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성장’의 형용모순 – 자연과 자본 [썩은 뿌리 자르기]

Spread the love

[썩은 뿌리 자르기]

‘녹색성장’의 형용모순

?-? 자연과 자본 –

 

글: 박민철 (건국대 박사수료)

4대강 살리기 사업과 ‘녹색성장’.

‘악마를 보았다’보다 더욱 잔인하며, ‘동물의 쌍붙기’(2002년 영화진흥법이 개정 시행된 이후, 첫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북한 영화)보다 더 자극적이며, ‘죽어도 좋아’(두 번째 제한상영가 판정)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어서, 이들 영화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나서서 방영을 금지하라고 요청했던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을 보았다.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에 담긴 내용을 정리하자면, 1.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그동안의 홍보와는 달리 홍수나 물 부족 문제 해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으며, 2.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대운하 사업과 유사한 방향으로 변경되었으며, 3. 현재의 계획 하에서 강에 호화 여객선을 띄울 수 있는 수심 6미터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공사비용이 지출되고 있으며, 4. ‘녹색성장’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생태계 파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보다도 4번이다. ‘녹색성장’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아래에서 시행되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 그에 걸 맞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경축사를 통해 ‘저탄소 녹색성장’을 ‘新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내세웠다. 수사법에 놀라울 만치 능한 그들이 내세운 이 말은 꽤나 섹시했고, 그에 따라 국가 주도 사업 및 국가 정책 맨 앞에 사용되고 있다. 그 중 4대강 살리기 사업은 4대강을 ‘녹색성장’의 거점으로 만들자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런데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이 말하고 있는 비판의 가장 핵심은 4대강 살리기 사업≠‘녹색성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PD수첩 ‘수심 6M의 비밀’편이 주장하는 ‘4대강 살리기≠녹색성장’이라는 비판은 어쩌면 비판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 PD수첩과 우리가 생각하는 ‘녹색성장’과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녹색성장’의 의미는 ‘녹색성장’이라는 단어에 담긴 형용모순으로 인해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성장’에 담긴 형용모순

국어사전에 따르면 형용모순은 ‘형용하는 말이 형용을 받는 말과 모순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둥근 사각형’이나 ‘작은 거인’, ‘소리 없는 아우성’ 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가 고안한 ‘녹색성장’이라는 단어에도 표현적인 형용모순이 담겨져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이 단어를 의미적으로 풀어보면 ‘녹색의 성장’과 ‘녹색적인 성장’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런데, ‘녹색성장’에 담긴 형용모순으로 인해,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녹색의 성장’과 ‘녹색적인 성장’은 결코 아니다.

‘녹색성장‘에서 우선 ’녹색‘의 대표적인 대응어는 곧 ‘자연’이다. 다들 알다시피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 여기에서의 ‘성장’은 인위적인 참여와 조작으로 그것을 발전시키고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물론 인위적인 참여와 조작이 없는 ‘자연적인 성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고안한 ‘녹색성장’에서 성장은 무분별한 삽질과 땅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며 자연적인 성장과 발전이라는 의미를 애초부터 담고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자연성(自然性)과 인위성(人爲性)라는 구도 속에서 ‘녹색의 성장’은 의미적으로 형용모순에 빠진다.

그렇다면 ‘녹색성장’이 ‘녹색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녹색적인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성장이 곧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해야 함과 동시에, 이러한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드러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성장이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포함하는 일, 그리고 녹색의 의미와 가치가 성장이라는 구체적인 모습 속에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보자. ‘녹색성장’과 같은 의미에서 ‘성장’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은 ‘경제성장’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표현방식은 일정 기간 동안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것을 의미하는 GDP를 들 수 있다. 하지만 GDP에는 눈에 보이는 가치만이 표현될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담겨 있지 않다.

