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2-현상에서 관계로의 이행

1)

개별적 현상에 내재하는 동일성이 곧 법칙이다. 이 법칙은 상대적이므로, 여기서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가 구별된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법칙의 세계이며 후자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의 세계이다.

이런 추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을 넘어 가장 완전한 추상적인 일반 법칙이 출현한다. 가장 추상적인 일반 법칙에서 법칙의 두 요소는 완전한 동일성을 이루며, 지금까지 그 요소를 지배했던 개별적 내용은 제거되고 오직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는 형식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 법칙은 주관적으로 추상된 것이니, 현상에 대해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

이런 추상적인 일반적 법칙과 구체적인 개별적 현상이 통일을 이루면서 처음 출현하는 것이 곧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다. 이는 현상의 측면과 법칙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성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현상의 법칙은 자기 내에 법칙의 동일성과 상호 무차별적 개별적 현상이 공존한다. 헤겔은 현상의 법칙 내에 들어있는 현상의 내용을 비본질적 현상이라 한다. 반면,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는 나타나는 현상은 ‘본질적 현상’이다.

법칙 세계의 본질적 현상은 현상 세계의 비본질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고 각자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완전하게 통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법칙을 이루는 양자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이면서 자기 관계이다. 즉 자기를 타자로 삼아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의 타자를 자기 자신에서 포함하는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 되어 이 타자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으로”(논리학, GW11, 348) 규정된다.

이전의 현상적 법칙은 내용이 무차별적이므로 그 내용은 법칙 관계 속에서 다만 형식적 자기 내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에서 정립된 존재는 자기 자신에서 내적으로 반성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헤겔은 이런 경우 동일성은 형식적 동일성이 아니라 실질적 또는 ‘실재하는 동일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 타자는 동일한 것이며 현상하는 것은 그런 가운데 사실상 타자 속으로 반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으로 반성된다. 정립된 존재가 자기로 이처럼 반성하는 것이 바로 법칙이다. 그러나 정립된 존재는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비존재로 반성되거나 그 자신의 동일성은 그 자체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정성이며 자신의 타자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자기 내 반성인 법칙은 현상의 동일적인 토대일 뿐만 아니라 현상은 그 법칙에서 자신의 대립물을 가지며 그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다.”(논리학, GW11, 347)

2)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가장 추상적인 일반성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개별성을 동시에 갖는다.

여기서 근거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이전에 추상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양자는 외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이제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며 개별적 현상이 되고 현상은 자기를 지양하여 법칙이 되니, 양자는 본질과 가상 사이의 매개 관계가 되며 이런 점에서 앞에서 설명한 근거 관계가 회복된다.

본질과 종적 개체 사이의 반성 관계가 여기서 다시 출현한 것이다. 여기서 법칙이 형식으로서 근거가 되고 현상이 토대가 되면서 현상은 자기 부정을 통해 근거로 복귀하고 근거는 자기를 정립하면서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제 법칙은 현상 세계의 총체적 반성이므로 또한 현상 세계의 본질을 결여한 다양성도 포함한다. 가변적이고 변화하는 계기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본질적인 계기로 되면서 그것은 절대적 부정성이거나 일반적으로 말해 형식 자체가 되지만, 그 계기는 그 자체적인 동시에 대자적인 세계 속에서 자립적이지만 반성된 실존이라는 실재성을 갖는다. 거꾸로 이 반성될 자립성은 이제부터 자기 자신에서 형식을 갖고 이를 통해 내용은 단순히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와 합일하는 내용인 것과 같다.”(논리학, GW11, 348)

“나아가서 또한 본질 세계는 현상 세계를 정립하는 근거이다. 왜냐하면, 절대적 형식을 자신의 본질 규정 속에 포함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자기 동일성이 지양되며, 자신을 정립된 것으로 만들어 정립된 직접성으로서 현상 세계로 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49)

3)

그러나 이런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은 아직은 피안에 머무른다. 그것이 지닌 본질적 현상은 구체적인 자립성을 가지지만, 아직은 현실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에서 가진다. 그러므로 현상의 세계를 감각적 세계라고 한다면, 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세계의 초감각적 세계이다.

이 초감각적 세계는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감각을 넘어서서 순수하게 동일한 법칙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법칙이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실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와 같다.

이와 같은 피안의 법칙은 현상에 내재하는 법칙과 마찬가지 내용을 지니지만, 그 내용은 전도되어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추어진 상처럼 현상 세계와 반대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피안의 법칙에 관해서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지성 장에서 자기의식 장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제시한 바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설명된 전도의 내용은 여기 논리학에서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즉 현상에서 남극은 피안에서는 북극이 되고 현상에서 -전기는 피안에서는 +전기가 되며, 현상에서 범죄는 피안에서는 타자에게 베푸는 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세계는 서로 관계하면서 현상 세계에서 긍정적인 것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인 세계에서는 부정적이고 거꾸로 전자에서 부정적인 것은 후자에서 긍정적이다. 현상 세계에서 북극은 그 자체적이며 대자적으로는 남극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양전기는 그 자체로는 음전기이다. 현상 세계에서 악이고 불행 등은 그 자체적이며 동시에 대자적으로는 선이고 행복이다.”(논리학, GW11, 351)

헤겔이 이런 설명을 어디서 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기독교에서 피안에 관한 서술에서 끌어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유사한 설명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그것의 피안이라고 할 화폐에서는 전도된다고 한다. 상품에서 사용가치가 지배적이라면, 화폐는 교환가치가 지배한다. 이런 전도는 상품이 화폐로, 화폐가 다시 자본으로 발전하면서 계속해서 전도된 물신의 세계로 등장하는 데 헤겔의 피안 법칙,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법칙’이라는 개념이 지닌 전도와 유사하다.

또는, 현대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하나의 에너지(감마선)는 서로 대립하는 두 물질로 분열된다. 전자와 양전자가 나오니, 만일 현실에서 전자가 나온다면, 그 이면의 세계에서는 양전자가 나올 것이다.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현상의 법칙과 피안의 법칙 사이의 관계와 서로 닮았다.

 

4)

현상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는 둘 다 현상과 법칙으로 이루어진 총체성이지만, 여기서 법칙의 측면은 서로 동일하고 현상의 측면은 서로 전도되어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으니, 이 모순을 통해 현상의 세계와 피안 세계의 대립은 해소된다.

“이제부터 법칙은 실재화하며, 법칙의 내적 동일성은 동시에 현존하는 동일성으로 되고, 거꾸로 법칙의 내용은 관념성[자기 동일성] 속으로 고양된다. 왜냐하면, 각 측면은 자기에서 다른 측면을 가지고 따라서 진정으로 다른 측면과 동일하며 그 결과 자기와도 동일하기에 이 내용은 자기 자신에서 지양된 내용이며, 자기 내로 반성된 내용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52)

양자의 대립이 해소되면서 법칙의 동일성이 이제 피안이 아니라 현상 속에서 출현하게 된다. 즉 피안의 세계가 현실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제 법칙은 반성된 총체성이고 현상은 직접적인 총체성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법칙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각자 타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대립하니, 여기서 자기를 넘어서서 자신의 타자로 끊임없이 이행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출현하는 것은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반발하여 두 가지 총체성으로 되는 총체성이다. 하나는 반성된 총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총체성이다. 양자는 처음에는 자립적인 것이지만, 다만 총체성으로서만 그런 것이다. 양자는 그런 한 각자 본질적으로 자기에서 타자의 계기를 갖는 것이다. 각자는 직접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동시에 반성된 것으로 규정되므로, 각자의 자립성은 이제부터 다만 타자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이런 양자의 통일 속에서 갖는 것으로서만 정립된다.”(논리학, GW11, 352)

법칙과 현상의 이런 관계가 앞으로 2편 3장 관계 장에서 전개될 전체와 부분, 힘과 외화,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양자의 통일성은 내재하다가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러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진다.

“세계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다양성의 형식 없는 총체이다. 이 세계는 본질적인 세계든, 현상하는 세계든 몰락한다. 왜냐하면, 다양성이 단순하게 상이한 것이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총체성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관계로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52)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1-법칙 세계와 피안

1)

앞에서 실존에서 현상 즉 정립된 것으로 이행하면서 여기서 법칙 관계가 등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현상 세계는 실존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는 세계다. 이 세계에 내재하는 관계가 곧 법칙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법칙의 독일어 표현인 ‘Gesetz’가 ’정립된 것[Gesetztsein]‘에서 나왔다고 본다. 법칙은 곧 정립된 것이므로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가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하나의 정립된 것은 다른 정립된 것과 관계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곧 법칙이다.

여기서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현상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 측면은 직접적이고 무차별적인 것이며 다른 측면은 부정되고 정립된 측면이다. 현상 세계에서 자립적인 것들은 서로 무차별하며 반면 법칙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것의 상호 관계를 통해 자기 동일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법칙은 현상의 반성을 통해 출현한 것이다. 현상의 무차별적 관계는 무실한 관계이고 이 반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의 관계로 된다. 이런 반성은 아직 외적 반성이며 경험적인 추상화이며 일반화에 속한다. 이런 법칙은 아직 독립된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현상에 내재할 뿐이다.

2)

현상과 내재하는 법칙 사이의 관계를 좀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우선 자립적인 현상의 자기 매개를 통해 대립이 해소되며 긍정적인 동일성이 출현한다.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여기서 현상은 법칙을 내용으로 갖는다. 이 내용은 상호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본질적 내용이다. 동시에 현상은 그것 외에 직접적인 내용을 지닌다. 그러므로 법칙은 일반적이지만, 그것이 출현하는 현상 세계는 다양한 개별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낙하 법칙은 지구에서와 달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인 현상의 토대[Grundlage]가 된다. 왜냐하면, 일반적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다만 외면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현상이 지닌 개별적 내용은 그 법칙이 지닌 본질적 내용에 내적인 관련을 지니지 않는다. 이 일반적인 법칙은 개별적 현상에 적용되는 추상적인 공통성일 뿐이다.

“법칙은 토대 자체이며 현상은 동일한 내용을 지니지만, 그에 더해서 그 직접적인 존재가 지닌 비본질적 내용도 포함한다. 현상 자체가 법칙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현상이라는 형식 규정조차도 하나의 내용이며 더욱이 법칙의 내용으로부터 구별되는 내용이다.”(논리학, GW111, 345)

이런 법칙은 현상의 피안에 독립된 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내재하며 “현상에 직접적으로 현현한다.” 그것은 “실존하는 또는 현상하는 세계의 고요한 모사”(논리학, GW111, 345)이다.

3)

그러나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보면, 법칙의 일반성은 사실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상대성 때문에 좀 더 일반적인 법칙과 좀 더 현상적인 법칙의 차별이 발생한다.

