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박종성, <막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의 소유>, 커뮤니케이션북스, 2026

 

 

[신간 소개] 박종성, <막스 슈티르너, 유일자와 그의 소유>, 커뮤니케이션북스, 2026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어떻게 우리의 삶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외부의 힘에 종속되지 않고 나 자신을 창조하며 소유할 수 있을까? 막스 슈티르너는 개성을 짓밟는 교리와 신념, 개인을 둘러싼 뿌리 깊은 고정 관념에 타협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로 맞선다.

대의의 근거를 ‘창조가 깃든 무’에 두고 나에게 이질적인 모든 신성한 것을 파괴하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자기사랑과 자기해방의 철학은 우리에게 유일자가 되는 방법, 즉 정신과 정신세계의 창조주이자 소유자로 우뚝 설 방법을 가르쳐 준다.

 

막스 슈티르너-유일자와 그의 소유, 박종성 지음, 145쪽, 커뮤니케이션북스.

 

이 책은 슈티르너의 주저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중심으로 슈티르너 사상을 열 가지 키워드로 살핀다. 자기중심성이 어떻게 종교·철학·도덕 배후의 공허함을 폭로하고 서로가 서로를 향유하고 이용하는 ‘유일한 개인들의 연합’으로 나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슈티르너가 어떻게 니체에 앞서 허무주의로의 전환을 포착하고 ‘창조가 깃든 무’를 반본질주의적인 자아 개념으로 세웠는지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를 둘러싼 평가는 다채롭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슈티르너 철학을 맹렬하게 공격한다. 이는 슈티르너가 마르크스와 헤겔 좌파들에게 미친 막대한 영향을 방증한다. 이후에도 슈티르너는 시대에 따라 니체의 선구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초기 포스트구조주의자, 개인주의 아나키즘의 시조로 재평가받았다. 그만큼 슈티르너의 사유는 지속력과 여러 세대에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이제 그 사유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는 1806년 바이에른주 바이로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07년 4월 19일,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약사와 재혼했고, 서프로이센의 쿨름에 정착했다. 20세가 되었을 때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 진학했고, 그곳에서 문헌학, 신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헤겔의 강의에 출석했다. 1841년 베를린에 머무르는 동안 자유인 모임에 참여했다. 주저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있으며, 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슈티르너 비평가들’을 써서 반박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덤 스미스와 장바티스트 세의 글을 번역했다. 1852년에 ‘반동의 역사’를 썼고, 1856년 벌레에 물린 뒤 열병을 앓다가 그해 6월 25일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브루노 바우어와 루트비히 불만이 참석했다.

지은이 박종성은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2014)’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논문으로는 “슈티르너의 ‘자유주의’ 국가 비판의 현대적 의미”(2011),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2020, 제8회 소송학술상 수상), “유일한 사람의 사랑”(2021),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2022), “철학자를 조롱하는 철학자”(2023)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이고, 한신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의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글은 <매일일보>에 게재된 신간 소개를 재인용한 것입니다.

https://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1401362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건국대학교 다자인 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

 

(이어서)

 

2. 『형이상학8(Η)(1~6)

8(Η)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실체들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간다. 모든 감각적 실체는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질료 또한 실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대립적인 변화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기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생성과 소멸이 수반되지는 않는데, 어떤 것이 있는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생성하거나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체와 질료가 일반적으로 실체라 일컬어지지만, 이것이 아직 가능적 실체이기 때문에, 감각적 실체 중 무엇이 현실적인 실체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있는 것들이 그 합성구조에 따라 있거나, 결합에 따라,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질료가 다르면 그것의 현실태가 다르고 정식이 다르다는 논의는 분명하다. 한편, 문지방에 대하여 ‘방과 방 혹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실적인 문지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고, 앞선 질료와 더불어 말한다면 돌로 이루어진 복합실체를 말하게 된다. 이로써 감각적 실체가 있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질료는 가능적 실체이고, (2) 형상(형태)은 현실적 실체이며, (3) 이 둘이 결합한 복합실체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실적 실체는 바로 형상이다.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부를 때, 이 이름이 합성실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현실태나 형태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때가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형상과 현실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현실태로서의 집은 합성구조(즉 형태)이지 이 합성구조에 속하게 되는 벽돌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장과 5장은 질료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적 실체에 대하여, 각 사물엔 그 고유한 질료가 있음을 논한다. 예를 들어 ‘이것’의 질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것’이 불이나 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답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질료들이 궁극적으로는 불이나 흙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의 질료 또한 불과 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흙이 사람의 고유한 질료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나 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실체를 이루는 첫 번째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최종적인 질료와 형태는 동일한 것이자 하나이고, 감각적 실체가 하나인 이유는 질료와 형태가 하나이기 때문에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질료로부터 형태로의 운동에는 제작자 이외의 다른 원인이 없다. 한편, 질료를 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 즉시 하나인 것이다.

 

 

3. 『형이상학9(Θ)권 전반부 (1~8)

9(Θ)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적 탐구를 수행한다. ‘가능태’와 ‘현실태’는 본래 변화 및 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개념들의 사용 범위를 넓혀 자신의 존재론적 탐구에 도입한다. 먼저 그는 가장 주도적인 뜻에서의 ‘가능태’에 대해 규정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뒤나미스’(가능태)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이다. 따라서 ‘뒤나미스’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능동적 능력), 어떤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수동적 능력), 어떤 힘이 가해질 때 변화를 겪지 않는 능력, 어떤 작용이 잘 이루어지는 능력 모두를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

운동 및 변화의 원리들은 어떤 경우 생명이 없는 것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경우 생명이 있는 것들, 즉 영혼이나 영혼의 이성적 부분 안에 있다. 이성을 동반하는 능력은 동일한 것이 반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가령 의술의 경우 본성에 따라 다루는 것은 건강이지만, 부수적인 뜻에서는 질병을 다루기 때문에 질병과 건강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비이성적 능력은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낳는다는 단순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참으로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즉 가능태 혹은 능력을 부정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메가라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집을 짓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집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주장이 결국 운동과 생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어떤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 존재에서 현실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에 아무런 불가능한 점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과 관련된 능력, 즉 가능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면, 6장에서 그는 현실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어떤지를 규정한다. 먼저 그는 ‘가능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대상이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현실태라고 말한다. 예컨대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에 대해 집을 짓고 있는 자, 잠자는 자에 대해 깨어있는 자, 눈을 감았지만 시력이 있는 자에 대해 보고 있는 자 등등의 예시에서 앞의 것은 가능태에, 후자의 것은 현실태에 분류된다.

이후의 논의는 “가능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 앞선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측면, 즉 정식(로고스)과 시간과 실체에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앞선다고 말한다. 첫째, 가능적인 것은 그것의 정식 안에 이미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능력은 어떤 ‘현실적 활동’을 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능적인 것이다. 둘째, 시간의 관점에서 씨앗은 곡식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가능적인 곡식으로써 씨앗이 곡식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에 시간적으로 앞서서 다시 곡식이 현실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처럼 종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시간적으로도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앞선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현실적인 것은 실체에서의 선행성 또한 갖는다. (1) 먼저 생성 과정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오는 것보다 더욱 완전하다. (2) 또한 모든 생성이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진행된다고 할 때, 현실적인 것은 목적으로서 이 생성의 과정 전체 가장 앞에 놓인 시초이다. (3) 질료가 가능적으로 있는 것은 그것이 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가능적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4) 모든 현실적 활동은 목적이거나 목적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활동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능력에 앞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영원한 것들을 논의에 끌어들여, 보다 주도적인 뜻에서 현실적인 것이 갖는 선행성을 논한다. 영원한 것들의 경우, 그것들은 실체의 측면에서 가멸적인 것들에 앞서며 영원한 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있지 않다. 또한 가멸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치면서도 이 세계 자체는 유지되는데, 이는 바로 태양의 운행이나 천체 운동과 같은 영원한 운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 속에 있는 것들은 이 불멸하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1. 서론

『논어』에는 여러 인간상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군자(君子)가 있다. 『논어』 내에서 군자는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백성을 이끌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흔히 ‘성인군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군자는 유가(儒家)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자 이상적인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다.

그런데 『논어』에는 군자 이외에 인자(仁者) 그리고 지자(知者)와 같은 인간상이 등장한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군자는 이미 인자와 지자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인다. 군자가 이상적이고 모범이 되는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라면 훌륭한 성품과 덕성 그리고 지적 역량을 모두 갖추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어』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군자가 인자와 지자를 포함하는 것처럼, 또 어떨 때는 군자, 인자, 지자가 각각 별개의 개념처럼 보인다.

한 개념은 다른 개념과 명확히 구분되며 문장 몇 줄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중국 고대사상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 그리고 그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사상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강독 모임 중 더 알아보고 싶었던 인자, 지자, 군자의 의미에 대해 모임에서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공자 초상 이미지

    2. 본론

2.1. 인자(仁者)와 군자(君子)

우선 인자와 군자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생긴 구절은 「옹야」(雍也) 편에 있다.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는 공자에게 인자에 대해 질문한다.

 

재아가 물어 말했다. “인자는 누군가 그에게 ‘우물 안에 인(仁)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에 따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군자는 (우물 앞까지) 갈 수는 있어도 (우물에) 빠질 수는 없다. 속일 수는 있어도 해칠 수는 없다.”

이 구절을 읽고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재아는 인자에 대해 질문했는데 왜 공자는 군자로 대답했는가?’이다. 마치 인자가 곧 군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재아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공자가 일부러 ‘군자’라는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혹은 일상 대화이기 때문에 생긴 사소한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인자, 군자 등의 개념 자체가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분명한 점은 인자와 군자는 아주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두 인간상 모두 『논어』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바람직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라는 근거가 『논어』 내에 있다. 「헌문」(憲問) 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이면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소인으로서 인한 사람은 아직 없다.”

위 구절에 따르면 군자 중에는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다. 반면 소인(小人)이면서 동시에 인자인 경우는 없다. 다시 말해 군자는 인자인 경우와 인자가 아닌 경우로 나뉘고, 소인은 인자가 아니다. 즉 군자이면서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으므로 인자와 군자는 동격으로 볼 수 없다.

위 구절처럼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언급하는 내용은 『논어』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리인」(里仁) 편을 보면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하고 소인은 이익만을 바란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는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군자가 철저하게 소인과 대비되는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소인이 땅(재물)을 생각할 때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이 이익을 바랄 때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한다. 또 소인이 이(利)에 밝을 때 군자는 의(義)에 밝다. 군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덕, 법도, 의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가치이다. 소인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물이라면 군자는 집단을 바로 세우는 인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군자는 인자와 구분된다. 군자는 덕이 충만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책임과 역할을 진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군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의(義)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도 사회 정의와 관련이 깊다. 의는 몫의 분배와 규범에 관한 덕목이다. 올바른 기준에 따라서 재화나 지위를 나누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칙과 제도를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또는 지키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의(義)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제 가족을 보살피고 이웃을 돕는 일상적인 일보다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일일 수밖에 없다. 공자 이전 시기에 군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고 공자 역시 군자를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는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군자는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인자와 다르다.

그러나 인자와 군자는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많다. 군자는 잠재적 인자이다. 이 말은 모든 군자는 인자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와 의가 분리 불가능하듯 인 또한 군자가 품고 살아야 할,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덕목이다. 그러므로 인자와 군자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지만, 유가 사상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을 설명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조각들이다.

 

(계속)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

1)

특정한 인과성은 실재적인 인과성이다. 이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 외에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가짐으로써, 원인과 결과가 양방향으로 무한히 진행하는 것으로 된다. 이런 무한 진행이 자기로 되돌아오면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그 자신의 결과를 원인으로 하게 된다.

이런 상호 작용의 출발점은 서로 엇갈리는 관계다. 즉 한편에서는 원인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원인으로 되어 결과를 자기의 결과로 정립한다. 다른 한편 원인은 자기의 기체를 전제로 하는데, 이 기체의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의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기서 원인과 그 기체의 측면은 서로 외면적이며 마찬가지로 결과에서 결과의 측면과 원인이 되는 측면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원인이 결과가 되는 인과적 관계가 결과가 원인이 되는 인과 관계가 서로 엇갈린다. 두 측면은 상호적이지만,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두 생산자의 교환을 생각해 보자. 하나의 생산자는 곡식을 만들어 팔고 다른 생산자는 옷을 만들어 판다. 곡식 생산자는 곡식을 옷 생산자에게 팔지만, 옷 생산자에게서 옷을 구입한다. 이 두 관계는 상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서로 엇갈리는 관계일 뿐이다. 즉 두 측면은 서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인과 관계는 상호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차례로 연결하여 인과의 연쇄로 삼더라도 무방하다.

