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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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3-심정의 예술로서 음악

 

1) 음악의 질료

낭만주의적 장르의 두 번째 형태가 음악이다. 많은 사람이 음악 장르가 특별하다는 점에 대해 언급한다.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마음을 직접적으로 흔든다. 음악은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감동을 준다. 음악은 심정을 무한히 고양시켜 탈아 상태에 이르게 한다. 등등. 이런 음악의 일반적 독특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질료 또는 매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다. 헤겔에서 이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체를 이루는 부분은 응집된 상태에서 고정되어 있다. 물체의 부분이 충격을 받으면 진동하게 된다. 진동은 물체의 부분이 제 자리를 이탈하였다가 다시 제 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이다. 헤겔은 이를 자기를 부정하고 부정된 자기를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진동이 물체의 공간적 고정성을 극복하는 운동이며 이를 통해 물체 내에 잠재하는 운동성이 밖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물체의 운동성이 해방된다고 말한다. 물체에 대립하는 순수 운동성으로서 빛이 물질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관념화라면, 물체의 진동은 두 번째 관념화에 해당한다. 진동은 빛처럼 물체에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운동이 아니라 물체 내에서 나온 운동이다. 헤겔은 진동을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1]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질료를 통해 더 이상 정태적 질료적 형상이 아닌 최초의 한층 관념적 물질[ideelle[2]]인 영혼성이 나타난다. … 음은 진동 즉 공간적 상태의 지양이지만, 반작용에 의해 다시 자기를 지양하는 것이므로 이중적 부정이다. 따라서 이런 음은 발생 속에서는 외면성은 그 현존재를 통해 자신을 다시 폐기하여 그 자체로 사라지고 만다.”[3]

 

진동은 물체의 속성에 따라 다양하며, 또 전달되는 매질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는데, 그 가운데 음악적 소리는 가청적인 비교적 고른 음을 내는 진동이 공기 중에 전달되는 소리로 제한된다.

 

2) 소리의 가상성

진동은 운동성의 해방이기는 하지만 다시 물체로 복귀하고 마는 것이어서 그것이 내는 소리는 일시적이다. 소리는 공간적 형태와 같이 존속하지 않으며, 한번 울렸다가는 곧 바로 사라지는 것이니, 이런 일시적인 소리 그 자체로서는 음악의 질료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소리는 일시성 때문에 서로 끊어지면서 다양한 소리로 분화될 수 있다. 빛이 분화된 색채가 가상화되면서 회화의 질료가 듯이 소리도 분화되면서 비로소 예술적 질료가 될 수 있다. 색채가 다른 색채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듯, 소리는 다른 소리와 대비되어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빛은 타자적인 물체에 반사되면서 분화되지만, 태어나면서 이미 분화되고 결합 가능한 소리는 색채 이상으로 가상적인 질료가 된다.

가상적 질료는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낭만적 예술을 가능하게 한다. 소리는 색채보다 더 가상적이므로,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소리 자체는] “이미 물질적 관념[ideell]이지만, 이런 물질적 관념의 현존을 포기하면서, 내적인 것에 적합한 표현방식으로 된다.”[4]

 

색채가 되려면 빛의 외부에 반사의 평면이 필요하다. 이 반사 평면에서 색채는 공존할 수 있기에 서로 대비되면서 주관성을 표현한다. 일시적인 음이 대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음이 보존되면서 시간적으로 지속하는 지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지반은 무엇일까? 음이 서로 대비되는 평면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처럼 어떤 시간적 지속체가 있는 것이라면, 그런 지속 위에서 소리가 서로 대비될 수 있겠다. 하지만 헤겔은 시간적 지속체를 상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헤겔은 시간적 지속이 주관의 내면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본다.  

소리는 인간의 주관적 내면 속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며 과거 보존된 소리는 현재 다시 받아들여지는 소리와 더불어 하나의 시간적 공존을 이루게 된다. 소리는 시간적 내면의 평면 속에서 보존되면서 서로 연관을 맺는다.

회화의 질료가 색채이지만 그 색채는 공간적 평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만큼 회화에서 공간적 평면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음악의 질료는 소리이지만, 그 소리가 지속되는 주관적 내면이라는 바탕이 없으면 소리로만은 음악의 질료가 될 수 없다. 그만큼 소리가 연관되는 주관적 내면성이 음악에서 중요하다.  

