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말, 체제에 대한 저항 [천 하룻밤 이야기]
입말, 체제에 대한 저항
– 입말과 언어; 상부상조와 명령체계
2024, 04, 19, 곡우(穀雨) – 언제나 자람과 생장은 터전의 것이다.
들뢰즈는 혁명의 결과(결실)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이 입말은 ‘다음(차후, 저승)’을 이야기하는 자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종교와 신화에서 다음에 저 세상에서는 잘 살 것이라고 하는 그 논리를 두고 들뢰즈는 공동체를 생각하고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라, 천상의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인민을 노예나 종으로 부리고자 하는 사악한 집단들의 논리이며, 그 다섯째 논리라고 한다. 다음에(après, 아프레)를 이야기한 자들을 선지자들 또는 예언자들이라고 할 때, 그들은 점쟁이도 마술사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여기 사는 것을 고민했다. 이제는 어제와 아제가 연결되어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다음에”가 종교에 들어가면서, 저세상이니, 천국이니, 미래의 평등사회니 등을 말하면서, 다음에 가서야 진실로 그런 세상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성직자들이, –입말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는 명령이다– 자신들도 마술(마약, 마술, 환각)에 빠져서 천국과 모든 인간의 편안한 사회가 있다고 말하게 되고, 그것을 들은 신자들이 설마 저 학식 많고 고결한 성직자가 거짓말 하겠느냐며 믿고 따른다. 그 성직자는 ‘봐라 백성들이 믿고 있는데, 그게 진실이지 않으면 무엇이 진실이냐’고 한다.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백성에게 보냈다가, 다시 백성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로 만드는 것을, 순환논법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이른바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 속에 “다음에”를 넣었다. ‘다음에 천국에 갈 것이니, 지금 고생 좀 해’ 다음에, 그 다음에는 성직자도 신자도 있지 않다. 그 다음에의 판단(심판) 설화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사람은 “챠텔레부인의 사랑”을 쓴 로렌스이다. 로렌스는 새소식의 경전에서 ‘묵시록’이 악한 자의 글이라고 보았다. –이런 글을 인용해서 이 땅에서 재현하려는 이들이 신천지부류일 것이고, 그런 신도들 옆에 붙어있는 사는 이가 방사(方士)이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천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한 것으로 여기는 데까지 갈 것 없이, 들뢰즈는 ‘5가지 악순환’의 마지막 악순환이라 했다.
들뢰즈의 악순환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벩송의 우주발생론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악순환을 세 가지로 잘 이야기 했다는 것이 보인다. 나로서는 ‘무’, ‘무질서’, ‘부동’ 이 세 가지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벩송을 버리러 프랑스에 갔다가 벩송을 다시 가지고 왔다”고, 그리고 “진정으로 박홍규(朴洪奎, 1919-1994: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고. 들뢰즈는 당시 태어나지도 않아서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을 들을 수도 없었고, 그 강의록이 2017년에 어쩌다 나온 것인데 그가 볼 수도 없었음에도, 벩송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20세기와 21세기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날 사건들처럼 이야기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다섯 가지 악순환을 이야기했다. 세 가지는 벩송에서 나왔을 것인데, 그 다섯째는 ‘다음에’라고 말했다. 넷째는 무엇인가? 넷째는 ‘적용의 잘못’이라고 했다.
우리 땅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담론 중에서, 개인에까지 억압이 스며들어 자기억제의 방식으로까지 고착되었다고 보는 것을 미세 파시즘이니, 권력의 미시화라든지 따위로 이야기한다. 나는 앵글로색슨을 읽으면서 푸꼬를 제대로 읽은 자들이 없어서 그렇다고 농담한다. 프랑스 철학이 읽히기 시작한 1995년 이후로 시작하여 2000년도 이래로 푸꼬를 읽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 이후에는 푸꼬 논문 발표자도 푸꼬를 그 문헌들의 연관 속에서 계속 읽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왜 그렇게 보냐고? 그 논문들을 읽은 그들의 머릿속에 현상과 재현을 설명하는 것이 ‘아프레’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아프레가 권력의 미시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데?‘라고 묻는다. 그게 잘 안보이지만, 푸꼬는 내가 보기에 진정 잘 보았는데, 학문 권력을 누리고 싶어서인지, 또는 고대 그리스를 깊이 있게 잘 몰라서, 르네상스 이래로 살아온 500년 과정을 이야기 하자고 했다. 사실상 그는 자기보다 더 잘 현상학적(후설은 수학과 물리학을 토대로 한 현상학이며, 푸꼬는 현실 삶과 연관시킨 현상학일 것이다)으로 역사나 사회를 설명한 적이 없었기에, 많은 역사적 증거들과 더불어 이야기한 것이다. 적어도 프랑스에서 250여 년 전에는 입말과 문자가 서로 상응하는 체계 속에 있었다.