“원인은 이제 작용한다. 왜냐하면, 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위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인은 자신에 전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자신을 타자로[기체] 즉 수동적 실체로 삼아서 자신에 작용한다. 따라서 원인은 수동적 실체가 지닌 타자성[기체]을 지양하여 이 수동적 실체[기체] 속에서 자기 자신[원인 실체]으로 되돌아온다.”(논리학, GW11, 405)

“두 번째로 원인은 이와 동일한 것을 규정한다. 원인은 이 수동적 실체의 타자성[원인에 대한 타자성]을 지양하는 것 또는 자기 내 복귀를 하나의 규정성으로 정립한다. 이 정립된 것은 동시에 원인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므로 우선 그 원인의 결과이다. 거꾸로 이 원인은 전제하는 것인 한, 자기 자신을 자기의 타자[기체]로 규정하므로 결과를 다른 실체 즉 수동적 실체 속에 정립한다.”(논리학, GW11, 405)

즉 원인이 원인이 되려면 전제된 기체에 부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결과는 원인에 의해 정립되면서(규정성을 지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체 즉 원인의 타자성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2)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로 넘어가는 매개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가 있다. 작용과 반작용은 여전히 외적인 반성에 머무르는 것인데,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를 보는 관점을 전도한 것이다.

즉 원인의 측면에 서서 보면, 원인이 직접적인 것이고 결과는 그 원인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결과 자신이 원인이 되어 원인은 결과가 된다. 다만 여기서 작용하는 방향이 반대이다.

예를 들어 태양에 지구가 충돌한다면, 이는 하나의 관점에서는 태양이 인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태양을 밀어내는 척력이 발휘된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인력의 힘이나 척력의 힘은 양적으로 동일하며 다만 방향만 대립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태양이 능동적 실체로서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이렇게 관점을 뒤집어 보면, 능동성과 수동성이 전환된다. 즉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원인의 받아들이는 것은 이 결과 내에 이미 그런 것으로 정립될 가능성[An sich Sein]이 실제로 정립되는 것일 뿐이다.

이는 능동적 실체 역시 마찬가지다. 능동적 실체가 힘을 행사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가 그런 힘을 받을 만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 실체는 강제당한다. 강제는 위력의 현상이거나 외적인 것으로서 위력이다. 그러나 위력이 외적인 것은 다만 원인이 되는 실체가 자기 자신을 [결과로] 정립하는 가운데 동시에 [타자를] 전제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양된 것으로서 정립하기 때문일 뿐이다.”(논리학, GW11, 405)

“수동적 실체가 타자에 의해 강제당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에 다만 정당한 권리가 행사되는 것이다. 수동적 실체가 잃어버리는 것은 그것이 지닌 직접성이며 즉 그것에 낯선 실체성이다. 수동적 실체가 자기에 낯선 것으로서 획득하는 것 즉 정립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규정이다.”(논리학, GW11, 406)

능동적 실체가 행사하는 것이 작용이라면, 수동적 실체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수동적 실체 자신의 반작용이다. 그것은 수동적 실체의 잠재적 존재가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수동적 실체의 반작용은 이중적인 것이다. 즉 우선 이 수동적 실체가 지닌 모습이 정립된다. 두 번째로 수동적 실체가 그것으로 정립되는 것이 그것의 그 자체 존재로서 서술된다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6)

“둘째로 반작용은 최초의 작용하는 원인에 대립한다. 이전에 수동적 실체가 자기 내에서 지양한 작용은 바로 최초의 원인이 작용한 것이다. 이 작용이 지양되면서 그 원인이 되는 실체성도 지양된다.”(논리학, GW11, 406)

4)

이런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서 마침내 원인과 결과의 상호 작용이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능동적 실체이며 동시에 수동적 실체 즉 결과이니, 원인과 결과가 단순히 엇갈리는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원인 자체가 곧 결과이다. 또한, 작용과 반작용처럼 단순히 관점의 전환에 의해 원인이 결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결과이고 결과를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원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과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 구별은 더는 구별이 되지 못하고 투명하게 된다.

이전에 특정한 인과성에서 기체와 실체, 토대와 인과 관계가 서로 외면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구분 자체가 해소된다. 원인의 기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 자체가 자신의 기체이다. 그것은 결과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과도 결과가 아닌 독자적 기체가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자체가 자기를 원인으로 만드는 기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바이메탈을 보자. 열을 받으면 많이 늘어나는 물질과 적게 늘어나는 물질 즉 서로 대립하는 성질을 지닌 두 물질이 결합한다. 이 바이메탈에 냉장 콤프레서가 연결되면, 냉장고가 된다.

냉장고 온도가 올라가면 바이메탈이 굽어져서 냉장 콤플레서가 작동하여 온도가 내려간다. 온도가 내려가면 바이메탈이 반대로 펼쳐져서 냉장 콤플레서의 작동이 중지하면서 온도가 다시 올라간다. 이런 상호적 운동을 통해 냉장고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 여기서 냉장 콤플레서 작동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냉장 콤플레서 중지의 원인이며 이 중지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곧 작동의 원인이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가 곧 원인이다.

5)

원인은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므로 자기 매개하는 것이다. 결과 역시 자기의 결과를 통해 결과로 되는 자기 매개이다. 곧 원인은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하고 결과는 자기 자신을 결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매개, 자기 근거를 통해 지금까지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일어난 상대적 필연성의 운동은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발전한다.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기에 더는 타자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니 항상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연성과 우연성이 통일로서 절대적 필연성이 출현한다. 즉 “한편으로 결합과 관계로서 직접적 동일성”과 다른 한편으로 “구별이 지닌 절대적 우연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런[특정한 인과성에서] 내적 필연성이나 잠재성은 인과성의 운동을 지양한다. 이를 통해 양 측면이 지닌 실체성[우발성]은 상실되며 필연성이 은폐를 벗어난다.”(논리학, GW11, 409)

이런 절대적 필연성은 동시에 자유(자발성)의 체계이다. 냉장고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므로 이 냉장고는 마치 목적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목적을 추구하는 자발적 존재다. 그러나 사실 이 합목적적 운동의 구조는 서로 대립하는 물질의 상호 작용에 있다.

“거꾸로 동시에 우연성은 자유로 된다. 왜냐하면, 필연성을 이루는 측면들은 독자적으로 자유롭지만, 서로 비추는 실제성이라는 형태를 가지지 않으나 이제부터 동일성으로 정립되면서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이루는 총체성이 이제 또한 서로 동일한 총체성으로 비추거나 서로 동일한 반성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409)

6)

이와 같은 자유는 아직 단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자유는 마침내 개념 운동에 이르러 등장하며, 아직은 단순히 자발적인 합목적적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개념 운동의 출발점이 놓인다.

능동적 실체는 개별적 개념이 된다. 이것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 또는 “자기와 동일한 부정성”이다.(논리학, GW11, 398)

수동적 실체는 일반적 개념이 된다. 여기서 직접적인 것이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단순한 동일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규정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정립된 것” 이다.(논리학, GW11, 398)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특수성으로서 개념이다. 이 매개는 구별된 개체다. 이 개체는 자립적이며 구별된 것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잠재적으로는 일반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상호 작용 속에 들어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 즉 개별자로 된다. 그러므로 이 특수성이 곧 가상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구별된 계기이지만, 동시에 각자 자기 속에 이미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 개별성의 부정성은 자기 부정성이므로 곧 동일성이다. 일반성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동일성이다. 특수성의 자립적 개체는 이미 부정적인 것이며 앞으로 부정될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부정의 부정을 통해 통일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총체성은 동일한 반성이어서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면서 앞에서 말한 두 가지로 자기를 구분하지만, 그런 구별은 완전히 투명한 구별 속에 즉 특정한 단순성 속에 또는 양자에 동일한 동일성인 단순한 규정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념이고 주관성의 영역 또는 자유의 영역이다.”(논리학, GW11, 409)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

1)

앞에서 우발적 존재에서 반성은 실존에 머물러 있어서 아직 본질이 그런 우발적 존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또는 공허를 본질로 한다고 했다. 이제 인과 관계에 이르러 처음으로 반성이 내적으로 되면서, 개체는 본질이 그 속에 비친 것 즉 현상으로 된다.

헤겔에서 인과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이처럼 현상으로서 개체이니, 이 개체는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이 개체가 지닌 양 측면이 곧 인과 관계의 핵심을 이룬다.

헤겔의 인과 개념은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인과 개념과 구분된다. 인과 관계는 철학상 법칙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지며 그 때문에 흄의 비판 이래로 부정되어왔다. 법칙 관계란 흔히 두 자립적 존재가 조건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하나의 존재가 있으면 다른 존재가 있는데, 이것이 항상 반복되면 법칙이 된다.

그런데 인과 관계는 이 두 자립적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데, 흄에 의하면 실제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지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과 관계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개별적인 것들 사이의 법칙 관계 또는 조건 관계뿐이라고 한다.

칸트는 흄의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이런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더라도 항상 계기해서 지각된다면, 선험적 주관은 이를 인과 관계로 파악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2)

헤겔은 힘의 관계를 인과 관계를 구분해서 다룬다. 법칙 관계 또는 힘의 관계와 인과 관계는 관계의 성격에서 구분된다. 전자는 현상 편에서 다루어지는 물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며, 후자는 실제성 편에서 다루어지는 실체적 개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다.

하나의 물체는 여러 성질을 지니고, 이 성질은 서로 관계한다. 이 성질이 다른 성질과의 관계는 양자 사이에 미분적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힘은 한편으로 발산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렴하면서 두 성질을 관계하게 한다. 이것이 힘의 외화라는 관계다. 헤겔은 이 힘의 외화를 통해 두 성질 사이의 법칙 관계가 성립된다고 본다.

반면 인과 관계는 유적 본질이 실체로 펼쳐지는 반성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종적 개체는 가능적인 것이며 다른 개체는 실제적인 것이다. 여기서 가능적인 것은 원인이 되고 실제적인 결과가 된다.

가능성의 실현은 앞에서 헤겔이 말했듯이 자기를 펼치는 운동이며 자기를 이중화해서 계시하는 운동이다. 여기서는 원인의 원인성이 결과에 전달되어 결과를 원인과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원인은 인과적 작용 속에서 자기의 원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과 역시, 인과 작용에 의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같은 것으로 정립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면, 하나의 당구공은 자신이 지닌 운동량을 잃어버리고 이 운동량을 다른 당구공에 전달한다. 즉 가만히 있던 당구공이 운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과 관계는 조건 관계와 달리, 원인과 결과가 인과 작용에서 스스로 변화한다. 원인은 원인성을 잃고 결과는 원인성을 띠게 되니, 이런 변화를 통해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단순한 조건적 관계 즉 법칙 관계와 구별할 수 있다.

3)

우발적 존재에서 일어난 반성 운동이 공허를 본질로 하는 것과 달리 여기서 일어나는 반성 운동은 일정한 본질을 설정한다. 인과 관계는 실체적 개체 사이의 반성 운동을 전제로 하지만, 이런 반성 운동은 아직 일면적인 것에 그치므로 인과 관계는 외적인 반성 운동에 그치고 장차 내적 반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과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전환한다.

헤겔은 인과 관계를 형식적 인과성, 특정한 인과성, 작용과 반작용 관계로 발전적으로 서술한다. 그 가운데 형식적 인과성은 인과의 단순한 개념만을 다룬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과성은 특정한 인과성에서 시작한다.

우발적 존재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통해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개체가 맺는 동일성의 관계를 통해 가능적인 것이 실현되어 실제적인 것으로 된다. 이때 가능적인 것이 원인이고 실제적인 것이 결과다.

