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없는 것(l’invisible)”, 시간과 공간 [천 하룻밤 이야기]
“볼 수 없는 것(l’invisible)”, 시간과 공간
2023 12 07 대설(大雪) {젊가13010형이상23시공}
교육의 문제는 인류사에서 난제일 것이다. 교육의 필연성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지만, 르네상스 이래로 교육이란 일반인을 포함하는 교육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교육이 1882년에 요즘 말하는 평등, 무상, 세속(무종교) 교육이라는 법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모든 어린이에게 어떻게 학년 구분의 교육방식과 교육의 내용을 설정할 것인지를 고민하여, 요즘의 각 학년의 구분을 검사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어느 지식을 갖추면 몇 학년 등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70년대에는 초등 3학년에서 구구단을 외우게 했는데, 요즘은 초등 2학년 때 한다고 한다. 전에는 중등 1학년 때 인수분해를 배웠는데, 초등 6학년이 되면 이미 인수분해를 알아채고 다룬다고 한다. 수학 만이 아니라, 물리학, 그리고 생물학, 건강을 위해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방식은 학년에 따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세계가 교육 방식에서 거의 공통의 진행방식을 따라간다. 유전자(DNA)에 연관과 미토콘드리아 역할은 고등교육에서 다룬다. 그런 교육의 배치와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종합과정으로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한다. 프랑스만이 철학을 대학입학 자격시험으로 네 시간에 걸쳐서 논술을 보고, 그리고 개인 능력의 실험으로 구두로 문답시험도 본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는 한자를 익히기 위해 ‘천자문’이란 단어의 기초를 배운다고 하지만, 어린이용으로는 “격몽요결”이 있었고, 사회의 생활을 위한 “명심보감”이 있었다. 그리고 제도 속에서 행정과 실무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사서삼경”을 통과해야 했다고 하는데, 중앙에서 관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사대부들이 사서삼경과 이에 걸맞은 다른 문헌들도 탐구했다. 학문의 방법과 사회제도의 연관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시대에 사서삼경이 중심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서양은 일곱(7) 예비학문이 있다. 문법, 수사학, 변증학의 삼학(trivium)과 산술, 기하학, 점성술, 음악의 사과(quadrivium)이다. 숫자로는 동서양이 모두 7학문이 기초이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임무를 맡기 위해서, 그들은 이런 기초보다 더 많은 공부를, 동양은 예기 춘추 등을 포함하는 10경을 읽어야 한다고 하듯이, 서양에서는 7학문을 넘어서 자연철학과 도덕론, 그리고 신학을 포함하였다. 이런 단계적 방식의 교육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고대와 중세의 상식에 준하는 지식의 이해는 초등학교에서, 근대에서 개별학문의 등장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학문을 다루는 과정은 중등과정에서, 19세기의 다양한 학문이 생성되고 분류되는 시기를 다루는 것은 고등학교에서 할 것인데, 그 고등학교에 마지막 학년에서는 현대에서 여러 갈래로 벌어지고 있는 학문들에 대해 맛보기 정도를 한다. 대학에 가서 학문의 가지 중 하나를 잡고서 공부하라고들 한다.
각자의 관심에 따라 분류들의 가지를 따라가기에 앞서, 인류가 이 지점까지 오게 된 과정의 종합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 종합이 철학인데, 그 철학을 다루지 않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교육의 방향 설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시행할 배치와 배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왜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깊이 또는 여러 방식으로 철학을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 고중세나 서양 고중세에 종교의 힘이 강했다. 한쪽은 불교가 다른 쪽은 크리스트교가, 그리고 서양이 르네상스를 겪듯이 우리에게 신유학이 있었다. 등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은 인류의 지식과 인식이 한계에서 오는 것이리라. 고중세에서 아무리 하늘과 우주가 무한하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상식(5관)을 통한 지식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인류가 망원경이 발명하면서 눈으로 보는 세계 이상의 우주를 설정하고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했고, 그와 더불어 다양한 사회 변화에 맞는 도덕론과 과학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여러 학문들이 생겨남에도 기본적으로 자연(la nature)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 서양철학사를 읽으면, 근대에 와서 신의 ‘자연들(les natures)’, 인간의 ‘자연들’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자연을 본성이라 번역했지만, 그 자연이 학문과 삶의 토대인 것은 분명하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부류들과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지식으로 삼는 부류들은 다르다. 자연을 공존이라 하는 공산주의자와 자연을 소유로 하려는 자본주의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자연은 상부상조와 사적 소유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두 부류가 있는 것은 현실 세상이다. 사람들은 세계관이 다르다고들 한다. 그 세계관이라는 관망(vision, 통찰)에 대한 견해들이 왜 다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다루는 방식을 나로서는 형이상학이라 부른다. 이런 문제 제기에는 탐만치가 들어있다고 본다. 형이상학은 탐만치를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나온 학문이리라. 탐만치의 이면에 들어있는 난제를 풀어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여러 난제(수학, 언어, 운동부정)가 있었고, 그 난제들을 해결했다고 하면, 더 깊이 또는 더 멀리 난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에서 수학적으로 1을 깊이 들어가는 경우와 무한을 더 멀리(?) 나가는 경우는 일상인에게는 문제 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 1보다 깊이 있는 문제를 잘 보아야 탐만치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함에도 이런 문제 같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문제로서 제기되었던 것이 1(단위) 보다, 공간과 시간이었고, 형이상학에서 아직도 논의되는 문제이다.