맑스가 노동력을 과학이라는 방식으로 잘 설명했지만, 입말과 현실 또는 상태가 마주하는 이야기를 과학이란 이름으로 풀 수 있는 자는 푸꼬였다. 그런데 그가 르네상스 이래 500년 역사가 억압의 역사였다고 했다. 유럽 사상계가 뒤집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크리스토스의 3개의 선전제가 그래도 유지되고 있는 것은, 넷째를 넘어서, 다섯째의 ‘다음에(아프레)’였다는 것을 푸꼬는 알아챘다. 나는 감히 이야기하지만, 푸꼬가 쓴 ‘의미의 논리’의 서평에서 이런 점을 알았기에, 푸꼬는 아이러니, 유머, 풍자 보다 깊이에서 솟아나는 것이 있다고 그책을 평했다. 나는 푸꼬의 글을 읽으면서, ‘깊이에서 솟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자연이 아니면 말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푸꼬의 글이 아니었으면, “안티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을 마치 소설처럼 읽지 못했을 것이다.
500년의 논리는 추리(ratio)인데, 삶은 추리가 아니라 상상작용(imagination)이리라. 추리란 자기에 맞게 자기를 합당화시키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합당화의 마지막이 칸트가 아니겠는가? 그 시절을 살면서 합당화는 유행 같고 또는 시대의 세시풍속 같은데, 사람들은 그 삶의 양식에서 사대부(상류층, 들뢰즈의 뜻을 잘못 번역하여 다수자)의 추리에 맞는 것이 진리 또는 법칙(원리)라고 생각하는데, 벩송이 보기에 이미 세 가지 착각에 속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들뢰즈가 넷째 착각을 구분해 내면서, 벩송이 우주와 토지의 관계에서 3가지 착각을 잘 말했지만, 나로서는 토지 위의 인간들 사이에 관계 그리고 제도와 연관들 속에서 착각을 들뢰즈가 보았다고 생각했다. 벩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MR)”에서 두 가지를 구분했다. 자연에 저항과 사회의 저항을, 자연의 저항에서 고착적 종교가 생기고 사회의 저항에서 동태적 종교가 생긴다고 말이다.
들뢰즈는 넷째 악순환의 오류를 적용의 오류라고 하였다. – 이 말의 뜻은, 자본이라는 제국이 금융을 전유하면서 인민들 속속들이 적용하고 있다고 보는데, 플라톤의 이데아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에 접근할 수 없듯이, 적용은 인민의 심층에까지 적용이 잘 안 된다. – 이 적용의 오류는, 땅을 설명하기 위해 하늘을 대입시키거나, 또는 영혼의 활동을 잘하기 위해 신체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는, 서양철학사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늘과 땅, 신체와 영혼이라는 이항 대립을 설명할 때와 증거를 댈 때가 서로 뒤바뀌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맑스의 노동은 인간의 삶에 관해서인데, 제국에 빌붙은 수학자들은 인간의 노동력도 계산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원신세도 계산한다. 계산에 들어가는 이들은 상부(다수자)이고, 계산과 관계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심층(소수자로 불리지만 세상에는 80%가 넘는 다수자이다)이다. 심층은 무지랭이처럼 살다가 간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럼에도 인민이 토대이고 최종심급이라는 것이, 프랑스 혁명 200여 년이 지나서도 나오는 입말이다. 인민이 아프면 위정자가 아프다는 것은 동서양에 심신(영혼과 신체)을 주제로 삼을 때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이렇게 노동력을 주제로 삼은 이후에 전 지구상의 먹거리와 잠자리 생산량이 넘치고 넘치는 데도, 굶는 자가 억명에 가깝고, 적도와 달리 사는 곳에서 잠자리를 마련하고자 평생을 노력하는 제도를 누가 만들었겠는가. 신이 만들었나, 자연이 만들었나. 이 제도가 게으른 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자들이 사기꾼 또는 점쟁이일 것인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고들 한다. 그 질문에 그들에게 불평등과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대해 물으면 그 사기꾼에게 말려든다.
