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서열화 폐지를 위한 물음은 우문우답(愚問愚答)인가? [썩은 뿌리 자르기]
질문놀이
나이가 들면서 혼자 망상(妄想)하는 습관이 생겼다. 망상놀이의 즐거움은 엉뚱한 질문과 대답이다. 단순한 예로, 쥐가 낙동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을까? 오리발로 헤엄쳐서? 전용보트를 만들어서? 아! 보로 건널 수 있겠구나! 이 놀이의 시작은 질문이며, 조금씩 변형시켜 계속 질문한다. 윤리적 규범을 생각하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해야겠지만, ‘혼자만의 산책’이기에 ‘우문우답(愚問愚答)’으로 끝난다. 사춘기에 끝냈어야 할 놀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의 경우 건망증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치함이 더 큰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학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질문일까 아니면 풀 수 없는 질문일까? 만약 풀 수 있고, 사회적 의제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를 정한다면 몇 번째에 해당할까? 한국사회는 학벌사회일까? 이에 대해 몇 %나 반대할까? 한국의 학벌사회가 공정하다는 주장에 대해 몇 %나 찬성할까? 만약 불공정하다면 그것을 극복할 의지를 가진 사람은 몇 % 정도일까? 만약 그 의지가 있다면 전국의 모든 대학을 없앨 수 있을까? 모두 없애지 못한다면 그 대학들을 평준화할 수 있을까? 평준화를 할 수 없다면 대학입시만이라도 없앨 수 있을까? 대학입시를 없앨 수 없다면 선발방식이 아니라 추첨방식은 안될까?
이 질문들을 보고 화가 나신 분들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분들이고,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하신 분들은 우문우답(愚問愚答)의 동호회원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대답은 질문 속에 있고, 인간은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기 마련인데, 질문의 연쇄가 현실적으로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학벌사회에서 부모님과 나는 전우(戰友)
‘학벌사회’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교육문제이면서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한국사회의 커다란 욕망거울이었고,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꿔왔다. 그리고 그 정책의 지렛대는 언제나 대학과 그 입시의 변화로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반복되는 대학입시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입시전형이 다양화되면서 소위 ‘수능’에 대한 관심은 과거 ‘학력고사’에 대한 관심보다 줄었다. 그러나 과거 고사장 앞에서 엿을 붙이고 기도했던 부모님의 모습보다 각 대학 입시설명회장을 뛰어다니는 부모님의 모습이 더 강조될 뿐이다. 형태는 바뀌어도 ‘병목현상’처럼 대학입시에 집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우리의 교육현실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 졸업생의 85%가 넘게 대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양적으로 보면 대학입시와 관련된 경쟁이 없어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모 일간지에서 학벌사회에 관련된 대안을 모색하고자 기획보도를 마련하였다. 기사 내용 가운데 2006년 대학졸업자 월평균 소득을 소개했다. 1-5위권 대졸자 227.5만원, 6-10위권 대졸자 205.4만원, 11-30위권 대졸자 193.9만원, 그 외 4년제 대졸자 169.0만원, 전문대졸자 158.0만원. 이를 기계적 방식으로 분석하면, 대학이 등수로 매겨져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소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대학의 서열화와 소득의 등급이 연동할 뿐만 아니라 대학의 등급이 소득의 등급을 결정한다. (기사원문)
예시가 소득 차이만을 제시해 단편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자신의 경험이든 가공된 공포 혹은 불신의 이야기든 학력과 소득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현상이다. 물론 이것이 반례(反例)적 개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구조와 믿음 속에서 대학 서열의 정점에 오르려는 이 전쟁에서 내 부모, 나 그리고 내 자식은 쉽게 ‘전우(戰友)’가 된다.
