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
1) 근대인
근대는 시장 또는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정신의 소외’라는 개념으로 서술했다.
소외된 정신 속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신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 즉 개인의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를 나타낸다. 앞에서 이를 내재적 초월이라는 기독교 신의 모습을 통해 설명하였다.
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대로 반영하는 것이 곧 근대인의 모습이다. 한편으로 근대인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자기를 긍정하리라 믿는다. 그는 자기에 대한 오만에 빠지며, 무한정한 열정으로 자기를 추구한다. 이것이 근대인의 파토스다. 다른 한편으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언제든지 그를 파멸시킬 수 있으니, 그는 운명에 대한 예감 가운데 죄의식을 느끼며 그 앞에서 불안하다.
헤겔은 무한한 파토스 속에서 오만하면서도 닥쳐오는 운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헤겔은 이런 점을 근대인의 파토스와 죽음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이 두 개념은 고대에서도 출현하는데, 헤겔은 고대적 개념과 근대적 개념의 차이를 정신적 토대의 차이에서 규정하려 한다.
2) 고대의 파토스
고대인의 파토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두 주인공 엘렉트라와 클레온은 파토스에 따라 행동한다. 역시 그들의 파토스는 그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 예를 들어 가족의 윤리나 국가의 윤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기 자신이 명백하게 정당하다고 믿고 이를 주저 없이 단호하게 행동으로 실천한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 몰락하지만, 그의 몰락은 그가 자기의 실체와는 대립하는 다른 실체적 힘을 해치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다른 실체적 힘에 의해 보복 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에 대립하는 실체적 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부당하게 보복 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안티고네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오빠를 장사 지내고 클레온 앞에서 끌려와서 자신이 택한 원리가 하늘의 법이라고 주장한다.
“전 글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임금님의 법령이 인간의 몸으로서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법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의 것이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릅니다.”[1]
반면 클레온[안테고네의 외삼촌이다]은 국가의 원리를 대변한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싸움을 벌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조국을 방어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을 배반한 자다. 당연히 전자는 경배 되어야 하고 후자는 처벌되어야 했다. 클레온은 등장하자마자 코러스 앞에서 자신의 임무를 고백한다. 그는 국가를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시민에게 안전이 아니라 파멸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서는 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작정이며, 또한 국가에 적대하는 인간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것은 즉 우리나라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배이며, 그 배가 편히 항해할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
안티고네든 클레온이든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과 다른 실체적 힘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는 무지에 의해 범법을 실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주장한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3]
그럼에도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되는데, 그런 자각은 자신이 다른 실체적 힘으로부터 보복 당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정당성이란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인 당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실체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파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된다. 아래 클레온의 고백을 들어보자.
“아, 이 죄는 도저히 다른 사람한테 전가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그렇다, 내가 죽였다. 불쌍한 이 몸!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얘들아, 어서 나를 데려가거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빨리 데려가거라!”[4]
3) 근대의 파토스
근대인의 파토스는 이런 실체적 힘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파토스란 자신의 목적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추구하면서도 이런 추구가 단순히 자신의 주관적 선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그는 아직 신적인 강요를 명백하게 자각하지 못하며 그것은 다만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그는 자신의 목적을 자기를 넘어선 욕망 즉 무한한 욕망 즉 열정이라는 방식으로 느낀다.
하지만 이런 자의적인 추구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파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토스적 인간은 처음에 그에게 다가오는 파멸을 어떤 알 수 없는 외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운명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런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끝없는 죄의식과 불안 속에 있다.
