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

1)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직관의 다양이 선험적 범주에 할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은 공허한 형식이고 그 내용은 직관에서 주어지는 다양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다.

헤겔은 선험적 범주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범주는 일반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자기 규정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념이다. 실재성은 범주 자신에서 나오므로 범주와 실재성, 개념과 대상은 합일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로 된다.

“또한, 여기[칸트적 심리적 관념론]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 다시 직관의 다양이 없으면 내용이 없고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개념이 선천적[apriori] 종합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개념이 그와 같이 선천적 종합이므로, 개념은 정말로 말해 규정성과 자기 내 구별을 지닌다. 규정성은 개념의 규정성이고 따라서 절대적 규정성, 개별성이므로 개념은 모든 유한한 규정성과 다양성의 근거이자 원천이다.”(논리학 2부, GW12, 23)

헤겔은 ‘선천적 종합’, 즉 개념에서 그 규정성이 나온다는 주장을 자기의 철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마치 나르시시즘적 원리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이니 그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은 주관적인 산물이며 그 너머에 대상 자체, 물 자체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헤겔이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규정성이 자기 넘어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개념이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되고 즉 그 자체 존재[an sich]가 대자 존재[fuer sich]와 대타 존재[Sein fuer andres]로 구별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의식, 대자 존재란 곧 개념에서 나온 실재성, 규정성을 의미하며, 대상 곧 대타 존재는 이런 실재성과 규정성 너머에 등장하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화와 구별이 의미하는 것은 곧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오는 순간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물 자체를 헤겔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모든 당대 철학자들의 근본적 아포리아였던 이 문제를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즉 하나의 의식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한다. 의식은 이 규정성을 자기의 범주에서 끌어내지만, 이 규정성은 그 너머 물 자체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 물 자체란 자기의 전제가 되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본래의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에 대해 그 자체적인 존재[Fuer es an sich Sein]’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범주와 물 자체는 서로 모순 속에서 빠지고 이로부터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규정성이 출현하며 이 속에는 그 이전 범주에서 물 자체였던 것이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범주에 대해 또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게 되면서 운동이 계속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의 범주가 개별적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대상이 점차 더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이 맞물려 나가는 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3)

정신현상학에서 서술된 이 의식 경험의 길은 역사적으로 의식의 형태들이 겪어나갔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을 매개하는 것은 의식과 물 자체와의 모순인데, 이런 역사적인 의식 형태가 현재 의식의 평면에 투영되면서 논리적인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에서도 범주는 그 자신에서 규정성과 실재성을 끌어내지만, 이는 곧 그 실재성을 넘어선 것 즉 물 자체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면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범주가 모든 실재성을 포괄하면서 더는 모순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이 범주가 최종적인 절대적 범주이며 곧 진리인 개념 즉 이념이다.

헤겔은 이런 논리적 발전을 통해서 칸트가 좌표축에 할당했던 범주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서 전개한다. 헤겔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과 그 범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만 칸트와 달리 이를 논리적인 발전에 따라서 배치했다. 헤겔은 의식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논리적 계기의 발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 규정성이 나온다는 선천적 종합 개념이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하나의 범주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범주의 자기 내 반성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물 자체와의 모순이지만, 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 사유의 과정이 추론적 이성이 하는 일이며 이 추론적 이성이 사용하는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이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무시했던 반성 개념의 역할을 사유 속에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었다.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서 선험적 통각의 개념을 차이 나게 만든다. 칸트에서 통각과 범주는 서로 구별된다. 통각은 범주를 직관의 다양과 결합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범주 밖에 있다. 마치 그것은 플라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와 아페이론을 결합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구별하여 출현한 하나의 규정성이며, 통각은 이 규정성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다시 새로운 범주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의 본래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서 마침내 선험적 통각은 범주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서 범주의 생성 운동을 통해 출현한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마침내 통각은 자기를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니, 그런 점에서 앞에서 개념이 곧 선험적 통각 또는 자기의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범주의 전개 운동 자체는 결국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칸트는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에 이르렀으나, 범주를 여전히 형식적인 좌표축으로 보면서, 다시 형식 논리학에서의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헤겔은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범주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헤겔은 형식 논리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논리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핵심은 곧 판단이다. 논리적 범주란 곧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계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판단의 형식은 12개가 있는데, 이 12개의 범주는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 범주가 지닌 내용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인 판단으로 나타날 때 지니는 내용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은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의 빨강임’이라는 특정한 사태는 긍정판단의 구체적 내용이지만, 긍정판단의 판단 형식은 개별자인 주어와 일반적인 성질인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 판단형식 자체의 내용은 개별자와 일반자의 관계이다.

이런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정언판단 형식과 구분된다. 이 정언판단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봄꽃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문법적 형식으로만 보면 질적 긍정판단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후자의 경우 주어는 개별자가 아니라 일반자(즉 ‘진달래’)이다. 그리고 술어는 유적 일반자(‘봄꽃’)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형식 자체가 즉 범주가 다른 범주와 지닌 차이가 곧 판단 형식의 내용이다. 이런 판단 형식은 직접적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이미 자체 내 모순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개별자와 일반자가 대립하니, 이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미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런 모순에 부딪혀서 다른 범주 즉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내용을 갖거나 실재성을 갖는다. 개념은 진부한 공허한 동일성이 아니므로 자신의 부정성이나 절대적 규정이라는 계기 속에 구별하는 규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말해 논리학의 내용은 절대적 형식의 그런 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절대적 형식을 통해 스스로 정립한 것이며 따라서 또한 그 자신에 적합한 내용이다.”(논리학 2부, GW12, 25)

어떤 판단 형식 속에 내재하는 모순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아직 경험이 제한되어 있을 때 판단 형식은 통일성을 지니고 그 모순은 감추어지지만, 경험의 발전에 따라서 이 판단 형식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논리적 발전은 이런 경험의 발전을 의식 내에서 즉 현재 의식의 평면 위에 투영된 방식으로 겪을 뿐이다.

5)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판단 형식 그 자체의 내용이 판단 형식과 부딪히는 모순이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헤겔은 이점을 진리의 이념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진리는 알다시피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다. 논리적 범주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일반적 형식이므로 이 일반적 형식에 관해 진리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 자체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판단 형식과 그 내용 사이의 모순이 성립하고 거꾸로 양자의 일치인 진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도 형식과 내용,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인 진리를 향해 나간다. 논리적 범주 역시 진리를 향해 생동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생동적 운동은 모순을 겪어나가는 운동이다.

“논리학은 절대적 형식의 학문이므로 이런 형식성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형식에 적합한 하나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것이 순수한 형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참된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이어야 하면 할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적인 것은 자체 내 규정이나 내용에서 훨씬 풍부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작용력을 지닌 것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27)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

1)

앞에서 헤겔의 ‘개념’이 논리적 범주로서 다른 범주와 구별되는 내용적 의미를 살펴보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논리적 범주가 지닌 의미가 형식 논리학에서의 의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살펴보았다.

이제 개념의 일반적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개념이 선험적 통각 즉 ‘주체’라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칸트에서 주체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의 맥락으로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비판이 가진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데 이는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서술했지만, 여기서 되풀이된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 체계를 그 체계 밖에서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은 비판하는 철학이 전제하는 근본 규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비판받는 철학은 자기의 근본 규정을 고집하면서 비판하는 철학의 근본 규정을 거부하니, 비판은 마치 적이 없는 곳에서 싸움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반박은 적의 힘 속으로 들어가서 적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진을 치는 것이어야 한다. 적을 적 자신 밖에서 공격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를 보유하는 것은 분투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2부, GW12, 15)

