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적 근본주의를 넘어서 [한철연 교육강좌]-⑧
[한철연 교육강좌]-⑧
여성주의적 근본주의를 넘어서
강사 : 강지은(건국대 외래교수)
후기 :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5월 20일에는 강지은 회원(건국대 외래교수)의 여성주의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강의는 성차별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수성을 보여주는 사례에서 시작되었다. 세계경제포럼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 평등 순위는 135개 국가 중 107위였다. 이 기관이 지니고 있는 평가 기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일단 한국 사회가 그다지 성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점은 대략 짐작할 만한 자료라 여겨진다.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강하게 요청되는 현실적 단면이다.
페미니즘은 성 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는 투쟁이다. 페미니즘의 목적은 어떤 특정 집단 여성들이나 특정 인종 및 계급의 여성들에게 이익을 주는 데 있지 않다. 또한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특권을 줄 것을 주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의 삶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페미니즘은 서구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여성 권리에 대한 옹호’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나 실체를 가진 것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갈래의 이념적 토대와 관점을 견지하는 사상, 이론, 행동주의로 구성된 묶음이다. 페미니즘은 통상 다음의 세 가지를 의미한다. ①여성은 체계적으로 억압당해왔으며, ②젠더 관계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거나 절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며, ③불평등한 젠더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
여성주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답한다. ①여성은 어떤 방식으로 종속되어 왔는가? ②우리는 어떻게 특정 사건을 개별적 불운이 아니라 성(sex)에 기반한 사회적 억압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할 것인가? ③우리는 어떻게 억압적 상황에 대해 명확히 이해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④여성은 어떤 방식으로 종속에 저항할 수 있는가? ⑤여성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⑥삶의 어떤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할 것인가? ⑦여성의 종속은 인종, 민족, 국적, 계급, 섹슈얼리티에 근거한 억압들과 어떻게 연결되어있는가? 등등.
페미니즘의 사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① 자유주의 페미니즘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개인의 권리 개념을 발전시킨 18, 19세기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전략은 자유, 평등, 정의라는 자유주의적 가치에 근거하여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법적,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데에 있다. 최근에 프랑스에서 남녀 동수 공천을 강제하는 법을 제정한 것도 이러한 사조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②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임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여성의 종속은 사유재산제의 도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제, 계급사회, 여성 억압은 필연적 관계를 갖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편의 역할은 임노동을 위해 가정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화된다. 아내는 임노동 체제의 지속을 위해 가사에 종사하도록 강제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이유는 가사노동의 위상이 대량 생산적 임노동 체제를 보조하는 것으로 배치된다는 데에 있다. 시장과 가사노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기혼 여성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임금의 유동적 노동력을 제공하는 산업예비군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확장시킨 데에 이바지 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에 의한 여성 억압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남성 문화에 의한 여성 억압의 문제를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③ 급진주의 페미니즘
1960년대 후반에 생겨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에 의한 여성 억압, 즉 가부장적 억압이 모든 형태의 사회적 억압 중 가장 근본적이라고 보며 여성들의 공통된 경험에 주목한다. 급진주의의 주장은 첫째 여성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피지배 집단이며, 둘째 여성 억압은 사실상 모든 형태의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 현상이고, 마지막으로 여성 억압은 근절하기 가장 어려운 억압 형태로 계급 사회 철폐와 같은 변화만으로는 제거할 수 없는 아주 뿌리 깊은 것이다. 이들은 공적인 영역에서의 기회 평등을 추구하는 제도 개혁의 방식만으로는 여성 억압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가부장제 문화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④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중요 요인인 문화적 제도들(가족, 섹슈얼리티 등)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둠으로써 마르크스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의 통찰을 결합시킨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생산 양식의 변화만으로 여성 해방을 이룰 수는 없다고 본다. 여성 해방은 경제적 예속에서의 해방과 더불어 정신적 혁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거나 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지난 2월 나꼼수의 비키니 파동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나꼼수를 지지하는 한 여성이 비키니 차림으로 가슴에 ‘가슴이 터지도록, 나와라 정봉주’이라고 쓴 사진을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 게시판에 보냈다. 나꼼수 멤버들은 ‘가슴응원사진 대박, 코피를 조심하라’고 쓴 정봉주 접견서를 인터넷에 올렸고 나꼼수에서 비키니녀의 사진을 보고 ‘생물학적 완성도’에 감탄하는 발언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꼼수가 여성을 성적 대상화했느냐 아니냐가 논란이 되었다. 나꼼수는 인간을 성적대상화하는 것과 동지의식은 같이 갈 수 있다고 해명했다. 과연 그럴까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강사는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조정희 씨의 자료를 예로 들며 김어준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소개했다. 열내는 페미니스트는 이제 필요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성성을 더 드러내는 ‘쿨한 엠브라’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정희 씨는 남성 마초에 대응하는 여성 엠브라는 성적인 여성성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여성이 대세라고 하였다.
