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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4월 제17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발제: 송인재│2025.04.11.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주제: 『중국현대철학사론』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발제자: 송인재(한림대)
-일시: 2025년 4월 1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 줌 온라인

이번에 살펴볼 양수명은 이규성 선생의 소개에 따르자면 대체로 유교를 중심에 두고 서구 사상을 흡수함으로써 현대에 되살리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유교는 양명학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유교의 인 개념을 서구 현상학자 오이켄의 직각 개념과 연결하여 정의적 공감을 나가고, 도 개념을 베르그송의 생명 개념과 연결하여 우주의 대 생명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생명과 정의적 공감에 기초하여 공동체(향촌)를 건설하려는 사회운동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양수명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군요. 강중기 선생이 책으로 발간한 바 있고 이철승 선생도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규성 선생도 거의 한 권의 책에 가까운 분량을 통해 양수명의 사상을 연구했군요. 아마도 전체적으로 보아 이규성 선생의 사상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에 남달리 애정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발표는 중국현대철학사상 연구자로 알려진 송인재 선생(한림대)이 맡아서 해 주시겠습니다.

 

발제문: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20250411

 

영상 출처: https://youtu.be/yMWvWZfSjFM?si=b8RAwnYEmdJA4wO_

헤겔 형이상학산책36-모나드와 일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산책36-모나드와 일자

1)

앞에서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 사이의 관계가 설명됐다. 대자 존재는 속성의 관계인 미분적 힘이며 이 힘을 통해 동일한 존재가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그것이 곧 일종의 존재다. 여기서 일종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대자 존재는 실재에 내재하는 존재[Insichsein] 즉 관념적인 것[Idealitaet]이 된다.

헤겔은 양자의 관계를 논의한 다음, 양자의 통일체로서 일자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대자 존재의 계기들(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이 몰락하여 구별 없는 것으로 되면서, 직접적인 것 또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직접성은 부정에 근거하고 이 부정이 그 직접성의 규정[Bestimmung: 본분]으로 정립된다. 대자 존재는 이렇게 해서 대자 존재자가 되며, 그 직접성 속에 그 의미가 사라지면서, 자기의 한계가 전적으로 추상적으로 된 것 즉 일자[Eins]다.”(논리학 재판, GW21, 150-151)

‘일종의 존재[Sein fuer Eines]’0가 다시 ‘일자[Eins]’로 변화하는데, 그 개념이 유사하기에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위의 인용구에서도 헤겔은 일자를 규정하면서 이 일자는 직접적인 것이지만, “부정에 근거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즉 대자 존재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산출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헤겔은 일종의 존재를 규정하면서도 유사하게 말한다. 그는 일종의 존재를 “자기를 지양된 타자로서 간주하면서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는데, 즉 대자 존재에 의해 지양된 직접적 존재라는 말이다.

2)

이처럼 ‘일종의 존재’와 ‘일자’를 규정하는 말이 유사해서 혼란스러운데, 헤겔의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같은 것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말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양자에 공통적 요소 즉 ‘대자 존재에 의해 정립된 직접적 존재’를 대자 존재가 정립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일종의 존재’며, 반면 직접적인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곧 ‘일자’다. 일자가 이런 직접성의 차원에 있으므로 이 일자는 다른 일자에 대해 외면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 계속 들어온 소금의 예를 들자면, 소금의 고유한 대자 존재는 대립하는 두 속성의 관계 즉 미분적 힘이다. 이 힘에 의해 소금이 만들어지면, 이 소금은 일종의 소금이 된다. 그런데 이 소금을 직접적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소금과 구별되는데 이 측면에서 보면 이 소금은 일자라고 하겠다.

일종의 존재는 대자 존재와의 관계에서 논의되었다. 그 관계는 일자의 내적인 관계다. 이제 그것이 일자로 규정되면서 다른 일자와의 외면적 관계가 논의되기 시작한다. 즉 일자와 다자의 관계다.

3)

일자와 다자 사이의 관계가 논의되기 전에, 헤겔은 주석에서 관념론적 사유에 주목한다. 그 가운데 헤겔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이다. 헤겔은 이 주석에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여기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논란이 깔렸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원자론자가 문제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없으니, 존재는 일자이며, 부동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운동과 다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우니, 이를 설명하기 위해 원자론자는 다수의 일자로서 원자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원자는 질적인 차이는 없고 다만 양적인 차이 즉 크기와 형태의 차이만 가질 뿐이다. 원자에서 이 차이는 외면적이고 우연적인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원자론자가 다수의 원자를 도입한 이유는 이해된다. 운동과 다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에서 일자는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일자일 뿐이니, 여기서 다를 끌어내는 필연성이 없다. 결국, 원자론자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유의 필연성을 희생했는데, 사유의 필연성 쪽에서 보면 참으로 찜찜한 타협이었다고 보겠다.

일자가 어떤 외적인 차이가 아니라 내적인 차이를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 부상하면서, 원자는 크기와 형태의 차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가지게 되고 이 무게가 운동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도 원자론자에게 무게라는 개념은 크기나 형태의 차이와 동렬에 놓이면서 우연적이고 외면적인 차이로 간주하면서 그 의미가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

4)

원자론자의 고민을 이어받은 것이 시대를 뛰어넘어 라이프니츠가 아닌가 한다. 라이프니츠의 모다드 즉 단자(일자) 또는 단순 실체는 자주 원자에 비교된다. 그러나 양자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 원자는 그 자신 내적인 차이 즉 질적인 차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서 단자는 질적인 차이를 지니는데, 그 차이는 곧 표상의 차이이며, 이는 내적 원리에 기초한다.

표상이란 관념인데, 이 관념과 주관 사이에는 자기 관계가 성립한다. 이 자기 관계가 곧 관념성[Idealitaet]을 의미한다. 관념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산출하는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곧 욕망이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에서 표상의 차이를 결정하는 내적 원리는 욕망이 된다.

“변화(즉 하나의 표상에서 다른 표상으로 이행)를 불러일으키는 내적 원리의 행위가 욕망이라 불린다.”(모나돌로기, 명제 15)

원자론자에게서 원자는 일자이지만, 자기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자라면, 자기를 통일하는 것이니, 자기 통일성을 통해 자기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라이프니츠는 단자는 표상의 차이를 지니며, 그 힘은 곧 내재하는 힘인 욕망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욕망이 곧 표상하는 능력이고 그 산물이 표상이다.

5)

헤겔은 주석에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욕망 즉 표상 능력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간파한다. 헤겔은 라이프니츠의 표상 능력(욕망)을 ‘대자 존재’로, 표상을 그것에 의해 정립된 ‘일종의 존재’로 규정한다.

“표상하는 작용이 대자 존재다. 그 속에서 규정성은 한계가 아니므로 하나의 현존이 아니며, 다만 계기다.” “이 체계 속에서 타자 존재가 지양된다.” “다양성은 다만 관념적인 것이며 내적인 것이다.” “단자는 그런 다양성 속에서 다만 자기 관계하며 변화는 단자 내부에서 스스로 전개되고 하나의 단자가 다른 단자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재판, GW21, 149)

라이프니츠에서 단자는 질적 차이를 가지지만, 자기 규정한다는 생각은 곧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아마 이런 혼란이 없었다면, 헤겔은 라이프니츠를 높이 평가했을 텐데, 이 혼란 때문에 헤겔은 심지어 철학사 강의에서 라이프니츠에게 독자적 자리조차 마련해 주지 않았다.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할당한 높은 지위를 생각해 볼 때 라이프니츠에 대한 이런 푸대접은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한데, 이어지는 주석에서 헤겔의 라이프니츠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헤겔의 심정이 이해될 만하다.

사실 라이프니츠는 욕망과 표상의 개념에서 두 가지 대립하는 길을 간다. 한편으로 단자는 자기 규정하는 것이니 단자는 자기 관계하는 일자이고, 따라서 타자와 관계하는 어떤 통로도 없다. 무수한 단자들은 고립적이며 타자와 관계하는 창을 가지지 않는다.

단자가 자기 규정하는 것이라면, 단자의 자기규정은 우연히 규정된 것이니, 각자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세계, 맹목적인 세계일 것이다. 그러면 이 세계가 조화에 이르려면 신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게 라이프니츠가 갔던 예정 조화론이다. 이 세계의 우연한 것들은 신의 최선 선택에 의해 충분하게 존재하도록 이유가 주어진 존재다.

“그러나 충분한 이유가 우연한 진리 또는 사실의 진리에 발견되어야 한다.”(모나돌로기 36), “그러므로 충분하거나 궁극적 이유는 이런 더욱더 우연한 사물의 일렬 또는 계열 밖에 아무리 그런 사물이 무한하더라도 그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모나돌로기, 명제 37)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그런 비난을 의식한 듯 라이프니츠는 자기의 주장을 완화한다. 그는 신이 우연적 사물의 충분한 원인이므로, 그것들은 서로 충분하게 얽혀 있다고 한다.