그러므로 진정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적이 진지를 차린 곳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내부에서 무너뜨려야 한다. 이것은 곧 그 체계 자신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스스로 부정되는 것이며 즉 그 체계 자신이 유래한 특수한 원리에 대한 부정이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 더 일반적인 체계가 제시되고, 지금까지의 체계는 그 일반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다. 헤겔은 스피노자 체계에 대한 비판도 이런 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성’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2)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헤겔은 이미 본질론에서 ‘절대자’ 개념을 논하면서 어떻게 스피노자가 한계를 드러내는지 보여주었다. 거기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는 출발점에서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원리로 제시했으나, 곧이어 이런 실체를 모든 규정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으로 순수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지닌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 개념으로 발전했다. 라이프니츠는 자기를 산출하는 표상 개념을 통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으나, 그로서는 이런 모나드가 개별적이며 따라서 이런 모나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비판을 넘어서 헤겔은 실체는 곧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헤겔은 이런 주체라는 개념이 곧 칸트의 순수 통각 개념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이며 여기서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범주를 통한 통일이다. 이런 통일을 통해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다양이 통일되면서 객체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주관 속에 있는 범주와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이 통일되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식의 주관적 통일]에 대립하여 표상의 객관적 규정이 지닌 원리는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라는 근본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규정이라고 할 범주를 통해서 주어진 표상의 다양이 규정되니, 이 다양은 의식의 통일로 이끌려진다.”(논리학 2부, GW12, 18)

“이와 같이 대상이 정립되면서 대상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거나 객관적인 대상으로 된다. 따라서 대상은 개념 속에서 이런 객관성을 가지며 이 개념은 대상이 수용되는 자기의식의 통일이다. 따라서 대상의 객관성 또는 개념은 그 자체 자기의식의 본성일 뿐이며 주관 자체와 다른 계기나 규정을 가지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8)

직관의 다양을 통일하는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그러므로 대상을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에서 비로소 ‘개념’으로서 주체가 출현했다고 보며,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이런 선험적 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며, 그 자신을 선험주의자라고 자처하기에 이른다.

3)

칸트의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곧바로 의문에 부딪힌다. 통각의 통일은 결국 주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현상 세계를 산출하기는 하지만, 물 자체를 인식하는 객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헤겔이 직관의 다양을 선험적 통각이 통일하면서 객체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칸트에 대한 오독이 아닐까?

바로 여기서 칸트와 헤겔의 차이점, 헤겔이 칸트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오히려 칸트가 참다운 철학의 원리 즉 개념과 주체에 이르렀으면서도, 다시 이를 내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칸트가 선험적 통각의 개념 즉 범주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것을 마치 ① 선험적 통각의 범주가 마치 하나의 좌표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직관의 다양을 그 주어지는 모습에 따라(즉 직관의 계기와 동시성 사이의 관계 즉 도식) 이런저런 범주에 할당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여기서 직관의 다양과 범주가 통일되기는 하지만, 이 통일은 다만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음양의 축을 설정해놓고 모든 주어지는 것을 이런 음양의 좌표축에 할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좌표축과 대상이 결합하기는 하지만, 이 결합은 외면적인 것에 그친다.

사실 무엇이든 이 음양의 좌표축에 따라서 할당할 수 있으니,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땅은 모두 붉게 칠하고 하늘은 모두 푸르게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나중에는 밤에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듯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색으로 칠해질 수도 있다.

4)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면, 통각의 선험적 범주는 스스로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아닌 ② 공허한 형식적 개념으로 다시 떨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생각은 칸트 자신이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원리와 모순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헤겔이 보기에 이런 선험적 통각의 원리에 따르면 범주가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런 방식에서는 독자적인 공허한 형식이며 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앞에서와같이 주어진 내용을 통해 실재성을 얻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런 내용을 추상하여 즉 그 내용을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개념에서 보면 다만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한다.”(논리학 2부, GW12, 20)

결국, 칸트는 직관의 다양이 일정한 좌표축에 할당된다고 보았으며 선험적 범주가 직관을 규정하는 것은 이런 할당에 한정하면서, 헤겔로 볼 때 칸트가 범한 가장 중요한 실책은 ③ 반성 개념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즉 칸트는 선험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를 제시했다. 이 범주는 지성이 가지고 있는 범주인데, 지성은 판단의 능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험적 통각 속에는 또 다른 능력이 있으니 곧 추리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런 이성의 능력에 속한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인데,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이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의 역할을 다만, 순수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하는 부록에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칸트는 다만 감정과 직관만 지성 앞에 둔다. 우선 그는 이미 그 자신의 이런 계단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단서는 곧 그가 반성 개념에 관한 하나의 논문을 선험 논리학이나 지성론의 부록으로서 덧붙인다는 데 있다.이 반성 개념의 영역은 직관과 지성 사이에 그리고 존재와 개념 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즉 본질론의 영역]이다.”(논리학 2부, GW12, 19)

직관의 다양이 범주에 할당된다는 칸트의 입장은 결국 ④ 범주 전체를 대상에 대해 외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범주 전체는 그 어느 것이든 그 너머에 물 자체가 존재하게 되며, 이런 물 자체에 이 범주를 적용할 수는 없다. 만일 물 자체에 이런 범주를 적용하는 순간 여기서 이율배반이 나오게 된다.

“칸트는 이성의 범주에 대한 태도는 다만 변증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실 이 변증법의 결과를 다만 전적으로 무한한 무인 것으로서 파악하니, 이를 통해 이성의 무한한 통일은 또한 여전히 종합을 잃어버리고 이로써 출발점이었던 사변적이고 진정한 무한한 개념을 잃어 버린다.”(논리학 2부, GW12, 21)

5)

결론적으로 칸트는 출발점에서는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했으나 곧 이를 단순히 범주가 대상에 할당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의 출발점을 부정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한 측면에서] 개념은 인식에서[선험적 인식] 객관적인 것으로서 제시되었으며 따라서 진리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개념과 같은 것은 어떤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실재성은 주관에 대립하는 객관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면서 그와 같은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성을 끌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9)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

1)

헤겔은 개념론에 들어가기 전에 ‘개념 일반에 관해’라는 글을 붙인다. 아마 개념론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문은 약 19쪽에 달하니 1부 객관 논리학 앞에 붙인 부분(‘Vorrede’ 4쪽, ‘Einleitung’ 15쪽, ‘Anfang der Logik’ 8쪽)에 못지않게 길다. 여기서 헤겔이 다루는 핵심적인 주제는 곧 논리학과 관련하여 칸트 선험철학의 의미와 그 한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논의의 출발점은 논리학(헤겔적인 의미에서 주관 논리학을 의미한다)의 출발점인 ‘개념’(개념에 관한 헤겔의 독특한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앞으로 헤겔적인 개념에 관해서는 ‘개념’를 사용하고자 한다)의 출현이다. 다른 학문의 경우 그 출발점, 원리는 단순히 전제되며, 이 전제는 이웃하는 학문에서 빌어오거나 더 높은 차원의 학문에 의존한다. 그러나 논리학은 자기의 원리를 다른 어디에서도 끌어올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서 끌어내야 하니, 논리학은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의 원리는 마치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공리처럼 전적으로 직접 주어지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헤겔은 오히려 논리학의 원리는 모든 존재자 속에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이 구체적 존재를 규정하고 정립하니, 논리학의 근거는 거꾸로 모든 존재자로부터 가장 일반적으로 끌어낸 것이라고 한다. 이 도출의 과정이 논리학의 근거가 생성하는 과정이며, 즉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자기를 정립하는 운동, 즉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과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 즉 개별적 존재에서 일반적 원리로 나가는 운동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 순환한다. 이 순환은 이미 정신현상학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직접적인 것은 매개된 것으로 전환하며 거꾸로 매개된 것은 직접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개념의 생성은 이런 직접적인 생성의 운동을 통해 서술된다. 그러나 개념의 생성이 지닌 의미는 모름지기 생성이 항상 그렇듯이 이행하는 것이 자기의 근거로 반성한다는 것이며 우선 앞선 것이 이행해 들어간 나중의 것이 처음에는 타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처음의 것이 지닌 진리를 이룬다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1-12)

“추상적으로 직접적인 것은 사실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인 한에서 오히려 매개된 것이며 그러므로 이 직접적인 것이 진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그 토대는 이 매개된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논리학 2부, GW12, 11)

이런 관점에서 주관 논리학의 원리는 앞에서 객관 논리학에 존재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다시 절대적 관계로, 여기서 실체관계, 인과 관계, 상호작용을 거쳐 생성된다고 한다. 헤겔은 이 과정을 다시 한번 간략하게 서술한다.