근대인의 파토스는 예를 들어 절대주의 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인 라신느의 희곡 페드라[5]에서 나타나는 페드라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페드라는 자신이 이폴리투스를 고발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유모!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이 몸의 심정을 보살펴 주오. 아리시아를 그냥 둘 수는 없소. 그 가증스런 혈통에 항거하는 내 낭군의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오! 그녀의 죄는 그의 오빠들의 죄에 능가하는 것이니 가벼운 벌로 그치지 않도록 내 질투에 겨운 분노에 힘입어 내 낭군 테세우스에게 간청하려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내 지각이 갈피를 잃고 질투에 눈이 멀어 테세우스왕에게 애원하는 것에 의지하다니. 내 낭군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시련으로 몸을 불사르다니!” [6]
위의 글의 앞부분은 질투, 뒷부분은 죄의식을 드러낸다.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한없는 질투, 그것이 곧 근대인의 파토스이다. 그런데 이런 파토스 속에 이미 그는 자신의 잘못, 죄를 자각하고 있다. 그의 질투에는 죄의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파멸을 예감하고 있다. 그에게 마침내 파멸이 다가온 순간 그는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적절한 자신의 정의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의 죄를 자각한 페드라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지금 이 몸은 촌각이 소중하오. 테세우스왕이시여!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우려주오. 순결하고 존엄한 왕자에게 불륜의 추파를 던진 것은 이 몸이요 비너스신의 화살이 이 가슴에 정념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으며, 그 밖에 모든 일들은 하녀 에노느가 서둘러 저질은 짓이옵니다. 그러나 이젠 그도 자기 죄를 깨닫고 바다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 몸은 당신 앞에 나아와 내 한 맺힌 탄식을 털어놓고 한발 늦게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려 합니다.”[7]
4) 죽음에 관해
헤겔에 따르면, 고대인과 근대인은 죽음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고대인에게 삶은 정당한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니, 그에게 죽음이란 자연이 그에게 부과한 몫이 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일은 이제 그의 사후에 새로운 인간에 의해 이어져가니, 그의 죽음은 우연적인 개인적 삶의 소멸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삶이 추구하는 본질은 계속적으로 이어 간다. 따라서 고대인은 이미 스스로 불멸하며, 불멸에 대해 진지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 담담하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래는 죽음 앞에 선 안티고네의 고백이다.
“(안티고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 [8]
반면 근대인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거꾸로 근대인에게서 죽음이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삶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이 무한히 중요한 것이므로, 죽음이 두려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근대인은 불멸에 대한 진지하고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대인에게서 죽음은 오히려 신적인 정의의 실현이 된다. 사실 무한한 욕망으로 추구되던 개인적인 목적은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이런 자의적인 목적이 제거되는 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객관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니, 죽음은 신적 정의를 회복하여 신적인 것으로 복귀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근개인에게서 죽음은 곧 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즉 개인의 죽음은 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의 죽음 개념의 앞에서 언급한 페드라에서도 나타난다. <페드라>에서 운명의 힘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로된다. 이 마지막 순간 페드라의 태도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라신느는 온몸에 독이 퍼져서 죽어가는 페드라의 고백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죽음은 내 눈에서 빛을 빼앗아 이 눈이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요.”[9]
페드라는 자기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 때문에 페드라는 마지막 순간 더는 자책도 사라지고 고귀한 고요 속에서 죽음을 겪게 된다. 이런 몰락의 극을 통해 라신느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영원히 지배하는 신의 힘, 신의 영광이다.
[1]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현암사, 1969. 이 가운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조우현이 번역했다.
[2]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3]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4]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5] 라신느는 루이 14세 시절 즉 바로크 시대 궁정 작가이다. 그는 같은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와 희극 작가 몰리에르와 대결하면서 여러 비극을 작성했는데, <페드르와 이폴리투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페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원래 에우리피데스가 만든 비극 <이폴리투스>가 있지만 작가 라신느가 이를 개작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교적 단순한 비극이지만 라신느의 비극은 그의 시대 바로크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화려한 비극이다. 라신느는 개신교의 예정조화론을 믿는 장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적인 운명 개념 대신 근대 기독교적 운명 개념을 비극 <페드라>를 이끌고 가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삼았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아내인 왕비 페드라는 전 왕비의 아들인 이폴리투스를 사랑하지만 감히 고백하지 못하고 야위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출정 중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폴리투스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반면 이폴리투스는 테세우스가 무너뜨린 아테네 전 왕조의 딸 아리시아를 사랑한다. 테세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폴리투스는 아리시아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한다. 아리시아 역시 이폴리투스를 연모해왔던 터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살아서 돌아온다. 그러자 페드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혹시 이폴리투스가 자신을 왕에게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페드라는 먼저 왕에게 무릎을 꿇고 이폴리투스를 고발한다. 이폴리투스가 오히려 왕이 없는 사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면서 이폴리투스에게서 훔쳐온 그의 단검을 증거로 내보인다. 테세우스는 이폴리투스를 추방하고, 분노 때문에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에게 추방당한 이폴리투스를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페드라는 이를 알자 후회하지만 이번에는 아리시아에 대한 질투감 때문에 자신의 거짓을 밀고 나간다. 이폴리투스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사랑하는 아리시아에게 먼 나라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떠나지만 그가 타고 가던 마차를 넵툰이 보낸 괴물이 덮쳐 그는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되자 죄의식으로 고통 받던 페드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페드라는 스스로 독을 마신 채 왕에게 나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죽는다.
[6] 라신느, Phaedra, 이연자 역(극단 성좌 77년 공연 대본), 2막 5장
[7]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8]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9]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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