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9- 판단에서 추론으로[흐린 창가에서 -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9- 판단에서 추론으로
1)
헤겔에서 개념 판단 형식은 단정 판단에서 개연 판단으로 그리고 자명한 판단으로 이행한다. 우선 단정 판단에서 주어는 눈앞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개별자이다. 술어는 ‘좋다’, ‘나쁘다’와 같은 양상어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 집은 나쁘다’라든가, ‘이 행위는 아름답다’ 등과 같은 판단이다.
여기서 어떤 것의 일반적인 개념이 판단자의 마음에 전제되어 있다. 이 일반적 개념은 앞에서 선언 판단을 통해 출현하는 일반적 본성이다. 이런 일반적 본성은 아직 ‘실제적[wirklich]’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므로 다만 주관적 사유 속에 있는 것이며,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당위로서 존재한다.
주어는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이 개별자는 “어떤 상태이거나 외적인 실존으로서 존재하므로””(논리학 2부, GW12, 85) 특수한 것[Besonderheit]이지만, 아직 그 특수성이 정립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판단하는 주관은 이 눈앞의 개별자가 그런 일반적인 개념 즉 당위에 속하는 상태를 지닌다고 단정하지만, 사실 이 개별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지는 주관적 단정에 속할 뿐이다.
단정 판단은 직관적으로는 주어와 술어가 통일되었지만, 이런 단정은 제삼자인 주관에 의한 것이며 이 개별자의 상태가 아직 무엇인지 명확하게 되지 않았으므로, 이 통일성은 잠재적[an sich]이고 내적일 뿐이며, 아직 정립되거나 드러난 것은 아니다.
단정 판단에서 개별자와 일반적 개념의 통일성이 양상어로 표현된다. 개념 판단의 주어 자체가 하나의 판단 즉 개별자와 일반적 개념이 결합한 판단이므로 이미 자기 내에 계사를 지니고 있다. 양상어는 주어에 속하는 판단이 지닌 계사가 이 주어에 대한 이차적인 판단이 지닌 술어로 출현한 것이다.
이런 단정 판단에서 주어가 직접적인 한, 그것과 일반적 개념의 구별이 들어 있으니, 이런 단정 판단은 곧 부정적 판단이다. 그러므로 단정 판단은 개연적인 판단으로 이행한다.
“따라서 이런 단정 판단이 지닌 확신에 대해 바로 그런 동일한 권리로 대립하는 판단이 서 있다. ‘이 행위가 좋다’라는 판단이 확실하다면 대립한 판단 즉 ‘이 행위는 악하다’라는 판단도 여전히 동등하게 평가된다.”(논리학 2부, GW12, 86)
2)
‘개연 판단’은 ‘의문스러운[problematisch]’ 판단이라는 뜻이다. 단정 판단에서 주어는 직접 눈앞에 있는 것이며 아직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다. 주어의 개별자가 어떤 것인지, 어떤 상태에 있는지가 파악되면서 개연 판단이 등장한다. 이 개연 판단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것이 좋다’라고 할 수 있다.
개별자가 지닌 상태 때문에 한편으로 이 개별자는 이 상태를 통해서 일반적 개념에 합치하는 측면을 가진다고 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이 개별자는 항상 이 상태 즉 합치하는 측면과 반대되는 상태를 동시에 지닌 것이기에 그런 측면에서는 일반적 개념에 합치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개연 판단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 즉 긍정인지 부정인지 무규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반성 판단에서 마치 단칭 판단이 하나의 임의의 개별자이므로 곧바로 특칭적인 판단이 되며, 이 긍정적인 특칭 판단에서 ‘몇몇이 그러하다’라면, 곧바로 ‘그런 몇몇과 다른 것은 그러하지 않다’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으니, 긍정적 특칭 판단이 부정적 특칭 판단으로 곧바로 이행하는 것과 같다.
가언 판단 역시 의문스럽기[problematisch]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가언 판단은 ‘P이면 Q다’라는 판단인데, P를 존재하게 하는 것 즉 주어는 ‘P가 아닌 것’도 포함하고 있기에 이 주어는 항상 다른 결과 R과 관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법칙 관계는 항상 부분적으로만 성립할 뿐이니, 이런 법칙들은 서로 무차별하게 관계할 뿐이다.
