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갖는 의미란? 6-① [色 다른 책읽기]
김택중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연구강사)
어린 시절의 화두 ‘진화론’
명색이 서평이니만큼 서평 대상 도서에 대한 소개로 글을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보편타당한 전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진화’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내 어린(어리석은) 시절, 화두나 다름없었던 것이 바로 이 ‘진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득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부터 글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려 하는 점,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미리 양해 구하고자 한다.
나름 철이 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렸던 고등학생 시절, 그 때까지 세상살이에 무슨 심각한 불만이 없던 나에게도 마침내 ‘의문’이라는 것이 하나 생겼더랬다. 딴에는 꽤 진지한 의문이었는데, 생물 교과서를 읽다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 실려 있음을 포착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즉, 19세기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생물은 오직 생물을 통해서만 이어진다는 생물속생설이 확립된 뒤로 자연발생설은 폐기되었다는 설명에 이어 그 유명한 ‘밀러-유레이 실험’이 소개되더니 생명의 기원은 결국 자연발생적이라는 자가당착적인 내용이 등장했던 것이다. 앞에서는 자연발생설을 실컷 오류라고 선언해 놓고 바로 뒤에서는 다시 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니?!!
물론 지금은 이 앞뒤 맞지 않는 모순된 설명이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도대체 이 모순을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혜성처럼 내 앞에 출현한 것이 소위 ‘창조과학’이었다. 집안이 3대를 이어 내려온 통짜배기 기독교도(신교도) 집안이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자연히 습득한 기독교 문화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간 알게 모르게 신앙의 갈등을 겪었던 나로서는 과학적 증거가 기독교 신앙과 성경 기록을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이 제2의 복음이나 다를 바 없었다. 요컨대 창조과학에 따르면 생명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시도된 ‘밀러-유레이 실험’은 거짓과학일 뿐이므로 그냥 무시해버리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사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들도 책에서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고 있듯이 신앙은 신앙 차원에서, 과학은 과학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19세기 말 개항 이후 수입된 기독교의 주류가 하필 ‘성경 무오류성’을 끔찍이도 챙기는 미국 보수교단들의 기독교였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면 발단이었다. 이들 교단은 성경의 기록이 모두 역사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므로 내용상에서도 오류가 전혀 없다는 이른바 ‘성경 문자주의’를 개인 신앙의 진실성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으로 삼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경의 문자적 기록에 집착했다. 그러므로 신이 세상을 창조했음을 엄숙한 어조로 선포하는 성경의 첫 장에서부터 벌써 이들은 굳이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과학적 사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고 있듯이 개항 이후 20세기에 접어든 뒤로도 한국에서 진화론 자체가 본격적인 학문적ㆍ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반대로 진화론은 우파적인 진보주의의 자장 안에서 장려되기까지 했으며, 서양 문명의 압도적인 우세 가운데 기독교도들에게조차 자명한 과학적 사실로서 불가피하게 수용되었다. 반면 성경 무오류성 신학에 기초한 기독교 보수교단들은 20세기 초 미국의 성경 문자주의자들, 즉 근본주의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분리주의 노선을 선택하여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개인 신앙을 추구하는 쪽으로 후퇴해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이 역전되어 한국의 보수주의 기독교도들이 공세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즈음이었다.
창조과학에서 과학으로
1980년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일단의 한국 기독교도 과학자들이 미국 창조과학계의 대부 격인 헨리 모리스 등의 영향 아래 창조과학의 세례를 듬뿍 받고 귀국한 시기였다. 이들에 의해 성경 문자주의는 과학이라는 날개를 달고 의도치 않은 재부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간접적으로는 미국의 창조과학계를 주도한 이들 상당수의 신학적 성향이 문자주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한국의 ‘창조과학자’들이─물론 선량한 의도에서 비롯되었겠지만─전국의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간증 형식을 빌려 정력적으로 창조과학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기독교도 대중은 이들의 공세적인 ‘과학적 간증’을 경청하면서 크게 안심하였고, 안심하면 할수록 거꾸로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폭은 넓어져만 갔다. 이것이야말로 창조과학이 한국 사회와 교회에 끼친 가장 큰 해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이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의 과학계에 기여한 바가 있음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간 자명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던 생물 진화를 한 번쯤 의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본의 아니게 창조과학측이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진화론은 창조과학자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공식 석상에서 단 한 차례도 부정되었던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진화론은 한국 사회에서 창조과학이라는 종교적 프리즘을 통해 비로소 재조명되었고, 또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그만큼 한국 학계의 진화론에 대한 이해 수준이 피상적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1988년 국내의 한 TV 패널토론에 출연하여 진화론측 토론자들에게 맹공을 퍼붓고 이들을 수세로 몰았던 창조과학자들의 전투적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럼에도 어쨌든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유사과학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로써도 쉽게 반증이 된다. 즉, 창조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도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도여야만 창조과학을 수용할 여지가 생긴다.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이 자청해서 창조과학을 수용하거나 나아가 창조과학자가 된 사례는 적어도 내가 알기론 없다. 단 한 명도 없다. 반면 진화학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비기독교도나 무신론자의 입장을 취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전혀 없다. 성경 문자주의를 신봉하지만 않는다면 설사 기독교도라 할지라도 무리 없이 진화학자나 진화론자가 된 사례를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생물학자 전방욱이 바로 그러한 한 예이다.