이제 현상적 법칙 세계를 헤겔은 간단히 현상 세계라 하고 일반적 법칙 세계를 간단히 법칙 세계라고 한다. 그러면 현상 세계에 이미 일반성으로서 법칙이 내재하며 거꾸로 법칙 세계도 완전한 동일성이 아니라 우연성과 개별성이라는 현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현상 세계 속에도 이미 법칙이 들어있다. 여기서 법칙의 관계는 개별적 요소에 대해 더욱 외면적이며 이 법칙은 제한적으로 적용되며 동일한 법칙을 내용으로 하는 개별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법칙들이 출현한다. 법칙의 개별적 내용이 곧 현상 세계를 현상 세계로 만드는 형식 규정이 된다.

일반적 법칙의 세계는 현상 세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법칙이 출현하지만, 완전히 개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법칙의 세계 자체가 나름대로 개별적인 현상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현상과 법칙은 각기 이중적으로 된다. 현상 내에서 일반법칙이 들어있으며 법칙도 개별적 현상을 지닌다. 그런 점에서 현상과 법칙은 모두 총체적이다.

“양자는 오히려 하나의 총체성을 이룬다. 실존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법칙의 왕국이며 이 법칙의 왕국은 단순한 동일한 것이지만, 이 동일성은 정립된 것 속에서나 실존의 자기 자립성을 스스로 지양하는 가운데서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1, 345)

4)

이런 법칙의 일반화의 과정에서 순수한 추상적인 법칙이 출현하게 된다. 순수한 법칙에 이르면, 법칙을 이루는 두 요소는 더는 자립적 무차별한 내용을 상실하고 법칙 관계를 이루는 한 요소로만 규정된다.

그럴 때 헤겔은 법칙은 긍정적 통일이 아니라 ‘부정적 통일’을 이루며, 즉 두 요소는 더는 구별되지 않고 개별 자립적 요소의 ‘내용’이 관계를 이루는 요소 즉 ‘형식’으로 되었다고 한다.

“[상대적] 법칙은 현상의 긍정적인 본질 규정일 뿐이며 그것의 부정적인 본질 규정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내용 규정이 형식의 계기가 되어서 그 자체로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며 자기 자신에서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될 것이다.”(논리학, GW111, 346-7)

예를 들어 전기에 관한 과학의 발전에서 처음에 전기는 유리 전기와 섬유 전기로 출현했다. 과학이 발전하여 추상화가 일반적으로 되면서 이런 물질 전기는 사라지고 + 전기와 – 전기로 규정되는데, 유리나 섬유는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전기는 그것에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지만, + 전기나 – 전기는 더는 구체적 내용이 없고, 여기서 +. -는 서로 상대적인 규정 즉 형식적 규정만을 지닐 뿐이다.

이런 순수한 추상적 법칙의 세계는 사유를 통해 가정되지만, 과연 이런 법칙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유가 추상한 것은 주관이 개입하여 외면적인 것일 뿐이고, 현상의 객관적 본질이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칙은 현상의 토대가 되기는 하더라도 현상의 근거라고 볼 수는 없게 된다.

“법칙은 현상의 자기와의 단순한 동일성이다. 따라서 현상의 근거가 아니라 그 토대이다. 왜냐하면, 법칙은 현상의 부정적 통일이 아니라 현상의 단순한 동일성으로서 직접적인 통일 즉 추상적 통일이다. 따라서 이 추상적 통일 옆에는 현상의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논리학, GW111, 347)

결과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법칙을 현상 속에 집어넣는 또 제삼자 예를 들자면 플라톤적인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존재가 있어야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0-현상의 개념과 법칙의 개념

1)

본질론 2편 1장이 실존 장이고 이것에 이어서 2장에서 헤겔은 현상을 다룬다. 2편에서는 전체적으로 종적 개체들 사이의 실재하는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관계는 점차 가능성이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다루어지는데, 최종적으로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서 그런 실재하는 관계가 완성된다.

그 가운데 처음 나타난 실존 장에서 실존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실존은 오직 심연 위에 떠돌고 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계는 아직 내면에 즉 가능성[an sich]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실존은 서로 상이한 것일 뿐이다. 판단 형식으로 본다면 이는 정언 판단 형식에 속한다. 여기서 실존은 주어에 해당하고 술어는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는 단순한 이름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진달래다”라는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실존하는 것을 지칭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 장에 이르면 종적 개체는 서로 상이한 것을 넘어서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이르게 되고, 판단 형식으로 보자면 그 관계는 곧 가언 판단의 형식으로 된다. 가언 판단은 법칙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p이면 q이다’라는 형식이다. 여기서 p, q에 해당하는 것이 현상이고, 양자의 관계를 이루는 전체가 법칙이다.

실존 장에서 나왔던 ‘성질’과 ‘질료’ 개념이 존재론에서 ‘질’과 ‘실재성, 규정성’(긍정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현상 장에서 전개되는 ‘현상’ 개념은 존재론에서 전개된 ‘부정성’라는 개념(부정 판단 형식)에 상응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현상을 ‘반성된[즉 부정된] 실존’이라고 한다.

2)

우선 실존이라는 범주에서 어떻게 현상이라는 범주가 출현하는가를 보자. 현상은 실존이 물질로 해체되고 이 물질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나온다.

즉 현상 장에 끝에 여러 가지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다. 이 물질은 규정적[bestimmt]이면서도, 독립적이기에 서로 대립적이다. 이런 대립적인 물질이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으니, 이 물질은 서로 침투한다고 생각된다.

즉 어떤 물질은 다른 물질이 비어 있는 곳[poros]에 들어가 있고 거꾸로 다른 물질은 이 물질이 비어 있는 곳에 들어있다. 이런 물질은 자기가 존립하는 가운데 이미 자기의 비 존립 즉 구멍이 존재한다.

“사물 속에 포함된 구별된 것이 자립적인 물질이다. 이 물질은 모순적인 것이니, 왜냐하면 이 물질은 직접적으로 존립하면서 동시에 다만 낯선 것이 자립성 속에 그러므로 그 자신의 존립이 부정당하는 것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며 다시 말하자면 바로 그러하므로 또한, 다만 자기에게 낯선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또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가운데서만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학, GW11, 342)

이런 상호 침투를 통해 물질과 물질 사이의 관계가 출현한다. 이 관계가 곧 법칙이다. 실존은 자립적인 것인데, 이것이 이런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되면 자신의 자립성을 부정당하게 된다. 여기서 법칙 속의 계기는 한편으로는 전체 속에 존재하므로 타자에 의해 정립된 즉 부정된 계기(-p)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직접 존재하는 것[존립하는 것:ㅔ]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이중성을 지닌 것 즉 존립하는 것이 동시에 부정적일 경우 헤겔은 이를 ‘현상’이라고 한다.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했던 실존에서 이런 관계가 출현한다는 것이 실존이 감추고 있는 근거인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아직 현상에서 본질로의 복귀는 중간에 머무른다. 왜냐하면, 여전히 실존이 가지고 있는 무차별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은 우선 본질이 그 실존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본질은 직접 실존에 현현한다. 실존이 직접적인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된 실존으로서 존재하게 되면서 이 사실이 실존에 나타나는 본질의 계기를 이룬다. 달리 말하자면 실존이 본질적 실존일 때 현상이다.”(논리학, GW11, 341)

3)

헤겔에서 현상은 자립적인 존재[긍정성]과 정립된 존재[부정성]이라는 이중적 계기를 동시에 가진 것이다. 반면 가상은 부정적인 현상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면서[이중 부정성, 정립된 존재로서 정립된 존재]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본질론의 순서로는 가상이 먼저 나온다. 1편 본질의 반성 운동을 설명할 때 헤겔은 개념적으로 가상을 제시했다. 즉 종적 개체를 매개하는 것이 본질인 종인데, 본질은 종적 개체를 정립하고 이 개체의 부정을 통해 다시 본질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종적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종적 개체는 자기 부정적인 것, 정립된 것이 다시 정립되는 것 즉 가상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앞에서 설명한 본질과 가상[Schein]의 관계였다.

1편에서 다루어진 본질과 가상은 본질론 전체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본질론에서 생성하는 운동 과정의 진정한 출발점은 ‘실존’인데, 이 직접적이고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이런 실존이 해체되어 물질의 법칙 관계로 되면서 이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현상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현상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본질이 처음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에서 법칙은 자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한 물질들의 관계이므로, 외적인 관계이다. 여기서 반성은 아직 “낯선 외적인 반성”에 머무른다. 이 관계가 관계하는 요소들에 내재하게 될 때 이 현상은 마침내 자립성과 무차별성을 잃어버리고, 가상으로 되면서 본질이 본래대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헤겔은 이런 본질의 본래적 모습을 즉 가상을 3장인 관계 장에서 다룰 것이다.

“이런 의미[부정성]가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이룬다. 그것은 곧 현상이 실존 자체에서 반성의 부정성 즉 본질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본질의 본성은 본질이 속했으며, 본질과 실존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이 실존을 현상으로 선언했던 낯선 외적 반성은 아니다.”(논리학, GW11, 342)

가상이 발전하여 드러내는 진정한 내적 관계를 통해 개체들을 전체로 묶는 일반적 본질이 출현한다.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종적인 본질과 구분된다. 이 일반적 본질은 개체들의 상호 관계를 통해 종적 본질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일반적 본질을 개체에 내재하는 본질 개념과 구별하여 개체들 전체를 의미하는 ‘사태’[Sache]라고 규정한다. 현상 장의 흐름은 이런 외적 관계가 내적 관계로 발전하면서 내적 본질이 외적인 관계, 즉 사태로 출현하는 과정이다.

4)

헤겔은 일단 위와 같이 실존과 현상을 개념적으로 구분한 다음 다시 현상과 법칙을 구별한다. 현상은 한편으로 실존이며 여기에 속하는 내용은 자립적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다른 한편 현상 속에는 이미 본질이 출현하니, 이때 현상은 본질적 내용을 지닌다.

이 본질적 내용은 실존의 부정성이며, 이는 다른 실존과의 관계 속에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실존의 부정성, 즉 관계 속의 계기가 곧 현상의 본질적 측면인 법칙을 이룬다.

이 현상의 본질적 내용은 이중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이 본질적 내용은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다양한 개별성,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연성에 비교해 보면, 그것은 자기와 동일하게 고요하게 불변적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을 헤겔은 현상 세계라고 규정한다. 반면 현상의 본질적 측면을 법칙의 세계로 규정한다. 처음에 이런 법칙의 세계는 아직 현상 세계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으며, 현상 세계에 내재하고 있다.

