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 철학(7)-왕선산의 인간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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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생성 철학(7)-왕선산의 인간론

1)

왕선산에게서 인간의 본성은 그의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다른 자연과 구별된 고유한 기질을 지닌다. 그 기질은 맑고 유동적이어서 사물을 관통하는 것, 즉 청통의 기질이다. 이 기질은 우주의 원초적 기질이니 그것은 만물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기라고 불리지만, 구체적으로는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은 단순히 신기라는 기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신기와 더불어 동물적 기질도 지닌다. 동물적 기질의 특성은 신기에 가깝게 다가가지만, 그것의 관통 능력은 감각에 불과하고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욕구를 지닌다.

더구나 인간의 삶은 자연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자연 물체는 탁한 기로 이루어져 있고 융통성이 없지만, 역시 우주적 기의 산물인 한 부분적으로는 서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과 신체 그리고 마음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문제다.

2)

먼저 자연과 관계해서 인간은 만물을 본질을 관통하여 인식하고 이를 삶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파괴하여 소모하는 활동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방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속에서 이용후생의 덕을 실현하고 예의의 문화를 건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본질을 파악하여 자연의 본질을 실현한다.

“.. 타고난 본성을 단순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지만,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본성을 개발하는 성취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생성철학, 272)

그런 점에서 이규성은 기존 성리학이 도덕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본다면, 왕선산은 “문명의 창조자로서 인간의 모습을 강조한다”(273)고 한다. 또한, 문명의 창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도가적 관점과 달리 “인간의 사회화에 따른 문화인으로의 발전은 인간다움의 필수적 조건이라”(273)고 한다.

왕선산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것은 아니니,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자. 더 중요한 것은 우선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문제다.

3)

인간의 본성은 그 기질이 청통의 기질, 신기 또는 마음이 벌이는 운동에서 나온다. 왕선산에서 이 운동은 두 측면에 걸려 있다. 하나는 지적인 인식과 실천적 행위 즉 지능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윤리적 본성에 관한 문제다.*

주*)지능의 관계가 일어나는 기질이나 윤리적 본성이 발생하는 기질이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아니면 크게 보아 하나이지만, 그 가운데 다시 음양으로 나누어진 부분인지는 불분명하다.

신기의 지와 능은 일단 나중에 언급되는 신체에서 나오는 감각과 욕망과 구별된다. 여기서 지와 능은 기의 음양과 관련된다. 지는 양기에 속하며 만물에 관통하는 능력을 지닌다. 반면 능력은 실천적 능력인데 도덕적 자유의지 개념에 가깝고 음기에 속한다.

우선 지적인 차원과 관련해서 인간의 기질은 마음이며 이는 맑고 유동적이기에 만물을 관통하는 소통적 성질을 지닌다. 이를 통해 지적 인식이 가능하다. 만물 역시 다양한 기질을 지니지만, 원초적으로는 마음이니, 지의 이런 능력은 외적 감응을 통해 일어나지만, 사실은 자기 인식이다.

“지는 힘에서는 자발성, 폭에서는 광대성, 깊이에서는 관통성을 가진다. 그것은 ‘만상 가운데 들어가 장애를 받지 않는’, 허명하고 청허한, 하나이자 거대한 신묘성이다.”(생성철학, 285)

이규성은 마음의 이런 능력으로부터 소통성의 근거를 확보하려 한다. 앞에서 황종희에서 마음은 우주와 직접적 합일을 통해 소통하지만, 여기서는 마음의 외적인 감응을 통해 소통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외적 감응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추론하거나 귀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적 감응은 마음이 소통하는 통로일 뿐이니, 그 인식은 마음이 마음과 통하는 것으로서 자기 인식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질적 능력에서 이러한 실천의 관심을 넘어서 스스로를 이완시킴으로써 사물의 내적 본성에 침투할 수 있는 이완적 유동성을 갖는다. 심적 능력의 이완성은 게으름의 이완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진입하여 세계의 통일적 본질을 체험하는 초월적 자기 수렴의 운동성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성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만유의 소통적 본성에 자신을 여는 개방적 자기 인식이자 세계 인식이다.”(생성철학, 306)

“허명하여 조감하는 것은 신의 밝음이다. 태허는 형체에 막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편재적인 밝음이다… 조감이란 살피고 관찰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능력을 말한다.”(생성철학, 285) “이목은 견문에 그치지만, 오직 마음의 신묘성만이 모든 공간을 RnpoEnf고 장구한 시간을 관통한다.”(생성철학, 285)