반면에 녹색은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녹색이 갖는 가치는 눈에 보이는 이익과 지표로 전환되지 않는다. 예컨대, 산을 깎아 레저시설을 만들고 그 산에서 나온 나무로 어떤 것을 만들 때 GDP는 늘어나지만, 산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삶의 재충전과 회복 등은 GDP라는 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강을 파서 그 모래로 무엇을 만들거나, 강 주위를 개발하여 대단위 레저시설을 만들 때 GDP는 늘어나지만 강 자체가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혜택과 이익은 GDP라는 수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장이라는 가시성(可視性)과 녹색이라는 비가시성(非可視性)의 구도 속에서 역시나 ‘녹색적인 성장’은 의미적으로 형용모순에 빠진다.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 속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애초에 그들이 생각했던 방식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형용모순을 알고서도 활용한 건지 아니면 모르고 사용한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골적으로 얘기해 전자라면 ‘나쁜 놈’이고 후자라면 ‘모자란 놈’이다.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

이러한 형용모순은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녹색’과 ‘성장’의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녹색’은 성장이라는 만고불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성장은 눈에 보이는 지표로 확인가능하고 계산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즉 녹색이 갖는 가치와 의미는 수단에 불과할 뿐 목적과는 별 상관없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지표와 이익들로 환원되기 위해 바쳐진 제물과 같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녹색성장’은 이렇게 보자면, ‘녹색의 성장’도 아니며 ‘녹색적인 성장’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성장’은 ‘녹색을 통한 성장’이다. 이것은 녹색을 희생시켜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하는 것, 녹색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성장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 포함시키는 것, 그리하여 산을 깎고 강을 파내어 구체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가치까지도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바꾸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이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통하면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변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될 때에만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잠재적으로 담겨 있는 가치를 눈에 보이는 이익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최우선적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녹색이 갖는 가치와 비슷한, 눈에 보이는 이익들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시스템 이 녹색의 가치들은 훼손되어 버린다. 이명박 정부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한 ‘녹색을 통한 성장’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녹색의 의미와 가치를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규정하는 이명박 정부의 인식틀 속에서 성장의 의미와 가치들도 경제주의적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들에 의하면 성장은 개조 및 개발과 동의어이다. 앞 선 예처럼, 성장은 GDP로 대표되는 수치로 평가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이익들을 우리들 앞에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주의적 사고방식과는 다른,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은 인간 삶을 질적으로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보편적 가치들의 증대를 의미한다. 이 보편적 가치들에는 도덕성, 역사적 책임의식, 공동체의식과 같은 거대한 것들로부터 배려와 존중, 사랑과 베풂, 평화와 공존 등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가치들도 포함된다. 이것들은 결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이익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증감의 결과가 눈에 보이는 지표와 표시들로도 나타나지도 않는다.

녹색의 의미와 가치들, 그리고 성장의 의미를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 속에서 ‘녹색성장’은 하나의 형용모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녹색의 성장’도 아니며 ‘녹색적인 성장’도 아닌, 녹색을 희생시켜 눈에 보이는 성장을 이룩하자는 ‘녹색을 통한 성장’은 그들이 만들어낸 ‘녹색성장’의 형용모순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녹색의 진정한 가치: ‘녹색을 통한 성장’에서 ‘녹색을 위한 성장’으로

어찌됐건 섹시한 수사법에 강한 현 정부는 ‘녹색성장’이란 말을 만들어 냈다. 미려한 수사에 반해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녹색성장’을 그들의 무모한 사고방식에서 건져내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그것의 첫 걸음은 ‘녹색’과 ‘성장’의 의미를 본래의 그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녹색을 통한 성장’이 아닌 ‘녹색을 위한 성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곧 ‘녹색’이 갖는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녹색의 가치는 굳이 여기서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들 모두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삶에 구체적인 이익으로 돌아오는 녹색의 가치를 보존하고 증대시키는 것은 ‘녹색을 통한 성장’이라는 형용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위 ‘생태근본주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모한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을 또한 아주 급진적인 주장으로 중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서울의 조그마한 개천을 복원시킨 경험으로 전국의 4대강을 살리겠다고 했으니, 그분의 ‘사이즈’로 볼 때, 이제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은 전 세계의 5대양을 살리는 일일 것이다. 만약 그러한 일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그 땐 제발 ‘녹색성장’이란 말을 버려주십사 하는 바람뿐이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