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3-완전한 근거, 세계의 근거로서 신과 자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3-완전한 근거, 세계의 근거로서 신과 자연

1)

앞에서 형식적 근거와 실재적 근거를 다룬 데 이어서 헤겔은 완전한 근거의 개념을 제시한다. 완전한 근거란 앞에서 말한 실재적 근거가 지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즉 실재적 근거란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출현한 개체에서 근거의 내용과 다른 내용이 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 개체가 근거에 의해 정립된 형식 외에 독자적인 형식을 지니고 있기에, 양자의 결합을 통해 그것의 토대로서 새로운 내용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체는 하나의 통일체이므로 근거에 의해 정립된 형식과 독자적 형식 사이의 결합이 요구된다. 이런 결합을 위해서는 그 결합을 위한 근거가 필요하다.

“실재하는 근거에서 내용으로서 근거와 관계로서 근거는 다만 토대이다. 전자는 다만 본질적인 것으로서 정립된 것일 뿐이며 근거로서 존재한다. 관계는 근거지워진 것을 상이한 내용의 무규정적인 기체로 만드는 어떤 것이니, 이는 근거지워진 것이 지닌 결합인데 자기 자신의 반성이 아닌 외적이며 따라서 정립된 것일 뿐인 결합이다.”(논리학, GW11, 312)

2)

여기서 하나의 개체에 두 가지 근거가 출현하게 된다. 하나는 어떤 개체의 형식을 결정하는 근거다. 다른 하나는 개체에 내재하는 형식들의 결합을 위한 근거이다. 이 두 가지 근거를 모두 가지고 있을 때 실재적 근거는 이제 완전한 근거가 된다.

이를 도해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것 B에서 내재하는 두 형식 a와 b가 결합하는 근거는 이 두 형식을 결합하는 원리가 된다. 개체 내에 두 가지 형식 a, b를 결합하는 근거 즉 a->b는 결국, 어떤 것 A와 다른 것 B가 근거 관계를 맺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결합하는 근거는 근거의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B에 대해 근거가 되는 A는 “지양된 것으로서”, 또는 ”정립된 것으로서” 근거이며, “이제 다른 근거를 갖는 근거지워진 것”(논리학, GW11, 312)이다.

그런데 첫 번째 근거 관계 즉 A와 B 관계(또는 a, b의 관계)와 달리 이것의 근거가 되는 근거에서 ① a와 b는 일정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a, b가 단순히 혼합된 것이 아니라 양자가 결합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는 ② 관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직 법칙적인 것은 아니다. 법칙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관계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일반성이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결합하는 원리를 단순히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의 관계 또는 ‘잠재적 관계[an sich]’로만 규정한다.

“두 가지 관계는 관계의 방식에 따라서만 구별되니, 그 관계 방식이란 하나의 관계 속에서는 직접적이고 다른 관계 속에서는 정립되어서 이를 통해 하나는 다른 것으로부터 형식에 따라서 다만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으로 구별된다.”(논리학, GW11, 313)

“두 번째 어떤 것[형식적 근거 관계]에서 내용규정이 지닌 근거 관계는 첫 번째 어떤 것[결합의 근거 관계]이 지닌 최초의 잠재적으로[an sich] 존재하는 관계를 통해 매개된다. 결론은 이러하다. 즉 어떤 것 속에 규정 B가 규정 A와 더불어 본래[an sich] 결합되어 있으므로 또한, 하나의 규정 A가 직접 속하는 두 번째 어떤 것에서 규정 B가 그 규정 A와 결합되어 있다.” (논리학, GW11, 313)

3)

여기서 이 결합의 근거가 일반적 법칙이 아닌 개별적 원리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와 관련해서 헤겔은 실재적 근거를 다룬 주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두 가지 근거가 상호 이런 근거 관계에 있으나 이 근거 관계는 법칙적인 것은 아니므로 “어떤 경우에 하나가 다른 것의 근거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 다른 규정이 다른 경우에도 또는 일반적으로 그 규정과 결합되어서 정립된다는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논리학, GW11, 310)

예를 들어 처벌의 근거는 자주 보복의 기능에 있다고 여겨지지만, 처벌은 그 외에도 범법의 방지를 자기의 기능으로 갖는다. 처벌이 보복으로 가해지더라도,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방지라는 결과를 자아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보복은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복을 위해 시행된 처벌이 방지라는 효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보복이 방지가 되게 하는 원리가 따로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 보복이 방지가 되게 하더라도 그 원리가 다른 경우에도 보복이 방지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법의 처벌이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실일 것이다.

또한, 이 점과 관련하여 헤겔은 세계와 관련하여 자연과 신이라는 두 근거를 살펴본다. 한편으로 자연은 세계의 근거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근거 관계를 통해 서로 합일하지만, 다른 한편 양자는 구별된다. 자연이 세계의 근거라고 할 때, 여기서는 세계의 추상적 본질의 측면만이 다루어지고, 세계가 지닌 구체적 측면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즉 자연은 세계의 실재적 근거일 뿐이다.

즉 “자연은 차라리 무규정적인 것이거나 적어도 세계의 본질 즉 다만 일반적으로 규정된 법칙 속에서 규정되어서 자기와 동일한 본질이므로 자연이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에 더 다양한 규정들이 외적으로 추가된다.”

그러므로 자연의 추상적 본질이 세계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근거가 필요하다. 이 근거는 추상적 본질을 구체화하는 힘이니, 이런 힘은 곧 신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과 달리 신은 세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제삼자이어서 이 두 가지 상이한 것[자연과 신]이 결합한다. 앞서 말한 근거는 근거[추상적 본질의 근거]과 구분되는 다양성의 근거는 아니며 더구나 그 근거가 다양성과 결합하는 근거도 아니다. 따라서 자연은 그 근거로서 신으로부터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하다면 신은 자연의 일반적 본질일 뿐이어서, 그런 본질은 규정된 본질이나 자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을 포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GW11, 310)

신은 추상적 본질을 구체화하는 즉 세계의 본질과 다양성을 결합하는 힘이지만, 신 자체는 법칙적인 것은 아니다. 신은 결합하는 원리지만, 유일할 수 있다.

4)

그런데 ③ 이 결합 관계에서 양자의 결합은 단순히 그러한 것으로 가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지적 직관에서처럼 직접 원리적으로 인식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a, b 의 관계는 상호침투적으로 매개된 것 즉 “정립된 것 속에 자기와 동일한 것” 또는 절대적 관계는 아니다.

“두 번째 관계는 형식상 구별된 것인 한에서 첫 번째와 동일한 내용[A-B, a-b]을 갖는다. 즉 그것은 두 가지 내용규정을 갖는데 그러나 양자[a, b]의 직접적인 결합이다. … 이 관계는 아직 자신의 진정한 절대적 관계는 아니다. 그런 절대적 관계라면 규정들 중의 하나는 정립된 것 속에 자기와 동일한 것이고 다른 것은 다만 이 동일한 것이 정립된 것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어떤 것은 그 내용규정을 지니지만, 그 내용규정이 지닌, 아직 반성되지 않고 다만 직접적인 관계를 이룬다.” (논리학, GW11, 312)

④ 이런 결합의 원리가 존재한다면, a와 b가 결합하는 것은 그것을 원리로 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리는 A와 B가 결합하는 것을 통해서 추상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파생된 결과를 근거로 해서 세워진 원리이므로 이 원리를 근거로 해서 결과를 끌어내는 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앞에서 형식적 근거는 동일한 내용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순환적인 것으로 도출되어야 할 결과를 전제로 그 원리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완전한 근거에서 결합 근거는 사실 형식적 근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헤겔은 이런 완전한 근거는 한편으로 실재적 근거와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 근거를 결합한 것이라고 말한다. 형식적 근거는 실재적 근거로 이행했으나 이제 다시 실재적 근거와 결합한다.

“두 번째로 이[일반적] 근거 관계는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재적이다. 이미 보았듯이 형식적 근거는 실재적 근거로 이행한다. 형식의 계기들은 각자 자기 자신으로 반성한다. 이 계기들은 자립적인 내용이 된다. 또한, 근거 관계는 하나의 본래적 내용을 근거로서 그리고 하나의 내용을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포함한다.” (논리학, GW11, 313)

그런데 이런 일반적 관계가 직접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이런 순환적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차라리, 이런 일반적 관계를 더 높은 일반적 관계를 근거로 해서 정립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하면, 이런 근거를 찾는 작업은 무한히 계속되어서 마침내 자기 스스로 결합하는 원리에 이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이 자기 스스로 결합하는 원리가 곧 이데아인데, 이는 현실 초월적인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악 무한이다.

“추론은 우선적으로 근거를 발견하고 전해주는 것에서 성립하는데 그 때문에 그런 발견과 전해주는 것은 끝이 없이 맴도는 일이라서 어떤 최종적 규정도 포함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것에 대립하는 것에 대해서 만큼이나 하나나 여러 가지 훌륭한 근거가 그 근거에 대립하는 근거만큼이나 가정될 수 있으니 한 무더기의 근거들이 출현할 수 있더라도 그런 근거들로부터 어떤 것이 끌어내어지지 않는다.” (논리학, GW11, 311)

5)

헤겔은 실재적 근거를 배후에서 가능하게 하는 근거의 근거를 제시한 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실재적 근거가 가능하려면 또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조건이다. 이 조건은 실재적 근거가 관계하는 토대에 관련된다.

이 토대는 한편으로 여러 가지 형식의 부정적인 통일이므로, 그 때문에 앞에서 근거의 근거가 발생했다. 그러나 여기서 관계하는 형식은 지각적 일반성을 지닌다. 종적 개체라는 토대는 이런 형식적인 일반성 외에 개별적 규정성, 질적 현존을 지니니, 이제 이 질적 현존은 근거 관계에서 토대가 존재하기 위한 직접적인 규정이 된다.

형식의 근거는 토대가 지닌 개별적 현존의 측면을 자신이 근거로 관계하는 관계의 전제로 삼으며, 이를 헤겔은 근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된 결과”이며 또는 “자기 자신을 타자로 삼아서 관계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형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반발하여 오히려 직접적인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런 가운데 자기 자신을 마치 타자로 삼아서 관계한다.”(논리학, GW11, 314)

이 조건은 어떤 것의 근거가 그런 근거로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여기서 어떤 것에 대해서 근거와 조건은 서로에 대해 근거가 되고 서로를 전제한다. 이 두 가지는 한편으로 서로 무차별하며 한편으로 서로 관계하며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한다.