이 법칙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본질적 내용은 현상의 비본질적 측면이 지닌 상호 무차별성과 달리 다른 본질적 내용과 맺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계기가 되니, 그것은 이 다른 내용에 대립하는 특정한 것이며 오직 이런 다른 내용과의 관계 즉 법칙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법칙 관계에서 한편으로 하나의 자립적인 것(존립하는 것)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부정되면서) 관계 속에 계기로(즉 정립된 것)으로 된다. 이런 관계는 상호적이므로 여기서 한편으로는 자립적인 것과 자립적인 것이 서로 우연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의 존립은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서로가 타자에 의해 정립되면서, 그 관계는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과 맺는 관계이다. 이제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하나가 존립하는 것이 타자를 존립하게 만든다. 거꾸로 하나가 정립된다는 것은 동시에 타자가 정립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정립된 것이 정립된 것에 관계하는 것이며, 가상이 다만 가상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5)

이 가운데 다만 관계 맺는 측면만 보면, 하나는 타자를 통해 자기와 매개하며 자기는 타자가 존립하는 매개가 될 뿐이다. 이 두 측면이 법칙적 관계에서는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현상하는 하나는 타자로 반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다. 이런 매개를 통해 각자는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실존하는 것은 현상하는 것으로서는 타자로 반성되는 것이며 이 타자를 자기의 근거로 삼지만, 이 타자는 그 자체 다만 [다시] 타자로 반성되는 것일 뿐이다. 현상하는 것으로서 실존하는 것에 본질적인 자립성은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그 계기가 지닌 부정성 때문에 무가 무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실존하는 것의 자립성은 다만 본질이 빛 나는 것[Schein: 가상]이다.”(논리학, GW11, 343)

그러나 현상의 법칙 관계는 이렇게 순수하게 관계 맺는 측면만 가진 것은 아니다. 이 관계는 현상의 무차별한 관계 속에 들어있는 것일 뿐이다. 헤겔이 생각하는 이런 법칙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낙하 법칙과 같은 것일 것이다.

낙하 법칙은 흘러간 시간과 경과한 거리가 관계 맺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과 거리는 서로 무차별한 것이므로 이 낙하 법칙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경험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낙하 법칙은 더 근본적인 본질적 관계 즉 힘의 관계가 지구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본질적 관계는 아직 감추어져 있고 낙하 법칙에 내재할 뿐이다.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20

 

아래 인용은 「옹야」20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자왈:「지지자불여호지자호지자불여락지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앎이 있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 좋아하는 이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며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알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

 

「옹야」20의 번역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부분은 ‘지지자(知之者)’와 ‘호지자(好之者)’, ‘락지자(樂之者)’의 의미이다. 『논어』 안에서 단계적으로 좋음과 나쁨을 설명하는 부분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그 기준을 마음과 형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은 「위정(爲政)」7, 「팔일」3, 4, 「양화(陽貨)」11이다. 네 구절 모두 형식만을 지키고,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하여 실제로 마음이 있는 것이 더 낫다고 공통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실제로 마음이 있으면서, 형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암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응하여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를 해석한다면 ‘지지자’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방법만을 알 뿐 알고 있는 그것을 실제로 행할 마음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다음으로 ‘호지자’란 좋아하는 그것을 행할 마음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락지자’란 즐기는 그것을 행할 마음도 있으며, 그것을 잘 행할 방법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 초상 이미지

이러한 해석은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을 준다. 또한, 『논어』 안에서 다른 구절들과도 크게 모순이 되는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언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논어』 안에서 단계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은 위의 예시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씨(季氏)」9에서 공자는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사람의 단계를 표현하는데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가장 위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다음, 어려움이 있어 배우는 사람이 그다음, 어려움이 있지만 배우지 않는 자가 가장 아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공자의 설명에 따른다면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는 충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논어』 안에서 ‘지(知)’와 ‘호(好)’, ‘락(樂)’이 앞서 설명한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가?”라는 점이다. 적어도 ‘지’는 『논어』 안에서 방법만 아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만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논어』 안에서 ‘지’는 72단락에서 117번 사용된다. 이 중 ‘지자(知者)’와 ‘지지자(知之者)’로 그 사용을 줄이면 ‘지자’는 「이인」2, 「옹야」23, 「자한(子罕)」29, 「헌문(憲問)」28, 「위령공」8, 「양화」24에서 그리고 ‘지지자’는 「술이(述而)」20, 「계씨」9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지지’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지지’의 사용은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인자(仁者)’와 ‘지자’를 대비하여 인자를 높이고 지자를 낮추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이인」2와 「옹야」23이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지자’와 ‘인자’, ‘용자(勇者)’를 병렬로 서술하여 이 셋의 특징을 서술한 것으로 「자한」23과 「헌문」28이 이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지자를 단독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며 지자를 높이고 있다. 「위령공」8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은 제자의 발화 안에서 ‘지자’가 나온 것으로 이때 ‘지자’는 살피는 지혜로 여기는 사람으로 엄연히 말하면 아는 사람으로 ‘지자’가 사용된 것이다. 「양화」24가 이에 해당된다. 첫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지자’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두 구절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현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이다. 이는 주로 ‘태어나면서 아는 자’로 해석되며 「술이」20에서는 공자가 ‘생이지지자’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고, 「계씨」9에서는 ‘생이지지자’가 가장 높고 그 아래로 순서대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즉 배워서 아는 자, ‘곤이학지(困而學之)’ 즉 부족해서 배우는 사람, ‘곤이불학(困而不學)’ 즉 부족하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지지자’의 해석은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을 할 수도 반대로 그 해석의 반례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해석에 근거가 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생이지지자’라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닌 방법만을 아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즉, ‘생이지지자’ 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이후에 노력이 필요하다. 반례가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자면 ‘생이지지자’는 태어나자마자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즉 이미 마음과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지자’ 중에서도 이미 마음을 다 갖춘 상태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호지자’와 ‘락지자’와는 구분되는 ‘지지자’의 특징과 모순되는 것이다.

 

– 글을 마치며

 

이렇게 『논어』 「옹야」13, 18, 19, 20의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보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논어』를 읽으면서 고민해보지 않았을 부분에 대한 것을 보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독자가 해보았던 생각일 수도 있으며, 이 글에서 독자의 견해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수많은 감상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전하고자 했던 『논어』가 단순한 격언 모음집이 아니라는 감상만큼은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이 독자들의 『논어』 읽기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끝)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형이상학7(Ζ)권 후반부 (7~17)

 

7(Ζ)권의 7~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에 대한 분석을 전개함으로써 형상이 생성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성 자체의 원인임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의 3가지 유형, 즉 본성적 생성, 기술적 제작, 그리고 자생적 생성을 구분한다.

 

본성적 생성이란 본성에서 시작해서 생겨나는 것들의 생성이다. 이때 생성의 출처를 질료라고 하고, 생성의 작용인은 형상이라는 뜻에서의 본성이며, 생성의 결과물인 목적인은 일반적으로 실체라고 불리는 것으로 사람, 식물 등의 것들이다. 반면 기술적 제작은 기술, 능력, 사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기술적 제작에서 형상은 제작하는 자의 영혼 속에 있다. 자생적 생성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동시에 생겨나는 것의 부분으로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제작과는 달리, 건축가의 개입 없이 돌로부터 어떤 것이 생성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들의 생성 모두에서 먼저 주어진 것, 즉 질료는 생성의 가능성 자체를 조건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것의 정식에 있어서도 질료는 속해야만 하는가? 생겨나는 것들을 그 질료의 이름에 따라 부를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된’이라 부른다. 생겨나는 것들은 그 질료에 따라 정식화되지 않으며, 생겨나는 것의 정식은 질료 외의 다른 요소로부터 형성될 필요가 있다.

 

생성의 원인인 형상 자체는 생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상 역시 생성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 가정했을 때, 형상인을 형상인의 생성 원인으로, 즉 형상인의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터인데 이런 결론은 무한 퇴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분들에 대한 정식이 전체에 대한 정식에 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명한다. 만약 전체에 대한 정식이 부분들에 대한 정식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가정했을 때, 부분들에 대한 정식은 전체에 대한 정식에 앞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가락이라는 동물의 부분이 동물이라는 전체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손가락은 동물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지만 동물은 손가락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정식이 정의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하나인가? 실체는 ‘이것’, 즉 어떤 것 하나인 바, 정의는 실체를 말하므로 정의 역시 병렬적 나열이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 정의에는 유와 차이(diaphora)가 있다. 이때 유가 그 유에 속하는 종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질료적이며, 정의는 차이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적 차이는 유를 규정한다. 차이가 없는 것들에 이를 때까지 차이의 차이(tēn tēs diaphoras diaphoran)에 따른 분할은 진행되어야 하는바, 차이들의 수만큼 종의 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로 마지막 차이(teleutaia diaphora)는 각 사물의 실체이자 정의이고, 형상이며, 정의는 마지막 차이로 규정되는 정식일 것이다.

 

13~16장은 보편자와 개별자의 정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실체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보편자는 실체일 수가 없는데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실체는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아야 하지만, 보편자는 특정한 개체들에 대하여 있으며 그와 분리될 수 없다. 둘째로, 보편자는 여럿에 대해 술어가 되기 때문에 여러 개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이다. 한편으로 개별자는 정의될 수 있는가? 개별자로서의 복합체는 생성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감각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정의도 없고 논증도 없다. 개별자는 질료적 우연성 때문에 정의될 수 없으므로, 실체의 정의는 복합실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질료 없는 형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형상들이 실체라고 한다면, 이는 합당하다.

 

1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논의들로부터 실체에 대한 규정을 이끌어 내며 7권을 마무리 짓고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 자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으나,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있다. 고로 탐구 대상은 질료를 특정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으로서, 질료들을 ‘어떤 것’으로 있게 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곧 실체인 것이다.

(계속)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9-물질 개념의 자기모순

1)

앞에서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이 일반적 규정 즉 성질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성질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물 자체의 내재적인 것의 표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자[주관]에 반사하여 자기를 표현한 것이다.

즉 그것은 “외면성 속으로 이행해 들어가서 이를 통해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며, “근거가 자신의 반발과 규정 속에서, 그 자신의 외적인 직접성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외적인 직접성인 동시에 본래적인 존재”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성질은 주관적인지 객관적인지 모호하다.

이제 경험의 발전은 이런 성질을 하나의 독립적인 물질로 규정하게 한다. 그 과정은 주어 술어 관계의 전도를 통해 일어난다.

한편으로 사물은 이제 여러 성질을 지니면서 다른 여러 성질을 지닌 사물과 구별된다. (헤겔은 물 자체가 성질을 지니면서 표현을 바꾸어 ‘사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성질은 규정성을 지니고 서로 대립하지만,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므로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질은 이런 여러 사물에 공통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제 성질은 그 자체가 자립적인 존재로 된다.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면서 여러 사물을 자신에 귀속하는 성질을 헤겔은 물질이라 한다.

이제 성질은 사물에 속해 있는 속성이나 술어가 아니라 사물이 성질의 외연에 속하는 것이 된다. 여러 사물은 주어인 일반적 성질의 한 예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성질은 이제부터 사물의 일자를 이루는 무규정적이고 힘이 없는 결합에서 해방된다. 성질은 사물을 존립하게 하는 것인 자립적 물질이다. 성질은 단순하게 자기와 연속하는 것이므로 우선 그 자신에서 상이성이라는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 그와 같은 자립적인 물질이 다양하게 성립하며, 사물은 이런 물질로 이루어진다.”(논리학, GW11, 334)

2)

헤겔은 성질로부터 물질로 이행하는 이 과정에 관한 예로 화학의 발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화학은 색깔이나 냄새, 맛 등의 성질을 물질적 원소로 규정해 색깔은 색소로, 냄새는 후각소로, 맛은 미소로 규정한다. 그 외 이런 물질로 열소나 전자기 물질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온도나 전자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성질을 자립적 물질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자립적인 것으로 된다.

