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1-규정된 근거와 근대 과학의 기만[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21-규정된 근거와 근대 과학의 기만
1)
앞에서 종적 개체[주어, 토대]와 형식[술어, 근거]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 관계는 형식과 본질, 형식과 질료,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했다. 이런 발전에서 핵심은 ‘형식‘ 갠념의 의미 발전이다.
이런 발전은 존재론에서 감각적 질이 지각적 일반 성질로 그리고 유한성으로 발전하는 것과 상응한다. 다만, 본질론에서 주어에 해당하는 것은 종적 개체이고 여기서 술어에 해당하는 것은 존재론에서 나오는 질적인 규정이 아니라 유기체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최초에 형식은 주관적으로 설정된 기능이며 그것에 대응하는 토대는 곧 그 기능에 무차별한 유기체적 조직이었다. (헤겔은 이를 본질 즉 유기적 척도 관계로 규정했다.) 두 번째 형식은 지각적으로 일반화된 기능이며 이는 다른 기능에 대해 독립적이어서 그것에 대해 토대는 이런 여러 일반적 기능을 동시에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무규정적인 매체 즉 질료다.
마지막으로 형식은 다른 형식과 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적 기능의 한 계기로 규정된 기능이 된다. 예를 들어 ‘진달래에 고유한 광합성 작용’과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응하는 것 즉 ‘내용’은 부분적인 매체의 통일체이면서 그 때문에 독자적인 규정성을 지닌 존재이다. 예를 들어 꽃나무는 잎과 줄기, 꽃의 통일체로서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된 것 예를 들어 진달래(유기체적 조직으로서)다.
형식과 내용은 각기 하나의 통일체이어서 각 개별적 부분은 전체로부터 떼어낼 수 없으면서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하나의 형식은 독자적이면서도, 다른 형식으로 내적으로 이행하는 유한한 형식이며, 하나의 유기체적 마디는 자립적인 부분이면서도 전체 유기체에 통일적으로 구성된 한 부분일 뿐이다.
2)
이와 같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관계로부터 근거의 문제가 출현한다. 근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생물체의 분류 기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하다. 생물체는 물체처럼 질적이거나 양적인 규정을 가지고 분류할 수는 없다. 생물체는 그 기능을 통해 분류될 수밖에 없다.
생물체의 기능은 여러 가지인데, 예를 들어 양분의 획득을 위한 기능이나 재생산을 위한 기능을 들 수 있다. 이런 기능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고립적으로 파악된다.
양분을 획득하는 기능은 다시 그 방식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식물처럼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획득하거나, 동물처럼 주변의 생물체를 소화해서 양분을 획득할 수 있다. 광합성을 통하더라도 그 방식은 다시 식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질 것이다.
이런 기능의 토대가 되는 것이 곧 내용이다. 이 내용은 유기체의 물질적 조직 체계를 말한다. 이것은 유기체적 방식으로 조직되어서 이를 통해 자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유기체적 조직도 고유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식물에서는 잎, 줄기, 꽃 등으로 구분되지만, 동물에 이르면 더 복잡해진다. 여기서는 신체의 마디와 다양한 내장 기관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 신체의 마디는 동물의 종마다 구별되며, 내장 기관 역시 다양하다.
사실 기능은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유기체 역시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기능의 분류와 유기체의 형태의 분류는 상응하지 않는다. 기능은 운동의 전체 과정을 분할한 것인 반면 유기체의 형태는 외적인 모습에 따라서 분할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의 종적 개체를 분류하는 기능이 곧 생물의 종차에 해당하는 형식이 되는데, 지금까지 헤겔은 그 형식을 생물체의 기능 속에서 찾았고 유기체적 조직을 그것에 대응하는 기체로 삼았다.
3)
이제 형식과 내용, 기능과 유기체적 형태 사이의 관계로부터 근거와 근거지워지는 것의 관계가 문제로 등장한다.
하나의 형식은 규정[bestimmt]되어 있다. 이 형식은 하나의 개체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형식의 가운데 하나로서, 다른 형식과 대립하지만, 통일적 전체를 구성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규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형식은 지각적 일반성을 지니는 것이므로 하나의 형식은 여러 종적 개체에 공통된 형식이기도 하다. 이 형식을 통해 하나의 내용을 지닌 개체가 다른 내용을 지닌 개체와 관계 맺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형식은 다른 개체의 내용을 규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진달래에 고유한 재생산 기능을 지니는데, 진달래의 고유한 내용 즉 유기체적 조직을 통해 이 기능이 수행된다. 동시에 이 기능은 철쭉의 고유한 내용을 규정하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철쭉은 진달래와 다른 유기체적 형태 즉 내용을 지닌다. 진달래는 꽃이 잎보다 먼저 피지만, 철쭉은 꽃이 나중에 핀다는 차이가 있으니, 필자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 유기체적 조직 즉 내용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진달래와 철쭉은 동일한 재생산 기능을 지니면서도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니면서 일정한 근거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근거 관계가 이제 헤겔이 1편 3장 B절 ‘규정하는 근거’ 장에서 다루려는 내용이다. 앞에서 ‘근거와 토대’의 관계가 존재론에서 질적 규정의 발전과 상응했듯이 ‘규정하는 근거’에서 다루어지는 개체와 개체의 관계는 앞에서 존재론에서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종적 개체 사이에 성립하는 형식과 내용, 즉 근거와 토대라는 관계에서 헤겔이 처음 다루는 것은 형식적 관계 또는 동어반복적인 관계이다. 이 관계는 언뜻 표면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 것들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형식의 관계일 뿐이다. 헤겔은 주석에서 이런 형식적 관계에 관해 많은 예를 제공한다.
