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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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38-낭만적 예술 장르가 가능한가?

1) 낭만적 예술 장르

헤겔은 예술의 역사적 형식을 예술이 표현하려는 정신과 예술 작품 사이의 기호적 연관관계를 통해서 규정했다. 세 가지 기호의 형식 즉 상징, 현상, 가상에 따라 세 가지 예술 형식이 출현했다. 그것이 곧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이었다.

 

헤겔은 심지어 예술 장르조차 세 가지로 나누어, 상징적 장르, 고전적 장르, 낭만적 장르로 구분했다. 그것은 작품과 정신의 관계와 유사하게 질료가 의미에 대해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에 따른 것이다. 앞에서 건축의 질료인 무규정적 매스는 그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니므로, 상징적 장르다. 조각은 구체적 물질성이 질료이니, 그 자체에서 정신적 형상을 표현할 수 있다. 조각은 고전적 장르이다.

 

그렇다면 낭만적 예술장르에서 질료는 무엇이며, 그것은 의미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가?  그것은 낭만적 예술 형식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낭만적 예술 장르로 헤겔이 포괄하는 장르는 회화, 음악, 그리고 시문학이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예술 장르가 낭만적인 장르에 속하게 된다. 이런 다양한 장르는 언뜻 보기에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어떤 하나의 공통적인 질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조차 든다.

 

2)

헤겔에서 회화의 질료는 색채이고, 음악의 질료는 음이다. 시문학의 질료는 음소나 문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적 관념[표상]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색채나 음은 물질적인 것이다. 반면 언어적 관념은 물질적인 것에 대립하는 관념이니, 그 사이에 어떤 공통성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헤겔의 자연철학적 관점에서는 생각이 달라진다. 헤겔에서 색채나 음은 언어적 관념은 아니지만 일종의 관념적인 것이다. 우선 색채를 보자. 색채는 빛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표면에 반사되면서 색채가 된다.[1] 색채의 원천이 되는 빛이 물체의 질량에 대립하는 순수한 에너지라는 점에서 헤겔이 색채가 이미 관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음도 마찬가지다. 음은 사물 자체의 울림[Klang]이며,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인데, 사물에 외적으로 존재하는 빛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 즉 진동[Erzittern]이다. 사물은 진동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만 다시 자기를 회복하니, 헤겔은 이런 진동을 물질의 관념적 운동이라 규정한다[2].  

 

헤겔은 색채와 음을 언어적 관념과 마찬가지로 관념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것들 사이에 일정한 단계적 구분이 존재한다. 색채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이 물체의 표면에 반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색채는 물체의 표면 공간을 떠날 수 없으며, 색채는 표면 공간에 의존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3]

 

반면 물체의 진동인 음은 스스로 소멸하면서도 자기를 보존해 나가는 시간적 존재이며[4] 따라서 색채보다 더 발전된 의미에서 관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물질은 외재성{Aussereinandersein:  병존성}을 벗어나서 탈자적[Aussersichsein: 소멸성] 존재가 된다. 이런 탈자적, 시간적 존재조차 여전히 물질의 진동인 한에서, 물질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언어적 관념에 이르러 음소나 문자와 같은 언어의 물질성은 관념을 지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고, 그것이 지시하는 관념은 물질성으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된 순수한 관념적 존재가 된다. 이런 관념성은 공간성뿐만 아니라 시간성마저 상실하고, 관념과 관념은 오직 논리적[언어적] 관계만 갖는다.

 

3)

낭만적 질료라 규정한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이 관념적인 것이라는 공통성을 지닌다고 해서 단순히 그런 공통성이 그런 질료를 낭만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근거는 아닐 것이다. 관념적인 것이 낭만적인 것이 되어야 할 이유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형식의 경우 그 기호는 가상이라고 규정되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가상이라는 것은 현상과 같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면서, 의미를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자기 부정성은 달리 말하자면 자기 내 복귀를 말한다. 이를 통해 무한한 주관성으로서의 정신이 자기를 드러낸다.

 

구체적으로 말해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인 주관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리얼하게 제시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서 부정되는 가운데 정신 드러낸다.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운동성 속에 제시되기에 가상이라 규정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보카시오의 데카메론과 같은 모험 소설이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같은 성격 희곡일 것이다.  

 

낭만주의의 말기 즉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개별적 사건이나 특칭적 주관성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긍정성은 무한성, 즉 자기복귀라는 자기 부정적 운동을 잠재적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대체로 외적 자연, 즉 이런 자연의 개별화되고 특칭적인 것으로 된 대상들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 이것들은 아무리 충실하게 취급되더라도 이 경우 이런 대상들에게는 자기 자신에서 정신적인 것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런 대상은 이미 그 예술적 실현 방식을 통하여 정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또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생동적이고, 외면성의 최종적 극단에조차 심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함, 한마디로 내적 관념적 요소를 가시화한다.” [5]

 