색채가 나타나는 평면은 외면적 공간이지만 음악이 나타나는 평면은 내면적 평면이다. 회화가 나타나는 평면은 주관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출현하는 시간적 평면은 주관 없이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음악은 소리를 받아들여 연결하는 바탕으로서 주관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음악의 표현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공간적으로 상존하는 객관성으로 만들지 않고 … 음악은 오직 내면적 주관적인 것에 의해 수행되며 또한 오직 주관적 내면에 대해서만 현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5]

 

3) 시간성의 종합

그렇다면 음악의 소리가 지속하는 지반인 내면적 시간 평면은 어떤 평면인가? 헤겔은 주관성의 차원을 다양하게 구분한다. 그 첫 번째 차원은 지각적 인상이 주어지는 차원이며 두 번째 차원은 표상[Vorstellung: 관념]의 단계이다. 관념의 차원은 이미지에서 상상(또는 환상), 기호를 거쳐 관념(언어)에 이른다. 세 번째 차원은 분석하고 종합하는 사유의 단계이다.

두 번째 관념의 단계는 나중에 나오는 시문학의 질료가 된다. 시문학은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나 상상이나 환상을 통해 추상적 사유를 표현한다. 이 첫 번째 차원 즉 외적 자극이 처음으로 직접 받아들여지는 차원이 음악과 관련된 주관적 내면이다.

이 첫 번째 차원에서 주관성은 외적 자극은 내적인 인상을 남기는데, 여기서 시각적 인상과 청각적 인상 등 다양한 인상의 구분이 일어나게 된다. 시각, 청각 등 각각의 감각 영역에서 한정해 본다면, 어떤 인상은 같은 영역의 다른 인상과 구별되는 질적 차이가 없으며 다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양적 차이만 가질 뿐이다. 헤겔은 이를 ‘흥분[Affekt]’ 또는 ‘육체화한[Verleiblichung] 정신’[6]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각적 인상은 명도나 온도, 채도의 크기 차이를 가지며, 청각적 인상의 경우, 고저와 장단, 강약 등의 크기 차이를 갖는다.

어느 감각의 영역에서든 인상이 완전히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미 주관적 자아가 움직이면서 일차적으로 관념화가 일어나니, 관념화는 주관의 자기 관계에서 나온다. 모든 인상이 동일한 주관 속에 들어오면서 주관은 그 인상에 대해서 자기 관계를 갖는다. 이런 대자성 때문에 지각인상은 관념화된 것이다. 빛은 색채감각을 남기며, 음파는 소리라는 소리감각[7]을 남긴다.   

지각 인상은 동일한 하나의 주관 속에 들어오므로, 이 관념화된 지각인상에서 이미 일차적 종합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지각 인상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繼起]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지각 인상이 하나의 주관 속에서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가 곧 시간성이다.

시간성 속에서 지각관념은 분석되거나 결합되는 법이 없이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만을 유지한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종합이며 가장 단순한 종합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동일한 시간적 주관을 “완전히 빈 자아”, “그 어떤 내용도 없는 자기”, “추상적 주관성 자체”[8]라고 말한다.

 

“자아는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은 현존하는 자아 자체[Das Sein des Subjekts selber]이다.”[9]

 

헤겔은 시간을 ‘개념의 현존{Dasein des Begriffs}’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개념’은 자기 운동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기를 구분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주관이 대상을 자기 내에서 분석하고 종합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개념이 여기 시간성의 차원에서는 단순히 공존하고 계기하는 관계일 뿐이므로 헤겔은 이를 ‘현존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감각적 인상의 첫 번째 주관화의 단계에서 등장하는 시간적 내면성 영역이 곧 소리가 받아들여져서 서로 공존하고 계기하면서 음악으로 발전하는 내면적 평면이다.

 

4) 심정의 차원

헤겔에서 지각적 인상에서 표상을 거쳐 사유까지는 이론적 인식의 영역이다. 반면 감정은 욕망 다음으로 일어나는 실천적 의지의 영역이다. 실천적 의지는 나중에 표상과 결합하면서 자유의지로 발전하는데, 감정은 욕망과 자유의지 사이의 중간 단계이다.

외적으로 주어진 감각적 인상은 시간성 속에서 최초로 내면화된 것이다. 이런 내면화된 감각 인상이 실천적으로 연결되면서 감정으로 발전한다. 이 감정은 실천적 의지의 일종인데, 감각 인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은 조건-반사적이다. 즉 감각은 특정한 주관이 가진 습관적 기제에 따라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자극에 대해 직접 반응하는 본능적 행동이라면 자유의지는 전적으로 주관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반면 감각과 감정은 조건-반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감정은 다중적으로 분화된 반사 체계가 구축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 반사 체계 속에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어떤 반응이 나타나게 될 때 이를 조건-반사적이라 한다. 여기서 반사 체계는 오랜 경험, 습관을 통해 학습된 것이다. 감정은 이미 학습된 체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능동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주어진 조건이 주어지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음악은 대체로 감정이라는 반응을 낳지만 때로는 이 반응이 직접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행진곡이나 춤곡을 예로 들고 있다.