물질은 한편으로 성질처럼 다른 것과 구별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질은 사물처럼 자립적으로 존재하니, 때로 물질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물질은 양극을 이루는 성질과 사물을 결합하며 양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것이다.

“성질이 물질로 이행하는 필연성 또는 성질이 진정으로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것은 곧 이 성질이 본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진정으로 자립적인 사물이라는 사실이다.”(논리학, GW11, 334)

성질이 물질로 되면서 이제 물 자체의 규정도 변화한다. 성질은 서로 대립하지만, 사실 이는 타자를 통해 반사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순을 회피하게 된다.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면서 그 밑바닥에 사물은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으로서 개별자로 다만 그 자체로는 아무 규정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성질이 물질로 되면 물질이 자립적인 것으로 되면서, 하나의 사물을 벗어나 다른 사물 속에 연속되는 것이니, 이제 사물이 여러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물질이 존립하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우연적인 존재이고, 그것의 물질로서의 규정 외 다른 규정들은 그 물질에 외면적이며 그것과는 무관한 개별적인 우연성으로 된다.

이 사물은 그 속에서 일반적 물질이 실현된 하나의 예로서 개별적인 사물로 된다. 예를 들어 열소라는 물질은 이런저런 사물 속에 있는 온도로 실현한다. 이때 온도를 지닌 개별적 사물이 지닌 다른 성질들은 모두 무의미한 우연적인 성질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단일한 물질로 이루어진 사물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자립적이면서 동시에 규정성을 지니는 한, 혼자서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규정성을 지닌 것은 다른 규정성과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물질은 항상 다른 물질에 대립하게 된다. 이런 대립은 부정성을 낳으니 서로 배척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물질의 대립적 관계가 모순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성질은 한편으로 동일적으로 자기에 관계하는 단순한 자립성으로서 규정이니, 그 속에서 부정적 통일, 사물의 일자는 지양된다. 또한, 이런 성질은 다른 한편으로 타자에 대립하는 규정이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내로 반성된, 본래 규정된 일자인 한에서 그러하다.”(논리학, GW11, 335)

3)

물질은 자립적이면서 다른 물질에 대립하는 규정적인 것이다. 물질들은 서로 밀쳐 내면서 자립적이니, 하나의 사물 속에는 여러 물질이 서로 물질들이 있다고 할 때, 그것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공존한다고 설명된다. 이 경우 사물은 하나의 텅 빈 그릇에 불과하게 된다. 사물은 이런 물질들을 외적으로 결합하는 것이어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것은 그 속에 담겨 있는 물질들이 어떤 것이고 어느 만큼 들어있는지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하지만 사물은 지속하는 개별자이므로 이 속에서 물질들은 단순하게 공존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부정적으로 통일되어 하나의 개별자를 이루어야 한다. 어떻게 여러 물질이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런 통일 가능성을 위해 우선[주로 고대철학에서] 제시되는 이론이 곧 구멍 나 있음[poros]이라는 개념이다. 하나의 물질은 자기 속에 구멍을 지니고 있어서 그 속에 다른 물질이 끼어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물질은 다른 물질의 구멍 속에 들어있다. 이와 같은 것을 상호 침투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서로 자립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멍 나 있음의 개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질이 구멍 나 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기의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질은 자신의 절대적 타자 속에 자기의 존립을 가지며 자신의 비존재를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사물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반대를 통해 즉 자신의 부정을 통해 자신과 자기 모순적으로 매개하는 것이 되며 또는 자립적인 물질이 다른 물질의 존립과 비존립을 통해 자기 모순적으로 자기와 매개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37)

이런 자기 모순적인 물질은 자기를 유지할 수 없으니 물질은 이제 자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물질이 자립성을 상실하면서 현상으로 된다.

“실존은 이제 사물 속에서 자신의 완전성에 도달한다. 즉 본래 존재하는 존재 또는 자립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본질 실존이 하나의 존재 속에 있다. 따라서 실존의 진리는 그 비본질성 속에 그 본래적 존재를 가지거나 타자의 존립 그것도 절대적인 타자의 존립 속에 자신의 존립을 가지거나 자신의 무실함을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현상이다.”(논리학, GW11, 337)

4)

헤겔은 주에서 표상이 이런 모순을 피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 방법은 무한소라는 개념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모순은 여기서 존재를 무한소로 나누면서 이 무한소에서 존재와 비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무한소는 존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한소가 있다면, 모순은 회피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표상 작용은 이 안개 같은 대상 즉 구멍이나 작은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런 것들 속에 어떤 물질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물질의 부정을 인식하니, 여기 물질이 있고 그 옆에 그 부정 즉 구멍이 존재하며 그 옆에 다시 물질이 발견될 것이라는 말이다.”(논리학, GW11, 339)

“뿐만 아니라 그런 표상 작용은 이런 사물 속에 첫째 자립적인 물질과 둘째 그 부정 즉 구멍 나 있음을 지니면서 동일한 지점에서 다른 물질을 지니니, 이 구멍 나 있음과 물질의 자립적 존립은 서로 넘어 들어가 있어서 서로 부정하면서 침투를 침투한다.”(논리학, GW11, 339)

이런 주장은 수증기가 일정한 가스 속에 확산하더라도, 그 부피가 변함이 없다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입증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임시방편은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 방식인데, 이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뒤로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은 오히려 모순을 모순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운동을 찾아내려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8-실존의 발전, 성질에서 물질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8-실존의 발전, 성질에서 물질로

1)

근거 관계는 주로 생물체의 분류에서 기준이 되지만, 이 기준은 주로 종적 개체의 기능 즉 형식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나 이런 형식은 분류를 위해 주관적인 것으로 선택된 것이며, 따라서 종적 개체의 실재적인 관계는 아니다.

이제 실존에서 하나의 개체와 다른 개체 사이에는 실재하는 관계가 발생한다. 실존은 그 개념 상 존재론에서 실재성,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타자와의 관계 속에 이미 들어서 있다. 왜냐하면, 마치 실재성이 여러 성질의 배타적 통일체이듯, 실존도 다양한 형식의 배타적인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헤겔에서 내적인 통일체란 곧 외적으로 통일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잠시 실존[Existenz]이란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현존은 ‘Da + Sein’이며 일정한 곳[Da]에 있는 존재[Sein]라는 의미다. 반면 실존 ‘Ex+Sistenz’에서 ‘Sistenz’는 라틴어 ‘Sisto’에서 나온 말로, 이 말은 ‘멈춰 서다’라는 의미니 “무언가의 바깥[Ex]으로 나와서 멈춰 서 있다”는 의미다. 이때 ‘멈춰 서다’라는 점에서 ‘현존’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지만, ‘무언가 밖에’라는 점에서 ‘무언가’와 연관되어 있다.

이 ‘무언가’는 ‘서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 즉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니 헤겔은 이런 의미에서 현존은 존재론에서 다루고, 반면 실존은 본질이 운동을 통해 성립한 것으로 규정한다. 실존에 관한 헤겔의 정의는 실존에 관한 하이데거의 정의와 대비된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현존’과 같은 의미로 보고, 이때 존재를 ‘있는 것’과 구별되는 ‘인 것’으로 해석하는데, 하이데거의 존재는 헤겔에서 본질과 가까운 의미다. 헤겔에서 실존이란 의미는 하이데거와 일치하지만, 현존은 하이데거와 다르게 해석된다.

여기서 하나의 실존은 이런 실재하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타자를 통해서 규정한다. 이 규정은 타자에 부딪혀서 외적인 반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이므로(헤겔은 ‘반사된 가상’이라고 말한다.) 실존 자체에 외면적으로 머무른다.

실존 자체가 어떤 타자에 부딪히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외면적 규정이 출현한다. 이 규정성은 다양하고 서로 무차별적으로 존재하는 규정이다. 실존 자체는 자기 관계 속에서 이런 외면적 규정 너머에 있는 것이니, 물 자체와 같이 무규정적인 것이다.

여기서 실존에서 최초의 관계가 등장한다. 즉 무규정적인 물 자체와 그것에 대해 외면적인 규정 사이의 관계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물 자체’와 ‘실존’의 관계로 규정한다. (이 관계 속에서 거론된 실존은 타자를 통해 반성된 외면적 규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헤겔은 이 관계를 실존의 두 측면으로 보아서, ‘본질적 실존’ 또는 ‘비본질적 실존’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2)

물 자체와 외적 규정, 양자는 우선 무차별적이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타자에 부딪혀서 반성된 것이므로 자기에게 본래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 외면적일 뿐이며 물 자체와 외적 규정 각자는 그런 관계에서 서로 반발하여 서로 부정적이다. 물 자체는 외면적 규정이 아니며 외면적 규정은 물 자체가 아닌, 이미 타자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런 반발과 부정을 통해 서로는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각자 고립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는 이미 타자를 전제로 하여 규정된다. 물 자체는 외면적 규정을 넘어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외면적 규정을 전제로 하며 거꾸로 외면적 규정은 자기 관계하는 물 자체가 타자 관계에 들어간 것이니, 자기 관계하는 물 자체를 전제로 한다.

이런 상호 전제하는 가운데 반사된 규정성은 “중단 없이 자신을 자기 자신 속에서 반발하여” 자기를 부정하면서 물 자체가 되며, 거꾸로 물 자체는 “자기 관계하며” “그런 한 자기 내 반성의 부정성을 포함하는 한에서 자기동일성”이니, 외적 실존은 그 자신 속에 있는 한 계기다.”(논리학, GW11, 328)

3)

물 자체의 외면적 규정은 한편으로는 타자에 의해 규정된 것이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외면적 규정성은 물 자체의 자기 관계를 포함한다. 외면적 규정은 타자 관계 속에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처음에 물 자체는 자기에 대해 낯선 물 자체라는 타자에 부딪혀서 외적 규정을 낳았다. 그러나 이제 이 외적 규정이 다만 하나의 물 자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 자체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 결과 다양한 물체에 공통된 규정이 추상되니, 이를 통해 성질이 출현한다. 성질은 곧 지각적으로 일반화된 규정을 말한다. 이런 지각적 일반성은 일반적인 것이므로 외적 반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물 자체 자체에 속하는 규정이다. 그러므로 이는 사물의 속성이 된다.*

주*) 이런 일반적 지각의 추상화를 헤겔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① 하나의 물 자체가 다른 물 자체에 부딪혀 외적 반성이 출현했다. ② 여기서 다른 물 자체는 자기와 동일한 물 자체이다. 왜냐하면, 물 자체란 무규정적인 것이니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③ 그러므로 여기서 반성된 규정은 타자를 통해 반성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타자로 삼아서 반성된 것이니 곧 자기반성을 통해 나온 것이 된다. ④ 이런 자기반성을 통한 규정이 성질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다른 물 자체[타자]에 대한, 그에게는 외적인 관계 속에 그리고 다른 물 자체가 자기에 대해 외적으로 관계하는 것 속에 이런 자기 규정성을 가지지 않는다. 규정성은 물 자체에 피상적으로 속할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가 자신의 타자로서 자신과 매개하는 것이다. 관계의 양극을 이룬다고 가정된 두 가지 물 자체는 사실상 하나로 합일한다.” (논리학, GW11, 329)

“물 자체는 다른 물 자체로서 다른 극단에 관계하므로 자기와 구별되지 않는 것에 관계한다. 두 극단 사이에 매개하는 관계를 이룬다고 가정되었던 외적 반성은 물 자체의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 되거나 본질적으로 자기 내 반성이다. 따라서 이 외적 반성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규정이거나 물 자체의 규정이 된다.”(논리학, GW11, 329)

4)

지각적 성질은 “반성의 부정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여기서 반성은 추상을 의미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제 규정성으로서 실존은 “일반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무규정적 물 자체는 “자기 동일한 것” 즉 여러 가지 성질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 하나인 존재자 즉 개별자가 될 것이다. (논리학, GW11, 330)

그런데 이 성질은 물 자체에 고유한 것으로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된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질은 여전히 ①타자(주관)를 통해 반사된 것이다. 다만 여러 물 자체에 공통된 일반적인 것이기에 성질이다.

