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 사고 대 다양체 사유: 비례중항 대 조화중항 [천 하룻밤 이야기]

이원론 사고 대 다양체 사유: 비례중항 대 조화중항

2026 02 19 우수(雨水): 겨울이 지나가는 기호(sig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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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언론지평 또는 공론장이라 하는 소통의 방식이 왜 이분법에 매여 있을까? 음양, 천지, 건곤, 용호 등의 용어에 습관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일까? 통시적 습관과 현 사회의 공시적 습관은 다를 것이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이런 사유방식에 어떤 문제가 들어 있다고 여겼다. 고대철학을 연구하는 철학도들도 이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지금도.

언어라기보다 입말의 분석에서 나온 공시태라 할 수 있는 현상에서도 사건들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위한 인용을 보면 더욱 흥미롭다. 언론이든 학자이든 인용하는 학자들의 소속 또는 계열을 보면 그러하다. 현 상황에서도 맑스도 공산주의도 주제로 올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맑스를 입에 올리는 자들이 맑스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한다. 이 문제만이 아니다. 민주정을 말하면서도 아테네 민주정이 아니라, 영국이나 미국이 민주제를 말한다. 공화정을 이야기하면서 로마 황제제 이전의 공화정을 말하지 않고, 나아가 프랑스 대혁명의 공화정을 말하지 않고, 민주제 앞에다 자유와 민주라는 용어를 붙여서 자유민주공화국이라 한다. 이런 담론들이 유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서양사 또는 세계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조선말 또는 대한 제국시대부터일 것이니, 동학이후로 치면 140여 년 쯤 될 것이다. 세계사 속에 편입의 시기에서, 코로나 이후에 눈떠보니 우리가 전지구적 삶을 살고 있다고들 한다. 우리가 세계의 일부를 넘어서 세계사 속에 가로지르며 흐르는 것은, 누리소통 이래로 AI시대에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세계사 속에서 파편들만 우리의 누리소통에서 전개될 뿐이지만, 소통의 연결방식은 무한정하게 열려있다. 이제 배치와 배열을 유기적으로 조직화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

공시태 속에서 주류(상층)가 지도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내류(심층)는 이 부류에 끌려가고 있다고 한다. 통시적으로 오랜 과정에서 주류의 학문(사서삼경)은 인민에게 명령 또는 지배의 논리였지, 내류의 삶과 심정과는 따로 놀았다. 그럼에도 주류 중의 일부는 항상 백성이 하늘이라고 한다. 백성이 하늘이 되기에는, 세계사에서 보아 백성의 소통(입말)이 문자화되어야 하는 데, 우리에게는 한자문화 속에서 상층과 심층이 따로 가고 있었다. 내류가 표면으로 오른 것은 겨우 80여 년이라 할 수 있다. 표면에서 심층이 내공을 가지고 표면의 각질을 균열내고 솟아나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아직도 필요하다. 내류의 강도가 축적된 내공은, 상층이 심층을 가르치는 정보의 획일화와 위계질서에 따른 명령과 지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층의 자각으로 자치성과 자율성, 공시태 속에서도 연대와 소통에 있다.

백성이, 인민이, 민중이 입말의 소통을 배치와 배열을 바꾸는 것은 두 가지 습관(역사적 습관, 현실 제도적 도덕)에 젖은 사고방식에서는 쉽지 않았다. 지금도. 바꾸고자 하는 과정에 걸림돌이 세계사를 재단하고 선전하는 상층의 방식이 공시태의 습관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 중에서 하나는 유럽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서양이 또는 이방인이 우리나라, 중국, 일본을 합하여 동양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의 특성을 무시하고 중국과 일본의 역사 또는 근대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복속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화를 낸다. 우리나라는 중국도 일본도 아닌 우리의 고유성이 있다고 한다. 그 고유성이 상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국뽕처럼 답한다. 그게 답이 아니다. 언어와 문자가 아니라, 입말과 문자화 방식이, 유기적 조직화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고, 이런 차이는 어느 차이보다 크다. 여기에 대해 우리나라 언론지평에서 인용하는 것을 보면, 유럽에서 영국, 독일이 거의 8할에서 9할이며, 프랑스는 언급일 뿐이다. 그리고 영국과 대륙이라고 이원화하면서 독일과 프랑스가 같은 대륙 사상이라고 독일이야기로 덮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화를 내듯이 프랑스인도 화를 낼 것이다. 프랑스의 고유성이 먼저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통시태로 보아, 단군과 고조선 이래로 중국과 다르다고 한들, 훈민정음(1446년)에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는 것보다 더 차아가 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대략 보아 유럽 3국의 차이가 르네상스 시기(1500년대)라 보면 비슷한 시기이다. 철학사에서는 이시기에 인류가 자의식의 발현의 시기라 한다. 중국은 금나라의 송나라 침입으로 자의식의 발현으로 신유학(주자학)이 생겼다고 하나,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1368-1664)에서 통일된 중국을 갖는 점에서 중국의 자의식의 성립으로 본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오랜 관습상으로 중국 사상의 일부로, 현시대의 공시태로서 서양학문의 수입의 습관에서 일본 사상의 일부로, 서양인들이 알고 있다. 냉전의 산물로서 남북전쟁이래로 피폐해진 나라에서 코로나의 방역으로 세계사의 표면에 오르면서, 세계가 우리나라를 중국과 일본과 다른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사상을 같은 대륙사상이라고 하면, 그 이방인이 우리나라를 모르듯이, 우리가 프랑스를 모르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사상적 차이와 통시적 차히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와 차히보다 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현시점에서 언론 지평에서, 사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서는 독일과 일본의 흐름과 영국과 미국의 사고방식을 따라 가고, 프랑스 사유를 밀어낸다. 내가 알기로 공산당과 사회당으로 집회 결사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는 프랑스가 유일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말하면, 이분법 사고에 젖어서, 마치 중국의 유학의 공화과 불교의 평등을 밀어내는 것처럼, 이것들을 이상하게도 사교(邪敎) 또는 빨갱이 취급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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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민주당에서 합당 문제에서도 그러하다. 합당의 주제로서, 또는 우리나라가 나갈 중요한 화두로서,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는 사회권과 자연권을 표면위로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사회권이란 상층의 공론장이 아니라 민중의 의식화의 표현, 심층의 표면화이다. 이 용어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부제로서 인용하는 정치권(le droit politique)과 같다. 이 시기는 그리스 민주제처럼 인민의 의사에 의한 발의와 결정이 제도화하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가 르네상스 이래로 프랑스 입말을 쓰기 시작하여 200여년이 걸려서야, 상층이 문자화를 통해 지배하던 라틴어가 물러나는 시점이다. 이 귀결이 프랑스 대혁명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계약의 사회에서, 철학적으로 ‘자연배후학(형이상학)’은 자연이지, 신이나 지배층이 만든 법률이 아니다. 법치는 자연권의 토대위에 있다. 모든 사회적 계약과 규약이 인민의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듯이, 세계는 자연의 자치와 자기과정 또는 자율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배후에는 자연의 자치성과 자율성이 있다. 인간도 스스로 자치와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유는 입말이 소통장에서, 표면에서 자유로울 때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여러 별종들이 성행했다는 것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서유럽의 세 나라, 프랑스, 독일, 영국에 대해 좀 더 깊이있게 들여다보고 생각해야하듯이,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 대해 공시태에 머물지 말고, 오랜 과정의 삶의 방식에서 나온 통시태의 사유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특이성이 뛰어나다. 일본이 한자와 자국어의 병행이듯이 중국의 고문과 간자체의 병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입의 구강(신체의 유기적 조직화)과 함께 하는 입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차이는 공시태의 차이가 아니라, 통시태의 오랜 과정에서 만들어진(창조된) 차히이다. 이로서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에서, 다양체가 아니라도 삼원적으로 또는 다원적으로 다루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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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을 대하는 태도에서 다른 하나는 서양사상사에 대한 이해가, 내가 보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이 또는 식자들이, 거의 9할이 일본과 미국에 젖어있다. 일제와 미제의 영향을 당연히 여기는 것은 꺼삐딴 리와 같은 사고방식이리라. 내가 서울에 와서 천재와 수재라고 불리는 이들을 많이도 보았다. 철학에서도 이들 중의 9할 이상이 앵글로색슨(영미, 독일철학)에 젖어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나도 잘은 몰랐었지만 박홍규(朴洪奎, 1919~1994 : 前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선생님에게는 열에 ‘하나’가 특이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를 이어가는 이는 드물다. 내가 가끔 농담처럼 이야기하기로, 왜 프랑스 철학을 선택했는가 하면, 2천년의 중국의 너울에서 벗어나고, 100년의 일본의 학문적 영향에서 떠나고 싶고, 미국의 철학이 우리를 지배하려 드는 것이 싫어서라고 한다. 인도나 중동을 선택하지 않고 프랑스를 선택한 것도 서울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은 통시적으로 조선시대에 훈구파로서 상층을 유지하려는 사장파, 서인, 노론, 주자학으로 이어지는 외세 의존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계보에서 학문적 편견으로 “사문난적”이라는 방식으로 편 가르기 하면서, 달리 사유하기를 배제를 넘어서 그런 사유를 은연 중에 악의 소굴처럼 만들었다. 이에 비해 내재적 발현을 이어가는 사림파, 동인, 남인, 실학 이후에도 문체반정에 대해 별종의 발언들이 있었으며, 이는 20세기에 만주에서 다른 계열로서 자주 독립파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원적 분화의 설명도 또한 이중성으로 한정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영토에서는 상층의 지배가 있었다. 심층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했던 시절에 이원화는 표면 위에서 이원화이지, 자연배후학의 자연과 정치권(사회권)의 주체로서 인민을 포함하는 이원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한계였다. 그럼에도 120여 년 동안에 자의식의 발현으로 80여 년 전부터 입말이 표면에 올라오면서 삼원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현재는 상층과 심층의 대립(모순이 아니다) 사이에 표면의 이중성이 드러났다. 이런 표면의 이중성을 주류 언론은 현실을 인정하자면서 공시태로서 사실(만들어진 것)들을 보자고 하고, 통시태 입장에서는 사건(연관들의 조화)들을 만들어가자고 할 것이다. 사건은 접속하는 연관의 사유에 덩어리로서, 이 사건이 굴러가는 방식에 따라 그 시대의 카이로스(또는 변곡점)를 드러내 보인다. 그 변곡점을 잘 들여다보면서, 사람들의 발언과 조화를 이룰 평결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이다. 이번에 유시민의 발언은 변곡점을 찍었을 것이며, 이런 사유의 흐름을 잡고 있었던 이는 이해찬(1952-2026)이라고들 한다. 이런 과정에서도 빨갱이니 공산주의니 하는 용어들로 공론장에서는 이런 화두를 매장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인류가 통시적으로 주장해온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사상의 자유에서 등장하는 자유가 자본주의와 우리나라 현실에서 모순이라고 여기는 이들이다. 모순은 유일신앙자의 논리이고 존재론의 비례의 논리이지, 자연배후학이든 실증철학사의 조화의 논리가 아니다. 전자에서는 사실에서 만들어진 것들의 비교와 수량적 비례로서 참과 거짓, 또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한다. 이에 비해 후자에서는 사건에서 다양한 접속에서 대립과 차히가 있지만 사유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한 사유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들(les faits)과 사건(les événements)의 차히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속에서 차이가 악마화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아류의 비례중항(比例中項)을 중요시하는 것이고 앵글로색슨의 사고방식이다. 이에 비해 사건 속에서 다양한 접속에 대립을 종합하는(진정한 의미에서 변증론) 과정에서 조화중항(調和中項)을 찾는데, 이는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사유에 있다. 이 후자들의 특징은 유일신이 없다는 것이다. 유일신으로 상승하는 사고에서 최고 류개념의 성립을 변증법이라고하는 것은 자연배후학이 아니고 유일종교의 신학이다. 철학은 신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신을 믿는 자들은 그 신이 자신들의 소유 또는 대변자라고 착각한다. 이에 비해 자연배후학에서 자연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누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자치와 자율성과 자발성에 대한 성찰과 집중에 있다. 변증법이란 이름으로 대립을 모순으로 몰아 적대시하는 사고와, 공동체에서 소유 없는 공산의 사회의 조화와 공감, 누리소통에서 공명을 찾는 사유, 이 둘 사이에 차히는 어디서 왔을까? 나로서는 박홍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무엇인가 다르긴 다른데 어떻게 다른지, 선생님의 설명이나, 뒷풀이에서 그 제자들 사이에서의 해석의 차히가 있다는 것은 느끼지만 무엇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없었다. 공시태와 통시태, 우주론과 우주발생론, 존재론과 자연론, 공간론과 시간론, 참주제와 민주제, 황제제와 공화제, 진위론과 실증론 등에서 사유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이 차히의 근원이 무엇일까?는 늘 고민이었다. 벩송은 두 가지가 근원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정지와 운동, 공간과 시간이란 용어를 내비쳤지만, 나로서는 젊은 시절에 운동(정확하게는 지속)의 설명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는 사유의 단위(l’unité)에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벩송은 수의 하나(un)라는 단위의 비판에서 출발했을까? 수학책을 열권이상 읽으면서도 잘 찾을 수 없었다. 수학사에서 한 가지 얻은 것은, 모든 수학들은 수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브룅슈비끄는 달리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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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하나의 단위, 그 다음으로 둘째 단위, 두 단위의 설명과 둘 사이의 유사성과 상사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늘과 땅, 음과 양, 좌파와 우파, 0과 1은 편리를 위한 사고방식이다. 그 둘은 유사성보다 상사성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양자를 쌍으로 보는 경우, 대립으로 보는 경우, 조화와 순환으로 보는 경우, 그리고 극한에서 모순으로 추상하는 경우, 등은 각각이 다르다.