원인이 이런 원인이 되려면, ① 처음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고, 가능적인 것[An sich Sein]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양된 것으로서 원인은 인과 관계 속에서는 오히려 직접적인 것, 근원적인 것이며, “자기로부터 시작하고 타자로부터 촉발되는 법이 없이 자기로부터 산출하는 자립적 원천이다.”(논리학, GW11, 398)

원인이 원인으로서 자기 내 반성과 원인이 결과를 규정하거나 정립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이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이 통일되어 있다. 즉 원인이 원인이 되면 즉시 다른 것에 작용[wirken]을 해야 한다.

“원인의 근원성이란 원인의 자기 내 반성이 곧 규정하는 정립이며, 거꾸로 양자는[자기 내 반성과 규정이] 하나의 통일을 이룬다는 데 있다.”(논리학, GW11, 398)

② 자기의 위력을 통해 이 정립된 규정성을 결과 속에 정립한다. 원인은 결과 속에서 자기와 동일한 것 즉 “정립된 것으로서 정립된 것”(논리학, GW11, 398)에 이르므로 ③ 자기 관계하는 가운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이제 원인은 원인으로서 자기를 소실한다. 결과는 처음에는 ④ 직접적인 것이었으나 이제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정립된 것으로 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서 “결과는 일반적으로 원인이 포함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으며 거꾸로 원인은 결과 속에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논리학, GW11, 398)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인데, 이는 원인의 가능성이 펼친 것이며, 자기를 이중화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단순한 이행도 아니고, 외화[형성]도 아니며 자기를 타자에 전달하는 것이니, 헤겔은 원인을 ‘위력을 지닌 것[Macht]’으로 규정한다.

4)

형식적 인과 관계는 인과 관계에 관한 개념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과 관계는 특정한 인과 관계이다. 특정한 인과 관계는 원인과 결과가 각기 직접적인 실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각자는 고유한 내용을 지니며, 그 가운데 하나의 내용에서 인과 관계가 맺어진다.

우발적 존재의 실체 관계가 추상적 필연성 즉 우연성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특정한 원인과 결과는 앞에서 논의한 상대적 필연성에 상응한다. 원인은 구체적인 가능성이며 결과는 구체적인 실제성이다.

인과 관계 속에서 개체는 실체로 규정된다. 원인과 결과는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실체의 형식을 지닌다. 그것은 서로 관계하여 실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지닌 내용은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토대가 되니, 곧 기체이다.

원인은 여러 내용을 지닌다. 원인이 원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되는 기체에서 벗어나 원인으로서 정립되어야 한다. 즉 원인은 자기를 지양해야 한다. 이제 원인은 실체가 되며 이 원인이 작용하면서 원인이 되는 내용을 결과로 옮기면 원인은 이 원인이 되는 내용을 잃어버리면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원인은 번래 기체로 복귀한다.

“이 [원인이 되는] 실체의 작용은 외적인 것에서 시작하며 이 외적인 규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외적인 것의 [결과를 통해] 자기 내 복귀는 자신의 직접적 실존을 보존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인과성을 지양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2)

예를 들어 돌이 다른 것을 타격하는 원인이 되려면, 돌이 들어 올려져서 하나의 운동량을 지닌 것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돌은 다른 것을 타격하면서 운동량을 잃고 다시 땅으로 낙하하고 처음의 직접적인 존재로서 돌로 된다.

결과는 원인의 작용에 의해 그 자신이 지양되면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결과는 이 정립된 원인을 다시 다른 타자에 정립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는 자립적인 내용을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무차별하지만, 어떤 인과 관계를 이루는 특정한 내용에서는 서로 동일하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서로 무차별한 측면과 서로 동일한 측면은 각기 독자적 내용을 지니면서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돌이 다른 것을 때릴 때, 여기서 원인이 되는 것은 운동량이다. 그런데 돌이 돌이라는 점에서 지닌 내용은 이 운동량과는 무관하다. 이 동일한 운동량을 돌이 지닐 수도 있고, 나무도 지닐 수 있으니, 돌의 구체적 내용은 원인으로서 내용과 서로 외면적이다.

형식적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서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분석적 명제를 이루며, 특정한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단순한 형식의 차이만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인과적 내용 외에 독자적인 내용을 지니므로 양자는 내용상 차이가 있다.

6)

① 하나의 결과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여러 원인이 동시에 작용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결과는 여러 형식을 가진 통일적인 내용이므로, 그 형식에 따라서 각기 다른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사고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자동차의 결함일 수도 있고, 도로 조건의 결함이나 운전의 미숙일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자주 중첩해서 작용하여 사고를 일으킨다.

② 특정한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지닌 내용의 차이 때문에 다양하게 발전한다. 우선 하나의 원인은 원인으로서 갖는 자신의 내용 외에도 다른 내용을 지니므로 이 내용을 통해 그 자신의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전투에서 아버지가 탄환을 맞아 전사하면서 아들이 각고 노력하여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여 성공했다고 하자. 아들이 성공한 원인은 각고 노력인데 이 각고 노력의 원인은 아버지의 전사이고 아버지가 전사한 원인은 다시 전투에서 맞는 탄환이다.

이런 관계는 무한히 펼쳐질 수 있으며 원인의 방향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결과의 방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를 통해 인과의 사슬이 만들어진다.

③ 생명체나 정신에 이르면 하나의 원인은 결과에서 자기를 그대로 이중화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결과는 자발적인 힘을 지니고 이런 원인이 미치는 작용을 자기 나름대로 고유하게 변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오니아 기후가 미치는 영향은 호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며 시저의 명예욕이 공화국을 멸망시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호머나 공화국은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이런 원인의 작용을 변형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예를 통해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작은 원인이 거대하고 심각한 사건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은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간접적 원인이거나, 여러 원인 중의 하나이거나 주체적으로 변형되는 원인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결과는 결코 원인보다 클 수 없다고 주장한다.

7)

원인의 사슬 가운데 원인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자기 자신 역시 다른 것의 결과이다. 하나의개체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는 것에서 자기 자신이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가 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결과는 원인과 관계하여서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내용을 지닌 기체이다. 이 기체는 인과적 동일성에 대해 다만 외면적인 것 즉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기체가 원인이 원인으로서 작용하게 하는 전제로서 규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결과가 원인이 되어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특정한 인과성에서 어떤 것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외적인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원인이 자기의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면서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전에 동일성이 다만 잠재적으로 존재했던 것인 기체는 이제부터 전제로 규정되거나 작용하는 인과성에 대립해서 규정되며, 이전에 동일한 것에 다만 외적인 것이었던 반성은 이제 이 동일한 것에 관계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43-실체 관계와 공연한 존재[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43-실체 관계와 공연한 존재

1)

마침내 본질론 마지막 3편 3장인 ‘절대적 관계’의 장에 이르렀다. 이 장을 통해 1부 객관 논리학은 끝나고 2부 주관 논리학으로 이행한다. 이 장은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의 마지막 장인데, 많은 내용이 3편 2장인 ‘양상’ 장의 내용과 중첩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2편 현상 편) 설명했듯이 본질론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본질론에서는 항상 먼저 개념이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는 추상적인 것이 점차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 끝에 이르러 개별적 형태가 다시 일반적 형태로 전개된다. 이는 곧 역사적 발전의 길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과 거꾸로다.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논리의 평면에 투영된다. 헤겔은 이것을 내면화[Erinnerung: 기억]의 과정이라 했다. 논리학에서 본질론은 거꾸로 논리적 계기의 발전이 시간의 축에 투영되니 이를 헤겔은 ‘형태화’라고 한다.


그러므로 3편에서도 2장에서 양상 개념이 추상적 필연성에서 구체적 필연성을 거쳐 절대적 필연성으로 전개되었다. 이제 3장에 이르면 개체들의 우연적 관계(실체 관계)에서 개체들의 구체적 관계(인과 관계)를 거쳐 개체들의 절대적 관계(상호작용 관계)로 나간다. 여기서 논리적 계기와 역사적 형태가 상응하는데, 추상적 필연성이 실체 관계와, 구체적 필연성이,, 인과 관계와, 절대적 필연성이 상호작용적 관계와 상응한다.

시야를 좀 더 넓혀서 보면, 2편 ‘현상’ 편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는 먼저 현상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는데, 2편 3장에서 이것이 시간에 투영되어 전체와 부분의 관계, 힘과 드러남의 관계, 외부와 내부의 관계가 전개되었다.

정신현상학에서 논리적 계기가 새로운 의식 형태를 토대로 새롭게 재구성되면서 그 이전의 계기와 평행하듯, 여기서는 논리적 차원이 발전하는 가운데 시간적 형태의 흐름도 재구성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새로운 이념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지만, 이전의 이념에서 구성된 역사와 새로운 이념에서 구성된 역사가 평행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간의 축에서 2편 3장의 축은 3편 3장의 축과 상응한다. 즉 논리적 차원이 현상에서 실제성으로 이행하면서 시간의 차원도 재구성된 것이다. 그 때문에 2편 3장의 현상의 관계는 3편 절대적[실체의] 관계와 평행한다. 즉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실체 관계에, 힘과 드러남은 인과 관계에,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상호작용적 관계에 상응한다.

2)

앞의 장에서 양상은 가능성과 실제성 사이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가능성이란 곧 유적 본질을 말하며 실제성이란 이것이 실현된 실체를 말한다. 이 관계가 개별적이면 우연성(추상적 필연성)이었고, 특수적이면 개연성(상대적 필연성)이었고 일반적이면 필연적(절대적 필연성)이었다.

헤겔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운동은 자기 자신을 펼치는 운동[auslegen]] 또는 자기를 이중화하여 계시하는[Menifestation] 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 유적 본질과 실체, 즉 근거와 그 토대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개체들의 상호 관계이었는데, 이제 3장 관계 장에서는 이 개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헤겔은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절대자의 펼침은 빛을 비추는 운동이며 이 빛남[Scheinen]은 곧 가상[Schein]으로서 정립되는 것이니, 관계를 이루는 양 측면은 총체성이다. 왜냐하면, 이 측면들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가상이 총체성인 까닭은 가상으로서 구별된 것들은 그 자신이며 동시에 대립하는 것 또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 구별된 것은 총체성이므로 가상이다. 그러므로 이 구별된 것 또는 빛을 비추는 절대자{scheinendes Aboslute: 즉 가상]는 자기 자신을 동일하게 정립하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GW11, 393)

이 구절에서 논의의 핵심은 곧 ‘가상’이 곧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가상(또는 양상)’, ‘가능성과 실제성’, ‘개체와 실체[개체의 관계]’의 개념을 서로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상은 무차별적인 실존이 아니라, 그 속에 절대자 즉 유적 본질이 자기를 비춘 것을 의미한다. 절대자의 비춤을 통해 실존은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자기 부정성 때문에 가상은 곧 양상이라 규정된다.

실존적 개체에 본질의 빛이 비친다는 것은 곧 하나의 개체가 자기와 대립하는 타자와 배타적 통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론 1편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본질로의 반성{수직적 운동)과 타자와의 관계(수평적 운동)는 상호 얽혀 있는 운동이다. 개체가 타자와 배타적 통일의 관계를 맺을 때 이 개체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이니, 곧 총체성이라 한다.

개체가 타자와 맺는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실체이다. 이 실체는 유적 본질로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한 것이다. 가상을 매개로 해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하여 실체가 된다. 이런 가상을 통해 절대자가 실현되는 과정이 곧 가능성(유적 본질: 절대자)이 실현되어 실제성(실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상에서 가상과 총체성의 관계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실제성 편 3장 절대적 관계 장에서는 논의는 개체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로 옮겨진다. 이 관계가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서 다양한 실체가 출현한다. 개체들이 서로 무차별하면 우발성의 관계이며, 개체들이 구체적으로 관계하면 그것이 곧 인과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개체가 상호작용하게 되면 그 관계가 곧 목적론적 관계이고 여기서 필연성은 자유로 발전한다.

3)

이런 실체적 관계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우발성[Akzidenz]의 관계로서 실체이다. 헤겔은 이를 단순히 실체 관계라고 하는데, 그 관계를 이루는 요소가 곧 우발적 존재*이다.

*주) 이 ‘우발성’은 앞에서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실현할 때 등장한 추상적 필연성으로서 ‘우연성’과 관련된 개념이다. 그래서 ‘우발적 존재’는 흔히 ‘우연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는 그때 나온 ‘우연성’과 구별하여 우연하게 등장한 개체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우발적 존재’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이는 실체적 집단을 이루는 한 원소로서 개체적 존재이다.