이런 타자(주관)에 의해 반사된 것이므로 타자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물 자체의 성질은 변화하게 되며, 다시 말하자면 이런 성질은 규정된 것이어서 다른 규정성을 지닌 성질과 대립한다. 그 때문에 다양한 심지어 서로 대립하는 성질이 하나의 물 자체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성질들은 타자를 통해 규정된 것이므로 서로는 무차별하다. 하나의 사물 속에 대립적인 성질은 무차별하게 속해 있다.

하지만, 이 성질이 일반적인 것은 물 자체에 ② 내재하는 것과 관계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런 물 자체에 일반적으로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성질은 이제 물 자체의 속성이 된다. 즉 성질은 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타자(주관)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무규정적 물 자체라는 표현 대신 자기규정을 지닌 어떤 것으로서 사물이라는 표면이 등장한다.

“하나의 사물은 성질을 갖는다. 첫째로 이 성질은 ① 타자에 대해 규정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성질은 상호 관계의 방식으로서만 현존한다. 따라서 성질은 외적인 반성이며 사물의 정립된 존재라는 측면에 해당한다. 그러나 두 번째로 사물은 이렇게 정립되는 가운데서 그 자체적이다. ② 사물은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를 유지한다. 물론, 이런 정립된 존재는 다만 피상적인 것일 뿐이어서, 이를 통해 실존은 ① 존재의 생성에 즉 변화에 맡겨져 있다. 성질은 그런 가운데 ② 자기를 잃지 않는다. 사물은 이런저런 것을 타자 속에 성취하며 독득한 방식으로 자기를 이 관계 속에 표현한다는 성질을 갖는다.”(논리학, GW11, 330)

5)

물 자체는 이런 성질을 통해 타자에 대해 단순히 형식적인 근거 관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식을 통한 근거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다. 이때 근거는 타자 속에서 자기를 정립한다. 여기서 사물의 성질을 통한 관계는 ③ 실재적인 근거 관계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실재적 근거는 “외면적인 것으로 이행하여 들어가는 것”이니, 즉 자기를 그대로 타자 속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성질은 독자적인 것으로 되면서 “진정으로 자기 내로 반성된 근거”이다. (논리학, GW11, 331)

“실존의 규정성은 근거가 자기에 외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전체는 근거가 자기로부터 반발하고 규정하는 가운데 자기를 외면적인 직접성으로 만들면서 그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는 본질적으로 실존한다. 즉 물 자체가 실존한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자면 실존이 외면적 직접성인 동시에 그 자체 존재라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31)

실재적 근거에서 성질이 이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성질이 다른 것의 성질로 옮겨간다는 말로 생각된다. 형식적 근거가 주관적 분류의 기준이라면,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제 물 자체의 성질이 다른 물 자체에 대해 미치는 일반적 영향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규정한다.

그러나 아직 물 자체의 성질로서, 이 성질은 아직 그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지닌 것일 뿐이며, 아직 실제로 그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원인은 아니다.

“사물은 그것이 지닌 성질을 통해 원인이며 원인이란 결과로서 자신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물은 다만 처음에는 여러 성질을 지닌 고요하게 머무르는 사물일 뿐이며 아직 실제의 원인으로서 규정되지 않는다. 사물은 다만 처음에는 본래[an sich: 가능적으로] 존재하는 반성이며 아직 그 자체로 자기의 규정을 정립하는 반성은 아니다.”(논리학, GW11, 330)

여기서 성질이 이제 “외면적 직접성인 동시에 그 자체 존재”로 되면 그것이 곧 물질을 말한다. 하나의 여러 사물에 공통으로 속하는 것이니, 개별 사물의 속성이기를 넘어서서 ④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된다. 이것이 곧 소재[Stoff]로서 물질[Materie]이다.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27-실존의 이중성과 신의 현존 증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27-실존의 이중성과 신의 현존 증명

1)

실존은 본질인 형식과 관계하여 두 가지 운동을 전개한다. 한편으로 실존은 본래 근거가 되는 형식이 자기를 구체화해서 내용 그리고 현존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제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존은 전제된 직접적인 것이며 여기서 자신을 내용으로 나가서 본질인 형식으로 즉 자기의 근거로 되돌아간다. 이 운동은 생성하는 운동이며 여기서 실존은 무제약적인 것이다.

실존의 제약성과 무제약성, 매개성과 직접성이라는 이중성 때문에 신 존재 증명에 관해 이중적인 증명이 출현한다. (존재론에서 현존과 본질론에서 실존은 헤겔의 논리학에서는 구별되지만, 일반적인 형이상학에서는 그 차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한편으로 존재론적 증명인데 이는 신의 현존이 제약된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온다. 다른 현존은 무제약적인 것 즉 우연적인 것인데, 여기서 우주론적 증명이 나온다.

헤겔은 우선 신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의 한계를 지적한다. 알다시피, 안셀무스에 이어서 데카르트가 근대에 신의 현존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했다. 안셀무스는 신의 위대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했지만, 데카르트는 신의 완전성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했다.

즉 신은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모든 실재성이 들어 있어야 하므로 현존 역시 하나의 실재성이니, 신 속에 그 개념상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실재성이 신이 창조한 신에 의해 제약된 것이듯이 실존 역시 신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칸트는 신의 현존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을 비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현존과 실재성의 개념을 구별했다. 실재성은 어떤 존재자의 술어에 해당하는 것인데, 현존은 존재자의 술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 유명한 백 탈러 예를 든다. 백 탈러가 현존하든 하지 않든, 백 탈러라는 실재적 내용은 아무 변함이 없다고 했다.

헤겔은 칸트가 신적 존재를 일반적인 사물과 혼동했다고 한다. 일반적 사물에서 그 현존은 실재성과 구별된다. 사물에 있어서 실재성은 규정성이므로 타자와 관계 속에 있는 것, 타자를 통해 매개되는 것이지만, 그것의 현존 즉 실존은 직접적인 것, 즉 매개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는 그 자신이 무제약적 존재이고 직접적인 것이니, 그런 점에서 실존한다고 할 수 있다. 신적 존재 속에는 없는 것은 오히려 타자를 통해 매개된 것인 실재적인 규정성이다. 신은 질적이거나 양적인 규정성을 갖지 않는다. 신은 실존하지만, 무엇이라 규정되지는 않는다.

2)

다른 한편 신의 현존 즉 실존을 무제약적인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부터 우주론적인 신 존재 증명이 나온다. 우주론적 증명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우연성을 통한 증명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증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세계는 우연적인 존재이다. 만약 세계에 오직 우연적인 것만 존재한다면,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연한 존재로 이루어진 세계가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이 증명에는 우연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그 근거가 필요하다는 충분 이유율이 전제된다. 이런 우연성을 통한 우주론적 증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우연한 것은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인데, 그것에 근거를 인정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러셀이 그렇게 비판했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비판에서 우연적인 것이 근거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우연한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존재하게 된 것이니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게 된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연한 무제약적 실존은 또한 제약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3)

실존의 이중성, 직접적인 것이며 동시에 정립된 것 즉 무제약적인 것이면서 제약된 것이라는 사실을 통해 이상과 같이 헤겔은 신 존재 증명이 성립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는 모순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신 존재 증명이 모순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직접적인 실존이 동시에 제약된 것이라는 이중성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역설적인데, 이런 역설은 대표적으로 자유의지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무엇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은 한편으로는 결정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적인 것 즉 자유롭게(즉 자의적, 우연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다가오는 선택 앞에 서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나 선택된 결과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나의 선택을 결정하게 만든 어떤 근거가 존재한다. 내가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자유롭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선택을 보면, 항상 결정된 것 즉 제약된 것이다.

헤겔은 이점과 관련해 실존에서 매개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실존에서 그 실존을 생성시킨 매개 즉 본질의 정립하는 운동은 실존이 출현하는 동시에 사라진다. 실존은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실존을 사유하게 되면 그런 매개하는 것 즉 본질이 다시 출현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증명하는 반성은 이 매개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 그런 반성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단순히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신 자체로부터 매개를 떼어놓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반성은 그 때문에 매개하는 운동을 즉 본질 자체 속에 매개가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논리학, GW11, 325)

“근거를 통한 매개는 자기를 지양하지만, 근거를 밑에 두고 이 근거로부터 나온 것이 정립된 것으로 되게 하고 그 본질을 다른 곳에 즉 근거에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근거는 심연으로서 매가가 사라진 것이다. 거꾸로 동시에 근거는 다만 매개로서 사라지는 것이니 이런 부정을 통해서만 근거는 자기 동일적인 것 직접적인 것[실존]으로 된다.”(논리학, GW11, 326)

그러므로 헤겔은 근거라는 말은 몰락[Untergang] 또는 심연[Zugrunde]과 근거[Grund]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고 한다. (논리학, GW11, 326 참조)

4)

이 점과 연관하여 실존이 먼저냐 본질이 먼저냐 하는 실존주의 논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한편으로 결정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의적이듯 실존 역시 한편으로는 제약된 존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존재다.

전자의 측면에서는 실존을 제약하는 본질이 전제된다. 후자의 측면에서는 실존이 전제되고 이로부터 본질이 생성된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논쟁은 실존의 이중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실존의한 측면만 가지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 것이 된다.

실존과 신의 대립도 실존의 이중성을 망각한 것이다. 실존이 무제약적이라는 점에서 실존은 근거 없는 심연 위에 떠 있는 존재다. 그러나 실존이 제약적이라는 측면에서 실존은 궁극적 근거로서 신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심연이 곧 신이다. 여기서 신을 심연으로 규정한 뵈메의 신 개념이 다시금 상기된다.