“이 실체가 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의 충분한 원인이므로,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고 이 신은 충분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세부적인 것은 완전하게 얽혀 있다.”(모나돌로기, 명제 39)

여기서 “완전하게 얽혀 있다”는 말은 상호 조화를 이룬다는 뜻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실제 상호 관계를 가진다’라는 의미로 전의한다.

“이제 모든 창조적 사물의 이런 상호 그리고 나머지 전체와의 얽힘 또는 적응은 이 단순한 실체가 그것이 표현하는 모든 다른 것들에 대해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주의 영원히 살아 있는 거울이다.”(모나돌로기, 명제 56)

그래서 다시 단자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표상하는 능력에 한계를 둔다. 한편으로 단자는 다른 단자와 관계한다. 이런 관계에서 어떤 자극이 단자에 주어지며 단자는 자신이 지닌 욕망의 힘을 통해 이 주어진 자극을 표상화한다. 즉 관념으로 변화시킨다.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능동적이며 따라서 더 완전한 단자가 된다. 즉 능동적 단자일수록 세계에 대한 표상은 더 분명해진다.

단자와 단자 사이에 이 관계가 있으므로 모나드는 각자 자기의 표상 능력에 따라 우주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주관성의 세계다. 그 결과 유명한 정원의 비유가 나온다.

“단자의 본성은 사물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어떤 것도 단자가 사물의 선택된 일부의 모습만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 모든 반영은 우주의 세부적인 사물들이 전체로서 관련되는 한 혼란스러운 반영일 뿐이다. … 단자는 지식의 대상에 관해 한계를 지니지 않으나 지식의 양상에 관해서는 한계를 지닌다.”(모나도로기, 명제 60)

“사물의 모든 부분은 식물로 가득 찬 정원과 같은 것으로 또는 고기로 가득 찬 연못과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모나도로기, 명제 67)

결정적으로 라이프니츠는 단자의 자기 관계와 단자의 타자 관계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신이 조화롭게 만들었다는 데서 곧바로 모나드가 상호 관계를 지니고 서로 반영한다는 데로 나갔다. 라이프니츠에서 두 가지 길은 충돌한다. 단자가 고유한 질을 갖는다면, 이 세계는 신이 조화롭게 만든 세계다. 반면 단자가 서로 관계한다면, 그 세계는 주관적 세계니 서로 충돌하고 갈등할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주석에서 라이프니츠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자에서 관념성은 다수성에 외면적으로 머무르는 형식이다. 관념성은 단자들에 내재하고 단자들의 본성을 표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단자의 태도는 한편으로 그 현존에 속하지 않는 조화이다. 즉 이 조화는 예정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단자의 현존은 타자 존재로 파악되지도 않고 관념성으로 파악되지도 않으며 다만 추상적[주관적] 다수성으로 규정된다.”(논리학 재판, GW21, 150)

6)

헤겔이 일자의 개념에서 고민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규정성이 있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한다는 것과 무관할 수 없다. 단순히 자기 규정성이라면 완전히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니 규정성은 타자와 관계를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규정성이란 부정성이며 즉 타자에 대립해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관계하는 일자에서 어떻게 타자와의 관계가 나올 수 있을까?

라이프니츠는 유감스럽게도 자기 규정성과 타자 관계라는 두 요소가 규정성을 위해 동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업적이다. 하지만, 그는 그 연관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라이프니츠 덕분에 헤겔은 다행스럽게도 그 연관성만 밝히면 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곧 ‘일종의 존재’에서 ‘일자’로의 이행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종의 존재’나 ‘일자’는 동일한 것을 말한다. 다만 전자는 그것이 대자 존재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며 이런 점에서 그것은 모나드처럼 단자이며 자기 관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동일한 것이 곧 일자다. 이 일자는 직접적인 것이며 그런 점에서 어떤 규정성을 지니고 있고 그런 한 타자에 대립하니, 타자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대립이 곧 그들의 관계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일자로부터 곧바로 일자와 다자[多者]와의 관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런 이행을 위해서 헤겔이 만든 장치가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사실 앞에서도 계속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했다. 생성이라는 매개를 거쳐 현존으로 복귀했으며, 현존과 타자의 대립이라는 매개를 거쳐 유한성, 즉 어떤 것으로 복귀했으며, 유한성과 무한성의 대립을 통해 즉 대자 존재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제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 사이의 대립을 매개해서 일자로 복귀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지만,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사실 헤겔 논리학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문제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매개의 직접성으로의 복귀는 매개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직접성을 전제로 하여 출발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매개가 개념이 타자화하는 운동 정립하는 운동이라면, 매개의 복귀는 곧 ‘자기 내로의 복귀’이며 ‘근거로의 복귀’라는 말이다. 결과가 출발점이 되고 출발점은 그 결과라는 순환적 논리가 헤겔의 논리적 사유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이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말이 이해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자 존재(예를 들어 소금의 미분적 힘)를 통해 일종의 존재가 생성하면서 동시에 본래 출발점인 일자(소금)로 되돌아온다. 본래 그 일자는 특정한 규정성을 지닌 것(예를 들어 소금)이니, 이를 통해 규정성이 출현한 것이다. 본래 출발점인 일자들의 관계를 일자의 공간(예를 들어 소금들이 관계하는 공간)이라 한다면, 대자 존재는 이 일자의 공간 내에서 활동하는 매개자인 셈이다.

7)

매개가 직접성으로 복귀한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생성하는 과정이다. 일자에서 대자 존재로 나가는 길은 분석과 추상의 길이다. 반면 이런 생성하는 길은 구체화의 길이며, 자기를 이원화하는 타자화의 길이다.

이런 타자화, 이원화의 길에서 일종의 존재에서 일자로의 이행을 생각해 보자. 이런 대자 존재 즉 자기 관계하는 것으로부터 다수의 소금이 나오는데, 이 생성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일자가 규정성을 갖는다면, 바로 그 때문에 일자는 다수의 일자와 관계하게 된다. 즉 하나의 일자가 나온다면,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다수의 일자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고유한 규정성을 가진 일자가 순수하게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규정성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금의 미분적 힘이 있다면 거기서 다수의 소금이 나오는 것은 불가피하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하나의 소금이 나올 수도 있고 아예 아무런 소금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분적 힘은 자기를 다수로 산출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니, 하나의 소금이 아니라 다수의 소금이 나오는 것은 항상 잠재적인 가능성이다.

‘존버’ 대 ‘난가’ [천 하룻밤 이야기]

‘존버’ 대 ‘난가’

2025년 5월 21일 소만(小滿):

비가 오고 모내기를 하는 절후 소만인데, 예전에는 논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생산도구의 발달로 논길에는 뛰엄뛰엄 모심기 기계들이 있다. 새참은 택배로 하는가? 잘 네모진 논들을 가로 세로 지르는 논길에는 오토바이가 지나가기도 한다.

*

까마득한 옛 이야기 속에는 신선(神仙)이 살았다고 하고, 그 하늘에서부터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는 환인(桓因)에서부터 맑고 상쾌한 아침의 햇살을 받는 나무들이 잘 자라는 곳에 터전을 잡은 단군(檀君)도 있었다. 이런 선도(仙道) 또는 샤먼의 이야기는 오래 즐겁고 평온하게 살아가려는 욕망(탐욕이 아니다)을 표현하였으리라. 그러다가 마을 공동체가 모여서 도시를 형성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체계화하면서, 제도를 전승하는 방식에서 입말의 소통을 넘어서 문자를 필요로 해서 중국의 문자를 받아들였고, 그러다가 불교라는 문화가 들어와 천년을 지내면서, 이 땅을 안양정토 또는 불국토를 만든다고 하면서, 불교는 백성들의 고통과 불안에 치유와 위로를 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세계는 언제나 변전하였다. 토지 소유의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여기는 변역(變易)은 삶의 태도를 바꾸었다. 차(茶)를 마시는 문화에서 누룽지의 숭늉을 마시는 문화로 이행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 전향을 설명해 주지 못하지만, 학문의 변화와 삶의 양식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맑스라면 생산도구의 변화와 이 도구를 전유(소유)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토지를 절(사 寺)의 소유에서 왕조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선후(先後)든 중경(重輕)이든 유학을 토대로 하는 지배층의 담론으로 넘어갔다고 할 것이다.