하나의 단위에서 둘로 구별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는 사고방식과 달리 하나에서 여럿이 발생한다는 사유는 다르다. 둘은 자르면서 생기는 것이고 이로부터 사고를 하는 이들이 간단명료해 보인다. 그럼에도 자연은 하나에서 여럿을 창조하고 생산하며, 여럿들 사이의 발생과 생장이 서로 다르다. 여럿을 모두 이야기하기 어려워서, 셋으로 줄여서 간략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넷 또는 다섯으로 다루기도 한다. 인간의 의식도 얼(혼)과 행(삶)의 이분법이 있는가 하면, 현실에서 상층과 표면과 심층(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로 구별하여 사유하는 이들도 있고, 나아가 사상처럼 넷으로 구별하는 경우도 있으나, 수학사에서 1차, 2차, 3차, 4차를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공간상으로 4차를 구해내기 어렵다. 그러면 점을 1차로 선을 2차로 면을 3차로, 체적을 4차로 생각해 보면 되지 않을까하는 이들이 있다. 점이란 것이 그렇지 않다. 이 점은 아톰과도 다르고, 산수학에서 수와도 다르고, 언어논리에서 항목 또는 용어들과도 다르다. 이런 차이들을 숙고하는 쪽은 (플라톤과 플라톤주의 이래로) 일자와 다자에 대한 구별에도 고심을 한다. 편리의 사고는 플라톤주의, 루소주의, 맑스주의 등으로 쉽게 구획정리로서 나름의 경계를 그은 것이다. 플라톤에서 페라스(한계)를 상충에 두는 이유이기도 한다. 그러면 반대편의 아페이론은 무엇인가? 페라스의 범위 밖인가? 페라스를 생산하는 토대 또는 재료일까? 그 자름의 경계는 무엇인가?

플라톤의 사유 깊이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이어지고, 대를 이어간 아카데미아 학당장(총장)들로 연결된다. 플라톤의 「폴리테이아」편에서 선분의 비유는 편리한 사고였다. 네 등분인데 이등분으로 보면 인식과 비인식(억측)이라는 이분법이다. 그러나 수학사는 흥미롭게도 인식(에피스테메)에 산술학과 기하학, 비인식 부분에 천문학(책력)과 음향(입말, 음악)을 포함시켰다. 이로서 중국의 주역이나 사상의학처럼 4가지로 분류된다. 그런데 플라톤이 후기에 가서 「티마이오스」편에서 이데아계, 데미우르고스, 아페이론계로 삼등분했다. 삶의 현실에서 로고서, 에토스, 파토스의 세 측면을 고민했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중간항처럼 보이는 에토스에는 서로 겹치는 듯하지만 다른 기하학과 천문학이 있다. 얼핏 보아 천문학이 상층에, 기하학이 심층에 가까울 것 같다. 이런 고민이 아카데미아 학당장들은 괴롭혀서 회의론으로 개연성으로 고민했다고 한다. 플라톤의 천문학은 이집트 책력에서 온 것이라 하며, 책력은 삶의 터전에서 생활양식의 필수요소이다. 그 당시에 12별자리든 24절기든 농사와 연관이며, 인간이 먹거리와 잠자리의 중요성이 표출된 것이다.

그러면 음향은 무엇일까? 비빌론과 이집트의 음악(율려)에 대한 전승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악기가 주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의 연극 극장을 생각해보면, 반원의 중심(촛점)에서 연기자가 이야기 한다. 관객에게 골고루 전달되는 방식이며, 그리스 민주정의 전성기에 시인 작가들이 또는 연설가, 변론가들이 시대 이끈 주인공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언설들이 난무하는 길거리에 이야기들을 종합(담론, 평결)을 하고자 한 인물로 보자. 그러면 플라톤의 고민은 아테네 시민의 의견들의 종합으로 실행방식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페라스를 전달하는 지자의 역할일까, 아니면 아페이론의 다양한 입말의 발설들을 종합하는 현자의 길이었을까? 앵글로색슨 철학사가들은 전자에, 프랑스 실증주의는 후자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카데미아의 후대 학당장이든 플로티노스이후 플라톤의 계승자들은 책력과 음향에서 그리고 수학의 내용에서 운동과 변환은 산술학의 단위 1과 기하학의 단위 점과 다른 것으로 보았다. 이 단위는 산술학도 기하학도 아닌 조화중항이라는 단위가 있다는 것이다.

학문사에서 늦게서야 이분법의 단위가 아닌 다른 단위가 있음을 확증했다. 비례중항이 맞다 틀리다를 따진다면, 조화중항은 소크라테스와 공자처럼 훌륭타 장하다를 다루었을 것이다. 되돌아가서 플라톤은 이원적 비례중항이 아니라, 삶에서 다양한 발생(아페이론의 생성)을 고심했다고 보았다. 그 삶에서 발현, 발생의 다양한 방향과 다양한 계열의 종합이 플라톤이 사유했던 변증법일 것이다. 이로 후대의 학자들은 4가지 분류방식의 종합은 상층의 산술과 기하의 비례방식의 중간을 기본으로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원(공)의 운행과 변화와 음향의 확장과 전파에 대한 것을 포함하여 종합으로서 변증법적 중앙, 즉 조화중앙을 찾으려했다고 보았다. 삶에서는 비례중항이 중하고 먼저라고 보았다. – 아마도 후대에서 플라톤의 다자의 조화에 대한 해석을, 상층의 이데아들의 조화가 아니라 아페이론에서 발생된 준이데아들의 조화로 보았을 것이다. – 브룅슈비끄 수학사는 이를 흥미롭게 전개한다. 양자 대결에서 진위, 선악의 구별은 비례중항이란 이름으로 유일신앙의 착각이지만, 이에 반해 삼자 또는 다자의 조화중항은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 상부상조, 약속, 계약, 평결, 협약 등에서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비례중항주의자들이 언론 공론장을 이야기하면서 중립적이라고 하는 말은 상층의 지배를 감추고 있는 사기에 가깝다. 비례중항에서 중립은 선과 악, 진과 위 사이에 서는 것으로, 전형적인 유일신앙의 이분법적 사고이다. 이 중립이라는 항은 현실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상층(극우)에 편드는 경계선을 긋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플라톤주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의에서 끌어내어 이야기 한다. 플라톤의 사상에서 초기부터 이분법이 있었지만, 그것은 영혼의 역량에 대한 마부의 비유에서, 하나에서 둘로 갈라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하나에서 둘만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을 선분의 비유로서, 우주의 생성에서 새로이 다루고자 하였으나, 당대의 입말과 수학들의 전개방식의 한계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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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일제에서 벗어나 20세기 후반에 입말의 발생과 확장이 극대화 되었다. 이런 발생론적 과정이 서울이라는 틀에, 즉 스스로 페라스를 긋는 작업에 갇히어, 또는 조선 시대 관습이래로 상층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남북의 경계를 긋는 자들에 포획되어, 이런 사고가 이분법에 머문 것은, 앵글로색슨 철학을 심은 일제의 강압도 있었지만, 사문난적과 문체반정의 영향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서울은 사대주의의 연장에 서 있었고, 미국이라는 제국으로 갈아타면서 앵글로색슨의 분석철학을 심었고, 정의론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비례중항을 심었다. 그 속에 미국의 정의, 독일의 공론장을 말하고 있다. 그나마도 플라톤에 대한 깊은 탐구와 이해가 있었음에도, 서울이 사문난적이래로 3백여년 습관과, 현실에서 영어를 간판으로 만드는 공시적 습관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덧씌운 플라톤주의도, 그리고 맑스주의도, 비례중항이라는 이름으로 젖어서, 중립적이고 하며 중간자의 입장이라고 하며, 민주와 정의를 말한다. 이들의 사고에서는 플라톤이 고민했던 에토스에 이르는 발생의 책력과 음향은 제국의 체제에 맞게 짜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산술과 기학의 이중성에 대해 언어 추리로서 최고류로 종합이 현시대를 지배한다. 그 지배는 로마 황제제 이래로 전쟁을 통한 지배와 수탈이며, 이 그늘 속에서 서울은 인민의 최종심급의 평결장을 법치라는 이름으로 공론장을 만들고 있으며, 발생과 생성을 거짓과 악으로 몰아가려 한다. 이번에 극우파의 제국 추종주의와 달리, 달리 사유하기의 방식으로 사회권(루소의 정치권리)과 토지에 대한 자연권을 화두로 올렸으나, 제국의 주구들이 덤벼들어 다양체의 논의를 공론장의 논의로 바꾸었다. 아직도 앵글로색슨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누리소통을 4천5백만이 손안에 쥐고 있는 나라에서 다양체의 발현은 이미 도래했다. 상부상조, 공감, 공명의 종합으로서 변증법적 사유인 조화중항을 널리 사유할 때이다.

플라톤이 흥미있게도 정의를 조화라고 했다. 영혼, 가슴, 팔다리의 삼자가 조화로울 때정의롭고, 이를 실행하는 이가 훌륭타. 영혼의 발산은 용기와 절제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진다고 하는 것은 발생과 과정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이를 고정시키는 자들이 이분법주의이자이며, 플라톤이 아니라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사고방식으로 보아, 그러면 용기는 선이고 절제는 악인가? 하나에서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설명 상 두 가지일 뿐이며, 발명과 창안은 여러 다른 방향의 길들이기도 하다. 유일신앙의 지배아래 아리스토텔레스를 두고 공론장이라는 비례중항의 정의는 편 가르기이다. 이에 비해, 마치 빛의 발산과 같은, 자연의 다양한 발현과 생성에서, 다양체들의 조화중항을 이루는 시대가 왔다. 5천만 중에서 4천5백만이 손바닥에 재료와 도서관 자료를 볼 수 있는 누리소통의 도구가 우리 입말과 더불어 빛처럼 퍼져나간다. 그 빛의 발산이 윤석열의 내란을 막지 않았는가? 이제 플라톤주의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제자인 플라톤의 진솔한 사유인 조화중항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내공을 쌓은 이들이 먼저 하나의 디딤돌을 놓을 것이다. (6:05, 59MLH) (6:39, 59M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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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는 19일 오후 4시경 내란 혐의 재판에서 선고 하였다. 윤석열 무기징역,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 징역 30년, 민간인 노상원 18년․‥….