즉 어떤 것이 우연히 실제적으로 될 때, 그것이 곧 우발적 존재다. 이 우발적 존재는 자립적인 실존이며, 타자에 대해 무차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발적 존재가 서로 맺는 관계 즉 실체는 공허, 무일 뿐이다. 우발적 존재는 각자 특정한 내용을 지닌 것이지만, 형식상 서로 동일한 것이다. 동일한 것이 무차별한 내용의 측면에서 우발적이며 형식적 동일성의 측면에서는 곧 실체적이다.

우발적 존재는 마치 점이 들어 있는 공허한 공간과 같다. 이 공허한 공간은 긍정적으로 보면 모든 우발적 존재에 공통적인 동일한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우발적 존재를 받아들이는 공허한 것이다. 이 공허한 공간과 같은 실체가 곧 우발적 존재의 토대가 되는 실체이다.

공허한 공간이 점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일반적 실체 역시 우발적 존재에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실체의 측면과 우발적 존재의 측면은 서로 대립하지만, 서로 동전의 이면과 같이 관계한다.

4)

이 관계의 구체적 예로서 앞에서는 형식 논리학에서 논리적 형식과 명제 내용 사이의 관계를 들었다. 논리적 형식은 명제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외면적인 동일성이고, 각 명제 내용은 서로 고립적이며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이제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우발적 존재와 일반적 실체의 관계는 마치 개별 인격과 추상적 법의 관계와 같다고 하겠다. 인격은 법적 인격이며 인격의 내용은 개별적이지만, 인격의 형식은 법적으로 인정되며,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일한 것이다.

명제의 논리적 형식이나 법적 인격은 긍정적으로 보면, 추상적인 동일성이며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형식이나 인격은 공허한 공간처럼 모든 명제 내용이나 인격의 모든 구체적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우발적 존재와 일반적 실체의 관계는 ‘현상’ 장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같다. 다만 전체와 부분에서 부분은 지속성이 없는 개별자(물체)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 실체적 관계에서는 실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에 이 우발적 존재는 그 자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하나의 실체 즉 종적 개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헤겔은 이 우발적 존재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규정하는데, 이 우발적 존재는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이면은 공허이니,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실제성이고 실체이지만 공허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가능성이고 절대자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결합하니,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 공허와 개체, 본질과 존재는 직접 자기의 반대로 전도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타자이며 이를 통해 서로 타자를 비춘다.

“이 빛남은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형식의 동일성으로서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은 최초에는 생성이며, 생성과 소멸의 영역으로서 우연성이다. 왜냐하면, 가능성과 실제성의 관계는 직접성의 규정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 양자가 서로 직접 전도하는 것이며 각자가 그에게 다만 타자인 것으로 직접 전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는 가상이므로, 가능성과 실제성의 관계는 또한 동일화하는 또는 타자에 자기를 비추는 반성이다. 따라서 우발성의 운동은 그 계기 모두에서 존재 범부과 본질의 반성 규정이 서로 비추는 것을 서술한다.”(논리학, GW11, 394)

5)

우발적 존재에서 가능성과 실제성은 끊임없이 교체한다.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 창조인데, 이 창조의 근거인 가능성은 곧 공허 즉 심연이므로 아무 근거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직접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독자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므로 존재할 뿐’이며 자기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이유 없이 존재하는 공연[空然]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우발적 존재는 공허를 그 근거로 하므로 자기 내에 부정성을 지니고,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다시 몰락하여 공허라는 가능성으로 되돌아간다. 그 존재는 헛되고 헛된 존재이다.

마치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감각적 질이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명멸하는 것이었듯이, 우발적 존재 역시 창조되었다가 다시 몰락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이런 우발적 존재의 창조와 소멸은 우발적 존재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창조와 소멸은 실체가 되는 공허의 위력[Macht]으로 나타난다. 공허는 근거가 되어 창조하며 근거가 공허이므로 또 소멸한다. 공허가 근거이므로 갑작스럽게 출현하지만, 근거가 공허이므로 존재하는 즉시 사라질 운명이다.

“실체는 자기가 가능적인 것을 그 안에 옮겨 놓은 실제성이 지닌 내용을 통해 자기를 창조하는위력으로 계시하며 자기가 실제성을 그 안으로 옮겨 놓는 가능성을 통해서 자기를 파괴하는 위력으로 계시한다.”(논리학, GW11, 395)

가능성(몰락)과 실제성(창조)이라는 형식은 공허라는 실체를 내용으로 하며, 이 형식은 갑자기 출현했으나 이미 몰락하는 것이며, 몰락하는 가운데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다. 실체는 매번 임의로 특정한 내용을 산출하고 다시 회수하는 가운데 내용상 끝없이 변천하며 또한 형식상 가능성에서 실제성으로, 실제성에서 가능성으로 전복하기를 영원히 계속한다.

“그러므로 실체의 위력은 영원히 자기를 형식과 내용의 구별로 분화하며, 영원히 이런 일면성에서 자기를 순화하지만, 이런 순화 자체 속에서 규정과 분화로 도로 떨어진다.”(논리학, GW11, 395)

6)

실제적인 우발적 존재는 그 자체 우연한 것이기에 다른 우발적 존재도 가능하며, 그러기에 여러 우발적 존재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용상 변천하며 형식상 전도한다. 이런 내용적으로나 형식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원천은 우발적 존재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본질인 공허한 실체에 있다.

이 일반적 실체는 그 자체 내용상 공허한 것이고 다만 형식상 일반적이지만, 모든 개별적 내용을 창조하고 다시 몰락시키는 가운데, 이는 겉보기에 마치 하나의 우발적 존재가 다른 우발적 존재를 추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는 우발적 존재가 아니라 실체 자체의 위력이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한 생산자가 다른 생산자를 패배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겉보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시장 자체가 자기를 전개하는 위력에 지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또는 옛날 첩들의 싸움과 같다. 그들은 서로 죽어라 싸우지만, 사실 그들을 싸우게 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적인 남자다.

“그런 우발적인 것은 다른 우발적인 것에 대해 위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실체의 위력이 양자[우발적인 것]를 자기 내에서 포괄하면서 부정성을 지닌 것으로서 양자에 부등한 가치를 정립하면서 하나는 소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하나는 다른 내용을 지니고 발생하는 것으로서 규정한다.”(논리학, GW11, 395)

“하나의 우발적 존재가 다른 우발적 존재를 쫓아내는 이유는 다만 하나의 우발적 존재를 고유하게 존속하게 하는 것이 형식과 내용의 총체성[일반적 실체]이며 이 우발적 존재는 다른 우발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런 총체성 속에서 존속하는 것에 못지않게 몰락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5)

이런 실체의 위력을 통해 우발적 존재는 명멸하는 모순에 처하게 되며 이런 모순을 극복하면서 인과적 관계로 이행한다. 우발적 존재가 서로 무차별한 실체이었다면, 인과적 관계에서 개체는 한편으로 자립적이며 ‘단순한 자기 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이어서’ 서로 관계한다.

“이 우발성은 자기에 대립하여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서 규정되며 동시에 자기 관계하는 단순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되니 독자적[fuer sich]으로 존재하는 위력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실체 관계는 인과 관계로 이행한다.”(논리학, GW11, 396)

플라톤의 <국가> 강해(8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6)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4)

 

[572b-576b] 참주정적인 인간, 참주

* 소크라테스는 불법적인 욕구에 관해 살핀 후(제9권 시작 571a–572b) 애초 논의 주제로 돌아와 참주정적인 인간을 다루되 그 인간이 어떻게 민주정적인 인간에서 생겨났는지를 아래와 같이 논의한다.(572b) 이를 위해 우선 민주정적인 인간이 어떻게 과두정적 인간에서 생겨났는지를 다시 한 번 간략히 환기시킨다. 즉 민주정적인 인간은 처음에는 과두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돈 벌어들이는 욕구χρηματιστικὰς ἐπιθυμία만을 존중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들은 무시하였으나 방금 우리가 이야기한 불법적인 욕구들로 가득한 보다 세련된κομψός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양쪽 욕구 사이를 오가다가 결국 양쪽 생활방식의 중간μέσος 즉 인색하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은 삶을 살게 된다.(571c-d)

* 이런 민주정적인 사람이 나이가 들어 그의 생활방식대로 키워진 젊은 아들이 있는 경우 이 아들에게도 그의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572d) 즉 이 아들은 전적인ἅπας 자유ἐλευθερία를 명분삼아 온갖 불법παρανομία을 부추기는 자들과 그 반대편 아버지와 다른 친척들 사이를 오가며 처음에는 인색하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은 삶을 산다. 그러다 저들 즉 교활한 마술사μάγος들과 참주 옹립자τυραννοποιός들이 달리 이 젊은이를 사로잡을 길이 없다고 여기면 ‘욕정’ἔρως을 -빈둥거리며 닥치는 대로 눈앞의 것들을 나눠 먹는 욕구들의 선봉προστάτης으로- 그에게 심어 놓을 방법을 고안한다. 이 욕정이 곧 날개 달린ὑπόπτερος 거대한 수벌κηφήν이다(572e)

* 향μύρον과 향유와 화관στέφανος과 포도주οἶνος로 그리고 그런 것들과 어울리다 생긴 쾌락ἡδονή들로 가득 찬 여러 욕구αἱ ἄλλαι ἐπιθυμίαι가 그의 주변에서 윙윙거리며 갈망πόθος의 침κέντρον을 극단까지 키우고 길러내 수벌에게τῷ κηφῆνι 심어주면, 그때 이 영혼의 선봉ὁ προστάτης τῆς ψυχῆς은 광기μανία의 경호를 받으며 미쳐 날뛴다οἰστρᾷ.(573a) 그리고 혹시 그 사람 안에서 유익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아직도 수치를 느끼는ἐπαισχυνομένας 믿음δόξα이나 욕구 ἐπιθυμία를 붙잡게 되면 이것들을 죽여서 그 자신의 바깥으로 쫓아낸다. 절제를 정화해버리고καθήρῃ 그 대신 바깥에서 들여온 광기로 채울 때까지 그렇게 한다. 이것이 곧 참주정적인 인간τυραννικός의 기원γένεσις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부터 에로스ὁ Ἔρως를 참주τύραννος라고 한 것이다.(573b)

* 술 취한μεθυσθείς 사람도 뭔가 참주정적인 마음새φρόνημα를 지닌 것이고 또한 정신 나간 미치광이ὅ μαινόμενος는 인간만이 아니라 신θεός마저도 지배할 수 있길 바라고 또 그렇게 하려든다. 이렇듯 엄밀한 의미의ἀκριβής 참주정적인 인간이 생기는 것은 타고난 본성φύσις이나 행태ἐπιτήδευμα, 또는 이 둘 모두로 인해 술 취하고 욕정에 휘둘리며ἐρωτικὸς 광증μελαγχολικός을 보일 때이다.(573c) 그래서 축제와 술판κῶμος과 연회θαλία와 기녀ἑταίρα와 그런 모든 것들이 그런 자들을 따라간다. 이것들은 에로스라는 참주가 그 안에 거주하면서 영혼의 모든 것들을 조종하게διακυβερνᾷ 되면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끔찍한δεινός 욕구들이 매일 밤낮으로 싹터 나와παραβλαστάνουσιν,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되고δεόμεναι

그에 따라 수입πρόσοδος이 생겨도 금방 써버리고(573d) 그다음에는 빚을 내고δανεισμός 자산οὐσία을 축내게 된다.

