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0-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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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0-색채의 음악, 색채의 마법

 

1)

회화의 질료는 공간적 형태가 아니라, 색채이다. 헤겔은 빛이 어둠과 관계하여[즉 물체의 평면에 반사하면서] 색채가 출현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색채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물체의 평면을 떠날 수 없다.

그 때문에 회화가 처음 시작했을 때, 색채보다는 공간적 형태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조각이 삼차원적인 공간적 형상을 보여준다면, 회화의 경우 공간적 형태는 이차원 평면에 한정된다. 그런데 헤겔은 회화는 그 출발점인 평면화에서부터 동시에 특칭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조각과 같은 입체적 형상은 관찰자와 상관없이 자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객관성을 지닐 수 있으므로, 정신의 이상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화적 형상은 사물의 공간적 단면을 이루는 외곽선을 본 따서 만들어지는데, 사물의 외곽선이란 관찰자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은 입체적이므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사물의 외곽선은 달라진다. 더구나 관찰은 단안 시각이 아니라 양안 시간이며 관찰자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에 있으므로, 사물의 외곽선을 객관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주관은 자신의 관점에서 일정한 외곽선을 선택하게 되면서 회화는 이미 형상에서 주관성을 표현하게 되어 있다. 회화의 평면적 형태는 불가피하게 특수한 주관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조각에서 작품은 그 자체에서 완결적이고 자립적이라면, 회화의 형상은 “내적으로 특칭화된 내면성”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회화의 대상은 공간적 현존재의 면에서 정신적 내면의 가상으로 존재할 뿐이며 그런 까닭에 공간적으로 현전하는 현실적 실존의 독자성은 해체되고 또 조각작품의 경우보다 관조자와 훨씬 밀접하게 관계한다.”[1]

 

2)

고전적 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회화적 형태가 지닌 이런 주관성은 약점이자 한계가 될 것이다. 조각이 객관적인 형상을 드러냄으로써 정신적 이상을 표현한다면, 회화적 형상은 주관성을 항상 지칭하고 있으므로 그런 이상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예술이 이제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면서, 조각을 대신해서 회화가 예술의 주도적 장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회화는 특칭적 주관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더욱 본격화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르네쌍스 시대 등장한 원근법이다.

여기서 사물의 형상은 관찰자와의 거리에 따라서 크기가 조절된다.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그려지면서 거꾸로 회화의 형상은 이제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성을 통해 관찰자를 지시하는 하나의 가상이 된다.

 

3)

회화의 공간적 형태가 원근법을 통해 관찰자의 주관성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관찰자 시점이 놓인 위치만을 드러낼 뿐, 비록 그것은 관찰자의 처지와 입장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직접 그 자체로는 관찰자의 주관적 내면성을 드러낼 수 없다.

헤겔은 여기서 회화가 공간적 형상을 떠나서 색채의 마법을 발전시키는 동인이 있다고 한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를수록 이제 중요한 것은 특칭적인 주관성이다. 이 특징적 주관성이 지닌 내밀한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원근법적 공간적 형상만으로 불충분하다. 여기서 색채가 회화의 본질적 질료로 등장하게 된다.

색채는 빛이 분화된 것이다. 빛을 분화시키는 수단으로 다른 수단도 가능하지만 주로 물감(또는 벽화나 아상불라주 등에서는 물체 자체의 표면이 직접 이용되기도 한다)이 개입한다. 물감은 일정한 빛의 파장 외에는 반사하지 않으니, 이로부터 다양한 색채가 분화되고 화가는 이런 색채를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다. 공간적 평면 위에 색채들의 유희가 펼쳐지는데, 이런 색채의 유희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우선 공간적 원근법 대신 색채 원근법이 가능해진다. 밝은 색은 가까이 보이고 어두운 색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헤겔은 회화에서 원근은 선 원근법 즉 추상적 원근법보다는 “상이한 색채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즉 “빛과 그림자가 색을 지녀야 한다고”[2] 말한다. .