이런 가상 개념을 생각해 볼 때, 헤겔이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과 같은 관념적 질료를 낭만적 질료라고 규정했다면 그 이유는 그런 관념적 질료가 자기 부정적이거나 자기 복귀라는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낭만적 질료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주관적인 것이 … 이 질료 속에 이입된다면, 내면은 내면으로서 비치기 위해 이 질료에서 한편으로는 공간적 총체성을 제거하고 또한 공간의 직접적 현존재를 그와 반대되는 것으로 즉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형상 및 그 외적 감각적 가시성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이 요구하는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들을 추가로 도입해야 할 것이다”[6]

 

여기서 헤겔은 낭만적 정신이 무한한 주관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이런 무한한 주관성을 예술적 질료가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질료에서 공간성을 제거하고 ‘정신에서 야기된 가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가상성 외에도 갖가지 특칭화하는 현상방식 즉 특수 기법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역시 전체의 핵심은 가상 개념에 있다. 낭만적 질료가 되려면 가상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4)

하지만 관념적인 질료가 가상적인 근거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이 가상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가상성이란 자기 부정성, 자기 내 복귀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관념적인 것은 이런 개념과 필연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여기서 헤겔의 관념성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겔이 물질은 외재적[Aussereinandersein]인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여 상호 내재적이 되면 관념적으로 된다. 즉 어떤 것이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에 의해 규정되면, 이 경우 타자는 자기의 부정이며 자기는 이 타자의 부정, 즉 이중 부정이 되면서 관념적인 것으로 된다.

“여기에 정립되는 관념성은 이중적인 부정으로서 변화를 의미한다. 물질적 부분이 상호 외부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부정되니, 그것의 상호 외부적 존재와 그 응집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관념성은 서로를 지양하는 규정성의 교체로서의 관념성, 물체의 자기 내부에서의 진동 곧 음이다.” [7]

 

이처럼 자기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 이제 의미는 개별적인 것 그 자체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관념적인 것은 오직 상호 관계를 통해 타자를 통해서 자기가 규정되니, 이것이 관념적인 것에서부터 가상적인 것이 출현하는 근거가 된다. 관념적인 것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이나 조각에서 물적 질료는 그 의미가 상징적이든 고전적이든 간에 개별적 질료가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개별적 질료는 서로 독자적인 것이며, 비록 외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념적 질료인 색이나 음, 그리고 언어는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항상 타자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런 질료는 개별자 자체로서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항상 서로 대립하는 질료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예를 들어 빨강색은 파란색이나 노랑색에 대해서 규정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빨강색은 이런 파란색이나 노랑색과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헤겔은 회화의 근본적 성격을 설명하면서 색채의 마법을 서술한다. 이 색채의 마법이란 곧 여러 가지 색채가 상호 대립과 조화를 통해 전체적으로 정신적 형상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음악의 음도 마찬가지다. 도미솔은 각자 고유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도미솔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되며 따라서 각자의 의미는 이런 음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헤겔은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 했듯이 음악은 음들로 이루어진 건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개별적 질료 사이의 반성적 관계는 언어적 관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개별 단어는 항상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단어가 그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등장 이래로 일반 상식이 된 것으로 보인다.

 

5)

물론 색채와 음, 언어적 관념 사이에서 각각이 갖는 상호 관계는 다르다. 색채는 다른 색채와 공간적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음과 다른 음은 시간적 관계 속에 있다. 색채나 음에서 그 관계는 마치 역학적인 인력과 척력의 관계처럼 대립과 조화, 또는 비례라는 단순한 수적인 관계에 머무른다. 이런 관계는 감각적 감정을 건드릴 수는 있지만, 이것을 통해 구체적 사태를 그것도 생성 소멸하는 운동 속에서 그려낼 수는 없다.  

 

반면 언어적 관념에서는 이제 주어와 술어라는 고유한 언어적 논리적 방식이 출현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가장 관념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사태를 그려낼 수 있고 그 사태를 운동하는 것 속에서 그려낼 수 있으니, 예술 가운데 가장 풍부한 질료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관념적 질료는 반성적 상호 관계 속에 있다. 그것은 이제 그 자체로서 규정되지 못하며 타자에 대해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관념적 질료는 자기 부정성이나 자기 내 복귀라는 성격을 지니게 되니, 헤겔은 이런 관념적 질료를 가상적 질료라 하면서, 낭만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1] 이 빛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이미 물질적인 것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니, 헤겔에 따라면 빛은 “물질적 관념성”, “불가분적이고 단순한 탈자태[Aussersichsein]”, “물질의 자아[Selbst der Materialitae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2] 이 진동은 “물체에서 나타나는 물체의 관념성[am Materiellen als dessen Idealitaet]” 또는 “역학적인 영혼성[mechanische Seelenhaftigkeit]”이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3]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동시에 빛과 상이한 어두운 것[물체]은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한, 빛은 이런 일단 불투명한 것의 표면에 관계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80)

[4] 아래 구절을 참조하라. “규정성의 특수한 단순성, 이 우선 내적인 형식은 물질적인 외재성[Aussereinandersein] 속에 잠겨 있던 것을 뚫고 지나가면서 그의 외재성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된다. 이것을 통해 물질적 공간성이 물질적 시간성으로 이행한다.” (헤겔, 철학강요, S. 297)

[5] 미학강의 3, 18쪽

[6] 미학강의 3, 18쪽

[7] 헤겔, 철학강요, S.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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