조가 왜곡되면 다스림도 왜곡되어 조화와 공존은 무너진다.

* 577d ‘참주정체제의 영혼’ :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 참주정적 인간의 극치가 참주라는 점에서 극명하게는 참주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 578a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 채워지지 않는 상태로 있을 것이네’ : <고르기아스> 416e, 493a-494e, 521a, <파이드로스> 279c, <편지들> 355c 참고.

* 578e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 : 기원전 5세기 고대 아테네에서 한 가구 당 노예의 수는 보통은 3명에서 많으면 12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50명 이상의 노예는 매우 부유한 소수 부자들의 경우일 것이다. 물론 대부호로 알려진 당대 니키아스는 1,000명에 달하는 노예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579a ‘신이 또 다른 여러 사람을 그 사람 둘레에 이웃으로 살게 한다고 해보세.’ : 여기서 ‘참주 둘레에 사는 이웃’은 앞서 자유인과는 다른 여러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참주가 갖고 있는 패권욕, 또는 그 참주의 전제 정치를 못 마땅하게 여겨 그를 제거하기를 원하는 주변 국가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 참주가 노예들 가운데 풀어준 자유인과 달리 민주정 치하에서 전적인 자유에 길들여져 있어 여전히 간섭을 싫어하거나 참주의 착취에 시달리며 참주정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자유인들 또는 과두주의자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579b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 : 고대 아테네를 비롯해 당대 그리스 폴리스 일반의 관습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다 드러난 공간에서 공공연히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법률> 781c)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이 <국가>에서 여성을 통치계급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남성들과 함께 공동 식사하도록 한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플라톤은 오직 철학만이 그러한 관습적 편견과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 579d ‘다른 몸뚱이들sōmata과 경쟁하고 싸우며 살아가도록 강제’ : 다른 몸뚱이들은 다른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가리킨다. 지배 욕구에 찌든 참주정적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평생토록 서로 간 권력 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580a ‘우리가 전에 말한 것들까지도’ : 이미 앞에서도 참주정적 인간들이 축복 받은 필연인 양 평생 대중들의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567a), 그리고 그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한 채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576a)이 언급된 바 있다.

* 580b ‘마치 최종 판정관kritēs이 결과를 발표하듯 자네도 내게 그렇게 해주게.’ : 당대 아테네인들은 가무단의 공연을 심사할 때 아래와 같이 매우 엄격하고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 심사위원을 선정했다. 먼저 축제가 열리기 전 평의원에서 후원자들과 함께 심사위원 후보들을 선발한 후 이들 명단을 부족별로 하나씩 총 10개의 항아리에 담았다가 경연 당일 각 항아리에서 한 명씩 총 10명의 심사위원을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다시 추첨된 5명의 최종판정관이 앞서 심사위원들이 적은 투표함을 열어 우승 가무단과 순위를 확정한 후 전령을 통해 발표했는데 이곳 최종 판정관은 위와 같은 가무단 공연 심사과정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최종판정을 자신이 아니라 글라우콘에게 맡기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플라톤의 대화는 대화자들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들과 문답을 나누며 비판적인 설득을 통해 함께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을 맡기고 그 내용을 받아 직접 다시 발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함께 동일한 진실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 580b ‘마치 가무단choros이 등장하듯 그들이 등장했던 순서라고 판정합니다.’ : 가무단 공연 심사의 경우 우승 가무단을 발표할 때 동시에 순위도 함께 발표하듯이 이곳에서도 그에 맞추어 최종 판정대상으로서 우승자인 철인왕정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된 타락한 정치체제들이 순서대로 함께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논의의 목표대로 철인왕정의 최종적인 비교 판정 대상은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이다.

* 580c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 : 아데이만토스가 제2권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이 비교 판정과 관련한 답변을 처음으로 요청할 때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을 환기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신들과 사람들에게 알려지든 그렇지 않든, 정의는 좋은 것이고 부정의는 나쁜 것인지도 보여 달라’(367e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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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소크라테스는 애초 계획한 대로 타락한 정치체제들과 그것을 닮은 사람들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과연 누가 행복한가를 비교 판정하는 논의(576b-592b 제9권 끝)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비교 판정을 위해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증명들은 아래와 같다.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2)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 부분에 기초한 증명(580c-583a)

3) 세 번째 증명 : 참된 즐거움과 거짓 즐거움의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8a)

*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증명에서 각각 사용하는 논거들은 크게 정치적 논거, 심리학적 논거, 그리고 형이상학적 논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첫 번째 증명은 정치체제로서 나라와 개인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하고 있고, 두 번째 증명은 영혼의 3부분 즉 이성적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 각각에 상응하는 즐거움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 번째 증명은 플라톤의 존재에 관한 이론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 내지 방법은 사실 대화편 전체를 통해서도 사용된 것들이다. 그 내용을 크게 구분해보자면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정치적 방법이, 제8권에서 제9권까지는 심리학적 방법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형이상학적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지금 그러한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 종합적인 관점에서 최종적인 마무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 증명을 토대로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야 말로 이익’(588b-592b 제9권 끝)임도 덧붙인다. 이로써 정의와 행복이라는 <국가>의 기본 논제를 촉발시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형식에서나 내용에서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번 강해는 우선 첫 번째 증명 부분을 다룬다.

*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정치제제로서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 즉 나라와 개인의 동형적 구조(577d)에 입각하여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살피는 방식으로 참주정 체제의 비참성을 드러낸 후 그것을 근거로 그것을 닮은 참주의 비참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행복이건 비참함이건 나라와 개인의 동질적 구조가 빚어내는 양태들은 각기 그것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를 ‘전체holos’(576d)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을 토대로 이와 같은 3계층 또는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 내지 질서를 개별차원이 아니라 ‘전체’ 차원에서 파악하는 방식으로(576d)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미 철학자의 행복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와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뒷받침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참주의 비참성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고 위계나 질서를 갖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구조가 역전된 것이다.

* 이와 같은 방식에 따라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 증명을 통해 종국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참주의 비참한 삶의 양상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579d-580a)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불운한 삶을 보낸다.

* 그리고 위와 같은 참주의 비참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논거의 내용들이 상호 중첩되어 있어 분명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대한 그것들을 차례대로 정리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577c-577e)

참주정이 극단적인 자유로부터 생겨난 최대의 예속이자 가장 야만스러운 노예 상태의 정치 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564a) 그리고 참주가 누군가의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산다는 것도 이미 밝혀졌다.(576a) 나라와 개인의 유사성에 기초한 증명 방식에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참주가 진짜 노예라는 증명 과제는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이곳에서는 정치체제의 내적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을 토대로 위계질서 붕괴에 따른 참주정과 참주의 노예 상태에 대한 증명이 수행된다. 즉 참주정은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분석해 보았을 때 위계질서가 무너져 가장 작은 부분인 참주가 나머지 생산자 계층을 비롯해 가장 훌륭한 부분인 수호자 계층까지 노예로 만들어 버린 정치체제이다.(577c) 이에 따라 참주의 영혼 또한 참주정을 닮아 내적 구조상 위계와 역할이 전도되어 전체적으로 무질서 상태가 되고 만다. 물론 참주의 영혼에서 욕정에 사로잡힌 욕구 부분이 거꾸로 기개 부분과 이성 부분을 폭압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성과 기개 부분이 노예이지 참주의 영혼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주의 영혼은 늘 욕망의 침에 쫓겨 다니면서 영혼 전체의 이익이 아닌 욕구 부분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주인다운 다스림과는 전혀 무관한 욕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혼 전체를 놓고 말한다면’(577e) 참주정 나라가 그렇듯이 참주의 영혼은 그 자체로 욕정의 노예일 뿐이다. 그래서 참주의 영혼은 혼란과 후회로 가득 차 있다.(577e)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577e-

578a)

참주가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임은 참주가 노예라는 앞서의 논거와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내용도 짧고 간단하다. 한마디로 참주정 체제의 나라는 노예 상태에 있는 나라이므로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못하는 나라이다.(577d) 그러므로 참주정 체제의 영혼, 즉 참주의 영혼도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요컨대 참주정 체제의 나라가 가난한 것이 필연적인 한,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가난하다. 물론 참주정의 나라에서 나라 전체는 가난해도 현실의 참주는 풍요하면 풍요했지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부와 가난은 재물의 크기가 기준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이루냐 못 이루냐가 기준이다. 욕망의 노예가 된 참주는 아무리 많은 것을 원해도 그것을 못 이루는 상태로 늘 결핍상태에 있다. 가난하다는 것은 결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비록 적은 재산을 가졌을지라도 결핍을 못 느끼면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부와 가난 역시 결국은 영혼의 내적 구조가 질서를 갖추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성이 아닌 욕구에 지배되는 참주는 그래서 늘 결핍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보낸다.(579b-580a)

