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9-판단이란 무엇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9-판단이란 무엇인가?
1)
논리학 2부 주관 논리학 1편 주관성은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이 개념이고 2장이 판단이며 3장이 추론이다. 이제 그 가운데 2장 판단론을 살펴볼 차례다. 헤겔은 판단론 앞에 상당히 긴 서론을 붙여 판단이 무엇인지 논한 다음, 판단을 4개 범주로 나누어서 전개하고 있다.
판단이란 흔히 주어와 술어가 계사[Kopula]를 통해 결합한 것으로 알려지며 일반 논리학(아리스토텔레스적)에서 사용하는 ‘판단’이라는 용어를 형식 논리학(메가라 학파는 명제 논리학이라 한다)에서는 굳이 사용하지 않고 ‘명제’라는 말로 대신한다.
명제는 더는 분할할 수 없는 원자와 같은 것이니, 나눈 것[teilenen]이라는 의미를 지닌 판단[Urteil]과는 구별되며 일반 논리학에서 판단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주어 술어 관계가 논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어, 술어 구별은 일종의 복합적인 명제로 재구성된다.
일반 논리학의 법칙은 전적으로 형식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일반 논리학에서 추론은 상당히 직관적인 방식에 의존하는데(그 때문에 그 추론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벤 다이어 그램이 사용된다) 형식 논리학에서는 이런 추론이 순수 사유를 통해서 다루어지니 자주 형식 논리학은 일반 논리학의 발전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헤겔 [주관] 논리학은 일반 논리학이나 형식 논리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근거 위에 서 있다. 그 밑바닥에는 ‘판단’에 관한 헤겔의 고유한 해석이 깔려있다. 일반 논리학이나 형식 논리학이 판단을 더 나눌 수 없는 명제로 환원한 것과 달리 헤겔은 판단과 명제를 명백하게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2)
서문에서 판단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에 들어가면서 헤겔이 처음 언급한 것은 곧 판단과 개념의 관계이다. 헤겔은 판단은 ‘개념의 규정’이며 ‘개념의 실재화, 구체화[Realizierung]’, “개념 자체가 규정된 개념을 정립하는 것”, “개념이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하는 것”(논리학, GW12, 53)이라 한다.
개념은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개념 계기는 서로 구별되지만, 이미 다른 나머지 계기를 포함하는 총체성이다. 따라서 이런 구별은 다만 내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고, 개념은 이미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관성 내에 머무르는 개념일 뿐이다.
그런데 판단은 개념에 내적으로 머무르는 계기들이 각기 자립화하면서 서로 외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개념이 실재화하는 것’이라 하지만, 그런 무차별적인 분화에도 여전히 개념의 통일성은 그런 분화된 계기들 속에 내적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외적으로 서로 무차별한 계기들은 내적으로 이미 관계 맺고 있으니 이 관계가 곧 판단이다. 다만 이 내적인 통일성은 판단의 출발점에는 감추어져 있는 것 즉 잠재적인 것이다. 판단이 앞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내적인 통일이 정립되면서, 판단은 더는 분리된 것으로서 판단[Ur-Teilen]에 머무르지 않고 연결된 것[Schliessen]을 의미하는 추론이 된다.
“판단은 일반적으로 말해 총체성을 양 측면으로 한다. 이 총체성은 우선 본질적으로 자립적인 것인데, 따라서 개념의 통일은 다만 최초에는[판단의 출발점에서는] 자립적인 것의 관계이며 이 통일은 아직 이 자립적인 실재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복귀하여 충만된 구체적인 통일이 아니고 오히려 이 실재성은 그런 통일 바깥에 머무르면서 그런 통일 속에서 지양되지 않는 극단으로 존립한다.”(논리학, GW12, 54-55)
헤겔이 판단을 이루는 요소는 개념 규정성이라 할 때, 이 개념 규정성은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 즉 헤겔이 보기에는 차라리 하나의 표상이라고 할 관념이 아니다. 여기서 개념은 앞에서 말한 개념의 계기로서 개념인데 핵심적인 차이는 이 개념 계기가 지닌 근본적인 특성은 곧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개념의 규정성은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이며 각자가 구별된 것이지만, 동시에 각자는 이미 내적으로 다른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는 총체성이다. 판단을 이루는 요소가 이처럼 총체성으로서 개념이기에 거꾸로 판단은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라 배후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 된다.