 

“빛은 이제 형상 거리 등과 같은 대상들의 차별성을 가상화함으로써.. 이 대상들이 인식되게끔 만든다.  왜냐하면 …명암 자체는 …가상화된 대상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에 관계하기 때문이다.”[3]

 

4)

색채가 명도를 통해 원근법을 만들어내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색채는 서로 대비된다. 색채는 서로 충돌하고 서로 조화됨으로써 하나의 색채 음악을 만들어낸다. 헤겔은 르네상스 화가 다빈치 등이 시도한 스푸마토 효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대상을 결여한 채 독자적으로 전개되는 색채의 유희가 등장하는데, 이 유희는 채색의 가장 극단적인 정점에까지 이르러, 색채가 서로 침투하고 빛[Schein]이 반조하니, 이 반조의 빛은 다른 가상 속으로 비추어 들어가면서 너무나 섬세하고 유동적이어서 영혼을 드러내며 음악의 영역으로 넘어 들어가기 시작한다.”[4]

색채의 음악

이 색채음악은 특칭적 주관이 지닌 감정을 촉발한다. “영혼적인 것은 회화가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생생하게 현상한다”[5]는 것이다. 헤겔은 색채가 전개하는 이런 마법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 소개한다.

 

“푸른색이 무저항의 어두움을 원칙으로 삼는 한, 그것은 비교적 온유한 것, 온당한 것, 비교적 고요한 것, 예민한 내면의 응시에 상응하며 반면에 밝음은 차라리 저항적인 것, 생산적인 석, 활기한 것, 명랑한 것이다. 녹색은 무차별적이고 중립적이다. 이러한 상징성에 따라서 예컨대 마리아는 대관을 한 하늘의 여왕으로 표상되는 곳에서는 종종 붉은 망토를, 반면 어머니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다.”[6]

 

네델란드 화가는 색채를 다루는 데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색채의 마법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이러한 마법사적인 예술가 특유의 정신에 의해 영혼의 빛남이[Schein]이 이러한 관념성, 이러한 내적 교호, 반사와 색채 빛남[Schein] 사이의 이러한 왕래, 이행의 이러한 변화와 유동을 통해 명료함, 광휘, 깊이, 색채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조명과 함께 화폭 전체에 퍼진다.”[7]

 

회화의 본질에 대한 헤겔의 설명, 르네상스 스푸마토 기법에서 발견한 색채의 음악, 네델란트 작품에서 보이는 색채의 마법은 20세기 등장한 모더니즘 회화를 헤겔이 미리 선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전개하면서 음악의 기법을 회화에 도입하려 했던 시도를 헤겔은 이미 르네상스나 네델란드의 작품에서 발견한 것이다.

 

5)

회화는 세잔느 이후 공간적 형상이 아니라 색채로 그 본질적 질료로 삼았다. 20세기 등장한 다양한 모더니즘 유파 즉 입체화나 추상화, 아상블라주, 꼴라주, 드립핑 등이 등장할 때만 해도, 회화는 색채와 평면이라는 질료적 한계 안에서 움직였다.

오늘날 개념 미술에 이르면 아예 평면과 색채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는 이제 문학적 표상을 질료로 삼는다. 많은 설치 미술의 경우, 회화는 조각을 닮아가며, 비디오 미술은 삼색화나 만화처럼 시각적 요소 속으로 언어나 운동이나 내러티브를 다시 도입하려 했다. 회화의 평면을 찌르거나 칼로 베면서 그 흔적을 남기거나 입체적 공간 속에 조명을 비추기도 한다.

이런 회화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통해 회화는 조각, 건축, 문학 장르로 넘어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색채와 평면이라는 질료적 특성을 떠나지 않는다. 회화 장르의 현대적 확장은 그런 점에서 장르의 경계선상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본다면 그 모든 시도는 색채와 평면의 확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회화의 본질적 질료는 색채이고 이 색채는 평면을 떠날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보겠다.


[1] 미학강의 3권, 32쪽

[2] 미학강의 3권, 78쪽

[3] 미학강의 3권, 36쪽

[4] 미학강의 3권, 86쪽

[5] 미학강의 3권, 75쪽

[6] 미학강의 3권, 79쪽

[7] 미학강의 3권, 8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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