“이런 직접적인 것은 내용규정이며, 단순한 근거이지만, 이는 이와 같은 것으로 즉 마찬가지로 자기로부터 반발되어 자기를 타자로 삼아서 관계한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근거 관계는 제약하는 매개로 규정되었다.”(논리학, GW11, 314)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2-실재적 근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2-실재적 근거

1)

종적 개체는 형식과 내용의 측면에서 서로 관계한다. 형식은 차이 있지만, 내용이 서로 동일할 때 그 관계가 형식적 관계다. 그런데 이제 형식은 동일하더라도 내용이 달라지면 그것의 관계가 실재적인 관계다.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이 상이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이제 근거 관계가 형식적인 관계이기를 중단한다. 근거로 되돌아가고 근거로부터 나와서 정립된 것으로 되는 것은 더는 동어반복이 아니다. 근거는 실재화한다.”(논리학, GW11, 307)

여기서 두 개의 종적 개체를 X와 Y라고 하고 각각이 A, B와 B, C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X의 형식과 Y의 형식은 B 형식에서 동일한 것이다. 다만 X에서 그 형식 B는 근거이며 직접적인 것이며 Y에서 그 형식 B는 근거지워진 것 즉 정립된 것이다. X와 Y는 내용도 지니는데, X의 내용은 A, B 각 형식의 토대가 된 것들이 결합체이고 Y의 내용은 B, C 형식의 토대가 된 것들의 결합체다.

여기서 형식의 결합과 내용의 결합은 서로 다른 것이다. 형식은 전체의 기능을 운동 과정 상에서 구획한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서 부분은 그 자체 하나의 유기체이지만, 부분의 전체는 그 부분들이 유기체적으로 결합한 전체다. 전체적으로 통일된 형식과 통일된 내용은 서로 반성적 관계에 있다.

그런데도 아직 지각의 단계에 머무르는 인식은 이를 고립적으로 분할해서 파악한다. 그러면 마치 부분적인 형식과 부분적인 내용이 서로 결합되어 있고, 전체는 이런 부분적 결합체가 다시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예를 들어 꽃나무에서 광합성과 잎, 영양분을 유통과 줄기, 그리고 재생산과 꽃은 각기 결합된 것이며 동시에 전체 꽃나무는 이런 부분적 결합체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지각 단계에서 실재적 근거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2)

이제 이와 같은 지각의 방식으로 보면 형식상 동일하지만, 내용상 차이가 있는 것들의 관계가 출현한다. 즉 두 개체 X, Y는 형식상은 B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각자는 자기에게 고유한 직접적인 형식(A, C)과 서로 공통적 형식을 동시에 가진다.

각자가 지닌 고유한 형식 때문에 이 두 개체는 서로 외면적이지만, 공통적인 형식 B를 통해 양자는 근거 관계를 가진다. X에서 형식 B는 근거가 된다. Y에서 형식 B는 X의 형식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X, Y가 이처럼 서로 다른 형식(AB, BC)을 지닌 한 그 형식들의 토대가 되는 내용(AB, BC)도 서로 달라진다. 각자의 형식이 혼합적이든 내용도 혼합적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형식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용도 두 측면을 지닌다. 서로 공통된 내용과 서로 다른 내용이다.

각자는 타자와 구별되는 고유한 내용(A, C)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서로 외면적이다. 그러면서 근거와 토대라는 관계 속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내용(B)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는 양자는 서로 동일하다.

“근거지워진 것은 근거가 지닌 내용 바깥에 존재하면서, 자기에 고유한 내용을 가지며, 따라서 이중적인 내용의 통일체이다. 이 통일체는 이제 사실 구별된 것의 통일이므로 그 구별된 것의 부정적인 통일이지만, 근거지워진 것은 서로 무차별한 내용규정들이므로, 그 통일은 다만 그들의 공허한, 자기 자신에서 내용이 없는 관계이지 매개는 아니다. 즉 그런 내용규정의 외적인 결합으로서 어떤 것 또는 일자이다.”(논리학, GW11, 308)

“실재적인 근거 관계에서 이중적인 것이 출현한다. 한번은 근거의 내용규정이 정립된 존재 속에서 자기 자신과 연속되며…. 따라서 근거지워진 것에서 이 단순한 본질[근거가 정립된 존재]에 더 추가되는 것은 다만 비본질적인 형식, 외적인 내용규정이다. 그런 내용규정 자체는 근거로부터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다양한 것이다.“(논리학, GW11, 308)

구체적으로 헤겔은 주석을 통해 이런 실재적 관계의 다양한 예들을 제시한다. 그는 우선 집의 토대로서 돌이 사용된 돌집을 가지고 설명한다. 여기서 돌이 토대로 사용된 근거는 곧 무게 때문이다. 그런데 돌에는 단순히 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이라는 독특한 물질적 구조가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 일정한 위치에 놓임으로써 특별한 운동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돌의 형식 속에 있는 무게, 물질적 구조, 운동 에너지 등이 돌을 내용상 목재나 강철과 구별시켜 주는 것이다. 돌이 지닌 무게라는 형식은 이제 원반던지기에 원반의 형식이기도 하다. 원반은 무게를 지니므로 투척될 수 있다. 그러나 원반은 다른 형식을 지니면서 다른 내용을 가진다. 특히 원반은 원반이라는 형식을 지니므로 멀리 던져질 수 있다.

3)

하나의 개체 속에 존재하는 여러 부분적인 형식-내용 결합체는 지각의 단계에서는 아직 통일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되니, 지각이 처한 관점에 따라서(또는 주관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가치가 매겨진다. X와 Y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B(형식-내용 결합체로서)가 본질적이고 C는 비본질적이다. 그러나 Y가 Z와 관계하는 측면에서 보면 C가 본질적이고 B가 비본질적인 것이다.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서도 이중성이 나타난다. 형식과 내용이 각자에서 통일적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각자에서 형식은 전체적 통일 속에 있으니, 형식은 전체적 내용과 반성 관계에 있다. 형식은 그런 내용의 근거가 되며 내용은 그런 형식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전체를 분할해서 형식이나 내용을 다른 것으로부터 고립적인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부분적인 형식은 부분적인 내용에 외면적이다. 예를 들어 잎의 기능은 흔히 광합성이고. 이것이 그것의 내용이라고 할 유기체적 조직으로서 잎과 흔히 통일되어 있다고 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양자는 서로 다르다. 잎은 광합성 기능 외에도 재생산 기능이나 유통 기능에도 관여한다.

더구나 이런 고립된 형식은 일반적인 자립성을 지니고 있으니 예를 들어 무게는 집의 토대로서 돌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무게는 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재나, 강철에도 있으니 그런 점에서 무게는 돌에 외면적인 것이다.

“근거의 자기 동일적 형식은 동일한 형식이 한번은 본질적인 것으로 다른 한번은 정립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런 동일성의 형식이 사라진다. 근거 관계는 이제 자기에게 외면적으로 되었다.”(논리학, GW11, 308)

4)

앞에서 형식과 본질, 형식과 질료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형식적 근거와 실재적 근거의 차이가 설명되었는데, 양자를 비교해 보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형식과 본질이 형식적 근거에 대응하며 형식과 질료가 실재적 근거에 대응한다. 형식과 본질이나 질료의 관계는 개체 내부의 관계라 한다면, 여기서 근거 관계는 개체와 개체 사이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개체 내부의 관계가 개체와 개체의 관계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환이 일어난다. 어떤 것의 형식(내용)이 지닌 두 측면은 일단 서로 독립적이어서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실 하나의 개체는 이미 형식상(내용상) 통일체이다.

그러므로 지각적인 관점에서 각기 독립하고 외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파악된 측면들 사이에 통일의 가능성이 모색된다. 어떤 것이 출현하려면 우선 그 형식에서 근거가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토대는 근거에 의해 정립된 형식 외에 고유한 형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토대가 하나의 구체적인 개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정립된 형식과 토대가 지닌 직접적 형식 사이를 결합하는 근거가 주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도덕은 인륜을 형성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도덕적 근거는 인륜 자신에 고유한 직접적인 형식과 결합해야 한다. 인륜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이며, 이는 개인이 실제 행위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 형성된다. 인륜이 도덕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도덕을 실제 행위와 결합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주어져야 한다. 예를 들자면 도덕적 충동이나 합리적 자유의지와 같은 것이다.

“도덕이라는 운동 근거로부터 행위가 나올 수도 있고 또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행위는 여러 가지 근거를 지닐 수 있다. 행위는 구체적인 것으로서는 다양한 본질적 규정을 포함하니, 그 본질 규정 각각은 그 때문에 근거로 가정될 수 있다.”(논리학, GW11, 311)

결국, 이런 근거를 찾는 이성의 작업은 끝없이 계속된다. 어떤 근거가 주관적인 관점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선택된다면, 그것에 대립하는 것도 근거가 될 수 있다. 하나는 대립하는 것만큼이나 탁월하게 본질적으로 된다.

어떤 근거가 실재하기에 충분하도록 새로운 근거가 요구되면서 실재적 근거는 완전한 근거로 이행하게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1-규정된 근거와 근대 과학의 기만[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1-규정된 근거와 근대 과학의 기만

1)

앞에서 종적 개체[주어, 토대]와 형식[술어, 근거]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 관계는 형식과 본질, 형식과 질료,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발전에서 핵심은 ‘형식‘ 갠념의 의미 발전이다.

이런 발전은 존재론에서 감각적 질이 지각적 일반 성질로 그리고 유한성으로 발전하는 것과 상응한다. 다만, 본질론에서 주어에 해당하는 것은 종적 개체이고 여기서 술어에 해당하는 것은 존재론에서 나오는 질적인 규정이 아니라 유기체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최초에 형식은 주관적으로 설정된 기능이며 그것에 대응하는 토대는 곧 그 기능에 무차별한 유기체적 조직이었다. (헤겔은 이를 본질 즉 유기적 척도 관계로 규정했다.) 두 번째 형식은 지각적으로 일반화된 기능이며 이는 다른 기능에 대해 독립적이어서 그것에 대해 토대는 이런 여러 일반적 기능을 동시에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무규정적인 매체 즉 질료다.

마지막으로 형식은 다른 형식과 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적 기능의 한 계기로 규정된 기능이 된다. 예를 들어 ‘진달래에 고유한 광합성 작용’과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응하는 것 즉 ‘내용’은 부분적인 매체의 통일체이면서 그 때문에 독자적인 규정성을 지닌 존재이다. 예를 들어 꽃나무는 잎과 줄기, 꽃의 통일체로서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된 것 예를 들어 진달래(유기체적 조직으로서)다.

형식과 내용은 각기 하나의 통일체이어서 각 개별적 부분은 전체로부터 떼어낼 수 없으면서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하나의 형식은 독자적이면서도, 다른 형식으로 내적으로 이행하는 유한한 형식이며, 하나의 유기체적 마디는 자립적인 부분이면서도 전체 유기체에 통일적으로 구성된 한 부분일 뿐이다.

2)

이와 같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관계로부터 근거의 문제가 출현한다. 근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생물체의 분류 기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하다. 생물체는 물체처럼 질적이거나 양적인 규정을 가지고 분류할 수는 없다. 생물체는 그 기능을 통해 분류될 수밖에 없다.