* 그리하여 그 모든 것들이 고갈되면 강렬한 욕구들이 마치 침에 의해 내몰리듯 다른 모든 욕구를 경호창병δορυφόρος처럼 이끌고 다니는 에로스 자신에게 내몰려 미쳐 날뛰면서, 에로스(참주)는 속임수나 폭력을 써서 뺏을만한 것을 누가 갖고 있지 않은지 찾아 나설 것이 필연적이다.(573e) 만약 그렇게 온갖 곳에서 거둬들이지 못할 경우 격심한 고통ὀδύνη과 괴로움ὠδίς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새로 생겨난 쾌락들이 옛 쾌락들보다 우위를 점해 저들의 것을 빼앗았듯이, 그는 자신의 몫μέρος을 다 써버리면(574a) 아버지의 것을 폭력을 써서βιάζοιτο 강탈하려고 할 것이다ἁρπάζοι.(574b) 결국 그는 새로 사귄 친구이자 필요치도 않은 기녀 때문에 오랜 친구이자 꼭 필요한 어머니와 연로한 아버지를 때리고 저들을 한 집안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의 부모를 저들 밑에서 종노릇을 하게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참주와 같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다.(574c)

* 그러나 부모 재산도 고갈되면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다 신전ἱερόν도 털게 된다. 그런 가운데 에로스를 경호하는 새로운 믿음 δόξα들이, 그자가 어려서부터 정의로운 믿음이라고 여기며 갖고 있던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에 관한 믿음을 지배하게 된다.(574d) 이 새로운 믿음들은 민주정 체제일 때는 잠자는 동안 꿈ὄναρ에서나 풀려났던 것들로 그는 가끔 그런 믿음에 이끌렸던 자였었는데 에로스의 지배, 참주정적인 지배를 받게 되면서는 깨어 있는 동안에도 그런 자가 되어 끔찍한 살인φόνος도 그 어떤 행동도 꺼리지 않게 된다.(574e) 에로스는 독재자μόναρχος이기 때문에 어떤 다스림도 없이ἀναρχίᾳ 완전히 무법ἀνομία적으로 참주처럼 살고 자신이 마치 나라처럼 차지하고 있는 그 사람을 이끌어서 에로스 자신과 그 주변의 소동 일으키는 무리를 부양하기 위한 온갖 대담한 짓거리를 저지른다. 그 무리 중 일부는 못된 패거리와 사귐으로써 외부에서 들어왔고 또 다른 일부는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같은 성향이 자기 안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된 것들이다.(575a)

* 이런 자들이 나라 안에 소수이고 다른 대부분의 사람이 절제 있다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어떤 참주를 경호하거나 어딘가에서 전쟁πόλεμος이 나면 용병 노릇 ἢ μισθοῦ을 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평화εἰρήνη시에는 나라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소소한 악행들 이를테면 도둑질, 가택 침입, 소매치기, 옷 훔치기, 신전 약탈, 인신 매매 같은 짓들을 저지른다. 그리고 말솜씨가 좋다면 무고를 하거나συκοφαντοῦσιν 거짓 증언을 하고ψευδομαρτυροῦσι 뇌물을 받아먹을 것이다δωροδοκοῦσιν.(575b)

* 그러나 참주가 나라에 끼치는 해악πονηρία과 비참함ἀθλιότης에 비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다 더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말마따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자들이 나라 안에 많아지고 다른 이들이 이들을 추종하게 되며 또 자신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을 이들이 감지하면, 그때 이들은 민중τὸ πλῆθος의 어리석음에 도움받아 그들 가운데서도 유독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참주를 자기 영혼 안에 지닌 자를 현실의 참주로 탄생시킨다.(575c)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참주정적인τυραννικώτατος 자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한다면 그렇겠지만 만일 나라가 응하지 않는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벌주었던 것처럼,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동료들을 끌어 들여와 조국도 벌주려 할 것이다. 그리고 크레타인들이 모국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친구인 조국을 이들의 종으로 삼아 그렇게 유지해갈 것이다.(575d) 이것이 이런 인간이 지닌 욕구의 종착지τέλος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런 자들은 권력을 잡기 전에 사적으로는 무슨 일이든 언제라도 해줄 것처럼 구는 아첨꾼κόλαξ들이 있을 때 또는 그들(참주)이 필요한 것을 누군가 갖고 있어 그들(참주) 스스로 그에게 납작 엎드릴 필요가 있을 때 그들(참주)은 마치 그들(아첨꾼들과 참주가 필요한 것을 갖고 있는 자들)을 가족인 양 여기고 별의별 시늉을 다 한다. 그러나 그러다가 목적을 이루고 나면 남처럼 대한다.(575e-576a) 그러므로 이들은 평생토록 결코 그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한 채, 늘 누군가의 주인δεσπόζοντες τινός아니면 노예δουλεύοντες τινός로 산다. 그러므로 이런 참주정적인 성향은 자유ἐλευθερία도, 진정한 우정φιλία도 결코 맛볼 수 없다. 그런 자들은 결코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ἄπιστος 자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전에 정의δικαιοσύνη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았다면 그들은 부정의한ἄδικος 자, 그것도 있을 수 있는 가장 부정의한 자들이다.(57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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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2e ‘ 교활한 마술사μάγος들과 참주 옹립자τυραννοποιός들’ : 민중들의 옹립을 통해 과두정에서 민주정으로의 혁명을 이끌었던 수벌, 즉 선도자들이 이번에도 민중들을 등에 업고 자신들 가운데 가장 참주정적인 인간을 참주로 옹립한다. 수벌들이자 교활한 마술사와 참주 옹립자들은 이들이 민주정적인 젊은이들에게 침을 심어 놓아 장차 그들과 같은 참주정적 인간 즉 날개 달린 수벌을 만들고 그 수벌들은 민중의 어리석음에 도움을 받아(575c) 그들 가운데에서 장차 가장 참주정적인 인간을 참주로 옹립한다.

* 572e ‘욕구들의 선봉ho prostatēs으로 욕정을’ : 불법적인 욕구들을 선두에서 이끄는 선봉장이 곧 욕정이다. 573a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혼의 선봉’도 바로 그 욕정을 가리킨다. 젊은이에게 그 욕정이 심어지면 그 젊은이도 바로 날개 달린 수벌 즉 참주정적인 인간 내지 참주가 된다. ‘이전부터 에로스를 참주라고 부른다.’(573b)는 소크라테스의 말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 573a ‘여러 욕구가ai allai episthymiai …… 그의 주변에서 윙윙거리며 갈망pothosς의 침kentron을 극단까지 키우고 길러내 수벌에게 심어주면’ : ‘여러 욕구’는 수벌로 비유되고 의인화되어 이글에서 주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주변에서’와 ‘수벌에게 심어주면’이라는 표현에서 ‘그’와 ‘수벌’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젊은이이다. 불법적 욕구 즉 수벌들이 젊은이 주변을 에워싸는 순간부터 이미 젊은이는 그 불법적 욕구에 끌려 들어가 또 다른 수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수벌이 된 젊은이에게 극단으로까지 키워진 갈망의 침 즉 욕정이 심어지면 그 욕정이 젊은이의 영혼을 선도하는 광기 어린 선봉장이 된다. 즉 젊은이를 불법적 욕구로 이끄는 수벌 같은 자들은 불법적 욕구들을 전적인 자유라 칭하며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그 욕구의 극단 즉 욕정에로까지 빠져들게 만들고 마침내 그 욕정은 젊은이의 영혼에서 모든 욕구들을 이끄는 선봉이 된다. 그 결과 젊은이의 영혼에 있었던 기존의 선한 믿음이나 욕구, 절제는 완전히 제거되고 대신 광기 어린 욕정이 젊은이의 영혼을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영혼 상태의 인간이 곧 참주정적 인간이다.

* 572e ‘욕정’erōs : 에로스에 대해서는 전승에 따라 기원과 설명에 차이가 있다. <헤시오도스>에서는 가이아와 타르타로스와 함께 가장 먼저 생긴 신이자 사려 깊은 의지를 제압해버리는 신으로 나오지만 <향연>에서는 페니아와 포로스의 아들로 나오고 다른 전승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아들로도 나온다. 이에 따라 에로스는 신격(ho Erōs, <국가>(573d, 574d와 e, 575a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랑, 욕망, 욕정의 의미를 지니는 일반 명사 eros로 폭넓게 사용된다. 참고로 <향연>에서 에로스는 아래와 같이 마치 사다리를 오르듯 의미상 상승적 층위를 갖고 단계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1) 젊었을 때 신체의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 2) 아름다움 일반에 대한 사랑, 3)영혼에 있는 아름다움의 사랑, 4) 앎에로의 사랑, 5) 단일한 앎으로서 좋음의 형상에 대한 사랑. 그러나 여기서는 가장 저급한 단계 즉 물질적 신체적인 것에 대한 원시적 욕망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향연> 201d-212a 디오티마의 이야기 참고)

* 573c  ‘정신 나간 미치광이’ : 참주의 성격과 생활 방식에 관해서라면, 참주정적 인간은 온갖 형태의 방탕에 빠져들며 늘 새로운 욕망에 쫓긴다. 그의 수입과 재산은 곧 바닥나고, 아우성치는 정욕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의 재산을 강탈하며, 필요하다면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뒤이어 신성모독과 절도, 그리고 온갖 범죄가 뒤따른다. 과거에는 꿈속에서나 아주 드물게 행하던 짓들을, 이제는 살아있는 현실에서 실제로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소수일 때는 외국으로 나가 다른 참주의 경호원이 되거나, 고국에 남아 잡범들의 무리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수가 많아지면, 그들 중 가장 악독한 자를 조국의 참주로 추대한다. 참주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자가 품은 욕망의 목표이자 완성이다. 참주정적 인간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전이나 후나 평생을 자유 및 우정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신의가 없고 극도로 부정의하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발견했던 기괴한 정욕이 살아 움직이는 화신이며, 통치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악해진다. 그들은 욕망을 마음껏 구현하는 욕망의 주인이 아니라 욕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욕정의 노예들이다. 이 모두가 참주정적 인간이 필연적으로 비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성한다.

* 573c  ‘술 취한methystheis 사람도 뭔가 참주정적인 마음새phronēma를 지닌 것’ : 당시 귀족들의 교유 형식으로서 심포지온(향연)symposion은 뜻 그대로 술을 마시며 진행된다. 이 말은 음주 자체를 배격하는 말로 들리진 않지만 최소한 술에 취한 상태를 플라톤이 얼마나 혐오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술에 취하면 이성적 부분이 약화되어 욕정에 휘둘리게 만든다. 평생 독신으로 산 플라톤의 생애 관련 전승에는 성적 스캔들은커녕 주변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없다.

* 573d ‘조종하게diakyberna 되면’ : 나라를 이끌고 다스리는 통치자는 배를 조종하는 키잡이kybernētēs로 비유되고 있는데(333c, 341c-342e 등) 철학자 왕과 참주 모두 키잡이이지만 그 방식은 전자는 철학 후자는 불법에 기초하고 있다.

* 574a ‘그에게 새로 생겨난 쾌락들이 옛 쾌락들보다 우위를 점해 저들의 것을 빼앗았듯이, 그는 자신의 몫meros을 다 써버리면 아버지의 것을 빼앗아서 한 몫 챙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 573e부터 576a끝까지 참주정적 인간의 욕구가 종국에 가서 맞이할 역설적 양태가 다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전적인 자유가 초래하는 무질서와 물질적 탐욕은 적대적 경쟁과 그 경쟁이 초래할 비극성을 필연으로 내포하고 있다. 오로지 폭력을 통한 독점적 지배 욕구에 매몰된 참주는 신뢰를 상실한 욕정의 노예로서 스스로 고립된 채 늘 반란과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공포와 불안 속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최종 비교 판정 과정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 575c ‘참주가 나라에 끼치는 해악ponēria과 비참함athliotēs에 비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다 더해도 그것은 사람들의 말마따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 <국가>의 주제가 기본적으로 철학자와 참주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지를 판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보다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대문자 비유를 거쳐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로 확대된다. 혹자는 이것을 근거로 <국가>가 정치철학적 저술이라기보다는 도덕 심리학적 저술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플라톤이 강조하듯 개인 차원의 부도덕한 악행이 초래하는 비참함은 그 심각성의 크기와 범위에서 신민의 통치자이자 최고 권력자로서 참주의 악행이 초래하는 정치 사회적 불행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국가>에서 정치철학과 도덕심리학을 분리하는 것은 플라톤의 기본 의도와도 맞지 않고 한쪽 눈을 가리고 사물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 575d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한다면 그렇겠지만 만일 나라가 응하지 않는다면.. 참주는 조국도 벌을 줄 것이다.’ : 참주정도 철학자왕정처럼 기본적으로 통치자, 군인, 생산자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참주정 치하에서는 철학자왕정과 달리 참주의 불법적 이기적 욕구가 이성적 욕구를 누르고 조종하여 다른 계층의 삶 전반을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참주정 치하에서 통치자에 대한 복종은 공포와 불신 속에서 강압을 통해 철저히 타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폭압적 복종 관계는 군인 계층과 생산자 계층 내부에서도 권력과 지위의 서열에 따라 똑같이 재현된다. 이를테면 군인들은 통치자와 상급자에게는 엎드려 복종하지만 하급자와 생산자 계층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복종을 강요한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 내부에서도 부의 크기에 따라 서로 뺏고 빼앗기는 약육강식의 상태가 마치 당연한 일상처럼 받아들여 지고 있다. ‘나라가 응한다.’(575d)는 것은 신민들이 기꺼이 통치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참주는 나라와 신민에 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라를 자신의 종으로 삼아 조국에 벌을 주고 있는 자이다. 참주정 치하에서는 욕망 구조상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이처럼 폭력적이고도 불법적인 욕구가 모든 계층과 영혼을 지배하고 있다.