문제 같지 않은 문제라, ‘우선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터전이 공간이잖아, 그리고 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 시간이잖아’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 왜 이오니아의 질료에 이어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의 한 축인 퀴니코스-스토아로 이어지는 현자들이 ‘볼 수 없는 것’(l’invisible)을 사유의 문제로 다루었을까? 그 스토아 현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말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거의 네 가지로 나열할 수 있었으리라. 공간, 시간, 원자(아톰), 영혼(퓌쉬케)이다. 유물론이니 실재론이니, 이미지니 하는 문제는 이 네 가지의 “볼 수 없는 것”에 관한 견해에서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볼 수 없는 것’임을 통상적으로 인정하지만, 공간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사유한 현자들에 대해서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현자들의 말하는 공간은 물건과 물건 ‘사이’가 공간도 아니고, 그리고 물건이 자리를 차지하는 ‘위치’도 공간이 아니며, 이 공간이 어떻게 있는지를 모르면서, 물건이 있고 사람이 있으니까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의 부분을 설명하는 방식이지, 공간이라는 전체 또는 현존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공간을 불가분성과 측정 불가능성은 아무래도 현자들의 말놀이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이 현자들은, 이데아들이나 논리의 항들이 말놀이라 여기고, 공간의 실재성을 다루려고 하는 것이 말놀이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이다.
우선 시간을 보자, 시간이란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인정하기는 쉽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하늘의 수를 땅으로 환원하려는 플라톤의 시간처럼, 시간의 지나감을 설명하는 것이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은, 지나간 흔적으로 설명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보면 그가 살아온 과정(흐름) 전체가 시간인데, 이 흐름 전체를 대상화하여 시간이라 부른다고 하는 것은 흐름을 사물처럼 대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벩송(Bergson)은 흐름을 대상화하지 않고서 ‘이미지’라고 스토아학자들처럼 말했다. 그 흐름은 어제라는 과거의 과정, 이제라는 현재, 그리고 내일도 살아갈 것이라는 아제가 있다. 시간은 어제, 이제, 아제의 세 단위를 잘라서 구별할 수 있다면 삼차원이다. 흐름에서 삼차원 이상을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제-이제-아제를 하나로 이미지로 생각하는 것과 차원 셋으로 잘라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이 세 과정을 하나 보아, 생(Vie)이라고들 하는데, 현자들이 말하듯이 어제-이제-아제를 이런 의미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은 시간과 달리 위치 또는 사이(간격)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그 너비 또는 부피 또는 무한으로부터 생각하는 것도 공간이 아니라고 한다. ‘볼 수 없는 것’으로서 공간(허무, 빈 것)이 논리적으로 점, 선, 면, 체적, 우주 등으로 차원을 달리하면서 위치와 크기의 관점에서 공간을 설명하기 위한 항목들을 설정할 수 있다. 문제는 단위 설정이다. 점으로부터 설명할 때, 점이 위치와 크기가 없는 차원인 0차원이고, 선이 1차원이라 한다. 이 0차원에서 점이 공간을 설명하는 항목 또는 대상이 아닐 것 같다. 다른 한편 수학에서 지수의 도입으로 x의 3승이 체적이면, x의 4승은 무엇이며, x의 5승은 무엇일까? 수학자들은 5승 이상을 다루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차원이 사유에서 있을 수 있듯이 공간은 볼 수 없고 나아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차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무한이 수의 나열에서 무한이 아닌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면, 공간은 시간과 달리 ‘볼 수 없는 것’이 다른 차원일 것 같다. 왜 원자론자들이 원자와 ‘빈 것’이라 했는지, 그 빈 것이 볼 수 없는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원자가 볼 수 없는 것으로 삼았던 현자들의 사유가 형이상학의 사유일 것이다.