생물체의 기능은 여러 가지인데, 예를 들어 양분의 획득을 위한 기능이나 재생산을 위한 기능을 들 수 있다. 이런 기능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고립적으로 파악된다.

양분을 획득하는 기능은 다시 그 방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식물처럼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획득하거나, 동물처럼 주변의 생물체를 소화해서 양분을 획득할 수 있다. 광합성을 통하더라도 그 방식은 다시 식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질 것이다.

이런 기능의 토대가 되는 것이 곧 내용이다. 이 내용은 유기체의 물질적 조직 체계를 말한다. 이것은 유기체적 방식으로 조직되어서 이를 통해 자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유기체적 조직도 고유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식물에서는 잎, 줄기, 꽃 등으로 구분되지만, 동물에 이르면 더 복잡해진다. 여기서는 신체의 마디와 다양한 내장 기관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신체의 마디는 동물의 종마다 구별되며, 내장 기관 역시 다양하다.

사실 기능은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유기체 역시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기능의 분류와 유기체의 형태의 분류는 상응하지 않는다. 기능은 운동의 전체 과정을 분할한 것인 반면 유기체의 형태는 외적인 모습에 따라서 분할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종적 개체를 분류하는 기능이 곧 생물의 종차에 해당하는 형식이 되는데, 지금까지 헤겔은 그 형식을 생물체의 기능 속에서 찾았고 유기체적 조직을 그것에 대응하는 기체로 삼았다.

3)

이제 형식과 내용, 기능과 유기체적 형태 사이의 관계로부터 근거와 근거지워지는 것의 관계가 문제로 등장한다.

하나의 형식은 규정[bestimmt]되어 있다. 이 형식은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형식의 가운데 하나로서, 다른 형식과 대립하지만, 통일적 전체를 구성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규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형식은 지각적 일반성을 지니는 것이므로 하나의 형식은 여러 종적 개체에 공통된 형식이기도 하다. 이 형식을 통해 하나의 내용을 지닌 개체가 다른 내용을 지닌 개체와 관계 맺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형식은 다른 개체의 내용을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진달래에 고유한 재생산 기능을 지니는데, 진달래의 고유한 내용 즉 유기체적 조직을 통해 이 기능이 수행된다. 동시에 이 기능은 철쭉의 고유한 내용을 규정하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철쭉은 진달래와 다른 유기체적 형태 즉 내용을 지닌다. 진달래는 꽃이 잎보다 먼저 피지만, 철쭉은 꽃이 나중에 핀다는 차이가 있으니, 필자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 유기체적 조직 즉 내용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진달래와 철쭉은 동일한 재생산 기능을 지니면서도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니면서 일정한 근거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근거 관계가 이제 헤겔이 1편 3장 B절 ‘규정하는 근거’ 장에서 다루려는 내용이다. 앞에서 ‘근거와 토대’의 관계가 존재론에서 질적 규정의 발전과 상응했듯이 ‘규정하는 근거’에서 다루어지는 개체와 개체의 관계는 앞에서 존재론에서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종적 개체 사이에 성립하는 형식과 내용, 즉 근거와 토대라는 관계에서 헤겔이 처음 다루는 것은 형식적 관계 또는 동어반복적인 관계이다. 이 관계는 언뜻 표면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 것들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형식의 관계일 뿐이다. 헤겔은 주석에서 이런 형식적 관계에 관해 많은 예를 제공한다.

그는 근대 물리학이 이런 형식적 관계에 관한 풍부한 예를 제공한다고 말하는데, 몇 가지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곧 태양을 중심으로 혹성이 돈다고 할 때, 그 근거로 제시되는 뉴턴의 인력이라는 개념이다.

헤겔은 태양 중심 회전운동이나 만유인력은 사실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양자는 같은 내용을 지닌 것인데 다만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태양 중심 회전운동은 운동하는 모습을 통해 규정된 형식이고 인력이란 그 관계를 힘으로 설명하는 형식이다. 두 형식은 마치 저녁별이 새벽 별인 것과 같이 의미상 동일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다 더 극적인 예는 생명의 탄생을 생명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역시 운동을 힘으로 설명하면서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력이란 개념은 생명을 탄생하는 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의 예보다 이 예가 더 나쁜 것은 생명력이라는 개념은 아직 해명되지 않는 신비한 것이니, 이는 무언가 설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설명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명의 근거가 신비한 것, 비밀스러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설명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신비하다는 말은 그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은 것일 뿐이다.

“여기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설명을 위해 사용된 힘이 감추어진 금거인 한에서는 [본래 설명에서] 요구되는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05)

이런 형식적 근거의 예를 통해 금방 이해되듯이 이런 설명은 설명되어야 할 결과를 근거로 해서 이를 추상화하며 이로부터 다시 자기의 근거가 되었던 결과를 끄집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근거는 현존이 파악되어야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 현존으로부터 그 근거로 추론이 일어나며 근거는 현존으로부터 파악된다.”(논리학, GW11, 305)

사실은 결과로부터 끌어낸 원리인데도 설명에서는 마치 직접적으로 출현한 것처럼 가장되니, 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결국, 반성을 통해 나온 규정이 일정한 방식으로 마치 직접적 경험에 속하는 것처럼 표현된다면, 반성되고 단순하게 된 가설적 규정이 현상의 직접적인 규정 자체와 혼동되면서 이런 혼란을 더욱 커진다.”(논리학, GW11, 306)

4)

이런 예를 통해서 형식적 근거 관계라는 헤겔의 개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헤겔은 이 관계를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종적 개체들 사이의 근거 관계를 보자. 여기서 하나의 내용이 지닌[A] 어떤 형식이 다른 내용을 지닌 것[B]의 형식을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A에서 그 형식은 근거이니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되며 B에서 그 형식은 ‘정립된 것’으로서 토대의 형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A와 B의 형식상 다르지만, 내용은 동일한 것이라면 형식적 관계가 발생한다. 서로 다른 형식을 지닌 것을 매개하는 것은 바로 양자가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형식적 매개가 자기 자신을 통해 긍정적으로 매개하는 것으로 삼으면서 관계하는 특정한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내용은 양자에 동일한 것이며 양자가 구분되지만, 각자는 그런 구별 속에서 타자와 관계하므로 내용은 양자를 존립하게 하는 것이며 각자를 전체 자체로 존립하게 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03)

5)

이런 형식적 매개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① 형식이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형식은 내용 자체와 무관한 것으로 된다. 내용의 형식이 이처럼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면, 그 형식은 내용에 고유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특정한 내용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된다. 즉 한번은 내용이 근거로 존재하는 한에서 고찰되며 다른 한 번은 내용이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정립되는 한에서 고찰된다. 내용 자체는 형식에 대해 무차별하다. 내용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다만 하나의 규정이다.”(논리학, GW11, 303)

② 동일한 내용이 지닌 두 형식이 하나는 근거로 다른 하나는 근거지워진 정립된 것으로 규정되므로 둘 중의 어느 것을 근거로 하든가 무관하게 된다. 한편으로 “근거는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동일성이며, 이를 통해 자기를 정립된 존재로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정립된 것[토대]은 자기를 지양하여 근거로 되돌아간다.” (논리학, GW11, 303)

“두 가지 규정 가운데 어느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삼는가는 무차별하니, 정립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타자 즉 근거로서 타자로 이행할 수도 있고, 근거로부터 출발하여 타자 즉 정립된 것으로서 타자로 이행할 수도 있다.”(논리학, GW11, 303)

③ 한편으로 이처럼 근거 관계를 통해 정립되는 관계가 있지만, 이 관계가 거꾸로도 성립하는 것이니, 결국 정립된 것은 자기를 지양하여 근거로 되돌아가는 순환적인 것으로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그와 같은 형식을 ‘매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각 측면은 근거이며 동시에 정립된 것이고 각 측면은 전적인 매개이거나 전적인 형식이다.”(논리학, GW11, 303)

④ 여기서 B의 형식은 한편으로는 A의 형식에 의해 규정된 정립된 것이면서 동시에 B 자신의 내용으로부터 반성된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이 관계는 거꾸로도 성립하니, A의 형식 역시 그런 이중성을 지닌다.

“근거에 관해 묻는다면 내용이라고 할 동일한 규정이 이중화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한번은 정립된 것의 형식으로 다른 한 번은 현존이 자기 반성되어 나온 형식으로 즉 본질적인 것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03)

이 형식이 내용에 외면적이므로 그 형식이 내용의 반성을 통해 나오더라도 이런 반성은 외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은 다만 단순한 규정성이어서 근거관계의 형식이 그 관계 자신에서 갖는 형식을 가지지 않으므로 그 단순한 규정성은 자기 동일적인 내용이며 형식에 무차별하고 그 형식은 그런 내용에 외면적이다.”(논리학, GW11, 304)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20-형식과 내용[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20-형식과 내용

1)

앞에서 형식과 본질(토대), 형식과 질료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본질론에서 주어는 종적 개체이며 그 술어는 종적 개체를 규정하는 근거 즉 그 기능이다. 헤겔은 이를 형식이라 했다.

기능이란 최종적 결과를 말하는데, 개체적 현존의 기능은 다양하게 규정된다. 그런 가운데 일단 감각적 질과 같은 형식과 독립적인 지각적 형식이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 그것에 대응하는 토대도 개체적 현존으로서 본질과 매체로서 질료로 구분된다.

형식과 질료, 독립적 기능과 매체 사이의 관계 끝에 헤겔은 새로이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설정한다. 이제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살펴볼 차례다.

2)

광합성의 기능과 꽃나무의 관계에서 광합성 기능은 독자적이어서 다른 식물의 기능이기도 하고, 꽃나무는 광합성 외에도 재생산 기능이나 영양분 유통 기능 등과 같은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형식과 질료는 각기 자립적이다.

그러나 잎의 기능인 광합성은 꽃나무 전체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여기서 양자는 본질과 현존 사이의 순수한 반성 관계를 지닌다.

형식과 질료는 한편으로 서로 무차별하고 다른 한편으로 상호 이행하는 상호 모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립적인 것이면서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모순적인 것임이 드러났다. 그런 가운데 형식과 질료는 각자 이미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 정립된다. 그러나 아직 이런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 되지 못하고, 다만 서로 엇갈린 방식으로 일어나는 통일이 된다.

즉 하나의 형식 B는 다른 것의 형식 A에 대해에서는 질료가 되며, 다른 형식 D의 질료 C에 대해서는 형식이 된다. 즉 예를 들어 광합성 B는 꽃나무 C의 기능이면서 그 자체가 자기가 생산한 전분A의 질료가 된다. 꽃나무는 광합성의 질료 B인데, 꽃나무 자체 C는 어떤 식물 D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형식 B는 자기 옆에 질료 A를 가지며, 질료와 형식은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으므로 자기 옆에 A의 형식 X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식은 이제 두 가지 형식의 결합체라는 것이 드러난다. 다만 하나의 형식 B는 표면에 있고 다른 형식 X는 이면에 있다.