창조과학측이 공격했고 무디어진 검이나마 지금도 여전히 휘두르며 공격하고 있는 진화론은 기실 알고 보면 허버트 스펜서류의 우파적 논리, 즉 사회진화론으로 각색된 일종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 찰스 다윈이 구상하고 제시했던 진화론의 본령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그러나 창조과학측은 현재도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사회적 해악의 진원지로 진화론을 지목하면서 찰스 다윈과 진화론을 분별없이 비난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창조과학이 이처럼 사회 전면에 등장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내가 알기로는 미국과 한국 밖에 없다. 미국도 그러하지만, 한국에서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던 까닭은 창조과학이 대체로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회의 세에 편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90년대에 걸쳐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에는 노골적인 근본주의 경향 대신 미국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복음주의라는 한층 세련되고 완곡해진 형태의 신학 사조가 등장하였다. 미국에서 이 복음주의는 레이건 공화당 정부의 집권과 맞물리면서 전반적으로 보수화된 미국 사회의 기류를 타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에는 복음주의가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사회를 기독교의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형태로 발화되었다. 다소 느슨한 방식으로 전개된 이 비공식적이고 범교파적이었던 개혁 운동의 지도자들은 그간 사회, 즉 세속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교회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적극적으로 사회를 수용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였다. 나아가 이들은 학문의 각 분야 또한 기독교의 시선으로 접근해 들어가 재해석하고자 했는데, 이 때 신앙의 과학적 정당성이라는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 우연히도 창조과학이었다.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상당수가 국내 창조과학의 출발점인 ‘한국창조과학회’와 어떤 식으로든 연계되어 있었던 데에 기인한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회가 내부적으로 진화론 대신 창조과학을 별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도들 상당수가 결과적으로 자연과학적 상식에 무지한 무리가 되어 갔다면, 그 사이 한국의 진화학계는 서구 학계의 논의들을 흡수하면서 차분히 내실을 다져 나갈 수 있었다. 이 책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는 사실상 그러한 내실화의 한 열매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진화 담론을 주도해 왔던 서구의 학자들이 아닌 한국의 각 분야 학자들이 찰스 다윈과 진화론을 소화해낸 상태에서, 그간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진화론자들의 논리를 지나칠 정도로 편식해 온 한국의 독자 대중에게 ‘변화(다양성)’와 ‘우연(무목적성)’을 핵심으로 한 진화론의 과학적ㆍ사상적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라면 미덕일 것이다. 다만 대담 형식의 책이므로 진화론이나 주변 학문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하기엔 다소 미흡하다는 태생적 약점을 안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중
나는 애초 창조론에 대한 변증을 목적으로 진화론에 다가선 위인이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의 굴레를 벗어난 지금, 창조론은 아스라한 과거의 추억과도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사실 성경에 근거한 부동의 진리를 앞세워 과학적 방법론으로는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자연의 일부 메커니즘을 초자연적 존재, 곧 신에 의탁하여 그때그때 해소하려는 입장이 과연 과학의 영역에 속할 수 있는지 나로선 의문이다. 그러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수사학적 차원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와 그닥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전지전능한 성경의 창조주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비유하는 나의 이러한 발언이 창조과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특정 종교의 경전 내용을 전제로 한 과학’이 더 괴이하고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이는 ‘창조과학’이 ‘지적 설계’로 옷을 바꿔 입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의 저자들도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적 설명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계속 변한다. 변하지 않고 정체돼 있으면 그건 이미 과학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정설에 기초하여 계속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과학 활동이 아니라 포교 활동에 해당한다. 창조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진화론은 변해 왔고, 지금도 논쟁을 거듭하면서 계속 변하고 있다. 이렇듯 진화의 메커니즘을 풀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 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과학의 ‘자연주의’적 접근 방식은 지극히 정당하다.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동양철학자 김시천이 적절히 언급했듯이 자연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으로 보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자연주의 말이다.
끝으로, 주제넘은 짓 같지만 의학과 생물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이든 창조의 과학화든 그 해명에 몰두하고 있는 분들께 바라는 것 한 가지 조심스레 언급하고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내 경험상 진화론자든 창조론자든 생명 현상을 환원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분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개인적인 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특히 공학 분야를 전공하신 분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진화론의 입장에 선 분들은 부지불식간 유물론에 기초하여 사람의 몸을 기계로, 창조론의 입장에 선 분들은 부지불식간 영육 이원론에 기초하여 사람의 몸을 썩어 없어질 것으로…. 그러나 내가 보기에 생명 현상이란 그렇게 쉽게 단정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생명 현상에 경이를 표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자체로서 가지는 놀라운 생명력과 인내력 때문이다. 자신의 탐구 대상에 대한 존중은 학자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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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섯 번째 책은, 최종덕 교수가 역사학자 임지현, 생물학자 전방욱, 의철학자 강신익, 동양철학자 김시천과 대담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휴머니스트 펴냄)으로 김택중(인제대 의대 연구강사), 강경표(중앙대철학과 대학원 박사수료), 백준수(인천석남초등학교 교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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