사람들은 걱정했다. 이병철 변호사의 말: 법원에서 90%가 보수이고 80%이상이 극우이라고 한다. 조희대, 박영재, 지귀연, 우인성이 극우라고들 하는데, 지귀연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다. (59MLI)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57-척도와 양상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7-척도와 양상

1)

헤겔 논리학 1부 존재론 1편이 질[그 제목은 ‘존재’지만 실질적으로 질을 다룬다], 2편이 양, 그리고 3편은 척도를 다룬다. 감각적 성질은 각기 독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양은 동일한 일자들의 서로 무차별한 관계다.

양을 다루면서 양들의 연속성과 불연속성(분산성)이라는 이중적 관계를 살펴보고, 이어서 이런 양들의 관계가 외연량의 관계와 내포량의 관계로 나누어질 수 있음을 보았다. 외연량은 예를 들어 어떤 것의 길이를 다른 것의 길이를 통해 측정한 것이다. 이는 수학적으로 기수를 통해 표현된다. 내포량은 어떤 사물의 경도를 잴 때, 단순히 다른 사물과 비교하여 측정한 것이다. 이는 수학적으로 서수를 통해 표현된다.

“존재 그 자체는 규정성이 직접 자기와 동일하게 된 것[질적인 것]을 말한다. 이 직접적 규정성은 지양된다. 양은 존재가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어서 규정성에 무차별한 것으로서 단순한 자기 동일성[대자 존재적 일자]이다. 그러나 이 무차별성은 외면성일 뿐이며, 자기 자신에서가 아니라 타자에서 규정성을 갖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3)

외연량과 내포량은 한 사물이 지닌 하나의 정량이 다른 사물이 지닌 동일한 정량을 통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아직 하나의 정량과 다른 정량의 관계가 출현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정량의 관계는 수학적으로는 비례를 통해 또는 분수를 통해(왜냐하면, 비례는 다시 분수화 될 수 있으므로) 표현된다.

처음 직접 비례는 두 정량의 서로 무차별한 관계다. 이는 정수비의 관계다. 역 비례에 이르면 두 정량의 관계는 어떤 한계 내에 묶이지만(서로 곱하면 동일한 수이므로), 여전히 서로 외면적인 관계 아래 있다. 마침내 정량이 제곱 비례의 관계, 통약 불가능한 무리수적인 분수의 관계에 있게 되면 서로 다른 두 정량 사이에 내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거리는 시간의 제곱이다.

이런 제곱 관계조차 사실 여전히 외면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거리는 시간의 제곱이라 할 때, 사실 시간은 거리의 일종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서로 다른 두 정량이 내적인 관계를 지니는 단계에 이르면, 그것이 곧 특수 량이다. 예를 들면,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내적 관계다. 이때 무게 없는 부피가 없으며, 부피 없는 무게는 없지만, 무게와 부피는 서로 다른 것이다.

2)

이 특수 량이 곧 사물의 척도다. 여기서 척도라면 어떤 사물의 고유한 크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사물의 무게나 부피 각자로는 사물의 고유성을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사물의 고유성은 그 사물의 비중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제삼의 것[척도]은 이제 외면성이 자기 관계하게 된 것이다. 자기 관계하면서 동시에 외면성이 지양되니 자기 관계 자체에서 자기와의 구별[두 정량의 내적 관계]을 갖는다. 그래서 이 구별은 외면성으로서는 양적인 계기이며 자기 내로 복귀한 것으로서는 질적인 계기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3)

물론, 이 비중은 아직 진정한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다만 주관적으로만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수한 일반성이다. 이것은 마치 질을 다룰 때 감각적 질이 일반적인 질 즉 성질[Eigenschaft]로 발전한 것과 같다. 일반적 성질은 아직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것 즉 이데아적인 성질(이것이 헤겔에서는 곧 대자 존재다)이 되지 못하며 다만 주관적으로 일반적인 것 즉 특수성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주관적 일반성이 사물의 양적인 관계에서 출현할 때 척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앞에서 질 범주의 논리적 발전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 척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척도는 주관적 척도에서 객관적 척도로 이행할 것이다. 그것이 본질인데, 마치 주관적 일반성 즉 성질 가운데 진정으로 일반적인 성질 즉 이데아를 찾는 것이 지난 한 작업이듯이, 주관적 척도에서 마침내 본질에 이르는 길은 지난한 길이다.

앞의 길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개념을 참조로 했는데, 주관적 척도에서 객관적 척도 즉 본질로의 이행에도 유사한 철학적 논의가 전개될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3)

척도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서두에서 곧바로 헤겔은 양상 범주에 대한 논의를 던진다. 헤겔은 이 특수 량 즉 척도가 질 범주와 양 범주에 이어지는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고 본다. 사실 양상 범주는 우연성, 현실성, 필연성 범주를 말하는데 논리학에서 1권 2부 본질로 마지막에 다루어진다. 그것은 본질론에 들어가 관계의 범주를 다룬 끝에 등장한다.

논리학이 1권에서 1부 존재론에서 질 범주와 양 범주를 다루고 2부 본질론에서 관계 범주와 양상 범주를 다룬 것은 칸트의 판단론의 12 범주의 체계에 따른 것이다. (다만, 칸트의 경우 양 범주가 먼저 나오고 질 범주가 나오는데, 헤겔은 질 범주를 먼저 다룬다) 칸트는 이런 범주들 사이에 어떤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았으며, 각 범주는 마치 좌표 체계처럼 경험과 관계했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범주들 사이에도 논리적 발전이 존재한다고 보면서, 그런 논리적 발전에 따라 논리학을 구성했다.

이런 논리적 발전의 배후에는 다시 정신현상학에서 보는 것과 같은 시간적 발전이 깔려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논리학 서문을 다룰 때 이미 언급했으니, 그 부분을 다시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헤겔은 1부 존재론에서 1편 질 범주와 2편 양 범주에 이어서 등장하는 3편 척도 범주 사이에도 어떤 범주적 연관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 범주들의 범주적 관계를 실체와 속성 그리고 양상이라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범주 체계(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체계 구성을 생각해 보라)를 통해 이해하려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척도는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질 범주는 실체 범주에, 양 범주는 속성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데, 헤겔은 그 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우리의 추측에 맡길 뿐이다. 우리도 굳이 여기서 그 점을 고민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헤겔이 여기서 양상 범주를 끌어들인 것은 이 3편 척도가 다루는 내용의 독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상 범주는 문법적으로는 부사에 해당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주어인 실체에 비해보면 중요하지 않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이고 유한한 것이다. 양상은[Modus] 사물의 양식[Art]과 방식[Weise]이다. 그러므로 양상에 해당하는 것은 제거되고 부정되고 만다. 헤겔은 이런 점을 지적하기 위해 범신론(구체적으로는 스피노자의 범신론과 인도의 범신론)에 양상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소개한다.

“스피노자주의에서 바로 양상 자체가 비 진리이며 다만 실체가 진정한 것이듯이 모든 것은 이 실체로 환원되어야 하며 그래서 이 모든 것은 모든 내용을 다시 공허에 빠뜨려야 하며 다시 말해 다만 형식적이고 내용이 없는 통일성 속으로 빠뜨려야 하니, 시바[인도 형이상학 체계-브라만, 크리슈나, 시바-에서 시바] 역시 위대한 전체이며 브라만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은 것 즉 브라만 자체다. … 생성과 소멸 즉 양상 일반의 영역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서 최고의 목표는 의식이 없는 것 속에 침잠하는 것이며 브라만과 통일하고 무화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5)

4)

헤겔은 이런 전통 형이상학 체계에서 양상 범주는 그 본래 진정한 의미에서 다루어지지 못했다고 본다. 헤겔은 양상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이며 유한한 것이지만, 그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즉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오히려 진리인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기독교 신학에서 양상 범주의 중요성을 주목하는데 그리스도는 개별적이고 유한한 존재로 출현했다. 그런 점에서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 하지만, 자기를 부정하면서 마침내 신이 되니, 양상 범주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헤겔은 질과 양에 이어서 등장하는 척도는 이런 자기 부정적인 양상 범주에 해당한다고 말하면서, 이 척도에서 본질로의 이행이 이런 자기 부정성의 운동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한다. 척도에서 본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척도가 없는 것 즉 무-척도[Masslose]에서 본질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리학적 자연은 척도를 지닌다. 자연을 수학화 하는 것은 이런 척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척도는 어디까지나 양적 관계다. 이 양적 관계는 아무리 수학적으로 복잡한 체계를 통해서도 그것은 척도에 머무르며 진정한 본질에는 이를 수 없다. 물리학적 자연 속에서는 본질은 찾을 수 없다.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제2 실체가 그렇듯이 물리학적 자연을 넘어선 생물의 영역에서 찾아진다.

그 과정에서 헤겔은 우선 화학의 영역에서 등장하는 친화성 개념을 검토한 후 마침내 생물의 영역에 이른다. 이 생물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척도를 상실해 버린다. 생물은 척도나 수를 통해서 규정될 수 없다. 이 영역에서 마침내 본질이 출현한다.

척도가 본질로 이행하는 과정이 이제 앞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 관계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척도 속에는 이미 본질의 이념이 들어 있으니 즉 규정되어 있음의 직접성 속에서 자기 동일적이라는 이념이 들어 있다. 그와 같은 직접적 본질[즉 척도]은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매개된 것으로 격하되고 마찬가지로 이런 매개된 것은 다만 외면성을 통해서 매개된 것이지만, 자기 매개이다. 그것은 반성이로되 그 규정성들이 존재하며 그러나 반성은 이런 존재 속에서 단적으로 그 부정적 통일의 한 계기가 되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326)

이 구절에서 척도의 이중성을 설명한다. 척도는 자기 매개, 자기 동일성과 타자 즉 외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 합일하면서 생겨난 것의 통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과 내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는 의미다. 내적인 관계이므로 자기 관계이며, 타자와 관계하므로 외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다. 이런 척도는 앞으로 본질로 발전하니, 척도 개념 내에 이미 본질이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질은 자기 내 반성과 직접성의 합일이니, 생물의 종이 개체 속에서[직접성] 자기를 재생산하는[본질] 관계를 통해 본질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la Vie)은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과정 [천 하룻밤 이야기]