그렇게 문제제기 하지 않고, 왜 삶에서 다른 자연재해나 기후변화에 대해 풀려고 하지 않고, 인간들 사이에 니가 많니 내가 많니 하는 문제를 다투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만들었나? 그 문제 맞기는 맞나? 싯달다가 왕궁을 벗어나 배고파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이미 그 시대가 이미 다른(문화) 관심을 가져도 먹고 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어째서 먹거리와 잠자리를 찾아서, 다른 이들에게 한 푼의 구걸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가. 그렇게 모자랄 것 같으면, 서구의 우생론자들 이야기처럼 인구들 줄이는 거세를 할 것이지, 왜 피지배자들에게는 많은 자식을 낳게 하고, 자신들은 전쟁하든지 간에 상부의 수를 전지구적으로 줄이면서 지배하고자 하는가?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로서 작품들이 이런 이야기를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적용의 문제를, 유일신앙자들이 얼마나 착각과 오류에 빠졌는지를 들뢰즈는 니체에서 찾았다. 니체도 서양인이니깐. 유일신앙자들은 인민에게 한번은 원한을 갖게 했고, 그리고 다른 한번은 먹거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도구/무기를 알았을 때, 인민이 상층에 저항하고 항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원죄를 심었다고 했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노동을 열심히 하라고 했다. 도구/무기의 의한 생산력의 강화인, 노동력에 의한 생산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은 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을 때, 인민에게 원죄의식처럼 부채의식을 안겼다. 부채가 있다면 채권자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국가를 통하여 채권자가 부채자에게 명령과 지배를 하는 방식이 소유권이다. 누구나 자연 속에서 부채의식은 없다. 왜 제도와 국가는 부채의식을 심을까? 부채, 그것이 적용의 코드였다. 왜 원리라고도 법칙이라고도 하지 않고, 규율과 훈육으로서 코드라고 했겠는가.
적용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의 허구와 착각을 길게 설명한다. 종교적으로 원한과 죄의식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맑스와 달리 억압과 억제로 바꾸어서 길고도 흥미있게 설명하였겠는가. 전자의 두 과정을 넘어서면, 현실에서 두 방식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은 서구가 유일신앙체제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두 방식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뭣이냐고 물어야 할 것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죽어서 천당 또는 극락이라는 저세상을 가는 것이 ‘차후에’라는 오류를 지적하듯이, 살아서 억압의 체제와 억제의 사고가 왜 나왔는지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억압이 왜 있는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러면 제도를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가? 생산양식을 넘어서 누가 누구를 먹어 살리는가? 인민이 위정자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을 먹여 살리자고 인민이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민이 누구하고 먹고 사는가? 인민이 인민하고 상부상조하며, 그보다 앞서서 자연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같이,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지 않겠는가?
적용의 오류는 하늘과 땅, 신체와 영혼의 문제라는 이항대립의 관계를 해결하려 하면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연 속에서, 생명체들의 상호연관에서, 문제의 해결방식을 찾아야 한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인가? 그것 믿는 유일신앙자들의 이기심이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를,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상업자유주의를 만들었고, 그런 방식이 광기라고 푸꼬가 왜 주장했겠는가? 그 후 250여 년 만에 인간이 이기심이 제도뿐만이 아니라 자연도 파괴하고 있다고 알았다. 자연은 자기 치유능력이 있다. 하다 안 되면 인간을 버리고 박테리아로 하여금 지구를 지배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공포나 허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게다가 지구는 언제나 돌고 있고 변하고 있다. 원래 하나의 통일성이든지, 차후에 통일성이 있다고 자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기심과 탐만치에 빠진 인간들이 이전에도 통일성이 있고 차후에도 통일성이 있다고 착각과 오류에 빠질 뿐이다.
천지와 심신의 이항 문제에서 자연 속 인간의 문제로 이전하여 심각하게 제기한 것은 그래도 정치경제학이다. 그런데 자연과 인간에서 인간의 지위를 자연 밖에다 두려고 한 책임은 자연학 배후를 형이상학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자연 밖, 이것은 탐욕과 오만과 치졸함, 탐만치이다.