그것은 질료 B도 마찬가지다. 질료 C도 다른 것 D의 형식이 되면서 이미 D의 질료 Y를 함축한다. 질료는 그러므로 두 질료의 통일이며, 다만 질료 B가 전면에 질료 Y는 이면에 있게 된다.

사실 형식과 질료의 관계는 이미 각자 직접적인 것이므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형식은 자립적인 것이지만, 다른 형식과 개체적 현존인 매체 속에 공존하는 것이다.

3)

형식과 질료의 관계에서 형식은 독립적이었고 질료는 텅 빈 매체였다. 그러나 형식과 질료가 이처럼 층계화 함으로써 형식은 다른 형식과 질료는 다른 질료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층계화 속에서 아직 그런 연관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제 형식과 질료는 각자 통일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질료는 자기를 이루는 질료들의 통일이 된다. 예를 들어 꽃나무는 그것을 이루는 질료적 부분인 잎과 줄기, 꽃의 통일체가 된다.

이런 통일체로서 꽃나무는 하나의 고유한 질료적 특성을 지니게 되니, 바로 진달래가 된다.

이제 질료는 자기 나름의 형식 즉 특정한 질료로서 특정성을 가지게 된다. 헤겔은 이런 전체적으로 통일되어 특정성을 지닌 질료를 내용이라 한다. 이 통일체는 이제 무규정적인 매체가 아니라 하나의 개체이다.

“질료는 오직 질료로서 질료가 아니라 본질[질료]과 형식의 절대적 통일인 한에서만 그 형식 규정의 근거이다. 마찬가지로 형식은 이와 동일한 통일인 한에서만 자기의 규정을 존립하게 하는[질료의] 근거가 된다.”(논리학, GW11, 300)

마찬가지로 형식도 통일적으로 된다. 하나의 형식은 다른 형식과 통일을 이루니, 하나의 형식은 이제 그 자신에서 타자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이행을 통해 각 형식은 자기 내에서 한계를 지닌 것임이 드러나니, 이제 형식은 유한한 형식이다. 예를 들어 광합성의 기능은 독립적인 기능이 아니라 재생산 기능이나 영양분 유통 기능과 통일되면서 그런 전체적 기능의 한 계기가 된다. 형식에서 이 전체의 통일적 기능이 고유한 질료가 된다.

그러므로 질료와 형식은 이제 자기 자신과 타자의 통일이 된다. 형식과 질료의 관계에서 처음에 이 통일성은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제 마침내 그 통일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헤겔은 형식과 질료의 ‘근원적인 통일’은 이런 모순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면서 ‘정립된 통일’로 이행한다고 한다.

“하나의 활동이 [타자를] 정립하는 가운데 자신을 통일 속에서 정립된 존재로 보존하며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하게 하여 자기로서 자기에 관계하는 동시에 타자로서 자기에도 관계하는 것이다. 또는 질료가 형식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은 근거로서 본질이 통일 속에서 자기 자신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부정을 통해서 자기와 매개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00)

4)

이제 전체적으로 통일된 질료 즉 내용과 전체 속에 하나의 계기로서 형식 사이의 관계가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내용은 질료의 통일체로서 자기의 형식을 지닌다. 그것은 곧 ‘진달래’다. 반면 형식은 통일된 전체의 한 계기 즉 ‘광합성’이다. 양자의 관계에서 한편으로 여전히 외면성이 등장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진달래와 광합성은 서로 외면적이다.

“내용은 우선 그 내용에 속하고 본질적인 하나의 형식과 하나의 질료를 갖는다. 내용은 형식과 질료의 통일이지만, 그러나 이 통일은 동시에 규정되거나 정립된 통일이므로, 내용은 형식에 대립한다.”(논리학, GW11, 301)

“내용은 두 번째로 형식과 질료에서 동일한 것이고 이 경우 형식과 질료는 무차별한 외적인 규정일 것이다.”(논리학, GW11, 301)

그러나 다른 한편 진달래는 질료적 통일체로서 개체이고 광합성이란 형식은 전체적 기능의 한 계기일 뿐이니, 이런 점에서 질료와 형식은 완전한 통일을 이룬다. 형식은 이제 본질이 되고 질료적 개체는 이 본질이 정립한 것이며 다시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즉 본질을 매개하는 것이다.

“내용의 자기 동일성은 한번은 형식에 대해 무차별한 동일성이지만 다른 한 번은 그 동일성은 근거[형식]의 동일성이다. 근거는 내용 속에 우선 사라진다. 그러나 내용은 동시에 형식 규정이 자기 내로 부정적으로 반성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01)

“한편으로 내용에서는 근거가 자신이 정립되는 가운데서도 자기와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은 근거 관계 대립하는 정립된 동일성이다.”(논리학, GW11, 302)

5)

근거 관계는 형식과 본질, 형식과 질료를 거쳐 형식과 내용의 관계 이르면서 다시 본질적 통일로 되돌아 간다.

야기서 하나의 형식은 다른 형식과 통일되어 있고 질료도 전체적인 통일체를 이룬다. 질료는 통일적인 개체가 되고 형식은 유한한 형식이 된다.

“정립된 존재는 이런 동일성의 표면[an]에 형식 규정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정립태 즉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의 전적인 관계로서 형식에 대립한다. 이 후자의 형식은 전체적으로 자기 내로 복귀한 정립태이고 따라서 전자의 형식은 직접적인 것으로서 정립태 즉 규정성 자체이다. 근거는 이로써[정립태의 자기 복귀를 통해] 일반적으로 말해 규정된 근거로 되었다.”(논리학, GW11, 302)

여기서 ‘동일성의 표면에 있는 형식 규정’이 매체 속에 담긴 독립적인 형식을 의미한다면, ‘자유로운 정립태’가 곧 자기 자신에서 타자로 이행하는 형식 즉 유한한 근거를 말한다.

존재론에서 유한자는 이제 무한한 존재로 이행하게 되는데, 그런 이행은 유한자에서 결합하고 있는 두 성질이 외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통일에 이르면서 무한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자에서 무한자는 악 무한이며 후자에서 무한자는 진 무한이다.

이런 악 무한에서 진 무한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앞으로 다루게 될 규정하는 근거에서 무제약자로 이르는 과정에 등장한 실재하는 무제약자(근거)와 완전한 무제약자(근거)의 차이가 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9-형식과 질료[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9-형식과 질료

1)

형식과 본질의 관계에서 형식은 주관적으로 파악된 우연한 기능이었다. 여기서 형식[술어]과 본질[즉 주어, 토대]는 서로 무차별했다. 형식은 생겼다가 곧 사라지는 명멸하는 것이었다.

경험이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면, 술어와 주어, 근거와 토대의 관계는 형식과 질료의 관계로 발전한다. 여기서 형식은 지각적 일반성으로서 유기체의 기능이다. 예를 들어 이제 잎의 기능은 ‘꽃을 보호한다는 것’과 같이 주관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광합성 기능’과 같은 객관적인 기능으로 파악된다. 이런 기능은 단순히 꽃나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라면 거의 전부에 존재하는 것이니 일반성인 기능이다.

이런 객관성 즉 일반적 지각을 유지하면서 차원을 옮겨 꽃나무 전체를 보자. 꽃나무의 기능은 무엇인가? 우리는 꽃나무를 기능별로 분해한다. 꽃나무는 잎을 통해서는 광합성을 하며, 꽃을 통해서는 재생산하며, 줄기를 통해서는 영양분을 유통한다. 그래서 꽃나무의 기능은 재생산 기능, 영양분 유통 기능, 광합성 기능으로 각기 고립적으로 파악된다. 이 기능들은 아직 전체 속에 통일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질료는 서로 독립적인 형식이 공존하는 일반적인 매체로 규정된다. 즉 꽃나무란 서로 독립적인 형식을 담는 그릇이 된다. 서로 다른 형식은 하나의 매체 속에 들어 있다. 각 형식은 그 속에 독립적이면서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는다. 조금도 빈틈없이 매체 속에 들어 있으니, 이런 관계는 마치 과거 고대 철학자들이 지각론자들이 다공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

2)

헤겔은 이와 같은 지각적 일반성으로서 형식과 매체로서 질료의 관계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a) 예를 들어 꽃나무라는 매체와 광합성이라는 잎 기능의 관계를 보자. 광합성의 기능은 전체 꽃나무의 일부 기능일 뿐이다. 또한 이 기능은 꽃나무가 아닌 식물들에도 존재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형식은 일반적이고 독립적인 것이므로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질료는 무규정적인 것이지만, 매체로서 긍정적으로 존립하며 자립적이다. 양자는 각기 직접적인 것이며 그런 한 서로 무차별하다.

이 형식들은 서로 무차별한 것들이기에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형식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니, 토대로서 질료 속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존립할 수 있다. 매체로서 질료는 텅 빈 존재이니, 형식을 받아들여야만 어떤 무엇이 된다. 이런 점에서 형식과 질료는 상호 전제하게 된다.

“질료는 본질이라고 할 단순한 구별이 없는 동일성[매체]이어서 형식의 타자라는 규정을 지닌다. 따라서 질료는 형식에 본래적인 토대이거나 기체이다.”(논리학, GW11, 297)

“형식은 질료를 전제로 하는데, 그 이유는 형식이 자기를 지양하는 것으로서 정립하고 따라서 자기의 동일성을 자신의 타자로 삼아 그것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형식은 질료에 의해 전제된다. 왜냐하면, 질료는 직접 그 자체 절대적 반성인 본질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으로 즉 부정성이 지양된 것으로서 규정된 단순한 본질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297)

그러나 질료는 무규정적이니 무엇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며 형식은 자립적이므로 어떤 질료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이런 외적인 관계 속에서 각자는 타자에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되면서 타자에 의해 정립된다.

“형식은 질료에 관계하여 이와 같은 자기를 존립하게 하는 것을 타자로 삼아 그것에 관계하는 것으로 정립된다. 그에 반해 질료는 다만 자기에 관계할 뿐, 타자에 대해 무차별한 것으로 정립된다. 그러나 질료는 그 자신에서 형식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질료는 지양된 부정성을 내포하면서 이런 규정을 통해서만 질료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298)

“질료는 형식을 타자로 삼아서 그것에 관계하는데 그 이유는 형식이 형식 자신에서 정립되지 않기 때문이며, 형식은 다만 잠재적으로만 질료이기 때문이다. 질료는 형식을 자기 내에 가둔 채로 포함하며 형식에 대해 절대적으로 수용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질료가 이 형식을 절대적으로 자기 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질료의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규정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298)

3)

b) 그러나 질료와 형식을 다른 측면에서 보자. 예를 들어 꽃나무의 기능 가운데 하나인 광합성의 기능은 단순히 꽃나무의 부분인 잎의 기능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체 꽃나무의 기능이기도 하다.