참주정의 나라와 참주정적 영혼은 욕망의 노예 상태에 있어 늘 가난하고, 결핍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보다 비탄과 한탄, 통곡과 고통이 더 발견되는 나라는 없다. 게다가 이런 나라와 그와 같은 사람은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578a) 이런 점에서도 참주정적인 인간은 단연 가장 비참하다.(578b) 특히 참주정적인 인간이면서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을 만나 사인이 아닌 실제 참주가 된 자가 한결 더 비참하다.(578b-c) 소크라테스는 참주가 늘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참주들과 닮은 부유한 개개인 즉 노예를 많이 거느린 자들의 경우를 예로 든다.(578e) 이들은 사실 나라에서 그 노예들을 두려워하며 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라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은 제도와 법률을 통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신들이 이 부유한 개개인들과 그들의 노예들을 나라가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상태, 이를테면 어느 외딴 곳에 떨어트려 놓았다고 가정할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그곳에서는 노예들이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 부자들과 가족들은 노예들에 의해 재산을 뺏기는 것은 차치하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가 늘 상존해있다. 이것은 참주나 기득권자들이 나라의 제도와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사적 탐욕을 거침없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그들의 삶 자체가 얼마나 많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나날이 키워내고 있는지 또 그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의심과 공포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설사 이런 고립된 상황이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비위를 맞추어 어떤 자를 자유인으로 풀어주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날이 갈수록 전적인 자유에 길이 든 자유인들이 참주의 지배에 불만을 가질 경우, 또는 참주의 패권욕과 전제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변 국가들이 있을 경우, 참주는 그들과도 적대적이 되어 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의심과 공포, 적들의 감시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집에 틀어박힌 채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579a-c)

* 혹자는 현실에서 성공한 참주정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통해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시켜 아주 오래 동안 체제를 유지하고 지속한 참주정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참주정의 비참성의 핵심적인 요체들 즉 ‘욕정의 노예상태’, ‘영혼의 궁핍’, ‘공포와 고립’은 현실 세계 실제 참주들 모두에게 – 그들이 끝까지 권력을 유지했건 중도에 좌절되었건 상관없이 – 하나같이 두루 적용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영혼의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에게 성공적인 참주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다. 플라톤 당대 가장 알려진 최고의 참주로서 제명을 산 디오뉘시오스 I세조차 평생 전쟁에 시달렸고 특히 암살 위협 때문에 꼼짝없이 성에 갇혀 지내는 신세라 당대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올림픽 구경조차 대리인을 보냈다고도 전해진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역사 속 폭력적 독재자들에 관한 전기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거를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반대로 처참하고 불행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오늘날 자기 세상인 양 설쳐대는 우리가 알만한 현대판 참주들 모두 하나같이 권력 상실과 전쟁에 대한 공포, 자신과 가족에 대한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 폐쇄된 공간에서 잠도 못 이루면서도 욕정은 들끓어 늘 결핍과 불만을 끼고 산다. 무엇보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참주의 욕망은 그 자체로 참주 자신을 배타적으로 고립시키고 타자들과의 관계 일체를 분열시켜 결국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현실 정치가 예외 없이 이러한 권력욕의 전쟁터일 수밖에 없다면 일시적인 평화는 몰라도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곳 첫 증명에서 다루어진 노예 상태가 아닌 자유, 부(富), 그리고 공포로부터 해방 그 모두는(이것은 우연찮게도 각기 민주정 치하 민중들, 과두주의자들, 참주 포함 참주정 치하 시민들이 바라고 원하는 가치들이다.) 오직 철학자왕정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철학자왕정의 도래 가능 조건에 신적 행운과 영감의 도움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편지> 326a, <국가> 499c) 그 실현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지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향한 이곳 <국가> 논의가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한 것인지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상의 실현은 어렵고 처절하다. ta kala tō onti chalepa.-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힘든 것이다.

* 이로써 첫 번째 증명이 마무리된다. 위 증명이 갖는 한계는 시작 전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다’(576a)는 것, 즉 본성에 따른 모든 계층 간과 영혼 간의 조화와 질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증명이 나라와 개인 간 ‘동일한 구조’와 ‘전체 연관’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부분에 상응하는 즐거움에 기초한 증명(580c-583a)

[강좌안내] 2026년 <한철연 아카데미> 서울도서관과 협업 : 9월 작가힙톡(Hip-Talk) 3주(매주 금요일 / 4일, 11일, 18일) 일정 [한철연 소식]

“2026년 <한철연 아카데미>는 서울도서관과 협업하여 서울도서관의 연속 강좌 “작가힙톡(Hip-Talk)”으로 진행합니다. 9월 작가힙톡(Hip-Talk) 3주(매주 금요일 / 4일, 11일, 18일) 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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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4일 – 윤태양 작가 : 온고지신도 텍스트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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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윤태양(건국대학교 철학과 강사)
>도서 : 『 다시 , 동학 』
>내용 : ‘온고지신’의 자세로 미래를 구상하는 주체적인 고전 읽기 방법을 제안
>일시 : 9.4.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3. (목) 선착순 모집
● 9월 11일 – 김정철 작가 : 알고리즘의 파도 속, 느리게 읽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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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김정철(충북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도서 : 『기울어진 문해력』
>내용 : 알고리즘 세계에서 느리게 읽기의 필요성과 가치
>일시 : 9.11.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10. (목) 선착순 모집
● 9월 18일 – 조배준 작가 : 포스트 휴먼의 질문하는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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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조배준(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연구교수)
>도서 : 『읽지 않는 사람들』
>내용 : AI 시대, 독서와 질문의 필요성
>일시 : 9.18.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17. (목) 선착순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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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두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2주차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철학의 기술 / 2026724일 금요일 19:00

 

두 번째 밤의 주제는 ‘관계 속의 나’였습니다. 성균관대 현남숙 교수님이 ‘공감, 소통, 인간관계’를, 한국방송통신대 진보성 교수님이 ‘인정, 비교, 신뢰, 공정함’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았다면, 이번 시간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즉 나를 둘러싼 관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진행을 맡아 무대에 섰습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서로 다른 전공의 두 분이 같은 주제 앞에 나란히 섰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현남숙 교수님이었습니다. 대화는 다이얼로그,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니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너 대화’와 ‘나-그것 대화’를 빌려, 상대를 인격으로 만나는 대화와 도구로 대하는 대화가 얼마나 다른지 짚었습니다. 힘들 때만 연락해 몇 시간을 쏟아내고는 평온할 때는 소식 없는 지인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빌려 온라인 시대의 소통이 편리해진 만큼 헐거워졌다고 짚었고,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인용하며 갈등은 침묵과 시간이 메워준다고 조언했습니다.

관계 이야기에서는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속,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해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로 나아갔습니다. 단단했던 관계들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시대, 우리는 책임을 지는 ‘릴레이션십’보다 책임 없는 ‘네트워크’에 익숙해졌다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빌려, 개성을 지키며 하나 되는 것, 보호와 책임, 존중과 지식이 관계의 조건이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진보성 교수님이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양 철학이 붙잡아 온 질문이지만, 『논어』에는 애초에 그런 존재론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사람(人)’ 옆에 ‘두 이(二)’가 붙은 ‘인(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자체를 중심에 둔다는 것입니다. 복숭아 씨앗 속 씨알처럼 누구에게나 있지만,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인정에 대해서는 『논어』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구절과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개념이 이어졌습니다. 비교에 대해서는 “군자는 두루 사귀되 비교하지 않는다.”는 『논어』 구절과 『장자』의 이야기를 빌려, ‘대동’과 ‘소동’을 구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문장으로 진짜 친구는 화려함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다고 전하며, 거리를 두고 기다리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가 이어졌습니다. 맨 앞에 나란히 앉은 두 분의 청중이 실은 오늘 처음 소개팅으로 만나 이 자리에 함께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강의실은 웃음과 탄성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오랜 친구인데도 나이가 들며 달라진 처지에서 오는 씁쓸함을 묻는 질문,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묻는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진보성 교수님은 타인을 자신의 삶의 패턴에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답했고, 현남숙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을 빌려, 굽신거림과 오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 순간 적절한 판단을 찾아가는 것이 관계의 기술이라고 답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탁 트인 서울광장에 다시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는 여전히 게으름 없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나를 들여다보고 관계를 살펴보는 일까지, 두 번의 저녁이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의미 있는 사색의 시간이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소개팅 당일에 강연장까지 와 주셨던 두 분, 첫 만남에 나누었던 수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함께 했으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예쁜 사랑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습니다. 강연을 수락해주신 박은미, 현남숙, 진보성 선생님과 강연 협의부터 실무까지 함께 애써주신 서울도서관 관계자분들, 영상 촬영을 맡아주신 최기봉 피디님까지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끝.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첫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1주차 진짜 나를 들여다보는 철학적 시선 / 2026710일 금요일 19:00

 