2)

헤겔을 따라 이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자면, 이렇다. 즉 실체관계는 서로 무차별한 우발적 존재의 관계였다면, 인과 관계는 개체가 각자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그 결과 인과 관계의 연쇄가 출현하고 마침내 상호 인과 관계 즉 상호작용이 출현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원인(능동적 실체)과 결과(수동적 실체)는 상호 교체된다. 원인의 작용에 의해 결과는 자신의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가 되면서 원인이 된다. 이 결과를 원인으로 해서 원인도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 즉 원인이 된다.

“능동적 실체는 작용을 통해 즉 자기가 자기를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정립하는 가운데 즉 그와 동시에 이런 전제된 타자 존재 즉 수동적 실체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 원인이나 근원적 실체로서 자기를 계시한다. 거꾸로 이렇게 작용이 가해짐으로써 정립된 것은 정립된 것으로,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며 따라서 수동적 실체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 계시되고 원인은 자기 자신의 타자 속에서 전적으로 다만 자기와 합일할 뿐이다.”(논리학 2부, GW12, 13)

이 두 가지 상호적 인과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 관계를 상호작용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인은 역시 자기를 결과 속에 정립하면서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존재자’(일반성)가 된다. 반면 결과는 근원적인 원인에 대립하는 것이니 이미 부정적인 존재인데, 원인에 의해 부정되면서 자기 부정적인 것 즉 가상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성)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측면 즉 타자가 자기에 동일하게 관계하는 것이거나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의 반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동일성의 관계와 부정성의 관계는 동일한 것이다. 실체는 이제 자기의 대립물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이것이 두 가지로 정립된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이룬다.”(논리학 2부, GW12, 13)

이런 상호작용을 매개로 해서 가능성으로서 절대자가 실제성으로 실체가 되며, 이런 매개는 자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기에 항상적으로 일어나니 절대자의 실현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실현된 절대자가 곧 실체다.

이렇게 절대자가 실현된 실체는 필연적 실현인 한에서 무조건적인 것이니 곧 자동적인 것[automatische]으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우연한 것이다. 이런 실체가 곧 ‘개념’으로 규정된다. 이 ‘개념’이 곧 앞으로 전개될 개념론의 출발점 곧 원리가 된다.

3)

앞에서 말했듯이 개념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매개로 한다. 이 관계를 목적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 양자의 통일성으로서 가정된 절대자가 양자로 분화되며, 이런 분화가 다시 통일되어서 양자의 통일적인 관계 즉 ‘실체’가 출현한다.

이런 통일성으로 가정된 절대자 즉 목적으로서 절대자가 곧 개념이니, 개념은 이미 이런 관계 속에 그리고 이 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운동 속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여기서 목적으로서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고(개념이 부정된 것, 정립된 것) 이 분화된 개체의 상호 관계를 통해(부정된 것의 부정, 정립된 것의 정립됨) 실현되니 이는 과정은 하나의 이중 부정 운동으로 서술할 수 있다.

우선 출발점에 있는 개념은 장차 분화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아직은 단순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의 실현은 이중적인 부정성(부정의 부정)을 통해 회복되는 자기 관계(일반자)이다. 거꾸로 매개가 되는 개체는 개념이 부정된 것이지만, 타자와 관계하면서 다시 이것이 부정되는 것이니, 자기 부정성 또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자)이다.

그러므로 일반자나 개별자는 각자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 있다. 즉 일반자의 자기 관계 속에는 자기 부정성으로서 개별자가 들어 있으며, 개별자의 자기 부정성 속에는 이미 일반자의 자기 관계가 들어 있다

“개념 규정성의 각각은 총체적인 것이며, 각자는 타자의 규정을 자기 내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총체적인 것은 전적으로 다만 하나이지만, 동시에 이와 같은 통일성은 자기 자신을 이러한 이원적인 것이라는 자유로운 가상으로 분화한다. 이런 이원화는 개별자와 일반자로 구별되는 가운데 완전한 대립으로 나타나지만, 이 대립은 그에 못지않게 가상이기에 하나가 파악되고 언표되면 그런 가운데 다른 것도 직접 파악되고 언표된다.”(논리학 2부, GW12, 16)

4)

헤겔에서 이 ‘개념’으로 지칭되는 것은 아주 특정한 것이니 그 출발점은 실체이다. 즉 생명체의 집단(암수 결합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개념의 단초, 출발점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 개념은 주관이 출현하면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겔은 주관을 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단순히 자기 동일성에 머무르는 것, 데카르트적 에고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 주관은 순수한 자기의식 즉 칸트가 말한 통각에 해당하는 것이니, 이 자기의식은 처음에 순수하게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를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하여 대립하는 가운데 다시 양자를 통일하여 자기 관계하는 통일에 이른다. 이런 전개 방식은 개념의 전개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니, 이 주관이야말로 개념의 구체적인 예가 된다.

“개념은 그 자체 자유로운 현존에 이른 한에서는 주관이나 순수 자기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주관은 사실 개념이며 즉 특정한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은 순수한 개념 자체이며 개념으로서 현존하기에 이른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앞에서 개념의 단초인 실체 즉 암수 관계에서는 아직 상호작용은 불완전하다. 암수 관계에서 개념적 실체는 아직 자동적인 우연성에 머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암수 관계는 각자 개별적인 생명체이면서 성적 관계에서만 상호작용이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실체는 아직 개체에 내면적으로 머무르는 잠재적인 개념이다.

반면, 주관에 이르게 되면, 개체의 사회적 상호작용적 관계가 출현하며 상호작용은 전면적으로 일어나며 그 관계는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호작용으로 성립하는 실체는 개체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사회가 된다. 이런 주관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개념이며 동시에 실현된 개념이다.

“주관은 순수한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이며 이것은 직접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관이 모든 규정과 내용을 제거한 채 한계 없는 자기 동일성의 자유 속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은 일반성이며 통일이어서 다만 추상작용으로 나타나는 그와 같은 부정적 태도를 통해 자기와 통일을 이루고 이를 통해 모든 규정된 것을 자기 내에 해소한 채로 포함하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5)

이와 같은 ‘개념’은 논리적인 범주 가운데 하나이다. 12개 판단 형식은 각기 독자적인 논리적 범주를 이루는데, 헤겔에서 ‘개념’은 이런 논리적 범주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다. 즉 ‘실체’ 범주에서 단초적으로 ‘개념’이 출현하며 본래적인 ‘개념’은 비로소 ‘주체’에 이르러 완성된다.

지금까지 논의한 ‘개념’은 이런 최종적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은 헤겔의 ‘개념’이 그 앞에서 다룬 논리적 범주 ‘질’이나 ‘양’ ‘본질’ 등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논의이다. 즉 ‘개념’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논의다.

그런데 논리적 범주 중의 하나로서 ‘개념’은 헤겔의 다른 논리적 범주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통 규정을 지닌다. 헤겔에서 모든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은 형식상 내용을 자기로부터 규정한다.

그 때문에 헤겔은 앞에서 제기한 ‘개념’에 관한 논의에서 이제 방향을 돌려, 판단 형식으로서 논리적 범주가 지닌 근본적인 특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을 통해 그는 그 자신의 주관 논리학이 기존의 형식적 논리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그를 따라 우리도 이제 논리적 범주의 형식적 의미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헤겔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 곧 칸트이므로 칸트의 기여와 한계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지금 다루는 개념에 관한 일반론의 핵심 주제이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논리적 범주와 일반적 개념 사이의 구별에 주목하지 않는다. 소의 개념이나 꽃의 개념은 추상적인 일반성을 의미한다. 이 추상적 일반성이 구체적 내용과 무관하고 외면적인 형식이듯이, 마찬가지로 논리적 형식 즉 판단 형식이란 구체적인 다양한 판단 내용과 무관하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판단의 형식 즉 논리적 범주는 질과 양, 긍정과 부정을 교차한 네 가지 판단 형식밖에 없다. 판단 형식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긍정과 부정, 개별과 일반이며, 판단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여기서 부정이니 양화니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논리적 추론 형식즉 대당관계라는 직접적 추론 형식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확장해서 12개의 판단 형식이나 범주를 제시한다.