* 575d ‘크레타인들이 모국mētris이라 부르는’ :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은 전통적으로 모계 사회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조국을 ‘아버지의 나라’patris라고 부르는 대신 ‘어머니의 나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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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 참주정적인 인간 내지 참주들의 불법적인 욕구가 자행하는 악행들을 들여다보면 당대 그리스의 악행들이 총망라된 것처럼 보인다. 우선 참주정적 인간의 불법적인 욕구들은 잠을 자는 동안에 사납고 야수적인 습성대로 먹을 것과 술로 채워져 제멋대로 날뛰고 수치심이나 현명함에서 풀려나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어머니를 포함 그 어떤 인간과 신과 짐승과도 몸 섞기를 주저하지 않고 살인도 무차별 저지른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즉 참주가 되면 꿈속에서 자행했던 악행들을 그 자신이 악한 습성에 따라 현실에서도 똑같이 저지른다.

* 이로써 제8권에서 시작된 타락한 현실 국가와 그것을 닮은 사람을 다루는 마지막 주제 즉 가장 부정의한 참주정에 이어 그것을 닮은 인간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된다. 이제 애초 논의 목표대로 가장 정의로운 사람으로서 철학자와 가장 부정의한 자로서 참주를 행복과 불행의 측면에서 비교하는 일이 남아 있다. 이글 서두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참주정적 인간을 시작하면서 참주정을 논의할 때와 마찬가지로 행복에 관한 언급을 꺼내 들고 이후에도 참주정적 인간들의 비참성을 크게 부각시켜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한 정치체제들에 관한 마지막 단계의 논의가 장차 이루어질 철학자와 참주 간의 행복 관련 비교 판정을 위한 도입부 역할도 함께 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플라톤의 <국가> 강해(8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5)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3)

 

* <국가>의 논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를 가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 전반부는 문자 비유를 거쳐 대문자로서 정의로운 나라가 논의되고 제5권 이후 중반부에서 그 정의로운 나라가 철학자가 통치하는 나라임이 제시된다. 그리고 제8권에서는 그 판정을 위한 비교 대상으로 타락한 정치체제들과 그것들을 닮은 사람들이 타락의 순서대로 다루어지면서 끝부분에서 가장 부정의한 나라인 참주정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제9권에 들어와 마침내 비교를 위한 논의의 마지막 단계로서 참주정을 닮은 사람과 그 극치로서 참주가 다루어진다. 

 

[제9권 시작 571a – 572b] 불법적인 욕구

* 소크라테스는 이제 민주정적인 인간에서부터 어떻게 참주정적인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자가 어떤 방식으로 살게 될지, 즉 비참하게ἄθλιον 살지 행복하게μακάριον 살지를 살피는 일이 남았다고 말한다.(571a)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살피기 전에 우리의 탐구ζήτησις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이지 않은 쾌락과 욕구 가운데에는 불법적인παράνομος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 이 불법적인 욕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이 욕구는 이성λόγος을 갖춘 더 나은 욕구에 의해 제어됨으로써 아예 제거되거나ἀπαλλάττεσθαι 약화된ἀσθενεῖς 채로 소수ὀλίγος만 남아 있지만(571b)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더 강력한ἰσχυρότερος 것으로 더 많이 남아있으며 잠자는 동안에 깨어나는ἐγειρομένας 것들이다. 그것은 이성적이고λογιστικός 온순한ἥμερος 영혼의 다른 부분이 잠들어 있을 때 사납고θηριώδης 야수 같은ἄγριος 부분이 제멋대로 날뛰며 잠ὕπνος을 밀쳐내고 나가 자기 습성을ἦθος 채우려 하는 때에 깨어나는 욕구들이다. 그때 이것은 모든 수치심αἰσχύνης과 현명함φρονήσὶς으로부터 풀려나고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다 하려고 덤벼들어(571c) 어머니와 몸 섞기μείγνυσθαι도 다른 그 어떤 인간과 신과 그리고 짐승과도 그러기를 주저하지 않고, 그 누굴 죽이는 것도 그 어떤 걸 먹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몰지각함ἄνοια과 몰염치함ἀναισχυντία의 극치이다.(571d)

* 하지만 자기 자신을 건전하고ὑγιεινός 절제 있게σωφρόνως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잠자리에 들 때, 자신의 이성부분τὸ λογιστικὸν을 깨워 아름다운 말과 고찰σκέψις의 성찬으로 대접하여(572d) 자신이 자기 자신과 일치된 생각σύννοια을 이루도록 하고, 한편 욕구부분τὸ ἐπιθυμητικὸν은 주리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게 해서 잠이 들게 만들어(571e) 이 부분의 기쁨χαῖρον이나 고통λύπη으로 최상의 부분에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없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상의 부분이 그 자체로 혼자서 순수하게 고찰하게 하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그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파악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개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 역시 진정시켜 누군가에게 화가 나 격분한 채로 잠드는 일이 없도록 한다. 이 두 부분은 잠잠하게 하고, 생각하는 곳인 세 번째 부분을 활동하게 하고서 휴식을 취한다면, 그는 그와 같은 상태에서 진리ἀληθεία에 가장 잘 닿을 수 있으며 꿈ἐνύπνιον속에서 보이는 것들도 이때 가장 덜 불법적이다.(572a) 요컨대 주목할 것은 아주 균형 잡혀 있다고μέτριος 알려진 사람들에게도 뭔가 무섭고 거칠며 그리고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ἄνομον ἐπιθυμιῶν εἶδος가 있으며 그런 것들은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57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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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1a ‘비참하게 살지 행복하게 살지를 살피는 일’ ; 다른 타락한 정체들이나 그것을 닮은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행복’이나 ‘비참성’ 관련 언급이 따로 없으나 플라톤은 참주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도 그랬듯이(566d) 참주정적 인간을 다루는 이곳에서도 그와 관련한 언급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것은 원래 목표대로 행복 관련 비교 판정에서 참주정적 인간 내지 참주가 철학자와 맞설 최종적인 비교 대상임을 다시 한번 환기해 준다.

* 571a ‘우리가 충분히 구별해내지 못했다’ : 소크라테스는 욕구를 ‘필수적인 욕구’와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로 구분한 후(8권 558d-559c) 필수적인 욕구는 과두정적 인간에,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는 민주정적인 인간에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나 욕구에 대한 충분한 구별이 이루어지려면 이제 참주정적 인간이 갖는 욕구 즉 불법적인 욕구까지 언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은 불법적인 욕구를 병렬적으로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필수적이지 않은 욕구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참주정의 탄생이 민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즉 민주정의 멋대로의 자유가 질서와 위계를 무너트릴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경쟁을 유발시켜 나라를 약육강식 상태로 만들어 결국 그들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옹립했던 선도자들이 되레 소수 강자 참주가 되고 정작 자신들은 그들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들이 민주정에서 누린 전적인 자유가 스스로를 참주정 치하 예속 상태로 빠지게 만든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 571c ‘잠자는 동안에 깨어나는engeiromenas 것들일세.’ : 불법적인 욕구들이 잠을 자는 동안 깨어난다는 것은 욕구를 억제하는 이성적 부분이 그 만큼 잠을 자는 동안에는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잠잘 때 구별해 내기가 가장 힘들다.’(<니코마코스 윤리학> 1102b 5이하)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 역시 깨어있을 때보다 잠을 자는 동안에 바람직하지 않은 충동적 이기적 욕구가  더 활성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비록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드러나는 정도는 깨어있을 때 형성된 습성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온갖 짓을 다하는 참주정을 닮은 사람들은, 이성적 부분이 약화되거나 왜곡되어 생겨난 나쁜 습성에 따라, 깨어있을 때도 꿈속에서 행했던 온갖 악행을 그대로 저지르지만(574e) 반대로 건전하고 절제 있는 사람은, 깨어있는 동안 이성적 부분을 강화하여 좋은 습성을 갖고 있어 자는 동안에도 욕구 부분의 소동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571e-572a)

* 571d ‘어머니와 몸 섞기meignysthai도 전혀 주저하지 않고’ :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포스 왕>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오이디푸스는 델피 신전에서 자기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고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 그 일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으로 그려지지만, 실상 플라톤에게 그러한 일들은 잘못된 습성을 가진 자들에게는 필연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능히 피해갈 수 있는 것들이다. 플라톤은 전통적인 운명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삶에는 물론 우연이 개입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삶은 자기 고유의 능력과 그것을 고양하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

* 571e ‘욕구 부분to epithymētikon은 주리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게 해서’ : 이 부분은 플라톤이 엄격한 금욕주의자라는 견해에 대한 반대 전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플라톤은 금욕과 사치 중간의 적도(適度to metrion)를 지향한다. 영혼의 욕구 부분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개 부분to thymoeides과 더불어 절제의 덕을 통해 이성적 부분과 조화를 이루면서 물질적 생산이라는 고유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와 건강한 영혼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이다.

* 572a. ‘최상의 부분이 그 자체로 혼자서 순수하게 고찰하게 하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그것이 알지 못하는 것을 파악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 이 내용을 어떤 사람은 ‘잠을 자는 동안 신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이 미래를 내다보고 깨어있을 때 허용되지 않는 진리의 영역에 접근하는 행위’ 즉 꿈을 신점(divination) 또는 예지몽 같은 것으로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행위와 연관시킨다. 다시 말해 꿈을 ‘깨어있을 때 자기가 알지 못했던 속마음, 또는 알지 못하는 사태를 드러내 주는 뭔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래의 언급들도 그러한 생각들과 연관되어 있다. ‘사지가 움직이는 동안 영혼은 잠들어 있지만, 잠자는 이들에게는 수많은 꿈속에서 기쁜 일과 힘든 일을 판가름해주는 일이 일어난다.’(핀다로스 <단편> 131. 3-5행), ‘잠을 자는 동안 영혼이 홀로 (신체와 격리되어) 존재하게 될 때 영혼은 자신의 본래 성품을 되찾아 미래의 일들을 예언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단편>), ‘영혼은 잠 속에서 활기를 띠며 신체가 거의 죽은 듯이 누워있을 때 감각과 모든 근심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진다.’(키케로 <신점에 관하여> 1권 60-61)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 영혼이 신체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은 이곳에서 ‘잠자는 동안 영혼의 이성부분이 약화되어 불법적 욕구가 깨어난다.’는 플라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은 ‘영혼이 신체로부터 해방되면 즉 영혼이 순수해지면 불법적인 욕구가 깨어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 572b ‘우리가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 참주정적 인간을 살피려다가 논의에서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서 571b 이후부터 불법적인 욕구에 대한 설명을 끌어들인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약간의 여담을 끌어들인 후 본론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한다.(<국가>만 보더라도 471c, 543c, 544b, 568d, 588b 참고)