꽃나무의 전체 기능은 보통 자기를 재생산하는 기능에 있다고 하지만, 오히려 광합성 기능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기능이란 최종적 결과를 의미하니, 꽃나무가 최종적으로 광합성을 위해 현존한다고 말해도 된다.

양자 사이에는 이전의 종의 재생산 관계를 통해 현존과 본질의 관계를 설명한 것과 같이 여기서도 본질과 현존의 반성 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양자 사이에는 앞에서 본질과 현존의 관계에서 설명된 것과 동일한 여러 가지 관계가 출현한다.

① 형식은 본질적으로 자기 부정적인 것이니, 이미 자기 동일성을 내포하면서 이 자기 동일성이 외면적으로 드러나면 곧 질료화 된다[materializieren]. 질료는 본질적으로 자기 동일적인 것이지만, 자기 부정성을 내포하니, 형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가능성이 실현되면 형성화 된다[formalizieren].

“형식은 자기 관계하는 부정적인 것이니 자기 내에 모순이며 자기를 해소하는 것이고 자기를 자기로부터 반발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형식은 질료에 관계하여 이와 같은 자기를 존립하게 하는 것을 토자로 삼아 그것에 관계하는 것으로 정립된다.”(논리학, GW11, 298)

“그러나 질료는 그 자신에서 형식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질료는 지양된 부정성을 내포하면서 이런 규정을 통해서만 질료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298)

② 형식과 질료는 서로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이런 본질의 반성 운동 속에서 내적으로 서로 관계하면서 이미 통일되어 있다.

“형식은 그 자체 절대적 자기 동일성이고 그러므로 질료를 자체 내에 포함하므로 마찬가지로 질료는 순수한 추상 속에서나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형식을 자기 자신 내에 가지므로, 질료에 대한 형식의 활동 그리고 질료가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오히려 서로의 무차별성과 구별성이라는 가상을 지양하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GW11, 298)

③ 형식과 질료는 이처럼 서로 자기에서 타자로 이행하므로, 거꾸로 “그 자신의 비존재[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하는 것”(논리학, GW11, 298)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운동이 이처럼 두 가지 운동으로 갈라지고 다시 통일된다. 이런 측면을 헤겔은 형식과 질료의 ‘근원적 통일’이라는 측면으로 말한다.

“이 두 가지 매개는 사실 하나의 운동이며 양자의 근원적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양자의 소외를 내면화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298)

“하나의 본질적인 통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이며 이 통일은 자기를 양분하여 본질적인 동일성은 자기를 무차별한 토대로 규정하며 본질적인 구별이나 부정성은 규정하는 형식으로 규정한다.”(논리학, GW11, 298-9)

4)

c) 형식과 질료의 서로 무차별하다는 관계는 양자가 근원적으로 통일된 관계와 직접 결합한다. 양자가 결합하면서 ‘정립된 통일’이 발생한다.

① 그러므로 질료와 형식은 각자의 한편으로 자립적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자립성은 내적으로 이미 지양되어 있다. 예를 들어 광합성의 기능은 독립적 형식이면서 꽃나무 전체의 한 형식이다. 거꾸로 꽃나무는 전체를 담는 매체이면서 그중 하나의 기능이 그것의 형식이 된다. 그러므로 질료와 형식은 상호 모순인 것을 넘어서서 각자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된다.

“형식은 자립적인 것인 한에서 곧바로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모순이 된다. 그러나 형식은 또한 그 자체로서 정립되니 왜냐하면, 형식은 동시에 자립적이며 또한 동시에 타자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299)

“질료는 형식이 포함하는 것과 동일한 본래의 모순이다. 이 모순은 자기의 해소와 마찬가지로 다만 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질료는 자기 내에서 모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질료는 무규정적인 자기 동일성인 동시에 절대적 부정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료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하며 질료의 동일성은 자기 부정성 속에서 붕괴되고 이 자기 부정성은 전자[동일성]에서 자기의 존립을 획득한다.”(논리학, GW11, 299-300)

② 각자가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므로, 그것의 지양도 이중적으로 일어난다. 형식은 자신의 자립성을 지양하면, 질료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되며, 이 질료를 전제하고 존립하게 한다. 형식이 질료에 의해 정립되는 측면을 지양하면, 질료를 통해 존립하게 된다.

질료도 마찬가지로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질료가 자신의 자립성을 지양하면 형식을 전제하게 된다. 반대로 질료가 정립된 측면을 지양하게 되면 형식을 통해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형식은 자립성을 지양하며 자신을 정립된 것으로… 만들며 이 자신의 타자가 질료이다.”(논리학, GW11, 299)

-“형식이 정립된 존재를 자기 내로 반성하게 하는 것은 형식이 거기서 존립을 얻게 되는 질료와 합일하는 것을 의미한다.”(논리학, GW11, 299)

③ 이런 정립된 통일은 메비우스적인 띠를 닮았다. 여기서 타자를 부정하는 활동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활동이 된다. 거꾸로 형식과 질료가 자기를 존립하게 하는 활동은 곧 타자를 존립하게 하는 활동이다.

“질료가 형식의 활동을 통해 규정된다고 할 때 이런 형식의 활동은 형식이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데 있다. 그러나 거꾸로 형식은 이를 통해 질료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기도 한다. 그러나 질료가 이렇게 규정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형식 자체가 전개하는 고유한 활동이다.”(논리학, GW11, 299·)

“형식이 자기를 정립된 존재로 만드는 것은 형식이 질료를 규정된 것으로 만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논리학, GW11, 299)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형식의 고유한 동일성은 동시에 자기를 소외하며 질료가 형식의 타자가 된다.”(논리학, GW11, 299)

————–

“질료는 자기 자신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이런 규정작용은 질료에 대해 외면적인 형식의 활동이다. 거꾸로 형식은 다만 자기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 의해 규정된 질료를 자기 자신에서 가지며 그에 그치지 않고 형식은 이런 자기의 규정하는 작용 속에서 타자에 대립하여 관계한다.”(논리학, GW11, 300)

④ 그러므로 각자의 활동은 곧 타자의 활동이다. 각자의 타자에 대한 활동은 사실 하나의 동일한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활동은 곧 하나의 활동이 자기를 양분하는 운동이며 동시에 서로를 지양하여 통일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부정적인 것은 자기를 지양하므로 또한 긍정적인 것도 자기를 지양한다.”(논리학, GW11, 299)

“나아가서 형식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에 못지않게 질료 자체의 고유한 운동이다.(논리학, GW11, 299)”

“하나의 근원적 통일이 자기를 양분하여 본질적인 동일성은 자기를 무차별한 토대로 규정하며 본질적인 구별이나 부정성은 규정하는 형식으로 규정된다.”(논리학, GW11, 298)

“본질과 형식의 통일은 형식과 질료에서 서로 대립적으로 정립되면서 절대적 근거가 된다. 이 통일은 자기를 상이한 것들로 만드는 가운데 상이한 것들이 지닌 밑바닥에 놓여 있는 동일성 때문에 그 관계는 서로 전제하는 것으로 된다.”(논리학, GW11, 299)

“양자 즉 형식의 활동과 질료의 운동은 동일한 것이지만,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활동이며 즉 정립된 것으로서 부정성인 반면 후자는 운동이며 생성이고 본래 존재하는 규정으로서 부정성이다.”(논리학, GW11, 300)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18- 감각적 질로서 형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18- 감각적 질로서 형식

1)

유기체의 형식은 곧 그 기능이다. 유기체에서 기능은 유기체적 현존이 도달하는 결과 즉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 유기체의 기능에 관해서는 그 유기체의 현존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 기능이 다르게 파악된다. 우선 하나의 유기체는 다른 유기체적 전체 속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하고 그것의 기능은 중간 과정을 거쳐서 도달하며 다른 기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유기체의 기능을 이런 복잡한 기능들의 연관 전체 속에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서 유기체를 규정하는 근거인 형식이 달라질 수 있다. 마치 존재론에서 질이 감각적 질에서 일반적 지각적 성질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한성으로 발전하듯이 본질론에서 형식도 감각적 형식, 일반적 지각적 형식 그리고 유한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형식의 이런 발전에 따라서 현존도 다시 단순한 본질, 질료, 그리고 내용으로 발전한다.

2)

이 가운데 우선 감각적 형식을 보자. 유기체의 형식이 감각적 질처럼 우연한 기능으로 파악되었을 때 이 형식과 유기체의 현존 사이에는 본질에서 주어 술어의 관계를 갖는다. 이 관계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술어와 주어 사이에는 본질의 반성 관계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은 그 기능인 형식과 무차별한 관계를 맺는다.

한편으로 보면, 잎의 현존은 ‘꽃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잎은 꽃을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할 때, 이 현존과 기능 사이의 관계는 적어도 판단 형식상에서는 본질의 매개 관계이다. 여기서 이런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잎의 현존 가운데 꽃을 보호하는 기능에 적절한 조직만을 보니, 양자는 서로 일치할 수밖에 없다.

양자는 동일한 것의 반복일 뿐이며 서로 순환적으로 규정된다. 이런 순환 속에서 현존은 다만 자기 동일성의 측면이며 형식은 자기 부정성의 측면을 지칭한다. 그러나 자기 부정성은 이미 자기 동일성을 포함하고, 자기 동일성은 자기 부정성을 매개한 것이니, 양자는 서로 이행할 뿐이다.

“자기 동일적인 부정적인 것[현존]과 자기와 동일적인 긍정적인 것[형식]은 하나의 동일성이다. 왜냐하면, 근거는 긍정적인 것의 동일성이거나 정립된 것의 자기 동일성[현존]이기도 하며 근거지워진 것은 정립된 것으로서 정립된 것이지만, 이런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은 근거의 동일성[형식]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294)

“형식은 그 고유한 동일성에서 본질을 가지며 이는 본질이 그 자신의 부정적 본성에서 절대적 형식을 갖는 것과 같다.”(논리학, GW11, 296)

3)

그러나 잎의 현존과 기능은 이처럼 자기 반복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순환하고 있으니, 여기서 여기서 단적인(또는 직접적인) 전도의 관계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런 전도의 관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한다.