진짜 나를 찾는 여름 밤. 첫 번째 밤의 주제는 ‘진짜 나’였습니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 ‘진짜 나, 욕망, 죽음, 행복’을, 저는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무더운 여름 공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사람들이 서울도서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마흔 명 정원을 훌쩍 넘어서 최종 신청 인원은 예순여덟 명이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이른바 ‘불금’을 포기하고, 저마다의 약속을 미뤄두고 온 얼굴들을 보면서, 무엇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를 설명하면서 저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두 글자를 나란히 세웠습니다. ‘사람(人)’ 옆에 ‘사이 간(間)’이 만나야 비로소 ‘인간(人間)’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좌우에 계신 이분들이 바로 여러분을 사람에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시는 소중한 조건입니다.” 『논어』의 한 구절도 함께 건넸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그런데 그 세 번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은 사람, 즉 ‘개인으로서의 나’를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었습니다. 먼저‘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을 ‘가짜 나’라고 했습니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인정받아야 안심이 되고, 그러다 문득 공허해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나’는 비교할 잣대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꼭 한 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말씀이 참석자들의 마음에 내려앉았습니다. 세네카의 말도 빌려 왔습니다. 인생은 진정으로 시작할 준비가 되면 거의 끝나 있다고 말입니다. 죽음을 자꾸 회피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 삶이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나섰습니다.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 네 개의 단어를 들고 무대에 섰습니다.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라던 어느 카피라이터의 문장에서 시작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의 시구를 지나, 마침내 『논어』의 한 구절에 닿았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넘어서야 비로소 독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얹었습니다. 다음 키워드는 불안이었습니다. 공포는 그 대상이 분명하지만, 불안은 그 대상 없이 오직 가능성만으로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정해진 목적 없이 던져진 우리 인간에게 불안은 숙명과도 같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혹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병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인 셈이라고 전달했습니다. 위로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짧은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한 참여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상황과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면서 매일이 불안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가수 보아의 노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데뷔 초, 유행했던 곡의 제목은 ‘No.1’이었지만, 십 년이 지나 그녀가 부른 노래는 ‘Only One’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등이 아니어도 좋다고, 유일한 존재가 되는 길도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은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을 더 오래 후회한다고, 망설여진다면 일단 저질러 보라고 말입니다.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정답을 얻으러 온 밤이 아니었습니다. 두 철학자의 이야기 역시 그들의 시선이기에, 각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강의실을 나서는 청중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한결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나와 탁 트인 서울광장에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무심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불금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자 와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2021) 서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서평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윤구병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지칭)의 철학을 소개한 한재경 선생의 책 <윤구병 철학의 이해>(미발간 원고)을 읽고 다시 한번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흥미가 이끌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인가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철학에 관한 심포지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선생님이 2013년 발간한 책 <철학 다시 쓴다>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관해 논평했다.

이번 읽은 한재경 선생의 책을 통해 그동안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새로 발간한 윤구병 선생의 책을 두 권이나 사서 읽었다. 하나는 <꿈꾸는 형이상학>(보리, 2021)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가 본 우주 역사>(보리, 2024)이다. 그 가운데 전자가 눈에 뜨였다. 이 책에서는 확실히 그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논의, 대표적으로 ‘거품 우주론’이 새로이 등장해서 진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2)

먼저 한재경 선생에게 감사하다. 한 선생은 선생님의 철학을 ‘산뜻하다’(또는 스마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정리했다. 먼저 선생님의 핵심적 저서 세 권(위의 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있음과 없음’이다)을 ‘단계’로 요약하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논점을 ‘고리’로 정리했고, 마지막에는 ‘묻고 답하기’를 통해 독자가 드는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이런 감각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편집할 때 지녔던, 또 출판사 보리를 통해 새로운 감각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낼 때 보여주었던 감각인데, 한 선생이 그런 감각을 빼닮았다는 느낌이 들어, ‘우연이 아니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필자가 잘 정리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생각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한 선생의 정리 덕분에 선생님의 생각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 선생의 글을 평가하려면, 선생님의 철학을 알고 그것과 비교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처지에 이르지 못해 그런 평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서문에 선생님 자신이 한 선생의 책이 자신의 철학을 온전하게 담아냈다고 하니, 그에 기초해서 차라리 선생님의 철학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철학 다시 하다’라는 저서도 못지않게 선생님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빠뜨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의 형이상학에는 그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동양철학의 전통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 철학의 전통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전통에 관해서 충분히 부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은 그사이에 그 이전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동앙 철학의 기 철학 전통으로 대대적인 회전 기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 아직 그런 회전 기동이 완성된 것이 아닌지, 그 이전 플라톤적 이원론적 체계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양극 체제와 기 철학에서 기 일원론적 사유가 혼재하면서 그사이에 균열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동기가 이런 갈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3)

선생님의 철학의 출발점은 여러 책에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빠진 것’으로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한 이래로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있는 것’에 대립하는 ‘없는 것’ 없이는 형이상학이 출발하지 않으니, ‘없는 것’이 부딪히는 난점, 모순을 피하려 ‘빠진 것’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 여러 책에서 선생님이 사용하는 언어를 검토해 보면, 굳이 이런 제안이 의미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 글에서 선생님은 ‘빠진 것’이라는 말 대신 ‘없는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빠진 것’이나 ‘없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제안한 것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빠진 것’은 빠진 것 외에 나머지는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빠진 것’은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빠진 것’도 모든 것이 빠진 것으로 되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되니,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필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과연 없는 것은 사유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없는 것’ 없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빨간색을 보고 거기에 없는 것인데도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선생님은 글에서 ‘없는 것이 없다’는 ‘[모든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만약 ‘없는 것’이 사유할 수 없다면, ‘없다’가 중첩된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서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반성적이다. 우리는 빨간색과 파란색(논의의 필요 상 색에 두 가지만 있다고 하자)을 묶어서 사유한다. 파란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하며, 파란색이 없으면 빨간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 전기와 -전기를 보자. – 전기는 ‘없는’ 전기는 아니다. 다만 + 전기에 대립하는 전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유에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대립시켜 사유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있으면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며 ‘없는 것’이 있으면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유가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사유가 ‘없는 것’을 통해서 사유하는 반성적 사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3)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든 ‘없는 것’을 ‘빠진 것’의 극단으로 보자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있는 것’ 역시 반대쪽 극단이 될 것이다. 양극단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있는 것인 동시에 없는 것’이며 ‘있지 않은 것이며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곧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아페이론이다.

아페이론’ 개념이야 플라톤 철학 이래로 익숙한 개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서 더 나가서 아페이론에 정도를 설정한다. 즉 ‘있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과 ‘없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그사이에 무한한 수의 아페이론이 출현한다. 제논의 역설이 잘 보여주듯 1과 0 사이에는 무한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페이론에 정도가 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아페이론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인데 무규정적인 것에 정도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유한한 것들 사이에는 가깝고 멀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처한 극단은 극단인 한에서 무한한 거리에 있다. 무한한 거리를 측정할 수 없으니, 어느 것이 무한에 더 가까운가는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무한히 선한 하나님 앞에서 교황과 나 가운데 누가 하나님에 가까울까? 아마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이 타락한 죄인일 것이다.

더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짝이 지어진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아페이론은 b, c, d는 있지만, a는 없다고 하자. 이것은 ‘있는 것’이 많으므로 ‘있는 것’에 가까운가? 그러나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에는 e, f, g, …d 없으니 차라리 없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4)

일단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아페이론이 있다고 하자. 중요한 것은 이 아페이론은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운동을 선생님은 ‘함’과 ‘됨’의 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 개념이 사실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각이다. 우선 이 운동은 각기 그 원천이 다르다. ‘함’의 운동은 원천이 ‘있는 것’에서 나온다. 반면 ‘됨’의 운동은 원천이 ‘없는 것’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의 핵심적 문제에 부딪힌다. ‘있는 것’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순전하면 할수록 더욱 ‘있는 것’뿐인데, ‘있는 것’이 어떻게 ‘함’이라는 운동의 원천이 되는가? ‘있는 것’은 하나이니,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없는 것’은 여럿이니, 여기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있기는 있고 그것이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없는 것’은 여럿이더라도 그것을 여럿으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에서 ‘있는 것’, ‘없는 것’과 구별되어서 ‘임’과 ‘아님’이 논의되어 왔다. ‘임’은 그 자체가 긍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고 ‘아님’은 부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 차라리 ‘임’과 ‘아님’에서 ‘함’과 ‘됨’이라는 운동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은 ‘있는 것’과 ‘임’, ‘없는 것’과 ‘아님’을 이미 동일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과 ‘아님’이 따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는 모든 철학자가 논하는 중요 문제인데도 선생님의 글에서는 그런 논의가 없다. 왜냐하면, 양자를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언어상으로, 특히 한국어에서는 두 언어쌍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헤겔의 경우도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구분된다. ‘임’과 ‘아님’은 문장의 계사이며 그것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이루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임’은 어떤 것을 서로 하나로 만드는 힘이며 ‘아님’은 서로 다르게(여럿으로) 만드는 힘이다. 어떤 것은 이런 두 힘 즉 ‘임’과 ‘아님’의 운동 속에 있으며 어떤 것은 이런 운동의 어떤 상태이다. 이 운동이 일정한 평형 상태에서 고정된 듯한 모습을 지니면,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이 지닌 규정 즉 ‘무엇임’이 출현한다.