유교의 전래에서 주자학 또는 신유학은 불교에서 공과 색의 선문답(변증법적 논변)에 대항하여, 선진유학에다가 태극이 무극이라는 담론으로부터, 음양(陰陽)과는 다르지만 이기(理氣)를 중심 논의로 전개하였다. 이런 이원론은 서양의 근세에서 영혼과 신체(정신과 물질)와 유비적으로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담론을 생산하였다. 이런 담론의 대조 또는 유비는 하늘과 땅의 이원화를 대상화하여 다루는 방식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둥글고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 인간들이 산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리고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연에서 여러 종들 중의 하나의 종임을 알게 되었다. 점점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물자의 소통이 늘어나고, 서양의 선교사들이나 동양의 군자들 사이에서 소통으로 세계가 하나임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통의 초기, 17세기에 서양의 학자들이 놀란 것이 있다. 유일신 또는 신학이 없이도, 높은 도덕심과 국가체제를 형성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중국은 유일신이 없음에도 백성들이 훌륭한 덕성을 지신 도덕적 삶을 살아가며, 지식인들이 체제 유지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신학적 사유에서 타종교와 문화를 알지도 못하면서 비하시키는 경향은 오만과 치졸함이 섞여있었다. 동양에서는 자연에 대해 격물치지(格物致知)한다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신 앞에서 평등과 달리, 동양에서 하늘아래 평천하를 이루기 위해 군자들과 학식 있는 선비들은 사적 탐욕을 벗어나 공화(화이부동)를 실행하려 한다는 점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서양은 기술발달과 도구의 무기화로, 타 지역의 지배를 통한 부의 축적을 신의 착한 부름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들의 탐욕과 오만은 지구상에서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며 식민지를 확장하였다. 수탈과 약탈이 신의 부름일까? 지금도 그들이 행한 전쟁은 그들만의 신의 축복이겠는가? 동양의 도덕과 지식의 습득시기에 서양이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탐욕(욕망이 아니다)의 서양인들은 식민지지배를 보다 확장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조합을 시도하였다. 이런 패거리의 내밀한 결탁(음모)은 19세기 말에 종교의 교리, 국가의 폭력, 지식의 독단, 이 셋을 결합하여 세 패거리(카르텔)의 야합을 이루었다. 이들이 행한 야합 또는 음모에는 벩송이 말하는 선전제미해결(악순환)의 오류를 감추고 있었다. 이 은폐에는 절대자 또는 완전성에 이르는 변증법이 있다고 선전했었다. 이 변증법에는 백성과 인민이 없다. 이런 전도된 사상을 뒤엎어서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독재)를 변증법으로 설명한 이는 맑스였다.

이들은 식민지 약탈과 강압은 기술 문명(문화가 아니다)을 전유하면서 도구를 무기화하였다. 패거리들이 무기를 가지고 식민지에 협박과 공포를 심으며, 패거리들의 재화의 획득을 혈안이 되어 욕망의 충족이라 가르치지만, 욕망이 아니나 탐욕과 도적질의 미화였다. 19세기말 제국주의와 20세기 후반의 제국은 국제질서라는 이름으로 전쟁의 위협으로 여전히 도적질을 실행했었다. 물론 이런 약탈에 대해 저항과 항쟁을 통한 세계사적 혁명은 20세기 전반에 소련과 중국을 낳았다.

그럼에도 패거리들은 지배의 논리를 버리지 않았고, 더욱 견고한 제국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자신들의 삿된(메샹, mechant) 생각을 은폐하고, – 미군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주둔하면서 신식민지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수법은 여전하다 – 기술문명의 이식에 서투른(mauvais) 민중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방식으로, 식민지에 독재자를 심으며, 잉여 착취와 자원 수탈을 자행했다. 마치 중세의 마남 사냥을 하듯이, 그들은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면서 이에 대해 저항과 항거를, 거꾸로 마치 항쟁자를 음모자처럼 말하는 것도 이 패거리들이었다. 이들은 반역이니 역적이니 하면서, 악순환의 잘못을 민중에게 넘겼다. 루소의 말대로 인민은 선량하게 태어났으나 사회와 제도의 감옥에서 살게 만들었다고 하듯이, 태어나면서 제국의 수탈을 당해야만 했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제국의 세계화는 두 가지 점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하나는 생명계에서 유전자와 그 변이들은 과학의 발달로 질병 없고 고통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지구상에 질병과 비참은 여전하다. 다른 하나는 기술의 무기화를 통해 제국이 주도권을 가질 것만 같았지만 규소의 시대에 누리소통은 지배와 피지배의 방식을 바꾸어 문화의 다양성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거가 현재를 살리거나, 죽은 자가 산자를 영향을 주는 것을 넘어서, 기나긴 자기 터전에서 생명과 영혼의 생성 과정을 잊는 자 또는 무시하는 자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잃고서 세계와 합일하는 것이 유일신앙자들의 망상이다. 자기를 잃지 않고서 세계영혼 속에서 자아의 영혼을 ‘존버’하면서 함양하는 것이 루소가 말하는 자기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고 계약을 맺어 합의를 통한 일반의지로 실행하는 것이다. 일반의지 속에 개별의지는 자기를 잊지 않으면서 일반의지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규소의 시대가 다양체의 흐름으로 이를 증거하고 있다.

*

광복 후에 독립운동가들의 집안은 피폐하고, 일제에 호의호식하던 일제 부역자(부일자)들이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의 식민지를 자처하는 숭미자로 변하였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치와 자주를 실행하려는 개혁가들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만들었으나, 매국적이고 매판적으로 사적이익만을 챙기는 자들이 반민특위를 무산시켰다. 이번 계엄세력에게는 특별조사법을 만들어 꼭 신상필벌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이 80여년동안 상층을 구성하여 대중을 지배하였으나, 대중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를 이루기에는 교육과 학습, 의식화의 과정이 거쳐왔다. 그 중에서도 우리 입말로 소통하고 우리 문자로 전승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내공을 쌓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저항과 항거, 항쟁과 광장시위를 하면서. 지금도 부일자와 숭미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으리라.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로, “범이 없는 골에 여우들이 설친다”고 하는 할배들은 일제 잔재가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걱정했다. 할배들은 일제의 부역자들이 이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듯이 숭미자들이 미국으로 넘겨주는 것을 걱정했다. 그 과정에서 범들의 후예는 몰락하여 개장수와 각설이가 되고, 제국주의 좀비가 제국의 주구(走狗)가 되어, 범 없는 골이 여우가 왕질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이 ‘왕’자를 들고 나온 것은 그 패거리(음모자)들의 일부가 표면으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공화국을 만들려는 대중과 인민의 저항은 수면 아래로 잠시 감춰져 있다가도 이어지면서, 적들의 심장을 향한 항쟁은 불쑥불쑥 솟아나왔다. 이 요상한 세력들은, 인민의 저항을 반체제, 반민주로라고 지 멋대로 규정하고, 마남사냥과 반국가주의로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의 상층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전승의 이야기에서 “곰과 범”의 이야기에서, 왜 우리의 민담과 설화 속에서 범이 남아있는데 비해, 곰을 이야기는 사라졌는가. 문화의 전승은 백성의 입말에서 이어져 왔을 것이고,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범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1894 동학혁명으로, 그리고 1895년부터 공공연하게 우리 입말이 문자로 등장하였다. 마치 범이 독립운동을 하려 만주로 떠나고 난 자리에 여우와 원숭이가 설치듯이, 일제에서 조선어조차 말할 수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광복후 입말과 문자화는 그 당시에는 지식인의 것이었으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대중화를 이어지면서, 공화국의 헌법에서 지적하듯이 국민 주권자이며, 인민주권 사상은 점점 대중화를 되어갔다. 1987년 이래 입말의 문자화와 가로쓰기가 전개되었고, 인민은 스스로 자치와 자주의 길을 찾아가면서, 인민이 존나 버티면서 기본심급이면서 최종심금이라고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법원도 최종판단의 결재를 인민에게 받아야 한다. 인민의 권리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감옥에 보내었고, 탈옥 중인 윤석열도 곧 감옥으로 보낼 것이다.

“지구는 둥글다”에서, 원주를 구성하는 모든 점들은 그 점이 하나하나가 중심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21세기에는 그 점이 트래픽(접합)의 다양체이다. 한반도가 다른 어느 터전들과 마찬가지로 고유성이 있고, 자치와 자주를 넘어서 자율성과 자발성이 분출되었다. 입말과 그 문자의 독특성은 새로운 문화의 전승과 확산으로 이어졌다. 사회의 도덕성은 인민의 것이며, 사회의 제도화가 인민의 것이라는 것라고 문자화하면서 제헌 헌법이래로 공화정을 추구해 왔었다. 그럼에도 매국적이고 제국의 주구의 지배에서는 공화가 아니었다.

정당정치는 상층은 자기들의 잘못(mal) 또는 삿된(méchant) 것을 감추고자하였고, 이를 드러내고 저항하는 세력에게 반국가, 반체제 또는 빨갱이로 몰았다.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며 나무라는 방식은, 세 패거리들으 좀비들이 실행했던 방식을 그대로 이 터전의 인민들에게 강제하고 위협하였다. 군비, 검비, 법비, 재비 등이 이참에 드러났다. 국민은 굴복하지 않았고 20세기 후반 내내 저항과 항쟁이 있었듯이, 21세기에 촛불시위와 응원봉 빛축제와 키세스 시위는 새로운 문화의 창달이었다. 이런 운동과 분출은 한류라는 문화의 세계화에서, 스포츠에서도, 대중음악에서도, 영화에서도, 게다가 문학에서도 전 세계 대중들에게 감응과 공감을 불러왔다. 범이 내려왔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터전에서 누리소통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순간을 열었다.

