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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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미

 

독립문, 자주독립의 열망

독립문역사거리, 사통팔달의 분주한 길 남쪽에 멀찌감치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북쪽에는 북한산이 양쪽으로 안산과 인왕산이 들어온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바로 앞에 고가도로에 가려 한 눈에는 볼 수 없는 독립문이 있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본다. 독립문 뒤로 서재필 동상, 독립관, 3.1운동 기념탑, 그리고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세의 침탈에 저항한 우리 역사의 흔적과 기억이 모두 모여 있다. 그곳은 중국 사신을 맞이한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며 자주독립 열망했던 근대의 꿈이,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라는 식민지의 좌절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과거의 독립문, 현재의 독립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곧바로 독립문과 독립관 건립을 계획했다. 독립관은 모화관慕華館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독립문은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세운다는 것이다. 모화관은 조선시대 명과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갑오개혁이후 사용하지 않아 폐가가 되어 있었고, 영은문은 바로 모화관 앞에 있던 것으로 1895년 철거되어 돌기둥만 남아 있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설계해서 1897년 11월 준공되었고, 197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은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제안했지만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이루어졌다. 19세기 말 안팎으로 거세게 흔들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조선의 운명을 붙잡고 싶었던 조선인들의 의지와 열망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 영문판 ‘The Independent’ 사설)

 

 

서재필과 <독립신문>, 계몽의 꿈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독립문을 건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립신문>이 있었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에 맞서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서재필이 주도하여 탄생시킨 근대적 신문이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7세 무렵 양자로 입적된 뒤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외숙인 판서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북촌의 양반 자제들과 교류하였고, 1880년 무렵 13촌 아저씨뻘인 서광범을 통해 김옥균을 소개받았다. 1884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했고 실패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국내에서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거나 참형되었고, 아들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죽게 된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시민권을 획득했다. 1895년 귀국을 요청받아 돌아 와 개화파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나는 우리나라 독립을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문 창간을 계획하고 당시 내무대신인 유길준에게 그 사정을 말하였더니 자기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국고에서 5,000원을 지출하겠다는 승인서를 받았다. 이것을 토대 삼아 우선 인쇄기를 일본 오사카에서 구입하기로 하고 장소는 정동 미국 공사관 뒤 정부 소유의 빈집을 사용하기로 했다.”(김도태, <서재필박사 자서전>)

 

독립신문 창간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 3면과 영문판 1면 총 4면, 주 3회 발행, 한글전용 띄어쓰기 언문일치를 실행한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창간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1 불편부당하고, 2 양반 상인의 신분차별이나 지방차별이 없이 전 국민을 평등하게 다하며, 3 전국 인민을 공평하게 대변하고, 4 정부정사를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실상을 정부에 알리어 정부와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을 시키며, 5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일반국민이 모두 신문을 읽도록 하고, 6 신문가를 저렴하게 하여 일반국민이 구독할 수 있도록 하며, 7 부정부패와 모든 불법행위를 고발하고, 8 영문판을 발행하여 한국의 사정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며, 9 국민에게 나라 안 사정을 알게 하고, 10 국민에게 외국 사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국민의 계몽을 목표로 한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는 처음 300부에서 곧 500부, 1898년 초에는 1500부, 그해 말에는 3000부로 급증했다. 당시의 구독방식은 지금과는 달리 신문 한 부를 여러 사람이 돌려 읽고 사랑이나 시장에서 낭독하는 것이었으므로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을 것으로 추측하면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1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개화’, 2 자주독립과 국가이익의 수호, 3 국민의 민권 신장과 수호, 4 한글 발전에 공헌, 5 부정부패 고발, 6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 7 세계와 한국의 연결과 한국인 시야의 세계적 확대 등에 기여 했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독립신문>의 한글전용 채택이다. 계몽의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 후반 동일하게 국민 계몽의 목표를 설정하며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신청년新靑年>이 가장 주력했던 것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사용하자는 백화문白話文 운동이었다. 이러한 취지의 <독립신문> 국문판을 창간부터 책임진 사람은 주시경이었다.