학벌사회 속에 강화되는 불공정한 경쟁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전장(戰場)’은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비판을 받는다. 보수진영의 경우 교육정책의 ‘개혁’의 외양은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이다. 단순한 학력고사에 따른 단순한 서열화보다 다양한 전형을 통한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에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진보진영의 경우도 학력고사에 따른 서열화의 문제점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해 온 다양화가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보다는 사교육을 매개로 사회적 양극화의 재생산이라는 점을 비판한다.
지난 달 30일 전국 모든 초·중·고교의 학교별 201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소위 ‘일제고사’의 결과가 공개되었다. 그 결과를 보도한 신문의 내용을 인용하면, “서울지역 초등학교에선 사립학교가, 중학교에선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가, 고등학교에선 특수목적고(외국어고·과학고·국제고)가 성적 상위 20위권을 휩쓴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하위 20위권에는 경제 여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의 학교가 다수를 차지해, 지역에 따른 학력 양극화가 극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원문)
물론 이 속에서도 ‘개천의 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년 11월에 내놓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외고 교육 실태’보고서를 인용한 모 주간지의 보도를 보자. “외국어고 학생 가운데 가구 소득이 500만원을 넘는 비율은 49.4%지만, 일반고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 이상 떨어진다(23.8%). 사교육 참여도도 달랐다. 외국어고 학생 10명 가운데 9명꼴(88.7%)로 사교육을 받지만, 일반고에서는 65.3%만이 사교육을 받았다. 월평균 사교육비도 외국어고 학생이 45만3천원으로 일반고 학생(22만원)의 두 배를 넘었다.” (기사원문)
인용문을 끌어들인 것은 현재 초·중등 교육과정이 출발점부터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제도는 ‘학력고사’에 의한 전국적 서열화를 개혁한 것이 아니라,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이란 가면을 쓴 부모들의 돈 잔치의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불공정한 정글 속에서 경쟁은 오히려 강화된다. 그 속에서 대학의 서열화뿐만 아니라 이제 특수목적고를 매개로 한 초·중등 교육기관의 서열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대학서열화의 극복 없이 학벌사회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럼 대안은? 그 동안 많은 교육학자와 정당 및 시민단체들이 대안들을 제시해왔다. 많은 논의과정은 학벌사회의 극복이란 총론적 방향에 동의하지만, 그 실현의 구체적 정책 수단에 대해서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진보정당의 경우 ‘국공립대의 통합네트워크’내지 ‘통합단과대 체제’를 통해 최소한 국공립대부터 서열화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제시한다.(기사원문)
그러나 이러한 진보진영의 대안 제시는 현실의 벽 앞에서 항상 외면을 당한다. ‘누더기 법’같은 교육 정책의 변화는 교육 정책에 강한 불신과 공포가 자리 잡게 만들었다. 따라서 교육 정책이 어떻게 변하든 사교육을 통한 내 자식 밖에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장(戰場)’에서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다.
따라서 학벌사회의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는 어려우며, 먼 길이다. 그러나 모든 교육과정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대학의 서열화를 폐지 내지 축소해가기 위한 계기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학벌사회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출발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초·중등 교육과정을 정상화하더라도, 대학의 서열화가 존재하는 한 사교육에 대한 열망과 공교육 과정의 파행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학서열화에 근거한 프리미엄의 유혹과 공포를 우리가 벗어나지 않는 한 학벌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 내딛기 어렵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해서 많은 남자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특히 ‘군대스리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축구대표의 경기력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포털의 토론장은 벌집이 된다. 교육문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교육의 경우 대부분 부모님이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정책의 방향을 크게 전환할 경우 벌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학서열화 방지를 위한 고등교육제도의 변화와 그 입시제도의 근본적 변화 없이 학벌사회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면, 그 벌집을 우리는 건드릴 수밖에 없다. 현실적-정책적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 자체의 목적과 규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벌집 건드리기 놀이가 고통스럽지만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놀이과정에서 질문은 100년을 내다보는 큰 물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비록 우문우답(愚問愚答)이더라도.
김광호 (서울시립대 석사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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