칸트가 이렇게 판단 형식을 확장한 것은 단순히 종류를 확장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이른바 선험철학의 원리를 통해 이런 판단 형식이 지닌 의미 자체를 형식 논리학과 근본적으로 구별해 새롭게 부여했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

1)

헤겔 논리학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헤겔 논리학 1부(존재론, 본질론)는 1813년 부활절 직전 발간되었다. 논리학 2부(개념론)이 발간된 것은 1816년 10월 초였다. 2부가 발간되는데 무려 3년 이상 지체된 것이다.

그는 개념론 앞에 ‘일러두기[Vorbericht]’(1816년 7월 21일 작성)에서 지연된 책임이 “그가 맡은 직책이나 다른 개인적 사정으로 산만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논리학 2부, GW12, 6)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뉴른베르크에서 김나지움 교장을 하고 있었으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의 번잡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책임이라면 1부 논리학 작성 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이 일러두기에서 개념론을 작성하는데 1부를 작성하는 데서 부딪힌 것과는 다른 어려움을 호소했는데, 그런 어려움이 그의 길을 더디게 했던 것이 아닐까?

헤겔의 논리학 1부는 여기에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논리학 2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확립된 논리학의 주요 내용(판단론, 추리론)이 들어 있으니, 논리학이라 불러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1부를 쓸 때는 “발판이 되거나 재료를 주고 전개할 길잡이를 보장할 만한”(논리학 2부, GW12, 5) 이전 철학자들의 노력을 발견할 수 없어서 그야말로 황무지에 아무런 설비도 없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어려움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러나 아예 아무것도 없는데 새로운 것을 짓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2부 개념론에 이르면, 이전 논리학의 “완전히 완성되고 심지어 석화된 재료가” 마치 장애물처럼 깔려 길을 막고 있어서 게다가 저마다 이전 시대에는 진리라는 영예를 부여받은 것이니 “이를 유동화해서 그와 같은 죽은 소재에 생동적인 개념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고 한다.(논리학 2부, GW12, 5)

2)

헤겔이 부딪힌 어려움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큰 문제는 아니지만, 어떻든 논리학 3부 개념론은 한 사년 뒤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진짜 문제는 이런 논리학이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은 부분 다음에 배치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몇 가지 단서를 좇아가 보면, 어느 정도 그 이유가 짐작은 된다. 헤겔은 밤베르크 시절 니트함머로부터 학생들을 위한 논리학 교과서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이게 그가 논리학을 작성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이다. 이에 대해 답장하면서(1808년 5월 20일) 자기의 철학적 견해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이 답장에서 그는 기존 논리학에 관해서 강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그것은 그런 방식으로 지속할 수 없는 것”(논리학 2부, GW12, 323)이라고 평가하며 기존 논리학의 내용이라면 “두 장[오늘날의 A4용지가 아니라 당시 작성의 기준이 된 전지를 의미할 것이다]이면 충분히 서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상의 내용이라면 “심리적으로 느끼는 가련함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4)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미 그는 1801/2 예나 시대에서부터 기존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개편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807년 발간된 그의 예나 시대 체계화 기획 2권을 보면, 이런 시도가 눈에 띈다. 이미 여기서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1. 논리학, 2. 형이상학, 3. 자연철학을 다루는데, 그 가운데 논리학은 1) 단순 관계(질, 양, 무한성)와 2) [절대적] 관계로 나누어지며, 그중 [절대적] 관계는 다시 ① 존재[실체] 관계와 ② 사유 관계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존재 관계는 논리학[GW11]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마지막 ‘절대적 관계’와 일치하며, 사유 관계가 앞으로 다룰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1편의 판단, 추리론과 일치한다.

형이상학은 사유 법칙(동일율이나 배중율, 모순율)과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을 다루고 있다. 헤겔은 사유 법칙은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1편에서 다루고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은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2편에서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룬다.

이상의 편제를 보면, 대 논리학에서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에 속하는 부분이 예나 시대에서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걸쳐 흩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를 통해 한편으로 이미 헤겔이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해서 사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아직 나중에 형이상학에 가까운 객관 논리학과 기존 논리학에 가까운 주관 논리학이라는 구별이 확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자기의 철학에 기초한 새로운 논리학을 발간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이미 니트함머의 권고를 받은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시도의 정체는 1813년 논리학 1부가 발간된 이후 등장한 출판사 광고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광고문에 따르자면, 새로운 논리학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예리함을 끝까지 함께 하며”

② “이를 자기의식으로 성장한 시대 정신에 적합한 형태로 고양하고”

③ “진정하게 해명된 형이상학을 통해 일찍이 너무 성급하게 추방된 신비를 철학에 다시 부여하고”

④ “철학에 본래적인 원리와 고유한 방법을 확신하게 하며”

⑤ “이성에 그 오래된 영원한 권리인 진리에 대한 자립적인 생산자라는 지위를 새로이 바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7)

펠릭스마이너 판 논리학(GW12)의 편집자에 따르자면, 이 광고문의 작성자가 누군지는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의 구절을 보면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헤겔 논리학을 나오자 말자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헤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한다. 아니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정말 이렇게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위의 광고문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광고문의 구절은 헤겔 논리학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는데, 한 가지가 눈에 뜨인다. 즉 자기의식 시대에 적합한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의식 시대란 다름 아닌 칸트가 제시한 선험철학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후진적 독일에 살았던 헤겔로서는 그 시대 원리인 선험철학의 원리가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 논리학을 비롯하여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 달성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 그는 이 시대를 ‘탄생과 이행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4)

칸트의 원리에 따르면 사유 범주는 직관의 다양을 구성하여 객관적으로 통일한다. 사유 범주는 곧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니 그것이 곧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유 범주를 다루는 논리학은 곧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형이상학이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읽어보면 판단과 주어, 술어 등의 구조가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실체’란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양상’이란 곧 술어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미 나중에 칸트에서 드러나는 “논리학이 곧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의 단초가 발견된다고 하겠다.

헤겔은 그런 점에서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이라고 보고 위의 광고문에서 보듯이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이 형식화하면서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예리함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비판적 의식이 담겨 있다.

논리학이 형식화함으로써 논리학은 순수한 필연성의 체계가 되었지만, 대신 공허한 형식적 동어반복에 그치며 그것은 구체적 내용을 상실한 채, 흔히 사유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진리의 인식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마치 공허한 사유의 논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논리학이 다시 진리의 생산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을 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즉 논리적 구조 속에서 존재의 본질적인 구조를 엿보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그의 시대 철학이 수학에서 방법론을 빌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수는 양적인 것이므로, 양적인 것에서나 적용되지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생명이나 정신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면서 철학은 고유한 방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고유한 방법론은 무엇인가, 앞에서 헤겔이 호소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를 생각해 볼 때, 그의 형이상학의 방법론은 바로 논리학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학이 궁극적으로 판단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헤겔의 방법론은 곧 판단 즉 문장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어쩌면 헤겔이야말로 언어 철학의 시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5)

논리학이 형이상학 즉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굳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이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논리학이 전개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헤겔에서 논리학은 추상적 존재가 구체화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가는 생성 또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이다.

논리학에서 처음 출발점인 현존은 가장 개별적인 것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적인 근거가 되는 논리적 범주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존재론이며 이 현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파악하는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그런데 1부 객관 논리학의 마지막에 일반적인 실체가 상호작용을 거쳐 주관적인 개념이 되면서 이제 논리적 범주가 우리 눈앞에 직접 등장한다. 그 결과 여기서부터는 순수한 논리학적 내용이 다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객관 논리학 대신 주관 논리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생각해 보면 ‘객관 논리학’에서 강조점은 논리학보다는 ‘객관’ 즉 존재론에 있으며, ‘주관 논리학’에서는 강조점이 곧 ‘논리학 자체’에 주어진다.