우선 형식과 개체적 현존 사이에서 근거 관계가 전도된다. 한편으로 형식이 근거이고, 다른 한편 토대가 근거가 된다. 어느 편이 근거이고 어느 편이 근거지워진 것이든, 근거일 때 직접적으로 규정되고, 근거지워질 때는 근거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

“현존은 아직 다만 정립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본질적으로 근거를 전제로 한다. ..직접적인 것[현존]은 차라리 정립된 것이고 근거는 정립된 것이 아닌 것이다.”(논리학, GW11, 294)

“따라서 본질이 근거로서 규정되는 것[Bestimmtheit]은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으로 이중화된 규정이다. 이 규정은 처음에는 ① 본질[형식]을 근거로 삼아 정립된 것에 대립하는 본질이라고 규정되면서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 존재한다. 두 번째로는 규정은 근거지워진 것, 직접적인 것인데[현존], 이는 그 자체로 대자적인 것이 아니라 ② 정립된 것으로서 정립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정립된 것으로서 정립된 것은 마찬가지로 자기 동일하지만 부정성이 지닌 자기 동일성이다.”(논리학, GW11, 294)

4)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형식과 현존은 서로 무차별하다. 형식은 주관적인 것이며 현존은 그것을 넘어서 있다. 그런 주관적 형식은 현존에 대해 외면적이며 현존은 그와 다른 무수한 형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잎은 꽃을 보호하지만, 광합성을 하는 것이며, 심지어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기도 하니, 그 중 주관적으로 어느 기능을 형식으로 규정하더라도 곧바로 무너지고 다시 다른 기능으로 규정된다.

그 때문에 이를 통해서는 어떤 것도 규정되지 않고 생물 세계 자체는 이름모를 꽃들처럼 잡다하게 흩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런 잡다성 앞에서 우리는 구토를 느끼거나 현기증을 느낀다.

그런 두 거지 관점에서 본다면, 근거 관계는 ‘순수한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의 결합이다. 순수 반성에서 현존은 정립된 것일 뿐이며(본질과 무구별적 통일) 규정하는 반성에서는 현존은 자립적인 것인데(본질과 구별 속에서의 통일), 근거 관계에서 현존은 두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따라서 이런 근거가 지닌 매개는 순수한 반성과 규정하는 반성의 통일이다. 그런 매개가 지닌 규정이나 정립되어 있음은 존립을 얻고 거꾸로 그런 규정의 존립은 정립된 것이다. 그런 규정이 존립한다는 것 자체가 정립된 것이거나 규정성을 갖기 때문에 따라서 그런 규정은 그 규정성의 단순한 동일성과 구별되며 본질에 대립해서 형식을 이룬다.”(논리학, GW11, 295)

이런 형식과 현존은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이라는 근거 관계에서 끊임없이 상호 위치를 전도하는 유희를 전개한다. 헤겔은 이 유희를 ‘상호작용’이라는 말로 규정한다.

“이것이 형식과 본질의 절대적 상호 관계이어서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의 이 단순한 통일[ 본질]은 그런 상호작용 속에서 그러나 바로 그 자체 규정되거나 부정적인 것이 되니, 토대로서 자신을 형식으로부터 구별하지만[무차별성], 동시에 형식의 근거나 계기로 된다.” (논리학, GW11, 296)

5)

이상에서 보았듯이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의 전도와 더불어서 형식과 토대로서 본질은 각자 직접적인 것 존립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근거지워진 것, 정립된 것이 된다.

그런 이중성 때문에 이들은 한편으로는 각자 동시에 존립하고 무차별하며 바로 그 순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연관된다. 이들을 연관의 측면에서 보면 서로 타자를 정립하고 이를 통해 자기를 존립하게 하고 동시에 그 순간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 이를 통해 타자를 존립하게 한다. 통일되는데, 이 통일성과 무차별성 역시 끊임없이 전도한다.

“그에 반해서 형식 규정은 본질의 표면에 있는 것으로서 규정이다. 본질은 그것들의 밑바닥에 있는 무규정적인 것으로 있으며 이 무규정적인 것은 자신의 규정에 대해 무차별하다는 규정 속에 있다. 반성규정은 그 규정 자체에서 존립을 가져야 하며 자립적이어야 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반성규정이 자립적이라는 것은 반성규정이 해소된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 형식 규정은 타자에서 이런 해소를 갖는다. 그러나 그 해소 자체는 자기와의 동일성이거나 이 반성규정이 얻는 존립의 근거이다. ”(논리학, GW11, 295)

이런 형식과 본질의 관계에서 형식은 한편으로 형식이면서 곧바로 부정되며 토대 역시 한편으로 토대이면서 곧바로 부정된다.

① 형식의 몰락

“형식은 본질을 규정하지 않는다. 마치 형식은 진정으로 전제되어서 본질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형식은 그렇게 하여 비본질적인, 끊임없이 몰락하는 반성규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형식 자체는 오히려 자기를 지양하는 근거이거나 자신의 규정에 속하는 동일한 관계이다.“(논리학, GW11, 296)

“형식은 자기가 정립되는 가운데 지양되고 지양되어 있다는 데서 존립하게 되는 모순에 처해 있다.”(논리학, GW11, 296)

② 토대의 몰락

“규정하는 형식은 정립된 존재를 지양하는 것에 관계하며[토대를 부정] 이를 통해 형식은 하나의 자기 동일성에 대해 그것이 마치 타자인 것처럼 관계한다. 형식은 자신을 지양된 것으로 정립한다. 이를 통해 형식은 그 동일성[토대]을 전제로 한다.“(논리학, GW11, 297)

③ 양자의 상호 몰락

“반성규정이 자립적이라는 것은 반성 규정이 곧 해소된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 형식 규정은 타자에서 이런 해소를 갖는다. 그러나 그 해소 자체는 자기와의 동일성이거나 이 반성 규정이 얻는 존립의 근거이다.”(논리학, GW11, 295)

④ 형식과 토대의 구별과 통일

“본질과 형식의 이런 구별에서 외적 반성이 머물러 있곤 한다. 구별은 필연적이지만, 이 구별 자체는 그들의 통일이다. 마치 이 근본적 통일이 자기를 자기로부터 밀쳐내고[구별] 정립된 것으로 만드는 본질인 것과 같다.”(논리학, GW11, 296)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17-존재론에서 질과 본질론에서 형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17-존재론에서 질과 본질론에서 형식

1)

지금 다루어지는 관계 범주(정언, 가언, 선언 판단형식)에서 발전은 생물의 종적 본질이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생물에서 종적 본질은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며, 개체적 현존이 재생산하는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은 인간이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는 사회이며 이는 개체적 개인을 벗어나 그들 사이의 관계로서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내재하는 종적 본질이 밖으로 드러나서 독립적인 유적 본질로 이행하는 것이 관계 범주에서의 운동이다.

그 가운데 정언 판단형식이 다루어지는 것이 1편 3장 근거 장이다. 여기서 1절이 절대적 근거이고 2절이 유한한 근거이고 3절이 무제약자다. 그 중 헤겔은 1편 3장 1절에서는 근거 개념을 다룬다.

서문에서 근거 개념에 관한 일반적 설명이 제시되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근거는 앞으로 전개되는 반성 규정 가운데 최초의 것이다. 근거는 근거지워진 것을 한편으로는 규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거지워진 것이 근거의 토대가 된다.

근거의 운동은 근거와 토대 사이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서문에 이어서 1절 절대적 근거에서 세 가지 관계를 통해 서술한다. 즉 형식과 본질, 형식과 질료, 형식과 내용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제목 상 형식 즉 근거에 해당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근거지워진 토대와 관련하여 본질, 질료, 내용으로 전개하니, 발전이 주로 여기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관계의 발전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오히려 형식이다. 형식의 의미가 변화하면서 그것에 대립하는 타자인 토대의 의미도 변화한다. 토대는 본질, 질료, 내용으로 차례로 규정된다.

2)

이 세 가지 단계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헤겔이 존재론에서 1편 2장 현존 장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헤겔의 판단형식에 관한 설명을 보면, 존재론 질적 범주의 전개(1편 2장과 3장)는 질적 판단형식에 상응하는데, 본질론의 전개(1편 3장과 2편 전체)는 관계 판단형식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적 판단형식과 관계 판단형식은 술어에서 발전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반면 양적 판단형식과 양상 판단형식은 발전이 주어에서 일어난다.) 질적 판단형식에서 그 출발점은 긍정 판단형식에 대응하는 질의 범주다. 질은 유한성으로 나가고 대자 존재에 이른다. 대자 존재의 끝에서 부정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 본질론에서 관계 판단형식의 출발점은 근거이다. 이 근거는 유한한 근거로 나가고 무제약자로 이행한다. 이 무제약자에서 법칙으로 이행하면서 선언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

이런 상응 관계에 비추어 볼 때 근거를 다루면서 헤겔이 서술한 내용을 질적 판단에서 헤겔이 현존을 다루면서 서술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3)

헤겔에서 처음 등장한 감각적인 질은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감각적 질은 쉼 없이 다른 것[Andersein]으로 바뀌어 나가는 명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감각적 질이 발전하면서 지각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성질이 등장한다. 이런 이행은 경험이 발전하는 것에 따라 일어난다.

그러나 어떤 것은 하나의 일반적 성질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일반적 성질[Bestimmtheit]을 가지니, 이것들은 어떤 것[etwas, Realitaet] 속에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매체 속에 서로 공존한다. 그것들은 서로 분리되지도 서로 통일되지도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헤겔은 그러므로 어떤 것은 그 자기 자신에서[an ihm selbst] 타자로 이행한다고 한다. 이들의 관계를 헤겔은 그 자체 존재[an sich sein] 과 대타 존재[Sein fuer anderes]의 관계로 설명했다.

여기서 경험이 더 발전하면, 어떤 것이 지닌 일반적 성질은 그것이 지닌 다른 일반적 성질과 결합해 있어서 그것은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서로 통일된 것은 이제 하나의 개별자를 형성한다. 여기서 개별자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성질[속성] 즉 규정과 다만 몇몇 개별자에 속하는 상태[우연성]가 구분된다.

나아가서 하나의 개별자에는 두 가지 이상의 일반적 성질 즉 속성이 등장한다. 두 가지 성질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성질이 이미 그 자체에서, 본래[an sich] 타자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의 성질은 어떤 개별자의 고유성[형상]을 의미하는 것[Sollen]인 동시에 개별자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한계[Grenze]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런 개별자는 그런 성질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에서 한계를 지닌 것 곧 유한한 존재[Endliche]로 규정된다.

유한한 존재에서 개별자의 고유성으로 여겨진 하나의 형상은 관점에 따라서 선택된 주관적인 것임이 밝혀진다. 개별자의 진정한 본성은 오히려 이 다양한 속성들 사이의 관계 즉 법칙적 관계로 밝혀지면서 이 법칙적 관계를 매개하는 질적 무한자가 출현한다. 이것이 곧 대자 존재다.