나아가 왕선산에서 지와 능은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지에는 능이 저절로 따른다고 본다. 물론 이 조화는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조화가 될 것이다. 즉 지능의 부조화가 항상적이지만, 이는 늘 균형을 향해 나가는 운동 속에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양명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양지양능의 즉각적인 무조건적인 일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지와 능의 관계는 왕선산의 기본 공리 가운데 하나인 음양 각자가 극이 아님이 없으면서도 치우친 극은 없다는 원칙 즉 극이 없으면서도 위대한 극이라는 도식에 따라 파악되고 있다.”(생성철학, 292)

4)

그런데 이런 지능의 관계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윤리적 본성의 문제다. 그 윤리적 본성은 인의의 상호작용이다. 인은 상통성을 지향하며 의는 차별성을 지향한다. 인의가 양과 음이라면,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져서는 부조화의 운동 상태에 있을 뿐이다. 양자는 함께 상호 작용해야만 조화로운 윤리적 인격이 이루어진다.

이런 인의가 개별적으로 본다면, 운동의 치우친 상태가 되며, 양자의 균형이 인간의 본성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인을 우위로 본 주희나 의를 우위로 본 담사동과 달리 왕선산은 인과 의가 “상보적 균형”(301)이며 상호작용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인의의 상호작용은 추상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구체적으로 본다면 신기, 마음의 음양 운동을 통해 형성된다*. 이 가운데 양의 운동이 측은지심에 해당하며 음의 운동이 시비지심에 해당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기에서 두 대립하는 마음의 운동인데 이를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인의가 된다. 여기서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의 구별이 발생한다. 전자는 추상적이며 후자는 인간의 기질에서 출현한 본성이다. 그런데 주희는 천지지성이 독자적으로 존립한다고 보고 이를 본연지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왕선산에서 천지지성은 추상적인 것일 뿐, 구체적으로는 기질지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5)

이제 인간을 다룰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이 마음과 신체의 복합체이라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마음이 고유한 기질을 지니듯이 신체 역시 고유한 기질을 지닌다. 그것은 동물적 기질이니, 여기서 감각과 정욕이 발생한다.

신기의 지적 능력과 달리 감각은 한정적이며 그것이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표면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에 대해서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렇지 못한 것에는 혐오를 느끼니, 이는 감정에 속한다. 감각과 욕망 역시 음양의 관계를 지니며, 즐거움과 혐오 역시 음양의 감정을 지닌다. 이런 음양의 관계를 통해 일정한 질서가 즉 신체적 기질의 질서가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 되는 것은 마음의 기질에서 출현하는 도심 즉 본성과 신체의 기질에서 출현하는 인심 즉 욕망 사이의 관계다. 일단 양자는 모두 자연적 기질의 산물이므로 천성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양자는 서로 대립하니, 신기의 감응과 감각의 지각이 대립하며 마음의 본성과 신체의 욕망이 대립한다. 전자는 인식론과 관련된 문제니 제쳐 두고 후자만 여기서 살펴보기로 하자. 본성과 욕망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 관계는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그 관계는 앞에서 말한 도와 기의 관계에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양자는 ① 동행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공욕[公欲]이 곧 이가 된다. 그보다 자주 이 관계는 ② 전통적인 양분법인 체용 관계로 설명되기도 한다. 체용은 상호 공속하니, 그 어느 것도 동시에 필요한 것이며 이런 점에서 평등성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도심과 인심은 ③ 음양이 층간에서 서로 교차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즉 신체의 음기과 마음의 양기, 신체의 양기와 마음의 음기가 상호작용하니, 마음을 통해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거꾸로 신체를 통해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정신을 수련하여 육체의 허약함을 보완할 수도 있고, 신체의 강건함이 정신의 허약함을 보완할 수도 있다.

6)

전체적으로 본다면, 황종희는 인간에서 본성을 규정하려 했다. 그는 이 본성을 마음의 기질이 이루는 음양 운동을 통해 설명했는데, 이렇게 본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개인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 회복하려는 운동이 곧 개인의 자주성이다. 이 자주성은 단순히 자의적인 자의가 아니라 본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양심 또는 도덕적 자유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에서 인과 의의 관계, 마음과 신체, 도심과 인심의 관계는 음양의 운동 상태이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곧 중정을 회복하려 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 한쪽은 자기에 대립하는 다른 쪽을 통해 보완된다. 즉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면서도 소통성을 지닌다.

인간의 곧바로 사회적인 관계로 규정될 수 있다. 한 개인의 내적 갈등은 사회적 갈등의 압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인자와 의자 또는 남녀, 정신적 노동자와 육체적 노동자 사이에서도 상반상성의 관계가 나온다. 즉 그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보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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