이상을 통해 헤겔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으로 구분하고, 주관 논리학에 와서야 비로소 기존의 논리학에서 다룬 내용을 즉 판단과 추론을 다루게 된 이유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기주의>, 빅토르 세르주(1913년 1월), 옮긴이 박종성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이기주의Egoism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 , 1913년 1옮긴이 박종성

 

이기주의는 모든 동물적 사고방식의 기초를 이룬다필수적인 것이기에그것은 정당하다. “정당하다니” — 아주 그럴듯한 표현이다사실우리의 언어는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이기주의가 원초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우리의 선과 악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것이다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우리는 이기주의를 여러 형태로 어렴풋이 보게 되는데이는 두 가지 본질적인 형태로 축소될 수 있으며이에 따라 우리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사이의 갈등즉 약자의 이기주의와 강자의 이타주의 사이의 갈등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약한 사람은 탐욕스럽고이기적이며편협하다약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힘이 부족한 존재다가난한 사람이 베풀 수 있을까자신에게 관대하고돈을 아낌없이 쓰고낭비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아니다그는 자신의 돈 한 푼까지도 허투루 쓰지 않으며자신의 적은 재산을 늘릴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빈틈없이 살핀다그는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하며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으며—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정당하지만—이타주의와는 정반대에 있다.

 

* 빅토르 세르주(Victor Serge, 1890~1947)는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에서 출발해 볼셰비키 혁명가로 활동하다가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이자 작가다. 청년 시절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활동하며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등의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흐름에 깊이 몰입했다.

 

이타주의자란자신을 내어주고애를 쓰며자신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 바로 그이며이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보여준다이타주의는 강자의 이기주의가 논리적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선함관대함헌신자기희생은 힘과 건강의 특징이다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주는 이기주의이다왜냐하면 그러한 감정들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생명력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다른 사람의 생명력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여기서 더 높은(superior)”이라는 말에는 도덕적 가치가 담겨 있지 않다이 말은 삶과의 관계에서 우월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강한 자가 강한 것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우리는 그것이 자기 의지(own will)로 자신을 강하게 만든 개인의 문제일 때만 이를 인정할 수 있다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격한 결정론자는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그와 그의 궤변은 그곳에 내버려두자.

의지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 역시 유전교육그리고 특정 질환에 의해 변형되는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례적인 인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 요인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한 부류는 강인하면서도 저속하게 이기적인 개인이고우리가 감탄하게 되는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신념으로 강해져 영웅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약한 개인이다.

[신간 소개] 박종성, <막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의 소유>, 커뮤니케이션북스, 2026 [한철연 소식]

 

 

[신간 소개] 박종성, <막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의 소유>, 커뮤니케이션북스, 2026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어떻게 우리의 삶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외부의 힘에 종속되지 않고 나 자신을 창조하며 소유할 수 있을까? 막스 슈티르너는 개성을 짓밟는 교리와 신념, 개인을 둘러싼 뿌리 깊은 고정 관념에 타협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로 맞선다.

대의의 근거를 ‘창조가 깃든 무’에 두고 나에게 이질적인 모든 신성한 것을 파괴하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자기사랑과 자기해방의 철학은 우리에게 유일자가 되는 방법, 즉 정신과 정신세계의 창조주이자 소유자로 우뚝 설 방법을 가르쳐 준다.

 

막스 슈티르너-유일자와 그의 소유, 박종성 지음, 145쪽, 커뮤니케이션북스.

 

이 책은 슈티르너의 주저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중심으로 슈티르너 사상을 열 가지 키워드로 살핀다. 자기중심성이 어떻게 종교·철학·도덕 배후의 공허함을 폭로하고 서로가 서로를 향유하고 이용하는 ‘유일한 개인들의 연합’으로 나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슈티르너가 어떻게 니체에 앞서 허무주의로의 전환을 포착하고 ‘창조가 깃든 무’를 반본질주의적인 자아 개념으로 세웠는지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를 둘러싼 평가는 다채롭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슈티르너 철학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이는 슈티르너가 마르크스와 헤겔 좌파들에게 미친 막대한 영향을 방증한다. 이후에도 슈티르너는 시대에 따라 니체의 선구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초기 포스트구조주의자, 개인주의 아나키즘의 시조로 재평가받았다. 그만큼 슈티르너의 사유는 지속력과 여러 세대에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이제 그 사유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는 1806년 바이에른주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07년 4월 19일,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약사와 재혼했고, 서프로이센의 쿨름에 정착했다. 20세가 되었을 때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문헌학,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헤겔의 강의에 출석했다. 1841년 베를린에 머무르는 동안 자유인 모임에 참여했다. 주저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있으며, 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슈티르너 비평가들’을 써서 반박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와 장바티스트 세의 글을 번역했다. 1852년에 ‘반동의 역사’를 썼고, 1856년 벌레에 물린 뒤 열병을 앓다가 그해 6월 25일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브루노 바우어와 루트비히 불만이 참석했다.

지은이 박종성은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2014)’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으로는 “슈티르너의 ‘자유주의’ 국가 비판의 현대적 의미”(2011),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2020, 제8회 소송학술상 수상), “유일한 사람의 사랑”(2021),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2022), “철학자를 조롱하는 철학자”(2023)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이고, 한신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글은 <매일일보>에 게재된 신간 소개를 재인용한 것입니다.

https://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1401362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건국대학교 다자인 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

 

(이어서)

 

2. 『형이상학8(Η)(1~6)

8(Η)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실체들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간다. 모든 감각적 실체는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질료 또한 실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대립적인 변화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기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생성과 소멸이 수반되지는 않는데, 어떤 것이 있는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생성하거나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체와 질료가 일반적으로 실체라 일컬어지지만, 이것이 아직 가능적 실체이기 때문에, 감각적 실체 중 무엇이 현실적인 실체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있는 것들이 그 합성구조에 따라 있거나, 결합에 따라,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질료가 다르면 그것의 현실태가 다르고 정식이 다르다는 논의는 분명하다. 한편, 문지방에 대하여 ‘방과 방 혹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실적인 문지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고, 앞선 질료와 더불어 말한다면 돌로 이루어진 복합실체를 말하게 된다. 이로써 감각적 실체가 있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질료는 가능적 실체이고, (2) 형상(형태)은 현실적 실체이며, (3) 이 둘이 결합한 복합실체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실적 실체는 바로 형상이다.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부를 때, 이 이름이 합성실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현실태나 형태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때가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형상과 현실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현실태로서의 집은 합성구조(즉 형태)이지 이 합성구조에 속하게 되는 벽돌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장과 5장은 질료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적 실체에 대하여, 각 사물엔 그 고유한 질료가 있음을 논한다. 예를 들어 ‘이것’의 질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것’이 불이나 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답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질료들이 궁극적으로는 불이나 흙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의 질료 또한 불과 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흙이 사람의 고유한 질료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나 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실체를 이루는 첫 번째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최종적인 질료와 형태는 동일한 것이자 하나이고, 감각적 실체가 하나인 이유는 질료와 형태가 하나이기 때문에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질료로부터 형태로의 운동에는 제작자 이외의 다른 원인이 없다. 한편, 질료를 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 즉시 하나인 것이다.

 

 

3. 『형이상학9(Θ)권 전반부 (1~8)

9(Θ)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적 탐구를 수행한다. ‘가능태’와 ‘현실태’는 본래 변화 및 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개념들의 사용 범위를 넓혀 자신의 존재론적 탐구에 도입한다. 먼저 그는 가장 주도적인 뜻에서의 ‘가능태’에 대해 규정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뒤나미스’(가능태)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이다. 따라서 ‘뒤나미스’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능동적 능력), 어떤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수동적 능력), 어떤 힘이 가해질 때 변화를 겪지 않는 능력, 어떤 작용이 잘 이루어지는 능력 모두를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

운동 및 변화의 원리들은 어떤 경우 생명이 없는 것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경우 생명이 있는 것들, 즉 영혼이나 영혼의 이성적 부분 안에 있다. 이성을 동반하는 능력은 동일한 것이 반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가령 의술의 경우 본성에 따라 다루는 것은 건강이지만, 부수적인 뜻에서는 질병을 다루기 때문에 질병과 건강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비이성적 능력은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낳는다는 단순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참으로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즉 가능태 혹은 능력을 부정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메가라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집을 짓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집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주장이 결국 운동과 생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어떤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 존재에서 현실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에 아무런 불가능한 점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과 관련된 능력, 즉 가능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면, 6장에서 그는 현실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어떤지를 규정한다. 먼저 그는 ‘가능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대상이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현실태라고 말한다. 예컨대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에 대해 집을 짓고 있는 자, 잠자는 자에 대해 깨어있는 자, 눈을 감았지만 시력이 있는 자에 대해 보고 있는 자 등등의 예시에서 앞의 것은 가능태에, 후자의 것은 현실태에 분류된다.