3)
판단에 관한 헤겔의 이런 설명은 흔히 제시되는 판단에 관한 설명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크다. 흔히 하나의 판단은 흔히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주어’는 직접 존재하는 것을 지시하는 이름, 즉 단순한 표상이며 이 주어가 무엇인가 하는 규정은 주어에 역사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부여된 것이며, 주어의 이름 안에는 아직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술어는 그런 주어의 이름이 감추고 있는 규정 즉 “[주어로서] 존재가 개념이란 의미에서 포함하는 것”(논리학, GW12, 54)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며 그것은 주어의 의미, 규정, 본질 등이다. 이런 술어를 끌어내는 것은 사유가 지닌 추상화하는 작업이며 그 결과 이렇게 끌어낸 술어는 마음에 있는 관념에 해당한다고 한다.
판단이란 결국 서로 외면적으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는지 즉 주어의 존재에 관념으로서 술어가 적합한지를 표현하는 것이며, 양자가 일치하면 진리가 되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허위가 된다.
판단에 관해 흔히 알려진 이런 견해를 헤겔은 이 서문에서 하나씩 부정한다. 우선 ‘주어’와 ‘술어’라는 말의 문제다. 헤겔은 ‘주어’나 ‘술어’라는 말이 판단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주어’, ‘술어’라는 표현은 판단의 한 측면에 불과하고 피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단을 단순히 주어, 술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4)
우선 헤겔은 ‘판단’과 ‘명제’를 구별한다. 헤겔에서 판단이나 명제는 내용상에는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이 73세에 죽었다’라고 할 때, 이 동일한 명제가 판단으로도 또는 명제로도 사용된다. 어느 것이나 형식적으로 보면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고 내용상 동일하지만, 사용되는 맥락이 다를 뿐이다.
즉, 판단이 되려면, 어떤 것에 관해 무엇인가가 주장[behaupten]되어야 한다. 즉 그것에 관해 다른 것이 주장될 수도 있는데 다만 이 무엇인가가 주장된다면, 그것이 판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어떤 물음, 회의가 전제된다. 위의 예에서 판단은 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것은 나이 60세 때가 아니냐?’ 할 때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반면 명제는 어떤 것에 관해 무엇인가가 단순히 서술되거나 묘사될 경우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보고하고 알려주는 것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런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삶에 관한 사실을 서술하거나[darstellen] 보고[nachrichten]하거나 묘사할[ausdruecken] 때 사용된다.
그런 주장과 서술의 차이 때문에 동일한 주어, 술어의 형식을 가지지만, 더 세부적으로 보면 판단의 형식과 서술의 형식은 구별된다. 헤겔은 판단의 경우 주어와 술어가 개념 형식에서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즉 ‘개별자’가 ‘일반자’이거나, ‘일반자’가 ‘개별자’이든가다. 그 때문에 주어와 술어 사이에는 상이성, 분리가 들어 있으며 그래서 판단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형식상 동일성의 관계를 취한다. 즉 ‘개별자’는 ‘개별자’이라는 형식이다. 물론 주어와 술어라는 형식으로 서술되는 한, 그 차이를 없앨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가능한 한 양자를 일치시키는 것이 적절한 서술이 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서술하려면, 단순히 그가 73세에 죽었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죽었다는 식으로 개별자의 모든 점을 상세하게 서술해야 한다.
5)
헤겔이 주어, 술어라는 용어를 피하려는 이유에 또 하나가 있다. 판단에는 단순히 주어와 술어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 것도 많다. 헤겔은 칸트가 만든 12개의 논리적 범주 즉 판단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여기에는 주어, 술어라는 형식만을 가지고 보면, 판단형식이라고 볼 수 없는 것도 많다.
우선 질적 범주나 양적 범주에서 속하는 무한 판단을 보자. 즉 질적 무한 판단과 양적인 전칭 판단이다. 단순히 주어, 술어의 형식만을 가지고 보면, 질적 무한 판단은 판단이라 할 수 없고, 양적 무한 판단은 단칭 판단으로 환원된다. 또한, 관계 범주에 속하는 정언 판단도 긍정 판단과 다른 바가 없다.
관계 범주에서 가언 판단이나 선언 판단은 복합적인 판단이어서 단일한 주어, 술어의 관계로 환원할 수 없고, 양상[개념] 범주에서 판단은 주어나 술어의 형식을 가지지만, 여기서 주어나 술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어, 술어와 의미를 달리한다. 주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명제이며, 술어는 어떤 존재를 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칸트가 12개의 판단형식을 받아들인 것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독자적으로 고유한 의미를 지니면서 따라서 그것에 대응하는 고유한 도식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헤겔은 여기서 더 나가서 이런 12개의 판단형식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판단형식을 주어, 술어의 관계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이유로 판단형식을 설명하는 데는 주어, 술어 대신 앞에서 개념론에서 논의했던 개념 규정성을 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어떤 판단형식은 ‘개별성이 일반성이다’ 라거나 ‘일반성은 특수성이다’든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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