삶(la Vie)은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과정이다.
– 2026 01 20 대한(大寒), 올해는 대한 추위를 한다. 겨울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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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나긴 역사에서 삶의 고통 또는 비참함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석기 시대에는 자연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집단화를 거치면서 자신감을 갖는 인간은 먹거리 해결과 거주지를 구축에 힘쓰면서, 나름의 제도에서 배치와 배열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먹거리와 잠자리(주거)에 대해 하늘(책력)과 토지생산(분배)이 제시하는 문제로부터 공동체에서 상부상조와 조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철기 이래로 생산력의 발달은 도시와 국가 속에서 제도를 만들어 안전과 편리를 보장하고자 하였다.
의식의 발전과 생산력의 발달로 국가체제의 확립은 계급의 지위에 따라 삶의 양식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백성없는 제도와 체제는 없다는 것도 상층은 잘 알고 있었다. 인민의 자각은 질병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세뇌당한 인민은 하늘에 이상을 투영하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인민은 스스로 자치와 자율로서 세상을 조성하고 하였다. 그런데 규소 시대에, 신에 매이지 않는 자연의 자발성이 있듯이, 인민이 지적 체계와 제도의 체제와 다른 자발성이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자발성의 발현과 수렴이 인민의 행복과 안정을 보장해주는 방법을 만들 수 있을까? 인민의 교육과 창발이 새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하리라.
상층에 속하는 검찰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장난질을 하고 있다고 한다. 표면상에서 이재명정부와 정청래 당대표는 시민의 힘을 믿고 있으나, 오랜 제도상의 공론장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다. 여론의 장으로 올라오는 시민의식은 이미 응원봉에서 표출되었고, 누리소통을 통한 대중의 평결 논장이 열려있다. 조국혁신당과 진보당이 다발의 함성을 내고 있다. 정부는 말한다. 국민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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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인식의 역사에서 지식의 범위 또는 위상은 추상화하여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 걸려있다고 한다. 동양에서도 막연하게나마 사상(四象)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의 기원을 둘로 나누어보면 에피스테메와 독사가 있듯이, 동양에서 음양이 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그 원인 또는 기원으로서 하나 또는 태극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은 좀 더 복잡한 것 같다.
서양에서는 흥미롭게도 이 기원 또는 원질이 한편으로 자연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영혼이라고 한다. 전자에서는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후자에서는 탐구의 주체로 삼았다. 이런 구별이 불분명하지만, 인식측면에서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토대로 하였다. 이런 대립을 세계의 운동과 인간의 인식 사이의 대비로 생각한 쪽이 퓌타고라스 학파였다면서, 틀을 만들려고 한 쪽이 플라톤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삶의 측면에서 세계영혼과 인간영혼의 연대와 연결로 보는 스토아학자들도 있었다. 철학사는 이런 두 방향의 진행 방식이 로고스와 에토스의 방향처럼 보았다. 그러면 인간의 감정과 공명은 어디에 속하는가? 이원적 구분에서 이것들은 에토스에 속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자연과 인간의 대립에서 자연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파토스는 인간에 내속하는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그 내속성 또는 내재성의 기원이 하늘의 운행에 투사되어 있다고도 한다.
우리말에는 이런 표현들을 연결해보자. 장하다, 훌륭타 등은 삶의 터전에서 체제와 제도와 제도 속에서 행위에 관한 것으로 에토스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잘났다, 멋지다 등은 인간의 내속성에서 드러나는 성격들로서 파토스에 속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는 자연 또는 대상을 다룸에서 다른 이들보다 처리하는 방식이 순조롭고 질서에 맞는 경우에 똑똑하다, 영리하다고 하며, 인식적인 로고스가 발달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 로고스 측면은 수학들의 교육에 익숙한 이들에게 속한다. 그런데 에토스는 그 터전의 문화에 잘 맞추어 살아가는 경우에 가깝고, 파토스의 경우에는 놀이(승부의 한판)와 음율(거의 모든 공연문화)에서 신체를 사용하여 잘 흡수하고 발산하는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고스에는 과학과 기술에 더하여 논리학과 수학을 연관시키고, 에토스에는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처럼 입말과 문자화에 연관이 많다고 하며, 파토스에는 스포츠와 연예계를 대응시키는데 익숙하다.
이 부류들이 공시태로서 분류(위상)를 갖는 평면들을 상층에 로고스, 표면에 에토스, 심층에 파토스로 여기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퓌타고라스를 비판적 수용하면서라고 한다. 그런데 로고스와 파토스의 양면성을 이끄는 영혼을 가정한 것은 플라톤의 장점이라고 하는데, 이런 양면성의 발생과 확장의 장면도 퓌타고라스학파의 수학적 분류에서 왔다고 한다.
크게 두 부류로서, 하나는 산술학과 기하학, 다른 하나는 천문학(책력)과 음율(율려)이라 한다. 기나긴 서양의 교육에서 이 두 부류가 청소년의 성장에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후자들에 속하는 책력과 음율이 파토스에 속한다고 하면, 의아해 할 것이다. 이집트와 수메르 이래로 삶의 토대로서 하늘의 운행과 몸의 활동은 로고스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소년의 교육에서 음율과 놀이(계절에 따른)가 기초이다. 초등학생은 뛰고 놀면서, 노래하고 신체운동을 한다. 그리고 산수를 다음으로 기하학을 배우고, 중등에서 좌표기하학을 고등에서 미적분과 행렬을 배운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서양 학문의 공시적 분류가 그럴듯하다.
그런데 역사적 발전에서 의식의 확장과 심화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로고스의 측면의 발달은 수학사의 발전과 상응하면서 발전과 확장을 이어왔다. 그 영역의 다양함에서 수학은 일찍이 수학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했다. 그리고 에토스 측면은 아마도 정의(正義)에 관련이 많다. 정의는 4상 또는 4가지 선분의 비유에서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동양에서 태극에서 발현처럼 여기듯이, 어쩌면 서양에서도 세계영혼(일자)의 발현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영혼이 용기와 절제라는 두 마리 말을 몰아간다고 비유하였을 것이고, 게다가 이런 세 가지 위상이 하나의 신체 또는 세계영혼 속에 들어있다면, 세 가지를 분할 또는 수학적 비례가 아니라, 조화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토스의 평면에서는 조화와 공감, 나아가 자연과 공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파토스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문학가들은 그리스 시민이 글자를 쓸 줄 몰라도 그리스 연극(희극이든, 비극이든)을 통해 공동체의 삶의 결속시켰다는 점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렇다. 니체도 강조하지만 아테네 시절에 철학이 뒷전이었고 비극시인과 희극시인들이 먼저이다. 각 도시국가 지역에서 열리는 2년제 올림피아와 4년제 올림피아에서 연극을 상연하고 우승자를 뽑는 것은 시대의 정신을 높이고, 또는 시대의 인물(상징성, 예로서 테세우스, 외디푸스)을 내세워 여론을 형성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올림피아에서는 놀이(운동)과 음율의 경쟁도 있었다. 연극의 대사는 음율이었다. 아테네가 페리클레스 시대에 제국을 형성하면서 지중해의 중심이었을 때, 주도층은 파토스를 인도하는 극작가였고, 로고스를 이끈 이들은 마치 수도원에서처럼 비밀스런 집단을 형성하고 영혼의 행방을 고민했던 퓌타고라스주의자로서 아르퀴타스(전435경-347경)와 아카데미아를 세운 플라톤(전428-348)이었을 것이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플라톤은 하늘과 땅의 이중성을 연대 또는 상응으로 풀어보려고 하였고, 그의 사상에서는 영혼이 이중적 역량(스키조)을 가졌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체의 영혼과 세계의 영혼 사이에 통일성을 새로운 공동체에서 조화(정의)를 제도의 틀로 만들어 보려고 법률(노모이)을 썼다고 한다. 즉 에토스 측면에서 역시 사회제도와 이상도시의 체제를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이라 한다. 서양의 사상이 아테네라는 도시국가가 제국화 되었을 때부터, 국가체제와 사회제도를 지적 체계에 맞게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통시태 측면에서 서양 철학사는 한편으로 인간적인 역량의 갈래들인,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은 각각의 길에 자기 정합성을 만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식과 지식의 체계로서 4분할로서 이데아, 도형, 물체, 그림자로 나누어, 각각이 자기 방식의 위상을 만들려 하고, 학문으로서 자기 영역과 방법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수학들, 논리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경제학 정립할 것이고, 그리고 20세기에 규소시대에 정보과학(또는 기술정보) 등이 각자의 자기정합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게다기 이를 확장하여 적용하는 학제간(interdisciplinaire) 연대가 중요과제로 떠오르면서, 학문의 영역들은 대상의 학문에서 다양체의 학문, 현상의 관계에서 사건의 연관으로 전환하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이런 변역의 과정에서, 공시태를 먼저 사유하는 우주론적 입장과 통시태를 중요시하는 우주발생론적 입장이 대립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철의 시대에 관계의 정립으로서 지식의 구성과 구축이 우선하던 시기에 비해, 규소시대에 연관의 다원성에 비추어 사건의 조성과 조화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한 사회에서 구성과 구축의 공론장을 먼저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의 생성과 연관에서 여론화가 먼저이고 그 다양한 담론들이 평결장에서 상호공감과 조성의 조화를 찾아가려 한다. 그 다음의 그 진행을 밀고나가 선견지명(πρόνοια)과 같은 평결문이라는 합의를 끌어내고 함께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런 평결이 인민의 누리소통, 어쩌면 생성인공지능의 도움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중경, 선후, 강온의 배열을 시행함에서 우주발생론으로부터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항상 말하곤 하는 좌파51% 우파49%의 조성에서 평결들이 조화를 이룰 것이다. (59L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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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생각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자치성을 생각한 “빛들세기(18세기)에는 생물학의 발생과정을 생각했던 뷔퐁(1707-1788)이 자연에서 발생과 생장이 기수(산술학)도 이분화도 아닌 다양한 발현이라 생각하였고, 각각은 고유한 계열(la série)이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계열의 발생은 수들의 순서도 비례의 분배도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기 노력의 과정이라고 본 것은 그 후배인 라마르크(1744-1829)였다. 자연 속에서 사물을 형성하게 하는 정신(지성, 누스, 신)이 외부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의 변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연이 신에서 벗어나 자치성과 자율성을 갖는다는 생각을 한 것은 “빛들세기”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였다. 물체나 생명체는 지성의 산물이라기보다 자연의 자기 창조에 의한 생성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생물학은 아직 이를 자기 방법으로 정립의 시기에 이르지 못했다.
여전히 사물은 정신(오성, 지성)의 산물이다. 이를 해석하는 방식의 탐구는 지속되었다. 사물을 분할하여 대상화하고 상징화(symbole)하려는 수학자 벤(1834-1923)은 다이아그램으로 이분법과 기수의 설명으로 불편한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프로이트(1856-1939)는 영혼의 3분할을 자아, 이드, 초자아로 나누었고, 이를 크리스트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불합리를 넘어서려는 방식으로 라깡(1902–1981)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바꾸어 놓았다. 리우츠신(劉慈欣, 유자흔, 1963-) 삼체론도 그 일종일 것이다. 중국에서 기원후 2세기경의 전쟁이야기를 삼국시대라 하지만, 그 당대에는 여러 나라들의 각축에서 위나라 우세였다는 것은 사실이라 한다.
이에 비해 제도에서 3원성을 다루는 이들은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의 분화 속에서 에토스를 중심에 두고 로고스로 풀이하며, 소설과 역사해설의 이야기는 인민의 파토스를 첨가하여 인민에게 교육용으로 쓴다. 그리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시대에도, 신화의 이야기를 연극무대에 올리고 시민의식을 고양했던 것과도 같다.
산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지식의 빅데이터는, 기독교 반달족이 불태웠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징키스칸 손자인 훌라구칸이 파괴했던 바빌론 도서관, 중국 강희제(1661-1722)의 한림원(또는 국자감)의 서고 등의 새로운 형태일 것이다. 이 정보기술이 확장은 도서관 확장보다 더 뛰어나게, 참고서를 찾게 해준 것이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이 학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물을 배치와 배열에 관계없이도 찾아내고 가르쳐 주는 것이 일반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식과 전승은 도서관과 정보체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화되어 체계화된 지식이 생산의 과정과 여러 갈래를 보여주는 것은 지구의 자전운동과 지층 속에도 있고, 나아가 다양한 생명체의 DNA 속에도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이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생산한 다양한 자료들이 지층처럼 생명체 안에 압축되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생성형 인공지능(the 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 GAI)이 이런 발생과정과 분화과정(이종과 별종의 발생)에 대해 과정을 잘 표출하게 되는 시절이 곧 올 것이라 생각한다.
도서관 이용과 같은 또는 참고서 찾아보기와 같은 일반인공지능(AGI)의 발달에 자극을 받아, 생성형인공지능(GAI)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인간은 터전에서 삶의 어려움, 고통과 비참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겉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인공지능(AGI)을 통해 탐욕과 재산축적이 먼저인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영혼으로 느끼고 사는 인민과 대중은 그래도 인간의 삶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런 노력을 하는 이들이 자연과 세계의 흐름에 내재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든 식자든 알고있다. 인민이 물과 같아서 제도를 띄울 수도 있고 뒤엎을 수도 있다.
시대 변역에서 새로운 창안과 발명이 나올 것이고, 그에 걸맞는 인물도 도래할 것이다. 그 풍토와 터전이 어쩌면 동방의 끝에 있을 것 같다. 인민이 다양한 평론이 등장하는 이 시대에서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4:29, 59LMA)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8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0)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현실 국가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3. 과두정과 과두정적인 인간(550c-555b)

 

[550c-552e]

* 소크라테스는 명예정에 이어 타락한 정치체제로서 과두정을 언급한다. 한마디로 과두정ὀλιγαρχία은 평가재산τίμημα에 기반한 정치체제, 즉 부자들οἱ πλούσιοι이 통치하고 가난한 자πένης들은 통치에 관여하지 못하는 나라이다.(550c) 과두정이 명예정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장님τυφλός에게조차 분명하다δῆλος. 그들은 저마다 황금χρυσίον으로 채워진 보관소ταμιεῖον를 갖고 법νόμος을 왜곡하여παράγουσιν 자신만을 위해 지출δαπάνη함으로써 명예정을 파괴한다.ἀπόλλυσι. 그들의 부인들γυναῖκες도 마찬가지이다.(550d) 그리고 그들은 경쟁ζῆλος적으로 자신들 중 다수τὸ πλῆθος를 돈벌이χρηματίζεσθαι 쪽으로 나아가게 하여 그만큼 덕ἀρετὴ을 낮게 평가τίμιος하게 만든다.(550e) 덕과 부πλοῦτος는 상반되는διίστημι 것이어서 나라 안에서 부와 부자가 높게 평가받을수록 덕과 뛰어난 사람οἱ ἀγαθοί은 그만큼 낮게 평가받는다. 그래서 이들은 승리를 사랑하고φιλόνεικος 명예를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사람 대신 결국 돈벌이를 사랑하고φιλοχρηματιστής 돈을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사람이 되어(551a) 재화χρῆμα의 양πλῆθος을 법으로 정해 그 액수τίμημα에 미치는 사람만 통치에 참여시킨다. 과두정은 이렇게 해서 수립κατάστασις된 정치체제이다.