*

21세기에 첫 사반세기에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의 터전에서 삶의 양식과 문화가 갑자기 세계 속에 있은 것이 아니라, 별종, 덕후, 존버들이 스토아 표현으로 노력(포노스) 내공(토노스)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출이 된 것은 단지 5년 사이이다.

하나는 코로나로 전 세계가 우왕좌왕하던 시기에 우리 문제인 정부는 새로운 방식으로 역병에 대처하여 우리나라가 자연스럽게 세계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역병은 공간의 구별이 아니라,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 하듯이, 공간자체가 운동하고 흐른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해도, 살아가는 보통사람은 이 터전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기며 습관적으로 산다. 그 습관의 방식에 젖어서, 어쩌면 세 패거리들이 대중 의식을 포획하고 포로로 삼고서, 노예 상태로 만드는 세뇌의 방식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를 대중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혼밥, 혼술, 혼일, 혼발신과 혼소통 등은 산다는 것이, 한 리좀이 다른 리좀들과 여러 방식으로 접속하는 가운데, 덩어리(트래픽)를 만들고 살아간다는 것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리좀의 덩어리가 운동하고 있고, 기나긴 과거의 노력을 통한 ‘존버’의 특성이다. .

다른 하나는 여러 번 말했지만 철의 시대를 지나 규소의 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코로나 2년에 혼밥 혼술, 혼일, 혼소통(일인 유투버) 들로 누리소통 공간은 각각이 지구상의 한 점이 되었다. 이 점들 각각은 다방향으로 확장되고, 또한 접속의 덩어리는 리좀 덩어리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이 도구로서 소통 방식에서, 방송과 신문과 다른 방식으로 쌍방이 정보와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제국은 정보 또는 명령의 전달이라는 일방통행을 넘어서, 선전제의 해결 없이 담론과 판단을 강제하면서 지배하려 하였다. 그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다양체의 활동은 제국의 통제가 바랐던 대로 일방통행이 될 수 없었다. 일방통행인 양식이 광기라는 것을 알아챈 것도 한 몫을 하였다. 제국이 광기라는 것이다.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 류(인류)와 인간 종(인종)에 의한 구별은 논리학의 류와 종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 개인 또는 개체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뭔가 이탈하고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이탈을 도착자로, 저항을 분열자(별종들)로, 항쟁을 악마 또는 빨갱이로 몰아가면, 세 패거리는 절대성과 완전성이라는 요상한 용어를 들먹이며 민중 또는 인민을 배제하거나, 포로를 만들지 못하면 제거하려 하고, 포섭되지 않은 자들을 개돼지 취급하기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패거리의 습관적 사고에는 탐만치가 가득 차 있으면서, 습관의 조건반사처럼 민중을 세뇌시켜 요상한 사건들을 만들었다. ‘국민의 힘’에서 서울의 강남구에 태영호를 내세우든 김정은을 내세우든 극우 꼴꽁들은 묻지마 투표를 하며 지지하였다. 이런 패거리 사고의 세뇌가 영남에서는 부지깽이를 내세우든 똥작대기를 꽂든 지지한다고 한다. 모든 사물이 ‘부타야!’라는 선승에게 부지깽이와 똥작대기도 부처이지라고 하듯이, 선거에서 우리 편에 투표하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또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같은 단어 부지깽이라는 용어가 선승에게는 노력과 각성의 지표가 되는가 하면, 강남과 영남에서 하나님과 같은 신주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개선하고 개혁하여 통일로 나가는 운동은 여전히 있다. 요즘은 영세중립국으로 나가자고 하기도 한다. 생명체의 소통 방식은 아직도 해결해야할 부분이, 코로나 해결보다 무한정하게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디지털의 세계는 누리소통의 확장이 기하급수적을 넘어서 불교의 숫자처럼 4제곱승으로 비약하고 있다. – 3제곱은 공간인데 4제곱승으로 확장은 무엇일까? 어쩌면 누리소통의 공간이 4제곱승일 것이다. – 이 비약의 미래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신선만이, 붓타만이, 신만이 안다고 하면, 그것은 부정형(4승의 형상은 아무도 모른다)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누리 소통의 확장과 다양체의 흐름을 아무도 모르는 차원의 무한의 다양체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세계와 문화의 창달에서 입말과 문자(이미지 포함)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살아가는 방식은 젊은이의 사유와 놀이(게임)에 달려있다. 이 젊은이는 “난가”라고 하며 기다는 것이 아니라, 노력(포노스)와 내공(토노스)의 과정을 겪으면서 잘못(mal)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투름(mauvais)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학습하면서 벗과 즐거이 유쾌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존버(덕후, 별종)를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언제나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 사유하는 것이다.

코로나와 같은 생명체의 변이와 확장 속에서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제국이 없는 세계 속에서 또는 세 패거리가 없는 터전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젊은이는 오래 깊이 사유할 수 밖에 없다. 열여덟에서 서른여덞 정도까지. 우리의 기나긴 과정에서 서투르고 착오와 오류도 있었지만, 우리가 창안해낸 입말과 문자화가 있으며, 누리소통을 통하여 문화의 창달로 널리 인류뿐만이 아니라 생명계도 전지구도 사유할 수 있는 길을 넓혀간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까. 이런 임무에서 또한 우리 터전으로부터 지작할 수 있는 우리 입말과 우리 문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하고 통쾌한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불평등 해소와 통일은 여러분의 덕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별종들이 제국주의와 제국에 저항하고 항쟁하였듯이, 존버와 덕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통일은 도구의 무기화에서가 아니라, 도구를 널리 이롭게 사용하는 누리 소통에서 다양체의 발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도구가 인민들 각각의 손바닥에 놓여있다, 쳇지피티의 문자화나 인공지능(AI)의 지식화와 달리 덕후들과 존버들의 창안과 생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생명학과 디지털의 발전은 철의 시대의 2천5백년의 과정을 거의 한 세기만에 이룰 것이라 한다. 생명과학의 정보축적 만큼이나 디지털 사용의 확장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우리의 자발성에 의한 입말과 문자화, 남북의 소통은 곧 이어질 것이다.

(4:11, 58PMA) (5:24, 58PMB)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갈무리, 2025) 서평|글: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사변적 물리학을 위하여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자연의 개념』, 갈무리, 2025

 

이수영(미술작가,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해가 붉게 서산에 걸리면 태양의 광선이 대기권을 통과하는 경로가 길어지면서 파장의 길이가 길어지고 각도가 커진다. 태양광선의 파동 630~750nm은 물리적 객체이지만 노을의 붉은빛도 객체일까? 화이트헤드는 ‘붉은색’이라는 감각이야말로 우선하는 객체라고 말한다. 붉은색이라는 감각-객체가 아니라면 태양의 가시광선이라는 물리적 객체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객체 ‘붉은색’은 석양이 지는 복합적 관계들 속에서 우리의 감각 지각이 붙잡은 관계항이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붉은색’이 자연의 존재자이기 때문이지 색깔이라는 것이 단지 인간 정신 안의 표상이거나 태양광선의 특정 파동에 귀속된 특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사고가 아닌 감각이 자연과학의 기초여야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 정신에 대해 자립적인 닫힌 체계이다. 화이트헤드는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고 부른, 즉 인간정신에 드리운 자연과 인간 바깥의 자연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맞선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를 끊임없이 서로 관계하며 변화하는 사건들의 총합으로 보았다. ‘사건’이라면 교통사고 같은 것을 떠올리지만, 화이트헤드에게 광화문 사거리 이순신장군 동상 역시 사건이다. 이순신장군 동상은, 동상의 양자장이 요동치고 전자기장이 저항하는 등 여러 흐름들이 광화문 이순신동상이라는 상황으로 회집되어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광화문 이순신동상을 감각적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렇게 화이트헤드의 세계는 존재자들이 세계를 경험하는 매순간 현실은 생성 소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를 들뢰즈의 생성과 흐름의 철학과 연결시킨다. 또한 화이트헤드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이나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 등의 신유물론의 계보학적 선행연구로 떠오르기도 한다. 들뢰즈, 신유물론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공통점이라면 세계를 자기동일성에 폐쇄된 정태적인 실체나 사물들이 아닌 역동하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일 것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를 존재이게 만들어 주는 작용인인 보편자는 창조성, 생성이다. 그는 ‘임페투스’라는 장(field) 개념을 도입하는데, 특정된 사건을 회집된 것으로 보는 관점은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을 떠오르게도 한다.

화이트헤드가 세계를 사건들이 요동치며 생성하는 과정으로 바라보지만, 수학자이기도 한 화이트헤드는 추이하는 사건을 미분해 들어가는 추론으로 이상적 극한을 추상화한다. 그리고 그 추상적 개념들로 지각 속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자연을 인식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사건들의 관계를 추상하는 것은 상대적이다. 요동치는 사건들을 경험하는 입각점에 따라 사건은 다르게 특정될 수 있다. ‘지각하는 사건’이라는 그의 개념은 지각하는 현재를 입각점으로 사건을 어떤 고유한 방식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관할하는 현재의 상황이 특정한 구조로서 사건을 파악하는데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관찰 행위가 관측이라는 장에 포함되어 관측결과에 영향을 주는 비결정성이라는 관찰자효과를 떠올리게 한다. 화이트헤드는 ‘파악(prehension)’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사건은 실재적 계기(actual occasion)의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다른 객체로 파악될 수 있는데, 객체란 이렇게 흐르는 사건 속에서 특정하게 상황화된 회집체이다. 들뢰즈라면 욕망에 따라 접속하여 전혀 다른 기계를 만들어 낸다고 했을 것이다.