그는 근대 물리학이 이런 형식적 관계에 관한 풍부한 예를 제공한다고 말하는데, 몇 가지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곧 태양을 중심으로 혹성이 돈다고 할 때, 그 근거로 제시되는 뉴턴의 인력이라는 개념이다.
헤겔은 태양 중심 회전운동이나 만유인력은 사실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양자는 같은 내용을 지닌 것인데 다만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태양 중심 회전운동은 운동하는 모습을 통해 규정된 형식이고 인력이란 그 관계를 힘으로 설명하는 형식이다. 두 형식은 마치 저녁별이 새벽 별인 것과 같이 의미상 동일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다 더 극적인 예는 생명의 탄생을 생명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역시 운동을 힘으로 설명하면서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력이란 개념은 생명을 탄생하는 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의 예보다 이 예가 더 나쁜 것은 생명력이라는 개념은 아직 해명되지 않는 신비한 것이니, 이는 무언가 설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설명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명의 근거가 신비한 것, 비밀스러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설명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신비하다는 말은 그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은 것일 뿐이다.
“여기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설명을 위해 사용된 힘이 감추어진 금거인 한에서는 [본래 설명에서] 요구되는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05)
이런 형식적 근거의 예를 통해 금방 이해되듯이 이런 설명은 설명되어야 할 결과를 근거로 해서 이를 추상화하며 이로부터 다시 자기의 근거가 되었던 결과를 끄집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근거는 현존이 파악되어야 하는 원천이다. 그러나 거꾸로 이 현존으로부터 그 근거로 추론이 일어나며 근거는 현존으로부터 파악된다.”(논리학, GW11, 305)
사실은 결과로부터 끌어낸 원리인데도 설명에서는 마치 직접적으로 출현한 것처럼 가장되니, 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결국, 반성을 통해 나온 규정이 일정한 방식으로 마치 직접적 경험에 속하는 것처럼 표현된다면, 반성되고 단순하게 된 가설적 규정이 현상의 직접적인 규정 자체와 혼동되면서 이런 혼란을 더욱 커진다.”(논리학, GW11, 306)
4)
이런 예를 통해서 형식적 근거 관계라는 헤겔의 개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헤겔은 이 관계를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종적 개체들 사이의 근거 관계를 보자. 여기서 하나의 내용이 지닌[A] 어떤 형식이 다른 내용을 지닌 것[B]의 형식을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A에서 그 형식은 근거이니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되며 B에서 그 형식은 ‘정립된 것’으로서 토대의 형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A와 B의 형식상 다르지만, 내용은 동일한 것이라면 형식적 관계가 발생한다. 서로 다른 형식을 지닌 것을 매개하는 것은 바로 양자가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형식적 매개가 자기 자신을 통해 긍정적으로 매개하는 것으로 삼으면서 관계하는 특정한 내용은 동일한 것이다. 내용은 양자에 동일한 것이며 양자가 구분되지만, 각자는 그런 구별 속에서 타자와 관계하므로 내용은 양자를 존립하게 하는 것이며 각자를 전체 자체로 존립하게 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03)
5)
이런 형식적 매개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① 형식이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 형식은 내용 자체와 무관한 것으로 된다. 내용의 형식이 이처럼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면, 그 형식은 내용에 고유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특정한 내용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된다. 즉 한번은 내용이 근거로 존재하는 한에서 고찰되며 다른 한 번은 내용이 근거지워진 것으로서 정립되는 한에서 고찰된다. 내용 자체는 형식에 대해 무차별하다. 내용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다만 하나의 규정이다.”(논리학, GW11, 303)
② 동일한 내용이 지닌 두 형식이 하나는 근거로 다른 하나는 근거지워진 정립된 것으로 규정되므로 둘 중의 어느 것을 근거로 하든가 무관하게 된다. 한편으로 “근거는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동일성이며, 이를 통해 자기를 정립된 존재로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정립된 것[토대]은 자기를 지양하여 근거로 되돌아간다.” (논리학, GW11, 303)
“두 가지 규정 가운데 어느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삼는가는 무차별하니, 정립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타자 즉 근거로서 타자로 이행할 수도 있고, 근거로부터 출발하여 타자 즉 정립된 것으로서 타자로 이행할 수도 있다.”(논리학, GW11, 303)
③ 한편으로 이처럼 근거 관계를 통해 정립되는 관계가 있지만, 이 관계가 거꾸로도 성립하는 것이니, 결국 정립된 것은 자기를 지양하여 근거로 되돌아가는 순환적인 것으로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그와 같은 형식을 ‘매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각 측면은 근거이며 동시에 정립된 것이고 각 측면은 전적인 매개이거나 전적인 형식이다.”(논리학, GW11, 303)
④ 여기서 B의 형식은 한편으로는 A의 형식에 의해 규정된 정립된 것이면서 동시에 B 자신의 내용으로부터 반성된 것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이 관계는 거꾸로도 성립하니, A의 형식 역시 그런 이중성을 지닌다.
“근거에 관해 묻는다면 내용이라고 할 동일한 규정이 이중화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한번은 정립된 것의 형식으로 다른 한 번은 현존이 자기 반성되어 나온 형식으로 즉 본질적인 것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03)
이 형식이 내용에 외면적이므로 그 형식이 내용의 반성을 통해 나오더라도 이런 반성은 외면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은 다만 단순한 규정성이어서 근거관계의 형식이 그 관계 자신에서 갖는 형식을 가지지 않으므로 그 단순한 규정성은 자기 동일적인 내용이며 형식에 무차별하고 그 형식은 그런 내용에 외면적이다.”(논리학, GW11,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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