이후의 논의는 “가능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 앞선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측면, 즉 정식(로고스)과 시간과 실체에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앞선다고 말한다. 첫째, 가능적인 것은 그것의 정식 안에 이미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능력은 어떤 ‘현실적 활동’을 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능적인 것이다. 둘째, 시간의 관점에서 씨앗은 곡식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가능적인 곡식으로써 씨앗이 곡식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에 시간적으로 앞서서 다시 곡식이 현실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처럼 종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시간적으로도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앞선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현실적인 것은 실체에서의 선행성 또한 갖는다. (1) 먼저 생성 과정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오는 것보다 더욱 완전하다. (2) 또한 모든 생성이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진행된다고 할 때, 현실적인 것은 목적으로서 이 생성의 과정 전체 가장 앞에 놓인 시초이다. (3) 질료가 가능적으로 있는 것은 그것이 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가능적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4) 모든 현실적 활동은 목적이거나 목적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활동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능력에 앞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영원한 것들을 논의에 끌어들여, 보다 주도적인 뜻에서 현실적인 것이 갖는 선행성을 논한다. 영원한 것들의 경우, 그것들은 실체의 측면에서 가멸적인 것들에 앞서며 영원한 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있지 않다. 또한 가멸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치면서도 이 세계 자체는 유지되는데, 이는 바로 태양의 운행이나 천체 운동과 같은 영원한 운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 속에 있는 것들은 이 불멸하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1. 서론

『논어』에는 여러 인간상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군자(君子)가 있다. 『논어』 내에서 군자는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백성을 이끌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흔히 ‘성인군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군자는 유가(儒家)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자 이상적인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다.

그런데 『논어』에는 군자 이외에 인자(仁者) 그리고 지자(知者)와 같은 인간상이 등장한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군자는 이미 인자와 지자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인다. 군자가 이상적이고 모범이 되는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라면 훌륭한 성품과 덕성 그리고 지적 역량을 모두 갖추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어』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군자가 인자와 지자를 포함하는 것처럼, 또 어떨 때는 군자, 인자, 지자가 각각 별개의 개념처럼 보인다.

한 개념은 다른 개념과 명확히 구분되며 문장 몇 줄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중국 고대사상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 그리고 그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사상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강독 모임 중 더 알아보고 싶었던 인자, 지자, 군자의 의미에 대해 모임에서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공자 초상 이미지

    2. 본론

2.1. 인자(仁者)와 군자(君子)

우선 인자와 군자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생긴 구절은 「옹야」(雍也) 편에 있다.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는 공자에게 인자에 대해 질문한다.

 

재아가 물어 말했다. “인자는 누군가 그에게 ‘우물 안에 인(仁)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에 따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군자는 (우물 앞까지) 갈 수는 있어도 (우물에) 빠질 수는 없다. 속일 수는 있어도 해칠 수는 없다.”

이 구절을 읽고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재아는 인자에 대해 질문했는데 왜 공자는 군자로 대답했는가?’이다. 마치 인자가 곧 군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재아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공자가 일부러 ‘군자’라는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혹은 일상 대화이기 때문에 생긴 사소한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인자, 군자 등의 개념 자체가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분명한 점은 인자와 군자는 아주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두 인간상 모두 『논어』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바람직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라는 근거가 『논어』 내에 있다. 「헌문」(憲問) 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이면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소인으로서 인한 사람은 아직 없다.”

위 구절에 따르면 군자 중에는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다. 반면 소인(小人)이면서 동시에 인자인 경우는 없다. 다시 말해 군자는 인자인 경우와 인자가 아닌 경우로 나뉘고, 소인은 인자가 아니다. 즉 군자이면서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으므로 인자와 군자는 동격으로 볼 수 없다.

위 구절처럼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언급하는 내용은 『논어』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리인」(里仁) 편을 보면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하고 소인은 이익만을 바란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는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군자가 철저하게 소인과 대비되는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소인이 땅(재물)을 생각할 때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이 이익을 바랄 때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한다. 또 소인이 이(利)에 밝을 때 군자는 의(義)에 밝다. 군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덕, 법도, 의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가치이다. 소인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물이라면 군자는 집단을 바로 세우는 인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군자는 인자와 구분된다. 군자는 덕이 충만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책임과 역할을 진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군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의(義)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도 사회 정의와 관련이 깊다. 의는 몫의 분배와 규범에 관한 덕목이다. 올바른 기준에 따라서 재화나 지위를 나누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칙과 제도를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또는 지키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의(義)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제 가족을 보살피고 이웃을 돕는 일상적인 일보다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일일 수밖에 없다. 공자 이전 시기에 군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고 공자 역시 군자를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는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군자는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인자와 다르다.

그러나 인자와 군자는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많다. 군자는 잠재적 인자이다. 이 말은 모든 군자는 인자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와 의가 분리 불가능하듯 인 또한 군자가 품고 살아야 할,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덕목이다. 그러므로 인자와 군자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지만, 유가 사상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을 설명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조각들이다.

 

(계속)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

1)

특정한 인과성은 실재적인 인과성이다. 이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 외에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가짐으로써, 원인과 결과가 양방향으로 무한히 진행하는 것으로 된다. 이런 무한 진행이 자기로 되돌아오면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그 자신의 결과를 원인으로 하게 된다.

이런 상호 작용의 출발점은 서로 엇갈리는 관계다. 즉 한편에서는 원인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원인으로 되어 결과를 자기의 결과로 정립한다. 다른 한편 원인은 자기의 기체를 전제로 하는데, 이 기체의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의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기서 원인과 그 기체의 측면은 서로 외면적이며 마찬가지로 결과에서 결과의 측면과 원인이 되는 측면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원인이 결과가 되는 인과적 관계가 결과가 원인이 되는 인과 관계가 서로 엇갈린다. 두 측면은 상호적이지만,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두 생산자의 교환을 생각해 보자. 하나의 생산자는 곡식을 만들어 팔고 다른 생산자는 옷을 만들어 판다. 곡식 생산자는 곡식을 옷 생산자에게 팔지만, 옷 생산자에게서 옷을 구입한다. 이 두 관계는 상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서로 엇갈리는 관계일 뿐이다. 즉 두 측면은 서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인과 관계는 상호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차례로 연결하여 인과의 연쇄로 삼더라도 무방하다.

“원인은 이제 작용한다. 왜냐하면, 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위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인은 자신에 전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자신을 타자로[기체] 즉 수동적 실체로 삼아서 자신에 작용한다. 따라서 원인은 수동적 실체가 지닌 타자성[기체]을 지양하여 이 수동적 실체[기체] 속에서 자기 자신[원인 실체]으로 되돌아온다.”(논리학, GW11, 405)

“두 번째로 원인은 이와 동일한 것을 규정한다. 원인은 이 수동적 실체의 타자성[원인에 대한 타자성]을 지양하는 것 또는 자기 내 복귀를 하나의 규정성으로 정립한다. 이 정립된 것은 동시에 원인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므로 우선 그 원인의 결과이다. 거꾸로 이 원인은 전제하는 것인 한, 자기 자신을 자기의 타자[기체]로 규정하므로 결과를 다른 실체 즉 수동적 실체 속에 정립한다.”(논리학, GW11, 405)

즉 원인이 원인이 되려면 전제된 기체에 부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결과는 원인에 의해 정립되면서(규정성을 지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체 즉 원인의 타자성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2)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로 넘어가는 매개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가 있다. 작용과 반작용은 여전히 외적인 반성에 머무르는 것인데,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를 보는 관점을 전도한 것이다.

즉 원인의 측면에 서서 보면, 원인이 직접적인 것이고 결과는 그 원인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결과 자신이 원인이 되어 원인은 결과가 된다. 다만 여기서 작용하는 방향이 반대이다.

예를 들어 태양에 지구가 충돌한다면, 이는 하나의 관점에서는 태양이 인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태양을 밀어내는 척력이 발휘된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인력의 힘이나 척력의 힘은 양적으로 동일하며 다만 방향만 대립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태양이 능동적 실체로서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이렇게 관점을 뒤집어 보면, 능동성과 수동성이 전환된다. 즉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원인의 받아들이는 것은 이 결과 내에 이미 그런 것으로 정립될 가능성[An sich Sein]이 실제로 정립되는 것일 뿐이다.