있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Da] 속에 있는 것 즉 현존[Dasein]이다. 이 관계가 운동하는 힘이 되어 어떤 것을 있게 만든다. 이 관계를 통해 생성되는 규정성은 이 관계가 전개하는 전체 공간 속에 위치하게 된다. 이런 위치함을 통해 어떤 것은 현존한다.

필자는 헤겔의 말대로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라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려는 것이다.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자체에 있다는 것은 특별하게 논증되어야 할 사실이다.

5)

이제 선생님 형이상학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이 운동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논증 없이 받아들이고 보자.

더 큰 문제가 있다. 운동의 힘은 성격이 다르다. ‘있는 것’의 운동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간다. 그래서 아페이론을 더욱 하나가 되게 만든다. ‘없는 것’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가서 더욱 여럿으로 만든다.

이런 운동은 사실 헤라클레이토스가 촛불의 비유를 통해 생성하는 힘과 소멸하는 힘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이런 운동하는 아페이론을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 운동이 균형 속에서 있을 때 그것은 정지한 것으로 보이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로고스’라 한다.

동양철학에서 기 철학도 마찬가지로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은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을 전개하니 이 운동 자체는 무극이며 이 운동이 고유한 균형을 이룬다면 곧 태극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든, 기 철학에서든 두 운동은 서로 대립하지만 대칭적이다.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앞서고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일방의 우위는 기의 일원론적인 철학에서는 논리적으로 배격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나의 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경우, 두 힘의 대립을 제시하면서 이 두 힘은 펼치고 수렴하는 힘이라고 하지만, 펼치는 힘이 펼치는 것은 수렴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수렴하는 힘이 수렴하는 것은 펼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양자 사이에 능동과 수동을 공평하게 부여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두 가지 운동을 ‘함’과 ‘됨’의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이 ‘함’과 ‘됨’은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적인 운동이다. ‘함’, 능동은 작용하고 ‘됨’, 수동은 수용한다. 그러나 ‘됨’이 능동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함’이 수동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5)

이렇게 비대칭적인 운동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이 앞서서 가졌던 유출설적인 흔적이 아닐까 한다. 신플라톤주의자에게서 ‘있는 것’은 ‘없는 것’을 향해 유출한다. ‘있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로 만드는 힘이 떨어지니, 거꾸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강하게 된다. 이런 유출 가운데 자연계의 다양한 층위가 출현한다. ‘철학 다시 하다’에 따르자면, 여기서 정신과 생명, 자연, 질료가 차례로 출현한다.

자연의 위계적 계층성을 설명하는데 이런 유출설이 기여한다. 이 신플라톤주의에서부터 나오는 유출설이야말로 그 이후 자연의 위계성 또는 진보적 진화를 확립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2021년 발간된 <꿈꾸는 형이상학>이란 책에 이르면, 이제 ‘함’과 ‘됨’이라는 두 가지 힘이 비대칭적이라는 성격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필자가 선생님이 이 시기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제 이런 변화의 측면을 더 규명해 보자.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은 두 가지 우주 설화를 제시한다. 한 재경 선생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다. ① 하나의 설화에서는 ‘한어미’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원래 두 힘은 ‘한어미’ 속에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두 가지 대립하는 힘으로 분열되는데, 이제 두 힘은 ‘밝이’나 ‘검이’와 같은 대립하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거미가 밝이를 푹 감싸고 있어서 .,, 밝이는 검이가 끝없이 옥죄는 바람에 뜨거워지고 또 뜨거워져서 펑 하고 터져 버렸다. … 이때 한 덩어리였던 힘이 둘로 갈라진다. 밝이의 힘은 하미가 되고 검이의 힘은 되미가 된다. 하미가 힘을 쓰면 되미는 그 힘을 받아 하는 대로 된다.”(한재경, 미발간원고)

② 다른 하나의 설화는 ‘까망이’와 ‘하양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런데도 일원론의 흔적은 은폐된 방식으로 출현한다. 즉 두 대립하는 힘의 긴장된 관계를 통해 내적인 통일성을 가정한다.

“하양이와 까망이가 틈새 없이 맞닿아 두 힘이 서로 다른 결을 이루면서 태극도형처럼 하나는 함으로 다른 하나는 됨으로 휘어진 결 무늬를 이루기 시작했다.”(꿈꾸는 형이상학, 28)

여기서 ‘밝이’나 ‘햐양이’, ‘검이’나 ‘까망이’는 동양철학에서 양과 음에 대응하는 용어로 보인다. 이렇게 두 힘이 원래 통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나, 두 힘이 음양으로 구분되면서 양자 사이에 비대칭적인 흔적은 사라진다. 그 점은 두 힘의 관계가 태극도설의 모양으로 제시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6)

이처럼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동양철학의 기 일원론으로의 전환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따지고 보면 그 이전부터 계속된 선생님의 지론인 ‘결’의 개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 ‘결’의 사상은 일찍부터 지녀왔던 사상이며 매번 강조해 마지않던 사상이다. 그런데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대립하는 힘인 ‘함’과 ‘됨’이 비대칭적이라면 이것들이 만나서 결이 나온다고 보기 어렵다. ‘결’은 두 힘의 균형을 통해 서로 순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비대칭적이라면 이런 균형이 깨어지면서 순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으로서는 ‘결’이 ‘톨’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현대과학의 이론과 연관되면서, 형이상학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미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그런데 유출설의 입장에서 이 결을 설명하기가 곤란했던지, 사실 앞선 책에서는 ‘결’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다.

‘결’의 사상을 끌어내려면 대립하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에 이르러야 했는데, 이런 대립의 균형은 이미 양자의 통일을 전제로 하기에 기 일원론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덕분인지, ‘꿈꾸는 형이상학’에서는 두 힘이 꼬여서 어떻게 결이 나오는지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이게 소위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이다.

‘거품 우주’론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자. 그게 성공적인지는 필자가 평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 근거는 함과 됨이라는 비대칭적 구조 없이 기일원론에 근거한 대칭적인 음양의 순환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우주는 주역에서 음양이 중첩되어 사상, 팔괘,  64효 등으로 나가는 세계와 어쩌면 그렇게 신통하게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은 주역에서 음양의 관계를 뫼비우스적 띠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밝이’의 한 가운데 블랙홀이 있고 ‘검이’의 한 가운데 화이트홀이 있으며 이 양자가 다시 월홀과 한 자리에 있다는 주장에서 분명하게 엿보인다.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가 다시 중첩되면서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면, 거품 우주론이 나오지 않을까? 

어떻든 간에 매우 흥미로운 우주였다. 필자는 이규성 선생 덕분에 동양철학, 그 가운데 왕선산의 기 철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하나의 기가 음양 두 기로 분화되어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우주 만물이 생겨난다는 주장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음양의 대립이 어떻게 다양한 만물로 발전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기에 청탁과 유동성과 고정성이 있다는 정도 외에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또한, 필자는 여러 주역 소개서를 읽었다. 동양철학 그것도 주역에 관해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주역에서 음양의 괘가 중첩되는 과정을 선생님처럼 우주 발생론으로 읽는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은 무척이나 탁월한 설명으로 보인다.  음양을 통해 이루어진 우주생성론, 코스모고니는 선생님이 최초가 아닐까? 여기 선생님이 주역이 제시한 것과 ‘거품 우주론’을 보여주는 한 가지 도해만을 소개하려 한다.(이 도해를 읽을 때 그저 평면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순환이 뫼비우스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읽으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도해로 보인다.)


 

이 거품 우주는 신적 지성의 눈으로(스피노자적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단순한 음양의 순환을 통해 모든 우주가 설명되는 일이관지 하는 우주일 것이다. 그러나 지상적 인간의 지성으로 보면, 아마도 그 인간의 지성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어떤 우주는 맴돌고, 어떤 우주는 휘돌며 어떤 우주는 감돌고 있을 것이다. 인간 지성의 눈으로 보면, 이 우주는 우연 그 자체이지만,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이 무한 기하학의 세계와 같이 아름다운 우주에서 선생님은 우연을 강조한다. 그것에서 자유가 나오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우연은 곧 맹목적 운명이니, 어린아이처럼 또는 선사처럼 이 운명을 즐기는 선생님은 몰라도 우리 같은 무거운 영혼에게는 필연성의 세계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7)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설적 흔적이 여전히 남아, 일원론적 기 철학적인 흔적과 충돌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마치려 한다.

