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㉑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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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

 

4-12(350d~352c):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350d]

* 소크라테스의 논박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곳에서의 그의 모습은 문답의 귀결에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지못해 동의하는 장면은 앞에서도 수차례 나오지만 이곳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질질 끌려가다가 가까스로 그것도 엄청나게 땀까지 뻘뻘 흘리다가ἑλκόμενος καὶ μόγις, μετὰ ἱδρῶτος θαυμαστοῦ ὅσου’ 동의하고 있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ἐρυθριῶντα 모습은 소크라테스도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모멸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교만하고 뻔뻔한 자일수록 그가 느끼는 수치의 강도 또한 그만큼 큰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봐 줄 기세 없이 트라쉬마코스를 몰아세운다. 그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한 논박은 그렇게 해결 본 것으로 치고οὕτω κείσθω 곧바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가 더 강하다ἰσχυρὸν εἶναι τὴν ἀδικίαν’라는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350e]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불만을 터트리지만 기세는 꺾여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말을 하려 하면 어차피 ‘대중 연설’δημηγορεῖν을 할 거라고 여길 터이니 내가 내 식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해 주던가 아니면 당신 좋을 대로 질문이나 하라‘고 말한다.

* 앞서 살폈듯이 검토 방식에 관한 논의에서 연설에 의한 방식은 아예 배제된 데다가 그 논의에 개입조차 못할 정도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한 반박에 크게 위축되어 있다. 여기서도 입으로는 자신도 할 말이 있고 또 말을 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는 하고 있지만 이미 트라쉬마코스는 주눅이 든 상태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이자 연설가임을 자부하는 그가 그것을 드러낼 리가 없다. 그런데 반박할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통상의 경우가 그러하듯 비아냥거리는 일이다.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 자기는 노파γραῦς의 이야기를 들어주듯 좋다εἶεν거나 아니라고만 대답하겠노라고 빈정거리듯 말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강자에 빌붙어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지식인들이 남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때 늘어놓는 부정직하고 비겁한 태도를 그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문답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래도 대답만은 솔직히 하라고 당부하는 것은 두 번째 논제 역시 자신의 검토 방식에 따라 논의를 이끌고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문답에 주도권을 잃은 트라쉬마코스는 그저 소크라테스 마음에 드는 말이나 해주겠다고 다시 빈정거리고 소크라테스는 바로 두 번째 논박을 시작한다.

 

[351a]

* 소크라테스는 먼저 ‘부정의가 보다 강하다’는 주장을 논박하려는 것은 부정의와 비교하여 정의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ὁποῖόν τι τυγχάνει ὂν 충분하게 논의해 보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즉 정의가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이라면 지혜와 덕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351b]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최선의 나라로 여기고 있는, 즉 가장 부정의한 나라가 과연 강한지를 묻는다. 이 물음에는 정의를 갖추고 있지 않은 부정의한 나라가 강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담고 있다. 역시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나라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부정의를 갖추고 있어 그런 것임을 재차 주장한다.

* 여기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가장 부정의한 나라 즉 ‘다른 나라들을 부당하게 굴복하게 하여 예속화를 시도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많은 나라를 휘하에 속국화해서 갖고 있는 나라’πόλιν ἄδικον εἶναι καὶ ἄλλας πόλεις ἐπιχειρεῖν δουλοῦσθαι ἀδίκως καὶ καταδεδουλῶσθαι, πολλὰς δὲ καὶ ὑφ᾽ ἑαυτῇ ἔχειν δουλωσαμένην는 분명 페리클레스 이후 부당하게 다른 폴리스들을 예속화하고 스스로를 제국화한 아테네를 가리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국가>를 집필하던 기원전 375년경은 물론 <국가>의 대화시기로 상정되고 있는 기원전 410년 전후는 아테네 제국이 쇠망기에 접어든 시기이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가 결코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없고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같은 민족 형제 나라들을 부당하게 침탈하고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아테네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351c]

* 소크라테스는 앞서 그가 당부한(350e) 대로 트라쉬마코스가 속내 그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한 후, 흥미롭게도 나라와 군대στρατόπεδον는 물론 하물며 강도단λῃστὰς이나 도둑κλέπτας의 무리까지 예로 들어, 어떤 집단이 ‘부정의하게 공동으로κοινῇ 뭔가를 도모할 경우에 만약 그들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른다면’εἰ ἀδικοῖεν ἀλλήλους 과연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πρᾶξαι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수행해낼 수 없을 거라 대답한다.