 

독립신문사터(배재학당 근처 표지석과 신아빌딩)

 

독립문을 둘러본 뒤 길 독립신문사의 흔적을 보고 싶다면 마을버스 종로05를 타보자. 독립문 건너편에서 출발한 마을버스는 인왕산 둘레 한양성곽까지 올라간 뒤 내려오며 사직공원 뒤편의 단군성전을 지난다. 그렇게 고불고불 작은 길과 큰 길을 지나 강북삼성병원에 하차해 길을 건너면 정동길이 시작된다. 정동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신아빌딩이 보이면 배재학당 방면으로 걸어 올라가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옆 배재정동빌딩 뒤편에 ‘독립신문사터’라고 쓰인 표식이 있다. 그런데 이곳이 실제 독립신문사 자리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걸어 왔던 길 초입에 있는 신아빌딩 근방에 독립신문사가 있었다는 다른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근대 시민의 길

<독립신문>의 발행 이후 독립문 등의 건립이 자주독립의 의지를 천명하는 상징적 실천이었다면, 독립협회의 창립과 만민공동회의 개최는 <독립신문>의 취지에 부합하는 근대적이며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서재필의 제안하고 여러 개화파 지식인집단이 참여한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한다. 독립협회가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을 추진하던 초기에는 관료들이 주도를 했지만 1897년 8월 29일 첫 토론회를 시작으로 점차 시민들이 표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국민 계몽에 관한 주제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지원하던 정부도 입장을 바꿔 서재필의 해고와 <독립신문>의 폐간을 시도하였다. 토론회는 매주 일요일 3시 독립관에서 개최하고, 논쟁적 주제를 선정해서 찬성과 반대 연사 각 2명이 발표를 하며, 회원들은 토론자로 참가하고 회원이외의 방청인도 참관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분야의 문제를 주제로 모두 34회 개최되었으며 제8회 토론회부터는 약 5백 명씩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독립신문>의 국민 계몽이라는 목표는 독립협회의 토론회를 거치면서 근대 시민의 탄생과 성장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1898년 2월 서재필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운동을 계몽운동으로부터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전환한다. 첫 번째 작업으로 황제에게 강국들이 나라를 넘보고 내정을 간섭하여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므로 국민과 함께 단결하여 밖으로는 자주독립을 굳게 지키고 안으로는 과검하게 내정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리고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한다. 최초의 만민공동회에는 서울 시민의 약 17분의 1인 1만여 명이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였다. 이 민중대회에서 미전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연사들의 연설을 들은 민중들은 박수로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12일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지 않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동일 장소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수는 더 많아져 수만 명의 민중들이 운집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을 추진한다. 근대적 정치제도의 건설에 대한 논의와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10월 28~29일 관민공동회를 거쳐 의회설립법이 제정 공포되었지만, 의회가 설립되기 하루 전날인 11월 4일 황제에 의해 개혁정부의 해산, 독립협회 해산과 간부들의 체포 명령이 내려지면서 의회설립의 꿈은 좌절된다.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던 곳은 지금의 광화문과 종각역 사이 종로구 서린동이다. 만민공동회가 열리면 종로의 상인들은 가게문을 닫고 참여했으며, 밥장사는 장국밥을 술장사는 술을 가져왔고, 부자와 거지 가리지 않고 기부금을 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낯설지 않고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은 역사의 반복 때문일 것이다. 2016년 가을에서 2017년 봄까지 이어졌던 촛불집회는 만민공동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898년 12월 1일자 <독립신문>의 사설은 당시 보름 넘게 철야투쟁을 하던 민중들을 “만민들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무한 고생한다”고 묘사했다. 그해 겨울 우리도 120여 년 전 민중들의 열망과 분노로 가득 찼던 그 길 위에 그렇게 서있었다.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으로 지나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의 한 구절이다. 19세기 한국의 사상지형을 설명하기에도 적절한 말이다. 19세기 사상의 하나는 동학으로부터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민중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초기 개화사상으로부터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에 이르는 계몽적 개화의 흐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앞의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한 전통적 위정척사의 흐름이다. 이들을 ‘흐름’이라고 표현한 것은 1850~60년대부터 1900년 초까지의 각각의 사상 안에서도 변화가 매우 컸으며, 단일한 하나의 사상으로 규정하거나 체계화되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첫 번째이고 가장 주목받지 못한 것은 두 번째이다. 앞선 시대와의 사상적 연관을 찾기 어렵다, 새로운 철학적 내용이 없다, 외세 의존적인 태도로 실제 많은 친일인사를 배출했다는 감정적 배제 등이 그 이유였다. 필자가 개화사상에 가졌던 오랜 편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19세기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과 방법으로 지나온 흔적이며 역사일 것이다. 오랜 편견을 버리고 갖게 된 생각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길을 읽고, 정리하고 그런 후에 평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다. 내가 찾고 있는 우리의 근대와 현대는 그렇게 지나온 시간과 길들에 의해 촘촘히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고자: 박영미(한양대 철학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7세기 이후 중국과 한국의 근대에 대한 모색과 사상적 연관을 연구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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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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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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