언어와 입말이 또는 문자와 기록(등록)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 속에 인간의 생물학적 등록은 유전자에 있다. 이 유전자의 생명체는 먹거리와 잠자리의 방식에 따라 달리 과거를 보존하고 기억한다. 유전자라는 기록들이 추억들이지만, 기억이 추억들을 사용하는 방식은 자연에 의존해 있을 수밖에 없다. 먹고 자지 않은 생명체는 없다. 자연은 수십 억년을 걸쳐서 자기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왔고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 대해 진솔하게 생각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허구와 착각에 빠진 자들이 인공지능을 통해 과거의 모든 지식을 종합 정리하면 인간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적용의 오류이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자연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졌지, 자연에서 예외로서 또는 자기 지칭을 제외한 논리로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러셀도 이미 말했다. 자기 이외 방식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 자연에 대한 무지이며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며, 적용의 오류이다.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자기 억제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제도 속일 때, 예속과 굴종이다. 이런 자발적 예속과 굴종이 인간들 전체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굴종의 삶은 제도 속이고, 노마드는 자연과 더불어 산다. 그리고 자연 속에 일정한 과정을 겪으면서 가야한다 것도 안다는 것이, 적용의 오류를 벗어나는 인민들이다. 인민들은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수많은 기괴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무덤도, 파묘의 첩장도, 인민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민은 안다. 싯달다가 염처경에서 말하듯이 죽으면 온갖 미세 벌레가 몸을 먹어치운다는 것도 안다. 그 흔적을 태우면 없어질 것이라고 설법하는 이들도 착각하는 것이다. 태우는 것 또한 자연의 불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여러 방식들 중의 하나이다. 흙 속에서 박테리아 먹게 두는 것도, 물 속에서 고기떼에게 먹히는 것도, 산중에 버려져 짐승들과 산새들이 먹는 것도 여러 방식들 중에 하나이다.
적용의 오류는 세상의 무수히 많은 방식 중에서 제도 속에서, 이 방식(양식)만이 맞고 정당하다고 법률을 정하고 원칙이라고 우기는 자들에게서 나온다. 그 양식을 우기는 자들을 들뢰즈가 외디푸스라고 말했지만, 서구에서 크리스토스이고 동방에서 황제(참주)였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황제로 받아들이고 고착시키려한 것이 로마라는 것이다. 하나로(uni – vers)가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강요하고 억압하는 것이 1600백년이 지났고, 문자보다 입말의 발전으로, 억압보다 억제를 심기 위해 훈육의 제도들(학교, 군대, 병원, 감옥, 요양원)을 만드는 것이 억압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가정에서부터 억제를 심었다. 프로이트가 19세기 말에 억압을 본 것이다. 그 억압을 죽음에다 붙인 것은, 억제를 벗어나는 떠돌이를 막기 위해 종교의 억압을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억압은 떠돌이와 거지들을 만들지 않고, 훈육의 제도,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산중 기도원의 제도를 만들어 그 속에 수용한다. 구호로는 깡패, 거지, 불량배라고 하지만, 이를 핑계로 체제의 저항자 몇을 제거하면서, 억압을 가정에서 학교에서 억제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터전은 입말이 제자리를 잡기 전에 제국의 억압과 마름들이 선진국 지식이란 이름으로 따라한 제도 속에, 가정에서 억제로서 자라서 사회에서 억압 속에 살아간다. 제국의 마름들은 인민에게 사회의 억압에 저항과 항쟁을 할 수 없는 틀에 살게 하면서, 틀 속에 자유가 있고 삶의 편리가 있다고들 한다. 그 틀에 반대하거나 그 굴종의 자유에 저항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들뢰즈가 베이트슨에 빌려와서 말하는 이중구속이다.
이중구속은 두 가지 상반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점에서 강제이다. 두 가지 상반된 힘의 존속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입말로 상반된 힘의 투쟁에 대한 통찰이지만, 그것을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석의 자기장이다. 지구가 돈다는 것은 남극과 북극의 양쪽 힘이 동시에 존속한다는 것이다. 생명체도 그럴까? 이런 질문보다 두 가지 힘에서 다른 길을 생각하는 것을 문자화 시대 3천여 년 동안에 왜 막았을까? 종교의 억압이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 니체이고, 19세기 이후에는 제도라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육과 훈육의 필요인 줄 알았던 것인데, 제도보다 남녀의 만남(짝짓기)에서부터 통제와 명령이 있어야, 그 다음세대도 통제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도록, 가정에다가 심었다. 그것이 개인의 억제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채무가 있다고 여긴 것도 억압을 억제로 바꾸는 통제의 방식이다. 그런 억제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나찌와 파시즘을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유일신앙이 있었고, 일본에서 이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천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자와 기록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도구지만 지배하고 정복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도구/무기에서 벗어난 삶에서 입말은 상부상조에 있다. 물론 입말보다 먼저 행동하는 것이 도구/무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포틀래치(Potlatch)가 있고, 무상보시(無相布施)가 있고, 무위자연(無爲自然, 은총)이 있다. 다만 이런 실행을 시도 때도 없이 할 수는 없다. 능력으로서 생산이 많을 때 하는 것이지, 어리거나 늙거나 아무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왜 19세기 초에나 와서야 능력 있을 때 무상보시(은총, 자비)처럼 베풀고, 능력 없을 때 필요한 것을 받으면서 살자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맑스는 노동 가능한 인간이 능력에 따라 일해도 세상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데,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삶의 터전에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다가 늙는다는 과정을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 축적을 하지 않고 공동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솔하게 깊이 숙고했을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노동력이 동등하지도, 같은 또래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지혜로운 자나 지식인이 아니라도 안다. 어찌 조화를 추구하고 이런 사회를 혼성(composer)하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겠는가.