상대적이라는 말에 아인슈타인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시공간개념과 빛의 절대속도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에게 시공간은 사물들 간의 질량에 의해 구성되는 중력장으로 물리적 실체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에게 시공간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의 상호관계를 추상하는 수학적 개념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 빛의 속도는 불변하는 절대속도이지만 화이트헤드에게는 빛의 속도 역시 사건들의 관계의 추상이어야 했다. 화이트헤드에게 존재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사건들이지 자기동일성을 가진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로부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곳-예를 들어본다면 수억 광년 저편의 천체-에서 사건들이 상황화 된다면 빅토리아 여왕의 탄생과도 공-현재하면서 2025년 우리와도 공-현재하는 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마치 끈이론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의 블록우주이론하고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른다는 선형적 시간이론과 달리 덩어리로 이미 존재하는 시간-실재에 어떻게 진입하느냐, 어떻게 상황화 되느냐에 따라 달리 현재화 된다는 이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하는 화이트헤드의 열린 사건들의 세계와 이미 닫힌 우주블록이론의 시간은 많이 다르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개념』에서 과학의 목적은 “다양한 객체가 상황화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다양한 사건 속에서 그 객체들의 나타남을 지배하는 여러 법칙을 추적하는 것(245)”이라고 밝힌다. 들뢰즈에서 양자역학까지 화이트헤드의 책 『자연의 개념』이 주는 영감은 생생하고 매혹적이다. 물질이 뿜어내는 생기, 감각에 대한 신뢰와 집중, 이접(disjunctive)하는 다자(多子)들의 세계, 그리고 이 요동치는 카오스의 세계를 끈질기게 미분하여 극한으로 추상해내는 정합성. 기후위기와 디지털 시대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다양한 실천에 소환되고 있는 이유를 『자연의 개념』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산책35-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산책35-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

1)

철학자마다 간판 단어가 있다. 칸트 하면 단연 ‘선험’이라는 말이 생각날 것이다. 하이데거 하면 ‘실존’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하면 ‘언어그림’이고, 데리다라면 ‘차연’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 하면, 어떤 개념이 생각날까? 아마도 대부분 ‘대자’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까?

‘대자[für sich] 존재’라면, 말 그대로 번역하자면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데,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주관성을 의미하며 때로는 고립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단어지만, 헤겔은 자주 사물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적용한다. 사물이 지닌 고유한 본성을 그는 대자 존재라고 말한다.

더구나 다른 용어가 뒤섞이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 자체로 그리고 대자적으로[an und für sich]’라는 말이다. ‘대자’는 자주 ‘대타[für andres]’와 동전의 이면처럼 결합해 사용되며, 논리학에서는 ‘일종의 존재[für Eines Sein]’이라는 용어가 대자 존재와 짝을 이루고 있다.

헤겔의 대자 존재라는 개념은 논리학에서는 앞에서 다루었던 무한성 개념 다음에 나온다. 즉 1부 객관 논리학 1권 존재론 2장 현존의 2절 마지막 개념이 ‘무한성’이고 이어서 3절이 ‘대자 존재’다. 이 대자 존재 다음이 3장 양이니 이 대자 존재는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직접 만나는 것은 어디서나 질적인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질적인 음을 양적으로 규정한 이후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것을 발견하면서, 과학이 발전했다. 그런데 질에서 양적인 것은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헤겔은 대자 존재에서 양적인 것을 발견했는데, 대자 존재와 양적인 것은 어떤 연관을 지니는 것일까? 우리의 의문은 꼬리를 문다.

2)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헤겔의 논리학 초판과 재판 사이에 목차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아예 구조틀 자체가 달라 서로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 알기 힘들다. 1판과 재판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면 간신히 그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대자 존재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진데, 초판과 재판의 목차를 비교해 보자.

초판

재판

A

대자 존재 자체

대자 존재 자체

1) 대자 존재 일반

a 현존과 대자 존재

2) 대자 존재의 계기

b 일자에 대한 존재

a 그 자체 존재

b 일자에 대한 존재

c 관념성

3) 일자로의 생성

c 일자

B

일자

일자와 다자

1) 일자와 공허

a 그 자체에서 일자

2) 다수의 일자

b 일자와 공허

3) 상호 반발

c 다자와 반발

C

견인

견인과 반발

1) 하나의 일자

a 일자의 배제

2) 견인과 반발의 균형

b 견인과 하나의 일자

3) 양으로의 이행

c 견인과 반발의 관계

이렇게 비교해 놓으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는데, 초판이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했던 것을 재판은 단순화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대체로 A 절은 대자 존재가 일자에 대한 존재를 거쳐 일자로 가는 과정이며 B 절은 일자와 일자 즉 다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반발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공허가 매개한다. C 절을 다자들 사이에 견인을 거쳐 양적인 단위(하나의 일자, 실재하는 일자)로 가는 과정이다. (위의 표 가운데 붉은 글자에 주목해 보기를 바란다)

현존 장 앞 부분은 초판보다 재판이 비교적 이해하기 쉬웠다. 3 절 대자 존재에 관해서는 재판보다는 오히려 초판이 이해하기 쉽다. 헤겔은 초판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재판을 썼을 텐데, 오히려 이 부분은 재판이 더 난삽해진 느낌을 받는다.

3)

앞에서 헤겔의 논리학에서 범주가 발전하는 과정은 경험의 발전하는 과정을 매개로 한다고 말했다. 이런 경험의 발전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헤겔의 복잡한 개념들의 연관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유한성에서 무한성으로 이행하면서 실재하는 어떤 것이 지닌 다양한 속성이 문제됐다. 다시 소금의 예를 끌어들이자면, 소금의 흰색은 우연성이다. 소금의 짠맛이나 소독성은 소금의 필연적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이 하나의 관계(dy/dx)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이 관계가 발전하면서 어떤 때는 짠맛으로서 소금이 어떤 때는 소독제로서 소금이 등장한다. 이때 속성의 관계 즉 미분적 힘이 무한성이며, 짠 소금이나 소독제 소금은 유한성이다.

유한성은 하나의 사물이며 그 내부에 이 사물을 생성하는 것이 곧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부정의 부정’이거나 ‘자기 관계하는 부정’으로 규정됐다. 유한성은 이런 자기 부정을 통해 산출된 결과이며 직접성을 지닌 것이다.

이런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는 이제 하나의 소금과 다른 소금과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사실 짠맛의 소금도 소독제로서 소금도 동일한 미분적 힘의 산물이면서 서로 다른 소금이 된다. 여기서 하나의 소금과 다른 하나의 소금, 즉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른 것으로 될 때 이 동일한 것들이 지닌 관계가 문제 된다. 이 관계가 이제 대자 존재에서 다루는 경험적 맥락이 된다.

4)

예를 들어 이런 소금과 소금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볼 때 A 절은 이런 관계 속에서 어떤 것이 지닌 내적인 이중성을 다룬다. B 절은 하나의 소금과 다른 하나의 소금 사이의 외면적인 관계 즉 서로 다른 동일한 것의 관계가 다루어진다. 논리학의 거의 모든 장, 절이 이렇게 어떤 범주에서 내적 대립이 대상의 외면적 관계로 전개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런 방식이 논리학이 전개되는 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A절에 들어가 보자. A 절에서 다루어지는 것 즉 하나의 동일한 것 예를 들어 하나의 소금은 내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 이중성은 곧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다. (일종의 존재란 말이 어색한데, 그 말에 대한 설명은 이 글 뒷부분에 나온다.)

먼저 대자 존재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대자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노동과 같은 개념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산출했을 때 그 속에 나 자신이 투입돼 있으니 그것은 곧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노동 산물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 칸트에 이르면 의식도 이런 노동을 하는 것으로 된다. 즉 의식은 범주를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대상은 자신의 범주가 투입된 것이니, 의식 자신이고 따라서 의식은 자기 자신을 마주 보고 있으니 대자 존재가 된다.

이런 산출의 관계에서 보면 무한성과 유한성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한성은 유한적 사물을 산출한다. 이 사물은 곧 무한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니 무한성이 곧 대자 존재다. 이 무한성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유한성과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무한성은 사실 유한자를 이루는 필연적 속성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미분적 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듯이 하나의 유한자로부터 자기 내로 복귀하고 다시 다른 유한자를 산출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이 과정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어지므로, 헤겔은 이를 ‘자기 관계하는 부정[das sich auf sich selbst beziehendes Negative]’으로 규정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 운동은 유한자가 자기를 자기가 매개하는 운동이다. 바로 이런 무한성의 매개과정을 통해 무한성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 존재하게 되므로 이 무한성을 헤겔은 대자 존재로 규정한다. 무한성과 대자 존재는 개념상 서로 공속하는 개념이다.