그러나 강사는 우리 웹진 <이 시대와 철학> 2월 15일에 실린 황주영 씨의 ‘(나)꼼수’에 속지 말고 닥치고 페미니즘‘은 김어준 씨의 의견이나 조정희 씨의 견해가 갖는 허점을 날카롭게 찔렀음을 보여주었다. 아래는 황주영 씨의 기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다행히도(?!) 나꼼수 멤버들은 (이번에 배운 건지 정말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지간한 진보적 남성 지식인에 비해서는 약간 더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방송에서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피해자의 판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가해자의 의도의 유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여성이 이런 이슈에 민감할 권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기들은 배운 남자라고 항변했다. (이 정도 기본 지식을 가지고 칭찬받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배운 여자들은 배운 남자들만큼 못 믿을 사람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특히 ‘진보적인’ 혹은 ‘비판적인’ 배운 남자들은 더 그렇다. 대학에서, 진보적 운동 단체들에서, 운동권 학생회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했던 수많은 남성들과 교수들이 자신의 여성 ‘동지들’을 성폭력 피해자로 만들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걸 김어준씨가 모르진 않겠지.
삼국카페는 공동성명서에서 여성을 치어리더로 삼는 남성중심의 ‘반쪽 진보’인 ‘나꼼수’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믿음, 동지의식을 내려놓는다’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런 심정으로 오래 몸담았던 진보적 집단에 등을 돌렸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여성운동을 시작했던가! 나꼼수 멤버들이 다른 남성들에 비해 1그램 정도 낫다거나,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변한 게 없다거나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 사실 이번 일에 대한 (나꼼수 멤버를 포함한) 남성들의 반응은 너무 빤하기 때문에 새삼 놀랄 것도 없다. 페미니스트들이 봐야 할 것은 저 삼국카페 회원들이 낸 공동성명서이며, 그들과 페미니스트 이론 사이의 격차, 그들과 비키니 응원 여성 및 그녀를 모방하며 나꼼수를 지지하는 여성들 사이의 격차, 그리고 이 후자의 여성들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격차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피해자 프레임의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성은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 내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여러 방식으로 수정보완하려는 노력들도 있어왔다. (이런 걸 언급하지 않은 걸 보니, 아마 김어준씨는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에 관심을 끊었나보다.) 문제는 그 파급력이다. 현재 페미니즘이 20대 여성들에게 매력이 없는 건 이전 세대들과 지금 20대의 삶이 크게 다른 데 비해 페미니즘에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20대 여성들의 삶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큰 변화나 도약이 없는 것은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여성들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어 그 누구보다 많은 독려를 받으며 자란 젊은 여성들은 소위 알파걸이라고 불리고 엄친딸을 지향하며 산다. 이들은 제2의 수퍼우먼이지만 선배들이나 엄마처럼 지독하게 혹은 청승맞게 애쓰지 않는다. 여성성을 한껏 뽐내면서도 학업이나 일에서 좋은 성과를 내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싸워야 할 상대는 남성이 아니다. 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애교로 의존하는 척 하면서 구워삶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른 세대에 속하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현재 20대의 많은 여성들도 여전히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저런 특별법이 마련되었어도 여성들은 여전히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아직도 임노동과 가사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이중부담을 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된 현장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라면 피해자 프레임의 페미니즘이 아직도 절실할 것이다. 이건 김어준씨가 스포츠 중계하듯이 ‘피해자 프레임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와 줘야 되는데 안 나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어준씨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정치적 표현의 수단으로 도구화하기로 결정한 그 여성을 골빈 년으로 만드는 폭력”을 경계한다. 그리고 이 폭력이 피해자 프레임 페미니즘의 콜래트롤 데미지(부수적 피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어준씨가 간과한 또 하나의 부수적 결과가 있다. 