* 그러나 과두정은 그만큼 결함ἁμάρτημα을 안고 있다.(551b) 우선 1) 이 정치체제를 규정ὅρος해주는 근거, 즉 평가재산τίμημα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결함이다. 만일 배의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로서 기술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그가 가난하면 그는 키잡이가 될 수 없다. 이 경우 항해가 엉망πονηρός이 되듯 다른 종류의 다스림ἀρχή도 엉망이 된다. 가장 어렵고도χαλεπωτάτη 가장 중요한μεγίστη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551c) 2) 그다음의 결함은 그와 같은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 둘δύο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와 부자들의 나라로 나뉘어, 같은 곳에 살면서 늘 서로에 대해 음모를 꾸민다ἐπιβουλεύοντας. 3) 게다가 그들은 전쟁πόλεμος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아름답지καλός 못하다. 대중πλῆθος을 무장시켜 동원하자니 적들보다 대중이 더 두렵고δεδιέναι 대중을 동원하지 않자니(551d) 자신들이 소수라는 점이 전장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전쟁에 돈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 4) 그리고 이러한 나라에서는 같은 사람이 여러 일에 관여해서πολυπραγμονεῖν 농사도 짓고 돈벌이도 하고 전쟁도 하는 일이 일어난다.(551e) 5) 그리고 이 정치체제는 이 모든 나쁜 것 중에서도 최대로 나쁜 이것 즉 자신의 것 전부를 파는 것ἀποδόσθαι과 또 그걸 다른 사람이 취득하는 것κτήσασθαι을 허용한다. 자신의 것을 팔아버린 사람이 나라의 구성원μέρος이 못 되는데도 나라 안에 사는 것이 허용됨으로써(552a) 그들은 그저 가난뱅이πένης이자 빈털터리ἄπορος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부자일 때도 재산을 탕진ἀνήλισκεν한 자에 불과했듯이 탕진한 뒤에도 마치 봉방κηρίον 안에 수벌κηφήν이 생겨나 벌집의 우환νόσημα이 되듯 나라의 우환이 된다.(552b) 이들 중 신이 처음 만든 대로 침 없는ἄκεντρος 벌들의 경우는 말년γῆρας을 거지πτωχός로 마감하겠지만 못된 짓 하는 자κάκουργος라 불리는 온갖 종류들의 놈들은 침 달린 수벌 같은 자들로서 그 나라 어딘가에 도둑κλέπτης, 소매치기βαλλαντιατόμος, 신전털이범ἱερόσυλος 등 그런 온갖 나쁜 짓의 달인들κακῶν δημιουργοί로 숨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552c-d) 다만 과두정 체제의 나라에선 통치자들αἱ ἀρχαί이 이들을 힘으로βίᾳ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나라는 통치자ἄρχων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거지이다. 이 모두는 교육의 부재ἀπαιδευσία와 나쁜κακός 양육τροφή, 그리고 잘못 수립된 정치체제 탓이다. 이처럼 과두정체제의 나라는 이렇게 많은 나쁜 점들을, 어쩌면 이보다 더 많은 나쁜 점들을 지니고 있다.(552e)

 

[553a-555a]

*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과두정 체제와 닮은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명예정적인 사람에서부터 과두정적인 사람으로의 변화는 이를테면 명예정적인 사람의 아들이 마치 암초에 부딪히듯 아버지가 무고꾼συκοφάντης들의 모함을 받아(553a) 장군이나 관직에서 쫓겨나 사형당하거나ἀποθανόντα 추방당하는ἐκπεσόντα 일을 겪거나 시민권 박탈ἀτιμωθέντα과 함께 전 재산을 몰수당했을 때 일어난다. 이 경우 그 아들은 겁을 집어먹고(553b) 명예사랑과 기개부분을 자신의 영혼 안 왕좌에서 몰아내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가난으로 위축되어 인색하게γλίσχρως 굴며 돈벌이에 나선다. 그래서 돈을 모으면, 그때 가서 그런 자는 욕구부분τὸ ἐπιθυμητικόν 즉 돈을 사랑하는 부분τὸ φιλοχρήματον을 왕좌에 앉혀 자신 안의 대왕μέγας βασιλεύς으로 삼는다.(553c) 그 반면, 이성부분τὸ λογιστικόν과 기개부분은 욕구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의 노예가 된다. 이성부분은 적은 돈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계산λογίζεσθαι 기능으로 전락하고 기개부분은 부와 부자들, 돈벌이와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명예롭게 여기지 못하게 된다. 명예를 사랑하는 젊은이에서 돈을 사랑하는 젊은이가 되는 것보다 빠르고도 강력한 변화는 달리 찾아보기 힘들다.(553d)

* 결국 이들은 돈을 가장 중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그리고 절약하며φειδωλός 일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ἐργάτης이라는 점에서 과두정 체제와 닮았다.(553e) 그는 자신에게 있는 욕구 중에서 ‘필수적인 욕구’ὁ ἀναγκαίος ἐπιθυμία들만을 채울 뿐, 그 밖의 소비ἀνάλωμα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중τὸ πλῆθος은 그런 자를 칭찬하기까지 한다.(554a) 무엇보다 그들은 교육이 부재한 탓에 수벌과 같은 욕구들이 그 사람 안에서 생겨나 때론 거지와 같고 어떤 것들은 못된 자와 같지만 다른 관심사 때문에 힘으로 그 욕구들을 억누르고 있다.(554b) 그들 또한 정의로운 자로 보여서 좋은 평판도 얻고 싶은 터라 거래관계 등에서 자신 안의 괜찮은 것으로 자기 안에 있는 다른 나쁜 욕구들을 힘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설득πειθός이 아닌 강제ἀνάγκῃ와 공포φόβος 이를테면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 그런 것일 뿐 그 숨어있는 욕구들은 마치 그들이 고아의 후견인ἐπιτρόπευσις이 그러하듯 부정의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제멋대로의 자유’ἐξουσία가 생겼을 때 밖으로 터져 나와 한껏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남의 돈을 쓸 상황이 되면 이들 대부분에게서 수벌과 같은 종류의 욕구들이 그들 안에 있음이 드러난다. 이렇듯 이들은 대개 더 나은βελτίων 욕망ἐπιθυμία이 더 못한 욕망을 지배하기는 하겠지만 이처럼 자기 안에 내분στασίς을 겪는 이중의διπλόος 인간이다.(554c-d) 이 점 때문에 이들은 겉으로는 번듯한εὐσχήμων 사람으로 보이지만 한마음을 이룬ὁμονοητικός 조화로운ἡρμοσμένης 영혼이 갖는 참된 덕ψυχῆ ἀληθὴς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554e)” 나아가 이들은 승리를 위한 경쟁ἀγών과 좋은 평판εὐδοξία을 위해 돈을 쓰려들지도 않고. 소비적ἀναλωτικός인 욕망을 깨워 승리를 위한 동맹συμμαχία으로 불러내기도 두려워하는 까닭에 나라 안에서 승리 또는 다른 아름다운 것들을 놓고 사적으로 벌이는 경쟁에서 신통찮은φαῦλος 적수에 불과하다. 그는 과두정의 방식대로ὀλιγαρχικῶς 자기 것을 조금만ὀλίγοις 써서 싸우기 때문에 싸움에서는 대개 패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절약하는 돈벌이꾼χρηματιστής은 과두정체제의 나라와 닮아있다.(555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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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0c ‘과두정oligarchia…평가재산timēma에 기반한 정치체제’ : 과두정(寡頭政)의 원어 oligarchia를 말 그대로 번역하면 ‘소수가 지배하는 정치체제’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III 81)에서 과두정을 말뜻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플라톤은 이곳에서 과두정을 아예 부자들hoi plousioi이 통치하는 체제 즉 금권정ploutokratia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아테네에서건 스파르타에서건 그가 경험한 과두정 모두가 하나같이 소수 부자에 의해 지배되는 금권정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원전 412년 아테네 과두정 치하 법령은 완전한 시민권의 자격을 재산을 기준으로 제정하고 있었다.(<투퀴디데스> VIII 65. 3, 97. 1) 이러한 이유로 플라톤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과두정을 줄곧 금권정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정치학> 제3권 1280a, 제4권 1292b 참고) 이것은 일찍이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기본적으로 소수이자 뗄 수 없는 한 부류였음을 보여준다.

* 550d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 이곳의 언급 역시 기본적으로는 명예정에서 사실상 과두정치로 퇴보한 스파르타의 역사에 대한 그의 경험에서 나왔을 테지만 솔론의 개혁과 411년과 404년 아테네에서 일어난 과두정 혁명도 함께 고려되었을 것이다.

* 551a ‘이들은 승리를 사랑하고philonikos 명예를 사랑하는philotimos 사람 대신 결국 돈벌이를 사랑하고philochrēmatistēs 돈을 사랑하는philochrēmtos 사람이 되어, 부자를 칭송하고 경탄하여 관직에 앉히지만 가난한 자는 멸시하네.’ :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자들이 돈을 버는 것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는 일부 예외적인 과두정을 근거로 과두정에 대한 이곳 플라톤의 견해가 온당치 않다고 비판하고 있지만(정치학 1316b, 1), 플라톤이 염두에 둔 것은 아마도 기원전 4세기 스파르타 과두정이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스파르타 과두정 치하에서는 재산이 소수의 손에 놓여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정치학> 1307a, 35) 실제로 스파르타에서는 부담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공동식사제도syssitia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정치학> 1271a 34) 그로 인해 하급시민hypomeiones의 수가 늘어났다.

* 551b ‘과두정의 성격이 더 강한 곳에서는 더 많은 양을, 더 약한 곳에서는 더 적은 양을 지정해서’ : 플라톤적 의미의 온건 과두정에 해당하는 후자의 예로 보통 솔론의 경우를 꼽는다.

* 551b ‘이를 무력으로 관철하거나, 그보다 앞서 겁을 주어 이와 같은 정치체제를 수립하네.’ : 411년 민주정에 대한 혁명과 404년 30인 과두정 치하에서는 물론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내내 그리스 전역에서 이 같은 폭력적인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 551c ‘배의 키잡이’kybernētēs : <국가> 488b-e, <정치가> 299b-c, <에우튀데모스> 291d 참고.

* 551d ‘그와 같은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 둘dyo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네.’ : 플라톤에게 빈부의 격차는 공동체의 해체를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나라가 극복하고 감시할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여겨졌다. <국가> 422a-423b 참고

* 551d ‘대중to plētos을 무장시켜 동원하자니 적들보다 오히려 대중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또 대중을 동원하지 않자니 : <투퀴디데스> VII 19. 3, IV 80 참고).