시간을 볼 수 없지만, 삶의 과정과 천체의 운동으로 보아도 ‘흐른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없고, 그럼에도 생명체인 한에서 흐름이 실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제-이제-아제의 삼차원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럴듯하다. 이와 유비적으로 추리하여 공간을 삼차원에 한정시키는 것은, 흐름으로서라기보다 부피[너비]를 지닌 생명체인 한에서 신체가 공간 속에 어떤 자리 또는 위치를 차지하는 체적이라는 점이다. 시간과 달리 공간 속에 체적으로서 물체 또는 신체는 3차 이상의 차원을 현실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유에서 실험적으로 3차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지만, 생명체를 다루는 한에서 3차원의 방식과 시간의 3차원을 겹쳐서 우화적 이야기가 난무한 것이 세상사일 것이다.
주역에서 8괘를 넘어서 4차원을 사유하지 않고, 삼차원을 두 겹으로 겹쳐서 64괘를 설정한 것은, 내가 보기에 나와 타인과의 관계 설정과 유비적으로 두 3항을 겹쳐서 삶의 양상들을 64가지로 나눈 것이며, 이는 요즘 MBTI의 8괘의 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말하자면 MBTI는 상식적 차원에서 인간의 자연들(본성)을 구별했다면, 복잡한 국가 또는 사회 체제에서 다양한 자연들(양상들)을 64가지로 분류하면서. 각 괘가 한 인간의 전형 또는 한 사건의 전형을 넘어서서 해석하는 틀로 보았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설명을 이런 이분법적 나눔으로 해석하는 것이 3차원 이상을 다룰 수 없다 또는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공간을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여 MBTI로 다루거나 좀 더 깊이 있게 64괘로 다룬다고 하더라도, 생명체의 삶의 과정은 이런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판단하려고 할 때 어떤 단면을, 의식상에서 추억, 또는 현재의 찰나를 기준으로 그 인간에 대해 해석하고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그 인간은 흐르는 과정이며 변화와 운동 중에 있다. 그런 운동과 변화 중을 공간상에서 정지된 측면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안다. 과정이고 흐름이기에 공간이라는 위치 설정도 궤적도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해석이 편리하다는 것도 사람들은 안다. 현자의 ‘볼 수 없는’ 공간은 어쩌면 원자보다 영혼과 맞물려 있을 것 같다. 그 영혼은 볼 수 없는 것이므로 점, 선, 면, 체적 속에 속하지 않지만, 그래도 해석과 설명을 위해 삼차원(신체)으로 환원해야 편리하다는 정도일 것이다. 공간 속에서 점이 움직인다고 여긴 쪽이 원자론자라면, 공간 속에서 영혼이 움직인다고 하면 스토아 현자들일 것이다. 이 두 계열로서 퀴레네학파와 퀴니코스학파는 공간 설정이 학문의 기초라고 보았거나, 공간 설정이 안 되지만 공간과 같은 설정이 필요하니까 영혼을 삼차원의 방식에 유비적으로 다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벩송은 공간이든 시간이든 이미지 덩어리가 활동 중이며, 스토아의 체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로 설정했던 이유가 있다. 그 운동 중이란 우주도 이미지이고, 운동 가운데에서 운동하고 있는 개체도 이미지이며 운동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 우주라는 운동 중인 이미지가 자연이라고 하면, 이오니아학파의 자연 즉 휠레로 거슬러 올라가고, 휠레 속에 연속적이 운동하는 개체의 이미지는 언젠가는 우주의 이미지로 되돌아간다고 하게 되면 자연회귀이고 그 자연의 운동 중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의 자기 활동성 또는 자발성이 형이상학의 기초가 된다. 이것을 스토아학파를 본떠서 벩송의 형이상학을 설명하면, 자연론, 휠레론, 유물론이며, 공간과 시간은 운동중인 이미지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벩송은 플로티노스를 통해서 스토아로, 퀴니코스로, 소크라테스로, 이오니아로 심층에서 연속하는 흐름을 철학으로 보았다. 철학은 운동하며 역동적이다. 이런 사유는 부동의 신을 사고하는 소르본 대학의 신학적 관점에 빠진 관념론들과 다르다.