실존은 이중적인데, 모든 개별자가 이렇게 이중적인 것은 아니다. 헤겔이 존재론에서 다룬 물체적 개별자는 이런 이중성을 지니지 않는다. 본질과 개체 사이에서 반성 관계가 존재하는 생물체에서 비로소 이런 이중성이 나타난다. 생명체 개체는 본질을 매개한다. 본질은 개체의 재생산을 통해 지속하지만, 그 스스로는 개체에 내재하며, 외적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개체는 본질을 통해 매개된 것이지만, 근거 없이 존재하는 직접적인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본질과 실존의 관계에서 본질이 주어이고, 실존이 본질의 술어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주어가 되는 것이 오히려 실존이다. 술어가 되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므로 본질이 실존으로 나가는 운동은 술어에서 주어로 반성하는 운동이다. 즉 본질인 술어의 자기 부정성을 매개로 해서 실존은 자신을 지속하는 것 즉 자기 동일적인 것이다.

“실존은 근거의 자기 내 반성이다. 즉 근거가 자신을 부정하는 가운데 성립하게 된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이런 매개는 자기와 동일하게 자신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26)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6-본질론 2편 실존 장의 위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6-본질론 2편 실존 장의 위치

1)

지금까지 본질론 1편 3장 근거 장에서 헤겔은 종적 개체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관계는 단순한 유기체에서 복합적인 유기체 즉 생물체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복합적 생물체에서 각 부분인 마디는 고유한 유기체적 조직을 이루면서 자신의 고유한 형식 즉 그 기능을 재생산한다. 그러면서 각 부분은 전체적으로 통일된 개체적 조직을 형성하며 그것에 따라서 형식적 기능도 통일된다.

예를 들어 꽃나무는 그 부분인 꽃과 줄기, 잎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적 통일체이며 여기서 꽃의 형식인 재생산 기능, 줄기의 형식은 유통의 기능, 잎의 형식은 광합성의 기능도 통일을 이룬다.

그 구성 요소는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데 형식에서 출발하여 내용으로 그리고 현존으로 이행했다. 형식은 개별적 기능이며, 내용은 그런 형식의 통일이 일어나는 토대인 유기체 전체이며, 현존은 이 유기체적 개별 현존이 지닌 개별성, 즉 질적, 양적인 규정이다. 헤겔은 이런 형식과 내용, 현존 사이의 관계를 근거(A절)와 토대(B절), 조건(C절)의 관계로 다루었다.

2)

논리학에서 존재론이든, 본질론이든, 개념론에서 1편은 대체로 운동의 전체적 모습을 그리며, 본격적인 내용은 2편, 3편에서 다루어진다. 그것은 본질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1편의 끝에서 실존이 등장하면서 본질론의 2편이 시작된다. 이 2편은 판단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관계 범주가 다루어진다. 관계 범주(정언, 가언, 선언 판단형식)에서 발전은 생물의 종적 본질이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생물에서 종적 본질은 개체적 현존에 내재하며, 개체적 현존이 재생산하는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 즉 사회적 유적 본질은 인간이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는 사회이며 이는 개체적 개인을 벗어나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하는 관계로서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내재하는 종적 본질이 밖으로 드러나서 독립적인 유적 본질로 이행하는 것이 관계 범주에서의 운동이다.

이 세 가지 단계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헤겔이 존재론에서 1편 2장 현존 장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본질론 2편 현상 편에서 전개되는 범주들은 존재론 1편 2장 현존 장과 3장 대자 존재 장에서 나오는 범주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헤겔은 개념론에서 판단형식을 다루면서 질적 판단 범주와 관계 판단 범주, 그리고 양적 판단 범주와 양상(개념) 판단 범주 사이의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질적 판단형식과 관계 판단형식은 주어를 전제하면서 술어에서 발전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반면 양적 판단형식과 양상 판단형식은 발전이 주어에서 일어난다.)

3)

존재론 1편 2, 3장과 본질론에서 현상 편에서 유사한 관계가 펼쳐지지만, 물론 차이가 있다. 존재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와 본질론에서 주어 술어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존재론에서 질은 물체적 개별자를 주어로 하고 그것의 술어인 성질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붉다’와 같은 판단에 성질 ‘붉다’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본질론에서 근거와 토대 역시 주어 술어 관계를 지니는데, 본질론에서 주어가 되는 것은 유기체적 개체 즉 생물체이다. 헤겔은 이를 ‘실존’이라 이름 붙였다.

존재론에서 술어는 질적 규정이나 양적 규정과 같은 것인데, 생물적 개체는 그와 같은 질적, 양적 규정으로 규정될 수 없다. (물론, 그런 생물적 개체도 하나의 물체적 개별자라는 점에서는 그런 질적, 양적 규정을 파악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물체로서가 아니라 생물적 개체의 현존에 속하는 것이다.)

생물적 개체에서 그것의 술어라고 한다면, 그것이 지닌 고유한 기능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기능은 개체의 본질적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 꽃은 진달래다’와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주어 ‘이 꽃’은 어떤 종적 개체를 지시한다. 술어는 ‘진달래’는 단순히 어떤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진달래’란 술어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곧 이 개체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결과 즉 재생산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다만 이 종적 본질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4)

본질론 1편 3장에서 다루어진 근거 관계는 형식적 관계다. 반면 2편에서 다루어지는 실존에서 종적 개체들 사이의 관계는 실재적인 관계이다. 그러므로 이 2편에서 생물체는 하나의 생물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하는 물체로서 다루어진다. 그렇기에 헤겔은 이 부분을 실존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즉 이 관계는 실존의 관계다. 이 실존하는 실재의 관계는 아직 완전한 객관적 관계는 아니며, 마치 성질처럼 주관적이면서도 일반성을 지닌 지각적 단계의 관계다. 2편 마지막 부분에서 내외의 관계가 나오면서 비로소 다시 종적 개체로서 생물체의 본래적 관계가 다루어진다.

이런 전개 과정은 마치 정신현상학에서 전개 과정과 유사하다. 정신현상학에서도 어떤 의식의 형태에서 새로운 의식의 형태로 시간적인 발전이 일어나면, 이 새로운 의식의 형태에서는 그 이전의 형태가 다시 하나의 논리적 계기가 되어 새로이 서술되면서 마침내 그 마지막에 이르로 새로운 의식 형태에 고유한 계기가 서술된다.

논리학의 실존 장에서도 근거 장 마지막에 생물적 개체가 출현했다. 그런데 실존 장에 이르러 다시 그 이전 존재론에서 물체의 계기로 제시된 범주들이 다시 출현하는데 이런 전개 방식도 정신현상학과 마찬가지다.

본질론에서 1편 3장에 이어지는 2편 현상 편의 출발점이 곧 1장에서 다루어지는 ‘실존’이다. 실존 장에서는 종적 개체를 한의 현존으로 보면서 전개해 나가니, 이 현존이 발전해서 마침내 본질의 개체적 현존으로 규정되면서, 종적 개체가 다시 되돌아온다. 종적 개체가 다시 출현하는 곳은 본질론 2편의 마지막 부분인 3장 본질적 관계 장이다.

이 상응 관계를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은 표로 그려보았다

긍정판단

<현존, 질>

정언판단

<실존>

그 자체 존재와 타자 존재

물 자체와 실존

<실재성, 어떤 것>

물 자체와 성질

규정과 상태

물 자체와 질료

부정판단

<유한성>

가언판단

<현상>

제한성과 무한성

현상의 세계와 법칙의 세계

무한판단

<대자 존재>

선언판단

<관계>

견인과 반발

촉발하는 힘과 촉발되는 힘

5)

이제 실존 장에서는 하나의 종적 개체가 다른 종적 개체와 사이에 전개하는 실재적인 법칙 관계가 제시된다. 이 실재적인 법칙 관계의 출발점이 곧 실존이다. 이 실존은 존재론에서 ‘실재성’ 또는 ‘어떤 것’ 개념에 상응한다.

존재론에서 실재성은 다양한 성질의 통일체다. 여기서 이미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개별자[‘어떤 것’] 사이의 관계가 문제 된다. 마찬가지로 본질론에서 실존은 다양한 형식의 통일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각기 다른 형식을 지닌 종적 개체[‘실존’]들 사이의 관계가 대두된다.

여기서 헤겔의 사유에서 구성 요소의 내적인 관계와 사물 사이의 외적인 관계가 상호 동전의 이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헤겔은 관계를 통해서 사유하기에 이 관계를 통해 생겨나는 결과를 출발점에서 선취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곧 이 출발점에 있는 이중성이 외면화하는 것으로 된다.

이제 실존이 출현하는 과정을 다시 되새겨 보자. 형식에서 현존으로 이행하는 운동은 본질인 형식이 자기를 구체적으로 정립하는 운동이다. 반면 현존에서 형식으로 가는 운동은 전제된 현존에서 점차 본질이 생성하는 운동이다.

이 전체의 운동을 매개하는 중심은 곧 내용이다. 이 내용은 종적 개체의 유기체적 조직을 말한다. 이 조직을 토대로 유기체적 기능이 출현하니, 그것이 곧 형식이고, 이 조직은 개별 요소를 통해서 자기를 재생산한다. 이 개별 요소가 곧 현존이다.

한편에서 현존을 매개하는 운동이 사라지고 그것이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되면 그것이 바로 실존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아무런 근거 없이 출현하는 무제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존은 이미 자기 속에 자기를 매개하는 운동을 지니니, 이런 점에서 실존은 제약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8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4)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제9권 576b) – (2)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자보다 행복한 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제2권부터 논의가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 단위로 확대된 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서 철학자 왕정이 말을 통해 제시되었고, 이제 제8권부터는 앞서 살폈듯이 그 연장선상에서 그 비교 대상으로서 타락한 현실 정치체제가 그 또한 말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전자가 말로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상승의 국면이었다면 후자는 그 나라가 말로 해체되는 하강의 국면이다. 그런데 이상국가가 해체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지성과 철학, 교육과 설득을 통한 수정과 극복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 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비교를 위한 논의의 방편 상 실제와 다르게 무사이 여신들의 입을 빌려 철학자 왕정에서 그 지성과 철학, 영혼의 이성 부분이 마비된 경우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했을 경우 철인왕정으로부터 어떻게 명예정, 과두정정, 민주정으로, 그리고 각각 그것에 상응하는 개인으로 순차적으로 타락의 정도를 더해가며 해체 타락해갈 수밖에 없는지를 다각적으로 살핀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비교 대상으로서 최악의 정치제제로서 최종 도착지 참주정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도 앞서 수차례 밝혔듯이 제8권 이후 이상국가의 타락과 해체과정은 비록 정치제제 변동과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성찰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 순서 그대로 정치체제가 변화해갈 것이라는 정치체제와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역사적 견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전 과정의 근간이자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성과 철학, 그것에 바탕한 교육과 설득이 덕과 제도로써 작동하고 있는 상태와 그 모두가 결여 또는 마비되어 있는 상태를 비교할 경우, 최악의 정체로서 참주정의 나라와 참주정적인 개인이 정의와 행복과 관련하여 얼마나 정반대의 귀결을 갖게 되는지를 이치의 측면에서든 심리적 측면에서든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566d-569c 제8권 끝]