* 551e ‘우리가 전에 비난했던 것’ : 직분과 소질에 맞는 한 가지 일이 아니라 여러 일에 개입하고 참견하는 것. 374b, 434a, 443d-e 참고

* 552b ‘그들은 부자일 때도 재산을 탕진한 자에 불과했듯이’ : 과두정과 과두정적인 인간은 돈에 집착하여 돈에 인색하지만 재화의 독점 독식이 허용되고 있어 돈에 눈이 먼 그 만큼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빚까지 지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부는 소수에게 편중되고 가난하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은 수벌 같은 자들이 된다.

* 552b ‘봉방 안에 수벌kēphēn이 생겨나 벌집의 우환νόσημα이 되듯’ : 수벌은 일벌과 달리 원래 독침도 없고 꿀도 꽃가루도 모으지 않고 오로지 여왕벌과 교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수벌은 이곳에서 게으르고 방만한 자로 비유된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마치 수벌이 독침을 가진 것처럼 해악한 존재가 된다.

* 553b ‘장군으로 있거나…모함을 받아 법정으로 소환되어 사형에 처해지거나‘ :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 후 8명의 참전 장군들은 생존자 구출과 시신 수습의 실패 건으로 대중들의 분노를 사 재판에 넘겨져 2명은 추방되고 나머지 6명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극히 일부 시민들만이 사형에 반대했을 뿐이다. 처형 후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시민들은 처형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해군 지휘부 전체를 스스로 제거한 꼴이 되어 1년 후 아테네 멸망을 재촉한 아이고스포타모스 해전의 패배를 자초하고 만다. 대중들의 변덕스러움과 집단심리에 대한 플라톤의 우려가 이곳에서도 일정 부분 표명되어 있다.

* 553d ‘이성부분과 기개부분은 저 욕구부분 아래 이쪽과 저쪽 바닥에 앉혀 노예로 삼으리라고 생각하네.’ : 나라와 개인의 해체 과정에서도 나라를 구성하는 3계층, 영혼을 구성하는 세 부분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해체는 그 계층과 부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이 지니는 본래 기능의 상실이나 변질에 따라 그것들 간의 관계 내지 경계가 달라지면서 초래된다.

* 554a ‘열심히 일하는 사람’ergatēs : 단순히 일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에만 얽매여 사는 사람을 뜻한다.

* 554a ‘필수적인 욕구’ho anangkaios epithymia : 점차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은 영혼의 욕구 부분을 필수적인 욕구, 불필요한 욕구, 불법적인 욕구로 세분화하여 각각 과두정적 인간, 민주정적 인간, 참주정적 인간에 대응시킨다.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욕구를 넘어 불필요한 욕구, 불법적인 욕구로까지 확장 변질되는 것이 나쁜 것이다.

* 554c ‘고아의 후견인’epitropeusis : 아테네에는 미성년 유자녀의 경우, 후견인을 지정하여 상속재산의 관리와 양육 등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특히 고아의 후견인은 유언과 상속의 집행, 상속재산 관리 처분 관련하여 전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 부정의한 짓을 마음껏 저지를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컸다. <법률> 766c, 877c, 909c-d, 926b-928d 참고.

* 554d ‘자기 안에 내분 없는astasiastos 사람이 못될 것이네.’ : 440b, e, <파이드로스> 237d-e,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9a 12 이하 참고.

* 554d-e ‘이중의diploos 인간’ : 과두정을 닮은 개인도 정의롭게 보여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을 욕구한다. 그래서 때론 나쁜 욕구를 힘으로 억누르기도 한다. 대개는 더 나은beltiōn 욕망이 더 못한 욕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위선은 이중의 인간이 갖는 일상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그 억제가 자발적인 설득이 아닌 마지못한 강제에 의한 것이어서 과두정적 인간은 결국 그것을 참아내지 못하고 마치 침 달린 수벌같이 자신의 나쁜 욕망을 드러내고 만다. 특히 부정의한 짓을 제멋대로 저지를 수 있는 자유(554c)가 주어질 경우 더욱 그러하다. 위선을 부릴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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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체제와 개인은 각각 세 계층, 세 영혼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치체제와 개인의 타락 과정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세 계층 또는 세 영혼의 부분들이 갖고 있었던 관계의 변화를 통해 나타나고 그러한 관계의 변화는 각 계층 간 욕망구조의 변화 또는 영혼의 각 부분 간 욕구의 변화로 구체화된다. 명예정이 타락하여 과두정에 이르기 직전 상태의 정치체제의 경우, 통치계층과 전사 계층은 이성적 통치 및 수호 기능을 상실하여 권력을 그들의 사적 소유욕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고, 그것을 닮은 개인 또한 영혼의 이성 부분이 욕구 부분에 지배되어 이성은 물질적 욕구의 확대 장치로 도구화되어 있다. 나라건 개인이건 직분에 따라 다양했던 본래의 욕망 구조가 물질적 욕망구조로 획일화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까지는 명예정의 잔재가 남아 있어 물질적 사적 소유욕이 채 노골화되지 않은 상태여서 생산자 계층과 영혼의 욕구 부분은 아직 통치계층의 착취와 이성의 계산적 침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일정 부분 자기 직분과 욕구를 유지하고 있다.

* 그러나 통치계층과 전사 계층의 사적 소유욕이 서로 간의 경쟁을 통해 나날이 증대되고 노골화되면서 그들 모두 겉만 수호자들일 뿐 실제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오로지 돈을 버는데 사용하는 돈벌이 꾼들임이 드러난다. 이러자 생산자 계층은 그동안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그들 또한 본래의 물질적 욕구 외에 통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이로써 각 계층이 고유하게 갖고 있었던 분업적 욕망구조가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계층과 무관하게 전쟁도 하고 생산도 하고 관직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모두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형식적으로 이들은 이제 전과 달리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멀티형 인간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돈의 노예가 되어 있다. 본래 다층적이었던 욕망 구조가 물질적인 욕구로 획일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자 계층에만 허용되었던 사적 소유 또한 계층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전일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명예정 다음의 타락한 정치체제로서 과두정이다. 명예정이 통치계층에서 물질적 욕구가 발단하고 확산하는 발판이었다면 그것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어 계층과 무관하게 욕망구조에서 마침내 전면적인 획일화 내지 등질화가 달성된 정치체제가 곧 과두정인 것이다.

* 사실 이러한 정치체제는 내용적으로 금권정임이 분명함에도 과두정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플라톤 자신이 다분히 기원전 4세기 스파르타의 과두정의 실제 전개 과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나 재화는 한정된 경우, 금권정의 과두정화는 필연에 가까운 일이다. 어느 시대, 어떤 정치체제를 막론하고 부와 권력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착취와 무차별적 독점욕을 통해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배타적 일극화로 내달리기 때문이다. 금전만능주의 과두정 치하에서는 글라우콘의 말 그대로 소수 통치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거지이다.(552d) 플라톤이 과두정의 나라를 두 개의 나라로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머릿수 비율은 99대 1임에도 부의 99%를 1%가 차지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모멸의 현실이 정치적 의사결정을 머릿수로 결정하는 사회에서도 시장주의와 능력주의 신화에 가려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은 실로 현대 형식 민주주의가 봉착해 있는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오늘날 이른바 AI로 표징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가 가난한 나라로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을 정도의 고도의 자본 축적과 투자의 집약적 지속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현존하는 국가 간 계층 간 양극화는 고착화를 넘어 이전의 제국주의의 폐해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식민 노예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과두정 체제와 현대 사회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지라도, 부와 권력의 편중이 초래할 심대한 위험과 폐해와 관련해서 이곳 과두정을 통해 플라톤이 피력하고 있는 경고의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과두정이 초래한 욕망구조의 등질적 획일화와 관련한 플라톤의 통찰은 근대 자유주의 철학적 담론들이 전제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 불변의 진실일 수 없으며 사회관계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철학적으로 새롭게 재정립될 수 있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 준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인간본성과 관련한 그러한 문제들을 정치철학적 탐문을 통해 비판적으로 되묻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 다만 이곳의 과두정이 금전만능의 현대사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의 과두정은 오늘날 경제적 강국들이 엄청난 자본을 들여 군사력 증강에 힘쓰고 있는 것과 달리 오로지 사적 소유에만 집착할 뿐 나라를 군사적으로 수호하기 위한 공적 지출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551e) 그래서 과두정은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다. 대중을 무장시켜 동원하자니 적보다 대중이 더 두렵고 그렇게 안 하자니 자기들 소수만으로 전쟁을 치르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551d) 이런 점에서 과두정은 국가 수호에선 무능하기 그지없는 정치체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 최악의 정치체계는 아니다. 최소한 폭력적 군사주의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제시하는 타락의 최후 단계로서 참주정에 이르면 마치 20세기 폭압적 정치체제들과 오늘날 패권적 강대국들의 만행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듯 금전만능주의와 폭력적 군사주의, 정치적 독재의 결합이 얼마나 재앙에 가까운 최악의 정치체제를 낳는지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 플라톤이 과두정이 갖는 결함으로서 또 하나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은 과두정이 최소한의 생존 조건까지 무시할 정도의 독점을 무한정 허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과두정은 ‘누군가가 자신의 것 전부를 파는 것과 또 그걸 다른 사람이 취득하는 것’을 허용한다.(552a)기록에 따르면 뤼쿠르고스의 헌법은 ‘원래 할당된 몫’archaia moira의 침탈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다. 4세기 스파르타 과두정에 이르러 이것은 크게 훼손되었지만 실제로 많은 그리스 국가들의 경우 ‘할당분’klēros을 처분하는 것은 불법이거나 적어도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플라톤 역시 <법률>에서 가난함의 한계 즉 가난함의 임계점 이상의 재산이 시민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하며 관리들은 그 할당분이 감소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부의 축적의 경우도 그 기본 할당분의 4배까지는 허용되지만, 그 이상의 부의 획득이나 소유가 발생하는 경우 반드시 신들과 나라에 그 초과분을 바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법률> 744d-745a)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기초적인 삶의 품격을 보전하기 위한 기본 소득과 복지의 개념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 국가에서부터 제도로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에 더해 플라톤은 빈부의 양극화를 막기 위해 비정상적 수준의 초과 수익 또한 중과세의 형식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시적 성공보수라면 모를까 최소한 정기 급여에서 개인 간 실재하는 대기업 임원과 일반 노동자들 간의 터무니없을 정도의 임금 격차는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로 인간의 사물화, 인간의 소외를 노골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수벌은 <국가>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데(552c, 554b, 555d-556a, 559c-d) 이곳에서는 갖고 있던 재산을 모두 팔아버린 후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 결국 과두정의 몰락을 앞당기는 자들로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수벌 같은 자들의 해악은 과두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나중 민주정 치하에서 자신 같은 부류들과 민중을 선동하는 선도자prostatēs가 되어 민주정마저 파괴하고 마침내 폭압적 참주정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한다.(559c-d, 564b-566d) 과두정은 재산의 독점적 취득은 물론 전 재산의 처분까지도 무차별 허용함으로써 이러한 해악이 되는 수벌들의 출현과 양산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이미 그 자체로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는 정치체제이다. 그러함에도 수벌 같은 삶을 무작정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소한의 삶의 여건이 충족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둑질이나 체제 전복 말고 무슨 살길이 남아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수벌 같은 삶의 잘못을 능력주의와 시장주의적 관점에서 그저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위기를 증폭시키는 일이다. 플라톤 말대로 그것은 개인의 잘못 이전에 잘못된 정치체제와 그 체제가 갖는 교육 및 양육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다.(552e, 423e) 빈부의 양극화가 빚어내는 가난의 고착화는 하나의 나라를 파멸과 분열로 이끄는 최대 원인이다.(422a, 422e-423d) 수벌과 관련한 곳으로 그 밖에 참고할 곳은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303 이하, 아리스토파네스 희곡 <말벌> 1071 이하, 에우리피데스 <탄원하는 여인들> 242, 크세노폰 <경제론> 17. 15, 베르길리우스 <게오르기카> iv. 168 등이 있다.