이런 흔적은 ‘밝이’나 ‘검이’ 대신 ‘하미’나 ‘되미’, ‘잇스미’나 ‘업스미’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는 데서 남아 있다. 또한, 한 덩어리인데 그 모습이 ‘밝이’가 ‘검이’를 싸안고 있고 옥죄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싸안더라도 또는 서로 꼭 붙어있더라도 둘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하미’가 하면 ‘되미’는 “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여전히 비대칭적 능동-수동 관계가 등장한다.

함과 됨,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성을 유지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유출설이나 서양철학적 흔적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의문이 많다. 2021년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이 유출설에서 기 일원론으로 도약했듯이 다시 한번 도약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선생님의 철학을 한마디로 하면 곧 ‘결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좀더 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또 “새로운 철학이네!” 하는 경탄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기를 고대해마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

1)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직관의 다양이 선험적 범주에 할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은 공허한 형식이고 그 내용은 직관에서 주어지는 다양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다.

헤겔은 선험적 범주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범주는 일반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자기 규정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념이다. 실재성은 범주 자신에서 나오므로 범주와 실재성, 개념과 대상은 합일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로 된다.

“또한, 여기[칸트적 심리적 관념론]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 다시 직관의 다양이 없으면 내용이 없고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개념이 선천적[apriori] 종합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개념이 그와 같이 선천적 종합이므로, 개념은 정말로 말해 규정성과 자기 내 구별을 지닌다. 규정성은 개념의 규정성이고 따라서 절대적 규정성, 개별성이므로 개념은 모든 유한한 규정성과 다양성의 근거이자 원천이다.”(논리학 2부, GW12, 23)

헤겔은 ‘선천적 종합’, 즉 개념에서 그 규정성이 나온다는 주장을 자기의 철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마치 나르시시즘적 원리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이니 그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은 주관적인 산물이며 그 너머에 대상 자체, 물 자체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헤겔이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규정성이 자기 넘어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개념이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되고 즉 그 자체 존재[an sich]가 대자 존재[fuer sich]와 대타 존재[Sein fuer andres]로 구별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의식, 대자 존재란 곧 개념에서 나온 실재성, 규정성을 의미하며, 대상 곧 대타 존재는 이런 실재성과 규정성 너머에 등장하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화와 구별이 의미하는 것은 곧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오는 순간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물 자체를 헤겔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모든 당대 철학자들의 근본적 아포리아였던 이 문제를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즉 하나의 의식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한다. 의식은 이 규정성을 자기의 범주에서 끌어내지만, 이 규정성은 그 너머 물 자체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 물 자체란 자기의 전제가 되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본래의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에 대해 그 자체적인 존재[Fuer es an sich Sein]’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범주와 물 자체는 서로 모순 속에서 빠지고 이로부터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규정성이 출현하며 이 속에는 그 이전 범주에서 물 자체였던 것이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범주에 대해 또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게 되면서 운동이 계속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의 범주가 개별적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대상이 점차 더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이 맞물려 나가는 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3)

정신현상학에서 서술된 이 의식 경험의 길은 역사적으로 의식의 형태들이 겪어나갔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을 매개하는 것은 의식과 물 자체와의 모순인데, 이런 역사적인 의식 형태가 현재 의식의 평면에 투영되면서 논리적인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에서도 범주는 그 자신에서 규정성과 실재성을 끌어내지만, 이는 곧 그 실재성을 넘어선 것 즉 물 자체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면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범주가 모든 실재성을 포괄하면서 더는 모순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이 범주가 최종적인 절대적 범주이며 곧 진리인 개념 즉 이념이다.

헤겔은 이런 논리적 발전을 통해서 칸트가 좌표축에 할당했던 범주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서 전개한다. 헤겔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과 그 범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만 칸트와 달리 이를 논리적인 발전에 따라서 배치했다. 헤겔은 의식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논리적 계기의 발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 규정성이 나온다는 선천적 종합 개념이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하나의 범주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범주의 자기 내 반성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물 자체와의 모순이지만, 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 사유의 과정이 추론적 이성이 하는 일이며 이 추론적 이성이 사용하는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이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무시했던 반성 개념의 역할을 사유 속에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었다.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서 선험적 통각의 개념을 차이 나게 만든다. 칸트에서 통각과 범주는 서로 구별된다. 통각은 범주를 직관의 다양과 결합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범주 밖에 있다. 마치 그것은 플라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와 아페이론을 결합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구별하여 출현한 하나의 규정성이며, 통각은 이 규정성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다시 새로운 범주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의 본래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서 마침내 선험적 통각은 범주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서 범주의 생성 운동을 통해 출현한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마침내 통각은 자기를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니, 그런 점에서 앞에서 개념이 곧 선험적 통각 또는 자기의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범주의 전개 운동 자체는 결국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칸트는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에 이르렀으나, 범주를 여전히 형식적인 좌표축으로 보면서, 다시 형식 논리학에서의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헤겔은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범주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헤겔은 형식 논리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논리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핵심은 곧 판단이다. 논리적 범주란 곧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계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판단의 형식은 12개가 있는데, 이 12개의 범주는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 범주가 지닌 내용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인 판단으로 나타날 때 지니는 내용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은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의 빨강임’이라는 특정한 사태는 긍정판단의 구체적 내용이지만, 긍정판단의 판단 형식은 개별자인 주어와 일반적인 성질인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 판단형식 자체의 내용은 개별자와 일반자의 관계이다.

이런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정언판단 형식과 구분된다. 이 정언판단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봄꽃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문법적 형식으로만 보면 질적 긍정판단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후자의 경우 주어는 개별자가 아니라 일반자(즉 ‘진달래’)이다. 그리고 술어는 유적 일반자(‘봄꽃’)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형식 자체가 즉 범주가 다른 범주와 지닌 차이가 곧 판단 형식의 내용이다. 이런 판단 형식은 직접적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이미 자체 내 모순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개별자와 일반자가 대립하니, 이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미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런 모순에 부딪혀서 다른 범주 즉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내용을 갖거나 실재성을 갖는다. 개념은 진부한 공허한 동일성이 아니므로 자신의 부정성이나 절대적 규정이라는 계기 속에 구별하는 규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말해 논리학의 내용은 절대적 형식의 그런 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절대적 형식을 통해 스스로 정립한 것이며 따라서 또한 그 자신에 적합한 내용이다.”(논리학 2부, GW12, 25)

어떤 판단 형식 속에 내재하는 모순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아직 경험이 제한되어 있을 때 판단 형식은 통일성을 지니고 그 모순은 감추어지지만, 경험의 발전에 따라서 이 판단 형식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논리적 발전은 이런 경험의 발전을 의식 내에서 즉 현재 의식의 평면 위에 투영된 방식으로 겪을 뿐이다.

5)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판단 형식 그 자체의 내용이 판단 형식과 부딪히는 모순이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헤겔은 이점을 진리의 이념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진리는 알다시피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다. 논리적 범주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일반적 형식이므로 이 일반적 형식에 관해 진리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 자체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판단 형식과 그 내용 사이의 모순이 성립하고 거꾸로 양자의 일치인 진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도 형식과 내용,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인 진리를 향해 나간다. 논리적 범주 역시 진리를 향해 생동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생동적 운동은 모순을 겪어나가는 운동이다.

“논리학은 절대적 형식의 학문이므로 이런 형식성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형식에 적합한 하나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것이 순수한 형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참된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이어야 하면 할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적인 것은 자체 내 규정이나 내용에서 훨씬 풍부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작용력을 지닌 것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27)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

1)

앞에서 헤겔의 ‘개념’이 논리적 범주로서 다른 범주와 구별되는 내용적 의미를 살펴보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논리적 범주가 지닌 의미가 형식 논리학에서의 의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살펴보았다.