* 이제 소크라테스는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관련한 참주정의 실상을 살피기 전에 참주의 모습과 특징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참주τύραννός는 처음 얼마 동안에는 자신은 참주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적으로도ἰδίᾳ 공적으로도 δημοσίᾳ 많은 것들을 약속하고 채무χρέος를 탕감해주고 토지γῆ를 나누어 주며 모두에게 상냥하고 부드러운 척한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전쟁πόλεμος을 일으킨다. 부과된 전쟁경비 때문에 궁핍해져서 그날그날 먹고사는 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그만큼 참주에 대해 음모ἐπιβουλεύειν를 꾸미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유인다운ἐλεύθερος 생각을 갖고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의심되는 자들을 적에게 넘겨 파멸시킬 구실을 갖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566d-567a)

2) 참주를 비판하며 거침없이 얘기παρρησιάζεσθαι하는 자들 있다면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도 유용한ὄφελος 자들, 이를테면 용감하고 야심이 있고 현명하고 부유한 자들을 적으로 삼아 온 나라를 정화할 때까지 음모를 꾸며 모두를 제거해야만 한다ὑπεξαιρεῖν.(567b-c)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름다운καλός 정화καθαρμός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의사ἰατρός들은 나쁜 것을 제거하고 좋은 것을 남겨놓지만 참주는 그 반대로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축복받은μακάριος 필연ἀνάγκῃ이라고 언급한다.(567d)

3) 이에 따라 시민πολίτης들의 미움을 받게 되면 될수록 믿을 만한πιστός 경호창병δορύφορος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참주는 보수μισθός를 주면 저절로 날아드는 외래종 수벌들 즉 외국인 용병들과 시민들에게서 빼앗은 자국인 노예δοῦλος 즉 토종 수벌들로 경호창병을 구성한다.(567e) 이들은 신참 시민으로서 참주와 어울리겠지만, 양식 있는ἐπιεικής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고 피한다.(567e-568a)

4) 그러나 에우리피데스 같은 비극τραγῳδία 작가들과 다른 시인들은 영리한πυκνός 생각διανοία에서 ‘참주들이 지혜로운 건 지혜로운 자들과의 어울림συνουσία 덕분’이라고 말하면서 참주정을 ‘신과 같은’ἰσόθεος 것이라고 찬양한다. 비극시인들οἱ τῆς τραγῳδίας은 지혜로워서σοφός 우리들이 그들을 참주정의 찬양자ὑμνητής들이라는 이유로 우리 체제 안에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들은 양해할 것이다.(568b)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중을 끌어 모으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우렁차며 설득력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는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참주정이나 민주정으로 끌고 다니며 그에 대한 보수를 받고 또 존중도 받는다τιμῶνται.(568c)

5) 참주들은 신전 재물ἱερὰ χρήματα 같은 나라 재산과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으로 전쟁 경비를 쓰고(568d) 민중에게는 세금εἰσφορά은 낮게 부과하다가(568d) 결국 자금이 동이 나면 마침내 자신은 물론 그의 술친구συμπότης들도 그의 남녀 패거리ἑταῖρος도 모두 참주를 낳아준 아버지 즉 민중 δῆμος들을 수탈한다.(568e)

6) 아버지(민중)가 아들(참주)을 낳고 키운 까닭이 부자들과 소위 ‘아름답고 뛰어난’ καλῶν κἀγαθῶν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한 것임에도 반대로 이제 다 큰 아들이 어버지의 돈을 빼앗는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과 아들의 골칫거리 술친구들을 집에서 내쫓으려 해도 그들보다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어떤 짐승θρέμμα을 낳고서는 그를 반기고 키웠는지 알게 된다.(569a-b)

7) 그리하여 아들인 참주가 아버지에게 완력βιά을 쓰려 들고, 아버지가 자신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으면 때리기τύπτειν라도 하는 상황 즉 참주가 부친살해범πατραλοίας이자 가혹한 노인부양자γηρότροφος가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569b) 민중은 자유민이 노예가 되는 연기καπνός를 피하려다가 노예가 주인δεσποτεία이 되는 불 속으로 뛰어들고 만 셈이 된 것이다. 예전에 입었던 지나치고 철에 맞지 않는 자유 대신, 노예들의 노예가 되는 가장 가혹하고χαλεπωτάτην 쓰라린πικροτάτην 옷으로 갈아입은 처지 한마디로 참주정의 예속 상태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민주정으로부터 참주정이 어떻게 변화해 나오는지에 관한 전말이다. (56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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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7b ‘유용한hophelos 자’ ; 참주 비판에 가담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 이어 나오는 용감하고 야심이 있고 현명하고 부유한 자들이 그에 속한다.

* 567c ‘계속 통치하려면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고 유용한 자는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제거해야 하네.’ : 이것은 참주가 왜 혼자 고립되어 황폐해진 영혼을 지닌 불행한 개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내적 필연성을 함축하고 있다.(헤로도토스<역사> 5권 92절,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 3권 13장 1284a 26 이하, 5권 10장 1311a 20 이하) 에우리피데스 <탄원하는 여인들>은 정적의 제거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들을 담고 있다.(445~449) 그 가운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코린토스의 독재자 페리안드로스가 밀레토스의 독재자 트라쉬불로스에게 ‘어떻게 해야 나라를 가장 안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지’를 전령을 보내 물었다. 트라쉬불로스는 말없이 전령을 밀밭으로 데려가 이삭들 중 가장 크고 유독 높이 자란 이삭들을 골라 잘라버렸다. 전령은 이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 페리안드로스에게 보고했고, 페리안드로스는 이를 ‘국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위협이 될 만한 엘리트)들을 처형하라’는 조언으로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서는 두 인물의 역할이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 567d ‘축복받은 필연’ : 앞서 설명한 내적 필연성 즉 평생 대중의 미움을 받고 살거나 죽을 수밖에 없거나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는 참주의 삶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 567d ‘숱한 자들이 날아 들 겁니다. 외래종 수벌’ : <법률>에도 이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거론할 가치가 있는 외국인들은 네 부류입니다. 첫째 부류 중 상당수는 돈벌이하러 다니느라고 한 해의 이맘때쯤 바다 건너 다른 나라로 그야말로 날개라도 단 것처럼 날아들지요.’(952e)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된 경호대는 그리스 참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크세노폰의 <히에로>(Xen. Hiero 5.3), 특히 디오니시우스에 관해서는 그로트(G. Grote)의 저서 <그리스 역사>(History of Greece X P. 221)를 참조.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외래종 수벌은 비 그리스계 외국인을 말하고 토종 수벌은 전쟁 포로가 되어 자국 시민의 노예가 된 사람들로서 비(非) 그리스계 외국인, 그리스계 다른 폴리스 출신자 모두를 포함한다.

* 568a-b ‘지혜로운 자들과 어울림 덕분’, ‘비극 시인을 체제 안에 받아들이지 않아도’ : 여기서 ‘지혜로운 자들’이란 참주와 어울리는 당대 비극 시인들을 말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참주 관련 부분에서 ‘지혜롭다sophos’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사용한다. 물론 그것은 참주들이 ‘부자의 문간’(489b)으로 몰려드는 현자들로부터 지혜를 얻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여기서 그 말을 참주와 그 주변에 몰려드는 시인들에 대한 찬사로 바꾸어 그들 모두를 지혜로운 자들로 비틀어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인용한 말 중 ‘비극은 지혜롭다’는 표현 자체는 사실 에우리피데스가 아니라 소포클레스의 <작은 아이아스> 중 한 구절이다. 플라톤의 이 오류는 <테아게스> 125b에서도 반복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아마도 에우리피데스가 ‘지혜로운σοφός’이란 말을 상투적으로 과도하게 반복하고 있었던 탓에, 그런 오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에우리피데스가 참주정을 ‘신과 같은 것이라고 찬양했다’(568b)는 말도 사실 그것이 실린 <트로이 여인들>에서는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진정한 비극은 아름답고 좋은 삶을 모방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당대 비극 시인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사실 5세기 아테네에서 전성기를 이룬 연극들은 비극과 희극을 불문하고 모두 부자들의 공적 기부로 유지되면서 권력을 비판하기보다는 당대 민주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도구 즉 대중용 교육과 선전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장치로 이용되곤 했다. 이곳에서도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중을 끌어 모으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우렁차며 설득력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 그 나라의 정치체제를 참주정이나 민주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568c) <법률>에서도 플라톤은 아테네 손님의 입을 통해 새로 세우는 나라에 비극시인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817a-d 참고)

* 568b ‘그들은 양해할 것입니다.’ : 비극시인들을 참주정 찬양자로 우리들이 배척해도 그들 중 일부는 왜 자기들이 그렇게 불리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의미. 이곳에서도 ‘지혜롭다sophos’와 ‘세련되다kompsos’라는 표현 모두 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 568c ‘정치체제들의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숨이 차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들에 대한 존중timē은 그만큼 더 시들고 마네.’ : 시인들은 기본적으로 지혜롭고 영리하여 현실과 타협하여 참주나 민중들의 즉물적인 요구에 잘 부응하고 그들로부터 존중을 받지만, 옳고 그름만을 기준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철학자 왕정에 가까이 갈수록 그 기준에 부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존중받기 힘들다. 이것 역시 당대 시인들에 대한 플라톤의 기본 시각을 잘 보여준다.

* 568c ‘옆으로 새서eksebēmen’ : 참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비극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새 나간 것을 말한다.