* 플라톤은 과두정의 나라를 다룬 다음 이제 과두정을 닮은 사람을 논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과두정을 닮은 사람은 장군이나 고위관직에 있던 아버지가 모함을 받아 사형을 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을 겪은 아들로 비유된다. 졸지에 이런 일을 당하고 재산까지 잃고 나면 누구든 겁도 나고 가난으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아들은 돈벌이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욕구부분을 왕좌로 올리고 이성부분과 기개부분을 노예로 삼는다. 이성부분의 지배를 받던 본래의 욕망구조가 기개부분의 지배로 바뀌었다가 이제 욕망부분의 지배로 타락하면서 본래의 지배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이성이 결여한 기개는 타락에도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다. 분별을 잃은 군인들의 명예욕이 맹목적인 그 만큼 돈에 대한 사랑으로 변하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다. 그리고 과두정을 닮은 사람은 겁도 많고 다시 가난하게 되는 것도 두려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욕구들만 채울 뿐 다른 소비는 허용하지 않고 돈이 생기면 모두 개인금고에 보관한다. 이 점 때문에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절제 있고 번듯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이성이 돈에 대한 욕구의 도구로 전락하여 참된 덕은 영혼에서 이미 멀찌감치 달아난 상태이다.(554e) 게다가 이들은 승리나 아름다운 것을 바라긴 하나 그것에 돈을 쓸 생각은 전혀 없어 실제로는 그와 관련한 경쟁에 아무런 적수가 되지 못한다.

* 그리고 플라톤은 과두정적 사람들의 이중적 욕구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권력욕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들은 겉으로는 물질적 욕구에만 기대어 부자로만 살기를 바라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평판을 의식하여 강제로 나쁜 욕구를 참고 있는 것일 뿐 재산 증대의 수단으로서 권력에 대한 욕망을 나날이 키워가고 있다. 과두정 치하에서는 부를 지니는 한, 계층에 상관없이 언제든 관직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두정적인 사람의 욕구가 기개는 물론 통치의 욕구로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것들의 내적 관계가 물질적 욕구의 주도로 부와 권력을 목표로 재편되어 있을 뿐이다. 과두정에서 매관매직과 부패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앞서 말했듯이 과두정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두정은 물론 나중 민주정마저 파괴하고 참주정을 세워 참주로까지 등극하는 그야말로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직 과두정적인 사람의 단계에서 이러한 위험까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은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덕으로서 이성부분의 본래의 기능은 이미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여 날이 갈수록 빈약해가고 있고 대신 그에 반비례하여 물질적 욕구 부분은 날이 갈수록 강력함을 더해가고 있다.

* 이렇듯 과두정 치하에서는 속칭 대중들이 말하는 부자들의 경우 훌륭함을 겸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에게 덕aretē과 부ploutos는 상반된 것이다.(550e) 왜냐하면 부정의한 방법에 의한 수입은 정의로운 방법에 의한 경우보다 두 배 이상 크고 아름다운 일을 위한 지출은 반대로 두 배 이상 적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그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법률> 742e-743c) 그러나 플라톤은 이상국가의 현실적 대안을 논하는 <법률>에서 조차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훌륭한 부자들’, 즉 덕을 갖춘 부자들의 존재를 나라를 개혁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의 하나로서 여전히 붙들고 있다. 절절한 기원의 형식으로 서술되고 있는 훌륭한 부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플라톤의 기대는 덕치와 분배에 기초한 정의로운 사회 공동체를 꿈꾸는 그의 이상이 <법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남아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하자면 기원하는 일이며, 오랜 기간에 걸쳐 조금씩 진행되는 조심스러운 작은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일어납니다. 풍부한 땅과 자신들에게 빚진 많은 사람을 보유하고 있는 어떤 개혁가들이 계속해서 있어야 하며, 이들은 공평성에 준거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어떻게든 공유하고자 해야 합니다. 어떤 건 탕감해주고 어떤 건 분배해 줌으로써, 그리고 어떻게든 적도를 견지하고, 재산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탐욕이 늘어나는 것이 가난이라고 여김으로써 말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나라 보존의 가장 큰 근원이자 든든한 토대입니다.”(<법률> 736d-e)

* 이제 과두정은 민주정으로 변화한다. 과두정의 이중성에 가려진 탐욕은 제멋대로의 자유를 만나며 본색을 드러낸다. 제8권에서 나라와 사람의 타락 과정이 이어지면서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꿈은 점점 더 요원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정의가 행복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된 장치들이다. 나라가 참주정에 이르기까지 타락의 심도를 더해가면 갈수록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향한 의지 또한 치열함을 더해간다.

* 과두정의 나라와 과두정적인 사람은 서로 닮아있기는 하지만 과두정의 사례들 하나하나에 대응시켜 유사성을 논할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과두정적 개인에서 과두정 정치체제의 소수와 나머지 대다수에 대응하는 것은 따로 없다. 물론 통치계층은 소수이지만 그것은 철인왕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사성은 앞서도 강조했듯이 나라와 개인이 구성하는 계층들과 영혼 부분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과 관련한 유사성이다. 이를테면 과두정 치하 부자와 빈자의 관계는 과두정적 개인에서 막강해진 욕구부분과 빈약한 이성부분의 관계에 상응함과 동시에 이성부분, 기개부분, 욕구부분의 관계가 이성 또는 기개의 지배에서 오로지 물질적 금전적 지배 관계로 역전 재편되었음을 보여준다. 과두정적 인간의 이중성 또한 과두정 체제의 계층 간 갈등적 내분 관계에 상응하는 것이다. 욕망구조에서는 명예정의 경우 물질적 욕구의 지배가 은폐된 상태에서 제한적인 수준이었다면 과두정에 와서는 말 그대로 계층과 영혼 전체에 걸쳐 노골화되면서 욕구의 등질화와 획일화가 전면적으로 관철되어 있다. 그만큼 그들은 부와 권력에 두루 관심이 있다. 그럼에도 지배관계에서만은 철학자왕정에서 명예정, 과두정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이건 군인이건 부자이건 하나같이 권력은 소수가 차지하고 있다. 소수가 지배하는 이러한 권력관계는 이제 민주정에 가서 형식적이나마 다수 민중의 지배로 재편된다. 물론 욕구는 과두정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돈에 대한 욕구로 등질화되어 있지만, 민주정에 이르면 ‘제멋대로의 자유’exousia와 ‘불필요한 욕구’가 그것에 더해진다.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현실 국가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3. 민주정과 민주정적인 인간, 필요한 욕구와 불필요한 욕구(555b-562b)

 

 

세 철학자가 들려주는 ‘분개’ 이야기 [시대와 철학]

세 철학자가 들려주는 분개이야기

 

정선우 (연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분개는 타인의 부당한 선을 불승인하도록 만들고(아리스토텔레스)
타인이 겪는 피해를 순전히 남의 일로 치부함으로써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도록 만들며(데카르트, 스피노자)
심지어 국가가 불의를 자행할 때 이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에 적극적으로 불복종하도록 만든다(스피노자)

우리를 분개하게 만드는 대상은 사적 존재인 한 개인일 수도 있으나 공적 존재일 수도 있다.
분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어떤 의미에서 위협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손해나 고통을 끼치는 사람에게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가령 누군가가 내 몸에 위협을 가하거나 내 것을 강탈하거나 내 평판을 떨어트리거나 내 인격을 무시할 때 나는 그를 싫어하고 그에게 화낼 것이며, 그 결과 그와 맞서 싸울 것이다. 이처럼 타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주로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진 해악을 이유로 생겨난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인간은 자신의 안녕이나 복리와 관련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감정으로 분개(indignation)를 꼽을 수 있다. 분개의 감정은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기피하는 자연적 성향, 곧 이기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감정에 주목해 왔다.

거의 모든 학문의 출발점에 놓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분개의 감정을 상당히 진지하게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분개는 일반적인 노여움이나 성냄과는 구별되는 감정으로, 이웃에게 일어난 일, 이웃에게 닥친 상황을 봄으로써 생겨나는 고통을 의미한다. 또한 분개는 시기(이웃이 잘되면 괴로워하는 것)와 심술(이웃의 불행에 즐거워하는 것) 사이의 중용에 해당하며, 따라서 유덕한 사람이 취하는 일종의 도덕적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분개란 불의를 향한 분노, 곧 ‘의분(righteous indignation)’이다. 가령 누군가가 요행이나 부정에 의해 정당하지 않게 선을 획득하는 경우, 그는 그 선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으므로 그가 선을 소유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은 그의 부당한 행복에 괴로워하며 분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덕스러운 행위자가 분개하는 까닭이 타인의 선이 행위자 자신의 이익과 상충하거나 행위자 자신의 행복을 저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그 자체로 옳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분개의 감정은 인간이 좁은 범위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옳음과 그름, 정당함과 부당함의 관점에서 사태를 평가할 수 있음을 드러내 준다.

한편,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개 개념을 보다 일반화함으로써 자신만의 분개 개념을 제시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떤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그를 미워한다. 이는 다시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첫째, 만약 이 악이 우리와 관련될 때, 곧 타인이 우리 자신에게 해악을 끼칠 때, 우리는 그에게 분노(anger)를 느낀다. 둘째, 만약 이 악이 우리와 관련되지 않는다면, 곧 타인이 우리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면, 우리는 그에게 분개를 느낀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선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소유한다면, 그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부당한 일(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에게 분개의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분개의 감정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처럼)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특징 짓는 요소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반대로 정의를 가장하는, 실제로 정의롭기보다 정의로워 보이기를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요소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지닌다. 데카르트는 이 후자의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분개의 배후에 놓여 있는 은밀한 인간 심리를 매우 예리하게 포착한다. 데카르트가 지적하듯, 자주 분개하는 사람은 참되게 덕스러운 사람이기보다 덕스러워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가령 비난받을 만하지 않은 일이나 사소한 일에 과도하게 분개하는 사람, 혹은 세계의 운행이나 신의 섭리를 탓하면서 신이나 자연의 작품에 분개하는 사람은 도처에서 흠잡을 거리, 비난할 거리를 발견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덕을 사랑하기보다 악덕을 추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런 사람은 자신의 빈번하고 과도한 분개가 도리어 자신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양 착각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지적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분개는 증오나 분노 일반과 구별되는 특별한 감정이다. 타인의 불의에 분개하는 마음은 나 자신의 이익과 손해라는 협소한 관점을 벗어나는 태도라는 점에서 도덕적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개는 합당하고 바람직한 분개에 속한다. 그러나 분개는 ‘가짜 덕’ 혹은 위선으로부터 비롯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타인의 악덕이 자기 자신의 덕의 징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과오를 비난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은 정말로 분개해야 할 것에만 분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에나 쉽사리 분개한다. 이러한 분개는 합당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 않은 분개에 속한다.