앞에서 우리는 대자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동과 의식을 예로 들었는데, 사실 노동과 의식은 대자 존재가 더 구체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대자 존재가 노동과 의식의 근본 전제가 된다.

5)

무한성의 매개를 통해 산출된 유한자는 곧 무한성의 타자는 무한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니, 독립된 존재로서 무한성의 타자가 아니라, 다만 무한성에 의해 산출돼 자기 자신을 지양한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무한성의 한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의식이 대상을 구성하고 노동이 사물을 가공하면서, 의식의 대상이 자립성을 잃고 관념이 되고 자연적 사물이 가공된 존재로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도 대상이나 사물은 지양된 것으로서만 즉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거꾸로 무한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무한성이 자기를 산출한 결과 타자가 지양되면서 자기 자신이 되니 처음에 자기 밖의 타자에 부딪혀서 자기를 상실했던 상태에서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고 인식을 통해 낯선 대상을 이해하는 데서 얻어지는 기쁨은 바로 자연 앞에서 또 낯선 대상 앞에서 두려움을 떨던 자가 자연과 대상 앞에서 자기를 되찾는 안도의 기쁨이라 할 것이다.

“타자는 대자 존재 속에서 다만 지양된 것으로서만 그리고 그것의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대자 존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그의 타자 존재를 넘어서면서 이런 부정을 통해 무한한 자기 내 복귀라는 데 있다.”(논리학 재판, GW21, 145쪽)

이런 점에서 ‘현존’과 ‘대자 존재’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현존은 어떤 규정성을 지닌다. 이 규정성은 타자에 대립하면서 얻은 부정성(대타 존재)이니, 현존은 항상 자신의 외부에 어떤 타자에 부딪힌다. 그러나 대자 존재에 이르면 자기 앞에 있는 낯선 타자는 없다. 자기 앞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 타자는 자기 안에 있는 타자일 뿐이다.

여기서는 자기 완결적인 관계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를 ‘무한한 자기 관계’라 한다. 이제 규정성은 사라지고 규정성이 없는[bestimmungslos]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이런 무한한 자기 관계가 전혀 미분화된 상태의 어떤 것, 즉 동어반복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무한한 자기 관계는 이미 그 속에 이중성 자기의 타자와 자기라는 두 요소의 관계가 존재한다. 다만 이 타자가 지양된 것, 그 자신으로서 정립된 것이므로 동일성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타자 속에서 자기 관계한다’(GW11, 87쪽)라든가 ‘타자에 머무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에 머무른다’(GW 21, 145쪽)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이 순수한 존재는 논리학의 출발점으로서 순수한 존재와는 다르다. 순수한 존재는 사실 무[無]였다. 그것은 끊임없이 명멸하는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제 대자 존재 속에 자기는 오직 자기와 마주 대해 있으니 자기를 파괴하는 타자에 대한 대립이 없으므로 자기 자신은 지속해서 존재하게 된다. (이런 대자적 관계가 후일 본질이나 실체 개념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으리라.)

6)

이렇게 대자 존재가 자기 완결성 속에서 순수한 존재가 되면, 직접성을 회복한다. 이런 직접적 존재를 헤겔은 ‘일종의 존재[für Eines sein]’라고 한다. 흥미로운 표현인데 사실 대자 존재와 관련해서 논리학에서만 나오는 개념이고 다른 데서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번역하기도 곤란한데, 흔히 ‘일자에 대한 존재’로 번역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어서 이 존재가 대해 있는 ‘일자[Eines]’라는 말은 곧이어 나오는 ‘일자[Eins]’와 혼동되기 쉽다.

다행히 헤겔이 이 말의 유래를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 독일어에서 ‘이것은 어떤 종류의 사물인가?’라고 물을 때, 이렇게 말한다. ‘Was für ein Ding etwas sei?’ 헤겔은 이 표현에서 für가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면서 이 ‘대해서[für]’는 ‘비추어서’라는 의미로 본다. “너는 꽃에 비해서 보면, 장미꽃이다.” “이 길은 강에 비추어 본다면 고난의 강이다”

인간은 항상 어떤 것을 이해할 때 이미 알고 있는 다른 것에 비추어서 이해한다. 이런 비유가 곧 인식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다. 그런데 이제 어떤 것을 그처럼 구체적인 다른 사물에 비추어서 이해하지 않고 일반적 존재자 또는 유적 본질에 비추어서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나오는 표현이 ‘was für Eine’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떤 것은 그것이 속한 일반적 존재자 또는 유적 본질에 비추어서 이해되고 있다. 비유적 사고가 동일성의 사고로 이행하는 매개가 위에 나온 표현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사물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나오는 대답은 ‘그것은 그런 종류의 사물이다’라는 대답이다. 그것은 꽃의 일종이며, 나무의 일종이다. 이때 이런 일종의 존재를 헤겔은 철학적 용어로 만들어 ‘Sein für Eines’(재판) 또는 ‘Für Eines Sein’(초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일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겠다.

7)

그러면 ‘일종의 존재’란 범주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에서 무한성이 보기에 유한한 사물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니, 대자 존재라고 규정했다. 거꾸로 유한한 사물은 이런 대자 존재에 비추어서 어떤 것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유한한 사물은 이런 대자 존재의 일종이며, 곧 일종의 존재다.

“대자 존재의 두 번째 계기[일종의 존재]는 무한성과 통일성 속에 있는 유한자의 모습이다.”(논리학 초판, GW11, 88쪽)

대자 존재는 자기 부정을 통해 순수한 존재로 되돌아 왔으니 이 순수한 존재를 내적으로 보면 아무런 규정도 없는 무규정적 존재다. 그러나 이것이 직접성을 지니는 한, 즉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는 어떤 구체적 규정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소금은 흰색의 소금도 있고 보라색의 소금도 있다.

그러나 소금을 대자 존재의 산물로 보는 한 모든 소금은 동일한 소금이다. 여기서 흰색이나 보라색과 같은 우연성은 일단 무시된다. 모든 소금은 동일한 관계 즉 미분적 힘이 산출한 것이며 그런 산출된 것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소금’이 된다.

사실 대자 존재와 일자에 대한 존재는 동전의 양면이다. 무한성의 측면에서 보면 대자 존재이며, 유한자의 측면에서 보면 일자에 대한 존재다. 무한성이 유한성과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고 유한자의 자기 매개이듯 대자 존재는 일자에 대한 존재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존재가 지닌 자기 매개다.

양자는 서로 매개하는 가운데 매개하는 운동의 측면이 대자 존재며, 이런 끊임없는 매개를 통해 고요하게 존재하는 것이 곧 일자에 대한 존재다. 이렇게 대자 존재와 일자에 대한 존재는 꼬리를 서로 물고 있는 뱀처럼 얽혀 있고 그 내분에서는 구별되면서도 통일된 관계 속에 있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을 헤겔은 관념성이라고 한다.

“대자 존재와 일종의 존재는 관념성의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본질적인 계기다.”(논리학 재판, GW21, 147쪽)

플라톤의 <국가> 강해(7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2)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V)

 

3)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519c-521c)

 

[519c-521b]

* 나라수립자οἰκιστής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τάς τε βελτίστας φύσεις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ἰδεῖν τὸ ἀγαθὸν 강제하는ἀναγκάσαι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보고 나면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그런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μὴ ἐπιτρέπειν. 즉 “거기에 머물며, 저 수감자들 곁으로다시 내려가기καταβαίνειν를 원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의 수고πόνος와 명예τιμή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μηδὲ μετέχειν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519c-d)

* 그러나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ἀδικήσομεν 것, 즉 그들이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데도 더 못한χείρων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지 반문한다.(519d)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 γένος가 특별히διαφερόντως 잘 살게εὖ πράξει 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에 그런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즉 법νόμος은 설득πειθός과 강제ἀνάγκη를 통해서 시민πολίτης들을 화합시키고συναρμόττων, 각자가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이로움ὠφελία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그것을 서로서로 나누어 주도록μεταδιδόναι 만든다.(519e) 법 자신이 나라 안에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도록 내 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신이 나라의 결속σύνδεσμος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철학자가 된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을 ‘돌보고 수호하도록’ἐπιμελεῖσθαί τε καὶ φυλάττειν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다.(520a)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수호자를 양육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국가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τέλειος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 벌 떼들σμῆνος의 지도자들ἡγεμόνας이자 왕들βασιλέας처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520b) 그러니 각자가 차례로ἐν μέρε 나머지 시민들의 거처συνοίκησις로 내려가야 하고καταβατέον,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τὰ σκοτεινὰ θεάσασθαι 익숙해져야 한다.συνεθιστέον. 익숙해지고 나면 그들은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과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τὸ τἀληθῆ을 본 까닭에 그곳 사람들보다 만 배나 더 잘 보게 될 테고, 각각의 영상들τὰ εἴδωλα이 어떤 것이며 무엇의 영상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깨어있는 상태οὐκ ὄναρ에서 다스려질 것이다. 오늘날 그림자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σκιαμαχούντων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가 그러하듯 결코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다.(520c) 그들은 마치 통치하는 일이 무슨 큰 좋은 일이라도 되는 양, 그와 관련해서 내분을 일으키고στασιαζόντων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즉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은 사람들’ᾗ ἥκιστα πρόθυμοι ἄρχειν이 통치하게 되는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ἀστασιαστότατα 다스려질 것이 필연적이며, 그 반대의 통치자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그 반대이다.(520d) 그러므로 우리에게 양육 받은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순수한 곳에서 서로 함께 살면서, 각자 차례가 되면ἐν μέρει 나라에서 ‘수고하는 일을 함께하길’συμπονεῖν 원할 것이다.(520d) 우리는 정의로운 자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명령하지만 그들 각각은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과 달리 통치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불가피한ἀναγκαῖος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임할 것이다.(520e)