그게 바로 비키니 응원 여성이나 코미디언 곽현화, MBC 이보경 기자와 같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걸 원하는 여성이야 없겠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피해의식도 없는 아주 당당한 여성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거칠고 민감한 페미니스트와도 거리를 두고 싶고, 고통스러워하고 청승맞은 피해자와도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도구화’하고 어떤 여성들의 ‘피해의식’을 비꼬는 패러디물을 만들고, 나꼼수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비키니 응원에 참여한다. 이들은 개인이다. 이들은 여성 집단에 대해서 아무 고려도 하지 않는다. 이 여성들은 한편으로는 이른바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적 존재로 자신을 등장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대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성적 존재로 노출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으로서 자기가 처해있는 성적 입장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피해자 프레임과 더불어 속박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자아를 실현하면서 살라는 일종의 강령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포섭되고, 남성중심적 권력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과이다. 게다가 이는 부수적인 게 아니라 결정적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몸이 ‘도구화’ 되는 것도 스스로 ‘도구화’ 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고,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피해의식’에서 출발해 그것을 정치적 활동의 역량으로 확대하면서, 하이힐 신고 아스팔트를 걸으며 가카 퇴진을 외치고, 시위대에 먹거리를 제공하거나 플래시 몹을 선보이는 등 ‘발랄한’ 시위 방식을 보여주었다. ‘대의’를 위해서 어떤 취약 계층을 배제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타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여성들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이 사유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 프레임을 넘어선 이야기들을 제시하는 페미니즘 이론과 여전히 피해자 프레임을 필요로 하는 여성운동 및 여성의 현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느 쪽과도 관계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들과 그와 동시대를 살면서도 페미니스트 의식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나꼼수를 이길 순 없다. 우리에겐 그만한 명성도 권력도 미디어도 없다. 게다가 그런 ‘팬덤’도 없다. 나꼼수의 지지자들은 이미 동지도 지지자도 아니다. 그들은 마치 아이돌의 팬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빠들 믿고 배신하지 말자’며 팬심을 다지듯이, 다 필요 없고 김총수가 알아서 잘 판단할 것이고 그 판단에 맡기고 우리는 한 길만 가자고 서로를 도닥이는 분위기다. 이렇든 천군만마를 가진 나꼼수는 꼴페라고 만날 욕만 들어먹는 여성들에게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사과한다면 잘해야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정도겠지만, 이런 소릴 할 캐릭터들이 아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민감할 권리는 있어도 자신들의 입을 틀어막을 권리는 없다며, 조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논점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돌리면서 회피해 가는 이런 담론에 또 휘둘릴 필요 없다. 그러는 대신 담론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나 대의가 뭐냐, 여성문제는 사소한 일이냐 하는 케케묵은 논쟁은 그만두자. 이런 쟁점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어떤 쟁점을 다루든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는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마주보게 하고 대화하게 하고 협상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8강 후기
여성과 남성은 분명히 다른 존재이고 여성은 역사적으로도 소수이자 약자의 모습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여성이 신체적 측성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육아, 가사노동이 페미니즘에 관한 인식으로 변화, 남성들의 공감과 사회적 인식을 이끌어내길 바랍니다.
여성의 권리가 상당히 발전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는 소수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정당한 권리 확보를 위한 유익한 강좌였다.
누군가 여성 해방이 인간 해방의 마지막 단계라는 말을 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인간 사회에서 여성 해방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문지에기도 하다.
여성은 소수자이다. 소수자인 여성이 중심에 서서 문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페미니즘 운동은 계속 되어야 한다. 남성은 더 교육 받아야 한다.
여성의 성이 착취당해 온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여성이든 남성이든 의식 속에 각인된 성 청체성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성만이 또 남성만이 피해자나 가해자라는 입장보다 우리의 의식에 고착화된 이성애주의에 대한 비판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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