분개의 중요성은 이뿐만 아니다. 이 감정은 비단 개인적 차원, 도덕적 차원에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안에서도 중대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분개는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거나, 심지어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데, 분개의 커다란 위력에 주목한 철학자는 바로 스피노자다. 우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분개 개념을 이어받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분개란 다른 이들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가지는 미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못되게 굴거나 해악을 끼친다면, 우리는 피해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분개를 느낀다. 가령 (우리가 이전에 아무 감정도 갖지 않았던) A라는 사람이 (마찬가지로 이전에 아무 감정도 갖지 않았던) B라는 사람을 괴롭힌다고 가정하자. 이때 우리는 A에게 분개를, B에게 연민을 느낀다. 이에 따라 B가 더 이상 A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B의 편에서 A와 맞서 싸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를 분개하게 만드는 대상이 사적 존재로서의 한 개인일 수도 있지만, 공적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지적하듯, 만약 주권자(가령 한 명의 군주나 여러 명의 귀족들)가 신민들을 학살하거나 약탈하거나 겁탈하거나 이와 비슷한 일을 행한다면, 수많은 신민들은 이에 분개하여 주권자에 맞서고자, 국가 권력에 대항하고자 공모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국가가 더 많은 사람에게 국가에 복종하기보다 저항할 이유를 제공할수록 국가의 지배력은 약해진다. 따라서 신민들이 공통의 분개를 계기로 하나로 뭉칠 때, 국가의 최고 권력은 무너진다. 역으로 말하자면, 국가 권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만약 주권자가 법을 위반하여 대다수의 시민들이 주권자에게 분개한다면, 그 국가는 보존될 수 없으므로 주권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법을 준수해야 한다. 제아무리 절대적 권력을 지닌 통치자라고 할지라도 대중들이 공통의 분개에 휩싸이지 않도록, 곧 시민들이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만큼 분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어떤 의미에서 위협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세 철학자 모두 제각기 다른 이유와 근거에서 분개라는 감정에 공히 주목한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분개하는 인간, 곧 불의와 악덕에 괴로워하고 불의와 악덕을 미워하는 자야말로 도덕적 행위자이자 정치적 행위자가 됨을 알 수 있다. 분개는 타인의 부당한 선을 불승인하도록 만들고(아리스토텔레스), 타인이 겪는 피해를 순전히 남의 일로 치부함으로써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도록 만들며(데카르트, 스피노자), 심지어 국가가 불의를 자행할 때 이에 침묵하지 않고 권력에 적극적으로 불복종하도록 만든다(스피노자). 반면에 분개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싶은 욕망이나 무엇이든지 흠잡고 깎아내리려는 기질로부터 생겨난다면, 이는 참된 도덕적 성품이라기보다 도덕을 꾸며내는 것에 불과하다(데카르트). 따라서 마땅한 때, 마땅한 일에 대해, 마땅한 사람을 향해, 마땅한 목적을 위해, 마땅한 방식으로 분개해야 하며, 그럴 때만 인간은 참되게 고귀하고 훌륭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세 철학자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실로 인간의 위대하고 찬란한 면모도 보잘것없고 암울한 면모도 분개라는 이 하나의 감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개가 그토록 오랫동안 철학적 주목의 대상이 돼 온 것일 테다.


 

[회원동정] 제10회 소송학술상「최시형 동학에서 ‘民’ : 깨뜨림 같음 다름의 근대 읽기」– 박영미 회원『시대와 철학』 제34권 1호 수록 논문 [한철연 소식]

안녕하세요, 웹진 〈(e)시대와 철학〉편집주간입니다.

 

지난 2026년 1월 8일 태복빌딩 302호에서 열린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에서 제10회 소송학술상 시상이 있었습니다.

소송학술상은 소송 송상용 선생님(한림대 명예교수)의 뜻을 이어 한철연 소장 학자들의 학술을 평가하고 고양하기 위해 한철연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시대와 철학』에 최근 2년 동안 수록된 논문 중 우수 논문 한 편을 선정하여 한철연 회원에게 2년에 한 번 수여하는 학술상입니다.

제10회 소송학술상은 박영미 회원이 수상하였습니다.

수상 논문은 「최시형 동학에서 ‘民’ : 깨뜨림 같음 다름의 근대 읽기」(『시대와 철학』 제34권 1호 수록 논문)입니다.

박영미 선생님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관련된 후속 연구가 기대됩니다.

논문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수상 소감을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영미입니다.

부족한 논문을 제10회 소송 학술상 수상 논문으로 선정해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학술상 수상 소식을 듣고 기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현재 제가 지방에 있어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매우 안타깝고,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최시형 동학에서 ‘인민’: 깨뜨림 같음 다름의 근대 읽기>에서 저는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주목했습니다.
첫째, 최시형의 동학은 당시 여전히 수동적 객체에 불과했던 ‘인민’도 사람이며 하늘임을 선언하며, 여전히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유학적 사유와 사회 제도의 핵심적인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하고 ‘깨뜨렸다’는 점입니다.
둘째, 최시형의 동학은 사람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으로부터 하늘을 ‘일상의 하늘’ ‘생활의 하늘’로 재해석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인식과 제도를 반대한 ‘깨뜨림’은 전통적 사유를 공유하는 ‘같음’으로, 그러나 그 실천은 ‘다름’으로 확장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최시형 동학의 해석을 통해 전통과 반전통의 이분법적 근대 읽기가 아닌, 反전통과 전통이 충돌하면서도 공존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사유를 확장하며 실천을 이루어낸 근대가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이와 같은 근대 읽기에 대한 생각, 의지, 실행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같이 모여공부하고 있는 한국현대철학분과가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이 상은 저희 분과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함께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현대철학분과원들, 한철연의 선배 후배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이런 뜻 깊은상을 만들어주신 이제 고인이 되신 송상용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좌: 2026년도 신임 한철연 회장 이병태, 우: 수상자 박영미 회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5년 가을 제69회 정기학술대회 ‘한국철학의 근현대, 그 전환의 장면들’ [2025 ‘한국철학자연합대회’] 20251025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제69회 정기 학술대회는 2025 [한국철학자연합대회](주제: 기술의 도전, 철학의 응전) 한철연 세션에 한국현대철학분과 발표로 진행하였습니다.

ㅇ주제 : 한국철학의 근현대, 그 전환의 장면들
ㅇ일시 : 2025년 10월 25일(토) 14:30~18:00
ㅇ장소 : 전북대학교 인문대 1호관 213호
ㅇ주관 : 전북대학교 철학과, 범한철학회, (사)한국철학회
ㅇ주최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전체 사회 : 이관형(강서대학교)
▷ 개회사 14:30 회장:전호근(경희대학교)

[제1부 전통과 근대를 가로지르는 사유]
*제1발표 14:40~15:15(발표25분,토론10분)
19세기 근대 민중운동에서 ‘민중’의식과 정체성의 변화
발표: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토론:김정철(한국국학진흥원)
*제2발표 15:15~15:50
한국철학에서의 ‘근대’ 계승: 1900년대 초 손병희의 동학 계승
발표:박영미(한양대학교)|토론:이병태(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3발표 15:50~16:25
1920년대 『개벽』의 전통사유
발표:윤태양(건국대학교)|토론:배기호(중원대학교)

[제2부 식민과 분단을 넘어서는 철학]
*제4발표 16:30~17:05
조소앙「素昻氣說」의 한국철학적 연원과 독창성 고찰
발표:한송희(성균관대학교)|토론:오주연(건국대학교)
*제5발표 17:05~17:40
북으로 간 철학자들-1950년대 북한 철학연구의 한 장면
발표:박민철(건국대학교)|토론: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종합토론 및 질의 17:40~18:00|좌장:이관형(강서대학교)


개회사 (회장: 전호근)

제1발표 [19세기 근대 민중운동에서 ‘민중’의식과 정체성의 변화]

제2발표 [한국철학에서의 ‘근대’ 계승: 1900년대 초 손병희의 동학 계승]

제3발표 [1920년대 『개벽』의 전통사유]

제4발표 [조소앙「素昻氣說」의 한국철학적 연원과 독창성 고찰]

제5발표 [북으로 간 철학자들-1950년대 북한 철학연구의 한 장면]

종합토론 및 질의|좌장:이관형(강서대학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5년 봄 제68회 정기학술대회 ‘전환의 상상력: 새로운 시대를 위한 철학적 구상’ 20250628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5년 봄 제68회 정기학술대회 ‘전환의 상상력: 새로운 시대를 위한 철학적 구상’ 20250628 영상

  • 일시 : 2025년 6월 28일(토) 12시~
  • 장소 : 경희대 청운관 207호

※ 1부 – 1발표와 2부 – 4발표는 영상이 누락되었습니다.

[1부] 사회 : 김은주(서울시립대)
1-발표) 12·3 내란 이후 정치와 언론의 공공성 문제에 대한 단상|발표자 : 이진욱(건국대) 토론자 : 강지은(건국대)
2-발표) 막스 슈티르너의 부활|발표자 : 박종성(건국대) 토론자 : 이병태(경희대)

[2부] 사회 : 박지용(경희대)
3-발표) 쓸모의 몫과 몫의 쓸모|발표자 : 문성원(부산대) 토론자 : 이현재(서울시립대)
4-발표) 극우의 파괴력과 민주공화국의 가치들|발표자 : 연효숙(연세대) 토론자 : 이정은(연세대)
5-발표) 탈노동사회의 도래|발표자 : 이성백(서울시립대) 토론자 : 한상원(충북대)

[3부] 종합토론 – 사회 : 박민철(건국대)


1부 – 2발표 [막스 슈티르너의 부활]

2부 – 3발표 [쓸모의 몫과 몫의 쓸모]

2부 – 5발표 [탈노동사회의 도래]

종합토론


 

이병창 선생님『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출판 기념회 2부 2025.12.26.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병창 선생님『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2권) 출판 기념회

 

-일시: 2025년 12월 26일 금요일 오후 3시

-장소: 한양대학교 HIT 6층 이십사절기 한양대점

-주관: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철연 이병창 회원(동아대 명예교수)이 헤겔의『정신현상학』을 번역하고 주해를 단 50여 년 헤겔 연구의 결정체를 책으로 출간한 것을 기념하여 저자의 변을 듣고 대담자들을 초빙하여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었다. 한철연 회원 30여 명과 전공자, 학부/대학원생 포함 총 90여 명의 청중이 참석했다.

 

관련기사: [“괴물 같은 정신현상학과 싸우느라 50년이 흘렀다” 신간 이병창의 《정신현상학-번역과 주해》출판 기념회 참석기] https://omn.kr/2gil1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94315)

식순

♦제1부 – 사회: 박지용(한국철학사상연구회)

2:30~3:00 등록

3:00~3:05 개회 선언 및 내빈 소개

3:05~3:20 개회사 및 축사

3:20~3:30 저자 소개 및 출판 경과보고

3:30~3:50 저자 인사말 및 출간 소감

3:50~4:00 꽃다발 증정 및 케이크 커팅식

4:00~4:10 기념촬영

4:10~4:30 휴식

♦제2부 저자와의 대담

좌장: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 한국철학회 회장)

4:30~4:35 대담자 및 진행방법 소개 (대담자: 연효숙, 이정은, 이종철, 최일규)

5:35~6:00 청중과의 질의응답

♦제3부 기념 만찬

6:00~7:30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o-JVgtuI3Hk?si=FjFc9Rgk1UMXGam-


이병창 선생님『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출판 기념회 1부 2025.12.26.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병창 선생님『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1·2권) 출판 기념회

 

-일시: 2025년 12월 26일 금요일 오후 3시

-장소: 한양대학교 HIT 6층 이십사절기 한양대점

-주관: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철연 이병창 회원(동아대 명예교수)이 헤겔의『정신현상학』을 번역하고 주해를 단 50여 년 헤겔 연구의 결정체를 책으로 출간한 것을 기념하여 저자의 변을 듣고 대담자들을 초빙하여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었다. 한철연 회원 30여 명과 전공자, 학부/대학원생 포함 총 90여 명의 청중이 참석했다.

 

관련기사: [“괴물 같은 정신현상학과 싸우느라 50년이 흘렀다” 신간 이병창의 《정신현상학-번역과 주해》출판 기념회 참석기] https://omn.kr/2gil1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94315)

식순

♦제1부 – 사회: 박지용(한국철학사상연구회)

2:30~3:00 등록

3:00~3:05 개회 선언 및 내빈 소개

3:05~3:20 개회사 및 축사

3:20~3:30 저자 소개 및 출판 경과보고

3:30~3:50 저자 인사말 및 출간 소감

3:50~4:00 꽃다발 증정 및 케이크 커팅식

4:00~4:10 기념촬영

4:10~4:30 휴식

♦제2부 저자와의 대담

좌장: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 한국철학회 회장)

4:30~4:35 대담자 및 진행방법 소개 (대담자: 연효숙, 이정은, 이종철, 최일규)

5:35~6:00 청중과의 질의응답

♦제3부 기념 만찬

6:00~7:30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tuA54HCdn-E?si=YPCDNCOhDjDOhXc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