* 만약 통치할 사람들에게 통치하는 일보다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이 있다는 것을 자네가 찾아낸다면, 잘 다스려지는 나라가 실현가능ἔστι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에서만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들’οἱ τῷ ὄντι πλούσιοι이 통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란 금으로 부유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부유해야 할 것으로 부유한 사람, 즉 ‘현명하고 좋은 삶으로’ζωῆς ἀγαθῆς τε καὶ ἔμφρονος 부유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만약 사적인 좋은 것들에 굶주린 거지πτωχός들이 공적인 일에서 좋은 것들을 낚아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일에 나서고 있다면, 그런 나라는 실현가능하지 않을οὐκ ἔστ 것이다. 그런 경우 통치하는 일이 싸움거리περιμάχητος가 될 것이고, 그러한 전쟁πόλεμος은 나라 안에서ἔνδον 벌어지는 내전이어서 그들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까지 모두 파괴할ἀπόλλυσι 것이다.(521a)

* 요컨대 ‘진정한 철학의 삶’τὸν τῆς ἀληθινῆς φιλοσοφίας 말고 정치권력을 낮춰 보는καταφρονοῦντα 삶은 없다. 통치하는 일에 나서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사랑에 빠진 자’ἐραστής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애 경쟁자들οἵ ἀντερασταὶ끼리 싸움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가장 현명하고φρόνιμος, 또한 정치적인πολιτικός 명예τιμή와는 다른 명예를 누리며, 정치적인 삶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들을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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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9 d : ‘그들의 수고와 명예를tōn par’ ekeinois ponōn te kai timōn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mēde metechein’ : 이 문장에서 ‘그들(수감자들)의 수고와 명예’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특히 수감자들의 명예라는 표현은 당혹감마저 안겨준다. 그러나 전치사 para에 주목하면 이 말은 ‘수감자들 쪽에서 힘들어 하는 것과 영예롭게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철학자가 동굴에 내려가 수감자들을 데리고 나오려면 우선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 또한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어둠에 익숙해지는 과정’(517a)의 일환이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한, 먼저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동거하며(520c) 동고동락(同苦同樂)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말대로 여민(與民)의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참고로 ‘나누려 하지 않는다’에서 ‘나누는 것’의 원어 metechein은 ‘사물들에 그 사물의 이데아가 분유(관여)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그 ‘分有(關與)’의 원어로도 쓰인다. 

* 철학자들과 달리 현실 권력자들과 사회 기득권자들은 일반 시민 대중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들을 낮춰보고 자기들만의 생각,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대중의 힘이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기에 부와 권력, 언론과 교육 제도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자신들의 의식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시민 대중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의 비판 정신을 마비시킨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피폐한 민주정 치하 소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어떻게 일군의 대중을 선동하여 폭압적 참주정의 주도 세력인 양 이용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행태는 20세기 나치즘, 파시즘의 등장을 거쳐 현재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대선을 앞두고 그 일단의 세력들이 단말마적 발악을 자행하고 있다. 불타협의 태세로, 시민들의 강건한 연대로 그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 519e ‘환기시킨다.’ : 제5권 466a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가리킨다. 본 강해 참고

* 519e ‘설득peithos과 강제anagchē’ : 이 표현은 488c에도 나온다. 설득과 강제는 사람을 의도자의 목적에 따라 변화시키는 방편이다. 설득은 말logos을 통해 강제는 행위ergon를 통해 이루어진다. 행위는 제도와 법률의 집행은 물론 개인들의 폭력이나 거짓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설득으로 이루어지나 제도로서 강제의 측면이 있다. 도덕과 강제와 관련해서는 강해 본문 참고.

* 520a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 흥미롭게도 글라우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끌어들이고 있는 정의관은 제1권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제기한 정의관 즉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다. 그 정의관의 한계는 충분히 비판되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생각에 맞추어 설사 당대 상식적 정의관에 비추어보더라도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 520c ‘깨어있는 상태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 전자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 후자는 타락한 정치가들이 다스리는 현실의 나라를 가리킨다. 현실의 나라임에도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실상이 아닌 영상들 즉 동굴 속 그림자 같은 것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520c-d 내분stasis(분쟁, 내란, 반목, 대립) : stasis는 <국가> 전편에 걸쳐 계층과 집단 또는 영혼의 상태로서 나라와 집단, 개인이 맞이하는 최악의 것으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351d-352a, 440b, 442d, 444b, 459e, 464e, 465b, 470b-d, 471a, 520c-d, 521a, 545d, 547a, 554d, 556e, 560a, 566a, 58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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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는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속 어둠을 빠져 나와 좋음의 형상을 본 후 그것이 얼마나 신적인 즐거움을 안겨 주는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인간사에 마음 쓰고 싶지 않고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517c-d) 그러나 철학자는 이제 수감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있다. 나라수립자들은 철학자가 동굴 속 수감자들 곁으로 돌아가 수고든 명예든 공유하려하지 않고  동굴 바깥에서 고고하게 지내는 것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이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못하게 하는 것은 부정의한 일이 아닌지’ 반문한다. 그러면 이러한 반문에 대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어떤 대답을 제시하고 있을까?

* 519c ‘좋음을 보도록 강제하는anagkasai 것’ : ‘강제’와 관련한 표현은 짧은 이 문맥에서만 아래와 같이 네 차례나 나온다.[‘법은 설득과 강제anagchē를 통해서’(519e) ‘돌보고 수호하도록 강제anagchē’(520a). ‘통치하는 일을 불가피한anagkaios 것으로 여기고’(520e),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anagkazein(521b) 등]. 강제의 그리스 원어 anagchē는 ‘강제’의 뜻만이 아니라 ‘필연’, ‘불가피함’, ‘운명’의 뜻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때 anagchē가 포함하고 있는 강제의 범위는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에서부터 형벌이나 처벌, 폭력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유념할 것은 플라톤이 철학자 또는 철학 교육과 관련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사회적 정당성에 기초한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 네 군데가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배의 비유(488b-489a)에서 ‘선원들(소피스트)이 선주(대중)에게 행하는 ‘강제’의 경우는 그와 다르게 바로 이어서 예시되고 있듯이 시민적 박탈과 벌금, 사형 등 외적인 강요와 폭압의 성격이 강하다. 위 두 경우는 같은 강제일지라도 자율과 타율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정반대이다. 전자의 경우는 강제의 사회적 도덕적 정당성에 기초한 강제, 즉 내적인 동의에 따른 자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내적인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무조건적 수용, 즉 외적 강제에 따른 타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자율은 도덕적 실천의 기본 원리이다.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일’이 본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인지 강제에 의한 것인지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자율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비록 동굴에 내려가는 일이 자신의 본성상 선뜻 반길 일은 아니지만 그것의 당위적 정당성을 배움에 따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그 강제를 내적인 동의, 즉 자발성과 강제를 공존시키는 자율의 방식으로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적 당위나 사회적 의무는 그 자체로 시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선뜻 반기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나 나라를 지키려 군대를 가거나 세금을 내는 일 등을 즐거워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순순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당위나 그것의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비록 힘들고 싫은 일이라도 그것을 자율적으로, 또는 최소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원함(wollen)과 당위(sollen)는 분명 다르지만 최소한 공동체의 시민에게 그 둘은 도덕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공존할 수 있다.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강제도 이런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그 공존을 누구보다도 기꺼이 그리고 쉽게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 철학자가 동굴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즉 통치 참여의 근거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본성과 배움 모두에 기초해 있지만 설명의 내용에서 보면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도덕적 당위성의 측면이 강조되고 어떤 경우에는 본성과 자질의 측면이 강조된다. 우선 전자의 측면에서 그 근거는 철학자도 시민 공동체의 일원인 한 법 준수의 의무 차원에서 제시된다.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가 특별하게 잘 살게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화합시키고 그들에게 이로움을 나누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사실 플라톤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이미 제4권(420b)과 제5권(466a)에서도 “아름다운 나라가 지향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잘 지내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름 아닌 시민을 돌보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인 한, 그들은 법에 따라 통치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이상 국가가 지향하는 법의 정신뿐만 아니라 제1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전통적 정의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나라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나라의 수호자로 일하도록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에 대한 나라의 처사는 부정의한 것이 아니다.