* 572b ‘무법적인anomos 유형eidos의 욕구’ :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는 적극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욕구의 전 단계 즉 불법적’paranomos인 욕구의 바탕이 되는 욕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명예정적인 사람이 과두정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만방자함(572c) 또는 법을 피하려는 태도(548b), 그리고 이곳에서도 환기되고 있듯이 과두정적 인간에서 민주정적 인간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인색하지도 불법적이지도 않은 상태가 곧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 상태이다.(572c-d) 인간의 욕구 부분은 이성 부분과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영혼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만 이성 부분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이곳의 경우는 ‘잠자고 있는 동안’) 그에 비례하여 욕구 자체가 갖는 물질적 본성상 언제라도 무법적 유형의 욕구로 드러날 수 있다. 그러다 침 달린 수벌들이 저지르는 온갖 불법에 둘러싸여 욕정erōs에 사로잡힐 경우 무법적인 유형의 욕구는 마침내 성문법이든 불분법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563d) 불법적인 욕구로 변질 전락한다.(572e-573a) 변증술을 배우는 단계까지 오른 제법 똑똑한 자가 변증술을 잘못 배워 오용해서 생긴 일에도 불법적이라는 말을 쓴다.(537c, 538b, 539a) 무지한 자보다 잘못 배운 똑똑한 자가 더 위험하다. 이곳에서 민주정적 인간의 경우 아직 불법적인 욕구 상태로까지 타락한 사람이 아닌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572d) 플라톤은 이미 <일곱 번째 편지>(324d)에서 30인 참주정의 잔혹상을 경험한 후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으로 보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만큼 참주정적 인간의 불법적 욕구는 민주정적 인간의 욕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가장 나쁜 수준의 욕구 상태이다. 여기서 유형의 원어 eidos는 일종의 형태, 방식의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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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에는 본성physis을 뜻하는 말은 있어도 생물학적 ‘본능’(instinct)에 해당하는 말은 딱히 없다. 굳이 내용상 가까운 말을 꼽자면 앞서 말한 대로 본성으로서 영혼의 세부분 중 하나인 욕구 부분 즉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과 관련한 필수적인 욕구epithymia 정도이다. 영혼의 나머지 부분 즉 이성적 부분과 기개 부분 또한 넓은 의미에서 뭔가를 욕망하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들 또한 본성적 욕구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이타적 합리성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생물학에서 말하는 ‘본능’과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 인간의 욕구를 자는 동안 꿈속에서 작동하는 경우와 깨어있는 동안 작동하는 경우로 구분하고 외적 행위를 그것들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욕구이론은 종종 현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 Freud)의 욕망론과 비교되곤 한다. 플라톤의 욕망 구조 이론이 영혼을 구성하는 세 요소 즉 이성적 부분, 기개적 부분, 욕구 부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면 프로이트의 욕망 이론 역시 똑같이 정신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초자아(Superego)와 에고(ego), 이드(id)의 관계로 해명된다. 그리고 크게 보면 어떤 요소는 충동적 이기적 성격을 갖고 있고 어떤 요소는 그것을 통제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의 영혼의 이성 부분과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통제의 성격을 갖고 있고 플라톤의 영혼의 욕구 부분은 프로이트의 이드가 그렇듯 이기적 신체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 영혼의 세 부분 모두 똑같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선천적인 것인데 비해 프로이트의 경우는 오직 이드만이 선천적인 것일 뿐 나머지 초자아와 자아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들이다. 초자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이드들이 상호 충돌하고 서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자기 보전을 위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자기 통제력이고 에고는 이드와 초자아가 타협하여 생겨난 현실 자아의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의 기개 부분에 상응하는 요소는 프로이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공히 통제의 성격을 갖고 있으나 플라톤의 영혼의 이성 부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이드를 제어한다는 측면에서 비록 도덕의 심리적 기초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는 이드와의 충동과정에서 형성된 억압을 근본 성격으로 갖는 비합리적 힘이다. 무엇보다 플라톤과 프로이트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욕구를 구성하는 세 요소 중 가장 원천적이고 중대한 것으로 내세우는 요소가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경우는 다른 욕구 부분들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담당하는 영혼의 이성 부분을 인간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대하고 우월한 요소로 내세우는 데 반해 프로이트의 경우는 반대로 통제를 거부하는 충동적 욕구로서 무의식 내에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드를 인간성을 특징짓는 가장 강력하고도 원초적인 요소로 내세운다. 플라톤의 영혼론이 합리주의 도덕이론의 토대가 되고 프로이트의 욕망이론이 오늘날 비합리주의 욕망론의 토대가 되는 것도 각기 최강으로 내세우는 요소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 이곳 내용에 기초해보면 플라톤에게 꿈은 이성적 통제가 약화된 상태에서 생기지만 그렇다고 이성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즉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아니다. 굳이 무의식을 본성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플라톤은 프로이트와 달리 무의식에 도덕적 이성을 선천적인 요소로 포함시키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는 꿈의 내용 또한 비록 약화된 상태이나 선천적 본성으로서 도덕적 이성과 후천적 습관 또는 그 모두가 합해져 형성된 습성ēthos의 결과물이다. 물론 프로이트에게도 꿈은 습성은 물론 욕구에 대한 억압기제로서 초자아의 도덕적 통제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플라톤의 이성과 달리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닌, 무의식 내에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드 못지않은 강력한 힘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초자아는 도덕의 기원이 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좋음과 나쁨과 무관한 그냥 욕망에 대한 비합리적 억제력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연과 인간에 비록 생성의 힘 내지 충동적 욕구들이 선천적으로 존재할지라도 그 욕구들을 절제할 수 있는 본성적 능력으로서 영혼의 이성 부분 또한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곳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불법적인 욕구는 특성상 프로이트의 이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잘못된 생각과 악행이 거듭되면서 더욱 나쁘게 굳어진 습성에서 비롯된 후천적인 욕구들로서 좋음의 형상에 기초한 인간 영혼의 내적 능력 즉 정신의 자기 고양을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고 아예 제거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571b) 동양의 불교에서도 인간은 누구나 미망(迷妄)에 빠져 탐진치(貪瞋癡)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내성으로 불성을 가지고 있어 정신의 자기고양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

* 불법적인 욕구들에 관한 언급을 마무리한 후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마지막 주제인 참주정적인 인간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576b) -(4)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2-필연에서 자유에로(3)-절대적 필연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2-필연에서 자유에로(3)-절대적 필연성

1)

가능성이 실현되어 실제성으로 되는 매개는 곧 개체들의 관계다. 이 관계가 자립적이고 무차별한 실존으로 이루어지면, 이 매개는 우연한 것이 된다. 이 우연한 것은 추상적 필연성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곧 공허한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하는 양적인 것을 말한다.

이어서 이 관계가 자립적인 현상의 법칙 관계로 이루어지면, 이 매개는 구체적인 필연성 또는 상대적인 필연성으로 된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법칙이 성립하지만, 이들 법칙은 서로 우연적으로 만날 뿐이다. 우리가 흔히 자연계 또는 생태계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을 넘어서 이제 헤겔은 절대적 필연성에 이르는 매개에 이른다.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 이르면 자립적 개체는 타자와 단순히 법칙 관계를 지닌 것은 아니다. 개체는 타자를 결여라는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어서 이미 내적으로 타자와 통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자를 자기의 목적으로 추구하게 되니, 여기서 가능성의 실현은 필연적이다.

2)

상대적 필연성에서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양적으로 척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정량은 자립적이면서도 다른 정량에 제약된다. 그런데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등장하는 개체는 양적으로는 척도 관계에 해당한다.

그것은 마치 산과 알칼리의 관계와 같은 것인데, 여기서 산에는 알칼리를 통해 제공되는 것을 결여하며 거꾸로 알칼리에는 산을 통해 제공되는 것을 결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개체는 타자를 결여라는 방식으로 포함하는 총체성이니,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타자와 결합한다.

산과 알칼리가 배타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동시에 선택적인 친화성을 지니고 있듯이 절대적 필연성에서도 두 개체는 배타적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이런 선택적 친화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개체의 결합은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

절대적 필연성에 두 개체의 관계는 자기를 결여한 것을 타자를 통해 채우려는 운동이므로, 그 운동은 합목적적으로 일어난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생명체에서 암수의 관계가 될 것이다. 양자는 서로 결여한 것을 타자를 통해 채우려 하는데, 이것이 자연적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욕망이라 한다.

여기서 욕망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자유 의지의 단초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아직 자동적인 것 즉 맹목적 필연성에 그친다. 이 자동적인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발전하면서 본질은 개념으로 고양되지만, 아직은 여기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3)

실체가 가능성에서 실제성으로 자기를 펼치는 운동에서 매개가 되는 것은 개체의 관계였다. 이 개체가 서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면서, 가능성이 실제성으로 전개되는 것이 항상성 또는 일반성을 지닌 필연적인 것으로 된다.

상대적인(실재하는) 필연성에서 가능한 것은 현존하는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실제성을 실현한다. 또 하나의 실제성을 실현하는 가능성 역시 그 형식이나 근거에 따라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절대적 필연성에서는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매개하는 것이 배타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은 실제적인 것의 ① 근거이면서 동시에 조건이 되니, 절대적이다. 실제적인 것은 오직 그 가능성을 통해서만 실현되고, 그 가능성은 오직 그 실제성만으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두 대립하는 형식은 각자의 자립성을 잃어버리고 정립된 것으로 이행한다. 두 계기는 서로 직접적인 자기를 지양하여 타자의 계기가 되며, 이는 자기를 정립된 존재로 만들고, 타자를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운동이다. 동시에 각자는 자립적인 타자를 부정하면서 자기의 계기로 만든다. 이는 곧 자기를 전제하면서 타자를 자기의 계기로 즉 정립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성은 이런 정립된 존재를 지양하는 것이거나 직접성과 잠재성을 정립하는 것인데, 그에 못지않게 그런 가운데 이런 [정립된 존재의] 지양을 정립된 존재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 필연성은 그 자체 우연성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 필연성은 이런 자신의 존재 속에서 자기로부터 자기를 반발시켜 이런 반발 속에서 그 자체 다만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며 이런 자기 복귀를 통해 생성된 그 자신의 존재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반발시킨 것이다.”(논리학, GW11, 390)

이런 ② 상호 자기 지양과 타자의 정립이라는 관계를 통해 가능성과 실제성이 통일을 이룬다. 이미 상대적 필연성에서 가능성과 실제성은 형식상 차이를 지닌 채 내용상 동일한 것으로서 통일되어서 필연성은 이 두 형식에 외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가능성과 실제성이 상호 타자를 통해 매개하면서 각자가 지닌 차별적인 형식은 투명해지며, 그들의 통일은 각자에게 내면적으로 되면서 ③ 형식과 내용의 구별조차 해소되고 만다. 헤겔은 이를 형식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차별하게 되는”(논리학, GW11, 390) 것이며, 각자는 “내용으로 충만한 사태가 된다”(논리학, GW11, 390)고 한다.

가능성과 실제성은 각자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를 통해 다시 자기로 복귀하니, 이 자기 매개적 자기 동일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지양된 존재가 다시 지양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의 자기 부정성이며, 직접적인 것이 자기 매개를 통해 되돌아온다는 점에서는 자기 관계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필연성에서 ④ 순수 존재와 순수 본질이 통일된다. 즉 단순한 직접성과 절대적 부정성이 통일된다. 따라서 여기서 절대적 필연성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논리학, GW11, 391)이다. 바로 이것이 곧 실체다.