특칭 판단이나 가언 판단이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갖는다는 점에서 개연 판단과 같지만, 개연 판단은 이런 무규정성이 판단 자체의 형식에 내재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주어인 개별성은 일반적 개념에 비추어서 판단되기 때문이다. 개별성은 개별성인 한에서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연 판단 자체에서 이런 긍정과 부정의 정립은 언급된 판단[특칭 판단이나 가언 판단]에서보다 더 내재적이다. 왜냐하면, 개연 판단에서 술어의 내용은 주어가 개념에 어떻게 관계하는가이며 따라서 이를 통해 직저적인 것이 하나의 우연적인 것이라는 규정이 그 자체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6)
개연 판단의 계사는 ‘이다’가 아니라 ‘일 수 있다’ 즉 가능적인 것이다. 이 가능성은 즉 긍정인지 부정인지 무규정성은 술어 때문은 아니다. 술어는 이미 일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어는 개별적인 것이고 직접 어떤 상태 속에 있는 것이기에, 이로부터 무규정성이 나오게 된다.
3)
주어의 상태가 술어의 일반적 개념, 당위와 합치해야, 자명한 판단으로 이행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주어의 상태가 개념에 합치하는 일반적 상태로 고양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런 합치가 일어나려면, 주어의 개별자가 지닌 어떤 상태 즉 특수성이 추상적인 특수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헤겔에서 특수성은 이미 정립된 것인데, 그 자신이 다시 부정되면서 구체적인 개별성이 된다. 이 부정의 부정으로서 구체적 개별성을 통해 개념의 일반성이 회복된다.
그러므로 개별자의 자기 부정적인 상태가 곧 술어인 일반적 개념이나 당위에 합치하는 것일 수 있으니, 여기서 일반적 개념은 “자기의 대립물인 개별자를 통해서 자기와 연속된다.”
“주어와 술어는 서로 상응하고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 이 내용은 그 자체 일반성이 구체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즉 이 내용은 두 가지 계기를 지닌다. 한편으로 객관적 일반성 또는 유[일반적 개념]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별화된 것[구체적 개별성]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 것은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을 통해서 자기와 연속되는 것이며 이 대립물과 통일로서 비로소 일반적인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88)
따라서 헤겔에서 자명한 판단에 이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자기 부정성을 결여한 것은 자명한 판단에 이를 수 없다. 예를 들어 ‘집’과 같은 것은 자기 부정성이 없으므로 자명하게 좋을 수 없으며, ‘행위’는 자기 부정성이 있으므로 자명할 수 있다.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 곧 주체이므로 결국, 자명한 판단의 주어가 되는 것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되는 것이다.
4)
자명한 판단에서 술어는 일반적 개념이며 곧 실체이다. 반면, 주어는 주체이며, 개별자이다. 양자는 모두 구체적 일반성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이를 통해 판단에서 지속 출현했던 구별이 사라지고 개념이 지닌 동일성이 회복된다.
지금까지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것은 계사였다. 이 계사는 주어, 술어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존재였다. 이 존재가 제삼자, 판단하는 주관이다. 그러나 이제 자명 판단에 이르게 되면, 주어와 술어는 동일하게 되면서, 양자를 연결하는 계사가 주어, 술어와 통일된다. 계사는 주어 속에 있는 주체, 선험적 통각이며 동시에 술어 속에서 양상어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판단의 형식이 몰락한다. 그 이유는 우선 주어와 술어가 본래 동일한 내용이기 때문이지만, 두 번째로는 주어가 자신의 규정성을 통해 자기를 넘어 술어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째로 이런 관계가 술어로 이행했으며 다만 그 술어의 내용을 이루며 따라서 정립된 관계로 되거나 판단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개념의 구체적 동일성은 선언 판단의 결과이었으나 개념 판단의 내적인 토대를 이루면서 전체적으로 자기를 회복한다. 이 내적 토대가 이제 처음으로 다만 술어 속에서 정립된다.” (논리학 2부, GW12, 88)
이제 주체인 주어 자신이 자기를 전개하여 자기를 술어화하고 이를 통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이런 계사인 주체 자신이 전개하는 운동이 곧 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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