 

[351d]

*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들끼리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동의를 얻는다.

* 이로써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면서 서로에게 부정의한 짓을 저지를 경우 서로 간에 ‘대립과 증오, 다툼’ ἢ στρατόπεδον ἢ λῃστὰς ἢ κλέπτας을 초래하여 결국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그르치며, 반대로 합심과 우애를ὁμόνοιαν καὶ φιλίαν 다하면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이 서로에게서 확인된다. 이로써 351a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으로서 정의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란 ‘합심과 우애’를 담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정의로운 사람은 합심과 우애를 이루는 능력이 있으므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해냄으로써 그 단체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증오와 불화만 일으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가 추구하는 일을 그르쳐 그 단체나 개인을 약화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부정의의 기능ἔργον이 그런 것이라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노예들 사이에서건ἐν ἐλευθέροις τε καὶ δούλοις 서로를 증오하고 대립하게 만들고μισεῖν καὶ στασιάζειν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언급 또한 5세기말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에 빠진 아테네를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을 두고 부정의가 마치 고유한 기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할 필요는 없다. 고유한 기능은 덕을 갖고 있지만 부정의는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부정의가 일으키는 어떤 나쁜 작용을 말한다.

 

[351e]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생겨 그들끼리는 물론 정의로운 사람과도 적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런 여러 사람들의 경우 말고 개인 한 사람 안에서 부정의가 생길 경우ἑνὶ ἐγγένηται ἀδικία에도 부정의가 조금도 힘δύναμιν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를 표한다.

 

[35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앞의 논의를 토대로 집단ἔθνος과 개인εἷς의 경우로 나누어, 부정의가 그곳 각각에 깃들 경우 어떤 힘을 갖는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우선 나라, 씨족, 군대 같은 단체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δύναμις이란 1) 대립과 불화τὸ στασιάζειν καὶ διαφέρεσθαι를 통해 뭔가를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각기 스스로에 대해서,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ἑαυτῷ τε καὶ τῷ ἐναντίῳ παντὶ καὶ τῷ δικαίῳ 그리고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 적ἐχθρὸν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이란 본성상 1) 자기 자신에 갈등과 불화στασιάζοντα καὶ οὐχ ὁμονοοῦντα를 일으켜 아무것도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이 되게 만든다.

*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갖는 힘을 설명하면서 위와 같이 집단의 내부와 개인의 내면을 각각 동일한 차원에서 대응시키고 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글 말미에서 따로 살피기로 한다.

 

[352b]

*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준다는 주장을 편 후 ‘한데 보시오. 신들θεόι도 어쨌든 정의롭다’고 말하고 그에 따라 정의로운 자는 신들에 대해 친구φίλος가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냥 ‘정의롭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몰라도 정의를 합심과 우애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묘사한 직후에 언급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은 결코 합심과 우애의 신들이라 단정하기 힘들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소크라테스 나름의 새로운 신관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에게 신들 모두는 <티마이오스>에서 강조하고 있듯 우주와 인간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창조한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 수호자들에 대한 시가 교육을 통해 신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이런 점에서도 짧은 언급이지만 이 또한 앞으로 펼쳐질 주장에 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 트라쉬마코스는 논의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자 아예 자기는 반론을 펴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논의를 마음대로 즐기라’εὐωχοῦ τοῦ λόγου θαρρῶν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금처럼 남은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대답하여 ‘이 향응을 흡족하게’τῆς ἑστιάσεως ἀποπλήρωσον 해달라고 말한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352b-c)

1) 정의로운 사람들이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으로서σοφώτεροι καὶ ἀμείνους더 유능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δυνατώτεροι πράττειν이다.

2) 부정의한 사람들이란 서로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들οὐδὲ πράττειν μετ᾽ ἀλλήλων οἷοί 이다.