4)

이제 본질론에서 본질에서 근거와 근거지워진 토대 사이에서도 유사한 관계가 펼쳐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존재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와 본질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존재론에서 질은 물체적 개별자를 주어로 하고 그것의 술어인 성질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붉다’와 같은 판단에 성질 ‘붉다’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본질론에서 근거와 토대 역시 주어 술어 관계를 지니는데, 이때 주어가 되는 것이 토대이고 술어가 되는 것이 근거이다. 본질론에서 주어가 되는 것은 유기체적 개체 즉 생물체이다. 여기서 개체란 곧 유기적으로 이루어진 조직체다. 헤겔은 유기체적 개체를 규정하는 술어를 형식[Form]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이 유기체적 개체를 규정하는 술어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존재론에서 술어는 질적 규정이나 양적 규정과 같은 것인데, 생물적 개체는 그와 같은 질적, 양적 규정으로 규정될 수 없다. (물론, 그런 생물적 개체도 하나의 물체적 개별자라는 점에서는 그런 질적, 양적 규정을 파악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물체로서가 아니라 생물적 개체라고 하는 측면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생물적 개체를 규정하는 것 즉 그 형식적 근거는 무엇인가? 생물체의 경우는 결국 그것이 수행하는 결과 또는 기능(또는 목적인)을 통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으니, 이런 기능이 곧 그것의 근거 즉 형식이 된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 꽃은 진달래다’와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주어 ‘이 꽃’은 어떤 종적 개체를 지시한다. 술어는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진달래’란 술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곧 이 개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과 즉 재생산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다만 이 종적 본질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5)

그런데 어떤 유기체 즉 생물적 개체의 형식을 이렇게 최종적으로 재생산되는 종적 본질로 규정하는 것은 논의의 결과를 선취하여 이루어지는 주장이다. 생물적 개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과 즉 그 기능을 이런 재생산으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

복잡한 생물체의 경우 유기체적 구성은 복잡하다. 어떤 꽃을 보면 잎이 있고 뿌리가 있으며 줄기가 있다. 꽃은 더 세부적으로 보면 꽃잎과 수술과 암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각각에는 고유한 기능이 있으니, 예를 들어 잎은 영양 획득의 기능을, 꽃은 재생산의 기능을, 줄기는 영양분을 유통하는 기능을 지닌다. 그러므로 어떤 유기체를 무엇이라고 규정할 때, 그 규정은 다양하게 파악될 수 있다.

어떤 꽃은 전체적으로 볼 수도 있고 구분해서 꽃과 줄기, 잎으로 분리해서 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결국 재생산이 유기체의 기능이라 할 수 있으나 각 부분을 분리해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체로 우리는 먼저 이렇게 유기체의 각 부분을 분리해서 보면서 각자에게 고유한 기능을 부여한다. 꽃과 줄기, 잎에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은 각자 독립된 기능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유기체의 기능을 이처럼 분리해서 보는 경우와 그 유기체를 유기체 전체 속에서 보는 경우 그 기능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잎은 고립해서 보면 광합성을 하는 수단이니, 영양 획득하는 기능이 그것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잎이 그런 기능만 가진 것일까? 잎은 전체적으로 보아 유기체의 일부이며, 그런 만큼 다른 기능도 포함한다. 즉 잎에는 영양 유통의 기능도 심지어는 재생산의 기능도 존재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잎이 영양 획득 기능을 한다는 것은 고립적인 관점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잎이 고립적으로 보아서 광합성을 한다는 규정도 사실 과학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다음에야 나타난 것이다. 처음 잎이 꽃을 관찰했을 때 사람들은 그 기능을 주관적인 판단으로 규정했다. 잎은 처음엔 꽃을 보호하는 기능으로 파악되었고 꽃은 벌을 유혹하는 기능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우연한 것을 그 고유한 기능으로 파악한 것이다.

6)

이처럼 유기체에 대한 파악의 출발점에서 서서 유기체의 주관적인 우연한 기능을 유기체의 형식으로 파악한다면, 이것은 마치 존재론에서 어떤 개별자를 감각적 질로 파악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마치 감각적 질이 명멸하듯이 유기체를 규정하는 어떤 기능 즉 형식도 마찬가지로 명멸한다. 여기서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하나의 형식은 존재했다고 곧 사라지고 다른 형식이 출현하니, 그 형식은 개체적 현존에 대해 명멸하는 관계에 있다.

나아가 형식인 기능을 고립된 기능으로 파악한다면, 이는 마치 존재론에서 독립적인 성질로 파악하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매체와 개별자 사이의 관계가 반복된다.

마지막으로 존재론에서 성질의 관계가 출현하면서 유한자로 이행하듯이 여기서도 기능들 사이의 관계가 출현하면 유한한 근거로 이행하게 된다. 헤겔은 이런 이행을 형식과 본질, 형식과 질료, 형식과 내용이라는 근거와 토대 사이 관계의 발전을 통해 설명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6-본질에서 근거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 운동16-본질에서 근거로

1)

앞에서 본질의 운동을 두 가지 축에 따라 살펴보았다. 하나의 축은 본질과 개체적 현존 사이 반성운동의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 반성은 외적 반성에서 내재적 반성 또는 규정하는 반성으로 나갔다. 이 축을 본질과 관계하는 수직축이라 하자.

또 하나의 축은 개체적 현존들 사이의 축이다. 여기서 개체들은 상이성의 관계로부터 대립 관계를 거쳐 모순의 관계로 발전했다. 이를 수평축이라 하자.

반성운동은 이제 이 수평축의 운동과 수직축의 운동 사이의 관계를 통해 전개된다. 그 출발점은 외적 반성운동에서 주관적 본질과 상이한 현존의 관계이고 그 도착점은 내적 반성운동이며 현존의 모순적인 관계이다. 이 관계는 상호작용 속에서 전진하는데, 수직축에서 한 단계 높아가면 수평축에서도 한 단계 발전한다.

이런 반성운동의 전개 과정은 판단에 비추어 본다면(나중에 헤겔이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에서 판단을 다루면서 설명하는 것에 따르자면), 관계 범주와 양상 범주(헤겔에서는 개념 판단형식이다)의 발전을 매개한다. 즉 본질론 1편 3장이 정언판단을 다루고, 2편 현상 편이 가언판단과 선언판단을 다루고 3편 현실 편이 양상 범주를 다룬다. 본질론에서 범주의 전개 과정과 판단형식 사이의 이런 관계는 존재론에서 질의 운동이 판단의 질적 범주에 상응하고, 양의 운동이 판단의 양적 범주에 상응했던 것과 같다.

2)

반성운동에서 개체적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 곧 본질이다. 본질은 개체적 현존을 부정하고 다시 자기를 개체적 현존으로 정립한다. 본질은 자기를 반발하여 개체적 현존을 정립하고, 다시 이 개체적 현존을 부정하여 자기 내로 복귀한다.

여기서 본질은 이데아와 같이 초월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개체적 현존의 지속적인 재생산 가운데서 존재하는 것 즉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는 운동으로서만 존재한다. 이런 개체적 현존은 본질의 내재하는 운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개체적 현존은 단순히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매개로 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지속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운동 속에서 개체적 현존은 자기를 부정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한다. 반면 본질은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하니, 이 동일한 운동이 지닌 두 대립하는 측면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절대적 부정성의 측면이 곧 개체적 현존이며 이를 통해 자기를 지속하는 동일성의 측면이 본질이다.

개체적 현존과 본질 사이의 이런 관계는 마치 존재론 처음에 존재와 무 사이의 관계와도 같다. 생성은 존재가 무로, 무가 다시 존재로 이행하는 가운데서만 있으니, 양자는 직접 결합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개체적 현존과 본질이라는 두 가지 측면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한다. 개체적 현존의 절대적 부정성의 이면이 곧 본질이며 본질의 자기 동일성의 이면이 절대적 부정성이다. 헤겔은 이처럼 동전의 양면으로 결합한 전체를 본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이 전체를 개체적 현존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처음 무는 존재와 단순한 직접적인 통일 속에 있었듯이 또한 여기서 우선 본질의 단순한 동일성은 절대적 부정성과 직접적인 통일 속에 있다.”(논리학, GW11, 291)

본질 전체가 전개하는 이런 운동이 지닌 대립하는 측면을 분리해서 보게 되면, 하나는 절대적 부정성의 운동이 다른 하나는 지속하는 존재의 운동이다. 전자가 곧 개체적 현존으로서 본질의 측면이며 후자가 곧 근거로서 본질의 측면이다.

3)

그러나 반성이 일어나기 전, 처음에 본질과 개체적 현존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때 본질은 개체적 현존의 성질 가운데 주관이 선택한 것이며 개체적 현존에 대해 외면적인 것이다.

개체적 현존은 우리 눈앞에 직접 현존하는 것이며, 그것은 본질이 스스로 정립한 것이 아니다. 본질 역시 주관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니 직접적인 것이며, 개체적 현존의 자기 부정을 통해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서로 외면적이다. 이 관계는 아직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의 관계가 아닌 서로 무차별한 관계이다.

“그러나 이런 근거로서의 규정성은 본질 자신을 통해 정립된 것이 아니다. 또는 이 본질은 이러한 본질의 규정을 그 자체로 정립하지 않은 한에서 아직 근거가 아니다.” (논리학, GW11, 291)

그러나 개체적 현존과 본질 사이에 반성을 통해 일정한 관계가 출현하면서 양자 사이에 근거 관계가 출현한다. 여기서 개체적 현존을 통해 지속하는 본질은 개체적 현존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반면 본질을 통해 재생산되는 개체적 현존은 이제 그런 본질을 통해 규정된 것, 정립된 것이 되니, 그것을 헤겔은 근거지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질의 반성은 자신을 그 본래적 모습으로 즉 부정적인 것으로서 정립하고 자신을 규정하는 데 있다.”(논리학, GW11, 291)

이 근거 관계란 본질의 반성운동이 전개하는 관계 가운데 최초에 출현한 관계이다. 반성은 외적 반성은 내적 반성으로 이에 따라서 현존은 상이성에서 대립으로 나간다. 외적 반성 가운데 최초의 반성이 근거이며 상이한 것 가운데 최초의 상이한 현존이 곧 근거지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근거 관계는 반성운동이 밑바닥[zugrunde]에 놓여 있는 것일 뿐이다.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나가는 인식의 출현 과정에서 이것은 최초의 것이지만,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나가는 논리적 서술에서는 최종적인 것이다. 인식론적으로는 반성이 최초로 시작하기에 논리적 서술에서는 반성이 최종적으로 등장해서 반성 자신을 넘어서 직접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는 본질의 반성규정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 마지막의 것이며 그런 반성규정이 자기의 규정[즉 반성이라는 규정]을 지양한 것[직접적인 것]을 의미하는 규정일 뿐이다. 반성규정은 밑바닥에 이르면 진정한 의미를 즉 자기[반성]이 자기 내에서 절대적으로 반발된 것[반성이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이제 본질에 속하는 정립된 것은 정립된 것이라는 사실이 지양된 것[직접적인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논리학, GW11, 291)

그러므로 여기서 근거로서 본질은 아직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는 본질이 아니라 외적인 직접적인 본질이다. 이 외적 본질은 자기를 부정하면서 개체적 현존을 규정하는데, 그 결과 본질과 개체적 현존의 관계는 자기 동일성의 관계가 된다.