운동하는, 흐르는, 덩어리가 이미지이며, 코스모스의 이미지이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의 코스모스에서 로마철학으로 넘어가면서 유니버스로 향하였다. 그 유니버스에서 사적 소유를 과거-현재-미래의 차원에서 유지하는 신학이 바울 이후 323년 삼위 격의 성립이다. 그 삼위 격이 상호부조 공동체를 버리고, 부동의 신의 자연에 사적 소유을 안겼다. 서양철학사 2천 년에서 공동체와 사적 소유의 논쟁이 형이상학의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다. 종교가 사적소유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잘 안다. 그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만들고 크리스토스라고 부르면서,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주장하는 이들을 즐겨 마남(魔男)사냥을 했다. 벩송이 보는 철학사적 관점이다. (4:08, 56WKG)
(4:31, 56WKGG)
♦ 참조:
성격학(caractérologi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41.(P.304)
성격들의 연구.
이 용어는 분트(Wilhelm Wundt 1832-1920)에 의해 창안되었다. 성격학은 성격의 분류와 그 형성에 관해 연구한다. 분류는 시험(tests, épreuves)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며, 가장 유명한 것은 로르샤흐(Hermann Rorschach 1884-1922)의 시험인데, 그 시험은 두 장의 종이 사이에 잉크 점을 으깨어서, 이 흔적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불러일으키는 생각을 물어보는 것이다. 비에르스마(Wierzma, 홀란드)와 헤이만스(Corneille Heymans 1892-1968 벨기에)가 행한 매우 복잡한 “격자칸”(les grilles)의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을 이용하여 매우 유명한 분류법을 확립하였다. 그 분류는 1. 정서(l’émotivité), 2. 활동(l’activité), 3. [반향으로서] 주도적 또는 부차적(la primarité ou la secondarité)으로 한다. 여기서 선도자(le primaire)이란 현실적 운동 속에서 살아가는 자이고, 조연자(le secondaire)는 자기 안에 경험들이 흔적으로 또는 깊은 반향(retentissement)으로 남아있어서, 이런 사실 때문에 과거 경험에 의해 여전히 제재를 받는 자이다.
단순히 사람들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내성적(introverti) 성격과 외향적(extraverti) 성격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자시 자신으로 향하는 성격이고 후자는 수다를 떨고 세상에 개방적이며, 내재성에 관계하지 않고 한계까지 가보는 성격이다. 예를 들어, 내성적인 성격은 그림을 감상하거나 세계의 광경을 보는 경우 특히 “움직임”(le mouvement)에 민감하며, 분열상(schizoïde)의 경향을 띤다. 그 예로 반고호(Van Gogh 1853-1890)의 『측백나무(les Cypres)』는 특히 이런 해석에 알맞다. 외향적 성격은 특히 “색깔”(la couleur)에 민감하다. 그리고 사물들의 “형태”(forme)에 주목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학식 있는 지성의 전형이며, 우울(mélancolie)하다 [형상주의는 철학적으로 좋게는 금욕주의, 이상에 대한 실망에 따른 허무주의에 가깝다]. 이 움직임, 색깔, 형태의 세 가지 모두에 균형적인 전형이 있는데, 이 대표자로서는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로 소개된다. 내성적 성격과 외향적 성격 사이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문학과 과학 사이에 나타나는 대립이다. (아래 도표 참조)
(43TKC)
성격학caractérologie 표
(이 도표는 8괘의 전형과 닮았다) (43TKC)
이런 상식으로, 물체가 정지 또는 운동을 그 자체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을 넘어가는 것이 갈릴레이와 뉴턴이다. 물체는 움직이고 있고, 게다라 나아가 진동하고 있다는 것은 열역학 다음으로 전자기학의 설명에서 등장한다. 물체는 움직이는 중이라는 것은 1930년대 불확정성의 원리 이후에 우주는 움직이는 중이 된다. 고대 이오니아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퀴니코스-스토아 계열에서 정리하기를 “볼수 없는 것”으로 공간과 시간, 원자와 영혼이라고 할때도 움직이며 변화하지만, 대상들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문제 제기 한 것이다. 마치, 거짓말쟁이 파라독사든지, 원이 직선으로 환원되는지에 대한 문제 등도 마찬가지로 풀 수 없는 난제였는데, 이런 난제에 거리를 두고서 출반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56WK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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