3) 이들이 부정의한 사람들인 채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효과적으로, 열심을 다해ἐρρωμένως, ῥώννυμι의 분사형) 해내는 것으로 우리가 말할 경우에, 그것은 전혀 진실ἀληθὲς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전적으로 부정의한 자들이었다면, 이들은 서로 삼가는ἀπέχω 일도 없었을 것인즉 이들 사이에는 그마나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352c]

* 그런데 위 3)의 언급과 그 이후 이어지는 소크라테의 말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3)의 내용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부정의한 사람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임에도, 이어지는 후반부 언급에서는 뭔가 서로 삼가기도 하고 그나마 어떤 형태의 정의도 깃들어 있어 뭔가를 해내기도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일치와 문장전후의 문맥을 고려하면 ‘그것은 전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οὐ παντάπασιν ἀληθὲς λέγομεν라는 역문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역문의 경우 παντάπασιν(altogether, wholly)을 ‘전혀’로 옮겨 앞의 내용을 전면부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내용상 ‘전면적으로’ 옮겨 앞의 내용을 부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판단된다. 상당수의 영역본(G.M.A. Grube, P. Shorey)도 그 부분을 부분 부정으로 번역하고 있다.(what we say(our statement) is not altogether true) 여기서 말한 부정의한 자들의 경우 철두철미하게 부정의한 자들이 아니라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한 자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여 그 부분을 다시 풀어서 옮겨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 부정의한 사람들도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전면적으로 부정의한 사람들이었다면 서로에게 삼가기는커녕 공격적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해냈다고 한다면 그나마 그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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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의 두 번째 논제 즉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보다 강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논제와 관련해서도 음미해보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태도에 관해서이다.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과 관련한 논쟁에서는 물론, ‘부정의는 정의보다 낫다’와 관련한 두 번째 논쟁에서도 예외 없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 당한다. 그것도 문답 하나하나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논쟁이라는 점에서 거의 완벽한 수준의 논박이다. 보통의 경우 논쟁의 귀결이 이 정도라면 한 쪽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여전히 부정의가 이익을 가져다주고 지혜와 덕은 물론 힘까지 갖춘 것임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논파를 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그와 문답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와 관련한 첫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태도를 바꾸는 등 태도를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결국 논리에서 밀리자 목욕탕에서 물을 붓듯 자기 속내를 쏟아냈을 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가 문답의 방식으로 논파는 되어도 설득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실제로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첫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트라쉬마코스가 쏟아낸 마지막 항변을 분수령으로 문답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확인한 후 크게 분노하여 그를 강력하게 반박한 후, 두 번째 논쟁에서는 아예 그를 제쳐두고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다. 그런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서 자신이 훨씬 중요하다 생각하는 논제를 자신의 주도하에 두 번째 논쟁의 화두로 내세운 후,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끌어들여 문답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두 번째 논쟁 역시 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두 번째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트라쉬마코스는 형식적으로 문답에 참여할 뿐 이미 문답을 나눌 의지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들여 문답을 이어가게 하고 있을까? 혹시 플라톤이 의도하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 국면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논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논박의 결과조차 인정하지 않는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실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그들을 원천적으로 압도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앞으로 플라톤이 내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속성을 일부나마 미리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두 번째 논쟁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덕과 지혜, 합심과 우애의 힘 그리고 더 잘 살게 해주는 것 즉 행복은 앞으로 <국가> 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펼치게 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고 있는 핵심적인 덕목들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 역시 <국가> 본론에 대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부여한 제1권이 갖는 함축이라 판단된다. 제1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함축과 관련해서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모든 논쟁이 마무리된 후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의 논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다루게 될 것이다.