입말이 시대적 변화 과정을 세대 간에 공유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한글을 통한 우리 입말이 공용된 지가 겨우 70여 년 밖에 지나지 않아서, 사고를 공시적 관점에서 할 수 밖에 없다. 동학 이래로 침략한 일제가 산업화의 사고를 심었다. 그런데 그 관점은 앵글로 색슨의 방식(명령과 억압)을 일제가 배워서 우리에게 적용한 것이다. 적용의 오류를 범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제도적 억압과 입말 말살로 나갔다. 인민은 상층이 아니라 인민들 사이에서는 조선시대보다 더 입말을 펴나갔다. 미제가 우리 입말을 그들의 문자의 등록에 맞게 지배하려고 했다. 70여 년이다. 그런데 입말의 체계가 서로 맞지 않아서, 보조로서 일본을 반도에 재진입 시키려는 전략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70여 년에는 3세대가 서로 소통이 잘 안되지만, 입말을 쓰면서 풍토(자연)와 조화를 찾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윤석열이 제국의 문자 등록으로 체제를 만들고자 했지만, 제국의 등록보다 우리 자신들의 생명 등록이 훨씬 더 확장되었다.
일본제국이 다시 들어온다고 해도 조선시대 이후의 한문세대는 이제 갔으니 일본식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다른 하나가 문제이다. 이미지의 지배가 들어오고 있다. 시각 이미지로 만화, 영화뿐만이 아니라 청각이미지로 노래, 활동 이미지로 운동과 연관 산업들이 들어온다. 문자는 그보다 견고하게 지배하고 있다. 특히 철학에서 120년 서구 사상의 유입은 일제의 잔재로서 존속한다. 이를 넘어서는 것은 긴 과정이 필요하다. 사상사에서만은 박홍규가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을 이야기했던 것이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배하에 있지만 말이다.
입말은 토지와 풍토에서 생성하고 성장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재의 자본(돈)이 지배하는 방식에서 입말이 돈에 밀려난다. 그러나 소수자(인구 수로는 다수자)는 먹고 자고하는 사는 데 목을 메고 있다. 먹거리와 잠자리가 불안한데, 그나마도 기아나 난민으로 살지 않기에, 교육과 의료의 차원을 달리 풀어 가면 될 것이다. 달리 살기, 달리 말하기는 이제 범위가 넓어졌다. 한류와 한-영화, 한-노래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이 인디언을 지배하면서 인디언을 몰아내듯이, 여기 인민들을 몰아내면서 억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억제는 크리스트교가 많다고 하지만 우리 전래의 선도와 샤마니즘에 중첩되어 있어서(파묘 영화가 그렇다), 문선명, 박태선, 조용기, 유병언, 김홍도, 이만희, 전광훈 등은 크리스트교라기보다 샤마니즘과 중첩된 기복신앙에 가깝다. 이런 종파 종교들은 5천년 역사에서 지나가는 하나의 유행일 수 있다.
불교 천년, 유교 오백년. 이 다음에 125년, 신업화의 돈(자본)신앙과 유일신앙이라는 외세의 억압에 시달리지만, 억제로서 우리 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입말이 새로이 살아있기 때문이고, 우리 입말은 제도적 언어체계와 다르고, 문자로서의 명령과 지배와도 다르다. 70여 년 만에 입말이 제 위상을 차지 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거의 경이로운 은총(무위자연)이자 기적(아자르)과 같다. 그 결과가 윤석열 정부의 레임덕을 넘어서는 새로운 풍토로 등장할 것이다. 인민의 입말은 저항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6:26, 57OLI)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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