이처럼 감각과 감정을 매개하는 주관은 다만 습관적인 체계일 뿐인, 헤겔은 이를 정신이 아니라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주관은 단순한 것이며, 헤겔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의 즉자적인 총체성이다. 영혼은 개체적이며 배타성을 가지지만 이는 자기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감정, 자기 정체성[Selbstgefuel]에 머무른다. 헤겔은 이런 자기감정을 지닌 주관 즉 영혼을 가슴[Herz] 또는 심정[Gemuet]이라고 규정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적 시간의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청각적 관념의 결합은 감정을 조건 반사적으로 즉 습관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의 주요 과제는 … 가장 내면적인 자기가 그 주관성과 추상 관념적[ideelle] 영혼의 면에서 내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방식을 반향하는[widerklingen] 데서 성립한다.”[10]

 

5) 음악의 독특성

음악에서 외적 자극이 지각을 거쳐 곧바로 감정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아의 활동이 시간적 종합에 머무르고, 감정은 습관성에 그치므로, 이 셋 사이에 수동적인 직접적 연결만 있을 때가 많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자극과 지각, 그리고 감정은 마치 하나로 결합되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말했듯이 외면적 평면을 필요로 하는 회화가 독자성을 지니는 것과 달리 음악은 주관의 내면적 평면이 있어야 하므로 주관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예술로서 존재할 수가 없다. 악보에 쓰인 음악은 아직 아무런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연주자가 있어야 하고 감상자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주관이 살아서 움직이는 동안만 음악이 존재할 수 있다.

 

“음악을 통해 요구되는 것은 궁극의 주관적 내면성 자체이다. 음악은 심정 자체에 직접 호소하는 심정의 예술이다.”[11]

 

“음악이 목적과 내용으로 삼는 주관적 내면 자체는 … 주관적인 내면성으로 현상시킨다. 그런 한에서 음악적 외화는 … 생동적인 주관의 전달로서 제시되어야 한다.”[12]

 

이 주관적 내면이 시간적 종합의 차원이며 조건 반사적이므로, 이로부터 음악의 독특성이 생겨난다. 음악에서 주관적 내면은 표상 아래의 가장 단순한 차원이므로 음악은 문학과 달리 민족과 상관 없는 보편적인 예술이 된다[13]. 음악은 이 매개과정이 거의 수동적으로 일어나므로,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예술이 된다.

 

“음악은 의식을 사로잡는다. 의식은 더 이상 객체에 맞서지 않으며 자유의 상실 속에서 음 자체의 계속적 흐름에 의해 감화[fortgerissen]된다.”[14]

 

또한 음악에서 작동하는 내면성은 추상적 자아와 영혼의 차원이므로, 자기의식적인 관념의 차원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음악은 마치 사유하는 정신의 차원을 벗어나 감정의 차원인 영혼으로 되돌아가서 황홀경에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발생하게 된다.

이런 영혼이 동물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정신을 표현하면서 순수한 내밀성의 단계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음악적 감정이 어떻게 무한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가? 이는 앞으로 살펴볼 문제가 된다.


[1] 헤겔, 철학강요, §300

[2] 헤겔의 용어 ‘ideell’ 이나 ‘reell’을 번역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관념적[ideal]’, ‘실재적[real]’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도 차별성을 지닌다. ‘ideell’ 이나 ‘reell’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본다면 양자는 실재하는 것과 관념적인 것 사이의 중간에 있다. 실재하는 물질이 물질성의 영역 내에서 관념화[ideell]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빛과 소리가 그렇다. 반면 관념적인 것이 관념의 영역 안에서 실재하면, 그것이 reell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의 의미나 수의 관념과 같은 객관화된 관념이 reell한 것이다. 그 의미를 살려 ideell은 ‘관념적 물질’로, reell은 ‘객관적 관념’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3] 미학강의 3권, 142쪽

[4] 미학강의 3권, 142쪽

[5] 미학강의 3권, 143-144쪽

[6] 헤겔, 철학강요, §401

[7] 시각이나 청각 인상이 시각이나 청각 관념과 다른 것은 아니다. 인상은 어디까지나 관념으로 존재한다. 인상이라 말할 때는 외부에서 자극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관념이라 말할 때는 주관 자신이 자기의 구별과 관계하는 대자적 관계의 측면을 말한다.

[8] 미학강의 3권, 143쪽

[9] 미학강의 3권, 163쪽. 여기서 시간이 자아 자체의 ‘존재’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시간이 개념의 현존이라 했을 때와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아직 존재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자아, 개념이라는 뜻이다. 

[10] 미학강의 3권, 143쪽

[11] 미학강의 3권, 143쪽

[12] 미학강의 3권, 165쪽

[13] 엄밀하게 말하면 음악도 민족성이나 계급성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정적 반응 체계는 습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습관적 체계는 모호하며 일반성을 가지므로, 음악이 민족과 계급을 뛰어넘은 가능성이 생긴다.

[14] 미학강의 3권,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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