2) * 게다가 이곳에서 플라톤이 정의가 갖는 힘을 논하면서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앞으로 <국가> 본론에서 펼칠 플라톤의 계획의 일단을 미리 드러내는 것으로서 나름의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덕과 지혜로서 정의가 갖는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며 집단은 물론 개인의 경우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합심과 우애를 이야기하면서 집단의 경우를 예시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집단이나 단체는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합심과 우애가 중요하게 문제되는 영역으로 개인의 내적 영역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는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한 주장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그러한 전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당연한 것으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심적 갈등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우리 안에 소박한 수준에서 이를테면 하얀 마음, 검은 마음 즉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다는 등 서로 다른 욕망의 요소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기독교 역시 우리 안에 신의 형상(Imago Dei)은 물론 영성 상실에 따른 원죄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은 신의 은총에 의해 극복되어야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선과 악, 죄와 은총은 서로 대립적인 것들로서 우리 안에서 서로 합심과 우애를 나눌 대상들은 아니다. 이에 비해 플라톤이 말하는, 개인의 내적 영역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들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나라와 우리 안에 서로 다른 계층과 욕망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합심하고 우애가 있어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개인을 끌어들이고 아무런 전제도 없이 개인 내면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끼리의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국가> 2권 이후에 펼쳐질 영혼 3분설의 내용을 미리 선취하여 예고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나라 또는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여럿들이 서로 적대적인 것인지 그래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제거 혹은 변모되어야 마땅한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의존적인 것이어서 그대로의 모습을 갖는 것이되 다만 관계를 잘 맺어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 마땅한지의 문제는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대립해 왔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타도하거나 심판해야할 죄악 또는 계급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의이지만, 플라톤이나 프로이트는 관계맺음의 원리와 목표는 다르지만 그것들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실재하는 현실 조건들이다. 부정의와 정신의 분열은 그것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 서로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무지와 일탈의 소산들이다.