* 플라톤은 이같이 사회적 법적 당위성 측면만이 아니라 본성과 자질의 측면에서도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즉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누구든 간에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적합한 일을 수행함으로써 나라의 안녕은 물론 자신의 행복을 구현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과 좋은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을 본 까닭에 그 누구보다도 또 다른 나라의 그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만 배나 더 잘 볼 수 있다. 배의 비유에서도 플라톤은 배를 지휘하기에 적절한 참된 키잡이라면 ‘한 해와 계절들 하늘과 별들 바람들 그리고 그 기술에 합당한 온갖 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게 필연적’이라고 말한다.(488d) 배를 거짓된 선원들에게만 맡기면 결국 배도 파도에 쓸려 난파하고 키잡이를 포함해 모두가 파멸한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나랏일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나라 공동체를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실상이자 진실이고 무엇이 영상이자 거짓인지를 탁월하게 분별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를 늘 깨어있는 상태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맞는 일을 가장 잘 해냄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타자들의 이익 즉 나라와 시민들의 행복도 함께 가져다준다. 이처럼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하는 것 즉 동굴로 내려가는 것은 수감자들을 무지와 불행으로부터 구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자신의 행복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배움을 통해 통치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긴 하지만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임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에게 통치는 부득이 감수해야 할 일이자 수고로운 일이기도 하다.(347c) 그래서 플라톤은 이들에게 통치를 맡기려면 벌로서라도 강제해야 한다고 말한다.(347a) 그리고 이때 벌zemia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347c)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벌의 성격이 비록 강제이기는 하지만 앞서 살폈듯이 수치를 두려워하는 철학자의 본성상 그들의 자율적 동의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이 벌이 철학자들로 하여금 수치를 면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그것을 보상misthos의 부류에 넣는 것도 그 때문이다.(347a) 참고로 이 벌은 오늘날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신보다 저열한 자들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플라톤의 금언으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실제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이 경고하는 대상은 시민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 인용이 비록 적확하지는 않더라도 플라톤의 현대적 적용 차원에서 민주주의 현실을 사는 오늘날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아무려나 통치하는 일은 분명 수고로운 일인지라 통치를 맡는 자들에게 보상이 있어야 하듯 철학자에게도 보상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사람들조차 보상을 원하기 마련이다.(347a) 그러므로 나라는 철학자들에게 나랏일을 맡기되 그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통치 의무를 번갈아 가며 수행토록 해야 하고 통치자로서 의무를 마친 후에는 이들을 위한 기념물도 만들고 신과도 같은 분들로 모시고 철학자로서 복된 삶을 하나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540b-c)

* 그러나 통치자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더라도 ‘인간사를 떠나 고고하게 철학자로서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 이상의 것은 없다. 관조의 삶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철학자들이 원하는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부득이하게 통치업무를 수행하지만 어떻게든 빨리 그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 한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자 왕은 나랏일에 가장 유능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원천적으로 권력에 대한 욕구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철학자들은 신적인 능력이라 할 만큼 정치권력에 초연할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인간의 권력의지와 관련하여 최소한 철학자의 경우 근본 전제부터 달리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치자에 대한 가히 비현실적이라 할 정도의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만큼 당대 현실 통치자에 대한 절망이 컸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목도한 당대 현실 국가의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모두 진실보다는 거짓에 매몰된 채 권력욕에 젖어있었고 그에 따라 통치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나라와 시민들의 이익보다는 오로지 권력의 유지와 자기 이익의 보전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들에게 통치 권력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는 최대 방편에 불과했던 까닭에 그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은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나라와 나라, 계층과 계층이 분열하고 개인과 개인이 반목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으면서 동시에 깨어있는 상태의 사람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다. 통치자는 결단코 권력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달리 길이 없다. 그런데 제대로 길러진 진정한 철학자의 경우 그러한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관조의 삶이 진정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정치권력을 능히 낮춰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권력보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들을 길러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그래야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 다스려질 수 있다. 현실국가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서 그 이상의 것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 조건이자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통치 권력자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초래할 위험성에 대한 의심에 기초해 있다. 이점을 고려하여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을 사람이 아닌 정치 원리로 바꾸어 말하자면 플라톤 <국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지성의 정치’, ‘정치의 지성화’라 할 것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되살아나 우리나라 시민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으로 반지성적 최고 권력자를 끌어내린 –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 – 세계사적인 장면을 목도하였다면 대중들에 대한 철학 교육을 <국가>의 중심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하는 근거를 다각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철학자들의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비록 대비적일지라도 훌륭한 삶으로서 상호 조화를 이루고 일치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제6권에서도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단순히 실재들에 대한 인식과 관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받고 삶에 구현하려고 하는 자(500c)이다. 지성이 좋음의 형상을 알고 있는 한, 다른 이들의 나쁨과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다. 만약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좋음의 형상을 모르는 것이다. 좋음의 형상을 인식하는 지성은 그 자체로 부정의에 대한 고도의 분별력과 함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섬세할 정도의 감수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 자신을 형성함은 물론 공적으로도 타자 즉 대중의 덕을 구현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다.(500d) 물론 배의 비유에서 보듯 철학자들이 다중의 광기에 둘러싸여 나랏일은커녕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 그들은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비를 피해 벽 아래에 대피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비록 작지 않은 성취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철학자에게 최대의 성취가 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496e) 그곳에서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철학자가 이룩하는 최대의 성취’란 다름 아니라 ‘철학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정체를 만나 자신도 성장하고 개인적인 것들과 함께 공동의 것들도 보전하는 것’(497a)이다. 요컨대 철학자는 나라에서 통치자로 참여하면서 자신들과 공동체의 보전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그곳에서 철학자로서 자신의 개인적 삶도 더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이처럼 철학자가 동굴에 다시 내려가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 배움에 부합하는 혼의 행복을 담보하는 일이자 공적으로는 나라를 수호하고 시민들의 이익과 행복을 돌보는 이른바 개인과 나라에서 상호상승의 덕을 실현하는 일이다.

* 철학자로서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노정하는 갈등적 측면은 어쩌면 플라톤 자기 삶의 여정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곱 번째 편지>(324b-326b)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겪은 그와 같은 갈등들을 직접 토로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은 종국적으로 좋음의 형상에 대한 깨달음을 토대로 그 두 측면의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지만, <파이돈>에서는 논의 주제의 특성상 ‘몸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해짐으로써’(67a) ‘영혼 자체를 그것 자체로 가지기를 열망하는’(67e) 순수 관조의 삶이 크게 부각되어 있고 그와 달리 <국가>에서는 부정의한 나라를 정의로운 나라로 이끌어가는 실천적 삶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조차 배의 비유에서 선주와 선원들에게 무시 받는 참된 키잡이에 대한 소회를 통해 플라톤 그 자신 얼마나 관조의 삶을 소망하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496d)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철학자로서 결코 작은 성취는 아닐지라도 결코 최대의 성취는 아닌 것이다.(497a)

* 끝으로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들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논의를 시작하며 철학자 자신은 자신의 변화 때문에 행복하다 여기지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는’eleein 장면(516c)이 그것이다. 이것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에 본성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심정이 그 출발점으로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후에 제기되는 논거들이 대체로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그로부터 연역되는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이곳에서 피력하고 있는 수감자에 대한 불쌍함은 그러한 논거들의 원천적인 배경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대중(수감자)을 불쌍하게 여기는 표현은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대중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크게 돋보이는 <국가>(499e-500b)의 내용을 포함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부성주의(paternalim)적 관점에서 또는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입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실 동굴의 비유가 동굴 속 어둠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구출하는 이야기를 골조로 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동굴에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이나 존재론, 정치철학과 도덕론 차원의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확장, 음미,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 사실 일상의 측은지심(惻隱之心) 너머 삶의 근원적 불쌍함에 대한 깨달음은 도덕이나 정치의 영역을 넘어 일종의 종교적 거룩함의 경지에 다가설 때 비로소 얻어지는 삶의 진실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삶의 근원적 비참성과 철학자들의 하강 또한 비록 그 배경과 성격은 다르긴 하지만 기독교 은총 신학만이 아니라 불교의 심우도(尋牛圖) 입전수수(入廛垂手)가 그러하듯 구원의 문제가 왜 궁극의 관심사가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불교의 수행자는 세계의 실상으로서 불성을 깨우친 후 고고하게 산사에 머물며 자신의 평안만을 누리려 하지 않고 그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미망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세속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대속을 통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 왔다가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시민의 무지를 일깨우려 시장과 거리로 나가 거침없이 진리를 설파하다 그 역시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가 종교적 대속자로 부활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대속자로 오늘날 되살아나 여전히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있다.

* 동굴의 비유는 위와 같이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와 정황을 논하는 것으로 모두 마무리된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그런 일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 것인가의 문제로 이행한다. 즉 어떤 이들이 지하세계로부터 신들에게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듯이 이 철학자들을 어떻게 광명으로 인도할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다루어진다. -끝-

 

다음 강해 :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527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