“본질은 근거로서 규정되는 가운데 규정되지 않은 것[직접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자기가 규정된다는 것을 지양하는 것만이 그 자신의 규정작용이다. 이렇게 본질이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것으로서 규정되는 가운데 본질은 타자[개체적 현존]로부터 나오는 본질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가운데서도[in seiner Negativitaet: 개체화 속에서도] 자기와 동일한 본질이 된다.”(논리학, GW11, 291)

하지만, 이런 처음 등장한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의 동일성은 사실 외면적이고 주관적이고 형식적인 동일성에 지나지 않으며 개체적 현존은 본질의 진정한 토대가 되지 못하고 본질은 개체적 현존을 진정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최초로 존재하는 직접적인 것으로서 규정[개체적 현존]으로부터 나와서 근거로 나가는 한에서(자기 자신을 통해 몰락한 [반성] 규정이라는 성격을 통해) 이 근거는 처음에는 최초의 것을 통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규정작용은 한편으로 본다면 규정작용을 지양하는 것이며 본질의 동일성을 다만 회복하고 순화하고 개시하는 것이다. 그런 본질의 동일성은 곧 잠재적인[an sich] 반성규정이다.”(논리학, GW11, 291)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규정작용으로서 부정하는 운동은 직접적인 것으로 출현했던 앞서의 반성 규정성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런 직접적인 반성규정은 근거에서 나타나는 자기 자신을 배제하는 반성에 의해서만 정립된 것이며 여기서 정립된 것이거나 지양된 것으로서만 정립되는 것이다.”(논리학, GW11, 292)

4)

앞에서 말한 반성 즉 절대적 부정성의 자기 동일성은 순수한 매개였다. 이것은 “무가 무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운동”이며 “자신을 타자 속에 비추는 것”이다.

헤겔은 최초로 일어난 반성 관계인 근거 관계를 앞에서 말한 반성의 순수한 개념에 따른 매개와 달리 직접적인 것이 가지는 매개라는 점에서 ‘실재적인 매개’라 한다.

“근거는 실재하는 매개이다. 왜냐하면, 근거는 반성이 지양되는 한에서 반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근거를 자신의 비존재를 통해서 자기 내로 되돌아와서 자기를 정립하는 본질이다.”(논리학, GW11, 292)

여기서 근거와 근거지워진 것은 직접적인 것들의 외면적 관계이다.

“지양된 반성이 지닌 이런 계기들에 따라서 보면 정립된 것은 직접성의 규정을 획득하며 관계 밖에 즉 자기를 비추는 것 바깥에 있는 자기와 동일한 것의 규정이다.”(논리학, GW11, 292)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이어서)

 

  1. <형이상학> 3(B)권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탐구되는 학문과 관련하여 이 학문의 물음 즉, 철학이 물어야 하는 주제가 어떤 주제들인지를 나열한다. 이 물음들은 철학적 난점들 즉, 아포리아(Aporia)들로 제시되며, 이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어려움과 탐구 주제를 보여준다. 로스(W. D. Ross)의 구분에 따르면 아포리아들은 총 15개가 제시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학문이 네 가지 원인을 모두 다룰 수 있는가? 2) 공리들을 다루는 것은 실체에 대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학문이 그것들을 다루는가? 3) 하나의 학문이 모든 실체를 다룰 수 있는가? 4) 실체에 대한 학문은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도 함께 다루는가? 5) 감각적이 아닌 실체들도 있는가? 그렇다면 그 종류는 얼마나 되는가? 6) 유들이 사물의 첫째 원리들인가, 아니면 사물들에 내재하는 부분들이 첫째 원리들인가? 7) 유들이 원리들이라면, 최상의 유들이 그런가 아니면 불가분적이 그런가? 8)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9) 첫째 원리들은 각각 종이 하나인가 아니면 수가 하나인가? 10) 가멸적인 것들과 불멸적인 것들의 원리들은 같은가? 11) 있는 것과 하나는 실체들인가 아니면 속성들인가? 12) 수학의 대상들은 실체들인가? 13) 감각물들이나 수학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이데아들도 있는가? 14) 첫째 원리들은 가능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있는가? 15) 첫째 원리들은 보편자인가 개별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물음들을 이전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참조하면서 이 물음들이 단순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포리아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포리아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여러 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그럼에도 이 아포리아들은 <형이상학>에서 큰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말해지는 아포리아들이 책이 탐구하는 학문 즉 형이상학의 범위와 문제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1. <형이상학> 4권(Γ) 3장까지

 

4권에서는 드디어 본격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논증이 펼쳐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형이상학을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면서,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의 첫째 원리와 최고의 원인들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때, ‘있는 것’이라는 말은 다의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있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설명한다. 있는 것은 실체와의 관계에 따른 하나의 원리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실체도 있는 것이고, 양태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원리를 지닌 것들은 저마다 그 원리를 따르고, 그것과 관계된 것으로 말해지는 것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학문이 있다. 이러한 실체 자체와 그 관계를 통해 다의적으로 있는 것 모두를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하나의 유에는 하나의 학문이 할당되고, 하나의 학문은 할당받은 유와 그 유에 속한 종들에 관한 분과들을 종으로 지니기 때문에, 철학은 있는 것의 유에 속한 종들만큼의 분과들을 그 종으로 지닌다. 따라서 있는 것의 유와 하나의 유는 서로의 유에 속한 종들이 일치하며, 하나의 유에 속하는 종들을 탐구하는 것 또한 철학과 그에 속한 분과들의 몫이다. 따라서 하나의 유에 종으로 속하는 동일성과 동질성 그리고 그것들에 반대되는 다름과 이질성 또한 철학의 탐구 주제에 속한다. 반대자들은 동일한 원리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음과 다름 그리고 실체를 다루는 학문을 고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철학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첫 번째 뜻에서 있는 것, 즉 실체를 탐구하고, 하나와 여럿,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반대자들, 그리고 있는 것과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탐구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의 첫째 공리 즉, 모순율을 탐구한다. 언뜻 수학에 몫인 듯 보이는 공리에 대한 이 물음은, 이 공리가 특정한 유에만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공리들에 대한 고찰 역시 보편적으로 있는 것과 첫째 실체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공리를 모순율로 제시하며 모순율에 대해서 모든 원리 중에서 가장 확고한 원리에 대해서는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무전제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있지 않을 수는 없고, 반대되는 것들이 동시에 동일한 것에 속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모순율은 여타의 모든 공리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원리이다.

 

(끝)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18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質勝文則野文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자왈:「질승문칙야문승질칙사문질빈빈연후군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본질이 꾸밈을 이기면 너무 거칠고, 꾸밈이 본질을 이기면 너무 사치스럽다. 꾸밈과 본질을 겸하여 아름답게 빛나면, 그 후에 자연히 군자답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색을 이기면 곧 야인이다. 색이 본질을 이기면 사관이다. 색과 본질이 겸비되고 겸비된 후에야 군자인 것이다.

서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무늬를 이기면 촌스럽고 무늬가 바탕을 이기면 사치스럽다. 무늬와 바탕을 모두 겸비하여 빛나면 그러한 후에 군자라고 본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본질이 (먼저) 훌륭하면 곧 문장은 질박해지고(수수해지고), 문장이 (먼저) 뛰어나면 곧 본질이 화사해진다.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가 서로 잘 어울리는, 후자야말로 군자의 모습이다.

 

「옹야」18에서 크게 논할 수 있는 부분은 한 가지가 있었다. 이는 ‘야(野)’와 ‘사(史)’의 해석에 대한 것으로 ‘야’를 야인 혹은 촌놈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관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야’를 거칠다, 촌스럽다, 질박하다 등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치스럽다, 화사해진다 등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용언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논어』 안에서 ‘야’와 ‘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야’의 사용이다. 『논어』 안에서 ‘야’가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선진(先進)」1이다. 「선진」1에서 ‘야’는 전자의 해석인 인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야’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야인(野人)’으로 사용되며 『논어』 안에서 ‘야’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다음으로 ‘야’가 사용된 부분은 「자로(子路)」3이다. 「자로」3에서 ‘야’는 후자의 해석인 용언으로 사용되었다.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야’는 ‘비속(鄙俗)’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야’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어느 한쪽이 더 확실한 해석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사’의 사용이다. ‘사’ 또한 『논어』 안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위령공(衛靈公)」7이다. 「위령공」7에 나온 ‘사’는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정확히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사’는 「위령공」7에서 ‘관명(官名)’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사’가 사용된 부분은 「위령공」26이다. 「위령공」26에서 ‘사’는 「위령공」7과 같이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사’는 관명 혹은 사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전자의 해석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야’의 용법에서는 두 해석 중 무엇이 더 정합적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의 용법에서는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두 해석 가능성을 평가하자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고 뒤에 나오는 군자를 고려해보았을 때 문장의 통일성도 더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야’와 ‘사’를 용언으로 해석한 후자의 해석은 ‘야인’과 ‘사관’이라는 현대인은 『논어』 안에서 사용된 그 특징을 이해하기 까다로운 단어를 용언으로 풀어서 설명하면서 그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옹야」18 ‘야’와 ‘사’에 대한 해석은 한국의 여러 『논어』 번역서에서도 그 해석의 방법이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 「옹야」19

 

아래 인용은 「옹야」19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자왈:「인지생야직망지생야행이면。」)

재국: 선생이 이르길, “사람이 직하게 살면, 불행한 삶이 아니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삶이 곧으니 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요행히 면한 것이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살아있는 자의 삶이란 곧게 하는 것(바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고, 망자의 삶이란 (살아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용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어』 한국어 번역본은 종범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장에서는 수진의 번역을 공유하고자 한다. 수진은 ‘망지생(罔之生)’을 망자의 삶, 즉 죽은 사람의 삶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앞선 ‘인지생(人之生)’과 대응 구조를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공자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살아있는 사람은 바르게 살고, 죽은 사람은 (제사를 받음에 있어서) 은혜를 베풀면서 용서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번역이지만 몇몇 문제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이 번역이 『논어』 안의 다른 구절과 모순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선진」11과 「옹야」22이다. 「선진」11에서는 산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삶을 모를 때 어찌 귀신을 섬기고 죽음에 대하여 알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다음으로 「옹야」22에서는 사람의 ‘의’에 힘쓰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는 귀신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 혹은 공경하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그리고 핵심적으로 실제 살아가는 삶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는 부분은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망자의 의무를 논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의 번역이 의미를 지니는 부분은 「옹야」19의 문법적 구성을 보았을 때 앞과 뒤를 대응 구조로 해석할 수 있는 적어도 문법적으로는 편하게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처음 번역하는 사람이 한 번은 고민해보아야 할, 다른 번역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번역이 더 합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논어』 전반의 구성을 고민해볼 수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되기에 이렇게 그 번역을 공유하며, 그 정합성에 대하여 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