* 568d ‘신전 재물이 나라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에는 그것을 쓰고, 또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을 쓰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 실제로 디오뉘시오스 1세는 신전들을 약탈함으로써 헬라스의 도덕관념에 큰 충격을 주었다.(그로트 <그리스 역사> X p. 300, 302) 시라쿠사의 기사 테오도로스(Theodorus)가 디오뉘시오스 1세를 고발한 탄핵서(Diodor. XIV 65)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자는 신전들을 약탈하고, 사유 재산을 그 소유주들의 목숨과 함께 빼앗은 후, 주인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 집의 종들에게 급료를 주고 있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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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주tyrannos는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의 대립을 이용하여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차지하고 독재를 일삼는 사람을 말하지만 세습 참주를 비롯해 참주마다 집권 배경과 행태가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 이곳에서 가장 타락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을 이끄는 참주는 민주정의 제멋대로의 자유가 초래한 위계질서의 붕괴와 그로 인한 계층 간 갈등과 빈부격차의 심화를 틈타 침 달린 수벌 즉 선도자가 대중의 이익을 내세워 환심을 얻은 후 민회 등 민주정의 의사 결정 체제를 무력화시키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오직 자신만의 권력과 이익, 안위를 위해 오히려 민중을 노예로 삼아 폭압적으로 지배하는 자로 그려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멀게는 기원전 6세기 초 코린토스의 페리안드로스Periandros, 기원전 6세기 중후반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Hippias, 기원전 5세기 시라쿠사의 히에론Hieron 1세와 겔론Gelon 등이 있었고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하기 전 만나거나 목도했던 참주들의 경우에는 기원전 404년 민주정의 혼란을 틈타 스파르타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한 30인 참주들과 플라톤 자신이 시칠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 목도한 시라쿠사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가 있다. 특히 플라톤의 <일곱 번 째 편지>를 보면 30인 참주정과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당시 민주정에 대한 절망적인 탄식과 함께 플라톤 자신 그러한 타락한 정체들이 철학자 왕정을 꿈꾸게 된 기본 배경이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326a)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품고 그의 나이 40세 때 방문했던 디오뉘시오스 1세 참주정 치하 시라쿠사 사람들의 타락상이 그 뒤를 이어 세세하게 그려지고 있다.(326b-c)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참주들의 행태는 이전 시대 참주들에 대한 전승도 일부 포함되어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그가 실제로 겪은 30 참주들과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의 폭압적 행태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불확실한 전승에 따르면 디오뉘시오스 1세가 그곳을 처음 방문한 플라톤을 초청하여 자신과 친교를 맺을 것을 강권하자 그에게 ‘강한 자가 덕에 있어서 뛰어나지 않는 한, 강한 자의 이익은 자족적이지 않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여 디오뉘시오스 1세에 의해 노예로 팔릴 뻔했으나 퀴레네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도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의 편지에는 정작 당시 시라쿠사의 타락상은 언급되어 있어도 디오뉘시오스 1세의 이름은 한군데에서조차 거론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주석가들은 시라쿠사에서 그가 겪은 수모가 플라톤 자신 얼마나 입에 담기조차 싫어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해석하기도 한다.(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편지들> 부록 ‘플라톤의 생애’ 참고)

*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참주정을 ‘1인 지배자가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으면서 지배 받는 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더 나은 사람들 모두를 지배하는’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정치학> 1295a 20 이하) 아리스토텔레스의 참주정에 대한 위와 같은 규정은 다른 정치체제들에 관한 규정과 마찬가지로 지배자의 숫자와 지배 목적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다른 정치체제들을 다룰 때도 그랬듯이 그러한 외적인 양태나 지배 목적만이 아니라 지배 원리가 과연 철학과 지성에 입각해 있는 것은 아닌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에 더해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 상태 내지 내적 욕망구조까지 유기적으로 함께 고려한 상태에서 참주정과 참주정적 인간을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은 복합적이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 참주정은 외적 통치구조에서 계층 간 상호 분업적 조화와 공존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 즉 나라의 모든 권력이 오직 참주 한 사람만의 이익을 위해 집중되어 있는 체제로 규정됨과 동시에 내적 욕망구조에서 영혼의 조화가 완전히 마비된 상태 즉 영혼의 이성 부분이 자신의 사적 탐욕을 극대화하는 도구적 계산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기개 부분과 욕구 부분은 그것에 철저히 예속된 상태로 규정되고 있다. 요컨대 철학자 왕정의 통치구조와 욕망구조 모두가 그야말로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와해된 상태가 곧 참주정인 것이다.

* 이곳 제8권 말미에서는 우선 참주정의 행태와 특징이 다루어지고 이어서 제9권부터는 참주정적 인간의 행태와 특징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참주정의 행태와 특징만 보더라도 참주정이 철학자 왕정과 비교하여 얼마나 정반대의 위상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전형적인 특징들을 간략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처음에는 채무 탕감과 토지 분배 등 대중을 위한 유화정책을 편다.

2) 민중이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처지에 놓이도록, 먹고 사는 일 외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그리고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파멸시킬 구실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한다.

3) 자신을 옹립하는 데 협력한 자들일지라도 참주를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 경우에 친구든 적이든 조금이라도 유용한 자는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모두 제거한다.

4) 자신의 안위를 담보하기 위해 외국 용병을 끌어들이거나 내국 노예들을 빼앗아 자신의 경호창병으로 삼는다.

5)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칭송하며 아부하는 시인들 세칭 지식인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시를 짓게 하고 목소리가 우렁차고 설득력 있는 자를 고용하여 참주정을 옹호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한다.

6) 신전 재물 등 국가 재산은 물론 자신들이 파멸시킨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쓰고 민중에게 부과하는 세금은 낮추다가 그것마저 동이 나면 폭력으로 민중들을 수탈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고대 그리스 참주정의 자기 보존 방식을 이곳보다 훨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곳의 특징들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참주정이 얼마나 최악의 정치체제인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그 주요 내용을 추려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정치학> 1313b 1-1314a 10)

1) 특출한 사람 높은 기상을 가진 사람을 제거한다.

2) 정치적인 모임, 사적인 잔치 등을 허용하지 않는다.

3) 자부심과 신념을 형성케 하는 모든 것을 경계한다.

4) 학파나 학문적 동아리가 생겨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5) 도성에 있는 사람들을 항시 보이는 곳에 있도록 한다.

6) 남자들에 대한 험담을 누설할 수 있도록 여성과 노예에게 선의를 베푼다.

7) 피지배자들의 말과 행위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도록 염탐꾼을 갖고 있어야 한다.

8) 일상에 매달려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여가를 없애고 피지배자들을 가난하게 한다.

9) 지속적으로 지도자가 필요한 상태에 있게끔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한다.

10) 고분고분한 사람,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영예를 부여한다.

* 참주정이 갖는 이와 같은 특징들은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금지하고 시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일상으로 삼았던 20세기 인류가 겪은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파시즘과 나치즘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오늘날 나날이 득세하는 인종주의, 극우주의, 신종 매카시즘, 무한경쟁과 배타적 이기주의 및 그로 인한 각자도생의 삶도 그러한 피폐상이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준다. 게다가 절망스럽게도 초국적 기업들의 정보 감시 및 통제 시스템은 대중을 위한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환호를 바탕으로 더욱 정교함을 더해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트럼프, 러시아의 푸틴을 비롯한 현대판 참주들은 그러한 행태들이 초래하는 문명적 환경적 위해들에 눈을 감고 오히려 그것들을 경쟁 우위의 발판으로 삼아 군사적, 경제적 온갖 수단을 다해 끊임없이 전쟁과 침탈을 자행하고 있다. AI로 표징되는 현재 정보문명의 급속한 발달 또한 그것을 선도하는 일부 소수의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의 나라를 거의 불가역적인 양극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부 선진 소수의 나라에 속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그것의 선도적 개발에 목을 매고 있지만, 자칫 초인간 인공지능이 통제 불능의 수준으로까지 발달하는 경우 거꾸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그것이 고도의 혜택과 효율성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어쩌면 속칭 부자 나라 잘난 사람들만 그것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과 사람들은 그들에 예속되어 가난과 억압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초국적 신종 계급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기후 및 환경파괴까지 더해질 게 필연이라면 인류의 미래는 더욱 암울하다. 만약 AI가 초고도의 인공지능을 갖고 있으면서 사람과 똑같이 자의식과 함께 생물에 준하는 생존 및 번식 욕구, 정치적 능력까지 갖추어 ‘자기를 무력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힘의 개입’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다면 또는 그런 AI를 최상위 수준으로 운용하는 초강대 국가들과 초국적 기업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그 자체 이미 참주적 특징을 내면화한 것들로서 필연적으로 상호 패권투쟁을 유발하면서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물론 위와 반대로 그에 대응하여 그 만큼 도덕적 AI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인류 전쟁사가 보여주듯이 그들 간 적대적 싸움 자체가 초래하는 피 흘림의 역사는 오히려 크기와 정도를 더해가면 더해갔지 결코 줄어들거나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비관적 상상들이 매우 극단적이고 단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지성의 결여가 초래한 고대 참주정의 폐해가 오늘날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의 힘을 바탕으로 더욱 강고하고 보다 주도면밀한 방식으로 더욱 광범위하고도 심각하게 유포, 심화, 고착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오늘날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평민 다수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체제를 강제로건 속임수로건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2500년 전 참주정의 참혹상을 겪은 플라톤은  아래와 같은 신념을 가슴 깊이 새기고 평생에 걸쳐 이상국가를 구상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 신념의 밑바닥에는 그 이상의 크기와 깊이에 못지 않게 신의 도움에 기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자신을 절망에까지 이끌었던 참담한 기억들이 무거운 근심으로 함께 자리하고 있다.  “올바르고 진실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일곱번째 편지> 326a, <국가> 473d)

*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정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체제의 변화를 논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실제 역사에서는 플라톤의 말처럼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과 함께 참주정 또한 정치체제 변화의 한 국면인데도 그 참주정이 또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지는 다루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정치학> 1316B) 그러나 이것 역시 오히려 <국가> 제8권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정치체제 변동론이 정치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화해가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다만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이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철학자 왕정으로부터 행복과 정의와 관련하여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적 논의 차원의 것임을 반증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번 언급했지만 플라톤의 철학은 역사철학이건 정치철학이건 바람직한 목적과 방향은 제시되어 있을지라도 그 실제 진행은 나라건 개인이건 능력에 따라 그렇게 갈 수도 있고 가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전환할 수도 있는 이른바 양상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의 철학을 목적론이되 동적인 목적론으로 부르는 이유도 플라톤 철학 자체가 그러한 변화의 역동적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박홍규의 존재론적 사유에 담긴 플라톤의 정치철학’,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 참고) 이런 의미에서도 오늘날 정치적 문명적 위기 또한 정치의 지성화를 강조하는 플라톤의 가르침대로라면 그것의 해결 및 극복 모두 우리 손 특히 현대 정치지형을 떠받치고 있는 시민들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지성의 힘을 어떻게 깨우치고 어떻게 함께 사회 변혁의 역량으로 모으고 키워 나아갈 것인가에 달려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경우 최고 권력자의 참주적 행태로 나라가 큰 위험에 처했을 때 평범한 일상의 시민들이 보여준 위기 극복의 모습들은 시대의 모순을 혁파하고 변화를 담보하는 민중의 지성, 집단지성의 발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평화적 시민 혁명으로서 촛불 혁명은 현대 문명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실로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이로써 참주정에 관한 논의는 제8권으로 끝난다. <국가>의 권수는 본 강해 서두에서 밝혔듯이 기본적으로 당대 파피루스 권당 기준 분량에 따라 나누어진 것이라 각 권이 꼭 주제에 맞추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참주정적에 인간에 대한 논의는 참주정과 쌍을 이루는 논의임에도 제9권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무리된 후(576b) 타락한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의 최종 목표 즉 가장 최선의 정치체제로서 철학적 왕정과 철학자 그리고 가장 최악의 정치체제로 다루어진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사람과 가운데 과연 누가 왜 얼마나 더 행복한가에 대한 비교 판정이 이루어진다.(576b- 제9권 끝 592b)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A. 부정의한 나라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적인 욕구(562b-제9권 576b)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