“절대적 필연성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실제성과 가능성이 그리고 형식적 필연성과 실재적 필연성이 복귀하는 진리이다. 이 절대적 필연성은 이미 밝힌 것처럼 존재가 자신의 부정인 본질 속에서 자기 관계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절대적 필연성은 단순한 직접성이거나 순수한 존재이며 그에 못지않게 단순한 자기 내 반성이거나 순수한 본질이다. 절대적 필연성은 양자가 동일하게 된 것이다.”(논리학, GW11, 391)

4)

우연성이나 상대적 필연성에서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매개하는 것은 가능성 자체에 외적인 것이었다.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이런 매개를 통해 가능성 자체가 자기를 실현하는 힘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필연적인 실제성 즉 실체는 “자기 자신에서 나와서 자기에 이르는” 필연성이니 이는 곧 ‘자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90)

그러나 동시에 헤겔은 이런 점에서 곧 이 실체는 곧 우연적이며 공허한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자기에 근거한다는 것은 자기 외에 어떤 다른 근거나 조건을 가지지 못하니, 그것은 자기 발생적인, 자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헤겔은 이런 실체를 ‘맹목적’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도 다른 것 속에서 빛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실체는 “타자에 관계한다는 흔적을 자신에서 보여주고자 하지 않으며” “자기 내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자신에서 필연적이다.”(논리학, GW11, 391)

여기서 본질은 “존재 속에 가두어져 있으며” 실체들 사이에는 서로 접촉함이 없고, 오직 “자기 매개하는 것이면서 타자를 통한 매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존재와 동일한 것인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실체는 “다만 가능한 것, 공허하게 정립된 것”으로 규정된다.(논리학, GW11, 391)

“이 우연성은 자유로운, 본래 필연적인 실제성의 본질이다. 이런 실제성의 본질은 빛을 꺼려하니, 왜냐하면 이 실제성은 빛이나 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순수하게 자기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독자적으로 형태를 갖추고 있고 다만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자유롭고 본래 필연적인] 실제성은 다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1-392)

이 실제성은 본질이 자기를 계시하는 것이다. 절대적 부정성은 단순한 존재이니, 본질은 “빛이 없는 직접성이 지닌 자유로움” 속에 사라지며 동시에 “이 실제적인 것들을 깨고 나온다.” 왜냐하면, 존재는 자기 속에 본질을 지니고 있어서 자기 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질은 그런 실제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2)

본질은 실제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이며, 이 무는 “실제성에 대립하는 자유로운 타자 존재”인 동시에 실제성을 산출하고 “그들의 존재”가 된다.(논리학, GW11, 392)

헤겔은 이런 자유로운, 필연적 실제성을 필연성이 등장하는 ‘기회[Mal]’(논리학, GW11, 392)라고 한다. 즉 절대자가 출현하는 때이다. 이 기회 속에 절대적 부정성으로서 본질이 자기를 계시하고 이런 자기규정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면서 이런 실제성을 “자유롭게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것으로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2)

실체는 내면과 외면의 통일이며, 본질과 존재의 통일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우연적인 것이니, 헤겔은 이를 기회라고 했다. 곧 절대자가 출현한 때이다. 여기서 실체는 절대적인 필연성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우연적인 것 즉 자동적인 것이다.

이런 자동적인 것은 앞으로 등장할 자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아직은 맹목적 필연성에 그치며, 이는 인간의 유적 본질에 관한 자각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실체 즉 사회 속에서 마침내 출현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 본질론의 마지막 장인 실체적 관계의 장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통과해야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1-필연에서 자유로(2) 개연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1-필연에서 자유로(2) 개연성

1)

형식적인 우연성은 무차별한 실존에서 발견되는 양상 개념이다. 자연계의 어떤 사물도 이런 무차별적 실존은 아니다. 이런 실존은 형식논리학(추상적 사유)에서 파악하는 사태이다. 형식논리학에서 모든 사태는 형식적 동일성 또는 공허한 형식을 제외하고는 내용상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공허한 동일성(유적 본질)을 지닌 실존이 형식적 가능성이고, 무차별한 집단을 이루는 실존이 곧 형식적 실제성이다.

자연 세계에서 존재하는 대부분 사물은 실존에 속한다기보다 현상에 속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상 편에서 설명했듯이 현상으로서 개체들은 한편으로는 자립적이어서 서로 무차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법칙 관계를 맺는다. 이 법칙 관계 속에서 각자는 부정성을 지니고 타자와 통일된다.

마찬가지로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매개하는 개체는 무차별한 실존에서 자립적인 동시에 법칙 관계 속에 있는 현상으로 발전하면서, 양상도 형식적인 필연성 즉 우연성에서 실재적인(구체적인) 필연성 즉 개연성으로 발전한다. 헤겔은 이를 상대적인 필연성이라고도 한다.

또, 앞에서 우연성이 정량의 세계에 상응했다면, 개연성은 정량이 지양된 것 즉 척도에 상응한다. 단칭 판단에서 정량은 서로 양적으로 동일하면서도, 질적으로 무차별하니 그 관계의 장은 텅 빈 공간이었다.

정량이 지양된 척도는 두 정량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되는데 이런 척도는 특칭 판단을 통해 표현된다. 이 척도는 두 정량의 관계인데, 이 관계 때문에 한편으로 한 요소는 자립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른 요소에 의해 제약된다. 이런 자립성과 제약된 관계라는 이중성 때문에 척도는 곧 현상에 속하는 것이며, 양상에서는 개연성에 상응한다.

현상에서 실체는 현상의 총체인데 이는 곧 다양한 법칙 관계가 서로 교차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 세계가 흔히 우리가 자연계라고 알고 있는 세계이다. 이 자연 세계는 법칙의 필연적 관계와 그 법칙 상호의 우연적 교차가 결합한 세계다. 생물계에서는 생태적 관계가 전형적으로 여기에 속한다. 그것은 진화의 법칙을 따르면서도 그 진화는 맹목적이다.

앞에서 실존에 적용하는 양상 개념이 의제적이라고 했듯이 여기서 현상에서 적용되는 양상 개념도 마찬가지로 의제적이다. 현상의 법칙 관계는 그 자체로는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제적으로는 하나의 현상에 내재하는 가능성이 이 관계를 통해 실제적인 것으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개연성에서 출발점은 하나의 구체적[real: 실재적] 실제성이다. 이 실제성은 하나의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 구체적 내용을 지닌 자립적인 실존이다.

다른 한편, 하나의 현상으로서 실제성은 다른 현상과 법칙 관계 속에 있다. 그런 관계 속에 있으므로 하나의 현상은 다른 현상으로부터 이미 반성된, 정립된 실존이다. 이 실제적 현상은 다른 현상으로부터 반성된 것이므로 구체적[real: 실재적] 내용을 지닌 가능적 존재[An sich Sein]다.

또한, 하나의 실제성은 이런 법칙 관계 속에서 다른 구체적 실제성에 대해 그것의 가능성이 된다. 이 가능성이 실현된 구체적[real: 실재적] 실제 역시 특정한 내용을 지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실제성은 가능적인 것이 지닌 구체적 내용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새로 실현된 실제성 역시 독자적인 자립적 실존을 갖는다.

“이 구체적[rea] 실제성 자체는 처음에는 다양한 성질을 지닌 사물, 실존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실제성은 현상 속에서 해소되어 버리는 실존이 아니라 실제성인 한에서 동시에 잠재적 존재이며 자기 내로 반성한 존재다. 이 실제성은 단순한 실존의 무차별한 다양성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니, 그것의 외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인 관계이다.”(논리학, GW11, 385)

3)

구체적 가능성에서 구체적 실제성으로 전환은 존재론에서 일어나는 타자로의 이행[Uebergehen] 운동(예를 들어 빨간색이 그 부정인 파란색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런 전환은 현상에서 일어나는 법칙 관계(“존재하는 어떤 것이 타자에 관계하는 것”)도 아니다.

양상의 운동은 근거 관계를 통해 내적 유적 본질이 외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운동이다. 여기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동일한 근거, 본질, 형식이 전이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관계를 절대자가 자기를 계시하는 것[Menifestat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것이 미치는 영향, 실제화[wirken]를 “그것이 산출하는 타자를 통해 알려주며”, “하나의 자립적인 것이 다른 자립적인 것 속에서 자신의 특정한 본질규정을 갖는 것”이다.(논리학, GW11, 385-386)

형식적 가능성은 무엇이든 가능하며 형식적 어떤 것도 형식적으로는 실제적이다. 그러나 구체적 가능성과 구체적 실제성에서 존재하는 근거 관계를 통해서 보면, 가능성과 실제성은 한계를 지닌다.

근거 관계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형식과 내용 그리고 조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대립하는 형식의 통일이 내용이며, 내용이 현존하는 조건에 따라서 실존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실제성은 그것이 지닌 내용이 포함하는 다양한 형식에 따라서 여러 근거, 여러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거꾸로 하나의 가능성은 다양한 현존이라는 조건을 통해 여러 실제성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가능성과 실제성 사이에는 근거 관계가 존재하므로 여기서 양자 사이에 구체적 본질이 동일하게 존재하는 한, 실제성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도 제한되며, 가능성을 현존하게 하는 조건도 제한되니, 어느 편에서나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형식적 가능성은 앞에서 말했듯이 다만 형식적이므로 내용의 구별에 무차별하다. 그러므로 p가 가능하다면, -p 역시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태의 형식에서는 무모순적이지만, 사태의 내용상 모순이 될 수 있다.

구체적 가능성 역시 이와 무모순성과 모순성을 동시에 가진다. 하나의 구체적 실제성의 조건으로 여러 구체적 가능성이 있다. 이 여러 구체적 가능성은 서로 통일되어 하나의 실제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은 그것이 지닌 그 자체 존재 때문에 그것이 지닌 단순한 내용 규정에 따라서 보더라도 모순되지 않는 것 즉 형식적으로 동일한 것이지만, 그런 가능한 것이 전개되고 구별된 상황이나 그것이 관련된 모든 것들을 따라서 보더라도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논리학, GW11, 387)

동시에 이 구체적 가능성은 조건에 따라 여러 실제성을 실현하니, 이 구체적 실제성은 서로 상이하며, 심지어 서로 모순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체적 가능성은 형식적 가능성처럼 그 자신이 모순적인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이 가능한 것은 자기 내에서 다양하며 다른 것과 더불어 다양한 관계 속에 있으므로 이런 상이한 것은 본래 대립으로 이행하니, 이는 모순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 387)

4)

헤겔은 이 운동에서 매개가 되는 구체적 가능성은 구체적인 실제성이 부정된, 정립된 것이면서 다시 자기를 부정하여 다른 구체적 실제성으로 나가니, ① 가능성은 기존의 실제성이 반성된 또는 정립된 것이며 이 가능성이 다른 실제성으로 실현되는 것은 “정립된 존재 자체가 정립되는 것”(논리학, GW11, 388)이고 실제성이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니 이런 점에서는 필연성이다.

“구체적 가능성의 부정은 그 가능성이 자기와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능성이 자기를 지양하는 것은 이런 지양이 자기 내에서 반발하는 것이므로 이 구체적 가능성은 구체적 필연성으로 된다.”(논리학, GW11, 388)

다시 말하자면 가능성은 실제성의 가능 조건이며 그런 점에서 가능성은 자기가 실현하는 실제성과 내용상 동일하니 “실제성을 그 자신에서 지니며” “달리 될 수는 없는 것” 즉 필연적인 것이다. 즉 “그런 조건이나 상황 아래서 어떤 것은 다른 결과를 이룰 수 없다.”(논리학, GW11, 388)

그러나 이 필연성은 제한된 상대적인 필연성 즉 개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법칙 관계를 이루는 ② 두 현상은 동일성과 동시에 무차별성을 가지고, 아직 외적 반성을 완전하게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칙 관계가 출발점으로 삼는 구체적 가능성은 다만 “규정된 실제성”이고, “직접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규정성을 다양성을 지닌 실존하는 상황에서 가지니” (논리학, GW11, 388)즉 이 법칙 관계는 일정한 상황 안에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동시에 상대적이다. 즉 필연성은 그 출발점이 되는 전제를 갖는다. 필연성은 우연적인 것에서 자신의 출발점을 갖는다.” (논리학, GW11, 385)

양자에서 동일한 내용이 이처럼 각자의 자립성에 외면적이므로 이 내용 자체가 특정한 것, 실재하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가능성의 실제성으로의 전환은 내용의 동일성 때문에 필연적이지만, 동시에 “이 내용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우연성을 갖는다.”(논리학, GW11, 388)

그러므로 이런 필연성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필연적인 동시에 우연한 것일 뿐이다. 헤겔은 이런 필연성을 구체적 또는 상대적인 필연성이라 하며 동시에 곧 구체적 우연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것인 동시에 우연적인 것이다.

5)

구체적 가능성과 구체적 실제성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내용의 동일성은 형식의 차이와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실재하는 필연성이 지닌 상대성은 내용에서 드러나는데 그 방식을 보면 그 내용은 다만 처음에는 형식에 무차별한 동일성이고 따라서 그 형식으로부터 구별된, 일반적으로 말해 특정한 내용이다.”(논리학, GW11, 389)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은 한편으로 전제된 자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자와 관계 속에 있고 타자를 매개로 자기 내로 복귀한다.

“이 필연성은 그렇게 되는 것을 통해 가능성과 실제성의 아직 자기 내로 반성되지 않은 통일에서 출발한다. 이런 전제와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은 아직 분리되지 않는다.”(논리학, GW11, 388-389)

또는 이런 매개 운동은 자립적인 각자에 외면적이어서, 자립적인 것 자체가 자기로부터 전개하는 운동은 아니니, “필연성은 아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연성[자유]으로 규정된 것”(논리학, GW11, 385) 즉 절대적 필연성, 자발적인 필연성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