이제 개념의 일반적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개념이 선험적 통각 즉 ‘주체’라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칸트에서 주체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의 맥락으로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비판이 가진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데 이는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서술했지만, 여기서 되풀이된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 체계를 그 체계 밖에서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은 비판하는 철학이 전제하는 근본 규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비판받는 철학은 자기의 근본 규정을 고집하면서 비판하는 철학의 근본 규정을 거부하니, 비판은 마치 적이 없는 곳에서 싸움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반박은 적의 힘 속으로 들어가서 적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진을 치는 것이어야 한다. 적을 적 자신 밖에서 공격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를 보유하는 것은 분투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2부, GW12, 15)

그러므로 진정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적이 진지를 차린 곳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내부에서 무너뜨려야 한다. 이것은 곧 그 체계 자신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스스로 부정되는 것이며 즉 그 체계 자신이 유래한 특수한 원리에 대한 부정이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 더 일반적인 체계가 제시되고, 지금까지의 체계는 그 일반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다. 헤겔은 스피노자 체계에 대한 비판도 이런 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성’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2)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헤겔은 이미 본질론에서 ‘절대자’ 개념을 논하면서 어떻게 스피노자가 한계를 드러내는지 보여주었다. 거기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는 출발점에서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원리로 제시했으나, 곧이어 이런 실체를 모든 규정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으로 순수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지닌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 개념으로 발전했다. 라이프니츠는 자기를 산출하는 표상 개념을 통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으나, 그로서는 이런 모나드가 개별적이며 따라서 이런 모나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비판을 넘어서 헤겔은 실체는 곧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헤겔은 이런 주체라는 개념이 곧 칸트의 순수 통각 개념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이며 여기서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범주를 통한 통일이다. 이런 통일을 통해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다양이 통일되면서 객체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주관 속에 있는 범주와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이 통일되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식의 주관적 통일]에 대립하여 표상의 객관적 규정이 지닌 원리는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라는 근본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규정이라고 할 범주를 통해서 주어진 표상의 다양이 규정되니, 이 다양은 의식의 통일로 이끌려진다.”(논리학 2부, GW12, 18)

“이와 같이 대상이 정립되면서 대상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거나 객관적인 대상으로 된다. 따라서 대상은 개념 속에서 이런 객관성을 가지며 이 개념은 대상이 수용되는 자기의식의 통일이다. 따라서 대상의 객관성 또는 개념은 그 자체 자기의식의 본성일 뿐이며 주관 자체와 다른 계기나 규정을 가지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8)

직관의 다양을 통일하는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그러므로 대상을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에서 비로소 ‘개념’으로서 주체가 출현했다고 보며,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이런 선험적 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며, 그 자신을 선험주의자라고 자처하기에 이른다.

3)

칸트의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곧바로 의문에 부딪힌다. 통각의 통일은 결국 주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현상 세계를 산출하기는 하지만, 물 자체를 인식하는 객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헤겔이 직관의 다양을 선험적 통각이 통일하면서 객체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칸트에 대한 오독이 아닐까?

바로 여기서 칸트와 헤겔의 차이점, 헤겔이 칸트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오히려 칸트가 참다운 철학의 원리 즉 개념과 주체에 이르렀으면서도, 다시 이를 내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칸트가 선험적 통각의 개념 즉 범주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것을 마치 ① 선험적 통각의 범주가 마치 하나의 좌표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직관의 다양을 그 주어지는 모습에 따라(즉 직관의 계기와 동시성 사이의 관계 즉 도식) 이런저런 범주에 할당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여기서 직관의 다양과 범주가 통일되기는 하지만, 이 통일은 다만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음양의 축을 설정해놓고 모든 주어지는 것을 이런 음양의 좌표축에 할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좌표축과 대상이 결합하기는 하지만, 이 결합은 외면적인 것에 그친다.

사실 무엇이든 이 음양의 좌표축에 따라서 할당할 수 있으니,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땅은 모두 붉게 칠하고 하늘은 모두 푸르게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나중에는 밤에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듯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색으로 칠해질 수도 있다.

4)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면, 통각의 선험적 범주는 스스로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아닌 ② 공허한 형식적 개념으로 다시 떨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생각은 칸트 자신이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원리와 모순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헤겔이 보기에 이런 선험적 통각의 원리에 따르면 범주가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런 방식에서는 독자적인 공허한 형식이며 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앞에서와같이 주어진 내용을 통해 실재성을 얻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런 내용을 추상하여 즉 그 내용을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개념에서 보면 다만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한다.”(논리학 2부, GW12, 20)

결국, 칸트는 직관의 다양이 일정한 좌표축에 할당된다고 보았으며 선험적 범주가 직관을 규정하는 것은 이런 할당에 한정하면서, 헤겔로 볼 때 칸트가 범한 가장 중요한 실책은 ③ 반성 개념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즉 칸트는 선험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를 제시했다. 이 범주는 지성이 가지고 있는 범주인데, 지성은 판단의 능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험적 통각 속에는 또 다른 능력이 있으니 곧 추리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런 이성의 능력에 속한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인데,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이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의 역할을 다만, 순수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하는 부록에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칸트는 다만 감정과 직관만 지성 앞에 둔다. 우선 그는 이미 그 자신의 이런 계단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단서는 곧 그가 반성 개념에 관한 하나의 논문을 선험 논리학이나 지성론의 부록으로서 덧붙인다는 데 있다.이 반성 개념의 영역은 직관과 지성 사이에 그리고 존재와 개념 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즉 본질론의 영역]이다.”(논리학 2부, GW12, 19)

직관의 다양이 범주에 할당된다는 칸트의 입장은 결국 ④ 범주 전체를 대상에 대해 외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범주 전체는 그 어느 것이든 그 너머에 물 자체가 존재하게 되며, 이런 물 자체에 이 범주를 적용할 수는 없다. 만일 물 자체에 이런 범주를 적용하는 순간 여기서 이율배반이 나오게 된다.

“칸트는 이성의 범주에 대한 태도는 다만 변증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실 이 변증법의 결과를 다만 전적으로 무한한 무인 것으로서 파악하니, 이를 통해 이성의 무한한 통일은 또한 여전히 종합을 잃어버리고 이로써 출발점이었던 사변적이고 진정한 무한한 개념을 잃어 버린다.”(논리학 2부, GW12, 21)

5)

결론적으로 칸트는 출발점에서는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했으나 곧 이를 단순히 범주가 대상에 할당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의 출발점을 부정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한 측면에서] 개념은 인식에서[선험적 인식] 객관적인 것으로서 제시되었으며 따라서 진리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개념과 같은 것은 어떤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실재성은 주관에 대립하는 객관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면서 그와 같은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성을 끌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9)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

1)

헤겔은 개념론에 들어가기 전에 ‘개념 일반에 관해’라는 글을 붙인다. 아마 개념론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문은 약 19쪽에 달하니 1부 객관 논리학 앞에 붙인 부분(‘Vorrede’ 4쪽, ‘Einleitung’ 15쪽, ‘Anfang der Logik’ 8쪽)에 못지않게 길다. 여기서 헤겔이 다루는 핵심적인 주제는 곧 논리학과 관련하여 칸트 선험철학의 의미와 그 한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논의의 출발점은 논리학(헤겔적인 의미에서 주관 논리학을 의미한다)의 출발점인 ‘개념’(개념에 관한 헤겔의 독특한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앞으로 헤겔적인 개념에 관해서는 ‘개념’를 사용하고자 한다)의 출현이다. 다른 학문의 경우 그 출발점, 원리는 단순히 전제되며, 이 전제는 이웃하는 학문에서 빌어오거나 더 높은 차원의 학문에 의존한다. 그러나 논리학은 자기의 원리를 다른 어디에서도 끌어올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서 끌어내야 하니, 논리학은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의 원리는 마치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공리처럼 전적으로 직접 주어지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헤겔은 오히려 논리학의 원리는 모든 존재자 속에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이 구체적 존재를 규정하고 정립하니, 논리학의 근거는 거꾸로 모든 존재자로부터 가장 일반적으로 끌어낸 것이라고 한다. 이 도출의 과정이 논리학의 근거가 생성하는 과정이며, 즉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자기를 정립하는 운동, 즉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과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 즉 개별적 존재에서 일반적 원리로 나가는 운동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 순환한다. 이 순환은 이미 정신현상학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직접적인 것은 매개된 것으로 전환하며 거꾸로 매개된 것은 직접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개념의 생성은 이런 직접적인 생성의 운동을 통해 서술된다. 그러나 개념의 생성이 지닌 의미는 모름지기 생성이 항상 그렇듯이 이행하는 것이 자기의 근거로 반성한다는 것이며 우선 앞선 것이 이행해 들어간 나중의 것이 처음에는 타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처음의 것이 지닌 진리를 이룬다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1-12)

“추상적으로 직접적인 것은 사실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인 한에서 오히려 매개된 것이며 그러므로 이 직접적인 것이 진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그 토대는 이 매개된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논리학 2부, GW12, 11)

이런 관점에서 주관 논리학의 원리는 앞에서 객관 논리학에 존재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다시 절대적 관계로, 여기서 실체관계, 인과 관계, 상호작용을 거쳐 생성된다고 한다. 헤겔은 이 과정을 다시 한번 간략하게 서술한다.

2)

헤겔을 따라 이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자면, 이렇다. 즉 실체관계는 서로 무차별한 우발적 존재의 관계였다면, 인과 관계는 개체가 각자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그 결과 인과 관계의 연쇄가 출현하고 마침내 상호 인과 관계 즉 상호작용이 출현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원인(능동적 실체)과 결과(수동적 실체)는 상호 교체된다. 원인의 작용에 의해 결과는 자신의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가 되면서 원인이 된다. 이 결과를 원인으로 해서 원인도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 즉 원인이 된다.