3) * 이곳의 논의 내용에서 의미 있게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소크라테스가 흥미롭게도 ‘기본적으로 부정의하지만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는 상태’ 즉 ‘어중간한 상태의 못된 자들’τὰ ἄδικα 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352c) 사실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첫 번째 논쟁에서 정의와 부정의를 구분할 때도, 그리고 또 두 번째 논쟁의 첫 번째 논제에서 지혜와 무지를 구분할 때도 각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와 그 결핍태로서의 부정의, 결코 능가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혜 자체와 그 결핍태로서의 무지를 2분법의 잣대로 엄격하게 나누어 설명해왔다. 이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 지혜σοφία와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덕ἀρετῆ과 악덕κακί은 서로 대립되는 양극단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두 번째 논쟁, 두 번째 논제에 들어오면서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들도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면 그 일을 조금도 수행해내지 못하지만,(351c) 만약에 그들이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다’(351d)고 말하면서부터 뭔가 달라지고 있다. 즉 ‘집단 전체는 비록 정의롭지 못한 일을 도모해도 집단 구성원들끼리는 정의로운 일을 한결 더 잘 해내는 상태’ 즉 한 집단에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존재하는 다시 말해 전적으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부정의한 것도 아닌 것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논제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은 마치 의도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이러한 내용을 더욱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논제를 제시한 처음 의도대로 힘에 있어 정의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정의로운 집단과 부정의한 집단, 정의로운 개인과 부정의한 개인만 비교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왜 강도나 도둑 같은 집단까지 끌어들여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혹시 이것마저도 앞서와 같이 앞으로 <국가>에서 다룰 논의를 위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제1권에 부여한 예고이자 함축이 아닐까? 사실 앞서 1)에서도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거침없고 무분별할 정도의 탐욕적 속내를 확인한 이후,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통해 그의 반론 의지를 잠재운 데에다,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으로 자신의 핵심 관심사와 관련한 두 번째 논제를 꺼내들어 자신의 주도하에 논쟁을 이끌고 있다. 그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이미 논박과 논파의 단계를 넘어 그들을 압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의 차원에서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정의와 일의 수행 능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 사실 우리들은 보통 현실 생활에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말할 때 특정 사람과 그룹을 칼같이 나누어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 않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자기를 언제나 정의롭다거나 언제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정의와 부정의를 혼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현실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와 어중간한 부정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완전한 정의와 그 반대로서의 완벽한 수준의 철저한 부정의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정의와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는 분명 존재하되 플라톤은 이제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듯이(351b-d)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일을 공동으로 도모하지만 구성원들끼리는 합심과 우애가 있어 한결 더 일을 잘 해내는 경우도 그러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이고, 또 극단적으로 참주가 자신은 철저히 부정의하지만 시민들을 완전히 속여 시민들 모두 참주를 정의로운 자로 착각한 채 서로 합심과 우애를 다해 참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경우도 그러한 다양한 현실 양태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극복하려는 것, 압도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들이다. 플라톤 철학을 현실 구제론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물론 그럼에도 지금까지 수행된 완전한 정의와 그 결핍태를 나누는 이분법은 여전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부정의한 현실일수록 부정의를 정의로부터 분리하고 구분하기 위한 확고한 정의의 기준과 푯대는 언제든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라와 개인 차원에서 완벽한 정의의 실체를 완벽하게 구축해내는 일과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의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실질적이고 실천적으로 구현해내는 일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정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각 인간에게서 어떻게 현상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고, 이제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중간한 상태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과 이해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에 대한 언급은 실로 소크라테스의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현실 인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것 역시 예비적인 수준에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리고 그것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서 살피게 되겠지만 존재론적으로도 존재(to on)와 무(無)(mē on) 그 중간에 있는 무규정적 존재(apeiron)에 대한 플라톤의 숙고와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무규정적인 존재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부동의 일자(一者, hen)를 주장하는 자들과 존재자 일체를 무 혹은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생성(gignōmenon)으로 환원하려는 자들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그러한 비판은 곧 무규정자에 대한 인식으로서 현실 인식을 사변에 예속시키는 것으로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되 현실의 무규정성이 허무주의로 방치되지 않고 역동적인 선과 아름다움(agathos kai kallos)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이자 그곳에로의 부단한 운동력으로서 우주 영혼과 인간 영혼의 내적 본질을 직시하고 그것을 구명하여 현실의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을 구현해내는 일을 그 자신의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 존재론의 핵심과제 내지 관심사는 형상(Idea)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무규정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에 있다할 것이다. 즉 철학의 관제는 존재와 무(無)사이에 있으면서 어떠한 단절도 받아들이지 않는 연속과 관계맺음 그 자체로서 무규정자를 어떻게 차별화하고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는 현실 존재자들이 형상적 존재로부터 어떤 거리를 두고 어떤 수준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인식해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규정자의 온전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자 그 인식이 곧 실천을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한, 그것으로 진리 존재로 육박해 들어가는 불굴의 정신이자 지적 실천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5) * 아무려나 두 번째 논쟁에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강하다는 주장은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진다는 것에 기초하여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경우들을 보면 오히려 부정의가 정의보다 강하고 그에 따라 부정의가 정의를 이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역사에서도 부정의한 군주나 독재자가 엄혹한 군기를 내세워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사들을 향해 패배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여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워 정의로운 군대를 무찌르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트라쉬마코스도 이곳에서 가장 부정의한 자 즉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보다 강하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는 그가 참주인 한, 시민을 통제하고 예속화시키는 힘과 권력이 있어 법률도 자기 이익에 맞추어 자기 마음대로 제정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시민적 의무 차원의 정의감 때문이건 법률 위반이 가져다주는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건 법률을 준수한다. 즉 그들로서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 이런 나라는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참주들의 억압에 의해 대립과 갈등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고 때로는 참주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나라가 목표로 하는 일을 해낼 수도 있다. 개인들 역시 스스로를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부하며 내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일상의 착하고 선량하며 나라의 법률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이나 거리낌 없이 하물며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독재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행태를 목도하고 있다.

* 이 밖에도 부정의한 나라나 개인이 정의로운 나라나 개인을 압도하고 지배한 역사적 증거들은 넘치고도 남는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서조차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덕과 지혜와 상관없이 합심과 우애를 ‘집단을 강하게 만드는 조직 원리’로 생각하는 깡패집단의 논리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근대정치 사상사에서 마치 상식이라도 되는 양 국가 및 권력을 정당화하는 당연하고도 적극적 근거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즘은 시민의 동의나 도덕과 상관없이 전제 군주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통치 권력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주장하고 있고, 또 홉스주의 또한 개인들은 모두 오로지 이기적인 자기 보전욕구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안전한 삶의 보전을 위해 강력한 통제 권력을 자발적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민들은 상호 계약의 형식으로 강권 국가를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정의는 그러한 폭력성과 비참성을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책이라는 소극적 원리로 여겨져 ‘정의는 곧 개인들의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 내지 부정의에 대한 응징’이라는 근대 이후의 정의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하여 현대의 권력가들은 고대의 참주 못지않게 부역 지식인들의 주도면밀하고도 충성스런 지원을 받아가며 보다 강력한 통제와 착취 기술은 물론 정의의 평판까지 얻게 해주는 고차원의 기술을 치열하게 연마하고 발전시켜가면서 더더욱 강고한 권력을 구축해가고 있다.