이는 능동적 실체 역시 마찬가지다. 능동적 실체가 힘을 행사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가 그런 힘을 받을 만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 실체는 강제당한다. 강제는 위력의 현상이거나 외적인 것으로서 위력이다. 그러나 위력이 외적인 것은 다만 원인이 되는 실체가 자기 자신을 [결과로] 정립하는 가운데 동시에 [타자를] 전제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양된 것으로서 정립하기 때문일 뿐이다.”(논리학, GW11, 405)

“수동적 실체가 타자에 의해 강제당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에 다만 정당한 권리가 행사되는 것이다. 수동적 실체가 잃어버리는 것은 그것이 지닌 직접성이며 즉 그것에 낯선 실체성이다. 수동적 실체가 자기에 낯선 것으로서 획득하는 것 즉 정립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규정이다.”(논리학, GW11, 406)

능동적 실체가 행사하는 것이 작용이라면, 수동적 실체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수동적 실체 자신의 반작용이다. 그것은 수동적 실체의 잠재적 존재가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수동적 실체의 반작용은 이중적인 것이다. 즉 우선 이 수동적 실체가 지닌 모습이 정립된다. 두 번째로 수동적 실체가 그것으로 정립되는 것이 그것의 그 자체 존재로서 서술된다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6)

“둘째로 반작용은 최초의 작용하는 원인에 대립한다. 이전에 수동적 실체가 자기 내에서 지양한 작용은 바로 최초의 원인이 작용한 것이다. 이 작용이 지양되면서 그 원인이 되는 실체성도 지양된다.”(논리학, GW11, 406)

4)

이런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서 마침내 원인과 결과의 상호 작용이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능동적 실체이며 동시에 수동적 실체 즉 결과이니, 원인과 결과가 단순히 엇갈리는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원인 자체가 곧 결과이다. 또한, 작용과 반작용처럼 단순히 관점의 전환에 의해 원인이 결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결과이고 결과를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원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과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 구별은 더는 구별이 되지 못하고 투명하게 된다.

이전에 특정한 인과성에서 기체와 실체, 토대와 인과 관계가 서로 외면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구분 자체가 해소된다. 원인의 기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 자체가 자신의 기체이다. 그것은 결과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과도 결과가 아닌 독자적 기체가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자체가 자기를 원인으로 만드는 기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바이메탈을 보자. 열을 받으면 많이 늘어나는 물질과 적게 늘어나는 물질 즉 서로 대립하는 성질을 지닌 두 물질이 결합한다. 이 바이메탈에 냉장 콤프레서가 연결되면, 냉장고가 된다.

냉장고 온도가 올라가면 바이메탈이 굽어져서 냉장 콤플레서가 작동하여 온도가 내려간다. 온도가 내려가면 바이메탈이 반대로 펼쳐져서 냉장 콤플레서의 작동이 중지하면서 온도가 다시 올라간다. 이런 상호적 운동을 통해 냉장고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 여기서 냉장 콤플레서 작동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냉장 콤플레서 중지의 원인이며 이 중지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곧 작동의 원인이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가 곧 원인이다.

5)

원인은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므로 자기 매개하는 것이다. 결과 역시 자기의 결과를 통해 결과로 되는 자기 매개이다. 곧 원인은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하고 결과는 자기 자신을 결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매개, 자기 근거를 통해 지금까지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일어난 상대적 필연성의 운동은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발전한다.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기에 더는 타자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니 항상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연성과 우연성이 통일로서 절대적 필연성이 출현한다. 즉 “한편으로 결합과 관계로서 직접적 동일성”과 다른 한편으로 “구별이 지닌 절대적 우연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런[특정한 인과성에서] 내적 필연성이나 잠재성은 인과성의 운동을 지양한다. 이를 통해 양 측면이 지닌 실체성[우발성]은 상실되며 필연성이 은폐를 벗어난다.”(논리학, GW11, 409)

이런 절대적 필연성은 동시에 자유(자발성)의 체계이다. 냉장고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므로 이 냉장고는 마치 목적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목적을 추구하는 자발적 존재다. 그러나 사실 이 합목적적 운동의 구조는 서로 대립하는 물질의 상호 작용에 있다.

“거꾸로 동시에 우연성은 자유로 된다. 왜냐하면, 필연성을 이루는 측면들은 독자적으로 자유롭지만, 서로 비추는 실제성이라는 형태를 가지지 않으나 이제부터 동일성으로 정립되면서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이루는 총체성이 이제 또한 서로 동일한 총체성으로 비추거나 서로 동일한 반성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409)

6)

이와 같은 자유는 아직 단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자유는 마침내 개념 운동에 이르러 등장하며, 아직은 단순히 자발적인 합목적적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개념 운동의 출발점이 놓인다.

능동적 실체는 개별적 개념이 된다. 이것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 또는 “자기와 동일한 부정성”이다.(논리학, GW11, 398)

수동적 실체는 일반적 개념이 된다. 여기서 직접적인 것이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단순한 동일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규정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정립된 것” 이다.(논리학, GW11, 398)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특수성으로서 개념이다. 이 매개는 구별된 개체다. 이 개체는 자립적이며 구별된 것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잠재적으로는 일반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상호 작용 속에 들어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 즉 개별자로 된다. 그러므로 이 특수성이 곧 가상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구별된 계기이지만, 동시에 각자 자기 속에 이미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 개별성의 부정성은 자기 부정성이므로 곧 동일성이다. 일반성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동일성이다. 특수성의 자립적 개체는 이미 부정적인 것이며 앞으로 부정될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부정의 부정을 통해 통일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총체성은 동일한 반성이어서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면서 앞에서 말한 두 가지로 자기를 구분하지만, 그런 구별은 완전히 투명한 구별 속에 즉 특정한 단순성 속에 또는 양자에 동일한 동일성인 단순한 규정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념이고 주관성의 영역 또는 자유의 영역이다.”(논리학, GW11, 409)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

1)

앞에서 우발적 존재에서 반성은 실존에 머물러 있어서 아직 본질이 그런 우발적 존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또는 공허를 본질로 한다고 했다. 이제 인과 관계에 이르러 처음으로 반성이 내적으로 되면서, 개체는 본질이 그 속에 비친 것 즉 현상으로 된다.

헤겔에서 인과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이처럼 현상으로서 개체이니, 이 개체는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이 개체가 지닌 양 측면이 곧 인과 관계의 핵심을 이룬다.

헤겔의 인과 개념은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인과 개념과 구분된다. 인과 관계는 철학상 법칙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지며 그 때문에 흄의 비판 이래로 부정되어왔다. 법칙 관계란 흔히 두 자립적 존재가 조건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하나의 존재가 있으면 다른 존재가 있는데, 이것이 항상 반복되면 법칙이 된다.

그런데 인과 관계는 이 두 자립적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데, 흄에 의하면 실제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지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과 관계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개별적인 것들 사이의 법칙 관계 또는 조건 관계뿐이라고 한다.

칸트는 흄의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이런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더라도 항상 계기해서 지각된다면, 선험적 주관은 이를 인과 관계로 파악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2)

헤겔은 힘의 관계를 인과 관계를 구분해서 다룬다. 법칙 관계 또는 힘의 관계와 인과 관계는 관계의 성격에서 구분된다. 전자는 현상 편에서 다루어지는 물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며, 후자는 실제성 편에서 다루어지는 실체적 개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다.

하나의 물체는 여러 성질을 지니고, 이 성질은 서로 관계한다. 이 성질이 다른 성질과의 관계는 양자 사이에 미분적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힘은 한편으로 발산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렴하면서 두 성질을 관계하게 한다. 이것이 힘의 외화라는 관계다. 헤겔은 이 힘의 외화를 통해 두 성질 사이의 법칙 관계가 성립된다고 본다.

반면 인과 관계는 유적 본질이 실체로 펼쳐지는 반성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종적 개체는 가능적인 것이며 다른 개체는 실제적인 것이다. 여기서 가능적인 것은 원인이 되고 실제적인 결과가 된다.