“능동적 실체는 작용을 통해 즉 자기가 자기를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정립하는 가운데 즉 그와 동시에 이런 전제된 타자 존재 즉 수동적 실체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 원인이나 근원적 실체로서 자기를 계시한다. 거꾸로 이렇게 작용이 가해짐으로써 정립된 것은 정립된 것으로,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며 따라서 수동적 실체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 계시되고 원인은 자기 자신의 타자 속에서 전적으로 다만 자기와 합일할 뿐이다.”(논리학 2부, GW12, 13)

이 두 가지 상호적 인과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 관계를 상호작용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인은 역시 자기를 결과 속에 정립하면서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존재자’(일반성)가 된다. 반면 결과는 근원적인 원인에 대립하는 것이니 이미 부정적인 존재인데, 원인에 의해 부정되면서 자기 부정적인 것 즉 가상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성)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측면 즉 타자가 자기에 동일하게 관계하는 것이거나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의 반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동일성의 관계와 부정성의 관계는 동일한 것이다. 실체는 이제 자기의 대립물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이것이 두 가지로 정립된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이룬다.”(논리학 2부, GW12, 13)

이런 상호작용을 매개로 해서 가능성으로서 절대자가 실제성으로 실체가 되며, 이런 매개는 자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기에 항상적으로 일어나니 절대자의 실현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실현된 절대자가 곧 실체다.

이렇게 절대자가 실현된 실체는 필연적 실현인 한에서 무조건적인 것이니 곧 자동적인 것[automatische]으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우연한 것이다. 이런 실체가 곧 ‘개념’으로 규정된다. 이 ‘개념’이 곧 앞으로 전개될 개념론의 출발점 곧 원리가 된다.

3)

앞에서 말했듯이 개념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매개로 한다. 이 관계를 목적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 양자의 통일성으로서 가정된 절대자가 양자로 분화되며, 이런 분화가 다시 통일되어서 양자의 통일적인 관계 즉 ‘실체’가 출현한다.

이런 통일성으로 가정된 절대자 즉 목적으로서 절대자가 곧 개념이니, 개념은 이미 이런 관계 속에 그리고 이 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운동 속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여기서 목적으로서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고(개념이 부정된 것, 정립된 것) 이 분화된 개체의 상호 관계를 통해(부정된 것의 부정, 정립된 것의 정립됨) 실현되니 이는 과정은 하나의 이중 부정 운동으로 서술할 수 있다.

우선 출발점에 있는 개념은 장차 분화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아직은 단순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의 실현은 이중적인 부정성(부정의 부정)을 통해 회복되는 자기 관계(일반자)이다. 거꾸로 매개가 되는 개체는 개념이 부정된 것이지만, 타자와 관계하면서 다시 이것이 부정되는 것이니, 자기 부정성 또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자)이다.

그러므로 일반자나 개별자는 각자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 있다. 즉 일반자의 자기 관계 속에는 자기 부정성으로서 개별자가 들어 있으며, 개별자의 자기 부정성 속에는 이미 일반자의 자기 관계가 들어 있다

“개념 규정성의 각각은 총체적인 것이며, 각자는 타자의 규정을 자기 내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총체적인 것은 전적으로 다만 하나이지만, 동시에 이와 같은 통일성은 자기 자신을 이러한 이원적인 것이라는 자유로운 가상으로 분화한다. 이런 이원화는 개별자와 일반자로 구별되는 가운데 완전한 대립으로 나타나지만, 이 대립은 그에 못지않게 가상이기에 하나가 파악되고 언표되면 그런 가운데 다른 것도 직접 파악되고 언표된다.”(논리학 2부, GW12, 16)

4)

헤겔에서 이 ‘개념’으로 지칭되는 것은 아주 특정한 것이니 그 출발점은 실체이다. 즉 생명체의 집단(암수 결합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개념의 단초, 출발점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 개념은 주관이 출현하면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겔은 주관을 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단순히 자기 동일성에 머무르는 것, 데카르트적 에고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 주관은 순수한 자기의식 즉 칸트가 말한 통각에 해당하는 것이니, 이 자기의식은 처음에 순수하게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를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하여 대립하는 가운데 다시 양자를 통일하여 자기 관계하는 통일에 이른다. 이런 전개 방식은 개념의 전개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니, 이 주관이야말로 개념의 구체적인 예가 된다.

“개념은 그 자체 자유로운 현존에 이른 한에서는 주관이나 순수 자기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주관은 사실 개념이며 즉 특정한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은 순수한 개념 자체이며 개념으로서 현존하기에 이른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앞에서 개념의 단초인 실체 즉 암수 관계에서는 아직 상호작용은 불완전하다. 암수 관계에서 개념적 실체는 아직 자동적인 우연성에 머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암수 관계는 각자 개별적인 생명체이면서 성적 관계에서만 상호작용이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실체는 아직 개체에 내면적으로 머무르는 잠재적인 개념이다.

반면, 주관에 이르게 되면, 개체의 사회적 상호작용적 관계가 출현하며 상호작용은 전면적으로 일어나며 그 관계는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호작용으로 성립하는 실체는 개체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사회가 된다. 이런 주관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개념이며 동시에 실현된 개념이다.

“주관은 순수한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이며 이것은 직접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관이 모든 규정과 내용을 제거한 채 한계 없는 자기 동일성의 자유 속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은 일반성이며 통일이어서 다만 추상작용으로 나타나는 그와 같은 부정적 태도를 통해 자기와 통일을 이루고 이를 통해 모든 규정된 것을 자기 내에 해소한 채로 포함하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5)

이와 같은 ‘개념’은 논리적인 범주 가운데 하나이다. 12개 판단 형식은 각기 독자적인 논리적 범주를 이루는데, 헤겔에서 ‘개념’은 이런 논리적 범주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다. 즉 ‘실체’ 범주에서 단초적으로 ‘개념’이 출현하며 본래적인 ‘개념’은 비로소 ‘주체’에 이르러 완성된다.

지금까지 논의한 ‘개념’은 이런 최종적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은 헤겔의 ‘개념’이 그 앞에서 다룬 논리적 범주 ‘질’이나 ‘양’ ‘본질’ 등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논의이다. 즉 ‘개념’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논의다.

그런데 논리적 범주 중의 하나로서 ‘개념’은 헤겔의 다른 논리적 범주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통 규정을 지닌다. 헤겔에서 모든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은 형식상 내용을 자기로부터 규정한다.

그 때문에 헤겔은 앞에서 제기한 ‘개념’에 관한 논의에서 이제 방향을 돌려, 판단 형식으로서 논리적 범주가 지닌 근본적인 특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을 통해 그는 그 자신의 주관 논리학이 기존의 형식적 논리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그를 따라 우리도 이제 논리적 범주의 형식적 의미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헤겔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 곧 칸트이므로 칸트의 기여와 한계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지금 다루는 개념에 관한 일반론의 핵심 주제이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논리적 범주와 일반적 개념 사이의 구별에 주목하지 않는다. 소의 개념이나 꽃의 개념은 추상적인 일반성을 의미한다. 이 추상적 일반성이 구체적 내용과 무관하고 외면적인 형식이듯이, 마찬가지로 논리적 형식 즉 판단 형식이란 구체적인 다양한 판단 내용과 무관하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판단의 형식 즉 논리적 범주는 질과 양, 긍정과 부정을 교차한 네 가지 판단 형식밖에 없다. 판단 형식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긍정과 부정, 개별과 일반이며, 판단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여기서 부정이니 양화니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논리적 추론 형식즉 대당관계라는 직접적 추론 형식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확장해서 12개의 판단 형식이나 범주를 제시한다.

칸트가 이렇게 판단 형식을 확장한 것은 단순히 종류를 확장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이른바 선험철학의 원리를 통해 이런 판단 형식이 지닌 의미 자체를 형식 논리학과 근본적으로 구별해 새롭게 부여했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

1)

헤겔 논리학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헤겔 논리학 1부(존재론, 본질론)는 1813년 부활절 직전 발간되었다. 논리학 2부(개념론)이 발간된 것은 1816년 10월 초였다. 2부가 발간되는데 무려 3년 이상 지체된 것이다.

그는 개념론 앞에 ‘일러두기[Vorbericht]’(1816년 7월 21일 작성)에서 지연된 책임이 “그가 맡은 직책이나 다른 개인적 사정으로 산만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논리학 2부, GW12, 6)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뉴른베르크에서 김나지움 교장을 하고 있었으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의 번잡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책임이라면 1부 논리학 작성 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이 일러두기에서 개념론을 작성하는데 1부를 작성하는 데서 부딪힌 것과는 다른 어려움을 호소했는데, 그런 어려움이 그의 길을 더디게 했던 것이 아닐까?