* 정의만이 합심과 우애를 발생시키고 일도 잘 수행해냄으로써 나라와 개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서 말과 명분에서만 우위를 점할 뿐 순진한 사람들의 소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의를 덕과 지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심과 우애의 근원이자 공동체와 개인을 강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내뱉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해 삶의 진실과 역사의 진보를 일구어 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패배주의적 냉소와 그럴듯한 담론들 모두는 권력에 빌붙어 기득권에 안주하는 지식 판매상들이 주구장창 늘어놓는 비겁한 자기변명이자 거짓 구호일 뿐이다. 현실 기득권자들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치의 상대성과 중립을 미명으로 현실 권력을 정당화하고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호도하는 작태를 거듭하며 안존을 도모해왔으나 장구한 인류의 역사는 그들의 권력과 영화, 부와 명예, 거짓과 위선이야말로 한 순간의 거품과도 같은 것이자 그 자신은 물론 그들의 자손들 모두에게 영원한 수치이자 멍에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2400여 년 전 이미 그러한 불의와 거짓과 탐욕에 맞서 지성으로 고양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합심과 우애어린 협동과 나눔이 경쟁과 대립, 증오와 차별보다 강함을 역설하며 우리들 모두에게 ‘순진한 사람들의 희망과 당위가 어때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고상한 순진성γενναία εὐήθεια이면 어때서!’, ‘그래서 그게 혼이 아닌 몸의 손해이고 죽음이라면 어때서!’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 이미 오래 전 그렇게 외치며 기득권자들이 건넨 독배를 들이켰지만 누구도 그를 결코 패배자라 부르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본성적으로 선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태어나 그것의 구현을 욕구할 수밖에 없는 우주적 존재이다.

* 선과 정의, 진실과 자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철학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전파하고 그것의 구현을 향한 힘과 희망을 키워가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철학적 실천의 본질이자 근원이다. 철학은 그 자체로 불의에 대한 절망과 패배의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힘이자 그 절망과 어둠을 뚫고 나갈 빛에 대한 열망이자 사랑이다. 그 열망과 사랑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들을 불의에 대적하는 전장에로 다가서게 한다. 입장의 상대화는 다만 그런 입장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힘으로 아니 강고한 힘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철학과 진실과 정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걸 직시하게 해주는 것 정도로 유효할 따름이다. 요컨대 철학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두 입장이 서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그 싸움에 의해 인간의 삶과 행복이 보전되느냐 유린되느냐가 걸려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우리의 철학은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판가름하고 결심하고 실천하게 하는 영원한 토대이자 보루이다. 우리가 진정 철학을 하는 한, 철학은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고 분연히 일어서게 한다. 억압과 거짓과 독단에 순응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로 가짜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적 정신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영원히 서 있어야할 지고의 당파성이자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당파성이다. 우리의 공부와 사색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우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근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순한 텍스트 내용에 대한 이론적 사색에 머물러 플라톤 사상의 우열여부만을 논하지 말고 그것의 실천적 전략도 함께 모색하고 정치투쟁도 감행해가면서 그의 철학과 사상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역사와 현실에서 그 우위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해야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믿음에 기초한 열망과 당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신영복 선생이 이야기 했듯이 친분과 혈연 등 사적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입장의 같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요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 말했지만 이미 플라톤 철학은 그 자체로 이미 정의와 진리를 향한 지적인 긴장과 분투의 철학이다. 플라톤의 열망 이상의 정열이 우리 안에서 불같이 끝까지 타오를 수 있도록 플라톤을 읽는 우리 또한 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국가> 강해는 학술임과 동시에 격정을 동반하는 다짐이기도 한 것이다. 철학은 무지와 탐욕에 휘둘려 가며 현실에 안주하는 자에게는 하염없이 시대착오적이고 불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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