가능성의 실현은 앞에서 헤겔이 말했듯이 자기를 펼치는 운동이며 자기를 이중화해서 계시하는 운동이다. 여기서는 원인의 원인성이 결과에 전달되어 결과를 원인과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원인은 인과적 작용 속에서 자기의 원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과 역시, 인과 작용에 의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같은 것으로 정립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면, 하나의 당구공은 자신이 지닌 운동량을 잃어버리고 이 운동량을 다른 당구공에 전달한다. 즉 가만히 있던 당구공이 운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과 관계는 조건 관계와 달리, 원인과 결과가 인과 작용에서 스스로 변화한다. 원인은 원인성을 잃고 결과는 원인성을 띠게 되니, 이런 변화를 통해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단순한 조건적 관계 즉 법칙 관계와 구별할 수 있다.

3)

우발적 존재에서 일어난 반성 운동이 공허를 본질로 하는 것과 달리 여기서 일어나는 반성 운동은 일정한 본질을 설정한다. 인과 관계는 실체적 개체 사이의 반성 운동을 전제로 하지만, 이런 반성 운동은 아직 일면적인 것에 그치므로 인과 관계는 외적인 반성 운동에 그치고 장차 내적 반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과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전환한다.

헤겔은 인과 관계를 형식적 인과성, 특정한 인과성, 작용과 반작용 관계로 발전적으로 서술한다. 그 가운데 형식적 인과성은 인과의 단순한 개념만을 다룬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과성은 특정한 인과성에서 시작한다.

우발적 존재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통해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개체가 맺는 동일성의 관계를 통해 가능적인 것이 실현되어 실제적인 것으로 된다. 이때 가능적인 것이 원인이고 실제적인 것이 결과다.

원인이 이런 원인이 되려면, ① 처음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고, 가능적인 것[An sich Sein]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양된 것으로서 원인은 인과 관계 속에서는 오히려 직접적인 것, 근원적인 것이며, “자기로부터 시작하고 타자로부터 촉발되는 법이 없이 자기로부터 산출하는 자립적 원천이다.”(논리학, GW11, 398)

원인이 원인으로서 자기 내 반성과 원인이 결과를 규정하거나 정립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이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이 통일되어 있다. 즉 원인이 원인이 되면 즉시 다른 것에 작용[wirken]을 해야 한다.

“원인의 근원성이란 원인의 자기 내 반성이 곧 규정하는 정립이며, 거꾸로 양자는[자기 내 반성과 규정이] 하나의 통일을 이룬다는 데 있다.”(논리학, GW11, 398)

② 자기의 위력을 통해 이 정립된 규정성을 결과 속에 정립한다. 원인은 결과 속에서 자기와 동일한 것 즉 “정립된 것으로서 정립된 것”(논리학, GW11, 398)에 이르므로 ③ 자기 관계하는 가운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이제 원인은 원인으로서 자기를 소실한다. 결과는 처음에는 ④ 직접적인 것이었으나 이제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정립된 것으로 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서 “결과는 일반적으로 원인이 포함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으며 거꾸로 원인은 결과 속에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논리학, GW11, 398)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인데, 이는 원인의 가능성이 펼친 것이며, 자기를 이중화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단순한 이행도 아니고, 외화[형성]도 아니며 자기를 타자에 전달하는 것이니, 헤겔은 원인을 ‘위력을 지닌 것[Macht]’으로 규정한다.

4)

형식적 인과 관계는 인과 관계에 관한 개념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과 관계는 특정한 인과 관계이다. 특정한 인과 관계는 원인과 결과가 각기 직접적인 실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각자는 고유한 내용을 지니며, 그 가운데 하나의 내용에서 인과 관계가 맺어진다.

우발적 존재의 실체 관계가 추상적 필연성 즉 우연성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특정한 원인과 결과는 앞에서 논의한 상대적 필연성에 상응한다. 원인은 구체적인 가능성이며 결과는 구체적인 실제성이다.

인과 관계 속에서 개체는 실체로 규정된다. 원인과 결과는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실체의 형식을 지닌다. 그것은 서로 관계하여 실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지닌 내용은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토대가 되니, 곧 기체이다.

원인은 여러 내용을 지닌다. 원인이 원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되는 기체에서 벗어나 원인으로서 정립되어야 한다. 즉 원인은 자기를 지양해야 한다. 이제 원인은 실체가 되며 이 원인이 작용하면서 원인이 되는 내용을 결과로 옮기면 원인은 이 원인이 되는 내용을 잃어버리면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원인은 번래 기체로 복귀한다.

“이 [원인이 되는] 실체의 작용은 외적인 것에서 시작하며 이 외적인 규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외적인 것의 [결과를 통해] 자기 내 복귀는 자신의 직접적 실존을 보존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인과성을 지양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2)

예를 들어 돌이 다른 것을 타격하는 원인이 되려면, 돌이 들어 올려져서 하나의 운동량을 지닌 것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돌은 다른 것을 타격하면서 운동량을 잃고 다시 땅으로 낙하하고 처음의 직접적인 존재로서 돌로 된다.

결과는 원인의 작용에 의해 그 자신이 지양되면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결과는 이 정립된 원인을 다시 다른 타자에 정립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는 자립적인 내용을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무차별하지만, 어떤 인과 관계를 이루는 특정한 내용에서는 서로 동일하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서로 무차별한 측면과 서로 동일한 측면은 각기 독자적 내용을 지니면서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돌이 다른 것을 때릴 때, 여기서 원인이 되는 것은 운동량이다. 그런데 돌이 돌이라는 점에서 지닌 내용은 이 운동량과는 무관하다. 이 동일한 운동량을 돌이 지닐 수도 있고, 나무도 지닐 수 있으니, 돌의 구체적 내용은 원인으로서 내용과 서로 외면적이다.

형식적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서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분석적 명제를 이루며, 특정한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단순한 형식의 차이만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인과적 내용 외에 독자적인 내용을 지니므로 양자는 내용상 차이가 있다.

6)

① 하나의 결과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여러 원인이 동시에 작용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결과는 여러 형식을 가진 통일적인 내용이므로, 그 형식에 따라서 각기 다른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사고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자동차의 결함일 수도 있고, 도로 조건의 결함이나 운전의 미숙일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자주 중첩해서 작용하여 사고를 일으킨다.

② 특정한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지닌 내용의 차이 때문에 다양하게 발전한다. 우선 하나의 원인은 원인으로서 갖는 자신의 내용 외에도 다른 내용을 지니므로 이 내용을 통해 그 자신의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전투에서 아버지가 탄환을 맞아 전사하면서 아들이 각고 노력하여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여 성공했다고 하자. 아들이 성공한 원인은 각고 노력인데 이 각고 노력의 원인은 아버지의 전사이고 아버지가 전사한 원인은 다시 전투에서 맞는 탄환이다.

이런 관계는 무한히 펼쳐질 수 있으며 원인의 방향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결과의 방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를 통해 인과의 사슬이 만들어진다.

③ 생명체나 정신에 이르면 하나의 원인은 결과에서 자기를 그대로 이중화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결과는 자발적인 힘을 지니고 이런 원인이 미치는 작용을 자기 나름대로 고유하게 변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오니아 기후가 미치는 영향은 호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며 시저의 명예욕이 공화국을 멸망시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호머나 공화국은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이런 원인의 작용을 변형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예를 통해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작은 원인이 거대하고 심각한 사건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은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간접적 원인이거나, 여러 원인 중의 하나이거나 주체적으로 변형되는 원인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결과는 결코 원인보다 클 수 없다고 주장한다.

7)

원인의 사슬 가운데 원인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자기 자신 역시 다른 것의 결과이다. 하나의개체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는 것에서 자기 자신이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가 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결과는 원인과 관계하여서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내용을 지닌 기체이다. 이 기체는 인과적 동일성에 대해 다만 외면적인 것 즉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기체가 원인이 원인으로서 작용하게 하는 전제로서 규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결과가 원인이 되어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특정한 인과성에서 어떤 것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외적인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원인이 자기의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면서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전에 동일성이 다만 잠재적으로 존재했던 것인 기체는 이제부터 전제로 규정되거나 작용하는 인과성에 대립해서 규정되며, 이전에 동일한 것에 다만 외적인 것이었던 반성은 이제 이 동일한 것에 관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