헤겔의 논리학 1부는 여기에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논리학 2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확립된 논리학의 주요 내용(판단론, 추리론)이 들어 있으니, 논리학이라 불러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1부를 쓸 때는 “발판이 되거나 재료를 주고 전개할 길잡이를 보장할 만한”(논리학 2부, GW12, 5) 이전 철학자들의 노력을 발견할 수 없어서 그야말로 황무지에 아무런 설비도 없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어려움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러나 아예 아무것도 없는데 새로운 것을 짓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2부 개념론에 이르면, 이전 논리학의 “완전히 완성되고 심지어 석화된 재료가” 마치 장애물처럼 깔려 길을 막고 있어서 게다가 저마다 이전 시대에는 진리라는 영예를 부여받은 것이니 “이를 유동화해서 그와 같은 죽은 소재에 생동적인 개념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고 한다.(논리학 2부, GW12, 5)

2)

헤겔이 부딪힌 어려움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큰 문제는 아니지만, 어떻든 논리학 3부 개념론은 한 사년 뒤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진짜 문제는 이런 논리학이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은 부분 다음에 배치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몇 가지 단서를 좇아가 보면, 어느 정도 그 이유가 짐작은 된다. 헤겔은 밤베르크 시절 니트함머로부터 학생들을 위한 논리학 교과서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이게 그가 논리학을 작성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이다. 이에 대해 답장하면서(1808년 5월 20일) 자기의 철학적 견해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이 답장에서 그는 기존 논리학에 관해서 강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그것은 그런 방식으로 지속할 수 없는 것”(논리학 2부, GW12, 323)이라고 평가하며 기존 논리학의 내용이라면 “두 장[오늘날의 A4용지가 아니라 당시 작성의 기준이 된 전지를 의미할 것이다]이면 충분히 서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상의 내용이라면 “심리적으로 느끼는 가련함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4)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미 그는 1801/2 예나 시대에서부터 기존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개편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807년 발간된 그의 예나 시대 체계화 기획 2권을 보면, 이런 시도가 눈에 띈다. 이미 여기서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1. 논리학, 2. 형이상학, 3. 자연철학을 다루는데, 그 가운데 논리학은 1) 단순 관계(질, 양, 무한성)와 2) [절대적] 관계로 나누어지며, 그중 [절대적] 관계는 다시 ① 존재[실체] 관계와 ② 사유 관계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존재 관계는 논리학[GW11]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마지막 ‘절대적 관계’와 일치하며, 사유 관계가 앞으로 다룰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1편의 판단, 추리론과 일치한다.

형이상학은 사유 법칙(동일율이나 배중율, 모순율)과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을 다루고 있다. 헤겔은 사유 법칙은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1편에서 다루고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은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2편에서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룬다.

이상의 편제를 보면, 대 논리학에서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에 속하는 부분이 예나 시대에서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걸쳐 흩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를 통해 한편으로 이미 헤겔이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해서 사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아직 나중에 형이상학에 가까운 객관 논리학과 기존 논리학에 가까운 주관 논리학이라는 구별이 확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자기의 철학에 기초한 새로운 논리학을 발간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이미 니트함머의 권고를 받은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시도의 정체는 1813년 논리학 1부가 발간된 이후 등장한 출판사 광고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광고문에 따르자면, 새로운 논리학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예리함을 끝까지 함께 하며”

② “이를 자기의식으로 성장한 시대 정신에 적합한 형태로 고양하고”

③ “진정하게 해명된 형이상학을 통해 일찍이 너무 성급하게 추방된 신비를 철학에 다시 부여하고”

④ “철학에 본래적인 원리와 고유한 방법을 확신하게 하며”

⑤ “이성에 그 오래된 영원한 권리인 진리에 대한 자립적인 생산자라는 지위를 새로이 바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7)

펠릭스마이너 판 논리학(GW12)의 편집자에 따르자면, 이 광고문의 작성자가 누군지는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의 구절을 보면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헤겔 논리학을 나오자 말자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헤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한다. 아니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정말 이렇게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위의 광고문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광고문의 구절은 헤겔 논리학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는데, 한 가지가 눈에 뜨인다. 즉 자기의식 시대에 적합한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의식 시대란 다름 아닌 칸트가 제시한 선험철학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후진적 독일에 살았던 헤겔로서는 그 시대 원리인 선험철학의 원리가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 논리학을 비롯하여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 달성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 그는 이 시대를 ‘탄생과 이행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4)

칸트의 원리에 따르면 사유 범주는 직관의 다양을 구성하여 객관적으로 통일한다. 사유 범주는 곧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니 그것이 곧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유 범주를 다루는 논리학은 곧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형이상학이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읽어보면 판단과 주어, 술어 등의 구조가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실체’란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양상’이란 곧 술어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미 나중에 칸트에서 드러나는 “논리학이 곧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의 단초가 발견된다고 하겠다.

헤겔은 그런 점에서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이라고 보고 위의 광고문에서 보듯이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이 형식화하면서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예리함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비판적 의식이 담겨 있다.

논리학이 형식화함으로써 논리학은 순수한 필연성의 체계가 되었지만, 대신 공허한 형식적 동어반복에 그치며 그것은 구체적 내용을 상실한 채, 흔히 사유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진리의 인식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마치 공허한 사유의 논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논리학이 다시 진리의 생산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을 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즉 논리적 구조 속에서 존재의 본질적인 구조를 엿보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그의 시대 철학이 수학에서 방법론을 빌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수는 양적인 것이므로, 양적인 것에서나 적용되지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생명이나 정신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면서 철학은 고유한 방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고유한 방법론은 무엇인가, 앞에서 헤겔이 호소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를 생각해 볼 때, 그의 형이상학의 방법론은 바로 논리학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학이 궁극적으로 판단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헤겔의 방법론은 곧 판단 즉 문장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어쩌면 헤겔이야말로 언어 철학의 시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5)

논리학이 형이상학 즉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굳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이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논리학이 전개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헤겔에서 논리학은 추상적 존재가 구체화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가는 생성 또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이다.

논리학에서 처음 출발점인 현존은 가장 개별적인 것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적인 근거가 되는 논리적 범주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존재론이며 이 현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파악하는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그런데 1부 객관 논리학의 마지막에 일반적인 실체가 상호작용을 거쳐 주관적인 개념이 되면서 이제 논리적 범주가 우리 눈앞에 직접 등장한다. 그 결과 여기서부터는 순수한 논리학적 내용이 다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객관 논리학 대신 주관 논리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생각해 보면 ‘객관 논리학’에서 강조점은 논리학보다는 ‘객관’ 즉 존재론에 있으며, ‘주관 논리학’에서는 강조점이 곧 ‘논리학 자체’에 주어진다.

이상을 통해 헤겔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으로 구분하고, 주관 논리학에 와서야 비로소 기존의 논리학에서 다룬 내용을 즉 판단과 추론을 다루게 된 이유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기주의>, 빅토르 세르주(1913년 1월), 옮긴이 박종성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이기주의Egoism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 , 1913년 1옮긴이 박종성

 

이기주의는 모든 동물적 사고방식의 기초를 이룬다필수적인 것이기에그것은 정당하다. “정당하다니” — 아주 그럴듯한 표현이다사실우리의 언어는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이기주의가 원초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우리의 선과 악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것이다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우리는 이기주의를 여러 형태로 어렴풋이 보게 되는데이는 두 가지 본질적인 형태로 축소될 수 있으며이에 따라 우리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사이의 갈등즉 약자의 이기주의와 강자의 이타주의 사이의 갈등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약한 사람은 탐욕스럽고이기적이며편협하다약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힘이 부족한 존재다가난한 사람이 베풀 수 있을까자신에게 관대하고돈을 아낌없이 쓰고낭비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아니다그는 자신의 돈 한 푼까지도 허투루 쓰지 않으며자신의 적은 재산을 늘릴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빈틈없이 살핀다그는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하며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으며—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정당하지만—이타주의와는 정반대에 있다.

 

*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 1890~1947)는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에서 출발해 볼셰비키 혁명가로 활동하다가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이자 작가다. 청년 시절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활동하며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등의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흐름에 깊이 몰입했다.

 

이타주의자란자신을 내어주고애를 쓰며자신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 바로 그이며이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보여준다이타주의는 강자의 이기주의가 논리적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선함관대함헌신자기희생은 힘과 건강의 특징이다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주는 이기주의이다왜냐하면 그러한 감정들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생명력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다른 사람의 생명력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여기서 더 높은(superior)”이라는 말에는 도덕적 가치가 담겨 있지 않다이 말은 삶과의 관계에서 우월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강한 자가 강한 것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우리는 그것이 자기 의지(own will)로 자신을 강하게 만든 개인의 문제일 때만 이를 인정할 수 있다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격한 결정론자는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그와 그의 궤변은 그곳에 내버려두자.

의지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 역시 유전교육그리고 특정 질환에 의해 변형되는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례적인 인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요인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한 부류는 강인하면서도 저속하게 이기적인 개인이고우리가 감탄하게 되는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신념으로 강해져 영웅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약한 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